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푸른 와이번
프롤로그
불안한 암시
꾸에에엑.
꾸에에엑!
그것은 지옥의 절규이자 절망의 비행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깊고 무거운 그림자의 주인공 와이번. 마치 바라만 보아도 눈이 멀어버릴 듯 치열한 살기를 내뿜으며 군무를 즐기는 와이번의 무리.
보통 와이번보다 열 배 가까이 큰, 절망적인 변종이었다. 그들의 강철 같은 눈빛은 햇살마저 튕겨냈다. 기괴하면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장엄한 비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빛살보다도 민첩한 몸통, 날개인지 강철인지 모를 정도로 강해 보이는 날개, 독이 있어 그 누구도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날카로운 이빨과 꼬리는 신의 치명적인 실수임이 분명했다. 악마의 상징이며 광포(狂暴)한 와이번에게 독까지 선물하다니…….
바로 그때, 하늘이 벼락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마치 사열 받는 군대처럼 질서정연하게 와이번의 무리가 길을 트는가 싶더니 그 터진 공간 사이로 햇살이 잠시 눈부시게 쏟아졌다. 빛을 따라 와이번의 무리가 진저리를 치며 출렁거렸다. 내리는 고요를 비집고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절망처럼 내려앉았다.
찬란한 햇살을 등지고 웅장한 날갯짓으로 몸을 드러낸 것은 바로… 푸른 와이번이었다.
온몸의 푸른 광택이 갓 물에서 나온 것처럼 촉촉하게 번득이는 푸른 와이번. 다른 와이번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며 죽어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불사(不死)의 강맹한 느낌, 그 섬뜩함을 따라 찬란하게 번득이는 살기는 햇살보다 무겁고 깊어 보였다.
수많은 와이번의 무리 가운데 가장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며 ‘와이번의 제왕’이라 불리는 놈으로, 마치 드래곤처럼 보였다. 그러니 ‘드래번’이나 ‘와이곤’으로 불려야 할 것 같았다.
놈은 와이번의 무리 가운데로 유유히 파고들며 몸을 나선으로 비틀어 천지를 뒤흔들 듯한 일성을 토해 냈다.
꿰에에엑!
하늘이 뒤틀리고 구름마저 물러앉았다. 그 괴성에 맞추어 와이번의 무리들은 고요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복종의 의미였다.
하지만 다른 무리와는 달리 푸른 와이번을 유유히 바라보는 단 한 마리의 와이번이 있었다. 무리에 비해 조금 몸통이 큰 이 와이번은 처음부터 푸른 와이번에게 호의적이질 않았다. 푸른 와이번은 천천히 눈빛을 돌려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와이번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너무도 깊어 흡사 지옥의 절망과 닮았다. 와이번들은 그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숨차 했고 두려움에 진저리를 쳤다.
허공에 완강하게 버티고 선 와이번의 날갯짓이 햇살 끝에서 한두 번 퍼덕이는가 싶더니 그 두 번째 날갯짓이 채 멈추기도 전에 푸른 와이번이 내리꽂혔다. 벼락같은 몸짓이었다.
촤악!
바람이 몸서리를 치며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번!
푸른 와이번은 단 한 번에 커다란 와이번의 목을 물어 숨통을 잘라버렸다. 사지를 떨며 부질없이 몸부림을 치는 놈에게 거대한 불덩어리가 쏟아졌다.
와이번 브레스!
믿기지 않게도 푸른 와이번에게서 그 절강의 화공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에인션트 급의 드래곤들이나 가능한 마그마 브레스처럼 보였고, 이미 목숨을 놓은 와이번의 몸통이 불길에 휩싸여 다시 한 번 고통에 떨었다.
꾸에엑!
푸른 와이번이 유유히 승자의 포효를 터뜨리자 절명한 와이번은 숯덩이가 되어 지상을 향해 빠르게 추락해 갔다. 와이번 무리는 지상으로 떨어지는 와이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푸른 와이번의 브레스에도 익숙해 보였다.
“…….”
깊은 침묵은 충성을 의미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푸른 와이번의 위용 아래 몸을 쉴 수 있는 것이다.
와이번의 제왕 푸른 와이번.
그를 거역한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지상 저만치에서 와이번이 떨어지며 일으킨 먼지가 작은 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푸른 와이번은 유유히 몸을 돌려 용암을 뿜어내는 화산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그 날갯짓은 차마 장엄했다. 바람이 물러나고 구름이 진저리를 쳤다. 그 뒤를 이어 와이번들도 푸른 와이번을 따라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지축을 뒤흔드는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무겁고 음산했다.
그것은 마치 지상의 종말을 고하는 도도한 비행 같았다. 저 많은 무리가 도달하는 대륙은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어떤 생명체도 지옥에서 비껴날 수는 없다. 더구나 차마 드래곤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하고 지옥의 사자와도 같은 저 푸른 와이번의 맹렬함이란…….
맹렬한 화산에 도달한 푸른 와이번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눈매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녹일 듯,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으헉!”
미누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손에서 판타지 책 한 권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잠시 시간이 난 틈에 숙소에서 판타지를 읽다가 깜박 잠이 든 것이었다. 뇌리엔 아직도 섬뜩하다 못해 몸서리쳐지는 푸른 와이번의 시선이 따갑게 출렁대고 있었다.
겨우 식은땀을 닦은 수련의 황미누는 소매에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가운을 여미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들고 나서야 피식 선웃음을 지었다.
1. 소변 사건(Urine Accident)
“몇 살?”
“만 스물두 살이래, 글쎄.”
“말도 안 돼. 스물두 살에 어떻게 수련의가 될 수 있어?”
“황 선생, 어릴 때 미국 가서 거기서 공부했대. 뭐, 머리가 좋아서 월반에 월반을 했고 의대도 최단기간에 졸업했다지?”
“와아! 끝내준다. 믿기지 않네.”
“어리다고 얕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전공에 대해서는 성깔 대단하대. 며칠 전에 응급실 수선생도 호되게 당했대.”
“당해? 몸짱 같지는 않은데?”
“그런 소리 마. 실력이 짱이란 얘기지. 그리고 보기보다 벗으면 죽인다던데. 게다가 검도 실력도 고수라는 소문이야. 검도동호회 사범선생도 대련에서 아주 아작이 났대. 아주 날아다닌다더라.”
“응급실 수선생이 당할 정도면 만만치 않은데. 게다가 검도사범 5단이라던데, 그거 진짜야?”
“당근 진실이지. 수선생이 딴에는 왕고참이니까 경험으로 밀고 나간 모양인데 황 선생 실력이 진짜 짱이라더라. 검도사범도 괜히 한번 폼잡아보려다가 박살난 거고. 오죽하면 그 깐깐한 진료부원장님도 아주 뻑 갔대.”
“그렇게나?”
“그뿐 아니야. 황 선생 아버지하고 부원장님이 대학 동기고 BF라던데.”
“맞아. 그래서 미국의 유수 병원도 뿌리치고 고국을 배우라고 부원장님에게 떠맡겼다지?”
“애인은? 여자는 있대?”
“있겠지. 저런 남자라면 미국에서도 빵빵한 인사들이 그냥 뒀겠냐? 뭐, 부원장님이 사윗감으로 팍 찍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에유… 그냥 팍 낚아채기만 하면 인생 한 방에 업그레이드되는 건데……. 일이나 하자.”
미누는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내과병동으로 들어섰다. 처음엔 저런 수군거림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이젠 농담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몸짱에, 수재에, 부원장 사윗감에, 게다가 검도의 초고수?”
미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전혀 없는 소리는 아니지만 과장된 측면도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PK들이 잔뜩 긴장을 한 채 인사를 하며 물러섰다. PK들이란 실습 나온 의대생을 이르는 말인데, 선배 의사들만 보면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게 특징이다.
내과병동 간호사 데스크가 가까워오면서 미누의 동공이 살며시 확장되고 있었다. 미누는 시야에 들어오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최근 들어 갑자기 3층병동을 좋아하게 된 미누였다.
간호사 데스크에 이르러 미누는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차트를 받아 체크를 하고 입원실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주위를 남몰래 두리번거린다.
308호의 환자는 당뇨였다. 당뇨가 심해서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 입원한 환자로, 48세의 여자였다. 지금은 신장까지 나빠져서 당뇨병성 신증의 소견까지 보이고 있어 검사 결과에 따라서 투석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환자였다.
차트를 정리하고 돌아서려는데 한 명의 간호사 실습생이 들어왔다. 미누는 순간 숨이 터억 막히는 걸 느꼈다.
그녀였다.
2주일 전 처음 본 순간부터 미누를 환상처럼 사로잡은 여자.
볼품없는 실습복 속에 가려진 그 아름다움에 한마디로 미누는 뻑 가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창해.
처음 그녀를 만난 곳은 소아입원실이었다.
목에 깁스라도 한 듯 힘을 주고 다니는 왕고참 수선생조차 손을 들어버릴 정도로 혈관이 보이지 않는 꼬마아이가 있었다. 결국 떠넘기다시피 인젝션(injection:주사)은 의사에게 넘겨졌고 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던 미누가 얼떨결에 그걸 맡았다.
미누는 별 생각 없이 나비바늘을 넘겨받았다.
꼬마 옆에는 금세라도 눈물을 찔끔거릴 듯한 엄마와 간호사들이 여러 명 붙어 있었다. ‘웬 난리들이람’ 하며 꼬마의 팔을 토니켓(채혈 시 팔뚝을 묶는 노란 고무줄)으로 묶고 정맥을 찾던 미누는 한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눈에 익은 간호사들 틈에 서서 미누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 아니, 여자라기보다는 판타지에 나오는 엘프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 창해가 거기 있었다.
미누가 얼이 빠진 줄을 모르는 수선생이 초조하게 재촉했다.
“황 선생님…….”
“아, 알았어요.”
미누는 혈관을 찾으면서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창해를 훔쳐보았다.
이창해.
그녀의 가슴에 쓰여진 이름이 클로즈업되며 맹렬하게 시선을 자극했다. 심장의 박동주기도 출렁거렸다.
그녀는 간호사 실습생이다. 그건 차림새만 봐도 알 수 있다.
엉뚱한 곳에 마음을 두어서였을까? 멋지게 한 방에 성공하려던 미누의 주사바늘은 꼬마의 살 속에서 헛손질만 해대다 허망하게 빠져나왔다.
“우아아앙!”
꼬마가 다시 몸부림을 치며 병실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나비바늘 하나 더 줘보세요.”
미누는 진땀이 흐르는 것을 참으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미누는 꼬마의 반대쪽 팔에서 다시 혈관을 찾기 시작했다. 작지만 느낌이 왔다. 하지만 위치가 중요했다. 꼬마가 조금만 팔을 움직여도 혈관의 위치가 변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하는데…….’
미누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간호사들에 대한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혈관보다도 더 마음이 쓰이는 저 간호사 실습생 이창해, 그녀의 시선은 진료원장이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도 더 뜨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작은 바늘이 스킨을 뜨며 들어갈 때 미누는 속으로 ‘하느님’ 하고 중얼거렸다.
‘아자!’
다행히 성공이었다. 미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늘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검붉은 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됐어요.”
지켜보던 간호사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미누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며 일어섰다.
보란 듯이 병실을 나서며 미누는 슬쩍 창해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을 미누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저 슬쩍 창해의 모습을 한 번 더 훔쳐볼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운명처럼 창해도 미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길이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미누의 심장은 맹렬하게 출렁거렸고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창해가 살며시 웃었다. 홍조가 벚꽃처럼 아름답게 번진 얼굴로.
둘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꿈결 같은 감성을 사정없이 깨뜨린 건 수간호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얘, 너희들 멍청하게 섰지 말고 환자 분 침대 시트 좀 갈아드려라. 체온도 체크하고.”
한순간에 창해의 시선이 경직되며 수간호사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아쉽지만, 미누는 이해한다. 실습생에게 병원이란 그것이 의사건 간호사건 의료기사건, 모든 것이 경이의 대상이다.
병실을 나오면서 미누는 입가에 함박 미소를 머금었다. 그 이후로 미누는 3층병동에 오는 것을 즐겨하게 되었다. 아니, 때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지나가곤 했다.
목적?
말해서 무엇 하랴? 당근 창해를 보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그녀를 세 번째 보는 날이었다.
미누는 해야 할 진료를 잊은 채 창해가 하는 행동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창해는 소변을 모으고 있었다.
내과 환자 중에는 신장기능 검사를 위해 24시간 소변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그걸 다 합치면 1리터짜리 링거 병으로 여섯 병이 넘는 사람도 있었다. 큰 콜라 페트병으로 네 병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럼 그 많은 소변으로 무엇을 하냐고?
당근 검사를 한다.
그렇게 모은 소변을 임상병리과로 가져가면 거기서 각 병마다 조금씩 검체를 취해 검사를 하고 나머지는 폐기하는데, 실제 검사에 드는 양은 1,000분의 1도 될까 말까 하다.
아무튼 창해는 그 냄새나는 소변을 가져가기 위해 목 짧은 작은 바구니 위에 소변 병을 담고 있었는데, 미누는 갑자기 이 병동의 간호사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예쁜 여자에게 소변이라니…….
편협하다고 비난을 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눈에 든 이성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경향이 있으므로. 더구나 그 양으로 보아 창해 혼자 들기엔 너무 벅차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변을 들고 일어서던 창해는 왠지 위태로워 보였고 바로 옆 환자 침대의 모서리에 팔이 부딪히면서 그만 바구니를 놓쳐버렸다.
순식간이었다.
미누가 미처 도와줄 시간도 없이 허공에 붕 뜬 여섯 개의 링거 병. 병들은 마치 느린 탐색 화면처럼 잠시 멈추었다가 일시에 수직으로 하강했다.
