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고고학자인데 땅을 안 팜 [E]

고고학자인데 땅을 안 팜 1

2019.09.18 조회 2,838 추천 23


 고고학자인데 땅을 안 팜 1
 
 1. 새로운 세계
 
 
 휘이이잉.
 주위는 하얗다.
 천지가 눈과 얼음으로 덮였다.
 바다마저 하얗게 얼어붙고 설빙이 떠다니는 이곳은 남극 대륙 로스해에 있는 맥머도 기지. 남극 대륙에 자리한 수많은 탐사 및 연구기지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미국에서 운영하는 이곳 맥머도 기지는 100여 동의 건물에 자체 원자력 발전소까지 세워져 있는 소규모 도시다. 여름철에는 상주인구만 1천 명을 훌쩍 넘기는 이곳에 때아닌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루카스 교수님!”
 한 미국인 기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시작했다.
 맥머도 기지의 프레스 센터로 명명된 이곳 회의실에는 수십 명의 기자가 모여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앞쪽 단상에는 수십 년을 고생한 듯한 나이 지긋한 미국인 남자가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었다.
 “네, 질문 하세요.”
 루카스 교수가 기력이 쇠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기의 대발견이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모두가 답변을 기다리는 가운데 루카스 교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문명이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생태계라 할 수도 있고요.”
 “새로운 문명이라면 외계 문명입니까?”
 “아닙니다. 지구의 문명이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흐음, 엘프라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요? 엘프가 건설한 거대도시, 고블린과 트롤이 살아 움직이는 세상. 바로 그런 곳입니다.”
 “판타지 세계!”
 기자들이 신음을 터트렸다.
 기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것은 외계 문명 발견에 버금가는 대발견이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지구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특종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남극에 판타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판타지 세계로 인도하는 입구가 존재하는 거죠. 구체적인 장소는 기밀입니다. 당국의 발표를 기다리세요.”
 텁수룩한 수염이 덮인 루카스 교수가 주름진 노안을 번뜩였다.
 일 년 전, 미국의 고고학자 루카스 교수는 일본의 요시다 교수, 한국의 노광국 교수와 함께 남극 대륙에서 새로운 문명을 발견하기 위한 탐사를 시작했다.
 세 사람은 불과 며칠 만에 소식이 끊어지고 실종되었다. 이후 그들 셋은 남극의 오지에서 이미 죽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사흘 전, 실종되었던 미국의 고고학자 루카스 교수가 살아서 발견됐다. 무려 일 년이나 행방불명이었고 모두가 포기한 상태였기에 그 충격은 매우 컸다.
 그리고 미국 당국의 비호 아래 생존 기자회견을 이곳 맥머도 남극 기지에서 열게 된 것이다.
 루카스 교수의 발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다시 기자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럼 드워프나 오크도 존재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화나 전설로 간주하던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거죠.”
 “그곳은 이 세상과 같은 환경입니까?”
 “글쎄요. 조금 다르죠. 그곳은 마나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물질과 에너지로 설명되는 곳이지만 그곳은 마나가 지배하는 세상이죠.”
 루카스 교수의 대답에 장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직 뭐가 뭔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탓에 대부분 기자는 기사를 작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나가 뭡니까?”
 “글쎄요. 기(氣)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신력, 초능력 이런 것들이 바로 마나의 한 단면이죠.”
 “그럼 신화 속의 마법사가 존재합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법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자들의 의문이 점점 증폭됐다.
 루카스 교수가 손짓하자 한 보안요원이 낡은 가방을 가져왔다.
 그는 가방을 열고 내부에서 주먹 크기의 돌 하나를 꺼냈다.
 돌은 투명했고 미미한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얼핏 보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루카스 교수는 돌을 바로 앞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보안요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보안요원이 작은 화분을 가져왔다. 그 화분에는 시들어서 말라비틀어진 풀이 담겨 있었다.
 루카스 교수는 작은 돌과 화분을 탁자에 올린 다음 입을 열었다.
 “이 돌은 마나가 스며든 마나석입니다. 뭐랄까, 생명의 기운이 담겨 있다고 설명하면 되려나요? 지금부터 마나석의 효능을 살펴보기로 하죠.”
 루카스 교수가 마나석을 들어 작은 화분에 심어진 풀 옆에 두었다.
 하나.
 둘.
 대략 십여 초가 흘렀을까.
 말라 비틀어진 풀에 생기가 돌더니 마치 방금 물을 준 것처럼 파릇파릇하게 변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놀란 기자들이 물었다.
 “마나의 효용이죠. 마나석에서 풀로 마나가 전달된 겁니다. 마나의 이런 효능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나는 피로한 사람의 기운을 회복시켜주죠. 매우 다양한 효능이 있지만 오늘은 이 정도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들의 추가 질문이 이어졌으나 루카스 교수는 사실상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소란이 일자 당국은 루카스 교수의 건강을 염려로 오늘 기자회견을 여기서 끝낸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기자에 둘러싸인 루카스 교수를 보안요원이 호위하며 회견은 끝이 났다.
 손을 흔들며 회견장을 벗어나는 루카스 교수를 향해 가까스로 기자를 뚫고 들어온 한 여인이 소리쳤다.
 “루카스 교수님!”
 하얀색의 두꺼운 털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십 대 중반의 한국인으로 다급하게 루카스 교수의 앞길을 막아섰다.
 보안요원이 그녀를 제지하려는 찰나 여인이 물었다.
 “노광국 교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루카스 교수가 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네는 누군가?”
 “노광국 교수의 제자였던 정세희입니다. 제 지도교수가 노광국 교수입니다. 한국대학교에서 고고학 박사를 받았고요.”
 루카스 교수가 그녀의 안면을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노광국은 판타지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했어. 요시다도 마찬가지고. 그곳에서 죽었지.”
 여인 정세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루카스 교수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떠나려던 루카스 교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그녀에게 손짓했다.
 “날 따라오게. 노광국 교수의 유품 몇 점을 가져왔어. 그것을 당신에게 주겠네.”
 루카스 교수의 휠체어를 정세희가 뒤따랐다.
 
 
 **
 
 
 대략 이십여 명이 모여 있는 멀티미디어 강의실.
 앞쪽 화이트보드를 채운 스크린에는 루카스 교수의 기자회견 장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의실 맨 뒤쪽에 다른 학생과 달리 군복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지겨운 표정으로 연신 하품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으아, 오늘 제대했더니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청년의 이름은 손대산이었다.
 그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이래저래 2년, 지금이 12월이니 정상이라면 내년에 대학교 4학년을 준비할 때다.
 오늘 오전에 제대하자마자 그는 유일한 친구를 찾아 이곳 한국대학교에 들렀다.
 군복을 입은 채 민간인 신분으로 처음 발이 닿은 곳이 이곳인 이유는 그가 고아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제대해도 갈 곳이 없었다.
 당장 오늘 밤부터 잘 곳이 없었다. 일단 친구에게 빌붙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라면 고등학교 친구인 권영재뿐이다.
 권영재는 바로 이곳 한국대학교 고고학과를 다녔다. 이 학교 학생이 아닌 손대산이 지금 이곳 멀티미디어 강의실에서 기록 영상을 보고 있는 이유였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영상을 시청하던 권영재가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적응이 안 돼?”
 “내가 오전까지만 해도 몸으로 굴렀잖냐? 갑자기 머리 쓰는 학교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거잖아?”
 “그래도 잘 들어봐. 꽤 흥미로워.”
 “짜식, 흥미롭긴. 잠만 온다.”
 하품하며 고개를 책상 면에 들이대는 그를 보며 권영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권영재는 군복차림의 그를 보면서 미안한 생각을 가졌다. 제대하자마자 학교 강의실, 그것도 세미나 시간에 불러들인 것이 무리였나?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이 이 세미나를 빠질 수 없는 상황에서 갈 곳 없는 친구를 추운 밖에서 마냥 기다리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너도 예전에 저런 것 좋아했잖아?”
 “이젠 관심 없어. 군에서 고민해보니 그냥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는 게 답이더라.”
 손대산이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둘이서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영상이 끝났다.
 강의실 내부에 불이 들어오고 앞쪽 단상에 한 여인이 올라왔다. 오뚝한 이목구비에 갸름한 얼굴, 늘씬한 몸매를 가진 미인이다. 방금 화면에 등장했던 정세희였다.
 “흠, 그래도 교수님이 예쁘니까 잠은 확 달아나네.”
 손대산이 갑자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봤다.
 권영재가 그 모습에 쿡쿡대며 웃었다.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이 영상은 3년 전, 루카스 교수가 돌아와 처음 진행했던 공식 기자회견 장면입니다. 놀랍게도 이후 3년간 단 한 번도 루카스 교수는 공식 석상에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발언했던 판타지 세계 역시 현재는 묻혀버린 상태이고요.”
 정세희 교수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대학교. 인재가 모인다는 국내 최고의 명문 대학이다.
 한국대학교 고고학과 노광국 교수의 제자였던 그녀는 노광국 교수가 남극으로 떠나기 직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노광국 교수가 자리를 비운 동안 노 교수의 연구를 계속 수행하며 자리를 지켰다. 노광국 교수의 사망이 확실해지자 그녀는 뒤를 이어 교수로 임용됐다. 현재 전임강사를 거쳐 한국대학교 고고학과 조교수 신분이었다.
 20대 후반의 여자 교수, 그것도 외모가 꽤 매력적인 교수란 점에서 그녀는 학교에서도 유명한 인사였다.
 “당시 학계에서는 이 회견의 진실 여부에 대해 말이 많았었죠. 이후 잠잠하던 학계에 다시 불이 지펴진 것은 미국 루카스 교수 측에서 대규모로 탐사대를 조직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움직임 뒤에는 세계적인 기업이 비밀리에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그 판타지 세계는 우리 노광국 교수님의 마지막 유작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부랴부랴 한국대에서도 탐사대가 조직된 겁니다.”
 정세희 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 내를 울렸다.
 손대산은 그녀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교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군에서 굳어진 머리가 돌아갈 리 없는 데다 그는 딱히 공부를 즐기는 학생도 아니었다. 학교 역시 이곳 한국대가 아닌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 소속이다.
 “이번 탐사를 자원한 여러분은 모두 축복받은 겁니다. 탐사 결과에 따라 여러분은 새로운 분야의 리더로 자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대단히 위험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도 아실 겁니다. 어쨌든 남극 탐사에 참여하게 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강의를 듣는 모두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탐사대는 내일 낮에 출발합니다. 오늘 마무리 준비를 완료하고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겁게 보내기 바랍니다. 앞으로 3개월간 여러분에게 고생문이 열릴 테니까요.”
 정세희 교수가 마무리 인사를 했다.
 학생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내일 남극으로 떠날 탐사대원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전달사항을 받고 가져갈 물품을 점검하기 위해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 강의실에서 유일한 외부인인 손대산은 환호하는 학생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자신도 한때는 고고학에 빠져 미친 듯 관련 책을 탐독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외국의 선사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었다. 하지만 그런 패기는 군에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제대한 오늘부터는 공무원 고시가 답이었다. 계속 뜬구름 잡는 고고학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도 삼류 지방대 출신인 자신의 경우, 이 인문과학 분야에서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눈에 정면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친구 권영재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야 그는 친구가 오늘 왜 이곳에 자신을 부른지 알 것 같았다. 내일 이 땅을 떠나 남극 탐사에 참여하는 친구는 오늘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 단 하루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것이었겠지.
 “자식, 드디어 유적 탐사를 떠나는구나. 부러워 죽겠네.”
 손대산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2. 신비의 다이어리 (1)
 
