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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빙살음혈기(氷煞陰血氣)(1)

2014.07.15 조회 2,147 추천 20


 근 이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엄청난 폭설을 동반한 한파를 홀로 비껴간 듯 가벼운 옷차림의 유대웅(柳大熊)은 급조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썰매를 힘겹게 끌고 있었다.
 썰매 위에는 눈 덮인 관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비록 석관이 아닌 목관이라지만 그 재질이나 시신의 무게까지 감안을 하면 제아무리 썰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유대웅이 또래 아이들보다 최소한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덩치라고 해도 분명 무리가 있어 보였다.
 “후∼”
 서산마루에 걸린 해를 보며 유대웅이 걸음을 멈췄다. 야산이라 해도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둠이 찾아올 터.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썰매를 끌어놓은 유대웅이 관 위에 쌓인 눈을 치우며 말했다.
 “다행히 눈도 멈췄고, 오늘은 여기서 쉬자.”
 유대웅은 관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에 소담히 쌓인 눈까지 툭툭 턴 후 썰매 위에 있던 봇짐을 풀며 능숙한 솜씨로 노숙 준비를 했다.
 우선적으로 주변을 돌며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은 뒤 부싯돌과 몇 차례 씨름을 하며 작은 불씨를 피워냈다.
 양 볼을 불룩하게 하여 연신 바람을 불어넣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어느 정도 불길이 올랐다.
 불길 좌우에 기둥이 되는 돌멩이를 세우고 그 위에 쇠꼬챙이를 얹은 뒤 눈이 가득 담긴 냄비 하나를 걸었다.
 냄비 안의 눈이 녹아 맑은 물이 찰랑이자 누룽지 몇 개를 집어넣었다.
 점심에 먹다 남은 육포 조각도 쇠꼬챙이에 매달렸다.
 불길에 닿은 육포 조각이 그럴듯한 향기를 발산할 때쯤 냄비 안의 누룽지도 끓기 시작했다.
 “대충 된 것 같네.”
 유대웅은 곳곳에 이가 나간 접시 하나를 꺼내어 펄펄 끓는 누룽지탕을 조금 퍼 담더니 관 앞에 놓으며 말했다.
 “아버지 먼저.”
 관을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유대웅이 조금은 짜게 만들어진 육포를 반찬 삼아 누룽지탕을 단숨에 비웠다.
 한 방울의 국물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셨으나 양에 차지 않는 듯 봇짐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이다 이내 몸을 일으켰다. 봇짐에 여분의 식량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 최소한 닷새는 더 이동을 해야 했고 기후도 좋지 않은데다가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음식을 아껴야만 했다.
 유대웅은 주변을 돌며 마른 나뭇가지를 최대한 모았다. 밤새워 불을 지필 요량도 있었지만 모아온 나뭇가지 위에 모포를 펴고 자면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제법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를 충분히 모은 뒤, 그 위에 모포를 펼쳤다. 두툼하기는 해도 산속의 매서운 추위를 막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웅의 입가엔 만족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고…….”
 나른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자리에 몸을 누이려던 유대웅의 시선이 관을 향해 움직였다.
 “후∼ 알았어. 누가 뭐래? 한다구.”
 마치 누군가에게 핀잔이라도 들은 듯 툴툴거린 유대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인가 유대웅의 행동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장년인.
 나이를 가늠키 힘든 노인은 십만대산(十萬大山)을 본거지로 광서와 광동, 운남, 남만까지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마황성(魔皇城) 장로 고독검마(孤獨劍魔) 서극이었다.
 왼쪽 눈가에서 반대편 턱밑까지 흉측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장년인은 근래 들어 마황성 못지않은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혈사림(血死林)의 고수 철혈독심(鐵血毒心) 이자웅이었고 그의 맞은편, 소맷자락에 매화 무늬가 그려져 있는 감청색 도복의 장년인은 화산파(華山派) 장로 청진(靑眞)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물과 기름과 같은 정사마 세력의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괴이한 일이었지만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들이 칼부림은커녕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객점이나 주루 좀 찾아 들어가면 어디가 덧나나? 벌써 며칠째…….”
 식사를 마친 유대웅이 가부좌를 틀고 앉자 이자웅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유대웅의 뒤를 밟은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출발 후 단 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노숙을 청한 덕에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도 그랬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먹거리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투덜거리지 말고 불이나 피워라. 오늘은 네놈 차례다.”
 이자웅처럼 얼굴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살벌한 분위기만큼은 오히려 그를 능가하는 서극이 발밑의 나뭇가지를 이자웅 쪽으로 툭 걷어차며 말했다.
 팍 구겨진 얼굴로 서극을 노려보던 이자웅이 입술 사이로 괴소를 토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크. 뭐, 그럽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이자웅이 섬뜩한 표정으로 불을 지피는 사이 서극과 청진자는 운기조식을 하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본산의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군.’
 청진자는 언제부터인지 기본을 무시하고 보다 강하고 화려한 것만을 좇는 제자들을 상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보기엔 어느 정도 수준으로 보이냐?”
