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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가도 1권

2019.08.20 조회 388 추천 3


 작가서문
 
 
 
 
 서현입니다.
 
 풍(風)!
 참으로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이기도 합니다.
 ‘바람을 피운다’, ‘풍이 들었다’, ‘저 친구 풍이 있어’.
 기혼자의 외도나 몸에 든 병, 그리고 거짓을 잘하는 이에게 이런 말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전 풍(風)이라는 글자를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거친 바람, 미친 듯한 바람이 좋습니다.
 광풍(狂風).
 이 세상의 찌꺼기를 모두 씻어 내 버릴 것 같은 느낌.
 거친 바람은 늘 불고 있습니다.
 일제의 억압에 독립을 외치던 순국선열들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까지 늘 불고 있는 거친 바람.
 그런 거친 바람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 악적과 함께 가슴속의 찌꺼기를 모두 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방법은 하나, 악적과 함께 강호를 주유하며 실컷 웃는 것뿐입니다.
 서현 올림
 
 
 
 
 
 第一章 악적과 마두
 
 
 사파의 종주 사도련의 산서 지부 철혈당(鐵血黨).
 산서의 패자로 불려도 손색없는 그런 철혈당의 내실은 공기를 달구는 찜통 같은 여름 날씨와는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실의 중앙에 회의용으로 만들어진 사각 탁자.
 그 삼면을 차지하고 있는 사내들은 이곳 철혈당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각 전의 전주들이었다.
 철혈당의 전주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터인데도 그들은 마치 숨겨 둔 애첩이 죽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표정이 밝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연출해 내어야 했다.
 그들이 나름대로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한쪽 벽면에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는 용모파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용모파기를 그리는 데 쓰이는 종이의 수십 배는 넘을 듯한 크기에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사내의 모습이 정밀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름 : 악자경(岳自警)
 나이 : 스물셋
 무공 수위 : 추정 불가
 별호 : 무(無)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가 추적하고 있는 공적 악자경이란 놈은 산서의 패자 철혈당을 찜통 같은 여름 날씨에 냉굴로 바꾸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놈이었다.
 삼 년 전 철혈당과 악연으로 이어진 악자경 저놈으로 인해 그 긴 시간 동안 회의석상에서 땀을 흘리지 않은 전주가 없을 정도니, 용모파기를 보는 전주들의 눈에는 분노를 넘어선 저주의 빛이 피어나고 있었다.
 하긴 어디 철혈당뿐인가?
 지금 악자경 저놈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세력은 손가락으로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강호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마의 연합이 이루어질 기미까지 보이고 있으니 악자경 저 공적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파리의 날갯소리조차 들릴 정도의 침묵.
 그렇게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모두들 긴장하고 있을 때, 상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들 말이 없나*집에 있는 마누라 가슴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상석에 앉아 노골적으로 ‘나 화 많이 났소.’ 하고 있는 흑의 노인. 흑의가 아닌 백의를 입었다면 의심 없이 도가의 선인으로 볼 법한 그가 바로 이곳 철혈당의 당주인 백무력이었다.
 철혈당 당주 백무력.
 산서에서 철혈당을 일으킨 지 삼십 년 만에 산서 최대의 세력으로 끌어올린 철혈의 사내가 바로 그였다.
 비록 철혈당이 사도련에 한발을 담고 있지만 단일 조직으로서도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곳이 바로 이곳 철혈당이었다.
 그렇게 강맹한 세력을 자랑하는 철혈당이었지만 당금의 실정은 어디 가서 얼굴도 들지 못할 정도로 체면이 구겨져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용모파기에 그려져 있는 저 악자경이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좌중을 훑어보던 백무력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아침에 꿀이라도 퍼 드셨나*왜 주둥이를 처닫고 말을 하지 않는 거지*응?”
 백무력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각 전주들.
 저렇게 거친 말이 나올 때에는 어떤 사단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기에 그들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는 전주들을 당장에라도 쳐 죽일 듯 쏘아보던 백무력의 시선이 좌측 두 번째 남색 무복을 입은 사내에게로 고정되었다.
 “만 전주.”
 “옛.”
 대답과 함께 중년의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일어남과 동시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쿠쾅!
 요란한 소리가 내실을 가득 울리자, 가뜩이나 짜증이 일어 있던 백무력의 안면이 마구 구겨졌다.
 “지랄! 아주 난리구만. 그냥 앉아!”
 “예!”
 급히 의자를 세우고 자리에 앉은 만 전주는 자신을 쏘아보는 당주의 눈빛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훌륭하신 만 전주께서는 그놈을 잡기 직전에,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놓쳤다지?”
 대장간의 화로도 백무력의 눈길만큼 뜨겁지 않을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염화를 머금은 백무력의 눈빛에 만 전주는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 그게······.”
 “아니야, 괜찮네. 그게 어디 자네 탓인가. 자네의 능력을 몰랐던 내 탓이지.”
 백무력이 스스로 자신을 탓하자, 만 전주뿐만 아니라 좌중의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 갔다.
 당주가 스스로 자신을 탓하는 날,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모두들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만 전주가 그것이 절대 아니라며 소리를 드높여 보았지만 백무력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야. 모두 내 탓임을 알고 있어. 내 어찌 자네에게 그리 힘든 짐을 지워 줬는지 내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있다네. 그래, 자네가 사용하는 도가 아마 귀두도지?”
 뜬금없이 자신의 독문병기를 묻는 당주의 말에 만 전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럼 오늘부터 식객전에 가서 자네 도(刀)로 질긴 고기나 좀 썰어 주게. 내 부탁함세.”
 좌천(左遷)이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악자경 그놈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지만, 한순간에 좌천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른 전주들이 좌천되는 이가 자신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백무력의 목소리가 다시 내전을 울렸다.
 “뭐 하는가, 식객전으로 가지 않고?”
 백무력의 명에 자리에서 일어난 만 전주가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었다.
 “다, 당주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 지금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식객전이 싫은가*외문 호위나 보표로 보내 줄까?”
 “아, 아닙니다.”
 “그럼 당장 꺼지지 못해!”
 엄청난 일갈이 터져 나오고, 백무력의 내력이 담긴 일갈은 내실을 무너뜨릴 듯했다.
 “저, 전위단의 만상기, 명주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안 받들어도 되니까 빨리 사라져.”
 만 전주란 사내가 도망치듯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쏘아보던 백무력의 시선이 다시 좌중으로 향했다.
 “자네들은 잡을 수 있겠지?”
 “옛! 믿어 주십시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각 전의 전주들. 마치 처음부터 입을 맞추어 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믿어야지, 암! 내가 자네들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단, 반드시 살려서 잡아 와!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내실이 떠나도록 대답하는 전주들의 시선은 당주의 등 뒤에 걸린 용모파기를 씹어 먹을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第二章 끝없는 도주
 
 
 
 “점소이!”
 객잔에 들어 점소이를 부르는 사내의 모습.
 꽤나 고급스러웠을 것으로 예상되는 비단 백의가 여기저기 찢어지고 구겨진 것이 마치 전쟁터라도 다녀온 모습이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얼굴에 굵고 길게 그어진 오선은 누가 보아도 여인네의 손톱자국임이 확연했다.
 “예.”
 부르는 소리에 달려온 점소이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급히 삼켰다.
 ‘도대체 사내가 얼마나 못났기에 아침 댓바람부터 저런 몰골로 쫓겨났을까*크크크.’
 “너, 뭐 하냐?”
 “아닙니다. 어서 오십시오.”
 급히 숨기려 했지만 지척에서 들린 점소이의 웃음소리를 사내가 듣지 못할 리 없었기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사내의 얼굴은 몹시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너, 방금 웃었지?”
 사내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에 점소이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부인했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뭐가 그럴 리인데?”
 “그게 저······ 웃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웃은 것 같은데······.”
 사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발견한 점소이는 더 이상 말을 잇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급히 사내를 안내하기 위해 앞장섰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해. 그리고 너, 웃으면 처절하게 찢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수가 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감히 손님······.”
 “주둥이 닫으시고 안내나 하도록. 남들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로.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큭큭! 당연히 잘 안 보여야겠지.’
 사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내심 웃음을 흘리고 있는 점소이는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있어도 있는지 모를 만큼 가장 구석진 자리로 사내를 안내했다.
 “만두하고 소면! 그리고 날계란도 좀 가져와.”
 객잔에서 날계란을 주문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점소이는 토를 달지 않고 대답을 했다.
 “예, 당장 대령합죠.”
 자신도 과거에 여러 차례 날계란을 이용해 본 적이 있기에 그 용도를 명확히 알고 있는 점소이였다.
 ‘크크큭! 멍 자국 빼는 데는 날계란이 최고지.’
 그렇게 돌아선 점소이는 참았던 웃음을 속으로 터트렸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저 자식이!’
 그 모습에 사내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점소이를 잡고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자신의 꼴을 생각하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천하의 화화공자 마두(馬頭)가 또 이런 꼴을 당하다니. 진정 이곳 산서의 여인들은 나의 매력적인 미소에 빠져 들지 않는단 말인가?”
 마두(馬頭).
 스스로를 마두라 부르는 것을 보니 그 이름이 마두임은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마두라는 이름, 그 누가 들어도 웃음을 참지 못할 특이한 이름이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마두로 지을 것이며,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작명이었다.
 아무리 좋게 해석을 하려 해도 말 그대로 마두란 ‘말대가리’란 말이 아닌가?
 괘씸한 점소이로 인해 솟구쳐 오른 화를 달래고 있던 마두의 시선이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왔구나.’
 객잔으로 들어온 사내도 마두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마두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숙인다고 그 화려한 오선을 보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반사적으로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넌 사람을 보고 아는 체도 하지 않냐?”
 “아, 아니.”
 살짝 얼굴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마두의 얼굴을 확인한 사내.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잔뜩 일었다.
 “쯧쯧, 또 맞았냐?”
 혀를 차며 마두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는 한심하다는 빛이 가득했다.
 “아니다.”
 고개 숙인 마두가 부인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친우에게 통할 리 없다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니기는. 두 눈에 분칠해 놓은 것 같은데. 어*입술도 터지고 손톱자국까지,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맞았구나.”
 “너! 즐기냐?”
 “위로하는 거다, 임마.”
 “내가 보기에는 즐기는 것 같은데.”
 “네 맘대로 생각해라. 그 꼴로 이제 기루에는 가지도 못하겠네. 아니, 기루는 고사하고 어디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냐?”
 “신경 확실하게 놓아라. 내 알아서 할 테니.”
 마두의 말에 친우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두야, 정신 차려라. 네가 무슨 화화공자를 한다고, 내 목이 막혀 말이 안 나온다. 그렇게 해서 망월루의 내기는커녕 그전에 목숨이라도 붙어 있겠냐?”
 “지랄. 안휘에서 나에게 넘어간 여자가 동아줄로 묶어 늘어놓으면 주청에서 태명산까지다!”
 “그 절구통 같은 과부들 말이냐?”
 “진정한 화화공자는 꽃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냐?”
 진정한 화화공자라는 말에 마두를 마주하고 있던 사내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풋! 화화공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화화공자 하기 전에 이름이나 바꿔라! 마두가 뭐냐*말대가리냐*아니면 마두(魔頭) 그 이름 가지고 무슨 화화공자는······.”
 같이한 세월이 얼마인데 또다시 이름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친우를 보며 마두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다른 이는 몰라도 이놈만큼은 이름 가지고 자신을 놀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어허, 이놈 봐라! 돌아가신 우리 조부께서 세상의 정점에 자리하라고 지어 준 귀한 이름을 감히 욕한단 말이냐!”
 “두(頭) 자야 좋지! 그런데 성이 문제가 아니냐. 그렇다고 그냥 ‘두’라고 부를 수도 없고. 아님 ‘두야’라고 불러 줄까?”
 “야, 이 자식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네 이름은 악적이 아니냐, 악적.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악적이라고 지어 주냐*응?”
 마두를 마주하고 있는 사내의 이름이 악적.
 그 정도의 작명이라면 마두가 충분히 반발할 만한 이름이었다. 제 이름이 악적임에도 불구하고 친우의 이름이 마두라는 것을 가지고 놀릴 입장이 아닌 것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광분하는 마두의 말에 악적이 부끄러운 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야, 임마! 그래서 난 이름 바꾸었지 않냐. 악자경! 자경이라고 불러라! 도대체 몇 번을 이야기해야 되냐!”
 악적의 말에 마두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랄하고 있네. 악적아, 악적아, 제발 정신 차려라! 그게 이름 바꾼다고 될 일이냐.”
 아침부터 벌어진 두 사람의 신경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객잔의 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쾅!
 열린 문 사이로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들어오는 사내들의 얼굴에는 ‘나 한 칼 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듯했고, 그들의 험악한 등장에 객잔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손님들은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저런 이들과 시선이 부딪치고 트집이라도 잡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인사하는 점소이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객잔으로 발을 들인 사내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고 있었고, 그들이 객잔으로 찾아오는 날은 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니 점소이로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객잔을 관리하는 반관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어떻게든 자신이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소이가 고개를 숙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험악한 표정과 불을 뿜는 눈빛이었다.
 “넌 주둥이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라. 밥 먹으러 온 것 아니니까, 응?”
 객잔에 발을 들인 세 명의 사내.
 그들 일행 중에서도 험상궂음의 원조라 지칭할 만한 사내가 점소이에게 고함을 지른 후 곧 뒤따라 들어온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염집 여인으로 보기에는 힘이 들 만큼 요란한 치장을 한 여인은 한눈에 보아도 기루에 몸담은 기녀임을 알 수 있었다. 파락호와 기녀의 관계는 참으로 끈질기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든 이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기루에서 술값을 떼먹고 달아나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들이 끈끈하게 맺어 놓은 인연의 끈은 쉽게 끊어질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뒷골목의 파락호와 기녀가 동행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을 확인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객잔을 가득 울렸다.
 “지금부터 이 객잔 안에 있는 놈들은 한 명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만일 새어 나가는 놈이 있다면 이렇게 만들어 줄 것이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차 버리는 파락호의 행동에 객잔의 손님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옥련아, 찾아보아라.”
 “예, 오라버니.”
 옥련이라 불린 여인, 그녀는 이곳 산서의 상음(湘陰)현에 자리한 매홍루의 기녀 중에서도 한 성질 하기로 이름난 기녀였다.
 외모는 빼어난 편이었지만 그 성질이 과격하다는 소문이 일고 손님이 줄어든 옥련은 오늘 아침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님이 없어 죽을 지경인데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과감하게 한 푼도 없다고 씨부렁거린 그놈, 두들겨 패다 지쳐 잠시 숨을 돌린 틈을 이용해 달아난 그놈을 잡지 못한다면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옥련이었다.
 ‘이놈! 잡히기만 해 봐라!’
 누구라도 걸리면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그 대상을 찾고 있던 기녀의 눈이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악적에게 멈추었다.
 ‘오호!’
 한눈에 보아도 사내다움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이는 악적에게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지금 이 와중에도 직업의식을 발휘해 기루를 홍보하는 것을 잊지 않은 옥련이었다.
 그렇게 옥련이 악적을 향해 다가가자 당사자인 악적은 별반 반응이 없었지만, 그에 반해 마두는 고개를 돌리고는 딴 짓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두의 입장에서 꽤나 미인인 이 아가씨에게 상처 입은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에 악적은 그것을 별반 개의치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닿는 옥련의 눈빛. 그 눈빛이 떠나간 정인을 만난 듯 몽롱해져 가고 있음에 악적이 어깨를 한번 세웠다.
 ‘기녀라 그런지 사람 보는 눈은 있군. 이놈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큭큭큭.’
 내심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악적이었지만 표정에는 단 한 점도 그런 내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어머, 공자님! 정말 잘생기셨다. 한번 놀러 오세요. 상음 동정호 어귀에 있는 매홍루의 옥련이에요. 입구에서 찾으시면 제가 완벽하게 한번······ 응?”
 옥련이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마두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공자님, 잠깐만요.”
 악적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두에게 다가가는 옥련.
 처음에는 의아한 눈빛을 자아내던 옥련의 눈빛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저기, 얼굴 한번 돌려 보시죠.”
 조금 전 악적에게 건네던 말투와는 그 느낌이 다른 말투였고, 옥련의 심장 뛰는 소리가 악적의 귀에 들릴 듯했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여인의 심장 소리가 악적의 귀에까지 들리겠는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악적의 눈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는 마두를 보고 지금의 상황을 눈치 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옥련의 손이 마두의 턱을 잡고 돌렸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옥련의 눈이 찢어졌다.
 “오라버니, 이놈이에요!”
 옥련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일자, 세 명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에 달려왔다.
 ‘휴! 또 일 나는군.’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달려오는 파락호들의 모습에 악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에 발을 들이고 마두를 만난 후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두가 합류하면서 풍파는 더욱 거세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달려오는 세 명의 사내 중 가장 앞선 사내가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서인지 오른발로 탁자의 아랫부분을 힘껏 찼다.
 달려오는 탄력에 무릎을 뒤로 한 번 꺾어 반탄력을 더했으니 그 한 번의 발차기에 적지 않은 힘이 실려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저 정도의 덩치라면 탁자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정말 짜증 난다, 짜증 나!’
 쏘아져 오는 발길질을 본 악적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꽝!
 빠드득!
 “커허허허허헉!”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자세는 물론, 모든 힘을 다해 탁자를 가격한 사내는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돌출됨과 동시에 바닥을 뒹굴었다.
 “꺼이꺼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는 사내의 모습에 뒤따라온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이놈 저리 치워라. 아우라고 하나 있는 것이 늘 병신 같은 짓만 골라서 한단 말이야.”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명을 내린 사내가 악적과 마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더럽게 생겼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악적은 내심 어떻게 인간이 이런 안면 구조를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내의 입장에서 자신의 얼굴은 파락호로 살아가라는 신의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얼굴 하나로 밀어붙여 덕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는 낳아 준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조금 전 아우의 실수로 손상된 체면을 만회하기 위해서인가?
 사내는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험악한 표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길게 그어진 칼자국만 하더라도 상대의 심장이 멈출 만큼 두려움을 줄 것인데 이 사내는 거기에 잔인한 미소까지 더해 더욱 사악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상대를 위협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금상첨화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악적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사내는 자신이 해야 할 작업을 시작했다.
 “난 표필이라고 한다.”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놈들이 이 고장의 사람들인가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놈들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을 리 없었고, 그렇다면 떼먹고 간 술값의 수금이 쉬워지는 것이었다.
 둘째, 만일 이 고장의 사람이 아니라면 수금에 있어 조금의 협박과 공갈이 가미되어야 한다는 피곤함이 있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그 장점이란 조금 무리다 싶은 금액이라도 요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입장에서 타지에서 객사를 당하지 않으려면 돈으로라도 때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표필은 그러한 방법으로 재미를 본 적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는 곧 드러났다.
 악적과 마두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자, 표필의 잔인한 표정에 비릿한 미소가 더해졌다.
 도망간 놈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지, 일단 찾으면 그 일은 반 이상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나를 모르는 게 확실하군. 이놈들의 주머니에 돈이 넉넉해야 할 것인데.’
 없다면 모를까,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돈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파락호 표필.
 그는 악적과 마두가 자신을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공갈과 협박은 이런 것이다’라는 표준에 해당하는 말을 뱉었다.
 “죽을래, 내놓을래?”
 “예?”
 악적의 의문에 표필의 안면이 구겨졌다.
 뒷골목의 파락호로 살아온 표필. 그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은 바로 눈치였다.
 수금을 함에 있어 늘 주의해야 하는 것은 행여나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 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대를 보고 수금의 방식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칫 한 번의 잘못된 판단에 바로 목이 달아나는 수가 있었고, 과거 이곳에서 파락호로 화려하게 살아가시던 선배들이 한순간에 생을 접는 모습을 많이 봐 왔었다.
 하지만 지금 표필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두 놈의 모습도 그러했지만 개중 한 놈은 아침에 옥련에게도 두들겨 맞을 정도로 대가 없는 사내였으니 한 팔을 뒤로 접고도 저승으로 보내 버릴 자신이 있었다.
 “특별히 두 번 물어 주지. 내놓을 것이냐,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냐?”
 “뭘 내놓으라는 것입니까?”
 이미 알아차린 상황이었지만 악적은 짐짓 모른 체했다.
 그것을 아는 척한다면 자신 또한 마두와 같은 인간으로 몰릴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네놈에게 한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은 표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직업이 그렇다 보니 이 정도의 안면 구조와 그 화려한 변화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었고, 표필은 자신의 일에 있어서 전문가다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놈!’
 악적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극도로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놈’이라는 소리였다.
 이제껏 사부를 비롯해 특별한 상대를 제외하고 악적에게 놈 소리를 담은 이들은 모두 저승사자와 면담을 하거나 그와 비슷한 처지에 당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지만 악적은 스스로를 다스렸다.
 지금 산서에서 그가 당면한 입장이 있어 소란스럽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너, 정말 운 좋은 줄 알아라.’
 스스로를 다지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악적이 다시 표필을 바라보았다.
 “일단 내용 좀 듣고 다시 진지하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 가시죠. 만일 돈 문제라면 제가 가진 게 좀 있으니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군요.”
 가진 돈이 있다는 말에 표필의 시선이 마두를 뒤로하고 악적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악적이 품에서 두둑한 주머니를 꺼내어 놓자, 표필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정을 찾았다.
 “흠흠, 보아하니 점잖은 젊은이인 것 같은데 친구의 과실은 본인의 과실이 아니겠나?”
 그 말에 악적이 동조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친구가 과실을 했다면 그 책임을 지어야죠.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셈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셈을 치른다는 말에 순식간에 안색이 밝아진 표필이 알았다는 표정을 짓자, 악적은 마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또 튀었냐?”
 “응.”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가*돈도 없이 기루에서 술을 먹고 계집을 품은 주제에 당당하게 대답을 하자, 악적은 칠공이 마구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왜, 또 화화공자는 돈을 내지 않는다, 이 얘기 하려는 거냐?”
 악적의 스산한 눈빛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마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응.”
 “정말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마두를 사정없이 째려본 악적이 고개를 돌려 표필에게 물었다. 표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원인은 마두에게 있었다.
 또한 일을 시끄럽게 만들어 좋을 일이 하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악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뒤를 추적하고 있는데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그들의 눈에 쉽게 드러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얼마나 됩니까?”
 표필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고, 악적은 곧 주머니를 열었다.
 “석 냥입니까*꽤나 나왔군요.”
 악적이 은자 석 냥을 꺼내 드는 동안 표필의 몸에서 한기가 몰아치며 분위기가 또다시 살벌해져 갔다.
 “이봐!”
 “예.”
 송충이 서너 마리를 엮어 놓은 것 같은 눈썹이 마구 일그러지며 표필이 악적에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것인가, 앙?”
 악적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냥 참기로 마음을 다스렸다. 당장에라도 손을 쓴다면 표필과 같은 파락호야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넉넉할 일이었지만 적절한 돈은 지급해 주는 것이 맞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장난이라뇨*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석 냥이 아니고 서른 냥이야!”
 석 냥도 적지 않은 금액인데 서른 냥이라는 금액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임에 악적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뭘 먹었기에 서른 냥이나?”
 악적의 물음에 표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맴돌았다.
 없다면 모를까 돈이 있다면 주지 않고 배겨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고, 사실 지금의 상황은 그들로서 횡재수를 만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계산을 해 주지. 술 먹고 옥련이를 품에 안은 값이 다섯 냥에 이곳까지 달려온 우리의 수고비가 스물다섯 냥이야. 이제 완벽하게 이해가 되나?”
 빠드득!
 마지막에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아붙여 또 한 번 진정한 공갈 정신을 보여 주는 표필.
 다른 이라면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었지만 그것이 악적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악적이 채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표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쾅!
 곧 자신의 두 눈을 악적의 두 눈에 가까이 가져다 대는 표필의 눈은 조금 전보다 더 이글거렸다.
 “이놈아, 아직도 서른 냥이 많으냐?”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표필의 눈을 바라보는 악적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잘못하다가는 일 나겠다.’
 표필의 행동과 악적의 미소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마두는 일이 터질 것을 직감했다.
 악적이 저러한 미소를 자아낼 때치고 일이 벌어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표필은 악적에게 놈이란 소리를 두 번째 하고 있으니 악적의 인내심이 폭발할 때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악적은 또 한 번 참아 내고 있었다.
 “한 냥 더, 넉 냥 주겠소.”
 “그럼 스물네 냥 치는 맞을래?”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 여섯 냥 주겠다.”
 조금 전까지 존대를 하던 악적의 말투가 바뀌었고, 그것을 용서할 표필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 상음에서는 내로라하는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표필이 이만큼 참은 것도 돈으로 꽉 들어찬 악적의 주머니 때문이었다.
 “그냥 서른 냥 치 다 맞아라!”
 표필의 주먹이 곡선을 그리고 악적의 얼굴로 정확하게 향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객잔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 냈지만 그 소리에 표필의 주먹이 멈출 리는 없었다.
 표필은 이런 경험을 자주 했다.
 처음에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일단 한 방 정도 가볍게 먹여 준 뒤 다시 대화를 해 나가면 순조롭게 잘 풀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평소와 달리 말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표필이었다.
 빠박!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단지 그 소리가 악적의 얼굴이 아닌 표필의 주먹에서 울렸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뼈는 확실하게 부러졌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커허헉!”
 표필이 자신의 주먹을 감아쥐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그의 귓전에는 악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 주먹이 한 냥짜리면 스물아홉 번은 더 맞아야겠지?”
 악적의 스산한 목소리에 주먹의 뼈가 부러진 고통보다 더욱 서늘한 기운이 자신의 몸으로 파고듦을 느끼는 표필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무림인! 이거 엿 됐다!’
 표필의 생각은 정확했다.
 뜨거운 여름날에 흐물흐물한 엿처럼 만들어 줄 악적의 주먹이 정확하게 자신의 코를 겨냥하는 모습이 보였으니······.
 
 
 
 
 
 第三章 제자, 그게 뭔 대수냐?
 
