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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소년 성공기 1권(1)

2019.08.13 조회 434 추천 0


 제 1장: 잊혀진 땅
 
 휴가. 학업 또는 근무를 일정한 기간 쉬는 일. 유급 휴가. 월차 휴가. 출산 휴가 등이 바로 휴가에 해당한다. 고등학생에게는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등이 있지만 그건 진정한 의미의 휴가가 아니다.
 휴가란 바로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 일정한 기간 동안은 아무런 걱정 없이 먹고 마시고 뒹굴며 마음껏 나태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휴가란 존재한다.
 “와아, 휴가다, 휴가.”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집안이 텅 비는 주말. 밭 솥엔 밥이 가득. 반찬은 풍성. 간식 거리 준비 완료. 용돈은 두둑. TV에서는 재미 있는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방영되고, 얼마 전에 발매한 신작 게임도 구비해 놓은 상태.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남은 건 신나게 노는 일 뿐. 집이 비는 주말의 휴일인 만큼은 공부 따위는 싹 잊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확실히 풀어야 한다.
 “일단 주말의 영화부터 보자.”
 오늘 자, 아니 시간상으로는 정확히 어제 자 신문의 방송 프로그램 편성표를 보니 맨 마지막 칸에 주말의 영화가 적혀 있었다.
 “오오, 14일의 토요일 X를 방영하는 구나!”
 예전에 상당히 큰 인기를 끌었던 공포 영화 시리즈로, 14일의 토요일 X는 시리즈 10번째 작품으로, 이번 편의 줄거리는 살인마가 판타지 세계로 가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였다.
 “음, 지금이 12시 25분이니까 10분 뒤에 시작하겠군.”
 이제 곧 시작될 영화 감상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버터를 두른 프라이팬 위에서 살짝 튀긴 팝콘과 콜라로 마무리됐다.
 따르르릉.
 영화가 시작되기 바로 5분전인 12시 30분.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올렸다.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사교성이 나쁜 건 아니지만 밤 12시 30분에 대담하게도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 친구를 둔 기억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집이 텅 비어 있으니 밤 늦게 통화해도 괜찮을 것이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하며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안녕, 자기야.”
 연인과 부부 사이에 쓰이는 2인칭 대명사 자기야. 늦은 밤에 이유 없이 걸려온 전화인 데다가 무엇보다 여자가 아닌 남자 목소리라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잘못 거셨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전화를 끊었다. 올바른 이성관에 입각한 단호한 행동이었다.
 따르르릉.
 수화기를 내려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전화 벨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미안, 잘못 걸어서..”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들었는데, 발신자 측은 방금 전에 전화를 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왜 또 걸었죠?”
 “사과하려고.”
 “됐어요, 그럼.”
 “잠깐, 끊지마.”
 “왜요?”
 “얘기 좀 하지.”
 “여긴 전화 방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 남자랑 통화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따르르릉.
 다시 전화벨 소리를 울렸다. 이번엔 전화벨 소리를 싹 무시하고 TV를 보다 보니 문득 집안에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64평정도 되는 넓은 집에 혼자서 마루 소파 위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공포 영화를 시청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음,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부침개나 구워 놔야지.”
 팝콘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어 얼른 거실에 갔다. 부침개 재료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냥 굽기만 하면 됐다.
 따르르릉.
 을씨년스러운 집안에 또 다시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 그냥 쌩 까고 TV를 보려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까 전처럼 장난 전화일 수도 있지만 여행가신 부모님의 안부 전화일 수도 있기에 전화 코드를 빼버리지도 못했다.
 “얘기 좀 하자고, 지금 뭐 하고 있니?”
 여보세요 라고 하기 전에 발신자 쪽이 먼저 말했다. 음산한 남자 목소리로 아까 전에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지?”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체불명의 발신자는 아마도 그 소리에 반응을 보인 것 같았다.
 “부침개 굽고 있어요.”
 “난 돈 없을 때 집에 가서 부침개를 부쳐먹지.”
 “전 영화 볼 거예요.”
 “정말? 뭔데?”
 “공포 영화요.”
 처음엔 그냥 끊으려 했지만 발신자의 페이스에 휘말려 그만 성실하게 답하고 말았다. 부침개 하나가 다 구워 졌을 때쯤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포 영화 좋아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포 영화는 그저 킬링 타임용으로 보고 있으며,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요.”
 “괜찮아, 말해봐.”
 “전 구미호가 나오는 전설의 고향을 좋아해요.”
 “전설의 고향은 옛날 버전이 더 재미있지.”
 “맞아요. 전설의 고향 리메이크판은 다 구렸어요. 당신은 뭐가 좋아요?”
 “나인테일 웨어 폭스.”
 “구미호죠?”
 “맞아. 구미호. 난 구미호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해.”
 “하지만 솔직히 구미호 극장판은 최악이었어요.”
 정체 불명의 발신자 측과 계속 문답을 나누다 보니, 이외로 편한 얘기 상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나쁜 목소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혼자서 심심하던 차였고, 전화비는 발신자 측이 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끊을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애인 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발신자 측에서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 남자로서 같은 남자,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애인이 있냐는 질문을 받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애인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걸 알려고 하죠?”
 “널 보고 있거든.”
 감시당하고 있다란 생각을 하자마자 왠지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진 것 같았다. 장난이겠지 하며 애써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무슨 뜻이죠?”
 “무슨 뜻 같아?”
 “그만 끊어요.”
 “데이트 안 할 거야?”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동성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은 건 상당히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공포보다 한층 더 발전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그때쯤 부침개 하나가 다 구워져 접시 위로 옮겼는데 순간 또 다시, 다섯 번째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봐주지 않는다, 따끔하게 말을 해서 다시는 장난 전화를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잔뜩 벼르며 수화기를 들었다.
 “이봐, 당신. 장난 전화도 적당히 해야지. 난 남자랑 사귀는 취미 따윈 없다고!”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쳤다. 그런데 발신자 측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미약한 숨소리 뿐. 왠지 기분이 더 나빠졌다.
 “또 한번 장난 전화 걸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알아서 해.”
 “끊지마.”
 “끊을 거야.”
 “끊지 말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면서 협박 조로 변했다. 그래서 오기가 생긴 나머지 끊기 전에 몇 마디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난 너를 원해.”
 묵직함에 느끼함까지 더한 목소리. 순간 의식의 끈이 끊어질 뻔했다. 황당무계함을 넘어서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체온이 급속도로 낮아지면서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미친 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끊으려 했다. 하지만 수화기를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 살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또 끊으면 달려가서 범해버릴 거야!”
 방금 발신자 측에서 한 말이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다. 대략 그때쯤 정신이 멍해졌다. 정신적 쇼크가 너무 커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차라리 제이슨과 프레디와 소꿉놀이를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본 게임을 시작하겠다. 감당할 수 있겠어? 프리티 보이.”
 “야, 이 미친 새끼야. 전화 안 끊으면 진짜 경찰 부를 거야!”
 “쯧쯧, 넌 아무래도 수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나. 신문을 봐. 경찰이 제 때 나타난 적은 거의 없다고.”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상당히 심기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전에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커서 더 이상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싫은데?”
 “내 애인은 여자 레슬링 선수라고. 특기는 초크 슬램이지. 너 같은 놈은 상대도 안 돼!”
 “아이고, 이거 무서워서 어쩌나.”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었다. 실은 여자 친구 따윈 전혀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특기가 초크 슬램인 레슬링 선수는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고 년 이름이 안나데이커였지? 정원의 불을 켜봐. 빨리!”
 불을 켜고 정원이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니 뭔가 시커먼 물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창문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옷을 입은 덩치 좋은 여자 레슬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내는 문제를 맞추면 이 년을 살려주고, 틀리면 당장 죽이겠어.”
 다시 거실에 와서 수화기를 들자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거기서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전 실은 애인이 없는데요.”
 “카악, 어쨌든 본 게임을 시작할 테니 그렇게 알라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발신자는 성이 날대로 성이 난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깥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덩치 큰 여자 레슬러를 애인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TV 이야기 속으로가 종영된 이유가 뭐지?”
 “속으로란 말이 너무 선정적이라서.”
 일단 기습당하는 게 두려운지라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을 했다.
 “틀렸어. TV 이야기 속으로 종영된 이유는 사이비 미신 조장과 모 종교 단체의 압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연습 문제니까 봐주도록 하지.”
 연습 문제까지 내는 것으로 보아서, 누군지 몰라도 꽤나 관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그럼 진짜 문제..”
 프라이팬 살피는 걸 잊은 사이에 두 번째 부침개 밑이 타버리는 바람에 그냥 끝내버리고 싶었지만 발신자 측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14일의 토요일에서 나오는 살인마는 누구지?”
 “게이슨, 게이슨!”
 마침 TV에서는 14일의 토요일이 시작된 이후라서 정말 쉬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저런, 틀렸어. 14일의 토요일에서 나오는 오리지날 살인마는 게이슨의 아버지야. 게이슨은 속편부터 나왔지. 영화를 제대로 봐.”
 “그럼 처음부터 14일의 토요일 1탄이라고 말했어야지!”
 “뭐 틀리긴 했지만 보너스 문제가 하나 남아 있어.”
 화를 다 내기도 전에 발신자 측은 마지막 문제를 냈다. 아주 신이 난 듯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이 너무 얄미웠다.
 “내가 어느 쪽 문에 있을까?”
 집안에는 분명 현관 문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쉬울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문을 찾아보았다.
 “문은 하나밖에 없는데..”
 “땡, 틀렸어.”
 쨍그랑!
 발신자 측의 대답과 동시에 천장의 유리가 깨지면서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프라이팬을 든 채로 유리 파편이 떨어진 마루로 달려가 보니 그곳엔 바바리 코트를 입고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이런, 거짓말쟁이. 지금 건 천장을 깨뜨리고 내려 온 거잖아!”
 “문이란 본래 지나가고 나서 생기는 법이야.”
 가면의 사나이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코트 아래로 드러난 맨 다리에는 무성한 털이 나있고 빨간 장화까지 신고 있는 게 패션 센스가 상당히 엉망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후후후, 자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가면의 사나이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뒤 주저 없이 바바리 코트를 활짝 열었다. 바바리 코트 안에 감춰진 것을 본 순간 머리털이 주뼛주뼛 서면서 팔 다리에 닭살이 쫙 돋고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이 집에는 너 혼자 밖에 없어, 프리티 보이.”
 “으아아아아아아악!!!”
 온 집안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곧바로 등을 돌려 현관문을 향해 달렸다. 문을 열고 신발 신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뛰어나가 정원 쪽으로 향했다.
 “안아 줘!”
 그때 피투성이가 된 채 정원에 쓰러져 있던 안나데이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상한 말을 하며 길 앞을 막아섰다. 덩치가 워낙 커서 해치고 나갈 틈이 전혀 없었다.
 “거기서, 베이베.”
 정면에는 반 좀비 상태에 가까운 여자 레슬러. 등뒤에는 바바리 코트를 펼친 채 달려오는 초 변태 남색마. 도망갈 곳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가지.
 “으아아아아아아악!!!”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 * *
 
