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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마전설 1권

2019.08.21 조회 625 추천 1


 序 1 천외천(天外天)의 대지(大地)
 
 
 
 
 
 
 
 
 
 
 
 산천이 푸른 영산(靈山) 백두(白頭) 어귀의 외딴 촌락으로 낯선 타향의 이방인이 찾아들었다.
 그는 오랜 여행의 증거를 먼지로 더러운 의복으로 알리는 젊은 남자였다.
 마을 어귀에서 남자와 만난 김(金) 노인은 손에 든 갈쿠리를 어깨에 턱 하고 걸치며 물었다.
 “뉘신데 농부의 시간보다 더 빨리 아침을 밝히는 게요?”
 김 노인의 목소리에는 작은 긴장감이 머물러 있었다.
 원래 김 노인은 담이 커서 술을 마시고 무덤 옆에 드러누워 자는 것도 괘념치 않아 하는 성격이었으나 이방인의 행세는 아직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처럼 뭔가 그늘진 곳이 있었다.
 윤기를 잃은 피부와 하얗게 바싹 마른 입술, 퀭하게 변한 눈매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병자의 모습이었고, 두 눈에 짙게 스며든 피로와 절망은 패잔병의 그것이었다.
 또한 간간이 내쉬는 떨리는 한 줄기 호흡은 짙은 혈향(血香)을 머금고 있었다.
 김 노인의 눈매가 좁혀졌다.
 ‘큰 상처를 입었군.’
 겉으로 이방인에게서 아무런 상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김 노인은 지금 이 낯선 남자의 육신이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때 이방인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혹시 송나라 말을 할 줄 아십니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건조하고 탁했다. 그리고 고려(高麗)의 것이 아니라 옆 나라인 송(宋)의 언어를 사용했다.
 김 노인은 이채를 발했다. 멀리 송나라의 사람이 혈혈단신으로 큰 상처를 입고 이곳 백두촌(白頭村)을 찾은 것은 그가 알기로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약간이나마 알고 있네.”
 김 노인은 보통의 촌마을 영감답지 않게 어렸을 때 송나라의 말을 조금 배워 둔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방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방인의 표정이 다소 환해졌다. 그동안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異國)에서 큰 고초를 수도 없이 겪은 터였다.
 그의 입술이 빠르게 열렸다.
 “반갑습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분을 찾았군요. 저는 이유청(李柳靑)이라고 합니다.”
 이른 아침의 이방인, 스스로를 이유청이라고 밝힌 송나라의 남자는 그들의 인사 방식인 포권지례를 펼쳐 보였다.
 김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김 노인이라고 부르게. 그런데 어떻게 혼자 이곳까지 흘러 왔는가? 혹여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말하며 김 노인은 백두촌의 많지 않은 식구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혹시 이 생기가 메마른 남자의 친인이 있을까 하며.
 하지만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팔십여 명이 사는 백두촌에 그가 알기로 혼혈은 단 한 명도 없고, 송나라와 인연을 가진 사람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청은 망설이더니 김 노인에게 목소리를 꺼냈다.
 “전설을 좇아왔습니다. 하늘의 못에 오르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뭐라고?”
 순간 김 노인의 음성이 높아졌다.
 김 노인의 두 눈은 기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네가 어찌 백두산의 성지(聖地)에 오르려고 하는가? 그곳은 우리 겨레의 영험한 곳이라 이국의 핏줄은 감히 진입할 수 없네!”
 “헛!”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골 노인의 모습에서 갑자기 위압감을 주는 기세를 일으킨 김 노인의 변화에 이유청은 당황하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이 없음을 깨닫자 씁쓸함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져오지 않음을 자주 잊는구나······.’
 그의 무기는 이 고단하고 오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그의 동생에게 맡긴 상태였고, 여행길에 구입한 싸구려 무기는 사흘 전에 늑대와 부딪치며 부러진 상태였다.
 이유청의 얼굴로 자신에게 던지는 조소(嘲笑)가 짙게 피어올랐다.
 김 노인은 자신이 과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직되었던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눈은 이유청을 관찰하듯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다시 묻겠네. 멀리 송나라의 사내가 어찌 성지에 오르는 법을 묻고 있나?”
 이유청은 이제 당황하지 않고 김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먼저 알려 주십시오. 제가 백두산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알다시피 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김 노인은 침음성을 토했다.
 이유청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르신, 저는 꼭 ‘하늘의 못‘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 남지 않은 제 생명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해원의 길입니다. 부디······ 소생에게 알려 주십시오.”
 짙은 간절함이 묻어나는 이유청의 호소에, 김 노인은 눈매를 가볍게 좁히며 다시 물었다.
 “어찌 그곳을 아는가?”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언장에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이것을 비밀리에 내려오는 선대의 유훈을 통해 알고 계셨다더군요.”
 이유청은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뒤집자 밑에 받친 손바닥으로 거무튀튀한 쇳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김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 이것은!”
 녹이 슬고 먼지가 가득한 쇳조각은 자신의 엄지손톱만도 못한 볼품없는 크기였지만, 언뜻언뜻 희미하게 드러나는 표면의 문양은 김 노인을 몹시 놀라게 만들었다.
 이유청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드디어······ 원하는 바에 근접한 것 같군요.”
 김 노인은 쇳조각에서 시선을 돌리고 이유청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보통 손님이 아니었구먼······. 나를 따라오게. 이것은 감히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김 노인은 곧장 몸을 돌려 마을로 향했다. 오늘의 일과 따위는 가볍게 잊은 지 오래였다.
 이유청은 다시 쇳조각을 회수하고 천천히 김 노인을 따라 걸었다.
 이내 이유청의 등과 얼굴에 짙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나왔다.
 김 노인을 보는 이유청의 두 눈으로 경악이 머물러졌다.
 ‘대단히 빠르다. 어찌 이런 움직임을······!’
 김 노인은 대개 남자들이 그렇듯 휘적휘적 팔 자 걸음으로 걷고 있었는데 그 보폭이 무척이나 넓었다.
 마치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김 노인의 등을 떠밀기라도 하듯 그는 이유청이 조금만 신경을 돌리면 벌써 열 걸음이나 멀어지는데, 이유청은 얼마 남지 않은 내기(內氣)를 쥐어짜듯 뽑아 올려 겨우 보신경(步身輕)을 전개했으나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한참 길을 걸으니 좌우에 들어선 논밭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농사를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양손을 허공에 대고 휘두르고 있었다.
 “······!”
 이유청의 눈이 커다래졌다.
 휙! 휙휙!
 흙을 파고들며 지면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물체가 시선에 들어온 것이다.
 빛살 같은 속도에 물체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이유청은 그것이 흙을 갈아엎고 있으며 드문드문 서 있는 농부들의 손동작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것이 어찌······!”
 이유청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밭 가는 것 처음 보나? 별거 아닌 일 가지고 뭘 그러는가.”
 “하지만, 하지만······!”
 이유청이 당황하며 외쳤다. 대체 천하에 누가 저런 방식으로 농사를 한단 말인가.
 김 노인이 낮게 웃었다.
 “허허, 세월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이런 잔꾀가 생기기 마련이지. 어서 가세나. 자네에게는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구먼.”
 
 마을에 들어서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이유청의 눈을 자극했다.
 “나 잡아 봐라, 개똥아!”
 “말똥이! 잡히면 대장은 내가 하는 거다?”
 김 노인을 따라 걷는 이유청의 곁으로 여섯 살 안팎의 꼬마가 개구쟁이 같은 몰골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어엇!”
 그때 앞서 도망치던 꼬마가 바닥에 널린 돌부리를 잘못 밟고 휘청대며 기우뚱하게 앞으로 엎어졌다.
 “위험해!”
 이유청이 자신도 모르게 꼬마를 지탱하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간은 약간의 거리가 있었고 힘이 빠진 그로서는 어린 멧돼지처럼 달려들던 꼬마를 빠르게 잡아 챌 기력이 없었다.
 별수 없이 꼬마는 우당탕 넘어져 바닥을 굴러 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읏차!”
 얼굴이 지면에 닫기 직전인 꼬마가 갑자기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땅을 받치더니 빠르게 두 다리를 허공으로 차 올렸다.
 휘리릭!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꼬마의 몸이 꼿꼿하게 거꾸로 선 자세가 되었다.
 이유청의 눈이 커졌다.
 “히히, 이제부터 대장은 내 차지다!”
 뒤따라오던 꼬마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개똥이 놈을 붙잡아 내기에서 이겼으니 다음 차례의 대장이 바로 자신이었다.
 파라라락!
 친구를 붙잡기 위해 활짝 펼쳐진 꼬마의 손바닥이 일순간 스물두 개로 늘어났다.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수영(手影)은 마치 만개한 꽃처럼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흥! 누가 졌대?”
 물구나무를 서 있던 꼬마가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지탱하던 양팔의 관절을 부드럽게 굽힌 다음 빠르게 펼쳤다. 그 반동으로 꼬마의 몸이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꼬마는 그대로 신형을 비틀어 몸을 회전시켰다.
 파파파팟!
 어느새 두 다리가 직선으로 찢어져 선풍(旋風)을 만들었다.
 “엇!”
 옷자락을 움켜잡으려던 꼬마가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라며 펼친 손가락을 주먹으로 말아 쥐고 빠르게 권을 내질렀다.
 퍼퍼펑!
 권풍이 솟아오르고,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물구나무선 꼬마의 발차기가 방어되었다.
 주먹을 말아 쥔 꼬마가 히죽 웃었다.
 “기습은 통하지 않아!”
 물구나무선 꼬마가 그 틈새를 노리고 몸을 제대로 뒤집은 다음 고개를 돌려 혀를 날름 내밀더니 그대로 곧장 줄행랑을 쳤다.
 “엇! 치사하게!”
 이윽고 다시 두 꼬마의 쫓고 쫓김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어찌······!”
 이유청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눈으로 멍하니 꼬마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앞서 걷던 김 노인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뭘 그리 쳐다보나. 애들 놀음이야 요란하고 시끄러운 게 당연한 일인데.”
 뒤이어 김 노인은 벌써 저만치 사라진 두 아이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인석들아! 마을 안에서 권풍 쓰지 마라! 먼지 일어난다!”
 “네, 할아버지!”
 “알겠어요!”
 두 꼬마들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입술 위로 허옇게 콧물 흐른 자국을 지니고,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모습은 어느 촌 마을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체 이곳은······!’
 이유청은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어,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을로 더 들어가자 대장간이 보였다.
 쇠의 울음이 마음 깊은 곳까지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 제련하는 소리는 맑고 커다랬다.
 “어르신, 아침부터 바쁘시군요!”
 한창 쇠를 두드리던 대장장이가 김 노인과 뒤따르던 이유청을 보며 아는 체를 했다.
 김 노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부터 까치가 울더니 이 늙은이가 길손을 만나게 되었지.”
 “촌장님의 손님이십니까?”
 김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천지(天池)를 보러 왔다는군.”
 “······!”
 대장장이는 얼굴을 빠르게 굳히고, 크게 놀란 눈을 치켜떴다.
 김 노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이 늙은이가 알아서 안내할 것이니 나중에 알려 줌세.”
 “알겠습니다.”
 대장장이는 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손에 든 망치의 육중함을 느끼며 제련하던 쇳덩어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깐 대화를 나눈 사이 붉게 달아오른 쇳덩어리가 조금 식어 있었다.
 대장장이는 지체 없이 쇳덩어리를 향해 망치를 쥐지 않은 빈손을 내밀었다.
 후우우웅!
 빈 장심에서 짙은 열기가 치솟아 오르더니 쇳덩어리를 집어삼켰다.
 치이이이익!
 새빨간 화염이 거칠게 타올랐다.
 쇳덩이는 이내 용암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따앙! 따앙!
 다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
 “뭘 만드나?”
 “호미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 노인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좀 제대로 만들어 보라고. 어째 자네가 만든 것들은 한 달을 못 넘기고 다 부러지냐는 말이야.”
 대장장이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거야 사람들이 험하게 써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무리 제가 노력해도 일반 강철에 수어검(手馭劒)의 묘(妙)가 담긴다면 어느 호미가 멀쩡하려고요.”
 이유청은 이제야 논밭을 가로지르던 물체를 알아냈다.
 ‘호미, 호미······!’
 게다가 수어검이라고 했다.
 자신의 터전에서는 감히 우러를 수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경지.
 이유청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혼돈만큼 희망은 강해졌다.
 ‘전설은 사실이었던가······?!’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혹자는 헛소문이라고 했고, 자신의 아둔함을 욕했다.
 어떤 이는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유청은 그들을 등지며, 이를 악물었다.
 전설과 함께 귀환하겠노라 피의 다짐을 하며!
 어느새 꽉 쥐어진 주먹으로, 단단히 뜨여진 두 눈으로 피어나는 결의와 각오가 흘러나온 것인지 김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참! 드넓은 백두의 대지에 온 것을 환영하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곳을 천외천(天外天)의 대지라고 부르지.”
 
 
 
 
 
 序 2 신마(神魔)의 맹약(盟約)
 
 
 
 
 
 
 
 
 
 
 
 “하으으음!”
 신소명(晨逍鳴)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중천에 뜬 햇살이 구멍 난 문풍지 사이로 쐬어지는데, 평소에 비해 늦잠을 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잠이 부족했다. 눈꺼풀이 벌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제길, 봄은 봄이군. 이렇게 늘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야.”
 하품을 하느라 찔끔 흘린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신소명은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뭘로 배를 채워야 하나?”
 봄 햇살이라는 것은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
 게다가 입맛까지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니, 결코 미식가가 아닌 신소명까지 매끼 다른 것을 먹고 싶게 만들 정도였다.
 사지를 활짝 벌리고 대자로 뻗어 있던 신소명은 허벅지를 벅벅 긁으며 오늘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 봤자 일과는 정해져 있고, 할 일도 정해져 있지만 사소한 일탈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던 존재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흐음, 좋아! 오늘은 불당 청소를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 시간에 물고기나 몇 놈 잡아서 구워 먹어야겠다!”
 신소명은 몸을 벌떡 일으켜 곧장 방을 벗어났다.
 삐거덕거리며 열린 문으로 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넓고 황량한 마당은 잡초만 무성했다. 혹여 폐가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지만 분명히 이곳의 주인은 신소명, 그가 맞았다.
 가꾸기를 싫어하는 몹시 게으른 주인이라 문제였지만.
 “고기를 잡자, 고기를.”
 그는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작은 창고가 보이고, 신소명은 몇 개 없는 물건들 사이에서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어깨에 걸쳐 메고 대문을 박찼다.
 쾅!
 아무렇게나 발로 열어젖힌 대문이 부서질 듯 커다란 소리를 냈다. 매일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니, 진작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신소명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시전의 한량처럼 건들거리는 보폭이었지만 이내 주변 풍광이 바람처럼 뒤로 밀리더니 그는 어느새 광활한 수면의 앞에 섰다.
 “그럼 대어를 낚아 볼까!”
 신소명은 팔을 휘둘러 수중의 죽간을 수평선을 향해 내뻗었다.
 쏴아아악!
 짙게 깔린 운해를 가르고 낚싯줄이 수면을 파고들었다.
 드리워진 낚싯줄을 보며, 신소명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쳐 가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잔잔한 파도, 그 수면 위에 드리워진 가느다란 낚싯줄.
 이제는 기다림만이 남았다.
 물론 일반의 낚시라면.
 파츠츠측!
 낚싯대를 쥔 신소명의 손아귀로 짙은 묵색의 전광이 가볍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풍우가 이는 겨울밤의 먹먹함처럼 짙은 어둠을 머금은 시커먼 뇌전은 줄기를 이루며 죽간을 타고 올라갔다.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왕창 낚아 보실까?”
 촤자자작!
 묵색의 뇌전이 낚싯줄을 타고 수면으로 급전직하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커먼 뇌전 줄기가 염료처럼 물속으로 흩뿌려졌다.
 첨벙! 첨벙!
 그와 동시에 고요했던 수면으로 팔뚝만큼 커다란 물고기가 용솟음을 치며 뛰어올랐다.
 다시 (낚싯대가 수중으로 사라짐이 찰나도 되지 않아, 물고기들은 배를 까뒤집고 수면으로 떠올랐다.
 “역시 인생은 한방이지!”
 신소명은 짐짓 커다랗게 웃으며 낚싯대를 다시 휘둘렀다.
 파라라락!
 낚싯줄이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이내 수면에 떠 있는 물고기들을 휘감아 신소명을 향해 내던졌다.
 털썩! 털썩!
 날아온 물고기들은 곧장 신소명의 발치로 떨어졌다. 착지하는 충격에 물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몸을 비틀어댔다.
 신소명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빠르게 물고기들을 건져 냈다.
 “역시 낚시란 이 재미라니까!”
 낚싯대로, 낚싯줄로 물고기를 끄집어 올렸으니 이것도 낚시일 것이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신소명이 마지막 물고기를 감아 챘을 때, 이미 그의 발치에는 여섯 마리의 물고기가 펄떡대며 주둥이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이놈은 구워 먹고, 이놈은 삶아 먹고, 너는 생으로 씹어 먹어야지!”
 신소명은 침을 꼴깍 삼켰다.
 천지 물에 사는 물고기의 육회 맛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낚싯대를 옆에 내려놓고 지척의 물고기를 집어 들었다.
 몸 전체가 붉은색인 물고기는 비늘 주변으로 지는 노을처럼 은은한 홍광(紅光)을 흘려 내고 있었다.
 신소명은 검지를 세우고 물고기의 비늘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후두두둑.
 그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비늘이 너무도 간단하게 벗겨졌다. 떨어지는 붉은 비늘은 추풍낙엽과 비슷했다.
 순식간에 모든 비늘을 벗긴 신소명은 한껏 입을 커다랗게 벌려 그대로 물고기의 살점을 한 웅큼이나 씹어 삼켰다.
 살점까지 붉은색을 머금고 있는 물고기는 입 안에 들어오자마자 매운 고추를 씹은 듯 얼얼한 매콤함을 혓바닥 전체로 짜르르 울리게 했다.
 “알싸한 게 좋군!”
 신소명은 한껏 웃으며 연거푸 살점을 씹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툼한 물고기가 뼈와 대가리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신소명이 두 번째 물고기를 잡고, 입맛을 다심과 동시에 비늘을 벗기려던 때였다.
 “소명아······!”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신소명은 눈을 좁히고 귀를 쫑긋 세웠다.
 “나다, 촌장······!”
 “김 영감이네?”
 신소명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나중에 보자.”
 그는 아직도 주둥이를 뻐끔거리는 물고기들을 보며, 발끝으로 물고기를 가볍게 걷어찼다.
 첨벙! 첨벙!
 발끝에 실린 경력에 물고기들이 휩쓸리고, 이내 물고기들은 수면을 파고들어 사라졌다.
 “평소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골방에만 박혀 지내던 양반이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다지?”
 신소명은 한쪽 어깨에 대나무 낚싯대를 걸쳐 멘 다음 어슬렁거리며 소리가 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휙휙휙!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신소명은 이미 낯설고, 익숙한 두 사람의 신형 앞에 당도해 있었다.
 “잘 있었는가?”
 먼저 아는 척을 한 김 노인을 보며 신소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은 잘 계셨소?”
 “이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신소명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기억하기로 벌써 오 년 전부터 그 말 하지 않았소? 대체 그놈의 언제는 언제 온다는 소리요?”
 “글쎄, 그거야 하늘이 알지 않나. 허허!”
 신소명은 시선을 돌렸다.
 “배 꺼지는 소리 관두고, 저 친구 소개나 해 주시오.”
 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만나러 왔다더군.”
 “나를? 알다시피 나는 평생 백두산에서만 자고 나라서 친구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신소명이 눈썹을 좁히며 의구심을 나타내자, 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 생각처럼, 산인(山人) 신소명을 찾아온 건 당연히 아니지.”
 “아하, 그러셨군. 나를 찾되, 꼭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은 아니구만.”
 신소명이 갸름한 눈으로 김 노인의 곁에 선 남자, 이유청을 바라보았다.
 이유청이 포권하며 말했다.
 “무림말학 이유청이라고 합니다.”
 신소명은 손을 저었다.
 “무림인지 나발인지 모르는 소리 관두쇼. 나를······ 그러니까 나를 찾아오셨다고?”
 꿀꺽!
 이유청의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그렇······습니다. 과연 귀하께서 이곳 천지의 주인이십니까?”
 신소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백두산에는 오직 나만이 천지를 바라보며 주거할 수 있지. 여기 촌장도 내 허락이 없으면 이 이상은 결코 접근할 수 없어.”
 김 노인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침의 묵계이자, 존중의 예의이지.”
 이유청은 떨리는 눈으로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 건장한 체격, 길게 기른 흑발을 단정히 묶어 등 뒤로 내린 당당한 모습의 남자다.
 두 눈은 정광으로 가득했고, 얼굴 역시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찾아왔다······.’
 이곳은 고려의 영산 백두.
 나 홀로 백두의 정상, 바다처럼 고인 호수 천지를 내려다보는 남자.
 전설의 주인.
 “천외제일신마(天外第一神魔)······”
 번쩍!
 “하하하!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그 이름은! 당신네들이 우리 사조(師祖)들을 뭉뚱그려 부르는 칭호라지? 아차, 이젠 나도 천외제일신마겠군. 당대 계승자가 바로 나니까.”
 신소명이 짙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유청을 바라보았다.
 이유청은 갑자기 피어나는 그의 기세에 퍼뜩 놀라며 무심코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흐읍!”
 너무도 선명한 흑백을 지닌 신소명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이유청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무한의 두려움이 전해졌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야수의 앞에 놓인 초식동물의 심정이라는 것밖에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악할 수는 있다.
 이것은 본능이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 강자를 두려워하는 생존의 욕망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신소명은 두려운 존재라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이유청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가볍게 몸을 떨고 있을 때, 김 노인이 그의 어깨로 주름진 손을 올렸다.
 “쯔즈, 늙으면 죽어야 하는 건가? 이 젊은이에게 자네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구먼.”
 신소명은 이유청에게서 눈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제 알게 됐을 거요.”
 “으음!”
 이유청은 신소명의 눈길을 벗어나고서야 숨을 제대로 돌릴 수 있었다.
 신소명이 등을 돌려 말했다.
 “우선 앉아서 얘기합시다.”
 
 넓은 대전.
 사방에 놓인 아수라의 석상이 음산함을 만들고, 오뉴월의 햇살조차 비집고 들어올 수 없게 하는 어두운 실내가 더욱 짙은 침묵을 만들어 주었다.
 마주 보고 앉은 세 사람 중에서 이유청이 먼저 품 안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신소명이 주머니를 받아 들고 속을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거무튀튀하게 녹슨 쇳조각을.
 그는 쇳조각을 집어 들었다.
 쩌어엉! 쩌어엉!
 신소명의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볼품없는 쇳조각에서 커다란 공명음이 터져 나왔다.
 쇠종을 울리듯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공명음이었다.
 신소명의 눈이 크게 뜨이고, 처음으로 선명하던 그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림을 만들어 냈다.
 “염왕전(閻王錢)이군!”
 자신의 목소리에 정말 오랜만의 경악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신소명은 이유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유청은 가볍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애써 그와 시선을 부딪치지 않으려 애쓴 것이다. 정면으로 조우한 눈동자에서 전해지던 미지의 공포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신소명이 물었다.
 “망할 사부에게 귀가 닳도록 듣기만 했는데 실제로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군. 대단해! 아직 염왕전을 보관하고 있는 양반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유품입니다. 선친께서는 임종하시기 직전, 저에게 이것을 물려주셨습니다. 자신조차 반신반의······ 아니, 거의 믿지 않으시던 전설상의 유품을.”
 이유청의 눈이 가볍게 가라앉았다. 죽은 이를 떠올리는 기억은 언제나 아픔을 머금기 마련이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 나를 찾았군. 천지관천하(天池觀天下)라는 문장은 결코 친절하지 않은데 말이야.”
 
 하늘의 못에서 천하를 내려다본다.
 
 이역만리 송나라에서 알기란 무척 힘든 내용이다.
 이유청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려웠습니다. 벌써 이 년이나 되었군요, 이 고행을 시작한 지. 처음에는 대륙 곳곳을 이 잡듯 돌아다녔고, 그 뒤로는 대막으로까지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와중에 우연히 현자를 만나게 되었고 천지라는 것이 장백산, 귀하께서 머무시는 백두산의 정상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소명과 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이유청의 설명과 다르게 그가 겪어 온 지난 이 년의 행로가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신소명은 더러운 쇳조각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스승, 그 양반이 나를 받으며 세 가지 약속을 받았지. 하나는 이 불당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라는 거고, 두 번째는 천지가 오염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누군가 염왕전이라고 불리는 쇳조각을 가져오면 그에게 딱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라는 거였다.”
 그는 길게 늘어트린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어. 그까짓 동전 조각이 뭐라고? 하지만······ 숨이 끊어지기 직전, 스승이 남긴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슬픈 이야기였거든.”
 그는 차분한 눈으로 이유청을 바라보았다.
 지치고 병든 이국의 남자.
 무엇이 그를 죽음에 몰았으며, 전설을 좇게 했는가.
 그 무엇이 자신을 부르는가.
 무림이라 부르는 대륙으로······.
 “누대를 이어온 전설의 유일한 치욕!”
 신소명의 흑백이 선명한 두 눈에 짙은 묵광(墨光)을 일렁였다.
 “염왕전이야말로 그 커다란 결점을 갚아 가는 과정이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마(神魔)의 유일한 맹약이기 때문이지······.”
 
 
 
 
 
 第一章 대해(大海)를 향해
 
 
 
 
 
 
 
 
 
 
 
 “나중에 봅시다.”
 커다란 흑색 피풍의로 전신을 덮은 신소명.
 “잘 다녀오너라!”
 “소명 오라버니, 가면 언제 와?”
 “형! 맛있는 거 사와야 해?”
 신소명이 이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백두촌의 모든 주민들이 마을 어귀로 잔뜩 모여들어 너 나 할 것 없이 작별을 아쉬워했다.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피풍의 자락을 움켜쥔 여자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빨리 와야 해? 그치? 빨리 올 거지?”
 두툼한 손바닥이 머리를 쓰다듬자 여자아이는 큰 눈동자로 물기를 그렁그렁하게 머금으며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산산아, 울지 마라. 잠깐 산보 나갔다 오는 것뿐이니까. 내가 어디 허튼 말 하더냐? 금방 갔다 올 거야. 이 오라비 믿지?”
 신소명이 나직한 어투로 여자아이를 달랬다.
 “쿨쩍!”
 여자아이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소명은 낮은 웃음을 머금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김 노인이 보였고, 창백한 안색의 이유청이 서 있었다.
 이유청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입술을 벌릴 수 없었다.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소명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섬서(陝西) 땅, 동천(銅川).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몸 관리나 잘하쇼.”
 이유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신소명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쾅쾅 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녀오지. 내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요.”
 김 노인은 부드럽게 이유청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는 괜한 걱정일랑 집어 치우고 요상에나 신경을 쓰게. 어디 남아 대장부가 이렇게 몸이 허술해서야 밭이나 제대로 갈겠는가?”
 “쯔즈. 보아하니, 먹고 재워 준다는 구실로 노역꾼 하나를 공짜로 얻게 되었구만. 당신도 팔자 한 번 드세군, 저 심통 맞은 촌장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생겼으니.”
 신소명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김 노인이 툴툴 웃으며 손을 저었다.
 “허튼 소릴랑 하지 말고 어서 출발하게.”
 “벌써부터 나를 쫓아내려고 하다니, 역시 심보 한번 무서운 영감이라니까.”
 신소명은 웃으며 악의 없는 농담을 건네고는, 잔뜩 몰려나온 백두촌의 주민들을 면면히 바라보았다.
 “다녀오겠수다.”
 신소명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광활하게 펼쳐진 지평선이야말로 이제 그의 발걸음이 닿을 곳이다.
 주민들은 이제 조용히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던 여자아이조차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신소명의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걷던 신소명이 걸음을 멈췄다.
 “아참!”
 빠르게 돌아간 고개.
 신소명은 크게 외쳤다.
 “돌아올 때 선물은 없어!”
 동시에 커다란 외침이 빽 하고 터져 나왔다.
 “돌아오지 마!”
 “오라버니, 바보!”
 
 * * *
 
 휘이이잉······.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머리를 흔드는 들바람에 신소명은 담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낮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눈 아래로 시끌벅적한 마을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집어삼켰다.
 사람, 말, 마차, 바다, 배······.
 색다르고 또한 이채롭다.
 신소명은 힘찬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길옆에 세워진 비석으로 예성항(禮成港)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선비는 개경입성을 꿈꾸고, 대상(大商)은 예성 바다에 뜬 배를 기다린다.
 고려 제일의 무역항이자, 최고의 상업도시에 신소명이 도착한 것이다.
 예성항으로 들어온 신소명은 짠내가 느껴지는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천천히 이리저리 잰걸음으로 왕래하는 행인들을 살펴봤다. 척 보기에도 다른 인종,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고려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휘유!”
 신소명은 돌풍에 흘러가는 구름보다 많은 사람의 인파에 기가 질려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평생을 적막한 산중에서 보낸 그에게 길가에 손바닥만 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을 본 것은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신소명은 낮게 웃으며 촘촘한 사람의 물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우선 포구로 가까이 걸어갔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뱃사람들이 보였고, 짐을 내리는 상인들도 보였다.
 그리고 마치 산처럼 거대한 배라는 놈이 신소명의 눈을 잡아끌었다.
 새파란 바다가 보인 것은 다음 일이었다. 그만큼 포구는 복잡했고, 활기찼다.
 신소명은 끝없는 수평선으로 이어진 바다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두산 꼭대기의 넓디넓은 천지를 매일 보며 자란 그였지만 제아무리 천지라고 해도 바다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 심심할 때면 천지를 보며 바다를 상상하곤 했던 기억이 떠올라 신소명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크군, 바다는!”
 신소명의 눈이 맑은 빛을 뿜었다. 이제 자신은 세상으로 나선다. 흥분과 설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이 그의 몸을 활활 태웠다.
 그는 곧장 길을 걸어 커다란 목채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벽란정(碧瀾亭)이라 불렸다.
 “낯선 친구, 무슨 일로 벽란정을 방문하셨는가?”
 육모 방망이를 든 포졸이 입구를 지키며 서 있다가 건들건들 걸어오는 신소명을 제지했다.
 신소명은 포졸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여기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말이외다. 그런데 포졸 양반은 여기가 관청도 아닌데 어째서 문지기를 하는 게요?”
 포졸이 낮게 웃었다.
 “하하, 자네는 예성항이 처음인가보지?”
 “그렇소.”
 신소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포졸은 예상했다는 듯 설명해주었다.
 “이곳 벽란정은 송의 사행(使行)이 여독을 풀며 잠시 머무는 곳이라네. 고국에 업무를 보러 온 귀빈들이 머무는 곳이니 당연히 우리 같은 포졸들이 지켜 서는 것이지. 아참! 그런데 자네, 뉘를 만나 뵈러 방문했다 하였지?”
 “이성운(李星雲)이라는 분이신데······.”
 신소명이 이름을 꺼내자, 포졸의 얼굴색이 가볍게 변했다.
 “자네, 정말 이성운 장군을 뵈러 왔나?”
 신소명은 코끝을 긁었다.
 “흠, 그 양반이 장군인가? 아무튼 예성항 벽란정에서 이성운이라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으니 그 양반이 맞을 거요.”
 그는 말하며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포졸에게 건넸다.
 서신은 길을 떠나기 전, 김 노인이 몇 마디의 말과 함께 써 준 것으로 예성항 또한 그의 조언에 따라 들른 곳이었다.
 서신을 받아 들며 포졸은 새삼스레 신소명의 몸을 훑었다.
 훤칠한 키에 선이 굵은 얼굴, 장부답게 생긴 풍채라 거짓말을 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 서신을 건네는 주먹이 두껍고 단단한 것을 보아 필시 무예를 수련하는 무인의 모습이었다.
 “호걸 청년, 잠시만 있으시게. 내 안쪽으로 기별을 넣고 오지.”
 포졸은 신소명을 세워 놓고 잠시 자리를 떴다.
 신소명이 가만히 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열 명 중에 아홉이 송나라 사람이었다. 지나가며 자기네 말로 떠드는 언어가 그러했다.
 “내 고향, 내 조국의 땅인데 쌀라쌀라 거리는 놈들 목소리만 들으니 귀가 간지럽구만.”
 신소명은 괜히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마침 포졸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호걸 청년, 이쪽으로 들어오게나. 이 장군께서 자네를 뵙자시네.”
 신소명은 설렁설렁 걸으며 포졸의 뒤를 따라 벽란정으로 들어갔다. 언덕을 가득 메우는 외향처럼 내부도 넓고 웅장했는데 가구와 장식품들이 죄다 다른 나라들의 호사품들이었다.
 신소명과 포졸은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이층으로 올라섰다.
 “호오.”
 이층의 첫 마루를 밟은 신소명의 눈매가 가볍게 오므려졌다. 첨예하게 흘러나오는 강자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는 곧장 기세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담백한 백의를 걸친 학자풍의 노인이 곧은 허리를 하고 우뚝 서 있었다. 갸름한 턱선과 온화한 눈빛은 허리춤에 차여진 검과 어울리지 않는 융화를 일으켜 냈다.
 포졸이 노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장군님, 청년을 모셔왔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이성운은 목소리마저 음이 낮고 가늘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학자의 외형이었다.
 하지만 신소명은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붓만 잡았을 것 같은 저 길고 호리호리한 손이 허리춤의 검을 뽑는다면 한바탕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이성운이 잔잔한 웃음과 함께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반갑네. 명우, 그 친구는 여전히 속을 모르겠구먼. 이런 늠름한 호걸 대장부를 소개조차 시켜 주지 않다니.”
 이성운은 서신을 먼저 받아 봤지만 서신에는 ‘이 친구를 부탁하네.’라고만 쓰여 있었다.
 도통 ‘이 친구’ 가 누구인지 알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이름 정도는 나와 있어야 하지 않냐는 소리였다.
 신소명은 이를 가득 드러내며 마주 웃어 보였다.
 “열 구절의 글보다 한마디의 말이 더 사내다운 법이죠.”
 “하하, 그런가? 그럼 어디 사내의 말을 들어 봄세. 자네는 누구인가?”
 이성운은 가볍게 웃으며 신소명의 눈을 응시했다. 서로 마주 본 눈으로 가벼운 기세가 전해졌다.
 신소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실까 모르겠지만, 백두산의 신소명이라는 작자입니다.”
 “백두산?”
 무척이나 짧고 간단한 인사였지만 이성운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렇군. 명우, 그 친구 또한 백두촌의 사람! 그 친구가 소개한 사내라면 응당 그곳의 사람이겠지. 하지만 정말 백두산인(白頭山人)이 올 줄이야······.”
 백두산인, 풀이하자면 백두산에 사는 사람.
 신소명은 독백하는 이성운의 얼굴을 보며 자신을, 정확히 말해서 자신이 계승받은 무맥(武脈)을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름대로 비전(秘傳)이라 불리는 것인데, 잘 아시는군요.”
 신소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성운은 멋쩍은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아차, 내가 그림자 속의 이름을 들춰내고 말았구먼. 미안하네. 자네의 무맥은 듣되,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네. 내 전설로만 듣던 이름을 직접 목도하게 되어 기쁨이 너무 컸구먼.”
 신소명은 건성으로 손을 휘저었다.
 “뭐 대단한 이름이라고 그러십니까.”
 이성운은 빙그레 웃었다.
 “어찌 대단한 이름이지 않는가? 고려 산천에 숨 쉬는 무인이라면 어찌 자웅을 겨루고 싶은 마음을 숨기겠으며, 뛰어 넘고 싶은 열망을 지우겠는가? 나 또한 경지에 이르러 그 마음,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나······ 이 가슴의 호기는 숨길 수 없구만.”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옮겼다.
 “어떤가? 나에게 멸망과 공포의 후예와 맞서 싸울 기회를 줄 수 있나?”
 단지 검파 위로 손을 올린 것에 불과한데 벌써부터 서릿발 같은 기세가 이성운의 전신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과 먹물 냄새만을 머금고 있을 법한 사람에게서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막강한 예기였다.
 신소명은 툴툴 웃었다.
 “늙어서 힘도 좋으시구만.”
 이성운은 흐릿하게 웃었다.
 “장수할 팔자인가 보네.”
 가벼운 목소리의 응대와는 달리, 이성운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내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도 이렇게 태평한 모습이라니······!’
 소심한 사람은 벌써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을 기세였거늘, 신소명은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삐딱하게 선 채 심드렁한 얼굴이었는데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무장이라고 하지만 예와 덕을 아는 이성운이다.
 가볍게 후배를 놀린다고 생각한 기세의 끓어오름이었지만, 저 무사태평한 신소명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호승심이 부풀어 오르며 더욱 굳센 기세를 끌어내고 말았다.
 파라라라락!
 단정한 옷자락이 망나니처럼 풀어헤쳐지고, 이성운의 두 눈으로 짙은 홍광(紅光)이 흘러나왔다.
 웅우웅우웅!
 이성운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벽란정이 크게 몸을 떨어 댔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건물의 흔들림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덜컥, 덜컹!
 곳곳에 들어선 책장이 흔들거리고, 바닥이 꺼질 듯 휘청거렸다.
 이성운은 어떠냐는 듯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지축이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신소명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흔들림 또한 그의 발밑에서는 미동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불어닥치는 기세의 광풍 한가운데서, 신소명은 태연히 그 힘을 받아넘기는 것도 모자라 짐짓 지루하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흐아암!”
 하품이 터져 나왔다.
 신소명은 찔끔 흐른 눈물을 닦으며 이성운을 바라봤다.
 “아, 죄송합니다. 매일 이 시간이면 낮잠을 자곤 해서요.”
 푸스슥!
 그 말 한마디로 이성운의 서릿발 같은 기세가 씻긴 듯 사라지고 말았다. 들끓던 공기가 허망하게 식어 버렸다.
 이성운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허, 노부의 팔 성 내력을 이렇게 쉽게 감당한다는 소리인가?”
 신소명은 딴청을 부렸다.
 “아! 갑자기 땅이 울리더니, 그게 지진이 아니었습니까? 전 또 갑자기 건물이 흔들리기에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지 뭡니까.”
 이성운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놀랍네! 놀라워! 대단한 경지야!”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지만, 저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이성운은 쓴웃음을 거두었다.
 “자네의 배포는 놀랍기만 하구먼.”
 그때였다.
 우당탕거리며 아래층에서 포졸들이 득달같이 달려 올라왔다.
 “장군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포졸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이성운에게 외쳤다.
 이성운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지진이 난 적 있었느냐?”
 “하, 하지만 분명 조금 전까지 벽란정이 무너질 듯 떨리지 않았습니까?”
 “이, 이건 필시 지진입니다! 지금은 다행히 잠잠해진 것 같으니 어서 몸을 피하시죠!”
 이성운이 내심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허허, 설사 지진이 왔다고 해도 이제 괜찮을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 이르게.”
 “하, 하지만!”
 “걱정 말게! 내 장담함세! 지진은 더 이상 없을 것이야. 안 그런가, 소명?”
 신소명은 모른 척 어깨에 내려앉은 긴 흑발을 쓰다듬었다.
 포졸들은 어리둥절하고 어색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성운이 그들의 등을 보며 낮게 혀를 찼다. 호승심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고조시켜 버린 것이다.
 만약 신소명이 자신의 도발에 휩쓸렸더라면 정말 벽란정은 붕괴되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이성운은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될 뻔하지 않았나.
 그때 신소명은 힐끗 이성운의 허리춤을 보며 말했다.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허리에 걸린 쇳덩어리의 이름을 묻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성운 또한 잘 알았다.
 “추풍검법(秋風劒法)일세.”
 이성운의 대답에 신소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고려의 삼대검공(三大劒功) 중의 하나인 추풍검법이라면 능히 염왕류의 이름을 알 자격이 있었다.
 신소명은 스승에게 잠시 들은 적이 있는 삼대검공의 전인을 두 사람이나 보자 나름 감흥을 느꼈다.
 삼대검공 중의 하나인 백두검법(白頭劒法)은 백두촌의 촌장인 김명우가 계승하고 있었다. 김산산이 조금 더 원숙한 경지에 오른다면 그녀가 다음 대백두검의 전인이 되리라.
 “백두검법은 촌장께, 추풍검은 노사에게 전해졌다면······ 혹시 뇌공검법(雷功劒法)은 누가 전인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신소명은 이성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를 알았으니 나머지 하나가 궁금해진 것이다.
 기대와는 달리 이성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뇌공검은 차력신공(借力神功)의 구결로 이루어진 법술검(法術劒)이라, 기기하다 여겨 정통성을 따르는 검도에서 방출되지 않았던가.”
 주문을 외워 천지사방에서 힘을 끌어 쓰는 뇌공검은 그 모습의 특성상 사도를 걷는다 하여 세인들 속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삼대검공의 이름 또한 신흥으로 떠오르는 용천검법(龍泉劒法)이 뇌공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네. 뇌공검은 잊혀져 버린게야.”
 이성운이 오랜만에 기억 속에서 꺼낸 뇌공검을 안타깝다는 듯 추억했다.
 “전대 전인이었던 벽산선인(碧山仙人)은 내가 서른 때 이미 예순이셨으니 벌써 천수를 다하였겠구먼.”
 지금 이성운의 나이가 예순이니, 벽산선인은 살아 있더라 하더라도 구십 세가 넘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무공에 도통하고 경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사람이 근 백 년을 산다는 것은 기문 중의 기문이었다.
 신소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뇌공검의 전인도 만나 보고 싶은데 안타깝군요. 뭐, 어떻게 인연이 된다면 만나겠지만 말입니다.”
 이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뇌공의 우레 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네. 그 힘은 결코 허술한 사술(邪術)이 아니었음이야······.”
 추억에 잠긴 이성운과 무언가의 생각에 빠진 신소명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 명우, 그 친구가 어떻게 노부를 부려 먹으라던가?”
 분위기를 전환하려 이성운이 그에게 본론을 물었다.
 “송으로 가는 배에 한 자리 마련해 주시면 됩니다.”
 신소명의 대답은 이성운이 내심 짐작하고 있던 터라 담담히 되물었다.
 “무림으로 가는가?”
 “그런 셈입니다.”
 이성운은 낮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자네가 무림을 활개하는 풍경을 직접 볼 수 없다니. 이럴 때는 관직에 올랐다는 것이 무척이나 후회스럽구먼.”
 그는 뒤로 돌아가 한쪽 서탁에 쌓인 종이 뭉치를 몇 번 훑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빠른 선로가 오늘 오후일세. 나와 잘 아는 송의 상인인데 성품이 나쁘지 않고 사람을 가려 만나지 않으니 가는 동안 피곤하지는 않을 것 같네. 마음 같아서는 고려사람 배에 태우고 싶으나 그러면 하루를 묵어야 할 터인데, 어쩌겠나?”
 “됐습니다. 지금 떠나도록 하죠.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닐세. 나야말로 말년에 즐거운 시간이었네!”
 
