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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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넘치는 자격 (1)

2019.11.26 조회 33,856 추천 500


 간절히 원하면 뭐든 이뤄진다던가.
 
 매일 잠에 들기 전에 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게 있었다.
 주변에 결계를 펼쳐두고 그 가운데서 잠에 들었다.
 결계는 책, 휴대폰, 티비, 노트북, 데스크탑 등 모든 걸 총동원해서 만들었다.
 책들은 이계로 진입하는 장면이 담긴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고, 화면에는 전부 그와 비슷한 장면에서 정지한 상태였다.
 언제나 마음속으로는 이계로 가자고 소리쳤다. 그게 안 되면 요정이든 마왕이든 뭐든 튀어나오라고.
 정신병원 직행 코스에 어울리는 짓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쳇바퀴 굴리듯 고단하고 똑같은 일상에 지쳤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격하게 표현했을 뿐.
 
 누구나 한 번쯤은 소설이나 만화, 영화의 주인공을 꿈꾸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다.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현실이 기다릴 것을 알면서도, 잠에 드는 순간만큼은 꿈이 이뤄지길 기대하며 좋은 꿈이라도 꾸길 바란다.
 
 꿈을 꿨다.
 지금까지 살면서 꾼 꿈들 중 가장 생생했다.
 어둠을 녹인 듯한 시커먼 물속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새로운 세상을 원하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물음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렇다고, 진정으로 원한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곳은 침대 위가 아닌 도심 한복판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다른 차원의 세상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30년을 살아온 내 인생이 3초 만에 뒤바뀔 줄이야······.
 
 도착한 직후까지만 해도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상에 오면 보통 내가 주인공이고 특별한 능력이든 뭐든 얻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재수도 없지.
 대지가 뒤흔들리고 거대한 무언가가 솟아나면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다른 세상을 바란 건 맞지만, 이런 아포칼립스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 * *
 
 새로운 삶은 말 그대로 바닥부터였다.
 같은 바닥이라도 발밑에 둘 것이 생기면 눈높이가 달라지는 법.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제발 목숨만은···!”
 
 피와 눈물로 세수를 한 듯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나는 남자를 소 닭 보듯 쳐다봤다.
 
 “이미 한 번 용서해줬었잖아. 기억 안 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쇼! 제발 용서해주십쇼!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너만 배고픈 게 아니야. 우리 모두 배고프다.”
 “제발요, 제발···! 저도 모르게 욕심이 나서 그랬습니다! 실수였습니다! 한 번만 더 자비를···!”
 “실수였다고?”
 
 남자는 오열을 하다 말고 광명을 찾은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예! 실수였습니다! 진짜 실수였습니다.”
 “실수는 길 가다 자빠지는 게 실수고. 넌 모두의 뒤통수를 갈기기 위해서 신중에 신중을 기했잖아. 그것도 두 번이나. 그게 진짜 실수라고 생각하냐?”
 “그, 그건······.”
 “걸린 것만 두 번이야. 이 짓을 얼마나 오랫동안, 몇 번이나 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지.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을 슥 둘러보며 고갯짓을 했다.
 
 “보내줘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주라는 뜻이었다.
 남자 역시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다급히 손을 싹싹 빌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나의 말 한마디에 열댓 명이 움직이고 있었다. 금세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매몰차게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파리가 싹싹 빈다고 해서 사과를 하는 건 아니다. 파리가 앞발을 싹싹 비빌 때는 뭔가 빨아 먹을 준비를 할 때고, 그때 때려잡아야 한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 읍! 으으으읍!”
 
 뒤로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금세 작아졌고,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몇 걸음 옮기지 않은 상태였다. 고요함이 남자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하지만 룰을 어긴 자를 그냥 놔둘 수는 없다.
 특히 물건을 빼돌려 모두의 생존권을 위협한 경우라면 더욱.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똑같은 일이 생길 확률을 줄일 수 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비정했기에 살아남았고, 나를 따르는 녀석들도 생겼다.
 아직 사자는 되지 못했지만, 이 근방의 하이에나들 중에서는 내가 왕이었다.
 
 * * *
 
 나의 위치 자체는 예전보다 지금이 나을지도 모른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부품 정도였던 내가 리더고 핵심이니까.
 하지만 세상이 뒤틀린 덕분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빡세다.
 
 대격변이 일어난 세상에서 살아간 지도 벌써 3년은 된 듯하다. 확신은 못한다. 날짜 따위는 잊고 산 지 오래니까.
 때로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게 맞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원래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린 건 아닐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좆같기는 매한가지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다른 세상 따위를 바라지는 않았을 텐데.
 
