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톱배우 매니지먼트 [E](종료230814)

톱배우 매니지먼트 1-1

2019.08.12 조회 4,147 추천 20


 톱배우 매니지먼트 1권
 
 목차
 1. 프롤로그
 2. 만년로드 김정운
 3. 스테이터스
 4. 전환
 5. 새로운 시작
 6. 만남
 7. 내 배우 1호
 8. 절호의 기회
 9. 내 배우 2호
 10. 스승의 은혜
 11. 첫 미팅
 12. 스승이 스승다워야 스승이지
 13. 첫 수업
 14. 내 배우 3호
 15. 인지도 없는 배우의 설움
 16. 날아올라라, 연쇄폭소마!
 17. 여신 출격
 
 
 
 1. 프롤로그
 
 
 
 “배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연기력이 아니야. 바로 매력이라고. 얼마나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
 술에 거나하게 취한 장준형은 언제나처럼 혀 꼬부라진 소리로 연기철학을 설파하고 있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야. 배우는 기껏해야 감독의 도구지. 요즘 편집기술도 얼마나 좋냐? 감독 연출하기에 따라서 발 연기 하던 애들도 인생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어. 연기력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해.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커버된다고.”
 “네, 그렇죠.”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애매하게 응수했다.
 요즘 장 배우에게 유독 저런 주사가 많아진 것은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 장준형. 70년 개띠니까 그야말로 중견 배우.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신급으로 취급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외모가 뛰어나거나 한눈에 사람들을 휘어잡을 만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애매하게 이름값만 높아져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 나이만 먹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최근 몇 년간 선택한 작품들이 모두 흥행에 참패했다.
 차라리 혹평이라도 있으면 화젯거리라도 되련만, 영화를 개봉해도 드라마를 방영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냥 조용히 묻힐 뿐이다.
 그러는 사이 장준형은 점점 잊혀져 가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차마 본인에겐 말로 옮길 수 없었지만, 믿고 거르는 장준형이라는 평이 영화광들 사이에 우스개로 돌 정도면 말 다했다.
 어제는 새로 방영한 케이블 드라마 ‘야차’의 종방일이었다.
 DNA 복제산업의 이면을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다.
 대본이 치밀하고, 반전이 충격적인 것이 미드 같다며 장 배우가 방영 전부터 은근히 기대를 건 작품이었다.
 [이거 잘 되면 종방연 때 스텝들한테 크게 쏴야 할 텐데. 내무부 장관님한테 미리 허락받아 놔야 되나.]
 그렇게 김칫국을 마시며 설레했더랬다.
 첫 시청률은 1.6%.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좋지 않았다.
 그래도 장 배우는 입소문이 돌아 반등해 주기를 종방일까지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시청률은 2%대로 올라가지 못했다.
 조금 기어오르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최고 시청률 1.9%로 종방연은 개뿔.
 연신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장 배우의 상기된 얼굴을 흘낏 살핀다.
 하기야 그로서는 좌절할 만한 상황이다.
 가진 것은 연기력밖에 없는데 이미 잠재력까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긁어다 썼다.
 새삼 연기가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작에서는 감정연기가 과한 것 아니냐는 평을 연이어 듣고 있었다.
 연극판에서 굴렀던 버릇은 무서웠다.
 무대에 서 본 지가 까마득하건만, 아직도 감정이 고조되는 씬에 오면 자신도 모르게 톤이 높아졌다.
 밑천을 다 내보였는데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70년 개띠 동기 중에는 쟁쟁한 중견 배우들이 많아 대체재는 넘쳐 난다.
 설상가상으로 어리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젊은 배우들도 하루하루 숨 막히게 따라붙고 있었다.
 이제 곧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배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위기감이 요즘 항상 똑같은 주사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배우는 연기력이 아니라 매력이라고.
 본인은 가지지 못했으니 별수 없다는 푸념과 빛나는 신예들에 대한 질투를 담아.
 까놓고 말해 ‘야차’에 투톱으로 출연했던 신인 꽃미남 배우는 이 드라마의 실패가 큰 타격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아~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장광설 끝에 언뜻 준형의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글쎄, 장 배우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요인들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했다.
 [넌 말이야, 새꺄. 냉철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실속이 없어. 물러 터져 가지고.]
 그렇다.
 친구 놈의 말처럼 모든 것은 다 내가 냉정하지 못해서다.
 모두 다 그놈의 정 때문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수년간 함께해 온 장 배우의 자조하는 한마디에 또 마음이 짠해진다.
 어휴,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해 줄 때라고. 한심하긴.
 29세 김정운.
 나는 장래가 어두운, 왕년에 잘나가던 배우의 매니저다.
 
 
 
 2. 만년로드 김정운
 
 
 
 [정운아, 너 나랑 같이 회사 나가서 일해 볼 생각 없냐?]
 장준형은 커리어의 정점에 있을 때 소속되어 있던 자이언트 엔터에서 독립했다.
 전속계약 만료를 앞두고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당분간은 소속사 없이 혼자 꾸려 볼 생각이라며 같이 나가지 않겠느냐 권했다.
 나는 망설였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잘나갈 때야 차기작도 알아서 척척 잘 들어오니, 다 내 이름값 때문이지 소속사가 하는 일이 뭐 있나 싶을 것이다.
 소속사에 떼이는 비용이 아깝겠지.
 하지만 소속사가 없어 아쉬워지는 시점은 반드시 온다.
 장 배우가 큰 소속사의 교섭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장 배우를 따라 나가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주위에도 스스로에게도 나는 이렇게 변명했다. 이것은 호기일지도 모른다.
 장 배우가 독립 후 잘 되면 지인 배우들을 끌어들여 매니지먼트사를 창립할 수도 있다.
 큰 회사에서 팀장 거치고, 실장 거쳐 지지부진하게 올라가서 언제 연예기획사 대표 자리에 오르겠나?
 사실은 정에 이끌려 한 선택을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독립 후 장 배우의 커리어는 급락했다.
 큰 회사에 있을 때는 작품 선택에 여러 역학관계가 작용했다.
 배우가 마음에 들어 한다고 작품을 바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속사와 제작사, 연출진 사이의 권력 관계에 따라 탐이 나는 작품을 놓아야 할 때도 있고, 내키지 않는 작품에 출연해야 할 때도 있다.
 소속사의 다른 배우를 끼워서 캐스팅하는 조건이 붙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때로는 장 배우가 다른 스타 배우에 끼어서 캐스팅되기도 했다.
 정치적인 부분에 서툰 장 배우는 다양한 압력을 고려해 내린 내 의견을 신뢰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속사가 없어지자 더 이상 눈치를 볼 일이 없어졌다.
 장 배우는 작품 선택을 주로 아내와 상의해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내 의견은 그냥 한 번 들어 보는 수준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의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항상 내 판단으로는 차선이나 차악이라고 생각되는 시나리오를 골랐다.
 최악은 아니니 발 벗고 뜯어말리기도 애매해서, 똥 누고 뒤 못 닦은 거 같은 찜찜한 심정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게 더 좋지만, 형님이 꼭 그걸 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세요.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처음에 차선 또는 차악이라고 판단했던 선택도 여러 가지 악재와 불운이 겹치면서 최악으로 결과 지어지곤 했다.
 거기까지 예상하고 필사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 역시 내 불찰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결국, 장 배우는 연기는 괜찮지만, 작품에 대한 선구안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수차례 증명하고 말았다.
 게다가 장 배우는 애초에 연기 외의 사업 욕심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사람이었다.
 장 배우를 더 키워서 연예기획사를 차린다는 꿈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름만 팀장인 박봉의 만년 로드 매니저가 되었다.
 장 배우가 소속사에서 독립한 후, 한 차례 월급을 올려 받은 적이 있다.
 그 후 지금까지 급여는 제자리다.
 넌지시 올려달라고 요구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장 배우는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너도 내 사정 잘 알잖냐.]
 작품이 실패할 때마다 시나리오 들어오는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때 탑급인 적도 있었으므로 개런티는 5억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제 그 돈을 주고 쓰려는 곳이 별로 없단 얘기다.
 반면 집이며, 차며, 자식들 교육이며, 각종 소비가 당시의 수준에 맞춰져 있다 보니 유지비는 지금도 상당하게 나가고 있었다.
 정상에 있을 때 무리해서 산 주택 대출금을 아직도 갚고 있다.
 게다가 경제권은 완전히 아내가 쥐고 있으니, 월급을 올려 받으려면 사모님과 먼저 담판을 지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말이 팀장이고, 로드 매니저지 이래서야 머슴이랑 다를 게 뭐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전환점이 필요하다. 계속하든지 때려치우든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야차’가 종방한 다음 날 나는 장준형 배우와 포차에 마주 앉아서도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좀처럼 장 배우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언제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 장 배우는 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흔쾌히 월급을 올려 준다고 한다면 이 희망 없는 머슴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만약 거절한다면? 그래서 그만둔다면 이제 와서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나? 과연 취직은 될까?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해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러니까, 인마! 김정운이! 우리 이제 제대로 좀 해보자!”
 장 배우가 내 어깨를 덥석 잡고 불콰해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욱하고 반감이 든다.
 마치 이 모든 사태가 내 탓이라는 것처럼 들리잖아? 따지고 보면 당신의 돈 욕심과 무사안일주의 탓 아닌가. 게다가 최근에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 결정으로 장 배우의 커리어를 망쳤다면, 차라리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 나는 꺼낼 기회만 살피고 있었던 말을 툭 던져 놓았다.
 “형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이런 시점에 드릴 말씀이 아닌 줄은 알지만, 월급 좀 더 올려 주실 수 없을까요?”
 준형은 묵묵부답으로 술잔만 기울였다.
 “저도 이제 곧 서른이고, 앞으로 직급이 올라갈 것도 아니니 월급이라도 좀 올려 주시면······.”
 나는 변명처럼 더듬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정운이 니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냐?”
 장 배우는 회고하듯 중얼거렸다.
 장 배우와 보냈던 좋은 시간들이 내 눈앞에도 흘러 지나간다.
 [김정운이? 반갑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갓 입사해 장 배우의 로드 매니저를 맡았을 때, 잔뜩 긴장한 내 손을 덥석 잡아주던 장 배우의 뜨거운 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장 배우 역시 이제 막 뜨기 시작해 처음으로 대형연예기획사인 자이언트 엔터에 영입된 직후였다.
 돌아보면 정신없이 지나갔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일은 말도 못 하게 힘들었지만, 현장에서는 언제나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장 배우 역시 의욕 백배여서 돕는 보람이 있었다.
 힘든 무명생활을 오래해서인지, 매사에 좀스러운 기질이 있어 때때로 까다롭게 굴고 은근히 뒤끝이 있기는 했지만.
 [장 배우 비위 맞추기가 여친 비위 맞추기보다 더 어렵다니까.]
 입사 동기들이 다투어 자기 배우 흉을 보며 고충을 토로할 때면,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해 동기들을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심성이 소탈하고 꾸밈이 없어. 좋은 배우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참 좋은 사람이야.]
 동기들은 흉처럼 시작해서 자랑으로 끝낸다며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장 배우는 입에 발린 아첨을 잘 못 하고 무뚝뚝한 나를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좋다며 편안하게 생각했다. 친구들조차도 그 붙임성 없는 성격으로 무슨 매니저냐고 타박했건만.
 우리는 꽤 좋은 콤비였다.
 이후 장 배우는 순조로운 상승세를 탔고, 나도 3년 후 실장 직함을 달았다.
 정점을 찍기까지의 황금 같은 시간들을 그렇게 함께했었다.
 ‘아, 안 돼. 또 마음이 약해지려 하잖아.’
 감상에 빠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준형이 푹 하고 한숨을 내쉰 후 언제나처럼 말했다.
 “너도 내 사정 잘 알잖냐.”
 그래,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지만······ 감상에 빠지려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다.
 “그래도 로드 월급이 180이면 이 업계에선 아주 후한 거야. 너도 잘 알지?”
 물론 잘 알고 있다.
 결국, 장 배우에게 나란 존재는 말만 팀장인 로드 매니저, 가방 모찌일 뿐이라는 것도 이것으로 분명해졌고.
 나는 결심을 굳혔다.
 “형님, 저 일 그만두겠습니다.”
 장 배우는 고개를 들고 찬찬히 내 얼굴을 봤다.
 혹시 잡아주려나 했는데,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래, 너도 딴 길을 찾을 셈이면 더 늦기 전에 새 출발 하는 게 좋겠지. 넌 마, 똘똘하니 무슨 일을 해도 잘 할 거다.”
 그렇게 오래 가깝게 지냈지만, 장 배우의 내심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가망 없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조인지, 혹은 어차피 로드라면 더 적은 월급에 초짜를 부리는 것이 낫다는 계산속인지.
 몹시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청춘을 다 바친 일이었건만, 포차에서 만취해 꺼낸 한마디로 이렇게 끝나 버리다니.
 나는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테이블에 코를 박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형님.”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정운아. 고생 많았다.”
 장 배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던 건 기분 탓일까?
 나는 한동안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
 
