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ENE#0. 프롤로그
디트로이트(Detroit), 다운타운 구도심.
노숙자 특유의 지린내가 풍기는 가로수 옆으로 버려진 건물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도통 적응이 안 되는 거리라니까.”
“왜? 쪼들리냐?”
“쪼들리긴, 이 머니를 뭐로 보고. 근데 그 자식들 제대로 본 거 맞대?”
드레드 헤어스타일의 머니가 한 발짝 뒤에서 도넛을 우물거리며 따라오는 마이크를 의식한 듯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폐가에서 술 처마시다 사고 치는 애들이 한둘인가. 근데 아예 뜬소문은 아닌 게 묘사가 꽤 상세하더라고.”
“미치광이 광대(Killer Clown)라······ 일단 찍기만 하면 밀리언(million) 조회 수는 그냥 먹을 텐데. 헤이, 마이크.”
“응?”
긴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대답에 머니가 한숨을 흘렸다.
“킬러 클라운이 실제로 있다고! 너 페니와이즈 앞에서도 이럴래?”
“페니와이즈? 그건 영화 아닌가? 나 본 적 있다.”
“······ 됐다.”
마이크의 2m에 가까운 덩치와 어눌한 말투는 썩 어울렸다. 머니는 ‘이 자식이 제대로 역할을 해 줘야 하는데’라는 눈치.
미튜브에 ‘스케얼 D(Scare Detroit)’란 공포 채널을 운영하는 우리의 이번 콘텐츠가 바로 몰래카메라였기 때문이다.
한참 밑밥을 깔며 소문의 폐가 앞에 도착하고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작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에 48불을 주고 구입한 캠코더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머니가 호러 쇼의 진행자처럼 잔뜩 분위기를 잡았다.
안타깝게도 벌어진 앞니 탓에 모양이 빠지긴 했지만.
“지금 우린 소문의 광대 살인마가 출몰하는 곳에 도착했어. 정체는 나도 몰라. 탈옥한 범죄자란 얘기도 있고, 전쟁 후유증에 미쳐 버린 퇴역 군인이란 설도 있고. 아무튼 중요한 건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오늘 밤 누가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거지. 하지만 내가 누구야?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터프한 머니 아니겠어?”
머니를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허풍이었지만 뭐 어떠랴. 음산한 폐가는 충분히 몰입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큰 눈을 끔뻑이는 마이크를 선두로 우린 조심히 집 안에 들어섰다.
2층 구조의 저택은 다른 여타의 집들처럼 오랫동안 주인을 비워 둔 티가 났다. 먼지와 거미줄, 노숙자의 흔적으로 보이는 타다만 재 찌꺼기와 발에 차이는 쓰레기들.
“휴우, 해리스빌(Harrisville)이라 해도 믿겠네.”
난데없는 지명.
정확히는 <컨저링>의 무대가 된 저택을 가리키는 것이다.
머니는 욕설과 함께 아무 말이나 내뱉었고 나는 앵글을 돌려 1층 곳곳을 담았다.
전 주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 액자라거나, 스프링이 튀어나온 침대. 깨진 접시가 너부러진 부엌까지 마무리했을 때 머니가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줬다.
이제 2층에서 광대 분장을 한 척이 나타나면 쇼의 시작!
거구의 마이크가 공포에 질려 버둥거릴 모습이 기대되는지 머니의 입가는 벌써 흐물흐물했다.
그 순간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의 계단 끝에서 정적을 깨는 소음이 울렸다.
삐걱.
“뭐, 뭐야.”
기다렸다는 듯 호들갑을 떠는 머니.
나는 재빨리 카메라 플래시를 계단 쪽으로 비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닥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괴인.
두툼한 허리와 귀까지 찢어진 커다란 입, 새빨간 머리를 지나 마침내 한 손에 든 해머가 시야에 들어오자 머니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흐읍-!”
“과, 광대다.”
저 자식 진심인 거 같은데?
과연 폐가에서 맞닥뜨린 광대의 존재감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키아아악!”
두다다닥!
“도, 도망······ 아!”
괴성을 지르며 광대가 우리를 향해 뜀박질을 하고 아차 싶었는지 머니가 재빨리 마이크의 뒤로 숨었다.
“마, 마이크! 날 지켜 줘!”
맙소사! 이 중요한 신(Scene)에 저런 멜로 영화스러운 대사라니.
그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마이크는 머니를 흘깃 쳐다보더니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때아닌 굉음과 함께 마이크의 손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쾅-!
“뭐, 뭐야.”
머니가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사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광대 살인마가 풀썩 쓰러졌다.
곧이어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광대가 나타나고 총성이 울리기까지 고작 1분도 안 되는 시간.
“이, 이게 대체······ 척? 헤이, 처키-!”
“안심해라. 내가 처리했다, 머니. 근데 척은 왜 찾아?”
정신을 차린 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광대를 흔들었지만 이미 바닥엔 축축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마이크가 눈알을 데룩 굴렸다.
“너, 너 총은 어디서 났어!”
“머니, 네가 살인마 잡으러 갈 거라 그래서 엄마 서랍에서 챙겼다. 역시 챙기길 잘했다.”
“야이, 미친놈아! 이거 몰래카메라라고-!”
“모, 몰래카메라?”
당황했을 때 튀어나오는 마이크 특유의 말더듬증과 함께 머니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망했어! 망했다고! 시, 신고해야겠지? 911을 불러야 하나? 경찰이 오면 어떡해? 척은? 제이디,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머니의 원맨쇼가 이어지는 가운데 2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일이야? 머니? 제이디?”
“······ 척?”
거기엔 광대 탈을 반쯤 벗은 척이 벙찐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척! Shit! 척이 죽지 않았어! 마이크, 척이 죽지 않았다고!”
“다행인가?”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미친놈아!”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돌아온 머니가 환호성을 지르며 마이크의 멱살을 잡고, 대롱거리는 머니를 보며 마이크가 퉁명스레 시체를 가리켰다.
“그럼 저건 누군가?”
“저, 저거······?”
다시 불안하게 흔들리는 머니의 눈동자.
뭐라 말을 하려는지 머니의 입이 뻥긋거리는 사이 죽었을 거라 생각한 시체가 움직였다.
꿈틀.
“······?”
꿈틀. 쿵!
이내 손에 쥐고 있던 망치를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키는 형체.
마주치는 나와 머니의 시선.
“으아아악!”
“머니! 날 내버려 두고 가지 마! 머니!”
“마이크! 마이크가 광대의 해머에 찍혔어!”
“제길, 척! 너라도 도망가, 어서! 크흐흡!”
“푸흡.”
머니가 엉덩이 골까지 흘러내린 바지를 움켜쥐곤 부리나케 입구를 향해 도망치는 동안 뒤에선 나와 마이크, 처키가 목이 찢어지라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디트로이트의 가장 터프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캠코더에 담기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쯤 장난감 총에 맞은 광대가 탈을 벗고, 머니의 대본에 없던 또 다른 광대이자 척의 여동생, 스카일라가 마무리 멘트를 쳤다.
“꺄하하, 겁쟁이 머니다워. 하이, 스케얼 D. 어때, 재밌었어? 오늘은 우리의 귀여운 마스코트, 머니의 몰래카메라였지. 그럼 다음에 또 봐!”
# SCENE#1. 디트로이트의 동양인
디트로이트.
입양 카드엔 부산 남포동의 산부인과가 출생지로 기록되어 있었다는데 나는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야 당연히 D 출신이지!”
라고 대답하곤 했다.
딱히 버려졌다고 한국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배X맨이 활동하는 고X 시티보다 더한 이곳에서 동양인 키드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보호색이랄까?
아무튼 앞니가 다 빠진 내 옆집 노인은 종종 ‘러스트 벨트’라 불리기 이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끝없이 발전하던 시절을 언급하곤 했지만 그래 봤자 지금은 슬럼(Slum)화된 파산 도시.
내세울 거라고는 겨우 딸 바보 에미넴과 언제나 터미네X터에게 발리는 로보X이 전부다.
친구들이 본명인 도주태의 앞 글자만 따와 ‘JD’라 부르는 나는 이곳 신도심과 구도심을 가르는 에이트 마일 로드(8 Mile Road) 너머 게토(Ghetto, 빈민가)에 산다.
* * *
“헤이, 제이디. 어제 경기 봤어? 월헴이 전부 킬링했다고.”
“그 자식, 이번에 드래프트(Draft)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누가 그래? 라이언스의 제이미, 제이미의 라이언스잖아! 제길, 구단주란 놈들은 하나같이 왜 그렇게 안목이 엉망일까 몰라.”
“하하, 그럼 네가 그 망할 N word의 엉덩이를 차 버리고 자리를 꿰차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방진 마스크를 뒤집어쓰곤 배정받은 컴프레서(Compressor, 압축기) 앞으로 가는 동안 동료들이 주먹 인사를 건네 왔다.
슈퍼볼 경기는 늘 흥미로운 주제다.
“어이, 또 잡담이야?”
“아뇨. 이 N word가 혼자 떠든 거뿐입니다.”
워크 스케줄을 든 작업반장의 등장에 난 잽싸게 동료를 팔아넘겼다.
“야, 제이디! 반장 그게 아니라······.”
“아니긴. 할당량 못 채우면 연장 작업을 해야 할 거야.”
탐욕스럽게 부풀어 오른 뱃살 좀 봐라.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망할 N word.”
“망할 N word.”
돌아선 반장 등에다 대고 동시에 욕을 뱉은 동료가 나를 향해 하얀 잇몸을 보였다.
전통적으로 N word를 N word로 부를 수 있는 권리는 같은 N word에게만 있다지만 굳이 내게 그걸 따지고 드는 흑인은 없다.
심지어 나를 욕할 때도 ‘빌어먹을 N word’라고 하는 마당이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찌나 황당했던지 모른다.
그래도 조금은 기뻤던 게, 어쩌면 그날이 내가 이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최초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던 거지.
옛 생각에 실소를 지은 나는 다시 기계처럼 손을 움직였다.
* * *
‘뭔 놈의 비가······.’
쏴아아.
점심부터 내린 비는 2008번 버스를 타고 퇴근할 때 즈음엔 시야를 가릴 정도로 거세져 있었다.
정류장 너머로 멀리 퓨즈가 몇 개 나간 단골 바의 네온사인.
주인장인 토니는 노토X어스 세대였는데 바의 이름을 ‘Big Poppa’라고 지을 정도로 그의 지독한 추종자다.
오죽하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노토X어스가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믿을 정도라니까? 쯧쯧.
가게 문을 열자 일찌감치 퇴근한 노동자 무리가 배드라이트 병을 부딪치는 게 보였고, 주인장 토니 앞엔 머니와 척, 마이크가 침을 튀기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나냐?”
“왔어? 이거 좀 봐 봐. 머니 이 자식한테 디엠(Direct Message)이 왔는데 무진장 섹시하다.”
“그 정도냐?”
과연 머니의 폰엔 지중해의 햇살을 머금은 금발 남미풍 미녀가 있었다.
오죽하면 1년 내내 겨울잠 자는 곰탱이 빅 마이크가 눈을 반짝일까.
최근에 업로드된 스케얼 D의 영상을 봤는지 그녀가 보낸 메시지엔 ‘귀여운 퍼피, 연락해’라는 말과 함께 번호가 딸려 있었다.
난리 칠 만하네.
그나저나 삐쩍 마른 위즈 칼X파 같은 머니를 보고 귀엽다니······. 취향이 특이하다 못해 괴랄한 수준인데?
차라리 척이라면 몰라. 어릴 때야 워낙에 못생겨서 처키라고 불렸다만 지금은 모델 못지않은 늘씬한 체격에 멋진 턱수염이 일품이잖아.
“조심해라. 얼마 전에 <겟 어웨이> 보니까 예쁘장한 백인이 외로운 흑인 남자들 꼬셔서 막 뇌를 바꿔치기하고 그러더라.”
“······ 제이디. 너 설마 그 영화 봤냐?”
“응.”
“같이 보자고 기다리라고 그랬잖아, 이 치사한 새끼야!”
“네가 연락 안 받았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척과 내가 다투든 말든 이미 아폴로를 타고 달나라로 가는 중인 머니는 사진을 쓰다듬으며 헤헤거리기 바쁘다.
척의 여동생 스카일라에게 대시했다가 차이고 나서 훌쩍이던 게 엊그제인데 하여간 지조 없는 놈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답잖은 대화가 오간다.
짭조름한 프레츨과 거품 빠진 맥주.
지역에서 막 뜨기 시작한 이름 모를 래퍼의 비트가 흘러나올 땐 옆자리에서 프리스타일 랩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맞다.”
한참 새로 나온 레몬 맛 스비틀즈에 대해 떠들던 척이 낡은 숄더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또 뭐야?”
척의 손에 들린 건 예스러운 디자인의 인형.
정장을 입고 반들반들한 양쪽 볼엔 빨간 점이 찍혀 있는, 오컬트 숍에나 있을 법한 괴상한 형태였다.
“지난번 그 폐가 있잖아. 거기 벽장에서 찾은 건데 어때? 빌리랑 비슷하지 않냐?”
척이 <쏘우>의 자전거 타는 인형을 언급하며 어떠냐는 얼굴을 했다.
쏘우의 감독 제임스 완은 이후에도 <애나벨>, <데드 사일런스> 등에서 인형 공포를 소재로 다룰 만큼 유명한 인형 마니아인데, 역시 그중 가장 유명한 건 기록적인 저예산 성공 신화를 이룩한 <쏘우>였다.
척의 말대로 녀석의 손에 들린 인형은 그 빌리와 매우 흡사했다.
“이바이에 올리면 돈 좀 꽤 받겠는데?”
“머니, 넌 어떻게 생겨 먹는 놈이 허구한 날 돈타령이냐? 그러게 이름을 바꾸라니까.”
“이젠 이름까지 걸고넘어지려고?”
나처럼 호러 무비라면 죽고 못 사는 척이 머니의 제안에 학을 뗐다. 반대로 스케얼 D의 공식 겁쟁이인 머니는 기분 나쁘다며 투덜거렸고.
