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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소림 1권(1)

2019.08.15 조회 321 추천 2


 序
 
 
 새외무림 최강의 세력, 천마교(天魔敎).
 땅거미가 질 무렵, 그 천마교 총단에 일백 명의 소림사(少林寺) 무승(武僧)들이 들이닥쳤다.
 예상치 못한 불시의 기습이었다.
 천마교 총단의 전력은 무려 일만여 명. 한데 고작 일백 명으로 그들과 부딪쳐 싸운다? 누가 보더라도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중앙 광장에 총집결한 천마교 전력의 삼분지 이가 시신으로 화했다. 그것도 불과 두 시진 만에.
 심지어 천마교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십팔당주(十八堂主), 십이주교(十二主敎), 호교사왕(護敎四王) 등 기라성 같은 고수들마저도 차례로 사멸했다.
 정작 기습을 감행한 소림사 무승들은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외상과 내상의 여파 따윈 없다는 듯 한결같은 무위를 뽐냈다.
 그들은 평범한 무승이 아니었다.
 분명 정파(正派)의 상징이자 불문(佛門) 무학의 성지 소림사 출신인데, 일신에 보유한 무공은 천마교 고위 마인들조차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절세 마공(魔功)이었으니까.
 무승들 연령대는 실로 다양해 삼십 대, 사십 대, 심지어 육순을 넘긴 노승들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 가장 강력한 무위를 가진 인물은 다름 아닌 수려한 자태에 강인한 눈매가 돋보이는 이십 대 무승이었다.
 특무제자, 천공(天控).
 현 장문 방장(掌門方丈)의 허락하에 절세 마공을 극성으로 익혀 천 년 소림사 법통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고 하는 항마조(降魔組) 수승(首僧)이 바로 그였다.
 천공은 잔존한 천마교 마인들과 항마조 무승들이 어지러이 얽혀 든 광장 한가운데에서 교주 천마존(天魔尊)을 맞아 일백 초(招)가 넘는 치열한 겨룸을 벌였고, 마침내 그를 제압했다.
 “끄으윽······.”
 천마존은 괴로운 신음과 함께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천공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마도무림(魔道武林) 으뜸이라는, 나아가 중원 강호에까지 위명을 떨치는 자신이 한낱 젊은 무승에게 패해 죽음의 문턱에 이를 줄이야.
 천공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마(魔)는 마(魔)로서 제압한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지.”
 “커억, 내가······ 이대로······ 곱게 뒈질 것 같으냐!”
 그런 천마존의 두 손이 상대의 팔목을 덥석 움켰다.
 천공이 흠칫하는 순간, 천마존의 상단전(上丹田)으로부터 광대한 빛살이 사납게 폭사되었다.
 “안 돼!”
 천공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천마존의 몸이 터질 듯 부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 버린 천마교 총단.
 반경 일백 장 내의 모든 사물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천마교 마인들 중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가공할 무위를 자랑하던 항마조도 전멸했다.
 아니,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자욱한 연기 아래로 만신창이가 된 천공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으윽, 내 몸에서······ 썩 나가지 못해.”
 그러곤 곧 허물어지듯 지면 위로 쓰러졌다.
 
 
 
 
 
 1장. 파문제자(破門弟子)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천공의 신형이 머리칼을 흩날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윽······!”
 아랫배를 움킨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정오의 햇살이 부서지는 아래, 한적한 숲길을 가로막고 선 십여 명의 검수(劍手)들.
 무리의 선두에 선 사십 대 흑의검수(黑衣劍手)가 비단신을 툭툭 털며 목소리를 발했다.
 “겨우 그런 실력으로 감히 본성(本城)의 일을 방해했느냐? 말해라. 두 계집을 어디로 빼돌렸지?”
 가까스로 호흡을 고른 천공이 몸을 일으키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녀들을 납치해 유곽(遊廓)에 넘기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잇살 먹고 그렇게 할 짓이 없나?”
 흑의검수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기백은 가상하다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후회할 짓 말고 불어라.”
 천공은 오히려 두 주먹을 움키고 싸울 태세를 취했다.
 “난 그저 도의에 따라 옳은 일을 했을 뿐.”
 “놈, 기어이······.”
 흑의검수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창졸간에 간극을 좁히고 들었다.
 퍽, 퍼억, 퍽.
 가슴을 연속 격타당한 천공이 이삼 장 뒤로 세게 튕겨 나가 지면 위로 엎어졌다.
 “끄으윽.”
 입술을 비집고 흐르는 비릿한 선혈 줄기.
 내상을 입은 것이다.
 천공은 분한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치익······! 내공(內功)이 너무 부족해!’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일 년 전, 경천동지의 초절한 무위로 새외의 절대자 천마존을 무찔렀던 그때의 그가 아니었다.
 멀찍이 선 흑의검수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걸음을 뗐다.
 “한쪽 팔을 잃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게다.”
 흑의검수는 고수였다.
 그것도 검도(劍道)에 일가를 이룬 일류 고수다.
 잘 벼려 낸 철검 같은 일신의 기도만 보더라도 쉬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별안간 천공의 머릿속을 울리는 한 줄기 전성.
 [천공! 심법(心法)의 힘을 거두고 본좌의 영혼이 네 몸을 다룰 수 있게 허락해라.]
 “어디서 수작이야. 윽······.”
 [갈(喝)! 고집 피울 때가 아니다! 네가 뒈지면 내 영혼도 곧장 저승행이란 말이다!]
 “뜻밖에······ 좋은 정보를 하나 얻었군.”
 [현재 네놈의 내공은 심법 외에 다른 것을 운용할 여력이 없거늘! 저놈이 누구인지 아느냐? 귀검성(鬼劍城)의 십대고수 음강(陰强)이다! 사파(邪派)의 실세 중 하나인 귀검성을 모르진 않겠지?]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천공은 어금니를 악물며 신형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심맥(心脈)에 스민 충격이 커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어느덧 가까이로 다가온 음강이 오른발로 천공의 머리를 꾹 밟았다.
 “혼자서 뭐라 중얼대는 것이냐?”
 그는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몸부림치는 천공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띠더니 검극으로 옷소매를 갈랐다. 그러자 매끈한 근육질의 팔뚝이 훤히 드러났다.
 “일단 왼팔부터······ 음?”
 일순 음강의 동공이 이채를 발했다.
 팔뚝에 새겨진 작은 점들. 불제자의 신표인 계인(戒印)이다.
 항마조는 소림사의 여느 진산제자들과 달리 머리가 아닌 팔뚝에 계인을 받았다. 당연히 음강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어냐, 불가(佛家)에 몸을 담았더냐? 행색으로 보아 파문(破門)을 당한 모양이군.”
 그러자 뒤쪽에 선 수하들이 소리 내어 비웃었다.
 “아니, 절에서 쫓겨난 중놈이었습니까? 하하하하!”
 “병신! 한 번 중이 되기로 했으면 평소 행동거지를 조심해 산사에 고이 박혀 있을 것이지, 왜 다시 속세로 기어 나와 욕을 당해?”
 “낄낄. 저 새끼, 이제 보니 제가 그 계집들을 따먹으려고 빼돌린 것 아냐?”
 천공이 울컥하는 찰나, 예의 전성이 재차 머릿속을 울렸다.
 [제기랄! 팔을 잘리고 나서야 비로소 후회할 것이냐? 꾸물대지 말고 내게 맡겨라!]
 음강이 서슬 푸른 검을 높이 쳐들며 싸늘히 말했다.
 “꽤 아플 것이야.”
 천공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 하지만 내 몸으로 괜한 짓거리를 시도하려 한다면 그 즉시 심법을 운용해 가둬 버릴 테다.”
 [알았으니 서둘러라!]
 천공은 신속히 심법의 힘을 거두어들였다. 동시에 신형이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고, 그렇게 전성의 주인과 천공의 심혼(心魂)이 서로 자리를 맞바꿨다.
 “후,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구나. 이상한 헛소리에 몸까지 벌벌 떨고. 아까의 호기는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이냐?”
 음강은 그 말과 함께 검을 세게 그어 내렸다.
 검날이 어깨에 이른 순간.
 퍼헝―!
 따가운 파공성과 함께 음강의 신형이 지면을 타고 뒤로 미끄러지듯 주르륵 밀렸다.
 “크윽!”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선 그는 손목에 엄습하는 저릿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력을 운용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칼자루를 놓칠 뻔했다.
 뒤쪽의 수하들이 화들짝 놀라 그의 곁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음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형지기(無形之氣)로 검을 튕겨 내다니! 설마······ 본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그때 천공이, 아니, 천공이 된 천마존이 신형을 일으켜 세우며 앙천대소했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 과연 대단하구나. 본좌의 현 내공으로도 하단전을 절반조차 채울 수 없다니······. 이것이 정녕 네놈의 몸이란 말이지?”
 [야단 부리지 말고 어서 처리해라!]
 천공이 다그치자 천마존은 목을 크게 한 바퀴 돌리며 전신으로 시커먼 기류를 피워 올렸다.
 사위를 짓누르는 엄청난 기운 앞에 음강과 그 수하들은 숨통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내 천마존의 머리 위로 무시무시한 마신(魔神)의 형상이 떠오르더니 체내로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저, 저것은······.’
 음강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언제가 먼발치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기(魔氣)다.
 아니나 다를까, 검수들 중 하나가 두려움에 찬 음성을 발했다.
 “처, 처······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존이 입꼬리를 샐쭉 올렸다.
 “잘 아는구나.”
 당황한 음강이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입을 뗐다.
 “정체가 뭐지? 천마존은 이미 죽고 없는데······ 네가 어떻게 그 마공을 익힌 것이냐?”
 “죽긴 누가 죽어? 내가 바로 천마존이거늘.”
 “웃기는 소리!”
 음강이 발작적으로 검을 내찔러 검기(劍氣)를 발출했다.
 쐐애애애액!
 귀검성 십대고수란 명성을 대변하는 듯한, 가히 육중한 검세(劍勢). 하지만 천마존은 손짓 한 번으로 그 검기를 단숨에 쇄파해 버렸다.
 음강이 숨도 쉬지 않고 연거푸 검기를 쏘아 보냈지만, 천마존의 신형을 감싼 무형의 기막(氣幕)을 뚫지 못하고 요란한 폭음만 토했다.
 퍼퍼퍼퍼펑―!
 기의 잔해가 어지러이 퍼지는 가운데 천마존의 두 눈이 짙은 살광을 머금었다.
 “귀검성주도 감히 본좌 앞에서 재주를 뽐내지 못하는데, 하물며 네깟 것들이······.”
 동시에 두 팔을 좌우로 내젓자 음강의 곁에 자리해 있던 검수 둘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손을 대지 않고 내력을 이용해 사물을 취한다는 극상 경지의 공부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지. 크흐흐.”
 소성을 흘린 천마존이 팔을 아래로 떨치자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두 검수가 빠르게 곤두박질쳐 머리통이 으깨져 죽었다.
 뒤이어······.
 팍!
 땅을 박찬 천마존의 신형이 잔영(殘影)을 파생시키며 수하들의 목을 모조리 잘라 버렸다.
 일순간이었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인세(人世)의 영역을 벗어난 무위.
 그사이 음강은 극성의 경공술(輕功術)을 펼쳐 숲 저편으로 도주했다.
 ‘체면 따윌 돌볼 상대가 아니다! 그가 만일 진짜 천마존이라면······.’
 강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검수답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일단은 살고 볼 일이다.
 음강은 이를 윽문 채 쉬지 않고 이십 장을 지나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정면을 가로막고 선 천마존이 시커먼 마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었으니까.
 “아까의 호기는 어디로 갔지?”
 음강은 앞서 자신이 천공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하나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머릿속이 새하얘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마존이 마기를 폭사하자 검은 돌풍과 함께 반경 십 장의 지면이 사납게 요동쳤다.
 쿠쿠쿠쿠쿠―
 그 거대한 힘에 의해 초목과 바위들이 무참히 부서져 허공으로 비산했고, 벌건 땅거죽이 해일처럼 휘말려 올라갔다.
 마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음강이 무릎을 쿡! 꿇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은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탈태환골(奪胎換骨)이라도······ 한 것이오?”
 “가서 염라왕한테 물어봐라.”
 천마존의 우수로부터 발출된 흑색 기류가 음강의 전신을 휘감았다.
 “끄아아, 끄아아아아아―!”
 괴로운 비명과 함께 음강의 몸이 보기 흉하게 뒤틀리며 섬뜩한 음향을 터뜨렸다.
 꽈드득, 부우우욱, 파하악, 파학!
 살이 찢기고 뼛조각이 불거지고 내장이 터지며 역겨운 핏물이 지면을 흥건히 적셨다.
 참혹한 죽음이었다.
 음강의 시신은 과연 사람인지 도살당한 짐승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윽고 마기를 갈무리한 천마존이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들간들 불어온 바람이 머릿결을 쓰다듬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바깥세상의 정취인가.
 “큭,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어떤 것이지 조금은 알겠구나.”
 바로 그때 천공의 전성이 뇌리를 울렸다.
 [누가 마도인 아니랄까 봐, 굳이 그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여야 했나?]
 “건방진 놈. 고마우면 고맙다고 솔직히 말해라.”
 [참 눈물겹게 고맙군.]
 “충고 하나 하지. 앞으로도 오늘처럼 불의를 볼 때마다 참지 못하고 설치다가는 명줄을 보존하기 힘들 것이야.”
 [넌 그저 내가 죽으면 저승으로 가게 되는 게 두려운 것이겠지.]
 “그러는 네놈도 뒈지는 것은 싫을 텐데?”
 [그렇다고 강자가 약자를 능욕하는 광경을 봐도 모른 척하란 말인가? 난 대소림(大少林)의 제자다. 피의 군림만을 추구하는, 너 같은 마도 무리와 달라!]
 “파문당한 주제에 아직도 소림사 타령이냐?”
 천공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누구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죽었으면 고이 저승으로 갈 것이지, 귀신이 되어 옮아 붙어? 추잡하게 굴지 말고 그만 떠나라.]
 그러자 천마존이 굉소하며 말했다.
 “크하하하하!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역천이혼술(逆天移魂術)을 이용해 가까스로 영혼을 옮겼는데, 네놈 같으면 쉬이 떠날 수 있겠느냐? 설령 역천이혼술이 한 번 더 가능하다고 한들 이토록 거대한 단전을 보유한 몸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을 터. 기다려라, 내 기필코 네 영혼을 멸하고 육신을 차지해 부활할 테니까!”
 천공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즉각 심법을 운용해 천마존을 심계(心界)에 가두었다.
 [빌어먹을, 시간을 좀 더 다오! 어찌 피 냄새만 맡게 하고 다시 가둬 버리느냐!]
 천마존의 고함질에 천공이 싸늘히 대꾸했다.
 “욕심이 과하군.”
 [크윽······ 이런 양심도 없는 새끼를 보았나!]
 “패악한 마도 무리의 상징인 네가 양심 운운할 자격이 있나?”
 그러곤 이내 제 몸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내상을 싹 고쳐 놓았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뜨끔거리던 심맥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내상이었는데······. 이 늙은 마귀가 어느덧 공력을 상당 수위까지 회복한 모양이구나.’
 천공은 일순 고민이 깊어졌다. 만약 천마존의 영혼이 하루가 다르게 제 공력을 증강해 나간다면 현재의 심법으론 한계가 올 것이 분명했다.
 실지 천마존의 영혼이 깨어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일 년 전, 대혈전을 치른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적처럼 소림사로 귀환했다.
 그렇게 사내 의승(醫僧)들의 도움으로 몸이 완쾌된 후 장문 방장을 비롯한 고승들과의 면담이 이어졌으나 천마존의 영혼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일절 발설치 않았다.
 사문(師門)에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은 이유도 있었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아무런 징후가 나타나지 않은 것 역시 한 이유였다. 나중엔 그냥 신경을 끄고 잊어버렸다.
 한데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예기치 않은 파문 결정이 떨어진 날, 일 년 가까이 몸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천마존의 영혼이 갑자기 깨어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선 본래의 힘을 절반 가까이 되찾았다는 듯 위력적인 마공을 펼쳐 보였다.
 심맥의 내상을 말끔히 완치시키고 귀검성의 이름난 고수를 단숨에 죽여 버린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반면, 천공은 과거 항마조 때의 내공을 대부분 소실한 상태. 단순히 심법 하나를 운용하는 것도 벅찼다. 게다가 그 심법마저 오 할의 묘용만 발휘할 뿐이었다.
 그 모든 게 다 천마존이 최후의 순간에 펼친 절기 마광파천기(魔光破天氣)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마광파천기를 받은 여파로 하단전을 향하는 주요 기로(氣路)가 위축되고 말았다.
 다행히 하단전 본연의 크기는 줄지 않았지만, 기로들이 위축된 탓에 많은 양의 내공을 쌓기가 힘들었다.
 매일같이 운기조식(運氣調息)으로 축기(築氣)를 시도해 봐도 허사였다.
 ‘초대 교주 이후 마광파천기를 대성한 자는 전무하다고 들었는데······ 내 불찰이다. 너무 방심했어.’
 마광파천기는 그 깨달음이 극성에 이르면 제아무리 무적지체(無敵之體)의 무인이라도 죽음을 피하기 힘들다는 무시무시한 마공이었다.
 지난 싸움에서 천마존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펼친 극성의 마광파천기로 항마조를 몰살시키며 그 위력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애초 천공의 내공 수위가 초절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천마존의 영혼을 제압하고 없애기 위해선 예전 내공 수위를 되찾는 수밖에 없어. 불력(佛力)의 심법과 마력(魔力)의 무공을 합일해······ 다시금 마불(魔佛)의 경지에 이르러야 그를 완전히 멸할 수 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심법이었다.
 신성한 불력을 바탕으로 한 심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끝내 천마존에 의해 심혼과 육신이 잠식당하고 말 테니까.
 문득 스승의 전언이 뇌리를 스쳤다.
 
