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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성-전왕의 검 1-1

2019.09.18 조회 1,418 추천 12


 십자성―전왕의 검 1권
 이골마족
 
 목차
 서장 호수의 전설
 제1장 도망자
 제2장 설루
 제3장 사냥꾼들
 제4장 흑사회
 제5장 천재지변
 제6장 호수를 찾아서
 제7장 뿌리
 제8장 배신, 그리고 하나의 시작
 
 
 
 서장 호수의 전설
 
 
 
 ―놈이 내게 온 날.
 
 결국 피는 속일 수 없는 걸까?
 어떻게 제 아비랑 이렇게 똑같을까. 고집불통에 난폭해 보이고, 거기에 거만하기까지 한······.
 정말··· 빌어먹을 부자(夫子)다.
 그 아비와 다른 점은 날 찾아온 방법뿐이다.
 그의 아비는 말이라기보다는 괴물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거대한 흑마를 타고 왔고, 그의 아들은 구멍 뚫린 배를 타고 이 맑은 호수를 건너왔다.
 바가지로 연신 물을 퍼내면서.
 왜 방법이 서로 다르냐고?
 당연한 일이다.
 그 아비가 날 찾아왔을 때는 이 호수가 없었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때, 이 호수가 생겨났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 이야기지. 인생처럼!
 아니··· 조금 긴가?
 
 ***
 
 ―이십오 년 전.
 
 벌써 이십오 년이나 지난 일이다.
 내 나이가 올해로 백서넛쯤 되었으니, 팔십 줄 바라보던 팔팔하던 때의 일이다.
 난 그와 삼 년 정도 함께 지냈다.
 아!
 생각해 보면 참 멋진 시간이었어. 세상에는 공포의 시간이었지만······.
 난 태어나면서부터 문지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보통 문지기는 아니었다. 아주 드물지만 몇몇은 날 수호자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
 수호자(守護者)!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통 문지기가 아니라는 것을.
 어쨌든 그날 그는 그 거대한 흑마를 타고 날 찾아왔다.
 그는 놈을 흑저라고 불렀지만, 사실 몸집이 클 뿐 돼지처럼 비대하거나 느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광풍 같은 속도와 신룡 같은 힘을 지닌 놈이었지. 전설의 오추마가 그랬을까?
 아무튼, 그를 보는 순간 난 직감했다. 이자는 다른 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등에 커다란 검과 도를 비껴 메고 있었고, 팔목에는 철갑을 차고 있었다.
 그뿐인가?
 말허리에는 창날에 용을 새겨 넣은 신창이 걸려 있었고, 다른 쪽 허리에는 철궁(鐵弓)이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방패까지는 들고 있지 않았으니.
 만약 방패까지 있었다면 정말··· 흐흠··· 그랬다면, 그랬다면 파마시에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에게 방패가 없었던 것은 내겐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문을 열어줘야겠어!”
 그가 날 만나자마자 한 말이다.
 제길, 문지기에게 문을 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하지만 난 거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문(門)도 내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명월문의 선조들이 들으면 경을 칠 일이지만 이후 우린 삼 년을 함께했다. 그 삼 년을 무림은 검은 사자들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포로 기억한다.
 왜 삼 년이나 무림을 떠돌았냐고?
 당연한 일이다. 그 문은 보통 문이 아니었고, 문을 열려면 제법 많은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야 어떻든 내겐 참 멋진 시간이었다.
 비록 파국이 결정되어진 시간이라고 해도.
 
 ***
 
 ―그 삼 년··· 검은 사자들의 시간.
 
 세상은 그를 오해했다.
 그가 원한 것은 무림천하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길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오해는 세상 탓이 아니다.
 명백하게 그의 실수다.
 말했지만 그는 오만한 자였다. 물론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세상에는 아는 사람만 안다는 일곱 개의 비밀스런 보물(密寶)이 있다. 그 비밀스런 물건들은 일곱 개의 가문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었다.
 웃기는 건, 그 가문들의 주인들조차도 그 밀보들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전 그들 가문에 밀보들을 맡긴 자들이 밀보의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여담이지만··· 그 밀보를 맡긴 자들 중 한 명이 나의 선조다.
 말했듯이 난 보통 문지기가 아니다.
 아무튼 그가 원하는 곳으로 가려면 그 일곱 개의 밀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수하인 검은 사자들은 삼 년 동안 그것들을 찾기 위해 무림을 휩쓸었다.
 물론 그동안 난 그들의 충실한 길잡이 노릇을 했다. 밀보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미련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조용히 그 보물들을 훔쳐 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만한 그와 그의 동료들은 오직 힘으로 그 보물들을 차지하려 했다.
 그 결과 그들은 무림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세상 모두가 그들을 쫓았다.
 정사가 따로 없고, 관과 무림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 잡힐 사람들인가?
 세상은 지금도 모른다. 사실 그들이 마음을 달리 먹었다면 지금쯤 세상의 지배자는 달라졌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수천 명의 추격자를 꼬리에 달고 그와 검은 사자들은 다시 이곳, 나의 오두막이 있던 북방의 아름다운 산, 월하선봉으로 돌아왔다.
 
 ***
 
 ―그날.
 
 그날 이 호수가 생겼다.
 녀석이 돛단배를 타고 건너온 바로 이 호수가.
 이 호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중 하나가 전마별호다.
 전마가 떠난 호수란 뜻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전마란 별호에 대해 말하지 않았군.
 녀석의 아비, 검은 사자들의 우두머리였던 그를 사람들은 전마라 불렀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싸움의 신과 같았으니까.
 만약 그가 정도(正道)의 길을 걸었다면 전마가 아니라 전신이나 뭐 전황 정도로 불렸을 것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그가 세상과 작별했기에 사람들은 이 호수를 전마별호라고 부른다.
 그날 정사양도에서 가려 뽑은 고수 삼백이 그와 그의 동료들을 공격했다.
 어땠냐고?
 그들은 그날 진정한 공포를 자신의 뼛속에 새겼다.
 흑저가 일으키는 광풍 같은 모래바람, 온몸의 병기를 모두 꺼내 쓰는 전율적인 전마의 무공. 산허리가 잘리고 비탈은 평지가 됐다.
 죽은 자의 숫자가 일백이 넘었을 때 정사양도의 고수들은 감히 전마를 감당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그렇게 단신으로 적을 물리친 그는 유유히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문을 여시오.”
 난··· 결국 문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 평생 그렇게 무서운 자를 상대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 내 기분은 아주··· 벌래 같았어. 살려고 발버둥 치는······.
 문을 열자 그의 동료들이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환희에 찬 표정으로.
 그는 가장 나중에 움직였어.
 왜냐하면 들어가기 전에 내게 아주 은밀한 부탁을··· 사실은 마지막 명령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굳이 부탁이라고 했지만······.
 그는 내게 한 자루 검과 한 여인의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말했다.
 “이 여인을 찾아주시오. 아이를 낳았을 거요. 아이에게 신혈(神血)의 기운이 보이면 내 이름과 검을 전해주시오.”
 “드러나지 않으면 어찌하오?”
 내가 물었다.
 “그럼··· 그냥··· 사람으로······.”
 제길 자긴 사람 아닌가?
 욕설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난 그냥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사실 난 그때 아주 중요한 일을 생각하고 있어서 그의 말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승낙하자 그는 처음으로 내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내가 그를 불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그의 이름으로 불렀다.
 “적황!”
 처음 말하나?
 전마의 본래 이름이 적황이었다.
 내가 부르자 그가 날 돌아봤다.
 그도 이상했을 것이다. 난 항상 그를 전마라 불렀으니까. 아마 그때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안 돌아볼 수 없었으리라.
 그가 날 보는 순간 난 내 모든 심력과 힘을 모아 파마시를 날렸다. 파마시는 정확하게 그의 심장에 꽂혔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으로 자신의 심장에 꽂힌 파마시와 날 번갈아 보더니, 또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문 안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난 재빨리 기관을 작동시켰다. 오직 문지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기관을!
 그러자 산이 무너지고 사방에서 물줄기가 솟구쳤다. 마치 물의 화산이 터진 것 같았다.
 물의 광란은 장장 보름 동안 계속됐다.
 그 후 이 호수가 만들어졌다.
 아마 지금도 호수 밑바닥 어딘가에서는 여러 갈래의 수맥을 통해 끊임없이 물이 솟구치고 있을 것이다.
 
 천하는 날 의인이라고 부른다.
 검은 사자들의 왕을 죽인 기인, 삼 년의 굴욕을 참으며 그의 최후를 준비한 희생자, 그리고 결국에는 무림을 지켜낸 불굴의 대협사!
 의천노공이자 밀교의 일맥을 이은 월문(月門) 제이십칠대 법황, 우서한!
 그게 바로 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난 그를 좋아했다. 절대 그에게 파마시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따라 그 천기자와 밀교의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어.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짊어진 숙명을 좀체 벗어버리지 못한다.
 난 최후의 순간에 문지기로서의 업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 아픔을 누군가는 이해할까?
 마음으로 따르던 자의 심장에 파마시를 꽂아 넣은 심정을.
 세상을 구한 영웅, 의천노공?
 훗, 개에게나 던져 주고 싶은 말들이다.
 그날 이후 난 호수를 떠났다.
 세상이 날 찾지 못하게. 그래서 그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그저 전설로 남을 만큼의 시간 동안.
 그리고 그가 부탁한 일도 해야 했다.
 그녀를 찾았고, 그녀에게 그의 말도 전했다.
 그녀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을 떠나주길 원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그녀와 자신의 아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물론 나야 바라던 바였다. 사실 나도 귀찮은 건 질색이었으니까. 내가 죽인 자의 아들을 키우는 것도 썩······.
 다행히 그때까지 그녀의 아들에게선 신혈의 특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녀를 떠나면서 당부해 뒀다. 신혈의 흔적이 보이면 아이를 내게 보내라고.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설혹 그런 일이 있어도 결코 내게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신혈의 기운이 일어나면 아이가 결코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
 
 ―그의 아들.
 
 검은 사자들의 시간을 견뎌낸 무림은 그 뿌리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사자와 연관된 모든 자를 추살했다.
 그들에게 주먹밥 하나라도 건넨 자는 설혹 그가 산촌의 노파라 할지라도 은밀하게 죽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한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검은 사자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의 사형, 월문 밖의 월문을 지탱하는 나의 사형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난 사형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신혈의 피가 두렵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사형의 손속은 내 예상을 벗어나 지나치게 단호했다. 그래서 난 그때 내가 사형의 일을 막지 않은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아마도 사형은 문지기의 업을 사형이 아닌 내가 이어받은 것에 아직도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화를 그들에게 푸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형 나이가 벌써 백열셋이다. 그런데 아직도 손에 피를 묻히고 있으니 생각해 보면 가련한 일이다.
 어쨌거나 세상일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난 단지 문을 지키는 일이 평생의 업인 사람이므로······.
 
 세상을 떠돌던 난 오 년 전에 다시 이 호수로 돌아왔다.
 세상이 내 이름이야 잊지 않았겠지만 더 이상 찾으려 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
 사형조차도 더 이상은 날 찾지 않고 있다. 어쩌면 아주 다행한 일이다.
 이후 내 기대대로 평온한 날이 이어졌다.
 호수는 아주 근사해졌다.
 투명한 햇살, 북방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흐흠, 내가 아주 즐기는 것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산에 벼락이 치고, 번개 맞은 박달나무를 베어 오고, 파마시를 다시 만들던 그날!
 빌어먹게도 녀석이 날 찾아온 것이다.
 놈의 아비처럼!
 