 
 
 열리는 객잔의 문 사이로 표필이 게거품을 물고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마두와 함께 객잔을 벗어나는 악적이 잔소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마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야, 너무 그러지 마라.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뭐*그럴 수 있는 일?”
 “그래.”
 “이 친구야, 그것도 어디 하루 이틀이지. 화화공자랍시고 기루에 가서 술 공짜로 먹고 계집한테 매질을 당하는 게 그런 일로 치부하고 말 일이냐?”
 악적의 잔소리에 마두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음성을 높였다.
 “그럼 여자를 때리랴?”
 “누가 때리라던?”
 “그럼 어쩌란 말이냐?”
 “처음부터 가지를 말아야지. 몸 팔아서 먹고 사는 애들한테 할 짓 안 할 짓 다 하고는 아침에 돈 없다 그러면 가만있을 계집이 어디 있겠냐?”
 악적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마두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는 분명 날 사랑하는 눈빛이었어.”
 “미친놈! 네놈 주머니에 돈이 있는 줄 알았겠지.”
 악적의 마지막 한마디에 마두가 뭐라고 대꾸를 하려 할 때, 스산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드디어 찾았군.”
 악적과 마두를 죽일 듯 쏘아보고 있는 흑의 무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는 악적이었다.
 ‘철혈당!’
 마두는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들과 악적의 얼굴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악적아, 또 걔네들이지?”
 지금까지 사부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 이 이름 때문일 텐데, 마두가 본명을 부르자 악적이 위협적인 눈으로 마두를 쏘아보았다.
 “자경이라 불러라. 쟤들 들으면 어쩌려고.”
 “지랄! 제발 인생 좀 똑바로 살아라!”
 조금 전에 당한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 마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런 말 할 때냐?”
 “그럼 어쩔 건데?”
 “튀어!”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악적은 바닥을 박차고는 바람처럼 달아나기 시작했고, 한발 늦은 마두도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악적이 시전하는 경공은 분행탈모(奔行脫毛).
 작명과 같이 말 그대로 털이 빠지도록 달린다는 분행탈모는 악적이 달아날 때 주로 사용하는 경공이었다.
 비록 작명은 조잡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빠름에 대해서는 마두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와 악적의 사부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은 알고 있지만 경공에 있어서만큼은 필시 악적의 사부가 앞서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경공.
 그렇게 달리던 마두는 숨을 들이켜며 멈추어 서야 했다.
 악적이 이미 멈추어 낯선 사내들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이리로 달려올 것을 예측했는지 미리 준비하고 있는 사내들을 보니 오늘 하루가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악적의 입에서는 욕이 절로 나왔다.
 “지랄! 철혈당주가 더럽게도 많이 보냈군.”
 “저놈을 잡아!”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명을 내리자, 수십의 무인이 악적을 향해 쏘아져 왔다.
 “마두야, 넌 빠져. 일이 더 커지는 수가 있어.”
 “알았다.”
 악적의 말에 바로 물러나는 마두.
 위험에 당면한 친우를 두고 뒤로 물러나는 마두의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산서의 패자 철혈당의 무인들이었다.
 그동안 악적을 잡지 못한 것에 대비한 그들이 결코 가벼운 무인들을 파견했을 리는 만무한 일.
 그 하나하나가 가볍게 볼 수 없음에도 마두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저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봤자 악적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절정의 고수가 이곳에 이르기 전까지 저들을 쓰러뜨리고 달아나면 되는 것이었다.
 검을 곧추세우고 쏘아져 오는 철혈당의 무인들을 향해 악적이 기운을 뿜어냈다.
 우우웅!
 악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부챗살 펼쳐지듯 사위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살기가 공간을 잠식했고, 마치 큰 벽에 당도한 것처럼 앞서 달려오던 사도련 무인들의 몸이 굳었다.
 ‘살안공! 언제 봐도 무서워.’
 마두는 악적이 펼치는 살안공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볼 때마다 두려움이 솟았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악적의 무공이었고, 더욱 두려운 것은 지금 펼치는 살안공이 악적의 무공 중 그 수위가 가장 가벼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적이 아니기를 정말 다행이지.’
 자신을 향한 기운이 아님에도 이 정도이니 저 기운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이들의 몸이 경직되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악적과 마두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악적의 뒤를 추적하며 수없이 접전을 펼쳤으니 악적의 무공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저잣거리를 벗어나 달아날 방향을 미리 가늠하고 무인들을 배치해 놓은 것만 보더라도 철혈당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일. 그것을 확인시켜 주듯 철혈당 무인들의 뒤편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크허헝!”
 웅위한 사자후가 울려 퍼지고, 몸이 굳고 의식이 혼미했던 철혈당의 무인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악적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젠장! 여러 가지 준비했군.’
 악적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아무리 상대를 상하지 않게 하려 해도 지금의 상황이면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 사자후를 뿜어낸 노인의 공력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과 공력을 알 수 없는 노인 하나까지 더해졌으니 피를 보지 않고는 달아나기 힘들 것이었다.
 악적은 재차 쏘아져 오는 사도련 무인들 사이로 모습을 보이는 노인에게 극성의 투안(透眼)을 펼쳤다.
 그 순간 노인은 무엇을 느꼈는지 내력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투안을 느낄 정도라 허점도 찾지 못한다. 이거 진짜 힘들게 생겼군.’
 악적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분류행(奔流行)을 밟았다.
 예전 사부가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라는 천마의 보법이 몸이 열두 개로 갈라져 상대를 공격함에 있어서 모두 실체라는 소리를 접하고 만들어 냈다는 보법이 바로 분류행이었다.
 급류의 세찬 물줄기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착안했다는 사부의 말은 믿을 수 없지만, 죽어도 천마보다 하나 많은 열세 개의 환영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사부의 억지가 끝내 환영을 열세 개 이상으로 만들어 놓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천마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자신의 분류행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광소를 터뜨리는 오만한 모습을 수없이 보여 주며 자신한 사부의 무공 분류행.
 그것이 지금 악적의 몸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천마의 무공이 실체라면 분류행은 환영이라는 것이 다르기는 했지만 위력 면에서는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열셋이나 되는 신형이 철혈당의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 악적의 중지가 사도련의 무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타타타타탁!
 혈도를 제압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철혈당의 무인들이 고목나무 쓰러지듯 바닥으로 무너졌다.
 “물러서라!”
 무사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노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악적의 무위에 대해서는 익히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목숨을 끊어 놓을 수도 있었지만 무사들의 의식만 제압하는 악적이었고, 그것을 간파한 노인은 이들로서는 악적을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고래를 잡으려면 고래에 맞는 작살을 사용해야 하는 법.
 철혈당의 무인들이 물러나고,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악적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자신의 투안에 노출되지 않을 정도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대의 무위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는 악적이기에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노인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절정의 고수. 절정 고수들 간의 싸움은 빈틈 하나로 끝이 나는 경우가 파다했다.
 상대의 공격에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는 한순간에 제압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노부는 위지천악(尉遲天嶽)이라 하네.”
 노인이 밝히는 이름에 악적의 눈이 가볍게 떨렸고, 그것은 곁에서 지켜보던 마두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도가 만만치 않더니······.’
 악적은 다시 한 번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조금 전 사자후 한 번으로 살기에 제압당한 철혈당의 무사들을 풀어내어 버릴 때 알아보기는 했지만 설마 그가 위지천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도련 오대고수 중의 하나인 위지천악.
 강호에서는 그를 금창무적(金槍無敵)이라 불렀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드세기로 유명한 사도의 종주들. 그들이 정파의 수장들을 아래로 본다 하더라도 위지천악만큼은 아래로 보지 못했다.
 위지천악, 그가 이미 불혹의 나이에 강호 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 이미 이십여 년 전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악적을 잡기 위해 이곳 산서로 온 것이었다.
 “악자경이라 합니다.”
 악적 또한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오해의 맞물림 속에 적으로 만났다고는 하나 위지천악쯤 되는 인물이라면 그로서도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소문과는 다른 느낌이야. 소문에는 마치 삼두육비의 괴물처럼 들리더니 실상은 그렇지 않군.”
 조금 전 철혈당의 무인들에게 사정을 봐준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소문과 같이 악적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한이라면 상대를 향해 손을 쓸 때 사정을 봐줄 리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상대의 사정을 봐준다는 것은 스스로 제압당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소문이 모두 맞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 같군.”
 “아니지요! 소문이 다를 수는 있으나 악적 저자가 강호의 공적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섭선을 가볍게 흔들며 악적에게 다가오는 잘생긴 사내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이미 악적의 눈에 익은 섭선.
 저 섭선을 독문병기로 사용하는 자가 자신을 얼마나 미워 하는지 익히 알고 있는 악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부는 아니었다. 섭선 주인의 뒤로 모습을 보이는 칠 척 거구 사내와 그 뒤에 시립하는 백의 무인들의 등장은 악적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백의 무인들의 가슴에 새겨진 정(正)이라는 글자, 그것은 정의맹의 표기임을 악적이 모를 리 없었다.
 ‘젠장, 아주 떼거리로 몰려오는구나.’
 악적은 새로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사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악적뿐만 아니라 당금 강호에서 저 두 사람을 모른다면 강호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유명한 이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정의맹의 백호대와 현무대를 이끌고 있는 수장들.
 섭선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사내. 어떤 여인이라도 품 안으로 끌어들일 것 같은 외모를 가진 그는 백호대의 대주 곡풍(曲馮)이었고, 칠 척이 넘는 거구에 패도를 품에 안고 있는 사내는 현무대의 대주 곽자흥(郭子興)이었다.
 “정의맹의 곡풍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곡풍의 인사에 위지천악 또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악적은 이미 자신들의 손에 들어 있는 존재라는 듯 서로 인사를 건네며 예를 차리는 모습이지만 예전의 사도련과 정의맹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극도로 반목하고 있는 두 세력이었다.
 그런 그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악적 하나를 잡기 위해 손을 마주 잡은 것이었다.
 “위지 선배, 남은 인사는 뒤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곽자흥이 그렇게 예를 갖추자, 위지천악이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악자경을 잡기 위해 이곳으로 향했다고는 하지만 우선 정의맹에게 한 수 양보를 하는 것이었다.
 선배로서의 배려가 아니라 악자경을 보는 순간 뭔가 깊은 오해가 있다는 느낌이 일었기 때문이다.
 “악자경, 순순히 따라오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칠 척 거구의 곽자흥이 자신의 대도를 말아 쥐며 악적을 쏘아보았다.
 ‘지랄! 순순히 따라가면 차분하게 고문을 가할 테지.’
 악적은 정의맹이 자신을 노리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적아, 오늘은 무리일 듯한데.”
 마두 또한 눈이 있음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동안 철혈당이나 정의맹의 무인들과 맞닥뜨리기는 했으나 오늘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악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백호대와 현무대를 아래로 볼 수 없었고, 또한 절정의 고수 위지천악까지 그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젠장, 나도 미치겠다. 달아나기는 틀린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하려고?”
 “몰라! 일단 다 때려잡고 보지, 뭐.”
 “미쳤냐?”
 “젠장! 도망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주 끝장을 보련다.”
 악적의 말에 마두의 눈이 치켜떠졌다.
 수없이 뒤를 쫓기고 달아나기는 했지만 악적이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악적이 검을 뽑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검을 뽑지 않아도 악적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검까지 꺼내어 든다는 것은 악적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었다.
 쿠르릉.
 악적의 검이 검명을 토해 내자 그 주위로 일진광풍이 일었다.
 “야, 이 사태를 어찌 감당하려고!”
 ‘젠장! 이 모든 게 사부 때문이야. 진작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냐!’
 이제 와 사부를 원망한들 달라질 게 무엇이 있을 것인가?
 사부로 인한 화를 담은 악적의 검이 주변을 공기를 모두 터뜨렸고, 그 파장이 사방을 잠식했다.
 콰릉!
 검명이 일어남과 동시에 악적의 검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콰콰콰콰콰쾅!
 땅거죽이 갈라짐은 물론, 허공에 존재하던 공기들이 일제히 굉음을 만들어 내며 터져 나갔다.
 엄청난 진동과 균열로도 그 기운을 모두 소모하지 않은 것인가*굉음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왔다.
 쩌저저적! 콰쾅!
 그 엄청난 기운에 호신강기로 스스로를 보호하던 위지천악이 악적의 검식을 알아보고는 경악했다.
 ‘아니, 저것은!’
 위지천악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악적은 자신의 검식 사이로 오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사부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젠장! 이게 다 사부 때문입니다!’
 
 
 
 
 
 第四章 만남
 
 
 
 
 태산(泰山).
 예로부터 산동성의 명산인 태산의 정상에 이런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태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데다 그 평지의 모양이 기묘하게 가려져 있어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렇게 신비함마저 감도는 태산 정상.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초옥은 마치 구름 위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태산의 풍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누구라도 그 수려함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풍경, 그중 백미는 초옥의 옆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연못이었다.
 그야말로 신선이 존재한다면 그 거처가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런 초옥으로 향하는 백의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의 기력으로 태산의 정상에 올랐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초옥으로 향하는 노인의 발이 바닥에 닿는 모습이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걸음이었지만 그것이 절정에 이른 무공의 고수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 노인의 정체가 신선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얼굴을 대한다면 그것이 착각임을 충분히 인지할 터였다.
 비단으로 만든 백의까지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었다.
 문제는 바로 노인의 외모였다.
 보는 순간 상대의 심장을 멎게 할 노인의 외모는 그야말로 웬만한 병기의 수준을 초월하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외모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옛 선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진정 입바른 소리일 뿐이었다. 같은 절이 두 개가 있다면 그 절에 있는 중의 외모에 따라 시주의 크기가 달라지는 이 마당에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세 살 먹은 아이에게나 통할 이야기였다.
 물론 선계의 신선만큼은 외모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사악한 느낌을 시작으로 기묘하게 배열된 눈은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별이 불가능해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말려 올라간 입매가 그 성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부족해 광대뼈까지 튀어 올라 있는 것이 남을 절대 믿지 않는 성격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외모를 소유한 노인. 그 노인의 시선이 초옥을 스쳐 지나가고 그 옆에서 한 아이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는 친우에게로 향했다.
 ‘복우황, 네놈이 말년에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노인의 유일무이한 지기 복우황.
 과거, 함께 강호를 질타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방면에서 자신을 따라올 수 있는 유일한 경쟁자가 바로 복우황이었다.
 두 사람은 늘 한 가지로 경쟁을 했고, 지금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우위를 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복우황보다 자신이 한 수 위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고 지기인 복우황 또한 자신이 항상 윗선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늘 티격태격했지만, 이제 그럴 힘도 없는 나이에 이르다 보니 서로 편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복가야!”
 부르지 않아도 친우가 당도한 것을 알고 있는 복우황이 백의 노인을 향해 다가왔다.
 “염가야, 네가 웬일이더냐?”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물론 평생을 그리 살았으니 오늘이라고 다를 바가 없을 터였지만, 먼 거리에서 친우가 찾아왔으면 반가운 기색이라도 짓는 것이 예의인 법이었다.
 하지만 복우황은 반가운 기색은커녕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네놈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할 말이 겨우 그것뿐이더냐?”
 “그럼 덩실 춤이라도 출까*왔으면 용무나 말하지, 엉뚱한 소리는.”
 사실 복우황의 입장에서는 염우빙이 반갑지 않았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제자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에 염우빙으로 인해 그 즐거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 복우황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 복우황의 말투에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른 염우빙은 괜히 그의 복장을 긁고 싶어졌다.
 “헛일 하지 말고 바둑 한 판 어떠냐?”
 헛일이라는 염우빙의 말에 복우황의 눈이 찢어졌다.
 “헛일이라니! 네 눈에는 천고의 기재! 타고난 무인인 나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헛일로 보이더냐!”
 ‘뭐*천고의 기재에 타고난 무인*이놈이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아직 기초도 닦이지 않은 아이를 두고 천고의 기재니 타고난 무인이니 하는 복우황의 모습이 눈꼴사나운 염우빙이었다.
 “복가야,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꼬마 놈에게 타고난 무인이니 천고의 기재이니 하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왜, 부럽냐?”
 복우황의 말이 주효했는지 순간 염우빙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친우가 제자를 기르는 것이 부러우면 자신도 제자를 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귀는 것도 귀찮아 지인이라고는 복우황과 연을 맺은 몇몇 사제가 전부라고 할 정도였으니 제자를 들이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나이는 속이지 못한다고 했던가?
 혼인을 하지 않아 가족 하나 없는 그에게 친우가 제자라고 들인 아이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사실 염우빙은 바둑을 두러 왔다는 핑계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복우황이 들인 제자의 성취가 궁금한 것도 없지는 않았다.
 짧은 다리로 궁보의 자세를 취하고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기합성을 지르는 것이 눈앞에 아른거려 복우황의 처소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지랄! 부럽긴!”
 “염가야.”
 복우황의 부름에 내심을 들킨 듯한 염우빙이었기에 괜스레 짜증을 냈다.
 “왜!”
 “너, 저승 갈 때 무공 싸 가지고 가서 염라대왕과 한판 하려는 거냐?”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왜 제자를 안 들이냐?”
 사실 염우빙도 복우황의 제자를 보고 난 후부터 제자를 들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평생 홀로 살아왔기에 어린아이의 뒷시중을 하면서까지 무공을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의 제자를 구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마음 한편으로 접어 둔 것이었다.
 “귀찮아.”
 “뭐, 귀찮아?”
 “그래, 이놈아! 귀찮다고!”
 염우빙이 음성을 높이자 복우황의 눈가에 가득 주름이 생겼다. 마치 그 표정이 네놈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고, 그것을 보는 염우빙은 속에서 또 한 번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쯧쯧! 네놈 성정에 내 그럴 줄 알았지. 그 귀찮은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 되는지 네놈이 알 턱이 없지.”
 사실 염우빙이 보는 복우황의 모습은 제자를 들이기 전과 달라진 것이 사실이었다.
 복우황 또한 자신만큼이나 귀찮아하는 성정임에도 제자를 들였고, 이후 늘 미소가 입에 걸린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나도 제자 한번 들여 봐?’
 염우빙은 혼자서 수련하고 있는 복우황의 제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조금 아깝기도 한데······.’
 문득 자신이 죽고 나면 죽을 고생을 하며 얻은 무가지보들을 토대로 하여 만든 자신의 무공이 사장될 것이라는 생각이 일자 그것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부님!”
 무엇이 잘 안 되는지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사부인 복우황을 불렀다.
 “염가야, 바둑은 다음에 두기로 하자.”
 유일한 낙이 복우황과 바둑을 두는 것임에 그 낙마저 사라져 버린 염우빙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제자라······.’
 
 
 
 
 
 第五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시전의 한 객잔.
 그 객잔 안에서 한 아이를 바라보는 염우빙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이제 열 살 정도 되었을까?
 한눈에도 무인으로서 자질이 충분한 아이였다.
 저런 아이를 제자로 들이지 못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일. 일 년 동안에 제자를 구하지 못한 것은 바로 저 아이를 만나기 위한 하늘의 안배라 생각하는 염우빙이었다.
 ‘너를 나의 제자로 임명한다.’
 사실 염우빙의 마음은 조급했다. 일 년 동안 제자를 구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었지만 자꾸만 성장할 복우황의 제자를 생각하면 더욱 맘이 편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염우빙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천고의 기재는 아니더라도 복우황의 제자보다는 자질이 나은 아이를 제자로 들여 그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생각,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옷매무새를 한번 살핀 염우빙이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이야.”
 “예?”
 소년은 자신을 부르는 염우빙을 보고는 맑은 눈을 더욱 크게 떴고,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물론 그것은 염우빙의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는 염우빙의 얼굴을 보고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누구인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나이가 찬 어른도 염우빙의 얼굴을 대하면 숨이 멎어 버릴 듯한 충격을 받음에 이 아이가 놀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아이의 상태를 감지하지 못한 염우빙은 제자를 들일 때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말을 꺼내어 놓았다.
 “내가 제자를······.”
 “천아!”
 염우빙을 바라보던 아이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눈물을 쏟아 냈다.
 “사부님! 엉엉!”
 “왜 그러느냐?”
 사부의 물음에 아이는 염우빙을 가리키려 했지만 이미 염우빙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 후였다.
 “뭘 보고 그리 놀란 거냐*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게냐?”
 사부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사부 되는 이는 밝은 웃음으로 아이를 다독거렸다.
 “겁낼 것 없다. 사부와 함께 있으면 귀신도 쉽게 물리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예.”
 그렇게 사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를 보며 염우빙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개나 소나 다 제자가 있는데, 왜 나만 없는 거야! 응?’
 일 년 동안 이와 비슷한 일이 적지 않음에 염우빙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도대체 무림인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좋지 않은 것인지, 쓸 만한 아이를 발견하면 여지없이 부모가 반대를 하니 염우빙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물건이라면 훔치기라도 하지.’
 아무리 제자를 들이고 싶다 하더라도 아이를 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염우빙의 속은 더욱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얼마 전 태안현에서 만난 아이의 부모는 마치 자신을 뒷골목의 인신매매단 바라보듯이 하니 진정 어이가 없을 정도였고, 그 이후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무림인에 대한 인식이 나쁘기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염우빙이었지만, 사실 그가 제자를 들이지 못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람은 무엇보다 첫인상이 중요했다.
 그런데 염우빙의 첫인상은 가히 최악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고, 그를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적으로 본 부모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어느 부모라도 염우빙의 모습을 보고 아이를 내어 놓을 일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염우빙.
 그가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안면 구조를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염우빙 자신만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고 한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염우빙이 누구라도 알 만한 사문을 가지고 있다면 모르되, 그것도 아니다 보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자 구하기가 황궁의 담 넘는 것보다 더 힘드니 원······.’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염우빙의 귀로 중년 부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혁아, 사부님 말씀 잘 따라야 한다.”
 ‘사부?’
 염우빙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림인의 평판이 좋지 않은 지금, 그 사부가 누구기에 부모가 아이를 내어 준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염우빙의 시선이 아이의 부모에게 향했고, 그곳에는 중년 부부가 백색 도복을 입은 노도사와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사님, 저희 종혁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량수불! 부모님께서는 종혁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먼 길 가시는 동안 노자라도 하시라고 조금 담았습니다.”
 ‘허! 노자까지!’
 그 모습에 염우빙은 마치 번개를 맞은 듯한 전율과 동시에 머릿속이 확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저것이야!’
 도가 문파.
 특히 무당과 화산 같은 문파는 수많은 제자를 두고 있다. 또한 그들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기재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었고, 부모들이 자식을 제자로 받아 달라고 뒷돈까지 밀어주는 실정이란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다음 날 위남(渭南)의 저잣거리에서 구입한 도관을 들고 객잔에 든 염우빙은 자신의 낡은 갈의를 벗어 버리고 도관으로 갈아입었다.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모르되 한번 마음을 정했다면 반드시 실행하고 마는 염우빙의 성정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제자를 들여 자신이 깨우치고 창안한 무공을 가르쳐 복우황의 콧대를 꺾어 주고, 또한 세상으로 내보낸다면 자신의 흔적이 세상에 남는다는 생각은 그가 그리도 싫어하는 도사의 차림까지 하게 만들고 있었다.
 염우빙은 탁자 위의 면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지만, 제자를 들이기 위해서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복색을 살폈다.
 ‘도관이 낯설지가 않아.’
 평생 처음 입어 보는 도관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음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염우빙이었다.
 ‘분명 처음 입어 보는 것인데······.’
 
 * * *
 
 염우빙이 생각해 낸 기발한 방법, 그것은 상대가 자신을 도인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막연히 제자를 찾아 헤맬 수도 없었고, 찾았다 하더라도 부모의 반대를 이겨 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도인이라면 달랐다.
 이 시대의 도인들은 세인들에게 추앙받는 존재들이었고, 여느 무림인들과는 그 인식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특히 집안에서 도인 하나가 나면 삼대가 저지른 죄과가 사라진다는 허무맹랑한 말까지 돌고 있는 터라 염우빙은 도인만큼 제자를 구하기 쉬운 이들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물론 그 안면 구조에 도인으로 가장한들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염우빙은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했다.
 ‘이제 제자를 구할 수 있을 것이야.’
 지금 염우빙의 입장이 천고의 기재니 근골이니 이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어떻게 기르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고, 어리면 어릴수록 좋다고 생각을 바꾼 게 꽤 오래전이었다.
 “자적산의 염우라고 하외다.”
 면경을 보고 도인의 흉내까지 내어 보는 염우빙, 그의 자존심에 얼마나 제자를 구하고 싶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 정도였다.
 그렇게 제자를 구하기 위해 저잣거리를 걷고 있는 염우빙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자, 구경들 하세요.”
 이제 열 살 정도 되었을까?
 한 소년이 저잣거리의 중앙에 서서 무엇인가를 구경하라고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부분 무관심한 듯 지나가는 행인들뿐이었지만 염우빙의 시선은 소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등을 타고 오르는 기이한 느낌이 저 녀석이 꼭 자신의 제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단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 해도 지금 소년이 무엇을 보여 주려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눈빛이 마음에 드는 놈이야.’
 그렇게 소년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모았고,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 어느 정도의 숫자에 이르자 소년은 미리 세워 둔 나무에 등을 붙이고 손을 움직였다.
 움직인다 싶은 순간 소년의 얼굴은 다른 얼굴로 바뀌어 있음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다.
 “이야, 대단하구나!”
 “정말 빠르다, 빨라!”
 기가 막힌 변검이었다.
 단지 키만 달라지지 않았을 뿐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고, 그것이 가면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바꾸었는지 본 사람은 없었다.
 그 모습에 염우빙도 적지 않게 놀란 눈빛을 만들어 냈다.
 ‘오호! 변검을 익혔단 말인가, 저 나이에······.’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어 쓰는 변검은 경극을 공연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했고, 그 배움이 까다로워 어린 소년이 익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얼굴에 미리 붙여 둔 종이를 연결한 실로 떼어 내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 재빨리 얼굴의 가면을 바꿔치기 하는 변검은 수십 년을 익힌 이도 쉽지 않은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것을 무척이나 쉽고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야! 저 녀석이라면 복우황을 짓뭉개 주고도 남을 게 분명해.’
 염우빙이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소년의 가면은 수차례 바뀌었고, 환호와 더불어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구리 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를 나의 제자로 임명하마. 영광으로 생각해라.’
 염우빙은 무슨 수를 사용해서라도 저 소년을 제자로 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좌수를 들어 상대의 시선을 교란하고 우수로 재빨리 가면을 바꾸어 내는 기술을 저 나이에 익혔을 정도라면 그 자질이 가볍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저 정도의 자질이라면 복우황의 제자 정도는 우습게 여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우빙은 바닥에 떨어진 구리 문을 챙기는 소년을 불렀다.
 “아이야?”
 보통의 소년이라면 염우빙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그 놀람이 적지 않을 것인데, 이 소년은 그러한 빛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
 “어떻게 변검을 익힌 것이냐?”
 “제가 공연하는 것을 보셨나요?”
 “그럼. 아주 잘 보았단다. 정말 대단하더구나.”
 염우빙의 칭찬에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실력을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행여나 자세히 보시지 못하셨다면 한 번 더 보여 드릴게요.”
 ‘어허! 이 나이에 겸손에다 친절하기까지······.’
 염우빙은 점점 더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익히기 극히 어려운 변검을 익힌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숙일 줄 아는 겸손함을 저 나이에 갖춘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이 대견스러운 염우빙은 스스럼없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순간 소년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것은 구경을 한 값이다.”
 염우빙은 품속에 있는 주머니를 뒤져 은자를 한 냥 꺼내어 손바닥에 올렸다.
 은자 한 냥.
 소년에게 있어 그 돈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었고,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거금을 내어 놓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한 번쯤 사양해 볼 만도 한 일이었지만, 소년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은자를 건네받고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상한 대로지만 이건 생각지 못한 횡재인데?’
 소년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묻어 나왔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염우빙은 볼 수 없었다.
 또한 그 웃음을 본다 하더라도 큰돈을 받은 데 대한 웃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사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다시 고개를 드는 소년의 모습에 염우빙이 꽤 놀란 눈빛을 자아냈다.
 ‘그사이 또 바뀌었구나.’
 가면을 바꾸어 쓴 것이 놀라운 게 아니었다.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다는 상거래의 법칙을 안다는 듯이 은자 한 냥을 받은 후 염우빙만을 위한 공연을 보여 주는 소년의 성정에 놀란 것이었다.
 더군다나 소년의 손놀림은 대단히 빨랐기에 제자로 들이기에는 그야말로 맞추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무조건 이놈을 제자로 들여야 해.’
 소년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는 염우빙이었지만, 소년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악적이라고 합니다.”
 순간 염우빙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차마 대놓고 웃는 경망한 짓을 할 수 없어 참고 있는 염우빙이었지만, 악적이라는 이름에 피어난 엷은 미소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함도 일었다.
 이름이 악적이라니?
 악이라는 성에 왜 하필이면 적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소년의 이름을 지어 준 그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잘못된 작명이 분명했다.
 “조금은 특별한 이름이구나.”
 “그렇죠?”
 대답을 하는 악적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조금 전 거금을 건네받아 기분이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이름에 대한 별다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한 염우빙은 악적에게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도 눌리지 않는 자신감까지 가지고 있구나.’
 염우빙은 소년의 모든 행동을 혼자 판단하고 결정을 지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제자가 절실한 것이었다.
 “그래, 네가 사는 곳이 어디더냐?”
 악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사님이 왜 자신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는지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뭘 알아내려는 거지?’
 속으로 노도사를 의심하는 악적이었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다 여물지 못한 어린 나이에도 표정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은 악적이라는 소년이 여간내기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랫마을에 살아요.”
 “호오! 아랫마을이라면 선도를 말하는 것이더냐?”
 “네.”
 대답하는 악적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있었지만, 염우빙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어린 소년이 어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버릇없는 짓이었으니 그 행동마저 마냥 좋아 보이는 것이었다.
 “허허허······.”
 염우빙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랫마을에 악적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으면 소년의 부모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소년의 이름이 워낙에 특이하다 보니 아주 손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소년에게 당장 제자로 들어오지 않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을 서두르다 그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염우빙은 여유를 가지고 부모를 먼저 찾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꾸나.”
 염우빙은 더 이상 묻는다면 악적이 다른 생각을 할까 두려워 이쯤에서 물러나 소년의 부모를 찾을 생각이었다.
 “예, 안녕히 가세요.”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 뭔가 하나 정도는 보여 주어야겠지.’
 순간 염우빙의 신형이 연기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소년에게 뭔가 확실한 인상을 남겨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악적은 그것에 대해 별반 놀라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 품속에 들어 있는 은자 때문이었다.
 이제껏 적지 않은 변검 공연을 해 왔지만 이토록 거금을 내놓은 이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에 만져지는 은자 한 냥.
 그 느낌이 확연히 전해지니 지금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려 주고 있었다.
 
 악적과 헤어진 염우빙은 우선 조사에 착수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먼저 악적의 가정 상황부터 주위 환경까지 모두 조사할 요량이었다. 변검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가족 중에 변검술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어린 나이에 저잣거리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살림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선도현을 조사하던 염우빙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놈이 나에게 생구라(生口喇)를······.”
 그놈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면 그 특이한 이름을 알지 못할 리는 없는 법!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애초에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랫마을까지의 거리는 백 리에 가까웠다.
 염우빙에게는 지척과 같은 거리였지만 소년의 잰걸음으로 성도까지 나와 변검 공연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염우빙은 그 영악한 꼬마에게 속았다는 점에 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영악하다면 무공도 빨리 배우겠지. 설마 네놈 하나 찾지 못하겠느냐.”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는 염우빙이었지만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第六章 사전제전
 
 
 
 이곳 위남에서 검의 명가를 묻는다면 모든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제검문을 가리킨다.
 위남의 동북쪽에 자리한 제검문.
 당금 구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힘을 가진 곳이 바로 이곳 제검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제검문주의 무공 수위로 인한 것도 있지만 제검문이 점점 세력을 넓혀 가고 있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제검문의 담장은 다른 세력들보다 그 높이가 아주 낮았다. 누구라도 자신이 있다면 도전하라는 뜻과 그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높지 않은 제검문의 담장 안에서는 소년들의 기합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타핫!”
 좌우측의 발을 연달아 앞으로 움직이는 상보(上步)와 동시에 검을 내리치는 소년들.
 그 검식이 평범했고 손에 들린 검이 진검이 아닌 목검이라 하지만 수련에 임하는 소년들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타핫!”
 또다시 힘찬 구령과 함께 검을 찔러 가는 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악적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난 언제 배울 수 있을까?’
 아직 어린 악적이었지만 나이가 든다 한들 저 검공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목검을 쥐고 있는 소년들은 이곳 위남에서도 있다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었고, 이곳 제검문에 들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애 고아에 제검문의 하인으로 몸담고 있는 악적에게 검공을 가르쳐 줄 리 만무한 일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악적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수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타핫!”
 가장 앞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장청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고, 그 뒤를 따라 동일한 자세로 검을 연마하는 소년들의 목소리가 장원을 울렸다.
 ‘청이 형은 언제 봐도 멋있어.’
 악적은 장청을 유난히 따랐다. 제검문의 장자로서 다른 세가의 아이들처럼 악적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장청은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뭐 하니?”
 소년들이 수련하는 모습에 빠져 있던 악적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그냥.”
 “어쭈! 말을 놓는단 말이지?”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눈초리를 말아 올리며 악적을 쏘아보고 있는 소녀는 제검문주의 여식이자 장청의 하나뿐인 동생 장하령이었다.
 “또 왜 그러냐?”
 악적은 슬며시 짜증이 났다.
 제 입으로 서로 말을 놓자고 하고서는 그새 또 마음이 변해 버린 장하령에게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뭐*왜 그래*하인이 주인에게 말은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럼 지난번에 말한 것은 뭐냐?”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마음이 변했어.”
 “어찌 계집애가 모든 게 다 네 마음대로냐*계집애하고 약속을 한 내가 바보지.”
 “뭐*계집애?”
 “그래, 이 계집애야. 그것도 엉덩이에 뿔이 서너 개는 난 계집애 같잖아!”
 악적이 몸을 휙 돌리고는 하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곧 수련이 끝날 것이고, 수련생들의 씻을 물을 준비하는 것이 악적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쭈! 너, 안 서?”
 자신을 무시하다 못해 계집애라는 욕까지 한 악적을 장하령이 용서할 리 없었다.
 “못 선다! 씻을 물 준비해야 돼.”
 “너, 너!”
 분에 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장하령을 향해 악적이 손을 한 번 휙 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너, 오빠한테 이를 거야!”
 장하령으로서는 유일하게 악적을 위협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신을 가장 아껴 주는 오빠 장청을 들먹이면 악적이 겁먹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하령의 예상은 빗나갔고, 악적은 옮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야! 너, 너! 정말 이른다니까.”
 다시 소리를 지르는 장하령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마음대로 해!”
 장하령에게 있어서 악적은 유일한 친구였다.
 악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보다 서너 살이 많았고, 그들과 어울려 본들 어린아이 취급밖에 받지 못하니 어울릴 수 있는 이라고는 유일하게 악적뿐이었다.
 그래서 말을 놓기로 한 것이 얼마 전이었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지만, 오늘 하루 종일 악적이 보이지 않자 심통이 난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악적이 하루 종일 보이지 않을 때는 장하령은 외톨이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것이 오늘 장하령이 화가 난 이유였다.
 “예쁜이가 왜 울고 있을까?”
 장하령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수련을 마치고 온 장청의 모습에 장하령은 오빠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빠! 앙앙!”
 “하령이가 왜 이렇게 슬퍼하지*뭘 또 잃어버렸나?”
 장하령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악적 때문에.”
 눈물을 마구 쏟아 내며 악적을 이르는 누이를 보고 장청이 미소를 지었다.
 “적이가 왜?”
 “날 무시했어!”
 장청은 악적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악적이었지만 얼마나 영악한지, 또 영악한 만큼 얼마나 행동을 조심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악적이 장하령을 무시할 리는 없는 일이었고, 만일 그리했다면 어린 누이가 먼저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치기 어린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빠가 혼내 줄까?”
 “응.”
 “그럼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이유 없이 혼내 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응.”
 “그럼 악적이가 어떻게 너를 무시한 것인지 오빠한테 이야기해 보렴.”
 “악적이가 내게 반말을 하고 내가 불러도 오지 않고 그냥 가 버렸어.”
 누이의 말에 장청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령아.”
 “응.”
 “악적이와 너는 친구 하기로 한 사이이지 않니*그럼 말을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악적이 네가 불러도 그냥 간 것은 바쁜 일 때문일 수 있잖니. 우리의 수련이 끝날 시간이니 씻을 물도 준비하러 가야 하니 너와 놀아 줄 수 없었을 거야.”
 “친구 하기로 한 것은 이미 취소했어.”
 “그것은 하령이가 잘못 생각한 거야. 한 번 친구를 맺었다면 그것은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야. 하령이 네가 취소하고 싶다고 취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악적이 취소하고 싶다고 취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이 오빠는 장원의 하인인 악적이와 하령이가 친구를 맺었을 때 아주 기뻤어. 비록 악적이가 지금은 이곳에 하인으로 있지만, 영원히 제검문의 하인인 것은 아니야. 하령이 네가 아직 어려 잘 모르겠지만 사람에게는 높고 낮음이 없단다.”
 어린 하령은 오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제검문의 주인인 문주의 딸이었고, 악적은 하인일 뿐이었다.
 그러니 분명 자신은 높고 악적은 낮은 것이었다.
 높은 사람이 약속을 취소하면 낮은 사람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이미 하령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장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난 주인이고 악적은 하인이잖아.”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누이를 향해 장청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겉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야. 악적이 하인처럼 일을 하고 있다지만 제검문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을 일로써 갚는 것이라 생각해야지. 그리고 오빠도 악적에게 하기 싫은 일을 명할 권리는 없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맺은 네가 악적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혼을 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야. 알겠니?”
 “난 몰라! 그냥 혼내 주고 싶단 말이야! 오빠는 맨날 악적이 편만 들어!”
 오빠라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장하령은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입을 더욱 삐죽하게 내밀고 있었다.
 
