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독심수라 [E]

독심수라 1권 (1)

2019.10.18 조회 807 추천 9


 # 序章
 
 
 
 오늘 내가 이곳에 마교를 세우니
 이후 어둠은 나로 인하여 소생하며
 빛은 나로 인하여 더 밝아지리라.
 
 
 # 보름달
 
 
 
 휘영청 떠오른 초가을의 보름달.
 그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객잔 지붕 위에 앉아 긴 풀잎을 잘근잘근 씹던 청년은 못내 미소를 쓰게 짓고 말았다.
 달을 응시하는 청년의 눈은 여느 사람의 눈과 조금 달랐다.
 보름달을 유난히 흠모하는 듯했고 또한 그 눈빛에는 애정이 실려 있었다.
 청년은 마치 달과 대화를 나누듯 말문을 열었다.
 청년의 두 눈이 생동감 있게 반짝거렸다.
 “올해로 제 나이 스물넷이니 유복자인 제가 아버지와 이별한 지는 스물네 해가 지난 셈입니다. 세월이 너무나도 빠르다고 어머니께서는 늘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뿌연 구름에 달이 가려지는 순간, 청년의 눈빛이 어느덧 약간 희미해졌고 그의 음성에도 서서히 우울함이 섞여 들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요즘 많이 편찮으십니다. 이 양우가 아직 어머님을 제대로 모시지도 못했는데······. 혹여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을 데려가실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셔서는 안 되실 것입니다.”
 ······.
 “이 양우와 꼭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절 키우시느라 어머님께서 얼마나 힘이 드셨는지 아버님께서는 아셔야 합니다.”
 독백이었다.
 잠시 한숨을 내쉬던 청년은 좀 더 낭랑한 어조로 다시 혼잣말을 이어갔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여기저기서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는 아버님을 더 닮았나 봅니다. 제 눈이 아버님 눈보다 더 무섭다고, 사람들이 다들 아버님과 저를 비교해서 말하는 걸 보니······. 소자는 그런 사실이 무척 기쁩니다. 하하하.”
 청년은 시원하게 웃었다.
 명료한 달빛이 청년의 얼굴에 부딪히자 때맞추어 그의 얼굴이 확실히 드러났다.
 이목구비는 단아했으나 눈매가 상당히 매섭고 날카로웠으며 보통 사람과 달리 동공의 크기가 작았다. 놀랍게도 사백안(四白眼) 중에서도 그 살성(殺性)이 가장 짙다고 하는 천살사백안(天殺四白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혼잣말을 듣건대 여간 심성이 고운 사람인 듯도 싶었다.
 
  * * *
 
 “여봐!”
 “······?”
 갑작스런 부름에 양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낡은 관복을 입은 한 중년인이 객잔 앞마당에 서 있었다.
 포쾌 한삼이었다.
 정색을 한 양우는 황급히 신형을 날려 땅으로 내려섰다. 그의 신법은 위태롭기는 했으나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몸을 바로 가누었다.
 “어서 이거 받아.”
 한삼은 두 손에 쥐고 있던 횃불 중 하나를 양우에게 건네주었다.
 양우가 횃불을 받자마자 한삼은 말문을 열었다.
 “쥐꼬리만 한 봉급이지만 명색이 포쾌 아닌가? 이곳저곳을 순찰이라도 해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아저씨.”
 “그럼, 가자구.”
 그렇게 말한 뒤 한삼이 앞장을 섰다. 양우는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가 보조를 맞추었다.
 두 사람은 한 조였다. 밤마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담을 넘는 도둑이나 강도를 잡는 포쾌였다.
 각기 손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 하나씩을 움켜쥐고 그들은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누비기 시작했다. 사경(四更) 무렵에 교대를 하기 전까지는 마냥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사실 그 일은 여간 따분한 일이 아니었다.
 쥐죽은 듯 고요한 깊은 밤중에 골목마다 일 없이 돌아다니기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들로서는 오히려 가끔 강도나 도둑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이 한 조라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인지 십오 년째 포쾌 노릇을 하고 있는 한삼은 제법 알아주는 수다꾼이었다.
 “여봐. 자네, 소식 들었어? 봉춘이 그놈! 지독하게 운이 없는 놈이야.”
 “······.”
 “석 달인가 넉 달인가 전에 그놈이 장가 간 거, 자네도 알지? 헌데 말이야. 그놈의 마누라가 웬걸! 며칠전에 계집애를 낳았다드만.”
 “······.”
 “웃기지? 내 참, 어이가 없어 나도 영 믿어지지가 않았거든. 그런데 그게 사실더라고. 혼례도 안 올린 여자가 이미 뱃속에 핏덩이를 갖고 있었던 거야.”
 “······.”
 “젠장! 태어난 녀석이야 무슨 잘못이 있나? 그 애 어미나 아비가 문제지.”
 “······.”
 “자네도 나중에 여자를 고를 때 잘 따져 보고 고르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나저나 자네는 언제 장가갈 건가?”
 한삼의 느닷없는 물음에 멈칫하던 양우는 이내 쑥스러워하며 피식 웃었다.
 그런 양우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한삼은 이상한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물었다.
 “어때? 관심은 있는 거지? 하긴 사내놈이 그런 데 관심이 없으면 어디 사내놈이라 할 수나 있겠나?”
 “······.”
 “어떤가? 이 사람아, 자네는 이제 대장간에서 밥 얻어먹는 잡부가 아니라 어엿한 포쾌가 되었네. 그러니까 혼례를 올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걸세. 이보게. 내가 어디 혼처라도 알아봐 줄까?”
 불쑥 튀어나온 한삼의 제의에 양우는 정색을 하고는 얼른 말했다.
 “아저씨. 제가 어떻게! 아닙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쯧, 이봐. 자네 나이가 벌써 스물넷이라며? 그 나이 때 나는 애가 둘이었네.”
 “허나······.”
 “내가 이래 봬도 포두 어르신이 재취(再娶)하려 하실 때 월하노인(月下老人) 노릇을 했단 말이야.”
 “······.”
 “자네도 알 거야. 매화객잔의 여주인이 어떻게 포두 어르신의 아내가 됐는지. 내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지. 헤헤. 어떤가? 자네도······?”
 양우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포쾌가 되긴 했어도 혼례를 올릴 생각은 여태껏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포쾌 일을 해서 받은 은자는 죄다 병든 노모의 약값으로 써 버리고 있으니 입 하나가 더 늘게 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우는 그런 변명을 하기 싫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꾸했다.
 “아저씨. 저 같은 가난뱅이한테 어느 여자가 시집오려 하겠습니까? 더구나 제 얼굴을 보고 좋다고 할 여자나 있겠습니까?”
 그러자 금세 한삼은 난리를 피운다.
 “에궁! 염려 말게. 자네 눈빛이 워낙 고약하기는 해도 장가가는 데는 무방할 게야. 내가 어···어느 정도는 보장함세. 으음, 어떤가?”
 그러나 양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왕 눈빛이란 말이 나왔으니 다시금 돌이켜 보지만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이한 사백안 때문에 일어난 일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안구의 한가운데 박혀 있는 좁쌀만 한 동공은 사실 여간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귀신이 붙었다며 때리고 걷어차기도 했고, 홧김에 혹은 술김에 양우를 죽일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던가.
 양우가 어른이 되자 이제는 더 이상 해를 끼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양우의 눈빛에 질려 감히 행동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 채 슬금슬금 피해 버리고 마니 이것이야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해야 할까.
 “이보게. 아무튼 걱정 말라고. 내가 월하노인이 되어서 모든 걸 알아서 할 테니 말이야. 자네 어머니한테는 내가 귀띔이라도 해 두겠네. 자네 어머니도 좋아하실 게야. 병수발 들어줄 며느리도 생기고.”
 한삼의 그 말에 양우는 문득 달리 생각해 보았다.
 그의 말처럼 자신이 혼례를 올린다면 이후 어머니의 병시중 들 사람을 얻게 되는 셈이다.
 자신이 포쾌 일을 하느라 밖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아무 탈 없이 지내실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우는 결코 내키지가 않았다. 마음이 이끌리기는커녕 외려 불안함만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혼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양우는 화제를 바꿀 작정으로 재빨리 말을 돌렸다.
 “며칠째 도둑 한 놈도 못 잡았는데 우리가 좀 더 힘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
 “못난 이놈을 포쾌로 받아 주신 포두 어르신께서 이번에는 꼭 대포두가 되시도록 하려면 우리가 나서서 한 놈이라도 더 잡아들여야 할 텐데······.”
 “아하! 그거야 그렇지.”
 수다쟁이 한삼도 같은 생각인 듯 이마에 가득 주름을 모으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야 몇 놈 건질 수 있을까? 그래! 한 군데가 있다. 여간 수상한 곳이 아니거든.”
 “······.”
 “헌데 조금 위험해 보여서··· 갈까 말까 꽤 망설였던 곳이 하나 있기는 해.”
 “······?”
 “흑선장(黑仙莊)이라고 자네도 알지? 거기 주인이 바뀐 뒤로 밤마다 흑영이 출몰한다고 해. 필시 도둑놈인데 주인이 모른 척하고 있으니 우리가 나서서 잡아들일 수도 없고. 그래도 일단 우리가 도둑을 잡아 주면 주인이 아는 척이라도 하겠지?”
 “······.”
 “지금으로서는 거기가 딱 좋은 곳이야. 다만 흑선장 주인이 강호인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그 말에 양우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강호인의 일에 관(官)이 나서는 건 웬만해선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강호인은 뒷골목 파락호들보다 오히려 상종 못할 무리들이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할 수 없지요. 거기라도 가서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좋다, 좋아! 오늘밤 거기로 가서 한번 잘 살펴보세.”
 뜻하지 않게 합의를 본 두 사람은 횃불을 휙휙 저어 어둠을 쫓아내며 종종 걸음으로 흑선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백의(白衣)를 입은 두 인영이 말을 타고 천천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밤중에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은 흔치 않는 일이라 한삼은 경계심을 발동했다.
 “어라? 누구지?”
 얼른 옆으로 물러난 한삼은 칼자루에 손을 대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두 인영의 얼굴이 달빛에 반사되는 순간 한삼은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어느덧 한삼과 양우의 앞에 말을 멈추고 선 두 인영은 낯익은 남녀였다.
 유생 강학과 진문관 관주의 딸 백지림.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시는 겁니까?”
 한삼의 물음에 강학이 바로 대꾸했다.
 “성주관 연회에 참석했다가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이크! 그러셨군요. 어서 가십시오.”
 한삼은 성큼 뒤로 물러나 두 남녀가 충분히 지나가도록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강학은 말을 재촉하며 곧장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외려 마상의 그는 한쪽 옆으로 물러 서 있는 양우를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양우, 너로구나.”
 양우는 흠칫 놀라며 강학을 올려다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학의 눈가엔 언제나 그렇듯 웃음이 맴 돌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북경에 다녀온 뒤로는 처음이지? 한 서너 달 되었나?”
 “······.”
 “후후. 그래. 그간 대장간 일을 그만두고 어엿한 포쾌가 되었다지? 그러고 보니 대장간에 들렀는데도 자넬 못 봤군그래······.”
 “······.”
 “그래서 자네 얼굴 보기가 더 힘들어진 모양이야. 늦었지만 포쾌가 된 걸 축하하네.”
 “······.”
 “으음······. 일은 힘들지 않나?”
 “······.”
 “······.”
 “그렇지는 않네.”
 양우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씁쓸히 웃었다. 사실 양우에게 강학의 친절은 외려 부담스럽기만 했다.
 강학의 조부는 한때 명망 높은 한림학사였으며, 그의 부친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으나 그 절개와 충의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생이었다.
 뼈대 있는 가문의 출신인 강학은 의젓한 공자였으며 품행이 방정하기로 소문난 젊은 서생이었다. 더구나 성주성(盛州城) 내에 자타가 공인하는 아름다운 여인 백지림을 정혼녀로 두었으니 일개 포쾌에 불과한 양우로서는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왔다고 해서 강학을 그저 친구로 여기기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라버니, 어서 가요.”
 갑자기 들려오는 청량한 음성.
 불현듯 양우의 시선이 좌측으로 향했다가 금세 허공에서 흩어졌다. 양우는 정색을 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는데 감히 백지림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양우, 다음에 또 보자.”
 강학은 그렇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렸는데 고개라도 끄덕여 줄 요량으로 고개를 들던 양우는 다시 흠칫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백지림, 그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우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 얼굴은 수줍은 총각의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양우를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모멸에 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그녀는 강학에게 수군거렸다.
 “오라버니, 다음에는 저런 하찮은 포쾌를 친구처럼 대하지 마세요.”
 비록 그녀의 말을 제대로 다 듣지는 못했으나 양우는 그녀의 모멸 어린 눈빛만으로도 그 뜻을 잘 알 수 있었다.
 양우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삼이 다가오자 이내 등을 돌렸다.
 다시금 흑선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지만 전과 달리 여간 마음이 우울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양우는 밝게 웃으려고 애썼다.
 ‘후후후. 양우야! 양우야!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다더냐.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 나름의 팔자가 있고 나에게는 나에게 맞는 운명이 있을 터,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이냐. 참으로 욕심 부릴 일이 아니지 않느냐!’
 양우는 이렇듯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걸어갔다.
 반면, 한삼은 조만간 강학이 장인의 후광을 입어 현령이 될 거라고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양우의 텅 빈 마음과 달리 한삼은 강학과 백지림의 일에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으슥한 경사진 길을 거슬러 올라갔고 외진 산길을 이리저리 지났으며 이윽고 촌락에서 제법 떨어진 흑선장 인근에 당도했다.
 그 무렵 달밤의 분위기는 더욱 더 을씨년스러워지고 있었다.
 “자네 혹시 아는가? 백지림의 부친이 한때 강호인이었다더군. 다들 모르는 척 쉬쉬하고 있지만 분명해.”
 “······.”
 “백발노인이 어찌 그리 눈빛이 형형한지 감히 쳐다볼 엄두가 안 나더구먼.”
 “······.”
 “거기다가 재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일개 성 하나쯤은 통째로 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갑부라고 하네.”
 “······.”
 “아휴, 나는 언제 그리 부자가 되어 볼까? 언제 그런 권력을 쥐어 볼까?”
 그렇게 나불나불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걸어가던 한삼이 갑작기 말을 멈추었다.
 순간.
 “여봐! 저, 저기······!”
 그토록 유창하게 떠들어 대던 한삼이 난데없이 더듬거리며 황급히 횃불을 껐다.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은 물론 양우의 횃불까지 급하게 빼앗아 꺼 버린 것이다.
 머리를 숙인 채 걷고 있던 양우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들고 한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 * *
 