 
 세미나가 끝나고 참여 학생들은 강의실 구석에 모여 가져갈 물품을 점검했다.
 탐사대 차원에서 필요한 물품으로 각종 탐사 장비, 의료품을 비롯한 식량이 준비됐다. 개인 차원에 가져갈 물품에는 현지에서 입어야 할 옷을 비롯하여 각종 개인 물건이 있었다. 그 대부분을 오늘 이곳에서 확인하며 짐을 꾸렸다.
 손대산은 권영재의 뒤를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짐을 꾸리는 것을 돕고 싶었지만 다른 학생들의 눈이 낯설어서 그만두었다.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앞장서서 학생들을 통솔했다.
 아침까지 군부대에서 지냈던 손대산에게 다소 낯선 풍경이었다.
 멀리서 학생들의 준비를 지켜보던 정세희 교수가 이쪽으로 손짓했다.
 “영재야!”
 “네! 교수님.”
 권영재가 교수의 부름을 받고 곧바로 뛰어갔다. 손대산 역시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세희 교수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영재, 넌 내 연구실로 가서 날 좀 도와줘.”
 “넵, 알겠습니다.”
 권영재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 후 그녀를 따라갔다.
 손대산 역시 멀뚱거리다가 친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을 살폈다.
 그는 권영재가 정세희 교수에게 꽤 신임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4학년에 올라가는 권영재는 대학원생을 제외하면 가장 고참이다. 그렇더라도 교수가 이름을 알고 부탁할 정도면 대단한 것이다.
 바로 뒤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이를 눈치챈 정세희 교수가 물었다.
 “누구지? 우리 학교 학생이야?”
 그가 입은 군복이 이상했나 보다.
 곧장 권영재가 소개했다.
 “아, 제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오늘 제대했고요. 학교는 대화대학교 응용고고학과입니다. 저를 만나러 왔어요.”
 손대산은 정세희 교수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인사했다.
 “영재의 친구 손대산입니다.”
 “손대산? 아, 반가워요.”
 손대산은 정세희 교수가 웃으며 대하는 것을 보고는 한시름 놓았다.
 권영재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자식이 오늘 제대했거든요, 내일 떠나면 못 볼 테니까 오늘 불렀어요. 얼굴이라도 보려고요.”
 “방해되어서 죄송합니다.”
 손대산이 깍듯하게 인사하자 정세희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그러잖아도 손이 부족했는데 잘됐네요.”
 “저도 고고학 좋아했어요.”
 “그래요?”
 손대산은 정세희 교수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자 기분이 좋았다.
 그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를 열심히 따라갔다.
 손대산이 고고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책에서 이집트 피라미드 발굴이나 트로이 유적 발굴 일대기를 읽으면서 꿈을 키웠다. 어쩌다 본 할리우드 영화 인디애나 존스는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보육원 출신인 그에게 꿈은 꿈일 뿐이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은 꿈을 가진 권영재를 만났다. 그와 권영재가 절친이 된 가장 큰 이유도 아마 공통 관심사인 고고학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권영재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는 거다. 전교권을 넘나들던 권영재에 비해 그는 중간 정도밖에 못 했다. 부모가 없어 학원이라고는 다닐 수 없었던 그로서는 그것이 한계였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길이 달라졌다. 권영재는 최고 대학인 한국대학교에 입학했고 그는 지방대학에 갔다. 하지만 전공은 비슷했다. 권영재는 고고학과, 그는 응용고고학과.
 고고학과가 순수 고고학을 연구하는 곳이라면 응용고고학과는 고고학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학과였다. 한마디로 취업에 더 특화된 학과라 하겠다.
 솔직히 그것도 말뿐이다. 지방대 출신으로 고고학 전공을 살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알게 됐다. 고아라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군대를 자청해서 간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학교 다니기 마저 쉽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군대에서는 굶지 않으니까.
 군대를 다녀온 오늘, 그는 대학은 졸업장만 받기로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정세희 교수의 연구실은 매우 좁았다.
 창가에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사방의 벽은 모두 책장과 책꽂이가 병풍을 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랄까.
 손대산은 연구실에 들어서는 순간 책에 압사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역시 한국대학교 교수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게다가 내일 탐사를 떠날 예정이다 보니 책상 위에는 각종 필요 물건이 널려 있었다.
 정세희 교수가 연구실에 들어선 다음 두 사람에게 책상 위를 가리켰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은 내일 모두 가져갈 거야. 저기 박스 보이지? 저 박스에 차곡차곡 넣어주면 돼. 정리한 박스는 다시 멀티미디어 강의실로 가져가. 거기에 내일 보낼 물건과 같이 쌓아두면 돼.”
 손대산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권영재와 함께 박스를 정리했다.
 책상 위에는 나침반과 남극 지도를 비롯하여 각종 책과 노트, 준비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비품이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도우며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손대산의 시선이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조약돌에 머물렀다.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투명한 돌멩이였다. 자세히 보니 연한 노란빛을 띠었다.
 그가 신기한 표정으로 돌멩이를 들여다보자 권영재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거 마나석이야.”
 “마나석?”
 “조금 전에 영상에 나왔었잖아?”
 “아!”
 영상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관심을 본 정세희 교수가 설명했다.
 “그거 노광국 교수님 유품이야. 루카스 교수가 전해준 몇 안 되는 유품에 포함된 거지. 마나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면 진노랑색을 띤다고 해. 지금은 거의 투명한 것을 보면 내부에 있던 마나가 거의 소진된 거야. 마나석도 내일 갖고 갈 거야. 저기 있는 다른 유품도.”
 손대산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다른 유품을 슬쩍 보고는 마나석을 조심해서 만져봤다. 매끈매끈한 돌 표면이 느껴졌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나석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자신에게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놀란 그는 황급히 손을 뗐다.
 정세희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나석의 효능은 아직 신비에 가려 있어. 미국에서는 꽤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효능이 밝혀졌다고도 하고. 우리도 연구해보려 했지만 마나석이 워낙 귀해서······.”
 말을 하는 도중에 정세희 교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세희 교수가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휴대폰을 받았다.
 “정세희입니다.”
 전화를 받는 정세희 교수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지금 서류가 필요하다고요? 제가 내일 남극으로 떠나는 것은 아시죠?”
 뭔가 행정적인 문제가 엉킨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금 그러시면······.”
 한참 전화로 투덜거리던 그녀가 휴대폰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클리어파일 뭉치를 꺼냈다.
 “대학 본부에서 서류 미비로 자꾸 시비를 걸어오네. 지금 가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아, 영재는 나를 따라서 같이 가자. 그리고······.”
 정세희 교수가 손대산을 바라봤다.
 “대산이라고 했지?”
 “네. 손대산.”
 손대산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자 기뻤다.
 “잠시 영재 좀 빌려 갈게. 여기에서 기다려 줄래?”
 “네. 알겠습니다.”
 물론 싫고 말고 따질 일이 아니었다.
 정세희 교수가 급하게 연구실을 나가고 권영재 역시 황급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손대산은 다시 마나석을 들여다보며 멀뚱거렸다.
 느낌이 이상했다. 마나석과 자신이 끈끈하게 연결된 기분이었다. 마나라고 했던가? 물론 그는 아직 마나가 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특이했다. 손을 댄 순간 뭔가 에너지가 충전된 기분이랄까.
 기다리는 동안 그는 책상 위의 물건을 박스에 정리하기로 했다.
 책과 각종 비품을 넣다 보니 정세희 교수가 노광국 교수의 유품이라고 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맨 위쪽에는 낡은 청색 표지의 다이어리가 놓여 있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다이어리였다. 거의 너덜너덜해진 표지 아래에 노광국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손을 뻗어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손님맞이용 의자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여기에 남극 탐사 기록을 남긴다. 노광국”
 그는 첫 페이지에 적힌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3년 전 남극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노광국 교수가 남긴 일기장이었다. 아마 이 일기장을 바탕으로 내일부터 남극 탐사가 진행될 것으로 추측됐다.
 첫 페이지에 적힌 글은 노광국 교수가 남극 도착 첫날에 적은 간략한 소감이었다. 글을 쓸 때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 종이 표면의 얼룩이 심했다. 글씨 또한 날림이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손대산은 재빠르게 다이어리를 쓱 훑었다. 안타깝게도 다이어리 뒷면은 절반가량 뜯겨 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뜯어진 부분이 매끈한 것으로 보아 예리한 칼 같은 것으로 도려낸 모양이었다.
 “이건 좀 아쉬운데? 전부 다 있었으면 탐사에 무척 도움이 되었을 텐데.”
 물론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남극 탐사는 그와 무관했다. 그와의 접점은 친구인 권영재가 관련된 일이란 것밖에 없었다.
 대충 다이어리를 살핀 그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뜯겨 나간 페이지가 끝나고 마지막 장에 노광국이란 큰 글씨의 서명이 보였다.
 손대산은 흥미를 잃고 다이어리를 덮으려 했다.
 순간 다이어리에서 그의 눈을 의심케 하는 변화가 일었다.
 서명이 적힌 마지막 장, 하얀 백지 위에 큼지막한 글자가 새겨졌다.
 
 *
 
 드디어 인연이 닿는 자를 만났구나.
 
 *
 
 “헉!”
 놀란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읽자마자 다이어리의 흰 백지에 새겨졌던 글자가 마치 공중에 물감이 퍼지듯 천천히 흩날리며 조각나서 사라졌다.
 상식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에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다이어리를 요리조리 훑어봤다. 겉보기에 낡은 것을 제외하면 평범했다.
 찜찜한 기분이 들어 다이어리를 덮으려는 순간 다시 백지에 글이 새겨졌다.
 
 *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삶을 살고 싶으냐? 그렇다면 내가 그 힘을 주마.
 
 *
 
 손대산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현상이지?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게 어찌 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지에 적혔던 글씨가 사라지고 새로운 글이 새겨졌다.
 
 *
 
 나는 노광국이다. 한국대학교 교수. 남극의 판타지 세계를 탐험했다.
 
 *
 
 손대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현상이 많다. 그런 현상을 인터넷에서 접했을 때 거짓이라고 일축하거나 자기 일이 아니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벌어지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시해야 하나? 내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두려움 속에서도 일말의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둘 중 어느 것이 이기느냐의 문제다. 두려움과 호기심. 혈기왕성한, 그것도 방금 제대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호기심이 더 컸다.
 그는 뾰족한 비명과 함께 물었다.
 “노광국 교수는 3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다이어리에 금방 답변이 적혔다.
 
 *
 
 내가 죽었다고? 흠, 세상 관점에선 죽은 게 맞긴 하지. 난 지금 다이어리에 봉인되어 있을 따름이다. 마법에 의해서.
 
 *
 
 손대산은 세차게 머리를 한차례 휘저었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정말 노광국 교수가 맞나요?”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금방 자신이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다이어리의 인물이 노광국 교수가 맞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뿐. 설사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더라도 알아낼 방법이 없기도 했다.
 
 *
 
 그렇다. 내가 널 속일 이유가 어디 있을까. 마법은 존재한다. 시간이 없다. 나를 도와다오.
 
 *
 
 손대산의 안면이 절로 찌푸려졌다.
 길을 가다가 할머니가 길을 물으면 당연히 도와주겠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괜히 답하면 이상하게 엮이는 것 아닐까.
 더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다이어리의 신분이 확실하거나 아니면 보상이라도 제대로 주어지든가.
 “뭘 도와주죠? 도와주면 내가 얻는 이익은 뭔가요?”
 
 *
 
 이익? 내가 주마. 최고의 삶을 살고 싶으냐? 힘을 원하느냐? 난 너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손대산은 신음을 토했다. 자신도 모르게 다이어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고아였다. 지금까지 험난한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 힘들었다. 현재 다니는 학교와 전공도 별 볼 일 없었다. 이대로라면 인생이 꼬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안정적이라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생각을 했다. 고고학을 좋아했던 어릴 적 꿈을 모두 접어두고.
 군을 제대한 후 돌아갈 집이 없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현실에 대한 불안은 다이어리의 제안에 더욱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다이어리가 제시한 최고의 삶이 어떤 삶인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그래, 일단 수락했다가 거짓말이면 도망치면 되지. 이깟 다이어리 버려버리면 되잖아.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네. 원합니다.”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
 
 좋다. 그럼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지.
 
 *
 
 다이어리의 백지에 새로운 글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3. 신비의 다이어리 (2)
 
 
 처음 다이어리에 글자가 나타났을 때 손대산은 매우 놀라고 두려웠다.
 몇 차례 다이어리와 대화가 진행되자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는 다이어리에 새겨지는 글자를 음미하며 이제는 그 의도를 생각해볼 만큼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질문을 던졌다.
 “최고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주겠다는 것이죠?”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나는 그대에게 강인한 힘과 육체를 줄 것이다. 또 꽤 돈이 될 수 있는 판타지 유물도 알려 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고 자산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내 말을 따르면 오래지 않아 꽤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원한다면 이 분야에서 명예도 얻을 수 있다.
 
