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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풍구 1권(1)

2019.08.13 조회 532 추천 2


 <시작하면서>
 
 
 
 
 
 
 
 
 
 이 글은 여태까지의 무협과는 많이 색다르게 진행되는 글입니다.
 구태의연한 <꼴>을 벗어버리고 싶은 저의 욕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생뚱맞은 진행이라 더러는 황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의아하기도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배경이나 진행과정을 과감하게 내버리기 위해서 택한 수단이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구파일방이니, 무슨 세가니, 내공이 어떻고, 현경이며 생사경이 어떻고 하는 따위의 개념은 모두 시원하게 빼버렸습니다.
 마교니 무림맹이니 천마가 어떻고 지존이 어떻고 하는 따위에는 이제 쓰는 제 자신이 질려 버렸으니까요. 관심 끊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를 아예 새로 만들었습니다. 중국이라는 지겨운 틀에서 과감히 빠져나온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쓰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무협의 기본적인 틀과 정서를 모두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한다면 그건 무협이 아닌 다른 게 되어버릴 테니까요.
 어쨌거나 이러한 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지금의 상태를 답습하기만 한다면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출판사나 시장에도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머지않아 지난 80년대 말처럼 한국무협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심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작심하고 이와 같이, 속된 말로 ‘저질렀는데’, 사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의 무협시장에서,
 “이게 뭐야? 왜 마교며 천마가 안 나와? 구파일방은? 남궁세가는?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런 성토를 받고 외면당하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든 끝까지 실망하지 않는 글이 되도록 고심하고 심혈을 기울여 쓰겠습니다.
 그게 제가 여러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약속입니다.
 
 
 
 
 
 
 
 
 
 
 
 
 
 
 
 
 
 
 
 서장(序章)
 
 
 
 
 
 
 
 
 
 대륙이 거대한 전란에 휩싸인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명멸해 간 그 시절을 후세의 사람들은 풍운의 세월이라고 했다.
 혼세(混世)에 군자가 나고 전란(戰亂)에 영웅이 나는 건 하늘의 뜻이리라.
 아니, 혼란한 세상이 군자를 만들어내고 전쟁의 혼돈이 영웅을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훗날 무후제국(武侯帝國)이라는 말로 더 많이 불리게 된 <대황국(大黃國)>의 처음은 지극히 미약했다.
 동쪽 초원의 한 부족으로 일어나 수백 개의 부족을 정벌하여 거대한 초원 연합체를 이루더니 질풍처럼 북쪽 사막을 휩쓸어 복속시켰다.
 자신들의 터전보다 수백 배 더 크고 넓은 사막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불과 석 달이 걸렸을 뿐이다.
 초원의 전사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맹수들이었고, 그들의 장수는 하나같이 천계의 신장(神將)이었다.
 일천의 보병으로 십만의 사막족을 무찌르는 데 사흘이면 족했고, 일만의 기병으로 백만의 연합군을 짓밟는 데 열흘이면 족했다.
 그래서 사막의 질풍신(疾風神)으로 불리게 된 자들.
 그 초원의 연합체를 맨 처음 결성하고 이끈 자를 세상은 무후(武侯)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대무후 사량격발(師亮擊跋)의 대에 이르러 하나의 통일된 대왕국을 건설했다.
 바로 대황국이다.
 초원과 사막의 수많은 부족을 하나로 규합하여 세운 강력한 왕국은 비옥한 대륙의 남쪽 땅을 향해 군침을 흘렸다.
 그러자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세 개의 나라가 두려움에 떨거나 혹은 전의를 불태우며 기다렸는데, 이 이야기는 그 무렵부터 시작된다.
 
 
 
 
 
 제1장 운명(運命)
 
 
 
 
 
 
 
 
 
 
 
 
 1. 전란(戰亂)
 
 “용은 승천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구름을 타는 순간 꼬리를 물리게 됩니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동물은 호랑이뿐이지요.”
 “호랑이라······.”
 “신의 불경을 부디 용서해 주소서.”
 와라락―
 붉은 융단 위에 흩어져 있던 악어 이빨들을 쓸어낸 도사가 물러나 엎드렸다.
 “호랑이라······.”
 “신은 다만 명하신 대로 점괘를 풀이해 드렸을 뿐입니다. 용서하소서.”
 “호랑이라······.”
 듣지 못한 것처럼 중얼거리는 붉은 얼굴의 노인은 체구가 장대했다.
 흰 털로 뒤덮인 북국의 곰과 같다.
 그래서 백모웅신(白毛熊神)이라고 불리는 사람.
 이대무후이자 대황국의 황제인 사량격발이다.
 구월 보름밤에 만조백관이 모인 가운데 신전에서 펼쳐지는 점복 행사였다.
 천신과 지신에게 드리는 성대한 제사가 치러진 후 나라의 길흉과 황실의 화복을 점치는 복술이 시행된 것이다.
 그 점괘가 대흉(大凶)이었다.
 신관(神官)은 보통 그와 같은 점괘가 나오면 에둘러 말하거나 대충 얼버무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의 제복사(祭卜事)를 맡은 신관은 그렇지 않았다. 점괘를 있는 그대로 풀이했으니 제 입으로 제 명을 끊은 것과 다름없다.
 황제가 진노하면 천하가 피로 뒤덮인들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신전 뜰에 가득 모여 있는 만조백관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채 오직 황제의 진노가 저희들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만을 빌었다.
 한동안 무겁게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좋은 점괘로군.”
 점괘를 풀이했던 신관은 부복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고개를 처박고 있던 만조백관이 어리둥절해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산이 있으니 골짜기가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용이 있으니 또한 호랑이가 있어야 어울릴 터. 물어뜯고 싸울 상대가 없다면 천하를 얻을 흥이 어찌 일 것이며, 그렇게 해서 얻었다 한들 무엇이 자랑스러울 것인가?”
 비로소 신관이 얼굴을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은······.”
 “꼬리를 물어뜯기지 않도록 더욱 분발하겠다는 것이네. 그래야 자네의 점괘가 엉터리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게 되겠지. 아하하하!”
 황제의 대범함과 호쾌함 앞에서 신관인 늙은 도사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성산(聖山)으로 불리는 초원의 서쪽 납천고량산(納天高亮山)에서 내려온 도사였다.
 청량관(淸亮觀)에서 도를 닦았는데, 천하에 그보다 밝고 높은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은 사량격발이 불렀고, 도사는 기꺼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다섯 명의 제자를 데리고 산에서 나왔다.
 나운 선인(懶雲仙人).
 그는 늘 고요했다. 잠에 취한 노인 같은 모습이었을 뿐, 어디에도 하늘의 도를 받았다는 진인(眞人)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납천고량산에서 도를 닦기 전에는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나이가 얼마인지를 아는 이 역시 없었다.
 혹자는 그가 어미 뱃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신선들이 산다는 저 먼 동해 밖의 금청도(金淸島)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했다.
 팔십 살이 안 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예닐곱 살이었을 때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고,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것이 온통 신비할 뿐인 선인.
 그는 늙은 황소 등에 거적 한 장을 덮고 그 위에 앉아 황성으로 들어왔다.
 남루한 늙은이에 불과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삼경(三卿)의 재상이 수많은 고관대작들을 거느리고 몸소 문밖에 나와 기다렸으며, 황제의 친위대인 흑룡탄(黑龍灘)의 기병 일만 명이 엄숙하게 도열해 있었다.
 늙은 소 한 마리를 위하여 열 필의 말이 나란히 지나가도 남을 만큼 커다란 성문이 활짝 열린 일은 지금도 세상에 회자되고 있다.
 그렇게 황성에 들어온 그는 곧장 황제 사량격발의 앞으로 나아가 황사(皇師)이자 대천관(大天官)이 되었다. 삼경의 재상들로부터 조석으로 문안을 받는 지고한 사람이 된 것이다.
 비록 그 자리가 정사(政事)와는 아무 상관 없는 복임(卜任)이며 천문직(天文職)이었으나 누구도 그가 유일하게 황제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있는 곳에는 그가 있었고, 그가 있는 곳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황국의 법과도 같아서 나운 선인이 황궁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황제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신전을 떠날 때까지 부복하고 있던 나운 선인이 허리를 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황제의 그릇이 저와 같으니 천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그의 자질이 정말 아깝구나.”
 
 ***
 
 한 달 후, 대황국은 드디어 대륙 정복의 첫 발을 내디뎠다. 서쪽에서부터였다.
 청오랑국(靑五狼國)의 국경을 짓밟기 시작한 것이다.
 청오랑국은 서른다섯 개의 대성(大城)과 일백구십팔 개의 크고 작은 현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천하의 서쪽을 차지한 지 오백 년. 호적에 등재된 인구만 일천오백만 명인 대제국이기도 하다.
 삼십만의 기병에 일백만의 잘 훈련된 보병이 있어서 주변의 소국(小國)들이 두려워할 만도 하건만 청오랑국은 지난 이십 년 동안 한 차례도 이웃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었다. 그건 현 황제인 신성대제(新聖大帝) 청하겸(靑河謙)이 덕치(德治)를 표방하고 지킨 탓이었다.
 그는 역대의 어떤 황제보다 후덕하고 온유한 황제였다. 내실을 다지면서 군비를 정비하고 병사를 기르는 일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성군(聖君)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황제인 것이다.
 그 청오랑국이 가장 먼저 대황국의 표적이 된 건 그러한 신성대제의 성향이 야심가인 백모웅신 사량격발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사량격발은 신성대제 청하겸의 인망과 세평(世評)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북쪽 첫 관문인 대운관(大雲關)이 무너지는 데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황국의 기병 중에서도 용맹하기로 이름난 적운기(赤雲旗) 십만과 보군 이십만을 거느리고 대운관을 들이친 자는 모아합(毛牙合)이었다.
 그는 표범의 얼굴에 곰의 몸을 가진 자였다. 맹장이면서 불같은 흉포함으로 초원과 사막에 오래전부터 이름을 떨친 대황국의 상장군 중 한 명이다.
 그를 맞이해서 대운관의 삼만 장졸은 목숨을 내던지고 분투했지만 보름 동안을 버텼을 뿐 결국 높은 성벽이 허물어지고 망루는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대모성(大母城)에 모여 전열을 갖추고 출발한 청오랑국의 원병이 아직 삼백 리 밖에 있을 때였다.
 항복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아합은 사로잡은 일만여 명의 수비병을 무너진 성벽 아래의 황토 벌판으로 끌어내 모조리 참수했다.
 그 광경은 참혹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아합은 포로들을 묶어 한 줄에 일천 명씩 열 줄로 꿇어앉히고 각 줄마다 열 명씩, 일백 명의 기병이 중병(重兵)인 언월도(偃月刀)를 들고 대기하게 했다.
 그날, 하늘과 땅이 누런 모래바람으로 뒤덮이고, 빛을 잃은 태양이 허공에 둥실 떠 있던 그날은 지옥의 날이었다.
 천지가 어두컴컴한 중에 종일 사나운 바람이 동서남북에서 몰아쳐 와 무너진 성벽을 마구 때리며 호곡성(號哭聲)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모아합은 높은 대 위의 표범 가죽 의자에 거만하게 버티고 앉았다.
 그의 좌우에는 번쩍이는 장검을 뽑아 든 두 명의 흑의위사가 지켜 섰으며, 대 아래에는 붉은색 단갑과 투구로 몸을 가린 호위기병 일천 기가 붉은 깃발을 매단 장창을 숲처럼 세우고 늘어섰다.
 둥―
 모아합의 손짓에 고수(鼓手)가 철고(鐵鼓)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러자 포로들의 각 줄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 일백 명이 일제히 투구의 가리개를 내렸다. 그 소리가 철그덕 하고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둥―
 다시 북이 울리고, 기병들이 고삐를 틀어쥐었다. 사나운 전마(戰馬)들이 머리를 흔들며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마른 땅을 긁어대는 발굽 소리가 북소리처럼 벌판 멀리 퍼져 나갔다.
 둥―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린 순간 그토록 사납게 몰아치던 모래바람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그리고 일백 명의 기병이 언월도를 치켜든 채 일제히 말 배를 박찼다.
 우두두두―
 전마들이 황토 먼지를 구름처럼 피워 올리며 포로들에게로 달려나갔다.
 언월도가 하늘에 번쩍이는 빛을 뿌렸다.
 그때마다 목 하나가 떨어져 뒹굴었고, 붉은 피가 솟구쳐 하늘을 적셨다.
 선두의 기병이 무거운 언월도를 쉴 새 없이 휘둘러 일백 명의 목을 치며 달려나갔는데, 언월도를 부지깽이 다루듯이 쉬지 않고 휘둘러대는 그 무서운 힘과 신속하며 정확한 솜씨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백 명을 참수한 자가 쉬기 위해 빠지면 그 뒤를 따르던 두 번째 기병이 언월도를 휘둘러 다시 일백 명을 참수하며 달려나갔다. 그가 뒤로 빠지면 세 번째 기병이 그와 같이 한다.
 열 개의 줄을 따라 달리는 열 무리의 기병들은 어떤 조가 먼저 끝에 도달하는지 경쟁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달한 조는 모아합이 내리는 상을 받을 것이고, 가장 나중에 도달한 조는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마는 끔찍한 피의 시합이면서 향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조 열 명의 기병은 모두 쉬지 않고 언월도를 휘둘러 포로들의 목을 쳐야 했다. 지치거나 힘이 달려 멈칫거리게 되면 그 순간 조 전체의 질주가 방해를 받게 되므로 누구도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둥―
 스무 번째의 북소리가 긴 여운을 끌며 잦아들 때 도살이 끝났다.
 누런 황토 벌판이 일만 개의 수급으로 뒤덮였고,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하늘마저 붉게 물들었다.
 그 시합에서 승리한 건 칠조의 기병들이었다. 삼조가 가장 늦었다.
 스무 번째의 북소리가 그치자 기다리고 있던 칠조의 기병 십 기가 일제히 돌아섰다.
 삼조는 막 도살을 마치고 포로들의 주검 사이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칠조의 기병들이 그들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더니 조금 전까지도 자신들의 동료이며 친구였던 자들을 가차없이 도륙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아합이 마련한 피와 죽음의 향연이 모두 끝났다.
 