 한숨이 나오는 일이지만 난 녀석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결정할 수 있으니까. 이 땅에서 전마의 피를 끊을 것인가 아닌가를!
 마침 녀석 같은 놈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제1장 도망자
 
 
 
 적풍이 처음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그해는 천하에 기근이 들어 어머니의 삯바느질로는 더 이상 생계를 잇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래서 마을 아이 대부분이 그러하듯 적풍 역시 바다로 나가 자맥질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적풍은 자맥질에 재주가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두어 배는 오래 숨을 참을 수 있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거친 해류를 감당할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적풍의 근력에 놀라 그를 장군감이라고 치켜세우곤 했는데, 어머니는 그 칭찬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맥질을 시작한 이후 집안 사정은 금세 좋아졌다.
 식구라야 어머니와 적풍 단둘뿐이어서 적풍이 자맥질을 한 이후에는 매끼 곡기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그의 몸이 바다에 익숙해졌을 때, 적풍은 자맥질을 관두고 배를 탔다. 적풍의 힘을 눈여겨본 선주 하나가 적풍을 어부로 고용한 것이다.
 벌이는 더 좋아졌다.
 물속에서 조개나 줍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대로라면 적풍은 훌륭한 어부가 되어 그런대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즈음 그의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적풍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와 어머니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 유하가 되물었다.
 “그물이 암초에 걸려 그걸 거두러 물속에 들어갔다가 강한 해류를 만났어요. 물 밖에서는 알 수 없는 해류였는데······.”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살아 돌아왔으면 된 것 아니냐는 듯 여전히 무심했다.
 물론 적풍은 서운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익숙한 모습이었고,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해류가 너무 강해서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어깨뼈가 마치 날개 돋듯 솟구치더라고요. 그러고는 생각지도 못한 힘이······.”
 “누가 보았느냐?”
 적풍은 처음으로 어머니, 유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마치 적풍이 사람이라도 죽인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함께 물속에 들어갔던 호 형과 덕술 형이······.”
 적풍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유하의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언뜻 감출 수 없는 분노도 엿보였다. 혹은 허탈함으로 금방이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유하는 긴 침묵 속에서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을 꽤 오랫동안 참아냈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그녀가 말했다.
 “내일 이곳을 떠날 테니 준비하거라.”
 
 이후 적풍과 유하는 천하를 떠돌았다.
 한 동리를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할 때마다 이름도 바꿨다.
 적풍은 특별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 특별함은 도드라졌다. 특히 타고난 신력은 어딜 가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유하는 적풍의 타고난 신력과 그 힘을 쓸 때 드러나는 어깨뼈의 이상한 움직임을 감추라고 수시로 주의를 줬다.
 그러나 낭중지추라고 적풍의 능력은 결국에는 사람들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유하는 미련 없이 짐을 싸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떠나자는 유하의 말에 적풍이 처음으로 반발하며 물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어머니 유하의 결정에 반발한 적이 없었던 적풍이다.
 요하 하류의 작은 강변 마을에 정착한 지 이 년이 지나서였다.
 적풍의 나이 열일곱··· 피어오르는 청춘의 나이였다. 그리고 그는 그 마을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가난의 누추함도 소녀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적풍은 그녀의 눈, 그녀의 말투, 그리고 그녀의 향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기야 어느 날 자신의 본래 구천이 아니라 적풍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비밀스런 몸에 대해서까지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 유하는 적풍에게 다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적풍은 그때만큼은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설루, 적풍에게 이성의 아름다움을 눈뜨게 해준 소녀 설루를 잃고 싶지 않았다.
 조혼의 풍습이 있는 요하의 마을은 적풍 나이 또래의 소년 중 일찍 가정을 이룬 아이들도 있었다. 적풍은 설루와 그 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반발하는 적풍에게 어머니 유하가 차갑게 대답했다.
 “네가 떠나지 않으면 그 아이가 죽을 게다!”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겁니다.”
 “이유? 진정 알고 싶으냐?”
 “말해주십시오.”
 적풍의 말에 유하가 한 서린 눈으로 적풍을 바라보다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오냐, 알고 싶다니 말해주마. 네 나이도 이제 적지 않으니. 이유는 오직 하나 네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잘난 신혈의 피를 받았으니까! 그 피는··· 그 피는······! 그 피가 어떤 피인지는 나중에 네가 직접 알아보거라. 그럴 생각이 있다면! 천하가 그 피의 가지를 자르기 위해 쫓고 있다. 그런데 설루와 혼인을 하겠다고?”
 서릿발 같은 노기를 드러내며 유하가 말했다.
 적풍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 유하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의 인생이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풍을 버리지 않은 것, 그를 살리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천하를 떠돌아다닌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적풍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었다.
 그리고 결국 그날도 묻지 않았다.
 유하의 눈에서 본 그 깊은 애증 앞에서 감히 그 아버지에 대해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두 모자는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이별이었다.
 적풍은 그 밤, 달이 지기 전 설루를 찾아가 약속했다. 그녀를 지켜줄 힘을 갖게 되었을 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운명은 그날 두 연인에게 부부로서 함께할 단 하룻밤의 호의를 베풀었다.
 
 ***
 
 적풍의 어머니 유하는 세 사람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적풍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 하나를 함께 주었다.
 죽기 전 유하는 손을 들어 난생처음으로 적풍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난생처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적풍을 바라봤다.
 그 순간 적풍을 알았다. 사실 유하에겐 아들 적풍이 전부였음을, 그리고 적풍을 위해 천하를 떠돈 삶이 그녀에게 슬픔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의 삶 자체가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그녀가 죽는 순간 적풍은 알게 된 것이다.
 “적황, 네 아버지의 이름이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거라. 살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 아마 대부분 좋지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와 인연을 맺은 자라면 누구든 우리처럼 평생 사냥당하고 살 만큼. 하지만 난 여전히 그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와 너에게는 몰라도······.”
 그렇게 적풍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의 이름을 알았다.
 “유천궁, 네 외삼촌의 이름이다. 뿌리이니 말해두지만 절대 찾지 마라. 찾는 순간 넌 죽을 것이다. 네 외가의 손에!”
 그렇게 또 외가의 존재를 알았다.
 “우서한, 강호라는 곳을 알게 되면 이 이름의 주인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네가 스스로 너의 힘을, 그리고 너의 몸을 견딜 수 없게 되면, 혹은 너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생긴다면, 그땐 그를 찾아가거라. 그만이 너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의 이유를, 나조차 모르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물론 그 이유를 설명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가능하면 그를 찾지 말거라. 그가 널 죽일 가능성이 팔 할은 넘으니까.”
 그렇게 세 사람의 이름이 유산으로 남았다.
 그리고 적풍에게 평생 기억될 유하의 마지막 말도 남았다.
 “사람들은 네 피를 이골마족의 피라고 부른다. 그들 스스로는 신혈이라 부르지. 나도 모르겠다. 그 피가 마혈인지 신혈인지, 또 어디서 연유했는지. 어쨌든 세상의 지배자들이 그 피를 지닌 자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껏 세상을 떠돈 이유다!”
 유하가 적풍을 자신의 품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내 아기··· 넌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단다. 어미는··· 이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적풍이 태어난 이후 유하에게 들어본 가장 따뜻한 말이자 선물이었다.
 
 거짓이 아님을 알기에 어머니가 죽은 후에도 적풍은 설루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이한 피를 이은 자들을 쫓는 사냥꾼들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이젠 스스로 자신을 숨겨야 했다.
 그래서 적풍은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글을 모르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 야만의 땅으로······.
 
 ***
 
 삼보노(參寶老)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적풍과 마찬가지로 북방의 이방인이었다. 적풍과 비슷한 시기에 야인 부락에 나타난 그는 처음에는 어린 적풍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삼보노는 애꾸에 얼굴에는 세 가닥 자상이 나 있었다. 옷차림은 추레했고, 키도 작아서 거친 야인의 땅에서 사람 구실 하며 살기 어려운 외모를 지닌 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숨은 재주가 많았다. 그리고 그 재주를 드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삼보노는 글을 알았고, 전략이라는 것을 세울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 도검을 쓰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삼보노(參寶老)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끝까지 본래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거렁뱅이 노인이라고,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삼보노로 불릴 뿐, 누구도 그의 과거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사실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야인의 땅, 하루아침에 부족이 멸망하고, 죽인 자의 두개골을 잘라 술잔으로 쓰는 이 야만의 땅에서 과거나 본명 같은 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늘 초원을 달려 적의 목을 벨 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삼보노는 보물이 분명했다.
 삼보노가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흑수의 늑대라 불리는 오르도 부족과의 싸움이었다.
 오르도 부족의 족장 수타이는 스스로 금황실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며, 심중에 야인들을 통합해 과거 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자였다.
 반면 적풍과 삼보노가 몸을 의탁한 단웅족은 유목보다는 사냥을 업으로 삼는 부족으로, 용맹하기는 하나 그 숫자가 오르도족에 비해 삼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부족이었다.
 만약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가 좋은 말로 복종을 요구해 왔다면 단웅족의 족장 고웅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타이는 복종을 요구하는 대신 단웅족을 멸족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용맹하기로 소문난 단웅족을 멸족시킴으로써 북방의 야인들에게 자신의 강맹함을 보여주길 원했다.
 수타이가 단웅족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이 일천, 반면 숲에 몸을 숨긴 채 방어에 나선 단웅족의 숫자는 겨우 이백칠십이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놀랍게도 단웅족이 승리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주역이 바로 삼보노였다.
 삼보노는 싸움 전날 족장 고웅타를 은밀히 찾아가 싸움에 대한 조언을 했다.
 족장 고웅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삼보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달리 승부를 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보노는 단웅족을 일곱 무리로 나누어 숲 곳곳에 숨겨둔 후, 그중 한 무리를 족장 고웅타와 함께 이끌고 나가 적을 맞았다.
 싸움이 시작되자 족장 고웅타와 삼보노는 거짓 도망으로 적을 숲 깊은 곳까지 끌어들인 후 미리 매복해 두었던 부족의 용사들을 움직여 사방에서 적을 기습했다.
 훗날 삼보노가 적풍에게 칠산진법이라고 말해준 그 포진으로 인해 수타이가 이끄는 오르도의 야인들 칠 할이 죽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삼보노의 재주였다.
 삼보노는 야인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고 날아다니며 적의 목을 베었다.
 급기야는 적장 수타이를 향해 날아갔는데, 결국 수타이는 부족들을 남겨두고 먼저 살길을 찾아 서쪽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그 싸움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족장 고웅타가 이끄는 단웅족은 흑수변의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싸움이 끝난 후 백 일이 지나지 않아 싸울 수 있는 용사의 숫자가 일천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 고웅타의 심복 둘이 천호장이라는 대단한 지위를 얻을 정도가 되었다.
 반면 싸움에서 패한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는 서쪽으로 도주한 후 소식이 끊겼다.
 개인적으로는 삼보노의 위치가 가장 크게 변했다. 그저 뜨내기손님이었던 삼보노는 어느새 족장 고웅타의 스승이자 존경받는 조언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년의 고웅타는 뒤늦게 삼보노를 통해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사냥으로 배를 채우고, 부족의 안전을 위해서만 칼을 들었던 고웅타가 나이 사십에 세상에 대한 야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옛날 자신의 조상 중 한 일파였던 완안부가 천하를 지배했었다는 그 전설적인 이야기처럼 그 자신도 그러한 전설을 만들어내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적풍도 변했다.
 적풍은 한 달 동안 쫓아다닌 끝에 삼보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족장 고웅타와 사형제간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적풍을 고웅타의 사형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야만의 단웅족에게 애초부터 사문의 법규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제자가 된 적풍에게 삼보노는 족장 고웅타와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쳤다.
 “네놈에겐 무공을 가르쳐 주마! 타고난 힘이 장사니······.”
 한 달의 실랑이 끝에 얻어낸 삼보노의 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적풍은 새로운 세상과 조우했다. 도검이 만들어가는 세계, 무림이었다.
 
