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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1권(1)

2019.08.07 조회 853 추천 3


 序
 
 해가 저물어가는 산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따스한 주홍빛에 물든 나무들, 부서지는 햇살을 따라 반짝이는 아름다운 시냇물, 흰 날개를 자랑하며 공중을 노니는 새들과 귀를 쫑긋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산짐승까지.
 산의 아름다움은 일노일소(一老一少)를 현혹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진정으로 은거에 드시려는 겝니까?”
 노인이 옆의 청년에게 말했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에게 존대하는 노인의 표정에는 조금의 어색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하다.”
 청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고하실 요량은 없으신지요.”
 노인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없느니라.”
 “하오나······.”
 “그만.”
 청년이 냉정한 대답에 노인이 침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두 노소(老少) 사이로 침묵의 바람이 불었다.
 고요한 풍광을 즐기던 청년이 흘끗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 없던 얼굴 속에서 회한이 떠올랐다.
 그것은 홀로 남은 제자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잠시 노인을 바라보던 청년이 입을 떼었다.
 “네가 내 곁에 온 것이 얼마나 됐지?”
 “벌써 반백 년을 넘었지요, 사부를 뫼신 지.”
 주름진 눈이 아련하게 과거를 더듬었다.
 아주 작은 소년이었을 때 사부를 만났다. 사부는 자신을 제자로 삼아 감당치 못할 은혜를 베푸셨고, 마침내 지존(至尊)의 자리마저 물려주셨다.
 “후회하지 않느냐?”
 “······.”
 청년의 말에 과거를 더듬던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진심이신가······.’
 노인은 청년의 심사를 가늠하려는지 주의 깊게 그를 살폈다.
 “문호에 든 이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하핫”
 청년이 소리내어 웃었다.
 “고맙구나.”
 진정으로 기뻐하는 듯한 청년의 모습에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축축해졌다.
 이제 헤어져야 하리라. 이제 더 이상 사부를 뵈올 수 없으리라. 파천(破天)이라는 광오한 별호도, 그만큼 강력했던 무공도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
 “이만 가보아라.”
 청년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노인은 쉽게 물러나지 못했다. 마지막 아쉬움 때문이었다. 사부께서는 진정 은거에 드시려는가! 천하를 상대로 한 복수를 눈앞에 둔 바로 이때에!
 “복수의 끝을 보지 않고 은거에 드시려는 겁니까”
 “더 말하게 하지 마라.”
 청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모습 속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마침내 노인이 체념한 듯 뒤로 물러나 중얼거렸다.
 “하오시면 제자는······.”
 노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곧 입을 다물고는 땅에 엎드렸다.
 배례(拜禮)를 취하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홉 번의 절을 하는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젖어들었다.
 “제자는 이만 물러나오리다. 강녕하시옵소서.”
 노을에 시선을 둔 청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노인은 청년의 뒷모습을,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듯한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어느새 마지막 빛을 뿌리던 노을이 어스름 속으로 사라졌다.
 
 * * *
 
 달이 떠올라 어둠을 밝히다가 동쪽에서 나타난 태양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천공을 빠르게 질주한 태양은 이내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몇 번의 일출과 몇 번의 일몰을 본 것일까.
 청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부스럭―
 수풀 사이로 들쥐 한 마리가 풀벌레 사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쥐는 탐욕스럽게 풀벌레를 삼켰고, 때문에 올빼미가 덤벼드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찌익!
 들쥐는 풀벌레를 입에 문 채 올빼미에게 잡히고 말았다. 잠시 버둥거리던 들쥐는 올빼미의 부리에 목덜미를 쪼이곤 움직임을 멈추었다.
 ‘생명이 지는구나.’
 들쥐의 처참한 모습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살리려 대신 죽었던 누이, 칼에 꿰이고도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 그것도 칼이랍시고 식칼을 휘두르던 아버지.
 오랜 세월이 지난 일이었지만 마치 어제 벌어진 일인 양 선명했다.
 억지로 기억을 삼키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던 눈, 순진한 눈, 이미 죽어버린 어미에게서 태어나 눈물을 먹고 자랐던 아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웃음 짓던 착한 아이.
 청년은 눈을 감았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었고 천하제일의 권력도 얻었지만 자신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복수도 이제는 지나간 기억일 뿐이다.
 ‘하핫, 모두 무용(無用)하구나. 진정으로 무용하구나.’
 보지 못할 복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늙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눈을 감은 청년은 상념 속으로 침잠되어 갔다. 오랫동안 괴롭혀 오던 무론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보이지 않으니 느끼는 것이 없고[不視則無感], 느끼지 못하니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不感卽無存].
 
 ‘어차피 내가 알 수 없는 것인데 존재하든 아니든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깨달음이었다.
 작은 깨달음은 곧 다른 깨달음을 불러왔다. 청년의 머릿속에 숨어있던 천무진경(天武眞經)이 한 올 한 올 풀려 나갔다.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다. 마음이 있으면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고 마음이 없으면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마음 자체도 허상이나 다름없구나.’
 “아!”
 청년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찌 모든 것을 놓아버린 이때에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단 말인가!
 
 모든 것은 없다[虛無]. 그러나 없음으로 있다[有生於無].
 
 도가에서 말하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무위(無爲)로 가는 길목에는 미칠 듯한 허무와 허무를 넘어서는 유(有)가 존재하고 있었다.
 청년은 깨달음의 한가운데에서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구나! 본래 없는 것을 나는 왜 기억에 담아놓고 있었을까!”
 청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세상이 사라졌다.
 ‘그래, 세상을 잊는구나.’
 마음을 바라보자 한 가닥 남아 있던 미망이 사라졌다.
 ‘슬픔을 잊는구나.’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복수심을 바라보자,
 ‘한(恨)은··· 분노는······.’
 잊을까? 잊어야 할까?
 자신이 아니면 기억해 줄 이 하나 없는 그들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렸던 그들을 잊어야만 한단 말인가!
 청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비어져 나왔다. 깨달음 속에서 잊기 싫었던, 아니,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잊혀지고 있었다.
 ‘한도 분노도 잊는구나······.’
 어느새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나를 잊는구나······.’
 자신을 지탱하던 원동력. 자신이 사랑했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들. 그들에 대한 정(情)으로 살아왔고, 그 정 덕에 세상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잊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한줄기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그래, 나를 잊는구나.’
 그 순간 거대한 깨달음의 환희가 찾아왔다.
 청년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공중에 뜬 청년의 몸에서 옅은 바람이 불어왔다. 부드럽게 팔락이는 옷자락 사이로 그는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깨달음의 웃음이었다.
 “하핫.”
 그래, 잊자.
 “하하핫!”
 잊어야 한다.
 “하하하핫!”
 모든 것을 잊어야 진정한 깨달음이 찾아오리라.
 “하하하하핫!”
 그런데······.
 “하하··· 하··· 하··· 하?”
 내가 누구더라?
 
 
 
 
 
  제1장 약선(藥仙) 이시진(李時珍)
 
 만력(萬曆) 칠년.
 신종(神宗) 치세의 불길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일까!
 만력의 연호를 사용한 지 칠 년째 되던 해, 호남성에 역병이 돌았다. 역병에 걸린 자들은 마치 나병에 걸린 것마냥 사지가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역병이 휩쓴 고을이 수십 개가 넘건만 생존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호남성 영흥(永興)의 무령산(巫鈴山)에 사는 장삼(張三)의 아들 역시 역병의 잔인한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근처를 지나던 약초꾼 노인이 없었다면 장삼의 아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
 
 * * *
 
 “하늘님, 하늘님, 우리 아들만은 좀 살려줍쇼.”
 장삼은 하늘을 향해 빌고 빌며 코를 훌쩍거렸다.
 “흐흑, 훌쩍.”
 아들의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흘러나온다. 소매로 눈을 쓱쓱 닦은 장삼은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조상님, 조상님, 부디 우리 인호만은 좀 살려주시옵소서.’
 장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빌고 또 빌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반드시 응답해 줄 것이다.
 “허어.”
 귓가로 들려오는 약초꾼 노인의 한숨 소리가 왠지 불길하게 느껴진다.
 ‘불쌍한 내 아들.’
 장삼은 울먹거리며 아들이 누워 있는 모옥을 바라보았다.
 
