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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라스트 킹덤 [E]

라스트 킹덤 1권

2019.08.21 조회 194 추천 0


 Prologue
 
 
 
 
 
 
 
 
 
 제갈공명.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의 신하가 된 이후 방랑의 영걸이었던 그를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 당대 제일의 군사다.
 천하삼분지계를 통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눈 웅대한 전략을 펼치고, 삼국 중 제일 국력이 약한 촉의 재상이 되었으나 죽기 전까지 힘의 균형을 유지한 업적은 가히 당대 제일의 군사라 칭송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보다 내 관심을 끈 장수는 따로 있었다.
 그 장수는 바로 위의 학소였다. 진창성에서 겨우 3,000의 군사로 출사에 오른 제갈량의 수만 군대를 물리친 장수.
 학소는 어떻게 제갈량의 북벌을 막을 수 있었을까?
 단지 하나의 성을 지키며 싸운 것만으로, 어떻게 당대 제일의 군사가 이끄는 군대로부터 성을 지켜 낼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하다.
 삼국지 정사나 연의 둘 다 기술된 바에 따르면 학소는 분명 제갈량을 막아 냈다. 그렇다면 그 성과는 일말의 과장이나 왜곡이 없는 진실이란 말이 된다.
 성을 세우고 지키며 싸우는 것이 농성(籠城).
 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공격하는 것이 공성(攻城).
 지금은 군 전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먼 옛날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것들이다.
 지금 현재로선 과거의 기록된 것으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는,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
 
 가상현실 게임 ‘라스트 킹덤’을 해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Chapter one
 
 
 
 
 
 
 
 
 
 “이신성 선수! 우승! 우승입니다!”
 해설자의 흥분된 외침이 내 자리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이 주변에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헤드셋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맞은 편 LCD 앞에 앉아 있던 상대를 힐끗 보았다.
 나보다 키가 훨씬 작고 교복을 입은 걸로 봐서는 학생인 것 같은데, 눈매가 날카로워서 한 성질 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수고했다. 잘 싸웠어.”
 난 상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녀석은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보면서 내가 내민 손을 팍 쳐냈다.
 뭐, 어쩌겠어? 싫다는데. 두 번 권하는 것도 보기 안 좋지.
 난 뭐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녀석이 내 등을 향해 소리쳤다.
 “이신성!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너 같은 놈이 감히 내 전승 행진을 망치다니, 이건 정말 가문의 수치다!”
 그 말에 난 다시 뒤돌아섰다. 그리고 녀석을 빤히 내려 보았다.
 “딱 보니 중삐리 같은데, 어디서 반말을 지껄여? 이 형아가 올해로 딱 스무 살이거든? 네가 엄마 젖 물고 앵앵거릴 때 이 몸은 초등학교에서 빵빵 공 차고 있었다고.”
 “누가 꼬마야, 누가! 그리고 나 중학생 아니거든? 사정이 있어서 교복을 좀 입었을 뿐이지. 열아홉이다!”
 “그래 봤자 나보다 어리네. 건방진 놈 같으니, 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반말로 지껄이라고 가르치던?”
 “······.”
 내 말에 녀석은 할 말을 잃었다. 설령 내가 좀 나이를 잘못 봤다고 해도, 저 녀석이 나보다 어리니까 게임은 끝난 거다.
 “이······ 이······.”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녀석······, 절대 용서 못해! 다시 한판 붙자. 이번에는 절대 안 질 거야.”
 “싫어. 내가 왜? 난 프로 게이머도 아니야. 이번 대회도 그냥 재미삼아 참가한 것뿐이라고.”
 누가 들으면 그게 무슨 건방진 소리냐며 오해를 하겠지만 내 본심은 그랬다. 방금 전에 저 땅꼬마와 결승전을 치렀던 게임도, 어쩌다 보니 우승을 하게 된 거지 처음부터 노렸던 건 아니었다.
 뭐, 우승 상금이 짭짤해서, 당분간 생활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 다행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니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너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서민 따위한테 질 수 없어!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대······.”
 “그래, 그래. 혼자 실컷 떠들어라. 난 그만 돌아갈련다.”
 왠지 계속 들어 주기 피곤해진 난 바로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지나가는 개가 짖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헤드라인[[이신성, 퍼스트 킹덤 리그를 제압하다!
 혜성처럼 등장하여 유력한 우승 후보 유성 선수를 누르고 깜짝 승리를 거머쥔 이번 시즌 최고의 다크호스![[
 
 인터넷 언론 IT 항목에서 일제히 보도된 기사는 온통 나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됐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 그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할 뿐이다. 사실 퍼스트 킹덤 같은 실시간 전략 게임보다는 오히려 삼국지 시리즈 같은 턴제 전략 게임을 더 좋아하지만 말이다.
 삼국지, 손자병법, 중세의 백년전쟁, 십자군 전쟁 등, 전쟁 관련 서적을 독파한 나는 언젠가부터 책에서 본 것들을 실제로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어려우니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면서 어느 정도 그 갈증을 해소해 왔던 것이다. 퍼스트 킹덤 리그에 참가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가 되어 우승까지 거머쥐었는데도 왠지 그리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마도 날 만족시켜 줄 만한 게임은 앞으로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통장에 입금된 우승 상금을 뒤늦게야 직접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왜 그런지 가까이 가서 보니 늘씬하고 잘 빠진 검은색 차체의 최고급 리무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누구 차일까?
 여긴 부자 동네도 아니고 번화가와도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라 저런 걸 타고 다닐 사람이 없다. 그런 차가 우리 집 앞에 주차되어 있으니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우리 집’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반지하 월세방에 사는 주제에.
 위층 주인집 손님인가 보지 뭐.
 전직 교장 선생님이었다는 주인집 할아버지와 달리 내가 처한 현실은 두말할 것도 없는 시궁창. 게임 리그 우승해서 받은 상금도 공과금과 집세를 뺀 나머지는 빚 갚는 데 써야 한다.
 부모님이 큰 빚을 지고 시골로 내려가셨고 나 혼자 서울에 남았는데 내 명의로 빌린 돈만큼은 내가 직접 갚아야 했다.
 정말 가난에 찌들어 사는 중이다. 하지만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고.
 난 그렇게 생각하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주인집 본관 건물 뒤로 돌아가서 지하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성 군.”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아래 누군가 서서 날 올려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벽 천장에 머리가 살짝 닿을 정도로 큰 키에 검은 정장을 쫙 빼입은 노년 신사로, 콧수염을 기르고 한쪽 눈에 외알 안경을 꼈다.
 “누구세요?”
 난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빽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거기다 정장을 입은 노신사라니. 난 그런 쪽하고 전혀 연관이 없단 말이야.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노신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내 쪽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최진철. 제왕 그룹 총수님의 집사를 하고 있습니다.”
 “제, 제왕 그룹?”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제왕 그룹은 삼성, 현대, LG, 기아와 더불어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나 같은 서민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는 세계가 완전 다른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의 집사가 날 찾아오다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설마 이번에 우승한 게임 리그의 준우승자가 대기업 총수 아들은 아니겠지.
 “안심하십시오. 신성 군에게 무슨 위해를 가하러 온 건 아닙니다.”
 진철 씨가 내 속마음을 간파한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점에 대해선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우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말에 나는 바로 집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철 씨가 따듯한 커피를 내왔다. 집 주인은 난데 어쩐지 손님한테 역으로 차 대접을 받고 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진철 씨는 내가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잔을 다 비웠을 때쯤 조용히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겠지만 너무 놀라지 말고 잘 들어주십시오. 저는 총수님의 지시로 가상현실 게임 ‘라스트 킹덤’을 배달하러 왔습니다. 고글과 헤드셋, 전용 침대식 의자 등 전 장비 일체를 집안에 설치해 두었습니다. 물론 신성 님이 스스로 개인 정보를 삭제하지 않는 이상, 평생 쓸 수 있는 계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용 인터넷을 설치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관계로 미리 들어와서 설치한 것에 양해를 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 집안을 둘려보니 안 쓰던 작은 방에 못 보던 물건들이 보였다. 진철이 말한 그대로의 게임 장비들이었다.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이라니!
 그런 건 지금까지 있다고 들어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해본 적이 없다. 온라인 게임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저한테 이런 장비를 지원해 주는 거죠? 전 온라인 게임 유저도 아니고, 그쪽한테 이런 걸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요.”
 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고 말했다.
 옛말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받아버리면 뒷감당을 못할 것 같았다.
 내 그런 반응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는지 진철 씨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저희 제왕 그룹의 지원 하에 개발된 라스트 킹덤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상현실 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특징은 유저가 군주로 선택하여 하나의 거점을 가지고 시작해서 전쟁을 하다가 종극에 이르러 대륙을 통일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삼국지나 손자병법, 항우기 같은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
 삼국지나 손자병법 같다고?
 종이가 닳도록 읽어댄 책 이름이 언급되니 왠지 모르게 흥미가 생겼다. 눈동자를 빛내며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서비스 개시 일 년 만에 대륙을 통일한 군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반년도 채 못가 통일 왕국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거듭된 폭정과 혼란으로 인해 일반 유저들의 피해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라스트 킹덤은 오로지 군주로만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따라 시민이나 병사, 재야 등의 일반 신분으로 고를 수 있으며 사실 상 그 수가 군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 유저가 잘못하면 정말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어 있지요.”
 “흠, 그럼 문제를 일으킨 군주 유저의 계정을 삭제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야기를 듣다 궁금한 점이 생겨서 바로 묻자 진철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사실 가장 간단하고 편리한 해결 방법이지만, 군주 유저가 게임 속에서 폭정을 저지르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임 개발자들도 일이 그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해서 이용 약관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요. 폭정의 범위를 제한하는 기준이 마련되지 못한 관계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업데이트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 같은 사람들을 찾아온 겁니다.”
 진철 씨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날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신성 군. 당신은 최근에 몇몇 게임 리그에서 우승을 하면서 업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실력을 라스트 킹덤에서 발휘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즉 유저에 의해 벌어진 문제를 같은 유저가 해결함으로써 아무런 잡음 없이 해결하고 싶다 이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새로운 유저가 폭군 유저를 몰아내고 새로이 대륙을 통일하는 것은 게임 룰 상으로 합법적인 것이니까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가 먼저 의뢰를 하는 쪽이니 게임 장비는 물론이고 전용 인터넷 선도 지원하겠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인가. 개발사가 게임 상에서 아이템이나 돈을 지원하면 불법이겠지만 이렇게 밖에서 장비와 인터넷을 지원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겠지. 생각해 보니 참 용의주도하잖아.
 “당연하겠지만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스카웃하셨겠죠?”
 “네, 통일 왕국의 세력이 워낙 큰 관계로 한두 명의 군주로는 대적할 수 없거든요. 신성 군 이전에 벌써 여러 명을 섭외한 상태입니다. 어떤 의미로 볼 때는 군웅할거 시대라고 할 수 있지요.”
 군웅할거(群雄割據).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쿵하고 울렸다. 한 명의 군웅이 되어 난세에 뛰어든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겐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다.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빈 거점이 아니라, 다른 군주의 거점을 하나 함락시킬 때마다 성과금으로 백만 원씩 지급해 드립니다. 하루에 수십 시간 동안 게임을 해야 할 테니 그동안 드는 생활비 일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내가 그토록 바래오던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돈까지 벌 수 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군.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지금 바로 돌아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게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매뉴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진철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난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게임 장비들이 구비된 방에 쌓여 있는 매뉴얼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첫 장을 펼치자마자 유난히 내 시선을 잡아끄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고딕[[성을 쌓아라!
 요새를 지어라!
 병사를 모아라!
 신 개념 전략+영지 경영 게임 판타지 라스트 킹덤.
 당신도 온라인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다.[[
 
 ‘전략과 영지 경영이라······.’
 이런 장르가 가상현실 게임으로 가능하다니. 국내 가상현실 게임이 언제 이렇게 발전한 거지?
 “후후후······.”
 진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만약 이 게임이 매뉴얼의 설명 그대로 구현되었다면.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갈구해 온 게임인지도 모른다.
 그 기쁨과 기대 속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실실거리며 매뉴얼에 파묻혔다.
 
 
 
 
 
 Chapter Two
 
 
 
 
 
 
 
 
 
 가상현실 게임은 이번에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지금 내가 사는 현실에 그런 건 넘쳐흘렀다. 그래서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사전 정보를 입수한 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이 게임 속 세상에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눈부신 빛만이 번쩍이면서 주변을 밝혔다.
 백지처럼 하얀 허공에 검은 번개가 내리치며 한글로 변모했다. 곧이어 상큼한 여자 목소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울리듯 들려왔다.
 
 고딕[[라스트 킹덤(Last Kingdom)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계정을 생성하시겠습니까?[[
 
 “예.”
 사전에 입수한 정보대로 대답 대신 생각으로 결정을 했다. 그러자 곧 검은 번개가 내리치며 허공에 수놓인 글자가 바뀌었다.
 
 고딕[[ID를 입력해 주십시오.[[
 
 “카이저.”
 
 고딕[[생성되었습니다. 한 번 생성한 ID는 한 달 동안 삭제 또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지.
 카이저란 ID도 나름대로 오랫동안 생각해서 결정한 거다. 누가 들으면 촌스럽다고 할지 몰라도 난 만족스럽다.
 내가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화면이 완전히 전환됐다.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하얀 허공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푸른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아래로는 녹색의 대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배경의 아름다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진짜 감탄할 만한 수준이다.
 
 고딕[[직업과 종족을 골라 주십시오.
 군주를 고르시면 거점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을 고르시면 전사, 도적, 성직자, 마법사 등 네 가지 기본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직업과 종족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시면 다음을 선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무슨 얼어 죽을 다음. 내가 기껏 일반 플레이를 하려고 이 게임을 하는 줄 아나.’
 난 추가 설명을 듣지 않고 바로 결정했다.
 직업은 군주.
 종족은 인간.
 능력치도 수정이 가능했지만 귀찮아서 전부 균일로 맞추었다.
 
 고딕[[튜토리얼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예.”
 내가 결정을 내린 순간 갑자기 눈앞에 지도가 하나 나타났다. 상당히 큰 규모에 무수히 많은 점이 찍혀 있었다.
 
 고딕[[지도를 보아 주십시오. 지도에 보이는 점이 다른 유저들의 거점입니다. 현재 라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군주 직업의 유저는 하나의 거점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자신의 거점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상대의 거점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가장 큰 세력은 어디지?”
 
 고딕[[가장 큰 세력은 지도상의 중간 지점, 즉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삼 년 전 최초로 라스트 킹덤을 통일한 ‘킹덤 오브 윈드’입니다. 그러나 통일 후 삼 년이 지난 지금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하여 현재 세력은 가장 크지만 그만큼 가장 불안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지도를 보니 과연 거점의 수는 많았다. 지도 중앙의 약 절반은 라스트 킹덤의 땅이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또 다른 한 가지 색이 점거하고 있었다.
 “킹덤 오브 윈드 주변의 정세를 설명해 줘.”
 
 고딕[[킹덤 오브 윈드의 주변 정세는 현재 혼란 상태입니다. 라스트 킹덤의 시스템상 ‘반란’이 허용되기 때문에, 킹덤 오브 윈드 소속의 유저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반란 세력의 이름은?”
 
 고딕[[반란 세력의 이름은 그레이 리베리온. 현재 대륙 중앙에서 킹덤 오브 윈드와 쌍벽을 이루는 세력입니다. 그 외에 신 유저의 거점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꼭 어느 한 곳에 소속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군. 어디 보자 어디서 시작하는 게 좋을까······.”
 난 지도를 자세히 보면서 비어 있는 땅을 일일이 살펴 보았다.
 거대한 두 왕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륙의 중앙에도 곳곳에 비어 있는 땅이 보였지만 왠지 거기엔 시선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중앙의 혼란에서 벗어난 외지. 즉 바깥쪽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의 정세는?”
 
 고딕[[외지의 정세는 조용합니다. 멀리 서쪽으로 이 년 전부터 킹덤 오브 윈드에 반역을 한 독립 유저의 거점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비어 있습니다.[[
 
 난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외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곧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북동쪽 끝에 있는 작은 땅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위치상으로 서쪽으로 통하는 길은 산 사이의 외길 하나 밖에 없었다. 동쪽으로 바다를 등지고 있지만 그건 해로(海路)고, 육로(陸路)는 하나뿐이니 지키며 싸우는데 용이할 것 같았다.
 “저기······ 저곳. 북동쪽 끝에 있는 빈 거점으로 고르겠어.”
 
 고딕[[거점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자동 생성으로 선택하셔도 됩니다.[[
 
 “그레이트 원.”
 난 주저 없이 답했다. 처음부터 거점의 이름 정도는 생각해 두고 있던 것이다.
 그레이트 원.
 그 뜻은 ‘위대한 하나’다.
 북동쪽 끝에서 생성된 그 거점 이름을 조만간 대륙 전체를 물들여 주겠어!
 
 고딕[[거점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럼 지금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지막 내레이션을 끝으로 내 시야가 한번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순식간에 지도에서 본 그 장소에 와 있었다.
 좌우로 산, 뒤로는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땅으로.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는 낡은 텐트 하나가 설치되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고딕[[지금 앞에 보이는 텐트가 카이저 님의 거점입니다. 카이저 님의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텐트도 업그레이드하여 나중에 가면 요새나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라스트 킹덤의 목적은 유저의 거점을 키우는 것이나,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유저의 거점에 소속될 수도 있습니다.[[
 
 흥이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시작이라고 해도 내 거점을 갖고 있는 게 낫지. 누가 남의 밑에 들어갈까 보냐.
 
 고딕[[시작 자산은 1,000골드. 필요한 장비와 물품은 상태 창을 열어 상점 메뉴를 클릭하셔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상점에 없는 품목을 구입하시려면 직접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상점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표준 장비와 물품은 굳이 상점에 가서 사지 않아도 된다 말인가? 이건 참 편리하군.
 
 고딕[[그럼 이것으로 튜토리얼을 마치겠습니다. 카이저 님의 무운을 빕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레이션이 끝났다.
 난 그제야 혼자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밖에 없다. 내 거점이라는 텐트를 중심으로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앞으로 차차 채워나가면 되겠지 뭐. 우선 상태 창부터 좀 체크하고 장비를 구입해 볼까?
 난 게임에 접속한 후 처음으로 상태 창을 켰다.
 
 고딕, 박스[[유저 상태 창
 이름 : 카이저
 레벨 : 0
 경험치 : 0/10
 성별 : 남자 종족 : 인간 직업 : 군주
 능력치
 HP : 50/50
 MP : 20/20
 피로도 : 500/500
 공겨력 : 5 방어력 : 5
 전투 힘 : 5 근력 : 5 체력 : 5
 민첩 : 3 마력 : 2 행운 : 1
 스킬 : 없음
 내정 통솔 : 35 지력 : 30
 정치 : 33 매력 : 40
 특기 : 없음
 장비 : 없음
 자금 : 1,000골드
 ->다음[[
 
 상태 창에는 문자 그대로 지금 내 상태가 떴다.
 수치 자체는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여타 게임과 비슷했다. 애초에 난 나 혼자 강해져서 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서 내 능력치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상태 창 맨 마지막 칸에 보이는 ‘->다음’이란 표시가 눈에 띄었다. 난 곧바로 그걸 손가락으로 지정해서 클릭했다.
 
 고딕, 박스[[거점 상태 창
 이름 : 그레이트 원
 레벨 : 0
 경험치 : 0[10
 소속 : 카이저군 태수: 카이저.
 형태 : 텐트
 내구력 : 100/100(나무)
 병력 : 0
 장수 : 1
 인구 : 1/10
 특수 : 없음
 금 : 1,000 병량 : 10,000
 ->건축, 상점[[
 
 거점 상태 창.
 말로만 듣던 걸 직접 보니 진짜 완전 새로운 느낌이다. 그동안 수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해 왔기 때문에 수치 자체는 익숙한데. 거점에 레벨이 있고 그게 나랑 똑같으며, 함께 성장한다는 개념을 가진 게임은 이게 처음이다.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건축을 클릭해 보았다. 그러자 돌과 나무를 비롯한 자재부터 이미 완성된 건축물 등의 목록이 쫙 떴다.
 그 다음에 상점을 클릭해 보니 일반적인 무기와 방어구, 도구의 목록이 가격순으로 쫙 떴다. 그걸 뒤로 팍팍 넘기다가 문득 ‘공성[농성 병기’라는 항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연노, 충차, 발석차, 정란, 투석기 등 동서양을 막론한 현존하는 모든 공성[농성 병기가 가격 순으로 쫙 보였다.
 보통 전략 시뮬레이션에도 이런 유의 무기는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는데. 이 게임은 진짜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난 내 개인 장비를 갖추는 것보다 오히려 공성[농성 병기 목록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하지만 역시나 상당히 가격이 비쌌고 목록을 쭉 내려 보니 지금 내 현재 자금으로 살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고딕, 박스[[발리스타(Balista)
 공격력 : 50
 내구력 : 50/50
 - 활의 원리를 이용하여 큰 목제의 틀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날리도록 만든 농성 병기
 가격 :900골드[[
 
 그걸 본 난 곧바로 발리스타를 구입했다.
 띠리링!
 
 고딕, 박스[[카이저 님께서 발리스타를 구입하셨습니다.[[
 
 작은 소리와 함께 자금 액수가 줄어들더니 내 앞으로 한 대의 발리스타가 나타났다.
 발리스타를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책에 나온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현된 걸 이리 저리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 몬스터가 당신의 거점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튜토리얼을 끝으로 다시 듣지 못할 줄 알았던 내레이션이 울렸다. 난 반사적으로 상태 창을 켠 뒤 도움말을 클릭했다.
 
 고딕[[유저의 적은 다른 유저뿐만이 아닙니다. 이 대륙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몬스터 역시 유저의 적입니다. 게임의 규칙 상 유저끼리의 전쟁에서는 도움말 기능이 지원하지 않지만, 몬스터의 습격은 알려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해당 서비스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환경 설정 창에서 꺼 주십시오.[[
 
 도움말을 다 듣고 나니 상태 창 위로 또 하나의 작은 창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이 근처 지리를 나타내고 있는 지도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간 점 하나가 내 거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바로 이곳을 공격하러 온다는 몬스터인가?
 난 황급히 상점을 클릭하여 개인 장비를 쭉 살펴봤다. 제일 싼 장비를 본 순간 저절로 헉 소리가 났다.
 
 고딕[[단검 : 50골드
 나무 방패 : 70골드
 가죽 갑옷 : 100골드[[
 
 검과 방패, 갑옷 등 기본적인 장비 셋트의 가격이 모두 합치면 200골드를 넘었다. 지금 내 몸은 맨 몸으로 방어력은 0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다. 갑옷 하나 달랑 사고 맨 손으로 싸울 순 없으니 최저한의 가격으로 공방을 맞추는 수밖에.
 
 고딕[[나무 곤봉 10골드 구입 완료
 나무 방패 70골드 구입 완료[[
 
 내가 상점 창에서 구입을 한 순간 내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곤봉과 방패가 쥐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니 처음 생긴 장비가 자동 장착되는 시스템인가 보군.
 쿵!
 그때 내 앞으로 약 1미터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 빨간 점이 내 거점이 있는 자리에서 반짝였다.
 “캬아아악!”
 거친 포효와 함께 나타난 그 몬스터를 본 순간 난 두 눈을 크게 떴다.
 
 고딕[[고블린(Goblines) 레벨 : 1
 HP : 50/50
 MP : 0/0[[
 
 특별히 무슨 조작을 한 것도 아닌데 친절하게도 몬스터의 상태 창이 눈에 보였다.
 “뭐야, 이거······.”
 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작 1레벨짜리 고블린 한 마리 가지고 경고 메시지가 뜨다니. 너무 허무해서 말이 안 나왔다.
 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에도 고블린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날 살기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골반까지밖에 안 오는 작은 키에 대머리, 뾰족한 귀, 녹색 피부를 가진 난쟁이의 모습을 하고선 전혀 위협거리가 안 된다고!
 쉬이잉~
 퍽!
 그때였다.
 뭔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 가슴 쪽으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머리 위를 보니 빨간색 그래프와 숫자가 보였다.
 
 고딕[[카이저 레벨 : 0
 HP : 45/50
 MP : 20/20[[
 
 “어어?”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다시 한 번 퍽 소리가 들리더니 HP가 40/50으로 줄었다.
 난 황급히 앞을 보았다. 아까 전의 그 고블린이 내 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고블린 주제에 건방지잖아!
 나도 못 산 활을 쓰다니.
 아니,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니잖아. 이러다 고블린한테 맞아 죽게 생겼다고.
 난 재빨리 나무 방패를 앞세워 내 온몸을 막았다. 고블린이 다시 활을 쏘았지만 이번엔 화살이 방패에 막혔다.
 
 고딕[[나무 방패 내구력 : 45/50[[
 
 이번엔 내가 아닌 방패의 상태 창이 떴다. 내구력이 내 HP와 똑같군. 계속 막고만 있을 수는 없겠네.
 난 방패를 앞세우고 전진했다. 방패의 내구력이 절반으로 떨어질 때쯤 간신히 고블린 앞에 도착했다.
 “어디 한번 죽어봐라!”
 난 곤봉을 번쩍 치켜들어 고블린을 후려쳤다. 그러자 곧 고블린 머리 위에 떠 오른 상태 창의 HP 수치가 40[50으로 떨어졌다.
 다섯 방만 치면 죽는 놈인데 계속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눈을 부라리며 손에 든 활로 내게 근접 사격을 가했다. 한창 곤봉을 휘두르는 중이라 화살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화살이 몸에 꽂히는 걸 감수하고 그냥 미친 듯이 곤봉으로 후려 팼다.
 그러다 내 HP가 10/50으로 줄어들어 빨간 빛이 번쩍일 때쯤 고블린이 먼저 쓰러졌다.
 털썩.
 땅에 쓰러지기 무섭게 고블린의 몸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작은 빛이 번쩍였다.
 
 고딕, 박스[[경험치 5 획득. 다음 레벨까지 앞으로 5 남았습니다.
 
 HP가 1/5로 줄어들 만큼 치열하게 싸웠는데 고작 5라니······.
 뭐 상대가 고블린이란 걸 감안한다면 수치상으로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분했다.
 어쨌든 이번 전투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아무리 상대가 고블린이라고 해도. 내가 저랩이니까 쉽게 상대할 수 없다는 거다.
 역시 발리스타를 사느라 개인 장비를 사는데 신경을 안 써서 그런가? 지금 내 장비로는 정말 싸우기 어렵군.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보니 고블린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작은 활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난 가서 그걸 냉큼 주워들었다.
 
 고딕, 박스[[[단궁]
 공격력 : 5
 내구력 : 10/10
 기본 화살 :무제한
 설명
 - 짧은 활로 사정거리가 낮지만 가격이 저렴하며 숙련도에 상관없이 누구나 쓸 수 있다.[[
 
 무기 설명을 보니 적어도 지금 내가 든 곤봉보다는 나았다.
 ‘앞으로의 전략을 수정해야겠군. 활을 기본 장비로 해서 사격을 하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곤봉과 방패를 꺼내서 싸워야지.’
 아참. 그보다 HP 회복이 급하군. 지금 상태로 또 고블린하고 싸우면 내가 먼저 쓰러지겠어.
 난 곧바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지만,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HP가 조금씩 차는 게 숫자로 보였다.
 근데 그 HP가 차는 속도는 정말 느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분에 2씩 차다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왜 그렇게 늦게 차는지 도움말을 켜 보니 거점 레벨이 낮아서 그렇다고 한다.
 거점이 낮으면 유저가 거점 내에서 휴식을 취해도 회복 속도가 늦고, 그걸 빠르게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구급 장비나 여관 같은 곳을 지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대체 그 돈을 언제 어떻게 버냐고. 고블린 한 마리 상대하기 힘든데 말이야.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 몬스터가 당신의 거점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휴식을 취한 지 5분이 지나고 내 HP가 20/50 정도 찼을 때, 조금 전에 들었던 경고 음성이 또 다시 들려왔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금 이 거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빨간 점이 보였다. 이번에는 점이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10개나 됐다.
 ‘설마······ 아까 전에 내가 쓰러트린 그 녀석, 고블린 부대의 척후라도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크네.
 내가 만약 소규모 부대를 거느린 지휘관이라고 해도 먼저 척후를 보내 적의 동향을 살핀 뒤에 공격을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공격당하는 게 내 쪽이잖아!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난 고작 0랩 유저라고. 거기다 HP가 꽉 찬 것도, 개인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잖아.
 가진 거라곤 정말 싸구려 장비 몇 가지와 20골드뿐이다. 이걸로 어떻게 고블린 10마리를 상대하란 말이야!
 무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어쩐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로그아웃하면 편한데. 한번 게임 오버 당해도 같은 계정으로 다시 접속하면 그만이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여기서 굴복하면 그레이트 원(위대한 하나)라는 이름이 울지. 고작 이 정도 시련으로 물러설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반드시 이겨 보이겠어!
 
