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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 첫째 아들 1권 (1)

2019.09.05 조회 3,607 추천 25


 # 대한민국 흔한 장년층의 일생
 
 
 “여기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요!”
 직장인처럼 보이는 남녀 한 쌍이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영혼 없는 눈으로 밀가루를 묻힌 닭고기를 철망에 담았다. 그리고 기름을 살짝 달구기 위해 불을 세게 켰다.
 틱틱틱.
 촤타타탁~
 늘 듣던 그 소리. 닭들이 기름에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한숨이 나왔다.
 나는 대한민국의 흔하디흔한 치킨집 프랜차이즈의 사장이었다.
 사장이면 좋은 거 아니냐고? 그럴 리가, 꿈도 꾸지 말아라.
 사장도 어디 사장 나름이지, 나는 그저 흔하디흔한 동네 치킨집 사장이었다.
 치킨을 튀기던 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내 가게 맞은편의 다른 치킨집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사장도 영혼 없는 눈으로 치킨을 튀기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쓰게 웃었다.
 삐비빅! 삐비빅!
 치킨이 다 튀겨졌다는 알림음에 나는 치킨을 기름에서 건져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올리며 내가 언제나 외치는 말을 했다.
 “프라이드치킨 나왔습니다!”
 그러자 알바생인 슬아가 치킨이 담긴 그릇을 들고 손님들에게 가져갔다.
 “네. 프라이드치킨 나왔습니다.”
 그저 그런 인생.
 대한민국의 흔하디흔한 자영업자의 인생이었다.
 어릴 때 내 꿈은 치킨집의 사장이었다.
 그 당시에는 배가 고팠고, 나는 치킨을 간절하게 먹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치킨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각종 트렌드에 맞춰 젊은이들의 입맛을 공략하였고, 부장까지 승승장구하며 승진해 나갔다.
 사장님에게 표창장을 받을 정도로 우수했고 능력 있는 사원이었지만, 거기까지.
 대한민국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모든 악의 근원인 IMF가 터졌다.
 소비는 줄었고, 내가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났다.
 사장은 도망갔고, 직원들은 절망에 빠졌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었다.
 IMF가 끝나자, 나는 일자리를 잃은 중년이 되었다.
 나이 40이 넘은 나를 받아 줄 곳은 없었다.
 그때 내 눈에 뜨인 것이 치킨집이었다.
 사람들은 치킨집에 줄을 서서 치킨을 사 갔고, 저것은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치킨집 프랜차이즈를 시작했다.
 눼눼치킨.
 그동안 갈고 닦은 인맥을 이용해 눼눼치킨의 프랜차이즈를 여는 데 성공했다.
 나는 나름대로 치킨을 잘 팔아서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었다.
 “하······. 그러면 뭐하나······. 나는 그냥 기계 같은 인생인데.”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치킨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하는 치킨집을 차리는 것.
 전 세계의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치킨을 만드는 것이었다.
 TFC처럼 말이다.
 TFC의 그 할아버지처럼 거대한 치킨 회사를 창업하고 싶었다.
 “휴······ 누가 나에게 투자 같은 건 안 해 주나······.”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치킨의 레시피가 있었다.
 내가 대한민국에 선보인 양념치킨.
 양념 반 프라이드 반, 간장치킨, 갈릭치킨 등 대한민국 치킨의 역사는 나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고, 사장은 나를 추켜세우며 고속으로 승진시켰다.
 그래 봤자 뭐하겠는가?
 “내가 가진 것은 허울뿐인 명예밖에 없는데······.”
 “여기 간장치킨 두 마리 주세요! 순살로요!”
 손님이 들어왔나 보다.
 “네! 알겠습니다.”
 활기차고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다시 닭을 튀기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다.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올 것이다.
 이렇게 한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 * *
 
 “후유······.”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마지막 손님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으으······. 사장님, 힘들어요······.”
 알바생인 슬아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는 피식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힘들었지? 이따가 치킨 한 마리 가져가라.”
 내 말에 슬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소리쳤다.
 “어?! 진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거짓거리가 가득한 주방을 보며 말했다.
 “대신 저거 다 치우고 가자.”
 “힝······.”
 슬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다가가 고무장갑을 꼈다.
 그나마 잘한 것은 저 윤슬아라는 알바생을 뽑은 것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여학생이다. 머리를 뒤로 묶고 열심히 알바를 하는 모습에 내 딸이 생각났다.
 “어휴······.”
 매일 돈, 돈, 돈 거리는 딸.
 같은 대학교의 학생인데 어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딸인데?
 나는 테이블을 닦은 후 설거짓거리를 주방으로 가져다 날랐다.
 슬아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설거짓거리를 닦았다.
 띠링.
 “어?”
 나와 슬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 취객이 붉은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아빠?”
 슬아의 말에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슬아를 바라보더니, 슬아에게 쿵쾅쿵쾅 다가갔다.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 쌍년이!”
 짜악!
 남자가 슬아의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고개가 홱 돌아간 슬아는 벌벌 떨면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슬아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개 같은 년!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한테 돈을 숨겨? 네년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슬아는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사······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모시고 나갈게요.”
 슬아가 남자의 양팔을 잡으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슬아를 노려보며 팔을 휘둘렀다.
 휙!
 “이거 안 놔?”
 와장창!
 슬아가 테이블에 부딪히며 바닥에 쓰러졌다.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이보세요. 어르신. 남의 가게에서 남의 알바에게 무슨 짓입니까?”
 “뭐? 남의 알바?”
 남자는 나를 홱 하고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화가 나려고 했다.
 대체 저 인간은 무슨 깡으로 이런 소란을 피운단 말인가?
 “계속 소란을 피우신다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당장 나가세요.”
 “이런 미친 새끼가! 아니, 어디다 대고 큰소리야! 엉!”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남의 가게에서 이러시는 거 영업 방해입니다. 슬아는 제 알바생이고 당신은 제 가게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슬아의 직장에 와서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상에, 저렇게 착한 여자아이에게 소리를 치고 난리를 치다니.
 이 남자 제정신인가?
 “너는 인마! 손님한테도 이렇게 소리를 질러? 인마! 너 이러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대체 이 개념 없는 인간은 뭐란 말인가.
 “당신 같은 사람은 손님으로 받을 생각도 없고, 이미 영업시간은 끝났습니다. 나가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하! 나는 슬아 아빠야!”
 “슬아는 제 가게 알바생입니다.”
 “이 새끼가!”
 짜악!
 뺨이 화끈했다.
 이렇게 개념 없는 작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가세요.”
 정말 제대로 화가 났다.
 저 남자는 구속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만하세요!”
 슬아가 소리쳤다. 나와 남자는 슬아를 바라보았다.
 슬아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빠. 그만해, 제발. 좀 나가 있어! 사장님한테 너무 죄송하잖아! 그리고 진짜 왜 그래!”
 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세상에 저런 인간이 어떻게 슬아의 아버지란 말인가.
 나는 정말 한숨이 다 나왔다.
 슬아의 말에도 남자는 적반하장이었다.
 “너 이년이! 네가 나를 무시하고도 살아남을 것 같아? 엉?!”
 탁! 탁! 탁!
 슬아는 눈시울을 적시며 남자를 밀면서 소리쳤다.
 “나가! 빨리 나가라고!”
 “이······ 이 년이!!”
 남자는 참지 못한 듯 바로 옆 주방에 들어가 도마에 있는 칼을 가져왔다.
 어······. 저건 아니다.
 저건 진짜로 아니다.
 나는 몸을 냅다 던져서 남자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발이 안 움직였다.
 푹! 푹! 푹!
 “커억!”
 나는 슬아가 남자에게 그대로 칼에 찔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슬아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슬아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슬아의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남자는 씩씩거리다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곤 인상을 찡그렸다.
 도망쳐야 한다. 저 인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쳤다. 미친 게 분명했다.
 그런데 발이 안 움직였다.
 “제기랄······. 어쩔 수 없지.”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망쳐야 한다.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나는 벌벌 떨리는 다리를 잡고 움직이려 했다.
 푹!
 “억!”
 배에 극심한 격통이 밀려와 나는 고개를 내리려고 했다.
 푹! 푹! 푹!
 남자는 나의 어깨를 잡고 내 배를 난도질했다.
 슬아가 바닥을 기어와 남자의 다리를 잡았다.
 “이런 개 같은 년이!”
 퍼억!
 남자가 슬아를 걷어차자, 슬아는 구석에 처박히며 힘없이 늘어졌다.
 세상에······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몸에서 힘이 빠졌다.
 철퍼덕!
 바닥에 비참하게 널브러진 나는 떨리는 동공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흥분한 눈으로 계산대를 뒤져 현금을 꺼내기 시작했다.
 ‘미친놈······.’
 분했다. 그리고 후회됐다.
 슬아를 알바생으로 뽑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바닥에 이미 피가 흥건했고, 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너무 억울하잖아. 이건 진짜 너무 억울하잖아!’
 평생 남을 위해 살았다. 남의 밑에서 능력을 발휘했지만, 허울뿐인 명예만 얻었을 뿐이었다.
 여한이 너무 많이 남았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단 말인가.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 60년대 재벌가의 손자
 
