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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공학자 1-1

2019.09.23 조회 6,452 추천 40


 색공학자 1권
 
 목차
 프롤로그(Prologue)
 1장. 복학생의 MT
 2장. 세 가지 계명
 3장. 운명
 4장. 변화의 시작
 5장. 색공 입문
 6장. 진짜 선수
 7장. 야망
 8장. 신세계
 9장. 브레인 맵(Brain map)
 10장. 숨 고르기
 11장. 노력하는 자
 12장. 공모전
 
 
 
 *색공학자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창작된 소설로서 실제 상황 및 현실 배경과 다른 내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 프롤로그(Prologue)
 
 
 
 공학자(工學者).
 영어로는 엔지니어(Engineer).
 
 대한민국에서 공학자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던전이나 다름없는 공대를 졸업해도 끝내 치킨집 사장이 되고 만다.
 용케 관련 분야에 취직을 해도 박봉과 컵라면을 친구삼아 야근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 공학자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별종 중의 별종, 색공(色功)을 익힌 공학자.
 그의 시작은 칙칙한 공대생이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바야흐로 색공학자의 시대가 왔다.
 
 
 
 & 1장. 복학생의 MT
 
 
 
 “야! 김도진!”
 캠퍼스 저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청바지에 체크 남방을 입은 김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 전역했다더니! 축하한다!”
 “오? 복학생 주제에 머리에 힘 좀 줬는데?”
 그에게 달려든 같은 과 친구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오늘은 개강 파티가 있는 날이자 2년여의 군 생활을 마친 김도진이 K대 컴퓨터공학과 3학년으로 복학하는 날이었다.
 제대 후 고향집에서 쉬다가 곧바로 서울에 올라온 김도진은 잔뜩 들떠 있었다.
 “잘들 지냈냐?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린 그가 동기들과 악수를 나눴다.
 같은 과 동기들이지만 1년 전쯤 휴가 때 보고 처음 만나는 것이다.
 다시 사회로 나와 복학을 해서인지 괜히 어색하기도 하고 더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보다 먼저 제대하고 복학한 동기들은 짓궂기 짝이 없었다.
 “이거 말투에서 아직 군대 냄새가 나는데?”
 “그러게. 나름 신경은 썼는데 파릇파릇한 신입생들 눈에는 복학생 아저씨로 보이겠어.”
 다들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김도진은 내심 신경이 쓰였다.
 남중, 남고, 공대, 군대.
 그야말로 모태 솔로를 양산하는 지옥의 테크트리를 타고 24년의 인생을 보냈다.
 그는 이번 학기에야말로 든든한 군필 복학생 오빠로서 솔로 탈출에 성공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물론 공대에는 여자가 부족하다. 예쁜 여자는 더더욱 부족하다.
 그러나 김도진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들이 놀려대니 괜히 위축이 되는 기분이었다.
 “됐고, 강의실이나 들어가자.”
 “그래. 오늘 개강 파틴데 죽어라고 마셔줘야지. 소문으로는 신입생 중에 여자도 많다더라!”
 “진짜?”
 김도진이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다.
 다른 친구들도 흥미를 보이며 여자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공대생에게 여자란 늘 고픈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다른 동기가 고개를 저으며 초를 쳤다.
 “야! 괜히 설레발치지 말자. 우리 과에 들어오는 여자들이 다 그렇지 뭐. 신입생이라고 다르겠냐?”
 “하아- 그건 또 그렇다.”
 “젠장.”
 김도진을 포함해 다들 공대생만 느끼는 설움으로 하나 되고 있었다.
 공대 아름이는 전설 속의 생물이다.
 현실에는, 특히 명문대지만 칙칙하기로 유명한 K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얼른 가자.”
 꿈에 부풀어 복학한 김도진도 힘 빠진 목소리로 친구들을 이끌었다.
 청바지에 남방, 혹은 피케 티.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 여럿이 우르르 몰려갔다.
 김도진은 그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올해는 기필코 솔로를 탈출하겠다는 희망이었다.
 