 “캇!”
 영화 스텝들에게 있어서 캇을 외치는 촬영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만큼 좋은 건 또 없었다.
 “오케이. 모두들 수고했어.”
 그것도 NG하나 없이 바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는 건 스텝들에게 있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난 정말 죽을 맛이었다.
 “꺄삐꺄삐, 야뿅♡”
 “아, 놀아줘, 아.”
 바바리 코트맨 역을 맡은 배우와 피투성이 여자 레슬러 역을 맡은 배우는 연기에 너무 몰입한 모양이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조차 보지 못한 채 불쌍한 고교생 역할을 맡은 날 껴안고 있었다.
 단순히 껴안는 것뿐이 아니라 몸을 밀착시키고 마구 비비는 그 장면은 방송 심의에 어긋날 요소가 다분했기 때문에 자막 처리 될 예정이었는데 정작 배우인 그 사람은 미처 듣지 못한 모양이다.
 “어이, 이제 그만 좀 떨어지라고. 지금 건 대본에 전혀 없는 액션이잖아.”
 뒤늦게 스텝들이 다가와 그렇게 말하자 두 배우는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그들의 그런 행동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난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는 그대로 땅 바닥에 쓰러졌다.
 건전한 이성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맹점이었다.
 “한빈씨, 수고했어. 아직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단역답지 않게 비명 지르는 연기를 정말 잘하더군.”
 그때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다가와 날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에게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나 차가운 캔 음료를 하나 받은 뒤에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여자 배우만 비명을 지르게 할 수는 없어서 말이야. 자네처럼 비명을 잘 지르는 남자 배우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튜디오에서 전속 단역 시험을 치르는 게 어떻겠나? 나중에 높은 사람들 눈에 띄면 주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텝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의 제의를 수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굳게 입을 다문 채 가볍게 웃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한번 직접 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베짱은 없었다.
 “잘 생각해보게. 이건 정말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난 스텝의 권유를 계속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캔 음료를 다 비우고 나서 숨을 한번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역시 단역은 엑스트라보다 힘든 것 같군요. 조금이지만 대사가 있기도 하고 간접적으로나마나 스토리에 연관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일단 최대한 정중하게 그 스텝의 권유를 거절했다. 비명을 잘 지르기 때문에 전속 단역을 해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정말 수고했네. 이건 오늘 하루 급료일세.”
 스텝은 돈이 든 봉투를 내게 건네 주었다. 난 그 스텝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스튜디오를 나섰다.
 때는 밤 11시 경. 조금만 지나면 버스와 전철이 끊길 것이다.
 스튜디오가 있는 곳은 신 서울시인데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버스로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뛰었는데 운이 좋게도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오늘 받은 돈은 얼마지?”
 버스 안에서 봉투를 열어 보니 삼만 원이 들어 있었다. 오늘 하루 스튜디오에서 보낸 시간은 3시간. 엑스트라의 경우 시간당 삼천 원을 받으니 구천 원이겠지만, 단역 같은 경우는 시간당 만원을 받은 꼴이 되어 삼만 원이었다.
 “어이, 학생. 이제 곧 종착 지점이야.”
 오늘 번 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종착 지점까지 왔다. 난 버스 운전 기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신 서울시의 외곽 지역. 그곳은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나 없어서 ‘잊혀진 땅’ 이라고 불렸다. 기업도 아닌 개인 소유의 땅으로, 그 개인이 바로 나, 한빈이었다.
 올해 나이 20살. 작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대학에 가기 전에 여객기 추락 사고를 당해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것은 거액의 빚과 잊혀진 땅의 땅문서였다.
 잊혀진 땅은 너무 인지도가 낮아서 헐값으로라도 팔지 못했고, 일가친척이 모조리 등을 돌리는 바람에 믿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공포 영화에 출현하는 바바리 코트맨이나 여자 레슬러가 아니라 바로 고독과 가난이었다. 하지만 난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혼자서 살아온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캠퍼스 청춘을 만끽하며 부모님한테 애교 부리고 용돈을 타서 쓰는 안락한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텅 빈 땅으로 쫓겨나다시피 해 그동안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사는 건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낟.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반겨주지는 않았지만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 한빈이 들어간 곳은 집이 아니라 커다란 6인용 짜리 텐트였다.
 빚 때문에 전에 살던 집을 차압당하긴 했지만 법률에 의거해 최소한의 가재도구는 건졌기 때문에 텐트를 치고 살아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텐트 자체는 상당히 고급이었기 때문에 몇 달 며칠을 세워두어도 끄덕 없을 정도로 튼튼했고, 비록 지명도가 떨어지나 물과 전기가 통한다는 점이었다.
 개인의 소유가 되기 전에는 정부와 민간 기업 등으로 땅문서가 넘어가면서 학교까지 세워진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 그 학교는 한참 전에 폐교되었고, 다른 건물들 역시 철거 된지 오래됐다. 그래서 세금을 걷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물과 전기가 통한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은 물과 전기가 통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거리 노숙자조차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뭐 노숙자들이 무더기로 와서 먹고 마시고 뒹구는 건 이쪽에서 먼저 사양하겠지만 말이다.
 꼬르륵.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배속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땀에 절은 옷을 벗어서 텐트 한쪽에 치워 넣고 러닝 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은 뒤 생필품을 모아둔 곳에서 코펠과 휴대용 가스렌지를 꺼냈다.
 아침 일찍 근처 수돗가에서 받아둔 생수를 냄비 안에 붓고 가스렌지 위에 올려 끓이면서 가방에서 컵라면을 하나 꺼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 살아오면서 10끼 중 9끼는 바로 이 컵라면으로 때웠다.
 인스턴트 식품의 대명사며 비록 영양가는 그리 높지 않으나 텐트 생활을 하면서 해먹기에는 딱 그만이며 돈도 적게 들어서 그런 것이다.
 만약 신 한국에 인스턴트 라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다수의 젊고 돈 없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컵라면에 물을 부은 지 5분이 지날 무렵 시간에 딱 맞추어 뚜껑을 떼고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난 비록 혼자 남았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하는 인사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예전에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주위에서 인사성이 바른 아이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던 나였다. 물론 지금 그런 건 전혀 쓸모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더 불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 난 체면 차릴 필요 없이 게걸스럽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계란은커녕 김치 살 돈조차 마땅하지가 않아서 맨 라면을 먹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라면에 계란을 넣고 김치랑 같이 먹는 게 사치라는 건 1년부터 알았다.
 이 근처에는 쓰레기장이 없어서, 쓰레기를 버리려면 천상 시내로 나갈 때 왕창 들고 가야하기 때문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마셔버렸다.
 “잘 먹었습니다.”
 5분만에 다 먹은 컵라면. 한창 젊을 때라 그거 하나 가지고 배가 찰리는 없었지만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다른 걸 먹지는 못했다.
 하루에 컵라면 두 개. 가끔 일일 아르바이트 중에 식비를 주거나 식사를 제공하는 게 있다면 그 날 돈은 굳은 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하나씩 먹었다.
 누군가 밤에 먹으면 살찐다고 했는데, 난 전 국민 평균키에 살이 잘 안찌는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 없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면 언제나 하는 일이 하나 있기 때문에 그냥 누워서 자는 건 아니다. 쓰레기를 치워야하고 빨래도 해야한다.
 “으앙,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백수야.”
 혼자 있을 때는 우는 소리도 하기 편하다. 문제가 있다면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만 말이다.
 아무튼 청소랑 빨래를 하기 전에 산책이나 좀 다녀와야겠다. 텐트에서 혼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거리가 부족한지라 소화도 안되기 때문이다.
 산책 정도니 무난하게 고등학교 때 입던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시장표 옷조차 살 돈이 넉넉지 않기에 시내로 외출 할 때 옷이 없어서 교복 바지차림으로 나간 적도 있었으니 부끄러울 건 없었다.
 아니, 어차피 이 근처는 나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인 데다가 겁나게 넓기만 하니 달밤에 체조를 하든 자기 위로를 하든지 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평소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걷던 중 길이 끊기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우우우우우우!”
 갑자기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난 당황해서 허리를 굽힌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늑대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무, 무슨 일이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서워할 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서울시 외곽 지역에 있는 땅이라고 해도 산도 아닌데 희귀 동물인 야생 늑대가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단 말이다.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경계를 하면서 약 10분 동안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지만 늑대 같은 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휴우, 잘못 들은 모양이군.”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이 될 때쯤 손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나도 참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군.
 하하, 늑대라니 농담이 너무 심하잖아? 게다가 정면은 막다른 길이라고. 내가 지나온 길은 외길이라서 만약 늑대가 있었다면 그 중간에 한번이라도 마주쳤을 거다.
 “비켜, 비켜, 비켜!”
 그 순가 누군가 크게 소리치며 엄청난 기세로 달려왔다. 그리고 곧 이어 아까 전에 들린 늑대 울음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난 조건 반사적으로 뒤돌아 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늑대와 같은 이상한 생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느, 느, 느, 느, 늑대 인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늑대 인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처럼 두 발로 우뚝 선 흉악한 인상의 늑대를 뭐라고 불러야 하냔 말이다.
 “아우우우우우우!”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남자의 뒤를 쫓던 것으로 추정되는 늑대 인간은 갑자기 딱 멈춰서 나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전국 20대 청년 평균키를 가진 나보다 20센티는 더 크고 덩치는 송아지 만한데, 손톱을 길고 뾰족했으며 쩍 벌린 입 속에 가지런히 늘어선 날카로운 이빨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크르르르...”
 생긴 거나 울음소리,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 등은 상당히 리얼하긴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늑대는커녕 들개조차 살지 않는 이 신 서울시의 외곽에 난데없이 늑대 인간이 나타나다니, 이건 현실이지 만화나 소설, 영화 같은 픽션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떠있다고 하기로 소니 늑대 인간이 나타나 울부짖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저, 실례지만 지금 영화 촬영하시는 건가요?”
 난 일단 침착하게 늑대 인간에게 말을 걸었다. 공포 영화의 단역으로 출현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은 늑대 인간을 봐도 별로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와아앙!”
 순간 늑대 인간이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늑대 인간의 커다란 발에 짓눌렸다. 손톱만큼이나 날카로운 발톱이 내 가슴을 파고 들어왔을 때 뜨거움과 함께 쓰라린 통증이 찾아왔다.
 “으아아아악!”
 난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늑대 인간의 두 손과 발은 내 팔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크르르르...”
 탐욕스러운 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침을 질질 흘리는 늑대 인간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바로 물어뜯지는 않고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내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마치 커다란 스테이크를 눈앞에 두고 어디부터 베어 먹어야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또 그런 행동을 해서 늑대 인간을 자극하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 아프다..”
 난 짧게 신음 했다. 가슴과 팔 다리에서 통증은 계속 느껴지는 가운데 맨 정신으로 나 자신의 뜨거운 피를 느끼며 비릿한 피 냄새를 맡는 것이 이렇게 끔찍한 일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수술대 위의 환자. 관으로 들어가는 사자.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망자. 등 ‘자’ 자로 끝나는 안 좋은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난 죽고 싶지 않아!”
 난 있는 힘껏 소리를 친 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늑대 인간의 완력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늑대 인간의 손과 발에 짓눌린 팔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어 일어서면 팔 다리가 찢겨나갈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
 “아우우우우우우.”
 늑대 인간이 크게 울부짖었다. 눈동자는 번뜩이다 못해 막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고 이빨을 딱딱거리고 있는 게, 아무래도 내 부질없는 저항에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다.
 “크와아앙!”
 늑대 인간은 괴성을 지르며 입을 쩍 벌렸다. 입가에 고여 있던 더러운 침이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보다 아직까지 내가 못해본 일이 더 많이 떠올랐다. 총각 딱지는커녕 키스조차 못해봤고, 해외 여행은커녕 제주도에도 가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죽어야 한다니,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
 “사람 살려!”
 최후의 발악을 해보았다. 이건 안 좋은 꿈이다. 빨리 깨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버둥쳤지만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신은 정말 존재하지 않고, 정의의 히어로 따위는 더더욱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엄마, 아빠. 이제 저도 뒤따라갑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이었다.
 “슈퍼 킥(Super Kick)!”
 낯간지러운 기술 명과 함께 누군가 늑대 인간의 턱에 강렬한 옆차기를 날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격인지라 늑대 인간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멀리 나가 떨어졌다. 난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방금 전에 옆차기를 날려 날 구해준 사람을 쳐다보았다.
 