 장삼의 모옥은 후줄근했다.
 나무와 흙을 아무렇게나 발라 다듬은 바닥은 울퉁불퉁했고, 벽이랍시고 세워놓은 판자는 약한 바람에도 삐걱거렸다.
 모옥의 중앙의 이부자리에는 한 소년이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아버지······.”
 사기가 깃들어 시퍼레진 소년이 몸을 뒤척였다.
 “으흠.”
 소년의 앞에 앉아 있던 신선 같은 노의원이 침통에서 세침(細針)을 꺼내었다.
 역병이 머금은 화기를 몰아내려면 길을 터야 할 것.
 노의원은 소년의 목에 있는 화개혈(華蓋穴)에 세침을 가져다 꽂았다.
 꿈틀―
 소년의 몸이 꿈틀거리자 노의원이 안쓰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어, 역벙의 기세가 제법이로구나. 화기가 끊이질 않아.”
 노의원은 이번엔 장침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년의 천돌혈(天突穴) 옆으로 가져가 천천히 꽂았다. 성대를 피해 찌르는 것이다.
 “큭!”
 소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년은 몸을 바르르 떨며 경련하더니 이내 기침을 시작했다.
 “쿨럭! 쿨럭!”
 소년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졌다. 새카만 피가 소년의 허름한 마의에 달라붙었다.
 “후우―”
 검게 물든 피를 바라보던 노의원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두 시진에 걸친 시술이 끝나간다. 화기를 다스려 토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약을 써서 그동안 깃든 사기(死氣)만 다스리면 된다.
 “끝났나?”
 노의원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며 아이의 맥을 짚었다. 맥이 약하긴 하나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진짜 끝났나 보다.
 “허헛. 다행이로구나.”
 노의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치료를 할 때는 신선 같던 노인의 기도가 단숨에 바뀌었다. 치료가 끝나자 마치 시골 촌로마냥 푸근하게 변한 것이다.
 “이보게나, 장가(張家)!”
 밖에서 서성이던 장삼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의, 의원님, 끝난 겁니까요? 제 아들은 살았습니까? 주, 죽은 것은 아니지요?”
 “들어오게나. 자네 아들은 무사하니.”
 덜컹―
 노의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삼이 문을 열어젖혔다. 방 한가운데 누워 있던 아들을 본 장삼이 통곡하듯 외쳤다.
 “아이고, 인호야!”
 장삼은 아들의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졌다.
 “호오!”
 노의원은 감동에 젖은 눈으로 장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이가 걸린 병은 보통 사람이라면 만지는 것조차 꺼리는 전염병인데도 장삼은 거리낌없이 아들의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노의원은 콧날이 시큰해지는지 코를 훌쩍였다.
 “훌쩍, 이제 안전할 걸세. 몸을 깨끗이 하고 쥐와 이가 아이의 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게야.”
 “네? 네!”
 장삼은 황급히 아이에게서 떨어졌다. 몸이 더럽기 짝이 없으니 다음부터는 좀 씻고 아이를 만져야겠다.
 “저, 정말로··· 우리 인호는 괜찮은 게지요?”
 장삼이 걱정스레 노의원에게 말했다. 훌쩍거리던 노의원이 그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최대한 근엄한 척을 하려 애썼다.
 “물론일세. 본 의원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네.”
 다시 신선처럼 변한 노의원이 준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삼은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과연 숨소리가 고르고 평안하다. 예전과 비교해 보니 확실히 나은 것이 느껴진다.
 “과연 신의십니다요!”
 아들을 훑어보던 장삼이 넓죽 엎드려 이마를 땅에 부딪쳤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의원님! 참말로 감사합니다요!”
 “허헛, 과례는 거두시게.”
 노의원은 멋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눈을 보니 진정으로 멋쩍은 게 아닌가 보다. 노의원의 눈은 방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흐음.”
 구석에 개켜진 마의를 발견한 두 눈이 반짝였다.
 노의원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
 한참 동안 머리를 땅에 부딪치던 장삼이 행동을 멈추었다. 갑자기 불길한 기운을 느낀 탓이었다.
 생각해 보니 의원님께 드릴 치료비가 없다. 집에는 구리 부스러기 몇 개가 있을 뿐이다.
 노의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근엄한 얼굴로 길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험! 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장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아이의 치료비는······.”
 “험! 험! 험!”
 노의원의 헛기침이 더 더욱 심해졌다. 이제 명백히 그 의도가 드러난 셈이다. 노의원은 치료의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장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장삼의 귓가에 노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 본 의원은··· 치료비를 받지 않은 적이 없··· 다네.”
 노인의 목소리는 대단히 긴장한 듯했다.
 “예? 뭐라굽쇼?”
 “아니, 방금은 실수일세. 본 의원은 치료비를 받지 않은 적이 없다네. 본 의원에게 치료를 받은 자는 반드시 치료비를 내야 하지. 이것은 본 의원이 지키고 있는 유일한 서원이라네.”
 장삼은 일단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그렇습죠, 그렇습죠. 제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그런데······.”
 돈에 눈이 먼 의원이나 가질 법한 서원이다. 악덕 의원들이 어떻게 돈을 갈취하는지 잘 알고 있던 장삼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런데 얼마 정도입니까요?”
 노의원은 애처로운 장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민망해하는 얼굴로 벽을 노려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노의원이 입을 열었다.
 “오, 옷 한 벌.”
 고작 옷 한 벌?
 장삼의 얼굴이 멍해졌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진다. 노의원이 바라는 것이 고가의 비단 금의라고 짐작한 것이다.
 장삼은 눈을 질끈 감고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인에게는 비단 금의를 맞출 만한 옷이 없습니다요, 어르신.”
 “마, 마의면 된다네.”
 장삼의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마의? 고작 마의면 된단 말인가?
 장삼은 진담인지 농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노의원을 바라보았다.
 장삼의 눈치를 몰래몰래 살피던 노의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이쿠! 옷 한 벌 얻어 입기도 힘들게 생겼구나!’
 노의원이 입고 있는 옷은 해지고 메져 옷으로써의 가치가 없었다. 일반인이 입는 옷이라기보다 저 개방도나 입을 법한 옷이다.
 하지만 이 촌부는 아무래도 옷을 주기가 싫은가 보다.
 “자, 자네가 입고 있는 것 정도면 되네.”
 장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이 입고 있는 정도의 마의라면 자신의 형편으로도 어려울 것이 없다.
 단 한 벌의 마의로도 충분하다고 하니 과연 청수한 얼굴에 맞게 청렴한 분이신가 보다.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의선(醫仙)이 아니신가!
 “지, 진정··· 마의면 됩니까요?”
 장삼은 감동에 젖어 울먹이며 노의원을 바라보았다.
 “으음.”
 하지만 노의원은 그 시선을 보고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
 ‘예사 놈이 아니구나! 입던 옷 한 벌만 좀 얻어가자는 데 눈물까지 보이다니!’
 상대는 보통의 촌부가 아니다. 저놈은 지독한 짠돌이 촌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노의원은 방향을 바꾸어 동정심을 유발해보기로 했다.
 노의원은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니까··· 하의만이라도 괜찮네. 아니, 하의보다는 상의가 낫겠구먼. 한 벌이 비싸다면 상의만이라도 괜찮네.”
 이제 노의원의 목소리는 거의 구걸하는 듯했다.표정을 보니 울상도 이런 울상이 없다.
 “드, 드리지요. 마의라면 한 벌 드릴 수 있습니다요. 그, 그런데 그걸로 충분하신지······.”
 “좋구먼!”
 노의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기쁨에 수염을 바르르 떨던 노의원이 다시 머뭇거렸다.
 “저기, 그런데 말일세.”
 “예, 어르신. 말씀하십쇼.”
 장삼이 넓죽 고개를 숙였다.
 “호, 혹시 감자 몇 알도 좀 얻을 수 없겠나?”
 당연히 드려야지.
 장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뭔가 수상쩍다는 눈으로 노의원을 주시했다. 혹시 뭔가를 더 요구할지도 모른다.
 “물론입죠. 한데 정말 그걸로 충분한지······.”
 “충분하고말고! 정말 고맙네!”
 노의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기쁨에 젖은 얼굴로 장삼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고맙네! 사실 본 의원은 끼니를 때운 지 몹시 오래되었다네! 산에만 다니다 보니 먹을 것이 만만치가 않았어!”
 물론 산행을 주로 하는 노의원이니만큼 아예 굶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숨어 있는 칡뿌리나 나물 같은 것을 캐어 먹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요기가 될 리 없다.
 “지, 지금 당장이라도 조금 올릴깝쇼?”
 노의원은 감동에 몸을 떨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주면 고맙지!”
 “그,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쇼.”
 장삼은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뭔가가 꺼림칙한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이상하다······.”
 아이를 저만큼이라도 낫게 한 걸 보면 분명히 대단한 노인네 같긴 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추레하다.
 “분명 대단해 보이는데······.”
 장삼은 중얼중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신선 같은 노의원은 바로 약선의제(藥仙醫帝).
 그는 무림을 싫어하는 무림인, 부귀를 싫어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기인(奇人)으로, 그 의술만으로 강호오제(江湖五帝) 중 일인의 자리에 오른 약선 이시진(李時珍)이었다.
 
 * * *
 
 약선이 곧 먹게 될 감자에 대한 기대로 어깨춤을 추고 있을 무렵이었다.
 장삼의 모옥이 자리한 무령산(巫鈴山)의 기슭에서는 한 청년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는 하늘을 언제부터 보았는지 몰랐다. 아니, 언제가 뭔지도 몰랐다.
 청년은 그저 백치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저건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청년은 하늘을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한동안 누워 있던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생각은 그에게 몸을 일으키라 말하고 있었다.
 “음?”
 청년은 땅을 짚은 손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이 보였다. 청년은 순진하게 그것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이게 뭐지?’
 손가락이 뭔지는 몰랐지만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다.
 청년은 손가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으윽!”
 갑자기 머릿속에 거센 물결이 몰아닥쳤다. 한 가지 기억과 동시에 끔찍한 두통이 찾아온 것이다. 청년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괴로워했다.
 두통은 찾아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이, 이것은 내 것.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 나.’
 두통이 사라지자 기억이 확고해졌다.
 한 번 더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청년이 이번엔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저게 뭐지?’
 울창하게 땅을 감싸고 있는 것.
 “으으······.”
 청년은 두통과 함께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땅에 뿌리를 품고 하늘로 자라는 것. 푸르고 넓적한 것을 드리우는 것.
 그 위에 있는 것은 뭐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
 청년이 발견한 것은 새였다.
 “아······!”
 청년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의 모습을 한 가지, 두 가지씩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을 신기하게 둘러보던 청년은 문득 뭔가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킁! 킁킁!”
 청년이 코를 찡긋거렸다. 어디선가 본능을 자극하는 냄새가 난다.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채 꿈틀꿈틀 기어서 냄새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머지않아 청년은 물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 아······.”
 청년은 더듬더듬 목소리를 내며 물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었다.
 “아앗!”
 누군가가 물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깜짝 놀라 머뭇거리던 청년이 다시 조심스레 물가로 다가갔다.
 변함없이 물속에 누군가 있다.
 손가락을 들어 물가를 쿡 찔러보자 청년의 그림자가 이지러졌다.
 “헉!”
 청년은 당황한 듯 손을 뒤로 빼었다. 흔들리던 물결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이번엔 웅덩이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저 속에 있는 것은 누구지?’
 물속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과 똑같이 행동한다.
 청년은 다시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으으윽!”
 신음을 내뱉은 청년은 이를 악물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통과 함께 한 가지 인지가 찾아왔다.
 ‘이건··· 바로 나.’
 빠르게 두통이 사라지자 청년은 다시 물가를 바라보았다. 겁먹을 필요 없다. 물에는 비친 것이 바로 자신의 그림자다.
 그는 입을 물가에 처박고는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약선 이시진은 찐 감자를 들고 희희낙락 웃었다. 감자는 노릇노릇한 연기를 뿜어대고 있다. 맛있어 보인다.
 “고맙구먼. 잘 먹겠네.”
 “예, 어르신.”
 장삼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을 고쳐 준 고마운 의원님이니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
 실제로 장삼은 모든 것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자네는 안 먹나?”
 입을 크게 벌리고 감자를 베어 물려던 이시진이 의아한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장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요. 저는 됐습니다.”
 “아무리 봐도 허기져 보이는데?”
 약선의 이름은 땅따먹기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장삼의 안색을 보고도 허기를 짐작하지 못한다면 약선이라는 이름을 달 자격이 없을 것이다.
 “괜찮습니다요.”
 장삼이 우울해진 얼굴로 말했다.
 사실 감자는 조금 더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으깨어 죽을 만들어 줄 아들에게 줄 참이다. 장삼은 나중에 나물 따위로 속을 채울 심산이었다.
 “허어!”
 약선의 눈에 그런 장삼의 마음이 보였다. 괜히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아 약선은 감자 한 개만 쥐어 들고는 그릇을 내쳤다.
 “에이, 이거 내다 버리게. 한 알도 다 먹기도 벅찬 사람에게 뭘 이리 많이 쪄온 게야.”
 “예?”
 장삼은 의아한 얼굴로 약선을 바라보았다.
 약선은 수염을 부들거렸다. 사실 몹시 아깝다. 그 역시 사흘을 굶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을 참으며 외쳤다.
 “버리든가, 자네가 먹어버리든가 하라고 했네!”
 