 장 배우는 대리를 불러 돌아가며 택시비를 후하게 찔러 주었다.
 짠돌이 주제에 마지막이라고 용돈을 털어 꽤 선심을 쓴 것이다.
 대로변에 서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준형이 찔러준 5만 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서성였다.
 바로 들어 올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이런 기분으로 우중충한 원룸으로 돌아가 박히고 싶지 않다.
 술도 깰 겸 근처 호수 공원을 한 바퀴 돌다가 다리가 풀려 가까운 벤치에 주저앉았다.
 가을밤의 찬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든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흡하고 들이켰다.
 검고 고요한 심야의 호수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 높이 뜬 만월이 흑요석처럼 빛나는 잔잔한 수면 위에 창백한 얼굴을 되비치고 있다.
 바람 한 점 없고 풀벌레도, 개구리도 숨을 죽였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이세계의 공간처럼 신비로운 정경이었다.
 어느새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름답네.”
 그렇게 뱉어 놓고 보니 서글퍼졌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이 무슨 당치 않은 감상이냐?
 따지고 보면 연예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에 감히 예술을 동경하여 자신이 이 업계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것이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냥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갈 것을 그랬나?
 아름다운 것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지 모른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주말에 좋은 영화를 보는 정도로 만족했으면 좋았을지도.
 “다 부질없지만.”
 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니지, 아니야!”
 갑자기 등 뒤에서 끼어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누, 누구세요?”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가로등 빛 아래로 다가선다.
 남루한 차림에 벙거지를 눌러쓴 수염투성이 노인이다.
 노숙자일까?
 “지나가는 과객이오.”
 노인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곁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움찔 경계했으나 다행히 악취는 나지 않았다.
 행색 때문에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목소리가 괄괄한 것이 어쩌면 생각보다 젊을지도 모르겠다.
 “부질없다니. 생에 아름다움을 빼면 무엇이 남는다고.”
 노인의 눈빛은 형형했다. 생각보다 젊은 것이 확실하다.
 깡마른 몸에 비해 눈빛이 너무 강해 어떻게 보면 광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섬뜩한 생각에 나는 옆으로 조금 엉덩이를 뺐다.
 “사람은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요. 그렇지 않다면 금수랑 다를 것이 뭐요? 지구상의 어떠한 생물보다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도 먹고, 자고, 싸기만 하며 살아가는 건 용서할 수 없는 낭비지. 똥 만드는 기계나 마찬가지야.”
 듣다 보니 슬슬 반감이 고개를 들었다.
 집도 절도 없는 노숙자가 그런 고상한 얘기를 해 봤자 조금도 설득력이 없잖아.
 초면에 사람을 가르치려 들다니? 게다가 왜 은근슬쩍 반말이지?
 “먹고, 자고, 싸는 게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나요? 어르신도 삶이 적잖이 고단해 보이시는데, 그런 상황에서 진리와 아름다움을 쫓을 수 있긴 합니까? 어떻게 추구하고 계시는지 한번 말씀해 보시죠.”
 뱉어 놓고 조금 후회가 들었다.
 눈빛을 보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괜히 도발해서 봉변당하는 거 아냐?
 슬쩍 표정을 살피니 노인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자네 말대로 내 처지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도저히 인간처럼 살아지지 않는군. 그렇지 않아도 지금 똥 만드는 기계나 다름없는 비루한 생을 마감하려는 중이었네.”
 갑자기 대화가 엉뚱한 데로 비화하여 나는 화들짝 놀랐다.
 “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내 몫까지 잘 살아주시게.”
 아니, 이 노인네가 대체 뭐라는 거야?
 나의 당혹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호수 변으로 다가갔다.
 “어, 어르신!”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설마 호수에 뛰어들 셈은 아니겠지?
 설마가 아니었다.
 노인은 때에 전 컨버스 운동화를 벗어 놓고는 성큼성큼 물로 들어갔다.
 “잠깐만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나는 한달음에 물가로 달려갔으나 노인은 이미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들어가 있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저러다 말겠지, 곧 후회하고 다시 뛰쳐나올 거야.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휘적휘적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벌써 물이 허리까지 닿는다.
 “여보세요! 어르신! 더 들어가시면 안 돼요. 장난 그만 치세요. 그러다 진짜 죽는다고요.”
 “바라던 바요.”
 노인은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어르신! 제발요! 가지 마세요! 돌아오세요!”
 제기랄.
 어쩌다 저런 미친 영감탱이랑 마주쳐서는 이 밤중에 공무도하가를 목 터지게 부르고 있나.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을 부를까도 생각해 봤지만, 경찰이 오기 전에 익사할 것만 같다.
 물은 이제 노인의 가슴까지 닿아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수영할 줄은 알지만 잘하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해 본 지가 언제더라?
 더욱이 지금 자신은 술에 취한 상태다. 잘못하면 나까지 익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람은 살려야지. 눈앞에서 빠져 죽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그렇게 결심한 순간, 나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가을밤의 호수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어르신, 거기 서세요! 더 들어가시면 안 돼요!”
 나는 물살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갔다.
 차가운 물이 몸에 휘감겨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지 않았다.
 노인은 물이 목까지 닿고 결국엔 물이 꼴깍꼴깍 넘어갈 지경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야, 이 개똥 같은 영감탱이야! 멈추라고!!!”
 노인의 머리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순간 물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나도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호수 아래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차고 앞으로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 언뜻 노인의 머리카락 같은 것이 스쳤지만 잡히지 않는다.
 그 사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나는 다시 물 밖으로 솟아오르려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던 것은 내가 술에 취했기 때문도 아니요, 물이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호수는 타르 같은 점성을 가지고 내 팔다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물이 점점 더 끈끈해진다.
 처음부터 호수가 아니라 늪이었던 것 아냐?
 나는 무력하게 끌려 들어가며, 빛조차도 빨아들인다는 블랙홀을 떠올렸다.
 발버둥 치는 사이 호흡이 한계에 왔다.
 손발이 축 늘어지며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걸로 끝인가?’
 눈앞에 이제까지 살아온 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구나.
 친구 놈 말이 맞았어.
 아무 상관 없는 광인을 구하겠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죽게 생겼으니, 나란 놈은 얼마나 실속 없는 놈이냔 말이야.
 정작 광인은 구하지도 못한 채.
 [사람은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요.]
 문득 노인의 말 한마디가 가슴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나는 정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까?’
 아무런 의미 없이 30년 가까운 인생을 낭비하고 가는 것이라면, 너무 허망하고 슬프잖아.
 그 와중에도 뜨거운 눈물이 스며 나와 차가운 물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시야 한구석이 부옇게 밝아왔다.
 한 줄기 빛이 어둠 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임사체험인가? 저기로 가면 돌아가신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똥꼬발랄했던 우리 해피도?’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깡통 속에서 알록달록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와 동네 밭두렁에서 쥐약을 주워 먹고 저세상으로 가기 전까지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애견 해피가 문득 생각났다.
 해피의 축축한 코와 빨간 혓바닥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유쾌해졌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빛 속에서 영화 자막처럼 문자가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슈퍼스타 메이커를 시작합니다.]
 엥?
 
