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패도무쌍

1화

2020.08.28 조회 742 추천 3


 서(序)
 
 
 
 
 
 一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도 죽었다.
 동생 란이도 죽었다.
 살아남은 이는 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들 그곳은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그곳을 지옥이라 생각하는 순간.
 마음속에 마귀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잉태된 씨앗은 단숨에 싹을 틔우며 자라나 광기라는 꽃봉오리를 맺었다.
 그것이 활짝 피게 된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아니, 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강렬한 욕구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괴롭혔다.
 다른 건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쳐 가는 중이었다.
 
 
 二
 
 노인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를 만나는 순간 나의 광기는 씻은 듯 가라앉았다.
 노인의 맑은 눈을 마주했을 때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움츠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미쳐 가는 내 모습이 너무도 못나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 게지. 노부는 담 모라 한다.”
 눈빛만큼이나 맑은 음성.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인을 다시 바라봤다.
 기다렸다는 듯 노인이 물었다.
 “나를 따라가겠느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노인이 손을 뻗어 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레 노인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타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내 나이 열셋의 일이었다.
 
 
 三
 
 한 사내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내는 석상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휘이잉!
 한 줄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와 사내의 몸을 감쌌다.
 그의 시선이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으로 향했다.
 없었다.
 그 흔한 이름 하나 새겨져 있지 않았다.
 이를 묵묵히 바라보던 사내.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런 사내의 손에는 곳곳에 녹이 슨 큰 칼이 들려 있었다.
 사내가 손을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따라 거도가 유려한 곡선들을 그려냈다.
 스스스슷!
 갖가지 곡선들이 비석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쇠와 돌이 맞부딪힘에도 아무런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치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써내려가듯.
 사내의 거도는 비석 위에 글자들을 남겼다.
 
 천하제일도객(天下第一刀客)
 담영우지묘(譚寧優之墓)
 
 “스승님······.”
 사내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눈가로 옅은 물기마저 어리는 듯했다.
 사내의 두툼한 손이 품속을 더듬었다.
 곱게 접혀 있는 종이 하나가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그 종이가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일까? 사내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쳐 본다.
 참으로 단정한 글씨들이 깨알처럼 쓰여 있었다.
 무덤의 주인이자 사내의 스승이 남긴 마지막 편지였다.
 사내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수십 번도 더 읽은 사내가 종이를 다시 품에 넣었다.
 “살아간다라······.”
 스승은 편지를 통해 사내에게 당부했다.
 멈추지 말고 살아가라고.
 그렇게 살아가며 세상을 배우고 또 사람을 배우라 했다.
 사내는 가슴이 먹먹했다.
 스승이 남긴 편지.
 이는 복수심에 불타는 자신을 향한 스승의 마지막 당부였다.
 이렇듯 목숨이 다해가는 순간에도 스승은 자신을 염려했다.
 뚝, 뚜둑.
 기어이 눈가의 물기가 방울져 무릎으로 떨어졌다.
 스승에 대한 고마움과 황송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덤을 향해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푸르른 창공이 보인다.
 마음을 다독였다.
 지금껏 활활 타오르던 복수심을 꾹 눌러본다.
 어렵지만 당분간 그리해 볼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의 당부였으니.
 저벅!
 사내가 성큼 발을 내디뎠다.
 “살아 보겠습니다, 스승님. 사람들 속에 섞여 사람을 배우고, 또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배워 보겠습니다. 그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그들을······ 그곳을 어떻게 할지.”
 사내의 입에서 묵직한 결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려던 사내가 멈칫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보였다.
 한두 해 산 것들이 아닌지라 하나같이 굵기가 대단한 거목들이었다.
 그것들이 무덤 앞쪽의 방향에 병풍처럼 꽉 들어차 있었다.
 “스승님께서 답답해하시겠군.”
 스파아앗!
 사내가 거도를 세차게 휘둘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재차 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쩍, 쩌저저저저저적!
 무덤의 앞쪽에 있던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일제히 쓰러져 내렸다.
 무덤 앞이 시원하게 뻥 뚫려 숲 너머까지 훤히 시야가 확보되었다.
 사내가 스승에게 전하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렇게 사내는 세상을 향해 다시금 발을 내디뎠다.
 그가 이곳으로 온 지 칠 년 만의 일이었다.
 
 더불어 시작이었다.
 훗날, 강호 전체를 전율시킬 패천도협(覇天刀俠) 손승적의 패도무쌍(覇刀無雙)한 일대기는.
 
 
 1화
 
 
 
 
 
 항주.
 예로부터 물자가 풍부하고 산수가 빼어난 곳이다. 덕분에 소주와 함께 명승지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항주하면 서호(西湖)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항주성 서쪽에 위치한 서호.
 이곳은 청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물이 어찌나 맑은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의 밑바닥이 훤히 보인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기에 사람들의 발길 또한 자연히 끊이질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 객잔과 주루가 번성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풍류객잔(風流客殘).
 이곳 또한 분위기에 편승해 지어진 여러 객잔들 중 하나였다.
 
