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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미각 1-1권

2019.11.05 조회 2,243 추천 10


 # 전설의 조상님
 
 “고 대리 어디 갔어? 고 대리!”
 
 강서구에 위치한 식품 회사인 마북식품 국내 영업 팀.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 한가운데를 무서운 기세로 헤치고 들어오는 간이소 부장이 국내 영업 팀 고민구 대리를 찾았다.
 
 “네, 부장님.”
 
 심각한 표정으로 열심히 엑셀 작업 중이던 민구는 어리둥절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야, 고 대리. JJ 푸드에 토마토소스 납품하기로 한 건, 진짜 나가리야?”
 
 “아, 그거요. 네, 사실 그쪽 구매 팀에서 워낙 말도 안 되는 딴지를 걸어와서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뭐? 달리 방법이 없어? 너 진짜 돌았어? 누구 마음대로 납품을 나가리시켜? 부장인 나도 모르게 네가 뭔데?”
 
 간이소 부장은 안 그래도 우락부락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다달이 실적이 줄어드는 판국에 고민구 대리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무려 2억이나 되는 납품 건을 말아먹으려고 한다.
 
 곧 있으면 이사 승진 심사가 있다.
 
 그때까진 최소한 매출을 떨어트리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한데 이 순진한 얼굴을 한 고민구가 자신의 앞길에 대찬 함정을 파 놓은 것이었다.
 
 간이소 부장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모르셨다고요? 지난번 회식 자리에서 말씀도 드렸고 다음 날 서면 보고 드렸잖습니까.”
 
 “뭐? 네가 언제?”
 
 “지난주 목요일 회식 날이랑 다음 날 아침이요.”
 
 “······.”
 
 간이소 부장은 눈동자를 굴리며 지난주를 회상했다.
 
 그러자 고민구 대리가 자신이 만취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던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올라온 서류는 그대로 책상 한구석에 처박아 버리고 자신은 곧장 사우나로 향했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기억? 웃기고 있네, 네가 나한테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부장님, 저 진짜 말씀드렸다니까요? 서류 보시고도 절 안 찾으시기에 그러라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암묵적 허락.
 
 그것은 자신이 빠르게 업무를 진행할 때 자주 하는 관행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사 승진이 걸려 있고, 영업을 담당하는 서도철 상무가 JJ 푸드 건을 주목하고 있다.
 
 JJ 푸드는 10개가 넘는 레스토랑 브랜드를 거느린 프랜차이즈 업체다.
 
 지금의 납품 2억이 차후 20억이 될지, 아니면 200억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유 불문이야. JJ 푸드에 우리 토마토소스 무조건 납품해. 알았어?”
 
 “절 더러 자기 차를 세차해 오랍니다. 회사 차도 아닌 개인 차를요.”
 
 “뭐?”
 
 민구가 짜내듯 목소리를 높이자 영업 팀 사무실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납품 업체의 갑질.
 
 이것은 영업 팀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는 고통이었다.
 
 그렇기에 간이소 부장이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귀추를 주목한 것이다.
 
 간이소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빠르게 평정심을 찾았다.
 
 “야 고 대리.”
 
 “네, 부장님.”
 
 “너 요즘 배부르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알기로 너 돈 많이 벌어야 되는 형편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어?”
 
 “말이 왜 그쪽으로 튑니까?”
 
 민구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입사한 지 4년이 채 되지 않은 회사라 아직 자신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민구로선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너 아버지 안 계시고, 어머니는 관절이 아파 일 못 하신다며. 그런데 동생 둘은 하나는 의대, 하나는 명문대 공대 다니고. 생활비랑 네 동생들 학비가 막 절실하지 않아?”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지부터 말씀해 주시죠.”
 
 민구의 눈매가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자신의 승진 앞에 두려울 것이 없는 간이소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인사 평가에서 과장 승진자로 내정된 게 너라는 거 알고 있지?”
 
 “그건······ 네, 듣긴 했습니다.”
 
 하필 승진 이야기를 꺼내 사람 말문을 막아 버리다니, 역시 간이소 부장다웠다.
 
 “왜인지도 알고?”
 
 “······.”
 
 “승진할 만한 연차가 됐으니까. 다들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연차가 쌓이면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 주는 관행이 있거든.”
 
 “부장님······.”
 
 “특별한 성과 없이 연차만으로 과장 승진? 그건 반대로 사소한 실수 하나가 네 인사 고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거야. 막말로 네가 이사님들이나 나처럼 좋은 대학 나온 것도 아니잖아? 타 팀 과장들 중 우리 후배 많다. 알아듣냐?”
 
 간이소 부장이 민구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민구는 분함에 치를 떨었다.
 
 사실 세차는 빙산에 일각에 불과했다.
 
 소스 샘플을 100개 넘게 전달했지만 모조리 퇴짜를 놓은 것은 기본이었다.
 
 구매 팀 사무실 청소에 담배 심부름에 술 시중까지.
 
 민구가 영업 팀으로 전보한 이래로 이렇게까지 자존심이 상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어렵게 간이소 부장에게 말을 꺼낸 것이다.
 
 그 말을 이런 식으로 묵살하고, 동료들 앞에서 개망신을 주다니.
 
 영업 팀에서 사소한 실수 없이 4년을 버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JJ 푸드 토마토소스 납품 건. 무조건 성사시켜. 그게 네가 사는 유일한 길이다.”
 
 간이소 부장은 민구를 향해 엄포를 놓고는 약속된 술자리로 향했다.
 
 ***
 
 퇴근 후, 영업 팀 사원들 중 민구와 친한 몇몇이 그와 함께 회사 근처의 곱창집에 자리했다.
 
 “고 대리님, 괜찮으세요?”
 
 “간 부장 미친 거 아니야? 대체 고 대리한테 무슨 원수를 진 거야?”
 
 “너무하셨어요. 그렇게 개인 사정을 공개해 버리는 게 어딨어요?”
 
 민구를 위로해 주는 사람들은 그가 나름 회사에서 믿고 의지하는 이들이었다.
 
 국내 영업 팀 막내인 정운혁 사원, 민구의 직속 사수인 박병기 과장, 그리고 같은 연차인 기소연 대리가 차례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JJ 쪽은 도대체 왜 우리 소스를 안 받아 주겠대?”
 
 박병기 과장이 물었다.
 
 “글쎄요, 일단은 맛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죠.”
 
 “맛? 제품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토마토소스 맛이 거기서 거기 아니야? 왜 그렇게 유난이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저는 샘플을 100개나 먹어 봤지만 큰 차이를 모르겠더라고요.”
 
 “결국엔 지들이 원하는 걸 안 들어줘서 아니야?”
 
 “원하는 거요? 그게 뭔데요?”
 
 “이거 말이야, 이거.”
 
 박병기 과장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뒤집었다.
 
 돈이라는 뜻이다.
 
 “에이, 아니에요 그건. JJ 거기, 사규가 엄청 빡빡해서 돈 같은 거 절대로 못 받아요.”
 
 민구가 손사래를 쳤다.
 
 JJ는 국내 요식업계 매출 1위를 찍는 회사다.
 
 그만큼 보는 눈이 많기에 사내 윤리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돈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럼 대체 왜 그럴까?”
 
 “실제로 맛이 없는 건 아니고요?”
 
 “뭐?”
 
 기소연 대리가 박병기와 민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두 남자는 일순 멍한 표정이 되어 기소연을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기 대리, 내가 아무리 일개 영업 사원이어도 미식 DNA만큼은 꽤 뛰어나다고. 내 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야. 우리 소스 진짜 맛 괜찮아.”
 
 “미식 DNA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기 대리님 모르셨어요? 고민구 대리님 가끔 자랑하시는데. 외가 쪽에 대단한 분이 계셨었다고.”
 
 정운혁 사원이 이때다 싶어 민구를 추켜세웠다.
 
 나름 민구의 기분을 배려한 것이었다.
 
 민구는 그런 눈치 빠른 운혁이 마음에 들었다.
 
 “대단한 분? 어떤 대단한 분?”
 
 “말씀하세요, 고 대리님.”
 
 “에이, 그게 뭐 별거라고.”
 
 “별거죠, 당연. 조상님 중에 희대의 천재가 계셨는데요.”
 
 “희대의 천재? 그게 누구야? 궁금해 고 대리, 말해 봐.”
 
 “아이참. 사람 난처하게 이런 분위기에서······ 사실 이건 믿거나 말거나인데 말이야······.”
 
 민구는 동료들 덕에 조금은 기분이 풀어졌고, 희대의 천재였던 그 조상님에 대해 신비로운 썰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전란으로 온 나라가 시름하던 바로 그 때.
 
 조선 팔도엔 임금의 혀를 사로잡았다는 전설적 요리사에 대한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윤공.
 
 약관의 나이인 그는 신이 내린 오감을 가진 남자였다고 한다.
 
 신이 내린 천부적 오감을 이용, 화려하지 않은 재료로 그 누구보다 맛있는 음식을 척척 만들어 내던 천재.
 
 그는 임금과 대령숙수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우연히 한양 끝 마을 어귀의 주막에서 대령숙수에 의해 발견된 그는 하루아침에, 오늘날로 치면 스타 셰프가 된 셈이었다.
 
 윤공은 날마다 소박하지만 그 깊이를 따질 수 없는 심오한 음식들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고, 임금은 그 요리로 인해 힘을 받아 북벌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 후.
 
 임금은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고, 그 원인이 윤공의 음식이라는 모함을 받게 된 그는 밤사이 청나라로 도망쳐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늦은 밤, 허름한 주택가를 갈지자로 배회하는 민구의 걸음이 불안했다.
 
 그는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내내 윤공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다면 혹시 신이 내린 오감, 그 100분의 1 정도는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
 
 외가 댁에 갈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어 이제는 줄줄 외울 정도가 된 윤공의 일화들.
 
 그로 인해 생긴 음식에 대한 애정이 식품 회사 입사로 이어졌다.
 
 하지만 애정과 실력은 비례하지 않았다.
 
 민구는 입사 이후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실적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럴 수록 윤공에 대한 생각은 점점 더 민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다.
 
 “물려받긴 개뿔.”
 
 야사는 야사일 뿐인 걸까?
 
 사실 동료들에겐 호기롭게 미식 DNA 어쩌고 했지만 민구는 영 맛에는 둔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정말 최악이 아니면 특별히 맛이 없다고 느낀 일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의 큰 납품 기회를 날리기도 했다.
 
 입찰에서 이기는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가격을 최대한 낮추면서 경쟁상대보다 맛있는 식자재를 만들면 된다.
 
 하지만 마북식품은 회사 특성상 연구원들의 분위기가 폐쇄적이다.
 
 그러니 그들은 발전하지 않고, 감각이 둔한 민구는 방향을 모른다.
 
 경쟁사의 제품과 마북의 제품이 어떻게 다른지, 또 어디가 모자란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딱히 그들을 이길 방법도 없었다.
 
 자신도 윤공처럼 척하면 척 음식의 문제점을 밝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민구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의욕은 앞서고, 언제나 공부하지만 맛에 관한 감각이 너무 무디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민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지잉― 철컥.
 
 술에 만취한 채 그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민구 왔니?”
 
 그 소리를 들은 민구의 어머니 윤현숙이 방 안에서 말했다.
 
 “네, 엄마. 주무세요.”
 
 “일찍 좀 다니지.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회식했어요. 주무세요.”
 
 “아침에 북엇국 끓여 줄게.”
 
 “됐어요. 북어가 얼마나 비싼데.”
 
 “······.”
 
 민구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JJ 푸드 납품 건을 대체 무슨 수로 해결한단 말인가?
 
 이번엔 정말 과장이 되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 최악의 조건을······.
 
 “미치겠다, 정말. 돈 들어갈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닌데.”
 
 과장이 된다고 해서 월급이 엄청나게 오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숨 돌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최소한 북엇국 정도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난 왜 윤공 같은 재능이 없는 거야? 그 사람 반의반의 반만큼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일이 풀릴 것 같은데. 우리 토마토소스가 진짜 완벽한 건지 증명할 수만 있다면 JJ나 회사에 뭐라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민구는 현숙이 깔아 놓은 이부자리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그러자 누렇게 변해 버린 천정의 벽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도배할 때도 지났는데 집주인은 돈이 없다고 핑계만 대고······.”
 
 한쪽 팔로 눈 앞을 가린 채 연신 한숨뿐인 민구.
 
 왜 자신은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윤공이고 나발이고 다 가짜 아니야? 우리 조상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나한테도 조금은 그런 재능이 있어야 말이 되잖아.”
 
 민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다 구라야. 조상 중 누군가가 지어낸 헛소리일 거야. 이참에 식품 회사 말고 어디 외국에라도 나가 돈 되는 일을 찾아볼까? 호주에선 화장실 청소만 해도 한 달에 삼 백을 번다던데······.”
 
 이번엔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윤공 선생님, 당신이 진짜 존재했던 사람이라면 후손인 나한테도 신경 좀 써 주시죠? 그런 천재적 재능이 있으면 좀 물려주고 그러면 좋잖아요?”
 
 민구는 홀로 중얼거리다 이내 잠이 들었고, 잠시 후 민구를 비추고 있던 달빛이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민구는 어머니의 북엇국 한 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 신이 내린 오감, 제1성의 단계
 
 “아음······.”
 
 이른 새벽, 민구는 일어나자마자 식탁으로 향했다.
 
 분주히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설렜기 때문이다.
 
 “일어났니?”
 
 “엄마, 이게 무슨 냄새예요? 냄새 너무 좋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생선 국물에 계란, 파, 마늘까지 넣은 것 같은데······ 북엇국이에요?”
 
 “얘는, 내가 어제 말했잖니. 아침에 끓여 준다고.”
 
 “그랬었나? 저 어제 회식해서 술 진짜 많이 마셨어요. 기억이 영 안 나네.”
 
 “술 좀 줄여. 아무리 영업 사원이라지만 너무 자주 마시는 거 같다 얘. 속 쓰리겠네, 어서 먹어.”
 
 “이야, 엄마의 북엇국 진짜 오랜만이다.”
 
 민구는 어제보단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아니, 많이 나아진 정도가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일어나는 순간 들려오던 엄마의 파 써는 소리.
 
 국이 끓으며 공기 중에 퍼지는 고소한 북어 냄새.
 
 냉장고에서 꺼내져 올라온 엄마의 오이지에서 나는 쿰쿰하면서도 짭짤한 냄새.
 
 태양초를 써 시골에서 직접 담근 고추장으로 무쳐 낸 오징어채의 알싸한 향도 너무나 좋았다.
 
 이른 아침, 엄마의 밥이 만들어 내는 풍성한 향들이 민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근데 원래 엄마가 밥 지을 때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났었나?”
 
 “응?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아, 아니에요. 잘 먹을게요.”
 
 “싱겁긴. 그래, 먹고 그대로 둬. 내가 치울 테니.”
 