 ***
 
 ‘올해도 또······.’
 김도진은 밤공기를 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암역 근처의 호프집 입구에 서서 청승을 떠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개강 파티에 참석했지만 사람들 틈에 섞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아웃사이더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커먼 동기들과 어울리는 건 질릴 만큼 해봤다.
 문제는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다.
 김도진은 소문대로 유독 여성 비율이 높은 이번 신입생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것도, 얼굴이 남다르게 잘생긴 것도 아닌 그는 여자 신입생들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딱히 모자란 구석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세울 것도 없는 선배. 어느 과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선배가 바로 김도진의 현재 위치였다.
 “여기서 뭐 하냐?”
 그때 다른 친구 하나가 담배를 피우러 나오다 김도진을 발견했다.
 외모가 뛰어나진 않아도 타고난 말발로 여자 신입생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던 녀석이었다.
 “말시키지 마.”
 김도진은 괜히 심통이 나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녀석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대하고 복학하면 세상 여자 다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맘대로 안 되니까 열받지? 나도 그랬어. 다 안 다고, 인마.”
 “알긴 뭘 안다고······. 됐다, 담배나 피우고 올라가라.”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고. 엠티가 있잖아, 엠티가.”
 “엠티?”
 엠티라는 말에 김도진이 눈을 크게 떴다.
 보통 복학생들은 신입생들이 참가하는 첫 엠티에 참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가 말을 꺼낸 걸 보니 다른 동기들도 참석할 작정인 것 같았다.
 “우리가 가면 욕먹지 않겠냐?”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과 단합 차원에서 이번 엠티에는 전 학년 다 참석하는 걸로 말해놨지. 그러니까 기운 내라고!”
 “엠티라, 엠티.”
 김도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책없지만 엠티라는 기회가 생기자 기분이 풀렸기 때문이다.
 평생을 솔로로 살아온 공대 복학생 김도진에게 이번 봄은 절대 그냥 보낼 수 없는 계절이었다.
 친구는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내가 가서 신입생들한테 니 이야기 많이 해줄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고맙다. 내가 잘되면 무조건 크게 쏜다!”
 “잘되기나 해. 이 기회에 너도 캠퍼스 커플 한 번 해보고 졸업해야지.”
 “그래!”
 캠퍼스 커플.
 그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김도진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개강 파티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도 엠티가 기다리고 있다.
 학점, 취업 준비, 어학연수.
 다 필요 없다.
 아직 군대 냄새가 덜 가신 김도진은 여자 친구를 만드는 걸 지상 목표로 삼았다.
 그런 그에게 신입생들과 함께 떠나는 엠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엠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김도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자, 한 잔씩 채우고··· 컴공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올해의 과대가 잔을 들고 소리를 높였다.
 그를 따라 엠티에 참석한 전원이 ‘위하여’를 외쳤다.
 전원 제창으로 엠티의 첫날 밤 술자리가 시작됐고,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마시는 밤샘 술판의 시작이었다.
 김도진은 신입생과 이 학년, 그리고 복학생들이 섞여 앉은 테이블에서 연신 소주잔을 홀짝거렸다.
 막상 엠티까지 왔지만 존재감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아침부터 지금까지 게임 등을 하며 신입생들과도 제법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타고난 어색함을 쉽게 떨쳐 버리긴 힘들었다.
 친구들과 놀 때는 자연스럽게 나오던 농담도 여자들, 특히 신입생들 앞에서 하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김도진을 딱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다수의 모태 솔로들이 겪고 있는 고질병이었다.
 “도진아, 왜 이렇게 조용해?”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눈치챈 동기가 말을 걸어왔다.
 개강 파티 때부터 화려한 말발로 신입생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던 녀석이 나름 신경을 써주려는 것이다.
 “그냥, 뭐.”
 김도진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 신입생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끼며 대답을 했다.
 그러자 말을 걸어준 동기가 그를 제대로 소개했다.
 몇 학번 누구 정도가 아니라 신입생들이 김도진에게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무게 잡기는. 다들 도진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2학년들은 들어는 봤을 테고.”
 “어떤 분이신데요, 선배?”
 신입생 중에서 제법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당돌하게 질문들 던졌다.
 김도진을 띄워주려던 동기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발을 과시했다.
 “우리 과에서 신입생 때 프로그램 공모전 입상한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이때까지 딱 한 명! 바로 여기 비리비리해 보이는 김도진이다, 이거거든.”
 “오-!”
 정부나 기업에서 여는 프로그램 공모전은 고학년들도 입상하기 어렵다. 워낙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도진은 일 학년 때 큰 규모의 공모전에서 당당히 입상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신입생들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범하게만 보이던 김도진이 사실은 컴공과의 숨은 능력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뭘 그런 걸 말하냐, 민망하게.”
 “왜? 대신 자랑해줘서 좋으면서. 하하하!”
 김도진은 민망한 척 했지만 실은 동기 녀석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여자 신입생들이 그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선배님, 진짜 일 학년 때 공모전에서 입상하셨어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드셨던 거예요?”
 “전 컴공과 들어왔지만 아직 기본 코딩도 못 하는데······. 진짜 대단하세요!”
 여기저기서 여자 신입생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김도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멋진 선배인 척 천천히 대답을 해나갔다.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어. 너희도 조금만 공부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거야.”
 “진짜 그럴까요? 전공 과목 이름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워요, 선배님.”
 김도진은 엄살을 부리는 신입생들이 귀엽게만 보였다.
 컴퓨터공학과에 들어온 신입생 대부분은 적성 때문이 아니라 점수에 맞춰 왔을 것이다.
 오히려 적성을 찾아 들어온 김도진이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며 멋진 선배 노릇을 계속했다.
 “어려운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전공과목은 전부 자신 있으니까.”
 “정말요?”
 “선배 좋다는 게 뭐겠어.”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선배님!”
 여자 신입생 몇몇은 어려운 과제가 주어질 때마다 김도진을 찾으려는 듯 애교를 부렸다.
 김도진은 한 손으로 동기 녀석을 툭 치며 감사를 표했다.
 동기가 칭찬을 해준 덕에 처음으로 존재감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들뜬 게 문제였다.
 자신감을 얻은 김도진은 신입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프로그램 이야기를 너무 길게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코딩도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야. C언어 같은 경우도······.”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같은 테이블에 앉은 신입생들의 표정이 굳어갔다.
 반짝거리던 눈빛도 생기를 잃었다.
 다들 지루한 이야기가 언제쯤 끝날지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김도진은 점점 더 신이 나서 신입생들의 분위기를 파악 못 하고 있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는 정보통신 우수병으로 선정되어서 포상 휴가를 얼마나 받았는데, 너희도 여자지만 이왕 들어온 거 전공만 열심히 파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결국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 일 순위인 군대 무용담까지 늘어놓은 김도진은 뒤늦게 분위기가 축 처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이, 그것도 스무 살 여자들이 프로그래밍이나 코딩에 큰 관심을 둘 리 없었다.
 그녀들은 컴퓨터공학과의 신입생이기 전에 갓 성인이 된 풋풋한 여자들이다.
 그런 점을 간과한 김도진은 자신의 장점을 과하게 드러내다가 또다시 재미없는 선배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설마 또 망한 건가······.’
 김도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동기 녀석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를 띄워줬던 동기도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 뒤로는 말발 좋고 유머러스한 몇몇이 대화를 완전히 주도했다.
 스무 살 여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연예인, 패션, 쇼핑, 힙합 클럽이나 음악 등 정해져 있다.
 전공에 대해 박식한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김도진은 도무지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걸그룹에 미쳤어도, 연예인 누가 누구랑 사귀고 최근에 뜨는 아이돌은 누구인지는 아무리 들어도 난해하기만 했다.
 패션이나 쇼핑은 말할 것도 없고 힙합 클럽이나 음악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진 쉬는 날이면 피시방에 가거나 집에서 코딩을 하던 게 김도진의 일상이었다.
 그는 옆자리에서 최신 패션 트랜드와 클럽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동기가 부럽고 신기했다.
 그리고 동기 녀석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터트리는 여자 신입생들이 얄밉기도 했다.
 저러다가도 시험이 다가오면 자신에게 찾아와서 전공 과제를 도와달라고 하겠지. 그러고는 고작 커피 한 잔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다른 동기 남자들과 어울려 캠퍼스 커플이 되겠지.
 빈정이 상한 김도진은 혼자서 묵묵히 술잔을 들이켰다.
 쓰디쓴 소주가 오늘따라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잔, 두 잔을 계속해서 마시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새벽 세 시, 술이 약한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장난기가 심한 고학번들은 쓰러진 남자 신입생들의 얼굴에 낙서를 하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엠티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도 하나둘 나타났다.
 이곳에서 눈이 맞은 남녀들이 드문드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티가 나게 둘이 같이 나가는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유심히 지켜보면 남자가 먼저 바람을 쐬러 나간다. 그 뒤에 여자가 술을 깨고 와야겠다며 따라 나가는 게 일반적이다.
 김도진 옆에서 화려한 말발을 자랑하던 동기 녀석도 신입생 여자 한 명을 낚아서 밖으로 사라졌다.
 주위에 있는 거라곤 펜션이 전부인 어두컴컴한 시골 마을에서 남녀 둘이 무엇을 할까.
 술도 취했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텅 빈 테이블에서 소주병을 비우는 김도진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릇 엠티의 역사는 첫날 밤 술자리에서 결정된다.
 크나 큰 야심을 품고 동기들과 함께 엠티에 온 김도진은 이번에도 패배자가 되었다.
 정녕 그에게 캠퍼스 커플은 사치란 말인가.
 될 놈은 계속해서 되고 안 될 놈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인생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여자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너무 컸다.
 단지 소망과 현실의 괴리가 더 커서 괴로울 뿐이다.
 “아··· 너무 취하네, 이거.”
 김도진은 울분과 취기가 뒤섞여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시느니 밤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그러다 밖으로 사라진 예비 커플들을 마주치면 훼방이라도 놓을 심보였다.
 “도진아, 너 어디 가냐?”
 그가 일어서자 남자 후배들 얼굴에 낙서를 하던 동기가 말을 걸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괜찮겠냐?”
 “신경 꺼.”
 김도진은 손을 휘저으며 신발을 챙겨 신었다.
 다른 사람들도 딱히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엠티에서 술 취한 복학생이 바람 쐬러 나가는 걸 걱정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끼익-
 펜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김도진은 예상보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찬바람을 쐬니 술기운이 확 도는 기분이었다.
 자칫하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길을 내키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다.
 “나 같은 놈은 감기에 걸려도 상관없어. 어차피 걱정할 사람도 없을 텐데.”
 잔뜩 취해서 무작정 걸어가던 김도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펜션에서 점점 멀어졌다.
 저벅저벅-
 그의 발소리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어둠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멍하게 걸어온 김도진은 문득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 돌아봤다.
 “여기가··· 어디지?”
 펜션에서부터 얼마나 걸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김에 걷다 보니 펜션들이 모인 곳에서 한참 멀리 나온 것 같았다.
 진퇴양난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한다.
 다시 온 길을 돌아가려고 했지만 머리가 핑핑 돌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술기운은 오를 대로 올랐고, 어두컴컴한 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김도진은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와버렸다. 멀리 와도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이, 일단 가보자.”
 그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걸음이 자꾸 엉켰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술기운이 몸을 지배해도 최대한 빨리 펜션으로 돌아가야 한다.
 쓰러지더라도 펜션에서 쓰러져야지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아침에 어떤 몰골로 발견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시골길이라 그런지 유독 발에 걸리는 게 많은 느낌이었다.
 올 때는 몰랐는데 돌아가려니 길이 더 험한 것 같았다.
 김도진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바쁘게 걸었지만 실제로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기운이 그의 팔다리를 지배해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만든 것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상태로 용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어? 어-!”
 그때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던 김도진이 뭔가를 밟고 넘어졌다.
 몸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길 바깥쪽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콰당탕탕!
 길 바깥은 급격한 경사면이었다.
 김도진은 저 아래의 계곡까지 굴러떨어지며 자갈과 나뭇가지에 온몸이 쓸렸다.
 “크윽··· 으으읍-!”
 그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술에 취했어도 급경사에서 데굴데굴 떨어지는 통증은 생생하게 전해졌다.
 얼마나 굴러 온 것일까.
 털썩!
 바닥에 다다른 김도진의 몸이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섰다.
 축 늘어진 그는 등판이 서늘하게 젖는 걸 느꼈다.
 기어코 계곡물이 흐르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나마 수심이 얕고 큰 바위가 없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돌에 찍혀 허리가 부러지거나 계곡 물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으윽-”
 김도진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최악의 경우는 피했지만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거기다 한참을 굴러서인지 술기운이 위장을 뒤집어놓은 것 같았다.
 까딱하면 정말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K대 공대 복학생, 개강 엠티에서 술 취해 실족사. 이 얼마나 우습고 꼴 보기 싫은 헤드라인인가.
 김도진은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서 체온이 더 떨어지는 걸 막아야 했다.
 스윽- 스르륵!
 열심히 기어가는 김도진은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군대 시절 혹한기나 유격에서도 이처럼 열심이진 않았다.
 그때는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 사고 현장이다.
 주위에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혼자 힘으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이 감기는 것일까.
 술기운과 추락의 통증을 견디지 못한 그의 몸이 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직 쌀쌀한 초봄인데 부상을 입은 채 잠들면 다시 못 일어날 수 있다.
 김도진은 입술을 깨물고 겨우 물가 바깥에 다다랐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쉬려니 이번엔 허기와 갈증이 그를 괴롭혔다.
 타는 듯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았다.
 솨아아아-
 그때 김도진은 자신이 계곡에 떨어졌음을 새삼 깨달았다.
 바깥쪽으로 기어 나왔지만 여전히 근처에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손을 휘저어보니 차가운 물이 느껴졌다.
 너무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진 않아도 바닥을 적시는 얕은 계곡 줄기가 분명했다.
 김도진은 앞뒤를 재지 않고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목부터 축이고 힘을 내서 위로 올라가는 거야.’
 그는 결심을 굳히고 계곡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시원한 물이 김도진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보통 물과는 다른 단맛이 느껴졌다. 마치 설탕을 듬뿍 탄 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갈증을 채우기에 급급한 김도진은 개의치 않고 계속 물을 들이켰다.
 “어······? 으- 으윽!”
 그 순간 갑자기 김도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풀썩!
 이윽고 김도진은 숨이 끊어진 것처럼 뒤로 쓰러졌다.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이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직은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 2장. 세 가지 계명
 
 
 
 일(一), 서른 날이 지나기 전에 음기를 흡수하라! 따르지 않으면 폭주하게 되리라!
 
 이(二), 음기를 흡수하면 색공을 익힐 수 있으리라!
 
