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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타임 1937 [E](종료230807)

타임 1937 1권 (1)

2019.12.23 조회 7,243 추천 44


 # 서(序), 회귀의 장
 
 눈꺼풀이 떨렸다.
 희미하게 보이는 전경.
 나는 눈을 비볐다.
 그때.
 “정신이 들었습니까?”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앵앵거렸다.
 천장에 비친 형광등의 주변을 둘러보니 선실이 맞았다.
 
 그날, 나는 1937년에 떨어졌다.
 
 == == == == ==
 
 2025년 1월 25일. 서해 해상.
 예멘 내전에 파견된 대한민국 해군 소속 독도함과 군수지원함 을지함이 서해를 지날 무렵. 다급한 무전음을 들었다.
 
 -치치치치치······. 해당 해역에 있는 모든 배는 신속히 대피하라!
 -서해상에 있는 중국 원자력발전소에 심각한 이상 현상이 생겼다.
 -주변국에서 알려온 바에 의하면 사고 지점 500km 이내까지 해일을 동반할 수······.
 
 그 말을 끝으로 거대한 폭굉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머리가 아프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함교의 인원도 한 명씩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참고로 내 이름은 서원식, 예멘에 파견된 한국군 군납 업체의 대표다.
 본래는 이웃한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서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으나, 몰래 수거한 타국의 전투 장비 때문에 독도함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내전 중에 노획한 무기류 중에는 RPG-7, 노린코 56식 소총, PKM 기관총, 드라노구프 구형 저격용 총 외에도 중국제 대전차 미사일 훙젠(홍전 : 紅箭) 발사대 24기와 탄두 250발, 이란제 공격형 드론 4기가 실려 있었다.
 국방부에서는 비밀리에 밀수를 요청했고, 현지 부패한 군인에게 뒷돈을 주고 사 왔다.
 만약 두 배에 달하는 웃돈과 함께 5년간 국방부 해외 분야 지원 기업으로 선정하겠다는 제안이 없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국방부에서 현지에 증거를 남기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 회사 금고를 털어서 미화 이백만 불을 지급해서 얻은 군수품이 운반 도중에 사라지면, 나는 좆된다.
 인천항에 도착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기에, 독도함에 탑승하고는 눈을 부릅뜨던 중이었다.
 “서 사장님, 깨어났습니까?”
 “함장님, 아까 충격은······.”
 “산둥반도 인근에서 중국의 부유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습니다.”
 이용진 함장의 설명.
 나도 아까 함교에 있어서 무전 내용의 일부를 들었다.
 “배가 떠 있는 모양을 보니 위기는 피한 모양인데······.”
 덜컥 겁이 났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으면 방사능이 주변 바다를 뒤덮을 것이 아닌가.
 이용진 함장은 말했다.
 ”핵폭발이 일어났으면 주변에 낙진이 보일 텐데 하늘에서 아무 이상과 조짐도 없습니다. 방사능 탐지기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함장 이용진의 말대로 함교 창문 밖을 둘러보니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
 “강 부장, 함 내 인원과 장비에 대해 보고를 준비하게.”
 부장, 해군에서는 보통 부함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부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두 사람의 대화 도중에 끼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서 물러났다.
 “내 화물에는 이상이 없겠지.”
 함교 문을 열고, 선실 아래로 내려갔다.
 독도함 강습상륙함의 격납고에는 국방부에 배달할 물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총을 든 해병이 나를 보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는 나무 상자와 알루미늄 상자로 밀봉한 무기류와 여러 제품이 이리저리 굴러떨어진 상태였다.
 “다행히 많이 부서진 것은 없는 것 같군. 대체 어느 정도 태풍인지? 폭발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대형 함선에 적재한 물품이 굴러떨어졌으면 엄청났다는 이야기잖아.”
 문득 핵폭발의 여파를 고민했다.
 중국 산둥반도와 인천은 직선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띠디디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위성 전화기를 구매했지만, 키패드를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신호가 뜨지 않았다.
 “핵폭발이 일어나면 전자 기기가 안 된다는데······.”
 이때였다.
 선내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성이.
 “함 내 승조원에게 알린다. 주변 해역의 상공에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떴다. 전원 일급 전투준비에 임한다.”
 귀를 기울여 보니, 함장 이용진 대령의 음성이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중국놈이 도발이나 침략을 한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 서해 해역에서 도발할 나라는 중국 외에는 없었다.
 수진평의 단일 지도체제로 변한 독재국가 중국은 주변국은 물론이고 한국에 경제와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대표적인 나라였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빈다.”
 
 ※※※※※
 
 독도함의 함교.
 콘솔을 바라보는 상황병이 외쳤다.
 “함장님, 10시 방향에서 의문의 비행체 출현! 항공기의 종류는······.”
 피아 식별장치가 달린 레이더 장치에서 식별하지 못하는 듯, 상황병은 머뭇거렸다.
 “제트기가 아닙니다. 속도가 대략 300km/h에 불과합니다.”
 “민간 여객기보다 못한 속도인데?”
 “100Km 밖에 있는 해상에서 출격한 기체가 분명합니다.”
 “그곳에는 있는 것은 바다뿐이다. 그렇다는 말은 강습함이나 항공모함에서 출발했다는 말인데, 부장! 즉시 대공 무기조 준비시키고 상황을 일급으로 올리게.”
 잠시 후.
 사이렌이 울렸다.
 독도함에 장착한 RIM-116 램 대함 유도탄 방어 체계 1문과 골키퍼 2문이 움직였다.
 함교에 설치된 SMART-L과 MW-08 레이더 2종이 사격통제장치와 연결되면서 함교가 바빠졌다.
 “전원 전투준비!”
 “목표는 좌현 6시 방향의 정체불명의 비행체 2기!”
 이윽고 시간이 흘렀고, 의문의 비행체가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이용진은 쌍안경을 들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위대? 아니, 욱일기 도장이 찍혔잖아. 어디 코스프레라도 하러 왔나?”
 비행체는 프로펠러로 구동되는 프롭기 형태였고, 해군의 주변국 데이터에 존재하는 피아식별 비행기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 기체였다.
 함교에 있는 승조원들은 창밖을 내다보는데, 상공을 선회하는 비행기를 보고 있을 때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아이치 99식 함상 폭격기잖아!”
 음성의 주인공은 서원식 사장이었다.
 
 ※※※※※
 
 ‘이게 왜 출현해!’
 나는 깜짝 놀랐다.
 상공에서 선회하는 비행기는 분명 아이치 99식 함상 폭격기로, 1936년 나카지마 사에서 함상 폭격기로 시험 제작했고, 아이치사가 수주 및 생산했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일본 제국 해군의 함상 급강하 폭격기였다.
 “당장 저놈을 격추하세요!”
 ”서 사장님······?”
 “내가 틀렸다면 모르겠지만, 저놈은 일본 해군의 함상 폭격기입니다. 동체에 250kg의 폭탄이 달린 녀석이라고요.”
 모두가 어이없다는 투로 나를 바라본다.
 그중에서 부함장 강용식 중령은 타박까지 했다.
 “민간 코스프레 비행기를 격추하면 국제 사회에서 무슨 비난을 받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 예측이 맞았다.
 함교의 상황병이 놀라 외쳤다.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집니다.”
 나는 외쳤다.
 “당장 골키퍼 쏘세요! 아님.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제야 놀란 이용진 함장이 외쳤다.
 “당장 골키퍼 가동! 떨어지는 폭탄을 요격하고 상공에 있는 전투기를 격추해!”
 말이 떨어지자.
 골키퍼에 장비된 30mm 구경의 GAU-8 어벤저 개틀링포에서 불꽃이 상공으로 뿌려졌다.
 네덜란드에서 개발한 CIWS, 일명 근접 방어 무기는 마하 2의 속도로 공격하는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자동으로 탐지 요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드르르르르르르-륵!
 콰아아앙!
 골키퍼의 30mm 탄이 낙하하는 폭탄을 공중에서 터뜨렸다.
 폭발의 여파로 함교의 창이 흔들렸고, 공중에서 파편이 떨어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함상기에는 무전기가 없습니다. 적에게 교전 내용을 알리기 전에 어서 남은 기체를 공격해야 합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상공에서 폭탄 투하 기회를 노리는 함상기를 골키퍼가 산산조각으로 요격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공중에서 산화해 버린 99식 함상 폭격기, 일본 해군 제식명 99식 함폭(九九式艦爆)은 잔해를 바다에 뿌리면서 바다 밑으로 사라져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서 사장님, 어떻게 저 비행기가 우리를 공격할지 알았습니까?”
 “함장님, 제가 돌았는지 모르겠지만······.”
 밀리터리 팬이었던 입장에서 구 일본군이 사용한 함상기를 모를 리 없었다.
 특히 진주만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 아이치 99식 함상 폭격기,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에서 D3A2 22형으로 분류한 함상기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과거로 온 것 같습니다.”
 “예?”
 “제가 일본어를 좀 하는데, 위성 전화기에서 갑자기 일본 방송이 잡혔고 ‘쇼와 시대’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쇼와요?”
 “일본의 연호를 말하는데, 1926년부터 1989년까지에 해당하는 세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잡히는 통신망 전체가 쇼와 11년으로 나옵니다.”
 부함장 강용식 중령이 끼어든다.
 “서 사장님,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나는 욱했다.
 “그러면 저기 격추된 함상기와 우리를 공격한 폭탄은 무엇입니까? 부함장님이 설명해 주시죠.”
 입을 다무는 강용식 부함장.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99식 함상기는 항공모함, 아니 일본말로 공모(空母)라고 부릅니다. 지상기가 아닙니다.”
 “100km 밖 해상에서 출격한 것 같습니다.”
 “그놈을 당장 침몰시켜야 합니다.”
 “예?”
 “우리는 타임 슬립인지 핵폭발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과거로 왔습니다. 당장 남쪽이든 한반도······. 아니,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으면 일본 해군기에 의해서 벌집이 됩니다.”
 “서 사장님, 잠깐 진정하시고······.”
 “함장님, 99식 함상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대략 1,000km 정도입니다. 폭장량을 감안하면 800km 이내 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공모에서 비행기가 뜨면 우리가 전속력으로 도주해도 따라잡힙니다.”
 “아!”
 이용진 함장은 신음을 뱉었다.
 함교에 있는 승조원의 눈들은 함장을 향했고, 결정을 재촉하는 눈빛이 강했다.
 “독도함에는······.”
 “함 내에 몰래 장착한 하푼 대함미사일 6발이 있지 않습니까.”
 독도함의 빈약한 무장 때문에 해군사령부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대함미사일 발사가 가능한 플랫폼을 설치했다.
 “어떻게······?”
 “제가 나름 유명한 밀리터리 마니아입니다. 기술관한테 듣기로는 구형이지만 사정거리 200km 이내에서는 요격 성공률이 95%에 달한다고 들었습니다.”
 “본 함의 일급비밀입니다.”
 “일본 해군의 공모에서 함상기가 출발하면 늦습니다. 레이더를 써서 해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힙니다.”
 내 말에 함장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로 왔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 판국에 공모, 항공모함을 공격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는 혼란에 빠진 모양이다.
 그때였다.
 레이더 모니터를 보던 부사관이 외쳤다.
 “공모로 추정되는 함선의 방향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속도는 30kn으로 추정! 속도가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나는 버럭 외쳤다.
 “서해에 있는 공모의 속도가 30노트 이상이라면, 정규 공모 히류(飛龍)급일 수 있습니다. 만재 배수량 19,500t에 총 70여 대의 함상기를 싣고 다닙니다.”
 이용진 함장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픈 발사 준비!”
 함교의 인원마다 얼굴이 굳었다.
 무기 담당 사관이 복명했다.
 “하푼 좌표 설정!”
 3차원 레이더가 돌면서, 다가오는 일본 해군 항모를 향해서 목표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함교 아래에 보이는 원통이 회전했다.
 “적 공모 설정 완료!”
 “발사!”
 “하푼 미사일 발사!”
 섬광과 함께 미사일이 수직으로 발사되었다.
 콰콰아아아아아!
 부스터의 화염이 뿜어지면서 순식간에 바다 저편으로 날아갔고, 잠시 후에 무기 사관이 외쳤다.
 “목표물 타격!”
 모두가 보는 가운데 대형 LED 화면에서 공모의 신호가 사라졌다.
 일본 제국 해군의 히류급 공모가 맞는다면, 최소 1,100명의 승조원이 물속으로 수장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용진 함장은 군모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나를 쏘아본다.
 “서 사장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회의의 장
 