 
 
 
 
 Chapter Three
 
 
 
 
 
 
 
 
 무기는 곤봉과 단궁.
 방어구는 나무 방패. 복장은 평상복. 갑옷은커녕 망토 하나 걸치지 못한 그야말로 최저가 장비 세트. 그게 바로 지금 내 장비 상태였다.
 현재 내 HP는 20[50. 절반도 채 차지 않은 상태였고 회복용 아이템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 거점을 향해 쳐들어오는 적의 수는 무려 10명.
 제아무리 저랩 몬스터 고블린이라고 해도 10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는 법.
 더구나 지금 내 레벨은 0이라 저 녀석들을 다 합친 레벨 총합수는 내 10배나 된다.
 하지만 난 지금 거점에서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 나와 있었다.
 서쪽에 나 있는 유일한 산길 너머에 고블린 무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근처 풀숲에 숨어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단궁에 화살을 장전했다.
 정확히 1분 뒤 고블린 무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보다 키가 한참 작은 녹색 피부의 대머리 난쟁이들이지만 역시 10마리가 한데 모여 움직이는 걸 보니 바짝 긴장이 됐다.
 눈으로 무장 수준을 대충 파악하고 보니 다행히 원거리 무기를 가진 녀석은 없었다. 갑옷이나 방어구 같은 것도 착용하지 않은 맨 몸에 단검과 곤봉 등 최저가 무지로 무장했다.
 즉 저놈들은 가까이 붙지 못하면 나한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난 풀숲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놈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분 뒤 놈들이 단궁의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을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활시위를 당겼다.
 쉬이잉~
 퍽!
 한 대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쌩하고 날아가 고블린 한 마리를 정통으로 맞췄다.
 보기 좋게 명중했지만 그래봤자 데미지는 고작 6.
 화살에 맞은 고블린의 머리 위로 43[50이란 숫자가 떴다.
 두 번째 활시위를 당겼을 때 고블린들이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못생긴 놈들이 내 쪽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퍽!
 두 번째 화살도 아까 그놈을 또 맞췄다. 그제야 고블린들이 무서운 기세로 내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난 곧바로 등을 돌려 달렸다.
 세 번째 화살을 장전한 채 달리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벌였을 때. 다시 한 번 화살을 쏘았다. 쏘고 도망치고 쏘고 도망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결과 마침내 한 마리가 털썩 쓰러졌다.
 그러나 그 직후, 선두에 서서 달려 온 고블린 세 마리에게 배후를 잡혔다.
 퍽퍽퍽!
 세 번 연이어 들려 온 타격음과 함께 내 HP가 쭉쭉 떨어졌다. 데미지는 10. 내 HP는 10[50으로 떨어졌다.
 “쳇! 벌써 이만큼 달았나!”
 난 바로 반격하지 않고 고블린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다시 등을 돌려 달아났다.
 단궁을 집어 놓고 나무 방패를 꺼내 들어 방어력을 높이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내가 도망치는 걸 본 고블린들이 한층 사기가 오른 상태로 쫓아왔다.
 “어휴, 고블린 따위한테 쫓겨 다녀야 하다니. 수치다 진짜!”
 말은 불평 투성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달린 지 몇 분 뒤.
 약 1미터 떨어진 곳 앞에 내 거점이 보였다.
 거점은 여전히 텐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주변의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 남은 20골드를 전부 털어서 1개에 1골드짜리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요새에 기둥을 세우듯 텐트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내가 들어갈 단 한 곳의 입구만을 열어 놓았다.
 빡!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등 뒤에 약한 충격이 전해졌다.
 내 머리 위에 뜬 숫자가 HP 8[10으로 바뀌었다.
 “뭐야, 씨······.”
 나무 방패를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고블린들이 바닥에 널려 있던 짱돌을 주워 던지기 시작했다. HP가 하도 바닥을 기고 있다 보니 데미지 2짜리 짱돌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난 고블린들을 마주 보는 방향에서 나무 방패를 들어 놈들이 던지는 짱돌을 막았다. 다행히 짱돌 공격력이 방패 방어도도 보다 낮아서 그런지 내구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난 방패를 든 자세에서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가 거점 안으로 쏙 들어갔다. 비록 울타리밖에 치지 못했지만 방패가 없어도 고블린의 짱돌 같은 건 가뿐히 막아냈다.
 난 곧장 나무 방패를 아이템 창에 집어넣은 다음 다시 단궁을 꺼내 들었다.
 울타리 한가운데 유일하게 트여 놓은 입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서서 정면에 활을 겨누었다.
 내가 그 자세를 유지한 지 약 2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마침내 고블린 무리가 나타났다. 놈들은 지금 내가 마주 보이는 길 앞에 우르르 모여 서 있었다.
 “캬아아악!”
 선두에 선 고블린 한 마리가 날 향해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8마리의 고블린도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마치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한 듯한 힘찬 함성과도 같았다.
 울타리를 전부 쳐 놓은 것도 아니고 딱 한 군데가 비어 있다. 나는 혼자고 HP가 바닥을 드러냈는데 비해 저쪽은 무려 9마리나 됐고 HP도 가득 찬 상태였다.
 누가 봐도 승패가 빤히 드러나는 상황이다.
 아무리 인공 지능으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의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승패를 가늠할 지적 수준을 갖추었는지. 한 번에 몰아붙이지 않고 천천히 압박하듯 다가왔다.
 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들이 가까이 오건 말건 정면을 향해 겨눈 활의 조준 방향은 그대로였다.
 그때 고블린 무리에서 어떤 한 고블린이 길을 해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른 고블린에 비해 덩치가 약 1.5배 정도 크고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 단검과 나무 방패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덩치나 무장 수준을 고려해 볼 때 아무래도 저 녀석이 저 무리의 대장인 모양이다.
 
 [인간이여, 이젠 도망칠 곳도 없다.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고블린 대장이 말했다. 내가 말할 때처럼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에 말풍선 같은 것이 떠서 글자가 떠올랐다.
 “건방진 놈. 일개 CPU 주제에 유저한테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네놈 분수를 알아라!”
 난 고블린 대장의 말풍선을 보고 놈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 붙였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단궁을 그쪽으로 겨누었다.
 놈은 내 말을 듣고 화를 내려다가, 내가 단궁을 겨눈 걸 보고는 킬킬거리며 웃고는 어디 한번 쏘아보라는 듯 손을 내렸다.
 난 주저 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단궁에서 쏘아진 한 대의 화살이 고블린 대장을 향해 날아갔다.
 [얘들아, 쳐라!]
 그와 동시에 고블린 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고블린들이 날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휘이잉~
 파캉!
 세차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내가 방금 쏜 화살보다 더 빠른 뭔가가 고블린 세 마리를 한 번에 관통했다.
 휘이잉~
 파캉!
 다시 한 번 같은 소리가 울리면서 또 다시 뭔가 날아가 고블린을 관통했다. 이번에는 두 마리를 한 번에 뚫어버렸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병력의 절반을 잃어버린 고블린 부대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쏜 화살을 몸으로 받은 고블린 대장만이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앞을 보았다.
 [뭐, 뭐야!]
 고블린 대장이 놀란 반응이 말풍선에 그대로 떠올랐다.
 “CPU 치고는 재미있는 반응이군. 그럼 친절히 가르쳐주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너희들과 맞서 싸우다 여기로 도망 온 줄 알았냐?”
 난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 주며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놈들은 이제야 비로써 내 등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발리스타.
 그것은 바로 내가 이 게임을 시작한 지 처음으로 산 무기인 발리스타였다.
 공격력 50의 초대형 활.
 고작 HP가 50밖에 안 되는 고블린 정도는 단 한 방에 격살시킬 수 있는 병기였다.
 [후퇴! 후퇴하라!]
 고블린 대장이 뒤늦게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놈들은 벌써 거점 안으로 들어와 있고 밖으로 통하는 입구는 하나뿐이다.
 그 입구로 달려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발리스타의 사정거리는 거점 밖으로 수십 미터 너머까지 닿는다.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그 순간까지 대형 화살의 놈들의 뒤를 쫓았다.
 발리스타의 사격으로 단 몇 분 만에 고블린 8마리가 쓰러져 나갔다. 남은 건 고블린 대장 하나 뿐으로, 대형 화살 한 대를 맞고 거의 다 죽어가는 걸 내가 직접 쫓아가서 단궁을 쏘아서 잡았다.
 띠리링~!
 
 고딕, 박스[[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딕, 박스[[유저 역사가 갱신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익숙한 내레이션 음성이 들려왔다. 이 게임은 전투 도중에 레벨이 오르는 게 아니라 끝난 다음에 오르는 모양이군. 잘 기억해놔야겠네.
 난 일단 해당 창을 열기 전에 고블린들이 떨어뜨린 무기부터 회수했다.
 가죽 갑옷, 나무 방패, 단검 4개, 곤붕 6개.
 역시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최저가 장비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난 갑옷 하나 입지 못한 상태다.
 가죽 갑옷은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내 상태 창으로 드래그하여 즉석에서 착용했다.
 매뉴얼에서 본 건데 이 게임에서 장비는 전 종족 공통이라서 고블린이 입던 갑옷도 ‘고블린용 갑옷’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갑옷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내가 착용하니 내 몸에 맞는 사이즈로 딱 변했다.
 나무 방패는 내구력이 낮으니 부서질 걸 감안해서 여분으로 남겨 두고, 단검 1개만 챙긴 뒤 나머지 물건은 전부 상점에 팔았다.
 
 고딕[[단검 3, 곤봉 6의 매각했습니다.
 
 - 135골드를 획득했습니다.[[
 
 싸구려 무기라서 그런 거겠지만 고작 수입이 135골드라니 정말 짜다. 몬스터가 현금을 가지고 다닐 리는 없으니까 당연한 설정이겠지만, 그럼 앞으로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는 거지?
 어쨌든 이제 슬슬 유저 상태 창을 켜 봐야겠군.
 유저 상태 창을 켜 보니 전투 능력치와 내정 능력치의 포인트가 각각 10씩 주어졌고 원하는 수치를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잠시 생각해 본 뒤 곧바로 포인트를 배분했다.
 
 고딕, 박스[[유저 상태 창
 이름 : 카이저
 레벨 : 2
 경험치 : 60/100
 성별 : 남자 종족 : 인간 직업 : 군주
 능력치
 HP : 80/80
 MP : 30/30
 피로도 : 520/520
 공겨력 : 8 방어력 : 8
 전투 힘 : 7 근력 : 5 체력 : 8
 민첩 : 5 마력 : 3 행운 : 3
 스킬 : 없음
 내정 통솔 : 38 지력 : 30
 정치 : 40 매력 : 40
 특기 : 없음
 장비
 주무기 - 나무 곤봉, 나무 방패
 보조 무기 - 단궁
 자금 : 136골드
 ->다음[[
 
 “어라, HP가 꽉 찼잖아. 레벨업의 특전인가? 유저들 입장에선 참 편리한 시스템이로군.”
 하지만 레벨 2라 아슬아슬하게 싸운 것 치고는 레벨이 그렇게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 이 정도로 만족한다. 적어도 지금 상태라면 고블린 한 마리 정도는 여유 있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딕, 박스[[거점 상태 창
 이름 : 그레이트 원
 레벨 : 2
 경험치 : 60/100
 소속 : 카이저군 태수 : 카이저
 형태 : 텐트
 내구력 : 120/120(나무)
 병력: 0
 장수 : 1
 인구 : 1/30
 특수 : 없음
 금 : 1,000 병량 : 10,000
 ->건축, 상점[[
 
 헐, 0랩에서 2랩으로 한 번에 껑충 올랐네. 거점도 레벨이 올랐지만 아직 형태가 변하지는 않았군. 그래도 뭐 내구력과 수용 인구수가 상승한 건 좋은 현상이다.
 유저, 거점 상태 창을 다 체크한 다음 유저 히스토리 창이란 걸 한번 열어 봤다. 내레이션으로 갱신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었다.
 
 고딕, 박스[[유저 역사창
 군주 카이저(Lv : 2)
 * 8월 27일 오후 5시 00분.
 - 고블린 격파
 총 입수 경험치: 5Exp
 * 8월 27일 오후 5시 30분.
 - 고블린 요격 부대 격파
 총 입수 경험치 : 55Exp
 ->다음[[
 
 오오. 이 히스토리 창 꽤 편리한데? 언제 어디서 뭘 했는지 기록할 수 있다니. 꼭 무슨 콘솔 게임 하는 것 같네. RPG느낌이 물씬 풍기는걸.
 그럼 다음 창으로 한번 넘어가볼까?
 
 고딕, 박스[[유저 퀘스트 창
 § 퀘스트 1.
 [북동쪽에 있는 고블린 부락을 함락하라!]
 - 북동쪽에 위치한 고블린 부락에는 약 50여 마리의 고블린이 모여 살고 있다. 그들은 미개한 몬스터들이지만 무리를 짓고 살기 때문에 얕잡아볼 수 없다. 고블린 부락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곳에서 편성된 요격 부대가 수시로 당신의 거점을 침략해 올 것이다.
 보상 : 500골드[[
 
 역시 온라인 게임 아니랄까봐 퀘스트도 있었군. 보상금이 500골드라니. 역시 돈은 퀘스트를 해결해서 벌어야 하려나?
 그보다 고블린 10마리도 간신히 물리쳤는데 50여 마리가 모여 사는 부락을 함락시켜야 한다니 이건 완전 산 넘어 산이다.
 이게 바로 군주 유저의 애환인가? 일반 유저로 이미 존재하는 도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배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또 도전 욕구를 자극한다 이거지!
 일단 정찰이나 한번 가 봐야겠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싸움에서 이긴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당장 함락을 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적에 대해 미리 알아 둔다면 여러모로 대응책을 짜는데 도움이 되겠지.
 다음 목표는 고블린 부락 정찰이다!
 
 
 
 
 
 Chapter Four
 
 
 
 
 
 
 
 
 
 일단 다음 목적은 세웠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매뉴얼에서 본 바에 따르면 군주 유저가 로그아웃을 하면 거점이 닫힌 상태가 되어 적의 공격을 받지 않지만, 반대로 로그인을 하고 있으면 언제든 타세력의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지금 내 거점에는 소속 장수가 군주인 나 하나밖에 없는 상태다. 즉,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 거점은 텅 빈 상태가 된다 이 말이다.
 소속 장수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제 게임을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안 되니 그건 무리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걸 해결할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혼자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미처 보지 못한 걸 발견한 것이다.
 거점 상태 창 다음에 뜨는 상점 메뉴에서는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 유저를 대상으로 한 특별한 창에서 NPC를 구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난 그 구입 목록을 확대시켜 보았다.
 
 고딕[[[현재 구입 가능한 NPC 목록]
 도구 상인 : 50골드
 - 거점 내에 도구 매매가 가능해 집니다.
 무기 상인 : 50골드
 - 거점 내에 무기 매매가 가능해 집니다.
 방어구 상인 : 50골드
 - 거점 내에 방어구 매매가 가능해 집니다.
 경비병 : 100골드
 - 24시간 내내 지정된 명령에 따라 해당 구역을 지키는 병사입니다.[[
 
 “음, 상인 시리즈는······ 지금 당장 구입할 필요는 없겠군.”
 상인들은 거점이 커진 다음 다른 유저가 찾아온다는 가정 하에 필요한 NPC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었다.
 그럼 남은 건 하나 밖에 없지.
 
 고딕[[경비병을 구입했습니다.[[
 
 귀에 익숙한 내레이션이 허공에 울리더니 내 눈앞에 푸른빛이 번쩍였다.
 잠시 후, 그 빛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이윽고 완전한 실체를 갖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뿔 달린 헬멧을 쓰고 가죽 갑옷에 나무 방패, 창으로 무장한 경비병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스터 카이저. 앞으로 그레이트 원을 수호할 경비병입니다.”
 경비병이 날 향해 고개를 숙이며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를 받아준 다음 경비병의 상태 창을 켜 보았다.
 
 고딕, 박스[[[경비병]
 레벨 : 2
 소속 : 그레이트 원
 능력치
 HP : 100/100
 MP : 0/0
 공격력 : 10 방어력 : 10[[
 
 역시 NPC 상태 창은 유저 상태 창보다 간소했다.
 ‘음, 레벨이 2인 걸 보니까······ 내 걸 공유하는 것 같은데. 마법은 못 써도 HP나 공방이 높으니 괜찮네. 적어도 0레벨일 때의 나처럼 고블린 한 마리 잡느라 쩔쩔 매지는 않겠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경비병은 AI상으로 미리 입력된 듯한 대사를 던지며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난 경비병에게 경계 근무와 유사 시 발리스타를 움직여 거점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발리스타는 공격력 50의 강력한 병기로 화살을 자동으로 발사하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수동으로 방향을 바꿔줘야 한다는 것이다.
 방향까지 자동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면 내가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블린 부대를 유인해 왔겠어?
 어쨌든 이제 경비병이 한 명이라도 생겼으니 그 문제는 해결됐다.
 남은 돈 35골드 중에 10골드는 주변 지도 구입에, 20골드는 거점 바깥에 두른 울타리의 빈 부분을 마저 채우면서 문을 다는데 썼다.
 이제 남은 돈은 달랑 5골드.
 내가 생각해도 진짜 빈곤하다. 진짜 돈만 많으면 발리스타도 3대 정도는 들여 놔, 씩 들여 놓고 경비병도 잔뜩 구입할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군.
 총 재산 5골드의 가난한 군주로서 툴툴거리며 거점 바깥으로 나왔을 때였다.
 띠리링~!
 
 고딕, 박스[[탐색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탐색 모드라니 그건 또 뭐지?”
 처음 들어보는 거라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관계로 도움말 기능을 켰다.
 
 고딕[[탐색 모드는 한 거점에 소속되어 있는 유저가 전투나 내정이 아닌 다른 일로 거점에서 벗어날 때 발동되는 모드입니다.
 몬스터 사냥, 미궁 조사, 인재 수색, 주변 경계 및 정찰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탐색 모드로 들어가면 피로도가 소모되기 시작하며 피로도가 다 떨어지면 행동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단, 소모된 피로도는 식량을 구입하거나 휴식을 취해야 다시 채울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군. 피로도가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우선은 식량부터 좀 사야 되려나.”
 상점 창을 열어 보니 도구점 판매 목록 제일 아래쪽에 보였다.
 
 고딕[[[현재 구입 가능한 식량 목록]
 여행용 식량 : 1골드
 - 10분 동안 피로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호, 소비형 아이템이 아니라 지속형 아이템이네.”
 일정 시간 동안이란 제한이 붙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렴한 가격을 따져 보면 꽤 쓸 만한 편이었다.
 지금 나한테 5골드가 있으니 적어도 50분어치 식량은 살 수 있다.
 난 곧바로 식량을 구입한 다음 상점 창을 닫았다.
 상점 창이 사라진 뒤 곧바로 작은 꾸러미 하나가 내 발치에 떨어졌다.
 보자기 같은 형태인데 호기심이 생겨서 슬쩍 풀어 보았더니 안에는 건빵과 육포 등 마른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이야~!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구현을 해 놓다니······ 새삼스럽지만 정말 대단하군.”
 난생 처음 해 보는 가상현실 게임은 정말 대단했다.
 먹으면 과연 무슨 맛이 날지 궁금했지만 그러다가 괜히 효과가 떨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관두고 도구창에 집어넣었다.
 여하튼 이걸로 정찰 준비는 끝!
 거점 방비도 확실히 해 놓아서 한결 편한 마음으로 탐색에 들어갔다.
 머리 위쪽에 지도 창을 켜 놓고 주변을 살피며 이동했다.
 지도가 그래도 돈을 주고 산 값어치를 한 건지 목적지의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어서 찾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내 거점에서 북동쪽으로 언덕길 두 곳을 지나 걸어서 약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고블린 부락이 있었다.
 언덕 위 수풀이 우거져 있는 곳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밑을 내려 보니 부락 안을 오가는 고블린들이 보였다.
 몬스터 거점이라 그런지 남녀노소의 구분 같은 건 없다. 다 똑같이 생긴 놈들만 있는데 그 수가 약 50명 정도로 추정됐다.
 거점 수준은 그야말로 최저.
 평지 위에 노란 짚을 엮어 만든 오두막 몇 개를 제외하면 다른 건물은 하나도 없다. 내 거점도 달랑 텐트 하나뿐이지만 그래도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울타리도 치고 발리스타도 사놓고 그랬지만 저 부락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뭐, 몬스터 거점이니 당연한 건가?
 막말로 전략이나 전술 같은 거 짤 필요 없이 그냥 쳐들어가서 고블린 무리를 도륙하면 끝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나로선 공격할 방법이 없다. 내 레벨은 고작 2이고, 능력치와 장비 수준도 낮다. 고블린 한두 마리 정도라면 어떻게 잡을 수 있겠지만, 50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한다면 단 1분도 안 돼서 쓰러질 것이다.
 만약 내가 전투 능력에 포인트를 올인하고 시작 자산을 전부 개인 장비를 사는데 썼다면 어떻게 혼자서도 도전해 볼 만하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와 정반대다.
 ‘후, 어차피 안 되는 거 미련을 두지 말아야지.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레벨업을 충분히 한 다음 다시 와도 늦지 않을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주변 지리를 꼼꼼이 파악해 두었다.
 공격을 할 때는 어느 길로 가는 게 좋고, 도망을 칠 때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은지 일일이 생각하면서 다 체크했다.
 만족할 만큼 주변 지리를 살핀 다음에야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났다.
 돌아가는 길에는 여기 오면서 지나왔던 서쪽 길이 아니라 처음 보는 남쪽 길로 내려갔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주변에 또 뭐가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한 10분 정도 쭉 내려가다 보니 지도 창에서 파란 점이 반짝였다. 점 위로 작은 글씨가 떴는데 그걸 확대시켜 보니 ‘동물의 숲’이란 글자가 떴다.
 이름만 봐도 어떤 곳인지 딱 알 수 있을 장소였지만 그래도 새로 발견한 곳이니 도움말 설명 정도는 들어볼까.
 
 고딕, 박스[[[동물의 숲]
 - 동물들이 사는 숲. 초보 유저들의 사냥터로 적합한 곳이다. 다람쥐, 토끼, 사슴, 여우, 늑대 등 야생 동물이 주로 출몰한다. 그 외의 동물들은 매우 희귀한 확률로 나타난다.[[
 
 쉽게 말하자면 숲 짐승 5종 세트가 때려잡아야 할 몬스터라는 말이군. 동물 애호단체에서 이걸 보면 무슨 말을 할지 참 궁금하네.
 하지만 난 동물 애호가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레벨만 올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뭐.
 난 주저 없이 동물의 숲에 들어갔다. 수풀을 지나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 하나 나왔다.
 그 공간의 중심에 도착했을 때 근처 수풀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조건 반사적으로 단검과 나무 방패를 꺼내들었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풀숲에서 뭔가 작은 물체가 튀어나왔다. 하얀 털을 가진 토끼와 그보다 훨씬 작고 복슬복슬한 다람쥐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작은 동물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나로 하여금 공격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무리 레벨업이 궁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람쥐와 토끼를 쳐 잡으면서까지 레벨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마저 떠올랐다.
 여우나 늑대가 상대였다면 또 몰라도 먹이 사슬 최하에 내 주먹보다 더 작은 초식 동물을 상대로 단검을 치켜들고 있으니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비비적, 비비적.
 그때 다람쥐와 토끼가 내 발치에 다가와 몸을 문질렀다.
 ‘일종의 친근함의 표시인가?’
 하지만 그건 좀 이상한데. 난 지금 단검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다고. 그러니 도망쳐야 정상 아닌가.
 부스럭.
 풀숲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사슴이다. 사슴은 다람쥐와 토끼가 내 발치에 몸을 문대고 있는 걸 보더니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내 쪽으로 다가와 비비적거렸다.
 레벨업을 위한 사냥을 했다면 지금이 딱 좋은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동물들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날 경계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비비적거리는 동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평화마저 느껴졌다.
 그래. 내가 잠시 몹쓸 생각을 했지. 어떻게 이런 녀석들을 사냥해서 레벨업을 하겠어? 차라리 사냥을 안 하고 말지. 레벨업 하는 방법은 사냥 말고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고딕, 박스[[히든 피스 : 스킬- 애니멀 토크를 습득하셨습니다.[[
 
 “헉!”
 난 순간 깜짝 놀라서 소리를 냈다.
 히든 피스.
 사전적 뜻은 숨겨진 조각. 매뉴얼에 본 바에 따르면 제작자가 게임의 재미를 위해 몰래 숨겨둔 일종의 특전 같은 것이다.
 그걸 게임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돼서 발견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냐.
 진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쳐 잡으라는 동물을 안 잡고 대자연의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느낀 내 자애로움에 대한 보상일까? 아니, 어쩌면 라스트 킹덤 제작진 중에 동물 애호가가 있는 걸지도 몰라.
 ‘그보다 히든 피스다! 내가 얻은 히든 피스가 어떤 능력인지 알아봐야지.’
 내가 그렇게 혼자 마구 들떠서 유저 상태 창을 켜려고 했을 때, 갑자기 사슴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가죽 갑옷 사이에 삐쳐 나온 내 옷깃을 물었다.
 “아앗, 갑자기 왜 그래?”
 난 약간 당황했지만 날 올려 보는 사슴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서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날 어딘가로 안내하려는 듯, 입으로 옷깃을 꽉 물고는 끌어 당겼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사슴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 보았다. 다람쥐와 토끼도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혹시······?’
 가면서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이것도 히든 피스의 추가 이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떤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까.
 레벨을 한 번에 막 수십 개씩 올려주는 초광랩?
 아니면 상점에서 팔지 않은 초 희귀한 장비 같은 것?
 그렇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사슴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을 보니 내 정면으로 커다란 동굴 하나가 보였다.
 사슴은 내 옷깃을 놓아 주더니 바로 숲으로 걸어갔고 다람쥐와 토끼가 그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약 1분 뒤.
 쿵! 쿵!
 바닥이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지진이 난 것 마냥 착각이 들게 만드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였다.
 곧 동굴 저편의 어둠 속에서 뭔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 나로선 한참 올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물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물체의 정체는 바로 곰이었다.
 대충 눈짐작으로 보면 키가 약 3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곰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같이 넓고 두꺼운 몸통이 붉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얼굴 왼쪽으로 칼자국이 깊숙하게 나 있어 동공이 사라진 하얀 눈이 보였고, 오른쪽 눈은 금색으로 번뜩였다.
 그 무시무시한 인상을 보니 완전 조폭 곰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무슨 히든 피스이기에 저런 무지막지한 놈이 나타난 거지?
 사슴아! 다람쥐야! 토끼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난 그렇게 무언의 절규를 하며 긴장으로 인해 굳어진 목을 힘겹게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풀 사이에서 동물들이 고개를 배꼼이 내밀고 날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넌 X됐어 임마 ㅋㅋㅋ]
 [우리 숲의 침입자에게 죽음을!]
 [걱정 마. 아픈 건 한순간뿐이니까.]
 
 동물들 머리 위로 말풍선이 보였다.
 난 순간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똑같은 게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유저 상태 창을 켜고 이번에 새로 추가된 스킬 애니멀 토크의 능력 설명을 봤다.
 
 고딕, 박스[[[애니멀 토크]
 - 동물들이 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숨겨진 스킬이다.[[
 
 “어?”
 잠깐. 그게 끝? 고작 그런 게 히든 피스라고?
 뭐야, 이거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거랑은 전혀 다르잖아! 아니 그전에 그럼 저 곰은 도대체 뭐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내 발치 아래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난 다시 굳어진 목을 힘겹게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내 바로 코앞에 붉은 곰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곰은 귀신같은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 자리에서 경직된 채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며 곰의 상태 창을 체크했다.
 
 고딕[[붉은 곰, 숲의 대장 레벨 : 10
 HP : 500/500
 MP : 0/0[[
 
 레벨 10. HP 500.
 내 레벨은 고작 2에 HP는 80이다.
 이, 이봐, 지금 장난하는 거지? 여긴 초보자 사냥터라고! 기껏해야 도전 레벨 1~3밖에 안 될 텐데, 레벨이 10이나 되는 몬스터를 준비해 놓다니 말도 안 돼.
 그때였다.
 
 고딕, 박스[[[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고딕, 박스[[[동물의 숲을 지배하는 숲의 대장을 쓰러트려라!]
 - 퀘스트 완료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응답하듯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속였구나, 속였구나 이 짐승들!”
 난 뚜껑이 확 열려서 수풀을 향해 소리쳤지만 놈들은 이미 꽁무니를 뺀 뒤였다.
 
 히. 든. 퀘. 스. 트.
 
 이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심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용어.
 그 말이 이토록 저주스럽게 들릴지 몰랐다. 숲 짐승들한테 배신당해 함정에 빠지는 히든 퀘스트라니······.
 제작진의 센스가 정말 의심스럽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깨라고!
 
 [크르르르······.]
 
 그때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위를 올려 보니 붉은 곰이 무슨 미친 개 마냥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나보다 레벨이 하나나 둘도 아니고 자그마치 5배나 높은 고랩 몬스터를 마주하고 나니 너무 긴장이 된 것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애니멀 토크 스킬이 있잖아! 그게 동물하고 말을 하는 기술이니까. 혹시 저 붉은 곰한테도 통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자 곧바로 도구창을 열어 식량을 꺼냈다.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보니 분명 배가 고파서 그런 걸 거야.’
 그렇게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말린 육포를 하나 꺼내 붉은 곰 앞에 내밀었다.
 “이, 이거······ 먹을래?”
 난 긴장된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애니멀 토크 스킬이 있으니 내 의사는 분명히 전달되었을 터.
 부우웅~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겁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앞발이었다.
 그것도 풀 스윙이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내 시야가 180도 회전했다.
 가상현실 게임이라 통증은 없지만 충격의 체감은 분명히 느껴졌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을 때는 어느새 붉은 곰에게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방금 전 그 한 방을 맞고 여기까지 날아온 모양이다.
 내 머리 위에는 지금 현재 남아 있는 HP 수치가 떠올랐다.
 
 고딕[[카이저 레벨 : 2
 HP : 30/80
 MP : 30/30[[
 
 오, 신이시여.
 단 한 방에 HP 50이 날아가다니 저건 완전히 걸어다니는 발리스타잖아! 저런 놈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라는 거지. 거점으로 돌아가 농성을 한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려면 또 한참 걸린단 말이야.
 크어어엉!
 애초에 대화 같은 건 없다. 붉은 곰은 말풍선 한번 보여주지 않고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땅을 박차고 뛰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식량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전력으로 달리니 피로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행히 속도는 내가 더 빠른지 단 몇 걸음 차이 정도지만 앞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는 방향이다.
 곧장 도망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어디로 갈지 감이 안 잡혔다.
 여긴 처음 와 보는 곳이기 때문에 지도상으론 지금까지 지나온 길 외에 다른 길은 표시되지 않았다.
 즉, 거점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막상 거점에 도착한다고 해도 문제다. 거점을 지키는 경비병과 발리스타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상대는 HP가 500이나 되는 괴물 곰이다. 한 방 데미지가 50이니 상대가 될 턱이 없다.
 그럼 이대로 한 방 맞고 쓰러지는 건 어떨까? 어차피 게임이니까 다시 부활할 테고 통증 같은 것도 없잖아.
 아니, 잠깐. 그 전에 내가 여기서 죽었다가 ‘죽은 자리’에서 다시 부활하면 어떻게 하지? 거점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아직까지 죽은 적이 없으니까.
 정말 상상하기 싫지만 만에 하나 부활 방식이 전자라면 다시 부활한 순간 붉은 곰한테 또 맞아 죽고, 부활하고 맞아 죽고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러면 로그아웃도 못할 테고 운영자가 발견해줄 때까지 계속 똑같은 짓을 해야 할 거다.
 쉽게 말하자면,
 
 무한지옥(無限地獄).
 
 이라는 걸까.
 
 ······.
 
 누가 나 좀 구해줘! 히든 피스고, 히든 퀘스트고 그런 건 개나 주라고!
 그렇게 오직 내게만 들리는 소리 없는 절규를 지른 순간.
 부우웅~
 무겁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소리의 정체를 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주저 없이 맨 바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직!
 땅바닥으로 몸을 날려 데굴데굴 구르다 다시 일어나 보니 방금 전 내가 몸을 날리기 전에 지나친 나무가 반으로 뚝 쪼개졌다. 쪼개진 나무 윗부분이 내 쪽을 향해 쿵하고 쓰러졌다.
 남은 반쪽 기둥 뒤에는 입에 침을 질질 흘리며 동공 없는 눈동자를 번뜩이는 붉은 곰이 서 있었다.
 “젠장!”
 저 녀석은 진짜 인정사정도 없다.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다니 너무 하잖아!
 난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다시 달렸다.
 그런데 방금 전 붉은 곰이 쓰러트린 나무를 훌쩍 넘어가다 뭔가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붉은 곰의 저 격한 성미와 물불 안 가리는 저돌성.
 “그래, 떠올랐다!”
 순간,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 떠올랐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게 누가 될지 어디 한번 해 보자 이거야!
 
