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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마풍협성 [E]

마풍협성 1권(1)

2019.08.11 조회 876 추천 5


 <시작하면서>
 
 
 명(明)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는 명사(明史)에 등장하는 몇몇 어리석기 짝이 없는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신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역대의 황제들과는 달리 환관 대신 도사(道士), 술사(術士)들이 그의 곁에 늘 붙어 있었다고 하니 특이한 일이다. 그래서 가정제 연간의 기록을 보면 환관에 의한 정치적 폐해는 거론되지 않는다.
 실로 이상한 황제요, 이상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결국 가정제는 총애하던 방사(方士) 왕금(王金)이 바친 단약을 먹고 죽었다.
 독살당했을 수도 있고, 드디어 우화등선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서(史書)는 그것에 대해서 명확한 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재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 가정제 연간은 또한 역대의 어느 황제 통치 기간 못지않게 특무 감찰 기관의 전횡이 심한 때이기도 했다. 동창(東廠)은 물론 서창(西廠)과 내행창(內行廠) 등의 특무 기관이 악명을 떨쳤던 것이다. 그들에 의한 공포정치 때문에 무능한 가정제는 그나마 황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황제가 무기력하니 대신들이 강직하고 국방이 튼튼해질 리 없다. 그래서 가정제 연간은 반란과 외침(外侵), 도적과 왜구의 발호 등이 극심했다. 한시도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왜구의 침탈이 극성에 이르렀는데, 그 야만적인 해적들은 해안도서 지방은 물론 내륙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히곤 했다.
 그와 같은 황제와 무기력한 정권하에서도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는 있게 마련인가. 척계광과 유대유 등의 명장이 이 시기에 있었다는 건 그나마 하늘이 아직 명나라의 국운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리라.
 절강에 부임해 온 척계광에 의해 왜구들은 섬멸이 되었고, 그 잔당이 남아 최후의 발악을 했으니 가정 43년(1564)의 일이다.
 이때는 복건의 산적 오평(吳平)이 왜구의 잔당을 끌어들여 만행을 저질렀는데, 유대유(兪大猷), 척계광(戚繼光)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멀리 안남으로 도망쳤다가 마침내 궤멸되었다.
 이렇게 해서 왜구는 완전히 소탕되고 오랫동안 소요가 끊이지 않았던 동남 연해 지방에도 평화가 찾아들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무렵, 오평과 왜구의 잔당이 달아나 최후의 결전을 벌인 안남의 싸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점차 범위를 넓혀서 가정제와 그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것을 아우를 것이다.
 시대 상황이 혼란해지고, 민간의 삶이 고달파질수록 영웅의 출현은 불가피해진다. 나는 그래서 출현한 한 명의 영웅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데, 물론 역사의 포장을 두른 상상 속의 인물이다.
 독자들이 과연 얼마나 재미와 감흥을 느낄 것인가 하는 건 언제나 글을 시작할 때면 찾아오는 가위눌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작가가 감당해야 할 몫 아닌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쓰는 동안 작가는 필연적으로 고독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먼 길을 함께 동행해 줄 독자 제현의 건승을 기원한다.
 
 
 
 
 
 
 
 
 
 서장(序章)
 
 
 
 
 
 
 
 
 
 “그놈 혼자서 돌아왔어.”
 “당연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출병했던 자들이 모두 죽는 격전을 치렀어도 그놈은 끝내 살아서 돌아왔잖아.”
 “그래도 그렇지, 장두위랑 왕노삼 등이 어떤 놈들이던가? 악바리로 치면 그런 악바리들이 없고, 용맹하기로 치면 우리 척가군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자들이잖아. 그런데 다 죽고 그놈 혼자서 터덜터덜 돌아왔다는 게 말이 돼?”
 “달리 불사귀라고 하겠어?”
 “하긴, 불사귀 그놈만 한 악바리는 어디에도 없지.”
 “게다가 솜씨도 있잖아. 싸움이 어디 악만 가지고 된다더냐?”
 “촌장 둘의 목을 가지고 왔다는군.”
 “에그, 끔찍한 놈. 그걸 여기까지 가져올 게 뭐야?”
 “어쨌든 말이야, 그걸 혼자서 했다는 거 아냐. 정말 기가 막히는 놈 아니냐?”
 “대체 그놈은 언제 죽을까? 아니, 죽기는 할까? 내 생각에는 목이 떨어져도 몸뚱이는 살아서 건들건들 돌아올 것 같아. 아니, 그럴 거다.”
 “흐흐흐, 달리 절강에서 왜구들이 불사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겠어?”
 “그놈 하는 말을 들었어?”
 “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느냐고 물었지. 목숨을 대여섯 개는 여벌로 가지고 다니느냐고.”
 “그랬더니?”
 나머지 세 명의 병사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을 방금 말을 꺼낸 동료의 입에 모았다.
 
 한 사내가 있다.
 건장한 체구에, 스물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투박하고 거칠게 생긴 자다.
 동료 병사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씩 웃었다.
 “한(恨)은 목숨보다 더 지독하거든. 너도 그걸 네 개쯤 가져 봐. 그럼 목이 다섯 번 떨어질 때까지는 죽을 수 없을 거야.”
 “왜 하필 네 개냐?”
 “장두위, 왕노삼, 이가춘, 정칠명 이렇게 네 놈의 한을 가졌으니까.”
 “······!”
 사내가 다시 한 번 씩 웃어주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불사귀(不死鬼)라고 불리는 사내.
 도수백(陶秀柏)이었다.
 
 * * *
 
 가정(嘉靖) 사십삼년(1564년) 사월.
 절강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은 부장 당운평(唐雲坪)에게 왜구와 함께 달아난 난적(亂賊) 오평(吳平)의 무리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즉시 당운평은 척가군 내에서도 정예로 꼽히는 자신의 별동대 오백 명을 이끌고 오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복건의 상장군(上將軍) 유대유(兪大猷)도 별동대 오백 명을 보내 당운평의 부대와 서로 협력하도록 했는데, 지난 석 달 동안 치른 몇 차례의 싸움에서 그들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왜구들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오평의 무리는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되어 만족의 땅 안남까지 달아난 것이다.
 적도들은 토옥림(土獄林)이라고 부르는 변경 지대의 밀림 속에서 마지막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덧 칠월이 되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숨을 턱턱 막아대는 무렵이다.
 당운평은 이곳까지 오평을 추격해 온 자신의 별동대를 운남성(雲南省) 남쪽 끝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흔히 남만(南蠻)이라고도 부르는 안남(安南)과의 접경 지대다.
 눈앞에는 노군산(老君山)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비를 잔뜩 머금은 짙은 구름을 무겁게 걸치고 있었다.
 용축령(龍築嶺)이라고 하는 곳으로써, 높고 험해서 저절로 운남성과 안남의 경계를 이룬다.
 늘 습하고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는 곳이라 이곳은 중원과는 달리 나무가 빨리 크는 탓에 숲이 무성했다.
 밀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 아래에서는 나무에 가려져 하늘을 볼 수 없지만, 용축령 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잔나무만 빼곡하게 들어차 길을 가리고 있을 뿐, 밀림의 음산함은 없다.
 용축령 위에는 드넓은 산정평원(山頂平原)이 펼쳐져 있었는데, 중원에는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지형이었다.
 칠 할이 질퍽거리는 습지이고, 그래서 억새며 습지 식물들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다.
 나머지 삼 할은 허리에 닿을 정도로 웃자란 무성한 풀밭이다.
 바로 그곳에서 장차 전설의 주인공이 될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1장 네 개의 한(恨)을 지닌 자
 
 
 
 
 
 
 
 
 
 
 
 
 
 
 덜컥!
 또 한 놈이 목을 건들거리며 쓰러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다.
 “일곱 놈.”
 음울한 중얼거림이 남는 곳에 어둠 한 조각이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간 습지에 긴 자국이 남았다가 곧 물에 잠겨 소리없이 사라진다.
 스스로 뱀이 되고 어둠이 된 한 사내.
 습지에 뿌리 내리고 있는 풀과 관목(灌木) 사이를 흔적없이 스쳐 가고 있는 그 사내는 두 눈만 살아 있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그대로 어둠이고 풀이며 젖은 흙이 된다.
 다섯 걸음 앞에서 부지런히 주변을 뒤지고 있는 두 놈이 보였다.
 사내는 숨을 멈추고 배와 가슴을 더욱 땅에 밀착시켰다. 그대로 축축한 습지의 진흙 속으로 파고들어 가 사라질 듯하다.
 그렇게 조금씩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오직 그 사내 혼자뿐일 것이다.
 도수백(陶秀柏).
 사람들이 불사귀(不死鬼)라고 부르는 자.
 그는 지금 뱀처럼 차갑고 냉정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가슴속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다.
 눈앞의 두 놈을 노려보며 숨을 고르는 도수백의 귓가에 장두위의 뜨거운 음성이 되살아났다.
 도수백은 그때를 회상했다. 불과 세 시진 전의 일이었다.
 
 “우리가 죽어주지.”
 “왜?”
 의아해서 묻는 도수백을 향해 장두위가 씩 웃어 보였다.
 “네놈은 불사귀잖아.”
 “······.”
 “우리 중 끝까지 살아서 본진으로 돌아가 이 일을 보고할 자는 너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여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저 만족(蠻族) 놈들을 따돌리고 본진까지 갈 수 없을 거야.”
 장두위가 눈으로 남아 있는 자들의 의향을 물었다.
 세 명.
 왕노삼과 이가춘, 정칠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몇 군데씩 부상을 입고 있었는데, 그중 정칠명의 부상이 가장 심각했다.
 복부가 쩍 갈라져서 내장이 삐져 나오는 걸 억지로 밀어 넣고 허리띠로 동여준 게 응급처치의 전부였다.
 입술이 쩍쩍 갈라져서 가쁜 숨을 헐떡거리는 정칠명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늘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가 도수백의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불덩어리가 닿은 것처럼 뜨겁다.
 “내 집을··· 알지? 내 마누라와 새끼들도··· 알지?”
 도수백이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절강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휴가를 맞아 그의 집에서 사흘 동안 머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칠명에게는 순박한 아내와 두 어린 아들이 있었다.
 도수백은 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목욕물을 데워주던 정칠명의 아내를 기억한다.
 두 눈이 초롱초롱하던 대두(大頭)와 득보(得寶), 두 개구쟁이 꼬마 놈들도 기억하고 있다.
 “돌아가면··· 이걸, 이걸··· 전해줘······.”
 정칠명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애써 무엇인가를 도수백의 손에 쥐어주었다.
 금 가락지였다. 묵직한 것이 반 냥은 족히 나가리라.
 “혼례도 못 올렸잖아. 예물 같은 걸 줘본 적이 없다.”
 정칠명의 음성이 점점 또렷해졌다. 얼굴에 붉은 기운도 감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그것이 죽기 직전의 현상이라는 걸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침울해졌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도수백이 한 쌍의 금가락지를 꽉 움켜쥐었다.
 “쿨럭, 쿨럭―”
 밭은기침을 몇 차례 내뱉은 정칠명이 칼을 집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중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놈은··· 너뿐이야. 흐흐, 네놈은··· 불사귀잖아······.”
 그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악문 이 사이로 붉은 선혈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숙여!”
 장두위가 도수백의 머리통을 내리눌렀다.
 “우리는 죽는다. 일각 정도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다. 그거면 되겠지?”
 습한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도수백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잘 가.”
 왕노삼이 무심한 말을 던졌고,
 “노소팔, 빌어먹을 놈에게서 받을 노름빚이 다섯 냥이다. 네가 대신 받아 가져라. 꼭 받아내야 해. 흐흐흐―”
 이가춘이 도수백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었다.
 도수백은 말하지 않았다. 어금니를 부서져라 악문 채 점점 몸을 낮추어 땅과 하나가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을 뿐이다.
 “씨발, 누가 이 창자 좀 어떻게 해줘봐.”
 자꾸 허리띠 밖으로 삐져 나오려는 창자를 밀어 넣으며 정칠명이 온통 인상을 우그러뜨렸다.
 그러더니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선다.
 “첫 번째 놈은 내 거다!”
 마지막 발악이다.
 그가 언제 부상을 입었느냐는 듯 용맹하게 칼을 휘두르며 관목 숲을 뛰쳐나갔다.
 허리를 동인 붉은 띠 사이로 내장이 삐져 나와 덜렁거리는 게 보인다.
 “가자!”
 정칠명이 달려나간 것과 함께 장도위도 소리치며 왼쪽으로 치달렸다.
 왕노삼은 정칠명을 보호하려는 듯이 곁에 달라붙는다.
 “개자식들! 내 목을 치려면 네놈들 모가지를 열 개는 내놔야 할 거다!”
 이가춘도 칼을 휘두르며 오른쪽을 바라보고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정칠명이 제 가슴으로 만족의 칼을 받고는 그놈의 목줄기를 물어뜯으며 함께 나뒹굴었고, 왕노삼은 다섯 놈을 찍어 쓰러뜨렸지만 기어이 뒷덜미에 칼을 맞고 반쯤 목이 잘린 채 비틀거리다가 풀썩 엎어졌다.
 빠르게 일곱 놈을 쳐 넘긴 장두위는 칼이 부러지자 두 주먹을 움켜쥐고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에워싸고 있는 만족들 속으로 뛰어들어 등짝이 창에 찍히고 어깨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악귀처럼 소리치며 몸부림쳤는데, 기어이 두 놈의 눈을 더 파내고 한 놈의 목을 꺾어놓고서야 쓰러졌다.
 이가춘의 죽음도 그들 못지않게 비참했다.
 마지막까지 살아서 버티던 그의 모습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핏줄기.
 갈가리 찢기고 갈라진 몸뚱이.
 그렇게 되어서도 무어라고 악을 쓰며 칼을 휘두르는 그에게 만족들마저 질려 버리고 말았다.
 주춤거리며 물러서서 빙 둘러 포위한 채 어느 한 놈 이가춘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가춘은 텅 빈 공간 속에서 홀로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조금씩 숨이 끊어져 갔다.
 그가 풀썩 엎어져 잠잠해지자 만족들이 일제히 땅을 구르며 괴이한 함성을 질러댔다.
 만족의 번쩍이는 칼 아래 하나둘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을 도수백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새겨둔 것이다.
 그리고 뱀처럼 미끄러져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눈에 가득하더니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지난 석 달 동안 천보산(千寶山)까지 오평의 잔당을 쫓아온 중랑장 당운평은 용축령 건너 남쪽 밀림 지대에 난적들이 모여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당운평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섯 명의 척후를 보낸 것이다.
 도수백과 장두위 등은 당운평의 별군 중에서도 특출한 자들이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누구보다 솜씨가 좋다.
 그래서 매번 척후로 뽑혔고, 여태까지 한 번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만족의 매복에 걸려 낭패를 본 것이다.
 만족들은 은밀하게 당운평의 군진을 멀리서 에워싼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랑장 당운평은 밀림 속에서의 싸움도 오평의 무리와 하게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큰 실수였다.
 오평이 어떤 수단을 발휘해서 토옥림의 만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밀림 속에서 나서 살다가 죽는 만족들 아닌가. 거칠고 흉포한 것 외에 밀림에 대해서 그들만큼 잘 아는 자들도 없었다.
 그들은 사냥을 하듯이 싸움을 했다.
 덫을 향해 가고 있는 짐승을 보듯 도수백 등이 은밀하게 움직여 지나가는 것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즐겼으리라.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도수백 등은 산정평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리에게 여지없이 걸려들었고, 네 명이 죽은 것이다.
 