 그런데······.
 빽빽한 수목!
 그 사이로 불그스름한 빛을 뿌리며 우뚝 서 있는 십 척 남짓한 담장.
 어둠에 휩싸인 장원 안에서 무언가 솟구치더니 휘릭 담을 넘었다. 잇달아 담을 넘는 흑영들은 한결같이 인기척을 흘리고 있었다.
 꿀꺽.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을 삼키던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의 생각은 일치했다.
 ‘도둑!’
 그랬다.
 그러나 한두 명의 도둑이 아니다. 도둑들이 줄을 이어 나타난 것이다.
 ‘이게 웬 횡재인가. 이게 웬 떡인가. 요놈들! 오늘 된통 걸린 줄 알아라. 으흐흐.’
 한삼은 노련한 사냥꾼다운 눈빛을 흘리며 도둑들을 노려보다가 양우를 향해 재빨리 수화를 보냈다. 두 사람의 힘으로 그들 모두를 때려잡기는 힘들 것 같으니, 일단 그중 한 명이라도 잡았다가 나중에 다른 이들의 행방을 알아내어 한꺼번에 모조리 검거하자는 뜻이었다.
 한삼의 현명한 생각에 양우는 즉각 동의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칼이 아닌 곤봉을 빼내어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포승줄을 쥐었다.
 ‘잡자!’
 한삼이 먼저 앞으로 뛰어나가고 양우는 몸을 잔뜩 숙인 채 그 뒤를 이어 내달렸다.
 앞선 네 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직후 또 다른 도둑 하나가 담을 뛰어 지면으로 내려서려는 순간, 즉시 양우의 곤봉과 한삼의 곤봉이 요란하게 허공을 갈랐다.
 퍽! 퍽! 퍽!
 “칵! 아악!”
 ‘잡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희색을 띠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정강이와 허리, 어깨를 두드려 맞은 도둑은 단발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으니.
 쾅!
 아악!
 “요놈! 잡았다!”
 노련한 포쾌답게 한삼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도둑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즉시 포승줄을 던져 도둑의 몸을 감고 번개같이 묶어 버렸다.
 어느새 흙을 털고 일어서는 한삼에게서는 한낱 수다나 일삼는 삼류 포쾌가 아니라 어엿한 사냥꾼의 기개가 물씬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솜씨는 또 얼마나 매끈한가.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묶여 버린 도둑이 뒤늦게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포승줄이 이미 온몸을 꽉 죄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후우······.”
 짧으면서도 깊은 숨을 내쉬며 흥분된 마음을 달래던 한삼이 씩 웃으며 사로잡힌 도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요놈아! 놀랐지?”
 “······.”
 “허나 네놈이 재수가 없는 것이니 누구를 탓할까? 이 어르신의 손에 걸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느니라. 하하하.”
 목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크게 입을 벌리고 한바탕 웃은 한삼은 도둑의 허리를 발로 툭툭 찼다. 자신의 전리품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담 위로 또 하나의 흑영이 솟구치더니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양우가 나섰다.
 곤봉을 힘껏 쥐고 있던 양우는 그대로 도약하여 흑영의 허리를 딱! 소리 나게 때렸다.
 착지 직전에 일격을 당한 흑영은 이번에는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그 순간 소리 없이 흑영의 허리춤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동시에 양우의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마치 살쾡이처럼 몸을 숙이고 있던 양우는 번개같이 앞으로 뛰어나가며 곤봉으로 흑영의 정강이를 때렸다.
 그러나 이번 흑영은 앞선 도둑과 달리 몸놀림이 제법 민첩했다. 대경실색하면서도 괴상한 보법을 밟으며 곤봉을 피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라? 이놈 봐라!’
 흠칫 놀란 양우는 몸을 한 바퀴 돌려 중심을 잡으면서, 한편으론 슬그머니 손을 내려 흑영이 떨어뜨린 조그만 검정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필시 흑영이 흑선장 안에서 훔친 물건이라고 생각한 양우는 나중에 증거물로 삼을 작정을 하고 주머니를 황급히 품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급히 신형을 날려 대포두에게서 배웠던 발기술을 펼쳤다.
 소위 ‘바람으로 낭심 차기’라는 교묘한 수법이다. 발등으로 상대의 낭심을 차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와 동시에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발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에 이 수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낭심을 걷어차려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흑영 역시 그 수법을 몰랐으니 양우가 자신의 낭심을 노린다고 생각한 듯했다.
 더구나 섬뜩하기까지 한 양우의 기세에 흑영은 자지러지게 놀라 번개같이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러다 보니 양우의 발은 허공을 찼고 뒤이어진 곤봉 공격도 허공을 때리고 말았다.
 양우는 아차 싶었다.
 “참으로 고약한 놈이로다! 강호의 금기(禁忌)를 어기는 놈이 여기 있었구나!”
 흑영의 노성이 귓가를 때렸으나 양우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도둑을 잡는 것이 급선무 아닌가.
 양우는 힘차게 뛰어나가며 다시금 공세를 펼쳤다. 정강이를 차고, 허리를 차고, 턱을 걷어차는 세 번의 발길질이 빠르게 이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영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 흑영의 몸놀림이 여간 빠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매섭게 흑영을 쏘아보던 양우가 빠르게 뛰어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빙글빙글 돌며 뒷걸음질치던 흑영은 대뜸 한 손바닥을 앞으로 쭉 내미는 것이었다.
 흑영은 장풍(掌風)을 발출할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장풍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박한 양우는 흑영의 수작이 참으로 어림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자세는 여기저기 허점투성이였던 것이다.
 이대로 달려가 손바닥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다시 흑영의 온몸을 공격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양우는 머릿속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양우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저돌적으로 신형을 날렸는데, 갑자기 흑영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범인을 잡으려 할 때면 언제나 그자의 눈을 보며 대응해 왔던 양우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격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미 힘이 실린 도약을 했고 몸은 앞으로 쏠려 있으니 이제는 어떤 수법을 구사하든 공격을 펼쳐야 했다.
 ‘설마! 저 도둑놈의 몸이 무쇳덩어리는 아니겠지. 어디 내 곤봉 맛을 봐라!’
 외려 힘껏 곤봉을 쥔 양우는 거친 기합성과 함께 전력을 다해 허공을 내려쳤다. 그 기세 그대로 흑영을 제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흑영과 두 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갑자기 뻑! 하는 충격과 함께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통증과 동시에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른다 싶었다.
 일순 숨이 턱 막히고 두 팔이 나무처럼 굳어지는데 두 발은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더구나 에앵 하는 귀 울림이 일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아닌가.
 해쓱하게 질린 양우.
 점점 흑영과 멀어지는 것을 느끼다가 이내 쾅! 하며 땅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욱!
 피를 토한 양우는 그 즉시 몸을 바로 세울 수도 없었다.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풍(掌風)의 여파가 남아 양우는 서너 바퀴 뒤로 데굴데굴 굴러간 끝에야 움직임을 멈췄는데 그 한 번의 충돌로 입은 피해가 실로 막심했다. 전신 근육이 욱신거리고 팔 다리의 힘이 남김없이 빠져나가 버렸으며 가슴의 통증으로 인해 숨이 꽉 막혀 버린 것이다.
 더구나 고통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뼈가 모조리 부서지는 듯하고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무엇보다도 숨을 쉴 수가 없어 양우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슴을 움켜잡은 양우는 피칠갑을 한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점점 그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양우는 단 일격에 흑영에게 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 이봐아······!”
 대경실색한 한삼.
 그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와 황급히 양우를 부축했다.
 양우의 상세는 심각했다. 점점 얼굴의 핏기를 잃어 가고 눈빛은 몽롱해지고 있었다.
 “이, 이 무슨 일인가. 어, 어, 어이그··· 이, 이게 무슨 일이···냐?”
 한삼은 생각지도 않는 사고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불현듯 정색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흑영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을 내가 콱! 감히 도둑놈 주제에! 포쾌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네가 살아남을 줄 아느냐!”
 한삼은 분노한 얼굴로 윽박질렀다.
 그런데······.
 어찌 일개 도둑이 저리도 당당하단 말인가.
 흑영은 한삼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외려 고고한 학처럼 우뚝 선 채 뒷짐까지 지고 있었으니.
 순간 욱! 하고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참지 못한 한삼은 저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대었다.
 이대로 뛰어가 저놈을 베어 버려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엇!’
 양우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한삼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양우가 힘겹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보게 이제 정신이 드나?”
 그러나 양우의 상세는 금세 치유될 만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양우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필시 계속해서 피가 목을 타고 넘어와 말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삼은 저도 모르게 한기를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얼마나 호되게 당했으면 그렇게 당차던 양우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양우의 모습은 참담했다.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있고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돌출되어 있었다.
 눈앞의 흑영이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양우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자꾸 울화가 치밀어 한삼은 좀처럼 분노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우가 느닷없이 입을 쩍 벌리더니 돌연 우욱! 하며 시커먼 핏덩이를 토하는 순간 한삼은 기겁을 했고 두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제야 한산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 눈앞의 도둑을 잡으려다가는 자칫 양우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도둑과 싸울 때가 아니라 양우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당황한 한삼은 말을 더듬거렸다.
 “여···여···여보게. 자···자네 어···어디가 그리 아픈가? 어디가 아픈 거여? 겉은 멀쩡한데······? 가슴이 아파? 으엉? 피를 왜 그리 토하는가. 아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한삼은 동네 의원에게 보일 생각으로 허겁지겁 양우를 등에 업으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차가운 음성이 그의 귓가에 들려 왔다.
 “일개 포쾌 주제에 강호의 일에 간섭하려 들다니! 흐흐. 호된 맛을 보았으리라!”
 ‘······!’
 부르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와 닿자 한삼은 경악했다.
 강호(江湖)!
 대포두조차도 강호의 일이라면 귀신보다 더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던가.
 ‘저 도둑이 강호인?’
 한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불안한 시선으로 흑영을 응시했다.
 그런데······.
 도드라진 광대뼈에 쭉 찢어진 눈매의 괴인.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닌 듯 보였다.
 ‘으윽! 게다가······.’
 문득 한삼은 침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좀 전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양우가 튕겨져 나간 것은 저 괴인의 장심에 닿기도 전이었다!
 이때 차가운 음성은 이어졌다.
 “일개 장풍(掌風)조차 견뎌 내지 못하는 놈이 어찌 나와 손을 나누려고 했단 말이냐.”
 “······.”
 “변명은 필요 없다. 모르고 한 일도 죄가 되는 법! 이후 경계로 삼고 조심해야 할 게다. 흥!”
 그 말을 끝으로 흑영은 휘리릭!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앗!’
 간신히 비명을 삼켰으나 한삼은 경악하고 말았다.
 어찌 사람의 움직임이 저렇듯 신비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한삼은 흑영의 신법에 놀라 넋을 잃고 서 있다가, 순간 헛바람을 들이마시더니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역시!’
 불안함은 적중했다. 포승줄로 칭칭 묶어 놓았던 그자 역시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잘게 끊어져 나간 포승줄만 땅 위에 남아 있었다.
 툭툭 튀어나온 실줄을 보건대 포승줄은 예리한 도구로 자른 게 아니라 그저 완력으로 끊어 낸 것이 분명했다.
 한삼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앗, 양우!’
 허겁지겁 한삼은 시선을 돌렸다.
 양우. 그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를 상태였다. 게다가 강호인의 장풍에 당했으니 웬만한 의원은 손도 쓰지 못할 것이다. 한삼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갖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몽달귀신이 되어서 나타날 양우를 생각하니··· 그 눈빛이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며······.
 갑자기 소름이 쏴악 끼치니 이대로 마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서 양우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삼은 허겁지겁 달려가 양우를 업었다.
 그러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의원 한백의 집으로?
 아니면 의원 양춘의 집으로?
 한삼은 이내 머리를 저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번개같이 몸을 틀었다.
 한삼의 시선은 담장 위로 솟구친 시커먼 전각에 집중되고 있었다.
 ‘강호의 일이라. 강호의 일······. 그래 저기!’
 한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선장의 주인은 강호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거기다가 방금 전의 일까지 겪고 나자 그 소문은 더욱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그래 그거야!’
 정신이 번쩍 든 한삼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흑선장의 대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흐릿해진 달빛.
 음험함이 달빛에 섞여 흘러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산야를 스치고 지나간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대문 앞에 이른 한삼은 재빨리 양우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발로 찼다.
 쿵! 쿵! 쿵!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어어어···! 사람 살려···!”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외치며 거듭 도움을 구걸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어어어···! 사람 살려···!”
 그의 목소리가 원래 크기도 했지만 주위가 워낙 조용한지라 한밤의 산야가 그의 외치는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어어어···! 사람 살려···!”
 한삼의 외침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런 난리 법석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심지어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이보오오! 여기 사람이 죽어 간다니까! 아이고야! 제발! 나와 보소! 제발!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보쇼! 제발 나와 보구랴! 여기 사람이 죽어간다고 하지 않소. 아고! 어서 나와 보소! 문 좀 열어······!”
 한삼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한시라도 빨리 누군가 달려 나와 양우의 내상을 고쳐 주기를 그는 갈망했다. 한삼은 쉬지 않고 소리쳤다.
 한삼의 외침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나뭇잎을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흑선장은 조용했다.
 “문 좀 열어! 이봐! 어서! 야! 거기 안에 없어! 나는 포쾌 한삼이다! 어서 열어! 야! 개놈들아! 문 열어! 사람 살려어! 사람 살려!”
 욕도 하고 애걸복걸하기도 했으나 흑선장의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잇! 부숴 버린다!’
 분노와 슬픔에 휩싸인 한삼은 이제 막 몸을 던져 대문을 부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대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몸을 던지려던 한삼은 흠칫 놀라며 멈춰 서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린 대문 너머로 짙게 펼쳐진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게 있었다.
 노파였다.
 백발에 두 눈이 형형한 노파가 뱀 모양의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나타났다. 한삼은 잠시 전까지의 격한 감정 탓에 다소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가···가···강호인이···시라면··· 저··· 제발 저···저···저놈 좀 살려 주···주시오. 저···놈이 주···죽어 가고 있······.”
 그러나 노파의 눈은 전혀 동요가 없다.
 일순 한삼은 화등잔만 하게 눈을 뜨더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버렸다.
 노파.
 과연 귀신인가 사람인가.
 ‘으윽!’
 한삼은 하체가 순간 돌처럼 굳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노파.
 그녀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양우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서···설마······?’
 두 눈을 비비적거리던 한삼은 다시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대로 달아날 수도 없는 일. 억지로, 억지로 숨을 거듭 내쉬며 한삼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필시 양우만 아니었더라면 즉시 그 자리를 떠났을 터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때 노파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불쑥 말문을 여는 게 아닌가.
 “이 할망구가 손을 봤으니 죽지는 않을 게야. 크크······. 허나 앞으로 또 이 주위를 얼씬거리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게다. 알겠느냐?”
 중년의 포쾌 한삼은 노파를 두려워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흑선장에 든 도둑을 잡으려다가 양우가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허···허···허지만 우리는 도둑을 잡으려고 살피고 있다가 봉변을······.”
 “흥! 쯧쯧쯧. 미련한 놈. 네놈들이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도둑이 아니야. 내 손주를 따르는 사람들이지. 킁! 이제 알았으면 어서 요놈을 데리고 가.”
 “······.”
 “앞으로도 너희 포쾌들이 강호에 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될 게야. 다음에 걸리는 놈은 누구든 찢어발겨 땅 속 깊이 묻어 버릴 테니까. 크크.”
 노파의 두 눈이 순간 섬뜩할 정도의 광채를 뿜어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오돌오돌 떨던 한삼은 노파가 천천히 흑선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한삼은 생각했다.
 흑선장의 사람이라면 왜 대문을 놔두고 담을 넘어간단 말인가.
 “우엑!”
 갑작스런 소음에 한삼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양우가 목을 앞으로 내민 채 꾸역꾸역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더구나 뻣뻣하게 굳었던 그의 팔 다리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멍해 있던 한삼은 환호성을 지르며 양우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보게! 자네 살아난 건가?”
 힘들게 피를 토하던 양우가 고개를 들어 한삼을 쳐다보았다.
 양우는 흐려진 눈으로 한삼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한삼은 죽음의 문턱에 섰던 양우가 소생한 것이 너무나도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파가 어떤 수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우가 살아났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어서 나한테 업히게. 밤이 깊었지만 의원한테 가 봐야지. 어서 가세.”
 
