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늙어서 메말라 한 톨의 그리움도 담을 수 없는 퍼석거리는 가슴을 갖게 되어도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제1장 추억
<1>
아미산(峨眉山)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청년이 있었다. 아미산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미산에서 자라 아미산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본 적이 없으니 그렇다.
사방 오백 리에 걸쳐 뻗어 있는 아미산은 그 봉우리만도 칠십이 봉이나 되었는데, 청년, 운몽(雲夢)은 아미산 남쪽 구름 속에 솟아 있는 학정봉(鶴情峰)에서 자랐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를 내고 그 중간의 우묵한 곳에 의지하여 위태롭게 세운 도관(道觀)이 곧 그의 집이자 고향이면서 수행처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사부인 광명존자(光明尊者)와 단둘이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은 <반정도관(半情道觀)>이라는 알쏭달쏭한 이름의 현판을 걸고 있는 도관이었다. 운몽이 몇 번이나 사부에게 도관의 저 이상한 이름에 대하여 물었으나 사부는 오직 희미한 미소 한줄기로 대답했을 뿐이다.
사부는 바위처럼 말이 없었고, 홀로 도를 수행하는 데 매진하느라고 나이를 먹는 것도 잊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반인반선(半人半仙)의 경지에 들었지만 운몽은 그렇지 않았다.
사부가 나이 들고 점점 신선 같아져 갈수록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과 구름과 물을 벗하고, 꽃과 새와 나무와 바위를 말동무 삼아 살아온 지 어느덧 스무 해가 지나서 운몽은 턱 밑에 수염이 거뭇거뭇한 청년이 되었다.
그동안 사부에게서 배운 무공이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스스로는 제가 배운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비교할 상대라고는 사부뿐인데, 사부는 하늘같기만 해서 까마득히 높았고, 가르쳐줄 때마다 늘 부족하다고 꾸짖을 뿐이니 운몽은 제 공부가 미천한 줄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반정도관을 나와 적막한 산중을 배회하며 홀로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그건 오래된 운몽만의 취향이면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의 아픔이고 그리움의 발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운몽이 도관을 나와 멀리까지 산중을 배회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이었다. 남들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운몽에게 그것은 여섯 살 때부터 익숙해져 있는 놀이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때 도관을 나오던 것과, 지금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여섯 살 때에는 순수한 마음 하나였고, 지금은 하나의 상념으로 인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렇다.
세상을 모르고 자랐으니 세상에 가득한 온갖 괴로움을 몰랐기에 늘 평안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자 저절로 한 가지 고통을 알게 되었으니 연정(戀情)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되는 게 아니고, 누가 가린다고 해서 모르게 되는 게 아니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익듯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아니던가.
운몽은 한 여인을 못 견디게 사모하고 있었다.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애타고 괴롭다. 그런 날들이 무려 사 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훨씬 오래전의 일이나, 마음속에 연정이 싹트고, 그래서 스스로 괴로워지기 시작한 게 사 년이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마음속에 연정이라는 것이 날아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하면서 운몽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한시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촌각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반정도관을 빠져나와 이처럼 숲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휴―”
운몽의 탄식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기운이 빠지면서 가슴이 무거운 바윗돌에 눌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숨 쉬기도 괴로워진다.
운몽은 멍하니 주저앉아 아득히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금정이 있고, 그 아래 깊은 숲 속에 그녀가 살고 있다.
‘그녀가 천 리 길에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얼 망설인단 말이냐? 너에게는 용기가 없다. 진정 용기가 있는 사내대장부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의 유황불 속에 있다고 해도 기꺼이 뛰어들어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내 몸을 태우는 고통을 무릅쓰고 구해내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고작 한 길의 돌담 안에 갇혀 있을 뿐인데 이렇게 애만 태우는 건 얼마나 못난 짓이냐.’
자기 자신에 대한 질책을 늘어놓는 동안 운몽의 멍하던 눈에 이글거리는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 가자! 누가 나를 막을 수 있단 말이냐? 설혹 나를 막는다고 해도 누가 그녀에게 향한 내 마음마저 막을 것이냐? 나를 막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나약함일 뿐이다.”
크게 용기를 낸 운몽이 자리에서 벌떡 뛰어 일어났다.
구름 속으로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봉우리를 넘고 깊은 골짜기와 개울을 건너고 울창한 수림을 지나야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번 불타오르는 마음에 사로잡히자 운몽은 그대로 불새가 되었다. 그녀에 대한 불같은 그리움이 그를 맹렬하게 떠민다.
팟!
그의 몸이 허공을 가르고 사라졌다. 순간적인 일이라 그림자마저 남지 않았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한줄기 돌개바람이 불어닥쳐서 풀잎들을 어지럽게 말아 올렸다.
운몽은 그대로 바람이 되었다.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질풍이다. 거침없다.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면 그것을 뛰어넘었고, 벼랑이 막아서면 날랜 원숭이처럼 타넘었으며, 작은 골짜기는 새처럼 훌훌 날아 건너고, 넓은 개울도 제비처럼 물을 차며 건너뛰었다.
그리하여 운대봉(雲臺峰) 높고 큰 산 봉우리를 올라가는데 채 한 시진이 걸리지 않았다.
새라고 해도 그처럼 빠르지 못할 것이고, 원숭이라고 해도 그처럼 끈질기지 못할 것이다. 한 시진 가까이 가파른 산을 뛰고 날며 치달렸지만 운몽은 여전히 그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숨결조차 처음과 다름없이 힘차고 일정하다.
누구나 운대봉 정상에 서면 구름이 저 아래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그 많은 봉우리들 중 멀리 서쪽에 불쑥 솟아 있는 봉우리가 아미산의 제일봉인 금정(金頂)인데, 천 길의 벼랑인 촬신애(撮身崖) 아래로 내려가 스무 개의 능선을 넘고 서른 개의 사찰과 암자를 지나 호욕교(虎浴橋)를 건너면 거기 복호사(伏虎寺)가 있었다.
아미산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찰과 암자들 중에서도 그 역사와 전통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면서, 무림에 여승들의 문파로 잘 알려진 아미파(峨眉派)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이 복호사였다.
운대봉 정상에 뛰어오른 운몽은 그곳에서 한 사람을 보고 크게 놀라 저도 모르게 “억!” 하고 소리쳤다.
<2>
십사 년 전이다.
그러니 운몽이 그녀를 만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여섯 살.
나서부터 산속에서만 살았기에 어린 운몽에게 아미산은 사부 다음으로 가까운 친구이고 사부의 무릎 다음으로 행복한 장소였다.
종아리를 때리며 글을 가르치고 도학(道學)을 강론할 때의 사부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 마주하는 사부는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바위처럼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운몽은 사부가 잠자는 제 머리맡에 찾아와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때로는 볼을 비비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때면 운몽은 행여 사부가 달아날까 봐 눈을 꼭 감고 잠자는 척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아침이 될 때까지 이렇게 제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매번 아침에 눈을 떠보면 저 혼자였다.
운몽은 한 번도 사부가 제 곁을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참고 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날, 운명의 그날, 사부는 오전 공부를 끝내고 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운몽은 사부가 매일 오전 한 시진씩 운기조식을 하며 무아의 경지에 노닌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앉아서도 잠을 자는 신통한 사부로 보일 뿐이었다.
봄날이었다.
따뜻한 봄볕 아래 반정도관의 손바닥만 한 뜰에 턱을 괴고 앉아 무료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운몽은 아름답게 지저귀는 노란 새를 보았다.
그것의 노래가 어찌나 맑고 고왔던지, 온 산에 쩡쩡 울리는 그 노래에 취해서 어린 운몽은 저도 모르게 도관을 나섰다.
산에 있는 나무와 풀과 꽃과 새와 나비······.
작고 예쁜 온갖 동물과 식물이 모두 운몽의 친구였는데, 그 새는 운몽을 낯설어했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새야, 이리 와. 가지 마. 나에게 노래를 들려줘. 나는 반정도관에 사는 운몽이란다. 너는 누구니? 어디에서 왔어? 제발 가지 말라니까.”
어린 운몽은 새가 자꾸만 저를 피해 달아나는 게 안타까웠다.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리면 단념하련만, 노란 새는 운몽의 눈 밖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그곳에서, 마치 운몽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신기해하는 것처럼, 그만큼의 거리만 두고 달아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고 노래하다가 운몽이 팔을 벌리고 다가오면 다시 포로롱, 날아가는 것이다.
운몽의 어린 마음에는 조금만 다가가면 새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새가 제 마음을 알아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자꾸만 반정도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한동안 운몽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애타게 하던 새는 마지막 노래를 맑고 힘차게 불러주더니 학정봉 아래로 단번에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운몽은 새를 포기할 수 없었다. 저 아래, 시커먼 숲을 지나고 골짜기를 지나면 거기 노란 새가 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졌다.
왜 이제 왔느냐고,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심심했는지, 나 혼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느냐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투정을 부릴 것 같았다.
운몽은 그런 저만의 환상에 빠져서 제가 어느새 학정봉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깊은 숲을 지나는 게 무섭지 않았고, 길도 없는 골짜기를 헤쳐 나아가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골짜기, 맑은 물이 콸콸거리며 흘러가는 개울가에 섰을 때 운몽은 비로소 제가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앞에는 여울지며 급하게 흐르는 개울이다. 건널 수가 없다. 돌아가는 길은 잊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려 보아도 방금 제가 어느 수풀에서 나왔던 건지 알아낼 수가 없다.
보이는 수풀이 모두 같았고, 보이는 바위와 나무들이 모두 비슷비슷해서 한 형제들인 것 같았다. 목을 길게 빼보아도 새는 보이지 않았고, 우거진 숲에 가려서 학정봉도 보이지 않았다.
노란 새의 고운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사부님의 기침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량한 바람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쏴, 쏴, 하고 들려올 뿐이다.
운몽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천지간에 오직 저 혼자인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든 것이다.
이제는 보이는 모든 것이 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콸콸거리는 개울물 소리마저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사나운 소리로 들린다.
노란 새는 보이지 않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고, 운몽은 혼자 개울가에 서서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어린 이방인이 되었다.
내 놀이터 같기만 하던 산이, 언제나 내 호령 한마디에 굽실거리던 나무들과 바위와 풀들, 그 모든 것이 죄다 낯설고 두려워졌다.
“사부님!”
소리쳐 불러보지만 개울 건너의 까마득한 벼랑에 부딪쳤다가 되돌아오는 공허한 메아리만 있을 뿐이었다.
무서워졌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릴 만큼 무서웠다.
“와앙―”
운몽은 철푸덕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땀과 먼지로 꾀죄죄해진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니 두 줄기의 자국이 볼에 새겨진다.
어린 마음에도 이제는 영영 사부님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더 커지기만 했다.
“와앙― 사부님―”
그래서 더 목청을 높여 울어보지만 사부님은 대답이 없고, 저를 불러냈던 노란 새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콸콸거리는 개울물소리보다 컸던 울음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낮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배가 고프고 몸이 고단한데 마음에 두려움으로 인한 상처마저 커서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된 것이다.
그때 그 노란 새가 다시 지저귀었다.
“아니, 넌 누군데 이런 데에서 울고 있니?”
짜랑짜랑하고 맑은 음성이다.
운몽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거기, 노란 새는 재색 옷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로 변해서 서 있었다.
목에 염주를 걸었고, 머리를 박박 밀어서 물가의 호박돌처럼 반짝이지만 운몽은 그 사람이 작은 여자라는 걸 금방 알아보았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비구니였던 것이다.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이 햇빛에 반짝이는 작은 여자 비구니가 이 깊은 산속을 혼자 배회하고 있다는 게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운몽은 비로소 누군가를 만났다는 기쁨과 반가움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길을 잃었어.”
훌쩍거리며 간신히 말하자 작은 비구니가 운몽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혀를 찬다.
“쯧쯧, 눈이 퉁퉁 부었잖아. 그리고 이게 뭐니? 이리 와봐.”
꼬질꼬질한 볼을 꼬집고 물가로 데려가더니 씻겨주었다.
깨끗한 수건을 꺼내 잘 닦아주고 난 작은 비구니가 활짝 웃었다.
운몽은 눈이 부셔서 차마 그녀를 마주 볼 수 없었다.
“귀여운 아이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길을 잃었어? 여기는 사람도 안 다니는 험한 곳인데, 산짐승이라도 만났으면 어쩔 뻔했니?”
“노란 새를 만났어.”
“노란 새?”
“응. 그 새를 따라왔는데, 나를 여기에다 내버려 두고 혼자서 날아가 버렸어.”