 오늘도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고물들을 뒤진다.
 ‘감정’ 스킬이 없기에 뭐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길은 없다.
 그나마 쓸만해 보이는 걸 찾을 뿐.
 
 철그럭.
 
 진회색 팔 보호대 한 쌍.
 착용해본다.
 왠지 모르게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긴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줄에 적당히 묶어 허리춤에 찬다.
 그 다음은 다시 반복이다.
 보랏빛 하늘 아래서 다시 고물더미를 파헤친다.
 ‘탑의 주민’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계속.
 
 한창 고물더미를 헤집던 중이었다.
 이 부근에서는 보지 못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잠시 내 허리춤에 달려 있는 팔 보호대에 머물렀다.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물들을 발로 이리저리 밀어내다 끝이 삐죽하게 찢어진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백 마디 말보다 완강한 의사표현이었다.
 남자는 음침한 눈빛을 보내다 씩 웃었다. 그리고 날이 다 상한 장검 한 자루를 주워들었다.
 
 “해보자고?”
 “얌전히 장비만 넘기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싫다면?”
 “피를 봐야겠지.”
 
 그의 일행들로 보이는 남자 4명과 여자 1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 있었다.
 
 “얘들아.”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자 흩어져 있던 내 아래 있는 녀석들이 달려왔다.
 10초 안에 몰려든 수가 9명이었고, 뭉쳐 있는 남자 일행을 에워쌌다.
 나는 파이프를 어깨에 걸치며 씩 웃어 보였다.
 
 “계속 해볼래?”
 
 남자는 인상을 찡그린 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다 이내 수그러들었다.
 
 “멈출 수도 있나?”
 “그쪽이 얌전히 물러나면 그럴 수도 있지.”
 “······아무래도 오해가 있던 것 같다.”
 “그게 끝인가?”
 “······미안하다.”
 “알면 됐다.”
 “조용히 물러나도록 하지. 반드시 피를 볼 필요는 없으니······.”
 
 그는 일행들과 함께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냥은 못 가지.”
 
 내가 한마디 툭 던지자 전부 얼어붙은 듯 멈췄다.
 
 “장비들 다 뱉고 가라.”
 “그건 불가능하다. 이건 우리들이 이틀 동안 모은 거다.”
 “살인도 불사하며 강도질을 하려고 했으면서 그냥 가겠다고?”
 “그냥 넘어가겠다고 했잖은가!”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남자가 말을 멈췄다.
 
 “지금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내 아래 있는 녀석들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준비가 돼 있었다. 어느새 몇몇 녀석들이 더 몰려와 고물더미 위에 서서 매섭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크윽···!”
 
 남자는 분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전부 장비 내려놓자.”
 
 그의 말에 일행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니고 있는 장비들을 바닥에 내려놨다.
 
 “잊지 않는다. 다음에 반드시······.”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 아래 있는 녀석들이 듣지 못할 만큼, 숨소리가 섞일 정도로 소곤거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들어왔고,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속으로 생각만 했어야지.”
 “뭐?”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쪽 룰도 모르고 하니 한 번쯤은 자비를 베풀어볼까 했어. 그런데··· 그런 식이면 곤란하지.”
 
 남자의 안색이 바뀌었다.
 나는 그의 일행들을 슥 둘러보며 물었다.
 
 “너희들도 언젠가 복수를 할 생각인가?”
 
 전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특히 남자의 눈치를.
 
 “빨리 대답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한 남자가 양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남자도 입을 열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겁니다.”
 “저, 저도요. 이곳을 완전히 뜰게요. 모든 걸 걸고 약속드려요.”
 
 나머지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그럼 얼른 꺼져.”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멈춰 섰다. 내 아래 있는 녀석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내가 고갯짓을 하자 길이 트였고, 잠시 멈춰 있던 이들은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자리에 남은 것은 처음에 강도질을 하려고 했던 남자 하나뿐이었다.
 
 “이 주변에서는 강도질 같은 거 못해. 우리 같은 하이에나들끼리라도 돕고 살아야 버틸 거 아니냐. 너 같은 놈들은 다른 곳에서 와서 뭘 모르니 그러는 거잖아? 그래서 보통 한 번은 기회를 주거든.”
 
 나는 미간을 팍 찡그리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넌 안 되겠다.”
 
 내 밑에 있는 녀석들이 서서히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뭐? 한 번은 봐주는 거 아니었어? 기다려봐!”
 “무조건 봐주는 건 아니지.”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잠깐만! 그냥 순간적으로 화나서 혼자 중얼거린 거야! 이곳이 그런 곳인 줄도 몰랐고! 이제 안 그럴게! 또 볼 일 없을··· 아아아아아악!”
 