 *
 
 “큰 부자?”
 
 *
 
 최소 현재 가치로 수백억이다.
 
 *
 
 손대산의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통장에는 군대서 모은 몇십만 원이 전부다. 수백억? 0을 몇 개 더 붙여야 하나?
 ‘으흐흐, 그 돈이면 평생 세계 일주하며 미녀를 거느리고 살 수 있나?’
 그는 다이어리에 봉인된 노광국 교수의 말뜻을 알아냈다.
 이 분야에서 당대 최고였던 교수가 장담하는 말이다. 같은 분야에 발을 담근 그로서는 당연히 더 믿을 수밖에 없다.
 손대산은 지금 그대로의 자신보다 다이어리가 보장한 그 삶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누구는 10억을 주면 교도소도 다녀올 수 있다던데 적어도 이 제안은 그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이었다.
 그는 속으로 희희낙락하며 물었다.
 “당신이 나에게 그런 선물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와달라던 게 뭐죠?”
 다이어리의 백지에 다시 검은 글씨가 새겨졌다.
 
 *
 
 내가 선물을 주는 대신 그대는 나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줘야 한다. 딱 하나다!
 
 *
 
 역시나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었다. 특히 그 하나는 만만치 않은 것이겠지.
 손대산은 주고받는 것이 분명한 이런 관계가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뭐죠?”
 
 *
 
 한 사람을 파멸시켜 달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는 나를 죽인 원수다.
 
 *
 
 다이어리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원수란 낱말만 붉은색으로 새겨졌다.
 손대산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문득 그에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노광국 교수는 남극 탐사 중 죽었고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루카스 교수인가요?”
 
 *
 
 그렇다.
 
 *
 
 손대산은 안면을 찌푸렸다. 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어쨌든 나쁜 일 아닌가. 그러다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그의 인생 역시 종 치게 된다. 그의 염려를 알아챈 듯 곧바로 다이어리에 글자가 새겨졌다.
 
 *
 
 함부로 남을 망치게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앞으로 루카스 교수를 파산시키거나 없앨 기회가 수차례 올 것이다. 그때 성심껏 실행해주면 된다. 그대는 안전할 것이다. 양심 가책은 필요 없다. 그는 인면수심의 나쁜 놈이니까. 보상이 확실한 것만 생각해.
 
 *
 
 자신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을 파멸시켜야 한다니 찜찜하긴 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그것도 악당이란 것이다. 나쁜 놈이라잖아.
 그는 자신이 나쁜 놈이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좋은 놈도 아니었다. 이런 기회를 얄팍한 도덕심 때문에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수차례 스스로를 세뇌했다.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하고 보상 역시 분명하다면.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쪽에서 해주는 것보다 저쪽에서 해주는 게 먼저다. 그렇다면 안전빵 아닌가. 만일 계약과 다르면 막판에 모른 척하면 되지 않을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고.
 그러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좋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했지요?”
 이번에는 다이어리가 대답하는데 시간이 약간 걸렸다. 적절한 답을 찾기 어려웠든지 아니면 쉽게 설명하려 했는지 모를 일이다.
 
 *
 
 나는 그동안 이곳에서 후보자를 찾았다. 그중 그대가 최고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가 본 인간 중에 최고의 마나 친화력을 가졌다.
 
 *
 
 손대산은 다이어리의 답변에 매우 놀랐다. 자신이 마나 친화력이 좋다고? 그것을 어떻게 알지?
 그의 눈에 창가에 놓인 마나석이 보였다.
 “아! 조금 전에 마나석을 만졌을 때 확인했구나.”
 그는 마나석을 만졌을 때 느꼈던 기이한 기운을 떠올렸다. 당시는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게 마나와의 친화력 때문이었나 보다.
 
 *
 
 마나 친화력은 판타지 세계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주는 선물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도 마나 친화력은 필수다. 그대의 친화력이라면 판타지 세계에서 상당한 효과를 얻을 것이다.
 
 *
 
 무슨 뜻인지 금방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친화력이 높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그의 눈에 다시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
 
 게다가 그대는 체력이 좋고 운동신경이 뛰어나다. 내가 그대를 선택한 이유는 이 두 가지다.
 
 *
 
 손대산은 피식 웃었다. 체력 하나는 남에게 뒤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평균보다 큰 키에 몸도 잘 빠졌다. 특히 지금은 군에서 갓 제대해서 근육도 제대로 박혔다. 물론 전문적으로 트레이닝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일반인 대비 몸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보니 군대도 일명 특공대라는 특수부대를 다녀왔다. 친구인 권영재는 특별히 공부 못 하는 대가리가 모인 부대라고 놀렸지만. 물론 그 특수부대에서 취사병을 담당했다고 밝힐 수는 없다.
 마나 친화력과 운동신경 때문이라. 어째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이해했어요. 그대와 계약하기로 하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그가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하는 순간 손에 쥔 다이어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잠시 후 다이어리에 글씨가 새겨졌다.
 
 *
 
 좋아, 지금부터 미션을 알려주마. 미션을 수행하면 자연적으로 그대는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
 
 “말하세요.”
 손대산은 기대감을 품고 다이어리를 뚫어지라 주시했다.
 천천히 다이어리에 미션이 나타났다.
 
 *
 
 첫 번째 미션. 일단 무슨 수를 쓰든 내일 떠나는 탐사대에 합류하라.
 
 *
 
 손대산은 안면을 찡그렸다. 이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내일 떠나는 탐사대원 자격은 한국대학교 고고학과 학생에게만 주어졌다. 그는 한국대 학생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떠날 인원은 확정됐다. 그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다행히 여권을 갖고 있다는 걸까. 여권은 대학 입학 후 해외 봉사를 목표로 미리 만들어 두었었다.
 “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외치려는 찰나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손대산이 뒤를 돌아보니 친구 권영재가 웃고 있었다.
 “뭐 해?”
 손대산은 황급히 다이어리를 덮고 권영재를 향해 씩 웃었다.
 권영재의 옆에 선 정세희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노광국 교수님 일기장을 보고 있었구나. 그거 매우 중요한 거야. 앞으로 우리 남극 탐사에서 지침이 되어줄 자료니까. 그런데 아쉽지? 뒤쪽이 사라져서.”
 정세희 교수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손대산은 다이어리를 본 사실을 그녀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이어리를 다시 원위치 시켰다.
 정세희 교수가 두 사람을 독려했다.
 “자, 빨리 우리도 준비물 정리해야 해. 대산이도 영재 좀 도와주렴.”
 손대산은 친구를 따라 짐 꾸리는 것을 도왔다. 정세희 교수가 편하게 대해주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정세희 교수는 얼굴도 예쁘지만 성격도 참 좋아 보였다.
 정신없이 짐을 챙기다가 손대산은 슬쩍 물어봤다.
 “혹시 노광국 교수님 다이어리요, 그것 자주 읽어보셨어요?”
 “왜?”
 “특별한 점 없었어요?”
 “아니.”
 정세희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에게는 방금 자신에게 있었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즉 이것은 다이어리가 자신만을 선택했다는 확실한 의미였다.
 정세희가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아, 아녀요. 다이어리를 보다 보니 저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어서요.”
 손대산은 적당히 둘러댔다.
 정세희가 소리 내어 한바탕 웃었다.
 “하하, 나도 데려가고 싶어.”
 “네?”
 “짐 나를 때 유용할 것 같아서. 아, 미안. 그런데 어쩌지? 이 학교 학생이 아니면 참가가 어려워.”
 손대산은 슬그머니 물러났다. 일단 지금 당장 합류할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인솔 교수의 눈도장을 받아놓은 것만은 수확이라 할만 했다.
 
 
 **
 
 
 제대 첫날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인생이 바뀌는 일 아닌가. 다이어리는 자신의 말을 따르면 최고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했다. 고아에 삼류대학 출신인 그가 수백억을 가진 부자가 될 수 있다니.
 한국대 출신처럼 고고학에서 권위자가 되고 부를 움켜쥐는 삶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이깟 고생쯤이야. 손대산은 내심 투덜대면서도 미래를 그리며 열심히 했다.
 온종일 탐사대 짐 꾸리는 일을 도운 손대산은 저녁 무렵에야 친구 권영재와 함께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권영재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살갑게 굴었다.
 “야, 오늘 고생했다. 역시 군바리 능력은 다르더라. 뭐 먹고 싶어? 내가 한턱 쏜다.”
 학교 부근 음식점 골목에서 두 사람은 배회를 거듭했다.
 군에 있을 때는 먹고 싶은 것이 넘쳤는데 막상 나와 보니 먹을 게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때 한 무리의 학생이 주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오늘 짐을 꾸리면서 계속 마주쳤던 학생들이었다.
 “오늘 모임 있나 보네?”
 손대산의 물음에 권영재가 대답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고 모여서 밤을 불태운다네. 함께 한 잔 하려나 봐.”
 “넌 참석 안 해?”
 “나? 네가 있잖아? 오늘 제대한 친구를 내버려 두고 저기 갈 수는 없지.”
 손대산은 친구의 두터운 우정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과도 앞으로 한동안 보기 힘들게 생겼다.
 손대산은 주점 앞에서 절로 발걸음이 멎었다. 다이어리에서 요구한 미션을 해결하려면 어쨌든 저 녀석들 주변에 있어야 기회라도 생길 것 같았다.
 “영재야, 나 술 고파. 우리도 저기로 들어가자. 저녁은 안주로 적당히 때우고.”
 손대산이 방금 지나친 주점을 가리키자 권영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거긴 학과 학생들 들어간 곳이잖아? 다른 곳으로 가지?”
 “아냐, 생각해보니 너도 저기 모여 있으면서 적당히 나 상대해주면 되잖아? 양쪽 오가면서. 난 한쪽에 떨어져 있을게.”
 만류하는 권영재를 떠밀며 주점으로 들어갔다.
 강의실에서 얼굴을 보았다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녀석도 있었다.
 적당히 구석에 자리 잡으려는데 한 학생이 재빨리 다가와서 만류했다.
 “영재야, 이쪽으로 합류해. 네 친구 얼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친구도 오늘 고생했잖아?”
 “아, 윤기 형!”
 권영재가 상대방을 향해 인사했다.
 손대산은 다가온 학생을 살폈다. 4학년인 영재가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복학생이거나 대학원생일 것이다. 안경을 낀 인상이 샤프하게 생긴 것이 전형적인 수재형이었다.
 “김윤기 형이야. 이번 탐사대에서 교수님 제외하면 실질적인 대장이지. 사실상 모든 준비와 학생 통솔을 다 맡고 있거든.”
 “안녕하세요.”
 손대산은 재빨리 인사를 했다.
 김윤기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대산은 가볍게 손을 잡고 흔들었다.
 김윤기의 요청으로 그들은 모임 무리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곧바로 생맥주가 배달되어왔다. 안주는 치킨이다. 치킨 안주가 적당히 요기도 될 것 같아 대만족이었다.
 손대산은 무리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내일 탐사 떠나는 내용이 주요 주제였다.
 그의 옆에 앉은 권영재가 맞은편 자리에 앉은 김윤기에게 물었다.
 “윤기 형, 저쪽 이야기는 들어봤어요?”
 “저쪽? 한석권 교수팀?”
 “네.”
 김윤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상황을 모르는 손대산을 위해 김윤기가 설명했다.
 남극에서 실종된 노광국 교수의 수제자는 원래 두 사람이었다. 바로 한석권과 정세희. 노광국 교수가 남극으로 떠날 때 한석권은 한국대 조교수로 임용된 상태였고 정세희는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였다.
 지금 현재 공식 신분은 한석권은 부교수이고 정세희는 조교수다. 한석권의 나이는 30대 중반, 정세희는 20대 후반이다.
 사실상 이 두 사람이 노광국 교수의 계승자라 할 수 있었다.
 노광국 교수가 실종되고 루카스 교수의 기자회견 이후에 한석권 교수는 남극 탐사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국이 비밀리에 탐사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도 정세희 교수와 달리 한석권 교수는 잠잠했다.
 그러다가 정세희 교수가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후 갑자기 한석권 교수도 움직였다. 그 시점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정세희 교수가 학교 측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추진한 것과 달리 한석권 교수는 기업체의 후원을 받았다. 특별한 이익이 없는 탐사에 기업이 후원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정세희 교수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탐사대를 합칠 것을 문의했다. 반면 한석권 교수는 독자적인 탐사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남극 탐사대는 둘로 나뉘어 출발하게 됐다. 정세희 교수 측은 모두 학생으로 구성됐다. 한석권 교수 측은 학생이 절반, 외부인이 절반이었다. 인원 규모는 양쪽이 비슷했다.
 “같은 비행기라네.”
 김윤기가 투덜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4. 합류하는 방법 (1)
 