 * * *
 
 제검문의 수련생들이 씻을 물을 준비해 놓은 후 악적은 늘 그렇듯 뒷담 아래에 난 자신만의 통로를 통해 제검문을 벗어났다.
 하루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그것은 수련생들의 검식을 홀로 따라 해 보는 것이었다.
 악적이 늘 수련하는 곳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한적한 숲 속이었다.
 누구의 눈에라도 띄는 날에는 무공을 훔쳐 배웠다는 이유로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모르니 이렇게 숨어 혼자서 수련하는 것이었다.
 숲에 도착한 악적은 한편에 놓인 목검을 들었다.
 그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작대기일 뿐이었지만, 악적에게는 그것이 목검이었고 그만큼 소중한 물건이 없는 것이었다.
 반년 가까이 악적과 함께한 목검이라 말아 쥐는 부분은 손때가 까맣게 묻어 반들반들 윤이 났다.
 ‘이런 모양이었어.’
 양발을 벌리고 자세를 잡는 악적의 모습은 나이에 비해 꽤나 안정되어 보였다.
 “타핫!”
 악적은 조금 전 장청이 만들어 낸 자세를 자신도 잡아 보면서 기합성을 뱉어 냈다.
 돈을 내고 배울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배우기 위해 매일 연습을 하고 있지만, 눈어림으로 본 것을 흉내는 내도 정확한 자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리였다.
 ‘팔이 이런 모양이었는데······.’
 기억을 되새겨 다시 자세를 취해 보는 악적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돈이 모두 모이면 그때는 정식으로 배울 수 있을 거야. 그날까지만 참자!’
 악적이 무공을 배우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스스로 돈을 벌어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힘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책에서는 그것이 바른길이 아니라 가르치고 있지만, 책만 따르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악적이었다.
 상대를 위한 배려와 베풂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버린 악적. 그것이 아직 치기 어린 나이의 소년에게 삶의 목적을 정해 준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다시 자세를 취하는 악적의 눈에 두 명의 소년이 들어왔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야, 임마! 일루 와 봐!”
 허리에 목검을 차고 오만한 자세로 자신을 쏘아보는 소년들의 모습에 악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소년은 제검문의 수련생들 중에서도 그 성질이 가장 고약한 조렬과 적인교였다.
 더군다나 늘 악적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이었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짜식이 이리 오라는데 안 오고 뭐 해!”
 조렬이 험악한 인상을 자아내며 부르자, 악적은 손에 쥔 막대기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어쭈! 이 새끼, 눈 안 깔아*어디 하인 주제에 겁도 없이 그런 눈으로 쳐다봐!”
 조렬의 협박에 악적이 눈을 깔았지만, 거기에서 끝낼 것이라면 이곳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너, 무공을 훔쳐 배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내가 한 번만 더 걸리면 그땐 죽인다고 했지!”
 악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곳 위남에서도 이름 있는 세가의 자손들이었고, 대답을 하려면 존대를 해야 함에 악적으로서는 그것이 너무나 싫은 것이었다.
 차라리 매질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어쭈, 이놈 봐라! 벙어리야*왜 대답이 없어!”
 빡!
 조렬의 주먹이 악적의 머리를 찍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지만 악적은 비명을 내지 않았고, 그것을 보는 조렬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호오! 맷집이 더 좋아졌구나. 그럼 오늘 제대로 한번 할 수 있겠는걸.”
 그 말과 동시에 조렬이 허리춤의 목검을 뽑아 들었다.
 “자! 한번 막아 봐!”
 쇄앵!
 열두 살의 소년이라고 하지만 이미 삼 년 이상을 제검문에서 수련을 한 조렬이었다.
 비록 내력이 담겨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제대로 맞는다면 뼈가 상하기에 충분한 힘이 담겨 있었다.
 조렬의 목검이 노리는 곳이 오른쪽 팔임을 알고 있는 악적이 급히 물러나며 피해 버렸다.
 다른 곳은 몰라도 팔은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악적이었다.
 팔이 부러져 버린다면 저잣거리에서 변검 공연을 할 수 없었고, 그럼 돈을 모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조렬은 자신의 목검을 악적이 피해 버리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청이 악적을 아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제검문 안에서는 악적을 패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제검문이 아니었고 마침 보는 눈도 없으니 실컷 두들겨 패 줄 요량에 힘껏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악적이 재빨리 피해 버리는 통해 넘어지기까지 할 뻔했으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감히 피해?! 아주 죽여 주마!”
 조렬은 그동안 배운 모든 검식을 이용해 악적을 향해 달려들었고, 곁에서 보고 있던 적인교도 목검을 빼어 들었다.
 휘잉!
 목검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어나고, 악적은 또 한 번 급히 뒤로 물러났다.
 퍽!
 조렬의 목검은 피했다지만 적인교의 목검까지 피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것도 상대는 정식으로 검술을 배운 소년들이었기에 누가 봐도 악적이 바닥을 뒹굴어야 하는 것이었다.
 퍼퍼퍼퍽!
 조렬과 적인교는 넘어진 악적의 몸을 마구 밟아 댔다.
 아직 치기 어린 아이들이라고는 하나 그 발길질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악적과 같은 하인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성정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발길질에도 악적은 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헉헉! 이 새끼 담에 걸리면 아주 죽을 줄 알아! 퉤!”
 때리는 것만으로도 지쳤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조렬은 악적의 등에 침을 뱉음과 동시에 돌아섰다.
 그 모습에 적인교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더 두들겨 패야지. 이런 놈은 한번 두들겨 팰 때 아주 죽여 놓아야 다시는 안 까분다고.”
 “그래. 하지만 일단 돌아가. 자칫하다가 죽어 버리면 가지고 놀 놈이 없잖아.”
 “그건 그렇구나.”
 그렇게 조렬과 적인교가 돌아서자, 악적은 고개를 들었다.
 수없이 많은 발길질을 당했지만 양팔만큼은 철저하게 지켜 내며 비명 하나 지르지 않은 악적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언젠가 입장이 바뀔 날이 있을 거다.’
 
 * * *
 
 며칠 후 조렬과 적인교는 수없이 비명을 질러야 했다. 수련을 마치고 수욕을 하기 위해 배정받은 욕조(浴槽)로 몸을 들인 그들은 욕조 속에서 헤엄치는 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독이 없는 뱀이라 한들 무섭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욕조에 뱀을 푼 범인으로 악적을 지목했다.
 며칠 전 구타를 당한 악적이 복수를 하기 위해 뱀을 풀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대놓고 악적을 추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검문 안에서는 악적을 패 줄 수 없음에 조렬과 적인교는 악적이 늘 수련하는 곳으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악적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악적에게 복수를 하지 못한 것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수련 후 수욕을 할 때마다 욕조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도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어떻게 악적에게 복수할까 고민하던 적인교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악적이 저잣거리에 변검 공연을 나간다는 것이었고, 그 길목을 막고 있다 잡는다면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악적이 돌아올 만한 길목에 자리를 잡은 적인교와 조렬의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다.
 “그놈이 언제쯤 돌아올까?”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곧 올 거야. 앗! 저기 온다!”
 적인교가 먼저 악적을 발견했지만 달려 나가는 것은 조렬이 먼저였다.
 지금 이 상황에 말이란 것은 필요 없었다. 일단 흠씬 두들겨 패는 것이 먼저인 것이었다.
 그렇게 달려오는 조렬을 보며 악적은 손에 든 가면을 내려놓았다.
 물론 맞아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팔을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한 지난번 자신을 구타한 후 조렬과 적인교가 마지막에 던진 말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욕조에 뱀을 푼 것도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한 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젠장! 제검문에 더 있기는 틀렸어.’
 쇄앵!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오는 조렬의 목검. 당연히 그는 악적이 목검에 맞고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렬의 검보다 악적의 손이 빨랐다.
 퍽!
 “아악!”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어 버리는 조렬의 코에서는 코피가 흘러내렸다.
 “어*코피! 이 새끼, 너!”
 조렬은 다시 일어나 악적에게 달려들었고, 적인교까지 합세를 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미 변검으로 다져진 악적의 빠르기를 그들이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퍽!
 퍼퍼퍽!
 조막만 한 악적의 손이지만 그 빠르기만큼 매서웠다.
 “아악!”
 “아아아악!”
 조렬과 적인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악적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번 그들의 행한 발길질의 두 배, 아니 세 배 정도로 두들기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 * *
 
 장청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악적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하면서 정이 든 것도 있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 악적이 제검문을 벗어나서 다른 곳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는 악적이 제검문에 머무를 상황이 아니었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아버지의 성정으로 보아 어제 오후 악적이 저지른 일은 그냥 넘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초주검이 되어 버린 조렬과 적인교는 이곳 위남에서도 힘을 가진 세가의 자식들이었으니 그 부모들이 그냥 넘길 리 만무한 일이었다.
 악적이 처음부터 제검문의 하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금지옥엽과 같은 자신의 자식이 하인에게 매를 맞았다면 가만히 두고 볼 부모는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식을 보배처럼 아끼는 그들이라면 어떤 수를 동원해서라도 악적을 잡아들여 치도곤을 할 것이 분명했다.
 “여비로 가져가.”
 장청은 악적에게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놓았다.
 여태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악적이 주머니를 받아 들며 장청을 바라보았다.
 “갚을게요.”
 악적은 장청의 배려를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형편으로는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다시 돌아와서 그때 갚아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니까 반드시 돌아와야 해.”
 “그렇게 할게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악적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장청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오려면 최소한 조렬과 적인교의 집안보다 힘을 기른 후일 것이었다.
 악적의 희미한 미소에 장청은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이곳 제검문에 몸을 들일 때도 그러했고 제검문을 벗어나는 지금까지 악적에 대해서 그가 아는 것은 함께했던 할아버지에게 변검을 배웠고 지금은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속을 드러내지 않는 악적이 신통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출발할게요.”
 악적은 진심이었다.
 제검문에 몸을 들이고 자신에게 가장 친절히 대해 준 이가 바로 장청이었고, 그에 대한 고마움은 가슴에 가득 차 있었다.
 “하령이는 보지 않고?”
 “그냥 갈게요.”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이었고,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두들겨 맞은 아이들의 집안에서 들이닥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적은 떠나지도 못하고 붙잡혀 버리는 것이었다.
 “적아.”
 “예.”
 “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네 뜻을 꼭 이루기 바란다.”
 장청 또한 진심이었다.
 자신보다 네 살 아래의 악적이었지만 고아의 몸으로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악적의 모습에서 배울 것이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자신이 느낄 수 없었던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 준 악적이었다.
 또한 변검 공연을 하며 돈을 모으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는 장청이었기에 진심으로 악적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악적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장청의 뒤로 자신을 보고 울먹이고 있는 장하령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계집애, 너도 잘 있어라.’
 
 제검문에서 벗어난 악적은 자신의 짧은 다리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을 내며 산등성이를 달리고 있었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악적의 뒤를 쫓아오는 사내들, 그들은 조가장에서 밥을 먹고 사는 무인들이었다.
 비록 삼류 무인들이라 하지만 그들의 빠르기가 이제 열 살 먹은 악적보다 느릴 수는 없는 일.
 악적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한들 그 거리를 줄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저쪽이다!”
 “가까운 곳에 있다. 빨리 잡아!”
 뒤에서 들리는 소리로 그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자 악적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에도 계속 달렸다.
 “어디를 그리 열심히 가냐?”
 앞을 가로막는 염우빙의 모습에 악적의 걸음이 멈추었다.
 “할아버지, 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다급한 악적의 목소리에 염우빙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왜, 또 거짓말을 하고 도망이라도 가는 것이냐?”
 악적은 지난번 저잣거리에서 거짓말을 한 것 가지고 염우빙이 탓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요. 지금은······.”
 악적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이미 당도해 버린 조가장의 무사들이 악적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쥐새끼 같은 놈! 네놈이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 소리에 악적은 온몸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악적아, 내가 도와주리?”
 그 순간 악적의 머릿속에는 저잣거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던 염우빙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도와주시면 뭐든지 다 할게요!”
 급했다. 지금 이 순간 악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가장 무인들의 손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곳에 끌려간다면 악적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죽음에 이를지 모를 일이었다.
 “뭐든지?”
 “예. 뭐든지 다 할게요.”
 “또 거짓말인 게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악적의 대답에 염우빙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복가, 이놈아! 나도 드디어 제자를 구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第七章 살안의 수련법
 
 
 
 염우빙, 그가 제자 하나를 들이기 위해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돌아다닌 노력은 평소의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악적을 제자로 들이고 삼 년이라는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자신이 제 놈을 어떻게 데려와서 어떻게 키워 왔던가?
 도사 복장으로 변복까지 하는 수고를 하고도 부족해 제 놈의 거짓말로 인해 헤매고 다닌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서책, 아니 보물 특호에 손을 대었다는 것!
 그것은 염우빙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도, 용서할 리도 없는 일이었다.
 “이놈! 오늘 아주 죽여 주마!”
 쾅!
 염우빙의 거친 손길에 기거하는 내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떨리는 손과 길게 찢어진 눈, 그리고 사악한 눈동자.
 정확히 삼박자를 이루어 내는 염우빙의 목에서는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네 이놈, 악적아! 당장 이리 오거라!”
 염우빙이 부르는 소리가 작지 않아 주위를 울렸지만, 제자 악적은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벌써 달려왔어야 할 제자가 아무 반응이 없자 염우빙이 조금 더 기운을 담아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적아! 이놈아!”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었는데 초옥이 마치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리고 자적산의 구름이 흩어질 듯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지만 이번 역시 어떤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뒈지려고 아주 땅을 파는구먼!”
 염우빙이 눈살을 찌푸린 채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는 문밖으로 나왔다.
 기운을 일으켜 주위의 인기척을 살펴보았지만, 일대에는 제자는 물론이고 쥐새끼 한 마리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 염우빙이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휘잉!
 염우빙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구름을 뚫고 자적산의 연혼계곡 아래로 질풍처럼 쏘아져 갔다.
 촤아아앙!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빠르기. 그 빠르기에 대기가 이지러질 정도였다.
 도대체 누가 알 것인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어기충소(御氣沖宵)의 기운과 허공을 밟고 나는 듯한 허공답보(虛空踏步)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 주는 염우빙이 다름 아닌 제자 악적을 잡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 * *
 
 세월의 흐름이 유수와 같고, 유수 속에서 세월은 흐른다고 누가 말했던가?
 염우빙의 손에 이끌려 이곳 자적산으로 들어온 악적은 어느새 아이에서 소년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악적이 이곳에 온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삼 년 전 조가장에 쫓기다 염우빙의 구원을 받은 악적에게 염우빙이 요구한 것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염우빙의 제자가 되어 버린 악적, 그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을 도로 담을 길은 없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락바락 악을 쓰다 못해 자신을 잡기 위해 연혼계곡까지 날아온 사부가 마치 경전이라도 읽는 듯 경건한 자세로 서책을 넘기고 있으니, 그 모습을 쏘아보는 악적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악적과 염우빙, 누가 봐도 사제지간이 분명한데 악적의 눈에는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눈 씻고 두 번 세 번 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악적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 년 전 사부에게 도움을 받고 이끌려 왔다고는 하지만, 당시 사부는 분명 천하제일 유아독존의 무공을 전수해 준다고 약속했었다.
 자신이 뭐든지 다 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다 사부의 그 말에 두말없이 이곳 자적산에 오른 것이었다.
 그런데 자적산에 오르고 흐른 세월이 삼 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권각술 하나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사부를 신선과 같이 여겼던 악적은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알게 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세월이 적지 않다 보니 악적의 눈동자에 사부를 존경하는 기운이 담겨 있을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속았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존경심이 생겨날 것인가?
 물론 수련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체력 훈련이라는 것과 매일 반복하는 숨쉬기라는 것! 하지만 악적은 그것마저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귀동냥에 의하면 내가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호흡법이 중요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악적의 각오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사부의 말씀은 그 숨쉬기를 스스로 각성하여 만들어 냈음은 물론이고 그 작명이 천지조화공이라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악적이 어리다고는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아님에 천지조화공이라고 가져다 붙인다고 그것을 믿을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삼 년 동안 그놈의 천지조화공을 수련했지만 별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사부의 이야기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천지조화공을 수련하고 난 후 산등성이를 타고 땔감을 마련하는 데 조금 수월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성장한 근력 덕분이지, 사부가 전수해 준 천지조화공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이 악적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악적이 달아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달아나 봐야 잡힌다는 것과 이곳을 벗어나 봐야 딱히 갈 곳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힘과 돈이 없으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은 악적이 어떤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자적산을 벗어날 리는 없었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가뭄에 콩 나듯 보여 주는 사부의 엄청난 무위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여하튼 오늘도 소위 체력 강화라는 수련을 열심히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거처로 달려오는 악적의 눈에 하늘을 날아 자신에게 쏘아져 오는 사부가 보였다.
 사탄과 마귀를 뒤범벅 해 놓은 표정을 짓던 사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표정을 바꾸고 내실로 불러들이고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있으니 보통의 소년이라면 답답해 견디기 힘이 들 것이었다.
 하지만 악적은 전혀 답답할 것이 없었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이라면 지금 악적의 엉덩이는 고슴도치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느 정도 사부의 성정과 행동을 파악한 악적이었기에 이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뭔가 있기는 있는데······.’
 악적은 나름대로 사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정해 보고 있었다.
 평소의 행동으로 미루어 본다면 지금 이 순간 필시 자신에게 뭔가 불리한 계략을 짜고 있을 사부였다.
 그렇다면 악적의 입장에서는 그 계략을 미리 유추해 두어야 상대하기가 용이한 것이었다.
 “흠······.”
 나지막한 신음성을 토해 낸 염우빙은 악적을 쳐다보지도 않고 검지에 침을 바르며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촤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서책에 그려진 그림이 살짝 드러나자 악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서책!
 물론 사부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그것을 제자에게 전수해 주기 위해 서책을 읽고 있다면 악적으로서는 도저히 존경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아니, 새로운 경지는 집어치운다 하더라도 삶에 도움이 되는 서책에 저토록 집중한다면 자신이 이토록 사부를 쏘아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책의 이름은 듣기조차 민망한 이름이었다.
 
 탈의도경(脫衣圖經)―십칠(十七)
 
 옷을 벗은 그림을 보고 도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게 무슨 개구리 하품하는 소리란 말인가*세상에 도를 깨우치는 방법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하나 춘화도를 보며 도를 깨우치는 일이 어찌 있단 말인가?
 어린 제자 앞에서 뻔뻔하게 잡서를 보고 있는 것으로도 부족해 가끔은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마구 가져다 붙여 대니 이제 사부의 행각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도 않을 지경에 이른 악적이었다.
 그렇지만 사부는 사부.
 그 뜻에 깊이가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악적이 사부 몰래 탈의도경을 펼쳐 보았고, 그 결과 탈의도경은 도와는 아무 관계없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잡서로 판명되었다.
 물론 한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떼기가 어려워 그 마지막 한 장까지 침을 마구 흘리며 탐독하고 말았지만 여하튼 삶에 도움이 되는 서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부는 한 권도 아닌 열일곱 권씩이나 소장하고 마치 보물처럼 대하고 있었다.
 저런 사부를 만날 당시 신선으로 알았다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기에 그날 이후 악적은 사람은 생긴 대로 판단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기다림에 다리가 저려 오자, 악적이 조심스레 사부를 불렀다.
 “사부님.”
 “······.”
 대답이 없는 사부를 향해 눈썹을 일그러뜨려 보는 악적이었지만, 염우빙은 개의치 않고 서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사부니임.”
 악적은 조금 높은 목소리로 사부를 불렀다.
 물론 조심해야 했다.
 자신이 방으로 불러 놓고서도 독서삼매경을 방해했다느니 막 등선을 하려던 참이었다느니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괴롭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적이 두 번 세 번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제야 염우빙은 서책에서 눈을 떼고 악적을 쏘아보았다.
 사부의 저 눈빛.
 마치 연적을 대하는 듯한 눈빛에 또 한 번 사부가 트집을 잡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악적은 스스로 마음을 다졌다.
 오늘만큼은 쉽게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며 생각지 못한 공격에 대비하는 악적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제가 당할 것 같습니까*어림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악적을 바라보던 염우빙이 스산한 목소리를 냈다.
 “적아.”
 “예.”
 “사실을 고하면 용서해 주마. 네 나이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으니.”
 사부의 말투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악적이었다.
 하지만 저런 잔수에 당한 것이 한두 번이던가?
 당할 만큼 당한 악적이 그리 쉽게 걸려들 리는 없었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오늘만큼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내심 다짐한 악적은 조심스레 반문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쾅!
 염우빙이 탁자를 내리치며 악적의 말을 끊었다.
 동시에 자신을 쏘아보는 가공할 눈빛에서 악적은 오늘 결코 하루가 편하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저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그렇게 잦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정 네가 잘못한 것이 없어 나에게 묻는 것이냐!”
 악적은 이미 위협과 공갈, 그리고 협박을 한눈에 담아내는 사부의 모습에 겁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만성이 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저 절묘한 삼박자에 의해 무조건 잘못을 빌었지만, 이제 그런 행동은 자적산의 바람결에 날려 버린 지 오래된 일이었다.
 사부와 제자의 신경전.
 절정 고수의 비무를 방불케 하는 사제의 신경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제자, 사부에게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제자가 아둔하여 사부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지 않으니 지적하여 말씀해 주시면 깊이 반성하여 차후 사부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악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사부의 눈을 마주한 악적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염우빙은 알고 있었다.
 제자 악적의 말이 길어지고 그 말에 예의가 깃들면 뭔가 구린 것이 있음을.
 사제의 연을 맺은 지 삼 년.
 삼 년이면 제자를 파악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었고, 악적이 사부의 성정을 파악했다면 사부는 악적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말투만으로도 악적의 생각까지도 모두 뚫어 보고 있을 정도였다.
 너무나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교차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오호, 네놈이 발뺌을 한단 말이지?’
 하지만 염우빙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잡아 두겠다는 생각이었다.
 “굳이 내가 말을 해야겠느냐*네 스스로 잘못을 시인한다면 없었던 일로 해 줄 수도 있음에.”
 ‘여기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악적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며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사부님!”
 악적의 당당하다 못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에 염우빙의 눈빛에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오호, 요놈 봐라*끝내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겠다, 이 말이지. 그래, 얼마나 견디나 보자.’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사부님, 제자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사오나 가르침을 내려 주신다면 제자 반성하고 또 반성하겠습니다.”
 “오호, 그래*네놈이 이 증거 앞에서······.”
 척!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탈의도경 제십칠편이 악적의 앞으로 떨어졌다.
 “이노오오오옴! 이것을 네놈이 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헉!’
 악적은 눈이 찢어지고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특유의 노련함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아궁이에 수없이 불을 붙이고 솥뚜껑을 얼마나 열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쩍!
 다시 한 번 허공에서 사제의 눈이 보이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사부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제자를 제압하겠다는 의지의 눈빛이었고, 제자는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필사적인 생존의 눈빛이었다.
 아궁이와 솥뚜껑을 생각하며 급히 마음을 다스린 악적은 지금 이 순간 사부가 잔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증거가 없을 텐데 또 감으로 때려잡으시는군. 내 이렇게 당할 수는 없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악적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곧 아주 태연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추스르며 사부에게 고했다.
 “사부님, 저는 그것을 절대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 사부가 ‘애독!’하시는 경전을 허락도 얻지 않고 본단 말입니까. 제자,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애독을 강조하는 악적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염우빙의 눈이 더욱 표독스럽게 찢어졌다.
 “그래?”
 “예.”
 “확실히 본 적이 없단 말이지?”
 “분명 그러합니다.”
 악적의 대답과 동시에 염우빙의 손이 서책을 향해 움직였다. 바람도 통하지 않는 내실에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책장이 미친 듯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휘리릭!
 차차차차착!
 한참이나 넘어가던 책장이 갑자기 정지하고는 한 여인이 과감하고도 자유스럽게 옷을 벗은 그림이 드러났다.
 “이것을 보아라!”
 여인이 알몸에 가까운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 모습을 이미 탐독한 바 있는 악적이었지만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 다짐 또 다짐을 하고 있었다.
 ‘절대 놀란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돼. 침착해! 악적아, 침착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린 악적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자, 아직 경전을 접할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럼 저 여인의 장태혈에 떨어져 있는 물 자국이 네 침이 아니겠구나?”
 투명하게 번져 있는 자국을 본 악적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혈도로 따지면 장태혈이라 하지만 사실 그곳은 여인의 봉긋한 가슴의 중심이었고, 악적의 눈에도 침 자국이 확연하게 보이고 있었다.
 
 * * *
 
 ‘아차!’
 악적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탈의도경을 접하며 너무나 감탄하여 침을 흘린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것을 발견한 사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빠져나가기 어려운 증거였다.
 사부가 흘리지 않았으면 자신 이외에는 있을 수 없는 일!
 그것을 아는 사부에게 완벽한 증거가 쥐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악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변검술을 공연하며 나이보다 세상을 빨리 안 악적이었고, 그동안 사부와 생활을 함께하면서 가장 많이 는 것이 바로 잔머리였다.
 세찬 물살보다 빠르게 회전하는 악적의 머릿속은 곧 적당한 결과를 산출해 냈다.
 “사부님, 오해이십니다.”
 “오해라?”
 “그렇습니다. 그 침 자국은 확실하게 제 것이 아닌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확실하게*아니라고 사료돼?’
 뭔가 어색한 악적의 대답에 염우빙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악적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놈이 어떤 핑계를 대어 이 위기를 빠져나가려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 네놈이 무슨 잔수를 쓰나 보자.’
 “그럼 내 것이란 말이냐?”
 염우빙의 말에 악적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황급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사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어찌 사부님께서 인체의 요혈을 적나라하게 공부하는 서책을 보고 침을 흘리실 수 있겠습니까*제 비록 좁은 소견이지만 사부님의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적나라하다’와 ‘좁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 염우빙이었지만, 일단 제자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그럼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제삼자의 것으로 보입니다.”
 “갈! 누가 있어 감히 나의 눈을 피해 이곳에 들었단 말이냐!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냐!”
 사실이었다. 사부의 무공 수위로 미루어 보아 그 눈을 피해 사부의 방에 들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악적이 그리 단순한 방법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려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사부,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그림을 그린 자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신이 그리면서도 스스로의 솜씨에 너무 감탄해 침을 흘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이없는 소리였다.
 이 정도에 넘어갈 염우빙이었다면 처음부터 악적을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도 아닌 소리. 그럼 왜 지난번에는 없었던 침 자국이 지금 생겨났단 말이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는 악적.
 그의 입에서는 청산유수와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가 평소에 사부님을 뵈어 온 것으로 유추한다면 사부님께서는 어떤 경전이든 한 번 잡으시면 심취하지 않으십니까. 상승의 경지에 이른 사부께서 그런 하찮은 침 자국에 흐트러질 리 없기에 그때는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바로 듣는다면 대놓고 욕을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소리였다.
 사부가 입에 담지 못할 소리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악적이 기묘하게 빠져나가자 염우빙은 마땅히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승의 경지라든가 심취라든가 하는 말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이 경전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을 테고, 점점 깊이 파고든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설 염우빙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남아 있는 최후의 방법이 있었고,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적아.”
 “예, 사부님.”
 “진정 네 것이 아니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래, 내가 너를 믿어야지. 사부가 제자를 믿지 않는다면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진정 넓고 깊은 생각이십니다.”
 “그래, 믿도록 하자. 이제 고개를 들고 사부를 보거라!”
 사부의 목소리에 악적의 어깨가 사시나무 흔들리듯 흔들렸다. 지금 사부가 무슨 방법을 사용하려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사하게!’
 만일 지금 사부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분명히 사단이 나고 말 것이기에 악적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였다.
 “어허, 이리 보래도!”
 “제자, 어찌 사부님의 눈을 함부로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는 악적이었지만, 곧 무형의 힘에 의해 고개가 들리고 있었다.
 ‘젠장, 다 틀렸어!’
 
