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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괴옥루 1-1

2019.10.24 조회 534 추천 4


 #서장
 
 
 
 그래 한번 해보자!
 무(武)가 됐든 협(俠)이 됐든 돈이 되었든지 간에······.
 
 난 한 번도 남에게 해코지 한 적이 없었다.
 난 항상 떳떳했다.
 그리고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떳떳하고 싶다.
 
 불괴옥루(不愧屋漏)라 했나?
 자고로 군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했지.
 
 자! 이제 해도 되겠소?
 
 
 
 #제 1 장 애 좀 낳아라!
 
 
 1
 
 제남(濟南) 외곽으로 병풍처럼 넓게 펼쳐진 두량산(豆凉山).
 두량산 산자락에 있는 무가촌 사람들에게 이곳은 식량을 얻는 자연의 보고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무가촌의 무씨 집안 삼대독자인 무성포는 오늘도 아버지 무 노인으로부터 장장 세 시진에 걸쳐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제발 부탁이다. 애 좀 낳아라. 누구처럼 낳아줄 부인이 없냐? 애 기를 돈이 없냐?”
 결혼한 지 이십 년을 훌쩍 넘었는데도 아이를 못 보고 있으니 무 노인의 화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잔소리를 해봐야 소용도 없고, 묵묵부답인 아들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보는 것도 답답했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무 노인은 마침내 부근에서 가장 용하다는 용골촌(龍骨村)의 점쟁이를 찾아갔다. 무 노인은 근검절약을 입에 달고 사는 구두쇠였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조상을 위해 대를 잇는 일에 돈을 아낄 수는 없었다.
 점쟁이는 산가지를 던져 점괘를 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참 뜸을 들인 그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늘이 바라지 않으니 어찌 대를 이을 수 있을까! 천지간에 이보다 불효한 것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노라!”
 무 노인은 가랑이 깊숙이 넣어 두었던 피 같은 비상금마저 바치고 연신 두 손을 빌어댔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도사님, 제발 목숨 하나 살리는 셈치고 아들 하나 점지해 주십시오.”
 이에 점쟁이가 눈을 감고 무성포와 며느리의 사주를 꼼꼼히 계산하더니 다시 산통에서 점괘를 하나 뽑아들었다.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폼이 영락없는 천하의 대학자였다.
 “평지(平地)는 정(精)을 깨뜨리고 산지(山地)는 정(精)을 갈무리하는구나. 동방(東方)의 산은 복(福)이요 북방(北方)의 산은 화(禍)로구나. 음, 만약 이것이 성공해서 아들을 낳는다면 나라의 기둥감이로세.”
 무 노인은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뒤의 기둥감이라는 말만은 머리에 쏙 들어왔다. 그리하여 기쁜 마음에 점쟁이에게 다시 물었다.
 “평지는 정을 깨뜨리고 산지는 정···,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점쟁이는 옳다 이놈 걸려들었다는 회심의 표정과 함께 무 노인을 느긋하게 쳐다보았다. 점쟁이는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놓고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게! 이 점괘를 서천 곤륜산 서왕모(西王母)에게 보였더니 자네 집안이 술장사, 색시장사를 하느라 자네 아들놈의 정기(精氣)가 어디론가 자꾸 새어 나간다고 말씀하셨네. 지금 당장 동쪽에 있는 태산으로 아들 내외를 쫓아 보내게. 그리고 만약, 만약에 아들을 낳게 되면 이 나라의 커다란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네.”
 무 노인은 큰 인물이 된다는 말에 정신이 혹해 점쟁이가 만약이라는 말을 거듭해서 강조했다는 사실을 저 멀리 흘려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무 노인은 아들 내외를 불러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 너희는 산속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양기(陽氣)를 하루라도 빨리 되찾으려면 대자연 속에 동화되어야 한다는구나.”
 문자를 빌린다면 대자연의 기를 받아 허한 양기를 보해야 후사를 이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무성포 내외는 그렇게 난데없이, 험하기로 유명한 태산(泰山)으로 쫓겨났다.
 태산으로 가는 마차에서 무성포의 부인, 진미령은 시아비가 태산 쪽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어 놓은 줄 알았다. 평소에는 인색한 어른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분가시키는데 번듯한 집도 없이 내칠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차도 못 오르는 산길을, 부리는 하인도 없이 짐을 지고 올라가며 진미령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로(指路)꾼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엽부(獵夫)들이 쉬어가기 위해 지어놓은 다 쓰러져 가는 움집이었다.
 지로꾼마저 내려가 버리자 산속엔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만이 가득했다. 부부는 누구를 원망할 기력도 없어 한숨을 쉬며 앉아 있을 뿐이었다.
 “미안허이.”
 무성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 놓고 앉아 있는 진미령에게 지나가는 소리처럼 툭 내뱉었다. 진미령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 백 리 안에 저만한 미인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진미령이었다. 미인을 버들 같이 하늘하늘한 미인과 목단처럼 풍성한 미인으로 나눈다면 진미령은 활짝 핀 목단 같은 여인이었다. 시집 오기 전까진 발에 흙을 디디지 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유한 포목점의 고명 딸로 자라 부모의 총애가 남달랐고, 주위 사람들도 언제나 밝은 그녀에게 우호적이었다.
 천하의 바람둥이 무성포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말 그대로 세상을 내 것인 양 살았다. 당시 무성포만은 절대로 안 된다던 오빠들의 말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 무성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불꽃놀이 핑계를 대고 다시 만나자고 한 것도 진미령 자신이었고, 편지를 기다린 것도 자신이었다. 밤을 새워 수놓은 손수건을 돌려받았을 때의 가슴앓이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했다. 예쁜 여자는 싫다는 그의 말에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다.
 진미령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는 남편을 흘겨 보았다. 사실 무성포가 여자를, 특히 예쁜 여자를 술만큼이나 좋아하는 사내라는 사실을 혼례를 올리고 나서야 알았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무성포가 돌아보며 씩 웃었다. 나이 사십이 넘은 사내가 웃음은 꼭 청년 같았다. 진미령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누굴 원망하겠어. 내 눈을 원망해야지.’
 금방까지도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부는 서로 잠시 바라보다가 짐을 들고 서둘러 움집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산 생활이 쉬울 리는 없었다. 그들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갖은 고생을 한꺼번에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부부는 짐승 가죽이나 약초를 마을에 내다 팔며 차츰차츰 산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무성포의 무능력으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진미령은 여느 때처럼 태산의 깊숙한 곳까지 약초를 캐러 들어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를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이렇게 갑자기 내리는 폭우에 익숙해져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후드득! 쏴아!
 북쪽 하늘에서는 잔뜩 습기를 머금은 비구름이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거센 빗방울에 눈도 뜨기 힘들었다. 태산의 그 많던 동굴은 다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어떻게든 비 피할 곳을 찾던 바로 그때였다.
 “어엇!”
 진미령은 갑자기 발밑의 흙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서 기겁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녀의 몸은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이 지나 진미령의 의식이 간신히 돌아왔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생전 처음 보는 화등잔만한 불빛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쳐다보던 진미령은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악!”
 어른 몸통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뱀이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뱀의 양미간 사이로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뿔이 나있었고 그 눈은 어른 주먹만하였다.
 진미령은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 하고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괴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독각괴망(獨角怪翻)은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우~웅!
 낮은 소리를 내던 독각괴망은 겁에 질려 미동도 못 하는 진미령의 몸을 서서히 꼬리로 말더니, 동굴 안쪽으로 거대한 몸을 소리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동굴을 얼마쯤 나아갔을까? 동굴 끝에는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로 키를 재듯 기대어 서 있었다. 바위 사이에는 간신히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틈이 나 있었다.
 어느새 독각괴망의 꼬리에서 풀려난 진미령은 독각괴망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자, 본능적인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 바위틈 속은 의외로 넓었으며, 동굴보다 밝았다. 주변보다 약간 솟아난 중앙에는 옅은 빛을 두른 신기한 약초가 보였다. 어른 얼굴 정도 크기의 연녹색 잎이 줄기를 받혀주듯 빙 두르고 있었는데, 그 입의 줄기는 두께가 어른 팔뚝만했다. 맨 위에는 연한 붉은빛의 열매가 여럿 맺혀 있었다.
 똑. 똑.
 신기하게도 허공에서는 영초(靈草)를 향해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일천 년을 주기로 아홉 개의 붉은 열매를 맺는다는 천지구연실(天地九蓮實)이었다. 독각괴망이 영력(靈力)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 영물이었다. 마침내 그 결실의 때가 다가왔지만, 바위 틈새를 통과할 수가 없자,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하던 참이었는데 진미령을 만나게 된 것이다.
 독각괴망의 이런 마음을 눈치 채고 바위틈으로 기어들어간 진미령이 영초를 바라보자 순간 마음속까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 천하에 다시없을 영약임에 틀림없구나. 특별한 아기를 낳게 해줄 거야. 이 귀한 걸 저 괴물에게 다 줄 수는 없고···`···.’
 천고에 없을 영초를 보자 욕심이 난 진미령은 다짜고짜 천지구연실 세 알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독각괴망이 탐낼 정도의 열매라면 사람 몸에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독각괴망으로선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독각괴망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워~~~응!
 괴망의 큰 소리에 동굴이 무너질 듯 진동하자 진미령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독각괴망의 거대한 몸뚱이로는 사람 하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그 틈새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진미령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지구연실을 씹는 동안, 독각괴망의 분노에 찬 눈 속에서 애처로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것을 본 진미령은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후환이 두려웠다. 다시 여섯 개의 천지구연실을 따서 다섯 개를 독각괴망에게 던져 주었다. 물론 한 개는 남편을 위해 남겨 둔 것이다.
 분노에 차있던 독각괴망으로서는 이제 다 틀렸다고 절망하던 순간에 천지구연실을 다섯 개나 얻게 되자, 누가 뺏기라도 할까봐 재빨리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쁨에 겨운 듯 소리쳤다.
 웅~~~웅.
 천지구연실은 본래 수많은 세월 동안 축적한 양기를 담고 있는 영약(靈藥)이었다. 보통 사람이 세 알이나 먹었다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몸이 속으로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미령에게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몸 안에 양기를 흡수할 수 있는 태아(胎兒)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태아가 거의 다 자란 상태였다면 열매의 열기로 타 죽었겠지만, 만물을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태아였기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천지구연실의 양기에 취한 독각괴망은 밀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진미령은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딱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물만 먹으며 자다 깨다를 거듭하기를 일 주일쯤 했을까? 진미령이 깜빡 잠에서 깨어나 보니 독각괴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본 진미령은 해방감과 영약을 얻었다는 뿌듯한 기분을 안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2
 
 팔 개월이 흘렀다. 무성포와 진미령 부부 사이에서는 그리도 바라고 바라던 아들이 태어났다.
 진미령이 집으로 돌아오던 날, 천지구연실의 효과 탓인지 그 날 밤 내내 그녀에게 시달려 무성포는 비몽사몽간을 헤맬 지경이었다. 다음날 진미령은 신음하는 남편을 보면서 마음 한편으론 그동안 바람피운 죄라며 고소해 했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남편인지라 동굴에서 가져온 열매를 먹였다.
 이렇게 죽다 살아난 무성포는 그날 이후 육체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사십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무성포는 문득 진미령의 배를 쳐다보며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한 개밖에 먹지 않았지만 앞으로 태어날 놈은 당신이 먹은 세 개의 약효를 다 빼앗아 먹었을 텐데···`···.”
 무성포는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태어날 놈의 정력을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진미령은 무성포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눈을 흘겼다.
 “점쟁이도 그랬고, 제 꿈속에서도 이놈이 장군복(將軍服)을 입고 나타났으니 앞으로 장군으로 키울 테니 그리 아세요.”
 그렇게 뱃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부부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갓 태어난 놈이 돌이 지난 아이만큼이나 장대하니 모두들 장군감이라고 기뻐했다.
 아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무성포와 진미령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이 잘나가고 거침이 없으라는 뜻으로 무가내(無可奈)였다. 물론 이 앞에 ‘막’자가 붙는다면 막무가내(莫無可奈)라는 전혀 다른 뜻이 되겠지만, 누가 감히 무씨네 사대독자의 귀한 성을 바꿔 부를 수 있겠는가? 어쨌든 무가내란 이름만 놓고 본다면 좋은 뜻을 가진 멋진 이름이었다.
 구두쇠 할아버지인 무 노인은 대를 이을 놈이 생긴 것까지는 좋았지만, 무가내의 무지막지한 식사량을 볼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덜컹거렸다.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됐을 때부터 한 끼 식사량이 어른의 서너 배를 넘었던 것이다.
 “허어, 그놈 참!”
 무가내가 자라남에 따라 늘어나는 빈 그릇 수에 무 노인의 신음소리는 높아만 갔다.
 타고난 신력(神力)에다 이런 식탐이 보태진 탓인지 무가내는 힘이 천하장사였다. 다섯 살 때부터 열 살짜리의 키와 비슷했고 몸무게는 백 근을 넘는데다 어찌나 힘이 센지 동네에서 당할 아이가 없었다.
 살찐 둥근 얼굴에 눈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두꺼운 눈썹은 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입술은 어머니를 닮아 작지도 크지도 않았지만, 꽉 닫으면 고집스러워 보였다. 몸 전체는 둥글둥글하여 멀리서 걷는 모습을 보면 마치 공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사대독자로 오냐 오냐 키운 탓인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장군감이라고 치켜 준 탓인지, 동네에서는 그의 고집을 꺾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은 덩치만 컸지 세상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로 자라난 것이다.
 무가내는 고슴도치 자식이었다. 부모만이 그를 예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보더라도 무가내의 몸은 도저히 정상이 아니었다. 무가내의 살을 빼기 위해 그동안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아들놈의 살을 빼야겠다고 방에 가둔 채 한 달 넘도록 하루 한 끼만 먹이는 극약처방을 해본 적도 있었다. 이런 시도는 무가내의 성질만 버려놓았을 뿐, 그 무성한 살은 여전히 무가내의 외투로 자리잡고 있었다.
 영약의 기운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형성된 살인지라, 밥을 며칠 굶는 정도로는 살이 빠지지 않는 매우 희귀한 체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성포와 진미령은 동네에 있는 무술관을 보고나서야 머리를 쳤다.
 “그래, 무술관에 보냅시다.”
 “그것 좋겠네요.”
 그들은 무가내가 무술관에서 열심히 몸을 놀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살이 빠질 것이고, 또 잘하면 진미령의 태몽과 점괘대로 무가내가 장군이 되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성포와 진미령, 여기에 무가내까지 합세해 무 노인을 한 달간 조른 끝에 무가내는 열두 살이 되는 해에 부근 무술관이라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제 2 장 천하제일방파를 꿈꾸는 사람들
 
