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무신탄생 [E](종료230808)

무신탄생 1-1권

2019.11.07 조회 4,338 추천 27


 # 여긴 어디?
 
 뭔 소릴까······?
 
 채애앵! 채앵!
 챙! 챙! 챙! 챙!
 
 끊임없이 부딪치는 병장기들의 시끄러운 쇳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다.
 아, 레이드 중이었지.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게도 살았나 보다.
 근데 이 끔찍한 두통과 근육통은 뭘까?
 살아남은 대가?
 뭐가 됐든 일단 일어나자.
 일어나서 상황파악부터······!
 
 ‘으아아악 씨발!’
 
 기껏 살아남았는데 심장마비로 갈 뻔했다. 눈을 뜬 순간 눈앞에 보인 게 두 눈을 부릅뜬 채 혀를 내민 피범벅의 사내였기 때문. 나는 헌터다. 그렇기에 피 냄새는 질리도록 맡아 봤고 죽음도 수없이 봐 왔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시체가 확실했다.
 대체 왜 나는 시체가 가득 담긴 수레에 실려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런 누더기를 입고 있는 건지도 도무지 모르겠다.
 그나마 사지는 멀쩡히 붙어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길드원들도 몬스터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보이는 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들며,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흩뿌려 대는 이들뿐.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느껴지는 모든 게 지나치게 생생하다.
 지옥일까? 살아 있음이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도저히 판단이 안 섰다.
 확실한 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란 것.
 도무지 이 빌어먹을 두통과 근육통 때문에 집중이 안 되니 꽝인 몸 상태부터 회복하고 생각해야겠다.
 
 ‘리커버리.’
 
 응?
 
 ‘리커버리!’
 
 아무런 변화가 없다.
 느낌이 싸하다.
 지금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상태창! 상태차아아아앙!!!’
 
 씨바아아아알!
 침착하자, 씨발. 침착해.
 한정우 침착하라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해.
 네가 괜히 특급 서포터라고 불리는 셀럽이었어?
 이래 봬도 대한민국 3대 길드의 부길드장이 너잖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운 것뿐이잖아.
 너라면 충분히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콰드득!
 
 목이 돌아가며 쓰러진다.
 
 푸욱!
 
 피를 토하며 죽어 간다.
 이런 상황에 침착하라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대체 눈앞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살벌하다 너무.
 길드원들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무서워 미치겠다.
 차디찬 바닥에 드러누운 시체가 까딱하면 내 모습일 거라 생각하니 머릿속은 생각이란 걸 거부하고 있다.
 살려 달라고 하면 살려 줄까? 말도 안 통하는 마당에 흥분까지 한 상태이니 욕이라고 생각하고 칼침 맞기 딱 좋을 것 같은데.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난 후방에서 버프나 힐을 주던 서포터였지, 딜러나 탱커가 아니었는데. 상태창은 먹통이지, 스킬은 안 나가지,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아······!
 할 수 있는 게 있다!
 경험이 말한다.
 너는 시체라고.
 지금은 존버를 할 때라고.
 애초에 깨어난 적 없던 것처럼 수레에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
 이제 기도하자.
 진심으로 간절하게.
 
 ―다 죽여 주세요. 제발!
 
 ***
 
 덜컹!
 
 수레의 흔들림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젠장.
 다시 눈을 뜨면 꿈이길, 본래 세상이길 바랐건만.
 무교인 내게 기도발이 있을 리가.
 역시나 헛된 희망이었다.
 코를 찌르는 역한 피비린내와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몸뚱이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고, 빌어먹을 승차감은 내가 수레 위에 누워 있음을 상기시켜 줬다.
 혼란스럽지만 현실도피는 여기까지,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다.
 다행인 건 더는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과 몸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
 어딘가로 이동 중인 것 같은데 여전히 저들의 말은 내게는 그저 소리일 뿐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띠링!]
 
 아아― 이 얼마나 애타게 부르짖었던 소리란 말인가!
 머릿속을 울리는 맑고 고운 알림 소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어무 반갑다.
 있을 땐 몰랐다.
 그 고마움을.
 당연했던 거였으니까.
 그 빈자리를 이제야 실감했다.
 너무 반가워 실체가 있다면 껴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다.
 기쁨도 잠시, 기분이 잡치는 건 찰나였다.
 눈앞에 있는 무수히 많은 알림창에 쓰인 말이 정말 사실일까?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다.
 
 [가이아와 플레이어 시스템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가이아와 연결할 수 없습니다.]
 [오류!]
 [플레이어 시스템이 동작하지 않습니다.]
 [오류!]
 [오류!]
 [안전 모드를 실행합니다.]
 [강제 종료를 추천합니다.]
 [강제 종료 후 재부팅 시 ‘한정우’님의 레벨과 스텟이 초기화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60초 후 자동으로 수락됩니다.]
 60
 59
 .
 .
 .
 3
 2
 1
 [수락하셨습니다.]
 [강제 종료를 시작합니다.]
 [재부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초기화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의 모든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랬구나.
 내가 기절했을 때 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구나.
 친절하게 레벨과 스텟을 초기화시켜 버렸구나.
 본래도 싸울 능력이 없었는데 도망칠 능력마저 뺏었구나.
 1레벨, 이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그래도 남은 게 있긴 있구나.
 폐부를 찌르는 이 상실감.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색다른 감정이구나.
 고맙구나. 눈물 나게.
 
 [언어 패치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현 차원의 정보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현 차원의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그래 열람해야지.
 어차피 내게 선택지란 건 없잖니.
 정보를 읽는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막막함이란 게 뭔지 처음으로 알았다.
 허허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과거나 미래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다른 세상.
 차원 이동이라니!
 이걸 믿어야 하나 싶지만 몬스터가 나타나고 게임처럼 변해 버린 세상에서 살아온 내가 헛소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스템이 장난을 친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킬링타임용으로 읽던 장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난 게 맞을 것이다.
 무림이라니······.
 무협 소설과 같은 세계관이라니······.
 막막함과 암담함이라는 쓰나미가 밀려왔다.
 씨@! @발! 씨@! @발! 씨@! @발!
 너무 좆같다.
 나는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잘 먹고 잘 살아왔다.
 재벌가 회장님이 할아버지였으니까.
 있는 놈이 더 가지고, 되는 놈은 뭘 해도 된다지만 난 정말 꽃길만 걸었다. 각성조차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서포터로 각성했고 그런 나는 아낌없는 지원 속에 성장했으니까. 언제나 최고의 헌터들이 내 앞을 든든히 지켰고, 덕분에 각성 초기에도 버스를 탄 채 편히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사이다 패스였던 내 인생에 호박고구마 투척이라니, 이건 뭔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순 없는 거다.
 초기화까지 된 마당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게 가능하긴 할까?
 오만가지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헤엄쳤다.
 ㅆ발 이거 완전히 ㅈ됐다.
 
 스읍―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식혔다.
 어쨌든.
 아무리 부정해도 이미 벌어진 현실, 화를 내고 처지를 비관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긍정이 주는 힘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현실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여서일까.
 알림창을 읽는 게 한결 순조로웠다.
 
 [이름: 한정우
 종족: 인간
 성별: 남자
 나이: 28
 소속: 無
 레벨: 1
 힘: 10
 민첩: 10
 체력: 10
 마력: 10
 미분배 스텟: 0]
 
 상태창······.
 그간 쌓았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초라함만 남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초기화가 됐다고 했다. 초기화가 된 건 맞다. 맞는데 처음 각성했을 때와는 스텟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힘 4, 민첩 5였는데 지금은 처음 각성할 때 1레벨이 가질 수 있는 한계 수치인 10이었다.
 왜인지 어렴풋이 알겠다.
 헌터로 활동하며 세월이 흘렀으니 일반인에서 각성자가 됐을 때랑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전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다는 사실을 빌미 삼아 좋은 거라고 세뇌했다.
 희망이 보인다고.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오! 역시나.
 헤이스트, 스트렝스, 스톤스킨, 실드, 블링크, 슬로우, 플라이, 스캔, 힐, 리커버리까지 10개의 스킬은 그대로 있었다.
 예상한 부분이다.
 각성과 함께 나란 인간의 영혼에 각인된 스킬들이니까.
 이게 바뀔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없다는 것.
 지켜 줄 길드원들이 없는 1레벨 서포터가 뭘 할 수 있을까.
 마력 고갈로 인한 리타이어는 곧 죽음인데.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긍정적으로라도 생각해야지 어쩌겠나.
 이게 긍정의 힘일까?
 인벤토리를 연 순간 잠시지만 소소한 기쁨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레벨과 스텟이 초기화된다고 했지, 인벤토리에 대해선 어떤 알림도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총기류나 폭탄만 있어도 생존율이 엄청나게 올라갈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다.
 외박이 잦아 넣어 둔 생필품과 장기간 레이드를 나갈 때 애용하던 라면과 텐트, 그리고 무기라고 넣어 둔 한 자루의 검이 전부였다.
 그래도 무기가 하나는 있어서 다행이라고? 천만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고 산 명검이지만 자기만족과 멋을 내기 위한 장식용이었을 뿐. 후방에 빠져 있던 난 이 검을 휘둘러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후방에서 오더를 내리며 시기적절하게 버프와 힐을 공급하는 도우미가 내 역할이었으니까.
 저들에 대해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 무인이란 존재들이 싸우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망설임 없이 죽이던 이들, 그런 이들과 검을 맞대고 휘두를 수준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건 현실을 비관해 자살을 결심했을 때나 할 수 있는 행동일 테니까.
 쥐뿔도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며 삶을 되돌아보니 그간 느꼈던 매너리즘과 공허함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는지 알 것 같다. 우물 안 개구리도 되지 못했다. 물을 줄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온실 속 화초였을 뿐.
 그동안 나름 사이다 캐릭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발암 캐릭터가 따로 없었다.
 일단 주제 파악은 이만하면 됐다.
 자존감 낮아지니까 그만하자.
 그러고 보니 상태창의 상단부에 있는 ?가 아까부터 깜빡거리고 있었다.
 마치 확인하라는 듯이.
 그럼 해야지. 망설일 필요는 없다.
 
 [플레이어 정보를 공개하시겠습니까?]
 [플레이어 정보를 비공개하시겠습니까?]
 
 잠금이 해제된다더니 이런 기능이 잠겨 있었네.
 첨부된 설명을 읽어 보니 비공개로 설정하면 자신의 스텟과 마력을 다른 이들에게 숨길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비공개로 설정한 동안 내가 스킬 사용에 제약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 좋은 기능이다.
 당장은 내가 너무 바닥이라 큰 효과는 없지만, 레벨이 오를수록 엄청나게 유용할 테니까.
 문제는 레벨을 어떻게 올리느냐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어떻게든 될 거다. 분명.
 어쨌든 이건 고민의 여지조차 필요 없는 부분이다.
 
 [상태가 비공개로 변경되었습니다.]
 