 
 
 
 
 Chapter Five
 
 
 
 
 
 
 
 
 
 필살의 책략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더 이상의 주저는 없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띠리링~!
 
 고딕, 박스[[전력 질주 시 피로도 소모는 두 배가 됩니다.[[
 
 허공에서 경고 음성을 들었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달리고 또 달렸다.
 520/520이었던 피로도가 순식간이 400/520, 300/520.
 이렇게 쭉쭉 달았지만 피로도의 분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진로 방향은 북쪽.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북쪽을 향해서 쭉 나아갔다.
 이미 한 번 지나온 길이었기에 헤매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곧 피로도 수치가 200[520으로 뚝 떨어졌을 때쯤 난 비로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딕, 박스[[고블린 부락에 도착했습니다.[[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내 앞으로 고블린 부락의 전경이 보였다.
 동시에 부락 안을 오가던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그중에서 동물의 머리뼈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하고 턱수염을 기른 고블린 추장이 지팡이를 붕붕 휘두르며 소리치자 지도 창에 수십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저건 곧 고블린들이 날 적으로 인식했다는 증거였다.
 앞에는 고블린.
 뒤에는 붉은 곰.
 누가 봐도 진퇴양난인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나의 승기(勝氣)는 분명 이곳에 있다고.
 
 쿵! 쿵!
 등 뒤로부터 붉은 곰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그리고 정면에서는 약 10여 마리의 고블린이 단궁을 들고 나와 날 조준했다.
 [쏴 라!]
 고블린 추장의 호령이 말풍선으로 나타난 순간.
 쉬이잉~
 부우웅~
 앞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다!’
 난 그렇게 마음속으로 힘껏 외치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바바박!
 붉은 곰의 풀 스윙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다음 곧이어 전방에서 날아온 10여 발의 화살이 붉은 곰의 몸통에 명중했다.
 붉은 곰의 머리 위로 HP 490/500 표시가 떴다.
 피해 수치는 고작 10.
 정말 약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바닥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붉은 곰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놈의 시선은 지금 전방에 있는 고블린들에게 가 있었다.
 그게 바로 내가 노리던 것이다!
 붉은 곰이나 고블린은 몬스터니까 날 적으로 인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둘이 서로 같은 편인 것은 아니다.
 놈들은 CPU에 불과하니 이미 입력된 패턴에 따라 움직일 터. 제거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자신’을 공격한 대상이 될 것이다. 더불어 난 양쪽의 표적이 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붉은 곰이나 이 부락의 고블린 중 그 어느 쪽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 감히 날 공격하다니. 모두 죽여 버리겠다!]
 
 애니멀 토크의 스킬로 인해 붉은 곰이 하는 말이 말풍선으로 보였다.
 놈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날 훌쩍 넘어서 고블린 궁수들을 향해 그 거대한 몸을 날렸다.
 퍽 소리가 나면서 고블린 한 마리가 나가떨어지는 걸 시작으로, 붉은 곰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됐다.
 한 방에 한 마리씩 확실하게 쳐 잡았다.
 하지만 고블린들 역시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고블린 추장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쏠리면서 부락에 있던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모두 합심하여 붉은 곰에게 달려들었다.
 이로써 붉은 곰 VS 고블린 부락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난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아무도 오지 않은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물론 언제 싸움에 휘말릴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지금 부락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쭉 지켜보았다.
 붉은 곰은 압도적인 힘과 체력으로 홀로 전장을 뒤집었지만, 고블린 무리는 철저하게 머릿수로 승부했다.
 앞서 달려 나간 동족이 붉은 곰에게 공격당한 그 순간의 틈을 노려 뒤에서 활을 쏘고 돌을 던지는 등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다 했다.
 아무리 평균 데미지가 1~2밖에 안 된다고 해도 50마리가 피해를 감수하고 온몸을 던져 싸우니 천하의 붉은 곰도 어쩔 수 없었다.
 풀 HP가 500이었는데 그게 400, 300으로 뚝뚝 떨어지더니 고블린 무리가 1/3 정도 남았을 때 HP가 100까지 떨어졌다.
 “좋아!”
 이제부터가 내가 움직일 차례다. 남은 고블린으로 붉은 곰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이제부터 내가 마무리를 해야 했다.
 잠시 쉬는 동안 회복한 HP는 50/80.
 어차피 이 상태에서도 붉은 곰에게 한 대라도 맞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지만, 붉은 곰을 확실히 쓰러트린다는 가정 하에 지금 HP 50으로 살아남은 고블린을 상대하는 게 낫지, 고블린이 다 전멸한 뒤 붉은 곰을 상대하는 건 싫다.
 그렇게 생각한 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초가집으로 달려갔다.
 짚을 엮어 만든 벽을 꽉 잡고 기어올라서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위에 올라가서 보니 붉은 곰과 고블린들이 맞붙어 싸우는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단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 붉은 곰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쉬이잉~
 퍽!
 화살은 정확히 붉은 곰의 몸에 명중했다.
 하지만 놈은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온 건지도 모르고 발광했다.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활을 쏘았다.
 고블린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그리고 행여나 빗 맞추는 일이 없게 정확히 거리를 재고 시위를 당겨 붉은 곰을 공격했다.
 화살 한 발, 한 발의 데미지는 겨우 5밖에 안 됐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지원 사격과 더불어 고블린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붉은 곰의 HP는 급격히 소모됐다.
 크어어엉!
 그러나 HP가 50 이하로 떨어질 때, 붉은 곰이 거칠게 포효하자 순간 녀석의 몸에 이변이 생겼다.
 전신에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폭주를 해 버린 것이다.
 
 고딕, 박스[[붉은 곰은 광폭화 되었습니다.[[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광폭화 된 붉은 곰은 마치 상처 입은 야수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미친 듯이 날뛰면서 보통 한 번에 한 놈을 쳐 날리는 걸. 두세 놈이 한꺼번에 쳐 날리는 등 범위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거의 대등했던 전투의 향방이 붉은 곰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속어 중에 원 펀치 쓰리 강냉이라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고블린을 3마리씩이나 쓰러트리니 아무리 머릿수가 많은 고블린들이라고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1분도 안 되는 채 짧은 시간에 고블린 무리는 완전 전멸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난 쉬지 않고 계속 활을 쏘아 맞췄다.
 붉은 곰의 HP가 20/500이 되었을 때, 그제야 놈은 초가집 위에서 사격을 하던 날 발견했다.
 크어어엉!
 주위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울부짖으며 내가 올라가 있는 초가집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왔다.
 하지만 난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았다.
 붉은 곰에게 향한 활의 조준 방향을 유지하고 계속 화살을 쏘았다.
 고딕[[붉은 곰, 숲의 대장 레벨 : 10
 HP : 15/500
 MP : 0/0[[
 
 [[HP 10/500[[
 
 약 5초 단위로 날아가는 화살에 맞을 때마다 붉은 곰의 HP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놈은 화살에 맞은 피해를 감수하고서 돌진해 왔고 마침내 내가 올라가 있는 초가집 앞에 도착했다.
 나와 붉은 곰 사이에 떨어져 있는 거리는 초가집 지붕에서 지상으로부터 약 1미터 남짓 되는 거리였다.
 난 위에서 놈을 내려 보며 화살을 날렸고, 놈은 날 올려 보며 앞발을 날렸다. 한 방이라도 잘못 스치면 그걸로 끝이다.
 그 생각에 난 나도 모르게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고딕[[붉은 곰, 숲의 대장 레벨 : 10
 HP : 5/500[[
 
 고딕[[엉기성기 만든 초가집
 내구력 : 50/100[[
 
 내가 다시 떴을 때 내 눈에 보인 두 개의 수치가 보였다. 하나는 붉은 곰의 것. 다른 하나는 초가집의 내구력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 데미지를 조금도 입지 않았다.
 ‘아! 날 공격하려면 그 전에 내가 올라가 있는 이 초가집부터 무너트려야 했던 거구나!’
 단순히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초가집에 올라 온 것이었는데 이 위에 올라와 활을 쏜 게 정답이었다.
 
 와르르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초가집이 무너져 내렸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붉은 곰이 두 번째 공격을 날린 것이다.
 난 그대로 바닥에 쿵하고 떨어졌고 붉은 곰은 땅 위에 두 발로 우뚝 서 있었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나다!”
 난 붉은 곰에 뒤지지 않게 목청이 터져라 크게 소리치며, 바닥에 누운 자세에서 곧바로 붉은 곰을 향해 활을 쏘았다.
 
 고딕[[크리티컬 히트![[
 
 단궁에서 뻗어나간 이 한 대의 화살이, 붉은 곰의 머리통 정중앙에 정통으로 꽂히면서 호쾌한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붉은 곰의 거대한 몸이 부들부들 떨리다 옆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고딕, 박스[[[고블린 부락을 함락하라 : 퀘스트 1을 완료하셨습니다.][[
 
 고딕, 박스[[[숲의 대장을 쓰러트려라 :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고딕, 박스[[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딕, 박스[[유저 역사가 갱신되었습니다.[[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네 마디가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것으로 이번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스스로 나의 장자방이라 불리며 신뢰하던 전한 시대 최고의 군사 중 한 명인 순욱이 짜낸 계책이다.
 뭐 정확히는 그 계책의 응용이지.
 본래 호랑이를 몰아서 이리를 삼킨다는 뜻이지만 지금 난 곰을 몰아 고블린을 삼키게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난 이걸로 퀘스트 1, 히든 퀘스트를 동시에 클리어하고 레벨업도 무사히 마쳤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초토화 된 고블린 부락에서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하며 유저 퀘스트 창을 열어보았다.
 
 고딕, 박스[[유저 퀘스트 창
 § 퀘스트 1.
 [북동쪽에 있는 고블린 부락을 함락하라!]
 - 퀘스트 완료
 보상 : 500골드
 § 히든 퀘스트
 [숲의 대장을 쓰러트려라!]
 - 퀘스트 완료
 보상 : 붉은 곰의 웅담(熊膽)[[
 
 붉은 곰의 웅담?
 “이건 또 뭐지. 히든 퀘스트 발생할 때 완료하면 보상을 준다고 했는데 그건가?”
 당장 도구창을 열어 아이템의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고딕, 박스[[[붉은 곰의 웅담(熊膽)]
 - 전투와 내정에 있어서 모든 능력치를 영구적으로 +1씩 올려준다.
 비고 : 소비형 아이템[[
 
 진짜 곰의 간처럼 시뻘건 물체가 불끈불끈 움직이면서 그 아래로 효과 설명이 쫙 떴다.
 전 능력치 +1씩 상승이라. 뭔가 굉장히 수수하네. 무지하게 고생하면서 싸운 것 치고는 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드는 보상이다.
 그래도 뭐 레벨 99짜리 적인 것도 아니고 레벨 10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납득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지금 바로 사용해야겠군.
 다행히 이 웅담은 씹어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아이템 창에서 손으로 가리켜 드래그하여 내 몸으로 옮겨오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난 그 다음에 부락 곳곳에 널려 있던 고블린들의 장비를 모아서 한군데에 쌓아 놓았다. 그리고는 내 도구창으로 드래그할 것도 없이 바로 상점 창을 켜서 모조리 매각했다.
 
 고딕[[모든 장비를 일괄로 매각했습니다.
 - 30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돈이 되는구나. 앞으로도 빠짐없이 체크해야겠군.
 아이템도 점검했고 떨어져 있던 잡템도 매각했으니 이제 다음은 내 상태 체크네.
 유저 상태 창을 켜 보니 4레벨이 올라 6레벨이 되었고 수정 포인트를 각각 20까지 얻었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히든 퀘스트 어쩌고 하면서 그 고생을 했는데 고작 4랩밖에 안 올랐으니 말이다. 이런 게임은 투자한 시간만큼 그 결실을 얻게 되어 있다고.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4랩씩이나 올랐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럼 이제 슬슬 포인트를 배분해 보실까나.
 
 고딕, 박스[[유저 상태 창
 이름 : 카이저
 레벨 : 6
 경험치 : 5160/8000
 성별 : 남자 종족 : 인간 직업 : 군주
 능력치
 HP : 180/180
 MP : 30/30
 피로도 : 560/560
 공격력 : 11 방어력 : 13
 전투 힘 : 10 근력 : 10 체력 : 18
 민첩 : 10 마력 : 3 행운 : 6
 스킬 : 애니멀 토크
 내정 통솔 : 40 지력 : 40
 정치 : 40 매력 : 52
 특기 : 없음
 장비
 방어구-가죽 갑옷, 나무 방패
 주무기-단검
 보조 무기-단궁
 자금 : 801골드
 ->다음[[
 
 “음, 확실히 전보다는 더 나아졌네. 그래도 어딘가 좀 부족해······.”
 만약 붉은 곰 같은 몬스터를 또 만난다면 혼자 잡을 수 없을 거다.
 여유 자금이 좀 생기면 개인 장비도 좀 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능력치가 떨어지면 장비로 커버한다.
 이게 바로 게임의 기본이다.
 “음······, 어디 보자. 다음에 확인해야 될 건 거점 상태 창인데······.”
 아마 거점 레벨도 4레벨 정도는 올랐을 거다.
 하지만 레벨이 올라 만약 뭔가 변했다면 상태 창으로 볼 게 아니라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설마 6랩씩이나 됐는데 아직도 텐트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겠지 뭐.’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난 그렇게 대충 확인할 거 다 확인한 뒤에야 고블린 부락을 떠났다.
 레벨업 덕분에 능력치가 다 꽉 찬 최상의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남쪽 길을 따라 내려갔다.
 가던 도중에 동물의 숲이 보였는데 일부러 그냥 지나쳐 갔다.
 동물 친구들(?)한테 갚아야 할 빚이 있었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후에는 무슨 특별한 장소 같은 곳이 없이 두어 개의 언덕을 지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완전 새로운 형태로 변한 거점이었다.
 “오오!”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새 거점은 정면에서 봤을 때 옆으로 길게 지어진 집이다.
 일단 ‘집’이라는 것 자체가 텐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가까이 가서 안을 살펴보니 넓은 복도가 한 길로 쭉 나 있고 그 사이사이에 수십 개의 방이 벽을 칸막이 삼아서 나뉘어져 있었다.
 ‘전문 용어로 이런 집을 뭐라고 하더라······. 동남아시아의 전통 가옥이지만 중세 유럽에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군.’
 난 그걸 확인하면서 동시에 새 거점 상태도 체크할 겸 거점 상태 창을 켰다.
 
 고딕, 박스[[거점 상태 창
 이름 : 그레이트 원
 레벨 : 6
 경험치 : 5160/8000
 소속 : 카이저군 태수 : 카이저.
 형태 : 롱하우스
 내구력 : 200/200(나무)
 병력 : 0
 장수 : 1
 인구 : 2/70
 특수 : 방 배정 가능
 금 : 1,000 병량 : 10,000
 ->소유 영토 : 2
 ->건축, 상점[[
 
 롱하우스(Longhouse).
 “아! 맞아! 확실히 그런 이름이었지!”
 난 내 레벨이 오른 것보다 거점의 레벨이 올라서 이렇게 형태가 바뀐 게 오히려 기뻤다.
 이제야 사람이 사는 곳 같았다.
 계속 이렇게 레벨업을 통해 형태를 바꿔나가면 정말 언젠가 성이나 요새로 진화할 날이 올 것 같다.
 “아! 그런데 저건 뭐지? 소속 영토? 이 항목은 오늘 처음 보는데 뭔지 한 번 클릭해 봐야겠군.”
 
 고딕, 박스[[소유 영토 : 2
 - 고블린 부락
 - 동물의 숲[[
 
 손가락으로 한번 슥 가리키니 그 밑으로 목록이 2개 떴다. 둘 다 내가 한번 지나온 곳이다.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니 어떻게 땅을 늘려야 할지 대충 감이 왔다.
 아마 탐색 모드를 통해 새로운 장소를 발견한 뒤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내 소유가 되는 모양이다.
 고블린 부락은 함락이 조건이고, 동물의 숲은 숲의 대장을 물리치는 게 그 조건이 되겠지.
 “근무 중 이상무!”
 그때 마침 순찰을 돌던 경비병이 날 보고 깍듯이 인사했다.
 “수고했다. 그럼 계속 순찰을 돌도록.”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경비병은 씩씩한 목소리로 답하고 다시 순찰을 하러 갔다.
 그 모습을 보니 슬슬 내정에도 신경 써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레벨업을 하고 돈도 벌었고 거점 형태도 바뀌었는데······ 인구수가 달랑 2명밖에 안 된다는 건 왠지 좀 허전하니 말이다.
 나는 새로운 NPC를 구입하기 위해 도구점 창을 켜서 NPC 구매 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창을 연 순간 ‘NEW’라는 머리말과 함께 구입 가능한 NPC가 더 추가됐다.
 나는 NEW 말머리가 붙은 것만 따로 검색해서 새로 추가된 목록을 확인했다.
 
 고딕[[[현재 구입 가능한 NPC 목록]
 농부 : 10골드
 - 지정된 평지 지형의 공터에 보내면 농사가 가능해 집니다. 농사를 짓고 시간이 지나 수확기가 찾아오면 농지 개수에 따라 병량이 대폭 상승합니다.
 사냥꾼 : 30골드
 - 지정된 숲으로 보내면 사냥이 가능해 집니다. 사냥에 성공하면 동물의 가죽을 팔고 고기를 식량으로 만들어 금과 병량이 소폭 상승합니다.
 나무꾼 : 30골드
 - 지정된 숲 지역으로 보내면 벌목이 가능해 집니다. 벌목을 통해 얻은 목재는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거나 상점에 팔 수 있습니다.
 고블린 : 50골드
 - 레벨은 낮지만 초기에 쓸 만한 용병이 될 것입니다.
 - 퀘스트 1을 완료함으로서 고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야, 목록이 전의 두 배로 늘어났군.”
 NPC 능력 대부분이 내정에 관련된 능력이었다.
 앞으로 거점의 금과 병량은 이런 NPC들을 활용해서 늘려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고블린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건 뭔가 참 기분이 묘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거랄까.
 난 새로 시작하는 유저고 지금 이 거점에는 시민이 없으니 당연히 거점 내에서 징병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이건 어떻게 보면 제작진이 사전에 염두 해 두고 만든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정규군의 경우는 여건이 되면 징병 메뉴 같은 게 따로 뜰 것 같다.
 “어쨌든 뭐 그래도 고블린은 지금 당장 고용 할 필요는 없겠지.”
 고블린 부락을 함락시켰으니 당분간 외적의 침입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내정이다.
 예로부터 아무리 전투가 강해도 내정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뭐 이제 겨우 텐트에서 전통 가옥으로 변한 것 정도로 국력 어쩌고 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음, 그나저나 생각보다 아는 게 너무 없는 걸.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잠시 정비부터 해야겠다.”
 잠시 이 시점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지금 내게 가장 부족한 건 정보다. 전투는 어찌어찌 임기응변으로 할 수 있다지만 내정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전투는 승패에 따라 한순간에 끝나지만 내정은 하나하나를 결정하더라도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니까 말이다.
 제작사에서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은 무엇인지 또, 다른 군주 유저들은 어떻게 플레이를 하는지 등을 충분히 알아본 후에 다시 접속하여 내정 모드에 들어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Chapter Six
 
 
 
 
 
 
 
 
 
 맴맴~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벌써 오후 2시였다.
 정확히 몇 시에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 은행 갔다 와서 바로 시작했으니 최소 6시간은 넘게 한 것 같다.
 게임 속 시간으론 적어도 반나절은 지난 것 같은데 실제 현실에선 그 절반의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그 시간의 흐름이 약간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부작용 같은 건 딱히 없었다.
 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쉬면서 현실 감각을 회복했다.
 그리고 나서 침실에 있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라스트 킹덤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HY목판L[[라스트 킹덤(Last Kingdom) 홈페이지에 어서 오세요![[
 
 누가 더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듣기에는 꽤 좋은 어여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난 마우스를 움직여 각 메뉴를 클릭하면서 홈페이지를 쭉 살펴보았다.
 그러다 곧 홈페이지 게임 가이드라인 항목에서 내정 모드를 클릭해서 설명을 읽어 보았다.
 
 HY목판L[[[내정 모드 가이드라인]
 초급편
 - 내정의 기본은 자원에서 시작합니다. 탐색 모드를 통해 빈 땅을 찾고 NPC 인부들을 동원하여 그곳을 개척해야 합니다.
 개척을 하는 데는 물론 돈이 들지만 모든 작업을 완료하면 분명 그 이상의 수입이 들어옵니다.[[
 
 “초급편은 별로 볼 게 없군. 문자 그대로 완전 초보한테 제시하는 가이드라인 아니야. 다음으로 빨리 넘겨야지.”
 
 HY목판L[[중급편
 - 개척을 통해 자원을 충분히 모았다면 다음은 건설입니다. 거점이나 소유 영토 내에 다양한 건물과 시설을 지어야 합니다.
 건물과 시설을 짓기 시작하면 거점 상태 창에 문명과 치안이란 수치가 추가됩니다. 그 수치가 표시된 이후부터 거점 내 인구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며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인구량이 증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점 내 고정된 인구는 AI들이지만, 그중에는 NPC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급편으로 넘어가니 확실히 내가 몰랐던 정보들이 나왔다.
 “거점의 인구를 높이는 방법이 이런 것들이었다니······, 내정 모드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겠군. 그런데 문명 수치가 생기면서 인구가 자연 발생한다면······ 과거 심시티(Sim city)같은 실시간 건설 시뮬레이션이랑 비슷한 건가?”
 심시티는 예전 나보다 한 세대 앞선 시대에서 유행했던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음, 그 게임 같은 경우도 도시 문명 수준에 따라 인구가 자연적으로 불어났지 아마.”
 치안이라면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의 개념이다.
 치안이 낮으면 범죄 발생률이 높아져 도적 떼가 들끓을 것으로 예상된다.
 즉, 민심이 흉흉해진다는 것이 되고 그건 여러 가지 문제와 사건으로 이어질 거다.
 인구 비율의 증가를 위해선 문명, 치안. 이 두 수치를 꽉 잡을 필요가 있다. 이게 바로 중급편의 핵심 내용인 것 같다.
 자, 그럼 이걸로 중급편은 됐고. 고급편은 나중에 천천히 봐야겠군.
 우선은 중급편을 보고 배운 것부터 철저히 해 보고, 그 다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순서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한 걸음부터 천천히 진행해 나가는 게 왕도다.
 내정에 대한 기본 정보는 대충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던 중 눈에 확 띄는 게 하나 있었다.
 
 HY목판L[[초보 군주 유저를 위한 팁[[
 
 “그래. 바로 이거야!”
 따지고 보면 난 아직 게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 중의 초보 군주다. 지금의 나에게는 저런 정보가 바로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난 얼른 그 항목을 클릭해 보았다.
 
 HY목판L[[초보 군주 유저를 위한 팁
 - 군주가 직접 행동을 하여 내정을 개시하면 거기에 드는 비용을 전부 개인 자산으로 지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돈이 부족해집니다.
 그럴 때는 거점의 자금을 융통하면 됩니다. 오직 군주 유저만이 거점의 자금을 인출할 수 있으며, 반대로 군주 자산을 자금을 입금할 수도 있습니다.
 거점의 자금은 군주가 NPC를 비롯한 소속 장수들에게 작업을 명할 때 드는 비용입니다. 때문에 소속 장수가 하나도 없다면 굳이 자금을 두는 것보다는 군주가 직접 자금을 인출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헉!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이걸 진작 알았다면 좀 더 쉽고 편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모르는 게 죄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저 인출 시스템은 왠지 양날의 검 같은데? 잘못 사용하면 해가 될 수도 있겠군. 오직 군주 유저만이 돈을 넣었다 뺄 수 있다면 그건 바꿔 말하자면 군주의 권한이 너무 높잖아.
 만약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국고의 인출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게임 속 세상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안 봐도 뻔하다.
 난 절대 그런 놈이 되지 말아야지.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그때 내 귀에 친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모 한국 영화에서 극중에 나오는 노래로 내 휴대폰의 벨소리였다.
 휴대폰을 짚어서 보니 액정 화면에 처음 보는 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신성 님. 최진철입니다.”
 휴대폰 너머에 들리는 중후한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철이 타이밍에 전화를 하다니 뭔가 좀 기분이 묘한걸.
 “먼저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신성 님은 사측에서 준비한 기본 과제를 훌륭히 마치셨습니다. 그것도 최단시간에 말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니나 다를까 진철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를 했다.
 축하는 뭐고 사측에서 준비한 기본 과제는 또 뭐지? 그런 건 전혀 듣지 못했는데.
 “아! 저 혼자만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만나서 드리겠습니다. 지금 신성 님 집 앞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그걸 타고 오십시오. 그럼 전 이만.”
 “······.”
 그러고는 거기서 통화가 툭 끊어졌다.
 뭔가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끊어버렸군.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거라고 내가 모르는 뭔가를 잔뜩 꾸미고 있었나보네.
 이 타이밍에 전화를 하지 않나, 이미 집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다고 하지 않나. 부자들은 다 저렇게 제멋대로인가? 내 입장에서는 너무 당황스럽다.
 하지만 차도 대기시켜 놓았겠다. 뭐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뭐,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싶기도 하니 지금 바로 가 봐야겠군.’
 난 욕실에 가서 깨끗하게 씻은 뒤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나가보니 방금 전 전칠 씨가 전화로 말한 그대로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나온 걸 본 운전수가 아무 말 없이 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운전수처럼 입을 다물고 뒷좌석에 탔다.
 그리고 곧 리무진이 출발해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특별히 차멀미 같은 건 없는 나였지만, 난생 처음 리무진을 타보는 거라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지 약한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리무진은 순식간에 우리 동네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쭉 지나가다가 곧 도심으로 들어섰다. 현기증 때문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제대로 보질 못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운전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차가 멈춘 뒤 시동을 끄고는 먼저 밖으로 나와서 뒷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렸을 때 내 정면으로 보인 것은 꼭대기가 까마득한 수십 층 높이의 초고층 빌딩이었다.
 난 저 빌딩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름은 ‘엠페러 타워.’
 지상 80층 300미터 높이로, 도곡동 타워 펠리스, 목동 하이페리온, 한화 그룹 소유의 63빌딩을 전부 제치고 한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우와.”
 이렇게 직접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웅장했다.
 “신성 님. 이쪽입니다.”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1층 현관문 앞에 진철의 모습이 보였다. 운전수는 곧 차를 몰아 어디론가 떠났고 혼자 남겨진 난 곧장 진철에게 다가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난 진철의 안내를 받고 엠페러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본 것 이상으로 안은 더욱 화려했다. 주변의 화려한 풍경에 시선을 빼앗길 뻔 했지만 난 이곳에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기에 진철의 등만 보고 따라갔다.
 단 둘만 타기엔 너무 크고 고급스러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50층에서 내렸다.
 난생 처음 올라가 보는 고층이었지만 막상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 보니 주변 풍경은 보통 사무실과 비교해서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앞서 걸어 나간 진철가 어떤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며 정중히 말했다.
 “들어오게.”
 안에서 누군가 답하자 진철은 문을 열고는 내게 먼저 들어가라는 듯 허리를 숙이며 안쪽을 가리켰다.
 안에 들어가 보니 입구 맞은편에 커다란 창문이 달려 있는 크고 넓은 방의 풍경이 보였는데 가구라고는 방 정중앙에 있는 데스크가 전부였다.
 그 데스크 뒤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물론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나이는 한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로 말끔하고 성실해 보이는 얼굴에 안경을 쓰고 있고, 회색 정장을 쫙 빼입었다.
 “어서 와. 유신성. 널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에 반말을 한다고 너무 기분 나뻐하지 말라고. 난 너보다 연상이고 계약주 입장이니까 말이야.”
 남자가 날 보고 웃으며 손짓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저렇게 친한 척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거기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면서 그걸 이해해달라니 말끔하게 생긴 것하고 다르게 무례하기까지 하네.
 어색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없이 꾸벅 인사를 한 뒤 가까이 가보니 데스크 앞에 빈 자리가 하나 보였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진철은 목례를 올리고 떠났고 방안에는 이제 저 남자와 나 단 둘 뿐.
 난 저 빈 자리가 앉으라고 준비해 놓은 자리라고 생각하고 바로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무심코 데스크 주변을 봤는데 남자 바로 앞에 있는 명패에 시선이 쏠렸다.
 