 * * *
 
 ‘툭 하면 투안(透眼)을 사용하니, 빌어먹을!’
 주방으로 발을 들이며 투덜거리고 있는 악적은 사부의 악질적인 행동에 치를 떨었다.
 사부의 투안 중에서도 가장 야비하고 치졸한 안공인 섭혼안을 사용하면 악적으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사부는 섭혼안을 사용했고 껍질이 홀라당 벗겨지듯 악적은 모든 사실을 뱉어 냈다.
 “정말 치사하다, 치사해!”
 악적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 것인가?
 방문이 열리고 사부의 얍삽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악적의 귀를 파고들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내가 잘못 들었나?”
 다시 방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며 악적이 미간을 좁혔다.
 ‘귀는 얼마나 밝은지······.’
 악적의 생각에는 오늘의 모든 일이 지난번에 사부 스스로 맹세한 약속 때문이라 생각했다.
 악적이 수련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점심은 스스로 지어 먹겠다고 선언한 맹세가 바로 그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기뻐하던 악적의 기쁨은 하루가 가지 못했다. 아니, 반나절이 가지 못했다고 해야 정확했다.
 사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부는 그 말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사부에게 약속은 깨라고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
 악적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부가 그 약속을 하고 난 다음 날의 행동 때문이었다.
 갑자기 말도 되지 않는 온갖 트집을 다 잡아내어 그것을 빌미로 결국 악적에게 밥을 짓게 만드는 사부의 모습에 악적은 과연 자신의 사부가 맞는지 의심이 일 지경이었다.
 물론 사부의 특기는 트집 잡기와 가당치도 않은 소리 늘어놓기라는 것을 인정하는 악적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약속 깨기를 하나 추가하는 것으로 속을 풀어야 했다.
 아니, 그것들은 특기가 아니라 사부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었고, 그 대상이라고는 자신 하나밖에 없으니 그 모든 고통은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디 그것뿐이던가?
 사부는 과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과장, 아니 생구라에 있어서는 한다 하는 호사가들도 사부 앞에 가져다 놓는다면 만월 아래 반딧불이요, 바다 앞의 항아리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구라(生口喇).
 그 생구라와 삶을 함께하는 사부를 왜 이때까지 모시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악적이 사부의 무위를 나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악적의 눈에 보이는 사부는 가끔 하늘로 붕붕 뛰어오르기도 하고 바위를 한주먹에 깨뜨려 버리니 그것마저 믿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부가 중원 대륙을 주유할 당시 세인들이 붙여 준 별호라고 이야기하는 것들 또한 말할 때마다 달랐고, 이제는 어느 것이 진짜 별호인지 악적도 모르고 사부도 헷갈려 할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를 가지고 과장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툭 하면 오대고수니 칠대검객이니 하는 이들을 전부 한 손 접어주고 상대해 주었다는 둥 지금이라도 강호에 발을 들이면 구파니 오대세가니 하는 이들은 그냥 고개를 조아린다는 둥의 말도 되지 않고 어이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면 악적은 스스로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생구라의 원조요, 생구라의 창시자인 사부.
 악적이 사부의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땅히 낙이 없는 사부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라고 호흡을 맞추어 주는 악적이었으니 그야말로 진정 사부를 사랑하는 제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악적의 마음도 모르고 하나밖에 없는 제자에게 허구한 날 시키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사부 스스로 작명한 천지조화공이라는 호흡법밖에 없으니 악적이 어찌 답답하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천륜으로 이어진 정을 끊을 수는 없기에 오늘도 악적은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적아!”
 ‘젠장! 또 왜 부르는 거야?’
 악적이 속으로 마구 사부를 씹고 있을 때, 또다시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적아!”
 “예!”
 “손님이 올 것이다. 밥을 넉넉하게 지어 놓아라.”
 
 
 
 
 
 第八章 전대미문의 사건
 
 
 
 “크하하핫! 제자 꼬락서니 하고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복우황이 한 말에 염우빙의 눈초리가 치솟아 올랐다.
 제 놈이 두 해 빨리 제자를 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제자 악적을 폄하하는 것을 용서할 염우빙이 아니었다.
 “네놈 제자나 잘 가르쳐. 제자라고 다 같은 제자인 줄 아느냐?”
 염우빙이 슬쩍 복우황의 염장을 질렀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복우황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염우빙의 속을 쑤시고 찌르다 못해 뒤집기까지 했다.
 “어허, 우리 마두를 보지 못해서 그렇지 본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천고의 ‘기재!’이자 타고난 ‘무인!’이다 보니 그 성취가 과연 빠르다 할 수 있지. 그럼! 누가 본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퍽이나 놀라겠다, 이놈아!’
 복우황의 제자 자랑에 치밀어 오르는 욕을 가까스로 다스리는 염우빙이었다.
 “근데 네 제자 이름이 마두였냐?”
 눈을 반개한 염우빙의 표정은 뭔가 꼬투리를 잡았다는 표정이었지만, 복우황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 이름이지!”
 자랑스러워하는 복우황의 목소리에 염우빙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핫! 차라리 말대가리라 부르지, 이름이 그것이 무엇이냐?”
 말대가리라는 말에 급히 얼굴이 붉어지는 복우황이었고, 염우빙은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자적산이 떠나갈 듯한 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크하하핫! 진정 이름 한번 걸작이구나! 말대가리라니!”
 “이놈아, 그 마두가 아니다!”
 복우황이 울화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염우빙은 거기서 멈출 위인이 아니었다.
 “그게 그거지. 생각만 해도 우습구나, 말대가리라니. 마두보다는 말상이 어떠냐?”
 “어허, 이름 가지고 사람 놀리는 것이 아님에 염가 넌 어찌 그 나이가 되도록 상대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이냐! 그것도 아직 어린 아이의 이름을 가지고!”
 복우황의 호통에 염우빙이 웃음을 그치고는 진지한 표정을 자아냈다.
 “그렇군. 남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이 아니지. 그럼!”
 뭔가 이상했지만 복우황은 더 이상 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는 그러지 말게.”
 “알았네. 내가 실언을 했어.”
 염우빙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니 복우황으로서도 더 이상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흠, 그렇게 말하니 내 더 할 말은 없네그려.”
 “자네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게.”
 “그러지. 그런데 자네 제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악적.”
 염우빙의 한 마디에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판단하지 못하는 복우황이었다.
 방금 전 자신의 입으로 먼저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바로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놈이 날 약을 올리려고. 이놈, 어디 보자!’
 복우황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참아 냈다.
 굳이 이름이 아니더라도 염우빙의 코를 눌러 줄 방법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 언제 한번 비무라도 해 봐야지?”
 복우황의 제안에 염우빙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것 좋지.”
 “내 자네 제자를 보아하니 아직은 이를 것 같고, 한 십 년 후에나 찾아오게나. 물론 그때가 되면 더욱 격차가 벌어지겠지만 배우는 자세로 임하면 될 것이야.”
 복우황의 말에 염우빙의 눈이 찢어졌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는 것임에도 저토록 오만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단지 이 년 정도 빨리 수련을 시작했기에 가지는 자신감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자네 제자의 진전이 빠른가 보군.”
 “당연한 것 아닌가. 내 화산의 자환신단을 두 알씩이나 먹였으니 그 나이에 내공 면에서는 강호에서 따를 자가 없다고 보아야겠지.”
 ‘자환신단!’
 염우빙은 자환신단이라는 소리에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화산이 몇 알 가지고 있지 않은 천고의 영약 자환신단을, 그것도 두 알씩이나 먹였다면 그 내력의 수준은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화산이 몽땅 미치지 않은 이상 복우황에게 자환신단을 건네줄 리가 없으니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놈이 이런 꼼수를 부리다니!’
 속이 터질 것 같은 염우빙이었지만 드러내지 않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기서 화를 낸다면 오히려 자신이 말려든다는 생각이었다.
 “허허! 옛날 솜씨를 발휘했는가 보군.”
 “하하하! 다 그런 것 아닌가*그 말코들이 가지고 있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진정한 기재요, 무림을 빛낼 나의 제자가 복용하는 것이 중원 강호를 위해서도 나은 일이지.”
 염우빙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복우황은 지금 스스로 훔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고, 염우빙의 눈가에는 잠시 기광이 일었다 사라졌다.
 ‘네놈이 자환신단을 먹였다면 나라고 가만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두고 보자, 이놈. 내 숨이 끊어져도 악적이를 네놈 제자에게 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암!’
 “크하하하! 거 잘된 일이군. 잘되었어.”
 “하하하! 고맙네.”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악적은 이제껏 자적산에 올라 사부의 지인이 찾아온 것을 처음 보았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사부와 지인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 상당히 친한 친구인 듯 보였다.
 ‘사부에게 친구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야.’
 치졸함의 대명사이자 종주인 사부에게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악적은 예상했다.
 그 친구도 별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복우황의 얼굴을 대한 악적은 그 예상이 확신으로 확연하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예를 갖추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기에 악적은 깊이 읍을 취했다.
 “악적이라 하옵니다.”
 악적의 인사에 복우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로운 눈으로 악적의 몸을 살폈다.
 ‘별것 없군.’
 “그래, 네가 악적이었구나. 한눈에 봐도 자질이 대단히 뛰어나 보이는구나.”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분이군.’
 조금 전 사부와 같은 부류로 마음속에 등록해 놓았던 악적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사실 복우황의 칭찬은 진심이 아니었다.
 복우황이 살펴본 악적의 몸은 평범한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렇게 말해 두어야 염우빙이 비무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 과찬이네. 너는 가서 수련이나 해라.”
 “예.”
 사부와 복우황에게 깊은 읍을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악적은 천지조화공에 관한 사부의 가르침을 다시 곱씹어 보고 있었다.
 사부의 설명은 늘 그럴듯했다.
 
 ‘천지 만물이 저마다 기(氣)를 흡수하고 발산함에 있어 그 시간이 정해져 있는 법. 생명체의 움직임이 정지된 시간을 지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 저마다 모두 정화된 기운을 대지에 발산한다. 그 기운을 받아들여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 시간이 하루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물론 사부의 말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악적이었다.
 해가 떠오르기도 전, 달빛을 받으며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천지조화공의 호흡법이었다.
 처음에는 잠이 부족해 호흡법을 수련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잠을 자는 시간보다 더 편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 힘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본격적으로 무공을 접한다면 그 위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야. 가문과 문파에서 제각기 만들어 낸 심법들엔 단점이 있다. 그 가문과 문파의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지. 하지만 천지조화공은 다르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은 천지조화공의 기운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니 네가 천지조화공을 대성하면 심법이 문제가 되어 익히지 못할 무공이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힘이 될 터이니 지금 답답해 할 일이 아니다.’
 
 최소한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사부를 믿는 악적이었다. 아니, 믿는 것 말고는 뾰족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믿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언젠가 이게 힘이 된단 말이지?’
 악적은 단전 주위로 뭉쳐진 딱딱한 무엇인가를 만져 보고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겨 버린 그것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해 이제는 꽤 넓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악적의 수련은 해가 지기 전 노을이 자적산을 덮을 때 다시 한 번 천지조화공의 호흡법을 수련하는 것으로 하루의 수련이 끝난다.
 그렇게 또 하루의 수련을 마치기 위해 바위 위에 좌정하고 숨을 가다듬는 악적의 귓전으로 사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래, 수련은 잘되어 가느냐?”
 ‘숨만 쉬면 되는데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을까?’
 속내는 그러했지만 악적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사부의 손에 들려 있는 가는 지팡이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악적의 몸을 사부가 훑어보고 있었다.
 ‘또 투안이구나.’
 악적이 사부를 속일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사부의 저 눈빛, 투안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었다.
 자신이 하루에 몇 시진을 수련했는지 사부가 어찌 알겠냐는 생각에 게으름도 피우곤 했었다.
 권각이나 검을 배웠다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나 천지조화공은 너무나 심심한 공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자신이 왜 천지조화공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였고 그래서 게으름을 피운 것이지만, 사부는 곁에서 보지 않고도 자신이 게으름을 피웠는지 피우지 않았는지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다.
 몇 시진을 수련하고 또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는지 알아내는 사부의 모습에 무척 놀란 악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원인은 조금 전 사부가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사용한 투안이었다.
 사람의 내부를 관통해 보는 듯한 저 눈빛, 저 눈빛이 스쳐 지나가면 모든 것이 다 들통 난다.
 사부가 저런 눈빛을 자아내는 경우는 자신의 몸을 훑어볼 때와 경전을 볼 때뿐이었다.
 사부의 투안을 알게 된 것은 천지조화공의 효과라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사부가 투안을 사용해도 느끼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부가 투안을 사용하는 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제자야, 너는 왜 무공을 배우려 하느냐?”
 ‘사부가 끌고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악적이었지만 그것은 사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님을 알기에 속과는 전혀 다른 말이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무공을 익혀 사부님께 효를 다하고 그 경지가 하늘에 이르면 사부님이 창안한 무공을 세상에 드날려 민초들의 삶을 보호하며 종국에는 신비문을 창시하신 사부님을 조사로 모시고 사부께서 창안하신 절대무적의 무위를 대대로 전수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입니다.”
 ‘사부님이 창안한’이라는 대목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악적의 대답에 염우빙이 흡족한 미소를 자아냈다.
 “그래, 네 뜻이 아주 훌륭하구나. 내일부터는 안공(眼孔)을 수련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예.”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심법이 아닌 다른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말에 제자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염우빙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뭐, 기분 나쁘면 배우지 말고.”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이야기였다.
 저것이 어찌 제자를 가르치는 사부의 자세일 수 있는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 악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배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부님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여 훌륭한 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돌아서는 사부의 모습에 악적은 짜증이 치밀었다.
 ‘젠장! 도대체 무슨 견공 토악질하는 소리야. 이제 와서 안공이라니?’
 배우려면 검이나 도 등 그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안공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인가?
 악적의 나이도 벌써 열셋.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숨 쉬는 것만 하더라도 삼 년이 걸렸는데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확 튀어 버려?’
 지금 이 순간 달아날 것까지 생각하고 있는 악적이었다.
 
 * * *
 
 크르르르.
 꽤나 덩치가 큰 견을 쏘아보며 악적은 사부의 말을 뇌리에 되새기고 있었다.
 
 ‘상대를 제압할 때는 심령마저도 제압한다!’
 
 상대가 견이라고 심령이 없을 것인가?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악적의 모습에 기가 막힌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견이었다.
 한 인간과 짐승의 대결은 처절했다.
 ‘감으면 진다.’
 악적은 눈이 붉게 충혈되도록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아니, 감을 수가 없었다.
 이미 수많은 경험으로 지금 눈을 감아 버린다면 상대는 다시 기세등등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약 반 시진의 긴 싸움은 자신의 패배가 되는 것이었다.
 살기(殺氣).
 도대체 사부가 말하는 살기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 수도 없는 악적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는 것!
 그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보면 견도 상당히 불쾌할 것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자신을 막아서고 눈이 충혈되도록 쏘아보는 악적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마치 자신을 음식 쳐다보듯이 하고 있었고, 저러한 눈빛을 가진 거지 놈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견이었다.
 물론 그놈들에게 걸리면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이 정도로 어린놈에게 달아날 정도면 이곳에 영역을 표시하러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악적과 견의 대결이 정점으로 치달을 때, 사부의 목소리에 악적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 지금 뭐 하냐?”
 사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악적의 눈은 붉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살기를 기르고 있는 중이죠.”
 “뭔 기?”
 “살기요.”
 사부가 어이없다는 듯 악적과 견공을 번갈아 보더니 손끝으로 견을 가리켰다.
 “쟤하고?”
 “예.”
 상대가 자신에게 눌렸다 생각했는가*악적이 사부와의 대화를 위해 눈을 돌린 터라 긴장감에서 벗어난 견은 기세를 드높이며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
 견은 과감히 상대를 위협하는 소리를 냈고, 제자와 대화를 나누던 염우빙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는 염우빙의 시선이 견에게 닿자, 견의 육신은 마치 한겨울 호수처럼 얼어 버렸다.
 “이런 개새끼가 어디서 으르렁거려*개방 거지 놈한테 줘 버릴까 보다.”
 퍽!
 사부의 발끝에 견공의 허리가 걸리자, 견공은 허공으로 떠올라 태양빛 사이로 사라져 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을 날고 있는 견공의 모습에 악적은 마치 제 허리가 차인 듯 고통이 밀려왔다.
 “본인의 제자가 겨우 개새끼하고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상대가 없지 않습니까.”
 악적도 할 말이 있었다.
 나무나 바위를 보고 살기를 펼칠 수는 없는 일!
 견공을 상대로 정한 것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혼애로 내려가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겨우 개새끼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잘한 짓이다, 이 말이냐?”
 ‘연혼애!’
 사부의 말과 동시에 악적은 소름과 식은땀이 동시에 등에서 교차하는 기연을 겪어야 했다.
 연혼애를 단순한 계곡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산이었다. 각종 짐승이 제발 한 놈만 걸려라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그곳이 바로 연혼애였다.
 “그냥 여기서 하겠습니다. 굳이 연혼애까지······.”
 악적은 말을 멈춰야 했다. 사부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어느새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 * *
 
 “날이 밝기 전에 초옥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는다.”
 제자의 안전을 핑계로 연혼애까지 동행한 사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고, 또한 이곳이 연혼애에서도 맹수가 가장 많이 출현하는 곳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사부. 누가 모르나?”
 사부의 욕을 마구 뱉고 있는 악적은 연혼애를 덮어 오는 어둠과 동시에 자신을 향하는 스산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
 ‘늑······대!’
 역시 연혼애였다.
 이미 악적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늑대는 용맹한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것이 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벌써 느낌부터 달랐다.
 생긴 모양도 감히 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양새를 갖춘 늑대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악적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바닥에 떨어진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며 마음을 다졌다.
 ‘그래, 이왕 하는 것, 저 정도는 되어야겠지!’
 어차피 그 살안을 익히지 못하면 사부가 자신을 가만 내버려 둘 일도 없을 터, 최대한 빨리 살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사부에 대한 분노를 늑대를 향해 돌린 악적은 나뭇가지를 굳세게 말아 쥐며 동공을 최대한 확장시키고 있었다.
 ‘너 죽는다! 너 죽어! 죽여 버릴 거야!’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모든 기운을 눈에 주입했지만 살기라는 것은 일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늑대도 왠지 상대의 기운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에 어떤 도발도 하지 않았고, 일다경도 되지 않은 대치에 악적은 점점 힘이 빠지고 눈이 아파 왔다.
 ‘제발 좀 물러가라, 응?’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은 어느새 애절한 부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물론 눈동자에는 위협을 담았지만 속으로는 늑대가 그냥 물러가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악적이었다.
 조금 전과 달리 악적의 기운이 약해졌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늑대는 악적의 그 간절한 기도를 저버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크르르.
 ‘빌어먹을, 엿 됐어.’
 늑대가 한 발 앞으로 나선다 하더라도 악적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만일 한 발 물러서서 기세가 죽는 동시에 늑대는 자신의 목줄기를 물기 위해 허공으로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마음으로 살심을 일으켜라.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유라도 가져다 붙여라. 곰을 만난다면 곰의 쓸개가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런 적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 상대를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는 살심을 가져야 한다. 그 살심이 기세로 드러나면 호랑이도 너에게 꽁지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야.’
 
 물론 사부의 말이었다.
 쉽기는 하다. 하지만 말과 현실이 같은 것인가?
 자신이 왜 늑대를 죽여야 할 것이며, 또한 늑대를 죽인들 어디에 쓸 것인가?
 늑대를 제압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살심이 끓어오를 것이 아닌가*악적은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안정시키며 늑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먼저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이 허세든 과장이든 일단 물러나는 것보다는 분명 옳은 판단이었다.
 가진 힘을 모두 동원해 눈을 치켜뜬 악적은 과감하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악적의 기세가 먹혀들었는가?
 늑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악적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늑대도 느낀 것이었다.
 다시 한 발.
 악적은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고, 살아야 한다면 상대를 물러가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일고 있었다.
 악적의 기세에 뒤로 한 발 물러나는 늑대.
 우우우우!
 늑대가 돌연 하늘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이 겁먹었군.’
 악적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다.
 이제껏 살기등등하던 늑대가 허공을 향해 울음을 터뜨리고 뒤로 다시 한 발씩 물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해.’
 처음으로 자신의 살안이 먹혀든다는 생각에 악적은 또다시 늑대를 향해 두어 걸음 전진했다.
 악적의 기세에 한풀 꺾인 늑대가 재빨리 몸을 돌리며 숲 속으로 달아나자, 악적은 마음에 담긴 모든 두려움이 승리감으로 전환되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나 악적의 능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이거 별거 아니잖아.”
 그렇게 승리감에 도취되어 몸을 돌리던 악적은 등 쪽으로 스산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본 악적은 심장이 양단되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커럭!’
 악적의 눈동자에 비친 늑대는 조금 전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달아났던 늑대였다.
 물론 그놈이 다시 왔다고 한들 이미 기세등등한 악적이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로 따라오는 다섯 마리의 늑대.
 모양만 늑대지 그 덩치는 호랑이도 한 수 접어 줄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튀어야 산다!’
 
 * * *
 
 늑대들에게 죽음에 이르기 전 탈출에 성공한 악적의 몰골을 본 염우빙의 첫마디.
 “너 돈 있냐?”
 이것이 과연 사부가 제자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이던가?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갑자기 돈이라뇨?”
 “의복이 그렇게 찢어졌으니 다시 사야 할 것 아니냐. 그럼 돈이 있어야 할 테고.”
 ‘결국 그 이야기군.’
 악적은 역시 사부답다고 생각했다.
 과거 변검 공연을 하던 자신에게 은자를 건네주던 사부의 행동은 그야말로 가식이었다.
 이렇게 매일 그놈의 돈으로 자신을 구박하는 사부일 줄 알았더라면 쉽게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사부가 제자를 들이면 당연히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당연함이 사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부, 진정으로 너무하십니다. 제가 탈의도경······.”
 사부의 유일한 약점, 탈의도경에 관해 입을 열려고 하자 염우빙의 표정이 바뀌었다.
 “됐다. 따라오너라.”
 ‘히히, 역시 탈의도경 이야기면.’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사부를 따르는 악적은 앞으로 종종 탈의도경을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놈 보이냐?”
 어디서 구해 왔는지 강한 독성을 가진 듯 보이는 뱀이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자적산에 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무늬가 아름다운 뱀을 처음 보는 악적이었다.
 “뱀 아닙니까?”
 “야, 이놈아! 그럼 저게 지렁이냐*누가 봐도 뱀인 줄 다 아는데 내가 왜 물어보겠냐?”
 “뱀을 뱀이라고 하는데 나무라시면 전 뱀을 구렁이라고 해야 합니까?”
 조금은 반항적인 목소리에 염우빙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네놈에게 바란 것이 잘못이지.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자세히 보거라. 저놈은 화사(花蛇)라는 놈이다.”
 그리고 곧 풀숲을 뒤적이고는 청와(靑蛙) 한 마리를 잡아 와서는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다.
 사부의 손을 빠져나온 청와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한 번 폴짝 뛰었을 때, 청와의 시선과 화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태껏 아무 움직임도 없던 화사는 개구리를 발견하자, 가늘게 뻗은 목을 치켜들었다.
 “느껴지는 게 있느냐?”
 “아뇨.”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하는 악적의 머리통으로 여지없이 지팡이가 날아들었다.
 딱!
 “악!”
 “아둔하기 짝이 없는 놈! 다시 잘 보거라. 청와는 뱀의 먹이 중 하나지. 세상이 뒤집어진다 하더라도 청와가 뱀을 먹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야. 그럼 청와가 어떻게 해야겠느냐?”
 “죽지 않으려면 달아나야죠.”
 “그래야지. 하지만 청와는 지금 꼼짝도 못하고 있지 않느냐*왜일까?”
 “무섭겠죠.”
 “바로 그거야. 청와는 화사가 무서운 거야.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두려운 게지. 극도의 두려움은 육신의 마비를 불러오는 것을 저 청와를 보면 알 수 있지. 그것은 청와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다.”
 쏴악!
 머리를 치켜들고 있던 화사가 단숨에 쏘아져 나가 개구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단숨에 청와를 제압하려는 화사의 움직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은 염우빙의 지팡이였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사는 마치 새인 양 허공을 날아 풀숲으로 들어갔다.
 “이것 보거라. 뱀이 공격을 하는 동안에도 청와는 꼼짝도 못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살안의 기본이다.”
 “먹이를 잡기 위해 살기를 뿜는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태고부터 모든 생물체는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호랑이와 같이 상대에게 잡혀 먹지 않는 동물들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이야. 먹어야 산다면 그 먹이를 잡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 않겠느냐*그렇게 살기 위해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도 알지 못하게 살기를 뿜어낸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동물들과 달리 먹이가 아닌 다른 방면에서도 살기를 뿜어 낼 수 있다는 것이지. 인간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동물이니까.”
 악적은 사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듯 사부의 말이 이어졌다.
 “적아.”
 “예, 사부님.”
 “넌 사람이 먹지 못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먹고 죽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고, 이곳 자적산에는 그 먹을 것이 널려 있지. 네 아둔한 머리로 깨우침을 바라는 것은 나의 바람일 뿐. 오늘부터 몸으로 깨우쳐라. 그것이 지름길일 것이야.”
 몸으로 깨우치는 것.
 악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곧 아둔함과 직결되는 것은 배고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오너라.”
 따라가기 싫었다.
 방금 전 사부의 눈에 비친 기묘한 기운, 늘 저런 기운이 일어나고 난 후에 악적은 어려움에 봉착했었고 이제는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게야, 따라오라니까!”
 사부의 고함에 악적은 힘없이 뒤를 따라야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저러할까?
 축 처진 어깨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고,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지만 사부는 결심을 꺾지 않았다.
 단순하고 무식이 철철 넘쳐흐르는 사부가 택한 방법은 굶기는 것이었고, 힘이 없는 악적은 그 말을 따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언제 어떻게 준비해 둔 곳인지 사부는 악적을 동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적아.”
 “예.”
 “내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것이다. 그동안 게을리 하지 말고 수련을 하도록 해라.”
 사부가 자리를 비운다는 소리가 악적에게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동굴에 가두고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악적 자신이 이곳에서 한 달을 거주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서, 설마 저를 여기에 두고······.”
 떨리는 목소리와 애절한 눈빛을 뿜어내는 악적이었지만, 사부의 행동은 잔인했다.
 사부의 몸이 동굴을 벗어나면서 집채만 한 바위가 동굴의 입구를 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망할 사부!’
 
 
 
 
 
 第九章 좋은 약이 효과가 있는 법!
 
 
 
 태산의 줄기를 벗어난 염우빙은 소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복우황이 자신의 제자에게 자환신단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염우빙으로서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천지조화공을 수련하고 있는 악적의 내공 수위가 가볍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자환신단은 염우빙을 찝찝하게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영약이었다.
 그 결과 염우빙은 소림사의 대환단을 훔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역대의 어느 도적도 감히 소림사의 경내에 침투할 생각을 가지지는 못했고, 복우황 또한 화산의 자환신단으로 만족한 것도 소림 안에 존재하는 절세의 고수들을 의식해서임을 알고 있는 염우빙이었다.
 하지만 염우빙은 과감했다.
 한때 신도무영(神盜無影)이라고까지 불리며 강호를 헤집어 놓았던 그가 들어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당시 황궁 무고까지 침입했던 그가 그곳에서 들고 나온 무공 서적들로 인해 동창과 금의위가 강호를 뒤집어 놓았지만 끝내 그를 찾지 못했었다.
 그런 그도 소림의 경내를 밟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 곰팡내 나는 중들에게서 훔쳐야 할 것도 없었지만 아무리 자신이라도 소림이 주는 이름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제자를 위해, 아니 자신의 자존심과 신비문의 미래를 위해 그는 과감히 소림의 경내로 침투하고 있었다.
 달도 뜨지 않아 어둠이 자욱한 소림의 경내에선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승려들의 염불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향내와 함께 들려오는 염불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심신을 안정시켜 줄 것이었지만 지금 염우빙의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발자국 소리,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움직이는 염우빙의 모습은 과거 그를 왜 신도무영이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고, 과거의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 발씩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염우빙의 눈으로 높게 치솟은 비석이 들어왔다.
 ‘계율월을 돌아가면 입설정(立雪亭), 조금만 더 나가면 탑림이 나올 것이다.’
 염우빙은 소림에서 대환단을 숨겨 놓을 만한 곳으로 우선 탑림을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예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동안의 경험이 그곳이라 말해 주었고, 염우빙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염우빙의 움직임은 빛살처럼 빨랐다. 지금 소림의 어느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렇게 염우빙은 탑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곧 탑림에 이른 염우빙은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탑림이라 하여 그 탑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이것은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수백에 이르는 탑을 일일이 다 조사해 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또한 그렇게 눈에 보이게 두었을 리는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는 어려운 일이야.’
 염우빙은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이런 방법으로 대환단을 찾아낸다는 것은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후 염우빙은 소실봉의 한 언덕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떴군.’
 촹!
 염우빙의 손이 하늘로 향하자, 곧 전서구 한 마리가 그의 손아귀에 빨려 들었다. 전서구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한 염우빙의 안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틀 후라······.’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염우빙의 곁에는 비둘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
 
 * * *
 
 소림사 내에서도 백의전(白衣殿)의 이름이 주는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백의전의 무승들은 소림에서도 주축 중 하나였고 마도의 부흥이 아니고서는 경내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백의전 전주를 맡고 있는 자보(自寶)는 막중한 임무를 맡기 위해 소림방장의 내실로 향하고 있었다.
 현 정의맹의 맹주 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남궁승은 소림방장과는 둘도 없는 사이라 할 정도로 격이 없었다.
 그런 그가 죽어 가는 손자를 위해 대환단을 부탁했고, 방주는 원로들과의 회의를 거쳐 대환단을 내주기로 결정을 지었다.
 대환단이 그리 함부로 건네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무림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의맹의 맹주였고, 그의 성정으로 이런 부탁을 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는 소림이었기에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자보입니다.”
 “들어오너라.”
 방장의 허락을 득한 자보가 방장실로 몸을 들이자, 그곳에는 장경각주이자 사숙이 되는 해수(解愁)대사와 계율원주 혜운(慧雲)대사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자보는 스승께서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소림방장과 계율원주, 그리고 장경각주가 한자리에 모여 자신을 부른 이유는 단 하나, 백의전에 보관해 두고 있는 대환단을 꺼내려 하는 것이었다.
 “제자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우선 앉아라.”
 “예.”
 “대환단 하나를 꺼낼 것이니 준비해 두어라. 오늘 저녁이면 그것을 가지러 오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자보의 얼굴에는 놀란 빛이 가득했다. 소림사의 영약이자 무림 제일의 성약이라고까지 불리는 대환단을 꺼내는 것은 자보가 백의전의 전주에 자리하고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실수가 없도록 하여라. 정의맹의 맹주인 남궁승 대협께 전해 줄 물건이니라.”
 “예.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보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환단을 꺼내기 위해 무승들에게 백의전 주위를 감시하게 하고는 홀로 백의전에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소림에서는 세 사람의 불패를 맞추어 넣어야 대환단을 꺼낼 수 있는 기관을 만들었고, 그 불패를 가지고 있는 세 명이 바로 소림방장과 계율원주, 그리고 장경각주였다.
 그것은 도난을 방지하려는 계획이었고, 그 어떤 도적이 경내에 침입한다 하더라도 그 세 명의 몸에서 불패를 훔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그만큼 안전한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또한 소림사의 중요 전각이 아닌 백의전에 그것을 감추어 둠으로써 상대의 이목을 한 번 더 속일 수 있는 것이었다.
 소림에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불패를 가지고 있는 세 명과 백의전 전주인 자보뿐이었다.
 ‘당도하셨군.’
 스승과 사숙들의 인기척이 느껴짐에 자보는 백의전 북쪽 벽에 그려져 있는 소림화상구당왕(少林和尙求唐王)의 벽화 아래를 지그시 눌렀다.
 그그긍.
 돌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흐르고 곧 벽화 아래의 바닥이 갈라졌다. 그리고 곧 솟아오른 또 다른 벽은 마치 한철로 만들어진 듯 단단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물러서라.”
 방장선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자보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세 명이 불패를 끼우자 한철로 만들어진 벽이 또 한 번 갈라지고 사각으로 만들어진 상자가 드러났다.
 상자의 뚜껑을 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량한 향이 백의전을 가득 덮었고, 방장선사는 조심스레 하나의 대환단을 꺼내어 미리 준비한 상자에 담았다.
 