 
 독도함과 을지함은 남하했다.
 레이더라는 기물을 이용해서 주변 군함을 피해서 망망대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독도함의 식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1937년의 과거로 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화두는 간단했다.
 일부 국뽕주의자는 일본을 공격하자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리터리 마니아이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30년 무렵의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다음가는 5대 해군 강국입니다.”
 이지스함도 아닌 강습상륙함과 지원함 한 척으로 일본 해군과 싸우겠다는 소리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헬리콥터 7대, 전차 6대, 상륙 돌격 장갑차 7대, 트럭 10대, 야포 3문, LSF-2 고속상륙정 2척, 승조원 300명, 상륙 해병 700명」
 
 독도함의 최대 무장능력이었지만, 실제는 대잠헬기 KA-32 1대, 기동헬기 UH-60 2대, AH-64E 1대로 총 4대의 항공 전력만 보유했다.
 전차와 상륙 돌격 장갑차는 한 대도 없고, K-9 자주포 3대, 솔개 631급 고속상륙정 2대가 전부였다.
 “이대로 우리 조국이 일제 치하에 빠진 것을 내버려 두자는 이야기입니까?”
 “저는 그런 말 한 적이 없습니다.”
 “일본군과 싸우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현재 우리가 가진 전력은 저기 계시는 함장님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철부지처럼 일본 제국 해군 혹은 육군과 싸우다가 우리가 가진 무기가 노획되면 2차 세계 대전에 변화가 생깁니다.”
 “······?”
 “일본군이 미래의 첨단 장비를 얻어서 연구한다면 세계 대전은 끝나지 않고, 어쩌면 가상 역사 드라마 ‘낮은 성의 사나이’처럼 미국을 독일과 일본이 공동 지배할지도 모릅니다.”
 
 [낮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Low Castle)]
 
 미국 마마존이 서비스하는 독점 콘텐츠로 SF의 거장인 필립 킹드레드 딕이 집필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서 미국 등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해 1947년에 항복하고, 아메리카 대륙은 세 조각으로 분단된다는 가상 역사를 그렸다.
 “······.”
 “저는 군인이 아닙니다. 전단의 책임자인 함장님이 결정과 답변해야 할 사항입니다.”
 바통이 넘어갔다.
 이용진 함장은 마이크를 잡았다.
 “제군, 우리는 미확인 현상으로 타임 슬립했다. 현재 시점은 1937년 1월의 서해 해상이다. 현재 미래로 돌아갈 방도를 다각적으로 찾아보겠으나, 현실에 대비해야 한다.”
 맞는 소리다.
 나도 고민이 되었다.
 이대로 미래 시점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회사는 망하고, 부모님은 거리로 내몰린다.
 “현재 본 함과 을지함에는 50일 동안 작전 가능한 물자가 적재되었고, 미래에 관해서 고민할 시간은 충분하다. 곧 담당 장교 및 사관과 의논해서 조처할 테니 그때까지 전원 비상경계 근무로 임한다.”
 
 ※※※※※
 
 독도함의 함장실.
 함에서 가장 널찍한 독실에 두 사람이 마주했다.
 함장 이용진과 부함장 강용식.
 “삼일 안에 결정이 나야 합니다. 함 내의 연료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장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우리가 선택할 목적지는 지휘관인 함장님이 선택하셔야 합니다.”
 “지금 전력으로 일본과 싸우면 자멸이네.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 망명한다고 해도 우리를 인정해 줄 나라가 있을까?”
 “형님, 사석에서 함장님 대신에 사관학교 때의 형으로 부르겠습니다. 미국에 유학 가셔서 알겠지만, 미래와 달리 현재는 인종차별이 심한 데다가 우리를 가두고 지식의 뿌리를 뽑을지도 모릅니다.”
 “영국은 어떨까?”
 “1930년대에 존재하는 미국은 양반입니다. 영국은 고리타분하다 못해서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라 아닙니까. 영화 ‘이미테이션 XX’에 나오는 실존 주인공을 보면 압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암호 기기를 해독했는데도,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라고 모욕을 받고······. 그들은 다문화를 인정 못 하는 꼰대 국가입니다.”
 “나도 영국은 별로 마음에 안 드네.”
 “미국에 가도 우리 같은 동양인이 편히 살 수 있을까요.”
 “휴! 이럴 때는 담배라도 피워야 숨을 쉬겠군.”
 군용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는 이용진 함장이다.
 강용식 부장도 마찬가지로 담배를 꺼냈다.
 니코틴이 함유된 하얀 연기가 함장실에 차고 나서야 입을 여는 두 사람이다.
 “형님, 차라리 서원식 사장을 끌어들이면 어떻겠습니까.”
 “서 사장을 말인가?”
 “우리는 군인입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족속이 아닙니다. 사업가인 서 사장의 수완을 보셨지 않습니까.”
 “예멘에서 각종 물자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우리 군에 공급했지. 사우디에서 들여오는 군수 물자도 차질없이 반입했고, 국방부에서 비밀리에 의뢰한 무기 밀수에 성공해서 배에 가득 채웠지.”
 서원식의 능력은 예멘과 사우디에 주둔한 한국군 장교 중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미군과 영국군, 다국적군에게서도 협력 기업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낮에 출현한 일본군 함상기를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군인 말고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동생 말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자에게 외교를 맡기자는 이야기로군.”
 “아예 전권과 협상권까지 부탁하는 편이 어떨까요.”
 “음······.”
 “미국이든 영국이든······ 누군가는 나서서 접촉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형님이랑 나는 사업이나 외교는 젬병이지 않습니까.”
 “군인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면 돼! 우리는 정치군인이 아니야.”
 이용진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강용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전까지 우리와 함대 인원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형수님과 아이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놔두고 온 가족들.
 두 사람 말고도 친한 승조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에 원칙을 정해야 한다.”
 “예?”
 “너와 내가 무리를 이끌지, 아니면 서원식 사장에게 맡겨서 운명을 걸지 말이다.”
 이용진 함장이 던진 질문에 강용식 부장은 고민에 빠졌다.
 담배가 필터 앞까지 하얀 재로 변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형님, 차라리 서 사장에게 전권을 줍시다.”
 “그래도 될까?”
 “우리는 군인입니다. 박통과 전통처럼 정치군인이 아닙니다. 정치는 민간인이 해야 합니다.”
 
 ※※※※※
 
 함장이 나를 불렀다.
 당직사관의 인도를 받아서 함장실로 들어갔다.
 “케헥! 너구리 잡을 일이라도 있습니까.”
 매캐한 담배 연기가 환기가 안 되는 방안에 가득 찼고, 손바닥을 펴서 부채질했다.
 그런데.
 함 내에서 일, 이 위의 지휘관인 두 사람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무, 무슨 일이라도······?”
 “서 사장님, 부탁이 있어서 모셨습니다.”
 “예?”
 “낮에 무슨 일이 생긴 지 보셨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왔습니다.”
 “저도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방도는 없습니까?”
 “불행히도 함 내에는 과학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무슨 현상으로 과거로 타임 슬립했는지 우리는 영문도 모릅니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추측일뿐입니다.”
 “저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순 머리가 백지처럼 멍했다.
 밀리터리 마니아의 입장에서 재미나게 읽었던 윤XX 작가의 ‘한XX건국사‘처럼 군인 수백 명이 통째로 타임 슬립이라니?
 나는 기가 차서 웃었다.
 “젠장! 젠장! 그동안 죽도록 고생하고, 이제 살 만해서 30평대 아파트와 회사가 성장하는 맛에 살아가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두 사람도 한숨만 내쉴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참 뒤에 강용식 부장이 커피포트를 누르고 끓는 물을 잔에 부었다.
 냄새가 딱 커피 믹스다.
 한 모금 마시라고 주니 먹고 나서 안정이 되었다.
 역시 불안할 때는 카페인이 짱이다.
 “이제야 제정신이 드네요. 함장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우리가 정착할 곳을 정해야 합니다.”
 “제 자랑은 아니지만, 1930년대는 제 전공이나 다름없는데······. 우리가 정착할 곳은 없습니다.”
 “예?”
 반문하는 두 사람.
 우리가 살던 현대와 달리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어우러진 세상에서 정체불명의 동양인을 반길 나라는 없었다.
 “자고로 나라를 잃어버린 국민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조선은 일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습니다. 망명을 신청한다고 해도 독도함 등의 기술을 얻고 난 뒤에 평생 감옥에서 세월을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두 분께서는 영화와 미국 드라마를 보지 못했습니까.”
 나는 사양이다.
 돈을 벌고 과학자를 고용해서라도 돌아갈 것이다.
 “영국? 그들은 신사의 탈을 쓴 살인마입니다. 처칠은 몇 년 뒤에 발생하는 벵골 대기근을 의도적으로 내버려 둬서 300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작자입니다. 세상이 아는 위대한 정치인이 아닙니다.”
 “음······!”
 “우리에게 친근한 미국과 미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이 저렇게 된 이면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때문입니다. 노일전쟁에서 일본은 미국의 양보를 받게 되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내가 아는 역사.
 밀리터리 마니아라면 알 만한 국뽕물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중에서 후손에게 처참한 기억을 남겨 준 고종은 바보 중의 바보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은 많은 이권을 미국에 내어줍니다. 그중 하나가 운산 금광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미조약 때문이었습니다.”
 “조미조약이라면······?”
 나는 UMPC를 꺼내서 전원을 넣었다.
 GPD 포켓이라는 명칭을 지닌 7인치 미니 포켓 노트북은 상시 상의에 꽂혀 있었다.
 