 궁서[[제왕 그룹 게임부 대표이사 유신락[[
 
 그 이름과 직책을 확인한 순간 깜짝 놀라서 소리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 대표이사라고는 해도 한 개 부서를 대표할 뿐이니까.”
 본인은 저렇게 말했지만 한 개 부서의 대표라고 해도 대기업 간부 앞이다. 진철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으로 놀랍고 긴장됐다.
 신락은 데스크 위에 놓여 있던 커피를 홀짝이면서 잠시 기다려 주었다가 내 쪽으로 서류 같은 걸 슥 건네주었다.
 무심코 그걸 받아서 보니 서류 맨 앞장에 쓰여 있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궁서[[라스트 킹덤 군주 유저 계약서[[
 
 “계약서?”
 내가 무심코 그렇게 말하자 신락 씨가 빙긋 웃었다.
 “응, 계약서지. 넌 할아범과 구두로 약속만 했지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잖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계약서를 써야 한다니 뭔가 좀 당혹스럽다.
 ‘아니, 잠깐. 그 당연한 일은 처음 만났을 때 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이렇게 나중에 불려가서 계약서를 써야하는 거지.’
 내가 잠시 그렇게 생각했을 때 신락 씨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계약이란 신뢰의 증표야. 너 개인과 우리 회사가 계약을 맺는 거지. 그렇다면 회사 쪽에서도 이 부분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와야 하는 거 아니겠어?”
 과연 그렇군.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과연 그걸로 끝일까?’
 뭔가 내가 모르는 꿍꿍이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계약서를 처음부터 쓸 생각이 있다면 날 여기로 데리고 와서 먼저 사인을 하게 하든가 그래야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순서가 안 맞는다.
 진철 씨는 분명 내가 없는 사이 우리 집에 와서 전용선을 설치하고 권유를 했는데 따지고 보면 무단 가택 침입죄가 성립된다. 내가 워낙 경황이 없어 구두로 승낙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 참고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사는 그 집. 오늘부로 우리 그룹한테 팔렸어. 며칠 내로 전 주인집 가구가 빠질 거야. 새로 누가 들어갈지는 아직 결정된 사항이 없지만 말이지.”
 무섭군.
 벌써 거기까지 다 손을 써둔 거였나. 너무 철두철미해서 이건 뭐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집에 대해서 물어볼 건 달랑 하나 뿐이군.
 “혹시 이 회사 사람이 이사를 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아직 누가 입주를 할지 결정된 건 없거든.”
 “그럼 왜 굳이 그 집을 사신 거죠? 당장 이사 들어올 사람이 없다면 말이에요.”
 “글쎄······. 왜일까? 네가 한번 말해 보지 그래. 너라면 눈치가 빠르니까 알 것 같은데.”
 신락은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받치곤 날 쳐다보았다. 뭔가 좀 부담스러운 시선이란 걸 느끼면서도 나름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다 곧 생각해낸 게 두 가지 정도였다.
 “인재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아낌없이 지원을 한다.’이거나 혹은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든다.’이 정도겠군요.”
 뒤에 한 말은 내가 직접 말을 하고도 섬뜩했지만,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 약점을 잡힐까봐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오! 역시 눈치가 빠르군. 바로 맞췄어. 정확히는 둘 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우리 그룹한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으니까’야.”
 어떻게 보면 오만한 말로 들리지만 그렇다고 듣는 내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상대가 충분히 능력이 있다면 그걸 인정해줘야 하지 않겠어?
 물론 나하고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 보여서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은 타입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물어볼게 있었지. 하마터면 잊고 넘어갈 뻔했군.
 “그건 아직 누구한테도 듣지 못했는데. 사측에서 준비한 기본 과제라는 게 뭐였지요?”
 “일종의 테스트지. 게임 시작 초기에 고블린 요격대가 러시를 들어오고, 고블린 부락 함락 퀘스트 등이 생긴 건 다 그 테스트 내용이었어.”
 내 물음에 신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즉석에서 답했다.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유저한테는 너무 어렵다 싶었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는 시험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 말을 안 한 거죠?”
 “게임 속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그곳은 난세야. 난세를 살아가는데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다 알고 있다면 영웅이 탄생할 수 있을 것 같나.”
 영웅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예측불허의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헤쳐 나가는 것 또한 역사에 기록된 영웅의 기본 조건은 맞다.
 뭔가 스스로를 영웅으로 비유하기에는 낯 뜨거웠지만,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선 신락의 말에 납득이 갔다.
 “만약 그 기본 과제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계약서를 쓸 것도 없이 거기서 다 끝났어. 그런 경우에는 정확히 한 달 뒤에 게임 장비 일체와 전용선은 철거하는 게 우리 방침이야.”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을 때 신락이 곧바로 대답했다.
 설치하는 것도 철거하는 것도 너무 일방적이었지만 뭐 별 수 없지. 칼을 쥔 건 저쪽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준비한 기본 과제를 최단시간에 해결한 것은 칭찬해 주지. 하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 정도로 너무 우쭐하면 안 돼.”
 별로 우쭐한 적 없는데. 난 내가 기본 과제를 하는지조차 몰랐다고. 만약 리플레이 영상을 저장할 수 있다면 내가 그걸 보고 우쭐하기보단 오히려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했을 거다.
 “넌 ‘수재’일수는 있어도 ‘천재’가 되기엔 아직 부족하거든. 라스트 킹덤의 세계는 넓고 대륙 전역에 너 같은 군주 유저가 흩어져 있어. 그중에서는 정말 천재라고 부를 만한 친구들도 있지.”
 수재를 넘어선 천재라······ 왠지 그거 흥미가 가는 걸?
 대체 어떤 녀석들이 군주 유저로 참가하기에 천재 소리를 듣는 걸까?
 그렇게 혼자 두근두근하고 있을 때 신락은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참고로 네가 얻은 히든 피스랑 히든 퀘스트는 다 내 아이디어야. 난 요행을 바라는 플레이어는 절대 용서 안 하거든. 그래서 혼 좀 나보라고 그런 걸 준비했지. 하하하.”
 신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벙 쪘다.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흔히 볼 수 있던, 안경 쓴 성실한 인상의 모범상 이미지를 가진 신락이 저런 장난스러운 사람 인 줄은 몰랐다.
 아니 그보다 내가 저런 사람의 장난에 걸려들다니. 이건 정말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하는 거지.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명색이 히든 피스잖아요. 그런 걸 저한테 직접 말하셔도 되요?”
 난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런 태클을 걸었다.
 그러자 신락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이미 발견된 히든 피스는 더 이상 ‘히든’이라고 할 수 없잖아. 게다가 네가 얻은 히든 피스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든. 뭐 아주 쓸모없는 건 또 아니지만······.”
 신락은 말꼬리를 흐렸다.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일부러 거기서 말을 끊은 것 같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싫은 타입이다.
 뭐 굳이 내가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그깟 개나 소가 하는 말 알아듣는 스킬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어쨌든 뭐. 저한테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할 수 없죠. 어디다 서명하면 되는 거죠?”
 내가 계약서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단번에 서명을 하겠다고 하자 신락은 뭔가 기대에 어긋나기라도 한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난 그걸 못 본 척하고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혼자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보았기에 계약서에 적힌 대부분의 조항은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몇 개는 머릿속에 분명히 입력해 두었다.
 
 궁서[[제6조 : (계약 해지의 권한)
 라스트 킹덤에서는 갑(군주 유저)은 거점을 빼앗기면 방랑 군주로 신분이 변한다. 그때 을(회사)은 갑에게 재기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준다. 그러나 만약 그래도 갑이 다시 재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에는 을(회사)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단, 그 기간은 최고 한 달을 넘지 않는다.(추가)
 
 제 7조 : (성실 이행의 의무)
 갑은 라스트 킹덤 플레이를 성실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을은 갑이 그 의무를 잘 이행하는지 관리 감독할 의무가 있다. 만약 불성실한 태도로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계약은 자동으로 파기된다.
 
 제8조 : (게임 시간의 설정권)
 갑은 게임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으며, 을은 그 부분을 간섭할 수 없다.[[
 
 6~8조까지가 가장 중요한 체크 사항인 것 같다.
 8조는 갑인 나한테 유리한 거니까 좋고, 7조는 그야말로 당연한 조항이지만 6조가 좀 마음에 걸렸다.
 거점을 빼앗기면 유예 시간을 준 뒤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하겠다니.
 정말 군주 유저로서 게임 속 난세를 살아가는 건 피 말리는 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뭐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난 계약서와 함께 건네진 펜으로 오늘 날짜와 내 이름을 적고 서명란에 사인을 한 뒤 다시 넘겨주었다.
 신락은 넘겨받은 계약서를 쭉 훑어보고는 도장을 꺼내 두 번 정도 쾅쾅 찍었다.
 “자, 이걸로 계약은 완료됐다. 라스트 킹덤의 군주가 된 걸 환영한다. 이성신. 아니 카이저.”
 
 
 
 
 
 Chapter Seven
 
 
 
 
 
 
 
 
 
 밤 12시.
 현실 세계는 밤의 어둠으로 가득 차 있지만, 가상현실 게임 라스트 킹덤 속의 세계에는 이제 막 저녁이 찾아왔다. 내가 다시 게임에 접속해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저녁노을이었다.
 계약을 맺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기에 조금 더 일찍 접속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밤 시간을 골라 들어왔다.
 요즘 어느 가상현실 게임이나 다 지원한다는 수면 모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수면 모드란 잠을 자면서도 게임 장비를 사용해 가상현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공학 계열과는 거리가 멀어서 대체 어떤 원리로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매뉴얼에 보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MC 스퀘어라는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뇌파 조절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한다.
 난 그 다음 세대에 태어났으니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면 모드로 접속해 보니 일반 모드와 거의 비슷했다.
 다만 뭐랄까, 몸에 느껴지는 감각과 움직임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일반 모드 때보다 약간 무뎌진 것 같다는 것 같다는 걸 제외하면 별 다른 부작용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앞으론 이 수면 모드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나보다 한참 먼저 시작한 다른 군주 유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 말이다.
 어쨌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해 볼까?
 난 홈페이지에서 얻은 정보와 팁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우선 내 거점. 즉 롱하우스 안에 들어가 보물 상자에 들어 있던 거점 내 금을 모조리 인출하여 내 상태 창에 넣었다.
 개인 자산이 순식간에 1800골드로 불어났고, 그 상태에서 곧장 상점 창을 열어 NPC를 구입했다.
 나무꾼 5명, 사냥꾼 5명, 농부 5명으로 모두 합쳐 딱 350골드를 썼다.
 각 NPC들은 경비병과 마찬가지로 구입한 즉시 내 앞에 나타나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했다.
 난 우선 그 녀석들 조종하기 전에 먼저 상태부터 점검했다.
 
 고딕, 박스[[[사냥꾼]
 레벨 : 2
 소속 : 그레이트 원
 능력치
 HP : 70/70
 MP : 0/0[[
 
 고딕, 박스[[[나무꾼]
 레벨 : 2
 소속 : 그레이트 원
 능력치
 HP : 90/90
 MP : 0/0[[
 
 고딕, 박스[[[농부]
 레벨 : 1
 소속 : 그레이트 원
 능력치
 HP : 30/30
 MP : 0/0[[
 
 역시 가격이 저렴해서 그런지 레벨이랑 HP는 무지 낮았다.
 특히 농부가 제일 약했다. HP가 30밖에 안 되니 고블린 한 마리랑 붙어도 견디지 못할 정도다.
 “쩝! 괜히 싼 게 아니구먼.”
 
 고딕, 박스[[일꾼을 구입하셨습니다.
 - 일꾼은 유저가 지시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할 때마다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을 합니다.
 - 레벨업을 하게 되면 작업 속도와 HP가 상승합니다.[[
 
 도움말을 항상 켜 두는 걸로 설정했더니 곧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NPC도 성장을 할 수 있다니 내 입장에선 참 반가운 시스템이다. 레벨업이 단순히 사냥에 의해서만 되는 게 아니란 점도 무지 마음에 들었다.
 “내정 모드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니, 일단 일꾼과 같이 움직이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둬야겠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 있다.
 여기서 또 탐색 모드에 들어가면 거점을 비우게 되니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방비를 철저히 해 두고 가야만 했다.
 난 건축 창을 켜서 한 개 5골드씩 하는 목책을 20개를 사서 100골드를 지출했다. 구입한 목책은 울타리의 바깥쪽으로 넓게 하나씩 꽂아 내 거점인 롱하우스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그렇게 빈틈없이 쭉 이어서 꽂아 거대한 울타리로 만들고 나니 그 자체만으로 나무로 된 성벽이 되었다.
 본래 목책은 역사적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대량의 노동력을 구할 수 없는 도서 지방에서 사용됐으며 우리나라 역사에선 토성(土城)이나 석성(石城)을 쌓기 전에 임시로 쌓아 놓는 방벽으로 알려져 있다.
 뭐 이 게임에선 목책 가격도 싸니 누구나 다 쓰고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에 멋모르고 발리스타를 사는 바람에 돈이 없어서 못 산거지. 목책 대신 나무 울타리를 쳐 놓을 정도로 방벽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다.
 목책의 내구력은 한 개당 100/100.
 싼 가격만큼 내구력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현재로선 이 정도로 충분할 거다.
 ‘뭐, 다음에 자금의 여유가 생긴다면 목책 바깥쪽에 석벽(石壁)이라도 쌓아야지 뭐. 어? 그런데 목책 한가운데 바깥으로 통하는 출입구도 따로 돈을 주고 사야 하네. 내구력 150/150짜리 나무로 만들어진 입구가 20골드라니 목책의 4배 가격이군.’
 거기다 추가로 사야할 건 그것만이 아니다.
 목책의 높이는 약 3미터 정도 되는데, 롱하우스를 빙 두르게 되자 이제는 안에서 바깥의 상황을 살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추가로 구입한 건축물이 바로 감시탑이다.
 감시탑의 구입비용은 70골드. 건물을 구입하고 위치를 손가락으로 지정해 주니까 그 자리에 바로 지어졌다.
 감시탑은 약 5미터 높이로 건물이다. 생겨나자마자 시험 삼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니, 목책 바깥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돈이 좀 넉넉하게 생기면 이 감시탑도 여러 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목책 안쪽으로 네 방위에 하나씩 감시탑을 세운다면 동서남북 어디에서든 외부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쓸 만한 점이 꽤 있다. 예를 들면 사격 같은 것 말이다.
 난 시험 삼아 단궁을 꺼내 들고 전방을 향해 화살을 한 발 쏘아보았다. 화살은 목책을 간신히 넘긴 지점에서 툭 떨어졌다.
 역시 단궁의 사정거리로는 안 되겠군. 장궁이나 석궁이 필요하겠어. 궁수라도 구입해서 배치하고 싶은데 NPC 구입 창 목록에 없었다.
 경비병을 감시탑 위에 배치시킨다면 경계 임무는 충실히 수행하겠지만 경비병의 기본 장비는 활과 방패다.
 즉,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만약 무기의 숙련도가 있다면 창과 방패 기술이 주력이라는 말이다.
 내가 지금 당장 활을 사서 장착시켜 준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난 경비병을 한 명 더 구입해서 감시탑 위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 지상 위에 있던 발리스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감시탑 꼭대기로 드래그 했다.
 발리스타의 크기는 꽤 컸지만 그래도 감시탑 꼭대기층보다 더 크지는 않았다. 난 경비병에게 여기서 24시간 경계 근무를 하고 유사 시 발리스타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80년대 액션 영화를 보면 정글 오지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감시탑 꼭대기에 거치 형 기관총 같은 걸 설치해 난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응용한 것이다.
 현대식 중화기에서 중세식 농성 병기로 대처한 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게 현실이었다면 반동이나 무게 때문에 이런 운용이 어렵겠지만 게임에선 그런 게 없어서 다행이다.
 거기다 발리스타의 장탄수는 무제한이고 재장전에 약간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수작업으로 장전을 하는 것이 아니니 문제가 없다.
 기본 방비는 이 정도로 해 놔야지. 그럼 이제부터 내정에 들어가 보실까?
 난 일꾼들을 데리고 가장 먼저 고블린 부락을 찾아갔다. 고블린 부락에는 초가집이 몇 개 남아 있긴 하지만 고블린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부락 안을 살펴보니 빈 공간이 꽤 많이 보였다.
 대부분 평평하고 기름진 땅으로 농사짓기에 적합했다. 특별히 도움말 기능을 켜지 않아도 대충 어떻게 하는지 짐작이 갔다.
 “농부들은 내 앞으로 집합!”
 내가 큰 소리로 말하자 농부 5명이 일제히 모여 들었다.
 “내가 지정한 위치만 정확히 경작하고 그 이상은 넘어가지 말도록!”
 난 농부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경작할 위치를 직접 지정해 주었다.
 모처럼 빈 땅이 많다면 전부 다 논밭으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 일단 나머지 땅을 어떻게 쓸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해야지.
 농부들을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농기구를 들고 해당 지역으로 가서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현실의 농사와는 달리 이 게임 속 농사는 땅을 일구는 동작 하나만으로, 그 주변 땅이 조금씩 밭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밭으로 변해가는 땅 위로는 작업 진행률이 퍼센트 수치로 떴다. 아마도 100퍼센트가 되면 밭이 완성되는 거겠지.
 그런데 일은 열심히 하는데 왠지 두고 보기 좀 불안했다.
 NPC니까 당연히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거겠지만, 만약 저 상태에서 외부의 공격이라도 당하면 정말 찍소리도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역시······ 호위 같은 게 따로 필요하겠군.”
 난 곧장 NPC 구입 창을 열어 고블린 5마리를 구입했다.
 본래 처음에는 지금 당장 고블린을 구입할 계획이 없었지만, 이렇게 직접 내정 모드에 들어가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고블린 팀. 지금 경작을 하는 농부들을 한 명씩 맡아서 보호하도록 해. 그게 최우선적인 일이다.”
 내가 명령을 내리자 고블린들은 말풍선을 통해 ‘분부 받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각자 농부들에게 다가갔다.
 농부들은 고블린이 다가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경작에 열중했다.
 이걸로 농업은 끝!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파악이 됐다.
 “자, 그럼 슬슬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볼까? 이제 내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지, 후후훗.”
 
 ***
 
 깊은 숲속의 옹달샘.
 토끼와 다람쥐, 사슴 등 귀엽고 온순한 초식 동물이 목을 축이고 있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광경이란 말인가?
 멀리서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난 얼굴에 한 가득 미소를 뗬다.
 “안녕! 동물 친구들아.”
 난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가 산뜻한 미소와 함께 동물 친구들과 마주했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동물 친구들은 달랐다.
 애니멀 토크 효과에 의해 내 눈에 또렷히 보이는 동물 친구들의 머리 위 말풍선에는 말줄임표와 함께 땀 흘리는 이모티콘이 떴다.
 
 [아, 안녕. 친구.]
 [잘 지냈어, 친구?]
 [네가 돌아와서 기뻐, 친구.]
 
 토끼, 다람쥐, 사슴 순으로 말풍선을 통해 내게 인사해 왔다.
 하나같이 말끝에 친구라는 말을 빼지 않고 말이다.
 셋 다 초롱초롱하나 눈망울로 날 바라보며 귀여움을 떨고 있는데, 만약 보통 사람이 봤으면 당장 달려가 부둥켜안고 비비적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 반응은 당연히 달랐다.
 “그럼 잘 지내지, 이 빌어먹을 친구들아! 내가 뭘 하러 돌아왔는지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난 얼굴에 웃음기를 순식간에 거두고 차가운 얼굴로 동물 친구들을 마주 보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 소리를 신호로 내 등 뒤의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냥꾼과 나무꾼이 걸어 나왔다.
 물론 녀석들은 내 영지에 속해 있는 NPC 일꾼들이었다.
 나무꾼들은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고 사냥꾼들은 단궁의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었다. 두 그룹 다 내 지시만을 기다렸다.
 그걸 본 동물 친구들은 공포에 질려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폭력 반대!]
 [여긴 동물 보호 구역이야!]
 [동물 보호 몰라?]
 
 “동물 보호? 웃기시네. 오늘 하루만큼은 난 숲의 약탈자다. 저 하늘의 저녁노을을 네놈들의 피로 물들여 주마!”
 스스로 생각해도 참 사악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그러자 사냥꾼, 나무꾼 무리는 내가 미리 지시해 두었던 작업을 일제히 개시했다.
 사냥꾼 무리는 전방의 숲속 친구들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리며 쫓아갔고, 나무꾼 무리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도끼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동물 살려! 목숨만 살려주면 진짜 히든······.]
 
 “닥쳐! 히든 따위는 이제 지긋지긋해.”
 숲속 친구 중 하나가 말풍선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난 중간에 딱 끊어버렸다. 말 그대로 히든 같은 건 이제 싫다.
 물론 처음에 히든 피스를 발견했을 때 너무 들떴던 건 인정하지만, 애초에 난 그런 요행으로 게임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치트나 숨겨진 비기에 의존하지 않고 게임을 해 온몸이라 이거다.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순식간에 초고랩이 되어 모든 사건을 해결하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난 지금 이렇게 갓 시작한 군주 유저로 플레이하고 있는데 충분히 만족한다.
 아무튼 ‘숲의 약탈자 놀이’는 이쯤 해 둬야지.
 난 사냥꾼과 나무꾼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사냥꾼은 기본적으로 숲속 동물을 활로 쏘아 맞힌 후, 동물들이 도망을 치면 그 뒤를 집요하게 쫓아갔다.
 내가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끝까지 쫓아가 사냥을 하는 모양이다.
 그중 HP가 특히 적은 다람쥐 같은 건 화살 한두 대 정도 맞고 쓰러졌다. 그런데 가만 보니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 죽은 동물의 시체는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었고, 사냥꾼이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만지니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아 어깨에 들쳐 멨다.
 사냥꾼 한 명이 동물 한 마리 이상을 잡지는 못하는 듯. 그렇게 어깨에 사냥감을 들쳐 멘 사냥꾼은 곧 내 곁으로 다가와 대기했다.
 
 고딕[[사냥꾼이 잡은 사냥감은 거점으로 가져가야 손질을 할 수 있습니다. 손질을 마친 사냥감은 그 즉시 가죽과 고기로 분리되어, 가죽은 재료로 추가되고 고기는 병량이 됩니다. 가죽은 그 자체만으로 제련하여 가죽제 아이템을 만들어 쓸 수도 있고 상점에 가져다 팔 수 있습니다.[[
 
 허공에서 도움말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눈으로 사냥하는 걸 직접 보고 도움말을 이어서 들으니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냥꾼 팀. 사냥을 마치면 전원 거점으로 돌아간다!”
 난 사냥꾼 팀에게 전체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장 먼저 사냥을 끝내고 내 곁에서 대기하던 사냥꾼이 거점을 향해 걸어갔다.
 난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나무꾼이 일하는 걸 보았다.
 나무꾼은 사냥꾼과 달리 움직이지 않은 나무를 상대했다. 도끼로 나무를 한 대 후려칠 때마다 나무의 내구력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보통 기본이 50/50인 것 같은데 그 수치가 0이 되니 나무가 베어져 쓰러졌다. 베어진 나무가 쿵하고 바닥에 쓰러지자 곧 나무꾼이 그곳으로 다가가 도끼로 몇 번 후려치고 나니 어깨에 메고 갈 만한 사이즈로 변했다.
 
 고딕[[나무꾼이 벤 나무는 거점으로 가지고 가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재료로 추가되며 상점에 팔거나, 그 재료를 이용하여 목조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목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나무와 돈이 필요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친절한 설명이 들려왔다.
 사냥꾼보다 짧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나무’가 꼭 필요하다는 게 포인트다.
 즉, 여기서 나무를 베어가지고 가면 그때부터 내 거점에서도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문득 홈페이지에서 본 내정 모드 중급편의 내용이 떠올랐다.
 “맞아! 거점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문명 수치가 생겨나고 그게 오르면 자동적으로 인구가 불어난다고 그랬지 아마.”
 「나무꾼 팀. 전원, 벌목 작업을 마치면 목재를 가지고 거점으로 돌아간다.」
 난 나무꾼 팀에게도 전체 귓속말을 보냈다.
 그렇게 다 지시를 내리고 나니 막상 내가 할 일이 끝났다. 사냥과 벌목이 대충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확인했으니 여기서 더 볼 건 없었다.
 나는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동물의 숲 안을 돌아다녔다. 저녁 시간이라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 지금 레벨이라면 늑대가 습격을 한다 해도 혼자서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여러 마리가 덮친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혼자만의 산책을 즐겼다.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계속 새로운 구상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두워서 좀 어렵지만 날이 밝아지는 대로 다시 한 번 이 숲을 탐사해야겠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숲의 지형을 파악하는 건 기본이다. 가능하면 지도를 만드는 것도 좋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보니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른 달이 보였다.
 실제 현실에서 보이는 달과 똑같이 구현된, 가상 세계의 달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현실적이었다.
 잠시 동안 달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렇게 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보니. 어느새 난 동굴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달빛에 의지해 그 동굴과 주변 지형을 보니 전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숲의 대장인 붉은 곰이 사는 동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저 동굴에 들어 가보지 못했군.”
 붉은 곰은 히든 퀘스트에서 나왔던 몬스터니 다시 부활할 일은 없겠지만, 왠지 저 동굴이 자꾸 신경 쓰였다.
 과연 저 동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명색이 숲의 대장이 살던 동굴이잖아.
 「마스터 카이저. 사냥꾼 팀, 나무꾼 팀. 전원 거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건장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속말로 들려왔다. 아마도 사냥꾼이나 나무꾼의 목소리로 추정됐다.
 벌써 작업을 다 마치고 돌아간 건가?
 아니, 잠깐. 그 전에 여기랑 거점은 꽤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그 먼 거리에서 여기까지 귓속말이 가능하다니 그렇다면 다른 응용도 가능하겠군.
 난 곧장 고블린 부락에서 경작을 하고 있을 농부와 고블린에게 전체 귓속말을 보냈다. 작업을 모두 끝내면 거점으로 돌아가란 내용을 말이다.
 그렇게 남은 뒤처리를 다 끝내고 나니 더 이상 귓속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난 다시 동굴을 마주 보았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은 되는데 막상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우우우~ 워워!
 그때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 늑대 정도는 가뿐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바로 몇 분 전이었지만, 막상 이런 한밤중에 숲속에서 늑대 울음 소리를 들으니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일종의 분위기가 문제랄까.
 능력적인 면에선 꿀릴 게 없지만 역시 밤에 혼자 인적이 드믄 곳에 있는 건 좀 심리적으로 압박이 생긴다.
 “아! 그래. 어차피 지금 거점에 돌아가 봐야 한밤중이라 작업하긴 좀 그러니까 그냥 저 동굴 안에서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
 동굴 안에 뭔가 있으면 그것도 좋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대로 로그아웃해서 현실상에서 자면 그만이다.
 생각해 보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좋으니 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상점 창을 열어 도구 목록에서 램프를 하나 구입해 손에 들고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동굴 입구에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Chapter Eight
 
 
 
 
 
 
 
 
 
 게임 속에 구현된 밤의 어둠은 실제 현실의 어둠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뒤덮었다. 만약 지금 내가 램프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지독하게 어두웠다.
 난 램프의 불빛에 의지하여 간신히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 일이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면서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깊은 밤에 램프 하나 달랑 들고 동굴 안을 조사하다니, 현실에서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좀 거창한 표현을 빌리자면 모험을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원주민의 공격이나 함정 같은 건 없고 무슨 보물을 찾으러 온 건 아니지만, 미지의 영역을 탐사한다는 점이 바로 모험의 포인트인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모험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한 10분 정도 계속 앞으로 걸어갔을 때, 정면에 막다른 길과 함께 검은 물체 같은 게 보였다.
 난 한 손에 램프를 잡고 다른 한 손에 단검을 꺼내 들고 바짝 경계를 하며 조금씩 이동했다.
 그리고 곧 램프의 빛 앞에 검은 물체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 물체는 말의 하반신과 인간의 상반신을 가진 반인반마(伴人伴馬)였다.
 “웬 켄타우로스(Centauros)?”
 난 무심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상대는 아직도 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리는 가까웠고 램프의 불빛이 정면에서 다가오는데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불을 비춰 보니 왜 반응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상대의 것인지 모를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망신창이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눈으로 척 봐도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끄응······.”
 미약한 신음 소리와 함께 켄타우로스의 몸이 꿈틀거렸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지만 아직 숨통은 붙어 있는 모양이다.
 난 손가락으로 켄타우로스를 슬쩍 가리켜 보았다.
 
 고딕, 박스[[[세르반티아]
 레벨 : 5
 HP : 1/250
 MP : 0/0[[
 
 켄타우로스의 머리 위로 이름과 함께 현재 상태가 간략히 떴다.
 그런데 놀라운 건 보통 몬스터처럼 종족명이 뜨는 게 아니라 고유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자기 고유의 이름을 가진 NPC라니, 이 숲의 대장이었던 붉은 곰조차 이름이 없었는데.
 지금 이건 도대체 어떤 경우일까?
 
 고딕[[재야 NPC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난 그걸 듣자마자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도움말을 들어보았다.
 
 [[재야 NPC는 자기 고유의 이름이 있는 NPC입니다. 군주 유저가 구입할 수 있는 직업이나 종족명이 이름 대신 올라간 NPC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들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 유저와 마찬가지로 행동과 의사의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이 게임 속 세계의 원 주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야 NPC는 대륙 곳곳에 은거하고 있으며 군주 유저가 직접 찾아내 설득을 하거나 특정 조건을 맞추면 장수의 한 사람으로 등용할 수 있습니다.[[
 
 재야.
 오래 전부터 시뮬레이션 게임을 해 온 내게 있어선 꽤나 친숙한 용어다.
 보통 역사 기반의 전략 시뮬레이션에서는 꼭 나오는 시스템이다.
 넓은 땅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은 군주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야를 장수로 등용하는 시스템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이렇게 직접 재야 NPC를 발견하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일단 지금 상태로는 말로 어떻게 설득할 상황은 아니니 회복부터 시켜 줘야겠군.
 치료 기술도, 회복 마법도 쓰지 못하는 관계로 바로 상점 창을 열어 치료 물약을 구입했다.
 빨간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내 손 위에 나타났다.
 사이즈는 (대).
 가격은 무려 100골드나 하는데 효과는 HP를 꽉 채워 준다고 하니 이걸로 충분할 것 같다.
 난 유리병 마개를 뽑아서 세르반티아의 몸에 절반을 뿌리고 나머지 절반을 입에 흘려보내 마시게 했다.
 사실 그냥 아이템을 찍어서 드래그하면 되지만, 그러면 너무 성의가 없는 것 같아서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자 곧 세르반티아의 몸에서 붉은 빛이 감돌면서 HP 수치가 실시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가 마침내 한계치까지 가득 차올랐다.
 동시에 몸에 묻어 있던 혈흔도 완전히 사라졌다.
 “크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세르반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런데······.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는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피로 물들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니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의 상반신이 보였다.
 녹색의 긴 머리를 붉은 머리띠로 묶어 내리고, 보이시한 외모에 오른쪽 뺨에 손톱자국이 칼자국처럼 깊게 패여 있고, 군살 하나 없이 적당히 근육이 잡힌 몸매에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가죽옷으로 가렸다.
 거기까지 보면 나랑 같은 인간 느낌이 났지만 그 밑으로 말의 하반신은 실제 말과 똑같아서 진짜 내가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고맙다, 인간! 네 덕분에 살았어. 하마터면 평생 여기서 골골거릴 뻔했네.”
 세르반티아가 내 앞에 자세를 낮춰 앉더니 눈높이를 맞추고는 어깨를 팡팡 치켜 말했다.
 “그런데 붉은 곰 이 자식은 어디에 있지?”
 다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짜 무슨 원수를 찾듯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눈에 띄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이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 아주 잠시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곧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그 녀석이라면 내가 해치웠어.”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세르반티아가 조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날 내려다보았다.
 “진짜? 정말이야? 네가 그놈을 해치웠다고? 나도 하지 못한 일인데.”
 보통은 얼굴을 불쑥 들이밀어야 되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세르반티아가 한참 위에 있으니 고개를 쑥 내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사실이야. 만약 내가 놈을 해치우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 동굴 안에 들어올 수 있겠냐?”
 난 세르반티아가 이 동굴 안에서 붉은 곰과 한판 붙었다는 걸 가장하고 상식적인 선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인간의 몸으로 붉은 곰을 해치우다니, 보기보다 강한가 보네.”
 “딱 죽지 않을 만큼은 강한 수준이겠지. 어쨌든 놈은 죽어 없어졌고 난 지금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말이야.”
 돈으로 구입한 NPC와 다르게 자의식을 가진 NPC라고 하니 어느새 나도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그냥 일방적으로 명령을 듣고 수행하는 NPC라기 보단 차라리 이쪽이 더 좋게 다가왔다.
 “젠장, 그럼 난 어디 가서 이 울분을 풀면 좋은 거야? 놈한테는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이 뺨에 상처를 얻는 대신 놈의 한쪽 눈을 가져갔지만 그걸론 부족해. 내가 직접 놈의 숨통을 끊어 버렸어야 했다고!”
 세르반티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붉은 곰을 자신이 직접 해치우지 못한 게 정말 분하고 원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묻겠는데 만약 붉은 곰을 네가 직접 해치웠다면 그다음에는 뭘 할 건데?”
 내가 그렇게 묻자 세르반티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마땅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은 건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나도 몰라!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고.”
 “그럼 날 따라와.”
 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답했다. 내 갑작스러운 제안에 세르반티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적어도 이 작은 숲에서 대적할 상대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나라면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뒷말을 추가하자 세르반티아가 무척 진지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론 내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야. 내가 왜 널 따라가야 하는 거지?”
 오, 그런 의문을 제기하다니, 보기보다 생각이 깊군. 역시 괜히 고유 NPC가 아닌가 보다.
 그냥 이름 없는 NPC였다면 단번에 넘어왔을 텐데 말이다.
 이제 여기서 승부수를 띄워야겠군. 나로선 모처럼 발견한 재야 NPC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그야 난 너보다 강하잖아. 너도 어쩌지 못한 붉은 곰을 쓰러트렸다고.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르면 약자가 강자를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약육강식의 법칙, 그게 내 승부수였다. 아마도 세르반티아와 붉은 곰이 이 숲의 패권을 놓고 싸웠을 걸 가장하고 한 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히 먹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세르반티아는 대답 대신 자기 등 쪽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길게 묶어 내린 말총머리 안쪽으로 숨겨져 있던 뭔가를 척 꺼내 들었다.
 그건 보통 활보다 더 길고 단단한 합성 장궁이었다.
 세르반티아는 아무 말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 한 대를 꺼내 들어 활시위에 메기었다. 그리고 곧 내 쪽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방금 전에 나한테 한 말, 지금 다시 한 번 해 봐.”
 세르반티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 쪽으로 향한 화살의 조준 방향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난 그걸 보고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았다.
 상대의 HP는 250. 내 HP는 180.
 단순 수치상으로도 밀리고, 난 인간이라 두 발로 땅을 달리지만 상대는 켄타우로스라 기동력도 하늘과 땅 차이다.
 거기다 무장 수준도 난 기껏해야 단검, 무장을 바꿔도 단궁 수준인데 상대는 합성 장궁을 가지고 있으니 거리 차이를 크게 벌려 먼 거리에서 화살을 쏘아 대면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HP 1로 다 죽어 가던 걸 기껏 살려 놨는데 나한테 활을 들이대다니 쓴웃음이 절로 났다.
 “안 들려? 다시 한 번 말해 보라니까.”
 세르반티아가 재차 말하며 활시위를 더욱 당겼다.
 “난 너보다 강하니까, 넌 네 말에 따라야 해. 난 네가 쓰러트리지 못한 붉은 곰을 이 손으로 직접 해치웠어.”
 그러나 내 대답은 똑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설령 지금 여기서 화살에 맞아 죽는다고 해도 그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다.
 난 내 선택을 믿고 내 판단을 신뢰한다.
 나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게 그동안 해 온 전략 게임에서 나를 승리하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다.
 “그래, 그게 네 대답이라 이거지.”
 세르반티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힘껏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쉬이잉~
 이제는 익숙해진 화살 날아가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합성장궁에서 뻗어 나온 화살이 내 쪽을 향해 날아왔다.
 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걸 똑바로 쳐다보았다. 맞을 때 맞더라도 내 의지를 관철시키고 싶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내 몸은 아직 멀쩡했다. 화살이 내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깨갱!
 곧이어 들려온 것은 개의 울음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늑대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고꾸라져 있었다.
 늑대의 몸 위에 뜬 HP 수치는 0[30을 가리켰고 곧 하얀 빛과 함께 소멸했다.
 다시 앞을 보니 이제 고개를 든 세르반티아의 얼굴이 보였다.
 녀석은 지금 날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역시 딱 부러진 게 좋다니까. 내가 좀 위협을 했다고 아까 했던 말을 바꿨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설마 저 녀석, 날 시험한 건가? 내가 반신반의하는 동안에 세르반티아가 다음 말을 이었다.
 “방금 네가 한 말이 정답이다. 숲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법. 넌 붉은 곰을 쓰러트렸으니 분명 나보다 강해. 그러니까 난 널 따르겠어.”
 그 말이 나온 직후.
 