 
 1
 
 “너희는 이제부터 천하제일방파를 만드는 초석이 될 것이다. 나로 말하면 그만한 실력이···, 물론 이론적으로 충분한 사람이다. 앞으로 너희가 나를 믿고 따른다면 꼭 이루고 말 것이다.”
 무가촌 인근에는 소림관(少林館)이라는 무술관 하나밖에 없었다. 무술관의 관장은 개벽신수(開闢神手)로 불리는 오십 정도 먹은 사황풍(司愰風)이라는 사람이었다.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연설은 처음 입관하는 제자들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황풍은 소림파 속가제자 출신이었다. 이런 궁벽한 곳에서 무술관을 차릴 정도였으니, 그 멋들어진 별호와는 달리 뛰어난 일류고수라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림삼절수(少林三絶手)와 팔십일복마장법(八十一伏魔掌法)은 제남현에서는 유명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림사 속가제자라는 배경만큼은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과거 제남에서 악명 높은 제남이마(濟南二魔)가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다 사황풍에게 당해 반병신이 된 사건은 제남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꽤 입에 오르내렸다.
 물론 말이 제남이마지 제남 외곽에서 잔돈푼이나 챙기는 동네 건달이나 마찬가지인 인물들이었으니, 사황풍의 실력을 높이 보는 강호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앞에서 당신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될 것인가?
 이런 소림관이었지만 그래도 관원은 사십 명이나 되었고, 만약 그 중에서 뛰어난 실력자만 키워낼 수 있다면 일가를 이루지 못하란 법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황풍은 터무니없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무림에서 일가를 세우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 중 하나는 어떻게 하든지 자질이 뛰어난 제자들만 선발하여 제자로 키운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만 입관자격을 주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렇게 키운 제자들을 다른 곳에 뺐기지 않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지금도 사황풍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네 명의 준재를 키우면서 문파로서의 틀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가내 역시 입관을 위해 두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시험인 무거운 돌을 멀리 던지는 것은 무가내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인 높이뛰기는 무가내에게는 다다를 수 없는 하늘이었다.
 무가내가 나무를 향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서 들리는 우지끈 하는 소리에 모든 사람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우아!”
 전부 입들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 하지만 넘어지면서 그 뿌리까지 빠져 나올 정도로 껴안고 뒹구는 모습에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그날 무가내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다.
 
 일 주일 내내 침울해 하던 무가내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내일부터 소림관에 나가거라.”
 “저번에 불합격 했잖아요.”
 “너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
 무가내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무술관에 간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어떻게 장군이라도 하나 만들어 볼까 하는 부모의 눈물겨운 정성과 뇌물이 사황풍을 움직인 결과였다. 무성포와 진미령은 사황풍을 가게로 초청해 그동안 무 노인 몰래 숨겨 놓았던 은자 백 냥을 건네고 거기에다 술까지 진탕 먹여 놓고서 겨우 무가내의 입관을 허락받았던 것이다.
 무가내의 부모는 사황풍에게 두 가지만을 요구했다.
 “관장 어른! 봐서 알겠지만 살 좀 제발 빼 주십시오.”
 “어험, 그 정도는 염려 놓으십시오.”
 사황풍이 보기에 무가내의 살은 내가(內家)무공보다는 외가(外家)무공 쪽으로 강하게 수련시키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질 것 같았다. 매일같이 땀을 흘리고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는데도 살이 찐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터, 자신이 보기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무가내가 영약에 의해 체질이 변화해 그런 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동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지금 사황풍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리인 줄은 알지만 강인하게 훈련시켜 반드시 장군감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하하하, 그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 있습니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사황풍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신의 무술관에서 장군이 나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공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이 어린 무가내가 장군이 되려면 최소한 이십 년 정도는 지나야 할 테니 문제가 생겨도 이십 년 뒤의 일이었다. 대답이 쉬울 수밖에 없었다.
 
 무가내는 처음 오 일 동안 기초훈련을 쌓을 때까지만 해도 덩치와 힘을 무기로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무가내의 느려터진 움직임 때문에 점점 관원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술 실력으로 모든 서열(序列)이 정해지는 소림관에선 필연적인 일이었다.
 입관하고 십 일쯤 지나 무가내는 최초의 무술대련(武術對鍊)을 벌이게 되었다. 신입의 무술 실력을 측정하고 서열을 매기기 위해 정례적으로 행해지는 대련이었다.
 무가내의 상대는 무술관원 중 제일 나중에 입관한 진표(晋彪)라는 아이였다. 무가내보다 다섯 달 먼저 입관했지만 나이는 무가내보다 한 살이 어리고 키도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아이였다.
 진표는 백정(白丁)의 자식으로 없는 살림에도 자식에게만은 백정이란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바람으로 무술관에 들어온 아이였다.
 처음하는 비무였고 기초도 없는 상태였으니 아무리 수련 기간이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나 무가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진표는 나한십팔수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무술관 내에서 몇 안 되는 아이였다.
 그만큼 재능도 있고 몸도 날렵했다. 사황풍도 진표에 대해서는 백정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드러내놓고 편애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얍!”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진표는 우수를 하늘로 반쯤 치켜들며 매섭고 야무진 기합성을 내질렀다. 무가내의 주위를 돌며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난생 처음 접하는 날랜 몸놀림에 무가내는 정신이 없었다.
 스스슥! 쉬익!
 날렵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진표의 우수가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며 무가내의 이마를 강타했다.
 “헉, 크윽···`···.”
 무가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이마를 얻어맞고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덕분에 잠시 몸이 주춤하는 동안 진표의 발차기가 연속으로 작렬했다.
 팍! 퍼퍽!
 이번에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무가내는 몸을 휘청거렸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저 조그만 놈에게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힘을 다해 진표의 손목을 휘어 잡아갔다.
 윙!
 둔탁한 바람소리가 들렸으나 다람쥐처럼 재빠른 진표를 따라 잡기에는 무리였다. 다시 한번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서서히 한 손을 앞으로 내밀다가 진표의 얼굴을 향해 숨겨진 손을 득달같이 내질렀다.
 자기 딴에는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진표가 보기엔 한없이 느리고 어설픈 동작이었다. 결국 자신의 허점만 노출시킨 꼴이었다. 진표의 몸이 낮게 가라앉더니 오른발로 무가내의 무릎 뒷부분을 걷어차 버렸다. 왕상와빙(王祥臥氷)이란 초식이었다.
 퍽! 쿠쿵!
 손이 빗나감과 동시에 다리가 순간적으로 접혀지면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무가내의 육중한 몸이 떨어지는 충격은 구경하던 관원들마저 놀람에 찬 탄성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어엇!”
 갑자기 지진이 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착각을 깨닫고는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낄낄.”
 엉금엉금 일어난 무가내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가내는 멧돼지처럼 돌진하며 두 손을 진표의 얼굴과 복부를 향해 연속으로 힘차게 뻗었다.
 “이놈!”
 그 순간 진표는 가볍게 발로 땅을 치면서 허공 일 장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내려오면서 사슴이 매화를 희롱하듯 매록헌화(梅鹿獻花)라는 초식으로 무가내의 얼굴을 가볍게 걷어찼다.
 휘익! 퍽.
 무가내는 사람이 그렇게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작은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높이였으니 무가내로선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힘으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고 어른과도 대등하게 싸움질을 벌이던 무가내는, 무공이란 것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가 오늘 그 진수를 맛보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실력이 안 되는 줄 알고 포기할 법도 하건만, 부러지면 부러졌지 꺾일 줄 모르는 특유의 고집이 발동했다.
 “이런 여우같은 놈!”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진표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휘둘러 갔다. 처음 배운 쌍수교차(雙手交叉)라는 초식이었다.
 진표는 미처 착지하기 전의 불안정한 자세에서 몸을 왼쪽으로 틀었지만 무가내의 왼쪽 어깨에 부딪히고 말았다.
 퍽!
 그 충격은 대단했다. 진표는 오른쪽 어깨가 탈골되는 듯한 충격에 깜짝 놀라 어깨를 잡으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무가내는 우연찮게 전개한 한 수가 먹혀들어가자, 결국 자신에겐 맷집과 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다시 적극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순식간에 나한신법(羅漢身法)으로 무가내 뒤로 돌아선 진표가 무가내의 뒤통수를 가볍게 밀어버렸다.
 “어어!”
 무가내는 달려오던 힘에 못 이겨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 모습을 본 관원들은 웃고 난리가 났다. 거대한 몸통의 무가내가 머리부터 거꾸러지며 공처럼 몇 바퀴를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는다는 건 부처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비웃음 소리.
 “야! 창피한 줄 알아. 뒷구멍으로 들어온 놈은 어쩔 수 없네.”
 “흥! 술집 자식 주제에 별 수 있겠어.”
 무가내로선 진표에게 당한 것보다 이런 비웃음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무가내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놈을 노려보았다. 화가 난 무가내는 온몸의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비무를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온몸의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무조건 상대를 잡으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달려가면서 양손을 휘둘렀다. 진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자배불(童子拜佛)이란 초식으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수그렸다 쳐들며 무가내의 코를 들이박았다.
 퍽!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소림관에 울려 퍼졌다. 달려오는 탄력과 함께 맞받아치는 힘이 배가되어 무가내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었다. 아무리 무가내의 맷집이 좋다지만, 그것으로 시합은 끝이었다.
 이 최초의 패배는 어린 무가내에게 견디기 힘들 정도의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삐쩍 마르고 힘도 없어 보이는 진표에게 이렇듯 호되게 당하고 보니 무가내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분을 참지 못해 사흘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씩씩대기만 했다. 그러나 이 패배야말로 무가내의 고집스런 호승심(好勝心)을 무공방면에 집중시키는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2
 
