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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 1권(1)

2019.08.12 조회 621 추천 6


 시작하면서
 
 
 이 글은 10년 전인 지난 2001년에 <시공사 드래곤북스>에서 <생사도>라는 제목으로 나온 글입니다.
 그동안 손대지 않고 있으면서 몇 군데 인터넷 이북 회사의 요청으로 초고를 그대로 넘겨준 적이 있습니다.
 출판된 지 너무 오래 전이라 최종 원고가 유실되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랬으니 당시 책으로 나왔던 글보다 조악했을 것이고, 지금은 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처음부터 손을 보아서 <개정판>으로 이북에 다시 올려봅니다.
 물론 스토리나 분위기 자체를 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는 개작(改作)이 아니라 새로 쓰는 게 될 테니까요.
 어색한 문장들을 가다듬었고, 오탈자에 대한 수정 작업을 하면서 필요에 따라 약간씩 첨삭을 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원래의 글보다 훨씬 깔끔해졌다는 걸 자신합니다.
 모쪼록 새롭게 태어난 이것이 독자 제현의 사랑과 아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제1장 소년 육초량(陸超梁)
 
 
 
 
 
 
 
 
 
 소년 육초량(陸超梁)은 숨을 멈춘 채 숲 속에 몸을 숨기고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북성(河北省) 자운부(磁暈府) 서쪽에 위치한 작은 산이었다.
 이름난 중원의 명산들에야 비할 수 없었지만, 용화산(龍化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산은 용이 꿈틀대는 듯한 남성적인 산세와 기암괴석, 무성한 수림으로 뒤덮인 자운부의 명산이었다.
 육초량의 열띤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그 용화산 자락을 깔고 있는 일만여 평의 넓은 초지(草地)였다.
 유월 한낮의 청청한 하늘이 머리 위에 있는데, 터럭 하나도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그 밝은 햇빛 아래 그곳에서는 지금 한바탕 처절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백 여 기의 중무장한 철기(鐵騎)들이 검은 빛 일색의 갑주를 쩔렁이며 종횡으로 말발굽을 놓아 달렸다.
 그들이 휘두르는 장창과 도검에서 튕겨져 나오는 햇빛 조각들이 평야를 온통 뒤덮는 듯했다.
 그 살기로 충만한 기마진세(騎馬陣勢)의 한복판에서 풀어놓은 사자처럼 좌충우돌하고 있는 거한(巨漢)이 있었다.
 한 필의 오추마와 한 몸이 되어 내달리며 금빛 찬란한 연자창(燕子槍)을 풍차처럼 휘두르는 거한의 용맹한 기세가 소년 육초량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아 놓았다.
 그의 창이 햇빛을 뚫고 번쩍일 때마다 어김없이 철기병 하나가 가슴이 뚫린 채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정말 대단하다!”
 육초량은 그때마다 그렇게 부르짖으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말머리를 돌려 도망하는 듯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바람처럼 내달으며 뒤쫓아 온 철기들을 창 한 자루로 헤집는 그 솜씨의 화려함이 마치 신춤(神舞)을 추는 자인 듯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동료를 잃은 철기들이 멈칫거렸다.
 “와하하하- 얼마든지 와라 흑룡보의 개들아!”
 사나이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용화산 기슭에 쩌르릉 울려 퍼졌다.
 육초량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강호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흑룡보(黑龍堡)와 신검문(神劍門) 사이의 혈전에 대해서는 그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만큼 그들 두 세력의 부딪침은 한바탕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것이다.
 
 신검문이 창시자인 만리신검(萬里神劍) 옥화량(玉樺梁)의 명성에 힘입어 오래 동안 강북 무림의 패자로 군림해 왔다면 흑룡보는 최근에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세력을 넓혀 가던 신흥 방파였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듯 늙고 젊은 두 개의 세력은 필연적으로 부딪쳤다.
 그들의 잦은 싸움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모두 그래도 뿌리가 깊은 신검문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지진(礎池鎭)의 일전(一戰)이라고 불리는 대청하(大淸河)의 싸움에서 신검문의 군웅들은 전멸하다시피 대패하고 말았다.
 구름을 타고 내려온 천병(天兵)들인 듯,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천 여의 철기(鐵騎)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검은 빛 갑주가 산과 들을 온통 뒤덮어 버렸고, 그 번쩍이는 창검의 살기는 발해만(渤海灣)의 파도마저도 숨죽이게 했다.
 벌판에 풀어놓은 야수의 무리처럼 철기들은 거칠 것 없는 도도함으로 신검문의 고수들을 짓밟아 버렸다.
 그 일전에서 주력을 잃어버린 신검문은 며칠 더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불과 석 달 전의 일이었다.
 강북 무림은 새로운 패자로 등극한 흑룡보의 위용에 숨을 죽였다.
 그와 함께 흑룡대(黑龍隊)로 불리는 그들의 철기는 단번에 두려움과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그 흑룡대의 철기들을 맞아 단신으로 무찌르고 있는 사나이에 대한 감탄과 존경으로 육초량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런 힘을, 저런 용맹을 가질 수만 있다면······.’
 육초량은 한없는 흠모와 부러움으로 거한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응?”
 그러던 육초량이 눈을 크게 떴다.
 사나이의 등 뒤에 마치 그의 신체의 일부인 양 바짝 달라붙어 있는 어린 소년을 본 것이다.
 소년은 사나이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고 양팔로 허리를 꼭 움켜쥔 채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겁쟁이로군.’
 육초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목숨을 내놓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적어도 자신 같으면 힘껏 응원을 해줄지언정 저처럼 겁에 질려 떨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짐짓 가슴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철기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더니 넓은 원을 그리며 사나이를 포위했다.
 “와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일제히 말발굽을 놓아 쇄도해 드는 철기들의 창검이 청청한 햇빛 아래 살벌하게 번쩍였다.
 두두두두-
 무겁게 대지를 두드리는 말발굽소리가 가슴을 뛰게 했다. 구름처럼 먼지가 피어올랐다.
 산사태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철기들을 바라보며 사나이는 한 필의 오추마 위에 오연하게 버티고 앉아 장창을 높이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타는 투지와 용맹한 기운이 넘쳐나고 있을 뿐, 그에게서는 한 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될까?’
 육초량은 바짝 긴장하며 사나이의 늠름한 모습을 주시했다.
 
 일대 일백의 싸움이 다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번만은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철기들의 공격은 전과는 달리 조직적이고 맹렬했다.
 그 속에서 사나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 가는 듯했다.
 그의 창에 점점 힘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육초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히히히힝-!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사나이가 타고 있던 말이 창에 찔려 쓰러졌다.
 사나이가 한 손으로 소년을 감아 안고서 훌쩍 말에서 뛰어 내렸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정면에서 달려드는 자를 향해 창을 던져 떨어뜨린 그가 선뜻 허리에 차고 있던 패검을 뽑아들었다.
 위기였다.
 일백 여 철기들 속에서 말을 잃은 채 검 한 자루로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보호해야 하는 어린 소년까지 있지 않은가.
 육초량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새 사나이는 철기들 속에 파묻히듯 에워싸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언제 적의 장창에 가슴이 꿰뚫릴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와주자.’
 육초량은 등에 메고 있던 활을 풀어냈다.
 사람을 향하여 살을 겨누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그의 팔이 짐승을 향할 때와는 또 다른 긴장과 흥분으로 떨렸다.
 마른침을 삼키고 숨을 멈춘 그가 입술을 악물고 시위를 놓았다.
 피이잉-!
 살기를 실은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았다.
 막 사나이의 배후에서 장창을 내지르려던 자 하나가 등 한복판에 화살을 깊이 꽂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보며 육초량이 다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시잇-!
 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또 한 대의 화살이 여지없이 사내의 좌측에서 달려들던 자의 옆머리에 틀어박혔다.
 “으앗!”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자의 비명 소리가 허공으로 날았다.
 육초량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사정없이 뛰었다.
 난데없이 날아드는 화살에 당황한 철기들이 주춤거렸다. 그들은 꿈에도 그것이 소년의 팔뚝이 쏘아 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람을 찢고 날아드는 살의 힘과 빠르기가 마치 쇠뇌인 듯했던 것이다.
 이미 시작한 일이었다.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육초량은 마음을 독하게 사려 먹고 다시 한 대의 살을 날렸다. 하지만 세 번째는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두 번은 아무 경계심 없이 있다가 당했지만 세 번씩이나 당하고 있을 멍청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표적이 되었던 자가 가볍게 창대를 휘둘러 날아드는 살을 쳐냈다. 그러나 그 자는 다른 두 명과 마찬가지로 역시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노린 사나이가 날랜 표범처럼 달려들며 일 검에 가슴을 뚫어 버린 것이다.
 사나이가 훌쩍 몸을 날려 주인을 잃고 맴도는 말을 잡아탔다.
 “앗!” 하는 놀람을 틈탄 그는 이미 포위망을 벗어나 질풍같이 말을 달려 용화산 어귀에 다다르고 있었다.
 뒤를 추격해 오는 자들을 향해 육초량은 거푸 세 대의 화살을 연사로 쏘아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가는 살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장창을 번쩍이며 뒤를 바싹 쫓던 자들이 미간에 박혀드는 화살을 쳐내느라고 주춤하는 사이에 사내가 말 등에 올라서서 발을 굴렀다.
 소년을 옆구리에 낀 그의 신형이 단숨에 십여 장을 날듯이 뛰어 건너 용화산의 울창한 수림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쯤 되면 철기들의 추격은 불가능했다.
 한동안 숲 밖에서 맴돌던 자들이 말머리를 돌려 일제히 떠나갔다.
 육초량은 비로소 천천히 활을 다시 어깨에 둘러메었다. 용감한 사나이를 도왔다는 뿌듯함이 그의 어린 얼굴에 의젓한 미소로 떠올랐다.
 
 “소 형제, 그대가 나를 도왔나?”
 불쑥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음성에 육초량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기척도 없이 다가온 사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얼굴을 온통 뒤덮다시피 한 검은 구레나룻 사이로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반짝였다.
 가까이에서 보자 더욱 늠름하고 사내다운 기개가 물씬 느껴졌다.
 육초량은 이 사람은 마치 한 마리의 기품 있는 사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눈이 부신 듯 한참이나 사내를 바라보던 육초량이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공평치 못한 싸움인 것 같아서요.”
 “호오······.”
 감탄성을 발한 사내가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육초량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소 형제의 말투로 보아 일대일의 싸움이었다면 설혹 내가 죽는다고 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겠군?”
 “물론이죠. 공평한 싸움이라면 약자가 패하는 건 당연하니까.”
 “왓핫하하! 오늘 뜻밖에 마음에 맞는 어린 친구를 만났구나.”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육초량도 그를 마주보며 밝게 웃어 보였다.
 조금 전의 치열한 싸움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한 기상이 짜릿한 감동으로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일백의 철기 앞에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싸우던 그 사내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다는 것이 꿈속의 일만 같았다.
 아마도 그 혼자의 몸이었다면 자신의 도움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육초량은 눈이 부신 듯 사내를 바라보았다.
 