 「조미조약 제1조의 주선 조항: 타국이 일방의 정부를 부당 또는 억압적으로 다룰 때, 타방의 정부는 사태의 통지를 받았을 때 원만한 타결을 주선해 그 우의를 표시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은 1조를 의무 조항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부당한 침해와 만행에 대해서 미국이 압력을 행사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정말이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1905년에 공사관을 제일 먼저 철수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미래와 달리 과거의 미국은 5대 열강의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의 편은 아니었다.
 “고종과 조선의 정치인은 바보입니다. 왜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미쳤습니까. 경제적이나 지정학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나라보다는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이 미국에 소중하니까요.”
 “서 사장님의 의견은 영국과 미국을 도외시하자는 말씀입니까?”
 이용진 함장의 질문.
 나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전에까지 미국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미국을 비난한 게 아니라 바보보다 못한 조선 정치인과 고종을 욕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미국과 어떤 관계를 맺자는 뜻입니까?”
 “미래에서 온 우리는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무과에 계시는 군의병과 약품으로 미국의 정치인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 각종 특허와 의약품, 페니실린이 있겠군요. 지금쯤 플레밍의 손에서 떠나 옥스퍼드팀이 양산화에 실패하는 시기이니 끼어들면 됩니다.”
 “페니실린이면 항생제가 아닙니까.”
 “기적의 항생제죠. 수십 년 동안 병균을 잡는 약으로 쓰였을 정도니까요. 이밖에도 돈을 벌어서 남경 임시정부를 우리가 장악해야 합니다. 현재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나는 속에 든 말을 내뱉었다.
 그래야만 과거로 왔다는 적막감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위조의 장
 
 
 다음날 독도함 장교 회의실.
 소수의 사람이 모였다.
 독도함의 함장 이용진을 위시해서 각자 자기소개를 했는데. 대부분 친분이 있었다.
 “항공대 소령 이필진입니다.”
 “해병대 소령 김남성입니다.”
 “해군작전사령부 직할 특수전전단, 제3 특전대대 소속 차해진 대위입니다.”
 “해군 공보실의 백지연 중위입니다.”
 네 명의 간단한 소개.
 나도 정중히 묵례했다.
 “국방부 해외 파트너인 대성기업의 서원식 대표입니다.”
 모두 인사를 마쳤다.
 이제 이용진 함장의 본론이 시작되었다.
 “귀관과 서 사장님은 어제 발생한 일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승조원의 안위를 위해서 몇 가지 문제에 관해서 기탄없는 의견을 토로하기 위해서 모였다.”
 서론이 끝났다.
 각자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함 내에 과학자가 없는 관계로 과거로 온 이유는 허무하리만큼 답변할 사람이 없었고, 가장 급선무는 근거지로 삼을 장소와 연료, 곧이어 벌어질 세계 대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논의가 벌어졌다.
 “제가 아는 정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도래한 시점은 일제의 쇼와 시대입니다. 시간은 대략 1937년 1월입니다.”
 포켓 노트북을 꺼냈다.
 내가 아는 자료 폴더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프로젝트 빔에 연결했다.
 
 「중일전쟁 1937년 7월」
 
 “올해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일전쟁이 이어집니다. 일본군은 베이징(북경) 서남쪽에 있는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자작극을 벌입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은 전쟁으로 돌입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중국 대륙을 정복할 야욕을 펼친다.
 내가 꺼낸 노트북과 연결된 빔에서 비친 내용이 끝나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2차 대전의 격동기가 시작될 무렵인 중국 침략이 발생하는 혼돈의 시기에 타임 슬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필진 소령이 말했다.
 “상황이 아주 더럽습니다. 하필이면 준비도 하기 전에 일본이 확장하는 모습을 봐야 하니 말입니다.”
 김남성 소령도 맞장구를 쳤다.
 “중일전쟁에 이어서 1940년이 되면 일본은 동남아까지 차지합니다. 태평양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합니다. 우리는 그전까지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 선택지에 관한 사항은 누구도 모르니 말이다.
 이때.
 이용진 함장은 말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안다. 곧 수천만 명이 죽고, 전 세계 대부분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자리에 모인 수뇌부에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의견을 묻는 자리다.”
 차해진 대위가 손을 들었다.
 “함대의 연료는 50일 뒤에 소진됩니다. 제일 먼저 연료와 식량부터 보급받아야 합니다.”
 고뇌가 얼굴에 서린 이용진 함장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나도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전에 우리의 노선과 나아가야 할 방향이 먼저다.”
 차해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함장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
 잠시 입을 다문 이용진 함장.
 테이블에 놓인 커피가 식을 때쯤 그의 입이 열렸다.
 “우리 조국인 대한민국의 과거, 1937년의 조선을 이대로 두고 우리끼리 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젯밤에 서 사장님과 의논했다. 조선의 독립에 우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떨까 말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차해진의 의문에 반대편에 앉은 김남성은 찬성표를 던졌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오로지 조국을 위해서만 싸웁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도 말입니다.”
 차해진도 질세라 말했다.
 “해군 특수전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공대 이필진 소령은 기가 찬 듯 입을 열었다.
 “독도함에서 부함장님을 제외하고 영관급 고참 기수는 나라고. 나도 함장님의 말에 동감입니다. 이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는 해군용 아파치는 구식 프롭기 몇 대쯤은 쌈 싸 먹을 놈입니다.”
 하나같이 전의를 북돋웠다.
 물론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백지연 중위도.
 이용진 함장은 두 팔을 뻗어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제 우리는 도래한 군인의 리더, 임시 수장을 뽑아서 선택해야 한다. 나는 서원식 대표를 추천한다.”
 모두가 입을 벌렸다.
 군인이 가득한 집단에 하나밖에 없는 민간인을 추천하다니.
 그들의 표정을 모를 리 없다.
 나도 사실 지도자가 되는 일이 탐탁지는 않았다.
 이용진 함장의 강권과 부탁이 아니라면 거절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해서 신분 세탁만 하면 어디를 가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저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여러분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살고, 조선이 독립해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1937년 2월 3일. 도래 9일째.
 독도함 전단은 필리핀 방면으로 향했다.
 조선과 중국이 맞닿은 서해 일대는 일본 제국 해군이 오가는 위치에 있어서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돈을 벌어야 했다.
 자본 투자 없이 수익성 높은 사업은 당연히 해적이었고, 함장 이하 장교들은 불명예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선이 지나갑니다.”
 “목표물의 국적은?”
 “일장기를 내걸고 있는 2천 톤 미만의 상선입니다.”
 “을지함에 일러서 포격과 동시에 나포하라고 해!”
 “예!”
 “방해전파를 송출해서 위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실시한다.”
 상선에서 외부로 정보가 새면 안 되었다.
 함장 이용진은 쌍안경을 들고는 함교 밖, 유리창을 통해서 나포되는 일본 상선을 목격했다.
 퍼어엉!
 퍼어엉!
 포격에 놀란 일본 상선은 전속력으로 도주하려고 했으나 을지함에 있는 20mm 씨-발칸 2문의 집중 사격에 선실을 두들겨 맞고는 멈추었다.
 고속 단정을 타고 배에 난입한 해병 소대는 K2 소총을 들이밀고는 선원을 한 명씩 갑판에 내몰았다.
 김남성 소령은 외쳤다.
 “함교는 물론이고 선실과 선창! 엔진실까지 모두 수색하고 확인해라.”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을 심산으로 해병대는 토끼몰이했고, 죽은 선장과 선원 일부를 제외한 수십 명의 일본인이 끌려 나왔다.
 “대대장님, 아군 피해는 전무입니다.”
 “이런 구닥다리 배를 점령하는데 죽는 자식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저들을 묶고 창고에 가둬! 배는 우리가 차지한다.”
 “예? 이런 구닥다리 상선을 운전하라고요.”
 “해군에 지원을 요청하던지, 저기 있는 일본인 선원을 닦달해서 을지함의 뒤를 따라가면 된다.”
 “젠장, 알겠습니다.”
 명령을 마친 김남성은 사다리를 내리고 보트에 올라탔다.
 남은 일은 부하들의 몫이었다.
 
 ※※※※※
 
 독도함의 함교.
 재수가 좋았다.
 쌍안경의 원에 있는 작은 상선의 나포.
 이로써 두 척의 일본 배를 납치했고, 선창에는 네덜란드산 석유 제품과 함께 특산물이 잔뜩 실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지였고, 동남아에서 대표적인 유전 지대 팔렘방이 있었으며, 일본과 중국 등지로 석유 제품을 수출하고 있었다.
 “함장님, 두 척의 배는 인근 무인도에서 페인트칠로 이름을 바꾸고 무역선으로 운용해야 합니다.”
 “의장님, 배의 이름은 무엇을 할까요?”
 “정체를 숨기려면 영문명이 좋겠습니다. 한국(Korea)의 첫 자를 따서 K1과 K2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필리핀에는 섬이 많아서 우리가 숨을 곳이 여러 군데입니다. 얼마 전에 해적 진지를 박살 냈으니 그곳에서 숨을 고르면서 본거지로 삼아야 합니다.”
 나는 몇 가지 안을 냈고, 수뇌부가 검토 후에 대부분 승인했다.
 덜컹!
 갑자기 문이 열리고 함교에 김남성 소령이 도착했다.
 “충! 명령을 완수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피해는 없습니까.”
 “함장님과 의장님 덕분에 인명 피해와 경상자 없이 배를 나포했습니다. 석유 제품 800t이 실려서 당분간 연료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척 분량은 홍콩으로 가져가서 돈을 만들어야 합니다. 보급품 일부라도 조달하려면 말입니다.”
 1930년대부터 석유 소비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현금처럼 거래될 만큼 환금성이 높았다.
 특히 석유 수요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홍콩의 경우는 영국의 조차지인 덕분에 달러와 파운드가 통용되고 있었다.
 “홍콩으로 갈 테니 특수전전대 요원과 해병대를 추려 주십시오.”
 “몇 명이나 생각합니까.”
 “선원을 제외하고 유사시에 전투 지원 가능한 소대급 인원이 필요합니다.”
 이용진 함장이 대신 대답했다.
 “차해진 대위를 데려가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에 능통한 사람도 몇 명 필요하고 행정관도 주십시오. 시장에서 속지 않으려면 능구렁이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홍콩은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입니다.”
 함 내에 소모되는 물품의 수급이 필요했다.
 특히 담배는 보충이 지지부진하면서 함 내에서 천정부지로 가격이 뛰고 있었다.
 사병 일부는 쓸모도 없는 한국 돈을 받거나 과자 등을 맞바꾸면서 화폐 대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위조지폐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함 내에 있는 고해상도 컬러 레이저프린터가 있기는 있지만, 진짜 지폐에 쓰이는 종이와 잉크가 달라서 불가능합니다.”
 “아! 강용식 부함장님, 당신은 천재입니다.”
 “예?”
 “지폐는 당장 만들지는 못해도 신분증은 위조할 수 있지 않습니까.”
 “포토샵에 능한 병사가 있어서 무리는 없습니다.”
 “당장 그 병사를 불러 주십시오.”
 잠시 후.
 멀티미디어실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신분증 위조에 들어갔다.
 원본은 내가 가지고 있는 포켓 노트북의 1920년대와 1930년대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여권과 신분증 스캔본이었다.
 웹 서핑을 하던 중에 흥미 삼아서 모아 둔 자료가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김상운 상병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디지털 사진을 여기에 복사해서 이름을 ‘제프리 서’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출력만 하면 됩니다.”
 ‘딸각’ 소리와 함께 ‘찌이이잉!’하며 레이저프린터에서 인쇄물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일반 잉크젯 프린터와 달리 레이저프린터에서 나오는 색감은 원판과 유사했다.
 하지만.
 “종이가 너무 깨끗합니다.”
 A4용지에서 뽑힌 종이는 반들반들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있던 장원용 원사가 종이를 낚아채고는 입에 든 커피를 뿜었다.
 푸우우우!
 커피 물이 뿌려졌다.
 이내 조심스럽게 티슈로 누르듯이 닦는 장원용 원사다.
 “하루 내내 햇빛에 두었다가 담배 물을 흩뿌리면 오래된 표시가 생깁니다.”
 군대는 정말 만능 인재가 넘쳐났다.
 나는 껄껄, 웃었다.
 “이번 홍콩행에는 장 원사님이 반드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놈에게 덤터기 쓰지 않고 싶습니다.”
 장원용 원사는 웃었다.
 “인사계와 보급계만 십 년 동안 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속이고자 하면 저승사자 정도는 불러와야 합니다.”
 아무리 언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사람 간의 거래는 눈치와 협상이다.
 장원용 원사처럼 세상 물정에 능한 사람이라면, 내가 구하고자 하는 물품을 충분히 후려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부심에, 내 입에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혹시 위조할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배 안에 레이저 각인기도 한 대 있습니다. 웬만한 수공업 제품을 만들기에는 그만입니다.”
 나는 활짝 웃었다.
 “당신은 정말 난 사람입니다.”
 