 
 종합해보니 내일 남극으로 떠나는 또 다른 팀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같은 한국대 팀이다.
 “서로 합칠 수는 없대요?”
 “두 교수님 간에 의견 차이가 심한가 봐.”
 손대산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대충의 상황을 짐작했다.
 이야기 주제는 금방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권영재가 물었다.
 “옷은 어떻게 가져가죠? 여기보다 훨씬 춥겠죠?”
 “현재 우리가 도착할 남극의 맥머도 기지는 여름이야. 그곳은 해안가라 기온이 대략 영하 10도 부근으로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아. 지금 옷차림 그대로 가도 돼. 물론 내복을 제대로 챙겨 입어야지.”
 우리나라 한겨울 기온보다 약간 추울 정도니까 의외였다.
 우리나라가 세운 남극의 세종기지나 장보고 기지를 이용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최종 목적지가 그곳에서 다소 멀어서인 듯했다.
 권영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바꿨다.
 “판타지아는요?”
 판타지아는 노광국 교수가 발견했다는 그 미지의 판타지 세상을 의미했다. 마나로 가득하다는 신비의 세상을 관련 학계에서는 판타지아라 불렀다.
 “노광국 교수에 따르면 판타지아는 평균기온이 20도 정도로 적당하다고 해. 그곳은 그리 신경 쓸 필요 없을 듯.”
 “우리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죠? 집에는 최대 1년이라고 말해뒀는데요.”
 “이미 알려진 대로 현재 계획은 3개월이야.”
 “판타지아에 먹을 것은 있대요?”
 김윤기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설마 굶어죽을 곳으로 데려가기야 하겠어? 일기장에 따르면 약간의 과일나무가 존재하고 토끼 비슷한 먹을거리도 살고 있나 봐. 굶어 죽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해.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말린 육포랑 햇반에 쌀과 밑반찬도 꽤 준비했어. 소금이나 후추는 기본이고. 하하.”
 노광국 교수 일기장을 참고해서 많은 준비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손대산이 두 사람의 대화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내일 출발 인원은 모두 20명이었다. 이 가운데 정세희 교수와 두 명의 대학원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학부생이었다.
 대학원생은 남녀 각 1명으로 모두 석사과정 학생이었다. 김윤기는 군대를 다녀온 석사 1학년으로 나이는 만으로 27살이었다. 정세희 교수가 지금 29살임을 고려하면 불과 두 살 차이였다.
 김윤기가 은테 안경을 매만지며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안전이야. 안전 관련 서약서 쓴 것 기억하지?”
 “네.”
 탐사대에 참가하는 모든 학생은 탐사에 참여하는 것이 자유 의지이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학교 측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서약을 써냈다.
 권영재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판타지아 위험하대요?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안전하다고 보기도 힘들어 보이던데요?”
 “그렇지. 솔직히 아무도 몰라. 그래서 많은 인원이 가는 거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니까. 교수님도 그 부분을 제일 걱정하고 계시지.”
 대화를 듣다가 손대산은 가볍게 농담조로 끼어들었다.
 “크크, 뭘 걱정해? 인생 한 방이야. 남자라면 굵고 짧게.”
 물론 그의 본심 역시 그렇지는 않았다. 굵고 짧게 보다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더 실속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야, 넌 안 가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
 권영재가 투덜댔다.
 김윤기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마 현지에 가면 약간의 무기도 지급될 거야. 대검 같은 거. 야생동물 잡아서 먹으려면 있어야 하거든.”
 “그럼 총도 가져가요?”
 “그건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단순한 장난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손대산은 어쩌면 친구 권영재를 보는 날이 내일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빈 맥주잔에 생맥주가 다시 날라졌다.
 밤이 깊어지자 대화는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에게서 약간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두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군복 입은 자는 누구야?”
 “아, 영재 오빠 친구래.”
 “친구가 이 자리에 왜 끼어들었어?”
 “오늘 많이 도왔잖아.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니라더라. 근데 왜?”
 “군복 입으니까 무식하게 보여서. 게다가 여자를 슬금슬금 보는 것 봐. 건수 있나 찾는 것처럼 보이잖아?”
 손대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군인을 향한 또래 여자의 일반적인 시각이긴 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비를 걸 수도 없어서 맥주만 들이켰다.
 무시하려 해도 두 여학생의 대화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계속해서 들어보니 한 여학생은 별 문제가 없는데 다른 한 여학생이 노골적으로 그에 대해 불만을 분출하고 있었다.
 한 차례 해당 여학생과 눈을 맞추고 분노를 표출했다.
 여학생이 찔끔하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짜증이 팍팍 솟구쳤으나 친구 얼굴을 봐서 화를 억눌렀다.
 대신 여학생의 얼굴만은 똑똑하게 기억해뒀다. 얼굴은 달걀형 외모에 매끈한 피부를 가졌다. 귀엽게 생기면 뭐하나, 성질이 저 모양인데.
 밤이 깊어갔다.
 자리에 술이 많이 돌고 나자 대부분 감정이 다소 격해졌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심리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뒤엉켜 이성이 살짝 마비되는 모양이었다.
 대화 소리도 절로 높아졌다. 주점 내부가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테이블마다 대화 주제가 나뉜 채 소란스러워졌다.
 그때였다.
 고고학과 모임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 하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좀 조용히 안 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는 녀석은 겉보기에도 학생이 아닌 동네 양아치처럼 보였다. 머리를 노랗게, 붉게 물들인 모습이 휘황찬란했다.
 순식간에 주점 내부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당황해서 옆 사람만 쳐다보고 있을 때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술집에서 떠드는 게 당연하지. 시끄러우면 조용한 커피숍이나 가라!”
 일어난 녀석은 파란색 패딩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이쪽 테이블에서는 제일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이다.
 노랑머리 녀석이 파란색 패딩을 입은 상대를 쏘아봤다.
 그는 피식 입술을 쪼개며 껄렁대기 시작했다.
 “네놈 죽을래? 여기 전세 냈어?”
 “하! 머 같은 게 깝죽거리네.”
 둘이 서로 눈을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대판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노랑머리 녀석 쪽 테이블을 보니 일행이 모두 넷이었다. 한결같이 그리 질이 좋지 않게 보였다.
 손대산의 앞에서 술을 마시던 김윤기가 일어나서 파란색 패딩을 말렸다.
 “시형아, 참아라. 우리가 떠든 잘못도 있잖아.”
 “아, 형! 놔 봐요.”
 파란색 패딩을 입은 이시형이 김윤기의 손을 뿌리쳤다.
 김윤기는 녀석을 말리면서 노랑머리 녀석에게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아아, 죄송합니다.”
 김윤기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노랑머리 녀석은 눈을 부라리며 이시형을 노려봤다. 이시형 역시 지지 않고 김윤기를 밀치며 상대에게 대들었다.
 순간.
 퍼억!
 노랑머리가 주먹을 날렸다.
 파란 패딩 이시형의 얼굴에 정통으로 한 대가 꽂혔다. 휘청하던 이시형이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야, 십팔 놈아!”
 이시형의 주먹이 상대의 가슴을 가격함과 동시에 발차기가 이어졌다.
 노랑머리의 옆에서 안주를 물어뜯던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이 자식 뭐야?”
 동시에 이쪽에서도 한 녀석이 이시형을 도우려고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 대 이로 네 녀석의 주먹과 발이 엉켰다.
 우당탕-
 테이블 한쪽의 의자가 넘어가며 소란이 일었다. 이시형을 패려던 노랑머리 녀석이 의자에 걸려 뒤로 굴렀다. 다른 녀석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뻐벅!
 몇 차례 주먹이 오가고 발길질이 이어졌다. 흥분한 네 녀석이 뒤엉켜 싸움이 살벌해졌다.
 놀란 여학생들의 비명이 요란했다.
 저쪽에서 주인아저씨가 달려오고 주변 사람들이 싸움을 말리려고 끼어들었다.
 다행히 싸움은 금세 끝났다.
 이쪽이 무려 스무 명가량이나 되어 상대인 넷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데다 이쪽 학생 대부분이 싸움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붙은 녀석들은 이쪽 둘 저쪽 둘 해서 모두 넷이었고 주고받은 주먹도 비슷했다.
 옆에서 말리는 친구에게 잡혀 상대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네 녀석이 떨어졌다.
 네 녀석은 물러나면서도 상대를 향해 주먹을 들이대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크게 다친 녀석은 없었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김윤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시형이 저 녀석 다혈질이란 말이야. 가서도 사고 치지 않을지 걱정되네.”
 “저쪽에서도 다짜고짜 먼저 팼으니까 저쪽이 잘못 한 거죠.”
 권영재가 김윤기를 달랬다.
 손대산은 지금까지의 소동을 지켜보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대학교 학생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싸움질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옆에 앉은 친구 권영재를 훑어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범생처럼 생긴 친구도 위험하면 싸우게 될까. 남극 가서 무사히 생환할지 새삼 걱정됐다.
 “자, 우리는 술이나 계속 마시자.”
 김윤기가 맥주잔을 들었다.
 모두가 다시 제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며 대화가 이어졌다.
 내일 큰일을 앞둔 터라 술자리를 금방 파했다.
 주점 앞에 모여 내일 만날 장소와 시간을 확인한 다음 모두 헤어졌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 모여 함께 공항으로 갈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사라지는데 싸웠던 두 녀석이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윤기가 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일 일찍 나와야 하니까 사고 치지 말고 얼른 들어가.”
 “아, 형. 우리 둘은 저기 노래방에 잠시 갔다가 집에 갈래요. 기분도 꿀꿀하고.”
 이시형이란 녀석이 길 건너 노래방을 가리켰다.
 김윤기가 안면을 찡그렸다.
 “알았다. 일찍 들어가.”
 두 사람을 보낸 다음 김윤기가 뒤에 선 손대산과 권영재에게 손을 흔들었다.
 “영재야 너도 얼른 들어가렴. 손대산?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래저래 인사가 끝나고 모두 헤어졌다.
 남은 사람은 손대산과 권영재. 어차피 손대산은 갈 곳이 없어 권영재네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문득 손대산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영재야, 잠시만 기다려.”
 그는 다급하게 건물 옆쪽 화장실로 뛰어갔다.
 신나게 볼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화장실 안으로 네 녀석이 들이닥쳤다.
 조금 전에 싸움질하던 노랑머리 녀석과 그 친구들이었다.
 어째 녀석들의 움직임이 수상쩍었다.
 슬쩍 피해서 나가려는데 역시나 노랑머리 녀석이 그를 불렀다.
 “어이, 군발이! 이리로 와봐.”
 나가려던 손대산의 몸이 멈칫했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난 그 녀석과 상관없다고 항변할 수도 없고.
 손대산이 멀뚱거리며 노랑머리를 쳐다보자 노랑머리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소롭게 여기는 웃음이 안면에 역력했다.
 “군발이! 너 방금 거기 있던 녀석 맞지?”
 노랑머리의 표정을 보니 자칫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군복이라 유달리 눈에 띄었나 보다.
 손대산은 어깨를 쭉 펴며 가볍게 상대의 손을 털어냈다. 그래도 그는 특수부대 출신이다. 군에서도 다양하게 갈고 닦은 몸이다. 물론 대부분 시간을 취사병으로 밥하고 무 썰며 보내긴 했지만. 저런 녀석에게 졸아들 그가 아니었다.
 덩치로 봐도 이런 노랑머리 녀석 하나쯤은 가볍게 밟을 수 있다. 문제는 상대가 넷이란 점이다. 넷은 좀 힘들려나. 게다가 제대하자마자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상대방의 눈치를 좀 살피기로 했다.
 “어? 맞는데 왜?”
 “거기 파란 패딩 입은 녀석 어디로 갔어? 제대로 말 안 하면 반 죽여 버린다.”
 노랑머리가 다짜고짜 협박을 해왔다.
 눈치를 보니 주점 안에서 싸운 연장전을 벌일 모양이다.
 옆에 있던 다른 녀석 역시 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군복 옷매무새를 잡아주는 척하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손대산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째려보자 노랑머리가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눈 안 깔아?”
 네 녀석이 그를 둘러쌌다.
 이렇게 되니 다소 심각해졌다.
 그는 네 녀석을 눈으로 훑었다. 살기등등했다. 두 녀석은 머리가 요란했고 한 녀석은 머리를 빡빡 밀었다. 다른 녀석은 걷어붙인 팔에 문신이 가득했다. 전형적인 동네 양아치였다.
 “먼지 나게 맞을래? 아니면 어디 갔는지 불래?”
 노랑머리 녀석이 주먹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5. 합류하는 방법 (2)
 