“풋.”
운몽의 천연덕스런 말에 작은 비구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몇 살이니? 너, 정말 귀엽게 생겼다. 아기 보살 같아.”
“여섯 살. 너는?”
“나는 열 살이야. 그러니 너라고 부르면 안 돼.”
“그럼 누나라고 할까?”
잠시 생각하던 작은 비구니가 머리를 흔들었다.
“음, 그것도 곤란하겠다.”
“왜?”
“나는 구족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으니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은 거잖아. 그러니 동생을 두면 안 되지.”
“왜?”
“구족계를 받았다니까.”
“왜?”
“에휴.”
운몽은 정말 몰라서 자꾸 왜? 라고 하는 건데 작은 비구니에게 그런 꼬마를 이해시킬 만한 말주변이 있을 리 없었다.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그런데 어디에 사니?”
“반정도관.”
“반정도관?”
작은 비구니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산에 그런 곳도 있었나? 나는 어째서 전혀 듣지 못했을까?”
중얼거리더니 깜짝 놀라서 운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도관에 살다니, 그럼 너는 꼬마 도사였니?”
“사부님이 도사인데, 나는 도사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그래?”
작은 비구니가 다시 머리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그럼 그 반정도관은 어디에 있어?”
“풍소애(風召崖) 위에 있지. 그것도 몰라?”
“풍소애?”
그 또한 작은 비구니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어리둥절했다.
“요 꼬마 동자가 나를 놀리는구나? 어째서 한 번에 말하지 않고 자꾸 묻게 만드는 거야? 좋아, 그럼 그 풍소애는 어디에 있어?”
“학정봉 남쪽에 있지. 그런데 너는 정말 모르는구나? 왜 모를까?”
이번에는 운몽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의 말을 들은 작은 비구니가 깜짝 놀랐다.
“너는 학정봉에 살고 있어? 거기에서 여기까지 온 거야? 혼자서?”
“응.”
잠시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던 작은 비구니가 등을 돌리고 앉았다.
“업혀, 내가 데려다 줄게.”
“헤―”
운몽은 얼른 작은 비구니의 등에 매달렸다. 그녀가 운몽을 가뿐히 업고 일어섰다.
한참을 그렇게 숲을 헤치며 나아갔는데, 운몽이 아무리 작은 꼬마라 해도 비구니 또한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니 힘들 것이다.
“무겁지 않아? 힘들면 내가 걸어갈게.”
“괜찮아. 하나도 안 무거워.”
“왜?”
“또 왜 소리를 하기 시작했구나.”
작은 비구니가 호호, 웃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사부님에게서 무공을 배웠거든. 너 같은 꼬마는 하루 종일이라도 업고 다닐 수 있단다.”
“왜?”
“무공을 배웠다고 했잖아.”
“무공을 배우면 힘이 세지는 거야?”
“힘이 세지고 몸이 가벼워지니 담력도 커지지. 그래서 나는 혼자 산속을 돌아다녀도 무섭지 않단다. 물론 너처럼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지.”
“응.”
저를 놀리는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하지만 운몽의 마음속에는 저도 무공이라는 걸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을 배우면 노란 새도 잡을 수 있을까?”
“새는 잡아서 뭐 하게?”
“예쁘거든. 아주 고운 목소리로 노래도 해.”
“그런 새는 누가 저를 잡는 걸 싫어할 거야. 예쁜 건 그저 눈으로 보고, 고운 노래는 귀로 들어야 할 뿐이지. 그걸 잡으려고 하면 새를 괴롭게 하고 너도 괴로워져.”
작은 비구니의 말속에는 장차 그들의 운명을 예언하는 오묘한 뜻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말을 한 작은 비구니는 물론 운몽도 그 의미를 까맣게 몰랐다.
“왜?”
“나중에 너도 알게 될 거야.”
운몽의 ‘왜?’ 하는 소리가 귀찮아졌는지 작은 비구니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운몽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왜 머리카락이 없어?”
“구족계를 받았다니까 그러네.”
“왜?”
“장차 불도를 깊이 닦아서 번뇌를 벗고 해탈하려고 그러는 거지.”
“머리카락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번뇌는 머리카락만큼 많단다. 그걸 다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속세를 등지고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는 거야. 번뇌가 없어야 해탈하게 되거든.”
“그럼 너는 작은 여자 중이로나?”
“나는 너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자꾸 너라고 할래?”
“그럼 뭐라고 불러? 누나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잖아.”
“음, 그냥 운지(雲智) 스님이라고 불러라.”
“운지? 그게 이름이야? 무슨 이름이 그래?”
“구족계를 받았으므로 법명을 갖게 된 거야. 그러는 너는 이름이 뭐니?”
“운몽.”
“운몽?”
어리둥절하던 운지가 까르르 웃었다.
“너야말로 무슨 이름이 그러니? 네 이름이 더 이상하다. 구름속의 꿈이라니? 그럼 너는 매일 꿈만 꾸다가 말겠네? 호호호호.”
놀림을 당하자 운몽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뻗대었다. 운지를 힘들게 하려는 건데 그걸 안 운지가 ‘요 녀석’ 하더니 엉덩이를 꼬집었다.
“항복, 항복.”
<3>
운몽은 어느새 운지의 등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노란 작은 새를 다시 만났고, 그 고운 노래를 실컷 듣는지 벙긋벙긋 웃는다.
노란 작은 새가 더 이상 달아나지 않고 품에 안겨 재재거리는 꿈인지도 모른다.
“얘, 얘. 이제 그만 일어나.”
운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뜬 운몽은 제가 어느덧 학정봉 아래의 오솔길에 와 있다는 걸 알았다.
“저 위가 학정봉이야. 여기서부터는 너 혼자서 찾아갈 수 있지?”
“응.”
“그럼 이제 그만 헤어지자. 나는 더 갈 수 없어.”
운지가 운몽을 내려놓았다. 서운해하는 얼굴이다.
운몽이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운지를 보고 오솔길을 보다가 물었다.
“왜?”
“사부님의 명이 있었거든. 누구도 학정봉에 이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안 돼.”
“왜?”
“아이, 참. 너는 그 소리밖에 모르니? 사부님의 명령이라고 했잖아.”
“알았어. 귀찮아서 그러는구나? 흥.”
운몽이 토라졌지만 운지는 한숨만 쉴 뿐 그를 달래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럼 조심해서 올라가. 다시는 함부로 혼자서 멀리까지 나오지 말고.”
앙증맞은 손을 모아 합장해 보이고는 돌아선다. 그런 운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몽이 소리쳐 물었다.
“작은 여자 중아. 너는 어디에 살아?”
운지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저 멀리를 가리켰다.
“저기.”
“저기 어디?”
“복호사(伏虎寺)에 산단다. 잘 있어.”
그녀의 작은 모습이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운몽은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서 운지가 사라진 곳을 보고 또 보았다.
터벅터벅 도관으로 돌아온 운몽은 사부님께 꾸중 들을 것이 큰 걱정이었다. 그러나 마당을 쓸고 있던 광명존자는 ‘왔느냐?’ 그 한마디를 했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늘 그런 사부지만 운몽의 마음속에 그때만큼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사부가 물어보면 운지를 만났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그때의 따뜻했던 감정을 떠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부는 말이 없고, 쫑알거리기 좋아하던 꼬마 제자도 말이 없어졌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보냈는데, 운몽의 가슴속에는 운지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져만 갔다.
여섯 살 꼬마에게 그것은 모성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었다. 운지의 등에 업혔을 때의 따뜻함과 부드러운 느낌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기에 더욱 간절해진다.
사부의 눈치를 보면서 닷새를 보낸 어느 날, 운몽이 불쑥 사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롱불을 밝히고 책을 읽던 사부가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아직 자지 않았느냐?”
“사부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응?”
“복호사가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왜?”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지요?”
“왜?”
“아이, 참. 사부님은 맨날 왜? 그 소리밖에 몰라.”
“흘흘, 이 녀석아, 네가 묻는 뜻을 알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냥 가르쳐 주시면 돼요. 어떻게 가야 하지요?”
“왜?”
“아이, 참.”
운몽이 발을 구르며 짜증을 내자 광명존자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복호사라는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느냐?”
“여자 중한테서요.”
“여자 중?”
“나보다 쬐끔 큰 여자 중인데 복호사에 산대요.”
“어디서 들었느냐?”
“저 아래 개울가에서요.”
“거기는 왜 갔던고?”
“아이, 참. 나는 한 가지만 물었는데 사부님은 대체 몇 가지나 물으시는 거예요?”
“복호사는 여기서 멀다. 그런데 왜? 찾아가려고?”
“예.”
“흘흘―”
당돌한 운몽의 대답에 광명존자가 다시 웃었다.
“이 녀석아, 두 개의 높은 산봉우리를 넘고 세 개의 골짜기와 다섯 개의 크고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네까짓 꼬마 녀석이 어떻게 가?”
“그렇게나 멀어요?”
운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멀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사부의 말을 듣고 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는 왜 가려고? 그 작은 여자 중을 만나려고 그러느냐?”
“몰라요!”
사부의 웃음과 눈길에 부끄러워진 운몽이 발끈 화를 내고는 우당탕거리며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광명존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회한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멍하니 등잔 심지를 바라보던 존자가 길게 탄식하고 책을 덮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운몽은 타박타박 도관을 나섰다.
“어디를 가는 게냐?”
난간에 기대서 발아래 운무 자욱한 골짜기를 내려다보던 광명존자가 묻자 운몽이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금방 다녀올게요.”
“흘흘, 금방이란 말이지?”
운몽은 씩씩하게 도관을 떠났고, 광명존자는 말리지도, 격려해 주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는 저를 부르는 노란 새도 없으련만, 운몽은 자박자박 산길을 걸어 끊임없이 나아갔다. 우거진 수풀을 지나는 일도 겁내지 않았고, 깊고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다.
자박자박―
작은 아이의 더 작은 발이 작은 소리를 내고 있는 산중에는 깊은 적막이 충만했다.
아미산에는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기로 이름 높았다. 늑대도 있고 곰도 있다. 그러나 운몽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작은 여자 중, 운지를 찾아간다는 것만 머릿속에 가득하고, 빨리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초조함만 가슴속에 가득할 뿐이다.
부스럭.
음산하고 비린 바람이 불어가더니 숲이 우는소리를 냈다.
불쑥,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자박거리며 다가오는 운몽을 바라본다. 아쉬운 대로 한 끼 저녁거리가 될 거라고 여기리라.
놈이 잔뜩 몸을 웅크리고 털을 눕혔다. 바야흐로 한 번 훌쩍 뛰어서 운몽의 머리통을 물어뜯을 작정인 것이다. 단번에 물어 죽이지 않고 한참을 이리저리 굴리고 던지며 희롱하다가 꽉 물어버릴 게 틀림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운몽은 입술을 잘근 깨문 야무진 얼굴로 앞만 바라보며 자박자박, 인적 없는 산중을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호랑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뒷다리에 불끈 힘을 준 순간.
크앙!
놈이 불에 덴 것처럼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무려 두 길이나 튕겨진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으악!”
운몽이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런 아이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은 호랑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린다.
운몽은 어리둥절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저 뒤에 저보다 더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 또 있었던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타당한 추측을 할 뿐이었다.
더 부지런히, 호랑이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더 빠르게 자박거린다.
늑대들이 군침을 흘리며 튀어나왔다가 기겁을 하고 놀라 달아났고, 곰이 불쑥 일어섰다가 마찬가지로 불침을 맞고 놀란 것처럼 허둥지둥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운몽은 저것들이 죄다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갸웃거리다 키득키득 웃었다.
그 뒤로도 꼬마 아이는 여러 차례 더 복호사를 찾아갔었는데, 그때마다 호랑이와 늑대와 곰들은 매번 아이를 노렸고, 매번 놀라서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이제 맹수들은 멀리서 운몽의 모습이 보이고, 자박거리는 발소리만 들려도 지레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는 지경이 되었다.
운몽은 그것이 제 사부가 몰래 지켜준 것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자 깜깜한 밤이 되었다.
사부가 가르쳐 준 대로 세 개의 골짜기와 다섯 개의 개울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중들에게 물어 복호사에 무사히 다다랐다.
그때 운몽은 지칠 대로 지쳐 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 작은 아이가 종일을 쉬지 않고 걸어서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고 세 개의 골짜기와 다섯 개의 개울을 건너왔다는 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건 운몽이 특별한 아이라는 증거가 된다.
