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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배인 1권(1)

2019.08.08 조회 4,977 추천 34


 0. 모험가
 
 
 
 퍽!
 통나무가 동굴 벽을 두드렸다. 짜개진 나무 조각과 암석들이 비산하고 충격파가 거대한 공동(空洞)을 뒤흔들었다.
 
 [상태 이상 ― 충격 : 민첩성이 저하되며 생명력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회복까지 30초.]
 
 알람과 함께 기계음이 들려왔다.
 “제길.”
 먼지를 뒤집어쓴 배인이 신음을 토해내며 통나무가 날아온 방향을 매섭게 노려봤다.
 눈길이 향한 곳엔 거대한 거인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옻칠한 기둥 같은 사지에 헐벗은 몸은 바위 같은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민망한 부분만 동물의 가죽으로 가리고 있었다.
 신장은 4미터 정도. 2층 창문이 달려 있어야 할 곳에 흉악하게 일그러진 머리가 달려 있었다. 오우거라는 괴물이었다.
 오우거의 충혈된 눈동자가 노랗게 빛나며 배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쏘아져 오는 살기가 배인의 가슴에 박혔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
 “원거리 공격이라니, 예상하지 못했어.”
 배인이 조금 전에 정면으로 날아왔던, 허리 굵기의 통나무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아온 통나무는 녀석의 무기도 아니었다.
 그래, 침목(枕木). 바로 방금 전까지 오우거가 베고 자던 베개였다.
 “겨우 베개에, 그것도 스친 것만으로 상태 이상에 걸리다니······.”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그 기분에 마냥 잠겨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오우거가 또 다른 통나무를 들어 올렸다. 의도는 명확했다.
 “젠장, 무슨 수학여행 나온 중딩도 아니고.”
 물론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베개를 던지는 중학생은 거의 없다.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콰각!
 배인이 땅을 구르며 날아오는 통나무를 가까스로 피해냈다. 다행히 이번에는 스치지도 않아 상태 이상 표시는 나오지 않았다.
 먼지투성이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민첩하게 일어서며 아공간에서 작살을 꺼내 쥔다. 2미터 길이의 작살. 생선 잡이용은 아니다.
 대는 맘모스의 상아로 되어 있고, 거무튀튀한 철로 만들어진 작살 날은 미늘 형태로 굽어 있었다. 창에는 녹색의 찐득한 독까지 발라져 있었다.
 오우거 사냥 퀘스트를 의뢰한 ‘고블린’과 ‘코볼트’들이 사력을 다해서 만들어준 무기였다.
 배인이 작살 끝을 오우거에게 겨누었다. 마침 녀석은 제 머리만 한 돌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세 번은 안 되지!”
 슈욱.
 쩍!
 대기를 가르며 쏘아진 작살이 정확히 오우거의 무릎에 파고들었다. 살과 뼈를 가르는 소리가 통쾌하게 들려왔다.
 “크악!”
 오우거가 들고 있던 바위를 내팽개치고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무릎 관절을 파고든 작살을 손으로 쥐고 뽑아보려 하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오우거의 녹색 피를 머금은 작살은 붉은색 기류를 뿜고 있었다.
 고블린과 코볼트. 양대 족속의 주술(呪術)까지 걸려 있는 무기였다. 그 주력(呪力)이 다하거나 오우거가 죽을 때까지는 부서지지도 뽑히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술사들은 가슴을 내밀며 장담했었다.
 오우거의 몸에는 그런 작살이 왼쪽 무릎 이외에도 가슴과 양어깨까지 세 개나 더 박혀 있었다.
 “어디, 어떤 상태려나?”
 여유를 되찾은 배인이 안목 스킬을 발동시키며 오우거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오우거 ― 거인족
 LV. 30
 칭호 ― 녹색분지의 폭군
 생명력 : ????? -65%
 지구력 : ???? -65%
 완력 : ??? -65%
 민첩성 : ?? -65%
 방어력 : ?????
 * 상태 이상 ― 오래된 원한 4/5 : 일부 능력치 대폭 저하.
 
 몬스터 특유의 상태창이 펼쳐졌다.
 아직 사냥해 본 적이 없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모든 파라미터의 수치는 물음표였다. 다만 옆에 붙은 마이너스와 퍼센트 표시 덕분에 녀석이 심각한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우, 작살 네 개에 65%. 마지막 하나를 꽂아도 80% 조금 넘으려나?”
 배인이 퀘스트 전에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오우거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력한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오우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주술이 걸린 무기로 녀석의 다섯 부분의 약점을 공격하여 마력을 없애야만 했다.
 그래야만 통상 무기에 의한 공격이 통한다는 정보였다.
 배인이 어쩐지 납득 안 되는 설정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 남은 부분은 오른쪽 무릎. 배인이 다시 작살을 꺼내 쥐었다.
 슉.
 퉁.
 “이런!”
 다섯 번째 작살이 튕겨지며 허공에서 회전했다.
 배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걸까? 오우거가 양손을 휘저으며 작살을 튕겨내었다.
 녀석이 땅에 떨어진 작살을 짓밟았다.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부서져 버렸다.
 작살의 주력은 오우거의 피와 반응하여 발동한다. 살을 파고들지 않는 한 흔한 목창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내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건가?”
 배인이 여분의 작살을 꺼내었다. 오우거가 보여준 지적 능력 때문인가,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분의 작살이 있지만 나머지 다섯 개 정도. 막힐 것을 뻔히 알면서 무작정 투척할 수는 없다.
 “하는 수 없다!”
 배인이 작살을 창을 쥐듯 단단히 거머쥐고 돌진했다.
 “쿼어억!”
 돌진해 오는 배인을 보며 오우거가 흉성을 아낌없이 표출해 내었다. 배인도 지지 않았다.
 “핫!”
 하고 기합을 뱉어냈다.
 
 [오우거의 함성에 저항하였습니다. [간파] 능력 활성화. 공격력, 민첩성이 증가합니다. 앞으로 60초.]
 
 [간파] 능력은 적의 강공격을 회피하거나 특수 공격에 저항할 때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활성화되는 스킬이었다.
 무감정한 시스템 음에 배인은 작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몸도 한층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좋아!”
 예상치 않은 행운에 쾌재를 부르며 돌진했다.
 훙, 훙.
 오우거가 작살을 겨누며 돌진해 들어오는 배인을 향해 양팔을 휘저었다. 양팔이 스칠 때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충격이 고막을 때렸다.
 일격, 일격이 바위를 부수고 거목을 쓰러트리는 힘을 품고 있었다. 한 방이라도 적중한다면 배인은 분명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느려!”
 그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가며 착실히 파고드는 배인이었다. 목표는 오른쪽 무릎!
 “하압!”
 기합과 함께 작살을 내질렀다.
 “쿠아악!”
 고통에 찬 오우거의 함성이 다시금 동굴을 진동시켰다.
 퍽!
 “큭!”
 날뛰는 오우거의 발에 채인 배인이 돌진해 온 만큼 튕겨 나갔다.
 “끄응.”
 신음을 내며 몸을 추스르는 배인.
 “죽을 정도는 아냐!”
 지기 싫은 마음에 내뱉었지만 생명력을 확인해 보니 방금 일격으로 생명력이 4분의 1 정도는 깎여 나간 상태였다. 빗맞았기에 망정이지, 정타를 맞았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오우거는 허공에 양팔을 휘두르며 고통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배인이 안력으로 오우거의 상태를 다시금 확인했다.
 
 오우거 ― 거인족
 LV. 30
 칭호 ― 녹색분지의 폭군
 생명력 : ????? -90%
 지구력 : ???? -90%
 완력 : ??? -90%
 민첩성 : ?? -90%
 방어력 : ????? -100%
 * 상태 이상 ― 저주(오래된 원한 5/5) : 모든 능력치 대폭 저하, 생명력 회복 불가, 독에 의한 지속적인 생명력 대미지. 남은 시간까지 30분.
 
 “좋아!”
 오우거의 능력치가 예상한 것보다 크게 떨어졌다. 굳건했던 방어력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
 배인이 아공간에서 한 자루 검과 방패를 꺼냈다.
 검은 검신과 손잡이까지 1m 정도, 장식은 전혀 없지만 검 전체가 은은한 은빛을 품고 있어 미지의 매력을 가진 장검이었다.
 검신의 길이는 70㎝에 조금 못 미치고 손잡이 부분이 길다. 한 손으로 휘둘러도 되고 양손으로 휘둘러도 되는 형태였다.
 그에 비해 방패는 투박한 원형 방패. 나무로 만들어진 것에 가죽과 철판을 덧씌운 모습이었다.
 “음······.”
 배인이 방패를 도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방금 받은 대미지를 생각하니 방어해 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오우거의 능력치는 90% 이상 깎인 상황이지만 방어력 이외를 보면 여전히 자신의 능력치를 훨씬 상회할 것이다.
 어쭙잖게 방패로 방어해 봤자 일격에 방패가 깨지는 건 당연하고 대미지는 대미지대로 받을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적의 공격은 무조건 회피하고 공격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편이 좋다고 배인은 판단한 것이다.
 “다섯 자리 수의 생명력이라니. 낙관적으로 일만이라고 쳤을 때, 90%가 깎여도 1,000이네. 제길.”
 배인의 생명력은 750이다. 방금 일격으로 남은 생명력은 500조금 넘는 정도.
 “하지만 할 수 있어!”
 배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배인이 현재 공격력은 250정도. 하지만 오우거는 상태 이상 때문에 방어력이 0. 공격력 전부가 대미지가 된다.
 오우거의 정확한 생명력은 모르지만, 최하 1,000 최대 9,999. 네 번 공격 또는 사십 번 공격.
 “모 아니면 도다!”
 배인이 호기롭게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끄으으.”
 거인의 거체가 앞으로 기울더니, 돌무덤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쓰러졌다.
 돌가루가 자욱하게 퍼지며 시야를 가렸다.
 “헉헉, 제엔장! 9,999였어.”
 먼지 사이로 전사 한 명의 모습이 보였다. 배인이었다.
 배인이 지친 음성을 내뱉고는 빈혈 환자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배인의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갑옷의 내구력은 바닥을 치며 너절한 모습이었고, 온몸도 상처투성이였다.
 상태 이상만 해도 쇼크, 출혈, 골절, 감각기관 손상에 중독까지 중첩된 상태였다.
 생명력과 지구력은 바닥을 쳤고, 상태 이상 때문에 모든 능력치도 하락한 상태였다. 문자 그대로 파라미터 창이 시뻘겠다.
 배인이 지팡이처럼 장검으로 땅을 디뎠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겨우 몸을 추스르며 검을 들어 올렸다.
 “크합!
 배인은 엎어져서 신음을 흘리던 오우거의 뒤통수에 검을 찔러 넣었다.
 “칵!”
 피가 확 튀고 오우거의 짧은 단말마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두둥! LEVEL UP!]
 
 낮은 북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들렸다.
 순간, 상태 이상이 사라지고 생명력을 비롯한 모든 파라미터가 정상치로 회복되었다.
 “후, 레벨이 한꺼번에 4나 올랐어. 역시 좀 무리였나?”
 배인이 자신이 벌인 일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선 장비 수리부터.”
 [잠시만요, 배인 씨.]
 자연석으로 되어 있을 동굴 천장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GM?”
 배인이 갑옷을 수리하던 손을 멈추고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흥이 깨져 나갔다는 얼굴이었다.
 [우선 보상부터 확인해 주세요.]
 “갑자기 뭡니까? 이번 72시간 연속 실험이 끝날 때까지 연락 없는 것 아니었어요?”
 배인이 불만스런 얼굴로 허공을 쳐다봤다.
 [그게 벌써 시간이··· 아, 박사님?]
 순간, 배인의 시각 모니터의 구석에 작은 창이 열렸다.
 [내가 설명하겠네.]
 백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노인이었다.
 “당신은······.”
 배인이 처음 실험에 참가할 당시, 리셉션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로젠탈······.”
 [로젠탈 박사라고 부르면 되네. 이름은 몰라도 되네. 좋아하지 않거든.]
 로젠탈이란 이름의 노인이 히죽 웃었다.
 “하, 한국말 잘하시네요.”
 [하하, 설마. 나는 한국어 따위 모른다네. 그냥 번역 프로그램으로 직접 자네 머리에 의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뿐일세.]
 “그렇습니까?”
 그 말에 배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이 화면 안의 인간에 의해서 멋대로 들쑤셔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실험이니까.
 “그래, 무슨 일입니까, 로젠탈 씨?”
 박사라는 칭호를 일부러 누락시키며 물었다. 그런 배인의 태도가 거슬릴 법도 하건만 로젠탈 박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우선 장비 손질은 놔두고 보상부터 열게나.]
 “어째서입니까? 72시간 동안은 외부에서 간섭이 없는 실험이 아니었습니까?”
 [그 72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네.]
 로젠탈의 말에 배인이 화들짝 놀랐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아직 열 시간은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몰입해서 그런가?’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 오버하거나 다음에 해도 되지 않습니까?”
 [자네도 짐작하는 대로 실험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네. 그리고······.]
 잠시 로젠탈 박사가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아무튼 가상현실 실험은 오늘로 마지막이야. 이 실험 이후로 자네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상현실 시스템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었으면 좋겠네.]
 그 말에 배인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쉬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보상은 오른편. 뼈 무더기 위에 있네.]
 로젠탈 박사가 낮은 음성을 내며 혼란스러워하는 배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배인은 그다지 납득이 가지는 않았지만 로젠탈 박사의 목소리에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동공의 한쪽에 구석에 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우거 녀석에게 잡아먹힌 것들의 흔적이었다. 그 뼈 무덤 위에 보물 상자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 그걸세!]
 배인이 보물 상자를 열었다. 커다란 보물 상자 안에는 웬 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뭐가 보이나?]
 질문하는 로젠탈 박사의 목소리가 어쩐지 희열에 차 있는 것처럼 들렸다.
 “병이 보입니다.”
 [병의 재질은? 안에 뭐가 들어 있나?]
 ‘모니터링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도대체 왜?’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묻는 말에 대답하기로 했다.
 “재질은 유리? 아니, 크리스털로 보입니다. 그리고 안에는 금빛 액체가······.”
 [오오! 맞네. 어서 들어 올려보게나.]
 배인이 병을 집었다. 콜라병 크기의 병이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약간 묵직했다.
 [어서 정보 창을 읽어보게나.]
 
