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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FFF급 구단 매니지먼트 [E](종료230728)

FFF급 구단 매니지먼트 1-1권

2019.11.08 조회 1,668 추천 19


 # 프롤로그
 
 고등학교 때까지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나 때문에 어머니는 있는 돈을 긁어모아 굿판을 벌이셨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늦게 선택한 축구의 길에서 한때나마 승승장구했다.
 연령대별 청소년 대표에 프로 계약까지.
 이렇게 성공 가도를 달릴 때마다 가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 외국에는 나가지 마. 정 나가려거든 부적을 꼭 품에 안고 가야 해.
 
 굿판을 벌이던 무당의 경고였다.
 외국에 나가면 귀신이 달라붙는다나 뭐라나.
 
 ‘아니, 축구 선수가 외국을 안 나갈 수 있어?’
 
 그건 불가능했고, 믿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부적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그 무당의 말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적이 헤지고 또 헤지다가 급기야 빨래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을 때, 나는 놀랍게도 부적이 없는 인생이 내게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는 걸 절감했다.
 그때가 국가대표로 발탁된 첫 해외 원정 경기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첫 번째 경기에서 자책골, 두 번째 경기에서는 복합골절.
 선수 생명의 위기를 겪으면서 후회가 막심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당연하겠지만, 일 년 반 후 경기력을 회복 못 하고 필드와 병원을 왕복으로 전전하던 나는 방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2부 리그에서 더 가지 말자고 외쳤건만, 역시 포지션 경쟁자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기 일쑤였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참 묘하다. 나락으로 떨어지니 미신에 기대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갔을 때 그 무당은 유명을 달리했고, 미봉책으로 다른 무당을 찾아가 부적을 만들었지만, 미신은 역시 미신, 일 년 동안 단 일 분도 경기에 뛰지 못하고 또다시 방출되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추한 꼴 보이기 싫다는 마음이 조기 은퇴를 결심하게 했다.
 남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했으니, 지도자의 길은 좀 더 일찍 걸어서 제2의 무리뉴라도 될 야망을 품자는 마음도 생겼고.
 그리하여 실제로 지도자 생활을 했는데, 웬걸 이게 또 천직이었나 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승승장구했고, 최연소 연령대별 감독을 거치며 미래의 국가대표 감독이라고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코치직 제안이 온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정확히는 챔피언십 리그, 즉, 잉글랜드 프로축구 2부 리그에서 2월을 끝낸 현재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강팀한테 연락이 왔다.
 
 ‘아, 이거 갈등되네.’
 
 한 단계 더 연령대별을 올려 감독을 맡느냐, 아니면 축구의 본고장에서 배움의 도전을 택하느냐!
 분명히 좋은 기회였지만, 바닥에서 다져야 하는 환경이 두려웠다. 이럴 때는 또 시간 내서 따놓은 해외 축구 지도자 자격증이 원망스럽다. 그게 없었다면 결심이 편했을 테니까.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도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서 나는 금의환향을 다짐하며 나라에 작별을 고했다.
 
 ***
 
 내가 몸을 담을 팀은 미드포트라는 곳인데, 축구 덕후라면 요즘 이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처럼 영국에서도 시민이 주인이 된 팀을 만든다고 도시 사람들이 한푼 두푼 모아서 세미 프로부터 시작해 불과 창단 10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를 넘보고 있었다.
 사실 감독이 레전드다.
 이름은 레디메인 히들스턴.
 선수 시절 또는 그 이후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4부 리그 때부터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고, 지금도 ‘ing’다.
 이미 미드포트를 챔피언십 리그에 승격시켰을 때 프리미어 리그의 여러 팀에서 그와 접촉했지만, 아직 떠나지 않는 걸 보니 팀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모양이다.
 그런 레디메인이 나를 반기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미스터 정.”
 
 참고로 내 이름은 정현진이다.
 
 “영광입니다. 감독님은 제 롤 모델이셨습니다.”
 
 나는 존경심 절반, 앞으로 이 팀 적응을 위한 사탕발림 절반을 섞어 입으로 내뱉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쉰다섯 살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웃을 때 특히 주름살이 자글자글해서 노안 느낌이 강했다.
 아무튼, 레디메인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물고 나에게 덕담으로 응답한다.
 
 “기록을 보니 나보다 더 지도자 생활을 일찍 했던데··· 내 나이 때는 아마 세계 최고의 감독이 되어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나는 내심을 숨기지 않았다. 선수로서 못 밟아본 정상을 지도자로서 누비고 싶은 야심이 없다면 거짓말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눈앞에 있는 자글자글 주름 감독한테 모든 걸 이어받고 싶었다.
 팀 운영, 경기를 보는 눈, 선수 기용과 운빨마저도.
 이런 각오 탓인지 몰라도, 왠지 모르게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운명을 느꼈다.
 하지만 개뿔, 다음 날 나는 엄청난 액운을 경험했다.
 
 『미드포트의 히들스턴 감독 심장마비!』
 『히들스턴 희망과 숙제를 잔뜩 남기고 천국으로 떠나다!』
 
 죽은 사람 두고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당장 누가 감독이 되든 내 입지가 불안해졌다.
 연령대별 청소년 대회에서 내 전술 능력을 본 레디메인 히들스턴 감독이 나를 데려와 달라고 팀에 강력히 요청했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속으로 고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도무지 의욕이 안 생긴다.’
 
 절망감에 한숨만 늘어갔다.
 왜 내 인생은 늘 잘나갈 때 꼬이는 걸까?
 좌절 또 좌절의 시간이 가고 있었을 때, 황당한 일이 그날 밤에 일어났다.
 죽은 감독이 내 눈에 보였던 것이다.
 
 “누··· 누구세요?”
 
 레디메인은 처음 봤을 때의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한 그 웃음으로 나에게 말했다.
 
 ― 너 내가 보여?
 
 제발, 꿈이기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침을 꿀꺽 삼키며 용기를 내어 감독한테 물어봤다.
 
 “아직 저 위로 안 가신 건가요?”
 ― 어, 좀 더 할 일이 남아서.
 “뭐··· 뭔데요?”
 ― 프리미어 리그 우승.
 “······.”
 ― 미안한데, 네가 나 대신··· 해줘야겠다.
 
 죽은 무당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국에 나가면 귀신이 달라붙을 거야!】
 
 그게 왜 지금일까?
 
 
 # 1회. 자네, 돈 좀 있나?
 
 ― 자네, 돈 좀 있나?
 
 자기 목표를 말한 후에 삥 좀 뜯으려는 걸까?
 경기 전날 찾아와서 하는 말이 돈 좀 있느냐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 삥 좀 뜯겨봤나 보네. 바로 거절하는 걸 보니. 하지만 자네를 도우려는 거야.
 “제가 돈을 좀 가지고 있어야 감독님이 저를 도울 수 있다고요?”
 ―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돈이 있어야 나중에 우리 팀이 승리할 수 있거든.
 “제가 한 10년 전쯤 친구 따라 간 곳이 생각납니다. 유명한 다단계 회사였는데, 2박 3일 동안 합숙을 시키더라고요.”
 ― 내 말을 안 믿는군. 그럼 딱 한 가지만 말하겠네.
 
 레디메인 히들스턴 감독은 답답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 내가 장담하건대, 우리 팀은 내일 경기에서 대패를 당할 걸세.
 “아니, 그게 지금까지 지도했던 팀한테 할 말입니까? 덕담해도 부족할 판에 저주를 쏟아내다니요?”
 ― 사실인 걸 어떡하나? 우리 팀은 사실 내가 다 해왔어. 훈련부터 전략전술 심지어 스카우트까지. 모두 내 돈과 땀과 시간을 투자해서 여기까지 온 거지. 대신 투자한 만큼 몇 배로 돈과 명예가 쌓이더군. 그래서 자네한테 제안한 거야. 초기 자본만 좀 투자하라고.
 “네, 네, 그러시겠죠. 와, 내가 살다 살다 귀신 사기꾼은 처음 봅니다.”
 
 사실 귀신도 처음 본다.
 그러다 보니 지금 현실이 현실 같지가 않아서 귀신 앞에서 잘 버티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곳에 와서 첫 경기 하기 전에 감독이 죽고, 죽은 감독한테 첫 경기에 대패한다는 저주를 듣자 기분이 더러워서 앞에 있는 귀신을 외면하고 싶었다.
 
 ― 내일 경기가 끝난 후 다시 오겠네. 그때 투자할 용의가 있다면, 나는 자네를 도울 걸세. 아니 내 목표를 위해서라도 꼭 자네를 돕게 해주게. 제발.
 “저야말로 제발 감독님이 천국에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죽었으면 빨리빨리 가셔야죠. 구천을 헤매시면 나중에 잡혀가십니다.”
 ― 하하하. 천국이라, 덕담은 고맙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그럼 내일 보세.
 “오지 마세요. 오셔도 전 모른 척···”
 
 내 말이 끝나기 전 그는 뿅! 하고 사라졌다. 나는 사람 마음 뒤숭숭하게 하고 떠나는 전 감독을 저주했다.
 그러다가 때마침 요란하게 울리는 내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스터 정?)
 “네, 맞습니다.”
 (나 그때 인사했던 제임스야. 제임스 코너.)
 “아, 안녕하세요.”
 
 나는 더듬거리며 제임스 코너를 떠올렸다.
 그는 전술 코치 겸 수석 코치였다.
 나 역시 전술 코치로 팀에 왔으니, 일종의 내 사수라고 볼 수 있었다.
 
 (잠시 좀 봤으면 좋겠는데, 시간 괜찮나?)
 “조금만 천천히 말씀 좀··· 아, 지금 보자고요?”
 
 영어 회화에 돈 많이 투자했지만, 현지에 오니 역시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렵다.
 특히 지금처럼 상대가 빨리 말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가까스로 알아듣고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클럽 하우스로 당장 오게. 내일 리즈 유나이티드 경기 때문에 상의할 게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상당히 추리력을 발휘했다.
 클럽 하우스와 내일(tomorrow),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라는 단어를 조합하면 어렵지 않게 때려 맞출 수 있었다.
 
 ‘어, 근데 아까 귀신 말은 내가 어떻게 다 알아들었지?’
 
 죽은 감독은 분명히 영어로 말했고, 나는 우리말로 답했다. 그런데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영적 교감을 통해 대화해서 언어의 장벽쯤은 문제가 없는 듯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귀신 생각은 그만, 부정 탄다.’
 
 자꾸 내일 경기 대패할 거라는 전 감독 말이 머리에 울린다.
 빌어먹을 레디메인 히들스턴 감독!
 내일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기를.
 
 ***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제임스 코너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게. 혹시 영어가 안 될 거 같아서, 내가 통역까지 같이 불렀네.”
 “아, 감··· 감사합니다.”
 