 신소명은 벽란정을 나서며 건물을 힐끗 쳐다봤다.
 이성운이 펼쳐 낸 기세로 인해 곳곳에 창문이 떨어져 있었고 외관 장식품들이 부러져 있었다.
 그는 가볍게 코끝을 긁었다.
 “미안하구먼. 괜히 나 때문에 멀쩡한 집 한 채 날려먹었네. 하하!”
 벽란정의 대들보에 미세한 균열이 간 상태라는 것이 보였다.
 파괴와 죽음이라는 부분에는 따라갈 곳이 없는 염왕류.
 살아 있지 않은 건물이라 할지라도 신소명의 눈에는 파괴와 죽음에 관한 모든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기의 폭풍, 기세의 발현 속에서 벽란정의 대들보는 이미 회생불능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물론 내일 당장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벌써 기우뚱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빠르면 일 년인가······?”
 오늘 시작된 균열은 시간을 좀먹으며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다음 파괴될 것이다.
 이렇게 고려 제일의 무역지대, 예성항의 중요 건물 하나가 붕괴될 예정에 처하고 말았다.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다녀와서 말해 주지, 뭐!”
 
 
 
 
 
 第二章 큰 바다에는 죽음도 많다
 
 
 
 
 
 
 
 
 
 
 
 “닻을 올려라!”
 “출항한다!”
 선상은 시장판처럼 복잡했다.
 대해로 나서기 위한 선원들의 움직임은 분주하고 체계적이었다.
 신소명은 항해를 시작한 배 위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신기함과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주히 움직이는 선원들은 한량처럼 기웃거리는 신소명을 외면하거나 불편해 했다.
 벽란정을 총괄하는 이성운 장군의 부탁으로 배에 태우기는 했지만 엄연히 그들과는 다른 나라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소명이 송나라 말을 쓸 줄 안다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았기에 뱃사람들은 그를 지나치면서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신소명은 외면 아닌 외면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선박의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그는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커다란 나무 판때기가 물 위에 뜨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만!”
 그때 신소명의 옆으로 화려한 비단 장삼을 걸친 중년인이 다가왔다.
 “사람이 작심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그의 말은 고려어였지만 어딘가 어눌하고 서툰 부분이 있었다.
 신소명은 중년인을 쳐다봤다. 가느다란 두 가닥 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이 상선의 주인이었다.
 “그럼 조만간 하늘을 나는 배도 나오겠군요.”
 송나라의 상인, 왕구경(王具敬)이 이채를 발했다.
 신소명이 송나라 말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기분이 흡족해졌다.
 “젊은 소협은 우리말을 할 줄 아시는구려.”
 “엄한 스승이 시도 때도 없이 닦달을 해서 얼추 몇 가지 재주는 지니고 있습니다.”
 왕구경은 고려말을 했고 신소명은 송나라 말을 썼다.
 서로 상대방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왕구경은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음! 그건 그렇고 하늘을 나는 배라······? 내 상인으로 여러 국가를 다녀 보았지만 소협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 사람은 오늘이 처음이오.”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재미있으니까 실현되기 마련이죠. 저같이 비상한 머리를 가진 놈이 후대에도 계속 태어난다면 언젠가는 나올 겁니다. 혹시 모를 일이죠. 그때는 나무판자가 아니라 쇳덩어리로 만들어졌을지.”
 “강철로 말인가? 하하하! 유쾌한 농담일세!”
 왕구경은 신소명의 엉뚱한 말에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신소명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나이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데, 분명히 하늘을 나는 쇳덩어리가 나올 겁니다.”
 “하하, 알았네! 소협의 말을 믿겠소이다! 내 이 장군께 소협의 탑승을 부탁 받았을 때 딱딱하고 거친 무장(武將)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주 유쾌한 호인이었구먼!”
 왕구경은 정말 재미있었다는 듯 웃음을 멎은 후에 신소명의 널찍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안으로 듭시다. 내 간단히 식사를 대접하겠소.”
 어찌나 웃었는지 왕구경은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구경을 따라 선실로 내려갔다.
 배 안에는 갑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왕구경이 말했다.
 “그래, 송에는 무슨 일로 행차하시오?”
 “사람을 데리러 갑니다.”
 “그렇구려. 가족인가 보오?”
 신소명은 손사래를 쳤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습니다.”
 “헌데 어찌 만나시려고 그러오? 가시는 길은 아시오?”
 신소명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섬서땅 동천에 살고 있다고 하니 귀동냥을 하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구경은 혀를 찼다.
 “쯧쯧. 어디 동천이 시골 마을과 같겠소? 내 고국에 가장 유명한 것이 무엇이오? 바로 드넓은 대륙 아니겠소! 동천이 작은 마을은 아니외다.”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천지를 뒤집어서라도 데려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허허, 그럼 내 도착하면 지리에 능통한 사람을 불러서 찾는 이에 대해 상세히 알아봐 주겠소.”
 신소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나누었고, 조촐한 후식까지 먹은 신소명이 다시 갑판으로 나왔을 때는 붉은 노을이 지는 늦저녁이었다.
 “후우! 이것이 바다 냄새인가?”
 신소명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어느 곳을 향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끝이 없는 수평선뿐이었다. 짭짤한 소금기가 코로 가득 스며들었다.
 신소명은 문득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껏 흙과 바위로 태어난 백두산에서만 지내던 사람이 난생 처음 고국을 떠나 맞이하는 밤이 흙이라고는 없는 물 위라는 것을 깨닫자, 자못 여러 가지 감정이 생긴 것이다.
 울적함 같기도 했고 낯설음에 대한 조금의 불안이기도 했다.
 우두커니 서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예성항 쪽을 바라보는 신소명의 귓가로 문득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부터 향수병에 걸린 겐가?”
 신소명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자신의 머리맡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 내 목소리가 조금 컸나?”
 목소리의 주인은 늙은 선원이었다. 그는 신소명이 단박에 자신을 쳐다보자 미안하다는 듯 앉아 있던 돛대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신소명은 늙은 선원을 쳐다봤다.
 “노인장, 거기서 뭐 하시오?”
 늙은 선원은 신소명이 익숙하게 송나라 말을 쓰자 조금 놀란 듯했으나 곧장 표정을 회복하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내가 내 배에서 내려앉는 태양을 구경하는데 청년은 무슨 상관인가?”
 신소명은 웃으며 말했다.
 “이 배가 노인장거란 말이오? 내가 알기론 왕씨 성을 쓰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늙은 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배의 주인은 왕 대인이지만 나와 같은 선원들이 있기에 배가 관리가 되고 항해를 하는 게 아니겠나? 적어도 이 녀석은 우리 모두의 자식과도 다름없다네.”
 말하며 돛대를 쓰다듬는 늙은 선원의 얼굴은 포근함이 가득했다. 마치 화폭 속의 장면 같았다.
 신소명은 문득 위에서 보는 바다가 궁금해졌다.
 “옆에 자리 있습니까?”
 늙은 선원은 껄껄 웃었다.
 “하하, 재주만 있다면 엉덩이 붙일 곳 없겠는가?”
 슈악!
 신소명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발돋움을 하여 곧장 위로 치솟아 올랐다.
 “으헛!”
 늙은 선원은 도깨비처럼 튀어나온 신소명의 신형을 보고 뒤로 자빠질 정도로 놀라 버렸다.
 신소명이 곧장 손을 뻗어 늙은 선원의 어깨를 붙잡아 자세를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는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을 것이다.
 신소명이 짐짓 혀를 차며 말했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 놀라다니, 노인장은 눈이 매우 나쁜 모양이군요.”
 늙은 선원은 겸연쩍게 웃으며 자리를 다시 잡았다.
 “허허, 그러게 누가 갑자기 튀어 오르랬나? 이건 무슨 새도 아니고, 자네 참 용하구먼.”
 신소명은 늙은 선원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자리라고 해봐야 길쭉하게 튀어나온 기둥이었지만 나름 균형을 잡고 앉으니 편했다. 무엇보다 넓은 시야가 마음에 들었다.
 늙은 선원이 잔잔한 물결처럼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는 운이 아주 좋군. 지금 이 바다야말로 뭇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관을 보여 주거든.”
 신소명은 고개를 치켜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은근한 양광이 부드럽게 두 눈에 스며들었다.
 “멋져! 꼭 천지에 비친 태양을 보는 것 같군!”
 그는 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바다 위에서 보는 해 지는 풍광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늙은 선원이 물었다.
 “천지! 장백산, 아니, 백두산 정상에 있는 그 호수를 이야기하는 겐가? 오호, 그곳에서 왔나 보구먼?”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의 물결도 바다만큼이나 넓고 푸르름을 자랑하죠. 여름에 그곳에서 멱을 감으면 고뿔이 나지 않을까 몸을 사려야 할 정도랄까요! 하하!”
 고국의 멋을 자랑하는 신소명의 목소는 활기찼다.
 늙은 선원이 돌연 목청을 돋구어 시구를 읊었다.
 “낙일적하(落日赤霞) 평채양운(平彩陽澐)이라······, 해가 지어 붉은 노을이 맴도니, 곧은 바닷물로 태양의 물결이 이는구나.”
 신소명은 잠시 울적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시원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선상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
 
 항해의 이틀이 지났다.
 신소명은 그동안 늙은 선원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밤에는 별을 헤아리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첫날 하루는 신기함에 심장이 두근두근거렸지만 이내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일이 배를 타는 거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흐아함!”
 신소명은 갑판 한쪽에 난 탁자에 앉아 늘어져라 하품을 해 댔다.
 이제는 선원들도 신소명이 송나라 말을 제법 한다는 것과 그의 성격이 모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가끔 말을 걸고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여전히 그는 혼자였고, 심심했다.
 “다음번엔 번거롭더라도 꼭 걸어야겠어. 보이는 거라곤 물, 물, 물뿐이니! 이러다 눈이 굳어 버릴 것 같구만.”
 투덜거리는 그의 곁으로 늙은 선원이 걸어왔다. 힘 쓰는 일을 끝낸 듯 목에 걸린 수건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젊은이가 투덜거리는 것도 많네! 발 편하게 옮겨 다닐 수 있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란 말인가?”
 그는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며 신소명의 맞은편 의자에 몸을 실었다.
 신소명은 늙은 노인을 향해 푸념을 내뱉었다.
 “노인장은 참 대단한 거 같습니다. 나란 놈은 천생이 날뛰는 것을 좋아해서 이 좁다란 배 위에 하루라도 더 있다가는 없던 병도 걸릴 거 같은데!”
 처음에야 백 명이 훨씬 넘게 타고 있는 상선이 무척이나 커다랗게 느껴졌지만 딱 하룻밤만 보내고 나자, 더없이 조그마한 골방임을 깨달았다.
 일생을 백두산에서 뛰놀던 그에게는 미칠 노릇인 것이다.
 신소명은 앉은 채 왼발을 들어 발목을 까딱거렸다.
 “벌써 녹이 슨 느낌이유.”
 “허허, 어지간히도 활달하군.”
 늙은 선원은 철이 들면서 시작한 뱃사람 일이 적성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이 다르지 않는지라 신소명의 좀이 쑤심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스운 일이야. 나는 이 배를 대궐처럼 생각하는데 자네는 감옥처럼 지겨워하다니.”
 신소명은 이를 보이며 히죽 웃었다.
 “제 가슴은 세상을 품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껄껄! 자네라면 응당 영웅의 풍모라 할 수 있네.”
 늙은 선원이 즐거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썰미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 훤칠하고 건장한 장신을 지닌 신소명은 무엇으로든 천하에 큰 이름을 떨칠 가능성이 보였다.
 자신의 고국에서 이방의 고려인이 이름을 떨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늙은 선원은 그런 것을 따질 정도로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지켜본 이 유쾌한 고려인은 나라와 나이를 떠나 누구라도 인정할 정도로 뭔가 남다른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늙은 선원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송인(宋人)답지 않은 송인이었다. 보통의 송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중원인(中原人), 세상의 중심에 사는 사람이라고 높여 부르면서 다른 나라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전혀 그런 것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떠돌며 많은 친구를 사귄 결과였다.
 늙은 선원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신소명에게 말했다.
 “자네가 유명해지면 내가 찾아가 술 한 상을 얻어먹겠네.”
 신소명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좋아! 기대하지! 고려의 신소명이 내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것을 말이야. 하하하!”
 늙은 선원이 크게 웃은 다음 다시 일을 마치러 돌아갔다. 신소명은 다시 대화 상대가 없어지자 심심한 표정을 얼굴 가득 지었다.
 그러다 결국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좋아, 자맥질이나 해야겠다!”
 그는 호탕하게 소리치며 겉옷을 훌훌 벗어젖혔다.
 신소명의 외침을 듣고 곁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선원 몇 사람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소형제, 설마 바다에 뛰어들 생각은 아니겠지?”
 “호기는 좋은데 너무 과해! 보기에는 느려 보이겠지만 이 배가 얼마나 빠른데! 자네가 물에 들어가면 우리는 벌써 저만치 앞에 가 있을 거네.”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내 눈에는 굼벵이처럼 보이는데 말이오?”
 “어허, 이 친구! 우리 말을 들으라니까.”
 “교룡(蛟龍)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한순간에 물고기 밥이 되는 게야.”
 선원들은 계속해서 신소명을 만류했다. 고려 장군의 특별한 부탁으로 배에 탄 손님이 물고기 밥으로 변했다고 하면 대체 왕구경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앞에 훤했다.
 하지만 신소명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달음박질을 쳐서 뱃전에서 뛰어내려 버렸다.
 첨벙!
 유려하게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신소명의 모습을 보며, 그 장면을 지켜본 수십 명의 선원들이 경악하며 입을 헤벌렸다.
 순식간에 뱃전의 모든 선원들이 몰려들어 신소명의 생사를 확인하려 애썼다.
 “저, 저런 미친 놈!”
 “살았을까? 아니, 자맥질은 할 수 있을까?”
 “어? 숨을 쉬러 안 나오는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선원들의 소리는 시장판과 다름없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왕구경이 소란스러움을 듣고 선원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이리 시끄러운가?”
 선원들은 왕구경과 신소명이 빠진 수면 위를 번갈아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나?”
 왕구경이 다시 묻자 주저하며 누군가 말을 꺼냈다.
 “그, 그게······ 왕 대인의 손님께서 자맥질을 한다니, 어쩌니 하면서 갑자기 바다 속으로 뛰어내려 버렸습니다.”
 “뭐, 뭐라고?”
 왕구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세상천지에 이곳이 해변도 아니고, 대해 한가운데서 자맥질을 한다는 작자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왕구경은 황당함을 수습하고 곧장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배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항해하고 있는데 바다에 뛰어들었다면 이미 저 뒤로 처진 상태이지 않는가?”
 “그, 그렇습죠.”
 쾅!
 왕구경은 발을 세게 굴렀다.
 “어서 닻을 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어! 어어!”
 갑자기 선원 한 명이 수면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검지를 치켜들고 바다 한쪽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저, 저기 보십쇼!”
 “어헉!”
 그 선원의 지시에 따라 바다로 시선을 옮긴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낮은 경악성이 울려 퍼졌다.
 물 아래로 배와 같은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고, 고래인가?”
 “하지만 고래치고는 덩치가 너무 작은데?”
 선원들이 크게 쑥덕거렸다.
 왕구경 또한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에 놀라며 시선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촤아아악!
 그림자가 물 위로 튀어 오르며 물살을 가득 뿌렸다.
 “으엑, 물맛 한 번 멋지군!”
 그림자의 정체는 신소명이었다.
 그는 긴 흑발을 휘날리며 빠르게 손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물고기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저, 저런 일이!”
 왕구경이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배와 같은 속도로 자맥질을 한다는 것인가.
 그는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물에서 평생을 자란 어부라 하더라도 지금 신소명처럼 빠르게 물살을 가를 수는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모든 힘을 짜낸 단시간일 뿐이지, 오래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어!”
 신소명이 놀라는 선원들을 향해 여유롭게 한쪽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쏜살같은 그의 신형은 흔들림이 없었다.
 “천하 각처를 돌아본 나지만 이런 해괴한 일은 또 처음이군!”
 왕구경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몇 번 흔든 다음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튼 멀쩡하다니 된 것이다.
 선원들도 신소명의 모습에 질려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별다르게 일이 없거나 무료한 선원 몇 명만 턱을 괸 채 그를 구경했다.
 
 “하암! 저 친구, 아직 멀쩡한 것 같구먼.”
 “힘들지도 않나 몰라.”
 마지막까지 신소명을 구경하던 두 명의 선원들도 슬슬 얼굴에 지겨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이 넘었는데 정말 굉장한 작자라니까.”
 “내가 볼 때는 미친 것 같은데?”
 서로간의 잡담도 시들해질 때쯤이었다.
 신소명이 문득 고개를 돌려 두 선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봐, 저기 뭐가 하나 다가오는데?”
 말하며 신소명이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두 선원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한 척의 배가 눈에 띄게 쏜살같은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양을 보니 군함 같은데 무슨 일로 저렇게 빨리 움직인담?”
 “글쎄, 해적이라도 나타났나?”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두 선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해, 해적!”
 “큰일 났다!”
 두 명의 선원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뒤이어 뾰족한 종소리가 뱃전을 가득 메웠다.
 땡땡땡땡!
 급하게 울리는 경종 소리에 왕구경과 배의 선장까지 뱃머리로 달려 나왔다.
 신소명은 뭔가 일이 터졌음을 짐작하고 웃는 얼굴로 배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가볍게 수면을 박차 오른 다음 배의 표면을 밟고 가뿐하게 기어올랐다.
 촤아아악!
 몸에 묻은 바닷물이 비상하는 신소명의 신형에 따라 물안개를 뿌렸다. 그는 날아오르며 힐끔 시선을 돌려 다가오는 군함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커다란 적기(赤旗)를 치켜세우고, 뱃머리에 해골을 치렁치렁 매달아 놓은 커다란 선박은 보기에도 음산해 보였다.
 “허억! 해골혈선이다!”
 때마침 눈이 좋은 선원 한 명이 배의 외관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배 위로 올라 온 신소명은 곧장 익숙한 얼굴인 늙은 선원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몸을 가득 적신 바닷물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늙은 선원은 신소명이 온 것도 모르고 뚫어져라 앞 바다만을 보고 있었다.
 신소명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 어? 자네, 언제 올라왔나?”
 늙은 선원이 잠깐 넋 빠진 얼굴로 신소명을 쳐다봤다.
 신소명은 단단하고 넓은 가슴을 활짝 펼친 채 웃어 보였다.
 “귀신이라도 봤습니까?”
 늙은 선원은 그의 말에 안색을 침중하게 물들였다.
 “봤지. 아니, 귀신보다 더한 놈을 보고 말았네.”
 신소명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 저 놈들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늙은 선원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려 노력하며 말했다. 물론 노력뿐이었고, 그의 주름진 얼굴은 한 줄기 죽음에 대한 체념이 흐르고 있었다.
 “대단하지. 대단하고말고! 활동을 개시한 지 이제 채 일 년도 넘지 않았는데 벌써 이 바다에 공포의 대명사로 구전되고 있으니까.”
 “공포의 대명사라? 으시시하네?”
 신소명은 단어를 곱씹었다. 그의 두 눈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그럼 얼마나 두려운지 구경이나 하고 올까······?”
 그의 얼굴로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가히 우습기만 하다는 조소였다.
 신소명은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 자네!”
 늙은 선원이 그를 불렀지만 신소명은 이미 뱃머리로 걸어간 상태였다. 그곳에는 왕구경과 선장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냐는 것과 항복하고 황금의 얼마를 바치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두 의견 모두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착하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이 모든 것을 죽이고, 강탈하는 해골혈선. 해적들의 집단인 대해수로연맹(大海水路聯盟)에서조차 공적으로 치부하는 악당 중의 대악당이었다.
 협상을 하려 해적들을 이 배에 태우는 순간, 이미 피는 갑판을 적시고 있을 것이다.
 왕구경은 낮은 한숨을 토했다.
 “내 이번에 거래가 잘 되어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어 기뻐했더니, 하늘은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이렇게 나, 왕구경이 몰락하고 마는가?”
 그는 이번에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털어서 교역을 한 상태였다.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다행히 고려에 좋은 값을 주어 팔 수 있었다. 또한 벌어들인 그 돈으로 비싸고 귀중한 고려인삼을 잔뜩 사온 상태였는데 지금 약탈을 당한다면 그는 완전한 파산이었다.
 대상(大商)의 이름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손해는 둘째 치고 낯선 바다 한가운데 물고기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할 판이었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용왕님, 부디 저희들을 돌봐 주시기를!”
 선원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바다 위에서 가장 무서운 해적을 만났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신소명이 왕구경에게 다가가 말했다.
 “해골인지 개뼉다구인지 지나쳐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넘어오려는 놈이야 족쳐 버리면 되는 거고.”
 왕구경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대포까지 장착하고 있는 놈들이오. 거리를 벌린다면 필시 격파 당할 것이고, 구멍 난 배가 무슨 수로 떠 있겠소이까?”
 “흐음.”
 신소명은 팔짱을 꼈다. 대포는 생각 외의 난제였다.
 물론 자신의 경지가 신에 도달했다면 쏘아 오는 대포를 권경으로 파괴시킬 수 있다지만 그것은 아직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였다.
 생각하면서 신소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나도 참 황당한 놈이군. 세상에 날아오는 대포를 도중에 때려 부수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말이지.’
 혼자 웃으며 그는 뒤로 늘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묶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구만!”
 중얼거린 신소명이 왕구경을 제치고 뱃머리 끝으로 올라섰다.
 상체를 벗고 우뚝 선 그의 신형은 마치 철탑과도 같이 우람하여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시종일관 헐렁하고 칙칙한 흑생 장포만 뒤집어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 고려의 대장부는 대단히 훤칠한 근육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소명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대로 수면으로 뛰어 버렸다.
 풍덩!
 다시 그의 몸이 바다 속으로 처박혔다. 선원들과 왕구경은 놀라며 동시에 낮은 외침을 터트렸다.
 신소명은 곧장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왕구경이 그를 향해 고함을 쳤다.
 “소협, 무슨 생각으로 다시 물에 뛰어든 것이오?! 설마 도망치려는 생각은 아니라 믿겠소만!”
 신소명은 왕구경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웃어 버렸다. 바다 한가운데서 혼자 살겠다고 물에 뛰어드는 놈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가던 길이나 계속 가십시오! 나는 저 친구들과 잠시 잡담이나 나누다 올 테니까!”
 말과 함께 신소명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뒤이어 수면 밑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재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선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도 모자랄 판인데 차나 한잔 얻어 마시겠다고 스스로 호랑이 굴로 머리를 들이미는 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왕구경은 허탈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내 이성운 장군께 부탁을 받아 저 고려의 소협을 태웠지만 그가 이토록 기묘한 사람임은 몰랐다.”
 그때 늙은 선원이 왕구경을 달랬다.
 “그는 분명 우리의 어려움을 혼자 해결하기 위해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허허! 아무리 고려의 소협이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혼자 수백에 이르는 해적 놈들을 물리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늙은 선원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어떻게든 하겠지요.”
 왕구경은 찌푸린 얼굴로 늙은 선원을 쳐다봤다.
 “자네 또한 고려의 소협처럼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먼. 후우! 아니네, 어찌됐건 우리가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늙은 선원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중요한 겝니다. 그는 고려를 넘어 우리 송나라에서까지 크게 이름을 떨칠 위인이니 분명 해적 따위도 어렵지 않게 박살낼 수 있습니다.”
 “후우!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왕구경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다가오는 해골혈선을 응시했다. 이제 모두 입을 떼지 않고 간절한 눈빛으로 전방만을 바라보았다.
 신소명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휘리리리릭!
 신소명이 선상으로 올라섰다.
 한참 살기를 달구며 약탈의 재미를 기대하던 해골혈선의 해적들은 물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그를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누, 누구냐!”
 “기습이다!”
 득달같은 고함과 함께 허리춤의 쇠꼬챙이를 뽑아 든 해적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신소명을 쏘아봤다.
 분수자(分水刺)의 첨극(尖極)이 섬뜩한 살기를 피어 올렸다.
 “잠깐, 나 머리 좀 말리고.”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요란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후두두둑!
 긴 흑발을 가득 적신 바닷물이 방울져 사방으로 튀었다.
 파파파파팟!
 “컥!”
 “으헉!”
 물방울이 날아가 신소명을 기습하려던 해적 여러 명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암, 암기다!”
 해적들 사이에서 경고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사냥감 앞의 늑대처럼 떼를 지어 모여들던 해적들이 흠칫 놀라며 재빠르게 걸음을 후퇴했다.
 신소명은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번쩍!
 짙은 흑발 사이로 신소명의 두 눈동자가 새카만 묵광(墨光)을 터트렸다. 마치 암흑의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안광이었다.
 “흐, 흐억!”
 해적들은 동시에 겁에 질린 신음을 터트렸다. 수많은 전투와 살인으로 인해 철담을 지닌 그들이었지만 지금 신소명의 눈빛은 난생 처음 겪는 지독한 기세를 머금고 있었다.
 “너, 너는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침입을······!”
 해적들 사이에서 애꾸눈을 한 남자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나름대로 으름장을 놓아 기세를 꺾어 보겠다는 뜻 같았는데 신소명의 시선을 받는 순간 황급히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신소명은 크게 미소를 지었다.
 “왜, 꼽냐?”
 이를 드러낸 시원한 웃음이었지만 두 눈과 전신에서 뭉클거리며 피어나는 암흑의 투기로 인해 마치 사신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다.
 해적들은 몸을 벌벌 떨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거 뭐야, 생각보다 싱겁잖아?”
 신소명이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시무시하다고 소문이 났다기에 제법 강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삼 할의 투기도 견디지 못하고 꼬리를 마는 것이다.
 그때였다.
 쿵!
 바닥을 울리는 육중한 굉음과 함께 선실의 문이 열렸다.
 “어떤 후레자식이 감히 본 해골혈선에 제멋대로 기어오른 것이냐?”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음습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걸어 나왔다. 쩌렁쩌렁한 목청과는 어울리지 않게 남자는 얼굴이 희고 눈 밑에 시커먼 기미가 잔뜩 끼어 있었다. 살집도 별로 없는 것이 비루먹은 전형적인 낙방 서생의 몰골이었다.
 신소명이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보고 황당하다는 듯 그를 손짓했다.
 “당신, 여기서 한가락하는 것 같은데 왜 몰골이 그따위요?”
 신소명이 중년 남자를 향해 물었다.
 “병든 닭처럼 골골대는군. 분명 저런 닭은 계란도 맛이 없지! 당신은 몹시 영양가 없는 놈이구만!”
 “무슨 개소리냐!”
 번쩍!
 중년 남자의 두 눈에서 짙은 살기가 폭사했다.
 “노오옴! 감히 나 백골인괴(白骨人怪)에게 욕을 해? 네가 오래 살기 싫은 모양이로구나!”
 퍽!
 신소명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주먹을 뻗었다.
 그의 권면을 타고 강력한 경력이 뿜어져 중년 남자, 백골인괴의 안면을 강타했다.
 “크억! 이, 이런!”
 백골인괴는 갑자기 들이닥친 무음무형(無音無形)의 권력에 놀라며 몸을 비틀거렸다.
 주르륵.
 그의 코로 두 갈래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신소명이 그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풉! 쌍코피 났다.”
 “찢어 죽일 놈!”
 백골인괴는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변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는 얼굴이 죽은 시체처럼 핏기 한 점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웅우우우!
 백골인괴의 전신으로 흉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해적들은 그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허둥대며 뒤로 도망쳤다.
 “암습 따위에 당했다고 하나, 그것이 나 백골인괴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은······ 컥!”
 새하얀 얼굴로 음산하게 중얼거리던 백골인괴는 다시 얼굴에 권력을 얻어맞고 몸을 휘청 흔들었다. 그러다가 왈칵 핏물을 뱉어 냈다.
 권력 두 방에 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끄으으으, 믿을 수 없······!”
 이번에도 그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신음처럼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꼬꾸라져 버린 것이다. 눈자위가 하얗게 뒤집힌 것이 혼절한 모양이었다.
 신소명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말 많은 놈치고 센 놈 없기 마련이다.”
 그는 손바닥을 눈 위에 붙이고 사람을 찾는 흉내를 냈다.
 “대장 나으리는 어디 있을까나?”
 “히익!”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서 있던 해적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피하기 바빴다. 이미 손 안의 분수자는 등 뒤로 가린 지 오래였다.
 신소명은 지루한 표정을 짓고는 왼쪽 발을 치켜들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나올지어니.”
 쾅!
 신소명의 올려진 발이 그대로 바닥을 때렸다.
 쿠왕! 쿠쾅!
 그의 발디딤에 따라 폭풍을 만난 듯 배가 커다랗게 흔들거렸다. 진각(震脚)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해적들은 기우뚱거리는 배 위에서 버둥거리다가 각자의 분수자에 상처를 입고 비명을 질러 댔다.
 쫘아아악!
 그 순간 갑판 바닥 일부분에 거미줄처럼 실금이 일더니 폭발하듯 부서져 버렸다.
 둥그렇게 뚫린 구멍 안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어떤 자식이 본좌의 향악을 방해하는 거냐! 친히 죽여 주마!”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사내는 건장한 근육질을 지닌 구릿빛 피부의 대머리였다. 아랫도리의 속곳조차 걸치지 않은 그는 벌거벗은 몸이었는데 지저분하게 자란 털들이 몸을 가득 덮고 있었다.
 신소명은 혀를 내밀고 인상을 찌푸렸다.
 “으엑, 못 볼 걸 봐 버렸군.”
 대머리 사내는 바닥에 쓰러진 백골인괴와 신소명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건 무슨 개지랄이냐?”
 그가 나타남과 동시에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해적들 사이에서 개미 기어가듯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 기습입니다.”
 “누가? 저 자식 혼자?”
 대머리 사내는 신소명을 쳐다봤다. 신소명은 히죽 웃어 주었다.
 “병신 같은 놈!”
 대머리 사내가 벼락같이 손을 휘둘러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백골인괴의 머리통을 부수었다.
 퍼석!
 둔탁한 소음과 함께 백골인괴의 창백한 피부는 붉은 선혈로 뒤덮였다.
 신소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피를 보아서가 아니라 대머리 사내의 잔인한 손속에 거부감이 든 것이다. 수하의 목숨을 취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니. 잔혹했다.
 대머리 사내는 신소명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는 누구냐.”
 신소명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대머리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마를 쳤다.
 “미치겠군! 감히 본좌 해천마종(海天魔宗)을 몰라 봐?”
 신소명 또한 대머리 사내를 흉내 내어 말했다.
 “미치겠군! 감히 이 어르신이 네놈 얼굴이나 외우고 다녀야겠냐?”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놈 좀 죽여라. 뭐냐, 남사시럽게.”
 신소명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숙인 해천마종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렸다.
 그는 전까지 해골혈선의 맨 마지막 층에서 애첩들과 함께 주지육림의 방탕한 놀이를 하고 있다가 선상의 소란스러움에 뛰쳐나왔기 때문에 아직 여체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신소명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해천마종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풉! 번데기.”
 슈악!
 “죽여 버리겠다!”
 해천마종의 육신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파파파파팍!
 그는 순식간에 쌍장을 내리꽂았다. 매서운 한풍과 함께 육중한 장력이 신소명의 전신을 위협했다.
 신소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강해서 다행이군. 그 물건으로 과부 한 명 꾀기 어려울 텐데!”
 꽝!
 중얼거리는 신소명의 자리로 해천마종의 장력이 내리꽂혔다. 바닥이 푹 파였다.
 하지만 신소명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전권에서 한참 떨어진 해적들 사이에 하품을 하며 서 있었다. 뒤늦게 신소명을 알아본 주변 해적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신소명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자리가 비었다. 그곳으로 해천마종이 달려들었다.
 “약삭빠르구나!”
 파앙!
 해천마종의 정권을 손바닥으로 막아 낸 신소명이 눈을 가볍게 찡긋했다.
 “네놈 물건만큼은 안 가벼워.”
 우드드득!
 해천마종의 주먹을 움켜 쥔 신소명의 손바닥이 천천히 오므라졌다. 둔탁한 뼛소리가 뱃전을 가득 메웠다.
 해천마종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신소명이 가볍게 웃었다.
 “손이 말캉말캉한 게 보드랍구먼.”
 콰드드드극!
 신소명의 손은 거의 주먹을 쥔 상태가 되었다. 그 손 안에 공간이 얼마나 있다고 해천마종의 주먹이 들어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해천마종은 속으로 통증의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주먹을 집어삼킨 신소명의 손을 쳐다봤다.
 도대체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거칠고 단단한 주먹이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이토록 무지막지한······!’
 해천마종, 그 또한 권각술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라 크고 단단한 주먹을 지니고 있었지만 신소명의 손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솜 주먹에 불과했다.
 “끄으읍!”
 해천마종은 핏발이 선 눈동자로 신소명을 쏘아봤다. 어서 빨리 으스러지는 주먹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벼락같이 왼 다리를 차 올렸다.
 부웅!
 진기를 가득 머금은 해천마종의 혈천비각(血天飛脚)이 신소명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퍼엉!
 혈천비각은 올곧게 적중했다.
 신소명은 무심한 눈으로 해천마종을 쳐다봤다. 진기를 가득 머금은 발차기를 급소의 하나인 관자놀이에 맞았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먼지를 털어 주다니, 친절한 놈이네?”
 신소명이 물끄러미 해천마종을 바라봤다.
 흑백이 선명한 신소명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본 해천마종은 알 수 없는 불길한 공포를 느꼈다.
 신소명이 히죽 웃었다.
 “쫄지 마. 어째 송나라 악당들은 이렇게 간이 작냐?”
 “송나라······의 악당?”
 해천마종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신소명의 말을 들음으로써 그가 자신과 같은 중원인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크흐흐······ 알고 보니 이국의 잡혈이었구나. 중원에 나 따위는······. 진정한 고수를 만난다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쾅!
 신소명은 그대로 이마로 해천마종의 얼굴을 받아 버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해천마종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파들파들 떨리는 사지 육신은 고통에 겨워 하고 있었다.
 “두고 보자는 놈이나, 무사하지 못한다는 놈이나 다 그렇고 그런 졸장부일 뿐이지.”
 신소명은 헝클어진 흑발을 뒤로 넘기며 주변을 돌아봤다.
 갑판을 가득 메운 해적들은 불신과 경악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잔혹과 냉정함으로 자신들을 이끌었던 해천마종이 고작 박치기 한 방에 기절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신소명은 그들을 보며 낮게 웃었다.
 “해적들이니 모두 물질은 잘하겠지?”
 그는 곧장 신형을 날려 뱃전의 중심에 위치한 돛대의 꼭대기로 올라섰다.
 찰나지간에 해적들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고개를 꺾어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해적들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신소명은 천천히 두 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콰직!
 돛대로부터 미세한 균열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롯이 올라선 돛대의 꼭대기에서 신소명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쿵!
 “엇, 어어억!”
 “으아아악······!”
 파도 한 점 없이 고요한 수면으로 해골혈선만이 폭풍을 만난 듯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두두두둑!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신소명이 서 있는 돛대가 망치로 내려치는 못처럼 아래로 움푹 들어가 버렸다.
 쿵! 쿵!
 신소명은 뒤이어 두 번 더 발을 굴렀다.
 돛대는 거의 절반 이상이나 갑판을 뚫고, 배의 밑창으로 튀어나왔다.
 “나무 꼬챙이에 메뚜기를 끼워 놓은 몰골이겠군!”
 신소명은 해골혈선의 상태를 상상하며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이에 산적들은 두 개뿐인 소형선을 바닷물에 띄우고 서로 타기 위해 우왕좌왕 미친 듯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선실에서 발가벗고 튀어나온 다섯 명의 여인들도 목소리가 찢어져라 고함을 치며 소형선에 타기 위해 악을 써 댔다.
 신소명은 그런 아비규환을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았다.
 한계는 열 명 남짓인데, 오십 명이 넘는 해적들이 서로 탑승하려 하니 결국은 소형선마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을 일이 자명했다.
 “오호, 통재라! 저곳이 지옥이로고!”
 혀를 찬 신소명은 힐끗 앞을 쳐다봤다.
 이미 왕구경의 상선은 저만치 앞에서 바람을 타고 있었다.
 이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선원들과 왕구경의 시선을 느끼며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가라고 정말 가네? 치사하긴!”
 