“재수 없게 그런 데서 뭔 물건을 주워 와. 홈리스(Homeless)도 아니고.”
“왜? 무서워?”
“칫, 무섭긴 뭐가 무섭다고. 그깟 인형 따위.”
“그깟 인형 따위?”
코웃음을 치는 머니를 향해 처키가 말투를 따라 하며 빌리를 머니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그러더니 호두까기 인형처럼 빌리의 입이 움직이며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으흐흐. 난 머니의 지난밤을 알고 있지. 요 앞 팬케이크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했다 차였다지?” “······ 마이크, 이 자식! 네가 말했지?”
“나 아니다.”
양손에 치킨 윙을 든 마이크가 시치미를 떼자 머니가 마이크의 어깨를 내리쳤지만 도리어 제 손만 아플 뿐.
나는 손을 붙잡고 울상을 짓는 머니를 제쳐 두고 척에게 물었다.
“그거 복화술용이야?”
“그런가 봐. 어때? 죽이지? 흐흐.”
안감 뒤로 들어간 처키의 손 움직임에 따라 인형의 입이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하는 게 보였다.
눈알도 데굴데굴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꽤 공들여 만든 수제품 티가 났다.
그나저나 참 기분 나쁘게도 생겼네.
가만, 방금 저놈이랑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인형과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찰나 편의점에서 구입한 선불폰이 울렸다.
띠링.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 * *
“제이디?”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볼룸하우스 기획실 매니저 캐서린입니다.”
화장실로 달려가 받은 전화기 너머로 핏이 딱 떨어지는 스커트를 입었을 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볼룸하우스(Bollum House)?
맙소사! 호러의 명가라 불리는 제작사에서 온 전화라니.
아마 내가 보낸 시나리오 때문이겠지?
“시나리오는 잘 받았습니다. 혹시 이전에 영화화된 작품을 집필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직 없습니다······. 혹시 그게 중요한가요?”
“아뇨. 시놉시스의 느낌이 좋아서 여쭈어봤어요.”
느낌이 좋단다. 느낌이!
찌든 암모니아 냄새가 나든 말든 내 모든 신경이 수화기 너머 목소리로 쏠렸다.
“디테일이 조금 부족하지만 그건 차후 각색하면 될 부분이고······. 그런데 감독을 맡으셨으면 한다고 조건을 달아 주셨더군요?”
“네, 맞습니다.”
“흐음, 잘못 기재된 게 아니었네요.”
애초에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감독을 꿈꾸는 내겐 포기할 수 없는 조건. 그러나 어째 말을 끄는 게 결말을 암시했다.
“······ 어려울까요?”
“아무래도요. 커리어가 없는 분을 감독으로 맡기기엔 리스크가 크니까요.”
이번에도 역시나.
그들 입장에선 쓸 만한 시놉시스일지라도 아무런 경력도 없는 나를 연출직에, 그것도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꽂는다는 건 상장도 안 된 주식에 투자하는 꼴이겠지.
게다가 아시안 감독?
할리우드 영화 시장을 흔드는 아시안 감독 대부분이 고국에서 먼저 증명되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미국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케이스라는 걸 감안한다면 내 제안은 스탠딩 코미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과 할렘가의 미들 스쿨 중퇴생인 나와의 간격은 마이애미와 워싱턴만큼이나 아득히 떨어져 있을 테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뇨.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뚝.
수도꼭지를 틀고 금이 간 거울에 얼굴을 비추자 눈 밑이 컴컴한 동양인 한 명이 들어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어느 흑인 가수의 재즈 앨범 재킷과 같은 풍경.
딱 8살이다.
8살에 수화물처럼 비행기에 실려 이 도시로 날아온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 백인 저소득 노동자)였던 에미넴은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지만 난 여전히 그의 자전적 영화 <8 Mile>에 나오는 트레일러에 사는 밑바닥 트윙키(과자, 백인처럼 되고 싶어 하는 동양인) 인생.
‘다시 15년이 지난 후엔 어떨까?’
머니는 입만 열면 그가 말하는 것처럼 벤저민(100달러 지폐)을 깔고 앉은 사진으로 <영스타>를 도배할지 모르지.
먹성 좋은 마이크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슈퍼볼 MVP 라인맨은 따 놓은 당상일 거다. 타고난 하드웨어가 원체 괴물 같은 녀석이니까.
처키는?
‘후, 내가 누구 걱정을.’
에이트 마일 로드의 척.
내일 당장이라도 소행성이 추락하거나 외계인이 쳐들어와 지구가 멸망하길 바라는 이곳 주민 중에도 척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정신 나간 알코올 중독자도 친구로 만드는 건 내가 아는 한 오직 척이 유일하다.
‘그럼 난? 넌 이대로도 괜찮은 거냐, 도주태?’
이대로 한두 푼 모아 여느 중국인들처럼 골목의 슈퍼마켓이라도 하나 연다면 노년은 꽤 평탄하리라. 좀 잘 풀린다면 꽤 널찍한 한인 레스토랑을 차려도 나쁘지 않다.
아, 이 동네엔 한국인이 거의 없지? 아니. 사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요리는 할 줄 모른다는 게 맞을 거다.
“안 나오고 뭐 하냐?”
언제 들어왔는지 척이 짧은 상념을 깼다.
소변기에서 한참 떨어져 바지춤을 내리곤 씩 웃어 보이는데, 문득 드는 패배감에 중지를 세웠다.
“새끼. 하도 안 나오길래 에드랑 사랑이라도 나누고 있는 줄 알았네.”
“에드가 난 지 스타일이 아니라 싫고 너는 탐내는 거 같더라.”
“오우, 난 에드를 정말 좋아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지. 너라면 모를까.”
“······ 꺼져.”
“하하하.”
동네의 유명한 동성애자인 에드는 마이크에 비견할 만한 거구였는데 그런 그도 게이란 사실이 알려지곤 편견과 친구들의 폭력을 견뎌야 했다.
그때 에드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도 척이었다.
대충 손을 씻은 척이 물기를 내 셔츠에 벅벅 닦고는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가자. 스카일라가 자기 레스토랑에 새로 온 종업원이랑 한잔하자더라. 오늘은 팍팍 밀어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이 형님만 믿으라고.”
그러곤 척이 가슴팍을 툭 치며 윙크를 보내왔다.
······ 어차피 말은 이렇게 해 놓고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채갈 거면서. 한두 번 속지 또 속겠냐?
흠흠, 그래도 조금 위로는 되네.
“저 자식들 봐라. 아주 X모라니까?”
“헤이, 에드. 방금 게리 저 자식이 네 욕하는데?”
“뭐? 어떤 새끼가!”
머니가 나와 척을 보며 비아냥거리자 척이 바로 받아치고, 그 말에 구석에서 피시 앤 칩스을 입에 구겨 넣던 거대한 덩치의 백인이 일어섰다.
“아, 아냐. 난 동성애 혐오자가 아니라고!
“머니. 오늘 너의 덜떨어진 가치관을 뜯어고쳐 주지. 21세기에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 혐오)라니······.”
“그래 머니. 313 스트리트 주민 주제에 넌 너무 구닥다리야.”
“맞아. 진정한 D맨이라면 상대를 존중할 줄 알아야지.”
“크하하하. 오늘 머니의 성 정체성이 바뀔지도 모르겠구만.”
“하하하.”
순식간에 머니의 성 정체성 가치관을 놓고 에드의 거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래. 뭐,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쥐꼬리만 한 보조금이나 타 먹는 늙은이가 돼도, 그때까지 육체노동으로 하루를 빌어먹고 산다 해도 이 녀석들과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루 종일 땀에 전 작업복을 걸치고 살더라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기다리던 영화나 단골 레스토랑의 새로 온 웨이트리스의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는 주말이라면······.
‘썩 괜찮은 하루겠지.’
슬그머니 입가가 풀리는데 어깨의 무게감이 사라지며 눈앞으로 무언가가 넘어갔다.
“······ 척?”
# SCENE#2. 벤저민스
I’m ready to go hell and no one can save me.
(난 죽을 준비가 됐고 아무도 날 구할 수 없어.)
Though I’ve grown, can’t stay it home.
(난 떴지만 고향에서 머물진 못해.)
Fuxk the world, fuxk my daddy and my friend.
(세상아 꺼져라, 아빠, 친구도 다 필요 없어.)
I still love for this street, I’m ready to go hell!
(난 여전히 이 거리를 사랑하고 죽을 준비가 됐어!)
머니의 애마, 64년식 임팔라엔 코피로 앞섬이 흥건히 젖은 척과 불난 집에 기름 붓는 노토X어스의 랩으로 난장판이었다.
“머니! 그 빌어먹을 노래 좀 끄라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척은? 주, 죽은 거 아니지?”
“죽긴 누가, 야! 앞! 앞!”
빠아앙-!
주태의 숨넘어가는 비명과 슬로우 모션처럼 간발의 차로 스치는 맞은편 차량의 헤드램프.
“끄아아아악!”
“으허허헉!”
“수, 숨이!”
* * *
삐-삐-삐.
생명선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출렁이는 응급실.
한쪽 침대를 차지한 척은 멀쩡하다는 듯 팔을 휘둘렀다.
“머니. 누가 죽기라도 했어? 왜 그렇게 죽상이야.”
“그, 그렇지만 의사 말로는······.”
“의사 말이 뭐! 수술만 하면 된다잖아.”
못생긴 얼굴로 울상을 짓고 있는 머니에게 내가 쏘아붙였다.
“Cerebrovascular vaso······, 아, 그러니까 일종의 뇌혈관이 비대하게 부푸는 증상인데, 그리 어려운 수술은 아니니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게 언제 터질지 모르니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수술을······.”
뇌혈관? 맹세코 살면서 난생처음 들어 보는 단어까지 들먹인 의사의 요지는 결국 수술이 불가피하단 내용.
다행인 건가? 단순 빈혈이길 바랐지만 그리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니.
문제는 정작 환자인 척이 고집을 피운다는 점이다.
“괜찮아. 재수 좋으면 평생 아무 일도 없을 수 있다잖아. 쓸데없이 돈을 왜 쓰냐? 한두 푼도 아니고.”
“하지만 척, 너는 운이 매우 나쁜 편이다.”
“······ 마이크 말이 맞긴 하지. 기억나냐? 이 자식 어렸을 때 처음으로 홈구장 구경 갔다가 파울볼에 맞고 기절했던 거?”
“큭큭, 정작 공은 옆에 있던 꼬마 애가 챙겼었지.”
“너희는 환자 앞에서 그게 할 말이야! 다 꺼져 버려!”
마이크의 말에 나와 척이 주고받는데 도리어 머니가 난리 법석.
나는 환자복이 갑갑한지 자꾸 몸을 비트는 척의 몸을 꾸욱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간호사나 꼬시고 있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 * *
의사 양반이 말한 수술비는 대략 3만 달러.
하하, 3만 달러라고?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부리토가 1개에 3달러니까, 대략 1만 개를 사 먹을 돈이구나.
빌어먹을, 산토스에서 건너온 자발라가 알면 까무러치겠네. 푸드 트럭이 아니라 병원을 차렸어야 했다고 말이야!
여기에 입원비와 이후에 들어갈 약값까지 합치면 4만 달러는 가뿐히 넘길 게 분명하다.
미국의 의료 보험을 욕하던 머니는 이내 자신이 아는 모든 정치인에게 X킹을 남발하고 있었다.
“X킹 트럼X! X킹 힐러X! X킹 부X! X킹 오바······ 아!”
물론 흑인의 친구 오바X는 제외.
본론으로 돌아와 척에겐 수술비를 감당할 돈이 없을 게 뻔하다.
아니, 있어도 제 돈으론 수술을 하지 않을 놈이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친구들의 수술비라면 선뜻 내놓았겠지만.
가진 거라곤 내 트레일러보다 2배쯤 비싼 집이 전부에 그마저도 집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 가는 빈민가의 부동산을 팔 수 있을 리가 만무.
- 제이디. 성실하게 일한다고 해서 누구나 부자가 되는 건 아니야.
언젠가 척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우린 각자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을 가지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래, 까짓것 설마 넷이서 4만 달러도 못 구하겠어?
1인당 1만 달러면 그리 터무니없는 액수도 아니잖아, 안 그래?
* * *
“죄송하지만 고객님의 신용 등급으론 대출이 어렵겠네요.”
“단돈 1000달러도요?”
“네.”
은행 직원 유니폼을 입은 백인 아줌마가 싱긋 웃어 보였다.
허름한 옷차림의 고객에게도 친절함을 잊지 않는 저 자본주의의 서비스 정신을 보라.
“그럼 100달러는?”
“큰 차이는 없겠죠? 역시 신용이 문제라서요.”
“스타버스 기프트 카드는 어때요?”
“······?”
“그거 아쇼? X킹 X럼프요.”
“겨, 경비원!”
이제야 좀 보기 좋은 낯짝이구만.
경비원의 손에 이끌려 가며 나는 산뜻한 얼굴로 중지를 날려 주었다.
일단 은행은 아웃.
* * *
“미스터 햄튼. 저기 혹시······.”
“제이디. 오늘은 왜 늦게 출근했지?”
“그게 은행에 다녀오느라······.”
최대한 공손하게 손을 비볐으나 작업반장의 싸늘한 얼굴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저 워크 스케줄엔 내 이름 위로 빨간 줄이 그어져 있겠지.
“최근 성실히 일한다 싶더라니 실망이야. 오늘 일당은 절반만 쳐줄 테니 그리 알게.”
“네.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 대신 월급을 가불받고 싶은데······.”
“가불? 하! 그건 어느 나라 말이야. 응? 네놈 나라 말인가? 일하기 싫으면 말해. 네놈 자리를 탐내는 N word는 깔렸으니까.”
후우, 참자 참아.
이 자식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더러운 인종 차별주의자 새끼! 에드에게 정신 교육을 당해야 질질 짜면서 회개를 할 자식!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여기선 인사권을 쥔 그가 왕이고 판사다.
대놓고 면박을 주는 꼴에도 옆에서 구경만 하던 동료가 작업반장이 사라지자 쪼르르 다가왔다.
