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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룡의 후예 1권(1)

2019.08.11 조회 510 추천 1


 작가의 변
 
 
 이 글은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에 대한 뒷얘기의 형식을 빌어왔습니다.
 그가 마도를 걷던 인물이든 백도의 영웅이든 상관없이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지녔던 한 사람이라는 데에서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의 몰락 이후부터 전개될 것입니다.
 영웅은 뒤로 물러나 전설이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갈 또 다른 영웅의 탄생을 처음부터 조곤조곤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역경과 풍파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웅을 만들어내는 가장 훌륭한 스승일 테니까요.
 주인공은 그러한 모든 역경을 다 이겨내고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 되어 세상에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협의 가장 전형적인 패턴이고, 그래서 차별화가 어려운 스토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무리없이 쓸 수 있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서장
 
 
 살아서 전설이 된 사람이 있다.
 풍약헌(風約憲).
 그는 살아서 전설이 되었고, 강호를 떠나서는 신화가 되었다.
 마도의 하늘이기에 절대천마(絶代天魔)라고 불린 유일한 사람.
 일인군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 한 사람.
 강호에 그와 같은 사람이 나온 건 저주이면서 축복이기도 했다.
 마교라는 거대한 마의 집단을 이끄는 종사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혼자서 강호를 떠돌았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무엇도 그의 독행보(獨行步)를 가로막지 못했다.
 가로막으려 한 자들은 모두 죽었고, 문파는 모두 무너졌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쓸쓸했다.
 이 세상에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길을 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십오 년 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세상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의아해하다가 조금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마도천하의 도래를 막기 위해 나선 백도의 십대고수들과 겨루었다.
 ―그 싸움에서 패하여 은거한 것이다.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말들이 조금씩 퍼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봇물 터지듯 온 세상을 뒤덮었다.
 절정의 득세기를 구가하던 마교 홍안적성(紅顔赤城)의 무리가 슬그머니 중원을 떠나 저 먼 청해성의 오지로 숨어버렸을 때, 사람들은 미친 듯이 열광했다.
 
 ―백도의 십대고수가 절대천마 풍약헌을 꺾었다!
 
 그 환희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춤을 추며 기뻐하던 강호의 무리에게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십 대 일의 싸움이었다. 정당한가?
 
 쿵!
 그 질문은 모두의 가슴에 바윗덩이처럼 떨어졌고, 한순간에 백도인의 모든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다.
 풍약헌과 싸웠다고 알려졌던 십대고수들.
 백도의 열 하늘이라고 불렸던 그들이 모두 강호를 떠나 칩거해 버림으로써 그런 의문은 더욱 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의기소침해졌다.
 더 이상 기뻐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씩 풍약헌의 존재는 전설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제1장 전설(傳說)
 
 
 십오 년 전의 어느 날이다.
 
 모악산(母顎山) 천궁봉(天宮峰)에 서서히 노을빛이 비쳐들고, 바다에서부터 불어왔던 서늘한 바람이 잠잠해져 갈 무렵이었다.
 천궁봉 정상의 너럭바위 위에 열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아홉 명은 한쪽으로 물러나 숨죽인 채 서 있고, 너럭바위 중앙에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수억 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바위의 곳곳에 균열이 가 있었다.
 지진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일까?
 검 한 자루를 늘어뜨린 채 오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중년의 한 사람.
 깨끗한 살빛과 용모는 언뜻 보기에 학식이 높은 고고한 선비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늘어뜨리고 있는 건 붓이 아니라 한 자루의 칙칙한 묵 빛을 띤 검이었다.
 장포의 이곳저곳에 피 얼룩이 졌고 찢어져 남루해진 모습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의연하게 서 있었다.
 원래 희던 얼굴빛에 창백함이 더해져 조금 더 희어졌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의연하고 오만하며 도도한 기품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
 풍약헌.
 절대천마라고 불리는 마도의 하늘은 그렇게 문약한 서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
 풍사곡주(楓沙谷主) 위진평(魏鎭平).
 그는 백도의 자부심이라는 열 개의 하늘 중 하나인 절대자이다.
 강호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를 일컬어 검 한 자루로 사마와 자기 자신을 이겼다고 해서 검진삼협(劍鎭三俠)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지극히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검협인 것이다.
 이제 겨우 사십대 중반이 되었을까 한 나이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는 건 그가 과거에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를 충분히 알게 해준다.
 몇 년 전부터 호남의 남쪽 광문산 풍사곡에 머물면서 고요한 삶을 즐기고 있던 그가 오늘은 모악산 천궁봉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안색은 침중하기 짝이 없었다.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풍약헌을 바라보며 꼼짝하지 않았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풍약헌의 검끝에 미미한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진삼협 위진평의 눈꼬리도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게 마지막 대전이오."
 풍약헌의 낮으나 힘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으음―"
 침음성을 흘린 위진평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 물러서 있는 아홉 명의 동료들을 힐끔 바라본다.
 자신과 함께 백도의 열 하늘이라고 불리며 존경과 경외의 대상인 그들이 지금은 한껏 위축된 모습으로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림의 탕마무불(蕩魔武佛) 각원 선사(覺元禪師).
 무당의 진양자(進陽子) 담옥천(潭玉泉).
 아미의 적운 사태(積雲師太).
 화산의 무량자(無量子) 이릉운(李凌雲).
 점창의 낙일검객(落日劍客) 이풍룡(李風龍).
 개방의 풍진걸개(風塵乞ㅤㅉㅏㅌ) 양위허(楊衛虛).
 산동의 하가신창(河家神槍) 하운봉(河雲峰).
 을목장주(乙木莊主) 관패호(關覇虎).
 풍사곡주(楓沙谷主) 위진평(魏鎭平).
 흑풍객(黑風客) 장하륜(張河崙).
 