 제임스는 통역을 불렀다고 생색냈지만, 실제로는 저 통역은 내 매니지먼트에서 붙여준 거다.
 즉, 구단에서 한 푼도 돈을 내지 않았다.
 뭐, 이걸 따지려고 하는 건 아니라서 나는 제임스를 바라봤다.
 나를 급히 불렀다면, 내일 경기에 관해서 할 말이 있다는 뜻 아닐까?
 
 “자네가 온 지 얼마 안 된 건 알지만, 그래도 한국의 청소년 대표팀을 운영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들었네.”
 “네, 그건 운이 좋아서···”
 “한국인들이 겸손하다더니, 자네도 그렇군.”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순간 매니지먼트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겸손하면 무시합니다. 그러니 다소 건방지더라도 할 말을 하세요.】
 
 이게 생각나자마자 배때기에 힘을 주고 말했다.
 
 “물론 저는 전술에 강점이 있습니다. 전력이 우위에 있던 독일이나 프랑스도 저 때문에 고전했었죠.”
 “역시···”
 
 짐짓 감탄하던 제임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전술을 같이 짜려고 불렀어.”
 “네?”
 
 지금 말하는 제임스 코너는 우리 팀, 즉, 미드포트의 감독 대행이다.
 갑자기 죽은 감독을 대신할 인물로 그가 뽑혔다면, 능력이 대단한 사람인데.
 
 ‘나··· 벌써 인정받는 건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마음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그런데 통역의 도움을 받으며 전술을 짜기 시작하면서 슬슬 황당함이 느껴졌다.
 
 ‘이거 전술 코치 맞아?’
 
 잉글랜드 챔피언십이라면 프리미어 리그 바로 아래 단계로서 굉장히 수준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의견을 교환하면 할수록 이 사람의 주관이 보이지 않았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주로 4-3-3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양쪽 윙 포워드의 주력이 장난 아닌데, 거길 막지 않으면 안 되죠. 그런데 우리 팀의 풀백 중 이 두 사람은 수비력보단 공격력이 더 좋습니다. 설마 내일 경기에서 공격 위주로 하시려고요?”
 “어? 아, 그렇지. 아니야, 아니야. 공격 위주는 무슨? 우리 원정 경긴데···”
 
 리즈 유나이티드는 미드포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홈 경기장이 있었다. 더비 경기라서 분명히 우리 팀을 응원하는 많은 관중이 오겠지만, 기본적으로 원정 경기에 공격보다는 안정적인 전술이 나을 것 같았다.
 
 “감독 대행 되고 첫 경기니 수비적으로 하는 게 좋겠지? 그럼 3-5-2로 할까?”
 “네? 3-5-2라면 풀백 말고 윙백을 쓰자는 말씀이신가요? 5-3-2에 가까운?”
 “그··· 그건 너무 소극적이지?”
 “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1위를 달리고 있는데···”
 
 이쯤 되면 나는 속으로 망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에서 감독은 전력의 절반이라고 보면 된다. 감독에 따라 선수가 구성되고 전략과 전술이 수렴된다.
 그런데 딱 봐도 무능력한 제임스 코너가 감독 대행에 앉았으니, 아까 귀신이 저주를 퍼부은 게 딱 맞을 예감이다!
 실제로 다음 날 경기에서 우리는 6-0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기 전체를 보면서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1위 팀이야?’
 
 챔피언십 1위 팀은 프리미어 리그 중하위권과 비슷한 전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수준 이하의 선수들 기량과 잘못된 교체로 말도 안 되는 졸전을 펼치는 걸 보며 나는 새삼 어제 본 귀신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내 질문에 대답하려는 걸까? 아니, 어제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 말을 지키려고 온 것이리라.
 그날 밤, 레디메인 히들스턴 감독이 다시 나를 찾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 자네, 돈 좀 있나?
 
 나는 심호흡을 한껏 들이쉬며 그를 쏘아봤다.
 
 “얼마면 되는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레디메인의 자글자글 주름 얼굴에 웃음이 깊이 패였다.
 
 
 # 2회. 그건 내일 확인해
 
 “도대체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두운 밤, 레디메인 감독은 앞장섰고 나는 뒤따랐다.
 나는 불안했다. 내 안주머니엔 1,000파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돈으로 150이다. 타국에서 강도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래서 몇 차례 물었는데, 끝내 대답하지 않고 나를 끌고 간 곳은,
 
 “여긴?”
 
 허름한 성당이었다.
 
 ― 자, 들어가서 제단 앞에 돈을 바쳐 봐라.
 “네? 저 천주교 아닌데요? 아니다, 영국은 성공회인가?”
 ― 내 말 좀 들어. 가서 바쳐 봐.
 
 주름 가득한 얼굴은 늘 미소를 동반한다. 강요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끙···”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사람이 있었던 때가 한참이나 오래된 곳 같다.
 군데군데 거미줄까지 쳐 있었다.
 
 “으슬으슬하네요.”
 
 나도 모르게 던진 말에 감독 귀신의 반응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뚝 멈추고,
 
 “왜 안 들어오시는데요?”
 
 레디메인에게 물었더니,
 
 ― 죽은 자는 들어갈 수 없어.
 
 황당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인상을 쓰며 투덜댔다.
 
 “죽어서도 저렇게 신심이 깊으신데, 그냥 들어오시지.”
 
 물론 말만 이렇게 하고 걷던 길은 그냥 갔다.
 여기까지 온 거, 전 감독을 위해 150만 원 정도는 투척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어쨌든,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잖아···’
 
 그거 하나는 고맙다.
 아시아인에 관한 편견 없이 내 전술적 능력만을 보고 영입한 거니까.
 
 “자, 하느님. 여기 돈입니다.”
 
 난 제단 앞에서 1,000파운드를 꺼내 들었다.
 막상 놓으려니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봤지만, 문밖이 어두워서 레디메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에라이!”
 
 나는 돈을 툭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기도는 안 해도 되죠?”
 ― 어!
 
 레디메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돈에 미련이 남는다.
 혹시 저 귀신 다단계 아닐까?
 별생각을 다 해보지만, 최종 결론은 체념.
 
 “휴우··· 바쳤습니다. 성의껏 하라고 하셔서, 천 파운드 했어요.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밖으로 나와 내뱉는 내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반면,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레디메인은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성공회 교인이 아니야.
 “네?”
 ―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감독 생활을 할 때 온 곳이었지. 당시 패전만 기록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10파운드를 네가 놓은 곳에 놨어. 그다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야.
 “뭔데요?”
 
 나보고 성의껏 하라고 말한 그가 겨우 10파운드를 냈다니, 다소 황당했다.
 하지만 기대감을 주는 그의 예고에 나는 일단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 그건 내일 알게 될 거야.
 
 복장 터질 것 같다.
 나는 성질을 냈다.
 
 “지금 말해주세요!”
 ― 말해도 못 믿을 거라서.
 “믿을게요!”
 ― 그냥 내일 확인해. 그럼 난 간다.
 “가··· 감독···”
 
 내 말도 끝나기 전에 레디메인은 진짜 뿅 하고 사라졌다.
 
 “···님!”
 
 나는 성질이 났다. 마치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괜히 골이 나서 당연히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
 
 돈이 없어졌다.
 분노가 두 배로 커진다.
 
 “이 미친 할배 감독아! 내 돈 내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
 
 다음 날 선수들이 회복 훈련을 하러 왔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뭐야, 왜 색깔들이 저래?’
 
 아지랑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선수가 붉은색 기운을 내뿜는다.
 
 ― 내가 말했지? 오늘 확인하게 될 거라고?
 “깜짝이야!”
 
 귀신은 낮에도 나타날 수 있구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제임스 코너 감독 대행과 스태프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다시 필드로 돌아갔을 때, 나는 레디메인에게 물었다.
 
 “이 붉은색 아지랑이는 뭐에 쓰는 겁니까?”
 ― 붉은색만 보이진 않을 텐데? 나도 성당에 헌금하고 나서 보였거든.
 “아···”
 ― 그리고 그래프 안 보여?
 “어? 네, 그것도 보입니다.”
 
 레디메인의 말마따나 선수마다 머리 위에 그래프가 그려진 걸 확인했다.
 투명해서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집중해서 주시하니 붉은색 윤곽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 다시 레디메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 저 그래프가 붉은색으로 꽉 찰 때까지 뛰게 해.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말씀이시죠?”
 ― 그럼 선수들의 능력치가 좋아질 거야.
 “우리 지금 대화하는 거 맞죠?”
 ― 내 말대로 해봐.
 “그게 제 마음대로 됩니까? 엄연히 트레이너가 있는데요?”
 ― 내 장담하지. 자네가 대신하겠다면 아마 양보할 거야.
 “헐···”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나 안 할 수도 없었다. 아니 나는 내가 이 사람 말을 들으리라는 걸 알기에 더 짜증이 났다.
 
 ‘끙, 앓느니 죽지.’
 
 결국, 필드로 나가서 몸을 푸는 트레이너에게 말했다.
 
 “이봐, 짐.”
 
 그의 이름은 짐 레이너.
 
 “으흠?”
 “내가 할게.”
 “What?!”
 “지금 이 훈련 내가 시킨다고.”
 
 안 되는 영어로 짐에게 표현하는데, 저기서 통역이 뛰어온다.
 
 ‘와 봤자 소용없는데···’
 
 어차피 길게 설득할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요즘 귀신 감독이랑 대화하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영어가 팍팍 는다.
 그래서 속으로 말했다.
 
 ‘짐이 싫다고 말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야. 안 와도 돼.’
 
 그런데.
 
 “Thank you! 정! Thanks!”
 
 짐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묘하게 웃고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해볼 수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뭐야 이건?’
 
 덕분에 통역이 오다가 엉거주춤했고, 짐 레이너가 중간에서 그를 끌고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클럽 이상하다.
 
 ― 직업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지?
 “네···”
 ― 그래서 편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네?”
 ― 앞으로 네가 하는 모든 짓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한마디로 여기 있는 스태프들이 허수아비란 말이죠?”
 ― 뭐···
 
 인정해야 할까 말까 고민하던 표정의 레디메인이 시선을 돌려 선수들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 자, 이제 훈련해야지? 모두 너를 바라보고 있잖아.
 “헐···”
 
 그러고 보니 선수들이 나를 보는 것도 모르고 감독과 계속 대화했다.
 
 ‘다행이다,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해서.’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들을 보며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 내가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자주 하니까 신경 쓰지 마.”
 
 아까처럼 안 되는 영어로 의사전달을 하니, 대충 알아듣는 표정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슬슬 뛸까?”
 
 첫날 소개는 했지만, 나와 그들 사이는 매우 어색했다. 데면데면한 사이를 좁히기도 전에 덜컥 훈련을 맡아서 뛰자고 했는데.
 