 
 물론 손대산은 고민하지 않았다.
 명색이 특수부대 출신이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밟아버릴까. 네 놈이라 해도 딱히 질 것 같지는 않았으나 만만찮게 힘들 것 같긴 했다.
 아, 귀찮은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낮에 있었던 다이어리의 미션이 떠올랐다. 무슨 수를 쓰든 내일 떠나는 탐사대에 합류하라고?
 사실상 포기했던 미션이었다.
 네 녀석의 기세등등한 얼굴을 보는 순간 잘 이용하면 미션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호라, 한 녀석이 내일 못 가게 되면 대신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한국대학교 학생이 아니니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교수님에게 꽤 잘 보이지 않았었나? 떼를 쓰면 가능할지도?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아아, 잠깐만.”
 그는 상대의 손을 치우며 안면에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노랑머리 녀석이 기가 찬 표정으로 눈을 부라릴 때 그는 말했다.
 “알려줄게. 대신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
 솔직히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 녀석과 친한 관계도 아니고. 본인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굳이 그 녀석 때문에 고생할 필요는 없다.
 “큭큭, 머리 제대로 돌아가네. 어디야?”
 노랑머리가 다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분이 나빴으나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썼다. 참자, 참아.
 “길 건너 지하에 노래방 있지? 거기 갔어.”
 그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노랑머리가 몸을 돌렸다.
 “야, 가자.”
 네 녀석이 몰려서 화장실을 나가려는데 손대산이 그들을 붙잡았다.
 “잠깐.”
 “뭐야? 이 자식이.”
 노랑머리가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손대산은 그들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파란 패딩 녀석 있지? 그 녀석 꽤 주먹이 세. 아까 너희들에게 한 주먹도 안 되는 녀석이라고 말하는 거 못 들었어? 게다가 자기가 오늘 많이 두들겨 팼다고 기고만장 날뛰더라.”
 슬쩍 그들의 분노를 건드렸다.
 노랑머리 녀석이 이빨을 갈더니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내달렸다. 다른 세 녀석도 흥분해서 곧바로 뒤따랐다.
 손대산은 휘파람을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킥킥.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노래방 속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현재 노래방에 간 녀석은 둘이다. 양아치 녀석들을 그 정도 도발해 놓았으니 쉽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 둘 중 하나만이라도 크게 다치면 자신이 대신 떠날 비행기 좌석이 생긴다. 확률이 조금은 올랐다.
 막판에 양아치 녀석들을 부추긴 것이 양심에 걸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나도 살기 위한 거라니까. 절대 녀석들이 무서워서 일러바친 것은 아니다.
 밖으로 나와 친구인 권영재를 찾았다.
 “영재야, 가자.”
 그는 권영재의 등을 떠밀며 곧바로 주점 앞을 벗어났다.
 
 
 **
 
 
 권영재네 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짐을 챙겼다.
 손대산이 군대에 가며 맡겨둔 물건이었다. 그래 봐야 책이랑 옷가지 일부가 전부였다. 군대에 가면서 대부분 정리했었기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늘 여기에서 떠나면 당분간 머물 고시원이라도 알아봐야 할 판이었다.
 권영재는 그의 편의를 봐주어서 당분간 짐을 계속 두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친구도 없는 집에 물건을 놓아두기란 친구 부모님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손대산이 물건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나도 남극 따라갈까?”
 “그러면 좋겠다. 그지?”
 권영재 역시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이 불가능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권영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응, 윤기 형. 어쩐 일이세요?”
 “아, 시형이 그 자식이 그새 일을 저질렀어.”
 “네?”
 “하여튼 얼른 학교로 와라.”
 시형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손대산은 뜨끔했다. 그 양아치들이 진짜로 사고 쳤나?
 권영재가 후다닥 일어나며 짐을 들쳐 멨다. 남극에 가져갈 옷가지와 각종 준비물을 넣은 배낭이었다.
 “대산아, 얼른 가야 해.”
 “잠깐, 나도 짐 꾸리고.”
 “네 짐은 나중에 가져가.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 일단 급하게 오라니까 나 먼저 배웅해주라.”
 오늘부터 휴학생인 손대산이 급할 일은 없었다. 일단 급한 마음에 작은 배낭에 옷가지를 넣은 그는 권영재를 뒤따라 나갔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군복 차림이었다. 솔직히 별달리 입을 옷도 없었다.
 
 
 **
 
 
 어제 세미나가 열렸던 미디어 강의실에는 남극 탐사를 위한 각종 수화물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이십여 명의 학생들이 걱정에 잠겨 있었다.
 모두에게 주목의 대상이 된 사람은 파란 패딩을 입은 이시형이었다. 그는 얼굴 곳곳이 맞은 흔적으로 부어 있었으나 큰 부상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리였다. 종아리뼈 일부에 금이 가서 무릎까지 깁스하고 있었다. 당연히 제대로 걷지 못하고 목발을 짚었다.
 “시형아, 어떡해?”
 주변의 친구들이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이시형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재수 없으려니. 어떡하긴. 어쩔 수 없지. 난 못 갈 것 같아.”
 목발을 집고 남극을 갈 수는 없었다. 판타지아가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체에 문제가 발생한 사람이 참가할 수 없었다.
 학생 통솔을 담당하고 있는 김윤기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휴, 그러길래 내가 어제 일찍 집에 가라고 했잖아.”
 김윤기는 짜증 내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손대산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가 바란 대로 이시형은 한 곳이 부러져서 나타났다. 당연히 남극행에서 탈락했다. 어제 이시형과 함께 노래방에 갔던 녀석은 몇 군데 부은 곳이 있었으나 큰 부상은 없었다. 덕분에 남극행에 지장 받지 않았다.
 딱 바라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손대산은 내심 희희낙락했다. 이시형에게 아주 조금 미안하긴 했으나 모른 척했다.
 잠시 후 정세희 교수가 나타났다.
 그녀는 어제와 달리 청바지와 두꺼운 남방에다 허리까지 오는 하얀 패딩을 걸치고 나타났다. 여행 복장이었다. 정장 차림의 그녀도 예뻤지만 청바지 차림의 그녀는 흡사 대학생 같은 발랄함이 돋보였다.
 그녀 역시 안면에 수심이 가득했다.
 손대산은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정세희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문제의 이시형에게 다가갔다. 이시형의 상태를 점검한 그녀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휴, 시형아, 어떡하니? 아무래도 넌 여기서 몸조리를 해야 할 것 같네.”
 “죄송해요.”
 이시형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냥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세희가 학생들을 독려했다.
 “자, 마지막으로 준비물 점검해. 모두 여권 잘 챙기고. 시형이는 두고 우리끼리만 가야겠다. 시간 없어.”
 그녀의 재촉에 장내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들은 학교 측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모두가 짐을 들고 버스로 움직였다.
 손대산은 부지런히 짐을 날라주었다.
 그제야 그를 눈여겨본 정세희가 물었다.
 “어? 대산이 오늘 또 왔네.”
 “네. 공항까지 배웅해주려고요.”
 “영재랑 정말 친한가 보구나.”
 손대산은 정세희가 커다란 하드케이스 여행 가방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그것 저에게 주세요.”
 “이거? 내가 들어도 되는데.”
 “아, 그래도 교수님이 그런 것 들고 갈 군번이 아니죠.”
 “응? 난 군번 없어. 킥킥.”
 정세희가 키득거리며 그에게 가방을 넘겼다.
 손대산은 그녀의 웃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가방을 끌고 조용히 뒤따랐다.
 이시형 덕분에 비행기 자리가 한 자리 비었다. 마지막 베팅을 시도할 시간이 다가왔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손대산은 권영재와 나란히 앉았다.
 정세희 교수는 좌석 맨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뒷자리에는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남녀 둘이 나란히 앉았다. 남자 대학원생은 바로 김윤기였다.
 버스는 순조롭게 출발했다.
 버스가 공항으로 떠난 지 얼마 후 손대산은 정세희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대산이? 무슨 일이지? 여기에 앉아.”
 정세희가 흔쾌히 그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손대산은 앉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남극에 가고 싶습니다.”
 그녀의 안색이 심각하게 변했다.
 “남극이라니?”
 “오늘 비행기 자리 하나 비었잖아요? 제가 이시형 대신 가면 안 될까요?”
 그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정세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넌 한국대학교 학생이 아니잖아.”
 “물론 전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대학교 학생만이 가야 한다는 조건은 없지 않습니까? 저도 고고학 전공입니다. 반드시 가고 싶습니다.”
 고고학 전공이라는 말에 정세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제도 지방대 응용고고학과를 다니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제대로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고학 전공이라······.”
 정세희가 말끝을 흐렸다. 고고학과 학생이라면 동행해도 문제없다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다.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긴 하다.
 곧바로 다시 정세희가 고개를 저었다.
 “판타지아는 위험해. 넌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았을 거 아냐.”
 “전 부모님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손대산의 말에 정세희가 눈을 크게 떴다. 고아란 사실에 놀란 듯했다. 정작 손대산은 그녀의 동그란 눈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흐음.”
 정세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손대산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저, 정말 잘할 자신 있습니다. 또 특수부대 출신이라 어떤 위험도 헤쳐 나갈 용기와 체력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 누구보다 제가 더 일을 잘할 겁니다. 교수님도 완벽하게 보호할 자신 있습니다. 꼭 데려가 주십시오.”
 그는 열변을 토했다. 다이어리의 미션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말 따라가고 싶었다.
 정세희의 까만 눈동자가 그에게 머물렀다.
 손대산은 가능한 진심이 보이도록, 또 자신감이 보이도록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정세희가 물었다.
 “여권은 있어?”
 “네, 갖고 있습니다.”
 “이 버스에 탄 것도 계획적이었구나?”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데려가면 어떨까요?”
 그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권영재가 다가와서 지원 사격을 했다.
 정세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재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이 탐사, 꽤 위험한 일이야.”
 “아마 제 친구가 그 누구보다 잘 적응할 걸요?”
 권영재가 확고하게 보증했다.
 정세희가 뒷자리에 앉은 대학원생에게 의견을 구했다.
 김윤기는 안경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긍정적인 의사를 표했다.
 “어제 이 친구를 유심히 봤었는데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반면 옆의 다른 대학원생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학교 학생이 끼어들면 화합이 문제 되지 않을까요?”
 손대산은 발언한 여자 대학원생을 살폈다.
 어깨까지 드리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두 눈에 쌍꺼풀이 졌고 뺨에 보조개까지 지어진 모습이 나름 예뻐 보였다. 하지만 인상이 다소 억세고 성깔 있어 보였다. 남아연이라고 했던가.
 그는 그녀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아연은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비쳤다. 그녀의 눈빛은 손대산을 깔보는 듯했다.
 “제 친구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도움이 되었지 절대 문제 일으킬 사람 아니고요.”
 권영재가 옆에서 도왔다.
 “흠, 너희 둘은 의견이 갈린다는 거네.”
 정세희가 생각에 잠겼다.
 손대산은 식은땀이 났다. 그녀의 한마디에 적어도 그의 앞날 3개월이 결정된다. 일단 이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해야 다이어리가 보증한 그런 인생이 가능해진다.
 이윽고 정세희가 입을 열었다.
 “좋아, 윤기는 항공사에 문의해봐. 다른 사람으로 명단 교체 가능한지. 그리고 대산이는 서약서를 써줘. 다른 사람도 모두 서명한 거니까 너도 해야 해. 아, 부모 동의는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그건 됐고······.”
 손대산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뒤에서 권영재가 그의 등을 툭 쳤다.
 “크크, 한 건 했네.”
 손대산은 정세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세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사실 정세희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결정이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면 절대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손대산의 눈동자에서 열정을 읽었기 때문에 수락했다.
 