 
 6·25 전쟁이 끝난 이후.
 대한민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정치 상황은 어렵고 복잡했으며, 사람들은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혼란한 그때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고, 군사 정변의 중심인 JH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의 당선 이후 대한민국은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베트남전에서 막대한 양의 외화를 들여온 대한민국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희망에 가득 찬 1968년을 맞이했다.
 들여온 외화들은 기업의 배를 불렸고, 기업들은 국민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기업들은 국민의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공업의 기반을 만들어 자본을 축적했다.
 그리고 이 당시 가장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 하나 있었다.
 치킨집 사장이었던 나는, 그 집안사람 중 한 명의 몸뚱이 주인이 되어 있었다.
 작은 팔과 다리.
 이제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가 다 되어 간다.
 7살이니 아마도 내년이면 국민학교에 들어갈 것 같았다.
 소개하겠다.
 내 이름은 김태준.
 대한민국 최고 자본가의 단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다.
 외부에서 보자면, 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후계자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으리으리한 규모의 서양식 가옥이었다.
 고용인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1960년대에 한국에서 보기 힘들다는 외제 차가 차고에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집이기에 이렇게 위세가 대단할까?
 이 집은 1960년대 대한민국의 재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이었다.
 “김천이라······.”
 김천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양계장.
 미국에서 ‘윌슨 닭’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닭을 수입해서 대한민국 최초로 공장식 양계장을 만든 인물.
 수입 시스템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낙농업의 현대화를 추구한 인물.
 JH가 초창기에 계획한 농업 중심 경제개발의 핵심 인물.
 “김건환 회장······.”
 대한민국 낙농업계의 큰 인물.
 80년대 이후로 잊힌 인물.
 바로 김건환 회장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김천에 농업연구소를 세웠고, 종자와 품종을 개량하여 제약, 중화학 분야까지 진출하며 대한민국의 낙농업을 일으킨 산 증인.
 이 으리으리한 서양식 가옥이 김건환 회장의 집이었다.
 김건환 회장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6·25 전쟁 이전 일본에서 일하던 발동기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6·25 전쟁 때 닭 한 마리로 시작해 대한민국 전 지역에 우유와 달걀을 전 국민에게 먹일 수 있게 만든 인물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닦은 인물이며, 대한민국을 일으킨 숨은 강자였다.
 이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목동에 대단위의 젖소 농장을 가지고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추후 목동이 개발될 때, 가지고 있던 목동 땅을 매각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린 투자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 내가 그런 대단한 사람의 손자라고 했다.
 나는 앞에서 멍하니 저택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낙농업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건환 회장.
 번듯한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김건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부탁하러 온 사람의 태도 같았다.
 “그러면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하하하. 고개 숙이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곧 부산의 시장님이 되실 분이신데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저야 회장님만 믿지요.”
 “허! 고개 드시지요! 시장님이 되실 남자가 이렇게 하시면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 저는 그저 계란하고 우유나 파는 늙은이일 뿐입니다.”
 저 남자가 김건환 회장이었다.
 50세의 나이로 경상도의 달걀과 우유 시장의 유통을 장악한 남자.
 김천의 유지이기도 한 남자.
 나는 그런 김건환 회장의 단 하나뿐인 손자.
 즉, 장손이었다.
 부산의 시장이 될 남자라고 불린 남자가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의 손자분입니까?”
 “아. 그렇습니다. 저 녀석이 제 손자이지요.”
 “하하하! 잘생긴 손자분을 두셨습니다. 똘똘해 보이는 눈을 보니, 앞으로 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하하하!!”
 김건환 회장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남자는 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할아버지를 많이 도와드리거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내 주머니에 지폐 한 장을 꽂아 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돈을 받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하는 말과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자는 내 모습을 보곤, 웃으면서 김건환 회장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인 뒤 일어나서 차를 타고 저택을 나갔다.
 남자가 나가자, 김건환 회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승냥이 같은 놈.”
 김건환은 제 아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양복을 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올린 남자.
 내 아버지인 김윤찬이었다.
 김건환의 업적을 모두 말아먹은 인물.
 김건환이 죽은 후, 물려받은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하고 끝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할 못난 인물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사람들은 호부(虎父) 아래에 견자(犬子)가 나왔다고 말하며 나의 아버지를 비웃었다.
 하지만 이쪽의 일을 아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못난 놈.”
 김건환이 벌레를 보는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눈치를 슬슬 보다가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 자리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어머니는 가만히 서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쯧.”
 할아버지는 박윤경에게 눈길을 슬쩍 주다가 혀를 차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여보. 들어가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팔을 잡아당기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나 그냥 갈래.”
 “여보.”
 “당신은 지겹지도 않아? 아니, 아버지한테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래?”
 “여보. 들어가요. 아버님이 기다리세요.”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못 들어가겠어. 나는 갈 테니까 이따가 부르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대체 이런 깡촌에 뭐가 있다고 자꾸 부르지? 돈도 많은 양반이······ 젠장······.”
 아버지는 짜증을 내며 차에 올라탔고, 기사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가!”
 기사는 꾹 참는 표정으로 차에 시동을 켜고 운전해서 대문을 나갔다.
 “휴······. 들어가자, 태준아.”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데리고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어머니는 박윤경.
 이 집의 첫째 며느리였다.
 아버지와 다르게 현숙하고 똑똑한 여자.
 동양맥주를 경영하는 박두용 회장의 셋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싫어했지만, 할아버지의 강압적인 요구에 굴복하여 결혼하게 됐다.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건, 모두 망나니 같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술을 마시며 깡패들과 어울렸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속만 푹푹 썩였다.
 “하······.”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저택을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식탁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식탁에는 여러 아이와 어른들이 앉아 있었다.
 이 집의 가족관계는 3남 2녀였다.
 장남 김윤찬.
 차남 김상윤.
 삼남 김문수.
 장녀 김희자.
 차녀 김연자.
 식탁에는 딱 보아도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브랜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식탁을 앞에 둔 사람들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재산을 탐내는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놈들.
 능력은 쥐뿔도 없는 놈으로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상윤.”
 “예. 아버지.”
 “사업은 어떠냐.”
 할아버지는 식탁에 앉자마자 사업 이야기부터 꺼냈다.
 김상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렸다.
 그런 김상윤의 옆에 있는 여자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식적으로 웃었다.
 “저희 그이야, 서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방금 말한 여자는 정선희, 현다이 그룹의 둘째 딸로 김상윤과 결혼한 여자였다.
 그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중에 한번 보면 알겠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정선희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한테 물어봤니?”
 할아버지의 말에 정선희가 당황했다.
 “난 분명히 상윤이에게 물어보았다. 김상윤, 대답해.”
 김상윤은 가식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유 공장은 올해 매출 12억을 달성했습니다. 아버지, 그래서 이젠 건설업으로 진출할까 하는데······.”
 김상윤, 우유 공장을 운영하다가 실패한 인물이었다.
 미래에 이 우유 공장은 남강유업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된 놈들이 없구먼.”
 할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태준이 너는 이리 오너라.”
 이 집의 장손인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 * *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서재였다.
 할아버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입을 열었다.
 “세상에 믿을 놈이 정말 하나도 없구나. 하나같이 거짓부렁에 사기를 치려고 한다니 말이야······. 허허······.”
 할아버지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면 뭐하나······. 내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데 말이야. 후······. 결국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할아버지는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는 발전하고 회사도 크게 키웠지만,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구나. 수신치업(修身治業)은 성공했으나 제가(齊家)에 실패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할아버지는 고민이 많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힘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태준아.”
 할아버지가 잔뜩 무게를 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잘 보여야 했다.
 “예. 할아버지.”
 “너는 우리 집안을 어떻게 생각하냐?”
 할아버지는 생기가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에게는 관심도 없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막대한 재산을 모았지만, 후계자가 없어서 무너진 인물.
 그것이 김건환이었다.
 나는 여기서 선택해야 했다.
 똑똑한 손자로 김건환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니, 애초에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망했어요.”
 나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돌직구가 최고다.
 나는 사랑 받는 막내도 아닌, 이 집의 장손이었다.
 장손은 무조건 똑똑하고 든든해 보이는 게 최고였다.
 가진 능력을 드러내며 어필하는 것.
 그것이 장손이 할 일이었다.
 “음?”
 할아버지는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망했다고?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가 나를 훑는 눈빛에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의 내면을 하나하나 뜯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당당해야 했다.
 다 차려져 있는 밥상을 못 먹는다면 등신이 아닌가.
 어차피 집안의 사람들은 멍청했고,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네. 망했어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할아버지의 눈에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뭘 아느냐는 눈빛이었다.
 “이놈! 할아버지한테 버릇없이 무슨 소리냐! 집안이 망했다니! 그게 할 소리더냐!”
 할아버지가 분노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얼굴이 붉어진 채 호통을 치셨지만,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뻔했다.
 너무 쉬웠다.
 내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망했어요. 아버지는 노름과 이상한 일에 빠졌고, 작은아버지랑 고모들은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무언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늘이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것인가.”
 할아버지는 웃으며 나를 상품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나를 가공할까?
 어떻게 해야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담긴 눈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솔직히 무서웠다.
 “태준아.”
 
 * * *
 
 “태준아.”
 할아버지는 내가 먹잇감이라도 된 것처럼 보며 말했다.
 “예. 할아버지.”
 똘똘해 보여야 한다.
 할아버지에게 이 집의 희망인 것처럼 보여야 했다.
 나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할아버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버릇없는 짓이었지만 이것만큼 있어 보이는 것도 없었다.
 최대한 독기가 서려 있으면서도 욕심이 있는 눈빛을 해야 했다.
 “클클클······.”
 할아버지가 비릿하게 웃었다.
 절대 손자를 향해 지을 웃음이 아니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대체 저 웃음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할아버지가 흘리듯이 말했다.
 “우리 집에 양의 가죽을 쓴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구나. 내가 왜 이걸 모르고 있었을까?”
 성공인가?
 호랑이라니? 무슨 의미지.
 아! 내가 새끼 호랑이라는 의미구나!
 내가 양의 가죽을 쓴 새끼 호랑이였다!
 성공이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할아버지는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탁.
 할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태준아.”
 “예. 할아버지.”
 “너는 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
 여기서는 너무 튀면 위험했다. 하지만 깔끔하고 간결하게 확신하는 말만큼 완벽한 것은 없었다.
 “부잣집 할아버지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상품을 바라보는 웃음.
 평범한 할아버지라면 절대 손자에게 보일 리 없는 웃음.
 철저한 자본주의 마인드를 가진 기업의 총수가 짓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냥 부자가 아니다. 어마어마한 부자지.”
 “진짜요?”
 나는 여기서 일부러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 웃음은 뭔가 묘하다······. 묘해······.
 할아버지가 나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태준아, 이리 와 보거라.”
 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나를 덥석 잡아서 들어 올렸다.
 팔이 아팠다.
 무슨 노인의 힘이 이렇게 세단 말인가. 분명히 나이가······.
 팔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으며 할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흐흐흐······.”
 할아버지가 음흉하게 웃었다.
 기뻐하는 기색인가? 할아버지는 나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군.”
 입으로는 확신하면서 눈빛은 불신하는 눈빛 그대로였다.
 원래 총수는 다 이런 것일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태준아,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해 줄까?”
 갑자기 무슨 옛날이야기인가? 뭐, 일단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이 집에서 할아버지는 왕이니 말이다.
 나 같은 애송이는 왕에게 대들지 않고 일단 꿇고 비벼 보는 게 옳았다.
 “네! 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한 마리와 여우 두 마리가 산속에서 살고 있었다. 여우 한 마리는 오른쪽 산에 다른 여우 한 마리는 왼쪽 산에 살고 있었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벌써 감이 왔다.
 이런 거야 뭐, 전생한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왼쪽 산의 여우는 굉장히 부자였고,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단다.”
 “고기처럼 맛있는 거예요?”
 이럴 때는 아이처럼 대답하는 게 좋았다.
 고기는 뭐, 맛있는 음식이니 말이다.
 솔직히 그것 말고는 생각이 안 났다.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지. 고기 같은 음식이 많았지. 왼쪽 땅에는 맛있는 것이 많았고, 그냥 주워서 먹기만 하면 되었단다. 그래서 왼쪽의 여우는 매일매일 고기반찬을 먹고 있었지. 반면에 오른쪽 여우는 배가 고팠어. 오른쪽에 있는 산은 먹을 게 거의 없었거든.”
 답이 나왔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여우와 호랑이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역감정.’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근데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내가 알기로 이 시기에는 아직 지역감정이 없었다.
 나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미친······. 벌써 지역감정까지 예측하는 것인가?
 경상도만 개발하려는 정부 계획을 눈치채고 일을 준비한단 말인가? 그것까지 이용하려고?
 나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20년이 흐르면 1988년이다. 그때는······.
 ‘88올림픽······. 이것까지 예상할 것 같지는 않은데.’
 88올림픽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발전할 것이라 예상하는 것 같았다.
 이 얼마나 굉장한가!
 괜히 대한민국 최고의 자본가가 아니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든 말든, 할아버지는 아련한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른쪽 여우는 왼쪽의 여우보다 훨씬 부자가 되었고, 갈비보다 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살게 되었단다.”
 대체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무언가를 생각하던 할아버지가 곧 나를 바라보았다.
 “왜 오른쪽 여우가 어떻게 잘살게 된 건지 아느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이야기는 단순히 양쪽 산의 여우와 호랑이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어린아이답게 보이면서도, 날카롭고 뛰어나게 보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말해야 할 시간이었다.
 너무 질질 끌면 무능해 보일 테니까.
 “할아버지. 호랑이는 왜 안 나와요?”
 나의 말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꿈틀했다.
 저 표정은 분명, 정답이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보통의 기업 총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다면 질문을 하지.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나는 점수를 딴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손가락을 천천히 까닥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까닥거리는 손가락을 따라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쪼르르 들러붙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태준아.”
 “네 할아버지.”
 “호랑이는 말이지······.”
 할아버지의 대답이 궁금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총수는 어떤 대답을 할까? 이미 정해져 있지만 궁금했다.
 “호랑이는 오른쪽 산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자기 고향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었단다. 자기는 강하다고, 자기만 믿으라고 말이다. 호랑이는 오른쪽 여우에게 고기로 갈비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시간이 흐른 후에 갈비를 팔아 더 다양한 음식들을 먹게 되었지.”
 호랑이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JH.’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왜 왼쪽 여우는 오른쪽 여우를 가만히 둬요?”
 “음?”
 내 말에 할아버지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왼쪽 여우가 가만히 있지는 않잖아요. 오른쪽 여우가 자기보다 더 잘사는데, 배가 아파서라도 갈비 만드는 법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왼쪽 여우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른쪽 여우가 어떻게 해야겠느냐?”
 “우움······.”
 나는 턱을 잡고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충 대답은 생각해 놓았는데 어떻게 말할지가 문제였다.
 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왼쪽 산의 여우는 고기를 먹는데, 오른쪽 산의 여우는 갈비를 먹잖아요. 그리고 오른쪽 여우가 갈비를 만들 줄 알면, 왼쪽 산의 여우한테 갈비를 먼저 맛보여 주고 갈비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는 대가로 고기를 받으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잘살 텐데?”
 나의 말에 할아버지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번뜩이며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가 말한 것은 프랜차이즈의 개념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나누는 것엔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업은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그 사이에서 최대한의 돈을 벌어들이면 된다.
 그래도 전생에선 나름 대기업에서도 일했었으니, 대충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도 그것을 떠올리신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세상에 산이 두 개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오른쪽 산 여우는 왼쪽 산 여우한테 갈비 만드는 법을 대가로 고기를 받고 더 많은 갈비를 만들어서 다른 곳에 많이 팔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 곳에도 갈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고기를 받는 거죠. 그러면 오른쪽 산 여우는 점점 부자가 될 거예요!”
 열린 생각.
 이것은 경영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내 말에 점점 빠져드는 듯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꼬리를 덜덜 떨었다.
 마치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내가 왜 이제야 이 녀석을 알았을까?”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준아.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느냐?”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다. 내 대답은 뻔했다.
 아니, 애초부터 나는 이 사건의 끝을 아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른쪽 여우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는 방법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오른쪽 여우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김건환.’
 오른쪽 여우는 돈을 많이 벌 것이다.
 “하하하! 우리 태준이는 똑똑하구나! 그 방법이 바로 오른쪽 여우와 왼쪽 여우, 둘 모두가 잘사는 방법이지! 하하하!!”
 정답인 것 같았다.
 정확히는 오른쪽 여우가 왼쪽 여우를 부려 먹는 방법이다.
 왼쪽 여우가 오른쪽 여우의 아랫사람이 되니 말이다.
 왼쪽 여우는 이제 평생 오른쪽 여우에게 갈비를 바쳐야 한다.
 오른쪽 여우는 더 큰 부자가 될 것이고 말이다.
 나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답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다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악동 같은 웃음에 괜스레 불안했다.
 “그런데 태준아. 한 가지 실수를 했구나.”
 “네······?”
 “틀린 게 있어.”
 어디에서 틀렸단 말인가? 완벽하지 않은가?
 프랜차이즈의 기본 개념으로 레시피를 주고 대가를 받는다.
 이것만큼 완벽한 답안이 어디에 있겠는가?
 충분한 대답이 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것일까?
 어디에서 틀렸을까?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울상을 지으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모르겠다. 어디가 문제인지 말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두꺼운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지······.”
 꿀꺽.
 긴장됐다.
 대체 어디에서 틀린 것일까?
 전라도와 경상도를 비교하는 문제를 맞혔고, 프랜차이즈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고 경상도에 공업 기반이 집중되는 것도 맞혔다.
 할아버지는 어떤 부분이 틀렸다고 말한 걸까?
 “그건······.”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
 “빨리! 빨리 말해 주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악동 같은 웃음을 지었다.
 어, 어······. 불길하다. 빨리 입을 열어라! 빨리!
 할아버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비밀이다.”
 “와. 치사하다.”
 나는 맥이 탁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궁금하더냐?”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궁금해요. 알려 주세요!”
 이미 점수를 땄으니 이 정도의 애교는 부려도 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짜로는 할아버지도 곤란하지.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하고 내기 하나 하지 않으련?”
 내기. 할아버지가 내기를 제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결단력 있게, 망설이지 않고 수를 던질 줄 아는 것.
 그게 부자가 될 남자가 해야 할 행동이었다.
 난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즉시 대답했다.
 “우리 태준이가 영어를 쓰고 말할 줄 알게 된다면 할애비가 답을 알려 주마.”
 너무 쉬웠다.
 전생의 나는 영어를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내기는 이미 낙승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당장 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7살이었으니까.
 하지만 재벌가 손자이니 조기교육을 받고 있다는 걸 이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네. 대신에 꼭 알려 주셔야 해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불길하게 웃었다.
 대체 저 웃음은 뭔가?
 이 대화에 또 무슨 함정이 있단 말인가?
 