 [만능약 ― 모든 질병과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의 만능약. 음용한 자에게 젊음과 활력을 준다.]
 
 [읽게. 어서!]
 “만능약 ― 모든 질병과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의 만능약. 음용한 자에게 젊음과 활력을 준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더!]
 “어째서 이런 일을?”
 [잔말 말고 한 번 더!]
 완고한 어조가 기분을 거슬리게 했지만, 그는 슈퍼 갑이었다. 배인은 하는 수 없이 몇 번이나 반복하여 정보창의 글을 읽었다.
 [내용을 확실히 숙지했나?]
 배인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질문하겠네. 자네는 그 병을 가지고 있나?]
 “예?”
 [가지고 있나?]
 “예,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한가?]
 “예, 확실히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래? 고맙네.]
 ‘뭐가?’
 화악!!!!!
 그때,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이 배인을 덮쳤다.
 
 
 
 
 
 1. 던져진 자
 
 
 
 어느 겨울 새벽,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갓난아기가 대도시 근교에 위치한 종교 계열의 한 고아원에 버려졌다.
 한창 겨울이었지만 이상 기온으로 날이 풀리지 않았다면, 밤잠이 많아 고민이었던 고아원 원장이 평소처럼 단잠에 빠졌더라면, 그리고 그가 갑작스레 달밤에 산책하려는 충동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버려진 갓난아기는 싸늘하게 식어 다음날 아침에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덕분에 구인 광고 신문지에 싸여 버려진 아기는 원장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고아원 원장은 얼어붙어 가던 갓난아기를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며 배인(裵寅)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여주었다.
 갑작스런 충동으로 지은, 성의 없는 이름이 아니었다.
 아기가 발견된 장소, 베드로 고아원의 앞 글자를 떼 한국 성씨로 변형시킨 배(裵). 그리고 원장이 아기를 발견한 때, 호랑이 년(年)과 호랑이 월(月)과 호랑이 시(時)를 상징하는 인(寅)을 붙인 것으로, 헐벗은 아기가 유일하게 소유한 ‘그날의 기록’이 담긴 이름이었다.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뿌리를 꼭 찾으라는 염원이기도 했다.
 배인은 놀랄 정도로 아무런 탈 없이 자랐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고 엇나가지도 않았다.
 좋은 말로 착한 아이. 하지만 배인은 스스로를 분수를 아는 아이라 불렀다. 고아원에서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천진함을 모르는, 약간 어두운 성격의 아이.
 배인은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떠났다. 그러고는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시장에서 공장까지 수많은 일들을 전전하다가 배인이 겨우 정착한 직장은 작은 건축 회사였다.
 사장을 포함해서 열 명이 채 안 되는 회사의 말단 중에 말단으로 들어가 일을 배웠다.
 처음 맡은 일은 사무실 청소와 직원들 커피 타는 일, 그리고 짐 나르는 요령 등 단순한 잡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점차 많은 일들을 배우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공구의 종류와 사용법, 자재의 종류와 단가, 도면을 보는 법, 제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법, 지게차 운전하는 법, 현장의 인간관계 등등. 1년 정도 바지런하게 일하니 정식 직원만큼이나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할 수 있는 분야는 오히려 정식 직원보다 다양했다. 사장도 그런 배인의 성장을 달가워하며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겠다 약속했다.
 그때, 배인은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회사에 그대로 뿌리를 내려도 좋고, 여건이 안 되면 분야가 같은 다른 회사로 가도 좋고. 경력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분명히 어딘가 자신의 자리는 있다고 믿었다.
 소박하지만 만족스런 미래. 하지만 그 꿈은 어느 날 갑자기 산산이 부서졌다.
 비 오는 날이었다. 현장의 인력이 둘이나 멋대로 결근하였고, 하는 수 없이 배인이 형광 봉을 들고 교통정리까지 하여야 했다.
 현장은 도심의 상가 건축 현장이었다. 평소에도 혼잡한 곳이고 비까지 오자 혼돈스럽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이에 자재를 실은 트럭들이 몇 십 분 동안이나 줄지어 자신들의 순번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참을성 없는 트럭 기사 하나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신호를 무시하며 역주행까지 감수해 가며 현장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
 정확히는 교통정리하던 배인을 향해서.
 그 사고로 척추를 심하게 다친 배인은 결국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배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망했다. 소박한 꿈마저 꾸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원망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나락으로 몸을 던지려는 배인을 붙잡아준 것은, 얼어 죽어가던 아기에게 온기를 나눠 준 고아원의 원장과 누구보다 배인을 이해하는 고아원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처음 배인은 그들의 손길을 완강하게 거부하였지만, 진심 어린 마음에 얼마 안 가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을 소중히 여겼고, 그들의 소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배인이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고아원의 동생 중 하나가 급성 소아암에 걸리고 만 것이다. 희귀하긴 하지만 제때에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살 수 있는 병이었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배인이 그동안 모은 돈과 위로금조로 받은 돈까지 탈탈 털어내고 형제자매들도 돈을 모았지만, 도무지 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의사가 권고한 골든 타임을 헛되이 보내던 때였다. 끝도 없는 자괴감의 늪에 점차 가라앉아 가던 배인에게 수상한 무리가 접근해 왔다.
 자신을 과학자라 소개한 자들은 배인에게 어느 과학 실험의 피험자로 참가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들은 일 년 동안의 실험 참가를 대가로 배인이 필요로 했던 치료비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사례금으로 제시해 왔다.
 원한다면 선불로 지급하겠다는 말도 넌지시 던졌다.
 너무나도 절박한 시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어서 신의 구원인 아닌, 되레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배인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험의 내용도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순식간에 계약서가 오갔다. 얼핏 훑어보니 주로 비밀 엄수에 관련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로 인해 목숨을 잃을 시, 이에 대해 항의하지 않으며 시체는 연구용으로 기증된다는 문구를 읽었을 때, 배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죽은 고아가 어떻게 항의한다는 말인가.’
 배인은 망설이지 않고 서명을 했다. 쓸모없는 육신을 비싸게 사 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지경이었다.
 서류 작업이 끝나자마자 과학자의 탈을 쓴, 아마도 악마일 것이 분명한 자들이 선금을 입금시켰다.
 배인과 미리 말을 맞춘 대로 거액의 돈을 기부금 명목으로, 그것도 익명으로 고아원의 계좌로 보낸 것이다.
 사정을 모르던 원장은 그 익명의 후원자가 보내준 거금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고민하였지만, 결국 동생을 위해 사용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배인은 동생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날, 과학자들이 준비해 준 차를 타고 고아원을 떠났다.
 배인을 실은 고급 세단은 고속도로를 타고 지방으로 향했다. 언뜻 보이는 이정표를 통해 향하는 곳이 울산 근처라는 것을 알았다.
 도심에서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실험 시설은 어지간한 대학 병원만 한 규모였다.
 
 시설에 들어간 첫날, 리셉션에서야 겨우 실험의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고도의 가상현실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이란 게 교육 스탭의 말이었다. 배인이 실제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현실적인 가상현실을 체험하면 과학자들이 이름도 생소한 기계들을 이용해 그 영향을 분석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배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게 전부라면 고가의 돈을 주고 굳이 배인을 피시험자로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어째서 굳이 자신을 선택하였는가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교육 스탭은 태연한 표정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일수록 가상현실에서 집중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특히 선천적 장애가 아닌 후천적 장애일 경우,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가상현실에 적응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배인은 거기에 더해 자신이 고아이기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찾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배인은 몇 가지 훈련을 거치고 시설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시설의 지하에 있는 가상현실 기계, 일명 네스트는 세로로 긴 타원형의 고치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몇 가지 몸에 나쁠 것 같은 주사제를 맞고, 네스트 안에 들어가서 선이 잔뜩 연결된 헬멧을 쓰고 나서야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배인이 가상 세계에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캐릭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교육 스탭의 권고 사항에 따르면, 자신과 닮은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다. 그편이 가상현실 캐릭터에 몰입도가 높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리 얼굴의 스캔을 떠둔 상태였고, 배인은 애초에 자신의 생김새에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은 덕에 금방 만들 수 있었다.
 배인은 평범한 사람치고는 준수한 편이었다. 다만 다리 길이만 쪼~끔, 5㎝ 정도만 늘리는 것으로 꿈에 그리던 키 180대에 진입하였다.
 그 정도 보정은 교육 스탭도 용인해 주었다. 오히려 모공과 여드름 흉터를 없애주어 피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
 캐릭터를 만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가상현실을 체험하였다. 처음 한 달은 하루에 두 시간씩만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의 배인 상태론 그 이상을 해봤자 몰입도가 떨어져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스탭의 설명이었다.
 처음에는 걷거나 물건을 쥐거나 하는 기본적인 움직임을 반복했다. 배인은 마치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가상현실에서 만큼은 다시금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해했다.
 시간이 흐르고 배인이 이미지 컨트롤에 익숙해질수록 가상현실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2시간에서 4시간으로, 8시간으로······. 뿐만 아니라 하는 일들도 다양해지고 난이도도 높아졌다.
 가상현실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12시간으로 늘어났을 때, 드디어 게임 시스템을 체험하게 되었다.
 배인이 왜 하필 게임 시스템을 이용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스탭은 캐릭터가 성장하고 퀘스트를 완수하는 데 따른 성취감을 느낄 때 몰입도가 높아진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배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게임의 내용은 한 모험가가 녹색분지라는 비경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내용이었다.
 지극히 진부한 내용이었지만, 게임을 그다지 해본 적 없는 배인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설정이었다.
 다만, 너무 현실적이고 여과 없는 묘사 덕분에 적응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냥을 하거나 몬스터를 쓰러트릴 때는 말 그대로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뿐, 배인은 금방 적응해 갔고 순수하게 모험을 즐겼다.
 만들어진 가짜이긴 하나 살육에 익숙해진다는 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배인은 원래 쥐도 못 죽이는 성격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과 이미지 컨트롤이라는 수면 학습에 따른 부작용인가?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배인의 가상 캐릭터 레벨이 23이 되었을 때, 최후의 퀘스트와 함께 72시간 연속 플레이라는 실험 과제가 주어졌다.
 
 가파른 절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녹색분지의 중앙엔 송곳니산이라 불리는 높은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평한 분지의 한복판에 삐죽하게 솟아 있고, 꼭대기 부위에는 만년설이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어서 송곳니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산의 한편, 비교적 완만한 능선에는 거대한 종유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녹색분지의 제왕, 오우거의 둥지였다.
 동굴 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태양 빛이 비추지는 않지만, 스스로 발광하는 이끼와 버섯이 잔뜩 자라고 있어 사물을 분간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우거의 침실이 있었다.
 넓은 동공에 크고 작은 그림자가 쓰러져 있었다. 커다란 것은 오우거였고, 다른 하나는 갑옷을 입은 전사 차림을 하고 있었다.
 너절하게 망가져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전사가 양팔을 벌리고 대자로 누워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생기를 찾을 수 없었다. 전사의 정체는 바로 배인이었다.
 “끄으으으.”
 그때, 배인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벌려진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방금 죽은 사람의 몸에 영혼이 되돌아온 것 같은 기괴한 광경이었다.
 신음을 시작으로 손가락 끝이 움찔움찔 움직이더니, 이내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쿨럭!”
 기침을 격렬하게 토해낸 배인이 쥐며느리마냥 몸을 둥그렇게 구부렸다.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잠겨 있어 기괴하게 들려왔다.
 “으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수십 분 만에 겨우 몸을 추스른 배인이 끔찍한 격통에 신음 섞인 질문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봐요, 누구 듣고 있습니까?”
 겨우 자신이 여전히 가상 공간 안이란 것에 눈치챈 배인이 허공을 향해 질문했다.
 “이봐요, GM. 로젠탈 박사.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대답 대신에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사고라도 난 건가?”
 부정적인 가정 탓인지 초조감이 배인을 엄습했다.
 “우선 나름대로 점검해 보자.”
 머리도 계속 아프고, 아무것도 안 하고 마냥 주저앉아 있으면 불안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상태창.”
 시야의 한구석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시스템은 살아 있군.”
 상태창을 중앙으로 끌어와 확대했다.
 