 현숙은 밥상 앞에 앉은 민구를 확인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온전히 밥상을 홀로 마주하게 된 민구는 앞에 놓인 북엇국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일단 밥 한 숟갈 먹고.”
 
 민구는 밥그릇에 소복이 담긴 밥을 한 수저 크게 퍼 입에 넣었다.
 
 그러자 스륵거리며 밥알 씹히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강렬히 자극했다.
 
 민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청력이 이 정도로 예민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어서 느껴지는 잘 지어진 밥의 구수한 향기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얼마 전, 자전거에 쌀자루를 실어 오셨다더니 그게 갓 도정한 신선한 쌀이었던 모양이다.
 
 한데 그 쌀이 먹고 자란 물맛이 굉장히 훌륭했다.
 
 이 정도로 미네랄 맛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물이라면 도시와는 아주 먼 곳에서 자란 쌀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평야보다는 산의 느낌이 강했다.
 
 “전라도 쌀인가?”
 
 민구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그거 옆 동네 순희 아줌마 고향에서 올라온 거야.”
 
 “헉.”
 
 그 말을 용케 들은 현숙이 방 안에서 대답했다.
 
 순희 아줌마의 고향이라면 전라북도 정읍인데?
 
 민구는 순간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뭐지?
 
 내가 어째서 밥맛만으로 이 쌀이 전라도 쌀인 걸 맞춘 거지?
 
 단지 밥물에서 산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산지가 많은 전라도 지역이라 추측했을 뿐인데 그게 진짜라고?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민구의 시선은 황급히 북엇국으로 향했다.
 
 그가 북엇국의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들어 그 향을 느껴 보았다.
 
 킁킁.
 
 코를 가까이 대고 최대한 풍부하게 향을 느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다양한 형태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주 이상적인 맛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북엇국.
 
 이번엔 손가락으로 북어 살을 살짝 눌러 보았다.
 
 완전히 말라 있는 북어가 이 정도 수분감을 가지려면 최소한 3시간 이상 불려 30분 이상 끓여야 한다.
 
 아니, 그렇다는 생각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엄마, 이 북어 미리 불려 둔 거예요?”
 
 “그럼, 너 잠들기 기다렸다가 새벽 2시에 잠깐 나와서 쌀뜨물에 담가 놨지.”
 
 “2시요?”
 
 민구가 빠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시간이 아침 5시 40분이다.
 
 시간은 얼추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대체 이 감각들은 뭐야······.”
 
 음식이란 걸 먹기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다양한 감각이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민구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고 있던 북엇국 한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북엇국의 다양한 건더기들을 입에 넣고 씹자 이번엔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그려졌다.
 
 각기 다른 캐릭터를 가진 재료들이 국 안에서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 내는 맛의 스토리.
 
 그는 본능적으로 오이지 한 점을 연이어 입에 넣었다.
 
 오독오독.
 
 “캬, 죽인다. 엄마의 붓엇국!”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황홀한 느낌일 줄이야.
 
 “감사.”
 
 민구는 붓엇국에서 느껴지는 맛의 감각 하나하나를 모조리 느끼며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아침 식사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가 밥을 다 먹고 일어날 무렵 문득 그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머릿속에 남는 희미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엄마, 혹시 북어 두드릴 때, 뭐로 두드렸어요?”
 
 설마 돈까스 펼 때 쓰는 망치는 아니겠지?
 
 “돈까스 펼 때 쓰는 그거 있잖아, 망치같이 생긴 거. 지난번에 네가 회사에서 가져온 그거. 그걸로 두드렸는데 왜?”
 
 “헐······.”
 
 민구는 다시 한번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북엇국에서 아주 엷게 느껴지는 돼지 앞다리살의 풍미 때문에 물어본 것이었다.
 
 물론 돈까스를 만들 때 비닐을 깔고 두드렸겠지만, 비닐을 투과하는 미세한 고기의 향이 망치에 배어 있던 것이다.
 
 “미쳤다, 나······.”
 
 전에 없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발달해 버린 감각들이 음식의 이력을 줄줄 읊어 대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북엇국에 들어간 마늘이 언제쯤 땅에서 캐내어졌고, 언제 빻았는지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민구의 눈이 번쩍 뜨였다.
 
 [후손이여, 너는 오늘부로 신이 내린 오감 제1성의 단계에 오르게 되었다.]
 
 “어라······?”
 
 그때 일순 민구의 귓가를 스치는 남자의 음성.
 
 묵직하면서도 기품이 흐르는 음성은 흡사 사극에서 가끔 나오는 도인들이 내는 목소리와 비슷했다.
 
 “누, 누구세요?”
 
 기적의 순간.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삶에 기적적인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민구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랬다.
 
 [내 이름은 윤공. 너의 까마득한 조상이다.]
 
 “유······ 유유유유유······ 윤공?!”
 
 “응? 윤공?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니?”
 
 “헙······!”
 
 [쉿.]
 
 “······.”
 
 윤공은 실체는 없었으나 목소리만이 민구의 귀에 들렸다.
 
 귀가 밝은 민구의 엄마가 듣지 못하는 걸 보면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다시 말해 주마. 후손이여, 넌 오늘부로 신의 오감 중 1성에 해당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신의······ 오감······?
 
 1성······?
 
 대체 이게······ 뭔 일이래······?!
 
 ***
 
 잠시 후.
 
 격해지는 호흡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민구가 방으로 들어왔다.
 
 “지금 제가 미친 건가요?”
 
 [아니다.]
 
 “아니면 면역력 뭐 그런 게 떨어진 건가요? 이명 같은 게 들리나?”
 
 [아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트루먼 쇼 같은 건가요? 나만 모르고 세상이 다 아는 눈속임 같은 거?”
 
 [네 이놈.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니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다!]
 
 “아우 깜짝이야······!”
 
 귓가에 들리는 음성은 생각보다 인내심이 부족한 타입이었다.
 
 묵직한 목소리에 비해서 급격히 화를 내는 것이 꼰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당신은 정말 윤공이라는 거고, 그렇다면 또 당신은 귀신이라는 건데······ 그걸 절 더러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라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민구가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멍하니 둔 채 양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목소리는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나도 그랬다. 나도 처음 신이 내린 오감을 전이 받았을 땐 너처럼 믿지 못했지. 고려 때의 한 산골 마을에서 외로이 살다 가신 분이셨다. 화려한 삶을 산 나와는 좀 달랐지.]
 
 “설마 그거······ 지금 본인 자랑······?”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놈아. 어쨌든 네놈이 지금 믿건 말건 앞으로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죽은 후로 단 한 놈도 이 능력을 달라는 놈이 없어 무료했는데 마침 잘 됐구나.]
 
 “하······ 미치겠네 이거······ 이걸 믿으면 진짜 미친놈 되는 건데······.”
 
 [차차 알아 가라고 했잖으냐!]
 
 “아우 깜짝이야······! 거 좀! 화 좀 내지 않으면 어디 덧납니까?”
 
 [에잇 재미없는 놈. 어쨌건 난 분명히 네게 말했다. 그러니 어디 한번 그 능력을 잘 사용해 보거라.]
 
 “아······ 저······ 잠깐만요!”
 
 [왜? 무엇이 잠깐이냐? 믿지 못하겠다며?]
 
 “하, 한 가지만 여쭐게요.”
 
 [여쭙거라.]
 
 “아까, 분명 1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그 말인즉, 신이 내리는 오감의 레벨······ 아니 단계 같은 거로 받아들여지는데 맞습니까?”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2성이나 그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허허, 이놈 뭐 그리 급한 게냐? 내 후손 아니랄까 봐 야망이 가슴 속에서 막 꿈틀대느냐? 미안하지만 네게 오감의 단계를 상승시켜 주는 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윤공······ 선생님 당신뿐이라고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네가 오감의 단계를 상승시키고 싶거든 일단 예의부터 갖추거라! 어째 죽고 나서 처음 만난 후손 놈이 이리도 천둥벌거숭이 같을꼬!]
 
 그때, 윤공의 목소리가 민구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아니, 잠시만요! 윤공······ 아니, 조상님! 그렇게 사라지시면 어떡합니까? 다시 나타나실 겁니까?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신이 내린 오감이 완벽히 네 것이 될 때까지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다. 단, 우리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딱 10분으로 한정하겠다. 나로서도 너와 대화를 나눈 것은 혼의 힘이 소진되는 버거운 일이거든. 하루 중 네가 원하는 시간에 마음속으로 내 이름을 부르거라.]
 
 ‘윤공······.’
 
 민구가 재빨리 마음속으로 윤공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말고 이놈아!]
 
 “헉······.”
 
 [벌써 10분 다 지났다. 그럼 어디 한번 1성급 초보자의 오감을 발휘해 보거라.]
 
 윤공의 목소리는 그렇게 사그라들었고, 민구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신이 내린 오감의 1성?
 
 그게 진짜라면 1성급의 오감으로 엄마의 북엇국을 줄줄이 꿴 거야?
 
 그럼 만일 내가 5성, 10성의 단계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민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다는 1성급 오감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
 
 속전속결.
 
 민구에게 만일 신이 내린 오감이 전수되었다면 당장 풀어야 하는 숙제는 바로 JJ 푸드에 납품할 토마토소스였다.
 
 그는 강남에 위치한 본사가 아닌 인천의 생산 공장으로 출근했다.
 
 “차장님, 좋은 아침이요.”
 
 “고 대리, 이거 너무 아침 댓바람 아니야? 아우 피곤해 죽겠네.”
 
 공장 1층에 있는 회의실.
 
 온갖 짜증을 다 품은 표정의 배효상 차장이 민구를 향해 불평했다.
 
 그는 민구가 진행 중인 토마토소스 프로젝트의 제조 책임자였다.
 
 그놈의 소스 때문에 배효상과 연구원 몇 명이 무려 3개월이나 강행군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JJ 푸드에 토마토소스를 납품하기만 한다면 월 고정 매출 2억 원이 늘어난다.
 
 1년으로 환산하면 거의 20억이 넘는 돈.
 
 간이소 부장이 그토록 화를 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대령했죠.”
 
 민구가 회의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음식들을 배효상에게 권했다.
 
 그는 내키지 않는 척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종이 포장을 거칠게 뜯었다.
 
 “샌드위치 빵 속에 아몬드 가루를 섞는 재밌는 집입니다. 맛은 보장해요.”
 
 “음? 맛은 있는데, 아몬드 가루가 들어갔다고? 난 모르겠는데?”
 
 “제가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이젠.”
 
 “뭐라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하하.”
 
 오직 샌드위치의 향만으로 아몬드 가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민구였다.
 
 블로그를 뒤져 보니 역시 이 집의 킬링 포인트는 아몬드 향을 입힌 고소한 빵 맛이었다.
 
 샌드위치 맛은 의외로 빵이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훌륭한 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스 맛을 다시 체크하겠다고?”
 
 “네, 죄송하지만 그러고 싶습니다. 이거 납품 못 하면 간 부장님이 절 잡아 잡수실 기세라서요. 만전의 만전을 기해야죠.”
 
 “내가 고 대리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소스 맛은 최고라는 거 자네도 알잖아? 이제 와서 무슨 맛을 본다고 그러는 거야?”
 
 “음, 그건 말이죠. 제게 좀 특별한 능력이 생겨서······.”
 
 “특별한 능력? 무슨 능력?”
 
 “그건 이제 확인해 봐야죠. 저도 아직 잘 몰라요. 제 능력이 정확히 뭔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최근에 만들었던 샘플을 가져오라고 하지.”
 
 “감사합니다, 차장님. 복 받으실 거예요.”
 
 “내 암만 생각해 봐도 소스엔 문제없고, 그 JJ 놈들 그냥 갑질하는 거야. 세차에 술 시중에 장난 아니라며?”
 
 “······.”
 
 사실 그랬다.
 
 만일 민구가 소스를 먹고 난 후 소스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게 더 문제였다.
 
 소스를 납품하려면 그들의 갑질을 온전히 몸빵으로 때워야 한다는 것.
 
 그 생각을 하니 민구는 또다시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
 
 잠시 후.
 
 “차에서 맛을 보겠다고? 왜? 여기서 먹어 봐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 없어.”
 
 “냄새가 섞이면 판단이 흐려질 것 같아서요.”
 
 이미 회의실은 직원들이 먹고 있는 샌드위치 향으로 가득하니까.
 
 “거참 유난은.”
 
 민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배효상과 연구원들을 뒤로 한 채 소스 한 병을 차로 가져왔다.
 
 다행인 것은 자신의 차량이 회사의 영업용 차량이라는 것.
 
 깨끗이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회사 물건이라 차에선 쓸데없는 향이 나지 않아 맛을 온전히 느끼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정말 우리 소스에 문제가 없을까······?”
 
 민구가 많은 생각을 하며 소스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풍성한 향이 차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과연 내 능력이······ 내 감각이 진짜로 발달해 버린 건지 확인해야겠어.”
 
 민구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감을 동원하여 소스를 맛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민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공장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차장님!”
 
 “뭐야? 무슨 일이야?”
 
 “차, 찾았어요.”
 
 “뭘?”
 
 “이 소스······ 이 소스에서 찾았어요.”
 
 “그러니까 뭘 찾았는데?”
 
 “치명적인 결함이요.”
 
 “뭐라고?”
 
 민구의 말에 배효상과 연구원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
 
 [토마토소스에 토마토가 문제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JJ 구매 팀 가서 술 시중을 한 번 더 들어. 그게 빠를 것 같네.]
 
 배효상은 민구를 차갑게 쫓아냈다.
 
 그는 마북식품 공장에서만 15년을 일한 프로였다.
 
 강한 애사심과 사명감을 가진 사람에게 만든 작품이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하니 못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내 말이 맞아. 확신할 수 있어.”
 
 하나 민구는 민구대로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생각이었다.
 
 아까 차에서 토마토소스 맛을 볼 때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생긴 변화.
 
 그것은 윤공의 오감이 전수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토마토소스 안에 들어간 화학 성분 하나까지도 모조리 느낄 수 있었다.
 
 성분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느껴지는 성분의 숫자와 겉면 라벨에 적힌 재료의 수가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배효상 차장이 이 소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 소스 최고의 장점은 바로 재료의 배합이었다.
 
 소스를 베이스로 다양한 재료들을 첨가할 수 있도록 맛의 일부분을 열어 둬 소스 본연의 미덕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딱 일류 요리사들이 선호하는 그런 이상적인 소스임엔 분명했다.
 
 하지만 소스를 손으로 살짝 비벼 보았을 때 느껴지는 토마토의 신선도.
 
 그리고 그 토마토가 자란 토양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금속 냄새.
 
 민구의 생각엔 바로 그 부분이 문제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민구는 지금 JJ 푸드 구매 팀 사무실 문을 당차게 여는 중이었고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마북식품입니다.”
 
 “저 친구 또 왔네?”
 
 “또 마북식품이야? 끈질기네 저 집.”
 
 민구를 맞이하는 구매 팀 직원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마치 물건을 팔러 온 잡상인을 대하는 듯한 시선.
 