 
 # 김 회장의 결심
 
 
 나는 할아버지와 서재에서 내려왔다.
 나는 할아버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자부심이 넘치는 모습.
 뭐 실제로 대한민국 최고였다.
 터벅터벅.
 할아버지가 내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것이 왕의 힘이었다.
 왕의 눈에 벗어난 공주와 왕자는 이야기 속에서조차 잊힌다.
 잊힌 왕자와 공주의 결말은 비참했다.
 드르륵.
 왕.
 할아버지는 이 집의 왕이었다.
 호랑이 같은 기세를 들어내며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는 밥을 쇠고깃국에 말았다.
 쇠고깃국은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국이다.
 쌀밥에 맑은 쇠고깃국.
 할아버지의 밥은 언제나 같았다.
 고모와 작은아버지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옆에 있는 의자에 올라갔다.
 “음······.”
 식탁이 너무 높았다.
 할아버지를 슬쩍 쳐다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젠장! 아까는 우리 태준이라고 하더니!
 뭐······. 어쩔 수 없는 건가.
 지금 이 집에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인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둘째 작은아버지인 김상윤이었다.
 가끔 삽질하지만, 나름대로 경영에 관해선 실적을 내는 인물이었다.
 탁.
 할아버지가 입맛이 맞지 않으신 듯 수저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문수. 이번에 남동 공단에 건설 중인 비닐 공장은 어떻게 됐느냐?”
 할아버지의 말에 셋째 작은아버지 김문수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이목구비를 가진 김문수는 27세의 나이에 남동공단에 비닐 공장을 짓고 있는 책임자였다.
 인천의 고잔동에 공장을 올리고 있지만, 이 공장은 완공된 지 3일 만에 조선화약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1970년에 완공될 테지만, 조선화약에 의해서 철저히 묻혀 버렸었다.
 이전 기억에서의 김건환 회장, 할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공장을 조선화약에 매각했다.
 역사에는 조선 그룹에서 만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모두 할아버지가 진행했던 일이다.
 그 사건을 겪기 전이지만, 김문수는 이때부터 이미 완전히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할아버지의 반응은 뻔하지.’
 “건설은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할아버지의 말에 김문수가 입을 다물었다.
 명백한 무시의 말투, 네가 뭘 잘했냐는 물음이었다.
 김문수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보고할 거면 숫자로 명확하게 말해야지. 어쭙잖은 멍청이들처럼 얼버무리려고 하지 말아라. 적자가 얼마나 났느냐?”
 할아버지는 이미 이 공사가 실패로 끝나리라는 것을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듯했다.
 감탄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김문수 작은아버지에게 명복을 빌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미 5억이 적자입니다······.”
 5억 원. 예상보다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시기의 5억 원을 내가 살던 2019년도의 금액으로 따지면, 500억 원 정도의 가치였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될 수도 있겠다.
 할아버지는 잠시 가만히 김문수를 노려보았다.
 식탁에는 정적이 흘렀고 할아버지는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미친놈.”
 ‘어······? 뭔가 바뀌었다?’
 내가 알기론, 김건환은 이 일을 그대로 밀어붙였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다?
 김건환은 이 고잔동 비닐 공장 사건을 계기로 1995년에 기업을 모두 매각하고 경제계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그런데 여기서 할아버지가 자식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 자체가 의외의 상황이었다.
 “접어라.”
 할아버지는 무언가 결심하신 눈빛으로 김문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공장 건설 중단해, 5억이나 적자난 공사를 계속 진행할 수는 없다.”
 할아버지의 말에 김문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버지! 고잔동 비닐 공장은······.”
 쨍그랑!
 “일을 그따위로 해 놓고 그게 할 말이야?”
 “······.”
 할아버지가 유리잔을 던지며 노성을 터뜨렸다.
 식탁에는 침묵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김문수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따가 서류 가지고 올라와. 김종혁 그놈에게 공장을 넘길 것이다. 그놈이면 그나마 낫겠지.”
 김문수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하······. 조선화약 말입니까?”
 음······. 공장은 역시 조선화약으로 넘어가는 것인가.
 공장이 조선화약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할아버지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겉보기에는 고잔동 비닐 공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할아버지는 달랐다.
 “넘기고 돈이라도 회수하는 게 이득이다. 전부 엔화로 받아.”
 “하지만 아버지! 고잔동 비닐 공장은 우리 집안의 중요한 사업입니다! 문상철 실장까지 저에게 붙여 주시면서 진행한 일이지 않습니까?”
 “입 다물어. 문상철이 그놈은 해고다. 자기 주인조차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우리 집안에 필요 없다.”
 할아버지가 분노한 음성으로 김문수를 바라보다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반응으로 나는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는지 눈치를 챘다.
 ‘나.’
 똑똑한 장손의 등장.
 이제 겨우 7살이지만 앞으로 13년 뒤면 20세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업을 맡겨볼 만했다.
 ‘그렇게 된다면······. 경상도가 내 손아귀에 떨어지지.’
 경제 관련 인사 중에서 김건환 회장을 아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했다.
 
 ‘만약 김건환에게 후계자가 존재했다면, 대한민국의 경제는 이병학이 아닌 김건환이 장악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김건환 회장은 굉장한 인물이었다.
 6·25 전쟁 때 현다이건설의 정주철이 무릎을 꿇고 빌어 철근과 시멘트를 받아 가져갔고, 오성물산의 이병학이 돈이 없어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빌었다.
 두 재벌을 무릎 꿇린 대한민국 산업계의 숨겨진 거인이 바로 김건환이었다.
 “네 놈이 똑바로 못해서 일어난 사태다. 정신 차리고 일이나 제대로 처리해라.”
 할아버지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김문수를 바라보았다.
 김문수는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 할아버지는 혀를 가볍게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김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자 너는 일본 도쿄로 가거라.”
 “네? 일본이요?”
 김희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것, 너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냐?”
 김희자는 이 집에서 그나마 똑똑한 인물이었다.
 오냐오냐 자랐지만 나름대로 욕심과 야망이 꽤 있는 여자로, 이전 생에선 김건환의 사후에도 미국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어 LA에서 VC(Voluntary Chain, 기업 조직 중 하나)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녀는 훗날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영광에 관한 미련이 남았기에.
 김희자는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백화점.”
 “아······ 알겠습니다.”
 눈치챈 듯한 김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면서 김희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김문수와 김상윤은 경악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런 둘을 보며 소리쳤다.
 “네놈들이 무능하니 여자에게도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야. 이 멍청한 것들.”
 그 말에 김상윤과 김문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둘은 김희자와 김연자를 바라보았다.
 전에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눈이었다면, 이제는 정적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연자는······.”
 할아버지가 김연자를 바라보았다.
 김연자는 이제 대학생이었다.
 할아버지가 연희대학교에 거대한 후원을 하여 대학에 집어넣었다.
 “연자는 대학 마치고 나서 보험 회사 하나 줄 테니까 해 봐.”
 “보······ 보험 회사요?”
 “그래, 보험 회사. 사람 하나 붙여 줄 테니까, 너는 옆에서 잘 보고 배워. 그리고 나중에는 네가 직접 운영해.”
 난 그 말에서 무언가를 예감했다.
 뭔가······ 굉장히 많이 바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밖으로 나갔다.
 식탁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김건환 회장은 원래 사업 다각화를 잘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김건환 회장의 눈빛에 스친 불꽃을 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야망의 불꽃을.
 내가 등장하며 공허하게 얼어붙어 있던 할아버지의 눈에 불씨를 피운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해야겠다.’
 
 * * *
 
 “아버지가 갑자기 왜 저러시지?”
 김상윤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자, 그 말에 김문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갑자기 희자 누님에게 일본으로 가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연자보고 보험 회사를 하라는 것도 그렇고······. 좀 많이 이상하십니다.”
 “이 멍청한 놈이, 너는 인천 공장부터 수습해라. 대체 뭐하다가 일이 그 지경이 된 거냐.”
 “그······ 그게 하다 보니까 노조라는 걸 만들어서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문수의 말에 상윤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같은 시국에 노조 하나 처리를 못 해? 무능한 놈,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경찰에 신고해. 어차피 일할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싹 잡아다가 남산에 집어넣어.”
 상윤의 말에 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그게······.”
 문수의 말에 상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뭐가 문제야?”
 “이놈들의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음······.”
 문수의 말에 상윤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있는지 파악이 전혀 안 돼?”
 “제 생각에는 조선화약 놈들이······.”
 “그래?”
 상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윤은 문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상윤아. 그런 거는 이 형한테 말해도 된다. 형이 도와주마. 이른 시일 내에 처리될 거다.”
 “저······ 정말이요?!”
 “그래.”
 “일본······ 일본이라······.”
 김희자는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윤은 그런 김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뭘 그리 생각해. 일본으로 가시라잖아? 뭐, 우리나라에 백화점 세우려는 거 아니겠어?”
 “어디에 세우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물건을 취급할지가 중요하고.”
 김희자의 말에 상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희자야. 오빠가 한마디만 할까? 지금 같은 시국에 백화점? 그거 안 돼, 대통령께서 내리신 특별 명령으로 사치품을 규제하는 상황에서 무슨 백화점이야? 앞으로 각하가 통치하는 상황이 10년은 넘을 것 같은데 백화점이 되겠냐? 맥아더 장군이 말했잖아, 우리나라가 일어나려면 앞으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상윤의 말에 김희자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딱 각하의 밑에서 줄 서 가지고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면 돼.”
 한심하다, 한심해 죽겠다. 이러니까 망하지 않고 버티겠는가?
 그 모습을 보던 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JH의 독재 기간은 길다. 하지만 그래봤자 1978년까지였다.
 그때가 되면······.
 ‘내가 17살이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그저 공부만 하면서 지내야 한단 말인가?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곧 어머니인 박윤경과 함께 저택에서 나왔다.
 저 자리는 어머니와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집안에서 버림받은 첫째의 가족이 감히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차에 탑승하며 생각했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돌파구가.’
 정리해 보자. 지금은 월남전이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은 월남전에서 많은 것을 얻어 낼 것이다.
 현다이건설은 도로 건설과 항만 건설 기술을 받고 막대한 양의 달러를 얻어 낼 것이고.
 그뿐인가? 대성 그룹과 나진 그룹이 급속도로 부상하게 되는 기반을 닦게 되는 것도 월남전 시기였다.
 ‘그러면 우리는?’
 이대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바뀌신 것 같았다.
 “대체 뭐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장 잘하는 것이 필요했다.
 ‘치킨.’
 나는 치킨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1977년에 특허청이 설립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가 기회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군.”
 