 배인 ― 모험가
 LV. 27 경험치 67%
 칭호 ― 녹색분지의 정점
 
 생명력 ― 810 / 810
 지구력 ― 470 / 470(-60)
 완력 ― 41
 공격력 ― 249 ~ 259 (* 성장치 투자가 불가능한 항목입니다.)
 방어력 ― 55(+29 * 갑옷이 파괴된 상태입니다.)
 민첩성 ― 23(-6)
 기술 ― 16
 
 * 남은 성장 포인트 ― 15
 
 [숙련도]
 지식 ― 262
 안목 ― 125
 전투 기술 ― 13 (* 영자팔검)
 방어술 ― 13 (* 방패를 장비하지 않았습니다.)
 손재주 ― 103
 
 한 번에 4레벨이나 오른 탓인지 생명력과 지구력 이외에도 몇몇 능력치가 상승해 있었다.
 “간만에 방어력이 올랐군.”
 좀처럼 올리기 힘든 능력치였지만 그다지 기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기뻐할 여유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스킬창.”
 
 스킬
 
 지구력계
 
 [안력]Lv. 9 : 상대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지구력을 5소모한다.
 [기합]Lv. 7 : 충격, 혼란, 공포 상태에서 회복한다. 지구력을 20소모한다.
 [투지]Lv. 7 : 40초간 공격력과 크리티컬 확률이 상승한다. 지구력을 20소모한다.
 [간파]Lv. 4 : 55초간 공격력과 민첩성이 상승한다. 적의 강공격, 특수공격을 피하거나 저항했을 때 발동된다.
 
 적용중인 능력
 
 [녹색 분지의 정점] - 보다 낮은 레벨의 몬스터의 조우할 경우 그 몬스터는 낮은 확률로 충격 상태에 빠진다.
 
 “스킬은 변함없네.”
 스킬은 실전에서 사용하는 빈도에 따라 발전한다. 오우거와의 전투가 격렬하긴 했지만, 스킬이 성장하기에는 전투시간이 너무 짧았다.
 
 “장비창.”
 
 장비
 
 [갑옷] 모험가의 진화하는 갑옷 세트(고블린 합금) 갑옷, 투구, 손목 보호대, 팔꿈치 보호대, 장화, 정강이 보호대 ― 방어력 0/30 내구력 0/100 (* 갑옷이 파괴된 상태입니다.) 무게 5
 * 방어력의 100% 이상의 대미지가 누적될 때마다 내구력 1 하락, 5일 연속으로 수리하지 않을 시 내구력 1 하락.
 [검] 모험가의 불멸의 검 ― 공격력 15 ~ 25 내구력 ∞ 무게 1
 * 공격력이 저하하지 않는다. 파괴되지 않는다.
 [방패] 없음
 [액세서리] 없음
 [평상복] 수수한 옷 ― 더위,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상승한다. 내구력 ∞
 [속옷] 수수한 속옷 ― 내구력 ∞
 
 갑옷이 파괴되었다는 표시에 반사적으로 갑옷을 벗어 들었다. 수백 시간 넘게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얻은 슬픈 근성이었다.
 “처참하군.”
 신체의 중요 부위만을 감싸는 하프 아머 형태의 갑옷은 판금이 모두 벗겨져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
 느긋하게 장비를 점검할 상황이 아니지만, 수리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려졌다.
 시험 전에 공부가 아닌 방 정리를 먼저 하는 학생의 심리와 비슷한 것이다.
 배인이 아공간에서 작은 망치와 금속 주괴를 몇 개 꺼냈다. 금속 주괴를 갑옷 위에 올려두고 망치로 두드렸다.
 땅땅!
 망치가 주괴를 두드릴 때마다 녹색 빛이 빛나며 주괴의 형태가 마치 찰흙처럼 뭉개지기 시작했다.
 뭉개진 주괴로 모르타르를 펴 바르듯이 뼈대만 남은 갑옷 위에 바르자 갑옷이 점차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배인이 발랐다고 하기보다는 주괴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 느낌이었다.
 이 ‘모험자의 갑옷’은 게임의 중반에서 얻은 이벤트 아이템이었다.
 스토리에 의하면, 배인 이전에 녹색분지를 발견한 이름 없는 모험가가 사용하던 마법 갑옷이었다.
 합성하는 소재의 특성에 따라 모습과 성능이 변화되는데, 배인이 처음 갑옷을 얻었을 당시에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소재가 적어 나무와 가죽을 덧씌워서 사용했다.
 그리고 갑옷을 수선할 때 사용한 망치는 ‘고블랭’이라는 마법 망치였다.
 고블린 족의 초능력이 담겨 있는 망치로, 광물을 융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철광석을 채취할 때 유용했다.
 또한, 광물뿐 아니라 갑옷을 강화할 때 사용하는 소재 아이템들을 가공하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열 개에 가까운 주괴를 소모한 끝에 겨우 갑옷이 제 모습을 찾았다.
 “어째 이상하게 힘들군.”
 작업을 끝낸 배인이 알 수 없는 피로감에 목 언저리를 두드렸다.
 리얼한 가상현실을 구현하기 위해서 전투 이외의 활동을 할 때도 지구력이 소모되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뭔가 몸에서 쑥하고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상태창을 열어 지구력을 확인했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10 정도밖에 소모하지 않았다.
 “이상하군. 기분 탓인가?”
 장비를 수리하고 나니 이번에는 쓰러진 오우거가 신경 쓰였다.
 배인이 아공간을 열어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코볼트 족의 퀘스트를 완수하고 얻은 것으로, 금속이 아닌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단검이었다.
 ‘갈무리’라는 이름을 가진 단검은 죽은 사냥감에게서 아이템만을 분해해 내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배인이 쓰러져 있는 오우거의 시체에 단검을 꽂았다.
 “갈무리!”
 붉은빛에 휩싸인 오우거의 몸이 점차 투명해지더니, 어느새 거체는 사라지고 아이템만이 남았다.
 
 [오우거 가죽, 오우거 두개골, 오우거의 뼈다귀 묶음, 오우거의 송곳니를 손에 넣었습니다.]
 
 “윽!”
 또다시 뭔가가 몸속에서 쑥 하고 빠져나갔다. 익숙지 않은 박탈감에 정신이 아찔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지구력을 체크해 봤지만, 역시 평소와 다름없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더욱 초조해졌다.
 오우거의 시체까지 갈무리하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시스템 창을 이리저리 들쑤셨지만, 여전히 지금 상황에 변화를 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배인이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진짜 아무라도 좋으니까 좀 도와줘!”
 그때, 머리로 한 단어가 삭 스치고 지나갔다.
 “도움······. 맞아! 헬프!”
 배인이 게임을 처음 시작할 당시, 배인의 상태를 모니터하는 GM 이외에도 진행을 돕는 존재가 있었다.
 ‘헬프’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이었다. 게임을 진행하다 막히면 ‘뾰롱’ 하고 나타나서 힌트를 주는 존재였다.
 게임 초반에는 이름 그대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지만, 게임의 중반 정도에 진행했을 때쯤에는 기계적인 설명음을 듣는 것에 염증을 느껴 GM에게 꺼달라고 요청했었다.
 배인의 요청에 GM은 직접 끄라며 명령어를 알려주었었다.
 “직접 실행 명령. 헬프 활성화.”
 
 [띠링. 헬프, 기동합니다.]
 
 원래 헬프는 그저 게임 진행을 위한 길라잡이 따위가 아니었다. 헬프는 녹색분지라는 ‘가상 세계’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인공지능 모니터였다.
 녹색분지를 처음 구축하고 테스트하던 때까지만 해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관찰의 대상이 가상 세계에서 ‘실험체’로 한정되고부터는 모니터의 역할을 가상 세계 밖의 인간이 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헬프는 그저 편리한 인덱스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헬프가 배인에 의해서 재기동되면서 어째서인지 권한 설정이 리셋되어 버렸다.
 권한 설정이란 것을 설명하자면, 헬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정보를 수집하고 누구부터 누구까지에게 정보 열람권을 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재기동과 동시에 메인 컴퓨터로부터 권한 설정에 대한 판단을 요구했겠지만, 어째선지 메인 컴퓨터와 접속이 중단된 상태였다.
 때문에 헬프는 현재 시스템상에서 유일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인 ‘실험체’, 즉 배인에게 권한 설정을 다시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원래 실험체의 정보 열람은 3급 정보까지, 그저 가상 세계 속 물체에 대한 정보만 열람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정보 열람은 금지된 존재인 것이다.
 한데 그런 ‘실험체’로 등록되어 있는 배인에게 권한 설정에 대한 허가를 요구하는 모순적인 상황. 헬프를 만든 프로그래머도 미처 생각지 못한 오류였다.
 당연히 배인은 모든 정보를 실험체가 열람 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모든 정보란 단순히 가상 세계의 물체 정보부터 시스템 로그, 뿐만 아니라 가상 세계를 만든 프로그래머나 테스트 플레이어의 메모까지. 그야말로 모든 정보였다.
 그 덕에 배인은 실험의 본질에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하, 고도의 가상현실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은 개뿔!”
 배인이 숨 한 번 쉬지 않고 언젠가 들은 기다란 실험 내용을 내뱉었다.
 그는 지금 헬프가 저장하고 있던 정보들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실험에 대한 기록, 참가자들의 신상 정보, 그리고 논문.
 논문은 A4 용지로만 수천 장 분량으로, 쓴 사람은 로젠탈 박사. 제목은 ‘인공 세계의 구축과 질량 부여’였다.
 제목처럼 내용도 어려웠다. 반 이상이 전문 용어였다.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은 배인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니, 아마 이 논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배인도 이 논문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읽는 것은 아니었다. 실험의 의도 정도라면 도입부와 결론 부분만 읽으면 될 터였다.
 원리 부분을 스킵하고 로젠탈 박사의 구역질나는 자아도취 부분을 억지로 읽은 끝에 배인은 대략적으로나마 실험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현실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가상 세계에서 만들어 현실 세계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뭔가 과학이라기보다는 오컬트 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오컬트 집단의 의식이라고 하기에는 과정이 체계적이고 들어가는 자원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실험 시설 자체가 이번 실험만을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실험의 대략적인 과정은 이러했다.
 먼저 인간의 힘으로 그럴듯한 인조 세계, 즉 데이터상의 가상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 세계는 말 그대로 그럴듯한 것일 뿐,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상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배인과 같은 실험체들이었다.
 약물과 트레이닝을 통해서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실험체들에게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한다.
 처음 단계에서 가상 세계는 그저 그럴듯한 그래픽을 가진 것뿐으로, 완벽과는 거리가 있었다.
 조잡하고 오류투성이인 것이다. 실험체들은 그 조잡한 부분을 발견해 내면 무의식적으로 현실에 가까운 ‘상’을 만들어낸다.
 ‘만약 이랬더라면 더 현실적일 텐데’라는 것으로, 이를 ‘무의식의 피드백’이라고 한다.
 이 ‘상’은 인간이 가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화상(畵像)이다.
 이런 화상을 실험체의 뇌와 연결되어 있는 슈퍼컴퓨터가 수집하고 데이터로 변환시켜 가상 세계에 다시금 반영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가상은 현실에 점차 근접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은 실험체가 가상현실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효과가 큰데, 그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장치가 바로 게임이었다.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실험체에게 한계가 있었다.
 약으로 사람의 신경을 가속시키고 정신을 억지로 개발하는 것이 정신과 몸에 좋을 리가 없다.
 실험에 참가한 실험체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발작을 일으켜 죽거나 뇌사 상태에 빠졌다.
 6개월 이상 버틴 것은 배인뿐이었다.
 배인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특출 나서가 아니라, 앞선 실험체들이 무의식의 피드백으로 대부분의 문제점을 바로잡아 준 덕이다. 말하자면 뇌의 열화가 적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실험체들 덕분에 가상 세계는, 아니, 인조 세계는 신이 빚은 현실에 근접하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인조 세계의 물질에 에너지를 주입해 질량을 가지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그 매개 역할을 본의 아니게 맡은 것이 바로 배인이었다.
 현실에 있던 과학자의 탈을 쓴 악마들은 배인이 물질의 존재와 위치를 확정하는 순간, 에너지를 주입했다.
 시스템에 남아 있는 로그로 보아 이 에너지를 조달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하나를 조달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조직의 거대한 힘을 엿볼 수 있었다.
  “그때 그 빛인가?”
 배인이 빛에 휩싸였던 때를 떠올리며 아공간에서 크리스탈 병을 꺼냈다.
 
 [만능약 ― 모든 질병과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의 만능약. 음용한 자에게 젊음과 활력을 준다.]
 
