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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운애록 1권-1화

2014.07.09 조회 4,464 추천 124


 진천운애록(震天雲愛錄) 1권
 
 
 
 한 줄기 찬 바람이 세차게 일었다. 세찬 바람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장한을 휩쓸고 지나갔다. 갑옷 아래 억눌려 있던 금사(金絲) 장포가 바람에 끊어질듯 펄럭였다. 그러나 세찬 삭풍도 장한의 부릅뜬 눈을 감기지는 못했다.
 장한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규모가 꽤 큰 성이었다. 성벽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성안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수습하지 못한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온전한 시체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가공하고 절륜한 무위를 가진 무인들 간의 전투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생사를 가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손 속에 자비를 베푼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장한 석대명에게 그 시체들은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숱하게 보아 왔던 시체들이었고, 그 자신이 저 처참한 사체들의 일부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무인의 길을 선택한 이상 처참한 죽음은 언제든지 각오해야 한다. 최후의 순간이 온다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결과이니 상대를 원망하지 말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해라.>
 
 석대명은 하나뿐인 아들 진천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그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운명에 처해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무척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같이 입문한 수백 명의 동기들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으니까.
 현재 구주 천하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오래전 무림인들에 의해 군권(君權)이 몰락하면서 법치(法治)는 사라졌고 덩달아 도덕률마저 땅에 떨어진 결과였다.
 무림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세를 이루고 작당해서는 목숨을 걸고 이권을 다투는 이 시대를 혹자는 생자독식(生者獨食)의 지옥이라고 평했다.
 어쨌든 석대명도 살아남은 자들 중 하나였다. 그럼으로 그 또한 적지 않은 것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것들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잠깐 빌려 쓰고 있다는 게 정확했다.
 실제로 그것들을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종주(宗主)들이다.
 석대명은 자신의 종주인 일월신교의 교주를 떠올렸다.
 교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십대 고수의 일인이다. 당금 구주 무림에서 일월신교의 교주를 열 손가락 안에 꼽지 않을 무림인은 없을 것이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 넣는 자도 부지기수일 터였다.
 
 철혈대제(鐵血大帝) 단목개라!
 