 
 # 회장과 대통령
 
 
 나는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내가 가장 많은 돈을 벌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특허. 그것도 미국에 등록할 수 있는 특허가 필요하다.’
 나는 생각했다.
 외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양계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양계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후우······.”
 나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커다란 대문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가정부 아줌마가 있는 집.
 자동차는 대문 앞에서 멈추었고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왔나.”
 빌어먹을 아버지.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여자와 술을 밝히는 망나니 중의 망나니이며 훗날 할아버지가 조금 떼어 주신 재산을 전부 날린 머저리였다.
 “쯧.”
 아버지가 나를 힐끗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인 박윤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버지의 앞에 있는 술병을 치웠다.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제발······ 그만 좀 해요.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예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버지가 정신 차리실 때까지.”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비화가 있는 것인가?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은 무슨 놈의 비밀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하기야 그럴 만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찰이 많은 집안이었지만.
 한순간에 몰락하고, 미래의 대한민국에선 잊힌 재벌가이니 말이다.
 “태준이는 들어가 있어라.”
 “끄응······.”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진짜 넓기는 더럽게 넓네······.”
 커다란 침대에 파란색 벽지로 꾸며진 방.
 아기자기한 규모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이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
 “젠장, 1980년대나 이런 때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아? 반도체, 철강, 조선 등등.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1960년대란 말인가?
 물론 지금 이 시기가 강남 개발 붐이 일어나는 시기이긴 했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시대인지라 돈으로 돈을 버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다.
 그런데 내 나이는 이제 겨우 7살이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한 꼬마 중의 꼬마였다.
 “아버님이 사업 다각화를 결심하신 것 같아요.”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놈의 친일파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계획이라는데?”
 다 들렸다.
 나는 호기심에 엄마 아빠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여보!”
 “나는 일본 놈들하고 상종하기 싫다니까! 그놈들한테 왜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해? 우리 이제 돈 많잖아? 그런데 대체 일본 놈들한테 고개를 숙이는 이유가 뭐야? 대체 아버지는 나에게 왜 그러는 거야? 그걸 알기 전까지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당신 대한민국에서 일본 기업을 빼면 사업할 수 있어요?! 그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왜 쪽바리 새끼들하고 상종을 해야 하냐고!”
 “그럼 미국으로 가시던가요!”
 “뭐······?”
 아······ 알겠다. 아버지는 그냥 일본 기업하고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가 싫기······ 는 개뿔!
 ‘저거는 그냥 바보 아니야?’
 신념이 강한 건지 바보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냥 저건 바보다.
 지금은 라디오 하나를 만드는 일에도 부품을 모두 일본에서 수입해 만들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재벌가의 장남이라는 사람이 일본과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정신에 문제가 있나······.”
 아버지이지만 저런 태도는 미쳤다.
 좋게 말하면 너무 꽉 막혀 있다고 해야 하나?
 “미국은 또 왜.”
 “미국으로 가시면 그렇게 싫어하시는 일본인들과 만날 일이 없잖아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그야 쪽바리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지!”
 “당신 미쳤어요!”
 말이 안 통한다. 저러니까 할아버지가 버릴 만하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헛소리나 내뱉는 개망나니가 우리 아버지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저렇게 망가질 수 있나?”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
 아버지가 저렇게 미친 일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저렇게까지 싫어할 이유가 정말 존재하는가?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이대로 가다가는 집안이 폭삭 망해서 대한민국 최고 재벌이 될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왜 일본인들을 그렇게 싫어해요! 이유라도 들어 보자고요! 당신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단 말이에요······. 흑흑.”
 급기야 엄마가 우는 소리까지 들렸다.
 “미안해······.”
 아버지가 사과하는 건 의외였다.
 그래도 꼴에 어머니는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놈의 집구석은······.”
 무슨 놈의 비밀이 이리 많단 말인가? 나는 귀를 기울였다.
 “어머님이 그렇게 되신 것은 유감이지만, 가족도 좀 생각해 주세요······.”
 박윤경이 훌쩍거리며 울음을 터뜨리자 김윤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공부 정도인가?”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펴 내용을 살펴보니 책 내용이 너무······.
 “쉽네······.”
 그래도 전생의 나는 꼴에 공부는 조금 잘했다.
 그래서 그런지 문제가 너무 쉬웠다.
 책 내용에 쓰인 내용이 곱셈이나 나누기 같은 수준이니.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인과관계를 만들어야겠네.”
 눈길이 책장으로 향했다.
 바로 눈에 뜨인 것은 두꺼운 영어 사전.
 영어 사전을 들어 올려 공부한 흔적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천재라고 얼버무릴 수 있긴 하지.”
 그렇게 된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는 할 만할 것이다.
 나는 영어 사전을 펼치고 흔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종이를 잘라 책갈피를 만들고 거기에 A1, A2 이런 식으로 구획을 나누는 작업이었다.
 그냥 단순 작업이었다.
 “할아버지와의 내기에서 압승한다면 뭐, 할아버지가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지.”
 내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 * *
 
 김건환 회장은 서울로 향했다.
 잘 빠진 검은색 포드자동차를 타고 청와대의 정문 앞에서 멈추어 서자 소총을 들고 있는 경비병이 차의 번호를 보고 경례를 했다.
 “충성!”
 덜컹.
 청와대의 대문이 열리고 차가 청와대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베트남······ 베트남이라······.”
 김건환 회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기회가 될 것이다. 분명히.
 6·25 전쟁 때 빌어먹을 일본 놈들이 막대한 돈을 쓸어 담았다.
 그때 전쟁은 돈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베트남전 때문에 기업들은 막대한 양의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회장님.”
 두꺼운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남자가 김건환을 불렀다.
 김건환의 비서실장 장학수였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죽을 뻔했으나, 김건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전직 OSS의 한국계 미국인 요원이다. 지금은 김건환의 비서실장으로 전국에 퍼져 있는 회사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음······. 내릴 시각인가.”
 중절모를 쓴 김건환 회장이 차에서 내려 청와대를 바라보며 걸었다.
 청와대의 안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 자네 왔는가?”
 김건환은 중절모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한민국 군사독재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 JH 대통령이다.
 “으음······. 자네가 왔다는 것은 자네의 자식 놈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 같은데······ 맞는가?”
 “각하께는 언제나 죄송할 따름입니다.”
 JH는 피식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이리 와서 앉게. 자네가 온다기에 내 직접 차를 끓였으니 말이야.”
 김건환은 터벅터벅 걸어서 JH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기업인 같으면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졌겠지만, 김건환 회장은 달랐다.
 김건환 회장은 JH의 은인이자 후원자였던 남자이니 말이다.
 “으음······. 자네가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는 사실은 내 잊지 않고 있네.”
 “저는 그저 유망한 젊은이들에게 투자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위해 인재를 키워야 할 시기였습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저도 더 큰 부자가 되니 말입니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JH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김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각하. 이제 제대로 한번 나서 보려고 합니다.”
 “으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뭐 자네에게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궁금하군. 우리 금산 김건환 선생이 무엇을 하려는지 말이야.”
 “그룹화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룹이라?”
 그룹이라는 말에 JH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김건환 회장을 바라보았다.
 아메바 경영으로 분산하여 운영되고 있는 회사가 김건환의 회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룹화를 한다면? JH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금만 정직하게 내게. 그렇게 한다면 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겠네. 그래서 본론이 무엇인가? 아, 뭐,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자네도 월남에서 전쟁 특수라는 것을 누리고 싶어서 찾아왔나 보군?”
 JH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비서실장 좀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그러게.”
 김건환 회장이 손짓하자 장학수가 다가왔다.
 터벅터벅.
 장학수가 고개를 숙이며 서류 가방을 열었다.
 서류 가방의 안에는 약간의 현찰과 서류가 있었다.
 김건환이 서류를 꺼내 들자 JH는 서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게 무엇인가?”
 “철은 산업의 쌀이라고 했습니다.”
 JH의 눈이 번뜩였다. 김건환은 묵묵히 말을 이어갔다.
 “저희 아버지는 일본에서 발동기를 만드는 기술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일본의 조선소에서 일하셨고, 제철소에서도 일하셨던 분이지요. 또한, 군수공장에서 일하셨던 분이시기도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해방 직후 일본에서 많은 양의 서류를 빼돌렸습니다.”
 JH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건환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이것은 그중 하나로, 야하타 제철소의 핵심 기술에 관한 서류입니다.”
 “이게 그 서류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야하타 제철소의 각종 핵심 기술이 이 서류에 담겨 있으며 일본 놈들이 전함을 건조했던 조선 기술이 이 안에 담겨 있고 일본 놈들이 자동차 엔진을 만들던 기술이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JH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건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김 회장. 고맙소. 내 정말 고마울 따름이요.”
 김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JH에게 고개를 숙였다.
 “충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JH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을 가져온 이유가 나는 반드시 있을 것으로 생각하오. 내게 무상으로 이것을 주는 것은 아닐 터이고, 대체 이유가 무엇이오?”
 “각하. 우리 공화국은 자본이 부족합니다. 월남전에서 최대한의 자본을 벌어올 필요성이 있습니다.”
 JH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월남전을 말하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각하. 전쟁이 난다면 아무래도 가장 많이 할 것은 공사입니다.”
 “공사라······.”
 “우리는 댐과 부두, 도로, 항만부터 우리 공화국에 필요한 모든 것을 미국의 원조로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조국의 인재들은 미국의 기술을 배워 와야 하고, 우리 공화국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산주의자 놈들보다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JH는 김건환의 눈에 불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김 회장의 목적이 대체 무엇이오?”
 김건환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엇이든, 공화국과 각하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은 틀림없다고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사치가 하는 일은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이익입니다. 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저는 하지 않습니다.”
 차를 마저 마신 JH가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
 “예, 각하.”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김 회장이 일을 진행하는 일에 하자가 없도록 필요한 수단으로 모두 동원하여 전폭적으로 도와주게. 김 회장이 마음을 먹고 성의를 보이려 하니, 나도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지시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각하.”
 이후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JH는 김건환을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는 표정이었다.
 김건환은 장학수를 바라보며 고갯짓을 했다.
 “지도 가져와.”
 장학수가 지도를 펼쳐 들자 김건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손가락으로 한군데를 가리켰다.
 김건환이 가리킨 지형을 JH는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항이라······.”
 김건환의 회장이 전면으로 나서며 진행하기로 한 첫 일이었다.
 목표는 포항이었다.
 JH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경상북도 포항.
 그곳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어촌이었다.
 주민들은 어선을 타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끼니를 해결했다.
 그랬던 포항이 갑작스럽게 붐비고 있었다.
 웅성웅성.
 포항의 시장이 나와선, 고개를 조아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가······ 각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은 어인 일이십니까요?”
 JH는 선글라스를 살짝 치켜 몰리며 시장을 쳐다보았다.
 “임자.”
 “예, 각하!”
 “임자는 임자 일을 보게나. 따로 명령이 내려갈 것이야.”
 JH는 그렇게 말하고 김건환을 바라보았다.
 “이봐! 각하 말이 안 들리나? 가서 일 보라니까!”
 불같은 성질의 이후락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후락이 성질을 내며 소리치자 시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냅다 도망쳤다.
 김건환은 그런 해프닝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포항 영일만은 보시다시피 해안이 둥그렇게 되어 있어 배가 드나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뿐이라면 삼척에 짓는 것이 나을 터인데?”
 김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북 지역의 사람들에게 각하의 업적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제야 JH가 웃음을 지으며 김건환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하하!! 역시 자네뿐이구먼. 그래, 기술자들은 확보가 되었고?”
 “장학수 비서실장이 그룹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미국에서 피츠버그제철의 기술자들을 거금을 주고 데려왔습니다. 아마도 내년에 부산항에 도착할 예정이고, 그들이 직접 기술자들을 가르치며 일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예상 필요 자금은 얼마나 되는가?”
 ‘자금’이라는 말에 김건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JH는 김건환의 표정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문제가 있나 보군.”
 “예. 각하께서 도움을 주셔야 할 일입니다. 설비는 부산항에 확보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운송 수단이······.”
 운송 수단이라는 말에 JH가 입을 열었다.
 “경제협력국장.”
 “예, 각하.”
 경제협력국장 황병철이 대통령의 뒤에서 입을 열었다.
 “조치해.”
 JH의 한마디에 황병철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각하. 해운 회사들의 반발이······.”
 “이봐, 황병철이, 내 말이 장난으로 들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 포항에 반드시 종합 제철소를 지어야 해. 안되면 지금 당장 영일만에 몸을 던지게.”
 JH가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황병철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JH는 김건환을 쳐다보며 해결되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김건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각하. 시멘트와 페인트도······.”
 “경제협력국장.”
 “예······. 각하.”
 “조치하게.”
 황병철은 김건환이 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슬쩍 바라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김건환은 속으로 웃으며 이참에 본전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JH의 꿈이 바로 이 종합 제철소의 설립이라는 사실을 김건환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더 문제는 없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부지 선정에 관한 문제입니다.”
 “으음······. 부지 선정이라······. 알겠네. 그것도 경제협력국장이······ 조치할 일이 아닌 것 같군. 개별 공시지가로 평당 1원으로 하지. 대신에 조건이 있네.”
 “조건······ 말씀이십니까?”
 JH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사업이니만큼, 이건 국가의 경제 기반 시설이네, 자네가 기업가이니 전부를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러니 지분의 반을 국가에 내놓게.”
 JH의 말에 김건환이 울상을 지었다.
 아니 반을 주면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하지만 JH는 대한민국의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여기서는 대가로 다른 것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하지만 이건 저에게 너무 손해가 많이 나는 장사입니다”
 JH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김건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원하는가?”
 “추후, 제1의 중화학 공장을 제가 건설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좋네. 경제협력국장.”
 “네······.”
 “조치해.”
 이즈음 되면 경제협력국장은 대통령의 동네북이었다.
 황병철은 울상을 지으며 JH를 힐끔 쳐다보다가 눈을 돌려 김건환을 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 *
 
