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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

사람의 불시착 (1)

2020.05.11 조회 114,082 추천 1,883


 “정은서!”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평소 잠꼬대도 없이 숙면하곤 했는데 왜 대뜸 동생 이름을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요란하게 깼지만 몸은 개운했다.
 가위에 눌렸거나 불편한 자세로 잤던 것 같지도 않았다.
 
 “왕자님.”
 
 미친, 깜짝이야.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소리를 쫓아 눈을 돌린 곳에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누구신데 저희 집에······.”
 “푹 주무셨습니까.”
 “네?”
 
 한 명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피부색과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자랑하는 낯모르는 자들이,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누군가는 번쩍이는 대야 같은 걸 들고, 누군가는 그 옆에 하얀 수건을 들고, 또 누군가는······.
 
 “한 시간 뒤 아침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먼저 세안과 양치부터 하시지요.”
 “네?”
 
 사람이 진심으로 당황하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네?’밖에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도 ‘네?’밖에 없다. 딱 지금의 내가 그렇다.
 몰래카메라인가? 은서가 어디 방송국에 사연 신청이라도 한 건가?
 이제 막 깨어난 머리가 최적의 답을 찾아 삐거덕거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깨셨나 봅니다.”
 “그렇기는 한데요······.”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이겠지요. 먼 길을 오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여독?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요즘 예능에서는 몰래카메라를 이렇게까지 하나?
 회사와 집만 오가는 내게 주입하기엔 너무 디테일한 설정이다.
 은서는 어디 있지. 상황실 같은 데서 날 지켜보고 있는 건가?
 
 “그, 여기가 어딘가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질문의 선택지도 별로 없었다. 휘휘 둘러본 실내는 내 방도, 거실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우리 집만 한 크기의 공간에, 친구 원룸만 한 크기의 침대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벽지에 저게 뭐야. 설마 진짜 금은 아니겠지?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중년의 남성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옆에 서 있던 사람 중 하나에게 눈짓을 하니, 한 소년이 재깍 알아듣고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따라 건넨다.
 
 “일단 속부터 차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 고맙습니다.”
 
 나는 얼결에 잔을 받아 절반을 비웠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맹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물이 아니면 어쩌려고 납죽 받아마셨지. 이거 그냥 납치인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평범한 물이었다.
 그리고 이건 납치나 TV 프로그램 출연이 아니었다.
 빙의였다.
 
 “아.”
 
 세숫물에 비친 내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고, 내가 ‘아.’ 한 마디로 그 상황을 넘긴 건 기적에 가까웠다.
 속으로는 팔짝 뛰고 비명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제 환복하실까요?”
 “······네.”
 
 세안과 양치를 마친 내가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서 이상하게 굴어 의심을 사거나,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건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아까는 잠이 덜 깼다는 말로 변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일단은 내 처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 게 중요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왕자님.”
 
 어려 보이는 시종 두어 명이 곁으로 와서 내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낯선 사람이 몸에 손을 대는 걸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하도 황당하니 그저 묵묵히 시중을 받게 됐다.
 
 빙의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들을 보면, ‘꿈이라기에는 현실감이 넘쳤다.’는 묘사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다.
 나는 굳이 살을 꼬집어보지 않아도 이게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피부에 닿는 천의 질감과 옷깃이 스치는 소리 모두 지나치게 생생했다.
 
 “불편하신 데는 없는지요. 황실 재단사들이 신국 왕실의 평복을 참고하여 만든 옷입니다.”
 “꼭 맞네요. 괜찮아요.”
 
 나는 신기하게 들어맞는 어깨와 품을 한 번씩 만져보며, 머릿속으로 힌트를 긁어모았다.
 건물 내부의 꾸밈새와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 소위 ‘근세 판타지’풍의 세계관인 게 분명하다.
 나는 어제 집에서 읽은 웹소설 <죽은 줄 알았는데 정복 군주>를 후보군에서 제외했다. 그건 주인공이 고대 로마 황제의 몸에 빙의하는 내용이었다.
 
 “여기 거울입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내가 전체적인 매무새를 확인할 수 있도록, 중년인이 시종들을 시켜 커다란 전신거울을 가져왔다.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수면에 비친 모습으로는 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면, 곧바로 내가 어디에 떨어진 건지도 알 수 있을까?
 
 “······음.”
 “마음에 드십니까?”
 