 
 
 # 흑선문
 
 
 
 밤은 점점 깊어져 어느새 사경(四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후면 교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번 임무 시간은 여느 때에 비할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가 버렸고 흥분은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양우가 불귀의 객이 되지 않았고 무사히 복귀를 했으니 말이다.
 한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큰일을 치룬 터라 한삼도 많이 지쳐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마냥 교대시간이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혼자 임무 수행중인 것을 포두가 볼까 염려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포두에게 들키면 흑선장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유야무야할 생각이었다.
 강호인과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대포두조차도 싫어하는 일인데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임자를 잘못 알고 함부로 곤봉질을 했던 자신의 잘못이었다.
 ‘염병할! 몸만 괜찮으면 대판 술이나 쳐 마시고 싶네. 큼. 나중에 양우가 회복되면 고주망태가 되도록 한번 마셔 봐야겠다. 쩌업. 헌데 양우 그놈은 괜찮을까?’
 한삼은 미간을 잔뜩 오므렸다.
 ‘그놈이 죽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그놈 모친이 얼마나 슬퍼했겠어? 장가도 못 가 본 그놈은 또 얼마나 불쌍한 노릇이고. 에구, 참으로 다행이야.’
 횃불도 없이 저잣거리를 오고가던 한삼은 갑자기 심한 피로를 느꼈는지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찬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피로를 떨쳐 내던 한삼은 다시금 잡념에 휩싸였다.
 ‘그나저나 참 포쾌라는 것이 얄궂단 말이야. 하루라도 빨리 포두로 승진해야 이 지긋지긋한 파리 목숨 신세를 면할 수 있을 텐데······.’
 그랬다. 포쾌들끼리 늘 하는 말이지만, 포쾌라는 직업은 여간 나쁜 직업이 아니다. 도둑을 잡다가 설령 다치더라도 관(官)에서 보상금이 나오지 않는다. 거기다가 봉급은 얼마나 쥐꼬리만 한가.
 그래도 말단 포쾌에서 승진하여 포두가 되면 형편은 풀리고 위세까지 얻게 되니 일개 포쾌로서는 마냥 포두 직위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분의 돈이 없는 사람은 뇌물을 쓸 형편도 되지 못하니 무슨 수로 포두가 된단 말인가.
 제법 큰 공을 세우기 전까지 포두는 사실상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놈도 매한가지지. 그나저나 그놈은 괜찮을까?’
 한삼은 내내 양우가 걱정되었다.
 그렇게 채근을 해도 의원한테는 안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더니 끝내 의원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다 돈 때문이다.
 포쾌의 봉급이 얼마나 되는가. 그 돈으로 양우는 노모의 약값에 보태고 또한 입에 풀칠까지 하고 있으니 모아 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한삼으로서는 의원으로 가자고 계속 종용할 수도 없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필시 몸이 나을 거라고 하니 미덥지는 않지만 양우의 말을 끝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보다 안타까운 것은 양우가 끝내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양우는 이 모습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노모가 크게 상심할 거라며 삼류 객잔 영춘각에 딸린 허름한 헛간으로 가서 쉬겠다고 한 것이었다.
 더구나!
 양우는 꾀까지 내었다.
 포쾌 종덕에게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자신은 그 사람을 대신하여 밤새워 저잣거리 경계를 서게 되었으니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고, 그 전언(傳言)을 한삼을 통해 모친께 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고놈 참! 고집은 세어 가지고. 우리집에서 하룻밤 머물며 몸이라도 추스르면 어디가 덧나나? 왜 꼭 그 헛간으로 기어들어가? 에구. 외모와 다르게도 그놈! 참 착하고 순박하단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안 주려고 하다니. 허허.”
 마냥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오가던 한삼은 독백하듯 말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빛이 여간 축축하지 않았다.
 