 “뭐? 김 회장이 직접 나섰다고?”
 이병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예, 예······.”
 “아니! 너는 대체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한 거야!”
 이병학이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비서는 찔끔거리면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병학은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나가!!”
 비서가 후다닥 나가자, 이병학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상을 구겼다.
 “김 회장님······. 조용히 계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신 겁니까. 하······.”
 이병학은 김건환이 두려웠다.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김건환 회장은 마음만 먹는다면 재계의 1위 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김 회장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막말로 룻데제과의 신격후 사장도 김건환의 도움으로 껌 공장을 세웠고, 금성전자의 구회수 회장도 김건환에게 기술을 받아 회사를 세웠다.
 “이 대한민국 재계에서 그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JH와 동향의 사람이라 그가 재계에 나서면 JH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 뻔했다.
 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JH와 독대를 할 수 있는 기업인이 김건환 회장이었다.
 벌컥!
 “사장님! 사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이병학은 급히 달려온 부사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파월 기업 명단이 공개되었습니다!”
 “정말이야!?”
 “네! 근데······ 이상한 기업이 있습니다.”
 서류를 보던 부사장의 말에 이병학이 부사장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기업의 명단을 천천히 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극동 그룹.
 극동.
 김건환이 처음에 열었던 극동상회. 부산에서 가장 큰 상회였던 극동상회.
 이병학의 머릿속에는 그 이름이 너무나도 잘 떠올랐다.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는 그릇과 힘을 가진 김건환 회장이었다.
 그래도······.
 “저도 욕심은 있습니다.”
 이병학이 중얼거렸다.
 
 * * *
 
 “김 회장님이 말이야?”
 “예, 그렇다니까요. 이번에 그룹화에 성공하셨습니다.”
 정주철은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회장님 그분이라면 진작 그러셔야 했어. 우리나라 재벌 중에서 그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재벌이 있나?”
 “솔직히 없지 말입니다.”
 “그래. 아, 안 그래도 이번에 김 회장님이 일본에서 건설 중장비 50대를 가져오셔서 임대하신다는 데, 연락은 드려 보았나?”
 “아 네. 일본 야하타 제작소에서 포클레인 50대를 발주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 현다이건설을 염두에 두신 것 같던데······.”
 “으음······. 좀 싸게 어떻게 안 되겠나?”
 정주철의 말에 비서는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 * *
 
 그렇게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나는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글부글.
 무언가 생각이 날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것, 할아버지에게 이익이 될 것이 필요했다.
 그게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데······. 이상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후······.”
 아버지는 집 한편에 있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샤토 디켐 1811을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한 병에 1억 원이 넘어가는 와인을 물 마시듯 들이켜는 모습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저거 하나면 집이 한 채인데······.’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던 나는 책상에 올라와 있는 우유 잔을 잡았다.
 우유 잔의 위쪽에는 검은색 가루가 살짝 묻어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신 아주머니를 바라보았고, 아주머니는 나에게 살짝 윙크하며 눈치를 주셨다.
 이런 센스쟁이 아주머니!
 나는 따뜻한 우유에 느껴지는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부모님이 아시면 난리가 나겠지만, 갑자기 철이 든 부잣집 아들이 아주머니에겐 대견스럽게 느껴져 기특했을 것이다.
 최소한 이 집에서 아주머니는 나의 우군이었다.
 “퍄아!”
 얼마 만에 맛보는 커피 향인가?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렇듯이 현관으로 나가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뉴스의 앞면에 적힌 헤드라인을 슬쩍 쳐다보며 바람을 음미했다.
 “응?”
 나는 헤드라인에 의문이 들었다.
 
 「김건환 회장. 그는 누구인가?」
 「경축! 포항에 대한민국 최초의 제철소 건립!」
 
 원래의 역사에서 포항제철소는 1969년에야 본격적으로 착공되었다.
 그런데 어디서 자금과 기술이 뚝 떨어졌단 말인가?
 나는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쳐 갔다.
 “할아버지인가?”
 부르릉.
 끼이익.
 대문 앞에 차들이 나란히 들어왔다.
 대한민국에서 보기 힘든 외제 차.
 나는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했다.
 외제 차에서 내리는 50대의 신사는 김건환 회장.
 우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비서실장 장학수와 함께 대문으로 터벅터벅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장손이 있었구나.”
 나는 배꼽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더니 나를 지나쳐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큰 사달이 날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신다면······.
 와장창!
 젠장······. 벌써 사달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현관의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못난 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네 애비는 멍청한 네놈 형제자매들 상대하느라 머리 아파 죽겠는데, 장남이라는 놈은 집구석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어?”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다 아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아버지께서 자초하신 일을 왜 저에게 화풀이하신단 말입니까?”
 “그래서 네놈이 원하는 대로 보내 주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불신에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식탁 위에 올렸다.
 “이건······.”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놈이 그렇게나 부르짖던 대일청구권 문제에 자금을 쏟아부으려는 걸 막았다.”
 대일 청구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귀를 기울여 상황을 몰래 지켜보았다.
 “각하께서 그렇게 원하던 종합 제철소의 건립을 내가 해 주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 이제 대일청구권이니 뭐니 하는 소리도 쓸모가 없겠지. 됐느냐?”
 김건환의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변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애비를 바라보는 눈 꼬락서니가 그게 무엇이냐.”
 “용건만 말해 주십시오. 회장님.”
 할아버지는 회장님이라는 호칭이 영 마뜩잖은 듯이 턱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베트남, 네가 직접 지휘해.”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의 인상이 구겨졌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너는 네 어미만 챙길지 모르겠지만, 이제 네 자식새끼도 챙기는 것이 어떠하냐?”
 “어머니는 쪽발이 새끼들한테 그런 치욕을 당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제 자식은 제가 물려주는······.”
 “네 자식새끼 그릇이 큰데,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시끄럽고, 베트남은 네가 지휘해. 이건 거래다. 싫으면 나도 물리겠다.”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베트남, 가겠습니다.”
 근데······ 아버지에게 저런 면모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충 무슨 일인지 벌써 짐작이 갔다.
 지금 할머니는 나의 진짜 할머니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면······.
 “지금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두 번째 처라는 이야기인가······?”
 흔한 재벌가의 비사지만, 내가 그 상황이 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현관을 나와 바람을 쐬며 신문을 읽었다.
 바뀐 역사에서, 아니 바뀌고 있는 역사에서 상황이 어찌 전개될지 굉장히 궁금했으니 말이다.
 
 
 # 극동 사발면
 
 
 대충 현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원래 역사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살다가 죽었던 잠룡이 일어난 격이었다.
 금산(金山) 김건환 선생.
 김건환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원래 역사에 존재했던 포항제철이 우리 손으로 건설을 시작하게 됐다.
 두 번째로 극동 그룹이라는 원래 역사에서 존재하던 극동 그룹과 다른 존재가 탄생했다.
 또한, 극동 그룹이 월남전에 특수를 누리기 위해 참여했다.
 김건환 회장은 일본에서 포클레인 50대와 불도저 20대를 주문하여 군산항에 집결시켰고, 아버지는 잠시 한량에서 벗어나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에 아버지가 세운 회사는 극동해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치 곤란이던 미국의 리버티선(Liberty ship) 2척이 포함된 해운사이다.
 김건환 회장은 2500만 불을 끌어와서 중고 선박들을 사들이는 일에 투입했으니 앞으로 규모가 확장될 것은 뻔했다.
 김건환 회장은 연일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대한민국 산업의 역군으로 급부상했다.
 “중장비와 사람이 가서 미국의 달러와 철근을 가져온다.”
 김건환 회장의 장남인 김윤찬 사장은 저 말을 모토로 삼았고 전국에서 기술자와 사원을 대대적으로 뽑는다.
 전국의 인재들은 극동해운에서 홍보하는 높은 임금을 보고 몰려들었고 군산은 엄청난 숫자의 사람으로 붐비게 된다. 이게 불과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덜컹.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문을 들어 올렸다.
 
 「금산(金山) 김건환, 극동제철에 이어 극동화학 설립!」
 [극동 그룹은 극동전자, 극동백화점, 극동제철, 극동화학, 극동해운, 극동건설, 극동시멘트, 극동중공업을 설립했고 엄청난 속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 극동 그룹의 김 회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선박 레인보우호와 베어호 군산항에 입항!」
 [극동해운은 지난 6월 5일 미국의 제7함대로부터 리버티선을 입찰받아 군산항에 선박을 집결시켰고 현다이건설과 함께 물류 계약······.]
 
 「극동해운의 김윤찬! 그는 누구인가?」
 
 이것에 관한 나의 대답은 딱 하나였다.
 “난리네, 난리야.”
 대한민국 전체가 야단법석이었다.
 김건환 회장은 가지고 있는 자본을 전부 쏟아부었다.
 포항에 있는 제철소에 이어서 새로운 화학 단지의 건설을 서두르고 있었다.
 또한, 대한중석과 납품 계약을 체결하는 등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솔직히······.
 “내가 할 일이 하나도 없네.”
 뭐 솔직히 할 일이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음······.”
 나는 내가 마시고 있는 따뜻한 우유 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당에 놓여 있는 스티로폼이 보였다.
 저 스티로폼은 일본에서 수입한 양주병의 보관 용기였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다.
 “컵라면······.”
 지금은 1968년이다. 아직 컵라면이 나오지 않은 시기이다.
 1971년이 되어야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나올 텐데, 그 말은 곧 아직 컵라면이란 것이 나오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흐흐흐······.”
 나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바보고 멍청이였다.
 지금은 패스트푸드와 프랜차이즈의 개념이 태동하는 시기인 것이다.
 1955년에 TFC가 만들어졌고, 1954년에 맥호날두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지금은 프랜차이즈 시장의 초창기였다.
 “그럼 내가 컵라면을 만들어서 특허를 내놓는다면?”
 답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닭고기 생산 업체를 가지고 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것은.
 “음식 개발이지.”
 나는 즉시 부엌으로 달려갔다.
 부엌에는 나의 가장 큰 지지자인 아주머니가 계셨다.
 아주머니는 설거지하고 계셨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나는 아주 예의 바르게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는 설거지를 멈추시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 작은 도련님?”
 내 머릿속에는 컵라면에 관한 원리와 제조 지식이 모두 들어 있었다.
 단열재인 스티로폼은 밖에 있었고, 우리 집에는 감자와 고추장이 있었다.
 “제가 발명한 게 있는데요 아주머니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발명이라는 말에 아주머니는 어린아이의 새로운 장난이라고 여겼는지 웃으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도련님?”
 이것은 어머니 아버지 몰래 진행해야 한다. 들키면 먹을 것으로 장난친다고 크게 혼이 날 터이니 말이다.
 “전분 가루로 면을 만들어서······.”
 내가 거침없이 줄줄 말하자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도련님. 사모님이 아시면 저 혼나요. 그리고 먹을 것으로 장난치시면······.”
 “아주머니,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한 번 도와주시면 앞으로 말 더 잘 들을게요.”
 아주머니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주머니가 허락하면, 나는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만든 컵라면의 아버지로 기록될 것이다.
 허락이 없다면 일본이 컵라면 특허를 낼 것이다.
 아주머니는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도련님 도와드릴게요.”
 유레카! 나는 씩 웃으면서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방으로 달려가서 컵라면의 제조를 위한 조합 비율과 면발을 제조하기 위한 제조법을 적었다.
 집에 있는 고추장과 다시마 국물로 만들 육수.
 닭고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들킬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면을 익히는 새로운 조리법을 할아버지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미국과 유럽에 특허를 등록한다면.
 ‘컵라면을 개발한 대한민국의 천재 소년!’
 이런 타이틀의 존재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타이틀이라는 건 브랜드라는 것을 만들며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와 브랜드는 나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줄 것이다.
 나는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스티로폼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가위로 쓱 자르기 시작했다.
 조각도 나름대로 할 줄 알았다.
 ‘치킨집을 만들 때 인건비 아낀다고 내가 직접 인테리어를 했으니까 말이야.’
 전생에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스티로폼을 조각했다.
 머릿속에 모델은 전부 나와 있었다.
 육개장 사발면.
 과거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한 가장 맛있는 라면.
 진한 소고기 육수 국물에 매콤하면서 시원한 맛을 자아내던 컵라면이다.
 나는 그 컵라면을 떠올리며 스티로폼을 조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스티로폼 용기 5개다.
 어머니가 이것을 보신다면 화를 내실 게 분명했다.
 또각또각.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나는 재빠르게 스티로폼 용기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야?”
 어머니가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완성하기 전까지 결코 들켜서는 안 됐다.
 들킨다면 헛짓을 한다고 혼날 게 뻔했으니 말이다. 나는 내 가슴에 겹쳐진 스티로폼 용기 5개를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 댁에서 모이는 날까지 완성해야 했다.
 