미누는 차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와장창!
정해진 순서처럼 병실 안에는 작은 폭탄이 터진 듯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허억! 냄새…….”
“어우! 지린내.”
“저걸 어떡해.”
놀란 환자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토해 댔다.
창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파리한 얼굴로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하긴,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병원에서 실습생이란 심하게 비유하면 있으나마나 한 존재다. 때로는 그들이 귀찮다. 실무를 가르쳐주고 보여줘야 하고 실습 성적까지 매겨야 하니 업무에 바쁜 사람에겐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환자의 샘플에 손상을 가하거나 잃어버리거나 하는 행위는 바로 죽음 그 자체였다.
“어우, 냄새! 미치겠네.”
환자들은 일제히 코를 막고 진저리를 쳤다.
당연한 일이다. 자그마치 5리터에 달하는 소변이 강물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금방 받은 것이 아니라 하루가 경과된 것들이니 그 냄새가 오죽하랴.
하지만 꼭 한 사람, 아주 난감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변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변이 엎어지자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양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미누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사태 수습에 안절부절못하는 창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창해의 손발도 소변에 흠뻑 젖었다. 이 가련한 천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그저 벌벌 떨고만 있었다.
샘플을 쏟아버렸다는 것은 곧 그녀의 실습 성적이 낙제에 가까울 거라는 예고이자, 비교적 위계질서가 엄격한 간호과의 모진 질책을 감내해야 함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병원에서 샘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까.
미누는 손수건을 내밀며 침착하게 말했다.
“가서 마포걸레 좀 가져와요.”
미누는 유리조각을 모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10여 분이 걸렸다. 다행히 그동안 병원 직원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환자에게는 비교적 쉽게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 창해가 벌벌 떠는 모습을 본 환자가 자기 딸 같다며 소변을 다시 받겠다고 흔쾌히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창해에게 소변을 옮기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 고참 간호사였다.
“걱정 말아요. 내가 잘 설명해 줄 테니까. 그리고 다음부터는 샘플을 운반할 때 특별히 조심하세요.”
“네에.”
창해의 얼굴이 빨개졌다. 창피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아, 더구나 그 냄새란…….
미누의 몸에서도 온통 지린내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간호사 데스크로 돌아온 미누는 수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소변이 약간 오염이 된 것 같아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네요. 오늘 것은 제가 치웠으니까 수고스럽지만 내일까지 다시 좀 샘플링해 주세요.”
“그래요? 별 이상 없는 것 같던데…….”
“수선생님, 그럼 내가 뭘 착각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요?”
미누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전공에 있어서라면 누구보다 프라이드가 강한 미누였으니 시비를 거는 자에겐, 설령 그것이 스태프라고 해도 결코 굽힘이 없었다.
“알았어요.”
수간호사는 떨떠름하게 대답을 했다.
미누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슬쩍 창해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개지고 있었다.
대충 샤워를 마친 미누는 로비로 나왔다. 아무래도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 뒤틀린 속이 진정될 것 같았다.
커피를 빼 들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 선생님.”
커피를 쏟지 않으려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별안간 눈이 확 부셔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 이창해였다.
“선생님 맞으시군요.”
그녀의 이미지는 청초했다. 하루의 실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듯 캐주얼로 갈아입은 모습은 뱃사람을 유혹한다는 전설의 로렐라이와도 같이 청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커피 드시려고요? 좋아하시나보죠?”
“아, 아니에요. 마실래요?”
미누는 말을 더듬으며 커피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제가 뽑아 마실게요.”
그녀는 극구 사양하며 동전을 자판기에 넣었다. 하얀 손이 미누의 동공을 자극했다.
“아깐 정말 고마웠어요. 전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그랬을 거예요. 병원에서 샘플을 잃어버린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거든요.”
“그건 아는데… 24시간 소변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이었어요.”
창해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 수선생님한테 엄청 깨지고 실습 점수도 엉망으로 나왔을 거예요. 그럼 장학금도 못 탈 테고……. 정말 고마워요.”
‘당근 고마워야지.’
미누는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라고 말하면 체면이고 뭐고 덥석 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병원이다. 그녀는 간호사 실습생이고 미누는 의사다. 그 정도 일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얄팍한 속을 내보이는 짓이었다. 미누는 속내를 감추고서 실습은 재미있냐고 물었다. 그녀가 가벼운 미소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저는 아직도 코에서 소변 냄새가 나는데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웬걸요, 방금 샤워했어요.”
미누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 가볼게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 핸드폰 넘버 좀 알려주세요…….’
미누는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그런 말이 맴돌았지만 끝내 꺼내지 못했다. 미누는 창해가 사라진 병원 밖을 내다보며 공연한 기대감에 중얼거렸다.
‘황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그럼 내 이름도 알고 있겠네? 어떻게 알았지? 혹시 그녀도 나에게 마음이……?’
2. 이상한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미누는 5층 버튼을 눌렀다. 안에는 미누 혼자였다.
이 병원에는 4층이 없다.
‘4’ 자가 동양에서는 불길한 숫자라 하여 한국의 모든 병원에는 4층 표기가 없다. 그런 것은 미국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에도 13층이 없는 병원이 있다.
만일 4층이 있다면?
짧은 시간에 미누는 상상에 빠진다. 3층을 지나 어느 날 버튼에도 없는 4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거기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판타스틱할까?
심야에는 이런 호기심이 더욱 마수를 뻗친다. 가령 새벽 2시쯤 응급환자를 보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라면 미누는 3층과 5층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불현듯 그곳에 ‘4’라는 숫자가 있어 다른 세상으로 안내해 갈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
미누는 판타지 마니아다.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한국에 와서도 틈만 나면 판타지 소설을 읽어치운다. 아마 줄잡아 1,000권 정도는 해치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일상을 판타지아로 착각할 때도 있을 지경이었다.
5층에 내려선 미누는 진료를 마친 후 수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왕고참 수간호사들은 표정에도 레벨이 있다. 의사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바로 이들 수간호사들이다. 미누는 두어 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어…….”
“왜요? 뭐 할말이라도 있나요?”
“그게 아니고… 이번 간호사 실습생들… 언제 실습 끝나죠?”
“그건 왜요? 걔들이 또 뭐 실수했어요?”
“아, 아뇨. 그냥 병원이 좀 산만해서.”
말을 마침과 동시에 미누는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망설임 끝에 한 말이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건 수간호사에게 공연한 시비의 빌미를 제공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말씀이 좀 심하네요. 산만하긴 PK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수간호사는 미누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반격했다. PK들은 의대 실습생으로, 간호사들 입장에서 보면 간호사 실습생들과 다를 게 없었다.
“쩝, 그렇군요.”
“이번 기수 애들은 주말이면 끝나요. 다음 주에는 새로운 애들이 올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유린(urine:소변)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수간호사가 코를 잡으며 주변의 간호사들에게 물었다.
“수고하시죠.”
미누는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뜨끔한 가슴으로 돌아섰다.
“이번 주면 끝난다고?”
미누는 중얼거리다가 앞에서 걸어오는 두 명의 PK를 보았다.
“PK선생.”
미누가 그들을 부르자 둘은 경직된 모습으로 멈췄다. 병원에서 PK는 수련의들의 밥이다. 수련의나 전공의가 하품만 해도 경기를 하는 처지였다. 얼마나 군기를 잡으면 코끼리를 캔에 넣으라고 시키면 넣는다는, 전설 아닌 전설까지 있는 판이었다.
“아, 별일 아니고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오늘 목요일인데요.”
한 PK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목요일? 고마워요.”
미누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수련의 생활을 하다 보면 요일 개념이 없다. 아니, 날짜의 개념도 없다. 사람들의 옷이 짧아지면 여름이 왔나보다, 두꺼워지면 겨울이 왔나보다 하며 살아간다.
미누는 담당 환자를 마저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 돌았나?”
숙소로 돌아오니 방을 같이 쓰는 장 선생이 침대에 누운 채 굵직한 경상도 억양으로 말했다.
“예. 한잠 때리려고요?”
“하모. 어제도 응급환자 때문에 두 시간밖에 못 잔 기라. 황 샘은?”
“저는 잠 대신…….”
미누가 판타지 소설책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참말로 영계가 좋긴 억수로 존네. 잠 안 자고 하고 자픈 일도 다 있꼬. 내는 잠이 최고라카이. 아! 내도 황 샘만할 때는 3일을 안 디비자도 끄덕 없었는데. 하매 늙었나?”
“판타지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장 선생님도 한번 보면 홀딱 빠질걸요?”
“이거 와 이카노? 내사 그 좋아하는 게임할 시간도 없는데.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해 본 지가 언젠지도 모르겠구마. 아이디하고 비번도 생각 안 나는 기라. 한때는 디아블로에서 아마존을 99까지 키웠었는데 말이제.”
“그런 게 다 이런 판타지에서 온 게임이잖아요. 더구나 책은 아무 때나 읽을 수도 있고…….”
“그기사 황 샘이 아직 어리니까 그카지. 함 세파에 찌들어봐라.”
“에이, 좋아하는 기호야 나이하곤 상관없지 않나요?”
“아, 참! 그 얘기 들었나?”
“무슨 얘기요?”
“우리 병원에 영화 찍으러 온다 카는 말.”
“영화요?”
“하모. 무신 판타스틱 스릴러라던가 카던데 우리 병원을 배경으로 촬영한다 카더라. 초일류 배우들이 다 출연한다 카던데.”
“재미있겠네요. 나도 오면 봐야지.”
“때 빼고 광내고 있어보래이. 또 아노? 출연 기회가 생기면 황 샘이 캐스팅될지. 황 샘이야 부원장님이 팍팍 밀어주지 않노?”
“또 그 얘기예요? 밀어주긴 누가 밀어준다고…….”
“이기 와 이카노? 부원장님이 사윗감으로 팍팍 찍은 거 모르는 사람이 어데 있다꼬.”
“사윗감은 무슨 사윗감이에요.”
미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웬수… 좋으면 조타 카지. 관두라카이. 내사 마 잠이나 자야겠구마.”
아직도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 선생이 몸을 돌렸다.
판타스틱 스릴러 영화 촬영?
미누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주말이다. 창해의 실습이 끝나는 날이 바로 주말인 것이다. 실습생들이란 한번 가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운이 좋다면 그녀가 졸업 후에 이곳에 취직할 수도 있지만 그건 확률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미누는 갑자기 속이 타기 시작했다.
주말이라면 이제 고작 이틀이 남았다. 자칫하면 한 번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미누는 아까 창해에게 연락처라도 물어볼걸, 하는 아쉬움을 안은 채 책을 넘겼다.
이번 판타지는 선한 세계의 힘을 되살릴 수 있는 공주를 두고 마법사와 성주가 벌이는 멜로 판타지였다. 성주는 공주를 사랑하면서도 아직 고백할 기회를 맞지 못하고 있다. 늘 아슬아슬하게 둘의 운명이 어긋나면서 미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성주의 족적을 따라 책이 몇 장인가 넘어가는데 호출 콜이 요란하게 울렸다. 뒤돌아보니 장 선생은 완전히 꿈나라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미누는 문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층.
버튼을 누르려다 미누는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이나마 분명 4층 버튼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아도 그건 분명 ‘4’ 자였다.
“4층 버튼은 없을 텐데?”
의아히 여긴 미누가 4층 버튼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숫자는 3으로 변했다.
“내가 잘못 봤나?”
미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3층에서 내렸다.
소동을 일으킨 환자는 어제 중환자실에서 올라온 급성췌장염 환자였다. 패혈증 증세가 있었는데 다행히 치료가 되나 싶었지만 다시 악화된 모양이었다. 일단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오늘은 좀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예외는 없다. 최근 서너 달 동안 아무 일 없이 밤을 보낸 시간은 고작 두세 번 정도였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오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탄 미누는 버튼의 번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4층은 없다. 1, 2, 3 다음에 바로 5, 6, 7이 이어졌다.
미누는 ‘그럼 그렇지’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침 햇살이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장 선생의 목소리가 미누를 흔들었다. 잠깐 단잠에 빠졌는데 또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수련의에게는 아무것도 규칙적인 게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늘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미누가 일어서자 그의 품에서 판타지 소설책이 툭 떨어졌다. 장 선생의 핀잔이 인사처럼 쏟아졌다.
“화이고, 그놈의 판타지 책 지겹지도 않은갑제? 잘 때도 끼고 자게. 그칸다고 판타지 속의 쭉쭉빵빵한 요정이 신붓감으로 뚝 떨어질 것도 아이고.”
“요정 같은 신붓감은 현실에도 많이 있어요.”
미누가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설마하니 신경과의 허 간호사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 여자, 다들 날씬하고 예쁘다고 난린데 내는 영 아니라카이. 그건 날씬이 아니라 말라깽인 기라. 더구나 황 샘은 이미 짝이 정해져 있다 아이가?”
“또 부원장님 얘기면 그만두세요.”
“와? 부원장님 딸, 그만하면 억수로 섹시하겠다, 또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니까 황 샘하고는 완전히 환상의 커플이제.”
“장 선생님!”
미누가 빼액 고함을 질렀다.
“아, 알았다카이. 성질머리하곤… 농담이구마. 병원의 환자들도 다 아는 빠삭한 소문 가지고 와 이카노?”
“나는 부원장님 딸한테 관심 없어요. 허 간호사도 마찬가지고요.”
“부원장님 딸이야 헛소문이면 그만이고, 허 간호사는 와? 요즘 우리나라도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 트렌드라던데 황 샘이 한번 대시해 보제. 아니다카이. 대시할 필요도 없이 황 샘 정도면 얼씨구나 할 테이까 내가 다리 놓아주까?”