  * * *
 
 나이는 20대 초반 가량. 청바지에 가죽 잠바를 입은 평범한 복장. 늑대 인간보다는 작지만 나보단 큰 키에 덩치도 좋은 청년이었다.
 머리는 짧은 편이고 얼굴엔 미소를 띄고 있어서 사람이 좋게 보여서 방금 전에 늑대 인간을 향해 옆차기를 날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봐, 아까 분명히 비키라고 말했는데 왜 안 듣고 가만히 있었어?”
 그 청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그렇게 말하고는 늑대 인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늑대 인간은 턱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짖지도 못한 채 침만 질질 흘리며 눈동자를 번뜩였다.
 “빨리 집에 가서 주말의 영화 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제 시간에 가기에는 그른 것 같군.”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벌린 채 땅을 딛고 있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뭔가 공격 자세인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그게 어떤 자세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덤벼라, 멍멍아.”
 청년은 늑대 인간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도발했다. 늑대 인간은 그 가운데 손가락이 의미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청년이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은 듯 입을 쩍 벌렸다.
 “아우우우우우우.”
 늑대 인간은 고개를 들고 하늘 높이 울부짖었다. 난 거의 무의식적으로 청년의 등뒤로 숨었다. 늑대 인간을 끌고 온 사람이 바로 그니까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 굳게 믿은 것이다.
 “크와아앙!”
 늑대 인간은 괴성을 지르며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청년의 등뒤에 있던 난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치다가 꼴사납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늑대 인간이 나오는 공포 영화는 공포로 치지 않은 나였지만 실재로 직접 마주치고 보니 너무 무서웠다.
 “시끄러워!”
 청년은 늑대 인간의 괴성에 맞서 큰 소리를 치며, 대담하게도 늑대 인간의 복부를 뻥 찼다. 늑대 인간은 병든 강아지 마냥 깨갱거리며 허리를 숙였고 그 순간 청년은 눈동자를 빛냈다.
 “싯 다운 파워 봄(Shit Down Power Bome)!”
 청년은 늑대 인간의 머리를 자기 가랑이 사이에 넣고 양손으로 허리 아래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엄청난 기세로 주저앉으면서, 늑대 인간의 머리통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한낱 인간이 늑대 인간에게 레슬링 기술을 걸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 거짓말.”
 “이번에는 스콜피온 데스락(Scorpion Deathlock)이다!”
 내가 말을 더듬는 사이 청년은 다시 일어나서 땅바닥에 머리가 처박혀 정신을 못 차리는 늑대 인간의 양다리를 8자로 잡고 돌려 꺾으며 긴 허리에 주저앉았다. 척추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는 듣기만 해도 섬뜩했다.
 저 기술은 바로 스콜피온 데스락. 일명 샤프 슈터, 전갈 굳히기로 대변되며 전갈의 꼬리 모양으로 다리 굳히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레슬링을 직접 보니 감개무량했다.
 “깨앵, 깨앵, 깨앵.”
 늑대 인간은 구슬프게 울면서 마구 발버둥 쳤지만 청년은 다리 굳히기를 풀지 않았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레슬링 기술에 걸리는 늑대 인간을 보고 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저런 늑대 인간, 아니 늑대 새끼한테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게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헤헤, 제법 근성이 있는 녀석이네. 끝가지 항복을 하겠다는 말을 안 하다니 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없지.”
 청년이 웃으며 늑대 인간의 양다리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난 그때 그가 중대한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늑대 인간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그냥 말해주기로 했다.
 “저, 저기요.”
 난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왜 그러냐는 듯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볼 적에 이 늑대 인간은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항복 의사 표현을 직접 말하길 원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아, 깜빡하고 있었군.”
 내가 그렇게 묻자 청년은 충분히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늑대 인간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 거품을 문 늑대 인간은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참, 그런데 넌 누구니?”
 청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제 이름은 한빈입니다. 올해 20살이에요.”
 일단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아서, 평소 때처럼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며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청년은 늑대 인간을 번쩍 들어 한쪽 어깨에 걸친 뒤 활짝 웃으며 빈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염신이야. 나이는 23살. 빈이보다 3살 많네. 그냥 부담 없이 신이 형이라고 불러도 돼.”
 그의 이름을 듣고 악수를 하면서 생각한 건데,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주변 분위기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분명 난 방금 전까지 늑대 인간에게 잡혀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는데, 그 두려움과 긴장감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아아, 그나저나 참 아쉽구나. 늑대 인간 한 마리 때려잡자고 주말의 영화를 놓쳤으니 말이야.”
 신이 형은 무척이나 아쉬운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난 주말의 영화 따위보다는 신이 형과 늑대 인간의 정체가 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거나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장 무난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신이 형은 어디에 살아요?”
 처음 보는 사람이 허락을 했다고 해도, 형이란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걸 신경 쓰는 건 아마 나 혼자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답변을 기다렸다.
 “난 이 근처에 살아.”
 난 그 말을 듣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혀진 땅에 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형은 아무리 봐도 생긴 건 멀쩡해서 노숙자처럼 보이진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 산다는 말이지? 분명 이 근처에 집은 단 한 채도 없을 텐데. 설마 나처럼 텐트에서 생활하는 건 아닐까.
 “아아,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빈이 너 혹시 이 잊혀진 땅의 주인 아니니?”
 나는 신이 형이 누군지 모르지만 신이 형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예, 일단 법적으로는 제가 이 잊혀진 땅의 주인이에요.”
 내가 성실하게 대답하자, 신이 형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내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우와아. 정말 반갑다. 이 땅의 주인인 널 직접 만나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이렇게 넓은 땅 주인이라고 하면 높은 건물에서 커다란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서 시가를 피면서 농땡이를 부리는 사장님이라서 앞으로 절대 마주칠 일은 없다고 생각했거든.”
 뭔가 가시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악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넓은 땅의 주인이면서도 실재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청년 가장이라는 현실을 상기하면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난 신이 형의 어깨에 걸쳐진 늑대 인간을 쳐다보며 물었다. 혹성탐사는 물론이요 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에 사람이 살며 외계인이 이곳에 내려와 살 정도로 과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지금 이때, 늑대 인간이 나타났다니,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음, 그거라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너희 집이나 우리 집에 가서 좀 쉬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게 어때?”
 난 신이 형의 제안에 찬성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사는 집으로 신이 형을 부르는 건 좀 힘들 것 같았다. 솔직히 내가 사는 집은 그냥 텐트이며, 6인용 짜리라고는 하지만 나 혼자서 사느라고 1인용에 맞게 꾸며 놓은 터라 다른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그럼 신이 형 집에 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신이 형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앞장 서 걸어갔다. 1년 동안 신이 형이 이곳에 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잊혀진 땅에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사는 집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이 형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으로 계속 걸어갔고, 난 그 뒤를 바싹 쫓아갔다. 그런데 내가 잊혀진 땅에서 1년 동안 살아오면서도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길이 막 나왔다. 막다른 길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덤불을 헤쳐 지나간 것뿐인데 말이다.
 손목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가까워지고 있지만 주변은 별로 어둡지 않았다. 밤하늘에 뜬 보름달의 빛이 내가 나아가는 길을 비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텐트를 치고 사는 곳은 전봇대와 수돗가, 이동식 화장실에 버스 정류장과 가로등까지 있지만 이곳만큼 밝지는 않았다. 전기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빛보다 달이나 별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적인 빛이 이토록 밝고 아름다운 줄은 전혀 몰랐다.
 그 빛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몸은 신이 형의 뒤를 따라가고 있지만 고개는 위로 향했다. 둥근 보름달과 별의 바다. 검은 하늘을 수놓은 그 보석을 바라본 건 얼마 만일까?
 지난 1년 동안 홀로 텐트 생활을 하면서 밤하늘의 풍경을 감상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지만 몸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친 것 같았다.
 “빈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이제 다 왔으니까 정신 차리라고.”
 그때 신이 형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려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아파트 건물이었다.
 어림잡아 10층은 넘어 보이는 건물 자체가 상당히 낡아서 건물 벽 이곳저곳에 난 균열이 눈에 확 들어올 정도였다. 그리고 전봇대가 이어져 있기는 하지만 불이 켜진 곳은 단 한군데도 없어서 아무도 안 사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아파트가 있었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 그건 당연해.”
 내가 놀란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신이 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아파트는 이곳이 잊혀진 땅이라 불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장소 중 하나야. 원래는 정부 주도로 철거를 할 예정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반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은폐시켜버린 거지. 근처에 수풀과 덤불, 키 큰 나무 같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중에 한 말은 이해가 갔다. 확실히 이곳에 오면서 가장 많이 보인 것은 신이 형이 말했던 데로 수풀과 덤불, 키 큰 나무였다. 내가 텐트를 치고 산 장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던 것들이라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요약하자면 아파트 터가 안 좋다든지 귀신이 출몰한다든지 저주를 받았다든지 같은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아무 생각 없이 말이었다. 우리나라, 아니 세계 어느 나라든 낡은 건물에 관련된 괴담은 꼭 한 가지씩 있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정답이야.”
 신이 형의 시원스러운 대답은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대답을 들으면 불안해할 게 분명하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호기심 내지 두려움을 느낀다. 진보한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사건과 초자연적 존재는 아무리 이성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의문이라는 틈새를 노려 두려움을 전염시킬 수 있다.
 “진, 진짜로 귀신같은 게 나오나요?”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신이 형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날 데리고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내가 사는 집이야.”
 신이 형이 안내한 곳은 아파트 건물 입구 근처에 있는 101호였다. 안에 따라 들어가 보니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아파트 근방에 전봇대가 있는 걸 보긴 했지만 서도 이렇게 낡은 곳에 아직도 전기가 들어온 다는 게 왠지 신기해 보였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봐. 씻고 나서 뭐라도 좀 내올 테니 말이야.”
 신이 형은 늑대 인간을 마루에 내려놓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은 다음 응접실에 가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가스도 통하고 물도 나오는 것 같은데, 난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1년 동안 텐트 생활을 한 게 너무 안타까웠다.
 밤만 되면 하루살이 같은 벌레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귀찮아 질뿐더러 이동식 화장실에는 막 썩은 내가 나고 어두운데 수돗가에 갔다오는 것도 귀찮아서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끄아하하하!”
 신이 형이 부럽다고 생각했을 때 위층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것도, 동물의 것도 아닌 기기 괴괴한 그 웃음소리는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부터 지상 위로 울려 퍼지는 악마의 그것과 같았다.
 물론 내가 실재로 악마의 웃음소리를 들어 본 건 아니고, 비디오나 영화관에서 본 공포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느낌의 것이었다.
 “시, 신이 형. 방금 그 웃음소리 들었어요?”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늑대 인간도 존재하는데 악마가 없으란 법은 없지 란 생각이 들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기 때문이다.
 “아아, 그게 얼마 전에 의뢰가 하나 들어와서 위층에다가 월세 방을 내준 거야. 뭐 내가 이 아파트의 주인은 아니지만 텅 비어 있을 때 가장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신이 형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난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내 땅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산 것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들려 오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무튼 일단 지금은 밥부터 먹자고. 너도 저녁 안 먹었지?”
 신이 형은 내가 앉아 있는 마루에 상을 펴면서 곧바로 밥을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반 공기. 반찬은 노란 단무지 세 쪽.
 빈곤의 극치를 달리는 식단이었지만 그래도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잘먹겠습니다!”
 한 시간 전에 먹은 컵라면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던지라 난 체면 차릴 필요는 없었다. 그냥 숟갈로 막 퍼먹으며 단무지를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끄흐흐흐..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돼지처럼 밥이나 처먹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한빈.”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그 목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체할 뻔했다. 위층에 있는 게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난생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 그것도 인간의 것이 아닌..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상한 목소리의 주인이 날 알고 있다는 건 정말 소름끼친 일이었다.
 “아, 정말 예의가 없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땅의 주인인 빈이에게 까지 함부로 말을 하다니 한 마디 해줘야겠군.”
 밥을 다 먹은 신이 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식욕이 사라진 난 숟가락을 놓고 신이 형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얀빛이 반짝이는 형광등 밖에 보이지 않는 천장이었지만 그 너머에는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아. 밥 다 먹었으면 위층에 한번 가보자.”
 신이 형은 다짜고짜 내 손을 끌고 문 밖을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누군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려움 보다 호기심이 더 강해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을 밟고 올라 짙은 어둠이 깔린 복도를 지나가 맨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때 난 지독한 한기를 느꼈다. 겨울은 간지 오래고 봄이 찾아왔으며,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입에서 내뿜는 하얀 숨결이 보일 정도로 주변 공기가 차가워졌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신이 형 역시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숨결이 보이는 걸로 봐선 나 혼자만 한기를 느끼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신이 형은 둔감한 건지 아니면 꾹 참고 있는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들어간다.”
 신이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정면에 있는 207호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난 조심스럽게 주의를 살피며 신이 형의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아까보다 더한 한기를 느꼈다.
 아무래도 바깥에서 느낀 한기의 원인은 이 방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불이 꺼져 있었지만 방안에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인공적인 것도 아니고, 자연적인 것도 아닌 이상한 빛으로 신비롭다고 하기보다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침대 안에 사지가 묶인 채 누워 있는 소녀. 그 소녀의 주위에 하얀 연기와 같은 것이 감돌며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시체처럼 창백한 회색 빛을 띈 피부. 얼굴은 물론이고 온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는 것이 너무나 흉측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녀의 인상을 무시무시하게 만든 것은 검푸른 기미 위에 보이는 금색 눈동자로 무섭게 노려보는 시선이었다.
 소녀의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지만 그 무서운 시선은 날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저건 분명히 소녀,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할 것이다.
 “지지리도 재수 없는 새끼. 너 같은 놈은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았어.”
 소녀는 대뜸 험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귀에 거슬리는 건 분명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가 노려보는 시선이 너무 무서웠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불행의 별이 떠오른 날 태어났고, 자랄 때는 가난의 신과 함께 했으며 사는 곳마다 전부 터가 좋지 않아서 재수가 없어도 아주 단단히 없지. 그래서 넌 혼자 남게 된 거야. 빚만 잔뜩 지고서 말이지.”
 소녀는 정말 재수 없는 말만 골라서 했다. 그런데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스스로의 무력함에 절망했다.
 부모님은 먼저 가시고 친척들은 외면을 한 마당에, 날 반겨준 것은 거액의 빚과 텅 빈 땅 덩어리뿐인데 뭐가 아쉬워서 죽지 않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죽으면 분명 아무도 울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또한 남길 수 있는 것도 없겠지. 그냥 이참에 콱 죽어버리는 게 나을까나?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즐거움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 그래. 죽는 것도 좋겠지. 앞으로 펼쳐질 절망의 미래는 네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거야. 크흐흐흐흐..”
 소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며 자살 충동을 일으켰다. 이성은 귀담아 들을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본성은 비관의 늪에 빠진지 오래다.
 난 정말 재수 옴 붙은 놈인 데다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고독하고 불쌍한 녀석인 것 같다.
 “야, 야. 정신차려.”
 그때 신이 형이 내 어깨를 팍 쳤다. 약간 세게 맞은 것 같아서 퍼뜩 정신이 났다.
 “너도 이제 좀 조용히 있으라고. 자기 입이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지껄여선 안되지. 입은 재앙의 씨앗이란 말도 있잖아?”
 신이 형이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화가난 투로 충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웃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감정이 격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알고 있어. 너희는 언제나 만만한 사람들을 노리고 작업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이야.”
 “킥킥킥, 웃기고 자빠졌네. 네가 도대체 뭘 안다는 거지.”
 소녀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신이 형을 쳐다보았다. 내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신이 형은 웃는 얼굴로 대응했다.
 “빈아. 지금 몇 시니?”
 신이 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시간을 물었다.
 “이제 막 새벽 2시가 됐어요.”
 “오, 그래. 그럼 그 녀석이 올 때가 됐군.”
 내가 손목 시계를 보고 답해주자 신이 형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었다. 반면 여유 있게 나와 신이 형을 조롱하던 소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원래부터 어둡긴 했지만 지금은 더욱 그래서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가즈.. 가즈 세인트..”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잠시 후 어디선가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밖을 보니 아파트 근처에 검은 자동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자동차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인데 지금 내가 서있는 방안의 빛을 받으며 창가를 한번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신이 형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서있었다. 소녀 역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전에 본 모자를 눌러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나보다 키와 덩치가 더 크고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는 게 꼭 운동선수 같았지만 옷차림은 영락없는 기독교 신부의 그것이었다.
 “하이, 미스터 신.”
 신부처럼 보이는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신에게 인사를 했다. 얼굴을 보니 금발벽안의 젊은 외국인으로 같은 남자라도 호감을 가질 만큼 핸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의 할 일도 역시 엑소시즘 의식?”
 약간 발음이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외국인치고는 능숙한 한국어였다. 그런데 엑소시즘이라니. 책에서 본 대로라면 그건 바로..
 “그래, 가즈. 이 녀석이 어서 빨리 자기 고향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발버둥치고 있어.”
 우려했던 대로 가즈란 사람이 말한 엑소시즘은 바로 구마(驅魔)의식이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푸닥거리 액막이 등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젠장, 늑대 인간도 모자라 엑소시즘까지 봐야 한다니! 나, 난 방금 전까지 아름다운 밤하늘의 전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질 정도로 순수한 20살 청년이란 말이다!!
 “음, 그런데 이 코리언은 누구?”
 가즈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보다 키가 커서 그런 걸까? 왠지 모르게 날 보는 시선과 신이 형을 보는 시선에 다른 것 같았다. 설마 내가 겁을 좀 먹었다고 얕보인 건 아닐까.
 “내겐 한빈이란 좋은 이름이 있습니다, 아메리칸.”
 오기가 생긴 난 가즈에게 내 이름 두 자를 똑똑히 밝히면서 아메리칸이란 말로 응수해 주었다. 양키란 말을 썼다간 시비조로 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메리칸으로 한 거지만 가즈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었다.
 “크흐흐흐.. 오늘 밤 침대에서 너희 넷이 추잡하게 뒹굴 거릴 계획을 세우는 거지?”
 한동안 잠잠히 있던 소녀가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즈는 나 대신 그녀를 노려보면서 품에서 작은 십자가와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유리병을 들고 성호를 그었다.
 “음,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이 미션부터 클리어 해야겠군.”
 전문가라서 그런 걸까? 가즈는 악령 들린 소녀를 눈앞에 두고도 엑소시즘을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가볍게 여겼다.
 “이봐, 코리언. 내 옆에 있는 건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몇 가지 주의해야할 사항이 있어. 절대로 저 악령과 대화를 하지 말아야 해. 질문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위험하거든. 악령은 거짓말로 우리를 혼란시키려 하지. 또 거짓과 진실을 섞어 우리를 공격한다고.”
 가즈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충고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엑소시즘을 할 때 반드시 지켜야할 사항인 것 같았다.
 “마인드 어택. 심리적인 공격이야. 아주 강력하지. 들으면 안 돼, 절대 귀 기울이지 말아.”
 심리적인 공격이란 말을 들어보니 방금 전에 저 악령 들린 소녀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불행의 별이니, 가난의 신이니 같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부추기던 장면을 떠올리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건 그렇고 유. 그 소녀의 몸에 언제까지 머무를 생각이지?”
 가즈가 악령 들린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나 신이 형을 대하던 때와는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무감각함으로 몸과 마음을 무장이라도 한 것처럼 가즈는 차갑고도 단단했다.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악령 들린 소녀는 고개를 팍 들며 거칠게 소리쳤다. 인간도, 동물도 아닌 이상한 목소리에, 번뜩이는 안광과 상처투성이 얼굴은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가즈는 그 소녀의 반응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둥근 유리병을 손에 들었다. 정 가운데 십자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 유리병의 마개를 뽑은 순간 소녀는 잔뜩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지?”
 소녀가 묻자 가즈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 마개를 꽉 쥐었다.
 “성수.”
 가즈는 짧게 답하며 주저 없이 소녀를 향해 성수를 뿌렸다. 그러자 성수에 맞은 소녀는 상처 입은 야수와 같이 끔찍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마구 발버둥 쳤고 성수에 맞은 부위에서는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뜨거워, 뜨거워!”
 소녀는 흰자위를 드러낸 채 고개를 마구 뒤흔들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당장이라도 결박을 끊고 튀어나올 정도로 격렬히 몸을 뒤틀었다. 내게 있어서 그 악령 들린 소녀의 반응은 늑대 인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서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에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가즈는 십자가를 들고 두 손을 모은 뒤 경건한 얼굴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친구 따라서 간식 얻어먹으러 갔던 교회에서 자주 듣던 기도문이었다.
 “카앗!”
 순간 악령 들린 소녀는 가즈를 향해 침을 뱉었다. 가래침처럼 목에 한번 걸렸다 튀어나와서 그런지 걸쭉한 게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그런데 그 더러운 액체는 간발의 차로 가즈의 어깨 너머를 스쳐 지나가 그 뒤에 있는 내 뺨에 닿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더러워! 기분 나빠! 토할 것 같아! 으으,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그 녹색 액체가 내 뺨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끄아하하하하.”
 소녀. 아니 정확히는 소녀의 몸에 씐 빌어먹을 악령은 방안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빌어먹을, 역시 저 녀석은 동정할 가치가 없다!
 열이 받을 대로 열이 받은 난 당장이라도 저 악령 들린 소녀를 패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신이 형이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렸다.
 “전지전능하신 주 하느님. 우리의 의지를 지켜 주시고 오만한 자의 핍박과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구하시어 주소서.”
 “닥쳐, 이 병신 새끼야.”
 “주 하느님은 저의 구원자. 제 삶을 지켜주고 원하는 바를 얻게 해 주시나이다.”
 “개소리 집어치워!”
 기도문을 외우는 가즈와 욕설을 퍼붓는 악령 들린 소녀의 대결 구도는 꼭 종교 관련 오컬트 호러 무비를 보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교회나 성당에 다녔으면 지금보다 더 큰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신의 교리나 악마 같은 것은 책에서 본 것말고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방 안에서 버틸 수 있었다.
 침대가 들썩거리고 방안에 있는 가구가 마구 흔들리는 심령 현상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막 팔 다리에 닭살이 돋았지만 꾹 참고 엑소시즘 의식이 끝나길 기다렸다.
 “주의 종을 구하소서. 주의 종은 주를 믿습니다. 주의 종을 원수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고 사악한 자로부터 지켜 주소서.”
 가즈의 기도문이 계속 되자 악령 들린 소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 대신 누운 상태로 몸이 갑자기 공중에 붕 뜨더니 수직 상태로 위로 올라갔다. 그로 인해 팔 다리에 결박된 밧줄이 끊어 졌지만 다행히 소녀는 발광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있어선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무서웠다.
 피아노 줄 같은 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인간의 몸이 아무런 도구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공중에 떴다가 다시 내려오는 장면에 가즈의 경건한 기도문을 합치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의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해석하면 해석할수록 호기심이 해결되면서 그와 동시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주의 포도밭에 기거하는 짐승을 쫓아! 주의 전능으로 짐승을 몰아내어! 주의 기쁨으로 창조된 종에게 더 이상 깃들지 말게 하소서!”
 가즈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악령 들린 소녀는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온 몸에 터진 듯한 상처가 조금씩 아물면서 회색 빛깔을 띄었던 피부색이 본래 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가즈의 엑소시즘 의식이 거의 성공한 줄로만 알았다.
 “킥킥킥..”
 그런데 악령 들린 소녀가 얼굴에 손을 모으고 작게 웃기 시작했다. 가즈의 기도문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지만 무슨 꿍꿍이인지 계속 웃기만 해서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가즈 세인트. 넌 날 너무 얕보고 있어. 난 지금까지 네가 퇴치한 악마와는 다르다고. 그들은 이름이 없었지만 내겐 이름이 있지.”
 웃음을 멈춘 순간 소녀, 아니 악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흰자위를 드러내고 있다고 지금 이 순간 다시 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노려보는 것은 상당히 섬뜩했다. 소녀의 얼굴로, 소녀답지 않게 짙은 살기가 서린 시선을 받는 건 내게 있어서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이름은 아스트라스. 아스타로트 님의 추종자. 너희 놈들의 영혼을 모두 빼앗아 그분께 바치겠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소녀는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바로 신이 형과 가즈를 강하게 밀쳐 내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춤거리고 물러서다가 그만 꼴사납게 자빠지고 말았다.
 “아, 아니. 왜 나를 노리는 거야!”
 난 당황한 얼굴로 옆에 있는 신이 형과 가즈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악령 들린 소녀에게 깔리고 말았다. 그 소녀는 거꾸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듯한 자세로 양손과 양발로 내 사지를 붙들고, 고개를 활자 모양으로 꺾었다. 그냥 제대로 서 있어도 무서워 죽겠는데 맛이 간 요가 선수처럼 날 거꾸로 보고 있으니 닭살이 돋다 못해서 아예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너부터다. 제물이여.”
 악령 들린 소녀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혓바닥을 내밀었다. 기형적으로 긴 그것이 내 귓구멍 속으로 들어오려 했다. 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 * *
 