 삼(三), 색공을 대성하여야 진정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
 
 머릿속에서 세 가지 계명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가운데 오직 세 문장의 계명이 천둥처럼 울리고 있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가 김도진의 가슴 깊숙이 계명을 각인시켰다.
 이 세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툭툭, 툭툭!
 그때 칠흑처럼 어둡던 김도진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배, 선배?”
 “도진아! 정신차려 봐, 인마!”
 귓가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김도진은 천천히 눈을 뜨며 현실 세계로 돌아갔다.
 “으음······.”
 그의 눈앞에는 어젯밤 함께 술을 마셨던 컴공과 동기와 후배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숙인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도진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김도진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건 대답 대신 염려와 화가 뒤섞인 동기의 질책이었다.
 “그건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 거고! 너 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건데?”
 “어제 술 먹다가 잠깐 산책한다는 게 그만······.”
 “산책을 이까지 와?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어딘데? 펜션 근처 아냐?”
 “우리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계곡이라고! 맨 정신으로 걸어도 몇 시간은 걸릴 거리를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네가 없어진 걸 알고 아침부터 찾았는데 벌써 점심이다, 인마. 경찰에 신고도 하려고 했었어!”
 “내가 그렇게 멀리까지 왔다고?”
 김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누워 있던 곳 바로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 위쪽은 가파른 경사였고, 크게 자란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술김에 걸어올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확실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까지 온 것 같았다.
 여기에 쓰러져 있던 그를 찾아낸 동기들도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멀리 온 것 같진 않았는데. 이상하네.”
 “술 취해서 얼마나 오는지도 몰랐겠지. 아무튼 무사하니까 다행이다. 사고라도 났으면 얼마나 쪽팔렸겠어, 안 그래?”
 동기 녀석의 말에 김도진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복학생이 되어서 이런 사고를 쳤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다들 밥도 못 먹고 고생했으니까 남은 고기 구워 먹은 뒤에 서울로 가자.”
 “네, 선배님!”
 “고기, 고기!”
 동기가 늠름하게 말하자 신입생들이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김도진은 다른 동기들과 비교해 더 초라해 보였다.
 이번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일 년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입생은 물론이고 동기와 다른 후배들도 그를 술 취해 실종됐던 복학생으로 기억할 게 분명했다.
 “후우······.”
 김도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완전히 낙인이 찍혔다.
 제대를 하고 야심차게 복학한 올해도 커플이 되기는 글렀다.
 커플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 안에서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망했다, 망했어.”
 그의 혼잣말이 유독 씁쓸하게 울렸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개강 기념 엠티는 한 학기의 시작일 뿐이다.
 대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되기 전까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거치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한다.
 엠티에서 다시금 쓴물을 들이켰던 김도진도 다를 건 없었다.
 이제 3학년으로 복학했으니 학점 관리도 더 철저히 해야 했다.
 어쩌면 엠티에서 사고를 치며 망해버린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연애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접어버리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됐기 때문이다.
 스슥, 스슥-
 김도진은 교양 강의를 듣고 곧장 도서관에 와서 복습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는 전공과목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재였다.
 교수님들도 프로그래밍에 열심인 그를 무척 아꼈다.
 하지만 낯선 교양 과목은 신경을 써서 공부해야 한다.
 더군다나 군대에 있으며 둔해진 머리를 다시 깨우려면 예전보다 더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집중하자, 집중!’
 김도진은 눈을 부릅뜨고 강의 내내 필기했던 내용을 훑어봤다.
 그런데 평소라면 머리에 쏙쏙 박힐 내용들이 계속 겉도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공부를 다시 해서 그런 것일까.
 휘익-
 김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눌렀다.
 얼마 전부터 공부에 집중할라치면 머릿속에서 자꾸 이상한 문구가 떠올랐다.
 술에 취해 실종됐던 그날 밤, 유난히 달달했던 계곡물을 마신 후 뇌리에 박힌 문장이 재생되는 것이다.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음기를 흡수하라고? 안 그러면 폭주한다고? 이게 무슨 헛소리야. 그리고 더 황당한 건 색공 어쩌고 하는······. 음기를 흡수하면 색공을 익히게 되고, 그걸 완성시켜야 자유로워진다? 기가 막힌다, 진짜. 삼류 무협지에나 나올 말이 왜 계속 반복되는 거냐고!’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울렸던 세 개의 계명이 김도진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날의 일은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딴 생각을 하려 해도 그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공부를 하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에게 말해봐야 미쳤다고 할 것이다.
 김도진은 답답함을 가누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술이 덜 깬 건가?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미치겠다, 정말.’
 그는 결국 책과 노트를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이대로 앉아 있어봤자 시간 낭비만 될 뿐이다.
 차라리 집에 가서 잠이라도 푹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처억-
 백팩을 어깨에 걸친 김도진이 도서관을 박차고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천 근처럼 무거워 보였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고민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풀썩!
 집에 도착한 김도진은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학교 근처의 원룸은 오직 그를 위한 공간이었다.
 대학생의 자취방답지 않게 여러 대의 모니터와 온갖 IT 기기를 갖춰 놓았기에 좁아도 남부럽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요즘은 자취방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친구들은 제법 있어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일까.
 김도진은 침대와 책상으로 이뤄진 자취방이 자신의 전부인 것 같았다.
 “누굴 탓하겠어. 멍청하게 술에 취해서 사고나 친 내 잘못이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린 김도진은 이불을 끌어 당겼다.
 그때 낯선 계곡에서 굴러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이상한 목소리를 계속 들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는 환청이 지속되면 병원에라도 가볼 생각이었다.
 후드득-
 김도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일단 일찍 잠들고 싶었다.
 학교 공부와 환청 등 나머지 일은 푹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인지 김도진은 금방 깊이 잠들었다.
 이불을 꽉 붙잡고 잠든 모습조차 그리 편해 보이진 않았다.
 “후우우우-”
 김도진은 잠에 빠진 채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꽈악.
 이윽고 그가 이불을 세게 움켜잡았다.
 엠티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 이제껏 환청으로만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이 드디어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지금 진짜 이상한 꿈을 꾸는 중이었다.
 
 ***
 
 젊은 남자가 있었다.
 하얀 도복을 입고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남자의 외모는 준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도사였지만 자유분방했고, 따르는 여인들을 내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천하를 주유하며 풍류를 즐기는 풍운아였다.
 하지만 비극은 한 권의 서적을 읽은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색도천문공(色道天門功).
 색의 길로 하늘 문을 여는 공법이란 뜻이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낡은 서적이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고구려의 방랑 도인이었던 담상군은 색도천문공을 익히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었다.
 색도천문공의 전승자는 무조건 서른 날에 한 번은 여인의 음기를 흡수해야 했다.
 다행히 따르는 여인이 넘쳐나던 담상군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간혹 서른 날을 넘길 때에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지곤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쳐 날뛰는 색마가 되어 음기를 충족시킨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담상군은 지속적으로 음기를 흡수하며 정진하였다.
 다행히 색도천문공은 사파의 흡정대법처럼 여인들의 기운을 빼앗는 무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음기와 양기를 교환하여 여인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운우지락을 나누며 몸을 섞지 않아도 음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여인을 모르는 신체일수록 아주 사소한 접촉으로도 충분한 음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담상군은 여인에 도가 튼 사내였기에 몸을 섞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고구려는 물론이고 중원 대륙의 여인들을 취하며 색공을 완성시키던 담상군은 점점 유명세를 얻게 된다.
 빼어난 외모에 엄청난 방중술, 거기다 고강한 무공까지 익힌 고구려 사내가 중원을 휘젓고 다녔으니 자존심 센 중국인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결국 담상군은 중원 무림의 추격을 받게 되고, 평화롭던 일상은 핏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죽이고, 도망가고, 죽이고, 도망가는 것의 반복이 지겹도록 이어졌다.
 담상군은 색도천문공의 힘으로 중원의 무림인들을 수도 없이 쓰러트렸지만 추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는 목숨을 건 전투 때문에 서른 날의 기한을 넘겨 버렸다. 색도천문공의 법칙을 어기고 제 때에 음기를 흡수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는······.
 