 ***
 
 “학벌이 좋으시네요. 학점 관리도 잘 하셨고. 어학 실력도 오오~.”
 이력서를 들춰보는 자이언트 엔터 면접관의 어투에는 조소가 살짝 묻어 있었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면접관은 1차 면접 때도 입회해 질문을 주도했었다.
 꽤 직위가 있는 실무자일 것 같다. 로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매니지먼트 팀장이 아닐까?
 서류 심사와 1차 단체 면접을 통과하고 2차 개별 최종면접만 남긴 상태였다.
 거의 합격했다고 생각하고 들떠 있었는데, 면접관의 냉랭한 태도를 보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더욱 단정히 했다.
 “1종 대형 면허 가지고 계시고, 군대는 운전병으로 다녀오셨고, 주짓수 유단자에······.”
 면접관이 중얼중얼 읊자 곁에 있던 여자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든다.
 “스펙은 충분하네요.”
 여자 면접관은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지만,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직급은 비슷해 보인다.
 관망하는 자세인 것을 보아서는 매니지먼트 실무 파트가 아니라 행정지원 쪽 상급자가 아닐까 싶다.
 남자 면접관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한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넘치죠. 로드로는 과하다 싶은데······.”
 남 면접관이 시선을 돌려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이런 스펙으로 대체 왜 이 일을 하려는 거죠?”
 나는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려 애쓰며 답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저도 영화판 어딘가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만, 감독이나 작가가 될 만큼 창의적인 재능이 없다는 것은 진즉에 깨달았습니다.”
 여성 면접관이 은근히 호감을 내비치며 물었다.
 “그럼 배우를 한번 해보지 그랬어요? 외모는 나쁘지 않은데.”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요.”
 여 면접관의 농담에 나도 농담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왜 꿈꿔 보지 않았겠나?
 영화를 사랑했던 것도 그 안에 빛나는 별들에 매료되어서였던 것을.
 고딩 때는 연극 동아리에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체질이 아니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나 아닌 타인을 흉내 낸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배우라는 것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의 몰입력이 필요하며,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고는 연기 근처에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꿈을 뒤로하고 공부에 전념해 K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연예매니지먼트사의 경영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세기의 스타들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는 거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눈앞이 확 밝아지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에 펼쳐졌다.
 “안소니 퀸이나 오드리 햅번 같은 영화 역사에 남는 대 스타들을 제 손으로 발굴하고 키우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나는 가슴을 펼치고 당당히 포부를 밝혔다.
 질문했던 면접관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했다.
 “고루하네.”
 “클래식한 거죠.”
 여자 면접관이 작은 소리로 한마디 거든다.
 남자 면접관은 못 들은 척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훈계하듯 말했다.
 “뭐 패기는 좋네요. 하지만 스타를 키우는 단계까지 가려면 로드 매니저로 몇 년은 굴러야 하는데, 로드 일이란 게 그렇게 낭만적이지가 않아요. 배우 매니저라니까 언뜻 생각하기에 화려해 보여서 섣불리 시작했다가 그만두는 일이 부지기수란 말입니다. 그런 친구들 때문에 우리도 참 곤란해요.”
 남 면접관은 자신의 로드 시절을 떠올리듯 미간을 모으며 첨언했다.
 “작품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24시간 자기 시간도 없이 붙어 있어야 하니,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해요. 스케줄 맞추려고 과속하다가 크게 교통사고가 나는 일도 있고요. 게다가 온갖 사람들한테 머리 조아리고 비위 맞춰 줘야 하는 드러운 일이죠. Difficult, Dangerous, Dirty! 3D 직업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연봉이 높으냐? 그것도 아니죠. 딱히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만만히 생각해 덤비고들 하지만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에요.”
 나는 즉답했다.
 “쉽게 보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최대한 진중하게 답을 하려 노력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성공하기만 하면 투자에 비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한류 붐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은 그 규모가 가히 천문학적이고요. 하지만 수익률이 높은 사업은 그만큼 위험도 큰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견뎌 내기만 하면 큰 과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면접관은 아직도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곁에 있던 여성 면접관이 깐깐한 면접관과 눈을 마주치더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이라선지 역시 스마트하네요. 수고했어요. 돌아가서 기다리시면 수일 내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면접 내내 노골적으로 눈총을 주었던 박원웅 매니지먼트 1팀 팀장은 합격 후로도 계속 나를 눈엣가시처럼 대했다.
 이희선 과장은 경영전략실 소속이라 일하면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마주치면 언제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박 팀장은 나를 채용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었고, 이후로도 주야장천 내 뒷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두고 봐라, 저런 애들이 제일 먼저 그만둔다.’라고 말이다.
 자신의 예언을 실현하려고 그렇게 계모 콩쥐 대하듯 들들 볶았나 보다.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했다는 이 과장은 또 나름의 속셈이 있었으니, 로드 일에 제대로 적응을 못 하면 경영전략실로 차출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잘해 준 것이었구나, 결국은 이 과장도 나의 실패를 바라고 있었구나 하며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의 기대와는 다르게 수년간의 로드 생활을 꿋꿋이 견뎌 냈고, 꽤 잘 해냈다고 자부한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렇게 로드로만 구르다 어영부영 끝나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눈 좀 떠보세요!”
 귓가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에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아직 흐릿한 시야 안으로 앳된 얼굴의 의경과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순경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지난밤 잠시 앉아 쉬었던 바로 그 벤치 위다.
 “아, 정신이 드세요? 다행이다.”
 젊은 의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젯밤 술을 깨려고 여기에 앉아 호수를 보고 있었는데, 웬 미친 영감탱이가 말을 걸었고······ 그리고······.
 “앗! 사, 사람이 빠졌어요!!”
 “예?!”
 내 외침에 의경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어젯밤에 저기로 어떤 아저씨가 뛰어들었어요! 분명 저기쯤에 신발을 벗어 놓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호숫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노인의 신발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순경이 내가 가리키는 호숫가를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긴 물이 얕아서 빠져도 죽을 일 없어요. 그보다 술 먹고 이런 데서 자다가는 저체온증으로 아저씨가 먼저 죽습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요.”
 “하, 하지만 어젠 분명히······.”
 잠수할 정도로 깊었다고 항변하려다가 나는 문득 입을 닫았다.
 물에 뛰어들었다고 보기에는 내 몸이 너무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상태였던 것이다.
 ‘꾸, 꿈이었나?’
 허탈함에 맥을 놓고 그제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해는 높이 떠 있었고, 호수는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현실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아침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저만치서 두셋씩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흘낏흘낏 본다.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상태로 멍하니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순경이 상황이 정리됐다고 생각했는지 허리를 펴고 선언했다.
 “단순 주취자입니다! 응급상황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갈 길 가세요!”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에서 걱정과 호기심이 걷히고 희미하게 혐오와 경멸이 비쳤다.
 “젊은 사람이 쯧쯧.”
 돌아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린 나를 젊은 의경이 부축하며 살갑게 물었다.
 “혼자 돌아갈 수 있으시겠어요? 차비는 있으시고요?”
 나는 혹시나 하고 주머니를 더듬어보았다.
 장 배우가 준 택시비도, 뒷주머니에 꽂아둔 지갑도 그대로 있었다.
 술 취해 쓰러져 있는 사이 누가 빼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이 동네 치안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 예. 괜찮습니다.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택시를 잡을까 하다가 버스를 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앞으로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는 한동안 긴축해서 생활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버스에 앉아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멍하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돌아보았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는데······.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이 아닌 것 같던 호수의 정경도 그렇고, 늪처럼 끌어당기던 호수 물도 그렇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러다 문득 필름이 끊기기 직전 나타났던 문구를 떠올리고 말았다.
 [슈퍼스타 메이커를 시작합니다.]
 “으악!”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걸로 어젯밤의 일이 지랄 맞게 생생한 꿈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정말로 나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어젯밤의 그 소동이 꿈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마지막에 나타난 황당한 문구였다.
 슈퍼스타 메이커라니!
 시뮬레이션 게임의 도입부라는 건 알겠다.
 근데 러브 라이브도 아니고, 아이돌 마스터도 아니고 구닥다리같이 슈퍼스타 메이커가 뭐냐? 프린세스 메이커 짝퉁인가?
 그 촌스러운 문구에 내 무의식이 너무나 투명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매니지먼트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도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구질구질한 미련 말이다.
 정말이지 한심하고 쪽팔린다.
 나는 버스 안에서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화끈화끈했다.
 
 ***
 
 “계란이오, 계란. 신선하고 맛 좋은 계란이 왔어요.”
 점점 가까워지는 구성진 가락에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창문으로 붉어져 가는 저녁 햇볕이 따뜻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나른한 몸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켰다.
 지금 몇 시지? 귀가한 후 씻고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잤다.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을 봐선 한 대여섯 시간 잔 건가?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다.
 꺼져 있었다. 진즉에 배터리가 다한 모양이다.
 충전기에 꽂아 놓고, 잠깐 기다려 전원을 켠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저녁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잠자리에 들었더니 꽤 배가 고프다.
 쌀은 아직 남아 있으니 밥은 하면 되고, 반찬거리가 뭐가 있으려나?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쓱쓱 빗으며 냉장고로 다가가 안을 뒤져 본다.
 “삭막하네.”
 나는 끌끌 혀를 찼다.
 냉장고 안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맥주 몇 캔, 소주 한 병, 생수 한 통, 계란 두 알.
 그나마 주현이가 집에서 몰래 빼내 온 김치와 밑반찬들이 있었지만, 김치는 이미 쉬어 터졌고 밑반찬은 술안주로 야금야금 집어먹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자취 생활이 길었으니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케줄이 있을 때는 밖에서 먹는 일이 많았고, 스케줄이 빌 때는 혼자 차려 먹기가 귀찮아 대충 때우는 때가 많았다.
 “그런 버릇도 이젠 고쳐야겠지. 생활도 규칙적으로 바꿔야 할 테고.”
 귀차니즘에 뭔가 시켜 먹을까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찬장을 열어 보니 다행히 참치 통조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밥을 하는 동안 참치랑 같이 기름에 볶아서 김치를 살려 보자.
 계란 두 알은 전자레인지에 돌려 약식으로 계란찜을 만드는 거다.
 든든하게 먹고 앞으로 살길을 개척해 봐야지.
 나는 짐짓 씩씩하게 쌀 포대를 열어 두 컵의 쌀을 덜어 내어 씻기 시작했다.
 막 밥을 급속 코스로 안치고 돌아서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충전기를 빼고 액정을 살펴보니 ‘장 배우’라고 떠 있었다.
 ‘어젯밤에 얘기 다 마치고 헤어졌는데 무슨 일이지? 그새 새 매니저 구해서 업무 인수인계하라는 건 아닐 테고?’
 나는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정운아,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
 장 배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들떠 있었다.
 “어제 형님하고 한잔하고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충전을 못 해서요. 핸드폰이 꺼져 있었습니다.”
 [뭔 소리야, 인마. 정신줄 안 붙들어? 우리 술 마신 거 이틀 전이잖아.]
 “예?”
 장 배우가 웃음 섞어 한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핸드폰 화면을 전환해 스케줄러 앱을 열어보았다.
 장 배우와 만난 날은 10월 30일이었는데, 지금은 11월 1일로 표시되어 있었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통째로 건너뛴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서른 시간 넘게 잠만 잔 건가?’
 문득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서 날짜를 확인하지 않고 잠들었다.
 서른 시간이 사라진 것은 집에 온 후일 수도 있지만, 장 배우와 술을 마신 그날 밤 그 기이한 호숫가에서였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맹렬히 고개를 저어 목덜미에 돋는 소름을 떨쳐 버렸다.
 일을 정리한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몰려나와 길게 잔 걸 거야.
 아무렴.
 “암튼 됐고. 내가 오 배우한테 네 얘기를 했는데 말이야.”
 세상에 오 씨 성을 가진 배우는 많지만, 장 배우가 일상적으로 오 배우라고 칭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이웃의 오종석이다.
 장 배우가 연예인들 많이 사는 부촌에 이사했을 때, 우연히도 오종석이 옆집에 살고 있었다.
 같이 작품을 한 적도 있고, 동갑내기라 함께 운동을 다니며 친해졌다.
 둘은 성격이 딴판이었는데도 희한하게 잘 어울렸다.
 아마도 아들 둘을 둔 가장인 공통점과 연예인답지 않게 아재다운 면이 있어서 의기투합했으리라.
 격의 없이 지내긴 해도 서로 꼬박꼬박 ‘장 배우’, ‘오 배우’라고 부르며 존대를 하는 것도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비결일 것이었다.
 [오 배우가 전부터 너를 좋게 봤다고, 그쪽 소속사 대표한테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거든. 근데 이 사람 성격이 오죽 급하냐. 그새 대표한테 말을 했다네? 강 대표가 관심을 보이면서 만나보고 싶다고 했단다. 잘하면 실장급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하림 액터스의 대표 강중달은 오종석 배우가 무명일 때, 로드 매니저로 시작해 그를 탄탄한 중견 배우로 키웠다.
 이후 오종석과 몇몇 배우들을 데리고 나와 독립 연예기획사를 차렸다.
 그리고 현재 하림 액터스는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 중에는 손꼽히는 회사였다.
 자이언트 엔터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소속 배우들의 평판이 좋고, 이미지 관리를 잘해 점잖은 회사라는 인식이 있었다.
 로드에서 시작해 굴지의 연예기획사 대표가 된 강중달은 나에게는 롤 모델 같은 인물이었다.
 그 이름을 들으니 새삼 가슴이 뛰어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형님, 저 아예 이 바닥 뜰 생각으로 그만둔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알아, 아는데······ 아깝잖아, 인마. 그동안 고생한 게. 내가 널 책임져 줄 처지가 못 돼서 보내는 마당에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에 짐이 좀 덜어지지.]
 “형님······.”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의심했던 장 배우의 진심이 이제야 와 닿았다.
 장 배우도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함께 꿈꾸었던 동지를 떠나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
 [오 배우에게 부탁한 내 입장도 있고, 오 배우 체면도 있으니 한번 만나는 봐라. 시간은 강 대표 스케줄 봐서 성찬이가 문자로 찍어주기로 했다.]
 구성찬은 오 배우의 로드다.
 나는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인사는 됐고, 나중에 술 한잔하자. 다음 작품 입금되면 네 퇴직금 좀 챙겨 줄게.]
 장 배우는 유쾌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퇴직금 주겠다는 얘기를 바로 못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사이 사모님과 담판을 하고 나서 결재를 받은 모양이다.
 참 한결같이 짠돌이 공처가인데 그래도 마음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장 배우의 아내는 긴 무명시절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도맡아 해결했다.
 따지고 보면 아내에게 그렇게 절절매는 것도 나름은 의리의 발로일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밥이 완성되기까지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이것저것 만들어 보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나는 계란 프라이를 두 개 부쳤다.
 그리고 갓 지은 밥을 양푼에 퍼 넣고, 반숙 계란 프라이 두 개를 올려 간장과 참기름을 떨어뜨렸다.
 양푼과 신 김치통 달랑 두 개만 상 위에 올려놓고 숟가락으로 쓱쓱 비벼 한 입 크게 입에 물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간장계란밥이 이렇게 맛있는 걸 보면.
 나는 밥을 씹으며 강 대표에게 뭐라고 말하며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다.
 