 나는 남자의 비명을 뒤로하고 다시 고물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아래 있는 녀석들 중 하나가 옆으로 다가왔다.
 
 “쫓아갈까요?”
 
 내가 보내준 놈들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한 번··· 고분고분하다면 한 번은 기회를 줘야지. 항상 그래왔잖냐. 아까 얼굴들을 보니 이쪽에 또 얼씬거릴 것들이 아니야.”
 “그래도 가능하면 후환을 만들지 않는 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알겠습니다.”
 
 녀석은 바로 몸을 돌려 뛰어갈 기세였다.
 
 “그런데 말이다.”
 “예?”
 
 눈빛에서 다급함이 보였다. 내가 보내준 것들이 간 방향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됐으니까.
 
 “지금 쫓아간다고 잡을 수 있을까? 뭐 빠지게 튀고 있을 텐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잡을 수 있습니다.”
 “확실하냐?”
 “100% 장담은 못하지만 아마도······.”
 “너 배고프지 않냐?”
 
 갑작스런 물음에 녀석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다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대답했다.
 
 “죽을 만큼 고픕니다.”
 “근데 굳이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 쫓아가서 힘쓰게? 그 시간에 장비 하나라도 더 건져야 되지 않겠냐?”
 “그건······.”
 “그것들은 보복하러 안 와. 아니, 못 온다. 그럴 배짱도 없는 것들이거든. 설사 그런다고 한들 뭐가 문제야? 그런 것들한테 겁을 먹는 거냐?”
 “아닙니다. 그랬다면 추격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너도 내가 한 번 봐줬던 걸 기억해라.”
 “······알겠습니다.”
 
 어설프게 건드리지 않는다. 할 거면 처음부터 확실히. 아니면 잊는다.
 
 어느덧 남자의 비명이 완전히 멈춰 있었다.
 내 아래 있는 녀석들은 흩어져서 고물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있는 녀석을 지그시 쳐다봤다. 녀석은 곧바로 장비를 찾아 움직였다.
 
 덜그럭. 철걱, 철그럭.
 
 나도 예외는 아니다. 다시 고물더미를 뒤진다.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 * *
 
 배가 고프다.
 짐승, 하다못해 벌레라도 있으면 허기를 달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탑 밖에는 고물과 인간밖에 없다.
 
 “왔다! 왔어!”
 “배식이다!”
 “탑의 주민들이 나왔다!”
 
 내 아래 있는 녀석들이 소란을 떨었다.
 
 “보스! 탑의 주민들이 나왔답니다!”
 “형님, 탑에 있는 것들 나왔다고 합니다. 얼른 가시죠.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은 것 같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뗐다.
 
 “나도 귀 달려 있다. 가자.”
 
 고물더미 위로 발을 내디디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도 걸음을 옮겨 소음을 더했다.
 
 금세 고물들의 산을 벗어나 황무지 같은 건조한 땅을 밟았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같은 처지인 하이에나들은 하나같이 마른 체구였다.
 하지만 내가 이끄는 집단에 속한 이들은 달랐다. 건장까지는 아니어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모습은 아니었다.
 집단을 이룬 덕분에 약탈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덕분에 온전하게 고물더미를 뒤질 수 있어서였다. 비교적 안전하게 지내니 스트레스도 적었고.
 
 하늘 높은 줄 몰고 솟아 있는 벽이 보였다.
 탑의 일부였다.
 세상의 중심에 솟은 거대한 탑.
 세상이 이렇게 된 지 몇 년은 지난 것 같았지만, 저 탑을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탑의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대략 십여 명 정도였다. 사람이 개미만큼 작아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도 마찬가지.
 탑의 주민들을 구별하는 건 쉬웠다. 때깔과 행색이 달랐으니까. 사자와 하이에나가 다른 것처럼.
 그들이 밖으로 나올 때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탑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들.
 
 부럽다. 죽도록 부럽다.
 나도 금방 저렇게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고물더미를 뒤지는 하이에나에 지나지 않는다.
 
 “자, 자! 일렬로 줄 서!”
 “밥 굶기 싫으면 빨리빨리 움직여라!”
 “감정 받을 장비들 미리미리 꺼내 놔! 또 앞에 와서 미적거리면 감정 안 받을 줄 알아!”
 
 하이에나들은 고물더미에서 건진 장비를 감정 받을 사람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몇몇 탑의 주민들이 배식대를 펼쳤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위장이 심장처럼 벌떡벌떡 뛰는 것 같았다.
 
 금세 내가 감정을 받을 차례가 왔다.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매부리코를 가진 홀쭉한 남자 앞에 섰다.
 계종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아래 있던 녀석이었다.
 