 ***
 
 삼보노는 어디서 구했는지 검신이 두꺼운 검 한 자루를 적풍에게 주었다.
 “청룡검이다. 무거워서 보통 사람은 쓰지 못한다. 본래 검은 빠르기를 생명으로 하는 병기니까. 그런데 왠지 네놈에겐 어울리는 것 같아. 신력을 타고났으니까.”
 청룡검은 사실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한 면이 있었다. 언뜻 보면 언월도와 닮았기에 도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검(劍)인 것은 양날을 모두 쓸 수 있는 모양새를 갖췄기 때문이었다.
 무게가 삼십 근을 넘어 누구라도 부담스런 무게였다.
 그러나 적풍에게는 처음부터 딱 맞춘 것처럼 손에 잡혔다. 무게도 묵직한 것이 적풍의 마음에 들었다.
 삼보노는 청룡검을 준 후 그 검에 어울리는 검법이라며 하나의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이 검법은 진천벽력검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난 천벽검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하여간 이게 이런 거창한 이름을 가진 이유는 검법이 극성에 이르면 번개가 치는 것 같은 위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지.”
 삼보노가 전수한 검법은 이름은 거창했다. 진천벽력검법, 이름으로는 천하제일검법에 어울리는 검법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기대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아직까지 진천벽력검법을 수련해서 검기를 만들어보았다는 자는 만나지 못했으니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고.”
 “사부도 말입니까?”
 “나? 난 이 검법 익히지 않았어.”
 “예?”
 “진천벽력검법의 검보를 얻은 것이 오 년 전이다. 대충 검보를 살펴보니 수련해 봐야 내 무공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더라고. 그러니 고생할 필요가 없지. 예부터 무공과 기병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더니 아마도 이 천벽검법의 주인은 너였던 모양이다. 몸에 익으면 적어도 이 야인의 땅에서 허망하게 죽을 일은 없을 게다.”
 그날부터 적풍은 청룡검을 들고 진천벽력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삼보노의 말처럼 진천벽력검법은 예사로운 무공이 아닌 듯 보였다. 수련한 지 일 년쯤 지나자 적풍의 검이 바위를 파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게 삼보노가 진천벽력검법 때문인지, 아니면 함께 전수한 호흡법인 천지밀법(天地密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적풍은 자신이 생각할 수 없었던 무공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풍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수련한 무공들이 무림의 웬만한 사람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삼류 토납법과 어린애도 검을 들면 수련한다는 삼재검법이었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삼보노도 예상치 못했었다. 그런 삼류의 무공으로 적풍이 일류고수의 경지에 오를 거라고는.
 
 서걱서걱!
 적풍의 청룡검이 무를 베듯 바위를 베어냈다. 그때마다 바위에는 제법 깊은 검흔이 생겨났다.
 깊은 것은 두 치 깊이까지 파인 것도 있었다.
 사방 십여 장의 공터를 둘러싼 절벽들은 적풍이 만든 검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삼보노는 청룡검을 휘둘러 대는 적풍을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못마땅한 얼굴은 또 아니다.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서걱!
 한순간 적풍의 청룡검이 번쩍이자 절벽 한 부분에 맷돌처럼 둥그런 원이 그려졌다.
 “그만하고 이리 와봐라.”
 적풍이 검을 거두자 삼보노가 적풍을 불렀다.
 “줘봐라.”
 다가온 적풍에게 삼보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적풍이 청룡검을 건넸다.
 “좋구나.”
 삼보노가 청룡검의 날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바위를 베어댔음에도 청룡검의 날은 상한 곳이 없었다.
 “칼이 좋아서지요. 쇠가 아주 강한 것 같습니다.”
 적풍이 대답했다.
 “쇠가 좋다고 누구나 검날이 상하지 않게 석벽을 베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내공도 미천한 녀석이 말이야. 이 결과는 결국 유괴, 네놈의 실력이 제법 쓸 만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물론 타고난 신력도 한몫했겠지만. 음··· 그래서 기분이 좀 서글퍼. 찝찝하기도 하고.”
 단웅족 내에서 적풍은 유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성을 유씨로 한 것은 죽은 어머니 유하를 생각했기 때문이고, 이름을 괴로 한 것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위협감을 주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찝찝하시다니요? 제 칼 쓰는 재주가 늘어난 것이 나쁜 일입니까? 모두 어르신께서 가르치신 것 아닙니까?”
 “그런 말이 아니다. 내가 서글픈 이유가 둘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네놈에 비하면 내 자질이 한없이 미천함을 오늘에서야 알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네놈의 그 재주가 이 야인의 땅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깝기 때문이지.”
 삼보노가 청룡검을 다시 적풍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적풍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 중원으로 가야지요.”
 “흐응? 이놈 봐라. 도망자 주제에 야심을 품었노?”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삼보노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미처 자신의 그림자가 따라붙지 못할 정도다.
 쿵!
 삼보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적풍의 검이 꽂혔다.
 쩌적!
 청룡검이 꽂힌 바위에 번개 모양의 금이 갔다.
 “이놈! 무슨 짓이냐?”
 삼보노가 노한 눈으로 적풍을 보며 소리쳤다.
 “내가 도망자란 건 어찌 아셨소?”
 삼보노가 문득 몸서리를 쳤다. 이 싸늘한 살기,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차가운 눈!
 더군다나 분명 자신이 약자임을 알 터인데도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는 무모함.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지 못했던 적풍의 모습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너 이놈의 새끼······!”
 삼보노가 적풍을 노려보며 욕설을 해댔다.
 본능적으로 내뱉는 말투에서 삼보노의 거친 본성도 여실히 드러났다.
 단웅족에게 삼보노는 현명하고 고고한 인품을 지닌 족장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무척 거칠고 잔혹한 성정을 지닌 마인이었다.
 “날 쫓아 이곳까지 오신 거요?”
 적풍이 적의를 드러내며 물었다. 더 이상 스승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흐흐, 너 따위를 쫓아와? 나 유령마군 사혼이?”
 “유령마군 사혼··· 그게 당신의 이름이군.”
 “이런 빌어먹을 놈! 사부에게 당신이라니, 이런 인간 말종을 보았나? 아무래도 네놈 배를 갈라 봐야겠다. 도대체 간이 얼마나 부었는지?”
 삼보노, 그러니까 스스로 유령마군 사혼이라고 이름을 밝힌 노인이 살벌한 마기를 쏟아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날 쫓아온 것이 아니라면 내가 도망자인 것은 어찌 아셨소?”
 유령마군 사혼이 화를 내든 말든 적풍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게 삼보노를 더 화나게 했다.
 하지만 사혼은 강호에서 일대거마로 불리는 자로 자신의 화를 제어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아! 멀쩡한 놈이 새파란 어린 나이에 이런 야인의 땅에 혼자 들어왔겠냐? 그것도 단신으로 말이다. 네놈이 도망자인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야! 이 멍청한 자식아!”
 “그 말은··· 단웅족 사람들도 모두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거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다들 알고 있지.”
 사혼의 말에 적풍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왜? 가서 모두 죽이게?”
 “그래야 한다면······.”
 “아서라. 네놈이 그들 모두를 죽일 수도 없고, 죽일 필요도 없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적풍의 말투가 조금 풀어졌다. 묻는 대로 대꾸해 주자 사혼에 대한 경계심이 옅어진 모양이었다.
 “이 호래자식아! 이 빌어먹게 추운 야인 놈들 땅으로 온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도망자야. 그렇지 않다면 따뜻한 남쪽 땅을 두고 미쳤다고 이 추운 북방까지 오겠느냐?”
 사혼의 말에 적풍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사혼이 말을 이었다.
 “이자들은 말이야, 우리가 남쪽에서 뭘 했었는지는 관심이 없어. 단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인가 아닌가만 중요한 거지. 이 땅은 야만의 땅이다. 강자존의 세상이지. 재주 있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고 쓰인다는 뜻이다.”
 “사부도 도망잡니까?”
 적풍의 말투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사혼을 사부로 인정한 것이다.
 사혼이 허망한 표정으로 적풍을 바라보다 투덜거렸다.
 “이 자식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이젠 다시 사부냐?”
 “사부께 무례를 범한 건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평생 도망만 다니며 살다 보니······.”
 “평생? 그럼 네가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은 선대의 일 때문이겠구나. 애가 태어나자마자 사람을 죽였을 리는 없을 테니······.”
 적풍은 자신의 사부가 머리가 비상한 자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한마디 말에서 열 가지 일을 유추해 낼 수 있는 노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물론 무슨 일인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지?”
 “사실 나도 잘 모릅니다. 무슨 일로 내가 쫓기는 건지. 또 설혹 안다 해도··· 사부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 나야 당연히 대답해 줄 수 있지.”
 사혼이 별일 아니라는 듯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사부는 무슨 죄를 지어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 재주에······.”
 “후후후, 별거 아냐. 사람을 좀 죽였지. 하지만 무림이란 곳에서 사람 백여 명 죽인 것이 그리 큰 죈가? 그저 날 시기하는 놈들이 나를 도망자로 만들었을 뿐이지.”
 “사람 일백을 죽여요?”
 적풍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정말 사혼은 적풍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조금 귀찮아 보일 뿐이었다.
 적풍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솔직히 사혼의 과거 따위 적풍도 별 관심 없었다. 대신 달리 묻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어쨌거나 사부는 무척 유명한 무림인이시라는 거지요?”
 “나? 그래, 그렇다. 왜?”
 “그럼 혹시··· 적··· 아니, 우서한이란 사람에 대해 아십니까?”
 “우서한? 우헤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사혼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잘못됐지? 우서한을 아느냐니, 세상에 칼 밥 먹는 사람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그런가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요?”
 “하아··· 네놈이 어려서부터 도망만 다닌 건 사실인 모양이구나. 의천노공 우서한을 모르다니, 변방으로만 돌았단 소리군.”
 “안 가보곤 곳이 없지요. 고려에서 중원을 거쳐 얼마간은 돈황에도 머물렀었죠.”
 “음······.”
 적풍의 말에 사혼이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적풍의 나이 많아야 스물서넛 정도. 그 나이에 돈황까지 도망 다녔다면 정말 보통 도망자가 아니란 소리였다.
 “네 조상이 황제 목이라도 쳤냐?”
 “예?”
 “그렇게까지 도망을 다녔다는 것이 이상해서 말이다.”
 “우리 집안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우서한에 대해서나 말해주십시오.”
 “알겠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 에··· 우서한이라··· 대단한 이름이지. 정사양도를 떠나 모두가 그를 무림의 구성으로 추앙한다.”
 “사부님도요?”
 “나? 글쎄··· 나도 뭐 대단하다고는 생각해. 검은 사자들의 우두머리 전마를 죽였으니까.”
 “검은 사자는 또 뭡니까?”
 역시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 자들이 있어. 고금절후의 악행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받는 자들이지. 그런데 네놈은 그들도 모른다 이거지? 하긴 우서한을 모르는데 검은 사자들과 그들의 왕인 전마 적황인들 알까.”
 사혼이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적풍의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그 강렬한 긴장감을 사혼은 알지 못했다.
 “적황이란 자를··· 죽였어요? 우서한이?”
 “그랬지. 검은 사자들은 삼 년 동안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북방의 월하선봉이란 곳까지 도주한 후, 그곳에서 자신들이 예전에 만들어놓은 도주로를 통해 추격대를 피하려 했다고 하더군. 탈출은 거의 성공했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때까지 마음을 숨기고 그들과 동행하던 의천노공 우서한이 우두머리인 전마 적황의 심장에 파마시를 꽂았다고 해.”
 “파마시요?”
 “소문으로는 밀교의 전설적인 화살이라더군. 부처의 기운이 깃들어 절대마기를 깨뜨릴 수 있는 신병이라나?”
 “그는 죽었나요?”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죽었다고 봐야지. 그와 검은 사자들 모두 호수에 잠겼으니까.”
 “호수요?”
 “사실 우서한은 처음부터 그곳을 검은 사자들의 무덤으로 준비했었다고 하더군. 산 아래 지하에 수십 갈래의 수맥이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 그는 그 수맥들을 끌어모아 검은 사자들을 수장시킬 계획을 세웠었던 거야. 무공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세상은 정사양도의 추격자들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소문이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적풍이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이한 열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 열기를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침묵하는 적풍을 사혼이 유심히 지켜보다가 충고하듯 말했다.
 “우서한과 인연이 있다면 넌 더더욱 강호로 나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강호제일의 의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 자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좋든 나쁘든 다 좋지 않아, 도망자에게는. 그래서 말인데··· 떠날 생각 말고 얼마간은 나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
 “정착이요?”
 “이 단웅족 말이다. 아주 재밌는 부족이야. 족장 고웅타는 더욱 그러하고······. 내 생각에는 조만간 이자들은 북방의 지배자가 될 거다. 그럴 만한 자질이 있어. 물론 내가 약간 도와줘야겠지만. 이들과 함께라면 평생을 영화롭게 살 수 있어. 누구에게 쫓기지도 않고 말이다.”
 사혼이 은근한 어조로 유혹했다. 아마도 그는 단웅족에 정착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절대 나쁘지 않지. 언제까지 도망만 다니고 살 순 없으니까. 널 쫓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모르겠지만 단웅족이 북방의 패자가 되고, 네가 그들의 수뇌가 될 수 있다면 넌 더 이상 도망자가 될 필요가 없을 거 아니냐?”
 “하지만 이자들이 과연 날 인정할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외인인데······.”
 “후후, 난 어때 보이냐?”
 “사부야 이미 능력을 증명해서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내 능력을 증명했지?”
 “그야··· 오르도 부족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셨기 때문 아닙니까?”
 적풍이 퉁명스레 말했다.
 “너도 그럼 된다. 싸워서 공을 세우면 이자들은 널 인정할 게다. 이 야인들은 말이야, 강자에 대해선 맹목적인 호감을 갖는단 말이지. 조만간 큰 싸움이 있을 거야. 그 싸움에서 네 실력을 보여라.”
 “누가 감히 지금 단웅족에게 싸움을 건단 말입니까?”
 최근에 들어서 단웅족은 흑수 인근의 패자로 우뚝 서 있었다. 감히 그 어떤 부족도 단웅족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있다.”
 “누가 말입니까?”
 “서쪽으로 도망갔던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 그자가 흥안령 서쪽에서 원군을 규합해 다시 이 땅으로 들어왔다고 하더구나.”
 “원군이요?”
 “몽골인 이천이라던가?”
 “몽골 기병이라면··· 설마 원황실의 지원을 받는단 말입니까?”
 “기병은 아니고 그냥 몽골 부족. 지금 원황실에겐 남 도와줄 여력이 없어. 대도의 황궁 지키기도 버거운 지경이지. 원(元)은 끝났어. 그래서 여기 단웅족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는 거고······.”
 “그럼 수타이가 끌고 온 자들은······?”
 “뭐, 대막에 흩어진 부족 중 강성한 자들을 끌어모았겠지. 지금은 초원도 원황실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으니까. 아마 개중 세력을 넓히려는 자들이겠지?”
 “단웅족이 이길 수 있을까요? 몰락하고 있다고 해도 천하를 제패했던 몽골인들인데······.”
 “그래서 네게 기회란 거다. 어려운 싸움이 될 테니까. 네가 수타이 그자의 목이라도 잘라봐라. 아마 널 신장처럼 떠받들걸?”
 사혼이 연신 적풍을 충동질했다. 그러자 적풍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한번 해보죠.”
 “정말?”
 “그런데 왜 사부가 직접 베지 않는 겁니까?”
 “나야 이미 날 증명했지 않느냐. 그러니 네게 양보하는 거다.”
 “이제 보니 어떻게든 날 사부 옆에 붙들어두려는 속셈이군요.”
 “후후, 맞아. 바로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나 혼자면 너무 외롭지 않느냐? 이 야만스런 놈들 틈에서 살기에 말이다.”
 