  * * *
 
 “휴우, 시원하다!”
 한삼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피로를 풀다가 크게 기지개를 폈다.
 어느덧 몸의 열기가 수그러들고 땀 냄새도 바람에 날아가 어느 정도 몸이 개운해지자 한삼은 다시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 희미한 인기척을 느끼고 막 고개를 돌리던 한삼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떴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두 인영이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 얼굴은 확실하지 않았으나 체격이 꼭 포쾌 종덕과 융삼을 닮았다.
 “이봐! 자네들! 어서 와 봐. 오늘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는가? 어서 와 보라구! 이 한삼이 말이야. 흐···흑선장에서 어헉······.”
 그러나 말을 끝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한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한삼은 금세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곤봉을 손에 쥐었다.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훈계를 할 참이었다.
 그러나.
 “흐흐. 네놈이 흑선장에서 행패를 부렸던 그 포쾌 놈이 맞느냐?”
 ‘으잉?’
 한삼은 다시금 정색했다.
 그러나 갑자기 한 인영이 번개같이 앞으로 치고 나오더니 대뜸 맥문을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대경실색하며 뒷걸음질치던 한삼은 경악성을 지르며 곤봉을 휘둘렀다. 그러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복부에서 강한 충격을 느끼며 한삼은 저도 모르게 몸을 휘청 꺾고 말았다. 내장이 통째로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누군가 뒤에서 정강이를 걷어차는데 다리가 부러지는 심한 충격과 함께 한삼은 휘청하더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한삼은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인영의 무릎이 돌연 안면으로 날아왔으니.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돌출된 앞니가 그대로 쑥 들어갔고 앞니들이 덜렁덜렁해지며 피가 그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울컥! 하며 피를 토하던 한삼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점혈된 줄도 모르고 한삼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리를 내려고 입을 쩍쩍 벌렸는데 그 모습을 본 인영이 다시 한번 무릎으로 안면을 올려 찼다.
 다시금 한삼은 한 사발 피를 토하며 뒤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르르 몸을 떨던 한삼은 간신히 머리를 들어 그들을 번갈아 가며 응시하며 눈빛으로 물었다.
 왜 자신을 이렇듯 폭행을 하느냐고.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싸늘한 웃음과 바짝 다가와 자신의 온몸을 이리저리 만지는 싸늘한 손길뿐이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한삼은 소름이 쫙 끼쳐 얼어붙었다.
 이때 한삼의 전신을 세세히 살펴본 한 인영이 일어서더니 느닷없이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심한 충격과 함께 엿가락처럼 허리가 휘어진 한삼은 간질병 환자처럼 격렬하게 몸을 떨며 컥컥거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고통은 잦아들었는데 그 무렵 차가운 음성이 귀청을 때렸다.
 “ 쓰레기 같은 놈.”
 “······.”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
 “누가 그 물건을 가져갔느냐?”
 “······?”
 한삼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물건이라니? 무슨 물건을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한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흥!”
 한삼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치던 인영과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인영이 갑자기 무슨 일인지 동시에 신형을 돌리더니 어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당황한 한삼은 눈에 힘을 주고 치켜떴다.
 서서히 어둠을 뚫고 걸어 나온 인영.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한삼이 아는 사람이었다.
 한삼은 크게 놀랐다.
 ‘어엇? 저 사람은?’
 도드라진 광대뼈, 그리고 쭉 찢어진 눈매. 양우를 죽일 뻔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에 반해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내는 여자처럼 이목구비가 곱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서생이었다.
 이때 들리는 음성들.
 “주군.”
 “······.”
 “저놈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싸늘한 꾸짖음.
 “포쾌 따위가 그것을 가져갔단 말이냐?”
 “소제는······.”
 “흥! 물건이 회수되면 본좌가 네놈을 반드시 징계할 것이다.”
 털썩.
 난데없이 꾸지람을 들은 자가 무릎을 꿇었다. 양우를 한손으로 날려 버렸던 그자였다.
 그런데 그 무서운 자가 어찌된 일인지 이마를 땅에 대고 울부짖듯 외쳤다.
 “소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형님, 이 풍귀(風鬼)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물건을 회수하겠습니다!”
 ‘으응?’
 한삼은 두 눈을 반짝였다. 양우를 한 손으로 날려 보냈던 그자의 이름은 풍귀인 듯한데, 풍귀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서생의 정체가 여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서생은 또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기에······.
 이때 서생이 차가운 눈으로 두 인영에게 눈짓을 보내자, 한삼을 공격했던 두 인영 중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보고합니다. 주군!”
 “······.”
 “이자의 몸에는 없습니다. 함께 있었던 다른 녀석이 가져간 듯합니다.”
 “······.”
 “아니면 둘 중 하나가 물건을 숨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서생은 코웃음 치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서생은 외모와 달리 말투가 냉정했다.
 “아직 얻은 것이 하나도 없군. 하는 짓이 참으로 어리석다! 미련한 녀석들.”
 그러고는 한삼을 향해 다가왔다. 두 인영이 옆으로 물러나자 서생은 몸을 낮추고 고개를 들고 있는 한삼의 머리를 갑자기 꽉 잡았다.
 한삼은 대경실색하며 서생을 올려다보는데 서생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서 보니 서생의 눈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한삼은 또한 깨달았다. 양우의 눈빛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사악하고 섬뜩했다.
 누구인가? 이 서생은······?
 “본좌에게 시간이 별로 없어. 다시 한번 묻겠다. 누가 물건을 갖고 있지?”
 “······.”
 한삼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순간 쫙! 소리를 내며 양쪽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삼은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흥! 벙어리도 아닌 주제에 아예 벙어리가 되고 싶은 것이냐?”
 “그···그게······.”
 저도 모르게 말을 하고 만 한삼은 자신이 다시 말할 수 있게 됐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다행스러워 하며 안도하는 순간, 다시금 쫙! 소리가 나며 뺨이 시큰해지고 머리가 얼얼해졌다.
 “대답해라.”
 “······.”
 “······.”
 “모릅니···다.”
 “흥! 주둥이를 열어 두었더니 겨우 하는 말이······. 흥! 다시 묻겠다.”
 ‘······?’
 “너는 그 물건에 대해서 아느냐?”
 “모···모릅니다.”
 한삼은 더듬거리면서도 힘차게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소였다.
 “연파쇄심절골수(連破碎心折骨手)라는 게 있다. 한 번 당하면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지. 허나 당한 뒤로는 눈이 멀고 귀가 막히게 될 것이다.”
 “······.”
 서생은 잠깐 뜸을 들였으나 한삼이 계속 모르는 일이라고 하자 갑자기 섬뜩한 안광을 내뿜으며 머리를 쥔 손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한삼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서생의 어깨 너머로 사오 장 떨어진 곳을 보았다.
 마침 포쾌 종덕과 융삼이 홰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교대 시간이 늦어져 뛰어오는 모양이었다. 한삼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 이제 살았다 싶었다. 하지만 고함을 지르려고 하는데 또 다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삼은 입을 쩍쩍 벌리며 발버둥 쳤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금 서생의 손에 의해 아혈이 점해진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그럼에도 한삼은 눈을 크게 뜬 채 포쾌 종덕과 융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착시(錯視)인가 아니면 헛것을 본 것인가.
 두 포쾌의 옆으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피어오르더니 사람의 수가 넷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눈을 부릅뜨던 한삼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넷 중 둘이 허물어지듯 땅에 쓰러졌고 남은 둘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오른손에 각기 시퍼런 검(劒)이 들려 있었다.
 ‘으아아악! 저들은······?’
 한삼은 경악했다. 빠르게 달려오는 두 사람은 포쾌 종덕과 융삼이 아니었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과 그 눈빛이 비슷한, 그러나 생전 처음 보는 자들이 아닌가.
 ‘그럼 종덕과 융삼이. 저놈들은······?’
 한삼은 오돌오돌 떨다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헉! 하며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눈알이 뽑혀져 나올 정도의 거센 힘이 머리를 짓누르더니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어와 전신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기운이 지나갈 때마다 오장육부가 타 버리는 듯한 충격과 뼈마디가 이리저리 비틀리는 심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으으으으으. 크으으으······.’
 한삼은 풍 걸린 사람처럼 격렬하게 몸을 떨다가 뚝! 뚝! 뚝!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깨와 무릎, 팔뼈가 탈골되는 소리였다. 심한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다시 묻겠다. 너는 풍귀로부터 훔친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어느새 안구가 뒤집힌 한삼은 피를 꾸역꾸역 토해 내다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아, 아니오. 크으으윽.”
 다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한삼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그러나 그 비명은 중도에서 흐릿해졌다. 다시 서생이 한삼의 아혈을 점한 것이다.
 “다시 묻겠다. 너는 풍귀로부터 훔친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똑같은 질문이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순간 우두둑 하며 목뼈가 탈골되었고, 그대로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 찰나 서생은 한삼의 머리를 잡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한삼은 그대로 널브러졌다. 호흡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으나 아직 죽지는 않았다.
 그런 한삼을 냉랭한 눈빛으로 쏘아보던 서생은 차갑게 말문을 열었다.
 “네가 거짓을 말하면 이후 네 가족들도 네가 느낀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
 “다시 묻겠다. 너는 풍귀로부터 훔친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시체처럼 굳어 있던 한삼은 가족이란 말에 기척을 보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말을 하는 듯 마는 듯, 그 목소리는 여전히 희미했다.
 “좋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하겠다.”
 “······.”
 “네 동료는 어디에 있느냐?”
 움찔하던 한삼의 입술이 한순간 굳어졌다. 한삼은 말문을 닫아버렸다. 지독한 고통의 와중에도 한삼의 두 눈에 반골(反骨)의 기질이 나타났다.
 “흥!”
 그런 한삼을 냉막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서생은 코웃음을 쳤고, 더 이상은 한삼을 통해서 알아낼 게 없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풍귀와 그의 수하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물건을 회수해 와라. 저놈은 갖고 있지 않다.”
 “······.”
 “어서 움직여라. 그놈을 찾아. 그놈이 가져간 물건을 회수해라!”
 “존명!”
 풍귀와 그의 수하들은 몸을 깊이 숙이더니 즉시 사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서생은 신형을 돌렸다. 겁에 질려 있는 한삼을 냉막한 눈으로 쏘아보던 서생은 뜬금없이 묘하게 웃으며 시선을 옮겼다. 서생의 두 눈은 하늘로 향해 요상한 달을 바라 보았다. 어리둥절한 한삼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서생이 별안간 발을 뻗어 한삼의 목을 지그시 눌렀기 때문이다. 한삼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으나 반항할 수가 없었다.
 누르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우두둑.
 서생은 가늘게 웃고 있었다. 한삼은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생의 발에 힘이 더욱 가해지자 이미 탈골되어 있던 뼈들이 모조리 부서지며 그 충격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한삼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서생의 입에서 섬뜩하면서도 음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낱 포쾌 따위가 나 장취진의 일에 방해를 하려하다니! 설사 네가 관련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네놈에게는 합당한 징벌이라. 죽어서도 명심하라! 내가 촌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하여··· 감히 네깟 하찮은 녀석들이 우리 흑선문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게다!”
 서생 장취진은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음험한 달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장취진은 갑자기 양미간을 한껏 오므리더니,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때 내가 갔어야 했는데. 나의 실수다! 하필 염왕의 사자가 그깟 사소한 물건을 원하는 바람에 풍귀를 보낸 것이······. 으음······. 대체 염왕께서 그걸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본파의 무공진보(武功眞寶)도 마다하고······.”
 그러고는 장취진은 다시금 축 늘어진 한삼을 흘겨보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저놈, 홧김에 죽이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는군. 허나 일이 꼬일 때는 이보다 더 매정해야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다.”
 등을 돌린 장취진은 이를 으드득 악물더니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반드시 그 물건을 회수해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물건을 전달해야 돼. 그래야 우리 흑선문이······.”
 두 눈에 기광을 보이던 장취진은 난데없이 걸음을 멈추고, 찰나지간 땅을 박차며 무서운 기세로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막 사경(四更)이 지날 무렵의 일이었다.
 