 * * *
 
 사부의 억지로 인해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갇힌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한 달 내내 천지조화공을 운기했지만 그것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는 없었기에 악적의 눈빛은 점점 야수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
 광대뼈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그때가 되었을 때 악적은 동굴로 찾아든 사부를 당장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나아졌군.’
 내심 흐뭇해 하며 악적을 바라본 염우빙이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사부의 첫 인사에 심하게 안면을 구기는 악적의 입에서 반가운 말이 튀어나올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사부 같으면 잘 지내겠습니까?”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쫑알대지 말고 이거나 먹어라.”
 품에서 환단 하나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밀랍을 벗기자, 칙칙하던 동굴에 순식간에 약향이 감돌았다.
 ‘설마 먹고 죽는 것이야 주겠어.’
 사부에게 건네받은 단환을 입에 넣은 악적.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한순간에 온몸이 시원해진다는 느낌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원한 느낌은 사라지고 단전을 불로 태우는 듯한 열기가 치솟았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염우빙이 악적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어서 운기를 해라!”
 “어어*예······.”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악적이 운기에 들어가자, 염우빙의 몸에서도 기운이 일었다.
 “처음이라 어려울 게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 버린다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 절대 의식을 잃지 말거라!”
 사부의 전음이 악적의 귀를 파고들며 정신을 일깨웠지만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놈, 정신 차리라 하지 않았느냐!’
 일갈과 함께 악적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하는 염우빙.
 두 시진 동안 이어진 추궁과혈로 인해 염우빙의 얼굴에는 적지 않은 피곤함이 감돌았다.
 그에 반해 악적은 온몸의 찌꺼기가 빠져나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클클클. 복가, 이놈아!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크하하하핫!”
 앙천광소.
 염우빙의 터질 듯한 웃음소리가 자적산을 가득 울렸다.
 
 
 
 
 
 第十章 사부의 선물
 
 
 
 그로부터 닷새 후 잠에서 깨어난 악적.
 자신의 몸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음을 느꼈다.
 평소와 달리 날듯이 가벼워진 몸이었고, 몸속에선 뭔가 울렁거리는 것이 그 무엇도 한주먹에 날려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잤지*두세 시진은 잔 것도 같은데?’
 두세 시진이 지났다면 해가 지고 어두워져야 하는데 아침 햇살이 방문으로 밀려드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악적이었다.
 “적아!”
 자신이 깨어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바닥도 밟기 전에 들리는 사부의 목소리에 악적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침이니 밥 먹자는 소리겠지?’
 속으로 투덜대며 초옥을 벗어나는 악적의 귀로 짜증이 담긴 사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적아!”
 “예, 갑니다요!”
 대답이 늦었다는 핑계로 무슨 치도곤을 당할지 모르기에 악적은 급히 사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사부가 마구 인상을 쓰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더욱 의심스러웠지만, 굳이 겉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아주 늘어지게 자더구나.”
 “제가 며칠이나 잤습니까?”
 “아마 닷새는 잤지?”
 “그게 무슨 말도 아닌 소리이십니까*두세 시진 정도를 잔 것 같은데요.”
 ‘오호! 네놈이 약발 한번 제대로 받았구나.’
 “클클, 네놈처럼 아둔한 놈이 무엇을 알겠느냐. 그건 그렇고 한 달 동안 동굴의 수련은 어떠했느냐?”
 한 달간의 수련, 악적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의 시간이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별 효과가 없었구나. 두어 달 더 해 보아야겠군.”
 “아닙니다! 아주 치명적으로 지대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악적의 말에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염우빙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클클, 그럴 수밖에. 이 사부가 다 너를 위해 그리한 것이 아니더냐.”
 사부의 웃음에 악적의 눈초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를 위해서 동굴에 한 달씩이나 처박아 둔다, 이 말이지?’
 내심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 효과가 탁월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둠 속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에 천지조화공의 운기에 더욱 치중할 수가 있었고, 영약까지 흡수했으니 그 효과는 지금 악적의 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가까이 오거라.”
 “예.”
 악적이 다가가자 맥문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은 염우빙은 자신의 내력 한 줄기를 악적의 내부로 밀어 넣었다.
 “오호!”
 염우빙의 눈초리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침투함과 동시에 자신의 내력을 흡수해 버리는 악적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악적이 익힌 천지조화공은 다른 내력과 반발하지 않고 흡수하는 것이니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염우빙이 놀란 것은 그 속도였다.
 ‘역시 효과가 대단하군. 이미 모두 흡수를 했구나.’
 염우빙은 악적을 향해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품에서 밀랍에 싸인 환단을 꺼냈다.
 “이것을 먹고 운기를 해라.”
 “예.”
 악적은 스스럼없이 대답하고는 환단을 삼켰다.
 지난번 동굴에서 사부가 먹인 환단이 이것이었고, 그것을 복용하고 난 후 그 효과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복우황, 이놈아! 자환신단 두 알 정도로 감히······. 클클클.’
 운기를 하고 있는 제자를 보고 즐거운 미소를 짓는 염우빙이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제자의 운기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 * *
 
 자적산에도 겨울이 왔다.
 세상을 얼려 버릴 듯한 추위였지만 악적은 그 추위를 작년만큼 느끼지는 않았고, 그것이 내력의 상승에 의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고생 끝에 낙이라 했던가?
 그동안 사부가 가르쳐 준 천지조화공은 악적의 몸에 활기가 넘치게 만들었고, 악적은 사 년 동안 행해 왔던 사부의 만행을 용서하기로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다.
 “적아!”
 “예.”
 의외의 일이었다. 사부가 한 번 불러 대답을 해 본 적이 없는 악적은 공손한 대답과 함께 사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부의 곁에 당도한 악적의 눈에 발자국이 들어왔다.
 아홉 개의 발자국.
 그리고 그 옆으로 세 개의 발자국.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진 바닥을 보며 악적은 사부가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알아차렸다.
 ‘보법이야, 보법.’
 한눈에 사부의 의도를 알아본 악적은 이제 무공다운 무공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말이 살안공이지, 째려보는 것을 배워서 어디에 쓸 것인가*아무리 투안을 배우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라지만 악적은 그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다.
 대장부가 겨우 눈싸움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기는 것이었다.
 “보이지?”
 사부가 발자국을 가리키자, 악적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확실히 보입니다.”
 “물론 어떤 수련을 하려 하는지는 알 것이고.”
 “그렇습니다.”
 “악적아.”
 “예.”
 “내가 오랫동안 너에게 호흡법과 체력단련을 시킨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다.”
 “사부님, 제자는 사부님의 그 깊은 뜻을 이미 확실하고도 완벽하게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활기찬 악적의 대답에 염우빙은 대견하다는 눈빛을 자아냈다. 실로 오랜만에 두 사제의 관계가 사제 간다워 보였고 이제야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씩 신뢰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장하구나, 나의 제자! 내 오늘 너에게 진정한 보법과 경공을 가르쳐 주마.”
 “제자, 열심히 배우고 수련하겠습니다!”
 “허허, 그래야지. 우선 저것을 보거라.”
 가장 앞자리에 찍힌 발자국은 다음의 발자국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한 발로 도약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달려와 뛴다면 닿지 못할 거리는 분명 아니었다.
 살안공을 터득하기 전 늑대의 추적에도 살아 나온 악적이 저 정도의 거리를 뛰지 못한다면 육 년간의 체력 단련은 왜 했단 말인가?
 “그래, 할 수 있겠느냐?”
 “예,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역시 장한 내 제자야. 어서 해 보거라.”
 사부의 명에 악적은 깊이 읍을 하고는 첫 번째 발자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빠른 속도.
 운신법을 익히지 않고 저 정도의 빠르기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도 그동안의 수련 덕분이었다.
 타타탁!
 바닥을 박차며 질주한 악적이 찍혀 있는 발자국을 밟고 허공으로 도약하려는 순간!
 “그 자세!”
 사부의 목소리에 급히 몸을 멈춘 악적은 당연히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사부님, 어찌?”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악적이 의문을 머금고 사부에게 물었다.
 “방금 전 그 자세야. 일학충천(一鶴衝天)!”
 “일학충천이라니요?”
 “한 마리의 학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지.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도약하는 그 자세가 네가 배울 경공의 기본자세지.”
 물론 이해가 갈 법도 한 일이었다.
 무엇이든지 기초가 중요함을 이미 겪어 본 악적이 아닌가?
 허공으로 떠오를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높이와 거리, 빠르기까지 달라질 것이기에 악적은 사부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자세를 제대로 갖추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허공을 밟은 후 초상비와 같은 절정의 경공을 펼친다면 그 얼마나 멋있는가?
 “한 번의 도약이 얼마의 힘을 가지는가에 따라 경공은 그 빠르기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자세가 안정될 때까지 수련을 해라.”
 “사부님, 워낙 순간적인 일이라······.”
 말끝을 흐리는 악적을 보고 염우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천고의 기재라 하더라도 한 번 뛰어 보고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확한 자세를 보여 주지.”
 사부는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소위 일학충천이라 말하는 그 자세를 보여 주었다.
 ‘저게 일학충천?’
 악적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양팔을 벌리고 한쪽 발을 허공으로 치켜든 후 남은 발마저도 뒤꿈치를 들어 발가락 힘으로만 유지하는 저 자세가 안정이 되어야 하다니 절대 쉽지 않아 보였다.
 잠시 시범을 보이는 사부의 자세 또한 조금은 흔들리는 듯했는데, 저 자세가 어찌 안정된다는 말인가?
 그것도 몸이 앞으로 기울어 있기까지 한 저 자세가······.
 악적은 다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머릿속으로 이해했던 사실들이 사부의 자세를 보는 순간 다시 엉켜 버렸다.
 “진정이십니까?”
 딱!
 악적의 머리에서 박이 깨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윽!”
 “이놈이 감히 사부의 가르침에 토를 다는 것이냐! 고얀 놈! 배우기 싫다면 말거라!”
 초강수였다.
 툭 하면 배우지 말라느니 집으로 돌아가라느니 강수를 던지는 사부였고, 그 사부의 말에 꼼짝도 못하는 것이 마치 악적에게 정해진 운명인 것 같았다.
 악적이 절대 산을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부는 물론 이번 일을 트집으로 또다시 아궁이 앞으로 악적을 밀어 넣을 계략임에 분명했다.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찌 저 자세가 안정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서······.”
 “그 입 다물고 수련을 해라. 수련을 해서 안 되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냐. 수련을 하다 보면 너도 모르게 자세가 안정될 것이야. 그것이 바로 수련의 힘이라는 것은 너도 익히 알지 않느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사부의 뒷모습은 마치 사탄과 악마를 뒤섞어 놓은 듯했다.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사부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악적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가까스로 감췄다.
 “악적아, 모든 무공의 기본은 정확한 자세이니라. 가부좌를 틀 때도 그 내력의 운기법에 맞는 자세가 있거늘, 넌 어찌 천하를 아래로 내려다볼 경공인 주구행을 그리 쉽게 익히려 한단 말이냐. 비록 지금은 힘들겠지만 익히고 난 후에는 사부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것이야.”
 ‘젠장! 그 뜻이 너무 깊어 이 제자 익사하겠습니다.’
 
 * * *
 
 ‘무공 서적이니 가르침이니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육신이 스스로 느낄 때까지 수련을 통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무공이거늘. 수련 앞에서는 현묘한 무공도 각성도 모두 다 부질없는 것이야.’
 
 인고를 거치는 수련이라면 되지 않는 게 없다는 사부의 무식한 명에 충실한 악적이 자세를 안정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나흘도 채 되지 않았다.
 육 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처음으로 무공다운 무공을 배우는 이때에 악적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무공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악적을 또 한 번 기가 막히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학충천이라는 아름다운 초식명을 가진 경공법의 진실한 이름은 어이가 없게도 주구행(走狗行)이라는 경공법이었다.
 사냥개가 달리는 모습을 본떠 만든 주구행에 일학충천이 무엇이란 말인가?
 초식명이야 어떻든 관여치 않을 악적이었지만, 주구행은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악적아.”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한 사부가 나지막하게 악적을 불렀다.
 “예.”
 “왜, 주구행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사부님의 말씀처럼 천하를 오시할 경공에 주구행이라는 명칭이 좀 어색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악적의 대답에 염우빙이 안타깝다는 눈빛을 자아냈다.
 “쯧쯧, 아직 어리구나. 그 명칭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냐. 경공은 단지 한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물론 빠르면 되지요?”
 “그럼 보법은?”
 “상대의 시선을 흔들 만큼 기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호! 네가 날로 이해력이 풍부해지는구나. 그럼 이제부터 주구행을 응용한 분류행을 가르쳐 주마.”
 사부의 말에 악적이 난처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사부님, 응용이라니요*저는 아직 한 발자국도 움직여 본 적이 없습니다.”
 일학충천인지 뭔지 그 자세를 안정시키라고 해서 나흘 동안 그것만 죽어라고 연습했고, 두 번째 발자국은 한 번 밟아 본 적도 없는 악적이었다.
 그런데 응용이라니?
 악적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다니?”
 “사부, 저는 나흘 동안 일학충천만 수련했습니다.”
 “나흘 동안이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능청을 떨고 있는 염우빙이 마치 몰랐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예.”
 “너 정말 이상하구나. 그 자세가 그렇게 어렵더냐*나흘 동안이나 한 자세만 연습을 하게*어디 한번 해 보거라.”
 나흘이면 짧은 시간이었다.
 과연 어느 누가 나흘 안에 그 어려운 자세를 안정감 있게 펼쳐 낼 수 있단 말인가?
 악적은 자신 있게 주구행의 첫 움직임인 일학충천의 모습을 펼쳐 보였다.
 “흠······.”
 염우빙은 나지막하게 침음성을 흘려 냈고, 악적은 속으로 자신의 대단함을 사부가 인정해 주길 바랐다.
 “과연 대단하긴 하구나.”
 악적은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사부의 말에 속으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시범을 보여 주던 사부 또한 일학충천의 자세에서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순수 근육의 힘만으로 그 자세를 취할 수가 있는 것이지?”
 사부의 말투에서 묘한 불안감을 느낀 악적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한 번 사부에게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몸을 스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불길한 기운에 악적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니, 용천혈에 내력을 주입하면 간단한 일임에 어찌 순수 근육의 힘만으로 나흘 동안이나 그것을 죽어라 연습했는지 그것이 조금 이상하구나. 근육의 힘만으로 그렇게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부의 입가에 드리워지는 비릿한 미소를 보는 악적은 도대체 이 사부가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칠 마음은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 * *
 
 ‘아마 그럴 거야.’
 사부는 단전에서 일어나는 내력의 움직임과 그 사용의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에게 그리했다는 것으로 악적은 결론을 내렸다.
 용천혈로의 진기 주입.
 열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분명히 낫다는 것으로 그냥 그렇게 인정해야 했다.
 지금 반발을 한다고 한들 마땅히 자신이 조치할 어떤 방법이 없었으니 어떻게 보면 지금 악적의 판단이 현명하다 할 수 있었다.
 또한 얼마 전부터 아침이 되면 사부가 자신에게 환약을 먹이고 내력의 운기 행공까지 도와주는 것은 이제 내기의 흐름에 대한 본격적인 지도를 겸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확정한 악적이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한결 편하기도 한 것이었다.
 ‘어찌했든 운신법에서 내력의 운용은 확실히 알았잖아.’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악적이었고, 비록 시작은 불미스러웠지만 주구행과 분류행은 진정으로 뛰어난 보법이자 경공임을 인정했다.
 “제자야!”
 사부의 부름에 악적은 오늘 사부의 기분이 아주 좋음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제자라고 부르는 날, 최소한 그날 하루는 편안하게 보낸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악적이었다.
 ‘아침부터 탈의도경을 탐독하셨나?’
 “뭘 생각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네가 요즘 이 사부의 절정 무공에 아주 심취해 있구나. 아주 좋은 현상이야.”
 “그렇사옵니다. 제자 사부님의 전지전능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절대 무공에 아주 심취해 있습니다.”
 “크하하핫! 역시 내 제자야. 암, 그렇고말고!”
 “하하하!”
 사부의 웃음에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는 악적이었고, 누가 곁에 있어 사제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머리 위에 손가락을 올려 원을 그릴 것이었다.
 다행히 이곳 자적산에는 이 사제만이 살고 있었고,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할 사람은 없었다.
 한참 동안 웃음을 그치지 않던 염우빙이 웃음을 그치고는 진지하게 악적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사부가 혼신의 힘을 들여 창안해 낸 진정한 보법을 하나 가르쳐 주마.”
 ‘또 보법?’
 이제 병기를 손에 쥐고 무공을 배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오늘 사부의 모습은 꼭 그렇게 할 것만 같았으나 보법이라는 말에 실망감이 드는 악적이었다.
 하지만 악적은 분위기 파악에 있어서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사부의 기분을 깬다면 조금 전의 웃음이 비명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악적은 마음과는 전혀 달리 감동의 눈빛을 자아내며 사부에게 고개를 아주 깊이 팍 숙였다.
 무당의 무공 중 마음을 둘로 나눈다는 절정의 무공이 있어도 그 수련이 지나치게 어려워 익히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악적은 사부와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비슷한 것을 익히고 있었다.
 “우선 이것은 사부가 강호를 주유할 때 자주 사용하던 무공이며 그 효과를 알게 된다면 아마 크게 놀랄 것이다. 크하하하핫!”
 ‘또 시작이군.’
 하루 이틀 들은 소리가 아니라 이제는 무덤덤한 악적은 사부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오냐! 잘 들어라! 만약 네가 수백 명의 무인과 조우를 했다고 하자. 상대의 무공이 가볍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달아나야지요.”
 악적의 현실적인 대답이었고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염우빙이었다. 과연 다른 사제지간에서도 이러한 대화가 오고가는지 궁금증이 일 정도였지만 이 둘의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그렇지. 꼭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다 보면 그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럴 때 이 무공! 잔상보(殘像步)를 사용해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명칭이었다. 뭔가 대단할 것 같은 명칭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악적의 눈에 사부의 신형이 수십 개로 갈라져 팔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중 어떤 것이 사부의 본모습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것은 악적에게 낯익은 무공이었다.
 “보았느냐?”
 “예, 하지만 그것이 분류행과 뭐가 다른지······.”
 말끝을 흐리는 악적을 쏘아보는 염우빙의 눈초리가 일그러졌다.
 “아둔한 놈! 신형이 환영을 일으킨다고 다 같은 것이더냐. 분류행과 주구행은 공격형 보법! 그리고 잔상보는 달아날 때 사용하는 것이다. 분류행이 환영을 일으켜 상대에게 집중된다면 잔상보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감조차도 잡지 못하게 하는 보법이니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악적은 사부의 말을 인정하는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렇군요. 제자가 아둔하여 몰라보았습니다.”
 “공격은 주구행과 분류행, 달아날 때는 잔상보! 이것만 하더라도 과거 중원에서 경공의 대가로 알려진 섬전무영도 바로 고개를 처박을 것이야! 음하하하핫!”
 악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는 저 오만한 자신감!
 사부의 내부 장기 중에는 분명 자신감만 따로 보관하는 특이한 장기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의 무공을 가르칠 때마다 저러한 소리를 하겠는가?
 그것도 무공을 가르치기 전 금쪽같은 반 시진이라는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늘 반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악적은 또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사부가 무공에 대한 자신감을 자신에게 심어 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시키며 이겨 내고 있었다.
 “사부님.”
 “오냐.”
 “사부님께서는 유난히 많은 경공을 창안하셨군요.”
 악적의 물음에 염우빙의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유난히 많은 경공’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제자에게 내보일 리 없는 염우빙은 짐짓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경공과 보법은 모든 무공의 기본이야. 그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지. 또한 그 사용에 따라 세분화해야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법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기본!
 그것은 악적이 인정하는 사부의 말 중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는 단어였다.
 “그렇군요. 역시 사부님은 대단하십니다. 이 제자, 사부님의 제자로 몸을 들인 것이 실로 영광입니다.”
 “오냐. 오늘은 심히 피곤하구나. 너 혼자 수련을 해라.”
 “예.”
 악적을 뒤로하고 몸을 돌리는 염우빙의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아 보였다.
 
 
 
 
 
 第十一章 천파객과 소면선풍랑
 
 
 
 크르릉.
 동굴의 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곧 그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다름 아닌 염우빙이었고, 그는 어두운 동굴을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화후에 달한 내력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그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었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어려웠다. 염우빙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거침없이 걷는 듯했지만, 어떤 장애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방향을 바꾸어 걷는다는 것은 이곳에 모종의 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동굴의 끝.
 분명히 막혀 있는 듯했지만 염우빙의 손이 들리자 동굴의 벽은 연기 꺼지듯 사라지고 환한 빛이 쏘아져 나왔다.
 그리고 빛과 함께 나타나는 광경.
 만일 무림에 몸담은 이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심장이 멈추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호에 존재하는 신병이기와 기서들은 모두 이곳에 모아 놓은 듯했고, 그 하나하나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염우빙의 눈빛은 잔잔했다. 자신이 직접 모았고 이미 수없이 봐 온 물건들이라 놀랄 일이 없는 것이었다.
 ‘보자, 어느 놈이 좋을까?’
 염우빙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금사보의(金絲寶衣)였다.
 과거 신강 천명문에 잠시 들렀을 시 자신도 모르게 빌려 온 물건이었지만, 이후 그곳으로 향할 일이 없어 아직 돌려주지 못한 물건이었다.
 물론 천명문에서는 금사보의가 사라지고 한바탕 난리를 치렀지만, 그것은 염우빙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저건 가벼워.’
 가볍다니?
 금사보의의 무게가 삼백 근은 족히 넘을 정도였음에 그것을 가볍다고 하는 염우빙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 마도 문파 중의 하나였던 환영문의 철잠흑의(鐵蠶黑衣)도 염우빙의 눈을 스쳐 갔고, 그의 눈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당대의 신병이기라고 불리고도 남을 물건들이 걸려 있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니?
 아미의 신물 중 하나인 불마검(佛魔劍)을 비롯해 과거 천무신제의 화룡쌍검(火龍雙劍)과 궁제라 불렸던 단목유의 황룡궁(黃龍弓)까지 자리하고 있었지만 염우빙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신병이기들을 살펴보던 염우빙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흠, 저게 좋겠어.”
 무엇을 생각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염우빙은 점찍은 신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누가 일각이 여삼추라고 했던가?
 악적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세월이 유수와 같았다.
 사부를 따라 이곳 자적산에 오르고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은 악적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누구와 손을 섞어 본 적은 없었지만 악적은 자신의 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적아!”
 사부의 목소리에 악적의 눈이 기묘한 이채를 만들어 냈다. 악적은 가끔 자신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사라져 해가 중천에 떠야 돌아오는 사부를 아주 깊이 의심하곤 했었다.
 혼자서 아랫마을에 들러 탈의도경 연결편을 사기 위해 다녀온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아! 이놈아!”
 이어지는 사부의 목소리에 악적은 곧 대답을 했다.
 “예!”
 “이놈! 사부가 부르면 빨리 오지 않고 뭣 하는 것이냐!”
 “갑니다요, 가요!”
 악적은 급히 초옥으로 달려갔다.
 이미 주구행이 몸에 익었는지 악적의 모습은 눈으로 가려내기 쉽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염우빙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성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더욱 좋은 것이었다.
 ‘너를 보니 내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구나.’
 염우빙은 그저 자신의 무공을 전수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 제자를 들인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로 그 성취가 깊어만 가는 제자를 보니 숨겨 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제자를 통해 그 한을 풀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여기 왔습니다.”
 악적이 당도하자 염우빙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놈아! 한 번 부르면 재빨리 달려오지 못하겠느냐?”
 요즘 들어 부쩍 잔소리가 는 사부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 악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반항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주구행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사부의 경공에 비하면 만월 아래 반딧불이요, 뒷간에서 방귀 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달아나다 잡히고 난 후의 처절한 응징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듣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주둥이에 기름을 둘렀구나.”
 “진심이옵니다, 사! 부! 님! 어찌 이 제자가 사부에게······.”
 “그만, 되었다.”
 염우빙은 알고 있었다.
 제자가 부쩍 말이 많아지면 자신의 머리가 서서히 아파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악적의 말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통했다는 생각에 악적이 속으로 웃음을 터뜨린 후 사부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찌 찾으셨습니까?”
 “내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선물!
 자적산에 오르고 강산이 바뀌어 가는 시간 동안 사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고는 코딱지만 한 것도 없었다.
 사정이 그러니 선물이라는 사부의 말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선물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내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였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등짝을 마구 긁고 있었다.
 이미 악적의 눈에서 의아함은 사라지고 진한 의심의 빛이 머물고 있음을 염우빙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눈빛이 왜 그러냐?”
 “아닙니다. 너무 황망해서······.”
 “갈! 사부가 제자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흔히 있는 일. 무엇이 황망하단 말이냐!”
 ‘흔히*사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다니 얼굴에 악어가죽을 세 겹으로 깔지 않고서는······.’
 악적의 생각은 곧 사부의 손에서 떨어지는 쇳덩어리로 인해 끊어졌다.
 쿠쿵!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면 땅바닥이 비명을 터뜨렸고 주위로는 먼지까지 휘날렸다.
 ‘설마!’
 악적은 쇳덩어리를 보는 순간 용도를 이미 알 수가 있었다.
 사부가 가져다 놓은 위인전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쇳덩이는 소위 무게를 늘려 경공의 경지를 높여 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무식하게 두껍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한 악적이었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설마······ 저것을 몸에 지니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악적의 말에 염우빙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고, 그 미소는 여실히 악적의 눈동자에 각인되었다.
 ‘저 사악한 미소! 불길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냐?”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사부님.”
 “오늘 이 사부를 상당히 자주 부르는구나.”
 염우빙의 태도에 악적은 지금 자신이 위기에 봉착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껏 이런 상황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그때마다 특유의 재치로 험한 상황을 벗어난 악적이었기에 지금도 그의 머릿속은 팽이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사부님의 깊은 뜻, 이 제자가 어찌 모르겠습니까*과거 대단한 절대고수들이 쇠로 만든 환을 차고 무공을 익혔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알면 됐구나.”
 “하지만 제자, 그 뜻만으로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은 수련 방법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당대의 무공 수련과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제자의 생각입니다.”
 “구시대의 유물?”
 제자의 말이 상당히 귀에 거슬릴 법도 했지만 염우빙의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고, 악적은 자신의 일침이 사부에게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저 환보다 상당히 무거우면서도 얇은 재질로 제련을 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하긴 네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구나. 내 생각이 짧았어.”
 “사부,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부님이 제자를 사랑하는 그 깊은 뜻만 하더라도 제자 가슴 깊이, 아주 깊이 각인해 두었습니다.”
 염우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너의 마음을 알겠다. 사실 내가 봐도 저 환을 찬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야. 구시대의 유물이지.”
 악적은 모든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제자야.”
 “예, 사부님!”
 “이것을 한번 보거라.”
 사부의 품에서 나온 물건은 눈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투명했다. 더 이상 가늘게 만들지 못할 정도로 뽑아낸 실로 그물처럼 엮어 놓은 것이 탄력 또한 상당한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귀영갑(鬼影鉀)이라고 하지. 과거 이 사부가 강호를 종횡할 때 마도 놈을 제압하고 빼앗은, 아니 습득한 것이다.”
 진정 선물다운 선물이었다.
 한눈에도 신병이기임에 틀림없는 물건이었고, 악적은 보통 저러한 신병이기들이 가진 효용에 대해서도 익히 공부한 적이 있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이 제자, 사부님의 깊은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악적이 제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였지만, 염우빙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너에게 주려고 했느니라. 단, 시일이 좀 더 흐른 후에 전해 주려 했건만······.”
 ‘그냥 말 나온 참에 지금 주지······.’
 말을 끌기 시작하는 사부의 모습에 악적은 사부가 과연 줄 생각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악적의 생각을 읽은 것인가?
 “넌 나의 제자, 지금 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네가 진정 귀영갑의 효용을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사부, 이미 깜짝 놀랐습니다.’
 어젯밤 무슨 꿈을 꾸었기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는지 악적은 그저 기쁘기만 했고, 평소보다 수십 배는 큰 목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예! 사! 부! 님!”
 “그래, 이제 네가 이 귀영갑을 착용해라. 어떤 병기도 이 귀영갑을 뚫을 수는 없느니, 네가 귀영갑을 얻게 된 것은 날개를 달게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감사드립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였다.
 양팔에 착용하면 도검불침의 경지가 되니 그야말로 완벽한 신병이었다.
 악적은 찢어지는 입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사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내 제자의 팔에 직접 채워 주고 싶구나.”
 “옙!”
 크나큰 대답과 함께 악적이 양팔을 내밀었다.
 ‘왜 저리 손을 떨고 계시지*그렇게 아까운가*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주지 않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 크크크.’
 악적은 그런 생각을 가지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사부로 인해 악적의 팔에 귀영갑이 닿자, 마치 뱀이 먹이를 감싸듯 휘감아 버리는 귀영갑은 과연 신병이기였다. 사부의 말과 같이 드디어 날개를 다는 순간이었다.
 “커컥!”
 악적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 냈다.
 팔이 떨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어깨로부터 전해져 오는 고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가는 실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귀영갑의 무게가 어떻게 어깨를 탈골시킬 정도로 무겁단 말인가?
 방금 전 왜 사부가 팔을 떨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악적이 사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사악함 속에 즐거움이 가득한 눈빛, 그 눈빛을 대하는 순간 악적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다.
 ‘당했다. 또 당했어!’
 악적이 팔을 부르르 떨며 안면을 구기자, 염우빙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악적은 대답 대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력을 끌어올려 두 팔을 들어 보려 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은 물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이 들었다.
 “사부님······.”
 “너무나 감동을 받았구나. 그렇다고 바닥에 주저앉을 것까지야 무에 있느냐*이제 그만 일어나라.”
 “지금 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어서 풀어 주십시오.”
 “갈! 이놈이 사부의 선물을 거부한단 말이냐*이런 배은망덕한 놈!”
 “배은망덕이고 뭐고 일단 풀어 주십시오. 무게로 인해 움직일 수조차 없으니 무공 수련은 어찌하란 말입니까?”
 “오호! 네가 무공 수련을 걱정하는 것이었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이것 또한 너에게 좋은 수련이 될 것이다. 귀영갑과 같은 신병이기는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귀영갑도 마찬가지, 귀영갑을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구결이 존재하지. 그것도 가까운 시일 내에 가르쳐 주마.”
 악적이 눈을 부릅떴다.
 ‘가까운 시일이라니?’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귀영갑의 무게로 인해 몸도 일으키기 힘든 악적에게 그것은 마귀의 속삭임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사부님!”
 악적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염우빙이 아니었다.
 “우선 네 몸에 적응하도록 해라. 흐흐흐.”
 사악한 웃음을 흘려 내며 어디론가 발길을 옮기는 사부의 등에 저주를 퍼부어 보는 악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현실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정말······. 어이구, 내가 미쳐!”
 