 ***
 
 ‘참으로 놀라운 소년이 아닌가. 고작해야 열대여섯 살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의 은행술(隱行術)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나이는 더욱 놀라운 눈으로 앞서 가고 있는 육초량의 등을 바라보아야 했다.
 육초량이 사나이와 소년을 인도하여 산 속 깊숙이 숨어들고 있는 그 운신법(運身法)은 무림에서도 고도의 수련을 쌓은 살수나 녹림의 두령들이 사용하는 그런 류의 몸놀림과 같았던 것이다.
 때로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내려가기도 했고,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뛰어 자신의 발자국은 숨기고 엉뚱한 곳에 미세한 흔적을 남겨 놓기도 했다.
 바람의 방향을 세밀하게 살펴서 언제나 바람을 등지고 나아가는 것은 나의 채취마저도 뒤로 흘리지 않겠다는 용의주도함이었다.
 시간과 일기의 변화를 따져 초목의 빛깔이 변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밟거나 밟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했다.
 사람이 지나가면 풀벌레들이 울음을 멈추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육초량이 자나가는 곳에서는 여전히 풀벌레들이 울어댔다.
 그는 주변의 환경에 철저하게 자신을 동화시키면서 움직여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점점 경이로운 눈으로 이 어린 사냥꾼 소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네 개째의 산봉우리를 넘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는 안전해요. 저 산 능선만 따라가면 새벽에는 하북성을 벗어날 수 있어요.”
 앞서 가던 육초량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웃었다.
 별빛 아래 반짝이는 그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소 형제, 자네의 그 은행술은 참으로 놀랍군. 사부가 계신가?”
 “은행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육초량이 비로소 알겠다는 듯 하하, 하고 웃었다.
 “흑랑백호(黑狼白狐)에게서 배웠다면 배운 셈이지요.”
 “흑랑백호? 처음 듣는 명호로군. 은거고인이신가?”
 “은거고인? 아하하하-”
 육초량의 치기 어린 웃음에 사나이는 어리둥절해졌다.
 “흑랑은 흑랑이고 백호는 백호지 무슨 은거고인이란 말이에요. 그놈들은 결국 내 손에 잡혀서 각기 은자 오십 냥씩에 팔렸는데······.”
 “어허?”
 사나이가 고리눈을 더욱 부릅뜨고 감탄성을 발했다. 비로소 소년이 말한 흑랑백호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검은 늑대와 흰여우.
 그 교활하고 영악한 짐승들을 쫓으며 이 사냥꾼 소년은 순수한 야성의 본능으로 그것들의 도피술을 스스로 체득하였던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소년의 놀라운 능력 앞에서 사나이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어쨌든 고맙네. 그런데 아직 은인의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군. 나는 강사옥이라고 하네.”
 “강사옥? 당신이 정말 철협 강사옥······?”
 육초량이 놀람으로 눈을 부릅떴다.
 철협(鐵狹) 강사옥(姜獅玉).
 십팔만 리 중원 대륙에 사는 자라면 세 살짜리 어린애라도 그 이름을 알았다.
 그는 만인(萬人)에게 물으면 만인 모두가 서슴없이 천하제일고수라고 대답하는 인물이었고, 쾌남아였다.
 설마 눈앞의 이 구레나룻 무성한 사내가 그 강사옥이라니······.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이 부신 듯 그를 바라보던 육초량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육초량. 나는 육초량이라고 해요.”
 
 “그래, 이제 생각이 나는군. 나는 너를 본 적이 있어.”
 그때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강사옥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소년이 앞으로 나서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육초량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는데, 그래도 그 나이에 비해 작았으며 연약해 보였다.
 “네가 이 소 형제를 안다고?”
 강사옥이 의아한 얼굴로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이 오만함이 배어 있는 몸짓으로 육초량을 턱으로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너도 기억이 날 텐데? 오 년 전 본문에 연회(宴會)가 있었을 때 너도 네 아비인 육가릉 그 비겁자를 따라왔었지.”
 “아!”
 달빛을 빌어 잠시 소년의 얼굴을 세심히 살펴본 육초량이 탄성을 터뜨렸다.
 비로소 소년의 정체를 알 아 본 것이다.
 그는 신검문의 마지막 문주였던 은하검(銀河劍) 옥구렴(玉龜濂)의 유일한 혈육인 옥풍규(玉風揆)가 틀림없었다.
 “흐흥, 맹약을 저버린 비겁자의 자식이 어디로 꺼졌나 했더니 이런 산 속에서 사냥꾼 행색으로 숨어 있었군 그래.”
 눈을 치뜨고 아래위로 흘겨보며 코웃음을 치는 옥풍규의 오만한 언동에 육초량은 어깨 너머로 분한 숨을 몰아쉬었다.
 “무엇이? 저 소년이 정말 흑석곡주 육가릉의 혈육이란 말이냐?”
 육초량을 가리키는 강사옥의 눈에 놀람과 반가움이 떠올랐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강사옥에게 가볍게 포권해 보인 육초량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깨끗하고 절도 있는 행동에 강사옥은 내심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육초량은 의식적인 듯 옥풍규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것이 어린 소년 옥풍규의 오만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는 육초량의 도움을 받고 이곳까지 피해오는 동안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불과 서너 살 많아 보일 뿐인 육초량에게서 자기에게는 없는 어른스러움과 담대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신검문의 차기 계승자로 꼽히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흠모를 받으며 살아온 옥풍규였다.
 연약한 체질을 타고났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의 자질은 역대의 어느 문주보다도 뛰어난 바가 있었다.
 특히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고, 한 번 배운 것을 그 자리에서 깨우치는 오성(悟性)의 탁월함은 단연 돋보였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장차 신검문은 창시자인 만리신검 옥화량보다 더 뛰어난 인물을 문주로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열심히 수련하여 체질의 연약함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러한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는 동안 옥풍규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씨앗이 싹텄다. 그리고 그것은 범인(凡人)에 대한 경멸로 커져갔고, 뛰어난 자들을 질투하는 편협한 성품으로 변해갔다. 자신의 우월함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의 발로였다.
 그런 그에게 육초량은 어렸을 때부터 마땅치 않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으니, 바로 오 년 전에 있었던 조부 소요선검(逍遙仙劍) 옥궁적(玉宮積)의 이순(耳順)을 축하하는 연회에서부터였다.
 
 당시 강북의 무림 제문(諸門)은 당대의 신검문주인 은하검(銀河劍) 옥구렴(玉龜濂)을 맹주로 하여 거대한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당연히 신검문은 강북 무림 연합의 주축으로서 맹약을 맺은 여러 방회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흑석곡(黑石谷)도 그 중 한 곳이었다.
 당대의 흑석곡주(黑石谷主)는 육가릉(陸加陵)이었다. 그는 철담소심(鐵膽素心)이라는 명호로 강호 동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의로운 일에는 물과 불을 가리지 않았고, 불의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보기 드문 호한(好漢)이었던 것이다.
 벗을 사랑하기를 피붙이와 다름없이 했으며, 불의한 자 대하기를 원수처럼 했다.
 또한 철담소심이라는 별호만큼이나 두려움을 모르는 깨끗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은하검 옥구렴은 그런 육가릉의 호협함을 높이 샀다. 그래서 그는 육가릉과 의형제를 맺었고, 그때부터 흑석곡은 신검문의 한 식구가 되어 강북 무림을 이끌어 갔다.
 신검문의 전대 문주이자 신선의 기품을 지니고 있는 소요선검 옥궁적의 이순 하례연에 수많은 군웅들이 모여들어 보름을 머물며 그치지 않을 듯한 연회를 즐겼다.
 드디어 그 마지막 날 옥구렴은 각 방파의 사절들과 지인, 문중의 원로들만을 따로 초빙해 신검각(神劍閣)에서 송별회를 겸한 연회를 열었다.
 육가릉은 그 자리에 하나뿐인 아들 육초량을 데리고 참석했다.
 열 한 살의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육초량의 의젓한 기품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육초량은 단번에 연회의 중심에 섰다. 그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은 그 연회의 주인인 옥궁적이었다.
 “아비보다도 오히려 크게 될 아이다.”
 옥궁적은 연신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육초량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손자인 옥풍규를 돌아보고 육초량을 다시 보며 마음에 이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손자이자 제 아비의 뒤를 이어 신검문을 이끌어가야 할 옥풍규였지만 그 타고난 기품에 있어서 눈앞의 육초량보다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풍규보다 네 살이 위라니 앞으로는 형이 되어 풍규를 잘 보살펴 주거라.”
 육초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타이르는 옥궁적의 눈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는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옥구렴 곁에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아름다운 여아(女兒)를 보았다.
 옥궁적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당대의 신검문주인 은하검 옥구렴이 뒤늦게 맞아들인 후처에게서 얻은 딸이자, 옥풍규의 이복누이인 옥청향(玉靑香)였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청향에게서는 벌써 정숙하고 우아한 기품이 엿보였다.
 옥궁적은 그 자리에서 장차 청향의 배필로 육초량을 꼽았다.
 흑석곡이라면 신검문의 사돈이 될 가문으로써 부족함이 없었고, 육초량의 뛰어남에 이르러서는 청향의 아비인 옥구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의 옥풍규는 아직 그녀가 자신의 이복누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녀간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옥풍규는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아끼고 곱게 여기는 누이가 생전 처음 보는 또래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웃는 것을 보고 심통이 났다.
 네 살 위라지만 자신보다 훨씬 의연해 보였고, 기품 있어 보이는 육초량에 대한 미움에 질투의 감정까지 덧씌워졌다.
 육초량이 청향의 작은 손을 잡고 서서 모두의 웃음과 갈채를 받으며 옥궁적에게 절을 올릴 때 옥풍규는 두 눈 가득 분한 기운을 담고 혼자서 씩씩거렸다.
 
 한 가문이든 한 나라이든, 그것이 쇠퇴할 때면 먼저 안에서 조짐이 보이는 법이다.
 신검문도 옥구렴의 대에 이르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순의 연회를 받은 옥궁적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산수간에 노닐기 위해 온다 간다 말없이 떠난 다음 해의 일이었다.
 신검문의 세력 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난 흑룡보(黑龍堡)의 처음은 보잘것없이 미약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검문의 실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안주인 사이의 암투에 편승하면서 조금씩 발톱을 세워갔다.
 옥구렴의 정부인이자 옥풍규의 모친인 강수은은 시앗이 심한 여자였다.
 옥구렴의 사랑이 첩실인 주연연에게 기울어 가는 기미가 보이자 그 분노가 지아비에게까지 미쳤다.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지아비를 몰아내고 아들인 풍규를 문주로 세울 계획을 세웠다.
 신검문 내에 그런 암투가 벌어지자 문중의 충복들은 물론 문 밖의 세가들까지 두 패로 나뉘어 반목하기 시작했다.
 그 그늘에서 흑룡보는 서서히 구름을 끌어 모으며 못을 떠나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오를 날을 손꼽았다.
 어쩌면 흑룡보라는 세력 자체가 신검문에서부터 싹튼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신검문의 힘을 먹고 자란 뿌리혹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강수은과 그녀의 지지 세력들 중 일부가 흑룡보와 내통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흑룡보가 웅크렸던 음지를 버리고 마각을 드러냈을 때 그들이 첫 제물로 삼은 것이 흑석곡이었다.
 흑석곡이야말로 신검문의 외문을 지키는 수호자였으며, 바깥으로 내뻗은 한 팔이기 때문이다.
 신검문의 지원이 없이 혼자의 힘으로 흑룡보의 드러난 힘을 당해낸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육가릉은 세 번째의 파발마가 빈손으로 털레털레 돌아왔을 때 옥쇄(玉碎)를 결정했다.
 세 번씩이나 급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달려간 사자들은 신검문주 옥구렴을 만나기는커녕 본전(本殿)에 발도 들이지 못한 채 내성 문밖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사흘을 버티고 흑석곡은 흑룡보의 발아래 처절하게 짓밟혔다.
 곡주 육가릉을 비롯한 가솔과 문하인들 이백 명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흑석곡은 석 달 동안 피비린내가 떠도는 귀곡이 되고 말았고, 옥구렴은 그것이 반란을 꾀하던 자의 말로라고 믿었다.
 베개머리 송사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침상에서 속삭이는 강수은의 이간질에 귀를 빼앗긴 탓이었다.
 흑석곡의 이백 가솔들이 몰살당했을 때 육초량은 가복의 희생으로 겨우 몸을 빼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는 하북의 말단 자운부(磁暈府)에 속한 온주현(溫州縣)에서 신검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흑룡보의 깃발이 신검전 앞에 내걸렸다지만 육초량은 애써 무관심하게 외면했다.
 
 -이것은 아비가 택한 길이다. 너는 네 길을 갈 뿐, 아비의 죽음에 연연해하지 말거라. 더 큰 뜻을 세우고 이루었다면 그때 이 못난 아비와 가문의 명예를 네 손으로 되찾아 다오. 그러면 족하다.
 
 울부짖는 그를 쫓아내며 엄하게 이르던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그때부터 어린 육초량의 가슴속에는 무거운 바윗돌 하나가 가라앉았다.
 복수는 작은 일이다. 가문의 명예를 만천하에 드날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큰 일이다.
 육초량은 늘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르며 살아남기 위해 활 한 자루를 둘러메고 용화산중을 떠돌았다.
 