 “천공아, 네 몸속에 도사린 정체 모를 마기가 근자 들어 빠르게 커져 이젠 겉으로 드러날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대로 두면 마성에 젖은 마인으로 오인을 받아 실로 감당하기 힘든 처벌이 따르게 될 것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장문령(掌門令)을 발해 내일 파문시키기로 결정했느니라. 하지만 이를 끝이라고 생각해선 아니 된다. 노납(老衲)은 굳게 믿고 있단다. 네가 반드시 그 난제를 해결하고 다시 본사의 자랑스러운 제자로서 돌아올 것임을······.”
 
 ‘사부님! 제자 천공, 그 믿음과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입술을 꾹 깨문 천공은 이내 상념을 접고 걸음을 옮겨 시신들의 품속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엔 십여 개의 염낭이 쥐여져 있었다.
 하나씩 열어 보니 돈이 나왔다. 그렇게 모인 금액이 칠십 냥. 심지어 일백 냥짜리 전표도 두 장이나 되었다. 그 거액 전표는 음강의 것이었다.
 “이 돈이면 당분간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그때, 천마존이 의미심장한 투로 전성을 보냈다.
 [보아하니 본좌가 공력을 회복한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구나. 흐흣, 너무 걱정하지 마라. 완전한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시일이 더 필요하니까.]
 천공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지?”
 [그걸 쉬이 알려줄 것 같으냐?]
 “하긴,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네놈의 심법은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고 있다. 현재 내 목소리조차 차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방증이지. 그런 불완전한 상태로 심계의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운다는 건 그야말로 말 못할 큰 고통일 터! 자,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먼저 힘을 되찾게 될까?]
 “그런 말로 날 초조하게 만들 심산인가?”
 [좋을 대로 생각해라, 애송이.]
 “네 말마따나 어디 한 번 두고 봐라. 과연 누가 먼저 떨어져 나갈게 될는지.”
 [하여간 중원 놈들의 허세란······. 크크큭.]
 그 전성을 끝으로 천마존은 침묵했다.
 천공 역시 입을 다문 채 돈을 챙겨 넣은 후, 숲길 저편으로 향했다.
 ‘천마존이 모든 힘을 되찾기 전에 하루 빨리 그곳으로 가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
 