 쿵! 쿵!
 사황풍은 인시 경에 밖에서 나는 쿵쿵대는 소리와 낑낑대는 소리에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잠을 깨운 주인공은 무가내였다.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인지, 그날 이후 무가내는 하루 온종일 수련에 매달렸다. 사황풍이 신입관원에게 무술대련을 시키는 것은 이처럼 패배를 딛고 분발하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무가내의 경우를 보니 그 효과가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쳤다. 이렇게 밤낮 없는 수련으로 자신의 잠자리를 어지럽히는 놈은 무가내가 처음이었다.
 그래도 기특하다는 생각에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황풍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해서 그만 웃고 말았다. 몸집의 두 배는 됨직한 바위를 들었다 내려놨다 하는 모양이 마치 무식한 곰을 보는 것 같았다.
 사황풍이 냅다 소리쳤다.
 “야, 이놈아! 달밤에 춤을 춰도 제대로 춰야지! 이런 무식한 놈이 있나. 네놈이 제아무리 강골이라도 남아나질 않겠구나.”
 무가내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사부님! 언제 나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나 했어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려면 그냥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두세요.”
 “알았다, 알았어! 내 너에게 적당한 무공을 생각해 볼 터이니 조금만 참아라. 잘못하다가는 우리 소림관에서 시체 하나 치우겠다, 이놈아!”
 그 말을 듣자 무가내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밤중에 이렇듯 요란을 떨어댄 것도 다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시위였는데, 이렇게 쉽게 문제가 풀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이지요, 사부님?”
 “오냐, 오냐.”
 그날 이후 사황풍은 무가내에게 적당한 수련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무가내의 맷집이나 선천적인 힘은 소림관에서 비슷하게라도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무가내만의 수련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무가내의 무력시위는 새벽마다 계속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사황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무가내를 불렀다.
 “이리 와봐라. 이놈아! 이 사부가 네놈 때문에 오래 살기는 애초에 틀린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황풍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없었다.
 “잘 들어라.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만한 몸에서 살덩어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을 빼기 위한 훈련 도중에 무릎관절이 망가질 우려가 있으니 우선 하체를 단련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내가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마보공(馬步功)이란 거지.”
 순간 무가내는 표정이 멍해졌다.
 “무, 물론 너에게 맞도록 강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하루 한 시진씩 연습할 것이며, 그것을 연습하는 동안 너는 자세가 엄정(嚴整)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느니라.”
 무가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마보공은 합동수련 때마다 취하는 자세라, 그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한 시진이라니,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대번에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시진이나요?”
 퍽! 뒤통수···`···.
 “요놈이 말이 많다. 마보공으로 자세를 잡은 후엔, 몸의 민첩성을 기르기 위해 원묘공(猿猫功)을 수련하도록 하여라. 이것은 본래 험한 산지를 오르내리는 공부로서 원숭이의 날렵함과 고양이의 날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매일 새벽에 너희 집 뒷산을 하루도 거르지 말고 그 자세 그대로 연습해야 하느니라.”
 “네에!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산을 올라가라고요!”
 “이놈이···`···.”
 벌써 사황풍의 다음 동작이 무엇인지 눈치를 채고 무가내는 재빨리 뒤로 도망갔다. 사황풍이 무가내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네 이놈! 한 번만 더 사부님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면 무공이고 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그 말에 무가내는 질겁했다.
 “아니오. 아니오. 사부! 절대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사황풍의 말이 이어졌다.
 “그 다음! 와설공(蛙舌功)으로 손을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공부다.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양으로 손을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기운을 내뿜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황풍은 잠시 말을 끓고서 무가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삼대신공(三大新功)을 네가 익힌다면 능히 살이 빠질 것이며 너의 무공실력도 나날이 늘어날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하고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도록 해라.”
 삼대신공이라는 거창한 명칭이 좀 어줍지 않았지만, 강호의 누구나 명호만은 거창하게 붙이는 게 상례이니 그리 큰 허물은 아닐 듯싶었다. 명칭이라도 그럴듯해야 제자가 수련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철로 만든 갑옷을 입혔다. 힘이 장사인 무가내는 처음엔 그쯤이야 하고 깔보다가 그대로 주저앉는 줄 알았다. 무가내 몸무게의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이어지는 사황풍의 한 마디는 무가내의 의식을 거의 몽롱한 지경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앞으로 매일 입고 다녀라. 그리고 아버님께는 아주 특별히 맞춘 것이라 말씀드려라.”
 한마디로 돈 내놓으라는 소리였지만 자기가 내는 게 아닌 이상 무가내로서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날부터 무가내는 삼대신공에 온몸을 던져 몰두했다. 삼대신공이라지만 실상은 초죽음 체력훈련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번 발동된 무가내의 오기는 몸집만큼이나 대단했다. 무엇보다 그날 자신을 비웃던 놈들에게 보란 듯이 되갚아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무가내는 이처럼 독하게 수련을 거듭하는 자신의 모습이 관원들에게는 또 다른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소림관을 드나들면서 무가내는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자 아이를 발견했다. 오빠인 열네 살의 사가량(司家亮)과 함께 소림관에 다니는 열두 살 먹은 사미진(司美振)이라는 소녀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사미진의 인물이나 무술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무가내의 눈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보여 몰래 훔쳐보곤 했다.
 그녀와 오빠는 명문가 자제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방관리의 자식들로, 소림관 내에서 상당한 위세를 부리는 위치였다. 소림관에는 제남성에서 조금은 행세를 한다는 집안의 자식들 네 명이 몰려다니곤 했는데, 그들을 소림관 사인방이라 불렀다. 사가량이 바로 그들 중 하나였다. 나머지는 천마표국(天馬標局) 부국주가 아버지인 여인도(呂人堵),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인 추진광(楸進廣), 이와 함께 대표적인 문인집안 아들인 가인경(價仁炅) 등이었다.
 소림관에는 사인방을 추종하지 않는 소수의 무리가 있었다. 제대로 된 배경이 없지만 그래도 줏대가 있는 관원들이었다. 바로 무가내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진표를 비롯한 청마산(靑磨山)과 마사청(馬司淸) 등이 그들이었다. 집안은 평범하지만 무술실력은 꽤 높은 편이었다. 이 두 집단은 함께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 서로를 백안시하고 있었다.
 “흥! 천한 것들이 무공을 배운다고 설쳐대고 있으니 꼴사나워 못 보겠군.”
 “돈과 지위가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란···`···.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이런 대립 속에서도 양 편 모두 무가내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무가내가 워낙 엉뚱하고 덜떨어진 친구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것과는 별개로 무가내는 사미진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는 것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봄바람 같은 감정들로 마음이 심란해진 어느 날, 무가내는 무 노인이 운영하는 주점을 찾았다. 그곳에는 어릴 때부터 무가내를 귀여워한 묘화라는 삼십이 다 된 기녀들의 언니가 있었다.
 무가내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자 묘화가 무가내에게 다가섰다.
 “꼬마 도련님, 어디 아프신가?”
 무가내는 묘화를 쳐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묘화는 어리둥절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무가내가 오늘은 어딘지 달라 보였다.
 “꼬마 도련님, 얼굴에 고민이 가득하네. 무슨 일인데? 마침 저기 방이 하나 비어 있는데 그리 이 누나랑 같이 가볼까?”
 그 은근한 말투에 무가내는 온몸이 오싹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나, 오늘은 장난 칠 기분이 아니에요.”
 이 말을 들은 묘화는 묘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오, 그래. 도대체 어떤 일인데.”
 얼굴을 앞으로 바싹 들이밀며 물었다. 무가내는 움찔해서 뒤로 물러서며 사미진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듣던 묘화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호호호! 우리 꼬마 도련님이 사랑에 빠졌네.”
 무가내는 묘화의 목소리가 너무도 큰 것에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이 소곤댔다.
 “좀 조용히 말해요. 남들이 다 듣겠어요.”
 “호호호, 이 누나가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어요. 보통 몇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답니다. 고고한 여자도 있고 재물을 좋아하는 여자도 있고. 고고한 여자는 시를 적은 편지에 반할 것이고요.”
 무가내의 코가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시(詩), 서(書), 화(畵)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묘화가 그 모양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물론 지금 그 여자애는 재물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꽃과 장신구를 사다 주세요.”
 
 
 3
 
 이렇게 시작된 무가내의 선물공세는 처음부터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사미진의 오빠인 사가량이 무가내의 선물공세를 보고 무가내에게 장난을 친 것이다. 사가량은 사미진을 꼬드겨 무가내에게 마을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폐가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무가내는 비바람이 치는 밤에 그 폐가로 가는 길목에서 사가량 일당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온몸에 철갑을 입은 무가내는 일 장 깊이의 구덩이 속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약속대로 폐가에 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행인의 도움으로 그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신열(身熱)로 집에서 끙끙 앓다가 오후쯤 되어 사미진을 보러 소림관을 찾았다. 막 소림관 담 모퉁이를 걸어가는 무가내 귀에 사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어제 그 뚱보가 그 비를 다 맞고 고생고생 했겠네, 오빠.”
 “하하하! 제까짓 놈이 감히 우리 사랑스런 여동생을 넘볼 수가 있단 말이냐.”
 그때 추진청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 도대체 그놈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놈입니다. 감히 사매를 넘보다니요.”
 “흥! 저는 그놈만 보면 온몸에서 두드러기가 난단 말이에요. 더 이상 그놈과는 마주치기 싫으니 앞으로 장난칠 때는 저는 좀 빼고 하세요.”
 “하하하!”
 “호호호!”
 무가내는 좋아하는 여자의 잔인하고 냉정한 말에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그 지겨운 소리 ‘뚱보’.
 무가내는 사흘을 더 드러누웠다.
 그 사흘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눈을 감아도 ‘뚱보’, 눈을 떠도 ‘뚱보’, 그 소리가 마치 악귀의 비명처럼 무가내의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 충격이 무가내를 또다시 변화시켰다.
 ‘좋다. 어떻게든 무공을 익혀 몸무게를 빼겠다.’
 이제는 사미진에 대한 감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표에게 당하고 사미진이라는 여자에게 당하고, 이제는 더 이상 집착할 것이 없었다.
 무가내는 고집스럽게 무공에만 미쳐가기 시작했다. 몸을 상할 정도로 삼대신공에 집착했다. 지금 와설공의 경지는 손에서 매서운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른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새벽마다 산으로 오르며 원묘공을 수련할 때는 철갑옷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몸을 베기 일쑤였다. 이 무식한 체력단련은 무가내를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하룻밤만 지나면 선천적인 영약의 힘 때문에 엉망진창의 신체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본래 무공은 심신단련으로 도(道)를 닦아가는 과정이며 깨달음의 기초 위에서 제대로 된 수련이 이루어져야 하는 법인데, 무가내는 이런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고집스레 수련에 집착하면서 살이 어느 정도 빠졌으나, 언제부턴가는 더 이상 줄지 않았다. 그 역시 영약의 기운 탓이었다.
 사황풍이 보기에도 갑옷을 입고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하는 그 엄청난 체력은 도저히 인간의 체력 같지가 않았다.
 “야, 이놈아! 쉬엄쉬엄 해라. 그러다 병 날라.”
 그렇지만 그런 무가내의 고집스런 면이 어쩐지 자신과 닮은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진표와의 재대결이 이루어지던 날 아침, 무가내는 더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미 자신이 예전에 비해 몰라볼 만큼 강해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가내는 진표가 빠르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헌원과호(軒轅跨虎)로 담벼락을 발로 걷어차며 뛰어올라 피해 버렸다. 다시 자세를 곧추 잡은 무가내는 선인지로(仙人指路)라는 초식으로 손을 뻗어 진표의 눈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으로 눈을 가리는 것과 동시에 무가내의 강력한 퇴법(腿法)이 진표의 무릎을 걷어찼다.
 휘잉!
 진표는 빠른 보법(步法)으로 무가내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면서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예전의 무가내와는 완전히 수준이 달랐다.
 다시 와설공의 경력을 실은 괴성점원(魁星点圓)이라는 초식으로 무가내의 손이 점을 찍듯이 작은 원을 그리며 어지럽게 날아왔다.
 휘~잉! 퍽!
 비껴 맞으며 담벼락에 부딪히는 순간 거센 파열음이 들렸다.
 곧바로 진표의 항마연환신퇴와 오공속신(悟空束身)이라는 수법(手法)이 무가내의 몸에 작렬했다. 그러나 무가내는 잠시 움찔했을 뿐 오히려 진표가 그 반탄력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진표는 접근전을 피하려고 나한신법을 응용하며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아직도 무가내가 진표의 동작을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 순간 진표의 발이 무가내의 무릎관절을 걷어찼다.
 퍽!
 무가내는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물고기가 배를 뒤집어 날아오르듯 이어번신(鯉魚飜身)으로 튀어 올랐다. 동작은 절묘했지만 엄청난 몸집 때문에 보기에 그리 아름다운 편은 아니었다.
 휘익!
 곧이어 회두망월(回頭望月)로 머리를 뒤로 틀어 진표의 몸을 향해 부딪쳐 갔다.
 “이얍!”
 진표는 나한신법으로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가내는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자 고민에 빠졌다. 비록 진표가 전개하는 초식의 진로는 눈에 들어왔지만, 진표의 나한신법을 쫓아가는 건 여전히 무리였다.
 ‘빠르기는 엄청 빠르군. 어떻게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대도 명중시키지 못할 것 같고. 일단은 저놈의 힘을 빼자.’
 이때부터 무가내는 힘 빼기 작전에 들어갔다. 진표도 함부로 공격했다간 반격을 허용할 듯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많이 발전했는데. 그런데 아까 그 이어번신은 살찐 돼지가 배를 비틀어 공격하는 수법인가?”
 “헌원과호는 어떻고. 이건 호랑이가 아니라 커다란 살찐 곰이 굴러오는 격일세.”
 “하하하!”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웃지 않고 있었다.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무가내의 노력이 가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치고 빠지는 걸 되풀이하면서 진표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빠지고 있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틈엔가 야유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우우.”
 진표는 무가내의 잔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 최후의 초식에 모든 힘을 집중해 승부를 걸기로 했다. 공중으로 뛰어 오르면서 연자급수(燕子汲水)라는 초식으로 제비가 물을 걷어 올리듯 무가내의 턱을 걷어찼다.
 무가내는 마침내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홍안전시(鴻雁展翅)로 몸을 열고, 날아오는 발을 어깨로 받았다.
 퍽!
 진표는 당황해서 주춤했다. 그 순간 무가내는 진표의 다리를 잡아 집어던졌다.
 휘익! 쾅!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진표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무가내는 어깨를 부여잡고 제 자리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몸의 날렵함이나 동작의 정교함은 진표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표라고 그동안 놀고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초식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무가내의 남다른 장점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번처럼 진표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거기에다 웬만한 타격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 맷집에 진표는 점점 지쳐 버렸고, 무가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무술 초보자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초식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가내의 이런 감각은 거의 선천적인 본능에 가깝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하튼 이 시합이 계기가 되어 진표는 무가내만 보면 이렇게 외쳤다.
 “사형!”
 
 다음날 무가내가 진표와의 대련을 떠올리며 사부에게 물었다.
 “사부님, 빠름과 끈기 중 어느 것이 더욱 소중한지요.”
 “빠름은 가벼움이고 끈기는 무거움이니 그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응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너에게는 지금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 하느냐?”
 “···`···.”
 사황풍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연습뿐이다. 알겠느냐, 이 뚱뚱한 놈아.”
 퍽!
 뒤통수 맞는 소리였다.
 ‘어휴~, 말로 하지. 여하튼 빠르다는 진표를 이겼잖아.’
 사황풍은 내공이나 재질면에서 남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무술시합을 수없이 지켜보았고, 제자들을 가리키며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은 누구보다 풍부한 편이었다. 게다가 소림사에서의 기본 무공수련 과정을 똑같이 따라 배우고 익혔던 사황풍인지라, 제대로 무공을 펼칠 줄은 몰라도 제자를 가르치는 데는 제법 활용할 줄 알았다. 문제는 이 모든 걸 체계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 그때그때 생각이 날 적에나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황풍도 이 시합을 계기로 무가내의 자질이나 체질이 꽤 괜찮은 편이라고 판단해, 무가내만을 위한 독특한 초식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실제로 철갑옷과 원묘공의 효과로 인해 무가내는 뚱뚱한 몸에 비해 민첩성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사황풍은 삼대신공에 이은 네 번째 신공으로 ‘번신공(鯢身攻)’을 고안해냈다.
 번신공의 모체는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당나귀가 몸을 웅크리다가 뒤집어 공격하는 수법으로 무가내에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번신공은 무가내만의 독특한 절기(絶技)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해 무가내의 체면은 당나귀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가내도 처음에는 사황풍의 시범을 보고 어이가 없어 정신이 나갈 정도였으니···`···.
 ‘과연 저 사람이 내 사부가 맞긴 맞나?’
 그가 허탈해 하는 걸 보면서 사황풍도 뭔가 찔린 게 있는 듯했다.
 “이 번신공은 비록 그 모양이 볼썽사납기는 하다만 너와는 아주 잘 어울리는 무공이니 열심히 연습하도록 하여라.”
 번신공은 공격과 수비에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공격할 때는 온몸을 최대한 웅크려 힘을 모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적의 가슴으로 짓쳐 들어가 몸을 뒤집어 힘으로 제압했다. 또 수비할 때는 타격 부위를 최소화시키거나 몸의 바깥쪽을 따라 비껴 맞도록 했다. 물론 무가내의 터무니없이 강한 맷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번신공은 사인방의 비웃음을 사고도 남음이 있었다. 연무장에서 관원들이 일정한 형에 맞추어 연공을 할 때 한쪽에서는 번신공을 응용해 땅바닥을 구르고 있으니, 창피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무가내도 처음에는 사황풍에게 떼를 쓰기도 했다.
 “사부님! 도대체 세상에 이런 연공법이 어디 있어요.”
 퍽! 그리고 뒤통수···`···.
 “야, 이놈아! 누가 너보고 그렇게 살이 찌라고 했냐? 흥! 열 받으면 살 빼. 알겠냐!”
 ‘살’ 이야기가 나오면 무가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번신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4
 