 그들 열 사람은 각기 십천의 보좌에 오른 극강한 고수들이었다.
 백도의 모든 힘이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절대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인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
 절대천마 풍약헌 앞에서 그들은 열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첫 싸움은 소림의 탕마무불 각원 선사가 했다.
 달마원의 주지이면서 육십 살이 넘은 노승이지만 그의 소림 절학은 천하제일이라고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삼십여 초 만에 그의 백보신권은 풍약헌의 마라혈권(魔羅血拳)에 의해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누구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경악했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로 대무당파의 진양자 담옥천이 나섰다.
 그는 무당검법을 대성한 극강의 고수이면서 검선(劍仙)으로 불리는 청수한 용모의 중년 도사였다.
 서른 살 무렵부터 이미 백도십천의 한자리에 당당히 오른 무당파 불세출의 영웅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그를 두고 여동빈의 환생이라고까지 극찬했다.
 그런 그의 삼십육로 현천검법도 삼십 초 만에 풍약헌의 수라칠검(修羅七劍)에 꺾이고 말았다.
 세상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백도의 십천은 오직 풍약헌의 위대함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모인 존재들인 것 같았다.
 권법에는 권법으로, 검법에는 검법으로.
 풍약헌은 상대의 절기에 따라 자신 또한 그와 같은 무공으로 싸웠을 뿐이다.
 대체 그의 한 몸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무공이 들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모두가 개세적인 신공절학들이라는 것이다.
 아미의 적운 사태가 이십 초 만에 풍약헌의 귀타십팔장에 의해 패배했고, 산동 하가보의 보주인 하가신창 하운봉이 이십오 초에 패했다.
 화산의 신검으로 불리는 무량자 이릉운은 삼십오 초를 버티더니 스스로 매화검을 꺾어 던지고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점창의 장문인이자 불세출의 고수인 낙일검객 이풍룡 역시 삼십여 초 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물러섰다.
 그때쯤이면 풍약헌은 지칠 대로 지쳐 진기가 고갈되어 가야 마땅했다.
 이미 여섯 명이나 되는 강호의 절대자들을 차례로 상대하며 전력을 다했을 테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신감과 함께 동료들의 기대를 받으며 나온 호남 을목장주 관패호가 이십칠 초 만에 무릎을 꿇었을 때 사람들은 절망했다.
 그의 필생의 절학인 을목신공과 목령신장조차 풍약헌의 흑수마장(黑水魔掌)을 상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 어떤 세력도 거느리지 않았고, 정착한 곳도 없었으며, 친구도 없이 늘 홀로 강호를 떠도는 방랑자.
 그런 면에 있어서는 풍약헌과 기질이 가장 비슷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초절정고수.
 괴팍한 성정과 제어할 수 없는 날카로움으로 인해 때로는 마도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는 사람.
 그래서 혹자는 정사 중간의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는 흑풍객 장하륜이 나섰다.
 그의 무공은 복잡했다. 권장법의 대가이면서 고절한 신법을 지녔고, 검법과 도법은 물론 창과 봉, 편, 금나 등 온갖 무예에 능했는데, 그 모든 것이 제각각 무적이라고 할 만큼 뛰어났다.
 천하의 무공을 모두 섭렵한 것 같은 기이한 자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그는 역시 풍약헌과 가장 닮아 있었다.
 흑풍객 장하륜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들고 나섰고, 끝까지 검법으로 풍약헌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앞서의 일곱 사람보다 끈질기게, 오래 버텼다.
 그러나 오십여 초 만에 부러진 검을 쥐고 물러났던 것이다.
 흑풍객마저 패하자 사람들은 풍진걸개로 불리는 개방의 장로 양위허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는 홀로 천하를 떠돌며 온갖 기괴한 일을 벌이곤 하는 기인이자 천하제일고수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양위허도 묵죽장(墨竹杖)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손오공을 비웃어줄 만하다던 그의 봉법도 풍약헌의 철장마륜(鐵杖魔輪)의 절기 앞에서 겨우 오십여 초를 버텼을 뿐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이미 여덟 명의 절대자들과 목숨을 건 혈전을 벌이고 난 뒤라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진걸개 양위허가 고작 오십여 초를 버티고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는 건 충격이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단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마지막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
 풍사곡주 위진평은 검법의 절세고수였다.
 나이 서른 무렵에 이미 종사의 반열에 올랐을 만큼 뛰어난 검객인 것이다.
 "시작하겠소."
 그가 장중한 기색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그는 이번 싸움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이제는 십대고수 중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진다면 마도천하의 도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필코 이겨야 한다.
 그런 부담감은 위진평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했다.
 그런 그의 눈에 풍약헌의 몸이 아주 잠깐 흔들 하고 흔들린 것같이 보였다.
 그가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위진평은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이제는 지칠 때도 되었지. 내력이 고갈되었을 것이다. 억지로 태연한 척하고 있을 뿐 사실은 검을 들고 서 있을 힘조차 잃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진평은 내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우우웅―
 풍약헌을 가리키는 그의 검신이 터질 것처럼 진동하며 웅장한 용음을 터뜨렸다.
 자잘한 초식 따위는 모두 생략한 채 오직 검강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것이다.
 풍약헌도 천천히 검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창백한 그의 안색에 한 가닥 붉은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위진평은 그가 이 한 번의 싸움에 진원지기마저 아낌없이 끌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만큼 위태로운 처지라는 반증 아니랴.
 "차합!"
 그가 웅장한 기합성을 터뜨리며 그대로 검을 뿌렸다.
 쉬아앙―
 한 가닥 뜨겁고 맹렬한 검강이 뻗어 전면을 휩쓸어가고, 위진평이 그것을 따르듯 풍약헌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부릅뜬 눈에 풍약헌이 입술을 악무는 게 보였다.
 회심의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풍약헌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파황일기(破荒一氣)!"
 번쩍!
 콰르르르―
 눈부시게 강렬한 빛 한줄기와 세상을 모두 태워 버릴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맹렬한 열기 한 가닥.
 그것이 위진평이 느낀 처음이자 마지막의 두려움이었다.
 쾅!
 천번지복의 굉음이 천궁봉을 뒤흔들었다.
 콰드드드―
 이미 아홉 차례의 대전으로 인해 갈라지고 터졌던 바위 조각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거대한 암반의 한쪽이 모래성처럼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머릿속을 혼란하게 하는 그 엄청난 굉음과, 영혼마저도 짓눌러 버릴 듯이 쏟아져 오는 상상 불허의 압력.
 '끝이야.'
 위진평의 정신이 아뜩해졌다.
 저도 모르게 온몸의 힘이 빠져버리고, 질끈 눈을 감게 된다.
 우르릉―
 먼 골짜기에서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굴러 떨어진 바위 조각들과 쏟아져 나간 기의 폭풍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적막.
 "아―"
 한참 뒤에야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절망에 찬 탄식이 터져 나왔다.
 풍약헌의 검이 위진평의 가슴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위진평의 보검은 산산이 부서져 자루만 남아 있었다.
 그의 안색이 죽은 자의 그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멍하니 풍약헌을 바라본다.
 풍약헌의 입가로 가느다란 선혈 한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자신이 외쳤던 파황일기의 무시무시한 마공으로 위진평의 검강을 흩치고 호신강기마저 단번에 뚫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손목에 조금만 힘을 주면 검은 위진평의 심장을 관통해 버릴 것이다.
 "······!"
 사람들의 부릅뜬 눈이 일제히 풍약헌에게 멎었다. 긴장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졌··· 소."
 졌소.
 그 한마디가 위진평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사람들이 다시 '아!' 하고 절망의 탄식을 터뜨렸다.
 위진평으로서는 그의 평생에 처음으로 내뱉는 한마디의 말이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풍약헌의 창백한 얼굴에 한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천천히 검을 거둔다.
 비틀.
 위진평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옷소매로 입가의 선열을 쓱 닦아낸 풍약헌이 빙긋 웃었다.
 "약속을 지키시오."
 "하―"
 탄식하는 위진평의 눈이 다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붉게 핏발까지 선 눈으로 풍약헌을 노려보기를 얼마쯤 했을까.
 "하―"
 그가 다시 한 번 탄식하고 품에서 천천히 자신의 신물을 꺼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옥령(玉鈴)이었다.
 딸랑―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작고 투명한 울림이 흘러나온다.
 그때 위진평의 귓속으로 여러 사람이 일제히 떠들어대는 소리가 앵앵거리며 어지럽게 파고들었다.
 나머지 아홉 명이 전음으로 서로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진평은 그들의 절규 같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대로 우리의 패배를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저자도 지금쯤은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 기진했을 것이다. 이때에 일제히 들이쳐서 아예 죽여 버리는 게 현명한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도 명색이 백도를 대표해서 온 우리 아닌가? 그런 짓을 한다면 마도의 무리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렇다. 그렇게 야비한 짓을 한다는 건 패배보다 더 수치스런 짓이다!'
 '나는 동의한다! 이대로 저놈을 놓아 보낸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아니, 그럴 것이다!'
 '맞다! 죽여 버리자. 우리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세상에서 이 일을 알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으냐?'
 '그러고 나서 우리가 승리했다고 떠들어댈 셈이냐? 풍약헌을 죽였다고 자랑하겠다는 거냐? 흥, 나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위 형, 당신이 결정하시오. 당신이 손만 한번 뻗으면 될 것이오.'
 결국 그 말로 모든 게 귀결되었다.
 위진평은 제 귓속으로 파고든 그 전음성들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모든 짐을 떠넘긴 자가 을목장주 관패호라는 것도 똑똑히 알았다.
 위진평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뒷짐마저 진 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오연히 서 있던 풍약헌의 눈길이 천천히 그런 위진평에게로 돌아왔다.
 "상의들은 다 끝낸 거요?"
 빙긋 웃는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았다.
 위진평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가 허공에 옥령을 띄웠다.
 그것이 마치 살아 있는 나비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허공을 가로질러 풍약헌에게로 날아갔다.
 풍약헌이 가볍게 손을 뻗어 그것을 잡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끝났다.
 열 명의 절대자들이 완벽하게 패배한 것이다.
 풍약헌은 그들과 싸우며 열 개의 서로 다른 절기를 썼다.
 그리고 매번 상대에게 자신이 쓸 절기를 큰 소리로 외쳐 주었다.
 그렇게 열 번 외쳤고, 열 번 모두 이긴 것이다.
 모두는 그가 어떤 절기를 사용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것뿐이었다.
 풍약헌은 열 사람 모두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진평과의 싸움에서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내력이 극심하게 소모된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마지막 순간에 손을 멈추었다.
 살려준 것이다.
 백도의 십천으로 불리는 열 명의 절대자들.
 그들은 그래서 더 큰 치욕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불과 한나절의 싸움이었을 뿐이다.
 그 한나절 동안에 자신들이 평생 이루어온 명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처럼 허무할 수가 없었다.
 풍약헌이 오연한 모습으로 비탄에 잠겨 있는 그들을 한 사람씩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불만이 있는 사람은 다시 시도해 봐도 좋소."
 "······."
 오만이 극에 다다른 말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없었다.
 풍약헌이 위진평에게서 받은 옥령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그것을 높이 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열 명의 절대자들에게서 받은 그들의 신물 열 가지가 들어 있었다.
 "나와 한 약속을 잊지 마시오."
 자신들의 신물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는 열 사람에겐 하나같이 착잡한 기색이 가득했다.
 풍진걸개 양위허가 그답지 않게 잔뜩 풀이 죽은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나에게 언제쯤 한 가지 일을 부탁할 건가? 나는 빨리 나의 신물을 되찾고 싶네."
 풍약헌이 빙그레 웃었다.
 "곧 때가 오겠지요. 당신이 늙어 죽기 전에 부탁을 해야 할 테니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 가장 먼저 신물을 되찾게 될 것 같소이다."
 십천 중 제일 연장자인 풍진걸개가 한숨을 쉬었다.
 "기다리고 있겠네."
 
 이 싸움의 방식은 십천이 결정했다.
 한 사람씩 차례로 싸우되 열 명 중 누가 되었든 한 번만 승리해도 십천 전체가 승리한 것으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풍약헌은 그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들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십천이 승리하면 자기는 그들의 손에 죽을 테니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러나 자기가 승리하면 그들은 각자의 신물 한 가지씩을 내놓는다는 조건이었다.
 신물이란 곧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빼앗긴다는 건 풍약헌의 포로가 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그와 같은 모욕은 참지 못하는 게 강호의 고수들이 가진 자존심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백도십천으로 불리는 절대자들 아닌가.
 하지만 자신들이 제시한 싸움의 방식을 풍약헌이 호쾌하게 받아들인 이상 그가 내놓은 조건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풍약헌은 자신이 이겨서 신물을 빼앗아 갖는다고 해도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최대한 존중해 주었다.
 또한 그것을 되찾아갈 수 있는 방법도 제시했다.
 언제든 그 신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대가로 자신의 신물을 돌려받을 수 있다.
 십천이 풍약헌의 그런 제안을 받아들인 건 자신들이 절대로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약헌은 열 번 싸워서 모두 이겨야 하지만 자신들은 누가 되었든 한 명만 승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자신들의 조건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 풍약헌의 자만심을 비웃기도 했다.
 필승을 자신했기에 그의 조건을 수락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자신들의 발목을 죄는 족쇄가 되어 돌아왔다.
 물론 풍약헌은 약속대로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신물을 내밀고 한 가지 부탁을 해올 때까지는 노심초사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떤 엉뚱한 요구를 해올지 모르지 않는가.
 
 풍약헌이 고개를 까닥여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천천히 천궁봉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의 모습이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열 사람의 절대자는 너럭바위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골짜기에서 달려 올라온 찬바람이 옷자락을 마구 펄럭이게 할 무렵에야 그들은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고 서로 바라보았다.
 "휴―"
 열 개의 입에서 동시에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각자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천궁봉 정상의 너럭바위 위에는 태고의 고요가 다시 찾아왔다.
 
 그날의 싸움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천궁봉의 대전에 대한 소문들이 퍼져 나갔고, 결과는 십천의 승리라고 믿게 되었다.
 풍약헌의 모습이 그날 이후 강호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백도십천에게 패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더라도 회복 불능의 중상을 입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랬기에 강호를 떠난 것 아니겠는가.
 풍약헌이 그렇게 모습을 감춘 것과 함께 그의 후광을 입고 득세하던 마교 홍안적성의 무시무시한 마인들도 일제히 중원을 떠나 새외로 사라졌다.
 그 사실도 십천의 승리에 대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벡도의 십천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한입처럼 떠들어댔다.
 그들에 대한 숭배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졌다.
 풍약헌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그들 열 명의 절대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은퇴를 선언하고 강호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문파나 장원,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건 물론, 일체의 외부인 접견을 거절했고, 강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참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철저한 칩거에 들어간 것이다.
 또한 사문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몇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굳이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절대천마 풍약헌과 그를 추종하던 홍안적성의 무리가 사라진 이상 십천은 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려져 갔다.
 오직 풍약헌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말들만 전설이 되어 떠돌았을 뿐이다.
 