 “저리 비켜!”
 난 크게 소리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악령 들린 소녀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팔 다리를 잡힌 상황이라 박치기만이 유일한 공격 수단이었다. 김일 선수의 원자폭탄 박치기를 생각하며 서너 차례 들이받으니까 악령 들린 소녀의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신이 형, 나 좀 도와줘요!”
 난 악령 들린 소녀로부터 멀리 떨어지면서 신이 형의 옷자락을 잡았다. 늑대 인간도 맨 손으로 때려잡은 그 형이라면 분명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끄하하하하, 겨우 그 정도냐?”
 악령 들린 소녀는 이상한 목소리로 웃었다. 아까 날 잡고 있던 모습 그대로, 몸을 뒤로 꺾어서 거미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다가 나와 신이 형을 향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우두두둑.
 악령 들린 소녀의 고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돌다가 마침내 한바퀴를 다 돌았다. 그때 들린 목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는 상당히 소름끼쳤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머리를 180도 돌린 뒤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흉측한 얼굴이었다.
 “너희들의 무기는 내게 통하지 않아.”
 악령 들린 소녀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신이 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신이 형은 검지 손가락을 척 치켜들더니 악령 들린 소녀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까부터 계속 기도문을 외우고 있던 가즈가 서 있었다.
 “무능한 예수쟁이 따위는 절대로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악령 들린 소녀는 얼굴을 포함해 팔 다리가 뒤로 꺾인 상태에서 그대로 일어나면서 가즈를 공격했다. 가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아 기도만 하고 있었다.
 “가즈, 위험해!”
 내가 다급하게 소리친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악령 들린 소녀가 나가 떨어져 벽에 부딪혔다. 그 바로 앞에 주먹을 쥐고 서있는 가즈의 모습이 보였다.
 “기도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야.”
 가즈는 검은 신부복을 확 벗어 던진 뒤 하얀 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복장을 한 뒤 머리 위에서 성수 병을 깨뜨려 온 몸을 적시고는 악령 들린 소녀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기도문 콤보!”
 가즈는 권투 자세를 취하고 벽에 부딪힌 악령 들린 소녀에게 달려들어 강한 펀치를 날렸다.
 “성부 레프트. 성자 라이트. 성령 보디. 이름으로 훅.”
 가즈는 권투의 레프트, 라이트, 보디, 혹을 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연계하면서 사정 봐주지 않고 마구 공격했다. 그래서 악령 들린 소녀의 몸은 마치 벌한테 쏘인 것처럼 엄청나게 부어 올랐다.
 “아멘 어퍼!”
 가즈의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온 강렬한 어퍼컷이 악령 들린 소녀의 턱에 정통으로 꽂혔다.
 “크, 크아아악!”
 악령 들린 소녀는 한 차례 비명을 지른 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이 내가.. 한낱 인간 따위에게 고전을 하다니..”
 악령 들린 소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즈는 거기서 끝낼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차기 천국!”
 가즈는 악령 들린 소녀의 머리를 잡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무릎차기를 날렸다. 내 박치기 공격을 맞고도 끄덕 없던 악령 들린 소녀의 얼굴은 완전 만신창이가 되 버렸다.
 “이 소녀의 몸에서 나갈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줘.”
 너무 맞아서 얼굴이 붓는 바람에 완전 아기 공룡 둘리가 되어버린 악령 들린 소녀가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의 위세와 오만 방자함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 주의 충실한 종은 악마에게 베풀 자비 따윈 없다.”
 가즈는 악령 들린 소녀의 애원을 무시하고 펀치 몇 방을 더 먹여 주었다.
 “이대로 계속 때리면 죽어 버릴 거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이 소녀까지 말이다! 의뢰자의 안전을 지키는 건 교황청 엑소시즘의 기본 원칙 아닌가?”
 악령 들린 소녀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제 3자인 내가 듣기에 방금 그 말은 꼭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상관없어. 내가 직접 나선 이상 그 자매는 순교자 명단에 올릴 예정이었으니까 말이야.”
 “이, 이런 악마!”
 “악마는 바로 너잖아?”
 가즈와 문답을 주고받은 들은 악령 들린 소녀는 새하얗게 타버렸다.
 신부 된 자가 산뜻한 얼굴로 저런 대사를 지껄이다니. 이거 도대체 누가 악당이야?
 “미스터 신, 저 좀 도와주세요.”
 “오케이, 오케이. 이제 피니쉬 무브가 나올 때가 됐어.”
 가즈가 신이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반정도 정신이 나간 악령 들린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기 가랑이 사이에 소녀의 머리를 집어넣은 뒤 어깨와 가슴 사이를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크로스 파일 드라이버!”
 악령 들린 소녀의 양팔을 잡고 수직으로 세워서 십자가 형태를 만든 뒤 바로 주저앉았다. 마치 방아 찍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악령 살려!”
 악령 들린 소녀의 구슬픈 외침이 들렸다. 딱딱한 마루 바닥 위로 머리부터 떨어지는데 신이 형은 그 순간 놓치지 않고 악령 들린 소녀의 두 발을 손으로 콱 눌러서 무게를 더해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콰지직.
 머리를 180도 돌려도 멀쩡했던 악령 들린 소녀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ㄱ’ 자가 되어 버렸다.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주여, 당신의 적을 섬멸했나이다.”
 가즈는 무릎을 끓고 앉아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올렸다. 난 그 옆에서 머리가 부러진 채로 경련을 일으키는 소녀와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신이 형을 번갈아 보며, 이제야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신이 형.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난 신이 형한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엑소시즘 의뢰자가 죽었으면 어떻게 해요?”
 난 그게 참 걱정됐다. 악령이야 죽건 말건 상관없지만 그 몸의 원래 주인인 소녀가 죽으면 너무나 안된 일이다.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코리언. 평소 때처럼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계하고 충분한 설명을 드린 뒤 장례식을 치르면 끝이야.”
 당신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목이 ‘ㄱ’ 자로 부러질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불쌍한 소녀의 명복을 비는 것뿐이었다.
 “그럼 난 이번 일을 마무리하고 올게.”
 가즈는 검은 신부복을 갖춰 입은 뒤 싸늘한 시신이 된 소녀를 어깨에 걸치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방안에는 나와 신이 형 단 둘만이 남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빈아, 이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일이 너무 많단다.”
 신이 형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신이 형 나름대로의 배려인 것 같았고, 지금의 나로선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몇 시니?”
 신이 형의 말을 듣고 손목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켰다.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하룻밤 묵고 가고 싶었지만 난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어, 벌써 가려고?”
 신이 형이 아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첫 인상부터 좋지 않은 양키 가즈 따위보다는 훨씬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신세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난 신이 형을 향해 고개를 꾸벅인 뒤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한 템포에 따라 쿵, 쿵. 꼭 사람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든 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아파트 입구 앞에 서있었다. 늑대 인간에 악령 들린 소녀까지 나왔는데 그보다 더한 게 나오지 않으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아아, 그러고 보니 슬슬 돌아올 때가 됐군.”
 어느새 아파트 밖으로 나와 내 옆으로 다가온 신이 형이 말했다. 신이 형이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길해졌다. 늑대 인간을 아작 낼 때, 가즈가 나타나 악령 들린 소녀를 지옥으로 보내버릴 때도 본 미소였기 때문이다.
 쿵, 쿵, 쿵.
 땅이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아파트 입구 맞은 편으로 보이는 어둠을 주시하며, 그 소리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시간이 조금 지나자 푸른 달빛 아래로 서너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태극 문양이 그려진 황색 도복을 입고 머리엔 관을 쓴 사람이 맨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중국 옷을 입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강시 선생?”
 난 무심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 본 영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음양오행의 이치를 능한 도사가 제자들과 함께 중국 판 시체 귀신인 강시와 싸우는 내용의 영화로 상당히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났다.
 “다녀왔습니다.”
 도사는 신이 형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자세히 보니 그 도사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안녕하세요?”
 난 일단 먼저 인사를 했다. 좀 무뚝뚝해 보이긴 하지만 꽤 예쁘장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장도영 이라고 합니다.”
 유신은 무협지에나 볼만한 포권을 취하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처음 보자마자 대뜸 코리언이라고 무시를 때린 가즈에 비해서 훨씬 인상이 좋았다.
 하지만 도영이 끌고 온 중국 옷의 사람을 본 순간 내 얼굴엔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유지한 그들의 정체는 안 봐도 뻔했다.
 “강, 강시 선생!”
 “제 뒤에 있는 분들은 강시가 맞습니다. 하지만 전 강시 선생이 아니라 영환 도사입니다.”
 강시 선생과 영환 도사의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영의 복장이나 강시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그 두 개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엔 또 뭘 그렇게 많이 주워온 거야?”
 신이 형은 내 어깨를 안고 강시 무리가 서있는 쪽을 가리켰다. 강시의 허리에 묶인 줄 뒤로 낡은 리어카가 하나 보였다. 리어카 안에는 어디선가 많이 보던 물건들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그, 그건!”
 깜짝 놀란 난 서둘러 리어카 쪽으로 달려갔다. 그 안에 있던 물건, 어디선가 많이 봤다고 생각한 그것은 바로 내 유일한 재산인 6인용 짜리 텐트와 잡다한 살림도구였다.
 “오늘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다녀왔는데 마침 버려진 텐트가 있기에 주워온 겁니다.”
 버려진 텐트라니! 지난 1년 동안 날 추위와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준 작은 보금자리를 그렇게 말하다니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도영은 가즈보다 성격이 더 나쁜 게 아닐까? 유신을 바라보며 좌절하는 날 뒤로하고, 신이 형이 리어카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어라, 이건 빈이 사진 아니야?”
 난 서둘러 신이 형의 손에서 사진을 가로챘다. 텐트 안에 있는 물건 중 사진이라고 한다면 딱 한 장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내 가족 사진.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모두 함께 모여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그리고 유일하게 남겨진 정신적 유산. 설령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도 이 사진만큼은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본래 주인이 있는 텐트였나 보군요.”
 도영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정중히 사과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진심이 담겨 있는 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바에 아예 여기다가 방을 잡고 사는 건 어때? 어차피 이 아파트는 땅 주인인 네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보여도 물하고 전기 정도는 다 통한다고. 그러니 텐트에서 지내는 것보단 더 나을 거야.”
 신이 형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이 아파트에서 방을 잡고 사는 게 텐트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오늘은 일단 밤이 늦었으니 내 방에서 같이 자기로 하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로 쓸 방을 알아보자. 방은 남아도니까 걱정하지 말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텐트가 뽑힌 이상 돌아갈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신이 형의 말을 따랐다.
 “그럼 먼저 주무십시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도영은 다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고는 강시들을 데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난 가만히 서서 신이 형의 눈치를 살폈다. 신이 형은 강시가 쿵쿵 뛰는 소리가 완전히 그칠 때쯤 내 어깨를 잡았다.
 “우리도 이만 들어가자.”
 난 다시 신이 형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까 전에 악령 들린 소녀에게 가래침 세례를 받은 것도 있는지라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화장실은 비교적 깨끗한 편으로, 내가 지난 1년 동안 사용한 이동식 화장실과 수돗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1년 동안 차가운 냉수만 나오는 수돗가를 이용하다보면 이런 평범한 것에도 감동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대충 세수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보니 신이 형이 잠자리를 다 만들어 놓았다. 신이 형을 따라 자리에 눕고 보니 거의 1년 만에 베개와 이불의 따뜻함과 실용성을 알게 되었다.
 “이만 불 끌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형은 곧 바로 전원을 내렸다. 방안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만 평소 때와는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 30분 동안 계속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정신은 말짱한 상태였다.
 “빈아, 너 혹시 지금까지 계속 혼자였니?”
 신이 형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처럼 잠이 안 오는 모양이다.
 “작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쭉 혼자였어요. 남은 건 거액의 빚과 잊혀진 땅이 전부죠.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난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고독과 가난에 익숙해진 탓일까? 나라에 보조를 받아야 될 정도로 어려운 개인 사정을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데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기운 내라고. 앞으로 넌 혼자가 아니니까 말이야.”
 신이 형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래서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이 든 난 빨리 자야겠단 생각을 했다. 머리에 베고 있던 베개를 빼서 얼굴에 파묻으니까 이외로 잠이 쉽게 찾아왔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눈을 깜빡여 보니 바로 앞에 신이 형의 미소가 보였다.
 