 청년의 귓가에 아련한 소리가 들려왔다. 웅얼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왠지 관심이 간다.
 청년은 최대한 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애썼다.
 “버리든가, 자네가 먹어버리든가 하라고 했네!”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과 장삼의 모옥이 오십여 장 이상 떨어진 것을 생각해 보면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청년은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는 고개를 들었다.
 ‘환하다.’
 청년은 멀리서 환한 불빛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것은 뜨겁지만 밝은 것. 가까이 있으면 다치지만 멀리서 보면 좋은 것.
 ‘저곳으로 가자.’
 어쩌면 저곳에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를 낯익음을 느꼈던 청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균형을 잡지 못해 기우뚱 기우뚱거렸지만 마침내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청년은 만족한 듯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몸을 제대로 일으킨 것이 신기하다.
 “아··· 아······.”
 청년은 이번에는 오른발을 들어보았다. 처음으로 걸음을 떼보는 것이다.
 이번에도 성공했다.
 청년은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는 신기하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기억이 모두 사라진 청년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세상에 태어난 보기 드문 신생아(新生兒).
 청년의 입장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바로 그것이 되리라.
 ‘저곳으로 가자.’
 청년이 불빛 쪽으로 발을 떼었다. 마음속에서는 불길 가까이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청년의 몸을 지배했다.
 “음?”
 청년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의아한 듯 신음을 내뱉었다. 뭔가 이상하다. 다시 한 번 움직여 보자.
 청년은 다시 한 발자국을 떼었다. 발은 땅에 닿자마자 거칠게 퉁겨났다.
 그것은 청년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하으허아흐아악!”
 굳건하게 딛고 있던 땅이 사라지고 거센 바람이 느껴지자 청년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 * *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장삼에게 감자를 양보하고 방을 나섰던 약선 이시진이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악!”
 “아이쿠, 하늘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요!”
 감자를 다시 권하러 나왔던 장삼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겁에 질린 장삼은 재빨리 엎드려 깊숙이 절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조상님이 크게 노하셨나 보다.
 굉음이 사라지고 흙먼지가 가실 때까지 장삼의 엎드린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흙먼지가 사라지자 거대한 구덩이가 보였다.
 “으아아! 으아아··· 아··· 아······!”
 이시진의 비명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흙먼지와 함께 공포가 조금씩 사라진다.
 마침내 비명을 멈춘 이시진이 천천히 구덩이로 다가갔다.
 “으음······.”
 많이 다쳤을 것만 같은 청년이 널브러져 있다. 이시진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혼잣말을 주워섬겼다.
 “이건 또 뭐지?”
 땅에 엎드렸던 장삼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시진의 혼잣말에 성심성의껏 대꾸했다.
 “모르는뎁쇼?”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라······.”
 이시진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질 일은 없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무림인 같구먼.”
 이시진이 걱정스런 얼굴로 구덩이 속을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무림인이라지만 하늘로 족히 이십여 장은 떠오른 듯하니 아무래도 많이 다쳤을 것이다.
 과연 구덩이 속에 있던 청년은 꿈틀꿈틀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많이 다쳤겠군. 꺼내세.”
 이시진이 장삼을 향해 말했다.
 “아, 예.”
 장삼은 꺼림칙한 얼굴로 구덩이를 살폈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을 보니 마귀가 아닌가 싶다.
 병자를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없는 약선이 터벅터벅 구덩이 속으로 걸어갈 때였다.
 “으헉?!”
 구덩이 속에 떨어졌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청년은 비명 소리를 듣고는 멍하니 이시진을 바라보았다.
 “까, 깜짝 놀랐잖소.”
 이시진이 긴장한 몸을 억지로 펴며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청년이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걸까?
 이시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기척도 없이 일어날 줄은 몰랐소이다.”
 하마터면 간 떨어질 뻔했다. 약선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런데 괜찮소?”
 “······.”
 이시진의 얼굴을 보던 청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상대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가 아는 것은 손가락이 자기 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청년은 멍하니 약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괜찮은 거요?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이시진이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사 무림인이라고 치더라도 하늘에 이십여 장 이상 떠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올랐다고 쳐도 무방비하게 떨어지면 커다란 외상과 함께 내상을 입게 된다.
 “무공이 뛰어나신가 보구려.”
 이시진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설마 스스로 뛰어오른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무공이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늘의 경지에 닿았다고 해야 옳으리라.
 “아··· 아······.”
 청년은 두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단 한 문장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이, 이보시오?”
 약선이 재차 청년을 불렀을 때였다.
 청년은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저 소리일 뿐이었던 것이 조금씩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으윽.”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은 두통이 밀려들어왔다.
 되살려야 하는 기억의 양이 조금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일까?
 고통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청년은 이를 악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아아아아악!”
 “으허억!”
 아무래도 미친놈인가 보다.
 헛바람을 잔뜩 집어삼킨 이시진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머리를 부여잡은 미친놈―약선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이 몸까지 뒤틀며 괴로워한다.
 “으아아아아악!”
 말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은 끔찍했다.
 청년은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극심한 고통에 입가는 바들바들 떨렸고, 눈동자가 크게 부릅떠졌다.
 이것은 말[言].
 말은 사람들이 서로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만든 것. 각각의 뜻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글자들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
 말에는 무엇이 있지? 꽃[花], 바위[石], 하늘[天], 사람[人], 새[鳥], 손가락[指]······.
 “으아아아아악!”
 수많은 단어가 청년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또 사라졌다. 그리고 서서히 조합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청년은 말이 태어나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단어들이 섞여 문장을 만든다. 몇 개의 단어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문장을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
 그것은 고통을 잊을 만큼 신비로웠다.
 실제로 고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기도 했다.
 “헉, 허억!”
 비명을 지르던 청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다물었다.
 청년의 비명이 사라지자 이시진이 의아한 얼굴로 청년을 훑어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숨소리마저 고르게 변했다.
 “왜 그러시는 게요?”
 이시진이 최대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데까지 물러난 채로 질문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청년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혀를 움직여 보았다. 한동안 그러기를 반복하던 청년이 마침내 소리를 내었다.
 “아응······.”
 혀의 움직임이 부드럽지 않자 청년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우물우물거리며 말하는 시늉을 해보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나은······.”
 이번엔 발음이 제법 정확해졌다.
 이시진은 청년이 뭐라고 말하는지 짐작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청년이 ‘나는’이라고 말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청년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괘앤··· 찬타······.”
 “‘나는 괜찮다’라고 한 거요?”
 약선이 되물어보았다. 청년은 무심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선은 정답을 맞혀놓고도 고민해야 했다.
 “그럼 뭐라고 한 거요?”
 청년이 홀로 중얼거렸다.
 “괘, 괘앤··· 차안타?”
 괜찮다. 괜찮은 게 뭐지? 아프지 않거나 상태에 이상이 없는 것. 아픈 것은 뭐지?
 청년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개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개념으로 화했다.
 아픈 것은 몸이 괴롭고 힘든 것. 몸이 뭐지? 몸은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은 뭐지? 나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 나는 뭐지?
 내가 누구지?
 “아······!”
 청년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말을 떠올릴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저 끔찍한 고통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기억의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누구지?
 청년의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이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질문은 답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아··· 누구우지?”
 청년은 멍한 눈으로 이시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그 혼란으로 인한 슬픔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그 애처로운 눈을 보면 누구든 대답해 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약선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나, 나도 모르는데?”
 이시진이 최대한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대답해 주었다.
 청년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반문했다.
 “왜 모라?”
 이 자식이!
 약선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을 수습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 * *
 
 장삼은 청년이 요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가 없으니. 하지만 실없는 놈이기도 했다.
 ‘왜 모라?’라니.
 하마터면 장삼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를 알 리가 없지 않나.”
 이시진은 분노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청년에게 말했다.
 “으음.”
 청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시진은 그 행동이 마치 ‘멍청한 녀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년은 집을 발견하고 신기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게 뭐지?’
 네모 모양이고 안정적으로 땅 위에 서 있는 것. 저것은 집. 그것도 작은 집. 아주 작은 집.
 “일단 치료부터 해야겠네. 다친 곳은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르니 말일세.”
 이시진이 중얼거렸다. 처음엔 공대를 했지만 청년의 나이가 어리니―버르장머리를 보니―하대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말을 마친 이시진이 모옥의 작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청년은 이시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뭐 하나, 들어오지 않고?”
 “드러가?”
 청년이 혼잣말을 주워섬겼다. 잠시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던 청년은 곧 답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아. 드러가지이.”
 “험! 험!”
 이시진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삼과 청년 역시 이시진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청년은 방에 들어선 이시진이 자리에 앉자 같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시진이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의 손목을 쥔다. 그리고는 얼굴색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바꾸더니 손목을 놓는다.
 “말도 안 돼.”
 뭐라고 중얼거린 그는 다시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는 좌절한 듯 수염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내가 인생 헛살았구나. 맥도 잡히질 않으니······.”
 그는 손목을 놓고 자신을 곰곰이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루하게 앉아 있던 그가 방법을 찾았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이 있지! 나는 강제로 맥을 틔울 수 있다네!”
 그는 조그마한 나무 상자에서 가늘고 뾰족한 것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을 찔렀다.
 “무어 하는 거야아.”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해보았지만 그는 더욱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무시했다.
 “빌어먹을! 금강불괴도 아니고 뭔 피부가 이리 딱딱해! 다시 대!”
 그는 다시 침을 쿡 찔러보았다. 안 들어간다.
 이번엔 침을 쿡쿡쿡 여러 번 찔러보았다. 여전히 안 들어간다.
 아무리 열심히 찔러도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가 침을 못 꽂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약이 오른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이마에 핏발을 세웠다. 그리고 있는 힘껏 뾰족한 것을 찌르려했다.
 “오! 들어가는 것 같아!”
 안 들어갔다. 뾰족한 것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진 까닭은 그것이 휘어졌기 때문이다.
 곧 그는 뾰족한 것을 부러뜨리고는 파편에 찔린 손을 부여잡고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으아앗! 따갑다! 따가워!”
 그는 대단히 괴로워하며 억울한 표정으로 긴 천을 꺼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싸맸다.
 “무얼 하는 거야아, 멍청한 노옴.”
 감히 자신을 함부로 다루다니. 슬슬 화가 날 지경에 이른 청년이 불쾌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노한 이시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신기한 몸을 가졌구먼, 자네. 침이 부러질 줄은 몰랐네그려.”
 “침?”
 “그래, 부러진 침 말일세.”
 청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생각해 보니 침이 뭔지 알 것 같다. 침은 옷을 꿰맬 때 쓰는 도구. 그런데 저 사람은 왜 그런 걸로 나를 찔렀지?
 “······.”
 약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수염을 부들거리며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은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시진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저 똑바로 주시할 뿐이었다. 약선의 시선은 끈질기리만치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
 가시방석 같은 침묵을 견디다 못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언 누운으로 보느은 건가?”
 “자네는 누군가?”
 이시진이 몸을 곧게 세운 채 청년에게 질문했다. 말이 막힌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모오른다아.”
 “으음.”
 약선의 입에서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 녀석, 신기한 몸을 가지고 있다. 의원 생활 육십 년 동안 맥을 잡을 수 없는 경우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무공을 배운 적이 있던가?”
 게다가 몸의 강도가 말도 안 되게 단단하다. 강제로 맥을 틔워보려 찔러 본 바늘이 부러져 버렸다.
 그래서 약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을 치료해야 했다. 게다가 바늘도 새로 구입해야 할 판이다. 돈도 없는데.
 청년은 도다시 고개를 저었다.
 “모오른다아.”
 어떤 질문에도 ‘모오른다아’로 대답하는 청년에게서 답답함을 느낀 이시진이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는 것이 낫겠다.
 “자네, 아는 것이 있기는 한가?”
 “있다아.”
 “말해보게.”
 청년이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언 손가라악, 그리고 이건 지입, 나느은 사아람. 아! 너도오 사아람.”
 ‘네가 사람이란 건 처음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에 이시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흐음.”
 아무래도 기억을 모두 잃은 듯하다. 이자가 무림인이라면 그 이유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주화입마인가?”
 주화입마에 빠져들어 이지를 상실했고, 또한 전신 세맥이 닫혔다면 이해가 되긴 한다.
 하지만 임맥과 독맥이 잡히지 않는다. 주화입마에 들어 마기가 골수에 치밀었든, 아니면 맥에 손상을 입었든 잡히기는 해야 하는 것이다.
 “것··· 참.”
 약선은 수염을 긁적거렸다. 수염의 부드러운 결을 파고드는 천의 느낌이 생경하다.
 침이 들어가지 않는 육신이라······.
 “으흠.”
 저 청년은 금강불괴에 가까운 육신을 지니고 있다.
 “이름··· 은 기억나나?”
 약선은 의구심 섞인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주화입마에 들었는 데도 불구하고 금강불괴의 몸을 유지하고 있다면 주화입마에 들지 않았을 때의 그의 무공은 얼마나 뛰어났겠는가!
 강호오제는 이름도 들이밀지 못할 만큼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무림의 전대기인일지도 모른다.
 “모오른다아.”
 “아쉽구먼.”
 이름을 모른다니······. 참 애석하게 됐다. 금강불괴에 이르렀다면 어쩌면 만독불침일지도 모르는데······.
 “음?”
 약선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그렇다. 금강불괴를 이룰 정도의 무공이 있다면 어쩌면 만독불침의 몸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오!”
 약선의 얼굴에서 흥미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반대로 청년은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왜애 그러나아?”
 청년이 조심스럽게 약선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약선은 빙긋 웃으며 탐스럽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별일 아닐세. 일단은 푹 쉬게나. 맥을 짚을 수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네만 두부(頭部)에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야. 아까 두통을 느꼈었지?”
 진맥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짐작이 가긴 한다. 약선이란 이름을 달 정도가 되면 보는 것으로 상대의 몸 상태를 알아볼 수 있다.
 이시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혹시 아직도 머리가 아픈가?”
 “아안 아프다아.”
 청년은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편안한 기분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서 두려운 얼굴로 청년을 노려보고 있던 장삼을 발견했다.
 장삼은 그가 마귀일 것이라는 추측을 사실로 굳히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온다.
 하지만 의술은 뛰어나도 눈치는 없는 약선은 그 시선이 청년을 재워주기 싫어하는 짠돌이 촌부의 시선 같다고 생각했다.
 두부에 충격을 받아 아파하는 환자를 내쫓을 수야 있겠는가!
 약선은 청년을 변호하기로 마음먹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이보게나, 장삼.”
 “예?”
 장삼이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약선은 헛기침을 험, 험 하고는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이 친구도 잘 데가 없을 듯한데······.”
 “걱정 마십쇼, 어르신.”
 장삼은 일단 머리를 조아렸다. 저 청년이 마귀든 아니든 아들을 치료해 주고도 마의 한 벌만을 원하는 순박한 의원 어르신의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다.
 “저 청년도 아파 보이는데 설마 풍진 데서 재우겠습니까요. 예서 재우겠습니다.”
 장삼의 말에 편안한 얼굴이 된 이시진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짠돌이로 보였는데 예상외로 그렇게 심한 짠돌이는 아닌가 보다.
 “그럼 부탁하겠네.”
 