 
 
 
 
 第三章 은(恩)을 만들고 원(怨)을 맺다
 
 
 
 
 
 
 
 
 
 
 
 “고마웠습니다, 대협!”
 “어흠! 별말씀을.”
 호화로운 장원을 나서는 신소명과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왕구경.
 해골혈선의 사건 이후, 왕구경은 신소명을 대협이라 높여 부르며 극진을 다해 그를 대했다.
 관선도 붙잡지 못한 공포의 해적들을 단신으로 격파했으니 절로 대단한 존경심이 생긴 것이다. 또한 전 재산과 다름없는 교역품과 목숨을 지켜 주었으니 그야말로 다시없는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왕구경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고려로 돌아가실 때에는 다시 한 번 뵈었으면 좋겠군요.”
 신소명은 그렇게 무림의 첫 발을 내딛었다. 과한 왕구경의 인사와, 그에게서 건네받은 묵직한 주머니와 함께.
 
 ***
 
 
 신소명은 왕구경이 마련해 준 튼튼한 흑마에 몸을 싣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디 보자, 철혈문이 어디쯤이라더라?”
 신소명이 품 안에서 조그마한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왕구경이 철혈문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에게 선물한 것으로 송나라의 대략적인 성도(省都)가 그려진 지도였다.
 국법으로 개인의 지도 사용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나 왕구경은 이름 있는 상인이었고, 사소한 뒷거래로 하여금 지도를 신소명에게 전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신소명은 두툼한 손가락을 뻗어 산동이라고 쓰인 부분을 짚었다.
 “여기가 내가 있는 산동성이고, 어디 보자, 여기가 동천이라는 곳이구만. 얼마 안 머네!”
 그는 위치를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왕구경의 상선이 송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그동안 신소명은 그의 장원에서 머물며 왕구경이 붙여 준 사람을 통해 이런저런 무림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풍령개(風令丐)라는 이름의 그는 귀가 밝고 아는 것이 많았다. 또한 이유청과 그의 동생은 무척이나 유명 인사였다.
 신소명은 자신의 간단한 계획이 조금 흔들린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신했다.
 “생각보다 떨거지들이 많은 모양이긴 한데, 뭐 문제없어. 당당하게 데리고 나오면 되니까!”
 하고자 하면 하늘이 말려도 이루고야 만다.
 정면돌파!
 이것이 신소명을 가장 단면적으로 잘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히이잉!
 갑자기 뒤편에서 거센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땅을 흔들리게 하는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신소명은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뒤에서 이두 마차가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신소명은 고삐를 잡고 말을 갓길로 몰았다.
 두두두두두두!
 질주하는 이두 마차는 성난 파도 위에 휩쓸린 부표처럼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이랴, 한시가 급하구나!”
 날뛰는 말을 이끌고 마부석에 앉은 남자가 쉴 새 없이 채찍을 뿌려 댔다.
 이두마차는 금세 신소명의 앞으로 지나쳐 사라졌다. 서로가 교차하는 시점에서 마부가 고갯짓을 해 양해를 구했다. 얼굴에 잔뜩 뒤덮인 어두운 기색을 본 신소명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지나쳐 보냈다.
 “성격 한번 급하군. 귀리 달린 지팡이라도 들고 있나?”
 중얼거리며 신소명은 다시 여유롭게 말을 몰았다.
 그가 지닌 일신의 경공절학에 비교하면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릿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신소명은 전혀 조급해 하지 않았다.
 급한 것은 철혈문이지 자신이 아니지 않던가.
 난생 처음 백두산을 내려와 멀리 이국의 강산을 구경하는데 차근차근히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
 
 드넓은 평야에 밤이 다가왔다.
 신소명은 굵은 아름드리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야숙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집어 모은 신소명이 낮게 투덜거렸다.
 “제길, 미련하게 넓은 땅덩어리! 반나절을 꼬박 움직였는데 촌 동네 한 곳 보이지 않는구만!”
 화르르륵!
 투덜거리는 신소명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에서 짙은 묵색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갑자기 피어나는 암흑의 불길은 귀신의 매화(鬽火)와 같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면 기겁을 했을 정도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시커멓게 불타는 나뭇가지는 장작에 들러붙은 순간, 원래의 제 색인 홍염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홍염 속에 묵염은 뒤섞이듯 사라졌다.
 장작불을 붙인 신소명은 말 등에 실어 놓았던 보퉁이를 뒤적거렸다. 속에는 왕구경이 집어 넣어준 이런저런의 물건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신소명은 보퉁이 속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를 펼치자 짙은 육향을 풍기는 건포가 보였다.
 “어이쿠, 누렁이님이구만.”
 신소명은 짐짓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짙은 육향을 풍기는 건포는 소고기로 만든 것이었다.
 고려에서 소는 보물 중의 보물인지라 이렇게 음식으로 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천석의 땅을 가진 토호라도 감히 소를 잡지는 않았다. 부를 벌어 주는 집안의 보물인 것이다.
 신소명 또한 이제까지 소고기를 먹어 본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백두산 야생에서 자란 암소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을 때 반쯤 남은 몸뚱이를 이고 가서 백두촌의 사람들과 함께 고아먹은 게 전부였다.
 신소명은 천천히 건포를 씹었다. 입에 넣는 순간 짙은 소고기의 육즙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죽이는군!”
 신소명은 몇 번 씹지도 않고 건포를 꿀꺽 삼킨 다음 감탄을 뱉었다. 대단히 뛰어난 맛이었다.
 “이런 맛에 술이 없다는 게 슬프구만!”
 그는 백두산에 있을 때 온갖 약초와 열매로 술을 빚는 것을 취미로 삼았을 정도로 주도(酒道)에 아주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신소명은 간절히 생각나는 산딸기 술을 추억하며 건포를 왕창 입에 구겨 넣었다. 그것은 신소명을 매우 행복하게 했다.
 신소명이 부풀어 오른 개구리의 볼따구니처럼 건포를 질근질근 씹어대던 때였다.
 부스럭!
 근방의 어느 곳에서 아주 미세한 풀잎 스치는 소리가 신소명의 귀를 간질였다.
 그는 모른 척 건포를 씹는 데 열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먼저 아는 체할 필요도 없었다.
 신소명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그가 만들어 놓은 장작불의 경계로 걸어왔다.
 “형제, 나에게 같이 쐴 불기를 빌려 주시겠나?”
 한밤중의 방문객은 낮은 목소리의 남자였다.
 신소명은 그가 몹시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너무 쉬어서 숨소리가 가득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소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닳는 것도 아니고 어서 오시구려!”
 “고맙소!”
 남자가 불가로 걸어왔다. 그의 모습이 천천히 발끝부터 얼굴까지 드러났다.
 “어?”
 신소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 또한 그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우리는 초면이 아니구려.”
 “그렇······소.”
 남자는 오전 무렵 신소명을 제치고 급하게 마차를 몰던 바로 그 마부였다.
 신소명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 물었다.
 “그런데 마차는 어디 가고 야밤에 떠돌아다니는 거요?”
 남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이 죽었으니 마차가 왜 필요하겠소.”
 “쯔쯔! 그러게 너무 혹사를 시킨다 했지.”
 신소명이 혀를 차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황금을 주고 구입한 명마인데······ 이리 쉽게 쓸모가 없어질 줄은 생각조차 못했소.”
 “당신같이 급하게 말을 몰다가는 천하의 말이 아주 씨가 마를 거외다.”
 “후후! 하지만 어쩌겠소. 마음이 초초한 것을······.”
 남자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신소명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 다음 손 안의 건포 주머니를 건넸다.
 “고맙소이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품 안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가죽 물통을 꺼냈다.
 “꿀꺽꿀꺽!”
 그는 자신이 먼저 두 모금을 들이킨 다음 신소명이 건넨 건포를 씹었다. 그리고 가죽 물통을 신소명에게 주었다.
 신소명은 벌써부터 알딸딸한 냄새를 맡은지라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가죽 물통을 들이켰다.
 “크아! 알고 보니 아주 선견지명이 좋은 양반이셨구만. 역시 건포에는 이 녀석이지!”
 신소명은 기분이 좋아져 빙글빙글 웃었다.
 정제되지 않은 싸구려 탁주였지만 거친 황야와 딱 어울리는 맛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군. 나는 고려의 신소명이라고 하외다.”
 “음. 해동(海東)의 친구셨구려. 본인은 곽천우(郭天雨)라고 하는 사람이오. 보다시피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털이라오.”
 신소명은 낮게 웃으며 가죽 물통을 들어 올렸다.
 “지금 여기, 이 녀석이 있으면 세상에 더없는 부자인 거요. 그런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던 중이셨소?”
 곽천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일이 사별한 아내의 기일이라 향을 올리기 위해 바삐 달리던 중이었소.”
 “저런!”
 신소명은 혀를 찼다.
 “그럼 어서 가보쇼. 여기서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야지!”
 곽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없고 마차도 없는데 어찌하겠소? 내 아무리 두 다리가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하룻밤에 초작(焦作)까지 당도할 수는 없소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허탈감이 가득했다. 하나뿐이고, 하나뿐일 아내와 일찍 사별한 것도 비분에 잠길 일인데 일 년에 한 번뿐인 아내의 기일을 제때 챙겨 주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마음을 짓누른 것이다.
 신소명은 안쓰러움에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그 초작이 어디 붙어먹은 땅인데 그러시오?”
 “하남성(河南省) 서쪽, 산서(山西)와 가까운 곳이외다. 마차를 달려도 쉬지 않아야 하는데······ 후우!”
 곽천우의 목소리에 짙은 상실감과 포기가 묻어났다. 불가능함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신소명은 잠시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하남성 부분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지도를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능하겠군.”
 곽천우가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신소명을 쳐다봤다.
 “무엇이 말이오?”
 신소명은 그의 시선을 받고 빙긋 웃어 보였다.
 “당신은 오늘 운이 아주 좋은 거요. 이토록 훌륭한 녀석을 지니고 나를 만났으니까!”
 그는 가죽 물통을 다시 한 번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아! 좋군!”
 신소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흑마에게 다가갔다.
 흑마는 근처에 풀을 뜯고 있다가 걸어오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신소명은 말의 긴 목줄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고생을 좀 해야겠다.”
 히이잉!
 흑마가 긴 울음을 내뱉었다.
 신소명은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빳빳이 세워 말의 귀 밑을 빠르게 찔렀다.
 손가락이 두 마디나 피부를 뚫고 틀어박혔다. 하지만 흑마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입 안에 있는 풀을 마저 씹었다.
 신소명은 손가락을 뽑아내고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곽천우를 향해 말했다.
 “이 녀석을 타고 가시구려.”
 곽천우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돼, 됐소! 어차피 시간은 늦었고, 말을 탄다고 해도 도착하리라 생각하지 않소. 마음만 귀중히 받겠소이다.”
 신소명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따위는 소인배나 하는 거요! 어서 오르기나 하라니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떨어지지 않게 바짝 엎드려야 할 거요.”
 곽천우는 계속 주저했지만 신소명이 억지로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흑마의 안장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는데 한 마리의 말로는 도착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후우. 형제의 마음은 고마우나, 전설의 한혈마(汗血馬)가 와도 부족한 일이거늘······, 으엇!”
 곽천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신소명이 흑마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겼기 때문이다.
 흑마는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갔다.
 곽천우는 주변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말의 속도에 크게 놀라 말의 목을 부여잡고 엎어졌다.
 히이이잉!
 흑마는 주변을 둥글게 달린 다음 신소명의 앞에 다시 멈춰 섰다. 길게 울음을 터트리는 흑마의 소리는 천둥처럼 우렁찼다.
 신소명은 말이 멈춰 섰는데도 꼼짝 없이 말등에 붙어 있는 곽천우를 보고 배를 붙잡으며 웃었다.
 “으하하하핫! 결국 내 말대로 되었군!”
 곽천우는 신소명의 놀림에 부끄럽기보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찌 말이 이리 빠른 움직임을 낼 수 있소? 보기에 보통의 준마 같은데 한혈마가 따로 없구려!”
 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말소리가 고함을 치듯 쩌렁쩌렁했다.
 신소명이 들뜬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 신소명은 고향에서 정직과 정의로움의 대명사로 통하지. 내가 된다고 하면 세상에 못할 것은 없는 거요!”
 득의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신소명.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독문기법 중의 하나인 격혈진기(激穴眞氣)를 흑마에게 주입했다.
 격혈진기란 생명체의 어느 특정한 혈도를 연속적으로 자극하여 대상의 생명력을 활발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쉽게 말해 몸속의 잠력을 끌어내는 기법이었는데, 선천진기(先天眞氣)를 고갈시키지 않고 어떠한 후유증도 남기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 선천진기를 소모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잠력을 만들어 내어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소명이 흑마에게 주입한 격혈진기는 하루치의 분량.
 시간이 지나면 흑마는 만들어진 잠력을 다 소모할 것이고 보통의 준마로 돌아갈 것이다.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도착하고 나면 말을 잘 먹여야 할 거요. 신명나게 달렸을 테니 배가 몹시 고플 테니까.”
 격혈진기로 인해 만들어지는 잠력의 재료는 음식.
 많이 먹어 둬야 오래, 빨리 달리고 도착한 다음에도 많이 먹어 줘야 소모한 체력을 복구하는 것이다.
 곽천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겠소! 시간 안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황금이라도 가루로 빻아 먹이겠소이다!”
 “배도 안 부른 금 부스러기는 됐고, 귀리나 실컷 먹이쇼!”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흑마의 몸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때 곽천우가 신소명을 향해 할 말이 있는 얼굴을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곽천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나를 쫓는 무리가 있소이다. 필시 지금도 내 뒤를 추적하는 중일 거외다.”
 신소명이 피식 웃었다.
 “돈이라도 떼먹었소?”
 곽천우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내 처가의 종복들이오.”
 “응? 사위 사랑은 처가라는데 왜 이 동네는 그게 반대인 거요?”
 신소명이 황당하다는 듯 묻자, 곽천우는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아내가 일찍 단명했다고 여기고 있다오. 애초에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반대했기에 그 증오는 아직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소······.”
 신소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사랑은 둘이 하는데 왜 집안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훼방을 놓는지 알 수가 없군. 게다가 사람은 제 팔자가 있는 법이라 먼저 갈 수도 있고 늦게 갈 수도 있는 건데 뭘 그거 가지고! 언제 죽든 나중에 극락에서 다시 만나면 될 거 아니오?”
 곽천우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극락이라······. 나는 분명 지옥에 떨어질 게요.”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 같은 애처가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옥황상제가 궁녀들에게 무슨 구박을 들으라고! 분명 당신의 애처심은 하늘의 궁녀들도 감탄하고 있을 거요.”
 그는 말을 마치고 곧장 흑마의 엉덩이를 때렸다.
 “말이 너무 길군! 잡담은 나중에 합시다. 어서 가쇼!”
 히이이잉!
 흑마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곽천우는 뭐라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말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이내 몸을 바짝 숙이고 말았다.
 흑마는 순식간에 멀리 사라져 버렸다.
 신소명은 곽천우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웃으며 서 있은 다음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진정한 남자를 보게 되어 훈훈하게 떠올라 있던 미소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고, 은근한 모닥불에 부드럽게 풀렸던 인상도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첨예한 소리가 장내를 휘몰고 지나갔다.
 스스스슷!
 바람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물체가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런, 오늘 밤은 손님이 많으시구만.”
 뚜둑. 뚜둑.
 신소명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며 손을 풀었다.
 “밤에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송나라 놈들은 예의가 없군······.”
 신소명은 어둠을 응시하며 눈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벅. 저벅.
 어둠의 자락을 뚫고 다섯 명의 흑의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신발은 물론이고 장갑과 복면까지 검정색이었다.
 신소명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와, 너무 노골적인 밤도둑 놈 꼬락서니다!”
 “······건방지구나.”
 중앙에 선 흑의인이 중얼거렸다.
 “곽가, 그 천하의 무뢰배는 어디 있지?”
 짐짓 신소명이 눈매를 좁혔다.
 “감히 나에게 곡차를 선물한 마음 넓은 애처가를 욕해?”
 화르르르륵!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힘을 잃고 꺼질 듯 비틀거렸다.
 촤앙!
 다섯 명의 흑의인이 동시에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곽가의 조력자로구나!”
 “그놈을 어디에 숨겼지?”
 흑의인들이 경각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소명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모른 척을 했다.
 “어디서 개가 짖나, 잡음이 들리네.”
 중앙의 흑의인이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서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위대한 사마검문(司馬劒門)의 무인들을 개 취급 하는 것이냐······?”
 신소명은 턱을 긁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사마검문이 뭔데? 미안하지만 여기서 통하는 이름은 지금 나한테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해. 사마가 누구고 우마(牛馬)가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쩌어엉!
 다섯 명의 흑의인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바람이 갈리고 맑은 검명(劒鳴)이 어두운 장내에 휘몰아쳤다.
 “본가를 농락하지 마라!”
 “잡졸! 감히 천하제일검문(天下第一劒門) 사마세가를 모욕하는 것이냐?”
 분노에 가득 찬 흑의인들의 짙은 살기가 신소명에게 쏘아졌다.
 쿵!
 신소명이 발을 굴렀다. 그 순간 혈향을 부르듯 그에게 날아간 흑의인들의 매서운 살기가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히죽!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이렇게 민감들 하실까? 진정해!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한 법이라구.”
 “이잇, 머리 위에 달린 것이 필요가 없는 모양이구나!”
 능글맞은 신소명의 여유로운 작태가 흑의인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중앙의 흑의인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뒤따라 좌우로 두 명의 흑의인들이 산개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스스스스삭!
 바람을 가르는 검신의 예리한 소리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신소명은 삐딱하게 선 채 그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가장 먼저 다가온 중앙의 흑의인이 목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슈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빛살과도 같이 궤적을 그리는 흑의인의 검.
 신소명의 몸이 움직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꼭 매를 번다니까!”
 혀를 차며 날아간 신소명의 우장이 곡선을 가르는 흑의인의 검면을 후려쳤다.
 짜앙!
 장력에 검신이 부러지며 검극이 팽그르르 돌아 바닥에 박혔다.
 흑의인이 부러진 반검에 경악하기도 전에 신소명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왼팔을 굽혀 팔꿈치로 반원을 그렸다.
 촤아아악!
 바람이 찢겨지고, 흑의인의 가슴 또한 기다랗게 상흔이 패였다.
 “크윽!”
 흑의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비틀거렸다.
 신소명은 그를 놓치지 않고 다시 오른팔을 들었다. 이번에는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두껍고 커다란 신소명의 주먹이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가슴을 부여잡은 흑의인을 뒤덮었다.
 흑의인이 눈이 크게 홉떠졌다.
 그 순간이었다.
 “대주!”
 좌우 한 쌍으로 나뉘어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검을 앞세워 신소명의 급소를 노렸다.
 신소명은 권을 뿌리는 과정에서 힐끗 주변을 살펴봤다.
 네 개의 검.
 네 곳의 방향.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게 표적을 노리는 네 명의 합격술은 자로 잰 듯 정확했다.
 이대로 주먹을 회수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목숨은 취할 수 있되, 큰 상처를 입을 판이었다.
 신소명은 미련 없이 권을 회수했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으며 쭉 뻗은 오른 다리를 풍차와 같이 휘돌렸다.
 치이이익!
 지면으로 짙은 먼지가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피해라!”
 대주라 불린, 가슴에 상처 입은 흑의인이 경각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곧장 세 명의 흑의인이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한 명의 흑의인만은 살기를 머금고 검로를 되돌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불쑥!
 흙먼지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신소명의 왼손이 그의 목 줄기를 쥐어 잡았다.
 “컥, 커억!”
 흑의인은 조여 오는 손아귀의 힘에 숨이 막혀 눈을 부릅떴다.
 우드드득!
 목에서부터 시작된 뼛소리가 몸속에 가득 울려 퍼졌다.
 “커걱······!”
 떨그렁!
 흑의인의 검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의 두 발은 이미 땅을 벗어난 상태였다.
 신소명은 왼손으로 흑의인의 목을 움켜잡은 채 거리를 두고 떨어진 나머지 흑의인들을 쳐다봤다.
 씨익!
 흰 치아로 웃는 신소명의 미소에 흑의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계속 할래?”
 콰당!
 목을 움켜잡고 있던 흑의인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말하는 신소명.
 “야밤에 괜히 땀 빼지 말고 곤히 가던 길 가자고. 나는 그 곽천우, 아차! 이건 실수다. 아무튼 그 사람을 못 본 거고 너희들은 그냥 지나간 거야.”
 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흑의인들은 다시 한 번 분노의 불씨를 되살렸다.
 비살오검대의 대주가 가슴의 상처를 억누르고 신음처럼 외쳤다.
 “사마검문 최고의 정예······ 우리 비살오검대(秘殺五劒隊)를 한낱 삼류 무사로 취급하는 것인가?”
 신소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봐, 솔직히 난 너희들이 누구인지 몰라. 사마검문이 뭐하는 작자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왜 자꾸 너희 송나라 놈들은 멍청하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는 건데?”
 비살오검의 대주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는······ 중원인이 아니로구나. 그래, 그렇다면 본가의 이름을 듣고도 저리 태연자약할 수 있었겠지! 하······, 새외(塞外)의 무리 중에 이런 강자가 있었던가?”
 신소명은 검지를 들어 흔들었다.
 “그 반대지. 나야말로 알량한 송나라 무공 나부랭이가 겉멋만 잔뜩 들어간 허풍선이 신공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그럭저럭 쓸 만하다고 말이지.”
 신소명은 말하며 흑의인들을 힐끗 살펴봤다. 그가 바닥에 내팽개친 흑의인까지 대열에 합류한 비살오검대는 천천히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신소명은 그들의 의도를 모른 척 넘어갔다.
 “그래. 그러면 이제 가던 길 갈 수 있겠지? 나는 잠이 많은 사람이야. 또한, 이 수다는 재미도 없고, 너희들이 미녀이거나 돈 많은 부자도 아니잖아? 그만 하자고. 어때, 접수 했지?”
 신소명은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렀다. 귀찮음이 가득 한 건성 어린 표정.
 비살오검대의 대주가 짧게 말했다.
 “그것은······ 염라대왕에게 물어봐라!”
 번쩍!
 검광이 번뜩였고, 다섯 갈래의 검기(劒氣)가 십자를 그리며 신소명에게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빛살, 신소명은 피하지도 못하고 검기의 그물 속에 갇혀 버렸다.
 펑! 퍼펑!
 검기가 작렬했다.
 짙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후욱! 후욱!”
 비살오검대의 흑의인들은 급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들의 얼굴은 몹시 피곤으로 가득해 보였다. 또한 격한 호흡을 숨기지 못했다.
 찰나지간, 전력을 다해 뽑아낸 검기의 발현 때문에 체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검기는 일류경(一流境)의 무예를 통해 깨달을 수 있고 발현할 수 있으나 기의 운집이 오래 걸리며, 연이어 발현할 수 없다.
 검기의 자유로운 수발을 위해서는 능히 심의통행(心意通靈)하는 절정지경(絶頂之境)의 초입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그래야 더 높은 단계로 진보할 수 있다.
 비살오검대가 일류경의 뛰어난 고수들임은 맞으나, 아직 절정지경의 단계는 요원한 일이었기에 이렇게 지쳐 하는 것이었다.
 비살오검대의 대주가 피곤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새외의 천둥벌거숭이라고 해도 다섯 개의 검기를 맞고도 무사할 리는 없겠지. 곽가의 소재를 다시 추적하는 일은 힘들겠지만 그자의 뛰어난 조력자를 제거했으니 이익이라고 할 수 있겠······.”
 그는 갑자기 이어가던 말을 잊어버렸다.
 후웅······.
 자신의 머리 위를 가득 뒤덮는 시커먼 그림자 때문에.
 콰앙!
 포진한 그들의 머리 위에서 묵색의 육신이 떨어져 내렸다.
 땅이 울리고 귀청이 멍멍하다.
 추락의 주인공은 신소명.
 그는 곧장 가까이 있는 흑의인을 향해 달려들어 낮게 몸을 띄웠다. 그리고 흑의인의 지척에 도착한 순간 왼발을 위로 치켜들며 곧장 두 주먹을 앞으로 휘둘렀다.
 퍽! 퍼벅!
 발꿈치가 닿기도 전에 가슴에 권을 맞은 흑의인이 울컥, 피를 토했다. 이어서 흔들리는 흑의인의 뒷목으로 철퇴와 같은 신소명의 발꿈치가 틀어박혔다.
 빠각!
 흑의인은 축 늘어진 목으로 맥없이 허물어졌다.
 신소명은 내리꽂힌 왼발과 함께 그대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허억······!”
 등 뒤에서 암습을 노리던 흑의인과 신소명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흑의인은 야수와 같은 신소명의 살기를 직시하고 낮은 신음을 토했다.
 신소명은 왼 다리의 안쪽 관절로 흑의인의 목을 휘어감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새외의 잡놈!”
 세 개의 검이 날아들었다. 예리한 기세였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신소명은 손바닥을 활짝 펼쳐 날아오는 검날을 후려쳤다.
 핑! 피핑!
 검신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부러져 나갔다.
 신소명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런, 미안해서 어쩌나. 그 염라대왕이 바로 나인데.”
 
 신소명은 짙은 어둠 속에 우뚝 섰다.
 아직 절반 이상이 남아 있는 가죽 물통을 손에 든 그는 벌컥거리며 내용물을 들이켰다.
 단숨에 가죽 물통을 비운 신소명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이래서 사람은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한다니까.”
 
 
 
 
 
 第四章 금기(禁忌)의 이름
 
 
 
 
 
 
 
 
 
 
 
 볕이 푸근한 낮이었다.
 “하으음! 날씨 좋군!”
 신소명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말 위의 출렁출렁 흔들리는 느낌이 너무도 나른하게 전해졌다.
 신소명은 찔끔 흐른 눈물을 닦아 내며 말의 갈기를 만지작거렸다. 묵묵히 걷던 백색의 준마가 낮게 하품 섞인 고개를 흔들었다. 나른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끄으응······.”
 그때 신소명의 뒤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소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 말 엉덩이 부분에 시체처럼 늘어진 사내가 짐짝처럼 실려져 있었다.
 “으윽, 이게 무슨 일이지?”
 사내는 정신을 차리며 꽁꽁 묶인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그는 잠시 당황하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소명이 말을 세우며 안장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정신이 좀 드시오?”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목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애썼다.
 “당신은 누구요? 또 난 왜 이렇게······?”
 “산도적 소굴에 자빠져 있는 걸 주웠수다.”
 “주웠······다고요?”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를 추억하듯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
 “산 고개를 넘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산적 나부랭이들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내 앞에서 미친년 봉산탈춤 추듯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겠소? 가소로워 몇 번 쓰다듬어 주니 아주 눈물을 찍 흘리며 아부를 떨더이다. 요기나 하려고 산채로 들어갔는데 잘못했니, 어쩌니 떠들어 대면서 물 먹은 거적때기처럼 늘어진 당신을 내놓지 뭐요? 나를 사람 구하는 협객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대로 버려두기 뭐해서 말 한 마리 얻어서 뒷자리에 태웠소.”
 심드렁한 신소명의 목소리에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드디어 그 망할 산채에서 벗어나게 되었구나!”
 사내는 곧장 말을 이었다.
 “은인께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소명이 어색해 하는 기척을 내자 사내가 이어 말했다.
 “생명을 구해 주고 명예를 지켜 준 은인께 어찌 함부로 말을 하겠습니까. 저 하문룡(河門龍), 비록 천한 신분이나 은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문룡의 목소리가 너무 확고한지라 신소명은 말없이 길게 늘어트린 머리만 매만졌다.
 하문룡이 말했다.
 “그것보다 이제 나를 좀 풀어 주지 않겠습니까, 은공?”
 신소명은 잊었다는 듯 검지를 퉁겼다.
 피잉!
 낮은 파공음과 함께 하문룡을 묶었던 밧줄이 잘려 나갔다.
 “······!”
 하문룡은 눈을 크게 떴다.
 쿵!
 덕분에 안장 위에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하문룡은 벌떡 일어나 신소명을 쳐다봤다.
 “이토록 선명한 지풍은 듣지 못했는데!”
 말하며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산채를 무너트린 분이 이 정도 지풍을 쏘아 내는 것이 무엇이 어려울까.”
 그는 곧게 서서 포권을 해 보였다.
 “제대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광동(廣東)의 하문룡입니다. 생명의 은인께 알려드릴 외호가 없어 부끄럽습니다.”
 신소명은 손을 저으며 마찬가지로 포권 했다.
 “백두산의 신소명이외다. 마찬가지로 외호 나부랭이는 없수다.”
 하문룡은 눈을 크게 뜨며 이채 어린 눈으로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은공 같은 고수에게 외호가 없다니······. 아! 강호에 출도하신 지 많은 시일이 지나지 않은 모양이군요.”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룡은 그런 신소명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은공과 같은 고절한 무예를 지니고 있다면 필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은공의 위명이 강호를 뒤덮을 것입니다.”
 신소명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해천마종이니 어쩌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별명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외다.”
 “해천마종? 그를 보셨습니까?”
 문득 하문룡이 놀란 듯 되물었다.
 신소명은 그와 싸운 이야기를 짧게 말해 주었다.
 하문룡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그가 비록 바다의 해적 따위라고는 해도 적수가 없어 흉포한 악당이었는데······ 그를 해치우다니 과연 은공은 무예에 도통하셨습니다.”
 신소명이 이채롭다는 듯 하문룡을 쳐다봤다. 산동의 무역상인들 사이에서나 악명이 높은 줄 알았던 해천마종을 어떻게 멀리 떨어진 광동의 사람이 아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문룡은 신소명의 마음을 읽은 듯 빙긋 웃어 보였다.
 “낭인(浪人)은 귀가 밝지요. 곧 제 귀에, 동료들의 귀에 은인의 이름이 지겹도록 들릴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인근 마을까지 동행했다.
 객잔에 자리를 잡고 음식과 술이 나왔다.
 하문룡은 혼자 다섯 잔을 금방 마시고 긴 장탄식을 내쉬었다.
 “후······! 다섯 달은 머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황룡문이 이토록 빨리 패망할 줄이야. 하하, 봉급조차 받지 못하고 도망자 신세가 될 줄 알았다면 진즉 귀석문으로 투신하는 것을.”
 신소명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으로 작은 의구심이 머물러 있었다.
 하문룡이 아, 하며 설명했다.
 “저는 낭인입니다. 일정한 봉급을 받고 힘을 빌려주는 임시 문도라고 할 수 있죠. 주로 전운이 감돌거나, 박빙의 승부가 지속되는 곳에 고용되는데······ 선택은 반반입니다. 승기가 기우는 곳에 고용되거나, 봉급을 더 받고 불리한 곳에 고용되는 겁니다. 물론 저는 모험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승기가 짙은 곳을 찾아갔지요. 하지만 선택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문룡은 쓰게 웃었다.
 “내통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적들이 더 큰 아군을 불렀을 줄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덕분에 도망치다가 가진 것 다 털리고 귀석문에게 패잔병으로 팔리게 될 팔자였는데 은공 덕분에 한목숨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신소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룡은 독작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후우······. 이제 어디로 가면 좋단 말인가? 경천방(驚天幫))? 아니다. 경천방주 조 대인은 심보가 고약하니 안 되겠고······. 암전문(暗箭門)? 사사림(士師林)?”
 그의 안색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동전 몇 푼에 생명을 파는 낭인. 어디를 가든 천대받기 마련이고 생사를 오가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죽음 속에 밀어 넣는 일이었다. 동전 몇 푼으로.
 