  * * *
 
 
 
 
 
 제 2장:
 
 새 집에서 산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 이 세상에 남아서 쓸쓸히 살아 온지 1년 만에 작은 행복감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텐트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다. 방 두 칸에 마루, 거실, 베란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집에서 공과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었다.
 첫날은 신이 형 방에서 잤고, 둘째 날에는 내 방에서 혼자 잤는데 평소보다 잠이 더 잘 왔다. 조금 더 오버하자면 마치 1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처럼 큰 침대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잘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 이불을 깔고 베개와 요를 벗삼아 잠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딱딱한 돌이 걸리적거리는 맨 땅 위에, 텐트를 세우고 침낭 속에 들어가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빈아, 왜 그렇게 싱글벙글 거리는 거야?”
 언제나 웃고 있는 신이 형에게 들으니 왠지 어색한 질문 같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난 그 행복의 근원이 바로 신이 형의 권유에서 비롯됐다는 말을 하기가 좀 부끄러워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통 내 나이 정도 되는 애들에게는 군복무 면제나 회사 취직, 작업 성공 등을 행복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난 꼭 나이 먹은 사람처럼 내 집 장만으로 들떠 있으니 내색하기가 좀 그렇단 말이다.
 “그만 웃고 밥이나 먹자고.”
 신이 형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상을 차렸다. 어젯밤과 똑같이 밥 반 공기에 노란 단무지를 곁들인 조촐한, 아니 조금은 비참한 식단이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자체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헤헤, 오늘은 빈이가 처음 들어온 날이라서 평소보다 신경 좀 더 썼어. 맛있게 먹으라고.”
 신이 형의 말을 듣고 밥을 한 숟갈 펐더니 어젯밤과 분명히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밥 위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계란 프라이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밥과 함께 한술 떠서 입안에 넣으니 담백함과 고소함이 가득 퍼졌다. 아아, 이렇게 따듯하고 맛있는 계란 프라이를 마지막으로 먹어본지가 언제였던가?
 “그러고 보니 슬슬 다른 녀석들이 올 때가 됐는데..”
 이곳의 본 주인은 나일지 몰라도, 관리인에 해당하는 사람은 신이 형이다. 신이 형은 이 아파트를 관리하면서 꼭 지켜야할 규칙을 만들었다. 그 규칙 중 하나는 바로 밥을 먹을 때는 모두 함께 모여서 먹는다는 것이었다.
 “굿 모닝!”
 그때 가즈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신이 형은 입에 밥을 물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즈는 얌전히 우리 옆에 앉아서 바닥에 냅킨을 깔아 놓은 다음 손에 들고 온 바구니 안의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즈의 아침 식사는 간소한 것 같으면서도 화려해 보였다.
 회색 빛깔이 나는 호밀 식빵 안에 각종 야채와 햄, 치즈, 정어리, 베이컨 등을 가득 넣은 초 특대 샌드위치였다. 그리고 거기에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곁들인 게 바로 가즈의 아침 식사였다.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즈는 식사 기도를 마치고 곧바로 입을 크게 벌려서 샌드위치를 와삭 물었다. 난 어제 아침에도 지금과 똑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신이 형에게 들은 바로는 악령을 맨 손으로 때려눕힐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인이라서 그런지 밥은 전혀 안 먹고 항상 빵과 치즈, 고기 같은 것만 먹는데도 살이 안찌고 근육이 잘 잡혀 있는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는 건 신기할 따름이었다.
 “모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도영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그녀 역시 이때는 우리와 함께 밥을 먹기 때문에, 자신이 먹을 음식을 따로 가지고 왔다.
 가즈에 비해서 너무나 조촐한, 나와 신이 형의 식단보다도 더 초라한 그녀의 아침 식사는 달랑 대추 한 알이 전부였다. 밥이 아니라 꼭 간식을 먹는 것 같이 보였지만 도영 본인의 말에 따르면 도사는 본래 소식을 해야 한다고 한다.
 뭐 그래서 체구가 작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밥을 먹고 있을 때는 가즈 보다 그녀 쪽이 더 나은 편이었다.
 “오우, 델리셔스!”
 샌드위치 하나 먹는데 오버를 하는 미국인은 절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신부란 신분의 사람이, 입을 쩍 벌리고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처먹는 모습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다.
 “역시 아메리칸 샌드위치가 최고야. 코리언들의 주식인 라이스 따위 보다는 훨씬 좋다고.”
 다 먹고 나면 꼭 조롱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니, 샌드위치가 대단하면 또 얼마나 대단하다고 우리 쌀밥을 무시하는 거야? 난 가즈의 저런 말투가 굉장히 싫었지만 신이 형이나 도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대추 한 알을 다 먹은 도영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초 특대 샌드위치 두 개를 먹어치우고 우유 한 병을 깨끗하게 비운 가즈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결국 남은 건 나하고 신이 형 단 둘 뿐이었다.
 “이런, 이런. 또 둘만 남았군. 밥 먹을 땐 회의도 겸하기로 했는데 저 둘이 밥을 너무 빨리 먹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회의를 할 수 없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한 이런 상황이 계속 되면 식사 중에 제대로 된 회의를 할 수 없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사교성이 없는 건지, 아니면 둔한 건지 도영과 가즈는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좀 기다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먼저들 자리를 떠났다.
 “뭐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미리 다 끝내놨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다른 곳을 보면서 내게 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말투. 난 그 말투 속에 담긴 의미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이제 만난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신이 형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간단하게 결론을 말하자면 좋은 사람. 내게 있어 신이 형을 표현하는데 그 이상의 표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밥 다 먹었으면 빨리 준비 해. 오늘부터 빡세게 나가야되니까 말이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신이 형이 설거지를 하며 그렇게 말할 때, 뒤늦게 밥그릇을 다 비운 나도 얼른 옆에 붙어서 일을 도왔다. 밥을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는 게 꼭 구내 식당 같은 분위기가 났지만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빈아,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면 나하고 같이 일일 아르바이트 자리나 알아보러 다니자.”
 신이 형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해온 게 바로 일일 아르바이트라서 내게 있어선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신이 형은 어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요?”
 난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신이 형 인상을 보면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는 잘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로 어떤 일을 많이 하는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음, 일단 약간 위험하긴 하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는 편이야.”
 위험하긴 하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니! 수상하고도 불길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신이 형. 설마 그 돈 많이 버는 아르바이트라는 거 호스트 바에서 일을 한 다거나 중년 아줌마하고 원조 교제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지?”
 난 그냥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는 중년 아저씨와 어린 소녀의 원조 교제가 많아졌지만 지금 현재에는 성차별이 어쩌고, 평등이 어쩌고 막 떠들면서 그 반대의 사례가 급증하다가 마침내 일반적인 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꽃 미남이나 영계가 아니라서 그런 일은 절대 못한다고.”
 신이 형이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됐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신이 형 외모 정도는 충분히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데 너무 자격지심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무작정 신이 형을 따라나선 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에서야, 난 약간 위험하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일 아르바이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으악!!!”
 난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 한 50년쯤 되어 보이는 낡은 집인데, 그 주변에 처진 현수막에는 실로 경악할 만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LBS 방송사가 주관하는 TV 공포 속으로 특선.
 ‘흉가 일일 체험기!’
 국내 최고의 흉가라 불리 우는 이 ‘그늘이 없는 집’ 에 묵을 용감한 젊은이를 찾습니다. 하룻밤을 무사히 지내고 나오는 사람에게 상금 백만 원을 수여합니다.
 단, 중간에 빠져 나오거나 흉가 내에서 해를 당하시면 책임을 지지 않으니 신중하게 생각하시고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장례 회사, 생명 보험 회사 협찬.
 