 2. 도유강(桃柔崗)
 
 온 나라가 들끓었다.
 변방에서 들려온 참혹한 학살 소식에 백성들은 물론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모두 놀라 허둥지둥했다. 그러나 대황국의 침입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언제가 될지 몰랐을 뿐이다.
 서쪽의 패자 청오랑국의 황제인 신성대제는 곧 동맹을 맺고 있던 삼 개 국에 사자를 보내 연합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전 군에 수성과 출진의 명을 내렸다. 또한 각 성의 창고를 열어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난민들을 구휼하고 과부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구제하여 피신시키도록 했다.
 청오랑국 전체가 기어이 닥쳐 온 전운으로 인해 뒤숭숭해졌으나 황제의 의연함과 자비로움은 그러한 혼란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그러자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싸우기를 원했으므로 병영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병사들로 넘쳐 났다. 사기 또한 드높아 막북의 패자인 대황국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이 전쟁은 청오랑국이 승리할 것으로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대황국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청오랑국의 수많은 젊은이 중에 한 사람이 있었다. 남쪽 변방인 황번현(晃蕃縣)에서도 뚝 떨어져 외진 산골 마을 가화촌(歌華村)에서 자란 청년이다.
 
 그곳은 이십여 호의 가난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궁벽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늘 밝고 활기찬 기운이 넘쳐 났다. 촌장인 여든 살의 상노인 우문덕이 마을을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촌민들의 존경을 받는 우문 노인은 부지런함과 온화함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젊어서도 그랬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온화하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해갔으므로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그런 우문 노인을 공경하고 따랐다.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할 때면 우문 노인은 웃으며 겸손하게 말하곤 했다.
 “다 황보 선생의 덕이라오. 그가 나는 물론 우리 부락을 변화시켰지. 그러니 공경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 황보 선생이라오.”
 우문 노인이 그처럼 떠받드는 사람. 그는 오십을 갓 넘긴 점잖은 선비였다.
 황보숭(黃補崇).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젖먹이 사내아이 하나를 강보에 싸안고 홀로 가화촌으로 들어왔다. 벌써 이십오륙 년 전의 일이다.
 황보숭은 마을 아낙들에게 젖동냥을 하여 아이의 배를 불리는 한편 햇빛 잘 들고 바람 시원한 언덕 위에 작은 집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 마을 사람들은 이 궁벽한 곳까지 찾아와 정착하려는 그를 의아하게 여겼다. 한눈에 이런 궁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언덕 위에 조악한 집을 짓고 눌러앉았다. 가화촌이 마음에 들었던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길도 잠시, 마을 사람들은 곧 그의 온화함에서 나오는 친화력에 동화되어 갔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이제는 누구도 황보숭을 외지에서 불쑥 찾아든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황보숭은 오두막집에 마루 하나를 더 만들어야 했다. 그가 글 읽는 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글을 가르쳐 주라며 개구쟁이들의 손을 이끌고 한 명 두 명 찾아왔기 때문이다.
 가화촌에 처음으로 긁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농한기에는 청년은 물론, 노인들까지 황보숭의 오두막집에 찾아와 글을 배웠다. 처음에는 제 이름자를 쓸 줄 알게 된 것에 만족하더니 조금씩 글에 대한 욕심이 생겨 다투듯 열심히 배우자 몇 년 뒤에는 마을에 글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이웃 마을 사람들은 말하기를, ‘가화촌에서는 개도 멍멍 짖지 않고 운율에 맞추어 노래를 읊조린다’고 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까지 아이들을 보내 글을 배우도록 했다.
 삼십여 명의 개구쟁이가 복닥거리기에는 집이 너무 좁고 누추했다. 그걸 본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조악한 오두막을 헐어버리고 새 집을 지어주었다. 두 칸의 방에, 번듯한 대청과 낮은 돌담을 두른 아담하고 튼튼한 집이 뚝딱 세워진 것이다.
 황보숭은 이제 네 살이 된 아들과 둘이 그 집에서 살았다. 하루 종일 거문고를 뜯거나 시를 읊조리고 글을 읽었으며, 때가 되면 찾아온 아이들을 가르칠 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원래 농사일과는 거리가 먼 그였지만 사는 데 궁색하지 않을뿐더러, 해가 거듭될수록 오히려 넉넉해지는 건 아이를 맡긴 사람들이 월사금이라며 가져다주는 몇 푼의 돈과 몇 되의 곡물 때문이었다. 그는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나자 황보숭은 가화촌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젖동냥을 해 먹였던 황보강(黃補崗) 또한 개구쟁이의 티를 벗고 열다섯 살의 어엿한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 황보강은 아버지를 닮아 영준했으며 온화하고 의연했다. 게다가 제 나이 또래의 소년들 중 누구보다 몸이 날쌔고 힘이 좋았다. 어쩌다 마을에 씨름판이 벌어지면 어지간한 장정들은 그에게 잡혀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였는데,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가화촌에 장사가 났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다시 몇 해가 지나자 인근 마을은 물론 황번현 전체에서 가화촌의 황보 선생과 그의 아들 강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황보숭의 집이 있는 언덕을 도유강(桃柔崗)이라고 불렀다. 그가 집을 짓고 나서 옮겨 심은 삼십여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 봄이면 복사꽃을 하나 가득 피웠기 때문이다.
 멀리서 그 언덕을 보면 분홍빛 구름 덩이가 내려와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누구나 탄성을 터뜨렸다.
 
 ***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황보강은 어느덧 스물다섯 살의 늠름한 청년이 되었고, 그 위엄이 해와 같이 빛났다.
 큰 지혜를 담은 맑은 눈은 아버지 황보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고, 씩씩한 기상은 가화촌과 도유강을 품고 있는 아라얼산(牙羅혦山)의 구름 인 봉우리를 닮은 게 틀림없었다.
 높고 크고 넓으며 험한 아라얼산의 정기가 온통 황보강에게로 내려온 것처럼 그는 장부의 기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또한 도유강의 만발한 복사꽃 그늘과도 같이 아름답고 온화했다.
 어느덧 청춘을 물처럼 흘려보내고 오십대 중반에 접어든 황보숭은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자부심이요 자랑이라는 말이 적어도 황보숭에게는 틀림없는 말이었다.
 그해에 나라에 전란이 발발했다.
 대황국의 모아합에 의해 대운관이 무너지고 일만 명의 포로가 모두 참수되었다는 소식은 도성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가화촌에도 날아들었다.
 그날 이후로 전황은 날로 나빠져만 갔고, 연합하기로 했던 나라들도 대황국의 위세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있을 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청오랑국은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겨울이 되자 전선이 잠잠해졌다. 다들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래가지 못할 긴장 속의 고요였다.
 신성대제가 수심에 잠겼다는 말을 들은 황보강이 아버지 앞에 엎드렸다.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찾아온 봄이 무르익어 가는 무렵이었다.
 “소자, 이제는 나라를 구하고 황제를 보필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그동안 갈고닦은 재주를 쓸 때가 왔습니다.”
 황보숭이 타고 있던 거문고를 밀어놓았다.
 “너는 공명을 얻으려느냐?”
 “대장부의 길이 어디 공명에만 있겠습니까?”
 “그러면 부귀영화를 얻으려느냐?”
 “아버님의 가르침에 그러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대의를 펼쳐 보이겠다는 것이냐?”
 “아버님께서는 대의라는 것도 필부의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검과 같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자는 그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말해보아라.”
 “어둠을 가르는 광명의 도를 세상에 밝히고자 함입니다.”
 “······.”
 황보숭이 입을 꾹 닫고 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여느 때와는 달리 뜨거운 정기를 가득 담고 이글거렸다.
 “고난을 헤쳐 나아갈 자신이 있느냐? 네 목숨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직 광명의 도를 세상에 밝힐 수만 있다면 열 번, 백 번이라도 그리할 수 있습니다.”
 “장하다.”
 황보숭이 다시 거문고를 끌어당겨 무릎에 올려놓았고, 황보강은 몸을 일으켜 초당을 나갔다.
 
 3. 장한가(長恨歌)를 부르다
 
 그로부터 닷새 후, 황보강은 스물다섯 명의 마을 장정과 함께 가화촌을 떠났다.
 전마를 타고 갑주를 입었으며, 안장에는 방패와 갈래진 창을 걸었고, 허리에 검을 찼다. 스무 대의 화살이 들어 있는 전통을 지고 손에 활을 잡은 그 모습이 영롱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한 번도 가화촌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그가 이제 처음으로 저 넓고 험한 세상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황보숭은 도화꽃 만발한 언덕 위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읊조렸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 같았고, 하나뿐인 아들이 전장으로 나가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도유강에 올라온 황보강이 말에서 내려 정자를 마주 보고 섰다.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서 아버지가 타고 있는 곡조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거문고 탄주를 듣는 게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드디어 탄주가 멎었다. 거문고 줄이 잉잉거리는 울림을 도화림 가득 펼쳐 놓았다.
 그제야 황보강이 갑주를 쩔그렁거리며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부디 옥체 보중하소서.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띵―
 황보숭은 말하지 않았다. 굵은 줄 한 가닥을 퉁겨 대답을 대신했다.
 애정과 존경과 흠모의 염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한참 동안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던 황보강이 몸을 일으켜 말에 올랐다.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도유강을 내려간다.
 바람이 불어와 만개한 복사꽃잎을 흔들어댔다. 그것이 붉은 눈처럼 천지간에 가득해졌고, 황보숭은 침묵 속에서 그 꽃잎들이 떨어져 사라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띵―
 그가 다시 거문고 줄을 퉁겼다. 그리고 학이 울듯이 맑고 청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저 높은 아라얼산의 눈 덮인 봉우리 위로 퍼져 나간다.
 
 북소리 둥둥 울리고 뿔피리 소리 가득할 때
 삼십만 대군이 성을 나섰네.
 넓고 거친 초원과 황토 벌판을 건너 긴 강가에 진을 쳤지.
 
 하늘이 붉게 물든 그날
 해도 달도 천공에 못 박혀 있던 그날
 나 홀로 부러진 창에 의지해 핏빛 강을 건넜다네.
 
 고향 가는 길을 찾아
 승냥이 무리 어슬렁거리는 어둠 속을 이리저리 헤매었지.
 남쪽으로 가고자 하나 구천에는 동서남북이 없다 하니
 갈 곳을 몰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떠도네.
 
 장한가(長恨歌)였다.
 도유강을 왼쪽에 멀리 두고 떠나는 황보강은 말 위에서 아버지의 그 노래를 들었다. 비장한 음조가 높고 낮게 흘러 허공에 긴 한(恨)의 강물을 굽이굽이 펼쳐 놓는 것 같았다.
 황보강은 그 강을 따라 터벅터벅 멀어져 갔고, 드디어 가화촌을 완전히 벗어나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반년이 지났다.
 푸르던 산천이 갈색으로 물들어 서걱거리더니 아침이면 흰 서리가 내리는 날이 되었다.
 어김없이 찾아오고 떠나가기를 멈추지 않는 계절의 무심함이다.
 지난봄부터 다시 시작된 전쟁에 대한 소문이 쉬지 않고 들려왔건만 가화촌은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황보강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황보숭은 그런 아들의 생사가 궁금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유유자적했다.
 