 내 눈은 빠르게 움직였다.
 잠금 된 기능이 더 없는지 최대한 파악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안타깝게도 더는 잠겨 있던 기능을 찾을 수 없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상태창을 끄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 나는 시선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산발이 된 머리에 피가 얼룩져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걷고 있는 한 사내.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사내를 빤히 바라보니 눈앞으로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예스!
 
 [이름: 방대보
 종족: 인간
 성별: 남자
 나이: 34
 소속: 강서표국
 등급: E
 재능: 2]
 
 다시 한번 이곳이 내가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정보는 등급이 아닌 레벨로 표기되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정보창은 몬스터나 이종족들에게서나 볼 수 있던 정보창이었다.
 한마디로 저들을 죽이면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거다.
 방대보란 사내의 정보를 열람하고 있던 그 순간, 난 아차 싶었다.
 내 시선을 느낀 방대보의 고개가 날 향해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젠장 실수다. 너무 빤히 바라봤다.
 결국, 눈이 마주쳐 버렸고 방대보란 사내는 놀란 토끼 눈을 뜬 채 나를 손가락질하며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닥쳐!
 말릴 틈은 없었다.
 이미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멀찍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으아아아악! 시, 시, 시체가 일어났습니다!”
 
 아저씨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한테 시체라니 초면에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이거 내 기분 탓이야?
 그래도 또렷하게 잘 들리는 걸 보니 언어 패치는 잘된 것 같네.
 거참, 아주 긍정적인 상황이야.
 
 
 # 서포터의 생존법
 
 쿠구구궁!
 
 덜컹거리며 나아가던 수레가 갑작스레 멈췄다.
 
 스스릉, 스르릉.
 
 수레가 멈추자 칼을 뽑은 무인들이 순식간에 나를 포위하며 칼을 겨누고 있었다.
 젠장.
 아무런 계획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당황스러워서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순간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리며 사내 하나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걸어왔다. 모두가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이들이 이 무리의 실세임을 알 수 있었다.
 
 [이름: 왕우진
 종족: 인간
 성별: 남자
 나이: 39
 소속: 강서표국
 등급: B
 재능: 5]
 
 [이름: 정원영
 종족: 인간
 성별: 여자
 나이: 16
 소속: 강서표국
 등급: C
 재능: 8]
 
 척!
 
 언제 발검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뽑힌 검이 내 목을 겨눴다.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살기 가득한 눈빛, 잔뜩 찡그려 험악한 인상에 화룡점정을 찍어 주는 뺨에 있는 검상은 전신이 굳어지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을 전해 왔다.
 좆됐다. B급 무인이라니, 이 인간 고수다.
 
 “누구냐! 네놈도 우리를 습격한 무리와 한패인 게냐!”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이런 걸까? 초면에 말 까는 것까진 이해하겠다만 무슨 대화를 이따위로 시작하는 걸까? 목에 대고 있는 거라도 좀 치워 줘야 뭔 말을 해도 하지. 그리고 그렇게 답을 정해 놓은 듯이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텐데 나보고 어쩌라고.
 막말로 솔직하게 말하면 미친놈이라고 당장 죽일 거면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자란 척이나 해야겠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수명을 단축할 생각은 없으니 지금은 숙이는 게 맞았다.
 불쌍한 표정이 먹힌 걸까.
 사내의 곁에 있던 여인이 손을 뻗어 사내를 제지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 여인의 복장만큼은 확연히 말끔했다.
 아무래도 실세 중의 실세 같았다.
 
 “왕 아저씨, 검을 거두세요.”
 “아가씨, 수상한 자입니다.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괜찮아요. 저분이 무인이 아니란 건 아저씨께서 직접 확인하셨었잖아요. 그리고 이제 막 깨어나셨고요. 내공도 없는 환자가 제게 해를 끼칠 수 있을까요?”
 
 아가씨라, 역시나 이 무리의 진짜 실세는 이 어린애였다.
 다행히 사내와 다르게 적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참 마음에 든다.
 나이를 숨기려는 건지 면사를 쓴 채 억지로 목소리를 굵게 내고 있었는데, 정보가 보이는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거기다 한 가지 정보도 얻었다.
 이들은 시스템이 먹통일 때 내 몸을 검사했고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한 거다. 지금은 비공개로 돌려놨으니 내공(마력)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숨길 수 있고.
 어차피 1레벨 서포터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계속 x밥인 척할 수 있는 거다.
 이건 내게 큰 무기다.
 
 “하지만······.”
 “당장 검을 거두세요. 어서요.”
 
 여자애의 단호한 행동에 목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날붙이의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왕우진이란 사내에게서 순간 할아버지 댁에서 봤던 김 실장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김 실장은 융통성 제로에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던 집요하고 피곤한 인간의 결정체였다. 만약 왕우진이 그런 유형의 인간이라면 저 인간은 절대 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언제든 내가 아가씨라 불리는 아이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죽일 것이었다.
 앞으로 아가씨라 불리는 아이에게 잘 보여야겠다.
 
 “아가씨께서 말리시니 내 너를 잠시 지켜보겠다만,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그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고, 고맙습니다.”
 
 나는 목이 빠질 기세로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젠장.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니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충돌은 피해야 했다.
 나는 x밥이니까.
 초기화 전에도 이들과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었는데 초기화된 내가 무슨 수로 저들에게 언짢은 기분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다.
 뭐 일단은 산 것 같다. 휴―
 
 “운형이랑 대수는 지금부터 저놈을 감시해라.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 놈에 대해······ 모두 피해! 습격이다!”
 
 피우웅―
 푹! 푹! 푹!
 
 화살이 날아오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빠르게 흩어지며 자세를 잡았다.
 젠장, 산 넘어 산이다.
 이 동네는 무슨 눈만 뜨면 칼질이냐.
 
 “쟁자수들은 표물이 실린 마차를 보호하고 운형이랑 대수는 아가씨를 보호해! 대보는 남아서 저놈을 감시하고 나머지 표사들은 나를 따라 적을 섬멸한다.”
 “예!”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방대보라는 사내가 다가와 귀찮은 짐 덩어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힐끔 훑고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장을 바라봤다.
 이하 동문이다.
 E급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나로서는 도무지 안심되지 않았다.
 역시나.
 전투가 시작되자 방대보란 사내는 불안한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방대보란 사내의 머릿속에서 나란 존재는 사라진 듯했다.
 감시자지만 때에 따라서는 나를 지킬 방패가 되어 주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역시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숨자.
 수레 밑으로.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 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억지로 수레 밑으로 몸을 밀어 넣자 지척에서 기합 소리와 함께 충돌 소리가 들려왔다.
 
 채애애앵―챙! 챙! 챙! 챙!
 
 “흐아아아아압!”
 
 시끄러운 기합 소리의 주인은 방대보였다.
 기합만 들으면 상대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며 밀리고 있었다.
 
 채앵! 채애앵!
 
 상대 또한 E급, 하지만 방대보는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기세를 탄 상대는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방대보는 뒷걸음질 치며 상대의 검을 막아 내는 것에만 급급해하고 있었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상태에서 싸웠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쿠웅!
 
 뒷걸음질 치던 방대보가 내가 숨은 수레에 부딪혔다.
 젠장.
 위기다.
 방대보에게도 나에게도.
 방대보가 쓰러지면 다음은 나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서걱! 푹!
 
 샹, 되는 일이 없다.
 방대보가 갈라진 가슴을 부여잡으며 꼬꾸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방대보도 무인이긴 했나 보다.
 방어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건지 동귀어진을 노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상대방의 복부에는 방대보의 검이 박혀 있었다.
 안타깝게도 깊이 박히진 않은 것 같지만.
 
 “버러지 새끼가······.”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날린 무인이 검을 뽑아 바닥에 집어 던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내가 던진 방대보의 검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굴러왔다.
 떨어진 검을 바라보던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크크큭. 진짜 버러지가 숨어 있었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일어난 사내가 상처 입은 복부를 한 손으로 틀어막은 채 날 향해 몸을 움직였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싸늘한 긴장감이 느껴진 순간 나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차원 이동이 머리까지 굳게 만들었던 걸까.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한심할 정도다.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고 자책하자.
 방대보의 검을 집고 수레를 빠져나오는 사이, 지척에 도착한 사내는 날 향해 조소를 머금고는 오른손에 쥔 검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놈은 내가 왼손에 쥔 검을 힐끔 보고는 더욱 짙게 웃었다.
 나는 놈을 향해 절망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표정을 지어 줬다.
 전투 중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일까?
 바로 상대를 이겼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일격을 가할 때다.
 놈이 찌르기 동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두르지도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대신 주먹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힘껏 휘두르며 손바닥을 펼쳤다.
 이제 방심의 대가를 치를 때다.
 
 촤아악―
 
 “이런 개······!”
 
 수레를 빠져나오던 내 손엔 방대보의 검만 쥐어진 게 아니었다. 오른손엔 모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다.
 얼굴에 모래를 직격당한 사내는 미처 검을 찌르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난 그런 사내를 향해 몸을 일으키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흐아아아아압!”
 
 푸욱!
 
 [레벨이 올랐습니다.]
 
 ***
 
 하아, 하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장감을 털어 냈다.
 생각할수록 나란 놈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현실을 자각할 줄이야.
 더는 지켜 줄 길드원이 없었다.
 전과는 다른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던 상황.
 싸울 줄 알지만 싸우지 못하는 헌터로 뒤에서 지켜보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초기화가 된 것도 맞고 1레벨에서 2레벨이 된 좆밥인 것도 맞다.
 하지만 그간 내가 익혀 온 체술과 생존법들이 사라졌을까?
 전장을 바라보던 시야와 오더 능력이 사라졌을까?
 경험치는 초기화가 됐을지언정 경험은 초기화가 되지 않았건만 초기화가 되지 않았던 것까지 난 초기화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차원 이동과 초기화.
 낯선 이들의 칼부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건 맞지만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고 본인이 가진 능력까지 망각해선 안 됐다.
 어쨌든 이제라도 자각해서 다행이다.
 자책은 여기까지.
 여기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전장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두통과 근육통 때문이었다고 정신 승리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뭐 레벨 업 전까진 두통과 근육통이 남아 있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아무튼,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갠 느낌이랄까.
 나는 이제야 비로소 전장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더는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돌파구를 찾았으니까.
 강서표국이란 곳이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들은 나 또한 강서표국과 한패로 보고 있었다.
 이미 운명공동체로 엮여 버린 사이.
 이왕 엮인 거 확실하게 엮여야 내가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엮이긴 엮였는데 유대감이라곤 전혀 없는 사이란 건데. 괜찮다. 방법은 생각해 놨으니까.
 그간 쌓아 온 경험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 주고 있었다.
 강서표국의 수는 이십, 소속이 ‘암운(暗雲)’이라 적힌 적의 수는 오십.
 수레에 실려 있던 시신들로 봤을 때 강서표국은 그동안 계속 습격받아 왔다. 계속된 습격으로 쌓인 피로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치열한 격돌 없이도 상황은 금세 끝났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적들의 전력으로는 강서표국을 상대로 절대 이기지 못한다. 머릿수는 많지만, D급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진 죄다 E급이었다.
 견적이 나왔다.
 이 새끼들은 미끼다.
 강서표국 무인들의 체력을 빼고, 상처를 늘리기 위한.
 문제는 이들을 막은 후라는 건데, 다음은 더 윗선이 찾아오거나 전력으로 부딪쳐 올 게 뻔했다.
 일단 답은 간단하다.
 강서표국의 무인들이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고 상처를 입지 않고 이기도록 돕는다.
 사실 간단한 답이지만 지금의 내 상황에선 엄청난 도박이자 모험이었다.
 내가 아무리 특별한 2레벨이라지만 스킬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육체 능력마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났으니까.
 경험이 아니었다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행동.
 하지만 필요한 행동이었다.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어딘가에 잠시라도 섞이는 게 맞았다.
 보통은 호흡을 맞춰 본 적이 없는 이가 도움을 주겠다고 전투에 난입한다면 압도적인 실력자가 아닌 이상 구 할은 아군에게 마이너스가 되지만, 나는 예외다.
 전체적인 흐름에 방해되지 않게 적절히 섞이며 죽이는 걸 돕는 게 내 특기니까.
 이제 특기를 살릴 때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 전장의 후끈한 열기가 나를 집어삼켜 왔다.
 그 열기가 주는 뜨거움이 가슴을 데웠다.
 하지만 머리는 차갑게.
 침착하자, 그리고 집중하자.
 경험이 말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으라고.
 