장 선생이 한껏 억양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디밀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좋아하는 잠이나 주무시죠.”
미누는 장 선생의 말을 막으며 대충 세수를 했다. 거울에 문득 비치는 머리를 보니 모처럼 말쑥해 보였다. 어제 샤워를 했기 때문이다.
수련의나 전공의들의 생활은 대체로 5분대기조 그 자체다. 진료 파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한 형편이다. 그러니 청결하고 멋진 ‘웰-빙’은 적어도 스태프는 되어야 누리는 것이지 수련의나 전공의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미누는 언젠가 사다 두고 딱 한 번 쓴 무스의 냄새를 맡았다. 아직 변질된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 손가락빗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추스른 장 선생이 성화를 했다.
“빨리 오라카이. 진짜 스태프들한테 뽀작나고 싶나? 황 샘은 빵빵한 빽이라도 있지만 내는 몸으로 때워야 하는 기라.”
미누는 표시나지 않을 정도로 무스를 바르고 서둘러 장 선생의 뒤를 따랐다. 회진이 끝난 후 미누는 다시 3층을 기웃거렸다. 얼굴이라도 한번 볼까 싶어 병실을 두리번거리지만 창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간호사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일이 마지막인데…….”
미누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이런 날엔 온갖 것들이 훼방을 놓는다. 유독 할 일이 많아지고 분주해지는 것이다. 미누는 아침에 한 번 외에는 하루 종일 5층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벌써 오후 6시.
종일 5층에서 시간을 허비한 미누는 잠시 짬이 난 틈을 타서 3층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퇴근하는 직원들과 면회를 마치고 가는 사람들로 엘리베이터는 초만원이었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3층에 서며 문이 열렸다.
미누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내리는데 낯익은 얼굴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이창해, 그녀였다.
문이 닫히기 전에 잠깐 창해와 미누의 눈빛이 마주쳤다. 미누는 손을 들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창해 뒤에 가득한 수많은 병원 직원들의 무표정한 시선이 먼저 미누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무정하게 닫혀버리고 미누에게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 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지하의 식당으로 가기 위해 만난 장 선생이 버튼을 누르며 자못 심각한 척 말했다.
“황 샘, 우리 병원의 전설 아나?”
“전설이요?”
“하모. 황 샘은 판타지 마니아니까 관심도 많겠구마. 여태 아무에게도 몬 들었나보제?”
“무슨 전설인데요?”
“4층의 전설.”
“4층이요? 그럼 5층 말인가요?”
“아이라카이. 엘리베이터의 4층.”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 병원에 4층 버튼은 없는데.”
“참말이라카이. 그기 마 어떤 날은 보일 때가 있다 카드라.”
“정말요?”
미누는 나도 봤는데, 하려다 참고 그냥 건성으로 되받았다.
“하모! 원래 우리 병원 지을 때 엘리베이터 업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병원의 속성을 모르고 4층을 표기한 버튼을 떡 만든 기라. 화가 이빠이 난 원청업자는 공사비를 주지 않았고 그래서 부도가 나는 바람에 팍 자살을 해삐린는데 이 병원 엘리베이터 중 한 곳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카제 아마? 버튼 판은 나중에 다른 업자가 바꿨지만 그 죽은 업자의 원한이 4층 버튼에 억수로 사무쳐…….”
“그래서요?”
“1년에 한 번 그 사람이 죽은 날이 되면 누군가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실종이 되는 기라. 흔적조차 없이 말이야.”
“에이, 순 뻥이죠?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아이다. 바로 이맘때가 그 업자가 죽은 때라니까 곧 한 명 또 없어질걸. 그카니까 황 샘도 조심하라카이. 황 샘 같은 판타지 마니아를 노릴지 누가 아노?”
자못 심각한 척하는 장 선생의 말은 식당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하긴, 내도 이 생활이 지긋지긋할 때는 차라리 그런 환상 속에서 좀 놀다가 왔으면 하는 생각도 들더라만은.”
“4층 버튼이 보인다고요?”
“하모. 그때 그걸 팍 누르면 된다 카드라.”
“다른 버튼을 누르듯이요?”
“당근이제. 그냥 팍!”
장 선생이 손가락으로 미누의 이마를 꾹 누르며 말했다.
“어우! 이 문디. 이카니까 사람들이 어리다고 놀려대지. 그걸 참말로 믿나?”
“그럼 거짓말이었어요?”
“원래 병원이란 죽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이 있는 기라. 6층의 전설도 있다 카이. 흐린 날 자정이면 복도 맨 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도 꼭 총각한테만 들린다 카더라. 아마 첫사랑에게 차여서 독극물을 먹고 실려온 환자가 죽은 귀신이라지.”
“그래요? 어째 으슬으슬하네.”
“화이고, 참말로 미치고 팔짝 뛰겄네. 고마 하자. 세상에 귀신이 어데 있고 보이다 안 보이다 하는 마술버튼이 어디 있겠노?”
“이상하다. 난 사실 4층 버튼을 봤는데…….”
“이런! 나보다 한 수 위군. 내가 졌다카이. 그만 하재이.”
장 선생이 장난스레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둘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판기 앞에 섰다. 커피 잔을 빼 든 미누는 장 선생에게 4층 엘리베이터의 전설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물었다. 커피를 마시던 장 선생이 입에 문 커피를 토해 냈다. 그는 질린 듯이 손사래를 치며 미누의 입을 막았다.
“고마 해라. 농담이구마, 농담.”
장 선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로비로 나가버렸다.
3. 사랑은 운명보다 강하다
우르르쾅!
번쩍번쩍!
어둠과 함께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료일지를 작성하면서 미누는 창해를 생각했다. 좀 유치한 일이지만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라도 쓸까? 아니면 이메일 주소라도 알려달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무엇 하나 신통하질 않아 보인다. 우선은 그녀를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수련의의 스케줄이라는 게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미누는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주머니에 넣어두기로 한다. 창해를 만나게 되면 슬쩍 쥐여주기라도 할 작정이다.
“오늘은 웬일로 억수로 조용하네? 비 오는데도 다들 지방으로 놀러가 삔나?”
병동을 둘러보고 돌아온 장 선생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뭐꼬? 웬 전화번호?”
미누가 메모한 전화번호를 본 장 선생이 알은체를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누는 얼른 메모를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와? 마담뚜가 여자라도 소개해 준다꼬 전화번호 알려달라드나?”
“무슨 소리예요? 내가 나이가 얼마나 됐다고…….”
“와 이카노? 요즘은 영계가 인기라카이. 오랜만에 텔레비전이나 좀 볼까? 요즘은 통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장 선생이 작은 텔레비젼에 리모콘을 쏘았다. 화면에 황칠나무를 이용한 금도금을 개발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었다.
“키햐! 기발하네. 금도금보다도 좋고 환경친화적이라면 떼돈을 벌겠구마. 내도 수련의 때려치우고 저런 거나 한번 해볼까. 황 샘, 잘 봐두라카이. 저거야말로 판타지 같은 이야기 아이가?”
“신기하긴 하네요. 식물을 이용한 금도금이라? 공해도 없고 금도금보다 품질도 우수하다니 잘 봐둬야겠는걸요.”
미누는 주의 깊게 화면을 응시했다.
쌍떡잎식물 두릅나무과의 상록교목, 분포 지역은 남쪽 섬이며 크기는 높이 15미터 정도. 나무껍질에 상처를 내면 노란 액체가 나오는데 그것이 황칠이며 양은 적지만 모아서 사용하는 장면까지 상세히 화면에 나타났다. 미누는 아세톤과 에테르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진짜 관심 있는 모양이네? 와? 당장 황칠나무를 찾아나설라꼬?”
장 선생이 빈정대며 말했다.
“그냥 봤어요. 시간 있을 때 잠이나 때리시죠.”
다른 화면이 나오자 미누는 돌아앉으며 판타지 소설을 펼쳤다. 장 선생도 텔레비전을 끄고 간이침대에 벌렁 누웠다. 이맘때가 되면 한여름 땡볕에 놓아둔 파처럼 완전히 늘어져 버리는 것이 수련의들의 일상이었다. 장 선생은 흉곽 마디마디에 맺힌 피로를 덜어내려는 듯 무겁고 깊은 날숨을 토해 냈다.
둘의 침묵과 평화는 한 시간쯤 이어졌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렸다. 미누가 판타지를 반 권 정도 읽었을 때였을까? 병실에서 미누를 콜하는 전화가 울렸다.
“조심하래이. 이렇게 심란한 밤엔 정말 엘리베이터에서 4층 버튼이 나타나고 드래곤이라도 튀어나올지 몰라.”
겁을 줄 양인지 장 선생이 돌아누우며 말했다.
“내가 4층 귀신들 좀 잡아다 줄까요?”
“하이고, 문디… 좋을 대로 하그라.”
장 선생의 대답을 뒤로하고 숙소에서 나온 미누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누는 버튼을 누르려다 문득 버튼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1, 2, 3, 다음에 5, 6, 7…….
어느 곳에도 4층 표시는 없다.
미누는 피식 웃어젖히며 문을 닫았다.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는 16세 소녀였다. 고등학생으로 보였는데 복통을 호소했다.
“배가 아프대요. 빨리 좀 봐주세요.”
소녀의 어머니는 화장과 의상이 두드러졌다.
약을 먹었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녀가 삼킨 수면제는 200알이었다. 일단 위세척부터 했다. 30여 분 간 실시된 세척에도 소녀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깊고 무거운 침묵은 차라리 몸부림보다도 비장해 보였다.
수액을 처방하고 입원실로 옮겼다.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미누는 소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각도를 비껴난 미누의 동공으로 그녀 머리의 곱창밴드가 들어왔다. 예뻤다. 상황과 너무 아이러니한 감정이었지만 흰색에 가장자리를 금색으로 처리한 밴드는 그냥 예뻤다. 미누는 진료를 마치는 순간까지 내내 흰색 곱창밴드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팔목에는 면도날 흔적이 여러 개 보였다. 이미 아문 흉터였지만 따갑게 미누를 자극했다. 흉터 약간 위에 투박한 시계가 보였다. 여자들도 이렇게 투박한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누는 더 이상 흉터를 보지 않았다.
경과를 보고 나서 입원 기간이 결정될 것이다.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지만 미누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나머지는 내일 스태프들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다.
비는 심술이라도 부리듯 폭우처럼 거세지고 있었다.
미누는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 들었다.
커피를 마시려는데 문득 소맷귀에 물든 커피가 강하게 시선을 파고들었다. 낮에 창해와 커피를 마시고 한잔을 다시 뽑아서 들고 가다가 소매에 흘린 그 커피였다.
“창해 씨, 저랑 사귀어 볼래요?”
미누는 마치 창해가 앞에 있어 고백을 하듯이 혼자 중얼거려 본다.
“아니야, 너무 약해.”
헛기침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미누.
“창해 씨. 첫눈에 필링이 왔네요. 이건 운명입니다.”
“유치의 극을 달리네.”
다시 고개를 저어보는 미누.
“창해, 나 뻑 갔어. 넌 내 꺼야.”
“나 괜찮은 사람인데 우리 애인 먹을까?”
떠오르는 대로 주절거려 보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우! 미치겠네. 그나저나,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냥 지금 콱 3층에 가서 간호사 실습생들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할까? 아니야. 그러다 병원에 소문 퍼지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미누는 다 마신 종이컵을 팍 구기며 혼자 속을 태웠다.
미누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스르르 움직이던 엘리베이터는 바로 위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의 발이 보였다. 미누의 시선은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옮겨지고 있었다. 무릎, 엉덩이, 허리, 가슴이 약간 봉긋하게 솟은 걸 보니 둘은 여자? 라고 생각하고 얼굴을 본 순간 미누는 병원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물기가 뚝뚝 흐르는 긴 머리를 산발한 두 여자.
그중 한 여자의 손에는 사람의 손이 들려 있었다. 미누가 엘리베이터 한구석으로 공포에 질려 물러선 채 전율할 때, 여자들 둘이 입을 삐죽이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의사가 의수 처음 봤나? 아래 병실에 내려왔다가 뜨거운 물에 머리 좀 감은 건데.”
그렇게 말하며 의수를 한 손에 턱 하고 끼우는 것이 아닌가?
그랬다.
두 여자는 다른 환자의 병실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머리를 감고 채 마르기도 전에 산발을 한 채 엘리베이터에 탄 것이었다.
오 마이 갓!
두 여자가 내린 후에야 미누는 식은땀을 닦았다.
“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미누는 깊은 날숨을 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질 않았다. 닫힘을 몇 번이고 눌러봤지만 그래도 엘리베이터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황한 미누가 계속 닫힘을 눌러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한순간이었지만 미누는 1, 2, 3 버튼 바로 위에 선명히 나타난 ‘4’ 자를 볼 수 있었다.
“4층?”
미누는 뜨악한 느낌에 한 발을 물러서며 눈을 비볐다.
착각이 아니었다. 거기에 분명 ‘4’ 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누는 눈을 비비고 다시 버튼 판을 주시했다. 버튼 판은 언제 그랬냐는 듯 1, 2, 3, 5, 6, 7, 하는 식으로, ‘4’ 자가 사라져 있었다.
미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느새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니 장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미누는 간이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려다 갑자기 들리는 벼락 소리에 놀라 뒤돌아섰다.
쾅!
가슴이 철렁했지만 벼락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김을 푹푹 뿜어내는 장 선생이 문을 있는 대로 박차고 들어선 것이었다.
“장 선생님!”
“오늘 왕재수라카이. 억수로 선수환자 만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아이가. 애즈머(asthma:천식) 환자가 스테로이드 써서 몸이 부었다고 쌩 난린데… 의사가 투약도 일일이 환자 허락받고 해야 카나?”