 
 
 3. 스테이터스
 
 
 
 [대표님이 내일 오후 2시에 시간 되신답니다. 논현동 하림 액터스 본관으로 오세요.]
 다음 날 오 배우의 로드인 성찬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당장 내일이라니, 이 사람들 참 속전속결이군.
 오래간만에 뒹굴뒹굴 하루를 게으르게 보내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가까이서 보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언뜻 보기로는 온화해 보이던데.
 먼발치에서만 보았던 강중달 대표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나도 모르게 들뜬 마음이 들어 입맛이 썼다. 예전 같으면야 둘도 없는 소중한 기회였겠지만, 이제 와서 설레어서 뭐 하려고?
 나는 주의를 환기하려고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본다.
 ‘저 배우는 전에는 연기가 참 좋았는데, 이 영화에선 왜 저렇게 오버하고 있지? 연출이 별로인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영화 전문채널에 멈춰져 있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배우의 연기를 품평하고 있다.
 이젠 본능적으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것도 직업병이라고, 이젠 영화도 재미있게 못 보겠네.”
 나는 TV를 끄고 리모컨을 아예 던져 버렸다.
 인생 참 시시하다.
 그날 저녁 내내 마치 똥 누고 못 닦은 것처럼 기분이 찜찜했다.
 약속이 빨리 잡힌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빨리 거절해 버리고 나면, 남은 미련도 깨끗이 사라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다음날 오후,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지 싶어 나는 오래 안 입은 정장을 꺼내 탈탈 먼지를 털어 입고 집을 나섰다.
 거절할 셈으로 나왔으면서도 어쩐지 하림 액터스로 가는 동안 점점 심장박동이 높아져서 당혹스러웠다.
 하림 액터스는 6층짜리 건물을 3층부터 해서 4개 층 전체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건물 앞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각 10분 전이다.
 정각에 딱 맞춰서 나타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이 정도면 너무 이르지도 않고 적당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 로비에 내려 쭈뼛쭈뼛 데스크로 다가갔더니 데스크의 여직원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강중달 대표님과 약속하고 왔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정운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데스크의 여직원이 수화기를 들고 인터폰을 누르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아는 척을 했다.
 “형, 일찍 왔네요.”
 엘리베이터에서 구성찬이 내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뒤를 오종석이 따라 내린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나는 일단 오 배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성찬이에게 다가가 작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보네. 오늘 스케줄 있어?”
 “예, 있긴 한데요. 여기선 아니고요······.”
 성찬이가 어쩐지 쓰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성찬이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오 배우가 성큼 다가왔다.
 “김정운이! 오랜만이네?”
 오 배우는 덥석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예, 형님. 잘 지내셨죠? 신경 써 주셔서 고맙······.”
 오 배우와 눈을 맞추며 거기까지 얘기한 순간, 갑자기 오종석 뒤의 풍경이 부옇게 흐려지며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순간 현기증을 느끼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흐린 배경 위로 오종석만이 3D 캐릭터처럼 두드러져 있었다.
 오종석은 눈 깜박임도 없이 마네킹처럼 멈추어 있었다.
 “뭐, 뭐지? 이거?”
 나는 중얼거리며 옆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 따라 오종석의 어깨너머로 어떤 수치가 좌악 펼쳐졌다.
 
 오종석(48세, 남)
 [외모 81(?)]
 [체력 73(?)]
 [지력 67(?)]
 [연기력 83(?)]
 [매력 74(?)]
 [도덕성 89(?)]
 [근성 92(?)]
 [스트레스 62]
 [기타]
 
 이건 꼭 게임 속의 스테이터스 창 같은데?
 그와 함께 불현듯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설마······ 슈퍼스타 메이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에이~ 하고 도리질했다.
 이상한 꿈을 꾼 그날 밤 이후로 내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그만둔다는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것일까?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정교한 환영이라니.
 “그보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그 말을 내뱉자마자 스테이터스 창이 착착 접히며 사라졌다.
 잠시 후 멈춰 있던 오종석이 눈을 깜박이더니 묻는다.
 “뭐라고 했나?”
 어느새 오종석 뒤의 풍경도 현실감을 되찾고 있었다.
 아,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벗어날 수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오종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는데 생각이 미쳐 화들짝 놀라 덧붙였다.
 “예? 아, 그······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하하. 이 친구 긴장했군.”
 오종석은 껄껄 웃었다.
 “대표님 지금 자리에 계십니다. 들어가세요. 대표실은······.”
 “아, 내가 같이 들어갈게요.”
 여직원이 인터폰을 내려놓고 말하자 오종석이 끼어들더니 선뜻 앞장섰다.
 힐끗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더니 시간은 여전히 2시 5분 전.
 환영 속에 있는 동안 현실의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오 배우의 뒤를 따르며 조바심이 나 견딜 수 없었다.
 대체 그 환영의 정체는 뭐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다시 해 볼 수 있는 건가?
 나는 좀 더 둘러보지 않고 나와 버린 것을 후회하며, 오 배우를 따라 대표실로 들어섰다.
 강 대표가 대표실로 들어서는 오종석을 보고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쩐 일로 예고도 없이 왔어요?”
 “용건이 있어야 들르나요?”
 오종석은 쾌활하게 웃으며 팔을 활짝 벌려 강 대표를 덥석 안았다.
 한동안 오정석을 부둥켜안던 강 대표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 없이 온 게 아니었네.”
 나는 강 대표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김정운입니다.”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강중달입니다.”
 강 대표는 젠틀하게 응대했다.
 그러자 오 배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강 대표에게 말했다.
 “얘기했듯이 장준형 배우 로드였는데, 로드로만 끝내긴 아까운 인재예요. 인성 좋고, 부지런하고, 똘똘하고. 같이 한번 일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얘기 나눠 보고 좋은 쪽으로 결정해 줘요.”
 “알겠습니다.”
 강 대표가 흔쾌히 답하자 오 배우는 빙그레 웃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얘기 잘 해 봐. 난 스케줄이 있어서.”
 그제야 아까 성찬이가 우물쭈물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종석은 오늘 다른 스케줄이 있는데도 나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일부러 사무실에 행차한 것이었다.
 뮤지컬 무대에도 열심히 서는 오종석은 항상 스케줄이 풀로 차 있었다.
 그걸 또 쪼개서 괜한 행차를 했으니, 원래 계획했던 동선이 많이 일그러졌을 것이다.
 오 배우에게 고마운 한편, 성찬이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천성이 게으르고 모험을 싫어하는 장 배우에 비해 부지런하고 자기관리도 열심히 하는 오종석을 보며 처음에는 조금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주 보다 보니 성찬이도 참 피곤하겠구나 싶었다.
 일을 만들어서 하는 데다가 주위 사람들의 열정까지 쥐어짜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악의는 없는 데다 자기가 솔선수범하니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로드끼리만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성찬이는 ‘좋아요. 좋긴 한데······.’하고 말꼬리를 흐렸었다.
 길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여운이 성찬이의 피로를 십분 반영하고 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자기 배우가 나를 하림 엑터스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니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었지만, 성찬이는 오 배우의 등 뒤에서 슬쩍 파이팅 포즈를 해보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하고는 웃어주었다.
 어느새 오 배우는 휙 등을 돌려 사무실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 안 돼. 아직 그 환영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나는 어쩌자는 생각도 없이 대뜸 오 배우를 불러 세웠다.
 “혀, 형님!”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 오 배우의 손을 나는 덥석 잡았다.
 아까 이렇게 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변화가 없다. 접촉은 아닌가?
 “왜?”
 “아니요. 너무 감사해서요.”
 오 배우와 눈을 맞추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까처럼 갑자기 현기증이 나며 배경이 흐릿하게 멀어졌다.
 오 배우가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춘다.
 “됐다!”
 답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오 배우를 봤을 때는 작동하지 않았고, 대표실로 오기 전 살짝살짝 시선을 맞춘 거로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1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약 3초 이상 눈을 맞추는 경우에만 작동한다는 얘기다.
 작동 메커니즘을 알아낸 나는 ‘유레카!’ 의 심정으로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보려 했다.
 그러나 소리가 안 난다.
 나는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심지어 내 몸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오 배우를 만지려고 해보았지만, 그것도 안 된다.
 확실히 이곳은 환영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물리력은 일절 작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아까 어떻게 했더라? 스테이터스 창······ 스텟 창······.”
 나는 중얼거리며 정신을 집중해 오 배우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곧 스테이터스 창이 촤악 하고 펼쳐진다.
 시험적으로 시선을 거두었더니 곧 사라졌다.
 나는 시선으로 스테이터스 창을 몇 번 접었다 펼쳤다 해보았다.
 아무래도 시선과 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메커니즘인가 보다.
 전신 마비 환자가 눈동자 트래킹이나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스템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환영을 보면서도 과학적인 근거를 추론해 내려고 애쓰는 스스로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강 대표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어때?
 어차피 현실에서 시간은 안 흐르는 것 같으니까 실컷 구경이나 하고 나가자.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고는 스테이터스 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오종석(48세, 남)
 [외모 81(?)]
 [체력 73(?)]
 [지력 67(?)]
 [연기력 83(?)]
 [매력 74(?)]
 [도덕성 89(?)]
 [근성 92(?)]
 [스트레스 62]
 [기타]
 
 [외모 81(?)] 쪽에 더욱 집중했더니 그 옆으로 새로운 창이 연결되면서 부연설명이 나타났다.
 
