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일인칭 재벌시점

차라리 건물주

2020.08.08 조회 41,792 추천 469


 (1)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창밖으로 이를 바라보는 고병윤(高炳潤)의 마음도 음울했다. 자신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치의의 말로는 길어야 1년, 짧으면 6개월의 시한부 생명이라고 했다.
 위암 판정을 받고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반 이상을 잘라내는 큰 수술이었다. 전이를 막기 위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어야 1년의 시한부 생명. 실로 허무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죽기 전에 꼭 할 일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이 평생 일군 재계서열 1위의 그룹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후속작업에 착수해야한다.
 
 GL그룹.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재계서열 1위로 올려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미련을 버려야 할 때였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을 시점.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룹의 영속성을 꾀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물려주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다. 이런 날을 대비해 사전에 포석해둔 대로 지금은 그걸 이행해야 할 때였고, 그걸 촉구할 때인 것이다.
 GL그룹은 혼자 일군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동업자가 있었다. 비록 60:40의 지분이었지만 하(河)씨 형제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GL그룹도 없었을 만큼, 그들과는 창업단계에서부터 돈독하게 지내왔다.
 
 그런 하가의 장형이요, 그룹의 부회장인 하준(河俊)의 무남독녀와 자신의 아들을 맺어주어, 자신의 사후에라도 경영체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 사명감에 고병윤은 갑자기 후끈 몸이 달아올랐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응접실 탁자에 놓인 전화기 앞으로 다가간 고병윤은 곧 다이얼을 돌렸다. 이내 비서실이 연결되었다.
 
 “난데.”
 수화기 너머로 여직원의 싹싹한 답이 들려왔다.
 “네, 회장님!”
 “비서실장 바꿔.”
 “네, 회장님!”
 
 잠시 후.
 “전화 바꿨습니다. 회장님!”
 “부회장 사내에 있나?”
 “아침에 구미로 출장을 갔다가 대통령 비서실장의 호출이 있어서, 지금은 청와대 경내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오는 대로 내 집으로 오라고 해.”
 “네, 회장님!”
 비서실장 소병규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병윤은 즉시 전화를 끊었다.
 
 왜 대통령 비서실장이 부회장을 불렀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회사 업무에서 손을 떼기로 한 이상, 더 이상의 궁금증은 놓아야 했다. 그렇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궁금증을 안고 고병윤은 응접실을 벗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여름 한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능소화 꽃무더기가 있는 곳이었다.
 기생식물인지라 기어오르는 특성 때문에 등나무처럼 시원한 나무 그늘을 제공해 주는 능소화.
 그가 그곳에 도착해보니, 며칠 전만해도 만개했던 꽃들이 많이 시들어있었다.
 꽃을 통해서도 세월의 빠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시한부 생명인 까닭에 세월이 더욱 빠르게 느껴지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고병윤은 갑자기 시계를 보았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시계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9와 한자로 토(土)라는 요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오늘이 벌써 9월 9일이로구나. 올해도 이젠 몇 달 남지 않았군.’
 내심 이런 생각을 하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주치의 말대로라면, 80년대도 못 보고 죽는다는 소린데······.”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은 1978년. 1년을 더 넘게 살아야 대망의 80년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중얼거림이 멎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담홍색의 화려한 꽃들이 자루째 떨어져 있었다.
 도처에 꽃자루째 떨어진 꽃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자신의 인생과 같아서 울컥 슬픔이 밀려왔다.
 
 ‘이래선 안 되지.’
 마음을 수습하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을장마가 들 때가 됐구나!”
 낮게 중얼거리며 고병윤은 쓸쓸히 돌아섰다.
 집안으로 들어가며 고병윤은 또 한 번 중얼거렸다.
 “토요일이면 좀 일찍 귀가해야 될 거 아냐. 뭘 하느라 지금까지 안 오는 거야, 이놈의 자슥은!”
 아직도 귀가하지 않는 아들이 마뜩치 않아 고병윤은 역정이 치밀어 올랐다.
 