 물건을 팔러 온 것은 맞지만 잡상인은 아니다.
 
 민구는 주먹을 꽉 말아 쥐며 구매 팀 팀장 책상 쪽으로 직행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됐다고 했잖아요. 우린 마북식품 소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고민구 대리는 벨도 없습니까? 여기서 곤란한 일 많이 당했잖아요? 그럼 이제 그만 찾아올 때도 된 것 같은데요?”
 
 JJ 푸드 구매 팀 팀장 이재근.
 
 그는 큰 키에 날렵한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팔 근육이 인상적인 스포츠맨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마지막?”
 
 “저의 새로운 제안을 듣고도 팀장님이 거절하신다면 토마토소스 납품 건은 접겠다는 말입니다.”
 
 “재밌네요. 하지만 시답지 않은 말이면 중간에 자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저는 여기에 저희 소스를 홍보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홍보하러 온 게 아니면 왜 온 거죠?”
 
 “까러요.”
 
 “네?”
 
 민구의 거친 표현에 드디어 이재근 팀장이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저는 오늘 여기서 저희 토마토소스가 갈아 뭉개질 때까지 깔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이재근 팀장뿐만 아니라 구매 팀 전 직원이 몸을 일으켜 민구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 못다 이룬 그의 소망
 
 “당신네 소스를 갈아 뭉개 버리겠다? 왜죠?”
 
 JJ 푸드 구매 팀 팀장 이재근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민구를 올려다보았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사실 그동안엔 저희 소스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흠.”
 
 이재근 팀장이 선 채로 팔짱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동안 민구에게 갑질 아닌 갑질을 했던 것은 다 의도한 일이었다.
 
 타사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은 있지만 JJ 푸드의 총괄 셰프인 리카르도(Ricardo)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이탈리아 교포 출신으로 7성급이라는 칭송을 받는 두바이 최고 호텔에서 총괄 셰프를 담당했던 요리계의 장인이었다.
 
 미각 하나만큼은 세계 제일인 그를 만족시키려면 마북식품의 소스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제품을 매일같이 들고 오는 영업 사원을 떼어 낼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갑질.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북식품 소스의 문제점들을 말해 주고 제품 개선을 하는 과정보다는 이미 최고로 정평이 나 있는 소스를 조금 비싸게 주고 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고 대리가 여기서 그 소스의 문제점들을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죠? 내 생각엔 시간만 아까울 것 같은데.”
 
 “3일만 주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 팀장님을 만족시킬 만한 소스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3일? 그 안에 소스 맛을 개선할 수 있다? 지금껏 100개가 넘는 샘플을 갈아 치워도 못 하던 것을?”
 
 “네. 믿어 주세요.”
 
 “참, 나. 하루만에 절대 미각이라도 된 거야 뭐야?”
 
 “그런 건 아닙니다.”
 
 절대 미각 그 이상이죠.
 
 말하자면, 절대 오감.
 
 나는 절대 오감을 가진 남자입니다.
 
 비록 1성의 단계지만 이 정도면 신세계죠.
 
 “나 곧 회의 가야 해요. 시간은 오래 못 줍니다.”
 
 “바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럼 어디 말해 봐요.”
 
 이재근 팀장이 이제 아예 의자를 가져다 놓고 관전하는 자세로 편히 앉았다.
 
 평소의 민구였다면 이런 상황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웠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구매 팀 팀원들이었다.
 
 느닷없이 자기 회사의 제품을 까겠다는 영업 사원의 행동이 이해가 갈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럼 말씀드리죠, 일단 저희 소스는 시작부터 핀트가 살짝 어긋나 있었습니다.”
 
 “어떤?”
 
 “토마토소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토마토인데 그 부분에 소홀했던 것이죠. 세부적인 맛의 조율도 필요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토마토였습니다.”
 
 민구가 말하자 이재근 팀장과 또 다른 팀원 하나의 몸이 움찔했다.
 
 두 사람이 민구 모르게 시선을 교환했고, 다시금 민구를 바라보았다.
 
 “마북식품은 국산 식자재를 대량으로 공급받는 계약을 사전에 체결하여 가격 위험을 없애 왔습니다. 토마토 역시 마북식품이 값싸게 공급받죠. 사실 수입산 홀 토마토를 쓰는 것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저렴합니다. 그래서 저희 연구원들이 국산 토마토를 선택했던 거죠. 그래서······.”
 
 “됐습니다, 거기까지.”
 
 “팀장님.”
 
 “알아들었다고요. 뭐, 대충 감은 잡은 것 같군요.”
 
 “대충이 아닙니다. 약속드릴 수 있어요, 3일만 주시면 완벽한 소스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민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더 이상은 말할 내용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1성 단계의 한계인 걸까?
 
 토마토가 문제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대안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토마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정확히 짚어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사실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
 
 지금은 시간을 버는 것이 급선무다.
 
 “······.”
 
 “팀장님······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어떻게 할까.
 
 이재근 팀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구두로 한 약속이지만, 사실 이미 공급받기로 내정한 수입 식자재 유통사가 있긴 했다.
 
 하지면 역시 가격이 부담이었다.
 
 만일 3일 안에 마북식품이 내정된 수입 토마토소스와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기만 한다면 손해 볼 건 없는 장사였다.
 
 마북이 실패하면 타사 제품을 쓰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그러든가.”
 
 “가, 감사합니다, 팀장님!”
 
 “딱 3일입니다. 그 이상은 안 돼.”
 
 “네, 그럼요. 기필코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더 있습니다.”
 
 “또 무슨 부탁을?”
 
 “공문을 하나만 써 주시겠습니까?”
 
 “공문? 무슨 공문 말인가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 말입니다.”
 
 “오호라. 이제 알겠군, 당신이 왜 여기에 와서 당신네 소스를 까겠다고 했는지. 공문이 목적이었어.”
 
 “사정이 급해서요. 죄송합니다.”
 
 “당신 진짜 재밌네. 알겠어요, 공문은 메일로 보내죠. 이만 가 봐요.”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3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민구는 입이 귀에 걸린 채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이재근 부장은 후― 하는 한숨과 함께 피식 웃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일개 영업 사원이.”
 
 “그러게요, 팀장님. 좀 놀랍네요.”
 
 “혹시 저 사람도 너 같은 능력을 가진 건가? 마북식품 소스를 먹고 나서 네가 한 말과 거의 비슷해. 토마토가 문제라던 네 말과 말이야.”
 
 “그럴 리가요. 소 뒷발에 쥐 잡은 거죠. 절대 미각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1,000개의 향신료를 매일 입 속으로 구겨 넣으며 얻은 능력입니다. 폄하하지 말아 주세요.”
 
 “폄하는 무슨, 내가 너 인정하니까 네 말만 믿고 저 회사 소스 반려시킨 거잖냐. 3일 안에 가능할까? 네 미각을 만족시킬 만한 소스를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죠. 팀장님께선 협상 중인 수입 업체와 계속 일 진행하시면 됩니다.”
 
 “하여튼 자신감은. 누가 진창기 아니랄까 봐.”
 
 JJ 푸드 구매 팀 검수 과 과장 진창기.
 
 30세인 그는 1년 전, JJ 푸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직급은 과장이었다.
 
 총괄 셰프인 리카르도가 무려 4번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설득해 데려온 특급 인재였기에 단행한 파격 인사.
 
 미각 하나만큼은 세계적 수준임을 자부하는 그는 마북식품의 소스를 맛보며 연신 코웃음을 쳤다.
 
 국산 토마토는 유럽산에 비해 단맛이 현저히 떨어진다.
 
 게다가 마북식품이 사용한 토마토는 일반 국산보다 조금 더 떨어지는 수준의 것이었다.
 
 어떤 토양에서 자랐는지는 몰라도 엷은 금속 맛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수준이지만 명백히 단점이 보이는 소스를 가격 경쟁력만으로 통과시키기엔 진창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자존심을 꺾을 만한 소스를 3일 만에 만든다?
 
 “말도 안 돼.”
 
 단 3일 만에 그런 토마토를 사용한 소스가 맛있어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하는 그였다.
 
 ***
 
 “대박.”
 
 차를 몰고 다시 인천 공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민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 통했다.
 
 토마토에서 느껴졌던 그 금속 맛이 문제였던 거다.
 
 대체 그 맛이 어디에서 올라온 것일까?
 
 어쨌든 이재근 팀장의 반응으로 보아 답은 맞춘 셈.
 
 이제 인천 공장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그나저나 쓸모 있네, 이 능력.”
 
 민구는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과연 신이 내린 오감 1성의 단계, 그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일단 미각과 후각이 무척이나 예민해졌다는 정도가 느껴졌다.
 
 냄새를 맡으면 그 재료의 형태와 이력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졌다.
 
 맛을 보면 식재료의 종류와 배합, 그리고 조리 방법 등이 또 어렴풋이 떠올랐다.
 
 확실히 엄청난 감각임엔 분명하지만 감각의 끝에 락 장치 같은 것이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일 1성을 뛰어넘어 그 이상으로 간다면?
 
 그렇다면 단순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그대로 재현하거나 미세한 단점들을 보완해 최고의 식자재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회사 내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보는 민구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이제 이 능력으로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겠어요.”
 
 민구가 하늘을 향해 중얼거리며 정지 신호에 멈춰 섰다.
 
 싱글벙글.
 
 그는 이미 마북식품의 토마토소스를 어떻게 개량해야 할지 대략적인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런 미천한 후손 놈 같으니.]
 
 “아니, 미천하긴 누가······ 음······? 어······?
 
 [네놈 말이다!]
 
 “뭐야······?”
 
 [나다 이놈아.]
 
 “헉······? 윤공 선생님?”
 
 [그렇다.]
 
 “어? 근데 선생님이 어떻게 다시 나타나셨죠? 분명 하루에 한 번 딱 10분이라고······.”
 
 [흠흠, 그거야 내 혼력이 허락하기 나름인 거고! 네가 하도 한심한 소리를 하기에 내 울화가 치밀어 다시 왔다. 덕분에 오늘 하루를 완전히 망쳐 버렸고 말이다.]
 
 “왜요? 선생님의 하루가 왜······.”
 
 [네가 쉴 수 없게 만들지 않았느냐? 나도 좀 쉬자 이놈아! 살아생전 소처럼 일만 하다 죽었는데 죽어선 좀 쉬잔 말이다!]
 
 “어째서 제가 선생님의 휴식을 방해했다는 겁니까······?”
 
 [네 그 욕심이 문제다 이놈! 네 녀석이 간절히 부탁하기에 내 들어는 줬다만 벌써 제 욕심만 차리다니 너무나 어리석구나.]
 
 “제 욕심만 차린다고요? 제가 언제.”
 
 [어허, 너 설마 귀신을 속이려고 하는 거냐?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네 이놈! 내가 내 능력을 맡긴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요행으로 성공할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확 다시 빼앗아 갈까 보다!]
 
 “그, 그건 안 됩니다. 제 말뜻은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귀신의 능력 같은 거로 확인해 보십시오. 그건 그저 말뿐인 거였습니다. 신박한 능력을 얻었는데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신박? 그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그럼 네 말은 무슨 뜻인데?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하긴 한 게냐?]
 
 “음······ 글쎄요, 제가 말한 성공의 뜻은 아무래도 사리사욕보다는 이상적인 성공을······.”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공의 정의는 무엇인데?]
 
 “성공의 정의요? 글쎄요, 진정한 성공이라면 돈도 돈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뭐 그런 거 아닐까요?”
 
 민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씁쓸한 인생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원하던 성공이라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명확히 생각해 보지 못했다.
 
 가족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바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공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다.
 
 윤공 선생의 오감이 내 것이 되었고, 그것으로 성공을 꿈꿀 수 있다.
 
 [말 한번 잘했다. 많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싶다니 그거 다행이구나. 그럼 넌 그렇게 성공하거라.]
 
 “네······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데 이 능력을 쓰겠어요.”
 
 [단, 네게 이로움을 받을 사람에 혼령 하나를 더해야 하는 것을 유념하거라.]
 
 “혼령 하나를 더 한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네게 능력을 준 것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혹시······ 제게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감각은 둔해도 눈치 하난 빠르구나.]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못다 이룬 내 소망을 이루고 싶다.]
 
 “선생님께서 못다 이룬 소망이 있으십니까? 천하의 위대한 윤공 선생님이요?”
 
 [뭐라? 흠흠, 그래, 나 천하의 윤공. 천하를 호령했던 위대한 요리사 윤공에게도 못다 이룬 꿈은 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데요?”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싶다.]
 
 “네······?”
 
 윤공의 뜬금없는 말에 민구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그야말로 천하의 윤공이었다.
 
 그런 그가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이미 최고이시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굳이 왜 지금 와서······.”
 
 [넌 나의 말로가 어땠는지 모르지 않느냐?]
 
 “선생님의 말로······ 말입니까?”
 
 [조선에서 피신하여 도망한 청나라의 뒷골목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오직 하루만 사는 피라미 같은 인생. 난 그곳에서 처절하게 이용만 당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잘나가던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지.]
 
 “그,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넌 네 능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단련하거라. 네가 최고가 되는 것이 곧 내가 최고가 되는 길. 나는 미천한 후손인 네가 최고가 되는 모습을 꼭 보고야 말아야겠다. 그렇게라도 이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야겠단 말이다.]
 
 “서, 선생님······.”
 
 [일단 그렇게 알거라. 오늘은 지쳤다. 이만 가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련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빠앙―!
 
 “헉.”
 
 윤공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민구는 뒤차의 경적 소리에 몸이 들썩일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신호는 바뀌어 있었고, 기다리다 못해 차선을 바꿔 지나치는 차의 운전자들에게서 험한 욕설이 들려왔다.
 
 “선생님?”
 
 [······.]
 
 민구가 윤공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최고가 되는 것이 곧 선생님이 최고가 되는 일······.”
 
 민구가 액셀을 밟으며 홀로 되뇌었다.
 
 두근두근―
 
 실로 가슴 떨리는 문장이다.
 
 과연 내 능력으로 최고가 되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다.
 
 요리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누구보다 월등한 최고가 되고 싶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상상 속에서 그려 보았던 윤공처럼 전설적이고 초인적인 요리사.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인생은 또 없을 것이다.
 
 남을 돕는 것은 물론이요 큰돈을 버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제 능력을 정확하게 아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그게 1성의 단계인 게 조금 문제라고요.
 
 토마토소스에서 토마토를 개선해야 하는데 어떤 토마토를 써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죠.
 
 지잉―
 
 민구가 답답해진 마음에 차창을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가을 공기가 차 문을 넘어 민구의 코끝을 자극했다.
 
 가을 공기는 실로 다양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도 그것이지만, 오감 중 하나인 후각이 발달한 만큼 그것을 제외한 향기를 분리하여 느낄 수도 있었다.
 
 과일 좌판에서 나는 사과 향기.
 
 노점에서 파는 붕어빵의 고소한 향기.
 
