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이었지만 오크 진영 도처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자크는 오크들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진영 외곽에 세워진 커다란 방어탑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쿰에게 들었을 때는 나무들을 잘라 간편하게 만든 정찰용 탑을 생각했는데 와서 살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칼로스 성에서 미스토스를 통해 생겨난 방어탑 못지않게 견고해 보였던 것이다.
석벽으로 축조된 원형 탑의 높이는 무려 10로빗에 육박했고 작은 요새를 방불케 했다. 오크 수십 마리가 그곳에서 거하며 농성을 벌일 수도 있을만한 규모였다. 게다가 탑의 주위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진동으로 볼 때 중급 이상의 마나 보호막이 탑을 보호하고 있었다.
‘놀라워. 대체 어떻게 이틀 사이에 저리 강력한 방어탑을 세울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오크들에게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는 듯했다. 물론 자크가 세운 기습 작전 앞에서는 방어탑의 기능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용족 골룡의 환영이 나타나는 순간 방어탑에서 경계를 서던 오크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테니까.
“모두 준비해!”
자크는 나직이 외치며 황금빛 계수나무 잎사귀를 한 장 빼들었다. 환영으로 인한 오크들의 공포심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방어탑 한두 개를 무참하게 박살낼 필요가 있었다.
‘섀도우 워리어!’
츠으읏!
자크가 주문을 외우는 순간 핏빛의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나 방어탑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콰지직!
쿠콰콰쾅-!
거암을 가볍게 산산조각 냈던 섀도우 워리어의 공격을 받자 방어탑의 견고한 석벽이 무력하게 부서져 내렸다.
“꾸어억-!”
“크악! 아딩거즈랄크!”
경계를 서고 있던 십여 마리의 오크 궁수들은 영문도 모르고 세상을 하직했다.
“······야눠므랄크?”
방어탑이 무너지고 오크 궁수들의 비명 소리가 난무하자 막사에서 자고 있던 오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자크는 곧바로 골룡을 향해 환영마법을 펼쳤다.
스스스.
순간 골룡 라칼의 모습을 한 거대한 환영이 부서진 방어탑 앞에 나타났다. 가장 먼저 달려온 오크 경보병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끼익! 저, 저것은 아즈용!”
“꾸어억! 요······용자다! 용자가 나타났다!”
자크의 예상대로였다.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로 몰려오던 오크들은 골룡의 모습을 보자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나기 바빴다. 하긴 그것이 환영인지 알아본다면 모를까 감히 대항이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크워어어어어!”
“우아아아아아!”
골룡은 짐짓 울부짖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자크 역시 내공을 끌어올려 일부러 큰소리를 냈다. 자크의 포효가 골룡의 울부짖는 소리와 더불어 사방을 진동했다.
“췩! 큰일입니다! 요, 용자가 나타났습니다!”
“뭐, 뭣이!”
해안에 상륙한 척후부대를 이끌고 있는 오크 천부장 애드니브를 향해 부관이 기겁한 표정으로 달려와 보고했다.
‘허억! 정말로 용자다!’
막사 밖으로 나온 애드니브 역시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크 천부장인 애드니브는 글라스탄이나 투거 서넛쯤은 가볍게 해치울 만한 실력자였다. 그러나 거대한 골룡의 모습으로 변신한 용자를 상대로는 감히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크워어어어어!”
골룡이 휘두른 거대한 두 개의 도끼가 허공을 누비며 달빛을 가리자 글라스탄과 투거들도 기겁하며 달아났다. 십부장들을 비롯한 지휘관들도 그 대열에 합류한 터라 상황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했다. 애드니브는 다급히 외쳤다.
“크으! 어쩔 수 없다. 일단 피해라! 최대한 도주해서 본대에 합류해라.”
“췩! 알겠습니다!”
“취익! 조심하십시오, 애드니브님.”
그 순간 눈치를 보며 집결해 있던 백부장들이 기다렸다는 듯 도주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모조리 쓸어버려!”
자크가 달려 나가며 외쳤다. 부대를 지휘할 지휘관들이 달아나는 이상 오크들이 진형을 갖추고 대항하기란 불가능했다. 자크가 바라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미 승리는 확정되었다. 지금부터는 달아나는 오크들을 뒤따르며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일만 남았을 뿐.