 #3
 
 
 그렇게 십오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강호는 그 어느 때보다 한가로웠다.
 태평천하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구파일방은 원래의 체통과 위엄을 되찾았고, 백도의 명숙들은 그들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했다.
 바야흐로 백도의 최대 전성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작은 사건이 강호의 변방,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천의 오지에서 꿈틀거렸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민산(岷山)의 웅장한 자태가 멀리 바라보이는 곳.
 성도에서 북쪽으로 일천리나 떨어진 송번고성(松藩古城)에서였다.
 제2장 무정무한(無情無恨)
 
 
 "어머니는 좀 어떠셔?"
 도리질하는 소녀, 아니, 계집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염소정(廉素情).
 열 살의 계집아이인데, 창백한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애처로울 만큼 마른 몸이 작아서 제 나이보다 두어 살이나 어려 보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꾀죄죄한 옷에서 신 냄새가 났다.
 어두컴컴한 방 안을 둘러본 사내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운도(段雲道)라는 이름을 가진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다.
 아니, 소년이라고도 청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의 사내 녀석인 것이다.
 희고 깨끗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굵은 눈썹과 우뚝한 콧날.
 붉은 입술이 곱고 그 안의 하얀 치아가 가지런하다.
 용모만으로 보자면 틀림없이 선동(仙童)의 귀품을 가진 동안(童顔)이었다.
 어느 귀족의 후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부와 둘이서 이 깊은 산골 오지 마을에 붙어사는 처지에 불과했다.
 "공기가 이렇게 안 좋으면 병이 잘 낫지 않아. 도대체 환기는 언제 시킨 거야?"
 도리도리―
 계집아이는 퀭한 눈으로 소년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 당최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주눅이 들어 있는 불쌍한 아이였다.
 제 운명을 두려워하며 떠는 것이리라.
 "안 되겠다. 먼저 청소부터 해야겠어."
 소년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꼭꼭 닫혀 있던 작은 창문도 열었다.
 비로소 바깥의 청량한 공기와 햇빛이 왈칵 몰려들어 음침하던 실내의 어둠을 몰아냈다.
 저쪽 구석의 침상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낡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단운도를 바라보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병들기 전, 그녀는 산골의 여인답지 않게 고운 용모와 기품 있는 분위기를 지닌 아낙이었다.
 남편의 성이 염 씨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염 부인이라고 불렀을 뿐 그녀의 성이 무엇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런 심심산골에서 농사일이나 하며 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염 부인에 대해서 다들 궁금해했지만 그녀는 제 사연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병들어 드러눕고 나서는 더욱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마치 원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운도가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허깨비처럼 가볍다.
 "아주머니도 햇볕을 좀 쬐시는 게 좋을 거예요. 기분도 한결 나아지거든요."
 마당에는 초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 위에 그녀를 앉힌 운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부축해 나올 때부터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던 것이다.
 대체 목욕은 언제 시킨 건지······.
 아무래도 저렇게 작고 맥없는 소정이 빨래를 하고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기에는 무리였으리라.
 "걸레를 빨아다 줄래?"
 눈치를 보던 소정이 우물가로 쪼르르 달려가는 걸 보면서 운도는 가슴이 아팠다.
 우선 안에 있는 옷들을 죄다 꺼내 마당에 쌓아두고 이불을 걷어 햇빛 잘 드는 곳에 펼쳤다.
 구석구석 먼지를 깨끗하게 쓸어냈을 때 소정이 걸레를 가지고 들어왔다.
 "내가··· 할까?"
 들어오지 못하고 문가에 서서 머뭇거린다.
 운도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빙긋 웃었다.
 "그럴 것 없어. 밥을 할 줄은 알지?"
 "응."
 "내가 쌀을 조금 가지고 왔다. 주방에 두었으니까 너는 밥을 지어."
 그 말에 소정의 눈이 반짝였다.
 주방으로 달려가는 아이를 보면서 운도는 다시 가슴이 아팠다.
 제가 찾아오지 않았던 지난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운도의 집에서 두어 마장 떨어진 곳이었다.
 마을에서도 뚝 떨어진 외진 곳의 낡고 허름한 초가집에 두 모녀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이 있었을 때에는 그래도 먹고사는 데에 걱정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군역에 나가 죽고 난 뒤로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지금은 끼니를 거르는 게 예사가 되었다.
 작년부터 어머니마저 병으로 눕게 되자 더욱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때부터 소정은 말이 없어졌다.
 재재거리고 웃고 떠들며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들로 개울로 뛰어다니던 댕기머리의 어린 계집아이를 이제는 골목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이는 제 어머니 곁에만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린 것이 제대로 병간호를 하고, 제대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때부터 운도가 틈틈이 찾아와 이렇게 청소며 빨래를 해주고, 쌀과 부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러나 운도 역시 고작 열다섯 살의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그것이 어찌 두 모녀를 만족시킬 수 있으랴만, 그나마 소정에게는 운도가 찾아와 주는 날이 잔칫날이나 마찬가지였다.
 늘 사부님의 식사며 빨래, 청소를 해오며 자란 운도였다. 이까짓 코딱지만 한 집의 일을 해치우는 건 문제도 아니다.
 후딱 방청소를 마치고 난 운도가 빨랫거리를 물에 푹 담가놓은 다음 주방에 들어가 소정을 도와 식사 준비를 했다.
 고기와 야채도 준비해 온 터라 두 사람이 한 닷새는 먹을 만했다.
 지지고 볶는 운도의 솜씨를 바라보던 소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로소 기쁜 소리를 냈다.
 "어머, 오빠는 정말 대단해. 요리사를 해도 되겠어."
 "어때? 맛있는 냄새가 나지?"
 "어서 줘. 나 배고파."
 "조금만 기다려. 아직 덜되었으니까. 내가 반찬을 마저 만드는 동안 너는 어머니를 씻겨 드리는 게 어떻겠니?"
 "알았어. 맛있게 만들어줘야 해? 난 많이 먹을 거야. 그래서 얼른 오빠만큼 클 거야."
 "그래. 얼른 커서 튼튼하고 좋은 남자한데 시집가야지."
 "핏, 난 오빠한테만 시집갈 거다, 뭐."
 "뭐라고? 아니, 요런 조그만 것이?"
 운도가 어이없어하자 혀를 내밀어 보인 소정이 밖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피식 웃은 운도가 이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사부님이 도와주신다면 아주머니가 곧 건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사부라면 운기도인(運氣導引)의 수법으로 병자의 막힌 혈을 소통하게 하고 원기를 이끌어내 주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원기가 살아난다면 자잘한 병이야 스스로의 치유 능력에 맡기면 된다.
 완쾌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소정의 어머니가 적어도 지금보다 나빠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운도는 사부님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안타깝기만 했다.
 등 선생은 자기의 무공을 절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운도에게조차 자신의 무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나서서 소정의 어머니를 치료해 줄 리가 없다.
 제가 했으면 좋으련만 운도는 아직 운기도인의 수법을 모를뿐더러 자신의 내공이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내 능력이 부족해 남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게 이처럼 괴로운 일일 줄이야.
 소정의 어머니 염 부인을 볼 때마다 운도는 마치 죄지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오늘도 역시 그렇다.
 "의원이라도 불러오는 수밖에."
 운도가 쓴 입맛을 다시고 중얼거렸다.
 "송번성에 다녀올 때가 되었구나."
 그곳에 가야 의원을 불러올 수가 있는 것이다.
 
 * * *
 
 운도가 빨래까지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져 갈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소정의 집에서 보낸 것이다.
 급하게 사부님의 저녁 식사를 챙겨 드리고 나자 온몸에 피곤이 밀려들었다.
 사부가 그런 운도를 불러 앉혔다.
 
 무정무한(無情無恨).
 
 지루할 만큼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부가 화선지에 그 넉 자를 썼다.
 한순간에 휘갈기듯 써버린 것이다.
 졸음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던 운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처럼 흰 화선지 위에 막 새겨진 그 짙은 먹빛이 눈을 아프게 찌른다.
 운도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화선지를 보고 사부를 보았다.
 등 선생(鄧先生).
 그는 이곳 송번성에 속한 화량촌(華良村)의 촌민들이 모두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모두 등 선생이라고만 부를 뿐이다.
 그는 오십은 넘었고, 육십은 채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의 청수한 선비였다.
 언제나 깨끗하게 손질된 흰옷만을 입었고, 그 나이에는 이르다고 해야 할 만큼 머리카락과 수염이 온통 희었다.
 마른 체격에 훌쩍 큰 키를 가지고 있어서 그가 마당에 우뚝 서서 달이라도 바라보고 있을 양이면 마치 선학(仙鶴) 한 마리가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 조용한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는데, 굵은 거문고 줄을 튕기는 것처럼 부드럽고 무거웠다.
 "운도야."
 "예?"
 "이 글의 의미를 알겠느냐?"
 "······."
 고개를 가로젓는 소년 단운도를 지그시 바라보던 등 선생이 예의 그 낮고 무거우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무정하면 한을 남기지 않게 되느니라."
 "하지만 사부님은 늘 사람에게는 따뜻한 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하―"
 운도의 말에 등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멍하니 어린 제자의 머리 위 허공을 바라보는 눈길에 회한의 기색이 가득한 것이어서 운도는 더욱 의아해졌다.
 등 선생이 다시 느릿느릿 말했다.
 "세상의 삶이란 이와 같다는 것을 너도 이제는 알 때가 되었지."
 "그 말씀은······."
 "명심하여라. 무정무한. 이 말을 앞으로는 평생 네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운도는 사부가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내 말이 옳았다는 걸 느끼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
 십여 년이 넘도록 붙어산 사부가 그 순간만큼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무섭기도 하다.
 운도는 제 부모를 몰랐다.
 그러므로 제 성이 단 씨인지도 확실치 않다.
 어렸을 때부터 사부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 불렀을 뿐이다.
 언제부터, 왜, 어떻게 해서 사부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너무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칭얼거리며 물었을 때, 사부는 그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손수 젖을 얻어 먹이며 키웠다고 했다.
 그 이후로 운도는 더 이상 제 부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사부가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등 선생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불쑥 말했다.
 "검법은 얼마나 익숙해졌느냐?"
 "잠을 자면서 꿈에서도 초식을 떠올릴 만큼이요."
 "어디, 한번 보자꾸나."
 