 ***
 
 싸움은 흑수변에서 벌어졌다.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는 일 년 전의 패배를 잊지 않았다. 도주하는 단웅족을 쫓아 숲으로 들어갔다가 매복에 당했던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수타이는 흑수의 강변을 싸움터로 결정한 것이다.
 그가 데려온 기마에 능한 몽골족을 최대한 활용하기에도 흑수변의 너른 초원이 적당했다.
 단웅족의 족장 고웅타는 삼보노의 조언에 따라 예전처럼 단웅족의 용사들을 일곱 무리로 나누었다.
 그러나 숲이 아니기에 단웅족의 용사들을 매복시킬 장소는 없었다. 삼보노는 불안해하는 고웅타를 달래며 단웅족의 용사들을 강변의 갈대밭에 기이한 모양으로 포진시켰다.
 포진법은 역시 지난날 처음 수타이와 싸울 때도 썼던 칠산진법이었다. 칠산진법은 싸움이 시작되자 평지에서도 금세 그 신묘한 위력을 발휘했다.
 단웅족은 기병과 보병의 숫자가 거의 절반씩 섞여 있었다.
 반면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가 데려온 몽골인은 전부 기병이었다. 너른 강변에서의 싸움은 기병의 장점이 최상으로 발휘된다.
 수타이는 자신이 데려온 몽골 세 부족을 앞세워 노도처럼 단웅족의 진영을 공략했다.
 몽골의 기병들은 마금, 고무, 살라 세 명의 이리같이 사나운 족장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은 괴성을 지르고 화살을 쏘아대며 거침없이 단웅족을 향해 돌진했다.
 수타이는 싸움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모든 전력을 단웅족의 진영 오른쪽, 그러니까 흑수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단웅족장 고웅타가 있는 곳으로 몰아댔다.
 단웅족들은 화살을 쏘는 것으로 적을 상대하려 했으나 워낙 그 기세가 사나운 몽골 기병에 밀려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상황은 일 년 전과 비슷하게 전개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후퇴하는 단웅족의 뒤에 몸을 감추고 매복할 숲이 없다는 것이었다.
 족장 고웅타 역시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그는 부족의 용맹스런 젊은 용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연신 뒤로 후퇴했다.
 “고웅타의 목을 베어 오는 사람에게 단웅족을 주겠소!”
 복수심에 불탄 수타이가 몽골의 세 부족장에게 다가서며 그들을 독려했다.
 그러자 몽골 족장들이 더욱힘을 내 고웅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반전이 일어났다.
 화르르!
 갑자기 물러나는 단웅족과 추격하는 몽골 부족들 사이에서 거친 화염이 솟구친 것이다.
 가장 먼저 불길에 놀란 말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평생을 말 위에서 살아온 몽골족조차도 불길에 놀란 말들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그 혼란 속에서 단웅족의 일곱 무리 중 왼쪽의 너른 벌판에 포진해 있던 두 무리의 기마용사들이 흑수의 갈대밭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멀리 불길을 우회하더니 그대로 적의 허리를 끊으며 돌격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적풍도 섞여 있었다.
 
 적풍은 이를 악물어 두려움을 억누르고 용기를 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작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사실 적풍은 오늘 처음 제대로 된 싸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말을 몰아 적진으로 뛰어드는 순간, 갑자기 적풍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수타이의 목을 베겠다는 결심조차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그저 앞에서 달리는 단웅족 용사의 꽁무니만 바라보고 말을 몰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붉은 피가 적풍의 눈앞으로 확 흩뿌려지는 순간, 그의 심장이 거짓말처럼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의 눈에 전장의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적풍은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 일순 당황했으나 그도 잠시, 문득 차가운 살기가 심장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싸움에 대한 열망이 차가운 이성과 함께 뒤섞인 기운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 투기가 솟구치면 심장이 뜨거워지고 이성이 사라져서 환각에 빠진 것같이 흥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적풍의 심장은 솟구치는 싸움의 투기를 오히려 차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적풍이 청룡검을 들었다. 그리고 매섭게 일 초의 검식을 펼쳤다.
 “악!”
 그의 검에 베인 몽골족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지며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핫!”
 적풍이 말의 허리를 때렸다. 그러자 놀란 말이 벼락처럼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어느새 적풍은 일행의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그의 앞으로 몽골족들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에 맞서 적풍이 광풍처럼 청룡검을 휘둘렀다.
 차차창!
 서너 자루의 검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뒤를 이어 적풍의 청룡검이 검을 잃은 적들을 베어 넘겼다.
 “크아악!”
 말에서 떨어지는 자들의 비명 소리는 어느새 적풍의 등 뒤에 있었다.
 적풍의 눈동자가 투명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냉혹한 눈동자다.
 그 눈동자가 전장을 훑어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를 찾았다. 멀리 자신의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수타이가 보였다.
 그즈음 수타이도 단웅족 기병들의 우회 공격을 알아채고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씨익!
 한순간 적풍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사자의 눈빛 같았다.
 “하앗!”
 망설임은 없었다. 적풍이 말을 몰아 수타이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그의 앞을 막아야 할 적들이 그의 기세에 놀라 파도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로 적풍과 단웅족의 기마들이 거침없이 질주했다.
 “막앗!”
 수타이는 본능적으로 단웅족의 젊은 놈이 뭘 원하는지 알아챘다. 놈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머리,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어린놈을 상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편한 방법을 택했다. 자신의 수하들에게 놈을 막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의 수하들보다 먼저 놈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흥안령을 넘어 몽골의 초원에서 불러온 자들, 그 우두머리 중 한 명인 살라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젊은 놈을 향해 달려갔다.
 “가자.”
 “예?”
 갑작스런 수타이의 말에 놀란 그의 수하가 돌아보며 되물었다.
 “싸움은 끝났다. 목숨이라도 구해야지.”
 “하지만 아직 우리 쪽 숫자가 많은데요?”
 수하가 도망가자는 수타이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멍청하기는!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다. 기세로 하는 거지. 이미 기세가 꺾였다. 몽골 놈들··· 용감하기는 하지만 머리가 나빠. 기습을 당하니 단번에 흩어지고 말잖아. 제길··· 단웅족에 모사꾼 늙은이가 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군. 가자!”
 수타이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하늘 높이 솟구친 반월검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였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신에는 흥건하게 핏방울이 맺혀 있다.
 몽골족의 족장 중 한 명인 살라의 검이다.
 “요홋!”
 살라가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말 위에서 상체를 세우더니 그대로 적풍의 머리를 검으로 쳤다.
 그러자 적풍이 상대의 검을 피하지 않고 청룡검을 들어 정면에서 적의 검을 받아쳤다.
 카앙!
 강렬한 파열음에 흑수가 놀라 물결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명의 비명이 들렸다.
 “악!”
 부러진 검 반쪽이 허무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아래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 쪽으로 길게 베어진 몽골 족장 살라가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떨어졌다.
 퍽!
 말 아래로 떨어진 살라의 몸에 창이 꽂혔다. 적풍의 뒤를 따르던 단웅족 용사가 살라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것이다.
 “저놈! 저놈은 반드시 죽여라! 그 이후에 물러난다!”
 살라의 죽음으로 당황하는 몽골족 사이에서 다른 두 족장이 소리쳤다.
 수타이가 도주한 이상 싸움을 지속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살라를 죽인 적풍만은 꼭 죽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명이 떨어지자 두 족장 곁에 있던 몽골족 기병들이 움직였다.
 두두두!
 모두 여덟 필의 말이 적풍을 향해 달려왔다. 그 위에 올라앉은 몽골족 용사들의 기세가 다른 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리 같은 눈빛과 무쇠 같은 팔뚝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말 위에서의 움직임도 다른 자들에 비해 한결 자연스러웠다. 두 손 모두 고삐를 잡고 있지 않음에도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적풍의 대응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었다. 적풍이 뒤로 물러나지 않고 맹렬하게 적들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웅!
 적풍의 청룡검이 허공을 갈랐다. 선명한 검광이 가장 선두에 선 자와 말을 단번에 잘라냈다.
 히히힝!
 말굽이 꺾이며 말과 사람이 그대로 땅 위에 고꾸라졌다.
 그러자 다른 몽골 용사들이 적풍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말을 모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의 형상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적풍이 탄 말이 요란스런 포위에 놀라 앞발을 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몽골 기병들이 쇠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졌다.
 퍼퍽!
 쇠고리 몇 개가 말의 몸에 박혔다. 그리고 그중 두어 개가 말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히히힝!
 적풍이 타고 있던 말이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더니 한순간 거대한 말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땅 위에 떨어졌다.
 쿵!
 말이 쓰러지는 순간 적풍이 재빨리 몸을 날려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몽골 기병들이 적풍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초원의 몽골족들이 맹수를 사냥할 때 쓰는 방법 그대로 그들은 적풍을 사냥하고 있었다.
 “호옷!”
 적풍이 그물에 휘감기자 몽골족 사이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어났다. 숲에서 대호를 사냥한 듯한 호기로움이 묻어나는 함성이다.
 척척척!
 다시 몇 개의 갈고리가 날아왔다. 갈고리들이 적풍과 그를 감싸고 있는 그물에 함께 걸렸다.
 그러자 갈고리의 주인들이 말을 몰아 원을 그리며 적풍을 밧줄로 휘감았다.
 적풍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든 단웅족의 용사 중 누구도 감히 달려들어 적풍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싸움의 전세야 이미 수타이의 도주로 단웅족에게 기울어져 있었지만, 적풍 하나의 희생은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적풍이 이를 악물고 힘을 썼지만 줄에 묶인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적풍을 줄에 매단 몽골족들이 갑자기 서쪽을 향해 말을 몰기 시작했다.
 “호오옷!”
 “젠장!”
 적풍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잡은 포로를 말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초원을 달리는 것 역시 몽골족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강변의 마른 갈대들이 꺾이며 적풍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그러나 그 아픔은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거친 강변 바닥을 몸으로 훑고 나가는 고통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서너 필의 말이 뒤를 따르며 가끔씩 적풍의 등에 대고 채찍질을 해댔다.
 채찍이 등에 닿을 때마다 적풍은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도망자로 살아온 세월에 대한 울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핏속에 잠재해 있던 선천적인 패도의 기운 때문인지, 이 수모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적풍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눈이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과 분노가 뒤섞이면 눈이 붉어지는데 이상하게도 적풍의 눈은 검은빛을 띠었다.
 그리고 그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가 누군가의 추격을 피해 살아온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검은 안광이기 때문이었다.
 검은 안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다른 변화들이 일어난다. 어깨뼈가 기형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그중 하나다.
 “으음······.”
 적풍이 나직하게 신음성을 흘렸다. 자신의 변화를 그도 눈치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변화를 억제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끌려 다니다가는 결국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적풍이다.
 그러나 그런 평소의 강력한 힘조차도 몸의 변화가 일어나며 만들어지는 거대한 신력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툭!
 한순간 검을 든 채 꼼짝할 수 없던 오른쪽 팔이 단단했던 밧줄을 밀어내며 움직였다. 팔이 움직이자 청룡검이 움직이고, 청룡검이 움직이자 자연스레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과 그물이 동시에 끊겨 나갔다.
 적풍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뒤에서 그를 따라 말을 달리던 몽골족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 순간 적풍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말과 연결되었던 밧줄이 단번에 끊어지면서 적풍의 몸이 움직이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땅 위에 나뒹굴었다.
 “죽어라!”
 적풍이 미처 몸을 세우기도 전에 나는 듯이 달려온 몽골족들이 창을 찔렀다.
 파팟!
 두 자루의 창이 좌우에서 적풍의 몸에 꽂혀들었다. 순간 적풍이 왼손을 휘저어 창대를 휘어잡았다.
 그러고는 큰 소리를 내지르며 두 개의 창대를 한 번에 당겨 세웠다.
 “으얏!”
 창의 주인들이 창을 놓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적풍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창대에 매달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앗!”
 “헉!”
 허공에 떠오는 자들이 질러대는 소리를 들으며 적풍이 도리깨질하듯 창을 휘둘러 두 사람을 땅에 처박았다.
 쿠쿵!
 “악!”
 무지막지한 힘으로 땅에 처박힌 적 중 하나는 즉사했고, 다른 하나는 어디가 부러졌는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뒤로 물러났다.
 적풍이 그런 적에게 달려들어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팟!
 한 줄기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지며 몽골족이 땅에 쓰러졌다.
 한순간에 놀라운 힘으로 그물을 벗어나고 두 명의 적을 죽인 적풍을 몽골족들이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적풍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을 뿐 감히 적풍을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적풍의 모습은 점점 괴상해졌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은 어느새 그의 전신을 감싸는 듯했고, 어깨 옷자락은 마치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몸은 평소보다도 두어 배는 커 보였다. 그런 기이한 모습 때문에라도 더더욱 몽골 용사들은 적풍을 향해 다가오지 못했다.
 적풍이 청룡검을 든 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몽골족들을 둘러봤다. 혼자지만 오히려 장내를 장악한 자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문득 주인을 잃은 말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적풍이 말고삐를 낚아챘다.
 히힝!
 낯선 손길에 놀란 말이 비명을 터뜨리며 반항했다. 그러나 어느새 적풍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청룡검을 들어 자신이 끌려온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검 앞에 있던 몽골족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자신의 기도만으로 적풍은 길을 열었다. 그리고 적이 열어놓은 길로 말을 몰았다.
 