 ***
 
 “꿇어라!”
 옥풍규의 입에서 날카로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육초량이 허리를 곧게 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아버님이 홀로 궁벽한 산곡에서 검을 꺾이는 수모를 당하고 목이 떨어졌을 때 신검문과의 인연도 끝났다. 더구나 나는 신검문의 가신도 아니고 충성을 맹약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가 있나? 있다면 꿇지.”
 감정을 절제한 육초량의 당당한 기개 앞에서 옥풍규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외숙, 저 발칙한 놈을 잡으세요!”
 육초량을 손가락질하며 강사옥을 향해 호통쳤다.
 “참아라. 어쨌든 그는 생명의 은인이 아니냐? 그의 가문 또한 신검문의 충신이었다. 그가 오늘 본문과의 인연이 끝났다고 한 이상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강사옥이 옥풍규의 외숙이라는 데에 육초량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개의 무리 속에 호랑이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육초량이 안타까운 눈으로 강사옥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이내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외숙마저······.”
 자신의 말이라면 모든 것을 다 들었던 강사옥이 육초량을 비호하자 옥풍규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몸을 떨던 그가 품속에서 예리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강사옥이 “앗!” 하고 놀라는 사이에 옥풍규가 몸을 던져 육초량을 찍었다.
 “죽엇!”
 어깨 너머로 섬뜩한 살기가 뻗쳐왔다. 그러나 돌아선 육초량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우뚝 서서 옥풍규의 악에 치받친 비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깨에 파고드는 서늘한 느낌과 함께 뜨거운 통증이 가슴을 달구었다.
 한 줄기 선연한 피보라가 밤하늘을 물들이며 쭉 뻗어 나갔다.
 “문주!”
 다급히 몸을 날린 강사옥이 육초량의 앞을 막아섰다.
 “이것으로 너와의 짧은 인연도 끝났다. 다시 만났을 때 네가 적으로 내 앞에 선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육초량이 어깨 위에서 뿜어지는 선혈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창백해진 얼굴로 옥풍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 무서운 눈빛을 당하지 못하고 옥풍규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아, 인재 하나를 버리는구나······.”
 탄식을 뱉어낸 강사옥이 간절한 눈빛으로 육초량을 바라보았다.
 “소 형제, 나를 따라가 천하제일의 무예를 배우지 않겠나?”
 “당신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 혼자서도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초량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강사옥은 다시 한 번 탄식하며 땅을 굴렀다.
 “이제 겨우 십육 세. 어디에 저런 기백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정녕 아까운 재목 하나를 놓아 보내는구나.”
 
 ***
 
 피는 멎었으나 뼈를 파고드는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졌다.
 ‘이 정도로 죽는다면 육초량이 아니지.’
 육초량은 어금니를 힘주어 악문 채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아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용화산의 십삼봉(十三峯)이라면 손바닥을 보듯 훤한 그였다.
 열두 살 때 홀로 이곳으로 와 사냥을 업으로 삼고 구석구석 산을 헤집기 어느덧 사 년. 이제는 누구도 그를 어리다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온주현 제일의 사냥꾼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부친을 본받아 호협한 기질을 키우고, 격검과 궁술을 닦았다.
 걸음을 걷기 시작했을 때 부친이 그에게 쥐어준 것은 목검이었고, 스스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그는 활을 잡았다.
 피는 속일 수 없어서일까. 그는 자랄수록 승마와 격검, 궁사(弓射)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이놈은 육씨 가문의 보배야. 장차 애비의 명성을 누르고 사해팔황(四海八荒)에 협명(俠名)을 드날릴 대영웅감이지.
 
 그를 안고 껄끄러운 볼을 비벼대던 아버지.
 
 -당신도 참······ 무사의 아낙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생각해 보셨나요? 나는 그 애가 장차 대과에 급제하여 판서나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걸요.
 
 어머니는 그 곁에서 눈을 곱게 흘기며 아이를 빼앗아 갔었다.
 
 -무슨 소리. 남아라면 용마(龍馬)에 몸을 싣고 강호를 굽어보며 장검을 휘둘러 천하를 호령해야지.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판서 나부랭이가 어찌 장부의 호쾌함을 알 것인가!
 
 아버지는 짐짓 근엄한 얼굴로 어머니를 나무랐다.
 그 자애롭고 엄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육초량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이 무슨 나약한 생각을······.’
 육초량은 행복했던 과거의 향수에 젖어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새벽빛이 멀리서부터 하늘 한쪽을 물들여올 때 그의 삶의 터전인 온주현의 불빛이 발아래 내려다 보였다.
 
 ‘이건 뭔가 수상하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야수의 본능은 육초량의 몸과 마음을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위기를 감지하는 그의 본능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야수를 쫓고, 때로는 맹수에게 쫓기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야성의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산을 바라보고 나섰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날선 본능은 무언가 다르다고 자꾸만 소리치고 있었다.
 그 가슴속의 소리에 육초량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른 새벽의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산하기만 했다.
 ‘장삼 아저씨는 여전히 부지런하군.’
 육초량이 맞은편 골목 모퉁이를 돌아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친근한 미소를 떠올렸다.
 골목 안에서 만두 장사를 하고 있는 그는 육초량과는 유독 친분이 돈독한 사이였다. 언제나 푸근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던 것이다.
 그는 십년 전 자운부를 휩쓴 도적 떼에게 어린 아들을 잃었다고 했다.
 살아 있으면 지금 육초량 만한 나이가 되었을 거라며 아들을 대하는 듯한 애틋함으로 육초량을 돌보아 주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장삼이 빠른 걸음으로 육초량에게 다가왔다.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거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철기를 탄 자들이 너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
 “너의 움막 주위에는 어제 저녁부터 매복이 좍 깔렸단 말이다. 저 골목 모퉁이에도 시커먼 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어. 어서 피해. 어서!”
 장삼의 다급한 말에 육초량은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의 일 때문이다.
 자신이 쏜 화살을 가지고 흑룡방의 무리들은 수소문 끝에 그것의 임자가 누구인지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장삼은 자신을 피신시키기 위해 지난밤부터 이 골목에 숨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사냥에서 돌아올 때면 늘 이 골목을 통해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육초량은 밤새 맞은 이슬로 축축이 젖어 있는 장삼의 옷을 보고 감격했다.
 “장 아저씨. 이 고마움을······.”
 “어서, 시간이 급해. 너와 있는 걸 들키면 나까지도 성치 못해.”
 식은 만두 한 꾸러미를 품에 넣어 주는 장삼의 얼굴을 뜨겁게 바라보던 육초량이 등을 돌렸다.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저기다!”
 “서라!”
 두드리듯 골목을 뒤흔들며 달려오는 말발굽소리에 섞여 위협적인 외침들이 터져 나왔다.
 흑룡방의 외단에 속해 있는 기마대가 분명했다.
 “뛰어!”
 다급한 장삼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육초량은 주저했다.
 자신이 달아나고 나면 장삼, 이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어찌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어서! 네가 또 내 눈앞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십년 전 도적 떼에게 아들을 잃었을 때의 악몽을 떠올린 것이다.
 장삼이 눈에 핏발이 선 채 필사적으로 육초량의 등을 떠밀었다.
 육초량은 그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뛰지 못하고 등을 때려 오는 장삼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선두 기마의 말고삐를 틀어쥐고 매달리던 장삼의 머리가 장한의 칼에 잘려 떨어지고 있었다.
 육초량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내려 들었다.
 장삼의 목을 치고 달려오는 선두의 기마를 노려보며 천천히 강전 하나를 활시위에 걸었다.
 오십 보, 사십 보, 삼십 보······.
 점점 가까워지는 자와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던 육초량이 힘껏 시위를 당겼다.
 말 등에 납작 엎드린 자의 이마가 크게 보였다.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 호흡을 가다듬는 그의 눈에서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살기가 흉흉하게 뿜어져 나왔다.
 거친 말의 콧김 소리가 잡힐 듯 귀에 가까워졌다.
 ‘십 보!’
 육초량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가랏, 흑룡방의 개!”
 피이잉-!
 번개와 같은 속도로 공간을 가른 강전이 사내의 이마 한복판을 뚫고 뒤통수로 반이나 빠져 나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말에서 굴러 떨어진 자가 등자에 발이 매달린 채 너덜거리며 끌렸다.
 “장 아저씨, 이것으로 당신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곁을 스쳐 가는 자의 주검을 힐끗 바라본 육초량이 다시 한 개의 강전을 뽑아 활시위에 걸었다.
 뒤따라오던 여섯 기의 기마가 주춤거릴 때,
 피이잉-!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강전이 다시 선두에 선 자의 이마를 여지없이 꿰뚫어 버렸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의 강전이 동시에 시위를 떠났다.
 
 “헉, 헉!”
 어깨에 자루까지 박힌 비수 하나를 꽂은 채 육초량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용화산의 숲 속이었다.
 한 번도 빗나감이 없이 무섭게 날아드는 그의 강전을 겁낸 기마 무사들은 섣불리 숲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십여 장 밖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추격조가 편성되어 뒤를 쫓을 게 분명했다.
 그 자들은 주린 들개들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피 냄새를 핥으며 다가올 것이었다.
 육초량은 어깨 죽지에 박힌 비수를 거칠게 잡아 뽑았다.
 엉겨붙은 피와 살점이 떨어져 나가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정수리를 꿰뚫었다.
 “빌어먹을. 정말 재수 없는 날이군.”
 그가 비명 대신 어금니를 악물며 투덜거렸다.
 어제 밤부터 이 새벽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비수를 살 속에 박아 넣은 것이다.
 속옷을 찢어 상처를 대강 싸매고 무성한 참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앉아 있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명(黎明)에 젖은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가자. 나서 자란 고향에서도 쫓긴 놈이 어디에 간들 마음 편하게 살겠는가.’
 육초량이 뱃속에서부터 게워 올린 끈적한 침을 숲 밖으로 뱉어 주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산과 함께 사는 거다. 산은 결코 나를 내쫓지 않겠지. 누구도 더 이상 나를 쫓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때는 내가 세상 모두를 쫓는 거다.”
 육초량이 울창한 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의 은행술을 따라 잡을 자는 아무도 없다.
 머지않아 그의 존재는 세상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말 것이다.
 만년의 침묵을 지키며 용이 웅크린 듯 굽이굽이 누워 있는 용화산의 십삼 봉이 새로 받아들인 한 생명을 어머니처럼 품고 멀리서 다가오는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 년이 지나갔다.
 세상에서의 이 년이라면 나고 죽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될 세월이다. 그러나 숲과 개울과 바위 봉우리들 속에서는 아무 시비 거리도 없이 흘러가는 물 같은 날들이었다.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이 여전하듯 그렇게 오고 갈 뿐이다.
 염천(炎天)의 더위를 어깨에 얹고 쫓겨 들어왔던 여름이 두 번이나 바뀌었고, 지겹다고 느꼈을 때에는 언제나 가을이 슬금슬금 다가섰다.
 계절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은 산이다.
 용화산의 구석구석에는 어느새 가을의 스산함이 찾아들고 있었다.
 쿠쿠쿠쿠--!
 계곡 가득 뽀얀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수직의 폭포가 장엄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그 거센 폭포의 물줄기 속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거친 힘으로 정수리를 짓누르는 수압을 온몸으로 견디며 마치 폭포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기라도 하듯 부동(不動)하는 다부진 사람이었다.
 폭포의 물줄기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그의 몸은 그러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용화산의 십삼 봉 중 아홉 번째 봉우리인 용추봉 아래의 계곡이었다.
 깊은 삼림과 수 겹으로 막아선 기암절벽에 가려져 그런 곳이 있는지조차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절곡(絶谷).
 육초량은 그곳을 삼년 전의 봄에 백원(白猿) 한 마리를 뒤쫓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 기묘한 풍광에 홀려 넋을 잃고 사흘을 보낸 육초량은 그곳에 백원곡(白猿谷)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후 그는 틈틈이 백원곡에 찾아와 며칠씩 묵었다. 올 때마다 달라져 있는 그 신묘(神妙)한 기운과 선경(仙景)은 어느새 어린 육초량의 가슴속에 이상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삼년 전 여름,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다시 찾아와서 아예 계곡에 움막을 짓고 눌러 앉아 살기 시작했다.
 
 -검의 도리를 깨우치기 전에는 결코 내려가지 않으리라.
 