 달빛이 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는 텅 빈 마당 가운데 소년이 우뚝 섰다.
 손에는 새파랗게 날이 살아 있는 청강장검 한 자루를 쥐었는데, 노란 수실이 길게 늘어져 땅에 끌릴 듯했다.
 운도는 다섯 살이 되어서부터 사부에게서 하나의 검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니 지난 십 년 동안 오직 한 가지 검법만을 배우고 익힌 것이다.
 꾸벅.
 사부에게 인사를 한 운도가 검법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4
 
 
 새하얀 검신이 달빛을 튕겨내며 번쩍이는 빛을 사방에 뿌린다.
 등 선생은 마루에 앉아 그런 단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하기만 한 얼굴이다.
 제일초 일기승천(一氣昇天)에 이어 이초인 응기상운(凝氣像雲)에 이르더니 삼초인 청풍도운(淸風導雲)과 사초 풍운만천(風雲滿天)에 이르자 번쩍이는 검광이 사방을 휘황찬란하게 뒤덮었다. 마치 촘촘한 그물을 활짝 펼쳐 허공에 던진 것 같았다.
 그리고 오초인 풍우세간(風雨世間)에 이르러서는 그때까지의 무겁고 장중하며 순수하던 검법이 돌변했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쏟아지는 검기는 먹구름이 기어이 거센 빗줄기를 퍼부어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들이친 폭풍우가 세상을 휩쓸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검법은 더욱 무시무시해져서 육초인 운비광풍(雲飛狂風)에 이르자 달빛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바람을 찢는 파공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검봉의 무시무시한 기세가 삼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요한 중에 눈부시게 번쩍이는 검광만이 마당에 가득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등 선생의 눈에 번쩍이는 신광이 이글거렸다.
 운도는 제가 펼치는 검법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잊고 있었다.
 세상의 번잡한 모든 일과 생사의 복잡하고 미묘한 갈등마저도 오직 한 가닥의 검로에 실어 허공에 흩뿌릴 뿐이다.
 무아지경.
 그 속에서 마지막 초식인 제칠초 풍운적멸(風雲寂滅)이 펼쳐졌다.
 고오오오―
 허공에 한 가닥 검음(劍音)이 실리고, 그것이 철금의 현을 튕긴 것처럼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 울림이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밀려 나간다.
 우르르르―
 운도를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 나간 기파가 청명당(淸明堂)의 기둥을 흔들었다.
 마룻장이 삐걱거리고 서까래가 진동하며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 소란의 복판에서 단운도는 검을 곧게 뻗은 채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등 선생의 가슴을 가리키고 있는 검봉이 파르르 떨린다.
 "으음―"
 한참 만에야 등 선생이 탄식 같기도 하고 신음성 같기도 한 소리를 흘렸다.
 비로소 검을 거둔 운도가 장중한 기세를 갈무리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겸손의 말이다.
 등 선생이 여전히 무겁도록 엄숙한 안색을 한 채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너의 풍운검법은 이제 완벽해졌구나. 단지 내력이 부족해서 본래의 검법이 지니고 있는 힘을 십분 끄집어내지 못할 뿐이지. 하지만 그것이야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구나."
 "모두 사부님의 가르치심 덕입니다."
 "풍운검법이 비록 절기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뛰어난 검법이 얼마든지 있고, 너보다 훌륭한 검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지난 십 년 동안 너에게 그 검법만을 가르쳐 주고 익히도록 한 건 너의 기틀을 다져 주기 위한 것이다. 너는 행여 풍운검법을 믿고 교만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소년은 청명당 안에서 하품을 하던 그 단운도가 아닌 것 같았고, 등 선생 또한 엄숙하고 위엄이 철철 넘쳐흐르는 모습이 평소의 자애롭던 등 선생이 아닌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목숨이 위급한 지경이 아니라면 절대로 너는 그 검법을 함부로 자랑해 보여서는 안 되느니라."
 벌써 여러 번 들은 말이다.
 "재삼 명심하겠습니다. 밖에서는 절대로 검법을 펼쳐 보이지 않도록 하지요."
 "그리고······."
 "예?"
 등 선생이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으므로 운도는 또 꾸지람 들을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등 선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오늘 소정이의 집에 다녀왔느냐?"
 "예, 그렇습니다만······."
 "쓸데없는 짓이다."
 "예?"
 "무정하지 못함으로 인해 너는 벌써 한 계집아이에게 한의 뿌리를 남겨주고 있느니라. 그걸 모르겠느냐?"
 "그건······."
 "너는 이곳에서 오래 살 사람이 아니다.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그 아이는 어찌할 생각이냐?"
 "하지만 여태까지 죽 살아왔지 않습니까?"
 말을 해놓고 나서 운도는 아차 하고 후회했다.
 감히 사부님의 말에 대꾸를 하다니.
 지그시 바라보는 등 선생의 눈길이 회초리보다 무서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게다가 소정이 어미의 병은 의원이 고칠 병이 아니다."
 "사부님."
 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운도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등 선생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소정이의 어머니를 치료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사부님께서 하지 못하실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가엾다는 듯 운도를 바라보던 등 선생이 혀를 찼다.
 "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어찌 하늘이 정해준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줄일 수 있단 말이냐? 그 여인의 병은 이미 골수에 스며들어 아무리 좋은 약을 먹이고 침을 맞게 해도 앞으로 며칠을 넘기기 힘드니라."
 운도는 사부가 벌써 소정이 어머니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며칠밖에 살지 못하다니, 그럼 그다음에는?'
 갑자기 막막해졌다.
 그 어린 소정이 어머니마저 여의고 나면 대체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
 아직 혼자서는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할 수 없는 어린 계집애 아닌가 하고 생각하자 소정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운도가 혼날 걸 결심하고 사부에게 말했다.
 "사부님이 내력으로 그녀의 폐혈을 뚫어주고 도인법으로 원기를 이끌어내 준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실 수 없나요?"
 "소용없다."
 사부가 딱 잘라 말했으므로 운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하여라."
 "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단운도가 안녕히 주무시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제 처소로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등 선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불쑥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소정이의 처지도 불쌍하지만 나에게는 너의 처지가 더 안타깝구나."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등 선생이 다시 탄식했다. 얼굴에 갈등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이제 곧 모든 게 드러나게 될 텐데,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나를 원망하겠지.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겠군. 아니, 그런 건 두렵지 않다. 운도가, 운도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등 선생이 고뇌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 아이가 나를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하― 이 문제는 정말 어렵구나. 무정무한. 그 말은 바로 나에게 해주어야 하는 말이거늘······. 정이 나에게 이처럼 깊은 괴로움을 가져다주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리요."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바라보는 등 선생은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한 몸에 짊어진 사람 같았다.
 "휴― 이것이 과연 누구에게 복이 되고 누구에게 화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오직 하늘이 정해준 운명에 맡길 수밖에."
 
 * * *
 
 송번성에는 명물이 한 명 있었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고, 처음 온 자라 할지라도 한나절이 지나기 전에 그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송번성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다.
 쾌도왕(快刀王).
 낯선 자는 그 별칭을 듣고 어리둥절해하기 일쑤였다.
 별칭만으로 보자면 마치 강호의 무서운 고수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쾌도왕.
 하지만 그것은 강호의 도왕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다.
 <쾌도왕>이라는 이상한 간판을 건 푸줏간의 주인을 부르는 말일 뿐이다.
 그는 사십대의 건장한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갈(鞨) 씨 성을 쓰고 있는 걸로 보아 한족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동북쪽 말갈 계통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본래의 이름은 갈포참(鞨抱懺)인데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를 '쾌도왕'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는 일견 산적처럼 생긴 자였다.
 커다란 체구는 곰을 닮았고, 부리부리한 눈과 쭉 찢어진 입, 퉁방울 같은 코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 하며, 턱을 온통 뒤덮고 있는 뻣뻣한 검은 수염은 보는 사람들의 기를 질리게 할 만했다.
 숲에서 불쑥 마주친다면 누구나 산적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포악한 자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순박하기 짝이 없는 푸줏간의 주인에 지나지 않았다.
 송번성 안에 뻔뻔하게도 <쾌도왕>이라는 낡은 현판을 내걸고 양고기와 말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를 파는 홀아비인 것이다.
 그 현판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쾌도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히죽히죽 웃었다.
 누가 보고 있어도 웃었고, 보는 사람이 없어도 웃었다.
 욕을 해도 웃었고, 골목 안 개구쟁이들이 흙을 뿌리며 놀려대도 늘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낯선 사람들은 처음에 그의 험상궂은 용모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그의 실없는 웃음에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버럭 화를 내기도 했는데, 쾌도왕이 저를 비웃는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가 쾌도왕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푸줏간에 내건 간판 말고도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고기를 썰고 다지며 뼈를 발라내는 놀라운 칼솜씨가 그것이다.
 칼을 쥐고 살을 다져 댈 때는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떨어지는 칼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얇은 칼을 쥐고 고기를 발라낼 때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다.
 그 재빠른 손놀림과 정확한 칼질 솜씨는 하늘이 낸 천부적인 재주인 것만 같았다.
 힘 또한 장사여서 이백 근이나 나가는 돼지를 이웃집 꼬마 놈 어르듯이 번쩍번쩍 들어 옮겼다.
 그는 늘 거무튀튀한 낡은 마의를 입고 있었다. 원래는 흰 것이었는데 짐승의 피에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번도 빨아 입지 않았는지, 피와 기름에 절어서 반질거리고 뻣뻣하기가 마치 철판을 두른 것 같았다.
 그의 몸에서는 언제나 역겨운 비린내가 났다.
 살이 발리고 다져진 짐승들의 고기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냉랭한 죽음의 냄새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면 다들 코를 쥐고 달아나기 바쁘다.
 그러나 쾌도왕은 그런 사람들을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을 뿐이다.
 
 송번성 중의 남통로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중 칠팔 할이 강족이나 장족이었고 한족은 몇 되지 않았는데, 그건 그곳이 원래 강족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때에 한족이 이곳까지 쳐들어와 성을 쌓은 뒤부터 강족과 한족의 경계를 이루는 변경이 된 것이다.
 중원에서도 서북쪽으로 한참 치우친 오지이면서, 늘 흰 눈을 이고 있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송번성은 강족과 한족들 사이에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한족들은 중원에서 가져온 화려한 장신구와 비단, 차 등을 팔았고, 강족들로부터 약재와 모피, 보석류를 구입해 갔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그 남통로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갈포참이 운영하는 푸줏간, <쾌도왕>이었다.
 그의 명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자랑스러운 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송번성 제일의 바보라는 명성이고, 곰 같은 체구에 걸맞게 멍청하다는 명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쾌도 솜씨 때문에 그는 더욱 유명했다.
 그가 고기를 바른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의 푸줏간 앞에는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면 쾌도왕은 더욱 신이 나서 칼질을 해댔는데, 그럴 때의 그는 마치 신들린 무당과도 같아 보였다.
 도마에 올려놓은 고기를 발라내고, 다지고, 뼈를 깎고, 자르는 솜씨가 어찌나 재빠르고 깨끗한지 그것을 보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커다란 소 한 마리를 해체하는 데에 뜨거운 밥 한 그릇 먹을 만큼의 시간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번쩍이는 절삭도(切削刀)와 세도(細刀)가 눈부시게 오가고 나면 어느새 뼈는 뼈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나뉘어져 수북하게 쌓이는 것이다.
 그런 믿지 못할 솜씨로 인해 쾌도왕 갈포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송번성에 없어서는 안 될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소년이다.
 #5
 