 두두두!
 적풍을 태운 말이 흑수 강변을 질주했다.
 “와!”
 “우우우!”
 멀리서 단웅족이 소리를 질러댔다.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던 적풍이 적진을 뚫고 강변을 질주하는 모습이 단웅족 용사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
 반면 몽골족의 두 부족장 얼굴은 붉게 상기됐다. 사로잡은 적을 놓친 것은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흥안령을 넘어 도주한다면 초원의 모든 부족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건 부족을 이끄는 그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수치다.
 두 몽골 족장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강변을 질주하는 적풍을 향해 말을 몰기 시작했다.
 “오오오!”
 단웅족과 몽골족의 함성이 뒤섞여 일어났다.
 양쪽에서 마주 달려오는 적풍과 두 족장의 격돌이 초원 용사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이런 대결이야말로 강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북방의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대결이었다.
 적풍의 옷자락이 깃발처럼 휘날렸다. 적풍이 청룡검을 어깨 뒤로 올렸다.
 슈숭!
 몽골의 두 족장이 먼저 화살을 날렸다. 달리는 말 위에서 날리는 화살이 놀랍도록 정확했다.
 적풍이 청룡검을 휘둘러 자신의 심장과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차앙!
 맑은 충돌음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족장이 나는 듯이 적풍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적풍이 청룡검을 들어 오른쪽의 적, 부족장 마금의 검을 막아내는 동시에 상체를 말 왼쪽으로 기울여 왼쪽에서 달려드는 몽골족 족장 고무의 검을 피했다.
 고무의 검이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적풍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적풍이 왼손을 뻗어 고무의 요대를 등 뒤에서 낚아챘다.
 “헛!”
 고무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고무의 몸이 단번에서 말 등에서 벗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그러고는 돌덩이처럼 삼사 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쿵!
 “억!”
 고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뼈가 부러졌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사이 적풍이 말머리를 돌려 다른 몽골 족장 마금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고 보자!”
 마금이 한마디 경고를 남기고는 말을 몰아 도주하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적풍이 한 차례 볼을 씰룩이더니 그대로 청룡검을 내던졌다.
 퍽!
 무서운 속도로 공기를 뚫고 날아간 청룡검이 그대로 마금이 탄 말 뒷다리에 꽂혔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덕분에 마금 역시 나무토막처럼 튕겨 나가 땅 위에 나뒹굴었다.
 그런 마금을 향해 어느새 다가왔는지 적풍이 말을 탄 채 닥쳐들었다. 그는 미처 마금이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빈 검집으로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둔중한 타격음이 터져 나오더니 마금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와아아!”
 순식간에 두 명의 적장을 제압한 적풍의 활약에 단웅족의 용사들이 사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적풍은 말 위에 앉은 채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질러대는 단웅족의 용사들을 바라봤다.
 그 순간 적풍의 가슴속에서 투기와는 또 다른 기이한 감정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쾌감, 그건 단지 싸움의 승리에서 오는 쾌감만은 아니었다. 단웅족이 질러대는 환호성에서 적풍은 본능적인 지배자의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 순간만큼은 천하가 자신의 발아래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 왕이 되려고들 하나?”
 적풍이 한 줄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안에 고인 침을 내뱉으며 갑자기 욕설을 해댔다.
 “젠장, 그러거나 말거나 또 떠나야 하는 건가?”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현실의 위험을 생각나게 했다. 익골이 최대한 솟구쳤고, 검은 안광이 파도처럼 넘쳐흘렀으며, 믿을 수 없는 신력을 내보였다.
 곧 소문이 날 것이다. 추격자가 있다면 오늘 몽골족과의 싸움에서 적풍이 보인 모습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떠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한번 붙어봐? 오늘 보니 나도 꽤 세진 것 같은데······.”
 적풍의 눈에서 새삼스럽게 검은 안광이 번뜩였다.
 
 ***
 
 거대한 불꽃이 타올랐다.
 둥둥둥!
 짐승 가죽으로 만든 투박한 북소리가 요란하게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그 속에서 단웅족의 우두머리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북쪽 가운데 자리 잡은 족장 고웅타는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제왕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잔치를 시작하기 전 목을 벤 적장 마금과 고무의 시체가 한쪽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들이 흘린 피가 아직도 불빛 아래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웅족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끌벅적한 잔치를 밤이 깊도록 이어가고 있었다.
 “더러운 족속들! ㅤㅌㅞㅅ!”
 사혼이 입안에 고인 침을 뱉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적풍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유주 특유의 향이 입안에 퍼졌지만 사실 술맛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뭘 그렇게 생각하냐?”
 자신의 말에 반응이 없자 사혼이 적풍을 툭 치며 물었다.
 “뭐, 그냥······.”
 “좋은 소식 알려주랴?”
 “뭡니까?”
 “조금 있으면 족장이 네게 큰 선물을 줄 거다. 흐흠··· 결국 계획대로 된 거지.”
 “선물이요?”
 “그래. 모두 내 덕인 줄 알아라.”
 “뭔데요?”
 “들어봐.”
 사혼이 눈으로 족장 고웅타를 가리켰다. 마침 고웅타의 시선이 사혼과 적풍에게 머물러 있었다.
 “형제들!”
 고웅타가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모두 취했는가?”
 “예, 족장!”
 “기분 좋습니다.”
 본래 북방의 야인들에게 주군에 대한 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 오늘 정말 대단했지?”
 “그렇고말고요! 저 사나운 몽골놈들 이천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놈들 족장 셋을 모두 잡아 죽이고 말입니다.”
 대답을 한 자는 단웅족에 두 명밖에 없는 천호장 걸사우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걸사우!”
 “예, 족장!”
 “그게 누구 공인가?”
 “예?”
 천호장 걸사우가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오늘날 우리가 저 사나운 몽골인들을 물리친 공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가? 누구에게 그 공이 있나?”
 “그, 그야 당연히 족장님의 용맹하신······.”
 “그만! 우리 단웅족은 허언을 내뱉지 않는다. 단웅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나 명예롭다. 비록 글은 배우지 않았지만 약속은 돌같이 단단하고 한 번 뱉은 말은 결코 주워 담지 않는다. 그러니 바로 말해라. 누구의 공인가? 아니, 누구 공이 가장 큰가?”
 고웅타가 다시 묻자 천호장 걸사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적풍과 삼보노에게로 향했다.
 단웅족의 누구도 적풍이 이번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란 걸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적의 우두머리 셋을 상대해 이긴 적풍이다.
 “역시 유괴겠지요.”
 걸사우가 대답했다. 하지만 떨떠름한 표정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인정한 것 같았다.
 “그렇지? 그럼 공을 세웠으니 상을 줘야지. 그게 이 땅의 율법!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자는 상을 받는다! 유괴!”
 고웅타가 적풍을 불렀다.
 “예, 족장.”
 적풍이 앉은 채로 고웅타를 보며 대답했다. 이 또한 북방 야인들의 자유스런 모습이다.
 “이번엔 정말 놀랐다. 네게 그런 솜씨가 있는지 몰랐어. 힘이 센 줄은 알았지만 말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 운으로 적장 셋을 베지는 못해. 아무튼 이런 전과(戰果)는 우리 단웅족 역사에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상을 주려 한다.”
 고웅타의 말에 적풍보다 단웅족 용사들이 더 관심을 보였다. 과연 몽골 족장 셋을 잡아 죽인 사람에게는 어떤 상이 주어질지 모두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번 싸움으로 근방의 부족들이 앞다퉈 우리 단웅족에 들어오려 할 것이다. 또한 사방의 뛰어난 사냥꾼들도 스스로 단웅족이 되길 자처하겠지. 아마··· 천여 명은 늘어나지 않을까?”
 고웅타가 옆에 앉은 또 다른 천호장 울루에게 물었다.
 “그보다 더 많지 않을까요? 이젠 우리 단웅족이 이 북방의 패자가 될 겁니다.”
 두툼한 몸집을 자랑하는 울루가 대답했다.
 “하하하, 울루 자넨 항상 욕심이 많아. 사람이 제법 모여들긴 하겠지만 아직은 북방의 패자를 자처할 정도는 아니지.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 할 일이 많아. 아무튼 말이야. 천여 명 이상은 모여들 것 같은데··· 난 그들을 유괴 네게 맡기려 한다. 단웅족에 새로운 천호장이 탄생하는 것이지.”
 “천호장을 말입니까?”
 울루와 걸사우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 정도 공은 세웠잖아?”
 “하지만 유괴의 나이가 아직 어린데······.”
 “이봐라, 이 땅에서 언제부터 나이를 따졌나? 센 놈이면 다지.”
 “하지만 백호장도 거치지 않고 바로 천호장이라시면··· 다른 백호장들이 서운해할 겁니다.”
 “그럴까?”
 “아마도······.”
 울루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너희들 정말 서운하냐?”
 고웅타가 천호장 울루와 걸사우 옆으로 줄지어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들에게 물었다.
 이들이야말로 단웅족을 떠받히는 기둥들로 스무 명 남짓한 백호장이다.
 만약 누군가 새로 천호장이 되어야 한다면 당연히 이들 중에서 천호장이 나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웅타가 이들이 의견을 물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저희이야 족장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백호장 중 한 명이 대답했다.
 골도후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다음 대 천호장으로 가장 유력한 용사였다.
 호랑이 같은 용맹과 뱀 같은 지혜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단웅족 제일의 용사가 바로 그였다.
 “골도후!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마라. 네 생각을 말해봐.”
 고웅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골도후가 잠시 고웅타의 눈치를 보다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유괴가 세운 공은 천호장이 되기에 충분하긴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가 문제냐?”
 “유괴는 단웅족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혈통을 따지자는 것이냐? 혈통을 따지고 들면 단웅족에 남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고웅타가 화가 난 모습을 보였다. 이 땅에서 혈통을 따지는 것은 오로지 족장의 가문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족장의 가문 이외의 단웅족에게 혈통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적으로 단웅족의 용사 중 태반은 최근 들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혈통을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외부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유괴가 천호장이 되려면 한 번의 전공으로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지요.”
 “흐흠··· 그렇긴 하군. 유괴가 싸움에 참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
 고웅타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적풍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듣다 보니 어쩐지 두 사람이 미리 말을 맞춘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자들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골도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능력으로 보자면 이번에 몽골 족장 셋을 잡은 유괴는 충분히 천호장이 될 능력이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웅족으로서 지낸 시간이겠지요.”
 “뒤로 미루자는 말이구나.”
 고웅타가 물었다.
 “그것보다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공을 하나 더 세울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뭘 말하는 것이냐?”
 “아직 수타이가 살아 있습니다.”
 “수타이! 그자를 잡자고?”
 고웅타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그자는 살려두면 언제든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추격대를 꾸려 그자를 잡지요. 그리고··· 그자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을 새로운 천호장으로 삼는 겁니다. 유괴가 수타이의 목을 잘라오면 아무도 유괴를 천호장으로 세우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타이라··· 잡긴 잡아야지. 유괴!”
 “예, 족장님!”
 “수타이를 잡아보겠는가?”
 “그러지요.”
 적풍이 순순히 대답했다. 마치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꺼내는 듯 쉬운 일인 것 같은 표정이다.
 그 대답에 고웅타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아좋아. 과연 적장 셋을 잡은 용사다운 배포다. 수타이를 잡아 오면 그 즉시 넌 단웅족의 천호장이 된다. 그리고··· 수타이의 추격에 나설 자는 누구든 나서도 좋다. 유괴뿐 아니라 누구라도 수타이의 목을 가져오라. 그럼 단웅족의 세 번째 천호장이 될 것이다!”
 “와아!”
 “호오옷!”
 고웅타의 선언이 끝나는 순간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단웅족 용사들 사이에서 새로운 전의가 일어났다.
 그 흥분 속에서 다시 잔치가 시작됐다.
 적풍은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고웅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를 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더러웠다.
 한바탕 고웅타의 말장난에 놀아난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한마디 말을 묻어뒀다.
 ‘돌아왔을 때 또다시 딴소리를 하면 그땐 족장, 당신의 목을 잘라 버리겠어’라고······.
 