 
 6. 남극 대륙 (1)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0시간가량 비행하여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북섬의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남극 탐사대는 곧바로 오클랜드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바꿔 타고 남섬인 크라이스트처치로 이동했다.
 손대산은 국내선을 탑승하고 나서야 한국대에서 출발한 두 팀의 신경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상 소형 국내선의 거의 전 좌석을 한국대 남극 탐사팀이 차지했다.
 정세희 교수팀과 한석권 교수팀은 제각각 무리를 지어 모였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인사를 나누기는 했으나 서로 섞이지 않았다. 타교생인 손대산이 보기에 다소 이상한 광경으로 보였다.
 순수하게 학생으로만 구성된 정세희 교수팀과 달리 한석권 교수팀은 학생과 외부인사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대학원생인지 학부생인지 분간 안 되는 8명에 나머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인사였다.
 손대산은 외부인사를 접한 순간 그들이 대부분 고도의 숙련된 요원이란 사실을 짐작했다. 특수부대 출신이었던 그가 본능적으로 느낄 그런 위험한 기운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는 판타지아를 탐사하는 일에 고고학자가 아닌 요원이 개입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한석권 교수팀은 이번 탐사를 꽤 위험하게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대산은 양 팀 신경전을 무시했다. 어차피 저쪽 팀은 그와 전혀 인연이 없는 쪽이다. 그는 앞길을 인도해줄 다이어리 속의 혼령과 보호해야 할 친구만 신경 쓰기로 했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나름 자부심을 가진 그다. 그는 기내에서 저쪽 팀 요원과 눈이 마주쳤을 때 가볍게 윙크를 날렸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여름철에만 남극 대륙의 맥머도 기지행 비행기를 운항했다.
 일행이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한 때는 이미 밤이 늦은 시각이었기에 그들은 부근의 호텔에 투숙했다.
 남반구의 여름철 밤은 매우 짧다.
 다음날, 맥머도 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탐사대는 필요 물품을 추가로 구매했다. 물건 구매는 대부분 정세희 교수와 대학원생 둘이 도맡아 했다. 주로 판타지아에서 필요한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과 무기류였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맥머도 행 소형비행기가 떴다.
 비행기에 탄 사람 대부분이 한국대 탐사팀이었다. 이곳에서도 양쪽 팀 분위기는 서먹서먹했다.
 “우와!”
 비행기의 작은 창밖으로 하얀 얼음 세상이 보였을 때 그들 모두는 남극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손대산은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세상을 보며 마음을 다졌다. 이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자신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이어리가 보장해준,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삶. 그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친구 권영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친구만은 반드시 보호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정세희 교수에게 향했다. 자신에게 기회를 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
 
 
 미국의 맥머도 기지는 100여 동에 달하는 작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남극을 연구하는 자라면 필수로 찾아오게 되는 초대형 기지다. 여름에는 오가는 인구가 1만 명에 육박하고 겨울철 월동하는 인구도 2천 명에 달했다.
 덕분에 편의시설이 꽤 발달했다.
 일행은 식당에서 끼니를 때운 다음 숙소에 머물렀다.
 “후아.”
 권영재에게서 빌려 입은 패딩을 걸치고 손대산은 숙소 밖을 잠시 배회했다. 숙소 주변에는 잘 다져진 도로가 뻗어있고 그 주위로 낮은 건물이 떼 지어 운집해있었다. 멀리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하얀 봉우리가 보였다. 낯선 풍경이었다.
 입을 벌리자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전혀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공기가 폐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현재 기온은 영하 12도. 한국에서도 매우 추운 겨울날 가끔 경험하는 기온이라 그리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오히려 체내의 열기를 불러일으켜서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 감각이 이상해졌나 보다.
 남극의 여름에는 사실상 밤이 존재하지 않았다. 끝없이 낮만 계속된다.
 손대산은 나지막하게 떠 있는 태양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어때?”
 옆에 다가온 권영재가 그의 기분을 물었다.
 손대산은 권영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떻긴. 아직 얼떨떨하지.”
 “큭큭, 정말 대산이 네가 오게 될 줄은 몰랐어.”
 “그렇지? 교수님께서 날 잘 봐주셨나 봐. 앞으로 충성해야지. 히히.”
 “으그.”
 손대산은 권영재와 손장난을 쳤다. 이런 낯선 곳에 와도 그만 곁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됐다.
 그는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멀리 남극 횡단산맥이 있다고 하더라. 우리의 목적지는 그 산맥 너머 어디라던데. 신기하지? 저 너머에 판타지아가 있다는 것이.”
 권영재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판타지아의 평균 온도가 20도 정도란 거. 정말 이상하지 않아?”
 “남극 대륙에 그런 곳이 있을 리는 없잖아? 있었으면 이미 오래전에 발견되었을 거고.”
 “그러게.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걸까.”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지금까지 그곳을 가본 사람은 미국의 루카스 교수가 유일했다. 평범한 곳에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지 못했을 리 없었다.
 손대산은 권영재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남극에 온 기분을 만끽했다.
 두 사람이 신선한 남극의 공기를 즐기고 있을 때 모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황급히 숙소로 뛰어갔다.
 
 
 **
 
 
 작은 회의실 앞쪽에 남극 지도가 걸렸다.
 정세희 교수는 지도 앞에 서서 학생들을 둘러봤다. 모두 눈이 초롱초롱한 상태로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심 만족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남극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맥머도 기지야. 남극점에 가장 가까운 바다인 로스 해에 인접해 있어.”
 그녀의 손가락이 맥머도 기지 바로 옆을 가리켰다.
 “맥머도 기지에서 남극점 방향을 보면 수직으로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고 있지? 바로 남극 횡단산맥이야. 가장 높은 산이 백두산과 비슷한 높이인 2800미터가량이고. 이 남극 횡단산맥을 넘으면 바로 남극점인데. 사실상 남극점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이지.”
 대부분은 남극 지도를 금방 이해했다. 물론 실제 환경은 지도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그들은 남극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남극 횡단산맥을 넘어 남극점과 중간 부분을 짚었다.
 “우리의 목표점은 바로 여기. 맥머도 기지에서 남극점 방향으로 대략 700km 지점.”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질문요, 거기까지 어떻게 갑니까? 700km를 걸어가나요?”
 정세희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은 전문 탐험가가 아니라서 빙판 대륙을 멀리 이동하는 게 불가능해. 우리는 맥머도 기지에서 제공한 설상차로 이동할 거야.”
 설상차는 남극 대륙의 빙판 위를 기동성 있게 움직이기 위해 개발한 소형 차량이었다.
 “설상차를 이용해 해안을 따라 대략 500km 이동한 다음 산맥을 뚫고 넘을 거야. 산맥 반대편 기슭에 목표지인 판타지아가 있어.”
 정세희 교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방금 질문했던 학생이 다시 물었다.
 “그곳에 가면 바로 판타지아가 있습니까? 남극 대륙 위에요?”
 정세희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상세한 것은 아직 몰라. 다만 노광국 교수님의 일기장을 통해 예상해보면 그곳에 판타지아로 통하는 크레바스(협곡)가 있다고 추정돼. 크레바스 틈으로 대략 5km가량 이동하면 판타지아 초입에 들어선다는데······.”
 손대산은 의문점이 풀렸다. 판타지아는 남극 대륙 아래쪽 지하에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온이 따뜻한 것도 이해가 된다.
 “중요한 점은 지금부터 대단히 위험하다는 거야. 절대 개인행동은 엄금하고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해. 알겠지?”
 다시 질문이 올라왔다.
 “한석권 교수팀과 같이 움직입니까?”
 “아니. 지금까진 같이 왔지만 완전히 별개라 보면 돼. 한석권 교수팀은 오늘 오후 늦게 출발했어. 우리는 내일 오전에 떠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상 만날 일 없다고 봐.”
 그녀의 대답에 일부는 안도했고 일부는 불안을 드러냈다.
 정세희 교수는 마지막 말을 전했다.
 “오늘이 숙소에서 편히 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까. 모두 편히 쉬면서 에너지를 충전해.”
 
 
 **
 
 
 설상차는 소형 봉고차 같은 녀석 두 대를 붙여놓은 형상이었다. 차량 몸체 두 대가 굴절이 가능한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두 대는 각각 기동이 가능한 구조였다. 한 대가 빙판에서 미끄러지거나 협곡에 끼어도 붙어 있는 반대편 차량이 구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일반 차량과의 차이점이라면 흔히 보는 바퀴가 아니라 탱크나 불도저처럼 궤도가 장착된 바퀴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빙판에서 쉽게 주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대신 속도는 매우 느렸다.
 손대산 일행은 설상차 한 대의 앞뒤 차량에 나누어 타고 남극 탐사의 깃발을 올렸다.
 맥머도 기지에서 해안가를 따라 남극 대륙 중심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잘 닦여 있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해안이라 하지만 얼어붙은 바다와 육지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동네였다.
 다행히 차량 내부에 있다 보니 그리 추운 줄 몰랐다.
 설상차의 속도는 시속 20km 정도. 중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멈추고, 식사시간, 취침 시간을 적절히 분배하다 보니 이동은 꽤 느렸다. 계획된 해안가 500km를 이동하는데 이틀이 소요됐다.
 3일째 되는 날 그들은 드디어 남극 횡단산맥을 만났다. 말 그대로 얼음산이 줄지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험해집니다. 앞으로 200km를 더 가야 해요. 설상차로 산맥을 넘게 되는데 대략 160km 거리를 사흘에 걸쳐 이동할 겁니다. 최종 40km는 도보로 움직이고요.”
 학생을 통솔하는 김윤기가 설상차 운전사의 말을 통역했다.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넓은 백색 평원이 얼음산과 얼음계곡으로 변했다.
 물론 설상차를 타고 있는 손대산 일행에게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차량 이동속도가 더 느려졌다는 것과 때때로 위험해 보이는 순간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때로는 경사가 가팔라 모두가 내려서 걸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입니다. 12월은 남극에서 여름이거든요. 여름 두세 달을 제외하면 설상차는 이곳에 오지도 못해요.”
 운전사가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미국인이었다. 이곳 남극에서만 10년째라 했다. 사실상 이곳 지리에 밝은 사람이다.
 “이곳에 오는 사람이 많나요?”
 정세희 교수가 옆에서 물었다.
 “가끔 극지 조사를 위해 여러 나라에서 탐사대가 오긴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대규모 탐사단은 매우 드물어요. 최근 대규모라면 이주 일쯤 전에 미국 탐사단이 있었고요, 어제 한국 탐사단이 있었죠. 아, 여러분도 한국 탐사단이죠?”
 운전사의 가감 없는 설명에 정세희는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말한 대규모 탐사단은 모두 판타지아 탐사단일 것이다. 미국의 루카스 교수팀은 이미 보름 전에 이곳을 다녀갔다는 의미다. 그녀의 마음이 급해졌다.
 “미국 팀이 이곳에 왔을 때 제가 목적을 물었거든요. 답해주지 않더군요. 여러분도 그러실 거죠?”
 운전사가 굳이 묻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는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남극은 남극입니다. 야영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언제쯤 돌아오실지 모르지만 모두 무사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설상차 주위로 깎아지른 빙벽이 드리워졌다.
 손대산은 멋진 광경에 입만 쩍 벌렸다. 대자연의 위대함을 몸소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곳 남극 횡단산맥에는 꽤 험한 지형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은 그나마 괜찮아요. 그동안 열심히 길을 닦았거든요. 그래서 설상차가 운행되죠.”
 운전사가 운전에 신경을 집중하며 계곡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설상차는 남극 횡단산맥의 산등성이 사이로 난 고개를 넘었다.
 설상차의 한계 지점에 도착했다. 정세희 교수팀 20명을 고개 정상에 내려놓고 설상차는 되돌아갔다.
 이제 도보로 목적지까지 이동할 시간이다.
 