 “헐···”
 
 진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헐···”
 ― 그래프 채워지기 시작하지?
 
 내 옆에서 레디메인의 흡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몇 바퀴나 돌아야 하나요? 그리고 저거 다 채워지면 끝인가요?”
 
 나는 한꺼번에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 말을 던지는 귀신 감독.
 
 ― 그건 내일 확인해.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한 번에 다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지?
 
 
 # 3회. 주급 루팡과 꼴통 선수들
 
 한편, 새로 온 한국인 전술 코치 정현진이 선수들을 다루는 걸 보면서 감독 대행인 제임스 코너는 눈살을 찌푸린다.
 
 “저렇게 맡겨도 돼?”
 “금세 떨어져 나갈 겁니다. 저 새끼들이 워낙 드세야죠.”
 
 반면, 제임스의 질문에 훈련을 맡기고 온 짐 레이너가 비웃듯이 대답한다.
 여기서 ‘저 새끼들’이란 선수들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보면 저 코리안 말을 잘 듣잖아.”
 “처음이니까요. 탐색하는 거겠죠. 곧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그럼 개판 될 텐데, 왜 코리안한테 맡겼어?”
 “솔직히 저 새끼들한테 훈련 방법을 바꾸자고 했잖아요.”
 “그랬지. 죽은 감독의 훈련은 워낙 구닥다리 방식이라서.”
 “그런데 말을 안 처먹으니, 저 훈련이 얼마나 안 통하는지 스스로 느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다행히 저 코리안한테 맡겼더니, 저 구닥다리 훈련을 하고···”
 “다음 경기에도 이기기는 힘들겠죠.”
 
 너무 쉽게 말했나?
 짐 레이너는 제임스 코너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인상을 찌푸린다.
 
 “짐, 우리 너무 여유 있는 거 아니야?”
 “두 경기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저 새끼들도 느껴야 해요. 그리고 이사회와 팬들도 이해해줄 겁니다. 감독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초반엔 혼란할 수밖에 없잖아요.”
 
 실제로는 감독 대행 제임스 코너의 무능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짐 레이너는 미드포트의 혼란을 틈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고 싶다.
 다행히 분위기는 좋다.
 그동안 제임스 코너는 허수아비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 팀 재정으로 새 감독을 스카우트하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더군다나 새 구장을 짓는다는데.”
 “그러니까 차기 감독은 정해진 셈입니다.”
 
 짐은 그게 누구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부 승진은 확실했다.
 이미 클럽의 부회장한테 넌지시 들었기 때문이다.
 드센 선수들을 장악하는 이가 아마 감독이 될 거라고.
 
 “두 번 정도 깨지면, 선수들의 불안한 심리를 파고들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저 구닥다리 훈련 말고 제대로 된 전술 주기화 이론을 접목할게요.”
 “그렇게 된다면야 좋긴 한데···”
 “다행히 저 코리안이 우리한테 명분을 주네요. 하기 싫었는데, 다음 경기 또 한 번 크게 깨지면 저 방식이 안 먹힐 거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음···”
 
 침음성을 내뱉는 제임스 코너 감독 대행을 보며 짐 레이너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제임스는 허수아비 기질을 버릴 수 없다.
 팔랑귀에 줏대도 없으니, 이렇게 활용하다가 저 자리를 물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니 헛심을 빼고 있는 코리안이 보인다.
 
 ‘신나지? 벌써 선수들을 장악한 거 같고?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개망나니들을 상대하고 있는지.’
 
 언젠가 감독으로 올라서면 저 개망나니들부터 다 바꿀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
 
 “근데 좀 쪽팔립니다. 이건 옛날 방식 같아 보이잖아요.”
 
 운동장을 뛰는 선수들 그래프가 각각 붉은색으로 중간쯤 찰 때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 같아 보이는 게 아니라 옛날 방식이지. 그래서 처음에 스태프들과 선수들이 당황했었고.
 “어? 그럼 계속 이런 식으로 훈련하셨단 말인가요?”
 
 질문에 대한 답은 은은하게 띄운 레디메인의 미소가 대답이다.
 
 ‘나이가 많으셔서 그런가? 구닥다리 훈련법으로 어떻게 버티셨대?’
 ― 나이 때문이 아니야.
 “윽, 제 생각이 들리시나요?”
 ― 좀 전에 건 들렸어. 아무튼, 감독은 늘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잖아.
 “그렇죠. 그래서 체력이나 근력 등을 강화하는 훈련은 시즌에 들어서면 안 하는 흐름이고요. 전술 주기화 이론이 축구계를 지배한 이후에 말입니다.”
 
 단 한 경기라도 승리하기 위해서 전술 중심 훈련은 중요하다.
 따라서 체력이나 근력은 미니 게임으로 대체하는 게 요즘 추세인데···
 
 “이번 주 훈련 일정표 보니까 ‘올드’해도 이렇게 ‘올드’할 수 있습니까?”
 
 나는 드디어 할 말은 해야겠다는 표정으로 레디메인에게 따졌다.
 위클리 훈련 일정에서 미니 게임은 사라져 있으며, 체력과 근력 위주만 존재한다.
 그런데 귀신 감독은 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 그래프 다 찬 놈 위주로 한 명씩 빼지?
 
 필드를 바라보며 나에게 주문했다.
 다소 답답했지만, 팀을 파악하기 전에는 귀신 감독의 말을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래프가 다 차니 붉은색 아지랑이가 없어졌네.’
 
 신기한 일이다.
 처음 봤을 때, 선수들 몸 주변에서 흘러넘치던 붉은색 아지랑이가 그래프가 꽉 차기 시작하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붉은색 아지랑이가 없어진 선수들 위주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조! 조 머피! 나와!”
 “필! 필 에드워드! 나와!”
 “닐 댄스! 닐 댄스! 나와!”
 
 놀랍게도 우리나라 고등학생 이상으로 말을 잘 듣는 선수들.
 이 방식이 얼마나 익숙하면 이럴까?
 그러나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제일 먼저 호명된 조 머피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나에게 엄지를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는데.
 
 “코치, 딱 좋았어! 더 뛰면 짜증 내려고 했거든.”
 
 땀에 젖어 반들반들한 조 머피의 대머리를 보며 순간 긴장했다.
 
 ‘역시 우리나라 애들이랑 똑같을 리가 없어.’
 
 그 뒤로 줄줄이 내뱉는 선수들의 목소리들.
 
 “맞아. 나도.”
 “나는 축구 때려치우기 일보 직전이었지.”
 “씨발, 저 코치 죽상을 치고 싶어!”
 ‘뭐야, 이 새끼들은?’
 
 놀랍게도, 레디메인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내 영어 듣기 실력이 향상되었다.
 이게 또 단점으로 작용한다.
 안 좋은 소리도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근데, 저 코리안은 뭔데 우리 감독님 훈련 방식하고 똑같은 거야?”
 “감독님 이야기 꺼내지 말랬지, 개새끼야!”
 “왜, 계집애처럼 눈물 나냐? 아유, 좁밥 새끼!”
 
 일부는 거칠었다. 주먹까지 꽉 쥐는 걸 보고 진짜 싸우는 줄 알았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연이어 선수들 이름을 불러 운동장으로 빼내는 데 치중했다.
 
 ‘굳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네···’
 
 붉은 반투명 그래프가 가득 차면 발생하는 일을 이제야 깨달았다.
 선수들은 집단적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듯했다.
 다행히 뒤로 갈수록 입으로 불만은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선수들이 폭발 일보 직전이라는 깨달을 수 있었다.
 
 “휴우···”
 
 잠시 후 수십 바퀴 운동장을 돌고 제멋대로 널브러진 선수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디메인, 도대체 얘넨 뭡니까? 아니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오신 겁니까?”
 
 이번에도 반응이 없어서 돌아봤더니,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에 애정이 가득 서리며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저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안다.
 나 역시 지도자다.
 지금까지 가르친 선수들한테 정이 없다면 거짓말, 이럴 때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게 내 도리였다.
 
 ‘감독 대행이랑 트레이너가 어째 쉽게 나한테 권한을 위임한다 싶더니···’
 
 딱 봐도 문제아들 천지였다.
 이런 선수들을 끌고 무패를 달리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오기가 생겼다.
 전 감독이 한 일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회 아니겠어?’
 
 상황을 보니 스태프들은 허수아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감독이 죽고 어수선해진 팀 분위기를 수습해서 프리미어 승격을 이루어놓는다면?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 리그 감독!’
 ― 그래, 그런 목표 좋아.
 “깜짝이야!”
 
 잠시 잊었다. 이 감독이 내 생각조차 읽을 수 있다는 걸.
 돌아보니 아까 잔정이 가득한 눈빛을 갈무리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 자넨 할 수 있어. 그게 바로 자넬 영입한 이유야.
 
 이거 칭찬인 거지?
 나도 선수들만큼 단순한지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
 
 다음 날, 새 아침이 또 밝았다.
 그동안 낯설었던 클럽 하우스를 향해 발걸음 떼기가 좀 무거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기대감마저 생긴다.
 
 “목표 설정이나 동기부여가 되니 이거 할 만한데요?”
 ― 다행이네.
 “그리고요?”
 ― 응?
 “지금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표정 보니까 뭐 숨기시는 거 있는데요?”
 ― 그렇게 보였어?
 “네.”
 ― 글쎄···
 
 레디메인은 말끝을 흐렸지만, 뭔가 있는 듯했다. 나는 그의 속마음을 이렇게 넘겨짚어 봤다.
 
 “제가 선수들을 못 다룰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어이, 감독!”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귀신한테 던진 말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곳 놈들은 모양새도 헷갈리지만, 목소리로 정체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돌아봤는데.
 
 “조?”
 
 전날 제일 먼저 붉은색 그래프를 채운 조 머피였다.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녀석의 특징이니까.
 나는 금세 그의 프로필을 머릿속에 새겼다.
 
 ‘포워드, 35세, 191cm에 90kg 거구.’
 
 그런데 오늘은 이 프로필 이외에 다른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마빡에 적힌 100이라는 숫자!
 
 “헐!”
 “왜 그래?”
 “아, 나는 감독이 아닌데, 네가 나를 감독이라고 불러서 말이야.”
 
 실제로 이 대머리는 좀 전에 나를 감독이라고 불렀다.
 
 “내가 감독이라고 부르면 감독인 거지.”
 
 역시 어제 인상 그대로 이 새끼 꼴통이었다.
 밤새 선수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뒤척였었는데, 첫 만남부터 꼬이는 느낌이다.
 이게 시작이었다.
 조 머피가 나를 감독으로 부르는 걸 들은 일부 선수들이 반발했다.
 
 “누구 맘대로 저 사람이 감독이야?”
 “야이, 개새끼야! 내가 마음대로 부르겠다는데 너는 무슨 상관인데?”
 “병신 같은 새끼들 아침부터 싸우네.”
 