“제이디,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참, 척이 아프다던데 별일 아니지?”
“아니. 수술해야 한다더라. 그래서 말인데 혹시 꿍쳐 둔 돈 좀 있어?”
“돈? ······ 알잖아, 내 사정. 척한텐 힘내라고 전해 주라.”
돈 얘기가 나오자마자 자리를 피하려는 녀석의 어깨를 내가 붙잡았다.
“그럼 지난번에 빌려 간 돈이라도 갚아.”
“내, 내가 무슨 돈을 빌렸다고 그래?”
“치즈 볼 산다고 10벅스(bucks) 빌려 갔잖아, 이 망할 자식아!”
“아, 알았다고. 갚으면 되잖아. 쳇, 고작 10달러 가지고 째째하게 굴긴.”
척을 걱정하던 녀석이 고작 10달러 앞에 툴툴대기 바쁘다.
난 이때다 싶어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척 수술해야 하니까 척한테 신세 진 사람들은 알아서 돈 좀 모아 줘.”
대답은커녕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인간들.
정말 없는 놈들의 우정은 브로맨스 영화 속에서나 끈끈한 거냐?
척. 네가 그리 좋아하는 디트로이트에 의리 있는 사내는 한 명도 없나 보다.
“빌어먹을 자식들······.”
난 걸치고 있던 점퍼를 거칠게 바닥에 벗어 던지고는 철강소를 나왔다.
* * *
“크으, 냄새. 청소 좀 하고 살지?”
“네 몸에서 나는 디오더런트 냄새가 더 지독하거든?”
소파에 늘어진 옷가지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휙 하고 집어 던진 머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자식은 생긴 거랑은 어울리지 않게 깔끔떠는 건 어째 아시아인보다 더하다.
“그럼 차례대로 꺼내 볼까?”
내 좁은 트레일러에 모인 우린 카드 게임을 하듯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참다못한 내가 먼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렸다.
냉큼 봉투를 들고는 지폐를 후루룩 넘긴 머니가 실망이라는 듯 혀를 찼다.
“에게, 겨우 이게 전부야? 3000달러도 안 되겠네.”
“그것도 빅파파(Bigpapa) 녀석들이 겨우 모아 준 거야. 평소엔 그렇게 처키를 찾던 놈들이 내가 돈 구한다는 소문이 들리자마자 어디로 다 내뺐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하여간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 다시 모조리 목화솜 농장에 보내 버려야 정신을 차리지. 퉤. 마이크, 넌? 아니다, 물어본 내가 멍청했어.”
“나도 돈 있다!”
마이크가 큰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주머니에서 짤랑이는 유리병을 꺼냈다. 한때 피넛 버터가 들어 있었을 병 안엔 동그란 페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 그래. 네가 돈을 모았다는 거 자체가 기적이지. 진화에 가까운 발전이네.”
“흥!”
우리 중에 가장 평범한 가정을 가진 마이크였지만 정육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것 정도론 마이크의 먹성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럼 머니, 넌 얼마나 모았는데?”
“후후.”
살짝 빈정이 상한 듯한 마이크의 어투에 한쪽 입꼬리를 잔뜩 올린 머니가 웬 검은 봉투를 떡하니 내놓았다.
설마 저게 다 지폐 뭉치는 아니겠지?
당당한 머니의 태도에 마이크가 움찔하고 나는 돈 냄새라도 맡듯 코를 킁킁거렸다.
돈이라면 환장하는 놈이니 어련히 모아 둔 돈이 있지 않을까 기대는 했다만, 어째 이번엔 제대로 한 건 터뜨릴 분위기잖아?
“하여간 이런 개털들을 친구라고 둔 척만 불쌍하지. 잘 봐라 이 자식들아. 이게 바로 머니란 거니까!”
딜러에게 마지막 패를 까 보이는 라스베이거스의 꾼처럼 거침없이 머니의 손길이 봉지를 헤집었고, 속살을 내비친 건······.
“······ 이게 뭐냐?”
“뭐긴. 잭 팟이지! 프흐흐흐흐.”
기껏 봉투에서 나온 건 웬 키(Key) 하나.
“또 장물 처리냐? 이번엔 어디 물건인데? 백악관이라도 털었대?”
“워워, 진정해. 아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망할 자식아!”
대번에 내가 멱살이라도 잡을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머니가 급히 엉덩이를 빼며 손사래를 쳤다.
어릴 적 남들이 턴 물건이나 팔아 치우던 시절 근성을 못 버리고 또다시 장물이라니.
뒤를 봐주던 갱에게 팽(烹) 당하고 몸에 총알구멍 날 뻔한 머니를 구해 준 게 바로 척인데, 이 자식은 여태껏!
“척이 알면 참 좋아하겠어, 그치? 친구들 도둑놈 만들어서 살아남았다고 말이야.”
“그래도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뭔가 오해하나 본데 이거 내 사촌 열쇠야. 얼마 전 포-포(경찰)에게 잡혀간 내 사촌 지미 알지? 그 자식 창고 열쇠라고!”
“지미? 지난번에 음주로 걸렸을 때 빼내 준 그 지미?”
“그건 짐이고. 이번엔 지미.”
“그래 봤자 장물이겠지.”
“······ 그, 그건 그렇지만.”
“흐음.”
대체 이놈의 사촌들은 몇 명이나 있는 건지 위급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게 이 정도면 거의 예수가 따로 없다.
“일단 처키의 목숨 줄은 늘여 놓고 생각하자. 솔직히 이 방법 아니면 우리가 어디 가서 그 빌어먹을 벤저민을 다발로 구해? 안 그래?”
내 얼굴을 침을 다발로 튀기며 머니가 열변을 토했다.
스카일라 말로는 그동안 모아 둔 돈에 집을 담보로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아도 최소 2만 달러가 비는 상황.
겨우 2만 달러다.
다리 건너 윈저 시티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상류층 코카시안(백인)에겐 그들이 굴리는 비머의 1년 유지비도 안 되겠지만, 이젠 망해 버려 찾기도 힘든 X터스나 다니는 우리에겐 평생 쥐기 힘들 목돈이었다.
갱과 관련된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마이크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자고? 갱단에게 넘기게?”
“갱은 안 돼. 출처가 확실하지 않아.”
“그럼 어디에? 재수 없게 엮이면 감당하기 힘들 텐데? 미시간강에 팅팅 부은 꼴로 떠올라서 아침 뉴스에 나오기에 딱 좋다고.”
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훔친 차량의 오디오 박스부터 시작해서 고급 접시와 가구들. 그리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박스 더미들.
“그럼 문제가 안 생기게 옆 동네에서 넘기는 건 어때?”
“옆 동네? 아는 애들 중에 갱 쪽이랑 연관이 없는 깨끗한 녀석이라도 있어?”
마이크가 고개를 갸웃하자 손가락을 튕기는 머니.
“대학생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좋지. 근데 어디서 컬리지 맨을 찾아. 너 아는 대학생 있어?”
이 동네에 대학은커녕 하이 스쿨도 제대로 나온 인간이 없는데 무슨 대학생이란 말인가.
인근엔 그 흔한 컬리지도 없었다.
내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머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한 명 있잖아. 너드.”
“······?”
# SCENE#3. 너드
University of Michigan South Ann Arbor.
에이트 마일 로드에서 대략 50마일(약 80km)가량 떨어진 앤아버에 위치한 캠퍼스는 가을 학기를 맞이해 길을 헤매는 신입생과 동아리 모집 등, 온갖 행사로 분주했다.
“저, 저기 학생 본관이 어디예요?”
“으자차차! 동양의 신비, 가라데를 배우고 싶은 신입생 있는가!”
“알라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코란과 함께 진리를 탐구합시다!”
일본인 특유의 발음으로 길을 묻는 유학생, 도복을 입은 채 격파 시범을 보이는 흑인, 공부를 하러 온 건지 전도를 하러 온 건지 알 수 없는 히잡 부대까지.
모두가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오웬은 학생 식당 구석에서 중고로 구입한 구식 노트북을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또 말썽이네.’
새로 나온 편집 프로그램의 사양을 못 따라가는지 버벅이더니 나중엔 블루 스크린까지 떠 버린 노트북.
마음은 당장에라도 X플숍에 달려가 맥북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고모 집에 얹혀사는 현실에선 장학금을 놓치면 당장 다음 학기 등록도 불투명했다.
“노트북이 말을 잘 안 듣나 봐?”
“······ 라이언?”
샌드위치를 놓으며 오웬의 앞자리에 앉은 라이언이 알 만하단 눈빛으로 노트북과 오웬을 번갈아 보았다.
짙은 눈썹에 각진 턱과 젊은 날의 브래드 피트처럼 길게 기른 금발.
딱 봐도 좋은 집안 배경에 하이 스쿨 땐 미식축구 쿼터백으로 수많은 치어리더를 울렸을 라이언의 등장에 오웬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어때, 제안은 생각해 봤어?”
“아, 그거.”
“아 그거라니 이거 실망인데? 그래도 나 정도면 제법 괜찮은 팀 동료지 않나?”
자신만만한 라이언의 말에 오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년 스프링 시즌에 있을 ‘미시간 독립영화제’에 라이언이 함께 출품하자고 제안을 한 게 지난주.
공식적으론 채 5년도 되지 않은 미시간 독립영화제이지만 주 단위로 개최되는 만큼 규모와 열기만큼은 선댄스 못지않았고, 오웬과 라이언의 학과인 영화연출부 또한 학과장의 지시 아래 학생들이 팀을 꾸리고 있었다.
“촬영 감독을 맡아 달라는 거지?”
“어. 이미 배우 캐스팅도 마쳤고 장비들도 대여했으니까 곧 크랭크인에 들어갈 생각이거든. 혹시 조비 드레인이라고 들어 봤으려나? 지난 선댄싱에서 심사 위원 상을 받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는 배운데.”
“들은 적 있어.”
“그 사람이 주연이야.”
한껏 자신만만하게 들어 올려진 턱이 이미 아카데미 황금상이라도 받은 듯 고고했다.
이래서 잘난 것들은 얄밉다.
작은 키에 뚱뚱한 체격, 붉은 기가 감도는 곱슬머리에 주근깨까지, 딱 불리들의 놀림감이 되기 좋은 외모의 오웬으로선 본능적으로 라이언 같은 타입에 거부감이 치솟는 달까?
‘돈 많아서 좋겠다, 재수탱이.’
꽤 잘나가는 사업가를 아버지로 둔 라이언답게 겨우 학부생이 만드는 영화에 이름값 있는 배우를 출연시킬 생각을 하다니.
뭔가 독립영화의 배고픈 정서에 배덕감을 끼얹는 느낌이다.
‘라이언 베이답네. 분명 제작비도 펑펑 써 대겠지?’
입만 열면 트랜스X머의 감독이 롤 모델이라 말하는 라이언이었으니 대충 어떤 영화를 만들지 감이 왔다.
비싼 차가 펑펑 터져 나가는 현란한 액션과 관객의 눈을 속이는 시각 효과.
아무리 겉멋만 잔뜩 든 라이언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정성이면 입상 리스트에 오를 것이고 엔딩 크레딧에 이름 한 줄 올릴 수 있다면 오웬이 목표로 하는 할리우드 촬영 감독엔 한 발짝 다가설 게 분명하다.
자존심상 잠깐 뜸을 들인 오웬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나도 합류할게.”
“오케이! 그럼 나중에 계약서에 사인하는 거로 하자고. 아, 그리고 필요하면 말해. 노트북 정도는 바꿔 줄 수 있으니까. 내 촬영 감독이 고물 노트북 때문에 낑낑대고 있으면 그림이 안 좋잖아.”
아아, 이런 재수탱이-!
여기서 꺼지라고 말하지 못하는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오웬으로선 그럴 용기도 없겠지만.
오웬이 부들대는 입가를 억지로 펴며 대답했다.
“······ 고마워. 꼭! 그럴게.”
* * *
“역시 진짜 사 달라는 건 오버겠지? 아냐. 굽히는 거야 한 번이지만 노트북은 몇 년은 가잖아. 최신형으로 사 달라고 하면 좀 염치없으려나?”
라이언의 제안을 대번에 거절하지 못한 것과 새 노트북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열에 머리털을 쥐어뜯던 오웬이 기숙사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얼굴을 구겼다.
“또야?”
인도에서 온 유학생인 룸메이트는 첫날부터 고향에서 함께 온 친구들을 데려와 힌두어로 어찌나 떠들던지, 막연히 가지고 있던 이국 친구에 대한 환상이 모조리 깨졌던 차.
배 속 깊은 데서 뜨거운 뭔가가 훅 치밀어 오르며 곱슬머리에 연기가 훅하고 피어올랐다.
‘안 되겠어! 친절한 비바 아메리카는 오늘부로 쫑이다, 자말.’
오웬이 몸을 부풀리며 씩씩거리는 얼굴로 거칠게 문을 열며 소리쳤다.
“자말!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여긴 너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
손잡이를 잡은 채로 얼어붙은 오웬.
방 안엔 예상치 못한 얼굴이 잇몸을 내비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오웬! 곱슬머리는 여전하네.”
“······ 제이디?”
* * *
“3장. 더는 안 돼!”
“오오, 노! 라띠까 엄청 이쁘다. 너 지금 아니면 인도 여자 못 만난다. 4장!”
“라띠까······? 이름도 죽이잖아. 크흠, 그래도 안 돼. 이거 내 친구 수술할 돈이라고.”
“그럼 라띠까 비키니 사진 보여 준다. 인도 여자 비키니 입은 거 본 적 있는가?”
“어, 없지.”
“하하. 원래 꽁꽁 싸맨 보물일수록 그 가치가 더 한 법이다.”
“으흐흐흐. 너 말이 좀 통하는 녀석이구나?”
치열한 협상 끝에 만족한 바를 이룬 자말과 머니가 각자 미키 맨틀의 신인 시절이 담긴 트레이딩 카드와 인도 미녀의 사진을 보며 황홀한 웃음을 터뜨렸다.
트레이딩 카드는 장물 창고에서 빼 온 것. 근데 저 인도인은 MLB 카드를 왜 수집하는 걸까?