 난 이대로 등을 돌려 달아나고만 싶었다. 이건 보통 위험한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장례 회사랑 생명 보험 회사가 협찬한다는 걸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늘이 없는 집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곳은 분명 30년 동안 방치되어 온 국내 최고의 흉가로서, 거기서 살던 사람들은 모두 미치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국내의 유명한 무당과 심령술사, 퇴마사 등이 총 출동해 진상을 규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유명한 곳이다. 그러니 겨우 하룻밤 자고 나오는데 백만 원을 준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 여기가 바로 흉가구나.”
 신이 형은 흉가를 바라보며 마치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굴었다.
 흉가는 이층 양옥집으로 벽 곳곳에 금이 가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 줄기로 뒤 덮여 있어서 상당히 오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마당은 개방되어 있지만 입구가 쇠사슬로 봉인되어 있다가 끊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척 봐도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언덕 사이에 지어진지라 그늘 속에 있어서 햇빛을 받지 못했다.
 “시, 신이 형. 나 그냥 돌아갈래요.”
 “안녕하세요? 문의 전화 드리고 찾아왔습니다.”
 신이 형은 내 뒷덜미를 잡고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 방송국 관계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 방송국 관계자는 서둘러 접수 담당자를 부른 다음 우리가 이야기를 할 자리를 따로 마련해 주었다.
 “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래도 워낙 위험한 일이라 지원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상금이 불어나 백만 원이 됐거든요. 그러니 몸을 사리고 싶으시면 그냥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뒷덜미를 꽉 잡고 있는 신이 형을 뿌리치고 갈만한 힘이 없었다.
 “아니요, 하겠습니다. 하루 일당이 백만 원인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신이 형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러자 접수 담당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과연 대단하군요. 역시 잊혀진 땅에 사시는 분답습니다.”
 어라, 잊혀진 땅이 그렇게 유명한 곳이었나? 난 전혀 몰랐다. 사람들의 관심이 없기에 잊혀진 땅이라 이름 붙여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던가. 신이 형은 혼란스러운 나를 뒤로 한 채 먼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내 이름을 기입해 넣은 뒤 아무렇게나 사인을 해버려서 이제는 발도 못 빼는 상황이 되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전 돌아가고 싶다고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단 시간 내에 많은 돈을 벌려면 이런 방법 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잖아.”
 난 할말을 잃었다. 분명 신이 형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몸과 마음이 자꾸 거부를 하기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미 계약을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이 상황에 갑자기 찾아온 혼란은 계속 이어졌다.
 “점심하고 저녁은 다 주는 거죠?”
 “하하, 그런 건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나랑 다르게 신이 형은 여유가 철철 넘쳐흘렀다. 접수 관계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신이 형, 촬영 스텝들을 데리고 근처 고기 집에 갔다. 아주 오랜만에 가보는 고기 집이었지만 정신이 워낙 없어서 거의 먹지도 못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밥이 잘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신이 형말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밥 먹고 차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시간은 무료하게 지나갔다.
 난 거의 반나절 정도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신이 형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며 어느새 촬영 스텝들과 친해졌다. 그래서 촬영 스텝들은 신이 형의 안부를 걱정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눈치였다.
 붉은 석양이 찾아 든 초저녁 무렵, 나와 신이 형은 흉가 마당으로 들어갔다. 접수 관계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슥 쳐다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저희는 일단 이 흉가 주위에 있다가 밤이 되면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촬영 기사와 심령술사를 투입하고 싶었지만 글쎄 아무도 안 가겠다고 하니 별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지요.”
 이봐, 아저씨.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 난 인상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미 촬영 스텝들은 다 떠나가고 흉가 마당에는 나와 신이 형 단 둘 만이 남았다. 요 며칠 사이에 느낀 거지만 신이 형하고 단 둘이 남으면 꼭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곤 한다. 그래서 난 지금 무척이나 불안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빈아,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빨리 들어가자고.”
 신이 형은 내 어깨를 안고 흉가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속담을 생각하면서 주의 깊게 주위를 관찰했다. 마루와 거실 바닥은 흙먼지가 수북히 쌓여서 상당히 지저분했는데 신기하게도 방안은 깨끗했다. 다만 기분이 나쁠 정도로 주변 공기가 차갑고 으스스하다는 게 큰 문제 거리였다. 일전에 악령 들린 소녀의 방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잖아. 일단 밥부터 먹고 보자.”
 신이 형은 촬영 스텝들과 친해져 도시락을 잔뜩 얻어온 상태였다. 돈까스 도시락에서 햄버그 도시락, 탕수육 도시락, 튀김 도시락 등 2인분을 훨씬 넘는 지라 손에 짐을 많이 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금 밥이 넘어 가요!”
 난 방안에 전등 스위치를 켜면서 신이 형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하지만 신이 형은 벌써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뜯고 있었다.
 “빈이 너도 빨리 먹어. 어쩌면 이게 최후의 만찬일지도 모르잖니?”
 칵, 최후의 만찬이라니! 이 형은 정말 무의식적으로 끔직한 말을 잘도 하는 것 같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아직 7시 밖에 안됐으니까 말이야. 피곤하면 내가 옆에서 망을 보고 있을 테니까 밥 먹고 나서 눈 좀 붙여.”
 난 신이 형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상냥한 것 같아 보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볼 때 완전 병 주고 약주고 식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때 보다 정신을 바짝 차려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흉가는 호랑이 굴 보다 더 무서운 곳이었다.
 
  * * *
 
 도시락 전문점에서 사온 즉석 도시락이라고는 하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서 그런지 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망을 봐주겠다는 신이 형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떠보니 손목 시계의 시간은 어느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라?”
 주위를 둘러보던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볼을 긁적였다. 신이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안은 붉을 켜 놓아서 비교적 밝은 편이었지만 활짝 열린 문 너머에는 어둠이 쫙 깔려 있었다.
 “신이 형은 도대체 어디에 간 거지.”
 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전등을 켜고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문 밖에 깔린 어둠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난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씩 내 딛으며 어둠이 깔린 마루 바닥 위를 걸어갔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신이 형.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난 신이 형을 부르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면 왠지 더 무섭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지 간에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이 형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때처럼 웃으며 날 반겨줬으면 좋으련만 내 눈앞에 깔린 건 어둠과 낡은 마루 바닥 뿐. 그 이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음침한 기운이다.
 쿠당탕탕.
 그때 안방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그 소리에 놀란 난 온 몸의 털이 곤두섰지만 일단 그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찰칵!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하얀빛이 터지면서 미세한 기계 음이 들렸다.
 “누, 누구야?”
 당황한 난 소리를 지르며 마구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상당한 완력으로 내 손목을 잡았기 대문에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못했다.
 “침착하시오. 본인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오.”
 척 봐도 이상한 말투였다. 하지만 분명 내 기억으로 그 말투는 근 30년 전에 유행하던 외계어로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었다. 그러니 그것을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인간이 분명했다.
 난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정면을 살폈다. 정면에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는데,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머리는 붕 떠 있고 턱에는 잔털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서 지저분하긴 했지만 인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본인의 이름은 강풍이라고 하오. 올해 나이 22살이며, 직업은 폐인 문화 연구가요.”
 자신의 이름을 강풍이라 밝힌 그 남자는 나이답지 않게 너무 늙어 보였다. 그래서 조금 수상쩍게 보이기도 했지만 특별히 눈에 거슬린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없었다.
 통통한 얼굴에 퉁퉁한 몸을 가지고 있는 지라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고등학교 체육복 잠바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발이 다 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는 강풍의 모습은 수수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난 마음을 편하게 놓을 수 있었다.
 “제 이름은 한빈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20살이에요.”
 난 뒤늦게 자기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다.
 “햏 문화를 연구하다 자금난에 시달려서 우연히 전단지를 보고 이 흉가 일일 체험기 이벤트에 참가하게 됐소.”
 강풍 씨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그 모습이 워낙 솔직하고 대범한 게 보여서 그에 대한 거리감은 크게 줄어들었다.
 “전 아는 형을 따라서 우연히 참가했어요. 그런데 강풍 씨는 이 이벤트가 실재로는 굉장히 위험하단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난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알려줌과 동시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면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판국에 본햏에게 있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강풍 씨의 말을 듣고 난 내 자신의 처지에 감사해야 했다. 면식, 라면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다니. 아무래도 그는 나보다 더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적어도 지난 1년 동안 혼자 살아오면서 라면 하나 만큼은 지겹도록 많이 먹었다. 집안 사정이 워낙 어려운 지라 근처 동사무소에서 생활 보호 대상자로 지목 받아서 매달 마다 라면 한 박스씩 제공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침 잘됐네요. 두 명보다는 세 명이 함께 있는 게 덜 무서울 테니, 저랑 같이 다른 일행을 찾도록 해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럼 어서 앞장서시오.”
 아주 우연히 새로운 친구를 얻게 됐다. 일단 난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 본 뒤 강풍 씨를 데리고 신이 형을 찾으러 나섰다. 강풍 씨는 역시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한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집안에 깔린 어둠과 음침한 기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한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보자면 눈이 워낙 작아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보다 대단한 건 분명했다.
 “1층에는 없는 것 같은데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보는 것은 어떻겠소?”
 한 30분 동안 1층 전부를 다 뒤집었을 무렵 강풍 씨가 의견을 하나 내놓았다. 아무리 찾아도 1층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난 이의 없이 그 말에 따랐다.
 난 손전등으로 계단을 비추면서 먼저 올라갔다. 강풍 씨는 내 주위에 손전등 빛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쫓아왔다.
 “어라, 이건 뭐지?”
 2층으로 올라간 뒤 주변을 살피며 걷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첩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수첩은 호주머니에 간단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얇았다. 그리고 꽤나 오래된 듯 빛이 바래있었는데 겉 표지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삐그덕, 삐그덕.
 그때 계단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강풍 씨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난 깜짝 놀랐다. 분명히 신이 형은 1층에 없었는데 지금 올라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눌려서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신이 형. 신이 형이야?”
 난 계단 아래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 옆에 있는 강풍 씨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계단 아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디지털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포즈를 취한 후 카메라 방향을 2층 입구 쪽으로 고정시켰다.
 분명 강풍 씨는 나처럼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게 틀림없다. 누군가의 기척이긴 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느낌. 그리고 목덜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오싹한 한기가 그 존재의 정체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낡은 나무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하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기척이 느껴지고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흘렀고 입술은 바싹 말라 붙었더. 잔뜩 긴장을 한 가운데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후우...”
 강풍 씨는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가 내쉬면서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온 순간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플래시를 터트렸다.
 팟!
 하얀빛이 번쩍인 순간 이상한 형상이 나타났다. 난 그때 분명히 보았다. 너무 말라서 반 해골처럼 보이는 사람을 말이다. 털이란 털은 모두 뽑혀 있어서 언 뜻 보기엔 성별을 구분하기가 힘들었지만 하얀 소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여자 같았다.
 “으으으으...”
 그 여자가 기분 나쁜 신음 소리를 내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 왔다. 손전등을 가까이 비춰보니 몸 색깔은 투명했고 두 발이 없는 상태에서 공중을 붕붕 떠다니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다 보니 그녀의 정체를 밝히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으악!!!”
 난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템포가 늦어져도 한참 늦어진 것이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귀, 귀, 귀신?”
 늑대 인간, 악령 들린 소녀, 강시.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흉가에 사는 귀신이라니. 게다가 이번에는 신이 형 마저 곁에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오, 좋은 사진이 찍힌 것 같소. 오늘 집에 가서 통신에 올린 다음 등수 놀이나 해야겠소.”
 아니,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눈앞에 귀신이 나타난 판국에 사진 이야기나 하다니. 이건 신이 형 보다 더 하잖아?
 강풍 씨는 그런 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데 열중했다.
 “꺄아아악!”
 수 차례 플래시가 터지자 귀신은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끔찍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 좀 보시오. 정말 잘 찍히지 않았소?”
 강풍 씨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디지털 카메라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보니 방금 전에 나타난 귀신이 생생하게 찍혀 있었다.
 설, 설마. 귀신이 이 사진기 속에 봉인된 것인가? 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사진을 수 차례 찍은 다음 귀신의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이 디지털 카메라는 실재로 100년이나 된 물건이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심령 사진 찍는 건 일도 아니니까 말이오.”
 강풍 씨는 정말 태연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난 절대로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신을 봉인하는 사진기라니. 뭔가 신비한 영석을 갖다 박은 구식 카메라도 아니고, 한낱 디지털 카메라 따위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요.”
 강풍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 바로 바닥에 엉덩이를 데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까 주운 수첩을 펴놓고 손전등을 비추며 맨 앞장부터 차근차근히 넘기며 그 내용을 읽어나갔다.
 