“내가 화낼 땐 다 그런 거라더니 왜 흥분하고 그래요.”
미누가 슬쩍 위로삼아 대꾸를 했다.
“내가 웬만하면 이카노? 몸짱이면서 그러면 말도 안 한다. 안 부었다 캐도 어차피 코끼리 같은 몸매로 말이야.”
“그런데 장 선생님.”
“와?”
“혹시 엘리베이터 말예요.”
“엘리베이터가 우쨌는데?”
“나 진짜 4층 버튼을 봤어요.”
미누의 말과 동시에 장 선생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잠이나 자라카이. 잠이 모자라면 헛것이 보이게 마련이야. 애들한테 그런 말 한 내가 잘못이구마.”
장 선생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창 밖은 여전히 축축이 젖어 있었다.
스태프들과 아침 회진을 끝낸 미누는 PK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바로 3층병동으로 향했다.
창해가 실습을 마치는 날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연락처 정도는 받아두어야 할 것 같았다.
간호사 데스크를 지나며 미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창해가 보이지 않았다.
3층만 해도 병실이 자그마치 30여 개다. 그러니 숨바꼭질을 하자면 찾아낼 확률은 거의 없었다.
미누는 문이 열린 병실을 날카롭게 관찰하며 지나쳤다. 반쯤 지났을까? 한 병실에서 창해가 실습생 동료와 함께 체온계를 들고 다른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누는 내심 환호를 지르며 그 병실로 다가갔다.
문에 가까워졌을 때 미누는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고르고 가운도 여미었다. 꾀죄죄한 가운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긴장을 털어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미누가 그 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3층 수간호사가 요란스럽게 미누를 불렀다. 미누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수간호사는 큰일이라도 난 듯 부산스럽게 말했다.
“부원장님이 찾으세요. 빨리 가봐요.”
“부원장님이요?”
“그래요. 가봐요. 뭐 좋은 일인가보던데……?”
미누의 속을 알 리 없는 수간호사는 빙긋 미소까지 지으며 등을 떠밀었다.
‘하필 왜 이럴 때 부른담. 지금은 창해를 만나는 게 가장 좋은 일인데. 돌아가시겠다.’
속으론 인상을 구겼지만 도리 없는 일이었다. 미누는 몇 번이고 창해가 들어간 병실을 돌아보며 부원장실로 향했다.
부원장실에 들어서자 말라깽이 부원장이 소파에서 반갑게 맞이했다. 나이는 50대 후반에 몸무게는 50킬로그램쯤 될까? 의사들 사이에서는 꼬챙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솔직히 미누는 부원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직업의식이나 인품 등은 마음에 들었지만 자꾸 자신의 딸 혜영과 미누를 연결시키려 하는 점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앉아. 힘들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 다름이 아니고 말이야, 며칠 후에 우리 병원에서 영화 촬영이 있는 것 알고 있나?”
“네.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영화사 쪽에서 배경으로 진료 장면을 넣고 싶어하거든.”
“…….”
“내 생각에는 내과과장과 자네가 그 배경이 되었음 하는데.”
“제가요?”
“그래, 자네야말로 우리 병원 공인 뉴스메이커 아닌가? 일단 최연소 의사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고.”
“하지만 펠로우나 스태프 선생님들도 많은데…….”
“아니야. 내가 결정한 사항이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그리고 말이야…….”
부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오후에 시간 좀 비우게. 다른 건 아니고 식사나 함께 하자고. 병원 밥이 입맛에 맞지도 않을 테고, 이러다가 자네 부친한테 너무 무관심하다고 혼날 것 같아. 내가 내과과장에게 미리 말해 두었으니까 오후에 혜영이 편에 차를 보내겠네.”
부원장은 그 말을 끝으로 컴퓨터의 화면에서 진료기록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다 결정된 일이니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미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수 없이 부원장실을 나왔다.
‘영화의 삽입 장면에 배경으로 출연? 게다가 저녁식사?’
미누는 무거운 날숨을 토했다. 절호의 찬스였는데 부원장의 호출 때문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혹까지 붙었다. 영화야 그렇다고 쳐도 식사는 부담스러운 초대였다. 단순히 식사라면야 상관없겠지만 진드기 같은 터프걸 고혜영이 있는 것이다.
미누는 갑자기 머리에서 우르르 지진이 이는 걸 느꼈다.
토요일 오후의 간호사 데스크는 한가했다.
교대 인원이 줄어들기 때문에 평소의 반 정도밖에 근무를 하지 않는 날이다.
하지만 사무직처럼 정시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간호사 실습생들은 토요일이 따로 없었다. 어떤 병원들은 주 5일 실습이라지만 실습생들은 심한 경우 일요일에도 콜이 있으면 나와야 했다. 아마 오늘도 오후 5시까지 실습을 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미누는 아침처럼 병실을 살피며 다녔지만 창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틀렸나? 하는 생각이 밀려드니 갑자기 허탈해지며 배가 더 고파왔다. 병실을 다 살핀 미누는 간호사 데스크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렇다고 간호사를 붙잡고 창해의 소재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간 내일 당장 병원에 엄청나게 과장된 러브스토리가 퍼질 건 뻔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병원 홈페이지에 도배가 될 것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수련의 황미누와 간호사 실습생 이창해, 갈 데까지 간 스캔들’ 하고 말이다. 미누는 쓴 입맛을 다시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일단은 출렁거리는 위장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데!
운명이란 이런 걸까?
아무리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지 못할 것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환한 표정으로 미누를 알아본 건 바로 창해였다.
“황 선생님.”
“창해 씨.”
둘이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어디 가세요?”
“지하 식당에…….”
그러고 나서 버튼 판을 보니 이미 ‘B1’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저도 매점 가요. 간호사선생님이 뭐 좀 사오라고 부탁을 하셔서…….”
“오늘 실습 끝이라면서요?”
“네. 선생님 덕분에 저 점수 잘 받았어요.”
“그래요? 점수가 벌써 나왔어요?”
“네. 오전에 수선생님이 알려줬어요. 어휴! 아직도 그 24시간 소변 생각만 하면 아찔해요.”
엘리베이터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미누는 한 층 한 층 아래로 향할 때마다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기도까지 새어나왔다. 제발 좀 천천히 내려가라……. 미누는 애매한 벽을 바라보며 그 말을 뇌고 또 뇌었다. 아니, 팍 고장이라도 나서 한 시간쯤 갇혀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선생님 미국에서 오셨다면서요?”
“아, 네.”
“좋겠다. 그럼 영어도 잘하시겠네요?”
“네. 미국 살면 싫어도 잘하게 되죠. 하하.”
미누의 심장이 둥방둥방 하염없이 뛰기 시작했다.
창해의 향기.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소독약 냄새에 찌든 병원에서 여자의 향기를 또렷이 느낄 수 있다니…….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창해의 연락처라도 확보해야 했다. 미누는 진땀이 흘렀지만 말을 꺼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렇다고 영화처럼 다짜고짜 키스를 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무정한 엘리베이터는 ‘B1’에서 심술이라도 부리듯 땡! 하고 멈췄다.
이런 바보 멍청이!
망설이다가 시간을 다 허비한 미누는 내릴 생각도 않고 자신을 꾸짖었다. 그때 한 발 앞서 내린 창해가 미누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 선생님 연락처 좀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네?”
미누는 믿기지 않는지 멍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선생님 연락처…….”
창해는 빨개진 얼굴을 숙이며 부끄럽게 말했다. 열린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밖에는 창해, 안에는 미누가 서 있었다.
“제… 연락처요?”
미누가 감격해 말을 더듬으며 되물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깜짝 놀란 미누는 엘리베이터의 문과 열림 버튼을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문은 다행히 닫힐 듯하다가 다시 열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누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창해는 그런 행동이 재미있는지 상기된 얼굴로 쿡 하고 웃었다.
“여기 있어요, 제 연락처.”
웃는 창해에게 미누는 미리 적어둔 전화번호를 건넸다. 창해가 신기한 듯 메모를 보며 물었다.
“어머! 그사이에 벌써 적으신 거예요?”
“네에…….”
미누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전화해도 돼요?”
창해가 메모를 가슴에 안으며 물었다.
“그럼요, 전화하세요. 아무 때나. 아 참, 진료 중이거나 수술실에 있을 때는 못 받을 때도 있어요? 아시죠? 첨단 의료기들이 있는 곳에선 핸드폰 쓰면 안 된다는 거.”
“네, 알아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창해가 꾸벅 인사를 하고 매점을 향해 돌아섰다. 멍하니 창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누가 입을 열었다.
“창해 씨.”
창해가 뒤돌아보았다. 미누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고 그녀도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미누는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서 기운이 쏙 빠졌다. 가만히 식당 옆 복도 벽에 기대어 잔뜩 흥분한 숨을 골랐다. 무엇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 연락처를 알아내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창해가 먼저 말을 꺼내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미누는 꾹 눌러참았다. 그는 당장 전화라도 올 것처럼 진동으로 해두었던 핸드폰을 벨소리로 전환시켰다.
오후 6시.
비가 그치고 있었다. 미누는 숙소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일어섰다.
창해의 퇴근시간이었다. 약속은 없지만 가는 뒷모습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오늘이면 그녀의 실습이 끝나니 어쩌면 다시는 병원에서 볼 기회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누는 현관에 내려와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 들고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마다 훔쳐보았다. 10분쯤 지나서 창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미누의 표정이 환해졌지만 금세 다시 굳어버린다. 창해가 내리고 다른 실습생 셋이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수간호사와 고참 간호사 둘이 뒤따라 내렸기 때문이었다. 함께 떠들며 나오는 품이 쫑파티라도 하러 가는 분위기였다.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누는 멍하니 시선만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 마음을 그녀가 알아챈 걸까? 무리 지어 나가던 창해가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누와 마주쳤다. 미누는 얼떨결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창해는 보지 못했는지 그냥 돌아섰다.
하지만 못 본 게 아니었다.
창해는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들 몰래 손만 들어 미누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그 눈부신 손 흔듦이 큐피드의 화살처럼 미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창해가 동료 하나와 수간호사의 차에 올랐다. 미누는 보았다. 창해가 차 안에서 핸드폰을 누르는 걸. 혹시나 하고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거짓말처럼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설렘과 흥분이 교차되며 미누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에서 크고 씩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누는 몸서리를 치며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여자였지만 창해가 아니라 부원장의 딸 고혜영이었다. 그녀는 더욱 큰 소리로 미누를 재촉하고 있었다.
“황 선생님, 저 혜영이예요. 어디 계세요? 저 지금 도착했으니까 빨리 내려오세요.”
미누는 코 꿰인 듯 끌려가 식사를 했다. 미누의 식성을 고려한 생선초밥이었다.
혜영의 압박이 심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혜영은 기회를 놓칠세라 미누의 곁에 바짝 붙어서 온갖 참견을 다 해대더니 마침내 마각을 드러냈다. 혜영이 기어이 미누의 팔짱을 은근히 끼고서 부원장에게 자랑하듯 물은 것이다. 그녀는 지나치리만치 명랑했고, 나쁘게 말하면 무데뽀였다.
“이놈아! 젊은 꽃들이야 그저 붙어만 있어도 아름답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별말씀을…….”
미누는 혜영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은근슬쩍 엮이기는 싫었다.
딩도로롱 딩도로롱!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뭐야? 핸드폰 아닌가? 내 건가? 아닌데?”
“내 벨소리도 아니에요.”
자기 전화를 확인한 부원장과 혜영의 시선이 미누에게 쏠렸다. 그때서야 미누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후닥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저 창해예요.”
“네?”
너무 놀란 나머지 미누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부원장과 혜영, 그리고 과일을 가져와 합석한 부원장의 아내까지 미누의 행동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전화기에서 맑고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기억 못 하세요? 간호사 실습학생.”
“아, 저, 그게…….”
미누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하루 종일 기다리던 창해의 전화였다. 다만 부원장의 집에 오면서 긴장하다 보니 잠시 깜박 잊어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세 사람의 시각과 청각이 온통 미누에게 집중되어 있는 순간이다. 미누는 그 시선이 따가워 속내를 보이지 못했다.
“예, 기억해요… 네…….”
이상한 분위기 때문에 미누는 한없이 어색한 목소리로 전화에 응했고 그럴수록 미누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병원인가? 응급환자라도 생겼나?”
부원장이 답답한 듯 물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 바쁘신가봐요. 그럼 저 끊을게요.”
“아, 네.”
딸깍!
전화가 끊겼다.
그와 동시에 미누의 눈앞도 정전이 된 듯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이게 뭐야, 하는 표정으로 얼이 빠진 채 미누는 핸드폰을 차마 닫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인데 하필 이런 때 오다니……. 미누는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눈치 빠른 혜영이 여자 아니냐고 묻자 미누는 환자라고 둘러댔다.
“역시 인기 좋다니까. 자, 과일 들게나.”
부원장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과일을 청했지만 미누는 장 선생을 핑계로 그만 일어섰다. 과별로 수련의는 많지 않았다. 병원 사정을 잘 아는 부원장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혜영이 키를 들고 따라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현관 앞에서 미누의 팔짱을 끼며 부원장에게 애교를 떨었다.
“아빠! 황 선생님은 제가 모셔다주고 올게요.”
차가 집 앞을 빠져나올 때 혜영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황 선생님.”
“왜요?”
“아이, 말 낮추세요. 저보다 오빤데.”
“…….”
“아까 그 전화, 정말 환자였어요?”
혜영은 다 안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요, 왜요?”
“또 존댓말이네. 반말하세요.”
“그런데… 왜?”
