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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 1권(1)

2019.08.11 조회 85 추천 0


 제0교시 [돼지 똥 싸는 소리]
 
 
 
 클레이즈 아카데미.
 비슈아드 대륙에 숨겨져 있는 제1의 마법 대학이자, 최고의 군사력과 교육을 자랑하는 꿈의 학원.
 클레이즈의 졸업장을 딴 이는 절대적인 명예와 함께 어느 국가에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그 직위는 장교와 맞먹었다.
 ‘절대적인 지식을 배운 자’, ‘무너지지 않는 교육을 습득한 자’, 그것이 클레이즈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그토록 위대하고 거대한 마법 대학 클레이즈. 그러나 그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클레이즈’를 졸업한 학생들은 물론, 칭송받는 두 제국의 황제들도 알지 못하는 극비 사항이었다.
 모든 입학시험을 ‘덴 이레프’에서 치렀다는 점에서 덴 이레프에 존재한다고 일컬어지나, 실로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이라고 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가난한 평민이나 노예라고 가지 못하는 곳도 아니었다.
 클레이즈의 입학 방식은 오직 한 장의 특수한 편지로 정해졌고, 이는 전 세계에 있는 19세의 아이들 중, 일정 이상의 ‘늄’을 가진 아이들만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편지가 입학시험을 치르는 장소와 준비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쉽게 말해 그것을 받은 아이들만이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화창한 8월의 시작과 함께 뿌려지는 백색의 편지. 그리고 그 편지는 ‘사혈’의 변두리 마을인 ‘소난’에도 예외 없이 퍼져 나갔다.
 
 비슈아드력 1771년 8월 1일. ‘령’, ‘사혈’의 작은 마을 ‘소난’.
 산과 숲이 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사혈은 하늘을 이용한 교통로가 활발히 발달한 나라였다. 항공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답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 복지도 좋아 자유롭고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곳이다.
 사혈의 모든 마을과 도시는 비행로를 통해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한 나라가 마치 하나의 마을인 것처럼 유대도 끈끈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늘길이 발달한 나라에서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변두리 마을인 ‘소난’이었다.
 초록빛의 넓은 들판 위에 이루어진 이 마을은 동화 속에 나오는 곳처럼 작은 호수와 넓고도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그리 높지 못했다. 마을 사람의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았으며, 대체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서 벌어들이는 주된 수입은 목제 산업과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한 휴양 사업이 전부였고, 그 외에는 자잘한 물품을 만들어 옆 마을이자 소도시인 ‘달’에 가서 파는 일이었다.
 때문에 ‘소난’엔 유독 목제와 관련된 장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유림’ 또한 나무를 깎아 장식품을 만드는 공예사 중 한 명이었다.
 153㎝의 아담한 키와 젖살이 남아 있는 얼굴. 흔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눈은 총명해 보일 정도로 동그랬고, 체구처럼 조그마한 코와 입은 그녀의 고집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체형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머리카락 색은 평범하지 않았다. 자색, 그렇다. 하나로 높게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한 가는 머리카락은 ‘령(동쪽 대륙을 일컫는 말)’에선 없다 할 정도로 보기 드문 자색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유림의 외모는 이곳 사람이라 치기엔 조금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외모에 걸맞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그녀는 눈썹을 덮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백색의 종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클레이즈]
 반갑습니다, ‘한유림’ 양.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월 1일까지 ‘덴 이레프’의 작은 마을 ‘콜람’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치러질 입학시험은 꽤 고단한 것이기에 며칠간 입을 옷가지와 생필품, 그리고 자신을 보호할 무기나 보호구를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글이 적혀 있는 백색의 종이. 잉크로 쓰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두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그 문구는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클레이즈? 능력을 인정받아? 덴 이레프?
 유림은 자신의 손에 들린 새하얀 종이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대로 구겨 구석에 있는 휴지통에 집어 던졌다.
 “클레이즈는 무슨 클레이즈.”
 툭.
 빈 휴지통을 채우는 종이 뭉치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유림은 그 소리에 피식 웃으며 지게를 졌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돼지 똥 싸는 소리 하고 앉았네.”
 
 
 
 
 
 제1교시 [이것이 정녕 입학시험입니까?]
 
 
 
 ‘늄’
 그것은 모든 생명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생명이자 마나의 그릇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마력의 원천이다.
 대체로 늄은 생명의 탄생과 함께 생성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데, 인간의 경우 열 살 즈음에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만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열 살이 지나면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반면 늄이 사라지지 않은 이들은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계 속의 세상을 누릴 수 있으며, 그 특권은 무한하고도 거대한 힘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늄을 ‘신을 칭송하는 이에게 신이 내린 찬란하고도 무한한 힘’이라 칭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무색하리만큼 허무한 곳에 늄을 사용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자, 1번 넌 나무 베고, 2번 넌 주워라. 3번 넌······ 그냥 이리 와서 어깨나 두드려.”
 나무 밑동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이는 작은 체구의 여인. 그녀의 손짓에 1m쯤 돼 보이는 나무 인형 세 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익끼익.
 인형이 움직일 때마다 소음과도 같은 나무의 마찰음이 숲을 울렸다.
 소녀, 아니, 유림은 몇 년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열심히 나무를 베고, 잘린 나무를 줍는 인형들을 바라봤다.
 아무런 무늬, 장식도 없이 긴 나무 막대기로 이어져 있는 투박한 몸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만들기 귀찮아 대충 주워 조합했더니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냥 제대로 몇 개 만들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꽤나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거기다 제대로 하기엔 유림의 성격이 너무나 게을렀다.
 턱턱.
 끼익끼익.
 나무 인형이 힘차게 도끼를 휘두르며 나무를 벴다. 유림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왠지 동족 학살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떡하랴, 나도 먹고살아야 하는 것을.
 목공예를 하는 유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나무였다. 다행히도 이 마을은 나무가 넘쳐났고 대다수가 질이 좋았으니, 베서 잘 숙성(유림만의 특별 기술)만 시키면 돈이 되는 건 안 봐도 뻔했다.
 그러니 너희는 나무를 베렴, 난 숙성을 시킬게. 너희도 내가 먹고사는 데 협조해야 하지 않겠니?
 눈앞에서 나무를 모으는 두 인형과 자신의 등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한 인형.
 느긋한 여유로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지.
 유림은 기지개를 켜며 여유를 만끽했다. 그때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유림이 황급히 손을 들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박수 소리에 맞춰 나무 인형들의 관절이 분리되더니 나뭇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흩어졌다.
 타닥, 탁.
 조금 전까지 움직였던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널브러져 있는 나무토막들을 보며 유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래서 제대로 못 만든다니까.
 유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땅에 떨어진 도끼를 주웠다. 그러곤 발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한 소녀가 두 팔을 흔들며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림림! 림!!”
 숲을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아따 목소리 한번 겁나 크네. 유림은 한쪽 귀를 막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소녀를 빤히 바라봤다.
 상당히 예쁜 아이였다. 갸름한 달걀형의 얼굴에 입술은 매력적일 만큼 도톰했고, 콧날 또한 오뚝했다. 눈은 사슴처럼 동그란 게 보는 이를 편하게 해줬고, 뜀박질에 흩날리는 밝은 갈색의 굽이진 단발머리는 햇빛에 닿을 때마다 옅은 분홍빛을 발산하며 반짝였다.
 평균보다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와 비쩍 마른 몸뚱이, 그리고 코에 걸린 뿔테 안경이 유난히도 거슬렸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엄청난 미녀라 봐도 무방할 만큼 아리따운 소녀였다.
 유림은 그녀가 자신의 친구인 ‘은하수’라는 것을 알곤 혀를 차며 도끼를 내동댕이쳤다.
 젠장. 놀랐잖아, 이년아.
 유림은 은하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후, 다시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분리되었던 나뭇조각들이 부르르 떨더니 이내 하나로 이어져 좀 전의 인형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가 오기 직전의 형태 그대로 한 놈은 나무를 베고, 한 놈은 나무를 줍고, 한 놈은 유림의 뒤로 다가와 등허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유림의 앞에 도착한 은하는 크게 숨을 고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림! 나 붙었어!!”
 라는 앞뒤 다 잘라먹은 소리와 함께 백색의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클레이즈]
 반갑습니다. ‘박은하수’ 양.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월 1일까지 ‘덴 이레프’의 작은 마을 ‘콜람’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치러질 입학시험은 꽤 고단한 것이기에 며칠간 입을 옷가지와 생필품, 그리고 자신을 보호할 무기나 보호구를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유림이 받았던 것과 같은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나 시큰둥하게, ‘돼지 똥 싸는 소리 하네’ 하고 집어 던졌던 유림과 달리 너무나도 기뻐하는 은하였다.
 은하는 뭐가 그리 기쁜지 종이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더니 만세 삼창을 외쳤다. 그 격한 움직임에 치렁치렁하게 긴 붉은색의 치마가 붕 떠올랐다.
 “미치겠다! 진짜 왔어! 꺅!! 어떡해! 완전 좋아!! 나, 붙었어!!”
 “엄밀하게 말하면 붙은 건 아니지.”
 “그거나 그거나~”
 “전혀 달라.”
 “쳇.”
 냉정한 유림의 반응에 은하가 치사해, 라며 짧게 칭얼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물었다.
 “넌?”
 “뭐가?”
 “넌 없어? 안 된 거야?”
 그럴 리가.
 유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나 멍청하게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은하였다.
 “떨어졌어?”
 “네가 됐는데 내가 떨어졌겠냐?”
 “근데 왜 이렇게 시큰둥해?”
 정말로 의아한 듯 물어오는 은하의 말에 유림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시큰둥하냐니.
 “뭐가 좋다고 기뻐하냐.”
 “안 기뻐? 세계 최고의 마법 대학 클레이즈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분명 돈 좋아하고, 팔자 고쳐 유유자적하게 살길 바라는 너로선 상당히 기뻐할 소식이라 생각했는데?”
 어이 어이, 돈 좋아하고 팔자 고치길 원하는 너라니?
 은하의 말에 유림이 정색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른 채, 계속 그 작은 입을 쫑알거리는 은하였다.
 “클레이즈만 졸업하면 대박이잖아. 돈 많이 버는 일도 할 수 있고, 우선적으로 특혜가 짱짱한데?”
 “어이 어이, 박은하수 양. 클레이즈가 뭐 동네 껌입니까, 쫙쫙 씹고 뱉고 하게. 졸업하는 게 말처럼 쉽냐? 뭐, 까짓것 못할 것도 없다만, 거기 다니는 게 다 돈이야. 학비야 그렇다 치자. 가서 생활하는 생활비는 안 드냐? 거기다 준비물이며 교재며 이것저것 다 사야 할지도 몰라. 아니, 그걸 떠나서 너 덴 이레프까지 갈 차비는 있냐?”
 유림의 말에 은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봐, 우리 팔자에 무슨 클레이즈.”
 “그치만······.”
 “그래도 너야 뭐 아저씨도 있겠다, 아줌마도 있겠다. 그리고 판타지 소설가로 데뷔한 네 남동생도 있겠지만 난 혼자라고. 나 먹고살기도 빠듯해.”
 유림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무 밑동에 앉았다. 그러자 나무 인형 하나가 유림을 쫄래쫄래 쫓아와 그치지 않고 등을 두드렸다.
 “······.”
 은하는 고개를 돌려 묵묵히 나무를 베고, 줍는 나무 인형을 바라봤다.
 늄의 운용 방식은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웠다. 그중 유림이 사용하고 있는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은 고위 마법사들도 잘하지 못하는 큰 기술이었다.
 은하는 유림에게 다가가 그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돈이 뭐기에 이 재능 있는 친구와 꿈 많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건지······.
 사실 유림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동생이 소설가로 데뷔했다고 해도 가난한 건 이전과 다름없는 집구석이었다. 설사 입학시험을 치르러 간다 해도 문제였다. 우선적으로 덴 이레프까지 가는 교통비가 장난 아니었으니 말이다.
 애당초 사혈이란 나라는 산과 숲이 많아 비행선을 타지 않으면 오가기가 힘든 곳이었고, 더욱이 그들이 사는 소난은 비행선으로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꼭대기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운 좋게 비행선을 타고 나간다 해도 덴 이레프까지 가려면 몇 개의 나라를 거쳐야만 했고, 그간 들 숙식비나 교통비를 계산하자면,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쁜 유림과 은하에겐 말 그대로 꿈과 같은 비용이었다.
 은하는 뒤늦게 깨달은 현실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다.”
 “뭐, 아쉽기야 하지. 근데 난 형편 된다 해도 싫어.”
 “왜?”
 “클레이즈를 졸업하면 거의 군에 끌려가잖아. 그것도 아니면 신전, 것도 아니면 귀족 집이나 왕실이야. 물론 자영업도 할 수 있지만, 대다수가 그렇잖아. 난 남 밑에 있는 거 자신 없어.”
 “하긴 너라면 왕이라도 하인 만들 애니까.”
 유림은 과연 이게 무슨 뜻일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
 “······여튼 그걸 떠나서도 바쁘고 정신없는 거 싫어. 난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고 한적하게 지낼 거야. 걍 적당히 벌어다 쓰고, 적당히 놀다가 적당한 때에 죽을래. 클레이즈는 개뿔. 그거 다 돼지 똥 싸는 소리다.”
 돼지 똥 싸는 소리라니······. 은하는 유림의 신랄한 표현에 쓰게 웃었다. 하여간 표현을 해도 꼭······ 어라? 잠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은하가 유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근데, 림. 나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던 건데.”
 “응?”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잖아.”
 이번엔 유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은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떻게 유유자적하게 사니, 연금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나오잖아.”
 “뭐?”
 “연금 나오잖아. 2년 안에 졸업하면 우수 장학생으로 죽을 때까지 매달 500만 량(량=원)씩 나오잖아.”
 은하의 말에 유림이 입을 쩍 벌린 채 굳어버렸다.
 굳은 것은 유림만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나무를 베고, 줍고, 어깨를 두드리던 나무 인형들도 돌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반응에 못을 박듯 은하가 입을 열었다.
 “세금 없이.”
 투두두둑.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관절이 해체되며 땅으로 쓰러지는 나뭇조각들.
 은하는 시간이 정지된 듯, 입만 떡 벌린 채 굳어 있는 유림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림?”
 자신을 부르는 소리, 그러나 유림의 귀에 그 목소린 들리지 않았다. 단 두 가지의 단어만이 머릿속에서 반복될 뿐이었다.
 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연금······세금 없이······.
 오, 아버지!!
 갑자기 유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행동에 저도 모르게 괴기스러운 비명을 지르고만 은하였다.
 “으엑?”
 은하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림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 이름을 불렀다.
 “은하.”
 “으, 응?”
 “짐 싸라.”
 “엥?”
 “지금 당장 출발한다.”
 “엑?!”
 이번엔 은하가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다시금 유림이 은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입가가 기분 좋게 휘어진 것이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출발한다, 클레이즈로!”
 “돼지 똥 싸는 소리라며! 아니, 그보다 돈이 어디 있다고?!”
 “몰라, 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마치 돈방석에 앉은 것처럼 너무나 밝아진 표정. 그 표정에 왠지 모를 불길함이 은하의 등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을 확인시켜 주듯 확고한 눈빛으로 계속 중얼거리는 유림이었다.
 “좋아. 연금이다, 연금. 까짓것 2년 안에 졸업해 버리지 뭐. 그게 그렇게 어렵겠어? 돼지 똥 싸는 것보단 쉽겠지.”
 아니, 차라리 돼지 똥 싸는 게 더 쉬울 것 같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은하였으나 너무나도 확고한 유림의 태도에 결국, 말을 삼키고 말았다.
 ‘아······ 선생님, 저 말실수한 거 같아요.’
 은하는 속으로 유림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선생님을 찾으며 고개를 떨궜다. 몇 분 전 자신이 내뱉은 말이 지독히도 후회스러웠지만 어찌하랴. 이미 쏟아진 말을 담을 수도 없고, 거기다 유림은 의욕 상태에 들어가 연금만을 외치고 있는데.
 결국, 유림과 함께하기로 한 은하는 그 단순함을 자랑하듯 머릿속의 고민과 후회를 말끔히 지워 버렸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래 즐기자~’라는 마음으로 번쩍 손을 들며 클레이즈를 외쳤다.
 화창한 사혈의 여름, 그리고 그곳에 있던 19세의 풋풋한 소녀 유림과 은하.
 그들은 가난을 청산하고 유유자적한 생활과 새로운 미래-정확히는 연금-를 위해 한 발짝 다가가고 있었다.
 
