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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나이트 레전드 1권(1)

2019.08.13 조회 49 추천 0


 프롤로그
 
 
 봄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쾌청했고 그 아래에는 드넓은 초원이 보인다. 초목이 무성한 초원은 사방이 탁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고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 파도치듯 흔들리는 것이 마치 바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외로운 섬처럼 그림 같은 집도 하나 있었다. 흘러간 노래의 유행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약간 불편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 집이 초원 위에 지어진 터라 생필품을 얻기 위해선 도시까지 가야하는데 차도가 없어서 큰 불편을 주었다. 다행히 도시 쪽으로 가는 길목으로부터 전신주가 이어져 있어 전기 공급이 되고, 집 주변에 꽃밭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물도 나오는 모양이니 최소한의 문명 생활 조건은 갖춰진 셈이나 도시 만큼 편안하진 않을 것이다. 이층 양옥인 집 자체도 꽤나 오래 전에 지어진 듯 척 봐도 낡고 허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초원 위에 지어진 집은 그 존재 자체로 특별하고 편안한 느낌을 풍겼다. 시멘트와 아파트의 정글로 변해가는 도시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인공 구조물이 아닌 자연 구조물,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힘든일이지만 보는 이에게 동경심을 유발시키는데는 충분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옛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연 속의 삶에 대한 매력을 강하게 어필하였다. 동경심은 세대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지만 결국 같은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 봐도 사람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대한 동경심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가던지 간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
 “와아~여긴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양옥집 앞에 서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그의 나이는 대충 20대 후반 같아 되어보이는데 인상이 밝고 시원스러워 남성적으로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가죽 잠바와 청바지를 입은 전형적인 도시 젊은이지만 초원 위의 집을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정말 예전에 왔을 때랑 똑같은 것 같네요.”
 노크를 한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고 남자 보다 몇 살 연하로 보이는데 차가운 미소가 어울리는 고전적 미인이었다. 지금은 외모와 잘 어울리는 차가운 미소가 아닌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것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빠, 이제 할아버지네 집에 다 온 거야?”
 남자와 여자의 틈 사이에 있던 어린 사내 아이가 같은 또래의 계집 아이 손을 잡고 불쑥 튀어나왔다. 사내 아이는 건강한 미소가 매력적인 장난꾸러기 같았고, 계집 아이는 그와 정 반대로 조용하고 얌전한 요조숙녀처럼 보였다.
 “여기가 할아버지 집이야. 작년에도 왔었는데 벌써 까먹은 거니?”
 남자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젊기는 했지만 확실히 아이를 가진 부모 같았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사랑의 감정이 담긴 미소만으로 다 증명시켜 보였다.
 똑, 똑, 똑.
 남편은 천천히 세 번 정도 양옥집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로 외출하신건가?”
 “한번 더 노크해봐요.”
  남편의 말에 아내는 한번 더 노크 할 것을 권했다. 남편은 알겠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세 번 정도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려라, 참깨!”
 아들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신중하게 아까와 똑같이 노크를 하는 모습이 아들의 눈에는 마법의 주문처럼 보인 모양이다.
 “후후, 그건 동화책에 나오는 돌문을 여는 주문이잖니.”
 아내는 인자하게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남편의 노크를 동심으로 해석한 아들이 너무나 순수하게 보였다.
 “알리바바..”
 “오, 정답이야. 알리바바와 사십 인의 도적에 나오는 거였지. 우리 딸 참 똑똑하네?”
 조용히 서있던 딸이 한마디했다. 그러자 이번엔 남편이 대경스럽다는 듯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딸은 빙긋 웃으며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내밀었다.
 아들 딸은 부모의 칭찬에, 부모는 아들 딸의 귀여움에 취했다. 한 세대 가족 전부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그렇게 눈부셔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끼이익~
 가족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 타 양옥집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반쯤 열린 상태에서 안에 있는 사람이 문틈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시오?”
 안에 있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안에 있는 사람이 가진 적대감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최소한의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 우리 왔어요.”
 남편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에는 무척이나 밝고 즐거운 듯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잠시 후에 문이 활짝 열리면서 누군가 집 밖으로 걸어나왔다. 얼굴 곳곳에 파인 주름과 희끗희끗한 머리칼로 보아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장년 남자였다.
 “오오, 이게 누구야!”
 장년 남자가 남편을 강하게 끌어 안았다. 그는 남편의 아버지이자 아내에게 있어서는 시아버지가 되며 아들과 딸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문안인사 드리겠습니다, 아버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허허, 난 잘 지내고 있단다 아가.”
 아내는 시아버지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시아버지는 너그럽게 웃으며 며느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이들은 냉큼 달려가 할아버지의 옷 소매를 붙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 소매를 잡은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아이구, 우리 귀여운 아기들도 왔구나.”
 할아버지는 손자와 손녀를 번쩍 들어앉으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직 할아버지가 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지만 손자 손녀를 빨리 안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한히 기뻤다.
 “먼 길 오느라 애썼다. 어서 들어오너라.”
 할아버지는 아들 내외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은 바깥에서 본 모습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깨끗하고 아담했다. 통풍이 잘되어 선풍기나 에어콘이 필요 없을 정도고, 겨울을 대비한 나무 난로도 보였다. 1층과 2층엔 각각 방이 두 개 씩 있으며 창고나 여분의 방을 겸용하는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었다.
 바깥처럼 도시와는 동떨어진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왠만한 가정 제품은 다 있었다. 부엌엔 냉장고와 오븐, 전자&가스 렌지, 전기 밥솥과 기타 주방 보조 용품, 거실에는 텔레비전, 비디오, 오디오, 스피커, 소파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셨어요?”
 “장보러 도시에 가셨단다. 이따 저녁 때 즘에 돌아오실 꺼야.”
 “그럼 오늘 하루 자고 갈께요. 동생들도 최근에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던데 전화로 불러도 되겠죠?”
 “허허허, 그거 좋지!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겠구나.”
 아들이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을 때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다가갔다. 며느리는 차분하고 공손한 자세로 선 채 시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아가.”
 “예, 아버님.”
 시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며느리를 불렀다. 며느리가 부름을 받고 가까이 다가오자 시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손자 손녀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이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항상 신혼 여행 온 기분으로 살고 있다고 하던데. 이 시애비가 우리 아기들의 새 동생들을 기대해도 되겠냐?”
 “그, 그이도 참.. 아버님에게 무슨 말을 하신 건지..“
 시아버지의 말에 며느리는 남편을 생각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비비꼬았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그런 반응을 보고는 그 나이 답지 않게 놀리는 재미를 느꼈다.
 “그나저나 정말 고맙구나, 아가야. 우리 바보 같은 아들 녀석과 결혼해줘서 말이다. 그 녀석은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서 평생 장가 한번 못 가보고 혼자 살 줄 알았지 뭐냐.”
 시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낮추어 말했지만 특별한 악의는 없었다. 며느리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특별히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사회 경험이 풍부해 악의가 없는 농담이 친숙한 대화의 조미료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이야말로 제게 너무나 과분한 사람입니다.”
 며느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없는 남편을 추켜세웠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아들이 결혼하여 한 사람의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있어선 언제까지나 철부지 아들로 보이는지라 현모양처의 조건을 다 갖춘 며느리가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누나, 빨리와~”
 “기, 기다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다정한 때 잠시 잊혀졌던 손자와 손녀는 어느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착했다. 어린 아이가 밟기에는 계단이 워낙 컸기 때문에 아이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냐면 아이들이 살던 곳은 양옥집이 흔치 않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양옥집보다 더 싸고 좋은 주택이나 빌라, 아파트가 많이 있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은 양옥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에게 있어서 양옥집의 2층은 동심에서 우러난 호기심을 발산할 만한 공간이 되었다. 어른들이 볼 적에는 단순한 인공 구조물이라고 할지라도 아이의 눈에서 보면 크게 달랐다.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아래층하고 똑같이 생겼잖아? 엄마랑 아빠랑 할아버지가 아시기 전에 그냥 내려가자.”
 “에이,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엄마랑 아빠랑 할아버지 몰래 올라왔는데 말이야. 누나, 그러지 말고 같이 돌아다니면서 재미있는 거 찾아보자.”
 “알, 알았어.”
 누나가 동생에게 휘둘리긴 했지만 무사히 2층에 도착한 남매는 잠시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다가 또 다른 계단을 찾았냈다. 그곳은 다락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계단 끝에 보이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습기가 차서 환기를 시키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어두운 굴로 보여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오, 처음 보는 곳이다. 우리 한번 여기 들어가 볼래?”
 동생은 두 눈을 반짝이며 다락으로 통하는 입구와 누나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누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묵묵히 동생의 말을 들었다.
 “누나, 계단 조심하고 내 손잡아.”
 “으, 응..”
 동생은 차분하고 침착하게 다락으로 통하는 계단에 올라섰고 한발자국 씩 뗄 때마다 누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었다.
 남매가 다락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시간적으로 훤한 대낮이었지만 빛이 잘 들지 않아 침침했다. 다락의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미세한 빛. 남매는 그곳을 중심으로 빛에 의지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 왼쪽을 찾을 테니, 누나는 오른쪽을 찾아봐.”
 “응.”
 창가 가까이 좌우로 오래된 가구들이 쌓여 있고 아이들은 그 속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 헤맸다. 허름한 옷장이나 반쯤 부서진 책상 같이 큰 가구는 손을 델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옷장문과 서랍 정도는 열 수 있었다.
 “앗!”
 “무슨 일이야?”
 한참 동안 다락 안을 뒤적이다 동생이 반응을 보였다. 누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동생 쪽으로 걸어갔다. 동생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눈앞에 있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백과사전 두 세 개를 쌓아 놓은 것 같은 크기와 두께를 가진 책으로 무척 낡아 빛이 바래있었다.
 “와, 책이다!”
 동생은 두 눈동자를 반짝였다.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나이라 한글을 다 떼지는 않았지만 그림책과 동화책 정돈 충분히 혼자 읽을 수 있었으며 또래 아이들 중에서도 유난히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책을 좋아했다.
 “우리 엄마한테 혼날지도 몰라. 우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
 누나는 동화책 보다 지금 상황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다. 다락에 있는 동안 입고 있던 옷이 먼지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억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아빠는 하하 웃으며 넘어가 주었지만 엄마는 정 반대였다. 엄마는 평소엔 부드럽지만 한번 화나면 무척 무서워졌다.
 “혼날 때 혼나더라도 보고 나서 혼나자! 어차피 혼나게 돼있잖아?”
 동생은 정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아주 버릇이 없거나 겁을 상실한 것은 아니고 혼나는데 익숙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심한 장난을 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관심을 가진 화제에 있어선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 중 그 누구보다 더 대담하고 행동력있는 악동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아빠 같이 보인다.”
 누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혼날까봐 겁이 나기는 했지만 왠지 동생이 아빠처럼 말하는 것 같아 용기가 솟아났다.
 “그럼 빨리 보자~”
 동생은 누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가구 사이에 놓인 책을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끌어 당겼다. 어린아이 혼자서 들기엔 책이 너무 무거웠다. 누나는 동생이 다칠까봐 조바심을 내었지만 동생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며 손을 저었다.
 “헥.. 헥..”
 잠시 후 동생은 힘들게 빼낸 책을 품에 안고 기진맥진했다. 누나는 수고했다며 손으로 동생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책표지에 쌓인 먼지를 털며 동생은 숨을 골랐다. 책표지는 요즘의 책과 다르게 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세월의 녹으로 인해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남매의 독서욕을 누르진 못했다.
 “문 나이트 레전드? 이상한 이름이네.”
 동생이 책표지에 쓰여있는 문구를 또박또박 읽었다.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표기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국엔 영어를 한글로 해석한 문자인데 한글도 다 떼지 못한 어린아이가 똑바로 발음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이상했다. 그러나 지금 다락에 있는 사람은 어린 남매 뿐이었다. 둘은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그게 이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디보자, 무슨 이야기가 쓰여있을까?”
 동생은 책을 꺼내는데 너무 진을 빼 지금은 혼자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었지만 이번엔 누나가 도와주었다. 남매의 작은 손이 첫 장을 넘기면서 책 속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지금 시대에는 결코 흔하지 않은 동화가 말이다.
 