 
 "어, 어? 왜 이제 온 거냐?"
 쾌도왕이 기름때로 번질거리는 가죽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달려나왔다.
 푸줏간 앞에 서 있는 소년은 단운도였다.
 "그동안 잘 있었어?"
 대뜸 하는 말이 반말이지만 그래서 더욱 다정하게 들린다.
 쾌도왕이 입이 찢어지도록 헤벌쭉 웃었다.
 그에게 운도는 아들뻘밖에 안 되는 꼬마 녀석이지만 누구보다 반가운 친구이기도 했다.
 때로는 단운도가 여느 아이들처럼 짓궂게 굴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지만 쾌도왕은 한 번도 싫은 기색을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떼쓰는 아들을 바라보듯이, 큰형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내동생의 응석을 받아주듯이 그저 히죽히죽 웃으며 다 받아주었던 것이다.
 외로운 처지의 소년인 단운도에게 그런 쾌도왕은 좋은 친구이면서 또한 든든한 후견인이기도 했다.
 쾌도왕이 들뜬 음성으로 소리쳤다.
 "너야말로 그동안 잘 있었던 거냐? 왜 그렇게 꼼짝도 안 했어?"
 운도의 손을 잡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응, 바쁜 일이 있었거든."
 "그래도 시간 내서 좀 오지 않고."
 "왜? 보고 싶었어?"
 "그럼. 눈깔 빠지는 줄 알았다."
 "쳇, 그런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저기 송번주가의 장 소저에게 해야지."
 운도가 턱짓으로 길 건너의 허름한 주가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쾌도왕의 시커먼 얼굴이 금방 숯불처럼 달아올랐다.
 두 손을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온몸을 비비 꼬며 어쩔 줄 모르는 꼴이 우습기만 하다.
 그는 송번주가의 점원인 장 씨 성의 아가씨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머리가 워낙 철부지 아이와 같아서 제대로 제 마음을 전할 줄 몰랐다. 그저 어쩌다 장 소저를 보게 되면 입이 있는 대로 찢어지면서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죄지은 자처럼 쩔쩔맸다.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은 달구어진 철판 위에 올라선 곰이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장 소저는 물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들어가자, 들어가."
 쾌도왕이 운도의 손을 마구 끌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쾌도왕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일손을 완전히 놓은 채 운도와의 이야기에만 푹 빠져 있는 것 또한 놀기 좋아하는 아이와 같았다.
 운도가 해주는 이야기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렇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런, 너무 늦겠다. 사부님에게 혼날라."
 운도가 일어서자 쾌도왕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벌써 가려고?"
 "마을까지 한나절 길이잖아.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안 그러면 사부님이 걱정하셔."
 "네 사부 늙은이는 얄밉다. 때려줄까 보다."
 "뭐라고?"
 "그렇잖아. 너를 꼼짝 못하게 하니 말이야. 제기랄, 하루나 이틀쯤 나하고 놀다가 들어가면 어때서 그런담."
 "틈나면 또 올게."
 "닷새나 열흘쯤 뒤에?"
 "싫어? 그러면 안 오지, 뭐."
 "아니, 아니다. 그냥 와라. 그런데 좀 자주 와라."
 "너무 멀어."
 "그럼 내가 가서 업고 올까? 갈 때도 업어다 줄게."
 "쳇, 내가 뭐 어린애인 줄 알아? 나도 이젠 다 컸단 말이야."
 그 말에 쾌도왕이 헤헤 웃었다. 운도를 아래위로 바라보더니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어?"
 "헤헤, 아직도 다람쥐만 한 게 언제 어른이 된단 말이냐? 네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나는 늙은이가 되어 있을 테니까 안 우스워? 그러지 말고 너는 그냥 이대로 있어라. 크지 마. 지금이 제일 좋아."
 "쳇, 어서 고기나 썰어줘. 다섯 근이야."
 "알았어. 제일 좋은 걸로 썰어줄게."
 쾌도왕이 비로소 칼을 잡았다.
 두리번거리더니 걸어놓은 돼지고기 중에서 맛있어 보이는 살점을 뭉텅 썰어 도마에 올려놓는다.
 얼핏 보기에도 십여 근은 족히 나가 보이는 큼직한 덩어리였다.
 "이건 너무 많잖아? 나 돈 없어."
 "다섯 근이다."
 "이게?"
 "내가 다섯 근이라면 다섯 근인 거야."
 두말 말고 얼른 가져가라는 듯 종이에 둘둘 말아 막무가내로 운도의 품에 안겨준 쾌도왕이 홱 돌아서서 팔짱을 끼고 섰다.
 운도가 떠나는 걸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운도는 그런 쾌도왕의 큼직한 등을 바라보며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 걸 느꼈다.
 남들은 모두 바보라고 놀리지만 운도에게 있어서 쾌도왕은 언제든 떼를 쓰고 응석을 부려도 좋은 믿음직한 친구였다.
 "잘 있어. 또 올게."
 다음에 올 때는 사부님이 따서 말린 국화차라도 한 봉지 몰래 가져와 건네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제3장 이별
 
 
 따분할 만큼 평온하고 조용한 날들이 소리없이 지나갔다.
 운도는 등 선생 모르게 매일 소정의 집에 찾아가 집안 살림을 보살펴 주었다.
 염 부인의 병색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운도는 소정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아팠다. 며칠 뒤에는 네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이라고 차마 말해줄 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철부지 소정이는 운도가 매일 찾아와 주는 게 그저 좋기만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병색이 날로 깊어져 가는 것과는 달리 소정이의 얼굴은 날로 밝아졌다.
 하루는 염 부인이 돌아가려는 운도를 불러 세웠다.
 "이리로 가까이 와주지 않겠니?"
 소정이를 내보낸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운도가 다가가자 온기라고는 없는 싸늘한 손을 내밀어 운도의 손을 잡았다.
 생기없는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나는 이제 며칠 살지 못할 거야."
 "알고 계셨군요?"
 "등 선생이 말해주었단다."
 "아, 사부님이 다녀가셨나요?"
 "소정이 모르게 살짝 다녀가시기를 여러 번 했단다. 너에게도 또 네 사부에게도 갚을 수 없는 신세를 졌으니 이 고마움을 어찌······."
 기어이 염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운도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무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사부님도 그러실 거예요."
 "고맙구나. 죽으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너와 네 사부님의 공덕에 보답을 하겠다."
 "그 말씀으로 이미 모든 걸 다 갚으셨어요.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염 부인을 위로하는 운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정이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망설이던 염 부인이 가쁜 숨을 헐떡이고 나서 겨우 말했다.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니?"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고맙구나."
 여느 때와 다르게 입가에 미소마저 떠올리고 운도를 바라보는 염 부인의 눈빛에 따듯한 정감이 가득했다.
 운도는 오늘따라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달리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 말투가 투박한 산골 여인의 그것과는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게 그랬다.
 염 부인이 한동안 망설이더니 말했다.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사부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분에게는, 그분에게는······."
 "예? 무슨 말씀이세요?"
 "부탁이다. 그저 내 말을 듣기만 해다오."
 "······."
 "네 사부님은 한이 많으신 분이다. 그것을 홀로 삭이며 오늘날까지 아무런 내색 없이 살아오셨으니 실로 대단한 분이시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사부님을 알고 계셨어요?"
 운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염 부인은 거기에 대해 대꾸하지 않고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하느니라."
 "예?"
 "아무도,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아무에게도 네 속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건 네 사부님에게도 마찬가지야. 그는, 그는······."
 염 부인은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운도는 그녀의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거릴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참 딱하지 뭐야.'
 가쁜 기침을 하고 숨을 할딱거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염 부인에 대한 측은지심이 더욱 커진다.
 한참 만에야 기침을 진정시킨 염 부인이 더욱 기운이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 말을··· 내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예, 그러지요."
 운도가 재빨리 대답한 건 염 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염 부인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 탁자를 밀치고 그 뒤의 벽을 뜯어내라."
 햇빛도 닿지 않는 음침한 구석에 지저분한 잡동사니를 쌓아둔 낡은 탁자 한 개가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운도가 그녀의 뜻대로 그것을 한쪽으로 밀쳐 내자 뒷벽이 드러났다.
 어떻게 이 벽을 뜯어내야 하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흙벽돌 한 개가 다른 것들과 달라 보였던 것이다.
 테두리를 봉하고 있는 석회의 색깔이 옅다.
 운도가 그것을 두드리자 금방 흔들거렸다. 손쉽게 빠져나온다.
 그 안에는 오동나무로 만들고 검은 옻칠을 한 작은 함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이상하구나. 어째서 이런 곳에 이런 것을 숨겨놓고 있었을까?'
 더럭 의심이 들었지만 염 부인의 뜻대로 그것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마도 금붙이 같은 귀물을 감추어둔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열어보아라."
 나무 함을 바라보는 염 부인의 눈길이 뜨거워졌다. 생기마저 감돈다.
 운도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 탄성을 터뜨렸다.
 "아!"
 나무 함 안에는 한 권의 얇은 책과 한 개의 영롱한 빛을 발하는 옥패가 들어 있었다.
 귀면(鬼面)을 하나 가득 새겨놓은 녹색의 작은 옥패였는데, 전면과 후면에 상고시대의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어찌 보면 글자가 아니라 구불구불한 문양 같기도 했다.
 운도에게서 그것들을 받아든 염 부인이 떨리는 손으로 한동안 쓰다듬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낡은 책 표지에 그녀의 눈물이 떨어져 얼룩진다.
 염 부인이 그것들을 운도에게 내밀었다.
 "나는 이제 며칠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더 이상 지키고 있을 수가 없지."
 "이게 무엇입니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또 소정이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이란다."
 운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정이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이것을 그 아이에게 맡길 수가 없구나."
 "제가 잠시 보관했다가 소정이가 이것들을 물려받을 때가 되면 반드시 전해주겠습니다."
 "부디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다만······."
 "말씀하세요."
 "소정이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이런 일을 말해서는 안 된다. 네 사부님에게도 마찬가지야.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너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어야 한다. 약속해 주겠느냐?"
 "그건 좀······."
 운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부님에게도 감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결국 사부님을 속여야 하는 일 아닌가.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안다면 사부가 몹시 실망할 것이다.
 그의 망설임을 본 염 부인이 간절하게 말했다.
 "죽는 자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내가 이 세상에서 품는 마지막 소원이 바로 그것이다."
 염 부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요. 반드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지요."
 "나는 네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
 "안심하십시오."
 비로소 염 부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운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 책에 있는 것은 하나의 내공심법이란다. 운기의 비결과 신공의 운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너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너는 그것을 읽고 익혀도 좋다. 그리하여 대성하게 된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너는 가히 천하무적의 내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아!"
 운도가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6
 