험한 학정봉에서 이때까지 살아온 산 꼬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세간의 어떤 아이도 흉내 내지 못할 끈기와 체력과 인내심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복호사의 굳게 닫힌 문 앞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두드릴 기력도 없이 탈진했다.
커다란 황동의 문고리를 쥐었다가 그만 스르륵 무너져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깊이 잠들어 버린다.
“어머나, 이게 웬 아이람?”
이웃의 암자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여승 한 명이 그런 운몽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큰일 났네. 이렇게 잠들면 입이 비뚤어질 텐데, 어린아이가 그 모양이 되면 얼마나 보기 흉할까? 어디 보자. 에그, 예쁘게도 생긴 사내아이로구나.”
여승이 복덩이를 주웠다는 듯 소중하게 운몽을 안아 들었다.
제2장 아미산(峨眉山)의 연정(戀情)
<1>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소정 사태(素情師太)의 자애로운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 앞에서 운영(雲暎) 비구니는 어쩔 줄 모르고 진땀만 흘린다.
그녀는 소정 사태가 거둔 다섯 명의 내제자들 중 둘째 제자인데, 다정다감하고 심성이 온후했으나 덜렁거리는 성품 때문에 종종 혼나곤 했다.
소정 사태는 복호사의 주지이면서, 아미파의 원로이자, 비구니들의 큰 사부이기도 하다. 자애로운 비구니의 한마디에 아미산이 들썩일 만큼 위세가 높은 것이다.
강호에서의 명성 또한 하늘을 찌를 듯해서, 누구나 아미파에는 소정(素情)과 소화(素華), 소령(素翎)이 있다고 말한다.
삼소(三素)의 노비구니들이 직계와 방계, 속가의 삼천 젊은 제자들을 합친 것보다 뛰어나다는 말로 그들 아미파의 세 명 노비구니에 대한 찬사를 했다.
배분으로는 육십을 넘긴 소정 사태가 가장 높았으나 장문 직은 둘째인 소화 사태가 맡아 금전(金殿)에 머물렀고, 셋째인 소령 사태는 아미금정(峨眉金頂)을 올려다보는 순양봉(純陽峰) 기슭의 뇌음사(雷音寺)에서 칩거했다.
강호에서는 그들 세 명의 아미파 노사태를 두고 평하기를, ‘소정 사태의 공력이 그중 깊고, 소화 사태는 아미의 진전을 가장 충실히 물려받았으며, 날카롭고 기묘하기는 소령 사태가 제일이다’라고 했다.
그밖에 넷째인 소양(素楊)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일하게 속가제자로서 진산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 자(素字) 항렬을 받았다. 게다가 사대고수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므로 강호에서는 그 일을 두고 아미파의 이변이라고까지 수군댔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삼십 년이 넘도록 소양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미파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므로 강호의 인사들은 저마다 멋대로 추측을 했다.
수많은 소문들 중 가장 신빙성이 가는 것은 그녀가 병에 걸려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삼십 년의 세월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아미파에 소양이라는 막내 제자가 있었고, 그 무공이 위에 있는 세 언니를 무색케 할 만큼 높았다는 걸 모두 지워 버렸다.
아미파에서는 여태까지도 소양의 일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다.
현재 아미파 최고의 배분이 된 소정 사태는 오래전부터 강호에서 존경을 받았던 인후한 비구니였다.
하지만 그런 소정 사태의 안색이 굳어졌으니 크나큰 벌이 떨어질 것이다.
사부가 노여워하는 기색이니 운영 비구니는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얼굴마저 창백해져서 몸을 떨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서는 여전히 작은 꼬마 운몽이 새근새근 숨을 쉬며 곤히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운영 비구니는 사부의 명을 받고 이웃에 있는 만년암(萬年庵)에 다녀온 길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산문 앞에서 주웠다며 어린 꼬마 아이를 안고 와서 좋아했던 것이다.
자랑스럽게 제 사부의 정실까지 안고 들어와 얼마나 귀여운 사내아이냐고 호들갑을 떨다가 벼락을 맞은 셈이다.
“어쩌자고 덥석 안고 들어온 것이냐? 그것도 사내아이 아니더냐? 네가 키울 작정이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소정 사태가 다시 안색을 온화하게 하고 물었다.
전전긍긍하던 운영 비구니는 운몽을 밀쳐놓고 납작 엎드렸다.
“제자가 아둔해서 또다시 사부님을 노엽게 했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너는 천성이 순박하고 정이 많으며 착해서 좋은데 경솔한 게 흠이다. 그것만 고친다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이곳은 청정한 곳이다. 외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해져 있고, 더구나 사내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
“예, 예.”
“그것이 아무리 철부지 어린 꼬마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어.”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깊은 밤중에 다시 내칠 수는 없는 일. 오늘 밤은 내 정실에서 재우겠다. 네가 내일 아침 일찍 산 아래까지 데려다 주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운영 비구니가 절하고 물러났다.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염불을 하던 소정 사태가 슬며시 운몽을 돌아보았다.
꼬마 아이는 보료 위에 누워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근엄한 소정 사태의 노안에도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어 있는 운몽은 일찌감치 눈을 떴다.
어리둥절해한다.
제 생각에는 반정도관의 제 방 안이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젯밤 제가 기어이 복호사에 찾아왔고, 산문 앞에서 쓰러졌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아!”
운몽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저쪽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노비구니가 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구세요?”
“······.”
엉뚱한 첫 마디에 소정 사태마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는 너는 누구인고?”
“저는 운몽이라고 해요.”
“나는 소정이라고 하느니라.”
노사태의 복장과 머리를 본 운몽이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 중이로군요?”
“스님이라고 해야지. 아니면 사태라고 하거나.”
“왜요?”
“다들 그렇게 부르느니라. 중이라는 건 별로 좋은 호칭이 아니야.”
“왜요?”
“누가 너를 이놈아,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안 좋겠지?”
“왜요?”
운몽은 소정 사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정도관에서 사부님은 언제나 ‘이놈아’ 또는 ‘이 녀석’, ‘고얀 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게 귀에 익숙해져서 당연한 걸로 여기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니 의아하다.
소정 사태는 어린 운몽이 꼬박꼬박 왜요? 라고 되묻는 게 이상했다.
“너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른단 말이냐?”
“다른 말도 많이 알아요.”
“그럼 대답해 보아라. 대체 그 깊은 밤중에 이곳에는 무엇 하러 왔던고?”
“아, 여기가 복호사 맞지요? 그렇죠?”
“그렇다.”
“잘됐다, 잘됐어. 그것 봐, 나는 할 수 있다니까?”
“뭐가 말이냐?”
“사부님은 멀어서 절대로 갈 수 없을 거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나는 왔어요.”
“그러니까 왜 왔느냐?”
“작은 여자 중을 보려고요.”
“응?”
소정 사태에게는 뜻밖의 말이었다.
이 녀석이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얼굴로 운몽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너는 어디에 사느냐? 부모님께서 걱정하며 찾고 있지 않겠어?”
“부모님은 없어요.”
“응?”
소정 사태는 또 한 번 놀랐다.
“누구인지도 모르는걸요?”
“그럼 여태까지 어떻게 살았어? 누가 너를 돌보아준단 말이냐?”
“사부님이요.”
“맞아. 조금 전에 사부님이라고 했었지. 그래, 네 사부는 어디에 사는 누구신고?”
“반정도관에 사시는 분인데, 광명존자라고 하세요.”
“무엇이? 반정도관? 광명존자?”
소정 사태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크게 놀란 노사태는 들고 있던 불진을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운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다.
“그럼 너는 정말 학정봉의 반정도관에서 살고 있단 말이냐? 네 사부님의 존호가 정말 광명존자이시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그곳이 학정봉의 풍소애에 있다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으음―”
소정 사태가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문밖에서 운영 비구니의 조심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어젯밤에 명하신 대로 그 아이를 산 아래까지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잠시 운몽을 바라보던 소정 사태가 낮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그럴 것 없다.”
“예?”
“조회 준비나 하여라.”
“예.”
운영 비구니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러났다.
소정 사태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수양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은은한 노여움과 두려움, 회한을 떠올리고 있었다.
운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묻는다.
“그래, 너는 누구를 찾아왔다고?”
“작은 여자 중이요.”
여전히 중이라고 부른다. 소정 사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법명이 무엇이던고?”
“운지라고 하던데요?”
“운지······.”
소정 사태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자신이 몇 년 전에 받아들인 막내 제자였기 때문이다. 손수 삭발을 해주고 구족계를 내려주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운지가 내 품에 들어온 것도 이 아이만 했을 때였구나.’
운몽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 아이를 어찌 아느냐? 학정봉과 이곳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좀체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그게 말이죠······ 제가 노란 작은 새를 보았거든요? 그런데 노란 새가 달아났어요. 저는 길을 잃어버리고 울었는데, 어라? 노란 작은 새가 작은 여자 중이 되어서 돌아왔네요? 그래서 만났어요. 저를 업어주고 길도 찾아주었어요.”
“무슨 소리냐?”
운몽의 말은 요령부득이었다. 소정 사태가 어리둥절해하다가 빙긋 웃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것이다. 통통한 볼이며, 나불거리는 붉은 입술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소정 사태는 나이를 잊고 문득 이 작은 꼬마 아이를 골려주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너는 헛걸음을 했구나.”
“왜요?”
“그 작은 여자 중은 다시 작은 노란 새가 되어버렸거든. 조금 전에 문 앞에서 노래하고는 호르르 날아가 버리더라. 에그, 너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니 보지 못했지.”
“아!”
운몽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재미있고 사랑스러운지 소정 사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소정 사태의 말속에 장차 운몽이 맞아야 할 사랑의 시련이 예고되어 있었지만, 그건 소정 사태도 운몽도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운몽이 울 듯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럼, 정말이고말고.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작은 노란 새 대신 커다란 검은 새를 잡아줄 수는 있다. 다시는 네게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발목에 노끈을 묶어줄 수도 있어. 어떠냐? 그런 새를 대신 잡아줄까?”
운몽이 상심한 얼굴을 하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그 커다란 검은 새는 커다란 여자 중이 되겠네요?”
“그렇겠지? 하지만 커다란 여자 중이라면 너를 더 잘 업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
“쳇, 싫어요. 커다란 여자 중은 예쁘지 않아요.”
“왜?”
“커다라니까요.”
“커다랗다고 다 예쁘지 않은 건 아니다.”
“쳇, 할머니 중도 커다랗잖아요. 하지만 예쁘지는 않아요.”
“뭐라고?”
소정 사태가 짐짓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지만 입가에는 재미있어하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정 사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인지 모른다.
운몽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노사태의 근엄하던 마음에 한 가닥 훈훈한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2>
“작은 여자 중아!”
소정 사태의 손을 잡고 대웅전 앞에 나온 운몽이 갑자기 소리쳤다.
뜰 아래 가득 늘어서 있던 백여 명의 비구니들이 모두 놀라고 어리둥절해서 사부를 보고 작은 꼬마 아이를 본다.
나이 지긋한 비구니들은 물론이고 중년의 비구니들과 젊은 비구니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주지이면서 아미파의 원로이고 대사부이기도 한 소정 사태가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서서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으니 그렇다.
언제나, 특히 조회 시간에는 더욱 근엄하던 노사태이기에 놀람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왼쪽에 다섯 명의 비구니가 따로 늘어서 있었는데, 소정 사태의 내제자들이다. 그 맨 끝에 작은 여자 중, 운지가 서 있었다.
운몽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바라본 운지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아!’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던지 제 눈을 마구 비벼댄다.
소정 사태의 손을 뿌리친 운몽이 쿵쾅거리며 함부로 대웅전의 높은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저런, 저런······.”
노사태가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급히 거두었다. 아이가 저러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지만 경솔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쿵쾅거리며 마구 계단을 뛰어내려 간 운몽이 비구니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 운지의 가슴으로 폴짝 뛰어 매달렸다.
“작은 여자 중아, 너를 보려고 밤새 왔어. 어때? 반갑지?”
운지의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려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운지는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부의 눈길이 따갑게 느껴지고, 일제히 바라보는 동문 사형들의 눈길에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운몽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오직 운지를 다시 만났다는 것 하나로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좋아한다.
“히히, 좋다, 좋아. 이 냄새도 좋고 따뜻한 가슴도 좋아. 히히, 작은 여자 중아, 나는 네가 좋아. 정말이다.”
“저리 비키지 못해? 어서 떨어져.”