 육초량은 그렇게 다부진 결심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쫓기지 않고, 이제는 스스로가 세상을 쫓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죽는 날까지 무인의 길을 갔던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함이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뼈에 새겨진 원한마저도 사사로운 일로 여길 만큼 그의 뜻은 원대했고 품은 의지가 굳었다. 아버지의 훈도(訓導)가 심어준 영향이었다.
 철협 강사옥.
 명실공히 천하제일의 고수로 꼽히는 그가 무예를 전수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실로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무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치고 누가 강사옥의 무학을 일초 반식이라도 배우고자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육초량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거절했다.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열여섯 살의 그의 가슴에 새겨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당시 그의 어린 가슴속에는 강사옥에 대한 뿌리 깊은 존경심과 함께 묘한 호승심이 솟구쳐 올랐었다. 그가 옥풍규의 외숙이라는 데에 더욱 그랬다.
 육초량은 강사옥을 바라보며 반발과 함께 적의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도 사람이다. 무신인 줄 알았던 내가 바보였다. 그도 해냈는데 나라고 하지 못할 게 무언가.’
 육초량은 폭포수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싸우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가 천하제일의 고수라면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반드시 내 힘으로 해내고 말겠다.’
 그의 이 오기와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육초량은 그 고집 하나로 폭포의 엄청난 수압과 싸우기 시작했다.
 
 흔히 검도를 터득하려는 자는 먼저 검부터 잡고 휘두르려고 한다. 그러나 육초량은 그 생각을 버렸다.
 검은 단지 팔로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휘둘러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던 이 도리를 깨닫는 데 석 달이 걸렸다. 백원곡을 달려가는 바람을 본 것이다.
 작은 풀잎 하나를 흔드는 산들바람을 보았고, 아름드리 거목을 통째로 흔들어대는 폭풍도 보았다.
 아무리 작은 풀잎이라 하더라도 바람은 결코 그의 일부분만으로 흔들지 않았다. 폭풍우와도 같이 온몸으로 부딪쳐 흔드는 것이다.
 석 달 동안 폭포를 마주하여 가부좌를 튼 채 주저앉아 오직 그것을 바라보던 육초량은 처음으로 희열이라는 것을 맛보았다.
 아무 공도 대가도 없이 백원곡의 바람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때로는 한 폭의 좁은 공간을 맴돌거나, 또 때로는 온 산 전체를 휘감아 갈 때도 바람은 저의 모든 것을 기울여 불었다.
 바람에게는 처음부터 일부분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바람 속에서 육초량은 그가 보고자 하던 첫 번째의 검을 보았다.
 
 -온몸으로 휘두르기 위해서는 굳센 호흡과 자유로운 두 발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힘의 강약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기(氣)의 단련, 그것은 곧 호흡의 단련이기도 했다.
 바람의 변화는 무궁하고 그 완급은 신묘하다. 좁게는 한 점에 집중하고 넓게는 천지를 뒤덮는다.
 빠르고 강함과, 느리고 부드러움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운신(運身)의 묘용(妙用)이었다.
 그 운신의 묘법을 품은 보행(步行)의 도리를 알아내기 위하여 육초량은 그 후 이 년이 지날 동안 오직 폭포의 수압과 싸웠다.
 처음 폭포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을 때 그는 전신을 찢어버릴 듯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수압의 공포에 파랗게 질렸었다.
 그것은 살을 에이는 한 겨울의 차가운 바람보다 더 날카로웠고 무정했다.
 육초량은 채 일각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얼음보다 차가운 용담 깊이 빠져들면서도 추운 줄을 몰랐다.
 폭포의 그 무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이 그를 안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육초량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뛰어들고 다시 내팽개쳐지는 일을 그 해 겨울 내내 되풀이하면서 그의 살갗은 쩍쩍 갈라졌고, 얼음에 찢기고 긁힌 상처들이 아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육초량은 이빨을 딱딱 부딪쳐 떨면서도 두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추위가 뼈 속에 파고들고, 살갗의 상처가 깊을수록 그의 눈빛은 더욱 맑아져 갔고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잡념도 사라져갔다.
 ‘흥, 강사옥이라고? 그에게 배워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된다면 그게 뭐 떳떳하겠어? 기껏해야 그의 분신이 되는 거겠지. 누구에게 배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두고 봐. 나는 나만의 검, 육초량의 검으로 천하제일이 되고 말 테다.’
 고통이 클수록 오기도 커져갔다. 그리고 그처럼 무모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집념이 그에게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 첫 해의 겨울을 이기게 해 준 힘이 되었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지나갈 무렵, 드디어 폭포의 거센 물줄기는 육초량의 단단한 몸을 받아들였다.
 육초량은 자신이 해냈다는 기쁨으로 마음껏 소리쳤다.
 그러나 그 기쁨은 또 다른 고통 속으로 밀려들기 전에 찾아온 잠깐 동안의 휴식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폭포 속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서자 이번에는 폭포가 눌러오는 거대한 수압의 울타리 속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는 고통은 폭포의 물줄기 속으로 뛰어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지독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육초량은 제 발로 폭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육초량은 먼저 자신의 호흡을 다스려야 했다.
 다시 석 달 동안 되풀이된 고통 속에서 그는 비로소 폭포에 강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극히 미세한 차이지만 폭포의 물줄기는 때로는 더 세차게, 그리고 때로는 조금 더 부드럽게 바뀌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육초량은 자신의 호흡을 폭포의 강약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다시 두 달이 지나 폭포의 호흡과 자신의 호흡이 일치해 가기 시작하자 숨 쉬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기도(氣道)를 통해 전신 세맥(細脈)들로 흐르는 호흡 속에 대자연의 호흡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호흡을 따라 운동하는 기의 흐름을 느꼈다.
 그것은 무림인이 비전의 심법을 토대로 하여 일정한 운기법으로 기르는 내공과는 다른 것이었다.
 인간의 몸 안 깊숙이 숨어 있는 대자연지기(大自然之氣). 바로 그 자연의 호흡을 육초량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터득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무림에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공부가 있다는 것이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육초량도 어렸을 적 부친으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들어 알았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익힌 자가 없다던 신비한 기운.
 사람들은 그것을 ‘혼원지기(混元之氣)’라고 했다.
 그러나 육초량은 자신이 지금 폭포의 호흡을 흡입하며 기르고 있는 힘이 바로 그 혼원지기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자유로워지고 기의 운행이 활발해지자 그는 폭포수의 만근 수압 속에서 발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발가락 하나를 까닥일 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하반신 전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속도는 계절의 순환과 함께 빨라져 갔다.
 흘러가는 세월의 양에 비례하여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단해진 그의 다리 힘은 폭포의 수압을 거뜬히 극복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또 일 년이 지났다.
 용추곡에 들어온 지 삼 년이 되어갈 때 육초량은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흥분했다.
 그것은 폭포의 수압이 미치는 곳의 강약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폭포수 전체의 강약을 느끼던 것에서 이제는 세세한 물줄기 하나의 강약을 느끼고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다.
 폭 일 장 여의 폭포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보이며 순식간에 바뀌는 물줄기들의 이동.
 육초량의 발은 어느새 그것을 따라 밟고 있었다.
 ‘좀 더 빠르고, 좀 더 정확하게.’
 육초량은 어금니를 악물고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외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워 발을 옮겨 디뎠다.
 때로는 넓고 완만하게 벌리고, 때로는 좁고 급하게 맴도는 그의 보법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무질서하기 짝이 없고 변덕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머리로 만든 온갖 정교함의 틀에서 과감히 벗어난 대자연의 보행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는 두 팔도 자유롭게 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보법과 마찬가지로 물줄기의 강약을 좇아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팔을 내뻗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육초량이 느낀 것은 수온의 변화였다.
 똑같은 물줄기 속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순간적으로 한 부분, 또는 여러 부분에 수온의 미세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촉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점차 그의 손은 먹이를 덮치는 독사의 영활한 움직임처럼 바뀌는 폭포수의 수온을 찍어갔다.
 때로는 단지 팔목만을 움직여서, 또 때로는 어깨와 가슴 허리를 한꺼번에 움직여서 전후좌우, 상하 측방 할 것 없이 팔을 기묘하고 신속하게 내뻗고 거두며 휘두르고 찍어댔다.
 백원곡에 묻혀 지낸 삼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폭포수와 일체가 되어 미세한 감정까지도 서로 나누는 경지에 들어서 버린 것이다.
 그는 마치 바위에 부서져 튕겨지는 물방울처럼 폭포의 거센 물줄기 속에서 가볍고 재빠르며 의외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용추봉 아래의 깊은 계곡을 울리는 낭랑한 기합소리가 있었다.
 육초량이 폭포에서 나온 지 다시 두 해가 지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열여섯 살의 조숙한 소년이 아니었다. 백원곡에서 보낸 오년의 세월이 그를 훌륭한 한 사람의 청년으로 키워냈고, 거친 야성으로 물들여 갔던 것이다.
 다섯 번째의 여름이 찾아왔다.
 무성해진 삼림의 그늘을 뒤흔드는 우렁찬 기합소리에 놀란 새들이 하늘을 어둡게 뒤덮으며 날아올랐다.
 놀란 새들의 울음과 기합소리는 장엄한 수직 폭포의 굉음마저 삼켜 버렸다.
 석자 두 치의 거친 목검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있는 육초량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그가 오년 전 흑룡방의 무리들에게 쫓겨 용화산을 바라보고 줄달음치던 그 소년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훌쩍 커버린 키에 어깨 너머로 거칠게 흘러내린 치렁한 머리카락.
 턱을 타고 온통 거뭇거뭇하게 자라기 시작한 수염은 강철같이 단단해 보이는 피부와 함께 야성에 깊이 물든 거칠고 투박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육초량이 맹수처럼 차갑고 깊은 눈을 번쩍이며 노려보고 있는 것은 한 그루의 노송이었다. 수없이 찍혀서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마저 헤진 채 너덜거리고 있는 노송의 아름드리 둥지는 반 넘게 패여 나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잔바람에도 휘청거렸다.
 육초량은 마치 대적을 눈앞에 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신중한 안색으로 그것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던 그가 한 순간 폭발하듯 “얍!” 하는 기합을 터뜨리며 땅을 박차고 도약해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름으로 가격해 드는 그의 목검이 거목의 둥치에 떨어질 때마다 그 맹렬한 힘에 의해 깊은 자국이 남겨졌다.
 상단, 중단, 하단. 정면에서 내리찍는가 하면 어느새 양 측면을 치고 다시 밑에서 위로 쳐 올린다.
 좌우로 수많은 사선을 긋고 비스듬히 쳐내는 검격의 맹렬함이 불길 같았다.
 육초량이 익숙한 솜씨로 쳐내고 있는 검로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목표물을 십자로 사등분하여 각기 그 정점을 치고, 다시 사등분 된 한쪽 면을 무수한 사선으로 잘게 쪼개듯이 가격한다.
 그것을 때로는 일 검 일 검에 온 힘을 실어 신중하고 무겁게 쳐냈고, 또 때로는 그 모든 것을 단번에 때려냈다. 그럴 때면 그의 몸놀림은 가히 질풍과도 같았다.
 좁아지고 넓어지며 자유자재로 방위를 바꾸어 딛는 보법의 기오함과, 신축을 마음대로 하며 길고 짧게 쳐 나가는 손속의 신속함은 유성우가 쏟아지는 듯 화려하기까지 했다.
 