 “왜 하필 만능약일까?”
 배인이 금색 액체가 담겨 있는 크리스탈 병의 정보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마 어딘가에 늙고 병든 부자가 있는 것이겠지.
 “근데 나는 왜 살아 있는 거지? 아니, 살아 있긴 한 건가?”
 실제로 몸은 죽고 뇌만 적출당해 컴퓨터와 연결해 놨을지도 모른다. 배인 이전에 실험체로 희생된 사람들의 사후 처리를 보면 그러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헬프, 외부와의 접촉은 여전히 안 되나?”
 [계속 시도 중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메인 컴퓨터와의 접속 자체가 끊어진 것 같습니다.]
 “혹시 외부에서 이쪽을 모니터하고 있다면 알 수 있어?”
 [예,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이 녀석의 말을 신용해도 좋을까?’
 헬프를 이용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배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녀석들은 악랄하긴 해도 유쾌범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이 상황에서 유일한 정보 제공자를 의심해 봤자 끝도 없다.
 [배인 님. 보고할 게 있습니다.]
 “뭐지?”
 [플레이어인 배인 님을 비롯해 녹색분지의 모든 NPC, 동식물, 물체들이 질량을 가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주 커다란 변화입니다. 이전 녹색분지의 모든 것은 그저 데이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질량이 없는 데이터가 아닌, 모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 녹색분지가 통째로 현실화되었다는 거야?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때, 배인의 뇌리로 가설 하나가 스쳤다. 혹시 실험이 실패했다면? 그리고 만능약뿐만 아니라 분지가 통째로 현실화되었다면?
 “헬프, 이번 실험 당시에 대한 자료 가지고 있어? 결과는 어떻게 됐지?”
 [메인 컴퓨터가 마지막에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성공했습니다. 만능약은 예정된 장소에서 물질화되었습니다.]
 “쯧, 그런가?”
 [하지만 데이터 변환 장치에 예정 이상의 에너지가 주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망하던 배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데이터 변환 장치라는 게 뭐지? 그리고 거기에 예상 이상의 에너지가 주입되면 어떻게 되는데?”
 [데이터 변환 장치란 에너지를 데이터화하거나 데이터를 질량으로 변환시키는 장치입니다. 만약 필요 이상의 에너지가 주입될 경우, 예정된 데이터 이외의 데이터 또한 질량을 가진 물질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 데이터의 위치 지정이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 부정형 에너지로 변화하며 폭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주입된 에너지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
 [예정 수치의 40배입니다.]
 “······폭발했겠구먼, 그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나저나 헬프, 너 그다지 똑똑한 편은 아니구나.”
 어쩐지 삽질한 기분이었다. 진작 이야기했으면 외부와 연락하려고 헛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 아닌가. 아마 외부 자체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는 데이터 수집과 정리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입니다. 결과에 대한 분석은 가능하지만 수집된 조건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배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무슨 말인지 완벽히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 헬프는 공식을 쓰고 그에 대한 답은 낼 수 있지만, 그 답에 따른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는 소리 같았다. 그것은 사람의 몫이란 것이겠지.
 “그래, 그건 그렇고······. 네 말대로 지금 내가 단순한 정신에 덧씌워진 데이터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울산인가? 설마 분지 자체가 대도시 위로 덧씌워진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진짜 대형 참사였다.
 [천체를 검색한 결과, 어디의 것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배인이 ‘이건 또 무슨 소리?’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거 봐봐. 저거 북두칠성 아니야?”
 동굴 밖으로 나온 배인이 밤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냉정한 녀석.”
 애초에 별을 보는 취미 따윈 없는 배인이다. 지금 있는 곳이 서울이라도 북두칠성을 찾을 가능성은 없었다.
 “근데 네 말대로 별자리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결국 가상공간 아니야?”
 [가상 공간에서도 지구의 천체 정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환장하겠군······. 크크크크.”
 괴상하게 웃었다. 이쯤 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세계라니.
 “근데 헬프 너는 어떻게 기동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게임 시스템도 그대로 살아 있는데, 이건 도대체?”
 [원래 제 전산 능력과 저장 능력은 플레이어의 뇌 일부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정보들은 특수한 압축 알고리즘을 이용해 플레이어의 뇌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헬프의 말대로라면 가상현실에 접속되었을 때, 배인의 뇌의 일부를 컴퓨터로 개조했다는 것이다.
 “그건 또 금시초문이군. 남의 뇌를 멋대로. 이쯤 되면 화낼 기력도 안 나.”
 [하지만 지금은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녹색분지의 모든 동식물들의 여분의 사고 능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성능이 올라간 상태입니다.]
 “좋겠네. 아주.”
 [그리고 게임 시스템의 경우, 배인 님이 가진 능력으로 고정된 상태입니다. 뇌의 구조가 시각에 영상을 투사할 수 있게 변화되었습니다.]
 머릿속에 생체 컴퓨터가 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시각 이외의 감각 또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신체의 세포 역시 단기적 진화가 가능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소리.
 이에 배인은 솔직히 기뻐했다. 얼마 전까지 불구의 몸이었던 배인이다.
 가상현실에서나마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이 기뻤는데, 초인적인 능력까지!
 [다만, 특정 능력을 사용할 경우, 미지의 힘을 소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지의 힘?”
 [예, 동식물들의 감각기관을 이용해 분석한 결과, 이곳은 지구와는 달리 대기 중에 미지의 성분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호흡기를 통해서 신체에 축적되는 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몸 안에 쌓인다는 소리지? 혹시 그거 방사능 아니야?”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공기에 방사능처럼 인간에게 해로운 원소들이 가득 차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방사능은 아닙니다. 쌓이긴 하나 특정 행동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게 가능합니다.]
 “특정 행동이라······. 혹시 그거 고블랭을 이용한 방어구 수리나 갈무리를 말하는 건가?”
 배인이 아까 전에 느낀 박탈감을 떠올렸다.
 [예, 아공간을 열고 닫거나 불 피우기 또한 그 능력에 포함됩니다. 또한 저와 시스템 역시 이 힘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불 피우기 능력이란 말 그대로 작은 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라이터 대신으로 야영할 때 편한 능력이었다.
 “시스템까지······. 혹시 그 미지의 힘이란 것 시각화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그 순간, 푸른 안개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야가 전부 푸른색으로 채워졌다는 것이었다.
 “으, 앞이 안보여.”
 배인의 불만에 푸른색으로 표시되었던 미지의 힘이 점차 투명해졌다. 투명해졌지만 무언가 존재한다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배인이 스스로 몸을 만지고 살펴보니 그 힘은 확실히 피부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흉부에 많이 쌓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화륵.
 배인이 손가락을 튕겨 불을 일으켰다. 작은 불꽃이 순간 일어남과 함께 그 미지의 힘이 몸에서 쑤욱 빠져나갔다.
 “으음, 과연.”
 배인이 그 감각에 익숙해지려는 듯이 불꽃을 연달아 만들었다.
 “영 싫지만은 않은 감각이네. 그래, 이 힘을 마력이라고 하자.”
 배인이 즐기던 게임은 오로지 전사를 위한 것으로, 원래 마나 같은 수치는 없었다.
 
 [마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지식이 1 올라갑니다.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상태창에 마력이라는 항목을 추가하겠습니다.]
 
 송곳니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는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은빛 호수가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는 송곳니산을 그대로 반사할 만큼 맑았기 때문에 녹색분지의 주민들은 그곳을 거울 호수라 불렀다.
 거울 호수의 한편에 작은 오두막이 서 있었다. 조금 낡았지만 통나무로 지어져 튼실해 보였다. 배인의 거점이었다.
 게임의 스토리에 의하면 배인 이전의 모험가가 만들었다가 버려졌던 것으로, 배인이 발견하여 보수한 것이었다.
 “후우~ 이제 어떻게 하지?”
 배인이 건초가 깔린 침대에 몸을 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위기감보다는 권태감이 더욱 묻어 있었다.
 배인은 현재 상황이 크게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배인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진실은 평범한 사람인 배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찼다.
 배인은 지금 정신적 그로기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불안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마취되었다는 것이다.
 “차원의 미아라니······. 젠장! 나는 소시민이야!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고!”
 얼굴을 감싸고 침대를 팡팡 차며 뒹군다. 건초가 날리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돌아갈 수 있을까?”
 발광을 멈춘 배인이 아련한 눈빛을 하곤 일 년 가까이 가지 못한 고향을 떠올렸다.
 서울 근교의 낡아 빠진 고아원. 그리고 그곳에 있는,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들. 자신이 있을 곳은 그들의 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떠난 곳이었다.
 “강력한 에너지를 허상에 주입하여 현실에 재현한 건가?”
 배인은 실험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기존의 물리 법칙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단순히 전기에너지는 아닐 테고.”
 전기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기계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 기계를 통해 데이터를 물질로 변환시킨 것 같았다.
 공학적 지식이 없는 배인은 그 기계가 어떤 것일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니, 배인이 아닌 공학 박사라도 힘들 것이다.
 “상상을 현실로······. 혹시?!”
 배인이 일어서서 손가락을 튕겼다.
 몸속에서 마력이 빠져나가고 불꽃이 생겨났다.
 “원리가 비슷한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불을 만들어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물건을 저장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마력을 소모해 실현시키는 것. 확실히 비슷했다.
 “우선 마력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어.”
 배인은 마력이라 명명한 미지의 에너지와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은 무언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녹색분지에서는 한계가 있겠지. 어차피 지구의 인간이 만든 세계. 밖에 나가서 마력에 대해서 탐색해야겠어. 그리고 만약 이 세계가 지구와 환경이 비슷하다면······ 인간처럼 지성을 가진 존재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들이라면 마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야.”
 배인은 녹색분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전에 우선 준비를 해야지.”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눈이 스스로 감기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너무 긴 하루였다.
 
 
 
 
 
 2. 현실 자각
 
 
 
 분지를 떠나기 위해선 단단히 준비해야했다. 외부의 환경을 모르는 상황이다. 식량은 물론이고, 장비도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는 편이 좋았다.
 다행히 지금 배인에게는 헬프가 있었다. 분지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존재. 아니, 실제로 분지의 정보는 배인의 뇌 속에 저장되어 있고, 헬프는 그것을 열람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배인이 헬프를 통해서 게임을 진행하면서 누락한 이벤트와 아이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배인은 우선 코볼트 족에게 향했다.
 코볼트 족의 부락은 분지의 남쪽에 있다.
 코볼트 족은 개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종족으로, 인간보다는 왜소하지만 빠르고 민첩한 신체 능력을 가졌고, 나무 활 같은 사출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지혜가 있었다.
 그들은 숲과 평야가 적당히 있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코볼트 족은 그곳에서 몇 개의 취락을 만들고 농사를 짓거나 수렵, 채취를 하면서 지냈다.
 이처럼 단순한 짐승은 아니란 것으로, 녹색분지에서는 고블린 족과 더불어 대화가 통하는 종족이었다.
 배인의 식량의 절반 이상은 그들과의 물물교환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부락에 들어가자 코볼트 족이 캥캥거리면서 배인을 피했다.
 몇몇 전사들은 이를 보이며 적의를 드러냈다. 배인은 그런 코볼트 족의 반응을 무시하며 부락의 중심으로 향했다.
 원래 배인과 코볼트 족의 관계는 문답무용으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배인은 코볼트 족들이 그냥 필드 몬스터인 줄 알았고, 코볼트 족들도 배인을 사냥해야 할 사냥감 또는 침입자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인이 트롤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해 있던 코볼트 족 어린애들을 구해주고 나서는 관계가 반전하게 되었다.
 물물교환이긴 하나 거래가 가능해졌고, 가끔 배인에게 퀘스트를 주기도 하였다. 배인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단검 ‘갈무리’도 코볼트 족의 퀘스트를 완수하고 얻은 것이었다.
 물론 배인에게 죽임을 당한 전사의 가족이나 동료들은 이처럼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지만 말이다.
 부락의 중심에는 커다란 집이 있었다. 땅을 파서 다진 집터에 판자로 벽을 쌓고 건초로 지붕을 올린 형태였다.
 마치 원시시대의 움집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코볼트 족의 집은 대부분 이런 형태였다. 하지만 조잡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야오, 있나?”
 배인이 문 앞에서 누군가를 부르자 인기척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코볼트 족 노파가 문을 열고 나왔다. 족장이자 제사장인 야오였다.
 “오오, 방벽 너머에서 온 전사. 돌아왔나?”
 다른 코볼트 족들이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증오가 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배인을 봤다면 야오는 진심으로 환대하는 모습이었다.
 “응, 왔어.”
 배인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왕 죽었나?”
 “그래, 왕 죽었다.”
 “오오오오!”
 야오가 기쁜 환호성을 지르며 이 소식을 부락민에게 전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락 전체에서 배인을 칭송하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코볼트 족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코볼트 족과 거래할 때 좀 더 좋은 값에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배인이 쓰러트린 오우거는 녹색분지에 군림하는 왕이었다. 그것도 폭군.
 거인의 피를 이은 오우거는 수백 년 동안 분지에 사는 모든 종족을 수탈하고 지배했다.
 몇몇 종족들이 전사를 모아 대항하였지만, 오우거의 둥지를 습격한 수백의 전사들은 오우거의 압도적인 힘에 일방적으로 살육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오우거에게 가축처럼 사육당하는 나날이 이어지던 그때, 방벽 너머에서 한 명의 전사가 찾아왔는데······.
 라는 것이 게임의 스토리였다.
 “그나저나 야오.”
 배인이 야오를 진정시키고는 손바닥을 쓱 내밀었다.
 “뭔가, 전사?”
 “보상 줘야지.”
 “크?”
 야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상?”
 “그래, 보상. 오우거를 죽였잖아. 그러니까 줘야지.”
 배인이 내민 손바닥을 흔들었다.
 “오우거는 보물 상자를 가지고 있다.”
 “알아. 챙겨왔어.”
 “그거면 안 되나?”
 야오의 말에 배인이 미간에 힘을 주며 따지 듯 말했다.
 “어허, 평소에는 계산이 정확하드만 오늘은 왜 이럴까?”
 “하지만 없다. 줄 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오우거를 죽이는 것이 게임의 마지막 퀘스트이자 이벤트였다.
 게임 개발자도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탓에 퀘스트를 준 코볼트와 고블린으로부터의 보상은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다.
 “진짜 없어?”
 “훈제 사슴 고기라도······.”
 “이 아줌마가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그건 늑대 가죽을 가져오면 받는 것이잖아! 자기 목숨 값이 겨우 훈제 고기란 걸 안다면 저세상 간 오우거가 울겠다.”
 배인이 계속 다그치자 야오가 곤란한 표정을 했다.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느낌.
 “나도는 소문에 의하면······ 좋은 방패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배인이 얼굴을 들이대며 약간 사악하게 웃었다. 물론 소문의 출처는 헬프였다.
 “그, 그건 늙은 트롤 잡으면 준다.”
 원래 코볼트 족 부락에서는 늙은 트롤 사냥이라는 퀘스트가 존재했다.
 코볼트 부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트롤을 사냥하는 것으로, 그 보상으로 어떤 방패를 얻을 수 있었다.
 원래 그 트롤은 중간 보스 개념으로 오우거를 사냥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것이었지만, 실험의 스케줄을 앞당기기 위해 GM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누락되었다.
 “트롤이랑 오우거 중 어느 쪽이 더 사냥하기 힘들어?”
 “오우거가 힘들다.”
 “사슴 훈제 고기가 좋아, 아니면 방패가 좋아?”
 “방패가 좋다.”
 “그럼 방패를 트롤 잡은 사람한테 줘야 해, 아니면 오우거 잡은 사람한테 줘야 해?”
 “······오우거?”
 야오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 묘하게 자신이 없다. 하지만 배인이 듣고 싶던 대답이었다.
 “내놔.”
 만면에 미소를 지은 배인이 내민 손을 까닥거렸다.
 야오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방패를 배인에게 건넸다.
 ‘확실히 NPC들의 반응이 변했어.’
 이전의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면 배인이 아무리 설득해도 정해진 퀘스트를 끝내지 않는 한 아이템을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 얼빵하지만 프로그램이 아닌 사고를 하는 지성체 다운 반응이었다.
 