 
 
 
 
 No. 0 - (구) 마왕과 용사의 사투
 
 빛과 어둠. 태초의 혼돈 속에서 동시에 태어난 두개의 빛은 어느새 서로 엇갈려 끝나지 않는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 개 의 싸움이 끝나면 또 다시 한 개 의 싸움이 시작된다. 서로 같이 있어야 더 빛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두 빛은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허나 어느 때는 빛이 이기고 또 어느 때는 어둠이 이기며 그 일상적인 패턴을 유지한 채 무한히 반복되는 이 허무한 싸움에도 절대 진리란 것이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긴 어둠의 터널 저편에 보이는 끝. 입구 너머에서 미세한 빛이 새어 들어 온다. 순간의 빛이 지나가고 검은 어둠이 장악한 웅장하고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 아래 깔린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또 하나의 끝이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난 모든 시작이 같은 끝을 향해 전개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홀 한 가운데 길게 깔린 검은 융단 끝에 옥좌가 보인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뜬 달처럼 푸르스름한 은빛을 띈 그 옥좌 앞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대가 태양이라면 나는 달이다>
 전신을 감싸는 검은 망토를 입고 어두운 빛을 띈 은발 머리를 뒤로 넘긴 그 남자는 가만히 두 금색 눈을 번뜩이며 자신 앞에 서있는 젊은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헉.. 헉.. 헉..”
 찬란한 태양과 같이 금빛으로 물든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는 옥좌 앞에 선 남자와 무척 대조적이었다. 비오듯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젊은 기사의 모습은 옥좌 앞에 서있는 남자와 큰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그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복장이었다. 금빛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와 푸르스름한 은빛 옥좌 알에 선 남자는 해와 달로 비유할 수 있었다. 한치의 어둠도 용납치 않은 빛과 약간의 빛을 포함한 어둠 말이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칼을 들이데는가?"
 머리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이 젊은 기사의 귓가를 자극하며 홀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젊은 기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쥘 뿐이었다.
 “스스로 길을 뚫고 나온 자여, 대답하라. 여기까지 온 이상 그대는 나에게 대답해야할 의무가 있다.”
 은발 머리 남자의 무거우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고압적이기까지 했지만 젊은 기사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두 푸른 눈은 투지로 불타올랐다. 상대의 강함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공격하진 않았지만 꽁무니를 빼고 도망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대답하기 힘들다면 그대가 뚫고 나온 길로 다시 돌아가라.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정한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 아닌가? 나도 무가치한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은발 머리 남자는 이번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젊은 기사를 타일렀다. 하지만 젊은 기사는 묵묵무답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양손에 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높은 하늘과 같이 푸른 눈동자를 크게 뜨고 은발 머리 남자를 노려보았다.
 "분명 난 인간이기 때문에 너에 비해 약하니 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악이 번영한 예는 단 한번도 없다.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지배하는 자. 악의 대마왕 갈시아 문 나이트 마스터여 그대는 결국 오늘 내 뜨거운 영혼과 정의로운 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젊은 기사의 단호한 음성이 홀 안을 울렸다. 마왕 갈시아는 흥미로운 얼굴로 용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근거 없는 자부심과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마왕은 깊은 흥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 기사의 융통성 없는 정의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여태까지 보아온 용사들은 단 하나의 길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고 지금 그의 앞에 서있는 이 젊은 기사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용사, 그 이름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이 젊은 기사는 바로 알고 있을까? 만약 그것을 알고 있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갈시아는 방금 머리 속으로 한 생각을 확신했다.
 “지금이다!”
 갈시아가 그렇게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을 때 용사는 공격할 기회를 포착했다.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기회였다.
 “골드 크러쉬(Gold Crash)!!”
 용사는 검을 바로 잡고 엄청난 기세로 도약했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눈이 아찔할 정도의 검광이 번쩍였다.
 “죽어라, 갈시아!”
 눈부신 빛을 머금은 황금 검날이 갈시아의 심장을 노렸다. 갈시아는 키가 무척 컸기 때문에 용가가 거의 날아가다시피 달려드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카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용사의 검이 무엇인가에 막혔다.
 “이, 이럴 수가!”
 갈시아는 아주 가뿐하게 용사의 검을 받아냈다.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기다려 준 것이다. 공격하기 전에 기술명을 외치는 것이 너무나 한심해 보였고, 피하는 것보다 막는 것이 공격자에게 더 큰 정신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후후후, 미숙하군.”
 갈시아가 차갑게 웃었다. 용사는 재빨리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전투 중인 것도 잊은 채 갈시아가 방금 그 공격을 어떻게 받아냈는지 살펴 보았다. 보호 계통의 마법은커녕 방패나 갑옷하나 장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자신의 최대 필살 기술인 골드 크러쉬가 막혔으니 용사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겨우 그정도인가?”
 갈시아는 망토 사이로 빠져 나온 오른 손가락 두 개를 까딱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용사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일격이 무참히 깨졌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용사는 주먹으로 애꿎은 땅바닥을 치며 절규하고 말았다. 갈시아가 손가락 두 개에 골드 크러쉬를 받아낸 것은 용사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은 오히려 그대인 것 같군. 아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나?”
 갈시아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비참하게 무릎을 꿇은 용사를 내려다보았다. 공격다운 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 일격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쉽사리 체념하는 용사를 보고 있자니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정말 의심이 간다.”
 갈시아는 발 밑까지 흘러내린 망토를 한번 확 펼쳐 보이고 조용히 옥좌 위에 앉았다. 그리고 한 팔을 팔 받침대에 대고 다른 손으로 턱을 괸 채 무릎 꿇은 용사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다.
 용사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마왕의 경멸어린 시선에 피할 수도 없고, 무시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는 수많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그런 만큼 어느 사이엔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용사라 불리우는 직업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것이 최악의 단점이 된 셈이다.
 치료를 해주는 성직자. 다양한 마법으로 보조를 해주는 마법사도. 앞장 서 싸우고 파티의 방패 역할을 해주는 전사. 적의 시야를 교란시켜 주는 도둑. 지금은 아무도 그의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는 용사 혼자 밖에 없었다. 가지고 있던 아이템도 모두 바닥이 나서 혼자 싸울 조건 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
 동료도 아이템도 없는 이 마당에 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용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용사든 무기력할 것이다.
 “무력한 자여, 조용히 듣거라. 그대는 힘의 정의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의 처지는 그대가 여기까지 오면서 베어버린 마족과 같다.”
 갈시아가 엄숙하게 말했다.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그 말투에 젊은 기사는 설움이 북받쳐 올라서 처절하게 절규했다.
 “난 무력하지 않아!”
 용사의 외침에 은발 머리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젊은 기사를 가르켰다.
 “강한 것은 살고 약한 것은 죽는다. 그것을 마왕인 나보다 더 잘 실천한 것은 용사인 그대이니 내 말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갈시아의 말은 지당했다. 용사는 더 이상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검으로 일어난 자로서, 검으로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무기력한 용사를 본 갈시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간이나마 기대했지만 그 역시 보통 용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대변하는 만큼 그런 감정의 극에 달한 인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생물. 결국엔 그 역시 그 동안 자신을 노렸던 다른 용사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실력은 높이 평가해주겠다. 나에게 도전한 용사들 중에 혼자서 내 앞에 선 인간은 그대가 처음이다. 긴 시간 아주 오랫동안 대면해온 인간 용사들 중에는 그대가 최강이었다. 그래서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내 손으로 직접 그대를 없애버리겠다.”
 갈시아가 옥좌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며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로 검은색 전류가 모이기 시작했다. 용사에 대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의였다.
 "골든 나이트 지고스 펜드래건. 나 달밤을 지배자 갈시아 문 나이트 마스터의 이름을 걸고 그대와의 싸움을 절대 잊지 않겠다."
 “이제.. 마지막인가..”
 용사 지고스는 땅을 짚은 검에 기댄 채 삶을 포기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문 나이트 템페스트(Moon Night Tempest)!”
 갈시아가 검은 전류를 머금은 손을 쭉 뻗자 사방에서 매서운 비바람이 회몰아치며 젊은 기사를 에워쌌다. 지고스의 몸은 공중에 뜬 상태로 갈시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여러 갈래의 검은 전류에 감전 당했다. 검은 전류는 지고스의 온 몸을 뱀처럼 유연하게 휘감아 스치고 지나가며 사정없이 전기 충격을 주었다. 살갗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어올랐다 가라앉음을 반복하며 극심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갈시아의 난폭한 경의에 지고스는 고통과 싸우면서 두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내가 그대에게 표하는 경의는 내 손으로 직접 그대를 죽이는 것.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말아라. 지금까지 그대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마족의 원혼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대가 인간의 용사라면 난 마족의 왕이다. 그대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난 마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갈시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젊은 기사를 마주보았다. 지고스는 전신의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로 격렬한 고통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갈시아가 하는 일이 자신과 같다는 말에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분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고스에게 그와 맞서 싸우는 자신을 발견하게끔 만들었다.
 콰카카캉!!!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홀 안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검은 연기는 갈시아의 시야조차 가릴 정도로 자욱했다. 갈시아는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홀의 입구로 추정되는 커다란 문짝이 통째로 나가 떨어져 나갔다.
 “거기까지다, 마왕!”
 홀 입구 너머에서부터 수천명의 사람들이 쳐들어왔다. 홀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을 위해 설계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 수천명 정도는 가뿐히 수용할 공간이 있었다.
 “초대 받지 않는 손님이 찾아왔군.”
 갈시아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홀 안으로 들어온 수천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으로 쏠리자 수많은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신속하게 지고스게 걸린 마력의 폭풍을 상쇄시켰다.
 “어째서인가.”
 갈시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행동을 방관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경계 했지만 일단은 좋은 기회를 잡은 거라 생각하고 지고스를 회복시키는데 전념했다.
 “크으으..”
 지고스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무수한 회복 마법을 한 몸에 받은 덕택에 체력은 거의 모두 회복된 상태였다. ///
 “여긴 어디지?”
 지고스는 방금전까지 죽음과 싸우던 때를 생각하며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에 의문을 가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고스, 이제 깨어났냐!”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지고스의 양 어깨를 꽉 잡았다.
 “카, 카논?”
 “그래, 나야. 하지만 그렇게 내 이름 하나만 달랑 부르면 안된다고.”
 카논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등뒤로는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그들은 모두 의지에 찬 눈동자를 빛내며 지고스를 바라보았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어!"
 "정의는 항상 승리하는 법이지."
 "모두를 위해 싸우는 거야!"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 같이 마왕을 무찌르자."
 "그래, 함께 싸우는 거야. 우리들은 언제나 함께였잖아?"
 하나 둘 씩 함께 해왔던 동료들이 모습을 비췄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지고스의 곁에 나타났다. 더 이상 용사에게 보호 받는 것이 아니라 용사와 함께 평화를 지켜나가겠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지고스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모두들 한가지 목적을 위해 제 몸도 아끼지 않고 모인 것이다. 정의를 지키고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마음가짐. 그들은 용사와 같은 정의와 마음을 공유했다.
 "난 절대 혼자가 아니야."
 지고스는 다시 일어섰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 소중한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보았는가 마왕이여? 우린 결코 지지 않는다. 작은 힘이 하나 둘씩 모이면 그것은 산보다 더 크고 단단한 힘을 갖지. 세계엔 아직 정의의 편이 많이 남아있기에 그대는 결국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내 한가지 묻건 데 너희들이 말하는 그 정의의 편의 기준은 무엇인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갈시아가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지고스와 그의 동료들은 질문을 무시한 채 눈 앞의 쭉 뻗은 길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결국 이번 끝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갈시아는 나직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칠흑의 망토를 휘날리면서 지고스와 그의 동료들을 맞이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악의 대마왕 갈시아 문 나이트 마스터!!"
 "아니, 마지막은 아니다. 이건 하나의 끝. 곧 새로운 하나의 시작이 될 것이야!"
 