 
 # 홍콩의 장
 
 
 상선 K1은 미국선적으로 위조한 선적 증명서를 들고 홍콩에 입항했다.
 영국령 홍콩의 중국인 세관 관리에게 증명서와 함께 신분증을 내미니 무사통과였다.
 하지만.
 첫발을 내디딘 홍콩의 냄새는 지독했다.
 미래에는 휘황찬란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생선 썩히는 냄새와 함께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콜리(일군)로 가득했다.
 나는 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비서로 동행한 백지연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잘도 참는다.
 이런 점이 군인과 일반인의 차이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일본 상선에서 빼앗은 옷을 입은 특수전전대 요원 여러 명이 나를 호위했고, 우리는 차를 빌려서 침사추이(Tsim Sha Tsui, 첨사저)에 있는 페닌슐라 호텔로 방향을 잡았다.
 1928년에 홍콩에서 최초로 문을 연 페닌슐라 호텔은 카두리 일가가 설립한 호텔로, ‘동양의 수에즈에서 제일가는 호텔’이라는 모토로 유명했다.
 모토는 대외적으로 드러난 포장이었고, 실제로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암시장이자 밀수품 경매장을 운영하는 장소로도 유명했다.
 ‘페닌슐라 호텔의 비밀은 80년이 지나서 밝혀졌지. 비밀의 정원을 보지 않았더라면 몰랐겠지.’
 나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텔 로비에는 백인 남녀와 중국 부호로 보이는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관광객은 카운터에서 객실 등록을 하는 등, 북적거렸다.
 아무래도 대륙의 정세가 불안해지니, 부자들이 외국 조계지로 돈을 빼돌리거나 가족을 도피시키는 모양 같았다.
 “작년에 국공내전이 끝났지만, 상해 등지보다는 안전한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하는 것 같군.”
 “우리를 보는 시선이 이상합니다.”
 “백 중위처럼 키가 크고 피부가 흰 동양인은 처음일 테니 그럴 것입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당당히 걸으세요.”
 로비를 지나니 지배인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호텔의 이급 지배인 새뮤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반갑습니다. 나는 제프리 서입니다.”
 “미국분입니까.”
 “귀 호텔에만 있는 황금 사과나무를 보고자 찾아 왔습니다.”
 “예?”
 놀란 새뮤엘의 표정.
 훗날 밝혀지는 페닌슐라 호텔의 비밀.
 국제 암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고가의 물품이 거래되는 지하 경매장으로 유명했고, 독특한 암호문과 표식을 통해서 고객을 확인했다.
 “내가 잘못 말했나? 황금 사과나무입니다.”
 “아, 아닙니다. 혹시 제게 표물을 주시겠습니까.”
 표식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품속에서 표식과 함께 위조한 동판 조각을 내밀었다. 함 내에 있는 레이저 각인기를 통해서 새긴 지도의 반쪽이 있는 표물을 내밀었다.
 “제가 출품할 물건의 절반입니다.”
 “이것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세밀한 동판 형태에 놀란 새뮤엘.
 그는 돋보기가 없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글자와 함께 새겨진 지도를 보고는 흥미를 느꼈다.
 “정말 놀라운 유물입니다.”
 “황금 사과나무에서 거래하는 물건 중에서 가장 비쌀지도 모릅니다. 물품을 검증할 동안에 경호원과 함께 쉴 테니 방을 안내해 주십시오. 참고로 페닌슐라에서 가장 좋은 방을 원합니다.”
 잠시 후.
 우리는 로열층을 배당받았다.
 백지연은 유럽풍의 장식물로 치장한 방안을 보고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이 시대에 이런 펜트하우스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녀와 마찬가지로 네 명의 경호원도 공감했다.
 “층의 오 분의 일이 하나의 객실입니다. 창문과 입구에 경호원을 배치해 둘 테니 조심하기 바랍니다.”
 경호원 역을 맡은 특수요원이 사라졌다.
 각자 맡은 구역에서 경호를 책임지겠다는 소리였고, 준비해 온 MP5 기관단총은 중대급이 달려든다고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의장님, 아까 내민 물건이 뭔가요?”
 “백 비서도 알아야 하겠지. 사해문서(Dead Sea Scroll)의 출처가 적힌 장소의 지도입니다.”
 “사해문서요?”
 “히브리어로 된 성서와 900편의 다양한 종교 문서를 보관한 장소의 위치로 후대에 발굴이 됩니다.”
 “설마······?”
 “나는 이것을 누군가에게 팔 생각으로 베껴 왔습니다.”
 고대의 보물에 관해서 스크랩해 둔 것이 이럴 때 사용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1947년부터 수십 년 동안 부분적으로 발굴되는 사해문서.
 사해 서쪽에 있는 와디쿰란, 고대의 키르벳 쿰란 주변과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는 문건은 엄청난 종교적, 역사적 가치를 지녔다.
 “성서를 판다는 말입니까.”
 “미국과 유럽의 부호 중에서는 자신의 명성을 드높일 고대의 물품을 사고 싶어서 안달인 자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페닌슐라 호텔에 머무르는 사람 중에서 동판의 가치를 확인한 자는 안달해서 전화할 테니 나만 믿으세요.”
 아니나 다를까.
 따르릉! 따르릉!
 고풍스러운 전화기가 울렸다.
 놀란 백지연.
 나는 손가락을 세우고는 입가에 댔다.
 아무 말 하지 말고 기다리는 뜻이다.
 서른 번 이상의 벨 소리가 나고 난 뒤에 전화기를 들었다.
 -미스터 제프리입니까?
 “맞습니다.”
 -저는 경매를 책임진 페닌슐라 호텔의 일급 지배인 안드레이입니다. 혹시 전화할 수 있으십니까.
 “근동에 다녀왔더니 피곤해서 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녁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벌써 미끼를 물었다.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는 ‘대이사야서(1QIsa)’의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사해문서 중에 열두 번째 동굴에서 발굴된 내용에 적인 문서 일부를 확인한 사람은 광분하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 ‘그’라면 말이다.
 이윽고 저녁이 되었다.
 호텔에서 마련해 준 양복과 드레스가 도착했다.
 눈짐작으로 옷의 치수를 맞추었는데도, 백지연 중위의 늘씬한 키에 옷이 달라붙었다.
 “어때요?”
 “오늘 만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겠군요.”
 “제가 잘 보필할게요. 의장님.”
 팔짱을 끼는 백지연.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네 명의 호위와 함께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전에 벨보이가 건네준 금빛 초대장.
 지하 5층을 알리는 글귀와 함께 방문을 환영한다는 문구를 뒤로했다.
 덜컹!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덩치가 여러 명 서 있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는 신호가 울렸으나 걱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특수전전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최고의 부대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간 네 명은 인간병기나 다름없는데, 저깟 기도 따위가 이길 리 없다.
 “여기부터는 당사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없군요.”
 나는 백지연과 함께 걸어 들어갔다.
 그들도 여자는 용인하는 모양이다.
 경매장은 의외로 작았다.
 대략 20명 내외가 앉는 극장식 좌석으로, 단상에는 양복을 입고 있는 경매인만 보일 뿐이다.
 “제프리 서, 저는 경매장을 맡은 일급 지배인 안드레이입니다. 이쪽에 앉으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군요.”
 “실은 경매장의 중요 고객 두 분께서 독점 입찰을 요구하셨습니다.”
 “뭐요!”
 나는 일부러 화를 냈다.
 안드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그는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었다.
 모르는 자의 편의를 봐줄 만큼 우리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사죄의 뜻으로 수수료를 10%에서 5%로 줄이는 배상을 하겠습니다. 부디 저희의 성의를 받아 주십시오.”
 “두 사람이 누구입니까?”
 “원래는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특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의 부호 존 데이비슨 록펠러 씨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경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노린 사람은 프랑스의 대부호 에두아르였지만, 더 큰 거물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존재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빈손으로 시작해서 전설적인 부를 쟁취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부디 저희 호텔의 실수를 눈감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두 명의 거물. 미국 석유 재벌과 유럽 금융 부호의 등장은 한국의 사업가 출신인 나, 서원식을 흥분시켰다.
 이 같은 정보를 모르는 백지연이 입을 열었다.
 “의장님, 두 사람은 누군가요?”
 “록펠러 가문의 창시자! 검은 황금의 제국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로 미국을 현금으로 살 수 있다는 대부호이고, 에두아르 경은 유럽의 금융 재벌로 프랑스에 본거지를 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라면 나머지 잔챙이는 필요 없었다.
 미국에 있어야 할 록펠러 1세가 홍콩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 행운이었다. 아니,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독도함과 을지함 승조원에게도 기회였다.
 처벅! 처벅!
 조용히 걸어 나오는 사람들.
 록펠러는 중년의 사내와 함께 자리에 앉았는데, 사진에서 본 적 있는 그의 다섯째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분명했다.
 다른 자리에 앉은 대머리에 외눈 안경을 쓴 자는 에두아르가 분명했다.
 경매인은 허리를 숙였다.
 “오늘 경매는 특별한 물건을 모시고 딱 두 분만 청했습니다.”
 말과 함께 검은 천이 걷혔다.
 내가 호텔 측에 넘겨준 낡은 동판.
 록펠러 1세가 손짓했다.
 그의 아들이 돋보기를 받아들고 천천히 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악했다.
 “맙소사! 이 내용은······.”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온전한 원본이 없다고 알려진 구약성서의 하나인 대이사야서(1QIsa)의 원본입니다.”
 존 D. 록펠러 주니어, 록펠러 2세는 눈을 부릅떴다.
 “온전한 원판의 남은 부분이 있다고?”
 안드레이는 살짝 웃었다.
 “의뢰인께서 주신 동판은 반쪽이고, 고대의 신비한 이능으로 새겨진 지도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구약성서와 솔로몬 왕의 문서가 숨겨진 동굴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순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던 록펠러 1세와 에두아르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어디서 힘이 솟구쳤는지 단상까지 가서는 동판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지도가 솔로몬 왕의 전설이 묻힌 곳을 알려 주는 지도라고?”
 “호텔 소속의 고고학자가 진품이라고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저기 계신 당사자께 물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전에 경매가 끝나야겠지요.”
 두 사람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나는 품속에서 반쪽의 동판 조각을 내밀었다.
 “이게 남은 반쪽 지도입니다. 솔로몬 왕의 보물이 매장된 곳을 알려 주는 장소가 기록되었습니다.”
 안드레이가 다가왔다.
 “남은 물품을 저희가 보관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동판 반쪽을 내밀었다.
 그가 받고는 검은 천으로 감싸서 단상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이제 경매로 얼마를 받을까.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얼굴이 나를 쏘아본다.
 “제프리 서, 귀하가 내민 물건이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맞습니까.”
 의심스럽다는 말투.
 나도 어느 정도 의심을 받을 것을 예상했다.
 “제 조건은 미국 내 기반을 잡기 위한 자금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도 아닌 뉴욕에서 록펠러 가문과 척을 진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자금은 귀 가문의 씨티은행을 통해서 받겠습니다.”
 존 D. 록펠러 주니어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 말은······!”
 속였다면 안 줘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웃었다.
 “참고로 보물과 성서가 숨겨진 장소를 찾으면 세기의 대단한 발견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금액은 딱 일천만 달러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천문학적인 금액에 록펠러와 에두아르, 두 사람도 놀란 모양이다.
 심지어 백지연 중위도 내 옷을 잡아당기면서 속삭였다.
 “의장님, 천만 달러는 많지 않나요.”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다.
 1930년대 초반에 시카고 마피아의 대부 알 카포네가 벌어들인 돈만 하더라도 매년 6천만 달러다. 정확히 1/6 정도에 해당하는 천만 달러는 받아야 내가 원하는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금액이 무리가 된다면 두 분께서 합작하셔도 됩니다. 열왕기 시대의 유물은 한두 개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일천만 달러에서 한 푼도 깍지 못한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지도에 쓰인 지명은 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럼 두 분의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세상을 뒤흔들 그분의 말씀이 담긴 성서와 솔로몬 왕의 보물입니다.”
 나는 삼류 장사꾼처럼 떠들었다.
 그래야만 몽롱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두 거물이 물건값을 제대로 쳐 줄 테니 말이다.
 