 고딕[[재야 NPC 등용에 성공하셨습니다.[[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난 그걸 듣고 나서야 좀 실감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을 듣지 못했군.”
 “내 이름은 카이저. 앞으로 날 따르기로 했다면 마스터 카이저라고 불러.”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마스터 카이저.”
 군신 관계가 되었음에도 높임말을 쓰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으로 인재 등용에 성공했다는 감격을 느끼며 세르반티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상태 창을 켜 보았다.
 
 고딕, 박스[[장수 상태 창
 이름 : 세르반티아
 Lv. : 5
 성별 : 여자 종족 : 켄타우로스 직업 : 순찰자
 능력치
 HP : 250/250
 MP : 0/0
 공격력 : 43 방어력 : 18
 전투 힘 : 23 근력 : 18 체력 : 25
 민첩 : 40 마력 : 0 행운 : 10
 스킬 : 기마 사격
 내정[통솔 : 84 무력 : 82 지력 : 61
 정치 : 36 매력 : 57
 특기 : 답파(산악)
 장비
 방어구-없음
 주무기-합성 장궁
 보조 무기-육척봉[[
 
 
 고딕, 박스[[소속 : 카이저군
 직위 : 일반
 충성 : 88 공적 : 0[[
 
 이 게임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자세한 상태 창을 본 것 같다.
 과연 켄타우로스라 그런지 육체적 능력은 나보다 훨씬 높았다.
 거기다 내정 수치는 몇 가지 능력을 제외하면 나보다 2배 이상 높다.
 레벨에 비해서 너무 높은 게 아닐까 했는데 마침 그 내정 능력치 옆에 도움말 표시가 뜨기에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았다.
 
 고딕[[NPC 장수의 전투 능력치는 레벨과 함께 오르지만 내정 능력치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특수 아이템을 얻지 않는 이상 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내레이션을 듣고 나니 대충 이해가 갔다. 확실히 장수 NPC는 내정 수치가 고정되어 있는 편이 좋지. 그래야 장수 등용하는 재미도 있지 않겠어?
 거기다 기본적으로 NPC에게 표시되는 건 이름과 레벨 HP와 MP뿐이다.
 즉 여기서 유추해 보자면 실제 게임에서 적용하는 건 전투 수치만이다.
 내정 수치는 아마도 군주 유저에 의해 등용되어 임관된 다음 적용되는 것 같다.
 애초에 그러지 않고서야 내정 수치를 적용할 곳도 없으니 말이다.
 “어이, 생각 같은 건 그만 하고 앞을 좀 보라고.”
 그때 세르반티아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그런데 램프의 빛이 닿지 않는 정면의 어둠 속에서 두 개가 하나의 쌍을 이룬 붉은 빛들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아까 해치운 놈은 척후였나 보군. 지금 우릴 향해 다가오는 놈들이 본대인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문득 내 첫 전투가 떠올랐다. 그때도 고블린 요격 부대가 척후를 먼저 보낸 다음, 본대를 이끌고 와 공격했다.
 아무래도 그게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몬스터의 기본 패턴인가 보군. 그렇다면 당황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 전에 여길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곳에서는 다수의 적과 싸우기에 불리하다.
 “세르반티아, 군주로서 첫 번째 지시를 내리마. 날 데리고 여기서 빠져나가!”
 “알았어. 그럼 내 등에 올라타.”
 난 세르반티아의 씩씩한 대답을 듣고 그녀의 등 위로 올라탔다.
 난생 처음 말의 등에 올라타는 거였는데 너무나 쉽고 간단히 성공했다.
 타는 것 자체가 쉬운 건 아마도 가상현실 게임의 룰인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램프의 불빛이 닿는 곳으로부터 늑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무려 20마리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횡렬로 쭉 늘어서서 입구를 막고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왔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난 좀 거칠게 달리니까 알아서 조심하라고.”
 세르반티아가 합성 장궁의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내게 말했다. 난 그 말에 따라 꽉 잡았는데 뭔가 물컹물컹한 게 잡혔다.
 “꺅! 어, 어딜 잡는 거야? 거기가 아니라 그 아래를 잡아야지, 인마! 죽고 싶어!?”
 처녀의 가녀린 비명으로 짧게 시작하다가 중간엔 당황하고 끝에 가선 한 대 칠 기세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난 순간 놀라 자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버티고 손을 아래로 내려 허리를 잡았다.
 터프한 이미지 속에 숨겨진 여자의 일면을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감상을 했다가는 맞아 죽을 것 같아서 관뒀다.
 “자, 그럼 간다!”
 마치 기합같이 우렁찬 외침이 동굴 안을 울렸다.
 그 외침이 터져 나오기 전에 먼저 활시위를 떠나간 화살이 맨 구석에 있는 늑대 한 마리를 정통으로 맞췄다.
 순간 내 시야와 몸이 한번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르반티아의 몸이 동굴 구석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구석의 빈자리를 돌파해 빠져나갔다.
 늑대 무리는 당황하는 일 없이 재빨리 우회하여 측면과 배후를 노리고 들어왔다.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마리가 땅을 박차고 훌쩍 뛰어올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난 순간 손을 떼서 무기를 꺼내 들 뻔했다.
 하지만 그 전에 세르반티아가 몸을 우측으로 홱 돌리며 튼튼한 뒷다리로 힘껏 올려 차 공중에 띄우더니,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화살을 쏘아 맞혀 즉사시켰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마리를 해치운 뒤 동굴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리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았다.
 늑대 무리도 전력을 다해 우리 뒤를 쫓아왔다.
 “다음은 어디로?”
 “거점으로, 거점으로 돌아간다. 방향은 내가 설명해 줄게. 멈추지 말고 쭉 달려가는 거야!”
 난 허리를 꽉 잡고 있느라 앞을 보지 못했지만, 지도 창을 잘 보이는 곳으로 가까이 끌어와 그걸 보고 진로 방향을 지시했다.
 평지를 지나 산기슭을 넘어가는데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몰라도 계곡 같은 험한 길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히려 속력이 더 붙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녀석은 자기가 말한 그대로 정말 거칠게 달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늑대 무리의 추적을 무사히 따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점에 가까워졌다. 수 미터 앞으로 거점을 둘러싼 목책이 보였다.
 다행히 거점에는 별 탈이 없었다. 목재 성문을 지나서 무사히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긴장이 풀리니 동시에 힘이 쫙 빠졌다. 세르반티아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땅으로 내려왔다가 그대로 누워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추적보다는 험한 지형의 효과를 무시하고 뛰어다닌 기마 때문에 더 힘들었다.
 실제로 숨이 벅차 오른 건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피로감이 느껴졌다.
 
 고딕, 박스[[유저 역사가 갱신되었습니다.[[
 
 익숙한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걸 확인할 여력이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다.
 이 상태로 그냥 자거나, 아니면 로그아웃해서 실제로 푹 자고 일어난 다음 천천히 알아봐야지.
 
 
 
 
 
 Chapter Nine
 
 
 
 
 
 
 
 
 
 간밤에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로그아웃해서 현실에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났다.
 역시 수면 모드로 플레이할 때보다는 실제로 자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난 대충 씻고 아침을 챙겨 먹은 다음 바로 로그인하여 게임에 접속했다.
 게임 속 시간대도 밤에서 아침으로 변해 있었다.
 로그아웃할 때는 분명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지금 로그인한 난 롱하우스 입구 앞에 서 있고, 세르반티아를 비롯한 NPC들이 거점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난 일단 NPC들을 내버려 두고 먼저 유저 역사 창을 켰다.
 어제 날짜로 붉은 곰을 쓰러트린 기록과 재야 NPC였던 세르반티아를 등용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곧 유저 퀘스트 창으로 넘어가자 역시나 새로운 게 떠 있었다.
 
 고딕, 박스[[유저 퀘스트 창
 § 퀘스트 2
 [늑대 굴을 찾아내라!]
 - 당신의 거점이 있는 이 땅 어딘가에는 늑대 굴이 숨겨져 있다. 늑대 굴에는 약 100여 마리의 늑대들이 모여 살고 있다. 늑대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주로 밤에 활동하지만 가끔 낮에 나타날 때도 있다.
 늑대 굴을 찾아내서 처리하지 않으면 필드 내에 늑대가 고정 몬스터로 출몰한다.
 보상 : ???[[
 
 퀘스트 1 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그때는 고블린 부락을 함락시키는 임무였지만 지금은 찾아내는 임무다.
 함락과 탐색은 엄연히 다른 것. 그래서 보상에 물음표가 뜨는 것 같다. 어쩌면 발견한 다음 어떻게 하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전력이다. 늑대 100마리라니 고블린 부락 전력의 딱 2배로군.
 전보다 퀘스트 난이도가 한 단계 오른 거라고 봐야 하나.
 하지만 뭐 이번에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별로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나도 거점도 레벨업을 했고 자금과 재원도 어느 정도 생겼다.
 전하고 다르게 지금은 굳이 퀘스트 1을 당장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걸 적절히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항상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그래서 전투가 너무 없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아군에 대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침으로, 늑대들을 상대하면 경험치도 늘어나고 긴장도 유지할 수 있을 거다.
 “세르반티아, 사냥꾼과 나무꾼 팀을 이끌고 동물의 숲에 갔다 와. 두 팀이 작업하는 동안 늑대들이 얼씬도 못하게 막아 줘.”
 “알았어. 맡겨 달라고.”
 내가 그렇게 지시를 내리자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르반티아는 곧 사냥꾼, 나무꾼 팀을 전부 이끌고 거점 밖으로 나갔다.
 난 방에 혼자 남아서 어제 작업의 결과물을 확인했다.
 
 고딕[[거점 자재
 나무 : 50, 가죽 : 50, 식량 : 50
 거점 건물
 밭 : 5[[
 
 전자는 사냥꾼, 나무꾼을 통해 얻은 거고 후자는 농부들이 고블린 부락에서 일군 땅을 뜻하나 보다.
 어쩐지 너무 초라한 수치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적으나마 그 수치가 오르면서 새로 생겨난 것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건물 건설 창이었다.
 NPC 구입 창과 마찬가지로 건물 역시 구입할 수 있는 목록이 주르륵 떴다.
 
 고딕[[[현재 건설 가능한 건물]
 농장(목재 10)
 : 내구력 100/100, 수용 인구 10/10
 - 농부의 지정 휴식처입니다. 5개의 밭을 1개의 농장으로 건물화할 수 있습니다. 지정한 농부가 밭을 일구며 농장 건물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어 경작 능률이 상승합니다.
 통나무집(목재 10)
 : 내구력 100/100, 수용 인구 10/10
 - 나무꾼의 지정 휴식처입니다. 거점으로 반드시 돌아올 필요 없이 나무를 다듬어 자재에 추가시킬 수 있습니다.
 오두막(목재 10)
 : 내구력 100/100, 수용 인구 10/10
 - 사냥꾼의 지정 휴식처입니다. 거점으로 반드시 돌아올 필요 없이 바로 사냥감을 손질하여 자재에 추가시킬 수 있습니다.
 초가집(목재 10)
 : 내구력 100/100, 수용 인구 10/10
 - 주민들의 주거 공간입니다. 건축 완료 시 시간과 환경에 따라 고정 NPC 주민이 생겨납니다.[[
 
 금이 아니라 목재만으로 건설이 가능하구나. 거기다 자재비용도 저렴한 편이군. 어찌 보면 그런 비용 책정도 이해가 간다.
 주변 탐색을 시도해 숲을 발견한 다음, 나무꾼을 구입하여 나무를 벤 다음에야 목재가 추가되어 건물을 지을 수 있으니, 이게 만약 비용이 많이 들었다면 게임 밸런스가 붕괴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나한테 있는 목재는 50.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아까 전에 일꾼을 보냈으니 뭐, 걱정 없겠지.
 우선 하나하나 천천히 처리해야겠군.
 지도 창을 켜고 고블린 부락을 크게 확대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농부들을 시켜 경작한 밭을 보았다. 그때 동원한 농부의 숫자는 5명. 1명이 하나씩 밭을 일구어 총 다섯 개가 됐다.
 확대된 지도 창에 나온 밭을 손가락으로 클릭하여 건설 창에 떠 있던 농장을 선택했다.
 그러자 곧 밭 주변에 목재가 하나 둘씩 쌓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형태를 이루어 하나의 농장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감시탑을 구입했을 때는 완성된 건물이 떡하니 나타났다.
 이렇게 목재로 건설하는 건물은 건축 과정이 실시간으로 보여서 그런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난 곧 농부와 고블린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농부 팀은 농장에, 고블린은 초가집으로 가서 살라고 지시했다.
 추가로 고블린에게 주요 임무로 농지를 경작하는 농부를 보호하는 일을 주었다.
 그다음에 한 일은 통나무집과 오두막 건설이다.
 이번엔 동물의 숲 쪽을 확대해서 본 다음, 세르반티아 팀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건물을 하나씩 지어 놓았다.
 그 뒤에 세르반티아 팀에게 전체 귓속말을 보내서 숲에 도착하는 대로 각각의 건물을 주거지로 삼아 사냥과 벌목에 매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남은 목재는 20. 건물 두 개 정도는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시범 삼아 초가집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다른 건물과 달리 이번에는 거점의 인구수와 직결되는 곳이다 보니, 건물을 짓기 전부터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롱하우스를 중심으로 바깥 쪽 자리를 한번 살펴보다가 적당히 빈자리에 초가집 두 채를 지었다.
 역시 실시간으로 건물이 지어지다가 몇 분 뒤 완공됐다.
 
 고딕, 박스[[초가집이 완성됐습니다.
 - 이제부터 거점 내에 NPC로 이루어진 주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 치안을 유지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면 인구는 더욱 늘어납니다.[[
 
 다른 건물을 건설했을 때와 다르게 이번엔 친절하게 설명이 떴다. 하지만 NPC 주민이 지금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건설 창에 적힌 간략한 설명에 따르면 시간과 환경에 따라 나타난다고 그랬다.
 환경은 아마도 방금 전 내레이션으로 들은 대로 문명 발달, 치안 유지 정도일 텐데 시간은 잘 모르겠군.
 하지만 뭐, 급할 건 없지. 아직 게임 시작한 지 30분도 안 됐으니까 말이야.
 난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롱하우스 안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 잠시 쉬려고 했지만, 긴 복도를 지나가다가 보니 문득 거점 상태 창에 떠 있던 ‘방 배정’이라는 특수 항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이 롱하우스 안에는 벽을 칸막이로 둔 수십 개의 방이 있다. 방의 개수는 많은데 각각의 크기는 좀 작은 편이다.
 현대식으로 방 크기를 재 본다면 약 2~3평 남짓 되는 공간이다. 굳이 뭔가에 비유하자면 고시원 같은 느낌마저 났다.
 거점 상태 창의 특수 항목에 대한 도움말을 켜 보았다.
 
 고딕[[방 배정 기능은 군주 유저가 지정한 대상에게 방을 배정해 주는 것입니다. 일반 유저, 장수 NPC, 일반 NPC 등 군주 유저와 같은 소속인 존재들만이 선택 가능합니다.
 이렇게 지정된 방은 그 주인의 고유 거주지가 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습니다.
 만약 전투 시 사망하면 방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고 아이템이나 돈 등을 따로 보관할 수 있는 기능이 주어집니다.
 군주 유저 또한 자신이 원하는 방을 지정해 가지면 같은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 생각보다 좋은 기능이잖아. 저거라면 언제 어디서 죽어도 걱정이 없겠군. 그럼 우선 내 방부터 한번 골라 볼까.
 난 복도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걸어가면서 방의 개수부터 먼저 셌다. 방은 총 20개 정도 됐다.
 그중에서 내가 내 방으로 고른 곳은 정 중앙에 있는 방으로 다른 방 두세 개를 합친 듯한 크기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지만 이 안에 채워 나갈 건 앞으로 찾으면 된다.
 내가 빈 땅에서 맨손으로 시작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모든 회의는 이 방에서 해야겠군.
 이 방을 중심으로 왼편은 일반 유저, 오른편은 장수 NPC한테 방을 배정해 줘야겠다. 그렇게 하면 첫 번째 입주자는 세르반티아가 되겠군.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일은 잘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무심코 지도 창에서 동물의 숲을 봤을 때.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 몬스터가 당신의 거점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허공에서 경고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곧 지도 창에 동물의 숲 근처에 붉은 점 10여 개가 떠올랐다.
 경고.
 몬스터의 공격.
 이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들었던 메시지가 다시 들려왔다.
 그때는 ‘거점’이지만 이번엔 ‘영토’였다. 지도 창에도 나오지만 동물의 숲이 공격받고 있다 이거로군.
 난 250골드를 써서 고블린 5마리를 구입하고 그 길로 곧장 동물의 숲을 향해 이동했다. 피로도를 충분히 계산하면서 속도를 잘 조절해 가며 달려가 예상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그때쯤 지도 창에 보였던 붉은 점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고 반신반의하며 숲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여기저기에 늑대 시체들이 널려 있는 게 보였다.
 대충 눈짐작으로 10여 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 시체를 따라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세르반티아와 만났다.
 “아! 마스터 왔어? 지원군까지 데리고 왔군. 뭐 굳이 안 와도 됐는데, 내가 다 정리했으니까.”
 세르반티아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머리 위에 뜬 HP 수치는 10/250.
 빈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중상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눈빛이나 목소리가 뚜렷한 건 정말 대단한 근성이 아닐 수 없지만, 나로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 그녀 혼자에게만 호위 임무를 맡긴 건 내 판단 실수였나 보다.
 “적의 수는 얼마나 됐어?”
 “열 마리 정도 됐지 아마.”
 10마리를 혼자서 다 잡았다니 역시 전투에 강하네.
 하지만 역시 숫자에는 어쩔 수 없군. 만약 늑대들이 좀 더 많이 몰려왔다면 쓰러진 쪽은 세르반티아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사냥꾼과 나무꾼 팀은 모두 무사하니까 안심해. 그 놈들은 전투에 하도 도움이 안 되고 거치적거리기만 해서 모두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
 그 말이 나온 직후 오두막과 통나무집에서 사냥꾼, 나무꾼 무리가 걸어 나왔다. 누구 한 명 다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그게 기특하면서 한편으로 너무 고마웠다. 자기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내가 내린 지시를 끝까지 수행하다니. 역시 세르반티아를 등용하길 잘한 것 같다.
 “수고했어, 세르반티아. 이 뒤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넌 저 건물 안에 들어가서 좀 쉬도록 해.”
 “그래. 그럼 사양 않고 좀 쉬지.”
 세르반티아는 내 지시에 따라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다. 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지켜봐 주었다.
 돈이 좀 넉넉했다면 포상금이라도 줬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장비라도 하나 사서 줘야지.
 “마스터 카이저,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사냥꾼, 나무꾼 무리가 내 앞에 모여 서서 대기했다. 작업 지시가 적의 공격으로 인해 무효화 된 모양이다.
 이왕 이렇게 직접 온 거. 300골드를 들여 둘 다 각각 5명씩 더 고용해서 재작업을 지시했다.
 이번엔 내가 직접 고블린을 이끌고 호위를 맡았다. 다행히 1차 작업이 끝날 때까지 또 늑대 무리의 습격을 받지는 않았다.
 인원수는 배가 되고 굳이 거점까지 갔다 올 필요 없이 바로바로 손질을 거치게 되니 작업 속도와 능률이 크게 상승했다.
 
 고딕, 박스[[목재 10, 가죽 10, 고기 10을 얻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언제 어느 만큼의 자원을 얻었는지 내레이션이 뜨는데 그걸 듣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마냥 단 몇 분 만에 자원 수치가 마구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진행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좀 불편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불편함보다는 불만에 가깝다고나 할까? 호위를 맡으면서 몇 번이나 계속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나무꾼과 사냥꾼의 전투적 문제였다.
 세르반티아 말로는 전투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거치적거린다고 건물 안에 집어 놓고 혼자 싸운 것이다.
 난 그게 이해가 안 됐다. 내가 직접 싸우는 걸 본 게 아니니 뭐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늑대의 HP는 30. 사냥꾼은 70, 나무꾼은 90이다. HP로 단순 비교를 하자면 두 직업군이 늑대에게 꿀린 건 없다.
 그럼 도대체 왜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은 걸까?
 늑대 무리의 공격을 두고 보면서 전투의 긴장을 유지한다는 당초의 목적도. 전투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일꾼 역시 성장이 가능하다면 단련을 시키는 게 당연하지. 정규군처럼 잘 싸울 수는 없어도 최소한 작업을 하면서 몬스터에게 발리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잠시 그렇게 혼자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자식들, 가만히 사냥당해 주니까 우리가 무슨 봉인 줄 아냐? 어디 한번 붙어보자!]
 
 정면의 수풀 위에서 말풍선이 보였다.
 무심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수풀 안쪽에서 사냥꾼과 사슴이 서로 대치되어 있었다.
 사슴은 가녀린 겉모습과 다르게 말풍선으로는 거친 대사를 날리며 뿔을 앞세운 채 사냥꾼을 향해 돌진했다. 사냥꾼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활을 계속 쏘아댔다.
 그런데 사슴이 화살에 맞으면서도 기어이 달려와 들이받자 사냥꾼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뒷걸음질 쳤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사슴이 근접해 있자 사냥꾼이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기가 활 말고 다른 게 없는 건지, 근거리에서도 활을 쏘니 공격 속도가 한 박자 늦어 사슴의 공격을 허용했다.
 끝까지 지켜 본 결과 결국 HP가 더 높았던 사냥꾼이 사슴을 잡기는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뭔가 굉장히 답답한 전투였다. 어째서 사냥꾼이 전투에 거치적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나무꾼은 또 얼마나 답답할까?
 이번엔 한번 나무꾼이 일하는 현장으로 가보았다. 그쪽이 하는 일은 나무를 베는 일이라 전투를 할 일 없이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무를 베는 동작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만약 저게 나무 같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몬스터라고 가정한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다.
 HP가 많으면 뭐해? 나무꾼이 한번 공격할 시간에 늑대가 두세 번 때리고 거리를 벌이면 잡을 방법이 없지.
 아,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하구나. 사냥꾼은 근접전에 무력하고. 나무꾼은 공격 속도가 느리니 세르반티아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정말 안 봐도 뻔하다.
 “쓰러진다!”
 그때 나무꾼이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 순간 내 코앞으로 나무 한 그루가 쿵하고 쓰러졌다.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니, 어느새 쓰러진 나무가 내 앞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좌우에 나무가 있고 앞뒤로만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외길이다.
 그래서 단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진 것만으로 길이 완전 막혀버린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무꾼은 뒤쪽에서 가지를 쳐내며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5분 정도 지나자 손질된 나무가 목재가 되어 중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앞길을 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졌다.
 나무꾼이 그걸 어깨에 들쳐 메고 통나무집으로 돌아갔다. 난 잠시 동안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냥꾼이 사냥을 하고, 나무꾼이 나무를 베는 건 일상이다. 그게 그들이 평생 할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는 일. 즉 작업과 전투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될까?
 단지 그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 머릿속에 새로운 전술과 새로운 전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의욕이 생겼다.
 정규군을 동원할 것도 없다. 이 숲을 두고 벌어지는 일은 숲에 사는 이들로만 해결할 생각이 들었다.
 사냥꾼과 나무꾼.
 이 단 두 직업군만으로 부대를 편성해 늑대 무리를 퇴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준비가 필요하겠지. 한 며칠 간 이 숲에서 지내면서 작업 관리를 하고 훈련을 병행해야겠군.
 “좋아, 어디 한번 제대로 해 보자고! 이 녀석들을 더 이상 거치적거리지 않은 부대로 만들어 주겠어.”
 
