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완전범죄 20세기

Loving You (1)

2020.06.15 조회 24,614 추천 393


 “유주열 님.”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머리와 달리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냥 내가 나 아닌 척 이대로 앉아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그녀는 내 이름에 짜증을 넣어 부르기 시작했다.
 
 “유주열 님.”
 
 결국 나는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실 앞 작은 데스크에 어리고 늘씬한 간호사가 뭔가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다. 그 옆 스탠딩 모니터 뒤에는 뚱뚱한 아줌마 간호사가 다시 내 이름을 부르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줌마는 소리 지르는 걸 멈추고 내게 물었다.
 
 “유. 주. 열. 님?”
 “네.”
 “일찍 좀 대답했으면 좋았잖아요.”
 
 구시렁거리는 아줌마의 목소리는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대신 점점 더 커지는 심장 소리가 귀에 가득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이 병원을 빠져나간다고 해도 경비나 남자간호사가 와 나를 붙잡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 환자가 아니었고 환자라고 하더라도 진료를 거부할 권리는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 병원에는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시네요. 우리 과에는 처음이지만요.”
 “네.”
 
 ‘저희 병원’과 ‘우리 과’라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존댓말 표현이 거슬렸다. 하지만 굳이 그 아줌마와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기 위해 앉아 있는 다른 간호사의 몸매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녀가 알몸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줌마가 방해했다.
 
 “혹시요. 저랑 병원 밖에서 개인적으로 말이죠. 우리 아는 사이 아닌가요?”
 “작업 중이십니까?”
 
 젊은 간호사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줌마 간호사는 앉아 있는 그녀를 째려본 후 건조한 톤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죠. 우리 큰 애가 고등학생인데 작업이라니. 여기 나이를 보면 우리 아들 친구도 아니고. 혹시 저희 병원 뒤 3단지 근처에서 몇 년 사시지 않으셨나 해서요. 상가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이인가 싶은 얼굴인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파트에 살았던 적 없었습니다.”
 “그래요?”
 
 오늘 하루 치 인내력이 바닥나려는 중이었다. 제발 그만 좀 물어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대로 애국가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아줌마는 다른 질문 없이 나를 진료실로 안내해 주었다.
 
 “똑똑.”
 
 아줌마는 문을 두드린 다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열었다. 심장이 다시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고 짜증도 사라졌다. 심지어는 데스크에 앉아 있던 매력적인 간호사조차 잊을 수 있었다.
 
 “딸깍.”
 
 진료실 안으로 두어 걸음 들어가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소파, 책장, 책상 그리고 노트북PC에 뭔가를 타이핑하는 의사 선생님이 보였다. 좁고 길쭉한 진료실 입구에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나는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에 앉아요?”
 “편한 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3인용 긴 소파 양쪽 끝에 일인용 소파가 마주 보며 놓여있었다. 의사는 여전히 타이핑을 멈추지 않고 있었고, 나는 당연한 듯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다가 멈췄다.
 
 “정말 아무 곳에나 앉아도 되나요?”
 “바닥이나 탁자만 아니면 됩니다.”
 “네.”
 
 나는 앉으려던 자리 건너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누가 봐도 이 사무실의 주인인 의사 선생님의 지정석 자리였다. 뒤통수 바로 뒤에서 들리던 다각다각하는 키보드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극장에 앉은 사람처럼 우리 두 사람은 유리창을 등지고 출입문을 보며 앉았다.
 
 “특별히 그 자리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출입문을 등지지 않고 정면으로 보고 앉으니 심리적으로 편안한데요.”
 “그렇습니까?”
 
 키보드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대신 의자 삐걱대는 소음이 등 뒤에서 났다. 나는 고개를 절반만 돌려 책장을 보며 말했다.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그냥 그 자리에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의사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몇 초가 지난 다음에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유주열 님?”
 “네.”
 “오늘 오전에 상담을 받고 오셨습니다.”
 “네. 잠깐이라고 하시더니 두 시간 넘게 붙들고 저를 고문하셨었죠.”
 “담당했던 임상심리사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고 별도로 메모까지 붙여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저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시더군요.”
 
 키보드 소음 대신 펜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났다. 볼펜이라기에는 너무 날카로웠고, 만년필이나 펜촉이라고 하기에는 부드러웠다. 수성펜이나 그와 비슷한 종류가 아닐까 짐작했다.
 