 숲을 흔드는 낭랑한 기합 소리 속에 계절이 일순환했다. 다시 해가 바뀌고 백원곡 가득 새 봄의 향기가 무르익어 갔다.
 육초량은 용추폭포의 비말이 물안개처럼 하얗게 부서져 날리는 용연(龍淵)에 발을 담그고 우뚝 서 있었다.
 덥수룩이 자란 수염과 더욱 거칠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잘록한 허리 위로 떡 벌어진 어깨가 검게 그을려 빛났다.
 육초량은 이제 야성에 물든 한 마리 표범인 듯했다.
 폭포를 마주 본 채 목검을 중단으로 겨누고 숨을 죽이고 있는 그의 온몸에서 터질 듯한 긴장이 느껴졌다.
 먹이를 노리는 표범의 눈빛처럼 차갑고 강렬한 기운을 갈무리한 채 숨을 억누르고 있는 그의 기세는 상대가 누구든 단번에 그 자의 정신을 제압해 버릴 듯했다.
 빠르게 수면을 스치고 육초량의 머리 위를 맴돌던 제비 한 쌍이 다시 급강하하여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육초량이 딛고 있던 바위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타핫!”
 짧고 힘있는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번갯불이 번쩍이듯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석자 두 치의 목검이 뿌려졌다. 사각의 측방 정점을 찍어 가는 익숙함이었다.
 그 순간, 정수리에 벼락같은 일격을 당한 제비가 날던 기세를 잃고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차도 없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제비를 쳐낸 것이다.
 그 쾌속함이 놀라운데, 어느새 육초량은 삼장이나 되는 용연을 건너뛰어 맞은편의 바위 위에 가볍게 내려서고 있었다.
 퍼드득-
 막 수면에 닿을 듯이 떨어지던 제비 한 쌍이 다시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는 육초량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이것을 비연참이라고 하자.”
 제비 베기(飛燕斬).
 낮게 스쳐 나는 제비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힘의 강약에 대한 자유로운 조절이었다.
 순식간에 그 엄청난 빠르기로 쳐나간 검의 흉포함을 마음먹은 지점에서 마음먹은 순간에 맺고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방금 전의 제비 한 쌍은 정수리에 와 닿았다가 가볍게 멎어버린 검세에 잠시 기절했던 것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정교함은 강호의 어느 문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검격이었다.
 육초량은 백원곡에 숨어든 지 꼭 육년 만에 그만의 검격을 이루어낸 것이다.
 대자연이 그의 스승이었고, 삼라만상이 그의 검법의 조력자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계곡의 구석구석을 더듬어 보는 그의 얼굴에 감회가 서렸다. 그는 드디어 ‘바람의 검’을 터득한 것이다.
 이제는 실전을 통해서 정교한 운용과 자유로운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만 남았다고 여겼다.
 육초량은 그 동안 자신의 손안에서 닳고 닳은 목검을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
 
 온주현은 하북성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는 삼백여 호의 아담한 마을이다.
 현의 외곽으로 뻗은 골목길을 걷는 한 청년이 있었다.
 일견 야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장발의 괴청년은 육년 전 흑룡방의 무리들에게 쫓겨 현을 떠났던 육초량이었다.
 그가 현을 떠났을 때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스물두 살의 헌칠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하루, 하루를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육년의 세월은 길고 고단하기만 했다. 그 세월 속에서 다시 돌아온 육초량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육초량은 천천히 눈에 익은 거리를 걸었다.
 그의 거친 행색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그러나 육초량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대하면 저마다 시선을 떨구기에 바빴을 뿐, 누구 하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겁 많고 풀이 죽어 있는 촌민들이었던 것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구름처럼 가볍게 걷던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저자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만두 가게였다.
 따뜻한 마음으로 언제나 그를 돌보아 주었던 장삼의 가게다.
 지난 육년 동안 육십 년은 늙어 보이는 장삼의 아낙이 멍한 시선으로 뜻 없이 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초췌해진 얼굴을 보자 육초량은 가슴이 아팠다.
 여자 홀로 육년간이나 이 비좁고 초라한 가게를 지키며 버텨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그녀의 얼굴이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잠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장삼의 훈훈한 얼굴을 회상하던 육초량이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아낙이 낯설고 거친 손님을 맞아 깜짝 놀랐다.
 구석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육초량은 만두 한 접시를 시켰고, 장삼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아낙이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육초량을 힐끔거렸다.
 그의 거친 행색이 금방이라도 행패를 부려올 부랑아 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런 아낙의 모습이 육초량을 서글프게 했다.
 한 때 자신의 집처럼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던 가게였다. 언제나 장삼의 털털한 웃음이 있었고, 분주히 오가며 수다를 떨던 아낙의 손길이 있었다.
 자식을 맞는 것 같은 따뜻함으로 맞았던 장삼이고 그의 아낙이었건만 오늘은 전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긴 머리카락과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훤칠하게 커진 키와 단단해진 몸매는 전혀 다른 사람과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예전의 영악했던 사냥꾼 소년 육초량을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한 마리 야수를 대하는 듯한 거친 기운마저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한 접시의 더운 만두를 다 먹은 육초량이 천천히 일어서자 장삼의 아낙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눈이 다가오는 육초량을 향하고 있었다.
 육초량은 메고 있던 행낭 속에서 두 뿌리의 산삼을 꺼내 들었다.
 “가진 돈은 없습니다. 이것으로 대신하지요.”
 아이의 팔뚝만한 귀물이었다. 그것이면 족히 은자 일천 냥의 값어치는 될 것이다.
 평생 만두를 팔아도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거금인 것이다. 아낙 놀람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귀한 것을······.”
 “장 아저씨의 마음에 대한 작은 보답의 뜻입니다. 그럼.”
 육초량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아낙을 스쳐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골목을 돌아 가게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부디 편하게 사시기를······.”
 다시 한 번 가게가 있는 방향을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그녀가 더 이상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고 전답을 구해 편히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비는 육초량이었다.
 
 
 
 
 
 제2장 총병(總兵) 왕정필(王正弼)
 
 
 
 
 
 
 
 
 
 가정(世宗嘉靖帝) 삼년(1524년) 여름.
 산서성(山西省) 북단(北端)에 있는 대동(大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총병(總兵) 왕정필(王正弼)이라는 자가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순무도어사(巡撫道御師) 장영규는 호위 군사 몇 명에게 에워싸여 겨우 대동을 벗어나 삭주성(朔州城)을 의지하고 숨어 버렸다.
 대동은 장성을 경계로 하여 막북의 패자인 달단부와 대치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달단부의 지배자인 알단칸(俺答汗)은 명에서 도망쳐 온 병사들에게 땅과 집을 주어 살게 하며 우대했다.
 그에 비해 고향을 떠나 변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병사들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한심할 지경이었다.
 병사와 하급 지휘관들 중에는 삼년이 넘도록 후속 부대와 임지 교체를 하지 못하고 눌러 앉아 있는 자들이 태반이나 되었다.
 게다가 부임해 온 고관들은 하나 같이 병무(兵務)를 핑계 삼아 오히려 병사들을 조이고 수탈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으니, 대동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짐승 취급을 받으며 배를 주릴 바에야 차라리 장성을 넘어가 집과 땅을 받고 농사지으며 거기서 살자.
 
 병사들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만연했다.
 그런 병사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왕정필은 병사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변방에서 이처럼 박대와 멸시를 받고 희망 없이 사느니 차라리 대동을 통째로 들어 알단칸에게 바칠 생각을 했다.
 더 이상 황제와, 그의 조정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그를 분노하게 한 것이다.
 알단칸에게 투항해 가면 적어도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은 밭과 집을 하사받아 평화롭게 살 것 아닌가.
 왕정필은 그러면 된다고 여겼다.
 조정에서는 대동부의 병란에 뒤늦게 위기를 느끼고 토벌대를 보냈으나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있었다.
 은연중에 알단칸의 지원을 받으며 기세가 욱일승천(旭日昇天)한 반군들 앞에 토벌대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동부는 바로 하북으로 통하는 관문과도 같았다.
 산서성에 속해 있었지만 연경(燕京)까지는 육로로 불과 보름 길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동부에서 연경에 이르는 길에는 험한 산도, 깊은 물도 없었다. 몽고의 빠른 말로 달리면 사흘이면 충분히 대군이 도착할 만했다.
 가정제와 대신들은 두려움으로 떨었다. 그러면서도 몇날 며칠을 두고 갑론을박할 뿐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것이 구중궁궐에 머무르며 턱짓으로 수하 부리기에만 익숙해져 있는 자들의 한계인지도 몰랐다.
 
 ***
 
 “와라! 대동부의 참장 유운필이 바로 나다!”
 무리를 헤치고 바람처럼 말을 달려 다가온 적장 하나가 오십 근은 나가 보이는 무거운 파풍도 한 자루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쩌르릉 고함을 질렀다.
 칼자루에 달린 한 발이나 됨직한 붉은 수실이 현란하게 나부꼈다.
 전투 중에 투구가 벗겨졌는지 맨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머리를 감싸고 있는 수건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붉게 핏발선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여기 저기 베이고 찢긴 갑옷도 피에 절어 있었다. 자신의 상처도 있었지만, 상대를 찍으며 얻은 핏자국들이다.
 육초량은 단번에 그 자가 악귀처럼 자신의 동료들을 찍어 넘기던 그 용맹무쌍한 장수라는 걸 알았다.
 용서할 수 없다는 투지가 불길처럼 일었다.
 “악인부대의 육초량. 그럼!”
 짧게 대답한 육초량이 그의 철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곧이어 굉장한 기합 소리가 남평진(南平鎭)의 벌판을 떨어 울린 순간, 그의 몸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는 게 보였다.
 유운필의 가슴이 왼쪽 어깨에서부터 비스듬히 갈라졌다.
 가슴을 쪼개고 나온 검이 그 여력으로 그가 타고 있던 말의 한쪽 머리까지 긋고 나서야 멈추었다.
 가죽이 찢기고 뼈가 갈라지는 그 기이한 소리에 그들 주위에서 서로 얽혀 혼전을 벌이고 있던 무리들 모두가 멈칫하며 싸움을 멈추었다.
 벽력검(霹靂劍).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무시무시한 육초량의 내려치기 일격이었다.
 서로 겨누어 서기 무섭게 질풍처럼 쳐오는 유운필의 파풍도를 오른쪽 어깨 너머로 흘리며 한 바퀴 돌아 파고든 육초량이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굉장한 기합을 터뜨리며 한 길이나 도약했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기세 그대로 단번에 사람과 말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린 것이다.
 오십 근짜리 파풍도 한 자루로 장성 남북은 물론 연경에까지 이름이 높았던 대동부의 맹장 유운필이 일합을 견디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
 
 군막은 남평진 외곽의 폐허에 세워져 있었다.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고 뒤에는 반이나 무너져 내린 장성의 돌무더기가 멀리 이었다.
 군막 안에서 대장 고양지(高陽止)는 오늘의 전과를 보고 받고 있었다.
 “사백 이십 두 명의 반군을 베었습니다. 적장은 다섯을 베었고, 우리 부대의 희생은 오십 사 명입니다.”
 “좋아, 그만하면 만족한 성과다. 이로써 남평진으로 물러나 진을 치고 있던 반도의 무리 하나는 토벌한 셈이다.”
 하루 낮과 밤에 걸쳐 벌어졌던 싸움의 결과를 보고 받으며 흐뭇해하던 고양지가 문득 눈을 번쩍였다.
 “그놈 살귀는 어땠나?”
 “반도 이십을 베고 적장 셋을 베었습니다.”
 고양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서기를 돌아보았다.
 “그놈에게 지급해야 할 군전이 얼만가?”
 “반도 한 놈이 은자 두 냥이고, 적장은 두당 열 냥이니······ 도합 은자 칠십 냥입니다.”
 “흐흐흐, 싸움이 없었다면 그놈은 대체 무얼 처먹고 살았을까?”
 고양지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꿈틀대며 탁한 소성을 흘리고 나서 옆의 부장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놈을 데려와라!”
 