 
 
 
 
  제2장 의현(醫賢)
 
 다음날.
 청년은 눈을 찌르는 환한 빛살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잔뜩 찌푸린 청년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지이?”
 울퉁불퉁한 벽과 낡은 닥종이 같은 것이 보인다. 벽은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아람이 없구운.”
 바람이 느껴지지 않으니 왠지 답답하다.
 침상도 없이 아무렇게나 누워 잤던 청년은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아!”
 문을 열자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햇살이 청년의 눈을 찔렀다. 청년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언뜻 빛 사이로 노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깼나?”
 자그마한 텃밭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노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았다아.”
 청년이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경한 산의 풍경이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산은 아름다웠다.
 청년은 제 처지도 잊고 산을 구경했다.
 “좋구운.”
 이시진이 헤죽헤죽 웃으며 다가왔다.
 “자네, 아무래도 많이 피곤했었나 봐. 늦잠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걸 보면.”
 “으음?”
 청년은 너무나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약선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약선은 유쾌했다.
 “자, 자! 아침이 되었으니 어쩌면 기억나지 않던 것이 기억날 수도 있네. 혹시 뭐 생각나는 것 없나?”
 “모오른다아.”
 “그렇구먼.”
 이시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져 보았지만 그것은 정말 기대일 뿐이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무언가 계기가 있어야 기억을 찾는 법이다.
 그는 능숙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말이야, 일단 자네 발음을 좀 고쳐 보세.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이.”
 청년이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진은 잠시 고민해 보았다. 발음을 교정하려면 일단 말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발음을 들려줘야 한다.
 방법을 찾은 이시진이 반갑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먼.”
 “으음?”
 “한번 따라 해보게. 아아치임.”
 약선이 입을 크게 벌리며 말하자 청년이 순박하게 약선을 따라했다.
 약선은 이번에는 조금 빠르게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빨라진 발음 때문일까? 청년이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주저하던 청년이 다시 입을 떼었다.
 “아아침.”
 이시진의 발음과 가까워진 목소리가 나왔다. 청년이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혀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다시 해보게. 아침.”
 “아침.”
 청년은 이번에는 곧잘 따라 했다.
 약선은 흥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하는구먼! 이젠 이 말을 따라 해보게. 안녕.”
 “아안녕.”
 약선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어쩌면 이 청년의 발음을 교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약선의 예감은 정확했다.
 해가 질 때까지도 약선과 청년의 교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약선은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가며 단어들을 말했고, 청년은 느릿한 발음으로 그를 따라 했다.
 하지만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 청년의 발음이 상당 부분 정확해진 것이다.
 “그래, 그렇지. 다시 불러보게.”
 “이시진?”
 청년이 약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선은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오전 내내 고생했던 결과가 드러나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쏜가!
 “으하하핫! 다시 해보게!”
 “이시진?”
 청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약선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그 광경은 대단히 기묘한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흰 수염의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으니 어떻게 봐도 좋을 일이 없다.
 그래서 화전 일을 하고 돌아오던 장삼은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으음······.”
 장삼은 노의원이 혹시 치매에 걸리지는 않았나 하고 추측해 보았다.
 정신이 나간 요괴 청년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데도 노의원은 기뻐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었던 것이다.
 “저, 의원님?”
 “이시진이라고 다시 해보··· 음?”
 신이 났던 약선이 장삼을 발견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잠시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약선은 곧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험! 험! 나, 나는 이, 이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있었다네.”
 “그러셨군요.”
 장삼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돌려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착각한 청년은 장삼도 기쁘게 해주기로 했다.
 “장삼?”
 새파랗게 어린 듯 보이는 녀석이 감히 손가락질하며 반말을 지껄이다니······.
 소싯적에 힘깨나 썼던 장삼은 청년을 한대 쥐어박아 줄까 하고 고민했다.
 청년은 청년 나름대로 실망했다. 이렇게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안 좋아한다.
 청년은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장삼?”
 약선의 노력은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이 분명했다. 장삼의 이름을 매끄러운 발음으로 구사한 청년을 보면 알 수 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요, 어르신.”
 차가운 얼굴이 된 장삼이 청년에게서 몸을 홱 돌리고는 모옥 안으로 총총 걸어 들어가 버렸다.
 “이, 이보게, 장가(張家)!”
 어쩐지 자신의 체면마저 망가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약선은 난감한 얼굴로 모옥으로 들어가 버린 장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불타는 눈으로 청년을 주시했다. 이 녀석에게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의 이름은 바로 예의다.
 “자! 이제 존댓말을 배우자.”
 “존댓말?”
 청년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존댓말은 상대를 높이는 말.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말. 해본 적 없는 말.
 청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싫다.”
 자신은 존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존댓말을 하기가 싫다. 하대를 해야 한다.
 약선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싫습니다.”
 “싫다.”
 명확한 발음으로 반말을 한 청년이 고개를 홱 돌렸다.
 “싫습니다.”
 약선의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교육은 자신이 말하면 상대가 따라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즉, 존댓말을 가르치려면 먼저 존댓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약선은 존댓말을 했다.
 시퍼렇게 어린 청년은 반말을 한다.
 “싫다.”
 약선은 분노했다. 명예나 세인의 존경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지만 그렇다고 반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는 분노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이 망할 녀석!”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존댓말만 아니면 얼마든지 따라 해줄 용의가 있다.
 “이 망할 녀석!”
 “······.”
 약선은 화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화를 내보아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 녀석은 그냥 따라 할 뿐이니까.
 약선은 이 교육이 발음 교정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청년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래, 오늘은 이만 하자꾸나. 벌써 노을이 비치니.”
 과연 해가 지고 있었다.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바라보며 약선은 미소를 지었다. 산에서 보는 노을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아름답지 않느냐?”
 “응?”
 청년은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언젠가 보았던 그 노을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 언젠가?
 청년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 낯설어 고개를 갸웃했다. 약선은 청년이 노을을 낯설어하는 줄 착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허헛, 녀석. 노을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 보구나.”
 청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약선은 다시 시선을 돌려 노을을 바라보았다.
 약선의 귓가에 청년이 노을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기억난다.”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감정이 격동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약선이 반가운 얼굴로 청년을 돌아보았다.
 “뭐, 뭔가가 기억나느냐?”
 “아니.”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약선이 초조한 듯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가 떠오를 것 같으면 그 기억을··· 기억을······.”
 약선은 청년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청년의 얼굴에는 기묘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마치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품은 듯한 얼굴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청년의 표정 하나하나를 훑어보던 약선이 중얼거렸다.
 얼핏 보기엔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은 청년의 표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읽게 해주었다.
 “굳이 떠올리려 하지 말거라, 아이야.”
 약선은 천천히 말을 끝맺었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큰 슬픔.
 “알았다.”
 청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을에서 시선을 떼었다. 오늘 오전부터 죽 함께 있었다고 약선의 말은 제법 잘 따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약선은 흐뭇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오늘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 푹 쉬면 될 게다.”
 “그렇군.”
 청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선은 갑자기 무엇인가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나저나 뭐라고 이름을 지어주긴 해야겠구나, 아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으니.”
 “이름?”
 청년은 멍하니 약선을 바라보았다. 이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자신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약선은 고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으음, 성은 줄 수가 없겠다. 어차피 기억이 돌아오면 본명을 사용하게 될 테니 말이다. 결국 가명을 써야 한다는 소리인데, 뭐가 좋을꼬.”
 청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이름이 뭐였지? 하얀 백지에 가려진 듯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본 노는 의원이니 의(醫)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좋더구나.”
 청년의 이름의 첫 글자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청년은 ‘의’라는 말을 조그맣게 주워섬겼다.
 약선은 조금 더 고심해 보았다. 이름을 ‘의’라고 외자로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이 좋을까?
 잠시 생각해 보니 이 아이의 이름이 무언지 생각이 날 듯했다. 약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그래. 네가 멍청하니 ‘현(賢)’ 자가 좋겠구나.”
 약선은 인자하게 웃음 지었다. 하얀 수염이 노을에 물들어 발갛게 빛났다.
 “그래, 어차피 가명이니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이 없지 않겠느냐? 이제 너를 의현이라고 부르자꾸나.”
 “의현?”
 “그래, 의현.”
 약선은 다시 노을로 시선을 돌렸다.
 ‘의’라고 중얼거리던 청년은 이제 ‘의현’이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다. 의현이라는 것은 이제 나다. 이제 나는 의현이다.
 “의현······.”
 청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것이 노을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얼굴이 붉어진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 * *
 