 ***
 
 “허억-!”
 꿈은 거기서 끝났다.
 김도진은 식은땀을 털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스르르 잠이 들어 몇 시간 동안 악몽 아닌 악몽을 꾼 것이다.
 “뭐야? 이 개꿈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담상군, 그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잊히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도진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꿈에서 담상군이 익힌 색도천문공의 세 가지 계명과 자신이 계곡물을 마시고 듣게 된 목소리가 똑같다는 것도 인정하기 싫었다.
 “개꿈일 거야, 개꿈. 자꾸 환청이 들리는 것도 기가 허해져서 그런 거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말자.”
 김도진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식은땀을 닦았다.
 이렇게 믿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꿈속에서 본 광경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담상군의 기억이 김도진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특히 중원의 무림인들과 담상군의 혈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생했다.
 칼이 부딪치며 뿜어지는 굉음과 검붉은 피의 향연은 김도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벌컥!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찬물이 들어가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몸을 돌린 김도진은 핸드폰을 찾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띠이이이-
 무미건조한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곧이어 익숙하고도 반가운 음성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이고, 도진아!
 “엄마!”
 김도진은 부산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오랜만에 아들이 먼저 전화를 해서인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그래, 그래. 학교는 잘 적응되나?
 “괜찮아요. 그것보단······.”
 -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 보약 한 첩만 지어주면 안 될까요? 기가 허한지 자꾸 환청이 들리고 악몽을 꿔서 공부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보약?
 순식간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부산 아줌마 특유의 거친 말투가 쏟아지기 직전의 신호였다.
 -이게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뭐? 보약? 니 서울에 보내놓고 등록금이랑 생활비 보내느라 허리가 휘는구먼 보약을 해달라꼬?
 “엄마, 그러니까 그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알겠나! 군대도 다녀왔으니 정신 차리고 장학금까지 받아오면 더 좋고. 엄마 아빠는 니만 믿고 있다 아이가.
 “네. 알겠어요.”
 김도진은 풀 죽은 얼굴로 보약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사실 부산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당찮은 소리였다.
 환청이나 악몽도 핑계일 뿐이다.
 전화를 끊은 김도진은 내일부터는 공부에만 집중하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한 번 악몽을 꿔서인지 낮 시간 내내 그를 괴롭히던 환청이 들리지 않았다.
 ‘연애는 글렀고, 공부라도 제대로 해보자. 까짓것 장학금 못 탈 이유가 뭐 있겠어!’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자극을 받은 듯 김도진의 눈빛이 변했다.
 전공과목에서는 두각을 나타냈지만 교양과목에 신경을 쓰지 않아 장학금을 놓쳤던 그가 각오를 달리 한 것이다.
 이상한 악몽을 꾸고 깨어난 새벽, 김도진은 앞으로 닥칠 일을 알지 못한 채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장학금을 목표로 삼은 김도진은 전공과 교양을 가리지 않고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게다가 공강 시간에는 틈틈이 도서관에 들러 복습을 빼놓지 않았다.
 원래부터 전공에는 탁월했던 그가 작심을 하니 뭔가 일을 내도 낼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밤에는 친구들에게 불려 다니며 복학 기념 술자리를 가지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덧 개강일로부터 한 달이 넘게 흘렀다.
 초봄의 추위가 가시고 완연한 봄기운이 캠퍼스를 물들이고 있었다.
 K대 컴퓨터공학과 안에도 봄기운을 풍기는 새로운 커플들이 속속 생겨났다.
 적은 수의 여학생 중에서 괜찮다 싶은 사람은 모두 짝이 있었다.
 물론 김도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연애 분위기로 물든 캠퍼스를 시커먼 남자 동기들과 오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낮에는 공부, 밤에는 피시방 아니면 술자리.
 이것이 지난 한 달간 김도진의 생활 패턴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김도진은 정체 모를 환청에도 적응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담상군이 나왔던 악몽은 그날 이후로 다시 꾸지 않았고, 세 가지 계명을 말하는 환청도 들리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가끔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도 이제는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다.
 여전히 찝찝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냥 안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김도진은 미처 세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이 엠티에서 사고를 당하고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말한 계명 중 첫 번째는 서른 날 안에 음기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폭주하게 된다는 말도 붙어 있었다.
 과연 환청은 사실인 것일까.
 김도진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늘이 지나면 그 목소리가 단순한 환청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밝혀질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면 그저 그런 환청인 것이고, 혹시 폭주를 하게 되면 세 가지 계명과 담상군이 나왔던 악몽까지 모두 현실로 증명되는 셈이다.
 “오늘도 10시에 정문에서 모인다, 알았지?”
 김도진은 강의를 마치고 흩어지는 친구들에게 약속 시간을 알려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그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전공과목 주제 발표에서 교수님에게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지목되어 칭찬을 듣는 기분은 짜릿하기 그지없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도서관에서 복습을 한 뒤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일 생각이었다.
 “불금이다, 불금! 제대로 한 번 달려보자!”
 “늦는 놈이 1차 쏘는 거야? 알았지?”
 대학 동기인 친구들도 금요일이라 그런지 제법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래봤자 매일 몰려다니는 사내들끼리 만나는 거지만 자취방에 박혀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이따 보자!”
 “늦지 마!”
 김도진은 친구들과 헤어지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지막 강의가 늦게 끝났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대충 끼니를 때우면 금방 10시가 될 것 같았다.
 학생증을 맡기고 빈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은 그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펼쳤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물론이고 모바일 앱을 만드는 것과 관련된 전문 용어들이 책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일반 사람이 보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지만 김도진은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다른 건 몰라도 컴공과의 전공과목은 어려울수록 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졸업해서 IT 업계에 취업한 선배들 여럿이 그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학과 내에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엠티 사건 이후 김도진은 이상한 복학생으로 낙인찍혔지만 전공 실력만큼은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스슥, 스스슥-
 노트에 필기를 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요즘엔 환청을 듣는 빈도가 줄어서인지 집중력이 예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 같았다.
 그렇게 바짝 집중을 한 김도진은 어느 순간 허기를 느끼고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그는 도서관 안에서 다소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곗바늘이 10시 정각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에 빠져들어 저녁을 먹는 것도 잊고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었다.
 김도진은 새삼 스스로의 집중력에 흐뭇해하며 책상을 정리했다.
 배가 고팠지만 술자리에서 안주로 저녁을 해결하면 된다.
 오늘은 금요일 밤이라 다들 늦게까지 달릴 것 같았다. 그렇기에 1차, 2차를 오가며 다양한 안주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타다닥!
 가벼운 결음으로 도서관 계단을 뛰어 내려온 김도진은 곧장 정문을 향했다.
 캠퍼스 정문 앞에는 친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웬일로 아무도 지각을 하지 않고 제 시간이 모인 것이다.
 “다들 뭐 잘못 먹었어? 내가 제일 빨리 도착할 거라 생각했는데.”
 김도진은 활짝 웃으며 일찍 온 친구들과 주먹을 부딪쳤다.
 기분 좋게 투닥거린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학교 근처의 고깃집으로 움직였다.
 김도진과 친구들이 선택한 고깃집은 저렴하고 양 많은 전형적인 대학가 스타일이었다.
 “이모, 여기 삼겹살 오 인분이랑 소주 두 병이요!”
 다른 친구 한 명이 넉살좋게 주문을 마쳤다.
 아까부터 배가 고팠던 김도진은 집게를 들고 자진해서 고기를 구웠다.
 지글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삼겹살을 바라보니 침이 저절로 고였다.
 한창 때의 남자들이 모였으니 고기가 다 익기를 기다리는 건 사치다.
 김도진을 비롯한 친구들은 핏방울이 남아 있는 돼지고기를 향해 거침없이 젓가락을 날렸다.
 특히 김도진은 한 손으론 고기를 구우며 나머지 다른 한 손으론 젓가락질을 하는 신공을 보여줬다.
 “야, 그렇게도 고기가 들어가냐?”
 “그럼.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김도진은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친구 녀석의 말은 그의 정곡을 찔렀다.
 “안 되는 거 있잖아. 여자 친구 만드는 거.”
 “야-!”
 여기서 모태 솔로는 김도진 한 명뿐이다.
 치명타를 입은 김도진은 빳빳하게 들었던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 대신 소주잔을 잡았다.
 “젠장.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잔인한 놈 같으니라고.”
 “삐진 거 아니지?”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그게 인생의 진리지, 별수 있겠어.”
 김도진은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소주를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주의 쓴맛이 그의 팍팍한 일상과 닮은 것 같았다.
 슈우우-
 그때 잔을 비운 김도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코끝으로 유달리 달콤한 향기가 스며 들어오는 걸 느꼈다.
 고기 냄새와 술 냄새로 가득한 이곳에서 꽃향기가 풍긴 것이다.
 “뭐지? 무슨 냄새 안 나?”
 “무슨 냄새? 삼겹살 익는 냄새?”
 친구들은 김도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김도진은 방금 전부터 달콤하면서 강렬한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직 그 혼자만이 특별한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슈우우- 슈르르륵!
 이윽고 달콤한 향기가 점점 더 진해졌다.
 사방팔방에서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향기가 뿜어져 김도진을 어지럽게 했다.
 그는 냄새가 맡아지는 쪽을 확인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설마······!’
 놀랍게도 고깃집 안의 여자들이 하나같이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예쁘고 못 생기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여자들 전부에게서 향기가 뿜어져 김도진을 유혹하고 있었다.
 고기 냄새로 뒤덮인 곳에서 아무도 맡지 못하는 특별한 향기. 이게 정상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김도진은 순간 환청이 말하던 세 가지 계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야, 우리가 개강 엠티를 간 날이 언제였지?”
 화들짝 놀란 그가 친구들에게 날짜를 물었다.
 아까부터 김도진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동기들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대답을 해줬다.
 “딱 한 달 전인데? 왜?”
 “정확히 한 달··· 그러니까 삼십 일에서 하루가 더 지난 거네?”
 “그렇지. 근데 너 어디 아프냐? 아까부터 이상하다.”
 “이런 제길!”
 김도진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환청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일(一), 서른 날이 지나기 전에 음기를 흡수하라! 따르지 않으면 폭주하게 되리라!
 
 설마 엠티 사건 때부터 머릿속을 떠돌던 환청이 진실이란 말인가.
 김도진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코끝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향기는 점점 더 진해졌다.
 잘못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향기를 뿜어내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추태를 부릴 것 같았다.
 색도천문공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에 폭주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나, 나 먼저 들어갈게.”
 “갑자기 왜?”
 “몸이 좀 안 좋아서. 이따 연락할게, 미안!”
 김도진은 다급히 짐을 챙겨 고깃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친구들이 황당해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거리로 나오니 여자들은 더 많았고, 가슴은 더 심하게 울렁거렸다.
 김도진은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자취방을 향해 달렸다.
 환청과 악몽이 엄연한 현실로 증명된 날, 김도진은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3장. 운명
 
 
 