 다음날, 신소명은 이른 시간에 객방을 벗어났다.
 일층으로 내려와 점소이에게 간단한 아침과 노상에서 먹을 음식을 주문하는데 객잔 입구로 초췌한 얼굴의 하문룡이 들어왔다.
 “아, 은공. 일어나셨습니까?”
 그는 곧장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신소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문룡을 다시 살피니 어깨로 축축한 이슬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하문룡이 쑥쓰럽게 웃으며 손으로 어깨를 털었다.
 “새벽부터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옷자락이 젖었군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보람은 있군요. 다행히 용부(傭夫)에서 시기에 맞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용부란 낭인들의 연합으로 개방(丐幫(확장한자))만큼이나 역사가 깊고, 그 세력이 도처에 려 있다.
 정통성이 없고, 삼류 낭인들로 주축되었기에 하오문(下汚門) 취급을 당하지만 말이다.
 그는 찻물로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철혈문이라는 곳에서 상시로 낭인을 고용하고 있다 하더군요.”
 신소명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철혈문······? 내가 알기론 거기 왕창 망해서 누구를 새로 고용할 입장이 아닌 걸로 아는데?”
 하문룡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망했기에 찾아가는 겁니다. 저 같은 삼류 무사가 폐망해 가는 문파가 아니라면 언제 고용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철혈문의 중요 저력들은 다 죽거나 물러난 지 오래일 것이지요. 쉽게 말해 어린애 조막손이라도 필요할 판이라는 것입니다.”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하문룡의 얼굴에는 짙은 자조가 물들어 있었다.
 “이미 전투가 끝나고 패배를 선언한 곳이라 생사를 걸며 싸울 일도 없고, 봉급이 싸긴 하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수복할 때까지 고용되어 있을 시간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곳입니다. 게다가 이리저리 부평초같이 지내는 것보다는 다 무너져 가는 곳일지언정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좋지요.”
 신소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의 눈이 가벼운 빛을 일렁였다.
 
 * * *
 
 철혈문.
 그곳은 현(縣)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낡은 장원이었다.
 정문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달린 용의 석상은 목을 잃은 지 오래였고, 붉게 칠해진 정문은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담벼락은 곳곳이 무너진 채 화살과 암기 같은 것들이 자잘하게 박혀 있었고,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가 가득 했다.
 “은공, 이제 철혈문입니다.”
 하문룡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도착했군.”
 느긋한 신소명의 목소리와는 달리, 단단히 닫힌 하문룡의 입매에 짙은 긴장감이 머물렀다.
 신소명은 장원을 빙 둘러본 다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안내였소.”
 “별말씀을······.”
 하문룡은 낭인답게 지리에 정통했고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지름길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의 시일이 삼 일은 줄어들었다.
 덕분에 처음 신소명의 진로와는 많이 어긋나는 점이 있어, 약속대로 곽천우를 만나지 못했고, 흑마 또한 돌려받지 못했지만 사실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만나지 않겠는가 생각하며 말이다.
 신소명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망가진 철혈문의 외부에 눈을 가볍게 가라앉혔다.
 “심하군.”
 하문룡은 익숙한 광경을 보았다는 듯 낮게 고개를 저었다.
 “싸움에서 진 문파라는 곳은 다 이렇지요. 사람은 떠나고 돈은 메마르고 의기는 실종되고 말입니다······.”
 중얼거린 하문룡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문으로 걸어갔다.
 어지간히 큰 상점을 가도 있을 문지기 한 명 없는 철혈문의 정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쿵! 쿵!
 하문룡은 주먹을 쥐어 정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동안 겪어 온 풍파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정문은 요란하게도 몸을 떨어댔다.
 쿵! 쿵!
 하문룡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속으로는 설마 문주까지 도망쳐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안쪽에서 사람 발자국 하나 들리지 않은 것이다.
 외관처럼 텅 비었다면 그의 발걸음은 정말 한순간에 쓸모없는 짓거리가 되어 버릴 판이었다.
 하문룡은 조급해 하며 다시 문을 두들기려 했다.
 그때였다.
 “본문파는 낯선 손님을 환영하지 않으니 발길을 돌려 주시오.”
 정문 안쪽에서 하문룡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기척이 들려왔다. 비록 내용은 차가운 축객령이었지만 하문룡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힐끗 신소명을 쳐다본 다음 목청을 높였다.
 “철혈문의 위태로움을 듣고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 멀리 광동에서 불원천리로 찾아온 하문룡이라고 합니다. 박봉이라도 좋으니 철혈문에 한 힘이 되도록만 부탁드리겠습니다.”
 “······.”
 정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문룡은 다시 불안해졌다.
 ‘설마 삼류 무사 한 명 고용할 자금도 없는 것인가?’
 그때 굳게만 닫혀 있을 줄 알았던 정문이 낮은 울음을 터트리며 두꺼운 속내를 활짝 드러냈다.
 “본문은 형제를 박대하지 않는 법. 호의로 찾아왔으니 동도의 예우로 대하겠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노학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문룡은 다소 긴장했다.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깡마른 신체가 노학사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광동의 하문룡입니다.”
 “철혈문의 총관, 청답서생(靑踏書生) 이곽이오.”
 두 사람의 짧은 포권지례가 지나갔다.
 “귀하 말고 도착하지 않은 일행이 있으시오?”
 총관의 어투가 이상한지라, 하문룡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
 하문룡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트렸다.
 신소명이 없어졌다.
 혼자된 말이 푸르르 울며 하문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원래 그러했다는 듯.
 하문룡은 당황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신소명의 종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아닙니다.”
 잠깐 주저했던 하문룡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신소명이 사라졌다면 필시 그에 따른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굳이 그것을 캐낼 필요는 없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문에 온 것을 환영하는 바이네!”
 
 * * *
 
 
 하문룡이 당황하던 그 시각, 신소명은 이미 철혈문의 내부를 활개하고 있었다.
 그의 보보에 따라 얕은 바람이 불어 인기척을 알렸지만 장내의 누구도 신소명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극성에 오른 잠행술, 천망종회(天網從徊)는 쉽게 간파당할 잡기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가소롭다는 듯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거 뭐야? 꼭 말라 붙은 대나무 속 같은 몰골이구만.”
 곳곳에 보이는 후줄근한 몰골의 무사들.
 어슬렁거리며 힐끗힐끗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경계를 서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다지 열성은 없어 보였다.
 피를 잔뜩 먹었다는 듯 날카로운 병기를 지니고 있어 일견 날카로워 보이지만 그것이 다였다.
 무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무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죄다 삼류에도 못 미쳤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늑대와 같지만 드러낸 이빨은 과장된 흉포함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위협이 아닌 애원이었다.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 달라는 겁쟁이의 허세였다.
 신소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녀석들까지 고용할 정도로 무너졌나?’
 약속을 완수하고 나머지 반쪽의 염왕전을 돌려받을 일이 몹시 귀찮겠다고 생각한 신소명은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일단은······ 그 녀석부터 만나 보도록 할까?”
 휘이이잉.
 가벼운 바람이 불어와 신소명의 신형을 부드럽게 이동시켰다.
 그의 걸음은 장원을 가로질러, 장원 안에 또 담을 친 내원(內院)으로 향하고 있었다.
 담 안쪽에 두터운 석벽으로 지어진 건물이 외롭게 홀로 자리하고 있었다.
 신소명은 가볍게 담을 넘어 석벽 건물로 진입했다.
 흉흉한 몰골의 무사들이 몰려 있는 외원과는 달리, 건물의 내부에는 드문드문 단정히 차려 입은 시비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훨씬 낫군!”
 소반을 들고 지나가는 시비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던 신소명은 무슨 생각인지 천천히 시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시비는 죽었다 깨도 자신의 뒤를 따르는 흑색 피풍의 남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석벽 건물은 넓고 컸다.
 경계 또한 삼엄했다. 곳곳에 숨은 냉철한 시선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은 담장 바깥의 허술한 삼류 무사들 따위가 아니라 정말 일류 급의 무사들이었다.
 움츠러든 시비의 어깨를 느끼며, 신소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세라고 할 수 있는 무인들은 건물 안에 다 배치되어 있군. 다 합쳐서 열셋 정도? 일개 문파의 저력으로 삼기에는 참 부끄러운 숫자군.’
 신소명은 엄중한 눈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무사들을 세심한 눈으로 관찰했다. 그리고 이내 철혈문의 장기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도법이군. 게다가 강맹하고 초식의 획이 굵은 중도(重刀).’
 무사들의 손은 두껍고 컸다.
 그리고 손바닥 전체에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여 있었다. 검법으로 인해 생긴 굳은살과 비슷하지만 더 두텁고 흉했다.
 더 무거운 것을 휘둘렀다는 의미.
 그렇다면 오직 도법이다.
 신소명은 물론 그들의 허리춤에 걸린 폭이 넓은 도갑(刀匣)을 먼저 발견했지만.
 상념 중에 시비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작은 화원(花園).
 지금은 만개한 꽃들로 인해 두 사람이면 발 딛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신소명의 시선이 화군(花群)을 갈랐다.
 그곳, 색색으로 잎을 펼친 꽃 무리 사이에 깨끗한 청의를 걸친 인영이 허리를 굽혀 꽃을 매만지고 있었다.
 시비가 조심스레 음성을 높였다.
 “문주님, 차를 대령했습니다.”
 “······.”
 인영은 대답이 없었다. 등도 펴지 않는다.
 시비는 익숙한 듯 종종걸음으로 근처의 탁자에 소반을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흰 김을 풍기는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이것이 신소명이 시비의 뒤를 따른 이유였다.
 시비가 뜨거운 차를 대령할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역시 나는 똑똑하다니까.’
 신소명은 히죽 웃으며 시비의 뒤에서 솟구쳐 올라 화원의 천정으로 신형을 옮겼다.
 그는 기둥의 교차점에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팔짱을 꼈다.
 “자, 얼굴을 들어. 구경이나 해 보자고.”
 기대와는 달리 청의인은 꽃을 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필생의 임무라는 듯 청의인은 단 한순간도 허리를 펴지 않고 꽃을 다듬었다.
 신소명의 얼굴로 하품이 일 무렵이었다.
 “문주님, 소신 이곽입니다.”
 총관이 화원의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청의인은 여전히 응대가 없었다.
 총관이 청의인의 등을 보며 이야기를 계속 했다.
 “오늘 새로운 무사를 채용했습니다. 광동에서 온 하문룡이란 사내로 낭인입니다.”
 “······후!”
 비로소 청의인이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가슴이 답답해 저절로 나온 숨결이었다.
 신소명은 이채를 띠었다. 한 번의 호흡 속에서 지독한 허무와 부끄러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숨을 쉬고 잠시의 정적이 있은 뒤, 청의인이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언제까지 그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 걸까요?”
 낮은 목소리와 함께 청의인이 신형을 돌렸다.
 신소명의 시선이 청의인의 얼굴을 훑었다.
 ‘들은 것보다 미인이군!’
 청의인은 갸름한 눈썹, 오목한 코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여인은 총관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총관은 이유천의 눈 속에서 짙은 허무를 발견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여인의 입술이 열렸다.
 “총관, 오라버니께는 여전히 연락이 없나요?”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합니다.”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메마른 숨결이 가슴 앞의 꽃잎을 흔들더니 잎을 떨어트렸다.
 그는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하는 꽃잎을 보며 목이 메어왔다. 마치 자신의 꼴을 보는 것 같았다.
 “벌써 넉 달이 넘었어요. 아무리 고려가 멀고 백두산이 험지라고 해도 너무 긴 시간이에요. 혹시 오라버니께서 변고를 당하신 게 아닌지······.”
 여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갈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말을 끊고 가슴 깊이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짧게 대화가 끊어지고 감정을 추스른 이유천은 총관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또 제가 감정이 격해지고 말았군요. 일문의 주인은 언제나 평정심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역시 저는 자격이 많이 부족한가 보네요. 하하!”
 나직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에 짙은 쓴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붉은 화초를 만지작거렸다.
 짧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여인이 입술을 벌렸다.
 “과연 오라버니는 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선대의 유품이라고는 하지만, 천외제일신마의 전설은 오래전부터 무림에 떠돌지만······ 실제로 염왕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개방의 사람들도, 하오문의 사람들도 반쪽의 동전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꽃잎을 만지는 여인의 손길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왜 오라버니는 그것에 모든 희망을 거신 거죠? 정말 천외제일신마는 존재하는 인물일까요?”
 총관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문주님!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무림의 오랜 금기입니다. 잊지 않으셨겠지요? 과거 그가 벌인 혈사(血史)를요?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그 여섯 글자는 어디에서나 꺼리는 단어입니다.”
 여인은 돌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제 집에서조차 입을 조심해야 하나요? 게다가 벌써 육십 년 전의 일이에요. 갑자(甲子) 하고도 십 년이나 더 지난 일이라구요.”
 “그래도 혹여 모를 적당의 귀에 들어간다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뿐입니다. 아무쪼록 그날까지 유념해 주십시오.”
 “후후······! 제발 그 시간이 왔으면 좋겠네요.”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 소신은 믿습니다. 도련님께서는 무모한 모험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거짓에 현혹되실 분이 아닙니다. 저는 믿습니다. 거짓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불신은 도련님의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며 본문을 영원한 어둠 속에 밀어 넣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총관······. 당신은 어째서 떠나지 않았죠? 다른 가신들처럼 재산의 일부나마 가지고 떠날 수 있었잖아요?”
 총관은 웃음을 머금었다.
 “소신과 십삼수령(十三守零)이 본문을 떠나는 일은 숨을 끊었을 때뿐입니다, 문주님.”
 
 지켜보던 신소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좋은 수하를 뒀군, 이가령(李歌零)!”
 
 
 
 
 
 第五章 신념을 품어라
 
 
 
 
 
 
 
 
 
 
 
 철혈문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드는 한 무리의 인기척이 신소명을 일깨웠다.
 번뜩!
 언제 밀려온 졸음이냐는 듯 그의 두 눈은 밤에도 식별할 수 있는 짙은 묵색 광망을 머금었다.
 ‘살기!’
 신소명은 인기척을 느낀 순간 그들이 좋지 않은 의도로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줄인 숨소리, 죽인 살기가 흙을 타고 대지에 가득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소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꽃을 노리는 날파리들인가?’
 스윽.
 신소명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드넓은 평야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피슛!
 신소명의 손아귀에서 녹색의 가느다란 섬전이 튀어나왔다.
 “큭!”
 달까지 흐릿한 야공 아래로 단말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쏴아아악!
 그리고 수십 개의 살기가 오롯하게 서 있는 신소명을 향해 집중되었다.
 “요즘 파리는 벌처럼 침이 있네?”
 중얼거린 신소명이 연달아 손을 뿌렸다. 손바닥 안의 예의 녹색 섬전이 빗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렸다.
 피피피핏!
 촤악!
 “크윽!”
 야공을 찢는 소리, 그것을 가르는 소리, 정적을 깨우는 비명.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동시처럼 터져 나왔다.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때?”
 스스슥!
 말과 함께 수십 개의 그림자가 신소명을 빙 둘렀다.
 흉흉한 살기가 바늘 끝을 보는 듯 첨예했다.
 신소명은 힐끗 그들을 모두 일별했다.
 짙은 흑의, 피로 색을 낸 듯 붉은 복면.
 모두 똑같은 복장을 했다.
 어둠에 감싸여 붉은 머리만 떠 있는 모습인지라 괴기스러웠다.
 신소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송나라 자객들은 생긴 꼴부터 우스꽝스럽구만.”
 촤악!
 자객들이 동시에 손을 뻗어 자신들의 옆구리에 꽂힌 녹색 물체를 뽑아냈다.
 어둠을 뚫고 가만히 바라보면 그들의 흑의 허리춤이 가늘게 찢겨져 피를 흘리는 것이 보일 것이다.
 신소명이 건성으로 말했다.
 “이봐! 푸른 버들잎을 그렇게 우악스럽게 움켜쥐다니, 넌 자연을 사랑하자는 말도 몰라?”
 피로 얼룩지고, 자객의 악력에 형편없이 뭉개진 녹색 물체.
 그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녹엽(綠葉)이었다.
 신소명이 말했다.
 “돌아간다면 막지 않겠어. 난 아직 더 자야 하거든.”
 “······.”
 자객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신소명의 얼굴이 가볍게 찡그려졌다.
 “말하는 입 따로 있고, 비명 지르는 입 따로 있냐? 아까는 목청도 크더만!”
 처척!
 자객들이 공세를 취했다.
 날카로운 단도(短刀)를 역수로 쥔 그들을 중심으로 강렬한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신소명은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볼을 씰룩였다.
 “아, 이 녀석들. 달밤에 체조하게 만드네.”
 그는 건성으로 검지를 들어 올렸다.
 까닥.
 “와라, 멍청이들아!”
 
 털썩!
 “허억, 허억······!”
 뒷걸음질에 스스로 넘어진 한 명의 자객이 창백한 얼굴로 자신 앞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 어둠은 피풍의를 펄럭이며 서 있는 신소명이었다.
 신소명은 홀로 남은 자객을 향해 낮은 웃음을 보여 주었다.
 “자! 이렇게 된 거, 우리 솔직한 이야기나 나눠 볼까? 아주 담백한 대화 말이지.”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춤!
 자객은 자신도 모르게 앉은 상태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은 그가 생각해도 충분히 놀라울 행동이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수많은 관문을 거친 자신이 고작 한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소명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이봐, 도망치지 마.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데?”
 자객은 수중의 단도를 세게 움켜잡았다.
 상대가 되지 않음은 본능이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붙잡혀 정보를 누설할 수는 없었다.
 자객은 섬전과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콰득!
 휘둘러진 단검은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
 자객은 자살을 택한 것이다.
 털썩!
 단전을 관통해 스스로 기해혈(氣海穴)을 파괴한 자객은 힘없는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앞으로 허물어졌다.
 숨이 끊어진 자객의 앞으로 신소명이 걸어왔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재수 없게 왜 다들 죽어 버리고 그러는 거야? 내가 무슨 사람 고기로 만두라도 빚어 먹는 놈이냐?”
 그의 시선이 차가운 대지 위에 싸늘해진 자객들의 시체들로 던져졌다.
 저들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그들의 수칙이었다.
 신소명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볼을 긁었다.
 “누가 밤손님을 보냈나, 이야기나 들어 보려고 했더니 제풀에 꼴까닥 죽어 버렸네. 곤란하네, 곤란해.”
 내용과는 달리 신소명의 목소리는 하나도 곤란해 하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하기만 했다.
 “자살이라도 해 버리면 끝날 줄 알았나?”
 파츠츠츠측.
 문득 신소명의 양손으로 묵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신소명의 두 손에서 시작된 묵색 불길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스스로 몸을 길게 늘어트리더니 가장 최후에 숨을 끊은 자객의 시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츠츳! 츠츳!
 불똥이 튀었다.
 허물어진 몸뚱이로 가늘게 경련이 치밀었다. 근육은 풀리고 심장은 멈추었건만 자객의 육신은 점점 더 떨림이 강해졌고, 피부 밑의 혈관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커다란 경련과 함께 자객의 몸이 뒤집혀졌다.
 하늘을 보며 누워 있는 자객의 육체는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되살아나는 것처럼.
 파지치칙!
 신소명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묵색 불길이 멎었다.
 자객의 경련 또한 멈췄다.
 씨익!
 “이제 못 다한 대화를 계속 해 볼까?”
 신소명은 짙은 웃음을 터트리며 발을 들어 자객의 얼굴을 덮은 복면을 벗겨 냈다. 복면 안에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눈과 입을 닫고 멈춰 있었다.
 신소명이 어느 곳 하나 특별하지 않은 자객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무심히 입술을 벌렸다.
 “너는 누구냐?”
 낮은 목소리.
 대답할 사람은 없다.
 이 텅 빈 들판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하지만.
 “······암은일호(暗隱一號).”
 대답은 들려왔다.
 죽은 자객의 입술 사이로.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좋군. 진작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렇게 명도(冥途)의 미혼(迷魂)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지.”
 명도는 죽은 이들이 윤회를 향해 걷는 길.
 신소명은 자객의 혼을 명도에서 데려왔다.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능력이었다.
 신소명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암은일호, 너는 어디에서 왔지?”
 “······암(暗)······천(天)······.”
 “그곳은?”
 “암살······ 집단.”
 “오늘은 왜 찾아왔지? 잔칫날도 아닌데 말씀이야.”
 “······동전······ 때문에.”
 신소명은 눈을 크게 떴다.
 “동전? 호오, 이거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구만! 계속 말해봐.”
 “······반쪽······ 동전······ 강탈 후, 귀환······ 나의 임무······.”
 자객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미 다 녹은 양초에 억지로 불을 붙인 꼴이기 때문이다.
 신소명은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암천, 그곳의 위치는 어디지?”
 “북망산(北邙山)·········!”
 자객은 짧은 단어를 내뱉음과 동시에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파스스스슥!
 그의 몸이 급속도로 허물어졌다.
 신소명은 손을 털었다. 수중에 맺힌 묵색 불길이 해소되었다.
 그는 길게 늘어트린 흑발을 거칠게 긁었다.
 “하암! 야밤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 * *
 
 굳게 닫힌 지존실의 방문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끼이익.
 은밀한 소음.
 문틈으로 머리카락 한 올 통과하기도 어려운 공간이 생겼다.
 스으으······.
 밤의 차가운 공기가 연기처럼 아래로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잠들었던 이가령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누구냐?”
 저벅. 저벅······.
 귀가 바닥을 딛는 발자국 소리를 감지했다. 보보마다 숨어 있는 진득한 느낌은 절대 선의(善意)가 아니었다.
 ‘습격······!’
 이가령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어나라.”
 그때, 방 안 어느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묵직한 목소리가 그의 귀청을 후벼 팠다.
 이가령은 소름이 돋았다. 한 치의 감정도 없이 냉막한 음성은 저승의 귀신이 찾아온 거라고 믿어도 가능할 정도였다.
 “누, 누구냐······?”
 신음처럼 경악을 내뱉은 이가령은 퍼뜩 몸을 일으켰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하지 마. 안 잡아먹으니까.”
 이가령은 기둥 밑에서 형체를 나타낸 신소명을 보며 긴장의 눈길을 지우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이방인.
 일단 시야를 가득 채우는 흑색 피풍의 하나만으로도 큰 위압감이 되었다.
 실내를 울리는 신소명의 발자국 소리만이 긴장된 침묵을 뒤흔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다가오는 이방인을 보는 이가령의 얼굴로 짙은 통증이 머물렀다.
 주르륵.
 그의 입가에 핏물이 흘렀다.
 압도적인 신소명의 기세를 이겨 내기 위해 스스로 혀를 깨문 것이다.
 그 순간, 이가령을 짓누르던 막강한 기세가 씻은 듯 없어졌다.
 “허억, 허억······.”
 이가령은 깊은 숨을 헐떡였다.
 조용한 방 안을 격한 숨소리가 가득 채웠다.
 신소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긴 침묵을 깨트렸다.
 “나는 백두산의 신소명. 염왕전의 오랜 약속을 지키러 왔다.”
 “······!”
 이가령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신소명을 가리켰다.
 그리고 결코 만나리라 상상치도 못했던 한 인물의 이름을 토해 냈다.
 “처, 천외제일신마?”
 씨익!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신소명.
 “반갑다, 이가령! 네 오라비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이가령은 발작하듯 중얼거렸다.
 “있었어, 있었어!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였어. 천외제일신마! 염왕전!”
 신소명은 건성으로 방문을 향해 턱짓했다.
 “가자. 빨리 짐 꾸려!”
 “······!”
 이가령의 동공이 커졌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을······?”
 신소명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여길 떠날 거야.”
 이가령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순 없어요! 아직 부탁은 이행되지 않았어요!”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같이 가겠다고. 너와 함께 여길 떠나면 돼.”
 이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약속은 그게 아니잖아요. 분명 오라버니께서는 원수들의 복수를······!”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들려진 신소명의 주먹에 의해서.
 “아니, 염왕전의 약속은 그게 아냐. 나는 동생을 지켜달라는 남자의 신념을 받아들였어.”
 이가령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서, 설마 오라버니께서······.”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이야기가 통하네. 난 너를 안전한 곳, 그러니까 지금 네 오라비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결코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랑 드잡이 질 해달라는 말은 없었다고!”
 또르륵.
 두 눈은 물을 흘리고, 갈라진 입술은 피를 흘린다.
 이가령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오라버니께서는 모든 것을 잊으셨군요.”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현명한 선택을 한 거지. 원수는 원수에게 죽는 법이야. 어차피 죽을 놈들이라는 소리지. 그냥 네 오라비랑 조용한 곳에서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아 봐!”
 “······없어요.”
 “응?”
 “그럴 수는 없어요!”
 이가령이 눈물과 독기가 서린 눈으로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결코 복수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들, 그 악적들에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저는 아직 잊을 수 없어요!”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철혈문을 무너트릴 수는 없어요. 이곳은 가족들과의 추억이 있는 곳······.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거잖아요?”
 흥건하게 젖은 두 눈은 바닥에 물기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이가령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신소명이 어색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이봐, 무릎 꿇는다고 되는 건 없어. 대체 어쩌자는 거야?”
 “그들을 대신 무찔러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그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으니까요! 지켜봐 주세요! 소녀를 지켜보는 사람이 천외제일신마라면······ 저도 힘이 날 테니까요.”
 신소명은 혀를 찼다.
 “그래서? 그 힘으로 칼이라도 뽑아 들고 전장을 나뒹굴어야 속이 풀리겠어?”
 이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충분히······.”
 “죽을 텐데?”
 “상관없어요. 전장에서 죽을 수 있다면 철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은 거니까!”
 당차다.
 신소명은 이가령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발견했다. 그녀는 외유내강, 겉은 아름다운 소녀이나, 그 속에는 뜨거운 무인의 혼이 타오르고 있었다.
 신소명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쇠심줄 같은 고집이구만. 일어나!”
 이가령은 몸을 일으켰다.
 신소명은 가볍게 쥔 주먹으로 이가령의 왼쪽 가슴을 툭 때렸다. 쇄골 근처를 친 것이지만 그녀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념을 가져라. 너의 오라비는 충분히 그것을 지니고 있었지.”
 이가령은 두 손을 포개 가슴 앞에 모았다.
 “저에게도 자격이 있을까요?”
 신소명이 말했다.
 “너에게 시간을 주마. 다섯 번의 밤낮을 주겠다. 그동안 너의 신념을 보여라. 네가 가진 것이 무력한 원한이 아니라 진실한 분노가 있다면, 나는 너를 지켜주겠다.”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네 오라비를 조금 기다리게 할 수 있지.”
 신소명은 눈웃음을 지었다.
 “맹약자보다는 친구가 더 중요한 법이거든!”
 
 * * *
 
 하문룡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 그는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터벅거리며 걷는 발걸음은 피곤이 가득했다. 또한 공허했다. 그의 임무는 검을 차고 철혈문의 외부를 빙글빙글 도는 게 전부였다.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해 순찰을 도는 임무인 것이다.
 “이제 왔는가?”
 그와 같은 방을 쓰는 동료 무사가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는 하문룡을 향해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잠이 덜 깬 얼굴이 역력했다.
 하문룡은 대꾸하지 않고 허리춤의 검을 끌러 침상 위로 던졌다.
 그리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나오지 않고 뭘 했나?”
 아침이 되어 순찰 무사가 변경될 시간이었다.
 교대를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거 깐깐하기는, 흐아암! 어차피 덤비면 도망치기 바쁠 거······.”
 동료 무사는 투덜거리듯 중얼대며 문을 나섰다.
 “후우!”
 하문룡은 그런 동료의 뒤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한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반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
 하문룡은 놀라며 침상에 내던진 검집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내 허탈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하하, 얼굴이 이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이는군!”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모습을 보인 그림자는 신소명이었다.
 하문룡은 눈을 크게 떴다.
 “은공,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 나타난 겁니까?”
 신소명은 잠시 울상을 지었다.
 “말도 마쇼. 아주 고생이란 고생은 죄다 했지. 오죽했으면 이제까지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은 적 없다니까!”
 신소명은 투덜거리며 근처의 침상으로 걸어가 밑을 뒤졌다.
 “배나 좀 채워야겠군!”
 침상 밑에는 작은 바구니가 숨어 있었다. 속에는 중간 크기의 옥병, 종이에 감긴 건포 덩어리가 담겨 있었다.
 “캬, 좋은 향기야!”
 신소명이 옥병의 마개를 열며 감탄했다. 짙은 과일향이 뱃속을 뜨끈하게 했다.
 하문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몰래 술을 반입하다니······.”
 그러고 보니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도 주향이 났던 것 같다.
 ‘음주를 한 채 경계를 서다니. 생각할수록 최악이군.’
 하문룡은 점점 철혈문에 대한 정이 떨어져 갔다. 적혈삼조에 관한 정은 애초에 없었다.
 신소명은 옥병을 다 비우고 손바닥 크기의 건포 다섯 개를 씹어 삼킨 다음에야 말문을 텄다.
 “북망산에 대해 알려 주시오.”
 하문룡은 이채 어린 눈을 했다. 북망산. 중원 사람치고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귀신이라면 더 잘 알 테고.
 그는 그제야 신소명이 이국 사람임을 다시 한 번 체험했다.
 “낙양의 동북쪽에 있는 작은 산입니다. 명당이라 산 전체에 무덤이 가득하지요.”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지?”
 “말을 타고 사나흘은 걸릴 테지요. 헌데, 그곳은 어쩐 일로 그러십니까?”
 신소명은 낮게 웃어 보였다.
 “그곳에 묻히겠다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외다.”
 
 하루가 지났다.
 신소명은 순찰을 도는 하문룡의 뒤에서 잠행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암천이라는 자객 집단은 강호에서 제법 유명합니다. 황금이 걸린 고급 의뢰만 받고, 실패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 거머리 같은 정신이 유명하지요.”
 이야기는 대부분 하문룡이 했다.
 신소명이 부탁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기에.
 “암천주는 십지쇄잔(十指碎殘) 무영혈(無影血)이라는 자입니다. 일흔 두 번의 자객행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끝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십지쇄잔이라는 조법(爪法)을 쓰는데 실제로 그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일흔두 명의 시체들이 모두 정수리에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이 있다는 것만 그를 증명하지요.”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룡은 이제 다른 주제를 꺼냈다. 조금 미안한 얼굴로.
 “반쪽 동전에 관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다들 고개를 젓더군요. 사실 저 또한 과문하여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신소명은 빙긋 웃었다.
 “좋군. 여러 사람 알아봤자 골치만 아픈 일이니까.”
 그는 하문룡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고맙수다. 역시 사람은 인맥이 중요하다니까.”
 하문룡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뒤쪽에서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고개를 돌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신소명은 또 사라지고 없었다.
 
 
 
 
 
 第六章 피 사이에 우뚝 서다
 
 
 
 
 
 
 
 
 
 
 
 야반삼경.
 유달리 시커먼 구름이 많아 달이 비추지 않는 암흑천지의 시간이다.
 눈을 돌리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커먼 초목의 그림자뿐인 산기슭 아래, 신소명은 암흑과 비교되는 새하얀 입김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착했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으로는 앞에 솟은 비석을 살피며.
 비석의 옆에는 넓고 잘 닦인 대로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이 넓고 큰 산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부귀의 차별이 없다. 화려한 금붙이가 달린 마차도 울면서 지나가고, 누추한 소마차도 울면서 지나간다.
 비단옷 부호부터 헝겊의 누더기 걸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추억하는 곳.
 “북망산, 망자들의 산이라지? 나에게 딱 맞는 곳이군.”
 신소명은 비석에 쓰인 글자를 읽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나야말로 진정한 귀신이며, 그들의 제왕이니까.”
 그는 천천히 신형을 움직였다. 터벅대며 걷는 그의 발자국 소리만이 북망산을 오르는 산길에 길게 울려 퍼졌다.
 “휘유, 조용한데?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
 들판에 그렇게도 많이 모여 떠들어 대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늦은 밤 먹이를 찾아 기웃거리는 산짐승들의 발소리, 푸드덕거리는 밤새들의 움직임. 모든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의 밤이라······!”
 조문 행렬도 없고 제사 음식을 찾는 걸인도 없다.
 짙은 안개와 사라진 달빛,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정적에 휘감긴 사위는 한줄기 시퍼런 귀기까지 전해졌다.
 북망산은 번잡한 낮과는 다른 밤을 지니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처럼, 어두컴컴하고 흉흉한 이곳이 대체 명당으로 유명한 북망산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신소명은 낮게 입 꼬리를 올렸다.
 “이봐, 귀신 나으리들! 썩은 몸뚱이 구경 좀 하게 밖으로 기어 나와 봐! 아무도 없어?”
 뚜둑!
 길을 걸으며 주먹을 쥔다.
 뚜둑!
 빙글 돌린 손목.
 씨익!
 “그럼 거기 있는 건 누굴까?”
 신소명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화악!
 짙게 깔린 안개를 찢어발기며 질주한 그의 앞으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솟아났다.
 신소명의 눈이 빛을 발했다.
 “자객 나으리들!”
 파파팍!
 신소명의 주먹이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었다.
 풍압이 큰 소리를 내며 터져 나왔고 자객들은 전신을 휘갈기는 철퇴의 압력을 느꼈다.
 퍼엉! 펑!
 “크아아악!”
 자객 한 명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거렸다.
 신소명은 신형을 뒤돌리며 다리를 휘둘렀다.
 빠각!
 배후의 기습을 노리던 자객이 복부를 얻어맞고 뒤로 튕겨나갔다. 돌연 자객이 뒤로 밀려나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신소명의 주변을 포위했던 자객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망치고 말았다.
 사방은 어두운 암흑에다가 마찬가지로 시커먼 흑의를 입은 자객들은 안개 사이로 도망침과 동시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이런, 놓치고 말았네! 이거 어쩌나.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걸?”
 신소명은 짙은 안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옛 추억이 생각나는군. 나는 옛날부터 밤에 하는 늑대 사냥을 좋아했지. 그때가 열두 살이었나? 세 살이었나? 아직도 캄캄한 백두산의 정경이 눈에 선하네.”
 중얼거리며 안개 사이를 걷는 신소명의 얼굴은 잔잔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너무도 여유로워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신소명은 낮게 웃었다.
 “사냥의 계절이 벌써 찾아왔군.”
 