 * * *
 
 그 시간.
 고병윤이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아들 고승지(高承志)는 한일관(韓一館)에 와있었다. 친구 네 명과 함께. 청진동 한일관은 이승만 대통령도 드나들던 명소였다.
 또한 미래그룹 왕 회장도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찾는 맛집으로 유명했다. 쇠고기 장국밥과 너비아니가 주 메뉴로, 일반인들이 찾기에는 가격이 좀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그런 곳의 2층에서 네 명이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 명은 남자로, S대 상대 동기들이자 75학번이었다. 또 한 명은 여자 친구로, 역시 S대 음대 4학년에 재학 중인 재원(才媛)이었다. 역시 75학번 동기생이었다.
 
 “자, 술도 이제 먹을 만큼 먹었으니, 국밥이나 한 그릇씩 하고 헤어지자.”
 승지의 말에 김동제가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또 먹어?”
 “술 배, 밥 배 따로 있는 거 몰라?”
 “아이고, 나는 배불러서 더 이상은 못 먹겠으니 먹고 싶은 사람들이나 더 시켜.”
 동제가 뒤로 나자빠지자 세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이에 승지가 여종업원을 불러 쇠고기 장국밥 네 그릇을 추가로 주문했다.
 동제 외에 술을 별로 마시지 않은 네 사람은 국밥을 깨끗이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1층 계산대로 내려간 일행은 승지가 계산하는 것을 이번에도 지켜봐야만 했다.
 “매번 고맙다.”
 동제의 말에 승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 자꾸 하면 안 끼워준다.”
 “알았다, 알았어.”
 등을 두드려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던 동제가 넉살좋게 김윤진에게 말했다.
 “제수씨, 먼저 갑니다. 양해하십시오.”
 동제의 농담에 윤진은 고혹적인 웃음으로 화답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에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자, 승지가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나 먼저 간다.”
 곧 두 사람이 떠나자, 먼저 간다던 동제까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한일관을 떠났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와 함께 인근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온 승지가 윤진에게 말했다.
 “오늘은 바빠서 먼저 가야겠다. 조심히 들어가.”
 “오늘도 고마웠어.”
 “월요일에 봐.”
 “그래.”
 손을 흔들어준 승지는 마침 지나가던 빈 택시를 세워 타고 정류장을 떠났다.
 
 * * *
 
 그 시각. 고병윤은 1층 서재에서 하준을 맞아 심각한 안색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젠 우리의 약속을 실천할 때가 온 것 같아.”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
 고병윤이 딱 잘라 말했다.
 “사돈을 맺자는 약속!”
 병윤의 말에 하준은 펄쩍 뛰었다.
 “딸아이는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알아! 내가 효주의 학년도 모르고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나?”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민법에 보면 분명히, 여자는 16세, 남자는 18세가 되면 부모 동의 하에 결혼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허허, 것 참······.”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하준을 향해 병윤이 이번에는 설득조로 말했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내 수명은 길어야 1년이야. 그 안에 두 사람이 맺어지는 걸 봐야,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단 말이야.”
 “형님 심정은 잘 압니다만, 요즘 누가 고등학생을 시집보냅니까?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래서? 싫다는 말인가? 약속을 어기겠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잖습니까? 너무 어리니 최소한 고등학교는 졸업하거든······.”
 “일 없네. 우리의 우의가 여기서 금이 갈 줄은 몰랐군.”
 돌아앉는 병윤을 보고 하준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우리가 갈라져서 GL그룹이 해체되는 것은 정말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군 기업인데······.”
 “그러니 내 말대로 해주시게. 마지막 소원이자 부탁일세. 이렇게 애원하네.”
 
 병윤이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으려 했다. 깜짝 놀란 하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형님,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승낙하면 될 것 아닙니까? 단, 딸아이가 반대하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효주는 걱정 마시게. 승지에게 시집오고 싶어서 안달이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그 아이가 워낙에 천방지축이라, 농담한 걸 가지고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것 아닌가?”
 “알아서 하십시오. 난 모르겠습니다. 삶아 먹던, 구워 먹던.”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 아이가 짐승도 아니고.”
 “끙······!”
 