 “오랜만이네요 형님.”
 
 계종렬이 히죽거렸다. 오른쪽 눈썹과 그 위에 장식처럼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철판이 함께 들썩거렸다.
 
 “줘봐요.”
 
 팔 보호대를 내밀자 녀석이 낚아채듯 빼앗아갔다.
 계종렬의 손에서 ‘오라’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감정’ 스킬을 쓰는 것이었다.
 탑의 주민들만이 가지는 특권 중 하나.
 오라도 없고 스킬도 사용할 수 없는 나 같은 하이에나들은 고물더미에서 건진 장비의 가치를 알 수 없었다. 오롯이 감정을 하는 탑의 주민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음···!”
 
 계종렬의 눈썹이 또다시 들썩거렸다.
 제법 가치가 있는 물건인 듯했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기대감을 품은 채 눈치를 살폈다.
 
 “쓰레기는 아니네.”
 
 계종렬이 씩 웃어 보이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 다른 특권인 ‘인벤토리’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적당한 거 같네요.”
 
 녀석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엿처럼 생긴 무언가의 뼛조각 2개.
 탑의 주민들이 고물을 대가로 내주는 일종의 식권(食券)이었는데, 하이에나들 사이에서는 화폐로 통했다.
 그래서 고물더미에서 건진 장비를 넘기고 식권(食權)을 받는 걸 ‘엿 바꿔먹는다’고도 했다.
 
 식권 2개.
 지난 이틀 동안 허탕친 걸 생각하면 감지덕지다.
 하지만 계종렬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최소 식권 5개짜리 표정이었다.
 감정은 할 수 없어도 눈치껏 개겨볼 수는 있었다.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하니까.
 아니, 내 아래 있는 녀석들 밥그릇까지 챙겨야 된다.
 
 “4개 더 줘라.”
 “뭐라고요?”
 “들었으면서 뭘 다시 물어? 4개 더 달라고.”
 “이건 2개짜립니다.”
 
 계종렬은 나와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하냐?”
 
 계종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까 표정 다 봤다. 후려칠 거면 티나 좀 내지 말든가. 우리한테까지 이러고 싶냐?”
 
 내가 한 집단의 리더가 될 수 있던 이유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딱 두 가지만 꼽으라면 흥정과 싸움이다.
 무법천지인 세상인지라 힘이 곧 법이고 정의다.
 얼마 전만 해도 계종렬은 내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덤벼들 생각조차 못할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잘 지냈으니 그럴 일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뒤바뀌었다.
 계종렬이 탑의 주민으로서 자격을 갖췄을 때 진심으로 축하했었다. 하지만 녀석은 순식간에 변했다.
 아직도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니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나.
 
 나 같은 하이에나가 사자인 탑의 주민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건강한 사자와 굶주려서 힘이 쭉 빠진 하이에나의 1대1 승부의 결과야 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흥정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만큼 중요한 능력으로 꼽힌다.
 단순히 입만 잘 턴다고 되는 게 아니다. 눈치만 잘 봐서도 안 된다.
 내가 느낀 흥정의 기본은 개기기. 개길 줄 알아야 한다. 목숨을 내거는 담력을 필요로 하는 거다.
 계종렬을 상대로는 더욱 물러설 수 없다.
 내 밑에 있던 녀석한테 쫄 수는 없지 않은가.
 
 “광인이 형.”
 “왜.”
 “몇 번을 말해요? 이쪽도 이쪽 나름의 룰이 있다니까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시세라는 게 있고―”
 
 내가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 그 시세라는 게 네 면상에 써 있다고.”
 “사람 얼굴만 보고 어떻게 압니까?”
 “너 옛날부터 그랬잖아. 같이 엿 바꿔먹던 시절부터 구라 치면 다 걸리곤 했었지. 웬줄 아냐? 쌍판 가독성이 상당히 좋거든.”
 
 계종렬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또 그러네? 감정을 그렇게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게 좋은 버릇이 아니라니까?”
 “하······. 진짜······.”
 
 나는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밑에 있던 녀석이라서가 아니었다. 항상 그랬다. 상대가 누구든 일단 뻗대고 봤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탑의 주민들이 웬만해서는 하이에나들을 건들지 않는다. 짐승도 배가 고프지 않으면 거를 만한 수준의 음식에 장비들을 가져다 바치는 노예가 하나라도 더 필요하니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윗분들’이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 짓도 누울 자리인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자리인지 잘 봐가며 발을 뻗어야 한다.
 목을 내놓은 채 눈을 마주치며 혀를 날름거릴지 입술을 붙이고 있을지 간을 보는 셈이다.
 