그 옆에선 방을 꽉 차게 만드는 마이크가 웬 작은 병들을 껴안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자말, 이건 뭔가?”
“그거 파피 시드라고 인도 전통 향신료다. 고기에 넣으면 맛이 풍부해진다. 맘에 들면 가져라. 선물로 준다.”
“오! 고맙다, 친구!”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듯 잠깐 사이에 의기투합한 이들 사이에서 오직 오웬만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악몽이야. 이건 악몽이라고!’
하필이면 이 자식들이 왜 여기서 나타난단 말인가?
그것도 외부인은 출입이 통제되는 기숙사에!
짝사랑했던 여자아이가 나타나도 반기지 않을 마당에 이젠 입에 꺼내지도 않는 옛 동네 친구들의 등장에 오웬이 말을 잃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오웬.”
“······ 어쩐 일이야?”
그 말에 머니가 서운하다는 듯 반응했다.
“야. 오랜만에 봤는데 친구들한테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
“누가 친구라고 그래-!”
겁에 질린 아이가 부르짖듯 꽉 쥔 오웬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그들 사이에 찾아온 정적.
주태는 그런 오웬을 향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방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영화 촬영 관련 서적들.
한쪽에 세워진 삼각대엔 관리에 공들인 티가 나는 카메라가 있었다. 작은 흔적들이었지만 그동안 오웬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주태가 바깥쪽으로 턱짓을 했다.
“날씨 좋던데, 좀 걸을까?”
캠퍼스 투어라도 하듯 말없이 걸은 지 30분쯤 지났을까. 내뱉은 말과는 달리 우중충한 하늘에 주태가 헛기침을 삼켰다.
“크흠,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
“미안한 걸 알면 다음부턴 출발하기 전에 연락해. 그럼 오지 말라고 미리 대답해 줄 테니까.”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온 고향 친구에게 여전히 날을 바짝 세우고 있는 오웬이었지만, 주태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그간의 근황을 물어 왔다.
“대학 생활은 어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대학생도 있고 뿌듯한데? 여긴 뉴욕에서 온 애들도 많겠지? 그거 알아? 뉴욕에 진짜 죽이는 치즈버거 가게가 있는데······.”
“제이디.”
“응?”
갑작스러운 부름에 주태가 돌아봤을 땐 차분한 오웬의 시선과 마주쳐야 했다.
“긴말 안 할게. 너라면 날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거든. 난 이제 그 동네랑 엮이기가 싫다. 너희가 싫은 게 아니라 그냥 그곳에서 자랐던 내 과거가 싫어······. 무슨 뜻인지 알지?”
참 부담스러운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알기에 주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에 버려진 동양인 꼬마로 자라 온 주태나, 빈민가의 백인이나 그리 다르지 않은 처지였기에.
깊이 들어가면 신경질 나는 가정사만 줄줄이 딸려 나올 뿐 어쨌든 이렇게나마 에이트 마일 로드를 떠나 새롭게 출발한 오웬으로선 달갑지 않은 과거와의 만남이란 건 주태도 이해했다.
오웬의 말대로 주태는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아들었다.
“새끼, 진지하긴. 알겠으니까 그만 쳐다봐.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다.”
“······고맙다.”
“고맙긴, 친구 사이에.”
“······.”
툭 하고 던진 주태의 말이 깊숙이 박혀 왔다.
“그래도 간만에 얼굴 보니 좋네. 예전처럼 너무 혼자 지내지 말고 연애도 하고 그러라고. 다 해피하자고 사는 세상 아니겠어?”
“하루살이 마인드는 여전한가 보네.”
“하하, 그게 어디 가겠냐? 알잖아. 우리 모토.”
돌연 주태가 복서의 포즈를 취하며 주먹을 오웬의 몸에 가져다 댔다.
“인생은 결국 난타전이야.”
“공은 아직 울리지 않았어.”
주먹을 마주 대며 응수하는 오웬.
“오, 기억하고 있었냐?”
“<록키>쯤이야 열 번 하고도 다섯 번은 더 봤으니까.”
합을 맞추듯 영화 <록키>의 명대사를 받아치는 오웬에게 주태가 웃음을 터뜨리곤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잘 지내. 참, 처키도 안부 전해 달라더라. 어디서든 넌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헤쳐 나가라고 말야.”
“처키?”
그러고 보니 처키는 왜 같이 안 온 거지? 언제나 붙어 다니던 녀석들이?
취한 아버지를 피해 마당에 나와 있으면 종종 찾아와 못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맥 앤 치즈를 먹으러 가자고 헤프게 웃던 처키가 떠올랐다.
오웬은 저도 모르게 벌써 저만큼이나 멀어진 주태를 불러 세웠다.
“······ 제이디! 처키, 처키는 잘 지내고 있어?”
# SCENE#4. 컬리지 맨
“꿈에서 또 보자고, 미스 도로시.”
“호호홍, 앙큼하긴. 굿 나잇.”
척의 능글맞은 인사에 넉넉한 몸매의 간호사가 수줍은 눈웃음을 흘리곤 병실을 나갔다. 처키 특유의 친화력은 아이가 둘인 아줌마마저도 한창의 레이디로 만들 만큼 유쾌했다.
이제 입원한 지 일주일째.
같은 병실의 환자들은 물론 아래층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전화번호까지 딸 정도로 척은 지나치게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 자식들은 뭘 하길래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야. 있을 때만 친구라 이거지?’
퇴원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가둬 놓은 것도 모자라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친구들이 떠올라 괜스레 속으로 욕을 하는 척. 아직 주태와 친구들이 뭘 계획하는지 모르는 척의 입장에선 유독 바쁜 척하는 녀석들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여동생 스카일라가 먼 친척들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녀석들도 터무니없는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고 있을 게 뻔했기에.
‘후후. 재수 없는 놈은 뭘 해도 안 풀린다더니 외통수에 제대로 걸렸어.’
병원비가 없어 죽는 건 그의 동네에선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괜히 블랙코미디의 소재로 의료 보험이 자주 등장하는 게 아니니까.
지역 신문에선 12분마다 치료비가 없어 죽어 가는 미국 시민권자에 대해 종종 떠들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 통계의 수치를 올리는 데 일조를 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제목이 뭐였더라?’
그런 영화가 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더럽게 재미없던 영화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보다 훨씬 긴 대사는 선명하게 외워 버린.
- 세상 어디에나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총알이 1개씩은 있지. 나도 곧 그 총알에 맞을 거야. 내 총알은 암일지도 모르지. 한 50년 뒤에 맞으려나?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닌데 뭐하러 걱정해?
친구들에게 했던 말처럼 쿨하게 여기려 애썼지만, 눈앞이 흔들리는 건 왜일까?
‘살다 보면 한 번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X같은 일이 닥칠 때가 있다. 난 그게 조금 빨리 왔을 뿐이야. 집어치워. 될 대로 되라지.’
억지로 생각을 돌리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는 순간 투박한 손이 입을 막아 왔다.
‘읍?’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돌려 손의 주인을 확인하자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댄 마이크가 보였다.
곧이어 슬그머니 병실 문이 열리더니 일당이 나타났다.
“오케이, 밖엔 아무도 없어.”
“읍읍!”
“마이크! 그렇게 세게 틀어막으면 어떡해?”
“제이디, 네가 비밀 작전이라고 했다.”
“그거야 간호사들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 거지 아예 숨통을 막으라는, 아차차, 얼굴 빨개진다. ······ 이봐, 소리 지르면 재미없을 줄 알아.”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저런 초짜 강도 같은 말이라니!
그러곤 뭐가 웃긴지 혼자 킥킥대는 주태를 향해 척이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읍! 으읍!”
“쉿! 그 버팔로 같은 간호사한테 들키면 말짱 꽝이라고. 마이크, 휠체어, 휠체어!”
봉제 인형을 둘러업듯 휙 하니 처키를 들어 휠체어에 앉힌 마이크.
여전히 곰 발바닥 같은 마이크의 손에 입이 막힌 척을 향해 주태가 딱 사고 치기 직전의 악동 같은 얼굴로 윙크를 했다.
“갑갑하잖아. 바깥바람이나 좀 쐬고 오자고. 어, 이 말, 최근에 언제 했더라?”
* * *
“Country road- took me home. To the town I belonged······.”
“이스트 버지니아······.”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잠시, 머니의 구식 임팔라에 탄 지 1시간이 지난 지금은 목이 터지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헐렁한 MLB 후드에 ‘Fuxk the 폴리스!’를 외치며 갱스터랩이나 부를 것 같이 생긴 주제에 척의 취향은 언제나 컨트리 송.
이런 면이 매력이라고 우기는 척이었지만 발매된 지 40년도 넘은 노래를 1시간 내내 들어야 하는 나와 머니 입장에선 고역이 따로 없었고 덩달아 신이 난 마이크는 X이즈투맨의 객원 멤버처럼 숙련된 바이브로 듀엣을 자청했다.
가끔 내가 이 녀석들과 다른 인종이란 걸 느낄 때가 있는데, 지금처럼 타고난 리듬감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머니의 싸구려 스테레오에서 나오는 저렴한 사운드에 부르기엔 처키와 마이크의 하모니는 그야말로 끝내주는 수준이다.
“테잌 미 호옴!”
다시 말하지만 1시간 내내 같은 곡만 반복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 * *
“다 왔냐?”
“맞게는 찾아온 거 같은데? 흐흐.”
서행을 하며 머리를 쭉 빼곤 도로를 살피던 머니가 커다란 지붕을 가리켰다.
도착한 곳은 앤아버의 교외 지역.
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넓은 부지의 저택에선 시끄러운 비트와 함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데?”
아직 영문을 모르는 척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고 대답으론 강제 휠체어 탑승이 돌아갔다.
멀쩡히 걸을 수 있다고 바락바락 우겼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하랴.
다 콘셉트지, 콘셉트.
저택의 대문엔 클럽 바운서처럼 빡빡머리의 덩치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여기 주인이 얼마나 골 때리는 놈인지 한 방에 와닿는다.
“헤이, 친구들. 안에 잭 팟이 왔다고 전해 주겠어?”
* * *
“트러블 G. 애들 사이에선 TG라고 불려. 연락처는 나도 몰라. 대신 워낙에 자기 과시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 <영스타>를 뒤지다 보면 찾긴 쉬울 거야.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척의 사정을 들은 오웬은 학교 내에 장물을 취급할 만한 인물을 묻는 내 말에 트러블 G에 대해 알려 주었다.
오웬의 말대로 ‘50센트’처럼 게시물마다 100달러 지폐 뭉치와 슈퍼카로 도배를 해 놓은 탓에 찾는 데 어렵진 않았다.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은 뒤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게 바로 며칠 전.
“하하, 어서 오라고, 형제들.”
가로로 자란 키에 목에 건 건지 목을 조르고 있는 건지 숫제 모를 용도의 금목걸이.
심지어 들고 있는 휴대폰의 케이스도 금으로 되어 있는 게 이건 대학생이 아니라 FBI 창고에 쌓여 있을 몽타주가 아닌가.
그럼에도 확실한 건 TG라고 불러 달라는 이 친구가 매우 유쾌한 놈이란 거다.
“형제?”
“당연하지. 컴튼 출신이든 퀸즈 출신이든 피부가 검으면 다 형제 아니겠어? 참고로 난 세인트루이스 출신이지. 하하하.”
“이 친구는 노란데?”
그새 그의 성향을 파악한 처키가 장난을 치듯 나를 가리켰지만 트러블 G는 손가락을 내저었다.
“오, 피부가 검다는 건 꼭 겉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중요한 건 그 속에 뭘 담고 있느냐가 아니겠어?”
“와! 방금 나 좀 감동 먹었는데? 제이디. 이런 멋진 녀석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하하, 네 휠체어도 죽이는데?”
“진짜? 그럼 한번 타 볼래?”
“이따가 타 보도록 하지. 하하하.”
“으하하하하.”
호탕하게 웃기 기네스라도 도전하는 것처럼 눈물까지 짜내며 웃는 척과 트러블 G.
미친놈끼린 통한다더니······.
그나저나 저런 철학적인 말도 할 줄 알고, 평가 상향이다.
게다가 세인트루이스라면 디트로이트 못지않은 슬럼가로 아는데 거기 출신이라는 트러블 G는 현재 미시간에서 제법 잘나가는 파티 업체의 대표 직함을 달고 있으니 또 사람이 달라 보인다.
래퍼도, 운동선수도, 하다못해 MIT 컴퓨터 천재도 아니고 핫하게 노는 거로 부자가 되다니. 여러모로 난 놈이구나 싶은 거지.
“우오오오, 분위기 죽이는데 트러블 G?”
“밑에 내려가서 재미 좀 보라고, 머니.”
넉살 좋은 머니는 2층 테라스 난간에 딱 붙어 아래로 보이는 풍경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작은 파티라는 말과는 달리 널찍한 풀(pool)엔 튜브 위에 올라탄 비키니 미녀들의 몸짓이 넘실댔고, 턴테이블에서 스크래치를 넣는 DJ와 함께 사이키 조명은 저택 전체를 비추며 분위기를 달궜다.
뜨거운 햇빛만 있었더라면 산타모니카 해변 저리 가라 할 분위기랄까?
형광의 액체가 찰랑대는 잔을 든 머니는 풀장에 뛰어들 기세로 달려가고, 마이크는 일찌감치 아래층에서 여자들이 눈짓을 보내건 말건 브라우니를 우걱우걱 삼키는 상태.
오늘 자리의 목적인 척은 그새 꼬신 미녀를 무릎 위에 앉히곤 추파를 던져 댔다.
‘······ 짜식, 고맙다.’
입을 벙긋거린 척이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이 자식.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다.
내가 해명을 하기 전에 트러블 G가 손을 비비며 본론을 꺼냈다.
“그럼 물건부터 확인할까?”
B급 영화에 흔히 나오는 대사에 금방이라도 침실을 찾아갈 것 같던 척의 얼굴이 딱딱해지고 난 품속에서 머니가 들고 온 창고 키를 꺼냈다.