 19XX년. 흉가 체험 일기.
 난 오늘 친한 친구들과 함께 이 ‘그늘이 없는 집’ 에 찾아왔다.
 국내 최고 최악의 흉가로 불리는 장소로 너무나 위험하기에 출입이 통제 된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젊은 혈기와 왕성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 삼아서 한 여름 밤의 공포를 느껴 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의미가 사라져갔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어디론가 사라질 때마다 두려움과 긴장이 찾아왔다. 내 손목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킬 때쯤 주위에 남은 것은 짙은 어둠과 미지에 대한 공포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머리털이 곤두 선 시간만큼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선천적으로 강한 영력을 가졌고, 또 부모님이 무당이셨기에,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 어떻게든 이 흉가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외로운 결전을 준비해야 했다.
 1층 모서리에 있는 작은 방에서..
 
 일단 첫 장에 적혀 있는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아직 모르는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일단 저런 귀신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1층 모서리에 있는 방을 찾아가야 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무 배가 고프오. 이번 이벤트에 너무 늦게 참가를 해서 저녁도 얻어먹지 못했단 말이오.”
 강풍 씨는 한가하게 밥 타령을 했다. 아무리 배꼽 시계가 울린다고 해도 이건 뭔가 상식이 어긋나 있어! 아무튼 난 강풍 씨의 손을 잡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막 1층 계단 끝에 다다를 무렵 오른쪽 구석진 곳에서 수상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신이 형?”
 난 처음에 그림자의 정체가 신이 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두 팔이 기이할 정도로 앞으로 뻗어 나와 바닥을 쓸면서 누군가 기어 나와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비로써 그 그림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복을 입고 하얀 얼굴에 긴 머리를 가진 여자 귀신으로, 위층에서 봤던 대머리 여자 귀신보다 더 뚜렷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히히히히..”
 가느다란 웃음소리. 전설의 고향에서나 들어 볼 법한 톤의 귀신 웃음소리를 직접 듣고 그 실체를 눈으로 보고 있자니 목덜미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으악!!!”
 난 또 비명을 질렀다. 긴 팔을 가진 귀신이 내 발목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여자인 건 좋소. 하지만 화장지가 없으니 무효! 군대 안 갔다왔으니 무효요!”
 난 귀신의 공격에 놀라 쓰러질 뻔했지만 강풍 씨의 헛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을 왜 데리고 왔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사진 찍어요, 사진!”
 난 귀신한테 잡힌 발을 마구 흔들며 강풍 씨에게 소리쳤다.
 “고구마 장사가 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강풍 씨는 끝내 내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 잡혔다. 왜 난데없이 고구마 장사 타령이야? 라고 소리치며 날뛰고 싶었지만 일단은 꾹 참아야했다.
 “이리 내놔요!”
 난 강풍 씨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낚아챈 뒤 서둘러 긴 팔을 가진 귀신을 찍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하얀빛이 번쩍이면서 귀신이 사진 속에 봉인 됐다.
 “이게 무슨 짓이오? 디지털 카메라는 본인 같은 사람들한테 있어 생명이나 마찬가지이거늘. 그걸 함부로 다루다니 자꾸 그러면 방법 당하고 말 것이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뛰어요!”
 난 마구 투덜거리는 강풍 씨의 손을 잡고 1층 안을 방방 뛰어 다녔다. 분명히 귀신같은 건 앞으로 더 많이 나오리라.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그들을 상대할 무기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수첩에 적힌 장소로 추정되는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콰당!
 난 거칠게 문을 닫은 뒤 손잡이를 돌려 굳게 잠갔다. 귀신이라면 벽을 뚫고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잠그는 쪽이 정신적으로 더 안심이 됐기 때문이다.
 “음, 그러고 보니 슬슬 심야 영화 방송이 할 때가 됐소.”
 강풍 씨는 어느새 방 한가운데에 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봐요, 강풍 씨! 이런 상황에서 텔레비전을 보려 하다니.. 정신 좀 차리세요!!”
 난 그만 화가 나서 크게 소리쳤다. 강풍 씨는 움찔거리더니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그 행동은 내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치이이익..
 텔레비전이 갑자기 저절로 켜졌다. 김풍 씨가 켰을 수도 있지만 내 눈엔 분명히 보였다. 텔레비전 코드가 빠져 있는 것을 말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지지직거리던 화면이 제대로 나오면서 작은 우물이 하나 나타났다.
 
  * * *
 
 텔레비전 자체는 상당히 구형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컸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넓은 선반 위에 놓여져 있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지지직거렸지만 어느 순간 선명해지면서 화면 속에 나타난 작은 우물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우물 주변의 배경에는 숲이 깔려 있는데 흑백 영화 같은 색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대가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느낌이 안 좋아.”
 뭔가 자꾸 연상되는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들은지라 서둘러 텔레비전을 끄기로 했다.
 “어, 어라?”
 본체의 전원을 아무리 눌러도 텔레비전은 꺼지지 않았다. 전원 코드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켜진 텔레비전이니 오죽하겠어? 란 생각을 한 순간 또 다른 일이 터졌다.
 쾅, 쾅, 쾅!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미치겠군. 앞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상황에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난 일단 디지털 카메라로 귀신을 봉인할 수 있는 강풍 씨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바닥에 뒹굴 거리면서 아까 디지털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강풍 씨. 귀신이 방안으로 들어오면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버리세요.”
 “귀찮소.”
 난 강풍 씨의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순간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거기서 그냥 멍하니 가만히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만고의 진리다!
 “강풍 씨. 이건 당신한테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요. 귀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안잖아요? 등수 놀이도 할 수 있고, 재미있는 합성 놀이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일단 지금 머리 속에 떠오른 온갖 생각을 쥐어 짜내어 감언이설로 강풍 씨를 설득했다.
 “음, 뭐 그렇다면 좀 생각해보겠소.”
 강풍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디지털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난 그 대답이 좀 어중간했지만 대충 승낙한 걸로 알고 탈출구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방문을 빼면 밖으로 나갈 통로 따윈 그 어디에도 없었다.
 창문은커녕 환기구도 없어서 혹시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방바닥을 샅샅이 뒤져보기도 했지만 끝내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탈출구를 찾아보다가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저, 저것 좀 보시오!”
 강풍 씨가 놀란 얼굴로 TV를 가리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귀신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강풍 씨가 그런 반응을 보인 걸까? 난 호기심이 일어나 탈출구 찾는 것도 잊은 채 TV 쪽으로 고개를 들렸다.
 TV 화면 속에 비추던 우물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느리지만 아주 정확하게 바뀌어갔다. 처음에는 검은 실같은 게 나오는가 싶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나 우물 위를 완전히 뒤덮었다. 양이 자꾸 불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엉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실이 아닌 것 같다.
 “머리카락?”
 좌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면서 찰랑거리는 걸 보니 그것의 정체가 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너무나 길고 풍성하며 찰랑거렸기에 기분이 나빴다.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한창 거세졌을 때 그 머리카락은 증식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우물가 주변에 가득 퍼지면서 위로, 점점 위로 올라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가냘픈 여인의 몸뚱이가 나타났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는 그 여인은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서 얼굴 전체를 덮었기 때문에 음침하다 못해 재수가 없어 보였다.
 여인은 우물가에서 나와 땅위에 선 게 아니라, 나오자마자 바로 땅 바닥에 손을 짚고 기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정면을 향해 기어오는데 계속 보고 있자니 너무 소름이 끼쳐서 미칠 지경이었다.
 여인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 반면 화면이 흑백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인의 손과 발은 지나치게 창백했기 때문에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채널을 돌리시오. 재수 없어서 더는 못 보겠소.”
 난 강풍 씨의 말을 듣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쾅, 쾅, 쾅!
 문밖에서 두들기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문 주위에 있는 벽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슬슬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위험하오!”
 그 순간 강풍 씨가 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그래서 난 깜짝 놀랐다. 분위기로 보아서 내가 무심코 금이 간 벽을 쳐다보던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놀랍게도 화면상에 나타났던 여인이 텔레비전 밖으로 머리를 끄집어 낸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방안에 막 펴지면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모습은 현실 그 자체였다.
 공상이나 상상이 아닌 현실. 머리에 이어서 목이 나오고 그 다음에 어깨까지 나올 무렵 강풍 씨는 아무 말 없이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하지만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튀어나온 그 여인은 귀신과 다른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 이거 어쩌면 좋겠소?”
 강풍 씨는 사진을 찍다가 말고 내 옷깃을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신은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저 여자는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난 있는 힘을 다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너무나 나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지만 별 수 있나? 난 지극히 평범한 백수일 뿐이란 말이다.
 와당탕!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날아갔다.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입구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신이 형이었다.
 “신이 형!”
 “한참 동안 찾아 다녔잖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아, 아니. 그보다 저거. 저거 좀 어떻게 해봐요.”
 난 신이 형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도 전에 TV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온 여인의 처리를 부탁했다. 그러자 신이 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와 강풍 씨, 그리고 의문의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드디어 찾았다. 제물이여.”
 그때 갑자기 여인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몸이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아서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긴 머리채가 흔들릴 때마다 살짝 비추는 충혈 된 눈동자는 소름끼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 여인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소.”
 여인이 내 쪽을 향해 소리 지르는 걸 본 강풍 씨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바로 몇 분전까지만 해도 내 옷깃을 잡고 떨던 사람이 그렇게 나오니 너무 황당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난 그보다 더한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야 말았다.
 “스터너!”
 신이 형은 뒤돌아 선 자세로 선반 위의 텔레비전에 빠져 나온 여인의 턱을 어깨에 걸고 목을 꽉 잡은 채 그대로 살짝 뛰어 올랐다가 팍 주저앉았다. 어깨의 탄력을 그대로 받은 여인의 턱에서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비친 턱을 보니 흐물흐물 거리는 게 아무래도 뼈가 바스러진 모양이었다.
 “굉장하오! 방금 그것은 십 수년 전 WWF 레슬링 계를 달궈 놓았던 오스틴의 스터너가 아니오?”
 “이 기술을 알고 있다니, 당신도 꽤나 레슬 매니아인 모양이군.”
 “그렇게 매니아는 아니지만 폐인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좀 구해 본 적이 있소.”
 강풍 씨는 신이 형이 사용한 기술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WWF라, 내가 어렸을 때 유행했던 레슬링 단체 중 해외에서 가장 크고 대중적인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무튼 그것은 신이 형과 강풍 씨가 의기투합하는 계기가 됐다.
 “폐인 문화라.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루고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을 주축으로 삼아서 생겨난 새로운 문화를 말하는 거지? 하지만 그 실상은 복잡하고 힘겨운 세상 속에서도 풍자와 해학을 통한 웃음을 지향한다는 고대의 ‘햏’ 문화를 부활시켰다는 말도 있더군.”
 “그런 가정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오. 당신도 나 못지 않은 폐인이구려.”
 “하하하, 그래도 전문가처럼 보이는 당신보다는 못하겠지.”
 강풍 씨와 신이 형은 쉽게 친해졌다. 사람은 서로 뜻이 맞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누구나 다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건 평소 때나 적용될 일이지, 온갖 귀신과 초자연적 존재가 출몰하는 흉가에서 그러는 건 아니란 말이다!
 “이.. 이런.. 귀신.. 같은.. 놈들..”
 턱이 부서져서 그런지 여인의 목소리는 상당히 이상했다. 그녀는 텔레비전 밖으로 완전히 기어 나온 뒤 우리를 공격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방향을 바꾸어, 다시 텔레비전 화면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신이 형은 텔레비전 화면 안으로 도망가려던 여인의 등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목에다가 팔을 감은 뒤 힘을 주니 여인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난 도대체 누가 귀신인지 몰랐다.
 도망치려다가 신이 형에게 잡혀서 된통 당하고 있는 여인이 취한 포즈는 엎드린 자세인지라 묘한 느낌을 주었다.
 “멋진 포즈오. 혼자 보긴 아깝구려.”
 강풍 씨는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 찍기에 전념했다. 내가 보기엔 필름이 아까울 것 같은데 강풍 씨가 보기엔 다른 모양이다.
 “누.. 누가.. 나 좀.. 도와줘..”
 여인이 끊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정말 동정심이 절로 일어날 정도로 비참했다. 레슬링 기술의 희생양이 되는 것도 모자라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치욕스러운 사진이 찍히는 등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내게 적대감을 갖고 덤볐으니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다.
 어쨌든 난 그 여인에 관한 일에는 신경을 끄고 내 앞가림을 하기로 했다. 일단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방안은 신이 형과 강풍 씨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방밖은 그와 정 반대로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아아, 재밌었다.”
 “유익한 시간이었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까 신이 형과 강풍 씨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 모습은 꼭 실컷 장난을 하고 나서 한숨 돌리는 아이들 같았다. 아무튼 의문의 여인이 무사히 도망간 모양이라서 참 다행이다.
 처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비과학적인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처럼 언제고 다시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올지도 모르겠지만 분한 감정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음에 볼 때 내가 아닌 신이 형과 강풍 씨를 공격하리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빈 군. 여기 있는 것 좀 보시오.”
 강풍 씨의 부름을 받고 가보니 텔레비전이 놓인 선반의 서랍장 안에서 이상한 물건을 잔뜩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 소금이 담긴 병과 일본식 정종. 그리고 렌즈가 깨진 구식 카메라와 고무 장갑, 지포 라이터. 성냥과 손전등. 휴대폰.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서랍장 한 구석에 놓여 있던 부적과 낡은 봉투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안에 뭔가 들어 있는 것 같네요.”
 난 조심스럽게 봉투 입구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1층 모서리에 있는 작은 방. 난 그곳이 내 최후의 영지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 당시 나하고 친구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 중 이 집안에 나타나는 귀신과 대항할만한 것들을 전부 모아두었는데 그것은 아주 큰 실수였다.
 유일한 무기를 모아 놓은 선반의 서랍장. 그 위에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저절로 켜진 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화면 속에서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여인은 그 방에 오기 전까지 마주친 귀신과 달리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얕보는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마주 본 채로 눈알이 뒤집혀 죽어 있는 내 친구의 모습을 봤을 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무기를 버려 둔 채로 도망을 친 내가 간 곳은 이 집의 정문 입구 근처..
 