 마을에 큰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해마다 봄이 올 때와 가을을 넘기는 때가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동쪽 신당에 모여 사흘 동안 기원제를 드리는 게 가화촌의 오랜 전통이었다. 풍도제(風道祭)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풍신(風神)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나로아함(羅露娥含)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신이다. 풍도천(風道天)을 관장하는 삼십육 주신(主神) 중 하나이면서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오늘, 그 풍신 나로아함을 모시는 마을의 제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 손님이 찾아왔다.
 창검을 든 기마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찾아온 손님은 화려한 비단 조복에 관모를 쓴 고귀한 자였다.
 커다란 수레를 다섯 대나 대동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따르며 지키는 자는 황번현의 현령과 그의 나졸들이었다.
 현령을 하늘처럼 높은 나리로 알고 있었던 촌민들에게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높은 사람이기에 현령을 종처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왜 이 궁벽한 마을에 찾아왔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모두 지레 두려워 벌벌 떨었다.
 가화촌의 제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그들이 곧장 향한 곳은 도유강이었다.
 “황제 폐하의 사자요!”
 앞선 자가 커다랗게 외쳤다.
 황제인 신성대제 청하겸이 보낸 사자의 행렬이라는 데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겁을 했다. 제사고 뭐고 팽개친 채 도유강으로 밀려들어 황제의 사자를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초당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은 황보숭 앞에서 황제의 사자가 거만하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황보강이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의 집에 쌀 일백 석과 함께 황금 열 근,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노라.”
 낭독을 마친 사자가 황보숭을 부축해 일으켰다.
 “아들을 그처럼 훌륭하게 키워 큰 공을 세우게 했으니 장하오. 그대는 한낱 재야의 선비이지만 이제부터는 아들과 함께 그대의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오.”
 “그가 무슨 공을 세웠습니까?”
 “석천강의 싸움에 일대의 대장으로 참전해 역천의 무리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오.”
 “얼마나 죽었습니까?”
 “모아합의 적운기 일만 중 살아서 달아난 자가 고작 일이천에 지나지 않소. 수급을 벤 보군들이야 셀 수도 없지.”
 “그가 그 싸움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선봉장인 상장군 이가욱이 적운기에게 에워싸여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 그대의 아들이 일대 일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곧장 달려와 적운기를 물리치고 상장군을 구해냈다오. 상장군 이가욱이 황제 폐하의 외사촌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터. 그의 목숨을 구했고, 그 덕에 석천강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으니 황제 폐하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겠소?”
 적운기라면 모아합이 자랑하는 정예의 기병단이다. 용맹하기가 굶주린 표범 같고 날쌔기가 매와 같은데다가 흉포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초원과 사막에서는 그들의 붉은 깃발이 곧 죽음으로 통한다.
 그런 자들을 물리쳤다니 보지 않았어도 석천강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갔다. 적병이 그렇게 많이 죽었다면 이쪽의 병사들 또한 온전했을 것인가.
 황보숭이 마지못한 듯 한숨을 쉬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사하오.”
 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아들이 전공을 세웠고, 황제 폐하의 하사품이 왔는데도 황보숭의 얼굴에 반가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담담하기가 마치 남의 일이라는 것 같았다.
 그들이 돌아간 후 황보숭은 수레를 부수고 그 안의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보고 촌장이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적지 않은 재물이고 특히 황제께서 하사한 것들인데 이렇게 함부로 나누어 주어도 괜찮겠소? 더구나 황보 선생 당신을 위해서는 쌀 한 톨도 취하지 않으니 우리는 기쁘지가 않구려.”
 황보숭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다 필요없소이다. 내가 언제 재물을 탐하더이까? 언제 내 집 쌀독에서 바가지 긁는 소리가 납디까? 내 한 몸 먹고살기에 족한데 재물은 무엇에 쓴단 말입니까?”
 말을 마치자 거문고를 안고 정자로 올라갔다.
 도화림에서는 그날 밤늦도록 처량하고 슬픈 곡조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상심한 듯 밝은 달마저 운행을 멈추고 도유강 위에서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전쟁의 소식은 점점 험악해졌다.
 한 달 전에는 광안관(光安關)이 깨졌다는 말이 들리더니 보름 뒤에는 북방의 대성(大城) 중 하나인 아고명성(雅高鳴城)의 성벽이 무너지고 오만 명이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북방의 세 개 성 중 하나가 무너졌으니 나머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며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했지만 황보숭은 여전했다. 그리고 첫눈이 내린 날 다시 황제의 사자 행렬이 가화촌의 도유강으로 찾아왔다.
 “그대의 아들 황보 참장이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소. 황제 폐하께서 여간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오. 병사들은 황보 참장을 귀호장군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지.”
 황보숭은 강이 벌써 참장이라는 직위에 올랐다는 걸 알았다.
 참장(參將)이란 상장군이나 대장군을 보좌하는 높은 자리다. 비로소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게다가 귀호장군(鬼虎將軍)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니 대견하기도 하련만 황보숭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황제의 사자가 다시 말했다.
 “나라의 모든 병사들이 황보 참장의 용맹에 고취되어 사기가 오르고 있으니 모아합의 대군을 무찌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요. 모아합에게는 황보 참장이 눈엣가시나 다름없지. 그래서 그의 목에 황금 열 근의 상금까지 걸었다고 하는구려. 그러나 그대는 걱정할 것 없소. 황제 폐하의 병사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싸우고 있으니까.”
 황보숭이 두려워할까 봐 서둘러 위로의 말을 꺼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보숭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무슨 공을 세웠습니까?”
 “어기장군 당호파가 유시에 맞아 전사하자 황보 참장이 동요하는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여 고작 삼만의 군세로 십만의 적병을 물리쳤다오. 탕무평의 일전이지. 그곳이 뚫리면 북방의 두 번째 대성인 반호성이 떨어질 상황인데 황보 참장이 용맹분전하여 그것을 지켜냈으니 황제 폐하께서 어찌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면서 사자는 수레에 가득 싣고 온 하사품을 내려놓았다.
 “모아합이 황보 참장의 목에 황금 열 근의 상금을 걸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께서는 황금 일백 근을 하사하여 위로하심은 물론 그대에게 대부의 직함을 내리셨으니 온 천하가 황제 폐하의 높은 덕을 찬양해야 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가화촌의 촌민들이 모두 크게 놀라 입을 딱 벌렸지만 황보숭은 여전히 담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 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헐어라!”
 사자가 동행했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공경대부의 집이 이렇게 초라해서야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헐고 새로 지어라!”
 그 즉시 병사들이 달려들어 황보숭의 초라한 집을 헐어버리기 시작했다.
 황보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는 법도 없이 거문고를 안고 흰 눈에 덮여 있는 복숭아나무 숲으로 사박사박 걸어 들어갔을 뿐이다.
 사자가 떠나고 병사들은 남아서 새집을 지었다.
 
 두 달 뒤, 봄기운이 바람에 실려 찾아오기 시작한 무렵에 도유강에는 열 개의 방과 청당이 있는 번듯한 집 한 채가 올라섰다. 높은 대문을 세우고 돌담까지 두르자 현령의 저택 못지않게 아름답고 웅장했다.
 집이 완성된 날 현령이 몸소 찾아왔다. 현의 유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예물을 들고 현령과 아문의 관인들을 따라왔으니 도유강이 사람의 물결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넓은 청당에는 온갖 예물들이 쌓여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황보숭은 그곳에 앉아 하루 종일 축하를 받았다. 그저 담담한 미소로 하객들을 맞고 보냈을 뿐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앞 다투어 아부를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그러자 황보숭은 청당의 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왔다. 대문마저 닫아걸고 봉인한 그는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도화림의 정자 곁에 스스로 움집이나 다름없는 초막을 하나 세우더니 늦겨울과 이른 봄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 거주했던 것이다.
 “황보 선생, 대체 무슨 일이요? 집이 마음에 들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지어드리리다.”
 촌장 우문 노인의 말에 황보숭이 빙긋 웃었다.
 “저 집은 내 집이 아닌데 마음에 들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상관없이 정자에서 세월을 구경했다. 거문고를 뜯고 노래를 부르고 때가 되면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게 변함없었다.
 출사하여 벼슬할 생각이 없는 건 물론, 집 안에 만금을 쌓아두고 있으면서도 그는 하루 세 끼 식지 않은 밥과 나물을 먹을 수 있는 데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황보 선생은 이제 보니 도인이었어.”
 “신선이 되려는 건지도 몰라.”
 “아니, 그는 이미 신선이야. 신선이면서 선계에 있지 않고 하계에 머물러 있는 거지.”
 “그렇군. 역시 처음부터 범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가화촌은 물론 황번현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자신들이 선인과 함께 살고 있다는 데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는데, 그건 곧 황보숭에 대한 공경으로 승화되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향을 피우는 사람이 생겼을 무렵, 북쪽 전선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청오랑국의 운명을 판가름할 커다란 싸움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4. 척망평(尺忘坪)의 전운
 
 반년 전부터 황보강은 여기저기 전장을 찾아 떠돌던 유장(流將)의 신세에서 벗어나 어기장군(御旗將軍) 도울(都亐) 각하의 참장으로 안착해 있었다. 그동안 모신 상장군만 세 명이었고, 그들을 따라 참전했던 전장이 무려 이십여 곳에 달했으나 이제는 오직 도울 각하의 군기 아래에서 그의 군령만 받드는 심복 무장이 된 것이다.
 북쪽 전선을 사수하던 세 개의 군단은 불굴의 기백과 용맹으로 모아합의 적운기에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여섯 개의 대성 중 다섯 개가 떨어졌고, 세 개의 군단 중 이제는 도울의 군단 하나만 남았다.
 전선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울은 악착같이 버티며 적운기의 진격을 가로막고 있었다. 전력과 군비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보름 동안 세 차례나 싸워 모아합의 대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가 지키고 있는 한 대모성으로 직통하는 천남로(天南路)를 지나갈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대황국과의 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이 년하고도 반이 지나고 있었으니 그만하면 청오랑국으로서는 잘 버틴 셈이었다.
 반대로 대황국의 사량격발로서는 단단히 화가 날 일이기도 했다. 그의 병사들이 언제 한 성,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몇 개월이라도 걸린 적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사량격발은 청오랑국의 어기장군 도울과 모아합의 이 싸움이 자신을 시험하는 하늘의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천남로를 지나가지 않고서는 천하를 얻지 못할 것이다.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가 오직 너에게 달려 있다.
 
 황제이자 이대무후인 백모웅신 사량격발의 그 말을 전해 들은 모아합은 의자와 탁자를 걷어차 버리고 군막 밖으로 뛰어나와 맨땅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황제를 뵐 면목이 없어서이고, 황제에게서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분해서였다.
 반나절을 그렇게 땅에 엎어져 있던 모아합이 벌떡 몸을 일으킨 건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그는 언제 몸부림치며 울었느냐는 듯 태연했다. 툭툭 옷의 흙을 털더니 머리를 단정히 하고 내던졌던 관을 주워 다시 썼다.
 “소와 양을 잡아라! 아끼지 말고 술을 내와라! 오늘 밤은 마음껏 먹고 취한다! 자, 잔치다! 광대와 악대를 불러와라!”
 그날, 모아합의 진영에서는 밤새도록 고기 굽는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왁자하니 떠들고 웃는 소리에 황량한 벌판이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이십만의 대군이 먹고 마시고 유흥에 들떠 춤을 추어대기를 밤새 했던 것이다.
 