 가까스로 자취방에 도착한 김도진은 주먹을 세게 쥐고 허벅지를 내려쳤다.
 퍽! 퍽! 퍽!
 얼마나 강하게 치는지 허벅지에 피멍이 들 정도였다.
 과거의 여인들이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렀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색공의 계명을 따르지 않아 폭주하게 된 김도진도 몸 안의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허벅지를 때리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허벅지의 아픔보다 몸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가 더 강력했다.
 고깃집에서 여자들의 향기를 맡게 된 후 아랫배에서 뜨거운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기운은 전신으로 퍼져 온몸을 살랑살랑 간지럽게 만들었다.
 건강한 성인 남성이 평소에 느끼는 욕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군대에서 맥심 잡지를 돌려 볼 때도 온몸이 지금처럼 뜨거워지진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것이다.
 환청과 악몽을 만들어낸 주범, 색도천문공이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색공이 김도진의 몸 안에 뿌리를 내렸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폭주? 폭주! 이걸 어떻게 하지? 진짜 사고라도 치면 인생 종 치는 건데!”
 김도진은 다급함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첨단 IT 기기들이 가득한 원룸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벅지만 내려치고 있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닌 게 이번이 첫 번째 폭주라는 점이다.
 그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색공을 깊이 익힐수록 폭주의 파괴력이 강해진다.
 아직 순백의 상태나 다름없는 김도진이기에 밖에 나가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이성을 완전히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색공에 대해 문외한인 김도진은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이런 식의 폭주를 처음 경험하면 누구든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는 이성을 붙잡으려 애쓰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저거다!”
 그때 김도진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애지중지하는 컴퓨터였다.
 프로그램 개발과 서버 유지를 위해 제대하자마자 구입한 초고성능 컴퓨터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부팅을 위해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는 순간 별다른 지체 없이 컴퓨터가 커졌기 때문이다.
 김도진은 새삼 자신의 컴퓨터 성능에 만족하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프로그램 코딩을 위해 구입한 컴퓨터지만 지금은 다른 용도로 써야 한다.
 타다닥!
 인터넷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니 새로운 화면이 넓은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섹시한 여자들의 하얀 속살이 고스란히 노출된 성인 사이트가 뜬 것이다.
 김도진은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에 집중하며 몸 안의 열기가 가라앉기를 바랐다.
 원하지 않게 얻은 색공의 첫 번째 폭주를 다스리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날이 밝았다.
 원룸의 창밖으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동이 튼 새벽까지 김도진은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웠다.
 컴퓨터 앞 의자에 축 늘어진 그는 짙은 다크 서클을 품고 있었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영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탈진한 것 같았다.
 밤새도록 뜨거운 화면을 재생했던 모니터는 역할을 다한 뒤 꺼졌고, 대신 본체 옆의 휴지통에는 쓰고 버린 티슈들이 수북이 쌓여 지난밤의 폭주를 증명하고 있었다.
 김도진은 해탈에 이른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폭주는 끝났고 몸 안을 간지럽던 열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음기를 흡수하는 대신 양기를 배출한 건 변칙적인 방법이었다.
 그마저도 폭주의 강도가 낮은 처음이라 통했을 뿐이다.
 만약 다음 달에도 똑같은 방법을 쓰면 절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김도진은 깊은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도 매달 이렇게 끔찍한 폭주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대로는 희망이 없어!’
 그는 위기감을 느끼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주먹을 꽉 쥐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풀썩-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김도진은 곧장 찬물을 틀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샤워기에서 뿜어졌다.
 찬물에 온몸을 적시자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엠티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색공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 술에 취해 굴러떨어졌고, 무의식적으로 계곡물을 마셨었지. 이상하게도 달달했는데 그게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상한 건 그 계곡물이 전부인데······. 꿈에 나왔던 고구려의 담상군, 그 사람이 익혔던 색도천문공이 계곡물을 통해 나한테 전달된 거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푸는 기분이었다.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악몽과 환청, 그리고 오늘의 폭주를 보건데 고구려 담상군의 색도천문공을 얻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색공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전해졌는지, 만약 계곡물이 매개체였다면 어째서 하필 그 자리에 흐르고 있었는지 모든 게 불투명했다.
 ‘그곳에 가보는 수밖에 없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뭐가 다른지 확인해야 해.’
 김도진은 엠티 때 굴러떨어졌던 장소인 계곡으로 다시 가볼 작정이었다.
 그는 색공이 진짜라는 사실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의 전후사정과 인과관계를 알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런 성격을 보면 김도진은 타고난 공대생이었다.
 생각을 마친 그는 실행을 망설이지 않았다. MT에서 자신을 발견했던 동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최신 유행 가요로 설정된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해가 떴어도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동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김도진은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어수룩해 보여도 뭔가에 한 번 꽂히면 물불을 안 가리는 성미가 발동된 것이다.
 -아, 왜!
 결국 전화기 너머에서 동기 녀석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금요일 밤을 불태우고 한창 자고 있던 걸 억지로 깨웠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김도진은 개의치 않고 질문을 던졌다.
 “저번에 엠티에서 내가 술 먹고 사라졌을 때, 그때 날 발견했던 곳이 어디였어?”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이 시간에 전화질로 깨운 거냐?
 “중요해. 진짜 중요한 거니까 정확하게 말해줘.”
 -미친놈!
 동기 녀석은 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딴 일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진짜 중요하다니까.”
 -아, 알았다고. 거기가 그러니까··· 펜션에서 엄청 떨어진 곳이었는데. 주인아저씨 말로는 무슨 연못 근처에 있는 계곡이라고 했었던 거 같다. 우리도 무작정 찾다가 혹시 몰라서 연못으로 올라가는 입구까지 가보고 널 찾은 거니까.
 이 정도 정보면 충분히 그 계곡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도진은 얼굴을 펴며 전화기 너머의 동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뭐 때문에 그러는데? 갑자기 네가 술 마시고 뻗은 장소는 알아서 뭐 하게?
 “그럴 일이 좀 있어서. 아무튼 다음 주에 강의실에서 보자.”
 -미친놈!
 동기는 한 번 더 욕을 날렸고, 김도진은 웃는 낯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청량리역으로 달려갈 마음을 품었다.
 환청이 들리고 악몽이 시작된 곳, 색공을 얻게 된 바로 그 곳. 엠티에서 사고가 났던 그 계곡을 확인하며 단서를 찾아볼 계획이었다.
 
 ***
 
 토요일이라 그런지 청량리역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리를 이룬 사람들은 다들 들떠 보였다.
 김도진은 그들 틈에서 혼자 기차표를 끊었다.
 신입생들, 동기들과 함께 떠났던 곳으로 혼자 가려니 우울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황금 같은 주말을 이용해 색공의 근원을 탐구해야 한다.
 적어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색공을 얻게 됐는지는 알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털썩.
 자리에 앉은 김도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다스렸다.
 기차 안의 시끌벅적함도 그의 상념을 깨지 못했다.
 엠티 때 사고를 친 후로 한 달. 그리고 어젯밤의 폭주까지. 김도진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능을 칠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먼 옛날, 고구려의 담상군이 익혔던 색도천문공.
 무협지에나 등장할 일이 현실이 되어 자신의 몸 안에 뿌리를 내렸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끝까지 현실을 부정하거나 계속된 폭주로 미쳐 버렸을지 모른다.
 그나마 김도진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대처를 하는 편이었다.
 철커덩- 철커덩!
 기차가 철길을 달리며 제법 요란하게 흔들거렸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김도진은 시끄럽고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묘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이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남들은 평생 겪지 못할 이상한 사건의 주인공이 됐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밤새 나름의 폭주를 했지만 체력적으로 멀쩡한 것 같았다. 눈 밑의 다크 서클을 제외하면 평소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의 몸에 스며든 색공의 기운이 벌써부터 김도진을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내리실 역은······.
 