 ***
 
 소림사 방장실(方丈室).
 사월의 봄 햇살이 스민 그 내부에 나이가 지긋한 두 노승이 마주 앉았다.
 이마 위로 아홉 개의 계인이 찍힌 백미노승(白眉老僧)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천공이 본사를 떠난 지 오늘로 한 달이 되었군.”
 장문방장 일화(一化)의 말에 사제 일각(一覺)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물었다.
 “장문 사형, 정녕 파문 외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까?”
 “업적만 가지고 붙들어 놓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네.”
 백의전(白衣殿) 지주인 일각은 두 달 전 급한 용무가 있어 출타를 했다가 오늘에야 돌아왔다. 그 때문에 천공의 파문 소식을 뒤늦게 접한 것이다.
 “상태가 그토록 나빴습니까?”
 “사제가 자릴 비운 동안 천공의 체내에 도사린 알 수 없는 마기가 날이 갈수록 짙어져 더 이상 숨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네.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노납도 당혹스러웠지.”
 “그런······!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군요.”
 둘은 그것이 천마존의 영혼 때문임을 알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했네. 더 두었다가는 계율원주(戒律院主)가 눈치를 채고 율법에 따라 그 아이의 단전을 폐하라고 명했을 것이야. 방장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바로 대소림의 율법 아닌가.”
 “하기야, 일광(一光) 사제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테지요.”
 일광은 계율을 어긴 승려에게 징벌을 내리는 계율원의 지주로, 사내에서 가장 냉엄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예전 천공이 살아 돌아왔을 때에도 항마조 진멸의 책임을 물어 특무제자 자격을 박탈한 후 속가제자로 강등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을 만큼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일각이 장탄식과 함께 안타까운 목소리를 이었다.
 “천공이 어떻게든 회복만 하면 항마조의 대업을 다시 이어 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젠 그 한 줄기 기원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았군요.”
 일화는 가타부타 말없이 조용히 염주를 굴렸다.
 ‘욕심이 지나쳤던 것인가? 항마조의 죽음은 어쩌면 불자의 본분을 망각한 탐(貪)을 성오(省悟)하라는 석가세존(釋迦世尊)의 교시인지도 모르겠구먼.’
 항마조는 기실 천마교를 위시한 새외 마도 세력을 멸하고 정파를 수호하기 위한 소림사의 백년대계였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이 년 전.
 소림사는 천마존이 이끄는 천마교 정예의 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주요 고위 무승들은 물론이고, 일화의 스승인 전대 장문 방장 현담 대사(玄覃大師)마저 죽임을 당했다.
 당시 현담 대사는 강호를 통틀어 열 손가락에 드는 고수였다. 그러나 천마존은 초절한 무위로 오십여 합(合) 만에 그의 목을 잘라 버렸다.
 소림사 창건 이래 유례가 없는, 실로 비극적이자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치열했던 삼 주야의 싸움은 결국 승패 없이 종결됐지만, 사실상 본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소림사의 패배였다.
 장례 의식이 끝난 직후 일화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차대 장문 방장에 올랐고, 실추된 사문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긴 논의 끝에 항마조를 창설했다.
 그런 후, 항마조에 차출된 무승들을 항마신승(降魔神僧)이라 명명하고, 봉마전(封魔殿)에 있는 마공서(魔功書)를 공부시켰다.
 소림 무학의 시조 달마(達摩)가 세운 봉마전은 결코 세상 밖으로 나와선 안 될 절세 마공들을 봉인해 둔 전각이었는데, 항마조 육성을 위해 그 오랜 금기를 깨뜨린 것이었다.
 또한 마공으로 인해 사악한 마심이 깃드는 것을 막고자 비전(秘傳) 혜가선도심법(慧可善途心法)도 전수했으며, 나아가 일대 제자 밑으론 구경조차 못하는 대환단(大還丹)을 무려 이백 개 이상 지급해 전원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금강불괴(金剛不壞)까지 이루게 했다.
 그 결과, 무림사에 다시없을, 그야말로 일신의 무력이 온 세상을 뒤덮는 일백 무승으로 꾸려진 가공할 집단이 탄생되었다.
 항마신승 개개인의 무위는 중원무림 최고수들인 십대무신(十大武神)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자질이 남달랐던 천공은 십대무신을 능가하는 지고한 무위를 자랑했다.
 그래서 기대가 컸다.
 다시는 마도의 무리에 의해 무너지는 일 따윈 없으리라 믿었다.
 천공을 비롯한 항마신승들이 마침내 연공을 끝냈을 때, 일화와 그 사형제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옛 치욕을 대갚음하기 위해 항마조 전원을 천마교로 파견했다. 승리를 확신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데 낭보와 비보가 엇갈렸다.
 천마교와 항마조가 똑같이 진멸했다는 소식.
 한 번의 싸움으로 무려 이십 년에 걸쳐 양성한 귀중한 전력이 제대로 명성을 떨쳐 보지도 못한 채 몰사(沒死)해 버린 것이다.
 다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비통함과 허무함에 잠겼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은 천공이 생존해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항마조 재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의 불씨였다. 공든 탑이 무너졌다 절망하지 말고 그 불씨를 잘 살려 다시 차근차근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심한 하늘은 끝내 그 실오리 같은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니······.
 일화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천공아, 부디 포기하지 말고 길을 찾거라.”
 그의 목소리에서 사제지연의 깊은 정이 묻어났다. 하기야 천공은 애지중지 키워 온 유일 제자가 아닌가.
 일각이 두 눈에 이채를 발하며 말했다.
 “장문 사형께선······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고 계시는군요.”
 “사부로서의 바람이지. 파문 조치는 단전을 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배임을 그 아이도 잘 알고 있다네. 또한 자신이 내공 수위를 되찾지 못한다면 불완전한 심법으로 인해 결국 심마(心魔)에 들게 된다는 것도.”
 “그 말씀은 천공에게 뭔가 특별한 당부를 남기셨다는······?”
 “강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으니 그 어딘가에 잃어버린 힘을 되찾을 방법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일렀지.”
 “하오나 너무 막연하지 않습니까?”
 “실은 천공을 떠나보내기 전날 밤······ 천견대법(天見大法)으로 천기를 읽어 보았네.”
 “······!”
 오직 장문 방장에게만 전수되는 천견대법은 천기를 읽는 대가로 무려 십 년에서 이십 년의 공력을 잃게 되는 상고의 대법술(大法術)이다.
 그런데 일화는 무인에게 있어 목숨처럼 소중한 공력 소실을 감내하고라도 하나뿐인 직계 제자를 위해 천견대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결과, 천공을 보살피는 불마성과 네 개의 보좌성이 동시에 붉은빛을 발했네. 이는 천공이 언제고 거대한 천운(天運)을 얻게 되리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일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입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도 실은 일화 못지않게 천공을 아꼈던 사람이다. 아니, 소림사 내의 대다수 승려들이 그랬다.
 평소 천공은 전형적인 불자가 아니었다. 천성이 자유분방해 언행에 거침이 없었고, 더러는 불가 고유의 생활 관습을 탈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예를 갖춰야 할 자리에선 항상 몸가짐을 조심했고, 계율을 받들어 사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욕된 짓은 절대 삼갔으며, 또 일신의 재능이 특출함에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에 임해 여러 무승들의 귀감이 되었다.
 때문에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다들 그를 향해 호감과 신뢰를 보냈다. 물론 탐탁지 않게 여기는 승려들도 있었지만, 지극히 소수였다.
 일각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천공의 얼굴을 떠올렸다.
 ‘천공아, 자비로우신 불존께선 아직 네 손을 놓지 않으신 것 같구나. 장문 사형의 말씀대로 부디 포기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해법을 찾거라.’
 별안간 일화가 던진 물음이 화두를 바꾸었다.
 “동향은 좀 알아보았는가?”
 낯빛을 진중하게 고친 일각이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예. 천마교가 괴멸했다는 소식은 이미 널리 퍼질 대로 퍼져 있었습니다. 하나 항마조에 대한 소문은 일절 떠돌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판단하기엔 어떤가?”
 “일 년이 지난 지금, 작은 풍설조차 떠돌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듯싶습니다. 귀환 도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당파(武當派)를 방문해 보았지만, 그들 역시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본사와 교류가 잦은 문파이니 경계를 늦추지 말고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항마조의 존재 자체는 그리 큰 비밀이 아니었다.
 하지만 항마신승들이 정도무림에서 금기시하는 마학(魔學)을, 그것도 절세의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실지 사내에서도 높은 계위의 일대 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대, 삼대 제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일신의 무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몰랐다.
 혹여 그 모든 사항이 다른 문파에 알려지게 된다면, 항마조의 창설 의도가 순수했다고 한들 고이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며 감당하기 힘든 질타와 공분을 살 것이 분명했다.
 마학 공부는 물론, 십대무신에 필적할 일백 명의 무승을 육성한 것 자체가 무림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으므로.
 “장문 사형, 그리고······ 조만간에 시간을 내시어 곤륜파(崑崙派)를 방문해 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일각의 말에 일화의 두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발했다.
 “새외무림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곤륜 장문인이 보낸 사람을 만나고 왔는데, 육대마가(六大魔家)의 일로 강호의 여러 명숙들과 긴히 논의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육대마가라······.”
 “듣자 하니 천마교가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그들의 움직임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 같습니다.”
 일화의 이마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호랑이가 죽자 웅크리고 있던 이리의 무리가 서서히 그 송곳니를 드러내려는가.’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장문 방장님! 장문 방장님! 안에 계십니까?”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사십 대 승려가 발을 들였다.
 그는 계율원 산하 참회동(懺悔洞)을 감독하는 일대 제자 천문(天問)이었다.
 “장문 방장님! 큰일 났습니다! 참회동에 갇혀 있던 천중(天重)이 탈신도주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일화와 일각이 동시에 놀라 물었다.
 “무어라?”
 “그, 그게 벌써······ 이십 일도 전에 이뤄졌던 모양입니다.”
 일각이 대신 나서 엄중하게 꾸짖었다.
 “기강이 말이 아니구나! 대체 어찌 그런 불미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송구합니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소승의 죄입니다.”
 황망히 고개를 숙이는 천문을 향해 일화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계율원주는 뭐라 하더냐?”
 “장문 방장님께서 하락하시면 당장 집법승(執法僧)들을 바깥으로 보내 천중을 잡아들일 것이라고······.”
 “알았다. 가서 그리하라 이르라.”
 합장을 한 천문이 부리나케 문을 닫고 사라진 직후, 일화가 묘한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말도 없이 떠난 제 단짝을 찾으러 나간 게로군.”
 그 말에 일각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 그렇다면······.”
 
 ***
 
 천공은 가까운 마을에 도착한 즉시 옷을 사 갈아입고 전장(錢莊)에 들러 전표를 환불했다. 그러곤 다시 외곽으로 빠져나와 한 허름한 객잔에 발을 들였다.
 이층 객실로 가 문을 열자 묘령의 쌍둥이 자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해 있었다. 바로 귀검성 일당에 의해 유곽으로 팔려 갈 뻔한 여인들이었다.
 “잘 해결했으니 안심하십시오.”
 두 자매는 감격한 듯 울먹거리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크흐흐, 본좌가 나서지 않았다면 뒈졌을 놈이······.]
 천공은 그런 천마존을 애써 무시하며 두 자매에게 앞서 환전한 이백 냥을 건넸다.
 “가족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럼 서둘러 마을을 떠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이 돈이면 다른 곳으로 가 정착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쌍둥이 자매는 구해 준 것도 고마운데 돈까지 받을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천공은 기어이 그 돈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들이 사라진 직후, 그는 객실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석양에 불타는 저녁놀이 눈부시게 눈두덩을 눌러 왔다.
 ‘그때도 지금처럼······ 붉은 석양이 내리비추고 있었지.’
 십오 년 전, 일화의 손에 이끌려 처음 소림사의 층계를 오르던 때가 묘연히 떠올랐다.
 일화는 스승이기에 앞서 구생(救生)의 은인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냉혹한 세상에 내던져진 채 비렁뱅이로 연명하던 열 살 소년에게 온정을 베푼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인연은 자연히 불문 무학의 성지 소림사로 이어졌고, 삭발 입문과 동시에 일대 제자가 쓰는 천 자(字) 항렬의 천공이란 법명을 받았다.
 당시 일화는 여느 진산제자와 별도로 천공을 가르치기 위해 특무제자란 계위를 만들었다.
 원래 소림사는 입문 후 삼 년이 지나야 비로소 무공을 배울 자격을 갖는데, 항마조로 조속히 편입시키기 위해 그 과정을 생략하려는 안배였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항마조에 임명되던 날 일화가 말했다.
 
 “천공아, 넌 하늘이 내린 무골(武骨)이다. 네 몸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트여 소주천(小周天)을 이룬 상태이며, 백회(百會) 또한 활짝 열려 있어 대주천(大周天)까지 가능하단다. 실로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신체이니라.”
 