 훤칠한 몸, 환한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슬쩍 웃어보니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누가 봐도 미남이라고 말할 만한 청년이 거울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네, 고맙습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맵시가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 정도로 생긴 인간이면 아예 주인공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가 읽은 작품 주인공 중 금발은 없었고, 대세는 검은 머리였다.
 그렇다면 ‘나’는 주인공의 절친, 동료, 맞수 내지는 중간 보스 따위의 주연급 조연일 확률이 높았다.
 귀가 플랜도 불확실한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까 싶어 심경이 복잡해진다.
 
 “그럼 이제 식사를 하러 가시지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길을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 속의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키는 나랑 비슷한가······. 어?
 
 “······어디서 봤는데.”
 “왕자님?”
 “아, 죄송해요. 별거 아니에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중년의 남성을 따랐다. 내 뒤로는 시종들이 붙었다.
 나는 널따란 정원을 투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창문 앞을 지나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내가 빙의한 이 몸은 ‘신국’에서 온 ‘왕자’다.
 묘하게 낯이 익지만, 누군지는 모르겠다.
 왕자의 이름과 신국의 국호는 아직 듣지 못했다.
 어떤 목적으로 여길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황실’이 있으니 황제가 있는 제국이겠지만, 국가명 역시 알지 못한다.
 
 “이쪽입니다.”
 
 중년인은 식당 문을 열고 나를 거대한 식탁 앞으로 안내하더니,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의자를 빼주었다.
 
 “곁들일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대륙 남부에서 난 커피콩과 북부에서 재배한 찻잎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뜬 직후부터 모든 대화와 일정을 주도하고 있는 이 중년의 남성은, 자신을 ‘뱅자맹 지라르댕’이라고 소개했다.
 ‘부족한 몸이지만 이곳 쥘리에트 궁의 시종들을 이끌고 있습니다.’라는 덧붙임이 있었으나, 사람의 이름과 궁의 이름 둘 다 너무나 생소했다. 젠장.
 
 “저는 허브차 종류로 부탁드릴게요.”
 
 말을 하고 나서야 내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원래의 내 몸은 심한 위염을 앓고 있어 카페인과 알코올은 물론 탄산도 편히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페에 가면 늘 주문하던 대로 내뱉은 건데······. 이 몸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와인이나 한 잔 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대책 없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제가 부주의했군요.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시종일관 표정을 읽을 수 없던 뱅자맹의 얼굴 위로 잠깐 균열이 일었다.
 내가 실수를 했나 싶어서 다른 시종들을 흘끔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낯빛은 다른 의미로 심상치 않았다.
 어딘가 감탄하는 기색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차 한 잔에 이렇게 유난스러울 일인가?
 
 “카밀러를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인 끝에, 주둥이에서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등장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시는지요?”
 “네, 맛있습니다. 간이 딱 좋아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갓 구워 따끈따끈한 빵, 크림처럼 보드레한 수프, 생전 처음 맛보는 드레싱과 좋은 향이 나는 고기 요리에 신선한 과일까지.
 눈이 즐겁고 입도 행복한 아침 식사였다.
 나를 깨워서 씻기고 새 옷까지 입혀 데려온 사람들이 이제 와 음식에 독을 탈 것 같지도 않아서, 나는 마음 놓고 끼니를 즐겼다.
 배를 든든히 채워야 머리도 더 잘 돌아가고, 집에 갈 추진력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깨끗하게 드셨군요.”
 
 뱅자맹이 의외라는 말투로 입을 뗐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포크로 샐러드 접시의 바닥을 긁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재빨리 식기를 내려놓았다.
 
 “하하,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나 봐요. 평소보다 과식했네요. 잘 먹었습니다.”
 
 나는 뱅자맹에게서 들었던 말을 인용했다.
 신국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지인이 먼 길이라고 했으니 먼 길이겠지.
 
 “그럼 후식은 물리라고 할까요?”
 “아뇨, 후식 배는 따로 있는데요.”
 
 *
 
 후식으로는 따뜻한 루이보스차를 마시며, 커스터드가 꽉 들어찬 에그타르트를 해치웠다.
 세 조각째 베어 물 때는 시종들도 먹고 싶었는지 ‘와’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배부르다······.”
 
 방으로 돌아온 내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뱅자맹이 건네준 담요를 덮자, 시종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란 적도 없지만 아무래도 카리스마 있는 첫인상을 주지는 못한 것 같았다.
 
 “왕자님, 읽으실 만한 책을 좀 갖다 드릴까요?”
 “네, 고마워요.”
 