 
 # 돈의 장
 
 
 내 눈에 놓인 가방.
 미화와 파운드화, 홍콩달러, 3종의 지폐 다발로 285만 불이 도착했다.
 페닌슐라 호텔 경매장의 수수료 5%를 제외했고, 나머지 700만 불은 미국 씨티은행에서 찾을 수 있는 수표로 받았다.
 “의장님, 성공했습니다.”
 “이제 이 돈으로 물건을 사들이세요. 배에 필요한 식량과 의복, 통조림과 고기 등 아끼지 말고 사세요.”
 “정말입니까.”
 “백 비서가 구할 품목을 적어 두었으니 마음껏 쇼핑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즐거운 표정으로 나갔다.
 나는 경호원 두 사람과 방에 남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중일전쟁 발발까지 몇 달 남지 않았다. 남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가서 사람을 구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홍콩에서 남경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1,175km다.
 포켓 노트북에 나온 거리와 달리 현재는 교통편이 형편없고, 도로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국민당 소속의 부패한 관리와 도적놈, 일본 밀정이 곳곳에 널렸기 때문이었다.
 “올해 일본군이 중화민국을 공격하면 장사(長沙), 중경(重慶)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할 테니 자금과 무엇이 더 필요할까? 군대 육성에 필요한 젊은이를 공급받아야 하는 문제도 있군.”
 난제가 속출했다.
 차라리 몇 년만 더 일찍 도래했다면, 이런 문장이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시간이 부족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최대한 돈을 벌어서 조달하지 않으면 답이 없어. 뭐든지 돈! 돈! 돈!”
 이렇게라도 해서 독립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결심했다.
 “성 요원, 공해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필진 소령을 불러 주세요.”
 제한된 시간.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
 
 ※※※※※
 
 홍콩 귀문(鬼門) 시장.
 1841년 홍콩섬이 영국군에 점령되고, 남경조약 체결 후에 정식 양도가 되었다. 영국은 이곳에 홍콩 총독(Governor of Hong Kong)을 신설했으며, 런던에서 핵심 관리를 파견했다.
 그리고.
 1860년 2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구룡(주룽 반도)이 베이징 조약 체결과 함께 영국에 귀속되었고, 인접한 북부 섬과 신제까지 99년간 조차를 받았다.
 영국은 홍콩을 중국 내 물산의 집결지로 활용했고, 구룡과 광둥 철도 노선을 개통하면서 광둥성의 부가 이곳에 몰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달리 구룡은 과거에 해적 소굴로 유명했는데, 전설적인 대해적 장보자의 본거지로 인신매매와 약탈품을 파는 귀신 시장이 몰래 존재했다.
 “원사님, 여기가 맞나요?”
 “의장님이 알려 준 장소가 분명합니다. 냄새부터 스멀스멀한 게 더러운 거래가 판을 치는 곳 같은데······.”
 구룡성채의 좁은 도로 좌우에 있는 가게에는 피 묻은 무기와 고가품, 동서양 물품을 가리지 않고 내다 파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백지연은 수건을 꺼내서 코를 막았다.
 그녀는 중국어가 불가능했다면 오지 않았을 테지만, 부대 내에서 광둥어까지 가능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 유일했다.
 “원사님, 아니 장 대인, 저기 있는 간판이 의장님이 주신 글자와 비슷한데요.”
 장원용 원사의 호칭은 장 대인.
 서원식은 두 사람에게 홍콩 암흑가의 사람과 거래하려면 호칭을 바꾸라고 했다.
 
 <흑룡상회(黑龍商會)>
 
 점포의 입구는 좁았으나 문을 열자 상당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점원은 인사도 없이 찢어진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왔소?”
 “물건을······ 아니, 흑룡과 산이 만난다!”
 “엥?”
 “다시 말할게요. 흑룡과 산이 만난다. 이제 알아들었죠?”
 백지연은 말을 뱉고는 서원식의 조언을 떠올렸다.
 
 -구룡 반도는 오십 년 전만 해도 해적의 소굴이었지만, 홍콩 총독부의 관할에 편입되면서 은밀한 거래를 하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거래인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속옷까지 털어 갈 자들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녀는 서원식의 당부가 기억났다.
 “네 주인을 불러와라! 흑룡과 동그라미 여섯 개 이상의 거래를 하러 왔다.”
 점원은 깜짝 놀랐다.
 “소인이 대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홍콩 정부에서 공인한 HSBC은행의 지폐입니까? 국민당 정부의 위안입니까?”
 백지연은 지갑에서 종이를 꺼냈다.
 영국 본토에서 발행한 파운드화였다.
 점원은 깜짝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다.
 “잠, 잠시 주인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사라지는 점원을 보던 장원용 원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백 중위님, 그게 무엇입니까?”
 백지연은 말했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독자적인 은행권을 발급했어요. HSBC은행이 독점 발급하는 화폐를 홍콩달러로 부르죠.”
 잠시 후.
 얼굴에 칼집이 길게 난 사내가 들어왔다.
 “흑룡의 대당가 위청이오. 어디서 왔는지, 우리 상회의 암구호를 아시니 거래는 하겠지만······.”
 떨떠름한 인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콩의 암흑가는 서로의 영역을 노리는 적이 널렸기 때문이다.
 “우리 장 대인께서 몇 가지를 사고자 합니다. 목록은 여기에······.”
 “독일제 마우저 소총 오백 정, 탄약 십만 발, 의복 이천 벌······. 뭐요? 당신의 정체는!”
 “전액 현금! 그것도 영국 파운화로!”
 “젠장, 이 정도 규모의 물품을 구하려면 총독부 관리의 눈을 조심해야 한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밑에 있어요.”
 “소비에트연방의 폴리카르포프 I-15 비행기와 교관······.”
 위청은 읽어내려가다가 기가 찬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종을 당겼다.
 점포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면서 험악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백지연은 피식 웃었다.
 “우리를 겁박하겠다는데요.”
 장원용은 씨익 웃었다.
 “해병대 애들이 좀이 쑤신다고 하던데.”
 리시버를 통해서 명령이 떨어지자, 해병대가 달려들어 주먹과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무술의 형만 멋진 중국 무술과 달리 이종격투기와 각종 현대식 살인 기술을 익힌 군인에게 변발의 사내들은 10초도 버티지 못했다.
 퍽! 퍽! 퍽!
 삽시간에 열 명의 덩치가 쓰러지자 위청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흑룡상회의 호위는 홍콩 암흑가의 다른 방파도 두려워하는 싸움꾼이었다.
 “이봐요!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싸우고자 하면······.”
 “잠깐!”
 “왜요?”
 “이곳은 우리 구역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너희를 살려 두지 않겠다.”
 “저 애들 믿고 그러면 안 되는데, 장 대인! 주인장이 화를 내는데요.”
 백지연은 일부러 장원용의 명령을 받는 척했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장원용,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이렇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부럴 놈! 아예 죽을 때까지 패 버려.”
 “그러면 누가 거래합니까. 의장님 말로는 비행기를 구할 수 있는 자는 홍콩에서 흑룡상회 외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 도중에 입구 문이 열렸다.
 누가 소식을 전했는지, 다들 칼과 모젤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슝! 슝! 슝!
 소음기를 단 권총이 연달아 불을 뿜었다.
 여러 명의 조직원이 고꾸라지자 상회 일꾼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 반면에 해병대 출신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고, 명령만 떨어지면 남은 사람까지 죽일 기세였다.
 장원용은 버럭 화를 냈다.
 “이봐! 너 죽고 싶으면 자꾸 장난쳐라!”
 군대 짬밥 30년, 특수부대만 전전하다 이제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다고 해도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위청은 흠칫했다. 말뜻은 알 수 없었으나 느낌만으로도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를 알아챘다.
 “알, 알겠소!”
 장원용은 중국 옷의 소매를 걷고 팔뚝을 드러냈다.
 그의 팔에는 흉터 자국과 포탄이 터져서 길게 찢어진 수술 자국까지 보는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험했다.
 “대인, 부디 화를 멈추시고 말로 하시죠.”
 백지연이 나섰다.
 “저희 장 대인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동그라미 여섯 자리, 영국 돈 100만 파운드의 거래를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위청은 입을 다물었다.
 홍콩과 중국 부자 중에서 외화를 원하는 수요는 많았다.
 특히 영국 돈은 금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본토의 부자가 선호하는 지폐였다.
 “당신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거래를 하는 거라고요. 우리는 홍콩에서 당신을 거래 대상자로 삼을 예정인데······.”
 “어느 정도 규모를 생각합니까.”
 “작으면 일 년에 한두 번. 많으면 네댓 번, 감당할 수 있어요?”
 “전액 현금입니까.”
 “맞아요. 우리 장 대인은 돈이 많고 뒤를 봐주는 분이 해외에 많다고요. 결정은 위청 대인이 하시고요. 지금부터 정확히 5분 드릴게요.”
 백지연은 냉정하게 말했다.
 