그리고 창고의 굵직한 물품들이 적힌 리스트도 건넸다.
“비머 휠이랑 튜닝 부품, 거기에 보증서가 없는 명품들이라······. 가구들이 이케이산은 아니지?”
“물론. 가죽이 질겨.”
“그거야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골동품은 따로 감정을 받아야 해. 출처는?”
“출처가 확실하면 널 찾아왔겠어?”
“그렇군. 트레이딩 카드? 이건 내 분야가 아니긴 한데 넘기긴 어렵지 않을 거야. 제값 받기는 힘들겠지만. 그리고 앰플? 이쪽은 내 취향이 아닌데······.”
정체를 모르는 앰플이 든 박스. TG는 위험한 냄새가 풀풀 나는 그 박스에 대해선 계산기에 올리길 거절했다.
굳이 처키를 데려온 것은 처키를 빼놓고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 그의 의사를 무시한다고 여겼기 때문. 무엇보다 척이 장물이라면 치를 떨기도 했고.
어차피 돈의 출처는 늦게라도 밝혀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척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다.
‘머니의 말대로 일단 살아 있어야 그다음이 있는 거니까.’
라는 눈빛을 보낸 후에 나는 그간 사정을 귓속말로 짧게 요약했다.
머니의 사촌 일과, 오웬을 만났던 것, 그리고 트러블 검을 소개받기까지.
“우리한테 이 방법 말고는 다른 게 생각나질 않더라.”
“······.”
자리 탓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척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사이 물건 감정을 끝낸 TG가 손뼉을 쳤다.
“오케이. 정확한 건 직접 방문을 해 봐야겠지만 리스트에 있는 물건들만 처리해도 대략 너희가 말한 2만 달러는 나올 거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올지도 모르고.”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
“고맙긴. 나도 이쪽 일은 파티 일을 시작한 이후엔 손을 뗐는데, 학교 친구 부탁이니 들어주는 거야.”
학교 친구? 오웬?
그 자식,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 하더니 따로 말을 해 놓았구나. 우리와 더 엮이기 싫다던 오웬의 눈빛이 떠오르곤 고마움이 뒤따랐다.
“처키라고 했지? 수술비가 필요하다고 들었어.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외면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거든. 아무튼 나도 인맥을 뚫어는 볼 텐데 캐시가 급하면 자잘한 건 직접 팔아 보는 건 어때?”
뜬금없는 제안에 나와 척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단 그가 보장금으로 먼저 지불해 주겠다는 금액이 1만 달러가 넘으니 급한 불은 끈 셈.
근데 나머진 직접 팔아 보라니? 의문을 표하기 전에 트러블 G가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할로윈 시즌에다가 학교 애들끼리 열리는 홈 파티도 많거든. 돈이 돌 시기라는 거지. 보석 종류나 백(bag), 시계는 애들 사이에서 수요가 있을 거 같은데, 어때? 일이란 게 뭐든 돈보다 재미가 중요하지 않겠어? 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내 눈빛에 척은 남의 일이라는 듯 눈썹을 올리며 알아서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하여간 빠져나가는 덴 선수라니까.
트러블 G로선 제대로 감정도 받지 않은 물건을 떠안은 호의를 보였기에 무작정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
흐음. 팔자에도 없는 대학생 노릇을 해야 하는 건가? 물론 진짜 수업을 듣거나 하진 않겠지만······.
“어때? 딜(deal)?”
마치 페니처럼 작고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내미는 트러블 G.
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딜! 잘 부탁해.”
* * *
이틀 후.
다시 디트로이트 사립대에 도착한 우리의 손엔 지난밤 TG가 알려 준 주요 인물들의 명단이 들려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마당발을 맡는 애들, 일명 트렌드 세터로 작은 홈 파티를 열거나 모임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 위주의 리스트.
공장엔 개인 사정을 이유로 일주일간 휴가를 신청했다. 그 깐깐한 작업반장을 생각하면 돌아갈 자리를 보장받긴 힘들었지만 자를 테면 자르라지. 뒤는 생각지 말자.
전날 시니어스에 들러 컬리지 룩이라며 옷을 쫙 빼입은 머니는 이미 대학생이 된 것처럼 입가가 쭉 찢어져 있었고 마이크마저 캥골 모자를 쓰곤 제법 멋을 부리고 있었다.
“얼굴이나 이름은 다 외웠지? 그럼 이제부터 흩어져서 각자 영업을 해 볼까?”
“오케이. 나만 믿으라고! 왕년의 솜씨 좀 발휘해 볼 테니까, 흐흐흐.”
이젠 잘 꺼내지 않는 과거 경력까지 들먹이며 자신감을 불태우는 머니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마이크, 그리고 이 팀의 포인트 가드인 나.
척의 수술비를 벌기 위한 스케얼 D의 새로운 작전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 * *
지성의 상아탑이라는 도무지 우리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캠퍼스에 출근 도장을 찍은 지도 오늘로 일주일째.
‘대학생이라고 뭐 다를 거 있어?’라고, 가끔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왠지 이곳에 있다 보면 나만 저능아처럼 느껴진다.
피부색 이후 한동안 숨었던 자격지심이 또 도졌는지 손에 두꺼운 책이라도 들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Excuse me, 저기 혹시 한국인이세요?”
“일단 그렇긴 한데······.”
“와아! 찾았다!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이번 학기부터 연수를 와서 사실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근데 교환 학생? 아니면 교포?”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여자애.
이럴 때마다 느끼지만 한국인은 참으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아니면 서로 도움을 베푸는 것에 익숙한 쪽이려나.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아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난 여기 학생이 아니야.”
“그, 그래요? 그럼 학교엔 무슨 일로······?”
“장물들 좀 팔려고. 어때? 생각 있어, 아가씨?”
“죄, 죄송합니다.”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여자애는 그 와중에 꾸벅 고개를 숙이곤 종종종 도망을 쳤다. 아쉽네, 번호라도 딸 걸 그랬나 싶다.
“어때? 좀 팔았냐?”
“아니. 차라리 우리 동네 교회에 가서 파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축 처진 어깨로 걸어오는 머니에게 나도 고개를 저어 보였다.
왕년의 솜씨를 보여 준다던 호언장담과 달리 머니는 그 사이 죽만 쓰고 있었다.
“헤이, 거기 아가씨, 혹시 반짝이는 거 필요하지 않아?”
“와아! 스타일 죽이는데? <에일리언 3> 봤어? 내 소원이 거기에 나오는 리플리랑 데이트를 하는 건데 그쪽이 리플리랑 똑 닮았거든. 응? 엿 먹이는 거냐니. 난 진심인데? 망할 엉덩이를 차 주기 전에 꺼지라고?”
“아니! 경비 아저씨!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요? 잠깐 친구 만나러 온 거라니까? 뭐? 수상하게 생겼다고? 지금 이거 인종차별 아냐? 경찰을 부르시겠다? 불러! 부르라고!”
콧대 높은 고객들에게 까이고 경비원과 실랑이까지 한 머니가 비에 젖은 길거리 개처럼 벤치에 늘어졌다. 하여간 이 자식은 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으음, 말해 놓고 나니 왠지 찔리네······.
그나마 의외의 다크호스라면 마이크.
“헤이, 브로. 물건들 좀 볼 수 있을까?”
“따라와라.”
기둥 뒤에서 은밀하게 오가는 거래의 현장.
빅 사이즈 후드 집업을 입은 마이크는 그늘진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게 전부였지만 표지판이라도 달린 건지 학생들이 은근슬쩍 다가와 말을 건다. 저 자식들 마이크가 뭘 파는 줄 알고 말을 거는 걸까?
잠깐 지켜본 동안만 해도 서너 명.
‘큭, 마이크에게 저런 재능이 있었다니.’
툭하면 경찰들의 불심검문을 받는 거구의 덩치가 이리 유용하게 쓰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현재 소지한 물건 중 처분한 건 겨우 5분의 1 정도.
반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는 장물이 든 가방을 머니에게 집어 던지고는 캠퍼스 구경을 나섰다.
“야야, 장사하다 말고 어디가?”
“기왕 온 김에 대학 구경도 해 봐야지.”
* * *
속으론 실컷 센 척을 했지만 내 어정쩡한 발걸음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막 출국장을 빠져나온 이민자와 다를 바 없었다.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안경잡이도, 복도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도,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서랍장들까지.
모든 게 생소하게 다가온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면 나도 분명 대학에 들어갔을 텐데.’
개나 소나 다 가는 게 한국의 대학이라니 변변찮은 내 머리로 미루어 보아 좋은 덴 아니더라도 나름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있지 않았을까?
집어치우자. ‘만약에(If)’란 놀이만큼 비참한 것도 없지.
괜스레 앞에서 마주 오는 학생들을 피해 구석으로 걷고 있는데 저 멀리 내가 자신 있게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지나갔다.
“오웬!”
내 외침을 못 들은 건지 오웬은 그대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일전에 트러블 G에게 말해 준 게 고마웠던지라 인사라도 할 겸 오웬을 따라 강의실로 들어가 오웬의 뒷자리에 슬쩍 앉았다.
“오웬!”
“뭐, 뭐야. 여기서 뭐 해?”
“뭐하긴 네 덕분에 돈 벌고 있지. 트러블 G가 절반은 직접 팔아 보라고 했거든. 흐흐.”
“여, 여기서?”
“응.”
“······ 거짓말이지?”
“진짠데?”
지금 타이밍에 벌어진 오웬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난리를 치겠지?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는 표정이다.
나비 효과라는 말은 들어 봤으려나.
그 영화 참 재밌었는데, 큭큭.
“지난번 일은 고마웠어. 너 TG한테도 따로 말······,”
“제, 제발 인사는 됐으니까 괜히 아는 척 좀 하지 말아 줘. 그리고 혹시 경찰한테 걸려도.”
“쓰읍-!”
나는 입술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너무 쌀쌀맞은 거 아냐? <록키> 대사까지 주고받은 사이에.”
“그건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 거잖아!”
“쉿, 쉿, 애들 듣겠다. 장물 딜러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쯧쯧.”
“끄응.”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오웬이 훽 몸을 돌렸다.
······ 이렇게 나오겠단 이거지?
뒷자리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니 녀석이 내게 안 나가냐는 눈총을 줬다. 난 뭐 어쩔 거냐는 식으로 눈썹을 까딱이며 시치미를 뗐고.
하하, 반응이 워낙 즉각적이다 보니 골리는 재미가 있다.
오웬이 불편해하는 꼴을 보다가 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한발 앞서 백발의 노신사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첫마디부터 ‘나 깐깐한 노인장이다’라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교수의 등장에 시끌벅적하던 강의실이 순식간에 도서관이 됐다.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라고 묻는다면 머니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쌍둥이 동생을 봤다며 사진을 보여 주면 믿을 정도?
콧잔등까지 내려온 안경을 한번 쓸어 올린 교수가 마피아 보스 같은 시선으로 강의실을 훑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영화의 비평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뤄 보겠다. 현대에 있어 영화 평론은 감독론과 내러티브, 영화적 장치 등 포괄적인 개념을 넘어 개개인마다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이냐에 따라 다양하게 다뤄지고 있다. 즉, 평론가 개인의 시각이 매우 중요하단 뜻이라는 말과 통한다.”
그렇게 얼렁뚱땅 시작된 내 대학 첫 강의는 영화 평론에 관한 주제였다.
낮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청각의 집중도를 이끌어 냈고 적당히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 버린 나는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의외라면 제법 강의를 잘 따라가고 있는 나 자신.
영화에 대한 주제였기에 나는 오웬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까먹고 교수가 던지는 말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평론의 기능에 있어서는 의견이 다양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치를 떠는 로튼 토마토가 있겠지.”
대표적인 영화 평론 사이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를 언급하던 교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로튼 토마토는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긍정적인 평가 비율을 프레쉬와 로튼(rotten, 썩은)이란 척도로 리뷰 점수를 제공한다. 이 척도를 ‘토마토미터’라고 하는데 내 경우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대다수가 이런 평론가들이 씹어 대기 좋아하는 작품이라 딱히 애용하진 않았다.
“······ 젠장 맞을 토마토미터.”
응?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냉철하게 강의를 진행하던 교수의 입에서 욕설이라니.
“혹시 네놈들 가운데 썩은 토마토 따위로 영화를 고르는 머저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방을 싸고 여길 나가길 바라마. 그건 평론이 아니라 잘 포장된 배설물을 싸지르는 것과 똑같은 짓거리니까.”
얼씨구. 이젠 책까지 덮어 버리더니 슬랭까지 섞어 가며 토마토를 씹어 댔다.
이 사람 의외로 나랑 통하는 면이 있는데?
소싯적에 찍은 영화가 로튼 토마토에 의해 갈가리 찢겨 나가기라도 한 건지 순식간에 불타오른 교수는 로튼 토마토에 이어 다른 평론가들까지 싸잡아 욕하기 시작했다.
“오웬. 원래 대학 강의란 게 이런 거냐? 이건 X니가 MBA 프로리그 씹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잖아.”
“······ 조용히 해.”
딱딱하고 올드한 얘기만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꽤 열정적인 사람이었잖아.
슬쩍 오웬에게 귓속말을 하는데 하필이면 숨을 돌리던 교수의 눈에 우리가 포착이 되었다.
그의 깡마른 손가락이 오웬을 가리켰다.
“어이, 거기. 방금 나온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저, 저요?”
“그래.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자네. 썩어 빠진 토마토 리뷰 따위가 산업에 발전이 되는 거 같냐고 물었다. 행여라도 네놈이 감독이 된다면 언젠가 그 사이트에 의해 테러를 당하게 될 테니 의견을 말해 보게나.”
“큭큭큭.”
훅하고 찔러 오는 교수의 평가에 주변 학생들이 킥킥거리고, 오웬은 원망 섞인 눈초리를 나에게 보냈다.
오웬. 사내자식이 고작 이런 거에 쫄면 어떡하냐? 내가 아는 유일한 컬리지 맨의 멋진 모습을 보여 달라고!
“저, 저도 감정적인 평론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캐치하지 못하는 감독의 의도라거나 영화적 장치를 집어내는 데 있어선······.”