 탁, 탁, 타타타탁.
 
 조심스레 옮기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목표는 강서표국의 C급 무인과 싸우는 암운의 E급 무인.
 C급까지 거저 올라갔겠는가.
 아무리 체력이 달려도 잠깐의 틈만 만들어 준다면 순삭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적의 등 뒤를 향해 달려가며 기척을 죽이기 위해 호흡을 멈췄다.
 이내 적의 등 뒤에 도착한 순간, 단전에서 시작되는 발성이 무엇인지 확실히 들려줬다.
 
 “으아아아악!”
 
 나를 봐!
 내가 시선을 끈 틈을 노려!
 어서!
 이런 마음의 소리를 담아 소리를 내질렀다.
 검을 맞대고 있던 적은 등 뒤에서 들려온 고성에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몸을 돌렸고, 난 즉시 몸을 숙이며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서걱! 소리와 함께 적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데구르르― 털썩!
 
 믿었다.
 이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을 거라고.
 역시 진심은 통했다.
 난 강서표국의 표사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일어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다.
 근데 왜일까, 마음이 좀 허하다.
 많이 없어 보였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아무래도 난 타고난 서포터였던 것 같다.
 
 ***
 
 뛰지 않았다.
 차분히 호흡을 조절하며 암살자라도 된 것처럼 은밀하게 이동했다. 하지만 언제든 뛰어야 하기에 경보를 하듯 다리를 놀리며 몸의 근육들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했다.
 이내 목적지에 도착하면 목이 찢어지라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아!”
 
 그 뒤론 사력을 다한 도주.
 이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철저히 E급 무인에게만.
 이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스킬이 아닌 직접 몸으로 때운다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위화감 없이 절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는 건 서포터였던 내 특기다.
 왜, 뭐, 이게 어때서?
 나도 멋있게 싸우고 싶지.
 언젠가 그런 날도 오겠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난 내 주제를 알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이고, 할 수 없는 걸 하려고 하면 꼭 사달이 나는 법이야.
 지금의 난 한없이 약자야.
 약자가 강자를 상대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 당연한 걸 체면 때문에 못 하면 죽어야지.
 조금 없어 보이면 어때.
 우선 살고 봐야지.
 같은 패턴의 반복은 결국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조금 전 상대하려던 녀석은 내가 소리를 질렀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신경은 분산됐는지 움직임에 빈틈이 생겼고 그 틈을 강서표국의 C급 표사가 제대로 노렸다.
 하지만 조금은 새로울 필요가 있었고, 그건 약간의 변화면 충분할 것이었다.
 돌아보지 않으면 돌아보게 만들면 그만.
 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친근하고 다정하게 적의 이름을 불렀다.
 
 “덕배야 뒤.”
 
 휘익―
 
 빠르게 몸을 돌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오른쪽으로 몸을 돌릴 것이었다.
 오른발이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덕배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고 난 놈에게는 사각인 왼쪽 옆으로 이동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덕배의 등짝이 시원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지던 덕배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름을 알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대답해 줄 수는 없다.
 세상에 비밀이 왜 있겠나.
 그리고 비밀이란 걸 알려고 하면 대부분 죽는다.
 이렇게.
 
 ***
 
 전장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데 어그로를 안 끄는 것도 이상한 거다. 당연히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이 상황 또한 내 계획에 있었으니까. 짬에서 나오는 자신감은 충만했다. 내가 목표가 됨으로써 누군가는 잠시나마 여유가 생길 테니까. 당장은 그거면 됐다.
 
 채앵!
 
 단 한 번의 충돌.
 입 안에서 ‘샹’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검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이 장난 아니다. 당장 검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그러니 이제 안 부딪쳐야지.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부터 난 하염없이 뒷걸음질 쳤다.
 상대는 당연하게도 따라왔고.
 허접해 보일 거다.
 소리나 지르면서 돌아다니던 놈이니까.
 
 쇄애액―
 쇄액―쇄애애액―
 
 좌로, 우로, 그리고 세로로.
 경험에서 나오는 예측력을 바탕으로 뒷걸음질 치며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매섭게 들려오는 칼바람 소리.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죽는다는 걸 알기에 더욱 집중했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할 생각이냐!”
 
 대답 대신 미소를 전해 줬다.
 내가 그저 피하기만 하는 줄 알면 죽음인데.
 얼굴이 시뻘게진 게 열 좀 받은 것 같다.
 불난 집엔 부채질을 해 줘야 제맛.
 
 “흐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어퍼스윙을 하듯 휘두른 검.
 
 째애앵!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역시나 상대는 어렵지 않게 막아 내고 있었다.
 나도 통할 거란 기대는 일절 안 했다.
 손바닥이 아플 것 같아서 마지막엔 힘도 좀 뺐거든.
 이제 할 건 뭐다?
 당연히 뒷걸음질이지.
 
 “야이 !@$!%#@%!%!%.”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놈은 날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돌진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얼마든지 욕해도 된다. 바라는 바니까.
 욕먹는 걸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다.
 대한민국에선 감히 내게 욕할 사람도 없었었고.
 그래도 들어준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내가 미쳤다고 신체 능력이 월등한 놈을 일대일로 상대하고 있었겠는가.
 
 카아앙!
 
 나를 쫓아오던 놈은 기세가 무색하게도 자리에 굳어 버렸다.
 어느새 다가온, 정확히는 내가 다가간 D급 표사가 나를 쫓아온 놈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이게 바로 전략이란 거고 바통 터치란 거다.
 잠시나마 직접 검을 맞댔다고 서포터로서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았다.
 아직은 내 손보다는 남의 손이 더 편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쫓아온 놈의 곁을 유유히 지나쳤다.
 
 “너 이 치사한······!”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놈 입에서 나올 말이냐?”
 
 이죽거리며 비웃어 주는 건 덤이다.
 E급이면 레벨이 10~19 사이라는 건데 2레벨짜리하고 정면 대결이 그렇게 하고 싶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 봐. 그럼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말이 떠오를 거야.”
 
 그래서 찾아온 D급 무인이고.
 잘가―
 자, 다음!
 
 서걱!
 
 [레벨이 올랐습니다.]
 
 헐.
 직접 죽인 게 아니어서 경험치가 들어올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며 시선을 끈 것과는 다르게 한 번이나마 검을 부딪쳤다고 경험치가 들어왔다. 그것도 100% 나에게만.
 이계인들은 사냥을 통해 레벨을 올리는 게 아니라 수련을 통해 성장한다더니 이쪽 세상의 무인들도 그런가 보다.
 개꿀이다!
 이건 흔치 않은 대박 기회다.
 작전을 변경할 필요성이 있었다.
 강서표국에 섞이기 위함이 우선인 건 변함없지만, 겸사겸사란 좋은 말도 있었으니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마당에 올릴 수 있을 때 최대한 레벨을 올려 둘 필요성이 있었다.
 가즈아!
 
 채앵!
 
 그렇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검을 한번 휘둘렀을 뿐.
 그리고 나와 검을 부딪친 틈에 이어지는 공격.
 
 푸욱!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다. 벌써 미분배 스텟이 제법 쌓였다.
 
 ***
 
 뻘겋게 충혈된 눈이 반쯤 돌아간 인간이 짜증 날 정도로 집요하게 날 따라오고 있다.
 덕진이란 놈인데 아무래도 덕배 놈의 형인 것 같았다.
 한 집안의 대를 끊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부디 다른 형제도 있길 바랄 뿐.
 뭐 끊기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딱히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날 향해 맹목적인 적의와 살기를 뿜어내며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이건 정당방위였다.
 쌤쌤이랄까.
 
 채애앵―
 
 몸을 뒤로 날리며 충격을 흘렸다. 이어지는 뒷걸음질.
 
 “왜 저만 따라오는 겁니까!”
 
 나는 당황하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척했다.
 그래야 유인이란 생각을 못 할 테니까.
 내가 생각해도 상대에겐 참 좆밥같이 보일 것 같았다.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다.
 놈은 이미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 있었다.
 
 “네놈 때문에 덕배가! 내 동생이!”
 
 지랄이 풍년이다. 내가 동생의 죽음에 관여한 건 맞지만 놈의 동생은 엄연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죽었다.
 솔직히 내가 만만해서 따라온 거다.
 그런데 너 뒤에 눈 없지?
 내 눈은 네 뒤를 향해 있는데.
 
 “지금 어딜 보는 거냐! 감히 네놈 따위가 날 상대로 한눈을 팔아!”
 
 지는 뭐라도 되는 줄 아네.
 
 “피우웅― 신”
 
 퍽!
 
 덕진이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비틀거리며 자신의 등을 보려 애썼다.
 그런다고 등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덕진이의 등에는 파르르 떨리는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형제가 쌍으로 등을 내줬다.
 이내 덕진이가 대지에 쓰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강서표국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10점 만점에 8점의 재능을 가졌던 여자아이.
 8점의 재능은 정말 보기 드문 엄청난 재능이었다.
 물론 재능은 재능일 뿐. 남들보다 조금 쉽게 위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지만, 타고난 머리가 좋다고 모두가 서울대를 가는 게 아니듯 노력이 뒷받침돼야만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거였다.
 열여섯의 나이에 C급이면 엄청난 노력파라는 것.
 나는 저 아이를 믿었고 시야가 닿을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결과는 완벽했다.
 눈도장 제대로 찍었다.
 