 척후를 통해 보고를 받은 어기장군 도울 각하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그는 대모성 앞 삼십 리 지점의 벌판에 주둔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쪽으로 곧게 나 있는 천남로를 등지고 보기(步騎) 오만의 군세로 낮은 구릉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숲을 배경 삼아 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대모성이 떨어지면 황도(皇都)까지는 빠른 말로 불과 사흘 거리였다. 도중에 가로막는 높은 산도 강도 없다.
 오십 리 밖.
 척망평(尺忘坪)이라고 불리는 이 드넓은 황무지 벌판 저쪽 끝에 대황국의 제일가는 맹장 모아합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
 그들이 이 밤에 취하도록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척후의 보고대로라면 경계병들마저 모조리 걷었다지 않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십만의 대군이 초병도 세우지 않은 채 마치 야유회라도 갖는 것처럼 시끄럽게 놀고 있으니 대체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모아합이 드디어 미친 것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도울이 저도 모르게 불만 어린 소리를 불쑥 내뱉었다.
 “찔러볼까요?”
 뒤에 공손히 서 있던 한 무장이 조용한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황동의 갑주에 붉은 전포를 걸친 삼십대 초반의 젊은 무장이었다. 깨끗한 용모와 정기 가득한 두 눈이 인상적인 사내. 참장 아국충(芽國忠)이다.
 그는 도울의 군진에 있는 열 명의 참장 중 가장 고참이기도 했다. 벌써 칠 년째 오직 도울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조부가 청오랑국의 대신을 오래 지냈고, 부친도 국공으로 불리는 귀족 집안의 자제였다. 그런 그가 무관의 길을 택하여 군문에 들어온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차례의 큰 싸움에서 충분히 무용을 떨치고 공을 세워 지금은 청오랑국에서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귀골로 생긴 그를 두고 샌님장군이라고 비웃던 자들도 이제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번 싸움에서 그는 청색 깃발에 매의 문양을 표기로 삼는 응신기(鷹神旗)를 이끌고 있었다. 오천의 기병단을 거느리고 도울의 우익(右翼)을 맡고 있는 우장군인 것이다.
 좌익(左翼)을 맡고 있는 좌장군은 야두차(野頭嵯)라고 하는 사십대 중반의 거친 사내였다. 그는 곰처럼 생긴 용모에 타고난 힘이 장사여서 너끈히 황소의 목을 비틀었는데, 역시 오천 기병단을 거느리고 도울 진영의 왼쪽을 책임졌다.
 잠깐 생각한 도울이 그 야두차를 바라보았다. 야두차의 털북숭이 뚱한 얼굴이 도울을 마주 본다.
 “네 생각은?”
 “소장의 머릿속에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공격이냐, 후퇴냐가 있을 뿐이지요.”
 도울이 빙긋 웃었다.
 전장에서는 용맹이 단연 뛰어나 믿음직스럽지만 군략을 세우는 일에는 답답한 위인이 바로 그였다. 그건 달리 말하면 그만큼 충성스럽다는 것이었으므로 도울은 그를 믿는 마음이 컸다.
 다음으로 도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뒤쪽, 군막의 기둥 곁이었다.
 거기 한 젊은 무장이 그림인 듯 조용하게 서 있었다.
 황보강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황보강이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비겁한 일입니다.”
 “비겁?”
 “승리한다고 해도 모아합은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뿐이냐?”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함정이라······.”
 도울이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아합이 진정 미치지 않았다면 적전(敵前)에서 저런 어이없는 짓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원하신다면 소장이 선봉을 맡겠습니다.”
 황보강은 도울 각하가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할 리 없다고 믿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가장 먼저 모아합을 치는 건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둘러선 참장들 모두에게 말했다.
 “모아합은 우리를 비웃고 자극하려는 것이다. 평정심을 흔들어놓겠다는 생각이겠지.”
 과연 진영의 병사들은 그 믿지 못할 소식에 모두 동요하고 있었다.
 도울이 빙긋 웃었다.
 “모든 병사가 배불리 먹고 마시도록 밥을 짓고 고기를 삶아라. 군량을 아까워할 것 없다. 우리도 오늘 밤과 내일 하루 편히 쉰다. 다들 허리띠를 풀어도 좋다.”
 참장들이 총사령의 그 엉뚱한 명령에 당황하여 술렁거렸다. 아국충과 황보강만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모아합은 병사들의 흥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그건 곧 사기가 된다. 그 상태로 내일 하루 푹 쉬게 하면 모두 몸이 근질거려 엉덩이를 들썩일 것이고, 말들도 짜증을 낼 것이다. 그때 갑자기 진격 명령을 내린다면 어찌 될 것인가.
 “이틀 후에 마지막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이기든 지든 결판이 나겠지.”
 흩어지는 참장들을 바라보던 도울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모두 죽게 될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될 게야.”
 우뚝 멈추어 선 황보강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도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너에게는 따로 맡길 일이 있다.”
 
 
 
 
 
 제2장 귀병(鬼兵)을 보다
 
 
 
 
 
 
 
 
 
 
 1. 귀호대(鬼虎隊)
 
 죽는다는 건 두렵다.
 장군은 죽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히 싸우라고 했다.
 죽기로 싸우면 살 것이요, 살겠다고 두리번거리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저 많은 적군의 엄정한 군기 앞에서 과연 죽음을 불사할 각오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정신이 멍해지고, 긴장으로 손에 땀이 배었을 것이다.
 상천하의 싸움 이후 계속된 몇 번의 큰 싸움을 치르면서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이었다. 이백 명이다. 운이 좋은 자들이라고 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도울 각하의 말처럼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몇 명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 좋은 자가 내가 될지, 다른 사람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게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미 정해져 있으련만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이란 눈을 가리고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다.
 멀쩡하게 지나다니던 길도 무섭고 불안해진다. 한 발 앞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운명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제가 정해놓은 길로 이끄는 폭군이다.
 
 “대장, 부탁이 있소.”
 “응?”
 우거진 풀을 살짝 젖히고 벌판을 노려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황보강이 곁을 돌아보았다.
 곰 같은 덩치에 온통 숯을 칠한 듯 시커멓고 철사 같은 수염이 무성하게 뻗쳐 있는 자.
 흔히 볼 수 없는 체구와 험상궂은 용모 때문에 누구나 그자를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지 못했다. 다들 검은곰이라고 부를 뿐 이름도 없는 자였다.
 황보강은 석 달 전에 그를 만났다. 도울 각하의 충의군으로 옮겨와서 정착한 뒤였다.
 그는 생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정이 거칠기 짝이 없어서 병영 내의 골칫덩이였다.
 동료들과의 화합은커녕 수틀리면 직속상관인 마병조장까지 두드려 패기 일쑤였으니, 누구도 그와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제가 속한 기병단의 군령(軍令)인 참장 아국충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군령의 호위대 열 명이 달려들어서야 겨우 뜯어말렸다고 하니 보지 않았어도 그 꼴이 눈에 선하다.
 고작 마창수(馬槍手)에 불과한 놈이 주먹을 불끈 쥐고 제가 속한 부대의 장군에게 대들었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일뿐더러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그동안 아국충은 검은곰 때문에 끙끙 속을 앓아오고 있었다. 그를 내쫓지도 못하고, 잡아두고 있자니 언제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하루도 군영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 날이 없는 망나니. 그러나 싸움이 벌어지면 그보다 더 든든하고 믿을 만한 자가 없었다. 능히 열 명, 스무 명의 몫을 혼자서 해내는 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상천하의 대전(大戰)을 눈앞에 두고 있는 때가 아닌가.
 붙여두고 있자니 골칫덩이요, 내쫓자니 아까운 자.
 하지만 아국충은 그자가 겁도 없이 자신에게 대들어 주먹질을 하려고 하자 더 참지 못했다. 군기를 문란케 한 죄로 참수하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안 총사령 도울 각하가 말렸다.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 놈이다. 귀호대로 보내라.”
 
 귀호대(鬼虎隊).
 굶주린 호랑이처럼 사납고 거친 부대로 명성이 자자한 독립된 조직이었다. 도울의 충의군(忠義軍)에 속해 있지만 별도의 명령 체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특별한 집단인 것이다.
 귀호장군으로 불리게 된 황보강의 별칭을 그대로 부대 이름으로 삼은 건 전장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과 과감성을 모두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직 황보강의 명령만을 들었고, 황보강은 총사령 도울의 명령으로만 움직였다.
 도울 각하의 군진으로 옮겨와 참장이 되자 황보강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손수 십만 충의군 속에서 오백 명을 가려 뽑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통제할 수 없는 골칫덩이들로만 뽑았다.
 처음 그가 그런 자들만으로 자신의 부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도울이 머리를 갸웃거렸고, 아국충은 크게 웃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중의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반년 동안 황보강이 그들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만의 병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상천하의 전투를 시작으로 계속된 몇 차례의 격렬했던 싸움에서 그 진가를 십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전장의 최선봉에 서서 싸웠다. 그리고 한 번 싸울 때마다 열에 일곱은 죽었다.
 살아 돌아온 자는 제 영광과 자부심에 취했을 뿐 죽은 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가치있는 건 죽은 자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잘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동정하기보다 다음 싸움에서도 승리하겠다는 투지로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할 뿐이었다.
 그런 신념을 가진 자들의 집단이니 귀호대는 도울의 충의군 내에서 가장 강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병영의 골칫덩이들을 끌어모아 그렇게 변화시킨 황보강의 능력에 대해서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경이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귀호대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늘어났다.
 그곳에 들어가 황보강과 함께해야 용사 중의 용사로 불리게 된다는 의식이 모두에게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보강은 악당 중에서도 으뜸가는 악당이라고 해야 할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점잖고 속이 깊으며 도량이 컸다. 그는 귀호대의 누구보다 더 큰 악당이면서 또한 악당들의 천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걸 느꼈기에 악당들은 누구나 황보강 앞에서 온순한 강아지가 되었다. 그리고 검은곰 역시 황보강과 딱 마주친 순간 그것을 느꼈다.
 