 육초량은 반쯤 불타다 남은 나무 등걸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의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이 황혼으로 붉게 물들어오기 시작하는 먼 초원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유운필의 칼은 빠르고 힘이 있었다. 나는 그 자의 정수리를 쪼갤 생각이었다. 그러나 빗나갔다.’
 그는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심각하게 지난 낮의 대결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놈이 칼끝을 돌려세우는 순간 하체에 위협을 느꼈다. 방법이 없었을까?’
 육초량이 철검을 뽑아 천천히 머리 위로 겨누었다.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는 늘 혼자서 자신의 검을 다시 생각해 보곤 하는 육초량이었다.
 적을 치던 자신의 검에 파탄이 있었다고 여겨지면 그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깊은 사색과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기질 때문에 그의 검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분수의 보. 그 보법을 내가 허공중에서도 응용했다면?’
 분수(粉水)의 보(步).
 그것은 백원곡의 폭포 속에서 엄청난 수압을 이겨내고 급변하는 물줄기를 따라 밟아 가며 익힌 현란한 보법이었다.
 바위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튀듯, 종잡을 수 없는 방향성을 가지고 재빠르게 움직임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허실을 알 수 없게 하는 데 커다란 효용이 있었다.
 실전을 통하여 육초량은 그 분수의 보가 상대의 눈과 검을 어지럽게 하는 충분한 위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통쾌했다.
 한동안 기괴하게 뒤틀려 그을린 나무 둥치를 바라보던 육초량이 맑은 기합과 함께 가볍게 도약했다.
 깃털보다 더 가볍게 허공에 몸을 띄워 올린 그가 공중에서 눈 깜박할 사이에 다섯 번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고 세 번을 걷어차며 움직여 갔다.
 차는가 하면 뛰고, 미끄러지며 도는 그의 현란한 운신은 곤륜파가 자랑하는 절정의 신법인 운룡대팔식보다 오히려 가볍고 현란한 데가 있었다.
 발끝으로 작은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찍으며 몸을 뒤채던 그가 맹렬한 기세로 수직의 일 검을 내리 꽂았다.
 쩌저적-!
 반 남았던 나무 둥치가 벼락을 맞은 듯 위로부터 쪼개져 양옆으로 쓰러져 갔다.
 “바로 이것이야! 분수의 보를 잘 응용하면 훌륭한 경신술이 되겠군.”
 육초량은 또 하나의 깨우침을 얻었다는 기쁨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의 철검을 거두었다.
 “육 비장(陸飛將), 고 군장(高軍將)께서 부르시오. 군막으로 가 보도록!”
 언덕 아래서 던지듯 그 말만을 전하고 난 부장이 못 볼 물건을 보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육초량은 내심 그가 무어라고 투덜거리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악인이지만 저놈은 정말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이야. 검만 들면 꼭 야차 같다니까. 인성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살귀 그 자체야. 기분 나쁜 놈.’
 악인부대라는 군기(軍旗) 아래 함께 몸담고 있는 오백여 동료들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욕하고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왜구와의 싸움이 벌어졌던 절강의 해안에서 이곳으로 급히 달려온 지 어느덧 두 달.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싸움을 겪으며 그의 검은 스스로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무섭게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악인부대는 조정의 군 체계를 따르는 정규 부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용병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정은 근년 들어 강소와 절강, 멀리는 복건 성에 이르기까지 동남 해안을 따라 극성을 부리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별동대를 급조했다.
 사람들은 그 부대를 악인부대라고 불렀다. 대륙에서 죄를 짓고 쫓기던 흉악한 자들이 모두 모여든 탓이었다.
 일단 이 악인부대에 입대하면 그곳에 몸담고 있는 동안 관에서는 모든 죄를 일체 불문에 붙여 주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혁혁한 무공을 떨친 자는 특사를 내려 사면해 주기까지 했다.
 당연히 쫓기고 쫓겨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자들이 스스로 자원해 왔다. 그리고 명조는 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싸움에서 벤 적의 머릿수에 따라 포상까지 해 주었다.
 죄를 면제받고 돈까지 번다. 죽지만 않는다면 일평생 쓸 돈을 벌어 당당하게 금의환향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악인부대에 모여든 자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게 했다.
 싸움이 벌어지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악귀처럼 달려드는 그들의 용맹은 정규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흉악한 것이었다.
 백전백승.
 그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들어가는 곳에 살아남는 적병은 없었다.
 육초량은 그 악인부대에 일년 전에 몸을 던졌다. 곧 절강성 해안의 왜구 토벌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부터 그의 악명은 시작되었다.
 이제 겨우 스물두 살 난 젊은 청년이 철검 한 자루를 들고 찾아왔을 때 부대의 악인들은 모두 그를 가엾게 여겼다.
 다음번 싸움에서 죽을 놈.
 그들은 육초량을 그렇게 점찍었다. 그러나 육초량은 죽지 않았다.
 다음번은 물론 그 다음번에서도, 또 그 다음······.
 그가 속한 일대(一隊) 오십 인이 모두 죽었을 때에도 그만은 홀로 철검을 끌며 귀대했다.
 사람들은 점차 그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애송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오늘날 육초량은 일대를 이끄는 비장으로 승격되어 있었고, 부대 내의 모두에게 상대할 수 없는 살귀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다.
 한 자루 철검을 들면 야수로 돌변하는 사나이.
 절강성의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은 그를 살신(殺神)이라고 부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정작 육초량에게는 생과 사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의 철검 아래 수십, 수백의 적이 쓰러져도 좋았고, 반대로 적의 칼 아래 자신의 목이 떨어져도 좋았다.
 그는 오직 그만의 독특한 폭풍검을 더욱 위력적이고 효과적인 것으로 다듬는 데 혼을 바쳤고, 왜인들의 신랄한 왜검을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이다.
 
 수장(首將) 고양지가 번쩍이는 눈을 들어 막 군막 안으로 들어선 육초량을 직시했다.
 유등 아래 붉게 달아오른 그의 흉측한 얼굴에서 스산한 귀기(鬼氣)마저 풍겼다.
 “육 비장, 네놈은 오늘도 많은 돈벌이를 했더군.”
 “······”
 “계산해 줘라!”
 고양지와 육초량의 눈치를 보던 서기 관안사가 교활한 눈빛을 빛내며 웃었다.
 “헤헤, 육 비장의 벌이가 이제는 우리들 중 제일입니다요. 가만있자, 졸개 이십 인에 적장 삼인이라······ 도합 칠십 냥이로구만요.”
 그가 오동나무 함(函)에서 열 냥짜리 은표 일곱 장을 꺼내 내밀자 육초량이 묵묵히 그것을 받아 품안에 쑤셔 넣었다.
 “놈, 이번에도 군호금은 떼어놓지 않을 셈이냐?”
 눈을 부릅뜨고 육초량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고양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 몫은 칠십 냥이 아니라 구십 냥이라야 맞아. 졸개 다섯에 적장 한 놈이 계산에서 빠졌으니까. 그 이십 냥이면 군호금치고는 과하다고 생각하는데?”
 고양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치열하게 얽혔다.
 ‘언젠가는······.’
 육초량은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자, 악인부대의 수장인 고양지가 오래 전부터 병사들의 포상금에서 군호금 명분으로 일 할씩의 돈을 떼어 착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포상액을 조작하여 챙기는 돈만도 적지 않았다.
 그는 도독부(都督府)에서 내려보낸 서기 관안사와 짜고서 병부에 포상금을 과다 청구하고, 병사들에게는 그것을 깎는 이중의 방법으로 매달 엄청난 양의 은자를 챙기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악인부대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모두는 비리를 알면서도 고양지의 흉포함과, 그를 비호하는 일부 무장들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눌려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한 내막을 알고부터 육초량은 과감히 그들의 손을 거절하고 있었다.
 목숨을 내걸고 싸워서 얻은 대가를 가로채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적 앞에 섰을 때보다 더 컸다.
 군례도 생략한 채 횅하니 돌아서서 거칠게 포장을 들추고 나가 버리는 육초량의 등을 무섭게 쏘아보던 고양지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놈, 언젠가는 나 고양지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내일은 청수하로 이동한다는군.”
 “그곳에 수괴인 왕정필의 본진이 있으니까. 아마 그것이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몰라.”
 반란을 일으킨 자의 목을 치고 나면 남은 적도들은 제풀에 꺾여 흩어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왕정필이 그처럼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벌써 십여 년 가까이나 대동부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막북의 강자인 오이랏트와 달단부에 맞서 싸워온 자였다.
 명 조정으로 본다면 그들의 무지함 때문에 참으로 아까운 장수 하나를 버린 셈이었다.
 제대로 된 군주를 만났더라면 왕정필은 벌써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대장군이 되어 연경에 진출해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도지휘사(都指揮使)의 직함을 받고 높은 태사의에 앉아 만군(萬軍)을 호령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무리를 이끌고 장성을 넘어 달단부에 투항하려는 초라한 배신자의 모습을 하고 지금 청수하(淸水河) 변에 웅크리고 있었다.
 한 때 기세를 떨치며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을 박살내던 그들의 전성기는 너무 빨리 끝났다.
 악인부대가 오천 리나 되는 길을 달려 대동에 이르면서부터 왕정필의 외곽 부대들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린 탓이었다.
 대동에서 참장(參將) 장성길이 성벽과 함께 무너져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최후를 맞더니, 믿었던 유운필의 부대마저 남평진에서 괴멸되었다.
 두 날개를 모두 잃어버린 왕정필은 겨우 그의 친위병 이천을 거느리고 청수하에 머물며 달단부의 눈치만 보는 한심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처럼 좋아하던 달단부에서도 이제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왕정필의 기세가 불같이 일었을 때는 그를 도와 곧 장성을 넘을 것 같더니, 그가 일패도지하여 장성 밖으로 내몰리자 이제는 명의 보복을 은근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왕정필은 달단부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알단칸(俺答汗)은 분주히 척후를 놓아 악인부대의 이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튀지 않도록 주변을 단단히 하는 일에 주의를 쏟고 있었다.
 청수하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왕정필의 마지막 싸움이 알단칸의 결심을 어느 방향으로든 굳혀 줄 것이었다.
 
 “흥, 죽어라 싸우면 뭐해. 그래봐야 고양지와 그 일당들에게 좋은 일 시켜주는 꼴밖에 더 되겠어?”
 육초량은 초원 위에 한가롭게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악인들의 투덜거림을 듣고 있었다.
 “벌레 같은 놈들.”
 그의 입에서 경멸에 찬 낮은 웅얼거림이 흘러나왔다.
 
 ***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하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청수하변에 함성이 진동하고 있었다.
 낮은 구릉을 타고 악인부대의 선봉 일백 오십 인의 무사들이 악귀처럼 내달렸다.
 그들을 맞고 있는 것은 이제 오백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는 왕정필의 마지막 군세였다.
 벌써 사흘 째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격전이 벌어졌다.
 거울처럼 맑던 청수하가 혈하(血河)로 변한 지도 오래다.
 고양지가 이끄는 악인부대와 왕정필의 이천 반군들은 서로를 물어뜯는 주린 들개들처럼 사납게 뒤엉켰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시간도 없었다.
 동료와 적의 주검이 뒤엉켜 있는 벌판에서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 주먹밥을 뜯어먹었고, 갈증이 나면 붉게 물든 강물을 움켜 마셨다.
 그렇게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지겹도록 죽이고 죽었지만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된 왕정필의 친위군들은 악착같았다. 그러나 이제 모두가 악이 오를 대로 올라 악귀 나찰이나 다름없이 변해 버린 악인부대의 흉포함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청수하를 들끓게 했다.
 머리 위에는 한낮의 청청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멀리 푸른 초원 너머로 한가롭게 걸쳐 있는 구름이 태평스럽기만 한데, 고함과 비명과 병장기 부딪는 날카로운 쇳소리는 이 청명한 가을날 오후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씩 밀리던 난군(亂軍)들이 청수하에 발목을 담그고 말았다. 더 이상 발 딛고 설 땅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라! 그럴 수 없다면 강물에 코를 박고 죽어라! 더 이상 갈 곳은 없다!”
 장수의 처절한 외침이 난군들 모두에게 마지막 투혼을 일깨워 주었다.
 사나운 몽골의 기마군단을 상대로 수십, 수백 번의 전투를 겪어내며 단련된 변방의 정예군들이었다.
 비록 그 처지가 오늘은 반도의 무리라는 오명 속에 더럽혀졌고, 명분을 잃은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인의 칼끝 같은 기세마저 던져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러서지 마라!”
 선두에서 장창을 휘두르던 자가 뒷걸음질 쳐 오는 동료의 등을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다.
 “죽이지 못하겠거든 스스로 죽어라! 우리가 언제 싸움터에서 등을 보인 적이 있던가! 우리는 대동(大同) 황금호(黃金虎)의 군사들이다!”
 절규하듯 피눈물을 삼키며 부르짖은 자가 장창을 들고 미친 듯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한 마리 날렵한 사슴을 노리고 달려드는 굶주린 들개들처럼 악인부대의 무사들이 환호와도 같은 함성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이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난도질된 그의 육신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가자!”
 그것을 본 난군들의 가슴에 마지막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뒤로 밀리던 발꿈치에 부쩍 힘을 주고 한 덩어리가 되어 강물을 차며 뛰쳐나오는 그들의 기세가 그 어느 때보다 사납고 용맹했다.
 이제 악에 치받치기는 악인부대의 병사들이나 난군들이나 다를 게 없었다.
 “대단하다. 과연 대동부의 무사들이다!”
 잠시 검을 쉬며 그것을 지켜보던 육초량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감탄하고 말았다.
 여태까지 악인부대를 맞아 이와 같이 용감하고 치열하게 버텨낸 자들은 없었다.
 사납고 잔인하기로 이름난 남해의 왜구들도 악인부대의 깃발만 보면 창대를 거꾸로 잡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아무리 어려운 싸움이라도 하루 낮과 밤이면 족했다. 그 이상을 끌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오백 정병들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대동부의 병사들이 오군도독부의 일백 만 정병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이라더니 과연 헛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앞장섰던 자가 죽으면 그 주검을 밟고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드는 그들의 처절한 투혼 앞에서 육초량은 경외지심마저 느꼈다.
 무적을 자랑하던 악인부대의 무사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난군의 발악 앞에서는 기세가 한풀 꺾여 주춤거렸다.
 