 
 
 
 
 Chapter Ten
 
 
 
 
 
 
 
 
 
 동물의 숲에서 지낸 지 4일이 지났다.
 현실에서는 2일이 지난 시간이다. 밤이 됐을 때는 로그아웃을 한 뒤 실제로 자고 일어난 다음 로그인하여 게임에 접속,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한 것 같다.
 4일 동안 거점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숲에 지냈다. 붉은 곰의 동굴을 임시 거처로 삼아 거기서 회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열심히 플레이한 결과, 당초 목표로 잡았던 작업과 훈련을 모두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작업의 결과로 4일 동안 것은 목재 400, 가죽 400, 고기 400.
 훈련의 결과는 약 3차례에 걸친 늑대 무리의 침공을 격퇴했다.
 자원이 풍부해진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훈련의 성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늑대 무리의 공격 같은 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약간의 시행착오도 겪었고 고생도 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어려운 때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본래 늑대는 CPU가 조종하는 몬스터에 불과했다. 그래서 공격 패턴은 항상 정해져 있다. 매번 같은 수법으로 공격을 해온다면 단 몇 차례의 전투만으로 충분히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마스터 카이저. 좋은 아침이야.”
 오늘도 아침 일찍 접속해 동굴 안에서 깨어난 난 날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동굴 입구 앞에는 세르반티아가 서 있었다.
 난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이렇게 아침 시간에 세르반티아가 동굴로 마중 나온 게 요 4일 간의 일상이 되었다.
 4일 간 그녀의 공적 수치는 500으로 상승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작업과 훈련을 같이 하고, 내가 부재중일 때는 대행을 맡아 주면서 장수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높이 사고 싶은 건 바로 전투적 활약이다. 이번 훈련을 통해 익힌 전술의 핵심은 세르반티아가 맡고 있기 때문에 참 큰 의지가 되고 있다.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경고![[
 
 고딕, 박스[[- 몬스터가 당신의 거점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때 허공에서 경고 음성이 들려왔다.
 곧 지도 창을 켜 보니 수십 개의 붉은 점이 반짝이며 이 동물의 숲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르반티아. 준비 해. 오늘도 먼저 ‘요격’하러 간다.”
 “훗, 요새는 늑대 사냥이 성수기인 모양이군. 그럼 오늘도 그럼 한 바탕 신나게 놀아볼까.”
 세르반티아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를 떠나 사냥꾼, 나무꾼을 소집하러 갔다. 난 그동안 지도 창을 확대시켜 늑대 무리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난 요 며칠 동안 작업과 훈련만 한 건 아니다. 틈틈이 시간 나는 데로 이 숲을 돌아다니며 주변 지리를 완전히 파악해 두었다.
 때문에 아군을 어디로 이동시켜 어떻게 배치시켜야 하는지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다음에는 한번 머릿속으로 가상의 전투를 시뮬레이팅 해 보고 결과를 낸 다음, 비로소 내가 해야 할 준비를 마쳤다.
 “마스터 카이저. 모두 도착했어.”
 그때쯤 세르반티아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동굴 입구 앞에 집결한 병력은 사냥꾼, 나무꾼이 각각 10명씩으로 둘이 합쳐 총 20명이다.
 단순히 병력 수 자체는 4일 전하고 똑같다.
 다만 전투력 자체는 그때보다 훨씬 낫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난 지도 창을 확대시켜 두 팀에게 가야 할 곳을 지정해주었다.
 혹시나 잘못된 건 없나 한번 볼 걸 두 번씩 다시 보면서 확인한 다음에서야 곧 지시를 마치고 세르반티아의 등위로 올라탔다.
 “자, 그럼 지금부터 요격에 들어간다. 전원, 위치로 이동하라!”
 “예스, 마스터!”
 내 외침과 동시에 두 팀이 흩어져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세르반티아도 이미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 올라타 달리는 것도 최근 충분히 훈련을 해두었기 때문에 기마에 어려움은 없었다.
 특기 답파 능력은 산악 지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기마 능력이라, 진짜 거칠고 험한 산세를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면 기수 입장에서 좀 버겁긴 하지만 못 버티고 떨어질 정도는 아니다.
 “보인다, 저기 늑대 무리가 보여!”
 세르반티아의 시선을 쭉 따라가 보니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늑대들이 보였다.
 저쪽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듯 무리를 지어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화끈하게 한 발 날려줘.”
 “분부대로!”
 내 지시가 떨어진 직후 세르반티아는 합성 장궁의 활시위를 힘껏 당긴 채 늑대 무리의 측면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다가, 발굽으로 땅을 박차고 힘껏 떠오르면서 활시위를 놓았다.
 쉬이잉~
 퍽!
 화살이 늑대 한 마리의 몸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 한방에 늑대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러자 순간 주위에 있던 다른 늑대들이 일제히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수는 어림짐작으로 약 20마리 정도 됐다. 지금 우린 그 중에 단 한 마리만 쓰러트렸다.
 “여기다, 여기! 따라올 테면 한번 따라와 보시지.”
 세르반티아는 곧장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늑대 무리는 일제히 우리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문득 전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불과 4일 전. 세르반티아와 처음 만났을 때도 난 이랬었다. 그저 등에 올라탄 채 아무것도 못하고 도망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과거고 지금은 현재. 거기다 ‘현재 진행형’이다.
 늑대 무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치던 중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왼쪽은 험한 계곡길. 오른쪽은 숲속길이다.
 세르반티아의 답파 능력을 사용하면 왼쪽이 길이 당연히 도주에는 더 유리했다. 하지만 난 지금 마냥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오른쪽 숲길. 물론 그건 전부 다 계획한 데로의 전개였다.
 숲길은 처음엔 넓었지만 나무와 수풀이 빼곡이 들어차면서 점점 좁아졌다. 그러다 곧 앞뒤로 지나갈 수 있는 외길에 들어섰다.
 세르반티아는 외길 중간 지점에 서서 늑대 무리를 향해 활을 쏘았다. 이번에도 역시 한 방에 한 놈이 쓰러졌다.
 벌서 두 마리 째 당하는 걸 무력히 보고만 있어야 했던 늑대 무리는, 더욱 사나워져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전속력으로 쫓아왔다.
 난 그 모습을 쭉 지켜보다가 늑대 무리가 외길로 들어선 순간. 세르반티아의 어깨를 탁 치는 신호로 하여금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우리가 외길에서 벗어났을 때 늑대 무리는 반대로 외길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이다!”
 난 외길 주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곧 나무가 우르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쓰러진다!”
 나무꾼의 외침과 함께 주변에 있던 나무가 쿵하고 쓰러졌다. 늑대 몇 마리가 그걸 미처 피하지 못해 그대로 깔려버렸다.
 그건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쓰러진다는 외침이 반복되어 들려오면서 다른 나무들도 연이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이런 지형으로 유인해 온 거고, 여기 도착할 시간을 미리 계산해 나무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베어 놓았던 것이다.
 나무가 한 그루 쓰러질 때마다 늑대들은 두 세마씩 착실히 깔려 죽었다. 외길 앞과 뒤쪽 끝에서부터 나무가 차례대로 쓰러지니, 늑대 무리로선 도저히 피해낼 재간이 없었다.
 거기다 공격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본격적인 공격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전원, 사격 개시!”
 세르반티아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며 합성 장궁의 활시위를 당기자 그걸 신호로, 근처 수풀에 숨어 있던 사냥꾼 팀이 몽땅 튀어나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나무로 인해 길이 완전 봉쇄되고 퇴로까지 끊긴 마당에, 20명의 사냥꾼이 하늘을 향해 쏘아댄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우수수 떨어지니 늑대 무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떠냐, 이놈들아! 이게 바로 매복(埋伏)의 계책이다. 사냥꾼과 나무꾼만으로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몰랐지?
 만약 늑대 무리가 전부 전멸하지 않았다면 애니멀 토크로 그런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전투는 이미 다 끝났다.
 교전이 벌어진지 5분 만에 종료된 것이다.
 결과는 아군의 승리였다.
 “어라? 마스터 카이저. 저기 봐. 한 놈이 빠져 있는데.”
 잠시 승리의 단맛을 음미하기 전에 세르반티아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외길 맞은 편 끝에 멀쩡한 늑대 한 마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녀석인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 내가 지금 쫓아가서 처리할까?”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난 세르반티아를 대기시키고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3차례 늑대 무리의 침공을 막아내며 전멸시켜왔지만. 지금처럼 한 마리가 생존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난 그 즉시 또 머리를 굴려 새로운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만약 소속된 부대가 전멸하고 단 한 명의 병사가 살아남았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대하 사극 같은 걸 보면 종종 죽음을 불사하고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가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는 장수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장수 레벨이지, 병사 레벨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보통은 아군 진영으로 도망쳐 가서 전멸 소식을 전하거나, 그대로 전장을 이탈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건 지금 내가 하는 이 게임. 라스트 킹덤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가 혼자 살아남은 늑대는 곧바로 도주했고, 난 부대를 이끌고 그 뒤를 쫓아갔다.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역추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동물의 숲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정도 쭉 내려가다가 초원 지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늑대의 본거지인 늑대 굴을 발견했다.
 늑대는 곧장 굴 안으로 들어갔고 난 멀리 떨어져 그걸 지켜보다가 주위를 살폈다.
 늑대 굴은 천연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곳곳에 바위와 돌이 널려 있어, 잘 보지 않으면 거기에 동굴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지금 이렇게 역추적을 하지 않았다면 찾는데 꽤 고생했을 것 같다.
 “마스터 카이저. 어떻게 할까? 이대로 공격해? 아니면 좀 더 상황을 지켜볼까.”
 세르반티아가 늑대 굴 쪽으로 고개를 까닥거리며 내게 물었다.
 “물론 당연히 공격해야지.”
 난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답했다. 처음부터 지금 이 병력만 가지고 늑대 굴을 공략할 생각으로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어떻게 싸울지 미리 다 생각해 두었다 이 말이다.
 “좋아, 그럼 가자!”
 세르반티아는 날 등에 태운 채 늑대 굴을 향해 올라갔다. 내가 미리 세워 둔 작전에 따라 혼자 먼저 가지 않고 사냥꾼, 나무꾼 팀과 걸음을 맞추었다.
 늑대 굴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마도 보초병으로 추정되는 늑대 세 마리가 우릴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짖어대기 시작했다.
 “세르반티아!”
 내가 소리쳐 부르자 세르반티아는 한 발 앞서 뛰어나가 화살을 날려 순식간에 정리해 버렸다. 곧 늑대들이 몇 마리 더 나타났지만 그때마다 화살에 맞아 쓰러져 나갔다.
 그 사이 다른 두 팀이 입구 앞에 도착했다.
 “나무꾼 팀, 작전대로 간다!”
 내가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호령하자 나무꾼 팀이 일제히 움직였다. 지금 나무꾼 팀은 도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어깨에 손질된 목재를 들고 있었다.
 나무꾼은 입구에 횡렬로 쭉 늘어서서 어깨에 메고 있던 목재를 바닥에 쌓기 시작했다. 그 사이 굴 안쪽에서 늑대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사냥꾼 팀은 나를 따라 엄호 사격을 한다!”
 세르반티아는 사냥꾼 팀을 이끌고 전방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늑대들은 우리 쪽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동안 나무꾼 팀이 합심하여 목재를 쌓으니 순식간에 긴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두께보다는 넓이를 최대한 고려하여 입구 전체를 막아버렸다.
 “나무꾼 팀, 도끼 장착! 사냥꾼 팀, 사격 준비!”
 내가 다시 호령하자 나무꾼 팀은 울타리 앞에서 각각 한 자리씩 맡고 도끼를 꺼내들었다. 그 뒤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사냥꾼이 한 명씩 서서 활시위를 쭉 당겼다.
 나도 단궁을 꺼내 들었고, 세르반티아도 합성 장궁에 화살을 메겼다.
 몇 분 뒤, 지도 창에 수십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그 위치는 이 늑대 굴 안쪽 깊숙한 곳이다.
 붉은 점들이 한데 모여 입구 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크허어엉!”
 곧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정면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빛이 나타났다.
 “쏴라!”
 내가 큰 소리로 외치며 화살을 쏜 순간 그걸 기점으로 사냥꾼 팀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 전방의 어둠 속을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이 쏟아졌다.
 중간에 깨갱하는 비명 소리가 울렸지만 곧이어 늑대 수십 마리가 나타났다.
 숲을 공격하러 온 늑대 무리의 약 3배, 아니 4배 가까이 되는 숫자로, 고블린 50 마리를 마주했을 때 보다 더 큰 압박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압박이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무꾼 팀을 동원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거대 울타리에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놈들의 머리 숫자는 아군의 4배가 넘는다. 그러나 공격 수단이 오직 물어뜯기 하나뿐이다. 장애물을 쳐 놔 접근을 차단, 기동성을 완전 죽여 버리니까 충분히 상대할 만 했다.
 울타리를 엄폐물로 삼아 사냥군이 쉬지 않고 사격을 전개, 울타리 근처에 배치 한 나무꾼은 행여나 울타리 위로 넘어오려는 늑대를 노려서 도끼로 내려찍었다.
 그리고 나와 세르반티아가 좌우로 이동하면서 지원 사격을 가하니 늑대들은 이빨 한번 들이밀지 못하고 하나 둘씩 쓰러져 나갔다.
 병력이 한 절반 정도 줄어들자 늑대 무리 쪽도 전술을 바꾸어 울타리 그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울타리의 내구력은 목재 하나 당 50[50으로 취급됐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약 40마리.
 아군의 2배나 되는 늑대가 목재에 달라붙어 마구 물어뜯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 이제야 비로써 위기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을 지시했다.
 쉬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한 끝에 늑대 무리의 수가 다시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마침내 아군 병력과 똑같아졌다.
 거듭된 공격으로 인해 울타리를 구성하는 목재의 내구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르반티아, 울타리를 넘어 가자!”
 내 말을 떨어지자마자 세르반티아가 날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울타리를 가볍게 넘어갔다.
 착지와 동시에 가까이 있던 늑대 한 마리를 발굽으로 콱 찍어 죽이고는 곧장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늑대 무리 중 절반이 우리 뒤를 쫓아왔고 나머지 절반만이 그 자리에 남아 울타리를 공격했다.
 그로 인해 늑대 무리의 전력은 또 다시 동강나 10마리가 두 부대로 나뉘어졌다.
 세르반티아의 전투력은 약 늑대 10마리 분.
 울타리 뒤에 남은 아군의 수는 10명.
 정확한 수를 딱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수치는 다 미리 계산해둔 것이다. 모든 게 작전대로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늑대들을 천천히 상대해 가면서 달린 끝에 이 굴 안의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금 지나온 통로에 비해서 비교적 넓은 공동 같은 곳으로, 정중앙에는 보통 늑대보다 덩치가 1.5배는 더 큰 늑대가 서 있었다.
 털색깔이 은색으로 빛나는 게 확 눈에 띄었다.
 
 고딕, 박스[[은빛 늑대, 늑대 굴의 대장 Lv. : 5
 HP 150[150
 MP 0[0
 
 무심코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니 이름과 능력 수치가 떴다.
 레벨은 나보다 1 낮고 HP도 한참 떨어졌지만, 지금까지 상대해 온 일반 늑대의 레벨이 평균 2인 것을 감안하면 적당한 수치였다.
 역시 내 레벨 대를 고려하면 저런 놈이 퀘스트 보스로 나와야 된다니까. 붉은 곰 같은 게 비정상적인 거지.
 그렇게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약탈자들이여,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애니멀 토크 스킬의 효과로 인해 은빛 늑대의 말이 말풍선에 보였다.
 
 [약탈자라니 누구? 우리말이야?]
 
 난 무심코 은빛 늑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은빛 늑대가 순간 놀란 얼굴로 날 마주보았다.
 난 별로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쪽이 놀란 건 당연하겠지.
 별로 쓸데는 없지만 애니멀 토크도 명색이 히든 스킬.
 아마도 일개 동물형 몬스터인 자기들 말을 알아듣고 말을 건 사람은 내가 처음일 거다.
 
 [약탈자라는 말에는 좀 어폐가 있군 그래. 내가 이 굴을 점령해서 얻을 게 뭐가 있겠어?]
 
 모처럼 애니멀 토크가 발동된 거. 대화를 좀 해 보고 싶어서 세르반티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은빛 늑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도대체 왜 우리 영역을 침범한 것이냐!]
 [먼저 침범한 건 그쪽이잖아.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간단해. 너희가 자꾸 내 땅을 공격하러 오니까 직접 정벌하러 온 거다]
 [동물의 숲 말인가? 우린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사냥을 하러 간 것뿐이다. 특별히 너희들을 적대해서 쳐들어간 게 아니란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만큼 알기 쉽고 공감이 가는 이유로군. 내가 만약 제작진이라고 해도 그런 이유를 다는 게 제일 편했을 거다.
 그런데 문득 또 다른 생각이 하나 들었다.
 
 [난 숲의 대장인 붉은 곰을 쓰러트렸어. 그러니 동물의 숲은 엄연히 내 땅이다. 하지만 너희가 내게 순순히 항복을 한다면, 내 영토에서 사냥을 허가해 줄 용의는 있다]
 
 난 은빛 늑대에게 정식으로 제안했다.
 내 말이 어느 정도까지 통할지 모르겠지만. 애니멀 토크로 인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으니, 상대를 단순히 금수가 아닌 지성을 갖춘 NPC로 생각하고 그리 한 것이다.
 
 [지금 우리보고 너희의 개가 되라는 거냐?]
 [글쎄. 항복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너희 자유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 우린 지금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고 너흰 지금 패배에 가까이 있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희를 토벌할 수 있지만 지금 이렇게 말이 통하는 걸 계기로 너희에게 한번 기회를 주는 거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은빛 늑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동공이 없는 하얀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날 마주 보며 말풍선을 띄었다.
 
 [항복하겠다]
 
 그 짧은 말이 말풍선에 나온 직후, 지도 창에서 번쩍이던 붉은 빛이 모두 사라졌다.
 
 [약속은 분명히 지키겠지?]
 [물론.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약속은 지킨다]
 
 확인 차 띄운 말풍선에 내가 바로 답하자, 은빛 늑대는 그 자리에서 벌러덩 누워 내 쪽을 향해 배를 드러냈다.
 개가 주인에게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고딕, 박스[[[늑대 굴을 찾아내라! : 퀘스트 2를 완료하셨습니다.][[
 
 고딕, 박스[[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딕, 박스[[유저 역사가 갱신되었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내레이션을 끝으로 이번 전투, 아니 퀘스트 2는 완전히 끝이 났다.
 
 
 
 
 
 Chapter Eleven
 
 
 
 
 
 
 
 
 
 퀘스트 2 완료.
 레벨 업.
 유저 역사 창 갱신.
 한 번에 3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난 일단 차분하게 하나하나 체크해 보기로 했다.
 현재 내가 위치한 곳은 늑대 굴. 이곳은 이제 더 이상 붉은 점으로 뜨지 않고 내 영토 중 하나로 표시됐다.
 그래서 우선 늑대들의 항복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부터 퀘스트 창으로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고딕, 박스[[유저 퀘스트 창
 § 퀘스트 2.
 [늑대 굴을 찾아내라!]
 - 퀘스트 완료
 보상 : 경험치 500[[
 
 “경험치 500이라······.”
 지금 내 레벨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큰 수치는 아니지만 뭐 없는 것보다는 낫지.
 퀘스트 1을 완료할 때처럼 금으로 주면 좋겠지만. 늑대 굴을 완전 함락시킨 것도 아니고 항복을 받아냈으니 그건 좀 힘들겠지.
 하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을 거다. 항복을 받아냈다면 그에 따른 특전이 따로 주어지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NPC 구입 창을 켜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새로운 NPC가 목록에 추가되었다.
 
 고딕[[[현재 구입 가능한 NPC 목록]
 석공 : 30골드
 - 돌이나 바위가 널려 있는 땅에서 자재, 석재를 채취하는 일꾼입니다.
 늑대 : 50골드
 - 움직임이 민첩하고 무리를 잘 이루어 다니는 짐승 형 유니트입니다. 특별한 조건으로 퀘스트 2를 완료하심으로써 고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늑대가 추가될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석공이 추가된 건 예상외였다. 하지만 주변 지리를 보니 왜 추가됐는지 이해가 갔다.
 늑대 굴 근처가 바위와 돌이 널려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석재가 자재로 새로이 추가된다면 새로운 건물 또한 지을 수 있겠지?
 목재만으로 건물 짓는 것도 아직 다 못해 봤는데 석재까지 추가되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일단 석공을 구입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 현재 예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는 일.
 거기다 새로 지을 건물에 목재 외에 돈 같은 게 따로 들어가면 낭패가 따로 없으니, 새로 뭔가를 하는 건 거점으로 돌아간 다음에 하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거점에서 떨어져 지낸 지도 벌써 오늘로 4일째가 되는군.”
 초가집을 몇 개 지어 놨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동으로 생겨난다는 인구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거점 상태 창을 켜 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거점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마스터 카이저, 늑대 굴도 평정한 것 같은데 이제 뭘 하지?”
 세르반티아가 날 내려 보며 물었다.
 난 팔짱을 딱 낀 채 잠시 생각하다가 곧 다음 방침을 결정했다.
 두 일꾼 팀은 다시 동물의 숲으로 귀환하여 작업을 재개, 난 세르반티아와 함께 거점으로 돌아가는데, 겸사겸사 고블린 부락도 시찰하기로 했다.
 방침을 그렇게 정한 직후 바로 일꾼 팀과 헤어져 북쪽으로 올라갔다.
 세르반티아와 옆에 서서 나란히 걸어갔는데, 등에 올라타란 제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
 세르반티아는 내 장수지 탈것이 아니다. 전투 때 같은 급박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평소 때도 말처럼 타고 다니면 왠지 버릇들 것 같아서 그런 것이다.
 도보로 약 30분 정도 쭉 걷다 보니 고블린 부락 앞에 도착했다.
 여기도 한 4일 만에 다시 찾아오는 것 같은데 뭔가 좀 달라져 보였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농장이다. 여러 개의 밭을 지정하여 건설한 농장 건물에서, 농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나가던 농부들이 날 알아보고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가 많군. 그런데 수확은 언제쯤 가능하지?”
 “앞으로 삼 일 정도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수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 뭐 그 정도면 적당하겠군.
 라스트 킹덤은 어디까지나 실시간 게임이니까. 기존의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처럼 1년에 한 번 병량이 들어오면 곤란하겠지.
 난 3일 후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농장에서 나갔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고블린들이 날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4일 전 고블린 5마리를 고블린 부락으로 보내서 지금은 10마리가 부락 안과 바깥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경계했다.
 늑대 굴을 정벌하면서 이 주변 몬스터의 씨가 말랐으니 당분간 싸울 일은 없겠지만, 이 땅은 애초에 고블린 부락이었고 실제로 경계를 서던 고블린이 초가집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걸 보니 그냥 이대로 두기로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늑대들을 구입해 고블린 팀과 함께 훈련을 시켜 봐야지.
 사냥꾼, 나무꾼 팀처럼 또 새로운 전술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대충 주변 시찰을 끝마치고 부락을 나왔을 때는 저녁 무렵이 된 뒤였다. 서쪽 하늘로 해가 지면서 주위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의 빛을 받으며 거점을 향해 돌아가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어서 좋았다.
 뭐라고 할까······ 출장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사원 같은 심정 같다고 해야 하나.
 한 30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걷다 보니 곧 내 거점, 그레이트 원에 도착했다.
 4일 만에 다시 돌아온 거점은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롱하우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비병이나 일꾼, 용병이 아닌 주민 NPC였다.
 석양에 물든 초가집 앞에서 뛰노는 아이들이나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는 어머니,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와 흔들의자에 앉아 조는 할아버지, 뜨개질을 하는 할머니. 가족 위주의 주민들이 생겨난 것이다.
 주민의 숫자는 언뜻 봐도 100명도 안 됐지만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 거점에 앞으로 살아갈 주민들이 생겨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까.
 초가집을 지으면 주민들이 생겨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짓고 만들어 가는 이 거점에 주민이 생겨남으로써 영지 경영과 관리에 중요한 의미가 생긴 것 같았다.
 “마스터 카이저, 평안하십니까?”
 날 발견한 주민들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대사가 다 비슷비슷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난 거점 안을 한 바퀴 빙 돌며 주민들을 한 번씩 쭉 본 다음, 롱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온 세르반티아에게 내 오른쪽 첫 번째 방을 배정해 준 다음, 내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상태 창을 켰다.
 
 고딕 박스[[유저 상태 창
 이름 : 카이저
 레벨 : 7
 경험치 : 8,000/12,000
 명성 : 0
 성별 : 남자 종족 : 인간 직업 : 군주
 능력치
 HP : 200/200
 MP : 30/30
 피로도 : 570/570
 공격력 : 11 방어력 : 15
 전투[힘 : 10 근력 : 12 체력 : 20
 민첩 : 11 마력 : 3 행운 : 6
 스킬 : 애니멀 토크
 내정/통솔 : 40 지력 : 40
 정치 : 42 매력 : 55
 특기 : 없음
 장비
 방어구-가죽 갑옷, 나무 방패
 주무기-단검
 보조 무기-단궁
 자금 : 1골드
 ->다음[[
 
 7레벨.
 4일 동안의 긴 여정 끝에 퀘스트 2를 클리어했는데 고작 1레벨 오른 건가?
 1레벨 오른 것 정도론 역시나 내 개인 능력치의 변화는 별로 없군.
 하지만 거점 능력치는 다르겠지. 포인트는 오히려 이쪽이라고! 난 곧바로 거점 상태 창으로 넘어갔다.
 
 고딕, 박스[[거점 상태 창
 이름 : 그레이트 원
 레벨 : 7
 경험치 : 9,000/12,000
 문명 : 100 치안 : 50
 소속 : 카이저군 태수 : 카이저
 형태 : 롱하우스
 내구력 : 250[250(나무)
 병력 : 0
 장수 : 2
 인구 : 92/180(부가 건물+80)
 특수 : 방 배정 가능
 금 : 0 병량 : 10,000
 자재
 목재 : 400 가죽 : 400 고기 : 400[[
 
 “역시 거점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 레벨 외에 여러 가지 수치가 확 오른 게 보이는군.”
 자재가 추가 되고 장수, 인구수가 올라가니 뭔가 색다른 기분이다.
 부가 건물 +80이란 건 동물의 숲과 고블린 부락에 지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겠군. 여덟 채를 지었고 각각 수용 인구수가 10[10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새로 추가된 수치가 유난히 눈에 띄는군.
 “어라? 명성, 문명, 치안이라고?”
 뒤에 2개는 홈페이지에서 봐서 알고 있지만 명성은 처음 보는데? 이제 주민들이 생겨났으니 어떻게 하냐에 따라 군주 유저의 명성도 올라간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운데 자세한 건 직접 게임을 하면서 알아봐야겠군.
 우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만 로그아웃해야지.
 내 거점에 첫 주민이 생긴 기념으로 외식이나 하러 가야겠다.
 오랜만에 칼질하러 가자!
 
 나이프와 포크.
 그건 서양 음식을 먹을 때 쓰는 식기지, 보통 한국 음식을 먹을 때 쓰지는 않는다. 그래서 칼질하러 간다고 하면 보통 사람은 경양식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리고 칼질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스테이크다.
 미디엄? 레어? 웰던? 뭘로 하시겠습니까.
 음, 적당히 구운 거. 미디엄 웰던으로 해 주세요. 와인은 적포도주로 주시고요.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와 이런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고 우아하게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 좋겠지만.
 “저기요, 여기 치즈 왕돈가스 하나 주세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는 법. 내 선택은 언제나 똑같았다. 스테이크가 다 뭐냐. 돈가스면 충분하다고.
 어쨌든 이것도 칼질은 칼질이잖아.
 그래도 오늘은 내 거점에 주민이 생긴 기념비적인 날이니 평소보다 더 힘을 썼다. 그냥 돈가스도 아니고 무려 ‘치즈’ 왕돈가스라고. 보통 왕돈가스보다 무려 1,000원이나 더 비싸!
 물론 내가 지금 스테이크 하나 사 먹을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비무환이라고 언제 또 돈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러니 스테이크의 1[3 가격인 돈가스로 만족해야지.
 어쨌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가게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이 늦은 오후라 그런 것 같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다.
 전에도 몇 본 와 본 가게지만 찾는 시간대가 다 지금처럼 애매한 때라 손님이 많은 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난 그게 좋아서 여길 찾아오는 거다. 카페나 레스토랑 분위기가 나면서 돈가스나 파스타 같은 경양식도 시켜 먹을 수 있으니, 적은 돈을 들여도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거지.
 “식사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쯤, 딸랑거리는 벨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리더니 어린 학생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교복 입은 걸로 봐서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10명 정도가 한 그룹인 듯 내 뒤편으로 4인용 테이블 3개를 이어 붙여 앉았다.
 “오늘은 내가 다 쏜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켜.”
 어리지만 당당하고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치상 누군지 볼 수 없었지만, 10명이나 되는 인원의 식사를 자기가 다 산다니. 무슨 좋을 일이 있기에 그러는 걸까? 보아하니 중학생 같은데 말이다.
 “야, 근데 진짜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돼? 돈 모자르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 용돈 많이 받았으니까. 그리고 오늘 같이 기쁜 날 이렇게 쏘지 또 언제 쏘겠냐? 드디어 나도 라스트 킹덤 군주가 됐다고!”
 그때 익숙한 말이 들려왔다.
 라스트 킹덤 군주 랭크라고?
 설마 저 녀석들 중에 나 같은 군주 유저가 있다는 건가.
 난 순간 호기심이 생겨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분위기를 파악하고 꾹 참아 냈다. 그래서 손으로는 나이프로 돈가스를 썰면서 몸은 소파에 딱 붙여 뒤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0명이 각자 먹고 싶은 걸 주문하는 말소리가 들린 다음 게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근데 어떻게 군주 유저가 된 거야? 그거 아무나 못 한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맞아. 나도 그래서 일반 유저로 시작했는데. 군주 유저는 처음부터 몇 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그랬잖아.”
 “후후후, 물론 그렇지. 하지만 우리 아빠가 누구냐? 오광 그룹 대표잖아! 마침 요번에 제왕 그룹과 거래를 하러 본사에 찾아갔다가 한 자리 얻은 거지. 내가 전부터 군주 유저가 하고 싶다고 졸랐거든.”
 쉽게 말하자면 낙하산 인사라는 건가. 아버지를 잘 둬서 한 자리 얻었다는 거잖아? 이렇게 보니 참 신락 씨도 게임부 대표 이사로서 고생이 많겠다.
 다른 곳도 아니고 거래처 사람이 그렇게 부탁을 하면 쉽게 거절할 수 없겠지. 아이의 필요에 따라 어른의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겠군.
 참 없는 사람은 서러운 세상인 것 같다. 돈가스를 한 조각 베어 포크로 찍어 먹는데 왠지 씁쓸한 맛이 났다.
 “나 지금 완전 물올랐다. 내 동생은 나보다 먼저 라스트 킹덤 시작했는데 꽤 고렙 유저거든. 내가 군주 유저하고 동생이 내 오른팔이 돼서 진행하고 있는데, 지금 건물도 여러 개 지었고 인구수도 점점 불어나고 있어.”
 “우와, 대단하다. 근데 돈 같은 건 어떻게 버는 거야? 건물도 짓고 뭐도 하고 그러다 보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일반 유저처럼 사냥을 해서 벌진 않을 거 아니야.”
 “아아, 내 거점의 자금을 말하는 거지?”
 앞전의 말은 자기 잘난 맛에 하는 거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뒤에 누군가 물어본 것에 답할 때 한 말에는 나도 귀가 솔깃해졌다.
 거점의 자금을 버는 방법. 난 아직도 그걸 모른다.
 병량을 늘리는 건 농장을 지으면 되고 사냥꾼을 구입하면 사냥을 해서 일부 충당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금 같은 경우는 가죽이나 목재 등의 자재를 구해다가 파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른다. 모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처럼 진지 근처에 광산이 있어서 인부를 보내 금을 캐 오는 것도 없으니 대체 무슨 수로 벌어야 되는 거지?
 특수 건물이나 NPC 구입할 때 드는 비용을 다 합치면 일반 유저가 사냥해서 버는 푼돈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럼 그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뭔가 있어야 한다.
 “내 거점의 자금을 버는 건 쉬워. 그냥 건물 많이 지어서 인구가 늘어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세금을 바치거든.”
 세금.
 그래, 그게 있었군! 내가 왜 그걸 몰랐지? 그건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본이잖아. 병량과 함께 1년에 한 번 자금이 들어오는 것 말이다.
 “어,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이면 너무 늦지 않아?”
 “늦다 싶으면 그냥 날짜에 상관없이 한 번에 걷어 버리면 그만이지. 강제 징수 같은 개념이야. 그러면 민심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어차피 그거야 당장 수치화된 것도 아니니 기껏해야 주민들이 불평하는 건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NPC에 불과하니까.”
 누군지 몰라도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걸 대신 물어봐 줘서 고맙군.
 하지만 그 방법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강제 징수로 세금을 걷다니 그 무슨 역사의 폭군 같은 짓이야? 게다가 민심을 생각하지 않다니 망군의 지름길이잖아.
 “난 강제 징수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다른 방법은 없어?”
 그래. 마침 잘 물어봤다. 과연 저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까.
 나는 돈가스 위에 있는 문어 비엔나소시지를 썰어서 오이 피클과 함께 먹으며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방법은 듣기만 했는데 시장을 만들면 된대. 시장을 만들면 매매가 이루어질 때마다 일정한 금이 들어온다더라. 난 아직 거기까지 해 보진 못해서 모르겠어. 어차피 그런 짓 안 해도 돈은 얼마든 들어온다고. 다른 지역을 약탈해도 되고.”
 “약탈?”
 돈가스에 딸려 나온 샐러드를 버무려 먹다가 순간 딸꾹질이 났다. 약탈이 게임 룰적으로 허용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응, 인접 지역의 마을이나 성을 약탈하면 금이랑 병량을 뺏어 올 수 있어. 그러면 명성 수치가 떨어지고 악명이 쌓이긴 하지만 그런 거 알게 뭐야.”
 질문은 개념이 있는데 답변이 개념이 없군. 하지만 저게 가능하다는 건 엄연히 제작진에서 허용한 룰이라고 봐야겠지.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기엔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민심을 헤아리지 않고 강제 징수를 하고, 인근 지역을 마구 약탈하면 안 망할 수가 없다. 반란이 일어나던지, 아니면 전쟁이 일어나던지. 두 가지 중 하나의 방법으로 망하겠지.
 그렇다는 것은 즉. 일부 무개념한 군주 유저로 하여금 스스로 망하게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세계의 역사에서 폭군의 몰락이 다 그랬었지.
 잠시나마 신락 씨가 고충이 크다고 생각했던 건 취소.
 “너희들도 그렇고 주변에 라스트 킹덤 하는 애들 있으면 다 내 거점으로 오라고 해. 내 거점 주변 땅도 졸라 명당자리야. 대륙 남동쪽 끝에 있는데 바다를 등지고 있고 자원도 풍부해서 뭐든 다 할 수 있어. 배 같은 거 타고 다니면서 대항해 시대처럼 놀 수도 있다니까.”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빈다는 것도 나름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남동쪽 끝에 있는 땅.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내 거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나저나 저 녀석, 이름이 뭐지?
 거점상의 위치도 그렇고, 나랑 같은 군주 유저이기도 하니 언젠가 한 번 마주칠 텐데. 최소한 이름 정도는 알아 놔야 되지 않나?
 그런데 그걸 알아볼 방법이 없군.
 난 돈가스를 마저 잘라 먹으며 녀석의 이름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접시를 다 비웠을 때였다.
 “그런데 오덕아, 너 게임에서 쓰는 이름이 뭐야?”
 “아, 그게······.”
 “후식 가져다 드릴까요, 손님? 커피, 콜라, 녹차 세 종류가 있습니다.”
 게임 속 이름이 언급되려는 찰나, 비워진 접시를 보고 다가온 점원의 말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뒤로 대충 아무거나 후식을 골라서 다 마실 때까지 녀석의 닉네임은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아쉽지만 닉네임은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뭐 저 녀석도 나처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 지금 당장 부딪칠 일은 없겠지.
 그보다 오늘 들은 건 확실히 써먹어야지. 앞으로 거점의 자금을 한번 늘려 보자 이거야!
 