 쾅!
 북망산 중턱, 아래로 쭉 펼쳐진 무덤가를 내려다보는 도관에 커다란 뇌성(雷聲)이 울려 퍼졌다. 평소에도 조용하고 밤에는 더욱 조용한 도관은 뒤이어 뼈를 떨게 하는 처절한 비명으로 가득 뒤덮였다.
 이미 시체는 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다. 작은 도관 어디에 수백 명에 이르는 자객들의 은신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객들은 개미굴의 개미처럼 끝도 없이 기어 나왔다.
 회음술“사살쇄연진(射殺鎖挻陣)을 펼쳐라!”
 그때 암중에서 울려 퍼진 다급한 외침과 함께 불붙은 양떼처럼 날뛰던 자객들이 커다란 거리를 벌리며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쉬시시싯!
 어둠을 가르고 쇠붙이가 날아들었다.
 암기다. 극독이 묻어 있는 것은 당연지사.
 자객들은 중첩된 원형을 그리며 신소명을 포위해 끝도 없이 많은 암기들을 집어던졌다. 일렬이 끝나면 이열이 던지고, 최종적으로 모든 원이 뒤바뀌며 암기의 폭우가 쏟아졌다.
 신소명은 재빠르게 발을 굴렀다.
 쾅!
 우렁찬 진각(震脚)이 북망산을 때렸고, 지면이 크게 들썩이며 바닥에 깔린 수많은 자갈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신소명의 신형이 빼곡히 떠오른 흙과 돌멩이 사이로 가려졌다.
 따당! 따당!
 허공으로 치솟은 분진에 부딪힌 암기가 힘을 잃었다.
 소량의 암기가 틈을 비집고 날아들었지만 그 정도는 신소명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양이었다.
 회음술“제법이군! 놀라운 실력이야. 가히 절정의······.”
 산개한 자객들 사이에서 명령하던 의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분명히 목소리는 하나인데 소리가 사방팔방을 울렸다.
 신소명은 가볍게 눈가를 좁혔다.
 “회음술(回音術) 따위나 쓰지 말고 나와라. 네가 암천의 주인이냐? 나는 십지쇄잔을 만나러 왔다고!”
 의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회음술“너는 십지쇄잔 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
 은은한 노기를 담은 대답을 들은 신소명은 잠시 길게 늘어트린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격이라?”
 빙긋!
 신소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감히 나에게 자격을 요구해?”
 쾅!
 진각이 밟아지고.
 퍼어어엉!
 광풍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권격이 앞으로 뿜어졌다.
 “피, 피해라!”
 전방으로 날아드는 권격을 피해 자객들이 분분히 자리를 피했다.
 우드드드득!
 권격의 광풍은 빽빽하게 자란 거목들조차 부러트리며 질주했다.
 삽시간에 신소명의 앞으로 넓은 대로가 만들어졌다.
 자객들이 피하지 못했다면, 조금만 더 반응이 느렸다면 피로 다져진 길이 되었을 것이다.
 신소명이 기를 표출시키며 말했다.
 “십지쇄잔을 불러와! 북망산을 뭉개 버리기 전에. 아참, 늦을 거 같으면 야식도 좀 준비하고!”
 일별하기에도 이백에 이르는 자객들.
 그 중심에 우뚝 선 신소명.
 저며 오는 살기가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당당하기만 하다.
 자객들은 그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목숨을 걸고 죽음을 다루는 살업(殺業)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감히 이길 수 없다고.
 암중의 목소리 또한 그것을 깨달았다. 아니 여기서 가장 많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 그였다. 본능이 뛰어난 만큼 그는 뛰어난 자객이었기 때문이다.
 회음술“······그분은 지금 이곳에 없소.”
 신소명은 팔짱을 꼈다.
 “흠, 그럼 어디 있지?”
 회음술“나도 모르오.”
 신소명은 문득 짙은 비웃음을 흘렸다.
 “으흐흐, 그럼 너희들이 살아 있을 이유가 없군.”
 고오오오!
 뿜어지는 살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바로 지금이 그 상황이었다.
 털썩! 털썩!
 곳곳의 진열에서 자객들이 급한 숨을 몰아쉬며 허물어졌다. 외상은 없었다. 심맥의 압박 때문이었다.
 “그, 그만!”
 진열 사이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신소명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번쩍!
 신소명의 두 눈이 신광을 폭사시켰다. 눈빛의 기세로 그림자는 감히 그의 지척에 다가오지 못하고 신형을 멈추어 비틀거렸다.
 “그만 하시오!”
 그림자는 암중에서 회음술을 쓰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는 왼쪽 눈을 안대로 감싼 애꾸였다.
 신소명은 외눈의 자객을 보며 말했다.
 “그쪽이 먼저 칼 들고 설쳐 댔잖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더니, 딱 그 꼴이네!”
 외눈 자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항복하겠소! 우리는 자객. 은원에 얽매이는 무림문파 따위가 아니오. 당신은 충분히 강하오. 우리 모두가 덤벼도 승산을 점칠 수 없음은 이미 겪어서 알고 있소.”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하군.”
 외눈의 자객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목숨이 비싸다는 것을 알 뿐이오. 돈이 되지 않는 죽음 따위는 개보다 못한 것이지.”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좋아, 이름이 뭐지?”
 “독목할자(獨目瞎者).”
 외눈의 자객, 독목할자는 신소명에게서 전해지는 기세가 씻은 듯 사라짐을 느끼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한 경악했다.
 ‘산 전체를 아우르던 기세를 단 한 순간에 지워 버리다니! 대단한 실력이다. 십지쇄잔 님과 싸운다면······?’
 독목할자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겉으로는 손을 들어 포진한 자객들을 뒤로 물렸다. 자객들은 소리도 없이 산 아래로 물러났다.
 신소명이 멀어지는 자객들의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잘 듣는군. 과연 똑똑한 사람 말은 들어 두면 손해 볼 일은 없지.”
 독목할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원래 암천의 지낭(智囊) 역할을 하는 총사였다. 이인자인 것이다. 자객들이 명령을 듣는 게 당연했다.
 신소명은 비스듬히 서서 독목할자를 바라보았다. 혼을 얼어붙게 하는 살기는 사라졌지만 시선을 받자 독목할자는 등으로 다시 식은땀이 축축하게 흘러나왔다.
 “다시 묻지. 십지쇄잔은 어디에 있어?”
 “모르오. 암천의 주인이 십지쇄잔 님이라고는 하지만 명목상의 사실일 뿐, 그분은 자주 들르시지 않소. 모든 지시는 전서구를 통해 내릴 뿐이오.”
 “그럼 그 전서구는 어디서 오는 거지?”
 “그것도 정확하지 않소. 도착하는 것도 시일을 가리지 않고.”
 신소명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언제 오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짜증스러운 눈초리로 독목할자를 바라봤다.
 독목할자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신소명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아참, 철혈문으로 온 손님은 내가 잘 대접했지. 그런데 너무 감격한 나머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나 봐.”
 “······!”
 독목할자의 눈이 커졌다.
 “처, 철혈문에서 오셨소?”
 “뭐, 대충은.”
 신소명은 말을 덧붙였다.
 “말해 봐, 너희들이 찾는 반쪽 동전에 대해서.”
 독목할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자세한 것은 모르오. 철혈문주가 지닌 반쪽짜리 동전을 강탈하라는 십지쇄잔 님의 지시만 받았을 뿐이오.”
 신소명은 짐짓 인상을 썼다.
 “그럼 동전만 훔치지 왜 사람은 죽이려 들어?”
 독목할자는 낮게 웃었다.
 “우리는 자객이오. 그 일이라면 밤도적들이 더 잘하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신소명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객은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다. 대개 훔치는 것은 사람 목숨뿐.
 “결국 당신은 아는 게 하나도 없군. 모든 것은 십지쇄잔밖에 모른다는 뜻인가?”
 독목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신소명은 독목할자의 외눈을 직시했다. 맑고 투명한 신소명의 두 눈은 지저의 심연을 보는 것 같았다.
 두 개가 있어도 부담스러운 일인데 외눈으로만 그 눈빛을 받으니 독목할자의 얼굴에 금세 땀이 솟아났다.
 신소명은 잔뜩 귀찮은 표정을 지은 다음 전투로 엉망이 된 도관을 둘러봤다. 그가 내뿜은 권격으로 인해 도관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일단 내일 다시 오지. 그때까지 좋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게 좋을 거야.”
 독목할자가 대답할 시간도 없이 신소명은 등을 돌려 길을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독목할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독목할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이 적지를? 마치 제 집이라도 된다는 듯하군. 대단한 배포다.”
 그때였다.
 독목할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의 하나뿐인 눈동자로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는 작은 비둘기 한 마리가 들어왔다.
 
 신소명은 북망산 인근의 마을에 있는 객잔을 찾아갔다.
 늦은 새벽이라 객잔의 문은 닫혀 있었고 불도 꺼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본의 아니게 주인의 허락도 없이 비어 있는 객방을 찾아 들어갔다.
 침상에 몸을 던진 신소명은 드러누워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생각했다.
 “암천의 자객들은 모른다. 모든 것이 십지쇄잔의 계책. 그 녀석은 어떻게 염왕전을 알고 있는 거지? 이가령조차 불신하고 있던 한낱 전설 나부랭이를······.”
 신소명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알고 있다는 건가? 잊히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천하에 홀로 우뚝 서 오롯한 존재로 태어났다. 적수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고독한 인생을 지내 왔다. 누군가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충분히 반가운 일이었다.
 신소명은 즐거운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흑일색의 복면인이 침상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신소명은 물끄러미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복면인은 짧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를 따라오시오.”
 신소명은 순순히 복면인의 안내를 받아 들였다.
 복면인은 쾌속한 경공을 전개하여 한참이나 대지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사람 흔적이 적어지고 땅이 드넓어질 때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줄였다.
 그 앞에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신소명은 현판도 없는 장원을 향해 말했다.
 “암천은 돈이 없나 보군. 이런 다 낡은 건물을 사용하다니. 쯧쯧.”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복면인은 이미 기척을 줄이고 장내를 벗어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신소명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순순히 보내 주었다.
 신소명은 어슬렁거리듯 걸어 장원의 문 앞에 섰다.
 낡고 더러운 문은 삐거덕거리며 열렸고, 화초도 없이 황량한 장원 내부가 여실히 드러났다.
 신소명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십지쇄잔! 귀찮으니까 어서 튀어나와!”
 커다란 목소리가 장원을 뒤흔들었다. 석판이 들썩이고 지붕 위의 묵은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신소명은 두껍고 커다란 주먹을 매만졌다.
 “송나라 놈들은 격식치레가 너무 많은 것 같군.”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전방을 쳐다봤다. 마치 시커먼 안개가 끼는 것처럼 신소명의 앞으로 흑의인들이 잔뜩 밀려들고 있었다.
 스사사삿!
 그것은 흑색의 파도였다. 노도와 같이 달려드는 흑의인을 일별하며 신소명은 천천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뭉클거리며 짙은 묵기가 피어올랐다. 기의 선풍이 불며 신소명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았다.
 흑색의 파도와 묵색의 돌풍.
 장내는 온통 어두워졌다.
 씨익!
 일렁이는 묵기 사이에서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지척까지 다가온 흑의인들을 맞이했다.
 쾅!
 신소명의 정면으로 커다란 기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권격은 쩌렁쩌렁한 뇌성을 떨쳐 댔다.
 “염라인(閻羅印)을 이렇게 자주 펼치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귀청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한 무더기로 튕겨 나가는 흑의인들을 보며 신소명은 문득 한가롭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열다섯 살 이후 처음인가? 망할 사부의 명령으로 곰 잡느라 가장 먼저 배운 포격(砲擊)이었지.”
 몸은 전장을 휘몰며 비명을 만들어 내지만 눈빛은 아련한 과거를 추억하는 신소명.
 “그때는 한 방을 떨치는 것도 힘겨웠는데, 시간 한번 빠르군!”
 쾅!
 다시 터진 염라인.
 군부의 대포처럼 전방의 모든 것을 뭉개 버리는 권격.
 흑의인들은 신소명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고 연달아 터져 나오는 염라인에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이것은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장내의 바닥은 온통 끈적거리는 핏물과 뭉개진 살덩이로 지옥도의 한 편이 따로 없었다. 이런 무의미한 학살은 일각을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신소명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놈의 송나라는 땅이 넓은 만큼 싸워야 할 놈도 많구나. 이러다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송나라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삐이이이이······!
 그 순간 날카롭게 울리는 호적(號笛) 소리가 길게 뿜어졌다.
 생사를 모르고 달려들던 흑의인들은 호적 소리를 듣는 순간 꽁지가 빠진 개처럼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신소명은 팔짱을 끼며 그들을 지켜봤다. 한번 시작된 후퇴는 신소명의 기감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어졌다.
 스윽!
 신소명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신소명은 주먹을 쥐지 않았다. 객잔에서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한 복면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소명은 짐짓 퉁명스레 말했다.
 “넌 또 왜 왔냐?”
 “안내.”
 신소명의 입술이 차갑게 올라갔다.
 “나를 너무 멍청하게 보는 거 아냐?”
 “······명령에 따를 뿐.”
 복면인은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신소명은 잠시 그의 등을 바라봤다. 순간적이지만 짧게 뜨거운 열기가 두 눈으로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신소명은 낮게 웃으며 복면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좋아! 오늘 하루, 심심하지는 않겠군. 조의를 표하기에 하루는 너무 짧으니까!”
 
 신소명은 전방을 잔뜩 메운 검은 그림자들을 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북망산이 왜 명산이라고 불리는지 이제 이유를 알겠군. 멍청한 거름 덩어리들이 이렇게 많으니 토양이 비옥할 수밖에 없겠지.”
 그는 앞에 서 있는 복면인을 쳐다봤다.
 “이쯤에서 사라지셔야지?”
 복면은 고개를 저었다.
 “내 임무는 여기까지.”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면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수고했다는 듯.
 신소명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털썩!
 복면인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숨을 쉬지 않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신소명은 일렬로 늘어선 흑의인들을 보며, 그 사이의 독목할자를 발견했다.
 “여어, 날씨 좋지?”
 독목할자는 쓰게 웃으며 포권을 해 보였다.
 신소명은 독목할자와 나란히 서 있는 흑의인들을 보며 말했다.
 “이 동네는 자객들이 넘쳐흐르는 모양이지?”
 독목할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졸부는 군주의 말을 따를 뿐이오.”
 신소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그 녀석이 있기는 한 모양이니까.”
 “산 정상, 사로(死路)의 정점에 계실 것이오.”
 독목할자의 말에 신소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불쌍하군. 벌써 죽음 끝에 몰려 있다니. 내가 그렇게 두려웠나?”
 “긴말은 하지 않겠소.”
 신소명의 두 주먹이 쥐어졌다.
 “남길 말은?”
 “죽음에 앞서 흘릴 피와 신음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소?”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라도 죽을 땐 그 두 가지를 남기고 가더군.”
 번쩍!
 신소명의 신형이 돌풍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세상에 남길 가장 큰 신음을 내가 너희들에게 선물해 주마!”
 쿠와아앙!
 두 주먹에 맺힌 경력이 직선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염라인의 권경은 흑의인들을 때리고 땅을 터트려 나갔다.
 쉴 틈 없는 주먹질이 이어졌다.
 흑의인들은 몸을 날려 신소명의 권경을 피하면서도 미리 준비한 암기를 던질 것을 잊지 않았다. 한 명의 흑의인에게서 수십 개에 이르는 암기가 던져졌다.
 독목할자 또한 가늘고 짧은 우모침(牛毛針)을 한 움큼 집어던지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의 생각은 짧았고, 터지는 진각 또한 빨리 이루어졌다.
 쿵!
 촤아아악!
 짙은 먼지 돌풍이 피어올랐다.
 회오리였다. 용권풍처럼 갑자기 만들어진 돌개바람은 흙과 낙엽을 잔뜩 집어 올렸고 나뭇가지도 휘청거리게 했다.
 휘이이이이잉!
 독목할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돌풍은 암기들까지 휩쓸어 경로를 이탈시키게 만들었다.
 파파파파팟!
 빨려 들어간 암기는 회오리의 나선을 타고 바깥으로 다시 뿜어졌다.
 ‘내력으로 만든 기의 선풍!’
 독목할자는 눈 꼬리가 찢어지도록 외눈을 부릅떴다.
 자객들은 아수라장을 뒹굴 듯 되돌아오는 암기를 피하기 위해 분연히 도망치고 있었다.
 스스스스!
 더 이상 허공을 가르는 쇠붙이가 없어질 즈음에야 돌풍도 멈추었다. 모래 바람이 가라앉고, 부릅뜬 독목할자의 외눈으로 부풀어 오른 옷자락이 줄어드는 신소명의 신형이 보였다. 하늘로 치솟은 머리카락이 요란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독목할자는 그의 발밑을 쳐다봤다. 그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지면이 심하게 비틀려 있다.
 ‘흙의 비틀림도 나선형이다. 나선이 처음 시작된 곳은 그의 발 밑······!’
 기를 뿜어내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일류가 되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의복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지 지금 신소명처럼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독목할자는 처음 알았다.
 신소명은 호흡을 정돈했다. 내력을 일시지간에 터트려 돌풍을 일으킨 것이라 체력의 소모가 조금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독목할자를 응시했다.
 “이봐, 이건 어제 해 봤잖아. 다른 거 없어?”
 독목할자는 신음을 참았다.
 ‘파괴적인 권법, 놀라운 내공, 냉철한 심계······. 어느 것 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 아니, 뛰어나다면 뛰어날까?’
 그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연속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이 그의 정신을 되돌려 줬기 때문이었다. 흑의인들은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별다른 공격도 못해 보고 신소명의 권 아래 쓰러지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독목할자는 우두커니 서서 수라장과 같은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벌 한 마리가 수백의 꿀벌을 해치운다고 했지. 지금이 바로 그 꼴이구나. 대체 십지쇄잔께서는 어째서 이런 무모한 일을 명령하신 것인가?’
 그때 그의 머릿속을 섬전과 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벌 떼······?!’
 독목할자는 신음을 억눌렀다.
 ‘한 마리의 말벌을 상대하기 위해 꿀벌은 숫자를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결국 말벌을 죽이는 방법은 스스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 ······결국 우리는 꿀벌일 뿐이었던가?’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독목할자의 머릿속을 크게 강타했다.
 독목할자는 무림 이대 자객집단 암천이 역사의 이름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민했다.
 ‘남은 이백은 본 천의 최정예 특급자객들. 이들과 함께라면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역천(逆天)하는 것이 된다.’
 독목할자는 영리하되, 고지식한 사람이다.
 충의를 버리느냐, 명예를 지키느냐.
 개죽음을 택하느냐, 현명하게 살아남느냐.
 독목할자는 굳은 듯 정지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지······!”
 그의 손이 하늘로 치켜 올려졌다.
 독목할자는 크게 부르짖으며 신소명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신소명은 독목할자가 달려오는 모습을 힐끗 쳐다봤지만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주먹을 거두었다.
 신소명은 다가온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뭐야, 설마 또 항복하겠다고?”
 독목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되었소.”
 독목할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씁쓸한 농담을 떠올리며 신소명을 바라봤다.
 암천의 자객들을 모두 희생해서라도 진기를 소진하려는 계책이었건만, 정작 신소명은 호흡 한 번 흩어지지 않은 채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두려운 자다, 이 자는······.’
 독목할자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서늘한 냉기를 집어삼키며 포권했다.
 “다시 통성명하겠소. 암천주 독목할자요.”
 신소명의 눈으로 이채가 띠었다.
 “새 주인이 들어앉았군.”
 “개를 삶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 수는 없는 법이지 않소.”
 굳이 토사구팽의 고사를 꺼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이제 십지쇄잔은 본 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물······. 우리는 귀하의 앞을 막지 않을 것이오.”
 신소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머리는 좋고 봐야 한다니까. 우리가 피 터지게 싸워서 괜히 남 좋은 일 시킬 필요는 없는 노릇이잖아?”
 독목할자는 쓰게 웃었다. 실제로 계속해 봤자 신소명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남는 것은 오직 암천의 멸망뿐.
 독목할자는 자객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이미 그들 또한 이루어진 도살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고 독목할자와 다르지 않은 의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고 신속히 움직였다.
 자객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독목할자가 신소명을 쳐다봤다.
 “조심하시오. 십지쇄잔은 암천의 천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독립된 단체가 존재하고 있소. 그들은 매우 강하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조용히 논이나 일구며 사는 게 좋을 거요. 앞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자객들이 없어도 충분히 번잡할 것 같으니까.”
 “하하!”
 독목할자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산을 벗어났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정상에 올랐다.
 다소 평평한 산의 중심은 피처럼 붉은 홍의(紅衣)를 걸친 중년인이 홀로 서 있었다.
 홍의 중년인, 매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그가 말했다.
 “내가 십지쇄잔 무영혈이다.”
 신소명은 근처의 이름 모를 묘비 위에 엉덩이를 붙이며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반가워.”
 십지쇄잔의 눈매가 크게 꿈틀했다. 아무런 감흥 없는 신소명의 어투가 그를 자극한 것이다.
 십지쇄잔은 비릿한 웃음을 터트렸다.
 “속을 숨기는군. 천외제일신마. 아니, 백두산의 후예여.”
 신소명의 눈매가 가늘게 꿈틀거렸다.
 “알고 있었군. 하긴, 그랬으니 염왕전을 강탈하기 위해 그 노력을 했겠지.”
 십지쇄잔은 피식 웃었다.
 “나와 내 주인 또한 완벽히 믿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전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심심하던 차에 나에게 명을 내린 것뿐이다.”
 “주인? 또 대가리가 있어? 제기랄, 무슨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점조직이야?”
 신소명은 볼을 씰룩였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십지쇄잔은 눈을 번득였다.
 “본 회(會)의 주인을 경시하지 마라!”
 십지쇄잔은 이어 말했다.
 “천외제일신마! 염왕전의 약속 따위는 무시해라. 주인께서는 너를 원하신다. 본 회와 함께 한다면 너는 드넓은 중원은 물론이거니와 고려까지 발아래 둘 수 있을 것이다. 원한다면 고려의 제왕으로까지 만들어 주마!”
 신소명은 손바닥 안에서 손가락을 두들겼다.
 “그거 재미있는 소리네. 나를 왕으로 만들어 준다고?”
 십지쇄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 회의 힘이라면 가능하다.”
 신소명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흐음, 거절해야겠어. 골치 아플 거 같거든. 게다가 고려 땅에는 괄괄한 노친네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나라도 어디 한 곳 부러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
 십지쇄잔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거절은 불가능하다!”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이봐, 불가능이라는 건 내가 패배한다는 말을 할 때나 쓰는 거야.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까. 거절 따위는 그냥 가능이야, 가능. 알아듣겠어?”
 십지쇄잔의 얼굴이 스산한 푸른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당돌하군.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
 신소명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한테는 안 죽거든?”
 “큭! 광오한 놈. 쓰레기 같은 고려의 잡혈 따위가 어쭙잖은 입만 살아 있구나.”
 신소명은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말조심해. 내 조국이야.”
 “흥! 냄새나는 오랑캐의 족속아!”
 신소명은 빙긋 웃었다.
 “이 자식, 정말 비뚤어진 놈이네? 까라면 까고, 말라면 말아야지. 너, 재수 없다?”
 뚜둑. 뚜둑.
 신소명은 주먹을 만지작거렸다.
 “미친개는 패는 게 약이지. 아프더라도 참아. 나 지금 살짝 열받았걸랑.”
 “미천한 놈!”
 촤악!
 십지쇄잔의 신형이 저녁 무렵의 그림자와 같이 길쭉하게 늘어나 신소명에게 들이닥쳤다.
 파콰콰강!
 십지쇄잔의 조공(爪功)은 강력한 진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톱에서부터 한 뼘은 튀어나온 경력은 금석이라도 자를 듯 위험스러웠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자 성명절기인 십지쇄혼파잔조(十指碎魂破殘爪)였다.
 신소명은 묘비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가 몸을 비틀었다.
 츠카아아악!
 두터운 대리석 묘비가 진흙처럼 뭉개지며 열 토막으로 갈라졌다.
 “약삭빠른 놈!”
 십지쇄잔은 병아리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활짝 펼친 채 연달아 공격을 가했다.
 취리리리릭!
 손가락 틈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날카롭다.
 신소명은 정신없이 이어지는 손가락 공격에 어깨를 흔들며 방어에 급급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파앙!
 체계적으로 쏟아진 일흔두 번의 조법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신소명은 처음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이제까지 제대로 움켜쥔 권이 아니라 손가락을 바짝 세운 수도(手刀)였다.
 쉬이잇!
 첨예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선으로 달려 나가는 신소명의 수도는 정확히 십지쇄잔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십지쇄잔은 양손을 떨치며 손가락으로 신소명의 손바닥을 뚫어 버리려 했다.
 수도는 손끝과 손날이 예리한 무기가 되지만 그만큼 손바닥과 손등이 방어에 허술해지는지라 손가락과 같은 뾰족한 공격에 상처를 입기 십상이었다.
 빠르게 뻗어지는 수도.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조법.
 그 순간, 신소명의 펼쳐진 손날에서 짙은 묵기가 피어올랐다.
 촤아아아악!
 손과 팔목이 묵기에 휘감기는 것은 찰나지간이었다.
 “크윽!”
 마치 하나의 창날처럼 솟아오른 신소명의 수도는 십지쇄잔을 관통할 정도로 길어졌다. 십지쇄잔은 코앞까지 치솟은 묵색 예기에 황급히 초식을 회수했다.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더 들어가 공격을 몰아친다면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가만히 멈추어서 창이 된 왼손을 가만히 들고만 있었다.
 “재밌지? 법왕수(法王手)라는 손장난이지. 하도 한 가지만 썼더니 지겨워서 꺼내 봤어.”
 파츠측, 파츠측!
 묵기의 파편이 불똥처럼 튀어 올랐다. 팔뚝까지 뒤덮은 묵기는 야차의 얼굴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움이 전해졌다.
 십지쇄잔은 공력을 가득 끌어올렸다.
 “전설의 모두가 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려의 잡술 따위는 결코 정점에 오를 수 없다. 하지만 네 모습을 보니 동이(東夷) 놈들도 어느 정도의 기예는 지니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글거리는 묵색 창날이 긴장되기는 했지만 결코 자신보다 월등한 기세라고는 생각지 않는 십지쇄잔이었다.
 세인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는 단순한 암살만을 일삼는 자객이 아니다. 천하에 손 꼽힐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속한 회에서 백군(百軍)의 위치에 속했다. 일백 번째의 서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상위 백 명에 꼽히는 무위라는 뜻이었다.
 “과연 주인께서 눈에 들이실 만은 하군. 고려의 오랑캐!”
 화르르르륵!
 십지쇄잔의 전신으로 의복처럼 붉은 기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신소명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고작 그게 다야?”
 번쩍!
 대답은 말이 아닌 섬전과 같은 빛 줄기였다.
 츠차차찻!
 열 개의 손가락 끝에서 튕겨 나온 적광(赤光)은 각각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먼저 도착한 것도, 아직 다가오는 것도 제각각이었다.
 신소명은 왼팔을 들어 팔목에 덮인 묵기를 넓게 펼쳤다. 마치 방패처럼 늘어난 묵기는 아무런 문제 없이 적광을 막아 냈다.
 츠팟!
 열 개의 적광이 묵색 기운 속에 녹아내릴 무렵, 신소명의 앞으로 십지쇄잔의 성난 손가락이 달려들었다.
 신소명은 어깨를 흔들며 법왕수가 실린 왼손을 출수했다.
 쩌저저저정!
 십지와 왼손이 만났다. 마치 철판을 두드리는 듯 날카로운 경력의 반발이 고막을 때렸다.
 십지쇄잔의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비틀린 회전을 그리며 신소명의 양목을 찍어 들었다.
 신소명은 여전히 법왕수가 실린 왼손만으로 공격을 방어하며 간간이 십지쇄잔의 허점을 노려 공격을 시도했다.
 치열한 접전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십지쇄잔은 변화가 없는 전황에 이를 악물었다. 시작은 언제나 우위였지만 손속을 섞을수록 뒤처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다분히 고의적임도 깨달았다.
 신소명은 적당히 허점을 보이고, 적당히 빈틈을 노려 공방을 끊이지 않게 만들었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상대하듯.
 십지쇄잔의 눈매가 서늘한 살기를 폭사시켰다.
 “무슨 짓이냐!”
 신소명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법왕수의 왼팔을 흔들며.
 “좀 놀아 봤어. 하도 오랜만에 사용하는 거라서 서투른 거 같았거든.”
 법왕수는 초식이 있는 무공이 아니다.
 염왕류의 기본이 되는 심결을 바탕으로 막대한 내공을 통한 기운의 발현. 이것이 법왕수의 전부였다.
 끊이지 않는 진기가 없다면 사용할 수 없고, 염왕류의 진수를 깨닫지 않아도 사용할 수 없다.
 빠드득!
 십지쇄잔의 얼굴로 짙은 분노가 치밀었다.
 “나를 고작 연습 상대로 이용해? 하하하! 너에게 알려주마. 내가 어째서 무영혈이라고 불리는지!”
 십지쇄잔의 전신으로 일렁이던 붉은 기세가 피를 쏟은 듯 짙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내 거품처럼 피어오른 기운은 두 눈 깊은 곳으로 빨려 사라졌다.
 ‘무영혈라공(無影血羅功)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마공(魔功), 십합이 지나기 전에 목숨을 취해야 한다!’
 욱신거리며 또한 저릿저릿한 뜨거운 진기가 단전을 들끓게 하는 것을 느끼며 십지쇄잔은 살의를 다졌다.
 무영혈라공은 그가 오 년 전 백군에 들었을 때 회주가 하사한 절학으로 순식간에 지닌 내공을 오 단계까지 증가시킬 수 있는 무공이었지만, 잠력을 격발시킨다는 특성상 오래 유지할수록 몸에 큰 부담이 되고 진기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 긴급한 순간에만 무영혈라공을 사용했고 최대한 이 단계 이상을 증가시키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그는 강호에 이름 높은 자객, 십지쇄잔 무영혈이 되었고 회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십지쇄잔은 분노에 이끌려 무영혈라공을 삼 단계로 운용했다.
 파아아앗!
 순식간에 내공이 대해의 물결처럼 늘어나 주체할 수 없는 힘을 전해 주었다.
 신소명 또한 십지쇄잔의 변화를 느꼈다.
 씨익!
 흰 치아를 드러낸 신소명은 늘어트린 왼팔을 다소 치켜들었다. 여전히 오른팔은 미동도 없이 내려가 있었다.
 그것을 본 십지쇄잔은 흉성으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아직까지 헛된 자신감에 가득 차 있군······!”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소 잡는 칼로 고양이를 죽이겠냐?”
 우드드득!
 십지쇄잔의 전신에서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영혈라공을 사 단계로 끌어올렸다.
 “크흐흐, 뼈를 산 채로 뽑아 버리겠다.”
 십지쇄잔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부담이 크고 제어가 어려운 네 단계 무영혈라공으로 뇌까지 살의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신소명은 법왕수의 왼손을 들어 검지를 까닥거렸다.
 “덤벼라, 멍멍아!”
 
 쉿! 쉬힛! 쉬힛!
 커다란 조영(爪影)이 전방을 가득 메웠다.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너덜거리며 뼈를 파 헤칠 것 같은 날카로운 예기가 휘몰아쳤다.
 츠츠츠츳!
 마치 채찍처럼 법왕수의 왼손이 흩뿌려졌다. 공기의 흐름을 비집고 들어가 바람과 하나가 되는 법왕수의 묵기는 허공에서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십지쇄잔의 모든 조영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십지쇄잔의 조법은 아무리 애를 써도 법왕수의 틈을 뚫을 수 없었다.
 짜악!
 빽빽한 손톱 그림자 사이를 너무도 쉽게 비집고 들어간 법왕수의 묵기는 그대로 십지쇄잔의 목을 타고 한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고통과 함께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십지쇄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웅!
 그 순간 신소명이 달려들 듯 십지쇄잔의 품 안으로 접근했다. 십지쇄잔은 손가락을 빳빳하게 세워 앞으로 찔러 들어갔다.
 신소명은 법왕수의 왼손을 휘둘렀다.
 우두둑!
 신소명의 왼손을 찌른 십지쇄잔의 손가락이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구부러졌다.
 “크헉!”
 십지쇄잔은 비틀린 손가락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일생을 수련한 손가락이며 손톱이 단지 휘둘러진 손등과 부딪혀 부러지고 말았다.
 신소명은 왼팔을 한껏 치켜들어 팔목으로 십지쇄잔의 몸통을 가격했다.
 쾅! 쾅!
 법왕수의 묵기에 휩싸인 그의 왼팔은 천근 바위처럼 무거운 소리를 내며 십지쇄잔을 두들겼다.
 십지쇄잔은 연달아 다섯 번을 얻어맞고 입으로 핏물을 왈칵 뿜었다. 그 순간 신소명은 쾌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촤악!
 핏물이 십지쇄잔의 가슴팍을 적셨다. 그는 피를 게워 내며 살기를 넘어 광기가 치미는 눈으로 신소명을 쏘아봤다.
 신소명은 히죽 웃어 주었다.
 “더러운 거 묻히기는 싫거든.”
 빠드득!
 “천외제일신마······!”
 비명에 가까운 십지쇄잔의 절규.
 그는 이미 드리워진 패배의 그림자에 이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뚜두둑!
 “끄흡!”
 십지쇄잔은 부러진 자신의 손가락을 억지로 접골시켰다. 과격한 동작으로 뼈가 기울었고 피부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다.
 “이 손가락으로 네 놈의 뇌수를 파먹고 말겠다.”
 신소명은 물끄러미 서 있다가 벼락같이 왼손을 흩뿌렸다. 조력이 달려 나가고.
 스칵!
 법왕수의 왼손은 마치 칼날처럼 길게 늘어나 십지쇄잔의 가슴팍을 길게 베어 냈다. 의복이 찢겨 나갔고 상체 위로 실처럼 가느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려 나간 피부 위로 불꽃처럼 파직거리는 묵기가 보였다.
 십지쇄잔의 눈으로 광기의 결심이 어렸다.
 “오랑캐 따위에게 본 회의 무공이 무너질 수는 없다!”
 그는 최후의 오 단계 무영혈라공을 끌어올렸다. 십지쇄잔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신소명은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 그런 허접한 진원술(盡元術) 따위에 의존하다니. 그런 것은 몸만 망가트릴 뿐이라니까.”
 “크흐흐, 필요 없다! 강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네놈을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나는 설사 마귀의 유혹이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호오, 그러셔?”
 신소명은 가소롭다는 듯 법왕수의 왼손을 휘둘렀다.
 쾅!
 “크억!”
 신소명은 비틀거리는 십지쇄잔을 쳐다봤다. 십지쇄잔은 오 단계의 무영혈라공에도 불구하고 신소명의 경력을 막을 수 없자 광분에 가깝게 분노하고 있었다.
 “크으으으! 죽인다! 죽인다!”
 다시 달려들어 저 건방진 고려의 오랑캐를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십지쇄잔의 사지는 근육이 파열되고 괴사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것이다.
 신소명은 왼손으로 천천히 십지쇄잔을 겨냥했다. 뭉클거리며 피어나는 묵색 진기가 폭발할 듯 이글거렸다.
 슈아악!
 법왕수의 왼손이 넓고 커다란 칼날을 만들어 냈다. 시커먼 묵기로 이루어진 예기는 피를 부르는 듯 불길하게 넘실거렸다.
 “오랜만에 피를 먹었더니 날뛰고 싶은 모양이군.”
 신소명은 법왕수의 왼손을 잠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묵기로 이루어진 칼날을 쓰러진 십지쇄잔의 앞으로 겨누었다.
 우우우우웅!
 먹잇감을 알아본 것인지 묵기가 크게 요동쳤다.
 신소명은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덧씌워진 법왕수의 공력이 따라 흔들리더니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왼손을 벗어나 십지쇄잔을 향해 쏘아졌다.
 “크헉!”
 십지쇄잔은 눈, 코, 입, 귀를 통해 스며든 묵색 기세를 느끼고 움직일 수 있는 고개를 커다랗게 흔들었다.
 “법왕수는 살아 있는 마귀. 아까 그랬던가? 나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귀의 유혹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자, 이제 받아들여 봐. 법왕수를 얻으면 넌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다.”
 신소명은 담담히 웃었다.
 “물론 네가 먼저 잡아먹힐 테지만.”
 쩌쩌저정.
 십지쇄잔의 몸통으로 하얀 서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팔다리에서 흐르던 핏물도 얼어붙었다.
 법왕수의 또 다른 이름은 명음(冥陰).
 지옥유부의 원혼들이 내뱉는 처절하고 차가운 절규로 만들어진 마귀였다.
 십지쇄잔은 얼어붙어 벌어지지도 않는 입술을 겨우 달싹거렸다. 본능이, 무의식이 내뱉는 공포였다.
 “주, 죽고 싶지······ 않아.”
 신소명의 양손으로 묵색 섬전이 피어올랐다.
 “마차 지나간 뒤에 손 흔드냐, 병신아?”
 