 
 # 스며들다
 
 하아, 하아.
 전투가 끝났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걸까.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 본 게 언제였던지.
 낯선 느낌이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신을 적신 피와 땀으로 인한 악취마저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기분은 괜찮았다.
 아마도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성취감 때문일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 도박이 통한 것 같았다.
 내가 이들과 섞이는 방법으로 택한 건 바로 ‘전우애’였고 살면서 이렇게 집중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며 전투에 임했다. 행동을 옮김에 있어서 중요한 건 절대로 방해돼선 안 된다는 것과 내가 함께 싸웠다는 걸 인식할 수 있도록 티 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노림수는 제대로 적중했다.
 
 “이야, 신고식 한번 화려하게 했네.”
 
 이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름이 어떻게 돼?”
 “한정우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
 
 나이를 밝힌 순간 침묵과 함께 다가오던 몇몇이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새, 생각보다 더 어려 보이시네요.”
 
 당연히 자신들보다 어리다고 생각하고 말을 놓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니 놀란 눈치였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다.
 동안으로 타고나기도 했지만, 길드의 얼굴이라며 온갖 관리를 받으며 살아서 외모는 이십 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
 
 “편히 말씀하시죠. 은인들께서 불편해하시면 제가 더 불편합니다.”
 “그래,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멈칫했던 이들이 다시금 다가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고 섞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덕분에 쉽게 잡았다.”
 “아닙니다. 소리나 질렀지, 제가 한 게 있나요. 고생은 다 형님들이 하셨죠.”
 “형님? 이놈 넉살 좋네.”
 “그러게. 근데 그 실력으로 용케 검을 휘두를 생각을 했더라? 안 죽은 게 다행이다 진짜.”
 “그래도 눈치 하난 기가 막히던데?”
 “형님들이 절 지켜 주시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우석 형님, 이놈 혓바닥이 아주 청산유순데?”
 “혓바닥 짧은 너보다야 백번 낫지. 정우야 이 기회에 너 내 동생 해라. 내가 한 수 가르쳐 줄게. 어때?”
 “제가 어찌 감히 형님의 시간을 뺏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몸은 좀 괜찮아? 솔직히 네가 살아날 거라곤 아무도 생각도 안 했거든. 그러니까 수레에 실려 있던 건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섭섭하다뇨, 당치도 않습니다. 만약 절 수레에 실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형님들과 말이나 섞을 수 있었겠습니까. 형님들은 제 은인이십니다.”
 “은인은 우리가 아니라 아가씨지. 우리야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하는 입장이니까.”
 “하긴, 아가씨처럼 착하신 분이 아니면 보통은 그냥 지나칠 상황이었지. 누가 대낮에 나체로 구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인간을 구해 주겠어. 우린 됐으니까 아가씨한테나 꼭 은혜 갚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체라니······.
 차라리 벗겨 간 거면 나중을 노려 보기라도 했을 텐데, 전신을 도배하고 있던 아티펙트는 차원 이동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짐작은 했지만, 진실을 확인하고 보니 마음이 참 헛헛했다.
 새삼 길드원들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름 잘해 줬다고, 인망 높은 상사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저 사회생활일 뿐, 진심으로 했던 칭찬은 아닌 듯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 전부 길드원들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이었으니 말이다.
 많이 얄미웠을까?
 직접 싸우지도 않으면서 왜 그걸 못 하나 답답한 표정을 지은 적도 몇 번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길드원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었던 거다. 억지로 입 안 가득 고구마를 쑤셔 넣은 것처럼 답답했겠지만 참았던 거다.
 높은 곳에 있을 땐 몰랐는데 바닥에 내려와 보니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안.
 이 말이 전해질 것 같진 않지만.
 
 ***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종 보스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전투 전보다 옅어지긴 했지만, 자신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날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 게 눈에 선했다.
 
 “왜 우리를 도운 거지?”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목소리가 뒷목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모두가 호의적인 눈빛과 말을 건네 오는 상황이다 보니 전투 전처럼 막 대하진 않았다.
 분위기는 내게 넘어왔으니 쫄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쫄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살 게 분명했으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 당당하게 나가야 했다.
 
 “대보 형님이 절 지켜 주려다 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대보 형님의 검을 들었습니다.”
 “그놈은 남을 구할 놈이 아니다. 지밖에 모르는······.”
 “대보 형님을 어찌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따뜻하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대보 형님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대보 형님께서 직접 알려 주신 겁니다. 돌아가면 밥도 사 주시겠다면서.”
 
 죽은 사람을, 동료였던 이를 깎아내린다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전우애로 똘똘 뭉치는 저들이라면 더더욱.
 그걸 알기 때문인지 왕우진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해다.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난 그저 네놈이 의······.”
 
 끝까지 들을 필요는 없으니 말을 잘랐다. 이제는 목소리에 물기를 머금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을 때였다.
 
 “저는 금수가 아닙니다. 어찌 사람 된 도리로······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흐윽.”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인해 평생을 대중 앞에서 연기했더니 이제는 정말 연기자가 다 됐는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아마도 생존과 관련돼 절박함까지 생기니 연기에 진정성이 더해진 듯했다.
 어쩌면 난 스스로의 연기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왕 호위님은 원래 아가씨를 제외한 모두에게 까칠하게 대하니까. 나쁜 의도로 하신 말은 아니실 거야.”
 “대보가 겁이 많아서 그렇지. 그리 나쁜 놈은 아니잖아? 그 겁많은 놈이 집에 있는 동생들 먹여 살린다고 표행도 빠지지 않았던 건데. 이번엔 우진 형님이 좀 심했습니다.”
 “거, 형님 살살 좀 합시다. 죽다 살아난 놈한테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왕우진의 뺨에 있는 칼자국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짐작한 것.
 나를 변호해 주는 표사들로 인해 기분이 언짢은 듯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자 돌파구였다.
 역시 칼 든 인간들에겐 전우애만 한 게 없었다.
 
 “형님, 아직 제가 미덥지 못하시겠지만 제게도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생명을 빚지고 어찌 마음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인간으로 살고 싶지 금수로 살고 싶진 않습니다.”
 “네놈은 날 언제 봤다고 형님이라 부르는 것이냐! 낯짝 한번 두껍구나.”
 
 왕우진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주변의 반응에 결국 고개를 흔들었고, 내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나보다 강하면 형님 아닌가.
 왕 씨라고 부르면 화낼 걸 뻔히 아는데.
 
 ***
 
 무겁게 느껴졌던 공기가 순식간에 환기되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그저 느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표사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너무나 밝아져 있었다.
 표사들의 표정을 본 순간 왕우진이 고개를 휙 돌렸고, 지금까지 보여 줬던 무게 있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그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어서 면사부터 쓰세요!”
 “답답해요.”
 “그럼 마차로 돌아가서 편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니시다가 몸이라도 상하시면 제가 국주님을 뵐 낯이······.”
 “바깥 공기 좀 쐴게요. 당장은 볼 사람도 없으니 괜찮잖아요. 그리고 전 아가씨가 아니에요. 임시지만 표두로서 이 표행에 나선 거라고요. 아저씨가 저를 아끼시는 마음은 잘 알지만, 너무 과한 보살핌은 그만둬 주세요. 저도 한 사람의 무인이니까.”
 
 대화를 듣던 난 왜 이리 유난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고 그 이유를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자체발광이란 말을 언제 써야 할지 정확히 알겠다.
 바로 지금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연예인과 모델을 만나 왔기에 내 미적 기준은 엄격한 편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아가씨라 불리는 아이는 취향을 떠나서 그냥 압도적으로 예뻤다.
 의학적인 도움을 받지 않은 자연미인이 저런 미모라니, 타고났다고 봐야 했다.
 이곳이 강호가 아닌 대한민국이었다면 당장 CF가 밀려올 것이 분명했다. 전형적인 과즙 상에 어떤 걸그룹에 속해도 당장 센터를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외모였으니까.
 170cm에 가까운 길쭉한 키와 땀에 젖은 옷 위로 드러난 몸매는 열여섯이란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물론 아직 여물지 않은 앳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귀여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달까.
 왕우진이 왜 저리 싸고돌려고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저 미모는 분명 화를 부를 미모였다.
 뭐 딱히 여자로 느껴지진 않았다.
 귀여운 여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남아 있는 나에겐 중학생 나이의 미성년자를 여자로 보는 건 철컹철컹과 직결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 상황에 여자를 생각하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인가.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여자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다.
 순간 눈이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저 꼬맹이한테 이런 긴장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닳고 닳은 내가 순식간에 빠져들 정도로 눈빛이 맑아도 너무 맑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깨어나시자마자 전투를 치르느라 더 나빠지신 건 아니신가요?”
 
 이제 숨길 생각이 없다는 걸까? 나를 일행으로 받아들였다는 걸까? 일부러 굵게 내던 목소리는 어느새 귀여운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이는 걸까.
 대화를 이어가 볼 필요성을 느꼈다.
 
 “저는 강서표국의 정원영이라고 해요. 임시지만 이 표행의 표두를 맡고 있고요.”
 “한정우라고 합니다.”
 “혹시 강서표국에 대해선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죄,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죠. 저희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거니까요.”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표두님께서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오랜 시간 산속에 혼자 살아서 강호에 문외한입니다.”
 “혼자 산속에서요?”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생각을 하듯 미간을 짚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모를 수밖에 없으셨겠네요. 그런데 어쩌다가 변을 당하신 건지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왕우진의 귀가 쫑긋하는 게 보였다.
 믿고 안 믿고는 저들의 몫이지만 최대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수밖에.
 원래 뻔한 거짓말이 더 잘 통하는 법이었다.
 
 “갑작스레 산적의 습격을 받아 기절했습니다. 그 뒤로 눈을 떠보니 수레에 실려 있었고요.”
 “이런, 정말 큰일을 당하셨네요.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에요.”
 
 응? 이걸 정말 믿어?
 순진해도 너무 순진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순간 든든한 전우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나도 성토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요즘 들어서 녹림도들이 너무 날뛴다니까요.”
 “지난달엔 통행세를 줬는데도 물러가지 않아서 결국 한판 붙었습니다. 두식이는 그때 다친 부상 때문에 이번 표행도 못 따라왔고.”
 “아가씨 무림맹이나 관아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놈들 요즘 기세가 너무 등등해서 좀 꺾어 줘야 할 것 같은데.”
 
 표사들이 맞장구를 치든 말든 왕우진은 다시금 날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 때문에 나를 더 추궁하지 못할 뿐,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눈치였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습니까?
 제발 그만 좀 봅시다.
 그러다 레이저 나올 것 같으니까.
 물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기에 속으로 삭여야 했지만.
 지금은 아무 말이라도 꺼내서 화제를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보는 것만으로 위축되는 저 눈빛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표두님, 저도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절 왜 도와주신 겁니까?”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이를 도울 수 있어서 도와주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요?”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자 오히려 당황해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건데······.”
 