 잠시 후 훈련하러 모인 이 새끼들은 정말 개판이었다.
 더 짜증 나는 것은 클럽 하우스에 감독 대행이고 트레이너고 코치고 단 한 명도 안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나도 화가 나서 외쳤다.
 
 “야 이 새끼들아! 지랄하지 말고 가만히 안 있어?”
 
 순간 싸우던 모두가 정지 화면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다른 건 모르지만, 목소리만은 컸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니라서 알아듣지 못한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효과는 주효했다.
 그때.
 
 “이마에 적힌 숫자가 100이면 뛸 수 있다는 뜻이지. 그 수치가 차지 않으면 경기에 뛸 수 없는 거야. 일단 갈라놔라. 그리고 숫자 100은 근력 훈련, 아니면 다시 운동장 돌기다.”
 
 귀신 감독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마빡 숫자가 다 100은 아니었다.
 
 ‘쟤는 72네.’
 
 숫자에 따라 주전과 비주전이 달라지는 걸까?
 그리고 성당에 바친 돈으로 이런 능력을 얻는 걸까?
 어제보다 약간 더 명확해졌긴 했는데, 모든 걸 파악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다행히 레디메인이 조금씩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 팀 스쿼드가 약해. 그래서 전반기 내내 애들이 혹사당했어. 그나마 부상 없이 뛸 수 있었던 것은 이 훈련 방법 때문이야.
 “그렇군요.”
 ― 내가 죽으면서 훈련 방법이 끊기나 했는데, 다행히 너 때문에 애들 체력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겠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야.
 “체력 수치···”
 
 다 알아듣긴 힘들지만, 대충 느낌으로 알 수는 있었다.
 확실히 성당에 헌금하고 나서 내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어쩌면 나를 통해 훈련하면 지친 선수들이 힘을 얻는 걸지도···’
 
 대략 이렇게 정리한 뒤에 나는 선수들을 바라봤다.
 일부 선수는 100이라는 숫자를 채웠고, 대부분이 100 이하의 숫자였다.
 그리고 100 이하의 선수들은 어제처럼 붉은색 아지랑이가 몸 주변에서 흘렀다.
 그걸 볼 수 있는 나는 주저하지 않고 외쳤다.
 
 “오늘은 근력 훈련과 체력 훈련에 들어간다! 근력 훈련은 왼쪽으로 서! 이름 부를게! 조, 필, 닐···”
 
 내가 이렇게 지시하니까 깨끗이 물러나서 불린 이름대로 왼쪽에 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와, 소름! 코리안 감독이 내 마음을 알아챘어. 나 솔직히 오늘 근력 운동하고 싶었는데.”
 “어? 나도.”
 
 나도 너희가 신기해. 좀 전에 주먹질 일보 직전 아니었어?
 속으로 이렇게 말한 뒤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신기한 점은 잠시 후에 단체로 지각한 스태프들이다.
 이 주급 루팡들은 내 곁에 다가오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대표로 감독 대행인 제임스 코너가 질문을 던졌는데.
 
 “혹시 쟤들 안 싸웠어? 자네한테 반항 안 해?”
 
 나는 그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귀신 감독을 바라봤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오신 겁니까?’
 
 귀신 감독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최초의 한국인 프리미어 리그 감독이 되는 게 쉬울 줄 알았어?
 
 
 # 4회. 말 좀 들어, 허수아비
 
 ‘참, 신기하네···’
 
 다음 날에 선수들을 보니 마빡에 적힌 숫자가 꽤 바뀌어 있었다.
 100 이하로 내려간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오늘 100을 채운 새로운 선수들이 탄생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붉은색 아지랑이도 당연히 숫자에 따라 변해 있었다.
 일단 나는 100이라는 숫자를 가늠해서 체력 훈련과 근력 훈련으로 선수들을 돌렸다.
 그러고 나니 귀신 감독이 나타났고.
 
 “이래서 전술 훈련을 안 했던 겁니까? 어차피 매일 숫자가 바뀌니, 그걸 채워야 해서?”
 
 마침 잘됐다 싶어 궁금한 점을 묻기 시작했다.
 
 ― 그것도 있지.
 “그것도? 그럼 다른 것도 있다는 뜻인가요?”
 ― 어, 다음 경기에 이기기 힘든 거 알지? 그래서 굳이 연습 경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기초 체력과 근력을 좀 더 닦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왜요? 왜 이기기 힘든데요?”
 ― 이번에 붙는 허더스필드가 리그 3위잖아.
 “우린 1위예요. 저번에 졌을 때 빼고 무패였고요.”
 ― 그러니까. 그건 내가 있을 때 이야기지.
 “헐···”
 
 대놓고 자기가 지휘했을 때 자랑질하는 그를 향해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해.’
 
 정확히 표현하면 귀신이다. 이 할배, 가면 갈수록 정신세계가 독특하다.
 
 ― 왜? 한번 이겨보게? 괜히 힘 빼지 마. 지금으로서는 절대 못 이기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누가 지는 걸 좋아할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귀신 감독의 희미한 미소가 비웃음으로 보였기에 고개를 휙 돌리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선수들을 바라봤다.
 
 ‘아무리 자기가 무패 감독이었다고 해도 사람 앞에 두고 무시해?’
 
 오기가 샘솟았고, 이 사람한테 의존하지 않아도 이겨보겠다는 심리 상태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마음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내 진지함과는 다르게 그들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당신, 마음에 들어. 내가 하고 싶은 훈련을 쏙쏙 시키거든. 아, 그렇다고 나를 길들이려고는 하지 마.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거든.”
 
 우리 팀 포워드이자 어제 처음 마빡에 100이라는 숫자를 확인시켜준 대머리 조 머피가 포문을 열었다.
 그다음엔 필 에드워드와 닐 댄스의 만담이 이어진다.
 
 “이봐 코리안, 나는 M 성향이야. 좀 세게 다뤄줘.”
 “으, 변태. 이리 와, 엉덩이 대.”
 “이 개새끼가!”
 “개한테 당하려고? 그건 좀 수위가 높은데?”
 
 하아, 한숨이 나온다.
 심지어 옆에서는 귀신 할배가 웃고 있었다.
 
 ― 핡핡핡핡핡핡···
 
 아무래도 미친 사람들을 너무 정상적으로 다루고 있었나 보다.
 그때 선수들의 인상이 바뀌면서 내 뒤를 바라본다.
 당연히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라서 뒤를 보았더니,
 
 “이제 슬슬 두 팀으로 나눠서 연습 게임 해야지.”
 
 감독 대행 제임스 코너다.
 그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뽐내며 내 옆에 다가왔다.
 그런데 감독의 말을 듣는 녀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아니 적개심까지 엿보였다.
 좀 더 과장하면 고의로 삐딱하다고나 할까?
 대체로 녀석들 떡대가 장난 아니었기에, 약간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내 귀에 귀신 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습 경기는 안 돼. 아직 안 된다고 해.”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체력과 근력 훈련은 이쯤이면 됐죠. 솔직히 후반기로 접어드는 시즌인데, 오히려 더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스쿼드가 약해서 선수 돌려막기를 하는 팀일수록 체력 훈련을 과하게 시키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귀신 할배는 완고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 그러니까 더 안 돼.
 ‘왜요?’
 ― 경기에 몇 번 더 져야 하거든.
 
 이게 무슨 소리지?
 내 표정을 보며 귀신 할배의 설명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 너도 알겠지만, 제임스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야. 그런데 만약 몇 경기 이긴다면 허수아비는 생각하게 되고 욕심을 부리게 돼.
 ‘어? 그럼 감독 대행은 감독으로 굳어지겠네요!’
 ― 드디어 너도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구나!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 제임스 코너를 바라봤다.
 그러고 나서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절대 반대를 외쳤다.
 
 “전 반대요!”
 “뭐?”
 
 제임스 코너가 목소리에 힘을 준다.
 역시나 나는 그의 사나울지도 모르는 눈빛을 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거듭된 경기로 선수들은 지쳤어요. 회복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멀쩡한 이야기를 하니 황당한 눈빛을 할 수밖에.
 일단 그는 내 반대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주급 루팡이었지만, 굵직한 것은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심리였는지 몰라도.
 
 “내가 봤을 때 몸은 문제가 없어.”
 “아니요. 조금 더 기본 훈련에 매진해야 합니다.”
 “옳소!”
 “코리안 감독 말이 맞아.”
 “코리안 감독 만세!”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 훈장질인 제임스 코너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이 정신병자들이 내 편을 들었다.
 내 얼굴에 여유가 넘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제임스 코너는 계속 뻗댔다.
 
 “슬슬 본궤도 훈련에 들어가야지. 경기 나흘밖에 안 남았다고.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내일은 연습 경기다. 그리고 그 경기로 주전과 비주전이 갈린다. 그렇게 알도록.”
 
 이렇게 나오니 더 개기긴 힘들었다.
 아무리 개판인 팀이지만, 정상인인 나마저 감독한테 항명한다면 더 나락으로 떨어져 회생시키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선수들은 말도 안 된다고, 하기 싫다고 외쳐댔지만.
 
 “오늘 훈련 끝. 내일 보자.”
 
 아예 그들을 해산시키는 제임스 코너.
 이 장면을 보고 있던 할배 감독이 슬쩍 이렇게 말했다.
 
 ― 혹시 내일 누가 오나?
 “내일? 누가요?”
 
 내 질문에 귀신은 답이 없다. 답답하다. 또 안 알려줄 모양이다.
 실제로 그날 몇 번이나 물어도 귀신은 답을 주지 않았다.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왜 제임스가 기필코 연습 경기를 하려고 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미드포트의 경영진이 왔다.
 회장, 부회장, 단장 등등.
 그중 회장의 비서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엄청난 미녀!’
 
 부회장과 단장까지는 봤지만, 회장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래서 비서도 당연히 처음이다.
 연습 경기를 하기 전에 감독 대행인 제임스 코너가 나를 회장에게 인사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로버트 켄트요.”
 “안녕하세요, 엘리자베스 히들스턴이에요.”
 
 회장 이름을 듣고 난 후 금발 미녀의 이름을 들었는데.
 히들스턴이라니, 어째 이 성이 내가 아는 사람, 아니 귀신하고 같다.
 
 ― 내 딸이야.
 
 역시 그랬다. 그녀는 내 옆에서 아련한 눈빛을 하는 귀신 감독의 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감독 장례식에서 언뜻 본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오늘 확인하니 심장이 후들거릴 정도로 미녀였다.
 
 ― 자네가 내 딸의 이상형은 아니지만, 도전하는 건 굳이 말리지 않겠네.
 ‘······.’
 ― 어, 경기 시작하려나 보다.
 