운지가 운몽의 엉덩이를 꼬집으며 꾸짖지만 운몽은 막무가내였다. 더욱 목에 매달리니 운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운지가 얼굴을 붉히고 운몽의 볼을 꼬집었다.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고, 부끄러움이라는 걸 아는 나이였지만 운몽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제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일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운지가 볼을 꼬집든 볼기를 때리든 머리를 쥐어박든 상관없이 그저 좋기만 했다.
그렇게 그날 아침의 엄숙해야 할 조회는 운몽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다시는 오지 마.”
“왜?”
“너 땜에 창피해 죽겠어.”
“왜?”
“자꾸 왜? 왜? 소리 할래? 그것도 아주 듣기 싫어. 짜증나.”
“왜?”
“너!”
“히히, 알았어. 오지 않을게. 대신 네가 반정도관으로 와야 해.”
“흥, 내가 왜?”
“우리는 서로 닮았잖아.”
“뭐라고?”
“내가 왜? 한다고 밉다면서 너도 왜? 그러잖아. 그러니까 닮은 거야.”
“말도 안 돼.”
타박하고 흥, 흥, 거리면서도 운지는 꼭 쥐고 있는 운몽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열 살 난 비구니와 여섯 살 난 작은 꼬마가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복호사 안을 돌아다녔다.
운지는 운몽에게 제가 사는 곳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고, 운몽은 그저 운지가 가니까 따라갈 뿐이다. 어린 마음에도 그녀가 가자고 하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갈 작정이 되어 있었다.
마주치는 비구니들마다 그런 운지를 보고 운몽을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어머나, 정말 귀여운 동자님이네.”
달려들어 운몽의 볼을 쓰다듬거나 머리를 쓸어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더러는 번쩍 안아 들고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운지는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안절부절못했고, 운몽은 히히, 웃으며 좋아했다. 운지가 눈을 흘기지만 못 본 척한다.
그렇게 복호사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동안 한나절이 지나갔다. 마주치는 비구니들마다 하나같이 예쁘다며 안아주니 운몽에게는 이곳이 제가 사는 반정도관보다 백배는 더 좋아졌다. 게다가 운지가 있지 않은가.
늘 바윗덩이처럼 묵직하고 말이 없는 사부보다 방긋방긋 웃어주는 비구니들이 천 배는 더 예뻐 보인다.
“다시는 오지 마. 장난 아니다?”
운지가 거듭 다그치는 데에는 사형들이 모두 운몽을 만지고 안아주는 게 내심 못마땅했기 때문이고, 운몽이 그때마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게 미워서였다.
하지만 그런 운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운몽은 두리번거리며 어디에 또 예쁜 비구니가 없나 찾을 뿐이다. 입으로는 응, 응, 하고 대답하지만 눈은 다른 데에 가 있다.
“알았어. 네가 오면 내가 안 오지 뭐.”
“나는 안 가. 그러니 너도 오지 마.”
“응, 응. 그러지 뭐. 딱 한 번만 더 오고.”
“요 꼬마가 정말?”
“응, 응. 알았어.”
그날 밤도 운몽은 소정 사태의 정실에서 보료를 깔고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소정 사태가 운지를 불러서 말했다.
“네가 이 아이를 불러들였으니 네가 돌려보내야겠다.”
“예.”
“학정봉 아래까지 데려다 주고 오거라.”
“예.”
대답하는 운지의 얼굴이 곧 울 듯했다.
사부의 명이 지엄한지라 아무 소리 못하지만 학정봉까지 다녀오려면 제 걸음으로도 하루가 꼬박 걸릴 일인데, 운몽의 걸음을 따라가야 하니 이틀 길이다. 그게 싫으면 운몽을 업고 가야 하는데 그것 또한 힘들 것이다.
작은 운지에게 사부의 명령은 너무 가혹한 것일 수 있었다.
소정 사태가 이번에는 운몽에게 말했다.
“학정봉에서 이곳까지는 너무 멀고 위험하며 힘든 길이다. 어린 너에게는 더욱 그렇겠지. 다시는 오면 안 된다.”
“왜요?”
“다른 말은 필요없다. 오지 말라면 오지 않는 게야.”
“······.”
운몽이 시무룩한 얼굴을 푹 숙였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소정 사태의 근엄한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운몽이 아무 말 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소정 사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안녕히 계시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운몽은 제 불만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더니 소정 사태의 정실을 자박자박 걸어나간다.
“얘, 같이 가야지.”
당황한 운지가 부르고 서둘러 일어섰다.
“필요없어.”
운몽이 쌀쌀맞게 말했다.
“혼자 왔으니 혼자 갈 거야. 너 작은 여자 중은 오지 않아도 돼.”
“뭐라고?”
운지가 기막혀 하고, 소정 사태도 의아해져서 운몽을 바라본다. 운몽이 야무진 얼굴을 하고 다시 말했는데, 조금도 장난기가 없었다.
“나는 어차피 학정봉으로 가야 하지만 너는 이곳까지 다시 돌아와야 하니 나보다 배는 더 고달프겠지?”
“······.”
“혼자 왔으니 혼자서 갈 수 있어. 둘이 가도 다리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괜히 너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 나는 부지런히 갈 테야.”
그리고 물끄러미 운지를 바라보는데,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눈빛이 애절했다.
소정 사태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과 함께 어린것에 대한 연민이 샘솟듯 솟았다.
‘얼마나 대견한 아이인가. 얼마나 훌륭한 생각인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마음인가.’
당장이라도 운몽을 끌어안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가기도 했다.
‘작은 아이의 마음과 생각이 벌써부터 저와 같으니 장차 또 하나의 불행을 가져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아, 아미파가 도대체 그와 전생에 무슨 악연을 맺었기에 이와 같이 오래도록 나쁜 인연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미타불······.’
소정 사태의 엄숙한 마음속에는 한 사람의 관옥 같은 얼굴과, 그와 얽혔던 많은 일들이 한순간에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 오랜 수양에도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잠시 격동했던 노사태가 길게 탄식하고 손을 저었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말거라.”
악연을 쫓듯이, 자신의 나쁜 기억을 쫓듯이, 속세의 애증을 쫓아내듯이 손사래를 친다.
지그시 운지를 바라보던 운몽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돌아섰다.
그의 작은 등을 멍하니 보고 있는 운지의 눈가에 조금씩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3>
겨울이 되었다. 찬바람이 씽씽 불고 눈이 온 산을 뒤덮었다.
운몽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반정도관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중에 불쑥 말했다.
“사부님, 나도 무공이라는 걸 배우고 싶어요.”
광명존자는 의아해했다.
“왜?”
“무공을 배우면 힘이 세지고 몸이 가벼워진다던데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왜?”
“그러면 혼자서 멀리까지 갈 수도 있잖아요. 지금처럼 눈이 가득 왔어도 갈 수 있고요.”
“왜?”
“아이, 참. 사부님은 언제나 그 소리만 해.”
운몽이 발을 비비며 짜증을 내자 광명존자가 빙그레 웃었다.
“요 고약한 녀석아, 솔직히 말해라. 복호사가 그리 좋더냐?”
“어? 아셨어요?”
“복호사의 무엇이 그리도 좋더냐?”
“히― 거기에 가면 작은 여자 중이 있거든요.”
“작은 여자 중?”
“운지라고 하는데, 만나면 내 엉덩이를 꼬집고 머리를 쥐어박아요. 못됐어요.”
“그럼 안 보면 되겠구나.”
“히― 그래도 예쁘거든요.”
“쯧쯧······ 요 쥐방울만 한 녀석이 장차 무엇이 되려고 이럴꼬······.”
광명존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째려보지만 운몽의 눈길은 어느덧 몽롱해져 있었다. 먼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서 히죽히죽 웃는다.
‘인연이라는 것이 이토록 질기고 고약한 것이로구나. 그러기에 불도에 매진하는 중들이 죄다 인연 끊는 걸 최대의 목표로 삼고 정진하는 거겠지. 아, 오고 가는 바람을 뉘라서 막을 것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뉘라서 멈추게 할 것이냐. 불어가다 제 스스로 소멸되고, 흘러가다 바다에 이르러 사라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정법인지도 모르지.’
광명존자는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란 역시 억지로 이래라저래라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광명존자가 그런 자신의 생각은 묻어두고,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그러잖아도 이제부터는 공부 외에 무공이라는 것도 가르쳐 줄 생각이었는데 너에게 이미 그런 마음이 들었다니 잘되었다.”
“어라? 사부님도 무공을 할 줄 아세요?”
운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사부는 늘 잠만 자고 글만 읽고 쓸 줄 안다고 여겼는데,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니 놀란 것이다.
“그럼 너는 왜 나에게 무공을 배우겠다고 했느냐?”
“다른 곳에서라도 배우고 싶다는 거였어요.”
“왜?”
“사부님은 무공을 가르쳐 줄 수 없을 테니까요.”
“왜?”
“아이, 참. 그만 해요.”
“이 조그만 개구쟁이 녀석아. 너는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느냐? 사부를 놔두고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공을 배우려고 생각했던 거냐?”
“복호사에서요.”
“응?”
운몽의 말이 의외인 듯 광명존자가 흰 눈썹을 꿈틀거렸다.
“복호사에 가면 무공이라는 걸 배울 수 있어요. 작은 여자 중도 거기서 배우고 있는걸요?”
“그만두어라. 다시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광명존자가 근엄한 얼굴로 꾸짖듯 말했으므로 운몽은 ‘왜?’라고 물을 수 없었다. 사부가 저런 얼굴을 할 때는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해야 혼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마.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무공을 배울 때는 조금도 한눈을 팔거나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 된다. 잠잘 때도 무공을 생각하고 꿈속에서도 수련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럴 수 있겠느냐?”
“자면서 어떻게 수련을 해요?”
“하겠느냐, 말겠느냐?”
“알았어요. 할게요.”
그렇게 해서 다음날부터 운몽은 사부로부터 무공이라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그건 매우 재미없고 지루하며 따분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사부가 그에게 전해준 건 몇 마디의 알쏭달쏭한 구결이었는데, 그게 무공의 기초가 되면서 근본이 되는 것이기도 한 내공심법(內功心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명존자는 어린 운몽에게 자신의 내공심법 중 기초가 되는 것을 전해주고 열심히 그것을 수련하도록 했다.
그 수련이라는 게 신나게 뛰거나 뒹구는 것이었다면 운몽은 역시 무공은 재미난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광명존자가 그에게 시킨 일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 구결에 따라 기운을 기르는 일이었다.
해 뜨기 직전에 앉아 한 시진 동안이나 꼼짝하지 못했고, 사시(巳時)가 되면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 시진 동안 있어야 했다. 술시(戌時)에도 그렇게 한 시진을 앉아 있은 다음에야 사부의 허락을 받고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글공부를 하고 청소며 사부 시중을 들어야 했으니 운몽에게는 눈코 뜰 새 없는 날들이었다.
“쳇, 이렇게 눈 감고 앉아만 있는 게 무슨 무공이야? 이래서야 어디 노란 새를 잡을 수 있겠어?”
쉴 새 없이 투덜댔지만 사부의 가르침이 워낙 엄격했고, 어린 마음에도 오기라는 게 생겼으므로 운몽은 미련한 곰처럼 졸음을 꾹꾹 참으며 심법을 운기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
벌써부터 발바닥이 근질거렸지만 운몽은 용케도 참고 있었다.
무공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면서 사부의 눈초리가 그전과는 달리 매서워졌고, 한시도 운몽에게서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으니 꼼짝할 수 없는 탓이기도 하다.
작은 노란 새도 찾아오지 않는다.
아직도 그때 보았던 그 고운 모습과, 그때 들었던 그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작은 새는 어디 먼 곳으로 영영 가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산중에 여름이 오더니 붉은 단풍이 가득해졌다. 그러더니 곧 하얀 눈이 온 산을 뒤덮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이 오고, 새 봄이 문을 열 때까지 운몽은 반정도관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사부의 엄명이 있기도 했지만, 저도 운지처럼 힘이 세지고 몸이 가벼워지기 전까지는 도관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결심했던 것이다.
한번 놀란 기억 때문이기도 했고, 운지에게 저를 자랑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곧 그 작은 여자 중에 대한 애정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지만, 정작 작은 꼬마 아이는 아직 그런 것까지 생각할 만큼 여물지는 못했다.
다만,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무언가 저를 돋보이게 하고 우쭐댈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적어도 그녀만큼 힘이 세지고 몸이 가벼워져서 혼자 아무 두려움 없이 산길을 다닐 수 있게 되어야 그녀 앞에서 우쭐댈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 일념으로 운몽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운지에 대하여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또 참았다.