 * * *
 
 1968년, 이 당시의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고 두 국가를 말할 것이다.
 소련과 미국.
 냉전 시대인 이 시기에는 양국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고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을 믿었다.
 달러가 가장 힘 있는 기축통화가 될 것을 믿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할아버지는 달러를 계속해서 모았고, 그것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강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병해······. 왜 이 회장이 안 오고 자네가 온 것인가?”
 김건환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유병해라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오성 그룹의 컨트롤 타워로 이름을 날리는 인물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김건환은 날카로운 눈으로 유병해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희 회장님께서 일본과의 계약으로 바쁘십니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김 회장님께 안부 인사를······.”
 “쓸데없는 이야기할 거면 저기 뒤에 있는 문으로 나가게. 내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말이야.”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는 소리였다.
 유병해는 김건환 회장을 보며 속으로 긴장했다.
 “저희 오성물산에서 사카린 공장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카린을 만들 줄 몰라서 나에게 왔다. 이건가?”
 김건환이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유병해는 배짱 있는 인물이었다.
 “예. 사카린에 관한 제조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무엇을 줄 건데? 세상은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거 알지?”
 “예······?”
 “나에게 사카린 제조법을 언제 맡겨 놓았나? 이거, 이거. 유병해 전무가 똑똑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하지?”
 유병해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김건환은 살짝 풀어진 태도로 유병해를 바라보았다.
 “뭘 주고 뭘 받을 것인지 정확히 말해.”
 김건환의 말에 유병해가 서류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김건환은 서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저희 오성물산에서······.”
 “나가.”
 “네······?”
 김건환이 장학수를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장학수는 유병해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예의를 갖춘 다음에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병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병학보고 직접 오라는 이야기였다.
 유병해는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놈들밖에 없군.”
 김건환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김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서 서로를 노려보는 이들.
 “쯧.”
 경멸스러웠다.
 자식 놈들 전부 자신의 돈을 탐내는 식충이들이었다.
 김윤찬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집안의 장손은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장손을 보는 어른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셋째 아들인 김문수는 장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지, 장손의 어미인 박윤경이 장손을 감싸 안고 있을 뿐이었다.
 김 회장의 눈에 바닥에 부서져 있는 잔해들이 보였다.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내 집에서 뭣 하는 게냐!”
 노성을 터뜨렸다.
 
 * * *
 
 ‘젠장······.’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가져온 사발면의 샘플 중 4개가 이미 바닥에 부서진 상태였고 작은아버지들은 나를 우습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들고 온 컵라면을 보자마자 냅다 부수는 이 미친 작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쓰레기를 가져왔다면서 바닥에 던져 버린 것은 둘째 작은아버지.
 김문수다. 망할 놈 나중에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내 집에서 뭣 하는 게냐!”
 유레카!
 할아버지 등장이다.
 저 빌어먹을 둘째 작은아버지에게 엿을 먹여 줄 할아버지의 등장.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은 채 내려오자마자 김문수를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내 집에서 무슨 꼴이냐?”
 김문수를 질책하는 듯한 말투였다.
 김문수는 잘났다는 듯이 어깨를 펴고 입을 열었다.
 “집안의 장손이라는 놈이 감히 쓰레기를 들고 다니기에 혼냈을 뿐입니다. 아버지, 저는 형님이 태준이를 키울 수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걱정하며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조금이라도 장남인 김윤찬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피우는 가식이었다.
 할아버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김문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태준이가 가져온 게 무엇인데?”
 “뜨거운 물만 부으면 조리가 완료되는 물건이라고 합니다.”
 문수의 말에 할아버지의 눈이 호기심으로 변했다.
 “그래?”
 할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서는 장손의 당당함이 필요하다.
 “네 할아버지. 제가 뜨거운 물만 부으면 조리가 되는 사발면을 발명했어요.”
 “발명? 네가?”
 할아버지는 내 손에 있는 것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해 봐.”
 “아버지! 저건 그냥 어린애가 만든 쓰레기······.”
 “내가 눈으로 보기 전에는 확신하지 말라고. 했다.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그······ 그게······.”
 할아버지는 버벅거리는 김문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맹추 같은 놈. 태준이 너는 해 보거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할애비가 너에게 큰 선물을 하나 주겠다.”
 젠장······. 컵라면 중에서는 분명히 결함이 있는 물품도 존재했다.
 그러나 무엇이 결함이 있는 것인지는 몰랐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방법은 하나다. 밀어붙이는 수밖에.
 입 밖으로 변명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변명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냥 밀어붙이는 게 답이다.
 “흐음······.”
 할아버지가 기다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사발면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분말 스프를 부었다.
 솔직히 이 분말 스프는 그냥 고춧가루와 다시마 국물을 함께 끓인 뒤에 말린 것에 불과했다.
 맛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3분 조리 기능.
 “여기에 이 눈금만큼 뜨거운 물을 붓고 3분 정도 기다리면 돼요.”
 할아버지는 나의 말에 집안에서 일하는 가정부에게 눈짓했다.
 가정부는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어 컵라면의 사발에 부었다.
 쪼르르르.
 이것은 투자를 받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초조함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나는 사발면의 뚜껑을 덮었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사발면을 바라보았다.
 무심하던 아버지도 나의 사발면에 집중했다.
 좌중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대체 뭔가, 고작 컵라면 하나에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것일까?
 3분이 지났다.
 
 * * *
 
 3분이 지났다. 할아버지는 손으로 스티로폼 용기를 잡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눈을 번뜩이셨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실패인가, 성공인가, 성공한다면 나는 발명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태준아.”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여셨다.
 “이것을 정말 네가 개발한 것이 맞더냐?”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할아버지 제가 만든 게 맞아요.”
 할아버지는 가정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젓가락 가져와.”
 가정부는 부엌에서 젓가락을 가져왔다.
 가정부가 내민 것 고급스러운 옻칠이 된 나무젓가락이었다.
 할아버지는 젓가락으로 면발을 들어 올렸다.
 잘 익은 면발을 본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후루루룩.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성공이다!
 컵라면!
 컵라면의 특허는 내 것이다!
 나는 속으로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우물우물.
 할아버지는 면을 씹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무척이나 기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안광을 번뜩이며 김문수를 노려보았다.
 김문수는 어쩔 줄을 모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나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김문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자기 눈으로 보고 확인조차 안 하고 보는 놈은 내 집에서 필요 없다.”
 할아버지의 말에 김문수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장하다, 내 새끼! 장하다, 장해! 하하하하하!”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떠올리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와라!”
 할아버지가 세상을 다 가지신 것처럼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겉은 어린아이지만, 내 속은 50대 아저씨다.
 오도도 달려가서 할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짓을 하라고?
 세상에! 저건 죽어도 못하겠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들어 올려 어깨에 붙이듯이 안아 주셨다.
 “우리 태준이. 할아버지가 선물 하나 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하하하하!”
 할아버지는 나를 들어 올린 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윤찬이 너는 따라오너라.”
 김윤찬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인 김윤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할아버지는 서재의 의자에 풀썩 주저앉으며 의자의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김윤찬이 나를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
 의외였다 저 망나니가 저런 눈빛도 한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그런 김윤찬을 보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냐?”
 “태준이를 노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준이는 아직 어립니다.”
 “어려도 사업은 할 수 있지. 안 그래?”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버지는 나를 보며 말했다.
 “태준아, 나가 있거라.”
 “누구 마음대로?”
 할아버지가 인광을 번뜩이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부자는 생각보다 앙금이 깊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아내가 아니라 손자까지 잡아먹으시려고 합니까?”
 “잡아먹는 게 아니라 키우려는 거다.”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를 갈다가 토하듯 소리쳤다.
 “아주 효자 났구나, 효자 났어. 네가 언제부터 효자였다고 어머니 핑계를 대느냐?”
 할아버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분을 참는 듯, 이를 악물었다.
 아니 이놈의 집구석은 대체 뭔 비밀이 이리 많아?
 “너는 그냥 단순히 어머니의 핑계로 가만히 있으려는 것 아니냐? 내가 당장 돈줄을 끊으면 허덕일 놈이 말이 많구나.”
 “아버지의 도움이 없어도 제 아들하고 아내는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가 비웃었다.
 “그까짓 거 내가 힘을 쓰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태준이는 신경 쓰지 말아라. 내가 가르치마. 네놈이 가르칠 만한 그릇이 아니야.”
 “태준이는 제 자식입니다.”
 “약한 놈은 강한 놈에게 무언가를 언제나 빼앗기는 법이지.”
 “으으······.”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이 딴따라를 하든지 노가다판에 가든지 나는 상관없다. 근데, 네가 안 할 거면 대체할 제안을 내놓아야 하지 않더냐? 그리고 솔직히 너보다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버지!”
 “너 이 녀석 잘 키울 자신 있냐? 이놈은 크게 될 놈이야.”
 “태준이는 제 아들입니다!”
 “그래도 애비라고 인제 와서 자식을 신경 쓰는 거냐? 하! 우스울 지경이구나.”
 “······.”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태준아, 특허에 관해서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다!
 특허, 지적재산권의 일부로 21세기가 되면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는 무기다.
 기업은 이 특허라는 무기로 다른 기업을 견제하고 보복한다.
 ‘그걸 그대로 말하는 정신 나간 짓은 안 하지.’
 나는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예요?”
 ‘몰라요’ 같은 멍청한 대답은 아니다.
 호기심, 새로운 것을 마주하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총수의 덕목이었다.
 할아버지는 내 대답이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특허는 우리 태준이가 만든 사발면을 쓰려면 태준이의 허락을 받고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근데 저보다 힘센 사람이 제 허락을 안 받고 쓸 수도 있잖아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이것 봐라?’ 하는 눈이었다.
 아직 특허라는 것은 사실상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고혈을 빨아먹는 수단이었다.
 중소기업이 특허를 내면 대기업은 그와 비슷한 것을 만들고 현금을 동원하며 눌러 버린다.
 그렇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면 할아버지한테 넘기지 않으련?”
 이 영감 봐라? 탐낼 것이 없어서 손자가 개발한 컵라면을 탐내?
 뭐 그럴 만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밀가루가 염가로 굉장히 많이 공급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컵라면은 막대한 부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뭐를 줄 거예요?”
 거래할 시간이다. 할아버지는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 할애비가 이 회사를 주마.”
 이 노친네가 장난하나?
 이 회사를 지금 당장 줄 것도 아니면서 공수표만 뿌리다니.
 답은 정해졌기에 나는 심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싫어요.”
 “싫어······?”
 할아버지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뭐?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이 녀석! 크하하하하!”
 할아버지가 고개를 허공으로 치켜들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부자로서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가 공수표를 믿지 않는 것이다.
 뼛속까지 불신으로 가득해야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가족조차 믿지 말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의 면모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웃음을 뚝 그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강철이.”
 할아버지의 뒤에 있던 남자가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이강철, 극동건설을 이끄는 그룹의 중진이었다.
 “예, 회장님.”
 “한강 이남에 올라가고 있는 극동 아파트 미분양 동 2개가 아직 남지?”
 강남이라는 말에 이강철의 인상이 구겼다.
 “회장님, 하지만 그건······.”
 “괜찮아. 넘겨줘.”
 강남! 강남에 있는 땅이다! 앞으로 대대적으로 개발될 땅.
 할아버지도 그곳이 개발되어 땅값이 오르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극동건설의 극동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의 아파트 2동이라니! 굉장한 대가였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파트가 뭐예요? 그런 거 싫어요. 제가 고를래요.”
 강남땅에서도 아주 비싼 땅이 있지 않은가?
 되지도 않는 극동 아파트보다는 다른 걸 가지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이강철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풋, 그래. 이강철 사장의 바람을 들어줘야겠다.
 “저는 땅이 좋아요.”
 나의 말에 할아버지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강철을 바라보았다.
 이강철은 할아버지의 눈짓에 지도를 가져와서 책상에 펼쳐 들었다.
 땅이다! 대한민국은 부동산의 왕국이었다.
 앞으로 천정부지로 솟는 강남의 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단 한 곳을 가리켰다.
 “음? 한강 이남 수도동?”
 강남 수도동. 1970년, 앞으로 2년 후에 강남 청담동으로 개명되는 곳이다.
 엄청난 땅값 상승률을 자랑하며 엄청난 가치를 자랑할 곳.
 그곳의 땅을 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었다.
 청담동의 땅값은 어마어마하게 상승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줄 것이다.
 솔직히······.
 ‘굳이 지금 사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청담동의 건물 따위보다 컵라면이 훨씬 이득이었다.
 월남전에 군수품으로 컵라면을 납품한다면?
 미군과 한국군이 가득한 월남.
 또한, 베트남의 인민들에게 컵라면을 먹인다면?
 훗날 고정적인 충성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컵라면의 가치는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군수품의 혁명.’
 할아버지는 그것을 넘기라고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냥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손자라서 봐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땅으로 받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사장. 저기 수도동 땅 전부 구매해서 태준이에게 줘.”
 “네? 하지만?”
 “쯧쯧쯧······.”
 할아버지가 혀를 차자 이강철 사장의 표정이 굳었다.
 무능은 죄였으니까, 이강철 사장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조치하겠습니다.”
 김건환 회장은 입을 쓱 닦으며 말했다.
 “좋다. 도준아 이 사발면은 이제 할애비 것이다. 알았느냐?”
 “네. 대신에 땅은 확실히 제 거예요.”
 내가 기분 좋게 웃자 할아버지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7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철두철미하고 욕심이 많아 보인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줘야 했다.
 이미지는 브랜드가 되고 그 존재만으로도 돈이 되니까 말이다.
 “장학수, 네가 직접 미국에 이 사발면 특허를 등록해. 적당히 개량만 조금 한다면 이건 큰 상품이 될 수 있을 거야.”
 “예, 회장님.”
 “그리고 일본에 스티로폼 공장이랑 장기 계약 체결한 뒤에 스티로폼 물량을 최대한 확보해서 군산으로 옮겨.”
 장학수는 책상 위에 있는 지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군산에 공장을 건설하는 거군요.”
 “그래. 군산에서 베트남으로 이 사발면을 수출할 거야.”
 할아버지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군산을 두들겼다.
 “여기서 베트남으로 바로바로 옮겨서 판다면 그게 바로 수출의 역군 아니겠어?”
 “바로 공장에서 일할 직원 모집 공고를 붙이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장학수는 김건환의 속내를 눈치챘다.
 군산에 사발면 공장을 올리고 기름에 튀긴 감자 면발과 스프를 넣어 군산에서 바로바로 수출한다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김건환은 이로 인해 2가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급격하게 몸을 불리고 있는 라면 회사의 견제.
 두 번째는 오성 그룹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제일제면소에 하는 경고였다.
 경고라니 무슨 말이냐고 할 수 있지만, 대체재 등장 측면에서 사발면의 등장은 제일제면소에 긴장감을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룹의 중진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했다.
 이거다, 이게 대기업에서 할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이강철 극동건설 사장을 바라보았다.
 “너는 빨리 이거 입찰해서 이번에 사내 보유금 좀 늘려.”
 이강철은 할아버지의 말을 기막히게 잘 알아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건설은 현찰 조성이 가장 쉬웠다.
 ‘비자금.’
 건설에선 빼먹을 것이 매우 많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할아버지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슬쩍 쳐다보다 이강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해.”
 비자금을 만드는 것은 좋지만,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이강철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나는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대체 치킨은 언제 만들지?
 