 
 
 # 남자의 눈물
 
 
 
 우수수 쏟아지는 빛.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헛간 지푸라기 속에 파묻혀 있던 양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휴우.”
 깊이 한숨을 내쉬며 양우는 전날의 악몽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살아난 이상 그 일을 더 마음에 두어 봤자 무얼 할까.
 “한삼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나는 십중팔구 싸늘한 시신이 되었을 거야.”
 처연히 웃던 양우는 일어서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몸 구석구석이 저려 왔지만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했고, 조례에 늦지 않았는지 염려도 되었다.
 그러나 마음뿐.
 머리가 빙글빙글 돌더니 양우는 중심을 잃고 도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내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데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심호흡을 거듭하던 양우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일 각 가량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양우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고 현기증도 덜해졌다.
 자신감을 얻은 양우는 한발 한발 천천히 떼어 가며 걸어 나가 헛간 문고리를 잡았고 온 힘을 다하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휘청!
 너무나도 빛이 강하여 양우는 그대로 졸도할 뻔한 것을 간신히 견뎌 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내를 이리저리 살피자 눈이 점점 빛에 적응되었다.
 외진 곳에 자리한 객잔이라 주변은 한산했다.
 마침 객잔 안을 청소하고 있는 점소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양우는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움찔하고 고개를 숙이다가 양우는 이내 정색하고 말았다.
 상의와 하의 가리지 않고 피범벅인 데다가 곳곳이 긁히고 찢겨져 있었다.
 양우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객잔이 눈에 들어왔다.
 딱히 다른 곳으로 갈 필요 없이 객잔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하고 옷도 수선하고, 몸도 좀 씻는 것이 좋으리라.
 양우는 발길을 객잔으로 옮겼다.
 
  * * *
 
 청소를 하고 있던 점소이 광춘은 양우가 들어오자 정색을 하며 반겼다.
 그러나 꺽다리처럼 길쭉한 체격을 지닌 광춘의 두 눈은 이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보게, 자네 왜 그런가?”
 양우는 다시 미묘한 미소를 보였다.
 “간밤에 대취(大醉)했는데 넘어졌나 보네. 속이 쓰린데 소면 국물이라도 좀 줘.”
 광춘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얼른 다가와 양우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양우는 핏덩이를 토하다가 옷을 버린 것뿐이었고 겉은 상처 없이 멀쩡했다.
 “쯧쯧. 어째 자네가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는가? 세상에 갑자기 피범벅이 되어 가지고 나타나다니! 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말지. 이런! 쯧쯧.”
 “······.”
 양우는 씁쓸히 웃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온 광춘은 광대뼈가 심하게 돌출되고 눈두덩은 푹 들어간 지독한 추남이었으나 인정이 많은 이였다.
 “몸은 성한 게지?”
 “그럼.”
 “알았어. 잠깐 기다려 봐. 그래도 사람 꼴이라도 하고 있어야지.”
 광춘은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기가 입던 깨끗한 옷 한 벌을 꺼내어 가지고 왔다. 광춘은 그것을 양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네. 어서 이것으로 바꿔 입어. 옷이 더러우면 어째 포쾌님으로 안 보인단 말이야.”
 빙그레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한 양우는 깨끗한 옷을 손에 쥐고 구석진 한쪽으로 갔다.
 상의와 하의를 벗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양우는 성큼성큼 광춘에게 다가갔고 부탁하여 바늘을 빌렸다.
 노모가 병석에 누운 이후로는 바늘질을 도맡아 했기에 양우는 능수능란하게 옷을 기웠다.
 손놀림이 제법 빠르고 정확했는데 그것은 그의 노모도 감탄했던 재주였다.
 이내 광춘이 김이 펄펄 나는 소면 국물을 가져왔지만 양우는 찢어진 옷을 다 깁고 나서야 광춘이 가져온 소면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고깃국물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먹고 나니 허기도 가시고 정신도 들었다.
 “휴우우.”
 뜨거운 입김을 불어 내며 양우는 빈 그릇을 내려놓았는데 마침 빗자루질을 마치고 의자와 탁자의 열을 맞추던 점소이 광춘은 양우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광춘의 이마에 희미한 주름이 생겨났다.
 “이보게.”
 “······?”
 “자네 혹 무슨 좋지 않는 일이 있는가?”
 “······.”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별로 없어도 이 광춘이가! 자네만큼은 성심성의껏 도와줄 수 있네.”
 양우는 광춘을 응시하며 웃었다.
 희미한 눈썹 아래 밝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언제 보아도 강렬하다. 자신의 눈매 또한 그에 뒤지지 않다 보니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또래 아이들은 늘 겁에 질린 듯한 눈길을 보내지 않았던가.
 양우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자네 마음은 다 아네.”
 “킁, 이보게. 혹시 포두가 자넬 괴롭히나? 포두의 심보가 고약하다고 하더니······.”
 “후후. 아니네. 그렇진 않아.”
 “끄응. 그것도 아니면 왜 그리 술을 마셔? 자기가 피를 흘린 것도 모르고 돌아다녔으니. 이보게. 자네 어머니가 염려하실까 두렵네.”
 “으음······.”
 “그래, 그건 그렇고. 자네 상처는 어떤가?”
 “괜찮아. 포쾌가 다 그렇지. 그 정도로는······.”
 광춘은 두 눈을 반짝였다.
 “오호라! 이제 나한테 힘 자랑한다는 건가?”
 “후후. 그건 아니야.”
 “흥!”
 “이보게. 그러지 말고 국물 한 그릇만 더 갖다 주게.”
 양우의 부탁에 광춘은 금세 강한 눈빛을 거두고 즉시 외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게!”
 주방으로 뛰어간 광춘은 큼직한 사발에 국물을 가득 담아 가져왔다.
 그리고 소리 죽여 말했다.
 “크응, 자네 좀 일찍 오지 그랬나? 하필 주방장이 있어 음식을 갖다 줄 수가 없어.”
 “괜찮아. 이것으로 충분하이. 하하.”
 “다음에 내가 한번 부를 때 그때 오게나. 그때는 남은 고기를 기름에 넣어 찌글찌글 구워 푸짐하게 대접함세.”
 “고맙네.”
 곧바로 후루룩 국물을 마시던 양우는 간간이 입을 벌려 허연 김을 토해 내며 입 안을 식히다가 지나가는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헌데, 자네. 혹시 점소이 일 그만두고 포쾌가 되어 볼 생각은 없는가? 나만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허허. 이 친구 보게. 나도 강골이긴 하지만 자네만큼 강골은 아니잖아.”
 그 말에 양우는 웃었다.
 “광춘이 자네! 옛날에 나하고 싸웠다가 진 게 그리도 서운한가?”
 광춘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헤헤. 난 포쾌가 될 사람은 아니여.”
 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포쾌보다는 점소이가 더 나을지도 모르지. 으으음······.”
 잠깐 상념에 잠기는 듯 보이던 양우는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보다 몸이 더욱 개운해진 듯 보였다.
 “아차차! 정신머리하고는! 이러다가 여기서 하루를 다 보낼 뻔했군.”
 광춘은 바로 대꾸했다.
 “이제 알았는가? 내가 곧 해 주고 싶었던 말이 그거야.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 백수처럼 자네가 그러고 있으면 안 되지. 어서 움직여, 어서! 헌데··· 그나저나 저 옷들은 어떻게 할 건가?”
 미간을 잔뜩 오므리던 양우는 옷가지를 모아 움켜쥐었다.
 “우선 핏자국이라도 지우고 가야겠는데······.”
 “하긴······.”
 양우는 그 즉시 객잔의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조그만 우물로 다가가 물을 길었고 더러운 관복을 나무통 속에 넣고 힘껏 비벼댔다. 손은 제법 시려왔지만 외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김에 양우는 그 자리에서 찬물로 얼굴도 씻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하아, 시원하다!”
 젖은 관복은 빨랫줄 위에 널어놓은 뒤 양우는 객잔을 떠나 곧장 저잣거리로 향했다.
 간밤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터라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전보다 더 눈을 자극했는데 양우는 이제야 살아난 기쁨을 느끼며 피식피식 웃었다.
 장신구를 파는 사람들, 점을 보라고 외치는 노인들, 활짝 열린 상점 안으로 꽉 들어 차 있는 곡물, 그릇, 건포, 비단, 제사도구들, 그리고 상점 사이사이마다 판을 벌리고 서 있는 행상들······.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양우는 삶의 기쁨을 다시금 만끽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양우는 금세 우거지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두의 성깔이 보통이 아닌데 자신이 관복도 안 입은 채로 나타난다면 무슨 행패를 부릴지 알 수 없는 데다가 또 이렇게 늦게 집으로 돌아가며 모친이 뭐라고 꾸짖으실지 앞일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한삼 아저씨가 포두에게 자신의 일을 잘 말해 주지는 않았을까 일말의 기대를 해 보았으나 그렇다고 포두가 호락호락 이 일을 유야무야하며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진 양우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어제는 한삼 아저씨께 참 큰 빚을 졌어. 언제고 갚아야 할 빚이 아닌가. 한삼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뛰어가지도 못했겠지? 한삼 아저씨를 만나면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려야지. 그래, 오늘 일을 끝낸 후 오리 구이에다가 따끈한 술 한 잔이라도 사 드려야겠다. 헌데··· 크음. 어머니께는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지? 아휴우우.’
 양우는 속으로 온갖 고민을 하면서 뛰어갔다.
 그렇게 달려 강묵이란 노인이 운영하는 조그만 식기점을 지나치던 양우는 갑자기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사오 장쯤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그 앞에 우글우글 몰려 있었는데,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던 양우는 갑자기 움찔 놀라며 그대로 멈춰 섰다.
 ‘저···저 사람들은······.’
 양우는 저도 모르게 꿀꺽 하며 침을 삼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근엄한 관복을 차려 입은 두 사람 때문이었다.
 포두 조창과 대포두 고중순!
 그 두 사람이 20여 명의 포쾌와 어울려 그 대열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포두와 대포두는 얼굴이 몹시 굳어 있는 데다가 은근히 노여워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본 양우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겼다.
 마치 죄를 짓고 쫓겨 다니는 사람처럼 정색을 하고 그들을 살피던 양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즉시 마음을 정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대로(大路)를 포기하고 양우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관복을 입고 와 저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그나마 살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크. 아무래도 운이 좋지 않아. 한삼 아저씨가 아무리 잘 말했다고 해도 대포두께서 친히 왕림을 하셨는데······. 어이구, 죽었다. 참으로 운이 없구나. 나는 왜 이리도 운이 없는지······. 이러다 설마 쫓겨나는 것은 아니겠지?’
 양우는 너무 염려되고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으로 돌아가 관복을 입고 다시 가는 것뿐이었다.
 집이 가까워지자 양우는 더욱 속력을 냈다. 노인 왕탁의 텃밭을 바로 가로질러 갔고 허리까지 오는 돌담도 곧바로 훌쩍 넘어 그대로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고 뛰었다.
 이윽고 서까래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초가 지붕이 보이자마자 단숨에 몸을 날려 나지막한 담을 넘었다.
 그리고······.
 양우는 큰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 양우가 왔습니다. 관복 좀 어서 내주십시오. 사정은 나중에 제가 말씀드리겠······.”
 방문 앞에 이른 양우는 기다리지 않고 화락 문을 열어 젖혔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고 용케 하룻밤을 무사히 보내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되고······. 이 모든 일이 양우에게는 하룻밤 꿈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일어서는 모습을, 그리고 한편으로 당혹스러워하는 모습, 노여워하는 모습을 그는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한편으로 그는 노모가 염려할까 두렵기도 했다. 그는 애써 한 여인의 귀여운 아들로 돌아가 치기 어린 웃음을 띠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야단을 치실지도 몰라. 그래도 대취했다고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리고······.’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어떤 때 참으로 냉혹하기만 하다. 아니 잔인하다고 해야 할까.
 착! 하며 방문이 열리는 순간 양우의 하룻밤 꿈이 통째로 깨지고 말았다.
 ‘······!’
 웃음을 띤 채로 굳어진 양우.
 어느새 웃음은 사라지고 얼굴은 새카맣게 변했다.
 양우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로 서 있다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버릇처럼 양우의 한쪽 눈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게 휘청거리던 양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쿵!
 넋을 놓고 주저앉아 격렬하게 몸을 떨던 양우는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나 꿈은 아니다.
 아니!
 꿈이 아닌 게 저주스럽기만 하다.
 부르르.
 격렬하게 떨리는 양우의 온몸은 눈앞의 사실을 한사코 부정하려는 듯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젓던 양우는 힘겹게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를 붙잡았다.
 그러나.
 감각이 없다.
 자신을 반겨 줘야 할 어머니는······.
 “하압······!”
 양우는 헛바람을 들이키자마자 옆으로 넘어졌고 다시 몸을 일으켜 어머니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똑같았다.
 흐느적거리는 그녀의 육신은 마치 뼈가 없어진 듯 팔이며 다리이며 마치 고깃덩이처럼 푹푹 손에 잡혔다. 더구나 그녀의 육신은 한겨울 눈처럼 차가웠고 그녀의 동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우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어머니를 만지고 흔들어 댔다.
 한꺼번에 주르륵 쏟아지는 눈물. 어찌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지 앞이 보이질 않았다.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떨쳐 낸 양우는 다시금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나 변함이 없었다.
 자신을 목을 움켜쥐었던 양우는 그제야 손을 풀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으으어엉엉엉엉······. 크어어어어어어억······. 으아아아아아아······.”
 그의 사백안에서 섬뜩한 독기와 처절한 슬픔이 뿜어져 나왔다.
 누가 감히 그녀를 해쳤단 말인가!
 어머니의 목은 움푹 파였고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다.
 누가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양우는 미쳐 울부짖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이렇게 울었던 적이 없었다. 양우는 자신의 심장이 통째로 도려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피를 토하며 울었다.
 “어머이! 어머이! 왜 나만 두고 가오! 으아아아아아아악. 으으아아아아가. 어머이이이이······.”
 격한 감정에 머리를 쥐어뜯었고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 치더니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못 이겨 손톱으로 자신의 얼굴을 쫘악 그어 버렸다.
 얼굴에서 피가 솟구치는데도 그는 얼굴을 쥐어뜯고 머리칼을 한줌한줌 뽑아 내며 오열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울음을 그치고 그녀를 확인했다.
 다시 울고 또 확인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육신이 갈가리 찢기고 뇌수가 터져 나가는 고통보다 심한 것이 눈앞에 보이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양우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그제야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기엔 이웃 사람들도 있었고 저잣거리에 있었던 포쾌들 모습도 몇몇 보였다.
 