그가 한 번 본 운지에 대해서 그토록 집착하는 건 그녀를 만났던 상황이 워낙 잊을 수 없는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지쳐 갈 때 노란 새처럼 갑자기 찾아왔던 사람 아닌가.
그것도 제 또래의 소녀였다.
그 인상이 운몽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자리 잡았다. 산중에서 늘 사부의 얼굴만 보고 살았을 뿐이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나이에 제 자신을 억제할 만큼 지독하다는 건 운몽이 여간내기 꼬마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일 년이 지났을 때, 광명존자는 운몽에게 한층 높은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는 한편, 비로소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수법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선 권각법과 신법에서 시작했는데, 운몽으로서는 그야말로 고대해 마지않던 일이었던지라 힘든 줄을 몰랐다. 다리가 꼬여 넘어지고, 중심을 잡지 못해 나자빠져도 아이는 괴로운 줄 모르고 신나기만 했다.
기본이 되는 권법과 신법, 보법을 여름 동안 끝내 버렸으니 광명존자의 놀람과 기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년째에 접어들자 운몽의 어린 몸에는 점차 내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운이 자리 잡아갔다.
몸이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워지고 튼튼해졌지만 운몽은 아직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수시로 그의 완맥을 쥐고 기혈의 흐름을 살펴보는 광명존자만이 그런 사실을 눈으로 보듯 잘 알았다.
그리고 존자는 내심 많이 놀라고 있었다.
‘이 녀석의 성취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구나. 이 나이 때에 나도 이와 같은 빠른 진척을 보지는 못했다.’
광명존자는 어린 운몽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한편, 그가 자만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더욱 엄하게 꾸짖고 독려할 뿐, 칭찬은 아주 조금만 해주었다.
그게 운몽에게는 오기를 더해주는 일이었다.
‘사부님의 눈에 들고 인정을 받으리라.’
그런 마음은 아들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분발하는 것과 다름없는 마음이다.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가 우상이듯이 운몽에게는 광명존자가 본받고, 나아가 뛰어넘고 싶은 우상이었던 것이다.
심법을 수련한 지 어느덧 이 년이 다 지나갔다.
그 무렵부터 존자는 비로소 자신의 절기들을 운몽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뇌정신장(雷精神掌)을 익히기 위한 삼양신공(三陽神功)과 육보장권(六步掌拳), 연자십팔권(燕子十八拳)을 전해주었으며, 유성구천(流星九天) 신법의 관문이 되는 유운신법(流雲身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아직 운몽이 검법을 익힐 만한 체구와 체력이 되지 못했으므로 그것은 뒤로 미루었는데, 검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우선 권법과 신법에 능해야 하는 탓도 있었다.
운몽은 그새 여덟 살이 되었다.
아직 앳된 티가 가득하고 개구진 용모였지만, 그에게서는 조금씩 사나이다운 기백과 늠름한 기상이 우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절벽을 차고 오르는 몸놀림이 날랜 원숭이와 같았고, 주먹을 뻗으면 조막만 한 손에서 센 바람 소리가 났다.
널찍한 곳이나 좁은 곳을 가리지 않고 힘껏 내닫고 이리저리 움직일 때면 검은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그의 형체를 잘 알아볼 수 없다.
하루 종일 그렇게 뛰어다녀도 지칠 줄 모르게 되고서야 운몽은 이것이 무공이라는 건가 보다 하는 생각에 기뻐했다. 제 사부가 놀라서 혀를 내두른다는 건 꿈에도 모른다.
“이제는 찾아가 볼 때가 되었어.”
이듬해, 봄날.
운지를 만난 지 삼 년째 되는 그날에 운몽은 비로소 다시 그녀를 찾아가 볼 작정을 했다.
그동안 고통과 지루함을 참고 견딘 게 모두 이날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설렌다.
제3장 첫 시련
<1>
아이는 이제 어엿한 소년으로 자라 있었다.
세상의 나이로는 아홉 살에 지나지 않았으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남다르다.
세 번 겨울을 넘기는 동안 키도 훌쩍 자라서 같은 또래의 여느 아이보다 한 뼘은 족히 컸다.
자박거리며 걷던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걸음에 어느덧 당당함이 배어난다.
삼 년 동안 사부에게서 배운 무공은 아이에게 자신감과 함께 의젓함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걸려서 한밤중에야 도착하던 그 길을 운몽은 이제 한나절 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몸놀림이 날렵해졌고, 힘이 넘쳐 났으며, 지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아니, 네가 정말 그 꼬마란 말이냐?”
“이를 어째? 이제는 총각이 다 되었잖아?”
“어이구, 저 인물 좀 봐. 더 훤해졌어.”
“어디 보자, 그새 얼마나 컸는지 한번 안아봐야지.”
“요 통통한 볼 좀 봐. 젖살이 다 빠졌어도 여전하네?”
운몽을 본 복호사의 비구니들이 모두 놀랐다.
아이를 둘러싼 채 만지고 꼬집어보고 쓰다듬고 놀려대느라고 조용하던 산문 안이 자글자글 시끄러워진다.
운몽은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기도 하려니와, 사부에게서는 맡을 수 없고, 예전에는 몰랐던 시원하고 상큼한 비구니들의 냄새가 좋았다.
손을 뻗어오는 비구니라면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덥석덥석 안겨서 이름을 불러대며 얼굴을 가슴에 마구 비벼댄다.
덩치가 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졌지만 비구니들이 볼 때는 아직 철부지 꼬마 아이에 불과했다.
운몽이 허리를 껴안을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고 간지러워할 뿐,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요하기가 깊은 물속 같고, 정갈하고 그윽하던 복호사가 운몽만 나타나면 비구니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떠들썩해졌다.
활기가 넘쳐 나는 것이다.
소정 사태도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서슬 퍼런 얼굴로, ‘수양하는 비구니들이 이 무슨 자발스런 짓이냐!’ 하고 호통쳤을 것이다.
하지만 소정 사태의 근엄한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활짝 번졌다.
무려 삼 년 만에 찾아온 운몽이 아닌가.
소정 사태는 점잖은 풍모의 중년 사내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중이었는데, 외인으로서, 그것도 남자의 몸으로 복호사에 들어와 이처럼 소정 사태와 마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중년의 사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온 모양이군요?”
중년 사내가 눈치를 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
소정 사태가 빙긋 웃는다.
“귀찮으면서 반가운 손님이기도 하지요. 오랜만에 찾아온지라 철없는 제자들이 저렇게 반기는 모양이오.”
“노사태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복호사와 인연이 매우 깊은 손님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니겠지. 불가의 인연에 어디 깊고 얕음이 있나요? 아미타불······.”
노사태의 눈가에 반가움이 일렁인다. 그걸 본 중년 사내는 내심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소정 사태는 돌부처 같아서 어떤 일에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 고승이었다. 수양이 깊어서 도대체 그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런 노사태가 저렇게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니 대단한 손님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소정 사태가 찻잔을 슬그머니 밀어놓으며 말했다.
“어디, 그새 얼마나 컸는지 볼까? 시주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소생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실례하오.”
일어서 나가는 노사태를 바라보며 사내는 다시 한 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도 궁금증이 머리를 든다.
“사태 할머니!”
정실에서 나오는 노사태를 본 운몽이 다른 비구니들을 죄다 뿌리치고 마구 달려갔다.
펄쩍펄쩍 뛸 때마다 날랜 토끼처럼 계단을 십여 개씩 뛰어오른다.
비구니들이 모두 처음 보는 그런 운몽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소정 사태도 놀란 듯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어요!”
어느새 높은 계단을 날듯이 올라온 운몽이 소정 사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멀리 떨어졌던 손자가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좋아한다.
“이런, 이런, 경망스럽게 이게 무슨 짓이야?”
입으로는 나무라지만 소정 사태의 얼굴에는 기쁘고 흐뭇해하는 웃음이 가득했다. 자상한 할머니처럼 운몽의 등을 토닥거려 준다.
“운지 스님은요?”
운몽이 본심을 드러내자 소정 사태가 빙긋 웃었다.
“왜 작은 여자 중이라고 하지 않고?”
“사태도 참, 그건 가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니잖아요.”
“오호.”
소정 사태가 놀랐다는 듯이 운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산문 안으로 활짝 피기 직전의 모란꽃처럼 풋풋하고 청순하며 아슬아슬해 보이는 소녀 비구니가 영준하게 생긴 한 소년과 함께 들어왔다.
운지였다.
어느덧 열세 살이 된 운지는 이제 어엿한 소녀의 티를 내고 있었다.
비록 헐렁한 잿빛 승복으로 몸을 가리고 머리를 깎았으나 볼에 감도는 홍조와 붉고 도톰해진 입술이며, 봉긋 솟아 보이는 가슴의 윤곽이 눈부시다.
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정갈하고 정숙해진 분위기가 그런 청순한 아름다움과 더해져서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작은 여자 중아!”
운몽이 소정 사태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힘껏 소리쳤다. 노사태의 품에서 의뭉을 떨었던 게 언제였느냐는 듯하다.
운지가 바라보고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그녀의 곁에 있던 소년이 의아해하지만 운지의 눈은 저기 마구 달려오고 있는 운몽에게 못 박혀 있었다.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목덜미까지 빨개지고,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나 반짝인다.
그걸 보고, 운몽을 본 소년의 표정이 싸늘해졌지만, 운지나 운몽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는 것이다.
“작은 여자 중아,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달려온 운몽이 펄쩍 뛰어 운지의 목에 매달렸다.
삼 년 전에는 두 발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매달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다리가 땅에 끌린다.
운지가 붉은 꽃처럼 얼굴을 붉히고 운몽의 가슴을 떠밀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점잖지 못하게.”
“어때서? 늘 그랬는데 뭘.”
“어서 저리 떨어져.”
“왜?”
“부끄럽잖아.”
“왜?”
“아이, 참.”
운지가 기어이 운몽의 통통한 엉덩이를 힘껏 꼬집었다.
“항복, 항복!”
운몽이 엄살을 떨며 두 손을 번쩍 든다.
흘겨보는 운지의 눈에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했고, 그것과는 다른 은밀한 빛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운몽은 그게 무엇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곁에서 그들의 만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준수한 소년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소년은 운지와 같은 또래로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살결이 고왔으며, 훌쩍 큰 키에 벌써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장부의 늠름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이 변성기에 든 걸걸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지 사매, 이 아이가 누구지?”
그제야 운지도, 운몽도 소년의 존재를 의식했다.
운지가 깜짝 놀라 운몽에게서 물러섰고, 운몽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년과 운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운지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당황한 기색으로 운몽을 소개했다.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소년이에요. 절에 자주 놀러 와서 알게 되었는데······.”
“나는 운몽이야. 너는?”
운몽이 불쑥 운지의 말을 막고 나섰다. 그는 운지가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무언가 그녀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짐작했다.
이제는 그런 정도의 눈치를 챌 수 있게 된 운몽인 것이다. 여섯 살 철부지 때의 그와는 다르다.
미소년이 제법 호탕하게 하하, 웃었다.
“귀여운 꼬마로군. 나는 화운평(華雲平)이라고 한다. 운지 사매와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냈지. 그런데 여러 번 복호사에 왔지만 한 번도 너를 보지 못했으니 이상한 일인걸?”
소년, 화운평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운지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왜 운지 사매는 그동안 한 번도 이 녀석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을까?”
운지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화운평의 눈길을 똑바로 받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운몽이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 녀석이 아니야. 운몽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도 절에 여러 번 왔지만 너를 보지 못했잖아. 네 얘기도 듣지 못했어. 그러니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는 운지 스님을 탓하지 않는데 너는 왜 탓하지?”
의젓하고 당당하게 운지를 감싸준다. 화운평의 눈에 번쩍, 하고 차가운 빛이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운지는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든 무렵이고, 작년부터는 달거리도 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도 안다.
소년, 화운평은 운지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열네 살이었다. 마음속에 이성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자리 잡을 나이인 것이다.
은근히 운지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녀가 운몽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속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일부러 운몽을 꼬마라고 얕잡아보는 듯 말했던 것인데, 운몽이 거위처럼 머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꽥꽥거리니 괘씸했다.
열네 살 소년에게 아홉 살짜리 사내아이야 꼬마로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다.
<2>
“흥!”
차갑게 코웃음을 친 화운평은 운몽의 차림새가 허술하고 꾀죄죄해 보이니 더욱 얕잡아보는 마음이 들었다.
산 아래 농가의 철부지 어린 녀석인 모양인데, 부모가 가난하고 무식해서 자식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게 틀림없다고 짐작한다.
화운평이 엄하게 꾸짖었다.