 “그럼 환불해드릴까?”
 
 말이 짧아진다. 사사로운 것에 연연치는 않는다. 존대한다고 존중하는 건 아니니까.
 녀석은 나름대로 강수를 던진 거겠지.
 하지만 이런 걸로 나를 휘두를 수는 없다.
 
 “그러든가 그럼.”
 “뭐라고요?”
 “들었잖아? 왜 들어놓고 되물어? 환불하라고. 내가 꼭 너한테만 팔아먹어야 되냐? 그건 아니거든. 그런데 내가 왜 너한테 먼저 올까?”
 “그거야 탑의 주민이어도 개길 수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네가 내 밑에 있을 때는 벌써 다 까먹었냐? 내가 그때는 안 개겼냐?”
 “뭔데요 그럼? 옛정에 기대려고?”
 “옛정은 지랄······. 사정 봐준 적도 없으면서 그딴 소리하지 마라. 내가 아까 말했지? 너 쌍판 가독성 좋다고. 그래서 너희들끼리만 알고 있는 그 시세라는 걸 읽으려고 먼저 오는 거다.”
 
 계종렬은 부글부글 끓는 듯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이거 도로 가져가고, 팔 보호대 내놔라. 다른 사람한테 넘길라니까.”
 
 내가 손바닥을 펼쳐 식권 2개를 내밀었다.
 계종렬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마주쳐왔다.
 
 “알겠습니다. 조정해드리겠습니다.”
 “조정해준다고?”
 “예에.”
 
 녀석이 식권 1개를 재빨리 낚아채갔다.
 
 “뭔 개짓거리야?”
 “방금 장비 값이 식권 하나로 떨어졌어.”
 “너 이 새끼 진짜···!”
 “어쩔 건데?”
 “뭐?”
 
 계종렬이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방금 들었잖아, 어쩔 거냐고.”
 
 놈은 이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엄지로 날밑을 살짝 밀어 검을 드러냈다.
 생물로서의 본능이 말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오기로 버티며 서 있었다.
 
 스릉.
 
 계종렬이 손잡이를 잡고 검을 조금 더 길게 뺐다.
 
 “끝까지 해보시겠다? 내가 그쪽 밑에 있을 때도 몇 번 말했었지? 이름값하지 말라고.”
 
 내 이름 최광인.
 본래 뜻은 최고로 빛나는 사람이지만, 이 근방에서는 최고 미친놈으로 통한다.
 
 계종렬은 미친개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렇게 계속 미친놈처럼 굴다가 제 명에 못······.”
 
 놈은 말을 하다 말고 허공에 시선을 뒀다.
 윗분들에게 온 메시지를 읽는 게 분명했다.
 탑의 주민에게는 이따금씩 윗분들의 메시지가 내려온다.
 이내 계종렬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검을 도로 집어넣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식권 11개를 내밀었다.
 
 “······받으쇼.”
 
 아마도 윗분들이 제대로 된 값을 쳐주고 입은 닥치기를 바란 거겠지.
 나는 낚아채듯 식권들을 챙겼다.
 계종렬은 불쾌하다는 듯이 천천히 손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마주치지 맙시다.”
 
 나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여기 오지 말든가.”
 “끝까지 이럴래? 옛정으로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진짜 죽고 싶어?”
 
 계종렬이 다시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끝까지 가보자? 넌 무사할 것 같냐?”
 
 뒤로 내 밑에 있는 녀석들이 바짝 다가왔다.
 계종렬의 눈알이 바삐 움직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사자도 굶주린 하이에나 여럿에게 둘러싸이면 물러서곤 한다. 도리어 당할 때도 있다.
 사자라고 이빨이 안 박히는 건 아니니까.
 
 “종렬아, 개폼 잡다가 개 같이 죽는다.”

작가의 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댓글(22)

풍뢰전사    
건투를
2019.11.30 16:57
용가리튀김    
오 느낌 좋당
2019.12.08 23:20
백백오    
오 좋은작품인거 같다
2019.12.11 09:28
불꽃날개    
주인공 느낌 좋다.
2019.12.14 17:48
렙톤    
쩐다 ㅋㅋㅋㅋ
2019.12.20 22:26
백묘    
개졸렬ㅋㅋ
2019.12.21 12:07
디텍티브    
잘보고가요
2019.12.27 05:32
[탈퇴계정]    
괜찮네
2019.12.29 23:17
이른황혼    
크 ~ 마! 목숨이 없지 가오가없나?
2020.01.02 22:36
힘이여솟아    
파리얘기 조국이 한말을 고대로 갖다쓰는거 같은데..
2020.01.04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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