 ***
 
 레바리움의 공화국 중 하나로 국가의 반 이상이 사막으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후덥지근한 나라 덴 이레프. 클레이즈가 있는 곳이라 불리며, 금지된 땅과 맞닿은 지형 특성상 경비가 삼엄하고 엄격한 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특징인 국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의미로 유명한 이 나라의 상징인 사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두 인영이 있었으니, 하나는 정신없이 뻗친 머리를 자랑하는 유림이었고, 또 하나는 까무잡잡한 피부가 한층 더 까무잡잡해진 은하였다.
 유림은 기쁨에 겨워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앞을 바라봤다.
 사막이었다. 덴 이레프의 상징, 사막!!
 나무를 주워 인형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 번 돈으로 이동하고, 또 나무를 주워 인형을 만들어 팔고 그 돈으로 이동하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무려 한 달 가까이나 걸린 그 고단한 여행은 통통했던 유림의 살을 쫙 다 가져가 버릴 만큼 혹독했다.
 살을 빼려고 기를 쓸 땐 빠지지 않더니 역시 고생을 하니까 빠지는구나······.
 유림과 은하는 눈앞에 펼쳐진 넓디넓은 사막에 눈물을 흘렸다. 안쓰러울 만큼 볼썽사나운 모습의 두 사람은 다 큰 처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꺼이꺼이 우는 중이었다.
 “봤어? 사막이야! 엉엉, 내가 진짜 여기까지 오겠다고. 으헝헝헝! 나무를 몇 개나 판 거야, 엉엉엉.”
 덴 이레프에 도착했다는 기쁨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유림과,
 “엉엉엉, 배고파. 엉엉엉엉.”
 밥을 내놓지 않으면 혈액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항의하는 장기들과의 전쟁에 아파서 우는 은하.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처참하게 우는 건 같았다.
 은하는 흘러내린 콧물을 손등으로 슥 닦으며 칭얼거렸다.
 “림······ 나 배고파.”
 “흐윽, 참아.”
 “그렇지만 너무 배고파.”
 “흑흑, 침 마셔.”
 “침도 안 나온단 말이야.”
 제 팔을 잡으며 떼를 쓰듯 칭얼거리는 행동에 유림이 한숨을 내쉬며 은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삐쩍 마른 것이 먹기는 어찌나 많이 먹는지 식비로 빠지는 돈이 장난 아니었다.
 네가 먹은 돈을 아껴 차를 탔으면 이미 다섯 번은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유림은 은하를 무시하며 엉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비녀로 고정했다. 그러곤 두 뺨을 가볍게 때려 눈앞에 놓인 세상을 바라봤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울 만큼 후끈한 열기,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온몸이 땀에 절어 찝찝하고 또 찝찝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막을 건너면 바로 그들이 그렇게 가려 했던 ‘콜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일이 꼬여 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면 억울해서 죽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은하야.”
 “응?”
 “배고프지?”
 “응.”
 유림은 은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학시험은 9월 1일. 오늘은 8월 31일.
 자신들이 초특급 마법사가 아닌 이상, 하루 안에 맨발로 사막을 건너 ‘콜람’에 도착해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
 “은하야, 내가 마지막 사비 털어서 밥 사줄게.”
 “진짜?!”
 “근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유림이 은하를 향해 싱글벙글 웃었다.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그 웃음에 은하의 등을 타고 불길함이란 놈이 슬금슬금 기어올라 왔다.
 어째, 등골이 쎄- 한 것이 느낌이 영 아니었다.
 “자, 은하야. 너의 자랑이 뭘까?”
 “글······ 쎄?”
 “후후훗, 소녀의 상큼함 아니겠니?”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소름이 돋았다. 맙소사, 이 더위에 한기라니!
 은하가 도망치려고 몸을 뒤로 뺐으나 곧 유림에게 양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어······ 저, 저기 나 갑자기 배가 안 고파.”
 “자, 은하야. 이제 좀 있으면 콜람에 가기 위해 잘난 집 아들들이 사막 마차를 몰고 지나갈 거야.”
 “하하! 나 배 안 고파!! 진짜 안 고파!!”
 “그러니까······.”
 유림은 싱긋 웃으며 발을 들었다. 그리고,
 “가서 마차 하나 잡아와!!”
 라는 말과 함께 은하의 몸을 돌려 엉덩이를 뻥 하고 걷어찼다.
 “우악!”
 거친 발길질에 짧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사막에 고꾸라진 은하는 모래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였지만, 쉽게 넘어갈 유림이 아니었다.
 결국, 유림의 회유(?)에 은하는 밥 대신 모래를 씹으며 그들이 얻어 탈 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어수룩한 미소의 소년이 몰고 있는 사막 마차 한 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
 