“이 녀석,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렇지, 운지 사매의 나이가 너보다 많고 내 나이는 더 많은데 함부로 너, 너, 하며 말하는 건 옳지 않다. 촌에서 귀엽게만 자라 예의가 없구나.”
운몽은 어리둥절했다. 화운평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이라는 건 알겠는데, 마치 사부님이 꾸짖듯 이렇게 꾸짖으니 승복하기보다는 반감이 인다.
“대체 너는 누구야? 보아하니 너도 어른은 아닌데 왜 어른처럼 굴지? 이 절에 있는 모든 스님들이 다 너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많은 스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너처럼 말하지 않았어.”
“허, 도대체 말귀를 못 알아듣는 녀석이로구나.”
“스님한테 중이라고 하면 못된 녀석이거든? 스님이 싫어하니까 말이야. 나는 누가 나한테 이 녀석이라고 하면 싫어져.”
은근히 화운평이 못된 녀석이라고 하는 욕이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화운평이 아니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입술이 일자로 닫혔다.
그때 저 위, 높은 계단 너머에 있는 소정 사태의 정실에서 점잖게 생긴 중년의 사내가 나오더니 화운평을 향해 말했다.
“벌써 뇌음사에 다녀왔느냐? 소령 노사태께서는 안녕하시더냐?”
힘이 깃든 굵직한 음성이다.
“아!”
화운평이 깜짝 놀라 즉시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머리를 숙였다.
“지금 막 돌아온 길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운지 사매가 잘 안내해 주어서 일찍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소령 사태께서는 마침 폐관 중이시라 뵙지 못했지만, 건강하시고 기력도 좋으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잘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구냐?”
두 소년 사이에 말싸움이 있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소정 사태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말한 그 손님이라오.”
“노사태께서 그토록 반가워하시기에 소생은 또 아주 대단한 인물이 방문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어린 꼬마였군요?”
은근히 소정 사태와 복호사의 비구니들에 대한 조롱이 숨겨져 있는 말투였다.
소정 사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내는 짐짓 모르는 척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말했다.
“하하하, 저에게도 저 어린 손님을 소개시켜 주시겠습니까?”
노사태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스쳐 갔다. 소정 사태는 아미파의 고승이지만 눈앞의 중년 사내에 대해서 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운몽을 있는 그대로 소개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도 하다.
‘삼세의 인연은 부처님의 소관이시라. 수양하는 비구니가 그 인연 때문에 거짓말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부처님께서도 용서하시겠지.’
잠깐 생각하던 소정 사태는 운지가 화운평에게 운몽을 소개하던 말을 떠올리고 빙그레 웃었다.
“저 아이는 운몽이라고 하는데,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소년이지요.”
운몽도 충분히 들을 만큼 큰 음성으로 말한다.
운몽은 소정 사태마저 저를 산 아래 마을의 소년이라고 하니 더욱 이상했다. 하지만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 위의 사내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사내가 호탕하게 껄껄 웃는다.
“매우 잘생긴 아이로구나. 복호사 여러 스님들의 귀여움을 받으니 복을 타고난 게지. 나는 낙산(落山)에 사는 화군악(華君岳)이라고 한다.”
어린 소년을 두고 포권까지 하며 정중하게 제 소개를 하는 것은 역시 소정 사태와 복호사의 비구니들에 대한 조롱이다.
하지만 누구도 듣지 못한 척할 뿐이었다. 소정 사태의 안색만 침울해졌다.
운몽은 화군악이라는 사람이 싫었다.
어린 소년의 마음에도 화군악의 오만하고 도도한 모습이 반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운몽은 그가 강호에서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 그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짐작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의 성이 화 씨인 걸로 보아 화운평이라는 소년과 깊은 관계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화운평도 싫고, 점잖을 떨고 있지만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화군악도 싫다.
그 첫 만남에서의 인상이 장차 저를 따라다니며 몹시 괴롭게 하는 일이 될 줄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복호사가 운몽에게는 좋은 인연만 아니라 나쁜 인연까지 함께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우리 저쪽으로 가자.”
운몽이 운지의 손을 잡고 끌었다. 운지가 머뭇거린다. 그걸 본 화운평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운몽에게는 운지가 화운평의 눈치를 본다는 게 아니꼽고 화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다.
“가자니까. 나 호천(虎泉)의 물을 마시고, 그전처럼 함께 수국의 꽃잎을 세며 놀고 싶어. 그리고 화엄보탑(華嚴寶塔)에서 탑돌이도 하자. 응?”
운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쩔쩔매는 건 화운평의 안내를 맡으라는 사부의 명을 받은 탓이었다.
그 말은 곧 화운평이 아미산에서 엉뚱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는 뜻도 있음을 알고 있다.
아미산에는 금지(禁地)도 많고, 여승들이 기거하는 암자며 사찰이 수없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화운평이 자칫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사히 그를 데리고 복호사로 돌아왔으니 제 임무는 끝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운지는 마지못한 듯 운몽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화운평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지는 듯했다.
운몽은 몇 년 만에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운지를 만나 복호사 뒤편의 호젓한 호천에 왔지만 예전과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운지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고, 자꾸만 화운평의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운몽은 그런 저의 마음이 질투의 감정이라는 걸 아직 몰랐지만, 그 고통스러움은 어린 마음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느끼고 있었다.
소중히 여기는 내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가지고 노는데, 그 아이의 부모가 곁에서 편들어주고, 그 아이의 힘이 저보다 세기 때문에 다시 빼앗아올 수 없을 때의 속상함이다.
운몽에게 운지는, 비록 네 살이 많기는 하다지만, 아미산에서 유일하게 만난 제 또래의 소녀이고, 사부에 대한 것과는 다른 따뜻한 감정을 갖게 된 비구니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의 상황이 극적이었던지라 결코 잊을 수 없고, 더욱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 운지가 제가 아닌 다른 사내 녀석을 만나고 있었다는 게 속상했다.
운지는 언제까지나 저 혼자만 알고, 저 혼자만 독차지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헤어져 있던 지난 삼 년 동안 어느덧 운몽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3>
“그 녀석은 누구야?”
운몽의 말에 화엄보탑의 계단에 앉아 멍하니 수국을 바라보고 있던 운지가 깜짝 놀랐다.
“누구?”
“화운평 말이야.”
“나도 몰라.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씩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온다.”
“왜?”
“화 공자 아버님이 사부님과 잘 아는 사이인가 봐. 그래서 이곳에 당신 부인의 유골을 모셨어. 때문에 기일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거야. 그리고 한 번 올 때마다 많은 돈을 기부하기 때문에 그게 복호사의 운영에 큰 힘이 된다고 해. 그러니 우리 절에서는 정성껏 화 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려주지 않을 수 없지.”
운지가 장황하게 말하는 건 자기가 화운평과 함께 있었던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다.
그녀의 여린 가슴에 왠지 운몽에게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운몽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아까 그 사람이 화운평의 아버지였군.”
“아니, 그분은 화 공자의 숙부님이셔. 매년 화 대인이 몸소 화 공자를 데리고 오셨는데, 금년에는 어쩐 일인지 숙부가 화 공자를 데리고 왔어.”
운지는 온화하게 말했는데, 그 말투에 화 대인이라는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운몽은 더 속상했다.
“흥, 숙부든 아버지이든 똑같겠지 뭐. 어쨌든 나는 화씨가 싫다.”
“어째서? 너는 오늘 처음 본 것에 지나지 않은데?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잖아.”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질려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더 알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고.”
“그렇지 않아. 화 대인께서는 인후하고 너그러우신 분이다. 네가 본 화군악이라는 분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
화운평의 숙부인 화군악에 대해서는 운지도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거만하고 잘난 척을 했기 때문인데, 사부가 그를 공경해 주므로 어쩔 수 없이 공경했을 뿐인 것이다.
운몽이 볼을 씰룩거렸다.
“그러니까 그 화 대인이라는 사람도 복호사에 드나들었군? 흥, 복호사에는 남자가 들어올 수 없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운지가 운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래듯 말했다.
“화 대인은 예외야. 사문에서도 그분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예외를 두고 있어.”
그것은 아미파가 그의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는 것이겠고, 화 대인에게 그동안 신세진 게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미파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운몽은 그런 걸 이해할 만큼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다.
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즉시 얼굴에 드러내고 말로 뱉어낼 뿐이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사문의 존장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아. 낙산에 칩거하고 있지만 그 위명이 강호에 진동한다고 해. 소림이나 무당 같은 큰 문파에서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더라.”
“왜?”
“그는 강호를 뒤흔들 만한 고수이거든.”
“강호? 그게 뭐야?”
운몽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사부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공의 고수들이 의와 협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기도 하면서 각축을 벌이는 무림을 말하는 거지. 넓게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오라, 무림이라는 데가 있었군. 무공을 익혀서 고수가 되면 또 다른 세상에 사는 거나 같겠네?”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 아니겠니? 굳이 일반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과 구분을 할 필요가 있을까? 민간에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듯이 무림이라는 곳 또한 그럴 뿐일 거야.”
“그런데 조금 전에 말한 아미파란 건 또 뭐야? 여기가 복호사지 어째서 아미파야?”
운몽은 궁금증으로 잠시 화운평을 잊은 듯했다. 운지에게는 그게 다행스런 일로 여겨진다.
운지가 운몽의 손을 잡고 그 손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마치 다정한 오누이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오순도순 옛날이야기라도 하고 듣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림에는 수많은 문파와 방회, 독립적인 세력가들이 있는데, 저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하더구나. 그중 명문정파로 꼽히는 역사 깊은 문파가 아홉 개, 방회가 한 개 있어. 강호에서는 그곳을 두고 구파일방이라고 하며 존경하지. 아미파는 그 구파일방 중 한 곳이란다. 복호사는 물론 아미산에 흩어져 있는 많은 사찰, 암자들이 다 그 아미파에 속하는 거야. 대단하지 않아?”
“그럼 그 구파일방의 무공이 제일 세겠네?”
“보통 그렇게들 말하지만 누가 알겠어? 강호에는 또 기인이사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니 그중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난 고수도 있겠지.”
“그럼 화운평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사부님이 그처럼 공경하는 걸로 보아서는 그런 것 같기도 해.”
“응, 그렇구나.”
운몽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운지의 말처럼 화운평의 아버지가 강호의 절정고수라면 화운평 또한 장차 제 아버지를 이어서 그렇게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두고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자 부러움과 함께 제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운지 앞에서 화운평보다 제가 더 멋지고 당당해야 하는데 저에게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 기가 팍 죽는다.
그런 운몽의 기분도 알지 못하고 운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부님께서도 강호에서 명성이 아주 높으신 분이란다. 절대로 화 대인 아래가 아닐걸? 그리고 우리 아미파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역사가 깊고 고수가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야. 명문정파의 기둥이지. 그런 점에서는 낙산에 있는 화 대인의 신검장(神劍莊)보다 뛰어날 거야.”
제 사문과 사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걸 보면서 운몽은 더 우울해졌다.
‘나에게도 사문이라는 게 있고, 소정 사태처럼 훌륭한 사부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 끝에는 제 사부에 대한 야속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없이 좁아터진 반정도관 안에서만 죽치고 있는 사부 아니던가. 기껏 한 달에 두어 번 도관을 떠날 뿐이다. 그 외에는 늘 말도 없이 돌부처처럼 앉아서 잠만 잔다.
지금은 그것이 자는 게 아니라 정좌운기(靜坐運氣)하는 것임을 알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사부가 가르쳐 준 무공이라는 것도 별것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강호에 무슨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정도관 자체가 복호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데, 그런 곳에서 늙어가는 사부에게 무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무공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운몽은 사부가 그 모양이니 제자인 자신도 초라한 것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운지나 화운평은 그렇지 않았다. 사문이 뛰어나고 가문이 훌륭하니까 의젓하고 기품이 있지 않은가.
얄밉기 짝이 없지만 운몽은 화운평이 저보다 점잖고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많은 탓에 덩치도 훨씬 컸다. 게다가 힘도 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운지를 돌아보자 그녀가 달라 보였다. 자기 꼴을 훑어보고 다시 보자 더욱 달라 보인다.
어린 마음에도 운몽에게는 왠지 운지가 저보다 화운평과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지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려고 지난 삼 년 동안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는데, 그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은 운몽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아미파에서 저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무공을 배웠을 운지는 물론 화운평이 본다면 얼마나 웃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자 끔찍해진다.
운몽이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운지에 대한 상심(傷心)으로 풀이 죽고 괴로워하는데, 저쪽에서 화운평이 천천히 보장전(寶藏殿)의 깨끗한 돌계단을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화 공자.”