 육초량은 야차처럼 그의 철검을 휘둘러 닥쳐드는 반군을 찍어 넘기며 전세를 살펴보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하고 만다는 위기감이 밀려왔다.
 굶주린 야수 같던 자들이 전의를 잃고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구릉 위에 악인부대의 깃발 아래 정연하게 벌려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본대 일천의 군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고양지라는 놈!’
 육초량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전사하도록 내버려 둘 속셈이 분명했다.
 ‘후위 부대는 없다!’
 육초량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들려주었다.
 후속부대의 지원을 기대하는 마음 따위는 깨끗이 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남던지 죽던지 결단을 내야 할 때였다.
 “으아악-!”
 우측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언뜻 고개를 돌린 육초량의 눈에 자신의 우측을 맡아 오십 인의 부하들을 이끌고 분전하던 비장 장소기의 목이 떨어져 날리는 게 보였다.
 좌측 우천청이 이끄는 오십 인의 악인대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장소기나 우천청은 육초량과 마찬가지로 평소에도 고양지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토해냈던 자들이었다.
 육초량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고양지 이 간악한 놈은 이번 싸움의 선봉에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만 골라 내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언덕 위의 본진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좋아, 우리 힘만으로 한다!”
 육초량이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를 악물었다.
 오백 보 전방에 한 필의 오추마 위에 앉아 번쩍이는 보도(寶刀)를 휘두르며 전군을 지휘하고 있는 무장의 모습이 보였다.
 눈부신 금색 전포와 갑주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반군의 수장인 대동총병(大同總兵) 왕정필인 것이다.
 ‘왕정필이다!’
 그를 확인한 육초량의 눈이 불을 뿜었다.
 장성(長城)의 수비군들이 모두 대동의 황금호(黃金虎)라고 부르며 경외지심을 품고 있는 맹장 중의 맹장인 것이다. 멀리서도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분노한 범의 그것처럼 환하게 보였다.
 ‘그를 친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정하자 온몸의 혈관을 타고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투지가 치솟아 올랐다.
 육초량은 서슴없이 갑주를 벗어 던졌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그가 다리에 힘을 더하여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으로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반군들을 정신없이 찍어 넘겼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도검과 자신의 철검이 맞부딪치지 않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검의 날이 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검에 일인씩. 육초량은 신중하게 검을 쳐내며 무서운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최대한 힘을 축적하고 검의 상태를 보전해야 한다는 것은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 준 난전 중의 비결이었다.
 정작 노리고 있던 상대에게 다가갔을 때 체력의 소모가 심하다거나, 검인(劍刃)이 무디어져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왕정필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뛰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고 풀밭을 가르며 달려가는 한 마리 맹수의 그것과도 같았다.
 수없이 베어져 너풀거리는 전복(戰服)과, 흩어져 날리는 거친 머리카락.
 부릅뜬 눈에 흉흉한 살기가 핏발이 되어 일어섰고, 끔찍하게 이가는 소리는 그의 앞을 막아선 자들을 섬뜩한 두려움으로 질리게 했다.
 전신에 뒤집어 쓴 피와 땀으로 인하여 그의 모습은 지옥의 야차 그대로였다.
 “훌륭하다!”
 정면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왕정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육초량의 용맹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저런 용맹과 무위를 지닌 자를 처음 보았다.
 삼십 년을 전쟁터에서 자고 샜지만 그가 보았고 마주했던 그 어떤 용사도 지금 눈앞에서 육초량이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은 저런 맹렬함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누구냐, 저 자는!”
 그가 한 손을 들어 육초량을 가리키며 곁에서 수행하고 있는 부장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이마를 좁히고 바라보던 부장이 육초량을 향해 말 배를 박차고 마주 달려나갔다.
 
 “날뛰지 마라, 돈에 팔려온 조정의 개야!”
 앞을 막아서며 환두대도를 들어 겨누어 오는 적장을 바라보는 육초량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졌다.
 그자는 기를 꺾기 위해 비아냥거림을 던진 것이지만 오히려 육초량의 살기만 더 짙어지게 했다.
 적장은 감히 육초량의 그 눈빛을 똑바로 받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마!”
 주둥이만 나불거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 자를 올려다보며 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장대를 가진 자에게 부지깽이를 들이미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육초량이 말발굽을 안을 듯 성큼 다가서며 검을 휘둘러 말의 다리부터 찍었다.
 말이 처량한 부르짖음을 터트리며 펄쩍 뛰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고삐를 쥐고 있던 자가 당황한 순간,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뛰어든 육초량의 검이 그의 환두대도를 밀어내며 그 기세로 곧장 목을 쳐버렸다.
 변변히 일합을 나누어 볼 새도 없는 사납고 빠른 일격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바라보던 부장들이 일제히 말고삐를 채며 곧 달려나갈 듯했다.
 왕정필이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기다린다.”
 그의 가늘게 뜬 눈은 여전히 육초량에게 멎어 있었다. 그 눈빛에 몽롱한 기색마저 떠올랐다.
 미인이 귀한 보석을 보듯, 육초량을 바라보는 왕정필의 눈에 가득한 것은 그런 안타까움과 황홀함이었다.
 부장들은 그가 육초량의 용맹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세를 올리며 악인부대의 선봉군을 괴멸시켜 가던 반군의 진영이 크게 술렁였다.
 좌우군들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여파가 물결처럼 빠르게 번져갔던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육초량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검에 일인씩, 그는 잔가지를 쳐가는 익숙한 나무꾼처럼 거침없이 앞을 막는 군사들을 쳐 넘기며 똑바로 왕정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지침도 보이지 않는 그의 눈부신 검을 바라보며 왕정필이 흠, 하고 탄성을 흘렸다.
 “훌륭하다!”
 두 번씩이나 적에게 똑같은 감탄을 보내는 왕정필을 본 적이 없었다. 부장들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다시 촌각의 시간이 지났고, 일직선으로 혈로를 뚫고 달려온 육초량이 온몸에 진득한 피를 뒤집어 쓴 끔찍한 모습으로 왕정필의 말 앞을 막아섰다.
 “악인부대 육초량이요. 오늘 그대의 목을 원하오!”
 “오오, 좋다! 기꺼이 너의 검을 받으마!”
 부장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큼 말에서 내려선 왕정필이 투구를 벗어 던지고 장도를 뽑아 들었다.
 ‘과연 대동의 황금호다!’
 육초량은 온몸을 압박해 들어오는 왕정필의 기세를 느끼고 긴장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무장의 위엄과 용맹이 커다란 바위덩이처럼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눌러왔던 것이다.
 육초량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왕정필의 빛나는 눈을 똑바로 받았다.
 마음으로는 흠모할 수 있어도 목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왕정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한 순간 누구의 입에서인지 모를 엄청난 기합이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의 병기가 은빛 무지개를 뿌리며 얽혔다.
 일합, 이합······.
 번개처럼 오가는 검격이 이를 갈며 섞이고, 그때마다 새파란 불똥이 튀어 유성우처럼 흩어졌다.
 “차핫-!”
 오십을 넘긴 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맹렬함과 투지를 담고 왕정필이 힘차게 다가들었다.
 머리 위에서 커다란 그의 칼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단순하고 패도적인 그 도법이야말로 전장(戰場)에서 가장 큰 힘과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전(實戰)의 도법이었다.
 분수(粉水)의 보(步)로 신형을 흩친 육초량이 팽이처럼 돌아 비껴서는 그대로 번개 같은 일 검을 사선(斜線)으로 그어 올렸다. 비연참(飛燕斬)의 눈부신 검격이었다.
 ‘베었다!’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부르짖은 순간 이마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끄으윽-!”
 귓속으로 기묘한 신음소리가 흘러들었다.
 아랫배에서 가슴까지 갑주와 함께 베어져 잘 익은 석류처럼 쩍 벌어진 왕정필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육초량은 갑자기 허전해지는 검의 무게를 느껴야 했다. 그의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뿐, 육초량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맛보듯 혀끝으로 찍으며 성큼 다가가 왕정필의 목을 베어냈다.
 
 ***
 
 탁!
 악인부대의 수장 고양지가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곁에서 서기 관안사가 공포로 질린 쥐눈을 소리나게 굴리고 있었다.
 술상 위에 내던져진 두 개의 수급은 군막 앞에 위사로 세워 두었던 심복들의 것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아직도 더운피를 흘리고 있는 그것의 기괴함이 승전을 자축하던 연회의 자리에 갑작스런 침묵을 몰아왔다.
 “이, 이놈!”
 고양지가 분노로 두 볼을 부들부들 떨며 무섭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육초량을 쏘아보았다.
 “버러지 같은 놈.”
 이 사이로 으르렁거리듯 낮게 뱉어낸 육초량이 검 자루를 잡은 채 성큼 다가섰다.
 “감히 난동을 부리겠다는 거냐!”
 고양지와 동석해 있던 다섯 명의 무장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료들의 피를 마시고 살찐 쥐새끼들을 잡으려는 것뿐이다!”
 “죽일 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무장들이 일제히 난검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육초량의 얼굴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미 살심을 크게 일으킨 뒤였다.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이 새롭게 솟구쳤다.
 지그시 입술을 악문 그가 탁자를 차 버리고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타핫!”
 싸늘한 일갈과 함께 그의 검이 불길을 토해내는 맹렬함으로 날았다.
 그 동안의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 단련된 육초량의 폭풍검은 이미 원숙해질 대로 원숙해져 있었다.
 주인의 살기를 읽은 검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듯 공간을 가르고 쪼갰다. 그때마다 처절한 비명과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한 구석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관안사가 놀란 눈을 두어 번 끔벅이는 순간 이미 다섯 명의 무장들은 목숨을 잃은 채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그 틈에 칼을 뽑아 든 고양지가 우렁찬 기합성을 터뜨리며 와락 밀려왔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사나운 얼굴로 상대의 전신을 압박하며 베어드는 기세가 사납기 짝이 없었다.
 그 또한 백전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은 맹장 중의 맹장인 것이다.
 발끝으로 힘차게 땅을 찍고 도약하여 그의 머리 위를 타넘은 육초량이 허공에서 허리를 쭉 펴 비틀며 비연참의 일격을 뿌렸다.
 철검이 번쩍하고 빛난 순간 악인부대를 이끌며 수많은 전장을 맨몸으로 질타했던 거친 사내 고양지의 강철같은 허리가 반으로 쩍 벌어져 꺾였다.
 탁자 위에 처박힌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끄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육 비장, 사, 살려······.”
 넋이 빠져 있던 서기 관안사가 털썩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의 생쥐 같은 몰골을 내려다보는 육초량의 눈에 경멸과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너는 저놈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는 것이 죄악이다!”
 손가락으로 고양지와 그의 무리들을 가리킨 육초량이 철검을 들어 한 점의 인정도 없이 관안사의 목을 쳐버렸다.
 선연한 피보라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허공에 무지개처럼 걸렸다.
 한바탕 처절한 살육의 뒤에 찾아든 잠깐의 정적이 우물처럼 깊었다.
 아직도 가슴에 남아 날뛰고 있는 살기를 가까스로 억누른 육초량이 탁한 가래침을 뱉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가 군막을 나오자 운집해 있던 악인부대의 일천 무사들이 분분히 양쪽으로 갈라졌다.
 육초량은 턱을 치켜든 오만한 얼굴로 사람의 바다 한 복판에 난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막막한 벌판 너머의 흐린 장성(長城) 그림자를 향해 멀어져 갈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모습이 언덕 너머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었고,
 “휴······”
 누군가가 내뱉는 한숨 소리에 벌판을 가득 덮고 있던 무거운 적막이 깜짝 놀라며 흔들렸다.
 
