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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1장 좌천(左遷)(1)

2020.08.24 조회 1,123 추천 10


 사고(事故)다.
 당당하게 맞겠다.
 일주일 전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본부장 김대영 앞에 선 서동수(徐東秀)의 머릿속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입사 경력 8년.
 그동안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팀장 직위에 오른 지 1년 반.
 동양전자의 3부 3팀장 서동수가 이제 그야말로 인생의 기로에 섰다.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라고 하는가?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 거기 앉아.”
 
 김대영이 소파의 앞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으므로 서동수가 조심스럽게 앉는다.
 45세, 경력 18년. 영업본부장 겸 상무이사.
 항상 서동수에게 호의적이었던 김대영의 얼굴도 오늘은 굳어져 있다.
 김대영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를 위해서나 회사를 위해서나 털어놓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다.”
 
 서동수는 시선만 주었고 김대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영일전자 최영일이도 너한테 간 돈이 위아래로 뿌려졌다고 증언을 했어. 너만 입을 열면 돼.”
 “······.”
 “그럼 넌 12개월 감봉에 현직이 유지된다. 네 경력이 아깝지 않으냐?”
 “······.”
 “그리고 네가 분 위아래 놈들도 비슷한 처벌을 받고 끝나는 거다. 그게 서로 좋다는 거다. 윈윈이지.”
 
 그러나 서동수는 김대영의 입술 끝이 조금 비틀리는 것을 보았다.
 금방 원상으로 회복되어서 놓칠 뻔했던 장면이다.
 김대영이 똑바로 서동수를 보았다.
 
 “자, 말해라. 내가 부탁한다. 그리고 같이 다시 일하자.”
 
 서동수는 소리 죽여 숨을 뱉는다.
 일주일 전, 서동수의 3팀이 관리하던 하청 공장 영일전자가 본사 기조실 감사팀에 걸렸다.
 14개월 동안 1억 3,000만 원이 리베이트로 송금되었는데 그 계좌를 추궁한 결과 팀장 서동수의 차명계좌라고 자백을 했다.
 현재 계좌의 잔액은 없다.
 그런데 영일전자의 사장 최영일이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자백하게 된 것이 분했던지 그 돈은 서동수 혼자만 먹은 것이 아니라 위아래 골고루 뿌려졌다고 폭로한 것이다.
 서동수에 대한 미안함 반, 자폭하는 심정이 반쯤 섞인 소행이었는데 이젠 공이 서동수에게로 넘어왔다.
 나눠 먹은 위아래 인간을 대라는 것이다.
 이제 서동수는 입을 꾹 다물고 혼자 책임을 뒤집어쓴 채 김대영 앞에 앉아 있다.
 
 “어떠냐?”
 
 다시 김대영이 물었을 때 서동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예, 저 혼자 다 먹었습니다.”
 “병신 같은 자식.”
 
 눈을 치켜뜬 김대영이 이 사이로 자근자근 말한다.
 
 “그런 관행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알아. 나쁜 관행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척결하려는 회사의 의도였어.”
 
 김대영의 말이 이어졌다.
 
 “시범 케이스로 말이다. 하지만 네가 이러니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죄송합니다.”
 “그 대신 너는 회사를 떠나야 된다.”
 
 이제는 외면한 채 김대영이 말을 잇는다.
 
 “전자에는 있을 수가 없어.”
 “······.”
 “그룹 계열사도 마찬가지.”
 
 길게 숨을 뱉은 김대영이 머리를 들고 똑바로 서동수를 보았다.
 
 “곧 인사 명령이 날 거야. 돌아가.”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선 서동수가 머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좋다. 끝냈다.
 
 ***
 
 포장마차에 둘러앉은 팀원은 셋. 이찬홍, 조민수, 양선아다.
 팀원 6명 중 절반만 나왔다. 그것도 군번이 낮은 셋만.
 소주잔을 쥔 서동수가 셋을 둘러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찬홍, 조민수는 제각기 시선을 내렸지만 양선아가 묻는다.
 
 “왜요?”
 “너희들이 귀여워서.”
 “억울해요.”
 
 마침내 양선아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졌다.
 입맛을 다신 서동수가 옆에 놓인 휴지통에서 휴지를 뽑아 건네주면서 말했다.
 
 “열심히 해. 데이비스 오더 마무리 잘하고.”
 “팀장은 어떻게 될까요?”
 
 휴지로 눈물을 닦은 양선아가 묻자 서동수는 술부터 한 모금에 삼켰다.
 
 “한국에는 있지 못할 거야.”
 
 양선아의 시선을 받은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아마 방글라데시나 과테말라, 또는 중국 공장으로 보내질 것 같다.”
 
 그때 양선아가 휴지로 커다랗게 코를 풀었고 서동수는 쓴웃음을 짓는다.
 
 “뭐, 가라는 대로 가는 거지.”
 
 그때 옆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을 했으므로 서동수가 발신자부터 보았다.
 최영일이다.
 모두의 시선이 핸드폰에 모아졌다.
 서동수가 핸드폰을 귀에 붙이면서 말했다.
 
 “예, 최 사장. 납니다.”
 “팀장, 지금 어디 계십니까?”
 
 최영일이 묻자 서동수는 다시 술잔을 들었다.
 