 자전거 타이어 닳는 냄새, 그리고 길가의 식당에서 풍겨 오는 다양한 음식 냄새.
 
 “음?”
 
 그중에서 민구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토마토소스의 향이었다.
 
 “이거 뭐지?”
 
 민구가 운전 중 살짝 고개를 틀어 냄새의 진원지를 확인했다.
 
 “살바토레? 파스타집인가 보네?”
 
 그곳은 <살바토레>라는 이름을 가진 파스타 전문점이었다.
 
 한데 그 외형이 특이했다.
 
 그곳은 여느 파스타 전문점과는 다르게 마치 한국 백반집을 연상시키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특이한 것은 그 앞으로 늘어선 손님들의 줄.
 
 민구는 그 모습에 재빨리 차선을 바꿔 유턴 신호에 멈춰 섰다.
 
 “분명 저 집 소스에서 내가 원하는 그 향이 났단 말이야······.”
 
 신이 내린 오감 중 후각의 쓰임새가 이렇게 유용한 것임을 깨달은 민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명 저기다. 저기에 해답이 있을 거야.”
 
 직진 신호에서 유턴 신호로 바뀌는 불이 들어오자 민구는 경쾌하게 액셀을 밟아 차를 돌렸다.
 
 
 # 살바토레의 가르침
 
 <파스타 전문 살바토레>
 
 JJ 푸드에 약속한 3일이란 시간은 짧았다.
 
 그렇기에 한시가 급했지만 민구는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약 30분을 소비했다.
 
 하지만 그 소비가 낭비는 아니었다.
 
 줄을 서 있는 내내 풍겨 오는 토마토와 바질의 향기가 일말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분명 뭔가 있다.
 
 토마토와 바질의 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었고, 특히 토마토에서 나는 달콤한 향이 마북식품의 소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마침내 테이블에 앉아 볼로네제 파스타를 주문한 민구가 양손을 비비며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그러고 나서 약 3분이 흘렀다.
 
 “주문하신 볼로네제 파스타 나왔습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실내.
 
 정신이 없을 법도 한 이 공간에서 파스타를 서빙하는 나이 지긋한 남성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네임 택에 쓰인 이름은 강철준이었다.
 
 “장사하신 지 오래되셨나 봐요.”
 
 민구가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었다.
 
 “20년 정도 됐습니다. 저희 가게엔 처음이세요?”
 
 “네, 그동안 사실 파스타에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혼자 오시기까지 하고. 장족의 발전을 하셨군요.”
 
 “그만큼 이 집 토마토소스 냄새가 좋아서요. 관심을 가진 후 발견한 식당이 이렇게 맛있는 집이라 참 좋네요.”
 
 “아직 드셔 보시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판단하시죠?”
 
 “저는 향만 맡아도 알 수 있거든요.”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이죠.
 
 “하하하, 향으로 저희 집을 찾았다니 대단한 미식가이신 모양이군요. 아무쪼록 맛있게 드십시오.”
 
 머리가 희끗한 강철준은 중후한 목소리로 민구와의 대화를 갈무리하고선 또다시 서빙에 열중했다.
 
 독특한 분위기의 가게다.
 
 이런 허름한 식당에서 이런 굉장한 향을 내는 토마토소스를 만들다니······.
 
 “어디 한번.”
 
 민구는 망설임 없이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오, 역시······ 역시 좋은데?”
 
 일단 뜨거운 첫 느낌을 지나고 나자 입 안에서 맛과 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상큼하게 씹히는 토마토의 질감과 달콤한 맛, 그리고 향.
 
 신선한 바질.
 
 거칠게 다져 넣은 소고기 등등.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져 완벽한 볼로네제 스파게티의 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거다.”
 
 민구는 맛을 보고 나서 완전히 확신했다.
 
 후루룩― 후루룩―
 
 두 번째 입, 세 번째 입 연신 파스타를 밀어 넣자 그의 미간이 저절로 치켜 올라갔다.
 
 바로 이 맛이다.
 
 상큼하면서도 녹진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소스.
 
 토마토소스에 얼굴이 있다면 이건 거의 정우성이나 조인성급.
 
 웬만한 수준으론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레벨이라는 거다.
 
 “그럼 이 집은 어떤 토마토로 소스를 만들고 있을까?”
 
 민구는 그때부터 파스타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주방 쪽을 두리번거렸다.
 
 어찌나 파스타가 많이 팔리는지 수시로 밖에서 식자재를 들여오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그 식자재 꾸러미 안에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이 소스에 들어간 토마토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음······?”
 
 그때, 민구의 코끝에서 미세하게 역한 냄새가 감지되었다.
 
 윽, 이건 무슨 냄새지?
 
 이렇게 좋은 향이 나는 식당에서 웬 쓰레기 냄새?
 
 “쓰레기?”
 
 그 순간 민구의 눈이 반짝이며 주방 쪽을 바라보았고, 직원 한 명이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낑낑대며 뒷문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빙고.”
 
 바로 저거다.
 
 ***
 
 잠시 후, 민구는 허겁지겁 계산을 하고서 건물 뒤편 쓰레기 집하장으로 나왔다.
 
 “아우, 냄새.”
 
 곳곳에 널린 쓰레기들이 내는 악취가 민구를 괴롭게 했지만, 그는 코를 막아 가며 조금 전 살바토레에서 내놓은 쓰레기를 찾기 시작했다.
 
 “어떤 토마토를 썼는지는 이 쓰레기를 뒤져 보면 알 수 있겠지.”
 
 민구의 생각은 그것이었다.
 
 이토록 대량으로 소스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면 베이스인 토마토의 출처를 밝혀 줄 만한 쓰레기가 분명히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토마토를 담았던 박스라든가, 토마토를 다듬은 자투리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그것만 밝혀낸다면, 앞으로 마북식품의 토마토소스를 어떻게 개량할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있다.”
 
 역시 민구의 예민한 후각이 금세 살바토레에서 배출한 쓰레기봉투를 찾아냈다.
 
 가까이 가 확인하자 그 봉투 안에 이탈리안 식당 특유의 쓰레기들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바질 냄새가 나는 스티로폼 박스, 건 파스타 면이 담겨 있던 비닐봉지 등등이 어지럽게 봉투 안에 섞여 있었다.
 
 “토마토는······? 토마토는 뭘 쓴 거지?”
 
 민구가 마침내 쓰레기봉투를 열어 그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JJ 푸드 구매 팀 이재근 팀장.
 
 내가 반드시 당신 설득한다.
 
 민구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결연했다.
 
 “어······?”
 
 그리고 잠시 후, 민구는 파스타 전문점 살바토레 토마토소스의 베이스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토마토가 들어 있던 용기의 모양이 민구에게 꽤나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알고 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거였어······?”
 
 “거기서 뭐 합니까?”
 
 “앗!”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새 민구의 뒤로 다가온 살바토레의 강철준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덕분에 소스라치게 놀란 민구가 그대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아니, 쓰레기는 왜 뒤지고 왜 또 그렇게 놀라? 혹시 우리 집 영업 비밀 같은 거 캐러 왔나요?”
 
 “아, 아닙니다.”
 
 “아니면 뭡니까? 왜 쓰레기를 뒤지고 그러는데요?”
 
 “그게······ 저······.”
 
 “맞구먼, 영업 비밀 캐는 거.”
 
 강철준이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파스타집의 영업 비밀을 캐려는 게 아니라 소스 맛의 비밀이 궁금했습니다. 어떤 토마토를 썼는지 궁금해서요.”
 
 민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반면 강철준은 민구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영업 비밀 캐는 거 아니고 뭐랍니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화가 난 표정은 아닌 철준.
 
 민구는 묘하게 의지가 되는 그의 침착한 모습에 자신의 속내를 조금은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저는 토마토소스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직원입니다. 파스타집을 열 예정이라거나 경쟁 가게의 사장이라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지금 저희 회사 소스에 사용된 토마토에 문제가 있어서 납품에 실패할 위기라······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와 본 겁니다. 정말이에요. 살바토레의 소스 향이 절 이끌었습니다.”
 
 “그러셨구먼.”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 그랬습니다.”
 
 민구는 그제야 자신이 확인했던 토마토 용기를 다시 쓰레기봉투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봉투 안에서 빈 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럼 이제 우리 토마토의 비밀을 알았겠네요? 그걸 봤으니까요.”
 
 “네, 알긴 알았지만 그게 좀······.”
 
 “잘나가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이래도 되느냐는 표정이군요. 명색이 파스타 전문점이란 곳에서 이런 걸 써도 되느냐 이거죠?”
 
 강철준은 사람을 대하는 것에 관한 일종의 장인이었다.
 
 표정만 봐도 척하면 척.
 
 지금 민구의 표정은 살바토레를 향한 의구심이었다.
 
 “네, 사실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허허허, 이런 걸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요?”
 
 “파스타 전문점이라면 이런 것 말고 더 좋은 물건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질 좋은 토마토와 별로 가격 차이도 크지 않을 텐데.”
 
 “그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우리 가게가 더 좋은 물건을 두고 편한 걸 쓴다고?”
 
 “아닌가요?”
 
 민구가 되묻자 강철준은 재미있다는 듯 민구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토마토 정도는 영업 비밀 축에도 들지 않았기에 민구를 나무랄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들릴 뿐이었다.
 
 “젊은 분이 꽤 고지식한 면이 있군요. 그럼 제가 한 가지 물어볼게요. 괜찮나요?”
 
 “아, 네.”
 
 “손님이 생각하는 좋은 식자재의 정의는 뭡니까?”
 
 “네?”
 
 “말씀해 보세요.”
 
 “글쎄요, 좋은 식자재란······ 맛있는 식자재······ 가 아닐까요?”
 
 민구는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맛있는 것보다 더 좋은 식자재가 어디 있겠는가?
 
 신선도, 원산지 등이 중요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맛을 구성하는 일부분들이다.
 
 그의 말을 들은 강철준은 이번엔 아주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걸 아시는 분이 그래요?”
 
 “네······?”
 
 “과연 우리 가게가 재료를 타협해서 맛을 떨어트린 걸까요?”
 
 “아······ 그게 아니라면······.”
 
 “정반댑니다.”
 
 “네?!”
 
 “우린 손님이 본 그걸 맛있어서 쓴 거라고요. 그 증거로 거기에 붙은 가격표를 다시 한번 확인해 봐요.”
 
 “가격표요?”
 
 민구가 조금 전 쓰레기봉투에 던져 넣었던 물건을 다시 집어 들어 거기에 붙은 가격표를 확인했다.
 
 “헐······ 이거 꽤 비싸네요? 저희 공장에 가끔 들여오는 비슷한 물건의 두 배가 넘어요.”
 
 “그렇죠, 결코 싸다고 볼 수 없죠. 그리고 우리 파스타가 일 인분에 얼마인지 봤죠?”
 
 “네, 일 인분에 만 원이요.”
 
 “그럼 이제 답은 나왔겠네요, 이 장사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정답이 없거든요. 하지만 우리 가게가 찾은 최소한의 정답은 이겁니다.”
 
 꿀꺽―
 
 과연 그가 생각하는 정답은 뭘까.
 
 민구가 강철준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때로는 맛을 위해 이윤을 일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먹는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요식업 종사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는 거죠.”
 
 민구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댕― 하고 머릿속 종이 울리는 기분.
 
 그가 여태껏 생각해 보지 않았던 심오한 개념인, 맛.
 
 맛은 인간의 본능임과 동시에 고고한 철학처럼 느껴졌다.
 
 정말 대단하다.
 
 신의 오감 1성의 능력만으로 단 하루 만에 엄청난 것들을 깨달아 가고 있다.
 
 큰 깨달음을 준 이분은 사람을 대하는 것뿐 아니라 대단한 맛의 장인이기도 하다.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민구는 감사의 표시로 공손히 두 손을 모아 강철준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사해야 할 것.
 
 마침내 그는 강철준의 조언 덕분에 토마토소스 개량에 대한 계획을 완전히 완성하게 되었다.
 
 ***
 
 <마북식품 인천 공장>
 
 민구는 파스타집에서 보낸 시간을 만회하느라 급하게 차를 몰아 공장에 도착했다.
 
 JJ 푸드 구매 팀 이재근 팀장과 약속한 3일의 기한을 맞추려면 시간을 최대한 아껴 쓰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회의실을 향해 내달렸다.
 
 “뭐? 공문을 가져왔다고?”
 
 잠시 후, 회의실에서 민구와 마주한 배효상 차장이 민구가 내민 노트북 화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JJ 쪽에서 마북식품 토마토소스의 주재료인 토마토의 질에 의심을 품어 납품 제안을 반려했음을 명확히 표시한 공문이었다.
 
 “차장님, 저 JJ 푸드에서 딱 3일 받아 왔습니다. 이쪽에서도 토마토를 바꿨으면 한다는 공문도 있고요. 잘만 개선하면 납품할 수 있어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이거 참, 사람 곤란하게······ 아무리 공문을 보냈다곤 해도 어떻게 3일 만에 새로운 소스를 만들 수 있겠어?”
 
 “에이, 왜 이렇게 약하게 나오세요? 소스류 하면 마북에서 차장님이 최고잖아요. 아닙니까?”
 
 민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배효상 차장을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그의 눈을 피했다.
 
 “아니 그거야 그렇지. 나 말곤 사실 3일 안에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힘들긴 하지.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 연구원들 집에도 제대로 못 가고 개고생시켰는데 그것의 배로 일을 시키란 말이야?”
 
 “차장님, 딱 3일이에요. 그 3일 안에 납품 못 하면 저도 포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흠······.”
 
 배효상은 아랫입술을 깨물어 가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사실 그동안 JJ 푸드는 소스류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었다.
 
 한데 전에 없던 이탈리안 토마토소스를 주문하기에 그는 이탈리안 소스에 대한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었다.
 
 한 마디로 완전 개고생.
 
 그렇게 만들어진 소스 샘플이 거의 100개에 달한다.
 
 그리고 JJ 쪽에서 발주한 토마토소스 프로젝트의 최대 난관이었던 가격.
 
 기존의 시세에서 거의 30%나 깎인 가격이 문제였는데, 그 가격을 맞추자면 원재료인 토마토를 최대한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야 했다.
 
 어차피 소스로 만들어지면 토마토의 신선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배효상 차장과 연구원들은 국산 토마토 중에서도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을 긁어모아 소스를 만들었던 것이다.
 
 “하긴, 고 대리 말 틀린 것 하나 없긴 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차장님?”
 
 “사실 대저 토마토를 그렇게 싸게 준다고 할 때 의심해 봤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진 않았거든.”
 
 대저 토마토라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토마토 산지.
 
 최고의 상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이름값에 잘못 속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역시 토마토에 실마리가 있었다.
 
 이번 납품 건의 승부처가 바로 이거란 말이다.
 
 “근데 3일 안에 질이 좋으면서도 싼 토마토를 어디서 구하냐가 문제인데······.”
 
 “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뭐라고?”
 