“이건 여자의 예감인데요, 갑자기 그 전화의 주인공이 내 라이벌일지도 모른다는 필링이 팍 꽂히지 뭐예요. 아, 이런 필링 아주 꼬진데.”
‘라이벌?’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미누는 대답 대신 이렇게 중얼거렸다.
‘꿈 깨라, 고혜영. 너하고 나는 코드가 맞지 않아.’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혜영은 빙긋 웃으며 윙크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다음엔 입술 조심하세요. 제가 덮칠지도 모르거든요.”
“윽! 입술?”
미누는 본능적으로 자기 입술을 손으로 감쌌다.
“어머! 농담이에요. 순진하시긴.”
혜영이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병원에 내린 미누는 혜영의 차가 사라지기 무섭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최근 수신번호를 찾아 잠시 심호흡을 한 미누는 서둘러 발신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이걸 어쩌죠? 아까 손님 중에서 누가 가게 전화를 쓴 모양인데 지금은 다 가고 가게가 비어 있답니다.”
호프집 주인이라는 여자가 친절하게 응대했다.
“그래요…….”
“네,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알았습니다.”
미누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창해가 아마 선배 간호사들과 뒤풀이를 하다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에이… 바보, 띨빵 같은 놈.’
미누는 자신을 한없이 질책하며 힘없이 숙소로 올라갔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
이틀.
48시간.
2,880분.
172,800초…….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미누는 3일하고도 하루가 더 지나는 동안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백 번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오죽했으면 수술 중에도 전화가 울려서 스태프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다리던 창해의 전화가 왔으면 오죽 신나랴. 피 묻은 라텍스장갑으로 황급히 꺼내본 핸드폰의 전화…….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당첨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자동차 정보센터인데요.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광고 전화임을 확인한 미누는 피가 화악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끊어버렸다.
“기다리는 전화 있나? 요즘 와 그카는데?”
위암 환자의 수술을 마치고 장 선생이 손을 씻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끈다는 게 깜박 잊고 켜놓은 모양이네요.”
“하긴, 마 내도 그런 적 있데이. 겨우 꺼놓은 걸 확실히 한다고 다시 눌러서 켜놓은 실수. 하지만 아까 과장님 눈치가 안 좋던데 다음부터는 조심하그레이.”
“네.”
미누는 무표정하게 수술실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었다. 부원장님의 집에 있던 날 어떻게든 창해의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걸 놓쳤으니 영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친절하게 받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받고 말았다. 실망한 창해가 다시 전화를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빗나갈 운명이었다.
“요즘 황 선생님 좀 수상하네.”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뒤돌아보니 이 간호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뭐, 뭐가요?”
“수상해. 누구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허 간호사? 아니야, 허 간호사는 6층이지. 설마 나일 리는 없고?”
“무슨 소리예요, 지금?”
미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봐. 지나친 부정은 긍정이란 말이야. 요즘 들어 부쩍 3층을 서성이는 게 아무래도 수상한데 말이야. 환자 중에 있는 건가?”
이 간호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돌아서 갔다. 그러고 보니 미누는 다시 3층에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해가 있던 3층으로 온 것이다.
그녀가 없는 3층은 황량했다. 오가는 면회객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터프하게 대시해서 고백을 하고 전화번호라도 받아내는 건데 그렇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미누는 모든 것이 아쉽고 안타깝기만 했다.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것도 그랬고, 이렇게 혼자 애를 태우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3층병동에 무의식적으로 오긴 했지만 이 간호사의 말을 듣고 나니 공연히 기분이 상해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미누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환자의 면회시간과 겹쳐 엘리베이터는 만원이었다.
띠리링 띠리리링!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리자 동시에 네 명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중에는 미누도 끼여 있었지만 미누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끄응!
이런 때 소위 쪽이 팔린다. 실제로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다.
미누는 공연히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 소리.
미누는 또 다른 사람의 것이겠거니 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미누를 따라 하듯 그대로 있었다. 다만 모든 시선은 미누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미누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치익… 치익…….
몇 번 더 말했지만 핸드폰은 말이 없었다. 그저 치익치익, 하며 소음만 거칠게 뱉어낼 뿐.
핸드폰은 잠시 후에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핸드폰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 이렇게 간절한 전화를 기다릴 때의 기분이란 정말 묘했다. 장난전화만 와도 가슴이 무너질 판이니…….
“이봐요,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세요.”
치익…….
“장난하나?”
미누는 핸드폰을 닫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다 내려버리고 이젠 미누 혼자만 남았다.
숙소가 있는 층에서 문이 열릴 때쯤 미누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기다리는 전화는 안 오고 겨우 장난전화나 오다니. 화풀이라도 할 양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조금 전의 번호가 다시 뜨면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작심을 하고 먼저 선공을 날렸다. 울고 싶던 차에 뺨 때려준다고, 그러잖아도 빼액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봐요.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하지, 지금 장난합니까?”
“네에?”
예상대로 상대는 주춤거렸다.
이때다 싶어 미누는 한 번 더 거칠게 쏘아붙였다.
“대체 누굽니까? 이렇게 전화 예절도 모르다니!”
“선생님…….”
갑자기 핸드폰에서 잔뜩 겁먹은 목소리가 기어나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미누의 온 신경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저, 기억 못 하세요? 저, 창해라고… 간호사 실습 나갔던 학생인데요. 아까는 아무 말도 안 들리기에…….”
“누, 누구?”
“창해요. 기억 안 나세요? 24시간 소변…….”
“창해 씨?”
미누의 후두가 한껏 열리며 밭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네에.”
“오 마이 갓!”
미누의 입에서 바로 흘러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토요일 이후 혼자서 수백 번도 더 불러본 이름이었다.
그런데 얄궂은 운명이란 놈.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전화를 겨우 이렇게 연결시켜 주다니. 미누는 중얼거리면서도 안테나가 잘 서는 방향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떻게 연결된 건데 또 끊어지게 할 순 없었다.
“창해 씨, 미안해요. 엘리베이터라서 안 들리기에 누가 장난하는 줄 알았네요.”
미누는 마음을 졸이며 사과를 했다.
“아니에요. 바쁘신데 제가 괜히 전화했나봐요.”
창해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마치 금세라도 전화를 끊을 듯한 분위기였다.
“아니라니까요. 끊지 말아요. 나 실은…….”
“네에?”
“실은…….”
그렇게 말하고 미누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창해의 전화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지만 마음에 담아둔 말을 당장 한다는 건 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이렇게 다시 전화가 끊겨버리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여자가 어떻게 다시 전화를 한단 말인가? 미누는 조급해졌고 결국 속내를 말해 버리고 말았다.
“창해 씨 전화… 많이 기다렸어요.”
“정말요?”
“네, 정말이죠. 지난번에는 전화 딱딱하게 받아서 미안했어요. 그 번호로 다시 걸었더니 창해 씨 집이 아니데요.”
“네. 거긴 수선생님이 쫑파티 열어준 맥줏집이었어요. 거기서 술 한잔 마시다가 병원 나올 때 손 흔들어주신 게 생각이 나서…….”
“그랬군요. 그런데 왜 이제야 다시 전화했어요? 나… 많이 기다렸는데…….”
“정말이죠? 믿어지질 않아요. 실은 전화하면서 많이 망설였거든요. 선생님이 저를 기억해 줄지… 용기가 안 났어요.”
“나는 후회 많이 했어요. 차라리 내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랄걸 하고요.”
“와아! 꿈만 같아요. 선생님이 그랬단 말이죠?”
“네. 창해 씨 전화 받으려고 핸드폰 켠 채 수술실 들어갔다가 짤릴 뻔했다니까요.”
“그럼 지금 잠깐 볼 수도 있겠네요?”
“지금요? 어딘데요?”
“병원 입구예요. 실은 다음 기수 애들 수선생님께 소개시켜 주고 가는 길이거든요.”
“그럼 당근이죠. 기다리세요. 바로 날아갑니다.”
미누는 핸드폰을 끊으며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아섰다.
4. 꿈같은 첫 약속
짧은 엘리베이터 운행 시간이 지루했다. 버튼은 층층이 눌려져 있었고 타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 같아서는 로비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조바심을 내면서도 미누는 잘 참았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미누는 제일 먼저 내렸다. 진청색 라운드 티에 몸의 곡선을 잘 살린 청바지를 입은 창해가 거기 있었다. 미누는 가쁜 숨은 감췄지만 환하게 열리는 웃음만은 감추지 못했다. 창해가 홍조를 머금으며 살며시 고개 숙여 인사를 해왔다. 미누도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했다.
“커피 한잔할래요?”
“그럼 영광이죠.”
둘은 자판기 앞으로 갔다.
딸각딸각딸각!
우우웅!
잠깐의 소음이 끝나고 커피가 튀어나왔다. 미누는 창해와 함께 옆문을 열고 나갔다. 비상계단을 바라보는 공간은 늘 비어 있다. 병원 계단은 이상하리만치 이용하는 사람들의 적었다. 창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뭐요?”
미누는 창해를 바라보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선생님 처음 본 날 선생님 얼굴이 빨개지셨다는 거.”
창해의 얼굴에 다시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병실에서 나비 꽂을 때요?”
“네.”
“그럼 창해 씨, 그거 알아요?”
미누도 똑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요?”
“그날 창해 씨 보고 밤에 잠도 잘 못 잤다는 거.”
“정말요?”
“네. 그래서 일부러 3층 병실에 자주 갔었어요.”
“맞아요. 간호사선생님들이 가끔 그런 얘기 했었어요. 황 선생님이 요즘 3층에 자주 내려온다고. 어떤 간호사들은 잘 보이려고 화장도 고치고 그랬는걸요.”
“그랬어요?”
“네. 황 선생님을 좋아하는 간호사선생님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저런! 어쩌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미누는 온화한 미소로 창해를 바라보았지만 창해의 표정은 어둡게 굳어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으시죠?”
창해의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미누의 말을 애인이 있다는 말로 오해한 것이다. 미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 속도 모르고 내 앞에서 유린만 잔뜩 엎었지 뭡니까?”
미누의 말과 동시에 풀죽은 듯 숙였던 창해의 고개가 튕겨 올라왔다.
“선생님……?”
“본인 앞에서 고백하는데도 안 믿겨요?”
“그럼 제가……?”
“네.”
“거짓말이죠?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창해 씨는 첫눈에 꽂힌 사람도 놀릴 자신이 있나보죠?”
“전, 저만 선생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요. 지난번 엘리베이터에서 나한테 전화번호 달라고 할 때 준 메모지 생각나요?”
“그럼요. 아직도 제 수첩에 있는걸요.”
창해는 소중한 것인 양 수첩 갈피에서 미누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실은 그거 창해 씨 주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차였어요.”
“정말이죠, 선생님?”
창해의 눈엔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와아! 꿈만 같아요. 마음이 통하다니!”
창해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가득 번지고 있었다. 미누는 사람들만 없다면 창해를 꼭 안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원내에 황미누 선생님, 황미누 선생님 계시면 지금 즉시 508호 병실로 와주십시오.
방송 소리를 따라 미누가 몸을 돌렸다. 잘못 들었길 바랐지만 그건 자신을 찾는 방송이 틀림없었다.
“선생님 찾네요. 빨리 가보세요.”
“하아! 이거 겨우 고백을 했는데… 가고 싶지 않은데 방송이 시샘을 하나보네요.”
“저도 그래요. 하지만 선생님 시간 나실 때 만나면 되죠 뭐.”
“맞아! 그게 좋겠다. 언제 시간 나요?”
“전 아무 때나 괜찮아요. 선생님 시간하고 맞출게요.”
“그럼 일요일 오전 어때요? 사람들이 말하길 춘천 가는 기차가 멋지다던데?”
“기차요? 저도 좋아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가실 수 있어요?”
“그럼요, 갈 수 있지요. 일요일 오전 10시에 청량리역에서 만나요. 표는 내가 구해 놓을게요.”
“네. 약속 잊으시면 안 돼요.”
“걱정 말아요. 죽어도 안 잊을 테니까.”
-원내에 황미누 선생님, 황미누 선생님 계시면 지금 즉시 508호 병실로 와주십시오.
작별할 시간을 재촉하듯 방송이 한 번 더 울려퍼졌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뒤돌아보는 미누를 향해 창해가 해맑은 미소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누는 꿈속으로 들어가는 양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만원인 엘리베이터도 나쁘지 않았다. 미누는 공연히 혼자 들떠서 처음 보는 보호자와 환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입은 귀 바로 밑에 걸려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뽀옹 하고 누군가 방귀를 뀌었지만 그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하하하! 충수염 수술을 한 환자라면 방귀를 당연히 뀌어야 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점점 더 오버를 하며 마음이 공중에 붕 떠버리는 황미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불평을 쏟아냈다.
“어우! 지독하다. 누구야? 이건 완전히 독가스 수준이네.”
두어 시간이 지난 후까지도 미누의 미소는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랑은 마법이다. 누구든 한번 빠지기만 하면 설렘과 황홀함에 허덕인다. 하지만 그 허덕임은 행복하다.
환자를 살피고 나오던 미누는 핸드폰을 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부재중 전화가 한 통 떡하니 찍혀 있었다. 번호의 주인공은 창해였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물결처럼 스쳐갔다. 전화를 해볼까 하고 생각하는데 마침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혹시 잠깐 시간 있어요?”
창해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흘러나왔다. 그녀는 작은 선물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여전히 상큼한 향을 알싸하게 흘리면서.
“선생님, 이거…….”
창해가 단청으로 단아하게 물든 손수건을 하나 내밀었다.
“지난번에 선생님 손수건으로 소변을 닦았잖아요. 제가 집에 가서 열심히 빨아봤는데 아무래도 냄새가 가시지 않아서 하나 샀어요. 받아주실 거죠?”