 군막 안에서 그들은 첫 대면을 했다.
 황보강은 넓은 탁자 위에 상천하 주변의 지형도를 펼쳐 놓고 백인장(百人將) 두 명과 함께 그것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신입이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툭 던지는 말이다.
 비위가 상한 검은곰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가 대장이라며?”
 황보강은 무심했다. 여전히 쳐다보지 않았다.
 “아국충에게 대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자로군.”
 “말을 할 때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해야 할 것 아냐!”
 응신기에서의 일을 들먹이는데 화가 난 검은곰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황보강은 여전히 지형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황보강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콧구멍을 후비며 이리저리 흘겨보고 훑어보던 검은곰이 기어이 성질을 부리고 말았다. 그로서는 여태까지 참아준 게 대단한 일이었다.
 “네가 지금 이 코딱지 같은 귀호대의 대장이라는 걸 믿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
 버럭 소리치더니 발을 들어 탁자를 걷어차 버렸다.
 아국충의 응신기 오천 기병 중 용력과 담력으로는 저를 따를 자가 없지 않았던가. 그들 속에서 제멋대로 행동해 왔던 검은곰이니 오백에 불과한 귀호대를 마뜩찮게 여길 만했다.
 꽝! 하는 소리가 났고, 부장들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황보강은 여전히 지형도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검은곰의 힘이라면 탁자가 통째로 밀려나 황보강을 저 구석에 처박아 버렸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요지부동이었고, 황보강은 여전했다.
 “이놈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검은곰이 다시 한 번 발을 들어 걷어찼다. 꽝! 하는 소리가 처음보다 더 크게 울렸으나 탁자는 여전히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그것을 누르고 있던 황보강이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귀찮은 놈이구나. 아국충같이 점잖은 사람이 화를 냈다더니 그럴 만해.”
 검은곰은 황보강의 팔 힘이 제가 걷어차는 힘을 능가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버텨봐!”
 세 번째로 다리를 번쩍 쳐들어 탁자를 걷어차려던 검은곰이 멈칫했다.
 한 발을 들어 올린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끔벅인다.
 황보강이 비로소 얼굴을 들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이런 한심한 놈이라니’ 하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검은곰이 발길질을 하지 못한 건 황보강의 그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눈이었다.
 검은곰은 처음으로 저를 주춤거리게 하는 눈빛을 보았다. 겁을 먹지는 않았지만 꺼리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깊은 눈빛이었다.
 ‘이건 예사 놈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으면서 흐르는 물에 담근 검은 돌처럼 번들거리는 그것 속에는 마주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묘한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검은곰은 그것에서 커다란 어둠과 광명을 동시에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한 발을 번쩍 쳐든 어정쩡한 모습으로 어리둥절해 있었다.
 ‘이놈은 미쳐도 아주 크게 미친놈이로군.’
 검은곰은 황보강의 눈길을 받은 순간 그가 악당 중에서도 정말 큰 악당일 것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러니 저와 동류(同類)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혈기가 한풀 꺾였다.
 ‘이런 놈이라면 좀······ 곤란해.’
 황보강이 들여다보던 지형도를 밀어놓고 무심하게 말했다.
 “죽을 테냐, 살 테냐?”
 “무슨 소리야?”
 “그 발로 나를 걷어차면 살고, 그 발을 내려놓으면 죽는다.”
 “걷어차라고?”
 황보강이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도 한 발을 쳐든 채 서 있는 검은곰을 바라볼 뿐이다.
 발만 내뻗으면 걷어찰 수 있다. 하지만 검은곰은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제기랄!”
 제 자신에게 버럭 화를 내더니 쿵! 하고 들어 올렸던 발로 땅을 굴렀다.
 “너는 죽을 것이다.”
 황보강이 단정하듯 말했다. 검은곰은 그 말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네가 뒈지는 걸 보고 난 다음에 죽을 거다!”
 곁에서 노려보던 부장들이 살기를 내비쳤으나 황보강은 개의치 않고 빙긋 웃었다.
 더욱 비위가 상한 검은곰이 소리쳤다.
 “자,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나를 죽일 건가? 너를 걷어차지 않았다고 말이야.”
 “그렇게 하겠다면?”
 “쳇, 그럼 한바탕해 보는 거지 뭐. 나를 죽일 만큼 센 놈이라면 죽여도 돼.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뒈지던가 무릎을 꿇는 거지.”
 검은곰이 씩씩거리며 군막 밖으로 달려나가더니 버티고 서서 옷소매를 둥둥 걷어 올렸다. 철사 같은 털이 무성하게 박혀 있는 울퉁불퉁한 팔뚝이 드러났다. 굵은 소나무 껍질 같다.
 황보강의 군막 앞에는 이미 많은 악당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검은곰이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호통 쳤다.
 “구경났어? 다들 꺼져 버리지 못해? 네놈들의 썩어버린 눈깔을 모두 뽑아버릴 테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포악을 떨지만 누구도 그런 검은곰을 만류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자도 없었다.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지켜볼 뿐이다.
 그때 황보강이 군막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며 말했다.
 “네가 힘을 써야 할 상대는 여기 있는 불쌍한 인생들이 아니야.”
 “역시 당신이란 말인가?”
 “너와 함께 싸우지 않는 자들인 거다.”
 “뭐라고?”
 “여기 있는 악당들은 전장에서 너와 함께 싸워줄 놈들이다. 이 넓은 세상에서 같이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을 달려가 줄 자는 이놈들밖에 없어. 네 목숨을 이놈들이 지켜줄 것이다. 너 또한 그렇게 해야지. 그러니 골육보다 가까운 자들 아닌가? 하루라도 더 목숨이 붙어 있기를 원한다면 이놈들을 네 자신보다 아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도 죽고 이놈들도 죽고 나도 죽는다. 곧 있을 상천하의 싸움에서 모두 죽어버리고 마는 거야. 너는 그걸 원하는 것이냐?”
 말을 듣는 동안 불같던 검은곰의 기세가 슬그머니 수그러들었다. 황보강을 흘겨보며 투덜거린다.
 “쳇, 귀호대라고? 뭐가 귀호대고 뭐가 악당들이야? 내가 네놈들에게 악당이 뭔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다.”
 그날부터 검은곰은 더 이상 포악을 떨지 않았다. 여전히 얌전한 강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난폭한 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천하의 싸움에서 그는 황보강과 함께 살아남았다.
 그게 다섯 달 전이다. 그리고 오늘은 척망평에서 또 한 차례의 큰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2. 죽음을 느끼는 자
 
 “이번 싸움에서 살아나면 대장은 휴가를 받는다고 들었소.”
 “그래서?”
 “그럼 이걸 좀 내 집에 전해주시오.”
 검은곰이 낡은 가죽 주머니를 불쑥 내밀었다.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누룩 한 덩이를 싼 것 같았다.
 “이게 뭐냐?”
 “돈이요. 제기랄.”
 “돈?”
 “그동안 받은 내 목숨 값이라오.”
 “이걸 왜 나한테 주지?”
 “나는 이번 싸움에서 뒈질 것 같거든.”
 “쯧쯧······.”
 황보강이 매섭게 흘겨보며 혀를 찼다. 큰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때에 재수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장은 이번에도 살아날 거야.”
 “너는 죽는 게 두려우냐?”
 검은곰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번뜩이며 빤히 바라보았다. 황보강이 그에게 찍어주듯이 말했다.
 “죽는 건 두려운 게 아니다. 치욕을 당하며 사는 게 두려운 거야. 나는 언제나 깨끗이 죽기를 원한다.
 “제기랄, 나도 그걸 원해.”
 “그럼 그렇게 해. 재수없는 말로 내 귀를 어지럽히지 마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수.”
 “······?”
 “그날 말이요, 정말 내가 대장을 걷어찼으면 어떻게 되는 거였지?”
 황보강이 피식 웃었다.
 “그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이라면 굳이 귀호대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다른 곳에서 더 큰일을 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검은곰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귀호대에 있는 악당들 중 정말 황보강을 걷어찰 만큼 용기가 있는 놈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걷어차지 못하면 죽는다는 건 그런 뜻이었군?”
 “나와 함께 있어도 될 놈이라는 허락인 거지. 귀호대에 몸담은 이상 살아남을 길이 없다. 모두 죽게 돼.”
 검은곰이 머리를 흔들었다.
 “다른 놈은 다 뒈져도 대장은 살 거라는 걸 난 알지.”
 “네가 어떻게?”
 “여태까지 그래 왔잖수? 상천하에서부터 지난 몇 차례의 싸움을 치르는 동안 귀호대가 싹 바뀌었지. 대장과 함께했던 놈들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런데 나는 오늘 뒈질 것 같거든. 하지만 대장은 이번에도 살아날 거야.”
 황보강은 잠시 검은곰을 노려보았다. 이놈이 비꼬는 건지 아닌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싸움이 끝나고 휴가를 받으면 내 집에 찾아가 이 돈을 빌어먹을 여편네한테 전해주란 말이요. 내 집이 황경산 아래 숙현에 있으니 여기서 멀지도 않아.”
 “네가 살아서 돌아가라. 그래서 네 마누라 손에 직접 쥐어줘.”
 “염병할. 나는 이번에 뒈진다니까 그러네.”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아직 몰랐수?”
 검은곰이 놀랍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황보강을 빤히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나같이 미련한 놈도 아는데, 대장 같은 사람이 그래 자신이 죽을지 살지 그걸 모른단 말이야?”
 “너는 그 꼴에 설마 도통했단 말이냐?”
 황보강이 비아냥거렸지만 검은곰은 어느덧 진지해져 있었다.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다 도통하는 거야. 도가 별건가? 나가고 물러설 때, 죽고 살 때를 아는 게 도지. 뒈질 놈은 누가 뭐래도 제가 먼저 알아. 대장이 아무 느낌이 없는 건 아직 뒈질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 거라우.”
 “그러니까 너는 지금 그걸 안다는 거지?”
 “물론이지. 나같이 무식하고 단순한 놈한테도 그런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틀림없어.”
 황보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 모아합의 시야에서 가려진 곳에는 부하들이 말고삐를 쥔 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세 차례 적운기와 싸우는 동안 삼백 명을 잃어 지금은 이백 명의 악당이 있을 뿐이다. 인원을 충원할 새가 없었으므로 오늘은 그들만으로 싸워야 한다.
 ‘저놈들도 그걸 느끼고 있을까?’
 황보강에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많이 죽을 것이다. 어쩌면 몰살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두 지금 검은곰이 말한 그런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있지 않겠는가.
 황보강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불쑥 내뱉은 그가 눈길을 돌려 벌판을 가득 뒤덮은 채 설진(設陣)하고 있는 적병들을 노려보았다.
 기병 팔만에 보명 십이만, 총 이십만의 군세였다. 천하를 노리는 백모웅신 사량격발의 일백오십만 대군 중 최정예로 꼽히는 적운기인 것이다.
 처음, 삼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호탕탕하게 쳐들어온 모아합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도울의 군단과 부딪친 지난 세 차례의 싸움에서 보기(步騎) 십만을 잃어 지금은 이십만으로 줄어 있었다. 그런 일은 아마도 대황국이 생긴 이래 처음일 것이고, 모아합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황보강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고 드넓은 척망평 끝에 여자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아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가물가물하게 보일 만큼 먼 곳이다.
 그 언덕 위에 깃발이 무수하게 꽂혀 있고, 여러 채의 커다란 군막이 쳐져 있었다.
 
 ***
 
 적운기의 총사령인 모아합은 호랑이 가죽을 덧씌운 높은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서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저 멀리 척망평 남쪽을 차지한 채 여기저기 흩어져 펄럭이고 있는 어기장군 도울의 깃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쳇.”
 모아합이 혀를 차고 뒤에 늘어서 있는 부장들을 돌아보았다.
 “저것 좀 봐라. 황제의 친위군(親衛軍)이라는 것들이 고작 저 모양이다.”
 척후들이 가져온 보고에 의하면 많아야 오만을 넘지 못할 군세였다. 지난 몇 번의 싸움에서 자신의 적운기를 잘 막아내며 버텼지만 그 와중에 반을 잃은 것이다.
 모아합은 도울을 비롯하여 저놈들 모두가 불쌍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한 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니 그렇다.
 십만 충의군이라며 우쭐대던 것들이 지금은 기껏 기병 이만에 보병 삼만이 남았을 뿐인데, 그중 오천은 병참을 운송하고 지키는 치중부대(輜重部隊)이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주력 전투병은 사만 오천인 셈이다.
 그에 비해 이쪽은 아직 기병 팔만에 보병 십이만 명이 남아 있었다. 치중부대는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삼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나와 그동안의 싸움에서 십만을 잃었으니 손해가 크지만 아직도 사기는 왕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수에서 여전히 도울의 충의군을 압도하고 있다.
 척망평을 양분하고 마주 보며 진을 벌린 위세만 보아도 당장 그 차이가 드러났다.
 이쪽이 긴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진용을 벌려서 벌판 북쪽을 온통 휘감았다면, 황제의 친위군이라는 것들은 이쪽에 한 무더기, 저쪽에 한 무더기 뚝뚝 떨어져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옹색해 보이기만 했다.
 저런 것들과 어떻게 세 차례나 싸우면서도 짓밟아 버리지 못했던 건지 의아해진다.
 “도대체 저것들은 설진법(設陣法)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란 말인가?”
 모아합이 짜증난다는 듯 툴툴거렸다.
 부장 사곤명기가 다가서서 그런 모아합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했다.
 “저쪽의 총사령은 금성(禁城) 안에서 황제를 끼고돌던 자입니다. 제대로 된 싸움을 지휘해 보았을 리가 없지요. 여태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뒷줄에 묵묵히 서 있던 부장 서평이 카랑카랑하게 소리치고 나섰다.
 “지난 보름 동안 그들은 세 번의 전투를 치르며 우리를 막아냈습니다. 비록 십만 정병이 오만 남짓으로 줄어 있다고 하나 백전불굴의 용사들만 남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머릿수에서 우세하다고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저 엉성한 포진(布陣)은 뭐냐? 네가 보기에는 저게 우스워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모아합이 짜증을 냈으나 서평은 굴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
 “그것은······.”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설 때마다 혁혁한 공을 세워 장군의 반열에 오른 서평이지만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적은 수로 다수를 상대하려면 한 덩어리로 뭉쳐서 힘을 모아야 하는 게 정법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병사들을 저렇게 여기저기 흩어놓으면 각개격파당해 버리고 말 것이다.
 충의군의 총사령인 도울이 그렇게 미련한 장수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서평으로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십방전(十方戰)을 꾀하는 모양입니다.”
 한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책사(策士) 우성(右城)이 조용히 말했다.
 황제인 사량격발이 총애하는 자인데, 황제가 그를 특별히 적운기에 보낸 건 계책을 내서 모아합을 돕는 한편 감군(監軍)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지라 모아합으로서도 우성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십방전?”
 “달리 십문종횡전(十門縱橫戰)이라고도 하는 것이온데, 옛적 석국(石國)의 오온(五溫)이 각기 천 명씩 열 무리의 병사를 거느리고 십방에서 적을 어지럽게 들이쳐 삼십만의 미평국(米平國) 병사들을 궤멸시켰던 전법이지요.”
 “그런 일이 있었어?”
 모아합이 비대한 몸을 흔들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아직 기병 팔만에 보병 십이만이 남아 있어서 여전히 대군이라고 할 만하나 척망평을 모두 가릴 수는 없습니다. 넓게 퍼져서 에워싸려면 자연히 진이 엷어질 수밖에 없으니 저들은 죽을 각오로 그것에 부딪쳐 우리를 흩어놓고 그 틈새로 마음껏 드나들겠다는 것입니다. 도둑 하나를 잡기 위해서 열 포졸이 부족하듯이 우리 병사들은 적의 무리를 잡기 위해 허둥댈 것이고, 피해는 저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입게 될 것입니다.”
 “쳇.”
 가만히 듣고 있던 모아합이 끌탕을 쳤다.
 “내 생각은 그 반대야. 말하자면 우리는 그물을 지닌 어부고 저놈들은 물속을 오락가락하는 고기 떼 같다는 거지. 그물을 활짝 펴서 사방을 덮는데 고기 떼 몇 무리가 재빠르게 움직인들 달아날 수 있겠어?”
 책사 우성이 조용히 웃었다.
 “좋으신 생각입니다. 하지만 도울이 십방진을 치고 십문종횡전을 획책하고 있다면 이미 살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입니다. 죽기로 싸우려들 텐데, 그러면 저들을 죄다 죽인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그보다 많은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사분오열되어서 패퇴할 것이고 저놈들이 승리하게 된다고?”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우성이 얼굴을 붉히고 겸연쩍게 웃었다.
 