 효상이 되물었고, 민구는 그를 바라보며 비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생각해 놓은 토마토가 있거든요. 차장님은 그 토마토를 베이스로 소스 배합 비율 샘플을 열 가지 정도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비율에 제 오감을 이용해 완벽에 가까운 소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 가만있어 봐. 대체 어떤 토마토를 쓰려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고 대리 부모님이 혹시 토마토 농장이라도 시작하셨어?”
 
 “하하, 무슨 그런 농담을. 농장 하나로 충당될 물량 아닌 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니라 베이스가 될 토마토를 뭐로 쓸지 이미 정해 놨다는 겁니다.”
 
 “그래? 어떤 걸 쓸 건데?”
 
 배효상 차장이 민구를 향해 묻고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째 지난주보다 사람이 더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갑자기 자신이 넘치는 표정도 그렇고, 배짱 좋게 갑질 납품 업체와 배팅을 하는 것도 그랬다.
 
 그런데 어쩐지 그 모습이 꽤 믿음직하다는 것.
 
 효상은 민구가 어떤 토마토를 쓰려고 하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거요.”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민구가 테이블 위에 캔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캔의 정체를 금세 알아챈 효상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거······ 그건 이탈리아산 토마토 페이스트잖아? 그것도 값이 꽤 나가는 최상품.”
 
 “맞습니다. 이걸로 소스를 만들 겁니다.”
 
 “난 또 뭐라고. 겨우 그걸 가지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 거야? 이봐, 고 대리. 그 소스 한 캔 가격이 얼마인 줄 아나?”
 
 “압니다.”
 
 “기존 토마토 가격의 정확히 두 배야. 무슨 뜻인 줄 알지?”
 
 “그럼요, 이거론 납품 가격을 절대로 맞출 수 없다는 거 잘 알죠.”
 
 “근데 그걸 들이미는 거야 지금? 정신 나갔어? 실성한 거야? 회사에 손실이라도 끼치게?”
 
 “아니요, 실성한 게 아니라 자신 있는 겁니다.”
 
 “자신? 무슨 자신?”
 
 배효상 차장이 묻자 민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내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납품 가격을 지금의 1.5배로 높일 자신이요.”
 
 “뭐, 뭐라고? 1.5배?!”
 
 1.5배면 식품 업계 시세보다도 높은 가격.
 
 하지만 민구는 자신만만한 얼굴.
 
 혼란에 혼란이 더해진 효상은 이제 민구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 맛의 재구성
 
 다음 날.
 
 민구는 마북식품 본사에 잠시 들러 간이소 부장에게 배효상 차장과의 상황을 보고한 뒤 곧장 인천 공장으로 향했다.
 
 지금 시간, 오전 10시.
 
 공장에선 한창 레시피 개발 중이었고, 민구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한참 생각에 골몰했다.
 
 신이 내린 오감 제1성의 단계.
 
 그 오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바로 어제, 민구는 토마토소스 납품 문제를 풀 만한 실마리들을 찾아내긴 했지만 그다음이 어려웠다.
 
 문제는 인지했지만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는 상황.
 
 JJ 푸드에 호언장담했던 기일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민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윤공 선생님.”
 
 그래서 그는 하루에 10분만 가능하다는 윤공과의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불렀느냐.]
 
 “네, 선생님.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그놈 참, 아침부터 성질도 급하구나. 그래, 뭐가 궁금한고?]
 
 “선생님께서 지금 제 능력이 신이 내린 오감 1성의 단계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럼 그 1성의 단계가 가진 능력의 한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궁금합니다.”
 
 [흠.]
 
 민구의 물음에 윤공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겨우 1성의 단계 가지고 능력의 한계를 논하는 때가 왔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지. 물론 1성의 단계지만 네 녀석보다는 영리하게 내 능력을 스스로 파악했었다.]
 
 “선생님······ 본인 자랑 말고 제가 알고 싶은 것만 딱 알려 주시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만.”
 
 [이런 버르장머리 하고는, 쯧쯧.]
 
 “제가 사정이 조금 급합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니는 일터에서 아주 중요한 납품 건이 걸려 있어서요. 알려 주십시오 선생님, 1성의 단계에선 오감을 어느 정도까지 활용 할 수 있습니까?”
 
 [그놈 정말 성질 급하네. 나도 생각 중이다. 흠······ 일단 1성의 단계에서 청각과 시각, 그리고 촉각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봐야 한다. 급격히 발달한 후각과 미각에 깜짝 놀라게 되거든. 1성의 단계에선 미각과 후각으로 음식에 들어간 재료의 전부를 구분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너의 경험 안에서 구분되는 것이지. 네가 네 입으로 먹어 본 재료가 아니라면 당연히 구분할 수 없겠지.]
 
 “그럼 그 윗단계로 올라가게 되면 먹어 본 재료가 아니어도 구분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네 능력이 1성의 단계를 소화하지 못한다면 그 윗단계는 없어.]
 
 “네? 소화하지 못한다면, 그 위가 없다고요?”
 
 [당연한 것 아니냐? 1성의 단계에서 네가 헤매고 있다면 내가 어찌 2성의 단계로 널 승격시키겠느냐?]
 
 “그럼 제가 1성의 단계를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준은 뭡니까?”
 
 [그건 오직 나만의 권한. 오감을 물려준 직계 스승만이 가지는 권리다.]
 
 “네에?”
 
 헐이다.
 
 그럼 결국 윤공 선생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승격은 없는 것이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저 괴짜 어른이 호락호락하게 날 평가할 리 없다.
 
 능력은 얻었지만, 완전해지려면 앞길이 까마득한 구만리였다.
 
 [1성의 단계에 오른 지 딱 하루 되었다 이놈. 왜 이리 욕심이 많은고?]
 
 “욕심이 아니라 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싶은 겁니다.”
 
 [말대꾸는.]
 
 “죄송합니다.”
 
 그래, 일단은 상황 파악이 먼저다.
 
 윤공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일단 지금 단계에선 후각으로 음식의 재료들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구분해 낼 수 있다.
 
 일전에 소스 맛을 보았을 때, 화학조미료들의 맛은 구분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었다.
 
 [네놈이 헤매는 것 같으니 내 자비를 베풀어 주마. 과거의 나도 시행착오를 거쳐 알아낸 능력의 활용법을 말이다.]
 
 “능력의 활용법이요?”
 
 [신이 내린 오감 제1성의 단계가 가지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실 후각이 아니다.]
 
 “그럼······ 그럼 그게 뭡니까?”
 
 [미각이다.]
 
 “미각? 왜 그것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입니까? 맛을 느끼는 감각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강력한 무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혹시 나에 관한 전설적인 소문을 들어 본 적 있느냐?]
 
 “네? 전설······ 적인 소문이요?”
 
 거참 자기 자랑할 틈새를 놓치지 않는 어른이다.
 
 그에 관한 전설적 소문이라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것이다.
 
 “제가 듣기로 선생님께선 천하제일의 진미를 수도 없이 만들어 내셨다고······.”
 
 [수가 왜 없느냐? 있지. 적어도 수천 가지는 될 것이다.]
 
 “아, 네······.”
 
 대체 윤공 선생님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잘난 척도 지나치면 잡음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1성의 단계에서부터 그걸 해냈었다.]
 
 “네?! 1성의 단계에서부터 천하제일의 진미를 만들기 시작하셨다고요? 설마······ 그럼 지금의 저도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요리나 미식에 관한 경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태생이 요리사였지만 넌 다르지 않으냐?]
 
 “하지만 전 태생이 식품 회사 영업 사원입니다.”
 
 [그럼 가능하겠구나. 네가 말한 그 납품할 물건. 그걸 천하제일의 진미로 만드는 일이.]
 
 “어째서······ 어째서 말입니까? 제가 무슨 능력으로요?”
 
 [맛의 재구성이라고나 할까?]
 
 ***
 
 맛의 재구성?
 
 과연 그게 무슨 의미일까?
 
 윤공은 10분이 다 되었다는 핑계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1성의 단계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맛의 재구성이라는 것이다.
 
 일단 민구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마북식품 인천 공장 연구실로 들어섰다.
 
 “어떻게 돼 가요 차장님?”
 
 “어, 고 대리. 인사보다 소스가 먼저야?”
 
 “사정이 급하잖아요.”
 
 “말은. 아무튼 고 대리 믿고 토마토 바꿔서 소스 샘플 만들어 봤어. 확실히 이태리제 토마토가 토마토소스엔 훨씬 잘 맞아. 맛도 일정하게 나오고.”
 
 배효상 차장이 민구에게 샘플 소스가 담긴 접시를 건넸다.
 
 민구는 익숙한 듯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살짝 마셔 보았다.
 
 그러자 이내 그의 미각과 후각이 발동하였고, 소스 샘플에 관한 스펙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토마토, 양파, 마늘, 바질, 페페론치노 고추, 소금, 후추, 설탕, 기타 보존제 세 가지······ 정도 들어갔네요?”
 
 “옴마? 그걸 다 어떻게 알았대?”
 
 민구가 소스의 스펙을 줄줄이 읊자 배효상 차장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소량의 설탕과 보존제를 세 가지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냥 요즘 혀가 좀 예민합니다. 어쨌든 맛은 좋네요.”
 
 “어떨 것 같아? 이 정도면 확실히 예전 것보다는 나은데.”
 
 “음······.”
 
 민구가 샘플 소스의 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물론 맛은 있다.
 
 하지만 이 맛은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 같은 것이 부족했다.
 
 들어간 재료도 딱히 문제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적당량의 페페론치노 고추를 넣어 톡 쏘는 뒷맛이 좋은 특색 있는 소스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맛이 JJ 푸드를 설득할 수 있느냐였다.
 
 “별로야? 내 입엔 맛있는데.”
 
 배효상 차장 이하 연구원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민구의 반응을 살폈다.
 
 하룻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만들어 낸 소스 레시피니 긴장될 만도 했다.
 
 “분명 맛은 있습니다. 맛있는데······.”
 
 “그런데······?”
 
 배효상이 되묻자 민구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윤공이 했던 말.
 
 그의 말뜻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 같아요.”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
 
 바로 그거다.
 
 그가 말했던 맛의 재구성.
 
 그것은 바로 기존에 존재하던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
 
 “어떻게 할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 민구는 인천 공장 회의실에 홀로 앉아 소스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맛의 조각들을 정리해 나가는 데 집중했다.
 
 토마토는 일단 통과.
 
 현재의 가격에 맞출 수 있는 토마토 베이스 중 가장 질이 좋고 단맛도 풍부하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는 맛의 배합이 중요했다.
 
 “지금도 맛있지만 더 맛있게······.”
 
 민구는 어렸을 때 이따금씩 외할아버지에게 윤공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는 한 번 맛본 음식은 완벽히 재현해 낼뿐더러 그것의 단점을 고쳐 더욱 완벽한 음식으로 만들어 냈다는.
 
 아무리 유명한 산해진미도 그의 감각으로 보면 작은 단점들이 드러났다고 했다.
 
 작은 단점.
 
 딱 지금 이 소스가 그렇다.
 
 “흠······.”
 
 민구가 다시 한번 소스를 맛봤다.
 
 그리고 단맛, 짠맛, 쓴맛, 신맛, 등등으로 정리된 감각들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했다.
 
 처음이라 자유자재로 맛을 상상해 내기 어려웠지만 나름 1성의 단계이기에 가능은 했다.
 
 빠르지 않게, 천천히.
 
 그는 지금보다 나은 소스를 그려 가고 있었다.
 
 그때, 회의실 안으로 배효상 차장이 들어왔다.
 
 “고 대리, 아직 멀었어?”
 
 “네,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요.”
 
 “거참 희한하네. 지금껏 레시피에는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는 고 대리가 웬일이래? 본사에서 그렇게 쪼아 대나?”
 
 “그것도 그거지만 이번엔 제 자존심이 걸려 있어서요.”
 
 “자존심을 받쳐 줄 실력은 있고? 아무리 혀가 예민해졌다고 해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야. 우리 연구원들이 거의 이틀을 써 가며 만든 소스를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뛰어넘을 수는 없어.”
 
 “차장님······.”
 
 배효상 차장의 마지막 말에 민구는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제 그만 하라는 뜻.
 
 더 이상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고 이쯤 하자는 뜻이다.
 
 “고 대리가 진짜 맛있는 소스를 만들어 온다면 모를까 그때까지 우린 일단 다른 일 볼 거야. 나 간다.”
 
 배효상 차장은 급히 회의실을 나갔고, 민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소스를 만든다? 내가 직접?”
 
 민구는 어리둥절했다.
 
 집에서야 이런저런 요리를 만들어 보긴 했어도 시판용 토마토소스를 직접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들 그것을 만들어 줄 사람이 협조적이지 않다면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없다.
 
 만드는 사람의 실력이 부족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오히려 내가 직접 만들어 보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거다.
 
 ***
 
 웅성웅성.
 
 마북식품 인천 공장 3층에 위치한 메뉴 개발실 안팎으로 직원들이 즐비했다.
 
 그들이 웅성거리는 것은 바로 개발실 안에서 조리복을 입고 선 민구 때문이었다.
 
 “고민구 대리님이 요리를? 저분 영업 사원 아니야?”
 
 “요즘 영업 사원 진짜 힘들다. 제품 개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저 친구 때문에 배 차장이 토마토소스 샘플을 백 개나 만들었대, 이제 두 손 들었나 보네.”
 
 “그렇다고 일개 영업 사원이 연구원들보다 나을 순 없어.”
 
 등등의 말들이 민구의 귀에 콕콕 와 닿아 박혔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 말들을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의 말이 아니라 전보다 맛있는 소스를 만드는 것.
 
 우리만의 엣지가 살아 있는 소스로 JJ 푸드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맛을 어떻게 개선할지는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졌다.
 
 이제 이것을 실현하는 일만 남았다.
 
 민구는 토마토 페이스트 등 칼을 댈 필요가 없는 재료들은 미리 한곳에 정리해 두었고, 칼질이 필요한 양파 등의 채소류를 도마 옆에 두었다.
 
 텅―!
 
 민구가 양파 한 톨을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러자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한 데시벨 올라갔다.
 
 탁―
 
 탁―
 
 탁―
 
 그리고 민구의 칼질이 시작되자, 그 웅성거림은 작은 실소로 바뀌었다.
 
 “뭐야, 칼질도 제대로 못 하잖아?”
 
 “완전 거북이 걸음이야. 저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소스를 만든담?”
 
 “고 대리가 진짜 칼을 잡았어?”
 
 “어? 배 차장님?”
 
 그때, 웅성거리던 직원들 틈으로 배효상 차장이 비집고 들어왔다.
 
 “고 대리가 진짜 소스를 만들어 보겠대?”
 
 “네, 그런가 봐요. 근데 칼질 되게 못해요. 양파 한 톨 다지는 데 30분은 걸리겠어요.”
 
 “그렇겠지, 소스용 양파 다지는 크기 정하는 것도 다 과학인데.”
 