 노을은 중원 곳곳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황궁과 대신들의 장원, 양민의 모옥이 이번만큼은 차별없이 붉게 물들었다.
 노을 지는 하늘은 남패천의 고루거각도 어김없이 바라보았고, 그래서 천하를 양분하는 남패천 역시 어김없이 주홍빛으로 물들어야 했다.
 남패천(南覇天)의 천주실(天主室).
 천하를 양분한다는 남패천의 천주실답게 방 안은 화려했다.
 금으로 만든 태사의가 가장 먼저 눈을 밝게 해준다면, 그 앞에 놓인 세원목(世原木) 탁자가 뒤를 이어 고고한 품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탁자 뒤쪽에 위치한 화려한 문양이 수놓인 비단 침상이 방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마 침상의 앞에 부복하여 앉아 있는 사내가 아니었더라면 방 안은 조금 더 화사했을 것이다.
 남패천의 천주를 보좌하는 제일마(第一魔) 모표(毛飄)는 침울한 얼굴로 남패천의 하늘 탈백마제(奪魄魔帝)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리에 누워 계실 분이 아니거늘······.’
 모표는 암담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
 “속히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주군.”
 “허헛, 그래. 고맙구나.”
 탈백마제는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얼굴색이 붉고 숨소리가 안정적이었지만 사실 탈백마제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절명독(絶命毒)이라고까지 불리는 부시혈독(腐屍血毒)에 중독되었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
 모표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감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주위의 시선이 있는지 훑어보았다. 천주를 해한 자가 보내둔 손길이 아직도 주위에 있으리라 짐작한 탓이었다.
 ‘있군.’
 세 명의 무인들이 쥐새끼처럼 숨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모표는 이를 악물었다. 충혈된 두 눈으로 잔인한 미소를 짓던 모표는 조용히 탈백마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탈백마제는 이미 상황을 짐작했는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아마 덕 장로가 보낸 눈일 게야.”
 “혹여 옥체에 이상이 있으시면 하문하소서. 속하가 조취를 취하겠나이다.”
 모표는 뜬금없이 동문서답을 했다. 상대의 시야를 돌려보려는 의도였다.
 그리고는 이번엔 입술을 오물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동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덕 장로가 개입된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탈백마제는 모표의 심산을 파악했다. 충직한 수하는 조금이라도 세작들의 이목을 돌려보려는 것일 것이다. 하나 저들의 눈이 그렇게 가볍지 않으니 모표의 행동은 모조리 들켰다고 봐야 옳으리라.
 그 사실을 모표에게 알려주고 싶진 않다. 탈백마제는 미소를 지으며 모표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쿨럭, 그래. 고맙구나.”
 [덕 장로는 반드시 끼어 있을 것이야. 그를 계속 감시하도록.]
 모표가 다시 입을 열어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음을 올렸다.
 “몸이 많이 불편하시거든 의원을 불러올리리다.”
 [약선이 남패천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
 탈백마군은 침묵한 채 말이 없었다.
 [하여 마영귀를 보내었습니다. 아마 무사히 그를 데려올 겝니다. 그때까지만 버텨주소서.]
 “의원은 됐느니라.”
 [미안하구나, 모표야.]
 짧게 중얼거린 탈백마제가 씁쓸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몸이 이런 지경이 되고 보니 수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사실상 자신의 모든 명령은 모표를 통해서야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표는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허허헛······.”
 탈백마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침상의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 강호는 아직도 자신의 지휘 아래 남패천이 존재하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사실이었다.
 이미 권력은 갈릴 대로 갈려 있었고, 그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집어삼키고자 혀를 날름거리는 뱀 같은 녀석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뱀 같은 놈, 제일장로 덕연승을 떠올리자 탈백마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속하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주군이 누워 계신 침상을 바라보던 모표가 굳은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가는 주군을 노리는 암중의 칼날이 무언가 낌새를 차릴지도 모른다.
 “부디 평안하소서.”
 고개를 꾸벅 숙인 모표가 걸음을 뒤로 세 걸음 물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천주실을 벗어나려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구파일방은?]
 모표는 흠칫 몸을 멈추었다.
 주군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남패천에서도 단 세 명만이 알고 있을 뿐인 대계(大計). 침상에 누워서도 주군께서는 그 일을 잊지 못하셨나 보다.
 상념에 빠진 모표의 귓가에 다시 탈백마제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벽력탄은?]
 탈백마제의 목소리는 초조했다.
 그에게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유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부 파천제의 유지를 지키는 일.
 그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쯤은 아깝지 않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목숨까지도.
 [아무 탈 없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모표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전음을 날렸다.
 “쿨럭! 쿨럭!”
 탈백마제의 괴로운 기침 소리가 모표의 가슴을 아프게 할퀴었다.
 방 밖으로 나서기 직전 모표는 탈백마제의 마지막 전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구파일방에 보낸 세작들을 철저히 관리하라. 대계를 망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존명.]
 모표의 대답을 들은 탈백마제는 금침 위로 보이는 아름다운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벽력탄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탈백마제는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침이 섞인 거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클클클.”
 가슴이 아린 데도 웃음이 자꾸 새어 나온다. 이 일을 마치면 사부께서 은거하신 곳을 찾아가 목숨을 놓을 생각이다. 남패천 따위 관심도 없다. 사부가 그랬듯이.
 ‘벽력탄은 구파일방 밑에 있지.’
 거친 웃음소리가 고요한 남패천의 천주실을 울렸다.
 