 병윤이 들을 정도로 큰 신음소리를 내며 이번에는 하준이 돌아앉았다. 이때였다.
 “다녀왔습니다. 할머니!”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며 내뱉은 아들의 목소리에 병윤은 푸념 섞인 말을 했다.
 “저 녀석은 제 할머니밖에 몰라!”
 “승지만큼 효성스러운 손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게 다 제 할머니한테서 내가 주는 용돈을 빼내는 재미로 저러는 거야.”
 “그렇게 받은 용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두 저축한다면서요?”
 “요즘은 그 돈으로 어디에다 땅을 사놨다는데, 나는 관심이 없어서 어디인지도 몰라.”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승지는 할머니께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제 엄마를 찾았다.
 “엄마, 엄마!”
 이 소릴 듣고 병윤은 또 한 번 푸념을 했다.
 “다 큰 녀석이, 젖 먹을 것도 아니고 엄마가 뭐야, 엄마가. 저 나이쯤 되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정상 아닌가?”
 “하루아침에 부르던 호칭을 정정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나저나 형수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낮에는 미술관에, 저녁에는 여고 동창모임이 있다고 나갔으니, 지금쯤 저희들끼리 잘 놀고 있겠지.”
 “참, 형님도. 말투 좀 고치십시오.”
 “자네 말대로 그게 쉬운가? 참, 비서실장이 부른 것은 곧 각하께서 부르셨기 때문 아닌가?”
 “그렇습니다, 형님.”
 
 이때였다. 노크도 없이 불쑥 서재 문이 열리더니 승지가 고개만 디밀고 물었다.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젖 먹을래?”
 아버지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승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
 “저 녀석이······.”
 
 부자의 실랑이를 보던 하준이 말했다.
 “승지야, 잠깐 들어와 봐라.”
 승지가 활짝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미소 띤 얼굴로.
 “용돈 좀 주시게요?”
 “그놈의 용돈, 용돈!”
 아버지의 말에도 승지는 하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래요? 그게 뭔데요?”
 “네 혼사문제다.”
 “네?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저야 그렇다 쳐도, 효주는 아직 고삐리잖아요?”
 “말 좀 곱게 못하겠니? 고삐리가 뭐야, 고삐리가!”
 
 아비의 잔소리에는 이골이 난 듯, 전혀 들은 척도 않고 승지는 하준의 대답만 기다렸다.
 “그건 내 원이 아니라 형님의 소원이시다. 하니 그 이유는 형님께 듣거라.”
 “정말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다부진 얼굴로 병윤이 딱 잘라 말했다.
 “그래. 내가 무릎 꿇고 빌다시피 해서 간신히 얻어낸 승낙이다.”
 “허, 정말 기가 막혀······!”
 내심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승지는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말

함께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선작과 추천은 작가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댓글(27)

또끼슈끼럽    
^^ 쪽지보고 왔습니다 ㅜㅜ 연재 축하드리고요 쫌 쌓이면 다시 올께요^^
2020.08.08 19:04
매검향    
또끼슈끼럽님! 이 작품도 함께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2020.08.08 19:10
별무리랑    
쪽지보고옴 20화정도 쌓이면올듯
2020.08.08 23:15
매검향    
별무리랑님! 감사, 감사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2020.08.09 04:45
보보꼭보    
쪽지보고 왔습니다 ㅜㅡㅜ 편수가 적어서 아쉽네요..ㅜㅡㅜ 전처럼 산처럼 편수가 쌓이길!!
2020.08.12 15:23
매검향    
삼대쇼님! 감사, 감사드리고요!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2020.08.12 16:44
풍뢰전사    
건필하세요
2020.08.23 01:35
한정우    
매검향 작가님, 작품 시작 축하드립니다. 대박 나시길 기원합니다.
2020.08.23 08:36
매검향    
풍뢰전사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wjsdn.H님! 감사, 감사드리고요! 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08.23 15:35
푸른솔내음    
78년도에 호출벨이 있어요? 그거 2천년대 들어서 나왔어요. 대문벨 누르면 안에서 소리 나는건 있었지만.
2020.08.25 11:45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