 * * *
 
 자적산 산등성이를 걷고 있는 악적은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았다. 살과 하나가 된 듯 보이지도 않는 귀영갑은 실로 신병이기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처음에 그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신병이고 뭐고 벗을 방법만 알았더라면 당장에라도 벗어 버렸을 것이었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걸음을 걷기도 힘들게 했던 귀영갑이었지만, 세월은 그 무게를 이겨 내게 해 주었고, 이제는 자신의 팔에 귀영갑이 채워져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익숙해졌다.
 오늘도 연혼애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악적에게 특이하게 생긴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마치 뱀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고, 몸에 일어난 돌기로 보아 뱀이 아님에는 확실했다. 또한 손바닥에 올려놓을 만큼 조그만 뱀은 본 적도 없는 악적이었다.
 사뭇 신기하다는 생각에 악적은 허리를 숙이고는 그놈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쭈! 발도 달렸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발이 네 개.
 악적은 더욱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이나 놈을 바라보던 악적이 검지와 약지를 이용해 등을 잡으려 하자, 놈은 작은 두 눈을 빛내더니 몸에서 붉은빛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오호, 이것 봐라!”
 눈을 빛내고는 놈의 등을 두 손가락으로 잡는 순간, 악적은 벼락에 맞은 듯 강한 충격을 느꼈다.
 “커컥!”
 온몸을 강타하는 전율, 비 오는 날 번개를 두어 번 맞아도 이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악적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그놈은 순식간에 악적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잠시 후 진정한 악적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만일 자신이 내력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었다면 이미 절명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놈! 담에 한번 걸려 봐. 다리를 하나씩 잘라 내 버릴 것이니까.’
 놈의 정체를 궁금해 하며 초옥으로 돌아오자 사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그럼 살안을 펼쳐 보거라.”
 사부의 명에 악적이 내력을 일으켜 살기를 뿜어냈다.
 단숨에 상대를 얼려 버릴 듯한 기운이 몰아치는 모습에 염우빙이 내심 감탄을 자아냈다.
 ‘오호, 벌써!’
 살안을 수련한 지 일 년, 길지 않은 시간의 수련으로 이 정도의 경지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염우빙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염우빙은 악적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쓸 만해졌어.”
 사부의 말에 악적은 살안의 기운을 거두었다.
 사실 악적의 살안에는 문제가 있었다.
 짐승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사부에게 살안을 펼치고 나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원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사부가 내력을 끌어올려 대응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부는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음이 분명했다.
 “적아, 굳이 손을 쓰지 않고 그 기세만으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살안이다. 호랑이가 먹이를 사냥할 때 뿜어내는 기운으로 이미 먹이들은 의지를 상실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살기야. 살기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고 자신을 더욱 커 보이게 만들지만, 그 살안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상대의 살기를 그냥 흘려버리는 자들이지. 일류에 이르거나 상대보다 강하다면 살기를 흘려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야.”
 ‘살기를 흘려버린다*그래서 사부에게 통하지 않았구나.’
 머릿속이 열리는 듯한 악적에게 사부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살안의 경지가 지나면 활안의 경지에 이른다. 살안이 그 기운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반대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경지가 바로 활안이지. 활안의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면 넌 이미 투안을 가진 것이야. 최소한 활안은 아니더라도 투안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넌 검을 잡을 수 있다.”
 ‘투안!’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가 자신의 경지를 투안으로 읽어 들이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성정을 가진 악적은 사부의 명과 같이 투안을 몸에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살안과 다른 점이 적지 않았지만 살안의 경지에 어느 정도 이르렀기에 투안이라는 경지를 넘볼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악적이었다.
 “네 수련이 깊어진다면 종내에는 검을 중점으로 배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보법과 안공을 착실히 다지지 못한다면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름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럼 한번 달려 보자. 네 주구행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 알아야 하니.”
 “예.”
 대답과 동시에 악적의 몸이 튕겨져 나가듯 달려 나갔고, 그 모습을 보는 염우빙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악적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그 미소는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과연!’
 달려가는 제자의 뒷모습에서 과거 자신이 중원 강호를 주유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염우빙이었다.
 ‘복우황, 이놈! 네놈의 똥 씹은 얼굴이 훤히 보인다. 내 제자가 남은 다섯 알을 마저 흡수하면······. 크크!’
 
 * * *
 
 강호무림이 뒤집어졌다.
 소림사의 대환단이, 그것도 스물세 알씩이나 몽땅 없어지는 사건은 강호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 한 알만 하더라도 이루 가치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데, 스물세 알이 한꺼번에 없어졌으니 모든 무림인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소림사에서는 이미 흉수의 뒤를 쫓기 위해 백팔무승이 산문을 뛰쳐나왔으며 정의맹에서도 정의사대의 대원들과 대주들이 하남성을 기점으로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지금 비록 마도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대환단 스물세 알이 마도로 흘러들어 갔다고 본다면 앞으로 무림에 어떤 혼란이 빚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으로 그동안 속내를 감추고 있었던 화산도 자환신단 두 알을 분실한 것을 정의맹에 알려 왔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정의맹이 숨어 있는 마도의 무리들을 하나씩 잡아내고 있을 때, 강호에서는 또 다른 소문이 흘렀다.
 삼십 년 전 모습을 감춘 신도무영과 천서도군(天鼠盜君)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과거 경쟁적으로 도둑질을 일삼던 이 두 명의 도둑은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어, 강호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무쌍도제(無雙盜帝)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황궁의 무고가 털렸다는 소식과 함께 두 사람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 후 그들의 행적은 과거보다 더욱 묘연했다.
 일각에서는 무쌍도제가 황궁과 당시 정의맹 고수들의 추적이 두려워 새외로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는 소식이었다.
 소림사와 정의맹에서도 그 추측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신비한 도적이라는 이 두 명 중의 하나가 아니고서는 남궁 맹주의 서신으로 위장하여 대환단의 위치를 파악하고 세 개의 불패도 없이 대환단을 가지고 사라질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第十二章 사부의 과거
 
 
 
 악적이 이곳 자적산으로 사부를 찾아온 사람들을 본 적은 사부의 지인인 복우황을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치 빚어 놓은 조각처럼 헌앙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는 스스로를 소면선풍랑(笑面扇風郞)이라 소개했고, 악적에게는 자신을 사숙이라 부르도록 명했다.
 그리고 곧 소면선풍랑 임낙안의 말을 가로막고 끼어든 또 한 명의 중년 사내가 악적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라고?”
 “악적입니다.”
 “크하하하하하핫! 그 이름 한번 그럴듯하구나.”
 악적의 이름을 듣고 한참이나 광소를 터뜨리던 사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멈추고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악적아.”
 “예.”
 “천파객이라고 들어 보았더냐?”
 “아니요.”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악적의 모습에 사내의 눈이 일그러졌다.
 강호에 있어 자신의 별호를 모르는 이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일이었는데 그것도 대형의 제자가 자신의 별호를 모른다는 것에 성질이 들끓고 있는 것이었다.
 “네 사부께서 이야기해 주지 않았더냐?”
 악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전 사숙이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흠······.”
 천파객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적아, 이제라도 알면 되느니라. 너의 훌륭한 사숙이자 무림 강호의 별이라 할 수 있는 천파객 유달산이 바로 본인이니라. 향후 어디를 가더라도 본인의 사제라 하면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았느냐?”
 스스로 사숙이라 일컫는 천파객의 자애로운 목소리였지만, 악적은 왠지 사숙과 친해져서 유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일었다. 하지만 사부를 대하듯이 마음을 분리하여 대답만큼은 그리하지 않았다.
 “예.”
 “사질?”
 “예.”
 “사······질.”
 “예.”
 유달산은 자신에게 사질이 생겼다는 것이 신기한지 자꾸만 악적을 불렀다.
 그에 반해 악적은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지만 감히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대의 성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사부와 관계가 있는 이들이라면 사부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최근에 인근에서 요렇게 생긴 놈을 보지 못했나?”
 손짓을 해 가면서 형태를 그리는 유달산의 행동은 악적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자아내는 악적을 보며 유달산이 뒷머리를 긁었다.
 “하긴 워낙 작은놈이어서······. 게다가 색깔까지 변하니 사질이 볼 리가 없지. 어렵게 구한 놈인데······. 어이구, 아까워!”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유달산의 소리가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무엇을 하느냐!”
 “갑니다! 사질, 작은 뱀같이 생긴 놈인데 다리가 달렸어. 워낙 빠르고 무서운 놈이니까 혹시 보게 되면 잡지 말고 이야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악적의 대답을 들은 후 급히 초옥으로 몸을 돌리는 사숙들을 보고 악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지······.’
 차라도 내놓기 위해 사숙들의 뒤를 따르는 악적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보았던 다리 달린 뱀이 생각났다.
 ‘그놈을 말하는 것인가?’
 
 * * *
 
 천파객과 소면선풍랑이 방으로 들자, 악적은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무엇을 했더냐.”
 “사질을 보니 반가워 인사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대사형은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얼어 죽을 대사형은······. 그래, 웬일이냐?”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염우빙의 말에 유달산의 눈초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니, 칠 년 만에 보는 사제에게 겨우 할 말이 그것뿐입니까?”
 “그럼 덩실 춤이라도 추리?”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그 성질 여전하시오. 그런데 제자는 도대체 언제 들인 거요?”
 “오 년 다 되었어.”
 염우빙의 대답에 두 사제는 놀란 눈을 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형은 결코 제자를 들일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 년 전에 이미 제자를 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의식은 치렀습니까?”
 “지랄! 제자를 들이는데 무슨 의식이 필요하단 말이냐!”
 “그래도 사형의 제자면 본문을 이끌어······.”
 염우빙의 호통에 유달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갈!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그냥 가거라!”
 염우빙의 호통에 유달산과 임낙안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사형, 본문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오. 아직 병증이 낫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임낙안의 전음에 유달산이 급히 표정을 바꾸고는 밝은 얼굴로 염우빙을 바라보았다.
 “알았소. 그건 그렇고, 무슨 바람이 불어 제자를 들이셨습니까?”
 유달산의 물음에 염우빙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가 깨우친 것을 이대로 사장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제자를 들여 전수해 주는 것 또한 무림에 몸담은 자로서의 도리이니 나도 그 도리에 따라야지.”
 염우빙의 대답에 두 사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우선 그의 대답 중 무림인의 도리라는 말과 대형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임은 말할 것도 없었고, 게다가 자신이 깨우친 것을 전수한다는 대목은 그들의 칠공을 다 막히게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사이 무공이라도 만들어 내셨습니까?”
 유달산의 물음에 염우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는 자신감까지 담겨 있어 두 사제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정말이십니까?”
 믿기 어렵다는 표정과 의구심이 담긴 유달산의 물음에 염우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난 무공을 만들면 안 된다 하더냐?”
 “그게 아니고······ 아무래도 사형이······.”
 “갈! 그럼 이곳에 들어앉아 무얼 하겠느냐*할 일도 없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무공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할 일이 없어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랬군요. 혹시 그 황궁에서 입수하신 무서들을 보고 만드신 것은 아니겠지요?”
 유달산의 물음에 염우빙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내가 남의 무공을 왜 나의 제자에게 가르친단 말이냐!”
 사형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유달산은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비슷하게 그럴 수는 있는 것이 아닙니까*특히 사형의 그 천지조화공의 특성도 있고 하니 염려가 되어서 말입니다.”
 유달산의 말에 곁에 앉아 있던 임낙안도 생각이 다를 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비슷한 부분이 있을지는 모르지. 하지만 내가 심오한 깨우침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하다.”
 유달산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왠지 사질의 보법이 유령기환보(幽靈奇幻步)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일더군요.”
 유달산의 말에 염우빙의 눈이 찢어지며 얼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염우빙이 분노를 표출하려는 순간, 임낙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형, 그것이 어디 환영문(幻影門)의 유령기환보와 비슷합니까*사형도 참으로 보는 눈이 짧습니다. 그렇게 강호를 주유하고 견문을 넓히고도 아직 무공을 보는 눈이 그것밖에 되지 않다니, 참 답답합니다.”
 염우빙이 임낙안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무공을 유령기환보와 비교하는 유달산보다는 임낙안을 훨씬 인정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임가 네가 무얼 좀 아는구나.”
 “안다기보다는 사질의 보법이 유령기환보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단지······.”
 “단지?”
 “제 짧은 소견으로는 자부문(紫府門)의 귀영마변보(鬼影魔變步)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악적이 수련하고 있는 보법이 환영문의 유령기환보와 자부문의 귀영마변보 중 어느 하나와도 비슷하다면 그것은 상당한 문제를 야기할 일이었다.
 한때 마도의 세력에 속했던 문파들의 무공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함은 물론 그것으로 인해 악적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절정의 반열에 오른 이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판단했다면, 다른 정파의 고수들도 이들을 그렇게 오인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정파가 득세한 당금 강호에서 마도의 무공을 사용해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대사형이 왜 그런 무공을 자신의 제자에게 전수해 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놈들이!’
 임낙안의 입에서 자부문의 귀영마변보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염우빙은 폭발했다.
 사제라는 것들이 자신이 창안한 무공을 다른 문파의 것을 본떠 만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니 그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희들, 내 염장 지르러 온 거냐?”
 평소 염우빙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두 아우였기에 그의 표정에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절대 아니죠.”
 “그럼 왜 온 거냐*아무 이유도 없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염우빙의 물음에 유달산이 자적산에 찾아온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지금 소림과 화산, 그리고 정의맹······.”
 
 
 
 
 
 第十三章 첫 나들이
 
 
 
 유달산과 임낙안의 시선은 악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악적과의 거리가 가깝지 않다고는 하나 그들이 악적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상하지?”
 “아주 극심하게 이상합니다.”
 아무리 봐도 사질의 무공이 자신들이 생각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내력의 운용에 있어 모든 것을 천지조화공으로 대처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명칭만 바꾼 것 같은데······.”
 유달산의 중얼거림에 임낙안이 동조하고 있었다.
 “저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염우빙의 성정을 익히 알기에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휴우······. 아무래도 대사형의 증세는 호전되지 못할 듯해.”
 유달산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그렇겠지. 당시의 그 충격을 받고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만 하더라도 다행인 일이야.”
 유달산의 말에 임낙안은 삼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사형이 제자를 들였으니 다행이 아닙니까?”
 “사질은 모르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지만 사질을 제자로 들일 때 도관을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임낙안의 대답에 유달산의 표정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무의식중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때는 제정신이 돌아오신 것이야. 도대체 언제 병증이 사라질는지······.”
 “충격으로 일어난 마음의 병입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삼십 년이야. 또 예전처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고.”
 유달산의 걱정 어린 말에 임낙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질!”
 유달산이 부르는 소리에 악적이 달려왔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며칠간 두 사숙과 함께하면서 사부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사질은 무공을 배워서 뭘 할 것이지?”
 “무공을 익혀 사부님께 효를 다하고 그 경지가 하늘에 이르면 사부의 무공을 세상에 드날려 민초들의 삶을 보호하며, 종국에는 신비문을 창시하신 사부님을 조사로 모시고 사부께서 창안하신 절대무적의 무위를 대대로 전수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입니다.”
 악적의 말에 유달산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돌았다.
 하나밖에 없는 사질의 행동이 귀엽게만 느껴졌고, 왠지 정을 듬뿍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외웠군.”
 임낙안 또한 유달산의 생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형이 그렇게 시키더냐?”
 “아닙니다.”
 “그런데 신비문은 뭐고 절대무적의 무위는 또 뭐냐! 나 참, 신비문의 조사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더냐?”
 악적은 인정했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두어야 삶이 편하다는 것도 동시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숙들께서도······.”
 악적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악적을 쳐다보는 두 사숙의 눈빛이 마치 덫에 걸린 토끼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분들을 만났어.’
 악적이 그런 생각을 가질 때, 일사숙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사질.”
 “예.”
 “우리 잠시 자리를 옮기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연혼애의 깊은 동굴로 달려갔다.
 유달산과 임낙안은 대사형을 걱정하던 마음을 아주 멀리 떨쳐 버리고 사질과 함께 대사형의 성품에 대해 깊은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유달산과 임낙안으로서는 무엇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는지 악적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사숙들을 만났기에 그곳에서는 염우빙만이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한편, 염우빙은 구부러진 나무작대기로 등을 긁고 있었다.
 ‘이런! 너무 수욕을 하지 않았나?’
 한 번씩 이렇게 등이 가려울 때는 마음의 찝찝함을 버리지 못하는 그였으나 오늘은 유난히 여러 부위가 한꺼번에 가려웠다.
 
 * * *
 
 “으하하하! 주구행이라니, 배꼽이 빠질 것 같다.”
 “아이고, 저도 죽겠습니다.”
 연혼애의 동굴 속에서 한참이나 광소를 터뜨리던 유달산과 임낙안은 얼마나 몸을 틀어 가며 웃었는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야 할 정도였다.
 “작명이야 그렇다 하지만,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악적의 말에 임낙안의 눈이 찢어졌다.
 “당연히 뛰어날 수밖에. 그것이 환······.”
 말을 잇던 임낙안은 곧 말을 멈추었다.
 이제껏 셋이서 함께 사형을 마구잡이로 씹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
 말을 멈추어 버리는 임낙안에게 의문을 표하는 악적이었지만, 임낙안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혹시 사형이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냐?”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아니, 누구와 비무를 하라든지 어디 애들에게 너의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든지······.”
 “있습니다.”
 악적의 대답에 임낙안이 궁금한 눈빛을 자아냈다.
 “그래, 뭐지?”
 “친구 분의 제자와 비무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임낙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형에게 친구라고는 단 한 명, 복우황뿐이었다.
 예전부터 두 사람의 성정이 흡사하다 보니 충분히 제자들의 비무를 통해 우위를 가리려는 의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없었나?”
 “예.”
 악적의 대답에 임낙안과 유달산의 눈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약속을 한 듯했고, 임낙안의 시선이 악적에게 다시 향했다.
 “사질.”
 “예.”
 “사질이 무공을 익히면 강호에 나갈 것이 아닌가?”
 “······.”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악적을 보고 유달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낙안이 말을 이었다.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보군.”
 “예.”
 “사질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또한 강호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운명적으로 무림에 몸을 들이게 되어 있어. 우선 사형이 사질의 무공이 자신의 범주를 넘어섰다고 생각할 때 사질에게 비무행을 요구할 것이고, 무의식중에······.”
 그렇게 이사숙의 말은 이어졌고, 악적은 그 말을 깊이 새겨듣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이야기들이 끝나고 임낙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부에게 그런 일이······.’
 사부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악적은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아파 왔다.
 늘 티격태격하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사부에게 그런 병증과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 적지 않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는 척해서는 안 되네. 어찌 보면 모든 것을 잊고 계시는 지금이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야. 자적산에서 사질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내시는 것은 사형에게 복이라 할 수 있어. 난 더 이상 사형이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네.”
 “알겠습니다.”
 유달산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악적에게 임낙안이 말문을 열었다.
 “사질, 아직 권각술은 배우지 않았지?”
 “예.”
 “그래. 그럼 권각술을 가르쳐 주마. 대신 사형에게는 절대로 비밀이다. 사형 앞에서는 이 무공을 펼쳐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악적의 대답에 임낙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자세를 잡았다.
 한눈에 봐도 절정 고수의 기수식이었다.
 자세를 취하고 허공에서 한 점을 그린 임낙안의 발걸음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절정에 이른 보법, 그 보법에 따라 흐르는 권은 마치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결과 같았다.
 팡!
 파팡!
 파파파팡!
 임낙안의 권이 허공을 때리고 그의 권에 닿은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것을 느낀 악적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멋있다!’
 강렬하지 않아 보이는 권법이었지만, 악적은 이사숙의 권이 가지는 힘을 충분히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쏘아져 나가는 듯하면서 종국에는 그 빠르기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절정의 빠름 속에서도 어느새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이사숙의 권법은 악적에게 있어서는 신기에 가까웠다.
 “사질!”
 “예.”
 “이제부터 따라 해 보거라.”
 이사숙의 명에 악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같은 자세를 잡았지만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 쉬울 리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임낙안이 속도를 줄여 천천히 하나하나 보여 주자, 악적은 머릿속에 이사숙의 움직임을 그리며 따라 하고 있었다.
 유달산은 흐뭇한 미소로 사제와 사질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태청신권(太淸神拳)이라 하는 것이다. 가히 소림의 권각에 비해 아래라 할 수 없는 것이지.”
 태청신권.
 대곤륜의 무학이 바로 태청신권이었다. 과거 구파의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도가 문파라는 특징을 가진 그들은 세속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우면 산문을 박차고 내려와 그 어지러움을 살피는 곤륜파였다.
 그런 곤륜이 삼십 년 전 원인도 알 수 없이 무너져 버렸고, 그 이유도 알 수 없음에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사라진 문파가 되었다.
 그러나 곤륜이 잊혀진다 한들 곤륜의 무공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절정에 이른 곤륜의 무학들.
 그중에서도 바로 권공의 절정인 태청신권은 태청진기를 익히고 신행미종보(神行迷踪步)를 습득해야만 이룰 수 있는 권공이었다.
 하지만 천지조화공의 특징이 태청진기를 대신하고 임낙안이 밟고 있는 보법이 신행미종보이다 보니 악적은 곧잘 따라 했다.
 사숙과 사질이 동굴 안에 그려 내는 권영으로 인해 크나큰 동굴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좋구나!”
 오랜만에 태청신권과 신행미종보를 견식하는 유달산은 흥에 겨웠는지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질!”
 “옛!”
 “이것이 회선각이라는 것이다. 잘 봐 두어라.”
 부웅!
 유달산의 몸이 허공에서 수없이 회전하고, 그의 각이 닿는 곳에선 기성이 터져 나왔다.
 파파파파팡!
 
 
 
 
 
 第十四章 기이한 사냥법
 
 
 
 
 자적산의 봄여름이 유수처럼 지나가고 나무들이 색동옷으로 갈아입을 때쯤 악적은 사숙들이 전해 준 곤륜의 무공에 점점 더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다.
 물론 재미가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익혀야 할 무공들이었고, 차후 자신이 후인에게 전해 주어야 할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악적은 의문이 들었다.
 사숙들에게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고 사부에게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왠지 사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곤륜의 무공들을 몰래 익히는 동안 사부는 마치 자신을 내버려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무공들을 수련한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사부의 눈이 너무 날카로웠다.
 천하에 눈치 빠르기 대회가 있다면 사부는 월등한 차이로 정상에 우뚝 서고도 남을 눈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익히 아는 악적으로서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적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악적은 사부의 부름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갑니다, 사부님!”
 미친 듯이 달려오는 악적을 보고 염우빙의 가는 눈이 더욱 가늘게 찢어졌다.
 “왜 그러냐?”
 “무얼 말씀이십니까?”
 “왜 갑자기 그렇게······ 아니다. 따라오너라.”
 사부의 예리한 눈빛에 가슴을 쓸어내린 악적은 곧 사부의 뒤를 따랐다.
 그저 크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의 엄청난 바위 앞에 선 염우빙이 말문을 열었다.
 “보거라. 이것이 무흔파열지라는 것이다. 물론 이 지법의 기본도 투안에 있지.”
 사부의 우수가 눈앞에 있는 바위를 가리키는 동안 악적은 눈이 빠져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위에는 어떤 변화와 흔적도 생겨나지 않았다.
 “보았느냐?”
 “뭘 말씀이십니까?”
 “에이, 둔한 놈! 아직 멀었구나.”
 사부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악적을 탓했지만, 악적은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심한 눈으로 악적을 바라보던 사부가 몸을 돌려 초옥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악적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 갔다.
 사부의 손이 향한 바위와 사부의 등을 번갈아 보던 악적이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기에 악적은 바위에 어떤 흔적이라도 남았을까 면밀히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떤 흔적도 남은 것이 없었다.
 ‘젠장, 도대체 뭘 보라는 거야!’
 악적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짜증을 내는 순간, 손에 닿아 있는 바위에 변화가 일어났다.
 쩌저적!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바위가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고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어떻게 이럴 수가!’
 사부의 무위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위였다.
 “무흔파열지. 이놈아, 말 그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뜨려 버리는 것이 아니냐! 네놈이 투안을 대성했더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야. 물론 투안을 대성하지 않고는 무흔파열지를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사부의 전음에 악적이 바닥으로 무너진 바위를 보았다.
 투안.
 활안의 경지로 이르는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능력이 바로 투안이었다.
 염우빙은 악적의 살안이 일정 경지에 올랐음을 알았기에 투안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 주려고 한 것이었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게냐, 따라오지 않고!”
 이어지는 사부의 전음에 악적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이제껏 사부가 보여 준 무공 중 가장 강렬하고 멋있는 무공에 악적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초옥의 뒤에 우거진 숲으로 향한 염우빙은 노송(老松)을 가리켰다.
 “노송이 보이느냐?”
 “예, 아주 잘 보입니다.”
 “지력을 이용해 노송을 내부에서부터 터뜨리려면 어디를 찔러 내력을 주입해야겠느냐?”
 사부의 물음에 악적은 노송을 뚫어져라 보았다.
 물론 악적이 노송을 터뜨릴 만한 내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도해 본 적이 없어 어디를 찔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자, 아둔하여 알지 못하겠습니다.”
 악적이 고개를 숙이며 가르침을 요청했다.
 “네가 아둔한 것은 인정하는구나.”
 ‘젠장, 그냥 가르쳐 주면 덧나나.’
 속으로 사부를 마구 욕하고 있는 악적이었지만, 겉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감히 반항을 하기에 무흔파열지는 너무나 매력적인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흠······. 잘 보거라.”
 “예!”
 악적이 크게 대답하며 눈을 반짝이자, 한심하다는 얼굴로 악적을 훑어본 염우빙이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무엇이더냐?”
 나무를 쓰다듬어 보는 사부가 손을 멈춘 곳은 나무 둥치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었다.
 “그것은 목와(木쾌, 옹이)가 아닙니까?”
 “그래, 이것은 목와지.”
 “그곳을 찔러 내력을 주입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 바로 이곳이다. 나무는 뿌리를 이용해 양분을 흡수하여 가지로 그것을 보내지. 그 과정에 통로가 되는 줄기가 있었던 곳이라면 다른 어느 곳보다 내부로의 유입이 쉽지 않겠느냐. 투안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나무든 바위든 그 어떤 것이든 그곳에서 바로 이 나무의 목와와 같은 곳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 그것이 바로 투안을 몸에 익히는 시작이 된다.”
 악적은 사부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투안을 익혀야만 조금 전 엄청난 위력을 보여 주던 사부의 무흔파열지를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감과 같은 것입니까?”
 “비슷한 유형이기는 하지만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기감이 느끼는 것이라면 투안은 그것을 명확하게 뚫어 보는 것! 투안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불괴의 신체를 가진 상대의 조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넌 조금 전 바위를 깨뜨릴 때 내가 얼마의 힘을 가했다고 생각하느냐?”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투안을 터득하게 된다면 바위를 깨뜨리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힘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그 큰 바위를 깨뜨리는데 큰 힘이 들지 않는단 말인가?’
 의아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눈으로 견식한 후였다.
 사부가 엉뚱한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만큼은 진지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아는 악적이기에 그 말을 믿기로 결정을 했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물론 명심해야지. 하지만 너의 둔한 머리로 과연 투안을 익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음화화화핫!”
 사부는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을 광오한 웃음과 더불어 저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악적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악적에게 있어서는 오직 투안을 익힌 후 멋있기 그지없는 무흔파열지를 습득하고야 말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 * *
 
 ‘투안이라, 투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곤륜의 권각에 빠져 있던 악적이었지만 지금은 사뭇 달랐다.
 악적의 머릿속에는 투안을 제외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부가 스스로 각성하여 깨달음을 얻고 창안해 낸 무공.
 물론 사부의 말이었지만 믿어 주는 것이 마음이 편해 그렇게 믿고 있는 악적이었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악적 또한 스스로 참오해 깨닫지 못하는 한 투안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무의 목와가 좋은 예였다.
 하지만 그것도 사부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인지한 것이지, 스스로 알아내려 했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지 모를 일이었다.
 집채만 한 바위 아래에 좌정한 악적은 사부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었다.
 ‘투안, 반드시 익히고야 말 것이다!’
 이제껏 어떤 무공을 익히면서도 지금과 같은 집념과 투지를 발휘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무흔파열지는 악적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적아!”
 “예.”
 사부의 부름에 악적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부에게로 달려갔다.
 “마을에 내려갈 것이니 준비해라.”
 “예?”
 이제껏 단 한 번도 마을에 내려가 본 적이 없는 악적인지라 사부의 말이 의외였다.
 “넌 내가 꼭 두 번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부의 사악한 눈빛.
 그 눈빛의 의미를 아는 악적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단지 마을에 내려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그것을 몰라서······.”
 악적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마을에 가는 데 무슨 준비가 필요한지 가 본 적이 없는 악적이 어떻게 알 것인가?
 물론 마을에 내려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다리 하나면 충분했다.
 긴 시간 동안 악적을 너무 자적산에만 머물게 했다는 생각에 마땅한 대꾸를 찾지 못한 염우빙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그냥 따라오너라.”
 