 ‘이륜’은 ‘랑’국에서 온 청년으로, 외조부의 유산 덕에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이었다.
 갸름한 달걀형의 얼굴과 마른 근육으로 이루어진 비율 좋은 몸, 단정한 연녹빛의 머리와 짧게 친 앞머리, 그리고 살짝 휘어진 눈매가 그의 서글서글한 인상을 더욱 부각시켰다.
 클레이즈의 입학시험 편지를 받은 그는 현재 콜람에 가기 위해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사막에서도 잘 굴러갈 수 있게끔 개조된 마차는 부드럽게 흩어진 모래 위에서도 흔들림 없이 달려갔다.
 륜은 후덥지근한 열기에 턱 끝에 고인 땀을 훔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차의 뒤쪽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청년이 마부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젠장, 더럽게 덥네.”
 족히 185㎝는 되어 보이는 큰 키와 길게 찢어진 눈, 반삭이라도 한 듯 짧은 잿빛 머리와 통통하게 붙은 살이 특징인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륜과 함께여서 그런지 한층 더 험악하고 거칠어 보였다.
 잠시 후, 그가 특유의 낮고도 굵직한 목소리로 륜을 향해 물었다.
 “언제쯤 도착하냐?”
 짜증이 가득 섞인 말투였다. 그리고 이에 답하듯,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단, 그것은 마차를 모는 륜이 아닌 그와 함께 뒤 칸에 앉아 있던 다른 청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루면 도착해. 오늘은 콜람의 옆 마을에서 지낼 거고, 내일 아침에 여유롭게 다시 출발할 예정이야.”
 륜이나 덩치의 청년과 달리 차갑고도 딱딱한 목소리였다.
 덩치의 청년은 그 목소리에 빈정이 상했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막 대답을 했던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더위가 무색하리만큼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남은 한 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다 길게 흘러내린 푸른색의 머리 때문인지, 아니면 날카로운 턱 때문인지 서늘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동행한 두 사람에 비해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투나 행동으로 봐선 세 사람 중 가장 성숙하고 현명해 보였다.
 “왜 바로 안 가고? 쉬었다 가게?”
 덩치의 질문에 안경을 쓴 청년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어, 미리 콜람에 갈 필욘 없으니까 옆 마을에서 쉬다 갈 거야.”
 “그 옆 마을은 언제 도착하는데.”
 “약 두 시간?”
 “염병할.”
 예상보다 많이 걸리는 시간에 청년이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마차의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움직임에 세워뒀던 거대한 대도(大刀)가 철그럭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뭐야 이게, 칙칙하게 사내놈 셋이서.”
 “불만이면 내리든지.”
 “미쳤냐? 이 더위에 내려서 걸어가게? 가만있어도 땀이 뻘뻘 나는데 어떻게 내려? 아씨, 입 여는 것도 더워. 젠장, 더워 더워! 몸이 땀에 절어 무겁다고.”
 “그건 땀에 전 게 아니라 네 몸이 원래 무거워서 그런 거야. 이 기회에 살이나 빼.”
 가차 없는 말에 덩치가 인상을 팍 구기며 욕설을 날렸다.
 “닥쳐라, 데몽.”
 “너나 닥쳐라, 테오.”
 작은 청년을 향해 ‘데몽’이라 부르는 ‘테오’와 똑같은 욕을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데몽. 륜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쓰게 웃었다.
 정작 가장 힘든 것은 마차를 모는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뒤쪽에 있는 이들이 더 난리다. 거기다 저런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운전을 떠넘기긴 어려울 것 같다.
 어차피 내일이면 끝나는 거 오늘 하루만 내가 더 몰지 뭐.
 륜은 물을 들이켜며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웬 소녀 하나가 달려와 마차의 앞을 막아선 것이.
 “앗!”
 륜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고삐를 잡아 마차를 세웠다.
 히이잉.
 말이 크게 우는 것과 동시에 마차가 잔뜩 쌓인 모래 사이로 바퀴를 들이밀며 급정거했다. 요동치듯 흔들리는 짐칸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입에서도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우앗!”
 “뭐야?!”
 끼익.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뿌연 모래 연기가 마차를 습격하듯 퍼졌다.
 테오는 마차가 완벽하게 정차한 것을 확인하곤 퉤퉤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입과 코, 그리고 눈에 모래가 가득했다.
 “퉤! 씨, 이게 뭔 일이야?”
 데몽도 입에 고인 모래를 뱉으며 테오를 따라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얼굴 가득 짜증을 바른 채 앞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 두 사람의 시야에 굽이진 짧은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안경을 쓴 인상적인 소녀가 양팔을 쫙 벌린 채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으아······.”
 “뭐야?”
 “여자다!”
 극명하게 다른 세 사람의 반응, 그리고 그에 답하듯 여자가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아주 안쓰럽고도 불쌍한 말이 튀어나왔다.
 “사, 살려주세요······.”
 박은하수, 처절한-유림에게서 살기 위한-구조의 목소리였다.
 
 “이쪽은 테오, 앞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녀석은 륜, 그리고 난 데몽이라 한다. 잘 부탁해.”
 자신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가볍게 손을 내미는 데몽의 말에 유림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난 한유림, 이쪽은 내 친구 박은하수야. 마차 태워줘서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마차도 없이 사막을 건너려 하다니······ 대단한 배짱이군.”
 “하하하, 어쩌다 보니 말이지······. 여튼 정말 고마워. 제시간 안에 못 갈 줄 알았는데, 덕분에 늦지 않겠어.”
 “뭐, 감사는 내가 아닌 마차 주인한테 하고······ 그보다 이름이 특이한데, 령에서 온 거야?”
 “응, 소난에서 왔어.”
 “소난?”
 “아, 사혈의 변두리 마을. 지도로 봤을 때 북동쪽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작은 마을이야.”
 그 말에 륜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앉아 있는 유림과 은하를 바라봤다.
 “사혈이면 그 비행 국가 아니야?”
 “응, 맞아. 역시 우리나라, 쓸데없이 유명하다니까.”
 “헤에~ 사혈 사람은 처음이야. 아, 난 원랑에서 왔어.”
 “오, 진짜?”
 륜의 말에 유림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의복이 전혀 동쪽의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차만 레바리움(남쪽 대륙)에서 산 건가? 아니다. 원랑이 령(동쪽 대륙)의 나라치곤 레바리움의 문화나 생활 방식에 더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옷차림이 비슷하다 해서 이상할 건 없겠구나.
 유림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튼 그런 곳에서 자신의 마차를 끌고 온 도련님?
 “잘사나 봐.”
 빙 돌리는 것 하나 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놓고 묻자,
 “응? 아, 외할아버지께서 재산을 좀 남기셔서.”
 륜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유림은 그런 륜의 순박한 대답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대박-!
 기쁨에 두 눈을 반짝이며 륜을 바라봤다.
 유림의 인간관계는 딱 세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은하처럼 정말 친한 친구였고, 나머지는 도움이 되는 인간과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중 가장 도움이 되는 인간이 돈 많고 빽 있는 이가 아니던가.
 이런 값비싼 마차를 몰고 있기에 제법 살 거란 예상은 했지만, 설마 저렇게 말할 정도로 부자인 줄은 몰랐다. 거기다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가 왠지 이래저래 쓸모가 많을 것 같았다.
 유림은 머릿속으로 륜을 ‘도움이 될 것 같은 인간’으로 정의한 뒤,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겠다 생각하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테오와 데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둘도 랑 출신이야?”
 유림의 질문에 데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펠리탄, 테오는 루만 출신. 잠시 륜네 집에 놀러 가 있었는데 초대장이 그곳으로 날아왔어. 그래서 겸사겸사 같이 왔지.”
 데몽의 대답에 유림이 응? 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데몽이 말한 그들의 출신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오가 사는 루만은 리오카르단(서쪽 대륙)의 국가고, 데몽이 산다는 펠리탄은 레바리움(남쪽 대륙)의 국가였다. 같은 나라가 아닌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바로 옆 나라도 아닌 동, 서, 남 대륙의 사람들이 친구가 되었다고?
 보편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유림이 다소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그 표정에서 유림의 생각을 읽은 데몽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머니들이 다 친구여서.”
 그리고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 유림이었다. 요즘은 타국으로 시집을 가는 사람들도 많고, 이민 가는 사람들도 많으니 어머니들이 친구라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뭐, 흔한 것도 아니지만.
 “어머님들끼리 소꿉친구인 거야?”
 “뭐, 정확하겐 가문끼리 친한 거지.”
 가문이란 말에 유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륜이 외조부의 유산을 받아 나름 부유하게 살고 있다는 건 륜네 외가가 부자란 소리였다. 그런데 그런 부잣집과 가문끼리 친하다고?
 “그럼 둘도 꽤 괜찮은 집안인가 봐?”
 어떻게 보면 꽤나 직설적이라 볼 수 있는 유림의 질문에 데몽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을 삼켰다. 데몽은 유림에게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앞에서 마차를 몰던 륜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데몽은 집안이 괜찮은 게 아니라 데몽이 괜찮지. 펠리탄 제국 소속의 수습 학자니까.”
 “수습 학자?!”
 “수습 학자라고?!”
 유림과 은하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과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놀란 표정으로 데몽을 바라봤다.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된 데몽은 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팔짱을 꼈다.
 “아······ 저 바보가.”
 반응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말 데몽이 펠리탄의 수습 학자라고?
 유림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펠리탄이 어디던가. 비슈아드에 단둘밖에 없는 대제국 중 하나이자 세상의 중심이며, 가장 칭송받는 황제이자 영웅인 ‘지크레이 드아몽 펠리탄 히첼리에테’가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리고 펠리탄의 소속 학자라면 바로 이 영웅인 지크레이 황제를 섬기는 황실의 사람이란 뜻이었다.
 어지간한 교수나 지식인들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자, 지식의 보고라 불리는 학자들의 성지!
 고작 열아홉이란 나이에 학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성지에 들어가다니······. 물론, 정식이 아니라 수습 학자라 말했지만, 이 또한 대단한 건 매한가지였다.
 유림은 데몽의 믿기지 않는 경력에 감탄하며, 기대감 가득 넘치는 눈으로 테오를 바라봤다.
 “그럼 테오는?”
 유림의 질문에 륜이 그랬듯이, 테오 또한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데몽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은근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난 뭐 학자나 부자는 아니고, 군인이야. 아버지가 장교라 어쩔 수 없이 열 살 때부터 군에 소속됐거든. 그렇다고 낙하산인 건 아니야. 정식으로 시험 봐서 들어갔어.”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림이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대- 박! 얘네 대체 정체가 뭐야? 수습 학자가 있는 것도 놀라운데 아버지가 루만의 장교라고?!
 루만은 리오카르단(서쪽 대륙)에서 가장 손꼽히는 군사 국가 중 하나였다. 애초에 두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3개국이 합쳐 건국된 막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물론 혁명단 때문에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하지만, 국가 자체는 부강했다. 그뿐 아니라 교육과 지략에도 힘을 많이 쓰는 나라라, 루만의 군인 대부분은 문무(文武)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의 군인인 것도 모자라 아버지가 장교라니!
 유림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들을 바라봤다.
 한 놈은 갑부, 한 놈은 제국의(수습) 학자, 한 놈은 장교의 아들!
 아버지,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봐요!
 유림은 고개를 돌려 이런 복덩어리들을 잡은 은하를 바라봤다.
 박은하수, 네가 천운의 소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 너는 뭔 짓을 해도 운이 팡팡 터지는 행운의 소녀였지. 어쩜 사람을 잡아도 이런 황금들을 잡냐. 내가 마을에 도착하면 밥 많이 먹게 해줄게. 네가 몇십 그릇을 먹어도······ 아니, 이건 좀 팰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돈 봐줄게.
 유림은 팔을 들어 은하의 등을 힘차게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은하가 얼빠진 표정으로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주 환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환~ 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유림이 보였다.
 퍽퍽퍽.
 등을 두드리는 속도에 맞춰 은하의 머리가 연신 흔들렸다.
 유림은 마지막으로 힘을 줘 은하의 등을 팍 하고 친 뒤, 고개를 돌려 앞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얘들아.”
 “응?”
 “어?”
 잘하면 꽤 괜찮은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유림은 흡족한 표정으로 데몽과 테오의 두 손을 꽉 잡아 보였다. 마주 잡은 손바닥 너머로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졌지만, 알게 뭐람.
 “우리 열심히 해서 같이 클레이즈에 입학하자~”
 꽃처럼 상큼한 미소가 유림의 얼굴에 번졌다. 테오는 이에 화답하듯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마차를 몰던 륜 또한 모두 힘내자며 맞장구를 쳤다. 오직 데몽만이 뒤가 구린 표정으로 유림을 흘겨볼 뿐이었다.
 하하하.
 하하하.
 끝없이 이어지는 행복한 웃음소리.
 은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차의 구석으로 슬금슬금 몸을 옮겼다.
 평소의 유림에게선 절대로 볼 수 없는 화사하고 상큼한 미소, 은하는 저 웃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봉’을 잡았을 때 짓는 미소였다.
 ‘······.’
 은하는 현실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고갤 돌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친구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희생될 불쌍한 세 소년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현할 뿐이었다.
 뭐,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위로이긴 했지만 말이다.
 