 사방에서 무어라고 떠들어대는 만족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수백은 당장 뛰쳐나가 그놈들의 목을 치고 싶은 충동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는 뱀처럼 소리없이 기어서 겨우 용축령의 산정평원을 벗어났는데, 불과 반 마장의 거리에 지나지 않는 곳을 무려 한 시진이나 걸려서 겨우 벗어났던 것이다.
 뒤쫓는 자들은 없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뿌리며 도수백은 정신없이 용축령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구름이 점점 짙어지고 날은 어두워져 갔다. 도수백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밀림을 발아래 두고 주저앉아 거친 숨을 헐떡였다.
 저 속에도 만족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저곳을 지나올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개놈들.”
 이를 부드득 갈지만 지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저놈들을 뚫고 본진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사히 해낼 자신은 있었다.
 ‘나는 본진으로 돌아가 보고를 하고, 살아 돌아온 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은?’
 장두위와 왕노삼, 이가춘, 정칠명 등의 죽음은 곧 잊혀질 것이다.
 처음에는 슬퍼하고 분노하겠지만 머지않아 아무도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게 전장(戰場)에서의 삶이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죽었다.’
 하지만 지금 도수백은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망막에 남아 있는 그들의 최후가 여전히 도수백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가 무사히 달아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그 시간을 벌어주고 만족들의 눈길을 붙들어두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버린 것 아닌가.
 ‘내가 그들의 복수를 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해줄 것인가?’
 살아 돌아가서 이곳에서의 일들을 보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변할 것도 없다.
 놈들은 사냥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들떠서 한 명이 빠져나갔다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고, 지금쯤은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때야말로 놈들을 죽여서 동료의 복수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지금 이대로 떠나 버린다면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 도수백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더듬어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둠이 짙어졌을 무렵에 산정평원으로 돌아왔고,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만족들 속으로 숨어든 게 반 시진 전이었다.
 
 * * *
 
 서걱, 서걱.
 짧고 깊은 절삭음(切削音).
 뒤에서 소리없이 다가온 비수에 목줄기가 잘린 두 놈이 짚단처럼 무너지고, 온통 흙칠을 한 괴이한 몰골의 사내가 드러났다.
 두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번뜩이는 자.
 손에 날이 새파랗게 서 있는 비수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저쪽에서 무어라고 떠드는 만족의 소리가 들렸다. 방금 숨이 끊어진 놈들을 부르는 것 같다.
 사내 도수백이 다시 몸을 낮추었다.
 어느새 그는 흙과 풀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숨과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는 곳은 십여 장 앞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었다.
 그곳에 다섯 놈의 건장한 호위를 거느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는 족장을 노리고 있다.
 조금씩,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렇게 다가가기를 일 다경쯤.
 이제 거리는 스무 걸음 남짓까지 좁혀졌다.
 거기서 도수백은 일체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모닥불 빛이 주위를 비치는 경계 부근까지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때 뒤쪽 어둠 속에서 무어라고 악쓰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만족들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린다.
 들킨 것이다.
 누군가가 죽은 놈들을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만족들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도 시간도 없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가 멈춘 도수백이 온몸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소리도 없이 도약한다.
 스무 걸음을 한순간에 좁혀가는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먹이를 향해 내리꽂히는 밤부엉이 같았다.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던 세 개의 비도를 힘껏 뿌렸다.
 그것들이 막 반응하던 호위 세 놈의 목과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놈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쓰러질 때 도수백은 모닥불 곁에 내려서고 있었다.
 번쩍―
 그의 칼이 불빛을 튕겨냈다.
 놀란 족장의 얼굴이 발아래 있다.
 퍽!
 단번에 그놈의 목을 쳐 날렸다. 동시에 남은 두 놈의 호위가 도수백을 향해 악을 쓰며 만도를 휘둘러 댔다.
 쨍쨍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새파란 불똥이 마구 흩어진다.
 몸을 낮추고 놈들의 만도를 받아낸 도수백이 불쑥 일어서며 모닥불을 걷어찼다.
 놈들이 덮쳐 오는 불덩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가린 순간, 도수백은 먹이를 노리는 야수가 되어서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없이 좌우로 쓸어간 칼에 묵직한 느낌이 걸리고, 두 번의 끔찍한 절삭음이 들렸다.
 저쪽, 어둠 속에서 만족들이 아우성을 치며 몰려들고 있었다.
 그놈들을 힐끗 바라본 도수백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족장의 머리통을 여유있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둠을 향해 뛰어든다.
 아우성과 고함 소리, 맹수가 울부짖듯 하는 기괴한 외침들로 사방이 온통 들끓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도수백은 귀에서 휙, 휙,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릴 만큼 정신없이 산정평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끼요오―”
 불쑥 두 놈이 풀숲에서 튀어나와 괴성을 지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도수백은 이를 악물었다. 몸을 던져 땅바닥을 뒹굴며 쳐들어가자 놈들이 당황했다.
 의표를 찌른다는 것.
 도수백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매번 상대는 의외의 공격에 당황하고, 승부는 그 순간 끝난다.
 다시 두 번의 절삭임이 들리고, 무릎 아래가 썽둥 잘려 나간 두 놈이 귀 따가운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벌떡 일어난 도수백이 다시 질풍이 되어 달려갔다.
 그가 노리는 것은 또 하나의 만족 집단이었다.
 그들은 산정평원 아래쪽에 있었는데, 토옥림의 다섯 개 부족 중 하나다.
 두 부족이 연합하여 산정평원에 덫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들을 치려면 어떻게 하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관목 숲에 이른 도수백이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대지를 두텁게 뒤덮고 너울거리는 새벽. 분노한 만족들의 소란도 조금씩 잦아들어 갔다.
 그들은 넓게 흩어진 채 한 명의 살수를 찾아서 밤새 산정평원을 뒤졌다.
 그 안개 속에 젖어 있는 땅과 풀과 나무뿌리들을 벌써 몇 차례나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도수백을 찾지 못했다.
 갈라진 나무뿌리 아래 몸을 구겨 넣은 채 도수백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젖은 풀을 일으켜 앞을 가렸고, 온몸에는 검은 흙칠을 했으며, 숨마저도 거의 쉬지 않는다.
 최대한 몸을 말고 있어서 그는 마치 작은 흙 무더기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게 밤을 샜고, 아침을 맞았다.
 온몸이 저려오다가 이제는 감각마저 사라졌다. 하지만 팔다리를 뻗거나 움직일 수 없다.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떼의 만족이 그가 숨어 있는 관목 숲으로 다가와 천천히 지나갔다.
 칼을 휘둘러 나뭇가지와 풀을 툭툭 치고, 발로 나무뿌리를 차면서 도수백을 찾지만 그들의 시선은 매번 도수백을 지나쳐 엉뚱한 곳을 맴돌곤 했다.
 어지럽게 얽힌 나무뿌리 속의 어둠 속에서 도수백의 두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러다가 한 놈이 다가오자 즉시 사라진다. 눈마저 감아버린 것이다.
 그놈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신경질적으로 나무뿌리를 걷어찼다.
 그것이 안으로 꺾여 들어와 옆구리를 심하게 찔러댔지만 도수백은 숨을 멈춘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것처럼 음습한 나무뿌리 속에 처박힌 채 하루를 보냈다.
 시간을 잊고 공간을 잊은 채 스스로의 생각과 의식마저 놓아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유령이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으면 비로소 살아나 움직이는 괴기한 존재.
 도수백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채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밤새, 그리고 다음날 하루 종일.
 만족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도수백을 찾아 산정평원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다시 날이 어두워지지 비로소 포기한 것 같았다.
 도수백이 감쪽같이 자신들의 포위를 뚫고 이곳을 빠져나갔다고 여길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사냥감을 놓친 사냥꾼들처럼 분한 마음이 된 만족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소리쳐 대며 산정평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고요가 다시 찾아왔다.
 만족들이 종일 설쳐 대는 통에 숨죽이고 있던 짐승들이 하나둘 머리를 내밀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내는 작은 소리가 사각거리며 들려오지만 도수백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몸뚱이에 붉은 점이 가득 박혀서 얼룩덜룩한 뱀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혀를 날름거리며 습지를 건너더니 방향을 틀어 도수백이 웅크리고 있는 나무뿌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남만에 서식한다는 지독한 독사가 틀림없다.
 그놈이 꿈틀거리며 천천히 도수백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다리를 감고 팔을 감더니 가슴을 타고 목을 스친다.
 한 덩이의 흙 무더기처럼 변해 있던 도수백이 눈을 떴다.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뱀의 차가운 기운이 섬뜩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뱀도 그런 도수백을 느끼지 못한 듯 목을 감고 올라가더니 머리를 지나 나무줄기를 타고 느릿느릿 사라졌다.
 그리고도 한참이 지났다.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으며 다가온 산고양이 한 마리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도수백이 천천히 다리를 뻗기 시작한 것이다.
 두 다리를 다 뻗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끄응―”
 작은 움직임에서조차 몹시 고통을 느끼는 듯 신음을 흘리면서 이번에는 두 팔을 조금씩 뻗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모두 펴기까지 무려 반 시진 가까이나 흘렀다.
 비로소 나무뿌리를 헤치고 나온 도수백이 진흙 뻘에 주저앉은 채 열심히 팔다리를 주물렀다.
 다시 반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벌떡 일어설 수 있었다.
 아무도 없다.
 그 많던 만족들도 모두 사라지고, 산정평원에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도수백 혼자였다.
 바위 아래를 파헤쳐 묻어두었던 머리통을 꺼낸 그가 그것의 머리카락을 풀어 허리띠에 단단히 묶고 나서 성큼성큼 북쪽을 향해 사라져 갔다.
 산정평원에 왔던 또 하나의 부족,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용축령 아래는 짙은 밀림 속이다.
 그곳을 두어 마장쯤 헤쳐 나가자 느릿하게 흐르는 밤공기 속에서 불 냄새가 맡아졌다.
 고기 굽는 냄새와 술 냄새도 섞여 있다.
 허공에 코를 두고 킁킁거리던 도수백이 몸을 낮추고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복은 없다. 놈들은 이곳이 저희들의 세력권이라 여기고 안심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약간 비탈진 언덕의 숲 속에 숨어서 도수백이 노려보는 곳에 그들이 있었다.
 몇 개의 말뚝을 박고, 커다란 나뭇잎으로 얼기설기 덮어놓은 조잡한 초막 십여 개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의 중앙에 그래도 튼튼하게 짓고 휘장까지 늘어뜨린 초막이 있었다.
 촌장의 거처가 틀림없다.
 도수백은 다시 한 마리의 뱀으로 돌아갔다.
 어둠이 되고 풀과 흙이 되어서 천천히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술과 고기에 취해 여기저기 쓰러져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는 자들은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도수백은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경계가 허술하고, 긴장이 풀려 있는 만족들이야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에게는 허깨비들이나 마찬가지다.
 벌떡 일어난 그가 칼을 움켜쥐고 이제는 성큼성큼 걸어서 촌장의 거처로 다가갔다.
 몇몇 잠에서 깬 놈들이 그런 도수백을 바라보았는데, 아직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쾅!
 도수백의 발길질 한 번에 기둥이 부러져 나가고, 초막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지붕이 와르르 무너졌다.
 안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두 놈이 뛰쳐나오는데, 촌장의 호위들이 분명했다.
 놈들도 외부인이 침입했을 줄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도 뽑지 않은 채 화난 얼굴로 뛰쳐나온 것이다.
 그러다가 괴물처럼 시커먼 몰골로 버티고 서 있는 도수백을 보고 깜짝 놀란다.
 도수백이 아무 말도 없이 대뜸 칼을 휘둘러 왼쪽 놈의 머리통을 쪼개 버렸다.
 빡!
 “끄아악―!”
 뼈가 갈라지는 섬뜩한 기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오고, 뜨거운 피가 확 뿌려진다.
 오른쪽에 있던 놈이 놀라서 물러서는 순간 도수백의 칼은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그놈의 목덜미에 깊이 박혀 버렸다.
 비로소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며 만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잠들었던 자들은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놀라 깨어났지만 아직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도수백이 성큼 반쯤 무너진 군막 안으로 들어갔고, 막 몸을 일으키던 늙은 촌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몸뚱이를 가볍게 해주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얼굴에 흰 이가 드러나니 끔찍하기만 하다.
 “어, 어?”
 촌장이 그런 도수백을 가리키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퍽!
 싸늘한 칼 빛이 목을 통과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린다.
 땅 위에 구르는 머리통을 태연히 집어 든 도수백이 군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제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그때쯤, 먼저 정신을 차린 자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서로 소리쳐 호응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도수백이 우뚝 서서 그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허리띠에 두 개의 머리통을 매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지옥의 야차처럼 끔찍해 보였으리라.
 잔뜩 성이 나서 달려오던 십여 명의 만족들이 일제히 주춤거렸다.
 “이제 너희들과는 볼일이 없다. 비키지 않으면 죽이고 지나가겠어.”
 하지만 만족들은 도수백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머리통을 가리키며 무어라고 악을 써댄다.
 “그래? 이게 너희들 거란 말이지?”
 제멋대로 해석하고, 머리통을 툭툭 두드려 보인 도수백이 또 한 번씩,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질풍처럼 몸을 날려 쳐들어갔다.
 씨잉―
 피 맛을 본 그의 칼이 인정사정없이 한 놈을 찍어 쓰러뜨리자 깜짝 놀란 만족들이 와, 하고 소리치며 흩어졌다.
 도수백은 그들이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곳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훌쩍 몸을 돌린 그가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악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자들이 횃불을 들고 급히 뒤쫓아오는 것이다.
 도수백은 그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만으로 거리를 짐작하며 오직 눈앞의 밀림과 그것을 두르고 있는 어둠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질주할 뿐이다.
 밤새도록 그는 밀림 속을 미친 듯 헤집으며 달려야 했다.
 몇 차례 밀림 속에 흩어져 있는 만족들과 부딪쳤지만, 그들은 대부분 뒤에서 달려오는 도수백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았다.
 도수백은 그들을 뚫거나 돌아갔는데, 반응하는 자들은 칼을 휘둘러 선공으로 몸뚱이를 찍어 넘겼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상관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밀림을 헤매는 중에 다시 날이 밝아왔다.
 그리고 도수백은 밤새 용추령을 멀리 돌아 제가 떠났던 별동대의 숙영지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다섯 명이 떠나서 사흘 후에는 그 혼자만 살아 돌아온 것이다.
 