(그 말을 기다렸어, 주인.)
“크흐! 돌격!”
“크큭큭! 명령을 받듭니다!”
가장 먼저 릴리가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고 티라스와 하쿰, 샤온이 뒤를 따랐다. 다크울프는 이미 서너 마리의 오크들을 휘감아 으스러뜨리는 중이었다.
‘좋아! 그럼 나도!’
자크는 나뭇잎으로 만든 복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사라의 검 대신 평범한 철검을 들었다. 혹시라도 오크들이 자크의 모습을 알아보면 환영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 있어서였다.
파앗! 파팟-!
끄윽! 꾸어억!
오크들은 마치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노루처럼 혼신을 다해 달렸지만 그레이더를 타고 달리는 자크를 따돌리지는 못했다.
“리게즈랄크······! 일단 저놈을 죽이고 도주한다!”
십여 마리의 오크들이 자크의 검에 죽음을 당하자 결국 주변에서 달아나던 오크들이 일제히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커다란 덩치의 오크 장수 하나와 중갑주를 두른 오크 십여 마리가 몰려왔다.
“췩! 건방진 놈! 죽여주마!”
“큭큭! 기분도 더러운데 네놈의 목이라도 잘라가야겠다.”
“능력이 된다면.”
싸늘한 음성과 함께 무수한 핏빛의 검영이 일어나 사방으로 난무 했다.
파팟- 스커커컥!
쿠어억! 끄아아악!
오크 네 마리의 목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오크들이 중갑주로 무장했지만 자크는 투구와 흉갑 사이의 틈새를 정확히 공격해 목을 잘라버렸다. 이 후로 종횡무진 자크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오크들이 피를 뿌리며 맥없이 고꾸라졌다.
쒸이잉!
그 순간 도끼 하나가 수직으로 회전하며 날아왔다. 자크의 미간을 정확히 노린 것으로 무척 빠른 속도였다.
자크가 잽싸게 몸을 회전해 피하자 중갑을 두른 우람한 덩치의 오크가 커다란 양손 대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사나운 기세를 보니 적어도 백부장급의 오크 장수. 오크 중보병들을 이끄는 지휘관인 듯했다.
훙! 후웅! 훙훙훙!
연속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대검으로부터 섬뜩한 파공음이 일었다. 왼쪽으로 파고드는 대검을 자크가 빗겨내자 오크 장수는 신속하게 몸을 뒤로 뺐다가 반대편으로 검을 휘둘렀다.
쒸잉!
마치 바람처럼 쇄도하는 대검! 자크가 그것도 가볍게 피하자 오크 장수의 두 눈에서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는 자크를 빨리 해치우고 달아나야 하는 만큼 마음이 조급한 터였다.
“으득! 아렁구랄즈크!”
오크 장수의 입에서 괴이한 주문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대검이 마치 광풍처럼 전면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그것을 본 자크의 두 눈이 커졌다. 오크 장수는 커다란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면서도 동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마 전 포로로 잡은 오크 장수에 비해 월등히 강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애초부터 자크에게는 그다지 위협이 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바람처럼 휘두르는 오크 장수의 대검이 자크의 눈에는 무척 느리게 보였으니까.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 없겠지.’
붉은 색의 오러가 맺힌 자크의 검이 오크 장수의 대검을 지나 그대로 투구를 강타했다.
콰앙!
“······쿠윽!”
투구와 함께 처참히 뭉개진 오크 장수의 머리. 그는 그대로 널브러져 즉사했다. 머리는 박살났지만 몸체는 멀쩡했다. 그것을 본 자크의 두 눈에 문득 이채가 일었다.
‘그렇지. 잘하면 마당질을 할 수 있겠어.’
평범한 오크들은 마당질을 해봤자 그다지 좋은 것이 나오지 않을 것이나 오크 장수라면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가하게 마당질을 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가급적 한 마리의 오크라도 더 죽여야 할 때. 아쉽지만 상황이 종료된 후에 돌아와 마당질을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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