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전략게임 속 엑스트라

1화

2020.01.04 조회 64,283 추천 915


 난 아주 교양인이다.
 얼마나 교양인인가 하니, 회귀물, 환생물, 전생물, 이세계물, 현판, 중판, 라노벨, 양판소 가리지 않고 다 보는 교양인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종류의 소설들이 가지는 공통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뭐 하나는 가지고 시작한다는 거다.
 엑스트라로 양판소에 들어갔어? 응 공작가 장남이야.
 이세계에 갑자기 떨어졌다고? 응 치트 능력 줌
 집안도 구리고 치트 능력도 없다고? 응 그래도 앞의 전개라도 앎.
 하나같이 주인공의 스타성을 띄워주기 위해 반드시 무언가 하나는 가지고 있다.
 
 그래 놓고선 “왜 갑자기 내가 이런 곳에 떨어진 거지?” “어서 집에 돌아가게 해줘!” 같은 말을 하면서 징징댄다, 고구마라면 질색하는 양판소에도 필수적으로 집어넣어야 하는 갈등이랍시고 말이다.
 
 그런 다음에 주인공들은 정말로 대한민국에 살았던 놈들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게 적응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 살던 놈이 중세에 떨어졌는데도 전혀 위화감 없이 살아가거나 한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물도 전혀 이상한 걸 못 느낀다.
 그게 아니면 갑자기 지하철에서 배틀로얄을 펼치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거나 비범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개연성을 집어넣는 장치로는 ‘캐릭터의 기억이 떠오름’이나 역시 우려먹기 좋은 클리셰인 ‘앞의 전개를 미리 알고 있음’ 같은 것을 써먹는다.
 
 글 쓰는데 있어서 이것보다 더 이상 편리할 수가 없는 구조다.
 저것들만 잘 써먹으면 주인공을 띄워주면서 동시에 플롯에 필요한 갈등도 집어넣을 수 있고, 그 갈등을 해결할 방법까지 제공한다.
 개연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덤이다.
 
 약간 신랄하게 평하자면 딱 생각 없이 쓰기 좋고, 생각 없이 읽기 좋은 구조라고나 할까?
 하지만 내가 이렇게 비판조로 쓴다고 해서 저런 것들이 싫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 말했듯, 나는 교양인으로서 저런 웹소설들을 흥미롭게 보았다.
 그저 왜 그것들이 인기 있을까에 대해 조금 고민하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 그런 놈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X같은 웹소설 구조가 절실하게 필요한 놈이 되었다.
 
 “온다! 와!”
 “도망치지 말고 버텨!”
 
 와아아아아아!
 
 녹색피부에 근육질인 아인종이 크기만 크고 조악한 도끼 따위를 들고서 달려오고 있었다.
 성인보다 머리 3개는 더 큰 그놈들은 판타지 매체에서 질리게 나오는 ‘오크’.
 그리고 그 오크의 돌격을 막아보겠답시고 나와 맨엣암즈들은 파이크를 쥐고 버티고 서 있다.
 오크들은 오늘도 보기만해도 지릴 것 같은 면상을 하고선 와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그 진형에 꼬라박고 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이, 저 빡대가리들은 우회전술이란 걸 모른다는 점이다.
 
 슉
 퍽!
 “버텨!”
 
 그리고 불행한 것은, 가끔 도끼를 던질 줄 아는 놈들도 있단 점이다.
 내 옆에 있던 불쌍한 친구 하나가 오크가 던진 커다란 도끼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소름이 끼쳐서 지릴 것 같은데도 어느 용감한 친구가 버티라고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그랬다간 오크들에게 죽고 한 끼 식사가 되기 좋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탈영병이 될 판이고, 탈영하지 않아도 겁쟁이, 배신자로 낙인 찍혀 맞아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선택권이 없다, 여기서 버텨서 죽든지 살든지 할 뿐이다.
 
 푹푹
 꾸엑!
 와아아아!
 “빈틈 보이지 마!”
 “여기 한 놈 붙었어!”
 “안 찌르고 뭐해?”
 
 이윽고 오크 놈들이 파이크 진형에 달라붙었다.
 사과를 던지면 사과가 꽂힐 것 같은 파이크 진형에 돌격한 놈들은 당연하게도 선두가 창에 꿰뚫렸지만 후열은 아랑곳 않고 들이댔다.
 오크들은 동족의 시체를 방패삼아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고, 반대로 우리는 계속 찌르면서 시체들을 밀어내고 틈을 찾으려는 오크들을 계속 찔렀다.
 내가 들고 있는 창도 오크의 시체 하나가 꽂혀서 아주 무거워졌다.
 하지만 살기위해서 팔에 힘을 주곤 창을 뽑아내려고 했다.
 다행히 비교적 쉽게 뽑혔다.
 만약 뽑히지 않았으면 그곳이 곧 진형의 틈이 되어서 오크들이 들이닥쳤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여전히 밀어닥치는 오크들을 막기 위해 파이크를 들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끈질긴 오크 몇 마리가 기어이 파이크 진형을 뚫고 들어와서 맨엣암즈들을 도륙하기도 했다.
 다행히 뒤에서 파이크를 들고 있던 이들이 바로 찔러서 죽이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주변의 맨엣암즈들을 더 데려갔을 테고, 그랬으면 진형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오크를 상대로 우리들이 진형을 무너뜨리면 살아남을 확률이 전혀 없다.
 그러나 기적같이 이번에도 버텼고, 오크들은 남은 무리와 후퇴하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오크들이 사기를 잃고 도망가는 걸 보고는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살았다고 말했다.
 다른 맨엣암즈들도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번 전투에도 살아남은 것이 기쁘긴 하지만 동시에 시체 냄새와 지린내들 때문에 토할 것 같이 역겨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제발 집에 돌아가게 해줘.’
 