 그 어려운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공의 공부는 불과 일 년 만에 삼대 제자들을 따라잡았고, 그로부터 이 년 뒤엔 이대제자들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다시 사 년 남짓 지난 때엔 일류 고수인 일대 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거듭한 그는 마침내 항마조 수승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파문과 함께 그 모든 것이 한 줄기 바람 같은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 항마조의 꿈을.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생각과 함께 저 먼 하늘로 시선이 던져졌다.
 붉게 물든 허공에 일화를 비롯한 그리운 얼굴들이 신기루처럼 겹쳐 아른거렸다.
 ‘항마신승으로서의 내 역할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날 아끼고 위해 준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예전의 힘을 되찾을 테다. 반드시······.’
 향후 ‘그’를 만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마존의 혼령이 깃든 것이 과연 자신에게 어떠한 천명을 부여할 것인지를, 다시금 대소림의 제자로서 멸마(滅魔)의 대업을 이어 갈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돌연 천마존의 전성이 그 상념을 깨뜨렸다.
 [네놈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한숨을 쉰 천공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스물다섯.”
 [한데 그 나이에 어찌 그런 엄청난 단전을 보유하게 된 것이냐? 백 살을 넘긴 본좌도 그만한 단전을 만들어 보지 못했는데.]
 “그야 뼈를 깎는 수련을 했으니까. 세상에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절대 없다.”
 [흥, 개소리 집어치워라! 단순히 노력만 가지고 될 일이었다면 묻지도 않았다.]
 “그럼 두 번 다시 묻지 마.”
 [단언컨대, 네 신체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하다. 뭐, 장차 자연히 알게 될 테지. 크큭.]
 천공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재차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네놈이 구사했던 그 마공······ 정체가 뭐지? 도대체 어떤 마공이었기에 극마경(極魔境)을 이룬 나를 죽일 수 있던 것이냐? 명칭이나 좀 알자.]
 “귀신 주제에 궁금한 것도 많군. 넌 감히 상상도 못할 절세의 마공이란 것만 알아 둬라.”
 [갈! 당금 천하에 천마신공을 능가하는 다른 마공이 존재할 리 없다!]
 “존재하니까 네가 지금 그 꼴이 된 것이지.”
 [큭······.]
 천마존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성가시게 굴지 말고 평소처럼 내 몸을 빼앗을 궁리나 해. 나도 좀 조용히 쉬며 널 저승으로 보낼 방법을 고민해 볼 테니까.”
 [날 저승으로 보낼 방법이라고? 크크큭! 왜,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느냐?]
 “있고말고.”
 [뭣······?]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 궁금하지 않나?”
 천마존은 순간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라 여겼다면 큰 오산이야. 아까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과연 누가 먼저 떨어져 나갈게 될지 두고 보라고.”
 [놈, 말해라! 목적지가 어디냐?]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다.”
 [망할 새끼!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안 그러면 앞으로 의협 놀음을 하다가 위기에 처하더라도 절대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야!]
 “내가 죽으면 너도 저승행인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직까진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걸 명심해.”
 그러자 천마존이 한층 격분해 고함쳤다.
 [내 기필코 네 영혼을 부숴 버릴 테다! 그런 후 육신을 차지해 본교를 재건한 다음 중원의 쓰레기들을 모조리 없앨 것이야! 그래, 제일 먼저 일화라는 늙은 땡추부터 모가지를 비틀어 죽인 후 그 피로 축배를 들어 주마!]
 ‘한 달이 지났어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인상을 찌푸린 천공은 객실 문을 걸어 잠근 후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아경으로 빠져들었다.
 길길이 날뛰던 천마존도 이때만큼은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운기조식 도중 자칫 잡념이 끼거나 충격을 받으면 기혈이 흔들리고 내력이 역행해 주화입마(走火入魔)의 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화입마는 상태에 따라 죽음과 직결된다. 그것은 천마존에게 있어서도 공멸(共滅)의 길인 셈. 그러니 방해될 짓은 삼가는 게 마땅했다.
 천공이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천마존은 자기대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놈,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군.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긴 하는데······. 정말로 힘을 되찾을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곧 부정했다.
 제 놈이 전능한 신선(神仙)이 아닌 이상 마광파천기를 맞고 위축된 기로를 다시 넓힐 순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나저나 어쩌자고 음강의 인(印)이 찍힌 전표를 함부로 바꾸었단 말인가. 오늘 일로 말미암아 조만간 녀석의 육신을 다룰 수 있는 기회가 또 오겠군. 크흐흣, 어리석은······. 심혼이 교체될 때마다 본좌의 힘은 보다 빠른 속도로 증강될 것이니라!’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났다.
 운기조식을 끝낸 천공은 조용히 호흡을 고르더니 대뜸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대체 축기를 어떻게 하지? 영혼 상태로도 그게 가능한가?”
 [아둔한 놈, 질문 수준하고는······.]
 “하기야 그게 가능하니까 내 몸을 가지고 천마신공을 구사했을 테지?”
 [사람 몸에서 정신이 존재하는 자리가 어디냐? 심계가 어디냔 말이다.]
 “뇌(腦).”
 [그래, 뇌. 상단전이지.]
 천공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상단전을 이용해 영적(靈的)으로 기를 쌓는다는 건가? 그것참 흥미롭군. 덕분에 한 가지 배웠다.”
 [크큭, 의외로 공부가 부족한 녀석이군.]
 “그래도 상단전은 몸의 하단전을 이용함만 못하지? 시간 또한 더 많이 소요될 것이고.”
 [그야 당연하······.]
 천마존이 황급히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다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천공의 입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훗, 그야 당연하다고? 과연······ 내 짐작이 옳았어. 그렇다면 현재 수준으로 힘을 모으는 데까지 장장 한 달이 걸렸단 의미인가.”
 [······!]
 “즉, 영혼의 상태로 상단전을 통한 힘의 회복은 그 속도가 느리지만 심혼을 바꿔 내 몸을 다루게 되면 하단전을 이용해 보다 빨리 힘을 되찾는 것이 가능하다, 맞지? 정곡을 찔러 당황했나?”
 [크음······.]
 “반응을 보아하니 확실하군. 앞서 내 육신을 더 다루고 싶어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였어.”
 천마존은 속으로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제기랄, 내 이 새끼를 너무 얕봤구나! 대갈통을 제법 굴릴 줄 아는 놈이었어!’
 침상 위로 몸을 실은 천공이 머리를 베개에 묻으며 말했다.
 “넌 앞으로 바깥 구경하기가 더 힘들어질 거다.”
 
 
 
 
 