 느긋하게 잠을 잤다. 먼 길 떠나기 전에는 잠을 충분히 자두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잠을 깬 것은 삼보노 사혼이 시끄럽게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일어나라. 이런 날 늦잠이라니 뭐하는 짓이냐?”
 사혼이 적풍이 덮고 있던 낡은 모포를 걷어치우며 소리쳤다.
 “해가 떴나요?”
 “점심 먹고 갈 생각이냐?”
 눈을 들어보니 과연 열린 천막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다른 놈들은 벌써 떠났어.”
 “조금 서둔다고 수타이의 목이 그들의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백호장 다섯이 추격에 나섰다. 각자 부족에서 가장 용맹한 수하들을 데리고 말이야.”
 “뭘 거추장스럽게······.”
 적풍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죽 옷을 걸치고는 청룡검을 챙겨 들었다.
 “어떻게 찾을래?”
 “예?”
 “수타이 말이다.”
 “뭐··· 어떻게 되겠지요.”
 “하여간 대책 없기는··· 나와봐라.”
 사혼이 천막 입구로 걸어가며 손짓을 했다.
 적풍이 어젯밤 챙겨둔 짐들을 주섬주섬 둘러메고 천막을 나섰다. 낯선 자 셋이 쭈뼛거리며 천막 앞에 서 있었다.
 “누굽니까?”
 기색을 보니 사혼과 아는 사이인 것 같아 적풍이 물었다.
 “널 따라가고 싶다는구나.”
 “나를요? 일없습니다.”
 적풍이 퉁명하게 말했다.
 그러자 삼 인 중 키가 작고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언제 보았다고. ㅤㅌㅞㅅ!”
 적풍이 투덜거리며 침을 뱉었다.
 나이로 보면 적풍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 자들이다. 그런데 초면부터 마치 상전을 대하듯 굽실거리고 들어오는 모양새가 영 적풍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가 많음에도 비굴하게 구는 것은 속셈이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들이 원하는 것을 짐작 못할 것도 없었다.
 적풍이 수타이의 머리를 가져와 천호장이 되면 그 아래서 백호장이라도 되어보려는 속셈일 것이다.
 “데려가거라.”
 적풍이 거절하자 사혼이 끼어들었다.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듭니다.”
 적풍이 말뚝에 걸어놓은 말고삐를 풀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도움이 될 거다. 내가 봐둔 사람들이다.”
 그 말에 적풍이 손을 멈추고 사혼을 돌아봤다.
 “사부님이요?”
 “그래. 물론 널 위해 준비한 사람들은 아니고, 날 위해 살펴온 사람들이다. 북방의 지리에 정통하고, 야인들의 풍습도 잘 아는 친구들이다. 물론··· 도검도 제법 쓰지.”
 “은밀히 사람을 준비하고 있다니··· 사부, 꿈이 크시군요.”
 “흐흐, 그럼 내가 족장의 늙은 스승으로 머물 줄 알았느냐?”
 “이거이거, 경쟁자가 한 명 더 생긴 건가?”
 “설마 네놈 천호장 이상을 바라는 거냐?”
 “뭐··· 기회가 닿으면 거부할 생각은 없지요.”
 적풍이 훌쩍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럼 너와 먼저 담판을 지어야겠구나.”
 “그 일은 돌아와서 결판을 내지요.”
 적풍이 대답을 하고는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들 가게.”
 사혼이 세 사람에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얼른 말에 올라 적풍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럇!”
 한순간 적풍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그를 태운 말이 쏜살같이 단웅족 촌락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두두두!
 늦은 아침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적풍이 단웅족 숙영지를 벗어났다.
 단웅족 사람들이 천막 앞으로 나와 멀어지는 적풍을 일행을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바라봤다.
 “어째 기분이 영 찝찝해··· 괜히 딸려 보냈나? 돌아와서는 저놈들이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든 단 말이야.”
 사혼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다가 문득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어라? 저 계집도 녀석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사혼이 족장 고웅타의 모전천막과 붙어 있는 흰색 천막을 바라봤다. 그 앞에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소녀가 서 있었다.
 단웅족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녀를 알고 있다. 고웅타는 아들이 없고 유일하게 고이령이라는 딸이 하나 있는데 천막의 앞의 소녀가 그녀였다.
 “흐흠··· 족장이 천호장을 내걸어서 생각보다 인심이 후하다 생각했더니 이제 보니 녀석을 사위로 삼을 생각인가? 하긴, 족 내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족장의 사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녀석이 과연 내 말을 들으려고 할까?”
 사혼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상관인가. 이도 저도 안 되면 모두 죽여 버리고 말지. 아무튼 흑사회를 재건하려면 이곳에서 힘을 길러내야 하니까.”
 그러다가 이젠 점으로 변한 적풍 일행을 보며 중얼거렸다.
 “참 알 수 없는 놈이야. 무림에 굴러다니는 삼류 호흡법을 천지밀법으로 속여 전해주고, 흔하디흔한 삼재검을 진천벽력검법으로 속여서 가르쳤을 뿐인데··· 둘 중 하나다. 무학의 천재든, 본신 내력을 숨기고 있든.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마찬가지야. 내 것이 아니라면······.”
 
 
 
 제2장 설루
 
 
 
 낯선 사람들이 어둠이 내린 마을로 들어섰다.
 많아야 서른 채를 넘지 않는 초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요하변의 작은 마을이었다.
 불청객들은 마을 외곽의 한 초가로 향했다.
 초가에서 구수한 연기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늦은 저녁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루야! 저녁은 아직 멀었느냐?”
 문득 방 안에서 늙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 되었어요. 가져갈게요.”
 사내의 말에 부엌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리더니 부엌문이 열리고 이십 세 전후의 여인이 밥상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부엌을 나선 여인이 밥상을 든 채 돌처럼 굳어지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인의 눈에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불청객이 보였던 것이다.
 “누, 누구세요?”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비친 불청객들의 얼굴은 처음 보는 자들의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마을에 살아서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든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그녀였다.
 “누가 왔느냐?”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방문이 열리며 늙수레한 초로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여인과 마찬가지로 불청객들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누, 누구시오?”
 여인과 같은 질문을 초로의 사내가 던졌다.
 “당신이 설찬이오?”
 그때까지 침묵을 지니고 있던 불청객 중 하나가 초로의 노인에게 물었다.
 순간 노인이 재빨리 밥상을 들고 있는 젊은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 앞을 가리듯 서며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설찬이오만··· 무슨 일로 나를?”
 노인 설찬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핏 불청객들의 손에 들린 도검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초옥 마당에 일진광풍이 부는 듯하더니 어느새 불청객 중 한 명이 노인 설찬의 목에 시퍼런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노인 설찬의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이자들이야말로 풍문에서나 듣던 바로 그 무림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자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무림이란 곳은 옛이야기처럼 듣기만 했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잘만 대답하면 당신과 당신의 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땐 너희 두 부녀는 죽는다.”
 “···무, 무엇을······?”
 설찬이 겁에 질려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러자 불청객이 슬쩍 시선을 돌려 설찬의 등 뒤에 있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당신 딸의 이름이 설루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좋아. 그럼 제대로 찾아왔군. 생각해 보니 당신보다는 당신 딸에게 묻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하겠군. 이리 나와봐라.”
 검을 든 사내가 설찬의 등 뒤에 서 있는 그의 딸 설루를 불렀다.
 그러자 여인이 겁을 먹은 표정을 하면서도 밥상을 내려놓고 아버지 옆으로 나섰다.
 “좋아, 제법 강단이 있군. 소문대로야. 천하일색에 재기를 겸비했다더니······.”
 사내의 눈이 훑듯이 설루의 몸을 쓸어내렸다. 순간 설루는 자신의 몸에 뱀이 기어가는 듯 소름 끼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설루의 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묻겠다. 구천이란 이름을 아느냐?”
 순간 설루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도리질을 했다.
 “모, 몰라요!”
 그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청객의 검이 움직였다.
 삭!
 칼날이 번뜩이자 설찬의 상투가 잘려 나갔다. 설찬은 몸이 벌벌 몸이 떨려 입을 열어 살려달라는 사정조차 하지 못했다.
 “경고는 한 번만 한다. 다음번엔 네 아비의 목이 떨어질 것이다. 난···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사람 죽이는 일이 특별한 일인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이제부턴 제대로 대답해라. 구천이란 아이를 아느냐?”
 사내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설루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떡였다.
 “알아요.”
 “좋아.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느냐?”
 “그건 정말 몰라요. 어디에 있는지 저도 알고 싶어요.”
 설루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니까. 그런데··· 듣자 하니 너와 그 아이가 혼약을 했다던데······?”
 “아이구, 그건 아닙니다. 그럴 새도 없이 떠나 버렸는걸요. 나도 그 아이가 듬직하니 마음에 들어 이 녀석과 짝을 지어줄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밤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습니다. 이후 그런 헛소문이 돌아 이 아이는 혼삿길도 막히고······.”
 설찬이 억울한 듯 설루 대신 대답했다.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혼인을 생각할 만큼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군?”
 사내가 되물었다.
 “천을 좋아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왜 천을 찾으시는 거죠?”
 설루가 입술을 지그시 물며 물었다.
 당돌하고 대범하다. 질문하던 사내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새삼스레 설루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설루는 그런 사내의 눈빛에 거부감이 들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질문은 내가 하는 거다. 넌 대답만 하면 돼. 그 아이가 떠난 이유를 정말 모르느냐?”
 사내가 칼처럼 날카로운 눈길로 설루의 눈을 보며 물었다. 한마디의 거짓도 용서치 않겠다는 기세였다.
 “천의 어머니가 떠나기를 원하셨어요.”
 “왜?”
 “그건 저도 잘······.”
 “혹, 그 아이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무슨······?”
 “골격이 기이하다든가, 혹은··· 간혹 흰 눈동자가 사라질 정도로 검은 안광을 드러낸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정말?”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설루가 얼른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이에요.”
 설루의 대답에 사내가 말없이 한동안 설루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검을 거두고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소득이 없구려.”
 그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오. 적어도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은 알았으니.”
 “하지만 몇 년이나 지난 일이오.”
 “어쨌든 그들 모자의 흔적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니 다행한 일 아니겠소?”
 “그렇기는 한데··· 가만! 이봐라, 혹 그 아이의 어머니 이름을 들었느냐?”
 “이름은 모르오. 다만 유씨 성을 쓴다는 것밖에는······.”
 설루 대신 아비 설찬이 얼른 대답했다. 어서 이들이 자신의 초가를 떠나길 바라는 표정으로.
 “유씨라. 그럼 정말 그녀일 확률이 높군.”
 “그렇구려. 하! 그렇다면 반드시 찾아야 하는데. 그녀가 정말 천의비문의 유하가 맞다면 그 아들은······.”
 “남쪽의 일이 급하다니 이곳에서 지체할 수는 없소. 대주께 보고하고 사람을 몇 북쪽으로 보내봅시다.”
 “그럽시다.”
 그 말을 끝으로 불청객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설찬이 설루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어서 들어가자.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구나. 구천이 녀석에게 특별한 내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지금에 와서 녀석을 찾는 자들이 나타날 줄은 몰랐구나.”
 “잘 지내고 있겠죠?”
 설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지경에도 그놈 걱정을 하는 거냐? 네 앞가림도 못하는 판국에······.”
 “아버지······.”
 “또 그놈이 네 서방이란 소리를 할 거면 그만두거라. 그깟 하룻밤 인연 따위······!”
 설찬이 화가 난 듯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설루가 마루에 내려놓았던 밥상을 들며 중얼거렸다.
 “온다고 했으니 반드시 돌아올 거야. 죽지 않았다면······.”
 