 
 
 
 제2장 함정(陷穽)
 
 
 
 
 
 
 
 
 
 
 
 
 
 
 도수백의 보고로 토옥림의 만족 다섯 부락이 모두 오평의 무리와 손잡았다는 걸 안 당운평은 즉시 숙영지를 옮겼다.
 오히려 밀림 속으로 들어가 바위 벼랑을 의지하고 있는 공터에 자리 잡더니 나무들을 찍어 목책을 세웠다.
 “오평이 만족들과 연합했다면 이 싸움은 오래갈 것이다. 우리는 오평의 목을 가지고 당당히 돌아가든지, 아니면 이곳에 뼈를 묻고 귀신이 되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목책이 불에 타서 사라지는 날 어느 쪽이든 결정될 것이다.”
 목책이 완성된 날 그는 부하 병사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렇게 말했다.
 목책이 불에 탄다는 건 그 안에 숙영하던 병사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한다는 걸 의미한다.
 떠날 때는 그들 손으로 목책을 태워 버리고 가는 것이다.
 나중에라도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불에 타버렸다면 적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일 것이다. 그러면 그 안에서 모두 죽게 된다.
 그러니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어쨌든 목책은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 절강을 떠나올 때는 오백 명이던 자들이 지금은 삼백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당운평은 어떻게 해서든 남은 자들을 모두 데리고 절강의 본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적의 영토에 스스로 뛰어들어 목책을 세우고 고립된 건 마지막 수단이었다.
 오랜 싸움과 몸에 익숙하지 않은 풍토로 인해 지금 병사들의 사기는 최악이라 할 만큼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는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죽을 것이다. 그래서 당운평은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를 바라서였다.
 
 닷새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밀림이 온통 물속에 잠긴 것처럼 젖었고, 새도 제 둥지 속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뽀얀 우막(雨幕)에 갇힌 채 짐승의 자취마저 끊어져 버린 밀림 속.
 우기에 접어들면 열흘이나 보름씩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비가 쏟아진다니 중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복건(福建)에서도 수천 리나 떨어진 오지의 밀림 속에서 보낸 날이 벌써 두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먼 원정에 나선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처음 보는 기이한 독충과 뱀, 짐승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밀림의 끈적끈적한 열기였다.
 그리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물동이를 들어 쏟아 붓는 듯한 이 폭우다.
 하지만 도수백은 이런 날이 좋았다. 적들도 이런 날에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 막사 안에서 마음 놓고 쿨쿨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닷새 동안 도수백은 충분히 쉬었고, 이제는 조금씩 무료해져 가기도 했다.(앞에서는 죽은 자들을 안 잊을 듯이 하더니만 벌써 잊은 듯이 느껴지는데... 닷새가 지났을 뿐인데...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 그럼 그런 표현이 있어주는 게..
 청승맞은 빗소리를 듣자니 문득 산정평원에서 장렬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두위와 왕노삼, 이가춘, 정칠명······.
 그들의 죽음에 분노했고, 악귀가 되어서 그 밤의 산정평원을 휘젓기도 했다. 하지만 도수백에게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이 과거였다.
 언제나 그렇다. 죽은 자들만 외로울 뿐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누구나 지금처럼 무료하거나 아니면 정신없이 바쁘다.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을 언제까지나 곱씹으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여태까지 많은 동료들과 함께 전장을 헤쳐나왔고, 많은 동료들이 죽었다. 그리고 아련한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산정평원에서 죽은 장두위 등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제기랄, 뒈진 놈만 억울한 거야.”
 도수백이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내질렀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절대로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 속에 파묻혀 버리지 않으리라고 내심 다짐했다.
 “나는 불사귀야. 너희들처럼 그렇게 죽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로 안 죽어.”
 말하는 동안 가슴에 뭉클한 감정이 맺힌다.
 “병신 같은 것들. 그렇게 뒈질 거면 뭐하러 갖은 고생을 해가며 이 지랄 같은 곳까지 왔어? 절강의 해안가에서 왜구 놈들의 칼에 맞아 뒈졌으면 적어도 만족의 염병할 땅에 뼈를 묻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혼자서 심심해 하고, 혼자서 화를 내고, 혼자서 울퉁불퉁한 나무 침상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군막의 휘장이 거칠게 젖혀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들어선다.
 중랑장 당운평을 보좌하는 부관이었다.
 “팔자 좋구나. 제기랄.”
 투덜거린 그가 뚱한 얼굴로 일어서는 도수백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장군께서 부르신다. 지금 즉시 가봐.”
 “왜?”
 “왜가 어디 있나?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거지.”
 짐짓 눈을 부라려 보인 부관이 씩 웃고 다시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염병. 며칠 편하게 쉬나 했더니··· 그 꼴을 그냥 봐줄 리가 없지.”
 도수백은 투덜대면서도 복장을 갖춰 입고 갑주를 걸쳤다.
 