 
 
 
 
 No. 1 - 남겨진 자들의 슬픔
 
 칠흑의 어둠 속에 커다란 침대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침대 위에는 어린 소녀 하나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은발의 긴 머리를 양 어깨에 늘어 뜨렸고, 반쯤 감긴 눈동자는 금색으로 빛났다. 청순하고 가련한 얼굴은 마치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으며 귀티가 나보였다. 체구는 작고 연약해 보이는게 꽉 안으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느 순간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소녀의 작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자 검은 촛대 위에 달린 푸른 불꽃이 소리없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살며시 눈을 뜬 소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언제나 볼 수 있는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았다. 소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 앉아 자기보다 더 큰 베개에 몸을 기대었다.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 흘렀고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이 안색은 창백했다. 작고 가냘픈 손으로 이불을 꽉 잡자 구겨진 이불 위로 굵은 물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요..”
 소녀는 머리 맡에 걸어 둔 아버지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눈물 흘렸다. 소리없이 주르륵 내리는 눈물이 소녀의 작은 손을 적셨다.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은 법. 나이가 든 어른에게도 큰 슬픔인데 하물며 어린 아이에게는 어떻겠는가? 기껏해야 10대 초 중반 가량 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어린 소녀가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워 하며 눈물 흘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알시아님."
 방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시아 불린 소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방문을 열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리광 부리려 하지도 않았다. 소녀는 다른 사람에게 보호 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작고 연약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강한 것 같았다.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강함 말이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큰 키에 약간 마른 듯한 몸집. 턱시도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방문을 열고서 고개를 빼 꼼이 내놓은 알시아에게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검은 빛을 띈 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에메랄드빛으로 촉촉이 빛나는 녹색 눈과 그 옆으로 보이는 두꺼운 외알 안경은 깨끗한 외모에 지성미를 더해주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그 남자가 알시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시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동안 빈 촛대들을 바라보았다. 불꽃의 온기가 식어버린 빈 촛대가 알시아의 공허한 마음을 반영해주는 것 같았다.
 "꿈을 꿨어요, 패트릭."
 알시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눈처럼 새하얀 이불 위로 물기에 젖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알시아님..”
 패트릭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편치 못했다. 그는 한 가문의 2대를 섬긴 집사로서 그녀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몇 십년 동안 계속 된 악몽. 돌아가신 아버지이자 대마왕이라고 불렸던 갈시아에 대한 꿈이었다.
 갈시아 문 나이트 마스터. 칠흑의 왕이자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지배하는 자. 그는 누구보다 더 강했다. 힘과 마력, 기품, 인덕. 지도자로서의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마계에 사는 마족들 중 그를 경애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승자가 되지 못했다. 지상계의 시간으로 정확히 20년 전, 용사라고 자칭하는 무리와의 싸움에서 패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던 그의 신화가 깨졌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른 것이 된다.
 마계의 마족들은 갈시아의 시신 조차 거두지 못했다. 마계와는 멀리 떨어진 외지인 지상계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다른 마왕들과는 다르게 지상계에 흥미를 느낀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것은 그를 다시는 마계에 돌아오지 못하는 고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약 그때 그가 죽던 날 밤. 은빛 달이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면 결코 이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왕은 마계에서 그 힘의 진가를 발휘하지만 지상계에선 그렇지 못했다. 지상계에서 마계에서 만큼의 힘을 발휘하려면 그 마왕을 상징하는 힘의 심벌이 필요했다. 갈시아는 그의 성인 문 나이트 마스터가 말해주듯이 달을 지배할 수 있는 마력을 가졌다. 그래서 그가 죽던 날 밤에는 달이 뜨지 않았었다.
 ‘후우..’
 패트릭은 알시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마족의 패배보다 더 그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던 것은 갈시아의 죽음과 알시아의 슬퍼하는 모습이었다.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갈시아의 죽음과 그가 서거한 날에 114 번째 생일을 맞이한 알시아. 생일 잔치에 앞서 그의 죽음을 통보 받은 그녀의 얼굴을 패트릭은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여린 얼굴에 균열처럼 번지던 슬픔. 그녀의 슬픔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회의에 갈 시간이군요.”
 알시아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발 앞으로 걸어왔다. 짙은 어둠이 깔린 차가운 대리석 위로 신발을 찾고 있는 그녀를 위해 패트릭은 푸른 광구 하나를 만들어 공중에 살짝 띄웠다.
 광구의 푸른 불빛 아래로 소매가 긴 검은색 잠옷을 입은 알시아의 작은 몸뚱이가 보였다.
 ‘때와 시간은 너무 잔인한 것 같습니다.’
 패트릭은 측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알시아는 아직은 아직 너무 어렸다. 원래대로라면 나이 많은 마족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그런 작은 행복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죽은 갈시아를 대신해 지난 20년 동안 성심 성의껏 마계를 위해 일했다. 어린 그녀에게 있어 가혹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름대로 힘차게 살아갔다. 같은 나이대의 마족들이 각 차원을 넘나드며 한창 놀고 있을 때 알시아는 자기보다 나이가 몇 백살은 더 많은 고위 마족들과 회의를 나누었다. 그런 만큼 예의가 바르고 차분하며 침착했지만 그 나이 또래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선천적으로 착하고 순수한 감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제위 당시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 갭을 피땀어린 노력으로 극복하고, 높은 명성과 공적을 쌓아 마계 마족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얻었지만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알시아는 마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신하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인 갈시아가 이루어 논 것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동안 인재 등용에 소흘히 했던 것이다.
 갈시아가 죽은 후 뿔뿔이 흩어진 신하들 중에 유일하게 그녀 곁에 남은 건 패트릭 하나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패트릭이 혼자서 열 사람 몫을 할 정도로 유능한 신하라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끔 한 장본인이다. 군주 본인의 노력과 유능한 신하의 조언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진짜 큰 문제는 선왕인 갈시아의 빈 자리가 너무나 컸다는 점이다.
 그는 패트릭에게는 훌륭한 왕이었고, 알시아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갈시아를 쉽게 잊지 못했다. 마족에게 있어서 슬픔은 나약한 감정.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족들도 육친과 군신에 대한 감정을 알고 최소한의 정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갈시아 폐하. 달을 볼 때면 당신이 생각납니다. 저희 마족들과 알시아님의 등불이 되어 주시던 당신의 모습이 말입니다.‘
 패트릭은 잠깐 동안 머리 속에 갈시아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벌써 마음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알시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녀와 그는 똑같은 슬픔을 나누었다. 서로 모르게 말이다.
 ‘죄송합니다, 알시아님.’
 패트릭은 알시아의 귀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갈시아의 죽음이 꼭 자기 잘못같고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괜시리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패트릭. 전 정말 괜찮아요.”
 알시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그의 걱정하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듯 하지만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럴 때면 으례 패트릭도 마음이 약해지게 된다. 억지로 힘을 내려하는게 눈에 보일 때는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져 자연히 고개가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잠옷 차림으로 회의에 나갈 수는 없어요. 제 옷 좀 꺼내주시겠어요?“
 알시아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패트릭이 옷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회의에 가야할 시간을 체크해 두었기 때문에 입고 갈 옷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준비성이 철저한 패트릭 덕분에 알시아는 무슨 일을 하던 큰 걱정이 없었다.
 “이 복장은 간편해서 좋은 것 같아요.”
 패트릭으로부터 회의복을 받은 알시아가 한마디 했다. 회의에 입고 갈 옷은 신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검은 로브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답답할 것 같으면서도 이외로 편해요.”
 안에다 무엇을 입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어서 그녀는 잠옷을 입은 상태로 그 위에 로브를 껴입었다. 잠옷이라고 하는 것도 외출복으로 겸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외견과 질이 좋았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예, 고마워요. 패트릭.”
 알시아가 옷을 갈아 입은 동안 패트릭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단은 왕과 신하의 관계이기 때문에 옷 갈아입을 때 곁에 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이성적으로 보아도 그리 올바른 일은 아니지만 그는 그녀가 태어난 모습을 보았고 지금까지 쭉 곁에 있어 주었다.
 따라서 알시아로서는 옷갈아 입는데 그가 같이 있어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고, 패트릭 또한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본직은 집사지만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알시아의 보모 역할도 해주었다. 그래서 알시아는 패트릭을 집사이기 이전에 친구이자 오빠, 보모(?)정도로 생각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돌아올꺼에요. 그동안 제가 처리해야할 일이 적힌 서류 좀 정리해주세요.”
 알시아도 명색이 마왕인지라 놀고 먹는 건 아니었다. 마계의 대마왕에게 지시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공적인 일과 자신이 소유한 지역의 내정을 맡는 사적인 일까지 해야할 일이 참 많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모든 준비를 끝마친 알시아는 패트릭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패트릭은 문 밖까지 배웅해 주었지만 회의실까지는 따라가지는 않았다. 회의실 근처는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알시아님.”
 패트릭은 알시아가 어둠이 내리 깔린 복도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전에 인사말을 던졌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빙긋 웃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점거하고 있지만 알시아는 익숙하게 평소의 보폭을 유지하며 걸어갔다. 회의실로 가는 길을 외워두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원래 마족에게는 어둠이 시야에 장애를 주지는 않았다. 원래 마계 자체가 어둡고 음습한 곳이기 때문에 마계 마족은 태어날 적부터 기본적으로 암흑 시야 능력를 갖게 되었다.
 “제 방하고 가까운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알시아가 회의실 앞에 도착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의실은 그녀의 방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곳 역시 방금 지나온 복도처럼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기묘한 문장을 새긴 철문의 실루엣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후우.. 이제 들어갑니다.”
 알시아는 심호흡을 한번하고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철문의 손잡이를 돌린 다음 살짝 밀어 젖혔다. 철문이 천천히 열리자 그 안에 있던 또 다른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실 안의 어둠 속에서는 보라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있고, 그 불꽃의 원 안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둥근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있다.
 그들은 마계를 지배하는 12 마왕들이었다. 알시아를 포함해 총 13 명으로 마계의 각 지역을 통치하는 13 마왕이라고도 불렸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물었는데 그 조용한 모습이 회의실 안의 분위기를 더 음침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지극히 마계를 대표하는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어둠, 음습, 암울, 음지와 그림자. 고독과 심연 같이 지상계의 축복이라고 불릴만한 요소의 정 반대되는 것들이 가득 찬 곳이 바로 마계다.
 ‘여전히 조용하네요.’
 마계에 사는 마족들은 감정 표현을 거의하지 않았고 침묵을 즐겼다. 개개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서로간의 관계나 문명의 발전 같은 것에는 전혀 신경을 안썼다. 알시아 같이 감정이 풍부한 마족도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알시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알시아는 고개를 크게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계 서열 20위 권내에 드는 강자들이기 때문에 알시아는 긴장을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었다, 나이로 따져보아도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마왕들에게는 알시아가 나이 어린 딸로 밖에 안보일 것이다.
 “어서 오너라.”
 나직하면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원탁에 있는 12 마왕 중 한명이 말한 것이다. 알시아는 알 수 없었지만 다들 그와 같이 생각을 했다. 다행히 그들은 알시아를 한 명의 마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선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알시아의 노력과 재능이 눈부시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도 분명 다른 12 명의 마왕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힘이 있었다. 단지 알시아가 회의장에만 들어설 때 그들의 분위기에 위축되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것 뿐이었다.
 ‘전 제가 마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마족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까지 알시아에게 있어서 마왕이란 직업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오만에 가까운 자긍심이 없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왕에게는 높은 긍지와 자부심이 필요한데 알시아에겐 그것이 약간 부족했다. 비굴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 자체를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착, 침착.’
 알시아는 손바닥을 펼치고 거기에 손가락을 이용해 글씨를 쓴 뒤 입으로 먹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패트릭이 가르쳐준 방법으로 긴장했을 때 잘써먹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유치한 행동일지 몰라도 그녀 자신은 상당히 만족할만한 효과를 얻었다.
 ‘자, 힘내자. 알시아.’
 알시아는 언제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독려하며 마왕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 긴장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셨을 거에요.’
 알시아의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다. 경어를 붙인 혼잣말을 자주 하는 것도 그녀의 버릇이기 하지만 이런 경우엔 큰 도움이 되었다. 마왕들이 모여 있는 원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알시아는 회의가 빨리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No. 2 - 선택 받은 자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다.”
 고요하면서도 위엄있는 음성이 회의실 안에 울려퍼졌다. 알시아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중앙에 있는 마왕을 쳐다보았다.
 ‘저분이 바로 회의장님이에요.’
 눈가를 빼놓고 얼굴 전체를 가린 마스크. 양 갈래로 휘어진 긴 뿔이 두 개 달려있는 투구. 그 사이로 보이는 두 개의 금빛 눈동자에 흰자위가 없는 것이 마치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현재 이 자리에 모인 마왕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또 갈시아와 가장 친했던 혼돈의 마왕 카오스였다.
 ‘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실력을 가지신 강한 분이지요.’
 카오스는 갈시아와 비견 될 만큼 강한 힘의 소유자로 아주 오랫동안 마계에서 살아왔다. 갈시아가 각 차원을 넘나들며 무용을 떨치는 동안 그는 마계 내정에 힘써 안으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래서 갈시아가 죽고 나서 거의 만장일치로 마계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진짜 아무리 봐도 저랑 하늘과 땅차인 것 같아요.’
 알시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나이와 실력, 명성과 공적 등등 카오스와 비교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연히 기가 죽은 것이다.
 “음..”
 카오스는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알시아를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알시아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알시아.”
 “예.”
 카오스의 부름에 알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얼굴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지만 이름이 불린 상태에서 고개를 돌리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게 버티어냈다.
 “선택할 시간이 왔다.”
 카오스의 단호한 음성의 알시아의 귓가를 울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그의 지시에 알시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회의는 이제 막 시작됐는데 아무런 진행도 없이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알시아는 자문하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무엇에 대한 선택이지요?”
 알시아가 되물었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주위에 있는 다른 마왕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최근 지상계에 사는 마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나?”
 카오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알시아는 슬픈듯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 그녀가 지상계에 사는 마족들에 대해서 모를리가 없었다. 특별히 피해 상황을 조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머리가 있다면 다 짐작할 수 있었다. 권위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인간들이 같은 땅에 살고 있는 마족을 가만히 내버려둘까? 말하나마나 뻔한 것이다.
 “네가 누구보다 더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네가 무엇을 선택해야하는지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카오스가 말했다. 하지만 알시아는 그의 말에 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도 제대로 들려 주지도 않고 선택을 하라니. 게다가 힌트 같지 않은 힌트를 주면서 어떻게 풀라는 것인가? 아무리 알시아가 마왕이라고 해도 그것은 무리였다.
 "선택받은 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카오스의 오른 편에 앉은 마왕 한 명이 알시아에게 물었다. 그는 턱수염을 멋지게 길렀는데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과 귀 부근에 돋아난 길고 예리한 뿔을 가지고 있었다. 맨 얼굴에 뿔이 달린 외모는 다른 마왕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예, 들어본 적 있습니다.”
 알시아가 바로 답했다. 그녀의 두 눈에 깊은 원망의 빛이 서렸다.
 선택받은 자, 그녀가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은 소위 용감한 인간 전사가 신탁을 받아 마족 살육의 대의명분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짧게 줄여서 말하면 용사, 알시아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 마계든 지상계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족의 숙적이었다. 타당한 이유도 없이 단순히 존재 자체가 해가 된다며 무차별적으로 살인 행각을 벌이는 용사는 마족들에게 있어 악의 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갈시아 님이 돌아가신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지상계 마족들은 유사 이래 최대 최악의 위기 상황에 처해있어.”
 "선택받은 자라고 자처하는 무리가 각지에서 일어나 마족을 토벌하고 있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말이야."
 "물론 개개인의 능력을 따져 본다면 우리 마족들이 월등히 뛰어나지만 현재 인간들의 숫자는 지상계 마족은 물론이고 마계 마족의 몇 십배나 된다고."
 기묘하게 생긴 마왕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의 모습은 금색 왕관을 쓴 머리 하나에 각기 다른 얼굴이 세 개나 달렸고,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세 쌍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며 생김새와 목소리는 전혀 달랐지만 서로 죽이 잘맞았다.
 "이대로 가다간 지상계의 모든 마족들이 사라져버릴지도 몰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 마계 마족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 빌어먹을 인간 놈들 보다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해."
 바짝 솟은 은발머리에 타는 듯이 새빨간 눈을 가진 마왕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체격이 탄탄하기 보다는 우뚝 솟은 칼날처럼 날카로운게 얼굴 생김새와 잘 어울렸다.
 "마계 마족과 지상계 마족이 합세한다면 인간 정도는 가뿐히 멸종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신계의 신들도 이 싸움에 개입하게 될 거야. 그건 해보나마나 뻔한 내기지.“
 얼굴의 일부분만을 드러낸 반쪽 가면을 쓴 마왕이 강렬하고 위협적인 쇳소리와 같은 소리로 말했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등을 타고 내려오는 돌기물이 마치 한 마리의 용을 연상시켰다.
 "지상계에서 어느 정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옥계 마족들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하더군.. 하긴 그들이 나선다면 천계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한 마왕이 녹슨 금속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하얀 가면을 쓰고 눈 이하의 모든 부분을 칠흑 같이 검은 천으로 감쌌는데 눈동자 부분 마저 공허한 어둠이 담겨 있어 음습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 우리들로선 전면전은 무리이군요."
 알시아의 말에 백가면의 마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 마왕들이 마계를 떠날 수는 없어.. 우리들의 부제를 천계와 신계 놈들이 알아차린다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
 백가면을 쓴 마왕과 정반대로 검은 가면에 하얀 천을 둘러쓴 마왕이 말했다. 그는 백가면을 쓴 마왕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데 외관이나 목소리는 그와 똑같고 다른 점이 있다면 가면과 천의 색깔이 뒤바꼈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희 쪽에선 소수의 정예 인원을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공식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저희 12 마왕끼리 정한 것이지만 당신에게 미처 알리지 못한 일은 사과 드리겠습니다."
 알시아에게 선택받은 자를 알고 있냐고 물었던 검은 머리의 마왕이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아닙니다. 전 아직 여러모로 부족해서.."
 알시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일단 그는 알시아보다 지위, 명성, 공적, 능력, 나이, 경험. 무엇으로 보나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른 12 마왕의 일원이다. 13 번째 마왕으로서 제대로 자각을 하지 못한 알시아에게 있어서 그의 사과를 받는다는 건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알시아, 너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카오스는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무거우면서도 위압적이었다.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카오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다른 마왕들 역시 그와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알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평소 버릇대로 손바닥에 쓴 글자를 먹으며 긴장을 풀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테이블 주위에는 고요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누구도 그것을 깨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그들에게 곰곰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가 선택 받은 자가 된 것 같군요."
 알시아의 작은 목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뜨렸다. 마왕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너나할 것 없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서야 카오스가 처음에 한 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선택 받은 자. 인간의 용사가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싸웠던 것처럼 마족에게도 용사가 필요한 모양이다. 하지만 알시아는 이 마계 용사 계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쉽게 승낙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히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같은 꼴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게 아니다. 지상계 마족, 더 멀리 보면 마계 마족. 아니 전 마족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일인데 자신같이 어리고 나약한 마족이 선택되었다는 사실. 즉 자격지심이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가지세요. 당신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알시아 왼쪽에 앉은 마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떨군 알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점이 없는 듯한 푸른 눈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으며 길게 늘어뜨린 푸른 머리는 매끄러웠다. 무척이나 잘빠진 몸매에 빼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왠지 모르게 얼음 같이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당신은 강해요, 알시아."
 알시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이 그녀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모처럼 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 나도 그 말엔 동감이다, 알시아. 넌 너 자신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강해!“
 푸른 마왕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빨간 머리는 짧았고 또렷한 붉은 눈을 가진 것이 맞은편에 서있는 푸른 마왕과는 무척 대조적으로 보인다.
 "용사라는 단어가 조금 꺼림찍하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겠지. 우리들의 원수인 용사를 흉내내는 것, 그 얼마나 부조화스러우면서도 유쾌한 일인가? 킥킥킥."
 이 자리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마왕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피에로 가면을 쓴 게 마왕이라고 하기 보다는 광대라고 부르는 게 알맞았다. 하지만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행동을 싫어하는 마왕은 아무도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이 우리 동포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갚아주거라."
 화려한 갑주로 무장한 마왕이 한쪽 팔을 척 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중한 몸매에 갑옷까지 입고 있는 걸 보자니 갑갑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모든 것은 혼돈의 어둠 속으로.."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마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아득한 심연 속에서 낮고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것 같아서 듣는 이의 기분을 가라앉혔다.
 "거기까지."
 카오스가 한 손을 펼치며 엄숙하게 말하자 일순간 테이블 주위의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 마왕들은 다시금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주위는 고요해지고 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중요한 건 알시아 너 자신의 선택이다. 우리들이 너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너의 의사를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만약 네가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카오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
 그를 제외한 다른 마왕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알시아의 선택에 있어서 조언은 해줄 수 있지만 강요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 알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알시아.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지배하는 자의 후계자여. 그대의 선택은 무엇인가?"
 카오스의 묵직한 음성이 회의실 안을 비추던 불꽃을 꺼뜨렸다. 주위는 일순간 깊은 어둠에 잠기었지만 마왕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알시아에게 집중되었다. 알시아는 잠시 동안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카오스의 질문을 받은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선택을 하지 않아도,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전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알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한 말대로 주저하지 않았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12 마왕들을 쳐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한 모습으로 말이다.
 “전 문 나이트 마스터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로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지배자들의 선택을 나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맹세합니다."
 알시아의 당당한 목소리가 테이블 주위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마계 회의에서 뚜렷하게 자기 주장을 펼쳤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을 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이겨낼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알시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안을 떠났다. 형식적인 회의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녀 자신의 선택에 대한 기로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알시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12 마왕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생각나는군.”
 “그 분은 항상 필요할 때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나서기도 전에 불쑥 나타나 어느새 일을 다 해결해 놓았어.”
 “그래서 자리에 없을 때도 의지가 되었지.”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올랐다.”
 “분하긴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돼.”
 “그 분에게 있어선 승부운 같은 것이 필요없지.”
 “강한 육체와 강한 마음의 조합..”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축되었습니다.”
 “한 명의 마왕으로서 부끄러운 때였지.”
 “그렇다고 해서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진 않았어. 누구보다 더 감성이 뛰어나셨지.”
 “힘의 법칙으로 따져 볼 때 제일 위에 있음으로서 진정한 무력의 표본이 되었다.”
 “마계의 모든 것을 대표했어..”
 12 마왕들은 차례대로 한 마디씩 한 다음 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것은 곧 그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마족의 미래에 서광을 암시해주기도 했다.
 “그 아이는 부친의 피를 이어 받은 아이다. 마계의 새로운 대표자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고귀한 혈통과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잠시 동안의 잡담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건 카오스였다. 다른 마왕들과는 다르게 좀 실리적으로 말을 한 것 같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알시아에게 기대를 많이하는 그였다.
 