 ***
 
 비슈아드력 1771년 9월 1일, 새벽 5시. ‘클레이즈’의 ‘교무회의실.’
 클레이즈의 간부 교수들만 들어올 수 있는 1급 회의실이자 대학의 중요 결정을 하던 거대한 집무실에 불이 켜졌다.
 허하리만큼 넓은 방은 매끈한 대리석 벽으로 꾸며져 있었고, 길게 트인 창문은 짙은 붉은색의 커튼으로 덮여 외부의 빛을 차단했다. 방의 정중앙엔 붉은색의 크리스털 구(球)가 허공에서 은은한 주홍빛을 뽐내며 방을 밝혔고, 그 아래엔 길고도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그것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질 좋은 가죽과 고급스러운 방석으로 이루어진 등이 높은 의자에는 금으로 된 장식이 등받이부터 손잡이까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등받이의 가장 윗부분엔 둥근 모양의 원판이 보였는데, 그 안엔 각기 다른 숫자가 세리프를 이룬 채 쓰여 있었다. 가운데 있는 것을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의자엔 1~4, 그 맞은편엔 5~8의 숫자였다. 그리고 그런 요사스런 의자에 아홉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클레이즈의 간부 교수라 치기엔 너무나도 젊은 외모였다. 스물다섯에서, 많이 봐야 서른 정도. 개중 한 명은 어린아이 같기까지 했다.
 그들은 회의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편한 자세로 앉아 이 장소의 중심이자 이사장의 자리인 가운데 의자를 바라봤다. 잠시 후, 그곳에 앉아 있던 잿빛 머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현 예비 신입생 상황은?”
 날카로우면서도 고집 있게 느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그의 질문에 2번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굽이진 긴 머리와 투명한 피부가 고혹적인 여인이었다.
 “령에서 152명, 레바리움에서 168명, 리오카르단에서 157명, 펜시리움에서 131명. 이렇게 해서 총 608명.”
 웃음기가 섞인 그 음성에 7번에 앉아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순수한 미소, 그리고 크고 투명한 눈동자가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나 많아?”
 그의 말을 시작으로 한 명씩 입을 열었다.
 “오~ 올핸 유독 많은데?”
 “그럼 경쟁률이 몇인 거죠? 신입생은 무조건 서른 명만 뽑으니······.”
 “약 20:1. 더럽게 많군.”
 “하하, 너무 많으니 좀 당황스럽네.”
 경쟁률을 들은 4번 소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140㎝ 정도의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앳되고 동그란 얼굴 때문인지 열 살이 막 넘은 아이처럼 보였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듬직한 체구에 짧은 머리가 인상적인 3번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올해 인재가 많았던 걸까요?”
 3번 사내는 그에게 최대한 예를 갖추며 답했다.
 “아뇨, 반대로 너무 없었던 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녀석들이 잔뜩 뽑힌 거겠죠.”
 “흠, 그건 그거대로 애매하네요.”
 클레이즈의 한 해 신입생 수는 정확히 서른 명이었다. 그리고 그 서른 명을 뽑기 위해서 치러지는 시험은 총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전 세계의 열아홉 살 아이들에게 보내지는 편지 테스트, 두 번째는 마나 숨바꼭질, 마지막 세 번째는 심층 면접이었다.
 응시생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점수를 합산해 등수를 매겼고, 이 중 1등부터 30등까지가 그 해의 신입생이었다.
 평소였다면 많아도 200명이었기에 무난하게 치를 수 있었지만, 이번은 그 수가 너무 많았다. 600명을 상대로 면접과 마나 숨바꼭질을 한다니······.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처럼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난 몰라. 나머지가 알아서 해’라는 무언의 눈빛을 담은 채 말이다. 그때 가운데 앉아 있던 잿빛 사내가 그 침묵을 가르고 입을 열었다.
 “시험을 바꾼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졌다.
 그는 다리를 꼰 후 두 손을 깍지 껴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잿빛 머릿결이 은은하게 흔들렸다.
 “올해는 입학시험을 바꾼다.”
 순간, 짧은 정적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바보 같은 목소리가 속속 튀어나왔다.
 “에?”
 “네?”
 “응?”
 “뭐? 내가 지금 무슨 헛소릴 들은 거지?”
 “시험을 바꾼다뇨. 무슨 개소리예요.”
 간간이 들리는 짧은 비명과 욕설. 사내는 그런 것들을 가볍게 무시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시험을 총 5차로 진행할 거야.”
 시험을 바꾼다 했을 때와 별 차이가 없는 어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한층 더 격해졌다.
 “미쳤군.”
 “헐, 대박.”
 “잠깐만요, 보스. 시험이 바로 오늘이에요! 대체 뭘 더 보잔 거예요?”
 “어제 술 마셨어? 내가 시험 전날은 제발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바꾸는 걸 떠나, 그 많은 애를 어떻게 관리하려고? 점수 세는 것만 해도 장난이 아니라고!”
 그들은 잿빛 사내, 아니, ‘케이’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잔뜩 구기며 불만을 토로했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회의실 안에 일어났다. 그러나 케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예의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오히려 조용히 하라는 듯 테이블을 가볍게 툭 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다시금 정적과도 같은 침묵이 회의실 안에 내려앉았다. 이를 확인한 케이는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니, 내 말대로 진행한다. 대신 합계 방식은 안 할 거야.”
 그리고 그가 나머지 뒷말을 이었을 때, 그악스러울 만큼 끔찍한 비명이 회의실 안을 울렸다.
 
 ***
 
 비슈아드력 1771년 9월 1일. ‘레바리움’, ‘덴 이레프’의 작은 마을 ‘콜람’.
 유림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인파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서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머지 네 사람을 바라봤다.
 륜의 마차를 계속 얻어 탄 덕에-정확히는 봉을 놓치지 않겠다는 유림의 집념 덕에-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된 다섯 사람. 그들도 유림과 마찬가지로 북적북적한 사람 수에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위를 훑어보듯 살피고 있었다.
 콜람의 유일한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19세의 소년 소녀들. 작은 마을답게 광장도 굉장히 아담했는데, 그 때문인지 사람들이 더 많고 복잡해 보였다.
 각국의 사람이 모인 장소답게 다양한 인종과 의복, 그리고 무기들이 보였다.
 “겁나 많네.”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풍경에 식겁한 유림이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바글바글 뭉쳐 쉼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한적하고 사람 없는 곳에서 살았던 유림으로선, 정말 질릴 정도였다.
 으으, 시끄럽고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인데······.
 “원래 이렇게 많아?”
 유림의 질문에 데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끽해야 200명인 걸로 알고 있어. 애초에 우리가 받은 초대장이 1차 테스트라고 했거든.”
 데몽은 윗옷 안주머니에서 백색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은하와 유림이 받았던 것과 같은 초대장이었다.
 유림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 종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곤 데몽에게 물어왔다.
 “어? 잠깐. 데몽, 너 본명이 ‘데몽’ 아니었어?”
 “아, 데몽은 아명(兒名)이야. 본명은 ‘히넨 휴’.”
 “······그럼 본명이 휴?”
 살짝 굳은 목소리에 데몽이 종이에서 시선을 돌려 유림을 바라봤다.
 “응. 왜? 뭐가 이상해?”
 “아니, 그냥. 아명을 쓰는 게 신기해서.”
 유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증식된 인파에 기겁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유림의 태도에 뭔가를 물어보려 했던 데몽은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벽에 바싹 붙는 유림의 행동에 고개를 들어 앞의 인파를 바라봤다. 확실히 듣던 거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의 학자 선배 중엔 클레이즈를 졸업한 이가 몇 있었다. 그들은 데몽이 열아홉이 됐을 때부터 그곳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입학시험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 말론 대체로 초대장을 받은 200명 안팎의 사람들이 총 2차의 시험을 더 치른 후 그 점수의 합계로 입학이 결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선배들의 말과 달리 이곳의 인파는 너무 많았다.
 이 많은 인원이 시험을 치르고 면접까지? 면접관이 죽어나겠군.
 사람이 많을수록 기다려야 할 시간이 길어질 거라 생각한 데몽이 혀를 차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때 유림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귓가를 두드렸다.
 “데몽, 너 시험이 어떤 식으로 치러지는지 알아?”
 “응?”
 유림의 질문에 테오와 륜을 비롯한 은하까지 데몽을 바라봤다.
 “음······.”
 뭐,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딱히 말한다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에 안경을 고쳐 쓰며 답해주는 데몽이었다.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총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첫 번째가 바로 그 편지 테스트, 두 번째는 마나 숨바꼭질, 그리고 마지막이 면접이라더군.”
 “마나 숨바꼭질?”
 “어, 응시생의 적성에 따라 각기 다른 대상물을 잡는 거라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다.”
 “그럼 면접은?”
 “클레이즈에 입학하려는 목적이 찜찜한 애들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인성 검사, 적성 검사 같은 거겠지.”
 “더럽게 까다롭네.”
 귀찮아질 것 같다며 혀를 차는 유림의 모습에 데몽이 얄밉게 키득거렸다.
 “솔직히 난 떨어질 것 같진 않은데.”
 뭐냐, 이 재수 없는 발언은?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데몽의 모습에 유림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난 지 이틀 만에 이런 말 미안한데, 욕 좀 해도 되냐?”
 유림은 허락만 해준다면 신명 나게 까준다는 듯 데몽을 쳐다봤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왜? 척 봐도 난 붙을 거 같은데. 이 정도 경쟁률이면 펠리탄 수습 학자 시험보다 적은 거라고.”
 그리고 이 말에 반박한 것은 유림이 아닌 옆에 서 있던 테오였다.
 “젠장, 왜 여기서까지 잘난 척이야.”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 거지.”
 “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떡 벌린 채,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는 테오의 모습에 데몽이 한층 더 얄미운 모습으로 키득였다.
 “너희나 잘해. 특히 륜, 너. 멍청하게 예예 거렸다 떨어지지나 말고.”
 “하하······.”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륜이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데몽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유림과 은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걸 못 물어봤네.”
 “뭘?”
 “전공······ 이라고 해야 하나? 특기 말이야.”
 특기? 뭔 놈의 특기?
 데몽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유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특기?”
 “아니, 무기도 없이 단신으로 왔기에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혹시 정통 마법사 계열이야? 그래 보이진 않는데······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가?”
 그제야 유림과 은하가 아무런 무기, 보호구도 없다는 것을 안 륜과 테오였다.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은 편지로도 예고했듯 상당히 고단하고 험난했다. 때문에 대다수의 응시생들은 무기를 비롯해 여러 준비를 해왔고, 이는 데몽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림과 은하는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도 평범한 것이었고, 짐도 푹 꺼진 작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심지어 무기조차 없었다. 물론 이는 유림과 은하가 돈이 없어서였지만,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세 사람에게 두 사람의 모습은 응시생이라기엔 그 거리가 꽤 멀어 보였다.
 “뭐······.”
 유림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옆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은하를 바라봤다. 특기라······ 글쎄, 우리가 특기니 뭐니가 있던가? 그딴 거 없는데.
 유림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데몽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특기랄 건 없고 나랑 이 녀석은······.”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에 참여하신 젊은 마법사 여러분.]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유림의 말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이 마치 공명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시작인가?”
 “오오.”
 광장에 있던 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늘 밑에서 햇빛을 피하던 유림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마법으로 떠드는 건가? 분명 사람이 있을 텐데?
 그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그때 그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라도 하듯 다시금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번엔 좀 더 또렷한 음성이었다.
 [저는 클레이즈의 시험 감독관 중 한 명인 ‘이즈네’라고 합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차분한 어조와 달리 어딘지 경쾌한 인사. 그리고 그에 맞춰 거대한 폭죽이 하늘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퍼엉!
 펑!!
 대낮부터 터지는 폭죽. 그 요란스런 불빛에 유림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은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며 위를 가리켰다.
 “림, 위에!”
 우렁찬 목소리에 유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하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하늘에 떠 있는 오각형의 불투명 판, 그 위에 한 여인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림은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을 살폈다. 빗장뼈까지 내려오는 밝은 노란색의 생머리, 이마까지 트여 있는 피부는 백옥처럼 깨끗했고, 늘씬한 팔다리에 전체적으로 가는 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 또한 그녀의 외모 못지않게 뚜렷했는데, 눈꼬리가 살짝 휜 것이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요염해, 묘한 매력을 풍겼다.
 그녀는 가늘고 긴 손을 뻗어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그 움직임에 입고 있는 백색의 로브가 펄럭였다.
 [모두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해 클레이즈 입학시험은 유독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데요. 그 덕에 지난해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유림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방식?”
 “뭐야?”
 “바뀐 거야?”
 한마디씩 던지며 떠드는 그들 사이로 웃음기가 섞인 이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존과 달리 올해는 총 다섯 차례로, 1차 편지 테스트를 통과하신 여러분은 앞으로 네 번의 시험을 더 치르시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를 마주쳤다. 딱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떨어졌고,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거대한 울림과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어?”
 “으아아?!”
 두두두두두두!
 지진이 일어났다 해도 믿을 만큼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리고 광장의 동서남북, 총 네 방향에서 거대한 문이 땅을 뚫고 올라왔다.
 “우앗!”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의 진동에 은하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유림의 팔에 매달렸다. 유림 또한 건물의 벽을 잡고 균형을 잡았다.
 콰아아아앙!
 하늘을 가르듯 거침없이 올라오는 거대하고도 웅장한 문. 길고도 거대한 문은 동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으로 칠해졌고, 입구 부분이 보통의 문 대신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흑색의 장막이 쳐 있었다. 마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두두두두.
 거대한 진동이 멈추고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림과 은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긴장감에 손끝이 저릿했다.
 광장을 메우고 있는 600여 명의 사람, 그리고 그 주위에 생긴 네 개의 문.
 시험 감독관인 이즈네는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듯 두 팔을 쫙 뻗으며 좀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2차 시험은 총 네 가지 문으로 나누어집니다. 여러분은 이 중 하나의 문을 골라 들어가 그곳의 시험을 통과하시면 됩니다. 얼추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네 곳의 시험 내용은 다 다릅니다. 그리고 본 시험은······.]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이즈네가 크게 소리치며 광장을 향해 뛰어내렸다.
 [선착 서바이벌로 진행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건, 클레이즈 회의실에서와 같은 비명이었다.
 