 2장. 둘도 없는 벗
 
 
 천공은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객잔을 나섰다.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 산속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이대로 하루 이틀만 더 걸으면 중원 천하의 가운데에 있는 산이라는 천중산(天中山)이 나올 것이다.
 [네 목적지가 천중산이냐?]
 천마존이 물었지만 천공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걸음만 옮길 뿐.
 천공의 목적지는 천중산이 아니었다. 그 천중산을 지나 하남성 경계를 넘고 안휘성을 가로질러 절강성 동남쪽에 이르면 나오는 광활한 대원시림(大原始林)이 진짜 목적지였다.
 예전의 힘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만나 봐야 할 인물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돌연 천공이 몸을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낯선 발소리와 인기척을 느낀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장한 체격의 흑의검수 다섯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왠지 눈에 익은 복색.
 ‘귀검성!’
 천공은 두 주먹을 꽉 움켰다.
 어제의 일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드디어 나타났군.]
 천마존이 전성을 흘리자 천공이 나지막이 물었다.
 “저들이 올 줄 알고 있었나?”
 [흥! 이 일대는 전부 귀검성의 영역이다. 한데 변장도 하지 않고 버젓이 전장을 들러 거액의 전표를 환전했으니 이렇듯 추적을 받는 게 당연하지.]
 천공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너무 경솔했군. 무릇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강호인데······.’
 하루 빨리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작은 부분을 신경 못 썼다.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에.
 그는 이것도 수행의 하나라고 여겼다.
 어차피 힘을 되찾기 전까진 내공에 기대지 않고 적과 싸우는 요령에 익숙해져야 했다.
 과거의 내공 수위를 언제쯤 회복할 수 있을지 기약이 힘든 상황이니만큼 현재 상태로 적과 맞서는 법을 터득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일을 몇 번이나 더 겪게 될지 모르니까.
 ‘늙은 마귀는 정말 필요할 때에만 이용해야 한다. 내 몸을 차지했을 때 힘을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사실 꼭 내공을 쓰지 않더라도 상대를 깨부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어제의 일도 그랬다.
 예상치 못하게 음강이란 일류 고수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맨 처음엔 대적한 검수의 수가 네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음강이 여러 명의 수하를 대동한 채 나타나기 전까지 쉽사리 자신을 제압하지 못했다.
 소림사는 중원 무학의 발원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무공의 종류가 실로 방대해 그 유명한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를 제외하더라도 권법(拳法), 장법(掌法), 지법(指法), 조법(爪法), 각법(脚法), 보법(步法) 등등 여러 방면에 걸쳐 내공 없이도 충분히 활용 가능한 것들이 많았다.
 천공은 예전 일화를 통해 내공 없이도 쓸 수 있는 무공을 몇 가지 배운 적이 있었다.
 특히 단시간에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노릴 수 있는 유용한 무공을 위주로 습득했는데, 그 덕분에 어제 검수 네 명과 맞서고도 우위를 점할 수 있던 것이다.
 ‘지금도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군.’
 보아하니 다가오는 검수들 모두 어제 상대해 본 무리와 큰 차이가 없는 실력인 듯싶었다.
 일류가 아닌 이류의 검수들. 그 수도 겨우 한 명이 더해진 다섯 명.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적어도 죽음에 처할 위기는 맞지 않을 것이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류라 하더라도 사파에서 명성이 높은 귀검성의 검학(劍學)을 익힌 자들이었으니까.
 한편, 천마존은 이 모든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제기, 인원수가 너무 적다. 이래선 곤란한데······. 최소 열 명은 넘게 데리고 왔어야지. 저놈들, 음강이 뒈졌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귀검성의 검수들이 십 보 간격에 이르러 멈춰 서며 저마다 은은한 살기를 내뿜었다.
 천마존이 은근슬쩍 천공의 속을 떠보았다.
 [본좌가 도움을 줄까?]
 “누구 좋으라고?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
 [괜히 몸 버리고 시간 버리지 말고 후딱 해치우면 좋지 않으냐! 네놈도 갈 길이 바쁠 터인데!]
 “바깥 구경하기가 더 힘들어질 거라고 했던 말, 벌써 잊었나?”
 [망할 새끼······.]
 “너무 아쉬워 마라. 절명의 위기가 닥치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널 이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 물론 오늘은 아니야.”
 그사이 귀검성의 검수들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중앙에 자리한 삼십 대 검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품에서 뭔가를 꺼내 펼쳤다. 그것은 천공과 꼭 닮은 초상화였다. 그는 두 얼굴을 대조해 본 후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확실하군.”
 천공은 짐짓 모른 체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소?”
 “이제 와서 발뺌해도 소용없다. 네놈이 어제 환전을 한 그 전표, 어디서 난 것이지?”
 “난 모르는 일이오.”
 삼십 대 검수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 말과 함께 손짓을 보내자 나머지 네 명의 검수가 사위로 벌려 서며 천공을 포위했다. 여차하면 손을 쓰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자, 이제 좀 파악이 되나?”
 조소를 머금은 삼십 대 검수가 칼자루를 뽑았다.
 스르릉.
 그 검명(劍鳴)을 시작으로 다른 검수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한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천공의 태도는 의연했다. 오히려 공격을 가해 오면 맞받아치겠다는 듯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접한 삼십 대 검수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 봐라?’
 처음엔 운 좋게 전표를 훔친, 뭣 모르는 도둑놈 정도로 여겼는데, 의연한 태도를 접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설마······ 무공을 익혔나?’
 그의 두 눈이 천공의 행색을 면밀히 훑었다.
 아무리 봐도 일신을 감싼 기도가 그리 대단한 것 같진 않은데······. 제법 훤칠한 신장에 준수한 얼굴을 빼곤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이 지역에 위치한 문파의 사람이라면 우리 복색만 보고도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단 뜻이겠지? 흠, 혹시 본성과 비등한 명성을 가진 곳에 몸담고 있는 무인인가?’
 그러다가 문득 어제 이후로 음강의 행방이 묘연한 것과 천공이 전표를 환전한 것이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음강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기에 괜스레 나쁜 상상은 하지 않았다.
 “어느 문파 소속이지?”
 삼십 대 검수가 신중한 투로 묻자 천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몸이오.”
 대답을 들은 삼십 대 검수는 그제야 안심이 됐다.
 ‘훗, 괜한 기우였나?’
 만약 다른 거대 문파에 속한 인물이라면 괜히 건드렸다가 불필요한 분쟁을 촉발할 수도 있지만, 기댈 곳 없는 몸이라 하니 거리낄 게 없잖은가.
 “나는 귀검성 흑심단(黑心團) 소속 도장평(陶場平)이라 한다.”
 귀검성의 위명에 기대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천마존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제 실력에 앞서 무문의 이름부터 내세우는 걸 보니 애초에 크게 되긴 그른 새끼로군.]
 도장평은 천공의 눈빛과 태도가 여전히 흔들림이 없자 자못 머쓱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한층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재주를 부려 전표를 손에 넣은 것인지 모르겠다만, 네가 함부로 가져다 쓴 돈의 주인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는 있나?”
 천공도 더는 말을 에두르지 않았다.
 “음강.”
 순간, 도장평이 전신으로 짙은 살기를 뿜었다.
 “놈! 어제 음 단주님을 뵈었느냐?”
 “물론. 그와 손속까지 나누었지.”
 거침없는 대답 앞에 도장평의 동공이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설마 음 단주님을 꺾고 그 전표를 빼앗았다는 뜻은 아니겠지?”
 천공은 전신의 감각을 한껏 열며 단호한 목소리를 발했다.
 “내가 죽였다. 음강과 그 일당 전부를.”
 도장평과 네 검수의 안색이 석상처럼 굳었다. 다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천공의 노림수였다.
 ‘예상대로 동요하고 있군.’
 음강이란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더없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껏 무식하게 살기만 드러내던 적들이 경각의 눈빛을 띠며 섣불리 덤비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천마존이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훗. 놈, 제법 그럴싸한 심리전을 쓰는구나. 싸움은 모름지기 먼저 흥분하는 쪽이 패하게 되는 법이지.’
 마음이 흔들리면 따라서 몸도 흔들리고, 일신의 무공마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다. 반드시 허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도장평이 광분해 외쳤다.
 “이런 미친! 네놈 따위가 본성의 십대고수이신 음 단주님을 해했다고? 그런 개소리를 믿을 것 같으냐!”
 천공이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손짓을 보냈다.
 “못 믿겠다면 직접 확인해라.”
 명백한 도발에도 도장평은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 막상 손속을 나누려니 왠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일단 수준을 가늠해 보자.’
 그는 얼른 천공의 등 뒤쪽에 선 검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그 검수 역시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뭣 하느냐!”
 도장평의 신경질적인 소리에 예의 검수는 마지못해 검을 검쥐고 돌진했다.
 천공은 즉각 신형을 돌려세웠다.
 ‘첫 상대는 무조건 일격(一擊)에 보내야 한다!’
 빠르게 간극을 좁혀 든 검수가 큰 동작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천공은 안력으로 검의 궤도를 읽어 들이며 민첩하게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이에 예리한 검날은 콧등과 가슴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며 지면에 깊이 쑤셔 박혔다.
 콰콱―!
 동시에 바람을 가른 천공의 주먹이 검수의 좌측 귀 뒤쪽 부위를 강타했다.
 뻐어억!
 검수는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방금 천공이 가격한 곳은 천극혈(天隙穴). 내력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라도 능히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사혈(死血)이었다.
 곧이어 좌측에 자리해 있던 검수가 우렁찬 기합을 지르며 사납게 쇄도했다.
 쐐애액.
 목을 찔러 드는 검날에 내력이 실렸다.
 천공은 빠르게 허리를 숙여 공세를 피한 후, 왼쪽 팔꿈치로 검수의 하복부를 때렸다.
 “컥!”
 숨이 턱 막힌 검수가 괴로운 표정을 짓는 찰나, 천공은 그대로 왼발을 일 보 내딛으며 두 주먹을 상하로 뻗었다.
 퍼벅, 퍽!
 안면과 명치를 강타당한 검수는 비명을 삼키며 뒤로 크게 나자빠졌다.
 “놈!”
 진노한 도장평과 나머지 두 검수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천공은 전신의 피부를 팽팽히 당기는 긴장감을 느끼며 그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쉭, 쉬익, 써걱, 슈우욱―!
 삼방(三方)으로 쇄도하며 파공음을 터뜨리는 칼날들.
 하나같이 내력이 실린 공세라 맞받게 되면 외상은 물론이고, 내상을 피할 수 없다.
 네 무인이 한 공간에서 마구 뒤엉키자 그 움직임이 한층 복잡해졌다.
 천공은 천공대로 세 개의 칼날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검수들은 또 검수들대로 행여 자기편을 찌르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신경을 쓰며 손속을 놀렸다.
 어느 순간, 천공이 우측에 있는 검수의 허점을 발견하곤 오른발을 높이 차올렸다. 퍽! 소리와 함께 턱을 얻어맞은 검수가 피를 머금고 비척대며 뒷걸음질 쳤다.
 공간을 확보한 천공은 곧장 좌측의 검수를 노려 권격(拳擊)을 내질렀다. 놀란 검수가 움찔하는 순간, 천공의 주먹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슴의 구미혈(鳩尾穴)을 두드렸다.
 “꺼어어······.”
 검수는 괴로운 얼굴로 가슴을 움키며 털썩 주저앉았다.
 구미혈은 심맥과 직결되는 요혈(要穴). 만약 내공이 실린 공격이었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천공은 신속히 왼발로 그 검수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차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것을 본 도장평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십 보 밖으로 운신하며 하얀 검기를 발출했다.
 슈우우욱.
 천공은 대나무가 휘듯 몸을 뒤집어 검기를 회피한 후, 다시 중심을 잡고 섰다.
 도장평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물었다.
 “후욱, 후욱!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천공 역시 가쁜 호흡을 고르며 대답했다.
 “후우우······ 지나가는 나그네.”
 천마존이 이때다 싶어 외쳤다.
 [놈! 더 힘 뺄 필요가 무어 있느냐? 이제 본좌에게 맡겨라! 눈 깜빡할 사이에 처리해 주마!]
 천공이 미간을 좁히며 속삭였다.
 “시끄러워. 이것도 내겐 중요한 수련이다.”
 [뭐? 수련? 네놈이 기어이 날 엿 먹이겠단 말이지?]
 천공은 그 말이 은근히 신경 쓰였지만 곧 눈앞의 상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그때, 앞서 턱을 맞고 물러났던 검수가 기습적으로 등 뒤를 노려 왔다.
 ‘앗!’
 천공이 황급히 발을 굴려 신형을 옆으로 옮겼다.
 찌이익.
 수직으로 떨어진 칼날에 의해 오른쪽 소매가 길게 찢겨 나갔다.
 “으윽!”
 팔로 스미는 화끈한 통증에 천공이 짧게 신음했다.
 완벽히 피하지 못해 살갗을 제법 길게 베이고 말았다. 그래도 상처가 깊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예의 검수가 재차 내력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천공은 이를 윽물고 검세를 피한 다음, 바짝 접근해 좌권(左拳)으로 구미혈을 강타했다.
 충격을 받은 검수는 뒤로 넘어지며 뾰족이 튀어나온 돌에 뒤통수를 박고 숨이 끊겼다.
 [왼쪽을 조심해라!]
 천마존의 갑작스런 전성에 천공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한데 느닷없이 우측에서 한 줄기 검기가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런!’
 화들짝 놀란 천공이 다급히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지만, 간발의 차이로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팔뚝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선혈.
 예의 검기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도장평이었다.
 [어리석은 놈, 내 말을 믿었느냐? 크큭.]
 천마존의 비웃음에 천공은 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평상심을 유지했다.
 ‘후우, 진정하자. 늙은 마귀의 심술에 휘둘려 흥분해선 안 된다!’
 도장평은 오륙 보 간격을 유지하고 선 채 밉살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후훗, 이제 보니 내공이 개뿔도 없는 놈이었군. 그따위 실력으로 음 단주님을 해쳤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지.”
 씁쓸한 미소를 그린 천공이 중얼대듯 말했다.
 “그래, 내가 죽이지 않았다.”
 도장평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득의에 찬 얼굴로 이죽거렸다.
 “흥, 지쳐 죽을 때가 되어서야 진실을 토하는구나. 내 다시 묻겠다. 그 전표는 어디서 난 거냐?”
 “이 싸움이 끝나면, 네가 날 이기면······ 그때 말해 주마.”
 “내공조차 없어 빌빌거리는 놈이 그 다친 팔을 안고 날 상대하겠다고?”
 그에 천공은 핏물이 연신 배어 나오는 자신의 오른팔을 흘깃 보며 생각했다.
 ‘몸이 지쳤다. 반응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어. 역시······ 내력이 동반되지 않은 근력만으론 한계가 따르는구나.’
 돌연 도장평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들고 마구 흔들었다.
 “이봐! 여기다, 여기!”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저 멀리 숲길로부터 귀검성 검수 이십여 명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천공은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녹록한 일이 아니군, 이러한 몸으로 강호를 헤쳐 나간다는 것은······.’
 천마존이 대소하며 거만하게 말했다.
 [크하하하하! 뭐? 오늘은 아니라고? 네놈의 예상과 달리 절명의 위기가 닥쳤구나! 이젠 네놈도 별수 없겠지. 자, 토막이 나 뒈지기 싫거든 어서 내게 몸뚱이를 허락해라.]
 천공은 내키지 않았지만 천마존의 말마따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운이 좋군, 늙은 마귀.”
 그렇게 천공이 심법을 힘을 거두려는 찰나, 뒤쪽의 무성한 수풀 너머로 빠르게 쇄도해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뿔싸! 적이 또 있었나?’
 그 짧은 의문을 품는 동안에 예의 기척은 벌써 지척으로 육박했다. 실로 엄청난 속도였다.
 천마존이 황급히 소리쳤다.
 [기척으로 보아 일류 고수다! 서둘러라!]
 파사삭!
 이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인영.
 팔 척이 넘는 곰 같은 체구에 죽립을 깊이 눌러쓴 회의사내였다.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도장평은 물론, 가까이로 온 검수들까지도 움찔 놀랐다.
 회의사내는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도장평 앞으로 가 육중한 일장(一掌)을 날렸다.
 푸하아아악―!
 손바닥 형태로 몸통이 꿰뚫린 도장평의 시신은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오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한순간에 찾아든 무거운 정적.
 그것을 본 천공이 두 눈을 부릅떴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설마······!’
 너무나도 익숙한 몸집과 무위였다. 이내 뇌리로 못내 그리운 얼굴 하나가 선명히 떠올랐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일편, 귀검성 검수들은 신속히 병풍처럼 펼쳐 서며 천공과 회의사내를 포위했다. 그러곤 저마다 서슬 시퍼런 칼을 사납게 뽑아 들었다.
 검날의 예기가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회의사내는 오른발을 뒤쪽으로 쭉 편 채 왼발로 지면을 꿍! 찧으며 우권(右拳)을 내질렀다.
 쿠아아아아―!
 무시무시한 힘이 압축된 권경(拳勁)이 발출되자 정면에 있던 검수 둘이 무참히 짓이겨졌다.
 덩달아 그 뒤쪽에 자리한 나무들도 일렬로 길게 줄을 잇듯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마구 비산했다.
 신장(神將)의 위엄이 서린 듯한 압도적인 권경.
 백 보 밖의 바위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소림사 최상승 절예,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회의사내가 잠깐 동안 펼쳐 보인 신위 앞에 귀검성 검수들은 몸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검을 통해 드러낸 예기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천마존은 자못 당혹스러웠다.
 ‘저놈이 왜 다짜고짜 천공을 돕는 거지?’
 그때, 회의사내가 천공을 향해 죽립 밑으로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망할 자식, 내 너를 배웅도 않고 보낼 줄 알았냐?”
 “천중······.”
 “됐다, 이따가 이야기하자. 잠시 쉬고 있어.”
 천중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냅다 신형을 날렸다.
 흡사 구름을 누비는 비룡 같은 운신.
 천공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운해비영(雲海飛影). 오랜만에 보니 새롭군.’
 억지로 용기를 짜낸 검수 둘이 좌우를 노리고 들었지만, 천중은 운해비영으로 가볍게 회피한 후 양 주먹을 뻗었다. 그 권풍(拳風)에 휩쓸린 두 검수는 뒤로 세게 튕겨 날아가 땅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었다.
 [뭐야, 소림사 땡추인가?]
 천마존의 물음에 천공이 짧게 대꾸했다.
 “내 단짝이다.”
 천중의 무위는 가히 일절이었다. 그가 돌덩이 같은 주먹을 지를 때마다 어김없이 섬뜩한 파골음이 터졌고, 귀검성 검수들은 하나둘씩 고혼(孤魂)이 되어 사라졌다.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무려 절반의 적이 목숨을 잃었다. 그 광경을 보던 천마존은 화가 치밀었다.
 ‘크윽, 재수가 없으려니······!’
 천공의 몸을 다룰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날려 버리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서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미운털만 더 박히게 생겼잖은가.
 차후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천공을 설득하기가 한층 더 어려우리란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네놈들 따위가 감히 내 하나뿐인 벗을 핍박해!”
 대갈을 토한 천중은 거침없이 소림사의 절예를 연이어 펼쳐 보였다.
 복마장(伏魔掌), 금룡조(金龍爪), 탄지공(彈指功)······.
 귀검성 일류 고수가 오더라도 감당하기 버거울 절예들이 공간을 화려하게 수놓았고, 일대는 금세 피바다로 변했다.
 검수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보낸 천중이 배를 쓸며 투덜거렸다.
 “젠장, 힘을 너무 과하게 쏟아부었어.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배가 고프네.”
 천공의 곁으로 온 그가 죽립을 휙 벗어 던졌다. 그러자 덥수룩한 머리칼에 산적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반년 만이구나, 천중.”
 천공과 천중은 동갑내기로 어릴 때부터 마음을 터놓고 지낸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야말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실 항렬은 같지만 계위는 천공이 더 높았다. 그는 다름 아닌 일화의 직계 제자였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평소 그러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를 편히 대했고, 어느덧 십오 년 가까이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절친한 친구답게 걸어온 길도 비슷했다.
 천중도 실지 천공처럼 무공에 대한 재능이 남다른 무승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파른 성장을 보이며 진산 무공을 하나씩 깨우쳤고, 약관이 넘어서는 그 어렵다는 오대관문(五大關門)도 모조리 통과했다.
 그러고는 결국 소림사가 자랑하는 고수, 십팔나한(十八羅漢)의 일원이 되어 일신의 명성을 드높였다.
 현재 천중은 나이의 고하를 떠나 소림사 내에서도 열 손가락에 드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칠십이종절예를 스무 가지 이상 익힌, 몇 안 되는 무승이기도 했다.
 “너, 이 괘씸한 자식! 어찌 내게 인사 한마디도 없이 떠날 수 있어!”
 천중이 버럭 성질을 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퍽!
 천공이 오른쪽 뺨을 감싸며 싱긋 웃었다.
 “그땐 나도 경황이 없었어.”
 오히려 당황한 쪽은 천중이었다.
 “이, 인마······! 피하라고 휘두른 건데 멍청히 서서 맞고 있으면 어떡해?”
 “보다시피 내가 정상이 아니잖아.”
 그 말이 천중을 더 미안스럽게 만들었다.
 “쳇, 일부러 맞아 준 것 다 알아. 나원, 천하의 천마존조차 오줌을 지리게 만들었다던 항마조 수승의 위용은 어디로 다 사라진 거냐?”
 [갈! 저런 미친 땡추 같으니! 본좌가 뭐, 오줌을 지려?]
 천마존의 광분해 소리치자 천공은 저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었다.
 “실없이 왜 웃어?”
 “아니다. 참, 넌 징벌 기간이 다 끝난 건가?”
 “껄껄껄! 끝나기는 무슨. 무단으로 도망쳐 나온 거지. 으, 진짜 참회동의 독방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참회동은 소림사 승려들이 계율을 어겼을 때 갇히게 되는 지하 동굴이었다.
 그곳에 든 승려는 하루 이식(二食)만 하며 강제적인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그 징벌 기간은 죄질에 따라 달랐다.
 천공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망할 네놈 때문이라고! 그러게 편지 한 장이라도 남길 것이지. 그간 네 종적을 뒤쫓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하하, 미안하다.”
 “쳇, 웃지 마. 맘 같아선 그 상판대기 한 대 더 때리고 싶으니까.”
 “나야 친구라 상관없지만, 사문으로 돌아가거든 웬만하면 그런 속된 말투는 자중해. 참회동에 갇힌 것도 그 때문이잖아. 명색이 십팔나한이 그래서 쓰나.”
 “내가 천성이 그렇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다만, 그때는 사형제들과 모여 무학논전을 벌이다가 나도 모르게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실수야, 실수!”
 천공이 혈(穴)을 눌러 지혈하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자. 외상도 치료해야 하니······.”
 “저쪽에 말을 묶어 뒀어. 가지고 올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려.”
 