그를 본 운지가 얼른 운몽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운몽은 제 손에 남아 있는 운지의 체온이 빠르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서 물끄러미 발아래의 하얀 돌계단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에서 저 혼자만 버림받은 것 같은 쓸쓸함이 밀려들어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화운평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기는커녕, 누가 나를 낳아주었는지도 모른다. 내 사부는 소정 사태처럼 인자하고 명성이 높지도 않다. 내 생긴 모양은 화운평처럼 의젓하지도, 잘나지도 못했다. 내 입고 있는 이 낡은 옷과, 화운평의 저 깨끗하고 화려한 비단옷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신고 있는 신발만 봐도 나는 그의 종보다 못할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운몽은 제가 아직 아홉 살의 꼬마이고, 화운평은 벌써 열네 살의 어엿한 소년이라는 건 잊었다. 운지를 사이에 놓고 보자 저와 화운평이 동등한 한 사람의 남자로 여겨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비교하는 마음이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천천히 다가온 화운평이 운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운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운지 사매, 이곳이 그윽하고 운치있기는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나는 아직 나한전(羅漢殿)의 부처님께 참배하지 못했는데 사매가 나를 안내해 주지 않을 테야?”
운지가 운몽의 눈치를 보았다. 운몽은 화엄보탑의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채 얼굴도 들지 않았다.
한숨을 쉰 운지가 그런 운몽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래? 화 공자를 나한전으로 안내해서 그가 참배하는 걸 도와준 다음에 곧 올게.”
“싫어!”
내내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운몽이 갑자기 소리치고 벌떡 뛰어 일어났다.
“나는 가겠어. 흥! 화 공자인지 화 미꾸라지인지하고 잘 놀아! 다시는 오지 않을 테야!”
작은 주먹을 꼭 쥐고 화운평을 매섭게 노려본다.
“아?”
운지는 돌변한 운몽의 말과 태도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화운평은 운몽이 저를 미꾸라지에 비교하자 참고 참았던 화가 울컥, 치솟았다.
“저런, 버릇없는 꼬마 놈이 감히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누구에게서 그런 못된 말버릇을 배웠느냐? 네 아버지냐?”
그가 가뜩이나 열등감의 원인이 된 아버지를 들먹이며 꾸짖는 데에 운몽 또한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에잇!”
소리치더니 그대로 화운평에게 부딪쳐 간다.
돌계단을 박차고 몸을 날리는 모습이 확실히 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날렵하고 힘차 보였다.
하지만 화운평에게는 가소롭기 짝이 없을 뿐이다.
그가 슬쩍 운몽의 발길질을 걷어내며 비웃었다.
“꼴에 어디서 무공이라는 걸 몇 수 얻어 배운 모양이구나?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형편없는 수법이로군. 이 못된 꼬마야, 그런 주먹질로 어디 허수아비나 제대로 칠 수 있겠어? 차라리 나에게 배우는 게 어떻겠느냐? 우리 집으로 와서 내 시동이 되어 신발을 들고 다닌다면 내가 그보다 훨씬 나은 무공을 가르쳐 주마. 하하하.”
운몽이 입술을 악물고 연신 주먹과 발을 날리지만 화운평은 여유있는 모습으로 슬쩍슬쩍 피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조롱하고 이죽거린다. 그게 운몽을 더욱 미치게 했다.
연신 날카로운 기합성을 터뜨리며 죽기 살기로 달려들지만 마음만 급했을 뿐, 손과 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화운평은 아예 뒷짐마저 진 채 이리저리 돌고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면서 운몽의 주먹질을 모두 피해 버렸다.
아무리 기를 써도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자 운몽은 제 분을 참지 못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털썩 주저앉아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고, 두 발로 땅을 마구 비벼대며 우왕! 하고 커다랗게 운다.
운지가 한쪽에서 멍하니 구경만 할 뿐 제 역성을 들어주지도 않고, 제 편은 더더욱 들어주지 않았다는 게 화운평에게 놀림을 당한 것보다 더 서럽고 분하다.
운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린 운몽을 끌어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화운평이 지켜보고 있는데 차마 그럴 수 없어 마음만 달아오를 뿐이었다.
화운평이 운몽을 흘겨보며 쯧쯧, 혀를 차더니 운지의 손을 냉큼 붙잡았다.
“버릇없는 아이들은 그저 맘껏 울게 놔두는 게 제일이야. 울다가 지치면 스스로 그치거든. 자, 우리는 어서 나한전으로 가자.”
마구 손을 이끄니 운지는 부끄러웠다. 꽉 붙잡힌 손목을 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화운평이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는 탓에 뺄 수 없었다.
거의 반은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운몽을 돌아보는 운지의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나는 갈 거야!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그렇게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에 대고 운몽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감이 가득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화운평이라는 이름과 얼굴만 더욱 깊이 각인되었고, 운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미움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정말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리라고 독하게 마음먹는다.
무슨 수를 쓰던, 화운평보다 뛰어난 무공을 배워서 혼내주고 말겠다는 오기가 불처럼 일었다.
복호사의 소정 사태며 그 많은 비구니들도 죄다 미워졌다. 화운평과 한통속인 것 같은 생각만 든 것이다.
“다 미워! 미워!”
아이의 악쓰는 소리가 고요하던 정원을 요란하게 했지만 와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운몽은 내내 울면서 두 개의 높은 봉우리와, 세 개의 깊은 골짜기와, 다섯 개의 크고 작은 개울을 넘어 터덜터덜 학정봉의 풍소애로 돌아왔다.
제4장 골짜기에 피는 사랑
<1>
귀에 들리는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봄풀의 파릇함과 신록의 영롱함도 더 이상 눈부시지 않다.
세상이 온통 암담한 절망의 어둠으로 덮여 있는 것 같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제 편은 아무도 없다는 것.
이제는 저와 놀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저를 업어줄 사람도 없고, 목에 매달려 응석을 부려볼 사람도 없다는 것.
그러한 모든 절망의 요소들보다 더 운몽을 절망하게 한 건 운지를 잃어버렸다는 아픔이었다.
그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붙잡는 비구니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듯 복호사를 떠났는데, 낙일봉(落日峰) 정상에 우뚝 서자 문득 후회가 되기도 했다.
못 이기는 척 그냥 머물러 있었으면 운지가 화운평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와 제 잘못을 빌며 안아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자기 자신의 바람을 상상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운몽에게는 그게 정말 그렇게 될 일이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아쉬움과 후회가 담긴 눈길로 복호사가 있음직한 산자락을 더듬었다.
지금이라도 운지가 숨을 헐떡이며 저 아래 아스라이 보이는 하얀 길을 마구 달려올 것만 같았다.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너를 버리지 않을게! 제발 나를 용서해 줘!”
낙일봉 정상에 서 있는 저를 바라보며 애절하게 소리쳐 부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참을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어도 운지는 달려오지 않았다.
호랑이도, 곰도, 늑대도 죄다 도망가 버린 길에는 산짐승 한 마리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분한 마음이 새롭게 들고, 낙심하는 마음이 더 깊어져서 운몽은 내내 발아래만 보며 걸었다.
그렇게 낙일봉을 내려왔고, 음침한 취운곡(聚雲谷)을 건넜다. 그리고 운대봉 정상에 올라섰다.
이제는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복호사가 어디쯤에 있는 건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새 발아래 밀려온 구름이 운해(雲海)를 이루고 온 산을 뒤덮어 버렸던 것이다.
하얀 구름의 바다 위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높은 봉우리들이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청승맞은 한숨을 내쉰 운몽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시 터벅터벅 걸어 운대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걷는 동안 밀려온 구름이 안개가 되어서 작은 아이를 부드럽고 축축하게 감쌌다.
갑자기 밤이 된 것처럼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짙은 안개에 나무와 바위와 길이 모두 숨어버린다.
운몽은 막막했다.
아홉 살 어린 마음에도, ‘이와 같이 몽롱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쓸쓸하고 적막한 얼굴을 한 채 풍소애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의 잔도를 걸었다.
발아래 구름이 밀려가니 제가 잔도 위를 걷고 있는 건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건지 모호해졌다.
속세를 떠나 하늘로 오르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처음 든 생각이었다.
여태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이 잔도를 따라 풍소애를 오르내렸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구름길을 타고 올라가 반정도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제 영영 세상과는 인연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다시는 세상에 나갈 일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없다는 마음이 되었다.
아홉 살 어린 꼬마가 느끼기에는 너무 심오하고 허무한 감정인데, 운몽은 그런 제 감정을 다른 그럴듯한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절실히 느낄 수는 있었다.
돌출된 차갑고 축축한 바위를 안고 돌자 저 앞에 반정도관이 보였다. 짙은 운무에 감싸여서 을씨년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칠 벗겨진 낡은 문 앞에 서서 운몽은 다시 한 번 제 마음속에 다짐을 했다.
“나도 사부님처럼 도관 안에서 꼼짝하지 않을 거야. 세상에 내려가 봐야 온통 기분 나쁜 일들뿐인 걸 뭐. 사부님처럼 조용히 수양이나 하면서 사는 게 더 좋아.”
운몽은 아미산이 세상의 모든 것인 줄 알고 자랐고, 지금도 그랬다. 아미산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고 그곳에 강호라는 곳이 있으며, 무림이라는 이상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돌아오는 길이지만, 여전히 아이에게는 아미산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 아미산에서 큰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도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고 있다. 그건 마치 상처 입은 작은 짐승이 애써 신음을 참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제 굴로 피신하는 것과 같았다.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유난히 크고 음침하게 들린다.
그리고 텅, 하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가슴에 못질하는 소리처럼 아프게 들렸다.
“에휴―”
작은 아이의 입에서 절로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이 새 나온다.
“웬 한숨이냐? 어린 녀석이 자발스럽게.”
이름만 그럴듯할 뿐이지 다 쓰러져 가는 조그만 전각에 불과한 광명전(光明殿) 앞에서 사부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그 모습이고 그 얼굴인 사부였다.
여전히 난간에 기대서서 자욱한 운무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늘 보던 모습이고, 늘 듣던 음성인데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부님!”
크게 부르는 운몽의 음성이 반쯤은 울음이다.
아이가 와락 달려들어 사부의 가슴속으로 뛰어들었다.
“어허, 다 큰 녀석이······ 무슨 일이냐? 또 다치기라도 했어? 어디 보자.”
운몽은 사부의 가슴속으로 자꾸만 파고들며 익숙한 그 냄새를 맡았고, 익숙한 그 음성을 들었다. 익숙한 그 마음을 보았다. 그래서 더욱 설움이 복받친다.
아이가 기어이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사부의 가슴에 제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광명존자가 말없이 그런 운몽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네 마음이 어떤지 다 안다는 듯 쓸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운몽은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고, 광명존자는 그날 밤이 새도록 어린 제자의 머리맡을 지켜주었다.
“내가 지은 악업이 너를 통하여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구나. 아, 이것이 하늘의 이치라는 것일까?”
중얼거리던 광명존자가 탄식했다. 물끄러미 운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려온다.
아이의 두 볼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보자 더욱 애틋한 정이 우러나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광명존자가 다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어린것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벌써부터 이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도 하늘의 이치라면 하늘은 얼마나 냉정한가. 사부를 잘못 만난 죄 때문이라면 나의 악업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한단 말이냐. 그 고리를 끊고자 벌써 사십 년을 자중하며 수양했건만 아직도 부족하다면 대체 이 세상에 누가 제 악업을 끊고 도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 사십 년을 더 고행하고 수양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이제는 존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철없는 어린 제자를 위해서였다.
운몽은 그날 이후 말이 없어졌다.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멍한 얼굴로 반정도관의 난간에 기대서 먼 하늘을 보거나, 발아래 가라앉아 있는 학정봉 기슭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제 사부의 모습을 빼닮은 것 같았다.
며칠이 그렇게 지났다. 그동안 운몽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무공을 수련하지도 않았다.
광명존자 또한 그런 어린 제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년이 되었든, 평생이 걸린다 해도 바위처럼 기다리겠다는 듯했다.
“사부님.”
어느 날, 모처럼 날이 맑아 밝고 따뜻한 햇빛이 도관 안으로 가득 밀려드는 오후에 운몽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옷자락을 뒤적이며 이를 잡고 있던 존자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사부님, 강호라는 곳이 있다면서요?”
“응?”
“무림이라는 곳도 있다던데 정말 그래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게냐?”
“사부님은 무공을 할 줄 아시잖아요. 그럼 무림에서 고수로 꼽히나요? 소림이나 무당, 아미파의 사람들도 두려워하는 그런 고수 말이에요.”