 창밖을 바라보던 김도진은 기차에서 울리는 안내 멘트를 듣고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기차가 멈추자 여행이나 엠티를 떠나온 무리들이 우르르 내렸다.
 혼자 내리는 김도진이 튀어 보일 정도였다.
 목적지가 엠티촌으로 유명한 곳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쓸쓸하게 내린 김도진은 망설이지 않고 엠티 때 묵었던 펜션을 찾아갔다.
 “택시, 택시!”
 역 앞에는 여러 대의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김도진은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펜션 이름을 말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기에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학생, 거길 혼자 간다고?”
 “네. 일이 좀 있어서요.”
 “아, 그래?”
 택시 기사는 엠티촌인 펜션에 혼자 가는 김도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귀찮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부르릉-
 펜션들이 늘어선 길을 달려간 택시가 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김도진은 말없이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모든 게··· 꼬여 버렸지.”
 그는 텅 빈 펜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김도진은 엠티 때 일을 곱씹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이왕 벌어진 일의 전후사정을 알아내서 잘 대처하기 위해 직접 달려온 것이다.
 ‘한번 가보자.’
 심호흡을 한 김도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펜션을 등지고 자신이 술에 취해 움직였던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것이다.
 그날 자신을 발견했던 동기는 그 계곡이 이름 모를 연못 근처에 있다고 말했다.
 우선 동기가 말해준 방향을 찾아서 계곡을 확인한 뒤 연못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저벅저벅.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리며 걸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김도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루만에 부쩍 강해진 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음기를 제때 흡수하지 않아 폭주라는 부작용이 뒤따랐지만, 어쨌든 색공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후우- 후-!”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걸어간 그는 여러 갈래의 길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날 밤에는 더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사고가 난 계곡을 찾아 가는 것이니 여기서 방향을 바꾸면 된다.
 “내가 진짜 멀리 오긴 멀리 왔었구나. 그 새벽에··· 술이 무섭긴 무서워.”
 김도진은 자신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긴 거리를 밤새 걸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고가 난 게 당연한 일이었다.
 펜션들이 모여 있는 곳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문 야생지대였기 때문이다.
 처억.
 한참을 더 걸어간 김도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길옆의 경사면을 찾았다.
 “이쯤인 것 같은데?”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진 곳이 이 부근인 것 같았다.
 김도진은 눈을 치켜뜨고 사방을 살펴보며 그날의 느낌을 기억해냈다.
 부스럭-
 나뭇가지를 밀어내고 길 아래쪽을 확인하니 가파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수심이 얕은 계곡이 흐르는 게 보였다.
 바로 여기가 김도진의 인생을 꼬여 버리게 만든 악몽의 계곡이었다.
 타닷, 타다닷!
 김도진은 겁도 없이 경사면을 내려갔다.
 정신을 바짝 차리면 넘어지지 않고 계곡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드득!
 자갈을 밟고 나뭇가지를 잡으며 내려가자 드디어 아래쪽에 다다랐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계곡을 쳐다봤다.
 흐르는 듯 마는 듯 얕은 물줄기가 어디론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이 확실했다.
 김도진은 눈을 반짝이며 계곡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사람이 없는 곳이기에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허리를 숙인 그는 바닥을 적시며 흐르는 물줄기에 입을 가져갔다.
 ‘어?’
 계곡물을 마신 김도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때는 분명 이상할 정도로 물맛이 달콤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의 물처럼 시원하기만 할 뿐, 단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물을 마신 건데 왜 맛이 다른 것일까.
 몸을 일으킨 김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단서를 찾긴 힘들어 보였다.
 결국 처음 생각했던 대로 계곡물이 내려오는 연못까지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물길을 따라 그대로 올라가면 연못이 나온다고 했었지.’
 김도진은 계곡의 근원을 따라 끝까지 가보려는 듯 힘차게 발을 뗐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날 순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연못까진 가보고 난 뒤에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계곡까지 오는데 한참 걸려서 그렇지 여기서 연못까진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길을 헤맬 걱정도 없다.
 물줄기를 따라서 거꾸로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김도진의 눈에서 승부욕이 일렁거렸다.
 과연 무엇이 자신에게 색공이라는 올가미를 던졌는지 알아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벅저벅.
 그의 발소리가 인적 없는 길을 채웠다.
 김도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오르막을 지나 연못이 있을 만한 곳까지 나아갔다.
 조금 움직이자 그가 찾던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의 상류는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연결됐고, 산 중턱에 적당한 크기의 연못이 있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에 숨겨진 연못은 초록빛을 받아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김도진은 뭔가에 홀린 듯 연못 가까이 다가갔다.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아-”
 그의 입에서 뜻 모를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계속 걸어서인지 새삼 갈증이 느껴졌다.
 김도진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두 손을 연못에 집어넣었다.
 투명한 물이 손바닥 위에 고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연못의 물을 마셨다.
 꿀꺽!
 시원한 물이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계곡 아래에서 마셨던 물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 느껴졌다.
 그날 밤 계곡에서 느꼈던 바로 그 맛, 달착지근한 감칠맛이 연못의 물에 배여 있었다.
 한 번 맛을 본 김도진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예 고개를 파묻고 연못에 담긴 물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가 검증되지 않은 물을 마실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김도진이 어수룩해 보여도 실상은 이성적인 사고를 앞세우는 명문 공대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 안에 뿌리를 내린 색공이 연못의 물에 반응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놀랍게도 연못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일어나 김도진의 몸을 덮었다.
 정작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있는 김도진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비단처럼 고운 무지갯빛 장막이 연못에서 뿜어져 그의 몸 전체를 부드럽게 덮었다.
 “······!”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던 김도진은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뭔가에 빨려 들어가듯 연못 안으로 기울어졌다.
 풍덩-!
 기어코 김도진은 연못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의 몸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연못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숨이 차거나 코로 물이 들어와 고통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지갯빛 장막이 그를 감싸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도진은 편하게 숨을 쉬며 연못 아래를 쳐다봤자.
 그를 이곳으로 부르고 연못에 빠지게 만든 운명의 주체가 바닥 위에 떠있었다.
 고오오오오-!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는 저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람의 심장처럼 생긴 무지갯빛 덩어리가 연못 바닥 위에 뜬 채로 기이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김도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이것은 고구려의 담상군이 죽어가며 남긴 내단이다.
 전설속의 용이나 영물들은 내단을 남겨 후세에 그 힘을 전한다.
 담상군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방법을 써 내단을 만든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억울하게 죽어간 자신을 대신해 색도천문공을 이어줄 계승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슈우우우!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담상군의 내단이 김도진의 손끝으로 흡수됐다.
 입으로 먹을 필요도 없이 손가락이 닿자 모든 기운이 흡수된 것이다.
 드디어 주인을 만난 내단은 김도진의 단전으로 스며들었다.
 이로서 중원 무림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색도천문공이 김도진에게 전승되었다.
 ‘이건······!’
 곧이어 김도진의 눈앞에 흐릿한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요한 부분에서 끊겼던 고구려 출신 담상군,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
 
 평소의 단정한 모습 대신 장발을 풀어헤친 담상군이 연못가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비장한 눈으로 사자후를 토해냈다.
 “기억하라, 우리의 땅에서 태어날 후손이여.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색도천문공은 삼류의 색공이 아니다. 만물의 근원인 음양을 다스려 남자와 여자를 모두 이롭게 하는 신공이다. 수많은 제약을 이겨내고 대성을 이루면 진정 하늘로 통하는 문을 열게 될 것이다. 비로소 그때에-! 이 힘으로 우리 민족의 이름을 천하 온 땅에 각인시킬 수 있으리라. 부족하고 모자란 나는 중원 무림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나라인 고구려에게도 버림받고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허나 나의 후손이여, 삼한과 대륙의 후손이여. 고구려의 정기를 품고 색공으로 하늘을 열어라. 그리하여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라. 온 천하가 너의 것이 되리라!”
 한 줌 남은 기력으로 마지막 말을 마친 담상군이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삶을 체념한 것 같았다.
 풍덩-!
 곧이어 담상군이 연못가로 몸을 던졌다.
 힘을 잃은 그의 몸이 연못 깊숙이 가라앉았다.
 고구려에서 태어나 넓은 대륙을 자유롭게 종횡했던 풍류남아 담상군.
 색도천문공으로 천하를 경악시켰던 일세의 풍운아가 이름 모를 연못에 잠들었다.
 세월이 흐르면 담상군의 몸이 연못 밑에서 녹아내릴 것이다. 그런 뒤에는 담상군의 단전에 생성된 내단만이 연못에 남게 될 터였다.
 담상군은 죽음을 직감하고 진원지기를 소모하며 인위적으로 내단을 만들었다.
 훗날 인연이 닿는 후인에게 색도천문공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후인이 지금 같은 연못에서 과거의 기억을 보고 있는 김도진이었다.
 그가 술에 취해 엄청난 양의 물을 마셨던 계곡은 연못 부근의 하류다.
 연못에 잠긴 담상군의 내단이 영향을 끼치는 범위였던 것이다.
 또 오늘 이곳까지 찾아와 내단을 통째로 흡수했으니 확실한 색도천문공의 전승자가 되고 말았다.
 
 ***
 
 푸슈슈슉!
 고래가 등으로 물줄기를 뿜어내듯 연못이 김도진을 토해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연못 밖으로 튕겨져 나온 김도진은 먼 하늘을 쳐다봤다.
 그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자신의 몸을 신기하게 여길 틈도 없이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아-!”
 얼마 전에 꿨던 악몽에서 담상군은 중원 무림인들과 혈전을 벌였었다.
 그리고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그가 이곳까지 와서 잠든 것은 알 수 있었다.
 김도진은 담상군이 마지막 생명을 희생하여 만든 내단을 흡수한 것이다.
 비록 중간 과정을 모두 알진 못해도 색공을 얻게 된 인과관계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운명이란 말이지, 운명.”
 김도진은 운명이라는 식상한 말을 되뇌었다.
 너무 뻔한 단어지만 그 외에는 담상군과 자신의 인연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담상군의 색도천문공은 김도진의 것이 되었다.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김도진의 몫이다.
 그는 이미 한 번의 작은 폭주를 경험했다.
 그렇기에 색공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것도 식상한 말이지만, 다른 게 떠오르지 않으니까.”
 혼잣말을 읊조리는 김도진은 답답함을 해소한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를 알았으니 개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변함없이 초록빛을 뽐내고 있는 연못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래 전 이곳에 잠들었던 담상군에게 예의를 표한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운명에 잡아먹히진 않겠습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담상군이 남긴 유언처럼 거창하게 천하를 도모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색도천문공을 얻은 이상 계명을 어기지 않고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폭주를 하지 않고 색공을 대성시켜 자유를 얻는 날까지 정진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담상군처럼 특별한 힘과 능력을 얻는다면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부터 미리 미래를 계획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한 달이 남았어.”
 김도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서른 날을 알차게 보내기로 작정했다.
 전형적인 모태 솔로 주제에 어떻게 한 달 안에 음기를 흡수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넋 놓고 모든 걸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담상군이 생을 마감한 연못 앞에서 김도진은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였다.
 