 무가내의 연공은 점점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림관 사인방은 무가내의 훈련 모습에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 왔다. 자신들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간혹 사람들이 지나치다 이 모습을 보고 웃느라 난리가 났고, 소림관에 가면 모두 당나귀 훈련을 받는다는 소문까지 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가내를 볼 때마다 야유를 퍼붓곤 했다.
 “어이 살찐 당나귀, 여기는 짐승 키우는 곳이 아닌데.”
 무가내는 자신의 실력이 사인방에 미치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꾹 참아 왔지만, 이제는 비웃음이 도를 넘고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더 이를 악물고 연공에 주력했다.
 마보공은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태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바위처럼 굳건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원묘공도 벌써 칠 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시진 걸리던 거리가 한 시진으로 단축된 상태였다. 와설공은 술 창고의 파리가 다 없어질 정도로 진척이 빨랐다. 번신공도 미숙하지만 어느 정도 동작은 흉내 내는 수준은 되었다.
 점점 자신감이 붙으면서 사인방에 대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함부로 덤빌 상대는 아니었다. 특히 사가량은 영약을 복용해 최소한 십오 년 정도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 ‘고수’였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무가내는 진표를 몰래 불러냈다. 진표는 무가내에게 사형, 사형 부르곤 있지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가내와 진표는 무가네 술 창고에서 만났다. 술장사 집안이다 보니 무가내는 사람이 술을 먹으면 얼마나 화통해지는지를 어릴 때부터 잘 터득하고 있었다.
 “진 사제!”
 다른 정식문파였다면 입관이 늦은 무가내가 사용할 수 없는 명칭이었지만, 사황풍의 문파를 열고야 말겠다는 열정 탓인지 사형제끼리는 무공서열 순으로 호칭을 정했다.
 진표는 생전 처음 먹는 술에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사제도 알다시피 내가 얼마나 사가량을 싫어하는가!”
 그것은 진표도 마찬가지였다.
 ‘백정의 자식. 백정의 자식.’
 그 말에 눈물을 흘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진표는 무가내를 쳐다보았다.
 “내 이번에 사가량의 버릇을 고쳐 주려는데 도움 좀 주라.”
 곰곰이 생각하던 진표도 잘됐다 싶었는지 그동안 파악해 둔 사가량의 장점과 단점, 순간적인 버릇 등에 대해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무가내는 진표의 치밀한 관찰력과 분석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표 놈이야말로 나중에 자신의 가장 무서운 적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정도였다.
 사가량과의 사건이 터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보공 자세를 취하고 있는 무가내 옆을 걸어가던 사가량이 놀려준다고 약간의 공력을 운용해 앞에서 밀었고, 결국 사인방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하하.”
 “깔깔깔.”
 무가내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희의 행패가 너무 심하구나.”
 사가량이 대꾸했다.
 “호! 그래서, 한번 싸워보자고?”
 “흥! 정녕 소원이라면 한번 해보죠.”
 바로 이때 사황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이놈들! 여기서 무엇들을 하는 것이냐.”
 이때다 싶어 사인방은 사황풍에게 정식으로 항의했다.
 “사부! 나는 저런 놈하고는 무공수련을 같이 할 수 없으니 알아서 하시오.”
 사부를 능멸하는 말투였다. 사황풍도 속으론 끓어올랐지만 그들이 소림관에 가져다주는 돈을 생각하면 강하게 대꾸할 수도 없었다. 사황풍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어허! 이보게들. 무공이란 각각 체질에 따라 연공을 해야 한다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무가내의 몸이 어디 정상인가? 헤헤, 좀 볼썽사나운 연공법이지만, 그래도 무가내에 딱 어울리는 무공 아닌가?”
 “흥, 사부! 저런 무공으로는 아무도 이길 수 없을 것이오.”
 사황풍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무가내가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벼르고 있던 터였다.
 “흥! 웃기는 소리 하지 마쇼.”
 사제로서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친 말이었고 도발이었다.
 그러자 사가량이 발끈하면서 무가내에게 소리쳤다.
 “네 이놈! 어디라고 끼어들어. 정말 네가 나하고 한번 해보자는 얘기냐.”
 무가내도 발끈해서 맞받아 쳤다.
 “흥! 어디 나를 이길 수나 있나.”
 “좋다. 어디 한번 해보자!”
 사황풍은 아무 소리 못하고 제자들이 하는 꼴만 옆에서 쳐다볼 뿐이었다.
 연무장으로 옮겨서 사가량과 무가내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관원들도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은연중에 두 패로 나뉘어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미진의 앙칼진 목소리도 들려왔다.
 “오빠! 그 뚱땡이를 묵사발 내버려.”
 무가내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음을 독하게 다잡아먹었다. 무가내는 여전히 자신의 치부에 대해 너그럽지 못했다. 한때 좋아하던 여자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무가내에게 이를 앙다물도록 만들었다.
 “시작.”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가량의 발이 무가내의 가슴을 향해 무섭게 날아왔다.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였다. 이 퇴법은 연환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일단 펼쳐지면 다섯에서 여섯 초식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사가량은 무가내 정도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가내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어쩌면 그렇게 진표가 얘기한 그대로 공격이 시작되고 초식이 이어지는지 감탄할 뿐이었다.
 퍽! 퍼퍽! 퍽!
 무가내는 미리 대비했던 대로 두 손을 교차시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대여섯 걸음을 물러났다.
 “으윽!”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해도 내력이 가미된 퇴법이 혈도 주위를 강타하자 하마터면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사가량도 일단 뒤로 빠르게 물러나더니 비웃듯이 무가내를 쳐다보았다.
 “야, 잘한다. 다시는 못 일어서게 패 버리라고.”
 사가량 패들이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 다른 편에서는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휴···`···.”
 무가내는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사가량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다가섰다. 무가내는 비무 때문에 철갑옷을 벗은 상태라 몸이 날아 갈 것 같았다.
 사가량은 무가내의 표정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감을 느꼈다. 자신의 퇴법에 당하고도 저렇게 자신만만하다니···`···. 사가량은 진표와 무가내의 이전 비무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무가내의 맷집은 보통 이상이었다.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혈도나 급소를 공격해야만 했다.
 막상 무가내와 마주서 보니 작은 곰이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살이 너무 많아 혈도가 어딘지 가늠하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눈대중으로 혈도라 생각되는 부위를 강타해도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듯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때 무가내의 예의 번신공이 발동되었다. 온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이 장 뒤부터 뛰어 오더니 반 장 앞에선 몸이 바닥으로 꺼지며 공격이 들어왔다. 사가량은 ‘흥’ 하는 비웃음과 함께 내력이 실린 나한십팔장으로 세 번 연속 가격했다.
 퍼퍼퍽!
 무가내의 몸을 세차게 때렸지만 마치 무른 솜을 치는 듯했다. 사가량은 깜짝 놀라 우측으로 비껴 나갔다. 무가내 역시 엄청난 충격에 뒤로 물러설 뻔했다.
 “윽!”
 내력이란 말만 들었는데 사가량의 크지도 않은 몸에서 뿜어 나오는 발경(發勁)은 상상을 넘어섰다. 자신의 선천적인 힘과 맷집이 없었다면 벌써 피를 토했을 것이다. 초보자에게 내력을 싣다니, 사가량의 악독한 마음 씀씀이에 분노가 치솟았다.
 사가량이 당황한 모습에 한쪽에서는 야유가 튀어 나왔다.
 “우우.”
 무가내의 몸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뛰어오르며 공격해 들어 갔다. 지레 겁을 먹은 사가량은 깜짝 놀라 뒤로 일 장이나 물러섰다. 무가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뒤를 계속 따라붙었다.
 사가량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보다 빠른 무가내의 동작이 무력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몸이 교차되는 순간 사가량의 엉덩이가 무가내의 엉덩이에 맞아 튕겨져 나갔다. 일견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사가량은 허리에 전해지는 충격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가내의 거대한 체구가 덮쳐오자 몸을 틀어 땅바닥을 뒹굴며 피했지만, 그의 양팔이 무가내 몸에 깔리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더 이상 팔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런 망신살이 없었다. 번신공이 보기 싫다고 야유했던 자신이 나려타곤 수법으로 무가내의 공격을 피했던 것이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 당나귀가 굴려 간다.”
 여기저기서 비웃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사가량은 허공으로 높이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는 힘을 더해 항마연환신퇴의 최후 초식을 연이어 시전했다.
 퍼퍼퍽!
 무가내는 몸을 움츠린 채 뒤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사가량의 발길질은 무가내를 뒤쫓으며 여기저기를 강타했지만 별다른 손상을 주지 못했다.
 사가량은 진짜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세 번의 공격에서 사가량은 무가내의 천부적인 힘 때문에 보통 공격으로는 도저히 허물어뜨릴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게다가 방금 눌렸던 자신의 팔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사가량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재빨리 사황풍을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사부! 이제 그만 하시지요. 괜히 더해 봤자 저놈만 죽어라 맞을 테니까요.”
 이 말을 들은 사황풍은 빙그레 웃었다. 얍삽한 머리의 소유자답게 사가량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알았다. 그만 두어라.”
 무가내는 어이가 없는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비무는 이제 끝났다. 정신을 차린 무가내는 씩씩대며 사부에게 대들었다.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끝내면 어떻게 해요.”
 퍽! 뭔 소리인가?
 뒤통수···`···.
 “야, 임마! 그만 하라면 그만 할 것이지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사황풍으로서는 돈 덩어리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씁쓰레한 표정의 사가량에게 다가가 은근히 팔을 잡더니 순식간에 뺐다가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탈골된 팔을 맞추는 순간 사가량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무가내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리라.
 비록 비무는 그렇게 끝났지만 무가내는 자신의 사대신공이 꽤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러나 이번 비무는 내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사가량과의 시합이었다. 그런데도 꽤 어려웠다. 아마 내력이 충분히 뒷받침되는 사람과 겨룬다면 중상을 입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대결이었다. 무가내가 또 하나 뼈저리게 느낀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날 대결 이후 무가내는 진표와 마사청 청마산 패거리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마사청과 청마산은 무가내보다 아홉 살이나 더 먹은 청년이었지만, 사가량을 통쾌하게 혼내주는 걸 보고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5
 
 꿀꺽! 꿀꺽!
 무가내가 제공하는 공짜 술은 이제 막 술맛을 알게 된 진표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무가내 술집의 창고는 거대한 열쇠로 채워져 있지만 무가내는 이 창고를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비밀스런 개구멍을 알고 있었다. 돈을 밝히는 할아버지와 사부 덕에 일찍부터 돈에 눈을 뜬 무가내는, 이 개구멍으로 몰래 술을 빼내 팔아먹거나 진표와 나눠 마시곤 했다. 물론 무 노인은 항상 숫자가 맞지 않는 술독으로 인해 골머리를 싸매곤 했지만 말이다.
 진표와 무가내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드러누웠다. 그런데 바로 이때 낯익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아닌가?
 “오빠, 오늘 아버지가 악가장의 악 총관을 만난다고 했죠?”
 사미진의 목소리였다. 무가내의 창고는 음식점과 붙어 있어 평소에도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응. 내가 부탁했다. 악가장이야말로 강서무림에서는 가장 유명한 무공세가 아니냐. 무공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고 아버님께 부탁했지. 소림관 같은 삼류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
 “하하하! 사형께서 이번에 너무 충격을 받으셨나 봅니다.”
 간사스런 목소리가 여인도였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게. 지금도 이가 갈려. 언젠가는 반드시 쓴맛을 보여줄 테야.”
 무가내는 그 이후로 다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사가량의 이를 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무가내 자신에게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사가량 저놈이라면 틀림없이 나를 해코지하려 들 텐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무가내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가내 주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씨 남매의 아버지와 천마표국(天馬標局)의 부국주, 그리고 알 수 없는 한 인물이었다.
 무가내는 사가량의 말이 떠올라 은밀하게 뒤를 쫓았다. 그들이 안내된 곳의 옆방에 마침 손님이 들지 않아 살짝 방에 들어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술을 먹는 소리와 함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앞으로 제 아들놈과 딸을 부탁합니다.”
 “하하하! 누구의 부탁인데 제가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 아들놈도 잘 부탁합니다. 저희도 이제는 표국으로 일가를 이룰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셔야죠. 그래야 저희 악가장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자, 악비 어른도 한잔 받으시지요.”
 본래 악비라는 인물은 악가장의 살림을 맡고 있는 총관이었다. 이 악가장은 처음에는 악가 일족으로만 이루어진 세가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부족한 재력을 채우기 위해 외부 제자들을 일부 받아들이고 있었다. 초기엔 자질이 중요했지만 최근에는 돈의 과다에 따라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었다.
 무가내도 악가장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무가내가 감히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쟁쟁한 위명의 실력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마침내 ‘황금 백 냥’이라는 말이 나오자, 무가내는 그만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꼴사나운 사씨 남매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욕지기가 튀어나오려고 했다.
 ‘지랄 났군.’
 사가량을 가까이서 본 무가내가 그의 야비한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무가내에게 복수를 하려고 날뛸 게 뻔했다.
 ‘에이구! 돈이 원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난생 처음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돈을 벌자. 그놈의 돈이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무엇을 해야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벌써 나와 있었다. 자기 두 귀로 똑똑히 듣지 않았는가?
 ‘음, 제대로 무공을 익혀 문파나 하나 만들자.’
 그러나 무가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먼저 문파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강호에서 어줍잖은 무공으로 설치다간 며칠 못 가 칼을 맞고 말 것이란 사실을···`···. 무가내의 나이에 이런 걸 안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무술관의 사인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악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황풍은 돈이 떨어져 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사흘 밤낮을 끙끙 앓아누웠다.
 그러나 무가내는 큰 뜻을 세운 바 있기에 더 한층 무공수련에 재미를 붙였다.
 