 ***
 
 북악(北嶽)으로 이름 높은 중원의 명승지 항산(恒山) 기슭에 은은한 달무리가 내려앉았다.
 산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 북쪽에 위치해 있고, 천도봉을 주봉(主峰)으로 하고 있는 그 산은 험한 산세와 깊은 계곡,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으로 중원 오악 중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산이다.
 열사흘의 은은한 달빛이 계곡과 수림을 더욱 짙은 음영으로 물들이며 천도봉 위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 소로(小路)가 끝나는 곳에 절벽을 등지고 서 있는 낡은 사당 하나가 있었다.
 항산의 칠선녀(七仙女)를 모시는 신녀당(神女堂)이다.
 그곳은 천도봉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어쩌다 들려 향을 태우고 갈 뿐, 찾는 사람이 드문 초라한 사당이었다.
 거친 잡풀들로 뒤덮인 일백 여 평의 뜰을 중심으로 하여 울창한 침엽수림이 빼곡히 둘러서 있어서 낮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았는데, 더구나 지금은 한 밤이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 아래 침엽수림이 감추고 있는 괴괴한 어둠은 음침해 보이기만 했다.
 먼 데서 달을 보고 우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에 화답하듯 구월의 제법 찬바람에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파도 소리 같이 다가왔다. 그리고 바람에 실려 날아오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사당 앞에 내려서는 몇 명의 그림자가 있었다.
 “신분을 밝히시오.”
 사당 안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무량수불. 무당의 청송과 오행검이외다.”
 청송이라면 현 무당의 장로 중 일인이었다. 그리고 오행검은 무당의 이대 제자들 중 가장 걸출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청년 고수들이다.
 “어서 안으로······.”
 사당 안에서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청송자가 가볍게 눈짓을 하자 그들의 신형이 소리 없이 날아 사당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후, 사당 앞에는 다시 몇 명의 사람들이 기척 없이 내려섰다.
 “공동의 당운표외다.”
 “아, 당 장문이시오? 어서 안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기라도 한 듯 개방의 청죽신개를 비롯하여 아미의 금화사태, 청성의 관일평 등 구파일방(九派一幇) 중 사파(四派)의 명숙과 수많은 강호의 군웅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과거 신검문에 몸을 담았거나, 신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자들이었다.
 강북 무림의 백도(白道)에 속해 있던 문파와 강호인들이 거의 모두 신검문을 맹주로 한 강북 무림 연합에 소속해 있던 탓이기도 했다.
 
 삼경이 되자 사당 안에 불이 밝혀졌다.
 뜰에서 서성이던 군웅들은 모두 긴장하여 사당을 바라보았다.
 딱, 딱!
 가벼운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신호로 한 듯 사당의 문이 활짝 열렸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당 앞에 하나의 태사의가 놓여졌다.
 두 명의 시동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 위에 의젓하게 좌정하는 인물은 십 팔 구세 가량의 이목이 수려한 청년이었다.
 그가 오만한 눈으로 군웅들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금의 화복에 옥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가벼운 비단 문사건을 썼다.
 절로 귀티가 우러나는 우아한 자태의 그는 바로 옥풍규였다.
 “소 문주를 뵈오!”
 뜰에 가득 늘어서 있던 군웅들이 일제히 외치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옥풍규가 여전히 오만한 신색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대신했다.
 “모두들 예를 거두시오. 곧 대회를 개최하겠소이다.”
 옥풍규의 우측에 서있던 중년의 청수한 문사가 낭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탁월한 지모와 학식으로 신검문의 총관을 맡아 그 명성을 떨쳤던 신기수사(神機秀士) 진필생(陳筆生)이다.
 옥풍규의 좌측에서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늠름하게 서 있는 태산 같은 기도의 장한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의 고수로 꼽히고 있는 철협 강사옥이었고, 무당의 청송자와 각파의 장문, 장로들이 병풍처럼 옥풍규의 뒤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태사의 아래에는 오파에서 엄선하여 데려온 청년 고수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엄숙하게 시립하고 있었다.
 옥풍규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 서 있는 그들의 기세만으로도 무림에서 보기 힘든 엄청난 모임이었다.
 구파일방 중 오파의 명숙들이 참석해 있었고, 각처에서 웅거하고 있는 일백 여명의 군웅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 각자가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의 세력까지 합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중원 무림의 반에 해당하는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득의한 눈길로 군웅들을 한 차례 쓸어 본 진필생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두 손을 모아 흔들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다시 모여 모임을 갖게 된 것은 실로 기쁜 일이요.”
 그가 장중한 어조로 입을 열자 술렁대던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흑룡보의 포악을 피해 음지에서 신검문을 재건한지 어느덧 사년. 그 동안 우리는 적지 않은 일들을 해 왔소. 많은 동지들을 모았고, 분타를 재건했으며 흑룡보와의 몇 차례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소이다.”
 진필생의 말은 청산유수와 같이 거침이 없었다.
 “우리는 그 동안 열혈의 의기로 강북 무림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흑룡보와 맞서 싸워 왔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소.”
 한 차례 운집한 군웅들을 둘러본 진필생이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문주를 옹립하고 그를 중심으로 뭉치지 못했다는 것이었소. 그러나 하늘의 도우심인가, 얼마 전 본인은 흑룡보의 눈을 피해 강호를 유랑하고 있던 소 문주를 모실 수 있게 되었소이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사의에 오연히 앉아 있는 옥풍규에게 향했다.
 그들 속에는 과거 신검문의 문도였던 자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던 소 문주가 오늘 저렇게 늠름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벅찬 기쁨 때문이었다.
 진필생의 얼굴에도 감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가 손을 들어 군웅들의 술렁임을 가라앉히고 다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소 문주께서 강호를 유랑하면서도 의기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여기 계신 철협 강사옥, 강 대협의 전적인 공이라 아니할 수 없소. 그는 비록 신검문에 몸을 담고 있던 협사는 아니었지만 실로 그 공이 크고 중하오.”
 무리들 중에는 철협 강사옥이 옥풍규의 외숙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 많았다. 그것은 평소에 강사옥이 어떤 문파, 어떤 방회와도 어울리지 않고 홀로 독보강호(獨步江湖)하던 호한(好漢)이기 때문이다.
 그 강사옥이 신검문을 도왔다는 것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이었다. 군웅들의 사기가 한 순간에 치솟아 올랐다.
 다시 한 번 손을 번쩍 들어 군웅들의 소란을 가라앉힌 진필생이 정색을 했다.
 “해서, 본인은 오늘 그 동안 유지해 왔던 백도 연합을 해체하고, 소 문주를 중심으로 신검문을 다시 일으켜 과거의 강북 무림맹을 부활시키려 하오. 그 동안 강북 무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써온 여러 형제들께서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각오로 기꺼이 동참해 주시리라고 믿소이다.”
 신검문이 해체된 후 강북의 무림에는 구심점이 없었다.
 그런 탓에 많은 문파와 방회, 각처의 고수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수가 흑룡보의 세력 속에 편입해 들어갔다.
 그러나 정통을 주장하는 자들은 끝까지 흑룡보에 저항하며 과거 신검문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그런 자들이 모여 백도 연합을 결성하고 힘을 합하게 된 것은 그동안 진필생이 동분서주한 공이 컸다.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어 온 것은 진필생이었다.
 이제 그가 새로운 무림맹의 탄생을 선언하자 모두의 얼굴에 감격과 굳은 의지가 가득 떠올랐다.
 패도를 지향하는 흑룡보의 그늘에 가려져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렇게 회합을 갖고 무림맹을 다시 결성하게 되자 과거 무림연합의 일원으로 강북 무림을 활보하며 위세를 떨치던 영화로운 시대가 다시 돌아온 듯 했다.
 
 진필생은 옥풍규를 신검문주이자 강북 무림맹의 태상(太上)으로 받들고, 맹주의 직은 철협 강사옥에게 위임하려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군웅들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옥풍규를 태상으로 모신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으나, 맹주의 위(位)를 놓고는 의견이 둘로 갈라졌던 것이다.
 강사옥이야말로 천하제일의 고수이고, 그의 협의지심과 공로는 충분히 맹주로 추대될만하다는 쪽과, 신기수사 진필생이 그 동안 백도 연합을 이끌어 온 이래 그의 뛰어난 지모와 통솔력이 더욱 빛을 발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굳이 맹주를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의 쪽이었다.
 군웅들이 분분히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느라고 장내에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그것을 보던 강사옥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딱-!
 그의 진력이 실린 손뼉 소리가 은은한 뇌성처럼 군웅들의 머리 위에 맴돌며 순식간에 잡다한 소음들을 눌러 버렸다.
 강사옥의 가벼운 행동 속에서 그의 심오한 내력을 충분히 느낀 군웅들은 저마다 은근한 경외지색을 띄고 그를 주시했다.
 “나는 일개 졸렬한 무부에 지나지 않소이다.”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중인들을 다시 한 번 압도했다.
 “강호의 외로운 떠돌이였다가 백도 연합에 입적한지 이제 겨우 몇 달. 내게는 그 동안 아무 공도 없었소. 그런 나에게 맹주의 중임을 맡으라는 것은 마치 객더러 주인을 쫓고 안방을 차지하라는 것처럼 부당하기 짝이 없소이다.”
 신기수사 진필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눈여겨본 사람은 없었다.
 “본인은 무림맹의 일개 무사로 만족하오.”
 강사옥이 강경하게 사의를 밝히자 양분되었던 군웅들의 웅성거림이 곧 멎었다.
 강사옥은 자신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제 막 출범한 무림맹이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재빨리 그 싹을 제거한 것이다.
 군웅들은 다시 진필생이 맹주의 위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마지못한 듯 진필생이 나섰다.
 “강 대협의 대의가 그러하고, 여러 형제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부족하나마 소생이 당분간 중임을 감당하겠소이다. 그러나 강 대협이야말로 누구나 흠모해 마지않는 의협이시며 천하제일의 고수. 그에 마땅한 예우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외다.”
 그가 의미 있는 눈으로 강사옥과 군웅들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해서 본인은 강 대협을 본 맹을 통솔하여 군령을 세우고 감독, 집행하는 통령에 추대하는 바올시다. 여러 형제들의 뜻은 어떠신지?”
 진필생의 말에 모두가 크게 소리질러 환영의 뜻을 밝혔다.
 청송자가 새로이 무당을 대표하여 가입함으로써 청성과 공동, 개방, 아미의 존장들이 맡았던 사대호법은 한 자리를 더 늘려 오대호법으로 재편되었다.
 그들이 새로 가입한 자들에게 알맞은 직위를 베풀고, 공석인 향주의 자리에 적당한 인물을 임명하는 등, 한동안 부산한 의식 절차를 끝냈을 때는 멀리서부터 새벽 여명이 은은히 밝아올 무렵이었다.
 
 새롭게 결성된 무림맹의 군웅들은 각자 준비해 온 건량과 술 등을 꺼내어 서로 먹고 마시며 즐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였다.
 우유 빛 새벽 안개에 잠겨 있는 숲 속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그러나 한창 흥이 오른 군웅들은 누구도 그 일에 신경을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숲 속에는 경비를 맡은 산서분타 소속 오십 여 명의 고수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펴고 있는 터였다.
 여간한 담력을 지닌 자가 아니고는 감히 무림맹의 총회 장소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숲 속의 소란은 점점 번져갔다.
 드디어 흉포한 고함 소리와 함께 병장기 부딪는 날카로운 소음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필생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감히 겁도 없이 무림맹 총회의 모임을 넘본단 말인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숲 속에서 한 인물이 재빠르게 신형을 날려 왔다. 개방의 걸인이었다.
 허리띠에 다섯 개의 매듭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개방 내에서도 꽤 배분이 높은 자임이 분명했다.
 “맹주!”
 그가 진필생 앞에 궁신했다.
 “분향주, 무슨 일이요?”
 “일단의 흑룡보 무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이 본 맹의 모임에 참관인 자격으로 입회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며 소란을 부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흑룡보의 무사?”
 진필생과 군웅들이 깜짝 놀라 분분히 일어섰다.
 지극히 은밀하게 계획된 그들의 모임이었다. 한데 흑룡보의 무사들이 어떻게 알고 몰려왔단 말인가?
 진필생이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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