 
 7. 남극 대륙 (2)
 
 
 40km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마라톤이 대략 42km이니 빨리 뛰는 사람은 2시간이면 된다. 군에서 야간행군을 하는 거리도 40km다. 열심히 걸으면 하룻밤 사이에 갈 수 있는 거리란 의미다.
 손대산은 군에서 야간행군을 자주 했었다. 군에 익숙해진 후부터 행군이 그리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남극 대륙에서 40km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산에서 40km와도 달랐다. 남극 횡단산맥의 한쪽 사면을 따라 남극점으로 접근하는 이 행군은 특수부대에서 겪었던 고난의 행군을 연상케 했다.
 그나마 갓 제대한 손대산은 나은 편이었다.
 대부분 학생은 맥을 추지 못했다. 특히 여학생들은 기진맥진했다. 그럴수록 이동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보조를 맞추었다. 다행히 친구인 권영재의 표정은 밝았다.
 “어이, 특수부대! 괜찮아?”
 “그러엄, 큭큭, 내가 누구냐.”
 중간중간에 손대산과 권영재는 장난치며 축 처진 분위기를 바꿨다.
 오히려 손대산은 정세희 교수를 눈여겨보았다. 가냘픈 체구의 그녀는 놀랍게도 끈기가 있었다. 학생들을 독려하며 끊임없이 전진했다. 그녀가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터벅터벅.
 얼음산 사면을 타고 내려가는 길목은 꽤 험난했다. 설상차가 갈 수 없다던 의견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다행히 남극의 여름에는 밤이 없다. 기온도 크게 내려가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에게 다행인 점이었다. 지금 계절이 아니었다면 시도도 못 하지 않았을까.
 예정된 길 한쪽 옆으로 거대한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언제든 쏟아질 것 같은 눈덩이가 절벽 위에 둘러쳐져 있었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으나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짐도 꽤 많았기 때문에 모두 힘겨운 행군을 계속했다.
 “아자!”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하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이동했다. 수시로 에너지 보충을 위해 간편한 식사를 했다. 취침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눈을 붙이는 것은 자칫 죽음과 연결될 위험이 컸다.
 “하아, 하아.”
 손대산은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바삐 걸음을 놀렸다.
 그는 자신을 참가시켜준 정세희에게 보답할 생각으로 간혹 그녀의 짐을 들어주었다.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짐을 날랐다.
 정세희는 중간에 노광국 교수의 다이어리를 꺼내 주변 지형과 대조를 거듭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에 그녀는 신중하게 모두를 인도했다.
 막 산사태가 날 것만 같은 산비탈 아래에서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식 시간 동안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세희는 다이어리를 들고 길을 찾았다.
 손대산은 그녀가 손에 든 다이어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다이어리가 그에게 명한 첫 번째 미션을 사실상 완수했다. 이제 두 번째 미션을 받아야 할 때였다. 문제는 그 다이어리가 그녀의 손에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이어리에 그려진 지도와 주변 경관을 대조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얼마나 남았어요?”
 “아, 대산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거의 다 온 것 같아.”
 “벌써 24시간이 훌쩍 지났어요. 모두 지쳤고요. 잠을 자지 않고 더 행군하는 것은 슬슬 어려울 것 같아요.”
 “응, 나도 알아. 빨리 쉴 곳을 찾아야지.”
 정세희는 대답하면서도 연신 햇볕에 반사되는 얼음산의 지형을 확인하고 있었다.
 손대산은 그녀의 열정에 감탄했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죠?”
 “응. 겨울철 남극이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야. 야밤에 이 길을 간다고 생각해 봐. 가능하겠어? 게다가 기온마저 영하 60도를 오르내리면.”
 확실히 여름철 남극은 겨울에 비하면 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이어리를 뒤적이던 정세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아, 이거 대조가 쉽지 않네. 금방 길을 찾을 줄 알았는데.”
 “길을 잃었어요?”
 “아니, 지금까지는 정확해. 앞으로가 문제지.”
 “지도가 그려져 있어요?”
 “원래는 지도가 있었어. 다이어리 뒤쪽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나 봐. 문제는 그 부분이 찢겨나가서 사라졌다는 거야. 그 덕분에 앞쪽에 글로 묘사된 부분만을 따라 움직이고 있긴 한데 애매한 부분이 다소 있어.”
 손대산은 다이어리를 보았을 때 찢겨 나간 부분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고의로 찢어놓은 것 같았다.
 정세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지도만 제대로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어도 최소한 일 년은 더 빨리 탐사대를 조직했을 거야. 사실 이번에도 미국 탐사대 원정 소식을 몰랐다면 내년으로 미루었겠지.”
 손대산은 그녀에게서 남극 탐사에 담긴 회한과 애증을 엿볼 수 있었다.
 “암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두 시간가량 걸으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빙판 호수가 있고 왼쪽으로는 사자 머리 모양의 암석이 보인다. 이 암석의 아래쪽을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 거대한 크레바스가 있다. 이렇게 적혀 있어. 지금 대충 두 시간 걸어왔거든. 그러면 호수가 보여야 하는데······.”
 정세희가 오른쪽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손대산도 그녀를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쪽 방면에 태양이 있어 햇빛에 비친 얼음조각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다시 고쳐 쓰며 빙판 호수를 찾았다. 눈 덮인 넓은 대지에 어디가 호수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잠시 다이어리를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차마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던 정세희가 다시 학생들을 독려했다.
 “자, 다시 출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
 힘찬 그녀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짐을 챙기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나마 학생들의 불평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모두 이 정도 고생은 각오하고 길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십여 분 걸었을까.
 손대산은 다른 곳과 다소 차이 나는 지형을 발견했다. 다른 곳은 울퉁불퉁한 곳에 눈이 덮이거나 얼음이 언 형상이라 불균일했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한 곳은 마치 편평한 운동장에 눈이 내린 듯 매끈했다.
 “교수님, 저기 아닐까요?”
 마침 정세희도 그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호수의 물이 얼어붙고 그 위에 눈이 쌓이면 비슷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가능성이 있어. 아니, 설명대로라면 저기라야 해.”
 정세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호수로 예상한 곳에 닿았다. 이곳이 예상한 호수라면 왼쪽에 사자 머리 모양의 암반이 존재해야 했다. 암반은커녕 커다란 바위 조각마저 없었다.
 정세희의 안색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자, 계속 가자.”
 달리 방법은 없었다. 일단 계속 전진할 수밖에.
 의외로 눈 덮인 운동장처럼 보이는 곳이 매우 넓었다. 한참을 걸었건만 동일한 지형이 계속됐다.
 눈 덮인 넓은 지형의 왼쪽은 점점 험해졌다. 하나둘 암반이 길을 가로막더니 제법 험한 빙벽이 길가로 둘러쳐졌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한 학생이 소리쳤다.
 “저기 봐!”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바라봤다. 왼쪽의 빙벽을 타고 높은 곳에 거대한 바위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손대산은 그 바위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 마치 사자를 아래쪽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형상임을. 이 바위는 멀리서는 절대 사자 머리로 보이지 않고 바로 아래쪽에서만 사자로 보였다.
 정세희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녀도 사자 머리 바위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럼 이 바위산을 옆으로 끼고 돌면······.”
 정세희는 거대한 빙벽을 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학생들이 따라갔다.
 빙벽은 매우 거대해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탐사대원 모두가 열을 지어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손대산은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제가 앞장설까요?”
 “아니, 괜찮아.”
 정세희가 길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빙벽을 반쯤 돌았을까. 거대한 협곡이 눈앞에 드러났다. 지금까지 그들이 본 적이 없었던,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크레바스였다.
 “아!”
 손대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곳에서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다.
 정세희는 다이어리를 꺼내 다음 구절을 살폈다. 이제부터 쉽지 않은 고행길이었다.
 다행히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길이 시작되었다면 그녀는 학생들을 계속 데려가야 할지 무척 고민했을 것이다.
 크레바스를 지나자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일행은 속도를 높였다.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
 
 
 빙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크레바스는 분명히 수만 년을 변함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래로는 끝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깊은 계곡. 위쪽에는 간신히 암벽 사이로 얼음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그 얼음 다리의 끝은 빙벽 한중간으로 연결됐다. 그 빙벽엔 사람의 몸이 간신히 통과할 크기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저기야!”
 정세희가 주먹을 꽉 쥐며 환호했다.
 설상차에서 내리고 거의 하루 반을 잠도 자지 않고 강행군한 결과가 눈앞에 드러났다.
 손대산도 직감적으로 저곳이 바로 판타지아로 연결되는 입구임을 눈치챘다.
 모두가 환호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모두를 감격하게 했다. 천운이었다. 날씨가 흐려 눈이라도 왔었다면 무척 위험한 여정이 되었을 테니까.
 “모두 고생했어. 이제 마지막이야. 자, 조심해야 해.”
 정세희가 학생들을 격려했다.
 얼음 다리는 다소 미끄러웠다. 다리 폭이 좁은 데다 표면이 눈에 덮여 기다시피 이동해야 했다. 더구나 아래쪽으로 보이는 거대한 크레바스의 위용은 모두를 넋이 나가게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일까.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이게 뭐 별거라고. 자, 힘내자고.”
 체구가 좋은 한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는 학생을 업고 가장 먼저 얼음 다리를 건넜다. 겉보기에도 꽤 강하고 용감하게 보이는 학생의 이름은 박용석이었다. 학년이 친구인 권영재와 같았으니 그와도 동갑이다.
 손대산은 그 학생을 눈여겨 봐두었다.
 박용석을 따라 스스로 건널 수 있는 학생들은 짐을 이고 다리를 건넜다. 모두가 빙벽 중간에 입을 벌린 동굴로 옮겨가고 나니 정세희만 남았다.
 정세희 역시 다리가 후들거려 얼음 다리를 건너지 못해 난감한 상태였다.
 손대산은 그녀를 업고 건널 생각으로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아쉽게도 정세희는 박용석을 선택했다. 박용석이 정세희를 업고 다리를 건넜다.
 의문의 일 패를 당한 기분. 손대산은 내심 실망한 채 맨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넜다.
 그는 다리 건너편에서 이 다리를 다시 건널 날이 언제가 될지 생각했다. 착잡한 기분이다.
 동굴 입구는 매우 좁았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넓어졌다. 게다가 동굴 내부에는 지긋지긋한 눈과 얼음이 없었다. 일반 동굴처럼 습기도 없었다. 흙 위를 걷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다.
 준비한 소형 랜턴을 벗 삼아 일행은 점차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바닥은 미끄럽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약간 경사진 길이 꾸준히 이어졌다. 동굴의 어둠은 마치 그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느낌이었다.
 손대산은 1시간가량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길이 비교적 평탄했으니 거리로 따지면 꽤 먼 거리만큼 땅속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어느 순간 동굴이 갑자기 좁아졌다. 입구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폭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동굴이 휘어져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지형이 달라졌다.
 “이제 다 왔어.”
 선두 그룹을 형성하여 걸음을 옮기던 정세희가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몇 번 동굴이 굽어졌다.
 마침내 그들은 넓은 광장에 이르렀다. 동굴 내부로 들어온 후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대략 이십여 평가량 되려나.
 그들은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불을 꺼봐.”
 정세희의 요구에 모두가 랜턴을 껐다.
 놀랍게도 동굴 앞쪽으로 은은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지금까지 보던 햇빛과는 다소 다른 은은한 불빛이었다. 반면 그들이 들어왔던 쪽 동굴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뭔가 이상한데요?”
 한 학생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저곳이 바로 판타지아 입구야. 판타지아는 전체가 은은하게 빛이 난다고 해. 대기에 섞여 있는 마나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몰라.”
 모두 기대감이 넘쳤다. 며칠 고생했던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얼른 가요.”
 한 학생이 다시 짐을 들며 재촉했다.
 손대산도 짐을 메고 부랴부랴 그들을 따랐다.
 동굴을 기어 내려가자 점차 주변이 밝아졌다.
 마침내 그들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아!”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손대산은 할 말을 잃었다.
 