 2층에서 발견한 수첩과 마찬가지로 편지 봉투의 글도 중간에 끊겼다. 자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귀신에 대항할 만한 무기를 입수했다는 것과 다음 목적지가 정문 입구 근처라는 것이다.
 “모두 빨리 나와요!”
 서랍 속에 있는 물건을 전부 다 끄집어 낸 난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신이 형과 강풍 씨를 데리고 방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 두 사람은 내 말을 잘 따라줬는데, 쉴 틈 없이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어쩌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억지로 끌고 다니며 정문 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위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익..
 뭔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후 늘어지는 듯한 괴 울음소리와 함께 계단 위쪽에서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손전등을 켜서 그곳을 비춰보니 새하얀 얼굴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무서운 형상의 여자가 계단 기둥에 붙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난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 여자는 지금까지 본 괴물 귀신 악령 중에서 가장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냥 기어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계단 기둥에 붙어서 내려오니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난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 아까 가지고 나온 무기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쓸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음, 다른 건 몰라도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쓸모가 있겠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신이 형이 소금 통과 술을 집어 들었다.
 “소금은 예로부터 사신이나 마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했어. 그리고 이 술은 그냥 보통의 일본식 정종이 아니라, 신령에게 바쳐진 신주로 귀신에 강하게 반응하는 효능이 있지.”
 난 그 말을 듣고 주저할 것 없이 신주를 받아 들었다. 옛날에 재수가 없는 일이 생기면 소금을 뿌리는 풍습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건 먹는 게 아니라 뿌리는 것이라면 신주는 분명히 마신 후에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난 서둘러 신주의 뚜껑을 따고 병째 나발을 불었다.
 
  * * *
 
 난 술을 그리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맥주의 톡 쏘이는 시원함과 담백함, 소주의 달짝지근한 맛의 깊이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신주라고 하는 일본식 정종의 맛은 영 아니었다. 맥주도 소주도 아닌 것이 너무나 느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우웨에엑!”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는데, 속이 막 뒤집히는 바람에 결국 오바이트를 하고 말았다. 내가 오늘 아침 점심 저녁에 먹은 음식 찌꺼기를 바라보는 심정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봐, 괜찮아?”
 신이 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며 등을 두들겨주었다.
 “미처 말을 못했는데 신주의 효능은 어디까지나 귀신에 반응하는 거지 퇴치 능력이 있는 건 아니야. 이 집에 있는 사람이 신주를 마시고 토하거나 속쓰림 증상을 느끼면 귀신에게 노출된 것을 뜻하는 거라고. 그래서 부동산 업자가 다른 사람에게 흉가를 팔 때 종종 쓰는 방식이기도 하지.”
 그런 건 진작에 말해줬어야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구토를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목이 아프고 머리가 띵하며 가슴까지 아파서 여기서 더 토하다가는 기절할지도 몰랐다.
 “이 구토 흔적은 꼭 뭔가를 연상시키는 것 같소.”
 강풍 씨는 디지털 카메라로 내가 토해낸 것을 찍었다. 그래서 난 순간 그의 안면에 펀치를 날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끄르르르..”
 그때쯤 계단을 타고 기어내려 오던 여인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났다. 마치 잔인한 살인마에게 살해당한 뒤 비닐봉지에 쌓인 모습을 한 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무서웠다.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에 입에서는 피를 질질 흘렸다. 자꾸 그런 모습만 보니 무서움을 느끼는 감각이 굳어버렸는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맛있겠다.. 제물의 살과 피.. 조금만 나눠줘..”
 여인이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말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피로 물든 입 속에 가지런히 정렬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싫어, 싫어, 싫어!”
 난 무서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신이 형과 강풍 씨의 손을 잡은 채로 계단 위로 뛰어 갔다.
 “왜.. 도망치는 거야..”
 여인은 순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기어오더니 내 발목을 콱 잡았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느낌, 지독한 피비린내와 함께 미끈거리는 점액의 조화는 무서운 감정을 훨씬 초월한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이젠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처음엔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만 다녔지만 지금부터는 살아남기 위해 악과 깡으로 정신 무장을 해야한다.
 “저리 비켜!”
 난 거칠게 소리치며, 내 다리를 잡은 여인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는 바람에 불쾌 지수가 큰 폭으로 상승했지만 정작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먹을게..”
 여인이 속삭이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종아리 쪽으로 입을 가져갔다. 발목을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한기와 다르게 쩍 벌린 입 속에서 풍기는 열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에이, 씨발,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난 욕지거리를 퍼붓고 나서, 내 종아리를 물어뜯으려 했던 여인을 마구 짓밟았다. 항상 이상한 것들이 꼭 나한테만 시비를 걸고 덤벼드니 이제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고!
 “난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이렇게 보여도 학창 시절에 싸움은 별로 많이 하지 않았지만 어디 가서 맞고 다닌 적은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바람의 파이터 영화로 유명해진 모 가수처럼 눈빛으로 상대방을 제압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면 반응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야야, 그만 밟아. 벌써 완전 피 떡이 됐잖아.”
 난 지금 무척 흥분한 상태였지만 신이 형과 강풍 씨가 붙잡고 말리는 바람에 일단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밑을 내려다보니, 내게 밟힌 여인인 신이 형 말대로 피 떡이 되어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으아아악!!!”
 난 그만 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지극히 평범한 백수임을 자부하는 이 내가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 여인이 귀신이라고 해도, 이건 완전히 공포 영화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한 희생자의 시체 같았다.
 “귀신을 봐도 비명을 지르고, 자기 손으로 직접 해치워도 비명을 지르니 도대체 어쩌겠다는 말이오?”
 강풍 씨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데, 아무래도 요즘 들어 비명 지르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그 모든 게 바로 내 옆에서 실실 웃고 있는 신이 형 때문이긴 하지만 이제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어라, 뭔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신이 형은 여인의 잔해 속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몇 번 정도 휘젓다가 작은 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난 처음에 그게 오장육부인지 알고 토할 뻔했으나 가만히 보니 피로 물든 종이조각이었다.
 “이리 줘봐요.”
 신이 형에게 그것을 받아서 읽어보니, 얼마 전에 본 종이에 적힌 문구와 이어지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정문 입구 근처. 씨발스럽게도 그곳엔 아무 것도 도움이 되는 게 없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계단을 타고 내려온 피투성이 여자에게 잡아먹힌 친구의 흔적뿐이었다.
 깜짝 놀라며 절규하는 날 내려다보고, 한 입만.. 한 입만 먹을 게란 말을 되풀이하던 그 피투성이 여자를 피해서 난 또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도착한 곳이 베란다가 붙어 있는 2층.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다.
 이곳은 내 최후의 영지가 될 것이다.
 
 이번에 적힌 문구는 상당히 짧았다. 하지만 앞서 두 번에 걸쳐 발견한 종이조각의 문구와는 다르게 확실히 끝맺음이 된 상태였다.
 아마도 글을 쓴 사람은 이 문구를 마지막으로 적은 뒤 귀신에게 당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걸 떠나서 생각해 봐도 가장 첫 문장에 19XX년란 날짜 표시가 표시되어 있었으니 적어도 40년 전의 사람 일 테니 살아있을 리가 만무했다.
 “자, 그럼 빨리 베란다가 붙어 있는 2층 방으로 가보죠.”
 “우리가 왜 가야 되는 거요?”
 “난 그냥 정문을 부수고 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강풍 씨와 신이 형이 처음으로 내 말에 반박했다. 그래서 난 내 나름대로 그 둘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보통 이런 흉가 체험 일화를 보면.. 먼저 이곳에 있던 사람이 남긴 메시지를 보고 거기에 적힌 데로 따라갔다가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아니면 이 집에 살던 사람의 일기장을 발견해서 그걸 보고 무사히 탈출하는 사례도 있다고요.”
 “아, 그것도 그렇군.”
 “일 리가 있는 말이오.”
 내 말을 듣고 신이 형과 강풍 씨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경험을 통해서 말을 했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론을 예로 들어 제시한 것뿐인데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괜찮다.
 “이의 없으면 2층으로 올라가요. 일단 강풍 씨는 다리가 없고 몸이 투명한 귀신이 나오면 사진기로 찍어서 봉인하고, 신이 형은 몸이 뚜렷이 보이는 귀신을 아작 내줘요.”
 정말 이상했다. 내가 이런 상황 속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른 사람을 이끌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좋게 생각해 보면 이 어려운 상황 속에 적응하며 성장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난 신이 형과 강풍 씨를 데리고 계단에 올라섰다. 다행히 2층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신이 형과 강풍 씨도 내 말을 잘 따라주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베란다가 달린 것으로 추정되는 방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신이 형에게 부탁해 간단히 날려버려 흉가 탈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아주 수고가 많구나. 제물이 될 자여.”
 그때 어둠이 짙게 깔린 방안에서 음침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전등을 비춰 보니 그곳엔 아주 긴 머리카락이 거꾸로 늘어 서 있었다.
 “거기가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무심코 위를 비쳐 보니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도대체 몇 번째인지 스스로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었다. 뉴턴의 만류인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흰자위를 드러내어 날 노려보는 그 무서운 여학생을 향해 미소짓는 건 코끼리와 씨름하라는 것 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두려운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내 옆에는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음, 분위기 깨서 미안하지만 너 속옷 보이는데?”
 “좋은 경험을 했소. 오늘 찍은 사진 중에 최고가 될 것 같소.”
 신이 형과 강풍 씨는 분명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하다. 아니, 백 보 양보해서 인간이라고 쳐도 귀신 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일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귀신 속옷 타령을 하는 거야!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저 둘을 질책하고 싶지만 난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참고 또 참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이런 변태 인간들! 제물만 사로잡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거 안 되겠군. 제물을 뺀 너희 둘은 유서나 미리 써두는 게 좋을 거다. 이 녀석처럼 이곳이 너희들의 무덤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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