 [모험자의 재생하는 방패(파괴 상태)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렇지. 칼이랑 갑옷이 모험자제인데 방패만 고블린제면 이상하지.”
 배인이 방패를 들고 희희낙락해했다.
 역삼각형의 카이트 실드 형태로, 테두리와 손잡이만 남아 있는 방패였다. 그냥 고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도 갑옷과 마찬가지로 재료를 합성하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공간을 열어 고블린 주괴와 망치 ‘고블랭’을 꺼냈다.
 주괴를 두 개 소모하니 갑옷과 같은 양식의 방패가 되었다.
 
 모험자의 재생하는 방패(고블린 합금) ― 방어력 10/10 내구력 120/120 무게 1
 * 방어력의 100% 이상 대미지가 누적될 때마다 내구력 1 하락, 수리를 하지 않아도 내구력이 하락하지 않는다. 하락한 내구력은 시간이 흐르면 재생한다(파괴 시 무효). 상태 이상 ‘충격’에 저항한다.
 
 배인이 제 모습을 되찾은 방패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방패의 능력을 보니 노골적으로 오우거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우거 사냥 전에 얻었다면 한결 좋았을 것을······.”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배인이 방패를 장착했다.
 
 [모험자의 무구 세트를 모두 모았습니다. 세트 무구 장비 시 보너스 능력치를 얻습니다.]
 [이벤트 ‘수집가’ 완료했습니다. 지식이 5 상승했습니다. 안목이 5 상승했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야오, 이건 충고하는 말인데, 혹시 다음에도 뭔가 부탁할 일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지원은 다 해줘. 이게 뭐야? 죽은 손자 불알 만지는 것도 아니고.”
 거듭되는 무의미한 능력치 상승에 배인이 불만을 토했다.
 “오우거 사냥 할 때도 그래. 어떻게 수백 명을 단신으로 살육한 녀석을 사냥하는 데 나 혼자 딸랑 보내니? 저기 널려 있는, 백수질 하는 애들도 같이 보냈어봐라. 훨씬 쉬웠지. 왜, 백지장도 맞들면 낮다는 말도 있잖아.”
 게임 속의 모든 NPC들에게. By 배인.
 야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하지만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늙은 트롤이라······.”
 헬프를 통해 녀석의 능력치는 확인했다. 보통 트롤보다 배는 강한 녀석으로, 능력치만 따지면 배인보다 위였다.
 하지만 오우거의 공략법이 있던 것처럼 녀석을 사냥하는 데 나름의 공략법이 있었다. 그 방법도 훨씬 간단했다.
 “능력치도 오우거보다 약하고······.”
 갑자기 녀석을 사냥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났다.
 “방패의 성능도 테스트해 볼 겸 한 번 가볼까? 아, 그러고 보니 녀석의 송곳니로 액세서리를 만들 수 있다고 했지. 좋아.”
 고민을 끝낸 배인이 야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오, 내가 늙은 트롤 녀석을 사냥하면 뭐 해줄 거야?”
 
 늙은 트롤은 코볼트의 부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배인은 지도를 열어놓고 여유 있게 녀석을 추적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흔적을 쫓아 진득하게 추적을 해야만 했겠지만, 헬프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헬프는 녹색분지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모니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배인은 늙은 트롤의 위치와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배인은 트롤과 1킬로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녀석이 둥지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트롤은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거인족의 후예였다. 크기는 2.5미터 정도로 오우거보다는 작다.
 하지만 배인으로선 목 아프게 올려다봐야 하는 곳에 머리가 달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덩치에 어울리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트롤이라도 완력만큼은 레벨업을 할 때마다 꾸준히 완력에 보너스 포인트를 투자해 온 배인의 두 배 정도였다.
 무엇보다 성가신 것은 강력한 재생 능력이었다. 아예 검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칼질만으로 상대하려면 끝이 없었다.
 재생 능력을 봉인하려면 불을 이용해야 했다. 배인이 보통 트롤을 상대할 때는 검으로 상처를 내고 만들어둔 횃불로 상처를 지지는 방법을 이용해 사냥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늙은 트롤을 사냥할 때는 횃불이 아닌 등유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헬프의 말에 따르면, 늙은 트롤의 경우 일반 트롤보다 피부가 두껍기 때문에 횃불로는 재생 능력을 봉인할 수 없게 설정되어 있다고 했다.
 중간 보스다운 번거로움이라고 배인은 생각했다.
 “이제야 녀석이 둥지로 향하는군.”
 늙은 트롤이 자신의 둥지에 돌아가 안심하고 있을 때 습격하는 게 배인이 세운 작전이었다.
 이전에 오우거 사냥 때도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오우거가 잠에 빠져 있을 때 공격하였다.
 작살을 던져 순식간에 능력치의 60퍼센트 가까이 깎은 상태에서 대결에 들어갔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작전도 맥락은 같았다. 방심하고 있을 때 몰래 다가가 만들어둔 화염병을 집어 던진다.
 늙은 트롤의 재생 능력과 생명력이 충분히 낮아졌을 때 격투전으로 쓰러뜨린다.
 배인은 신중히 걸음을 놀려 늙은 트롤의 뒤를 밟았다. 어느덧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갔다.
 수풀 사이로 늙은 트롤의 커다란 등판이 보였다. 보통 트롤과 달리 하얀 가죽 털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죽은 곰을 끼고 있었다.
 “크기는 3미터 정도인가? 역시 보스급이야.”
 녀석은 흡족한 사냥을 했는지 희희낙락해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가고 있었다.
 늙은 트롤의 둥지는 역시나 동굴이었다.
 “헬프, 녀석의 둥지 평면도를 보여줘.”
 그리 깊은 동굴은 아니었다. 호리병 모양으로 입구는 좁지만 안은 넓은, 단순한 형태였다.
 배인은 지도의 표시를 통해 늙은 트롤의 움직임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둥지에 들어간 녀석은 둥지에 중앙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식사 중인가 보군. 좋아.”
 배인은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아마 녀석은 한창 식사에 열중하느라 주의력이 떨어진 상태일 것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돌입하기 전에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몇 가지 시각 효과를 조절했다. 지도는 꺼버렸다.
 아공간에서 화염병을 꺼내 들었다. 불꽃을 만들어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다른 한 손에는 검을 쥐었다.
 배인이 발소리에 주의하며 동굴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 늙은 트롤이 있을 공동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공동의 중앙엔 엉망진창으로 해체된 곰의 시체만 너부러져 있을 뿐, 녀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퍽!
 “크헉!”
 무언가가 배인의 측면을 강타했다. 배인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상태 이상 ― 충격 : 민첩성이 저하되며 생명력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회복까지 30초.]
 [상태 이상 ― 혼란 : 공격력과 방어력, 크리티컬 확률이 저하됩니다. 회복까지 60초.]
 [상태 이상 ― 골절 : 생명력과 지구력의 최대치가 줄어들었습니다. 공격력이 저하되었습니다. 효과는 질병이 치료될 때까지 지속됩니다.]
 
 상태 이상이 한 번에 세 개나 떴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배인의 눈에 둔기를 들고 있는 늙은 트롤의 모습이 모였다. 녀석은 입구의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배인의 미행을. 그러곤 영악하게도 오히려 덫을 놓고 있었다.
 트롤의 노랗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배인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트롤이 곤봉을 번쩍 들었다. 마냥 쓰러져 있다가는 말 그대로 곤죽이 될 것이다.
 땅바닥을 굴러 가까스로 곤봉을 피했다.
 배인이 체조 선수같이 몸을 튕기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검을 양손으로 쥐고 트롤을 향해 겨누었다.
 겨우 전투태세를 취했지만,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검 끝이 미세한 진동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들고 있던 화염병은 공격을 받았을 때 떨어트린 것 같았다. 깨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깨졌다면 온몸이 불탈 뻔했다.
 배인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것도 그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공격에 따른 격통 때문이었다. 가상현실이었던 때에도 공격을 받으면 고통은 있었지만, 그것은 연출된 감각에 불과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은 몇 년 전 공사 현장에서 트럭에 치였던 그때를 연상시켰다.
 ‘생명력이 3분의 1 정도 줄었나?’
 배인이 눈동자를 굴려 생명력과 지구력을 체크했다. 오우거의 일격을 받았을 때보다 대미지가 더 컸다. 그때와는 달리 정타를 불시에 얻어맞았다.
 “크어엉!”
 늙은 트롤이 곤봉을 쥐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전의를 고양시켰다. 배인은 그런 트롤의 행동에 가슴이 진탕됨을 느꼈다.
 
 [트롤의 위협에 따라 방어력과 민첩성이 저하됩니다.]
 
 연이은 실패에 배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래선 안 돼. 마음을 다잡자!’
 “합!”
 [기합] 스킬로 골절 이외의 상태 이상에서 회복되었다. 그리고 다시 [투지] 스킬로 공격력과 크리티컬 확률을 상승시켰다.
 부웅.
 챙!
 트롤이 휘두른 곤봉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지구력이 크게 깎여 나갔다.
 배인도 트롤에게 공격을 가했다. 배인의 검이 트롤의 몸을 몇 번이고 잘랐다. 하지만 역시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쯧, 이대로 가다간······.”
 생명력도 문제지만 지구력의 저하도 문제였다. 지구력은 행동을 실행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지구력이 없으면 방어나 공격은 물론, 걸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건 게임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당연한 것이었다.
 ‘공격해도 안 돼. 막아서도 안 돼. 회피다. 기회가 생길 때까지 지구력을 보전해야 해.’
 다행히 민첩성은 배인이 트롤보다 훨씬 높았다.
 트롤의 강맹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떨어진 생명력과 지구력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전투 중이기 때문에 더디긴 하지만 조금씩 게이지가 차올랐다.
 그때, 떨어져 있는 화염병이 배인의 눈에 띄었다. 심지의 불은 꺼져 있는 상태였다.
 ‘저걸 이용하면······.’
 순간, 작전을 세운 배인이 트롤의 공격을 피하는 척하면서 화염병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딸캉.
 화염병의 주둥이가 발뒤꿈치에 닿았다.
 그때, 트롤이 배인의 머릴 노리고 곤봉을 휘둘렀다.
 붕.
 하지만 배인은 이미 그 공격을 읽고 있는 상태였다.
 백스탭으로 뒤로 물러서며 화염병을 차올렸다. 날아간 화염병이 트롤의 가슴에 부딪쳐 부서졌다. 트롤의 가슴털이 등유에 흠뻑 젖었다.
 “뜨거운 거 좋아하냐?”
 배인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배인의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며 작은 불꽃이 터졌다.
 화악.
 “크아악!”
 가슴팍이 화염에 휩싸인 트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양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불이 꺼질 리 없었다.
 몇 발자국 물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배인이 여분의 화염병을 꺼내 던졌다. 이제 화염은 트롤의 전신에서 타올랐다.
 트롤의 피부 표면을 태운 화염이 사그라졌을 때, 배인은 아공간에서 방패를 꺼내 장착했다.
 안력 스킬로 트롤의 상태를 보니 생명력이 반 넘게 줄어들어 있고 재생 능력은 사라져 있었다.
 변제의 순간이 왔다. 배인은 기꺼이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후하게 쳐줄 작정이었다.
 