 
 
 # 운명
 
 
 
 양우의 초가로 들어서던 두 포쾌는 방안의 참변을 보자마자 두 눈을 부릅뜨며 기겁을 하더니 이내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대포두와 포두를 대동하고 나타났는데······.
 사실 간밤에 포쾌 세 명의 시신과 온몸의 뼈가 박살 나 버린 여섯 명의 포쾌가 촌락 곳곳에 발견되었는데, 그 일은 조그만 촌락의 관아를 풍비박산 내 버렸다.
 포쾌 한삼의 가족까지 남김없이 간밤에 참변을 당한 터라 포쾌들은 더욱 정신이 없었다.
 시신들을 수습하랴 또 부상당한 자들을 옮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이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행적이 묘연한 양우의 집으로 달려왔다. 거기에서 비록 양우는 살아 있었으나 그의 모친이 살해당한 것을 그들은 발견했던 것이다.
 포두 조창은 씁쓸한 표정으로 양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고, 대포두 고중순은 오만상을 쓰며 주위를 배회하더니 포쾌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대포두 고중순은 포두 조창에게 소곤거리듯 말했다.
 “이보게. 이번 살인 사건에 범인을 잡지 못하면 우리 두 사람 모가지가 달아나겠어.”
 “······.”
 “자네도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가. 이 일로 낙마(落馬)할 수는 없지.”
 “······.”
 “조 포두. 생각이 있으면 말하게. 이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으음.”
 조창에게서 대꾸가 없자 대머리 고중순은 작은 눈을 더욱 작게 뜨며 탄식음을 흘렸다. 그의 기름진 두 볼이 출렁거렸다.
 고중순은 말했다.
 “하필이면······.”
 “으음.”
 “수법이······.”
 말을 하다 말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이내 미간을 굳히더니 서서히 인파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러고 난 뒤 고중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속 시원하게 말해 보세.”
 “······.”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으음.”
 “······.”
 이윽고 포두 조창이 말했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조창은 뇌물도 뇌물이지만 솜씨도 제법 빼어난 포쾌 출신이었다.
 “대포두 어르신께서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속하의 생각은 같습니다.”
 “으음, 자네도 그 생각을 했겠지. 참으로 엿 같은 일이 아닌가.”
 대포두 고중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자글자글 파였다.
 뇌물을 썼든 공을 세웠든 간에 두 사람은 오랫동안 포쾌 일을 했던 터라 시신을 보자마자 이번 살인 사건의 윤곽을 대충 꿰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고중순은 말을 이었다.
 “하필 강호인이 개입될 것이 뭐람. 관에서 그놈들을 잡아들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이 일을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새로 부임하신 검찰관(檢察官) 나으리께서는 이 일이 강호인의 소행인 줄 알면서도 우리한테 호통을 치시겠지.”
 “······.”
 “흐음. 어쨌든 자네는 죽은 포쾌 한 사람당 은자 열 냥씩 가족들에게 보상금으로 지불하게.”
 “한삼의 가족들은······?”
 “그의 형제든 사촌이든 팔촌이든 간에 가까운 친척에게 지불하면 될 게 아닌가.”
 “알겠습니다.”
 “으음.”
 “······.”
 “헌데 문제는 저놈이란 말이야. 용하게도 살아남았어. 제 모친도 죽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후 알아보면 될 겁니다.”
 “아···아니. 그거 말고.”
 “······.”
 “괜히 저놈이 감찰관에게 입을 놀려 긁어 부스럼 만들면 안 되니까······. 저놈이 뭘 알든 모르든 간에 자네는 조용히 그를 불러 잘 단속하게.”
 “······.”
 “동료들을 죽음을 내몰지 않고 차라리 입을 봉하고 있으라고 말이야. 복수를 하고 싶으면 혼자서 하지 애꿎게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는 말라고.”
 “······.”
 “저놈한테는 미안하지만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강호인과 혹여 싸우게라도 된다면 우리 피해가 얼마나 심하겠나? 그때가 되면 우리 두 사람이 왕창 뒤집어쓰는 거야.”
 “······.”
 “그럴 바에야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게 좋겠고, 우리는 그저 이리저리 뒤지는 흉내만 내면 되는 게야. 시간만 때우다가 추관(推官) 어르신께 뇌물을 쓰면 감찰관 어르신도 이 일을 포기하시겠지.”
 “······.”
 “그래도··· 끄으음. 감봉 처분 정도는 생각해야 할 걸세. 흠······!”
 포두 조창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는 이제 가 보겠네. 자네가 잘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네.”
 그러고는 대포두 고중순은 그대로 그곳을 떠나 버렸다.
 포두 조창은 한숨을 길게 내쉬다가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전히 포쾌 양우는 오열하고 있었고 피까지 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해 보였으나 조창은 슬그머니 양우의 옆으로 갔다.
 수하들을 시켜 군중들을 뒤로 물리친 후 조창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모친을 죽인 사람이나 포쾌 한삼과 그의 가족들을 죽인 사람이 동일인 같네.”
 “······.”
 “강호인이야. 저런 수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예사 사람이 아니지.”
 그때였다.
 스르르.
 양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은 시뻘겋게 변해 있는 데다가 동공은 너무나도 작아 사악한 악마로 화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흐르는 눈물 때문에 그의 섬뜩한 모습은 흐트러졌다. 이에 조창은 놀란 가슴을 다스릴 수 있었다.
 조창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강호에는 은원(恩怨)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는 그 배에 배로 갚는다는 말이 있네.”
 “······.”
 “나는 믿네.”
 “······.”
 “자네가 자네 모친의 원한을 반드시 갚을 수 있으리라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네의 손으로 말이야!”
 “······.”
 “이보게. 자네도 그렇지만 한삼이나 한삼의 가족들도 참으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네.”
 그리고는 조창은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난 양우의 얼굴이 변했다.
 한삼이 죽었다는 말에 양우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호흡도 점점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양우의 두 눈은 섬뜩하리만치 번쩍이고 있었고 뿌드득 하며 이를 가는 소리가 단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양우가 한순간 벌떡 일어나더니 모친의 시신을 안은 채 밖으로 나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경실색하며 군중이 좌우로 갈렸고 양우는 그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이때 양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 기이한 시선이 섞여 있었다. 그 시선은 예리하면서도 매서웠고 어딘지 모르게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군중이 동요하며 양우를 쫓아 움직이자, 그 시선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양우는 초가에서 그리 멀지 않는 산으로 올라가 땅을 파고 그곳에 모친을 모셨다.
 다행히 포두 조창이 즉시 장의사를 물색하여 시신을 쌀 천과 허름한 관(棺), 그리고 지전(紙田)을 가져와 양우는 바로 장례를 치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식을 치르면서 양우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한 시진 남짓 방 안에서 피눈물을 흘렸기에 그의 눈물샘이 혹여 말라 버린 것일까.
 양우는 굳은 표정으로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을 바라보았고 바위를 가져와 앞에 세워 놓고 표식을 삼았다. 가난한 양우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다시금 왈칵 눈물이 쏟아지니 양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사람들은 하나씩 떠나갔고 이웃에 살던 두 노인은 가만히 서서 끝까지 기다려 주려 했으나 날이 저물자 그들도 산을 내려가 버렸다.
 홀로 남은 양우.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이 자신을 심장을 찌르고 자신의 눈을 긁어내고 가는 것 같았다. 양우는 발버둥 치면서 또 울고 또 울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의 자상한 음성들. 그것들이 양우를 더욱 괴롭혔다.
 