 
 "당신, 당신은··· 강호의 여협이었습니까?"
 그건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누가 염 부인이 강호와 관련된 여인이라고 짐작인들 했을 것인가.
 그녀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염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사람은 감추어야 할 비밀을 평생 지니고 살기도 하지. 너는 어떠냐? 너 또한 네 사부님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있지 않으냐?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런 걸 내색하지 않았지? 네 사부님도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보기에 네 사부님은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고수일 것이다. 틀림없어.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고 있지?"
 없다. 아무도 없다.
 운도는 저는 물론 등 선생 또한 그런 것을 철저히 비밀로 지켜오고 있었다는 걸 생각했다.
 염 부인도 그런 사람이었으니 달리 이상하게 여길 게 없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아주머니는 제가 무공을 배우고 있다는 걸 아셨군요?"
 염 부인이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보일 뿐이다.
 "안심해라. 나 또한 아무에게도, 소정이에게까지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휴―"
 "너는 절대로 그 책을 네 사부님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아니, 세상사람 누구에게도 보여주어서는 안 돼. 그걸 맹세해라."
 염 부인의 안색이 엄숙해졌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장중한 기색을 띤 것은 물론, 운도를 바라보는 눈길마저 비수처럼 싸늘했다.
 이번에는 부탁이 아니라 강요였다.
 약속이 아니라 맹세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운도는 이 일이 심중한 것임을 느꼈다.
 거짓으로 맹세를 해서도 안 되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미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이제 와서 못하겠노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가 역시 엄숙한 낯빛이 되어 천천히, 무겁게 말했다.
 "맹세하겠습니다."
 "아, 이제야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게 되었구나."
 염 부인의 얼굴이 비로소 긴장을 풀고 환하게 밝아졌다.
 운도는 그것이 말로만 들었던 회광반조의 현상이라는 걸 직감했다.
 "너는 그 책의 내용을 모두 암기한 다음에 그것을 불태우는 게 좋겠다."
 "제가 품에 지니고 있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시는 건가요?"
 "그렇다. 아직 너는 소년에 불과하고 그것을 지킬 만한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구나. 다만 훗날 네가 외운 그 구결들을 한 자도 빠짐없이 소정이에게 전해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좋지 않은가요?"
 "아직은 안 된다. 소정이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그 아이가 인연이 닿아 좋은 스승을 만나고 그로부터 십여 년 동안 열심히 수련하여 고수의 소리를 들을 만큼 성장했다면 그때는 가능하지."
 운도는 이 안에도 어떤 사정이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젖을 떼려고 하는 아이에게 이유식 대신 밥을 퍼 먹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되었다. 비록 내 한이 깊고 크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더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 늦었지만 이렇게 너를 만나게 된 일을 감사할 수밖에."
 돌아가라는 듯 그녀가 눈을 감고 외면했다.
 운도가 무거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소정이 반갑게 달려왔다.
 "오빠, 벌써 가려고? 어머니는 어떠셔?"
 "응. 지금 막 잠드셨어."
 "그럼 나하고 더 놀다가 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정이를 측은한 얼굴로 바라보던 운도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사부님이 기다리셔. 꾸중 듣기 전에 돌아가야지."
 "그럼 내일 또 놀러 올 거지?"
 "시간 봐서 올게."
 서운한 얼굴로 내내 바라보고 서 있는 소정이를 두고 돌아가는 운도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 * *
 
 그로부터 또 며칠이 훌쩍 지나간 어느 날이었다.
 단운도를 불러 앉힌 등 선생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불쑥 말했다.
 "이제 나는 떠나야 한다."
 "예?"
 뜻밖의 말에 운도는 제 귀를 의심했다.
 멍하니 사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운도를 지그시 바라보는 등 선생의 얼굴에 회한과 쓸쓸한 기색이 가득해졌다.
 "십년지약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십년지약이라니요? 그런 말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잖아요?"
 운도의 마음에 처음으로 사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 단운도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준 등 선생이 다시 말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만큼 비밀을 더 갖게 되는 것이란다. 또한 그만큼 후회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기도 하지.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는데, 아쉬움과 쓸쓸한 감회가 더욱 깃든 음성이었다.
 "네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내가 해준 말을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이다. 잊지 않고 있겠지?"
 "무정무한 말씀인가요?"
 "그렇다. 오직 그것만이 너를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명심하여라."
 "그런데 꼭 가셔야 하나요? 정 그렇다면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그건 안 된다."
 등 선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색마저 근엄해졌다.
 운도가 잔뜩 볼을 부풀렸다.
 "대체 누구와의 약속이기에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좋아요. 그럼 가셨다가 언제쯤 돌아오실 건가요?"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
 사부의 말에 운도가 깜짝 놀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이것이 나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구나."
 "원수와의 약속인가요?"
 등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운도는 제멋대로 그럴 것이라고 믿어버렸다.
 "이기지 못할 자라면 달아나면 되지 않겠어요? 사부님, 그가 찾지 못할 곳으로 달아나요. 제가 끝까지 사부님을 따르며 수발을 들어드리겠어요. 예?"
 옷소매를 흔들며 떼를 쓰듯 조르는 운도를 멍하니 바라보던 등 선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럴 수는 없지. 장부가 되어서 어찌 제 입으로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있단 말이냐?"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그게 더 낫지 않겠어요?"
 "네 이놈!"
 등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 쳤다.
 "너의 짐작처럼 내가 원수를 만나러 가든 그렇지 않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약속이 중요한 거야. 내가 여태까지 너를 하찮은 소인배로 키웠더란 말이냐? 나의 가르침이 네 귀에는 다 쓸데없는 소리였더란 말이냐?"
 "사부님······."
 단운도가 고개를 떨어뜨렸는데, 커다란 눈에 금방 눈물이 가득 고였다.
 등 선생은 여전히 노여운 기색을 풀지 않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릴 줄 아는 게 장부이니라. 버려야 할 때는 제 목숨이라도 가볍게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게 또한 장부의 길이다. 내가 한 말을 내 목숨과 같이 여겨야 비로소 사내라고 할 수 있느니라. 검을 휘둘러 열 사람의 목을 치고,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일보다 내가 한 말 한마디를 지키는 게 더욱 대장부다운 일이다."
 "제자가 실언했습니다."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등 선생은 아주 바빴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면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으므로 운도는 사부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늦도록 사부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마루에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서 기다리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들기도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보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사부님이 왔다는 생각에 반가워서 뛰어나가 보지만 그때는 이미 등 선생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닷새쯤 지나갔을 때 등 선생이 단운도에게 말했다.
 "내일 내가 떠나고 나면 너는 이것을 가지고 즉시 호남 광문산으로 가거라."
 "내일 가시나요?"
 단운도의 가슴에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의 손에 밀봉한 서찰 한 장을 쥐어주면서 등 선생이 다정하게 말했다.
 "광문산에 도착하면 사람들에게 물어 풍사곡이라는 곳으로 찾아가라. 그곳의 주인이 위진평이라는 사람인데, 그에게 이 서찰을 건네주면 된다. 그가 너를 잘 돌보아줄 것이다. 거기 있는 동안 너는 그를 사부로 여기고 나를 모시듯이 해야 하느니라."
 "사부님······."
 "풍사곡주를 만날 때까지 너는 혼자서 먼 길을 가야 할 텐데···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등 선생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누가 물어도 너와 나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원수 때문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사부의 말이 애매했으므로 단운도는 여전히 그럴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뜸을 들였던 등 선생이 탄식을 섞어 말했다.
 "화가 너에게 미칠까 봐 나는 그게 걱정이 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결코 누구에게도 사부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며, 제 신세에 대해서도 털어놓지 않겠습니다."
 말하는 동안 서찰을 받아 쥐고 있는 단운도의 손이, 어깨가 와들와들 떨리고,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여태까지 한 번도 이별이라는 걸 겪어보지 않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사부와 함께 살았으면서 한 번도 떨어져 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는 제 친자식인 것처럼 언제나 저를 데리고 다녔다.
 어려서는 업고 다니고 걷게 되면서부터는 손을 잡고 다닌 사부 아니던가.
 그런 사부가 이제 죽게 될지도 모르는 약속을 위하여 저를 떼어놓고 홀로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
 그 사실이 사부와 헤어지게 된다는 것보다 더 운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말을 해주지 않으니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어떤 약속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어 더욱 답답했다.
 무엇보다도 단운도는 사부님 같은 사람이 남과 원한을 맺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사부님은 그 자체로서 인의군자의 표상 같은 분이 아니던가.
 등 선생이 다정한 손길로 단운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래듯 말했다.
 "나의 약속은 중하기가 이 천하와도 같아서 피할 수가 없단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날을 기다리며 용맹정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단운도의 얼굴에 한 가닥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등 선생이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
 "명심해라. 네 재주는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저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자만큼 바보는 없지. 너는 언제나 네 재주의 반을 감추고 꺼내 보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것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은 충분히 놀라게 되겠지."
 단운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그렇게 대단한 재주가 있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해서였다.
 어려서부터 사부와만 붙어살았을 뿐, 누구와 비교하거나 비교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교 대상이라고는 사부가 있을 뿐인데, 단운도에게 있어서 등 선생은 하늘같은 존재이기만 했다. 그 앞에만 서면 제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다.
 그러니 그는 자기의 재주를 칭찬하는 사부의 말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등 선생이 다시 말했다.
 "아니, 반도 많을지 모르겠구나. 너는 네 재주의 칠 할을 감추고 삼 할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가 네 신상에 닥칠 것이니 함부로 혈기를 부리지 말 것이며, 어린 마음으로 우쭐거려서 네 자신을 망치는 짓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세상의 인심은 사납고 사람들은 교활하기가 여우보다 더하다. 아, 나는 네가 그들 속에서 어떻게 네 자신을 잘 지켜 나갈 수 있을지 그게 걱정되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단운도는 사부의 탄식 속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진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제자는 사부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언제나 그것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잠시 무엇을 생각하던 등 선생이 머뭇거리며 어린 제자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과연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휴―"
 마음을 정한 듯 한참 뒤에야 한숨을 쉰 등 선생이 입을 열었다.
 #7
 
 
 "혹시 소정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너에게 알 수 없는 말 같은 걸 하지는 않았더냐?"
 운도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며칠 전 소정이의 집에서 있었던 염 부인과의 일을 사부가 혹시 아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등 선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운도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운도는 그 짧은 순간에 수없이 갈등해야 했다.
 이제 내일이면 사부와 헤어지게 되지 않는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부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말해야 할지 말지 언뜻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염 부인에게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건 염 부인과 나 사이의 사사로운 일이니 사부님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판단한 운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염 부인은 병이 위중해서 의식이 가물거리는 터라 여전히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
 등 선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도를 바라보는 눈길에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기색이 깃들어 있지만 달리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제4장 계획된 도움
 