 * * *
 
 “김 회장님이 직접이요?”
 김건환과 바둑을 두던 JP가 당황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JP의 앞의 김건환 회장은 대한민국의 산업계를 이끄는 숨은 강자였다.
 김건환은 JP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가야겠습니다. 베트남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일본 놈들도 베트남에 가서 전쟁 특수를 누리겠다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50세의 나이로 눈을 번뜩이며 말하고 있는 김건환의 말에 JP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환은 자신이 작성한 계획서를 JP에게 내밀었다.
 JP는 계획서를 받아들고 쳐다보며 신음성을 흘렸다.
 “흐음······.”
 “우리 대한민국의 기술 수준을 끌어올릴 기회입니다. 미군들이 각 기업에 공사를 맡길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제가 일본에서 포클레인 50대를 주문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국내의 건설 업체에 임대할 예정입니다.”
 “대가가 필요하겠군요.”
 김건환은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 장병들에게 먹일 식량을 만들기 위해 전라도에 공장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전라도에 공장이라는 말에 JP가 눈을 빛냈다.
 “전라도에요?”
 “그렇습니다. 경상도만 개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침 전라도에는 식량이 풍부하니 군납 식품을 개발하여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이건 이번에 개발한 물건입니다.”
 김건환은 작은 용기 하나를 올려놓았다.
 스티로폼으로 된 동글동글한 스티로폼 용기.
 놀랍게도 그것은 사발면이었지만, JP는 이게 무엇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라면이라고 아십니까?”
 “라면 말입니까?”
 김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제 손자가 개발한 사발면입니다. 이미 미국에도 특허를 출원하였고, 곧 심사에 통과될 예정입니다.”
 JP는 사발면을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뭐냐는 표정이다.
 김건환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끓인 물 있으십니까?”
 “끓인 물은 갑자기 왜 찾으십니까.”
 “이 사발면은 3분이면 완성입니다. 전투 상황에서 3분 만에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은 국군장병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분 만에 조리가 된다는 말에 JP는 그제야 관심이 생긴다는 표정으로 눈을 번뜩였다.
 “김 회장님. 이런 것은 경제협력국장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왜 나에게 이런 것을 가져오느냐는 말이었다.
 “경제협력국장님께서 저에게 쌓인 게 좀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경제협력국장이요?”
 JP는 김건환을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현재 JP의 위치는 중앙정보부의 부장.
 말 그대로 공산주의자들을 잡아서 남산에 집어넣는 집단의 수장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다.
 이 중앙정보부는 후에 안기부로 불리는 곳이었다.
 “경제협력국장이 또 무슨 짓을 했습니까? 그 사람 제가 알기로는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김건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JP는 턱을 잡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적을 많이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혹, 누가 회장님을 건드리기라고 합니까?”
 분위기가 살짝 어두워지자 김건환이 입을 열었다.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그저 길거리의 사람 하나를 키워 주었더니 기어오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람이 말입니까? 대체 누구입니까?”
 “부장님.”
 김건환이 나지막하게 JP를 바라보았다.
 “이건 부장님과 저 사이에 하는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요즘 딴짓을 하는 놈들이 몇몇 보이지 않습니까?”
 “딴짓이요?”
 JP는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건환은 조용히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JP는 서류철의 단추를 풀고 읽기 시작했다.
 팔락.
 “이건······.”
 JP의 눈이 부르르하고 떨렸다.
 “그렇다고 너무 나쁘게 보시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그 친구도 다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나름대로 우리 대한민국 수출의 역군이 아닙니까?”
 JP는 선글라스는 살짝 추켜올리며 불편한 음성을 내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김 회장님. 그 친구에게 말을 계속해도 말을 잘 들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김 회장님 정도 되시는 분이시면 모를까 그 친구는 아직······.”
 “그래도 어린 친구이니 우리가 이해해야지요.”
 JP는 턱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김 회장님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중앙정보부의 사람을 후원하다니요. 이건 자칫하면 빨갱이로 몰려서 남산에 끌려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김 회장은 눈웃음을 지으며 품속의 무언가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으음······ 김 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책상에 올려진 것은 스위스의 놀렉스사의 시계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딱 보아도 귀해 보였다.
 JP는 자꾸 시계에 눈길이 갔고, 김건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남자의 심금을 울리는 디자인의 시계는 이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구경하기도 어려운 명품이었다.
 JP는 헛기침을 하면서도 소매를 들어 올려,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곗줄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값싼 시계를 은근슬쩍 가렸다.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도 품위가 있어야지요. 모두 국가를 위하는 거 아닙니까? 조국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들이 그러시면 국제 망신입니다. 이건 제가 국가를 사랑한다는 충심에 드리는 것이니 받아 주시지요.”
 “어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김 회장님, 아무리 각하와 막역한 사이라지만······.”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잘 입지 않으면 우리 같은 기업인들이 힘듭니다. 국위 선양이 우선되어야 저희 같은 기업가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수출을 하지요.”
 김건환의 거듭된 말에 JP는 은근슬쩍 시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차고 있던 가죽 시곗줄을 살짝 풀어, 차고 있던 시계는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김건환이 건네 준 놀렉스 시계를 찼다.
 김건환이 JP의 손목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이제 빛이 나시는군요.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그 가죽 시계가 소중하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를 위해서는 좀 더 밝은 시계가 좋습니다.”
 “회장님······.”
 JP가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렵게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이 친구,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말입니까?”
 JP의 사뭇 진지한 말투에 김건환은 귀를 기울였다.
 JP는 손가락을 살짝 흔들며 바둑알 통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번 중앙정보부에 큰바람이 불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JP의 말에 김건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JP가 눈빛을 번뜩이며 김건환을 바라보았다.
 “김 회장님께서 이 나라를 위해 하시고 있는 일들을 제가 정말 잘 압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탁.
 JP가 바둑판 위에 흑색 돌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필요 없는 것들은 걸러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요컨대 중앙정보부에서 각 기업의 끄나풀들을 모조리 잘라 버리겠다는 이야기였다.
 김건환은 무언가 고민하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요.”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건환 본인이 전면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상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성의 끄나풀들이 중앙정보부에 숨어들었지만, 그 끄나풀을 JP가 직접 자른다.
 그 말은 다르게 해석한다면.
 “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작정하고 극동을 밀어준다는 이야기였다.
 김건환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누가 지시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각하께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꼭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JP는 김건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궐련을 입에 물고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찰칵!
 “후우······.”
 JP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복잡한 눈으로 김건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장님 덕분에 일본 놈들에게 고개 숙일 이유가 없어졌거든요.”
 JP의 말에 김건환은 포항과 남동공단을 떠올렸다.
 포항제철소, 남동공단 종합화학단지 김건환이 꺼내놓은 2개의 카드.
 김건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JH가 많이 봐준 것이었다.
 JH가 가장 원했던 것을 내놓았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좋은 기회 잘 활용해 보겠습니다. 각하에게 감사하다고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JP는 씩 웃으면서 궐련으로 재떨이에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하모요.”
 오성과 극동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군산항은 연일 사람이 몰려들었다.
 극동 그룹에서 식료품 공장을 설립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군산항은 연일 성세였다.
 “아따! 고마 비켜 보랑께!”
 “식료품 공장이라잖어! 먹을 게 조금 떨어질 거 아녀?!”
 “싸게싸게 합시다! 싸게싸게!”
 호객까지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공장의 반장들은 사람을 통제하느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줄 좀 서요! 줄 좀 서라고요!”
 “거기 형씨! 줄 똑바로 안 서!?”
 김윤찬은 그것을 쳐다보다가 인상을 구겼다.
 “책임자 어떤 놈이야?”
 “박찬성 부장입니다.”
 “당장 줄부터 세우라고 해!”
 김윤찬의 말에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김윤찬은 군산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시장 바닥이 따로 없구먼.”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철근과 시멘트는 바닥에 쌓인 그대로 있었고, 반장들과 사무원들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김윤찬은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큰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웅성웅성.
 사람들이 그제야 김윤찬을 바라보았다.
 박찬성 부장은 김윤찬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김윤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박찬성을 바라보았다.
 “자네, 지금 이걸 일이라고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빠······ 빨리해 보겠······.”
 “빨리고 뭐고, 줄부터 똑바로 세워. 입구에 밧줄로 줄 만들고 사람들 하나씩 면접하면 되잖아.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말해 주어야 하나?”
 박찬성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런 사람은 글러 먹어서 쓰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김윤찬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똑바로 통제해. 반장들 밑에서 일할 잡부들 배정하고 일도 좀 가르치고. 본사에서 내려준 지침 못 봤어?”
 “······.”
 쫘악.
 김윤찬은 박찬성의 가슴에 있는 배지를 떼어 냈다.
 김윤찬은 악귀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 해고야.”
 “사······ 사장님.”
 김윤찬은 박찬성을 노려보다가 김창수 차장을 바라보았다.
 “김창수 자네가 차장인가?”
 “에······ 예!”
 “오늘부터 자네가 부장이다. 빨리빨리 일 처리해.”
 “넵!”
 어쩜 이렇게 인재가 없단 말인가.
 박찬성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김윤찬은 뒤돌아서서 경호 실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 작자 조용히 처리해.”
 “예.”
 저런 부류의 인물이 악감정을 품으면 괜히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골치 아파지기 전에 빠르게 치우는 것이 답이었다.
 김윤찬은 차가운 눈으로 부장이었던 박찬성을 보다가 조용히 차에 탑승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차 안에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비서가 있었다.
 김윤찬은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부산에서 온 베어호와 함께 차량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까지 차량의 하역이 끝날 것 같습니다.”
 “하역이 끝나는 대로 군산 사발면 공장 현장에 투입해. 일본에서 들여온 튀김 기계는 어떻게 됐어?”
 “덴뿌라(튀김) 말씀이십니까?”
 “그래, 덴뿌라 만드는 기계 말이야.”
 비서는 서류철을 넘겼다.
 “가쓰후 제작소에서 만든 튀김 기계와 스티로폼 성형기는 아직 군산항의 세관에서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세관에서 대기 중이라는 말에 김윤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세관 직원이 뭐 요구하나?”
 “아닙니다. 단지 아직 공장이 완공되지 않아서 기계를 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 알았어. 일단 공장이 올라가는 대로 바로 생산 라인 가동해.”
 “예. 사장님.”
 김윤찬은 문득 자기 아들이 떠올랐다.
 천재적인 아들.
 “태준이 이 녀석······.”
 