 “직업을 무직이라고 적어 놓으셨습니다.”
 “네.”
 “그 나이면 보통은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이 아닙니까?”
 “1학년 1학기 후 자퇴했어요. 그 얘기는 오전 상담하는 시간 전에 다 해 드렸었는데요. 설마 그 얘기를 여기서 재방송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짧게 줄여서 다시 말씀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왜죠?”
 “본인에게서 듣는 편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약속을 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 내 인생에 하등 쓸모없는 게 학교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랬더니 뭐라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죽여버린다 - 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친이 농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셨습니까?”
 “네. 대신에 딜을 걸었죠. 대학교까지는 바라지 마시라. 그랬더니 이번에는 죽인다는 말씀까지는 하지 않으셨지만, 불쌍한 표정으로 ‘대학생 아들’을 가지는 게 평생소원이라고 하시더군요. 아이씨.”
 “왜 그러십니까?”
 “그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가 우는 흉내를 내는 표정이라니. 정말 짜증이 났었거든요. 제가 먼저 제안했었죠. 입학은 하겠다. 하지만 기필코 중간에 그만둘 거다. 그러니 말리지 마라.”
 “협상이 이루어졌습니까?”
 “네.”
 
 뒤통수 뒤에서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말이 없었다. 결국, 나는 입학했던 대학교와 학과 이름을 댔다.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만 냈죠. 학교에 간 적이 모두 열 번도 되지 않았어요.”
 “억지로 간 학교에 학과치고는 성적이 나쁘지 않으셨습니다. 학과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는 명문대라고 할 정도로 상위권입니다.”
 “그러니까요. 다니기조차 싫었던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얼마나 제가 큰 고통 속에 살았을지 짐작도 못 하실 거에요.”
 “협상대로 대학은 자퇴했었습니까?”
 “몰라요. 학교에서 전화 몇 통이 왔었고, 우편물도 날아왔지만 읽지 않고 버렸거든요. 자퇴, 퇴학, 제적? 그중에 하나겠죠.”
 “그다음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뭐가요?”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작 학교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하셨잖습니까.”
 “네.”
 “그럼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에 뭘 하셨습니까?”
 “책을 읽었죠. 세수하면서 비누 냄새를 맡았고, 음식을 만들면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들었어요. 하루에 한 번은 읍내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고요. 마당에 있던 잡초를 뽑았어요. 대단한 일이었죠.”
 
 작게 들리던 펜 소리가 갑자기 더 커졌다.
 
 “대단한 일이라. 뭐가 그토록 대단한 일이었습니까?”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책 읽기, 세수하기, 음식 만들기,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잡초 뽑기와 음악까지. 소름이 끼치는 짜릿한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물론 학교에 다니면서도 그런 순간을 자주 맞이하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걸 말하면 늘 미친놈 취급을 받았거든요.”
 “예를 들어봐 주신다면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리요?”
 “미친놈이란 말을 어떤 상황에서 들으셨다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의사의 진지한 질문에 나는 ‘미친놈 취급하지 마라’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의 어떤 질문이나 태도가 내 마음을 후벼 팠는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짜증이 올라왔다.
 
 “물 끓는 소리를 예로 들어 볼까요. 커피도 내려야 하고 라면이나 된장국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루에도 두세 번은 물을 끓여야 하잖아요.”
 “네.”
 “전기 포트와 가스레인지에 따라 기포 터지는 소리가 다르죠. 약불, 중불, 강불에 따라서 보골거리는 강약이 다르고, 냄비에 담긴 물 높이와 용기의 모양에 따라서도 그 소리가 다르단 말이죠. 음의 높낮이가 달라져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말씀이 당연히 맞을 것 같습니다. 소리는 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 하루도 똑같은 소리가 나지 않아요. 물론 매일 아침에 750mL 맹물을 전기 포트에서 끓이면 거의 비슷한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죠.”
 “어떤 차원이 다른 겁니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속초 앞바다의 파도가 하루에서 수천 번 모래사장으로 밀려들어 오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이 생긴 파도는 없어요. 양재동 화훼시장에 수만 송이 장미꽃이 있고, 이 병원에도 수백에서 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지만요. 똑같이 생긴 꽃과 사람은 없죠.”
 “물론입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기 위해서 끓이는 전기 포트의 보글대는 소리도 음높이는 일정해요. 하지만 절대로 같은 소리를 두 번 들을 수는 없다는 거죠. 너무나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계속 말해야 하나요?”
 “왜 쓸데없습니까?”
 “어차피 선생님은 의사고 저는 환자로 여기에 왔고. 미친놈에게 적당한 약이나 하나 혹은 두 가지를 처방해 주시면 끝나는 거 같은데요.”
 “약 드시고 싶은 겁니까?”
 “아뇨. 전혀요. 처방은 받겠지만 먹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드릴 수 있어요.”
 “왜 그런 약속을 제게 하시려는 겁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고 그래서 잠시 멍하니 출입문을 보며 앉아 있었다.
 