 당운평의 군막 안에는 몇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낯선 자들이었다.
 이십 리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유가군에서 찾아온 두 명의 전령은 몇 번 본 적이 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생면부지였다.
 두 명은 병사가 아니었다.
 검은색 경장에 피풍을 두르고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가죽신을 신었으며 헐렁한 옷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팔뚝에는 거무튀튀한 철비구(鐵臂具)를 차고 있었다.
 등에 노란 검수를 매단 한 자루의 검을 지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한 명은 하관이 빠진 갸름한 얼굴에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가졌고, 한 명은 두루뭉실한 얼굴인데, 두 사람 모두 살결이 창백하도록 희었다.
 ‘강호의 무리.’
 도수백은 그자들이 강호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라는 걸 짐작했다. 그런 자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도수백이 머리를 갸웃거리고 눈길을 또 한 사람에게로 옮겼다.
 거기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비록 갑주를 입고 칼을 찼지만 누가 보아도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홍안의 소년이었다.
 붉은 얼굴에 피부가 곱고 살결이 여린 것이 이런 곳에서 거친 병사들과 어울려 있을 놈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눈빛이 맑고 코와 입술의 윤곽이 뚜렷한 소년 병사.
 병사라기보다는 어느 권문세가의 자제라고 하면 어울릴 그런 용모였다.
 그 소년 병사의 얼굴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불쑥 들어선 도수백의 거칠고 삭막한 인상에 더욱 주눅이 든 듯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어깨를 움츠린다.
 그를 바라본 도수백이 혀를 차고는 당운평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만둬.”
 제지한 당운평이 잔뜩 낯을 찌푸렸다.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라 도수백은 어리둥절해서 제가 모시고 있는 젊은 장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수십 번의 싸움을 치렀는데,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용장이고, 부하들을 잘 다독일 줄 아는 덕장이기도 했다.
 절강의 총병인 척계광 장군에게서 단단히 신임을 받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한 번 수고해 줘야겠다.”
 그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으므로 도수백은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토옥림 남쪽 끝까지 갔다 와.”
 “척후요?”
 “그렇다.”
 “제기랄!”
 도수백이 낯선 자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네 명의 동료를 잃고 돌아온 게 며칠 전의 일인데 또 가란 말이오? 제대로 쉬지도 못했소이다!”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다.”
 “저 밖에 있는 놈들 중 아무나 찍어서 보내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돌아올 거요.”
 “시끄럽다!”
 당운평이 버럭 화를 냈으므로 도수백은 찔끔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기색이다.
 당운평이 달래듯 말했다.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대체 뭡니까?”
 “토옥림 남쪽 삼십 리 밖에 만족 부족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 오평이 무리를 이끌고 그곳으로 옮겨간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가서 그걸 확인하고 돌아오는 거야.”
 “믿을 만한 소식입니까?”
 당운평이 힐끗 하관이 빠진 흑의사내를 보고 나서 말했다.
 “어디까지나 첩보야. 그러니 네가 가서 그곳의 자세한 정황을 파악해 오란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중요한 일이었다.
 오평의 무리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랑 갑니까?”
 “이 신입을 데려가라.”
 당운평이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턱짓으로 소년 병사를 가리켰다.
 도수백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당운평이 애써 그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말했다.
 “진짜 싸움이 뭔지 잘 가르쳐 주라고.”
 도수백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요? 장군!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 놈을, 게다가 아직 솜털도 안 벗겨진 애송이를 데려가란 말입니까? 이런 젠장!”
 발을 구르고 침을 뱉는다.
 “오늘 유 장군의 별동대에서 전출해 온 자다. 그러니 신분은 확실해.”
 “싫소! 나는 못하오!”
 도수백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는 장군 앞에서도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천성이 그런지라 당운평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무시해 준다.
 “장군은 척후가 무슨 소풍이라도 나가는 걸로 아는 거요? 하, 참,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가서 죽으라고 솔직히 말하지 그러시오?”
 “시키는 대로 해.”
 “그만두시오. 차라리 나 혼자서 다녀오리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모를 당운평이 아니다.
 그가 절대로 그처럼 무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도수백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당운평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도수백을 노려보기만 했다.
 도수백은 조금씩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 못하는 사정이 있군.’
 “군령이다.”
 당운평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제기랄!”
 분하지만 군령이라는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수백이 발을 구르고 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 당운평의 덧붙이는 말이 달라붙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이상하다?’
 막 군막을 나가던 도수백은 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반드시’라는 말과, ‘임무’라는 말을 할 때의 장군의 어조가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했기 때문이다.
 도수백이 잔뜩 화난 채 소년병사를 끌고 군막 밖으로 사라지는 걸 유심히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저놈은 누구요?”
 왼쪽의 죽립인이 턱짓으로 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군장(軍將)에 대한 존경심은커녕, 싸늘한 어투에 경멸의 기색마저 담겨 있다.
 하지만 당운평은 속으로만 화를 삭일 뿐 불쾌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그러나 공손하게 대답한다.
 “도수백이라는 자입니다. 열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조장이지요.”
 “실력은?”
 “대충 제 앞가림은 할 정도랄까요?”
 “그래?”
 죽립인의 싸늘한 눈길이 훑듯이 당운평의 전신을 오르내렸다.
 당운평은 뱀 한 마리가 옷 속으로 기어들어 온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한 놈도 살아 돌아와서는 안 돼.”
 차가운 그 한마디를 던진 흑의인이 수하와 함께 군막 밖으로 나가고 나자 당운평이 비로소 분통을 터뜨렸다.
 “개새끼들! 감히 내 영채에 들어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다니!”
 이를 박박 갈며 분해하지만 그것뿐,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제 신분으로는 그들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동창에서 직접 나온 무사들인데, 하관이 빠져서 날카롭게 생긴 자는 당두(췧頭)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동창의 무사 중 고위급에 있는 자이니 변경의 무장에 지나지 않는 당운평으로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껄끄러운 존재인 것이다.
 ‘살아서 돌아와라. 제발 그렇게 해야 해. 그래서 저 개새끼들에게 물을 먹이는 거야. 불사귀, 너만 믿는다.’
 당운평은 도수백의 삭막하고 무뚝뚝한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기원했다.
 그는 두 동창의 무사에게 불사귀로 통하는 도수백의 진면목을 끝까지 속였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그놈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그런 믿음 속에는 도수백이 소년 병사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있었다.
 
 * * *
 
 도대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다.
 아무리 우기(雨期)에 들었다지만 이렇게 며칠을 두고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중원에서는 볼 수 없었기에 더 끔찍하고 지겹다.
 새도 짐승도 종적이 끊어진 밀림 속에서 그 폭우를 뚫고 천천히 움직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아직도 멀었소?”
 낮게 속삭이는 자는 소년병사였다.
 서너 걸음 앞서 조심히 나아가고 있던 도수백이 그를 돌아보았다.
 소년 병사는 그의 투박하게 생긴 용모에서 도수백이 살아왔을 거친 삶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안심해. 그는 불사귀거든. 그놈 곁에만 꼭 붙어 있으면 별일 없을 거다.”
 
 귓가에 속삭여 주던 전령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당운평의 군진에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마치고 다시 유가군의 진영으로 돌아가던 전령이 소년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었던 것이다.
 ‘불사귀(不死鬼)······.’
 소년은 가만히 그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눈앞의 사내가 아무리 격렬한 전장(戰場)의 한복판에 내던져져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는 자라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도수백은 동료들이 모두 죽었을 때도 혼자서 이 빠진 칼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 돌아왔다.
 한두 번이 아니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지독하고 악착같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리라.
 게다가 목숨을 건 전장에서 단련된 칼 솜씨 또한 그 어떤 백전의 노장보다 훌륭했다.
 혹자는 그가 짐승 같은 본능으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지 아는 까닭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말 그를 잘 아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무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눈앞의 적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에 그는 언제나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 속으로 풍덩 뛰어들 때 비로소 한줄기 기사회생의 길이 열린다는 걸 그는 수많은 싸움을 통해서 절로 터득하고 있는 자였다.
 불사귀 도수백이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렸다.
 눈짓으로 제 앞쪽, 속이 보이지 않는 밀림을 가리키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인다.
 이 리 밖에 적의 본진이 있다는 의미였다.
 전력을 다해 달리면 차 한 잔 마시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소년 병사의 얼굴에 언뜻 긴장과 두려움이 스쳐 갔다.
 도수백이 그의 차가운 손을 끌어 제 옆에 주저앉혔다.
 “무서우냐?”
 소년 병사가 크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의 눈 속에 깃들어 있는 두려움은 더욱 분명해졌다.
 도수백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 잠깐 쉬어갈 테다. 심호흡을 깊게 해. 그러면 마음이 안정된다.”
 “후, 후웁―”
 그 즉시 주저앉아 숨을 깊이 들이켜는 소년 병사를 보면서 도수백은 낯을 찌푸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는 여전히 퍼붓듯 쏟아지고, 밀림은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했다.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도수백이 소년 병사의 손을 끌어당겨 제 곁에 더 가까이 앉게 하고 속삭였다.
 “저 앞에는 귀신같은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너도 여기 오기 전에 들어봤겠지? 안남의 야만족에 대해서 말이야.”
 소변 병사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기랄 놈의 비는 그칠 줄을 모르는구먼.”
 얼굴의 빗물을 훔쳐 내며 투덜거린 도수백이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날 칼 맞고 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피가 더 빨리 빠져나가서 곧 창백하게 변하지.”
 “······!”
 “텅 빈 몸속으로 빗물이 콸콸 스며든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퉁퉁 불어서 항아리처럼 되지.”
 소년 병사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럴수록 도수백의 말투는 더욱 음산해졌다. 귓가에 속삭인다.
 “그걸 짐승들이 뜯어 먹고 벌레가 파먹는다. 며칠 뒤에는 앙상한 뼈다귀로만 남게 되지. 그런 걸 본 적 있느냐?”
 소년 병사의 눈이 두려움으로 초점을 잃어가고 턱이 덜덜 떨렸다.
 ‘제기랄, 이건 새색시 같은 놈이로군.’
 도수백은 놀려준 걸 후회했다.
 이런 놈을 끌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다시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
 장군 당운평의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던 말이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벌써 수십 번도 더 척후로 뽑혀 나갔지만 그때마다 당운평은 ‘살아서 돌아와라’라고 딱 한 마디를 했을 뿐이다.
 이번처럼 말한 적은 없다.
 도수백은 내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목표한 곳에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당 장군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와 이놈을 이런 날 척후로 내보낸 건 다 속셈이 있어서였군.’
 그런 확신이 섰다.
 당운평은 누군가에게 압력을 받은 게 분명했다. 군막 안에 있던 흑의의 두 사내일 것이다.
 그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소년이 이곳에서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리라.
 하지만 당운평은 어떻게 해서든 소년을 살리고 싶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척후병의 임무는 그저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기랄 놈들. 죽이고 싶으면 굳이 여기까지 보낼 필요가 없었잖아?’
 저희들 손으로 아무 데서나 목을 쳐버렸으면 이런 귀찮은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흑의인들에 대한 그런 불만으로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걸 보니 그놈들에게도 무언가 곤란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도수백은 어쨌거나 이런 일에 말려들면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봐서 매끄럽게 발을 빼야 한다.
 ‘잘됐어. 한숨 푹 자고 돌아가면 그뿐이다.’
 돌아가서 대충 둘러댄들 어느 놈이 알 것인가.
 소년 병사는 당운평이 알아서 감쪽같이 처리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 새삼 소년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이봐, 네 이름이 뭐냐?”
 “그건······.”
 “여기는 너하고 나 둘뿐이다. 안심해도 돼. 그리고 조금 있다가 네 녀석이 야만족들의 칼에 맞아 뒈지면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 하는데, 이름을 모르면 곤란하지 않겠어?”
 소년 병사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제는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나, 나는··· 주소룡(朱小龍)이라고······.”
 “주소룡? 그게 네 이름이야? 정말이지?”
 소년 병사가 무엇을 더 말할 듯 입을 오물거렸지만 그 이상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 * *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하관이 빠진 흑의인 손적풍(孫赤風)의 짜증 섞인 질문에 곁에 있던 공손랑(孔孫郞)이 말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그들은 발아래 당운평의 별동대가 들어 있는 목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책 왼쪽에 솟아 있는 벼랑 위에서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초조하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이다.
 “저기!”
 잠시 후, 공손랑이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텅, 텅, 텅―
 둔탁한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밀림 위로 십여 개의 커다란 자루가 불쑥 솟아올랐다. 목책에서 서쪽으로 일 리쯤 떨어진 곳이다.
 기습자들은 특이하게도 공성전에 쓰이는 투석기(投石機)로 돌 대신 무엇을 담았는지 모를 자루를 쏘아댄 것이다.
 “이제 시작하는군.”
 죽립을 들어 올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손적풍이 씩 웃었다.
 죽립 아래 드러난 날카로운 턱을 타고 빗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밀림을 건너 날아온 자루들이 더러는 목책 벽에 부딪치고, 더러는 목책 안으로 떨어졌다. 병사들의 숙영지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퍽, 퍽!
 자루들은 떨어지자마자 터져 버렸는데, 그 안에서 시커멓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쏟아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끈적거리는 그것은 폭우에도 잘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빗물과 섞이며 빠르게 주변으로 퍼진다.
 “무슨 일이냐?”
 뜻밖의 일에 놀란 당운평이 갑주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군막에서 뛰어나왔다.
 막사에 들어 있던 병사들도 병장기를 움켜쥐고 뛰어나왔지만 어리둥절해서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폭우가 이처럼 지독한 날에 적이 쳐들어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당운평이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촤아아아―
 여전히 거세게 퍼붓는 폭우 때문에 그들은 날아오는 화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적이다!”
 망루 위의 병사가 비로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불덩이를 매단 화살이 하늘을 덮다시피 하며 목책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퍽!
 폭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길을 매단 화살들이었다.
 그것이 목책에 꽂히자 조금 전 자루가 터지며 흘러나온 검은 액체로 불이 옮겨졌다.
 화르르르―
 비에 아랑곳없이 불길이 치솟는다.
 목책 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수도 없이 내리꽂히는 불화살들이 이미 넓게 퍼져 있던 시커먼 액체에 불을 옮겨 붙였다.
 금방 불길이 치솟고, 숙사(宿舍)며 병기고, 마구간이 화마에 휩싸인다.
 “흑유!”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당운평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하지만 머릿속에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흑유(黑油)가 인화성이 강한 것이라지만 이와 같은 폭우 속에서는 점화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았다.
 물과 섞이자 오히려 물마저도 인화성을 띠게 되지 않는가.
 예로부터 안남의 오지에서는 희귀한 광물과 함께 양질의 흑유가 많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당운평은 이 미개한 부족들이 흑유의 성질을 더욱 인화성이 강한 것으로 바꿀 줄 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정제하는 그들만의 비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흑유가 이처럼 폭우 속에서도 불타오를 수 없으리라.
 잠깐 사이에 목책 안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불길에 휩싸인 병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며 쓰러져 간다.
 철벅거리는 빗물 속에서 활활 불타오르는 것이기에 더욱 괴기하고 끔찍해 보였다.
 삼 장 높이로 세운 튼튼한 목책도 불길에 휩싸여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야만족으로부터 보호하던 목책이 이제는 그들의 화장장(火葬場)이 될 참이다.
 “목책을 버려! 밖으로 나가라!”
 당운평이 악을 썼다.
 다행히 불길이 가장 거셌던 목책 한 군데가 우르르 하는 굉음을 내며 넘어갔다.
 그리로 살아남은 자들이 앞 다투어 달려나갔다.
 더러는 목책의 불길이 몸으로 옮겨 붙어 비명을 지르며 마구 뒹굴어댄다.
 “와아아―”
 당운평과 병사들이 간신히 목책을 빠져나오자 저 앞의 밀림 속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얼핏 보기에도 이백 명은 넘어 보이는 만족들이 벌거벗은 몸에 등갑만을 두른 채 만도(蠻刀)를 휘두르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빠드득!
 당운평이 이를 갈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빗물을 털어냈다.
 목책을 빠져나온 병사들은 일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병사들이 목책의 불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발을 구른 당운평이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저 앞에서 무어라고 악을 쓰며 달려오고 있는 만족들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불에 놀라고,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 어리둥절해 있는 그들에게서는 더 이상 척가군이 자랑하던 용맹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모두 뒈지고 말 테냐!”
 당운평이 악을 쓰지만 한 번 꺾인 병사들의 사기는 좀체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끔찍한 곳에서 뼈를 묻게 되는군.’
 불타는 목책을 돌아보자 그런 생각과 함께 자조적인 탄식이 흘러나오는 걸 당운평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제3장 토옥림(土獄林)의 악귀(惡鬼)
 