 * * *
 
 파란 하늘은 아름다웠다. 몽실몽실 떠 있는 조각구름과 공중을 노닐 듯 날아가는 새,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창공.
 의현은 황홀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이 의현의 눈가를 시리게 만들었다.
 “하핫.”
 무표정하던 의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하늘을 볼 때마다 즐거움을 느꼈다.
 “의현아!”
 “헛!”
 하늘을 잘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시진이 자신을 부른다. 의현은 사색이 되어서 몸을 일으키고는 후닥닥 모옥 뒤로 숨어들었다.
 ‘무슨 일이지?’
 의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 멀찍이 자신을 찾는 약선이 보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해괴한 것을 가져왔을까.
 며칠 전, 의현은 뭔가 굉장히 쓰고 맛없는 것을 먹었다. 그것을 먹고도 아무 이상이 없자 약선은 몹시 기뻐했다. 사실 그것은 발열을 일으키는 약초이자 독초인 당유고(唐杻暠)였다.
 의현이 그것을 먹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가 추측한 ‘의현 만독불침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다음날에는 더 쓰고 맛없는 것을 먹어야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약선은 의현에게 미귀독(美貴毒)과 중고(重睾)를 먹여 버린 것이다. 약선이야 해독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지만 맛없는 것을 먹기 싫었던 의현은 몹시 곤란한 처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으음.”
 의현은 가끔 약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선은 대체로 자신에게 잘해주지만 때때로 명령을 내리려 든다.
 그런 일을 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약선을 거부하고는 했다. 자신은 명령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내려야 할 사람. 그가 부탁을 하면 모르되 명령을 내리면 받아줄 수 없다.
 “나쁜 놈.”
 의현은 기억나는 어휘로 최대한 욕을 구사해 보았다. 욕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든다.
 죽여 버린다면 마음이 더 시원해질 텐데.
 ‘죽여?’
 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죽음. 살아가는 것이 끝나는 일. 그만큼의 추억만을 남기고 떠나는 일. 나에겐 쉬운 일.
 ‘안 돼.’
 죽음을 생각에 담았던 의현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죽는 것은 안 된다. 자신의 누이가 죽으면 안 됐던 것처럼.
 자신의 누이?
 “앗!”
 의현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것이다. 게다가 떠오른 기억은 아무런 통증도 유발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은 떠올랐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방금 뭐였지?’
 의현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무언지는 알지 못했다.
 “뭐지?”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던 의현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주워섬길 때였다. 의현의 비명을 들었던 이시진이 밝은 얼굴로 몸을 들이밀었다.
 “여기 있었구나, 의현아!”
 밝은 이시진의 얼굴과는 별개로 의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난 안 먹겠다.”
 의현은 각오 어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시진이 부탁해도 더 이상은 먹지 않으리라.
 “그래. 오늘은 먹지 않아도 된단다.”
 이시진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은 먹일 것이 없다. 대신 다른 것을 가져왔다.
 약선은 등 뒤에 돌려져 있던 팔을 내밀어 그 손에 쥐인 것을 보여주었다.
 “자, 이걸 받아라.”
 손에 들린 것은 식칼이었다. 의현은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 뭔가?”
 “그것은 칼이다. 잠시 손끝을 좀 베어보려무나.”
 “왜?”
 미간을 찌푸린 의현이 질문했다. 약선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긴 왜겠느냐. 네가 금강불괴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그러지.’
 바늘로 이미 일차적인 확인을 마쳤지만 약선 이시진은 확실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시진은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네 피 한두 방울 정도가 필요해서 그렇단다. 작게 상처만 내면 되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의현은 얼굴을 굳혔다. 피를 흘리기 싫다.
 하지만 약선은 인자하게 웃으며 의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잠시 고민하던 의현은 흘끗 이시진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 싫지만 해주자.
 “해주지.”
 의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식칼을 들어 가볍게 그었다.
 아무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음?”
 의현이 재차 시도해 보았지만 손가락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할 뿐이다.
 그 과정을 세세히 훑어보던 약선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과연 금강불괴로구나.”
 오늘 오전에 날카롭게 갈아 둔 식칼인데도 의현의 손가락은 멀쩡했다. 심지어 피부색조차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군.”
 의현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날카롭다. 날카로운 것에 찔리면 상처가 생긴다. 하지만 난 안 생긴다.
 의현은 다시 식칼을 들어 이번엔 조금 더 힘을 주어 베었다. 이번에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이제 되었느니라. 이리 내거라.”
 약선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더 해봐야 헛수고일 것이다. 아마 어지간한 보도(寶刀)가 아니면 상처를 입지 않으리라.
 “······.”
 의현은 의아한 얼굴로 약선을 바라보았다. 약선은 의현에게서 칼을 받아 들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는 아마도 무림인이었을 게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무림인이었을 것이다.
 사실 손에 상처가 생기지 않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공을 사용한다면 어지간한 무림인은 이런 무딘 식칼에 베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공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으니······.’
 의현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공을 익힌 것도 아니다. 의형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는 몸을 하고서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천하제일인이었던 파천제(破天帝)도 아마 이런 경지에는 닿지 못했을 것이다.
 약선은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래. 아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무림인이었겠지.”
 의현은 이시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두운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정말 피가 필요한가보다.
 의현은 침울한 얼굴로 다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기묘한 기분이 의현의 몸을 휘감았다. 상처를 입힌다? 자신에게는 쉬운 일이다. 죽인다? 그것도 쉬운 일이다. 왜? 모르겠다.
 뭔가가 떠오른 것 같았지만 그것은 떠오르자마자 삭제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사라진 기억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처를 내는 건 쉽다.’
 의현은 다시 한 번 이시진을 올려다보았다. 이시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는지 의현이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의현은 왼손의 검지로 오른손의 엄지를 푹 찔렀다. 검지 끝에 날카로운 푸른빛이 빠르게 태어났다 빠르게 사라졌다.
 “헛!”
 무심코 의현의 행동을 지켜보던 약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황급히 의현의 손가락을 잡아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피.”
 의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시진이 원하는 대로 피를 뽑아내었으니 그는 만족하리라.
 “시켰다고 정말로 하는 놈이 어디에 있느냐!”
 당황한 이시진이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 피, 자신이 이야기했던 피 때문에 이 녀석이 손가락을 상케 했단 말인가! 마음 한 구석에 약간의 죄책감이 떠올랐다.
 ‘아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의현이 검지로 손가락을 뚫었다는 사실이다.
 “너······.”
 이시진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의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의현의 검지에서 푸른빛을 보았던 것 같다. 자세히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본 것 같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강기(剛氣)?’
 의현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이시진은 그 시선에 더욱 당황했다.
 “이상하군.”
 사실 의현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피를 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살짝만 상처를 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아예 터져 버렸고, 피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흘러나왔다.
 이시진이 생각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피를 닦아야겠구나. 손이 크게 다쳤어.”
 약선은 의현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또 다른 충격으로 이를 악물었다.
 “으음······.”
 손가락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약선은 신비롭다는 눈으로 의현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손가락이 나아간다.
 “이, 이것은······.”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약선 이시진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확인해 보았다. 손가락의 상처는 이제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군데군데 묻은 피만이 의현의 손가락에 상처가 났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자, 잠시만······.”
 이시진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뭔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금강불괴, 만독불침, 경악할 만한 회복 속도. 또 뭐가 더 있을까?
 약선은 힘껏 머리를 굴렸다.
 다 나은 손가락을 감싸 쥔 의현이 의아한 얼굴로 이시진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이시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이시진은 곧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다.
 장삼이 치워보려 했으나 아무리 힘을 써도 꼼짝하지 않아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바위이다.
 “저기 저 바위가 보이느냐?”
 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인다.”
 이시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바위를 가리켰다.
 “한번 깨보거라.”
 의현은 고개를 꾸벅꾸벅 끄덕이고는 바위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자기 키만 한 바위 앞에 선 의현이 주먹을 쥐고 별다른 준비 자세 없이 내려쳤다.
 콰아앙―!
 인간의 손과 바위가 부딪친 소리치고는 너무나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때는 바위였던 파편이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이시진은 눈을 부릅뜨고 바위를 바라보았다.
 방금 의현의 주먹에 맺혔다 사라진 푸른 기운을 발견한 탓이었다.
 “허··· 허··· 허······.”
 “또 이렇군.”
 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바위를 깨고 싶었을 뿐 조각조각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너무 과하게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호, 혹시 저기까지 뛸 수는 있겠느냐?”
 이시진이 떨리는 손길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켰다. 의현은 하늘에서 떨어졌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직접 뛰어오른 걸지도 모른다.
 의현은 이시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법 먼 거리였다. 하늘의 새도 날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릴 듯한 먼 거리. 할 수 있을까? 있다. 어떻게? 그냥 뛰면 된다.
 “뛸 수 있다.”
 “헉!”
 이시진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뛸 수 있단다. 이십여 리는 떨어진 듯 보이는 산봉우리를 여기서 뛸 수 있단다.
 “뛰, 뛰어보거라.”
 이시진의 떨리는 중얼거림에 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별다른 준비 자세 없이 발에 힘을 주었다. 자세가 살짝 낮아지는가 싶더니 곧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높이 뛰어올랐다.
 “허··· 허······.”
 이시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 작게 보이는 의현을 주시한 채였다.
 “으하으허아하아악!”
 한편, 공중에 떠오른 의현은 공포에 어린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시진과 모옥이 손톱보다도 작게 보인다. 조금 전까지 구경하던 파란 하늘에 손에 잡힐 듯했고, 옷자락은 거친 소리를 내며 휘날렸다.
 의현은 하늘에서 몸을 버둥버둥거려 보았지만 그저 빠른 속도로 앞으로 쏘아져 갈 뿐이다.
 ‘빌어먹을.’
 의현이 원한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멋진 곡선을 그리며 건너편 산봉우리에 착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높이 뛰어오르고 말았다.
 “으허아하아아악!”
 땅으로 몸이 곤두박질치는 것이 느껴진다. 땅이 빠르게 커진다. 마침내는 흙 알갱이가 보일 정도로 커졌다.
 쿵!
 봉우리를 바라보던 이시진의 눈에 폭음과 동시에 아련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처음에는 의현에게 조금의 약을 투여해 볼 생각이었다. 만독불침이니 의학에 많은 발전을 가져다주리라.
 호기심.
 그것은 호기심일 뿐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의현은 무학의 일대 경지에 오른 자일 것. 한낱 호기심으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시진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혹시 주화입마가 아닌 건가?’
 의현은 주화입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했다는 것뿐이다.
 멍하니 산봉우리를 바라보던 이시진은 봉우리에서 무엇인가가 하늘로 빠르게 쏘아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의현이리라.
 “으하으허아하아악!”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쏘아진 의현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약선의 머리를 지나 굉음과 함께 땅에 곤두박질쳤다.
 쿵―!
 모옥 근처의 숲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흙먼지 사이로 곧게 자라 있던 나무가 몽땅 부러진 것이 보였다.
 “허어―”
 이시진은 부러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나무들 사이에 생긴 자그마한 공터에서 의현이 불쑥 몸을 드러내었다.
 혹여 어딘가 다쳤을까 살펴보았지만 조금도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의현은 무감정한 얼굴로 몸을 툭툭 털더니 별것 아니라는 시선으로 이시진을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다녀왔다.”
 “그, 그래.”
 이시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의현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상념에 빠진 얼굴로 모옥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건가?”
 뒤에서 의현이 물었지만 이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진··· 응?”
 의현은 재차 이시진을 불러보려다가 문득 뭔가가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곳에 무엇인가가 꿈틀대고 있다. 의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뭔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여러 곳에서 여러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의현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대체 누가 자신을 바라보는지는 알지 못했다.
 “흐음―”
 의현은 기묘한 콧소리를 내며 관심을 끊어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무림인들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의현은 이시진을 따라 모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밤이 깊어지자 나무도 숲도, 그리고 산도 어둠에 젖어들었다.
 오직 장삼의 모옥에서 비쳐 오는 조그마한 호롱만이 빛을 뿌렸다.
 호롱 빛 아래 앉아 있던 약선 이시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앞에 누운 장삼의 아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맥을 쥔 이시진을 훑어보았다.
 이시진은 아이의 몸에서 화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지독한 역병이었지만 아이는 다행히 이겨냈다.
 눈을 뜬 이시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름이 인호라 했더냐?”
 “네.”
 조그맣게 입술을 모아 말하는 아이가 귀여워 이시진은 주름진 손으로 그 볼을 꼬집었다.
 “이제 다 나았구나. 너희 아버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 꼭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 다음부터는 아프지 말고.”
 아이는 낮선 손길에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이시진은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슬슬 이 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장삼의 아들을 치료했으니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아니, 하나 있다. 이시진의 머릿속에 의현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광경이 떠올랐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야.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
 약선은 더 이상 그에게 관여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는 그 아이의 운명이 있으리라. 아마도 강호와 연관될 인연이.
 하지만 동시에 의현과 연관될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이가 상념에 든 이시진을 깨웠다. 이시진은 아이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이시진은 아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추슬러 주며 말했다.
 “별거 아니니 걱정 말고 한숨 푹 자거라. 그리고 말이다.”
 인호를 토닥여 준 이시진이 자신의 망태기로 다가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었다. 향긋한 약초 냄새가 방 안을 진동했다.
 “이거 받아라. 내일 너희 아버님께 드리면 될 게다.”
 “이게 뭔데요?”
 이시진이 준 것은 낡은 천에 싸인 울퉁불퉁한 뿌리였다. 그것에서 좋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허허헛, 먹으면 몸에 좋은 거란다. 내일 잊지 말고 아버님께 드리거라.”
 “네.”
 아이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의원님이 뭘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하면 되겠지.
 “그래, 이제 할애비는 나가보마.”
 이시진은 인호의 머리를 자그맣게 토닥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인호는 눈을 끔뻑이며 이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옥을 나선 이시진은 밤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장삼의 방―방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조그마한 창고였다―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이보게, 장가(張家). 방에 있나?”
 “예? 예!”
 구석진 방에서 웅크려 누워 있던 장삼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얼른 문을 열고 이시진을 방 안으로 모셨다.
 “의원 어르신이 이 밤에 웬일로······.”
 이시진은 대꾸도 없이 천천히 장삼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삼은 자리에 앉는 이시진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어르신, 진료는······?”
 이시진이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끝났네. 이제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음이야. 며칠만 지나면 또래처럼 뛰어다닐 수 있을 걸세.”
 “휴우―”
 장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아들이 잘못되었을까 걱정했는데 진료가 무사히 끝났다니 다행이다.
 “그럼 이제 멀쩡하다는 말씀입죠?”
 “그래.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 이제 모두 나았네. 앞으로는 아들의 몸을 깨끗이 유지하고 운동이나 시키게. 그 동안 움직이지 않아 경락이 다 굳을 지경이야.”
 “예, 예. 그렇게 하고말굽쇼!”
 장삼의 눈에 핑그르르 눈물이 고였다. 사내로 태어난 이상 세 번 이상 울면 안 된다지만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따듯한 미소를 머금은 이시진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자네 아들도 다 나았으니 본 의원은 이제 그만 떠날 예정이라네.”
 “예? 벌써 떠나십니까?”
 장삼이 떨리던 눈가를 수습하고는 이시진을 바라보았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만 떠나야지.”
 말을 마친 이시진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뭔가가 부족한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조용히 떠날 예정이라네.”
 “조용히 떠나시다니요? 그 청년은요?”
 장삼이 되물었다. 자신의 집에 묵는 객은 노의원 한 분만이 아니다.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청년도 이곳에서 묵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말게. 아마 그 아이도 곧 떠나려 들 게야.”
 이시진은 천장을 바라보며 주름진 미간을 좁혔다.
 ‘함께 떠나자고 말해볼까?’
 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 아이와 자신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안 이상 품어두었던 호기심도 버려야 할 참이다. 그가 결정하기 전에 자신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에게 어떤 인연이 있었고,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이시진은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내일 새벽 출발하겠네. 그간 환대해 주어 고맙구먼.”
 “아, 잠시만요!”
 곧바로 떠날 것만 같은 이시진의 모습에 장삼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그리고는 방구석에서 준비해 두었던 것을 꺼내 들었다. 노의원이 언제 떠날지 몰라 미리부터 준비해 두었던 것들이다.
 “이거 받으십쇼!”
 “음? 이게 뭔가?”
 이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그마한 보따리를 바라보았다. 보따리 속에는 곱게 개켜놓은 마의 한 벌과 구리 일곱 문이 들어 있었다.
 장삼이 두려운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는 중얼거렸다.
 “가진 게 이것밖엔 없습니다요.”
 “후우―”
 이시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촌부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저 옷이나 한 벌 얻어볼까 해서 ‘치료비는 꼭 받는다’고 말한 자신에게 죄가 있을 뿐이다.
 “본 의원이 세운 유일한 서원을 알려줌세. 저번처럼 잔꾀를 부리는 것이 아닌 진짜 서원이지.”
 “예?”
 “본 의원은 사람을 고치는 일로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네. 때로는 필요한 것을 받기도 하고 또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지의 구걸과 다름없을 뿐, 치료의 대가를 받은 것이 아니야.”
 장삼의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쯤이야 알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요.”
 “음?”
 이시진은 의아한 시선으로 장삼을 바라보았다. 장삼은 면구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들을 고쳐 주셨으니 제 목숨을 달래도 드렸을 겁니다. 한데 원하는 것은 고작 마의 한 벌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치료를 해준 것이 돈을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의 한 벌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구나 하고 말입죠.”
 “그런데?”
 “이건 그냥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요.”
 장삼이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마의 한 벌만 던져 주고 입을 싹 닦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긴 싫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아들을 살려준 은인이 아닌가! 머리칼을 잘라 짚신을 만들어주지는 못할망정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준비한 것이 구리 일곱 문이다.
 그것이 장삼의 전 재산이었다.
 “받아주십시오, 어르신.”
 이시진의 턱 근육이 움찔댔다. 장삼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의 처지를 잘 아는데 어찌 구리를 받을 수 있겠는가!
 입을 다물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이시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준다면 받아야지. 어디 보자. 구리 일곱 문과 마의로구먼.”
 장삼이 멍한 눈으로 갑자기 쾌활해진 이시진을 바라보았다. 이시진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장삼을 바라보았다.
 “잘 받았네. 치료비로는 충분해. 그러니 내 선심 쓰지. 이건 자네에게 주는 선물일세.”
 마의만 챙겨 들고 구리 일곱 문을 퉁겨낸 이시진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이만 자러 가네. 좋은 꿈 꾸게나!”
 “어이구, 의원님!”
 마치 도망가는 듯 사라지는 이시진의 뒷모습에 장삼이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간 이시진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얼굴로 이시진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장삼은 시선을 내려 탁자에 떨어진 구리 일곱 문을 바라보았다.
 “받아 가시지.”
 아쉬운, 하지만 따듯한 얼굴로 장삼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들을 고쳐 주고도 고작 마의 한 벌만을 얻어 가는 의원님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들의 방에 오십 년은 족히 묵은 삼(蔘)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가 베푼 작은 마음을 간직한 약선이 더 큰 마음을 두고 떠난다는 것을 장삼을 모르고 있었다.
 내일 정오가 넘어서야 장삼은 삼을 발견할 것이고, 그쯤에야 장삼은 약선이 떠나간 자리에 큰절을 올릴 것이다.
 장삼은 앞으로의 일을 짐작하지 못한 채 따듯한 미소를 짓고는 조그마한 방에 몸을 뉘였다.
 