 
 
 & 4장. 변화의 시작
 
 
 
 사고를 당했던 계곡과 담상군이 생을 마무리한 연못에 다녀온 김도진은 자신의 몸이 변했음을 느꼈다.
 아랫배 깊은 곳에 묵직한 뭔가가 자리 잡힌 기분이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숨을 쉴 때마다 폐 대신 아랫배로 호흡하게 되었다.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온몸이 아랫배, 즉 단전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잠을 조금만 자도 피곤하지 않았고,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힘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친구들과 농구를 할 때 힘 조절을 못해 농구공을 터트릴 뻔했다.
 크고 질긴 농구공을 저도 모르게 터트릴 뻔했으니 평범한 사람의 힘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연못에서 담상군의 유지를 받아들인 후 생긴 일이다.
 본격적으로 색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
 만약 음기를 흡수하며 색도천문공의 단계를 밟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야.’
 캠퍼스 안의 벤치에 앉아 있던 김도진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못에서 담상군의 유지를 받아들인 게 나흘 전이다.
 이제 폭주를 하기 전까지 25일 정도가 남았다. 그 안에 음기를 흡수하지 못하면 저번보다 더 강력한 폭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꿈과 환상을 통해 색도천문공의 속성을 알게 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무슨 수로 한 달 안에 음기를 흡수하지?”
 누가 그의 혼잣말을 듣는다면 미쳤다고 말할 게 분명했다.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도진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현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지금껏 한 번도 여자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숫총각이란 점이다.
 온몸이 순수한 상태이기에 여자와 손만 잡아도 필요한 음기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손으로는 부족해져 점점 더 많은 음기가 필요해질 터였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김도진에겐 여자와 손을 잡는 것도 어렵기 짝이 없는 미션이었다.
 “야, 혼자 뭐 하냐?”
 그때 같은 과 동기들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김도진을 보고 지나가던 친구들이 몰려든 것이다.
 “너넨 어디 가는 길인데?”
 “우린 밥 먹으러. 같이 갈래?”
 “어차피 공강인데, 그러자.”
 김도진은 동기들 무리에 섞여 캠퍼스 밖으로 걸어갔다.
 K대 부근에는 싸고 양 많은 학생 식당이 많이 모여 있었다.
 대충 아무 곳에나 들어앉은 김도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친구들의 대화를 흘려들었다.
 그러자 이상한 점을 느낀 동기 하나가 입을 열었다.
 컴공과 내에서 말발로 유명한 이지훈이 김도진을 똑바로 쳐다본 것이다.
 “너 어디 아프냐? 요새 좀 이상하다. 어제 농구장에서도 그랬고.”
 “그러게, 도진이 저거 맛이 간 거 같아.”
 “설마 아직도 엠티 후유증으로······? 흐흐흐.”
 이지훈이 말을 꺼내자 다른 동기 두 명도 맞장구를 쳤다.
 김도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귀찮다는 듯 친구들의 농담을 무시했다.
 “진짜 이상한데? 뭔 일 있냐?”
 “지훈아, 너 밥 먹고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나만?”
 “어, 너만.”
 김도진은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이지훈과 약속을 잡았다.
 다른 친구들이 궁금해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컴공과 안에서 말발 좋고 발 넓기로 소문난 이지훈의 도움이 필요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친 김도진은 두 명을 캠퍼스 안으로 보내고 이지훈을 이끌었다.
 “커피는 내가 쏜다.”
 “불안하게 왜 그래? 뭘 부탁하려고?”
 낌새를 챈 이지훈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 투덜거렸다.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 같던 김도진이 이런 자리를 만들었으니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이지훈. 우리 친구 맞지?”
 “하! 나왔네, 나왔어. 그냥 본론부터 말해, 인마.”
 “대답해. 우리 친구 맞냐고?”
 “그럼 친구지.”
 김도진은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인 걸 보고도 한 번 더 약속을 받아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비밀이다. 과에 소문이라도 나면··· 알지?”
 “알았어. 입 닫을게. 네가 이렇게 나오니 궁금해진다. 무슨 부탁인지 얼른 꺼내봐.”
 김도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지훈아, 네가 우리 과 동기들 중에서 말도 제일 잘하고 인기도 많잖아. 생긴 것도 멀쩡한 편이고.”
 “뭐, 솔직히 컴공과 안에서는 괜찮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지.”
 “그리고 발도 제일 넓고.”
 “무슨 이야길 하려고 이렇게 칭찬만 해주냐?”
 “사실 내가 소개팅을 해볼까 생각 중이거든.”
 “너 원래 소개팅 같은 인위적인 만남은 싫다며? 친구들이 해준다고 해도 다 거절했잖아.”
 “이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야.”
 “잘 생각했다, 인마. 소개팅이면 어떻고 다른 거면 어때? 모태 솔로만 탈출하면 되는 거지.”
 이지훈은 김도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해 줬다.
 그는 동기인 김도진이 조금 엉뚱해도 제법 괜찮은 놈이란 걸 알고 있었다.
 친구가 어렵게 부탁한 게 소개팅이라면 열 번이라도 시켜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근데 너 소개팅에 너무 큰 기대는 품지 마라.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어.”
 “특히 너처럼 소개팅이나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처음엔 엄청 힘들지도 몰라. 괜히 멘탈 붕괴라도 당하면······.”
 “그러니까 딴 애들한텐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알아봐 줘.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김도진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게 뭔지 밝혔다.
 한 달 안에 여자의 손이라도 잡아보기 위해선 일단 상대를 만나야 한다.
 자존심 때문에 전에는 이런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려다 색공의 계명을 어기면 무슨 후폭풍이 불어올지 모른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계명을 지켜서 색공을 익혀야 한다.
 그것만이 김도진의 살 길이자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이지훈은 그런 김도진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래, 말 잘 꺼냈다! 김도진의 모태 솔로 탈출 작전, 내가 끝까지 도와주마!”
 “어?”
 “왜? 내가 놀리기라도 할 줄 알았냐.”
 “솔직히 어느 정도는.”
 김도진은 이지훈의 반응에 놀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인데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지훈은 자기 일처럼 나서고 있었다.
 “내가 몇 년 동안 너를 지켜봤잖아. 솔직히 옆에서 조언도 해주고 싶었는데 네가 자존심이 좀 세냐? 근데 이렇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인마.”
 “고맙다··· 이지훈.”
 “됐고, 나중에 솔로 탈출 성공하면 술이나 한 번 크게 쏴.”
 “그거야 당연하지!”
 “일단 네 말대로 이건 비밀로 하자. 다른 애들한테 말해봤자 소문만 날 테니까.”
 “그래, 진짜 고맙다.”
 김도진은 약간 감동한 듯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친하게 지내긴 했어도 이지훈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거 참 답이 없긴 하네.”
 이지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주 앉은 김도진을 샅샅이 훑어봤다.
 소개팅을 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숙맥 중의 숙맥인 김도진이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하지만 김도진은 평소와 달리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은 25일, 반드시 음기를 흡수해서 색공을 익히고 말겠어. 절대 이 운명에 지지 않아.’
 그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게 각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색공을 익히느냐 마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의에 의한 건 아니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운명의 주사위를 손에 넣은 김도진은 인생 최대의 도전을 하고 있었다.
 일단 소개팅만 주선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K대 앞의 카페에서 김도진의 색공 익히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명동은 일 년 내내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시내 최고의 번화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K대 앞인 안암을 벗어나지 않는 김도진도 명동을 찾아왔다.
 그는 이지훈의 조언을 받고 옷을 사기 위해 명동까지 온 것이다.
 이제까지 김도진의 패션은 전형적인 공대 복학생 스타일이었다.
 약간 헐렁해 보이는 청바지, 식탁보 무늬의 체크 남방, 검은색 뿔테 안경.
 물론 가끔 다른 바지를 입고 남방 대신 티셔츠나 피케 티를 입을 때도 있지만 전체적인 틀은 똑같았다.
 조금의 특색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패션. 그런 스타일로는 김도진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없다.
 어설프게 패셔니스타를 따라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늘 칙칙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도 솔로로 남는 지름길이다.
 김도진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알아낸 지식을 머릿속으로 확인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동대문에 가면 눈탱이 맞기 쉬워. 차라리 명동에 있는 쇼핑몰이 혼자서 둘러보기 편한 분위기라고 했지. L백화점 본관 옆에 붙어 있는 영플라자는 스트리트 패션이 많고, 자라나 H&M같은 외국 브랜드도 저렴하면서 괜찮은 옷들이라 했어. 여기까지 나온 김에 천천히 둘러보자.’
 원래 김도진은 패션에 패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랬던 그가 불과 며칠 사이에 요즘 패션 트렌드를 줄줄 외고 있었다.
 뭔가에 빠져들면 밤을 새워가며 끝을 보는 성격이 발휘된 까닭이다.
 이제까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만 열정을 쏟았지만 색공을 익히기 위해선 다방면에 능통해야 한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인터넷의 패션 동호회와 소개팅 팁을 알려주는 카페 등에 모조리 가입해 수천 개의 게시물을 읽었다.
 적어도 이론으로는 패션과 연애 기술에 대해 빠삭하게 꿰뚫은 것이다.
 과연 글로 배운 것들이 실전에서 어떻게 쓰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김도진이 사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작은 자라부터. 어색해 하지 말자!’
 김도진은 스스로에게 기운을 불어 넣고 자라 매장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자라(ZARA)는 비교적 싼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브랜드이다.
 옷에는 관심이 없던 김도진도 그 이름은 종종 들어봤었다.
 “어서 오십시오!”
 매장 안에 들어서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다소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인사지만 과하게 친절한 것보단 훨씬 편했다.
 김도진은 매장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쳐다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돌아봤다.
 다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비해 스스로가 너무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김도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까진 패션에 관심을 둘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먹었으니 지금부터라도 달라지면 된다.
 그는 기죽지 않고 남성복이 있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예전 같았으면 김도진은 혼자 매장을 구경 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형형색색의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 틈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매장을 빠져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요즈음의 김도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체력과 힘, 정신력이 좋아진 것 외에도 전에 없던 배짱과 강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단전 깊숙이 자리 잡은 색도천문공의 기운은 벌써부터 김도진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음··· 일단 기본 중의 기본인 청바지부터 고르자.’
 김도진은 이 층 남성복 코너에서 청바지를 뒤적거렸다.
 이제까진 입고 다니기 편한 사이즈의 청바지만 샀었다.
 힙합 바지 수준은 아니어도 적당히 헐렁한 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핏이 안 사는 펑퍼짐한 스타일과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
 다행히 김도진은 표준보다 약간 마른 체형이었다.
 허리를 기준으로 32 사이즈를 입는 게 편하지만 과감하게 30 사이즈를 선택했다.
 “이거 입어봐도 되나요?”
 김도진은 짙은 회색의 청바지를 들고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딱 붙는 정장을 입은 직원이 손을 들어 탈의실을 가리켰다.
 “탈의실은 이쪽입니다, 고객님. 한 벌만 입어보실 건가요?”
 “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모델처럼 키가 큰 직원이 탈의실로 앞장섰다. 그는 김도진에게 번호표를 주고 탈의실 문까지 열어주었다.
 김도진은 전면 거울이 설치된 탈의실 안에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이것 자체도 그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혼자 옷을 사러 왔고, 탈의실에서 직접 입어 보기까지 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평범한 남자들에겐 힘든 일이기도 하다.
 아직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사이즈 맞는 옷을 대충 가져다가 계산하곤 한다.
 매장에서 직접 입어보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번거롭게 여기기에 딱 맞는 옷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김도진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딱 달라붙는 스키니진은 아니다. 대신 적당히 다리의 선을 드러내는 라인이 어색하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불편한 것도 그리 심하진 않았다.
 요즘 청바지는 대부분 신축성이 좋은 소재로 만들어져 움직이기에 무리가 없었다.
 “진작에 좀 입을걸!”
 김도진은 한껏 들뜬 기분으로 바지를 다시 벗었다.
 어정쩡하게 통이 넓은 원래의 바지를 입으려니 영 찝찝했다.
 하지만 그의 변신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입어보셨어요, 고객님?”
 “네. 이거 살 겁니다.”
 “계산은 카운터에서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더 둘러보고 같이 할게요.”
 “네, 손님.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탈의실 앞을 지키는 직원은 친절하게 고개를 숙였다.
 김도진은 한 손에 새로 고른 청바지를 든 채 산뜻한 기분으로 매장을 돌아다녔다.
 이제껏 왜 옷을 사고 꾸미는 즐거움을 몰랐을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니 큰돈 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괜찮은 옷들이 곳곳에 보였다.
 ‘흥분하지 말자. 여기 말고도 가볼 곳은 많아.’
 김도진은 미리 조사해 온 명동의 패션 매장들을 떠올리며 숨을 골랐다.
 그러다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오늘처럼 혼자 쇼핑을 하는 게 자연스러워질 것 같았다.
 