 * * *
 
 나는 지금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월남 파병에는 미국의 막대한 수주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직접 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현다이 놈들이 기술을 독식하도록 둘 수 없습니다.”
 “우리 극동 그룹은 물류하고 선박만 축적하는 일도 바빠요. 지금 건설업에나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번에 사발면 공장이 완공되면 막대한 양의 사발면이 군수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일본에서 조리 기계들이 속속히 군산항에 입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또 벌인단 말입니까?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곳은 할아버지의 서재였다.
 극동 그룹의 실세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바로 그 서재.
 하찮은 사원 따위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대한민국의 산업계를 이끄는 거두, 극동 그룹 계열사의 사장 정도는 되어야 겨우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극동건설의 이강철 사장과 극동물산의 김상윤 사장.
 김상윤은 이번에 서울에 있는 우유 공장을 극동물산에 편입시키고 계열사의 사장이 된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김상윤을 묘한 표정과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웬일로 그런 소리를 다 하느냐?’라는 말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눈빛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김상윤은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은 선박을 늘려서 수출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공장이라도 하나 더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김 사장님. 이번에 베트남에 가서 벌어올 자산은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기술입니다. 기술! 현다이 놈들이 기술을 독식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이강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극동건설.”
 할아버지의 물음에 이강철이 할아버지에게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예, 회장님.”
 김상윤의 표정이 살짝 구겨지는 것은 덤이었다.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현다이건설이 포클레인 임대를 요청한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정확히 뭐야.”
 할아버지의 말에 이강철 사장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베트남에서 얻을 숙련된 건설 기술자들입니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현다이 놈들에게 하청을 받아서 하면 되잖아.”
 “회······ 회장님.”
 ‘하청’이라는 말에 그룹의 중진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하청이라니! 극동이 현다이 따위에게 감히 하청을 받다니!
 할아버지의 말에 서재가 침묵으로 잠겨 있었고, 장학수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실리만 쟁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기술자이지, 돈이 아니지요. 돈은 물산이 벌면 될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김 사장님.”
 장학수의 말에 김상윤은 부들부들 떨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건설에서 모자란 자금은 저희 물산 쪽에서 채워 넣겠습니다.”
 그제야 김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끼리 싸우지 말고 잘해 봐. 허구한 날 쌈박질만 해서 되겠나? 실속을 차려야지, 실속을. 김상윤.”
 할아버지가 둘째 작은아버지, 김상윤을 바라보며 두꺼운 시가를 입에 물었다.
 이강철은 가슴팍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할아버지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후.”
 할아버지는 시가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물산 쪽 일을 잘해야 할 거야. 형이랑 싸우지 말고, 네 형이 꽉 막힌 놈이기는 해도 능력은 있는 놈이다. 그놈이 지금 해운이랑 식품하고 있으니까 네가 잘 도와줘.”
 요컨대 형을 공격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소리였다.
 할아버지의 말에 둘째 작은아버지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쌤통이다’를 외쳤다.
 “그건 그렇고 요즘 아파트는 어때?”
 할아버지의 눈이 자연스럽게 이강철 사장에게 향했다.
 “최근에 안산 시멘트 공장이 완공되어 안산과 인천에서 자재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더는 일본에서 가져온 보루꾸(시멘트 블록)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자체 생산한 시멘트를 넣어서 보루꾸를 찍어내고 집을 짓고 있어서 나름대로 진행이 잘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없고?”
 할아버지가 눈을 번뜩이며 묻자 이강철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극동 아파트 단지에 넣을 양변기가 부족합니다.”
 “양변기가?”
 이강철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처음 지을 극동 아파트는 외형뿐만이 아니라 내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양식 양변기, 온수난방 장치와 대리석을 집어넣은 모던 스타일의 부엌을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실내 장식에 쓸 자재가 부족하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 물어보지. 예산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실내 장식용품의 물량이 부족한 것인가?”
 할아버지의 물음에 이강철은 잠시 침묵했다.
 그런 반응에 할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악이 안 됐나?”
 “아닙니다······.”
 “그럼 뭐야? 뭐가 문제야?”
 “으음······ 그게. 실내 장식용 자재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시공할 기술자들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월남전에서 나올 기술자들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된 것입니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에 기술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기술자가 없으니 현장에서는 시공이 늦추어지고 어물쩍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기술자를 통제하는 시스템도 효율적이지 못했고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과 자재 파악도 주먹구구식이었다.
 그나마 이강철 사장이 상고 출신이라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해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현장은 이미 개판이 나도 진작 개판이 났을 것이었다.
 극동건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 중에 핵심은 한강철교의 복구 사업과 극동아파트의 건설 현장이었다.
 극동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정부의 공무원들에게 헌납하여 국산 아파트 브랜드 만들기의 성격이 강했고, 한강철교는 기간 사업이라는 명목에서 수익이 큰 사업이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잘 들었어?”
 할아버지가 김상윤을 쳐다보자 김상윤은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으면 자세한 것은 밖에 나가서 논해.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참이야. 내가 일일이 다 짚어 줘야 하겠어?”
 할아버지의 싸늘한 말에 주위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극동 그룹에서 무능은 죄였다.
 할아버지가 일일이 다 짚어 준다면 그것은 그룹 수뇌부가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뭣들하고 있어? 얼른 나가서 일 안 해?”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룹의 중진들이 서재를 나갔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멍청한 놈들. 장학수.”
 “예. 회장님.”
 “조만간 한번 정리해야 할 것 같지 않아? 저것들 일을 영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할아버지의 말에 장학수 실장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듯이 할아버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서류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뭔가?”
 “올해 각 계열사의 실적입니다. 아마도 내년부터 자료가 쌓이기 시작할 터인데 새로운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드리는 자료입니다.”
 장학수의 말에 할아버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어디가 부진이야?”
 “부진이라고 말씀하신다면야······.”
 할아버지의 물음에 장학수 실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할아버지는 뻔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안 봐도 답이 나오는구먼. 건설이 제일 문제지?”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회장님도 그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강철 사장은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제철소와 중화학 공업단지를 염가로 건설하려고 해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거구먼?”
 “네······?”
 “우리 그룹의 제일 큰 적이 누굴까?”
 “오성 그룹입니다. 아!”
 장학수가 무언가를 눈치챈 듯이 감탄의 탄성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악동같이 웃으며 말했다.
 “오성 놈들 최근에 건설사 하나 인수하려고 한다면서?”
 “그렇습니다.”
 할아버지와 장학수는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자네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야.”
 “경쟁사를 엿 먹이는 수법이야, 언제나 그 방식이지요.”
 “파악조차 못 하게 만들어 버려. 그리고 우리가 주장할 때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지. 후후후······.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 아니겠어?”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이란 말인가.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태준아 할애비가 재미있는 거 알려 주마.”
 ‘이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너한테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를 혼쭐내는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뭔데요?”
 나는 천진난만하게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 친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주는 거다.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혼쭐이 날 만한 것을 선물로 주는 거지.”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다.
 할아버지 같은 기업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채다.
 할아버지에게는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다.
 불공정 계약과 빚을 진 계열사를 오성에 매각하면 오성은 고스란히 극동 그룹의 제철소와 중화학 공업단지를 손해를 보면서 건설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성은 극동건설이라는 폭탄을 끌어안은 채로 침몰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계책에 소름이 끼칠 만큼 놀랐다.
 오성은 현재 건설 회사를 인수하려 하고 있었다.
 현다이그룹의 약진을 주목한 기업들이 월남 특수를 누기 위해 건설 업체를 인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부실 회사를 매각하면?
 건설 특수를 누릴 수도 있지만, 부실 업체를 매각할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재벌의 마인드란 말인가? 부실 업체를 국내 대기업에 떠넘기고, 그 후에 월남전에서 비틀거리면서 나오는 알짜 기업들을 인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리스크는 떠넘기고 이익만 갈취한다면······.’
 할아버지는 장학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서 중화학 공업단지하고 제철소 건설은 극동건설과 염가로 계약 체결했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답은 나왔군. 오성 그룹에 극동건설 매입 의사를 알아보고 보고해. 솔직히 우리가 운영해도 상관없지만, 오성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
 극동건설은 극동 그룹의 산하 은행인 유한은행에서 막대한 양의 대출을 받았다.
 유한은행의 총재는 이희건으로 김건환이 간사이에서 직접 데려온 인물이었다.
 “오성 그룹에 극동건설이 넘어간다면 그것을 사실상······.”
 “그래, 우리의 부채와 불공정 계약에 관한 부담을 전부 오성 그룹이 부담해야 하거든. 뭐, 의사를 타진해 보고, 싫으면 말라고 해. 솔직히 우리가 운영해도 상관없으니 말이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악동처럼 웃으셨다.
 덥석.
 갑자기 나를 할아버지가 들어 올렸다.
 이제 내 시간인가 보다.
 “그래. 알파벳을 다 외웠다고?”
 “네. 읽고 쓰는 것도 가능해요.”
 나의 말에 할아버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읽고 쓰기가 가능하다고······?”
 할아버지는 장학수에게 손짓했다.
 장학수는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종이와 연필을 나에게 내밀었다.
 ‘하······. 이정도야 뭐······.’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헛기침하며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호랑이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 호랑이, 엄마 호랑이, 새끼 호랑이.”
 “There are three tigers in a house. Father tiger, mother tiger, baby tiger.”
 뭐 간단한 문제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해석하면서 그대로 썼고 할아버지와 장학수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장학수는 나를 보며 감탄했다.
 “회장님 일가에 굉장한 천재가 태어났군요!”
 “하하하하하!”
 자신의 손자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할아버지들에게 크나큰 기쁨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눈과 그리고 흥분한 표정도 같이 보였다.
 젠장, 뭔가 불길했다.

댓글(2)

다크라이    
나름 재미있게 봤네요. 쉽게 읽히고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2020.06.18 15:33
쌍둥아범    
정확히 몇년도 인줄은 모르겠지만 이 당시 강남(영등포의 동쪽이라 영동이라 불렀지만)은 그냥 논밭이라 저런 저택은 없었는것으로 압니다.
2020.06.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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