 밤이 깊어졌다. 불 밝힌 초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설루의 초옥 역시 불이 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불 꺼진 설루의 초가 앞에 갑자기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실로 오랜만이 아닌가! 이런 미녀를 본 것은. 궁주께서야 호천대에 있는 동안은 색탐을 금하라 하셨지만, 그야 뒤처리를 깨끗하게 하면 될 일, 진흙 속에 나뒹구는 보물을 보고도 줍지 않으면 어찌 천하의 구지마 기륜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내의 눈빛이 음흉하게 번뜩였다. 붉은 기운이 가득해 사람의 심장을 태워 버릴 듯한 안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구지마 기륜이라면 당대 무림에서 손꼽히는 마인 중 하나였다.
 천산마문과 더불어 천하이대마문으로 불리는 혈궁의 고수인 그는 손속이 독하고 심기가 음험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음행(淫行)을 즐기는 색마라는 사실이었다.
 오직 혈궁의 몇몇 수뇌만이 알고 있는 그의 음행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겁간한 여인은 반드시 죽였다. 이유는 자신의 행적을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음행을 알고 있는 혈궁의 수뇌들은 항상 그에게 특별한 주의를 주곤 했다. 그의 음행이 알려지면 혈궁이라 할지라도 그를 지켜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누추함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미모를 지닌 설루를 욕심내고 있었다.
 그 자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 그 임무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강하게 음심이 동한 구지마 기륜이 초가의 두 방 중 오른쪽 방에 시선을 주었다.
 “예쁘장한 계집의 신발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겠지? 후후, 이야기가 잘되면 거두고 싶은 계집이야. 한 번 즐기고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워.”
 기륜이 서슴없이 여인의 신발이 놓인 방 쪽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악!”
 날카로운 비명에 설찬이 눈을 떴다.
 “저리 가!”
 다시 들려오는 딸의 외침에 설찬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방을 나선 설찬이 마루 아래에 놓아둔 낫을 찾아들고 딸 설루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의 눈에 옷이 찢겨진 채 방 구석에 몰려 있는 설루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죽일 놈!”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향해 설찬이 온 힘을 다해 낫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 순간 설루를 위협하던 검은 옷의 사내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놈이?”
 설찬이 설루를 등으로 가리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자의 얼굴이 보였다.
 “늙은이가 제법 강단이 있군.”
 “다, 당신은······?”
 “참 보물 같은 딸을 두었어. 내게 주면 평생 호강시켜 주지.”
 “이런 개 같은 놈!”
 딸을 두고는 설찬도 두려움이 사라졌다.
 어떻게 키워온 딸인가. 아내가 죽은 후 오로지 딸이 크는 낙으로 살아온 설찬이다.
 고관대작은 아니라도 마음 착한 사위를 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인 설찬에게 이런 마귀 같은 음적은 개보다 못한 인간이다.
 “제길, 계집 하나 취하려다 이런 빌어먹을 욕을 듣는군. 너무 오랜만에 듣는 욕이라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네.”
 설루를 겁탈하려던 구지마 기륜이 오른손으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네 개밖에 없는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구지마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네 개뿐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물러가라! 이 음적!”
 설찬이 다시 소리쳤다. 그러자 구지마 기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고민할 게 없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평소에 하던 것을 하면 되니까!”
 한순간 환영처럼 설찬 앞으로 다가든 기륜이 손을 휘둘렀다.
 퍽!
 손에 든 낫을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설찬이 기륜의 권장을 맞고 허공에 떠오르더니 오른쪽 벽에 날아가 부딪혔다.
 “억!”
 설찬이 신음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런 설찬을 향해 기륜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기륜의 손에서 희미한 적색 기운이 일렁이더니 한순간에 설찬의 가슴을 후려쳤다.
 “악!”
 설찬의 입에서 재차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에 정신을 잃은 설찬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악적!”
 설루가 악을 쓰며 설찬이 놓친 낫을 주워 들고 기륜을 후려쳤다. 그러나 기륜 같은 고수가 일개 소녀의 낫질에 당할 리 없었다.
 기륜이 손을 교묘하게 틀어 낫을 든 설루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 운이 없구나. 네 애비가 조금만 현명했어도 네 애비도 살고 너도 호강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지. 아무튼 말이다, 마지막 가는 길은 황홀하게 보내주마. 흐흐.”
 기륜이 음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놔라! 이놈!”
 설루가 기륜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강호의 대마두인 기륜의 힘을 설루가 당할 수는 없었다.
 “나쁘지 않구나. 앙탈이라니. 흐흐흐, 이런 경우는 또 다른 재미가 있지.”
 기륜이 가볍게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설루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그녀의 침상에 내동댕이쳐졌다.
 “나에게야 반항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별스런 재미가 있으니까. 그러나 널 위해서는 반항하지 말거라. 고통스러울 테니 말이야.”
 기륜이 침상에 앉으며 말했다. 정말 설루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다.
 “간악한 놈!”
 “물론 난 그렇게 불려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지. 그리고 그게 기분 나쁘지도 않아. 내가 두렵다는 뜻이니까.”
 기륜이 설루의 저고리를 낚아채며 말했다.
 순식간에 설루의 흰 어깨가 드러났다. 어깨가 드러나자 설루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였다. 신비로울 지경의 아름다움이다.
 “이거··· 정말 보물이구나!”
 기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수많은 여인을 겁간한 기륜이지만 설루와 같은 소녀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라. 내게 복종한다면 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죽고 말겠다.”
 “안 되지!”
 기륜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번개 같은 기륜의 솜씨에 혀를 물고 자결하려던 설루의 아혈이 제압됐다.
 “으으!”
 “죽는 것은 일이 끝난 후에! 평생 널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뭐 하룻밤도 나쁘지는 않지.”
 기륜이 다시 설루의 옷자락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구지마 기륜이 막 설루의 치마고름을 풀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목덜미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놈의 모기가?”
 탁!
 기륜의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문 모기를 때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기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 건?”
 기륜이 모기를 때려잡은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있어야 할 모기는 없고 대신 실처럼 가는 은빛 침이 보였다.
 “웬 놈이냐?”
 기륜이 재빨리 몸을 돌리며 번개처럼 옆으로 움직였다.
 “음!”
 그런데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이던 기륜이 한순간 신음을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독(毒)!”
 기륜의 입에서 당혹스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고통스러울 텐데. 원하면 편하게 죽게 해줄 수도 있소.”
 나이 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륜이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백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누구냐?”
 기륜이 여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말해줄 수 없소.”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말이냐?”
 “호천대의 열두 개 조는 언제나 조심해야지. 그중에서도 구 조에 속한 자들은 범상한 자들이 아님을 알고 있소. 죽어가면서도 흔적을 남기는 자들이니까. 내가 정체를 밝히면 그댄 어떤 식으로든 나에 대한 단서를 남길 것이오.”
 여인의 말에 기륜의 눈빛이 번쩍였다.
 “호천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가?”
 “이골마족(異骨魔族)을 쫓는 자들이란 건 알고 있소.”
 백발의 여인이 대답했다.
 “그럼 이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 텐데?”
 “그렇다 한들 연약한 여인이 겁탈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대단한 자신감이군.”
 “호천대의 눈을 피할 만한 능력은 있소. 그런데··· 지금쯤이면 고통이 심할 텐데?”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손이 덜덜덜 떨렸다.
 “죽여라!”
 기륜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한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주면 고통 없이 보내주겠소.”
 “뭐냐?”
 “호천대를 이끄는 자, 묵안노의 정체가 뭐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
 “모른다라··· 그대조차도? 호천대 구 조의 고수인 그대조차도?”
 “끄윽··· 나라고 별수 있나. 아마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북두회의 일곱 회주밖에 없을 것이다. 우욱!”
 급기야 기륜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방바닥에 댔다.
 “좋소. 그건 믿어주지. 하지만 내 질문에 대답을 못 했으니 다른 질문 하나를 받아야 할 것 같소.”
 “뭐냐?”
 “호천대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요?”
 “끄으으··· 모, 모른다.”
 기륜이 힘겹게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알고 있소.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오. 아마 이 두 부녀의 입을 바닥까지 열었을 거요. 이들의 오장육부가 토해질 때까지 말이오. 그게 호천대가 일하는 방식이니까. 아니오?”
 “너··· 너······.”
 기륜이 백발 여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고통은 더 심해질 거요. 하지만 그대들이 지금껏 이골마족을 쫓으며 행한 악행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고통도 아니지.”
 “그들은··· 무림제일적······.”
 “무림제일적이 아니라 그대들 북두회의 두려움이겠지.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함구하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니오?”
 “흐으으··· 너도 이골마족이냐?”
 “그랬다면 그대가 알아봤겠지. 이따위 더러운 버릇에도 불구하고 혈궁주가 그대를 호천대에 넣은 것은 바로 그 눈, 이골마족을 알아보는 그 눈의 뛰어남 때문이니까.”
 “끄아악!”
 기륜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뜨렸다.
 “어디요? 다음 행선지가?”
 백발 여인이 차갑게 물었다.
 “남만 맹족의 땅······!”
 “그곳에 누가 있소?”
 “이골마족의 힘을 쓰는 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맹족의 눈에 띄었다는 ··· 끄어억!”
 기륜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백발 여인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팟!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은침이 미세한 파공음을 남기고 기륜의 정수리에 박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기륜의 신음과 움직임이 멈췄다.
 “주··· 죽었나요?”
 설루가 두려운 얼굴로 물었다.
 “죽었다. 그도··· 네 아버지도!”
 그제야 설루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방바닥을 기어 자신의 아버지 설찬에게로 다가갔다. 백발 여인의 말대로 설찬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아버지!”
 설루가 설찬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런 설루를 보며 백발 여인이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의 동료들이 다시 올 거다.”
 “그들은 대체 누구죠?”
 설루가 원한이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그보다 넌 그 구천이란 아이와 어떤 사이냐?”
 백발 여인의 질문에 설루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당신도 천을 찾나요?”
 “그래.”
 “도대체 왜 모두들 그를 찾는 거죠?”
 “그 아이가 무척 특별한 아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솔직히 내가 찾는 사람은 그 아이가 아니다. 난 그 아이의 어미를 찾고 있다.”
 “천의 어머니를요?”
 “그래.”
 “왜죠?”
 “내 조카니까. 지금껏 보살피지 않았던······.”
 “정말인가요?”
 설루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하다.
 “당장에야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나와 함께 다니다 보면 알 수 있을 게다. 내 말이 진실이란 것을!”
 “설마 제게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어째서······?”
 설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생면부지의 여인이 왜 자신을 구하고 또 자신을 데려가려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네가 그 아이와 혼약을 했으니까. 그럼 결국 너도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겠느냐? 비록··· 가문이 그들 모자를 버렸지만 말이다.”
 여인의 눈에서 설루는 진심을 읽었다. 그래서 그녀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날 설루는 백발 여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산에 묻고 마을을 떠났다.
 그렇다고 유취려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백발의 여인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를 따라가는 것 말고 설루가 택할 다른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구천, 아니, 적풍을 알고 있는 여인이니 결국 그녀를 따라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적풍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내심 하고 있었다.
 