 트롤을 쓰러트리고 배인은 레벨업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우거를 쓰러트렸을 때와 달리 1레벨밖에 오르지 않았다.
 트롤을 갈무리해서 가죽과 송곳니, 뼈, 혈액 등의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트롤이 둥지로 삼은 동굴에서는 은 광석을 채취할 수 있었다. 고블랭을 이용해 주괴 세 개분의 은을 얻었다.
 동굴에서 나와 배인은 휴식을 취할 겸 장비를 수리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하며 자기 반성을 시작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행운인지 불행인지, 멀쩡한 육체를 가지고 부활했다. 지금 있는 장소는 더 이상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인 것처럼 육신 또한 실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투 전의 자신의 태도는 도대체 뭔가. 목숨이 오고 가는 실제 상황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여전히 게임 감각에 빠져 있었다.
 헬프를 이용해 트롤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우거를 쓰러트렸다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적을 얕보고 최선을 다하지 않다가 거의 죽을 뻔했던 것이다.
 지금의 환경, 녹색분지는 자신에게 있어 인큐베이터와 같은 환경이었다.
 직접적으로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모든 정보를 알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근데 이런 환경에서 고전해서야 녹색분지의 밖, 완전한 미지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조금 더 치열해질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동시에 게임 시절과 지금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알아둬야 했다. 고통만 하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런 차이를 모르고 넘어간다면 발목 잡힐 일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배인은 각오를 새로 다졌다.
 
 “후우, 이걸로 된 건가?”
 배인이 세공 바늘을 내려놓으며 한숨 돌렸다.
 작업대에는 트롤의 뼈와 이빨로 만든 팔찌가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상아색 팔찌는 약간 조잡한 느낌을 주었다.
 “비고, 이것 좀 봐줘.”
 배인이 건넨 팔찌를 한 괴상한 소인이 꼼꼼히 확인했다.
 소인은 피부는 녹색이었고, 머리가 배인의 가슴 언저리까지 오는 작은 키에 등허리는 굽어 있었다. 고블린이다.
 그 고블린의 이름은 비고. 고블린 족의 젊은 족장이자 주술사였다.
 배인은 원래 고블린 족과 적대적 관계였지만, 코볼트 족 때와 마찬가지로 특별 이벤트를 통해서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는 오히려 코볼트 족보다 좋았다. 동료 간의 유대를 소중히 여기는 코볼트 족과 달리 동료애가 적은 고블린 족의 성격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배인이 과거에 자신들의 동료를 죽였든 말든 그다지 관심 없었다. 대신에 자신의 이익에는 매우 민감한 종족이었다.
 고블린 족은 녹색분지의 북쪽에 있는 커다란 지하 광산에서 살고 있었다.
 고블린 족은 코볼트 족과는 반대로 농사나 사냥, 채집에는 재능이 없었다.
 대신에 광물을 채굴하고 그 광물을 이용해 도구를 만드는 데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재능이라 해도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배인의 눈에도 고블린제 하면 모양은 투박하고 성능은 그저 그런 소모성 아이템인 것이다.
 지금은 그런 고블린에게 기술을 배우는 처지이긴 하지만······.
 “크흠, 좋다. 이 정도면 합격.”
 “휴우, 다행이구만.”
 비고의 합격점에 겨우 이마의 맺힌 땀을 닦았다.
 
 [액세서리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1 상승했습니다. 숙련도―손재주가 5 상승합니다.]
 [회복의 팔찌를 손에 넣었습니다.]
 [회복의 팔찌 ― 생명력, 지구력의 회복 속도가 상승합니다. 전투 중에도 통상과 다름없는 회복력을 가집니다.]
 
 “좋았어!”
 배인이 상승한 능력치를 확인하며 쾌재를 불렀다.
 “이쯤 되면 준비가 된 걸까?”
 한 달 전 늙은 트롤에 크게 당한 이후, 배인은 자신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사하였다.
 현재 녹색분지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 족인 트롤들과 치열한 전투를 되풀이하면서 육체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가상 게임 시절에는 시도하지 않은 행동을 하며 게임 시스템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런 노력을 통해 결실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적지 않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능력치에 관한 것이었다.
 본래 능력치는 레벨업을 할 때 랜덤으로 상승이 일어나거나, 레벨업으로 얻을 수 있는 보너스 포인트를 통해서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예정된 이벤트를 완수하는 것으로도 능력치가 상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외의 활동, 육체 단련을 하는 것으로 능력치가 상승되는 것을 확인했다.
 예를 들어 무거운 돌을 드는 것을 반복하면 완력이 상승했고, 달리기 연습을 통해 지구력과 민첩성이 상승했다.
 이것들은 현실 기준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체가 마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없고 단련을 쉰다고 해서 능력치가 퇴보하지도 않았다.
 거의 초인과 같은 능력이었다.
 물론, 단련을 통해서 능력치를 높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로, 항상 한계점까지 육체를 몰아붙여야 했다.
 1의 완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근육이 타버릴 것 같은 고통스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의 미지의 힘인 [마력]의 속성에 대해 파악하였고, 이를 이용한 스킬 개발에 성공하였다.
 원래 배인이 가지고 있는 스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상대의 상태 정보를 확인하는 [안력], 일부 상태 이상에 저항하는 [기합], 공격력을 상승시키는 [투지], 상대의 강(强)공격이나 특수 공격을 피하거나 저항했을 때 발동되는 [간파]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체력을 소모하면서 발동되었다.
 한데 신체 단련을 하다가 마력이 흉부뿐만 아니라 힘이 집중되는 장소에 몰려서 근력을 강화시키거나 상처의 회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의지에 따라 몸 안의 마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스킬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모두 세 가지로······.
 마력이 충만한 상태에서 생명력과 지구력의 회복을 가속시키는 [가호].
 마력을 근육과 무구에 집중시켜 일시적으로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강건].
 마력을 몸 전체로 보내 모든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고 상태 이상에서 회복되는 [강체술]이었다.
 패시브 스킬인 가호를 제외하고는 지구력이 아닌 마력을 소모하는 스킬들이었다.
 이 외에도 개발 중인 스킬, [심화]가 있었다.
 이것은 기본 행동 중 하나인 불 피우기 능력을 스킬화한 것으로, 마력으로 만들어낸 불로 적을 공격하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마력의 소모가 극심하고 아직 만족할 만한 화력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횃불만 한 불꽃을 아주 잠깐 발생시키는 정도였다. 그러고는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해 버리는 것이다.
 배인은 이때 마력의 부족을 절실히 느꼈지만, 총 마력을 늘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생명력과 지구력 수치와 달리 마력은 레벨업을 해도 올라가지 않았고, 보너스 포인트를 투자하여 올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찔끔찔끔 올라갔다.
 더딘 마력 성장에 답답해하던 배인은 마력이 의지에 영향을 받는 것에 주목하고 실험체 시절에 배운 ‘이미지 트레이닝’을 떠올렸다.
 시설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상현실의 동화율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배인에게 정신 수양을 가르쳐 주었다.
 동서양의 정신 수행을 집대성해 체계화했다던 그것이었다.
 배인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다시 시작하였고, 명상과 같은 정신 수양이 마력을 움직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배인은 동양의 단전호흡법을 떠올리며 마력을 하복부에 저장하려 했지만, 그곳에 마력을 옮겨도 금세 피부 밖으로 빠져나가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호흡법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발견한 게 심장이었다.
 자연스러운 호흡을 통해 마력은 폐에 가장 먼저 축적되었다. 그리고 저장된 마력의 일부가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 혈관을 통해 혈액과 함께 전신을 순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모든 마력을 심장에 저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성공하였다.
 마력은 심장에 모여 혈관을 통해 온몸을 순환하였다. 이 와중에 피부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력은 없었다.
 마력의 회복도 훨씬 빠르게 이루어졌다.
 또 새로운 스킬을 연습하다가 마력을 많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리고 소진된 마력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총 마력이 늘어난다는 것을 포착했다.
 배인은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 끝에 [심화 마력 순환법]을 만들어냈다.
 성냥불만 한 작은 불꽃을 만들어 천천히 마력을 태움과 동시에 심장의 마력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것이다.
 마력이 소진되는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효과가 높았다.
 심화 마력 순환법을 시작한 이후로 축적되는 마력의 양은 전과 비교하면 급격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정신과 육체의 소모가 너무 심했다. 한 번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기껏해야 하루에 두 번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배인은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이 얻은 것에 대해 찬찬히 복기했다.
 “좋아, 짐을 싸자!”
 결단을 내렸다.
 
 
 
 
 
 3.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위한 짐을 싸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지고 갈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배인은 한시름 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인의 아공간을 설명하자면 육면체 모양의 밀폐된 무중력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피는 80㎥로 거의 컨테이너 크기의 공간이다.
 또한 물건을 장기 보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밖에 놔두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오랫동안 물건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냉장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는 컨테이너가 부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게가 없으니.
 배인은 모험 준비를 위해 아공간을 정리했다. 무의미하게 쌓아뒀던 잡동사니는 모두 내버리고 품목에 따라 구획을 나눴다.
 소모품을 우선순위로 해서 식량, 의약품, 연료, 수리용 소재, 여벌의 무구, 취사도구, 옷가지, 담요와 천막, 귀금속순이었다.
 품목을 나누긴 했지만 식량 이외에는 특별히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식량은 약 일 년 동안의 여행을 상정하고 준비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먹을 과일과 채소와 생고기, 다음 11개월간 먹을 훈제육과 절인 채소와 과일,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비상식량용 건육과 치즈와 요구르트 같은 발효 식품. 감자의 경우, 아공간에 넣어두면 3년은 상하지 않아서 잔뜩 준비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물로 남은 공간을 채웠다.
 
 “가방의 점검은 끝냈고.”
 지금 배인은 모험 전의 최종 점검 중이었다. 마치 소풍 전에 짐을 쌌다 풀었다 하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다. 모습뿐만 아니라 심리도 어린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험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녹색분지를 떠나는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쿵쾅쿵쾅거렸다.
 나잇값 못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배인 스스로도 깨닫고 있긴 하지만, 어찌하랴.
 “다음은 상태창이랑 장비.”
 
 배인 ― 모험가
 LV. 33 경험치 77%
 칭호 ― 녹색분지의 정점
 
 생명력 ― 1,030 / 1,030
 지구력 ― 650 / 650(-70)
 마력 ― 208/208
 완력 ― 73(+1)
 공격력 ― 423 ~ 508 (* 성장치 투자가 불가능한 항목입니다.)
 방어력 ― 150(+81)
 민첩성 ― 51(-6)
 기술 ― 24
 
 *남은 성장 포인트 ― 10
 
 [숙련도]
 지식 ― 312
 안목 ― 155
 전투 기술 ― 19 (* 영자팔검)
 방어술 ― 23 (* 방패를 장비하지 않았습니다.)
 손재주 ― 151
 
 몇몇 능력치, 특히 완력수치가 상승한 레벨에 비해 높았는데. 이는 몸을 혹사시키는 것으로 억지로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도 어느 순간부터 상승하는 게 더뎌 졌다.
 
 스킬
 
 지구력계
 
 [안력] Lv. 9 : 상대의 능력을 꿰뚫어 본다. 지구력을 5 소모한다.
 [기합] Lv. 9 : 충격, 혼란, 공포 상태에서 회복한다. 지구력을 10 소모한다.
 [투지] Lv. 9 : 60초간 공격력과 크리티컬 확률이 상승한다. 지구력을 10 소모한다.
 [간파] Lv. 5 : 60초간 공격력과 민첩성이 상승한다. 적의 강공격, 특수 공격을 피하거나 저항했을 때 발동된다.
 
 마력계
 
 [가호] Lv. 5 : 패시브 스킬.
 [강건] Lv. 3 : 10초간 공격력과 방어력이 50% 상승한다. 30의 마력을 사용한다.
 [강체술] Lv. 3 : 30초간 모든 신체 능력이 20% 상승하고 스킬이 발동하는 동안에는 모든 상태 이상에 의한 능력치 하락 효과를 무시한다. 50의 마력을 사용한다.
 [심화] ― 비활성
 [심화 마력 순환법] ― 1초당 10의 마력을 소모, 1초당 5의 마력을 회복. 모든 1주 순환 시 1~2의 마력이 영구적으로 상승한다.
 
 적용 중인 능력
 
 [녹색분지의 정점] ― 녹색분지 내의 고블린 족, 코볼트 족 과 더 좋은 가격으로 거래를 할 수 있다. 보다 낮은 레벨의 몬스터의 조우할 경우, 그 몬스터는 낮은 확률로 충격 상태에 빠진다.
 [가호] ― 마력이 충만한 상태에서 생명력과 지구력의 재생속도가 증가한다.
 [모험가의 유물] ―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한다.
 [회복의 팔찌] ― 생명력과 지구력의 재생 속도가 증가한다.
 [코볼트 족의 후드 달린 망토] 방어력이 1상승한다. 더위,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상승한다.
 