 ‘양우야, 이 어미 걱정 말고··· 항시 맡은 일에 충실히 하거라. 항상 포두 어르신을 잘 받들고.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양우야. 이 어미는 언제나 네가 잘되기를 바란다. 이 어미 때문에 네가 잘못되는 건 죽어도 원치 않는 걸 꼭 명심하거라······.’
 ‘우리 양우······. 언제 장가를 보내 줘야 하는데······. 이 어미가 이렇게 아파서 어찌한담.’
 ‘아이고. 착한 양우야. 걱정 말거라. 이 어미는 손주도 보고 손녀도 보고 그러고 나서야 네 아비 만나러 저승으로 갈 테니까. 그때까지 이 어미는 절대 안 죽는다.’
 ‘양우야. 일이 고단한 모양이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고기라도 먹여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이 못난 어미가 약값으로 네가 벌어들인 돈을 모두 탕진하니······. 양우야. 이 어미가 너 볼 낯이 없구나. 흑흑······.’
 ‘양우야, 왜 이리 얼굴이 앙상해지는 게냐? 일을 하면서도 밥은 반드시 챙겨 먹어야······.’
 
 이윽고 양우는 일어섰다. 쾌청한 밤하늘. 오늘따라 별과 달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보이고 그 빛들이 찬란했다. 그래서 양우는 더 슬퍼졌다.
 사르르······.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에 실린 파공성이 왠지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어깨를 부르르 떨던 양우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겨 내며 양우는 걷기 시작했다.
 이 차가운 곳에 어머니를 혼자 두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운지 다시 양우는 몸을 돌리더니 단숨에 뛰어가 어머니의 무덤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냥 이대로 1년이고 10년이고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은 왜 이렇게 야속한 것일까.
 갑자기 들려오는 싸늘한 음성. 그리고 곧이어 얼굴을 두드리는 냉정한 눈빛들. 고개를 돌리던 양우는 어둠 속에 휩싸여 있는 다섯 인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문객이 아니라 매서운 눈빛을 지닌 불청객들이었다.
 너무 지쳐 눈을 자꾸 감겼지만 양우는 억지로 참으며 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들은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성이 또렷하게 귀에 울렸으나 양우는 일어설 힘도 없었고 반항할 힘도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흥! 네놈이 양우라는 녀석이로구나. 네 녀석 때문에! 염왕의 사자를 맨손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크으으으윽······! 네 녀석만 아니었어도······.”
 “······.”
 “우리는 지금쯤 비서(秘書)를 받고 천중(天中)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
 “흐흐흐. 죽일 놈! 네 녀석 때문에 다시 일 년을 기다리게 되었다!”
 “······.”
 “허나 이미 제법 혹독한 대가를 치렀으니 팔 다리 하나씩 잘라 끝내게 해 주지. 지금 즉시! 물건을 본좌에게 넘겨라······! 뿌드드득······.”
 빠득 이 가는 소리를 끝으로 양우는 정신을 잃었다.
 
 미친듯이 핏빛 강을 헤엄치는 꿈 끝에 양우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앞에 모친의 무덤은 보이질 않았고 후끈 달아오르는 화로(火爐)와 두 명의 음침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양우는 저도 모르게 몸부림치며 달려가려고 했으나 그의 몸은 철제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양우는 기력이 쇠하여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준수한 서생 하나와 한때 자신이 연모했던, 아니 늘 자신에게 비웃음을 던졌던 여인 백지림이 서 있었다.
 양우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이 찡그려졌고 이내 눈빛이 흐릿해졌다.
 ‘이럴 수가!’
 서생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백지림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양우. 결국 네가 사고를 쳤구나! 흥! 미련한 녀석! 아버지께서 너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나신 줄 알아! 더러운 녀석! 질 낮은 인간 주제에 감히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도 네가 살아날 수 있을 줄 알아.”
 백지림, 그녀는 노여워하며 고함을 치다가 별안간 앞으로 바짝 다가가 오른손으로 양우의 뺨을 여러 차례 때리는 게 아닌가. 그 손길이 어찌나 매서운지 맞을 때마다 양우의 머리가 이리저리 휘둘렸다. 이가 부러져 나가고 울컥울컥 연신 피를 토했다.
 그러나 혼미한 상태의 양우에게 고통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강학의 약혼녀이자 진문관 관주의 딸 백지림이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이런 장소에 있는 건지 의문을 느꼈다.
 불현듯 한삼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자네 혹시 아는가? 백지림의 부친이 한때 강호인이었다더군. 다들 모르는 척 쉬쉬하고 있지만 분명해.’
 ‘백발 노인이 어찌 그리 눈빛이 형형한지 감히 쳐다볼 엄두가 안 나더구먼.’
 ‘거기다가 재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일개 성 하나쯤은 통째로 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갑부라고 하네.’
 한삼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추리가 이어지기도 전에 양우는 다시금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가. 양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니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양우의 얼굴은 더없이 수척해졌으나 기이하게 두 눈만큼은 강렬하게 빛났다.
 양우는 호흡을 길게 했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서서히 내뱉고······.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죽음, 한삼의 죽음,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들.
 그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으나 현실은 그대로 참담하기만 하다.
 허무한 웃음이 양우의 입가에 걸렸다. 양우는 어둠을 응시했다. 그리고 양우는 생각했다.
 포두 조창이 했던 말도 떠올랐고 괴이한 서생의 말도, 백지림의 앙칼진 음성도 잇달아 떠올랐다. 여러 번 끊겼던 생각들이 그제서야 이어졌다.
 온몸에 힘은 하나도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머리는 맑아 온갖 상념들이 뒤이어졌다.
 어린 시절의 생각들, 막 포쾌가 되었을 때의 생각들, 모든 생각들이 뒤엉켜져 있다가 어느 순간 실마리를 찾아 하나 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양우는 일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고 힘껏 주먹을 쥐었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흑선장 담을 뛰어넘던 도둑을 공격하던 일.
 그리고 그 도둑이 떨어뜨린 조그만 주머니.
 증거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아무도 모르게 슬쩍 품에 넣었던 것.
 양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들이 물건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목숨을 해칠 정도로 그렇게 소중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 강호인들이란 족속들은 과연 그렇게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단 말인가.
 대체 강호인이 뭐기에 그런 특권을 갖는다는 말인가.
 양우는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부릅뜬 두 눈은 증오와 살기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러기를 잠시.
 양우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포박당하여 갇혀 버린 자신이 이제 어떻게 원한을 갚을 것이며 이 분노를 어떻게 다스린단 말인가.
 문득 양우는 선배 포쾌들의 말이 떠올랐다.
 포쾌가 되자마자 그들은 이야기했다.
 포쾌는 도둑과 강도를 잡는 게 일이고, 강호인의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혹여 강호인과 시비가 생기더라도 대포두나 감찰관 어르신의 명령을 받아 행동하라 했다.
 덧붙여 그들은 강호인이 저지른 수많은 혈겁에 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그 혈겁의 대상이 되었고, 모친과 한삼은 그 혈겁으로 인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으니. 양우는 비통했고 서글펐다.
 그러나······.
 그럴수록 집념은 양우의 전신을 휘감았고 양우는 반드시 살아서 이 원한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양우의 얼굴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으으윽! 이제 나는 포쾌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포쾌의 일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세상의 강호인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고··· 내 어머니를 죽인 자들은 모조리 찢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마교의 출현을 알리는 효시가 되었음을 세상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그로부터 한두 시진쯤 지났을까?
 어둠이 걷히고 인영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사방은 횃불로 밝혀지고 화로에 불이 피어올랐다.
 양우는 정색했다. 그리고 보았다.
 형틀, 쇠집게, 채찍, 칼, 낫, 몽둥이 등 온갖 고문 기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시커멓게 변한 핏자국들이 사방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온 한 서생은 스스로를 장취진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섬뜩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물건을 내놓으라고 다구쳤다.
 ‘으음.’
 양우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자신이 완강히 저항한다면 저들은 자신의 팔 다리 하나쯤은 거리낌 없이 잘라 버리리라. 그렇게 된다면 복수는 물 건너가 버리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폐인이 될 뿐이다.
 마음을 불같이 끓어오르고 있었으나 육신은 그것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
 양우는 혀를 깨물며 고통을 느꼈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복수를 다짐했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양우의 얼굴에 일순 비굴함이 일어났다.
 오들오들 떠는 양우. 겁에 질린 양우. 말을 더듬거리는 양우. 콧물 눈물로 범벅이 된 양우.
 “으으아앙. 어···어···어르신······. 이 머···멍청한, 한 노···놈의 모···목숨만 사···살려 주십시오. 아···아이고. 이놈이 미···미···미···미쳤나 봅니···다. 저··· 제발 모···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으으흑······. 제발······.”
 “흥!”
 바로 들려온 코웃음 소리.
 그러나 양우의 연기는 그럴싸했다.
 어머니를 떠올리니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눈빛은 흐트러졌고 안색은 창백해졌다.
 “저따위 놈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차질이 생길 줄이야. 흥! 갈기갈기 찢어 버려도 시원찮겠군.”
 장취진은 차갑게 외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허공을 때렸다.
 찰싹찰싹하며 양우의 볼이 이리저리 돌아갔는데 양우는 아프기도 했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암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의 서생은 양우의 머릿속으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였던 것이다.
 “입 닥쳐!”
 “······.”
 “다시 묻겠다.”
 “······.”
 “네놈의 눈에도 그것은 귀해 보였겠지? 역겨운 포쾌 놈! 관인(官人)인 주제에 정신이 나갔군. 네놈은 재물에 눈이 멀어 훔쳐서는 안 될 것을 훔쳤다.”
 “······.”
 “말하라!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
 “말하라.”
 “······.”
 지금 눈앞의 사내는 자신을 도둑 취급하고 있다. 억울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울먹이던 양우는 떨리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으로서 살길은 그 물건뿐이다. 양우는 그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그럼 저···절 사···사···살려 주···주시는 거···거···겁니···니까?”
 “흥! 네가 순순히 나온다면 팔 다리 한쪽씩이 아니라 팔이든 다리든 한쪽만 내놓으면 된다.”
 냉정한 대꾸였다.
 ‘팔이든 다리든 한쪽이라······.’
 그러나 다리가 잘리면 움직이기 힘드니 팔을 내놓아야 하는데, 팔 하나를 가지고 복수를 하기는 무척 힘들지 않겠는가.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지를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고 양우는 생각했다.
 ‘살육을 일삼고도 감히 나를 병신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악독한 놈!’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건대 협상을 하려들었다가는 외려 화를 부추기게 될 것 같았다.
 양우는 말했다.
 “아···아···아이고 사···살려 주···주셔서, 가···감사하···합니다. 어···어르신··· 소···소···소···소···소···소인이 그···그것을 뒤···뒷산··· 사···산중에 무···묻어 두···두었는데······.”
 “······?”
 “그것이······.”
 “흥!”
 “······.”
 “주머니를 열어 본 모양이었군. 그것으로 집이라도 서너 채 살 생각이었느냐?”
 갑자기 장취진의 눈빛이 악독하게 변했고 이상한 기운이 전신으로 다가왔다.
 양우는 움찔 놀랐으나 즉시 표정을 고쳤다. 정녕 장취진의 말처럼 그 물건이 그렇게 귀한 모양이었가 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물건을 열어 봤다고 이자들이 믿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얼른 말을 바꿀 수도 없었다. 이미 내뱉은 말이니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물건을 확인하고 숨겼다면 말이 되지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산중에 묻었다는 건 어림없는 수작이 아닌가.
 장취진은 말했다.
 “뒷산 산중이라. 좋아. 그곳으로 지금 가겠다. 만약 그곳에 물건이 없으면 네 팔 한쪽을 도려낼 것이다.”
 “······.”
 “풀어 줘라.”
 장취진의 옆에 있던 자들 중 삐쩍 마른 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얼른 포승줄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사내는 양우를 앞으로 밀쳤는데 양우는 어이쿠! 소리를 내며 힘없이 나가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비웃음과 조소의 눈빛들.
 그러나······.
 양우는 꿋꿋하게 이겨 내며 마음을 침착하게 유지하려고 했고 육신의 힘을 최대한 아꼈다.
 