 슬쩍 말을 돌리는 귀신 할배를 보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경기가 시작되려고 한다.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었고 이번엔 제임스 코너 감독 대행이 나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포지션을 결정했다.
 
 ‘완전 바보는 아닌가 보다. 이대로 가다간 나에게 팀의 통제를 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지?’
 
 정신병자들 같은 선수들이었지만, 얘네들은 희한하게 나를 따랐다.
 제임스는 그게 위험해 보인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긴 바보가 아닌 한···’
 
 공석인 감독 자리에 무사히 안착하려면 경쟁자를 키울 수 없다는 생각이 저 콧수염 감독 대행의 머리를 지배했겠지.
 일단 내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시작해!”
 
 한쪽에 있던 경영진이 들으라는 듯이 제임스 코너의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던 것이다.
 
 “삐이이익!”
 
 그리고 오늘 심판으로 배정된 트레이너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솔직히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궁금한 점 하나가 있었다.
 체력과 근력 훈련 위주의 구닥다리 방식을 이틀 운용했는데, 과연 선수들한테 변화가 있었을까?
 답은 곧바로 나왔고, 잠시 후 내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네요.”
 ― 잘 뛰어서 놀랍지?
 “정말 놀랍습니다. 지난주 리즈 유나이티드전에서는 완전히 파김치였었는데. 진짜 왜 그렇게 경기했을까요?”
 ― 지쳤었으니까.
 “네?”
 ― 스물다섯 명 스쿼드로만 한 시즌 내내 돌렸거든.
 “헐··· 정말이요? 부상도 없었어요?”
 ― 없었어.
 “그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 그럼 혹시 그동안 해왔던 훈련이?”
 ― 너도 봤잖아. 일종의 사기 훈련이지. 이 훈련을 하면 선수들의 체력과 근력 등의 능력이 최고로 올라와서 경기력이 눈에 띄게 좋아져. 부상도 최대한 방지할 수 있고. 물론 이건 죽기 전 나와 지금의 네가 훈련시킬 때만 효과가 있어.
 “그럼 지금 연습 경기는요?”
 
 연습 경기 또한 훈련 과정이다. 아니 현대 축구에서는 체력과 근력 등의 훈련을 최대한 줄이고 연습 경기를 통해 전술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이 훈련 방법은 무리뉴가 본격적으로 도입한 후 현재 주류가 되었는데.
 
 ― 지금 연습 경기는 당연히 네가 시킨 게 아니잖아. 저기 허수아비 녀석이 시키는 거지. 경영진한테 자기가 감독으로서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그럼 효과가 없겠네요.”
 ― 그냥 효과만 없으면 좋은데 잘 보면 붉은색 아지랑이가 진해지지?
 “어? 그러네요?”
 
 지금 보니 선수들의 몸에 붉은색 아지랑이가 계속 뿜어져 나온다.
 이건 설명 안 해도 알 듯싶다.
 체력이 소모될수록 붉은색은 더 진해진다!
 당연히 아까웠다.
 이런 내 심정을 대변하듯 귀신 감독도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뱉는다.
 
 ― 간신히··· 안정적으로 100을 다 채웠는데,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겠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연습 경기를 그만뒀으면 좋겠···
 
 순간 귀신 할배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삐이이이이익!”
 
 코치의 호루라기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괜히, 그가 경기를 중단시킨 건 아니다.
 선수 한 명이 넘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진 누군가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수비형 미드필더 닐 댄스다.
 
 “뭐야!”
 “넘어질 때 다리가 좀 많이 꺾이지 않았어?”
 “최소 한 달은 나오겠는데···”
 
 감독과 스태프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왔다. 갑자기 끓어오르는 분노에 나는 감독을 보며 외쳤다.
 
 “내가 연습 경기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이십오 명 중 한 명이 전력에서 이탈한 나머지 잠시 이성을 잃은 것이다.
 그래도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뭔데 감독한테 이 지랄이야?’
 
 그것도 경영진이 보고 있는 앞에서 월권을 한 것이다.
 속으로 난리 났다고 생각했는데, 로버트 켄트 회장이 다가오며 나에게 물었다.
 
 “연습 경기를 하지 말자고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왜지?”
 “스물다섯 명의 스쿼드의 심신이 지쳐 있습니다. 지금은 시즌 후반기입니다. 융통성을 발휘해서, 적당한 훈련량으로 선수의 체력을 보호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며 로버트는 회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러다가 다시 연습 구장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친다.
 
 “많이 다쳤으려나?”
 
 나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작지 않은 부상인 듯하다.
 팀 의료진이 닐 댄스를 들것으로 옮기는 걸 보니.
 이 때문에 경기는 일순간 중단된 상태였고 필드 밖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자 심판을 보던 코치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즉, 경기를 재개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선 것이다.
 
 ‘하··· 감독부터 모든 코치까지 진짜 다 허수아비구나.’
 
 이런 내 생각을 읽었을까?
 아니면 평소에 회장 역시 이들이 다 허수아비라는 걸 알았을까?
 
 “제임스, 연습 경기를 더 진행해야 할까요?”
 
 회장이 감독 대행에게 물었고,
 
 “아니요··· 아무래도 여기서 중단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제임스 코너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시 허수아비 모드로 돌아갔다.
 
 
 # 5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
 
 연습 경기를 중단한 그날 밤, 레디메인은 나에게 말했다.
 
 ― 참, 이상해.
 “뭐가요?”
 ― 제임스가 변했어.
 “어떻게요?”
 
 합류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다 파악했다고 자부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귀신 감독에게 의존해야 했다.
 
 ― 원래 철저한 허수아비였거든?
 “지금도 그렇게 보이는데요?”
 ― 아냐, 지금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있잖아. 예를 들어, 오늘 연습 경기를 봐도 느낄 수 있어. 아무리 경영진이 와서 본다지만, 일부러 전시하듯이 연습 경기를 추진할 사람이 아니야.
 “도대체 그런 사람을 전술 코치로 데려오고 수석 코치로 삼은 이유가 뭔가요?”
 ― 두 가지 이유가 있지. 하나는 우리 구단이 꽤 가난하다는 것.
 “짐작은 했습니다.”
 
 잉글랜드의 구단은 철저하게 구단주 소유나 마찬가지다.
 회장이 존재하는 시스템은 독일이나 스페인에서 이루어졌고, 몇몇 구단을 제외하고 이들은 구단주보다 힘이 약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돈이 아니라 구단 수입으로만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싼 맛에 제임스 코너를 고용했다?”
 ― 우리 팀 대부분 코치는 그냥 하부 리그 때부터 거의 단 한 번도 안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돼. 다 가성비는 최고지.
 “결국, 싸다는 이야기네요. 아무튼, 두 번째 이유는요?”
 ― 내가 다루기 쉽잖아.
 “갑자기 궁금하네요. 왜 저를 데려왔는지.”
 
 내 질문에 귀신 감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떠보듯이 물었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제가 만만하다고 생각하셨군요?”
 ― 우연히 본 적 있어. 한국의 축구인들은 외국에 나오면 조용하고 성실하다는 것을···
 “음··· 주입식 교육과 군대식 훈련의 폐해죠. 부정하기 힘들지만, 저는 그렇게 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럴 리야 있겠어? 나는 그냥··· 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말해줘도 네가 이해 못 해. 그냥 네가 못 보는 걸 내가 볼 수 있어서 널 선택한 거야.
 
 의미심장한 말이다.
 내가 속으로 계속 의문을 던질 정도로.
 
 ‘뭐지? 혹시 내 주변에도 붉은색 아지랑이가 있나? 아니면 내 마빡에 숫자가 찍혔나?’
 
 이처럼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나는 참기로 했다.
 솔직히 성당에 갔다 와서 그가 대답을 미룬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말해줘도 내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요. 다시 돌아가서, 제임스 코너 감독이 갑자기 허수아비 모드에서 변했다는 건데, 혹시 누군가 제임스한테 충동질하는 건 아닐까요? 잘못하면 저 같은 코리안 코치한테 자기 위치를 빼앗긴다고.”
 ― 그렇지. 코리안 코치가 감독이 되는 건 세상에 놀라운 뉴스야. 특히, 잉글랜드 축구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되니까.
 “그걸 아시면서 저를 충동질하신 건가요? 최초의 한국인 프리미어 감독이 되라고?”
 ― 솔직히 욕심은 나잖아?
 “그렇기는 하죠···”
 
 사실 처음엔 미드포트 클럽에 들어와서 단계적으로 경력을 쌓을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레디메인이 죽고 공석인 감독에 제임스 코너처럼 무능력한 사람이 대행으로 앉아있는 걸 보면서 욕심이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욕심에 오기도 생기네요. 코리안 프리미어 리그 감독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 없지.
 “많이 보여줘야겠네요.”
 
 내가 점점 진지한 의지를 드러내자 주름살 가득한 귀신 감독이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 내 장담하지. 자넨 할 수 있을 거야.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 진심이야. 지난번 리즈 유나이티드와 싸우기 전에 제임스한테 제시한 전술을 보고 느꼈거든.
 “네, 저도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는데, 결과는 6-0이었어요.”
 ― 그럴 수밖에. 이제 고작 레드잖아.
 “네? 레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음··· 이건 설명이 길어서···
 “그냥 또 지켜봐라?”
 ―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저도 바보는 아니라서 대충 눈치가 생깁니다.”
 
 아마도 단계를 표시하는 말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 단계로 선수들의 능력치가 달라지고.
 여기서 생기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그럼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하면 올라가는데요?”
 ― 아주 간단해. 승리를 쌓으면 되지.
 “이기면 된다?”
 ― 그래, 빨리 이기라고.
 
 굉장히 간단명료한 핵심이다. 승리하면 전리품이 생기고, 그 전리품은 업그레이드를 약속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든 이길 이유가 계속 생긴다는 것은 내 동기부여를 한껏 자극하는 일이었다.
 
 ***
 
 문제는 감독 대행, 제임스 코너였다.
 허더스필드와의 경기 이틀 전, 그는 포메이션과 전술을 위해 나를 불렀는데,
 
 “3-5-2요?”
 “그래, 때에 따라서 양쪽 윙백을 아래로 내리는 5-3-2에 가깝게 말이야.”
 
 이 대화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리즈 유나이티드 전을 앞두었을 때, 제임스 코너는 3-5-2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3-5-2 성애자인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비기는 전술로 가신다고요?”
 “어,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어.”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어제 연습 경기하다가 닐이 다쳤어. 3주에서 4주는 출전하지 못한대. 사실 수비수들이 꽤 녀석한테 의존하고 있거든?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 앞에서 클리어하는 능력이 장난 아니라서···”
 “그래도 홈 경긴데요? 이렇게 소극적으로 하다가는···”
 “자네가 우리 팀을 몰라서 그래. 저번에 리즈 전에서 괜히 여섯 골을 먹은 게 아니야. 우리 팀 공격력은 봐줄 만한데, 수비는 꽝이야, 꽝! 실점이 없었던 경기가 없었다고.”
 
