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몰락한 문파의 대제자

서(序)

2020.10.19 조회 23,399 추천 255


 “좋은 비무였소.”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앳된 사내가 이를 악물고 보화문(宝华門)의 소문주 설패영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정중한 태도에는 흠잡을 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열하게 뒤에서는 수작을 부려놓고, 앞에서는 저리도 공명정대한 척을 하다니!’
 
  사내, 운휘는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심스럽게 패자가 된 예청선자(銳淸仙子)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일방적인 패배.
  평생을 문파의 재건만 바라고 자신을 채찍질해온 그녀였기에 패배는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예청선자의 분노와 원통함이 서릿발처럼 휘몰아쳐 운휘를 얼어붙게 했다.
 
  “가서 사매를 부축해주어라.”
  “예, 장문인.”
 
  장문인 헌원자(獻元子)의 명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도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뭐, 대충 결판은 난 듯싶소만? 남경이 이리도 혼란스러워졌으니 우선파(遇仙派)로는 힘들기도 할 것이오. 하니 앞으로는 우리 보화문이 요방문(姚坊門)의 주변 상인들을 돕도록 하겠소.”
 
  소문주 설패영의 사제라는 자가 얄팍하게 생긴 입으로 밉살스럽게 떠들어 댔다. 하지만 이미 비무에서 패한 우선파로서는 이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자, 밉살스러운 사내가 한쪽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뚱뚱한 남성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시선을 받은 등현객잔의 주인 방씨가 힘겹게 땀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 장문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등현객잔은 외성 끄트머리에 위치해 남경 중심가의 여타 화려한 객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나름 남경 외성의 북동쪽 요방문 인근 상인들의 대표격인 인물이었다.
  해서 그런지, 그의 뒤로 줄줄이 서 있는 요방문의 인근 상인들은 장문인 헌원자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로서도 더는 연을 이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장문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천도(遷都) 이후에 워낙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터라···.”
  “죄송합니다, 장문인.”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헌원자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의 수모는 보화문의 농간 때문이긴 하지만, 보화문이 그런 농간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인 방씨가 말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전진(全眞)이 어쩌다 이리되었는가!’
 
  헌원자가 장문인으로 있는 우선파(遇仙派)는 중양자(重陽子) 왕중양이 세운 전진(全眞)과 한몸이었다.
  전진 개파 이후, 전진칠자(全眞七子)라 불린 왕중양의 일곱 제자는 개파조사의 유언에 따라 천하에 이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 각기 흩어져 분파를 세웠다.
 
  그리고 그중 대제자인 단양자(丹陽子) 마옥이 세운 문파가 바로 이 우선파였다.
  천하에 일곱 제자가 세운 일곱 분파만 두었을 뿐, 따로 본산을 두지 않았던 전진이었으니 전진칠자의 수장인 단양자가 세운 우선파는 전진의 본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우선파가 몰락하여 쇠락해버린 탓에 지금의 수모를 겪고 있었으니, 장문인인 헌원자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문파가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해낸 것이 없으니 사조를 뵐 낯이 없구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진의 몰락은 애초에 일곱 갈래로 나뉜 후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에 와서 헌원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그는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다독이려 했지만, 이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모두를 붙잡아 버렸다.
 
  “사형!”
 
  비수로 찌르는 듯한 예청선자의 목소리에 헌원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파의 운명을 짊어졌던 사매에게 빚을 진 그는 결국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자.”
 
  그런 헌원자의 명에 따라, 예청선자를 부축하고 돌아가는 운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어머니의 상태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지만, 야차같이 변한 그녀의 표정이 더욱 그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다.
 
 *
 
  “못난 놈! 사내자식이 어찌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한단 말이냐?”
 
  예청선자(銳淸仙子)는 독기 어린 말투로 운휘를 다그쳤다.
  비무에서 패하기 전에도 그랬었지만, 이제는 주변의 만류마저 매몰차게 뿌리치며 혹독하게 그를 다그쳤다.
 
  “본파가 어떤 수모를 당해왔는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이 어미도 무공이 부족하여 사문에 죄를 짓고 말았으니, 이대 제자들의 대사형인 너는 이 어미의 전철을 밟지 말고 누구보다도 독해지고 강해져야 한다.”
 