 [타고난 외모는 중상이나, 꾸준한 관리로 나이에 비해 우수]
 
 나는 오종석의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멈춰놓은 상태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장점도 단점도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오종석의 3D 입체영상이 천천히 한 바퀴 회전하며 몸 전체를 보여 주었다.
 꾸준한 운동으로 잘 다듬어놓은 몸은 동년배 중에서는 아주 훌륭한 편에 속한다.
 운동하기 싫어하는 장준형에 비하면······.
 아니, 완전 저질 몸매인 거기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이 대비 꽤 우수한 피지컬인데 태생적인 골격으로 보면 균형이 아주 잘 잡힌 것은 아니다.
 다리도 요즘 젊은 배우들에 비하면 짧은 편이고 힙도 좀 퉁퉁하다.
 하관은 얄팍하지만 미세하게 돌출되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평가였다.
 이 점수는 꽤 신뢰할 만한 거 같다.
 나는 다음 항목들을 훑어보았다.
 
 [체력 73(?)]
 [운동신경 중하. 액션 적합성 낮음. 체력을 올리는 데 노력이 많이 듦. 꾸준한 관리로 나이에 비해서는 우수.]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테니스를 그렇게 열심히 치는 데도 안 느는 건 이유가 있었다.
 
 [지력 67(?)]
 [작품분석력 중상. 깊이 있는 통찰은 부족.]
 
 하긴 뭐 그렇게 지적인 배우는 아니지.
 
 [연기력 83(?)]
 [몰입도 높음. 딕션이 다소 부정확.]
 
 확실히 발음이 조금 샐 때가 있다.
 
 [매력 74(?)]
 [개성이 강하고 예술 지향적. 상대의 성향에 따라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음.]
 
 더 말해 뭐해.
 
 [도덕성 89(?)]
 [가정적. 자기관리 철저.]
 
 사고 칠 일이 없다는 얘기군.
 
 [근성 92(?)]
 [의욕 과다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함.]
 
 이 항목에서는 풉 하고 뿜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근성이 90점대야.
 
 [스트레스 62]
 [긍정적이고 자존감 높음. 스트레스 저항력 상.]
 
 스케줄을 앞두고 살짝 스트레스가 올라간 것은 오히려 좋은 징조다.
 기분 좋은 흥분상태란 얘기다.
 
 [기타]
 [보컬, 악기 연주 중상.]
 [댄스 중하. 근성 패치로 중상까지 버프 가능.]
 
 그러니까 뮤지컬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세부 창을 모두 닫고, 전체적인 스테이터스를 조망해 보았다.
 전반적으로 우수한 점수에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역시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이끌어 나가는 중견 배우다웠다.
 문득 점수 옆에 있는 (?)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아무리 거기다 시선을 주고 눈이 빠질 듯 집중해서 노려봐도 열리지 않았다.
 아직 이 부분을 볼 수 있을 만큼 렙업이 안 됐다는 건가?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지금까지로 보았을 때, 이른바 슈퍼스타 메이커라는 이 시스템의 신뢰성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오종석은 이미 잘 아는 배우다.
 무의식중에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반영되어 나타난 그럴듯한 환영일 수도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이 모든 황당한 상황이 너무나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나.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흥분했던 마음이 푸쉬식하고 식어 버렸다.
 “부질없네.”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갑자기 나는 휙 하고 현실로 던져졌다.
 오 배우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고 있다.
 “그, 그래.”
 당황한 오 배우가 슬그머니 손을 빼고는 대표실을 나갔다.
 성찬이도 서둘러 따라나선다.
 머쓱해서 머리를 긁고 있는데 강 대표가 소파에 앉아 나를 불렀다.
 “이리 앉으세요.”
 
 
 
 4. 전환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강중달 대표는 소파의 맞은편에 앉은 나를 지그시 보더니 물었다.
 “스물아홉입니다.”
 “군대는 갔다 왔고요?”
 “예, 운전병으로 갔다 왔습니다.”
 거절할 셈으로 왔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스펙을 밝히고 있다.
 엉겁결에 뱉어 놓고도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 하마터면 혀를 찰 뻔했다.
 “장준형 배우와 일할 때 직함이······.”
 “팀장이었습니다.”
 내 말에 강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팀장급으로 모시는 건 어렵겠군요. 아시다시피 연예기획사마다 직제가 달라서 말이죠. 우리 회사 매니지먼트 부서는 팀제로 운영되고 있어서요. 실장으로 오셔도 괜찮겠습니까?”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의 매니지먼트 본부는 다섯 개 내외의 조직으로 분리해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조직은 회사에 따라 팀별로 운영되는 곳도 있고, 실 체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팀 체제로 운영되는 회사에서 팀장급은 매니지먼트 팀 하나를 총괄하므로 상당히 높은 직책이었다.
 근속연수가 차고 실적이 있어야 오를 수 있다.
 그에 비해 실장은 근속연수를 채우면 일단 달아 준다.
 근속연수를 채우지 못해도 실적이 괜찮으면 달아주기도 한다.
 실 체제로 운영되는 회사는 그 반대다.
 실장급이 높고 팀장이 그 아래였다.
 배우의 추천만 믿고 낙하산으로 데려오는 로드에게 처음부터 팀장을 달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갑자기 이야기가 비화해서 내심 놀랐다.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직함 얘기가 나오다니.
 만나자고 할 때부터 속전속결이구나 싶긴 했지만.
 나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벌써 결정하시는 겁니까? 저는 아직 확답을 안 드렸는데······.”
 강 대표가 빙그레 웃으며 마주 본다.
 “거절할 건가요?”
 “아, 그게······.”
 나는 즉답이 나오지 않아 또 한 번 자괴감을 느꼈다.
 “거절할 사람 치고 옷차림은 꽤 기합이 들어갔는데?”
 나는 머쓱해 머리를 긁었다.
 예의를 차리고자 입고 온 슈트가 오해를 불렀나?
 “너무 쉽게 결정하는 것 같아 의아한가요?”
 “예, 그렇습니다.”
 강 대표는 잠시 손가락으로 볼을 두드리며 할 말을 골랐다.
 “별로 손해 볼 게 없거든요.”
 무슨 뜻인가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고 있는데, 강 대표가 웃으며 덧붙였다.
 “나도 로드 출신이에요. 이 일은 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빠지는 사람도 워낙 많아서 경력자가 항상 모자란 상황입니다. 매니저가 딱히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업은 아니죠. 그러니 스펙을 꼼꼼히 따져 봐야 별 소용없을 테고. 오히려 감정 노동에 가까운 일인데, 인성이나 인내심 같은 것을 짧은 대화로 판단하기는 무리일 테고요.”
 강 대표는 거기까지 얘기하다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오 배우와 내 관계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좀 굴러 봤으면 들어 아는 바가 있겠지요.”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종석은 강중달과 데뷔 때부터 함께해온 의리파로 강중달이 하림 액터스를 창립하고 키워오는 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오종석의 한마디가 강 대표에게 이 정도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 경우는 오 배우를 한 번 믿어 보는 겁니다. 의리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거든요. 잘 해내서 실적을 내주면 좋고, 못 버티고 나가면 오 배우는 나한테 빚이 하나 생기는 거죠. 나한테는 손해날 게 전혀 없어요.”
 안경 너머로 강 대표의 눈이 장난기를 띠며 반짝 빛났다.
 호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면은 또 냉철해 보인다.
 하기야 어떤 분야에서 살아남아 일가를 이룬 사람치고 무골(無骨)이 있을까?
 “그래서······ 할 건가요?”
 나는 망설였다.
 거절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왔지만, 조금 전 본 환영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당겼다.
 슈퍼스타 메이커가 정말로 현실에서도 기능한다면? 배우가 가진 재능과 상태를 정밀하게 수치화하여 들여다볼 수 있는 이능력이 생긴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나의 인생에 어떠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밤의 호수에서 만난 노인이 떠오른다.
 노인은 죽음을 말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노인의 눈빛에서 본 것은······.
 그렇다.
 지금의 강 대표의 눈빛에서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놈이 어떻게 반응할까 흥미진진해 하는.
 바로 호기심이었다.
 어쩌면 노인은 장난기 심하고 괴팍한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자신이 던져준 새로운 기회를 어떻게 쓰는지 보자, 하고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다.
 혹은 나의 영혼을 저울질하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악마였을지도?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을 제시하면서 지옥행 이면계약서에 지장을 찍기를 기다리고 있다던가.
 ‘제기라아아알!!’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될 대로 되라지. 신이든 악마든 알게 뭐냐? 이런 멋진 장난감을 던져 줬는데 줘도 못 먹는 게 병신이지.
 나는 슈퍼스타 메이커가 매우 관대한 신이 나에게 주는 멋진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도 뜬금없이 물에 뛰어든 것은 내가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될 사람인지, 생명을 던져 대의를 추구할 용기가 있는 인간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 틀림없다.
 나는 이번에도 내가 미쳤다는 가장 간단명료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애써 회피했다.
 “언제부터 출근하면 됩니까?”
 강중달 대표가 트레이드 마크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팀을 정리해서 김정운 씨가 맡을 배우를 결정해야 하니 시간이 좀 필요해요. 우리 쪽에서 연락을 드리죠.”
 강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는 협탁 안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근로계약서예요. 천천히 읽어 보고 다음에 올 때 도장 찍으면 되겠네요.”
 “하겠다고 말씀드렸으니, 지금 바로 훑어보고 찍겠습니다.”
 나는 결심이 흔들릴까 봐 서둘렀다.
 빠르게 계약서를 넘겨 보았지만, 일반적인 근로계약서일 뿐 별다른 사항은 없었다.
 연봉은 2천을 살짝 넘으니 장 배우의 로드일 때와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4대 보험이 보장되고 승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엔 나에게 슈퍼스타 메이커가 있었다.
 그 힘을 하루빨리 시험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사실 계약 내용 같은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강 대표에게 인주를 건네받아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강 대표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같이 한번 잘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하림 액터스에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바로 다음 주 월요일 아침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나는 늦잠을 자다가 벨 소리에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매니저의 직업병이 발동해 반사적으로 통화를 눌렀다.
 “네.”
 [김정운 씨?]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하림 액터스 매니지먼트 3팀 팀장 허일상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상대는 나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밝혔다.
 [이번에 매니지먼트 3팀으로 오게 되셔서요. 담당하실 배우를 배정해 드릴 텐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 가능합니까?]
 “예. 가능합니다.”
 [그럼 13일 오전 9시에 회사 로비에서 보죠.]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허 팀장은 그것으로 모든 용건을 끝마쳤는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한동안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출근일이 정해지고 말았다.
 “이제 다시 시작인가?”
 나는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잘 먹고 푹 쉬어 체력을 다져야겠다.
 일을 다시 시작하면 당분간 잠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샤워를 하며, 나는 어쩐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역시 나는 이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
 