 소림관에 몸담은 지 벌써 이 년이 지나 무가내의 나이는 열네 살이 되었다. 무가내는 위로 청마산과 마사청 사형을 제외하고는 어느새 소림관 서열 삼위라는 자리에 도달해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파고든 덕에 사대신공은 이미 숙달될 대로 숙달된 상태였다. 수법(手法)이나 퇴법(腿法)에 힘을 실어 차면 한 치 정도 되는 어린나무는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다만 와설공은 아직도 기를 뿜어내는 데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표가 달려와 소리쳤다.
 “무 사형, 알고 있어요?”
 “무얼?"
 “삼 년에 한 번씩 소림사에 사부님이 인사드리는데 금년이 바로 그해라는 소리 못 들었어요?”
 “그래?”
 과연 얼마 있지 않아 사부는 관원들을 불러 모아 소림사로 갈 연수생을 모집했다. 연수라고 해봐야 사황풍으로서는 자신의 사부도 볼 겸해서 떠나는 유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무가내로서는 무공의 본산인 소림사 견학은 일생의 숙원과도 같았다.
 산동성 제남에서 숭산 소림사까지는 천리 길로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무씨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할아버지는 나이도 어린 사대독자가 외유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거친 산중생활을 경험한 부모들이 무 노인을 적극 설득함으로써 마침내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무가내의 거창한 강호 출도가 이루어졌다.
 
 
 
 #제 3 장 숭산 가는 길
 
 
 1
 
 무가내 나이 십사 세 되던 봄날.
 사황풍은 제자들 중 무가내와 진표, 그리고 나이 많은 사형제인 청마산, 마사청과 함께 장도에 올랐다.
 당금 이십삼 세의 청마산과 마사청은 사황풍의 직계제자로 꼽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무공실력이 특출 난 것은 아니지만 사부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청마산은 소림삼절수(少林三絶手)와 팔십일복마장법(八十一伏魔掌法)에, 마사청은 나한십팔수와 나한십팔장 등에 능통한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사황풍은 앞으로 이들이 소림관에서 사범을 맡아주길 원했지만, 소림관이 독자적인 무림문파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들이 그런 바람을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태산을 지나는 중이었다. 숭산까지의 여정 가운데 태산이 가장 험한 곳이었다. 본래 태산은 자칫 길을 잃으면 영영 나오지 못할 정도의 오지(奧地)였다. 절벽의 아래는 만 장이나 되는 듯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구름은 안개와 같이 밀려오고 물러나기를 거듭했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무성한 풀잎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곳 어림에서 자리를 잡고 노숙 준비를 했다. 무가내는 얼굴도 닦고 목욕도 할 겸해서 근처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이제 막 봄이 오는 길목이라 계곡의 물은 차가웠지만 무가내는 옷을 벗자마자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풍덩!
 한데 바로 이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놀란 무가내가 돌아 봤을 때 무언가 작고 희끄무레 한 것이 삼 장쯤 앞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막 어둠이 밀려오는 때라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누구냐?”
 무가내는 깜짝 놀라 소리쳐 물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들짐승이 아닌 벌거벗은 사람인 줄 알고서야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 이런 깊은 산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허나 이미 지나간 사실에 대해 머리를 굴려 봐야 답이 나오는 건 불가능했기에 느긋하게 물놀이를 즐겼다.
 
 다음날 일행이 행장을 꾸릴 때 무가내가 말했다.
 “사부님, 어제 제가 목욕을 하다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
 사황풍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음, 산중호걸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사황풍으로서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산적이라면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변변찮은 실력이지만, 그래도 소림사에서 사사받은 자신의 무공이 이런 궁벽한 곳의 산적에게 꺾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발목을 잡히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냥 산짐승이겠지.”
 마치 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일행이 산중턱을 돌아가는 순간 십여 명의 험상궂은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심상치가 않았다.
 사황풍이 앞으로 나섰다. 제자들을 보호하고 엄포를 주기 위해서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산중호걸 가운데 얼굴이 구레나룻 수염으로 덮여 있고 한쪽 뺨에 칼자국이 있어 험악해 보이는 놈이 커다란 도끼를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목숨이 아까우면 조용히 해. 그리고 좋은 말할 때 가진 것 다 내놔.”
 아마도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개벽신수 사황풍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산적 놈의 말이 끝나자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어 제치더니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네 이놈들!”
 모두들 사황풍의 사자후에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았다. 사황풍은 갑자기 손을 들더니 손바닥으로 곁에 있던 나무를 내리쳤다.
 퍽!
 사황풍이 내리친 곳이 움푹 꺼지며 까맣게 타들어간 것이 아닌가? 산적들 중 몇몇은 그것을 자세히 쳐다보더니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엇!”
 사황풍이 보인 이 솜씨가 상승(上乘)의 내공(內功)이며 현묘한 장법(掌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산적들은 냉큼 뺑소니를 쳤어야만 했다. 뒤쪽 산적들은 주춤했지만, 텁석부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이놈, 감히 나에게 반항하는 거냐?”
 다시 커다란 도끼를 빙빙 돌리며 거들먹거렸다. 산중에서 작업할 때 마주친 사람마다 벌벌 떨기만 해서 그런지, 텁석부리는 교만과 횡포함이 몸에 배인 것 같았다. 급기야 텁석부리는 노기충천하여 커다란 도끼를 사황풍에게 내질렀다. 도끼 휘두르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왔다.
 휘잉~.
 사황풍은 이를 간단히 피했지만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방금 보인 한 수면 산적들이 알아서 도망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천둥벌거숭이 산적은 여태까지 제대로 된 고수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물론 텁석부리의 무공도 막 배운 것은 아니었다. 도끼 휘두르는 것이 틀이 잡혀 있었고, 그 동작도 대단히 영민했다. 초식의 변화 역시 교묘했다. 일반 녹림도(綠林盜)치고는 그래도 꽤 한 가닥 하는 축(軸)에 드는 솜씨였다.
 이렇게 사황풍이 감탄하는 눈빛을 보내자 텁석부리는 그것이 자기를 겁내는 건 줄로 착각하고 더욱 콧대가 높아졌다.
 사황풍은 옆 나무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텁석부리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의기양양해서 다시 한번 커다란 도끼로 내리쳤다.
 사황풍을 단번에 쳐 죽일 듯 내리치는 그 도끼질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흉맹한 기세를 드러냈다.
 타닥!
 도끼와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나뭇가지가 도끼를 밀어냈다. 그제야 텁석부리는 약간 놀란 듯 움찔했지만 이내 더욱 흉포하게 덤벼들었다. 사황풍은 텁석부리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좌우로 피했다. 텁석부리는 부하들 앞에서 위세를 떨쳐 볼 생각으로 연달아 큰 소리를 지르며 사황풍에게 맹공을 가했다.
 “이얍!”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사황풍은 그런 텁석부리를 보더니 갑자기 히죽 웃었다.
 “그만 부족한 줄 알면 이만 물러서시게.”
 사황풍의 입에서 이죽거리는 말이 나오자 제자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제자들은 사황풍의 무공이 텁석부리를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텁석부리가 그토록 난리를 쳤어도 여태껏 사황풍의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했다. 산적들을 처음 만나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제자들은 그제야 큰 숨을 몰아쉬었다.
 제자들은 사황풍이 텁석부리를 혼찌검을 내주기 원했다. 마치 그 생각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사황풍은 텁석부리의 도끼를 가볍게 피하고서, 눈 깜짝 할 사이에 가슴으로 파고들더니 황룡출수(黃龍出水)라는 초식을 펼쳤다.
 퍽!
 사황풍은 손속에 사정을 둔 채로 일격을 가했다. 그 순간 텁석부리의 얼굴이 새까맣게 질렸다.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는 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윽!”
 만약 전력을 다 했다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텁석부리는 가슴이 콱 막히면서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시뻘건 핏덩이가 왈칵 쏟아질 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사황풍을 바라보는 텁석부리의 눈빛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입안에 가득 찬 피를 가까스로 삼킨 텁석부리는 맥 빠진 목소리로 몇 마디 뱉었다.
 “너의 무공은 절륜하구나. 나는···`···.”
 텁석부리는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산적들은 빨간 피를 연이어 토하는 텁석부리를 보자 중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는 공격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찌할 줄 몰랐다.
 사황풍의 신묘한 절기를 처음 보는지라 산적들은 물론, 다른 제자들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무가내의 놀라움은 특히나 남달랐다.
 ‘아까 나무가 꺼져 들어간 것 좀 봐. 저 노친네가 그래도 숨겨놓은 한 수가 있었군. 저런 손바닥으로 내 몸을 친다면 내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겠군! 세상에 저런 무술이 다 있었구나. 저 텁석부리를 제압한 한 수는 내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무공이네. 가만있어 봐라. 이럴 게 아니라 어떻게든 졸라서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무가내는 새삼스레 무공의 신비에 감탄을 했다.
 바로 이때 언덕 위로부터 장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림의 심의권(心意拳)을 응용한 것이로군.”
 이 소리에 제자들은 물론 사황풍도 깜짝 놀랐다. 자기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듯 가까이 접근할 사람이 산적 중에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또 하나, 심의권을 응용해서 나뭇가지로 검을 쓰듯 전개했는데도 그 원류를 알아낼 정도라면, 자기가 상대하기엔 벅찬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황풍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문사 차림에 청수한 모습의 사십대 정도 되는 사람이 섭선으로 부채질을 하며 서 있었다.
 그렇게 몸을 돌려 쳐다보는 순간 사황풍은 보이지 않는 기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 당신은 누구시요!”
 너무 놀라 사황풍은 말을 더듬었다. 그로서는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고수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람은 그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곁에는 특이하게도 열 두어 살 정도 되는 꼬마 계집아이가 서 있었다.
 꼬마의 생긴 모습은 참으로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예쁜 얼굴에 화가 났는지 입을 실룩대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얼굴과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 눈빛이 표독스러웠다. 그 여자 아이는 무가내를 보더니 다짜고짜 앙칼지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놈이에요! 내 알몸을 본 놈이 바로 저놈이에요. 저놈 눈깔을 파주세요.”
 도대체 어린꼬마의 입에서 저런 험한 말이 나온다는 것이 끔찍할 정도였다. 그 험한 말투에 놀란 무가내는 꼬마애가 자신을 가리키자, 깜짝 놀라 부릅뜬 눈으로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언제 너의 알몸을 보았단 말이냐?”
 만약 여기서 큰소리치지 않는다면 정말로 파렴치한으로 몰릴 판이었다. 그러자 그 여자애는 더욱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흥! 네놈이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내가 어제 저녁에 목욕하고 있는데 네 놈이 몰래 다가와서 보고 있었잖아.”
 그 말에 무가내는 어제 저녁 그 희끄무레한 인영이 바로 이 꼬마인 것을 알고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전적으로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 꼬마에게 묻듯이 따졌다.
 “꼬마 아가씨, 어제 저녁에 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싶어 본 것도 아니고, 또한 날이 그렇게 어두웠으니 그런 날에 어떻게 알몸을 볼 수 있지?”
 “흥.”
 삐익!
 기분 나쁜 바람소리와 함께 무가내의 뺨에서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가내는 어리둥절했다. 그 꼬마와 자기와의 거리가 못 잡아도 삼 장 정도 되는데 자신이 어떻게 뺨을 맞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또한 나이도 어린 여자 아이의 솜씨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 이년이.”
 비록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자기 실력으로 삼장이나 날아간다는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더욱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황풍이었다. 그 꼬마의 경신법을 보는 순간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그 신법이 펼쳐질 때 기분 나쁜 바람소리가 났다는 걸 기억해낸 사황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흑! 탈, 탈명신법(奪命身法)!”
 “호, 탈명신법을 알아보다니 무명은 아니군.”
 역시 늙으면 눈치만 는다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황풍은 얼른 두 손을 모아 포권지례를 했다.
 “후배 사황풍이 탈명검제 여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순간 그 자리에는 괴이한 침묵만이 흘렀다.
 