 
 
 
 
 No. 3 - 마계의 용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어둠. 검은 공간 안에 터널을 뚫고 바닥을 깐 다음 입구를 몇 개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바로 마궁이 되리라. 한참 동안 마궁의 복도에 서있던 패트릭은 그렇게 짧은 감상을 마쳤다.
 “슬슬 돌아오실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벽 한쪽 귀퉁이에 붙은 보라색 불꽃이 커다란 철문을 비추고, 그 문 앞에 패트릭이 홀로 서있다. 주인인 알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인과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할수 있는 일은 그저 주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끼이익..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철문이 천천이 열렸다. 열린 철문 너머로 알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기쁨, 불안. 기대감 등의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애석하게도 패트릭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패트릭은 목례를 올린 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알시아는 그의 인사를 보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패트릭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알시아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대신 답했다. 그러자 패트릭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기다리는 것에는 이미 익숙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처럼 방까지 가는 시간은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패트릭이 먼저 나아가 방문을 열자 알시아는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선 채 잠시 동안 깊은 상념에 젖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사가 되어 달라더군요."
 알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패트릭은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용사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지식은 꽤 높은 편에 속했다.
 “용사라..”
 패트릭은 용사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바로는 용사란 무력한 이를 돕고 약한자를 지키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위해 싸우는 강한 전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악의 원흉이라 치부한 마왕을 숙적으로 삼고 닥치는대로 마족을 죽였다. 마족의 뼈와 살을 분리하면서 재물을 약탈해 이속을 챙기니 정말 잔혹한 무리가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12 마왕들은 그런 용사의 탄생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마족으로서는 아직 어린 나이인 알사에게서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일까?
 용사와 마왕의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을 분석해 보자면 혼란스럽고 힘든 지금의 시기와 딱 들어 맞았다. 다만 마족과 인간 중 죽고 죽이는 자가 뒤바꼈을 뿐 근본적인 배경은 거의 똑같았다. 하지만 용사에게 부모를 잃은 자식을 원수인 용사처럼 만는는 건 가혹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에 속한다. 공적인 입장에 선 자들은 절대 개인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억측을 하자면 미리 계획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게다가 마왕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대안이니 알시아로서는 쉽게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어려운 선택을 하셨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본 패트릭은 기운이 쭉 빠졌다.
 “결국 우리들도 그들과 같은 끝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걸까요?”
 패트릭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마왕들의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마족은 본질적으로 감정 표현을 잘 안하지만 최소한의 정도는 지키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알시아는 패트릭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지금 그녀의 두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더 의지에 차 빛나고 있었다.
 “지금 우리들의 과제는 새로운 길의 발견입니다.”
 