 
 8. 신세계 (1)
 
 
 산 중턱에 올라 방금 떠났던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는가.
 멀리 지평선 아래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풍경. 바로 지금 그들에게 보이는 광경이 그런 느낌이었다.
 남극 대륙의 빙벽 중턱에 나 있던 동굴을 따라 땅속 깊이 들어온 그들은 꽤 오랜 시간을 걸어 반대쪽 동굴로 빠져나왔다. 그곳은 이름 모를 산 중턱이었다.
 눈앞에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나지막한 산이 군데군데 솟아있고 유유히 흐르는 강과 초원, 심지어 한쪽에는 정글처럼 보이는 나무숲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지상의 풍경과 똑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사람이 만든 집이라곤 없다는 것과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머리 위로는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강하게 끼어 시야가 금방 차단됐다. 위쪽을 가득 메운 안개 너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를 덮은 안개는 은은한 빛을 뿌렸다. 햇빛처럼 밝지 않았지만 아침에 해뜨기 직전 정도의 밝기가 유지됐다.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방금 그들이 들어온 곳이 추운 남극이었음에도 이곳은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따뜻한 봄을 만난 기분이랄까.
 “어떻게 이런 곳이!”
 정세희 교수가 신음을 터트렸다.
 손대산 역시 두 눈을 비비며 눈에 보이는 광경을 의심했다. 땅속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이곳이 판타지아?”
 권영재가 소리 지르며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손대산은 권영재의 어깨를 얼싸안고 도착의 기쁨을 나누었다.
 모두가 한동안 솟구치는 흥분을 누리고 난 뒤 정세희가 팀원을 모았다.
 “자, 여기부터는 미지의 세계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 모두 조심해야 해. 개인행동은 금한다. 일단 모두 모여 봐.”
 마치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들뜬 상태의 탐사대원이 모였다.
 그들이 나온 동굴 입구 부근 비탈에는 넓게 잔디가 깔려 있어서 편하게 줄을 지어 앉았다.
 기온이 높아 모두 입고 온 두꺼운 패딩을 벗었다.
 손대산 역시 권영재에게서 빌린 패딩을 벗었다. 어제 제대할 때 입었던 군복이 드러났다.
 군복에는 좋은 점이 있다. 막 입고 아무 곳에나 앉기 좋다. 한마디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천후용이라 거리낄 게 없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자신 있게 풀밭에 앉았다.
 정세희가 손뼉을 치며 주목을 유도했다.
 “지금 우리는 거의 이틀간 잠을 자지 못해 매우 피곤한 상태야.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잠부터 자서 피로를 풀어야 해. 지금부터 두 사람은 보초를 서고 나머지는 자기로 하자. 텐트를 칠까? 일단 그냥 자도 될 것 같지? 절대 여기를 벗어나선 안 돼. 알았니?”
 일단 자고 일어나서 시작하자는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다.
 보초는 지원자를 받았다.
 손대산은 첫 보초를 자청했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처음 보초를 설 두 사람은 그와 대학원생 김윤기로 정해졌다.
 두 번째 보초는 친구 권영재와 용감했던 박용석이었다.
 탐사대원들은 가까운 곳에 흩어져 입고 있던 패딩으로 자리를 깔고 누웠다. 일부 학생은 텐트로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적당히 자리가 잡히자 정세희가 보초인 두 사람을 불렀다.
 “뭐가 나타날지 몰라. 때로는 야생동물이 나타날 수도 있어.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깨워. 알지? 그럼 두 사람 수고해줘. 일단 8시간가량 자는 것으로 하고 4시간 지나면 다음 보초랑 교대하면 돼.”
 “알겠습니다.”
 손대산은 그녀가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전혀 모르기에 자칫 한눈을 팔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두 사람에게 지시를 마친 정세희도 부근의 나지막한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김윤기가 손대산이 보초 설 장소를 지정해주었다.
 “대산아, 넌 저기에서 보초를 서렴. 난 이쪽에 설 테니까.”
 손대산은 정한 자리로 떠나기 전에 정세희에게 말했다.
 “교수님, 다이어리 잠시 보여주실 수 있나요?”
 하얀 털옷 패딩을 벗어 잠자리를 마련하던 정세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이어리는 왜?”
 “뭐가 적혀 있는지 궁금해서요.”
 “음······.”
 정세희가 손에 잡은 다이어리를 내려다보며 주저했다.
 손대산은 다이어리가 필요했다. 다이어리가 알려줄 두 번째 미션을 보아야 했으니까. 짐작건대 앞으로도 계속 미션을 받으려면 수시로 다이어리에 접근해야 했다. 그 방법도 고민되었다.
 다행히 정세희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이어리를 건넸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꼭 돌려줘.”
 “감사합니다.”
 손대산은 다이어리를 건네받았다.
 정세희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자, 그럼 수고.”
 손대산은 그녀와 김윤기에게 인사한 다음 보초를 서야 하는 장소로 갔다. 현재 탐사대가 자리 잡은 지역의 오른편에 서 있는 작은 나무 옆이었다. 부근이 한눈에 보여 감시하기 좋았다.
 그는 나무 아래에 앉아 타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잔 강행군 탓에 모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모두가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이어리를 펼쳤다.
 이곳에서 다시 보는 다이어리는 새로웠다. 과연 어떤 미션이 주어지는 걸까. 다이어리는 어떻게 그를 최고의 삶으로 이끌어줄까.
 그는 다이어리의 맨 뒷장을 펼쳤다.
 다이어리의 백지에 검은색 글씨가 나타났다.
 
 *
 
 탐사대에 성공적으로 합류했구나.
 
 *
 
 예상대로 글씨가 보였다. 손대산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이곳 판타지아에서도 다이어리의 혼령과 대화가 됐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여기 판타지아 맞죠?”
 
 *
 
 질문할 것이 많겠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다. 너에게 약속했던 새로운 삶은 나의 미션을 따르면 저절로 도달할 것이다. 너도 약속을 기억하겠지?
 
 *
 
 손대산은 순간 주변을 둘러봤다. 2주일 전에 미국 탐사대도 이곳에 왔다고 하니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
 
 루카스 교수를 처리하는 것은 급하지 않다. 그를 만나더라도 당분간은 절대 그런 내색을 비추지 말라. 지금은 힘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럼 바로 새로운 미션을 알려주마.
 
 *
 
 손대산의 시선이 다이어리에 고정되었다. 판타지아란 신세계를 접한 이상 그는 다이어리를 확실히 믿게 되었다.
 멀티미디어 강의실에서 본 루카스 교수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가 판타지아를 언급했던 기자회견도 기억이 났다.
 엘프가 건설한 거대도시, 고블린과 트롤이 살아 움직이는 세상. 우리의 세상은 물질과 에너지로 설명되는 곳이지만 판타지아는 마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눈앞에 인상 깊었던 장면이 휙휙 지나갔다.
 
 *
 
 넌 이곳에서 누구보다 강해질 것이다. 강해지려면 마나를 흡수해야 한다. 많이 흡수할수록 좋다.
 두 번째 미션. 이곳에서 밑동이 빈 고목을 찾아라. 그 아래 숨겨둔 마나석이 있다. 마나석에서 마나를 흡수하라.
 
 *
 
 마나가 언급됐다. 자신이 마나와 친화력이 높다고 했던가. 미션 내용으로 보아 이곳 어딘가에 과거 노광국 교수가 숨겨놓은 마나석이 있고 그 마나석에서 마나를 흡수해야 할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의 시선이 다시 다이어리로 돌아갔을 때 검은 글자가 비산되며 모습을 감췄다.
 그가 다시 질문하려 할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깜짝 놀란 그는 정면을 바라봤다. 대학원생이자 통솔자인 김윤기였다.
 “뭐 해?”
 “아, 형. 다이어리를 보고 있어요. 여기가 어떤 곳인지 빨리 알고 싶어서요.”
 “교수님께 다이어리를 빌렸구나.”
 김윤기가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며칠 새 그는 김윤기와 꽤 친해졌다.
 “여기 오니 어때?”
 “그냥 얼떨떨해요.”
 “나도 그래. 넌 갑자기 끌려와서 더 심할 것 같아.”
 “헤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꽤 했어요.”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멀리 풍경을 바라봤다.
 “여기 엄청 평화롭게 보이지 않아?”
 “네. 한 폭의 그림 같은 세상이네요.”
 “저속에 온갖 위험이 잠재되어 있나 봐.”
 “흐음,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김윤기의 말을 듣는 순간 손대산은 방금 다이어리가 요구한 미션이 생각났다. 다이어리는 그에게 강해질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가 복수 때문일지 위험 때문일지 알 수 없었다.
 “학부생에게 특별히 알리진 않았지만 내가 교수님과 이곳 탐사를 준비하면서 위험 때문에 꽤 많은 신경을 썼어. 예를 들어 트롤이 나타난다고 해봐. 엄청 위험하잖아.”
 손대산은 영화나 게임에서 보았던 트롤을 떠올렸다. 그런 괴물과 비슷한 녀석들이 이곳에 출현한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여간 조심해야 해. 흠, 그리고 여기 좀 어두워진 것 같지 않아?”
 “네?”
 손대산은 고개를 들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머리 위쪽에 뿌옇게 낀 빛나는 것이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다소 어두워졌다. 그렇다고 해도 약간 어둑어둑함을 느끼는 정도. 깜깜한 밤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어두워진 것 같아요. 여기도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나 봐요. 낮과 밤처럼.”
 판타지아에도 낮과 밤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낮에도 지상의 낮처럼 밝지 않고 밤에도 지상의 밤처럼 어둡지 않다.
 한동안 주위를 살피던 김윤기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손대산은 홀로 남자 다시 다이어리의 혼령을 불러봤다. 다이어리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미션만 알려주고 끝낼 모양인가보다. 어쨌든 미션을 따른다 하여 손해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밑동이 빈 고목이라······.”
 그는 주변에서 다소 키가 큰 나무를 찾았다. 이곳의 나무는 잎사귀가 작고 뾰족한 침엽수였다. 대부분 나무 키도 작았다. 지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특이한 종류였다.
 잔디가 깔린 산비탈 가장자리에 작은 숲이 보였다.
 손대산은 그곳으로 접근했다. 경계를 서고 있는 그는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미션 수행이 더 급했다. 별다른 위험이 없을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도 자리 이탈에 한몫했다.
 2m를 넘는 잡목이 비탈에 우거져 있었다. 그는 고목이라 할만한 오래된 나무를 찾지 못했다. 대부분 나무는 줄기가 그의 팔보다 가늘었다. 태양 빛이 없다 보니 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일행이 자는 쪽을 살펴보며 그는 잡목과 덤불을 헤쳤다. 그가 찾는 고목은 보이지 않았다.
 덤불을 헤치는데 무언가가 후다닥거리며 도망쳤다.
 “으악.”
 놀란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그것을 노려봤다. 회색빛의 토끼 비슷한 것이 반대편 덤불로 숨었다. 아니, 토끼가 맞았다. 귀가 길쭉했으니까. 그가 이곳에서 처음 본 동물이었다.

댓글(4)

선비홍빈    
30중반에 최고대학 부교수. 조교수즌.20대. 상상이.안가네요.
2019.10.07 00:02
fo*****    
남극까지 가는 탐사가 무슨 애들 수학여행도 아니고.
2022.05.05 15:39
뵬돼    
취사병은 그냥 취사병이지 뭔 계속 특수부대부심이래 똥군기나 있지 훈련 다 열외아냐 자대복귀해도 같은 소대 중대원이 아니라 반 아저씨취급 아닌가? 취사병이면 훈련하는거 조차 아마 거의 못봤을텐데 생각하고 말하는건 능력 좀 숨겨둔 스페셜리스트야ㅋㅋㅋ
2022.05.31 13:53
궁성2    
결제하지마세요 작가가 초등생수준임 짜증나는 전게로 암 유발함 속시원히 해결도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고
2022.06.01 12:05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