 
 
 2
 
 탈명검제(奪命劒帝) 여진청(呂振晴)!
 이 사람은 진실로 간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 실제 나이가 칠십 세로 무공의 경지가 반노환동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오십 년 전 그가 강호에 출도할 당시 그의 가문과 그의 풍모, 그리고 무공실력은 강호 여협(女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스승인 고죽노인(孤竹老人)은 무림오절(武林五絶)에 들어가는 기인이었으니 얼마나 안달이 났겠는가? 그리고 오 년마다 개최했던 종남 비무대회에 출전하여 수많은 강적들을 물리치고 우승까지 하니 그의 무명(武名)은 천하를 진동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탈명검제 여진청은 정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강호인들이 여의검제(如意劒帝)라고 부를 정도로 인자했던 사람이었다. 한참 명성을 날리던 당시 중원오미(中原五美) 중 하나인 표향선자(飄香仙姿)에게 반한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하자마자 무림에서 손을 씻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강호와 인연을 끊고 지내던 어느 해, 탈명검제의 자식과 며느리가 갑작스럽게 실종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섬서 지방의 변두리에서 자식과 며느리가 잔혹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런 충격을 견디지 못한 표향선자마저 주화입마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탈명검제의 분노에 찬 울음이 삼 일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사방 오 리 안의 모든 짐승들이 죽어버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때 탈명검제는 자식을 죽인 사람을 내놓지 않는다면 관련자들을 다 죽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사태가 그렇게 심각하게 돌아갈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림에서는 추적대를 구성하여 암중으로 흉수를 찾는데 전력을 다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갔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또다시 일 년이 지나가고 나서야 협서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비천방(飛天幇)의 소방주가 탈명검제 며느리의 자색을 탐내 일어난 일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날 비천방의 일백 식솔은 탈명검제의 손에 의해 한 명도 남김 없이 몰살을 당했다. 그 참혹한 모습에 시체를 치우던 사람이 손을 흔들며 진저리를 칠 정도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협서혈란(陜西血亂)이라 일컫는 살육사건이었다.
 이때부터 탈명전(奪命箭)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비천방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는 두 개의 탈명전이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비천방주와 소방주의 이마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렇게 강호에 새로운 살성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 이후 비천방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탈명검제를 찾아 복수를 하겠다고 쫓아다녔다. 그러나 탈명검제의 칼 씀씀이는 더욱 독해졌고, 그를 가로막는 상대는 누구든지 칼끝의 고혼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백색의 탈명전이 하나씩 남아 있었다. 무림에서는 일명 백색의 공포라 하여 탈명전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는 격언이 생길 정도로 두려움의 표징(表徵)이 되었다.
 여의검제에서 탈명검제라는 별호로 바뀌면서 그의 성격 또한 더욱 괴팍하게 변해갔다. 세상사를 본인만의 일방적인 잣대로 결정해버리는 정사 중간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런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단 하나 남은 혈육인 손녀딸에 대해서는 더 할 수 없이 관대해지는 마음이었다. 손녀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 여진청이 이 산적들과 함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손녀 때문이었다. 산적놀이를 하자는 어린 손녀의 억지를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무가내만 불쌍한 처지였다. 여진청의 손녀 여소진에게 얼떨결에 뺨을 얻어맞은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여소진과 무가내의 드잡이질은 굳이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무가내가 얻어터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무가내는 맷집으로 견딜 수 있었다. 나한십팔수와 사대신공을 결합시켜 피나는 수련을 거듭해온 초식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얍!”
 무가내의 공격이 빠르게 짓쳐 들어갔다. 탄사천구(彈射天狗)에 번신공을 섞은 것으로 자기 딴에는 가장 쾌속한 초식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여소진은 얄미울 정도로 살짝 피하면서 뒤통수를 때렸다.
 “억!”
 뒤통수를 수시로 맞아온 무가내로서도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강한 충격이었다. 여소진의 내공이 가미된 타격이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만약 여소진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가내는 염라대왕과 면담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가내가 지금까지 수련해온 사대신공이나 무적의 맷집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퍽!
 또다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고 말았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그래도 사내라고 체면에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있었다.
 “이얍!”
 백사토신(白蛇吐信)으로 오랜만에 공격에 나섰지만, 어느새 여소진은 무가내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가장 아픈 부위인 옆구리만을 골라 때린 뒤 얄미울 정도로 빠르게 빠져 나갔다.
 여소진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한 폭의 그림이었다. ‘휘익’ 차올라가더니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고, 어느 틈엔가 무가내의 뒤에 나타나더니 어김없이 시원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스윽! 팟! 퍽!
 무가내는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동안 여소진의 다음 동작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대비해 손을 쓰기도 전에 얻어터졌다. 무가내의 거친 숨소리와 얻어맞는 소리만이 조용한 산야를 울릴 뿐이었다.
 퍽! 퍽!
 “윽, 헉!”
 비록 타고난 신력과 맷집으로 겨우겨우 견디고는 있었지만, 벌써 얼굴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온몸의 뼈가 모두 어긋난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아무리 무가내가 남자고 다른 아이들보다 힘이 장사라고 하지만 무림의 십대고수 안에 드는 탈명검제의 진전을 이어 받은 여소진을 당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여소진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여진청에게 무공을 배워 나이는 어리지만, 벌써 반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쌓고 있었다. 즉 밤이라도 사물을 환하게 볼 수 있는 경지에 있었다.
 그러나 무가내는 주로 체력단련 위주의 외공을 중심으로 수련을 쌓았기 때문에 저녁을 낮처럼 볼 수는 없었다. 당연히 여소진의 알몸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소진은 남들도 다 자기와 같은 줄 오해하고 있었다.
 알몸이나 제대로 보기나 했으면 원망도 덜하련만 본 것도 없이 얻어터지기만 하니 이보다 더 분통터질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오기는 살아 있어 단 한 번이라도 명중시키겠다며 끊임없이 허점을 찾기 시작했다.
 청마산과 마사청도 처음에는 무가내를 도와주려 했지만, 사황풍의 탈명신법이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지방에 틀어박힌 별 볼일 없는 존재라 해도 강호의 소문이 그냥 지나갈 리는 만무했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니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탈명검제라는 말에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진표도 여소진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무가내와 자신이 합공(合攻)을 해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무가내를 두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던지라 남몰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한순간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한 진표가 기합과 함께 일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가면서 십팔나한공 중 좌우삽화(左右揷花)를 시전했다.
 “받아라!”
 가벼운 바람과 갑작스럽게 들리는 고함소리에 여소진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여소진은 간단히 몸을 들어올려 피했다.
 “흥! 사내놈들이 비겁하게 여자에게 합공이나 하고 웃겨.”
 그 말을 듣는 무가내와 진표의 얼굴이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었다. 진표의 몸놀림은 상당히 날랬지만, 여소진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벼운 경풍이 여소진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휘익! 펑!
 진표는 가슴을 얻어맞고 일 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의외로 강한 공격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에 독기를 품고 일어나더니 여소진에게 돌진했다. 또 다시 진표의 몸이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퍽!
 “으악!”
 한쪽에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여진청은 진표의 날랜 동작과 그의 끈질긴 근성에 흥미가 있는 눈치였다.
 보다 못한 사황풍이 재빨리 무가내와 진표를 가로막고 꼬마 아가씨를 달래지 않았다면, 오늘 두 구의 시체를 치우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여소진은 여전히 씩씩댔다.
 “네 이놈 어서 나한테 안 빌 거야!”
 무가내는 얻어터질 건 다 얻어터진 상황에서, 빌기까지 하라니 미칠 지경이었다. 진표도 한쪽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씩씩댔다. 그래도 무가내의 입만은 살아 있었다.
 “네 이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재빨리 사황풍이 입을 다물라는 눈치를 주었다.
 무가내는 볼멘소리로 소리쳤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눈치 없이 무가내가 물어보자 할 수 없이 사황풍이 말했다.
 “여 선배님 체면을 봐서 이제 그만 해라.”
 ‘씨, 그만하라니. 얻어맞을 건 다 맞았는데.’
 사정을 모르는 무가내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부를 보았다.
 탈명검제의 성질이 아무리 괴팍하다 하나 자기 손녀와 내공도 없는 무가내의 싸움을 보고 어제 저녁의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략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손녀의 위신도 세워줘야 했고, 자기 체면에 무가내 같은 어린애와 다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무가내에게 여유를 줄 요량으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네 이놈! 내 손녀에게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무가내도 사태가 이쯤 되자 사부가 이 노인네에게 꼼짝 못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죽도록 얻어맞은 것만 해도 분하고 원통한 일인데, 이제 혼자서 덤터기까지 써야 한다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어씨,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는데···`···. 사부는 창피하지도 않나? 아무 소리 못하고 말이야.’
 그러나 강호의 세계가 어디 한두 마디 말로만 끝나는 곳인가? 힘이 있어야 말이 통하는 세상이었다.
 사황풍에게 여진청의 말은 마른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가내야, 그 목걸이라도 벗어서 꼬마 아가씨에게 주거라.”
 사황풍은 목걸이를 넘기라고 계속 눈짓을 했다. 지금 상황은 폭풍 앞에 선 촛불과 같은 형국이었다. 제자들 앞에서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체면과 목숨을 바꿀 순 없었다. 지금까지 이 험난한 강호에서 사황풍을 살아남게 한 금과옥조와도 같은 원칙이었다. 분위기가 조금만 틀어져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무가내의 눈치도 그 못지않은지라 사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투덜투덜 거리며 목걸이를 벗어 넘겨주었다.
 이 목걸이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금에 봉황(鳳凰)을 정교하게 조각한 것인데, 어머니로부터 열 번째 생일날에 선물 받은 이후 애지중지하던 것이었다.
 여소진은 그것을 냉큼 받더니 자기 목에 걸었다.
 “자, 받아.”
 조금은 미안 했는지 혀를 쏙 내밀면서 금빛 탈명전 하나를 주었다.
 ‘흥, 못된 년. 언제고 한번 두고 보자. 꼭 혼내 줄 테다.’
 무가내는 겉으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아 속으로만 욕을 해댔다. 그러다 사황풍의 눈이 탐욕(貪慾)으로 번들거리는 걸 보았다. 바로 이 탈명전은 탈명검제에게 부탁 하나를 할 수 있는 신표였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입장에서 사황풍이 욕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무가내의 눈치나 욕심도 만만치 않았다. 사황풍을 바라보면서 이 탈명전이 의외로 대단한 물건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누구에게 뺏기면 큰일이라는 듯 탈명전을 급히 품속에 챙겼다. 무가내의 마음은 탈명전을 얻어 한결 편해졌지만, 오늘처럼 당하고 살지 않으려면 자신의 무공을 빨리 높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한편 여진청은 손녀가 탈명전을 건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으나 이내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여소진도 무가내를 실컷 때리다 보니 어느덧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졌고 비록 몸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뚱뚱했지만 무가내의 어수룩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3
 
 “잠깐 나 좀 보세.”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종료되어 길을 떠나려는 순간, 사황풍은 여진청의 말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또 무슨 일인가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명검제는 사황풍의 그런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표를 가리켰다.
 “저놈을 나한테 주고 가게.”
 이 말을 듣고 사황풍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진청이 자식을 잃은 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났다. 지난날에 벌인 지나친 복수극에 대해 후회하는 감정도 들고, 자신도 이미 늙었다는 회한(悔恨)의 감정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면서, 적당한 후계자에게 자신의 무공을 잇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소진은 여자의 몸이라 자신의 진전을 이어받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진표의 자질이 특출 나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몸도 민첩하고 끈기와 오기가 있어 자신의 무공을 익히는데 적합한 체질이었다. 끈기와 오기라면 진표보다 무가내가 한수 위겠지만, 탈명검법을 익히기에는 몸이 너무 뚱뚱했다. 진표로서는 생각지도 않던 엄청난 복이 굴러들어 온 격이었다.
 사황풍은 이 말을 듣자 냉큼 진표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표야, 인사드려라.”
 진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구배(九拜)를 올렸다.
 “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진표도 분위기를 보면서 여진청이 사부 정도는 범접할 엄두도 못 내는 절대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중대한 기회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진표는 그동안 사황풍에게 좀더 사사(師事)를 받아도 부모님이 원하는 만큼의 뛰어난 고수, 유명한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또한 자신보다 뒤늦게 입문한 무가내가 자신을 앞서가는 걸 보면서, 영원히 그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 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런 고민과 괴로움을 단번에 털어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연이 자신을 찾아 온 것이다.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유명한 고수가 되어 부모님과 무가내 앞에 다시 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그렇다고 무가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뚱뚱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이지만,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우직함과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이후 둘이 만나게 된다면 아마 또 한 번의 비무가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가 되겠지만, 어쨌든 그때는 결코 지고 싶지 않았다.
 진표는 무가내와 사부, 그리고 사형들과 이별을 나누었다.
 “사부님, 백정의 자식인 저를 누구보다 아껴주신 걸 잘 압니다. 이렇게 떠나지만 사부님은 언제나 저의 사부님입니다.”
 사황풍은 재질이 뛰어난 진표를 남의 품으로 보내는 게 더할 수 없이 쓰라렸지만, 그래도 진표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주었다.
 진표는 특히나 무가내의 손을 오랫동안 꽉 잡고 놓지를 않았다. 무가내에겐 그것이 마치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며 시비를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만나면 그땐 누가 사형이 될지를 다시 겨뤄보죠. 사형! 아마 사형이라고 부르는 게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밉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진표에게 무가내는 겉으로나마 대범한 척 축하를 해주었다. 진표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짓궂게 변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으이씨! 내가 진표보다 한 수 위인데···`···.’
 은근히 샘도 나고 앞날을 생각하니 겁도 났다. 진표가 고수가 되어 ‘무 사제’라고 부르는 일만은 없도록 죽으나 사나 연공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먹어 보았지만, 어쩐지 자신이 손해 보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순 없었다.
 무가내의 이런 묘한 표정을 읽은 탈명검제는 살며시 웃으며 무가내를 숲 안쪽으로 데리고 가서는 호신검법(護身劒法)이란 한 가지 검법을 전수하고 따로 책자까지 하나 건넸다.
 이것은 여진청의 성격으로 보아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무가내를 여소진의 친구로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명검제가 건넨 책자의 표지에는 날아갈 듯한 필체로 무의신공(無意神功)이라 적혀 있었다. 그는 무가내가 아직 제대로 된 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오래전 우연한 기회에 얻었지만 사문의 무공과는 맞지 않은 일종의 양생검법(養生劒法)이자 내공심법인 무의신공을 전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검법이 존재하느니라. 싸움을 위해 검기를 발산하는 실전검법(實戰劒法)과 도에 이르기 위해 검무로 자신을 수련하는 양생검법(養生劒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무의신공을 무시하지 말거라. 나의 사문의 무공과 맞지 않아 너에게 전해주지만, 만약 내가 사문의 독특한 내공을 먼저 익히지 않았다면 이것을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신공이니라.”
 무가내는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무의신공이란 신체의 기를 키우고 내공발전의 터를 잡아나가기 위한 독특한 검법으로, 검법으로서의 위력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수련과정을 통해 무의신공을 대성한다면 다른 어떤 내공심법도 따라올 수 없는 신공이라는 게 여진청의 설명이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기초적인 운기토납법이 필요했고 수많은 깨달음의 벽을 넘어야 했으므로, 무가내에겐 요원한 일이기도 했다.
 