  * * *
 
 어두운 허공에 뜬 보라색 불꽃. 불꽃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마왕들의 회의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불꽃에 비추어 보라색으로 물든 원탁의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곳은 방금 전 마계의 용사로 선택된 알시아의 자리였다.
 “그 아이는 강합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자각을 못하는 것 같더군.”
 온 몸에서 차가운 냉기를 뿜는 푸른 마왕, 그와 반대로 열기를 뿜는 붉은 마왕. 속성으로 따져 보면 상극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하는 말은 죽이 잘맞았다.
 “그 말대로야, 이번 임무를 수행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지. 우리들은 기다림의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직접 보증하겠어. 이건 정말 가치 있는 투자라고.”
 금가면의 마왕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딱딱 치며 말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 주변엔 미소가 담겨 있다. 그는 마치 도박을 하는 것처럼 알시아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알고 있어..“
 “우리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말이다..”
 백가면 마왕과 흑가면 마왕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처음에 녹슨 금속음을 내던 목소리가 지금은 마치 교회 조종소리와 같이 어둡고 조용했다. 서로 상반된 모습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말투나 음성은 거의 똑같았고 무엇보다 말하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마치 쌍둥이 같이 말이다.
 “기특한 녀석이야. 애송이답지 않게 아는 게 많지. 분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은발 마왕의 얼굴이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그러면서 인상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사나운 눈매와 굵은 눈썹을 치 뜬 게 호전적으로 보였으나 우수에 젖은 금색 눈동자는 차분했다. 일그러뜨린 인상만 핀다면 꽤 수려한 용모였다.
 “강한 무력.”
 “뚜렷한 목표 의식.”
 “고귀한 피.”
 삼면 마왕의 세 얼굴이 서로 다른 빛의 눈농자를 번뜩이며 말했다. 세 얼굴이 입술을 움직이며 차례대로 말하는 것이 기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그건 바로 용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지..”
 검은 후두를 눌러 쓴 마왕이 허공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음울해 듣는 이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킥킥킥,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 아이는 용사가 되야해. 안되면 곤란하다고.”
 피에로 복장을 한 마왕은 여전히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 웃음 소리가 점점 더 커지려 하자 스스로 입을 막고 꾹 참았다. 웃기게 생긴 것 만큼 웃음이 많은 모양이었다.
 “음..”
 카오스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른 마왕들은 그에 상관없이 계속 잡담과 의견을 주고 받았다. 의논할 건 없지만 대화를 나눌 하나의 주제가 생겨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마침내 회의실 안에 있던 보라색 불꽃이 모두 꺼졌을 때 마왕들의 대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때까지 카오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카오스가 천천히 한 손을 펼치자 다른 마왕들은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회의장 안에는 정적이 흐르자 그는 다시금 천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마왕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카오스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채롭게 빛나는 두 금색 눈동자는 그가 지금 회상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 * *
 
 마계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카오스조차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한 짙은 어둠 속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귓가에 들리는 세 가지 목소리가 있었다.
 "자네에게 어려운 문제라는 건 잘 아네.“
 "하지만 너는 꼭 선택을 해야돼!“
 "당신의 대답을 들려주십시오."
 세가지 질문. 카오스는 질문을 한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해야 했다. 의무이자 책임, 약간의 강압과 운명적 필연이 뒤섞인 복잡한 구조의 상황이지만 분명한 것은 대답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걸세.”
 “다음 기회라는 건 없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불가항력적. 제 아무리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수레바퀴. 운명의 수레바퀴란 말 만큼 단순하고 진부한게 없지만 누구도 그것에게서 도망치진 못했다. 아무리 카오스가 강력한 힘을 가진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운명의 수레바퀴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자네의 욕구."
 "그리고 다른 모든 이의 욕구."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질문자들의 말이 백 번 옳았다. 절대신이 아닌 이상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시작과 하나의 끝의 전철을 밞는 것이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부끄러운가?"
 "아니면 두려운 건가요?"
 망설임과 부끄러움, 두려움 같이 작은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감정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 두 번 두명의 인물에게 느낀 묘한 감정이었다.
 "지켜보겠네."
 "너희들의 믿음이."
 "사라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것이 질문자들의 마지막 세 마디 말. 아직 대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질문자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래서 카오스는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재로는 이제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는 못한다. 앞으로 가야만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 그의 선택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모든 선택은 하나의 답으로 통한다는 것이다. 선택에 앞서 주저한다는 것 또한 모든 이들의 공통된 사항이다. 그게 연륜있는 마왕이든 신참내기 마왕이든 아주 평범한 인간이든 말이다.///
 
  * * *
 
 알시아는 자신의 방안에서 돌아올 날의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항상 로브 속에 입던 잠옷을 벗고 내의로 싹 갈아입은 뒤 그 위에 겉옷이 되는 여행복을 준비했다. 소매가 긴 옷과 바지를 입고 허리춤에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찼다. 여행복 겉으로는 흑요석처럼 검게 빛나는 갑옷을 착용하고 쇄갑에 망토를 씌웠다. 얼굴이 워낙 앳되어 보여 갑옷의 이미지가 반감됐지만 사이즈가 너무 딱 맞아떨어지는 게 멀리서 보면 평상 복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옷단장의 마무리는 칠흑같이 검은 로브를 입는 것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로브를 갑옷 위에 덮어 씌어 입었는데 전혀 이상한 티가 나지 않았다. 안에는 내의와 여행복, 가죽 바지와 같이 상당히 많은 옷을 껴입었지만 그건 모두 마계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큰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왜 혼자서 떠나시려는 거죠?"
 옷단장의 마무리를 해주던 패트릭이 넌지시 물어 보았다. 알시아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쭉 보살펴온 패트릭이었다. 그는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분위기만 보아도 숨기고 있는 사실이 많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알시아님은 분명 뭔가 제게 숨기시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할 상황에 처하면 말이 없어지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방안으로 돌아와 갑작스럽게 여행 채비를 갖추면서 한마디 말도 없던걸로 미루어 볼때 혼자서 떠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제가 선택한 일인 동시에 제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알시아는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얼굴을 붉히며 무슨 큰 잘못이라고 했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정말 알시아님 답습니다.’
 패트릭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을 못하는 착하고 순수한 어린 군주. 하지만 같은 마족의 입장에서 볼 때 알시아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지금 그러한 생각도 그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되니 말이다.
 “알시아님, 방금 하신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전 무슨일이 있어도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패트릭도 이대로 가만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부복했다. 군신의 예로 알시아를 대한 것이다. 그것은 곧 집사와 주인이 아닌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일어나세요, 패트릭.”
 알시아는 크게 당황하며 패트릭을 일으켜세웠다. 만약 이 마계에 알시아가 유일하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패트릭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와 신하보단 그 이전의 관계 그대로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을 원했다. 신하가 아니라 친구이자 오빠, 보모를 말이다.
 “무리하실 것 없어요. 나는 나, 아버지가 아니에요. 당신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한 상대는 제 아버지였어요. 아버지가 안계신 저를 지금까지 보살펴 준 것에는 정말 감사드리지만 더 이상 폐를 끼쳐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알시아는 패트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단호함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극히 옳은 말이나 솔직한 심정으로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알시아님..”
 패트릭 역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됐다. 갈시아처럼 알시아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때가 온 것이라고 생했다.
 "전 알시아님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쭉 지켜봐 온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전엔 갈시아 폐하을 보필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 패트릭 그린아이.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지배하는 자, 문 나이트 마스터 가문에 영원의 충성을 맹세한 마족. 지금 제가 섬기는 분은 알시아님입니다. 전 이제부터는 언제까지나 알시아님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패트릭의 맹세는 새롭게 이루어졌다. 부복하는 신하의 충성스러운 맹세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군주는 그런 충성된 신하의 뜻을 결코 저버릴 수 없는 법이었다.
 
 
 
 
 