 ※※※※※
 
 페닌슐라 호텔 스위트룸.
 록펠러의 다섯째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방문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호로 불리는 ‘스탠더드 오일’의 설립자 존 D. 록펠러의 다섯 번째이자 외아들로 록펠러 2세라고도 불렸다.
 “제프리,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나는 커피를 시켰다.
 각진 얼굴에 목까지 잠근 셔츠와 넥타이만 봐도 그의 성격이 어떤지 추측할 수 있었다.
 때마침 점심 무렵이라 그런지, 호텔 측에서 고급 식사와 함께 시녀까지 보냈다.
 나와 그.
 그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입을 열었다.
 ‘록펠러 가문의 행동 방식은 미래에 다 알려졌다. 먼저 말하는 놈이 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침묵을 참다못한 록펠러 2세가 입을 연다.
 “당신은 참으로 과묵하군요.”
 “미국 제일의 부호로 불리는 록펠러 가문의 후계자가 오셨는데, 제가 먼저 물어볼 수는 없잖습니까.”
 “허!”
 “저는 대학을 설립한 분을 매우 존경합니다. 만약 기회만 된다면 록펠러 대학에서 수강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수강할 수 있게 말해 두겠습니다. 내가 방문한 이유는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록펠러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와 함께 미국 상류층에서 졸부로 손가락질받았다. 그러한 이유로 문화 사업에 누구보다 관심이 컸다.
 록펠러 2세가 문화 재단과 록펠러 대학을 설립한 이유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자금은 가문 소유의 은행에 예치해 두었고, 언제든지 내 이름을 대고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면서 내미는 명함.
 미국 상류층의 사람도 쉽사리 받을 수 없는 록펠러 2세가 주는 명함의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다른 말로 록펠러 가문 소유의 기업에서는 자유 출입으로 간단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다른 유적을 원하십니까?”
 “헉!”
 자신의 의도가 들킨 록펠러 2세.
 문화 재단의 수장으로 역사적 문화재 수집의 욕심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와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
 “유물 외에도 수백만 명을 구할 항생제의 양산 레시피가 있습니다.”
 “헉!”
 두 번 놀라는 록펠러 2세.
 내가 페닌슐라 호텔의 방문 자격이 없었다면, 동양인의 허튼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만큼, 호텔이 보증한 출품인은 신용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귀 가문에서는 백 년이 지나도 역사에 기록될 만큼의 업적을 이루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록펠러 2세와 함께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록펠러 가문을 속여서 허드슨강에 떠오르는 시체는 되기는 싫습니다.”
 “정말입니까?”
 “기적의 항생제입니다. 알렉산더 플레밍 경이 추출 후에 정제와 양산에 어려움을 겪는 신물질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생산할 방안입니다.”
 1932년에 플레밍은 페니실린 양산의 어려움으로 연구를 포기하고, 하워드 월터 플로리가 이끄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으로 넘어가서 39년이 되어야 양산에 성공한다.
 나는 이점에 착안했다.
 “매독과 각종 질병 및 상처에 특효약입니다.”
 뉴욕 상류층은 방탕한 성생활로 성병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치료 약의 효과만 입증되면 투자자는 널렸다.
 록펠러 2세는 정색했다.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환자를 데려오십시오. 완치시킬 테니······. 아니, 제가 미국에 도착하면 환자를 맡겨 주십시오. 대신 검증이 끝나면······.”
 말끝을 살짝 흐렸다.
 결정 나기 전에 금액을 말하는 일은 초보나 하는 짓이다.
 나는 일천만 달러나 받고 판 솔로몬 시대의 성서보다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을 더 비싸게 받을 생각이었다.
 “모레 당신을 초대하겠소. 미국으로 말이오.”
 “홍콩항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유람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려면 45일 이상은 걸리겠군요.”
 지루한 배 여행.
 미래에도 크루즈를 타고 가는 여행을 싫어했다.
 록펠러 2세는 고개를 저었다.
 “홍콩의 모처에 가문의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놀랐다.
 ‘뭐! 비행기가 있다고?’
 미래와 달리 1937년에 국제행 장거리 노선은 극히 드물었고, 미국과 유럽에만 있다고 알려진 상태였다.
 록펠러 2세는 웃었다.
 “기종은 더글러스 DC-3로 아시아에서는 1대도 구경하기 힘든 신형 여객기입니다. 탑승할 인원은 5명까지, 수하물은 500kg까지 비워 두겠습니다.”
 
 
 # 각자의 장
 
 
 페닌슐라 호텔. 스위트룸.
 밤에 몰래 잠입한 항공대 이필진 소령이 도착했고, 귀신 시장에서 장보기를 마친 백지연과 장원용 등도 합류했다.
 “맙소사! 비행기를 샀다고요.”
 “폴리카르포프, 일명 I-15로, 자료는 의장님의 노트북을 보십시오.”
 백지연은 테이블에 있는 포켓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소비에트연방의 열다섯 번째 전투기인 I-15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산한 복엽기로 항공기 기술이 부족한 소련에서 단엽기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 단계의 기체였다.
 “뭐, 뭐야! 조종석과 동체의 앞부분만 두랄루민이고 나머지는 목제에 캔버스 천으로 만든 복엽기잖아!”
 울상으로 변한 이필진.
 첨단 공격용 헬기인 아파치를 몰고 다니던 그의 눈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처지에 소비에트연방의 복엽기라도 살 수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의장님, 메샤슈미트는 바라지 않습니다. 최소한 영국제 호커 허리케인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승무원: 1명
 전장: 6.17m
 전폭: 10.00m
 전고: 2.80m
 출력원: 쉬베로프 M-62 공냉식 엔진(800hp)
 최고 속력: 444km/h
 항속거리: 470km
 최대 상승 고도: 10,700m
 무장: 7.62mm ShKAS 기관총 4기
 -폴리카르포프, 일명 I-15의 제원」
 
 “나중에 최고의 전투기를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일 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오늘 부른 이유는······ 남경에 있는 임정을 전담해 주셔야겠습니다.
 “예?”
 “곧 일본이 중국을 공격해서 국민당군의 수도 남경까지 순식간에 함락됩니다. 임시정부는 남경에서 장사로, 끝도 없는 도주를 통해서 중경까지 흘러갑니다. 빈곤한 독립지사의 가족들이 곤경에 처할 테니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누구를 지원해야 합니까? 시청각실에서 본 자료에 의하면 임정 내에 여러 계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는 임정의 정치는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강력한 지휘체계와 대일항쟁을 위해서는 김구 선생님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서 국민당 정부와 끈을 만들고 중경에 공군을 창설합니다.”
 나는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장원용, 백지연, 차해진, 김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내륙으로 이동할 임정을 위해서 1939년까지 홍콩에 거점을 둡니다. 이곳을 통해서 중경까지 물자를 공급할 테니 최대한 수령해서 독립군을 육성해야 합니다.”
 노트북을 켜고 밤새 두들기다시피 만든 도표를 내밀었다.
 