 일행은 진표와 헤어져 태산을 넘어 제우(濟宇)에 도착했다.
 길을 가면서 무가내는 사부에게 치근대며 이것저것 무림에 관한 일들을 물었다. 제자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고, 가장 기대하던 제자까지 남에게 빼앗긴 사부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적들 앞에서 펼쳤던 나무를 움푹 패게 했던 무공에 대해 물었다.
 “사부님, 그런 기술을 무어라고 합니까?”
 사황풍은 무가내를 바라보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산에서 있었던 일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짐짓 유쾌한 듯 말을 했다.
 “내공이라 하는 것이다.”
 “아! 내공이요?”
 무가내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내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전에는 자신의 타고난 힘 때문에 크게 필요를 느끼지 않았는데, 여소진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뒤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또 내공을 익히는 무의신공을 얻지 않았는가?
 “사부님, 저에게도 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사황풍은 어린 제자를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무가내에게 내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쯔쯔쯔. 야, 이놈아! 본시 내공이라 함은 기운을 일으키는 운기토납법으로 시작해서 내공을 쌓아가는 심법으로 넘어가는 법이다.”
 한두 마디 말로 그 오의(奧義)를 다 전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황풍은 소림사에서 처음 입산하면 배우는 소림나한공(少林羅漢功)의 구결을 가르쳐 주며 아침과 저녁 한 시진씩 익히도록 일렀다. 소림나한공은 소주천의 세세한 세맥(細脈)은 건너뛰고 커다란 틀만 움직여나가는 대주천 중심의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이었다.
 난생 처음 운기토납법을 배우는 무가내였지만 마치 지금 당장 내공고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둔중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눈치 하나는 사황풍을 뺨치는 무가내답게, 소림나한공을 기초로 운기토납법을 시행하고 다음단계로 무의신공을 수련한다면 적지 않은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본디 내공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영약 등 속성법에 의존한 일 갑자 내공은 수련을 통해 축적된 일 갑자 내공과는 순도와 위력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이 진정한 내공을 일 갑자까지 쌓으려면 어렸을 때부터 준비해도 평생을 걸려서 이룰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의신공에 대한 여진청의 언급은 무가내를 들뜨게 만들었다.
 “이 신공은 그 요체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네가 사심 없이 꾸준히 정진하여 진정한 오의(奧義)를 깨닫는다면, 내공 축적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소림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 너의 큰 복연이다. 무의신공 또한 뿌리가 불가(佛家)에 있기에 소림의 내공심법과 병행한다면 그 효과가 훨씬 더 클 것이다.”
 
 
 4
 
 제우의 번화가에 들어섰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층으로 된 주루와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비록 시끌벅적 소란스럽긴 해도 사람 사는 듯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일행은 오내주루(俉內酒樓)라는 고급 객잔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었다.
 밤이 깊어 갔지만 무가내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설렘과 오늘 겪었던 놀라운 경험 탓이었다. 객잔 후원으로 나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문득 여진청이 시범을 보인 두 가지 검법이 생각났다. 지금도 세상에 이런 검법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처음 배운 검법은 검법이라기보다 내공심법인 무의신공이었다. 두 번째는 이름이 호신검법(護身劒法)인데 여진청의 말로는 몸을 지키는데 유용한 검법이라 했다. 특히나 마지막으로 펼친 호신검법을 보는 순간 무가내는 얼이 빠질 정도였다.
 여진청은 호신검법을 처음에는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시전했다. 이때는 검로가 단순하고 평이하게 보여서 따라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수준을 감안해 검법의 가장 기초부터 일러주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떠냐!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무가내는 그 신묘(神妙)함에 빠져 있다가 여진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간신히 그 길을 흉내 낼 수 있겠습니다.”
 여진청의 얼굴에 약간은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검법이 보기와는 달리 익히기 까다로운 편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 보고 그 길을 따라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뛰어난 오성(悟性)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래, 그럼 한번 해 보거라.”
 호신검법은 모두 세 초식이었다. 볼 때는 쉬울 것 같았지만 막상 따라해 보니 간단치가 않았다. 무가내가 볼 수 있었던 변초(變招)까지 합해서 중간 중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실연할 수 있었던 건, 열 번 넘게 지적을 당하며 반복해서 연습한 다음의 일이었다.
 호신검법은 한마디로 무가내처럼 내공이 없거나 부족한 무인들을 위한 검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여진청의 설명대로라면 내공이 없어도 호신검법을 펼치면 웬만한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틈을 노려 반격까지도 할 수 있었다.
 검법에서 가장 기초적인 찌르기, 베기, 내려치기 등으로 이루어진 검로(劒路)는 그 절묘한 조화로 인해 허와 실이 적당히 감추어져 있었다. 몇 번을 연습하는 동안 무가내는 그 교묘한 초식의 연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음, 그래 제법 볼 만하구나.”
 여진청은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았는지 다시 한번 검무(劒舞)를 추기 시작했다. 무가내는 여진청이 추고 있는 검무가 호신검법이 아닌 다른 검법인 줄 착각했다가 똑같은 호신검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처음에 내력을 운용하지 않았을 때와 내력을 운용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게다가 처음에 보이지 않던 또 다른 변초들로 인해 완전히 다른 검법을 보는 것 같았다.
 검명(劒鳴)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해서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웅~웅.
 잠시 시간이 지나자 검에서 바람이 일고 무가내의 옷자락이 거세게 펄럭였다.
 휘잉! 파라라락!
 멍하니 검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검이 조금 커진 것 같은 느낌에 검을 쳐다보았다. 검 주위를 한 치 정도 되는 흰색의 뿌연 기(氣)가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검에서 작은 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며 모여 들었다. 그것은 다시 일정한 틀을 이루고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명(劒鳴), 검풍(劒風), 검기(劒氣), 검화(劒花), 검환(劒環)이라는 무공의 초절정 단계에 나타나는 검의 기운들이었다. 그 최후의 단계는 검강(劒剛)으로 무림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심즉검(心卽劒), 즉 주위의 모든 사물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였다. 검환의 경지만 되더라도 어지간한 쇠를 무 자르듯이 할 수 있다는 전설의 경지였다.
 여진청은 다시 한번 호신검법을 시전했다.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시전 속도가 빨라졌다. 이번에는 변초는 거의 없이 본 삼식만을 하나의 초식처럼 펼쳤다. 무가내는 검에 혼이라도 빼앗긴 듯 그 검 끝에 몰입된 상태였다. 평생을 주유하며 검으로 살아온 노강호일지라도 경험하기 어려운 귀중한 기회였다. 검에서 연한 붉은색이 펼쳐지고 하나의 점이 되어 자신의 어딘가를 노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때 다시 한번 검 끝이 힘차게 진동했다.
 윙~~~윙!
 그것은 아주 미세한 소리였으나, 마주하는 상대에게는 마음의 평정을 깨트리는 소리였다. 주위를 감싸고 도는 맹렬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검 끝에서 퍼져 나온 세 줄기 검기가 자신을 노리더니 다시 아홉 줄기의 환, 순식간에 여든 한 줄기의 붉은 환이 되어 밤하늘의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대낮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별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살인적인 아름다움이 무가내의 사고를 전부 잠식해버린 듯 머릿속이 텅 비었다.
 무가내는 자신이 평생 무공을 연마해도 과연 이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무가내의 상상을 자극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의 기를 완전하게 꺾어버리는 거의 예술의 경지였다.
 탈명검제는 십성(十成)에 다다른 호신검법을 검환(劒環)과 함께 마음껏 펼쳐 보인 것이었다. 만약 십이성의 경지에서 펼쳐졌다면 붉은 기운은 애초에 있지도 않을 것이며, 상대는 어떤 형태의 색깔도 소리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갑자기 떨어지는 유성우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신검법은 범인이 평생을 바쳐서 연구한다면 그 검자락의 끝이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를 대단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무가내가 누구인가? 고집과 근성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자기 딴에는 악착같이 그것을 보려고 상상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있을 때, 갑자기 사황풍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에 들어와 있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안타까웠다. 과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애써 다시 떠올리려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황풍도 이것이 어린 제자에게 평생에 단 한 번 올까 말까한 소중한 기회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한정 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심마(心魔)에 빠질 수도 있었고, 여진청이 가르쳐 준 게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서운해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은근히 물었다.
 “그래, 무엇을 가르쳐 주든···`···.”
 사부의 속내를 눈치 챈 무가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르치긴 뭘 가르쳐 줘요.”
 “한 번 해봐라.”
 “싫어요.”
 “야, 이놈아! 너 좋은 말로 할 때 배운 거 안 토해 낼래.”
 퍽! 그리고 뒤통수···`···.
 ‘이건 사부가 아니라 웬수구먼. 자기 거라도 좀 잘 가르쳐 주든지, 치사하게 제자의 것을 빼앗아 배우려고 하니···`···.’
 하지만 무가내는 사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뛰어나지 못한 자의 비애···`···. 가슴 한구석이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물들었다. 무가내는 겉으로는 투덜투덜 대며, 어설프게나마 실연(實演)했다.
 호신검법의 본 검식에 변초(變秒)까지 다 집어넣은 것이니 아무리 눈칫밥이 발달한 사황풍이라 해도 그것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가내의 무공수위로 그것을 제대로 시현(示現)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두 사형도 이것을 보고 겉으로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사황풍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자 괜히 신경질을 냈다.
 “야! 다시 한번 해봐.”
 무가내는 그래도 모른 척하며 두 번에 걸쳐 시범을 보였다. 그런데 시범을 보일 때마다 자신이 펼치는 검식이 계속 달라졌다. 검식을 반복할수록 무언지 모를 함정에 빠져 드는 기분이었다.
 반복할 때마다 무공의 틀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무가내의 무공이 원체 낮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공이 주입된 호신검법은 개별적인 초식이 아니라, 일관된 검법의 흐름이 아닐까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호신검법의 초식을 응용하면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초식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모든 것이 만류귀종(萬流歸宗)었고 만법귀일(萬法歸一)이었다. 즉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하는 법이다. 무가내가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간다면 언젠가는 여진청이 살짝 보여준 그 끝과 만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가내처럼 어린 나이에 이런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가내가 생김새와는 달리 오성이 뛰어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여진청의 전심을 다한 시범이 무가내의 심신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세적인 호신검법을 어쩌다 만난 자신에게 선뜻 전수해준 여진청에게 새삼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호신검법의 진수를 터득해 그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깨달음이 필요하고, 내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내공이 뒷받침 되지 않아도 매일같이 꾸준히 연습한다면, 실전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란 사실 또한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세 번을 실연하고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무가내의 머리에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 늙은이가 그래도 나를 꽤나 생각해 주는구나.’
 그랬다. 반복연습(反復練習)이었다. 사황풍은 반복 연습을 통해 무가내가 오늘 얻었던 심득을 최대한 몸에 익혀 잊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제자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지만, 남의 절기를 훔쳐본다는 자괴감 때문에라도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자기 것도 좀 챙기겠지만 말이다.
 무가내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사부나 제자 모두 그렇고 그런 처지지만, 강호의 뼈대 있는 문파를 만들겠다는 사부의 소원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 수 있었고, 자신이 꼭 이루어주고 싶었다.
 이때 생각에 잠긴 무가내의 뒤통수가 번쩍 하더니 사황풍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가자.”
 날이 어두웠다. 어둠의 그늘에 비치는 사황풍의 뒷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자신의 제자를 다른 사람의 제자로 보내고···`···. 게다가 남은 제자마저 다른 사람의 절기를 신나게 펼치고 있으니···`···.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제 4 장 인연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준다
 