 한편, 방 밖에서는 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시진과 장삼이 나눈 이야기들을 모두 들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일 떠나?”
 내일 이시진이 떠난단다. 의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떠난다는 것은 이 장소를 벗어난다는 말. 여기에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의현은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시진이 떠난단다. 어떻게 할까?
 ‘같이 가지.’
 왜?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
 의현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싱긋 웃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별빛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 * *
 
 다음날.
 동쪽 끄트머리에서 해가 떠올랐다. 새벽의 어스름 속이었지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것을 보면 오늘도 몹시 더울 것 같다.
 “호오!”
 낡고 허름한 마의 차림새를 한 약선이 커다란 망태기를 메어 들었다.
 세간에 알려진 약선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설과도 같은 소문에 따르면 허름한 마의에 망태기를 메어 든 신선을 만나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라 했다.
 그는 돈을 받지 않고 병을 치료해 주는 선의(善醫)이며, 못 고치는 병이 없는 의선(醫仙)이니까.
 약선 이시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한 생명을 구했으니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한 셈이다. 이제 또 방랑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천하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집하는 것이 그의 일이니 본업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그래, 또 가보자.”
 장가촌을 벗어나면 어디로 갈까? 호남에서 볼일도 다 보았으니 사천으로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는 영산(靈山) 청성산이 있고, 아미산도 있다. 아마도 좋은 약초가 많을 테지.
 “음?”
 걸음을 옮기던 약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마의를 걸친 영준한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그는 별다른 짐 없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네가 여기서 뭐 하느냐?”
 “같이 간다.”
 약선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연이 내게로 이어지지 않는 아이다. 강호의 칼밥을 먹어야 할 아이다.
 “너와 내 길은 다르니라.”
 “같이 가겠다.”
 의현의 표정은 몹시 무덤덤했기에 약선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의현은 자신에게 이름을 준 약선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은 후였다.
 “······.”
 약선은 입을 한일 자로 다물었다. 저 녀석은 자신과 길이 다르다. 저 녀석에게는 강호의 인연이 이어져 있을 것이고, 그 인연은 어떻게든 그를 찾아오리라.
 그러나 자신은 강호와 연이 이어지지 않는, 아니, 이어져서는 안 될 의원일 뿐이다.
 “으흠.”
 하지만 작은 호기심이 약선을 사로잡았다.
 ‘내가 그 길을 안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약선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버렸다고 생각했던 한줄기 호기심이 홀연히 피어올라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만약 의현이 동행을 원한다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약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이 녀석아. 함께 세상으로 나가보자꾸나.”
 이시진은 강호로 나갈 생각이 없다. 그저 세상으로 나갈 뿐이다. 표정 하나 없던 의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그럼 이만 출발하자꾸나.”
 이시진은 갑자기 들러붙은 짐 덩어리를 바라보며 호쾌하게 외쳤다. 그리고는 왠지 모를 쾌활한 기분을 느끼며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흰 머리칼과 흰 수염이 바람이 휘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상쾌한 바람이었다.
 의현 역시 기운차게 걸음을 옮겼다. 의현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시진을 쫓아가다 보면 자신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희망이 먼저 사그라든 쪽은 이시진 쪽이었다. 천하를 방랑하는 처지에 입 하나 늘어난다고 뭔 일이 있겠느냐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 그런데······.”
 이시진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의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돈 없지?”
 “없다.”
 의현이 당당하게 말했다. 있을 리가 없다.
 앞으로의 행보를 계산해 보던 이시진의 얼굴이 암담하게 변해갔다.
 
 그렇게 둘의 고생길이 열렸다.
 
 
 
 
 
  제3장 사천행(四川行)
 
 하남성 정주. 무림맹.
 무림맹의 현무단주 혜월은 차분한 몸놀림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뚜벅뚜벅 진천각(震天閣)의 맹주실로 향했다.
 향하는 길목에 서 있던 위사들이 두려움 섞인 눈으로 그런 그녀를 주시했다.
 “저 여자인가?”
 “그렇다네. 저 여자가 바로 남패천의 비영각주를 암살했다는 소문이라네. 그 임무를 위해 수십 명의 동료를 제 손으로 죽였다지.”
 위사들은 꺼림칙한 벌레를 보는 시선으로 혜월을 바라보았다.
 혜월은 애써 들려오는 속삭임을 무시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몸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느니, 임무를 위해 어린 아이를 죽인 적이 있다느니, 임무를 위해 임신한 산부를 죽인 적이 있다느니······.
 잡다한 소문이 혜월의 귀를 파고들었다.
 혜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위사들을 바라보았다.
 “흠! 흠흠!”
 위사들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찔리는 것이 있는지 시선을 애써 피한다.
 혜월은 씁쓸하게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실이 아닌데······.’
 혜월은 본래 협의심을 마음속 깊숙이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일반 양민이 다치는 것을 목도하곤 임무를 늦추었던 적이 있을 만큼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휴우―”
 모퉁이를 돌아 무림맹의 맹주실에 도착한 혜월이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 입을 열었다.
 “무림맹주께 고합니다. 현무단주 혜월이 부르심을 받들어 뵙기를 청합니다.”
 잠시 뒤,
 맹주실 안에서 발걸음이 들려왔다. 문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맹주실의 문이 열렸다.
 놀랍게도 문을 연 사람은 시비가 아닌 맹주 본인이었다. 흰머리 하나 없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들어오시게.”
 무림맹주 신무제(神武帝)는 부드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혜월은 맹주의 심사를 짐작해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시비가 아닌 맹주가 직접 문을 열었다는 것은 그가 주위에 있는 위사들과 시비들을 모두 물렸다는 뜻.
 그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효과로 무림맹 내에 광고될 것이다.
 아마도 내일 즈음에는 혜월이 맹주의 비밀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소문이 돌 것이고, 무림맹은 한 번 더 술렁이게 되리라.
 맹주는 중앙에 놓인 탁자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현무단주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뭐였더라?”
 “신귀투(神晷偸)를 생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혜월은 허리를 꼿꼿이 피고 섰다.
 “그래, 삼 개월에 걸쳐 포획에 성공했었지?”
 맹주는 여유롭게 중얼거리며 탁자에 앉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혜월을 바라보았다.
 “신귀투는 유성월보(流星越步)를 익혔어. 유성월보는 천하제일경공이라고 말해도 손색없는 것이었지. 어떻게 잡은 거야?”
 “······.”
 헤월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맹주를 바라보았다.
 맹주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秘事)를 하나하나 열거했다.
 “남패천의 장로를 두 명 암살했고, 공작을 펼쳐 금와전장을 흡수했지. 황궁의 대신(大臣) 네 명을 우리 쪽 요인과 바꿔치기하는데도 성공했어. 참, 이 대신들은 어떻게 됐나?”
 “죽었습니다.”
 대신들은 직위를 매매하던 자들로, 마차에서 내릴 때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여 죄없는 백성의 목을 벨 만큼 잔인한 자들이었다.
 악인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임무라 해도 그것을 거절했을 것이다.
 “아, 잘했군.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한두 개가 아니라서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힘들구먼. 소림사의 고승을 죽였다는 것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
 남패천의 장로는 그야말로 피에 미친 살인귀였고, 소림사의 고승은 동남들을 납치해 강간한 후 꼬리가 밟힐까 살인멸구하던 남색가였다.
 그녀가 딱딱하게 변명했다.
 “···무공으로 겨뤘다면 필패했을 겁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변명을 하는 혜월의 모습에 맹주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그래, 좋아! 무공으로 겨뤘다면 아마도 자네가 졌겠지. 하지만 암살을 했었지?”
 “그렇습니다.”
 현무단은 무림맹에 존재하지 않는 단이었다. 현무단은 흔히 말하는 ‘그림자’로 맹 내의 배신자나 적의 요인 암살, 정보 수집을 하는 특수한 단이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맹주와 군사만이 현무단의 존재를 알 뿐이다.
 “그동안 할 만했나?”
 “······.”
 혜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맹주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할 만하진 않았을 걸세. 몹시 힘든 일이었겠지. 내가 자네를 쉬게 해줌세. 오늘부터 자네는 현무단주가 아닐세.”
 탁자에서 일어난 맹주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혜월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맹주의 궤적을 쫓아 시선을 돌렸다.
 ‘제거인가······?’
 그녀는 몰라야 할 강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언제 제거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녀다.
 게다가 비밀로 감춰져 있던 현무단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정보 역시 알려졌다.
 무림맹으로서는 그녀를 제거하는 편이 이로우리라.
 ‘맹주가 나를 배신한 건가?’
 혜월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자신이 맹주를 잘못 보았던 것일까? 협의와 정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맹주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따르지 않았으리라.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듯 맹주가 입을 열었다.
 “대신 자네는 지금부터 신황문에 입문하게 될 걸세. 거기가 어딘지는 묻지 말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예?”
 당황한 혜월이 멍하니 맹주를 바라보았다. 맹주는 여태껏 거두지 않았던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눈으로 혜월을 보았다.
 “임무를 하나 맡아주게, 혜월.”
 “···하명하십시오.”
 맹주는 한 점 미동도 없는 태도로 혜월에게 말했다.
 “약선을 무림맹으로 데려오게.”
 혜월의 얼굴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당금 강호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약선이다. 그는 백성들을 돌보는 선의임과 동시에 폭풍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맹주는 혜월의 의문을 짐작했다는 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무림맹이 아니어도 좋아. 남패천에 약선을 빼앗기지만 않으면 되니까.”
 “남패천에서 약선을 노리고 있습니까?”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얼마 전 남패천에서 정식으로 약선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네. 아마 병자를 치료한다고 변명을 했겠지. 한데 약선은 거절했어.”
 “예?”
 병자를 치료하는 데는 선악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 약선이다. 그런데 그가 환자를 거절했단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네. 어쨌든, 그래서 남패천은 약선을 강제로라도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네.”
 혜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약선을 가지겠다는 말은 천하 쟁패를 노려보겠다는 뜻, 정사대전을 열겠다는 뜻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약선을 가진 문파는 천하제일문파일세.”
 약선의 위치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는 무공을 모른다. 호신할 수 있는 재주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를 보호해 줄 무사도 없다. 강호세가나 명문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궁과 연이 닿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강호오제 중 일인으로 꼽혔을까?
 어쩌면 그가 가진 의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죽지만 않았으면 완벽한 상태로 되살려낸다는 신비한 의술을 가진 노인이었으니까. 각 문파의 요직을 맡은 사람이 암살을 당해도 그가 있으면 여벌의 목숨을 챙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가 강호오제에 꼽힌 것은 아니다. 신묘한 의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시진이 의선(醫仙)이 아닌 약선(藥仙)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영약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광혼단과 기혼단은 오직 그만이 생산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는 소림의 대환단과도 비견한다는 생화현단을 별다를 것 없는 잡풀로도 만들어낸다.
 각 문파에서 이를 악물고 약선을 노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있으면 무공이 두세 단계 이상 뛰어오르는 것은 물론이요, 일반 무인들을 일류 무인으로 만들 만한 기틀을 만들 수도 있다. 기혼단은 단전의 크기를 넓혀주는, 의학의 상리를 뒤집는 약이었으니까.
 이 사태는 대단히 복잡한 사태를 만들어냈다. 각 문파의 대립과 견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문파나 약선을 모시고 싶어한다. 하지만 다른 문파에서 약선을 데려가게 둘 수는 없다.
 모든 강호에 필요하기에 역으로 아무도 데려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약선이었다.
 “모든 강호가 약선을 감시하고 있네. 그의 위치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 지금은 사천으로 향하는 것 같다는군.”
 맹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덕택에 우리도 약선을 데려올 수 없다네. 아마도 자네의 임무는 극비리에 처리될 게야.”
 혜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현무단주를 퇴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현무단에게도 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약선의 주위에는 천하무림의 눈이 항상 깔려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약선의 주위에는 구파일방과 남패천의 무인들이 부지기수로 암행 중일 것이다.
 그런 그들을 뚫고 약선을 빼낸다?
 불가능하다.
 “우리 역시 자네를 보호해 줄 수 없네, 현무단주. 지금부터 그대는 강호의 신생 문파 신황문의 문도야. 만약 그대가 무림맹에 걸림돌이 된다면 무림맹은 그대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위해 신황문을 강호 공적으로 선포할 걸세. 물론 존재하지도 않지만.”
 무림맹주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혜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그녀에게 무림맹을 도우라 명했을 때부터, 그리고 무림맹주가 진실로 정의롭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혜월이 승낙하자 맹주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부관을 붙여줌세.”
 “한 명입니까?”
 “그렇다네.”
 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임무에 투입될 사람은 고작 둘이라는 소리였다.
 맹주는 탁자에 놓여 있던 작은 한지를 들어올렸다.
 “이름은 제갈현중. 제갈세가의 삼남일세. 그는 일찌감치 후계 다툼에서 손을 떼고 학문을 연마했다는군. 그 결과로 그는 모든 전략을 깨달았고, 모르는 기관이 없으며, 새로운 기진을 만들 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네. 군사의 말에 따르면 가히 천하제일지자라고 불릴 수 있다는 평가야. 그의 별호는······.”
 “신산자!”
 한껏 밝아진 얼굴로 혜월이 외쳤다. 천하제일지 신산자가 그녀의 동료라니! 어쩌면 이 임무를 무사히 해낼 수도 있겠다.
 