 마치 웹소설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벌써 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 중세 비슷한 망할 곳에 떨어져서 개고생하고 있는지 20년이 넘었고, 그중 5년은 맨엣암즈가 되어 군대와 전장에서 굴렀다.
 아직도 20년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학생이었던 난 그저 밤늦게까지 ‘워소드 판타지’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아기의 시점으로 환생해 있었다.
 사고는 여전히 성인인 채로 말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 이건 웹소설이다.’하고 떠올렸다.
 그때까지는 내가 얼마나 X같은 상황에 처 했는지 실감하지 못 했었다.
 오히려 은연중에 ‘무슨 소설에 들어온 거지?’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자라면서 그리고 주변을 파악하면서 그 X같은 상황에 대해 파악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이곳이 내가 읽던 웹소설의 세계가 아니란 점이었다.
 이곳은 바로 게임 ‘워소드 판타지’의 세계였다.
 
 그럼 그 게임의 스토리를 떠올리면서 미래에 대비하면 되지 않느냐고?
 택도 없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그 게임은 ‘주인공’은 고사하고 ‘메인스토리’도 없는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플레이어는 그저 전지적 시점으로 장군이나 왕 같은 인물들을 조종하고, 내정을 하고, 병력을 뽑아 여러 종족의 적들과 싸우는 것이 주요한 플레이인 게임이었다.
 예컨대 나는 그 게임 속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로 알게 된 것은 나는 쥐뿔도 가진 거 없이 이 생지옥에 떨어졌단 사실이었다.
 
 웹소설에서 보통 이런 상황이 처하면 웹소설의 주인공은 항상 좋은 집안 출신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뭘 하기도 전에 객사하기 바쁠 테니까.
 혹은 비주류긴 해도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라면 뭔가 비범한 치트 능력 하나라도 준다.
 그것도 없으면 적어도 앞의 전개라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 셋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단 내 출신은 천했다. 백작가의 서자, 한마디로 사생아다.
 
 백작가의 서자면 일단 귀족 아니냐고? 그런 건 꿈 같은 이야기다. 서자는 말 그대로 사생아, 귀족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할 말이 없다.
 예외적으로 아버지가 서자에게 애정이 있다면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나는 그 백작가에서 하인처럼 아동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밥을 빌어먹으며 자랐다.
 나의 ‘형제’들에게 비웃음과 멸시, 폭력을 당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치트 능력? 그딴 거 없다.
 앞의 전개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종족의 배경스토리 외에는 딱히 정해진 메인스토리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들이 나를 먹여는 준 이유는 이 전쟁뿐인 중세랜드의 ‘제국’의 법률 하나 때문이엇다.
 모든 귀족들은 그들의 자식들 중 한 명을 의무적으로 맨엣암즈에 복무시켜야 한단 거다.
 즉, 나는 형제들의 군입대를 위해 길러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선에서 구르고 있지.
 
 와 대체 어쩌란 말이지? 그냥 죽으란 소린가?
 진짜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런 지옥에 떨어트렸으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죽는 것밖에 더 할 수 있는지?
 혹시 날 떨어트린 게 신이나 뭐 그 비슷한 거라면 욕을 한 바가지 해줬을 것이다.
 뭐 이런 개똥같은 일이 다 있냐며 말이다.
 
 “어이 한스, 오늘도 용케 살았네.”
 “······응.”
 
 이곳에서 내 이름은 한스다.
 원래 내 이름 따위는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워낙 사는 것이 팍팍하다 보니 쓰지도 않는 이름은 잊어버리게 되었다.
 날 한스라고 부르는 시커먼 놈은 제일 친해진 전우라 할 수 있는 존이었다.
 존나 흔한 이름이라고 존일지도 모른다.
 나와 그는 지금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파이크를 짊어지곤 주둔지로 복귀하는 중이다.
 
 “로버트랑 제임스가 당했어. 운이 나빴지.”
 “젠장.”
 
