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프롤로그
“드디어 내일이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연신 키보드를 두들기던 시후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은 그의 입사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천무」 온라인이 세상에 모습을 선보이기 때문이었다.
「천무」 온라인.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가상현실 게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게임이 선택한 방법은 매우 특별했다.
‘과거는 쓰여 있지만, 미래는 여러분이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게임 속 배경이 되는 무협지 『천무』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 미래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천차만별로 바뀔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려 나갔던가.
우스갯소리로 ‘영혼을 갈아 넣었다’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건 손가락을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다들 들어가 봐.”
백창현 부장의 말에 일순간 시후의 몸이 멈췄다.
비단 그러한 반응을 보인 건 시후만이 아니었는지,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고개를 돌린 시후는 백창현 부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물론. 다들 확인하던 것만 끝나면 퇴근해. 아, 그리고 방금 되물어 본 차시후 대리는 메일 보내 줄 테니 그거 검토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시뮬레이션 한 번 더 돌리고 퇴근하도록.”
‘제기랄, 실수했다.’
퇴근이라는 달콤한 꿀에 취해, 두 번 말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백창현 부장에게 질문을 던진 건 명백한 시후의 실수였다.
그 실수의 대가는 다름 아닌 업무의 연장.
그가 말을 철회할 일은 없으니, 시후는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할 것이다.
시후는 분노 어린 마음을 담아 키보드를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물론, 손끝으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요즘은 기도 메타가 유행이라고 했던가.
메일을 클릭하기 전, 시후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짧게 기도를 올렸다.
“젠장.”
하지만, 신은 없었다.
확인해야 할 자료량을 본 시후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의 절망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창현 부장은 야속하게도 겉옷을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 과장을 필두로, 사람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비어 가는 사무실 인원만큼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나야?”
“그러게 왜 말을 걸었어? 5년을 지냈는데 저 사람 성격을 아직도 몰라?”
“빌어먹을.”
입사 동기인 태영의 이죽거림에 시후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말대로 알고서도 실수한 건 시후 자신이었으니까.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시후의 어깨를 태영이 툭툭 건드렸다.
“도와주면 마치고 술이나 한잔?”
“너랑 술을 마시느니 회사에서 잠을 자겠다.”
“아, 진짜 딱 한 잔만.”
“꺼져.”
시후가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태영도 자기 일에 집중했다.
다만, 많은 양은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간다?”
시후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태영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조그맣게 투덜거리던 태영이 사라지자, 곧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는 시후의 키보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시후가 잠시 손을 멈추자, 사무실 내부엔 정적이 찾아들었다.
혹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빌어먹을 오늘도 최후의 생존자는 나 혼자군. 윌 스미스조차도 곁에 개 한 마리는 있었는데 말이야.”
시후는 최근에도 다시 봤던 고전 영화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샘이라 불리는 개 또한 감염되어 윌 스미스가 숨을 끊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하긴, 결국엔 윌 스미스도 혼자 남았었지. 일이나 하자, 하지 않고 집에 갈 방법은 없으니깐.”
신세를 한탄해 봤자 뭘 하겠나 싶어 잡념을 빠르게 내려놨다.
시후는 두 눈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덕분에 키보드는 연신 비명을 토해내야만 했다.
집중이 끝났을 땐, 이미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지나 있었다.
그 덕분에 다행히도 열 시 전에는 퇴근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 행복한 생각이 찾아들자, 시후는 책상을 살짝 내려쳤다.
“뭐가 다행이야. 여덟 시에 출근해서 열 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제기랄! 이런 거지 같은 회사.”
입과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투덜거리는 입은 분노를 내뱉었고, 구름을 매만지는 듯한 손놀림은 키보드를 어루만지며 제 역할을 다 했다.
다행히 메일을 회신한 시간은 열 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퇴근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취하기 위해선,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위해선 사무실 가운데 놓인 중앙 컴퓨터로 가야 했지만, 중앙으로 향하던 시후의 걸음이 갑자기 선회하며 사무실 구석으로 향했다.
시후의 발이 멈춘 곳은 새까만 캡슐 앞이었다.
‘블랙 모아이.’
캡슐 초기 모델은 몇 번 들어가 보았지만, 최종판이라 불리는 이 블랙 모아이를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캡슐 하나가 삼천만 원이라니.”
시후는 곁으로 다가가서 블랙 모아이 캡슐을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무광과 단순하게 생긴 외견은 회사가 추구하는 것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캡슐의 디자인에 백날 신경 쓴다고 해도, 게임이 재미없으면 팔리지 않는다.”
입사부터 질리도록 들었던 말을 중얼거리다가, 캡슐 상단에 있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띡.
퓨쓔우우.
바람 새어 나오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껍질을 벗고 내부를 보여 주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엔 충분해 보이는 공간.
내부 역시 외견과 마찬가지로 깔끔했다.
슬쩍 몸을 집어넣어 보자, 예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관에 들어가는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면, 지금은 몸을 살포시 감싸오는 게, 마치 오리털로 만든 침낭 같았다.
“이야, 여기서 자도 괜찮겠는데?”
조금 누워 있다 보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극 초반에야 시후도 자주 들어가서 구현도를 확인했지만, 전문 테스터들을 고용한 뒤부터는 들어갈 일이 없었다.
영상으로 보기는 했지만, 캡슐에 누워 있을수록 과거의 향수가 시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잠깐만 들어가 볼까?”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신속했다.
“일반 사용자로 들어가고······.”
초기 테스트를 해 보았던 탓일까.
손가락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십여 가지에 다다르는 패널 버튼을 연이어 누르자, 곧 캡슐 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신경 안정화 가스가 나옵니다.]
캡슐의 소리와 함께 머리맡에서 약한 바람과 가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빠른 접속을 위해 강제적으로 반 수면 상태에 빠지자, 한창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메인 서버로 시후가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차 대리는 벌써 갔나?”
백창현 부장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인 거로 봐선, 시후를 위한 선물이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사람은 지금 자리에 없었다.
그는 양손에 커피를 들고 사무실을 걸어오다가 시후의 자리를 지나 중앙 컴퓨터에 다다랐다.
“어딜 간 거야? 게다가 내가 시뮬레이션 다시 돌리라고 했을 텐데?”
백창현 부장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중앙 컴퓨터에는 아직 기존의 시뮬레이터가 돌아가는 중이었으니깐.
“차 대리 이 녀석은 가끔 덤벙거리는 성격이 문제란 말이야.”
한숨을 푹푹 내쉬던 백창현 부장은 중앙 컴퓨터의 키패드를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리셋하고······ 2만 배속으로 돌리면 내일 7시 전에는 끝나겠군.”
백창현 부장은 패널 위로 뜨는 알람 창을 읽지도 않은 채 YES를 연타했다.
곧이어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들린 커피 중 하나를 시후의 자리에 올려 두곤, 품에서 담배를 꺼낸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빠져나온 사무실 구석에는 아주 미약한 소리와 함께 캡슐이 작동하고 있었다.
캡슐에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빨간색 불빛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중앙 컴퓨터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캡슐 외부에는 ‘Uploading 100%’라는 글자만 계속 점멸하고 있었다.
여전히 시후를 품은 채로.
- 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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