 
 
 
 
 第七章 검치(劒痴), 염마를 탐내다
 
 
 
 
 
 
 
 
 
 
 
 이가령은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몹시 부르터 있었다.
 “으읏.”
 그녀는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이다 저릿저릿한 통증에 가늘게 눈썹을 찌푸렸다. 뜨거운 액체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뒤집었다. 하얗고 고운 살결의 손등과는 달리 그녀의 손바닥은 목수의 손처럼 상처와 물집으로 가득했다.
 “또 물집이 터졌네······.”
 이가령은 낮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였다. 엄지부터 약지까지 움직인 순서에 따라 저릿저릿한 고통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기분 좋은 아픔이었다.
 그녀의 입가로 잔잔한 웃음이 머물렀다.
 “통증도 이젠 익숙해졌어. 도를 잡는 것도 이제 힘들지 않아······.”
 불과 오 일.
 짧고 김을 판단할 수 없는 애매한 시간.
 이가령에게도 그랬다.
 도를 휘두를 때는 천추를 왕복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이렇게 식어 가는 땀에 조금의 추위를 느끼며 앉아 있을 때는 정말 빠르게도 지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옆에 비스듬히 세워 놓은 보도(寶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가족을 보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철왕(鐵王)은 제가 잘 사용하겠어요. 본문의 이름에, 아버님의 신념에 결코 누가 되지 않도록.”
 짜라랑.
 바람도 없는데 도파(刀把)에 매달린 붉은 수실이 가볍게 흔들렸다. 수실 끝에는 콩알만 한 방울들이 달려 있었는데 흔들리며 청명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가령은 빙긋 웃었다. 마치 그녀의 혼잣말을 대답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왕도(鐵王刀),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잘 부탁하지.”
 흠칫!
 이가령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곳은 철혈문의 지존만이 출입할 수 있는 지하 연공실. 하나뿐인 비밀문은 단단히 걸어 잠갔고 문이 열린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그때 드문드문 틀어박힌 야명주(夜明珠)의 밝음이 찾아들지 않는 연공실의 구석에서 훤칠한 키의 건장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나야, 나.”
 긴 머리를 어깨 너머로 늘어트리고 무쇠처럼 단단한 주먹을 지닌 사내, 신소명은 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이가령은 가슴을 짚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여기는 어떻게 알고 들어왔죠?”
 안도 속에 짙은 의문과 호기심이 어렸다.
 신소명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새벽에 비도 오고, 잘 곳이 없어서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이가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삼 겹이나 되는 기관을 멈추고 반각이나 지하로 내려와야 하는 은밀한 연공실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신소명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졸려서 몰랐는데 이거 나름 멋지네. 야명주도 많이 박혀 있고. 아버지가 부자였나 봐? 이거 나 하나 주면 안 돼?”
 이가령은 말없이 쓰게 웃었다. 그녀의 부친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분명 철혈문은 강호에 유력한 패도지문(覇刀之門)이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신소명은 문득 눈매를 좁히고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여기가 그렇게 은밀한 곳이야? 흐흐흐! 나도 은밀한 거 좋아하는데······.”
 노골적으로 몸을 훑는 신소명의 시선에 이가령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몸을 황급히 움츠렸다.
 “우리, 더 친해지지 않겠어? 으흐흐.”
 신소명은 어슬렁거리듯 이가령에게 걸어갔다. 마치 곰이 먹이를 노리듯 느리지만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먼저 집어삼켰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이가령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신소명은 아무런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천외제일신마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은 이미 이가령의 마음 깊은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흥!”
 그때 갑자기 신소명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꺅!”
 이가령은 들이닥친 공포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따악.
 눈을 감은 이가령의 코끝으로 가벼운 통증이 전해졌다. 그리고 드리워진 신소명의 인기척이 다시 뒤로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놀라며 퍼뜩 눈을 떴다.
 신소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날 놀렸어!’
 이가령은 부끄러움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내가 귀신 소리는 자주 들어도 짐승은 아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신소명은 팔짱을 풀었다.
 “그럼 다시 해볼까?”
 “네? 으윽!”
 짜라랑!
 갑자기 들이닥친 주먹에 이가령은 몸을 숙이며 철왕도를 움켜잡았다. 신소명의 주먹은 유성처럼 꼬리를 물고 다시 날아들었다.
 카앙!
 ‘으윽······ 대단한 권력(拳力)!’
 이가령은 양손으로 도파를 움켜잡고 도신을 눕혀 신소명의 주먹을 막아 낸 상태였다.
 신소명은 다시 주먹을 뻗었다. 진기를 집어넣지 않은 순수한 육체의 힘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이가령은 충분히 위태로웠다.
 캉! 캉!
 도신과 권이 만났는데 날카로운 쇳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가령은 도신으로 권을 막아 내기만 하며 이를 악물었다. 연환으로 들이닥치는 신소명의 주먹은 한 치의 빈틈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같이 놀아 보자고!”
 신소명은 종용하듯 고함을 질렀다.
 “철혈문의 도법은 방어용인가?”
 ‘당할 수만은 없어!’
 이가령은 도파를 쥔 손에 힘을 가득 집어넣었다.
 짜랑. 짜랑.
 수실에 매달린 방울이 춤을 추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핫!”
 이가령은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방어로만 사용하던 철왕도를 날카롭게 세워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번의 호흡에 세 번의 투로!’
 그녀는 낭랑히 목소리를 높였다.
 “웅산반획(雄山班劃)!”
 쇄새새색!
 도첨(刀尖)이 가볍게 흔들리나 싶더니 흐릿한 잔영과 동시에 세 갈래로 나뉘어져 신소명의 요혈을 노렸다.
 신소명은 쏘아져 오는 도첨을 권배(拳背)를 이용해 모조리 비껴냈다.
 “괜찮군, 다음!”
 이가령은 그의 말을 듣기 전부터 천중도결(天重刀訣)의 두 번째 초식을 준비 중이었다.
 “교획거전(鮫劃擧塡)!”
 파앙!
 멈춘다 싶던 도신이 돌연히 달려들어 신소명의 명치를 노렸다. 교어(鮫魚)처럼 질주하는 철왕도에는 무거운 경력이 잔뜩 맺혀 있었다.
 신소명은 손바닥을 활짝 펼쳐 박수를 치듯 가슴 앞에서 양손을 붙였다.
 쩌어어어엉!
 손바닥에 붙잡힌 철왕도는 원통함을 내뱉듯 커다란 도명(刀鳴)을 터트렸다.
 “도명이라, 제법이군.”
 신소명은 히죽 웃으며 철왕도를 놓아주었다. 도는 재빨리 회수되어 도갑에 들어갔다.
 신소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끝이면 서운한데? 오 일 동안 저거 두 개 익혔어?”
 이가령은 고개를 저었다.
 “종화추언(縱火追偃), 수룡철소(授龍鐵搔), 비촌구솔(批忖拘率)까지 모두 오 초식을 연성했어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겠죠.”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가령의 옷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굵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바닥을 적셔 댔다.
 “여섯 번째 초식을 쓰겠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최고의 무위랍니다.”
 이가령은 발도(拔刀)를 준비했다. 허리를 숙이고 회수된 도파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금방이라도 쏘아질 화살을 선명히 떠오르게 했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식 자체가 신도합일(身刀合一)을 품고 있군. 완성한다면 충분히 강해지겠어.”
 이가령은 이미 집중에 빠져 신소명의 칭찬은 들리지 않았다.
 고오오오.
 좁고 가녀린 이가령의 어깨를 타고 땀의 김이 하얗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소명은 양손을 떨어뜨리고 가만히 서 그 모습을 관찰했다.
 주르륵!
 이가령의 볼로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얼굴은 땀으로 흥건한데 입술은 메말라 조금만 달싹거려도 피가 흥건히 쏟아질 것 같았다.
 ‘빈틈이 없어······!’
 겉으로 보기에 신소명의 모습은 빈틈밖에 남질 않았지만 이미 심기(心氣)가 하나로 어울린 이가령의 심상은 신소명을 하나의 틈도 없는 철옹성으로밖에 그려내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한껏 달아오른 진기는 이제 더 이상의 팽창을 거부하는 듯 한시라도 빨리 달려 나가기를 원했다.
 “후······ 흡!”
 이가령의 날숨과 함께 불꽃처럼 피어난 도신은 아래서 위로, 구부정한 반원을 그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쏴아아악!
 발도의 도풍이 신소명의 옷자락을 크게 흔들었다.
 이가령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하늘로 치솟은 철왕도를 손목을 이용해 돌린 다음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내리꽂았다.
 “풍벽첩운(風擘疊雲)!”
 바람을 찢고 구름을 쌓는다는 초식답게 도영(刀影)이 순간적으로 서른 개로 늘어났다.
 연무장은 빼곡한 칼 그림자로 발 딛을 곳 없이 변했다.
 “칼의 비······!”
 신소명은 짧게 감탄하며 소매를 휘둘렀다.
 휘이이잉!
 소매 끝자락에서 시작된 돌풍이 도영과 맞섰다.
 타탕! 타탕! 타타타탕!
 불꽃이 튀고, 칼 그림자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서른 개의 도영이 사라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신소명이 모두 제거하기 전에 이가령이 먼저 초식을 거두었다. 거둘 수밖에 없었다.
 철컥!
 이가령은 철왕도에 의지해 몸을 겨우 세우고 있었다. 지팡이가 된 철왕도는 아직도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폐부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마시며 입가의 단내를 풍기는 이가령은 심하게 지쳐 보였다.
 신소명은 고요히 서서 이가령을 지켜보았다.
 이가령은 최소한의 기력만을 회복한 다음 애써 흔들리는 다리를 지탱해 몸을 곧게 세웠다.
 “옷자락 하나라도 스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부족했군요.”
 처량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많이 창백했다. 과도한 진기를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쁘지 않던데? 물론 내가 그까짓 칼질에 당할 리가 없지만 비슷비슷한 송나라 놈들에게는 통할 거 같구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가령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퉁퉁 부르튼 그녀의 손가락은 처음 봤을 때와 비하면 생김새가 천지 차이였다.
 ‘재능이 있어. 아무리 밑바탕이 되는 내공이 착실하다고는 하지만 불과 닷새 만에 흉내 낼 수 있는 초식들이 아니었어.’
 신소명은 새삼스레 이가령을 쳐다봤다. 손바닥 전체가 부르트고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그녀는 매일 밤을 쇠의 냄새와 보냈으리라.
 “그래, 열심히 했네. 고생한 흔적이 보여! 이게 다야?”
 신소명이 물었고, 이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쯤은······.”
 신소명은 이채를 띠었다.
 “절반? 아직 또 있어?”
 이가령은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철혈문을······ 소녀를, 당신의 뜻에 모두 맡기겠어요. 물론, 이것은 철혈문이 홀로 설수 있을 때까지, 조언을 듣는 것뿐이에요! 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남에게 미루지 않으니까요!”
 신소명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지금도 그 처지잖아?”
 “고용한 낭인 무사들을 해고했어요. 오직 저와 총관, 십삼수령들로만 이곳을 지켜낼 거예요.”
 “어쩐지 외원 쪽이 조용하다고 했지.”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통보한 오 일의 시간.
 그동안 이가령은 홀로 철혈문의 비기를 연마했다.
 철혈문의 도법은 남자를 위한 중도.
 여자가 익히기에 결코 쉽지 않다. 지금도 드문드문 보이는 상처의 흔적들이 그 당시의 통증을 전해 주고 있었다.
 신소명이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신념은 뭐지?”
 이가령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가는 것! 결코 흔들리지 않는 긍지 있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호전적인 대답이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그녀는 고된 수련으로 철왕도를 쥐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기 위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도식을 연마했으리라.
 부족하다면 부족하고, 제멋대로인 대답.
 생각하는 그에게 이가령의 강렬한 눈빛이 전해졌다.
 뜨거운 열망으로 타오르는 두 눈.
 하지만 마치 어린 아이가 보내는 간절한 눈빛처럼 느껴졌다.
 피식!
 신소명은 이를 드러냈다.
 여러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웃음이 모든 것을 대답할 수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아······.”
 이가령의 눈으로 금세 습막이 어렸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며, 가슴에 우러난 고마움 때문이었다.
 “감사해요, 정말로······!”
 신소명은 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며 그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재미있는 녀석들을 자주 만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는 십지쇄잔의 죽음을 떠올렸다.
 십지쇄잔은 고통스럽게 죽었고, 신소명은 명도를 떠돌던 십지쇄잔의 혼을 불러 질문을 던졌다.
 구유(九幽)의 망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원하는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나를 굴복시키려고 한다고? 칠익회(七翼會)라고 했던가? 이제 육익이 되었군. 좋아! 벌써부터 주먹이 근질근질 한데?’
 스르릉.
 연공실의 문이 열렸다.
 신소명은 이가령을 먼저 지나치며 툭 내뱉었다.
 “앞으로 치마도 좀 입고 그래. 여자가 돼서 남자 옷은 왜 입는 거야? 가슴에 묶은 천도 풀고. 여자가 너무 밋밋하지 않냐?”
 이가령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렸다.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위층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나고, 이가령은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가슴은 원래 작았는데.”
 
 * * *
 
 백발의 노인이 있다.
 서캐 가득한 머리는 봉두난발이며, 대충 기운 천 조각으로 치부만 거의 가린 몰골은 흉년 즈음에나 보이던 거지의 모습이었다.
 “배고파······.”
 노인은 시장통 골목의 응달진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비루먹은 거지의 몰골과 꼿꼿이 세운 허리로 다부지게 좌정한 모습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꼬르륵.
 자문자답이 이러하듯 노인의 말에 배가 커다란 소리를 냈다.
 노인은 뚫어져라 앞을 쳐다봤다. 그의 바로 앞에 다소 뚱뚱한 남자가 굵은 땀을 흘리며 자신과 비슷한 만두를 찌고 있었다.
 “배가······.”
 신음처럼 중얼거리던 노인은 문득 말을 멈추고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제기랄, 또 까먹었구나.”
 노인은 심한 건망증을 앓고 있었다.
 내일을 기억하기 어렵고 오늘을 기억하기는 더 어렵다.
 노인은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 그래. 나는 배가 고팠다.”
 겨우 하려는 말을 기억한 노인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만두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먹은 것이 없어 휘청휘청 흔들렸지만 두 손을 뒷짐 지고 고개를 반듯이 세운 노인의 걸음걸이는 그럴듯한 고관대작의 모양새였다.
 “어서 옵······ 어?”
 만두가게 주인이 정신없이 만두를 찌다가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뱉은 말도 다 끝내지 않고 인상을 왈칵 썼다.
 만두가게 주인은 코를 붙잡고 손을 저었다.
 “제기랄, 냄새 풍기지 말고 꺼져!”
 노인의 몸에서 나는 악취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만두가게 주인은 권고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멀뚱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만두피를 미는 홍두깨를 집어 들었다.
 “기왕지사 죽어 뒈질 몸, 오늘 내 손에 죽고 싶다는 거냐?”
 두툼한 살집이 부르르 떨리며 인상을 쓰는 만두가게 주인의 모습은 여간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주변에서는 둥그렇게 구경꾼들이 모여 이 행태를 구경하고 있었다.
 노인은 갑자기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 내가 여기 왜 서 있는 거지?”
 그는 주변을 휙휙 돌아봤다.
 “에잉, 또 건망증이 도졌구나. 어? 이것은 만두로군!”
 노인은 잘 쪄진 만두를 보고 반갑다는 듯 새카만 손을 뻗었다. 만두가게 주인이 화난 얼굴로 깡마르고 지저분한 손을 향해 홍두깨를 내리쳤다.
 “어디서 감히!”
 휘익!
 만두피를 밀며 다져온 근력은 커다란 홍두깨를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움직이게 해 주었다. 볼품없는 노인의 손은 홍두깨와 부딪치는 순간 어느 한 곳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건 또 뭐야?”
 날아오는 홍두깨를 보며 노인이 인상을 쓰는 순간.
 때마침 홍두깨가 노인의 손목에 내리꽂히던 그때.
 퍼석!
 마치 물에 적신 모래가 말라 흩어지듯 단단한 홍두깨가 형체도 없이 바스라지고 말았다.
 톱밥의 잔해만이 찜통 위로 가득 흩어졌다.
 “허억!”
 만두가게 주인은 물론이거니와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멀쩡하던 홍두깨가 가루가 되어 버리다니, 생각지도 못한 괴사였다.
 노인은 묵묵히 만두를 집었다.
 “맛있겠구먼. 허허······ 끄응!”
 밝게 웃던 노인의 표정이 왕창 일그러졌다.
 왜소한 그의 어깨를 타고 겨울바람보다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쳤다.
 쩌저저정!
 찜통에서 나오던 김이 얼어붙어 찜통을 가득 뒤덮었다. 화로는 이미 불을 잃은 지 오래였다.
 홍두깨가 바스라지면서부터 만두가게 주인의 사타구니를 뜨뜻하게 적셨던 노란 그것도 꽁꽁 얼어 버렸다.
 “이가 다 빠져서 만두를 씹을 수 없다는 걸 또 깜빡하고 말았군.”
 살기를 진득하게 흘리며 중얼거리는 노인.
 만두가게 주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노인의 옆과 뒷모습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의 바로 정면에 선 상태였다.
 그래서 잘 보였다.
 희고 깨끗한 노인의 치아가.
 몸은 진창에 빠진 듯 더러운데 특이하게도 치아만큼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너무도 깨끗했다.
 “빌어먹을!”
 만두를 먹지 못해서인가, 자신의 건망증을 탓해서인가.
 노인의 인상은 더 굳어 갔고 그럴수록 피어나는 무형의 기세는 사람들을 크게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는지라 만두가게 주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인의 입을 가리켰다.
 “저, 어르신······ 이빨이 멋지신뎁쇼.”
 “응? 내가 이빨이 어디 있다고······ 어, 있네?”
 노인은 무심결에 손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가 단단하게 잡히는 치아를 느끼고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핫, 핫핫! 이빨이 있군!”
 쾅과아아아!
 노인의 웃음에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심장을 덜컥 떨어트리는 차가운 기세는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귀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만두가게 주인은 황급히 찜통을 들어 노인에게 건넸다.
 “마, 만두 좀 드시지요. 어르신.”
 “어? 그래. 고맙다.”
 노인은 만두를 집어 들고 한 입에 우겨 넣었다. 한동안 쩝쩝거리는 소리만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모양이군! 제기랄, 오늘 횡액을 당했다.’
 만두가게 주인은 질린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양손에 하나씩 만두를 들고 번갈아 씹어 대는 식탐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노인은 가게의 모든 만두를 먹고 나서야 배를 두드렸다.
 “으윽, 내 배가 왜 이렇게 아프지? 오호라, 네가 암수를 썼구나! 누구냐? 감히 나······ 내가 누구지? 아무튼 본좌에게 승부를 거는 것인가!”
 우르릉!
 노인의 몸에서 천둥이 일고 벼락이 쏟아졌다.
 만두가게 주인은 억울해 미쳐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고, 어르신! 아닙니다! 소인의 만두를 드시고 그렇게 배가 부른 것입니다! 아픈 게 아니라 부른 거라구요!”
 그는 애걸복걸하며 노인을 설득시켰다.
 노인은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흥! 나는 만두를 좋아하지 않는다. 벌써 만두를 먹어 본 지 육십 년이 흘렀지. 그래, 열살 무렵 어머니의 손을 잡고 먹은 만두 반쪽은 정말 다시 찾을 수 없는 맛이었지.”
 노인의 얼굴로 짙은 회상이 어렸다. 만두가게 주인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노인은 한참 만에야 추억에서 깨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만두를 먹으러 왔는데 주인이 없군. 만두도 다 떨어진 것을 보니 장사를 관둔 모양이구나. 안타깝다, 허허!”
 그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는······.”
 노인은 애써 가는 눈길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던 수십의 사람들이 황급히 딴청을 부렸다.
 “허허,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모였는고?”
 노인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수염이 없었다.
 “내가 수염이 있었나?”
 노인은 길가에 서서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렇게 그는 노을이 깔릴 때까지 우두커니 길가에 서 있었다.
 “어이쿠, 벌써 해가 졌구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정신을 차리자 총총한 별을 발견한 노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내 두 걸음도 걷기 전에 울상을 했다.
 “내 집이 어디지?”
 노인은 난감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일단 오늘은 객잔에 거처를 잡고 지난 과거를 생각 해 봐야겠구나.”
 
 노인은 지체 없이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건장한 체격의 점소이가 더러운 맨발로 객잔에 들어서는 노인을 보고 쌍심지를 켰다.
 그때 입구의 장반(지배인)이 노인을 보고는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아칠! 이 개새끼야! 어서 저 귀인을 상석으로 모시지 못할까?!”
 장반은 점소이가 거들먹거리며 노인에게 향하자 자신도 모르게 절박한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는 오전 중의 만두가게 사건의 구경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만두가게 주인이 그의 매형이기도 했다.
 “예? 네, 넷! 노인 어른, 이리로 오시죠.”
 점소이는 갑자기 떨어진 장반의 불벼락이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눈치를 살피고는 노인을 향해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인사를 받아들였다.
 점소이는 다급히 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석으로 모시라 했지만 사실 밥 먹고 술 마시는 곳은 일층뿐인지라 좋고 나쁘고 할 자리가 없었다.
 얼추 빈자리를 주면 되는 것인데 하필 손님이 제일 많은 시간 때라 자리가 모두 가득 차 있었다.
 “어르신, 죄송한데 자리가······.”
 점소이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가득 띠우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심 자리가 없으니 포기하고 나가지 않겠냐는 잔머리에서였다.
 ‘저, 저 미친 새끼!’
 장반은 눈앞이 아찔하여 속으로 온갖 욕을 점소이에게 던졌다. 노인이 화가 나 객잔을 뒤집어 버린다면 그날로 쪽박을 찰 신세였다.
 하지만 노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도 보아 알고 있네. 그렇다면 합석이라도 안 되겠는가? 굳이 다시 발품을 팔고 싶지 않아 그러네. 오랜만에 사람들의 냄새도 맡고 싶고.”
 ‘니미, 냄새는 네놈한테 더 많이 난다.’
 점소이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눈은 이미 목표를 물색 중이었다. 만만해 보이고 혼자 앉아 있는 인물. 없어 보일수록 상대하기 쉬울 것이다.
 ‘옳지!’
 때마침 객잔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들이켜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로 근심이 가득하고 우울함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
 ‘보나마나 계집이 바람을 피웠겠지!’
 점소이는 노인을 남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커흠, 손님. 죄송하지만 합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빈자리가 없어서······.”
 남자는 고개를 힐끗 들어 점소이와, 그 옆의 노인을 잠깐 바라봤다. 점소이는 당연히 남자가 거부할 줄 알았고, 그에 대비한 거짓과 협박을 입 속에 옹알거리고 있었지만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로 모시게.”
 점소이는 미친놈이라고 그를 비웃으며 노인을 맞은편 자리에 앉혔다.
 노인은 잔잔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별 말씀을.”
 남자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소이는 주문을 받지도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주방에서 장반에게 주판으로 호되게 얻어맞고 있었다.
 노인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구먼. 좋지 않은 일을 당한 모양이지?”
 “돈벌이를 잃어서 그렇습니다.”
 씁쓸히 웃으며 거푸 술잔을 들이키는 사내는 오늘 철혈문에서 해고당한 광동의 낭인 하문룡이었다.
 노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사지 멀쩡하고 모난 것도 없는데 왜 그런가?”
 하문룡은 짧게 대답했다.
 “무력(無力).”
 “힘이 없다고? 그래도 이 늙은이보다는 건강하지 않나? 나를 보게. 곧 관에 들어갈 송장이나 다름없음이야.”
 노인의 얼굴이 우울하게 변했다.
 하문룡은 실소를 흘리며 자신의 잔을 노인에게 건넸다.
 “아, 좋군! 대체 얼마 만에 주흥이 생기는 것인지 모르겠군. 아주 기분이 좋아.”
 노인은 즐겁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피어난 미소로 유독 흰 치아가 드러났다.
 ‘고수?’
 하문룡의 눈이 빛났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치아다.
 ‘반노환동(返老還童)?!’
 퍼뜩 강호의 상식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반노환동이 어디 쉬운 경지이던가. 흘러간 젊음을 되찾는다는 것은 이미 무공이 극에 도달했다는 뜻이고 입선(入仙)에 가깝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는 고고한 무당파의 도사들조차 꿈에서 바라는 경지를 이 추레하고 어딘가 멍해 보이는 노인이 이루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문룡이 추측을 마무리 짓는 사이 노인은 벌써 술병을 다 비우고 말았다.
 “허허, 좋군. 좋아. 탁한 화주(火酒)의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오르는구나.”
 노인은 혼잣말처럼 시구를 흥얼거렸다.
 “사람을 죽였네, 피가 튀는구나. 얼쑤! 무의 길이 무엇이고 인의 길이 무엇이던가? 내가 믿는 것은 한 자루 검이노니······.”
 하문룡은 가만히 노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말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무림과 연관이 없지는 않은 것 같고 호탕함도 묻어 있는데 도통 무림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세상에 사연 없고 슬픔 없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마침 점소이가 휘황찬란한 음식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두 눈은 시퍼렇게 변해 퉁퉁 붓고, 한쪽 코는 헝겊으로 막고 있었다.
 “마, 많이들 드십시오.”
 점소이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음식을 내려놓고 후다닥 사라졌다.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이 객잔은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공손하군! 자네도 들게나.”
 하문룡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떨 때는 노회한 강호의 노고수처럼 보이고 지금은 또 천지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노인은 고개를 파묻고 음식을 먹어 댔다.
 그때였다.
 “언제부터 여기가 거지들 밥이나 먹여 주는 곳이 됐지?”
 대머리에 눈썹이 없는 거구의 사내가 한껏 인상을 썼다. 손님들은 숨을 죽이고 황급히 객잔을 도망쳤다. 밖에는 일견하기에도 서른 명은 넘어 보이는 장한들이 둥그렇게 진을 치고 있었다.
 장반은 사색이 되었다.
 “와, 왕 대협! 저 어르신은 거지가 아니라······ 어이쿠!”
 인근 시장통을 장악하고 있는 독두방의 우두머리 왕석은 한 주먹에 장반을 바닥에 뒹굴게 만들고는 침을 퉤 뱉었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 어쩐지 요즘 뒤에서 보호비가 많다고 중얼거린다더니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는 모양이군? 그래, 그러니 내가 수금하러 나오는 날 저런 거지 늙은이를 데려다 놓은 거겠지!”
 장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왕 대협! 저 노인은······!”
 “노인은? 황후장상이라도 되는 분이시냐? 클클!”
 장반은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 노인은 보통 노인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거지 늙은이지!”
 왕석은 다시 주먹을 날렸다. 장반은 신음도 못 내고 기절해 버렸다.
 왕석은 인상을 가득 쓰고는 노인에게 걸어갔다.
 하문룡은 내심 긴장하며 그를 살폈다. 혼자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밖에 세워 둔 삼십 명 정도의 부하들이 문제였다. 이런 개싸움은 난전이 될수록 개인이 불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문룡은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이봐, 영감!”
 왕석은 다가와 뼈를 핥고 있는 노인을 향해 목소리를 깔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노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미친 늙은이가!”
 왕석은 위협적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때 노인이 입에서 오물거리던 뼈를 퉤 뱉었다.
 푸숙!
 뼈가 절반 이상이나 탁자에 내리꽂혔다.
 왕석의 눈이 커졌다. 노인이 뒤를 돌아봤다.
 “나를 불렀느냐?”
 “그, 그래······.”
 노인은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왕석의 배에 문질렀다. 마치 손가락의 기름기를 닦는 행동이었다.
 “무, 무슨 짓이냐!”
 왕석이 놀라며 허둥지둥 몸을 뺐다.
 파락호 생활을 하며 악명을 쌓았고 그만큼 무림인들에 대한 경각심을 지니고 있었다. 뼈를 뱉어 두꺼운 탁자에 박아 넣는 순간 이미 그는 충분히 놀라고 있었기에 노인의 사소한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먹을 때 말 시키지 마.”
 노인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그게 왕석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쿵!
 거구의 육체가 바닥에 허물어졌다. 하문룡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지 한 번의 손가락질에 절명한 것이다.
 노인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하문룡을 쳐다봤다.
 “자네, 힘이 없다고 했던가? 자네에게 이 관천지(貫天指)를 주겠네.”
 하문룡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짐작했던 대로 노인은 고수였다.
 “소, 소생이 어찌 노야의 절학을······.”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좋은 만찬이었다. 이 많은 음식들도 자네가 권한 한 잔의 화주보다 못했음이네. 오랜만이야, 과거의 기억을 추억하는 것은. 알다시피 나는 건망증이 아주 심해서 옛날을 다 잊어버렸거든.”
 말하는 노인의 뒤로 방주의 죽음을 눈치 챈 서른 명의 파락호들이 흉기를 뽑아 달려들고 있었다.
 노인은 빙긋 웃었다.
 “또 언제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몹시 행복하다네.”
 꼿꼿이 세운 검지를 앞에 들고.
 
 콰직!
 아름드리나무의 정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후욱, 후욱!”
 하문룡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구멍의 크기는 쌀알과 비슷했지만 그에게 큰 성취감을 안겨 주었다.
 나무 그늘에서 만두를 씹고 있던 노인은 박수를 쳤다.
 “좋아, 자네는 재능이 있어. 손가락 힘이 아주 대단하구먼. 누구에게 배웠지?”
 하문룡은 진기를 거두며 노인에게 걸어갔다.
 “바로 노야께 전수받았죠.”
 이제 그는 노인의 건망증에 잘 적응한 상태였다.
 노인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자야! 오늘은 이 사부가 무엇을 가르쳐 주면 좋겠느냐?”
 하문룡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노야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저 관천지를 전수 받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자가 아닌데 관천지를 전수 받는다고? 관천지는 또 뭐지?”
 하문룡은 관천지의 구결을 말하며 지풍을 날려 보였다. 다시 아름드리나무에 쌀알만 한 구멍이 뚫렸다.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구만. 자네는 이미 관천지를 익히고 있지 않나?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르쳐 주지?”
 “보름 전부터 저에게 가르쳐 주셨죠. 오늘은 저희가 함께하는 마지막 날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석하다는 얼굴을 했다.
 “자네를 다시 못 보게 된다고 하니 슬프구먼. 그래, 우리는 어쩌다 만나게 되었더라?”
 하문룡은 짧게 객잔에서의 만남을 들려주었다. 하루에 적어도 두어 번은 물어 온 일인지라 간략하고 조목조목하게 말할 정도로 입에 익어 버린 내용이었다.
 또한 이제 노인의 곁에서 무공을 배운 지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안 물어보면 오히려 어색해질 정도인 것이다.
 “오, 그런 일이 있었나? 그건 그렇고······ 힘이 없어서 쫓겨났다고? 이제 자네는 그럭저럭 관천지를 익혔으니 더 이상 무력하지 않지?”
 하문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의 덕분에 진신절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박수를 치며 자리를 일어났다.
 “그럼 가자!”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자네 주인한테!”
 “예?”
 하문룡은 눈을 크게 떴다.
 노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부당하게 자네를 쫓아냈으니 관천지를 익힌 기념으로 찾아가서 한바탕 휘저어 줘야지!”
 하문룡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는 노인을 붙잡으려 애썼다.
 “노, 노야!”
 “내가 어디를 가고 있었지? 어, 그래! 잔말 말고 빨리 안내해!”
 