 ***
 
 유림은 웃고 있었다. 환하게 휘어진 눈매, 그리고 유려하게 그려진 입가.
 아아······ 그래. 이것도 서바이벌이라면 서바이벌이겠지. 뭐 시험으론 나쁘진 않아.
 유림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은하가 옆에 있었다면 눈물을 질질 짤 만큼 환한 미소였지만 이곳에 은하는 존재하지 않았다.
 광장에 나타난 네 개의 문, 그리고 서바이벌이라며 소개했던 이즈네란 여인. 그 이야기를 듣고 유림과 은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갈라지는 것이었다.
 서바이벌이란 건 말 그대로 한 명(혹은 일정 수)이 남을 때까지 계속 간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랬기에 갈라지는 편이 둘 다 붙을 확률이 높다 생각해 서로의 합격을 기원하며 흩어졌다.
 혹시 모를 험난한 전투를 대비해 다시 비녀를 정리하고 신발 끈을 동여매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유림의 앞에 나타난 건······.
 [그럼 제7번 문제! 늄은 이식이 가능하다! 맞으면 O, 틀리면 X!!]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상한 기계였다.
 설마 서바이벌이 그 서바이벌이 아닌 이 서바이벌이었다니······.
 이런 시발♥
 유림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이 방으로 들어온 과거의 자신을 욕했다.
 
 약 20분 전, 이즈네란 사람이 광장으로 뛰어들며 시험의 시작을 알리고 유림은 애들과 갈라져 초록색 문으로 뛰었다. 왠지 사람들이 가장 안 들어갈 것 같기도 했고, 멀리 가기 귀찮아 한 선택이었다.
 유림이 초록색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을 땐 이미 백여 명의 사람이 먼저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나 많은 인파가 몰려 있음에도 싸할 만큼 조용하단 것이다.
 침묵이 가득한 진중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유림은 긴장이나 풀 겸 손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늄으로 구현된 공간에 들어온 것인지 벽과 천장이 온통 흑색으로 되어 있어 그 넓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고, 바닥은 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백색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민짜는 아니었다. 정 가운데에 1m 정도의 두께를 가진 거대한 금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왼쪽엔 푸른색으로 ‘O’가, 그리고 오른쪽엔 붉은색으로 ‘X’가 크게 쓰여 있었다.
 ‘어째···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다?’
 유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봤다. 유림의 시선이 가운데 선을 따라 쭈욱 이동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철로 된 이상한 기계였다.
 정확히 선 위에 있는 기계는 사람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치 철로 만든 인형 같았다. 그러나 평범한 것과 달리 눈코입이 존재하지 않았고, 등엔 거대한 톱니바퀴 하나를 달고 있었다. 톱니는 태엽처럼 치걱치걱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소리가 멈추더니 기계의 배에 있던 램프에 푸른색 불이 들어왔다.
 잠시 후, 낯선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반갑다, 클레이즈에 온 응시생 여러분. 나는 이 초록 방의 감독관 히야스라고 한다.]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매끈한 남성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작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림 또한 놀란 가슴을 쓸며 기계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시선을 알기라도 한 듯 기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아, 그렇게 놀랄 건 없어. 기계가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딱딱해 보이는 광택의 고철과 달리, 들려오는 어투는 마치 장난기가 가득 묻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처럼 익살스러웠다.
 [참고로 이게 내 본 모습은 아니야. 이 녀석은 상큼하고도 사랑스러운 안젤리카 중 하나지.]
 유림은 미간을 구기며 안젤리카란 고철을 바라봤다.
 [이 녀석은 내 안젤리카 중 막내인 8호야. 그냥 안젤리카 8호라 부르지. 취미는 요리하기, 특히 다지기를 잘한다고.]
 키득거리는 목소리에 유림이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 돼지 똥 싸는 소리는······?
 유림은 왠지 모를 께름칙함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그건 그곳에 있던 다른 응시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똥 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단 하나, 이 사태를 만든 안젤리카 8호만 빼고 말이다.
 [끌끌끌. 안젤리카 8호의 다지기는 깔끔하다고. 떡갈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놀러 와. 녀석의 현란한 기술을 보여줄 테니까. 아, 그렇지만 구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안젤리카 6호를 찾도록 해. 안젤리카 6호의 주특기는 바비큐 구이 만들기거든. 녀석의 구이는 참 맛깔스럽지.]
 안젤리카인지 개젤리카인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시험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야?
 [참고로 안젤리카에겐 형이 일곱 명 있어.]
 안젤리카, 남자였어?!
 [그중 가장 큰 아이인 안젤리카 1호는 잔소리가 심해. 안젤리카 2호는 애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려고만 하지. 그래서 1호랑 2호는 매일 싸운다고. 뭐 2호가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난 잘 알아서 살 거라 생각해. 안젤리카 3호는 운동하는 것을 좋아해. 자꾸 집을 부수려 해서 문제지, 체력이 엄청나게 좋거든. 그리고 안젤리카 4호는······.]
 “저기······.”
 안젤리카 8호가 안젤리카 1호부터 한 명씩 나열하고 있을 때, 응시생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의 행동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졌다. 안젤리카 8호에겐 눈이 없지만, 왠지 그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뭐지?]
 안젤리카 8호가 차갑게 물어왔다.
 “시험은······ 언제 시작합니까?”
 모두가 궁금해하던 질문이 그 응시생의 입을 통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유림은 시선을 돌려 다시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순간 그의 배에 있던 램프가 번쩍거리며 빛났다.
 [아, 내 정신 좀 봐. 자네들이 시험 중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군.]
 긴장했던 초반과 달리 너무나 태연하게 태엽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하는 안젤리카 8호의 모습에 유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기가 차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이 인간 대체 뭐지? 이 사람 진짜 시험 감독관 맞아?
 유림은 뭔가 방을 잘못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고민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안젤리카 8호가 입을 열었다.
 [좋아 좋아, 시험을 치르자고. 밖에서 이즈네의 설명을 들었겠지만, 올해 시험은 서바이벌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방에선 오직 35명 이하의 사람만이 살아서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지.]
 안젤리카 8호가 연신 태엽을 감으며 떠들었다.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목소리와 섞여 방을 울렸다.
 [합격자 수는 무조건 35명 이하여야 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상관없다.]
 유림은 왠지 안젤리카 8호, 정확하겐 그를 통해 이야기하는 감독관이 웃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얄궂은 미소로.
 [그리고 초록 방에 온 너희가 치러야 할 이번 시험은······!]
 유림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치며 안젤리카 8호의 뒷말을 기다렸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어째······ 뭔가 좀 불안하다? 썩 좋은 시험은 아닌 것 같은데······.’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앞의 눈치를 살필 때, 안젤리카 8호가 램프의 빛을 한층 더 밝게 하며 크게 소리쳤다.
 [바로 상식 OX 퀴즈다!!]
 “니미랄!!”
 안젤리카 8호의 말과 동시에 짤막한 욕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런 염병, 상식 OX 퀴즈라니!
 이건 유림의 전공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해 마법 대학에서 요구하는 ‘상식’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젠장, 차라리 은하와 같은 방향으로 갈걸!
 유림은 혀를 차며 인파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초반은 눈치 싸움으로 가야 했다.
 몰라. 많은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정답이겠지. 클레이즈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시점에서 늄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단 것이 인정된 거니까, 자신보다 잘 알면 알았지 모르진 않을 것이다.
 유림이 그렇게 생각하고 뒤에 서서 앞을 노려볼 때 안젤리카 8호가 오른손을 가볍게 들며 첫 번째 문제를 불렀다.
 [그럼 첫 번째 문제! 돌멩이도 늄을 가지고 있다. 제한 시간 5초!]
 갑작스러운 문제에 모두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돌멩이가 늄을 가지고 있냐고?
 [오, 사, 삼······.]
 유림이 채 문제를 정리하기도 전에 안젤리카 8호가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약간의 틈도 주지 않는 조급한 초읽기에 응시생들이 크게 당황하며 황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림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문제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돌멩이가 늄을 가지고 있냐고? 모든 생명은 탄생과 함께 늄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건 세상의 모든 자연과 사물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자연의 일부인 돌멩이 또한 늄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돌에 관련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늄이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 일······.]
 유림은 재빨리 ‘O’가 그려져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시간 안에 안전하게 O의 칸으로 넘어온 유림. 그리고 칸으로 들어간 것과 동시에 안젤리카 8호의 입에서 마지막 초읽기가 진행되었다.
 [영, 땡!!]
 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가운데 그어져 있던 선 위로 거대한 식칼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다다다다다다다!!
 마치 바닥이 도마라도 된 듯, 식칼이 잔상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가운데 선을 다지기 시작했다.
 설마 특기라던 다지기가 이런 다지기였냐?!!
 뭐든 썰어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속도와 날카로움으로 선을 다지는 거대한 식칼, 그 속도와 움직임에 미처 ‘O’로 넘어오지 못한 학생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타앙!
 잠시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식칼이 바닥의 중앙에 있는 금에 박혀 버렸다.
 “······.”
 서늘한 바람 소리와 함께, 장내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정답은 O! X로 간 친구들 다음에 보자고~ 뾰로롱~]
 라는 개 같은 안젤리카 8호의 말과 동시에 X 쪽의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방 안을 울리는 비명, 그리고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정체 모를 어둠 속으로 꺼지는 응시생들.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며 살아남은 이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
 “······.”
 초반에 말했던 ‘살아남길 바라’가 이런 거였다니······. 하하하······ 이런 미친.
 유림은 당혹감에 연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어색하게 올라간 왼쪽 입꼬리에서 경련이 일었다.
 [끅끅끅끅~! 자 그럼 두 번째 문제!!]
 요사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두 번째 문제를 내려는 안젤리카 8호. 유림은 그 모습에 최대한 선 쪽으로 다가갔다.
 이번 시험만 이런 거겠지? 설마 나머지 시험이나, 학교 자체가 이러진 않겠지? 아아, 돌겠네.
 미친 시험··· 연금··· 세금 없는 연금··· 미친 시험··· 연금······.
 유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랠 겸,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들려오는 두 번째 문제에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제기랄! 연금이 뭐라고!!
 