 천공과 천중은 말을 타고 산길을 통과해 정오 무렵 한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그러곤 곧장 의원을 들러 상처를 꿰매고 반점에서 식사를 해결한 후, 다시 마을 바깥의 외진 계곡으로 향했다.
 퀄퀄거리는 계곡물 옆에 자리한 작은 동굴.
 입구와 가까운 곳에 천공과 천중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파문을 당했다고? 정체불명의 마기가 겉으로 드러날 지경에 이르러서?”
 “사부님을 포함해 몇몇 분만 알고 계시지.”
 “어쩐지······. 대다수의 일대 사형제들은 일 년을 기다려도 네 상태가 나아지질 않자 무승이 아닌 다른 삶을 찾도록 하는 게 낫다고 여겨 파문시킨 것으로 알고 있거든. 물론 나도 그런 줄 알았고. 이, 삼대 제자들은 아예 그 사실조차도 몰라.”
 “그나저나 넌 내게서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나 보군.”
 “잠깐만, 제대로 한 번 살펴보자.”
 천중은 가부좌를 틀며 내력을 운용해 기감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는 하단전을 빠르게 돌려 내력을 극성으로 이끌어 냈다. 그러자 비로소 천공의 체내로부터 음침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이 감지됐다.
 이내 내력을 갈무리한 천중이 눈살을 찌푸렸다.
 “흠, 정말 그렇군. 그 마기는 네가 익힌 마공과 비교해 뭔가 성질이 달라.”
 “잘 봤다. 역시 대단해.”
 “대단하긴 무슨. 장문 방장님처럼 대번에 눈치챌 수준은 돼야 대단하단 말이 어울리지. 아, 그러고 보니 넌 아직까지 내게 마공 명을 가르쳐 준 적이 없네?”
 순간, 천마존은 귀가 솔깃해졌다.
 “항마조 수칙이니까. 자신이 익힌 마공의 명은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천공의 대답에 천마존은 그만 김이 새고 말았다.
 [젠장.]
 “됐어, 나도 딱히 궁금하진 않아. 아무튼 그것 혹시 마광파천기의 잔여 기운이 숨어 잠들어 있다가 알 수 없는 작용으로 되살아난 게 아닐까?”
 “글쎄······.”
 천공은 일부러 말을 아꼈다.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을 활짝 터놓는 친구이긴 하나 이제 와서 굳이 천마존의 존재를 알려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위축된 기로를 원래대로 되돌려 내공을 회복하면 그 마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거지?”
 “아마도.”
 천중이 문득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무쪼록 이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솥뚜껑 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불그스름한 환약.
 바로 무림제일의 영약이라 일컫는 소림사 대환단이었다.
 놀란 천공이 이내 굳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받을 수 없다. 사정을 빤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대환단은 그 효능이 대단한 만큼 한 알을 만드는 데 무려 십 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것도 단순히 약재만 가지고 연단하는 것이 아니라 고위 무승이 주기적으로 내공을 불어넣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현재 소림사가 보유한 대환단은 겨우 서른 개 남짓.
 과거 항마조를 양성하며 이백 개 넘게 써 버린 탓에 남은 양이 많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한 알, 한 알이 귀한 때였다.
 천공이 극구 사양했지만, 천중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널 위해 가지고 온 거다. 잔말 말고 받아!”
 “이것은 네가 복마십팔관문(伏魔十八關門)을 어렵사리 통과하고 상으로 받은 대환단 아닌가?”
 “맞아. 칠 년 동안 안 먹고 보관해 두고 있었지.”
 “한데 그 소중한 걸 내게 주겠다고?”
 “제아무리 귀한 대환단이라도 우리 우정보다 소중하진 않아. 인마, 내가 기껏 네놈 얼굴이나 보자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냐? 참회동을 탈출하면서까지?”
 천중의 그 말에 천공은 가슴이 뭉클했다.
 “하나 네가 이걸 복용하면 당장 십팔나한의 수승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어이, 집어치워라. 그런 건 내 노력으로 쟁취하면 돼.”
 “천중······.”
 “언젠가 장문 방장님께서 말씀하셨지. 벗을 믿지 않는 것은 그 벗에게 속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 대환단은 널 믿으니까 주는 거야. 다른 이유가 필요하냐?”
 자신을 부끄러운 사람으로 만들지 마라, 그 뜻.
 결국 천공은 무거운 낯빛으로 대환단을 집어 들었다.
 “네 마음이 그러하다면 받지 않을 수가 없군.”
 자신이 받아 든 것은 단순히 영약이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값진 협기(俠氣)를 품은 우정의 증표였다.
 천중이 싱긋 웃으며 천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섣불리 복용하지 말고 기로를 넓힐 방법을 찾거든 그때 복용해. 아무튼 꼭 힘을 회복해 본사로 돌아와라. 그게 오늘의 은혜를 갚을 유일한 길이니까.”
 “가슴 깊이 새겨 두마.”
 “껄껄껄, 낯간지러운 대화는 여기까지 하자. 너 말이야, 기왕 속세로 쫓겨났으니 그동안 승려로 살며 못해 본 것들이나 좀 해 봐.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해 보겠어?”
 대환단을 갈무리한 천공이 물었다.
 “못해 본 것들······?”
 “이런 순진한 놈! 척하면 척 알아들어야지. 여자 말이야, 여자. 넌 지금 완전히 자유의 몸이잖아.”
 천공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대로 파계승 놀음을 하라는 건가?”
 별안간 천마존이 불쑥 나섰다.
 [후훗! 저 땡추 말이 맞다. 계집질도 안 하고 세상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이냐? 네 녀석도 솔직히 동정을 떼고 싶지? 아침마다 거기가 벌떡 서 있는 걸 다 봤다. 가는 길에 기방(妓房)이나 한 번 들러라. 함께 재미 좀 보게. 가서 가슴도 주무르고 엉덩이도 만지고, 그렇게 하루 정도 질펀하게 놀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야.]
 듣고 있던 천공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나참, 이제 보니 천마가 아니라 색마(色魔)로군.’
 [모름지기 욕정도 참으면 나중엔 병이 되는 법이지. 크흐흐흐······.]
 소성을 흘린 천마존은 교주 시절 밤마다 자신의 침소로 와 운우지락을 나누던 요녀(妖女)들을 떠올렸다.
 ‘그년들 전부 요분질 하나는 진짜 끝내줬지.’
 새삼 그때를 생각하니 천공의 젊고 건장한 육신을 차지하고픈 욕구가 한층 더 커졌다.
 ‘이놈의 육신만 빼앗으면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것이나 다름 아니지! 상상만 해도 흐뭇하군.’
 그때, 천중이 능글맞은 얼굴로 놀렸다.
 “풋, 얼굴이 좀 상기된 것 같은데? 속으로 이상한 생각 한 거냐? 난 그저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말한 거라고. 하룻밤 불타는 인연이 아니라.”
 “어째 네가 더 좋아하는 것 같군.”
 “들켰나? 껄껄껄! 속가제자로 강등되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다고 가끔 생각은 하지.”
 “하하하, 계율원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넌 그날로 영원히 참회동에 갇혀 햇볕 구경을 할 수 없게 될 거다.”
 천공은 잘 알았다, 비록 천중이 말은 저렇게 해도 소림사 십팔나한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그 누구보다 크다는 사실을.
 결코 속가제자로 강등 당할 짓은 하지 않을 친구였다.
 “쳇, 네놈이 갑자기 또 참회동 얘기를 꺼내니 가슴이 갑갑하네. 이번에 돌아가면 독방에서 최소 일 년 이상은 더 썩게 될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날 만나러 온 걸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후회된다, 인마! 그건 그렇고, 너 목적지는 있는 거냐? 혹시 천중산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 그보다 더 먼 곳으로 가는 중이다.”
 “더 먼 곳? 어디?”
 천중의 물음에 천마존도 귀를 기울였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목적지가 어디인지, 과연 누굴 만나러 가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천공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안탕산(雁蕩山) 북쪽의 대원시림.”
 “뭐?”
 [뭣?]
 천중과 천마존이 동시에 놀랐다.
 “흔히 그곳을 신비괴림(神祕怪林)이라 부른다지?”
 “너, 진심이냐? 신비괴림에 발 한 번 잘못 들였다간 죽을 때까지 못 빠져나올지도 몰라.”
 “거기에 내가 꼭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구?”
 “흑선(黑仙).”
 “아! 흑선······.”
 흑선은 신비괴림 내에 있는 흑운동(黑雲洞)에 기거한다는 기인이다.
 그는 과거 중원을 주유하며 의술(醫術), 선술(仙術), 귀술(鬼術), 주술(呪術) 등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신비괴림의 흑운동으로 들어 여생을 보낼 것이니 혹여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곳으로 오라’는 말만 남긴 채 홀연 종적을 감추었다.
 그날 이후로 흑선을 만났다는 사람은 전무했다. 되레 그를 찾기 위해 신비괴림으로 들었다가 허탕을 치거나 행방불명된 자들만 있을 뿐.
 천마존은 속으로 천공을 비웃었다.
 ‘미친! 네놈이 무슨 수로 흑선을 만난단 말이냐? 현재 살았는지 뒈졌는지조차 알 길이 없거늘. 그보다 문제는 신비괴림으로 향한다는 것인데······. 이 정신 나간 녀석이 제 발로 사지를 찾아 들어가는구나. 가만, 가만! 아니지, 생각해 보니 나쁠 것도 없겠군. 가서 절명의 위기가 닥치면 내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크흐흐, 그곳이 괜히 신비괴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니라.’
 천공이 눈빛을 깊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흑선은 의신(醫神) 화타(華佗)의 환생이란 말을 들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술(方術)을 지녔지. 그라면 분명 내 몸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도를 알고 있을 거야.”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천중이 물었다.
 “흑선이 은거한 이후로 지금까지 그를 만났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
 “물론.”
 천공의 표정을 살피던 천중이 돌연 대소했다.
 “껄껄껄! 좋아, 가서 꼭 힘을 되찾아라!”
 “뜻밖이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이런 의뭉스러운 놈. 눈빛만 봐도 알아. 너······ 흑선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지?”
 천공이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자 천마존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놈······ 정말로 흑선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때, 천중이 자못 진중한 눈빛으로 당부했다.
 “흑선에 대해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 같으니 더는 안 물으마. 아무튼 그와의 만남은 둘째 치고, 신비괴림은 일류 고수들도 발길을 꺼리는 곳이니 각별히 조심해.”
 안탕산 북쪽, 태고의 대원시림은 작금까지도 전인미답의 험지를 품고 있는 신비의 장소였다.
 풍문에 의하면 그곳엔 온갖 종류의 기초(奇草), 독초(毒草)가 자생하고, 이름 모를 괴수(怪獸)나 독물(毒物)도 무수히 잔존한다고 전했다.
 또한 고대의 천험한 환경이 만들어 낸 천연의 결계가 형성되어 있어 일신의 능력이 부족한 자가 섣불리 안으로 발을 들었다간 죽을 때까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해 대원시림을 찾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어 왔다. 특히 모험을 즐기는 강호인들이 그랬다.
 그 이유는 또 하나의 오랜 풍문 때문이었다.
 바로 대원시림의 깊은 골짜기마다 자리한 크고 작은 동혈(洞穴)에 전대 기인들의 안배가 숨겨져 있으며, 심지어 강호에서 사라진 몇몇 신병이기(神兵利器)도 그 어딘가에 있다는.
 하나 말 그대로 풍문은 풍문일 따름이었다.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아직까지 그곳에서 기연이나 신병이기를 얻어 고수가 된 사람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신비괴림에 대해 전설 같은 말들이 난무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또 거짓인지는 직접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천공이 신형을 일으키며 그를 안심시켰다.
 “만약 죽을 것 같다 싶으면 잽싸게 도망쳐 나올 테니 너무 걱정 마라.”
 덩달아 자리를 털고 일어난 천중이 동굴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읏차! 절강성은 너무 멀어서 힘들고, 안휘성 내의 구화산(九華山) 부근까진 동행해 주마.”
 “뭐······?”
 뒤따라 나온 천공이 놀라 두 눈을 치켜떴다.
 천중은 굵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씩 웃었다.
 “뭐긴. 오늘 같은 일 또 당하지 않게 호위해 주겠다, 이 뜻이지.”
 “하지만 밖을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징벌 기간도 늘어나게 될 텐데······.”
 “인마, 그러니까 딱 구화산까지만 바래다준다고. 그 이상은 나도 무리야. 관도로 올라 쭉 따라가면 그리 오래는 안 걸려.”
 천마존으로선 전혀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망할······. 거머리 같은 땡추로군! 천공, 너무 좋아하지 마라. 어차피 네놈은 저 땡추가 떠나고 나면 다시 본좌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천공은 말없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칠 일 후, 천공과 천중은 구화산 부근의 청양현(靑陽縣)에 도착했다.
 천공은 저잣거리에 위치한 객잔 뒷마당에 말을 묶어 놓고 천중의 곁으로 가 인사를 건넸다.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맙다.”
 천중과 함께한 짧은 나날은 꽤 즐거웠다. 모처럼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시간이었다.
 갈 길이 바쁜 와중에도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새삼 그의 존재가 감사하게 다가왔다.
 천중이 고삐를 당겨 쥐며 입맛을 다셨다.
 “쩝, 난 돌아가는 길에 장이나 들러야겠다. 긴 시간 참회동에 갇힐 게 빤한데, 이 기회에 술이나 실컷 먹어 둬야지.”
 그러더니 주머니 하나를 툭 던졌다.
 천공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열어 보니 제법 묵직한 돈과 전표 열 장이 들어 있었다.
 “널 만나러 오기 전, 갑부로 유명한 속가제자 집에 들러 이런저런 말로 꼬드겨 얻었어. 뭐, 그 정도면 최소 이삼 년은 걱정 없을 거야.”
 끝까지 고마운 짓만 하는 녀석이다. 생긴 건 꼭 불량한 산적 같은데.
 빙그레 웃은 천공이 작별을 고했다.
 “잘 가라.”
 “거듭 당부하지만, 조심해. 그럼 난 이만 간다.”
 또각또각.
 말이 채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았을 때, 천중이 고개를 홱 돌렸다.
 “천공!”
 그 외침이 객잔으로 향하던 천공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천중은 애써 불러 놓고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처음 비무(比武)했을 때, 기억하지?”
 일화의 입회하에 진행된 비공개 비무. 벌써 팔 년도 더 지난 일이다.
 “기억하고말고.”
 “내가 몇 초 만에 패했는지도?”
 “아마······ 십팔 초였지.”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상대해 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부족함을 깨닫고 더 열심히 수련에 임할 수 있었거든.”
 “그 비무가 없었더라도 넌 분명 십팔나한이 됐을 거다.”
 “그때 지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지. 아, 이 자식은 장차 소림사를 가히 하늘의 자리로 올려놓을 만큼 무시무시한 재능을 가졌구나. 장차 내가 친구란 이름에 걸맞게 그 길을 따라가려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면······ 어떻게든 성장해야 되겠구나. 뭐, 그런 생각들.”
 그런 천중이 합장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넌 내 친구이자 마음속의 영원한 우상이야.”
 “······.”
 “잊지 마, 넌 언제까지나 본사의 제자란 것을. 네가 없는 소림사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어.”
 천공은 가슴속으로부터 뜨거운 무엇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천중······.”
 “지금의 역경을 딛고 반드시 돌아와라.”
 주먹을 꽉 움킨 천공이 조용히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반드시······.”
 “훗. 이거, 잡소리가 길었네. 모쪼록 무운을 빌어 주마. 이랴!”
 그렇게 천중은 말을 몰아 길 저편으로 향했다.
 먼지를 머금은 바람이 말발굽 소리를 빠르게 덮어 갔다.
 천마존이 꼴사납다느니 낯간지럽다느니 뭐라 뭐라 지껄였지만, 천공은 신경을 끈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짧은 이별 인사. 하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3장. 갈응문(褐鷹門)
 