 * * *
 
 신소명은 늘어져라 하품을 계속했다.
 그 옆에는 이가령이 철왕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땀이 흥건하게 흘러 발밑이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열심이었다.
 “배 집어넣고, 팔 쫙 펴고.”
 신소명은 건성으로 말을 내던졌다. 그럴 때마다 이가령은 이를 악물고 자세를 바로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바닥난 체력은 들고 있는 철왕의 도첨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벌써 반나절째였다. 철왕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
 처음에는 단순한 아침 연공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잔뜩 심심한 얼굴의 신소명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신소명으로서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지만 이가령에게는 모든 부분이 충고가 되는지라 묵묵히 동작을 이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저기 앉아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사내야말로 전설의 주인공인 천외제일신마라는 것을.
 그의 지적이 틀릴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보강해야 될 부분이고, 자신의 목숨을 더 연장시켜 줄 것이다.
 이가령은 오히려 지금을 기회라고 여기고 이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
 신소명은 피곤을 참는 기색이 역력한 이가령을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쉬었다 하지 그래. 오늘 달거리라도 해? 왜 그렇게 무섭게 칼을 휘두른대?”
 이가령은 철왕을 내려놓았다. 누구 때문에 계속 칼을 휘두르고 있었던가. 이제 쉬려고 하면 허점을 지적하던 주제에.
 “달거리가 뭐죠?”
 그녀는 다소 높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민망하구만.”
 “······.”
 이가령은 못 들은 척 다시 철왕을 잡았다. 이럴 때는 정말 단박에 베어 버리고 싶었다.
 신소명은 모른 척 기지개를 켰다.
 “으읏, 날씨도 좋은데 이런 지하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니. 나도 참 박복한 인생이군.”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지 그래요?”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 있던 친구가 잘려서 놀 사람이 없어.”
 이가령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알았다면 그는 해고하지 않았을 거예요. 미안해요.”
 신소명은 손을 휘휘 저었다.
 “뭐 그 친구 팔자지. 아! 어디 재미있는 일 안 생기나?”
 그때였다.
 문 옆에 달린 방울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가령은 눈을 크게 뜬 다음 신소명을 쳐다봤다.
 “말이 씨가 됐네요. 외인이 침입한다는 비상경계예요.”
 신소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훨씬 더 환해졌다.
 “어? 오랜만이우!”
 하문룡은 그를 알아보고 황급히 포권을 취했다.
 “은공,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하게 되어 부끄럽군요.”
 신소명은 손사래를 쳤다.
 “자,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어서 오시오. 고집 센 여자만 조심하면 나쁘지 않은 곳이니까.”
 뒤따라 나온 이가령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하문룡에 뒤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거지 몰골의 깡마른 노인이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볼품없는 몰골.
 노인과 신소명의 눈이 서로의 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커다란 기의 장벽을 느낄 수 있었다.
 태산을 보는 듯 높고 우주를 보는 듯 넓었다.
 겉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대고 있는 무한의 잠력이 강자의 본능을 일깨웠다.
 “······.”
 두 사람은 굳은 듯 서로를 응시했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소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추레하고 늙은 노인이야말로 그가 송에 들어와 처음 보는 강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영감, 대체 누구요?”
 “흥! 내 이름은 나도 모르는데 네가 왜 물어봐!”
 노인이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가령의 눈에서 당황이 감돌았다. 웅장한 기세에 비해 터져 나온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투정과 비슷한 음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하문룡이 황급히 노인을 막아섰다.
 “노야, 저분은 소생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십니다. 은공, 이분은······.”
 하문룡은 짧게 노인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소명이 나름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오, 이런 걸 두고 기연이라고 하던가? 역시 인생 한방······.”
 하문룡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때였다.
 “이놈, 죽어라!”
 갑자기 노인이 신소명을 향해 검지를 내밀었다.
 “어?”
 신소명은 경시할 수 없는 경력을 느끼고 왼손을 내밀어 마주 검지를 찔러 갔다.
 쿵!
 검지와 검지가 부딪쳤다.
 마치 산이 울리는 듯 커다란 기의 공명이 터져 나왔다.
 노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소명을 향해 말했다.
 “너는 누구냐?”
 신소명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는 노인장은 누구요?”
 “나는······ 음. 나는······.”
 노인은 주저하더니 얼굴을 가득 찌푸렸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근데 왜 손가락질을 하고 그러쇼?”
 “나도 모르겠다.”
 노인은 검지를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왜 갑자기 공격했을까? 이런 살심을 가져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인데, 이상하네.”
 노인은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래. 너와 싸워 보면 그 이유가 떠오를 것 같다!”
 츠츠츠츠츳!
 노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다섯 개로 분리되었다. 다섯 개의 잔영은 곧장 각기 다른 손동작으로 신소명을 공격해 들어갔다.
 “거참!”
 신소명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왼손을 들고 법왕수를 일으켰다. 직선으로 쏘아지는 강력한 염라인보다는 움직임이 자유스럽고 방어에도 용이한 법왕수의 묘용이 지금 상황에 더 적절했다.
 촤라랏!
 하늘을 가리는 흑막처럼 신소명의 왼손으로 짙은 묵색의 법왕수가 피어올랐다. 장내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신소명의 신위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쿠왕!
 다섯 개의 그림자가 동시에 쏘아 낸 경력이 법왕수의 시커먼 진기 속에 묻혀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신소명은 막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손가락을 활짝 펼쳐 다섯 개의 손끝으로 법왕수의 묵기를 뿜어냈다.
 촤자자작!
 다섯 갈래의 묵기가 다섯 개의 그림자를 집어삼켰다.
 네 개는 그림자의 패배로 끝났고, 하나는 그림자의 승리로 끝났다. 하나의 그림자야말로 노인의 실체였다.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검지를 세워 들고 공중을 향해 기묘한 궤적을 그려 나갔다.
 휘잉! 휘잉!
 작은 손짓에 따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노인의 검지는 태극(太極)의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선연히 눈에 보일 정도로 태극 무늬는 한층 짙어졌고 선명해졌다.
 신소명의 등으로 몇 방울의 땀이 어렸다. 그의 눈에는 태극 속에 풀려나오는 노인의 막대한 진기가 보였다. 그조차 쉽게 측량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이었다.
 쿠르르릉!
 노인의 얼굴이 신중해지고 장내로 커다란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단지 검지 하나의 움직임에 불과하지만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을 보듯 중인들은 침조차 곧장 삼키지 못했다.
 신소명의 두 눈으로 짙은 신광이 머물렀다.
 ‘재미있는걸?’
 꾸욱!
 신소명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
 한껏 집약된 묵기가 뿜어질 폭풍처럼 뇌전을 일으키고 굉음을 터트렸다.
 노인의 손짓도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고 곧 터져 나갈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달아오른 기세로 장내의 그 누구도 숨조차 쉽사리 쉴 수 없었다. 그리고.
 쿠와아아아앙!
 검지와 주먹이 부딪쳤다.
 퍼어어어엉!
 손끝과 주먹 끝이 만나며 지독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옷자락이 찢어지고 바닥의 대리석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터져 버린 격돌은 흡사 천붕(天崩)을 알리듯 건곤을 가득 때렸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먼지바람을 얼굴로 따갑게 느끼며 중인들은 하나 둘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천붕의 폭발은 범인들로 하여금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격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가령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어느 정도 지고 있는 오후였다.
 그녀는 놀라며 퍼뜩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에 하문룡과 총관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승부는······?’
 이가령은 황급히 신소명과 이름 모를 노인을 찾았다. 일생에 다시없을 희대의 대결을 두 눈으로 끝맺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그녀의 머리를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신소명은 곳곳이 찢어진 의복을 입고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피곤해 보임을 느낀 이가령은 노인의 행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신소명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노인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이가령은 다소 안도를 느꼈다.
 “이겼군요?”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무승부.”
 “하지만······.”
 신소명은 주먹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이겼지만, 저 노인장의 장기는 따로 있어. 결국 이 승리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가령의 눈이 커졌다. 지법으로도 경악할 만한 신위를 보였는데 장기는 따로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검만 있었다면······.”
 신소명이 말했다.
 “쓰러지며 그러더군.”
 “검법의 고수란 말인가요? 하지만 검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신소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야, 나도 모르지.”
 그는 말을 마치며 기지개를 켰다. 거의 전력에 가까운 힘을 쏟아 내어서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신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땅이 넓은 만큼 재미있는 것도 많군. 송나라는······.”
 
 모든 사람이 깨어났다.
 하문룡은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연거푸 사과했고, 노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었다.
 신소명이 물었다.
 “광동으로 돌아갈 거요?”
 하문룡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관천지를 계속 수련하고 싶은데 딸린 식솔이 있으니······ 당분간 일자리를 찾아봐야 할 거 같군요.”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가령을 바라봤다.
 “여기 미래의 고수가 있는데 어쩔래?”
 “뭘요?”
 신소명이 웃으며 말했다.
 “미리 잡아 뒀다가 나중에 부려 먹어야지.”
 이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하 대협, 혹시 본문에 입문하실 의향이 있으세요?”
 하문룡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낭인입니다. 낭인은 낭인으로 살아야 가장 마음이 편하답니다, 이 문주님.”
 이가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그럼 호법으로 고용하겠어요.”
 하문룡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일개 낭인입니다. 아직 관천지도 일성밖에 이루지 못했고 가진 재능에 비해 너무 과한 처사입니다.”
 이가령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더 이상 일반 무사를 고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하지만 본문을 지켜 줄 호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렇지 않을까요, 소명?”
 신소명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요즘에는 좀도둑이 크게 활개를 치니, 이 넓은 장원에 그거 막을 사람은 있어야겠지.”
 하문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포권했다.
 “부족하지만 과분한 직책을 맡겠습니다.”
 이가령은 빙긋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하 호법.”
 그때였다.
 이제까지 조용하던 노인이 갑자기 이가령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고용해 주시오!”
 “네, 네?”
 이가령은 감히 측량도 할 수 없이 뛰어난 고수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스러워했다.
 노인은 이전까지와 달리 열망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가령을 직시했다.
 “내 이름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검치(劒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산동 출신이고 관천지는 내 어머니께 전수받은 것이다!”
 하문룡의 눈이 커졌다.
 “노야, 기억이······?”
 스스로를 검치라고 부르는 노인은 그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기억났다. 저자와 일전을 겨루고 혼절한 그 순간. 꿈에서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검치 노인의 얼굴은 다시 우울하게 변했다.
 “하지만 다시 잊어먹어 간다. 분명히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해 냈는데 다시 떠오르지 않고 있어.”
 검치 노인은 뚫어져라 신소명을 쳐다봤다.
 “싸워야 한다! 저자와 싸우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잊어도 다시 생각해 내기 위해서는 저자가 꼭 필요하다! 잃어버린 내 과거를 찾기 위해서!”
 검치 노인은 이가령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문주! 제발 나를 받아 주시오! 똥간이라도 마다 않고 푸겠으니 부디 나를······ 크흑!”
 검치 노인은 감정이 격해 올라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예 철혈문이 떠나가라 울어 대기 시작했다.
 “엉엉! 나를······ 엉엉! 받아 주······ 엉엉!”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검치 노인의 모습은 불과 반시진도 지나지 않은 치열한 접전의 당사자라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문룡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무공이 지고에 이르러 도를 얻으면 사람이 아이와 같이 변한다더니······.’
 
 이날, 철혈문은 두 명의 호법을 고용했다.
 그중 한 명의 호법은 조금 치매 기가 있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第八章 초대를 받다
 
 
 
 
 
 
 
 
 
 
 
 검치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한 대만 더 때려 주라.”
 신소명은 귀찮은 얼굴로 손을 저었다.
 “그러다 늙은이 뼈 부러지면 내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검치 노인은 얼굴을 가득 일그러트렸다.
 “나 세잖아. 뼈 단단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는 검치 노인.
 신소명은 한숨을 쉬었다.
 “에휴, 벌써 한 달째다! 내가 날마다 미친다, 미쳐.”
 그는 결국 주먹을 쥐었다. 검치 노인은 좋아라, 헤 입을 벌리고 머리를 주먹이 올 곳에 가져다 댔다.
 쾅!
 염라인이 터졌다.
 검치 노인의 고개가 크게 흔들렸다. 깡마르고 왜소한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으히히히, 생각난다! 생각나!”
 검치 노인은 치밀어 오르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입가의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신소명은 떫은 표정으로 주먹을 풀었다. 아무리 절반도 되지 않는 힘을 실었다고는 하지만 맞고 즐거워하는 노인이라니, 보면 볼수록 꺼림칙했다.
 더욱이 신소명의 권은 필살을 위한 것. 시작부터 오직 죽음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주먹을 쓴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몹시 낯선 행동이었다.
 “제길, 꿈에 나올까 겁나네.”
 신소명은 투덜거리며 연공실로 향했다. 연공실은 그와 이가령만이 출입하는 곳이기에 요사이 신소명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할 수 있었다.
 등 뒤로 히죽히죽 웃다가 다시 까먹기 시작하는 검치 노인의 절규를 들으며 그는 더욱 빨리 신형을 움직였다.
 건물로 들어서기 전에 마당에서 관천지를 수련하는 하문룡이 보였다.
 “은공.”
 그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신소명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 왔다.
 신소명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힐끔 뒤를 돌아보는데 다행히 검치 노인이 따라붙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신소명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문룡의 안색을 살폈다. 눈 밑이 어둡고 수염이 거칠거칠한 것을 보아하니 요새 잠을 설치는 것 같았다.
 “하 호법! 요새 여자라도 생긴 모양이지? 얼굴이 푸석푸석 하네.”
 “하하, 이 녀석 때문에 그럽니다.”
 하문룡은 신소명의 농담에 유쾌하게 웃으며 왼손의 검지를 들어 보였다. 손끝에는 진기가 가득 밀려든 상태였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운행이 잘 안되는구만.”
 “도통 생각대로 움직이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지풍(指風)을 쏘아야 하는데 바깥으로 배출되지가 않고 손 안에서 꿈틀대기만 하는군요.”
 신소명은 힐끗 하문룡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굳은살이 가득한 그의 오른손은 진기의 흐름이 자유로웠다.
 “대개 오른손잡이들이 그렇듯이 팔 또한 오른손이 잘 발달되어 있지. 왜냐면 오른손을 많이 쓰니까. 그만큼 왼손은 퇴화되기 마련이고.”
 “양손잡이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편했을까요? 하하.”
 신소명은 피식 웃었다.
 “양손잡이로 변해 보쇼. 젓가락으로 콩을 오천 개만 집으면 왼손을 무리 없이 쓸 수 있을 테니까. 결국 그게 양손잡이지.”
 하문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로군요. 콩이라······. 지금부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문룡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젓가락과 콩을 얻으러 간 것이었다.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연공실로 들어섰다. 과정에서 내원을 지키는 철혈문의 열세 명의 정예, 십삼수령들이 경계와 호기심, 적의 섞인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문주 이가령의 특별 지시로 철혈문의 귀빈에 오른 신소명이었지만 십삼수령들이 신소명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극소수였다.
 상상할 수 없이 강하다는 것과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문주의 연공실을 제집처럼 들락거린다는 것.
 적의는 바로 후자의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 납작 가슴을 좋아하는 녀석도 있다니, 참 세상은 살고 볼 일이라니까.’
 신소명은 피식 웃으며 연공실로 향하는 지하 외길을 걸었다.
 드문드문 박힌 야명주의 녹색 밝음만이 홀로 걷는 신소명의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카앙! 카앙!
 지하로 제법 내려오고, 연공실이 가까워짐에 따라 힘찬 고함과 벽을 긁는 쇳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신소명은 문을 열고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곳에는 모포가 깔려 있었고 이불과 베개도 있었다. 신소명을 위한 전용 침상이었다.
 물론 연공실의 청소를 위해 들어온 총관이 오해를 했음은 당연지사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총관은 거의 신소명을 큰 주인 취급하고 있었다.
 남녀 둘이 있는 은밀한 실내, 한쪽에 깔린 이불은 충분히 아늑한 공간이었으니까.
 “하음!”
 신소명은 침상에 누워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진지한 얼굴로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 앞에서 할 행동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가령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천중도결의 투로를 이어가기에 몰두했다.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이제 적응된 것이다.
 쉬익! 쉬익!
 이가령은 천중도결의 여섯 번째 초식, 풍벽첩운의 자세를 취했다. 어느덧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으로 증가해 풍벽첩운의 도영 서른 개를 완벽히 유지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점차 도영의 수를 늘려 나가고 있었다. 완성된 풍벽첩운이라면 능히 천지를 채우리라.
 피피피피핏!
 서른 개의 도영이 연공실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서른한 개의 도영이 만들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만!”
 신소명의 목소리가 철왕도를 멈추게 했다.
 이가령은 한창 절정으로 치솟던 도무(刀舞)의 흥이 깨어지자 다소 화가 난 얼굴로 그를 쏘아봤다. 하지만 딱딱한 신소명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금방 눈을 내리깔았다.
 신소명은 혀를 찼다.
 “쯧쯧. 변화와 빠르기에 몰두해서 힘을 죄다 잃어버렸구만. 덥냐? 부채질은 왜 하고 그래?”
 이가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소명은 몸을 일으켰다.
 “칼 줘 봐.”
 이가령은 눈을 크게 떴다. 신소명이 시범을 보이기 위해 그녀에게서 철왕도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묵직한데?”
 이가령에게서 철왕도를 받아 든 신소명은 익숙하지 않다는 듯 어색한 모습으로 도파를 움켜잡았다.
 부웅! 부웅!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충분히 위압적인 풍압이 터졌다.
 신소명은 씨익 웃었다.
 “나쁘지 않군.”
 그는 도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풍벽첩운이라고 했나? 얼추 흉내나 보여주지.”
 신소명은 말과 동시에 철왕도를 치켜들었다.
 휘리리리릿!
 순식간에 칼 그림자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이가령은 놀라 숨을 멎었다. 그녀가 행하는 발도의 준비도 없었고, 가속을 받는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소명의 흉내는 오히려 더 진짜 풍벽첩운이었다.
 쉭쉭! 쉬시식!
 도영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이가령은 일견해도 백 개의 칼 그림자를 시야에 각인시켰다. 하나하나 위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날카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두······ 진짜 같아.’
 이가령은 감탄밖에 할 말이 없었다.
 휘리리릿!
 도영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철왕도신으로 스며들었다.
 신소명은 앞으로 도를 내민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크고 두꺼운 중도로 쾌속한 움직임을 보이며 특유의 중압감을 잃지 않는 것은 충분히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어렵다고 버리면? 베어도 안 죽어. 그렇다고 중압만을 살리면? 안 맞으니까 안 죽어.”
 신소명은 허공에서 철왕도를 던져 손끝으로 도첨을 움켜잡았다. 도파는 이가령에게 향하고, 그녀는 묵묵히 철왕도를 돌려받았다.
 신소명은 자리에 다시 누워 등을 돌렸다.
 “아참, 미안.”
 “네?”
 이가령의 눈이 커질 때였다.
 스스슥.
 그녀의 무복이 잘게 찢어진 종이 조각처럼 산산이 떨어져 나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꺅!”
 이가령은 놀라고 당황해 주저앉아 버렸다.
 누운 채 등을 보인 신소명이 말을 덧붙였다.
 “난 권법가야. 손으로 하면 진짜가 나와. 수도로 했으면 아마 옷만 잘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걸.”
 이가령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신소명의 무예는 초절정의 살인 무예. 약하게 조절한다고 해도 이미 살기 짙은 죽음이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좋다고 매일 맞는 검치 노인이 해괴한 별종이었다.
 신소명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잘 테니까 알아서 갈아입고 나가.”
 이가령은 당황하며 말을 주저했다.
 “하, 하지만······.”
 신소명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본다. 뭐, 볼 게 있어야 구경이나 하지.”
 이가령의 얼굴에 곤혹이 어렸다. 벗은 몸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기는 한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이가령은 힐끔 신소명을 쳐다봤다. 그는 벌써부터 낮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었다. 참으로 태평해 보였다.
 “으음, 망할 늙은이!”
 자면서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신소명은 인상을 쓰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넣고 벅벅 긁어댔다.
 이가령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지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많이 망설였다. 구석에 여벌로 준비해 놓은 무복이 있기는 했다. 당장 갈아입고 싶었다.
 스르륵.
 이가령은 결국 넝마 같은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태로는 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흰 살결이 조심스럽게 드러났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땀이 다시 날 정도로 은밀하게.
 “영가암······.”
 흠칫!
 신소명의 목소리에 이가령의 어깨가 움찔 굳어 버렸다. 하지만 잠꼬대 같았고 그녀는 겨우 한숨을 내쉬며 완벽히 옷을 갈아입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옷맵시를 한 번 살펴보고 힐끗 신소명을 바라본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다.
 스르릉.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단단히 감겼던 신소명의 눈이 슬그머니 떠졌다.
 
 “거참.”
 신소명은 입맛을 다셨다.
 왼손을 이용해 젓가락으로 콩을 옮기던 하문룡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제 이후로 표정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은공.”
 신소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가늘게 떴다.
 “음,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 잠시 다녀왔소.”
 “······?”
 하문룡의 눈에 의구심이 어렸다. 신소명은 지그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제법 볼 만하더군.”
 신소명은 쑥스럽다는 듯 손을 저었다.
 “뭐, 그런 게 있소.”
 하문룡은 의문 어린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신소명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은공의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구나. 이럴 때는 꼭 소년처럼 보이니. 이 하문룡의 은인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참으로 천진난만하다.’
 하문룡은 속으로 생각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문룡아, 뭐가 그렇게 좋냐?”
 검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소명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문룡은 걸어오는 검치 노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안색이 더 좋아 보이시는군요, 노야.”
 검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소명을 향해 턱짓했다.
 “저 힘만 센 자식이 나를 어찌나 두드려 패는지 정신이 아주 말똥말똥하다.”
 “쳇, 맞으면 좋다고 실실 웃는 영감 주제에.”
 검치 노인은 윗옷을 까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여기 한번 때려 주라. 간질간질한 게 안 되겠다.”
 신소명은 인상을 썼다.
 “씻으쇼.”
 “씻었어!”
 “언제?”
 “음. 어, 모르겠다. 그러니까 기억나게 때려 주라.”
 신소명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건망증 때문에 언제 씻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하도 씻은 지 오래 돼서 까먹은 거요.”
 “어허, 일단 때려 주고 이야기해라.”
 신소명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강렬하게 염라인을 검치 노인의 복부로 때려 넣었다.
 쾅!
 “휴, 좋아. 기억난다! 네 말대로 안 씻어서 그런 거였네. 씻고 오마.”
 기억이 난 것인지 검치 노인이 히죽히죽 웃으며 욕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한 달 전 철혈문에 고용됨과 동시에 목욕을 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씻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다소 더러워진 상태였다. 물론 이전에 비하면 충분히 깨끗했지만 말이다.
 “정말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신소명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때렸다. 그때 걸어가던 검치 노인이 그 모습을 보며 다급히 외쳤다.
 “야, 그거 아껴 뒀다가 나 때려 줘! 금방 씻고 올 테니까 아껴! 알았지?”
 쌔앵!
 검치 노인은 말 그대로 섬전이 되어 사라졌다.
 “······.”
 신소명은 허탈해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철혈문이 떠나가라 커다란 고함과 욕지거리가 울려 퍼졌다.
 “철혈문의 졸부들은 어서 대문을 열어라!”
 “망할 자라새끼들아, 어서 본 어르신들을 영접하지 못하겠느냐?”
 목청은 커다랬지만 얕은 내력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실상 목소리가 큰 게 아니라 신소명과 하문룡의 청각이 남다르게 뛰어난 탓이었다.
 “오, 그동안 내공 수련도 진척이 있었나 보네.”
 신소명은 바깥의 소란스러움보다 하문룡의 성취에 더 관심을 두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류 낭인에 불과했던 그가 검치 노인이라는 기연을 만난 후 월등하게 진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문룡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분의 조건곤심법(照乾坤心法)을 반 구결이나마 익히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치사한 늙은이. 고작 절반밖에 알려주지 않아?”
 “나머지는 그분께서도 잊어버렸다고 하시더군요.”
 신소명은 볼을 찡그렸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음흉한 늙은이!”
 하문룡은 낮게 웃으며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철혈문 일대제자들의 기척이 전해졌다.
 “그건 그렇고,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흉한 늙은이 오기 전에 후딱 가자고!”
 
 신소명과 하문룡이 대문으로 가는 사이, 내원에서 이가령 또한 일대제자 모두를 이끌고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가령의 얼굴이 다소 긴장됨으로 물들였다.
 “낯선 무리들이 본문을 침탈하려고 농성을 부리고 있어요.”
 “으하핫, 야차 아가리로 대가리를 들이미는구만!”
 신소명은 즐겁다는 듯 크게 웃어 버렸다.
 하나로 뭉친 일행은 곧 대문에 도착했다. 총관과 일대제자 몇 명이 안간힘을 쓰며 대문을 막고 있었다.
 이가령이 노성을 터트렸다.
 “총관, 대체 무슨 소란이죠?”
 총관이 황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적당들이 억지로 문을 부수고 있습니다.”
 신소명은 총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말고 여쇼! 어디 우리가 졸장부들도 아니고 충분히 반가워해 줄 수 있으니!”
 총관은 기다렸다는 듯 일대제자들을 시켜 대문을 열라 지시했다.
 “열어라!”
 쾅!
 “어이쿠!”
 때마침 열린 문으로 한껏 어깨를 내밀고 달려들던 장한들이 그대로 우당탕 마당으로 자빠지고 말았다.
 마치 주머니에서 살색 콩을 쏟아낸 듯 끝도 없이 들이닥치자 신소명이 어처구니가 없어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야, 너희들 뭐냐?”
 먼저 벌떡 일어난 털보 남자가 외쳤다.
 “우리는 대 흑산파(黑山派)의 호걸 협객들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흑산파의 이채주, 아니 무상(武相) 마광······다알······.”
 가슴을 펴고 우렁차게 외치던 마광달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죽였다.
 이가령은 분노한 눈으로 총관을 바라보았다.
 “총관, 흑산파라는 곳도 있나요?”
 “글쎄요. 인근에 흑산채라는 산적 소굴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총관은 애매모호하게 말을 꼬았지만 진실을 못 알아들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고작 산적 따위가 본문을 침입한 것인가?”
 이가령의 어투가 절로 싸늘해졌다. 최근에 신소명의 지도 아래 무위가 크게 성장하고 있는 그녀인지라 차가운 기세가 물씬 풍겨났다.
 마광달은 그녀가 단지 여자라는 것으로 힘을 얻었는지 눈을 부라렸다.
 “우리는 산적이 아니라 엄연한 무림문파······ 히끅! 산적 마, 맞습니다!”
 물론 뽑아 든 철왕도의 섬뜩한 예기를 보며 힘을 풀었지만.
 신소명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불쑥 앞으로 튀어나왔다.
 “일단 맞고 시작하자!”
 우당탕탕!
 장한들은 입을 뗄 시간도 없이 신소명의 손에서 뻗어 나온 접인지력(接引之力)에 의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무차별적인 몽둥이질을 당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신소명이 마당을 쓸 때 사용하던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날뛰는데 마치 물 위의 생선 같았다.
 “으악!”
 “사, 살려주십쇼!”
 장한들은 비명을 터트리며 고통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여기서 누구 하나 신소명을 말릴 수 없었고, 말릴 마음조차 가지지 않았다.
 매타작은 한 식경이 넘게 이어졌다.
 신소명이 진기를 끌어내지 않고 육체적인 힘으로만 매질을 하기 때문에 머리가 깨지는 정도는 있을지언정 생사가 위급한 중상을 입은 장한은 없었다.
 신소명은 그들을 곤죽처럼 뭉갠 다음에야 환한 미소를 짓고 대나무 빗자루를 내려놓았다.
 “휴, 속이 다 시원하군.”
 신소명의 얼굴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역시 비명을 들어야 패는 맛이 나지.”
 그때 그 순간이었다.
 골병이 들어 끙끙대는 장한들 사이에서 유독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늙은이 하나가 뿌듯해 하는 신소명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는 혼자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휙!
 신소명은 날듯 다가가 그의 뒷목을 집어 들었다.
 “이런 망할!”
 “헤헤, 기억난다. 기억나.”
 고통의 신음 사이에서 히죽히죽 웃는 유일한 존재, 검치 노인은 먼지 범벅이 되어 즐거워하고 있었다.
 신소명은 팽개치듯 검치 노인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맞는 것도 나름 효과가 있는데? 하지만 약해! 어렴풋이밖에 기억나지 않는구먼.”
 검치 노인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툴 털며 말했다.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신소명은 간만의 흥취가 깨어져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문룡이 쓰게 웃으며 검치 노인을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
 “노야, 왜 적당의 사이에서 매를 맞으십니까?”
 “응? 저놈들이 적이었나? 난 그냥 소명이가 몽둥이를 들길래 얼씨구나 끼어들었지.”
 검치 노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하는 장한들을 쳐다봤다.
 순식간에 막대한 살기가 장내로 불어 닥쳤다.
 “감히 본문을 침입해? 호······ 그래, 호법. 고맙다, 문룡아. 호법의 자격으로 네놈들을 때려 주겠다!”
 검치 노인이 양팔을 걷고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잠시만요, 호법 어른.”
 이가령이 가볍게 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문주는 소녀입니다. 섣불리 경거망동을 하지 말아 주세요.”
 “으음. 미안하네, 이 문주.”
 검치 노인이 촌부처럼 순박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이가령은 먼저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코피를 줄줄 흘리는 마광달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왜 본문을 침입하는 것이죠? 우리는 분명 봉문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문을 걸어 닫는 문파는 무림의 도의상 창칼을 빼들지 않는 것이 법도가 아니던가요?”
 마광달은 신소명에게 혼이 빠지도록 얻어맞고 기가 한참이나 죽어 있는지라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몹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예, 예. 문주님? 사실 그것이 예의이기는 하지만······ 저희, 무식한 산도적 놈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요? 그저 채주. 그 빌어먹을 자식이 남은 재물이나 털자고 명령하는 바람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 살려주십쇼!”
 마광달과 장한들은 눈치라도 주고받았는지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이가령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잠시 생각한 다음, 손을 들어 일어나라는 표시를 보냈다.
 마광달과 장한들이 일어나자 이가령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대들은 돌려보내 주겠어요. 하지만 이 말을 퍼트리도록 하세요. 본문은 아직 허수아비가 아니라고!”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 개 같은 목숨이나마 보존해 주신다니 문주님의 덕망이 높이 칭송될 겁니다요.”
 마광달과 장한들은 허리가 부러져라 고개를 굽실거리며 도망치듯 철혈문을 벗어났다. 그들의 뒤를 신소명이 먹이를 놓친 고양이처럼 아쉽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살려줬지? 몇 놈 잡아서 목을 베어 버리면 다시는 넘보는 놈들이 없을 텐데.”
 신소명이 물었다. 이가령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피라미 따위는 몇 백을 죽여 봤자 아무런 소문을 떨치지 못해요.”
 “또 덤비면?”
 이가령의 얼굴로 비웃음이 어렸다.
 “저들은 승냥이 같은 족속들, 한 번 꺾임을 당하면 결코 다시 덤비지 못하는 부류들이죠.”
 꽝!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짝이 다시 몸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무리의 괄괄한 욕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철혈문의 졸자들아, 어서 문을 열고 우리 영웅들을 영접하도록 해라!”
 “빨리 기어 나오지 않으면 눈깔의 먹물을 쪽 뽑아 버리겠다!”
 이가령의 얼굴로 당황과 분노가 동시에 어렸다.
 신소명은 히죽 웃었다.
 “범은 못 돼도 늑대는 되는 모양인데?”
 그녀는 드물게 표독한 얼굴을 하고 총관에게 지시했다.
 “총관, 문을 열도록 하세요.”
 문이 열렸다.
 문 밖에는 서른 명 정도의 남자들이 둥그렇게 포진해 있었다. 갈색의 가죽옷을 걸치고 돼지를 잡을 때나 쓰는 육도를 움켜쥐고들 있었다.
 “너희 천한 철혈문을 접수하러 왔으니······ 크악!”
 이가령이 허공을 격해 말하던 자의 따귀를 때렸다. 남자의 얼굴이 팩 돌아가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이가령이 냉기가 싸늘하게 흐르는 눈매로 육도를 든 남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 우리는 육도방의······ 으억!”
 남자들 사이에서 우물쭈물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도 이가령의 장력에 따귀를 맞고 쓰러졌다.
 비로소 어깨를 잔뜩 펴고 서 있던 육도방의 남자들이 얼굴빛을 사색으로 물들였다.
 “본 철혈문을 너희 같은 졸부들이 지배하겠다고?”
 육도방의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체감하지 않았던가. 입을 떼는 순간 들이닥치는 매서운 손속을.
 짜자작!
 이가령의 장력이 스물여덟 육도방도들의 따귀를 동시에 때렸다. 남자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번갯불과, 한쪽으로 흐르는 코피를 느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육도방의 남자들에게서 처음의 기개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본문주의 물음에 답하지 않을 생각인가?”
 스스릉!
 철왕도까지 뽑아 든 이가령의 두 눈은 가닥가닥 너무도 차가운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히이익!”
 육도방의 남자들은 오줌까지 지리며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이미 일류에 도달하고 있는 이가령의 기세는 내공이 없는 그들로 하여금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때 신소명의 왼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딱딱한 굳은살의 거칠거칠함을 느끼며 이가령은 서서히 침착성을 되찾았다.
 이가령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말했다.
 “사라져! 오늘의 치욕은 늦지 않게 보상 받을 테니.”
 육도방의 남자들은 네 발로 기듯 황급히 도망쳤다.
 이가령은 한참 동안이나 처음의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신소명 또한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가령은 이제 황당함만을 얼굴에 드리웠다.
 “대체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째서 같은 날, 이런 치욕을 연이어 당하게 되었는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해. 아,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마라. 머리 위로 현판 떨어질라.”
 “소명!”
 이가령이 고함을 빽 질렀다.
 신소명은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쿵쿵.
 낮은 울림.
 장내의 모든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이가령의 얼굴로 실소가 어렸다.
 “설마······!”
 다시 등장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한 그녀는 총관을 시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의구심과 기대와는 달리 문 밖에는 짙은 녹의를 걸친 한 명의 남자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마치 제 집처럼 장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정확히 이가령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 문주, 반갑소.”
 이가령의 눈매가 좁혀졌다.
 “나를 아시나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끄덕였다.
 “나는 이 문주를 본 적이 있지만, 이 문주는 나를 본 적이 없을 거요. 그때 이 문주는 울고 있었고,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야밤의 전투 속에서였으니까.”
 차앙!
 철왕도의 예리한 도첨이 남자에게 향했다.
 이가령은 딱딱해진 얼굴로 외쳤다.
 “성라보(星羅堡)의 악적인가?!”
 남자는 벌레처럼 징그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소. 대 성라보의 문인이라오.”
 이제 십삼수령들까지 살기를 피우며 분연히 도를 뽑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남자를 천참만륙낼 기세였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철혈문은 너무 살기가 짙군.”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한 장의 배첩을 꺼냈다.
 “예로부터 무림에서는 첩지를 전하는 자는 악당이라도 보내 주는 것이 관례이지 않소?”
 이가령은 부르르 떨리는 도첨을 내리고 손을 뻗었다.
 “이리 내라!”
 남자는 순순히 배첩을 전했다. 그러다가 빙긋 웃었다.
 “이 문주는 무모하고 또한 용감하시오. 배첩에 독이라도 발라져 있으면 어쩌시려고.”
 흠칫!
 배첩을 잡아가던 이가령의 손이 굳었다.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농담이오.”
 이가령은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가벼운 심리전에서 흔들리고 만 것이다.
 “소인이 먼저 받겠습니다.”
 총관이 먼저 다가와 배첩을 집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신이로군! 과연 이래야지.”
 총관은 세심하게 배첩을 살피다가 배첩의 봉인을 뜯었다.
 “여기 있습니다, 문주님.”
 총관은 문제가 없는 것만 확인한 다음 첩지를 이가령에게 건넸다. 이가령은 얼른 첩지를 펼쳤다.
 “······.”
 꾸욱!
 빠르게 읽어 내린 첩지를 와락 구긴 이가령은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남자를 쏘아봤다.
 “진심인가? 성라보주는?”
 남자는 빙글빙글 웃었다.
 “지존께서는 당신 같은 여인네를 희롱할 정도로 한가한 분이 아니오.”
 이가령은 화내지 않았다.
 스르릉.
 철왕도가 도갑으로 회수되며 서늘한 도명을 터트렸다.
 남자가 물었다.
 “응하시겠소?”
 이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역시 호쾌하시구려! 또한 무모하시오! 스스로 사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으니······.”
 남자는 크게 웃은 다음 포권지례를 펼쳤다.
 “그럼 이 문주, 본인은 임무를 완수했소.”
 신소명이 정중한 남자의 포권을 보며 퉁명스레 입을 벌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분위기 싸하게 만들어 놓고 멋진 척은 다 해먹는구만!”
 남자는 힐끗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계속 웃음을 짓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가볍게 급변했다.
 짙은 흑색의 피풍의를 두르고 서 있는 신소명을 이제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혈문 내부로 들어왔을 때부터 펼친 기세 속에 전혀 감지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저토록 특이한 모습인데,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존재 자체도 인식하지 못했다.
 특이한 자다. 머리가 본능적으로 경고를 때렸다.
 “하하, 의외로 쓸 만한 종자가 철혈문에 남아 있었군. 좋아! 더욱 기대가 되는군······!”
 남자는 중얼거리며 돌연 좌수로 자신의 가슴을 퍽 때렸다.
 우드득.
 남자의 전신이 흉측하게 부풀어 올랐다.
 “모두 물러서!”
 신소명이 피풍의를 휘날리며 남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
 취리리릭!
 법왕수의 묵기가 가닥가닥 풀려나와 남자를 휘감았다. 그리고 곧장 담장 너머로 남자의 신형을 던져 버렸다.
 꽈득.
 퍼엉······!
 남자의 전신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후드드득!
 육괴와 골편이 장내로 휘몰아쳤다.
 신소명은 양수를 내밀어 경력을 터트리며 이가령을 향해 날아드는 인체의 파편들을 모조리 반대편으로 쳐냈다.
 치이이익!
 바닥과 문에 떨어진 육편이 지독한 독향을 내며 한 줌의 혈수로 녹아내렸다.
 “이, 이런······!”
 이가령은 창백한 안색을 지우지 못했다.
 신소명은 인상을 썼다.
 “여기 소금 좀 뿌려!”
 
 * * *
 
 (문서)철혈문주를 모시는 바이오.
 성라보주 배상.
 
 첩지를 읽은 신소명은 고개를 들었다.
 이가령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연공실의 초록색 야광주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가지 마. 사탕 주는 아저씨도 아니고 따라가서 뭐해?”
 신소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가령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주저하며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아요.”
 신소명이 코웃음을 쳤다.
 “도망? 이깟 종잇조각을 무시하는 게 도망자라고 불릴 일이냐?”
 이가령은 주먹을 움켜 쥐었다.
 “물러설 수 없어요! 더 이상 비관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전진뿐······!”
 “이길 수 있냐?”
 “그건······”
 이가령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신소명은 문득 손을 들어 이가령의 숙여진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윽!”
 이가령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신소명은 낮게 웃었다.
 “자신 없냐?”
 이가령은 대답이 없었다.
 신소명의 지도 아래 천중도결을 수련했다지만 아직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섯 초식으로 아버지를 죽인 성라보주와 싸우기에는 반딧불과 달의 밝음을 견주는 승부일 것이다.
 신소명이 그녀를 위로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마라.”
 이가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신소명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할 수 있어. 가서 힘차게 휘둘러 봐! 네 신념을 떨쳐 보라고!”
 “알겠······어요!”
 주르륵!
 이가령의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가 목숨을 버리며 지켰던 명예, 오라버니가 목숨을 걸고 만들었던 신의······. 이제는 제 차례예요!”
 