 “3팀 배정됐다고요? 허 팀장님 밑으로?”
 성찬이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나도 덩달아 놀랐다.
 출근날이 확정되고 인사차 성찬이한테 연락했다.
 앞으로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될 사이고 하니, 회사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대충 들어 보자 싶었던 것이다.
 성찬이는 오 배우가 지금 한창 대극장 뮤지컬 출연 중이라 시간이 안 난다며 평일 낮에 카페에서 잠시 보자고 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으며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고 나서 매니지먼트 3팀에 실장급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더니, 이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요······ 형도 고생 좀 하겠네요.”
 성찬이가 작게 중얼거리며 혼잣말을 한다.
 나는 슬쩍 떠보았다.
 “왜? 팀장이 깐깐해?”
 “뭐 좀 그렇기도 하고요.”
 성찬이는 대충 얼버무리며 곤란한 듯 웃었다.
 하기야 전화통화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색이 딱딱하다 싶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자니 성찬이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제가 있는 1팀은 대표님이 하림 액터스 창립할 때부터 오래 같이했던 중견 배우들 담당이고요. 2팀은 이후에 영입한 스타급 배우들 중심이에요. 3팀은 신인이랑 조연급이 대부분이고요.”
 성찬이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3팀으로 가셨으면 실장급이라고 해도 뒤치다꺼리가 많을 텐데······.”
 나는 짐짓 쾌활하게 답했다.
 “낙하산이 바로 핫한 배우 매니저로 밀어 넣어주기를 바라면 도둑놈 심보지. 오히려 내가 열심히 해서 키울 가능성이 있으니 좋은데?”
 성찬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뭐라 더 말할 듯 움찔거리다가 결국 이렇게 말을 맺었다.
 “네. 그러시다면야 뭐. 열심히 하세요, 형. 파이팅!”
 마지막에는 주먹을 꼭 쥐고 파이팅 포즈까지 취해보였다.
 뭔가 나를 딱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친데? 누가 누굴 딱하게 보는 거야?
 나는 낄낄 웃으며 타박했다.
 “너 시도 때도 없이 파이팅하는 그거, 오 배우 버릇이지? 파이팅도 적당히 해야지 말이야.”
 성찬이는 아차 하고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해 했다.
 “안 그래도 조금만 긴장 풀고 있으면, 자꾸 지쳤냐고 추궁을 해서 저도 모르게 파이팅을 하게 되네요. 그렇게 계속 파이팅하다가 스케줄 마치고 오면 완전 탈진한다고요.”
 성찬이의 너스레에 나는 껄껄 웃었다.
 이후에는 적당히 성찬이의 하소연도 들어주고, 농담 따먹기도 하다가 헤어졌다.
 하지만 어쩐지 성찬이가 걱정해 주던 것이 마음에 남았다.
 
 ***
 
 일주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드디어 출근 첫날.
 나는 꽤 긴장한 상태로 출근준비를 했다.
 고생이야 각오한 것이고, 슈퍼스타 메이커를 다시 확인할 생각에 흥분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강중달 대표와 성찬이를 비롯해 쉬는 기간 동안 만난 친구들까지 여러 사람과 근거리에서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얘기해 보았다.
 하지만 오 배우 이후로 누구에게도 스탯 창이 펼쳐지지 않았다.
 TV나 영화를 보면서도 화면 속 배우와 눈을 맞춰 보았는데,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아마도 현직 배우이거나 배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실제로 마주 보고 있을 때 한해서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
 만약 슈퍼스타 메이커가 일회성 환영이라면 다시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속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초조해졌다.
 그래서 장 배우를 찾아가 확인해 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둔 마당에 별 용건도 없이 찾기가 민망했다.
 게다가 스탯을 열어 봤다가 ‘내가 엄청난 가능성을 포기해 버렸구나’하고 후회하게 된다면?
 혹은 ‘역시 장 배우는 이 이상은 힘들겠구나’ 하며 깨닫게 된다면, 어느 쪽이든 몹시 곤란하고 슬픈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을 기다렸다.
 내 배우들을 만나는 이날을.
 스탯 창이 마르고 닳도록 분석해 주마!
 나는 컨버스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며 다짐했다.
 
 
 
 5. 새로운 시작
 
 
 
 오전 9시를 10분 앞두고, 하림 액터스 로비로 들어서니, ‘아! 이 사람이구나!’ 싶은 남자가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얀 셔츠 위에 검은 자켓을 입고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남자였다.
 남자는 옆구리에 파일을 하나 낀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30대 중후반 정도일까? 약간 살집이 있는 얼굴이 둥글둥글하다.
 ‘그냥 보기에는 서글서글한 인상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허일상 팀장님이십니까?”
 남자가 고개를 드는데 순식간에 서글서글하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아, 이거 확실히 만만치 않겠네.
 “김정운 씨?”
 “예, 김정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정신이 퍼뜩 들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허 팀장은 내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옮기죠. 따라오세요.”
 나는 쭈뼛쭈뼛하며 허 팀장의 뒤를 따라가며 쓴 입맛을 다셨다.
 호의적이지 않을 줄은 예상했다.
 낙하산으로 들어와 실장 자리를 꿰찬 내가 곱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찬바람이 쌩쌩하다니?
 현장 매니저로 바닥부터 구르다가 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라면, 숱한 더러운 꼴을 보고도 웃는 낯으로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성격일 것이었다.
 붙임성 없는 성격으로 내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도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여 표정이 금방 드러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허 팀장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것은 그가 갑이고, 내가 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서는 애써서 비위를 맞출 필요가 전혀 없는 상대인 것이다.
 회의실로 들어선 허 팀장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이제 확실히 내 밑으로 들어온 거니 말 놔도 되지?”
 “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각 잡고 선 채로 말했다.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앉아.”
 나는 그 말에 얼른 허 팀장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어. 안 잡아먹으니까.”
 “아닙니다. 제가 붙임성이 없는 성격이라······.”
 “그러면서 잘도 이 바닥에 붙어 있었네?”
 “예?”
 허 팀장이 투덜거리며 혼잣말을 해서 나는 짐짓 못 들은 척 되물었다.
 “됐고. 미리 말해 두지만, 난 김 실장이 낙하산으로 굴러들어 온 게 존나게 마음에 안 들어. 친절하게 대해주리란 기대는 하지 말고. 어쨌거나 그와는 별개로 일은 일이니까 어디 한번 잘 버텨 봐.”
 이쯤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자이언트 엔터 박원웅 팀장.
 내가 맘에 안 든 이유는 다른 것 같지만, 그 사람도 참 집요하게 구박했었지.
 그래도 아예 경험이 없는 것보다 모진 콩쥐 생활을 겪어 본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려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우렁차게 대답하자 허 팀장은 미덥지 못하다는 듯 콧방귀를 한 번 뀌고는 가지고 있던 파일을 쓱 밀어주었다.
 “앞으로 김 실장이 담당할 배우들이야.”
 나는 파일을 받아들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배우‘들’이라는 것은 스타급 배우를 단독으로 맡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성찬이가 했던 말처럼 일이 별로 없는 신인이나, 조연급 배우를 여럿 총괄하는 일이 되려나 보다.
 나는 천천히 파일을 넘겨보았다.
 보나 마나 신인배우들이겠거니 생각하고 무심히 열었다가 나이가 상당한 배우가 맨 처음으로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파일의 맨 앞에 올라와 있는 사람은 개성 있는 마스크의 중년 남자배우였다.
 개성 있다는 것은 좋게 말해서고, 솔직히 말하면 잘생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네모나게 각진 턱에 찢어진 눈매가 날카롭다.
 악역이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다.
 이름 한대성. 나이 53세.
 얼굴은 익다.
 분명 어딘가에서 조·단역으로 몇 번 본 사람인데······.
 아는 배우인데, 정작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주욱 한 번 살펴보았다.
 필모는 상당히 길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작품도 있고, 분명 본 적이 있는 작품도 어떤 역할로 나왔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드라마라면 몰라도 영화는 상당히 봤다.
 그런데 이만큼의 경력을 가진 배우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마도 임팩트 있는 한 방이 없었으리라.
 게다가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듯한 이 촌스러운 프로필 사진은 대체 언제 찍은 것이란 말인가?
 현재 나이는 53세인데, 사진은 4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안인 편이라 해도 최소 5년 이상은 이전에 찍은 사진이 분명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사람은 소속사에서 방치하고 있는 배우구나.
 더 이상 뜰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투자도 하지 않고, 묵혀 두고 있는 배우.
 언제 나가도 아깝지 않고, 나간다면 옳다구나 쌍수 들고 환영할 배우.
 그래, 자이언트 엔터에도 그런 배우가 몇 명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페이지를 넘겨 다음 배우를 보았다.
 아주 앳되어 보이는 청년 배우다.
 이름 차영석. 나이 23세.
 고딩인가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나이가 있다.
 피부가 하얗고 정돈된 이목구비이긴 하지만, 곱상한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남성적으로 잘생긴 얼굴도 아니다.
 비율은 괜찮아 보이는데 너무 말랐다.
 쌍꺼풀 없이 길쭉하게 찢어진 눈이 요즘 대세라곤 하지만 전통적인 미남상과도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래, 실물의 아우라가 더 나은 예도 없진 않다.
 하지만 대체로 프로필 사진은 실물보다 많이 미화된다.
 그것을 감안하면······.
 ‘평범한데?’
 번화가를 지나가면 한둘은 볼 수 있는 좀 깔끔하고, 귀엽게 생긴 청년 정도라고 할까.
 그래, 뭐 하림에서 뽑은 거면 이유가 있겠지.
 실물이 훌륭하다거나 연기가 좋다거나, 비주얼로 편견을 가지지 말자.
 나는 얼른 필모란으로 눈을 돌렸다.
 필모는 달랑 하나. ‘우당탕탕 패밀리’
 들어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당장 이 작품부터 찾아봐야겠다.
 무심코 비고란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뭐? 국적이 캐나다?!
 “저기, 이 친구 설마 교포입니까?”
 나는 다급히 허 팀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황한 내 표정에 허 팀장은 별것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맞아. 2세야. 캐나다에서 동영상으로 오디션 지원했는데, 괜찮아서 뽑았지. 영어 연기도 가능하고 말이야.”
 영어 연기가 문제가 아니다.
 “한국어 연기는 가능한가요?”
 “당연하지. 부모한테 한국어를 잘 배웠나 봐. 그냥 한국 애 같아.”
 나는 허 팀장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교포 배우들은 한국에서 성공시키기 힘들다.
 한국어가 서툴거나 잘해도 억양이 남아 있으면 역할에 한계가 생긴다.
 또한, 한국적인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연기에 한계가 될 수 있다.
 비주얼 훌륭한 교포 배우들도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뜨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런 부분들은 하루아침에 교정되는 것도 아니다.
 근데 이런 평범한 외모로 한국어도 안 된다면······.
 아냐, 아냐. 편견을 가지지 말자. 걱정은 만나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급히 다음 장을 넘기다가 순간, 아! 하고 탄성을 뱉고 말았다.
 프로필 사진 안에는 눈이 크고 개성 있는 마스크의 늘씬한 미녀가 앉아 있었다.
 빨려 들어갈 듯 깊은 눈매는 살짝 올라가 있어 장난기 많은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무표정한 사진은 카리스마 있었고 웃는 얼굴은 시원시원하다.
 예쁜데 그냥 예쁜 것이 아니다.
 개성 있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굉장하잖아!’
 이름 성혜나. 나이 21세.
 필모는 백지다. 아주 깨끗하게 비어 있다.
 “필모가 없네요.”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중얼거림에 허 팀장이 듣고는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신인이야. 모델 에이전시에서 뽑아온 지 얼마 안 됐어. 지금은 연기수업 중이고, 아직 데뷔 전이지.”
 어쩐지 포즈에서 프로의 향기가 느껴지더라.
 나는 세 사람의 프로필을 다시 한번 찬찬히 넘겨보았다.
 젊은 두 배우는 아예 필모랄 것이 없고, 나이 든 배우의 실속 없는 필모에는 그나마도 올해 작품이 없었다.
 게다가 세 사람 모두 ‘준비 중인 작품’ 항목은 텅 비어 있다.
 신인을 배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생초짜 둘에 퇴물 하나라니.
 이건 엿 먹어 보라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흘낏 허 팀장의 얼굴을 살폈다.
 허 팀장은 기대에 찬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내 실망한 꼴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기대를 만족하게 해 줄 순 없다. 보란 듯이 키워 주지.
 다른 둘은 몰라도 성혜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원석을 허 팀장의 말마따나 낙하산한테 순순히 넘긴 것에 조금 의심이 들긴 했지만, 뭐 어쨌든 맡겨만 준다면 감지덕지다.
 나는 빙긋 웃으며 파일을 덮었다.
 “배우와 담당 로드들은 언제 만나 볼 수 있습니까?”
 허 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웃었다.
 “김 실장.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로드가 따로 없어요. 스케줄도 없는 배우들한테 전담 로드는 무슨. 자선사업도 아니고. 김 실장이 돌아가면서 뛰면 돼. 나중에 스케줄 생겨서 바빠지면 붙여 줄 테니까.”
 맙소사. 배우 셋 로드를 삼교대로 뛰라고? 성찬이가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나는 당혹감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배우분들은 언제 만나볼 수 있습니까?”
 “혜나는 연습실에 있을 테고, 대성 씨는 송파에 있는 연기학원으로 찾아가야 할 거야. 요즘은 그쪽이 생업이니까. 그리고 영석이는 시트콤 하나 끝내고, 부모님 만나고 온다고 캐나다 들어갔는데. 곧 들어오겠지, 뭐.”
 하아~.
 지금 이 상황에서 한가롭게 캐나다라니.
 그나마 군대 보낼 일은 없어서 다행인가?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러면 혜나 씨라도 먼저 만나 봐야겠네요.”
 그래, 어차피 잘된 것인지 모른다.
 가장 유망주를 제일 먼저 영접하는 것이다.
 내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자, 허 팀장도 일어나 앞장섰다.
 허 팀장은 나를 이끌고 하림 액터스 건물을 나섰다.
 건물 뒤쪽으로 골목 몇 개를 지나니 ‘혁신 연기 아카데미’라는 간판이 달린 4층짜리 건물이 나왔다.
 허 팀장은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로비에는 배우 양혁신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사진 아래쪽에는 ‘혁신 연기 아카데미 원장 양혁신’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멋지게 사인이 새겨져 있다.
 양혁신은 하림 액터스 출신의 중견 배우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의 연기파 배우이자, 한때는 로코물 주연도 도맡아 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스타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하림 액터스와 협업으로 소속 신인 배우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허 팀장은 1층 접수대 앞에 앉은 직원에게 다가갔다.
 여직원이 허 팀장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혜나, 지금 와 있죠?”
 “네, 3층에서 마임 수업 듣고 있어요. C 강의실로 가 보세요.”
 