 
 
 
 
 
 
 
 
 
 
 
 
 
 파앗!
 느닷없이 날아온 비도(飛刀) 한 자루.
 폭우에 섞인 그것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도수백이 본능적으로 젖은 땅 위를 뒹굴며 소년 주소룡을 걷어찼다.
 퍽!
 옆구리를 호되게 채인 주소룡은 영문을 모른 채 ‘음’ 하는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퍽!
 그 순간 또 한 자루의 비도가 그가 기대고 앉아 있던 나무 깊숙이 박혀 부르르 떤다.
 “굴러!”
 도수백이 칼을 뽑아 들고 벌떡 뛰어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제야 눈치를 챈 주소룡이 즉시 데굴데굴 굴러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사이에도 네 자루의 비도가 폭우를 뚫고 날아왔다.
 도수백은 침착하게 그것들을 쳐내 주소룡이 나무 뒤로 숨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제기랄, 이번에도 함정이다!’
 문득 산정평원에서의 일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놈들도 이미 이쪽의 동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주소룡 때문이리라.
 ‘대체 이놈의 정체가 뭐기에 만족의 손을 빌어 죽이려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젖은 숲이 와사삭거리며 크게 흔들렸다.
 ‘적!’
 도수백은 긴장으로 몸을 사렸다.
 다른 때 같았다면 그렇게 느낀 순간 벌써 땅을 박차고 먼저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달려들던 놈들은 오히려 당황하여 움찔거리게 마련이다. 그 순간 싸움의 주도권은 저에게로 넘어온다.
 하지만 지금 그는 주소룡을 보호해야 했으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포위되어 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끼야아―!”
 함성과 함께 후끈한 열기와 비린내가 왈칵 밀려들었다.
 토옥림의 만족이 분명했다.
 얼굴에 울긋불긋한 색칠을 했고, 빗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맨몸뚱이 위에 물소 가죽과 등나무 껍질로 만든 단갑을 입었다.
 숲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귀신같은 형상이었다.
 그런 자들이 팔다리를 그대로 드러내 놓은 채 역한 숨을 훅, 훅, 불어대며 커다란 멧돼지처럼 무작정 달려들었다.
 초승달 같은 만도의 새파랗게 살아 있는 칼날이 빗물을 뿌리며 번들거렸다.
 어지간한 자였다면 갑자기 나타난 만족의 그 괴이하고 흉맹한 기세에 놀라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수백은 오히려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놈!”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힘껏 후려친 칼에 놈의 만도가 걸렸다.
 쨍!
 쇳소리와 함께 만도가 동강 나 날아가고, ‘으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쩍 벌어진 놈이 쿵쿵거리고 두어 걸음 스쳐 가더니 풀썩 쓰러졌다.
 그 다음부터는 사방에서 떨어지는 만도의 소나기였다.
 쨍강거리는 쇳소리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와 나뭇잎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마저 밀어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이 열 토막, 백 토막 나버리고 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수백의 칼은 침착하기가 장인의 손에 들린 조각도 같았다.
 한 번 한 번 조금도 흔들리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찍고 베어간다.
 그때마다 쨍강거리며 만도가 밀려났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만도가 밀려오니, 도수백은 혼자서 파도를 막아선 처지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분한 외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주소룡이 한 팔의 힘이 되어준다면 쉽게 이 만족의 무리를 뚫고 달아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더욱 화가 난다.
 ‘오늘은 이 불사귀님이 저 꼬마 놈과 나란히 뒈지는 날이 되겠구나.’
 핏!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만도 한 자루가 치밀한 수세를 뚫고 들어왔다.
 어깨 어림에 선뜻한 감촉이 지나간다.
 그게 도수백을 불처럼 화나게 했다.
 빗물 속에 확 번지는 제 피를 보자 야수의 본능이 폭발한다.
 도수백이 어금니를 악물고 정면의 적을 노려보며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놈이 움찔해서 물러서는 순간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춘 그가 옆으로 맹렬하게 휘돌았다.
 씨잉―
 뒤에서 쳐 나온 한 자루의 만도가 아슬아슬하게 정수리 위를 스쳤고, 반 바퀴 돌아 물러선 도수백의 칼이 그놈의 허벅지를 뼈가 드러나도록 찍어놓았다.
 “끄아악―!”
 처절한 비명성. 그러나 도수백을 만족시키진 못한다.
 그는 어느새 사나운 바람이 되어 있었다.
 좌충우돌이라는 말 그대로 미친 듯 부딪치며 팔방을 어지럽게 치고 깎았다.
 “으악!”
 “캑!”
 칼바람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몇 마디의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허공에 뿌려진 핏물이 굵은 빗줄기를 붉게 물들인다.
 서걱!
 또 한 놈의 목을 훑듯이 그어버리고 옆으로 물러선 순간, 옆구리에 선뜻한 감촉이 와 닿았다.
 “빌어먹을!”
 도수백이 분통을 터뜨리고 이를 악물었다.
 쩍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에서 선혈이 뭉클거리고 솟구쳐 오르지만 돌아볼 새가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놈들이 몰려든 건지 짐작이 서지 않았다.
 칼을 힘껏 후려쳐서 코앞에 닥쳐든 만도 하나를 튕겨 버리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나무를 기대고 잔뜩 웅크린 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주소룡의 창백한 얼굴이 보인다.
 ‘미치겠군.’
 절로 한숨이 새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쨍, 쨍!
 다시 두 개의 만도를 튕겨내자 손아귀에 얼얼한 느낌이 왔다.
 ‘빌어먹을!’
 점점 손발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적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몰려들었다.
 도수백의 주변에는 벌써 십여 구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중상을 입은 자들이 뒹굴며 질러대는 비명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칼날이 뭉텅뭉텅 빠져나갔을 정도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도수백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대여섯 군데의 크고 작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멎을 줄을 몰랐다.
 지혈할 새가 없고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으니 더욱 그렇다.
 정신이 갈수록 흐릿해져 갔다.
 이처럼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한 자리만을 고집하며 버티고 싸운다는 건 나를 죽여주시오, 하고 사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도수백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동쪽을 보고 달리다가 북쪽으로 돌아서고,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것.
 좌충우돌이라는 말처럼 이리저리 옮겨가며 적을 끌고 다녀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싸움의 주도권이 생기고 뚫고 나갈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혼자서라도 달아날까 하는 유혹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달아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기력이 쇠진해 버릴 것이다. 그때는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순간 도수백은 그런 유혹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겁에 질린 채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는 소년.
 덜덜 떨고 있는 그 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울고 있었다.
 빗물과 뒤섞인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면서 도수백을 빤히 바라본다.
 칼을 뽑아 들기는 했지만 두 손을 와들와들 떨고만 있을 뿐, 지금 제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조차 잊은 것 같았다.
 “제기랄!”
 도수백이 다시 한 자루의 만도를 쳐내며 악을 썼다.
 그는 어느덧 주소룡이 숨어 있는 나무 둥치에까지 밀려와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물러서면 등이 그것에 닿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이야아―!”
 도수백의 입에서 발악 같은 고함성이 터져 나왔다.
 콰콰쾅―!
 그것에 대답하듯 머리 위에서 뇌전이 번쩍하더니 엄청난 벽력성이 터졌다.
 짜자자작―!
 쿠아앙―!
 폭우 속으로 연이어 달리는 방전(放電), 그리고 지축을 흔들어대는 굉음.
 귀를 먹먹하게 하는 그 소리에 만족들이 움찔하고 몸을 사리자 도수백에게 숨을 돌릴 수 있는 한 줌의 여유가 생겼다.
 “흐읍파!”
 혼탁해진 숨을 두어 번 크게 들이켜고 격하게 내뱉어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린 그가 미친 듯 칼을 휘두르며 만족들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우와아악―!”
 그의 고함 소리가 우르릉거리며 남아 있는 벽력성의 여음을 뚫고 울려 퍼진다.
 그는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머리 위에 떨어진 뇌성벽력이 그를 미치게 했거나, 아니면 마성(魔性)을 갑자기 불어넣은 건지도 모른다.
 그의 칼이 지금껏 보아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용맹하고 거칠게 허공을 갈랐다. 이제는 그것이 뇌전이 되어 폭우를 찢어댄다.
 창창창―!
 요란한 쇳소리가 터져 나오고, 몇 마디의 참혹한 비명성이 뒤를 따랐다. 비릿한 선혈이 확 뿜어져 눈앞을 붉게 물들인다.
 “끼야아―!”
 도수백이 다시 벽력성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얼굴에 튄 핏물이 비와 섞이며 눈으로 흘러들어 앞을 볼 수가 없다.
 이런 때 누구라도 달려와 도와준다면 열 배의 힘이 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그 절망적인 상황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렇게 죽어도 원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전에 한 놈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런 지독한 마음이 되어서 얼굴에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치는 순간, 허벅지에 뜨거운 고통이 파고들었다.
 “욱!”
 도수백이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허벅지를 깊게 훑으며 만도 한 자루가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왼쪽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렸다.
 그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톱처럼 되어버린 칼을 지팡이 삼아 버티고 있는데, 정신을 차린 만족들이 다시 무어라고 악을 써대며 달려들었다.
 이를 갈아대지만 도수백에게는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떨어지는 만도가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잘라 버릴 것 같다.
 “안 돼!”
 그 순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나무 뒤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하던 소년 주소룡이 악을 쓰며 튀어나왔던 것이다.
 챙!
 소년의 칼이 도수백의 목덜미로 떨어지는 만도를 쳐냈다.
 “이야아아―!”
 터뜨리는 고함 소리가 폭우를 찢는다.
 도수백이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한눈에 소년이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주소룡은 도수백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는 걸 본 순간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것인데, 그러자 지나친 두려움이 광기로 변하여 그를 지배했다.
 주소룡이 저도 모르게 도수백의 위기에 반응한 것은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넓은 천하에서 지금 이 순간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라는 생각이 가져다준 것이기도 했다.
 유일한 보호자가 죽는다는 것. 그건 곧 자신의 생명줄이 끊어진다는 것과 같다.
 본능적으로 그걸 느낀 순간 주소룡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오직 도수백을 구해주고, 저 악귀 같은 만족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이성이 묻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광기에 사로잡혔다.
 “우와아악!”
 주소룡이 짐승 같은 포효를 터뜨리며 미친 듯 칼을 휘둘렀는데, 그게 도수백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으아악!”
 “크악!”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명 소리들.
 주소룡의 칼은 도수백의 그것을 닮은 듯했다.
 무지막지하달 만큼 용맹하고 잔혹하다.
 그의 칼이 쏟아지는 빗물을 사방으로 튕겨내며 번쩍일 때마다 만도가 부러져 날아가고 비명이 솟구쳤다.
 “꼴에 한가락 하는 솜씨가 있었군 그래.”
 주소룡의 광란에 찬 칼부림을 지켜본 도수백이 피식 웃더니 벌떡 일어섰다.
 위기를 넘기고 맞은 잠깐의 휴식이 그에게 다시 맑은 정신과 함께 투지를 돌려준 것이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성큼성큼 다가가는 사이에도 주소룡은 다시 두 명의 만족을 찍어 쓰러뜨리고 있었다.
 비록 광기에 휩싸여 미친 칼부림을 하고 있었지만 주소룡의 칼에서는 일정한 법식이 엿보였다.
 그는 무예를 수련한 자였던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주소룡이 의외로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자 도수백도 용기백배해졌다.
 몸의 상처가 움직임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으나, 죽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끼요옷!”
 굉렬한 외침을 터뜨린 그가 주소룡의 왼쪽을 맡아 쳐들어갔다.
 그의 칼이 번쩍일 때마다 만족들이 두려움에 떨며 물러선다.
 도수백의 기백과 악에 질리고 살기에 질린 것이다.
 한쪽에서는 주소룡의 광기가 만족들을 주춤거리며 물러서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돌볼 새도 없이 싸웠다.
 수많은 만족들에게 몇 겹으로 에워싸였지만 그게 위험하다는 걸 생각할 새가 없다.
 그저 제 눈앞에 있는 적을 찍고 또 찍으며 무작정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들이 지나온 길은 그래서 혈로(血路)가 되었고, 주검의 길이 되었다.
 힘차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질퍽하게 흐르는 핏물이 사방으로 튄다.
 “헉, 헉!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요?”
 주소룡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도수백은 대답할 수 없었다.
 풀무 같은 숨을 내뿜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다.
 칼을 지팡이 삼아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주소룡은 거의 탈진할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그렇게 미친 듯 칼을 휘둘러 광기를 발산하고 나자 마음은 가라앉았는데, 그 대신 피곤이 밀려들어 꼼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도수백도 형편이 나은 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부상과 쉴 새 없는 싸움으로 인해 황소 같은 그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당장 칼을 집어 던지고 드러눕고만 싶다.
 저만큼 물러나서 넓게 에워싸고 있던 만족들이 다시 슬금슬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힘이 바닥났다는 걸 아는 것이다.
 ‘여기가 끝이군요.’
 ‘제기랄, 그러면 그런 거지, 뭐.’
 마주 보는 주소룡과 도수백의 눈길이 그런 생각을 주고받았다.
 도수백은 제가 언제든 칼바람 속에 고꾸라져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제 팔자요 운명이라고 여기고 산다.
 그래서 살고 죽는 일에 대한 집착을 끊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처럼 지옥 같은 밀림 속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폭우 속에서도 아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애송이 한 명을 지키려다가 만족들의 칼에 난도질당해 죽는 건 더더욱 아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소룡이 불쑥 말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엉뚱한 말이다.
 도수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기랄, 언 놈은 이런 데서 이렇게 뒈져도 상관없고 언 놈은 안 된다는 거냐?”
 “나는, 나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한이 있어요. 그 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을 수 없어요.”
 “한이야 나도 넘치도록 많은 놈이다. 개소리하지 말고 한 놈이라도 더 쳐죽이고 뒈질 궁리나 해.”
 “당신은··· 도 형은 몰라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다.”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도수백이 쓰러질 것처럼 앞으로 튕겨 나가며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씨잉―
 “크아악!”
 “억!”
 그의 칼이 빗물을 튕기며 열십자를 긋듯 종횡으로 무찔러 나갔고, 주소룡을 노리고 달려들던 두 놈이 참혹한 비명을 터뜨리며 무너졌다.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던 싸움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지―!”
 주소룡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터뜨린 커다란 외침에 도수백은 움찔하고 칼을 멈추었다.
 주소룡은 울고 있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다시 미친 듯 칼을 휘둘렀는데, 꺼져 가는 제 기력을 되살리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아버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 놈씩 목이 찍히고 어깨가 찍혀 나뒹군다.
 “대단한걸?”
 경황 중에도 도수백은 주소룡의 그 정확하고 깨끗한 도법에 감탄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제대로 된 무예 수업을 한 자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전쟁터에서 오직 실전의 감각만으로 다져지고 사나워진 자신의 칼과는 달랐던 것이다.
 도수백은 이 소년이 무언가 한 맺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곳에서 죽어버린다면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
 “기요성―!”
 주소룡이 아버지를 부르듯, 도수백은 불쑥 기요성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칼을 휘둘렀다.
 기요성(奇曜星).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이 튀어나온 건 평소에 깊이 품고 있었던 그놈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기요성 그놈이 여기 있다면 백 명, 이백 명의 원군을 곁에 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리라는 믿음인 것이다.
 당운평의 별동대에서 그놈의 숨겨진 힘을 아는 자는 군장(軍將)인 당운평과 도수백 두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
 지금 이곳에는 오직 자신과 주소룡 둘뿐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으로 도수백이 절망에 빠져드는데, 그때 기적처럼 그놈이 제 흔적을 드러냈다.
 시잇―
 짧고 높은 파공성과 그것에 반응하듯 터져 나오는 비명.
 “컥!”
 시잇, 시잇―
 화살들이 폭우를 뚫고 번쩍이며 연달아 날아들었다.
 한 대도 빗나가는 법 없이 정확한 것도 놀랍지만, 잠깐 사이에 십여 대를 쏘아대는 속사의 솜씨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한 대에 한 놈씩. 모두 뒤통수나 정수리가 꿰뚫려 퍽퍽 넘어진다.
 머리통을 관통해서 빠져나올 만큼 화살에 실린 힘이 대단했다.
 “왔다!”
 도수백이 환희의 외침을 터뜨렸다.
 궁수를 보지 않았어도 그놈, 기요성의 솜씨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던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그 모든 상황보다 훨씬 절박한 상황에 부딪쳐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기요성을 떠올리고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놈이 정말 이렇게 제 흔적을 드러내며 다가온 것이다.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쩍 힘이 솟았다.
 잠깐 사이에 십여 명이 그렇게 쓰러지자 만족들이 다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쪽으로 튀어!”
 왼쪽, 짙은 숲의 음영 속에서 폭우를 뚫고 들려온 귀에 익은 음성.
 “가자!”
 도수백이 주소룡의 손을 잡아끌며 구르듯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핏, 핏, 핏!
 몇 대의 화살이 그를 엄호해 준다.
 뒤따르던 만족들이 다시 몇 놈을 잃고 멈추어 서서 분한 괴성을 질러댔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알았어?”
 도수백이 흥분과 기쁨으로 소리치며 멱살을 쥐고 흔드는 사내.
 빗물에 씻겨 드러난 얼굴이 분을 바른 듯 하얀 자였다. 웃고 있는 눈이 별처럼 반짝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 그리고 홍조 띤 볼과 계란을 세워놓은 듯 부드러운 턱.
 계집이 아닐까 싶을 만큼 깨끗하고 단아한 얼굴의 사내였다.
 그래서 주소룡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요성이다.
 그는 단갑을 입고 활을 들었는데, 등에 진 전통(箭筒)에 아직 대여섯 개의 화살이 남아 있었다.
 병영의 병사 대부분이 실전에서 위력적인 도(刀)를 개인 병기로 삼는 데 비해 기요성은 특이하게도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것이 허리띠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고동색 낡은 검집에 귀품(貴品)이 어려 있는 것이 보검이 분명해 보였다.
 도수백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제 몸을 맡겨두고 있던 기요성이 소리없이 웃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도수백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저기 또 온다.”
 