 
 하남성은 도처에 무림 문파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의 수많은 문파들 중 으뜸은 단연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峯)에 자리한 강호의 태산북두 소림사였다.
 그 소림사의 존재로 인해 하남성 북부는 정파를 지향하는 무문들이 득세했다.
 반면, 하남성 남부는 사파에 속한 무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단한 위세를 떨치는 세력이 바로 ‘검귀의 집’이라 불리는 귀검성이었다.
 
 큰 도시인 서평(西平)에서 남서로 이십여 리 떨어진 광대한 평야에 뿌리를 박고 있는 웅장한 성채(城砦).
 그 성문 위에 걸린 커다란 현판엔 귀검성이란 세 글자가 화려한 필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성내 중심부의 대청에서 성난 일갈(一喝)이 터져 나왔다.
 “무어라!”
 상석에 자리한 오십 대 검수가 서릿발 치는 눈빛으로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매섭고 준엄한 기도를 가진 그는 다름 아닌 귀검성주 신검귀(神劍鬼) 구예(具銳)였다.
 상석의 좌우로는 수뇌부가 도열해 섰고, 가운데 바닥엔 흑심단 소속 검수 한 명이 부복해 있었다.
 구예가 날카로운 어조로 그 검수를 향해 물었다.
 “시신들은?”
 “지하실에 안치해 놓았습니다.”
 “모조리 화장(火葬)하라!”
 “예.”
 검수가 물러간 직후, 구예의 눈이 좌우에 자리한 수뇌부를 훑었다. 그러다가 왼쪽 끝에 선 붉은 의복의 이십 대 여검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희연(姬娟)! 임무를 부여하마.”
 구예의 부름에 여검수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부복했다.
 “하명하십시오.”
 “음강을 죽인 인물의 행방을 추적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못 찾으면······ 네가 죽는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그녀는 빠르게 대청 밖으로 사라졌다.
 
 단희연(段姬娟)은 귀검성을 나와 인근 마을에서 하루를 묵은 뒤 외곽지의 울창한 숲으로 향했다.
 금년 스물세 살의 그녀는 귀검성 십대고수, 아니, 음강이 빠진 구대고수 중 유일한 여인으로, 나이가 가장 어렸다.
 하지만 일찍부터 검술에 대한 공부가 남달라 일신의 무위가 연배 높은 고수들을 제치고 상위에 속할 정도로 출중했다.
 구예가 특별히 지목해 임무를 준 것도 그 실력을 높이 산 까닭일지 몰랐다.
 하나 정작 명을 받은 단희연의 생각은 달랐다.
 ‘지긋지긋해. 언제까지 이런 일만 맡길 생각인 거지? 이번 임무는 마땅히 흑심단 부단주가 맡아야 하는 거잖아!’
 그녀는 자신을 파벌의 희생양이라고 여겼다.
 실지 돌아가는 사정이 그랬다.
 귀검성의 요직이란 요직은 전부 사내들 차지였다. 실력이 뛰어난 여검수들도 많았지만, 늘 사내들 텃세에 밀려 배척당했다.
 그나마 잘 풀린 경우가 단희연이랄까.
 물론 그녀 역시도 가진바 실력에 비하면 결코 좋은 대우를 받는 게 아니었다. 구대고수라면 의당 하나씩 거느리고 있는 검단(劍團)조차 없었으니까.
 몇 해 전, 구색을 맞춘답시고 어중이떠중이로 구성된 소검대(小劍隊)를 떠안겨 줬지만,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남녀 파벌에서 비롯된 차별이었다.
 단희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투덜거렸다.
 “못 찾으면 죽이겠다니, 이래서야 어디 충성할 맘이 생기겠어? 어차피 충성심 따윈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곱고 예뻤다.
 첫눈에 도발적으로 담겨 드는 화려한 미색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묘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귀한 상(相).
 그런 미모 때문에 예전부터 성내 많은 사내들이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늘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다.
 경쟁과 차별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그들 전부가 밉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희연은 제 손에 들린 보따리를 보며 냉소했다.
 ‘흥, 본 성의 위세에 기대 만날 나쁜 짓만 일삼다가 기어이 천벌을 받은 거지.’
 거기엔 검붉은 핏자국이 얼룩진 음강의 무복이 들어 있었다.
 평소 음강이 일대 사창가 포주들과 거래하고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단지 음강뿐이 아니라 일부 고수들도 그에 동조해 뒷돈을 만졌다.
 사실 구예는 그것을 알고도 여태껏 묵인했다. 그들이 벌어다 주는 부가 수입이 꽤나 짭짤했기에.
 그러다가 결국 명색이 성내 십대고수라는 음강이 한 이름 모를 인물에게 잘못 걸려 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이윽고 단희연의 신형이 한 가옥 앞에 이르러 우뚝 멈췄다. 인적이라곤 없는 숲 속 깊은 곳에 자리한 가옥은 왠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풍겼다.
 대문을 두드리자 곧 깡마른 체구의 육순 노인이 나와 인사했다.
 “냉옥검녀(冷玉劍女)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웃어른을 대하듯 더없이 깍듯한 예우였다.
 “뭣 때문이겠어요?”
 단희연의 냉랭한 반문에 노인이 히죽 미소를 그렸다.
 ‘언제 봐도 기분 나빠, 저 웃음은.’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노인을 따라 안으로 발을 들이자 뭐라 형언하기 힘든 비린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앞마당엔 십여 마리의 개들이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다. 여느 개들과 달리 덩치가 몹시 크고 눈동자가 적색(赤色)을 띠었는데, 희한하게 낯선 사람을 봐도 짖는 법이 없었다.
 “저 귀견(鬼犬)들은 여전하군요.”
 “후훗, 귀검성에 계신 분들은 제 귀중한 고객인데 함부로 짖어서야 쓰겠습니까?”
 장방형의 내실로 들어선 단희연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한 장의 초상화를 꺼내 보였다.
 “이 남자를 찾고 있어요.”
 그러곤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추적에 쓰일 물품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노인의 물음에 그녀는 즉각 보따리를 풀었다.
 피로 얼룩진 무복들을 살피던 노인이 다시 물었다.
 “이자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보름.”
 “쓰읍, 보름이라······.”
 “왜, 문제 있나요?”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말투에 단희연이 엄엄한 눈빛을 발했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요.”
 노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지막이 일렀다.
 “아시다시피 귀견의 추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보통의 개들은 제아무리 후각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오 일 이상 지난 냄새까진 정확히 탐지하기 힘든데, 귀견은 그와 다르지요. 열흘 가까이 지난 냄새도 추적이 가능합니다. 하나······ 보름은 여태껏 시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단희연은 삼백 냥이 든 두루주머니를 탁자에 올리며 말했다.
 “무조건 찾아야 해요. 성주님께서 직접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하셨으니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백오십 냥만 더 주십시오. 제가 확실한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후후훗······.”
 노인의 음흉한 소성에 단희연은 분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칫! 이제 보니 돈을 더 뜯어내려는 수작이었군.’
 “냉옥검녀께선 너무 불쾌해 마십시오. 저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보니 흥정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표도 되나요?”
 “죄송합니다. 오직 현금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흥······.”
 단희연은 싸늘한 표정으로 요대에 걸려 있던 두루주머니를 끌러 던지며 말했다.
 “자, 이백 냥이에요.”
 “아이고, 오십 냥이나 더 얹어 주시다니, 이런 감개무량할 데가······. 한데 동행은 몇 분이십니까?”
 “나뿐이에요.”
 “예?”
 “성가시게 여려 명 대동할 필요 있나요? 어차피 휘하에 마땅히 뽑아 쓸 만한 사람도 없는데.”
 “그자를 죽이러 가시는 길이 아니었습니까?”
 “행방을 찾아 전서로 보고하면 돼요. 나머지는 그 잘난 사내들이 알아서 하겠죠.”
 “후후훗, 아쉽군요. 모처럼 귀견들에게 사람 고기 좀 먹이나 싶었더니. 참, 출발은 언제입니까?”
 “술시(戌時:오후 7시~9시)까지 모든 채비를 마치고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바위 앞으로 나와요.”
 “알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 귀견옹(鬼犬翁)의 명성을 걸고 반드시 그자를 찾아내 보이겠습니다.”
 