 시종 아이 하나가 친근하게 말을 붙이기에 내가 넙죽 받았다. 책 좋지.
 이곳의 단서만 얻을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행여 웹소설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콘텐츠에 들어왔나 했으나, 그건 오판이리란 감이 왔다.
 웹툰이나 만화책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거의 읽지 않았다.
 가족들과 영화나 드라마를 종종 시청하긴 했지만, 이런 풍경의 시대극은 최근 접한 적이 없다.
 스무 살 이후론 문학 서적과도 소원해졌고, 그렇다고 뮤지컬은 너무 나간 것 같았다.
 누군가의 창작물이 아닌 진짜 ‘별세계’에 떨어졌단 막막한 가정은 하기 싫었다.
 결국 남은 건 웹소설뿐인데, 출퇴근길에 들춰본 작품의 수가 적지는 않았기에 아직까진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다음 일정은 뭔가요?”
 
 내가 뱅자맹에게 물었다.
 방과 식당을 왕복하며 복도에 놓인 장식품이나 상감 문양 같은 것을 유심히 살폈지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숟가락과 나이프 끝에 새겨진 문장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다음 일정은 없습니다.”
 
 뭐지, 방금 살짝 난감해 보이지 않았나?
 
 “지난밤 늦게 도착했으니, 오늘은 푹 쉬게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일정은요?”
 
 묵묵부답. 역시 뭔가 있다.
 전형적인 집사 캐릭터처럼 생긴, 빈틈없는 그의 태도에 찰나의 흔들림이 있었다.
 반대로 내 머리는 서서히 맑아졌다.
 
 “이번 주 내내 쉬나요?”
 “네.”
 “그래도 이 궁에만 있으면 심심할 것 같은데. 다른 곳을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마지막 질문은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궁에 머물게 된 외국의 왕자인데, 외교적인 일정이 없다는 게 미심쩍었다.
 그걸 통보하는 뱅자맹의 얼굴빛도 영 찜찜했다.
 
 “죄송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왕자님.”
 “왜요?”
 
 나와 똑바로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오래지 않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정 답답하시다면, 정원 산책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제 귀국 일정은 알고 계시나요?”
 “······.”
 
 그렇구나. 이 왕자는 여기 갇힌 것이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혈혈단신으로 와서, 아마도 텅 비어있을 궁에 감금됐다.
 대접은 나쁘지 않지만 산책을 나설 때조차 시종의 의견을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소화도 시킬 겸 바로 걷고 싶습니다. 아까 창밖으로 보니까 정원이 참 예쁘더라고요.”
 
 나는 볼모가 됐다.
 
 “······윗전에 먼저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뱅자맹이 시종 중 하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로메로 궁의 카퓌송 님을 찾아가, 예서 왕자님께서 정원 산책을 요청하셨다고 일러라.”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들은 것을, 드디어 귀에 꽂힌 해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움에 숨이 턱 막혔다.
 
 ‘예서’는 내 이름이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댓글(289)

망했다    
아 여성여성물이네 실망
2020.05.18 19:31
미치곳    
잘보고갑니다! 선호작, 추천 박고 갑니다. 시간 남으시면 제 소설도 한번 놀러와 주세요. 건필하시길 기원드리겠습니다 ^^7
2020.05.22 20:38
rh*********    
꼭 문피아에서만 저런 댓글 달리던데... 댓글 신경쓰지말고 힘내세요!!
2020.05.28 20:02
이숑이숑    
오..주인공이 되게 예의바르네요 마음에 들어요ㅎㅎ
2020.06.06 01:09
라힘턴    
와 뭐지
2020.06.06 18:04
개개구리    
대체 여성여성물이 뭐지 신조어냐
2020.06.06 21:58
맛집기행    
재밌다는 소문 듣고 찾아왔습니다
2020.06.06 22:28
[탈퇴계정]    
예의가 바르도다 합격
2020.06.07 00:59
[탈퇴계정]    
예의 그딴건 솔직히 싸가지 없지만 않으면 예의바를 필요까진 없고 이런 소설류는 굳이 주인공을 원작 소설의 주인공들과 억지로 엮을라는 짓만 안하면 됨. 솔직히 엮는거 볼 바에는 내가 남자여도 그냥 순정물 봄. 실제로 몇개보기도 했으니까 하는 말
2020.06.07 02:57
고래뷰    
20화까지 봤는데 히로인은 업는거같고... 불안하네 이거
2020.06.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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