 
 
 
 
 제4장 유령이 된 자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도수백은 기요성의 부축을 받으며 정신없이 숲 속을 달려야 했다.
 방향도 잃어버린 채 족히 한 시진은 그렇게 달렸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보이는 건 모두 까마득히 치솟은 울창한 나무들뿐이기 때문이다.
 “좀 쉬자.”
 기요성을 밀어낸 도수백이 물기 번들거리는 바위를 등지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새 폭우는 그쳐 있었으나 아직 숲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디 좀 보자. 이쪽 허벅지의 상처는 제법 심각한 것 같은데?”
 도수백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기요성이 왼쪽 바지 자락을 쭉 찢었다.
 말라붙을 새가 없이 계속 터져 흘러내린 피로 인해 도수백의 왼쪽 다리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만도에 베어 쩍 벌어진 상처 속이 하얗다.
 “쯧쯧, 무식한 놈.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놔두고 있었단 말이냐? 쯧쯧, 다리가 욕한다, 이놈아.”
 “빌어먹을 놈.”
 기요성의 투덜거림을 듣던 도수백이 풀썩 웃고 외면했다. 금창약을 고루 뿌리고 난 그가 품에서 돌돌 만 가죽 조각을 꺼냈기 때문이다.
 기요성이 그것을 풀어놓았다.
 안에서 굽은 바늘과 실, 크고 작은 금침, 가느다란 대롱처럼 생긴 몇 개의 동관(銅管)과 유지(油紙)에 싸놓은 고약 등, 일상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기물(奇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요성이 굽은 바늘에 실을 묶더니 익숙한 솜씨로 쩍 벌어진 도수백의 상처를 꿰맸다.
 그의 손놀림은 마치 외과적인 요상법(療傷法)에 아주 밝은 의생의 그것 같았다.
 상처 위에 다시 한 번 금창약을 바르고, 품에서 면포를 꺼내 단단히 묶어준 기요성이 도수백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다 됐다. 나머지 상처들이야 뭐 그냥 놔두면 저절로 나을 거야.”
 굵은 바늘이 생살을 뚫는 아픔을 참느라고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도수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어떻게 된 게 칼에 맞을 때보다 네놈의 바늘에 찔리는 게 더 아프다.”
 주소룡은 그때까지도 멍한 얼굴로 도수백과 기요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잃은 사람 같고, 넋이 나간 사람 같기도 하다.
 그를 본 기요성이 비로소 빙긋 웃으며 포권했다.
 “공자, 무사하셨으니 다행입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아시나요?”
 주소룡이 깜짝 놀라 물었지만 기요성은 환하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공자의 용맹이 대단하더이다. 그만한 솜씨를 지닌 분이 어째서 그렇게 겁쟁이의 모습을 보였소?”
 “나는, 나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요. 죽는 게 무섭고 싫어······. 그런데 그들이, 그놈들이 형님을··· 그리고 이제는, 이제는 아버지까지······. 하지만 나는 죽어서는 안 돼······.”
 횡설수설하는 동안 주소룡은 다시 겁에 질린 소년이 되어 있었다.
 제가 조금 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 떠올리고 그것 때문에 더 놀라고 무서워서 벌벌 떤다.
 기요성이 그런 소년을 위로했다.
 “공자, 전쟁터에 나오면 누구나 다 살인자가 되는 거요. 내가 죽지 않으려면 할 수 있소?”
 “······!”
 “여기 이놈을 보시오. 이놈은 평소에는 멀쩡한데 전장에 나오면 악귀 그 자체가 된다오. 그동안 이놈 손에 죽은 자들만 해도 수백 명은 될걸?”
 주소룡의 얼굴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든다.
 기요성이 빙긋 웃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 오늘 공자가 한 일은 가히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지. 마음에 담아둘 것 없소.”
 잠시 숨을 돌리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던 기요성이 다시 말했다.
 “세상이 그 자체로 전쟁터나 다름없는데, 어디에 있든 평화로울 날이 있겠소? 감상과 연민은 나를 나약하게 할 뿐,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오.”
 “······.”
 그의 말에 많이 안정된 듯했으나 주소룡의 얼굴에 덮인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소년은 초점없는 눈길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불쑥 중얼거렸다.
 “그렇지.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래.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죽일 수밖에 없어. 그런 거야······.”
 그는 이 비정한 세상 속에 홀로 내던져졌다는 걸 처음으로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파졌다.
 한 인간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던 아버지와 사부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살아왔던 그 모든 날들이 갑자기 허무해졌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변해갈까?’
 기요성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의 싸움과 제가 한 말이 이 귀공자의 앞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짐작한다.
 “자, 또 움직여 봐야지. 놈들이 일 리 밖까지 따라왔어.”
 기요성이 상념을 떨치고 도수백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도수백이 힘겹게 일어서며 말했다. 기요성이 피식 웃는다.
 “아직도 모르겠어? 당 장군의 속마음을 말이다.”
 “당 장군이 보냈다고?”
 “네가 주 공자를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니까. 그게 장군의 본심이다.”
 “그렇다면 이건 역시 함정이었군.”
 “그래. 주 공자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었지.”
 “제기랄, 나는 영문도 모르고 저승으로 가야 할 신세였구나? 개자식들 같으니!”
 도수백이 벌컥 화를 냈다.
 기요성에게도 아니고 당 장군에게도 아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두 놈의 흑의인에게였다.
 그리고 주소룡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누군지도 모르는 놈을 위해 제가 저승길의 동행자로 나서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미안해요.”
 도수백의 사나운 눈길을 받은 주소룡이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말했다.
 기요성이 도수백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곧 덜미를 잡힐 거다.”
 “그걸 어떻게 알죠?”
 주소룡이 어리둥절해서 사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기요성은 또 피식 웃는다. 버릇인 것 같았다.
 “다 아는 수가 있다오. 나는 앞서 가겠으니 이제는 공자가 이 멧돼지 같은 친구를 부축해 줘야겠소.”
 