 ***
 
 광장의 몇 배나 될 법한 거대한 백색의 땅. 은하는 그 위에 올려진 진수성찬을 멍하니 바라봤다.
 살면서 한 번 맛볼까 말까 하는 으리으리한 음식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아리따운 여인과 멋진 남자들, 거기다 평생을 쓰고도 남을 금은보화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이 방이 뭔 방인지는 모르겠으나 천국이 분명할 거라 생각한 은하는 고개를 붕붕 끄덕이며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 냄새 죽인다.
 옆에서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들이 함께 놀자며 부르고 있었지만, 은하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오직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산해진미뿐.
 ‘으으, 배고파. 근데 나 분명 시험을 보러 왔는데······.’
 그녀는 한 손엔 포크, 한 손엔 나이프를 집으며 주위를 살폈다.
 여자애들은 뭐가 저리 좋은지 미남과 값비싼 옷, 보석을 보며 얼굴을 붉혔고, 그 반대쪽에 있는 남자애들은 양쪽에 미녀 한 명씩을 낀 채 맛난 것을 먹으며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은하와 같은 문으로 들어오게 된 테오도 앉아 있었는데, 유독 많은 미녀를 끼고 있는 것이 꼭 욕심 많은 탐관오리 같아 보였다.
 뭐··· 여자라면 끔뻑 죽는 애라 했으니까.
 은하는 데몽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앞에 놓인 오리구이를 접시에 덜었다.
 엄마, 여기 너무 좋다.
 코끝에 느껴지는 향긋한 냄새와 잘잘 흐르는 윤기에 군침이 절로 넘어갔다.
 스윽.
 은하는 조심스럽게 살점을 떼어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오리구이를 맛봤다.
 “우아······.”
 입에 들어오는 순간,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씹으면 씹을수록 짙어지는 향과 부드러운 식감은 살살 녹는다는 게 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혀를 행복하게 해주는 고기 특유의 맛이 은하를 절로 미소 짓게 하였다.
 은하는 행복한 표정으로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너무 맛있어서 그런지 손이 멈추질 않았다.
 그보다 진짜 여기 뭐지? 난 분명 시험을 보러 왔는데 왜 이렇게 많은 음식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 예쁜 선생님이 서바이벌이라 했는데······.
 은하는 출구로 보이는 문을 바라보며 계속 고기를 씹었다. 손과 입이 연신 썰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늦으면 림한테 맞을 거야. 몇 명까지가 합격선인진 모르겠지만 한 다섯 명 정도 나가면 그때 나가야지. 그러려면··· 음··· 빨리 먹어야겠다.
 자신이 내린 답이 마음에 드는지 은하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간을 잠깐 확인하더니 손을 들어 엄청난 속도로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오리고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고기와 음식들이 은하의 입속으로 무참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렇게 거침없이 쓸어 마시던 은하가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간 것은 과일을 제외한 모든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뒤였다. 물론, 여자들에게 흠뻑 빠져 있는 테오를 끌고 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고 말이다.
 
 ***
 
 은하가 노란색의 문인 유혹의 방을 멋지게 통과했을 때, 유림은 11번 문제를 풀고 있었다.
 현재 남은 인원은 36명. 35명 이하만 나갈 수 있다 했으니, 전원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한 이번 문제에서 판이 끝날 것이다.
 유림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자비하게 난도질 된 중앙선 위에 서 있었다. 안젤리카 8호가 워낙 초를 빨리 세다 보니 최대한 서둘러 움직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실로 중앙선은 어디로든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위치였고, 이 때문에 유림은 칼이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중앙선 위에 올라가 문제를 듣고 움직였다.
 난이도는 들쑥날쑥했는데, 개중 유림이 아는 문제도 있었고, 찍어서 맞은 경우도 몇 되었다.
 어찌 됐든 한 문제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것만 넘기면 3차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오오! 잘하면 이번 판에서 승부가 나겠군. 그렇지, 제군들? 좋아! 이번엔 내가 승부가 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내줄게!]
 쉬운 걸로 해, 이 거지야. 너 때문에 뛰어다닌 내 다리가 불쌍하지 않냐!!
 유림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안젤리카 8호를 노려봤다. 그때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제12번, 클레이즈는 덴 이레프에 있다!]
 그 질문에 일순,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짙은 침묵이 주위에 내려앉았고, 잠시 후 대다수의 아이들이 O로 이동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유림은 쉽사리 이동하지 못한 채 그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클레이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입구가 덴 이레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건 이미 덴 이레프에서 공표한 적이 있었고, 클레이즈에서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답은 O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림은 왠지 모르게 X로 이동했다. 물론, 정확한 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문제가 제법 난제여서 그런지 안젤리카 8호가 흥미롭다는 듯 천천히 시간을 셌다.
 [오~ 사아~~~]
 열아홉 명 정도의 아이가 O를 향했고, 유림 혼자만 X에 있는 상황. 나머지 아이들은 중앙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삼~ 이~~~]
 카운트가 세어지고, 그제야 자신이 X에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림이 혀를 찼다. 그녀는 무언가 놓친 듯 아차 한 표정으로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클레이즈는 덴 이레프에 속해 있으나 덴 이레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클레이즈에선 학교의 위치에 대해 특별히 뭐라 말한 게 없었으니까. 더욱이 클레이즈 시험 감독관이 원할 만한 답이라면······ ‘△’다. ‘O’도 ‘X’도 아닌 가운데 선 위가 정답인 것이다.
 유림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보다,
 [일, 땡!!]
 ···이라는 안젤리카의 말이 더 빨랐다.
 [정답은 △!]
 늦었다!
 머릿속에서 짧은 비명이 울렸다.
 경쾌한 안젤리카 8호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선을 제외한 모든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제길!’
 땅이 꺼지는 아찔한 느낌. 그 느낌에 유림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유림의 손을 재빨리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선 위로 잡아당겼다. 단번에 잡아끌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발밑에 땅이 닿고, 조심스럽게 눈을 뜬 유림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잡아끈 이를 바라봤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은은한 고동색 머리카락과 입가에 비친 옅은 미소. 그리고 자신을 잡아 끌은 이가 노란색과 주홍색의 오드아이를 하고 있는 청년이란 걸 알았을 때,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디하르······?”
 디하르.
 유림이 8년간 잊고 살았던 소꿉친구였다.
 
 유림의 인생은 크게 두 덩이로 나뉜다.
 사혈에 거주하기 전과 거주한 후, 쉽게 말하면 ‘박은하수’를 만나기 전과 후로 말이다. 그리고 이 디하르란 친구는 유림이 사혈에 살기 전, 즉 은하를 만나기 전에 함께 지냈던 소꿉친구 중 하나였다.
 어릴 때보다 한층 더 성숙해지고 매력적으로 자란 자신의 친구. 체격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예전보다 더 그윽해져 한편으론 수려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드아이와 왼쪽 눈 밑에 자리한 섹시한 눈물점에 유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가 유림을 향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너였어. 오래간만이네.”
 “아······.”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에서 나오는 은은한 중저음은 꽤나 일품이었다. 그러나 썩 익숙하진 않았다. 유림과 디하르가 헤어진 건 그가 변성기를 겪기 이전이었으니 말이다.
 1m의 폭을 가진 가운데의 선, 그리고 무너진 양옆의 바닥. 그 위에서 유림은 디하르와 마주 선 채 밀착되다시피 서 있었다.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만 마주할 수 있는 시선. 바뀐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유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 말 그대로 오래간만에 본 친구에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치사한 놈······.”
 젠장, 치사하게 지 혼자 크냐.
 