 
 
 6. 만남
 
 
 
 로비의 직원에게 혜나가 3층 연습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허 팀장은 두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층에 내리니 마침 C 강의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중년 남성 배우였다.
 이름이 주민영이었던가?
 연극이 주 무대고,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조연으로 간간이 출연하고 있는 배우다.
 이 사람이 마임을 가르치고 있나 보다.
 그에게 허 팀장이 성큼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여어~ 허 팀장. 오랜만이에요.”
 “예, 건강하시죠? 혜나는 잘 하고 있나요?”
 “아이~ 뭐 알잖아요. 워낙 비주얼이 좋으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거.”
 주민영은 조금 망설이나 싶더니 농담처럼 덧붙였다.
 “근데 조금 뻣뻣하긴 하네요.”
 허 팀장과 주 배우가 허허 동시에 웃어 버린다.
 둘 사이에 뭔가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은데. 무슨 의미일까?
 나는 그게 뭘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허 팀장이 나를 주 배우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앞으로 혜나를 담당하게 될 김정운 실장입니다.”
 “아, 그래요? 반가워요.”
 주민영은 별다른 얘기 없이 쭈뼛쭈뼛하더니 서둘러 우리를 들여보냈다.
 “지금 쉬는 시간이니까 들어가 봐요. 혜나는 안에서 스트레칭하고 있어요.”
 나는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 맡은 매니저라고 하면 예의상으로라도 덕담 한마디 해 줄 법도 한데, 혜나에 대해서는 계속 코멘트를 망설이는 느낌이다.
 C 강의실로 들어가니, 스트레칭을 하는 혜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앉아 등을 앞으로 굽히고 있다.
 그런데 저게 다 굽힌 건가? 좀처럼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게다가 무릎이 다 펴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주 배우가 뻣뻣하다고 했던 것은 태도나 연기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신체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였던 건가?
 “혜나야.”
 허 팀장이 부르니 혜나가 몸을 일으켜 뒤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쑥스럽게 웃는다.
 심!쿵!
 헉, 세상에 프로필 사진보다 더 낫잖아.
 실물이 더 나은 아주 희귀한 경우다.
 내가 감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170이 조금 안 되려나?
 모델치고는 작지만, 여배우로서는 큰 키다.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혜나는 그야말로 늘씬했다.
 볼륨이 좋은 글래머 타입은 아니지만, 약간 마르고 늘씬한 쪽은 남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다.
 요즘 대세는 걸 크러시이기도 하고.
 혜나가 웃으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모델 일로 다져진 시원스러운 워킹은 순간적으로 연습실을 런웨이처럼 보이게 했다.
 전면의 통유리창으로 늦은 아침 햇살이 들어와 반대쪽 벽면의 거울에 반사되어 혜나는 후광처럼 몸에 빛을 두르고 있었다.
 아아~ 눈부시다.
 ‘여신이네, 여신이야.’
 나는 흡족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혜나가 다가와 서니 허 팀장이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이제부터 너를 맡아 줄 김정운 실장이야. 얘기는 들었지?”
 혜나가 반색하며 내 눈을 똑바로 본다.
 1, 2, 3초.
 가볍게 현기증이 일며 배경이 멀어진다.
 슈퍼스타 메이커에 다시 접속되었다. 고대하던 순간이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찬찬히 혜나를 뜯어보았다.
 빙글 한 번 돌려 보기도 했다.
 봐도 봐도 아름답다. 앞태를 봐도 뒤태를 봐도 완벽하다.
 그동안 연예계 일을 하며 예쁘다는 배우들을 많이 봐왔지만, 비주얼만으로 보면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나는 감격했다.
 ‘비주얼이 이 정도면 된다! 무조건 된다!’
 스탯창은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건성으로 휙 한 번 눈길을 주었다.
 
 성혜나(21세, 여)
 [외모 93(?)]
 [체력 52(?)]
 [지력 36(?)]
 [연기력 17(?)]
 [매력 76(?)]
 [도덕성 64(?)]
 [근성 67(?)]
 [스트레스 68]
 [기타]
 
 ‘우와, 외모가 90대야!!!’
 배우 중에서도 상당히 상위라는 얘기다.
 나는 기뻐하다가 문득 현저하게 낮은 수치를 발견하고 굳어 버렸다.
 
 [연기력 17(?)]
 
 17이라니! 그것도 하필 연기력이다.
 이 정도면 일반인 수준도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패닉에 빠져 급히 연기력 지수의 하위 창을 열어보았다.
 
 [연기력 17(?)]
 [억센 사투리로 인해 딕션이 매우 부정확. 연기력 올리는 데 노력이 많이 듦.]
 
 사투리?!!!!! 게다가 수치가 이렇게 바닥인데 올리기도 힘들어?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울상이 되어 스탯창을 접고, 혜나를 찬찬히 다시 보았다.
 아름답다.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다워.
 나는 홀린 듯이 생각했다.
 비주얼이 이 정도인데, 다른 걸 더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지.
 이제 막 연기수업 시작했으니, 수치가 바닥인 건 당연한 거고.
 그래, 힘들더라도 꾸준히 올리면 돼.
 사투리는 예쁜 여배우에게는 치명적이긴 하지만, 사투리 억양 가지고도 대배우가 된 사람도 많은데 뭐.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정하면 되지.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일단 나가서 혜나와 얘기를 나눠 보자고 생각했다.
 배경이 다가오며 다시 현실로 돌아온 순간, 나는 얼른 혜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김정운입니다. 앞으로 같이 잘 해 봐요, 혜나 씨.”
 혜나는 방긋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더. 성혜나라예.”
 ······어? 외모와 전혀 맞지 않는 허스키 보이스였다.
 그뿐이라면 개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저 사투리는······ 단순히 억양이 있는 정도가 아니잖아! 요즘도 이렇게 심하게 사투리를 쓰는 처자가 있다는 말이야?!
 내 손이 굳어지는 걸 의식한 듯 혜나가 어투를 바꿨다.
 “제가↘ 할매↗밑에서 커서요오↘~. 서울말↗ 쓸라고↘ 노력하고 이써요↘.”
 ······그래, 이걸 서울말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어때? 사투리도 귀엽지?”
 허 팀장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이건 약 올리는 거 맞지?
 어지간해야 귀엽다고 받아들이지, 외모랑 어투의 갭이 너무 커서 귀엽다고 할 수준이 아니라 숫제 깨지만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네요.”
 혜나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수줍게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진 배우라니······.
 