 삐이―
 왼쪽에서 작고 가냘픈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저쪽.”
 도수백이 망설임없이 그 방향을 가리켰고, 주소룡은 그를 부축하여 부지런히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휘파람 같기도 한 새 울음소리는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그때마다 매번 방향이 바뀐다.
 그렇게 다시 한 시진쯤 쉬지 않고 나아갔는데, 한 번도 매복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추격자들도 멀어졌는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축축하고 어두운 숲 속에 헐떡이는 주소룡의 숨소리만 울린다.
 “그는 안전한 길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지요?”
 주소백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다시 물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놈만의 재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궁금하군요. 그는 용케도 만족들이 없는 곳으로만 우리를 인도해 가고 있어요.”
 “그놈의 재주라니까. 그보다 너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봐.”
 “······.”
 “그놈이 너에게는 함부로 말하지 않더군. 그건 곧 너의 정체를 안다는 건데··· 그게 뭐지?”
 경계의 눈길로 힐끔힐끔 바라볼 뿐 주소룡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도수백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이봐, 나는 네가 어떤 놈인지 모르고, 상관도 없다. 하지만 너 때문에 죽을 뻔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말해봐. 내 목숨을 내던져 가면서 너를 지켜줬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른다면 억울하지 않겠어?”
 “미안해요. 언제든 오늘 진 신세는 반드시 갚겠어요.”
 주소룡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무 뒤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지켜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새삼스럽게 그때 도수백은 과연 악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멀쩡해 보이는 이 사내가 어떻게 그렇게 미친 듯이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맹을 가지고 맹수처럼 사나워졌던 건지 의아해지기도 했다.
 주소룡은 도수백의 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강렬함과 투지를 생각하면 또 다른 두려움이 생긴다.
 도수백의 칼은 명가의 무예를 닦은 칼이 아니었다.
 척가군에서 익힌 병영의 무예였는데, 수많은 싸움을 통해서 그것을 더욱 실전적이고 용맹한 자신만의 도법으로 발전시켰다.
 단순한 도법 속에 깃들어 있던 무지막지한 위력. 그건 악이고 일격필살의 투지이며 과감함이었다.
 그 앞에서 상대는, 그게 어떤 자이든 칼을 받기도 전에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 주춤거리게 되리라.
 두려움으로 위축된 자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서 싸울 수는 없다. 그러니 승리는 매번 도수백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주소룡은 눈앞의 사내가 신기하게만 여겨졌다.
 비록 거칠고 투박하게 생겼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년일 뿐이니 그렇다.
 그 평범한 사내 도수백이 다시 말했다.
 “너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이제 더 이상 너를 위해 내 목숨을 내던지는 미련한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
 앞으로는 네 스스로 알아서 죽든지 살든지 하라는 말이다.
 주소룡이 울 듯한 얼굴을 했지만 도수백은 외면하고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어쨌든 제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당운평의 뜻대로 이 소년 병사를 무사히 지켜주었으니 그렇다.
 군영으로 돌아가서 그에게 소년을 넘겨주고 나면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일에 얽혀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삑, 삐이―
 저 앞쪽 음침한 어둠 속에서 다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빠르고 높다.
 생각에 잠겨 있던 도수백이 칼을 움켜쥐었다.
 
 * * *
 
 꿰맨 상처가 다시 터진다면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도수백은 큰 나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댄 채 편히 앉아 있었다.
 품에서 건포를 꺼내 빗물에 적셔가며 우적우적 씹는 것이 태평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캑!”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비명 소리.
 “열둘.”
 도수백이 건포를 우물거리며 볼멘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끄아악!”
 “컥!”
 “열셋, 열넷.”
 다시 건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힐끔 주소룡을 바라본다.
 소년은 손등에 불끈불끈 힘줄이 서도록 칼을 움켜쥔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딱딱 마주친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서는 한바탕 처절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셨을 만한 시간이 지나도록 기요성 혼자의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는데, 폭우는 아니었지만 밀림을 적시기에는 충분한 그런 비였다.
 그 빗속에서 기요성의 검무(劍舞)는 새파란 요기(妖氣)를 띠고 번쩍였다.
 창백한 보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튕겨지는 빗방울이 아름답다.
 “끄으으―”
 또 한 놈이 길게 베어진 목을 움켜쥐고 무너졌다. 그리고 도수백의 투덜거리는 소리.
 “열다섯. 좀 더 빠르게 못하나?”
 쨍!
 한 자루의 만도를 쳐낸 기요성이 힐끔 돌아보았다.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인다.
 일 다경 가까이 혼자서 서른 명이 넘는 적을 맞아 싸우면서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거칠고 사납기로 이름난 만족들이었지만 기요성의 검을 뚫고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도수백과 주소룡은 편하고 안전했다.
 계집처럼 곱고 아름다운 사내.
 그가 지금은 요괴라도 된 듯 요악한 모습으로 변해서 부드럽게 검을 휘두르고 있다.
 빗물에 씻겨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렸고, 그래서 그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과 투명한 눈이 더욱 요사스러워 보였다.
 다시 세 명의 동료를 잃은 만족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저놈은 사람이 아니라 요괴요, 요물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기요성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물에 씻긴 달처럼 드러나는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것을 본 만족들의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주춤거리며 자꾸 물러선다.
 그러면서 기요성을 손가락질하며 저희들끼리 무어라고 마구 소리쳐 댔다.
 “네놈은 누구냐!”
 갑자기 터져 나온 한어(漢語).
 도수백과 주소룡이 깜짝 놀라 고개를 빼고 그쪽을 바라보지만 기요성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빗물에 씻기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만족들을 헤치고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복장으로 보아 한족이 분명하고, 눈빛과 기세로 보아 강호의 물을 먹고사는 자들이 분명했다.
 그것도 고수일 것이다.
 숨결이 거칠어져 있는 것이 연락을 받고 쉴 틈 없이 달려온 모양이다.
 “네놈은 당운평의 병졸이 아니지?”
 눈매가 가늘고 날카로운 자가 차갑게 묻는다.
 기요성이 히죽 웃었다.
 “그러는 형씨는 토옥림의 만족이 아닌 것 같구려?”
 “우리는 오 장군을 모시는 사람들이다.”
 “흥, 오평의 도적 떼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강호의 고수들이셨군?”
 “잔말 말고 저 어린 놈을 우리에게 넘겨라! 그러면 더 이상 너희들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
 “주 공자의 뜻이 어떨지 모르겠구려?”
 주소룡이 새파랗게 질린 채 머리를 마구 가로저었다.
 “본인이 싫다는구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기요성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눈매 가는 자가 살기를 드러내고 날카롭게 말했다.
 “너희가 어떤 놈들이든 상관없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오늘 이곳에서 뒈져 짐승 밥이 될 거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잠시 침묵하던 기요성이 빙긋 웃었다.
 눈앞의 사내를 상대하지 않고 도수백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한다.
 “마지막인 것 같은데? 일 리 안에는 아무도 없어.”
 “그럼 가야지,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그래야겠지?”
 다시 돌아선 기요성이 두 사내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들은 행세깨나 하는 강호의 고수로 보이니 이놈들보다 재미있겠군. 자, 어울려 봅시다.”
 “죽일 놈.”
 눈매 가는 자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왼쪽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그러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또 한 명, 매부리코에 세 가닥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음침하게 생긴 사내가 나섰다.
 “나는 문필교이고 동행해 온 저 친구는 나의 의제인 곽부염이네. 강호에서는 우리를 하남이웅이라고 부르는데, 들어봤겠지?”
 색혼마편(索魂魔鞭) 문필교(文弼敎)와 하안독검(鰕眼毒劍) 곽부염(郭負鹽).
 그들 두 사람은 하남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흑도의 마두였다.
 지닌바 무공이 기이하고, 성격이 음험, 독랄하여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그들을 두고 하남을 어지럽히는 두 도깨비라는 뜻으로 하남이매(河南二魅)라 했는데, 문필교는 그걸 하남이웅(河南二雄)이라고 고쳐 말한 것이다.
 기요성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바로 겁도 없이 황제 폐하에게 진상되는 공물을 털었다는 하남의 두 도깨비로군?”
 벌써 삼 년 전의 일이었다.
 “동창의 추격을 받아서 얻었던 것도 다 빼앗기고 겨우 목숨만 구해 달아났다는 소문은 들었지. 하긴, 천금이 있으면 뭐 하겠어, 우선 살고 봐야지?”
 조롱하는 말에 문필교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성질을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조금 전 자네의 검법을 보니 화산파의 진전을 받은 것 같더군?”
 탐색하듯 기요성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본다.
 기요성이 다시 히죽 웃었다.
 “귀하는 그래도 눈깔이 제대로 박혔구려.”
 “으음―”
 문필교가 된 숨을 내쉬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당장 달려들어 두 손에 가득 피를 묻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기요성의 검법을 똑똑히 보고 난 뒤라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화산의 어떤 고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지 모르나 그대 혼자서는 우리 두 사람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네.”
 슬쩍 기요성 뒤의 도수백과 주소룡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도수백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 조금도 도움을 줄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주소백이야 한낱 철부지 아이로 보였으리라.
 “흐흐, 천금보다 목숨이 중요하지. 그대들은 그렇지 않은가? 저 꼬마 녀석보다 그대들의 목숨이 더 중요할 텐데?”
 협박이 분명했지만 기요성은 히죽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좋네. 자네가 무슨 까닭이 있어서 화산을 떠나 병영에 몸을 던졌는지는 묻지 않겠네. 누구든 말 못할 사정은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저 주 공자가 꼭 필요하다네. 그를 넘겨준다면 곱게 이곳을 떠나도록 해줄 뿐 아니라 한 관의 금을 주지. 서로 낯을 붉히지 않고 해결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나?”
 “너그러우시군. 하지만 나는 나라에서 매달 석 냥의 녹을 받고 있는 몸이니 과한 금은 필요치 않다오.”
 “형님!”
 저쪽으로 물러서 있던 하안독검 곽부염이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당장 저 요악한 놈을 쳐죽이면 그만이지!”
 그 말에 자극을 받은 듯 문필교의 눈빛에도 살기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기요성의 뜻이 단호하니 달리 방법이 없기도 하다.
 돌아가는 사정을 구경하듯 지켜보던 도수백이 칼을 집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왼쪽 발을 절룩거리며 다가와 기요성 곁에 서더니 턱으로 눈매 가는 사내 하안독검 곽부성을 가리킨다.
 “저놈은 내가 상대한다.”
 기요성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
 “강호의 고수라는 것들이 대체 얼마나 센지 한번 보지.”
 “하긴······.”
 강호의 고수라고 다를 건 없다. 누가 되었든 제대로 한 칼을 맞으면 죽는다.
 그리고 그런 칼질에 있어서만큼은 도수백이 누구보다 무시무시한 솜씨를 지녔다는 걸 기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왼쪽 허벅지 부상이 심각하다는 건데, 그거야 도수백이 알아서 하리라고 믿었다.
 자신이 없다면 나서지 않았을 테니까.
 “저자의 검을 조심해. 만만한 자가 아니다.”
 그래도 한마디 주의를 주는 건 전장에서 쌓은 우정 때문이다.
 기요성의 말에 도수백이 시커먼 얼굴을 활짝 펴며 소리없이 웃어 보였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판이 깨졌다는 걸 안 문필교가 스산하게 말하며 품에 말아 넣고 있던 채찍을 꺼내 들었다.
 색혼마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써, 한번 펼치면 반드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알려져 있는 지독한 것이었다.
 질긴 교룡의 힘줄을 여러 가닥 꼬아 만든 것이라 보검으로도 자를 수 없었다.
 자루 쪽은 엄지손가락 굵기만 했고, 갈수록 얇아져서 끝은 실낱같았는데, 그곳에 세 개의 날카로운 철낭아(鐵狼牙)를 매달았다.
 채찍 중간중간에 철편(鐵片)을 박아 넣었기 때문에 휘감기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기도 한다.
 “흐흐흐, 네가 화산파의 진전을 받은 놈이라고 해도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테니 후환은 없겠지.”
 채찍을 손에 쥔 문필교에게서는 자신감이 넘쳐 났다. 눈앞에 있는 기요성쯤은 단번에 찢어놓을 것 같다.
 그건 장검을 뽑아 들고 있는 하안독검 곽부성도 마찬가지였다.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뜬 채 도수백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조금씩 다가들었다.
 “병신이 되어 평생 사느니 깨끗이 죽는 게 훨씬 나을 거다. 흐흐흐, 저승에 가면 나에게 감사하게 될걸?”
 왼쪽 허벅지를 면포로 칭칭 감은 채 절뚝거리는 도수백을 비웃는다.
 도수백이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두 손으로 칼을 움켜잡은 채 버티고 섰다.
 불편한 왼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밀고 몸을 틀어 칼을 뒤로 뺀 자세다.
 왼쪽 어깨를 적에게 온통 드러낸 것이다.
 집요하게 곽부성의 눈을 노려보던 도수백은 가느다랗게 뜬 그놈의 눈 속에 담기는 비웃음과 자신감을 보았다.
 ‘흐흥, 자만심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곧 깨닫게 될 거다. 그리곤 곧장 저승으로 가는 거야.’
 도수백은 내심 그런 곽부성을 비웃었다.
 그는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불편한 제 몸으로는 싸움이 길어질수록 견디기 힘들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일격에 승부를 내야 한다.
 단번에 죽이던가 단번에 죽어버리는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이 한 번의 칼질에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도수백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지독하고 모질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석상을 대하듯 무표정하고 차갑기만 하다.
 눈빛마저도 칙칙하게 가라앉아 어두웠다.
 노련한 노름꾼이 마지막 패를 쥐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떤 상대라도 지금 도수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제5장 나는 내 길을 가겠어
 