 솔직히 나 같은 속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과 눈빛을 봤을 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순수한 호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왕우진이 싸고돌던 이유는 미모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겐 득이 됐지만 때 묻지 않은 착한 심성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한 행동은 분명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좋게 말해 순박함이지, 나쁘게 말하면 이용당하기 딱 좋았다.
 나 같은 놈한테.
 나는 좋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순탄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절대 만만치 않았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된다는 걸 어려서부터 뼈저리게 경험하며 커 왔기에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양심이 따끔거릴 정도로 나를 대하는 이들의 행동은 호의적이고 착했다. 칼을 뽑았을 땐 세상 무섭더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을 정도였다.
 선택의 여지가 마땅치 않아 잠시나마 몸을 의탁할 곳으로 택한 강서표국이지만 아무래도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역시 될놈될이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저 도와드릴 수 있어서 도와드린 거니까. 그리고 이미 저희를 도와주셨으니 은혜는 갚으신 게 맞죠. 그런데 이렇게 계속 밖에 계셔도 괜찮으세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너무 무리하신 것 같은데 마차에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떠세요?”
 “아가씨! 그건 안 됩니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한 마차를 같이 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누가 태워 달라고 했습니까?
 왜 제 의견은 묻지도 않으십니까?
 저도 치사해서 안 타요.
 
 “그럼 여긴 좀 그렇고, 조금만 이동해서 점심을 해결하고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떨까요? 계속된 습격으로 다들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잖아요.”
 
 모두가 그러자며 밝게 웃었고 왕우진은 현명한 판단이라 말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빼고 다들 즐거웠다.
 마차에 안 태워 줘서 삐진 게 아니다.
 못 볼 걸 봐서 그렇지.
 난 지금 내 빌어먹을 눈썰미가 아주 저주스러웠다.
 봤다.
 똑똑히.
 솔직히 내가 잘못 본 거라면 좋겠지만 분명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기대를······.
 기대는 무슨.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이런 상황은 내 계획에 없었는데······.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들다.
 대체 왜 원영이의 발치에 죽어 있는 새끼의 정보창만 없어지지 않은 걸까?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죽은 척하는 무공이 있을 줄이야.
 어쩐지 일이 풀려도 너무 술술 풀린다 했다.
 근데 노려도 하필 애를 노리냐.
 왕우진을 놔두고.
 그런데.
 그렇게 안 봤는데 강서표국도 좀 그러네.
 보험 가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험료 인상이나 운운하고 말이야.
 인간적으로 보험 가입 심사도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냐.
 대신 명심해.
 이제 해지를 해도 내가 할 거고.
 환급은 필수야.
 근데 왕 형.
 아니 왕 씨.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정신이 투철하고 헌신적인 사람 본 적 있어?
 봤냐고 묻잖아.
 못 봤으면 그 부리부리한 눈 부릅뜨고 잘 봐.
 나 이제 리타이어할 예정이니까 섭섭하지 않게 잘 모시고.
 뒤처리 정도는 알아서 해.
 괜히 깨우지 말고.
 
 “죽어라!”
 
 적은 마지막 힘을 쥐어짠 듯한 외침과 함께 일어났고 소매 속에서 꺼낸 단검은 서슬 퍼런 기세와 함께 허공을 거칠게 가르고 있었다.
 역시나 목표는 예상대로였고 눈치채지 못한 상황에 발치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모두가 확장된 동공으로 바라볼 뿐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예외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갑을관계는 역전될 테니까.
 
 ‘헤이스트.’
 
 왕 씨 잘 봐.
 이게 어깨빵이란 거야.
 
 퍼억!
 
 앞으론 조심 좀 하자.
 그리고 갑도 해 본 놈이 하는 거야.
 이만 잔다.
 
 ***
 
 으음.
 의식이 깨어나는 느낌에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테니까.
 1분 정도가 지났을까.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깨어나며 육체에 힘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고 제대로 생각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콧구멍 가득 들어오는 공기가 실외가 아닌 실내임을 알려 왔다.
 등에 닿는 감각 또한 수레가 아니었다.
 마차도 아니었고.
 제대로 모신 것 같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제법 푹신했다.
 매트리스가 조금만 더 과학적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손가락에 닿은 이불이 전해 오는 포근함이 만족스러워 나름 괜찮았다.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은데, 너무 푹 자서 몸이 약간 무겁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뭐 움직이다 보면 괜찮아질 거다.
 슬슬 일어나자.
 
 “흐아암―”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던 나는 지척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놀란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 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깔끔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각종 도자기로 장식한 실내는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잠들었던 사이에 강서표국에 도착한 듯했다.
 근데 피와 땀에 절어 있던 옷도 말끔하게 갈아입혀졌고 몸도 깨끗했다.
 설마? 왕 씨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냈다.
 앞으로 살 집이나 잘 봐 둬야지.
 
 드르륵―
 
 닫혔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원영과 왕우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급히 달려온 듯 머리와 옷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다다다닥.
 
 내가 앉아 있던 침상까지 덮치듯 달려온 두 사람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둘의 표정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한 명은 울기 직전이었고, 한 명은 미안해 죽으려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저는 혹시라도 잘못되시면 어쩌나 하루도······.”
 
 아, 아, 안돼! 제발!
 
 “흐윽, 끄윽······.”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중2병을 벗어나냐 마냐 하는 나이일 텐데 순순히 말을 들을 턱이 없었다.
 근데 좀 반칙 아닌가.
 우는 모습마저도 뭐 저리 예쁘고 귀여운 건지.
 딱히 달래는 재주는 없었기에 울고 싶은 만큼 울도록 내버려 뒀다.
 결국, 10분가량을 멍하니 우는 모습만 지켜보고 나서야 상황이 종료됐다.
 
 “공자님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아가씨라뇨, 말씀 낮추세요.”
 “제가 어찌······.”
 “공자님은 목숨을 걸고 절 구해 주신 은인이시잖아요. 부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공자님께서 계속 그리 대하시면······.”
 
 다시금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에 난 바로 말을 잘랐다.
 
 “그래. 앞으로 편하게 대할게. 원영아.”
 “네!”
 
 사실 기다렸던 말이다.
 아무래도 이쪽이 익숙하니까.
 근데 공자라니.
 조금이나마 내 자리를 찾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제가 공자님을 못 알아보고 감히 의심하고 무례를 저질렀던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님이 내리시는 벌이라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태세 전환이 오졌다.
 조금 전 내가 원영일 편히 불렀음에도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전에 봤을 때와는 완전 딴판이랄까.
 말끔해진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그 살벌했던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다.
 
 “형님.”
 “저는 제 본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공자님께서 죽으라면 죽······.”
 
 이 사람은 죽으라면 죽을 것이다.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융통성이라곤 없는 진지충.
 그 정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김 실장과 너무나 닮은 유형의 인간이었기에 거의 확실했다.
 사실 마력 고갈로 인한 리타이어였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몸을 던진 척 시늉을 했을 뿐, 실제로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솔직히 은인이 됐다고 하지만 왕우진 정도의 인간을 죽인다면 기껏 다져 놓은 입지가 급격히 좁아질 게 뻔했다.
 아직 가입 후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했는데 해약은 사절이었다.
 지금은 과거를 잊고 포용할 때였다.
 
 “제 형님 하시죠.”
 
 당장 무릎을 꿇을 기세였던 왕우진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날 보고 있었다.
 
 “어찌 맡은 바 본분도 다하지 못한 저따위가 공자님의 형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산속에서 혼자 살았다고 했죠? 저는 늘 외로웠습니다. 그러니 제 형님이 되어 주세요. 전 그거면 됩니다.”
 
 왕우진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원영이 또한 마찬가지.
 
 “앞으로 형님이라 불러도 되죠? 거절은 거절할게요.”
 
 아무래도 나도 좀 변한 것 같다.
 나는 호의에 호의로 보답하는 인간도, 내가 구한 대상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인간도 아니었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목적의식이 없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기절하기 전 난 깨어남과 동시에 이들에게 내 희생정신과 헌신을 다시금 일깨워 줄 생각이었다.
 더 미안하고 더 고마워하라고.
 한데 너무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니 다시 한번 강조하며 생색을 내려던 내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원영아. 내가 얼마나 잔 거야?”
 “공자님께선 사흘을 내리 주무셨습니다.”
 
 피곤하긴 했나 보다.
 낯선 세상에서 고군분투를 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하긴 레벨 업 효과로 육체적인 피로를 10% 회복할 순 있어도 정신적인 피로까진 어쩌지 못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푹 쉬었으니 앞으론 리타이어를 해도 이렇게 오래 누워 있진 않을 게 분명했다.
 
 “근데 여긴 어디야?”
 “강서표국이자 저의 집입니다.”
 
 역시.
 원영이한테 귀티가 나더라니, 있는 집 자식이었다.
 한동안 빌붙어도 눈치는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순진한 애를 농락하려는 건 아니다.
 이미 서로 목숨을 구해 준 사이가 아니던가.
 공생!
 윈―윈이랄까.
 
 똑―똑―
 
 대화를 잇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큼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태 의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서 방으로 모시세요.”
 
 태 의원이란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와 원영이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나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의원이 어떻게 치료하는지 궁금해 나 또한 유심히 관찰했지만, 호기심은 얼마 가지 않았다.
 한의사와 큰 차이가 없었고, 내가 가진 의학적인 지식의 수준이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환자분의 신체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기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으니 일주일 정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탕약을 드시며 규칙적인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것만 지키시면 곧 완쾌되실 겁니다.”
 “천만다행이네요. 완쾌될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원영이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었고 표정도 어두워졌다.
 괜찮다는데 왜 표정이 어두운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원영이는 잠시 배웅을 하고 오겠다며 의원과 함께 밖으로 나갔고 잠시 뒤에 들어왔다.
 원영이가 들어옴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절로 찌푸리게 만드는 구린내가 방 안 가득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니지?
 그걸 어떻게 사람 입에 넣어?
 이 세계 인간들은 칼로도 모자라 먹는 거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거야?
 내 떨리는 동공과 찌푸린 인상을 보고는 원영이와 우진 형님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한 공자, 아가씨께서 이틀간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달인 탕약이네. 쭉 들이켜게.”
 “왕 아저씨께서 보물이라고 애지중지하시던 천년하수오를 탕약의 재료로 쓰라며 내오셨어요. 그러니까 절대 남기시면 안 돼요.”
 
 저건 못 먹는다.
 한약 냄새를 안 맡아 본 게 아니다.
 그걸 초월했으니 하는 말이다.
 막말로 저건 장에서 오랜 시간 숙성해도 내기 힘든 냄새였다.
 천년하수오가 뭔지 몰라도 어찌 사람이 입으로 똥을 먹는단 말인가.
 이건 아니었다.
 