 No. 4 - 떠나가는 마계의 달
 
 용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고귀한 태생이어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 강해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 뛰어난 재능 혹은 잠재력이 있어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네 번째 조건! 운이 좋아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다섯 번째 조건! 마음씨가 착해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여섯 번째 조건! 용모가 수려해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일곱 번째 조건! 검과 마법, 두 가지 다 잘해야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여덟 번째 조건! 근성과 투지는 필수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아홉 번째 조건! 용기가 있어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열 번째 조건!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용사가 되기 위한 열 한 번째 조건! 때로는 무모할 줄도 알아야 한다, 체크.
 용사가 되기 위한 열 두 번째 조건! 젊어야 한다, 체크.
 탁.
 “후우...”
 패트릭은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방금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용사가 되기 위한 지침서!’ 라는 것으로 세계 최초로 마계에 넘어온 무명의 인간 모험가가 우호의 증표로 여러 마족들에게 증정한 책이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마계로 넘어왔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도 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내용이 담긴 책을 주고 무사히 돌아갔다는 사실은 충분히 전설이 되고도 남았다. 보통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마계 마족이라면 인간을 만나자마자 죽여 없애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살아남아 이 책을 전달하고 마계 마왕과 기묘한 우정을 나누었을까? 하여튼 그 사건은 마왕들이 유구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일 대로 쌓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랬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아니면 마계를 대표하는 마왕들이 인간을 순순히 살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상에서 마주친 게 아니라 마계에서 조우한 이상 인간을 죽이는 것은 마족의 당연한 권리가 된다. 인간 역시 지상계에서 마족을 보면 주저없이 공격하니 말이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군.”
 패트릭은 책을 서고에 다시 꽂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아무리 용사를 치기 위함일지라도 그와 같은 용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여간 꺼림찍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용사굴로 들어가기 전에 용사에 대한 데이터를 파악해야 임무를 무사히 완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보니 체면을 차린다는 게 사치가 될 정도다. 마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용사가 되는 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 순위로 밀려난다.
 “알시아님에게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찝찝하군.“
 그나마 위안 거리가 되는 것은 알시아가 용사가 되기 위한 조건들에 딱 알 맞는 인물이란 것이다. 마족이 아니라 인간 용사로 태어났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본래대로라면 그것은 단점에 속하겠지만 임무 수행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니 장점이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알시아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패트릭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녀는 마냥 즐거운 것 같았다.
 “이제 드디어 지상 위로 올라가보는군요. 왠지 가슴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요.”
 알시아는 앙증맞은 손으로 작은 가슴을 누르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패트릭은 충분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리고 보니 알사이님은 이번이 처음이시죠?”
 패트릭의 말대로 알시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상계에 가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막중한 임무를 띄고 있다는 걸 떠나서 마음은 자연히 들뜨기 마련이었다. 평소에는 일에 치여 지상계에 나갈 시간이 없었고, 또 솔직히 혼자서 가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에 이번 임무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알시아에겐 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럼 전 잠시 다른 마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올께요.”
 옷단장은 한참 전에 끝났지만 여행 준비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여행에 앞서 알시아는 그 동안 친하게 지내던 마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열 두 마왕들에게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을 잔뜩 얻어왔다.
 탐욕의 마왕 골디온에게 받은 보물. 크기와 중량, 수량에 관계없이 모든 걸 담을 수 있다는 ‘욕망의 주머니’ 덕분에 물건의 적재량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용사... 지침서’ 에 나오는 여행 도구와 기본 장비를 준비하고, 또 무엇보다 지상계에서 활동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이 될만한 것들을 가득 넣었다.
 마왕들 중에서 가장 소박한 알시아였지만 그래도 그녀의 재산 정도면 웬만한 지상계의 섬 하나 정도는 통째로 사고도 남을 정도다.
 마계에선 금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금은보화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기껏해야 장식품 말고는 사용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이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돈에 환장한 인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금전의 개념이 없다는 게 어떻게 보면 축복인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집안 정리가 남았군요.”
 “알시아님은 이제 쉬십시오. 집안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패트릭이야 말로 좀 쉬세요. 여행 물품 준비를 하시느라 피곤하실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건 원래..”
 “긴말하지 마세요. 패트릭. 오늘만큼은 제가 한번하고 싶어요.”
 아주 오랜만에 알시아가 고집을 부렸다. 집안 정리 같은 건 패트릭이 하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손수 집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방과 그녀 자신의 방. 그리고 거실과 주방 및 응접실과 창고, 서고 등등 차분한 마음으로 방안 정리에 정성을 다했다.
 “제가 이곳에 없을 때도 더러워지지 않도록 깨끗하게 하고 싶어요.”
 알시아의 음성은 왠지 모르게 떨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 혼자서 해보는 방안정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마계에는 낮과 밤이란 것이 없다. 사시사철 차가운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검은 하늘에는 해가 없지만 대신 달이 있었다.
 별이나 구름이 없는 하늘에서, 아니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는 이 마계에서 유일하게 큰 빛을 발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달이다.
 갈시아가 죽었을 때 처음으로 한번 달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알시아가 새로 즉위한 뒤 다시 생겼지만 그 달은 예전의 것보다 크기가 작고 빛의 세기도 약했다.
 마계 마족은 특별히 빛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모두들 그 작은 달에 대해 유난히 많은 신경을 썼다. 예전의 큰 달을 그리워하는 이가 있고, 지금의 달을 아예 없애버려 달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자고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마계의 일부분 밖에 비출 수 없던 작은 달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커져 마침내는 마계 전체를 비추는 큰 달이 되었다.
 시간은 달의 존재 가치에 대한 논쟁을 자연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의 달은 예전의 그 어떤 달보다 더 크고 밝게 빛났다. 오늘따라 유달리 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이 더 밝아 보였다.
 마계 회의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마계 광장 한복판. 달빛이 가장 잘 비추는 장소인 그곳에서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알시아와 그녀를 배웅하러 나온 12 마왕들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동안 아니 어쩌면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12 마왕 모두 모인 것이다.
 “자신 있지?”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붉은 마왕은 알시아의 한쪽 어깨를 토닥였고, 푸른 마왕은 반대편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적, 청. 12 마왕들 중 유일한 여성들로 알시아에게 있어서 좋은 언니이자 동성 친구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은 알시아에게 기품과 차분함, 화려함과 정열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고..”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어..”
 백가면을 쓴 마왕과 흑가면을 쓴 마왕이 엄숙하게 말했다. 백, 흑. 가면 속의 얼굴은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알시아는 본의아니게 그들의 참모습을 본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알시아가 그들과 대면할 때는 무서움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방황도 할 꺼다..”
 검은 후드를 눌러 쓴 마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항상 어두 침침한 말투를 사용하지만 검은 후두 아래로 살짝 드러난 입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언제나 미소가 서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러한 특정을 알고 있는 건 아마 마계 내에서 알시아 하나 뿐일 것이다.
 “킥킥킥, 웃으라고. 네가 하는 여행은 분명 힘들겠지만 지루하고 재미없는 여행이 되지는 않을 꺼야.”
 광대 복장을 한 마왕은 웃음 아직도 계속됐다. 언제나 킬킬거리며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없이 장난만 치고 다니지만 그건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12 마왕 중에서 감정이 가장 풍부하기 때문에 알시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많았다.
 ‘진짜 똑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알시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광대는 실제로 속이 깊고 영리하다고 말이다. 자신이 웃던 남을 웃기던지 간에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중요한 건 힘이다. 너 자신의 힘을 믿는 거다.”
 갑주로 무장한 마왕의 팔을 치켜 들며 말했다. 그는 항상 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화려한 갑옷, 그 커다란 금속 안에 단순한 힘만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에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배팅해.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꺼야. 이 내가 보장하는 승부다.”
 금색 가면을 쓴 마왕이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도박을 좋아했고 무엇을 하든 내기를 잘 걸었지만 선택을 하는데 있어 유유부단하지는 않았다.
 “용사 녀석들의 뼈와 살을 분리하고 으깨버리라고.”
 은빛 마왕이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얼핏보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말과 행동이 공격적이지만 잘 사귀어 보면 호탕한 기질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시아.”
 “네가 가는 길에.”
 “언제나 마계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빌겠다.”
 삼면 마왕이 세 쌍의 눈동자를 굴리며 알시아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세 개, 눈은 여섯 개나 되며 각각 색깔이 다르지만 모두 똑같은 하나를 바라본다. 많은 만큼 보다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지상계에 가시면 일단 처음엔 마족이라는 신분이 들통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검은 날개를 가진 마왕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주의 사항을 말해주었다. 12 마왕 중에서 가장 예의가 바르고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지만 어디가서 미움을 받지는 않을 스타일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세 쌍의 검은 날개만큼이나 세련되고 아름다웠고, 용모 또한 수려해 인상은 12 마왕 중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나?”
 “예!”
 카오스의 말에 알시아는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계와 지상계는 다른 점이 많다. 마계는 어둠과 정적이 환영 받지만 지상계에서는 그런 것이 배척 받는다. 지상계는 시끄럽고 혼잡할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 인간에게 정체가 탄로나지 않게 끔 주의해라. 일이 지금보다 더 커지는 걸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 들었으면 어서 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오너라.”
 카오스가 말했다. 지극히 딱딱하며 사무적인 말투, 어떻게 보면 그게 그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카오스를 끝으로 알시아는 13 마왕 중 그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에게 인사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서 각자의 특징을 생각하니까 마음의 한결 후련해짐을 느꼈다.
 ‘모두들 정말 고마워요.’
 알시아는 마음 속으로 깊이 감사했다. 마계에서 패트릭을 제외하고 유일한 후원자라고 부를 수 있는 그들과 잠시 동안이나마 헤어진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상당히 슬픈일이지만 이렇게 모두에게 배웅 받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우선 제일 먼저 지하 미궁 속에 사시는 현자 님의 조언을 듣는 거다. 텔레포트의 위치를 지하 미궁 입구 앞에다 설정해 놓았으니 힘들게 찾아갈 필요는 없을 거다.”
 카오스가 말했다. 지하 미궁의 현자 방문. 그것이 알시아에게 주어진 첫번째 임무였다. 그녀는 지상계에서의 첫 임무라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패트릭은 약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왜 알시아님이 이런 일을 하셔야되는 거지?’
 그는 이 진부한 용사 전설적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12 마왕들 앞이라 내색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계시를 받아 선택되고 현자에게 조언을 들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라는 건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패트릭 혼자만의 투덜거림일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알시아가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알시아는 자신을 마중 나온 모든 마왕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자 12 마왕들이 시계 방향으로 한명씩 앞으로 나와 한번 더 말을 건넸다. 이번엔 진짜 작별 인사였다.
 “부디 무사히..”
 “몸과 마음도 건강하게..”
 “잘 다녀와 알시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베팅을 거는 식으로 노력해라.”
 “네 아버지는 강했다. 그러니 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명성을 떨쳐봐.”
 “진정한 강함, 아니 너만의 강함이 무엇인지 찾길 바란다.”
 “떠나는 자의 준비.”
 “배웅하는 자의 추복의 말.”
 “그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히히히, 지상 계의 모험에 언제나 웃음이 함께 하길 바랄께.”
 “무운을 빌어드리겠습니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고 잘 다녀오라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의 얼굴과 손짓 하나 하나를 잊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녕히..’
 텔레포트의 시전으로 사라져 가는 마계의 풍경과 지인들의 모습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손을 흔든 알시아는 패트릭과 함께 사라지면서 언젠간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다짐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길 바란다.”
 주위에 있던 마왕들 중 유일하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던 카오스의 이제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의 시선이 달이 사라져 버려 텅 빈 마계의 검은 하늘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달이 사라지다니. 한동안 마계의 하늘이 쓸쓸해지겠군.”
 카오스는 그답지 않게 주위에 있는 다른 마왕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No. 5 - 지하 미궁
 