 ***
 
 혜나와 인사를 마치고 바로 한대성을 만나러 가기로 했던 계획은 변경했다.
 혜나를 만난 충격이 너무 컸다.
 가장 유망주라고 생각했던 혜나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강하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른 두 사람을 만나러 가는 데는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어차피 영석이는 국내에 없고, 한 배우는 송파의 연기학원에 있다고 했다.
 일단 한 배우를 만나려면 필모를 분석하고 가는 것이 예의이기도 할 것이었다.
 나는 허 팀장을 따라 매니지먼트 3팀 사무실로 들어왔다.
 내 자리에는 이미 내 이름과 직함이 찍힌 명함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한대성의 필모를 분석해 보기로 했다.
 허 팀장에게서 받아 온 파일을 다시 열어 보았다.
 가져도 되냐고 물었을 때 허 팀장은 말했다.
 [김 실장 보라고 가져온 거니까, 가져가. 대신 보안 걸린 문서니까, 유출 안 되게 조심하고. 괜히 연예인 매니저 됐다고 들떠서 SNS 같은데 찍어서 올리고 그러는 애들 있는데, 잘리는 건 물론이고 인생 망하는 거 한순간이다. 회사에서 소송 걸어서 아주 탈탈 털어 버린다고.]
 내가 초짜도 아니고 뭘 그런 얘기까지 하나 싶었지만, 그냥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한 배우의 필모를 주욱 훑어본다.
 짧은 시간 안에 다 보기에는 너무 많다.
 게다가 어차피 큰 역할로 나온 것도 아닐 테니, 전부 다 보는 건 시간 낭비겠지.
 한 배우의 출연작 중에서 영화만 뽑아냈다.
 드라마는 보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그래서 그중에서도 꽤 알려진 영화들만 뽑았다.
 이번에는 프로필상에 역할명이 언급되어 있는 것만 고른다.
 역할 이름이 있다는 것은 아주 단역은 아니라는 얘기니까.
 그렇게 뽑고 보니 7편 정도 되었다.
 나는 바로 책상에 놓인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해 영화를 하나하나 다운받았다.
 오래된 영화 중에는 포털 사이트에서 VOD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가려진 것이 5편.
 오늘은 종일 영화를 봐야 하려나 보다.
 나는 각오를 하고 첫 영화를 틀었다.
 
 ***
 
 ‘음, 생각보다 괜찮은데?’
 10시간 정도의 대장정 끝에 나는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가고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사와 끼니를 때운 것 외에는 종일 모니터 앞에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영화를 끝냈을 때는 밤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한 배우는 다섯 편의 영화 중 네 편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다.
 세 편에서는 사망하면서 퇴장했는데, 심지어 그중 한 편에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죽어 버려서 모니터링 시간을 상당히 단축해 주기도 했다.
 한 배우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훌륭했다.
 그런데 연기 스타일이 수수했다.
 화려하지도, 크게 눈에 띄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이 튀기보다 상대의 연기나 작품 전체의 톤을 살리는 타입이다.
 인상적인 한 방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 때문에 매번 비슷한 역할만 전전해서 그렇지, 괜찮은 캐릭터를 만나면 분명히 뜰 수 있는 재목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경력을 가진 나이 많은 배우에게, 더욱이 소속사도 포기한 배우에게 제대로 된 역할이 들어 올 리 없다.
 좋은 역할은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더 인지도 있고, 더 젊은 배우가 채갈 것이었다.
 요행히 괜찮은 역할을 맡았다고 해도 더 유명한 배우가 배역을 욕심내면 바로 잘릴 것이 뻔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내가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뛰어도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가망이 없는 배우도 아니고 어떻게든 심폐소생을 시켜 봐야지.
 슈퍼스타 메이커로 능력치를 확실히 파악하면 좀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체조를 했다.
 굳어 있던 관절들이 우두둑 아픈 소리를 냈다.
 이미 지하철도 끊어졌고, 오늘은 차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스케줄이 있을 땐 회사 차를 쓰지만, 매니저는 언제 불시에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 때문에 자이언트 엔터 시절 구입한 중고 카렌스가 한 대 있는데, 고장이나 사고 없이 잘 쓰고 있다.
 아직 정해진 스케줄이 없는 배우들을 담당하게 되었으므로 당분간은 내 차를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다.
 오랜만에 제대로 정비를 해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은 회사 휴게실에서 자야 할 것 같다.
 일단 편의점에 나가서 야식거리를 좀 사서 들어와야겠다.
 다음은 영석이의 유일한 출연작인 ‘우당탕탕 패밀리’를 깨야 한다.
 
 ***
 
 “첫날부터 유난이네, 유난이야.”
 주위가 술렁술렁한다 싶더니 가시 돋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허 팀장이 아니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는 지나간다.
 주위의 직원들이 흘낏흘낏 쳐다보며 실실 웃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9시가 훌쩍 넘은 시간.
 어젯밤 영석이가 출연한 시트콤을 보다가 깜박 엎드려 잠이 들었나 보다.
 이 시간이 되도록 어쩌면 아무도 깨워 주지 않았을까? 낙하산인 나를 모두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차라리 대놓고 잔소리를 하는 허 팀장이 정감이 갈 정도네.
 나는 서둘러 소매로 입가를 문질러 침 자국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화장실로 갔다.
 불편하게 잔 탓에 머리가 아직도 멍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종이 타월로 얼굴을 닦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지금부터 한대성을 만나러 가야 한다. 정신 차려야지.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볍게 팡팡 두드려 심기일전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어, 형! 마침 잘 만났네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며 성찬이가 불쑥 나타났다.
 “성찬아! 웬일이야?”
 적대적인 근무 환경 속에 그나마 하나 있는 친구가 반가워 나는 나도 모르게 벌쭉 웃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성찬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을 뒤져 커피체인 스타더스트 마크가 찍힌 봉투를 하나 쥐여주었다.
 열어보니 5천 원짜리 상품권 10장이 들어 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뭐야?”
 “지난 일요일에 오 배우 뮤지컬 막공이었거든요. 기념으로 현장 매니저들한테 쏘래요. 뮤지컬 스탭들한테도 다 돌렸어요.”
 현장 매니저만이라고 해도 로드와 실장급 포함해 50명에 가깝다.
 대극장 뮤지컬 스탭들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천만 원 정도는 쉽게 깨졌을 텐데?
 “뮤지컬 출연료를 한턱내는데 다 쓰는 거 아니냐?”
 “워낙 그런 걸 좋아하는 형님이잖아요. 버는 거 90%는 주위에 다 쓰는 거 같아요. 그래도 그 때문에 또 벌어야 하니까 열심히 일하는 건 좋죠.”
 내 질문에 성찬이는 하핫하고 웃었다.
 “형은 어디 가는 길이세요?”
 “한대성 배우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 한 배우 맡으셨어요?”
 성찬이가 조금 미묘한 표정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송파에 한 배우가 하는 학원이 있다고 해서 거기로 가는데.”
 “차 가져오셨어요?”
 “아니. 지하철 타려고.”
 “그럼 조금 기다리세요. 저 이것만 돌리면 오늘 일은 끝이니까 태워다 드릴게요.”
 “괜찮은데······.”
 성찬이는 내 답이 끝나기도 전에 부지런히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밖에서 보니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인사말을 하며 전하고, 나머지는 팀장에게 한꺼번에 맡겼다.
 3개 팀을 모두 그렇게 돌고 나서 성찬이는 후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가요, 형.”
 버릇이 무섭다고, 성찬이는 무의식중에 나를 앞장서 에스코트하다가 위화감을 느끼고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 모습에 나는 허헛하며 웃고 말았다.
 
 ***
 
 “아무래도 허 팀장님이 3팀 골칫덩이들 떠넘긴 거 같네요.”
 성혜나와 한대성, 차영석 3명을 맡았다고 하니 성찬이는 운전하면서도 혀를 찼다.
 무의식중에 말해놓고 성찬이는 슬쩍 내 눈치를 본다.
 “형도 눈치채셨죠?”
 “아, 뭐······.”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성찬이는 그제야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한 배우는 나이도 있고 앞으로 크게 뜰 가능성 없으니, 방치하고 있는 것 같고요. 혜나는 워낙 비주얼이 아까우니까 뽑아 놓긴 했는데, 단점이 너무 분명해서 띄우기가 힘들 거예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였다.
 게다가 혜나 정도의 비주얼 가진 애를 못 띄우면, 그것대로 매니저의 역량을 의심받을 수 있다.
 여러모로 데리고 있기 부담스러운 존재이긴 할 것이다.
 “영석이는 어때?”
 “글쎄요. 제가 볼 때는 싹싹하고 괜찮던데······. 뭐 저는 자주 보지는 못해서 뭐라고 말하긴 그렇네요.”
 성찬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들리는 말로는 허 팀장이 영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걔가 겉보기에는 한국 애들과 다른 바 없어 보여도 교포잖아요. 정서가 좀 다르달까? 한국 애들 같으면 어른이 시키면 그냥 예, 예 하고 지나갈 일도 고집을 피운다나요? 배우는 자기 고집도 있어야 하긴 하는데, 새파란 신인이 알아서 기지 않으니까 허 팀장으로서는 아니꼽겠죠.”
 아니꼽더라도 명백히 스타의 자질이 있다면, 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까우니까.
 아마도 애매하다고 판단했겠지.
 애매하니까 굳이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밀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형이 3팀 들어간다고 했을 때 이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허 팀장, 그 인간이 공정하게 배우를 배정해 줬을 리 없겠다 싶어서요.”
 직속 상사도 아닌데, 성찬이는 상당히 격하게 말했다.
 덩치 크고, 둥글둥글 곰 같은 성찬이는 항상 허허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 성찬이치고는 꽤 정색하고 얘기를 해서 나는 슬쩍 물었다.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쌓인 거랄 건 없고요. 그 인간이 좀 재수가 없잖아요.”
 성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허 팀장 대외적으로는 사람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뽑아먹을 게 있겠다 싶은 사람한테는 그렇게 잘할 수가 없어요. 근데 얘는 영원히 내가 신세 질 일이 없겠다, 얘가 나보다 잘 될 일은 절대 없겠다 싶으면 싹 안면몰수해요.”
 “너한테도 찬바람이 쌩쌩해?”
 “······네.”
 성찬이가 망설이다가 답하며 쓰게 웃었다.
 나도 덩달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나 나나 허 팀장한테 가망 없는 인생으로 찍힌 모양이다.”
 “아, 씨~. 열 받아서라도 잘 되려고요. 형도 힘내세요. 우리 같이 열심히 해 봐요.”
 그동안 성찬이와 깊은 얘기는 별반 나눠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깊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래, 그러자. 우리는 오늘부로 ‘두고 보자, 허 팀장’ 프로젝트의 동지인 거다?”
 “하하핫. 그거 좋네요.”
 성찬이는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댓글(5)

속삭이는비    
아직 까지는 좋습니다
2019.10.05 12:41
夢幻人    
지나가는 과객이오 는 동어반복입니다 ㅋ
2020.11.30 23:43
maru9    
초반은 괜찮은데 뒤로 갈수록 좌빨에 동성애 예찬이 나옴
2020.12.01 13:00
흑화너굴맨    
6권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진짜 재미있게 보고있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2020.12.06 20:46
ki*****    
bl팬픽 쓰다 소설로 넘어온 작가느낌이남. 여초 페미 느낌도 뒤로갈수록 남
2021.05.15 12:13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