 3. 출병(出兵)
 
 모아합의 머릿속에 불만이 가득했다.
 ‘제기랄 놈의 서생 같으니. 저는 편한 곳에 앉아서 느긋이 구경이나 하고 있는 팔자니 장난치듯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싸움이라는 게 어디 장기판의 졸을 움직이는 것 같은 줄 아느냐?’
 우성의 콧대를 꺾어놓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저놈들을 짓밟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살심이 솟구친다.
 ‘도울을 붙잡아 이 서생 놈이 보는 앞에서 손수 목을 치고 말겠다.’
 지그시 어금니를 악무는 모아합의 마음속에는 우성의 면전에서 저의 용병술과 적운기의 용맹을 자랑해 보이겠다는 치기 어린 감정도 있었다.
 황제에게 제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알리는 일도 될 것이다.
 “뭘 더 기다리는 거냐? 날이 저물 때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모아합의 짜증 섞인 음성에 군막 뒤에 늘어서 있던 부장들이 갑주를 쩔그렁거리며 부리나케 흩어졌다.
 중얼거리듯 내뱉은 모아합의 그 몇 마디 말이 드넓은 척망평에 갑자기 칼끝 같은 긴장감을 몰아왔다.
 불어오던 바람도 놀라 잠잠해지고, 누웠던 풀잎들이 올올이 곤두서 파르르 떨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마저 뚝 끊어진 절대의 적막이 무겁게 내리덮인다.
 
 ***
 
 쿵 !
 멀리서 뇌성처럼 무거운 포성이 들려왔다.
 “시작한다!”
 황보강이 먼지구름이 자욱이 일어나고 있는 벌판 저쪽을 가리켰다.
 기치창검이 햇빛에 번쩍이고, 말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
 먼지구름 속에 검은 띠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데, 그것이 드넓은 척망평을 쓸 듯이 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다.
 모아합이 자랑하는 철기(鐵騎)가 모두 나온 것이다.
 사람은 물론 말까지 검은 철갑으로 뒤덮은 무쇠 덩어리들이다.
 
 “조금만 더!”
 진문 안에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고 있는 벌판을 노려보던 아국충이 이를 악물었다. 말고삐를 움켜쥔 손아귀에 땀이 밴다.
 그의 뒤에 늘어서 있는 오천 기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국충이 뒤를 돌아보고 버럭 소리쳤다.
 “기다려! 기다린다!”
 오천 기의 전마(戰馬) 중 무려 일천 기가 항아리처럼 커다란 검불 더미를 뒤에 매달고 있었는데, 말들도 긴장하여 앞발로 땅을 긁으며 투레질을 했다.
 도울의 충의군은 오늘의 싸움을 화공(火攻)으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 계책을 낸 사람은 바로 황보강이었다. 총사령의 군막에 모여 마지막 병략 회의를 할 때였다.
 적을 상대할 방법을 묻자 여러 장군들이 제각각 큰 소리로 묘안을 꺼내놓느라고 시끌벅적해졌지만 도울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총사령의 침묵에 군막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도울이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황보강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눈으로 묻는다.
 황보강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승산은 없습니다.”
 무정하리만큼 단호한 말이었다.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장군들은 물론, 도울마저 눈살을 찌푸렸으나 황보강은 개의치 않고 남의 말을 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하지만 충의군의 명예를 천하에 알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량격발과 모아합은 척망평에서의 싸움을 결코 잊지 못하겠지요.”
 “어떻게?”
 도울이 비로소 입을 열어 물었다.
 “모아합의 기병 중 철기가 일만인데 그들은 세상을 두렵게 하는 무적의 철갑기병입니다. 지난 세 차례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모아합은 장기판에서 차(車)를 밀어내듯 그것들을 밀어내 선봉으로 삼을 것입니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일이다. 장군들이 어두워진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에게는 모아합의 철갑기병단을 상대할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괴멸시킨다면 전혀 없던 승산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황 대장에게 비책이 있소?”
 성급한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황보강이 허공을 향해 대답했다. 무심한 말투고 무심한 얼굴이었다.
 “날은 건조하고 오화평에는 잡풀이 많습니다. 농부들이 늦은 가을에 들불을 놓는 것은 해충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손으로 잡아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도울은 말이 없고, 그의 장군들은 황보강의 말을 듣기 무섭게 버럭 화부터 냈다.
 “화공이라니!”
 “눈앞의 적만 해도 숨이 목구멍에서 막힐 만큼 벅찬데 불기둥까지 안고 싸우라는 거요? 차라리 놈들 앞에서 칼을 물고 자결하라고 하지 그러시오?”
 “대체 황보 대장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소. 이 싸움에서 우리가 아예 몰살당하기를 바라는 거요?”
 장군들은 총사령 도울 각하의 군막 안이라는 것도 잊은 채 흥분하여 소리쳐댔다.
 황보강이 그들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 살아날 자신이 있는 사람은 굳이 화공을 따를 필요가 없겠지. 그게 누구요?”
 장군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걸 모두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니······.
 그 말을 병사들에게 전하면 당장 사기가 꺾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싸우면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병사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불을 지고 나가 싸우라고 하면 다들 기막혀 할 게 뻔했다.
 철기의 발굽에 짓밟혀 죽거나 내가 지고 있는 불에 타 죽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죄다 창칼을 내던지고 병영을 이탈해 달아나 버릴 것이다.
 도울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깊은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
 그의 심중에 어떤 계획이 들어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 노장군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때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매번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장군들은 일제히 도울을 바라보았다. 이번 싸움도 그가 있는 한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던 아국충이 탁자를 꽝! 내려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황보 대장의 계획에 찬성하오! 모두 반대한다면 나 혼자서라도 불덩이를 지고 달려나갈 것이요!”
 과격한 그의 말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아국충이 싸움에 임해서는 후퇴를 모르는 용장이지만 평소에는 온화하고 순종적인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말없이 병략 회의에 임했고, 총사령 도울 각하의 결정이 내려지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복종했다. 그리고 매번 충의군의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 아국충이었기에 누구보다 도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침묵을 깨고 황보강의 계책에 따르겠다고 나선 건 여태까지 없던 일이다. 아직 도울 각하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 아닌가.
 아국충의 낭랑한 음성이 모두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렸다.
 “나는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소. 때문에 나를 믿어준 병사들에게 조금의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소. 원하지 않는 병사는 고향으로 돌려보내겠지만, 여전히 나를 따르겠다는 병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와 함께 죽을 것이오.”
 단호함으로 시작했던 그의 웅변은 비장함으로 끝났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깬 사람은 도울이었다.
 “황보강의 계책을 채택하겠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게 결정되었다. 도울 역시 척망평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대가 귀호대를 이끌고 모아합의 철기를 후방의 경기병들로부터 고립시켜라.”
 모아합의 경기병단은 무려 칠만이었다. 그들이 앞서 달려나온 철기를 지원해 준다면 어떠한 계책도 소용없다.
 도울은 누가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화공을 펼친다고 해도 일만이나 되는 철갑기병들을 괴멸시키기 위해서는 이쪽의 보기(步騎) 오만 중 적어도 삼만은 그것들에게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남은 이만의 군사는 보병들을 상대하기도 벅찰 테니 모아합의 경기병단을 저지하기 위해 따로 병사를 빼낼 여유가 없다.
 남은 건 황보강의 귀호대뿐이다.
 고심 끝에 도울은 그들을 택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고작 이백 명의 경기병 아닌가.
 누구도 그 숫자로 모아합의 칠만 경기병단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건 도울도 잘 아는 사실이고, 황보강도 그렇다.
 “잠시만 그들의 진군을 늦추면 된다.”
 도울이 안타까운 눈으로 황보강을 바라보며 변명하듯 그렇게 덧붙였다.
 황보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차가운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매번 가장 위험한 싸움에 그와 귀호대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죽어갔다. 도울은 그 대가로 언제나 승리했다.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군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눈길을 떨어뜨리고 침묵한다.
 “명을 받듭니다.”
 황보강이 조용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울의 군막을 나가는 그의 눈앞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스쳐 갔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그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되겠지.’
 두려움은 없었다. 죽으면 죽을 뿐이다. 후회도 없다.
 
 4. 나를 따르라
 
 “우리는 불을 지고 적진 속에 뛰어들어 가야 한다. 살 생각은 버려라.”
 응신기의 군진에 돌아온 아국충이 사실대로 말했다. 병사들은 놀라고 절망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가장 믿고 따르는 장군 아국충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원치 않는 자는 떠나라. 누구도 비겁하다고 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죽겠다는 자는 남아라. 나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서 죽어줄 것이다.”
 아국충의 이글거리는 눈이 낯익은 병사들을 훑었다. 군진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갔다.
 자리를 이탈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천 병사가 침묵으로 자신들의 결의를 알렸듯 아국충도 침묵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저기 저렇게 철벽처럼 밀려오고 있는 모아합의 철기들을 노려보고 있다.
 아국충은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충의군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아까울 게 없었다. 내 목숨도 그렇다. 모든 걸 다 쏟아붓 고, 그래서 승리하든지 장렬하게 죽든지 할 뿐이다.
 아국충은 아주 잠깐 금성에 두고 온 처자식을 생각했다. 승상부의 따님이었던 그의 부인은 얼마 전에 서른 살을 넘겼는데, 아직도 그 아름다움으로 금성의 꽃이라 불리고 있었다.
 아국충은 그녀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금년에 열두 살이 된 그 아이는 막 피어나기 시작한 모란꽃처럼 화사하다.
 이제는 영영 사랑하는 그 두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그를 비통하게 했다.
 ‘승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장렬히 죽으리라.’
 아국충은 그런 다짐으로 자칫 어지러워질 뻔한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했다.
 두두두두
 대지를 뒤흔드는 무거운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욱이 일어난 먼지구름이 긴 띠를 이루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조금만 더.’
 아국충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악문 이 사이로 거친 숨이 새 나온다.
 일만의 철기. 모아합의 자랑인 무적의 철갑기병. 그들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쪽은 고작 이만의 경기병들이 남았을 뿐이니 전력 면에서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저놈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려갈 테다.’
 아국충이 부서지도록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쏴아아아―
 멀리서 소나기가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갑자기 밤이 된 것처럼 컴컴해진다.
 뒤쪽에 위치하고 있던 다섯 개의 병진에서 이만 오천의 보군과 기병이 일제히 활을 쏜 것이다. 궁시(弓矢)가 하늘을 뒤덮어 태양마저 가렸다.
 그것이 응신기의 머리 위를 지나 모아합의 철기들을 향해 검은 구름처럼 몰려가는 걸 본 아국충이 뇌성 같은 군령을 터뜨렸다.
 “나를 따르라!”
 우렁차게 울부짖은 그의 전마가 진문을 박차고 달려나갔고, 그 뒤를 따라 응신기 오천의 경기병이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내달았다.
 