 [자! 드디어 2차 시험의 합격자가 확정됐네!!]
 안젤리카 8호가 기쁜 듯이 떠들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 뒤의 태엽이 달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리고 땅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거대한 울림과 함께 꺼졌던 바닥이 다시 형성됐다. OX 표시만 없을 뿐 조금 전 그들이 시험을 치렀던 바닥과 같은 백색이었다.
 유림과 디하르는 선에서 나와 평평한 바닥 위에 올라섰다. 그런 뒤, 이 방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안젤리카 8호를 바라봤다.
 [끅끅끅, 출구는 저쪽이야.]
 안젤리카의 익살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뒤쪽에 빛의 문이 형성됐다. 입구가 있던 방향과 같은 위치였다.
 살아남은 열일곱 명의 아이는 문을 바라봤다.
 2차 시험의 어이없음과 어처구니없는 난이도를 보면 분명 3차 시험도 쉽게 통과하긴 힘들 것이다, 거기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할 테고.
 은하는 잘 통과했으려나? 은하가 어떤 시험을 치르는진 알 수 없지만, 자신과 같은 복불복 형식의 시험이었으면 분명 통과했을 것이다. 녀석의 운은 정말 하늘이 준 것이니까.
 [저쪽으로 나가면 3차 시험을 보게 될 거야. 그럼 남은 시험도 잘 보라고, 미래의 신입생 여러분.]
 밝고 경쾌한 인사.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안젤리카 8호의 배에 있는 램프의 불빛이 사그라졌다.
 치익.
 피요용.
 기계의 스위치 꺼지는 소리가 공허한 방을 울렸다.
 추욱 늘어진 안젤리카 8호의 모습을 보며 살아남은 아이들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유림과 디하르만큼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아이들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흑색의 공간엔 유림과 디하르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유림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몸을 돌려 디하르를 바라봤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그것도 꽤 친했던 둘이었기에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아무 일 없다 치기엔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러자고 지난 세월을 느낄 만큼 거리감 있는 말은 어색해질 것이 뻔했기에 하고 싶지 않았다.
 유림이 멋쩍음에 뺨만 긁적이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자, 그 고민을 날려주기라도 하듯 상냥하게도 먼저 입을 여는 디하르였다.
 “어째 하나도 크지 않았군.”
 물론, 내용은 그닥 상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유림은 디하르의 말에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어이 어이, 간만이네 다음이 키 이야기냐?
 “네가 비정상적으로 큰 거라 생각하지 않아?”
 눈썹을 꿈틀거리며 올려다보자 디하르가 옅게 웃는 걸로 대신 답했다.
 디하르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유림을 찬찬히 살폈다. 특유의 자색 머리와 자신의 목에 살짝 못 미치는 작은 키. 과거에도 그랬지만 설마 나이를 먹어서도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다. 옛날의 식성 그대로이면 지금도 꽤 많이 먹을 텐데 왜 이렇게 크지 않은 건지. 그래도 표정은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그간 잘 지냈어?”
 급습과도 같은 디하르의 질문에 유림이 살짝 움찔거리더니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아······ 뭐, 적당히 잘 살았지. 너는?”
 “나도 잘 지냈어.”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유림이 가슴을 쓸며 웃었다. 이상한 곳에서 소심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디하르는 어릴 적의 유림을 생각하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때 유림이 불쑥 물어왔다.
 “근데 너 여기 왜 있어?”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디하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왜 있겠어, 시험 보러 왔지.”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묻는 건, 너 원래 학교나 대학 같은 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묻는 거야.”
 그 말에 디하르가 피식 웃었다.
 “어쩌다 보니까. 그보다 너야말로 웬 클레이즈야? 나보단 네가 더 어울리지 않는데.”
 “아······ 난 좀 그럴 이유가 있달까?”
 차마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한테 연금 때문에 시험 치러 왔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유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보면 수상쩍어 보이는 그 태도에 디하르가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흐음, 뭔가 수상한데? 혹시 뭐 있는 거 아니야? 아님 무단 침입?”
 “아니거든? 자, 보라고! 나 당당하게 초대받았어.”
 유림은 주머니에서 초대장이라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심하게 구겨져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펴 디하르에게 내밀었다.
 “종이가 아니라 쓰레기네. 분명 돼지 똥 싸는 소리라면서 집어 던졌겠지.”
 “헐······ 어떻게 알았어?”
 “네 생활 방식이야 늘 똑같지. 그보다 이건 뭐야?”
 라면서 디하르가 초대장의 이름이 쓰여 있는 부분을 가리켰다. 유림은 그런 디하르를 보며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긴 뭐야, 내 이름 ‘한유림’이지. 언제 봐도 예쁜 이름이지 않냐?”
 “이거야말로 돼지 똥 싸는 소리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아는······.”
 디하르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유림을 내려다봤다. 약간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좀 전의 가볍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이다.
 “이게 가능해? 내가 알기로 분명 클레이즈 초대장은······.”
 말끝을 흐리는 디하르의 모습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알고 있어. 처음엔 단순히 오류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유림은 다시금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디하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흘러내린 유림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뭐가 있긴 있나 보군······.”
 “그런가 봐. 뭐,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시험이 먼저니까. 그러니 무조건 클레이즈에 붙으라고.”
 단호하게 떨어지는 유림의 음성에 디하르의 표정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알았어. 너도 꼭 붙어.”
 “걱정 마. 내가 누군데.”
 정말로 자신 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는 유림이었다. 그녀는 마치 너도 힘내라는 듯 디하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곤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려 디하르를 바라봤다.
 “근데, 디하르.”
 “응?”
 “혹시 너 혼자 왔어?”
 그 질문에 디하르가 옅게 웃었다.
 “그럴 리가.”
 
 [제98번 문제. 대다수의 사람은 열 살 전후에 ‘늄’이 줄어들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그 이후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로 알맞지 않은 것은?]
 ① 어렸을 적부터 늄에 지속적인 자극을 준 경우.
 ② 타인의 늄을 이식받은 경우.
 ③ 천부적으로 대량의 늄을 타고난 경우.
 ④ 외부적인 자극으로 늄이 다시금 확장되는 경우.
 
 데몽은 펜을 들어 2번을 찍었다.
 이식이라니. 늄은 고유한 전유물이었다. 자신의 늄을 이용해 타인의 늄을 활성화하고 부풀릴 순 있으나, 이식해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것을 상대방에게 주입할 순 있었으나, 거부 반응이 일어나 받질 못한다.
 데몽은 미간을 구기며 다음 문제로 시선을 내렸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서 이러한 문제를 풀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광장에 네 개의 문이 나타나고, 유림은 초록색, 은하와 테오는 노란색, 륜은 붉은색 문으로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데몽은 모두가 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푸른색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런 데몽을 맞이한 건 거대한 방과 수많은 책걸상, 그리고 좀 전에 광장에서 봤던 이즈네란 감독관이었다.
 그녀는 방에 있는 응시생들에게 앉으라 지시했다. 그런 뒤 모두가 앉은 것을 확인하곤 시험지를 돌렸다.
 그리하여 시작된 기초 상식 100제.
 제한 시간이 고작 30분밖에 안 되는 촉박한 시험이었지만, 데몽은 막힘없이 술술 풀고 있었다.
 시험 문제 자체는 난이도가 높았으나 펠리탄의 수습 학자인 그가 풀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수준이었다. 더욱이 사지선다였기에 크게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았다.
 문제는 난이도나 시간이 아니었다.
 탁탁탁.
 아까부터 묘하게 자신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
 탁탁탁탁.
 바로 앞자리에서 계속 발로 박자를 맞추며 문제를 푸는 웬 사내놈이었다.
 약간 곱슬거리는 푸른색의 머리, 깔끔하고도 질 좋은 옷차림이며 적당하게 마른 체격이 꽤 곱게 자란 것 같았다.
 아니, 근데 행실은 왜 저따위야?
 물론, 데몽은 저런 방해쯤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그의 집중력은 제국의 학자 중 최고였으며 옆에서 전쟁이 나도 알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일정한 속도로 박자를 맞추는 행동에 흐름을 놓쳐 버린 그였다.
 데몽은 99번 문제를 풀며 생각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갈 때 뒤통수라도 한 대 치든가 해야지, 진짜. 보통 이런 장소에선 조용히 하는 게 기본이란 걸 모르나? 아니지, 그걸 알면 저렇게 행동할 리가 없지······ 제기랄, 면상 한번 보고 싶네.
 그는 99번의 문제를 검토하고 마지막 100번 문제로 넘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앞의 남자가 박자를 바꿔 발을 까딱였다.
 탁, 타탁 탁, 탁.
 ‘벼, 변조(變調)?’
 신경을 확 잡아끄는 변조에 데몽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미간을 확 구기고 다시 문제를 내려다봤다.
 제길, 또 끊겼어.
 데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소리를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바뀐 박자 때문인지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문제가 읽히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온 신경을 문제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앞의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자기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연이은 공격(?)에 데몽은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펜을 놓치고 말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발로 박자를 재던 남자가 지금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반쯤 미친 상태로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데몽은 떨어트린 펜을 집으며 앞의 소년을 바라봤다.
 “으아어아어아아아어어어어어!”
 마치 실성한 사람 같은 그의 돌발 행동에 감독관인 이즈네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다급한 물음에 소년이 머리를 움켜쥔 채, 고개를 들어 이즈네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시험 시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앞자리 소년의 얼굴을 확인하게 된 데몽이었다.
 “아······.”
 짧은 감탄과 함께 그는 저도 모르게 또다시 펜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펜. 그러나 데몽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앞의 소년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건 데몽뿐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그와 똑같은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몽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쪽빛······.”
 그렇다. 쪽빛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소년은 ‘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준다는 쪽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보기 힘든 네 가지 색 중 하나이자 존재 자체로도 신성시하는 색, 쪽빛. 펠리탄의 수습 학자로서 많은 사람과 색을 봐온 데몽이었지만, 그 또한 쪽빛 눈동자는 처음이었다.
 그 색은 모두에게 좀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잊게 해줄 만큼, 강력했고 신묘했다. 소년의 비명에 달려왔던 감독관 이즈네조차 멍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소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녀의 질문에 쪽빛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좀 전까지 미친 듯이 머리를 헤집은 인물이라 하기엔 지나치리만큼 곱상하고 뽀송뽀송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소년의 미성이 방을 울렸다.
 “······하나도 모르겠어요.”
 “······.”
 그리고 그 말에 한쪽 발을 삐끗한 이즈네와 아무래도 오늘은 집중하기 글렀다는 걸 깨닫고 힘을 쫙 빼버린 데몽이었다.
 