 지난번과 달라진 점은 없던 고집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강하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도 우리 팀의 장단점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적할 팀을 샅샅이 분석한 건 당연한 준비 과정.
 나는 미드포트가 수비보다 공격이 좋다는 걸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 골 먹고 두 골 넣는 공격적인 전술이 중요했고 내 주장을 굽힐 수 없었다.
 
 “허더스필드도 최근 수비력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보단 나아.”
 “그럼 이건 어떨까요?”
 
 대화하다 보면 사람의 의지라는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의지라기보다는 고집에 가까운데, 제임스 코너는 절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대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조 머피를 닐 댄스 자리에 세우는 겁니다.”
 “조를? 포워드인데? 수비형 미드필더로 세우면···”
 “제가 봤을 때는 축구 감각이 가장 좋은 선수입니다. 비록 지난번 연습 경기를 하다가 중단되었지만, 당시 움직임도 가장 좋은 선수였고요. 그리고 대안도 있어요. 그 자리에 저스틴을 놓으면···”
 
 그때 눈을 부릅뜨며 내 말을 단호하게 끊는 제임스 코너.
 
 “저스틴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건 반대 안 하겠어. 그러나 조가 DM(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뛰긴 힘들어. 나이가 너무 많잖아. 지난 경기에서도 체력이 고갈되어서 교체할 수밖에 없었어. 자네도 알다시피 미드필더는 활동량이 담보되어야 해. 미안하지만, 그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네.”
 
 단호하게 말하는 이 ‘콧수염’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이번 경기도 틀렸네.’
 
 ***
 
 시합 전날.
 체력과 근력 훈련만 할 수 없었기에 부분 전술 훈련이 이루어졌다.
 이때만큼은 감독 대행인 제임스 코너가 앞에 나서서 선수들을 지도했다.
 
 ― 네 말대로 누군가 제임스를 충동한 건 사실인 거 같아.
 “그죠?”
 ― 저렇게 나서는 사람이 아니거든? 거기다가 힐끗힐끗 너를 보는 게 의식도 많이 하잖아.
 “저도 그거 느꼈어요.”
 
 오늘 제임스는 선수들의 훈련을 지도하면서 나에게 벤치에 앉아서 관망할 걸 지시했다.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인 문제점을 발견해달라면서.
 
 “역시 코리안 프리미어 리그 감독으로 가는 길에 넘어야 할 산은 낮지 않군요.”
 ― 자네라면 해낼 거야. 약해지지 말게.
 “절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장 내일 경기에 질 조짐이 엿보여 힘이 꽤 빠진 상태였다.
 그때.
 
 “어? 저긴 왜 또 그러나···”
 
 전술 훈련 상황에서 제임스와 대머리 조 머피가 심하게 다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거 보면, 확실히 한국과는 다르단 말이야.’
 
 한국에서는 감독에게 선수가 대들면 그날로 주전 보장은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는 선수도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문제는 조 머피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축구공을 발로 찼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둘의 싸움이 봉합되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공이 제임스 코너의 몸을 맞추고 말았다.
 곧바로 조 머피에게 삿대질하는 감독 대행, 지지 않을 듯 목소리를 내는 조 머피.
 그러다가 조가 먼저 훈련장을 나왔고, 나를 발견하더니 방향을 이쪽으로 잡았다.
 곧바로 다가온 조 머피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봐, 감독! 이대로라면 내일 경기는 또 질 것 같아.”
 “나 감독 아니라니까. 여하튼,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대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 대머리 왈패는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나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당신이 한 가지만 도와줘.”
 “뭘?”
 “닐이 빠진 자리 있잖아.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서 뛰면 어떨까 해서. 그러니까 제임스를 설득해봐. 우린 좀 찍힌 몸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내가 생각해낸 대안과 똑같다.
 이 때문에 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전날 같은 내용으로 감독을 설득해봤다는 걸 알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녀석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알았어. 내가 말은 해볼게.”
 “오, 정말?”
 “응. 그러니까 지금은 다시 훈련에 복귀해.”
 “오케이, 알았어.”
 
 조 머피는 씨익 웃으며 다시 연습 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신기했다. 좀 전까지 감독과 다퉜지만, 정말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이게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진 이들의 스타일인가 싶다.
 그때 귀신 감독이 나에게 물었다.
 
 ― 왜 사실대로 말 안 하지? 네 말을 제임스가 들을 리가 없잖아.
 “없죠. 그래도 저 녀석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는 싫어서요.”
 
 순간 할배의 받는 말이 없어졌다.
 시선을 돌려보니 흐뭇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너 참 인간적이야.
 “칭찬으로 들을게요.”
 ― 좋아. 우리 내일 이기자. 오늘 밤 최선을 다해서 전술을 짜보자고.
 
 나는 순간적으로 혹했다.
 선수들의 특성을 나보다 훨씬 잘 아는 할배가 도와준다면, 정말 내일 이길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과는 다르게 내 머리가 좌우로 가로저어진다.
 
 “전술을 논하는 건 하겠지만, 내일 이기지는 않을 거예요?”
 ― 뭐?
 “아쉽지만, 지금은 져야죠. 그래야 지금 감독 대행이 욕을 먹고 저 자리에서 물러나죠.”
 
 그럼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수 있었다.
 어차피 2위와는 아직 승점 차이가 꽤 존재한다.
 몇 번 진다고 승격이 어렵지는 않으리라.
 내 계획이 나쁘지 않은지 귀신 할배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오늘 왜 이러시죠? 폭풍 칭찬이 과하시네.”
 ― 방금 한 말, 몇 번 져도 팀 수습해서 남은 경기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당연하죠.”
 ― 그 자신감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야. 그거면 됐어. 그리고 나는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
 
 
 # 6회. 지면 네 탓, 이기면 내 덕
 
 한편, 이날 훈련이 끝난 후 제임스 코너 감독 대행은 로버트 케인 회장을 만나러 갔다.
 
 “어떻게··· 내일 경기는 괜찮겠습니까? 저번 경기 대패해서 팬들이 걱정 많이 하던데···”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부상도 있고, 최근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요.”
 
 여기까지 말한 제임스는 아차 싶었다.
 전투에 임하는 장군이 이기기 힘들다는 말을 해?
 그만큼 자신감이 없긴 했지만,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재빨리 둘러댔다.
 
 “저번에 기억하시죠? 코리안 코치 말입니다. 그 사람이 팀 기강을 자꾸 흐트러트립니다.”
 “그래요?”
 “온 지 얼마 안 됐으면 조용히 적응해야 하는데, 훈련에 전술까지 이것저것 다 끼어들고 있어요.”
 “그런데 선수들은 그 코리안 코치를 싫어하지 않는 거 같던데요?”
 “그야 가끔 자기들 뜻대로 쉬게 해주고 놀게 해주니 좋은 거겠죠. 아시겠지만, 감독이나 코치는 가끔 욕도 먹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당장 위약금 때문에 해임할 수도 없고···”
 
 미드포트는 챔피언십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이다.
 회계사 출신 로버트 켄트 회장이 위약금 걱정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일단 제가 잘 수습해 보겠습니다만··· 선수들이 자꾸 그 코리안 감독 말을 들어서 걱정이긴 한데···”
 
 주관이 없는 사람은 논점이 없고 말끝을 자꾸 흐린다.
 자기가 바라는 점만 반복할 뿐이다.
 그걸 파악한 로버트가 날 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경기에 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니겠죠.”
 “그건 모릅니다. 경기에 져야 팀이 흔들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를 감독 대행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팀에 온 지 보름도 안 된 사람인데.”
 
 이건 너무 나간 것 아닐까?
 그만큼 그 코리안 코치가 제임스 코너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마음은 모르는 겁니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내일 선수들이 저보다 그 코리안 코치 말을 더 들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제임스 코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임스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로버트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 말이 아니라 코리안 코치 말을 더 듣는다면,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갑자기 죽은 전 감독이 떠오른다.
 
 ‘휴우, 레디메인, 왜 그렇게 빨리 가셨습니까?’
 
 그와 함께였다면, 프리미어 리그, 그리고 그 이상도 함께 누려볼 수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이번 코리안 코치도 레디메인이 데려온 거잖아.’
 
 로버트는 늘 레디메인이 하는 일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코리안 코치를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당장 일어서서 자신의 비서를 불렀다.
 
 “엘리자베스.”
 “네, 회장님.”
 “이번에 온 코리안 코치 있지? 그 사람 서류 좀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스태프들한테 그 사람 평판 좀 물어보고. 저번에 보니까 선수들을 제법 잘 다루고 있던데··· 아, 이번 경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파악했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주문을 듣고 엘리자베스의 아름다운 얼굴에 복잡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의 인생도 축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가 직접 데려온 코리안 감독 정현진한테 마음이 안 갈 수 없는 법.
 
 “바로 알아볼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제 슬슬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봐야겠다.
 
 ***
 
 날이 밝았다.
 내 목표를 위해 오늘 경기를 져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었는데, 나한테 자꾸 앵기는 대머리 조 머피가 문제였다.
 
 “4-3-3이지?”
 “뭐?”
 
 몸을 풀기 위해 머문 연습 구장에서부터 녀석이 발동을 걸었다.
 
 
 “오늘 전술. 4-3-3 맞잖아. 그지, 감독?”
 “그게··· 뭐···”
 “내 동선 좀 알려줘.”
 “엥?”
 “레디메인은 미리 다 말해줬단 말이야.”
 
 이 녀석 참 일방적이다.
 그런데 또 밉지가 않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조 머피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공이 너를 거쳐서 가야 해. 그건 알지?”
 “당연하지. 그러려고 오랜만에 중앙에 서 보는데.”
 “그렇다고 골 욕심을 버리면 안 돼. 상대는 골잡이인 너한테 신경을 쓸 거야.”
 “맞아, 맞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녀석은 아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 마침 잔디가 없는 곳에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앙에 자기 위치를 점 찍어놓고 선을 긋는 거로 봐서 본격적으로 전술 이야기를 할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나는 전술을 주제로 한 대화가 즐겁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녀석 앞에 앉았다.
 그러다가 느끼게 됐다.
 녀석뿐만 아니라 슬슬 선수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어쩌지? 오늘 4-3-3 아닌데.’
 