 「1937-38년 독립군 육성 계획」
 
 소련제 I-5 복엽기 8기, 엔진과 정비 기계를 도입해서 100명의 조종사와 100명의 정비병을 육성할 계획이다.
 더불어 독립군 보병 삼천 명, 연대급 병력 육성 계획까지 제시했다.
 장원용 원사가 학을 뗐다.
 “맙소사! 2년 안에 이런 규모를 만들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팀은 중경으로 가서 외곽에 있는 부동산을 사고 임정의 사람을 최대한 영입하세요. 대외적으로 김구 선생님을 앞세우면 됩니다.”
 장원용은 물었다.
 “비행기는 어디서 구할 생각입니까. 설령 구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암흑가와 소비에트연방 라인을 통한다면 부속품을 수급하기가 힘듭니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국민당 장개석과 소비에트연방에 선을 댑니다. 김구 선생님을 통해서 지원과 구매를 병행합니다. 우리가 구매하고자 하는 비행기는 현재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나온 I-15bis입니다. 역 갈매기 주익을 일자형으로 바꾸고 양산 중인 데다가, 신형 단엽기도 개발 중입니다. 이선급으로 전락한 I-15의 수는 대략 800대, 그중에서 절반이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이필진은 맞장구를 쳤다.
 “의장님의 의도는 구형 복엽기를 통해서 훈련생을 키우고 고급 단엽기로 전환하겠다는 생각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육 기수가 훈련을 마치면 버마 랭군으로 보내십시오. 1941년이 되면 미국 제1 의용대대가 생깁니다. 그들의 이름은 플라잉 타이거스(Flying Tigers, 飛虎隊)로 총 3개 비행대대를 창설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조해서 싸우는 한편, 독립 정부를 미국에 공인받아야 합니다.”
 이필진은 바로 반응했다.
 “우리가 탈 비행기의 최종은 P-40B 토마호크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커티스-라이트 사에서 만든 P-40은 영식 함상 전투기보다 성능이 떨어집니다. 아프리카 주둔 영국군을 위해서 생산한 기종인 데다가 전투기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필진은 한숨을 내쉰다.
 “영식 함상 전투기와 나카지마 사의 Ki 시리즈보다 못하다고 나오네요. 의장님의 노트북을 볼 때마다 제 기운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정보를 안다고 대처까지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우리 중에 일부는 내일모레 미국행 비행기를 탑니다. 그곳에서 세계 최고의 비행기로 불리는 무스탕을 만들어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정말입니까. P-51 무스탕이라면 일본 전투기는 추풍낙엽입니다. 그런데 미국이라니요? 태평양을 횡단할 여객기가 나왔습니까?”
 “록펠러 가문 소유의 더글러스 DC-3 여객기를 타고 태평양의 중간 기착지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몇 가지 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전쟁 전에 최대한 많은 비행기와 엔진을 구매해서 랭군과 본거지가 있는 필리핀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참겠습니다.”
 “이필진 소령은 사람들과 함께 남경에서 임정의 인물을 만난 뒤에 중경으로 이동하십시오. 반드시 김구 선생님과 우호 세력을 설득해야 합니다.”
 “설득은 해 보겠지만······.”
 “현재 임정은 유례없는 자금난에 시달려서 어려운 상황입니다. 미국에 있는 교포 제프리 서의 이름으로 도움을 주고, 우리를 크게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날뛰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임정의 이름으로 공식 활동이 이루어져야 독립의 명분을 얻는다.
 “임정은 과거에 레닌이 보낸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유용한 이동희, 한형권, 김립 등의 사회주의 계파 독립운동가와 척을 진 상태입니다. 김구 선생님이 그들을 배척하고 내보면서 암살단까지 보내는 등의 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의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집단지도체제로 임정을 운영하면 중구난방이 되겠군요.”
 “백지연 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조직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이제 임정 역사상 고난의 길로 불리는 3,000km 이동의 시기가 도래하니, 금력을 쓰더라도 김구와 독립지사의 가족을 포용해야 한다.
 “우리는 저들에게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임정의 지도자들이 믿고 의지합니다.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자를 통제해야 김구 선생님을 주축으로 새로운 임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동이 동의했다.
 장원용이 물었다.
 “이필진 소령님은 중경으로 갈 테고, 나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전쟁은 무기만으로 싸울 수 없다.
 보급이 필수다.
 “장 원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광둥어는 못 하지만, 중국어를 하는 병사를 뽑아서 홍콩과 랭군에 거점을 부탁드립니다. 독도함에 필요한 자재와 물자도 조달해 주시고, 상선을 운용하는 해운사를 차려 주십시오.”
 “해적질로 빼앗은 배로 말입니까.”
 “등소평의 연설 중에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많이 잡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화물선의 외형은 원형과 달리 변형하시면 디지털 등록이 없는 시대니 일본 회사가 모를 것입니다.”
 “몇 척까지 운영해야 합니까.”
 “많을수록 좋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를 데려다가 선원으로 키우고 난 뒤에, 해군으로 넘깁니다.”
 “아!”
 다른 병종과 달리 해군 양성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부터 가르치는 것보다는 선원으로 육성해서 전환하는 편이 유리했다.
 “제가 미국으로 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기 회사를 인수하겠습니다. 그중에서 잠수함을 최우선으로 사들여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혹시 항공모함은 안 될까요?”
 이필진 소령의 욕심.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으나,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순 없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의장님과 장 원사님은 홍콩과 랭군을 맡고, 이필진 소령님은 중경으로 가시고, 저는 어디를 맡을까요?”
 “백 비서와 차해진 실장은 저를 따라서 미국으로 갑니다.”
 “예?”
 “미국에 유학 다녀온 두 분이 저를 도와서 미국 사업을 맡아 주세요. 우리 앞에 있는 1937년의 아메리카 대륙은 엘도라도와 같습니다.”
 록펠러 가문에서 배려한 5장의 티켓.
 미국행 인선에는 백지연 중위와 군의병 허창식 병장, 특수전전대 차해진 대위와 요원 1명으로 정했다.
 
 ※※※※※
 
 홍콩 일본 마루베니 상사 지점.
 일본은 아시아 전역에 수입과 수출을 위해서 거점을 둔 기업과 별도로 육군 특무대 소속 군인을 직원으로 위장해서 내보냈고, 이시이 소좌는 대외적으로 마루베니 홍콩지사의 지사장으로 알려졌다.
 그는 건네받은 보고문을 읽다가 짜증을 냈다.
 “암흑가 시장에서 다량의 무기가 거래되었다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조선인 밀정 김판돌과 지켜보는 곤도 소위.
 홍구공원 폭탄 사건 이후, 일본군은 중국 전역과 외국 조계지에 숨어 사는 조선인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대부분 정보는 조선인 밀정을 통해서 입수했는데, 그들이 물고 오는 정보 중에 쓸 만한 것은 별로 없다고 판단하는 이시이 소좌였다.
 “칙쇼! 지난번에는 김구가 왔다고 하더니! 너희 조선인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당장 나가서 쓸 만한 정보를 물어오라고.”
 호통에 뒷걸음질 치는 김판돌.
 문이 닫히고 나서.
 곤도 소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독일제 마우저 소총 수백 정이 밀거래되었습니다. 구형 중고 제품이지만 인수한 자가 조선말을 썼다고 합니다.”
 이시이 소좌는 피식 웃었다.
 “거지들이 무슨 돈으로 샀다는 말인가. 소비에트연방의 레닌이 자금을 줘도 떼먹고 저들끼리 싸우는 반도 놈들이야.”
 임정을 보는 외부의 시각은 최악이었다.
 소비에트연방의 국제공산당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조선인을 돕고자 거액의 자금 지원을 결정했다.
 이동휘의 수하 한형권이 레닌과 비밀 협정을 맺고, 금화 200만 루블을 받아오던 중에 임정으로 보내지 않고 좌파 독립운동가에 건네면서 임정과 한인 사회당은 내홍을 겪었다.
 여기에 임정의 강력한 군사력까지 ‘자유시 참변’을 통해서 수천 명이 죽고 포로가 되면서,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조선인은 화합하지 못하는 쓰레기다. 그들이 무슨 돈으로 무기를 산다고?”
 “김판돌이 가져온 정보 중에 쓸모없는 것도 있지만, 유용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페닌슐라 호텔 로열층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칙쇼! 그런 고급 호텔에 반역자들이 머무르다니. 자네는 제정신인가. 자네와 내 월급으로 하룻밤 잘 수 있는 방을 빌릴 생각은 엄두도 못 내는 곳이야.”
 “알, 알겠습니다.”
 “당장 나가!”
 이시이 소좌는 호통을 내질렀다.
 홍콩은 일본과 관계가 좋은 영국의 식민지다.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본국에 소식이 들어갈 테고, 행여 좌천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시이에겐 곤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닌 페닌슐라 호텔이라고. 그곳의 사주가 누구인지 모르는군. 우리 대일본 제국에도 투자한 해외의 거물이야. 네 녀석이 쓸데없이 건드렸다는 소문이 본국 대신의 귀에 들어가면 가만히 있을까. 조선독립군 따위야 한두 명 정도는 눈감아도 무방하다. 얼마 후에 있을 중국 침공까지 조용히 기다리라는 대본영의 보고가 왔단 말이다.”
 서랍의 문이 열렸다.
 빨간색 글씨로 <특급 기밀>이라고 적힌 문서에는 ‘중국 침공 작전’이라는 제목이 인쇄되었다.
 
 
 # 임정의 장
 
 
 「상해 임정에 한인 70여 명이 근무하는데, 전 직원에게 봉급을 지급한다고 결정했지만, 아직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생활의 비참함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상해임시정부 관찰 보고서」
 
 상해의 일본 밀정은 임정을 몰래 감시했고, 일거수일투족을 조선총독부 등에 보고했다.
 1920년을 기점으로 임정은 엄청난 자금난에 봉착했는데, 두 사람의 수뇌부가 일으킨 문제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인물은 이승만이었는데, 그는 임정의 대통령에 선임된 직후에 미국 교포가 내는 애국 후원금을 전용했고. 가장 크게 의존하는 미주 동포사회가 내는 지원이 끊기면서 곤경에 처했다.
 두 번째는 레닌이 지원한 자금이 이동휘의 고려공산당에 들어가면서 다시 자금난에 빠졌다.
 
 「코민테른에서 이동휘와 박진순에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돈’을 주었지만, 지극히 소액만이 노동자 대중에게 들어갔고 대부분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직 각료들, 온갖 종류의 직업이 없는 전도사들, 모험주의자들, 투기꾼들 그 외의 무뢰한들에게 들어갔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국 보이찐스끼 동지」
 
 훗날 레닌과 코민테른이 지원한 독립자금의 총액을 400만 루블로 전하고는 있으나, 각종 문헌과 자료를 보면 이는 과장된 금액이었다.
 대략 60만 루블이 맞는다고 이야기가 돌았다.
 이렇듯 상해에서 한차례 난장판이 있고 난 뒤.
 이승만은 임정의 위원으로부터 탄핵당했다.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이승만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임정 내에서 같은 사회주의자와 반목했는데, 안병찬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이르쿠츠크파, 상하이파, 김준연을 중심으로 하는 엠엘 파(ML) 등과 화합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승만을 인정할 수 없다.
 
 이동휘의 사임과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의 이탈로 임정은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왜 임시정부에서 써야 하냐면서 이견을 제시했다.
 김구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자금을 임정의 주류 세력에 주지 않았다면서 김립을 암살하기까지 했다.
 임정의 혼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사임하고 미국으로 떠나자, 이번에는 안창호와 김규식 등이 내각에서 사퇴했고, 이동녕과 김구가 안간힘을 써서 집단지도체제로 임정을 안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노선에 따라서 임정은 분열되는 증상을 내비쳤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에 터를 잡은 임정은 일본의 협박 때문에 이번에는 진강(鎭江)으로 옮겨 가는 수모까지 당했다.
 
 -남경 성안에 임정의 청사를 두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포격하겠다.
 
 일본 해군의 최후통첩.
 이로 인해서 임정 청사는 진강에 두고, 독립지사들은 남경 성내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김구는 성내의 회청교(淮淸橋) 근처의 고물상으로 위장했고, 곽봉원은 마도가(馬道街)에서, 광화문(光華門) 남기가(藍旗街)에는 요인 가족들이, 중화문(中華門)에는 한국 국민당 청년들이 모여 살았다.
 이밖에도 교부영(敎敷營) 거리에 김원봉을 필두로 하는 조선 의열단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청년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서 회청교에 고물상을 찾아온 사내가 있었다.
 “김구 선생님, 홍콩에서 손님이 만나고자 합니다.”
 “밀정은 아닙니까?”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만나 보겠습니다.”
 “조선혁명당 아이들이 교부영 일대의 경호를 맡기로 했고, 김원봉도 합류하기로 했으니, 일본 밀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음······.”
 “저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중국인으로 위장하고는 교부영 거리로 갔다.
 이청천이 숨어 있는 골목에 다다라서 똑똑! 문을 두들기자 좌우로 활짝 열렸다.
 “두 분을 기다렸습니다.”
 김원봉이 나타났다.
 김구는 모자를 벗었다.
 “김 동지, 오랜만입니다.”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잠시 후.
 사합원 방식의 집 뒤 별관에 훤칠한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저는 대한민주독립당의 이필진입니다.”
 “대한민주독립당?”
 한 번도 듣지 못한 당의 이름에 김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원봉과 이청천도 마찬가지였다.
 “내래 한 번도 듣지 못한 당이오. 당신은 어디 출신이오?”
 “이 장군님, 저희는 미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지사입니다. 참고로 이승만 씨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부터 하겠습니다.”
 “그 아는 아이다!”
 “저희 의장님께서 조선 남아의 의기를 만방에 알린 세 분을 존경합니다. 오늘 방문한 이유는 약소하지만, 독립 자금을 지원하고자 왔습니다.”
 “정말이오?”
 “저희가 제공하고자 하는 일차 목록입니다.”
 고이 접은 종이.
 집주인인 이청천이 대뜸 펴 본다.
 