 그럼 그렇지, 고 대리 같은 요리 문외한이 제대로 할 리가 없······.
 
 “오잉?”
 
 그런데 그때, 허탈한 시선으로 민구의 도마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배효상 차장의 눈이 일순 동그랗게 커졌다.
 
 “뭐야, 저거······?”
 
 속도는 엄청나게 느리지만 양파를 다져 놓은 한 피스당 크기······.
 
 그것은 자신들이 십수 년간 시행착오를 거쳐 오며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다진 양파의 크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배효상 차장은 서서히 구경꾼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더니 이내 진지하게 민구의 요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 핵 존 맛!
 
 다진 양파의 크기는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마늘은 세 알이면 되겠고, 제품 소스에 생바질을 넣는 건 불가능하니까 분쇄한 건바질을 한 스푼 넣어야겠어.
 
 느리지만 정확하게.
 
 민구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레시피를 그려 가고 있었지만 역시 손이 느렸다.
 
 프라이팬을 잡는 모양새도 엉성했고, 요리하는 자세도 그러했다.
 
 모든 것이 어색해 죽겠는데 구경꾼은 왜 이리 많은지.
 
 민구는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애써 프라이팬 안에서 끓고 있는 소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젓고 또 저었다.
 
 “관건은 지금부터야.”
 
 민구의 오감으로 분석한 결과 배효상 차장들의 소스는 사람의 미각을 사로잡는 한 끗이 부족했다.
 
 과연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그것에 대한 대답을 지금의 민구는 가지고 있었다.
 
 송송송송―
 
 그가 도마 위에 무언가를 잔뜩 올리고 칼로 그것을 다져 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배효상 차장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페페론치노?”
 
 민구가 도마 위에서 썰고 있는 것이 이탈리아 매운 고추인 페페론치노라는 것을 효상은 금방 알아챘다.
 
 그러나 그 양이 생각보다 꽤 많기에 놀란 것이다.
 
 “설마 저걸 다 넣을 생각인 건가? 그럼 엄청 매울 텐데······.”
 
 배효상 차장은 민구의 요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 속에 저장했다.
 
 요리하는 자세나 속도는 완전 생초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 느껴지는 이 향이었다.
 
 전에 없던 토마토소스의 풍미 넘치는 향.
 
 아직 페페론치노 등의 몇 가지 재료를 넣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향이 너무 풍부해서 군침이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대체 고 대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알바라도 했었나?”
 
 하지만 단순 알바 경력이라고 보기엔 소스의 수준이 너무 높다.
 
 요리엔 서툰데 결과물은 향부터가 대단하다.
 
 배효상 차장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저 페페론치노는 양이 지나치게 많다.
 
 지난날 페페론치노 하나만으로 며칠을 골몰한 적이 있다.
 
 결론은 너무 많이 넣으면 맵고, 너무 적게 넣으면 밍밍하다는 것.
 
 토마토소스에 매콤한 풍미를 넣으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페페론치노의 양 조절이란 말이다.
 
 ***
 
 한편, 민구는 다져 놓은 재료 때문에 눈이 매워 죽을 지경이었다.
 
 “윽······ 눈물이 왜 이렇게 나는 거야······?”
 
 톡 쏘는 매운 기가 어찌나 센지 민구의 눈은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은 괴로운 반면 속으론 만족스러웠다.
 
 이토록 성능이 좋은 재료라면 원하는 맛에 더욱 가깝게 만들 수 있을 것.
 
 그가 다져 놓은 재료 전부를 소스 안으로 투하했다.
 
 “야, 고 대리! 그거 너무 많아!”
 
 “차장님?”
 
 그러자 지켜보던 배효상 차장이 저도 모르게 민구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에 깜짝 놀란 민구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잘 나가다가 왜 그래? 갑자기 그걸 왜 다 때려 넣어?”
 
 “아······ 그게······.”
 
 “얼른 다시 빼든지 해! 지금까진 괜찮았단 말이야.”
 
 “저, 그게······.”
 
 “뭐해, 고 대리?”
 
 “싫은데요.”
 
 “뭐······?”
 
 민구의 대답에 장중은 다시 술렁이게 되었다.
 
 웅성거림은 전보다 한층 더 커졌고, 배효상 차장은 멍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 대리가 미친 건가?
 
 회사에서 제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해서 진지한 줄 알았더니 다 장난이었던 거야?
 
 민구는 다시 소스 만들기에 열중했고, 배효상 차장은 낮은 탄식과 함께 허탈해졌다.
 
 “우와 냄새 죽이는데?”
 
 음?
 
 “그러게? 아까보다 훨씬 강렬하면서 알싸해졌어. 군침 도는데? 고 대리님이 완전한 파스타는 만들어 주지 않겠지?”
 
 뭐야······ 이거?
 
 배효상 차장의 주변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반응.
 
 깜짝 놀란 그가 민구의 소스가 뿜어내는 향에 잠시 집중했다.
 
 믿을 수 없어.
 
 페페론치노를 그렇게 많이 넣은 소스라면 기침이 나고 눈물만 날 텐데?
 
 킁킁.
 
 배효상 차장이 눈을 감고 향을 코로 들이마셨고.
 
 “마, 말도 안 돼······.”
 
 이내 그는 더 참을 수 없게 되어 민구의 소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미 그의 입 안에는 군침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
 
 “어떠세요?”
 
 민구는 소스를 만드는 김에 아예 파스타 한 그릇을 만들어 버렸다.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민구가 파스타 완전체를 완성하자 구경하던 직원들이 삼삼오오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단 물어볼게, 고 대리. 아까 페페론치노를 엄청 넣은 것 같은데 왜 소스에서 페페론치노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거지? 아니, 어떻게 이렇게 딱 좋게 알싸한 향이 나는 거야?”
 
 “페페론치노요?”
 
 “그래.”
 
 “차장님.”
 
 “그래, 말해 봐 얼른.”
 
 “저는 페페론치노를 넣지 않았는데요.”
 
 “뭐라고? 아까 넣는 거 분명히 봤어, 이거 왜 이래?”
 
 페페론치노를 넣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까 분명 도마 위에 쌓인 빨간 건고추를 보았단 말이다.
 
 “그게 사실 페페론치노처럼 보였던 것뿐이지 페페론치노는 아니었습니다.”
 
 “페페론치노가 아니다? 그럼 뭔데? 베트남 고추? 아니면 중국 고추?”
 
 “말린 청양고추요.”
 
 “청양고추?”
 
 배효상 차장이 잠시 민구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하 그래, 그러면 말이 된다.
 
 페페론치노보다 맵기는 덜 하지만 말려 놓은 고추의 향은 거의 비슷하다.
 
 다시 말해, 맵기는 일정하게 고정하고 향만 배가시킨 셈.
 
 자신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접근이었다.
 
 “제가 만든 이 토마토소스의 테마가 향이거든요. 보시기에 고추를 잔뜩 넣은 것 같아도 씨는 분리하고, 적당량만 넣었어요.”
 
 “향······ 향이라······.”
 
 “차장님의 소스 맛은 저도 인정해요. 재료 배합을 미세하게 조정만 해 주면 제품 소스로선 완벽에 가까운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 소스로 JJ 푸드를 설득하기엔 한 끗이 부족했거든요.”
 
 “그 한 끗이 바로 향.”
 
 “맞습니다.”
 
 민구는 배효상 차장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효상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떻게 아까처럼 서툰 요리 실력으로 이렇게 완벽한 향을 내는 소스를 만들었을까?
 
 안 먹어 봐도 그려진다.
 
 이 소스는 우리 마북식품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맛을 내는 소스임에 분명하다.
 
 “먹어 보나 마나겠네.”
 
 20년이 넘는 연구원 경력의 배효상 차장은 군말 없이 뒤돌아섰다.
 
 고민구의 소스를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보고 계시지만 마시고 드세요. 그리고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민구가 고통스럽게 군침만 흘리고 있던 장중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부탁하자 그들은 벌 떼처럼 그의 파스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거 완전 핵 존 맛!”
 
 ***
 
 [어떠세요, 이 소스?]
 
 [뭘 어때? 물으나 마나지. 우리 레시피와 재료는 거의 같아서 생산하는 데엔 아무 문제 없겠어. JJ 쪽에서 컨펌하면 바로 생산 들어갈게, 고 대리는 가서 까이지나 말고 돌아와.]
 
 다음 날 아침, JJ 푸드로 향하는 민구는 또 다른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마북식품의 소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개량할 수 있었지만 고추만을 바꾸는 쪽을 택한 건 배효상 차장 이하 연구원들의 자존심을 최소한으로 건드리기 위한 민구의 배려였다.
 
 개량된 레시피를 연구원들에게 전달하고 조금 더 발전시키는 작업이 꼬박 하루가 걸렸고, 오늘은 JJ 푸드와 약속한 3일째가 되는 날이다.
 
 이제 남은 일은 JJ 푸드 구매 팀 이재근 팀장을 설득하는 일.
 
 민구가 비장한 마음으로 액셀을 깊게 밟았다.
 
 “이 사람, 약속 하나는 칼이네?”
 
 오전 9시.
 
 JJ 푸드의 출근 시간에 맞춰 구매 팀에 등장한 민구를 향해 이재근 팀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영업 사원은 신뢰가 생명인 거 아시잖습니까?”
 
 “호오, 자신만만한 표정인데? 소스에 꽤 자신이 있나 봅니다?”
 
 “그거야 드셔 보시면 아실 거고요.”
 
 민구가 이재근 팀장의 뒤를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미리 와 있던 구매 팀 팀원들이 때 이른 민구의 등장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중 제일 놀란 것은 구매 팀 진창기 과장이었다.
 
 중국에서 오랜 수련을 거쳐 완성한 절대 미각을 가진 사나이.
 
 JJ 레스토랑 사업부의 총괄 셰프인 리카르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보물 중의 보물.
 
 그는 민구가 3일 안에 자신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소스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었다.
 
 한데 3일째가 되자마자 출근 시간에 등장이라는 건 사실 좀 놀라웠다.
 
 “진 과장, 회의실로 따라와. 고 대리도 따라와요.”
 
 “넵!”
 
 “네, 팀장님.”
 
 대체 어떻게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지?
 
 납품을 포기한 건가?
 
 아니면 실성을 했나?
 
 진창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냉정하고 신랄하게 소스 맛을 평가할 것이라고 내심 굳게 다짐했다.
 
 잠시 후, JJ 푸드 구매 팀 회의실에 이재근 팀장과 진창기 과장이 민구를 마주했다.
 
 그들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는 스테인리스 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구매 팀, 하나는 리카르도 셰프님 몫입니다.”
 
 “거참 희한하네. 고 대리가 원래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나요? 내가 아는 고 대리는 지금보다는 살짝······ 위축되어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이재근 팀장은 일단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민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감 넘치는 것이 당연하다.
 
 20년이 넘는 경력의 연구원이 말 한마디 보태지 않고, 자신의 레시피를 인정했다.
 
 자존심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효상 차장이 그랬단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능력, 신의 오감 제1성의 단계는 진짜 중의 진짜다.
 
 맛에 관해선 지금의 내가 일반 사람보다 월등히 앞선 감각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소스 맛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다른 건 없습니다.”
 
 말해야 믿지도 않을 테니 말이죠.
 
 “대단하네. 이거 고 대리가 그러니까 더 기대가 되잖아? 안 그래 진과장?”
 
 “그러네요.”
 
 진창기는 특유의 째진 눈매로 민구를 관찰 중이었다.
 
 어디 맛없기만 해 봐라.
 
 어느 한군데 빈틈만 보여도 파고들어 네 레시피를 찢어 버릴 테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민구가 거두절미하자는 듯 더 이상의 대화를 사양하며 소스를 권했다.
 
 이재근 팀장과 진창기 과장은 앞에 놓인 스푼으로 민구가 내민 소스를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두근두근.
 
 그러자 민구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과연 어떻게 될까?
 
 만족할까?
 
 납품에 성공할까?
 
 나는 회사에서 무사히 승진할 수 있을까?
 
 “······.”
 
 “······.”
 
 왜 말이 없지?
 
 민구는 소스 맛을 본 후로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이재근 팀장은 소스를 입 안에서 굴리며 한참 생각에 잠겼고, 진창기 과장은 곧바로 스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 어떠십니까?”
 
 기다리다 못해 민구가 물었다.
 
 “음, 글쎄······ 진 과장은 어때?”
 
 “글쎄요.”
 
 두 사람이 잠시 혼란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글쎄’라는 표현은 물건이 마음에 들 때 주고받는 둘만의 신호였다.
 
 사실 이재근 부장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전의 소스도 맛은 괜찮았지만 모자란 한 끗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것은 자신이 그려 왔던 가장 이상적인 토마토소스 그 자체였다.
 
 아니, 오히려 그 위를 웃도는 감칠맛이 도사린 무서운 소스였다.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네?”
 
 그때, 진창기 과장이 민구에게 물었다.
 
 “이 소스, 시간이 짧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바뀐 거냔 말입니다.”
 
 “아, 그게······ 원래 저희 마북식품 연구원들이 열심히 일합니다.”
 
 “그게 아닐 텐데······.”
 
 분명 맛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지휘한 것이 분명하다.
 
 진창기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 3일 만에 맛의 균형과 그중 매콤한 향을 엣지로 내세운 개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자신과 견줄 만한 수준의 미각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반면, 민구는 살짝 안도했다.
 
 전엔 마북식품 소스에 관심이 하나도 없던 사람들이 소스를 앞에 두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이 소스가 마음에 든다는 것.
 
 일단 첫 번째 펀치는 먹혀들어 갔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소스 맛은 잘 봤어요. 납품 문제는 차후에 연락드리는 거로 하죠.”
 
 이재근 팀장은 서둘러 미팅을 마무리했다.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얼른 현재 얘기가 오가는 타 식품 회사와의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했고, 총괄 셰프인 리카르도에게 이 소스 맛을 보여야 했다.
 
 진창기가 이 정도 반응을 보인 것은 구매 팀 입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을 빠르게 진행하여 이 소스를 확보해야 한다.
 
 “잠시만요, 팀장님.”
 
 “네?”
 
 미팅을 마무리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재근 팀장을 민구가 잠시 붙잡았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만일 저희가 소스를 납품하게 된다면 납품 단가를 조금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납품 단가 조정을?”
 
 “네.”
 
 이재근 팀장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필 단가 얘기다.
 
 사실 이 가격에 이 맛이면 가성비가 국내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맛이었다.
 
 “설마 여기서 더 깎는 건 아닐 거고.”
 
 “그렇습니다.”
 
 “얼마나 올리려고요?”
 
 “지금의 두 배로요.”
 
 “뭐라고요?!”
 
 이재근 팀장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가격이라고 바로 판단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 소스의 맛과 가격을 저울질해 보았다.
 
 아무리 소스가 맛있어도 두 배는 너무 갔다.
 