 지상에는 인간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금기의 땅이 있다. 인적이 드문 들판이나 산짐승이 자주 출몰하는 산속 깊은 곳, 황량한 벌판과 아득한 광야 어느 한복판에 위치한 미궁도 금기의 땅에 포함된다.
 일반인들에게 있어 미궁은 절대 금기의 땅으로 인식되지만 모험가들한테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잠든 미지의 영역은 모험가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죽음의 기운마저 풍기는 그곳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살아 나온다면 설령 보물을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재물로 얻을 수 없는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미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모험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와 명예, 모험심의 충족을 위해 미궁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모험가의 반수 이상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 미궁을 탐험하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족은 인간들에게 있어 존재 자체가 위험 요소 중 하나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미궁은 금기의 땅이라고 하기 보단 지상보다 더 친근한 장소였다. 마족은 미궁을 모험하는 게 아니라 그곳의 주인이나 주민이 되는 쪽이 더 어울렸다.
 미궁을 구성하는 인공 구조물은 하나같이 움울하기짝이 없었다. 빛도 잘 통하지 않아 낮과 밤의 개념이 없는 마계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이 지상계의 미궁이군요.”
 “확실히 마계의 미궁과 기본 형태 부터가 다르듭니다.”
 미궁 앞에 서서건축 양식을 유심히 살펴보는 모험가 파티가 하나 있었다. 한 명은 검은 로브를 입은 어린 소녀, 다른 한 명은 턱시도를 곱게 차려입고 외알안경을 낀 청년 집사. 알시아와 패트릭이었다.
 “그런데 이외로 빨리 도착한 것 같네요.”
 “지상계에 이동할 장소의 좌표를 먼저 설정해 놓고 그 다음 마계 마법진을 이용하여 텔레포트 능력을 급상시켰기 때문에 단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된겁니다.”
 알시아의 물음에 패트릭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간략한 설명을 마친 그는 오른쪽 녹색 눈동자를 희미하게 뜬 채 곧장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미궁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물론 마족인 패트릭의 눈엔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보인 것도 어둠 이상의 것이 없었다.
 “어둠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습니다.”
 미궁 속의 어둠은 한 마리의 야수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유혹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는데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직접 와서 경험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패트릭은 외알 안경을 살짝 들어 보이며 앞장 서서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안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암흑천지였다. 그는 양손을 모으고 천천히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손안에 푸른 광구가 생겨났고, 그것은 곧 그의 손에서 떠나가 입구 안쪽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푸른 빛의 아지랑이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순간 주위에 빛이 번쩍거리더니 입구 안쪽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주위가 더 밝아지자 패트릭은 입구 바깥 쪽에 서있는 알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십시오, 알시아님."
 알시아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조심스럽게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패트릭이 미리 조사를 해뒀겠지만 그녀 자신도 어느 정도 지리의 성향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군요.”
 미궁 안을 둘러본 알시아는 탄성을 질렀다. 입구 안쪽 너머로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넓은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통로 바닥에는 곰팡내와 차가운 습기로 가득 차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이진 않았다.
 “길잡이 역할을 하는 빛입니다. 이 빛을 쫓아 갑시다.”
 두 사람은 희미한 빛을 쫓아 어둠 속을 익숙하게 걸어갔다. 어둠은 그들에게 문제 거리가 되지 않았다. 주위를 밝게 만든 것은 구조물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통행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을 꼽자면 통로의 복잡한 구조 밖에 없었다.
 “뭔가 길이 자꾸 변하는 것 같지 않아요?”
 패트릭의 뒤를 따라 미궁 안으로 들어가던 알시아가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좁아졌다. 일직선을 유지하던 길이 어느 사이엔가 지그재그의 곡선으로 바뀌거나 위 아래로 크게 휜 경사로를 이루기도 했다.
 “알시아님의 말씀대로 인 것 같습니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통로의 구조가 바뀌고 있습니다.”
 패트릭은 내심 감탄을 마지 않았다. 지상계의 미궁은 본질적으로 땅 위에 지어진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런 복잡한 길을 만들 수 있는지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미궁의 변화에 감탄하면서 몇 시간 정도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쯤 알시아 일행 앞에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어느 쪽이 올바른 길일까요?"
 알시아가 두 갈래의 길을 번갈아보다가 패트릭에게 물었다.
 “빛이 인도하는 데로 오른쪽 입구로 가야할 것입니다.”
 패트릭은 외알 안경을 살짝 들어 보이며 주저없이 답했다. 실제로 그가 만들어낸 푸른 빛의 광구가 오른쪽 길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럼 오른쪽으로 가요.”
 알시아는 패트릭의 말을 곧이 들었다. 무작정 자신의 감각을 믿는 것보다 경험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출구가 보이지 않은 어둠의 통로가 이어졌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바닥을 거닐며 둘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미궁 곳곳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함정보다 더 귀찮은 장애물은 지성이 없는 미궁의 마족들이다. 미궁 안에선 서식하는 마족 중, 대화가 통하는 것들은 거의 없기 때문에 만에 하나 조우를 하게 된다면 전투가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지상게 마족과는 다르게 미궁의 구조에 습성을 맞춰 살아가며 진화하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본적인 성향은 어둡고 음습했다. 미궁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고 생활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며 사고 회로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동족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특히 이렇게 복잡하고 긴 그리고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미궁에는 더욱 그런 마족들이 많을 것이다.
 챙, 챙!
 어디선가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소리로, 근처 가까운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싸움이라면?"
 "미궁을 탐사하던 모험가와 그 속에 서식하는 마족들이겠지요. 알시아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좀 더 안전한 것을 원하신다면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셔도 됩니다.”
 패트릭은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주며 선택문까지 제시했다. 알시아는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곳에 가만히 있기는 싫었다. 난생 처음 지상계에 나와서 도착한 미궁이다. 분명히 뭔가 마계의 미궁과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득 지상계 미궁에 사는 마족을 부하로 거둘 수는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미궁에 사는 마족들을 회유시킬 수는 없나요?"
 “그들을 회유시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패트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시아는 조금 실망했지만 호기심과 인재 욕심으로 인해 평소 부리지 않던 고집을 다 부렸다.
 “마계 미궁에 사는 마족들은 그랬지만 지상계 미궁에 사는 마족들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알시아님. 지금 우리들을 따르고 있는 마족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왕 갈시아 폐하의 수하 마족들도 그분이 서거하신 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요. 우리 둘 만으로는 절대 용사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아주 많으니까요. 그러니 알시아님은 지상계 마족들을 찾아다니며 수하로 거느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미궁에 사는 마족들은 지상계 마족이면서도 조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은 철저히 폐쇄된 공간에 살아가면서 지성을 퇴화시켰습니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아요. 마계 미궁에 사는 마족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등용 가능성이 있는 상대를 찾아야합니다.“
 패트릭의 긴 설교가 시작되었다. 알시아는 매일 겪는 일이라서 많이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설교 중 영양가 없던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지상계 미궁에 사는 마족을 말이에요."
 알시아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지상계 미궁에 사는 마족을 한번도 본적 없는 상태니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 이 곳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요. 마계 미궁 어디에도 없는 지상계 미궁만의 독특한 구조. 대리석 바닥을 밟는 촉감까지 다르게 느껴져요. 모든 게 새롭게 보이고, 아니 처음 보는 것이니 그렇겠지만 이 기분을 잊고 싶지 않고 더 만끽하고 싶어서 모험을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런 모험도 없는 여행이란 하나도 재미가 없으니까.. 아니,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중요한 때에..” ///
 처음에는 차분하게 입을 연 알시아였지만 감정이 고조되자 말이 꼬였다. 그리고 나중에 그 현실을 깨닫고 나서는 횡설수설했다. 바로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 중 하나였지만 혹자는 마왕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그녀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마계 마족은 바로 그런 점을 좋아했다. 패트릭도 그 중 하나였고, 12 마왕들도 그러했다.
 “알시아님이 그렇게 까지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찬성하겠습니다. 대신 너무 무리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결국에는 패트릭이 두 손을 들었다. 늘 이런 식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안전히 가는 것과 그냥 거쳐가는 것 등의 두가지 선택문을 제시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마워요. 무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께요.”
 알시아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지어 보였다. 패트릭은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은 긴장을 했다. 말은 잘만 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상계 미궁의 마족과 조우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갈시아님이 계셨다면..’
 패트릭은 잠시 옛날 생각을 했다. 그때는 갈시아와 함께 지상계 미궁을 탐사했는데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모든 위험 요소를 피하고 지름길을 알고 부비트랩 등의 설치 유무을 미리 파악해 두어 매우 순조로운 탐사를 했었다. 자기가 미궁에 들어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이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미궁 탐사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점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전 이번에 진정한 탐사의 의미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패트릭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도움 또는 지도를 통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험 따위는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육감에 의지해 나아가는 것이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개는 주인을 닮는다고 하던가요.’
 패트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험을 즐기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모험가 기질이 다분하고, 방랑벽이 있던 갈시아를 보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알시아 역시 피를 속일수는 없었다. 사전에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순탄한 길을 가려던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란 말이 딱 들어 맞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계세요?“
 알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패트릭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과거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마음의 준비, 그리고 현실의 상황 파악 등을 통해서 평상시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패트릭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소리없이 발걸음을 떼며 걸어나갔다. 알시아도 그의 뒤를 따라 벽에 바싹 붙어 다녔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통로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아른거렸다.
 "혹시 저 곳인가요?"
 알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까지 쫓아온 빛보다 좀 더 밝은 것 같아 확실히 뭔가 달라 보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패트릭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빛이 새어나오는 통로 입구 사이로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쭉 빼고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위를 살폈다.
 "우선 상대편의 전력을 알 수 없으니 싸우기에 앞서 충분한 정찰을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물론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알시아님과 제 실력으로 무난히 헤쳐 나갈 수도 있겠지만 미궁에 흠이 가지 않도록 주의 해야합니다.“
 패트릭은 검지 손가락을 척 치켜 든 채 작은 목소리로 이 미궁에서 주의해야할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미궁의 주인 되시는 분은 평소에는 온화한 분이시지만 한번 크게 화가 나시면 주체를 잘 못하시는 분이거든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알시아는 단 한자도 놓치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그런데 이 미궁의 주인은 누구시죠?"
 "아, 곧 만나보게 되실 겁니다. 이 곳에 온 목적이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함이었으니."
 "그럼 그분이 다른 마왕님들이 말씀하신 현자님이신가요?"
 "저희들에겐 그렇게 불리시고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현자란 칭호를 그리 달가워 하시지 않으시더군요."
 패트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알시아의 질문에 답할 때였다.
 음메에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성난 황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주위의 벽과 바닥을 진동시킬 정도로 컸다. 두 사람은 황소의 울음소리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안쪽은 상당히 밝아서 패트릭이 푸른 광구를 띄우지 않아도 주변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확실히 미궁의 마족과 조우한 모험가 파티가 맞는 것 같군요."
 천장엔 이미 노란 광구가 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패트릭이 만들어 내던 푸른 광구와는 다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공중에 뜬 채 정지된 상태였다. 인간, 그것도 성직자가 사용하는 빛 계열의 마법이었다.
 "이것은 성직자의 라이트(Light)마법입니다."
 "앗, 그것보다 저기 좀 보세요!"
 패트릭이 막 라이트에 대해 설명을 할 찰나 알시아가 중간에 탁 끊으며 소리쳤다. 지금은 라이트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패트릭은 노란 광구에서 눈을 떼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 저것은.."
 패트릭이 외알 안경을 살짝 들어보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No. 6 - 인간 모험가와 반인반수의 사투
 