 ***
 
 초원이 며칠 이어지더니 듬성듬성 낮은 산들이 나타났다.
 급기야 눈을 가리는 숲과 하늘에 닿을 듯한 봉우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흥안령이다.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산으로 들어서는 서쪽 길, 남쪽 초원으로 내려가는 길, 북쪽 혹한의 설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어디로 가시겠소?”
 이산해가 물었다.
 나이는 서른한둘 정도, 야인의 피를 이은 자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머리에 제법 먹물도 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야인 땅에 산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마음속에 야심이 있거나 혹은 적풍처럼 도망자거나.
 “어느 쪽으로 가면 좋겠소?”
 적풍이 반문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그런 일을 조언하라고 당신을 데려온 것이 아니냐는 듯했다.
 이산해가 바로 대답했다.
 “길을 정하기 전에 일단 근방 마을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겠소.”
 “마을을?”
 “그렇소.”
 “이유는?”
 “어디로 도주를 하든 이쯤에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오. 약탈을 하든 금자를 주고 사든 혹은··· 훔치든 말이오. 어디서든 그런 일이 있었다면 금세 근방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해주겠소? 후환을 두려워할 텐데.”
 적풍이 못미더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산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말해줄 거요. 그들도 흑수 강변의 싸움에 대해 들었을 것이니, 이제 이 흥안령 동쪽 땅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 것이오. 본래 이 땅의 사람들은 강자에 대해서 본능적인 복종심이 있소.”
 “그럴듯하군. 좋소, 그리합시다.”
 적풍이 허락하자 이산해 곁에 있던 무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마침 근방에 아는 곳이 있소이다.”
 무투는 단웅족 출신은 아니지만 야인의 피를 이은 자다. 단웅족이 처음 오르도의 수타이를 이긴 이후 단웅족에 합류했는데, 지난 흑수 강변의 싸움에서 몽골족 여덟을 벤 용맹한 자였다.
 야인 출신이므로 근방의 지리에도 밝았다.
 “앞장서시오.”
 
 동행한 지 닷새, 일행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적풍도 적풍이지만 그를 따라온 삼 인 역시 서로 친분이 돈독한 사이가 아닌 듯 보였다.
 이들이 적풍과 동행하게 된 인연은 오직 하나, 삼보노 때문이었다.
 삼보노는 이들 삼 인과 모두 친분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이 단웅족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삼보노의 부탁만으로 적풍을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이들 역시 적풍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직감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은연중에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가 있었고, 몽골 족장 셋을 무너뜨린 용맹함, 그리고 간혹 드러나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성정은 누가 봐도 지배자의 그것이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다가온 권력도 있었다.
 단웅족의 족장 고웅타가 약속한 천호장. 천호장만 되면 이 젊은 용사의 앞날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천호장이란 신분은 야인의 땅에서 스스로 독립적인 일가를 이룬다는 의미를 가진다. 만약 그리되면 그들도 적풍 아래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적풍을 따라온 근본적인 이유였다.
 “내가 다녀오겠소.”
 마을이 나타나자 무투가 홀로 말을 몰아 마을로 향했다. 함께 가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경계심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무투는 마을에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왔다.
 “하루 전에 백호장 골도후와 그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하오.”
 “수타이의 행방은?”
 적풍이 물었다.
 “역시 서쪽 산길을 택했소. 그런데······.”
 “문제가 있소?”
 이번에는 이산해가 물었다.
 “수타이를 따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오.”
 “이상한 일이군. 싸움에 패해 동료를 버리고 도주한 자를 누가······?”
 초원에서 수하를 버린 우두머리는 설 자리가 없다. 지금쯤 수타이 일행의 숫자는 열이 넘어서는 안 된다.
 “이유야 알 수 없으나 족히 오십은 넘는다고 하오.”
 “오십이라. 그럼 쉽지 않을 수도 있겠군.”
 이산해가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앞서간 백호장 골도후와 다른 백호장들의 추격대도 오십이 넘지 않는다. 싸움을 한다면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나름대로 신망을 얻었던 모양이군.”
 적풍이 중얼거렸다.
 “하긴 예부터 수타이가 다른 부족에게는 패악을 부렸으나 자신의 수하들에겐 아낌이 없었소.”
 무투가 대답했다.
 “갑시다. 아무튼 그의 목은 필요하니까.”
 적풍이 말을 몰아 산속으로 이어진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삼 인도 서둘러 적풍의 뒤를 따랐다.
 
 ***
 
 오르도의 족장 수타이와 조우한 것은 삼 일 뒤였다.
 그는 노련한 자였다.
 추격자의 숫자를 확인한 후 싸울 만한 숫자라고 판단한 수타이는 흥안령 깊은 계곡에서 추격자들을 기다렸다.
 골도후는 단웅족의 백호장 중에서도 매우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급하게 수타이를 잡으려고 진격하지 않았다. 매복에 대한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골도후의 신중함으로 애초에 준비했던 매복이 소용없어진 것을 안 수타이는 결국 수하들을 자신 곁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적이 모두 모습을 드러낸 후에야 골도후가 진격했다.
 양쪽의 숫자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으므로 싸움은 팽팽하게 진행됐다.
 서로 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시작으로 양측이 서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초원에서라면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있을 테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 안에선 속임수를 쓸 수도 없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면 결국 도검을 들고 생사결을 벌일 것이고, 그 싸움은 한쪽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계곡을 가르는 화살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순간 멀리 계곡 안쪽에 도사리고 있던 수타이가 검을 높이 들고 천둥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추격자의 숫자를 가늠한 수타이가 전면전을 벌여도 패하지 않을 거란 계산이 선 모양이었다.
 수타이의 명이 떨어지자 그의 수하들이 말을 몰아 계곡 앞쪽을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오오옷!”
 수타이의 수하들이 전의를 돋우기 위해 괴이한 소리를 질러댔다.
 “수타이가 저기 있다. 가서 그의 목을 잘라 늑대의 밥이 되게 하라!”
 골도후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러자 단웅족의 용사들도 소리를 지르며 적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르도족 최후의 전사들과 단웅족 추격대 간에 치열한 생사전이 벌어졌다.
 
 적풍은 말 위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허리를 숙인 채 산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웅족과 오르도족이 질러대는 요란한 소리가 산 위까지 들려왔다.
 “지금 가지 않으면 놈의 머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할 수도 있소.”
 무투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열하던 싸움이 조금씩 단웅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추격에 참여한 단웅족의 용사들은 하나같이 부족에서 고르고 고른 용맹한 자들이었다.
 반면 수타이의 곁을 지키던 자들은 비록 용맹하기는 하나 싸움에서 패한 이후 쉴 틈 없이 도주해서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급격하게 지치기 시작했다.
 “계곡 뒤는 어떻게 보시오?”
 적풍이 무투에게 물었다.
 “워낙 가팔라서······.”
 “말을 타고 이동할 수는 있겠소?”
 “설마 뒤를 치시려오?”
 무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아니라 수타이가 너무 쉽게 밀려서 말이오.”
 “······?”
 무투가 멀뚱한 표정으로 적풍을 바라보는데 곁에 있던 이산해가 고개를 끄떡였다.
 “옳은 말이오. 수타이는 음흉한 자요.”
 “산 위에 매복이 있을 거란 말인 것 같은데 그의 수하들은 얼추 숫자가 맞지 않소?”
 무투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되물었다.
 “우리가 모르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소.”
 “너무 걱정이 많은 것 아니오? 그랬다가 늦으면······!”
 무투가 중간에 입을 닫았다.
 “오오옷!”
 갑자기 계곡의 뒤편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일행의 눈에 절벽만큼이나 가파른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이십여 기의 사람과 말이 보였다.
 온통 검은 천으로 머리와 몸을 휘감은 자들은 마치 평지처럼 말을 몰아 가파른 산비탈을 달려 내려왔다.
 “저자들은!”
 이산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설마 혈랑대요?”
 무투가 두려운 얼굴로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이산해가 고개를 끄떡였다.
 “좋지 않구나!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수타이가 혈랑대를······?”
 무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대막에서 돌아올 때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을 것이오. 어쩌면 수타이가 그렇게 쉽게 몽골족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도 저들의 도움 때문이었을 수 있소.”
 “제길, 그렇다면 정말 쉽지 않겠구려.”
 무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타난 자들이 정말 혈랑대라면 무투가 걱정할 만한 존재였다. 그들은 광풍사와 더불어 대막의 이대마적집단으로 꼽히는 자들이었다.
 숫자는 광풍사에 비해 삼분지 일도 되지 않지만, 그 잔혹함과 귀신같은 칼솜씨로 인해 오히려 광풍사보다 무서운 자들로 여겨졌다.
 그런 자들이 나타났다면 단웅족의 용사들이라 해도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걱정대로 전세는 금세 역전됐다.
 단 스무 명일 뿐이지만 혈랑대의 마적들은 금세 전장을 장악했다. 단웅족의 용사들이 한순간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골도후를 따라 수타이 추격에 나선 백호장 중 한 명인 도골이 혈랑대의 마적 두목으로 보이는 자에게 채 십여 합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죽는 순간부터 단웅족의 전의는 완전히 상실됐다.
 그나마 용맹하고 노련한 골도후의 지휘로 전멸은 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쩌겠소?”
 무투가 적풍에게 물었다.
 그러자 적풍이 대답했다.
 “같은 방법으로 수타이의 목을 베겠소.”
 “같은 방법이라면······?”
 무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적풍이 산 능선을 따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설마 혈랑대가 내려간 곳으로 내려가겠다는 건가?”
 무투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를 믿어봅시다. 사실 기습을 하기엔 가장 적당한 곳이기는 하오. 갑시다!”
 이산해가 서둘러 적풍을 따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고립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무투가 소리쳤다.
 “무서우면 이곳에 남으시오.”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던 또 다른 동행자 흑웅이 불쑥 말하고는 몸을 낮춰 말 등에 바싹 엎드린 채 빠른 속도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흥, 누가 무섭다고 했나? 그냥··· 제길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 핫!”
 무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서간 자들의 뒤를 따랐다.
 
 적풍의 생각은 간단했다. 적의 가장 약한 곳을 찔러 수타이의 목을 베면 싸움은 끝이라는 생각이었다.
 수타이가 죽으면 혈랑대도 이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갑자기 말이 걸음을 멈춘다. 눈앞에 가파르게 기울어진 산비탈이 펼쳐졌다.
 “가자!”
 적풍이 매몰차게 말을 산비탈로 몰아댔다. 그러자 그를 태운 말이 한참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두두!
 적풍의 뒤쪽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이산해 등이 적풍을 따라 산비탈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호옷!”
 문득 등 뒤에서 무투의 외침이 들린다. 야인 특유의 전의를 돋우는 외침이다.
 그 순간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는 수타이의 얼굴이 보였다.
 의혹이 가득 찬 얼굴이다. 적풍 일행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혈랑대의 후군으로 보기에는 차림새가 달랐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저 험한 산비탈을 타고 전장으로 내려올 리도 없었다.
 “가봐!”
 수타이가 곁에 있던 수하들에게 턱짓을 하며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수하 둘이 적풍이 달려 내려오는 산비탈을 향해 말을 몰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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