 
 다음날이 되었다.
 운도가 일어나 보니 아직 이른 아침인데 등 선생은 이미 길 떠날 채비를 다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
 그런 사부를 보는 운도의 가슴에 슬픔이 북받쳐 올라왔다.
 등 선생이 애써 감정을 억제하는 듯 더욱 근엄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풍사곡에 가면 특히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
 "네가 일어나기 전에 떠나려고 하다가 그 말을 해주어야겠기에 그러지 못하고 기다렸느니라."
 운도는 사부의 갑작스런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풍사곡주 위진평은 너를 잘 대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네 심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 그는, 그는······."
 그 말을 해주기 위해 떠나는 걸 미루고 기다렸다니 매우 중요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등 선생은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탄식으로 대신했다.
 "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래 봐야 제 얼굴에 침 뱉는 일과 다름없는 것을······."
 "사부님?"
 "아무튼 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운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부의 말속에서 앞으로 제가 몸을 의탁하고 있어야 할 풍사곡주 위진평이라는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사람에게 저를 보내려고 하는 사부의 의도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부에게 어떤 생각이 있으니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컸다.
 그렇다면 아무리 큰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야 하리라.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언젠가 사부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훌륭하게 성장한 자신을 보여드려야 할 것 아닌가.
 "부디 몸조심하여라. 매사에 신중하고 무정무한이라는 말을 잊지 말거라."
 등 선생이 몸을 일으켰다.
 "사부님······."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며 부르는 단운도의 음성에 울음이 섞였다.
 목이 메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사부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지금 등 선생의 마음도 그와 같다는 걸 알 수는 없었다.
 등 선생의 안색은 어디까지나 단호하고 엄숙했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듯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단운도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부에게 처음 원망을 느꼈다.
 우두커니 서서 사부의 뒷모습을 제 눈 속에, 가슴속에 박아 넣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부가 담장 밖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아!'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사부의 모습은 이미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언덕 아래로 구불구불 나 있는 뽀얀 길을 따라 허청허청 멀어져 가고 있다.
 그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문 앞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단운도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부님, 부디 보중하소서."
 중얼거림과 함께 털썩 무릎을 꿇는다.
 사부가 사라진 그 길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날 운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멍하니 대문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한시도 저 아래의 텅 빈 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사부가 웃으며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가도 사부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휴―"
 운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사부님이 떠났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 내일이면 저도 그동안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벽지의 무늬며 휘장의 실오라기에 이르기까지 서운하지 않은 게 없었다.
 들보 위를 재빠르게 달려가고 달려오는 쥐들의 소란마저 정겹게 느껴지는 밤인 것이다.
 운도는 사부님의 등에 업혀 이 마을로 들어서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부터 지난 십 년 동안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기껏 가본 외지라고는 송번성이 다일 만큼 철저하게 이곳 화량촌에서 붙박이로 살았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운도는 일찍 집을 나섰다.
 그가 정이 듬뿍 든 집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향한 곳은 소정이네 집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저만큼 낯익은 소정이네 집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운도의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리며 뛰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답답해졌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냉랭하고 싸늘한 무엇이 집을 온통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소정아!"
 다가간 운도가 활짝 열려 있는 문 앞에 서서 소리쳐 불렀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마당을 건너 방문을 왈칵 열자 안에 고여 있던 냉랭한 기운이 갑자기 밀려 나왔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고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어둠 속에 소정이는 없었다.
 "아!"
 운도가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침상 위에 염 부인이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턱 밑까지 이불을 덮은 채 두 손과 두 발을 곧게 펴고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셨다!'
 운도는 즉각 그걸 알 수 있었다.
 산 사람의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가 겁이 난다.
 '소정이는?'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불안해진다.
 
 "등 선생을 따라가던데?"
 "예?"
 "어제 아침 일찍 들일을 하기 위해 나가던 길에 마주쳤지.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기만 하시더구나."
 "소정이를 데리고 가셨다고요?"
 "그렇다니까. 그 어린것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더구나. 등 선생의 손을 잡은 채 훌쩍거리며 울고 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아―"
 운도는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부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를 데리고 간 건지 알 수 없지만 혼자 남게 된 소정이를 불쌍하게 여겨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마도 소정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밤새 울고만 있었으리라.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내려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사부님이 그 아이를 잘 돌보아줄 사람을 찾아 맡기겠지. 소정이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누구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더라도 혼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또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는 운도였다.
 운도의 기별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염 부인을 땅에 묻는 동안 운도는 내내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고, 그 처지가 가여워서 한숨을 쉬었다.
 보잘것없는 흙무덤 한 개가 언덕 위에 만들어졌다.
 장례 절차니 사흘장이니 하는 건 다 필요없었다.
 그날로 염을 하고 땅을 팠던 것이다.
 하긴, 죽은 자가 사흘장을 알 것이며 장례식의 절차를 지켜볼 것인가.
 염 부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드리느라고 운도는 그날 오후 늦게야 화가촌을 떠날 수 있었다.
 
 * * *
 
 "나 왔어."
 불쑥 들려오는 반가운 음성.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던 쾌도왕이 번쩍 눈을 떴다.
 "운도구나!"
 우당탕―
 황급히 일어나느라고 나무 의자가 자빠지고 선반에 머리를 부딪쳐 그 위의 그릇이 온통 쏟아져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쾌도왕은 개의치 않았다.
 뒹구는 그릇들이 깨지는 것도 상관없이 마구 밟으며 달려오더니 운도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며 껄껄 웃었다.
 "어허허허― 조금 전에 꿈을 꾸었는데, 네가 보이지 뭐냐? 그러더니 정말 이렇게 왔네. 그참, 내 꿈이 신통방통하다니까? 우허허허―"
 그러더니 운도의 몰골을 살펴보고 당장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운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것이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이게 뭐야? 어디 가?"
 말끔한 옷을 입었고, 등에 봇짐까지 진 것이 어디 먼 곳으로 가는 사람 같았다.
 운도가 울 듯한 얼굴을 끄덕였다.
 "응. 나 이제 다시는 여기 못 올지도 몰라."
 "뭐라고? 아니, 왜?"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쾌도왕이 멍하니 운도를 바라보았다.
 "잘 있어."
 울먹인다.
 쾌도왕이 운도의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못 가."
 "······."
 "네 사부가 내쫓았구나? 그럼 여기서 나랑 살면 되지. 아무 데도 가지 마라."
 "그런 게 아니야."
 "아니든 뭐든 상관없어. 못 가."
 "사부님의 명령이야. 지키지 않을 수 없어."
 "응? 그게 뭔데?"
 "당분간 어디 가 있으라는 거야."
 "어디? 멀어?"
 "응. 호남."
 "호남?"
 쾌도왕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얼마나 먼데? 한 닷새쯤 가면 되는 데냐? 그럼 내가 같이 가줄까?"
 "바보."
 운도가 피식 웃었다.
 "오천 리는 족이 될 거야."
 쾌도왕의 입이 딱 벌어졌다.
 "오천 리라고? 그렇게나 멀어? 아니, 그 먼 데를 너, 쬐그만 다람쥐 같은 녀석이 혼자서 가겠다고 나섰단 말이냐?"
 "쳇, 다람쥐 아니라니까. 나도 이제 다 컸다고."
 흘겨보는 운도에게 쾌도왕이 헤벌쭉 웃어 보였다.
 "그래도 나한테는 작고 귀여운 다람쥐다. 너 거기 가지 마라."
 "가야 해. 사부님이 가라고 하셨다니까?"
 "네 사부 늙은이를 내가 좀 만나야겠다. 만나서 혼내주겠어. 아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 쬐그만 다람쥐를 그 먼 데까지 혼자 보내다니? 아무래도 네 사부 늙은이가 노망이 든 모양이다. 그러니 말 들을 필요 없어. 가지 마라."
 "바보야!"
 운도가 버럭 소리쳤다.
 사부에게 함부로 말하는 건 그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릴 걸 내가 괜히 작별 인사라도 하겠다고 찾아왔지 뭐야. 저리 비켜."
 쾌도왕의 손을 뿌리친 운도가 쌀쌀맞게 말했다.
 #8
 
 
 "어쨌든 잘살아. 남들한테 놀림만 당하지 말고 정신 좀 차리고 살란 말이야. 그리고 건강해야 해. 언제든 다시 만날 날이 올 거 아냐? 그때 골골거리는 병자가 되어 있으면 막 화낼 거다. 알았지?"
 "어? 어."
 쾌도왕이 얼떨결에 대답하고 멍하니 운도를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어준 운도가 돌아섰다.
 매정해 보인다.
 하지만 어차피 떠나야 할 사람 아닌가. 미련을 두는 건 자기 자신에게도 쾌도왕에게도 가슴이 더 아파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보란 듯이 씩씩하게 걸어서 멀어져 갔다.
 이제 송번을 떠나 저 먼 호남 땅까지 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엇보다도 쾌도왕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가슴 아팠다.
 "잘살아."
 뒤돌아보지도 않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속에 울음이 묻어나려고 했다.
 그동안 깊이 정들었던 또 한 사람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쾌도왕은 눈을 끔벅거리며 멀어지는 단운도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인지, 운도가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자꾸만 멀어지는 단운도에 대한 섭섭함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운도가 드디어 사람들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쾌도왕은 눈을 끔벅거리며 그가 제 앞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위험할 텐데······. 저 녀석이 혼자 가기에는 너무 먼 곳 아닌가. 안 좋아. 이건 정말 안 좋은 일이야."
 그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닌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번쩍이다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더니 제 이마를 딱 쳤다.
 "그렇지.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하면 되겠군. 마침 송번에 와 있으니 잘된 일이야."
 중얼거리는 쾌도왕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누가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다시는 그를 두고 바보라고 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다시 푸줏간 안으로 들어가는 쾌도왕의 눈빛이 흐리고 멍해졌다.
 입마저 헤벌린 채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는 본래의 그의 모습이었다.
 