 혜월과 무림맹주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림맹의 본단을 헤매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만 보고 자라와 남에게 질문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소심한 사내가 바로 그였다.
 진법가인 주제에 패철(佩鐵), 나경(羅經)이 없이는 길도 찾지 못하는 길치이기도 했던 그는 한참 동안 무림맹을 헤맸다.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위사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저기요······.”
 “음? 무슨 일이오?”
 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란 지저분한 위사가 말간 얼굴의 서생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안 찬 사람을 보기가 힘든 이 무림맹에 서생이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저기, 진천각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 요?”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사내가 말했다. 그는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수상해 보여 위사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기는 맹주님께서 계시는 곳인데··· 당신은 누구요?”
 겁에 잔뜩 질린 사내가 다리를 바르르 떨며 말했다.
 “저기요, 저는 제갈현중인데요······.”
 
 그렇게 혜월의 고생길도 열렸다.
 
 * * *
 
 겁에 질린 제갈현중이 부들부들 떨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경 땅에는 그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무량검(無量劍) 현천자(玄天子).
 그는 무당파 내에서도 강직하다는 소문을 가진 자로, 지나치게 강직한 덕택에 장로들의 미움을 사 약선을 감시하는 한직으로 쫓겨난 자였다.
 현천자는 침중한 얼굴로 약선의제와 웬 청년을 주시했다.
 “무량수불.”
 약선의제(藥仙醫帝)야 본래 괴이막측한 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새로이 나타난 청년은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청년에 대한 확실한 것은 단 하나.
 그는 고수다. 어쩌면 상상도 하지 못할 고수.
 “으음······.”
 내공이 하늘에 닿아 있는 것일까? 청년의 경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늘로 이십여 장 떠오르는 경공이라면 경공이 아니라 허공답보나 비행이라고 표현해야 될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바위를 힘 하나 안 들이고 박살낼 수 있는 무공이라니······. 강기를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경지에 오른 내공의 덕분일 것이다.
 자신의 사부인 취선(醉仙) 백의 진인도 그런 경지에 오르진 못했으리라.
 현천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기감에는 잡힌다.
 ‘소림의 승려가 근처에 있군.’
 한때 통성명을 한 적이 있는 소림승 공미(孔米)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소림승 공미 외에도 많은 무인들이 이곳에 와 있으리라.
 어쩌면 남패천까지.
 빼액―
 생각에 빠져든 현천자의 귓가에 전서응의 날카로운 울음이 들려왔다.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돌던 전서응은 곧 현천자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빠르게 내려왔다.
 푸드덕―
 현천자는 푸드덕거리는 전서응을 달랬다. 전서응이 진정한 듯하자 현천자는 다리께에 매달린 조그마한 밀서를 끌러내었다.
 밀서에는 도가의 경전 몇 구절이 적혀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도가 아니다[妄動卽不道]. 느리게 보고 더 느리게 행하되[緩視緩行] 도에서 벗어나지 말라[不行脫道].]
 
 현천자는 밀서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고 감시하되 약선에게서 벗어나지 말라.
 무당의 도사는 서신을 조그맣게 접어 들었다. 그리고는 무거운 얼굴로 길을 걷는 이시진과 의현을 주시했다.
 
 “음?”
 의현은 흘끗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제법 많다. 그것도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시진.”
 “왜 그러느냐?”
 말이나 마차도 없이 걸어가려니 이만저만 지치는 것이 아니다. 이시진이 기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누가 우리를 본다.”
 “음?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다고?”
 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 짜릿하게 느껴진다.
 약선 이시진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숨짓듯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두어라, 나를 감시하는 놈들일 테니.”
 “감시?”
 의현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약선을 바라보았다.
 약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약선의제(藥仙醫帝)니 뭐니 해가면서 있는 힘껏 자신을 칭송했지만 사실은 뭐 주워 먹을 것이 없나 기웃거리는 것일 뿐이다.
 그런 주제에 남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얻어갈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왜 너를 감시하지?”
 “글쎄다.”
 약선은 무림인이 아프면 치료해 주긴 한다. 하지만 아무 보상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주는 어떠한 편의도 거절한다.
 삼십여 년 전, 그 일이 있었던 때부터 늘 그래왔다.
 “아마 친하게 지내자고 저러나 보다. 못난 놈들. 역병이 돈답시고 장가촌에는 오지도 않더니······.”
 불쾌한 얼굴이 된 이시진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몇 개의 문파는 장가촌에서도 이시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당파 역시 이시진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문파 중 하나였다.
 의현은 이전부터 그 시선을 감지했었다.
 “죽여줄까?”
 의현이 무감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시진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의현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이시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의현의 눈길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마, 마라······.”
 의현은 무감정한 얼굴로 떨리는 이시진의 얼굴을 주시했다.
 저들을 죽일 수 있을까? 있다. 어떻게? 모른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시진이 원한다면 죽여줄 수 있다.
 의현을 노려보는 시선들이 더욱 짜릿해졌다.
 “되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될 일이니.”
 이시진은 그런 의현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진심이든, 아니든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유 모를 두려움 때문이었다.
 의현이라면 진짜로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얼른 가자꾸나.”
 약선은 짧게 중얼거리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의현의 또 다른 일면을 보기가 싫었다.
 뒤에서 의현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소리에 주위에서 느껴지는 관심을 끊은 의현은 이시진을 따라잡아 보조를 맞추고서야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과는 다른 태도로 중얼거렸다.
 “나는 배가 고프다.”
 “그러냐? 나도 고프다. 하나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할꼬.”
 이시진 역시 조금 전과는 다른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몹시 배가 고팠다. 의현은 물론이거니와 이시진까지 무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굶어야 했다. 이시진은 남의 것을 탐해본 적이 없는 강직한 인물이었고, 또한 병자를 치료하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가끔 조금은 바라지만―의선(醫仙)이었다.
 “약초라도 팔면 돈이 될 텐데··· 하필이면 가진 약초가 없어.”
 팔 만한 약초는 예전에 다 팔았다. 그 뒤로 의현과 시진은 그야말로 풀만 뜯어먹고 살았다.
 의현이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도 난다.”
 “냄새?”
 이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냄새를 킁킁 맡았다. 과연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의현이 반각 전부터 맡아왔던 냄새를 이제야 알아차린 이시진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고기 냄새인데? 어디··· 오!”
 이시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멀찍이 보이는 관도에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멧돼지가 구워지고 있었다.
 “멧돼지다!”
 이시진이 외쳤다. 의현의 머릿속에 멧돼지에 대한 단어가 떠올랐다. 멧돼지가 뭐지? 산에 다니는 고기. 먹을 수 있는 기름진 생물.
 “먹을 수 있다!”
 의현이 희망찬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는 황급히 멧돼지로 달려들었다. 옆에 있는 귀찮은 노인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내 거!”
 의현의 처절한 외침은 곧 처절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는 때때로 마음이 행하면 육신도 행하곤 하는데, 문제는 육신의 뛰어남을 조절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제어하지 못한 힘은 그 스스로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으하으허아흐아하학!”
 “옳거니! 내 거!”
 약선 이시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핏발이 잔뜩 선 눈으로 흰 수염을 휘날리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저 멀찍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의현이 땅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질 즈음, 약선 이시진은 탐욕스러운 손으로 불길을 뚫고 멧돼지 고기 한 덩이를 움켜쥘 수 있었다.
 “으하하핫!”
 주린 배를 움켜잡고 승리의 웃음을 터뜨린 이시진은 고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수염에 기름이 묻는지 안 묻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배를 채우는 것이 중요했다.
 멀찍이서 땅에 떨어졌던 의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이시진을 노려보았다.
 “나도 먹겠다!”
 이시진은 대꾸가 없었다. 고기를 입가로 가져가는 데 정신이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의현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가가야 한다. 몸을 제어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혹은 ‘기억하지 못하니’ 그는 육신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주린 배가 그의 사념을 가로막았다.
 의현은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날아가야 했다.
 이시진은 일단 식사를 마치기로 했다.
 그의 의학적 계산에 따르면 의현은 안 먹어도 십여 년은 거뜬히 살만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
 그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 멧돼지를 굽고 있던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얼른 멧돼지 고기를 먹어치워야 할 터.’
 이시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털북숭이 사내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저 사람이 이 멧돼지를 굽고 있던 사람 같다.
 이시진은 당황했다.
 “어··· 저··· 그러니까······.”
 “이런 벼락 맞을 노친네가 내 맷돼지를······.”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털북숭이 사내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고기를 움켜쥔 이시진은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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