 안면이 있는 녀석이 둘이나 죽었다.
 안면을 알고 있다고 해봐야 같이 술 한 잔 한번 한 정도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 번 습격이 있을 때마다 한 둘 죽어가는 것이,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 하고 두려워진다.
 백작가에서 힘들게 살긴 했지만 그땐 그래도 전투에 끌려 나가진 않았다.
 하지만 장성하자마자 얄짤없이 맨엣암즈에 입대해야만 했다.
 만약 거부했다면 나는 가문의 사병에게 죽었을 것이다.
 한때는 입대하는 척하고 모병관에게 사정을 말해 퇴역하는 것도 생각해보았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입대를 하지 않으면 결국 가문에서 나를 조질 거다.
 암살자를 보내서 보복하겠지, 이용가치가 없는 사생아는 그냥 지우고 싶은 존재일 뿐이니까.
 
 “기분도 울적한데, 오늘 한 잔 어때?”
 “돈 없어. 그리고 지쳐서 그냥 쉴래.”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존은 그리 재촉하지 않았다.
 맨엣암즈들은 ‘귀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이긴 하지만 그런 명칭과는 다르게 별로 고귀한 이들이 모이진 않는다. 나와 사정이 비슷하거나, 가문의 권력 싸움에서 밀린 이들이 맨엣암즈에 떠밀려 입대한다. 물론 병사는 평민도 ‘엄선해서’ 받는다. 그래도 ‘귀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이유는, 맨엣암즈 자체가 작위가 가장 낮은 귀족의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영지도 없고, 그저 반쪽짜리 명예일 뿐이지만 말이다.
 
 병영에 도착한 뒤 무기를 반납하고 나는 터덜터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마침 나 혼자 있었다. 전투를 끝마친 맨엣암즈들은 지친 몸과 정신을 달랜다고 술을 마시러 가기 때문에 막사가 빈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봉급도 쥐꼬리만하고, 가문의 지원도 없는 나는 술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출출한 배나 채울까, 하고 보존식량인 딱딱한 건빵을 꺼냈다.
 현대의 건빵처럼 먹을만한 물건은 아니다.
 그냥 씹으면 이빨이 부러질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침으로 녹여 먹든지, 아니면 물에 불려서 스프처럼 먹어야 한다.
 
 막사 한편의 화로에 물을 올리고 건빵과 육포, 말린 채소를 좀 넣었다.
 잘 저어서 잡탕을 만들어낸 후, 나무 수저로 그것을 퍼먹었다.
 이런 군대식 잡탕의 맛? 딱 먹고 죽지만 않을 맛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지구에서 맛본 김치찌개가 그리워질 뿐이다.
 
 “어흐흐흐흐흐흑.”
 
 서러움에 눈물이 다 났다.
 이런 시펄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물이 잡탕에 섞여 짭짤한 맛을 냈다.
 젠장 소금이 없었는데 잘됐네.
 혼자서 서럽게 우니 그만한 궁상도 없었다.
 이게 소설이라면 주인공인 나를 위로해줄 예쁜 히로인이라도 있겠지만, 그딴 건 존재하지 않았다.
 
 “후우······.”
 
 그 맛없는 잡탕을 다 먹고 포만감이 차니 눈물도 멎었다.
 오직 생존만 생각하면서 살아오다 보니,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되면 슬픔 같은 것은 생리적으로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면이라면 긍정적인 면이겠네.
 진짜 살려고 뭔짓인들 다 해봤다.
 혹시 나한테 숨겨진 힘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몰라서 틈나는대로 단련도 해봤다.
 하지만 몸이 건강하다는 것 정도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 흔한 ‘스테이터스 창’도 없었다.
 하기야, ‘워소드 판타지’는 MMORPG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 게임에 병종간의 능력치는 있었는데, 그런 거라도 있지 않을까해서 허공에 스테이터스를 외쳐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완벽한 무근본, 그래 제목으로 무근본 양판소라고 하면 딱 적당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작자가 있다면 사이다를 어떻게 준비해야할지 크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시작부터 이런 핵고구마를 적어놨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댓글(73)

사리v    
헐 다시 적는건가요?
2020.01.04 20:36
아론트라    
흐뮤흐뮤.....잘 읽고 있었다규 젠장..
2020.01.04 20:38
배나온곰돌    
방금까지 잘 읽고 있었는대 ㅡㅡ
2020.01.04 20:39
양꾸르    
역시 같은내용을 다시 읽는건 힘드네요
2020.01.04 20:49
땅콩빌런    
농노 설정은 갈아버렸네. 그거 언젠가 터질거같더니 그냥 핀 뽑아버렸네.
2020.01.04 22:11
파트랑    
다시 읽는건 힘드네요..
2020.01.04 23:13
철혈의황제    
라..
2020.01.05 03:02
dbtasy123    
기존에 부실했던 설정들을 채우셨네요 개연성이 높아지겠어요 물론 만난지 얼마안되서 사랑해라고 하는게 고쳐질지 모르겠지만 ㅠ
2020.01.05 03:14
Maverick    
오 주인공 신분이 살짝 보정됐네요...
2020.01.05 05:13
흑기사Soul    
비밀글입니다.
2020.01.05 09:56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