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만약 20년 전에 이 질문을 던졌다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비행기나 헬기 등의 항공기 조종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때와는 시대가 다르다.
이제는 조종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백이면 백 기간트 조종사라고 알아듣는다.
평균 전고 10m.
무게는 약 80톤.
마나코어로 움직이는 거신을 목격한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세계 각국의 주요도시들은 방비가 너무 잘 되어있으니 기간트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도 방어군 소속의 기간트 조종사는 출동 할 일이 거의 없는, 쉽고 편안한 한직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다르다.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PMC 본부.
북아프리카를 탈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보급기지에서는 날마다 수많은 기간트들이 드나든다.
나처럼 기간트를 몰고 싶어서 조종사가 된 사람에겐 딱 맞는 곳이다.
날씨가 나쁘고 여가시설도 부족한데다 공습까지 종종 받지만, 기간트를 타는 것 만큼은 질리도록 할 수 있다.
새삼 그런 생각을 하며 격납고로 향하자 맞은편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회 초년생을 갓 벗어난 것 같은 한국인 여자.
그리 멍청한 인상은 아니지만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비사 주제에 기름때 한 점 없는 작업복을 입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저, 박정상 조종사님 맞으시죠? 오늘부터 정비팀에 합류하게 된..."
"그래. 잘 부탁해."
나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청했다.
내 이상한 태도에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힘겹게 손을 맞잡는다.
이 여자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름을 외우는 헛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내 기간트 하나에 달라붙어있는 인원이 50이 넘는다.
그녀를 비롯한 정비팀이 30명. 전투시에 호위로 편성되는 헌터가 10명에, 매니저, 오퍼레이터, 보급팀, 분석팀 등등.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크루들의 이름을 일일이 외우다 보면 끝이 없다.
그러나 이 신입은 내 예상보다 훨씬 의욕이 넘치는 듯, 태블릿 PC를 들고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하긴. 기간트를 보유한 PMC에 고용될 정도면 한낱 정비사라 해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
유치원에서부터 지금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을텐데... 경험은 부족하니 자연스레 오만해질 수 밖에 없다.
과연. 그녀는 딱 내가 예상했던 종류의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29명의 선배들과 조종사인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조언.
물론 악의는 없는지라 그럭저럭 참아줄만했다.
"제가 박정상 조종사님의 기체를 봤는데요, 몇몇 부품을 레전더리 컴퍼니의 제품으로 바꾸면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 같습니..."
"레전더리 컴퍼니?"
이번에는 대놓고 비웃었건만, 그녀는 내가 대답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좋은데 눈치는 나쁜 타입인가?
나는 올해들어서 5번째로 경험하는 헛소리에 진절머리를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전더리 컴퍼니.
많고 많은 기간트 제작사들 중에서도 대표격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
자타가 공인하는 업계의 선두주자로서, 굉장히 비싼 가격과 그만큼 뛰어난 성능이 특징이다.
이쪽 업계의 지식이 얕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너도 학교 다닐 때 레전더리 컴퍼니 장학금 받았냐?"
"네? 그, 그건 그런데요... 레전더리 컴퍼니 제품이 확실히 좋잖아요. 다른 회사 제품엔 없는 감성도 있고..."
내가 혹시나 싶어서 묻자 역시나 하던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레전더리 컴퍼니 제품의 성능은 최상급.
하지만 내가 그걸 쓰기 싫어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팀의 실소를 받으며 격납고에 들어섰다.
그들도 내 옆의 신입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대충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레전더리 컴퍼니의 변호사라도 된 것 같은 그녀의 변론을 무시하며 정든 기체를 올려다봤다.
내 기간트는 늘 그랬듯 완벽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고 9.6m. 중량은 표준급인 82톤.
출력 1.2에 작전시간 72시간.
오른팔에는 대구경 레일건, 왼팔에는 마나 블레이드를 장비했다.
이렇다할 장점이 없는 대신, 약점도 없다.
두껍고 투박하지만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인간형 기체를 눈 앞에 둔 신참이 새삼 감탄한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신입. 기간트가 왜 인간형인 줄 알아?"
"네? 아... 네. 조종사와 마나코어의 동기화를 통해서 조종되는 기간트의 특성상..."
뻔하디 뻔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물어본게 아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말을 끊었다.
"폼이 안 나서 그래."
"네에?"
"원래 1세대 기체는 사족보행으로 만들었어. 근데 그거 조종하던 놈들이 기체랑 동화돼서 네 발로 기어다니더란 말이지? 그래서 그 뒤로는 쭉 인간형으로 만든거야."
사실 사족보행도 성능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폼이란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신입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때마침 레전더리 컴퍼니에서 제작한 부품이 격납고로 들어온다.