 처억.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수십이 서호의 대로에 들어섰다.
 그들은 입구 부근에 죽 늘어서서 주변을 훑어봤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건만 벌써 대로에는 백여 개가 넘는 가판들이 펼쳐져 있었다.
 “자아, 오세요! 맛있는 서호의 명물 소면 맛 좀 보고 가세요!”
 “소면만 명물인가! 우리 서호의 자랑, 닭꼬치도 맛보고들 가세요!”
 “거기 가는 아리따운 낭자! 이리 와서 장신구 좀 보고 가요!”
 “새로운 비단이 들어왔습니다! 와서 구경들 하세요!”
 가판대의 주인들은 저마다 목청을 돋우는 중이었다.
 이를 보며 사내들이 킬킬댔다.
 “난다, 나. 돈 냄새가 나는구나.”
 “키야~! 역시 서호야. 소주보다 훨씬 괜찮은걸?”
 사내들 중 둘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이름은 전립과 구홍진.
 일행 중 행동대장 격인 자들이었다.
 전립의 시선이 옆쪽에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 옮겨 갔다.
 “철무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흑사방으로 갈까요?”
 거구의 사내, 철무는 고개를 내저었다.
 “서두를 필요 없겠지. 너희도 여기까지 쉬지 않고 오느라 고생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마음껏 즐기도록 해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나는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아,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셨습니까?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니다. 그곳은 나 혼자 들러볼 생각이야. 그러니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즐기도록 해라.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흑사방으로 오도록 하고.”
 “예.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철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립과 구홍진을 비롯한 사내들이 시시덕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철무가 고개를 돌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호라······ 오 년 만인가? 어쨌든 눈물 나도록 반갑군.”
 그는 습관적으로 오른쪽 얼굴을 더듬었다.
 관자놀이부터 턱 밑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
 철무는 손을 내리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붉은 흉터가 보기 흉하게 꿈틀거렸다.
 
 전립과 구홍진.
 이 둘은 소주의 거대 흑도문파 적웅방(赤熊幇) 소속이었다.
 쌍광견(雙珖犬).
 소주에서 두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그만큼 거칠고 흉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다.
 헌데 요 며칠간은 마음껏 활개를 치지 못했다. 상관인 철무 때문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하여 내일 아침까지 아주 원 없이 날뛰어 볼 생각이었다. 이미 다른 방도들과는 헤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낄낄대며 근방의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두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과 젊은 여인.
 그들을 본 전립과 구홍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노인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인의 미모 때문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눈은 티 없이 맑아 밤하늘의 별을 담아 놓은 것 같다. 더불어 오똑한 콧날에 앙증맞은 입술. 마치 미인의 기준은 죄다 집대성한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저렇게 예쁜 계집은 내 태어나 처음 보는구나!’
 ‘고년 참!’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전립과 구홍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분히 음심(淫心) 가득한 미소.
 수십 년 버릇이 소주 땅을 벗어났다고 사라질 리 만무하다. 그들이 여인과 노인을 향해 건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처억.
 전립과 구홍진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 이곳 서호에 웬 월궁항아가 강림하셨나?”
 “그러게 말이야! 이보시오, 낭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가까운 곳에 가서······.”
 전립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노인과 여인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구홍진과 전립의 얼굴이 대번 구겨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이 활동하던 소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런 썅!”
 구홍진이 씩씩대며 재차 여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년아,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쌩을 까! 뒈지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 어이, 늙은이. 늙은이는 필요 없으니 꺼지고.”
 콰악.
 구홍진이 여인의 팔뚝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구홍진은 여인이 겁을 집어먹었다 생각하며 히죽거렸다.
 ‘겁먹은 토끼처럼 요리하기 쉬운 것도 없지. 별미 중의 별미 아니겠어?’
 구홍진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흠칫.
 구홍진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한순간 알 수 없는 싸한 기운이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뭐, 뭐야!’
 구홍진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다시금 얼굴을 구겼다.
 “이 개 같은 년이 어디서 눈깔을!”
 자존심이 상한 탓일까? 구홍진은 다른 때보다 더욱 흥분한 모습이었다.
 구홍진이 여인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어 갔다.
 바로 그 순간.
 “그만하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홍진이 뻗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건장한 사내 하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다양한 식재료가 들려 있었다.
 “넌 뭐냐?”
 전립이 피식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들고 있던 고기와 채소 등을 근처에 얌전히 내려두었다.
 그러고는 전립과 구홍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금세 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냐? 못 보던 놈들인데. 오늘 서호에 처음 온 놈들인가?”
 사내의 말에 전립이 인상을 썼다.
 “이 좆만한 새끼가. 혀가 반 토막이냐? 초면에 반말을 지껄이네.”
 자신이 반말한 것은 생각도 않고 말을 내뱉는 전립.
 사내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하긴, 처음 온 놈들이겠지. 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번 한 번은 봐줄 테니 그만 가라.”
 “지금 뭐래는 거야, 이 병신이. 너 감히 누구한테 오라 가라야?”
 사내의 음성이 살짝 힘이 실렸다.
 “그냥 가라. 보내 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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