 「마우저 소총 500정, 실탄 10만 발, 맥심 기관총 5문, 루이스 경기관총 10정, 의복 2,000벌, 군화 1,500족······.」
 
 “이게 뭐인가?”
 “독립군에 지원할 무기입니다.”
 “정말인가?”
 “내일 진강에 화물선이 도착할 것입니다.”
 “맙소사! 엄청난 선물이 아니오. 내래 우리 수백 명의 혁명당 애새끼를 전부 무장시키고도 남겠어. 일본군을 죽일 무기를 줘서 고맙네.”
 “이것뿐이 아닙니다.”
 “······?”
 이청천을 시작으로 모두의 눈이 이필진을 향했다.
 지금 건네주기로 한 물자만 해도,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웠다.
 “저희 의장님은 임정과 가족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협의가 끝나면 100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구의 눈이 커졌다.
 “100만 위안을 준다는 말입니까?”
 이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100만 홍콩달러입니다.”
 모두가 다시 놀랐다.
 “예?”
 국민당의 화폐와 달리 홍콩달러는 가치가 매우 높았다.
 대륙의 부자 중에 일부는 영국 식민지 홍콩으로 이주하기를 바랐고, 홍콩 돈은 장강 이남에서 유통되는 비싼 화폐였다.
 이때 김원봉의 눈이 반짝였다.
 “만약 왜놈의 앞잡이라면 당신을 죽이겠다.”
 의심이 가득한 눈.
 이필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민족이 타국에서도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군요. 의장님과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을 이루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겪어 보지 않고 하는 말은 사절입니다.”
 네 명은 입을 다물었다.
 오늘 자리를 만든 곽봉원이 입을 열었다.
 “이필진 의사는 내가 보장합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봅시다.”
 이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진강에 도착하는 화물을 직접 찾아가십시오. 여기 증서가 있으니 물품을 내어줄 것입니다. 직접 확인하고 난 뒤, 사흘 이내에 연락해 주십시오. 태호객잔에 머무르겠습니다.”
 
 ※※※※※
 
 다음날 진강의 선착장.
 증기 화물선 주-6호에서 부두로 화물이 하역되었고 상자가 옮겨졌다.
 임정 소속 젊은이들은 품에 권총을 넣고는 주변을 살폈고, 마차에 실린 화물이 약속 장소로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구와 이청천, 김원봉, 세 사람이 차례대로 말했다.
 “곽봉원 동지가 무사히 이동했습니다.”
 “정말 화물이 도착했군.”
 “나는 아직 못 믿겠습니다. 외곽에 무장 부대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잠시 후.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일본군과 여러 번 전투를 벌여 승리한 이청천은 성격을 참지 못해 도리깨로 상자의 못을 땄다.
 빠지직!
 나무 뚜껑이 열렸다.
 “맙소사! 정말이야! 여기 마우저 소총이 맞는구먼.”
 지푸라기와 함께 기름칠한 마우저 소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다른 상자도 뜯었다.
 프랑스제 루이스 경기관총의 원통 모양이 드러났다.
 “들고 다니는 경기관총이잖아. 국민당군의 정예만이 쓰는 경기관총이라오. 동지들, 이것을 직접 만져 보라고.”
 기뻐하는 이청천.
 천생 군인이 따로 없는 그에게 좋은 무기만큼 좋은 일은 없었다.
 김원봉은 실탄 클립에서 탄환을 뺐다.
 “일본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탄환에서 탄두를 분리하면 화약량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뚝!
 검은 화약 가루가 떨어졌다.
 성냥으로 붙을 붙이자, 화르르! 타는 모양새가 양질의 발사약이 맞았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김원봉은 몇 개의 실탄을 꺼내서 다시 테스트하고 나서야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가짜가 아닙니다.”
 “미국에 이승만 같은 작자 말고 진정한 독립 애국지사가 있었구먼. 당장 수백 명의 젊은이를 무장하고 훈련할 생각을 하니 흥이 나네.”
 “김구 선생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돌연 말을 돌리는 김원봉이다.
 김구는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의장이라는 자가 두렵습니다. 그가 무슨 의도를 품었는지 모르겠지만,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무기를 우리에게 선심 쓰듯이 주었습니다. 게다가 돈까지 주겠답니다.”
 이청천이 활짝 웃었다.
 “나는 일본군만 죽일 수 있다면 상관이 없어. 이승만이는 말로만 떠도는 지사지만, 의장이라고 부르는 자는 우리에게 돈과 무기를 주었잖아.”
 김원봉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빨리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당과 갈라선 이후에 코민테른의 자금도 끊겼습니다. 소비에트연방도 일본의 눈치를 살피니, 우리에게 자금줄이 필요합니다.”
 곽봉원도 맞장구를 쳤다.
 “대한민주독립당이 제시하는 조건을 들어봅시다.”
 김구는 대답했다.
 “오늘 무기를 수령하고 무장한 이야기는 내일모레면 일본 해군에 들어갈 것입니다. 오늘 바로 가서 그자를 만나고 결판을 냅시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생활고에 빠진 조선인 중에서 일본 밀정이 많았다.
 
 ※※※※※
 
 남경 시내에 있는 태호객잔.
 이필진은 기지개를 켜고는 구시렁거렸다.
 “벼룩과 이가 내 생살을 뜯고 잔치를 벌였군.”
 위생 상태가 좋은 객잔이라고 해도 해충을 막진 못했다.
 홍콩과 달리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현대인의 관점에서 벌레의 천국이었다.
 같은 방에 있는 김기운 중위도 인상을 썼다.
 “젠장! 벌레 쫓는 약이라도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 종일 밤잠을 설쳤습니다.”
 팔뚝과 배 쪽에 물린 자국들.
 두 사람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제기랄, 인제 생각해 보니 점원 녀석이 어제 우리를 비웃었잖아.”
 “예?”
 “어젯밤에 향을 끄는 모습을 보더니 웃더군! 제기랄, 우리가 끈 향대가 벌레를 쫓는 방충제였던 모양이야.”
 “냄새나는 향이 말입니까.”
 “오늘 밤에는 끄지 말고 피워야겠군.”
 이때였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
 김기운 중위는 대뜸 홀스대에서 권총을 끄집어냈다.
 K5는 한국군의 제식 권총으로 13발을 장전할 수 있어서 저지력이 탁월했다.
 “누구입니까?”
 “김구입니다.”
 문을 여니 김구와 이청천 등이 함께 들어왔고, 김원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잠복한 일본 밀정이 없나 살펴보는 것 같았다.
 “의장님의 선물을 받으셨습니까?”
 이청천이 나섰다.
 “중고지만 좋은 무기였네. 자네 의장님이라는 분이 더 많은 무기를 줄 수 있다고 했지. 우리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
 이필진은 대답했다.
 “저희가 준비한 물품에 관해서 들으시면 뒤로 까무러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음을 흘리면서 김구를 보았다.
 김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의장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의 됨됨이를 묻는 질문 하나로 김구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냈다.
 “조선의 독립을 누구보다 바라는 동지를 모아서, 아무도 모르게 경제적 기반을 쌓고 때를 기다린 의인입니다.”
 “······?”
 “그분의 지론은 독립은 무력만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좌·우파는 물론이고, 사회당 계열과 민족당 계열로 혼란한 이유도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레닌과 코민테른이 건네준 수백만 루블 때문에 치고받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음!”
 “의장님은 임정이 강력한 단일체계로 모두를 아우르고 독립을 끌어낼 힘을 얻기를 바라는 뜻으로 거액의 자금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선결 과제로 군사 조직과 내각 조직의 개편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자네의 말은 많은 점을 시사하네.”
 “안 그러면 임정은 와해할 수 있으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승만과 결별 후에 미주의 지원 자금은 끊어졌고, 사회당 계열의 이동휘와 다툼으로 임정을 불신하는 자가 태반입니다.”
 “······.”
 “장개석 정부도 일본의 눈치를 살피는 판국에 임정의 향후 행보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의 말은 건방지군. 어디까지 논하는지 들어보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필진은 서류 가방에서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김구를 위시한 사람은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가 얼굴색이 샛노랗게 변했다.
 그러고는 동시에 외쳤다.
 “이 말이 사실인가!”

댓글(9)

흑기샤    
끝까지 봤습니다. 볼만해요^^
2020.02.13 12:28
re******    
완결 보고 왔습니다. 중2병 소설 아닙니다. 괜찮으니 대여 ㄱㄱ
2020.02.13 22:32
나은아빠    
나름대로 괜찮은 대체역사물. 대여 추천합니다
2020.07.07 14:03
어림없지    
독립운동가분들에게 저리 풍족하게 지원되는 모습을 보니 울컥하네요 ㅠㅠ 그런데...이승만 이역적세끼는 반드시 능지처참해야됨
2020.07.09 08:15
어림없지    
완독 햇네요 강추합니다 대체역사 소설중 이렇게 통쾌하게 친일파 매국노들 처리하는 소설을 본적이 없네요 마무리까지 매우 좋습니다
2020.07.30 22:00
다크라이    
인물도 많고, 고증도 잘된편이고, 글 잘쓰는 작가. 역사물 좋아하면 추천함
2021.02.01 13:34
진호(珍昊)    
개승만이는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18대 손이고 철종의 8촌 동생이어서 조선(대한민국)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자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동양의 프린스라고 떠벌이면서 재미교포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면서 모아준 돈을 가지고 백마타고 노는 등 호의호식하며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역적으로 생각해서 지 마음대로 행동하는 개 쓰레기 새끼였다. 임정에서 재미동포들의 성금을 착복하는 것으로 탄핵을 가하자 일방적으로 임정에 보낼 독립자금을 보내지 않아서 임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던 거다.
2021.04.20 22:34
진호(珍昊)    
조선을 망해 먹은 조선 왕족의 후예라는 이유로 수많은 재미 동포들의 피를 빨아 먹었던 인간 모기 개 쓰레기 개승만이라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삼한의 내로라하는 갑부 가문이었던 이회영 선생의 일가는 삼한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이를 독립 자금으로 충당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승전이나 청산리 대첩도 따지고 보면 이 회영 선생의 독립 자금이 밑바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2021.04.20 23:11
원조음냐리    
위성전화기는 아날로그 무선신호 안 씁니다.
2021.04.2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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