 “형님, 그런 귀한 걸 어찌 저 같은 놈에게 쓰십니까.”
 “아가씨를 구하려다 다친 공자를 위해서 쓸 수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네. 솔직히 한 공자한테 내가 잘못한 것도 있지 않나. 이렇게라도 사죄하고 싶네. 고지식하다고 욕해도 좋네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갚아야만 공자와 진심으로 형제의 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네.”
 “공자님 냄새는 좀 그렇지만 몸에는 좋아요. 원래 입에 쓴 게 몸에는 달다고 하잖아요. 무인들이 섭취하면 내공 증진에도 도움이 되는 엄청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더더욱 왕 형님이 드셔야지.”
 “왕 아저씨가 드시려면 생으로 드셨어야 했어요. 이건 이미 공자님만을 위한 탕약이에요. 그러니까 한 방울도 남기지 마시고 쭉 드세요.”
 
 젠장.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두 사람의 결의 가득한 눈빛은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졌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
 먹자 먹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원영이가 들고 있는 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
 코를 찌르는 구린내에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솔직히 말하면 실수인 척 떨어뜨리고 싶은데,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휴―
 
 호흡을 가다듬은 뒤 손으로 코를 잡았다.
 찔끔찔끔 먹어봐야 고통만 클 테니까.
 두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띠링!
 
 [마력 스텟이 영구적으로 10 상승하였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알림을 바라봤다.
 
 “대박!”
 
 
 # 강서표국의 암운
 
 “대박!”
 
 너무 기쁜 마음에 튀어나온 본심.
 
 “이, 이거 더 없어?”
 
 순간 침묵이 드리웠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제야 나도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기를 쓰고 안 먹겠다고 하던 사람이 약을 더 달라고 하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하지만 난 지금 일어난 현상이 생각대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더 시급했다.
 
 “좋은 재료라 그런지 기운이 솟아오르더라고.”
 “아.”
 “그래서 그런데 한 사발만 더 먹어 보면 안 될까? 더 없어?”
 “몸에 좋은 것도 과하면······.”
 “딱 한 사발만.”
 
 원영이는 왕 형님을 바라봤고 왕 형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만 기다리란 말을 남기며 밖으로 나갔다.
 원영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내게 억겁의 시간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초조하게 기다리길 잠시 원영이가 들어왔고 바로 원영이의 손에 들린 사발을 들어 입 안에 넣었다.
 
 꿀꺽.
 
 [마력 스텟이 영구적으로 10 상승하였습니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다.
 입에서 똥내가 좀 나면 어떤가.
 중독되어 평생 약쟁이로 살고 싶은 심정인데.
 아티펙트의 도움 없이 무슨 수로 스텟을 올리나 했는데 이런 깜찍한 잠금 해제 같으니라고.
 더 먹고 싶다.
 더! 더!
 
 “한 사발만 더 안 될까?”
 “안 돼요! 몸에 좋은 것도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했어요!”
 “한 공자, 탕약은 충분히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아가씨나 내가 아니면 시비들이 때마다 가져다줄 걸세.”
 
 나에겐 독이 아닌 내공이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단호한 눈빛들을 띠고 있어 더 달란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기다리면 준다는데 기다려야지 어쩌겠나.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단 법인데.
 
 “공자님, 누워만 계셔서 몸이 불편하실 것 같은데 근육을 풀어 줄 겸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떠세요?”
 “안 그래도 표행을 함께했던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자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참에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는 게 어떻겠나? 이 기회에 표국 구경도 하고.”
 “아저씨, 정말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요.”
 
 아무런 대답도 안 했건만 어느새 난 두 사람에게 이끌려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일단 구경이고 나발이고 화장실부터 가고 싶은데.
 밖으로 나간 순간 넓은 마당이 눈에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이 내게 알은체하며 달려왔다.
 
 “공자님 드디어 깨어나신 겁니까?”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죠?”
 
 리타이어 전에도 느꼈지만, 사람들이 참 순박했다.
 함께한 시간은 찰나일 뿐인데 공자라며 살갑게 맞아 주는 걸 보니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형님들도 건강하신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근데 다들 제가 기억하던 모습이랑 너무 달라지신 거 아닙니까? 때깔이 너무 좋으신데요?”
 “맞다, 넌 강호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지. 원래 표사나 쟁자수들은 표행 중엔 거의 안 씻어. 어지간해선 옷도 잘 안 갈아입고.”
 
 표사라, 위생 관념이 철저한 나와는 상극인 집단이었다.
 어차피 강서표국에 취직을 한 게 아니라 은인으로서 머물 예정이었으니 표행을 갈 일도 없었다. 저들과는 지금처럼 깨끗할 때만 마주치면 될 듯했다.
 강서표국 곳곳을 둘러본 뒤 느낀 소감은 확실히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거다.
 강서지역에서 시작해 강서표국이라 지어진 강서표국은 강서지역을 대표하는 표국이자 말석이나마 중원 십대 표국으로 꼽히는 곳이었는데 그 역사도 제법 길었다.
 원영이는 강서표국 국주의 딸이었고 국주인 아버지가 요즘 일이 많은 관계로 시간이 여의치 않다고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겠다며 죄송하다 말해 왔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고 자연스레 원영이의 가족 관계를 알게 됐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오빠가 한 명 있는데 현재는 폐관 수련 중이라 자신이 임시로 표국의 살림을 맡고 있다고.
 보금자리로 이만하면 안성맞춤이었다.
 넓은 장원과 연무장, 일을 도와주는 하인들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런데 둘러보며 한 가지 찜찜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통점이랄까.
 모두가 한결같이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나를 살갑게 대해 주던 이들마저도 그랬는데 자세히 보니 원영이나 왕 형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표국을 둘러본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했다.
 아직은 표국 사람들을 잘 모르는 나를 배려해서인지 저녁은 셋이서 따로 먹었는데 생각보다 음식이 잘 맞았고 맛있었다.
 이후 나는 처소로, 원영이와 왕 형님은 일을 보러 갔다.
 
 ***
 
 사흘을 내리 잤기 때문일까.
 낯선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머리에 베개만 대면 잠들던 내가 눈을 감고 누워 있음에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양을 세는 건 천 마리가 넘어가면서부터 포기했는데 숫자가 많아지니 오히려 잠이 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 이렇게 마음 편히 산책을 해 봤던지.
 지겹게 따라다니던 카메라와 어떻게든 물어뜯겠다고 달려드는 악플러가 없다는 건 참 좋았다.
 
 “그러고 보니 살겠다고 별짓을 다 했네.”
 
 소리를 지르며 전장을 뛰어다니다니, 대한민국에서 그랬다면 다음 날 1면을 장식하는 것으로 모자라 주가가 곤두박질쳤을 것이 분명했다.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는, 가진 건 한정우라는 이름 석 자가 전부지만 어쩌면 이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더니, 위기라 생각했던 현실이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 무림이란 곳에 온 건 다시금 꿈꾸기 위한 걸지도 모르겠다.
 더는 기업과 길드의 얼굴이기에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었고, 대한민국에선 느낄 수 없던 긴장과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전환점이란 게 이리도 갑자기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긍정적인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상념에 잠겨 제법 많이 걸어온 것 같았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원영이가 낮에 소개해 준 표국 내에서 가장 끝에 있는 화단이었다.
 밤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향긋한 꽃 냄새는 여전했다.
 향기에 취해 두리번거리길 잠시 슬슬 하품이 나오는 게 처소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았다.
 
 “한 공자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원영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또 보네.”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 그런지 제법 반가웠다.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 하세요?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신 거라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잠자리는 편하고 좋아. 그냥 바람이 좋아서 좀 걸었던 거지. 그러는 넌 안 자고 뭐 해?”
 “저, 저도 바람이 좋아서요.”
 “무슨 일 있어?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네.”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있네, 있어.”
 “······.”
 “앉아 봐.”
 “여길요? 여긴 길 한복판인데······.”
 “편하게 앉아.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잖아.”
 
 원영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쪼그리고 앉았고 난 원영이의 등 뒤로 걸어가 원영이와는 반대로 앉았다.
 등과 등이 닿는 순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지금부터 난 네 감정 변소야.”
 
 더는 모른 척 지나치기 찜찜했다.
 속세에 찌든 내 본능상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머물러야 할 곳의 사람들이 죄다 우환이 깃든 표정을 짓고 있는데 뭘 알아야 대비를 해도 할 게 아닌가.
 
 “감정······ 변소요? 그게 뭐예요?”
 “속에 담아 두고 있는 말들을 전부 쏟아내기 위해 이용하는 곳이랄까. 우선 시범을 보여 줄 테니까 참고해. 난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변해 버렸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누리던 모든 걸 한순간에 잃었고, 좌절하고 절망했어.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다른 것들도 보이더라고. 잃고 나니까 진짜 잃고 있던 것들이 보였달까?”
 “그래서 산에서 혼자 사신 거예요?”
 “뭐 그렇지.”
 “저는······.”
 
 ***
 
 물꼬가 트이니 흐르는 물처럼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감정 변소 이거 정말 효과 있는데요? 솔직히 공자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좀 우울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진 것 같아요. 이래서 사람들이 누군가한테 속 얘기를 털어놓는 건 가봐요.”
 “앞으로도 종종 이용해. 너는 특별히 무료로 이용하게 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진짜 네 속 얘기를 해 봐.”
 “······공자님은 정말 이상해요.”
 “왜?”
 “보통은 잘 안 묻지 않나요?”
 “감정 변소는 원래 이런 거야.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냥 남김없이 쏟아내고 가면 되는 거야. 편하게 생각해.”
 “희한하게도 공자님이랑 얘기하는 건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처럼 편한 것 같아요.”
 “우리가 공생 관계라서 그래.”
 “공생 관계요?”
 “응. 우린 서로의 목숨을 구해 준 사이잖아. 이만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공생 관계지.”
 “생각보다 더 좋은 관계였네요.”
 
 원영이는 교묘하게 말을 돌리며 정작 중요한 얘기를 쏙 빼고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핵심인 것 같은데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니 감을 잡기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내 안위가 걸린 문제기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원래 표행이란 게 그렇게 습격을 자주 받는 거야?”
 “아니요······ 이렇게 자주 습격받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등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
 나는 조금 전 건넨 질문이 바라던 답과 상당한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표행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한 표행이에요.”
 “왜?”
 
 등 뒤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공자님도 아시게 될 테니 말씀드릴게요. 사실 이번 표행은 강서표국으로 신의님을 모셔 오는 게 목적이었어요.”
 “신의?”
 “예. 중원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난 의원이세요. 저희가 도착했을 땐 안타깝게도 신의께서 기약 없는 외출을 하신 상태였고요. 제자들 말론 한 번 외출하시면 짧게는 두 달 길게는 몇 년씩 돌아오지 않으신다고.”
 
 심각한 목소리에 나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기다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계실 만한 곳에 전부 연통을 넣어 봤지만 닿지 않았어요. 하는 수 없이 신의께서 만들어 두신 것 중 가장 좋다는 영약을 구매해 표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요. 돌아오던 중에 공자님을 만난 거예요.”
 
 이제야 조각이 좀 맞춰지는 느낌이었지만, 아직 진짜 들어야 할 얘기는 나오기 전이었다.
 