 외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게임에 접속해 보니 롱하우스에 있는 내 방에서 깨어났다. 게임상의 시간은 아직도 석양이 지고 있는 저녁때였다.
 난 밖에 나가기 전에 미리 상태 점검부터 했다.
 유저 상태 창을 켜 보니 현재 내게 남아 있는 자금은 달랑 1골드.
 거점 상태창에 표시된 자금 수치도 0이었다.
 그래서 사냥을 해서 얻었던 가죽 400을 상점 창에 매각하여 400골드를 얻었다.
 사냥을 통해 얻은 식량은 자재 창을 보니 뼈가 달린 고기 조각처럼 표시됐는데, 보통은 병량으로 바꾼다고 그랬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돈이다 보니 상점 창에다 드래그하여 팔아 치웠다.
 그런데 식량을 팔아서 번 돈은 200골드밖에 안 됐다. 가죽은 1장당 1골드. 식량은 그 절반 값으로 거래되는 모양이다.
 뭐 일전에 구입했던 여행용 식량이 1골드였던 걸 감안하면 팔 때는 절반 값인 게 당연한 건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냥을 통한 금 수입은 총 600골드. 4일 동안 번 것치고는 비록 액수가 적지만, 세금이 일주일에 한 번 걷힌다는 걸 감안하면 꽤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시장이란 걸 만들어야겠지.
 강제 징수나 약탈같이 제 살 깎아 먹기는 사양한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어.
 난 그렇게 다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장 NPC 구입 창을 켜서 3종류의 상인을 구입했다.
 구입을 마친 순간 빛이 번쩍이며 상인들이 나타났다.
 
 고딕, 박스[[상인을 구입하셨습니다. 건설 가능 건물에 상점 건물이 추가되었습니다. 건물이 없을 때 상인은 노점에서 장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장소를 지정해 주십시오.[[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난 그걸 듣고 곧 건설 창을 켜서 새로 추가된 건물을 확인해 보았다.
 
 고딕[[[현재 건설 가능한 건물]
 도구점 : 목재 10
 - 내구력 100/100, 수용 인구 10/10
 - 도구 상인의 상점입니다. 소모용 아이템 외 무구를 제외한 기타 아이템 전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점의 레벨이 오름에 따라 판매하는 물품의 수준이 향상됩니다. 교역소 건설시 연동 기능으로 특산품을 입하할 수 있습니다.
 무구점 : 목재 10
 - 내구력 100/100, 수용 인구 10/10
 - 무기, 방어구 상인의 상점입니다. 상인 두 명을 구입했을 경우 하나의 건물에 가게가 2개 생깁니다. 거점 레벨이 오름에 따라 판매하는 물품의 수준이 향상됩니다. 대장간 건설 시 연동 기능으로 다양한 무구를 입하할 수 있습니다.
 경비 초소 : 목재 30
 - 내구력 150/150, 수용 인구 20/20
 - 경비병이 근무를 하는 건물입니다. 경비병이 교대로 근무하여 낮과 밤에 상관없이 항상 경계가 가능해집니다. 또 거점 내의 치안을 언제나 체크하며 위험이 발생할 시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도구점, 무구점, 경비 초소라······.”
 상점 건물이 추가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경비 초소까지 추가될 줄은 몰랐다.
 혹시 NPC 주민이 생겨나면서 거점 능력치에 치안이 추가돼서 건설이 가능해진 건가?
 목재 값이 더 들긴 하지만 뭐 그만큼 쓸모가 있으니 체크해 놔야지. 우선 지금 당장 지을 건물은 상점 건물이다.
 경비 초소는 그 다음에 지어야지.
 난 건설 창에서 도구점과 무구점을 클릭하여 빈 공간으로 드래그했다. 그러자 건설 비용에 얼마가 들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건물이 실시간으로 지어졌다.
 몇 분 뒤 건설이 완료된 직후.
 내 주위에 있던 상인들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구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역시나 상인은 먼저 가게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마스터 카이저. 어떤 아이템이 필요하신 가요?”
 도구점 주인이 날 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더니 곧 내 앞으로 상점 창이 자동으로 떴다.
 이렇게 도구점에서 상점 창을 킨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뭔가 색다른 기분이 들었지만. 목록을 쭉 훑어보니 내가 항상 켜는 상점 창 판매 목록과 다를 게 없었다.
 이래서야 나한테는 내 거점 내 상점에서 아이템을 사는 의미가 없잖아.
 뭔가 좀 아쉬운걸.
 “흠, 혹시 내가 여기서 물건을 사면 무슨 이득 같은 건 없나?”
 난 무심코 그렇게 물어보았다. 내가 말한 거지만 너무 바보 같아서 정정을 하려고 했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있습니다. 마스터 카이저께서 저희 상점의 물건을 사실 때는 이십 퍼센트를 할인해서 드립니다. 또한 저희가 바치는 일정한 수입을, 돈 대신 물건으로 받으실 수 있지요.”
 오오, 군주 유저에게 그런 혜택이 있다니. 그거 참 쓸 만한데? 20퍼센트 할인에 세금 대신 가게 물건을 받을 수 있다니 이거 잘만 쓰면 아주 유용하겠는데? 이래서 상인을 구입하고 상점 건물을 짓는 모양이군.
 난 도구점 주인에게 수고하란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엔 옆에 있는 무구점에 들어갔다. 뭐 지금 당장 급하게 사야 할 물건은 없지만 그래도 구경을 한다면 도구보단 무구 쪽에 더 관심이 갔다.
 무기점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도구점 주인과 마찬가지로 무기 상인과 방어구 상인이 날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난 대충 손을 흔들어 답해 준 뒤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너무 평범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도구점 풍경과 달리 무기점은 정말 뭔가 좀 달랐다.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무기점, 오른쪽에는 방어구점이 있는데 각 가게의 벽면은 갖가지 무기와 방어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동안 개인 장비 강화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상점 창에 목록이 뜬 것만 봤지 실제로 무기 그림을 확대해서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리얼 사이즈로 전시되어 있는 무구는 내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각종 무구들을 살펴봤다.
 당연하겠지만 지금 내가 장비한 무구들은 정말 최저가. 가게에 진열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여기서 진열된 저가 장비는 장검, 사슬 갑옷, 메이스, 철 방패였다.
 본래 장비를 사는 건 예정에 없는 일이었지만. 왠지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 사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지르고 싶은, 그런 느낌하고 비슷하다고 할까나.
 하지만 사실 난 그렇게 씀씀이가 큰 편은 아니다. 칼질하러 외식을 나가도 스테이크 대신 돈가스를 선택하는 절약가였다.
 그렇다고 결코 구두쇠인 건 아니다.
 일단 가격부터 알아보고 견적을 뽑아 봐야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무기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상점 창을 켜서 저가 장비를 이것저것 클릭했다.
 “이렇게 다 해서 얼마 정도 하지? 그리고 지금 내 장비를 팔고 이걸 사면 얼마나 추가되는지 알고 싶군.”
 내가 그렇게 묻자 무기 상인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펜촉으로 종이에 뭔가를 끼적거렸다. 그러다 곧 종이 한 장을 북 찢더니 내 앞에 척 내밀었다.
 “단순히 추가 비용만 말씀드리자면 백 골드가 더 듭니다.”
 무기 상인이 내민 종이에는 상세한 내역이 적혀 있었다.
 장비의 매매가 어떻게 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추가 비용이 100골드밖에 안 된다는 게 구미가 당겼다.
 나 자신한테 그 정도 투자하는 건 괜찮겠지 뭐. 그동안 열심히 한 나에게 선물을 주는 셈 치자.
 난 큰맘 먹고 100골드를 지불해 장비를 강화했다.
 돈을 지불한 그 순간 내 몸에서 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현재 입고 있는 장비가 변했다.
 단검에서 장검, 가죽 갑옷에서 사슬 갑옷, 나무 방패에서 철 방패.
 모든 게 다 바뀌었다.
 시험 삼아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봤는데 장검은 확실히 길었다.
 단검과는 다르다고!
 뭐 누가 보면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리 들떠 있냐고 한 소리 하겠지만, 이 게임을 시작한 지 5일 동안 단검과 단궁만으로 싸워 온 나한테 있어선 감회가 새로웠다.
 유저 상태 창을 켜서 대충 확인해 보니 공격력은 무려 7, 방어력은 11이나 상승했다. 순수 능력치와 합치면 18, 26밖에 안 됐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아참, 그러고 보니 세르반티아한테도 장비를 사 주기로 했지.
 여유 자금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내 것만 살 수는 없지. 그 녀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테니 뭔가 하나 사 줘야겠다.
 난 방어구 상인에게 말을 걸어서 상점 창을 다시 띄웠다.
 방어구 목록을 눈으로 쫙 훑어보다가 이거다 싶은 걸 찾아냈다.
 
 고딕, 박스[[강화 가죽 갑옷 : 70골드(-20%)
 방어력 : 9
 내구력 : 90/90
 강화된 가죽 갑옷. 민첩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구력과 방어력을 높인 갑옷이다. 나중에 필요하다면 대장간에 맡겨 계속 강화시킬 수 있는 특제품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사슬 갑옷보다 더 좋고 비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세르반티아에겐 이걸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난 그걸 구입하는 걸로 쇼핑을 마치고 무구점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주민들은 다들 초가집으로 들어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경비병만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순찰할 뿐이다.
 선물을 건네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가? 이 시간이면 세르반티아도 자기 방에서 자고 있겠군.
 나도 일단 로그아웃해서 한숨 자야겠네. 수면 모드로 하면 밤새서 할 수 있지만, 굳이 다들 잠들어 버린 이 시간에 일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결정한 난 곧 환경 창을 켜서 로그아웃을 클릭했다.
 로그아웃의 효과로 인해 시야가 검게 물들었는데. 그때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경비 초소. 그걸 짓는 걸 깜빡했군.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자고 일어나 접속해서 아침에 지으면 되지 뭐 별일이야 있겠어? 괜한 걱정은 하지 말자.
 
 
 
 
 
 Chapter Twelve
 
 
 
 
 
 
 
 
 
 게임 상의 시간으로 이른 아침. 난 언제나와 같이 롱하우스에 있는 내 방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르반티아의 방에 찾아가는 일이었다.
 내 방 바로 오른쪽 첫 번째 방이 그녀의 방이다.
 예의상 노크를 했더니 곧 들어오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말을 듣고 난 뒤에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풍경은 꼭 무슨 유목민 천막 같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화톳불이 있고 그 주위에 앉을 자리가 있으며, 화톳불 바깥쪽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생활용품들이 널려 있었다.
 중세식에 가까운 내 방하고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방 주인의 특성에 맞게 방의 풍경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좋은 아침! 그런데 이런 시간부터 어쩐 일이야?”
 세르반티아가 날 보고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난 대답 대신 개인 상태 창을 켜서 지난밤에 무구점에서 구입한 강화 가죽 갑옷을 꺼냈다.
 “자, 이거 받아. 그동안 수고했으니까 포상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며 강화 가죽 갑옷을 건네자 세르반티아가 그걸 받아 들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야, 이거 정말 내 마음에 딱 드는데? 안 그래도 갑옷이 필요했는데. 정말 고마워, 마스터 카이저!”
 진심으로 기쁜 듯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니 듣는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진작 사줄 걸 그랬네.
 
 [세르반티아의 충성도가 올랐습니다.[
 
 도움말 내레이션을 듣고 세르반티아의 상태 창을 켜 보니 88이었던 충성 수치가 100으로 올랐다.
 기존의 전략 시뮬레이션에서는 보통 금을 주면 충성심이 오르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아이템을 줘도 오르나 보다.
 물론 ‘마음에 든다’라는 말을 한 걸 생각해 보면 장수들도 각자 취향이 다를지도 모른다.
 제법 중요한 것 같으니 체크해 놔야지.
 “그런데 받기만 하고 넘어가기는 좀 그런데. 혹시 뭐 부탁할 일 같은 거 없어? 뭐든 좋으니 다 말해 봐!”
 모처럼 본인의 의욕이 넘쳐흐르니 그냥 넘어가기도 좀 그래서 뭔가 시킬 일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뭐 어차피 난 군주 유저고 저쪽은 장수니까 언제 어디서든 일을 시킬 수 있지만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 테니 뭔가 특별한 걸 시키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이 내 거점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자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하지. 혹시 아는 사람 중에서 누구 장수로 추천할 만한 인재는 없어? 있으면 바로 데리고 와 줘. 지금 우리 거점에서 가장 필요한 건 새로운 장수니까.”
 난 거의 인재 수색의 개념으로 부탁을 했다. 어떤 특정한 지역을 지정하기보다는 ‘아는 사람’ 중에 없냐고 한정을 걸어 두었다.
 그런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듯. 세르반티아는 팔짱을 딱 낀 채 잠시 고민했다.
 난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아, 그래. 한 명 있긴 있다.”
 몇 분 뒤 세르반티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게 누군데?”
 “우리 일족의 할아버지야. 이름은 던호크인데 우리들 사이에서는 괴짜 노인네로 통하고 있어. 젊었을 때 대륙 전토에 이름을 떨친 기사단 단장이었다고 허풍을 떠는데,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실력은 아직도 쓸 만한 편이야. 가끔 혼자 들떠서 아무 데나 들이박지만 않으면 돼.”
 하는 말을 들으니 걱정부터 앞섰다.
 실력은 쓸 만한 데 괴짜에 할아버지라니, 과연 정말 도움이 될까?
 하지만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지.
 이대로 계속 게임을 하면 세르반티아 혼자만 혹사시키게 되니 다른 장수가 꼭 필요하다.
 “좋아. 지금 당장 데리고 와 줘.”
 “알았어. 맡겨만 달라고!”
 세르반티아는 자신의 탄탄한 복근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씩씩하게 답하고는 곧 방을 나섰다.
 나도 혼자 기다리고 있기는 뭐해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롱하우스 밖으로 나간 순간 입구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스터 카이저. 간밤에 도둑이 들어 상점가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갑자기 웬 도둑?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도움말 창을 켜고 검색 기능을 사용해 도둑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러자 치안 관련 항목에 도둑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치안이 50 이하로 떨어지면 거점 내에 도둑이 출몰합니다. 여기서 도둑에 의해 피해를 입은 건물에서는 그 날 하루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또 교외에 도적 떼가 나타나 거점에 약탈을 하러 오기도 합니다.[
 
 난 그 설명을 들은 순간 바로 거점 상태 창을 켰다. 거점 상태 창에 추가되었던 치안 수치는 지금 40을 가리키고 있었다.
 맨 처음 치안 수치 50도 지금 생각해 보면 평균적인 게 아니라 위태로운 수준이었군.
 그럼 치안을 올리려면 뭘 해야 할까? 난 그것도 한번 찾아보았다.
 
 [거점 내의 치안을 높이기 위해선 경비 초소를 건설한 뒤 경비를 해야 합니다. 이 경비는 유저가 직접 맡아서 일정 시간 동안 거점 내를 순찰하여 올릴 수도 있고 경비병에게 임의로 맡길 수도 있습니다.[
 
 경비 초소. 그러고 보니 어제 로그아웃하기 직전에 생각나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 짓기로 했지. 그때는 뭐 별일이야 있겠냐고 하면서 넘어갔지만 지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지. 만약 내가 지금까지 경비병 한 명 구입해 놓지 않았다면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몰랐을 거다.
 난 더 늦기 전에 건설 창을 열어 경비 초소부터 지었다. 목재가 30이나 들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지어 온 건물보다 완공되는 데 조금 더 오래 걸렸다.
 경비 초소가 완성된 다음 그 건물 안에 들어가 보니 벽 쪽에 경비병이 누워서 쉴 수 있는 간이침대가 보였고, 그 맞은편에는 나무를 철창처럼 엮어서 만든 감옥이 있었다.
 「경비병은 지금 즉시 경비 초소로 집합하도록!
 난 경비병들에게 전체 귓속말을 보냈다. 그래 봤자 고작 2명밖에 안 되지만. 내 귓속말이 전달된 즉시 초소 앞에 도착했다.
 난 일단 NPC 구입 창을 켜서 경비병 한 명을 새로 구입해서 세 명을 내 앞에 대기시켰다.
 “지금부터 내가 순찰을 맡겠다. 세 명 다 나를 따르도록. 수상해 보이는 자가 있으면 그 즉시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카이저!”
 난 그길로 곧장 경비병 셋을 대동하고 순찰에 나섰다. 어젯밤에 산 사슬 갑옷 차림에 장검을 차고 한 손에 방패를 든 채 앞장서 걸어갔는데, 왠지 주변에 지나다니는 주민들이 경외의 시선을 보내 왔다. 평소 때 날 보고 먼저 인사해 오던 때와 달랐다.
 역시 순찰을 맡아서 그런 걸까? 현실 세계로 치면 방범 대장 같은 거니 내가 만약 주민 입장이었어도 좀 접근하기 어렵겠다.
 그래도 순찰은 치안을 높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세르반티아는 인재를 찾으러 가 버렸으니 내가 순찰을 해야 한다.
 경비병한테 임의로 맡겨 버려도 되지만 사냥, 벌목과 마찬가지로 순찰도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난 가장 먼저 도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상점가부터 찾아갔다.
 도구점과 무구점에 들렀는데 가게 상인들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신경을 껐다.
 그보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가게 안에는 의외로 손님이 많았다. 손님은 전부 다 이 거점에 사는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경비병 둘을 도구점에 보내고, 경비병 한 명과 함께 무구점 안을 지켰다.
 만약 현실에서의 도둑이라면 자기가 한 번 턴 곳에 다시 나타나지 않겠지만 이건 게임이다.
 상점이라곤 여기 두 군데밖에 없으니 치안이 낮은 이상 언제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내 그 예상이 적중한 듯, 30분 정도 뒤에 좀 수상한 손님을 발견했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데 지나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 눈치를 살피며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저건 완전 ‘나 도둑이요’라고 얼굴에 써 둔 것 같았다.
 난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다가 녀석이 마침내 물건을 자기 품에 쑥 집어넣는 순간을 노렸다.
 “어디서 감히 도둑질을 하는 거냐!”
 일부러 크게 소리를 치며 뽑아 든 장검을 도둑의 목에 겨누었다.
 그러자 도둑은 깜짝 놀라며 폼에 집어넣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경비병. 이 녀석을 감옥에 처넣어!”
 난 내 곁에 있던 경비병에게 도둑의 신변을 넘겼다.
 “하, 한 번만 봐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도둑은 양손을 싹싹 빌며 울부짖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경비병은 도둑의 뒷덜미를 콱 잡아끌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곧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울렸다.
 
 [치안 수치가 5 상승했습니다.[
 
 치안은 이런 식으로 오르는 거구나. 어떻게 보면 이게 더 낫지. 도둑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순찰을 돌 수는 없잖아.
 어쨌든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재미가 있네. 도둑 잡는 재미라고 할까.
 치안이 오른다는 확실한 성과가 있으니 검거 성공 시의 만족감도 높았다.
 난 곧 다른 경비병들과 합류해 순찰을 재개했고 거의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을 소요한 끝에 치안 수치를 60까지 올렸다.
 그러는 동안 잡아들인 도둑의 수는 4명.
 도둑이 제 발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만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경비병을 초소로 돌려보낸 뒤 나도 롱하우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디선가 귓속말이 왔다.
 「마스터 카이저, 교외 산길에 도적 떼가 나타났습니다!」
 
 
 21.
 
 
 
 
 
 
 
 
 
 게임 상의 시간으로 늦은 오후. 난 다시 경비 초소를 찾아갔다.
 내가 초소에 도착하자마자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이 다가와 말했다.
 “마스터 카이저. 교외의 산길에서 도적 떼가 나타났습니다.”
 경비병은 아까 전에 귓속말로 보낸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지도 창을 켜 보니 진짜 거점 바깥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점이 반짝였다
 난 분명 경비병에게 바깥 순찰을 시키지는 않았는데 알아서 도적 떼가 나타났다고 알려 주다니. 이게 경비 초소의 부과 효과인 것 같다.
 그런데 도적 떼라니 도둑하고 또 뭐가 다른 걸까? 난 그걸 알아보려고 도움말을 켜 보았다.
 
 [도적 떼는 무리를 지어 다니며 거점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필드 몹입니다. 경비 초소를 클릭해 토벌대를 편성하여 완전히 퇴치를 해야 사라집니다.[
 
 필드 몹이라. 고블린 부락하고 늑대 굴에서 보내오던 몹하곤 좀 다른 모양이군.
 그때는 퀘스트 창도 새로 갱신됐는데 이번에는 그런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게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몹이 한 번 나타날 때마다 일일이 퀘스트가 갱신되면서 몹의 근거지를 함락시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도 창에 도적 떼의 위치는 떴으니 남은 건 토벌대를 편성해서 치러 가는 것뿐이군.
 토벌대는 어떻게 편성하면 좋을까?
 지금 이 거점에 있는 병력은 0명. 경비병을 전력으로 치면 달랑 셋.
 거기다 세르반티아는 인재를 찾으러 나갔으니, 토벌대를 지휘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정규군조차 만든 적이 없구나. 일꾼을 임시로 사병화시켜 전투를 벌이고 고블린을 호위 용도로 구입한 것 정도가 전부였군.
 이번 기회에 정규군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네.
 난 도움말 창에서 정규군이란 단어로 검색해 그 방법을 알아냈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병영을 짓는 것. 그리고 그다음에는 병영에서 징병을 실행하여 거점 내 인구의 일부를 병사로 모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집된 병사는 병과, 사기, 훈련 등의 개별 수치를 가지고 있으며 항상 거점 내의 병영에서 대기한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내 거점에 병영을 지으려고 하니까 건설 창에 목록이 안 보였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보이지 않아서 검색을 해 봤더니, 아직 건설이 불가능한 건물 목록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현재 건설이 불가능한 건물.
 병영, 목재 30, 석재 30
 내구력 200[200, 수용 인구 50[50
 병사들을 징집할 수 있는 건물입니다. 기본 병과는 처음에 징병을 할 때 정한 것으로 나옵니다.[
 
 목재는 아직도 남아돌지만 석재가 없어서 문제였구나. 역시 목재만으로 모든 건물을 다 지을 수는 없는 거군. 진작 체크해 둘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다.
 
 [동물의 숲에서 사냥, 벌목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가죽, 고기, 나무가 각각 100씩 추가되었습니다.[
 
 그때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난 거점 상태 창을 열어 추가된 자재를 확인하고 곧바로 매입하여 150골드를 얻었다.
 그걸로 현재 내 수중에 있는 돈은 총 480골드가 됐다.
 지금 당장 병영을 지을 수 없으니 돈으로라도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한다.
 비록 능력은 낮지만 저렴한 몬스터라도 잔뜩 고용할까.
 고블린이나 늑대를 한 부대 만들어 토벌대로 편성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게 과연 효율적일지는 의문이군.
 난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했다. 고민을 하는 사이에 게임 상의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그러다 약 2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도적 떼가 나타났습니다!”
 하늘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감시탑 꼭대기에 있던 경비병이 내 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보니, 정면으로부터 약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가벼운 옷차림에 검으로 무장한 도적 떼로 대략 30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난 그 도적 떼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능력치를 체크해 보았다.
 
 [도적 레벨 3
 HP 70/70
 MP 0/0[
 
 평균 레벨 3이라. 고블린, 늑대 다음 수준이군. 저 한 명, 한 명의 레벨과 HP만 보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니 대비할 건 해야겠지.
 “성문을 닫아라!”
 내가 그렇게 외친 직후 거점 입구 근처에 있던 경비병이 성문을 굳게 닫았다.
 생각해 보니 난 지금까지 고블린이나 늑대를 상대할 때 상대의 거점에 먼저 공격하러 갔지, 정작 내 거점을 직접 공격당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발리스타의 조정을 맡은 상태에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았다.
 “와아아아!”
 도적 떼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기세 좋게 달려왔지만 정작 내 거점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의 방벽 앞에서는 가로막혔다.
 몇몇 도적은 앞장서 나가서 성문을 직접 공격했지만 그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공성추라도 하나 만들어서 가지고 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역시 치안이 낮을 때 나타나는 필드 몹이라 그런지 기본적인 전술이자 전략 같은 건 없나 보다.
 거점을 공격할 때 입력된 기본 명령어가 성문 공략인지 성문만 줄기차게 공격했다. 도적 떼의 공성은 굉장히 시시했지만 그래도 잠시 지켜볼 만은 했다.
 병과는 오로지 검으로 무장한 경장 보병뿐. 병력은 대략 30명.
 그 정도 숫자면 개인 레벨이 좀 높은 장수 한 명만 보내도 충분히 정벌할 수 있는 수준이다.
 세르반티아가 늑대 20마리를 혼자서 해치웠으니, 좀 레벨을 올리면 저 도적 떼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세르반티아가 부재중이고. 난 내 개인 능력치가 높지 않으니까 토벌대 편성은 필수겠지. 그 전에 몇 가지 할 일도 생각났다.
 일단 이 전투부터 간단히 끝내 보도록 할까. 난 감시탑 위에 설치해 둔 발리스타를 조정해 성문 아래쪽을 향해 겨누었다.
 휘이잉~ 파캉!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쇠뇌가 성문을 공격하던 도적 떼를 관통했다.
 그 날카로운 일격에 도적 한 명이 빈사 상태에 빠졌다. 한 방에 죽지는 않는 모양이네.
 활로 마무리하면 딱 좋은데 단궁은 거리가 닿지 않으니 아쉽군.
 약 10분 뒤 발리스타의 쇠뇌 공격에 혼쭐이 난 도적 떼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놈들의 시시한 공성은 그렇게 끝났다. 도적 떼로부터 거점을 무사히 지켜 낸 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마저 들었다.
 “마스터 카이저. 지금 즉시 도적 떼를 퇴치하러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감시탑에 나와 함께 있던 경비병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참 경비병다운 대사였다.
 내가 볼 때는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 대답해 주기로 했다.
 “도적 떼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지금 바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퇴치하러 가겠다.”
 난 그렇게 말하며 경비병을 먼저 내려 보냈다. 혼자서 감시탑 위에 남아 잠시 생각한 뒤 저 아래 쪽에 있는 경비 초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순간 내 눈앞에 토벌대 편성 창이 떴고 동시에 내레이션이 들려왔다.
 
 [토벌은 소규모 전투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병량 소모가 없으며 유닛을 개별적으로 선택하여 편성해야 합니다. 토벌대는 군대와 마찬가지로 유저의 통솔 수치에 따라 기용 가능한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난 그 말을 듣고 시험 삼아 경비병 한 명을 클릭해서 편성 창에 끌어왔더니 유닛 이름이 크게 떠올랐다.
 그리고 창 맨 끝에 1[40이란 수치가 떴다. 지금 내 통솔력이 40이니 거기에 맞춰 40명을 기용할 수 있다는 건가.
 좋아. 그 정도면 딱 적당하지, 뭐. 굳이 세르반티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는걸.
 지금 나한테 있는 유닛만으로 한번 토벌대를 편성해 봐야겠다.
 난 그렇게 생각한 직후 지도 창을 켜서 동물의 숲, 고블린 부락, 늑대 굴 쪽을 순서대로 확대시켜 보았다.
 쭉 보다 보니 벌써 머릿속에 하나의 부대가 완성됐고, 그 부대로 하여금 어떤 전술로 싸울지 벌써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한번 시뮬레이션 해 보니 가슴이 설렜다.
 후후, 기다려라, 이 도적놈들아. 오늘 하루가 다 가기 전에 반드시 섬멸해 주마!
 
 
 
 
 
 Chapter Thirteen
 
 
 
 
 
 
 
 
 
 [토벌 모드에 들어갔습니다.[
 
 허공을 울린 내레이션과 함께 나, 아니 내가 이끄는 부대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늑대 굴을 함락하러 갈 때와 비교를 하면 토벌 모드는 유닛 운용이 한층 쉬워졌다.
 일일이 지정을 하지 않아도 내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유닛도 움직였기 때문이다.
 진군을 하면서 체크해 본 바로는 이 모드의 가장 큰 장점은 전 유닛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내 눈앞으로 유닛의 상태를 축소한 창이 상시 떠 있어 아군의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보통 유저였다면 눈이 어지러웠겠지만 나한텐 익숙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많이 했기에 나는 오히려 그런 시스템이 익숙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도적 떼가 나타났다는 교외의 산길로, 지도 창 덕분에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다.
 아군은 파란 점, 적군은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어 진군할수록 서로 간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점이 서로 겹치는 지점에 도착했다.
 
 [드래곤 마운틴[
 
 허공에서 짧은 내레이션이 울리며 드래곤 마운틴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곳은 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입구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단순한 배경인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따로 이름을 갖고 방문이 가능한 지역으로 분류될지는 몰랐다.
 어쨌든 이번 전투의 교전 지역은 그 드래곤 마운틴의 입구. 적군은 30여 명의 도적 떼로 산기슭을 등지고 있다.
 지형은 정면으로 멀리 세 갈래의 산길이 있지만, 적군이 포진하고 있는 곳은 지금 아군의 진영과 마찬가지인 평지였다.
 그렇다는 것은 즉, 이번에 벌어질 싸움은 요격전이 된다는 말이다.
 고블린 부락의 전투는 유인, 늑대 굴의 전투는 매복. 두 전투 다 계책을 사용했으니 이번에는 그야말로 전술에 의존해야 한다.
 “잘도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애송이 놈!”
 그때 정면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보니 도적 떼 한가운데에 유난히 덩치가 좋은 도적이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니 이름과 레벨, 능력치가 떴다.
 