창해가 해맑게 웃었다.
미누는 살포시 떨리는 손을 감추며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도 없는 빈 계단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손수건을 받아 들던 미누의 손과 창해의 손이 닿았다. 출렁! 미누의 심장에 격랑이 일었다. 그녀의 맑은 미소가 미누의 안으로 들어왔고 미누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가만히 당겼다. 그녀의 향이 후각의 끝까지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미누는 그녀의 얼굴로 자꾸만 끌렸다.
쏴아아! 쏴아아!
미누의 청각으로 바람소리가 일었다. 미누의 입술이 가만히 창해의 입을 덮었다. 태초의 향이 끼쳐왔다. 그 향은 미누의 의식 속으로 맹렬하게 번져갔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그리 길지는 못했다. 하필이면 계단 위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미누는 창해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더없는 홍조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미누는 그녀를 한 번 더 안았다. 아름다운 세상, 그 벅찬 아름다움이 미누의 안으로 가득 밀려왔다.
창해를 배웅하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미누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손에서, 입술에서 여전히 창해의 냄새가 새록새록 새어나왔다. 그런 미누에게 장 선생이 물었다.
“뭐꼬? 무신 좋은 일이라도 생깄나?”
“좋은 일은요. 의사가 즐거워야 환자 치료도 잘하는 거 아닙니까?”
“얼씨구! 문디, 아주 무슨 도사처럼 말하네. 그카지 말고 말해 보라카이. 뭐꼬? 혹시 부원장님 딸하고 약혼이라도 하는 거 아이가?”
“장 선생님!”
미누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혜영 씨하고 저하고 자꾸 연결하지 말랬죠? 전 부원장님 딸한테 관심 없다고요!”
“아, 알았꾸마. 그칸다고 소리 지르기는.”
“그건 그렇고, 장 선생님.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뭔데?”
“이번 일요일에 저 오프 좀 시켜주세요.”
“글쎄, 과장님한테 물어봐야겠는걸.”
장 선생이 은근한 눈초리로 한 발을 뺐다.
“아, 왜 그래요? 지난번 설날에도 제가 장 선생님 대신 근무해 줬잖아요. 또 그 전 추석에도요.”
“그거야, 황 샘은 집이 미국이니까 그렇지. 국내에서 그 정도는 관례 아이가.”
“정 이렇게 나오시면 이번 명절부터는 저도 협조 안 할 겁니다.”
“이 친구 진짜 쫀쫀하게 나오네. 알았꾸마. 과장님이 안 된다 카몬 내가 몸으로 때워서라도 하루 비워줄게. 그카몬 됐나?”
“역시 장 선생님!”
미누가 기뻐하며 장 선생을 껴안았다.
“와 이카노… 내는 남자는 싫다카이.”
“흐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요.”
“에이! 누군 복도 많지. 왕재벌 부원장님이 딸을 준대도 배짱이니. 내 같으면 홀랑 받아들일 낀데.”
“사랑은 돈이 아니라 마음인 거 모르세요? 까짓 돈이야 나도 벌면 되지요.”
“마음 좋아한다. 내처럼 서른쯤 돼보그라. 돈이 최고제, 마음은 무신 마음……. 그런 순정은 내도 의대 다닐 때 이 병원에 도배를 할 만큼 있었꾸마.”
장 선생이 침대에 벌렁 누우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벌떡 일어서며 다시 물었다.
“소개팅이라도 나가나?”
“비슷한 거죠.”
미누가 씨익 웃으며 윙크를 날린다.
“젠장! 누군 마담뚜 하나 안 붙는데 역시 영계가 좋네. 누꼬? 부원장님을 무시하고 덤벼드는 그 무식한 마담뚜?”
“셀프!”
미누는 꼭 한 마디만을 남기고 바로 판타지 책을 펼쳤다.
“셀프면, 간호사? 아니면 환자? 환자는 황 샘한테 어울릴 쌈빡한 사람이 없을 낀데? 젠장! 내도 꾸미고 나가면 여자들이 줄을 서는데 이놈의 수련의 생활이 세수할 시간이나 제대로 있어야제. 잘해 보그라. 내는 데이트고 뭐꼬 그저 잠이 최고니까.”
장 선생이 다시 침대에 큰 대 자로 누워버릴 때, 침대 모서리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응급실요? 알았어요. 갑니다, 가!”
눈치를 보니 또 응급실 콜이다. 응급환자라도 들어온 모양이었다.
“내가 갈게요.”
“참말? 그래줄 끼고?”
“예. 장 선생님은 그 좋아하는 잠이나 자십시오. 젊은 내가 몸으로 때울 테니.”
“오케바리! 일요일 오프는 내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보장할 끼라.”
“땡큐!”
미누는 힘차게 소리치며 문을 나섰다. 어디에서 이런 활기가 나오는 걸까?
핸드폰을 보니 창해에게서 문자가 두 개 날아와 있었다. 바로 답장을 하면서도 그녀의 기억 속에 허덕이는 미누. 좋았다. 마냥 좋았다. 그녀가 좋았고, 그녀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 좋았다.
새벽 4시 44분.
아직도 설렘이 가시지 않은 미누는 시계를 보았다. ‘4’가 일렬로 겹쳐 있자 기분이 찜찜했다. ‘4’ 자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생각도 경험도 없지만 하필이면 남들이 다 싫다는 ‘4’ 자가 일치되는 순간에 시간을 볼 건 또 뭐람? 하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창해 생각만 하면 모든 짜증과 고단함은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미누는 다시 손을 코로 가져갔다. 그녀의 향기가 배어나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119 구급대에 실려온 응급환자를 보고 돌아온 미누는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읽던 판타지 소설을 펼쳤다.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기 위해 기사와 성주 일행이 떠나는 장면에서 덮은 까닭에 다음 장면이 궁금한 미누다. 이 판타지는 중세풍의 배경을 꼼꼼히 묘사하고 있어 특히 미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더구나 사랑하는 공주가 괴물 드래곤에게 납치되었으니 성주의 마음이 오죽 비통할 것인가?
책을 읽던 미누는 성주가 공주를 그리워하는 대목에서 별안간 화들짝 일어섰다.
“가만! 기차표!”
갑자기 미누는 책을 내동댕이치고 부리나케 컴퓨터를 켰다. 서둘러 일요일의 춘천행 좌석을 체크했다.
다행히 표는 20여 장의 여분이 있었다. 왕복표를 예약하고서야 미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일 몇 시간만 늦었더라도 기차표를 사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요일.
이제 오늘 하루만 지나면 일요일이었다.
내일이 되면 창해와 나란히 기차에 앉아 데이트의 명소라는 경춘선 기차 안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얼마나 멋질 것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앉히고 떠나는 기차 여행. 더구나 한국에 들어와서 변변한 기차 여행 한번 못 해본 미누였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아니면 아무리 청춘이라도 육체적인 한계일까? 갑자기 미누는 달려드는 피로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창해와의 기차 여행을 꿈꾸며 설렘 가득한 미누는 판타지 소설책을 안은 채 침대에 누워 창해가 주고 간 손수건의 향기를 맡으며 잠시 눈을 붙였다. 마치 성주와 함께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기 위해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딩도로롱 딩도로롱!
핸드폰이 울렸다.
겨우 눈을 붙인 미누는 간신히 눈을 뜨며 핸드폰을 받았다. 옆 자리의 장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여보… 세요.”
미누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겨우 대답을 했다.
“선생님, 창해예요. 잘 잤어요?”
미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 코, 잎, 귀, 심지어 세포 하나하나마다 생생한 물기가 올랐다. 그는 몇 번 발음 연습까지 한 후에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창해 씨?”
“네. 낮에는 전화 받기 힘드실 것 같아서 지금 했어요. 저 방해 된 거 아니죠?”
“그, 그럼요. 방해라뇨. 안 그래도 내가 전화하려던 참인데.”
“정말요?”
“네. 아, 참! 기차표 예약했어요. 10시 표니까 내일 9시 30분까지 청량리역으로 나오세요.”
“와아!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지는걸요.”
“나도 그래요.”
미누는 마치 창해에게 속삭이기라도 하듯 정답게 말했다.
“황 선생님.”
“왜요?”
“보고 싶어요. 전화 끊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창해의 전화가 끊겼다. 여운처럼 그녀의 홍조가 느껴졌다.
“아자!”
미누는 드라마의 연기자들이 하는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내렸다 올리며 환호를 내질렀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고 속삭이듯 말했다.
“실은… 나도 너무 보고 싶어, 창해.”
“와 이카노? 영화에 나온다 카더니 미리 연기 연습? 하지만 아침에 보기에는 좀 느끼하구마.”
깜짝 놀란 미누가 눈을 떠보니 장 선생이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앞에 서 있었다.
“오, 오셨어요?”
“빨리 씻그레이. 전쟁터에 나갈 시간이구마.”
장 선생이 얼굴을 닦은 수건을 미누에게 휙 던졌다. 세수를 마치고 장 선생과 아침식사를 하러 가면서 미누는 창해의 문자를 받았다. 미누는 즉시 창해에게 답글을 보냈다.
<너무 행복한 아침! 창해 씨도 아름다운 하루가 되길! (^0^)>
밤을 새운 의료진과 간호사들, 의료기사들과 직원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의 아침 표정은 늘 무미건조하다. 사람들의 얼굴마다 가득 서린 피로감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바로 황미누.
<빨리 내일이 왔음 좋겠어요. -창해>
식당 테이블 아래에서 또 한 번 몰래 확인하는 창해의 문자 메시지.
미누의 표정에 저절로 웃음이 배어나온다.
“황 선생! 뭐 좋은 일 있어?”
앞 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다른 수련의가 물었다.
“황 선생님, 오늘부터 우리 병원에서 촬영하는 영화에 출연한대잖아요. 좋겠다아.”
밤을 새운 나이트 조의 간호사 한 명이 부러운 듯 말했다.
미누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깟 영화 배경에 출연하는 건 관심조차 없었다. 미누가 원하는 건 오직 일요일이었다.
대충 식사를 마치면서 미누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도 정확히 26시간이 남아 있었다. 스태프들과 미팅을 하고 회진을 하면서, 혹은 실습 나온 PK들을 지도하면서도 미누의 마음은 이미 기차에 올라 있었다. 창해와 데이트할 생각만 하면 갑자기 온몸에 해피 호르몬이 팍팍 쏟아지는 것이었다.
“장 선생님, 저 내일 오프 해결된 거죠?”
미누는 한 번 더 장 선생에게 다짐을 놓는다.
“하모. 몇 번을 말해야 되나. 가그라, 가. 가서 아예 오지 말그라.”
“에이, 질투하시긴.”
“질투는 무슨 질투. 가서 졸지나 말라카이.”
“졸아요?”
“그래. 저쪽 ENT(이비인후과)양 샘은 연애할 때 매일 졸았다 카더라. 수련의가 잠보다 더 좋은 데이트 상대가 있노?”
“그건 여자 나름이죠.”
“맞아. 황 샘 같은 희대의 영계라면 또 얘기가 다를 수도 있겠제. 갔다 와서 보고나 제대로 하라카이. 진도가 월매나 나갔는지.”
“네!”
둘이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걷는데 이 간호사가 뛰어오며 미누에게 소리쳤다.
“황 선생님! 왔어요, 왔어.”
“뭐가요?”
“영화 팀 말예요. 지금 내과병동에 있는데 빨리 오래요. 가보세요.”
이 간호사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가보그라! 누군 좋겠네. 영화에도 나오고. 그카다 일마 이거 스타 되는 거 아이가?”
“같이 가시죠? 여배우들도 많을 텐데.”
“일 없다카이. 내는 잠이나 좀 때리고 있을 끼구마.”
장 선생이 하품을 하며 미누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가요. 얼짱 스타들도 다 떴어요. 난 몰라아.”
이 간호사가 진저리를 치며 미누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과병동 복도는 초만원이었다.
영화 스태프들과 조명 그리고 몸이 약간 성한 환자들이 구경을 위해 몰려들었고 심지어 진료 스태프들과 간호사들도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누의 역할은 간단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 주인공의 암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과과장 뒤에서 다른 환자를 진료하는 일상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 미누에겐 간단한 역할이었지만 내과과장 때문에 무려 열 번에 가까운 NG가 났다. 멋지게 보이려고 너무 긴장을 하다 보니 자꾸 말이 끊기거나 표정이 굳어버린 탓이었다.
한 시간여를 계속한 끝에야 촬영은 끝이 났다.
“주간 촬영은 됐습니다. 이따가 야간 촬영이 있을 거니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이고! 얼마든지요. 개봉은 언제 하죠?”
내과과장은 흔쾌히 허락하며 개봉일부터 물었다.
“한 4개월 정도 걸릴 겁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독이 내과과장과 악수를 나누고 촬영 스태프들을 철수시키는 순간, 배우들에게 환자와 보호자들이 몰려들었다.
“사인 좀 해주세요.”
한순간에 내과병동 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젊은 간호사들까지 합세한 탓에 제지할 사람도 없었다.
미누는 피식 웃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여! 톱스타님. 촬영은 잘 끝난능교?”
잠을 자겠다던 장 선생은 잠 대신 피자를 먹다가 미누를 맞았다.
“웬 피자예요? 잠잔다는 사람이.”
“글쎄 자려고 했는데 과장님이 피자를 보내셨다 아이가. 뭐 영화 출연 기념으로 쐈대나? 그카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는데 먹을 건 먹어야제. 황 샘도 먹그라.”
“다 드세요. 다 드시고 내일 나 오프시키는 거나 잊지 마세요.”