 “공자님께서 물으셨죠? 원래 이렇게 자주 습격을 받냐고. 신의님의 영약 때문이에요. 전대 국주님과 신의님 사이에 인연이 없었다면 본래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드려도 구할 수 없는 게 신의께서 만드신 영약이거든요. 보물을 노려 볼 만한 자들이 보물을 가졌으니 습격을 받을 수밖에요.”
 
 정말 그럴까?
 
 “너희가 영약을 가지고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입단속을 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흘러나간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영약이 아닌 너희를 노렸을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없어요. 영약의 가치가 저희보다 훨씬 더······.”
 
 내 생각은 원영이와 달랐지만 아직은 좀 더 들어 봐야 하기에 경솔하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실 신의를 모시러 갔던 것도, 영약이 필요했던 것도 제 아버지인 국주님이 아프시기 때문이었어요.”
 
 국주가 바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진실은 만날 수 없었던 것.
 강서표국 사람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그늘이 있던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심 기대를 했는데······ 영약 덕에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치료엔 실패했어요. 태 의원님 말로는 당장 신의님을 모셔 오지 않는 한 치료는 불가능하대요.”
 “표국 사람들은 알고 있어?”
 “치료에 실패한 건 저와 왕 아저씨를 비롯한 다섯 분 정도밖에 몰라요. 이제 공자님까지 여섯 분이네요.”
 
 글쎄, 다들 아는 눈치던데.
 모르는 게 약인 것도 있으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애가 겪기엔 딱한 사연이었다. 아버지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원영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내게도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었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가 부도 직전이란 사실을 알게 된 신입사원의 기분이랄까.
 하지만 내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으론 이 이상 개입하지 않는 게 맞았다. 대한민국에 있던 한정우는 그랬다. 하지만 무림에 있는 한정우는 그 삶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가끔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다.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순수한 호의를 베푼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건 감정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원영이의 투명한 눈빛 때문이다. 진심으로 다른 이를 위하며 아낄 줄 알았다.
 그 수혜자가 나였고.
 나와는 정반대 유형의 사람이라 낯설지만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란 말을 믿어볼 생각이다.
 어째 빨대를 꽂으러 와서 빨대가 꽂히는 것 같지만.
 이제 평생 놀면서 먹여 살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다.
 자식에 이어 부모까지 살려 주면 말 다 했지.
 
 “넌 웃는 게 예뻐.”
 “갑자기요?”
 “그러니까 웃게 해 줄게.”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려요. 이렇게 공자님께나마 털어놓으니 답답한 게 좀 사라진 기분이에요.”
 “감정 변소 제법 이용할 만하지?”
 “네. 앞으로 종종 이용해야겠어요.”
 “그러니까 혼자 다 짊어지고 가려고 하지 마.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짐은 좀 내려놓고 살아.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해.”
 “네.”
 “원영아 넌 내가 산속에서 무공 수련을 하던 무인 같아?”
 “아니요.”
 “대답이 너무 빨리 나온 거 아니야? 생각하는 척이라도 좀 해 주지. 나 상처받아.”
 “푸웁, 탕약이 떨어지면 생각해 볼게요.”
 “나 사실 의원이야.”
 
 !
 원영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하긴 은인으로 대하는 것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가 보여 준 모습은 전장에서 소리를 지르던 경박한 모습뿐이었으니까.
 한마디 말로 의원이라 믿긴 어려울 것이었다.
 
 “농담 아니야. 물론 너로선 오해할 만해. 화가 날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 네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생명으로 장난이나 치는 그런 사람 같아?”
 “저, 정말 의원이세요······?”
 “밑져야 본전 아니야? 날 한번 믿어 봐. 영약을 드셨으니 당장 상태가 더 나빠지시진 않을 거 아니야.”
 “공자님께서 의원이란 건 믿을게요······. 하지만 소용없을 거예요. 태 의원께서 신의가 아니면 치료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
 “그런 돌팔이 말을 믿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돌아가신 사부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 내가 익힌 의술이 중원 제일이라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무리 나에 대한 믿음이 있더라도 이건 가족의 생명이 달린 문제니까.
 99%의 믿음을 100%로 만들 때였다.
 
 “지금 치료하러 가자. 왕 형님을 불러.”
 “지금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아. 확인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나는 원영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고 결국 국주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원영이는 국주의 처소에 있는 호위를 잠시 물리며 나를 비밀리에 들어가도록 배려했다.
 혹시라도 치료가 잘 안 되면 내가 괜히 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는데 나 또한 바라던 바였다.
 
 ***
 
 마치 국주의 상태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이 국주의 처소를 밝게 밝히고 있었다. 이내 시야에 들어온 국주는 원영이의 아버지답게 상당한 미중년이었다. 꽤 오랜 시간 투병으로 인해 상태가 엉망인 걸 고려하면 원영이가 얼마나 물심양면으로 아버지를 보살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들 나가 주세요.”
 “안 될 말일세. 태 의원이 진료를 볼 때도 나나 아가씨가······.”
 “형님이 무슨 우려를 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전 근처에 누군가 있으면 치료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워낙 혼자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요. 어차피 날이 밝은 뒤에 태 의원을 불러 확인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10분. 저에게 10분만 혼자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결국, 왕 형님과 원영이는 문 앞에서 대기하기로 하며 물러갔다.
 사실 1분도 필요치 않았다.
 오늘 하루 30의 마력이 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못 해 봤겠지만, 여전히 스킬을 사용하기엔 부족한 마력이었으니까.
 
 ‘스캔.’
 
 2초 정도의 짧은 스캔 후 난 두 눈을 의심했다.
 원영이는 내게 국주가 주화입마의 초기 증상이라 했다.
 주화입마가 무엇인지는 나 또한 알고 있었다.
 중국계 헌터들은 마력중독이나 마력 역류 현상을 두고 주화입마라 불렀으니까.
 하지만 국주는 주화입마가 아니었다.
 국주는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가지의 독이 아닌 스무 가지 이상의 독에.
 국주의 체내에선 현재 국주의 내공과 독이 치열한 혈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스킬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스킬의 위력이 레벨과 비례하기 때문인데 레벨이 오르면 그 범용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겠지만 지금은 고작 8레벨에 불과해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어차피 지금의 치료는 맛보기일 뿐.
 그렇다면 외상에 탁월한 힐보단 리커버리가 정답이었다.
 
 ‘리커버리.’
 
 스킬을 전개하고 1초나 지났을까.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과 함께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내 스킬이 강제로 중지되었고 난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1초 사이에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다.
 역시 지금의 마력 양으론 리커버리를 1초 이상 전개하기 버거웠다.
 
 “형님······ 원영아······.”
 
 기어들어 가는 내 목소리를 들렸을까.
 드르륵―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달려왔다.
 
 “확인······ 해 봐······ 먼저······ 잘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
 
 “으으······.”
 
 얼마나 잤을까.
 전처럼 많이 자지는 않았을 텐데.
 
 “공자님 이제 정신이 드세요?”
 
 원영이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으킬 수 없었다. 리타이어의 후유증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물 좀······.”
 
 물을 쭉 들이켜고 나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난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고 두 사람은 날 행해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얼마나 잤어?”
 “여덟 시간 정도 주무셨어요.”
 
 적당히 잤네.
 반면 두 사람은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이 검었다.
 
 “태 의원은 다녀갔어?”
 “네!”
 “뭐래?”
 “아무래도 영약의 기운이 국주님을 살리신 것 같다고······ 분명 차도가 있다고 하셨어요.”
 “정말 영약 덕인 것 같아?”
 “아니요!”
 “이제 믿겠어?”
 
 두 사람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한 표정엔 경악과 존경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내가 바라던 표정이었다.
 
 “왜 진작 의원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아픈 사람이 없었는데 보여 줄 순 없잖아. 구덩이에 나체로 있던 놈이 말로만 의원이라고 하면 거짓말쟁이라고 했을걸?”
 
 두 사람도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신의가 아니라면 고칠 수 없다며?”
 “공자님께서 치료하시고 차도가 있으셨어요. 안색도 몰라보게 좋아지셨고요. 다녀갔던 의원들이 하나같이 신의가 아니면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하다 보니 쉽게 믿어 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부디 아버지를······.”
 “한 공자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알지만 제발 국주님을 살려 주게. 한 공자가 원한다면 내 목숨을 한 공자에게 내어 주겠네.”
 
 그 목숨 넣어 두시고요.
 
 “자신이 없어.”
 “이제 믿을 사람은 공자님밖에 없어요. 제발,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못 고칠 자신이 없다고.”
 “······나빴어요.”
 “······.”
 “하지만 이대로는 국주님을 치료할 수 없어.”
 
 이대로 치료를 계속했다간 국주보다 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는 수가 있었다. 계속된 리타이어는 정신을 갉아먹을 테니까. 이 빌어먹을 두통을 매일 느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레벨이 낮아 미미한 효과지만 분명 효과가 있었고 그 효과를 지속시킬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선 처리해야 할 선결 과제가 있었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지속적인 치료가 계속된다면 국주는 아주 건강하게 완쾌할 수 있을 것이었고, 희망을 본 이상 저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지금부터 할 내 제안에 대한 선택은 저들의 몫이지만 사실상 저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역시 나란 놈은······.
 순수하게 호의를 베푸는 놈은 될 수 없나 보다.
 본능적으로 내게 이익이 될 걸 알고 도운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였다.
 
 “문제가 있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 드릴게요. 제발 저희 아버지를 치료해 주세요.”
 “그러고 싶지만 내가 기절한 건 봤지? 내겐 당장 국주님을 치료할 체력이 없어. 네가 날 구했을 때 내상을 심하게 입은 상태였거든.”
 “아저씨 어서 태 의원을 불러 공자님을 치료하도록······.”
 “말을 잘라서 미안한데, 돌팔이한테 진료를 받는 건 사절이야. 내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아, 나도 의원이니까. 어차피 날 진료한다면 신의라도 돌팔이와 같은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거야. 내가 특이체질이거든.”
 “특이체질이요?”
 “응. 내 의술은 기본적으로 선천진기를 사용하는 의술이야.”
 
 선천진기란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걱정 마. 선천진기를 채우는 방법도 있으니까.”
 “선천진기를요?”
 “내가 특이체질이라고 했잖아. 나만 가능한 방법이야.”
 “그 방법이 뭔데요?”
 “나는 영약을 먹으면 선천진기를 회복할 수 있어.”
 “여, 영약이요?”
 “응. 질이 좋고 나쁨은 상관없어. 내공을 늘려 주는 종류라면 뭐든 괜찮아.”
 “영약을 통해 의술을 펼칠 선천진기를 회복하시는 건가요?”
 “정확해. 지금은 선천진기가 거의 바닥이라 국주님을 치료할 여력이 없어.”
 “영약엔 주인이 따로 있다더니, 만약 아버지가 드신 영약을 공자님께서 드셨다면······.”
 “그 영약의 주인은 국주님이셨던 거지. 너무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어제는 말을 못 했는데 탕약으로 달이지 말고 생으로 가져다줬으면 좋겠어. 그게 가장 효과가 좋거든. 선천진기를 회복하면 반드시 국주님을 완치시켜 줄게.”
 