 한가로이 걷는 사제.
 누가 봐도 조손으로 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쯤 걸어 사제가 도착한 곳은 ‘풍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풍연마을.
 태산의 줄기인 자적산 아래에 위치한 풍연마을은 주로 사냥꾼과 약초꾼들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나는 약초들이 적지 않은지라 시전에는 꽤 많은 약재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잣거리 또한 약재를 사고파는 상인들로 북적거렸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저잣거리의 풍경에 악적은 여기저기 쳐다보기도 바빴다.
 “예서 잠시 기다려라.”
 “예.”
 서책이 즐비하게 진열된 서점으로 들어가는 사부의 뒷모습에서 음흉한 기운이 이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악적은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사춘기에 이른 악적에게 있어 가슴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여자들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저잣거리에서 변검 공연을 할 정도로 세상 물정에 익숙한 악적이었지만, 칠 년간의 자적산 생활은 모든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길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악적의 눈에 들어오는 먹음직스러운 만두는 입맛을 다시게 하기 충분했다.
 ‘아, 냄새 좋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만두 가게 앞에 선 악적은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맛있겠다.’
 악적은 군침을 흘리고 있다가 서점에서 두툼한 보자기를 하나 들고 나온 사부를 보며 물었다.
 “이것이 만두입니까?”
 ‘이놈이!’
 염우빙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만두를 처음 본다는 듯한 악적의 모습에 만두 가게 주인의 눈빛이 변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 나이가 되도록 만두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던가*아무리 돈을 아껴도 손자에게 만두 하나 사 먹이지 않는 영감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빛이 고울 리는 없었다.
 ‘아직 손자에게 만두 하나 사 먹인 적이 없다니, 쯧쯧!’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만두 가게 주인은 초만석이라는 사내였다. 대대로 이곳 풍연마을에 살면서 인심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하루에 팔 수 있는 만두의 양보다 항상 여유 있게 만들어 어려운 사람이나 굶주린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어 마음이 곱기로 이름난 이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풍연마을의 인근에 거주하는 거지들은 오히려 그의 가게를 찾지 않았다.
 괜히 자신들이 만두 가게 근처에서 서성거리게 되면 장사가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당장 한 끼 먹기도 어려운 거지들이 초만석의 만두 가게를 배려할 정도니 그의 마음 씀씀이가 어떤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거 먹어 보거라.”
 초만석이 악적에게 내미는 손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만두가 두 개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염우빙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러지 말고 다섯 개 주게나. 얼마인가?”
 “두 문입니다.”
 “여기 있네.”
 염우빙이 건네준 구리 문을 받은 초만석이 만두를 담아 내놓는데, 그 수가 다섯 개가 아니라 열 개는 넘어 보였다.
 “다섯 개만 달라고 했네만.”
 염우빙의 말에 초만석이 미소를 지었다.
 “손자 분이 워낙 맛있게 드시는지라 제가 조금 더 내놓았습니다. 개의치 마시고 드시지요.”
 허겁지겁 만두를 먹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염우빙의 눈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악적 놈이 만두가 무엇인지도 모른 체하는 짓이 얄미웠지만, 가게 주인 초만석의 마음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사를 해서 무슨 이문이 남겠나?”
 “아닙니다. 이미 입에 풀칠할 만큼은 벌어 두었습니다. 또한 만두 몇 개 더 내어 놓는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고맙네.”
 주인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악적에게로 시선을 옮긴 염우빙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방금 전까지 접시에 놓여 있던 만두가 어느새 하나밖에 남지 않고 다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 것이었다.
 ‘진즉에 한번 데리고 내려올 것을 그랬구나.’
 그런 염우빙의 마음도 모른 채 순식간에 만두로 입을 꽉 채워 우물거리는 악적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 * *
 
 염우빙이 배가 부르도록 만두를 먹은 악적을 이끌고 당도한 곳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땅! 땅!
 석공이 조각을 하기 위해 돌을 깨뜨리는 모습이 악적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것이다.”
 석공의 망치질을 가리키는 사부의 말에 악적이 의문을 보였다.
 “저것이라니요*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잘 보거라. 정으로 돌을 내리치면서도 저 사내는 자신이 깎고 싶은 만큼 정확히 깎아 내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라면 가능하겠느냐?”
 사부의 말에 악적이 다시금 석공의 망치질을 보았다.
 강하고 약함에 분별을 두어 깎아 내는 모습이 보였지만, 자신이 저렇게 세밀하게 깎아 낼 확신은 없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놈아, 쉽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다. 저 석공은 오랜 세월 동안 돌을 깎아 왔지. 그 세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돌을 깎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무인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네 생각에는 저 석공이 무엇을 익혀 저렇게 세밀하게 돌을 깎을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 악!”
 대답을 채 다 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는 악적은 마치 둔기로 맞은 듯한 고통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제발 이놈아, 생각 좀 하고 대답을 해라. 숨도 쉬지 않고 모른다고 하면 너를 가르칠 힘이 나겠느냐*응!”
 사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또 한 번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잠시라도 생각하는 척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땅! 땅!
 계속 이어지는 망치질.
 그 망치질 속에서 문득 악적의 뇌리를 강타하는 것이 있었다.
 “사부님, 힘의 분배가 아니겠습니까?”
 악적의 대답에 염우빙이 조금은 놀란 듯했지만 곧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냐*이제부터는 좀 머리를 쓰도록 해라. 머리는 그냥 모양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알았냐?”
 “예.”
 “네 말처럼 돌을 깎을 때는 정을 어떻게 세우고, 그것을 두드리는 망치의 힘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곳을 어떻게 때려야 자신이 원하는 만큼 깎아 낼 수 있는지 그것을 보는 눈이다.”
 지금 사부는 석공을 예로 비추어 투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악적이 무흔파열지에 대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투안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이고 노송의 목와에 이어 석공을 통해 깨달음을 주려는 의도였다.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그 길을 열어 주어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염우빙이었기에 함께 마을로 내려온 것이었다.
 “그럼 저 석공도 투안을 지니고 있군요.”
 “그렇지. 그것을 익히고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야. 저 석공도 자신이 다루는 돌에게만큼은 투안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래야지.”
 사부가 악적을 데리고 마을로 나온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 했다. 풍연마을의 석공을 예로 든 사부의 말씀은 악적에게 크나큰 도움이 된 것이었다.
 하나를 가르쳐 열을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두셋은 알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악적이었다.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를 찍을 때도, 사냥꾼이 어떤 곳에 짐승이 살고 있는지 알아낼 때도, 또한 약초꾼이 어디에 어떤 약초가 자라고 있는지 캐러 갈 때에도 모든 것이 투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을 수련하고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라는 것이 사부의 설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악적은 다시 바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사부는 단 일지(一指)로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어.’
 무흔파열지를 처음으로 보여 주시던 날, 사부는 바위를 으스러뜨리면서도 많은 힘을 가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셨다.
 ‘어디를 가격하면 바위를 깨뜨릴 수 있는지 알고 계셨던 것이야. 바로 투안을 통해 말이야!’
 외공을 익힌 무인도 조문이 있듯이 바위도, 나무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는 것!
 그것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숨에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나 연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수없이 바위를 두드려 보았지만 악적은 입 안에 쓴맛을 느껴야만 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초옥으로 돌아가는 악적은 투안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 들고 있었다.
 “적아!”
 “예.”
 “부러뜨려 보거라.”
 뒤에서 들려오는 사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악적의 앞으로 장작이 날아왔다.
 급히 장작을 손에 쥔 악적은 사부가 가르침을 내리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장작을 부러뜨리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내력은 사용하지 말고.”
 “예?”
 악적의 되물음에 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 굵은 장작을 어떻게 부러뜨린단 말인가?’
 악적은 가할 수 있는 모든 악력을 가해 장작을 부러뜨리려 했지만 그것이 될 리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힘을 사용하는 악적을 보고 사부가 혀를 찼다.
 “아둔한 놈! 어찌 열을 가르쳐 줘도 하나를 모르느냐*이리 내놓아라.”
 악적의 손에서 뺏다시피 가져간 장작이 소리를 내며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악적의 머릿속은 밝은 빛이 스며들어 가슴속까지 환해지는 듯했다.
 ‘결! 결이구나!’
 
 
 
 
 
 第十五章 공적 사아란
 
 
 
 “루루루!”
 콧노래 소리가 산자락을 울리며,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오는 악적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악적이기에 고뇌란 것이 없을 테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악적의 어깨 위에 있는 멧돼지를 본다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비록 거대한 멧돼지는 아니라 해도 저 정도의 크기면 족히 백 근은 넘을 듯했다.
 그럼에도 저렇게 가벼운 발걸음이라니?
 하지만 놀라운 것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어깨 위에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멧돼지는 살아 있었다.
 아직 어린 악적이 멧돼지를 산 채로 잡고 그것을 어깨에 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는 사람보다 더 황당한 것은 멧돼지 자신이었다.
 무언가 번쩍하더니 몸이 마비된 듯했고, 기절한 후 눈을 떠 보니 이렇게 매달려 허공에서 휘둘려지고 있었다.
 맞은 자리에 상처라도 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도 고통도 없었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묶인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멧돼지는 자신의 처지를 서글퍼 하며 아래를 바라보고는 입과 눈이 찢어졌다.
 꾸엑!
 너무 놀라서 비명마저 지르는 멧돼지의 눈에 들어온 것!
 자신의 눈 아래.
 정확히 소년의 뒤.
 넝마와 같은 붉은 천 위에 올려져 끌려오는 것은 다름 아닌 호랑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비록 기절해 있다 하지만 멧돼지에게 있어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였다.
 자연의 법칙을 멧돼지가 어찌 어길 것인가?
 멧돼지는 사람에게 잡혔다는 두려움보다 호랑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놀람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요동치는 멧돼지는 악적의 어깨 위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딱!
 깩!
 무엇인가 가격되는 느낌에 멧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잠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네.”
 보지도 않고 멧돼지의 머리를 가격한 악적의 손놀림은 가히 섬전 같았다.
 더군다나 살짝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멧돼지가 기절하는 것을 보면 그리 작은 충격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초옥으로 향하는 악적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아!”
 사냥꾼의 복색을 하고 악적을 부르며 달려오는 중년 사내는 이곳 자적산 줄기 아래에 있는 풍연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냥꾼이었다.
 비록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사냥 실력이 뛰어나 주위 일대의 산에서 맹수가 나타났다 하면 바로 찾을 정도로 유명한 사냥꾼이었다.
 또한 악적이 사냥을 시작하고 나서는 사부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종길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할아버지는 잘 계시고?”
 악적의 사부인 염우빙을 말함이었다.
 최근 들어 자적산 아래 풍연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악적의 사부인 염우빙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풍연마을 사람들은 악적과 염우빙의 관계를 조손간이라고 알고 있었다.
 “예. 잘 계시다 못해 펄펄 날아다니죠.”
 악적의 말에 종길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럴 거야. 아주 펄펄 날아다니고도 남을 분이지.”
 “그런데 웬일이세요*오늘 사냥하시는 날이 아니시잖아요.”
 악적의 물음에 종길은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적산 줄기를 가리켰다.
 “산에 놓인 덫을 걷어 내려고 왔단다. 언제부턴가 산에 덫이 많아졌어. 어제도 여섯 개나 발견했지 뭐냐. 오늘 구석구석 다니면서 걷어 내야겠어. 도대체 웬 놈들이 그렇게 덫을 많이 놓았는지, 아주 죽일 놈들이야.”
 말을 잇던 종길은 악적의 뒤쪽으로 기절해 있는 호랑이를 보고는 물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자신도 쉬이 잡을 수 없는 호랑이를 잡은 것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또 잡았구나?”
 악적이 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그렇게 되었네요.”
 “가죽이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꽤 받을 것 같죠?”
 “그렇구나. 그 가죽 벗기면 나에게 팔라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라. 가격은 후하게 쳐 드린다고.”
 “예.”
 “그럼 뒤에 보자.”
 그렇게 돌아서는 종길의 모습에 악적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눈빛을 반짝였다.
 “아저씨.”
 “왜?”
 “저와 흥정하시죠. 제가 싸게 드리죠.”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서 바로 가져가시라는 이야기죠. 물론 할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죠.”
 악적의 눈에서는 볼 수 없던 음침함에 종길 또한 그와 비슷한 미소를 뿌렸다.
 한 사람을 속이고자 하는 의견이 합해지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미소였다.
 “얼마나 줄까?”
 “가죽 값으로 스무 냥이면 어떨까요?”
 종길에게는 확실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아니, 거저먹는다고 볼 수 있는 금액임에 분명했다.
 당장에 내다 팔아도 백 냥은 거뜬히 받을 수 있는 호랑이였고, 더군다나 가죽에 흠 하나 없으니 더 높은 가격을 매기고도 남을 것이었다.
 “가죽은 그렇다 치고 뼈와 고기는*어차피 그것만 가지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더냐?”
 종길의 말이 맞았다.
 호랑이를 가죽만 벗기고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껏 흥정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악적은 뼈와 고기의 가격을 고민하다 나름대로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다섯 냥만 주시죠.”
 다섯 냥이라는 말에 종길의 눈이 밝아졌다.
 “열 냥 주마.”
 “그렇게 하지요.”
 악적은 곧 자신의 주머니로 흘러들어 올 서른 냥을 생각하며 기쁨에 젖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사냥한 것으로 돈을 거둬들이다시피 한 사부가 자신에게 옷 한 벌 제대로 해 주지 않은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언젠가 산을 벗어난다면 여비가 필요할 터.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는 악적의 판단이었다.
 “가죽이 스무 냥에 나머지가 열 냥이니 그럼 서른 냥을 주면 맞겠구나.”
 “예.”
 종길의 손에 들린 은자가 막 악적의 손으로 건너올 때, 악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마음대로!”
 너무나 익숙한 음성.
 사탄과 마귀가 부부지연을 맺고 후손을 낳는다면 저런 목소리를 낼까*나지막한 소리가 들리고 난 뒤 악적은 지금 자신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엿 됐다! 튀어야 해.’
 이미 종길은 사부의 눈빛을 대하고 기절한 상태였고, 깨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 사이 사부가 자신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파팍!
 악적이 내력을 끌어올려 잔상보로 환영을 만들고 동시에 주구행을 펼치자, 여덟 개로 분리된 몸이 튕겨지듯 쏘아져 나갔다.
 “어쭈! 튀어*오늘 완전 죽여 주마!”
 쌩!
 
 * * *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의 주구행이 얼마나 빠르던가?
 아무리 사부라 하지만 그렇게 단숨에 자신을 잡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악적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생각보다 사부가 사용한 경공에 대한 궁금함이 가득 찬 눈으로 사부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디 보자!”
 고리눈을 뜨며 바닥에 내려놓은 멧돼지와 호랑이를 살펴보는 염우빙은 최근 악적이 잡아온 호랑이와 각종 짐승의 가죽을 내다 팔면서 단단히 한몫을 챙기고 있었다.
 “두 방이냐?”
 “······예.”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염우빙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하자, 악적의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오다가 깨어나서 한 방 더 때린 것뿐입니다.”
 “이놈이 핑계는! 그러니까 아직 멀었다는 거 아니냐! 이놈아, 한 방에 반나절 정도는 기절을 시켜야 오다가 깨지 않을 것 아니냐!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알겠습니다.”
 “뭘?”
 “담에는 한 방에 반나절 기절시키겠습니다. 한 방이나 두 방이나 뭐가 얼마나 다르다고······.”
 소년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호랑이를 살펴보는 그 순간, 호랑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산중의 왕이라 불리는 호랑이.
 역시 그 이름값을 하는지 몸을 일으키며 우렁차게 포효했다.
 크허헝!
 누가 봐도 소름이 돋고 오줌을 지리고도 남을 상황.
 그러나 호랑이의 눈앞에 존재하는 염우빙과 악적은 그 ‘누가’가 아니었다.
 딱!
 끄응!
 언제 일어났었냐는 듯 바로 바닥으로 무너지는 호랑이는 자신이 왜 기절을 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했다.
 “봤냐?”
 “예.”
 “내가 어디를 때리더냐?”
 “삼점(三點)을 가격하셨습니다.”
 “힘은?”
 “일 푼 정도입니다.”
 “정확히 봤구나. 그럼 얼마 있다가 깨어날 것 같으냐?”
 “호랑이의 몸무게가 천 근이라 보면 한 시진이면 깨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놈아, 삼점을 일 푼의 힘으로 때렸고 무게가 천근이면 어떻게 한 시진이더냐! 반 시진 안에 깨어나지.”
 한참이나 계산을 해 보던 악적이 사부의 말을 인정하며 대답을 했다.
 “그렇네요.”
 “그렇다고 할 일이 아니고 정확하게 알아 두어야 한다. 잘못하면 경을 치를 수도 있어. 언제 깨어난다고?”
 “반 시진입니다.”
 악적은 사부가 왜 저렇게 힘과 시간을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습무자불가부지점혈지패도(習武者不可不知點穴之覇道).’
 
 무술을 익히는 자는 점혈(點穴)의 패도(覇道)를 모르면 안 된다며 강조하는 사부는 조금이라도 힘이 더하게 되면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특히 무흔파열지의 위력은 진정으로 무서웠기에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조금 전 네놈이 한 방과 두 방의 차이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지?”
 사부의 표정을 보아 그것으로 트집을 잡을 것이 분명했지만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악적은 조용히 대답했다.
 “······예.”
 “야, 이놈아! 너하고 마도 놈들 천 명하고 붙으면 어떻게 되겠냐*한 방에 하나씩이면 천 번! 한 놈에 두 방씩이면 이천 번을 써야 하는데, 아무리 마르지 않는 내력이 있다 한들 그게 쉬운 일이더냐!”
 ‘또 그 소리!’
 늘 하는 소리였다.
 물론 사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도 정도가 있는 것인데, 이건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하는 소리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과거 사부가 혈 무슨 평이라는 데에서 마도인 천 명과 손을 섞은 적이 있었고, 그때 마도인 천 명 중 단 한 명만 두 방을 가격하고 나머지는 한 방에 전부 바닥으로 굴렸다는 이야기였다.
 얼마나 계산이 빠른지.
 천 명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정확하게 세고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는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그 마도인이라는 것들이 무엇을 하는 것들이기에 저렇게도 싫어하는지 그 이유도 알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주야장천 이어지는 사부의 이야기는 한두 번 들은 이야기도 아니고 이제 외우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사부가 또 시작하려 하자 악적은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경공이나 다른 무공을 가르치는 동안에는 마도인들의 이야기를 입에 담은 적이 없는 사부가 유독 지금 배우고 있는 무흔파열지(無痕破裂指)를 가르치는 동안에는 쉴 틈 없이 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느냐!”
 반 시진 가까이 제자를 족치던 염우빙의 마지막 고함 소리와 동시에 호랑이는 깨어났다.
 사부의 말과 같이 정확히 반 시진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크렁!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호랑이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또한 자신보다 약자인 인간의 모습에 위협적인 자태를 스스럼없이 보여 주는 호랑이는 허공을 가르는 무엇인가를 봐야 했다.
 딱!
 번쩍!
 호랑이는 대낮에 불빛을 보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봤냐?”
 “예.”
 “깔끔하지 않던?”
 “무지하게 깔끔하셨습니다.”
 “클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무흔파열지의 운영이지, 크하하하핫!”
 염우빙이 광소를 터뜨리는 동안 호랑이가 깨어났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쟤가 깨어났는데요?”
 호랑이를 가리키는 제자의 손짓에 염우빙의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졌다.
 “흠······. 좀 특이한 놈이구나.”
 그렇게 다시 깨어난 호랑이는 염우빙의 손에 의해 진정으로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가죽이 홀라당 벗겨진 자신의 몸을 보는 역사상 최초의 호랑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第十六章 비무
 
 
 
 오늘도 시원한 바람이 악적의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해 질 무렵 악적은 항상 산등성이를 달렸다.
 고즈넉한 저녁노을이 이곳 자적산을 덮을 때의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악적에게는 하루 중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내력이 고갈될 때까지 전력으로 질주하는 악적의 주구행은 없는 바람도 만들어 낼 만큼 빨랐다.
 사부로 인해 생겨난 모든 짜증이 그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렸고, 그로 인해 내부에 존재하는 탁기가 모두 바람에 날려 가는 듯했다.
 ‘분행탈모.’
 이 년 전 호랑이를 몰래 팔아먹다 걸려 달아나는 자신을 순식간에 잡아 버린 사부의 경공법이 바로 지금 악적이 운용하고 있는 분행탈모였다.
 주구행과 분류행이 뛰어난 운신법임에는 분명하지만 빠르기에서는 분행탈모를 따르지 못했다.
 사부의 말로는 장거리를 달려야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경공법이라고는 했지만 악적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단지 사부가 왜 경공에 있어서만큼은 세세히 분류까지 하며 많은 공부를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구행 하나만 해도 가볍지 않았는데 분행탈모까지 굳이 만들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악적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오호, 저놈들!”
 달리던 악적이 늑대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살안을 펼쳤다.
 살안을 수련한 지 벌써 사 년.
 어느새 열여섯이 되어 버린 악적은 이미 투안의 경지에 발을 들여 무흔파열지의 경지도 가볍지 않았다.
 그런 악적의 살안이 스치기만 하더라도 늑대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릴 정도였으니 이제 악적이 그토록 원하던 다른 무공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타타탁!
 짐승의 발소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에 악적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천지조화공과 사부가 먹여 준 알 수 없는 영약으로 인해 기감이 극대화된 악적에게 이십 장 내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지척에서 들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발소리로 보아 사람이 분명한데?’
 악적의 의문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부와 악적의 거처가 있는 태산의 줄기인 자적산 중에서도 이곳 연혼계곡으로는 사냥꾼도 잘 드나들지 않았다.
 산세가 험해 연혼계곡에 이르면 노숙을 하지 않고 하루 안에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용기 있는 사냥꾼이라 하더라도 맹수가 적지 않은 이곳에서의 노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고의 사냥꾼이라 자부하는 종길 아저씨도 이곳만은 피했고, 약초꾼들도 금기시 하는 곳이 바로 연혼계곡이었으니 악적은 누구인지 모를 발소리에 궁금증이 일었다.
 
 * * *
 
 한 명의 여인과 다섯 명의 사내.
 면사로 가려져 있어 여인의 외모를 확연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드러나는 선으로 보아 상당히 미모가 뛰어난 여인인 듯했다.
 “소수마후의 제자를 내 손으로 잡게 되다니, 강호에 발을 들이고는 가장 기쁜 일이군.”
 소수마후.
 수백 년 이어져 온 강호의 전설 중 하나가 소수의 전설이었고, 당대의 소수마후는 임옥경이라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무공은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혔고, 그 제자라 한들 무공이 가볍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를 제압할 무위가 있다면 소수마후의 제자가 이렇게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석백군, 스스로 정파라 칭하는 네가 어찌 이런 악독한 수를 쓴단 말이냐?”
 “흐흐흐. 사아란, 넌 아직 강호를 모르는구나. 너 같은 마녀의 제자를 잡아 후환을 제거함에 있어 무슨 짓을 한들 누가 나를 탓하겠느냐. 더군다나 그것이 강호를 위한 일임에.”
 석백군이라 불린 사내의 안면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사아란은 진한 모욕감을 느꼈다.
 강호의 공적으로 분류되어 악인으로 지탄받고 있어도 그녀 또한 무림인이기에 앞서 여인이었다.
 상대의 검에 죽음에 이른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받아들여야겠지만, 지금 상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님을 알고 있는 사아란이었다.
 “더러운 놈!”
 사아란이 내력을 끌어올리자, 그녀의 장포가 바람에 일렁이듯 펄럭였다.
 우웅!
 이미 내상을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소수마후의 제자였고, 그 무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래, 계집이라면 가시가 있어야지.”
 그 말과 동시에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석백군의 신법은 섬전처럼 빨랐다. 허공을 가르는 석백군의 권은 사아란의 가슴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정파에 몸담고 있는 이라면 여인을 상대함에 있어 공격을 꺼려 하는 곳이었지만 석백군의 권에는 단 한 치의 거리낌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대의 심기를 더욱 어지럽히기 위해 그곳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타탁!
 석백군의 손목을 막아 내며 권력을 흘린 사아란이 반탄력을 이용하여 회전하며 각법을 시전했다.
 쇄생!
 사아란의 날카로운 공격에 급히 뒤로 일 보 물러난 석백군은 자못 놀랐다는 눈빛을 만들어 냈다.
 “오호! 아직 힘이 남아 있단 말이지?”
 석백군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석백군은 이미 실혼침에 묻어 있던 독에 중독된 사아란이 이곳까지 달아나면서 내력을 모두 소모했다고 판단했기에 조금 전의 기세는 허세라 생각했다.
 물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사아란은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내력이 고갈된 상태라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직 사아란에게 어느 정도의 힘이 남아 있다고 판단한 석백군이 한 발 물러서며 몸을 돌렸다.
 “상처 나지 않게 다루도록!”
 그의 명에 뒤에 시립해 있던 사내들의 몸이 동시에 사아란을 향해 쏘아져 왔다.
 타타탁!
 사내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사아란의 손이 조금씩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만일 그녀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미 그녀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들은 그녀의 목숨을 뺏으려는 것이 아니라 제압을 하려는 것이었다.
 퍽!
 “아악!”
 어깨에 일격을 당한 사아란이 비명을 토해 내며 뒤로 튕겨져 나갔고, 그 틈을 놓치지 않는 사내들이었다.
 쉬익.
 가장 앞선 사내가 사아란의 기문혈을 노리고 지법을 펼치고 있었다. 기문혈을 적중당해 그 정도가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되고, 슬쩍 제압된다 하더라도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퍼펑!
 굉음과 함께 그녀의 기문혈을 노리던 사내는 가슴을 격타하는 충격을 느끼고 바닥을 뒹굴었다.
 “크허헉!”
 곧 울혈을 토해 내며 의식이 끊어지는 사내의 가슴에는 뚜렷한 장인이 남아 있었다.
 “소수마장!”
 석백군이 그 장력을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사아란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내력까지 끌어올려 장력에 쏟아 부어 버렸기에 지금 이 순간 시야마저도 흐려지고 있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던 세 명의 사내 또한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사아란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이미 모든 내력을 소모한 사아란이 그들의 손에 제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점혈을 당하고 끌려온 사아란을 바라보며 석백군의 얼굴에 욕정의 빛이 드러났다.
 “흐흐, 반항이 꽤 심했어. 그래서 더 재미있었지만 말이야.”
 비릿한 웃음을 흘린 석백군이 남아 있는 수하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돌아가 삼위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곧 뒤를 따르겠다.”
 “예!”
 수하들은 석백군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재빨리 쓰러진 삼위를 데리고 움직였다.
 수하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석백군의 눈이 탐욕으로 빛나며 사아란의 면사를 찢었다.
 쫘악!
 면사가 찢어지고 드러난 사아란의 눈이 죽일 듯 쏘아보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석백군의 음심을 더욱 자극했다.
 “어디 한번 볼까?”
 비릿한 미소와 함께 석백군이 그녀의 상의를 찢어 내자, 백옥 같은 나신이 드러났다. 비록 가리개로 가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소녀티를 벗은 사아란의 성숙함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한 사아란의 모습에 석백군의 동공이 더욱 확장되었다.
 “흐흐흐, 아주 좋아.”
 몸이 달아오른 석백군이 사아란의 가슴으로 손을 옮길 때, 자신의 등을 파고드는 살기를 느꼈다.
 그 기운에 놀란 석백군이 급히 몸을 돌렸다.
 아무리 흥분한 상태였다지만 상대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올 동안 자신의 기감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상대의 살기가 느껴지고 있는데도 상대의 모습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수다.’
 석백군이 상황을 판단하고 살기가 일어난 방향으로 포권지례를 취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정의맹의 석백군이라 합니다. 지금 강호의 공적인 마녀를 제압하려는 중이었으니 살기를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조금 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명문의 자제라 칭송할 만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석백군이었다.
 “다 봤거든?”
 생각보다 어린 목소리에 석백군의 뇌리는 재빠르게 회전했다.
 “고인께서는 모습을 드러내 주십시오.”
 “고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넌 제압을 옷 벗기고 하냐*혈도에 점이라도 찍혀 있디?”
 간단하게 대답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이의 모습을 본 석백군은 호흡이 불편할 정도로 놀랐다.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나이에 청년이라 부르기에도 어려 보이는 소년의 모습인 악적이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있단 말인가?’
 석백군은 악적의 모습을 보고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눈앞의 소년이 조금 전과 같은 강렬한 살기를 뿜어낼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일행이 있거나 자신이 잘못 느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소형제는 누구인가*사도나 마도에 몸을 담지 않았다면 그냥 물러서게.”
 악적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부가 상당히 심정이 좋지 않을 때 자주 보이는 모습을 악적도 어느새 배워 버린 것 같았다.
 “누가 네 형제냐*또 사도나 마도에 몸을 담지 않았다 한들 그냥 물러서겠냐*발정 난 수캐 같은 네놈이 그렇게 침을 마구 흘리고 있는데.”
 악적은 노골적으로 석백군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사람이 입이 험하군.”
 악적과 대화를 하면서도 기감을 극대화하며 주변에 다른 이가 있는지 살피는 석백군의 모습에 악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 많이 처먹은 네놈은 입도 험한 데다 눈치도 없구나. 누가 더 있을까 봐 그리 두리번거리는 것이냐?”
 그 말에 석백군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찰나에 지나친 빛이었지만 악적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 소형제 말고는 아무도 없단 말인가?”
 “속고만 살았나, 아니면 속이고만 살았냐*그리고 한 번만 더 소형제란 말 사용하면 넌 죽는다! 아주 지근지근 밟아 버리는 수가 있어! 앙?”
 주위 어느 곳에도 기감으로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고, 악적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석백군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놈, 봐주려 했더니 주둥이가 아주 요악하구나!”
 채챙!
 검을 뽑아 들고 일 검에 악적의 목을 베어 버리려는 듯 쏘아져 오는 석백군의 검을 보고 악적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개나 소나 나만 보면 다 놈이라고 지껄이는군.”
 따당!
 기성이 들리고, 석백군은 자신의 검면을 때리는 악적의 지력에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어디 그것뿐인가?
 몰아쳐 오는 살기로 인해 마치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나오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오고, 석백군은 자신도 모르게 사지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아차! 사숙께서 처음에는 사부의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악적은 순간 사숙들의 말을 떠올렸지만, 그동안 익혀 온 살안이 자연스럽게 발휘된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디다 검을 들이대고 지랄이냐*돼먹지 않은 놈이 검은 좋은 것을 들고 다니는구나.”
 악적은 마치 제 검인 양 자연스럽게 석백군의 손에서 검을 뽑아내려 했다.
 검은 무인의 신체와 같은 것.
 아무리 두려움에 질려 있어도 그 역시 무인이기에 무의식적으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어허! 지랄을 하는군. 콱!”
 악적의 위협에 몸서리를 치는 석백군이었지만 이미 악적의 발이 허공을 가르고 석백군의 사타구니를 파고들었다.
 퍽!
 뿌드득!
 부러지는 소리인지 찢어지는 소리인지 둘 중 하나인 것만은 확실한 소리가 일고, 석백군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크아아아악!”
 악적이 뿜어내는 살기로 인해 말조차 하지 못했던 석백군이었지만, 그 엄청난 고통에 연혼계곡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석백군의 검을 손에 쥔 악적이 그의 허리춤에 걸린 검집까지 뽑아냈다.
 “앞으로는 여자한테 그리 함부로 하지 마라. 알았냐?”
 퍼퍽!
 “크아아아아악!”
 