 걱정은 됐지만, 이미 활시위를 당겼다.
 더구나 조 머피가 선을 다 그렸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 말대로 초반에 중거리 슛을 아끼지 않을게. 들어가면 좋고, 안 들어가도 상대는 나를 신경 쓸 거야. 그때 저스틴이 틈을 보며 들어가야겠지?”
 “너무 세밀하게 할 필요는 없어. 허더스필드도 수비가 강한 팀은 아니라서 수비수들의 장거리 패스도 나쁘지 않지. 가끔 미스가 일어나거든. 그리고 이렇게 양쪽 풀백이 올라와서···”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해 왔던 전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귀신 감독의 얼굴을 살폈는데,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그다음에는 흥미가 돋은 표정이었고, 나중에는 눈동자에 잔 떨림이 생겼다.
 
 “···결국, 네 체력이 관건이야. 여기 중앙에서부터 아크 안팎까지 상대 수비수를 계속 신경 쓰게 해야 해.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녀석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나는 웃음이 났다.
 그때 들려오는 귀신 감독의 목소리.
 
 ― 어제랑 말이 다르다. 질 경기에 이렇게 최선을 다해 개인 전술을 알려주다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때로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논다는 걸 어떻게 이해시키랴?
 
 ***
 
 이날 저녁 허더스필드와의 경기를 위해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확실히 지난 경기에서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일단 관중들의 열렬한 함성이 귀로 들어와 가슴으로 이어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셈여림표의 크레셴도(Crescendo)처럼 점점 세고 활기차게 다가오는 걸 보니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이게 홈경기군요.”
 ― 너 홈경기 제대로 못 치러봤나?
 “네, 어르신이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 너와 대화하다 보면, 죽은 것도 미안해야 하는구나···
 “솔직히 귀신으로라도 제 앞에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제 인생 단단히 꼬였을 겁니다. 나름대로 한국에서 차세대 국가대표 감독 1순위였거든요.”
 ― 그렇다고 쳐주지.
 
 왠지 잡담 그만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실제로 그랬다. 왜 그런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부동의 스트라이커 조 머피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오자마자 물어보는 걸 보면 녀석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명단 봤잖아.”
 “그러니까··· 고작 그거밖에 안 되는 거야? 왠지 당신한테 레디메인 냄새가 났었는데.”
 
 BL 냄새 풀풀 풍기는 대화는 더 그만하고 싶었기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일단 기다려봐.”
 “기다려?”
 “경기에 뛰어야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잠시 대화의 여백이 생긴다.
 그래도 내 말을 녀석이 들어줘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건 내 착각이었다.
 
 “기회라··· 이건 어떨까? 아예 제임스 지시 무시하고 내가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로 들어가는 플레이를 하는 거지.”
 “그럼 득점력이 약해져.”
 “대신 실점을 최소화할 수 있잖아. 그럼 제임스도 생각이란 걸 할 줄 알 거야. 그래서 득점력 강화를 위해서 후반전에 저스틴을 들여보내지 않을까?”
 
 나는 하나만 생각하고 둘을 생각 못 하는 대머리 왈패를 보며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가 감독이 저스틴과 너를 맞바꾸면?”
 “······.”
 “스트라이커 능력은 약해지고, 수비형 미드필더는 그대로고. 이걸 벤치에서 보다가 답답해할 거고. 아니야?”
 “그러네. 그나저나 당신 나를 인정하고 있었구나. 저스틴보다 내 득점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어. 키야, 고마워.”
 
 사람이 이렇게 단순할 수 있구나.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팀에는 안정을 가져왔다.
 조 머피가 투지 넘치게 큰소리치는 게 들려왔고.
 
 “전방 패스만 잘 연결해줘! 허더스필드 똥꾸녕을 찔러버릴 테니까.”
 “변태 같은 새끼.”
 “저 새끼 여자 친구가 저거 알고 있나?”
 
 더러운 소리가 오갔지만, 심리적 안정이 엿보였다.
 이 부분이 경기 초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순간 허더스필드의 공격이 중앙에서 차단되었기에.
 
 ― 최소한 하나는 인정해야겠어. 네 욕심보다 팀을 생각한다는 걸.
 
 팔짱을 낀 레디메인이 나를 칭찬했다.
 
 “그거야 당연하죠. 그래서 안타깝네요. 잘못해서 오늘 경기 이기면 어떻게 하죠? 언론은 빠르게 안정시킨 제임스를 칭찬할 텐데···”
 
 이 팀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감독이었지만, 나도 코치로 일해 본 적이 있었다.
 코치진으로서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도 수장인 감독에게 간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고 막상 경기에 임하니 팀을 지게 할 수도 없고···’
 
 실제로 생각과 본능이 따로 움직이는 나한테 암 걸릴 거 같았다.
 
 ― 너, 타고난 승부사인 거 같구나. 내가 사람 잘 봤어.
 “일부러 칭찬 안 하셔도 돼요. 사실 지금은 그게 필요 없는데···”
 ― 그렇긴 한데, 어차피 오늘 경기는 쉽지 않아. 아무리 애들이 분투한다고 해도,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존재하고 제임스가 전술을 저따위로 짜놨기에 곧 팀이 흔들릴 거야.
 
 죽은 노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낸다.
 자기가 지휘했던 팀에 악담을 날리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하지만 그의 예측이 모두 맞아떨어져 간다.
 초반 공세를 잘 막아내던 우리 팀이 슬슬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중앙에서 공수를 조율하는 이가 없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주도권을 내줬고, 정말 암 걸릴 것 같은 상황이 계속 연출됐다.
 그것도 초기가 아니라 말기 암이 바로 올 것 같았고···
 
 “저, 저거!”
 ― 으아! 한 골 먹을 뻔했네.
 “아, 제길! 막아!”
 ― 으아아아악!
 
 이처럼 나와 귀신 감독은 비명 지르느라 바빴다. 물론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한 것은 제임스 코너 감독 대행이었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라인 바로 뒤에서 크게 소리 지르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그게 아니잖아!”
 “라인 똑바로 안 맞춰?”
 “야, 중간에서 수비를 도와줘야지!”
 “그걸 뻔히 보고만 있네. 안 뛰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심장은 같은 곳을 향해 뛰고 있었다.
 바로 우리 팀의 패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고인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이라도 말해볼까요? 고립된 조를 내리면 공수의 안정감이 높아진다고.”
 ― 그거 제임스가 안 들은 내용이야? 이미 들어놓고 명단을 이렇게 내보낸 거잖아.
 “지금 눈으로 확인했으니, 내 말이 먹힐 거 아니에요?”
 ― 너 생각이 바뀌었다. 설마 이기고 싶어?
 “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리고 경기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제가 이기고 싶다고 진짜로 이기게? 그냥 또 대패당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이건 사실이다.
 당장 한 골이라도 먹으면, 지난번처럼 와르르 심리적 지지선이 무너져 대패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오늘 지는 게 목표였더라도 두 번 연속 대패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팀 분위기를 나중에 수습하려면 정말 힘이 든다.
 그러나 왜 슬픈 예감은 늘 맞을까?
 전반 끝나기 직전.
 허더스필드의 최근 경기력을 반영하듯, 중앙에서 수차례 패스가 연결되더니 결국 완벽한 슈팅을 허용했다.
 가까스로 골키퍼가 그걸 막았으나, 하필 튀어나온 지점이 허더스필드 스트라이커 정면이었다.
 
 쾅!
 
 내 귀에 들리는 그의 슈팅하는 소리가 핵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닮았다고나 할까?
 
 출렁!
 
 그물이 꿈틀거리는 걸 보며 내 가슴은 아려왔다.
 아니 욱신욱신 쑤셨다.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나 혼자 동떨어진 공간에서 실점 장면을 보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선수들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분노, 좌절, 상실감··· 에라 모르겠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리?
 
 “새끼들아, 그럼 안 되지.”
 
 나도 모르게 한마디 꺼낸다.
 동시에 하나의 욕구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역시 지는 건 싫다.’
 
 ***
 
 선수들 앞에서는 짠한 표정을 다 지우고 격려에 열중했다.
 
 “고생했어. 진짜 잘했어.”
 “잘하긴! 와, 제임스 때문에 이게 뭐야?”
 “워, 워. 조, 참아··· 제임스가 들으면···”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제임스는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있었으니까.
 어쩌면 좀 전에 조 머피가 한 말을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 좀 서로 아닌 척 넘어가는 것도 미덕일 텐데,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미 틀렸다. 제임스 코너가 적나라한 감정을 드러내며 조 머피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당연히 굽힐 조 머피가 아니었기에 내 우려와 똑같은 대화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내 말이 틀렸수?”
 “이 새끼가.”
 “지금 욕한 거지? 욕한 거 맞지?”
 “너 후반전에 뛸 생각 하지 마, 개새끼야!”
 “뻐큐! 더러워서 안 뛰어.”
 “그만!”
 
 오죽하면 내가 큰 소리를 내겠는가.
 확실한 정리까지 해줬다.
 
 “싸우려면 라커룸 들어가서 싸우든지, 이게 뭐야? 아오, 진짜 씨바···”
 
 대신 나도 성질을 다스리기 위해 정중하게 한국어 욕을 던져주었다.
 다행히 내 말이 먹힌다.
 아니 일단 조 머피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좋아요. 들어가서 싸웁시다. 나도 할 말 많수다.”
 “어쭈, 내가 겁낼 줄 아나?”
 
 개판 오 분 전. 아마 라커룸은 개싸움이 일어날 게 확실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귀신 할배의 웃는 얼굴.
 
 ‘뭐지?’
 ― 제임스 코너 멘탈 나갔잖아.
 ‘그렇죠. 그런데 그게 왜요?’
 ― 너한테 밑져야 본전인 상황이 시작된 거지. 어차피 몇 경기 지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잖아. 지면 너한테 기회가 생길 거고, 지금 네가 이 상황을 수습한다면, 네 존재감을 키우는 게 된단 말이지.
 ‘제가 존재감을 키운다고 누가 알아주나요?’
 ―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알아주긴 할 거 같아.
 ‘누가요?’
 ― 회장.
 ‘······?’
 ― 그 사람 눈은 어디든 있거든?
 ‘······!’
 
 순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분 탓일까?
 몇몇 스태프가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눈에 넣는 것 같았다.
 
 ‘잘됐네요, 저 이 경기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 그럴 줄 알았어. 여하튼, 지는 거 참 싫어해.
 
 나만 지는 걸 싫어할까?
 이미 귀신 감독의 목소리에도 즐거움이 깔려 있었다.
 마치 기막힌 반전을 준비라도 하듯이.
 
 
 # 7회. 저 코리안, 이름이 뭐지?
 
 라커룸에 들어온 나는 분위기를 살폈다.
 지금 새로 부임한 코리안 코치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인가!
 다행히도 그랬다.
 아까 개판인 상황 후 감독 대행 제임스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선수들은 그를 보기도 싫다는 듯 앉아있었으며 코치진은 오히려 내 눈치만 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은 자포자기의 심리 상태에서 해결사가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는 눈빛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간을 먼저 봤다.
 