“어떤 의도와 장치를 말하는 거지? 애초에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꼭꼭 숨겨 둔 레퍼런스라면 억지로 끄집어낼 필요가 있나? 아니면 자넨 관객들의 수준이 떨어지니 베이비시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가?”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앞으로 자네가 만들 영화가 죄송한 게지.”
“푸흐흡.”
아니, 이 자식은 평소엔 그렇게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차례가 넘어가기만을 기다리는 오웬의 꼴을 보니 괜히 울화가 치민다.
나는 번쩍 일어나 손을 들었다.
“오, 그래. 내 강의 시간에 떠들 정도로 용기 있는 학생이 친구를 위해 대신 나섰군. 좋아, 자네가 대신 대답해 보지. 내 둘의 우정에 대한 보답으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 이번 학점은 책임지고 챙겨 주겠네.”
이, 이게 아닌가?
안 그래도 암울했던 오웬의 얼굴이 이젠 아예 흙빛이 되었다. 나는 그 간절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 죄송하지만 질문이 뭐였죠?”
“······ 자네의 아둔한 머리를 위해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로튼 토마토와 같은 평론과 영화에 점수를 매기는 행위가 영화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에 관해서 물었네.”
“아아, 어려운 질문이네요.”
“하.”
“크흐흐흡. 큭큭.”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교수와 자지러지는 학생들.
내가 마피아 보스 앞에서 그의 딸과 잠을 잤다고 고백이라도 한 분위기다.
나는 뚫어질 듯 노려보는 교수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교수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를 빌어먹을 미슐랭처럼 점수를 매긴다는 게 불쾌하단 거겠죠?”
“······ 난 그렇게 표현한 적 없네만.”
“그게 그거죠. 아무튼 저도 일부 동감합니다. 요즘 그 사이트에 가 보면 이게 도통 영화를 보고 화가 나서 리뷰를 쓴 건지, 리뷰를 쓰려고 화가 난 상태로 영화를 본 건지 헷갈리는 것들이 있단 말이죠. 뭐, 저도 가끔 그렇게 주말을 죽이기도 하고요.”
“······ 계속해 보게.”
“근데 사실 영화란 게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잖아요. 교수님이 생에 최고로 치는 영화가 제게 똥 덩어리일 수도 있고, 제 최고의 영화가 교수님에게 그럴 수도 있고. 요는 그렇게 떠드는 거 자체가 영화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헛소린 다 끝났나?”
튀어나오는 대로 내뱉긴 했는데 미동도 없는 교수의 표정을 보니 아차 싶다.
미안하다, 오웬. 내가 너의 한 학기를 말아먹었구나.
절망적으로 숙인 오웬의 뒤통수와 비웃음이 가득한 주변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라, 모르겠다.
“한 가지 더!”
“아직도 남았나?”
“만약 여기 오웬처럼 교수님의 제자들이 나중에 영화를 찍고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게 된다면 적어도 4년간 대학에서 뺑이 칠 돈으로 차라리 넵플릭스 정기 구독권이나 연장하는 게 더 나았을 걸 하고 깨닫긴 하겠죠.”
“······.”
싸늘함이 감도는 강의실.
이젠 침까지 질질 흘리는 오웬은 아예 넋이 나간 게 어떻게든 미친 척으로 현실을 회피하려 들고 있었다.
‘친구야. 남은 <록키>의 대사는 다음으로 미루자.’
자격지심인지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튀어나와 버린 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내가 문 쪽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는데, 강단에서 갑자기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좋아. 방금 건 꽤 괜찮았어.”
‘괘, 괜찮았다고?’
“그렇지. 자네 말대로 고리타분하게 의자에 앉아서 써먹지도 못할 책이나 파는 것보단 영화를 한 편 더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교수들이라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같은 영화광들보다 영화를 더 잘 만든다고 볼 순 없으니까 말이네.”
“아하하, 그, 그런가요?”
휴우, 이게 이렇게 먹히다니.
어색한 표정을 관리하려는 찰나 웃음을 뚝 끊은 교수가 흥미로운 눈빛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자넨 누군가? 내 강의에선 처음 보는데?”
“······ 아, 그게.”
망할.
아직 남은 게 하나 더 있었구나.
# SCENE#5. 할로윈
할로윈(Halloween).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1년 중 가장 화끈한 파티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캠퍼스의 열기도 조금씩 달아올랐다.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꼬마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획 상품이나, 할리우드 스타들의 <어벤져스> 코스프레 예고는 애교.
청춘을 불태우기로 작정한 남녀는 벌써부터 결전의 눈빛을 다지며 파티를 탐색했고, 그중 라이언의 파티는 벌써부터 줄을 설 만큼 인기가 높았다.
“DJ도 섭외했고 거품 기계도 큰 거로 하나 장만했어, 라이언.”
“수고했어. 바텐더는?”
“물론 준비했지! 한 방에 매출을 왕창 올려 주니까 알아서 보내 준다던데?”
라이언은 대목을 앞둔 클럽 오너처럼 차근차근 파티 준비 사항을 꾸려 나갔다.
리커 스토어(Liquor Store)엔 온갖 종류의 칵테일과 와인 주문이 들어갔고, 시내에 커다란 풀장이 딸린 빌라를 대여했다. 심지어 옆집에 선물까지 듬뿍 안겨 주었다.
괜히 시끄럽다고 경찰을 불러서 흥을 깨지 말라는 뇌물인 셈.
“라이언! 이번 할로윈도 기대할게!”
“이번엔 누구 유명한 사람 안 와? 지난번 미키는 정말 죽여줬다고!”
“친구들이랑 단체로 섹시 바니 코스튬을 맞췄는데 혹시 우리도 초대 가능할까?”
라이언이 1층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할로윈 파티에 관해 물어 오는 학생만 부지기수.
초대만 되어도 학교에서 나름 잘나간다는 이미지가 박히는 라이언의 파티인지라 여학생들은 유혹 섞인 눈빛도 서슴지 않았다.
원래 사람은 이미지로 먹고사는 법이니까.
‘왜 할로윈은 1년에 한 번뿐인 거야.’
멍청한 고민마저 들 충족감에 라이언이 씩 웃었다.
부질없는 인기 스타 놀음이라 손가락질하는 애들도 있겠지만 젊었을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부지런하게 놀아 보겠는가. 마음 같아선 지구에서 제일 핫한 곳이라는 이비자섬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지만 그건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된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대형 클럽보다도 북적거리리라.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헤이 TG! 할로윈 준비는 잘돼 가?”
“여어, 브로! 이제 슬슬 해야지.”
주먹들을 아래위로 맞부딪치며 흑인 특유의 인사를 나누는 TG와 그 친구들.
‘트러블 검 저 자식도 파티를 열 거란 말이지.’
파티 업체로 시작해 최근엔 소규모 힙합 레이블까지 인수한 TG는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유명 인사.
좋은 집안의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신과는 달리 밑바닥 출신으로 지금 위치에 올라온 TG와 비교가 될 때면 불쾌감과 인정하기 싫은 패배감이 들었다.
태생적으로 결이 맞지 않는 상대.
안타깝게도 복도는 일직선이었고 라이언이 머뭇거리는 사이 TG가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신수가 더 훤해졌어, 라이언. 파티 준비는 얼추 끝나 가나 보지? 듣자 하니 이번에도 꽤 공을 들인다고 하던데.”
“그러게. 기왕이면 너한테 부탁할 걸 그랬나? 아는 사람 매출이라도 올려 줄 김에.”
“하하, 그래 준다면 나야 땡큐지. 술에다가 오줌이라도 갈겨서 너한테 맥일 수 있으니까. 큭큭.”
“이거 어디 소문이라도 내야겠네. TG가 여는 파티엔 오줌이 술로 나간다고.”
“몰랐어? 작년에 내가 몰래 네 파티장에 들어가는 맥주 통 하나에 섞어 놓았었는데.”
“지저분한 건 여전해.”
“그거 칭찬인가?”
“그럴 리가.”
듣기엔 시트콤에 나올 법한 대화였지만 오가는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유치한 라이벌 의식으로 시작한 둘의 관계는 이제 와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새끼.’
‘저열하고 비열한 자식.’
몇 차전인지도 모를 둘의 대결에 길을 가던 주변 애들이 걸음을 멈추고 둘러싸고, 자연스레 라이언 쪽엔 백인이, TG 쪽엔 흑인으로 파가 갈렸다.
개중엔 린스타에 올릴 작정인지 폰 카메라를 켜는 눈치 없는 자식도 있었다.
“앞으론 다른 곳으로 지나다녀야겠어. 웬 멧돼지가 좁은 복도를 막고 있으니 지나갈 수가 없잖아.”
“어딜 가나 겁쟁이가 문제지. 똘마니가 없으면 어딜 돌아다니질 못하니 말이야. 그래도 이런 복도에서까지 우르르 몰려다닐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고.”
“······ 말조심하지 그래?”
“음? 난 너한테 한 말이 아닌데 찔리나 봐?”
금방이라도 주먹이 오갈 것처럼 고조되는 분위기.
그 순간 뒤쪽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말! 라띠까는 대체 언제 만나게 해 주는 거냐고! 약속이랑 다르잖아.”
“칫, 되게 달달 볶네. ······ 보스리께 바그 야하 쎄.”
“방금 욕한 거지?”
“아니다. 자말은 욕 같은 거 안 한다. 자말 이슬람 신도다. 근데 왜 여기 학생들이 이렇게 몰려 있는 건가?”
“마이크, 길 좀 뚫어 봐. 재미난 거 있나 본데? 알몸 레슬링 같은 거 하는 거 아냐?”
“멍청아. 어떤 대학생이 알몸 레슬링을 하냐?”
“왜! 대학생이랑 알몸 레슬링이랑 무슨 상관인데!”
코뿔소 같은 덩치가 우직하게 길을 뚫고, 곳곳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어어, 밀지 마.”
“내, 내가 미는 게 아니라 저 덩치가.”
“꺄악!”
비명이 들리든 말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마이크와 그 등 뒤로 따라붙은 주태 일행이 벙찐 얼굴의 라이언과 TG 사이에 멈춰 섰다.
“TG!”
“오, 마이 브로.”
이런 극적인 아군의 등장이라니.
대번에 TG는 잇몸을 보이며 주태를 끌어안았고 반면 딱 봐도 괴상한 조합의 등장에 라이언의 얼굴은 구겨졌다.
“길 한복판에서 뭐 해? 무슨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거야?”
“하하, 친구랑 얘기 좀 한다고.”
“이렇게 다 모아 놓고? 흠, 하여간 대학생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진짜 알몸 레슬링 같은 것도 하는 거 아냐?”
“흐흐, 원하면 다음에 보여 주지.”
“오, 진짜? 머니, 네 말이 맞나 보다.”
“거봐! 내가 있다고 그랬잖아!”
이건 웬 미친놈들이지? 주변 학생들의 눈빛.
잔뜩 달아오른 상황이 한순간에 코미디가 되고, 슬쩍 주위를 둘러본 주태가 TG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서 얘기는 다 끝난 거지?”
“흠, 아마도?”
“그럼 같이 점심이나 먹으면서 비즈니스 얘기나 하자. 혹시 주변에 치즈버거 잘하는 곳 알아?”
“하하, 죽이는 곳 알지.”
“좋아. 마이크 한 번 더 부탁해.”
“오케이, 제이디.”
쿵.
내딛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을 주는 마이크.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선 라이언 일행에게 피식 웃어 보인 주태가 TG와 함께 그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갔다.
“저 친구는 허여멀건 게 못 먹고 자랐나 봐?”
“응? 그게 무슨 뜻이야?”
“하하, 내 고향 조크야 조크. 코리아 알지? 막 핵전쟁 하고 그런 곳.”
“오, 코리아였나? 난 차이나인 줄 알았지. 아, 방금 건 인종차별적인 발언인가?”
“큭큭, 됐어. 나도 어차피 너희는 다 아프리칸으로 보이니까.”
“하하하.”
꽈드득.
저도 모르게 물러선 라이언이 어금니를 꽉 다물며 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몇몇 학생들은 그런 라이언에게 고소하단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 씹은 라이언이 정보통인 녀석에게 물었다.
“저 자식들 누구야?”
“나도 자세히는 잘 몰라. 일주일 전인가 학교에 나타났는데 저기 동양인은 오웬이랑 친구처럼 보이긴 했어.”
“오웬? 오웬 크리스?”
“응. 버나드 교수 강의 시간 때 서로 아는 척을 하더라고.”
“오웬이라.”
골목 싸움에서 진 어린아이처럼 라이언의 치졸한 눈빛이 반짝였다.
* * *
TG의 장담대로 학교 인근에 있는 치즈버거 가게의 맛은 끝내줬다.
‘나중에 처키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네.’
늘어진 치즈를 돌돌 말며 언젠가 미국 최고의 치즈버거 가게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척을 떠올렸다.
미국인들의 치즈버거 사랑은 어찌나 극진한지, 괜히 아이X맨이 버거왕에서 치즈버거를 먹는 게 아니라니까.
머니와 마이크, 그리고 그사이 부쩍 친해진 자말은 그놈의 라띠까를 찾는다며 어디론가 훌쩍 가 버렸고 내 앞의 TG는 뭐가 그리 재미난지 버거를 한입 베어 물곤 실실 웃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웃겨?”
“하하, 아까 그 라이언 자식 상판 말이야. 그 반들반들한 낯짝이 시커메지는데 안 웃고 배기겠어?”
“어지간히 애틋한 사이인가 보네.”
“애틋하지 여러모로. 살면서 그렇게 재수 없는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잖아.”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에서 대충 느낌이 온다. 잘난 놈들끼리의 라이벌 그런 거겠지.
한방에 버거를 입에 다 털어 넣은 TG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트림을 내뱉었다.
“꺼억. 시원하구만. 그래, 물건은 다 팔았어?”
“아니. 아직 절반도 다 못 치웠어.”
“어쩌다가. 물건을 찾는 데는 많았을 텐데?”