 뜨거운 열기와 날카로운 쇳소리. 그 두 가지로 미궁 안을 가득 채우며 지칠 줄 모르고 싸우는 무리가 있다. 입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보통 인간보다 배나 좋은 시력을 가진 알시아와 패트릭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치열한 사투의 현장을 말이다.
 "저 생물은 분명!“
 라이트 마법의 불빛 아래, 모험가로 추정되는 인간 무리가 커다란 생물 하나와 맞부딪혀 싸우고 있었다. 인간 무리와 싸우고 있는 커다란 생물은 휘어진 뿔이 두 개 달린 소머리에 전신이 하얀 털로 뒤덮힌 인간의 몸을 가졌으며 덩치가 무척 커서 외모만으로도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음메에에!!”
 소머리 거인의 울음소리가 음침한 미궁 안에서 크게 울려 펴졌다. 그것은 창칼이 부딪히는 금속음을 묻어 버리고, 차가운 대리석 벽과 바닥을 진동시켰다.
 쾅, 쾅.
 소머리 거인이 발굽으로 두어번 땅을 박차고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배틀엑스(BattleAxe)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인간 모험가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건 누가보아도 강하고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세상 하직한다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소머리 거인이 들고 있는 배틀엑스의 크기는 지금 그에 맞서 싸우는 인간 크기만 했다. 그림자 또한 엄청나게 커서 입구 근처에 서있는 알시아 일행에게 비출 정도였다.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알시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곧 미노타우로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미노타우로스는 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반인반수 마족으로 미궁의 단골 파수꾼으로 지능은 낮고 공격적인 성향을 띄웠으며 단독으로 행동하는 거친 전사였다.
 “휴우~어쩌면 이렇게 된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패트릭은 미노타우로스를 만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안심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지능이 낮지만 대신 오감이 발달되어 있다. 발달된 오감을 통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한 다음 종속시키면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힘세고 머리나쁜 마족에게 사용하는 회유책 중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무력으로 설득시키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패트릭을 비롯한 대부분의 상급마족들은 미노타우로스 같은 마족만큼은 정중하게 설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군단 편성 때 보병이 되어 백병전에 활약을 시킬 수는 있지만 내정의 측면에서 볼 때는 경비와 잡역을 빼면 정말 쓸모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인재가 필요한 시기니 미노타우로스를 설득시키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패트릭이니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가 한 말에는 강한 힘과 마력을 지닌 상급 마족이란 배경이 뒷받침해주었다.
 “패트릭의 말도 옳아요. 하지만 우리 마족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보면 어떻겠어요?
 알시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일단 마계 마족의 입장에서 보통 미노타우로스는 중하급에 속하기 때문에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급 혹은 몇 단계 아래나 그보다 훨씬 약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평가가 확 달라질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패트릭은 알시아의 현명함에 감탄하면서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평가를 나누고 있을 때 눈앞에 벌어진 사투는 더욱 더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소 대가리 자식!”
 “제발 좀 쓰러져라.”
 선두 에 선 전사 둘이 악을 쓰며 검과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투에 임했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무기도 조잡하기 짝이 없어 제대로된 타격 한번 입히지 못했다. 가끔 성공하는 공격도 단순하게 미노타우로스가 가진 거체의 약점. 몸이 워낙 커서 움직임이 둔하기 때문에 맞은 것뿐. 중상은커녕 찰과상 하나도 제대로 입히지 못했다.
 “음메에에~~”
 반면 미노타우로스의 배틀엑스는 쉬지 않고 바람을 갈랐다. 쌍 도끼날은 쇠울음 소리를 내며 희생자를 갈구했다. 목이든 머리든 몸통이든. 희생자의 모든 것이 쌍 도끼날의 목표가 되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일반적인 무기술을 익히지 않은 것에 대해 인간 전사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야성과 괴력으로 무장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하기 힘들었다.
 “인간 쪽이 밀리고 있습니다.”
 “미노타우로스가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요.”
 미노타우로스의 상태를 확인한 알시아는 안심했다. 인간 전사들이 핀치에 몰려 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인간을 구해줘야할 의무가 없었다.
 “음머어어~”
 미노타우로스의 배틀엑스가 전사들의 머리통을 노렸다. 인간 전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반격할 엄두도 못내고 도망다녔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싸움은 정말 못했지만 도망치는 실력하나는 일품이었다.
 “푸르르..”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공격이 계속 빗나가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갈색 눈을 치켜 뜨고 콧김을 뿜으며 발굽으로 땅을 쾅쾅 찼다. 그리고 곧장 인간 전사들을 향해 돌격했다.
 쿠구구구..
 지면을 울리는 발굽 소리에 투구와 가죽 갑옷이 흔들렸다. 물론 그전에 무기를 잡은 손과 땅을 딛은 발이 벌벌 떨렸다.
 “으으으..”
 인간 전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져 거의 혼란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공포와 떨림으로 인해 미노타우로스의 돌격을 피하지 못했다. 무기를 내던지고 머리를 부여 잡고는 몸을 웅크릴 뿐이다.
 “으, 으아아아~~~”
 인간 전사들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공포를 느끼겠지만 그들은 그게 보통 사람보다 더 심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검과 창을 든 전사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패트릭은 인간 전사들의 추태를 눈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앗!”
 그런데 바로 그때 알시아의 눈동자에 놀람이란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미노타우로스의 맹렬한 돌진에도 불구하고 인간 전사들은 무사했다. 그들은 머리 바로 위의 벽면에 찍힌 도끼날을 보고,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미노타우로스는 킁킁 콧김을 뿜으며 도망치는 인간 전사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의 등 뒤에 달라붙은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녕~~”
 미노타우로스의 어깨 너머로 한 소녀가 고개를 쑥 내밀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금발 머리를 붉은 두건으로 질끈 동여멨고, 가벼운 복장에 가늘고 유연한 몸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은이빨의 토파즈 등장!”
 토파즈는 특정의 누군가에게 할 것 없이 혼자서 자기 소개를 마치고 살짝 윙크를 해보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벼워지자 알시아와 패트릭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음머어어!!!”
 미노타우로스는 토파즈의 장난질이 짜증 나는지 온 몸을 뒤흔들며 미친듯이 날뛰었다. 그녀는 마치 로데오 경기에 참가한 선수처럼 능숙하게 미노타우르스의 등에 탔다. 격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부드럽고 유연하게 반응했다.
 “자, 이제부터 즐거운 쇼가 시작됩니다.”
 토파즈는 맨 처음 미노타우로스의 양 어깨에 박아 놓은 단검을 빼는 동시에 넓은 등짝을 박차고 위로 솟구쳐 올라 두어 바퀴 공중 제비를 돌았다. 미노타우로스는 재빨리 등을 돌려서서 공중 곡예 쇼를 벌이는 토파즈를 노려보았다. 배틀엑스 자루를 불끈 쥐고 그녀에게 받은 모욕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준비해 두었다. 쌍 도끼날이 바람을 가르며 토파즈를 향해 날아갔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배틀엑스가 공중에 뜬 토파즈를 향해 날아갈 때 어디선가 끝이 둥글고 긴 꼬리가 달린 세 개의 광채가 날아와 미노타우로스의 양어깨와 등을 가격했다. 얼핏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노타우로스에게 순간의 고통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했다. ///
 그 사이 지상에 착지한 토파즈 앞으로 푸른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홀연이 나타난 것이 꼭 유령 같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 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프르르.. 프르르..”
 미노타우로스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나자 더욱 사나워졌다. 갈색 눈은 붉게 충혈되고, 거칠게 콧김을 뿜었으며 얼굴은 새빨개졌다.
 “에메랄드, 빨리 튀어 나와!”
 토파즈가 소리치자 누군가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 대담한 행동을 한 주인공은 전투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처럼 얌전하게 생긴 소녀 성직자였다. 단정하게 자른 녹색 머리 위에 법모를 쓰고 하얀 법복을 입고 있었으나 한 손에 굳게 거머쥔 메이스(Mace)를 보니 그저 기도만 하는 성직자는 아닌 것 같았다.
 미노타우로스는 배틀 엑스를 어깨 위로 치켜 들었다가 곡선으로 내리쳤다. 에메랄드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고 쌍 도끼날이 내려 올 때 그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미노타우로스의 굵은 발목 안으로 파고 들어가 탁 차고 빙글 돌아 제자리에 섰다.
 “신앙과 믿음, 그리고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신벌을 내리겠습니다.”
 한 손에 든 메이스를 휘둘러 성호를 그은 뒤 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미노타우로스의 맨 발굽을 내리찍었다.
 “음머어어어!!!!!”
 미노타우로스는 죽을 것 같은 비명을 지렀다. 배틀엑스를 집어 던지고 성한 발로 펄쩍펄쩍 뛰었다.
 “잘했어, 에메랄드.”
 토파즈가 웃으며 에메랄드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집어 던진 베틀엑스는 네 다섯 번 정도 공중에서 빙빙 돌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게 구석진 곳으로 도망친 인간 전사들의 코 앞에 떨어져 본의아닌 공포를 선사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무척이나 웃길만한 모습이었지만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 자들이 진짜 모험가인 것 같습니다.”
 패트릭이 말했다. 그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으로 본 것만으로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예상하건데 치밀한 계획과 탄탄한 구성, 서로의 약점을 보완한 전법. 각자의 능력에 따른 배치. 나타나자 마자 미노타우로스를 궁지로 몰아간 그들이 바로 인간 모험가 파티가 분명하다. 그 파티란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집단 의식과 응집력을 무엇보다 더 잘나타낸 것이 바로 파티 시스템이니 말이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미노타우로스가 죽게 될지도 몰라요. 인간 모험가 파티의 싸움 방법을 알아두는 것도 좋지만 미노타우로스를 구하는 게 더 급해요.”
 그 말을 마치고, 알시아는 인간 모험과 미노타우로스가 대치된 곳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오차가 없는 판단이자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알시아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패트릭은 행여나 그녀가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서둘렀다. 미궁 바닥을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이동하면서 녹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쟤네들은 또 누구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알시아 일행을 발견한 건 토파즈였다. 알시아 일행의 외관을 대충 훑어본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미궁 깊숙한 곳에서 어린 소녀와 정장을 차려 입은 신사와 조우했다는 건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위험해요, 토파즈 자매님!”
 잠시 한눈을 팔고 잇는 사이에 미노타우로스의 불끈 쥔 주먹이 토파즈를 향해 날아왔다. 에메랄드는 다급히 소리치며 재빨리 몸을 날려 토파즈를 덮쳤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은 미궁 벽에 꽂혔고 가까스로 그 우악스러운 공격을 피한 두 사람은 바닥에 몸을 굴려 구석진 곳으로 도망쳤다.
 “음메에에~~”
 미노타우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배틀엑스를 치켜들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미노타우로스를 가만히 지켜보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마법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투명화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푸르르, 푸르르.”
 미노타우로스는 마법사의 움직임에 신경쓰지 않고 다른 모험가들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모험가 파티 중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사실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무우?”
 미노타우로스는 갑자기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기척이 느껴졌다. 발달된 오감을 통해 누군가 접근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 준비해라.”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노타우로스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에메랄드의 메이스에 찍힌 발굽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음메에에~~”
 미노타우로스는 다시금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떨어뜨렸다. 토파즈와 에메랄드는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자, 간다~”
 “각오하시길!”
 미노타우로스의 발목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면서 은색 단검과 메이스로 피가 흐르는 발굽을 공격했다. 그러자 발굽의 살점이 터져 나가면서 뼈가 드러나 보였다.
 “음머어어~~”
 아까부터 계속 같은 부위만 공격을 당하고 있으니 제 아무리 미노타우로스라고 해도 고통에 신음하며 몸부림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상처입은 맹수를 더욱 난폭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통이 분노로 바뀌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는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서 상처입은 발굽으로 땅을 쾅쾅 찼다. 이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정말이지 질긴 애군.”
 “명색이 미노타우로스니까 그런 거겠지요.”
 “둘다 잡담은 그만두고 준비해!”
 인간 모험가들은 그들 나름대로 진형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미노타우로스를 맞이하였다.
 
 
 
 
 
 No. 7 - 중재
 
 “음메에에~~”
 미노타우로스는 성난 황소의 울음 소리를 내면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펼쳤다. 그것은 무식한 막무가내 공격으로 온몸의 신경 세포에 의지해 주위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적으로 삼았다. 배틀 엑스를 마구 휘두르고 뿔로 들이받으며 발굽으로 밟는 등등 철철 넘쳐흐르는 힘과 용맹을 과시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전투 방식으로 싸우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포위를 당한 상태라면 복수 범위의 적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것이니 미노타우로스의 특징을 미루어 볼 때 나름대로 효율적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 정 반대의 상황에서라면 평가가 달라진다.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고 하더라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도적인 토파즈는 여유만만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난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지만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일행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도적이나 성직자, 마법사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가뿐하게 피했다. 그만큼 공격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느리다는 사실이 증면된 것이다.
 “저렇게 계속 날뛰면 체력이 떨어질 겁니다.”
 “바로 그때를 노려야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최소한의 공격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만들어 내며 미노타우로스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싸움은 완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선제 공격을 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한 다음 빈틈을 노렸다. 그리고 계속 같은 부위만을 공격했다. 발굽 주위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도 많이 공격 당해 살이 으깨지고 뼈에 금이 갈 정도였다.
 “이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미노타우로스와 모험가 파티를 향해 달려가던 알시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3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당사자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험가 파티는 단호한 눈빛은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라는 뜻을 시선에 담은 것이다. 그것은 한쪽 발굽으로 우뚝 서서 쓰러질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는 의지를 몸으로 밝히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만하세요!”
 미노타우로스와 모험가 파티의 싸움 한가운데 낀 알시아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평소와 다른 성질이 나온지라 패트릭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든 모험가 파티든지 간에 알시아의 외침에 신경쓸 정도로 여유있는 쪽은 없었다. 지금 그들의 싸움은 순간의 방심이 생사를 결정할 정도로 격렬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제 말이 안들리시나요?”
 알시아는 무시당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단지 미노타우로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타개책을 생각해보았다.
 “이거 정말 큰일이네요.”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최대 숙적은 용사지 모험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살려서 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미노타우로스와 인간 모험가들을 진정시키고 설득을 하거나 기억을 지워 돌려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하아...”
 간단히 생각을 마친 알시아는 심호흡을 하고 마력을 모았다. 그들의 서로에 대한 적의가 커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급해졌다. 희생자가 생기기 전에 어서 빨리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는 모든 힘의 근원이여. 알시아 문 나이트 마스터의 이름에 건 맹약을 지킬 때가 왔다>
 알시아는 두 눈을 감으며 양손을 모았다.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암송할 때마다 작은 몸에 은색 전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공에서 울부짖는 자의 절규와 한탄은 섬광이 되어 그 주인 앞에 모습을 드러낼 지어다>
 보라색 전류는 그녀의 발치에서부터 솟아나 몸을 타고 올라 머리 끝까지 가서는 파지직거리며 엄청난 방전을 일으켰다.
 “문 나이트 헤비 레인(Moon Night Havey Rain)!”
 주문의 암송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 일어난 전류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후 어두운 천장에서 나선 모양의 은색 빛줄기가 무자비하게 쏟아져내렸다.
 콰콰콰카쾅~~~~
 순간 미노타우로스와 모험가 파티는 엄청난 폭음과 먼지 바람에 휩싸였다. 그 마법 공격의 대상은 미노타우로스를 제외한 인간 모험가 파티 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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