 ***
 
 “대장, 저기!”
 거친 숨을 씩씩거리던 검은곰이 남쪽을 가리켰다.
 어기장군 도울의 충의군은 다섯 무더기로 나뉘어 서로 오 리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포진하고 있었는데, 방패를 꽂아서 진을 삼았다. 그 진 안에서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다섯 개의 군진에서 쏘아져 나가는 궁시가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쏴아아아
 그것들이 웅장한 바람 소리를 내며 귀호대가 숨죽이고 있는 서쪽 언덕 앞을 지나갔다.
 철기들은 그 화살의 소낙비 앞에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일만의 기마가 세 무리로 나뉜 채 삼면을 가로막고 구르듯 쏟아져 나올 뿐이다.
 쨍강거리는 귀 따가운 소리가 벌판을 가로질러 들려왔다.
 근접한 거리에서 날리는 강전이 아닌 다음에야 벌판을 건너 멀리 날아가 떨어지는 궁시쯤은 철기들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온통 검은빛의 철제 투구와 갑주로 몸을 감싸고 있는 그것들에게는 그저 시끄럽고 귀찮은 일일 뿐이다.
 철기의 무서움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에게는 창검이 소용없고 화살도 무용지물인 것이다.
 갑주 소리를 쩔그렁거리며 짓밟고 지나가는 곳에는 생령의 기운이 모두 끊어지고 만다.
 그 철기가 무려 일만이었다. 나머지 칠만의 기병은 이쪽 충의군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들이었는데, 본진이 있는 북쪽 언덕 아래 길게 늘어서서 다음 돌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철기가 적의 예봉을 짓밟아놓으면 비로소 경기병들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가는 것이다.
 철기는 그 무장 때문에 말도 사람도 움직임이 느리고 빨리 지친다. 그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막강한 위력으로 초전에 적의 예봉을 꺾어놓은 뒤에 멈추어서 무거운 몸을 추스르며 잠시 숨을 돌려야 한다. 그러면 경기병들이 뛰어들어 바람처럼 내달리며 적을 휩쓰는 것이다. 그리고 보군이 뒤를 따라 쏟아져 들어와 기병을 지원하면서 전장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것이 철기를 앞세운 기병전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모아합은 우세한 머릿수와 철기를 믿고 그런 기병전으로 국면을 이끌어가려 하고 있었다.
 충의군에는 남아 있는 철기가 없었다. 이만의 경기병이 다인데, 그것으로는 철기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조금만 더.”
 황보강이 주먹을 움켜쥐고 긴장으로 뻣뻣해진 머리를 세우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이 나가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 뛰는 소리가 큰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귀에 들린다.
 이쪽은 이백의 경기병이었다. 그것으로 칠만이나 되는 모아합의 기병단을 막아야 한다.
 누가 들어도 어처구니없는 명령이었지만 오백 명에서 이백 명으로 줄어 있는 귀호대의 악당들은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대장인 황보강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먼저 적의 기병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귀호대의 무리는 목전에 다가와 있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
 “열렸다!”
 황보강 곁에서 거친 숨을 씩씩거리던 검은곰이 버럭 소리쳤다.
 남쪽, 다섯 개로 나뉘어 있는 충의군의 진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준비해!”
 그것을 본 황보강이 소리쳤고, 언덕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백 명의 수하가 창검을 쥐고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마지막 명령이 떨어지면 일제히 몸을 숨기고 있던 언덕에서 뛰어나가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갈 것이다. 전마들도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며 땅을 긁어댔다.
 “대장, 저것 봐! 응신기다!”
 검은곰이 열에 들떠서 소리쳤다. 저희들이 적군 가까이 숨어들어 와 몸을 감추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것이다.
 과연 왼쪽 진문을 무너뜨리고 뛰어나오는 것은 응신기의 오천 기병이었다.
 선두에서 장군 깃발을 펄럭이며 미친 듯 달려가고 있는 것이 군령인 우장군 아국충이라는 걸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말 뒤에 커다란 공처럼 뭉쳐진 건초 더미를 매달고 있었는데, 그것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꽁무니에 달라붙은 항아리만 한 불덩이에 쫓겨서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아국충뿐만이 아니었다. 오천 응신기의 기마 중 무려 일천 기나 되는 기병이 모두 그와 같은 불덩이를 매단 채 모아합의 철기들을 마주 보며 곧장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둥치듯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척망평을 뒤덮었다. 중앙에 있던 총사령 도울의 군진이 활짝 열리더니 백여 대의 치중을 실은 마차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마차마다 가득 쌓여 있는 곡식과 건초 더미에 불이 붙어서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식량과 건초를 모두 태워 버렸으니 도울은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죽든지 살든지 이 한 번의 싸움으로 결판을 내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소중한 군량에 저렇게 불을 붙여 끌고 나가지 않을 것이다.
 백여 대의 마차는 그대로 불마차가 되었다. 그것들이 앞서 뛰어나간 응신기와 선두 다툼을 하듯 맹렬하게 철기의 거대한 파도를 향해 부딪쳐 갔다.
 왼쪽과 오른쪽에 뚝뚝 떨어져 있던 다른 진문들도 일제히 열렸다. 좌장군 야두차가 이끄는 오천 흑룡기의 뒤를 따라 일만 오천의 보군이 구르듯 쏟아져 나왔다.
 흑룡기의 기병들도 응신기와 마찬가지로 말 뒤에 커다란 불덩이를 매달고 있었다.
 놀란 말은 주인의 재촉이 없어도 제 스스로 죽을힘을 다해 앞만 바라보고 달려갔다.
 먹구름처럼 무섭게 몰려오고 있는 일만 철기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그리고 거칠 것 없이 대지를 짓밟아오던 철기들이 주춤거렸다.
 도울의 충의군이 화공으로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척망평에는 마른 풀이 가득하다. 그것들에 옮겨 붙은 불이 바람을 타고 북으로 치달았다. 그러자 매캐한 연기가 벌판을 뒤덮었고, 넘실대는 불길이 빠르게 번졌다.
 “지금이다! 가자!”
 황보강이 가슴에 붙이고 있던 차가운 땅을 밀고 벌떡 뛰어 일어났다.
 막 응신기의 선두와 철기가 충돌하는 걸 본 직후였다.
 언덕을 달려 내려간 그가 말 위에 뛰어올라 칼을 뽑아 들었다.
 “죽는 게 두려우냐?”
 “와아 !”
 이제는 숨죽이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귀호대의 악당들이 미친 듯한 고함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죽이지 못하게 되는 걸 두려워해야 할 때다!”
 “와아 !”
 “잔꾀는 필요없다.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똑바로 적진을 가르고 나가 모아합의 철기를 고립시킨다! 뒤돌아볼 필요 없다! 죽은 자는 버린다! 부상당한 자도 버린다! 나는 오직 살아서 따르는 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게 싫은 놈은 지금 빠져라!”
 “와아 !”
 악당들의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병장기로 곁에 있는 자들의 투구와 갑주를 마구 두드리며 미친 듯 고함쳐 댄다.
 황보강이 마지막 다짐을 해두었다.
 “우리의 상대는 칠만의 기병단이다. 우리는? 이백 명에 지나지 않다. 두렵지 않으냐?”
 “와아 !”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악을 쓰는 것이다.
 황보강은 그들이 지나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리기를 바랐다.
 이런 때에, 이런 상황에서 광기보다 무서운 힘은 없다. 그것은 마약처럼 이성을 마비시키고 오직 한 가지 환상만을 갖게 해준다. 나는 살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의 바람처럼 이백 명의 악당은 충분히 이성을 잃었다.
 그때를 기다렸던 황보강이 목청껏 소리쳤다.
 “가자!”
 그의 말이 두 발을 높이 들고 으르렁거리며 울더니 튕겨진 것처럼 뛰어나갔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악당들의 함성과 함께 이백 기의 말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황보강의 뒤를 바짝 따랐다.
 
 
 
 
 
 제3장 전장(戰場)의 칼
 
 
 
 
 
 
 
 
 
 
 1. 광기(狂氣)
 
 “저건 뭐냐?”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모아합이 손가락으로 서쪽 언덕을 가리켰다.
 거기에 이백 기의 경기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펄럭이는 깃발도 없고 대오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였다.
 무기도 제각각이어서 창과 칼, 철퇴와 낭아봉에 구겸(鉤鎌)을 쥔 자까지 있는데다가, 정규군에게서 보이는 엄정한 질서도 없었다. 그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미친 듯이 철기의 배후를 타고 이쪽으로 달려올 뿐이다.
 마치 산에서 봉물을 노리고 쏟아져 내려오는 산적들 같았다. 그 무질서함이 가소로웠지만 멀리서도 그들의 거침없는 기세와 투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의아하다.
 눈썹을 모으고 바라보던 부장 서평이 놀라 소리쳤다.
 “귀호대입니다!”
 “귀호대?”
 이곳에서 귀호대가 보여준 악과 용맹은 모아합에게도 충분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세 번의 싸움을 통해서 모두 죽였다.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아직 남은 놈들이 있다니 의아해졌다.
 “그놈이 아직 살아 있었나? 이름이······.”
 “황보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놈.”
 모아합이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지겨운 놈이군. 악연이야.”
 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 가장 속을 썩인 게 바로 그놈이라는 걸 다시 생각해 내자 울컥 화가 났다.
 그가 석천강의 싸움에서 처음 나타났다는 걸 기억해 냈는데, 그때만 해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후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끼어들어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화가 난 모아합은 황보강의 목에 황금 열 근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놈의 목을 들고 오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놈은 비웃기라도 하듯이 지난 세 차례의 싸움에서도 결정적일 때마다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그러더니 오늘 또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눈앞의 상황이 그걸 확신케 해주고 있지 않은가.
 모아합이 채찍을 들어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핫! 그런데 저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이 뭘 하려고?”
 철기들이 불을 지르며 달려든 충의군의 선봉과 부딪치고 있는 동안 이백 기의 귀호대 기마는 어느덧 철기와 경기병들 사이의 공간으로 쐐기처럼 박혀들고 있었다.
 곁에서 눈썹을 모으고 가만히 지켜보던 책사 우성이 빠르게 말했다.
 “좋은 전법입니다.”
 “뭐가?”
 “어기장군 도울이 병법을 아는군요. 별동대를 보내 본진의 진로를 가로막고 철기를 고립시키려는 겁니다.”
 “핫! 별동대라고? 저것들이?”
 모아합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본진에서 말고삐를 틀어쥔 채 대기하고 있는 이쪽의 경기병은 무려 칠만이나 되지 않는가. 그것을 고작 이백여 명으로 보이는 저것들로 막겠다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황보강이라는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거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어리석은 짓이 틀림없다.
 “이천 기를 데려가라. 창검을 쓸 것도 없이 그냥 꾹꾹 밟아버리고 와.”
 우성을 흘겨본 모아합이 귀찮다는 듯 서평에게 손짓을 했다.
 “복명!”
 그러잖아도 온몸이 근질거리던 서평이다. 그가 재빨리 명을 받고 군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부드득!
 곁에서 끔찍하게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힐끗 돌아본 곳에 언제 따라붙었는지 검은곰이 말 목을 안고 찰싹 엎드린 채 핏발 선 눈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보강의 눈길을 받은 그가 활짝 웃었다. 붉은 입을 쩍 벌리고 누런 이빨을 다 드러내는 그 소리없는 웃음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는 백 근이나 나가는 커다란 낭아봉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거무튀튀한 쇠몽둥이인데, 손가락 굵기만 한 가시가 무수하게 박혀 있는 흉측한 것이었다. 한번 얻어맞으면 말과 사람이 함께 짓이겨지고 말 것이다.
 혀를 찬 황보강이 칼자루를 움켜쥔 채 말 목을 감싸 안고 더욱 납작 엎드렸다.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자들도 모두 그와 같이 말 등에 찰싹 달라붙어서 미친 듯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서로를 격려하고 용맹을 자랑하는 함성도 지르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남쪽에서 시작된 불길은 좌우로 긴 띠를 이루며 빠르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 앞에서는 무적의 철기도 어쩔 수 없었던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우장군 아국충이 여전히 말 뒤에 불덩이를 매단 채 장창을 휘두르며 맨 처음 그 철기들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따라 오천의 기병이 바위틈을 파고드는 쐐기처럼 박혀들어 갔다.
 함성과 창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 말 달리는 소리로 드넓은 척망평이 들끓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그 싸움의 격렬한 소리를 음미하듯 듣고 있던 황보강이 벌떡 말 위에서 몸을 세우고 활을 뽑아 들었다. 강전 한 대를 시위에 걸며 재빨리 사방을 훑어본다.
 다섯 방향에서 일제히 달려든 도울의 이만 기병이 모두 철기의 대열에 달라붙고 있는 게 보였다.
 자욱한 연기와 불길 속에서 그들은 철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뒤를 삼만 보병이 받쳐 주고 있다.
 아직 장군기는 살아서 펄럭이고 있었다.
 함성과 비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철기들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황보강은 철기를 구하기 위해 대오를 갖추고 급히 몰려 나오고 있는 적운기의 경기병들을 노려보았다. 본진의 칠만 중 삼만이 일파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이쪽을 무시한 채 오직 남으로 말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귀호대는 그들의 옆구리를 찌르는 형국이 되었다.
 저것들이 불길에 갇힌 철기들과 합류하기 전에 갈라놓아야 한다. 일각이라도 발을 붙잡아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이쪽은 목숨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온다!”
 황보강이 힘껏 활시위를 당기며 크게 소리쳤다.
 저 앞에 모아합의 본진에서 떨어져 나온 이천 기가 방향을 틀더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천 대 이백이다.
 말은 미친 듯 내닫고 황보강의 활은 만월처럼 휘었다.
 황보강도 검은 곰처럼 입을 활짝 벌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칠만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뛰어든 귀호대가 아닌가. 이천의 경기병이 성에 찰 리가 없다.
 시잇!
 팅, 하는 시위 소리와 함께 강전 한 대가 이백 보 앞까지 다가온 자를 향해 날아갔다. 선두에서 무어라고 괴성을 지르며 큰 칼을 휘두르고 있는 적장을 향해서였다.
 “제법이다.”
 그자가 칼을 휘둘러 첫 번째 화살을 쳐내는 걸 보며 황보강이 다시 활짝 웃었다.
 양쪽의 말들이 미친 듯 서로를 마주 보고 달리니 이백 보이던 거리가 순식간에 백오십 보로 줄었고, 다시 백 보로 줄었다.
 시잇!
 두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황보강의 활 솜씨는 명궁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것이었다. 백 보의 거리라면 빠르고 강하며 정확한 그의 활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
 그가 날린 두 번째 강전이 미처 쳐낼 새도 없이 선두의 적장에게 날아들었다.
 “으앗!”
 투구를 뚫고 박힌 강전이 서평의 뒤통수로 빠져나왔다.
 칼을 쥐고 수많은 전장을 치달리며 용맹을 떨쳤던 장수 한 명이 황보강의 첫 제물이 된 것이다.
 쏴아아아
 그 비명을 신호로 삼은 듯 이백 대의 강전이 일제히 날았다. 백 보의 거리가 그사이 오십 보로 줄어들었으니 화살들은 허공을 꿰뚫고 직선으로 뻗어나간다.
 직사(直射)가 곡사(曲射)보다 빠르고 강력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귀호대의 악당들이 지니고 있는 건 모두 강궁이었다. 오십 보의 거리쯤은 그냥 접는다.
 선두에서 마구 소리치며 무섭게 달려들던 자들이 무더기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십 보 앞에서 다시 한 번 굴러 떨어지더니 드디어 으르렁거리는 말들의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황보강은 활을 버리고 칼을 쥐었다.
 “끼야아아 !”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야수의 부르짖음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고, 칼이 흰 빛을 뿌리며 큰 원을 그리고 떨어졌다.
 깡―! 하는 쇳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쏟아졌다. 황보강의 첫 칼을 막아낸 자가 잘려진 창과 함께 이마를 찍히고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우하하하하 !”
 그의 왼쪽에서 검은곰의 끔찍한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리고 붕붕거리는 바람 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그의 무지막지한 낭아봉은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으깨놓았다. 살이 뭉개지고 뼈가 박살 나 흩어진다. 말과 사람의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황보강의 칼은 날카롭고 맹렬하며 깨끗했다. 지칠 줄을 모르고 머뭇거릴 줄도 모른다.
 번쩍이는 그것이 신들린 것처럼 종횡으로 찍고 후려치는 곳에 남는 건 매끈하게 쪼개진 투구와 골육일 뿐이었다. 비명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백 명의 악당 모두 용맹과 투지에 있어서는 그와 같았다. 각자 제가 지니고 있는 모든 힘을 남김없이 끌어내 오직 이 한 번의 싸움에 쏟아부었는데, 이것이 저를 뽐내 보일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직 앞을 보고 달릴 뿐 내가 몇 놈을 죽였는지, 내 주위에 누가 남아 있는지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저도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찍어 넘기고 달려갈 뿐인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몸부림 같은 처절함. 그리고 드디어 앞이 확 트였다.
 “뚫었다!”
 흠뻑 피를 뒤집어써서 혈인(血人)처럼 되어버린 황보강이 크게 소리치고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미친 듯 앞으로만 질주하고 있는 그의 말이 뚫고 나온 적들로부터 그를 점점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검은곰, 막충, 구정, 하길상, 장육······.”
 적들을 등지고 속속 빠져나오고 있는 부하들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며 그는 웃었다.
 