“이상하게 내가 접근하면 다들 짝퉁인지 의심하더라. 난 또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가 붙어 있는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유독 하얀 치아를 내보인 TG가 웃음을 멈추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한동안 못 보는 건가?”
“아마도? 팔자에도 없는 대학생 노릇에 똑똑한 애들 사이에서 강의도 들어 봤고, 옛 친구도 만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으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그 말은 이상하군. 네 제자리가 어디길래?”
“글쎄? 아직 잘리지 않았다면 철강소일 테고, 아니면······ 그때 가서 또 찾아봐야지.”
어떻게든 되겠지.
적어도 부지런한 인간치고 굶어 죽는 놈은 못 봤다.
정 안 되면 척이랑 같이 길거리에서 햄버거를 팔아도 되고. 혹시 알아? 대박 나서 뉴욕 길거리 푸드로 진출할지?
“아무튼 덕분에 척의 명줄이 길어졌으니 대신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워워, 친구 사이에 무슨.”
“하하, 그래. 고맙다 친구. 디트로이트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비싼 데는 몰라도 물 좋은 곳은 많이 알고 있거든.”
도와줄 이유가 없음에도 호의를 내민 TG였기에 난 진심을 가득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가끔 동양인의 이런 인사법에 대해 낯설어하는 애들도 있었는데 TG는 능숙하게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남은 물건은 조금씩 나눠서 동네에 팔기로 했다. 정리를 하듯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는 내게 TG가 입을 열었다.
“이거 안 되겠네.”
“뭐가?”
“간만에 만난 좋은 친구를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쉬워서 말이야. 혹시 할로윈 때 약속 있나?”
“할로윈?”
“큰 파티를 열까 하거든.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시간 되면 놀러 와, 웬만한 클럽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흠, 척이 들으면 당장에서 휠체어를 끌고 여기까지 달려올 만한 소식인데?”
“하하, 그래야지. 아주 죽여줄 거다.”
TG가 말하는 죽여주는 파티가 무엇일지 대충 예상이 간다.
“버플 파티?”
“멋진 아가씨들이랑 죽이는 음악도 있지. 흐흐.”
첫 만남에 보았던 파티가 2배쯤 커진 규모이려나?
“그런 건 아까 그 허여멀건 자식도 하지 않겠냐?”
“할로윈이 다 그렇잖아. 결국 스케일 차이지. 대신 나는 비장의 무기로 코스튬 아티스트를 불렀어. 아마 그 멍청한 라이언 자식은 생각도 못 했을걸?”
과연 꽤 괜찮은 전략이었었지만······.
여전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내게 TG가 몸을 바짝 당겼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다는 얼굴인데?”
“어쩌면?”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대신 그날 애들에게 팔 물건은 우리가 들고 있는 거로 해 준다면 말해 줄 수도 있지.”
“제길, 끝까지 빼먹겠다 이거지? 좋아. 일단 들어 보고 맘에 든다면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굿! 안 그래도 식상한 디트로이트에서 뭘 하고 놀지 고민이었는데 남은 물건도 처분하고 한바탕 즐길 스테이지도 생겼다.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말이지······.”
* * *
어렸을 적, 같은 반 녀석이 빌려준 <13일의 금요일> 비디오 테이프를 본 이후로 척과 나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은 언제나 할로윈이었다.
그 이전엔 윌마트에서 파는 조악한 슈X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나는 포즈를 취한다거나 이마에 번개 그림 달랑 그려 넣고 해X포터라고 우기며 ‘Trick or Treat(장난이 싫으면 사탕을 내놔!)’이라는 따위의 말을 내뱉었지만, 생에 첫 포르노를 본 아이들처럼 혁명적인 2차 성징이 찾아왔다고나 할까?
“할로윈이라고 할로윈! 악령들이 도망갈 정도로 으스스해야 되는데, 우리 엄만 내게 멍청한 스머프 분장을 시키려 하고 있어!”
“처키, 넌 스머프야? 난 보거스라고······. 망할 노란 괴물이라니. 끄흑.”
용납할 수 없다! 단 한 번뿐인 12살의 할로윈을 이렇게 망칠 순 없어!
자고로 의지를 불태우는 철부지 꼬마들은 무서운 법.
우리는 한동안 디트로이트 시내에 버려진 집들을 다 뒤져 고물을 팔아넘겼고 마침내 이바이에서 꽤 괜찮은 코스튬을 배송받았다.
척은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
나는 <할로윈>의 마이클.
꿈의 택배 박스를 받은 꼬마들이 그날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해 보라.
‘······ 거기서 멈춰야 했었는데.’
하필이면 쓸데없이 우리 둘 사이에 경쟁이 붙은 것.
“제이슨이 더 쎄! 총을 몇 방이나 맞아도 끄떡없잖아!”
“그건 마이어스도 마찬가지거든? 바보 같은 하키 마스크 따윈 한주먹거리에 불과해!”
누가 더 세냐는 ‘vs 놀이’는 한창 민감한 감수성의 우리 마음에 불을 지폈고, 할로윈 당일 기어코 척, 이 멍청한 자식이 옆집 영감의 도끼를 훔쳐 들고나오는 또라이 짓을 저질러 버렸다.
그다음에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긴, 당연히 어른들에게 걸려 엉덩이가 퉁퉁 불도록 볼기짝을 두들겨 맞았지. 척은 아직도 그때 맞은 것 때문에 엉덩이가 짝짝이라며 울분을 토하곤 한다.
만약 그때 내 품에 있던 마이어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식칼까지 들켰다면 아마 엉덩이 정도론 끝나지 않았으리라.
천만다행이다, 흐흐.
아무튼 그날을 계기로 전통처럼 이어져 온 할로윈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스케얼 D란 채널로,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할로윈을 더 재밌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공상으로 이어졌다.
개중엔 돈이 많이 들거나 멋모르고 하다간 경찰에게 끌려가기 딱 좋은 소재라 구상만 했던 것들도 여럿 있었는데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숙원을 풀지도 모르겠다.
* * *
“또 멋대로 병원 밖으로 나가면 강제 퇴원인 줄 알아요!”
“하하. 미안하다고 했잖아, 도로시. 다신 안 그럴게!”
“흥, 정말 밉상이라니까.”
톡 쏘는 말투와는 달리 잔뜩 애정이 담긴 눈빛을 흘리는 간호사에게 척이 손 키스를 날렸다.
이 자식은 하여간 어딜 가나 조용해 지내는 법이 없다.
하긴 이래야 척답지. 병원에 있다고 다 죽어 가는 환자처럼 빌빌거리는 꼴은 처키에겐 어울리지 않으니까.
간호사가 나가자 척은 실실 웃더니 배게 밑에 숨겨 둔 봉지에서 캔디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지니어스 하다니까? 어떻게 이런 맛의 캔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몰라.”
한글로 ‘총합 캔디’라 적힌 사탕 봉지를 보며 척이 볼을 우물거렸다. 스케얼 D 채널엔 한국인 구독자들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내게 보내온 것.
처음 계피 맛 사탕을 먹곤 똥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던 척은 이제 적응이 됐는지 주변 환자들에게 나눠 주며 반응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래서 치사하게 그동안 너희만 재미 봤다는 거지? 대학 강의도 듣고, 단체로 미팅도 하고 말이야.”
“······ 미팅을 했단 말은 안 했는데?”
“그게 그거지. 브루클린에서 온 똑똑하고 예쁜 금발 여인이랑 농담도 하고 그랬을 거 아냐!”
“넌 뉴욕에 무슨 판타지 같은 거라도 있냐?”
“판타지라니. 고상하게 취향이라고 해 줘. 그리고 살면서 한 번쯤 뉴욕 출신이랑 데이트는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자기가 말하곤 한바탕 웃은 척이 허리를 세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 지금 그 말 되게 사망 플래그 같았던 거 알지? 죽기 직전에 남기는 마지막 인사론 최고였어.”
“새끼, 말을 해도 꼭.”
“큭큭, 그러니까 그런 인사는 나중에 수술 끝나고 해. 날짜 나왔냐?”
“어, 다다음 주에 하기로 했어. 빌어먹을. 하필이면 할로윈 직후라니. 이래선 올해 1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분하다는 듯 처키가 장난스레 침대에 주먹을 내리쳤다.
그 주먹질엔 수술비를 마련해 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치료에나 집중해. 수술만 잘 끝나면 뉴욕이든 마이애미든 소개팅을 시켜 줄 테니까.”
“진짜지? 약속했다, 너.”
“그래. 그쪽 애들은 불량품에 잘 끌린다더라.”
짓궂은 농담이 오가고 눈매를 휜 척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보내 준 영상 어땠어?”
“그거? 죽이더라. 직접 만든 거지?”
“어, 밤새 촬영하고 편집한다고 똥줄 빠졌다. 스카일라가 열연을 했지.”
“남의 여동생 데려다가 너무 빼먹는 거 아니냐?”
“섭섭하네. 스카일라가 남이야? 나한테도 지분이 있잖아!”
“······ 미친놈, 지분은······. 아무튼 퀄리티는 좋더라. 괜찮겠어? 그쪽 동네 애들한텐 꽤 하드코어일 텐데.”
TG에게 할로윈 파티 기획을 약속한 다음 돌아와 내가 만든 예고편 영상. 거기엔 그동안 우리가 짰던 아이디어 중 하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게 우리 취향이니까. 기왕 할 거면 어설프게는 안 되지. 그리고 솔직히 비어퐁 게임에 엉덩이 흔드는 거보단 이쪽이 재미나지 않겠냐?”
“큭큭, 그렇긴 하지. 대학 샌님들 쇼크 먹고 기절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네.”
“네가 앰뷸런스라도 몰고 와 그럼. 뭐, TG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지금쯤 영상을 확인하고 있겠지?
난 금니를 벌리고 있을 TG의 살찐 얼굴을 상상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 *
트러블 검이 운영하는 파티 업체 ‘빅트러블’의 회의실.
평소의 헐렁한 이미지와는 달리 상석에 앉은 TG는 동업자인 닐과 함께 제법 CEO다운 눈빛으로 매출 자료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닐, 레이블 쪽은 어때?”
“좋지 않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비트메이커 조쉬 알지?”
“영화 사운드 트랙에 참여했다던 친구?”
“응. 경력이 괜찮아서 계약을 하긴 했는데 좀 지내 보니 마니아틱한 측면이 있더라고. 작업물 대부분이 지나치게 어두워.”
“길게 보자고. 어차피 레이블 쪽은 단기 이익을 내려고 론칭한 건 아니잖아.”
자본이 넘쳐 나지 않는 이상 넉넉한 초기 투자는 힘들었고 TG는 늘 장기적인 관점으로 사업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레이블 쪽은 이제 막 발을 들였으니 당장에 흑자를 내기엔 당연히 무리.
그럼에도 동업자 닐의 미간에 파인 골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들 사업의 핵심인 파티 쪽에 문제가 생긴 탓이다.
“TG.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지난번에도 보고했지만, 올해 들어 파티 쪽 계약 건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그 정도로 심각해?”
“오픈부터 우리랑 함께해 온 클럽도 조심스레 계약 해지를 물어 올 정도니까. 콜린스 쪽이 꽤 공격적으로 확장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얼마 전, 다운타운에 새로 입주한 경쟁 업체의 등장은 빅트러블의 새로운 위험 요소였고 이는 하반기에 와선 중요 고객들의 마음이 변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다시피 할로윈부터 크리스마스 시즌까지 1년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데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이번엔 우리가 죽을 쓸 거 같단 말이지.”
“흐음······.”
턱을 만지며 고민에 빠진 TG에게 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상황이 나빠. 그 듣도 보도 못한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파티는 물 건너갔다고 전하기나 해.”
“아직도 그 얘기야?”
“괜히 늦장 피우다가 수습하기 골치 아파지는 거보다야 낫지 않겠어?”
닐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처음 다른 이들에게 할로윈 파티를 맡기겠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 TG의 병이 도졌나 싶어 머리를 짚어 보기도 했었다.
세상에 파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 정작 할로윈 파티를 남의 손에 맡긴단 말인가?
단순히 파티를 넘어 고객들에게 보일 중요한 홍보 수단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번 일은 비싼 콘서트를 열어 놓고 데모 테이프가 전부인 신출내기를 무대에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 그것도 가뜩이나 사업이 기울어 가는 시점에 정작 그래미 래퍼는 뒷전에 박아 놓고 말이다.
TG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진정해. 어차피 콘셉트만 조금 달라지는 거니까 크게 문제 될 건 없잖아. 솔직히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기존의 고객들을 잃진 않겠지.”
“어차피 잃을 고객이라면 어떻게든 떠나가게 돼 있어. 곧 연락 주기로 했으니까 그때 가서 결정합시다.”
겨우 닐을 달랜 TG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상투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 대비는 해야겠군.’
TG가 본 주태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기질이 있는 친구였다.
첫 만남에 흔쾌히 호의를 보여 준 건, 손에 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주눅이 들지 않는 예전의 자신과 비슷한 그 분위기 때문.
‘친구 수술비를 위해 먼 동네까지 찾아올 놈이 허세나 부릴 리는 없잖아.’
만약을 대비해 기존의 장소와 준비 사항은 진행되고 있었지만 속으론 제이디가 한 방 터뜨려 주길 기대했다.
여러모로 이번 할로윈 파티는 그에게 있어 비중이 커진 상황.
경쟁 업체는 물론, 재수 없는 라이언 녀석도 칼을 갈고 있을 게 뻔했다.
어차피 파티야 결국 스케일의 차이겠지만 센스 있는 분위기와 음악, 알코올 브랜드의 매치업은 노하우가 꽤 필요한 분야이고, 과연 이쪽은 문외한으로 보이는 동양인 친구가 어떤 마법을 부릴지 궁금하기도 했다.
건조해진 입술을 핥은 TG가 회의를 마무리하려 할 때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이잉.
“오, 때마침 도착했네.”
“그 친구들이 밖에 왔다고?”
“아니, 영상을 보냈나 본데?”
첨부된 링크를 확인한 TG가 패드를 꺼냈다.
혼자 먼저 확인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눈에 불을 켜고 고개를 들이미는 닐을 보니 늦었다 싶었다.