 * * *
 
 송번성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단운도는 홀로 길을 가면서도 생각은 내내 사부님과 천하에 의지할 곳 없게 된 어린 소정이에게 가 있었다.
 사부가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더욱 애가 탔고, 소정이의 처지를 생각하면 가여움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소정이는 영리하고 심성이 착하니 어디에 가 있든지 사랑을 받으며 잘살 거야."
 그렇게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부님이라면 반드시 원수를 무찌르고 이기실 거야."
 그는 여전히 사부가 원수와의 대결을 하기 위해 떠났다고 믿고 있었다.
 사부의 승리를 믿지만 그 믿음의 한편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사부의 말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야!"
 운도가 버럭 소리쳤다.
 "사부님은 반드시 돌아오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어둠의 속삭임.
 '그렇다면 어째서 너에게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고 그 먼 호남의 끝까지 가라고 했지? 어째서 너에게 풍사곡주 위진평이라는 사람을 사부처럼 모시라고 했지? 어째서?'
 단운도는 그 어둠의 속삭임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네 사부는 돌아오지 못하는 거야. 원수가 찾아와서 너까지 해칠까 봐 그 먼 곳으로 피신시키는 거지. 안 그래?'
 "시끄러워!"
 운도는 제 귀를 틀어막고 마구 달려갔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산속의 오솔길이었다.
 사천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이곳은 어디를 가나 편한 길이 없다.
 골짜기를 건너고 가파른 산 능선을 넘어야 하며 울창한 삼나무 숲 속을 종일 헤매기 일쑤였다.
 지난 이틀 동안 내내 그렇게 험하고 인적 드문 길을 혼자 갔으면서도 호랑이나 곰 같은 산짐승 하나 만나지 않았고, 산적 한 명 만나지 않았다는 게 행운이라고 여겨질 만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단운도는 비로소 험한 관문이나 마찬가지인 천태산을 넘을 수 있었다.
 발아래 콸콸거리며 흘러가는 급한 물길이 보였다.
 이리저리 구부러지며 산을 휘돌아가고 있는 민강(岷江)이다.
 비로소 길이 걸을 만해졌다. 마차가 다니고 통행하는 인마도 많아진다.
 조금만 더 가면 진강관(鎭江關)이 나오고, 반나절쯤 더 가면 점장대(點將臺)를 지나게 된다.
 그러면 저녁 무렵에는 무현(茂縣)에 도착할 수 있다.
 배불리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운도는 무현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진강관이 저 앞에 보였다.
 가파른 산비탈에 나 있는 외길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성벽과 망루가 위압적이다.
 관 앞에는 그곳을 통과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곳을 지나야 비로소 중원이라고 부르는 땅을 밟게 되는 것이라 진강관은 오가는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부분 성민이거나 상인들이지만 그들 중에는 가끔 강호의 무리로 보이는 자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예외없이 수문장의 검색을 받아야 한다.
 단운도는 검색을 기다리는 사람들 뒤에 섰다. 그 뒤로 사람들이 계속 붙어 서고 있었다.
 두어 식경이나 기다려서야 겨우 차례가 되었다.
 단갑으로 무장하고 칼을 찬 병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고, 서탁에 서기로 보이는 사람이 문사건을 쓰고 앉아서 부지런히 통행인 명부를 작성하고 있었다.
 운도가 그 앞에서 서자 서기가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이름."
 "단운도입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야?"
 "송번입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성도로 갑니다."
 "무슨 일 때문에?"
 "호남으로 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것이지요."
 "응? 호남?"
 서기가 붓을 놓고 운도를 바라보았다.
 "너 혼자서 말이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단운도는 고작 열대여섯 살 먹은 소년이 아닌가.
 그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서 오천여 리에 이르는 길을 가겠다고 나섰으니 누구나 의아해할 만하다.
 운도가 당찬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다 컸습니다. 길이 있다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어요."
 "이놈 봐라?"
 그의 당돌한 말에 서기가 빙긋 웃었다.
 "이 녀석아, 호남이 무슨 이웃 마을쯤 되는 건 줄 아느냐?"
 "그래도 가야 합니다."
 "좋다. 그럼 통행패는 있느냐?"
 "예?"
 "관을 통과하려면 통행패가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겠지? 송번성에서 왔다니 그곳의 참령 나리가 발행해 준 통행패를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그건······."
 "원래 너 같은 아이 녀석들은 통행패가 없어도 된다. 물론 보호자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때의 얘기지. 하지만 혼자라니 예외는 없어. 통행패가 있어야 보내줄 수 있다."
 난감한 일이었다.
 통행패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도 거기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운도는 그저 길이 있으니 가면 되는 것인 줄 알았을 뿐, 이런 귀찮은 절차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우물쭈물하자 서기가 더 볼 것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가서 보호자를 데리고 와. 그러지 않으면 보내줄 수 없다."
 운도가 울상을 하고 애원했다.
 "꼭 가야만 하는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고작 생각해 낸 말이 그것뿐이다.
 서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녀석아, 네가 죄를 짓고 달아나는 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죄라니요? 저는 그런 것 모릅니다."
 정색을 하고 펄쩍 뛰자 서기 역시 정색을 하고 따져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너 혼자 이 먼 곳까지 온 거지? 게다가 무엇 하러 호남까지 가려는 거냐?"
 "그건······."
 운도는 사부님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물쭈물하자 서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죄가 없다면 당연히 송번성의 관아에 가서 통행패를 만들어 달라고 했겠지. 죄가 있으니까 몰래 빠져나온 것 아니냐?"
 "억울합니다."
 "당장 끌고 가서 조사를 해야 하지만 네가 아직 어린 녀석이라 그 정도는 봐주겠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정 이곳을 지나가겠다면 보호자를 데리고 와라. 물론 통행패를 발급받아 가지고 말이지."
 손사래를 친 서기가 귀찮다는 듯, '다음 사람' 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운도는 난감했다.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성도로 갈 수 없으니 앞이 깜깜해지기만 한다.
 그때였다.
 "아니,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뒤쪽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운도야, 네가 여기에 웬일이냔 말이다."
 "응?"
 운도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저 뒤쪽에서 부유해 보이는 상인 한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다.
 그래서 더욱 의아해지는데 상인이 종으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자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종이 바삐 달려온다.
 "도련님, 숙부께서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숙부?"
 종이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송번을 지나면서 도련님의 아버님으로부터 걱정을 들었답니다."
 운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의 손을 마구 끈다.
 "어, 어?"
 운도는 얼떨결에 따라가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화려한 옷을 입은 상인은 얼굴이 희고 귀티가 나는 것이 대상단을 거느리는 화주쯤 되어 보였다.
 과연 그의 주위에는 몇 사람의 건장한 종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체격이 좋은 청년들이었다.
 상인이 운도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이 녀석, 형님은 급한 일을 시켰는데 네 녀석은 고작 이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볼기를 맞아야겠구나?"
 "저를······."
 '아세요?' 하는 말은 상인의 두툼한 손에 입이 막혀서 마저 하지 못했다.
 상인이 연신 눈짓을 하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관을 나가는 게 급하지 않으냐?"
 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라."
 비로소 운도는 그가 저를 도와주려 한다는 걸 알았다.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황 대인이시군요?"
 상인의 차례가 되자 그를 본 서기가 반갑게 일어서서 아는 체를 했다.
 "번거롭게 줄을 서시다니······ 그냥 종을 보내서 말씀만 전하시면 될 걸 그랬습니다."
 "허허, 국법인데 어디 그럴 수 있소? 다들 줄을 서니 따라야지. 내가 어디 특별한 사람이오?"
 "하하, 역시 황 대인이십니다."
 황 대인이라고 불린 상인이 품에서 전낭 한 개를 꺼내 서기에게 건네주었다.
 "다들 이렇게 수고하는 덕에 내가 편히 오가면서 장사를 할 수 있으니 고맙지 뭐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내 감사의 표시로 알고 받아두시오."
 "이런, 이런. 매번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기는 재빨리 전낭을 품속에 찔러 넣고 있었다.
 "저녁에 번을 마친 병사들과 술 한잔하면서 오늘의 노고를 푸시구려."
 "감사합니다. 황 대인 같은 분 때문에 저희가 이곳에서 고생하는 보람이 있지요."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뜻밖에 조카 녀석을 만났지 뭐요."
 "조카라구요?"
 황 대인이 손짓을 했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단운도를 본 서기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니, 저 녀석이 황 대인의 조카란 말입니까?"
 "그렇다오. 오래전에 송번성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 한 명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는데, 나보다 한 살 나이가 많은지라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지. 이 녀석이 바로 그 형님의 자식인데, 송번성에서 안 보이더니 여기에 와 있지 뭐겠소?"
 "그랬군요."
 서기가 탓하는 얼굴로 단운도를 힐끔 바라보았다.
 왜 진작 황 대인과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것이다.
 "저 뒤에서 듣자 하니 이 녀석이 급한 마음에 통행패도 발급받지 않고 그냥 온 모양인데 어쩌겠소? 다시 사흘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기도 곤란하고······."
 #9
 
 
 "황 대인께서 보증을 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고맙소이다. 그리고 내 통행패는······."
 황 대인이 품을 뒤적이자 서기가 두 손을 마구 내저었다.
 "서로 형제처럼 잘 아는 처지에 새삼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황 대인의 얼굴이 저희들에게는 통행패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하하―"
 "허허, 매번 이렇게 편의를 봐주니 고맙소이다. 커흠."
 "별말씀을."
 황 대인이 거들먹거리며 단운도의 손을 잡고 관을 나갔다. 그 뒤를 짐을 잔뜩 진 다섯 명의 종들이 바삐 따른다.
 
 * * *
 
 "수상쩍은 자는?"
 "오늘도 없었습니다."
 "그래?"
 "여기 통행인의 명단입니다."
 서기가 지난 낮 동안 기입한 통행 장부를 공손히 건넸다.
 그것을 받아드는 사람은 관인(官人)이 아니었다.
 한눈에도 강호의 고수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노인이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졌고, 비단옷을 입었으며, 풍채가 좋았다.
 탁자에 한 자루 고색창연한 검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위엄 가득하다.
 통행 장부를 살펴보던 노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황 대인이라는 자는 자주 오가는군?"
 "강족과는 물론 민산을 넘어온 대상들과도 활발하게 거래를 하는 상인이니까요."
 "단운도?"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오 세의 소년이라니? 황준보에게 언제 이런 일행이 있었던가?"
 황 대인으로 통하던 그의 이름이 황준보(黃俊寶)였던 것이다.
 "조카랍니다. 이곳에서 우연히 만났다더군요."
 "조카라······. 송번성에 사는 조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무어 수상쩍은 데라도······."
 "음―"
 서기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노인이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그런데 행선지가 성도인가?"
 "그렇습니다."
 서기는 단운도가 호남까지 간다는 건 기록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귀찮아서이기도 했다.
 '왜 가느냐?', '무슨 일이냐?' 하고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는데, 황 대인의 면전이라 곤란했던 것이다.
 "좋아, 다음번에도 황 대인이 낯선 자를 동행하고 있으면 반드시 나를 만나보고 가도록 조치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장부를 돌려받은 서기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노인은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불쑥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이 황준보라는 자는 주의해서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겠어."
 황 대인의 무엇이 의심스러운 것인지는 오직 노인 본인만 알 뿐이다.
 "단주, 속하입니다."
 밖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노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자는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날카롭게 생긴 사내였다.
 "총단에 달리 보고할 사항이라도 있으신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다. 평온해. 그렇게 보고하도록."
 "존명."
 사내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그는 이곳 진강관과 성도의 총단 사이를 매일 오가는 전령이었다.
 성도에는 백도의 연합체인 무림맹을 대표하는 사천 총단이 있었고, 사천 총단은 또 각 관마다 지단을 두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게 했다.
 관을 지키는 병사들과는 별도로 움직이는 강호의 힘인 것이다.
 노인은 바로 이곳을 관장하고 있는 지단주인데, 검 한 자루로 명성을 쌓은 노고수였다.
 강호에서 뇌호팔검(雷號八劍)이라고 부르는 노문량(盧門糧)이다.
 무림맹이 중원의 변경마다 이처럼 감시 조직을 둔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바로 십오 년 전에 사라진 마교 홍안적성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림맹은 이곳 진강관처럼 관문이 있는 곳마다 자신들의 제자를 서기로 앉혔다.
 관문의 책임자인 수문장을 매수했으며, 관을 관할하는 도지휘사의 장령들을 폭넓게 포섭했으므로 자신들의 제자를 서기로 박아 넣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홍안적성의 첩자들을 색출해 내려는 것이다.
 무림맹은 마교가 비록 중원을 떠나 저 먼 청해의 어디인가로 사라졌지만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들의 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설이 되어 전해지는 절대천마 풍약헌의 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그와 같은 자가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홍안적성의 무리가 결코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사전에 철저히 막아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길목마다 감시처를 설치했고, 각 관마다 감시의 눈을 박아놓은 것이다.
 그런 만큼 쥐새끼 한 마리도 무림맹의 눈을 피해서 중원으로 숨어든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처럼 철저하게 감시한 탓인지, 십오 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한 번도 이렇다 할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이 아직도 이처럼 철저한 감시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만큼 그들의 뇌리에 홍안적성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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