 남쪽에서 시작된 불길은 이제 벌판 전역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이글거리며 하늘로 치솟았고, 사람과 말들의 비명 소리, 아우성 소리가 땅을 뒤덮었다.
 응신기와 흑룡기의 기병들은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고 있는 불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력으로 달려 도망쳐 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불에 타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렇기도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악에 치받쳐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전의(戰意) 앞에서 모아합의 철기들이 멈칫거렸다. 빠르게 번져 오고 있는 불길보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적의 무모함이 더 무섭다.
 “미친 것 아닌가!”
 군막 안에서 모아합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기장군 도울이 미쳤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제 병사들마저 태워 죽이려 할 것인가.
 “저놈들도 미친놈들이다!”
 그가 자신의 철기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이쪽으로 쏟아져 오고 있는 충의군의 기병과 보병들을 가리켰다.
 장군이 불속으로 뛰어들라고 명령했다고 해도 그렇지, 그 명령을 고지식하게 따라서 제 몸을 불구덩이 속에 처넣는 놈들은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도울의 충의군 놈들은 그러므로 모두 미쳤다.
 
 2. 모아합을 노리다
 
 모아합은 짜증이 났다. 이십만 대군을 투입했으면서도 고작 오만의 적군을 뜻대로 짓밟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
 더구나 그렇게 믿었던 철기가 이제는 대오를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지 않은가.
 빠르게 번져 오는 불길은 느린 철기의 발목을 핥고 있었다. 일부는 불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무너져 일어나지 못한다.
 남은 철기들이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는데, 그 뒤를 응신기와 흑룡기의 경기병들이 바짝 쫓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럴 때는 철갑으로 중무장한 철기의 느려 터진 모습이 답답하기만 했다.
 도울의 이만 경기병은 얼른 보기에도 그 수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을 등지고 있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철기는 불길과 연기를 안고 있다.
 놀라고 겁먹은 말들은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한사코 꽁무니를 빼거나 방향없이 날뛰기만 했다. 도저히 잘 훈련된 전마(戰馬)들이라고 믿을 수 없는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거기에 비해 등에 불을 지고 있는 충의군의 기마들은 살기 위해 무작정 앞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저절로 맹렬하게 철기들을 쫓아 쳐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저런, 저런!”
 모아합이 다시 팔걸이를 두드리며 혀를 찼다.
 기어이 철기의 대열이 물 맞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적의 경기병들이 그것들을 뚫고 이리저리 내달았고, 뒤따라 달려온 보군들이 휘두르는 도끼와 쇠도리깨에 철기들은 머리와 다리가 으깨져서 주저앉았다.
 말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철기병들은 이제 쓸모없는 고철 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몸을 지켜주던 무거운 철갑이 오히려 형구(刑具)가 되었던 것이다.
 철갑의 무게 때문에 한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굼뜨고 힘들었다. 보군들의 눈에는 그런 그들이 병든 멧돼지처럼 보일 뿐이다.
 
 이쪽에서 삼만 경기병이 철기를 돕기 위해 일제히 달려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십 리 밖이었다.
 그 경기병들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듯 서쪽 언덕에서 내려온 한 무리의 귀호대가 미친 듯 질주해 오고 있다.
 그것을 본 모아합이 다시 혀를 찼다.
 “저놈들도 단단히 미쳤어. 도울의 진중에는 온통 미친놈들뿐이다.”
 그 미친놈들이 서평의 이천 기병을 가볍게 뚫고 나오더니 처음의 기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처음 이백 기이던 것이 백오십 기로 줄어 있기는 했다. 그러니 더욱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천 기를 뚫고 나오면서 고작 오십 기를 잃었을 뿐 아닌가.
 “저놈들을 막아야 합니다. 아니면 기병의 진군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부장 사곤명의 소곤거림에 모아합이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만만하게 뛰어나갔던 서평이 죽는 걸 그도 똑똑히 보았다.
 이천의 기병으로 그들을 가로막지 못했다는 게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귀호대와 부딪쳤던 자들은 아직 일천여 기가 남아 있었는데, 그들이 말 머리를 돌려서 뒤를 추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좀체 따라잡지 못하고 거리가 점점 벌어지기만 했다.
 이천 기로 안 된다면 더 많은 기병을 보내리라.
 모아합이 소리쳤다.
 “좌선봉에서 전위 오천을 빼라! 모조리 밟아 죽이라고 해!”
 “복명!”
 사곤명이 즉시 복창하고 군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내 높은 뿔나팔 소리가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척망평 멀리 울려 퍼지고 청색 깃발 한 개가 솟구쳐 올랐다가 서쪽을 가리키고 누웠다.
 
 “오천을 빼서 서쪽으로 보내라는 신호입니다!”
 일만 오천의 기병을 이끌고 있는 좌장군(左將軍) 귀아손 곁에서 부장 탕립이 소리쳤다.
 귀아손도 총사령의 군령을 전하는 뿔나팔 소리를 듣고 깃발을 본 터다.
 “대체 무슨 일이야?”
 “서쪽에 강력한 적의 별동대라도 나타난 모양입니다.”
 “매복이 있었던 게로군.”
 귀아손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일만 오천 기병 중 오천을 빼서 서쪽으로 보내면 결국 선봉은 우장군(右將軍) 당고량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
 저 멀리 자욱한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질주해 가고 있는 우군을 돌아보았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이쪽으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과 불길을 보며 귀아손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들은 매운 연기를 무릅쓰고 불을 향해 달려가는 형세였다. 거기 철기들이 고립된 채 위기를 맞고 있었고, 적의 기병은 이쪽으로 쇄도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응신기의 오천 기병이 비록 삼천으로 줄어 있기는 하지만 철기대를 정면에서 뚫고 나오면서도 그만한 전력을 유지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다.
 거기에 흑룡기의 남은 기병이 있고, 도울의 본진에 속한 기병도 있다. 대략 일만 기가 아직 건재한 것이다.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불을 등지고 있고 이쪽은 불길을 마주 보며 싸워야 한다.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귀아손은 선봉에 서지 않는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다.
 “호양걸에게 우익을 끌고 가라고 해라!”
 귀아손이 소리쳐 명령하자 그를 따르던 전령이 즉시 말 머리를 돌려 우익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좌군의 우익이 주춤거리며 진군을 멈추더니 일제히 서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귀아손은 좌군 전체의 진군 속도를 늦추게 해서 경쟁 상대인 우군의 뒤로 처졌다.
 
 “대장, 저기! 이번에는 많다!”
 검은곰이 소리치지 않았어도 황보강 또한 한 무리의 기병이 대열을 떠나 이쪽으로 달려오는 걸 보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천둥소리 같고, 땅이 은은히 흔들린다.
 “제기랄, 오천 기는 충분히 되겠는걸?”
 “겁이 나냐?”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놀리면 대장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겠어!”
 “그렇다면 네 용맹을 한번 보여봐라.”
 “좋아! 까짓, 나 혼자서 다 해치울 테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황보강과 검은곰은 태연히 말을 주고받으며 애써 눈앞에 보이는 적을 무시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걸 잊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쪽은 이제 일백오십 기가 남았을 뿐 아닌가. 그것으로 오천 기는 무리다. 뒤에서는 그들이 뚫고 나온 기병들이 이를 갈며 맹렬하게 추격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고작 이백 명의 귀호대 무리와 한 번 부딪쳐서 일천 기를 잃었으니 치욕스러웠으리라. 게다가 장군마저 죽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노여움과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황보강은 그런 자들과 다시 부딪쳐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철저히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만 내달릴 수도 없는 것이, 새롭게 오천 기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놈들을 상대하느냐, 아니면 돌아서서 악에 받쳐 있는 저 일천 기를 다시 상대할 것이냐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살아날 가망은 없는 결정이다.
 ‘이게 마지막인가?’
 황보강의 눈에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적의 모습이 저승사자가 밀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오 리 밖. 그 왼쪽이 모아합의 본진이 있는 언덕이었다.
 적의 오천 기는 이제 얼굴을 알아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몇 번 숨을 쉬고 나면 부딪치리라.
 잠깐 생각하던 황보강이 목청껏 소리쳤다.
 “오 리만 더 전진한다! 그다음에는 모아합을 잡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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