“젠장! 내일이면 수련의 생활이 끝나기라도 하는 기고? 대체 얼마나 예쁜 여자길래 그렇게 목숨 거노?”
“적어도 남자라면 목숨 걸 만한 여자를 사랑해야죠.”
“너무 그카지 마라. 그럼 신의 질투를 산다고, 책에도 그런 얘기 억수로 많다.”
“무슨 얘기요?”
“내가 옛날에 읽은 책 중에 진짜 깨는 러브스토리가 있는데 두 남녀 학생이 사랑하다가 겨우 고백을 하고 일요일 날 창경궁에서 만나기로 한다카이. 그칸데 그 일요일 날 무슨 일이 생긴 줄 아노?”
“무슨 일이요? 뭐 전쟁이라도 터졌어요?”
“아네! 걔네 둘이 만나기로 한 날 바로 6.25가 터져버린 기라.”
“장 선생님, 지금 초 치는 거예요? 그런 구닥다리 소설 가지고 말이야……!”
미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아이다! 말하자면 그렇다 이거지. 피자나 먹자카이.”
장 선생이 말꼬리를 돌렸다.
저녁이 되면서 정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병원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는다.
환자와 비는 아무래도 상극이다. 비가 오면 환자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엄살이 심한 환자거나 나이가 연로한 환자는 이런 때 특히 통증을 호소하곤 한다. 미누는 관절염이 심해 입원한 할머니의 환부를 봐주고 잠시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노인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몇 마디 귀를 기울여 들어주었더니 할머니가 고맙다고 사탕을 한 주먹 내밀었다. 사탕을 주머니에 넣으며 미누는 할머니가 벗어둔 안경을 집어 들었다.
“할머니, 이거 오늘 밤에 안 쓰실 거죠?”
“그려. 밤에야 쓸 일이 있나. 그란디 왜?”
“너무 지저분하네요. 제가 깨끗이 닦아다 드릴게요.”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미누는 할머니의 공치사를 뒤로하고 병실을 나섰다.
할머니의 안경은 너무 더러워져 있었다. 이런 건 임상병리과의 초음파세척기의 힘을 빌리면 금세 새 안경처럼 깨끗해진다. 그런 다음 아침 회진 때 돌려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나서도 저녁 내내 미누는 장 선생을 대신해 병실을 뛰어다녔다. 아무래도 내일 쉬려면 장 선생의 피로를 덜어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요일 새벽 2시.
응급실에 실려온 췌장염 환자의 응급처치를 끝내고 중환자실로 옮긴 후에야 미누는 한숨을 돌렸다.
드디어 일요일이다. 이제 일곱 시간 후면 창해를 만날 수 있다. 몸은 고단하지만 창해 생각만 하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미누였다.
그런데 화장실에서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텅 빈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뒤에 무엇인가 가득한 것 같은 느낌이 전해 왔다. 모골이 송연해진 미누가 휙 뒤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하며 뒤돌아서는데 이번엔 뭔가 아련한 메아리 같은 것이 화장실에서 들려나왔다. 마치 유혹의 메아리 같기도 하고 혹은 절규 같기도 한 소리였다. 잠깐 망설이다가 미누가 소리쳤다.
“누굽니까? 화장실에 누가 있어요?”
화장실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미누는 화장실을 하나하나 노크하고 열어보기 시작했다. 환자들 중에는 화장실에 일을 보러 왔다가 통증이 심해져 기절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개의 화장실을 다 열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온 미누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복도가 이상해 보였다.
크게 변한 건 없는데 뭔가 이상했다. 거리감이 너무 멀고 엷은 안개까지 피어오르는 게 아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 촬영이 있다더니, 환상적인 분위기라도 내려고 드라이아이스라도 뿌렸나?”
미누는 별 생각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제 한잠 자야 할 시간이었다.
잠을 자고 싶은 건 아니지만 데이트의 분위기를 살리자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빠알간 토끼눈으로 창해를 보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숙소 층의 버튼을 누르려던 미누는 버튼 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상한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3층과 5층 버튼 사이였다.
잘못 보았나 하고 미누는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버튼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빛은 점점 강해져 미누가 잠시 시선을 비낀 사이 3층과 5층 사이에서 선명한 4층 버튼이 하나 거짓말처럼 튀어나왔다.
4층?
미누는 잠시 당황했다.
지난번에 그것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번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미누는 무엇에 홀린 듯 4층 버튼 앞에서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라면 단순한 착시일 것이다.
미누는 일단 손을 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음을 느끼는 미누. 한 번 더 4층 버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미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버튼을 힘껏 눌렀다.
그건 명백한 미누의 실수였다.
4층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버튼에서 강력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핵폭탄이라도 터지는 듯 강력한 섬광이었다. 어떤 물질이라도 다 흡수해 버릴 듯이 강력한 빛은 마치 컴퓨터 그래픽처럼 미누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누는 마치 자신이 스펙트럼에 빨려 들어가는 듯 허공에 부웅 뜨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야?”
느낌.
아련한 느낌.
엄청난 속도로 한없이 이끌려 들어가는 느낌.
그런 느낌도 잠시, 뒤이어 미누는 끝없는 추락을 느꼈다. 어디엔가 떨어지면서 분자보다 작은 알갱이로 산산조각 나는 듯한 느낌.
퍼엉!
마침내 미누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처박히기라도 한 걸까?”
뼈마디가 다 부서진 듯한 고통으로 미누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5. 눈물의 평원
퍼억!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날아드는 묵직한 발길질. 통나무처럼 나가떨어진 미누는 고개를 들면서 바로 경악해 버렸다.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막아! 여기가 뚫리면 가족과 형제들이 모두 죽는다. 클로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한 놈도 통과시켜선 안 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미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친 짐승가죽이나 쇠붙이로 장식된 옷을 입고 투구를 뒤집어쓴 채 야수의 안광을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야만족, 그리고 그들과 혈투를 벌이는 중세의 기사와 결사대들이었다.
야만족의 무리는 줄잡아 1,000명을 넘을 것 같지만 결사대는 고작 100여 명에 불과해 보였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야만족을 맞아 결사대는 정말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다.
활과 칼, 그것도 안 되면 도끼로… 죽어가면서도 한 명의 야만족이라도 더 죽이려고 몸을 던지는 결사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미누는 일어서려고 땅을 짚다가 물컹한 느낌에 소스라치고 만다.
시체였다.
그것도 한두 구가 아니라 끝없이 늘어진 시체들. 줄잡아 수백 명의 시체가 미누의 발밑에 뒹굴고 있었다.
“뭐야? 영화 촬영이 시작된 건가? 세트 한번 죽이게 실감나네.”
미누는 비틀대며 일어섰다. 한 명의 야만족이 미누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이봐요, 나 이 병원 의사입니다. 촬영을 하려면 미리…….”
퍽!
미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만족의 발길이 미누의 배에 꽂혔다. 숨이 턱 막힌 미누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당신… 엑스트라인 모양인데… 미쳤어? 난 이 병원 의사…….”
미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야만족의 무시무시한 발길질이 다시 한 번 미누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입과 코에서 선혈이 붉게 터지는 걸 미누는 똑똑히 보았다. 야만족은 들고 있던 도끼에 침을 퉤 뱉더니 징그런 미소와 함께 도끼를 치켜 들었다.
놀란 미누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과 동시에 야만족도 뭔가 경이로운 눈빛으로 주춤거리는 모습이 확연했다.
“이, 이봐. 미쳤어? 난 의사라니까.”
주춤거리는 야만족을 밀치며 미누가 소리쳤지만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야만족의 도끼가 내리꽂혔다.
퍼억!
도끼는 미누의 몸통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옆에 쓰러진 다른 시체의 팔뚝을 스쳐갔다.
“감독 어디 있어? 당장 집어치워. 이게 무슨 짓이야?”
미누는 절규했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워워워!”
야만족은 둔탁한 방패로 미누를 밀어붙이며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가 미누의 귓불을 차갑게 스치며 빗나갔다. 후각에 쇳날의 섬뜩한 느낌이 화악 치고 들어왔다.
“야! 이 미친놈아. 아무리 역할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난 의사야. 니들 나 다치면 엄청난 손해배상을 해야 할걸.”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미누에게 야만족은 계속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뒷걸음질치던 미누는 죽은 병사의 시체에 걸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야만족이 미누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휘잉!
이번에 피할 수 없었다.
“소품이야? 진짜야? 이 미친놈아, 그만 해애!”
미누의 외침과 함께 야만족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췄다.
한숨을 돌린 미누가 고개를 들어보니 야만족의 가슴에 화살이 박혀 있고 야만족의 뒤로 화살을 날린 듯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야만족의 안면근육이 잠시 실룩거리더니 화살이 박힌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퉁 하고 쓰러지는 야만족을 간신히 비껴서며 미누는 얼굴에 묻은 야만족의 피를 닦았다. ‘요즘은 피도 실감나네’라고 말하려던 미누는 입을 쩌억 벌리며 온몸에 번져오는 전율을 느꼈다.
Blood!
진짜 피였다. 미누의 후각에 피가 가진 독특한 철분 냄새가 화악 끼쳐왔다.
황급히 야만족을 살펴보니 이미 사망한 후였다.
“이봐! 중지, 중지! 사람이 죽었어. 엑스트라가 진짜 죽었다고!”
미누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결사대와 야만족의 무리로 미친 듯이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만 해! 사람이 진짜 죽었다니까.”
미누는 혼전 중인 결사대와 야만족에게 뛰어들어 야만족을 들이치며 절규했다. 미누의 공격을 받은 야만족이 저만치 나뒹굴었다.
퍼억!
하지만 멍하니 서 있던 미누는 무언지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한 야만인이 던진 도끼가 미누의 뒷머리를 비껴간 것이다. 미누는 천천히 쓰러지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결사대와 야만족의 눈을 보았다. 뒤이어 폭풍처럼 결사대를 윽박지르며 잔혹하게 살육하는 야만족도 보았다.
남은 결사대는 기사를 포함해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서나 봄 직한 실감나는 복장으로 무장한 기사도 이미 야만족의 협공에 피를 뿜으며 휘청거리고 있다. 그는 분전했지만 베어버린 야만족보다 달려드는 숫자가 더 많았다. 분위기를 보니 이 전투는 야만족의 압승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영화는 우리 병원을 세트장으로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신성한 병원에서 무슨 이런 돼먹지 않은 전투 씬이람…….”
미누는 희끄무레 터오는 먼동에 가물가물 맺혀오는 거대한 나무의 형상을 보면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누는 온몸의 통증을 느끼며 간신히 눈을 떴다. 주변의 느낌이 음산하고 차가웠다.
끄응!
장난이 아니었다. 미누의 온몸은 벼락을 맞은 듯 허덕거렸다.
“가만, 지금 몇 시야? 기차!”
미누는 통증 속에서도 창해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정신을 수습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미누가 눈을 뜬 곳은 평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판에 통나무를 베어다 박아 담장처럼 만든 임시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사방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날카롭게 청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아직도 촬영장이야?”
미누는 기가 막혔다.
담장 안에 갇힌 사람은 50여 명이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미누를 해치려던 야만족에게 화살을 날리던 기사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었지만 몰골만은 한결같이 중세풍의 복장 그대로였다.
“젠장! 이것들이 미쳤나? 나는 청량리역에 창해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미누는 씩씩거리며 담장 가까이로 걸어갔다.
“이봐요! 여기 스태프 좀 불러와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난 이 병원 의사란 말입니다.”
미누가 통나무를 붙잡고서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보초를 서던 야만족 두 명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미누에게 다가왔다.
“이거 열어요. 난 의사라고요.”
미누가 더욱 맹렬히 소리치자 야만족 한 명이 히죽 미소와 함께 긴 창을 미누에게 거꾸로 겨눴다.
“장난 그만 해요. 난 의사라고요. 문 열어. 아니면 당신들 감독 불러오든지.”
발악을 하듯 흥분해 소리치던 미누는 사정없이 복부를 향해 날아오는 창을 맞고 저만치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야만족이 창의 뒷부분으로 미누를 거칠게 내질러 버린 것이었다. 미누는 내장이 터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 이것들이 정말…….”
미누는 배를 싸안고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불러와! 당장 감독을 불러오란 말이야!”
악에 받친 미누가 통나무 기둥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몇 번을 계속하자 다시 야만족 한 명이 조금 전처럼 창을 겨눴다. 이번에는 날카로운 창날이었다.
“그래. 어디 찔러봐라. 당신 엑스트라 같은데, 미쳤어? 난 의사라니까.”
퍼억!
발악하듯 대들던 미누의 몸이 다시 허공에 붕 떠버렸다. 야만족의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무리가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친 것이다. 숨통이 금세라도 끊어질 듯 숨이 터억 막혔다.
끄윽… 끄윽……!
바닥에 처박힌 미누는 한동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맞은 부위가 터진 듯이 아팠다. 가운을 걷고 보니 가슴 부위가 퍼렇게 멍들다 못해 껍질이 벗겨진 채 피가 검붉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포기해. 클로제님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아껴뒀다가 저놈들의 숨통을 하나라도 더 끊자고.”
어디선가 굵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피로 범벅이 된 위엄 있는 기사였다.
“이봐요. 대체 당신네 감독은 어디 있습니까? 난 의사예요. 배우가 아니라고요.”
비틀거리며 미누가 기사에게 다가서자 역시 피투성이로 서 있던 두 명의 병사가 길을 막았다.
“비켜.”
미누가 거칠게 밀어버릴 태세로 나오자 병사 중의 한 명이 먼저 미누를 집어던졌다. 무방비로 있던 미누는 시체 위로 날아갔지만 몸을 날려 안전하게 착지했다.
“흐억!”