 ***
 
 오월의 햇살이 성큼 다가온 여름을 느끼게 만들었다.
 절강성 중부 포강현(浦江縣)에 도착한 천공은 웃옷을 한 겹 벗으며 인파가 북적대는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이 지방 특유의 무덥고 습한 바람에 사람들 온기까지 더해지자 등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그는 널따란 사거리에 위치한 반점으로 가 일층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했다.
 [항주(杭州)가 그렇게 좋다던데, 한 번 가 볼 생각은 없느냐?]
 “같잖은 소리 그만하시지.”
 [제기랄! 네놈처럼 재미없게 사는 종자도 드물 거다.]
 “그러게 백 살 넘도록 항주도 안 가 보고 뭐 했어? 네 자신을 탓해.”
 [망할 새끼, 본 교에서 중원까지 나오기가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느냐?]
 “그런 자가 본사엔 잘도 쳐들어왔군.”
 [크크크. 아, 그땐 참 재미있었지. 현담인지 뭔지 하는 늙은 땡추의 실력이 궁금해서 가 봤는데, 막상 만나 보니 별것 없었어. 오십여 초도 못 버티고 뒈졌으니까.]
 천공은 그가 사조(師祖)의 죽음을 들먹이자 발끈해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나도 그랬다. 천마존이란 늙은 마귀가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다들 두려워하나 궁금했는데, 막상 싸워 보니 별것 없었지. 듣자 하니 꼴사납게 자폭하고 죽은 뒤 귀신이 되어 남의 몸뚱이에 기생하고 있다더군.”
 [갈! 그 건방진 주둥이, 언젠가 꼭 찢어 버릴 테다!]
 “내 몸을 차지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고작 입을 찢는 건가? 그렇게 자해를 하고 싶나?”
 [크윽······!]
 천마존은 자꾸 말발로 눌리자 분통이 터졌다.
 그때, 점소이가 주문서를 들고 가까이로 왔다.
 “손님, 뭘 드릴까요? 저희 반점은 특별히 소흥주(紹興酒)가 맛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추천은 감사하나 제가 술을 못합니다. 시원한 국수나 한 그릇 말아 주십시오.”
 천공의 말에 점소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토록 공손하게 응대하는 손님은 간만이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한데 여행을 오셨습니까?”
 “절강성에 구경할 곳이 많아 천천히 유랑 중입니다.”
 “예서 동남쪽으로 네댓새만 더 가시면 그 유명한 안탕산이 나옵니다. 제가 감히 장담하건대, 안탕산은 한마디로 산 전체가 거대한 산수화랍니다. 봉우리, 바위, 계곡, 호수 등등 어느 곳 하나 환상만태가 아닌 곳이 없지요.”
 “하하, 안 그래도 그곳을 향하는 중입니다.”
 “과연 그러셨군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안탕산 북역으론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흔히 신비괴림이라 불리는데, 아주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듣고 있던 천마존이 투덜댔다.
 [젠장, 닥쳐! 이놈의 목적지가 바로 거기라고!]
 피식 웃은 천공이 점소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요.”
 잠시 후, 식사를 끝낸 천공은 일어설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멀리 반대편에 자리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건장한 체격의 그 패거리는 양팔을 훤히 드러낸 차림이었는데, 왼쪽 어깨에 하나같이 ‘갈응(褐鷹)’이란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문파의 무인들인 듯싶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술판을 벌인 채 쌍소리를 해 대며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천공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불량한 말씨로 보아 정파 소속의 무인은 아닌 것 같았다.
 [크큭, 왜? 가서 떠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으냐? 본좌가 힘을 좀 빌려 주랴?]
 “훗, 틈만 나면 몸을 다루고 싶어 안달이군. 흑선을 만나기 전에 내 미완의 심법을 깨뜨리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되니 초조한가?”
 정곡을 찔린 천마존은 이를 갈았다.
 [놈! 기고만장하지 마라. 흑선을 만나기 전, 반드시 매운맛 좀 보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하지.”
 천공이 그렇게 반점을 나간 직후, 이층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기울이고 있던 삼십 대 사내가 죽립을 눌러쓰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찰나지간 문신을 새긴 장한 패거리의 대화 주제가 새외무림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천마교를 시작으로 육대마가 등을 거론하며 저마다 낄낄 웃었다.
 일층으로 온 죽립사내가 가만히 그들 곁으로 가 목소리를 발했다.
 “방금 뭐라 했나?”
 장한 패거리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아졌다.
 “시벌, 이건 뭐야?”
 장한 한 명이 눈을 희번덕거리자 죽립사내의 손이 불가해한 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타탓!
 예의 장한은 아혈(啞穴)을 점혈당해 입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새끼가······!”
 장한 패거리가 우르르 일어서려는 순간, 엄청난 무형지기가 그들의 어깨를 짓눌러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고, 고수다!’
 죽립사내는 아혈을 짚인 사내의 귀에다 대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육대마가의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함부로 담아선 안 되지.”
 무형지기가 갈수록 짙어지자 장한 패거리는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체내로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암울한 기운이 스며들어 심장을 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중 한 명은 압박감을 못 이겨 허연 게거품마저 물었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자리의 사람들은 괜히 피해를 입을까 봐 썰물 빠지듯 허둥지둥 반점 밖으로 사라졌다. 왁자지껄하던 반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
 “후후······.”
 비릿한 조소를 흘린 죽립사내가 이내 기운을 갈무리하자 장한 패거리는 저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립사내가 아혈을 풀어주며 말했다.
 “문신으로 보아 모두 갈응문(褐鷹門) 소속일 터.”
 한 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소.”
 “갈응문이 이곳 포강 일대 전부를 관리하나?”
 “십여 개의 군소 문파가 일부 상권을 잡고 있지만······ 대부분 본 문이 관리하오. 그 군소 문파도 사실상 본 문 산하라 할 수 있소.”
 죽립사내는 옷깃을 세우며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배신자 주제에 제법 세를 누리며 살고 있군.”
 그러곤 갈응문 무인들을 향해 명령조로 말했다.
 “너희 문주를 만나러 왔다. 안내해라.”
 ‘문주님을······?’
 갈응문 무인들은 서로 힐금힐금 눈치를 보다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바로 그때.
 우웅.
 느닷없이 미약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흠칫한 죽립사내는 황급히 자신의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호두 알만 한 크기의 붉고 투명한 구슬.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구슬은 작은 떨림과 함께 검은 아지랑이를 내뿜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안광을 번뜩인 죽립사내는 신속히 반점 밖으로 나가 거리의 행인들을 살폈다. 그사이 예의 구슬이 검은 아지랑이를 사그라뜨리며 떨림을 뚝 그쳤다.
 ‘분명 지척에 있다가 사라졌다!’
 내력으로 기감을 돋워 좌우를 둘러봤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가만, 이 마령옥(魔靈玉)은 힘이 불안정해 간혹 시간 차를 두고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눈을 지그시 감은 죽립사내는 반점에 자리해 있다가 나간 사람들을 역순으로 하나둘씩 상기했다. 그는 꽤 대단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중 천공의 뒷모습을 떠올렸을 때,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자가······ 천마존이구나!’
 자신의 예민한 육감을 슬쩍 건드리고 사라진 그 남자.
 왠지 모르게 인상 깊은 뒷모습이었다. 이층에 앉아 있어 미처 그 얼굴까진 보지 못했다.
 ‘갈응문에 볼일만 없었다면 그 육감을 그냥 흘려버리진 않았을 터인데······.’
 죽립사내는 자못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반점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데 갈응문 무인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 저쪽······.”
 점소이가 두려운 듯 몸을 떨며 손가락으로 주방 쪽을 가리켰다. 아마도 주방의 뒷문을 통해 내뺀 모양이었다.
 “후후후, 내가 이래서······ 중원의 쓰레기들을 싫어하는 것이야.”
 
 ***
 
 천공은 시장을 돌며 신비괴림으로의 여정을 대비한 물품들을 골랐다. 이곳 포강현을 벗어나서부터는 도시나 마을에 머물지 않고 곧장 목적지로 향할 생각이라 그에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챙겼다.
 장보기를 마친 그는 곧장 마구간에 들러 새 말을 구입해 짐을 실어 놓고 서둘러 전장이 밀집한 거리로 향했다. 지난날 천중에게서 받은 돈을 맡겨 놓기 위함이었다.
 포강현엔 전국 규모의 큰 전장들 중 하나인 금룡전장(金龍錢莊) 지점이 자리해 있었다.
 그곳에 입금해 두면 차후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빼 쓸 수 있어 유용할 것이다.
 이윽고 금룡전장 지점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다.
 천공은 별안간 날렵한 동작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닿은 낯선 손을 덥석 움켰다.
 “아야!”
 뾰족한 외침을 발하는 조그마한 아이.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듯한 소녀였다.
 ‘엇!’
 천공이 되레 놀라 손아귀의 힘을 살짝 거두었다.
 어린 소녀는 남루한 행색에 며칠간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듯 눈이 퀭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는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조용히 타일렀다.
 “꼬마야, 남의 돈을 훔치는 건 아주 나쁜 짓이란다. 그러면 못써.”
 “아저씨,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한 번만 봐 주세요!”
 잔뜩 겁먹은 소녀가 울먹이며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운 천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러라고 누가 시키더냐?”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것 아니에요! 우리 집이 못살아서, 그래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네? 네?”
 소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듭 애원했다.
 그때, 천마존이 전성을 툭 던졌다.
 [큭! 빤하다. 이곳 무뢰한들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모아 날치기를 가르친 게지.]
 번화가라 행인들로 북적거렸지만, 어느 누구도 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없었다.
 어린애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다들 신경 쓰기 귀찮다는 듯 모른 척 지나가기 바빴다.
 ‘세상인심이 이토록 각박해서야.’
 천공은 씁쓸함을 느끼며 소녀를 안심시켰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그리 겁먹지 마라. 보아하니 오래 굶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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