‘제발 한 건만 해 주라, 제이디.’
속으로 주태의 이름을 부르며 TG의 뭉툭한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이후로 3분.
그 짧은 시간이 지나갔을 때 TG와 눈을 맞춘 닐의 입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 나쁘지 않은데?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봐, 닐. 이럴 땐 죽인다고 표현하는 거라고. 하하.”
* * *
시작은 고막을 찢는 고주파의 사이렌 소리였다.
위이잉- 위잉- 위이잉.
본능적으로 심장을 펌프질하는 사운드.
대낮임에도 먼지가 낀 창은 투과되는 햇빛을 감췄고, 어두운 건물 안엔 다급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제발, 제발!”
필사적인 중얼거림과 함께 여자가 숨어든 곳은 부엌의 찬장.
헉. 헉.
사이렌 소리에 묻혀 들릴 리 없지만, 여자는 행여 작은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꺼풀을 살짝 뜨려는 순간 코앞에서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쿵-!
실낱같은 문틈으로 두꺼운 다리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도끼가 나타났다.
“끅-!”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
제발 듣지 못했다고 해 줘!
기도가 통한 걸까? 잠시 앞에서 서성이던 발걸음의 주인이 멀어지고, 부엌엔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터질 듯 방망이질하던 심장이 점차 진정되고, 여자가 참았던 호흡을 토해 내려는 찰나.
다다다닥-!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녀가 숨어 있던 찬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찾았다.”
[Hide and Seek. Coming Soon.]
타이틀이 떠오르며 마무리된 영상엔 순식간에 족히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스케얼 D & 빅트러블이란 계정으로 티저가 올라온 지 단 3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SCENE#6. Hide and Seek
Annie_Hickey : Shittttt!! 이게 할로윈 티저 영상이라고? 맙소사!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Jak : 잘빠진 호러 영화 예고편을 본 기분인데? 어디서 하는 파티야? lol
AudiGUM : @Jak – 트러블 G라고 내가 다니는 학교 애가 여는데, 스케얼 D는 모르겠네. 혹시 아는 사람? 영화 제작사야?#BIG trouble#SCARE_D
detik_debi : @AudiGUM - 호러 콘텐츠 미튜브 채널이야. 밑에 링크를 달아 둘게.
Dondon : 그래서 지금 할로윈을 어릴 때나 하던 숨바꼭질 따위로 날려 버리겠단 건 아니지?
Flawless : 시간이 없어서 아쉽네. 내가 갔다면 살인마를 잡아 족쳤을 텐데.
Dondon : @Flawless - Hahahaha FUXK OFF!!!
* * *
[Halloween Hide and Seek.]
할로윈 숨바꼭질 홍보 영상은 예상보다 훨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대학 커뮤니티 위주로 오가던 반응은 상세한 진행 내용이 없는 파티에 대해 꼬리를 물고 늘어지더니 이젠 타 대학에서까지 문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제이디, 이거 대박 날 거 같은데? 오늘 연락 온 클럽만 2곳이라니까?”
TG에게선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메시지가 도착했고, 처음 구두로 오갔던 약속과는 달리 파티 수익금 일부가 명시된 계약서를 보내기도 했다.
만약 이번 파티의 반응이 좋다면 후에 빅트러블의 정식 상품으로 만들어 이후에도 꽤 짭짤한 로열티를 주겠다나? 딱히 저작권이 있는 아이디어가 아님에도 이런 면에서 TG는 후했다.
‘반반일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네.’
꽤 공을 들여 찍긴 했다만 그래 봤자 3분짜리 영상.
기존의 할로윈에 익숙한 이들에겐 오히려 거부감이 들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대체로 참신하단 평이 지배적이었다. 아마 뻔하디뻔한 할로윈 파티 사이에서 다른 각도로 날린 잽이 제대로 꽂혀 들어간 거겠지.
돌아가는 분위기와는 별개로 우린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스테이지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마이크. 스피커 설치는 끝났어?”
“끝났다.”
족히 30kg가 넘는 대형 스피커를 나른 마이크가 뻘뻘 흐르는 땀을 훔쳤다. 주머니엔 스니쿠즈 초코바가 삐져나와 있었는데, 그 마이크가 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현장은 바삐 돌아갔다.
TG가 내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이후 내가 요구한 건 단 한 가지.
“완벽한 무대가 되어 줄 저택이 필요해. 뭐든 대충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거든.”
내건 조건이 꽤 까다로웠기에 기존에 섭외되어 있던 다운타운의 빌라에서 교외의 별장으로 파티 장소가 변경되었고, 오래된 저택은 차근차근 ‘숨바꼭질’의 세트장으로 변모해 가는 중이다.
“카메라 설치도 해야 하는 거 알지?”
“······ 제이디는 나만 부려 먹는다. 머니도 일해야 한다!”
“머니, 마이크가 너 보고 하라는데?”
보기 드물게 짜증 어린 마이크의 말에 머니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오른팔에 찬 밴드를 가리켰다.
“이거 안 보여? 난 감독이라고, 감독! 현장을 조율하는 아주 막대한 임무를 지고 있단 말이지. 자말! 거기가 아니라니깐?”
“으아아악!”
TG가 보내 준 직원들과 섞여 있던 자말이 머니의 지적질에 못 참겠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트레이딩 카드 20장에 팔려 온 인도인이라니. 내 가슴이 다 아프네.
이후 창마다 짙은 커튼이 쳐지고 중요 포인트엔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손을 오래 맞춰 온 머니는 내가 작성해 준 스케치대로 재빠르게 현장을 구성해 나갔고, 난 손에 들린 각본을 체크해 나갔다.
‘포그(fog, 안개) 설치도 끝났고 조명이랑 동선만 짜면 끝이구나. 예약 인원이 한 80명 정도 된다 그랬지?’
저택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 이상으로 많아 봤자 북적거릴 뿐, 적정 인원이다.
겨우 할로윈 파티에 들어가는 노력치곤 필요 이상으로 가상했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남의 돈으로 이런 짓거리를 해 보겠어?
이제 남은 건 아무런 대본도 없이 도착할 배우들.
이번 이벤트의 콘셉트는 ‘Real’로 정했다.
* * *
“난 솔직히 이해가 안 돼. 왜 굳이 이렇게 멀리까지 가야 해?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은 다 어쩌고.”
“또 그런다, 에밀리. 네가 그 영상을 못 봐서 그렇다니까? 봤으면 네가 먼저 졸랐을걸?”
“그래 봤자 이상한 분장이나 하고 갑자기 튀어나와선 ‘웨에에!’ 하며 놀래기나 하겠지. 차라리 라이언 쪽이 돈은 제대로 쓰잖아. 이번에도 가수를 부른다 했는데.”
“지난 방학 때 유니버셜에 <워킹 데드> 보러 갔다가 질질 짰던 게 누구더라?”
“······ 오빠도 여자애처럼 비명이나 꽥꽥 질렀으면서!”
“노우노우, 바이킹의 후예인 내가 그랬을 리가 없지. 아무튼 난 이제 라이언 파티는 질려. 덜떨어진 장난이나 치면서 낄낄거리는 것도 꼴 보기 싫고. 이번엔 새로운 경험을 한다고 치자. 응?”
“흐응, 알았다고.”
오빠의 말에 에밀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탐스러운 머릿결을 쓸어 넘겼다.
기껏 준비해 온 허벅지가 깊게 파인 간호사 코스프레가 좀 아깝긴 했지만 다음을 위해 한 번쯤 져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좀비 같은 건 정말 싫은데.’
호러 영화라면 질색을 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그저 오늘 파티가 적당히 놀래는 수준에서 끝나길 바랐다.
에밀리가 고민을 하는 사이, 차는 야생 곰이 출몰한다는 표지판이 보이는 산어귀에 들어섰고, 헤드라이트에 이미 도착한 차량의 불빛이 보였다.
“그럼 우리도 들어가 볼까?”
부엉이 소리와 함께 주태의 배우들이 속속들이 저택의 입구로 들어섰다.
* * *
3층의 저택 중앙 로비엔 수십 명의 코스프레 군단이 모여 떠들썩하게 서로를 품평하고 있었다.
“저 애는 올해도 심슨이구만. 작년엔 온 가족이 심슨 분장을 하더니.”
“저기 간호사 봐 봐. 오우, 몸매가······. 가서 주사 좀 놔 달라고 해 볼까?”
“아서라, 저 애 우리 과에서 제일 잘나가. 라이벌이 수두룩할걸?”
“응? 그런 애가 라이언 파티는 놔두고 여긴 왜 왔대? 여긴 너드들을 위한 성지가 될 곳이라고!”
“그런 것치곤 라이언이랑 친한 애들도 많이 보이는데? 근데 분위기가 왜 이러냐. 언제 시작하는 거야?”
“그러게······. 티저처럼 음산하긴 한데, 파티 같진 않네.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천장의 샹들리에는 어디 가고 대신한 건 사방에 세워진 촛대.
맥주나 칵테일 따위가 차려진 테이블도 처음에만 사람들이 서성일 뿐 30분쯤 지나자 다들 투덜대기 시작했다.
배경으로 우중충한 사운드가 흐르는 것도 한몫했다.
“이래서야 전혀 취할 기분이 들지 않잖아!”
“망했어. 난 제니랑 잘해 볼 생각으로 여길 왔다고. 근데 지금 제니 얼굴 좀 봐. 썩은 청어가 따로 없다니까?”
“TG는 대체 어딜 갔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점점 커지는 불만의 소리. 자정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시내의 클럽으로 갈까 하는 대화도 얼핏 들려왔다.
그때 파티의 주최자 트러블 G가 저택의 입구를 열며 등장했다.
손엔 들린 마이크를 후 하고 분 TG는 모인 파티 참가자들을 둘러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먼 곳까지 와 준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
평소라면 ‘TG! TG!’를 외치며 격렬하게 튀어나왔어야 할 반응이 없자 당황한 TG가 기침을 삼켰다.
‘흐흐, 조금만 기다려 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해 줄 테니까.’
속으로 결의를 다진 TG가 다시 말을 이었다.
“크흠, 이거 다들 라이언 파티에 놀러 갈 걸 그랬나 싶은 얼굴인데?”
“TG! 우리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맞아! 하다못해 이 우중충한 노래라도 좀 바꿔 달라고!”
“설마 이런 고스트 하우스 따위 같은 분위기로 끝은 아니겠지? 그 영상에 나온 건 다 뭐였어?”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원성의 목소리.
“워워, 진정해. 아직 쇼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얼른 시작하지 않고 뭐해. 이러다 브루스 배너로 변할 거 같다고!”
“큭큭큭.”
헐크 분장을 한 이가 가슴을 두드리며 항의하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긴장을 풀어 주는 농담에 TG가 고개를 까닥, 고마움을 표시했다.
“안 그래도 그럴 거야.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어.”
난데없는 이야기꾼 할아버지 모드라니.
의아해하는 반응과는 상관없이 턱을 쓰다듬은 TG가 외웠던 대사를 풀기 시작했다.
호러 영화엔 클리셰처럼 반복되는 공식이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꼭 영화 초반에 말 많은 인물이 살인마나 귀신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는 것.
이번에 TG가 제이디에게 배정한 역할이 바로 그랬다.
때마침 어디선가 음산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와 분위기를 더했다.
“사실 이 저택은 내 그랜드파의 그랜드파가 관리했던 별장이야. 주인은 독일에서 이민을 온 의사 부부였는데, 그들에겐 불치병을 앓는 아들이 있었다나 봐. 뭐, 흔한 이야기지. 마을은 20명 정도만이 살 정도로 작았고 사람들은 착했어. 다들 그 부부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지.
문제는 그들이 이주를 해 온 얼마 뒤부터 벌어졌어.
마을 목장에서 기르던 동물들이 이유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아 숲을 헤맸어.
기르던 가축의 비명이 들릴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사이렌을 켰다고 해. 야생 동물에게 위협을 가할 생각으로 말이야.
그런데 범인은 야생 곰 따위가 아니었어.
바로 그 의사 부부의 아들!
얼굴에 늘 자신이 그린 그림을 오려 가면으로 써서 놀던 아이가 놀랍게도 범인이었던 거야. 부부는 보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어린아이를 께름칙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부부를 내쫓기로 마음먹었고, 빗길에 쫓겨난 부부는 마주 오던 트럭에 치여 죽었어.”
동굴처럼 울리는 TG의 목소리와 촛불에 비쳐 일렁이는 그림자.
거기에 깔린 음울한 사운드는 조악한 스토리조차 단숨에 몰입을 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TG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 10년쯤 지났을까?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이제 더 이상 부부는 존재하지 않았어. 그저 그들이 한때 살았던 저택에 종종 휴가를 오는 외지인을 들여놓아 돈벌이를 했을 뿐. 더는 사이렌을 울릴 일도 없었지.
그날도 평소처럼 외지에서 온 이가 돈을 내며 한동안 별장에 머물 것을 요구했고,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였어. 외지인은 고마움의 표시로 저녁 식사에 마을 사람들을 초대했고.
만찬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외지인이 잠깐 기다리라며 말렸다더군.
그러더니 그 남자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얼굴에 썼다는 게 아니야? ······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위이잉- 위이잉-!
손을 뻗어 천장을 가리킨 TG의 손가락과 때맞춰 울리는 사이렌.
위이잉- 위잉-!
“뭐, 뭐야? 시끄럽잖아.”
“TG, 저 소리 좀 꺼 줄 수 없어?”
TG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등 뒤로 저택의 입구에서 거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는 TG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순간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섬뜩한 미소를 짓는 TG.
“이미 늦었다네, 친구들.”
촤아악-!
시퍼런 칼이 TG의 두꺼운 배를 뚫고 나와 피를 흩뿌렸다.
“꺄아아악-!”
“뭐, 뭐야!”
“으허헉!”
쾅-!
비명을 그치라는 듯 열렸던 입구가 거칠게 닫히고, 이제 사라져 버린 출구를 막아선 거구는 어린애가 그렸음 직한 기괴한 가면을 꺼내어 썼다.
가면 안에선 쇳소리 같은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Come out come out, whatever you are(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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