 ***
 
 “리이이이이임!”
 테오를 구석에다 버려둔 은하가 유림이 나오기 무섭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유림은 그런 은하를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어 붕붕 흔들어 보였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덴 이레프의 광장이 아닌 이상한 숲속이었다. 주위엔 은하를 비롯한 몇몇 아이가 있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합격자들만 이쪽으로 이동된 듯싶었다.
 디하르는 앞에서 촐싹거리며 달려오는 은하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야?”
 “친구.”
 그 대답에 디하르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진짜?”
 “응, 진짜.”
 진짜라니. 디하르는 유림의 대답에 은하를 유심히 살폈다. 헤어지고 단 한 번도 유림의 거취를 알 수 없었던 디하르에게 있어 유림의 친구란 참으로 생소하고 낯선 존재였다. 특히 저렇게 촐싹거리는 아이는 더더욱 생소했다.
 “역시 붙었구나!”
 엄청난 기세로 달려온 은하가 유림의 팔을 잡으며 깡충깡충 뛰었다.
 유림은 그에 맞춰주듯 몇 번 손을 흔들어주더니 피식 웃으며 은하를 진정시켰다. 그런 뒤, 안색을 살폈다. 하도 우렁차게 부르며 달려오기에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시험을 치르고 온 사람이라 치기엔 지나칠 정도로 반질반질했다. 위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뭐야, 뭔 시험이었기에 이렇게 반질반질해?”
 “나, 짱 좋았어.”
 “뭐가?”
 “음식이 이마아아안~ 큼 있었거든.”
 시험인데 웬 음식?
 유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하가 뒤이어 설명했다.
 “짱이었어. 멋진 남자도 있었고, 예쁘고 빵빵한 언니들도 있고, 금은보화도 잔뜩 있었어.”
 “진짜?! 뭐 안 집어왔냐?”
 “응? 아니, 그냥 먹고만 왔는데. 아! 나 식탁에 있던 거 다 먹고 왔어! 과일 빼고 다 먹었는데 짱 맛있었다.”
 마치 뼈다귀를 선물받은 강아지처럼 은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림은 그런 은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뒤, 한쪽 볼때기를 꼬집었다.
 이 우라질 년, 그러니까 쉽게 말해······.
 “너만 맛있는 거 처먹고 그냥 왔단 소리야?”
 “어······ 그, 그러네······?”
 “그래그래~ 그러니까 정말 너만 맛있는 거 잔뜩 처먹고, 내 선물로 금화 하나 안 집어 왔단 거 아냐.”
 환한 미소. 그 미소에 은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자들에게 흠뻑 빠져 있던 테오를 끌고 오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유림이 좋아하는 돈을 들고 나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하하······ 그, 그렇지만 나오면 없어지지 않았을까?”
 “그래도 집어 왔었어야지.”
 “그, 그런가······?”
 “으응? 뭐라고?”
 환한 미소와 더욱 세게 당겨지는 볼. 발음까지 뭉개질 정도의 묵직한 통증에 은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빌었다.
 “자모해떠······.”
 “쳇.”
 은하의 빠른 항복 선언에, 유림이 혀끝을 차며 볼을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흑, 칭찬받으려고 일찍 나왔는데 혼나 버렸어.”
 시뻘게진 자신의 볼을 비비며 칭얼거리는 은하와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차는 유림. 디하르는 두 사람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유림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인간관계가 확실하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을 빼곤 쓸모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는 귀찮냐 덜 귀찮냐를 구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중 유림이 가장 귀찮아하는 것이 바로 쓸데없이 착하고 순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쉽게 말하면 백치, 그니까 활발하고 착하고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뒤통수 잘 맞고 다니는 녀석 말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유림이 친구라 칭한 은하가 바로 이 유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유림의 성격이 바뀐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뭘 뜯어먹으려고 같이 다니는 것 같진 않은데······.
 디하르는 은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순간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응?”
 부담스러울 만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은하 또한 그를 바라봤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큰 키와 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 신기하게도 양쪽 눈의 색이 달랐는데 이상하다기보단 잘 어울리단 느낌이 강했다. 거기다 왼쪽 눈 밑에 있는 점은 관능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은하는 디하르와 유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시선을 유림에게 고정하고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은하의 짧은 질문에 유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디하르를 바라봤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림이 저리 웃는 것을 보니 이 친구를 만난 것이 꽤 기쁜 듯싶었다.
 “음······.”
 유림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아는 은하로선 유림의 옛 친구인 디하르의 존재가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림의 친한 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반가워! 난 박은하수. 그냥 은하라 불러줘.”
 디하르 또한 은하가 내민 손을 잡으며 제 소개를 했다.
 “이덴 디하르. 디하르라고 불러줘.”
 흠, 디하르라 하는구나. 잘생겼다.
 잘생긴 놈은 일단 피하고 보라 했지만, 유림이 저러는 걸 보면 좋은 애인 거겠지?
 은하는 그렇게 디하르를 좋은 사람으로 판단하곤 잘 지내자는 의미를 담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옆에서 지이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응?”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숲. 그 위에 이상한 소리와 함께 푸른색 원형 판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익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림과 은하가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유림과 은하는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
 “데몽.”
 “몽?”
 “어라? 박은하수, 한유림.”
 데몽은 안경을 고쳐 쓰며 앞을 바라봤다. 왠지 남자 자존심 상하게 하는 얼굴의 청년과 유림과 은하가 함께 있었다.
 “둘 다 합격했냐?”
 “그럼”
 “완벽하게 합격했어.”
 데몽이 유림과 은하에게 합격 여부를 묻고 있을 때, 뒤에 있던 판에서 지이잉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다시 다른 그림자가 비쳤다.
 이번엔 데몽을 포함한 네 명이 고개를 돌려 막 나온 인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빛의 문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저들도 모르게 입을 열고만 네 사람이었다.
 “와······.”
 은하에겐 세상에 저런 뽀송이가 다 있나, 하는 의미로.
 “엑?”
 데몽에겐 자신의 시험을 방해한 몹쓸 놈으로······.
 “나왔군.”
 디하르에겐 함께 시험을 보러 온 친구로.
 그리고,
 “레, 레이먼?”
 유림에겐 또 다른 만남으로 말이다.
 
 ***
 
 륜은 지금 폭이 좁은 외나무다리 위에 위태로이 서 있었다. 입구부터 출구까지 길게 뻗어 있는 다리는 그리 길진 않았으나 애석하게 그 반도 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음침하게 생긴 헝겊 인형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개같이 푹신푹신해 보이는 솜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인형. 머리엔 얼굴이랍시고 눈과 입을 그려놨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더러운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곳이 평지거나 여유가 있는 길이었다면, 손쉽게 피해 지나치거나 뛰어넘어 갔을 텐데. 다리의 폭이 워낙 좁은 데다 밑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어둠이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인형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이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지도 못할 만큼 당황스럽게 했다.
 륜은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헝겊 인형을 바라봤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상한 인형. 왜 자신이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지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하하하하······.”
 그가 평소처럼 힘 빠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륜을 보며 헝겊 인형이 움직였다. 손가락이랍시고 울퉁불퉁하게 다섯 가락으로 묶인 솜뭉치. 인형은 륜을 향해 뭉툭한 손을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
 솜뭉치 인형이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팔을 꺼냈다. 륜은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황급히 가위를 냈다. 그러나······.
 “아······.”
 그 뭉툭한 손가락을 접어 ‘묵’을 낸 헝겊 인형이었으니.
 파칭!
 륜의 패배를 확인한 순간, 인형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헝겊 인형은 가위바위보를 이긴 것이 기뻤는지 대충 그은 듯한 눈을 살짝 휘며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두 다리를 들어 륜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그 경쾌한 스텝에 외나무다리가 요동쳤다.
 “으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입구 쪽으로 도망친 륜과 그런 그를 무서운 기세로 쫓아가는 헝겊 인형.
 제2차 시험, 붉은 방의 가위바위보.
 헝겊 인형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연속으로 다섯 번을 이길 것. 실패 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라는 룰을 가지고 있는 마의 방이었다.
 또다시 패배하고 만 륜은 헝겊 인형의 공격을 피해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거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헉헉헉······.”
 륜은 이를 악물며 뛰었다. 체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 상태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도 출구를 나간 이가 없달······ 까(아니, 있는데 못 본 걸지도).
 “후우, 돌겠네.”
 서바이벌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선착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열 명 안에는 탈출해야 안전하게 합격이란 것이다.
 잠깐, 어차피 탈출이 목적이라면 굳이 가위바위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륜은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끼익.
 갑작스러운 멈춤에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한 신발이 마찰을 일으키며 미끄러졌다. 그는 최대한 몸을 낮춘 후 등허리에 있는 두 개의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애초에 가위바위보를 하는 이유가 헝겊 인형을 이 길에서 치우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베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그는 검을 양손에 하나씩 잡은 후 몸을 낮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힘은 몰라도 속도와 기술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헝겊 인형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한쪽 다리를 벤 후 균형을 무너트려 외나무다리 밑으로 걷어차는 것이다. 그 뒤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가면 된다.
 륜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리고 인형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자 팔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꺄아아아아악!!”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중심이 흔들린 륜은 달려오는 인형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가 뒤로 빠지기 무섭게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꺅!!”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하듯, 륜을 향해 뛰어오던 헝겊 인형 위로 떨어졌다.
 푸욱!
 인형의 솜이 뭉개지는 소리.
 쿠웅.
 그리고 그 무게에 외나무다리가 작은 진동을 울리며 흔들렸다.
 몸을 최대한 낮춰 떨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은 륜은 멍청한 표정으로 엎어진 거대한 헝겊 인형과 그 위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불린 미역마냥 길게 흩어진 푸른색의 머릿결, 새하얀 피부와 늘씬한 팔다리, 그리고 입고 있는 짧은 바지와 쫙 달라붙는 셔츠. 다소 민망한 차림새에 얼굴이 괜히 달아올랐다.
 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뻗어 칼끝으로 헝겊 인형의 머리 부분을 조심스럽게 쳤다.
 “저, 저기요?”
 갑자기 떨어지다니··· 위쪽 다리에서 떨어진 건가?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륜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헝겊 인형의 머리 부분을 다시 칼끝으로 툭툭 쳤다. 그러자 그 행동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쓰러져 있던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여자치곤 참으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륜은 그 기세에 움찔하며 몸을 조금 더 뒤로 뺐다.
 “······.”
 그녀는 길게 흘러내린 머리를 헤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륜의 길을 막던 헝겊 인형을 발로 뻥 차, 저 아래로 떨어트려 버렸다.
 “이건 또 뭐야?”
 거침없는 발길질을 선보인 그녀는 목을 움직이며 경직된 몸을 풀었다. 발을 헛디뎠을 땐 그대로 탈락인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고갤 들었다. 그러다 외나무다리에 주저앉다시피 한 륜을 발견했다. 사람이 없는 다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여자가 미안함에 머쓱한 얼굴로 바라보자, 도리어 어수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륜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여자는 괜찮단 의미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그제야 이 여자가 엄청난 미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아, 미안해요. 갑자기 떨어져서 놀랐죠? 실수로 그만 발이 미끄러져서요.”
 “아뇨, 저도 덕분에 골치 아프던 걸 처리해서 괜찮아요.”
 “오! 정말요? 다행이네.”
 여인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륜은 멀쩡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에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가위바위보 이기셨어요?”
 “아뇨, 대충 처리하고 뛰려고 했죠.”
 “하하······. 역시 꼭 안 이겨도 되나 보죠?”
 “네, 그보다 우리 빨리 뛰어야 할 것 같아요.”
 여인의 말에 륜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런 곳에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어수룩한 륜의 모습에 풋 하고 작게 미소 짓더니 주변을 가리켰다.
 “주위에서도 그걸 알아챈 것 같아서요.”
 “아!”
 그제야 나머지 응시생들도 외나무다리에서 헝겊 인형을 떨어트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륜이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허리를 짚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일단 나가볼까요?”
 그리고 그 질문에 륜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때 먼저 시험을 마치고 나온 유림 일행은 레이먼과 마주하게 되었다.
 디하르가 혼자 안 왔다고 했을 때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 느낌이 좀 색달랐다. 실감이 났다고 해야 하나, 낯설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디하르 못지않게 친했던 레이먼의 등장에 유림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니, 여기가 동창회야? 왜 다 여기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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