 [도적 두목 레벨 4
 HP 90/90
 MP 0/0[
 
 뭐야, 나보다 레벨이 낮잖아? 거기다 자기 이름도 없는 필드 몹 대가리 주제에 날 애송이라고 부르다니. 적당히 봐줄 필요는 없겠군.
 “이곳에는 널 지켜 줄 성벽 따위는 없다. 목숨이 아까우면 가진 걸 전부 내놓고 꺼져!”
 “일개 몹 따위를 상대하는 데 성벽은 필요 없지. 잔말 말고 덤비시지.”
 난 도적 두목의 외침을 바로 차가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러자 녀석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얘들아, 쳐라!”
 도적 두목이 소리친 순간 좌우에 쭉 늘어서 있던 도적 떼가 우릴 향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당황하지 않고 심호흡을 한 뒤 장검을 뽑아 들었다.
 “제1진 늑대 부대, 공격 개시!”
 허공을 향해 장검을 휘두르며 호령한 순간 부대 맨 앞에 포진하고 있던 늑대 부대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적군의 병력은 30명. 늑대 부대는 고작 5마리밖에 안 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늑대 부대는 빠른 기동성을 발휘하여 도적 떼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적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집요한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도적들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먼저 빠져나가 아군 진영으로 돌아오게 했다.
 “제2진 나무꾼 부대, 공격 준비!”
 아군 진영의 2진에 대기하고 있던 나무꾼 10명이 도끼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늑대 부대가 옆자리를 스치고 지나간 뒤.
 “공격 개시!”
 이어진 내 외침과 동시에 몇 박자 늦게 다가온 도적 떼를 향해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늑대 부대를 쫓아오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도적 떼는 도끼로 난도질당했다.
 처음의 일격은 강하게 들어갔지만 곧 일꾼 출신의 한계로 공격 속도가 느려 이격이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앞장서 달려왔다가 도끼에 찍힌 도적 떼가 주춤거리는 사이, 그 뒷줄의 멀쩡한 도적들이 좌우로 돌아서 나무꾼 부대의 측면을 노리고 들어왔다.
 “제3진 고블린 부대, 공격 개시!”
 난 곧바로 3진에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 10마리를 보냈다.
 나무꾼 10명에 고블린 10마리를 합쳐 총 20명의 병력으로 난전을 벌였다.
 “제4진 사냥꾼 부대, 사격 개시!”
 이어서 최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사진의 사냥꾼 10명이 내 지시에 따라 사격을 개시했다.
 난 맨 뒤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보면서 상태 창을 수시로 체크했다.
 나무꾼은 높은 체력으로 몸빵을 하고, 고블린은 나무꾼의 느린 공격 속도를 보완해 주고. 사냥꾼은 후방에서 지원 사격, 늑대는 기동성을 살려 치고 빠지는 공격을 반복하여 도적 떼를 상대했다.
 난 그걸 쭉 지켜보고 있다가 좀 상황이 안 좋다 싶을 때 장검을 빼 들고 달려가 도와주었다. 비록 내가 세르반티아처럼 전투력이 높은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전술, 전략도 없이 그저 우르르 몰려와서 각자 자기 멋대로 싸우던 도적 떼는 우리 부대한테 철저히 밀렸다.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 보니 도적 두목이 바로 보였다.
 놈은 날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며 양손에 철퇴를 들고 달려왔다.
 “일기토(一騎討)를 신청한다. 덤벼라, 이 애송아!”
 도적 두목이 날 향해 소리친 순간 내 머리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상대가 일기토를 신청했습니다. 수락 여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짧은 내레이션과 함께 예[아니오의 선택문이 떴다.
 일기토. 그건 불리한 전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장수와 장수의 일 대 일 대결이다.
 분명 지금 전투는 우리 토벌대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적장이 일기토를 신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기서 좀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당연히 거절하고 그냥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난 거기서 잠시 고민했다. 이 게임에서 구현된 일기토 시스템이 어떤지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건 게이머로서의 본능이었다.
 내 이성은 그러면 안 된다고 외쳤지만, 내 본능은 이미 ‘예’를 가리켰다.
 
 [일기토를 수락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내레이션이 울리더니 순간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한창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마치 내 주위의 시간만 멈춘 듯 배경이 완전 정지했다.
 그 정지된 공간 속에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단 두 명뿐이다.
 나하고 지금 내 맞은편에 서서 이를 갈고 있는 도적 두목이다.
 도적 두목은 철퇴를 번쩍 치켜든 자세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왼손에 장검, 오른손에 철방패를 들어 도적 두목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도적 두목이 힘껏 내리친 철퇴가 내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난 철방패를 높이 들어 철퇴를 막았다.
 콰앙!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힘이 전해져 방패로 막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상대는 일개 도적 두목이잖아.
 그것도 이름도 없는 필드 몹의 대가리에 불가한데 이 말도 안 되는 공격력은 뭐냐고!
 철퇴의 이격이 들어오려는 찰나, 난 이번엔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옆으로 황급히 몸을 굴려 피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철퇴가 쾅하고 내리꽂혔다.
 하지만 땅이 패기는커녕 흙먼지조차 날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공격이 그렇게 세진 않다는 건데 왜 난 저걸 간신히 막아 낸 거지?
 “이놈, 내 공격을 한번 받아 봐라!”
 도적 두목이 철퇴를 들고 날 쫓아왔다. 난 이번에는 상대가 공격하길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상대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장검으로 몸통을 푹 찔렀다.
 내 검은 분명히 명중했다. 하지만 무슨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타격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돌이나 나무 같은 배경을 공격한 것처럼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흥, 간지럽지도 않군그래. 어디 한번 더 쳐 보시지!”
 내 공격이 무효화된 걸 아는지, 도적 두목이 날 도발했다.
 난 화가 나기보단 오히려 한 가지 의문을 갖고 공격을 개시했다.
 일격, 이격, 삼격. 총 8번을 공격했고 전부 다 명중시켰지만 상대의 체력을 단 한 칸도 줄이지 못했다.
 어째서 내 공격이 통하지 않은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문득 위를 보니 그래프로 된 체력 게이지가 떠 있었다.
 하지만 도적 두목 그래프의 수치가 41을 가리키고 있는 데 비해, 어째서인지 내 쪽에는 그래프 위의 수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만약 진짜 일기토를 구현한 것이라면 분명 그래프 위의 수치는 무력일 텐데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뜨는 거지?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처음부터 내정 능력치에 무력은 없었잖아! 장수로 등용한 세르반티아한테는 분명 무력 수치가 떠 있었지만 나만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천상 버그겠군. 어떤 게임이든 버그는 있기 마련이니까 유저로서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만약 평소 때 같았으면 그렇게 쿨하게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필이면 지금 알아차리다니 너무 늦어! 보아하니 무력 공백인 게 0으로 취급되는 것 같은데. 이건 상대가 무지하게 강한 게 아니라 내가 무지하게 약한 거네.
 그래도 0하고 41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 삼국지로 비유하면 듣보잡 잡졸이 여포를 상대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건 게임 자체가 안 된다.
 내가 무슨 나폴레옹도 아니고, 내 사전에는 분명 불가능이란 단어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직후 난 무기를 거두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하지만 일기토가 성립되면서 주변에 투명한 막이 생겨 가로막혔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
 도적 두목이 뒤쫓아 오더니 내 등을 철퇴로 내려찍었다.
 이번만큼은 막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공격당했다.
 통증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체력 게이지가 단 한순간에 쫙 줄어들었다.
 그러나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에너지 한 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10합이 지났습니다. 카이저 VS 도적 두목의 일기토는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허공에서 내레이션이 들리더니 순간 내 주변이 정지되어 있던 배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 간신히 본래대로 돌아온 건가?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잠시뿐, 자리를 이동하려고 했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발뿐이 아니라 몸 자체가 안 움직였다.
 
 [일기토의 결과, 중상을 입었습니다. 5분간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허공을 울리는 내레이션이 원망스러웠다.
 난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고 도적 두목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철퇴를 치켜들었다.
 이건 그야말로 산 넘어 산. 아니, 절체절명의 위기.
 난 이대로 필드 몹 따위에게 첫 게임 오버를 당해야 하나? 내가 여기서 뻗으면 토벌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단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아직 도적 두목이 공격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수는 없다. 비록 내 몸은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아직 내 부대는 움직일 수 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말은 할 수 있으니 전체 명령을 내리는 게 가능했다.
 “전군······.”
 있는 힘껏 소리치려고 입을 연 순간, 정면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거리에 나타난 뭔가를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중앙과 우측 산길에서 동시에 나타난 그것은 새로운 도적 떼였다.
 대충 눈짐작으로 한 부대당 30명가량 됐다. 두 부대니까 60명. 지금 내 뒤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난전에 참가하면 근 100명에 가까운 숫자가 된다.
 현재 아군 부대는 30명의 적군을 압도하고 있지만 그 수가 3배로 불어나면 결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떠냐, 이놈아. 이런 건 예상 못했겠지? 우린 처음부터 너희 놈들의 3배 병력이었다. 단지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전군이 출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한 부대만 끌고 왔을 뿐이다.”
 도적 두목이 날 보고 히죽거리며 말했다. 지금의 나로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내가 일기토만 수락하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없을 텐데. 여기서 이렇게 만용의 대가를 치르는 건가?
 “아무래도 토벌 당하는 건 네놈들 쪽인 모양이구나.”
 도적 두목은 손에 침을 퉤 뱉고는 철퇴 자루를 양손으로 잡았다. 일기토 할 때와 똑같이 철퇴를 치켜들고 다가왔다.
 싫다.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 나 개인이 죽는 거야 어차피 거점에서 부활할 테니 상관없지만, 그 뒤에 내 토벌대가 전멸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누구든 좋으니 제발 좀 도와줘!
 “그럼 이제 그만 죽어라!”
 마음속으로 절규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춰라!”
 순간 도적 두목의 외침보다 더 우렁찬 외침이 이 주변의 산길을 뒤흔들었다.
 순간 나와 도적 두목을 비롯해 주위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외침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정면에 나 있는 세 갈래의 산길 중 좌측 위쪽이었다.
 산중턱에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이가 있었다. 하얀 투구와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길고 예리한 창을 든 위풍당당한 기사로,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Pegasus) 위에 타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잘생긴 얼굴에 큰 키, 늠름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 전신을 뒤덮은 하얀 갑옷이 아주 잘 어울렸다.
 “상태 이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유저를 공격하려 들다니, 아무리 AI라고는 하지만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하얀 기사가 우리, 아니 정확히 도적 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AI라는 용어를 쓰는 걸 보니 설마 NPC 같은 게 아니라 나랑 같은 게임 유저인가?
 “네놈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필드 몹 따위에게 가르쳐 줄 이름 따위는 없다.”
 하얀 기사가 도적 두목의 말에 차갑게 답한 순간.
 챠캉!
 투구 밑으로 노출된 입가에 마스크가 튀어나왔다.
 “얘들아, 저놈부터 쳐 없애라!”
 도적 두목이 격노하며 외치자 산길을 내려온 도적 떼가 하얀 기사가 서 있는 좌측 산길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하얀 기사가 페가수스를 몰아 산길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뒤였다.
 페가수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도적 떼의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갔다.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가속도가 붙더니 순식간에 지상으로 하강했다.
 “이런 건방진 놈!”
 도적 두목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철퇴를 아래로 내리고 스윙 자세를 취했다.
 콰직!
 그러나 승부는 한순간에 결정 났다.
 철퇴를 한 번 휘두르기도 전에, 먼저 하얀 기사의 창이 도적 두목의 가슴을 관통했다. 길고 예리한 창날이 몸통을 뚫고 나왔다.
 하얀 기사는 그대로 페가수스를 몰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전장 한가운데다가 창으로 꿰고 있던 도적을 힘껏 던졌다.
 땅이 한번 쿵 하고 울리며 도적 두목의 시체가 나뒹굴어 곧 빛이 되어 사라지자, 방금 전까지 한창 발 빠르게 움직였던 적군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대장님이 당했다! 모두 도망가자!”
 누가 외쳤는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자 순간 도적 떼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 도주 방향이 산길 맞은편, 즉 아군 진영이었다.
 
 [적이 동지가 되었습니다.[
 
 허공에서 들린 내레이션을 듣고 뒤를 슥 돌아보니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도적 떼가 아군 유닛과 부딪힌 순간 지도 창에 표시되는 색깔이 바뀌면서 아군 유닛으로 변했다.
 위기의 순간 갑자기 나타난 하얀 기사.
 두목이 쓰러진 직후 도망치다가 동지가 된 도적 떼.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 두 가지가 동시에 생기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소리 없이 숨을 고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이, 괜찮나?”
 그때 하얀 기사가 내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때마침 마비 상태가 풀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난 바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전 괜찮아요. 그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내가 당황하지 않고 감사를 표하자 하얀 기사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에서 내려왔다.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데다가 나이도 많고 고랩 유저인 것 같은데 거들먹거리는 일 없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내 닉네임은 클라우드야.”
 “전 카이저라고 합니다.”
 서로 통성명을 나누고 클라우드와 악수를 하면서 무심코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았다.
 
 [클라우드, 레벨 25
 HP 1500/1500
 MP 500/500[
 
 상대의 레벨과 HP[MP를 간단히 확인한 순간 난 완전 할 말을 잃어버렸다.
 
 
 
 
 
 Chapter Fourteen
 
 
 
 
 
 
 
 
 
 클라우드. 그는 내가 이 게임을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나 본 일반 유저였다. 난 그의 도움을 받아 도적 토벌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뭐해서 일단 가까운 숲의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게 현실이었다면 답례로 술이나 식사라도 대접했겠지만 아쉽게도 게임이라 그런 건 못했다.
 “자리도 잡았으니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닉네임은 클라우드. 본명은 조운룡이다. 올해 나이는 26살이고, 현재 용산고등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재직 중이다.”
 클라우드가 먼저 본명과 나이, 직업을 밝혔다. 요즘 온라인 인사 예절은 저런 걸까? 그럼 나도 일단 정식으로 소개를 해야겠군.
 “제 나이는 20살이고 본명은 이신성이라고 해요.”
 “이신성? 혹시 저번 퍼스트 킹덤 리그에서 우승했다는 그 다크호스?”
 “네. 그게 저 맞습니다. 다크호스란 표현은 좀 부끄럽지만 말이에요.”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부끄럽지.
 퍼스트 킹덤 리그에선 우승한 사람이, 정작 이 라스트 킹덤에선 일개 도적 두목한테 발려서 게임 오버당할 뻔했으니까 말이다.
 현실은 현실. 게임은 게임. 그 두 개 사이의 갭은 매우 크다. 난 요 며칠 동안의 게임 플레이를 통해 그걸 절실히 느꼈다.
 “전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점을 두고 있는 군주 유저예요.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이제 막 하나하나 배워 나가고 있지요.”
 난 현실의 유명세 따위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러자 곧 클라우드도 그 화제를 따라와 주었다.
 “난 이 드래곤 마운틴 출신이야.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여기를 스타팅 지역으로 골랐지. 나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 척박하고 외진 땅을 고른 건데, 나 말고도 또 다른 유저를 보니 엄청 반갑다.”
 클라우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잘생긴 얼굴에 잘 어울리는 미소로 전혀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난 지금 클라우드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저도 반갑네요. 실은 게임 시작한 지 5일 만에 처음 만나 보는 유저가 클라우드 님이거든요. 정말 이 땅에 NPC나 필드 몹 외에 나랑 같은 유저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건 이제 알았어요.”
 클라우드 역시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이 외지에서 시작했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네 토벌대의 편성 유닛을 보니 다 비정규군이더군. 거기다 절반 이상이 작업용 유닛이고 말이야. 혹시 지금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 않아?”
 “네. 자원이 부족해서 아직 병영조차 짓지 못했어요.”
 난 허세 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뭔가 적절한 조언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노하우를 하나 알려 줄게. 지금 당장 병력을 고용할 여건이 안 되면 토벌을 잘 활용해 봐. 우두머리 몹을 쓰러트렸을 때 부하 몹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는 걸 붙잡으면 바로 동지가 되거든. 만약 몹들을 잡지 않고 전멸시키면 돈을 입수할 수도 있어.”
 그러고 보니 그걸 살펴보는 걸 잊고 있었군.
 지금 현재 내 토벌대는 110명으로 불어난 상태다. 방금 전 클라우드가 말한 대로 필드 몹인 도적들이 동지가 된 것이다.
 이미 돈을 버는 방법을 안 이상, 당연히 돈을 추가로 얻는 것보단 병력을 얻는 게 나로선 더 좋았다.
 “그렇게 동지로 만든 몹은 기본적으로 ‘무명용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건 보병, 기병, 궁병 같은 병과를 가진 정규군이 아니야. 순수한 병사 그 자체지. 그래서 돈을 주고 징집하는 정규군 병사보다 조금 약해.”
 그 말을 듣고 부대 상태 창을 켜서 보니 정말 무명용사란 이름의 유닛이 쫙 떠 있었다.
 레벨과 HP는 도적 베이스라 그런지 좀 낮은 편이고, 무장이라고는 겨우 투구와 단검을 쓴 게 끝. 갑옷 하나 걸치지 못했다.
 “그래도 정규 병사와 다르게 능력치가 고정된 게 아니니까 잘만 성장시키면 큰 도움이 될 거다.”
 유동적인 능력치에 성장이 가능한 병사라, 그거 하나만큼은 마음이 드는군. 앞으로 많은 신경을 써야겠네.
 일꾼 팀은 다시 작업을 재개시키고 정규군을 편성하기 전까지 무명용사를 주력으로 삼아야겠다.
 “생각해 보니 거점 내 인재도 부족하겠군. 이 근처에는 장수는커녕 일반 유저도 찾아보기 힘드니 말이야.”
 그 말이 나온 순간 난 눈을 번뜩였다. 지금 내가 인재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필요했다. 지금 날 마주보고 앉아 있는 클라우드 같은 인재가 말이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만약 클라우드를 장수로 맞이한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 지금 바로 등용을 청하는 거야. 나와 함께 이 게임 속 세상의 천하를 얻자고 말이다.
 “클라우드 님! 저······.”
 이름을 부를 때까진 기세가 좋았지만 그 뒤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분명 입은 벌리고 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감정은 앞으로 나아가라 등을 밀고 있는데 이성이 날 잡아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등용은 어렵다.
 상대는 NPC 장수가 아니라 일반 유저다. 특정 조건을 수락하면 바로 장수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만큼 유저 대 유저, 혹은 인간 대 인간으로 청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과연 등용을 청할 자격이 있을까? 난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군주 유저고 레벨도 6밖에 안 된다.
 그런데 클라우드는 무려 25렙이나 되고 개인의 능력치나 이 게임 경험도 나보다 월등히 높다.
 이렇게 여기서 만나게 된 건 어쩌면 기이한 인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실제의 인연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응?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짧은 순간 혼자 깊이 생각하다 결론에 도달한 난 본심을 감추고 대충 얼버무렸다.
 “난 그럼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아, 실은 난 던화이트 장군 막하로 들어가려고 길을 떠난 중이었어. 이 북쪽 땅에서 제법 명성이 자자한 군주 유저지. 지금 중앙에서 그레이 리베리온이 난을 일으켜서 이 대륙이 혼란에 빠졌으니, 던화이트 장군을 모시며 평화를 지킬 생각이란다.”
 뭐야, 마음에 두고 있던 군주 유저가 따로 있었나? 던화이트가 누구인지 이름만 듣고선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참 부럽네. 저런 용장이 알아서 모시러 간다고 하다니.
 역시 군주 유저는 명성이 높아야 사람이 잘 따르는 걸까.
 정말 아쉽다. 하지만 그걸 클라우드 앞에서 내색하진 않을 거다.
 언젠가 내가 명성을 쌓고 지금보다 더 성장을 한다면 그때는 주저하는 일 없이 바로 등용을 청할 것이다.
 난 클라우드가 페가수스에 올라타 떠날 준비를 하는 걸 쭉 지켜보다가, 그가 하늘 높이 올라갔을 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클라우드 님.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만약 던화이트 장군이 좀 아니다 싶으면 저희 진영으로 오세요. 클라우드 님 같은 유저 분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내가 웃는 얼굴로 소리치자, 클라우드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난 곧장 등을 돌리고, 토벌대를 이끌고 거점을 향해 이동했다.
 지금은 아쉬워할 때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부터 다 해야지.
 난 돌아가는 길에 사냥꾼, 나무꾼 부대를 동물의 숲으로 보내 작업 재개를 명했고 고블린 부대는 고블린 부락에, 300골드를 써서 그 자리에서 즉시 구입한 석공 10명은 석재를 채취하게 시키고 늑대 부대에게 호위 임무를 맡겼다.
 처음의 토벌대 편성 유닛이 전부 다 빠져나갔지만 내겐 아직 무명용사 80명이 남았다.
 처음에 데려간 부대의 2배 이상을 새로 얻었으니 그게 또 나름 큰 수확이라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그런데 거점에 거의 도착할 무렵, 기쁜 소식 하나가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왔다.
 
 [장수:세르반티아가 재야:던호크를 등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재야 등용에 성공! 아까 전에 클라우드라는 유능한 인재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나한테 그 소식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과연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것인가?
 “전군, 전 속력을 내서 거점으로 돌아가자!”
 나는 들뜬 마음에 부대 전체로 전력 질주를 시켰다. 피로도가 쭉쭉 다는 것도 무시하고 거점을 향해 한 걸음에 달려가 30분 거리를 단 10분 만에 주파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명용사를 거점 내에 풀어 놓은 다음에서야 롱하우스에 있는 내 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보통 내 방은 집무실에 가까우니 세르반티아와 신 장수가 그곳에 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나 왔어!”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어서 와, 마스터 카이저.”
 세르반티아가 날 반겨 주었다.
 “어?”
 그런데 순간 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어?”
 세르반티아의 옆에 서 있는 신 장수를 보니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곳은 나이가 조금 많은 것도 아니고 상당히 많아 보이는 백발노인이다.
 정확히는 보통 노인이 아니라 켄타우로스 일족의 노인이었다.
 그런데 보통 노익장하면 생각나는 덩치 좋은 노인장이 아니라, 정말 그 나이에 걸맞게 빈약해 보이는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세르반티아와 다르게 철갑옷을 입고 있지만 오래돼서 빛이 바랬고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다. 손에는 기병용 창인 랜스를 들고 있지만, 팔이 워낙 가늘어 들고 있는 것도 불안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봐서 첫 인상은 정말 약해 보였다. 진짜 바람만 불어도 휭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저기, 세르반티아.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난 확인 차 세르반티아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소개할게. 이쪽이 우리 일족의 할아버지인 던호크야.”
 세르반티아의 소개를 받고 날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이가 있었다.
 혹시나 했던 일이 역시나였군. 저 할아버지가 새로 임관한 장수였을 줄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본인의 이름은 던호크! 현재는 와일드 켄타우로스 일족에 속해 있지만, 한창 젊었을 때는 전 대륙 통일 전쟁에서 황제의 창기병을 이끈 기사 중의 기사였습니다. 일족의 애송이, 아니 전사 세르반티아의 추천을 받고 당신을 섬기러 왔습니다!”
 던호크는 왜소한 체구와 달리 힘찬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하며 날 향해 상체를 숙이며 인사했다.
 무지 약해 보이는 첫 인상과 달리 기운 찬 장수인 건 다행이다.
 옆에 있던 세르반티아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던호크 경.”
 “핫핫핫, 경이라는 칭호는 오랜만에 듣네요. 그냥 던호크라고 불러주십시오. 기사로 활동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서 현직에서 물러난 지 꽤 됐습니다.”
 “그래도 기사는 기사지요. 전 경이란 칭호를 붙이는 게 더 편하니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카이저!”
 한 번 기사는 영원한 기사 아닌가? 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던호크는 무척 기뻐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난 본의 아니게 감사 인사를 받으며 던호크의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장수 상태 창
 이름: 던호크, 레벨: 10
 성별: 남자, 종족: 켄타우로스, 직업: 기사
 능력치
 HP 350/350, MP 200/200
 공격력 28, 방어력 45.
 전투 힘: 18, 근력: 25, 체력: 35, 민첩: 35, 마력: 20, 행운: 30
 스킬: 기마 돌격
 내정 통솔: 80, 무력: 68, 지력: 56 정치: 55 매력: 60
 특기: 훈련(기병)
 장비:
 방어구-판금 갑옷
 주무기-헤비 랜스
 보조 무기-없음
 장수 소속: 카이저군, 충성: 90, 공적: 0, 직위: 일반
 
 호오. 레벨이 10이라니 나보다 훨씬 높군. 그런데 레벨에 비해 능력치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네. 역시 나이 때문에 제작진이 그렇게 책정한 건가?
 뭐 그래도 능력치가 전투나 내정 둘 다 보통 이상은 되니 만족스러운 편이다.
 같은 켄타우로스 일족인 세르반티아가 공격력에 올인했다면, 던호크는 수비력에 투자해서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믿고 일을 맡길 만한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내정 특기인 훈련(기병)은 뭔지 모르겠군.
 도움말로 듣지 말고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야겠네.
 “던호크 경. 특기가 뭔지 혹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네. 제 특기는 기병을 훈련시키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한창 젊었을 때 황제의 창기병을 이끌었거든요. 비록 제가 전선에 나가 싸우면 예전만큼의 실력은 보일 수 없지만 아군 진영의 젊은 장병들을 확실히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네 발 달린 건 뭐든 다 타고 다닐 수 있도록 말이지요.”
 네 발 달린 건 뭐든 타고 다닌다? 왠지 그 말에 콱 필이 꽂히는데, 뭔가 구체적인 생각이 나지는 않는군. 이 부분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어.
 지금은 다른 할 일이 있다.
 “던호크 경. 무명용사들이 80명 정도 있는데 이들의 훈련을 맡아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그냥 훈련을 시키는 것보다는 훈련장을 따로 만들어 훈련시키는 쪽이 더 효율적입니다. 또 기병을 편성하시려면 마구간이 필요합니다.”
 훈련장이라. 지금 그런 건물을 지을 수 있으려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물 창을 한번 켜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쭉 보다 보니 새로 추가된 건물들이 보였다.
 
 [현재 건설 가능한 건물.
 훈련장, 목재 30
 내구력 150/150, 수용 인구 20/20
 전투 유닛을 훈련시킬 수 있는 건물입니다. 정규군 외 비정규군도 훈련이 가능합니다. 한번 훈련을 할 때 참가할 수 있는 인원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일반 유저들 또한 자유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이용자 수가 수용 인구를 초과할 수 없습니다.
 마구간, 목재 30
 내구력 150/150, 수용 인구 20/20
 기병 병과를 추가할 수 있는 건물입니다. 해당 병사의 수에 맞춰 말을 사육해야 합니다. 말의 사육에는 금이 필요합니다.[
 
 구입비용이나 건물 능력치는 경비 초소와 같군. 뭐, 아직 목재는 남아도니 하나쯤 지어도 되겠지.
 마구간 같은 경우는 말을 사는 데 따로 돈이 든다고 하니 건물만 지어 놓고 말을 사육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난 다른 두 장수와 함께 롱하우스를 나와서 거점 안을 돌아다니다 빈 공간을 하나 찾아내 두 개의 건물을 건설했다.
 몇 분 뒤 건물이 완공된 다음 훈련장에 먼저 들어가 봤다.
 아마도 근접 무기로 공격 훈련을 하는 걸로 추정되는 나무 인형이라든가 사격 훈련을 할 수 있는 과녁 그리고 서로 대련을 할 수 있는 연무장 등 있을 만한 건 다 있었다.
 난 시험 삼아 장검을 뽑아서 나무 인형을 두들겨 보았다.
 그러자 나무 인형이 뒤흔들리며 경험치가 조금 올랐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움직이는 몹들과 고생스럽게 싸워 온 나로선 나름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만약 군주 유저가 아니라 일반 유저였다면 처음부터 훈련장부터 찾았을 것 같다.
 「무명용사들은 전원 지금 훈련장으로 집합하도록!」
 난 전체 귓속말로 무명용사들을 소집했다.
 “던호크 경. 그럼 병사들의 훈련을 맡기겠습니다.”
 “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난 던호크의 씩씩한 대답을 듣고 훈련장을 뒤로했다.
 그다음 마구간에 가봤는데 건물만 있고 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돈이 얼마 드나 체크해 보니 말 한 마리당 사육비 명목으로 10골드가 들었다.
 무명용사의 수에 맞춰 80마리쯤 구해 놓고 싶지만 그만한 여유 자금은 없었다.
 그냥 샘플 삼아 100골드를 써서 10마리 정도만 사육했다.
 돈을 지불한 순간 튼튼한 말이 나타나 마구간 안을 돌아다녔다.
 말 자체야 뭐 현실에서도 경마장이나 동물원에 가면 볼 수 있으니 별로 신기할 건 없지만. 병사들이 저 위에 타서 싸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도 따로 마구간에 가서 말 한 마리를 가져다 타야겠군.
 “저기, 마스터 카이저. 나한테는 뭐 시킬 일 없어?”
 그때 세르반티아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녀석이 옆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군.
 “잠시 기다려봐.”
 난 세르반티아를 대기시키고 거점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치안을 확인해 보니 현재 수치가 60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도적 떼가 나타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세르반티아. 넌 지금부터 거점 내의 치안을 맡아 줘. 경비병은 얼마든지 데리고 다녀도 좋으니 수상한 자가 있으면 잡아들이고. 만약 도적 떼가 출몰하면 네가 임의로 유닛을 편성해서 토벌하고 와. 단, 무조건 도적 두목만 때려잡으라고. 되도록 나머지 부하들은 되살려서 동지로 만들어야 돼.”
 “알았어. 전투만 할 수 있다면 경비 대장 노릇도 꽤 할 만하겠군. 토벌 문제도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난 본래 한 놈만 노리고 패는 걸 잘하니까.”
 세르반티아는 경비 임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분간 경비 및 토벌을 전담시켜야지.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나보다 더 잘하리라 믿는다.
 자원 채취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더 추가할 건 없겠고. 석재가 들어오면 바로 병영을 지어야겠군.
 그럼 이제 남은 할 일은 또 뭐가 있더라?
 막상 이것저것 다 처리하고 나니 정작 내 할 일이 없군.
 전투 훈련이나 말 타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고. 우선 지금은 잠시 로그아웃해서 쉬어야겠네.
 로그아웃 한 김에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군.
 아무리 별일 없이 끝났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그 작자든, 그 작자 부하든 이번 건은 완전 그쪽에 과실이 있으니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는데, 이거.
 
 (라스트 킹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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