 “선생님. 대화가 옆으로 너무 많이 샌 것 같지 않나요? 상담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나요?”
 “그건 제가 정하는 겁니다.”
 “언제 끝내실 건데요?”
 “오늘 유주열 님이 했던 오전 상담테스트가 뭔지는 알고 계십니까?”
 “몰라요. 하지만 미친놈을 가려내는 테스트 같아 보이지는 않더군요.”
 “맞습니다. 웩슬러 성인지능검사였었습니다. 표준편차 15짜리 테스트였고, 그 결과가 제 손에 있습니다. 인구대비 상위 2.5 퍼센트로 판정되었습니다.”
 “손뼉이라도 쳐야 하나요?”
 “테스트를 담당하신 선생님의 코멘트를 보면 유주열 님은 지속적으로 높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듯하다고 적어 놓았네요.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평가했습니다.”
 “절반은 동의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않아요. 어렸을 때 스트레스가 많았던 건 맞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괜찮 - 음, 사실은 괜찮지는 않았죠. 그랬으니 여기까지 온 거고요.”
 “입원치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의사 선생님은 의사가운 대신에 흰 티셔츠에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앉으세요. 아직 예정된 진료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기요. 선생님. 입원 어쩌고 그런 말을 또 들으면 곧장 나가겠습니다.”
 “이 사무실에 비상벨이 두 개가 있습니다. 벨을 누르면 대기 중인 남자간호사나 인턴이 출동하게 되는 거죠. 위험한 환자를 제압하고 저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위험이요? 위기?”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자리에 앉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유주열 님.”
 
 나도 모르게 ‘아이씨’라는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이곳이 병원이 아니었고 등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나이 차이 크게 나는 의사가 아니었다면 ‘발’이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분별력과 지금껏 배운 사회성의 도움으로 나는 참아냈다.
 
 “미치겠네.”
 “사실은 이런 경우는 드물지만 말입니다. 가족이나 보호자에게 끌려오시는 분을 제외하고서 진료실에 오시는 분은 모두가 자발적인 환자입니다.”
 “저는 일단 환자가 아니고요.”
 “그럼 왜 오셨습니까?”
 “약속했거든요.”
 “무슨 약속입니까?”
 “거기 기록에 나와 있지 않나요? 지난 일요일 밤에 이 병원 응급실에서 위세척해 주신 간호사였었는지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남자였는지 여자분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상태가 메롱이라서 정확하게 누군지 기억나지 않아요. 하여튼 그 비몽사몽 그동안에 저에게 온 어떤 분에게 약속했었어요. 정신과 상담 진료를 받겠다고 했었죠.”
 “위세척은 왜 받으셨습니까?”
 “같은 병원이니까 기록에 남아 있을 거 같은데요.”
 “유주열 님께서 직접 말씀해주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소파였지만 팔걸이는 딱딱한 나무였고 높이가 낮았다. 나는 양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길게 눕다시피 몸을 뒤로했다. 진료실 천장을 보며 말했다.
 
 “약을 잔뜩 먹었죠. 죽으려고.”

댓글(40)

쭈녕뿡    
선추천 후감상 입니다 이번에도 좋은작품 부탁드립니다
2020.06.15 07:29
메롱이군    
저도요
2020.06.15 08:39
hs*********    
돌아오셨다 ㅋㅋㅋㅋ
2020.06.15 09:29
젤고머    
2020.06.15 09:40
밥그릇대장    
오랜만입니당
2020.06.15 09:48
殺人微笑    
기다렿던 1편이 업로드 됫네요
2020.06.15 11:39
버마리스    
드디어 1편이 올라왔네요, 축하드립니다
2020.06.15 12:12
도피칸    
미친 또라이는 맞을거 같당.
2020.06.15 13:19
무투파란    
시작!
2020.06.15 13:46
주르망    
이번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2020.06.15 16:34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