 
 
 # 천살사백안(天殺四白眼)
 
 
 
 구수한 부엉이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오고 벌레 소리도 감미롭다.
 천공에 자리 잡은 훤한 달은 손에 잡힐 듯 말 듯 물결치며 빛을 뿌려 댄다.
 마른풀을 밟는 소리가 밤을 흔들어 놓고 저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아미산에 반쪽 된 가을 달은
 그림자만 평강강을 따라 흐르네
 밤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가며
 임 그리며 못 본 채 유주로 가네
 
 峨眉山月半輪秋
 影入平羌江水流
 夜發淸溪向三峽
 思君不見下逾州
 
 음성은 낭랑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험했다. 장취진은 화사한 달을 보자마자 이백의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를 읊었는데 어딘지 모르지만 그리움이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우에게는 그 시구도 달도 별도, 그 어느 것도 중요치 않았다. 양우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고 저도 모르게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막상 산중으로 나왔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허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장취진과 네 명의 수하들. 그들은 무척 신중하고 냉철했다.
 삐쩍 마른 사내가 앞장을 서서 걸어가고, 좌우로 벙어리 같은 두 사내들이, 그리고 등 뒤 좌우로 각기 장취진과 한 사내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으니 숨이 턱턱 막히고 암담함만 가중되었다.
 다섯 사람 모두 무공 고수이어서 그 신법이 또한 얼마나 빠른가.
 그런 데다가 이렇듯 포위하며 움직이니 달아날 구석은 보이질 않았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했으나 좀처럼 탈출할 길을 찾지 못한 채 점점 뒷산 깊숙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어머니의 무덤도 스쳐 지났다.
 저도 모르게 눈에 습기가 어렸으나 양우는 가까스로 참아 냈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 될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양우는 인내하려고 했고 불시에 움직여 원수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했다.
 “아직 멀었어?”
 차가운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양우는 바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다 왔습니···다.”
 “허튼 수작을 하다가는 목숨까지 잃게 될 수도 있다.”
 냉혹한 음성.
 양우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취진, 백지림 그리고 흑선장, 잊지 않으리라. 목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그러다가 양우는 문득 속으로 웃었다. 그 물건은 자신의 관복과 함께, 아니 광춘의 객잔 뒤뜰에서 마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후. 나는 원수의 말을 믿지 않는다. 저들은 그 물건을 찾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저들이 나의 목숨을 남겨 놓을까?’
 양우는 이를 악물었다.
 ‘원수의 물건······! 복수를 끝내기 전까지는 내 목숨과 함께 지고 갈 것이다. 크으윽!’
 그리고 시간은 또다시 흘러갔다.
 비탈진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무성한 잡초 밭을 지나치기도 했다.
 촘촘히 세워진 고목들 사이도 지났다. 밤바람은 다소 냉기를 품고 여기저기서 불어 왔다.
 그러나······.
 포로 신세인 양우는 최대한 천천히 걸으면서도 체력 낭비를 최소화했다.
 그 와중에 어느덧 절곡(絶谷)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양우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낮추고 이곳 저곳을 손으로 뒤적이며 걸어갔다.
 마치 기억을 더듬어 어딘가를 찾는 사람 같았다. 그의 그런 모습에 이끌려 고수들도 주위를 새삼 살펴보며 움직였으니.
 그러는 사이, 양우는 흙 한 줌을 손에 쥐었고 다른 손에는 조그만 돌멩이 하나를 쥐었다.
 ‘빠르게. 신속하게. 그리고 지독하게, 악마가 되더라도··· 반드시!’
 양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조그만 실수라도 한다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되고 만다.
 양우는 앞장선 사내의 뒤통수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고는 여러 차례 위치와 거리를 가늠하며 돌멩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절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이겨 내야 한다. 양우는 혀를 깨물어 피 맛을 보았다.
 그리고.
 바람 소리.
 발걸음 소리.
 그 모든 것에 양우는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앞장서 가던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등을 돌리며 말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흥! 무슨 수작이냐? 이곳으로 가면 더 이상 길이 없지 않느냐?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
 “······.”
 “······?”
 “놈! 멈추······.”
 이어지는 이상한 눈빛들이 양우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장취진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양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 모았다.
 두 눈에 광망을 돋우며 눈앞의 사내를 쏘아보던 양우는 번개같이 돌멩이를 던졌고 우측에 선 사내에게는 흙 한 줌을 화악 뿌리며 뛰어나갔다.
 그러나 앞에 선 사내는 양우가 던진 돌멩이를 피했고, 양우의 우측에 있던 사내는 뒷걸음질쳐서 흙먼지로부터 눈을 보호했다.
 이때.
 “잡아랏!”
 장취진의 함성이 터지자, 누구랄 것 없이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얼굴이 잔뜩 굳은 장취진은 수하들보다 한 발 앞서 허공을 날았고 고목을 잇달아 박차며 쏜살같이 나아가 한순간 양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죽기 살기로 달리던 양우는 땅을 데굴데굴 구르며 방향을 틀더니 단숨에 자세를 잡고 다시 앞으로 질주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흥! 미꾸라지 같은 녀석!”
 사실 어림없는 일이었다. 무공 고수들은 경공술에 능하니 양우의 모습은 풋내기의 발버둥이나 다름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양우가 단순한 곤봉질로 풍귀를 놀라게 했던 일을 말이다.
 더구나 그들은 양우가 사백안 중에서도 천살사백안(天殺四白眼)을 지닌 인물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충고로 양우는 눈빛을 흐리려고 웬만하면 눈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 간혹 화가 날 때도 일부러 한쪽 눈을 자꾸 찡그려 천살사백안에서 발산되는 섬뜩한 안광을 사그라뜨리고 흐리게 했다.
 그러나 지금 양우는 두 눈을 힘주어 부릅뜨고 있었다.
 일부러 한쪽 눈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섬뜩한 광망이 그의 눈에서 발출되어 나오는데 일순 그의 앞을 가로막던 한 고수가 양우의 얼굴을, 아니 눈을 보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천살사백안에서 쏟아지는 가공할 눈빛은 마치 야밤에 떠도는 야수의 눈처럼 번득이는데 인간의 눈에서 그런 빛이 나오니 누구도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의 몸이 경직되는 순간을 양우는 놓치지 않았다.
 생사(生死)는 한순간이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
 양우는 번개같이 달려가 즉시 상대의 낭심을 노리고 발길질을 했다. 상대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사이 양우의 두 손이 상대의 눈을 찔러 갔다.
 그러나 상대는 바로 반격해 나왔다.
 이때 번쩍! 하며 쏟아지는 양우의 안광이 상대를 위축시켰다.
 상대는 대경실색하며 뒷걸음질치는데 양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바짝 다가섰다. 아랫입술이 찢어지도록 악물며 전력을 다해 다시 상대의 낭심을 걷어찼다.
 뻑!
 저돌적으로, 겁도 없이 날린 공격이 이번에는 제대로 박혔다. 아무리 내가고수라고 하지만 순간적인 공격을 피하지는 못한 것이다.
 더구나 양우의 섬뜩한 안광은 불같이 일어나 그를 휘감아 버렸으니.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상대가 주저앉자마자, 양우는 무릎으로 상대의 턱을 차고 미친 듯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해 휘익······! 하는 파공성과 함께 성난 장취진이 앞을 가로막았다.
 ‘······!’
 흠칫 놀라던 양우는 방향을 틀어 달아났으나 금세 다른 고수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으음.’
 앞뒤로 포위된 상태였으나 양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아가는 속력 그대로 뛰어올라 고목을 차며 신형을 틀었고 곧바로 고수의 턱을 걷어찼다.
 그 동작은 빠르고 날카로웠으나 뒷골목 건달에게나 통할 만한 수법일 뿐이었다.
 눈앞의 상대는 무공 고수였다. 냉소와 함께 사내는 신형을 틀더니 번개같이 장심을 뻗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버쩍 놀라 양우는 나려타곤(懶驢打滾)과 유사한 수법으로 땅을 굴렀다.
 그러나 양우는 쉬지 않았다.
 그 와중에 흙을 한 줌 손에 쥐고 있다가 사내가 바짝 다가서는 순간 흙을 뿌리며 번개같이 달려가 왼발로 낭심을 걷어찼다.
 “어딜!”
 사내는 고함치며 두 손으로 발길질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양우의 눈을 대한 사내는 흠칫 놀랐고, 그 찰나의 순간을 양우는 놓치지 않았다.
 양우는 상대의 눈을 가늠하여 침을 뱉었고, 사내가 놀라며 머리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그대로 신형을 날려 오른 발등으로 사내의 왼쪽 귀 언저리를 걷어찼다.
 크게 놀란 상대가 쌍장을 휘두르려 하자 양우는 손으로 사내의 낭심을 잡고 비틀어 버렸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