 기존의 1.5배 정도가 JJ 푸드 예산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구가 애초에 생각했던 가격 인상 계획과 정확히 일치하는 수치였다.
 
 
 # 행복
 
 “What the f······? 두 배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JJ 푸드 본사 내의 총괄 셰프실, 그 방의 주인인 리카르도와 구매 팀 이재근 팀장이 마주했다.
 
 리카르도는 이탈리아 교포 출신의 셰프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인 쟝 피에르에서 10년간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스타 셰프였다.
 
 큰 키에 샤프한 인상을 지닌 그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말이 안 되죠, 사실.”
 
 “이 팀장도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이 소스는 왜 가져온 겁니까? 그냥 이 팀장 선에서 리젝트해 버리면 될 것을.”
 
 “저, 그게 말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이 소스 맛을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가져와 봤습니다.”
 
 “맛을 봐라? 내가?”
 
 “네.”
 
 이재근 팀장이 숙연하게 대답하자 리카르도의 목소리도 따라서 점차 차분해졌다.
 
 직접 맛을 본다?
 
 JJ 푸드가 론칭하는 모든 레스토랑의 요리를 컨펌하는 위치에 있는 리카르도 자신에게 직접 맛을 보인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니었다.
 
 “당연히 진창기도 맛을 봤겠죠?”
 
 “그럼요. 진 과장도 셰프님께 직접 결정케 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절대 미각을 가진 진창기 과장.
 
 그가 맛을 보고 자신에게 가져올 정도면 이 소스가 보통은 아니라는 거다.
 
 현재 비딩(Bidding) 중인 소스 납품 업체의 가격 중 가장 낮은 것의 두 배.
 
 가격만 놓고 본다면 마북식품은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이다.
 
 그 말인즉,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리카르도는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했고, 서서히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뭐.”
 
 리카르도가 샘플 용기를 집어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맛없기만 해 봐라.
 
 이재근 팀장이고 절대 미각 진창기고 간에 자신의 시간을 빼앗은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어?”
 
 그런데.
 
 그런 다짐도 잠시, 열린 소스 용기에서 흘러나오는 토마토소스의 향기가 리카르도의 의식을 순간 멎게 만들었다.
 
 “이거 뭐지?”
 
 리카르도는 지난 날 유수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한 바 있었다.
 
 전 세계의 유명한 미식가란 미식가들은 다 만나 보았고, 때때로 그들의 극찬을 이끌어낸 적도 있다.
 
 한 마디로 경험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
 
 그런데 그 경험이 오작동을 일으켰는지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소스, 물건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단지 식품 회사에서 찍어 내는 양산형 소스일 뿐인데 어째서 이런 위화감이 드는 것일까?
 
 단지 향만으로 어떻게 이런 강렬한 느낌을 주는 거지?
 
 후릅―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리카르도의 입으로 마북식품, 아니 고민구의 소스가 흘러 들어갔다.
 
 “헉······?!”
 
 “역시.”
 
 리카르도는 경험이 풍부한 만큼 맛에 관해서도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좋은 물건은 전문가가 바라봤을 때 숨어 있는 세밀한 가치가 살아나는 법.
 
 그는 이 소스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게 정말 마북식품에서 만든 소스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물론 양산하게 되면 이것보다는 임팩트가 덜해질 겁니다. 레시피를 보여 드릴 요량으로 소량만 만들어 온 거니까요.”
 
 “누가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이재근 팀장이 놀란 눈으로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누가 만들었냐고요, 이 소스.”
 
 “글쎄요, 문의해 보겠습니다.”
 
 “일개 중소 식품 회사가 이 정도 소스를 만든다는 게 놀랍군요. 그쪽 연구원들 중 엄청난 실력자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마북식품? 들어 본 적 있는 것도 같은데 이렇게 머릿속에, 혀 속에 각인되긴 처음이네요.”
 
 “그 정돕니까?”
 
 “이 소스면 특별히 뭔가를 추가할 것도 없이 면과 볶아서 내기만 하면 끝입니다. 그 말이 뭘 뜻하는 줄 알죠?”
 
 “누구나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비싼 셰프들 고용하지 않아도 맛있는 파스타집을 붕어빵 찍듯 찍어 낼 수 있다는 말이죠.”
 
 무서운 사람.
 
 소스 맛에 감탄하는 줄만 알았더니 어느새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다니.
 
 이재근 부장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리카르도는 요리도 요리지만 레스토랑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는 데 귀재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싼 인력.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보이는 인테리어.
 
 가맹 점주들의 이익을 줄일 수 있을 데까지 줄이고, 장사가 잘되는 지역에 똑같은 매장을 빼곡히 채워 넣는 방식.
 
 그로 인해 JJ 푸드가 얻는 수익은 실로 엄청났다.
 
 그렇기에 이 소스의 단가가 두 배나 오르더라도 그의 입장에선 이익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스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두 배 올린 가격 그대로 인정하실 겁니까?”
 
 “그건, 글쎄요.”
 
 ***
 
 다음 날, 민구는 본사로 출근했다.
 
 며칠 내내 공장에만 붙어 있었더니 책상 위에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물티슈 몇 장을 빼 책상과 집기류들을 닦는 그에게 간이소 부장이 다가왔다.
 
 “고 대리,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어떻게 됐어?”
 
 “연락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가격을 두 배나 뻥튀기한 건 좀 무모한 거 아니야? 아니면 입찰을 포기한 거야?”
 
 “그럴 리가요. 두 배면 그쪽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가격입니다. 소스의 질을 생각한다면요.”
 
 “그래? 뭐, 알았어. 결과에 책임은 고 대리가 지는 거니까.”
 
 “······.”
 
 간이소 부장의 말에 민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휘파람을 돌며 사무실 순회를 시작했고, 민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슬쩍 발을 빼는 걸까?
 
 평소 같았으면 승진을 하네 못 하네 하며 노발대발해야 했는데 오늘은 반응이 영 미지근하다.
 
 책임은 내가 진다고?
 
 그건 또 무슨 가슴에 쐐기 박는 소리지?
 
 언제는 책임을 지지 않았었나?
 
 잘되면 제 공, 안 되면 내 탓.
 
 언제나 그렇게 해 온 회사 생활 아니었던가?
 
 오늘따라 간이소 부장의 휘파람 소리가 왜 이리도 찝찝한 걸까?
 
 지잉―
 
 그때, 민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
 
 발신자는 JJ 푸드의 이재근 부장이었다.
 
 “네, 부장님!”
 
 좋은 예감.
 
 민구가 환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나 이재근입니다.]
 
 “압니다 부장님.”
 
 그럼 어서 할 말을 하시지요.
 
 [결론부터 말하죠, 우리 총괄 셰프께서 거기 소스가 마음에 든다네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아아, 감사는 이르고. 가격이 좀 걸려서 말이죠.]
 
 “가격이요?”
 
 최초 입찰가의 딱 두 배를 불렀었다.
 
 과연 그들은 얼마까지 깎으려고 할까?
 
 처음 예상대로 1.5배?
 
 아니면 1.2배나 1.3배?
 
 [두 배 말고 1.7배로 하는 거 어떻습니까?]
 
 “1.7배 말입니까?”
 
 오, 마이, 갓.
 
 민구는 1.7배란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애초에 생각했던 1.5배를 웃도는 숫자.
 
 이 정도면 이 소스 하나의 마진율이 40%가 넘게 된다.
 
 [너무 적습니까?]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쪽 담당자와 조율 후에 전화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우리 시간 없습니다. 빨리 연락 줘요.]
 
 그럼요, 빨리 드려야죠.
 
 민구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민구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단 회의 들어갔다가 협의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아, 참 그런데.]
 
 “네?”
 
 [우리 총괄 셰프님이 그 소스를 만든 직원과 면담을 하고 싶어 하시는데.]
 
 “며, 면담이요?”
 
 [스카우트 제의 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은 말고, 앞으로 JJ 푸드 전용 소스 맛 조율도 할 겸 한번 보자십니다.]
 
 “아······ 네······ 그, 그렇게 하시죠.”
 
 [그럼 연락 줘요. 끊습니다.]
 
 이재근 부장은 바로 전화를 끊었고, 민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팍 하고 내쉬며 휴대폰을 쥔 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고 대리, 뭐야? 무슨 일이야?”
 
 “대리님, 왜 그러세요?”
 
 주위에 모인 동료 직원들이 물었다.
 
 민구는 가쁜 호흡과 함께 그들을 둘러보며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됐어.”
 
 “뭐가요?”
 
 “JJ 푸드 소스 납품 성공했다고! 그것도 마진율 40%로!”
 
 “헐, 진짜요?”
 
 “대박, 40%? 진짜?”
 
 “미쳤다 고 대리, 개대박이네.”
 
 “내가······ 내가 해냈다!”
 
 민구가 천정을 뚫을 기세로 허공을 향해 어퍼컷을 쏘아 올렸다.
 
 ***
 
 밤이 되었고, 민구는 납품 성공 기념 회식 후 술에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윤공 선생님.”
 
 [거 술 취했으면 곱게 잠이나 잘 것이지 날 왜 부르느냐?]
 
 “선생님.”
 
 [왜? 왜 부르는데?]
 
 “감사합니다.”
 
 [참 나. 겨우 그 말 하려고 불렀냐?]
 
 “정말, 진심으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30년 넘게 살면서 이렇게 짜릿한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제 능력으로 인정받는다는 거. 그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는지 미처 몰랐어요.”
 
 [겨우 1성에 진입한 것 가지고 너무 감동받는 것 아니냐? 네가 실력을 갈고닦으면 그 위로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
 
 “1성만으로 벌써 한 건 했습니다. 더 대단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니 너무 흥분되고 신이 나요.”
 
 [순진한 녀석 같으니. 자만하지 말거라. 네가 아무리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후손이라도 자만하는 꼴은 못 본다.]
 
 “그럼요, 명심하겠습니다.”
 
 민구가 침대 위로 흐느적거리던 몸을 던졌다.
 
 불을 끄지 않았지만 그대로 자도 좋았다.
 
 넥타이가 목을 갑갑하게 했지만 그래도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행복.
 
 납품에 성공한 것이 행복하기보다 자신이 세상을 향해 조금은 고개를 든 것 같아 그게 좋았다.
 
 “저, 선생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해 보거라.]
 
 “제 능력이 1성의 단계라고 하셨는데, 신의 오감은 몇 성의 단계까지 존재합니까?”
 
 [그건 나도 궁금했지만 나에게 능력을 전수했던 선생께서도 몰랐다. 그러니 나도 모를 수밖에.]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선생님께선 몇 성의 단계까지 오르셨었습니까?”
 
 [예끼 이놈. 그리 중요한 질문을 빨리도 하는구나.]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서 그랬습니다.”
 
 [나 윤공, 임금의 총애를 받던 숙수이자 청나라 요리계를 쥐락펴락했던 전설적인 요리꾼. 나는 신의 오감 제10성의 단계까지 올랐었다.]
 
 “아니 뭐 그렇게 이력을 읊으실 것까지야······ 그런데 10성의 단계라니 그 경지에 오르면 무엇이 보이게 될지 궁금합니다.”
 
 [10성에 오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맛은 전부 네 손끝으로 창조해 낼 수 있다.]
 
 “그럼 11성의 단계도 있을까요?”
 
 [내가 모셨던 선생께선 8성의 단계에서 임종하셨다. 그 전대에서도 11성은 들어 본 적이 없지. 그래서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아느냐? 11성에 오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맛을 창조할 수 있을지.]
 
 “꿈 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하고, 어쨌든 오늘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됐다 이놈. 아무튼 말이다. 내가 소싯적엔 정말 날고 기었다. 임금께서 처음 내 요리를 드셨을 때 그 표정을 아직 잊을 수가 없지······.]
 
 “······.”
 
 [그때 그 표정이······.]
 
 “······.”
 
 [서, 설마 자는 게냐?]
 
 “······.”
 
 [에라이 무심한 놈 같으니. 제 할 말만 쏙 해 놓고 자 버리면 난 무료해서 어찌하라고? 쯧쯧쯧.]
 
 윤공은 실망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의 톤은 격앙되어 있었다.
 
 1성의 단계에 입성하자마자 그 능력을 제 나름대로 이용하여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단 이틀 만의 일이다.
 
 [신의 오감의 단계들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5성의 단계까진 달성이 빠르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윤공이 5성을 달성하기까지 불과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10성의 단계까지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네 응용력이 좋은 점을 인정하여 내 너에게 2성의 단계를 선물하마. 네놈이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럼 이만.]
 
 윤공의 목소리는 약속한 하루 10분을 머물다 이내 사라졌다.
 
 살짝 웃는 듯한 표정의 민구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깊게 잠에 드는 것이 얼마 만일까?
 
 세상 후련한 기분으로 드는 잠은 그에게 꿀맛 그 자체였다.
 
 ***
 
 하지만 다음 날.
 
 민구는 자신을 깨우는 전화 한 통을 받고 나서 잠시간의 행복감을 고스란히 날려 버려야 했다.
 
 “당장 회사로 갈게.”
 
 어젯밤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어두워진 표정의 그가 빠르게 옷을 챙겨 입고 회사로 향하기 시작했다.
 
 
 
 # 벌써 2성의 단계까지?
 
 출근 시간인 아침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민구가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고, 고 대리님······.”
 
 그 모습을 제일 먼저 확인한 기소연 대리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민구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기 대리 잠깐만. 먼저 부장님하고 할 말이 있어.”
 
 “고 대리님······.”
 
 “괜찮아. 잠깐만.”
 
 민구는 자신의 어깨에 올린 기 대리의 손을 뿌리치고서 간이소 부장의 방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이어서 그 모습을 확인한 다른 직원들도 반쯤 몸을 일으키며 탄식을 했다.
 
 “말도 안 되지. 그럼, 말도 안 돼.”
 
 “고 대리님 진짜 어떡해요? 기대 많이 하셨을 텐데.”
 
 “어떡하긴 어떡해. 뭐 별수 있어? 까라면 까는 거고 말라면 마는 거지.”
 
 쾅―!
 
 마침내 민구가 간이소 부장의 방문을 닫고 나자 직원들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은 하나였다.
 
 결국 사회생활은 인맥이다.
 
 학연, 지연, 혈연.
 
 그중에 하나라도 가진 나는 행운아라고 말이다.
 
 ***
 
 “부장님.”
 
 “어, 고 대리.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간이소 부장이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자동차 잡지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민구를 무심히 맞이했다.
 
 민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왜 승진에서 누락된 거죠? 왜 저 대신 2팀 장 대리가 명단에 올라 있는 거죠?”
 
 “거, 거,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일단 앉아 봐.”
 
 “······.”
 
 민구가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간이소 부장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응접용 소파로 향했다.
 
 민구는 오늘 아침 정운혁 사원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승진 명단이 기습적으로 발표되었는데 과장 승진자 명단에 민구의 이름 대신 국내 영업 2팀 장제훈 대리가 올라 있다는 것이다.
 