운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명존자의 얼굴이 점점 무심해져 갔다.
“다 잊었다.”
“잊었다니요?”
“무림을 잊었고, 강호를 잊었으며 내가 누구였는지도 다 잊었느니라.”
“왜요?”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니 그렇지.”
“그러니까 왜요?”
“그런 걸 두고 강호를 떠났다고 하느니라. 강호의 말로는 금분세수(金盆洗手)했다고도 하지. 그것도 오래전의 일이니 강호의 일은 다 잊었을 수밖에.”
“아이 참, 그러니까 왜 떠났느냐고요?”
“······.”
운몽의 그 물음에 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쓸쓸해진 기색이 잠깐 얼굴에 스쳐 갔을 뿐이다.
존자가 다시 이를 잡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 사부를 째려보던 운몽이 불쑥 물었다.
“낙산에 있다는 신검장을 아세요?”
“글쎄다.”
“거기 산다는 화 대인이라는 사람을 모르세요?”
대꾸를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 소림이나 무당 아미파도 쩔쩔맨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흥.”
존자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이를 잡으며 가볍게 코웃음 쳤다.
“아닌가요?”
“낙산 화가(華哥)의 무공이 뛰어나기는 하지. 하지만 그뿐이니라.”
“어라? 정말 아시는군요? 그럼 좋아요. 사부님은 그 화 대인보다 무공이 높은가요?”
“흥.”
이번에는 존자의 코웃음 소리가 조금 전보다 컸다.
운몽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역시 사부님이 더 세군요? 그렇죠? 히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다 잊었느니라.”
“무공도요?”
대답이 없다.
“다른 건 다 잊었어도 괜찮아요. 무공만 잊지 않았으면 돼요.”
“왜?”
“그래야 사부님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
“허허, 고얀 놈이로고.”
광명존자가 비로소 이 잡던 손을 멈추고 운몽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무공도 잊었다면 너는 나를 사부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겠구나?”
“사부님이면 제자에게 뭔가 가르쳐 줘야 하잖아요? 아무것도 배울 게 없는데 왜 사부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이 녀석, 한번 사제의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거다. 너는 그 이치도 모른단 말이냐?”
“쳇, 나한테 무공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사부는 필요없어요.”
“어허, 이게 아주 큰일 낼 놈이로구나.”
광명존자가 혀를 찼다.
“사부는 부모와 같다. 한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인 게야. 부모가 못나고 형편없다고 해서 내 부모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지. 아니, 짐승도 그렇게 하지 않느니라.”
“괜찮아요. 나에게는 부모가 없으니까요. 낳아놓고서 내버렸으니 그런 부모는 차라리 없는 게 낫지요.”
“끄응―”
광명존자는 운몽의 그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이 당돌한 녀석이 벌써 사춘기가 오나?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 심성을 잘 잡아주지 못하면 평생의 한이 될 것이라는 걱정도 들었다.
“나는 너에게 도(道)를 가르쳐 줄 수 있느니라.”
“그런 것보다 무공을 더 배우고 싶어요. 그것도 아주아주 센 걸로요.”
“무공은 작은 것이다. 도보다 더 크고 가치있는 것은 없느니라. 무공으로는 신선이 될 수 없으나 도는 나를 신선이 되게 해주느니라. 무공으로는 고통과 번민을 이길 수 없으나 도는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해주느니라. 너는 그와 같은 도를 알고 싶지 않느냐?”
“몰라도 돼요.”
단호하다. 그래서 광명존자는 하루 종일이라도 할 말이 남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도는 사부님이 닦으시고, 나한테는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벌써 삼 년 동안이나 가르쳐 주었지 않았느냐?”
“그런 시시한 것 말고 진짜 무공이요. 천하제일이 될 수 있는 무공 말이에요. 사부님은 화 대인보다 세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그걸 가르쳐 주세요.”
“내가 언제?”
“조금 전에 내가 화 대인이 천하제일이라고 하니까 코웃음 쳤잖아요. 그건 무슨 의미예요?”
광명존자가 대꾸하지 못하고 커흠, 커흠, 하고 헛기침만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나무란다.
‘내가 아직도 호승심을 버리지 못했고, 속세의 공명을 버리지 못했구나. 쯧쯧, 광명존자야, 광명존자야. 그리고도 네가 어찌 사십 년 동안 도를 닦았노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도 멀었다. 에휴―’
<2>
한 달이 지났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어느덧 운몽의 어린 마음에 찾아왔던 상심의 아픔도 조금씩 옅어져 갔다.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상처야 영영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그 고통으로부터의 면역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운몽은 다시 사부로부터 무공을 배우고 수련하는 데 전념했다.
아이와의 대화가 있은 후부터 광명존자는 어린 제자에게 더욱 엄격하고 혹독하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는데, 한번 네가 원하는 대로 해보라는 마음이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이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상처를 덮어주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이기도 하리라.
어쨌든, 그렇게 원하는 무공을, 그것도 삼 년 동안 배웠던 기틀 위에서 이제는 그보다 더 강력하고 복잡한 수법들을 배우기 시작하자 운몽은 오직 그것에 열중했다.
타고난 자질 위에 집념이 더해지니 그 성과는 눈부실 지경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광명존자가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운몽은 마치 잘 마른 솜 같았다. 존자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려고 한다.
그렇게 바쁘고 즐거운 한 달이 지났을 때, 노란 작은 새가 다시 찾아왔다.
어느덧 봄도 깊어 여름을 바라볼 무렵이었다.
반정도관의 날아갈 듯한 처마 위에서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공 수련에 여념이 없던 운몽은 깜짝 놀랐다. 몸이 절로 굳은 것처럼 뻣뻣해진다.
“노란 작은 새다!”
운몽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아름답고 낭랑하던 노랫소리가 뚝 그치고, 노란 새가 그때처럼 호르르, 날아갔다.
“거기 서!”
이제 운몽은 노란 새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지 않았다. 네까짓 게 달아나면 어디까지 달아날 테냐, 하는 마음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간다.
훌쩍, 뛰어서 벽을 한 번 차더니 그대로 처마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작은 노란 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풍소애 아래로 떨어지듯 날아간 모양이다.
“흥, 나는 네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어.”
이마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운몽이 중얼거렸다.
삼 년 전 제가 길을 잃었던 그 골짜기를 떠올린 것이다.
운몽이 쏜살같이 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천 길의 가파른 절벽에 걸려 있는 잔도 위를 달리면서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날랜 원숭이처럼 단숨에 풍소애를 내려와 무명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달려온 운몽이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이르는 데 불과 한 식경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어쩌면 작은 노란 새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저곳이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제가 주저앉아 울었던 물가의 바위가 보였다.
후다닥 달려가 그곳에 오뚝 선 운몽은 이제 울지 않았다.
삼 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가 그렇게 달라졌지만 삼 년 전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삼 년 전의 만남에 대한 기억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가에 서서 운몽은 멍한 얼굴로 급하게 흐르는 개울물을 바라보았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절로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그때의 감정을 어쩔 수가 없다.
잊었다고 여겼던 일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두리번거리는 눈에 저만큼 활짝 피어 있는 두견화가 보인다.
가지를 우산처럼 드리운 커다란 나무에 분홍빛 손바닥만 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어서 마치 커다란 분홍 우산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 꽃나무의 활짝 핀 아름다움이 절로 한 사람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수백, 수천 개의 얼굴이 되어서 와르르 피어난다.
운지였다.
작은 노란 새의 짜르랑거리는 맑고 높은 노랫소리였다.
“왜 이제 왔어?”
작은 새의, 작은 노란 새의 잊을 수 없는 노랫소리.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 그리운 음성.
“너는 정말 못된 꼬마 아이야.”
타박하는 모습.
“아!”
운몽이 깜짝 놀라더니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눈을 비비다가 주먹으로 제 머리통을 두드려 댄다.
“바보 같아.”
웃음 실린 그 잊지 못할 음성. 노랫소리.
거기 운지가 있었다.
작은 여자 중이다.
아니, 이제는 어엿한 소녀가 된 비구니다.
하지만 운몽의 머릿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작은 여자 중이었다.
그 투명하도록 맑고 고운 볼과 수줍은 듯, 노여워하는 듯 흘겨보는 눈길.
운몽은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프도록 눈을 비비고 떠보아도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저 꽃 좀 봐. 참 예쁘게 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꽃망울이 맺혀 있을 뿐이었는데······.”
이건 꿈이 아니다. 착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운몽은 운지가 분홍색 두견화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을 때에야 비로소 제가 정말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하다.
“너는 정말 요술을 부릴 줄 아는 거야?”
“바보.”
“아니면 네가 어떻게 작은 노란 새가 될 수 있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헛소리하는 버릇은 여전히 못 고쳤구나?”
“아니, 나는 정말······ 작은 노란 새가 왔어. 그래서······ 왔더니······ 여기 네가······.”
“뭐야, 너는 내가 보고 싶어서 정말 바보가 되어버린 모양이구나. 쯧쯧, 불쌍하기도 하지.”
운지가 눈을 흘기며 웃는다.
운몽은 눈부셔서 두견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듯,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작은 노란 새는 날아가 버리고 없는데, 운지가 사박사박 걸어 다가왔다.
“너 왜 여기에서 울고 있니?”
삼 년 전 그때, 처음 들었던 그 음성이 운몽의 귀에 쟁쟁 울렸다.
하지만 운지는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운몽은 울지 않았고, 운지는 달래주지 않는다.
그 대신 부끄러움으로 두 볼을 붉힌 채 낮게 말했다.
“오늘도 못 보는가 보다 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그럼 나를 보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왔단 말이야? 다른 날에도 왔었어?”
“벌써 세 번째야. 열흘에 한 번씩 와봤지. 오늘도 못 보면 이제는 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열흘에 한 번씩······.”
운몽은 제가 운지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자박자박 걸어서 찾아가던 때를 떠올렸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길이던가.
하지만 운지를 볼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이길 수 있었는데, 이제 운지가 그렇게 저를 찾아왔다니 가슴이 미어진다.
“왜 풍소애 위로 올라오지 않았어? 그랬으면 나를 보았을 텐데.”
“처음에 말했었잖아, 이 이상은 학정봉에 다가갈 수 없다고.”
사부님의 엄명이라고 했었다. 운몽은 삼 년 전에 그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왜 그랬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왔어?”
마음과는 달리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온다. 운지가 다시 눈을 흘겼다.
“네가 울고 갔잖아. 내내 마음에 걸려서 한 번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
“흥, 화 공자가 있을 때는 모른 척하더니 그가 이제는 오지 않는 모양이지?”
“아직도 그때 일로 삐쳐 있니?”
운지가 울 듯한 얼굴을 했다. 운몽은 당장 그녀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라는 놈은 제멋대로 툭, 툭, 튀어나온다.
“아직도라니? 흥,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내내 울면서 혼자 풍소애까지 걸어왔는데. 오는 동안 수백 번도 더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는데. 지금이라도 쫓아와 나를 잡아주면 다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수천 번도 더 중얼거렸는데. 그런데 작은 여자 중은 오지 않았어.”
“미안해.”
오히려 운지가 울음 섞인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여기서 하루 종일 멍하니 네가 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잖아.”
“지금도 화 공자라는 녀석이 좋아?”
“좋다니?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야?”
“아이, 참.”
운지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내며 또 한 번 눈을 흘긴다.
그 모습에 운몽은 가슴이 철렁,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고, 이와 같은 감정도 다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한다.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볼이 홧홧해졌다.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병이 났나보다.’
덜컥 겁이 난다.
운지가 살며시 운몽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열세 살의 소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운몽과 같이 아홉 살의 철부지 작은 여자 아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운몽을 열세 살 난 소년으로 여기는 것이리라.
“이렇게 너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오늘도 보지 못하고 혼자 돌아갈 뻔했잖아. 그랬다면 나도 너처럼 엉엉 울면서 저 산을 넘어갔을지도 몰라.”
그 말에 운몽이 와락 운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뭉클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순간 지난 일들을 모두 잊었다. 화엄보탑의 돌계단에 혼자 앉아 울었던 일들이 까마득히 멀어진다.
운지가 화운평에게 손을 잡혀 나한전으로 가던 모습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금 이렇게 그녀의 품에 다시 안겨 있고,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
작은 사내아이에게 이 순간 그것보다 소중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시간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3>
운몽의 등을 토닥여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운지가 가만히 말했다.
“이제 울지 않을 거지?”
“응.”
“다시 나를 보러 와줄 거지?”
“아니.”
“싫다고?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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