 
 
 
 
 第九章 분노를 깨우다
 
 
 
 
 
 
 
 
 
 
 
 섬서 땅에 큰 돌풍이 불어 닥쳤다.
 동천 구석에 있는, 한때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패도지문 철혈문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세력이 무너진 문파가 활동을 선언한 것이 색다른 일은 아니었지만 철혈문의 경우는 그게 달랐다.
 보통 문도들이 다 떠나고 허깨비만 남은 여타 전례들과는 다르게 뛰어난 정예가 문주를 보좌했다.
 뛰어난 지공을 쓰는 무사의 용맹은 특히 섬서 땅을 가장 들썩거리게 했다.
 철혈문이 가장 먼저 건재함을 알린 흑산채와의 전투에서 그는 악독하기로 소문난 흑산채주를 일수에 해치우더니 뒤이어 섬서 흑도(黑道)의 거두들을 모두 하나하나 죽여 나갔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새로운 신진고수의 등장이라고 반가워했다.
 몰락한 문파의 재기, 그리고 용맹이 뛰어난 무사.
 이것은 충분히 세인들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하는 가십 거리였다.
 철혈문은 재기와 동시에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아 동천 인근의 모든 흑도사파를 처단하고 위명을 높여 나갔다.
 철혈문은 분명히 뜨겁게 변해 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화로 속에 달궈진 강철처럼.
 
 * * *
 
 깊은 새벽.
 이가령은 무심함을 가장한 분노를 마음 깊이 불태웠다.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성채가 보였다.
 “성라보! 철혈문의 재기를 복수와 함께 시작할 것이다.”
 철혈문의 모든 것을 빼앗고, 부친의 숨결을 거두어 간 불구대천의 원수가 일으킨 성세.
 작지 않았던 철혈문의 세력 속에 자리를 잡고, 순식간에 철혈문을 무너트린 성라보였다.
 이전의 그녀였으면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힘을 지닌 곳이다. 하지만 이가령은 변화를 시작했고 그것에 성공했다.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신소명이라는 존재로 인해 메워질 것이다.
 불과 어제까지 그러했듯.
 이가령은 양팔에 친친 감긴 흑색의 헝겊을 보며 조그맣게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지끈거리는 근육통이 전해졌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 한 달.
 철혈문은 피를 게워 내는 훈련 속에 살았다.
 모자란 부분은 보충하고 흩어진 부분은 집약했다.
 십삼수령은 물론이거니와 이가령과 하문룡까지 신소명의 지도 아래 무공을 수련했다.
 ‘전쟁 같은 시간이었지.’
 이가령은 그때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철혈문.
 좁다면 좁고 크다면 큰 그 공간은 쫓고 쫓기는 아수라장과 다름없었다.
 모두가 적이었고 아군은 없었다.
 비록 가상으로 벌이는 전투라고 하지만 신소명은 냉정했다.
 조금의 빈틈은 큰 고통을 안겨 주었고, 다소의 여유는 치명적인 죽음을 눈앞에 가져다 주었다.
 어느 한 곳 부러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한 달 내내 한 시진 이상 연속해서 잠든 사람도 없었다.
 신소명은 혹독하게 대했다. 정말로 적을 대하듯.
 물론 예외는 있었다.
 검치 노인.
 누가 그를 가르칠 것인가.
 이가령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정말 우리를 적으로 삼았다면 벌써 죽고 말았겠지······.’
 그녀는 쓴웃음을 거두며 뒤를 돌아봤다. 쥐고 있는 칼의 도첨만큼이나 날카로운 신광을 흘려 내는 철혈문의 십삼수령들이 보였다.
 든든하다.
 이 감정 이상으로 그녀에게 들어오는 상념은 없었다.
 휘릭!
 그의 앞으로 신소명의 신형이 안착했다.
 그는 도열한 십삼수령들을 한번 훑고는 이가령에게 말했다.
 “경계를 서는 위사가 한 명도 없다. 문은 닫혀 있지만 잠기지는 않았고.”
 이가령의 얼굴로 의아함이 어렸다.
 “보초가 한 명도 없다구요? 성라보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신소명은 이가령의 눈을 직시했다.
 “방법은 두 가지다. 나아감과 물러남. 냉정하게 충고하자면 지금은 물러남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가령은 고개를 저었다.
 “소명, 당신이라면 어떠하겠죠?”
 신소명은 시원하게 웃었다.
 “물론 달려든다. 나에게 후퇴는 없으니까.”
 이가령은 어쩐지 그의 웃음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저도 같아요. 당신을 믿고, 우리가 흘린 뜨거운 한혈을 믿어요.”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외쳤다.
 “자신의 시간을 망설이지 말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가령과 십삼수령들은 결연한 눈빛을 머금었다.
 신소명은 다시 소리쳤다.
 “기회가 왔음을 망설이지 말라! 지금이 기회다!”
 
 신소명은 좌수를 내밀었다.
 “왼손을 내밀어라, 가령! 그것이 우리 둘의 심장과 가장 가까우니까.”
 와락!
 두 사람의 손이 맞잡혔다. 뜨거운 기운이 저릿저릿하게 팔을 타고 몸으로 퍼졌다. 그것은 신의이며 신념이었다.
 “잘 싸워라, 내 친구!”
 
 * * *
 
 콰득!
 성채의 문이 뜯겨져 나갔다. 먼지와 나무 파편이 동시에 피어오르고, 그 속을 이가령은 천천히 걸어갔다.
 염라인으로 대문을 우그러트린 신소명이 그녀의 곁에 붙었다.
 뒤이어 철혈문의 십삼수령들이 도를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고요하다.
 호흡을 숨긴 살기도, 독을 바른 암기도, 도화선을 태워 가는 불꽃, 그 어느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가령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 했다. 신소명을 한참이나 앞설 정도로.
 일행은 너무도 쉽게 성라보의 내부로 침입했다.
 막아서는 이가 없으니 침입도 아니다. 그저 진입에 불과했다.
 “있다.”
 문득 신소명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신소명은 잠시 눈을 감고 기감을 극대화시켰다.
 “인기척이 느껴지는군. 절대 하수는 아닌데?”
 이가령은 단단히 빛나는 눈으로 철왕도의 도파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반가운 소리예요!”
 
 그는 넓은 연무대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 그가 입은 혈의(血衣)만이 유독 붉게 존재를 드러냈다.
 혈의인은 다가오는 신소명과 철혈문도들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반갑소. 내 소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가령이 철왕도를 앞세우며 차갑게 음성을 내뱉었다.
 “흥! 나는 아직 네 뱀 같은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혈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구려, 이 문주.”
 그는 시선을 돌려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흐음. 언제 이 문주께서 성혼을 하셨는지? 그럴 줄 알았으면 친히 참석했을 터인데 말이오.”
 혈의인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군.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라니! 게다가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필시 범인(凡人)이거나, 대단한 고수이겠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지!”
 그는 이가령을 바라보았다.
 “남자 후리는 기술이 뛰어난 줄은 몰랐군. 그런 재주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너를 취했을 것인데. 하하하!”
 신소명과 이가령이 동시에 소리쳤다.
 “난 아직 총각이야! 어디 멀쩡한 총각 혼삿길을 막고 그래?”
 “죽어엇!”
 이가령은 백색의 섬전으로 혈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철왕도를 부여잡고, 단숨에 달려드는 그녀의 기세는 더없이 날카로웠다.
 “단순하구나, 너라는 계집은.”
 번쩍!
 혈의인의 두 눈으로 가벼운 섬광이 흘러나왔다.
 단지 눈빛일 뿐이지만 파급은 컸다.
 무형의 경력이 이가령을 향해 쏘아졌다.
 신소명이 소리쳤다.
 “잘 봐!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
 이가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신을 비스듬히 눕혀 무형의 경력을 막아 냈다.
 타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가령의 신형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발걸음에 힘을 주며 달려 나갔다.
 휘리리릭!
 도영이 난무하며 짙은 예기가 사방에 폭사했다.
 혈의인은 양손을 휘저으며 소매를 크게 흔들었다.
 휙! 휙! 휙! 휙!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경력이 둥글게 모여들어 이가령의 앞을 막아섰다.
 “차압!”
 이가령은 양손으로 붙잡은 도파를 거칠게 휘두르며 물을 박차는 제비처럼 허공을 향해 도신을 내밀었다.
 추와압!
 짙은 도풍이 뿜어지며 혈의인을 곧장 베려 했다.
 “흥!”
 혈의인은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양수를 포개 아래로 내리쳤다.
 양수에 운집된 경력이 커다랗게 모여 올려치는 도첨을 찍어 눌렀다.
 콰앙!
 도풍과 장력이 부딪치며, 거센 후폭풍을 터트렸다.
 이가령은 뒤로 넘긴 머리칼이 춤추듯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도파를 타고 스며든 저릿저릿한 경력에 이를 악물었다.
 짜라라랑!
 도명이 울려 퍼지며 이가령은 지지 않고 전진했다. 천중도결의 전반부 모든 초식이 그녀의 손을 타고 뻗어 나왔다.
 장내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신소명은 십삼수령들과 함께 가만히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손에 땀을 맺게 하는 치열한 승부였다.
 이가령의 무예가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직 그녀는 후반부의 천중도결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모든 것, 천중도결의 마지막 투로를 풀어내는 순간, 내가 너를 상대해 주마.’
 신소명은 혈의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금은 적어도 이가령을 믿고, 그동안의 고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시키는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퍼퍼퍼펑!
 신소명의 근처에서 갑자기 지면이 들썩이더니 파편을 뿜어내며 폭음을 터트려 냈다.
 “크억!”
 “기, 기습이다!”
 폭발한 흙더미에 십삼수령들이 경악하며 도를 치켜들었다.
 스스스슥!
 흙더미 사이로 지면에 바짝 붙은 그림자가 바닥을 기었다.
 취리리릿!
 혼란스러운 장내로 날카로운 섬광이 일렁였다. 이내 십삼수령 여러 명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허물어졌다.
 “크아아악!”
 “내, 내 다리!”
 비명을 지른 그들은 무릎 아래가 싹둑 잘려나가 선혈을 콸콸 뿜어내고 있었다.
 “요즘 두더지는 사람도 잡아 먹냐?”
 신소명이 난장을 가로지르며 거세게 권격을 터트렸다.
 콰앙!
 흙이 파여 커다란 홈을 만들었다.
 신소명은 이미 그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벼락같이 양권을 떨쳤다.
 퍼엉! 퍼엉!
 짙은 묵색의 경력이 대지 곳곳을 때렸다.
 파라라라락!
 그때, 뒤집어진 흙더미 사이로 지면에 굵은 홈이 파이더니 사방으로 흙이 튀었다. 마치 두더지처럼 빠른 움직임이 땅 밑을 기어가고 있었다.
 신소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지둔술(地遁術)인가?”
 푸확!
 그때 성장이 멈춘 아이 처럼처럼 동안(童顔)에 주름지고 수염이 난 기괴한 외모의 난쟁이가 땅을 터트리며 지하에서 솟아나왔다.
 열 살 어린아이와 비슷한 덩치였다.
 “키키키킥!”
 난쟁이가 음충맞은 괴소를 터트렸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였다. 음역이 높고 날카로워 까마귀가 우짖는 것 같았다.
 칙칙한 갈의(葛衣)를 입은 난쟁이는 십 년은 기른 듯 길고 뾰족한 손톱을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쳇, 요상하게도 생겼군. 꿈에 볼까 두렵네!”
 신소명은 벼락같이 법왕수를 내밀었다.
 촤자작!
 짙은 묵기가 창날처럼 날아가 갈의인을 노렸다.
 “히킥!”
 갈의인은 짐승 같은 소리를 외치며 곧장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파파파팍!
 지면이 들썩이는 움직임이 빠르게 장내를 종횡했다.
 “모두 도첨을 지면에 꽂아라!”
 그때 십삼수령 사이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며, 그들은 곧장 도신을 힘껏 지면에 틀어박기 시작했다. 그들이 동시에 지면으로 칼을 꽂자, 갈의인은 흙 속에서 갈 곳을 잃고 갈팡질팡 했다.
 푸확!
 “키키킥!”
 결국 땅이 들썩이며 갈의인이 튀어나왔다.
 갈의인은 길게 자란 손톱을 빠르게 휘저으며 십삼수령들을 공격했다.
 “크아악!”
 손톱에 스친 것뿐인데 십삼수령 한 명이 왼쪽 허벅지부터 섬뜩하게 잘려 나가며 넘어졌다.
 “키키키!”
 흉소를 터트리는 갈의인을 향해 신소명의 법왕수와, 십삼수령들의 도첨이 제각각 날아들었다.
 쾅!
 푸푸푹!
 하지만 갈의인은 손톱을 휘두르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멍 속으로 다시 은신했기 때문에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으악!”
 “피해라!”
 십삼수령들은 처음 겪는 기이한 공격에 평정심을 잃고 우왕좌왕하며 바닥을 항해 힘껏 칼을 내리꽂았다.
 신소명의 두 눈이 짙은 묵광을 머금었다.
 “별게 다 열받게 하네!”
 그는 벼락같이 진각을 떨쳤다.
 콰앙!
 땅이 들썩이며 굉음이 터졌다.
 십삼수령들까지 귀를 막고 신형을 휘청거렸다.
 “키엑!”
 땅 속에서 갈의인이 튀어나왔다. 진각의 음파를 그대로 겪은 그는 손톱이 기다란 조막손으로 귀를 부여잡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피잉!
 신소명이 그곳을 향해 묵기를 내밀었다.
 섬전처럼 날아간 법왕수의 진기는 순식간에 갈의인을 노렸다. 하지만 민첩하기 짝이 없는 갈의인은 작은 신형을 데구루 굴려 도열한 십삼수령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촤작!
 몸을 굴리는 갈의인은 그 사이에도 양수를 거칠게 흔들었다.
 다시 몇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피해라!”
 “거리를 벌려!”
 일류제자들은 발밑에 걸리는 갈의인의 신형을 보며 분분히 거리를 벌렸다.
 신소명은 그들 사이를 파고들며 양수를 빠르게 뻗어 십삼수령들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휙휙휙!
 그는 곧장 십삼수령들을 전권 밖으로 던져 냈다.
 “어억!”
 느닷없이 신형이 날아가게 된 십삼수령들은 경호성을 토했지만, 신소명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뒤로 던져 내며 바닥을 구르는 갈의인을 향해 체중 실린 왼 다리를 내밀었다.
 “키익!”
 쿠웅!
 체중 실린 진각을 겨우 벗어난 갈의인은 독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신소명을 쏘아봤다.
 끼긱, 끼긱!
 긴 손톱이 서로 마주치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 냈다.
 신소명은 벼락같이 갈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키킥!”
 갈의인은 작은 신형을 화살처럼 날려 신소명에게 쏘아졌다.
 츠츠츠츳!
 바람을 할퀴는 갈의인의 손톱 공격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신소명은 염라인을 터트렸다.
 쿠왕!
 노도와 같은 경력이 앞으로 뿜어져 날아오는 예기를 소진시켰다.
 “킥······!”
 갈의인의 신형이 염라인의 경력에 스치며 허공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그는 다람쥐처럼 몸을 웅크리며 바닥을 향해 신형을 뒤집었다.
 양수를 머리 위에 들고 지면을 향해 떨어지는 갈의인을 향해 신소명은 완만히 추락하는 와중에 신형을 빙글 돌려 그 회전력과 함께 다시 권력을 뻗었다.
 갈의인의 작은 몸을 향해서가 아니다.
 콰드득!
 지면이 진흙처럼 뭉개졌다.
 “키킥!”
 갈의인은 막 파고들려던 지면이 무척이나 아래로 파여 버리자 당황하며 신형을 바로 했다. 얄팍한 두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도망칠 길을 찾았다.
 하지만 어느새 십삼수령들이 도를 날카롭게 박은 채 둥그렇게 포진한 상태였다.
 파라라라락!
 허공으로부터 피풍의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신소명이 떨어져 내렸다.
 자그마한 전신을 모두 뒤덮는 그림자에 갈의인은 퍼뜩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곳에 신소명의 넓은 권면이 보였다.
 “키이이익!”
 갈의인은 비명을 터트리며 빠르게 바닥을 굴렀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상처 없이 깨끗한 흙바닥을 찾은 것이다.
 그는 퍼뜩 양수를 치켜들고 흙을 팠다.
 푸푸푹!
 순식간에 생긴 구멍으로 갈의인이 사라졌다.
 신소명은 법왕수의 좌수로 잔뜩 묵색 진기를 응집시킨 다음 갈의인이 만든 작은 구멍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추아아악!
 손끝으로 빛살 같은 어둠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쏟아져 구멍을 파고들었다.
 “키아아아악!”
 찰나지간에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땅의 한 면이 크게 들썩였다.
 푸학!
 갈의인이 튀어나왔다.
 왼쪽 팔이 어깻죽지부터 터져 나가 앙상한 뼈를 보이며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키키키키!”
 짐승과 같은 흉포한 광기를 잔뜩 터트리는 갈의인은 두 눈으로 짙은 귀화를 머금었다.
 신소명은 다시 권격을 터트리며 갈의인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 순간, 이가령의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휘리리릭!
 피풍의가 거칠게 펄럭이며 신소명의 신형이 연무대 위로 쏘아졌다.
 연무대 위에는 이가령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리는 모습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혈의인의 등 뒤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크게 드리워지며 새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우윳빛 장검을 든 녹의인(綠衣人)이었다.
 “사내새끼들이 치사하게 자꾸 이럴래?”
 고함치며 신소명이 빠르게 권을 떨쳤다.
 쿠르릉!
 묵색의 경력이 지면을 가로지르며 청의인에게 날아들었다.
 촤자자작!
 짙은 검광이 폭사하며 경력과 부딪쳤다.
 거센 기의 돌풍이 터져 나오고.
 피잉!
 청의인은 검극으로 지면을 찍어 재차 허공으로 신형을 날리며, 핑그르르 회전해 곧장 급전직하로 검을 내리쳤다.
 까앙!
 “으윽!”
 도신과 부딪친 검극으로 불똥이 튀었다.
 치이이익!
 이가령은 검을 막은 상태로 거칠게 뒤로 밀려났다. 족흔이 길게 바닥에 늘어졌다.
 “쿨럭!”
 핏물이 앞섶을 적셨다.
 신소명이 밀려나는 그녀의 명문에 장심을 붙이고 부드럽게 진기를 주입했다. 묵색의 빛이 이가령의 등허리를 훑었다.
 이가령은 그를 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나는 괜찮아요! 십삼수령들부터!”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키키킥!”
 갈의인의 음침한 흉소가 신소명을 향해 쏘아졌다.
 잔뜩 뒤틀린 얼굴은 자신의 팔을 빼앗은 대가에 대한 광기가 치밀어 있었다.
 신소명은 좌수를 펼쳐 묵기를 뿜어냈다.
 짙은 묵색의 기류는 빗살처럼 흘러나와 갈의인을 집어삼켰다.
 촤악!
 갈의인의 몸동작은 무척이나 재빠른 구석이 있어서 찰나지간에 묵기를 피했다.
 등 뒤에서 터지는 파공음과 함께 갈의인은 하나뿐인 외팔을 휘둘러 짙은 조력(爪力)으로 맞서 왔다.
 쇄애애액!
 동시에 녹의인이 검과 하나가 되어 돌진해 왔다.
 혈의인은 허공으로 떠올라 수십 개의 장풍을 뿜어내고 있었다.
 신소명의 안색이 가볍게 굳었다. 그는 양수를 모두 펼쳐 사방으로 뿜어냈다.
 쿠왕!
 목표 없이 허공에서 터진 경력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커다란 파공음을 터트렸고, 찰나지간 빈틈을 만든 신소명은 이가령을 품에 안고 빠르게 보신경을 전개했다.
 스스스슥!
 쿠와아앙!
 그림자처럼 사라진 신소명의 잔상으로 세 가지의 경력이 동시에 틀어박혔다.
 “키리릭!”
 갈의인이 광기에 찌든 외침을 터트렸다.
 녹의인은 다시 검초를 준비했고, 혈의인이 바닥에 착지하며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과연······. 우리 세 사람의 공세를 감당할 수 있다니.”
 신소명은 인상을 구겼다.
 “너희 같은 놈들이랑 비교하지 마. 격조 떨어진다, 격조!”
 날카롭게 대답하며, 신소명은 이가령을 십삼수령들에게 건넸다.
 십삼수령들은 결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둥글게 겹을 쌓아 이가령을 호위했다. 이가령은 조금 전 녹의인의 내려친 검과 상대하며 체내로 침투한 검경(劒勁)을 해소하기 위해 내력을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신소명이 각기 다른 색깔의 삼 인을 향해 말했다.
 “제대로 해보자고!”
 번쩍!
 한 줄기 검은 빛살이 되어 신소명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휘리리리릿!
 검은 피풍의 전체로 묵색 기류를 퍼트리는 신소명의 몸체는 가히 검은 돌풍과 같았다.
 “크핫핫하!”
 혈의인이 문득 앙천광소를 터트리며 양수를 모아 신소명과 대적해 나갔다.
 퍼퍼펑!
 콰앙! 콰앙!
 장권수도(掌拳手刀)의 경력이 매섭게 장내를 휘감았다.
 쇄애애액!
 녹의인의 매서운 검경도 신소명을 일참하려 했다.
 “키키키킥!”
 갈의인은 흉소를 터트리며 하나 남은 팔로 미친 듯이 신소명의 배후를 노렸다.
 세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 신소명은 정신없이 공방을 계속했다.
 이들 개개인의 무위는 신소명과 비교하면 다소 격차가 존재했지만 안위를 저버리고 필살의 각오로 달려드는 공격들로 하여금 그들은 각자의 약점을 보호하고 신소명의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예리하기 짝이 없는 연환공격이었다.
 신소명은 주변을 에워싼 상대를 향해 주먹을 풍차같이 휘둘렀다.
 부우우웅!
 소용돌이 같은 권력이 신소명의 주변을 휘감았다.
 우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음이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장내를 뒤흔들었다.
 “키아아악!”
 갈의인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하나뿐인 외팔의 다섯 손가락은 이미 처참하게 부러진 채 뒤로 완전히 꺾여 있었다.
 신소명의 권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갈의인의 그토록 예리하던 손톱이 젓가락처럼 맥없이 부러져 나가고 뒤이어 손가락까지 뭉개진 것이다.
 법왕수의 묵기에 의해 터져 나간 왼팔과 이번의 권격으로 인해 부러진 오른손, 이제 갈의인은 양팔을 모두 쓸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갈의인의 광기를 더욱 자극시켜, 그는 이제 이빨을 들이밀고 신소명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등 뒤로 녹의인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다가왔다.
 펄럭!
 신소명은 벼락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녹의인을 향해 권격을 쏘아낸 다음, 뒤로 발을 차 올려 달려드는 갈의인의 몸통을 그대로 후려쳤다.
 퍼억!
 신소명의 발뒤꿈치가 갈의인의 사타구니를 파고들며, 그대로 갈의인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뒷발길질을 한 덕에 갈의인의 신형은 신소명의 머리를 넘어, 녹의인이 있는 전방을 향해 빠르게 추락해 내렸다.
 쿵!
 녹의인이 갈의인의 몸체를 피하려 가볍게 신형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신소명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주먹 쥔 손등으로 비스듬하게 녹의인을 후려쳤다.
 퍼걱!
 목울대에 내리꽂힌 손등 공격에 녹의인은 찰나지간 호흡이 멈추어 격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퍽! 퍽!
 신소명은 좌우로 어깨를 흔들며 연달아 손등으로 녹의인을 공격했다.
 아무렇게나 후려치는 손등 공격은 녹의인의 상체 전반부를 모두 때렸다. 녹의인의 코는 이미 한쪽으로 뭉개져 있었고, 얻어맞은 턱은 이빨이 수어 개나 빠져 핏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쇄액! 쇄애액!
 검신은 여전히 강한 힘을 머금은 채 신소명을 노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혈의인이 연무대에서 벗어나 철혈문도와 함께 포진한 이가령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파라라라락!
 짙은 혈의를 펄럭이며 날아오는 혈의인.
 후우웅!
 날아가며 양수를 모아 짙은 혈광을 뭉쳐 만들었다.
 쿠르르릉!
 거대한 돌풍이 휘몰아치며 혈의인의 전신으로 짙은 혈광이 폭사했다.
 번쩍!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혈광은 장내를 모두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았다.
 “으윽!”
 “내 눈!”
 혈광의 전권에 휘말린 십삼수령들과 이가령은 눈가를 좁히며 다급히 도를 치켜들었다.
 “무슨 짓이야!”
 “캐액!”
 장심으로 갈의인의 관자놀이를 후려친 신소명이 피풍의를 펼치며, 혈의인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콰앙!
 혈의인이 혈광을 뿜어낸 양수를 풀어내던 찰나에 신소명은 지체 없이 어깨를 내밀었다.
 “크허억!”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맞은 혈의인이 입가로 피를 게워 내며 비척비척 뒤로 물러섰다. 창백한 안색에 흉부가 눈에 띄게 우그러들어 버린 혈의인은 문득 짙은 웃음을 터트렸다.
 “쿠하하하하! 쿠하! 쿠하하하하······ 우웩!”
 광소의 끝을 내장 찌꺼기가 스며 있는 토혈로 마무리한 혈의인은 두 눈가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신소명을 바라보았다.
 “크크큭. 너는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신소명은 지체 없이 권격을 뿌렸다.
 퍼퍼퍽!
 “크아악!”
 연달아 권을 틀어 맞은 혈의인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크윽, 크읏······!”
 신소명의 눈이 기광으로 일렁였다. 이토록 많은 공격을 허용하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혈의인의 질긴 목숨이 이채로운 것이다.
 그것은 다른 갈의인과 녹의인도 그러했다. 벌써 치명상을 입었을 공격에도 그들은 생명을 도외시한 듯 계속해서 치열한 공세를 퍼붓는 것이다.
 어느새 혈의인의 곁으로 갈의인과 녹의인이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섰다.
 혈의인이 짙은 조소를 지었다.
 “대단한 실력이군. 과연 회주께서 노릴 만해! 하지만 아직 어려! 풋내기 같군!”
 신소명이 피식 웃으며 입술을 벌렸다.
 “그게 지금 너희들 몰골로 할 소리냐?”
 “크크큭, 과연 그럴까?”
 혈의인이 알 수 없는 흉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털썩!
 돌연 방호진의 가장 선두를 지키던 다섯 명의 십삼수령이 도를 놓치며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나머지 십삼수령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대지에 쓰러졌다.
 “모, 모두들 왜······?!”
 이가령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녀 또한 자신의 시야가 급하게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신소명을 불렀다.
 “소······명······!”
 털썩!
 “가령!”
 신소명의 커다란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지만 이가령은 눈을 뜨지 않았다.
 신소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허술하게 등을 보일 정도로 삼 색의 괴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혈의인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회주께서 명령하시길, 가끔 소중한 것을 잃어봐야 자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 걱정 마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테니까. 저 계집에게 사용한 것이 아까울 정도로 뛰어난 독이거든!”
 신소명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하아······ 멍청한 짓을 했군!”
 “멍청한 짓?”
 신소명의 한쪽 입술이 크게 일그러졌다.
 “내 분노를 깨워 버렸거든.”
 신소명은 타오르는 분노를 곱씹었다.
 “내 친구에게 내린 시련······. 나는 그것을 반드시 받아 내고 말겠다.”
 흑백이 선명한 그의 눈동자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너희들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야 할 거야!”
 번쩍!
 신소명의 신형이 흑색의 질풍이 되어 전방으로 쏘아졌다.
 “죽어라!”
 “키키키킥!”
 스르릉!
 삼인의 공격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신소명은 단타의 권격을 뿜어내 파공으로 하여금 그들을 흔들리게 만든 다음, 곧장 검을 날리는 녹의인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양수로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신소명은 붙잡은 녹의인의 양팔을 곧장 바깥으로 꺾어 버렸다.
 콰드득!
 둔탁한 소음과 함께 녹의인의 어깻죽지가 그대로 뒤틀렸다.
 “끄아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신소명은 좌측으로 공격하는 갈의인을 향해 접전의 흔적으로 조각난 연무대의 석판을 발로 쏘아 보냈다.
 퍼서석!
 주먹만 한 석판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그의 경력에 무수히 많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갈의인의 면전에 틀어박혔다.
 피가 사방에 튀고, 갈의인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동시에 신소명은 몸을 틀어 날아오는 장력을 향해 어깨를 부딪쳐 갔다.
 쿵!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혈의인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콰등!
 신소명의 무릎이 녹의인의 복부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쿠왝!”
 녹의인은 입으로 짙은 선혈을 뿜어냈다. 핏물은 신소명의 피풍의를 잔뜩 적셨다.
 콰등!
 신소명은 다시 무릎을 차올렸다.
 녹의인의 허리가 흐물거리며 출렁거렸다.
 신소명은 다시 무릎으로 녹의인의 턱을 강타했다.
 퍼석!
 녹의인의 턱이 옴폭하게 들어가며 턱뼈가 산산이 부서졌다.
 짙은 선혈이 잔뜩 뿜어졌다.
 “키이이익!”
 그때 얼굴 전체로 돌 파편이 박힌 갈의인이 괴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신소명은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바닥의 돌멩이를 발로 찼다.
 피슉!
 섬전의 속도로 자그마한 돌멩이가 갈의인의 이마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퍼억!
 잘 익은 수박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갈의인은 머리가 통째로 터져 나가며 허연 뇌수를 잔뜩 뿜어냈다.
 콰가가강!
 연거푸 혈의인의 장력이 신소명에게 쏘아졌다.
 신소명은 양손에 붙잡은 녹의인을 그대로 날아오는 장력을 향해 내던졌다. 이미 녹의인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퍼엉!
 혈의인의 장력에 적중한 녹의인은 피륙이 터져 나가며 짙은 핏물을 잔뜩 흩뿌렸고, 신소명은 재차 양수를 모아 장력을 뿌리는 혈의인을 향해 어깨를 내밀고 거칠게 달려들었다. 피풍의가 긴 궤적을 그리며 펄럭였다.
 퍼억!
 가슴뼈가 으스러지며 혈의인은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으웩!”
 입가로 한 움큼의 사혈을 토해 낸 그는 곧장 지면에 틀어박혔다.
 쿵!
 “크윽······!”
 사지를 아무렇게나 벌린 채, 혈의인은 급속도로 창백해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죽을 수는······. 지존이시······여!”
 신소명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삼 인의 죽음과 동시에 이미 이가령을 품에 안아 들고 있었다.
 그는 퍼뜩 맥문을 짚었다.
 뛰지 않는다.
 “제기랄!”
 신소명은 이를 악물며 코밑에 손가락을 붙였다.
 숨 쉬지 않는다.
 신소명은 그녀의 왼쪽 가슴에 양수를 붙였다.
 부우우우웅!
 묵색 아지랑이가 가슴에 밀착된 손바닥의 틈새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가령! 이가령! 정신 차려라!”
 신소명이 크게 외쳤다.
 “쪽팔리게 왜 지금 죽고 그래! 어서 눈 떠!”
 신소명은 진기를 한껏 끌어올려 이가령에게 주입했다.
 차갑게 식어 가는 혈도를 타고 피보다 많게 심장으로 흘러들어간 묵색의 진기는 거칠게 심장을 두드려 댔다.
 하지만 여전히 이가령의 몸은 차갑게 식어 가기만 했다.
 신소명은 가슴에 붙인 양수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하다. 멍들면 약 사줄게!”
 꽈앙!
 중얼거린 신소명이 곧장 과격한 움직임으로 이가령의 심장 위로 염라인의 권격을 처박았다.
 비록 위력을 최소로 줄인 권력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이가령의 육신은 벼락을 맞은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신소명은 퍼뜩 가슴 위로 귀를 가져다 댔다.
 미동이 없다.
 “제기랄!”
 꽈앙! 꽈앙!
 신소명은 연달아 염라인을 터트렸다.
 삼 색 불사존자들과 싸울 때도 흘리지 않은 한혈을 지금은 비오듯 쏟아 내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신소명은 허탈하게 이가령의 가슴 위로 주먹을 날렸다.
 툭.
 가벼운 움직임.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소명은 이를 악물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원수는 꼭 갚아 주마. 아참, 납작 가슴이라고 한 거 미안하다. 너 나름, 크더라.”
 그 순간이다.
 가슴에 올려놓은 자신의 권면으로 가벼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신소명은 숨을 멈추면서까지 그 소리에 집중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신소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금방 한 말 취소!”
 
 
 
 
 
 第十章 전설의 시작
 
 
 
 
 
 
 
 
 
 
 
 신소명은 품 안의 이가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자의 우람한 가슴에 안긴 상태에서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되살아난 숨결은 아직 미약하기만 했다.
 신소명은 격노로 타오르는 두 눈으로 적막에 휩싸인 성라보를 쳐다보았다.
 짙은 묵색의 안광이 폭사하며 터져 나왔다.
 신소명은 이가령을 품에 안고 전력으로 경신을 발휘했다. 그의 신형이 바람을 파고들고, 대지를 도약했다.
 
 * * *
 
 쿠와아아아아아!
 하문룡은 일출과 함께 굉음을 터트리며 들이닥치는 묵색의 빛 덩어리를 보며 경호성을 발했다.
 “멈춰라!”
 하문룡이 다급히 외치며 두 다리를 굳건히 대지에 틀어박고 관천지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는 검치 노인과 함께 혹시 모를 기습자들에 대비하여 철혈문을 지키던 중이었다.
 “하음! 으엥? 문룡아, 갑자기 웬 고함이냐?”
 검치 노인이 그의 곁에서 늘어져라 늦잠을 자고 있다가 눈을 떴다.
 때마침 새카만 유성과 같은 묵색의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단숨에 내원의 담벼락을 뛰어넘어 하문룡의 앞에 내려섰다.
 쿠왕!
 진기를 조절하지 않은 용천혈로 만 근의 거력이 뿜어져 나와 대지를 짓눌렀다.
 “후욱!”
 묵색 빛 덩어리가 옅어지며 거친 사내의 숨결이 토해졌다.
 “은공! 아니, 이 문주님!”
 하문룡은 자세를 풀며 눈을 크게 떴다. 피풍의를 뒤덮은 묵색의 진기가 한 올 한 올 풀려나며 신소명의 건장한 신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품 안에 아이처럼 잠든 이가령을 발견하고 하문룡의 얼굴이 다급하게 변했다.
 “상처를 입었습니까?”
 그가 급히 의품 창고로 달려가려는데 검치 노인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됐다, 문룡아. 피륙의 상처가 아냐.”
 검치 노인은 오랜만에 맑은 안광을 흘리며 이가령의 얼굴로 주름진 노안(老顔)을 들이밀었다.
 새근거리는 그녀의 숨결을 한참이나 맡고 있던 검치 노인은 이내 굽은 허리를 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먼지와 비듬이 북북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소명아.”
 신소명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영감.”
 “엥, 몰라?”
 검치 노인이 당황하며 물었다.
 신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독이라고는 하던데, 이름을 모르겠어. 하 호법, 여기서 독을 제일 잘 다루는 곳이 어디요?”
 “당연히 사천당문(四川唐門)입니다. 암기와 용독의 대가로 오래전부터 군림하고 있는 곳 아닙니까?”
 “좋아, 곧장 출발합시다!”
 “잠깐!”
 검치 노인이 신소명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쇼, 영감?”
 한시가 급한데 불러세우니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가는 안 좋아. 거기 놈들 음흉해! 재수 없어! 그거보다······ 음음음······!”
 검치 노인이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었다.
 “아, 까먹었다.”
 꽈앙!
 염라인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검치 노인의 돌아간 고개가, 등 뒤로 꺾여 버릴 정도였다.
 “아 생각났어!”
 검치 노인이 떠오르는 기억에 환하게 웃었다.
 “모봉의(募奉醫). 그놈을 찾아가면 된다.”
 “누구요?”
 “이름 보면 몰라? 의원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험험. 물론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구천신의(救天神醫)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놈이다. 내가 맹세하지! 그 녀석은 해독(解毒)에 있어서는 누구도 못 따라가는 대단한 의원이다!”
 신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이고 구천이고 일단 출발부터 합시다!”
 그는 이가령을 품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검치 노인이 뒤따라 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경공으로 날아가면 되지, 어디 가?”
 신소명이 짙은 묵광을 터트리며 말했다.
 “주인이 담 넘어 나가는 거 봤소? 우리는 정문으로 나갈 거요!”
 그는 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전설의 시작이 도둑놈처럼 담 넘는 걸로 시작하면 쪽팔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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