 “감독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조를 중앙으로 내립시다.”
 
 예상대로 반응이 아예 없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기에 나는 조 머피와 눈을 마주치며 재빨리 말했다.
 
 “조, 너도 중앙으로 내려오면 각오 단단히 할 거지?”
 “당연하지. 나 원래 미드필더 출신이라고.”
 “그랬어? 어쩐지 경기 시야가 장난 아니더라.”
 “하하하, 역시 당신 눈깔은 똑바로 잘 박혔네.”
 ‘그러는 너는 정말 뇌가 청순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나는 웃었다.
 단순한 조 머피를 어르고 달래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제 감독 대행만 고개를 끄덕이면 만사 오케이인데···’
 
 나는 이쯤에서 다시 감독 대행 제임스 코너를 보았다.
 그런데 내 시선을 받고 그는 켕기는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경기에 지면 책임은? 누가 질 거야?”
 “······.”
 
 이 조건 정말 황당하다.
 감독 대행이 책임을 회피하다니.
 나는 욱하는 마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지겠습니다.”
 “어떻게?”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걸 말해주세요.”
 
 제임스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러다가 그가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는 게 내 레이더에 잡혔다.
 고개를 돌렸더니, 짐 레이너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뭐야, 얘가 제임스의 브레인이었어?’
 
 제임스가 완벽한 허수아비라는 증거가 또 나왔다.
 마치 제임스를 조종하듯 짐이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신호를 빠르게 읽어냈다.
 즉, 순간적으로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는 했지만, 두 사람 다 생각해 놓은 것이 없어 보인다.
 결국, 돌파구를 모색하던 제임스가 목소리를 높여 거친 말을 쏟아냈다.
 
 “너도 너지만, 저 새끼는 가만히 못 둬.”
 
 여기서 말하는 ‘저 새끼’는 그의 삿대질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대머리의 조 머피였다.
 
 “경기에 지면 각오해야 할 거야.”
 “지면 어쩔 건데?”
 “네 자리를 노리는 리저브 애들이 많다는 거 알지?”
 “날 빼고 핏덩어리를 넣겠다는 거지? 뭐, 그러든지 말든지.”
 
 일단 나는 감독의 지금 표현들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오케이, 우리 아웅다웅 다툴 시간이 없어요. 승낙하신 것으로 알고 설명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제임스는 인상을 굳힌 채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스!’
 
 속으로 외친 뒤에 나는 선수들에게 경기 전에 말했던 전술을 쏟아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포메이션을 통째로 바꾼다. 3-5-2에서 4-3-3으로!”
 
 내 한마디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제각각으로 바뀌었다.
 선수들은 드디어 하고 싶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 화색이 돋았고, 언뜻 비친 감독 대행 제임스의 눈빛에는 후회와 경계심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뭐야? 사전에 작전을 짰어?】
 
 마치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는데, 나는 혹시라도 그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봐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전반기에 가장 많이 쓴 전술이 바로 4-3-3이잖아. 나는 이게 통할 거라고 봐. 누가 뭐래도 우리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어야지. 안 그래?”
 “옳소!”
 “당연하지!”
 
 금세 선수들의 추임새가 내 선언을 뒷받침했다.
 당황한 제임스 코너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미 늦은 셈이다.
 나는 입에 모터를 단 듯 계속 말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자, 먼저 조가 중앙에서 버텨줘야 해. 바로 여기. 그리고 조 자리에는 저스틴이 들어간다.”
 
 아무리 그래도 결국, 이번 포메이션 배치의 묘수는 조 머피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중앙에서 호흡을 틔워주느냐에 따라 공격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이 끝날 때쯤 내 목소리에는 바람이 담겼다.
 
 “한 골이야, 한 골! 많은 거 안 바랄게! 한 골로 시작하자. 응?”
 
 전반전 내용을 보아, 현실적으로 비기면 선방한 거라고 봤다.
 이 때문에 내 절박한 목소리가 선수들의 머리에 쏙쏙 들어가길 바랐는데···
 
 ― 내 장담하마. 네가 말한 것보다 더 적절한 전술은 없었을 거다.
 
 레디메인 감독이 나에게 힘을 준다.
 물론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후반전을 위해 들어가는 선수들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할 뿐이었다.
 
 ***
 
 “오늘도 힘들어 보여.”
 
 선수들이 필드에 자리할 무렵 미드포트의 회장 로버트 켄트의 목소리가 엘리자베스 히들스턴의 귀에 들려온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후반전 포지션이 조금 바뀐 거 같은데요?”
 “안 되면 바꾸긴 해야지. 그런데 제임스가 썩 믿음직하지가 못해서··· 역시 이럴 때마다 자네 아버지가 생각나.”
 
 로버트 역시 누구보다도 더 미드포트의 승리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변화의 모습을 눈에 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기대가 안 되는 것은 감독 대행인 제임스 코너가 미덥지 못해서였기 때문이다.
 
 ‘돈만 더 있었다면, 좋은 감독을 데려올 수 있을 텐데.’
 
 팀 재정은 늘 어려웠다.
 잉글랜드의 다른 팀과 태생이 달랐기 때문이다.
 돈 많은 구단주까지는 아니라도 회원들의 푼돈을 모아 탄생한 미드포트.
 구단주의 개입에서 벗어난 유형의 팀을 만들었으나, 자금 압박은 늘 팀을 옥죄고 있었다.
 이런 그의 고민은 모른 채,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아, 어제 말씀하신 거 조사해 봤는데요?”
 “어제? 아, 새 코리안 코치 알아보라는 거?”
 “네, 알아보니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나 그 사람 이름이 잘 안 외워져. 코리안이라고 했지?”
 “네, 이름이 현진 정이에요. 따로 알아봤더니, 선수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해요.”
 “그런 것 같더라고. 그런데 어느 정도야?”
 “고작 보름 만에 선수단을 휘어잡았어요.”
 “휘어잡아?”
 
 그 어감이 주는 의미는 꽤 인상적이었다.
 일부 스태프에게도 듣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아예 코리안 코치가 팀을 장악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주의 깊게 봐야 할 거 같아요.”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의미는?”
 “차기 감독군 중 하나로 올려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로버트의 눈이 반짝인다.
 그는 팀 창단 후에 전 감독이 골칫거리 선수들을 어떻게 장악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팀은 스쿼드를 싹 갈 순 없어요. 아니 좋은 선수 한 명을 데려오기도 쉽지 않죠. 모두 돈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차라리 그들을 장악해서 예전 모습만 보인다면? 사실 그 역할을 충분히 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해요.”
 “그렇기는 하지.”
 
 자기도 모르게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보름밖에 안 된 일개 코리안 전술 코치를 차기 감독 후보로 올린다는 것은 뭔가 거부감이 생겼다.
 그때 들리는 엘리자베스의 말.
 
 “기억하시죠? 아버지는 미드포트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전설을 쓰셨어요. 그전에 아버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왜 모르겠는가.
 늘 돈이 부족한 구단에 감독으로 부임한 레디메인 히들스턴은 그야말로 신화를 썼다.
 그런데 그전 경력을 들여다보면 괄목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최하위 리그에서 레디메인이 지휘한 팀들이 모두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었다.
 그냥 패배도 아니고 압도적인 숫자의 패배.
 솔직히 미드포트에 부임해서도 초반에는 죽을 쒔다.
 그를 경질하지 못했던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돈이 없기에 변변치 않은 제임스 코너를 감독 대행으로 두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를 내리고 새로운 사람을 올린다는 건 쉽게 결정할 바가 아니었다.
 
 “일단 자네 말대로 주의 깊게 보지.”
 
 마침 심판이 경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옮긴 조 머피가 손뼉을 치며 동료 선수들에게 뭐라고 외치는 중이었다.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와의 대화가 중단되었고, 경기에 몰입하기 시작한 로버트 회장.
 
 ‘초반은 나쁘지 않네.’
 
 전반과는 다르게 꽤 안정적인 플레이가 연출되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싹 바뀐 듯하다.
 로버트 역시 회장 노릇을 하며 축구를 많이 보러 다녔다.
 거의 준전문가란 뜻이다.
 따라서 포메이션 자체가 바뀐 게 한눈에 확 들어왔다.
 3-5-2에서 4-3-3으로.
 더군다나 그 중앙에 조 머피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한 수인 듯했다.
 가끔 앞으로 찔러주는 조 머피의 패스에 허더스필드의 약점이 노출되었으니까.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 팀은 꽤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균형점이 맞았다고나 할까?
 
 ‘그럼 점수도 똑같아져야지.’
 
 속으로 이 말을 되뇌는데, 결정적 순간이 도래했다.
 중앙에서 상대 공격을 태클로 차단한 조 머피가 긴 패스를 한 것이다.
 
 “······!”
 
 저런 재능도 있었던가?
 탄성을 내뱉을 틈도 없다.
 공을 받은 저스틴이 직진하며 슈팅을 날린다.
 그러나.
 
 “아아아아아!”
 
 홈팬의 아쉬운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 이유.
 저스틴의 강슛이 하필이면 골키퍼 정면이었다.
 전반보다 허리가 강해졌지만, 최전방의 날카로움이 줄어든 게 아쉽다.
 그때였다.
 골키퍼가 튕겨 낸 공이 다시 돌더니 아크 부근 조 머피의 발로 전달된다.
 이건 누가 봐도 중거리 슛 타이밍!
 로버트도 안달 나서 외치고 말았다.
 
 “슈우웃!”
 
 로버트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조 머피의 발이 잔디 위를 갈랐다.
 그리고···
 출렁!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깔끔한 골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코너를 향해 꽂혀 들어간 득점에 아까와 다른 관중들의 외침이 귓가에 들렸다.
 로버트 역시 어린아이처럼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잘했어! 조! 잘했다고! 하하하.”
 
 로버트의 눈에 비친 조 머피가 신이 나는지 어디론가 달려간다.
 이번 골 세레머니는 새 감독 대행인 제임스 코너와 할 예정인가?
 
 “······!”
 
 아니다.
 덩치 큰 조 머피를 품에 안는 사람은 이번에 새로 부임한 코리안 코치였다.
 
 “엘리자베스?”
 “네, 회장님.”
 “늙으니까 또 까먹네. 저 코리안, 이름이 뭐라고 했지?”
 “현진 정입니다.”
 “그래, 현진 정. 현진 정이라···”
 
 이번엔 안 까먹겠다는 듯 로버트의 입이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되뇐다.
 
 <『FFF급 구단 매니지먼트』 1-2권에 계속>

댓글(2)

cg*****    
끝까지 다 봤습니다. 조금 반복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소재와 디테일의 변화로 20권까지 스무스하게 읽히고 나쁘지 않아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020.05.16 22:18
개백금    
벌써 답답한데...
2021.05.01 14:50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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