 신의가 백 명이 있다 한들 내 의술을 따라올 자가 있을까?
 의술만큼은 난 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자네 같은 의원을 가르쳤다면 강호에 이름을 날렸을 텐데 혹시 사부님의 별호가 어떻게 되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형님, 안타깝게도 사부님께선 별호가 없으셨습니다. 제 사문은 일인전승을 원칙으로 하는 데다 대성을 하지 못하면 강호에 나가지 못하는 게 율법이니까요. 대성한 자가 아니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진법까지 펼쳐져 있어 사문에는 강호에 출가한 이가 천 년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강호의 그 누구도 제 사문이나 의술에 대해 알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의술을 대성한 게인가?”
 “예. 전 사문의 의술을 대성했고 그 결과 진법이 해제되었으니까요. 덕분에 산적의 습격을 받았지만요.”
 “자네는 하늘이 내린 기재였군.”
 “체질 덕분이죠. 사부님께선 제 체질이 사문의 의술을 익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셨거든요.”
 “실례라는 걸 알지만 가능하다면 자네의 체질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나? 솔직히 너무 궁금하네. 혹 천무지체라도 타고난 게인가?”
 “영약지체(靈藥之體)라고 합니다.”
 
 못 들어 보셨을 겁니다.
 방금 지은 거라.
 
 
 # 위기는 기회다
 
 밥 대신 영약을 먹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끊임없이 울려오는 알림에 기쁜 마음으로 섭취했다.
 영약은 그 어떤 꿀보다 달았으니까.
 영약을 섭취하며 강호에 대해 알아 가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말보단 문서를 선호한다.
 말은 전달자의 생각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내 처소는 영약과 서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환기를 시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향으로 가득해져 갔다.
 이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이나마 알게 됐다. 그간 읽었던 무협 소설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등급의 F급은 일반인, E급은 삼류, D급은 이류, C급은 일류, B급은 절정, A급은 초절정, S급은 화경의 무인이었다.
 서책을 읽으며 무인들과 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영약.
 이 세상의 무인들은 영약을 먹으며 내공(마력)을 늘렸다.
 그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무인들은 영약을 섭취할 경우 그 기운을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운기를 하며 깨달음을 수습해야 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내공과 함께 경지(레벨)가 오르는 것이었다.
 반면 나에겐 그저 입에 쓰기만 할 뿐, 그런 과정이 일절 필요 없었다. 대신 레벨(경지)이 오르지 않았고 마력(내공)만 늘었다.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무인들은 영약을 섭취해도 영약의 기운을 반도 흡수하지 못한다고, 경지가 높아지고 내공이 늘어날수록 영약의 효과가 줄어들며 일정 경지에 도달하면 아무리 영약을 많이 먹어도 내공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난 좋은 영약이든 나쁜 영약이든 영약의 기운을 100% 흡수할 수 있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영약을 평생 먹어도 마력이 늘어나는 것이다.
 무한하게.
 집중력이 높아진 걸까.
 책을 읽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 느낌이었다.
 한데 책을 읽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책으로 배운 세상이 내게 강한 찝찝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 무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라고.
 내가 겪은 칼부림들은 대체 뭘까?
 이게 평화라고 생각하니 왜 이리 불안감이 드는 건지.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불길한 예감이 잘 들어맞는 편인 내 직감이 두렵기에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해선 안 됐다.
 마력은 많을수록 좋다지만, 이 상황을 강해진다고 말할 순 없었다.
 8레벨 힐을 한 시진 동안 쓰는 것보단 50레벨 힐을 1초간 쓰는 게 더 효율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영약의 제공은 국주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일 터.
 앞으로는 영약을 구매할 돈을 벌 방법과 레벨을 올릴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 보니 일단 오늘 들여온 영약은 다 먹었다.
 과연 마력이 얼마나 올랐을까 기대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나는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며 상태창과 알림창을 바라봤다.
 
 [‘집중(Passive)’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집중력이 올라갑니다.
 
 [‘속독(Passive)’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글을 빠르게 읽게 됩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한참을 웃었다.
 미친놈처럼.
 기존에 가지고 있던 10개의 스킬 외에도 스킬이 생성되다니, 정말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거기다 패시브다. 마력이 없어도 사용이 가능한.
 돌아가면 규부문고에 취업이라도 해야 하려나.
 그나저나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법칙.
 진심으로 실감했다.
 초기화가 가져온 가능성은 내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져오고 있었다.
 여윽시 될놈될이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내가 강서표국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책에 파묻혀 산 덕분일까 이해(Passive) 스킬이 생성됐다. 물론 스킬이 다 유용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식사 도중 젓가락질(Passive) 스킬이 생성되었고 변소에서 쾌변(Passive) 스킬이 생성되었으니까. 덕분에 반복 활동을 능숙하게 하게 되면 스킬이 생성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연무장에서 운동도 시작했다.
 어쨌든,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아직 내상이 덜 치료됐다는 핑계로 국주의 치료는 주 1회로 제한했다.
 영약을 더 먹기 위해서 갑질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 또한 이 세상을 제대로 알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국주에게 무려 1분이나 리커버리를 전개했으니까.
 그랬음에도 적절히 끊어 리타이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정이 넘은 지금 난 화단을 향해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감정 변소를 이용하고 싶단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 의원님 말로는 아버님의 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지셨다고 이 기세라면 곧 주화입마에서 깨어나실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고맙단 말은 백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은데.”
 “천 번을 넘게 해도 부족하니까요.”
 “마음만 받을게. 고맙단 말은 이제 완치되는 날 딱 한 번만 더 하고 끝내자. 어때?”
 “좋아요. 아 참, 제가 지난번엔 깜빡하고 정정을 못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요.”
 “뭔데?”
 “저 어린애 아니에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처음 내가 의원이라 밝힌 날 어린애답지 않게 세상 짐을 홀로 짊어지고 사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었다.
 역시 애는 앤지 그 말을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대답이 너무 빠르게 나온 것 같은데.”
 “아직 탕약 남지 않았어?”
 “정말 공자님은 못 당하겠네요.”
 “연륜이란 거지.”
 
 내가 알던 원영이와 지금의 원영이는 달랐다. 전에도 밝고 예뻤지만 그건 그늘이 진 원영이었고 그늘을 걷어 낸 원영인 치명적일 정도로 미소가 밝고 예뻤다.
 
 “역시 넌 웃는 게 예쁘네.”
 “예, 예뻐요······?”
 “응. 그러니까 앞으로 우울한 일이 있으면 감정 변소에 다 쏟아내고 가. 지난번에도 쏟아내니까 근심 걱정이 해결됐잖아. 아직 해결 중인가. 아무튼.”
 “가끔 보면 공자님은 자화자찬을 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낯이 좀 두꺼운 편이긴 하지.”
 “지난번보다 등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요즘 운동해서 그런가 보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근데 나도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요?”
 “곽씨상단은 어떤 곳이야?”
 “공자님께서 곽씨상단을 어떻게 아세요?”
 “지난 표행에 배 형도 있었잖아.”
 “아, 배 아저씨한테 들으셨구나. 배 아저씨는 곽씨상단 소속인데 곽씨상단과 강서표국의 연락책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거의 표국에 머무시고요.”
 “표국 사람이 아닌데 표행도 나가거나 머물고 그래?”
 “곽씨상단의 상단주께서 아버지와 막역한 친우 사이시거든요. 덕분에 곽씨상단은 대부분의 의뢰를 저희 표국에 맡기는 상황이고요. 이번엔 곽씨상단에서 정말 큰 의뢰를 맡겨서 팔 할 이상의 표사님들이 표행에 나선 상황이에요.”
 “어쩐지 규모보다 사람이 너무 없다 했는데 다 표행에 나간 거였구나.”
 
 소리를 지르던 와중 이상했었다.
 한 사람만 소속이 달라서.
 그런데 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고 있었다.
 과연 배 씨가 전부일까.
 내가 보기에 원영이나 강서표국 사람들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믿음을 주면 의심이란 걸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건 좋은 거지만 믿음이 배신당하게 되면 더 큰 상처를 받는 법이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
 
 강서표국에 온 지도 어언 이 주가 됐다.
 강서표국에 드리웠던 암운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원영이와 대화를 나눈 뒤로 내 의심은 더욱 커졌고 확고해졌다.
 의뢰를 빙자해 외부로 무력을 빼돌린 거라고 가정하니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그렇기에 하나씩 짚어 봤다.
 국주가 독에 중독됐다.
 입단속을 했음에도 영약의 존재가 알려졌다.
 정말 영약의 존재가 알려진 거라면 중구난방으로 습격을 받아야 했지만, 어딘가 통일된 살수들의 습격만 이어졌다.
 습격자들은 영약을 내놓으란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오직 죽이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목적을 가진 배후가 존재하는 경우뿐이었다.
 영약을 사용한 치료가 실패한 것을 원영이는 비밀로 했지만, 모두에게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내 치료에 대해선 왜 소문이 안 나는 걸까.
 치료할 능력이 없는 태 의원조차 원영이에게 넌지시 신의를 데려온 거냐고 물었다고 했다. 원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워낙 거짓말을 못 하는 아이이니 다른 의원이 치료 중이란 사실을 태 의원은 눈치챘을 것이었다.
 이건 누군가가 감추는 게 분명했다.
 강서표국에 희망이 싹트는 걸.
 분명 모종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음이 확실했다.
 그래서 이제 확인해 볼 생각이다.
 
 “한 공자!”
 “어? 호삼 형님? 전 잠이 안 와서 산책이나 할 겸 나왔는데, 형님은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뭐 하십니까?”
 
 [이름: 배호삼
 종족: 인간
 성별: 남자
 나이: 36
 소속: 곽씨상단
 등급: D
 재능: 4]
 
 내가 처음으로 의심했던 곽씨상단 소속의 무인인 배호삼이 내 앞에 나타났다.
 형님이라 불러도 별 반응이 없던 양반이 이틀 전 국주님을 치료한 뒤부터 부쩍 살갑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태 의원에게 뭔가 언질을 받은 게 있는 듯했다.
 
 “저녁을 잘못 먹었는지 배가 너무 아파서 변소에 다녀오는 길이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이 시간에?
 그것도 내가 머무는 별채까지 변소를 찾아 왔다고?
 개소리다.
 혹시 내가 국주를 치료하는 의원인지 아닌지 감시를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형님 제가 의술을 좀 할 줄 아는데 진료 좀 해 드릴까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걸까.
 찰나지만 눈빛이 번뜩였다.
 
 “그럼 어디 한번······.”
 
 무방비하게 다가오는 배호삼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렴 제가 의원인데······.”
 
 빠악!
 
 “암 덩어리를 보고만 있겠습니까.”
 
 선빵 필승이라 했다.
 
 <『무신탄생』 1-2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