  일찍이 이런 예청선자의 독선을 경계하였기에, 예청선자의 아들인 운휘는 장문인인 헌원자의 제자로 정해졌었다.
  하지만 문파 내 최고수인 그녀를 막아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 망해 허울만 남은 문파, 그렇기에 예청선자도 간신히 절정을 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장문인인 헌원자는 그 절정의 벽조차 넘지 못했다.
  그런 탓에 문파의 온갖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던 예청선자였으니 헌원자는 그녀를 강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끝내 파국을 맞이하게 된 까닭이.
  예청선자는 결국 무리한 운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다. 그나마 문파를 지탱해주었던 기둥이 쓰러져버린 것이다.
  헌원자와 사제들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치료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고작 몇 해 더 숨을 붙여놓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
  “내가 했던 말을 가슴에 새겨라. 본파의 명운이 오직 네게 달렸다고···, 생각해라.”
 
  운휘는 그날 어머니의 처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전진의 이름이 바로 서야 그때와 같은 수모도 없을 거다.”
  “어머니···.”
  “독해져야 한다. 강해져야만 본파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예청선자는 임종에 이르러 손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푸른 환(環)을 운휘에게 건넸다.
 
  “사조께 받은 약조의 신물이다. 이제는 네가···, 지니고 항상···, 그 뜻을 되새겨야 한다.”
 
  그녀가 사조와 나눈 문파 재건의 약조가 이 신물에 담겨 있기에, 운휘는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서!”
 
  그러나 결국 그는 어머니의 호통 앞에 눈물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엄했던 것 이상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녀는 그렇게 청석환(靑石環) 하나만을 덩그러니 남긴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휘야.”
 
  사매가 가버린 지금, 헌원자는 누구보다 자신의 제자가 걱정스러웠다.
  예청선자에게 어미의 정(情)보다 사고(師姑, 사부의 사매)로서의 채찍질을 더 많이 받았던 제자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도 크지만, 그와 상반되는 원망 또한 그의 가슴에 맺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예청선자가 그리 비통하게 가버렸으니, 제자는 어머니에게로 향했던 원망의 화살까지도 스스로에게로 되돌리려 할 것이 분명했다.
 
  ‘이게 다 내가 부족한 탓이구나!’
 
  헌원자는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를 감싸 안았다.
  생사가 오가는 실전에서 무(武)의 길을 찾았던 예청선자였기에, 마음이 흔들린 제자가 섣불리 무림으로 뛰쳐나가 그녀의 뒤를 따르려 할까 염려스러웠다.
  예청선자는 허울만 남은 문파에 어울리지 않는 재능이 있었지만, 제자인 운휘는 어머니에 비하면 크게 부족한 재목이었다.
  함부로 그녀의 방법을 택했다가는 되레 큰 화를 입을 것이 자명했다.
 
  “본파를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한 사매이니 예(禮)를 갖춰 마지막까지 효(孝)를 다하도록 해라.”
 
  제자를 붙잡아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헌원자는 운휘에게 삼년상(三年喪)을 권했다.
 
  “정식으로 삼년상을 치르란 말씀이십니까? 고관대작이나 한다는···.”
  “본파의 뿌리를 잊었느냐?”
 
  도교의 바탕 아래 유(儒)와 불(佛)의 합일을 기치로 내세웠던 전진이었으니 운휘도 장문인의 말에 쉽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단양자께서도 개파조사이신 중양자께서 돌아가셨을 때 삼년상을 지내 예를 갖추었다. 너는 본파의 대제자이며, 또한 예청선자는 사적으로 네 어머니이니 예를 갖춰 삼년상을 치르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운휘는 어렵게 입을 뗐지만, 생소한 사부의 단호한 모습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헌원자는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했다.
 
  “너를 고생시키려는 게 아니다. 혼란한 마음을 다듬을 시간을 주려는 게다. 상을 치르는 중에는 문파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그동안은 폐관수련을 한다고 생각하려무나.”
 
  그러나 헌원자는 이런 배려가 운휘의 조급한 마음만 더욱 재촉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쿨럭.”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목구멍을 태워 오르며 입안을 가득 메웠다.
  참지 못한 운휘가 숨을 뱉자, 선명한 핏덩이가 한 움큼 쏟아져 바닥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헌원자는 운휘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하길 바랐지만, 예청선자가 바랐던 성취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 운휘는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임종의 순간까지 그를 독하게 채근했던 예청선자의 모습이 선명히 가슴에 새겨졌었다. 그리고 이는 지울 수 없는 각인으로 남아있었다.
  원망이 자책으로, 좌절이 자괴감으로,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었기에 그는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단전에서 거칠게 끌어 올린 내공이 가슴 한복판의 중정혈(中庭穴)에서 뒤죽박죽 뒤엉키며 기혈을 뒤틀어버리고 있었다.
 