 * * *
 
 투안.
 사아란의 몸을 투안으로 살펴보며 악적은 내력의 손실과 더불어 이질적인 기운이 존재함을 보았다.
 투안으로 사람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악적이 활안의 경지에 한걸음 다가섰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질적인 기운이 무엇인지, 또한 그것을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지는 악적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흠······.”
 침음성을 흘리는 악적을 보며 눈을 치켜뜨는 사부의 입에서는 괜히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뭘 안다고 침음성을 흘려?”
 ‘젠장, 숨도 쉬지 못하나?’
 속에서 그 말이 튀어나올 듯했지만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빤한 것이었기에 악적은 말을 돌렸다.
 “무엇입니까?”
 “무엇이 말이냐?”
 “저 여인의 몸에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할까······.”
 악적의 말에 염우빙이 꽤 놀란 빛을 발했지만, 그것은 잠시였기에 눈치 빠른 악적도 알아채지 못했다.
 “잘 알면 네가 치료하든지.”
 “아닙니다.”
 악적이 무릎을 꿇은 채로 조금 뒤로 물러갔다. 그것은 곧 더 이상 사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복이었고, 염우빙은 다시 의식을 잃은 사아란의 맥문을 잡고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악적은 사부의 행동이 미덥지 못했다.
 ‘저건 탈의도경을 볼 때의 눈빛인데······.’
 사부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 지금 사아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옷 속을 뚫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거의 확실해.’
 악적이 그렇게 확신을 가질 때, 사부가 고개를 돌렸다.
 “적아.”
 “예?”
 마치 제 생각을 들킨 듯 조금은 놀란 모습을 보이는 악적의 행동에 염우빙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리 놀라느냐?”
 “아닙니다.”
 악적의 대답에 뭔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않는 염우빙이었다.
 “중독이다.”
 “독에 당했다는 것입니까?”
 “그렇구나.”
 두 분의 사숙과 함께하던 당시, 사숙들이 독에 대해 일러 준 바가 있기에 악적도 중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넌 가서 홍심초를 달여 오거라. 아주 오래 푹 달여야 한다. 알겠느냐?”
 “예.”
 사부의 명을 받아 홍심초를 아주 오래 달인 물을 내실로 가지고 들어오던 악적의 눈이 찢어졌다.
 도대체 무엇을 치료하기에 사아란의 옷섶이 젖혀져 있으며 사부의 저 음흉한 미소는 무엇인가?
 “사부, 뭐 하시는 겁니까?”
 추궁하는 듯한 악적의 목소리였지만 염우빙은 동요하지 않았다. 더욱 악적을 놀라게 한 것은 사부는 분명 탈의도경을 정독할 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해되니까 조용히 하고 그것이나 내려놓아라. 나가면 더욱 좋고.”
 물론 악적은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사자 우리에 토끼를 던져 주는 것이 낫지, 의식 잃은 여인을 사부와 단둘이 방에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악적의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지만 염우빙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사부, 어떤 독이기에 홍심초가 효험을 발휘하는 겁니까?”
 악적의 물음에 염우빙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치료에 방해가 된다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악적은 더 이상 사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홍심초 달인 물은 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부는 저 흔한 것으로 독을 제거할 수 있다니.’
 사부가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을 처음 보기에 악적은 그 모습에 집중했다. 자신 또한 배워 두면 쓸 일이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부의 손이 홍심초를 달인 물이 담겨 있는 찻잔을 들더니 천천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
 악적은 의문이 일었다.
 홍심초 달인 물을 왜 사부가 마시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사부의 손이 사아란의 가슴 가운데에 위치한 현기혈에 다가가는 순간, 악적은 숨을 멈추었다. 그것도 잠시, 현기혈을 지나간 사부의 손은 봉곳하게 솟은 가슴 주위를 주무르고 있었다.
 ‘설마 즐기는 것은 아니겠지.’
 악적이 어떤 생각을 하든 개의치 않고 한참 동안이나 그 행동을 반복하던 사부가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 내며 사아란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창백했던 사아란의 피부색이 점점 제색을 찾아가는 모습에 악적은 방금 전 가졌던 생각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독특한 치료법이야. 사부에게 저런 능력이 있었다니.’
 홍심초를 자신이 마시고 그 기운을 내력으로 화하여 상대의 몸에 주입하는 저런 엄청난 치료법을 사부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사부와 함께한 뒤 처음으로 존경심이 일어나는 악적이었다.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악적의 말에 염우빙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쥐어진 바늘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실혼침이라는 것이지. 단순한 침처럼 보이지만 실혼침의 위력은 대단하다. 만일 이 실혼침이 어깨의 혈맥에 박히지 않고 혈류를 따라 심장으로 향했다면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리지 못했을 것이야.”
 “그렇군요. 독은 어떤 종류였습니까?”
 이미 치료를 끝낸 터라 악적은 내심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미혼산(迷魂散)이야. 일단 중독이 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특징이지. 미혼산에 당하고도 이곳까지 도망쳐 올 정도라면 정신력이 대단한 아가씨구나.”
 악적은 사부의 말에 더욱 이해가 쉬워졌다.
 평소에도 자주 마시는 홍심초를 달인 물은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의식을 잃은 여인에게 홍심초를 먹일 방법이 없으니 사부가 스스로 복용하고 그것을 사아란의 몸으로 주입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스스로 복용하고 그 기운을 상대의 몸에 심어 넣는다.
 화타가 와도 울고 갈 정도라 자부할 수 있는 사부의 능력에 악적은 내심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과거 악적의 의부가 진 빚을 갚아 주던 때를 제외하고는 오늘처럼 사부가 멋있어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제자, 홍심초가 미혼산의 중독에 효과가 있다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 말에 염우빙이 의아한 듯 악적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사부께서 홍심초를 마신 후 그 약력을 저 여인의 몸으로 주입하신 것 아닙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어 내던 염우빙은 이제 악적을 미친놈 쳐다보듯이 보기 시작했다.
 “내가 홍심초의 약력을 저 아이의 몸에 주입시키다니, 참으로 특이한 생각을 하는구나. 누가 자신이 차를 마시고 그것을 상대의 몸에 주입한단 말이냐*또한 그게 가능하기나 한 말이냐?”
 “예?”
 악적은 자신의 판단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악적의 등 뒤에서 소름들이 아우성치며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스스로 진정하며 사부에게 되물었다.
 “그럼 왜 홍심초를 달인 물을 가져오라 하셨습니까?”
 “목이 말라서 먹으려고 가져오라 했지.”
 “아주 오래 달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래 달이면 진하게 우러나니 맛이 좋잖아.”
 사부의 한마디에 처음으로 가졌던 존경심은 악적의 내부에서 산산이 갈라지고 찢어졌다.
 동시에 조금 전 사아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사부의 손길과 어깨를 주무르던 행동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차를 가져오란 것도 그사이 다른 짓을 하······.’
 딱!
 “큭! 왜 때리십니까?”
 “너 지금 무슨 생각했냐?”
 보일 듯 말 듯한 사부의 눈동자는 마치 악적의 내부를 뚫어 보는 듯했다.
 “아닙니다.”
 “뭐가 아냐!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방에 불이나 더 지펴라. 해독이 되었다곤 하나 한기에 시달릴 거야. 방을 따뜻하게 덥혀 주도록. 알았냐?”
 “예.”
 사부와 함께 방에서 나와 불을 지피러 가는 악적은 사부의 비릿한 표정을 볼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해.’
 방에 넉넉하게 불을 지핀 악적은 사아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풍연마을에서 또래의 계집아이들을 많이 보았지만, 사아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백옥처럼 하얀 피부는 악적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예쁘다.’
 한참이나 사아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악적이 그녀의 하반신만 가리고 있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주기 위해 다가갔을 때, 사아란의 눈이 떠졌다.
 사아란은 무척이나 놀란 듯했고, 그 거리가 워낙 가까워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보였다.
 악적은 자신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지었다.
 휘잉!
 사아란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악적의 눈을 향해 쏘아져 왔다.
 뻑!
 “컥!”
 뒤로 나가떨어지는 악적을 보고 사아란은 마치 튕겨지듯 바닥을 차고 올랐다.
 그 순간 악적의 눈에 들어오는 사아란의 붉은빛 고의.
 도대체 치마는 어디로 달아난 것인가?
 “크크컥!”
 심장의 박동 소리가 급격히 빨라지고 온몸의 피가 눈에 쏠린 듯한 악적의 시선이 사아란의 하반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꺄아아악!”
 자신이 고의만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아란의 놀란 비명 소리가 초옥을 울릴 때, 염우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 악적을 바라보는 사아란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어떤 경위이든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주고 치료까지 해 준 악적의 얼굴에 멍 자국을 만든 것은 자신이 경솔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치마를 왜 벗겼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치료를 위함이라 판단했다.
 “미안해.”
 미안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지만 말투는 하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미안하다면서 말은 놓네.”
 악적의 말에 사아란의 눈초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럼 존댓말을 하란 말이야?”
 “그래도 초면에 말을 놓는 것은 실례가 아니냐*목숨도 구해 주었는데 말이야.”
 “그랬지. 치마도 벗겼지만 말이야.”
 사아란의 말에 악적은 손으로 머리를 짚어야 했다.
 도대체 그놈의 치마를 왜 벗긴 것인지 그것에 꼬리가 잡혀 계속 곤란을 겪는 것이었다.
 “그 치마를 벗긴 것은 내가 아니고 사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해 줄게. 그 대신 나에게 존칭을 바라지는 마라. 남자와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지만, 남자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외모는 천상의 신녀가 내려온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뒷골목의 파락호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사아란, 그녀는 늘 사내를 혐오했다.
 사내라는 것들이 어떤 것을 원하고 여인을 그저 노리개쯤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탓이었다. 또한 강호에서는 명문의 소협으로 알려진 석백군의 행동은 그녀에게 사내를 더욱 혐오하게 만들어 주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그런 그녀로서는 사내들에게 존칭을 사용해 본 적도,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미치겠군. 도대체 치마는 왜 벗긴 거야.’
 악적은 다시 사부를 마구 씹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몇 살이야?”
 “열일곱.”
 “뭐?”
 “열일곱이라고.”
 “호호호! 이제 열일곱이면 아직 한참 어리네. 앞으로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라.”
 사아란의 웃음소리가 자적산을 울리는 동안, 악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예쁘다.’
 그것을 느낀 것일까?
 사아란이 매서운 눈으로 악적을 쏘아보았다.
 “눈빛이 왜 그래?”
 “아니, 뭐 그냥······. 쳐다보지도 못하냐!”
 “어쭈! 누나에게 말을 놓네*난 열여덟이란 말이야. 앞으로 누나라고 부르고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해! 알았어?”
 앙칼진 목소리였지만 악적에게는 비단결보다 더 부드러운 소리로 들렸다.
 “정말이야?”
 “그럼 거짓말하겠니?”
 악적은 조금은 아쉬운 듯, 또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아란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어려 보이는데······.”
 “오호! 지금 날 못 믿겠다는 거야?”
 “못 믿겠다기보다는······ 뭐 조금의 의심······.”
 악적의 흐릿한 목소리에 사아란이 뭔가 개운치 않는 표정을 지어 냈다.
 “좋아! 목숨도 구해 주고 했으니 특별히 친구 해 준다. 그러니까 너도 마음 편하게 말 놓아. 정말 나, 크게 마음먹고 봐주는 거다.”
 “아닌 것 같은데······.”
 악적의 말을 듣지도 않는 사아란이 악적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난 사아란이야.”
 “그래, 난 악적.”
 “뭐?”
 사아란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악적에게 다시 물었다.
 “악적이라고, 악적.”
 “이름이 악적이야?”
 “응.”
 “호호호! 악적! 이름 정말 멋지다!”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아란의 얼굴은 어느새 악적의 가슴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너, 되게 예쁘다.”
 갑작스러운 악적의 말에 사아란의 웃음이 멈추었다.
 또래의 사내에게 이런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알았어?”
 “아니. 처음 볼 때부터 알았어.”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배운 것인가?
 가르친 이가 없고 배운 적이 없으니 천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악적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것이 거짓이라고 한들 자신을 예쁘다고 하는데 기분 나빠할 여인은 없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물론 사아란이 그 법칙을 깰 수 있는 여인은 아니었고, 악적의 한마디는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너도 볼만해.”
 사아란은 지금 왜 자신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볼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이런 느낌은 처음 받아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사부님이 남자를 조심하라고 했구나.’
 사아란은 악적의 눈을 보지 못했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거.”
 악적이 내민 손 위에는 조그만 장신구가 들려 있었다. 호랑이 발톱을 갈아서 만든 목걸이는 악적이 소중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뭐니?”
 “호랑이 발톱이야. 액운을 피하게 해 준대.”
 자신도 모르게 악적의 눈을 바라본 사아란은 급히 시선을 돌리고는 장신구를 건네받았다.
 “고마워.”
 “아니야.”
 그렇게 얼마 후.
 몸이 회복된 사아란을 자적산 아래까지 배웅해 주고 돌아오는 악적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 듯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겨우 보름 안에 무슨 감정이 생기겠냐고 생각한다면 오판이었다.
 악적의 나이 열일곱.
 여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도 남을 나이였고, 어느 날 다가온 사아란의 존재는 악적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악적은 사아란이 건네준 작은 조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조각일 뿐이었지만 사아란이 건네준 것이니 의미가 깊은 물건이었다.
 ‘이런 것을 정표라고 하는가?’
 혼자서 온갖 망상과 착각으로 잠겨 있던 악적은 사아란을 머릿속에 그리며 초옥으로 향했다.
 ‘다시 온다고 했으니······. 하긴, 여자라면 날 보고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지.’
 
 * * *
 
 이 년.
 사아란이 꼭 한 번 다시 들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난 지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악적은 마음속에서 사아란을 지우지 않았고,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이곳 연혼애에도 남아 있었다.
 ‘설마 나에게 반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악적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렸다. 사아란이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해 줄 수 있지만 여자라면 자신의 늠름한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곧 오겠지, 뭐.”
 사부와 악적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모든 일들을 자신이 편한 대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사부는 그렇다 하더라도 악적은 그런 성정이 아니었음에도 짧지 않은 세월은 악적을 사부처럼 변하게 한 것이었다.
 ‘저놈!’
 악적은 나무 둥지에 꼼지락거리는 놈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과거 자신을 기절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던 뱀과 같이 생긴 동물이었고, 저놈이 사숙이 말하는 그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악적이었다.
 이미 이곳 연혼애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번번이 놓쳐 버린 놈이었다.
 ‘오늘은 기어코 잡아 주마.’
 악적은 내력을 끌어올려 놈을 잡을 준비를 했고, 놈도 무엇인가 눈치를 챘는지 더욱 나무와 하나가 되고 있었다.
 파팡!
 악적의 지력이 쏘아져 나가 나무 둥치를 때렸지만, 놈이 그것을 피할 것이라는 건 악적도 익히 알고 있었다.
 쏴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네 발을 놀리는 놈의 빠르기는 진정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어딜!”
 악적은 극성의 분행탈모를 시전하며 놈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피피피핑!
 놈의 뒤를 쫓으며 수없이 쏘아지는 악적의 무흔파열지.
 그 지력에 닿은 땅이 파이고 갈라졌지만 아직 놈을 격중시키지는 못했다.
 악적은 점점 약이 올랐다. 사숙이 놈을 영물이라고는 했지만 영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악적으로서는 손바닥만 한 놈을 잡지 못한다는 것에 약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라졌다!”
 악적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 놈을 찾기 위해 기감을 극대화했지만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놈이야.”
 악적은 오늘도 실패로 끝나 버린 것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방법이 없었기에 몸을 돌렸다.
 극상의 기감에도 느껴지지 않는 놈은 색깔마저 마음대로 변화시키니 시각으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악적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에 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퍼펑!
 악적의 신형이 뒤로 이 보나 물러났다.
 그것도 잠시, 하나의 비수처럼 쏘아져 오는 놈의 모습에 악적은 급히 양수에 기운을 모았다.
 번쩍!
 전에 그러했듯이 또 한 번 섬광 같은 빛을 발출해 내는 놈이었고, 그 위력은 악적의 몸에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놈!”
 악적은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놈의 공격에 방어를 했고, 동시에 우수로 놈의 몸을 잡아챘다.
 찌르르르.
 번개를 맞은 듯한 느낌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악적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악적의 손아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던 놈은 몇 번이나 발버둥을 치다가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축 늘어졌다.
 ‘어?’
 악적의 눈이 의문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 엄청난 기세를 발하던 놈이 갑자기 축 늘어지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죽었나*설마!’
 악적은 슬며시 손에 준 힘을 풀어 보았지만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놈, 진짜 죽은 것 아냐?’
 의아함에 좌수로 놈의 몸을 뒤집자, 손바닥 위에서 배를 드러내고 한 바퀴 구르는 놈이었다.
 “이거 구워 먹을까*맛이 있을는지 모르겠네.”
 악적의 비릿한 음성에도 눈을 뜨지 않는 놈이었지만, 놈의 몸에서 일어나는 파장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놈이 누구 앞에서 죽은 척을······.’
 악적의 입 끝이 말려 올라가고 진기를 모아 손바닥에 주입하자, 삼매진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열기를 이기지 못한 놈이 죽은 체하기 어려웠는지 급히 손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지만 악적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너 임마, 오늘 죽었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악적의 좌수에 잡혀 버린 놈은 눈빛이 덫에 걸린 사슴처럼 가련해 보였다.
 
 * * *
 
 “그놈은 뭐냐?”
 악적의 가슴에 붙어 있는 악룡을 본 사부가 의아한 듯 물었다. 웬만한 눈썰미로는 악룡을 알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부는 한눈에 악룡의 존재를 파악했다.
 “악룡 말입니까?”
 “뭔 룡?”
 “악룡이요.”
 “그놈 이름이 악룡이냐?”
 “예.”
 악적을 보는 염우빙의 눈에는 한심하다는 빛이 가득했다.
 “같은 악 씨니 네 동생이냐?”
 “그냥 그렇게 지은 겁니다.”
 “어이구, 바보 같은 놈! 쯧쯧.”
 제자의 속을 알고 있는 것인가?
 염우빙의 혀를 차는 소리가 자적산을 울릴 듯했다.
 “자꾸 왜 그러십니까?”
 악적의 어투에 상당한 반항이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당장에 주먹이 날아올 일이었지만 염우빙은 그저 안타깝다는 눈빛만 보내고 있으니 그것이 악적을 더욱 미치게 했다.
 사아란이 떠나간 후.
 늘 자신을 보고 혀를 차는 사부였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더욱 속이 뒤집어졌다.
 “이놈아, 이 사부가 중원을 주유할 시 가는 걸음마다 여인네들의 웃음과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부의 말에 악적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실 외모로 따지자면 사부의 외모는 인간의 범주는 이미 벗어난 외모였다. 어두운 밤에 본다면 누구라도 심장마비를 일으킬 저런 외모에 여인네들을 울고 웃기다니.
 길을 잡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콧방귀를 뀌고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 일이었다.
 “호오! 네놈이 사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악적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후의 일을 감당하기에 아직 자신의 수준이 사부의 경지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어찌 대답이 떨떠름하다?”
 “사부, 아무리 사부라 하지만 그것만큼은 진정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 장님이 아닌 이상 사부의 얼굴······.”
 딱!
 “크헉!”
 “이놈이 아주 사부를 물로 보는구나. 네 이놈!”
 일갈과 동시에 염우빙의 눈빛이 확연하게 변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악적의 눈은 곧 몽롱하게 풀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놓아 버린 악적은 그 후 사부가 사용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섭혼안과 동시에 발현한 흡혼소(?魂笑).
 상대의 혼을 흡수해 버린다는 사공 같은 무공으로 여인을 끌어들였단 말인가?
 저런 사악한 무공에 여인들이 당했으니 당연히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악적이었지만, 어느새 사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야 했다.
 그냥 사악한 무공이라고 넘겨 버리기에는 흡혼소는 너무 매력적인 무공이었다.
 “사부님, 진정으로 존경합니다!”
 “그래, 나의 제자야! 내 어찌 흡혼소를 너에게 전수해 주지 않겠느냐. 다만······.”
 “하명하십시오! 이 제자,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열혈지옥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허헛! 그래야지, 암! 악적아!”
 “옙!”
 “태산에서 복우황과 제자의 비무에서······.”
 사부의 명에 악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중원오악 중 하나로 불리는 산동성 태산의 정상에 염우빙과 악적의 모습이 보였다. 조그맣게 지어진 초옥을 거쳐 인공으로 만들어진 연못을 지나자, 염우빙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왜 이리 소원했는가?”
 자신의 거처로 찾아든 친우 염우빙을 복우황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미안하네그려. 몇 번이나 찾으려 했지만 발걸음이 쉽지는 않았네.”
 “그랬겠지. 어디 제자를 가르친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이해해 주니 고마우이.”
 두 사람의 대화는 사실 평소에 이와 같이 점잖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나이이거니와 제자들이 보는 앞이어서 체면상 점잖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자네 제자인가?”
 “그렇다네. 적아, 인사해라.”
 사부 염우빙의 명에 악적이 복우황을 향해 깊이 읍을 했다.
 “악적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이름이 악적이라는 말에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급히 삼키는 복우황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지만 스스로 악적이라 말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우스웠던 것이다.
 “참으로 훌륭하게 키웠어. 두야, 너도 인사를 해라.”
 복우황이 제자를 부르자, 헌앙하게 생긴 미소년이 앞으로 나서 염우빙에게 읍을 했다.
 “마두가 어르신을 뵙습니다.”
 방금 전 자신의 이름을 듣고 언뜻 미소를 비치던 복우황의 행동에 어이가 없는 악적이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마두라니 이름 한번 특이하구나.’
 “자네 제자도 헌앙하기 그지없군. 그동안의 배움이 짧지 않을 것 같네그려.”
 악적과 마두.
 향후 무림을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을 두 청년의 첫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 명 모두 외자 이름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성까지 붙여 부르면 당장 마도인으로 몰리고 남을 이름들이었다.
 “그럼 한번 시작해 보지.”
 “그러지.”
 염우빙이 악적을 데리고 이곳 태산에 오른 것은 제자들의 무위를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말로는 친선을 도모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배워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사람이 자신의 제자가 지는 꼴을 볼 리 만무했다.
 악적과 마두 둘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상대에게 패하면 사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두라는 이의 무공이 가볍지 않게 느껴질뿐더러 사부와의 비무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손을 섞어 보는 악적이었기에 그는 기대감에 가득 찼다.
 “아무래도 힘들겠구먼.”
 복우황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염우빙이 의아한 눈빛을 자아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비무 전에 미리 말해 두어야 자네의 실망이 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실망이라니?”
 염우빙의 되물음에 복우황이 입가에 가는 미소를 드리우면서 말을 이었다.
 “천고의 기재인 나의 제자 마두는 이미 천뢰행공(千雷行功)을 칠성이나 익혔네.”
 복우황의 말에 자못 놀란 모습을 보이는 염우빙이었다.
 “그 절정의 심법인 천뢰행공을 칠성이나 익혔단 말인가*자네도 저 나이에는 다다르지 못했던 일 아닌가?”
 염우빙의 놀람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복우황이 또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 그것뿐인가*파천십이연환권(破天十二連環拳)과 탄권류(彈拳流) 또한 이미 절정에 이르렀네.”
 “이런! 진정으로 기재가 따로 없으이. 자네도 중년이 되어서야 절정에 이른 파천십이연환권과 탄권류를 저 나이에! 자네의 제자야말로 진정한 기재라 할 수 있군.”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이네. 자네가 오늘의 비무로 너무 실망을 할까 내 우려되어서 미리 언질을 하는 것이네.”
 복우황의 자신만만한 말에 염우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우이. 내 아직 자네의 제자와 비무를 할 때가 아님에 너무 이른 시간에 이곳에 찾아왔나 보네. 오늘의 일을 경험 삼아 더욱 제자를 가르치는 데 정진해야겠어. 진정으로 대단하이, 대단해!”
 평소의 염우빙이라면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었지만 제자를 앞에 둔 사부의 모습은 염우빙도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가지는 복우황이었다.
 하지만 염우빙의 생각은 복우황과 전혀 달랐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 소림사의 소식을 들었다면 네놈이 이리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제 시작하는군. 적이가 오늘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텐데.”
 염우빙의 목소리에 복우황도 제자들이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웅!
 쇄앵!
 복우황의 제자 마두가 절정의 보법인 신선보를 밟으며 솟구치고, 악적 또한 주구행을 운용하며 마두에게 향했다.
 “아니, 저것은!”
 복우황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냈다.
 자신의 제자와 허공에서 부딪치는 악적의 무공은 그에게도 낯익은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혼천수라각(混天修羅脚)! 안 돼!’
 이미 멸문한 자부문의 혼천수라각을 알아본 복우황이 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퍽!
 “크으아아악!”
 딱 한 방!
 단 한 방의 발길질에 마두의 눈이 뒤집어지며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 모습에 복우황의 눈 또한 뒤집어졌다.
 “마두야!”
 비명을 토해 내며 제자에게 쏘아져 가는 복우황은 의식을 잃은 마두를 안아 들었다.
 “마두야! 나의 제자야, 정신 차려라!”
 “어허, 이런!”
 한 번의 가벼운 탄성을 질러 낸 염우빙이 걱정 어린 눈빛과 미묘한 미소를 동반하고는 복우황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
 염우빙이 걱정하는 말을 꺼냈지만 복우황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기혈이 뒤엉킨 제자의 몸을 치료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의식을 잃은 제자의 몸에 내력을 주입하고 있는 복우황의 귓전으로 염우빙의 목소리가 사악하게 파고들었다.
 “적아!”
 “예, 사부님.”
 “좀 살살하지 그랬느냐?”
 “제자, 일 할의 힘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염우빙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악적의 대답에 복우황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마두의 몸에 내력을 주입해 치료를 하고 있던 복우황에게 사제의 대화는 주화입마에 빠져 들게 하는 마귀의 손짓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 저것들이!’
 오만은 곧 화를 부르는 법.
 물론 비무에서 승리했다고는 하나 제자가 이토록 오만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용서할 염우빙이 아니었다.
 “적이, 네 이놈!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냐!”
 사부의 노기 어린 음성에 악적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
 “사부, 제자는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어허, 이놈! 그것이 사실이라 한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상대를 두 번 죽이는 말이다!”
 염우빙의 그 한마디에 복우황은 울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제자에게 주입하던 내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것이 상대를 두 번 죽이는 것인 줄, 제자 미처 몰랐습니다.”
 악적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자, 염우빙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우황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 친구, 미안하네. 내 제자가 아직 철이 없어서 말이야. 나 먼저 내려가겠네. 수고하게.”
 염우빙의 염장에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는 복우황의 등 뒤로 사제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적아, 어떻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일 초에 끝나 버려서.”
 “그럴 게야. 하지만 마두라는 저 아이의 무공 경지가 칠성을 넘었다고 하더구나.”
 “칠성이란 말입니까?”
 “그래, 칠성.”
 “사부님, 보통의 무공은 십이성을 익히면 대성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저 친구가 익힌 무공은 한 오십성은 익혀야 대성하는 무공인가 보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크크.”
 평소에는 어떨지 몰라도 이럴 때만큼은 죽이 척척 맞는 두 사제의 대화가 복우황의 귓전으로 흘러들었고, 복우황이 기어코 울혈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광풍가도』 제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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