 “예,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고 있는데요.”
 “제가 지금 서울 와 있습니다. 오늘 만납시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서동수가 빈 잔을 내밀자 이찬홍이 소주를 채운다.
 한 모금 소주를 삼킨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최 사장, 미안해 하실 것 없습니다. 다 끝난 일이니까 이젠 신경 쓰지 마세요.”
 “팀장, 저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럼.”
 
 그러고는 귀에서 핸드폰을 뗀 서동수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최 사장이 서울에 와 있구만.”
 “박 부장은 내일 파리 출장을 가던데요.”
 
 불쑥 조민수가 말했으므로 모두 입을 다물고 긴장했다.
 조민수가 눈을 치켜뜨고 서동수를 보았다.
 
 “그동안 눈치만 살피다가 사건이 이렇게 종결되니까 마음 놓고 떠나는 겁니다.”
 
 그러자 이찬홍이 말을 받는다.
 
 “박 부장이 대놓고 상납 받은 건 3부 팀원은 다 압니다. 이번에 팀장이 박 부장을 물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놔둬라.”
 
 머리를 저은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영일전자는 내 책임이야. 부장까지 끌고 들어가면 안 돼.”
 
 정색한 서동수가 셋을 둘러보았다.
 
 “본부장은 다 밝히는 것이 회사를 위한 도리라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심호흡을 한 서동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 혼자 죽고 내 팀을, 내 부까지 살리련다. 난 그것으로 족해.”
 
 그때 다시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옆에 앉은 양선아가 집더니 서동수를 보았다.
 
 “문자가 왔어요.”
 
 서동수의 시선을 받은 양선아가 핸드폰을 보면서 말을 잇는다.
 
 “박 부장인데 읽어 드릴까요?”
 
 술잔을 쥔 서동수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양선아가 읽는다.
 
 “서 과장, 미안하다. 넌 나보다 나은 놈이다. 고맙다.”
 
 ***
 
 오피스텔 앞에 선 서동수가 12층을 올려다보았다.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의 불이 환했다.
 1202호실이다.
 한동안 창문을 올려다보던 서동수가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른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자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정은지가 응답했다.
 
 “으응, 자기야?”
 “응, 나야.”
 
 심호흡을 한 서동수가 대리석 기둥에 등을 붙였다.
 이곳은 오피스텔 현관 앞쪽의 휴게실이다.
 벤치만 여러 개 놓인 휴게실은 텅 비었고 지붕이 없는 터라 위쪽 오피스텔의 불빛이 내려 비치고 있다.
 
 “너 지금 어디야?”
 
 서동수가 그렇게 물은 이유가 있다.
 지난 달 연락도 없이 1202호실 앞까지 왔다가 안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 놀라 돌아갔기 때문이다.
 정은지한테 월세 보증금을 내주고 매월 200만 원씩 용돈을 주는 터라 서동수도 오피스텔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불쑥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이 으스스하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전화로 묻는 것이다.
 
 “으응. 나 지금 친구 집에 와 있어.”
 
 하고 정은지의 목소리가 수화구에서 울린 순간 서동수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머리를 든 서동수가 1202호실을 보았다. 아직도 불은 환하다.
 
 “으응, 그래? 그럼 집에는 언제 들어갈 건데?”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더니 정은지가 대답했다.
 
 “아마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그래?”
 “자긴 어디야?”
 “나 술 마시고 있어.”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간다며?”
 “뭐, 그냥.”
 “지금 12시가 다 되었어. 집에 가 자.”
 “그래야겠다.”
 
 그때 1202호실의 불이 꺼졌으므로 서동수는 영화가 끝난 느낌이 든다.
 핸드폰을 접은 서동수가 기둥에 붙였던 몸을 떼면서 말했다.
 
 “씨발년, 바쁘구만.”
 
 정은지를 만난 곳은 룸살롱이다.
 룸살롱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정은지에게 월세방을 얻어주고 한 달 생활비 200만 원을 주기로 했지만 한 달 30일을 찾아가 연속 방아를 찧는다면 그야말로 도둑놈이다.
 정은지만 한 미모에 대학 휴학생인 22세짜리 영계를 온전한 제 것으로 하려면 최소한 30평 전셋집에 월 1,000만 원은 줘야 마땅하다.
 그래서 한 달에 서너 번 찾아가겠다고 미리 구두계약을 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동수는 12시 반이 되어서야 제 집으로 돌아왔다.
 
 ***
 
 “자?”
 
 응접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박서현에게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딸 미혜가 자느냐고 물은 것이다.
 
 “3차 하자는 거 몸이 안 좋아서 그냥 온 거야.”
 
 정은지한테 가려고 미리 박서현한테 바이어하고 3차를 가게 되었다고 연락을 했던 것이다.
 옷을 벗기 전에 안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미혜는 침대에 누워 깊게 잠이 들었다.
 볼에 입술을 붙였다 뗀 서동수가 물끄러미 미혜를 내려다보았다.
 여섯 살이지만 다섯 살 때부터 읽고 쓰기를 배워 지금은 동화책도 읽는다.
 
 “미혜야, 아빠 잘렸다.”
 
 서동수가 입술만 달싹이며 말하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미혜의 볼에 다시 한 번 입을 붙였다가 떼고 나서 방을 나왔다.
 그러자 서동수와 엇갈려서 박서현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열쇠 채우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박서현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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