  “컥!”
 
  붉은 핏방울들이 푸른 숲에 수놓아졌고, 이내 운휘의 시야마저 붉게 물들였다.
  그는 뒤늦게 날뛰는 내공을 다독여보려 했다.
  하지만 의념의 통제에서 벗어난 내공은 날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점점 굳어지며 폐색되는 중완혈을 부여잡으며, 운휘는 끝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
 
  깊은 탄식과 함께 피에 젖은 손아귀의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러나 반대로 피 묻은 푸른 환(環)은 기묘하게 점점 더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운휘도 그것을 느꼈다.
  그는 눈앞이 밝게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혼란에 빠졌다.
 
 *
 
  생이 끝날 때 사람들은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들 한다.
  수많은 장면이 빠르게 흘러가는 걸 보며, 운휘는 스스로가 결국 주화입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거라 생각했다.
  한데···.
 
  가만, 이건 대체 무슨 장면이지?
  기괴한 세계, 달리는 철마, 엄청난 크기의 새가 하늘을 수놓는다. 태양을 찌를 듯한 거대한 높이의 건물들 사이로, 그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거침없이 지났다.
  몽환적이고 나른한 불빛들을 뚫고 걸어가자 보이는 둥근 물체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매끈하고 거대한 알 앞에 섰다.
  반쯤 열린 알 안은, 성인 남성이 들어가도 충분한 공간이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알 속에 몸을 뉘었다.
 
  [가상현실 게임 인로(引路)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요란한 불빛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어지럽게 삐쭉대는 불빛들이 길게 스쳐 지나가며 암흑이 시야를 가득 메웠고, 이내 번쩍하며 새하얀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그리고 드러나는 세상의 풍경.
 
  그곳에는 수십 명의 다른 ‘내’가 있었다.
  운휘는 서로 다른 ‘나’로 번갈아 변하며 수백 종의 무공을 자유로이 연마했다. 수천, 수만 번의 싸움을 겪으며 고수로 성장했다.
  그곳에서 그는 무공광이었고, 절세고수였으며, 천하제일인이었다.
  주마등 속 세상의 운휘는 인로라는 게임의 극한에 이른 자였다.
 
 *
 
  쿨럭!
 
  또다시 토해내는 붉은 핏덩이가 운휘를 현실로 끌어왔다.
  가슴이 찢기는 듯한 견디기 힘든 통증과 함께 환영처럼 스쳐 지나간 주마등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뭐, 뭐였지?’
 
  그리고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현실 속 주화입마에 빠져 숨이 끊어지고 있는 우선파의 대제자가 분명 ‘나’이지만, 주마등 속 가상현실 게임 ‘인로’를 통달한 고인물 역시 ‘나’였다.
  서로 다른 ‘나’의 기억이 하나로 합쳐졌기에, 운휘는 눈앞에 떠오른 증강현실 창에 놀라면서도 동시에 친숙함을 느꼈다.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운휘의 눈에만 보이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13)

안부낙도    
이거 제목이 계속 '몰락한 문피아의 대제자'로 읽히는건 나만 그런건가?
2020.10.19 16:52
euskal    
시스템?메이저리거 느낌나네여 ㅎㅎ
2020.10.21 01:17
오들이햇밥    
재밌겠다^^
2020.10.28 19:41
스티커마일    
전작들 다 봤는데 믿고볼수 있는 작가분이라 반갑네요ㅎㅎ 처음이신분들에은...제 기준은 기본 스무한 필력과 쓸데없이 안늘리는 스토리, 쿨한전개입니다ㅎㅎ
2020.10.28 21:42
Aurora0    
몰락한 문피아 ㅋㅋ 웃기네
2020.10.28 22:43
풍뢰전사    
건필하세요
2020.10.29 22:35
발견자    
전진파 본산은 보통 종남산으로 나오던데 여기는 본산이없고 분파만 나와서 특이하네요
2020.10.30 02:49
김영한    
헌원자가 장문인으로 있는 이 문장부터 집즹력이 사망하는 느낌
2020.10.31 19:24
지휘문장    
신작.축하드립니다.ㅎ 저는좀더쌓아두고볼게요ㅎ 1년만에 컴백축하드려요
2020.11.04 22:06
개두껍    
신작 잘보겠습니다
2020.11.07 01:26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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