미누는 시체 위에서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봐도 역시 소품이 아니었다. 끈적이는 피와 조직 덩어리들. 그건 밀랍인형이 아니라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그때서야 미누는 어쩌면 이것이 영화 촬영 현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이상했다. 방금 전 기사한 한 말도 그랬다. 난생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익숙한 것처럼 이해가 되었다. 엘리베이터의 섬광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 같았다. 몸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케샨트 슈마, 케샨트기니 슈마!”
그때 몇 미터 옆에서 여인의 절규가 들려왔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초라한 여인이었다.
“까아악! 누가 우리 슈마 좀 살려줘요. 우리 애가 죽어가요.”
그녀는 품에 딸인 듯한 여자아이를 안고 울부짖었다. 그녀의 주변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다들 침통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리 줘봐요. 내가 봐드리죠.”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는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화든 현실이든 부상자를 치료하는 건 역시 의사의 몫이었으니까.
“피스라나타리아마!”
여인이 살기를 뿜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뭐라는 겁니까?”
미누는 여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이에게 다가섰다.
“안 돼. 우리 슈마한테 손대지 마.”
미누가 여자아이의 상처를 보려고 빼앗아 들었을 때 여인이 미누를 떠밀며 거부했다.
“다들 미쳤어? 왜 이래? 난 의사예요. 의사라고요. 딸을 살려줄 테니까 저리 비켜요.”
미누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피스라미고슈마반!”
그래도 뭐라고 소리치며 대드는 여인을 미누는 힘껏 밀어버리고 슈마라는 여자아이의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미누에게 밀려 넘어진 여인은 이성을 잃었는지 땅에서 돌을 하나 주워 미누에게 달려들었지만 기사의 손이 빨랐다. 돌을 든 여인의 손을 잡아챈 것이다.
“그냥 놔둬.”
피투성이였지만 기사의 말은 위엄이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몇 번 씩씩거리더니 손에서 돌을 놓고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슈마인지 하마인지 여자아이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미누는 일단 지혈부터 시작했다.
상처를 보니 날아온 도끼에 맞은 듯 옆구리의 상처가 깊었고 왼쪽 팔뚝은 살이 뭉텅 베여져 나가 피를 쏟고 있었다.
비단 이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전쟁터가 아니고서야 중환자실에 실려온 환자들도 이토록 처참하지는 않았으니까.
슈마라는 아이의 피는 다행히 오래가지 않아 멈췄다. 하지만 흘린 피의 양이 너무 많았다. 상처를 꿰매야 하는데 기본적인 봉합기구들이 없었다.
하긴, 말해 무엇 하랴? 수혈이 시급하지만 그것도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겨우 한숨을 돌리며 미누가 슈마의 엄마에게 물었다.
“영화가 아니군요.”
여인은 미누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정신을 잃은 슈마를 안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리 와요. 상처를 좀 봅시다.”
미누는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품을 지키는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다시 달려들 태세를 갖췄다.
“꿈인지 생시인지, 영화인지 현실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상처를 봅시다. 치료는 해야죠.”
미누가 진지하게 말하자 기사가 주변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해가 지면 저들은 우릴 죽일 것이다. 상처를 치료하는 건 별 의미 없는 일이야.”
기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래도 합시다. 의사가 환자를 그냥 놔둘 수는 없어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미누는 강한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기사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상처를 맡겼다. 기사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상처를 하나하나 확인한 미누는 치를 떨었다.
“아프지 않습니까? 이건 생각보다 너무 심각하군요. 이 정도면 중상이에요, 중상.”
“아픔 따위는 괜찮다. 블러디안의 힘에 밀려 사로잡힌 것이 더 원통할 뿐.”
“블러디안?”
기사의 상처를 닦고 동여매면서 미누가 물었다.
“그대는 우리 피스랜드 사람이 아닌 것 같군. 어디서 왔나?”
“피스랜드?”
“마법사인가?”
기사가 팔을 천천히 움직여보며 말했다.
“웬 마법사? 나는 의사입니다.”
“어디서 왔나?”
“미국. 아니, 지금은 한국에 있으니까 한국이군.”
미누는 지금 기사가 뭘 묻는 건지, 혹은 자신이 무엇을 대답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가 동문서답을 하는 느낌이었다. 블러디안이니 피스랜드니 하는 말은 세계사에서도 들은 적이 없는 너무나 생소한 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영화 촬영장은 아닌 것 같고,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언어도 이상한데?”
“피스랜드! 클로제님의 땅이다.”
“피스랜드? 유럽입니까?”
“너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가만히 보니 생김새도 많이 다르다. 어느 부족 출신이냐?”
“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
기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쪽에 있는 나라요. 미국은 서쪽에 있는 나라고.”
“동과 서? 그렇다면 우리의 적이 아닌 건 확실하군.”
“이게 뭡니까? 나하곤 상관없지만 상황이나 알아둡시다. 대체 여긴 어디고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메이징님에게 무례하지 마라.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미누에게 날카로운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괜찮다. 이자는 다른 곳에서 온 모양이다. 알 리가 없지.”
기사가 병사들을 제지했다.
“메이징?”
“내 이름이다. 너는?”
“나는 미누요. 황미누.”
“미누? 옷차림만치나 특이한 이름이군.”
기사가 엉망으로 더럽혀진 미누의 가운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고통에 못 이겨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어쨌든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죽을 테니까.”
“죽는다고요?”
“그래. 블러디안은 포로를 석양이 질 때 처형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저 해가 붉은 황혼을 쏟아낼 때 남자 포로들의 피를 뿌리며 축제를 여는 거지. 그리곤 성으로 진격해 가서 여자들과 물건을 약탈할 거야. 그 전에 클로제님이 돌아오셔야 할 텐데…….”
“말도 안 돼. 그런 야만족이 어디 있어? 식인종이 아닌 다음에야 피를 즐기다니.”
“슬픈가?”
메이징이 숙연하게 물었다.
“대체 여긴 어딥니까? 죽는다니요? 여기가 어디예요?”
미누는 믿기지 않는 듯 소리쳤다.
“말했지 않은가. 여긴 피스랜드, 클로제님의 땅이다.”
“당신은 그 클로제란 사람의 부하고?”
미누의 말과 동시에 메이징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클로제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으니.”
그 눈빛에서 어찌나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지 미누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클로제님의 자랑스러운 결사대다. 블러디안의 침략에 맞서 저 벌판에서 이틀 밤낮을 놈들과 싸웠다. 빅 레이크 쪽으로 침략해 온 다른 블러디안을 치러 간 클로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하루쯤 더 버텼어야 했는데……. 성을 지키는 케시안은 무사한지 모르겠군.”
메이징은 못내 원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사대?”
“메이징님! 불화살입니다.”
메이징의 병사 하나가 하늘을 가리켰다.
진짜 불화살이었다.
검붉은 연기를 뿜으며 거센 불길로 날아오는 수천 발의 불화살이 축포처럼 솟아올랐다.
“클로제님이다. 클로제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그 순간 상처로 신음하던 병사와 무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서며 소리쳤다. 메이징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미누는 똑똑히 보았다.
블러디안이라고 불린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불화살을 피해 허둥대는 모습을.
“클로제님을 도와라! 최후의 한 명까지 싸워라!”
“메쉬도! 큐안사타마 티엔슈라!”
메이징이 괴성을 지르며 상처로 신음하던 병사들을 지휘해 통나무 담장으로 몰려갔다.
“이봐요. 그 몸으로 움직이면 안 돼요. 겨우 지혈된 상처가 터진다고요.”
미누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먼 평원으로부터 먼지가 가득히 일고 있었다.
“클로제님이에요!”
언제 눈을 떴는지 슈마도 엄마의 품에서 일어나 비장하게 소리쳤다.
“클로제?”
미누도 아련하게 그 말을 따라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저런 희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미누는 자신이 처한 상황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먼지 이는 벌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원의 중심에서 블러디안과 한 무리의 군사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먼지 속의 병사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두 힘은 팽팽하게 충돌하는가 싶더니 블러디안들은 바로 밀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화살이 블러디안의 진영에 쏟아졌다.
먼지가 조금 가시는가 싶더니 진격해 오는 병사들 속에서 우뚝 선 한 사람이 보였다. 까만 말을 타고 흰 전투복을 입은 채 블러디안을 쓸어버리는 섬광 같은 사람. 옆으로 펄럭이는 드래곤의 형상을 한 푸른 문장의 깃발을 나부끼며 등장한 영웅은 바로 이들이 말하는 클로제였다.
사로잡혀 있던 메이징의 무리도 만만치 않았다.
불붙은 담장을 쓰러뜨리고 블러디안들의 무기를 빼앗은 메이징과 부하들은 중상을 입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블러디안의 배후에서 적들을 베고 있었다.
벌판에 가득 찬 비명.
허공에 난무하는 피와 살덩어리들.
무딘 창검과 도끼에 동강 나는 근육과 뼈마디들이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누는 믿기 싫었지만 이것이 어떤 형식에서든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 어떤 그래픽도 이토록 생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격전의 마지막 분수령은 메이징과 야만족 리더의 혈투였다.
메이징의 분투는 감동 그 자체였다. 언제 부상을 입었냐는 듯 그는 불같이 적을 몰아세웠다. 마지막으로 철갑으로 중무장한 블러디안의 리더를 향해 튀어오른 메이징의 검이 허공에서 번쩍 빛나는 순간, 벌판에서 혈전을 벌이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미누도 똑똑히 보았다.
마치 고릴라 같기도 하고 사자 같기도 한 블러디안 리더의 목은 몸에서 거짓말처럼 숭덩 떨어져 나와 피를 뿜으며 메이징의 발 아래 툭 떨어졌다. 그의 투구에서 노란 새의 깃털이 속절없이 파르르 떨었다.
대세는 그것으로 완전히 갈렸다.
리더를 잃은 블러디안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메이징은 떨어진 리더의 목을 검에 꿰어 포효했다.
“슈탄카로나!”
메이징의 포효를 따라 모든 병사들의 함성이 벽력처럼 들판을 뒤덮기 시작했다.
“슈탄카로나! 슈탄카로나!”
“와아아!”
처절한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살아남은 블러디안들은 먼지와 함께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흑마를 탄 클로제의 무리가 부복한 메이징 쪽으로 다가왔다.
“메이징! 고맙구나. 끝까지 살아 있어줘서.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빅 레이크의 전투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린 플레인의 디오펜이 때를 맞춰 지원군을 보내주는 바람에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위엄!
바로 그것이었다. 형언하기 힘든 거대한 위엄 같은 것이 클로제에게서 팽팽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클로제님.”
메이징 이하 부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일어나라. 내 너를 잃었다면 하늘이 부끄러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클로제님!”
메이징과 부하들이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클로제가 말에서 내려 메이징을 따뜻이 안았다.
“상처가 깊구나. 어서 가자. 빅 레이크의 블러디안들은 모조리 격퇴했으니 당분간은 도발하지 못할 것이다.”
“천운이로군요. 모두 클로제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누구인가?”
클로제가 부상자들 틈에 서 있는 미누를 바라보며 물었다.
막상 클로제가 자신을 바라보자 미누는 숨이 터억 막혔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8등신의 근육질 몸매, 거기다 독수리를 닮은 날카로운 눈빛과 온몸에서 풍겨나오는 눈부신 광채는 메이징의 그것보다도 몇 레벨은 높은 것으로 보였다. 그때서야 미누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클로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알았다.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미누뿐이었다.
“저와 친구들의 상처를 치료해 준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예, 그렇습니다.”
“오! 그렇다면 그건 메이징 자네의 축복이다. 저 마법사가 자네에게 행운을 가져온 거야.”
“클로제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성으로 동행할까 합니다만.”
“메이징의 친구라면 내게도 친구지. 더욱이 마법사라면 피스랜드의 영광인 데다 자네의 상처까지 돌봐주었다면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클로제님.”
“날이 저물고 있으니 결사대원들의 시신 수습은 내일 하도록 하자. 블러디안들이 습격해 올지도 모르니.”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클로제님.”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 메이징에게 말을 내주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먼저 말에 태워라!”
클로제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했다.
“타지.”
말을 탄 메이징이 미누에게 다가왔다.
“어디로 가는 거죠?”
미누가 물었다.
“강요하진 않겠네. 하지만 여기 혼자 남으면 자넨 와이번의 밥이 되거나 블러디안에게 찢겨 죽을 거야.”
“와이번? 그런 게 진짜 있단 말입니까?”
미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살던 곳은 평화로웠나보군. 여긴 와이번의 땅이야. 타겠나? 아니면 남겠나?”
메이징의 말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쳤다. 미누는 자신이 갇혔던 통나무 담장을 뒤돌아보았다. 담장은 이미 다 타버려 연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 너머에 있는 거대한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산이 분명했다.
“따라가는 게 낫겠군요.”
미누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메이징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미누를 뒤에 태운 메이징은 안도하는 슈마와 여인 일행에게도 한마디를 남겼다.
“이곳은 위험하니까 아무리 과일이 좋다 해도 다시는 허락 없이 오지 말도록!”
“네…….”
슈마와 그 일행이 고개를 조아렸다.
메이징의 말을 타고 무리에 섞여 성으로 향하면서 미누는 옆을 스쳐가는 슈마와 그 엄마를 보았다.
상처를 손으로 감싸고 고통스러워하던 슈마가 미누를 보더니 힘겹게 다가와 웃음을 보였다.
“세당케!”
“뭐라는 거죠?”
미누가 메이징에게 물었다.
“자네는 고대어를 모르는 모양이군. 고맙다는 거야.”
메이징이 힘 있게 대답하며 말을 재촉했다. 미누는 꾸벅 인사를 하는 슈마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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