 스킬의 숙련도 수준 낮은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약간 어거지로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숙련도를 올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 만들어낸 스킬들을 실전에서 실험하였다.
 시험결과 새로운 스킬들의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배인은 이전부터 사용했던 지구력계 스킬보다 새로 만들어 낸 마력계스킬을 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 예감하였다.
 다음으로 장비창을 확인하였다. 고블린과 코볼트에게 배운 액세서리 이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장비
 
 [갑옷] 모험가의 진화하는 갑옷 세트(고블린 합금) 갑옷, 투구, 손목 보호대, 팔꿈치 보호대, 장화, 정강이 보호대 ― 방어력 30 내구력 100/100 무게 5
 * 방어력의 100% 이상 대미지가 누적될 때마다 내구력 1 하락. 5일 연속으로 손질하지 않을 시 내구력 1 하락.
 [검] 불멸의 검 (내구력 ∞) ― 공격력 15 ~ 25 무게 1
 * 공격력이 저하하지 않는다. 파괴되지 않는다.
 [방패] 모험자의 재생하는 방패(고블린 합금) ― 방어력 10/10 내구력 120/120 무게 1
 * 방어력의 100% 이상의 대미지가 누적될 때마다 내구력 1 하락. 수리를 하지 않아도 내구력이 하락하지 않는다. 하락한 내구력은 시간이 흐르면 재생한다(파괴 시 무효). 상태 이상 ‘충격’에 저항한다.
 [액세서리] 회복의 팔찌 ― 생명력, 지구력의 회복 속도가 상승한다. 전투 중에도 통상과 다름없는 회복력을 가진다.
 [액세서리2] 코볼트 족의 후드 달린 망토 ― 방어1, 더위,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상승한다. 내구력 ∞
 [평상복] 수수한 옷 ― 더위, 추위에 대한 내성이 상승한다. 내구력 ∞
 [속옷] 수수한 속옷 ― 내구력 ∞
 
 “상태도 장비도 이상 없음. 음, 한 번 더 점검할까?”
 어째 해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배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가자!”
 배인이 정면을 노려봤다.
 지금 배인은 분지의 동쪽 끝에 있었다. 시야에 거대한 방벽으로 꽉 찼다.
 분지를 감싸고 있는 절벽이었다. 높이만 해도 200미터의 방벽이 반경 15㎞의 녹색분지를 감싸고 있었다. 녹색분지를 외부와 격리시키는 천연의 방벽. 아니, 실제론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이걸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목에서 뚜둑 소리가 날 정도로 올려다보았다. 압박감에 상태 이상에 걸려 버릴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배인이 자기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장비들을 꺼냈다.
 로프. 낙하 방지용 안전벨트, 절벽에 박을 못과 줄을 고정시킬 고리, 갈고리가 달린 장갑 등등. 예전에 현장에서 일할 때 사용했던 낙하 방지 도구와 영화 같은 데서 본 등산 장비를 나름 흉내 내서 만들었다.
 “가자!”
 배인이 로프의 끝에 갈퀴를 달아 붕붕 돌렸다. 목표는 절벽에 수직으로 나 있는 나무의 가지가 우선 공략 목표였다.
 던져진 갈고리가 정확히 나무로 향했다.
 휭.
 “엉?”
 갈고리가 나뭇가지를 그대로 통과했다. 뿐만 아니라 절벽 까지 통과했다.
 “뭐야? 이게······.”
 괴현상에 배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벽을 그대로 통과한 로프를 도로 당겼다. 아무런 저항 없이 갈고리가 돌아왔다.
 배인이 방벽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눈에는 분명 꺼칠한 돌 벽이 보였지만 손은 그대로 절벽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런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것참······.”
 당황해하는 배인의 뇌리로 예전에 TV에서 본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마법사 소년인 영화로, 그 소년이 마법 학교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의 기둥으로 돌진하는 장면.
 배인이 침을 꼴깍 삼키며 머리를 절벽으로 들이밀었다.
 화끈.
 “윽!”
 얼굴이 뜨거웠다. 강렬한 빚에 눈이 아팠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올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망막에 담았다.
 사막이었다. 언젠가 TV에서 본 거대한 모래사막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배인이 잠시 입을 벌리고 그 장관을 음미했다. 입안의 침이 순식간에 말랐다. 몸을 숙여 모래에 손을 파묻었다. 화끈한 열기에 손이 익어버릴 것 같았다.
 배인이 뒤로 돌아 자신이 걸어 나왔던 곳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사막만이 펼쳐져 있었다.
 손을 뻗으니 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한 발자국 앞을 향해 걸으니 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녹색 가득한 숲의 세상이었다.
 멀리 송곳니산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산악지대의 시원한 공기가 상쾌하게 폐부를 채웠다.
 배인이 다시 뒤를 돌아 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작열하는 태양이 시야 가득한 모래들을 지금 당장이라도 유리 조각으로 바꿀 듯이 달구고 있었다. 생명의 자취는커녕 그림자조차 없었다.
 “헬프!”
 [예, 배인 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방벽이 있는 자리는 가상현실의 가장 테두리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세계의 끝인 것이죠. 선의 밖은 아무것도 없도록 설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공백으로 두기엔 게임의 분위기를 저하할 우려가 있어 그래픽을 덧씌웠습니다. 하지만 그뿐, 그 이외의 감각에 관한 것은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장식이었기 때문에 현실계에서 영상 이외에는 구현되지 않았다는 건가?”
 [그렇게 분석됩니다.]
 “하면 기후는?”
 [절벽을 기점으로 녹색분지와 사막의 환경이 완벽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한 분석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괴현상에 마력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헛된 추측에 배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뭔지.’
 “뭐, 감각을 믿는 수밖에······.”
 복잡하게 생각해 봤자 소용없었다. 지금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제일이었다.
 “그나저나 헛고생했군.”
 등산 장비를 보는 배인의 눈빛이 허무감으로 가득했다. 힘들게 만든 등산 장비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아공간으로 처넣었다.
 “쯧, 출발은 밤까지 미뤄야겠군.”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행군할 자신은 없었다.
 배인이 처음 사막으로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가혹한 환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 예상대로 낮에는 40도를 웃돌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살인적인 일교차에 행군은커녕 정신을 차리는 것도 벅찼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으로 초인이 된 탓인지, 아니면 인간의 적응력과 의지가 원래 강한 것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적응하게 되었다.
 사막을 행군하는 데 필요한 규칙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낮에 쉬고 밤에 걷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을 규칙적으로 마신다는 것뿐이었다.
 배인은 이 정도만 지키면 사막을 행군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막에 나온 지 열흘··· 아니, 보름 정도 흘렀나?”
 밤엔 걷고 낮엔 휴식을 취한다. 이런 단순한 사이클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무감각해졌다.
 마치 감각과 정신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모래에 매몰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만약 헬프라는 말상대가 없었다면 진짜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가혹한 환경보다도 반복되는 단조로운 나날이 배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오늘 일기도 별로 쓸 게 없겠군.”
 배인은 이세계로 떨어진 이후로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막에 나와 최근 수일간, 일기의 내용은 그저 그날그날 먹은 음식에 대해서밖에 쓸 게 없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호사를 부려봐··· 음?!”
 식사 메뉴를 생각하는데 모래를 딛는 발을 통해 진동이 느껴졌다.
 “환촉?!”
 ‘드디어 감각이 맛을 가버렸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무언가 지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지?”
 배인이 감각을 주변으로 확장시켰다. 약물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얻은 초인적인 감각은 새로 얻은 몸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진동을 잡아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오른쪽.”
 그 무엇인가가 배인을 향해서 다가오는지 진동은 점점 커졌다.
 “빠르다!”
 이제는 미지의 생물의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모래를 파헤치며 배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래가 울룩불룩 지면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니 보통 큰 게 아니었다.
 위협을 느낀 배인이 아공간에서 검과 방패를 꺼냈다. 갑옷도 꺼내 입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행군에 방해되는 물건은 모두 벗어둔 것이 불찰이었다.
 파박.
 “쉬에엑!”
 “큭!”
 배인의 눈앞에서 거대한 물체가 모래를 뚫고 뛰어올랐다.
 날카로운 포효를 내며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전갈이었다. 당연하지만 보통의 전갈이 아니었다.
 보통 전갈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등장한 녀석은 크기는 고급 세단만 했고, 꼬리는 양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딱, 따딱.
 녀석이 집게발을 서로 부딪치며 위협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배인이 침을 꼴깍 삼켰다.
 “너, 혹시 말할 줄 아니?”
 배인이 전갈에게 질문했다. 가혹한 환경과 단조로운 나날 속에서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것일까?
 하지만 배인의 눈은 진지했다.
 원래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였다. 배인의 여행은 단순히 투어가 아니라 미지 세상에 대한 탐구였고, 고로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눈앞의 거대 전갈이 인간 이상의 지성을 갖추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물론 그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는 것은 배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저기, 여보세요?”
 배인이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끼에엑!”
 그런 배인의 질문에 전갈이 포효를 내질렀다.
 이것이 과연 의사 소통 시도에 대한 회답인 것인지 판단하기 모호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배인에게 상당히 적대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슈욱.
 전갈이 거대한 집게발을 배인을 향해 내질렀다. 배인이 백스탭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뒤를 이어 전갈의 꼬리가 섬전 같은 속도로 배인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팡!
 방패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꼬리가 두 개라는 사실을 순간 잊고 말았다. 시간 차로 남은 꼬리가 배인의 가슴팍을 노리고 쏘아졌다.
 “큭!”
 상체를 비틀어 정타는 피했지만, 스치는 것까지 피할 순 없었다.
 
 [상태 이상 [맹독]. 10초에 5%의 생명력에 대미지를 입습니다. 이 효과는 상태 이상을 치료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크으, 하는 수 없지.”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원주민은 대화보다는 식사를 원하는 것 같았다.
 밥 사 준다는 사람은 항상 환영이지만, 서로 식성도 다르고 손님을 초대하는 예절도 엉망이다.
 배인도 그에 합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만 할 것 같았다.
 배인의 검이 전갈의 머리를 향해 공간을 잘라갔다.
 창!
 하지만 배인의 공격은 전갈의 거대한 집게에 가로막혀 버렸다.
 꾸준한 포인트 투자와 단련 덕분에 배인은 평범한 사람의 일곱 배가 넘는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한 공격력은 400대 후반.
 마음먹으면 사람 허리 두께의 통나무 정도는 일격에 자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 공격을 막아내다니, 엄청나게 단단한 외피를 가진 듯했다.
 표피의 표면이 약간 우그러진 게 흔적의 전부였다.
 막긴 했지만 전갈도 아무런 대미지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충격은 집게를 통해 전신에 전해졌고,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배인이 기합과 함께 스킬을 발동했다. 마력 스킬 [강건]이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50% 상승했다.
 그때를 노려 전갈이 꼬리로 공격했다.
 팡! 촤악!
 “끼엑!”
 첫 번째 꼬리는 방패로 막고, 시간 차를 두고 쏘아져 내린 꼬리는 검으로 잘라냈다.
 “두 번은 안 통해!”
 배인의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빛살처럼 내려쳐진 검이 집게발을 잘랐고, 다시 회수된 검은 전갈의 머리를 찔렀다.
 전갈은 남은 집게발을 들어 그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배인의 몸무게가 실린 검끝은 집게발을 뚫고 머리 한복판에 꽂혔다.
 “키에엑!”
 전갈이 비명과 함께 발버둥 쳤다. 이에 배인이 검을 휘저어 상처의 크기를 넓혔다.
 결국 그 공격에 전갈은 남은 다리를 비틀며 괴로워하다 이내 배를 까뒤집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죽었나?”
 배인이 검을 뽑아내 몇 발자국 물러나 전갈의 상태를 살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공간에서 해독약을 꺼내 마셨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후우, 결국··· 다른 세계가 맞는 건가?”
 전갈을 상대하며 배인은 실감할 수 있었다.
 녹색분지의 몬스터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생명체로서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을 강하게 느꼈다. 절대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배인이 있는 곳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적어도 가상현실 속 세계가 아니었다.
 약간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긍정적인 마음을 품었다.
 “어찌 됐든 생물이 살 수 있는 세계인 거야. 분명 말이 통하는 지성체도 있겠지.”
 낙천적으로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하였습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헬프의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 그렇게 하지.”
 
 [어떤 이름으로 하시겠습니까?]
 
 “음······. 사막 거대 전갈.”
 배인이 별 고민도 없이 내뱉었다.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하였습니다. 지식이 1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배인은 시스템 음을 뒤로하고 전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갈무리’를 꺼내 전갈에 대고 외쳤다.
 “갈무리!”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예상은 한 거지만.”
 실망하지 않고 또 다른 단검을 꺼내었다. 쇠로 만들어진 것으로, 날이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배인은 갈무리 효과가 가능하려면 그 생물체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가정을 세우고 있었다.
 만약 거대 전갈을 갈무리하고 싶다면 녀석의 데이터를 얻어야 했다.
 단검을 든 배인이 아주 신중한 태도로 거대 전갈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단단한 표피와 표피의 사이, 그리고 관절에 단검을 밀어 넣어 절개하였다. 체액이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내장 기관을 살필 때는 직감적으로 오늘 식사는 다 했다는 예측을 할 수 있었다.
 배인의 해부 실험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후우, 어디 한 번······.”
 엉망진창으로 해체되어 있는 전갈의 주검에 갈무리를 대고 주문을 외웠다.
 전갈이 반투명해지더니 거체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빈병을 하나 소모해서 전갈 독을 채취하겠습니까?]
 “응.”
 