 장제훈 대리는 여기 앞에 앉은 간이소 부장이나 영업부 서도철 상무와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가 식약청 고위직에 있다는 소문까지.
 
 그러나 민구의 실적은 JJ 푸드 토마토소스 납품에 성공하며 장제훈 대리를 월등히 앞선 상황이었다.
 
 이것은 누가 봐도 학연 등에 의한 불합리한 인사.
 
 민구는 화가 치밀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회사로 달려왔다.
 
 “말씀해 보세요, 제가 왜 승진하지 못했습니까? 제가 장제훈 대리보다 성과가 부족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 납품 건으로 회사에 기여한 매출이 얼만데요?”
 
 “알지, 알지. 그거야 나도 잘 알지. 하지만 나도 일개 부장이야. 상무님 뜻이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게다가 자네가 일으킨 이번 매출이 일시적일지도 모르는 거고.”
 
 “말도 안 됩니다. 일시적이어도 그거 1년 계약입니다. 미니멈 30억짜리라고요.”
 
 “글쎄, 그건 가 봐야 아는 거고.”
 
 “부장님!”
 
 민구가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
 
 간이소 부장이 간혹 자신을 멸시하는 말을 했을 때 살짝 흥분하는 정도가 전부였던 민구였다.
 
 이토록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처음이라 간이소 부장은 살짝 놀라 앉은 채로 몸을 뒤로 살짝 뺐다.
 
 “거, 좀 기다려 봐! 내가 다음 인사 때는 무조건 고 대리 밀어줄게. 상무님 뜻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잖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 못 하면? 못 하면 어쩔 건데?”
 
 “글쎄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번 JJ 건 같은 거 하나만 더 물어 와. 그럼 또 알아? 특별 승진 같은 거라도 하게 될지?”
 
 “······.”
 
 민구는 울화가 치밀었다.
 
 이건 백 프로 학연이다.
 
 아니면 소문대로 장제훈 대리의 아버지가 끗발 있는 공직자라는 게 사실이던가.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더 화가 났다.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 보던가.”
 
 “부장님.”
 
 “왜.”
 
 “제가 JJ 건 따낸 게 우연 같으시죠?”
 
 “뭐? 글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죠?”
 
 “자네? 자네야 고민구 대리지.”
 
 그렇죠, 고민구 대리.
 
 당신의 밥이자 심부름꾼이자 항상 빌빌대기만 하던 천덕꾸러기.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무슨 후회? 내가? 왜?”
 
 “예전의 제가 아니니까요.”
 
 말을 마친 민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상 외로 강하게 나오는 민구의 모습에 위축된 간이소 부장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이고 무서워라. 고 대리가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눈이라도 깜빡할 줄 알아? 웃기지 마. 나 부장이야. 조금 미안한 게 있어서 받아 줬더니 아주 끝을 모르고 기어올라? 당장 가서 일이나 해!”
 
 “······.”
 
 민구는 간이소 부장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속에 어렴풋이 했던 생각 하나를 구체화하게 되었다.
 
 ‘과연 신의 오감을 마북식품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옳을까?’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이 지금 도출되었다.
 
 “옳지 않아요, 부장님.”
 
 “뭐? 지금 뭐라는 거야?”
 
 “이 회사에겐 제 능력이 너무 과분하단 말입니다.”
 
 민구는 두 번 돌아보지 않고, 간이소 부장의 방을 나와 버렸다.
 
 ***
 
 퇴근 시간이 지난 초저녁.
 
 국내 영업 팀 고민구 패밀리들이 단골 곱창집에 모여 앉았다.
 
 박병기 과장, 기소연 대리, 정운혁 사원.
 
 이들과 모일 때면 언제나 시끌벅적 즐거웠지만 오늘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심각한 표정의 민구를 필두로 모두가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도철 상무가 요즘 식약청 사람들하고 마찰이 잦잖아요. 근데 장제훈 대리 아버지가 식약청 고위급 인사래요. 며칠 전, 그걸 안 서 상무가 기습 승진 발표를 뙇! 나쁜 새끼.”
 
 기소연 대리가 상스러운 욕까지 해 가며 민구를 위로했다.
 
 박병기 과장이나 정운혁 사원도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이놈의 사회는 아직도 연줄로 돌아간다.
 
 더러운 세상.
 
 그중에서도 마북식품은 그런 더러운 짓들을 일삼는 꼰대들의 집합소다.
 
 “솔직히 고 대리가 이번 납품 따내면서 스포트라이트도 꽤 받았잖아. 잘될 줄 알았는데, 아쉽다.”
 
 “괜찮아요, 과장님. 위로 고맙습니다.”
 
 “그냥 하는 위로는 아니고. 공장 사람들이 이번 주 내내 고 대리 얘기밖에 안 하더라고. 고 대리가 요리 금손이라나 뭐라나? 그 소스 고 대리 레시피라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배효상 차장님 레시피를 살짝 손만 본 거예요. 제가 무슨 장금인가요? JJ를 홀릴 만한 소스를 하루 만에 만들게?”
 
 물론 장금이 비슷······ 한 사람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창작물은 명백히 아니다.
 
 “아니던데, 요리 엄청 잘한다고 하던데.”
 
 “그냥 미튜브에서 본 거 따라 한 거예요.”
 
 “그래?”
 
 “미튜브가 또 간접 경험 하기엔 엄청 좋잖아요. 좋은 영상 많아요.”
 
 민구가 대충 둘러대는 사이 테이블 위엔 주문한 곱창 한 판이 세팅되었다.
 
 지글거리는 곱창 밖으로 녹진한 곱이 흘러나왔다.
 
 곱창 기름 특유의 진한 향이 네 사람의 코를 부드럽게 감쌌다.
 
 곱창 주변으로 놓인 염통구이에선 아주 신선하게 응축된 소고기의 향이 톡 하고 작게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일단 먹자. 먹고 마시고 힘내서 다음 승진 기회를 노려보자고.”
 
 “그래요, 고 대리님. 우리 파이팅해요.”
 
 “자, 그럼 짠 할까요?”
 
 민구는 세 사람의 적극적인 위로에 서서히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회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화가 가라앉은 것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의 소주잔이 공중에서 부딪혔고, 이내 비워진 잔을 내려놓은 네 사람이 일제히 곱창을 집어 소스에 담갔다.
 
 “그래도 우리, 단골이라고 양도 많이 주셨네. 하여튼 이 집이 전국에서 곱창 맛으론 1등이라니까?”
 
 “그래요? 저는 교대역 근처에 대교곱창하고 여기가 톱 투요.”
 
 “어? 신촌 왕소곱창은요? 왜 거기 빼 놓으세요?”
 
 그때, 대화의 주제가 갑자기 곱창집 랭킹 다툼으로 바뀌었다.
 
 민구는 나름 영업 사원 생활을 하며 다양한 회식 메뉴를 먹어 본 경험이 있었다.
 
 이곳이야 뭐 법인 카드발로 자주 오긴 했고, 나머지들도 거래처 접대를 위해 가 보았던 곳이다.
 
 그런데 그때, 민구의 머릿속에서 마치 흩어진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는 것처럼 다양한 생각 조각들이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 생각 조각들의 정체는 바로 맛.
 
 그중에서도 곱창 맛에 관한 것들이었다.
 
 “근데 곱창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 우열을 가리기가 진짜 힘들긴 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과장님?”
 
 박병기 과장이 의미 없는 대화를 갈무리하기 위해 꺼낸 말에 민구가 끼어들었다.
 
 “응? 내가 뭘?”
 
 “대교곱창, 왕소곱창, 그리고 여기 강서곱창 세 군데만 놓고 보자면 대교가 우세하죠.”
 
 “에이, 고 대리까지 왜 그래? 곱창 맛에 어떻게 우열을 가리는데? 대교곱창을 가 보진 못했어도 뻔한 비디오야.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글쎄요, 대교는 1년 이상 간수를 뺀 신안 천일염으로 곱창 간을 하고 향이 깊은 조선간장으로 소스를 만들거든요. 근데 여기는 식품 회사에서 나오는 기성 소금과 기성 간장을 써요. 그리고 이 염통의 두께도 대교 쪽이 0.7mm 정도 두껍고요.”
 
 “0.7mm 두꺼운 걸 고 대리가 어떻게 아는데?”
 
 “그냥요, 먹어 보니까 식감이 그렇던데요?”
 
 어?
 
 그러고 보니 오늘 이 곱창 맛을 보며 도드라지는 감각이 바로 촉각이다.
 
 미각과 후각도 어제보다 더 정교해진 느낌이었지만 촉각으로 고기의 익기 전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신의 오감이 점점 내게 익숙해지는 것일까?
 
 “아이고, 우리 고 대리 허풍 장난 아니다. 먹어 본 식감만으로 고기 두께를 맞춘다고? 무슨 신 내렸어? 아니면 고 대리 마장동 출신이야?”
 
 “근데 확실히 그쪽 염통이 더 탱글탱글하긴 해요. 소스 맛도 더 깊고.”
 
 이중 민구와 함께 대교곱창을 경험해 본 기소연 대리가 민구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민구가 곱창 순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소금, 간장, 고기 써는 방식. 그 차이로 약간 대교가 우세한 거로 결론 내겠습니다. 사실 고기는 둘 다 경북산 한우 곱창에 충청도산 부추를 쓰거든요. 재료의 질엔 차이가 없다는 뜻이죠.”
 
 “이거 누가 보면 대단한 미식가 납신 줄 알겠는데? 대교곱창 사장님이랑 친분이 있나 봐? 어떻게 그런 걸 세세하게 다 알아?”
 
 “그러게요? 나도 그것까진 몰랐네?”
 
 이번엔 기소연 대리도 궁금한 표정이 되었다.
 
 왜 자신이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민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불러야 하는 사람이 있다.
 
 ‘윤공 선생님······.’
 
 민구는 집으로 돌아가 그를 불러도 되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각들이 살아 펄떡이는 생선처럼 생생하여 이 감각의 근원이 너무도 궁금했다.
 
 [이젠 이런 시전통 주막거리에서까지 날 부르는구나, 무례한 놈.]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어제보다 제 감각들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아서요. 심지어 과거에 먹었던 기억들까지도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이런, 쯧쯧. 내 어제 네게 일러 주고 물러났거늘. 술에 취에 잠만 퍼 자느라 듣지 못한 거지!]
 
 ‘저, 정말요? 뭔가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에라이 한심한 종자 같으니. 내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해야 하는 거냐? 아이고 귀찮아라. 아이고 부산스러워라!]
 
 ‘어차피 별로 하실 일도 없으면서······.’
 
 [뭐라? 네놈 지금 뭐라 했느냐?!]
 
 ‘아, 아닙니다, 선생님. 저, 근데 너무 죄송하지만 어제 제게 했던 말이 무엇인지 딱 한 번만 더 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쯧쯧. 어쩌다 이런 놈이 내 후손으로 나오게 되었는고! 이놈아, 2성이다 2성. 내 네놈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2성의 능력을 주었다! 어찌 하루 만에 날 실망시키느냐?]
 
 ‘2······ 2성이요? 신의 오감 제2성의 능력 말입니까······?’
 
 [출셋길에 눈이 멀어 헐레벌떡 달려갈 때부터 2성을 준 걸 후회했다.]
 
 ‘눈이 멀다니요. 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원하는 것뿐입니다. 맹세코 돈에 눈이 먼 그런 놈 아닙니다, 저.’
 
 [그걸 내가 어떻게 믿느냐?]
 
 ‘선생님의 후손이지 않습니까?’
 
 [뭐라?]
 
 ‘선생님이 피를 물려받은 후손입니다. 그럼 아실 거 아닙니까? 제가 그럴 놈 아니라는 거.’
 
 [이놈이 뚫린 주둥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민구와 윤공은 잠시간의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출셋길 논란을 마무리 지었다.
 
 그사이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이 다시 한번 잔을 나누었다.
 
 ‘어쨌든 2성의 능력을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한데 2성으로 올라가고 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건 네가 방금 한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네? 제가 한 말 속에 들어 있다고요?’
 
 [그래. 신의 오감 제2성의 단계에 오르면 맛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력이 생기게 된다. 과거에 먹어 본 경험이 있는 맛도 생생히 떠오르게 되지.]
 
 ‘아아, 그래서 제가 지금 예전에 먹었던 음식과 지금 먹는 음식을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었던 거군요?’
 
 [맞다. 2성의 단계가 네게 주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바로 맛을 비교하는 능력이다.]
 
 ‘맛을 비교하는 능력이요······?’
 
 [무엇이 더 맛있고, 무엇이 덜 맛있는지. 혹여 악의를 품은 요리사가 먹는 이를 농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선의를 품은 요리사가 재야에 묻혀 빛이 바래고 있진 않은지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 너를 기특하게 여겨 2성을 주었다. 그 능력을 결코 허튼 곳에 허비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고 대리.”
 
 “······.”
 
 “야, 고 대리.”
 
 “······네? 네, 과장님.”
 
 민구는 박병기 과장이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윤공과의 대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곱창 생각하는 거야?”
 
 “아, 아니요. 죄송해요.”
 
 “죄송이고 나발이고 방금 내가 한 말에 동의하지?”
 
 “말이요? 아, 네······.”
 
 민구는 박병기 과장의 말을 듣지 못했으나 대충 얼버무렸다.
 
 “자, 다 들은 거다. 내일 저녁 7시에 이 멤버 그대로 교대 앞 대교곱창에 모이는 거야 알았지?”
 
 “예썰.”
 
 오잉?
 
 이대로 대교곱창에 모인다고?
 
 왜?
 
 “좋았어, 곱창값 플러스 10만 원 빵. 고 대리도 동의한 거니까, 내일 가서 고 대리가 했던 말이 틀리면 곱창값도 계산하고 10만 원도 줘야 해.”
 
 “네에?! 자, 잠시만요 과장님. 넷이서 곱창 먹으면 10만 원은 훌쩍 넘을 텐데. 게다가 과장님 말술이잖아요······?!”
 
 “얼래? 좀 전에 그 미식가는 어디로 갔어? 몰라, 이미 고 대리도 동의했어. 내일은 법카 반납해야 해서 내기 지는 사람이 독박이라고.”
 
 아니,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내기를 제안하는 거야?
 
 박병기 과장은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아닌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민구는 이미 달아오른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내기에 수긍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박병기 과장이 이런 실없는 내기를 왜······?
 
 “음······?”
 
 그 순간, 잠시 민구가 박병기 과장의 표정을 보았을 때 잠시 스치는 그림자.
 
 일순 표정이 어둡게 변하는 박병기 과장 또한 이 내기가 유쾌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기를 제안한 것은 과장님이 분명하다.
 
 대체 왜일까?
 
 그는 내기에 걸린 돈 말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의 미각』 1-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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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참돔얻어서..해물탕 해 먹고 행복해 하다가...억울해지는 고구마 주인공이네.;;
2020.03.05 23:12
tonic    
ㅎㅎ하ㅊㅊ차
2020.03.17 22:01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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