 
 
 
 
 
 
 
 
 
 
 
 
 
 도수백이 일격의 승부를 노리고 있을 때, 곽부성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번에 저 병신을 찔러 죽이면 이 싸움은 끝난다.’
 그도 자신의 그런 흉심을 천연덕스럽게 감추었다.
 그들은 며칠 전에 이 지독한 오지까지 찾아온 동창의 고수를 보고 치를 떨었다.
 삼 년 전의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이 오지까지 쫓아와 잡아가려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문필교와 곽부성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두령 급으로 보이는 동창의 사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주소룡의 목을 가져와. 그러면 황금 열 관을 상으로 주겠다. 사면도 시켜주지.”
 두 악당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이건 하늘에서 복이 절로 굴러들어 온 것이라고 믿었다.
 그 복덩어리가 저기 저렇게 있는데, 눈앞의 두 놈이 방해를 한다.
 ‘이번 일이 마지막이다!’
 곽부성은 그런 생각을 했다. 황금 열 관을 받아서 강호를 떠날 작정인 것이다.
 비록 사면을 받는다곤 하나 동창에 낙인찍혔으니 강호에 남아 있는 한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필교가 슬쩍 눈짓을 보내왔다.
 “이얍!”
 곽부성이 그 즉시 힘찬 기합성을 지르며 도수백을 노리고 미끄러지듯 부딪쳐 갔다.
 짝―
 그와 동시에 문필교도 색혼마편을 힘껏 휘둘러 기요성을 후려쳤다.
 그를 물리치려는 게 아니라 그가 도수백을 돕지 못하도록 떼어놓으려는 것이다.
 “흥!”
 기요성이 코웃음을 치고 옆으로 두 걸음 비켜서며 매향남천(梅香南天)의 수법으로 검을 비스듬히 후려쳤다.
 채찍이 번쩍이는 검광을 두려워하듯 즉시 도르르 말리며 미끄러져 올라간다.
 마치 영사(靈蛇)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편법(鞭法)이었다.
 ‘과연 허명은 아니었군.’
 한 번 부딪친 것에 불과하지만 기요성은 문필교의 솜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과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이 일 초를 나누고 떨어졌을 때, 저쪽에서는 두 사람이 막 부딪치고 있었다.
 “끼요옷!”
 도수백의 벼락같은 일성이 쩌르릉 울렸다.
 막 검과 편을 부딪쳤던 기요성과 문필교가 저도 모르게 힐끔 그곳을 바라보았다.
 “억!”
 문필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낙뢰처럼 떨어지는 도수백의 허연 칼 빛이 보였던 것이다.
 빡!
 “저놈!”
 문필교는 입을 딱 벌린 채 몸을 굳혔다.
 어떻게 된 건지 곽부성의 머리통이 정수리에서부터 콧등에 이르기까지 쩍 벌어지고 있는 게 두 눈에 크게 들어온 때문이다.
 그의 검은 도수백의 어깨 속으로 두어 푼쯤 파고들어 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곽부성은 더 이상 검을 찔러 넣지 못했다.
 그것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머리통을 쪼개 버린 도수백의 칼 때문이다.
 비명을 터뜨릴 새도 없이 곽부성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도수백이 그의 가슴을 걷어차며 머리통 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칼을 뽑아냈다.
 뜨거운 선혈이 허공에 왈칵 뿌려지고, 얼굴이 양쪽으로 나뉜 곽부성의 몸뚱이가 내던져진 것처럼 철썩 하고 젖은 땅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문필교는 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와락 검은 구름처럼 덮쳐 오고 있는 도수백의 흉악한 얼굴을 보았다.
 “끼욧!”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장한 기합 소리.
 “억!”
 비로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느낀 문필교가 놀란 비명과 함께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씨잉―
 그것이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말아갈 때, 상황을 파악한 기요성도 몸을 던지며 소리쳤다.
 “무모하다!”
 퍽!
 허공에서 꿈틀거린 채찍이 그대로 도수백의 목을 휘감는 게 보였다.
 기요성은 너무 놀라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도수백의 뜯겨진 머리통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치솟는 게 보이는 듯하다.
 창백한 빛 한줄기가 눈을 찔렀다.
 그리고 채찍에 휘감겨 둥실 떠오르는 것.
 그것은 도수백의 듬성듬성 이 빠진 칼이었다.
 문필교의 채찍이 휘감겨 오자 그는 칼로 그것을 쳐냈는데, 채찍이 교활한 뱀처럼 칭칭 감기며 전해주는 힘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냉큼 칼을 놓아버린 도수백이 바람처럼 문필교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헛손질했다는 걸 느낀 문필교가 채찍을 털어 칼을 멀리 던져 버렸을 때, 도수백은 이미 그의 가슴에 달라붙기라도 하려는 듯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문필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수백이 이처럼 재빠르게 다가올 줄 몰랐고, 서슴없이 제 칼을 버릴 줄 몰랐던 것이다.
 도수백의 너덜거리는 왼쪽 옷소매가 펄럭인 것 같은 순간,
 핑―
 창백한 비수 한 자루가 쏘아져 그대로 문필교의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으으―”
 가슴을 얼려 버리는 서늘한 느낌.
 그것이 머릿속 가득 뿌려주는 고통 때문에 문필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코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도수백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곽부성이 넘치는 자신감으로 검을 찔렀을 때 도수백이 제 가슴을 내주며 칼을 힘껏 내려친 것과, 놀란 문필교에게 달려들어 암격으로 단번에 끝내 버린 것이 찰나의 일이었던 것이다.
 강호에 악명을 떨치던 두 명의 마두가 도수백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거의 동시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들의 자만심과 방심이 불러온 결과라고 해도 도수백의 기백과 투지는 확실히 그들을 뛰어넘는 바가 있었다.
 ‘비장의 한 수!’
 그 모든 일을 똑똑히 지켜본 주소룡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도수백이 불사귀로 불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죽음 직전에 가장 용맹하고 강력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 있는 자였던 것이다.
 어떤 교묘한 수법도 절기도 아닌, 그의 투지와 용맹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너, 너······.”
 기요성이 어이없다는 듯 도수백을 가리키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 너라는 놈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너에게 맡겨두었다면 시간이 많이 걸렸을 거다. 저 채찍 쓰는 놈은 너를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나에 대해서는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지.”
 “그래서 내 몫까지 가로채 버렸다는 거냐?”
 “일찍 끝내고 쉬는 게 좋지 않아?”
 도수백이 히죽 웃었다.
 기요성은 입맛을 다실 뿐 더 할 말이 없었다. 도수백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믿었던 두 명의 고수가 맥없이 고꾸라진 것을 본 만족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들에게선 이제 조금의 투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칼을 집어 든 도수백이 한 걸음 다가서며 눈을 부릅뜨자 모두 와! 하고 놀란 외침과 아우성을 지르며 뒤돌아서 정신없이 달아나 버린다.
 
 * * *
 
 “이제 어쩌면 좋지?”
 잿더미가 되어버린 목책 앞에서 기요성이 한숨을 쉬었다.
 애써 길을 찾아 돌아와 봤더니 목책은 불타 없어졌고, 그 많던 동료들은 모두 참혹한 주검이 되어 여기저기 널려 있지 않은가.
 살아 있는 자가 한 명도 없다.
 “여기 당 장군이 있어요!”
 저쪽에서 주소룡이 소리쳤다.
 급히 달려간 기요성과 도수백은 시체 속에서 당운평의 주검을 확인했다.
 그는 온몸에 난자당한 흔적을 새긴 채 눈을 부릅뜨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갑주조차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한 모습이다.
 얼마나 갑작스럽게, 얼마나 격렬한 기습을 당한 건지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목책 안에는 불에 타 한 덩어리로 뭉쳐 버린 주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참혹한 형상에 진저리를 친 기요성이 홰홰 손사래를 쳤다.
 “나는 가기 싫다, 싫어.”
 도수백도 그 끔찍한 곳을 뒤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겨우 당운평의 주검을 끌어내 나무뿌리 아래 파묻어주고 나자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풀려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기요성이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다시 묻는다.
 멍한 눈길을 허공에 두고 있던 도수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백전불패의 용맹을 자랑하던 중랑장 당운평의 별군이 한순간에 이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살아남은 건 우리 둘뿐이다. 아니, 저쪽에 또 한 명이 있군.”
 기요성이 불안한 눈길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하지?”
 “빌어먹을!”
 도수백이 주먹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나는 돌아갈 테다!”
 “어디로?”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기요성이 묻는다.
 “잘됐어. 그러잖아도 이번 일만 마치면 군문을 떠나려고 작정했는데 그날이 빨리 왔군.”
 “떠나겠다고?”
 “그럼 내가 평생 군문에서 썩을 줄 알았어?”
 “너는 갈 데도 없잖아?”
 “그러는 너는 갈 데가 있어? 군문으로 다시 돌아갈 테냐?”
 “그건······.”
 도수백의 다그치는 말에 기요성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맞아, 나에게도 갈 곳이 없다.”
 처량해진 얼굴이 되어서 중얼거리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런 기요성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도수백이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와 함께 가자.”
 “······?”
 “우리가 모두 전사한 걸로 알 거다. 누군가 그렇게 보고할 것이고, 척계광 장군께서는 땅을 치며 애석해하시겠지. 그러면 된 거 아니냐?”
 “그럼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거냐? 유령이 되어서 떠도는 거야?”
 “흐흐, 세상에서 이제 우리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유령이 된 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군.”
 “주 공자는?”
 기요성이 아직도 저쪽에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는 주소룡을 가리켰다.
 “알게 뭐야!”
 도수백이 버럭 소리쳤다.
 “그도 유령이 된 처지니 어디로든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리면 그뿐이다!”
 “나는, 나는······.”
 주소룡이 깜짝 놀라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나는··· 나도 갈 곳이······ 없는 걸요······.”
 주춤거리며 다가온 그가 도수백의 팔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힘이 완강하다.
 “도 형님, 나를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 나는 도 형님을 따라가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도수백이 눈을 부라리지만 주소룡은 막무가내였다.
 여기서 도수백과 떨어진다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훗날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 주세요. 제발······.”
 “시끄러!”
 버럭 소리친 도수백이 주소룡의 팔을 억지로 잡아떼었다.
 사납게 눈을 부라린다.
 주소룡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 되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제기랄!”
 땅을 찬 도수백이 등지고 돌아섰다.
 “그러지 말고 데리고 가라.”
 기요성이 거들었다가 도수백의 성난 눈길을 받고 흠칫하더니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도수백이 주소룡과 잿더미가 되어버린 목책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당 장군이 나에게 원한 건 너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했어. 너를 데리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여기까지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제는 다 끝났다!”
 기요성이 목책의 잔해를 돌아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돌아오긴 했구나. 아무도 알아줄 자가 없어서 그렇지.”
 도수백이 주소룡은 외면한 채 그런 기요성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척 장군에게로 돌아갈 거야?”
 척계광은 그들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존경하는 장군이다. 하지만······.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잠시 망설이던 기요성이 맥 빠진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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