다른 조종사가 사용할 예정인 부품의 뒤쪽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Created By Christina Velotz]
무슨 싸구려 공산품도 아니고.
기간트의 머리 부분에 저딴걸 새겨놓다니.
그것을 목격한 신입이 입을 쩍 벌렸다.
역시 흉물을 분간할 안목 정도는 있는 것 같다.
"근데 레전더리 컴퍼니 주임 개발자가 완전 미친년이라서 지가 만든 부품마다 저런걸 새겨놔."
하다못해 레전더리 컴퍼니의 로고가 박혀있는 것이라면 참아줄만 하겠는데 저건 좀 힘들다.
자신의 장학금이 어디서 나온지 이해한 신참이 어렵사리 변호를 이어나갔다.
"그, 그래도 성능이 뒤떨어지는건 아니잖아요."
"아니. 성능을 제외한 모든게 문제라고. 내가 레전더리 컴퍼니 제품을 주문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가르쳐줄까?"
원래 레전더리 컴퍼니는 몬스터 출현 이전에 휴대폰을 만들어서 팔던 회사였다.
그런데 이놈들이 고객들에게 실전 테스트를 시키던 버릇을 못 버려서 군수업체가 된 지금도 그 짓거리를 한다.
내가 예시를 고민하고 있자 제품을 수령한 신참 조종사가 친절하게 모범을 보여줬다.
"이, 이게 뭐야? 우리가 주문한 제품이 아니잖아?"
트럭에 실려온 헤드 파츠를 보고 경악한 조종사.
레전더리 컴퍼니에서 나온 직원들이 표정도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본사가 새로 개발한 제품으로 업그레이드 해드렸습니다. 일단 한 번 써보시고, 만족하지 못하시면 원래 제품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런 부품은 카탈로그에서도 못 봤다고요. 이거 테스트는 충분히 된 겁니까? 저거 달고 나갔다가 기체가 뻗어버리면 누가 책임져요?"
"일단 한 번 써보시고, 만족하지 못하시면 원래 제품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주문과 다른 상품에 열을 올리는 조종사와, 순식간에 앵무새가 되어버린 직원.
사실 레전더리 컴퍼니는 업계 최고의 양아치들이다.
매번 저런 식으로 다른 제품을 보내준 다음 실전 테스트를 끝낸 뒤에야 진짜 제품을 보내준다.
보통 회사 같았으면 고소를 먹어도 엄청나게 먹었겠지만...
기간트를 개발하는 회사들은 재력과 권력 양면에서 일개 기업이라 볼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완전히 얼어버린 신참에게 설명을 덧붙여줬다.
"참고로 레전더리 컴퍼니 제품은 중고로 팔지도 못해. 회사에서 나온 전속 정비사들이 관리하는데다, 되팔고 싶으면 본사로 반납하는 형태 밖에 없지."
물론 보상금을 주긴 하는데, 그래봤자 구매가의 2할도 안 된다.
원래 휴대폰 팔아먹던 놈들이 군수시장에서 더욱 악질적으로 변했다.
플래그쉽 파츠를 얻었다고 기뻐할 수도 없는게...
레전더리 컴퍼니가 저런 식으로 떠넘기는 물건들은 내부 테스트만 겨우 거친 물건이다.
즉, 혁신적인 성능을 지녔을지는 몰라도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전장에 저런걸 들고 나가는건 조금 점잖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주변 사람들이 말릴 때엔 들은 척도 안 하던 신참 조종사가 뒤늦게 레전더리 컴퍼니의 실체를 깨닫곤 울상이 됐다.
누가 함께 나갈지는 몰라도 저 녀석 뒤치다꺼리 하느라 고생 좀 하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의 임무에 대해서 듣기 위해 몸을 돌리자 PMC의 작전 담당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정상 씨. 고생 좀 하시겠네요. 오늘은 정상 씨가 신참이랑 같이 나가시는데."
"네? 제가요?"
못 알아들은게 아니다.
왜 하필 나냐고, 띠꺼움을 가득 눌러담아서 되묻자 미안한 표정을 짓는 작전 담당자.
"원래 신참들 출전 할 때에는 정상 씨 같은 베테랑이 같이 가주잖아요."
"제가 신참일 때는 그런거 없었는데요."
"그야 정상 씨는 저희 회사 창립멤버니까 그렇죠. 의뢰비 절반 더 드릴테니까 부탁할게요. 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PMC 주제에 창립멤버를 이렇게 부려먹는가.
역시 이 업계는 양아치들 뿐이다.
나는 싫은 티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회의실로 향했다.
비싼 돈을 내가며 실전 테스트를 치르게 된 신참 조종사가 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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