 ***
 
 엉성하고 펑퍼짐한 바지가 알맞게 슬림한 청바지로 바뀌었다.
 특색 없는 체크 남방은 깔끔한 라인의 단색 셔츠로 바뀌었고, 그 위에는 아가일 패턴의 가디건이 세트가 되었다.
 신발은 덩치만 큰 농구화에서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나이키 블레이져 모델로 교체했다.
 검은색 뿔테 안경도 책상 구석으로 밀려났다. 대신 콘택트렌즈가 눈을 밝혀줬다.
 마지막으로 머리.
 블루 클럽 같은 남성 전용 미용실에서 대충 자르던 헤어스타일은 영영 안녕이다.
 큰마음 먹고 비싼 돈을 지불하며 자른 머리는 요즘 유행인 투 블럭 컷이었다.
 연예인들처럼 과감한 투 블럭은 아니지만 딱 봐도 예전보다 훨씬 세련돼 보였다.
 바뀐 헤어스타일 덕분에 칙칙하고 무겁던 분위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처음이라 어색하긴 해도 훨씬 나아진 거 같은데, 이상하게 보진 않겠지?”
 김도진은 자취방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봤다.
 너무 확 변한 모습이 적응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색한 감도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부분이 더 컸다.
 헤어스타일과 옷을 요즘 트렌드에 맞춰 세련되게 바꿨고, 무거운 뿔테 안경을 벗어 버렸다.
 작다면 작은 변화인데 이것만으로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후우- 잘해보자, 김도진!”
 그는 거울 앞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며 눈을 부릅떴다.
 검은 뿔테 안경이 사라지자 눈이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김도진이 이렇게 전의를 다지는 건 오늘이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컴공과 동기인 이지훈이 주선해 준 첫 번째 소개팅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김도진의 생애 첫 소개팅이다.
 게다가 색공을 익힌 후 처음으로 여자를 소개받는 자리였다.
 아직 20일이라는 시한이 남았지만 첫 소개팅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이번 소개팅에 성공하면 한 달하고도 20일의 시간을 벌게 된다.
 모태 솔로인 덕분에 순수한 몸을 유지해 온 김도진은 여자의 손만 잡아도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음기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딸칵-
 심기일전한 김도진은 자취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약속 시간은 한참 남았지만 학교에서 이지훈을 만날 계획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가벼워 보였다.
 
 K대 정문 앞은 늘 수많은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이지훈은 정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김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분명 김도진의 목소리였다.
 이지훈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낯익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봐?”
 “응?”
 이지훈은 놀란 얼굴로 눈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그의 앞에서 친한 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너 설마······?”
 “대체 뭐냐, 그 떨떠름한 반응은.”
 “김도진? 도진이야?”
 “그럼 내가 김도진이지 누가 김도진인데?”
 “와-! 대박!”
 이지훈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알던 김도진이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너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감탄을 해도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김도진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달라진 새사람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라? 못 알아볼 정도로?”
 “너인 줄 알고 나니까 알아보겠는데, 처음엔 완전 딴사람인 줄 알았어. 머리랑 옷이랑··· 안경도 뺐네? 진작 좀 이렇게 하고 다니지, 인마!”
 “괜찮은 것 같아?”
 “우리 과 애들 아무나 잡고 물어봐라. 칙칙한 범생이가 사람 됐다고 난리일 거다. 이 정도면 나도 욕 안 먹겠어.”
 “그럼 다행이고.”
 김도진은 미소를 머금고 이지훈의 어깨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사춘기 이후 외모로 칭찬받은 건 평생 처음인 것 같았다.
 이지훈이 괜한 아부를 하지는 않을 테니 그동안 고생하며 변신한 보람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 대박이다, 김도진! 너도 이렇게 보니 제법 훈남인데?”
 “됐어, 인마.”
 “아니 진짜로. 사실 오늘 소개팅에서 네가 100% 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 정도면 가능성이 있겠다.”
 “어떤 여자앤지나 말해봐. 궁금해 죽을 것 같았는데 안 물어보고 꾹 참았어.”
 김도진은 이지훈의 칭찬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상대 여성에 대해 물었다.
 보통 소개팅을 하면 주선자가 서로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다. 그 뒤에 남자와 여자가 알아서 카톡 등으로 연락하며 만날 날짜를 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김도진은 고전적인 방식의 소개팅을 선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소개팅이기에 기대감을 안고 시작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괜히 카톡으로 미리 연락을 해봤자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주선자인 이지훈과 함께 첫 만남을 가지는 게 나을 것이다.
 “어떤 애냐면······.”
 이지훈은 뜸을 들이며 김도진의 반응을 살폈다.
 친구의 첫 소개팅을 주선하게 돼서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Y대 알지? 거기 영어교육과 다니는 앤데 동아리 연합 파티에서 알게 됐어. 성격도 밝고 얼굴이랑 몸매도 괜찮은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있군.”
 김도진은 예리한 눈빛으로 이지훈을 추궁했다.
 그가 이것저것 따질 형편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좋은 조건의 여자가 상대로 나오게 돼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이지훈의 말투를 보니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지훈이 먼저 두 팔을 들고 실토를 했다.
 “다 좋은데 딱 하나가 걸려서 말이야.”
 “뭐라고 안 할 테니 빨리 말이나 해.”
 “그게··· 얘가 알고 보니 클럽을 좀 좋아해서······.”
 “클럽? Y대 영어교육과에 성격 밝고 얼굴 이쁘고 몸매 좋고. 그 정도면 클럽 좋아하는 거 정도야 이해할 수 있지.”
 김도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지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죽순이야. 일주일에 사일은 클럽에서 남자들이랑 노는 걸 즐기는······. 나도 웬만하면 다른 애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다 보니까. 그래도 첫 소개팅 상대로 이만한 애도 드물다, 도진아.”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게 예쁘고 괜찮은 애가 클럽 죽순이면 남자가 넘쳐나는 게 정상 아냐? 굳이 소개팅을 나올 필요가 없잖아.”
 “골 때리는 게 얘가 남친은 안 만들어. 그냥 이 남자 저 남자 홀리고 다니는 게 재밌나 봐. 소개팅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냉큼 하겠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난 솔직하게 다 말했다.”
 “음······.”
 김도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해 남자를 자유자재로 홀리고 다니는 여우 중의 여우가 소개팅 상대였다.
 “상관없어. 오늘 일곱 시 약속이니까 슬슬 움직이자.”
 “어? 어. 그래야지.”
 김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말을 꺼낸 이지훈이 놀랄 정도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여자들에 질색을 했을 김도진이다.
 그러나 색공을 받아들인 그는 모태 솔로이면서도 남들과 다른 여유를 갖게 됐다.
 ‘클럽 죽순이? 남자를 갖고 노는 어장관리녀? 차라리 잘됐어. 첫 소개팅 상대로는 이런 스타일이 부담 없고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내 목표는 음기를 흡수하는 거니까. 잊지 말자, 왜 소개팅을 하는 건지.’
 그는 이지훈과 함께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목표를 되새겼다.
 본래 소개팅은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김도진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최소한의 음기를 흡수해 색공을 익히는 것, 그 목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소개팅 장소로 향하는 김도진은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마음을 무장했다.
 색공을 익히고 맞이하는 첫 소개팅.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댓글(5)

AceOfEcon    
K대 컴공인데 도서관에서 내려와서 정문가는 거랑 Y대 영어교육과에서 몰입 확 깨지네 ;
2019.10.18 18:08
너솔    
서론이 너무 길어서 따라가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피곤한 글
2019.10.21 09:16
13572468    
여자는 점 머하면 색주가 가면될거같은데요
2019.10.22 06:30
갱상도촌놈    
전권대여해서 꾸역꾸역 읽는 중 아 힘들다
2022.06.10 04:01
le*****    
진짜임?
2022.08.24 01:15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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