 [전갈의 단단한 외골격×5, 마력이 담겨 있는 결정, 전갈의 고기, 전갈의 꼬리 독을 손에 넣었습니다.]
 
 “좋았어!”
 연달아 터지는 시스템 음에 배인이 환호성을 내뱉었다. 가정이 들어맞아 기뻤다. 오늘 일기에는 쓸 게 많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간간이 몬스터들과 조우했다.
 출현하는 몬스터의 종류는 거대 전갈만이 아니었다.
 모래 속을 유영(遊泳)하는 모래 상어나 수십 마리씩 무리지어 다니는 개만 한 두더지도 있었다.
 배인은 새로운 몬스터들과 조우할 때마다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답 대신에 공격을 걸어왔다.
 아무튼 사막의 생태계 속에서 몇 번인가 위험한 지경에 빠졌지만, 능력과 기지를 발휘해 모두 해쳐 나갔다.
 “저게 뭐지?”
 사막에 들어선 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 배인은 언제나처럼 달빛을 벗 삼아 걷고 있었다. 한데 사막의 저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붉은빛을 발견한 것이다.
 “별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아. 혹시!”
 등대 같은 인공 건축물일지도 몰랐다. 사막의 등대라니, 분명 어울리지는 않지만······. 꼭 등대일 필요는 없다. 불이 켜진 탑의 꼭대기일 수도 있었다.
 배인은 빛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게······.”
 장소에 도착한 배인은 실망한 것인지, 아니면 좋은 것인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했던 인공 건축물은 없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사막에선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오아시스?”
 배인이 발견한 것은 오아시스였다.
 하지만 그 형태가 특이했는데, 반경 20미터 정도의 원형 오아시스였다. 그 외에도 특이한 점이 몇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오아시스 주변에 그 어떤 식물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중심에는 15미터 높이의 기둥이 서 있는 점이 특이했다.
 기둥이라 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아니었다. 식물의 줄기가 얽혀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점은 줄기의 끝부분이 붉은빛을 내며 빛난다는 점이었다.
 배인은 저 불빛에 매료당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다.
 “마실 수 있으려나?”
 오아시스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물은 깨끗한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아공간에서 물컵을 꺼냈다. 독이 있을지도 몰라 해독제와 질병 치료제도 함께 꺼냈다.
 꼴깍.
 “헉!”
 오아시스의 물을 한 모금 마시던 배인이 갑자기 목을 부여잡았다.
 “크··· 캬아!”
 맛있었다. 마치 설탕을 탄 것 같은 달콤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알싸한 산미까지······. 단순히 맛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효과로 인해 생명력, 지구력, 마력의 회복 속도가 경이적으로 올라갑니다. 생명력, 지구력, 마력의 최대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상승합니다.]
 
 “뭐, 뭐야, 이거?!”
 배인이 들려오는 헬프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물을 퍼 올리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연거푸 다섯 컵이나 마셨다.
 “후아~ 뭐지? 기분도 좀 알딸딸한 것 같은데······.”
 천연 발효수인지도 몰랐다.
 들썩.
 “응?”
 오아시스의 물을 음미하고 있는 배인의 감각에 무엇인가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헉?!”
 그때, 배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던 땅이 갑자기 기울어졌다.
 첨벙.
 갑작스럽게 생긴 경사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오아시스로 굴러 떨어졌다.
 “어푸, 뭐, 뭐야?! 바닥이!”
 땅이 기울어져 한 번 놀라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한 번 더 놀랐다.
 오아시스는 배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하지만 다행히 갑옷을 입고 있어 가라앉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괴상한 소리냐면, 지금 배인이 입고 있는 갑옷은 마치 구명조끼처럼 물에 떴다.
 최근에 손에 넣은 ‘전갈의 단단한 외골격’으로 갑옷과 방패를 완전히 개수했다. 전갈의 외골격은 고블린 합금보다 훨씬 단단하면서 마치 나무판만큼 가벼웠다.
 그리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물에 뜨기까지 했다. 그건 지금 알았지만······.
 “도대체 뭐야?”
 배인이 수면 위에 둥둥 떠서 갑자기 솟아오른 바닥을 봤다.
 모래 바닥의 아래에 무언가 녹색의 잎 같은 게 솟아 있었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잎이었다.
 길쭉한 테두리에는 삐죽삐죽한 가시가 나 있고 표면이 단단해 보이는 것이, 알로에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크기는 훨씬 컸다.
 거의 경비행기의 날개만 한 잎이었다. 그런 잎 수십 개가 둥근 오아시스의 테두리를 감싸 안는 형태로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었다.
 배인의 뇌리에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구체적인 영상도 떠올랐다.
 달콤한 향기로 곤충을 유인하는 아마존의 식충식물, 촉수에 달린 불빛으로 먹이를 꼬여내는 심해의 아귀 같은······.
 “하하, 그러니까 이 물이 꿀이고, 저 불빛이··· 윽!”
 고개를 돌려 기둥을 보려는데 기둥의 줄기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두꺼운 줄기 하나가 배인을 잡기 위해 다가왔다. 배인이 급하게 검을 뽑아 휘둘렀다.
 줄기가 반쯤 잘려 나가며 투명한 수액이 떨어졌다. 물에 빠져 부자유스런 상태에서 줄기 하나를 물리쳤지만, 줄기는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배인이 바쁘게 검을 움직였다. 다행히 줄기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물 아래에서 조용히 다가온 줄기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꼬르륵!”
 배인이 줄기에 의해 수면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물이 입안으로 잔뜩 들어왔다. 달콤했지만 숨을 쉴 수 없었다.
 바닥까지 끌려 내려간 배인의 눈에 바닥에 잔뜩 깔린 하얀 뼈와 단단한 외피 같은 것들이 보였다.
 오아시스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주검이었다.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배인이 몸부림치며 줄기로부터 벗어났다.
 겨우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기다리고 있던 다른 줄기에 또 붙잡혀 버렸다. 이번 줄기는 배인을 들어 올려 수면으로 몇 번이고 내동댕이쳤다.
 마치 날뛰는 물고기를 기절시키려는 물새처럼.
 팡, 팡!
 배인이 수면에 부딪칠 때마다 물보라가 튀었다.
 
 [상태 이상 ― 충격 : 민첩성이 저하되며 생명력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회복까지 30초]
 [상태 이상 ― 골절 : 생명력과 지구력의 최대치가 줄어들었습니다. 공격력이 저하되었습니다. 효과는 질병이 치료될 때까지 지속됩니다.]
 [알 수 없는 효과에 의해 모든 상태 이상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상태 이상 효과가 생기자마자 지워졌다. 물의 효과였다.
 “이 망할! 죽일 건지 살릴 건지 둘 중에 하나만··· 끄억!”
 물론 배인은 죽기 싫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생명력과 지구력이 빠르게 내려갔다가 다시 빠르게 올라가는 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생명력 최대치를 넘는 대미지로 일격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에라, 이판사판이닷!”
 줄기에 의해 다시 공중으로 오르는 순간에 몸을 구부려 발목을 붙잡고 있는 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심화!”
 손에서 화염이 뻗어 나가 줄기를 태웠다.
 화염은 배인의 발목도 함께 감쌌지만, 배인의 몸속에서 나온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염이었다. 줄기는 불태웠지만 배인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
 화염에 휩싸인 줄기의 힘이 약해졌다. 배인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아니, 공중으로 내던져진 상태였다.
 퍽!
 “끅!”
 오아시스 중심에 있는 줄기 기둥의 꼭대기 언저리까지 날려가 몸을 부딪쳤다.
 떨어지면서 꿈틀거리는 줄기 하나를 손에 잡았다. 수액 때문에 미끄러질 것 같았다. 검으로 기둥을 깊숙이 찌르며 버텼다.
 줄기에게 갖은 농락을 당해가면서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배인의 검이 기둥을 깊숙이 파고든 순간, 모든 줄기들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는 검으로부터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아항~”
 그 반응의 의미를 캐치해 낸 배인이 씨익, 괴소 지었다. 마치 사람의 약점을 잡은 악당 같은.
 “강체술!”
 스킬을 발동시켰다. 30초 동안 모든 신체 능력이 20% 상승하고 상태 이상에 의한 능력치 하락 효과에서 자유로워졌다.
 원래는 [심화] 스킬로 마력이 대부분 소진되기 때문에 마력이 부족했겠지만, 누구 덕분에 배인의 뱃속은 오아시스의 물로 가득한 상태였다.
 지금도 맹렬한 기세로 마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다른 손으론 수도로 만들어 줄기 기둥에 찔러 넣었다. 그렇게 몸을 고정시킨 뒤 검을 기둥에서 뽑아내 다시 찌르길 반복했다. 그러다 마력이 회복되면 심화로 줄기를 태웠다.
 오아시스 전체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창 복수를 하고 있는 배인의 눈에 붉게 빛나는 기둥의 꼭대기가 들어왔다.
 “저걸 아작 내면 더 좋겠지? 응?”
 배인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어떨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도는 확실하게 전해진 것 같았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배인을 막기 위해 줄기들이 몸부림 쳤다.
 줄기 하나가 배인의 등에 닿았지만 너무 늦은 상태였다. 배인의 손이 기둥의 첨단에 파고들었다. 첨단은 기둥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마치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배인의 손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쥐여졌다. 그리고 그대로 그것을 뽑아내었다.
 그 순간, 줄기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는 힘이 빠진, 마치 냉장고 안에서 빳빳했던 시금치가 더위에 시들어 버리듯이.
 
 [LEVEL UP!]
 [새로운 스킬 [심화]를 익혔습니다.]
 
 들려오는 낮은 북소리에 배인이 미소 지었다.
 첨벙.
 시들어 버린 줄기 기둥이 수면의 아래로 가라앉았다.
 배인은 수면 위에 둥둥 떠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드드드.
 그때, 테두리를 감싼 꽃잎이 오아시스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꽃잎도 시들어 있어서 오아시스가 닫혀봤자 완전히 그 속에 갇혀 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으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
 푹 젖은 배인이 두터운 꽃잎에 의해 닫혀 버린 오아시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헬프,”
 [예, 배인 님.]
 “녀석은 완전히 죽은 건가?”
 [활동이 대부분 정지되어 있지만 마력의 움직임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뭐, 식물이란 건가? 얼마 안 가 부활하겠군.”
 [분석한 후 갈무리하시겠습니까?]
 “글쎄······.”
 배인은 잠시 고민했다.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두겠어. 다시 부활한다고 내 뒤를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혼자서 이거 해체하려면 몇 년은 걸릴 거야. 근데 신종 등록은 가능해?”
 [예. 이름을 붙이시겠습니까?]
 “음, 사람 먹는 오아시스.”
 몬스터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지명이었다.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하였습니다. 지식이 1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위치를 표시해 둬. 나중에 탐색의 거점으로 이용할 거야.”
 [알겠습니다.]
 배인의 뇌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인공지능 헬프는 고성능 내비게이션이기도 했다. 배인이 한 번 들른 곳의 위치 정보는 모두 기록되었다.
 배인은 오아시스의 물을 잔뜩 채취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참고로 물은 ‘사막 단물’이라고 이름 지었다.
 “근데 이건 어디에 쓰는 거지?”
 배인의 손에는 붉은빛을 내는 결정이 쥐어져 있었다. 줄기 기둥의 첨단에서 뽑아낸 것이었다. 불투명한 것으로 보아 보석은 아니었다.
 “뭐, 쓸 데가 있겠지.”
 그대로 아공간의 귀금속 공간에 보관해 두었다.
 
 사막을 탐사한 지 딱 사십 일이 되었을 때, 배인은 사막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기온이 낮아졌고 모래의 입자가 좀 더 굵어졌다.
 또 전에는 보지 못했던 바위나 마른풀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등장하는 몬스터에도 변화가 있었다.
 전갈의 경우 색이 검은색에서 사막의 모래색으로 변하며 크기도 현저하게 줄어들어 겨우(?) 대형견만 해졌고, 사막 두더지의 경우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고운 모래 속에서 헤엄치던 모래 상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녀석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데,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2미터 정도 되는 왕 도마뱀이라든지 대머리독수리에 뱀의 꼬리를 가진 괴조가 나왔다.
 이외에도 들쥐나 뱀, 벌레 같은 작은 생물들은 종류를 셀 수조차 없었다.
 배인은 새로 만난 몬스터들에게 전처럼 말을 걸었지만, 녀석들은 대답 대신 가지고 있는 호전성만을 과시할 뿐이었다.
 물론 새로운 녀석들은 전에 나오던 녀석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약해서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번번이 튀어나와 행군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어느덧 눈에 익은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묵묵히 길을 가고 있었다.
 근데 어디선가······.
 코호, 코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로, 새로운 몬스터가 나왔나 싶었다.
 그렇다면 또 신종 등록이나 할 생각에 검을 뽑아 들고 조용히 울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종래의 몬스터와는 또 다른 모습의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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