 
 1
 
 일행은 어느덧 정주(鄭州)에 닿았다. 소림사와 하루거리에 접어든 셈이다.
 사황풍에게 소림사로 가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 씁쓸했다. 무가내는 가라앉은 사부의 기분을 풀어주려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떨었다.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말로 무가내는 물어보았다.
 “사부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까?”
 사부는 무가내를 의아한 빛으로 쳐다보았다.
 “음,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이라···`···.”
 사황풍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퍽! 역시나 뒤통수···`···.
 그리고 터져 나오는 호통소리.
 “야, 이놈아! 내가 그것을 알면 지금껏 시골에서 무술관을 하고 있겠냐? 벌써 사해팔황에 내 이름을 남겼을 테고, 너 같은 놈은 나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윽, 맞긴 맞는 말인데 내 뒤통수는 왜 때리냐고.’
 이런 투덜거림과는 상관없이 진시(辰時)경이 되자 일행은 숭산의 소림사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웅장한 건축물과 은연 중에 흘러나오는 위엄이 사황풍의 제자들을 위축시켰지만, 무가내만은 그저 희희낙락이었다. 사황풍이 자신의 사부이자 소림사의 원로 장로인 무진 대사(無盡大師)에게 인사를 올리러 간 사이, 무가내는 사형들과 여기저기를 구경하다 연무장에 들렸다.
 무승들의 소림오권 수련이 한창이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절도가 있고 위맹하면서도 여유로움이 넘치는 모습이 무가내가 소림관에서 배우던 것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무가내가 청마산에게 이전에 보았던 탈명검제의 무공과 소림사 무공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차이···`···. 옜다! 이거다.”
 꽝!
 청마산도 사부의 수제자답게 역시 뒤통수를 쥐어박았다. 그런 걸 알 정도라면 이미 소림관을 떠나 일가를 이루고도 남았으리라. 무가내는 아무래도 뒤통수에 고슴도치를 키워야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연무장과 맞닿아 있는 소림사 본전 내부의 석주(石柱)를 구경하던 무가내의 눈에, 소림사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의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그 순간 무가내의 머리와 등줄기로 짜릿한 전율과도 같은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 왜 이런 느낌이 들지···`···.’
 그 소년은 십오 세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로 오관이 단정했고, 매일 미친 듯한 연공 덕에 까맣게 탄 무가내의 얼굴과는 달리 희고 깨끗했다. 천상의 선동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할 정도로 잘생긴 탓에 사이함까지 느껴졌다.
 그 옆의 소녀는 비슷한 나이였는데 소년과 서로 바뀌었으면 할 정도로 야무진 모습이었다. 단정하면서도 남자처럼 잘생겼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들 뒤에는 두 명의 검객이 호위하듯 뒤따르고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 군(君)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당금 무림에서 이런 표식은 단 한 곳, 군왕성(君王城) 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이들 두 사람은 군왕성 총 일백팔 인의 정천호위대(正天護衛隊) 일원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강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이들 개개인이 강호에 나서는 것만으로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 명성과 신분이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이런 그들이 호위를 할 정도라면 소년과 소녀는 강호인이 감히 마주 대하기 어려운 높은 신분을 갖고 있음이틀림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무가내는 문득 이 소년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잘생긴 모습이 부러워서였을 수도 있고, 사귀어서 손해 볼 게 없을 것 같다는 특유의 잔머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천천히 남자애를 향해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호위들의 몸이 약간 경직되더니, 이내 무가내가 아직 어린애라는 사실에 자연스럽게 경계동작을 풀었다. 그러나 무가내는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무가내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나는 무가내야.”
 언뜻 희미한 미소가 소년의 얼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만한 듯도 하고 약간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한 것 같았다.
 “나는 백리강(百里剛)이라 해.”
 “음, 참 좋은 이름인데.”
 무가내는 백리강이란 이 이름이 강호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아직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백리강! 천하를 양분하고 있는 군왕성(君王城)의 소성주인 옥기린(玉麒麟) 백리강 외에 이런 이름을 쓰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시골 무술관에서 연공에 미쳐 있는 무가내가 이런 무림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무가내는 백리강을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소녀는 수줍은 듯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헌원지(軒轅智)야.”
 놀라운 이름들이 계속 나왔다. 군왕성의 군사인 만사통(萬事通) 헌원일격(軒轅一擊)의 무남독녀이자 뛰어난 재지로 촉망받는 소녀였다.
 백리강은 무가내를 보면서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도대체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니?”
 “응, 돼지보다는 덜 나가.”
 무가내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백리강과 헌원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깔깔, 까르륵.”
 무가내는 예전에 비해 자신의 몸매에 대해 너그러워진 편이었다. ‘뚱보’나 ‘뚱땡이’란 말을 들어도 그러려니 하고 그리 불쾌해 하진 않았다. 물론 살을 빼는 걸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집념은 연공을 거듭하면서 더 강해졌다. 하지만 남들이 그런 말을 할 때 무가내 쪽에서 웃으며 그렇다고 인정하고 들어가면, 오히려 다음부터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가내의 속은 멍울이 깊어질망정···`···.
 백리강과 헌원지는 이렇게 유쾌하게 웃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처럼 서로 한바탕 웃고 나니, 같은 또래인 그들은 잠깐 사이에 금방 친숙해졌다.
 백리강이 소림사에 들르게 된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 군왕성에서 백리강이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검륜왕(劒輪王) 백리산(百里山)은 군왕성의 장로들에게 벌모세수(伐毛洗髓)를 부탁했다.
 보통 벌모세수는 세 명 이상의 고수들이 탈태환골을 시키기 위해 진기를 불어넣는 방법으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또 성공적으로 시행되었더라도 반년은 운기조식을 해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백리산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무공에 대한 욕심으로 장로들에게 은근한 압력을 넣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백리산은 세상의 진귀한 영약들은 모조리 수집해 백리강에게 먹였다. 이런 엄청난 배려 끝에 백리강은 일 갑자를 상회하는 내력이 몸에 주입된 무동(武童)이 되었다.
 군왕성 백리가문에는 창천일검(蒼天日劒)이라는 구 단계를 거쳐야 완성되는 양강의 검법이 있었는데, 구 단계에 이르면 하늘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최강의 검법 중 하나였다. 백리산은 지금 칠 단계까지 완성했으나 더 이상의 진보가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칠 단계의 창천일검만으로도 무림에 적수를 찾기 어려웠으니 그 위력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백리산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이 완성해 주길 바라며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동원했던 것이다.
 백리강의 하루 일과는 무술로 시작해서 무술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다져진 근골에 재질마저 탁월해서 백리강은 이미 창천일검을 오 단계까지 연성한 상태였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믿기 어려운 성취였다. 그런데 어느 선에 이르자 더 이상 진보를 이룰 수 없어,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과 무공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소림사로선 외부인에게 비전의 대환단을 내준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현 군왕성주의 아버지인 무림일성(武林一聖) 백리장천(百里長天)이 소림사에 큰 은혜를 베푼 적이 있어 매정하게 뿌리 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현재 소림사 장로들과 장문인이 모여 이 문제로 숙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2
 
 땡그랑!
 처마 밑에 달려 있는 풍경(風磬)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가내는 백리강과 헌원지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 둘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무가내가 보기에 백리강은 살아 있는 무예의 보고와 다름없었다. 각파의 무공서적이 망라되다시피 한 군왕성의 무서각(武書閣)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백리강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무림인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꼭 자신의 가전무공이나 소속 문파의 무공만으로 발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공은 생명체와도 같이 끊임없이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 발전된다. 그러나 자신이 취하고 있는 무공의 기본적인 원류(原流)인 내공의 배합 또는 강약은 달라질 수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다른 무공의 참모를 통해 자신이 처음 배운 무공을 더욱 개발하고 단점을 보완하며 발전 시키는 것이다.
 무가내는 백리강에게 물었다.
 “소림오권은 어떤 무술이지?”
 백리강은 빙긋이 웃고 나서 대답했다.
 “소림오권(少林五拳)은 인체의 정(精), 력(力), 기(氣), 골(骨), 신(神)을 단련하는 것이지. 그 다섯 가지 중 하나인 용권연신(龍拳練神)이란 근육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단전의 기를 끌어서 수련하며 수심(手心), 각심(脚心)과 중심(中心)의 오심상인(五心相印)이 되어 신룡과 같이 움직이지. 호권연골(虎拳練骨)은 팔을 튼튼하게 하고 허리를 견고하게 하며 겨드랑이의 힘을 증대시키지. 또한 표권연력(豹拳練力)이란 힘을 키우는 것이 목적으로서 자세를 낮추고 허리와 쌍권에 힘을 이끌어 전신에 힘이 넘치게 하며, 사권연기(蛇拳練氣)는 기를 양성하며 팔과 허리를 유연하게 하여 기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만들어 준단다. 마지막으로 학권연정(鶴拳練精)은 정을 축적하는 수련으로서 신, 기가 합하여 정을 증강시켜 주지. 그리고 이 모든 권법을 완성시킨 사람은 달마대사로 알려져 있고 소림사에서 수양을 하고 있는 스님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만든 권법이라는 말이 있단다.”
 무가내로선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이었다. 사부가 제대로 알고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무학상의 비결이 술술 나오고 있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무가내는 몸으로 구르면서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높여왔지, 이처럼 수준 높은 무학강의는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 혹시 살을 빼는 무공은 없어?”
 백리강은 무가내의 비대한 몸을 쳐다보며 약간은 당황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런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어쨌든 무가내는 백리강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기가 죽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후! 나이는 나랑 비슷한데 무공 조예와 식견은 상상을 뛰어 넘는구나. 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어. 나도 언젠가 백리강을 뛰어넘어 볼 테다’
 다른 사람이 만약 무가내의 이런 속내를 들었다면 코웃음 칠 게 뻔했다. 하지만 이런 황당할 정도의 오기와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부심이 없었더라면, 그 비정상적인 신체를 갖고도 이처럼 밝게 살아오긴 어려웠을 것이다.
 헌원지의 식견 또한 놀라웠다. 소림사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이 무엇이냐고 묻는 무가내에 대한 대답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소림사의 무공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이라고 봐야 해. 현재는 세수경은 실전(失傳)되어 역근경만 전해지고 있대. 아쉬운 것은 지금 전해지는 역근경도 중간 중간이 유실되어 그 원형이 온전히 전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지. 역근경의 행법(行法)은 기혈(氣血)의 유통과 운행을 도모하여 근육과 근골을 개조시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시킬 정도로 대단한 무공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환골탈태(換骨奪胎)!”
 무가내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지나가는 말로만 들었던 그 말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헌원지는 무림의 고사나 무술의 흐름 등에 대해 막히는 법이 없었다.
 무가내는 이처럼 뛰어난 백리강과 헌원지에 비하면, 자신이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무가내가 할 수 있는 건 허풍뿐이었다.
 “나는 이 다음에 큰돈을 벌고 싶어.”
 백리강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나 풍족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는 그에게 있어 돈이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뿐더러, 무림인으로서 돈을 밝히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가내는 이런 백리강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채 계속 허풍을 늘어놓았다.
 “적어도 나는 황금 백만 냥은 벌고 싶어. 너희도 언제고 나에게 돈이 필요하다면 말만 해. 내가 다 줄 테니까.”
 백리강은 쓴웃음이 나왔지만, 자신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처음 만난 터라 무가내의 기를 꺾기 싫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하하! 언제고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지.”
 
 백리강과 헌원지와의 만남이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는 무가내의 연정(戀情)이었다. 나중에는 헌원지만 보면 얼굴이 붉어져 어찌 할 줄 몰라 했다. 사미진과의 사건 이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누구보다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무가내의 사랑은 스스로에 대한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스스로 헌원지의 마음을 얻을 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 번 좋아진 감정을 그리 쉽게 지울 수 없어 혼자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청마산과 마사청은 어린 사제를 놀려 먹곤 하였다.
 그러나 백리강과 헌원지의 내력을 듣고 나자 꿈에도 소원인 군왕성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청마산은 자신의 신세를 생각해 보았다.
 ‘사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이제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 사부에게 배우는 무공으로 약간의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름을 날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지. 그때가 되면 오히려 사부를 돕는 것도 더 쉬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마사청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딱딱하기가 무쇠와 같던 두 사형이 아부를 하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무가내를 괴롭혔다.
 “무 사제! 무 사제, 제발~!”
 두 사람의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다.
 “무 사제가 군왕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 좀 해줘.”
 “무 사제,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무 사제···`···.”
 군왕성의 위력은 이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대단한 것이었다. 무가내는 문득 돈을 벌 기회가 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무가내는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일단 백리강에게 부탁을 했다. 의외로 백리강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호위들에게 확실한 언질까지 주었다.
 “아저씨들, 저 친구의 형인 두 사람을 부탁합니다.”
 백리강 자신이 생각해도 이렇게 무가내에 호의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뜻밖이었다. 군왕성 호법이나 장로의 자식들 중 같은 또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가내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 친구는 없었다.
 백리강은 그게 우정(友情)이라는 것에 대해선 부인하고 있었다. 자신은 앞으로 오 년만 있으면 천하제일인이 될 사람이었다. 지금의 만남은 한순간일 뿐, 뒤돌아서면 잊혀질 정도의 인연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손쉽게 허락을 받아낸 무가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청마산과 마사청을 만났다.
 “사형들 있잖아. 군왕성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그 호위아저씨 말을 들어보니까 한 사람 앞에 금화 열 냥씩이 필요하다고 그러네.”
 “응? 왜 돈이 필요하지.”
 “잘 모르지만 생활비와 의복비가 아닐까?”
 당장 그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일단은 가지고 있는 돈을 무가내에게 다 털리고 나머지는 차용증을 써주었다. 아마도 훗날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용증까지 써준 마당에 빼도 박도 못할 것이었다.
 성정이 순박한 청마산과 마사청은 사부에게 막상 하직 인사를 하려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능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자신들을 가장 아끼고 이렇게 키워준 사람이 바로 사부였다. 사부의 꿈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고, 한때는 사부와 함께 그 꿈을 이뤄나가는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도 그 현실이 어떤 것인지 알 만큼 나이가 먹었다. 지금은 미안했지만, 자신들이 군왕성에서 출세해 훗날 사부를 돕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형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소림사에 벌어지는 무술대회도 큰 역할을 했다. 소림사에서는 3년마다 속가제자들이 모여 서로 실력을 겨루는 무술대회가 열렸다. 사황풍은 자기 제자들의 실력을 알기에 거의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직 혈기왕성한 청마산과 마사청의 마음은 달랐다. 이곳에 도착해 다른 도전자들이 연공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형편이었다. 사황풍의 품에서 떠나 군왕성을 희망한 데에는 아마 이런 좌절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황풍 자신도 일가를 이룬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십오 년을 넘게 노력하고 있었지만 점점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허니 두 제자가 군왕성으로 간다고 하자 말릴 수가 없었다.
 “잘 가라. 다만 소림관의 명예는 실추하지 말거라.”
 말을 하는 사부나 이를 받아들이는 두 사형은 심각했지만, 무가내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명예? 푸후후! 실력이 있어야 명예도 있는 거 아닌가? 그 명예는 제가 만들어드릴 게요.’
 그렇게 백리강과 헌원지, 그리고 두 사형과 무가내는 헤어졌다.
 헤어지던 날 무가내는 헌원지에게 가슴에 맺힌 말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머리 좋은 헌원지는 무가내의 이런 감정을 눈치 채고 아예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헌원지가 보기에 무가내는 특이한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이 없었고, 무언가 마음만 먹으면 거의 막무가내로 밀어 붙여 반드시 이루어냈다. 분명 자신이 보아 오던 무림세가의 소년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다. 무공이나 배경 등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턱없는 자부심과 넉살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헌원지도 그런 무가내에게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가내의 뚱뚱한 몸매는 헌원지에게 웃음을 선사하긴 했지만,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건 절대 아니었다.
 무가내는 전날 밤 헌원지와 헤어진다는 사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렇게 밤을 새며 준비했던 그 모든 말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사라져 가고 결국은 이 한 마디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잘 가.”
 “잘 있어.”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그러고도 며칠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들의 열병이 다 그렇듯, 심한 가슴앓이의 기억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그 대신 무가내에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목표가 생겨났다.
 ‘너희들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겠어. 앞으로 십 년 이내에 너희들을 능가하고 말겠어. 그때는 너희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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