 석대명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교주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한기를 느낀다.
 교주는 백만 교도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절대자였다. 교주의 한마디 명이면 죽음조차도 달가워해야 한다.
 저 무너진 성안에 웅크리고 앉아 죽음의 시간을 손꼽고 있는 자들도 교주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었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그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투항한다고 해도 결국 몰살될 것을 알기에 절대적인 비세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하고 있었다.
 ‘희망이라곤 조금도 없는 싸움을 해야만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석대명은 교주의 냉혹한 처사가 조금은 못마땅했다.
 조금만이라도 유화책을 펼친다면 흘리는 피의 양이 현격하게 적어질 텐데 말이다. 책임이 있는 우두머리를 죽이는 정도라면 오늘 같은 필사의 저항은 없었을 것이다. 덩달아 수하들의 피도 적게 흘르게 될 터였다.
 석대명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저었다.
 ‘칼 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일반 양민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너무 심하다.’
 순간 석대명은 흠칫했다.
 아무리 잠시 동안이고 마음속으로라곤 하지만 교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다니.
 일월신교 수석수신위장의 신분으로 감히 생각해서는 안 되는 불경죄를 지은 것이었다.
 석대명은 두려웠다.
 마음 한구석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 은연중에 행동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더구나 교주는 수하의 변심에 관한한 귀신처럼 알아맞히는 재주를 가졌다.
 ‘어떻게든 잊어버려야만 한다.’
 석대명은 교주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떠올려 불민한 생각을 상쇄시키려 했다.
 교주가 하사해 준 커다란 장원과 오천호의 식읍(食邑)을 떠올렸고, 그간의 무수한 논공행상들로 하사받은 보옥과 재물들도 헤아렸다. 그 모든 것은 사실 은혜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노력과 충성에 대한 보상에 가까웠다. 살아남은 자가 마땅히 부여받을 특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은혜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운 법이다.
 석대명은 난감해지고 말았다. 한번 불만의 싹이 트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너무도 위험했다.
 곤혹스러워하던 석대명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 진천(震天)이었다.
 아들을 떠올리자 커져만 가던 불만의 싹이 뭉텅 잘렸다. 교주가 자신의 아들에게 베풀어 준 일들은 확실히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미천한 가문 출신인 까닭에 자격이 안 되는 아들이 교주의 은총으로 태평무관에 입관했다. 그것은 무한한 광영이었고 은혜였다.
 태평무관은 일월신교 최고의 무관이었다. 최고의 장로급 교관들이 최고급의 무공들을 가르쳤고, 무수한 영약과 더불어 천하제일의 내공심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공의 진보를 이뤄 주었다.
 태평무관의 설립 목적은 영재들을 발굴하여 어린 나이에 절정 고수의 단계에 들게 하는 데 있었으니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진천은 특히나 선천적인 재질이 뛰어났다. 태평무관에 입관하고부터 더욱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번 출정을 나오기 전 친분이 있는 태평무관 장로로부터 귀띔을 들었다. 그는 진천이 태평무관의 수련생들 중에서 차석으로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사실 수석의 영광은 감히 바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소교주의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소교주 독고추연은 일찍부터 일월신교 제일 기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소교주가 태어나자마자 십대장로들이 자신들의 내공력의 일 할을 아낌없이 투여한 합체진력으로 벌모세수를 해 주어 일찌감치 환골탈태까지 이룬 몸이었다.
 소교주와 함께 태평무관에 입관하였다는 자체가 진천에게는 미래가 보장되는 기연이었다. 더군다나 진천이 소교주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일월신교의 만인이 석대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석씨 가문이 다음 대에 공후의 가문으로 발돋움하리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석대명의 마음속에서 교주에 대한 불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천이를 위해서라면 천하를 피로 씻어도 좋다.’
 석대명의 눈에 살벌한 기운이 치솟았다.
 그사이에 해는 서산에 걸려 기웃거리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태양은 곧 벌어지게 될 인간들의 살육 행위를 차마 지켜볼 용기가 없다는 듯 서둘러 걸음하고 있었다.
 석대명이 허리에 차고 있는 패검 자루에 오른손을 얹었을 때였다. 누군가 언덕을 부지런히 뛰어 올라오더니 그의 등 뒤에서 예를 취했다.
 “합하(閤下), 본단으로부터 전갈이옵니다.”
 “본단으로부터?”
 의외라는 눈빛을 한 석대명은 전령이 두 손으로 받쳐 올린 전서를 받아 들었다.
 전서를 읽어 내려가는 석대명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혹시나 했던 사면령을 기대하는 마음은 진즉에 버린 터였다. 물거품이 된 사면령 못지않게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
 
 유시 말(酉時末: 오후 일곱 시)로 예정되어 있던 최후의 공격 명령이 느닷없이 연기되었다.
 석대명은 수하 백인대장들을 대동하고 군진의 후문 밖에 나와 도열해 있었다.
 잠시 후, 관도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다섯 인마가 어둠 속에서 달려 나와 그들 앞에 당도했다.
 석대명과 휘하 백인대장들이 일제히 오체투지를 했다.
 “수석수신위장 석대명이 소교주님을 뵈옵니다.”
 채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헌앙하게 생긴 젊은이가 마상에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수신위장, 반갑소이다. 그만 일어들 나시오.”
 “명을 받잡습니다.”
 석대명이 큰 소리로 외치고 일어서자 그 뒤를 따라 백인대장들이 몸을 일으켰다. 소교주를 제외한 네 명의 인물들은 벌써 말에서 내려 소교주의 옆에 시립해 있었다. 네 명의 수행 인물들 중 유일한 젊은이가 환한 미소를 짓고서 석대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티를 갓 벗은 약관의 청년은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소교주 못지않게 잘생긴 그 청년이 바로 석대명이 그토록 아껴 마지않는 아들이었다.
 석진천은 당장이라도 아버지에게 달려들 태세였다. 석대명이 엄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소교주 앞에서 정말로 어린 추태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부자간의 눈빛 교환을 바라본 소교주가 입을 열었다.
 “부자지간에 오랜만의 해후일 터인데 인사라도 나누시오.”
 석대명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교주, 공무에 임하매 공과 사는 엄연해야 하는 법이옵니다. 더구나 군문(軍門)의 일일진대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교주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수석수신위장의 청백(淸白)을 만 사람이 칭송하더니 과연 풍문이 그르지 않은 것 같소. 그럼 어서 군막으로 안내하시오. 내가 여기서 지체할수록 부자 사이의 인사가 늦어질 것이고, 그건 내 친우에 대한 도리가 아닐 터이니 말이오.”
 소교주가 석진천을 향해 눈가를 찡긋거리고는 말고삐를 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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