 서극이 물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어림잡아 보건대 오성 정도로 보이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어린 녀석이 꽤나 맹랑해. 이 추운 날, 제 부모 관을 끌고 이곳까지 온 것만 봐도 그렇고, 자질도 쓸 만해 보이고.”
 서극이 냉막한 웃음을 지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자 막 불을 지피고 몸을 일으킨 이자웅이 콧방귀를 꼈다.
 “쓸 만하긴 개뿔. 이름만 그럴듯하지 건청기공(乾淸氣功)이라면 개나 소나 다 익히고 있는 것이오.”
 “말이 지나치군.”
 청진자의 눈매가 매서워졌지만 이자웅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건청기공하면 솔직히 뒷골목 파락호도 익히지 않는 삼류무공 아닌가?”
 참지 못한 청진자가 노호성을 터뜨리려는 찰나, 서극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하면 그런 건청기공에 고꾸라진 혈사림은 대체 뭐지?”
 “뭐요?”
 “기억을 못하는 거냐? 아니면 애써 기억을 하지 않는 것이냐?”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이자웅이 일그러진 얼굴로 대꾸했다.
 “옛날 얘기를 하는 거요? 하지만 그때 검선(劍仙)이 익히고 있던 심법은 건청기공이 아니라 자하신공(紫霞神功)이었소.”
 “한심한… 알려면 제대로 알아두거라. 네놈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라 알지 못하겠지만 노부는 당시의 대결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검선은 자하신공이 아니라 건청기공만으로 혈사림이 내세운 고수를 꺾었다. 물론 자하신공처럼 더욱 위력적인 무공도 있었겠지. 그랬다면 애당초 승부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검선이 굳이 건청기공만을 사용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바로 네놈과 같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놈들의 콧대를 꺾어주기 위함이라고나 할까.”
 “잘났소.”
 괜히 말을 섞어봤자 자신과 혈사림의 입장만 구차해진다고 생각했는지 이자웅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청진자는 생각지도 못한 서극의 도움에 목례로 인사를 했다.
 서극은 청진자의 인사를 외면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엄밀히 말해 잠재적 적이라 할 수 있는 화산파를 두둔한 것은 청진자의 인사 따위나 받자고 한 일이 아니었다. 추구하는 길과 이상은 달라도 그저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검선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을 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청진자도 서극의 냉막한 태도에도 불쾌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이자웅의 콧대를 눌러 버린 서극이 모닥불 옆에 피풍의(皮風衣)를 깔고 묵빛 장삼을 이불 삼아 덮고 누웠다. 이자웅이 불길을 이용해 간단히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전혀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청진자는 서극의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허리춤에 패용(佩用)하고 있던 검을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힐끗 시선을 던진 이자웅이 같잖다는 웃음을 흘리며 손바닥만 한 냄비에서 걸죽하게 변해가는 음식물에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든 무엇인가가 청진자의 무릎에 내려앉았다.
 하룻밤에 만 리를 날아간다고 해서 만리조(萬里鳥)라 불리는 정무맹(正武盟)의 전서구(傳書鳩)였다.
 누워 있던 서극이 상체를 일으키고, 이자웅의 고개도 이미 전서구를 향해 있었다.
 만리조의 발에 달린 서찰을 읽는 청진자의 안색이 몇 번이나 변했다. 분노, 어이없음, 당황스러움이 겹쳐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에 남은 것은 진한 허탈감이었다.
 “결국… 그리된 것인가?”
 “뭐가 그리되었다는 거지?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나?”
 이자웅이 급히 물었다. 청진자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자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귓구멍이라도 막힌 거냐? 사람이 묻잖아. 빨리 말해보라니까.”
 “이 전서구는 정무맹에서 온 것. 혈사림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청진자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이자웅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서극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서극은 서극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극의 행동에서 그가 누군가와 전음을 주고받고 있으며 그 내용이 모르긴 몰라도 방금 전 청진자가 전서구를 통해 받은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직감한 이자웅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제길. 뭐야, 이거. 나만 병신 되는 거야?”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이자웅이 스스로 자학을 할 때, 전음을 끝낸 서극이 청진자에게 물었다.
 “정무맹에서 온 소식… 아마도 그 얘기겠지?”
 “그렇소이다. 마황성에서도 소식을 접한 모양입니다.”
 “그랬으니 연락이 온 것이겠지. 이것 참.”
 서극이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있는 유대웅에게 시선을 두며 혀를 찼다. 청진자 역시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유대웅의 아비 유섬강(柳閃剛)은 사천 일대 수로를 장악하고 있는 일심맹(一心盟)의 수장이었다. 비록 수적에 불과했지만 독문무공인 천뢰육도(天雷六刀)는 무림의 일절로 인정받는 절기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근에선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을 휩쓴 한 가지 소문 때문에 그는 평생을 바쳐 일궈낸 세력과 명예(?),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잃을 위기에 봉착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유섬강은 일심맹과 그를 따르는 수하들,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한낱 소문에 휘둘려 미쳐 날뛴 무림인들의 광기가 그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 것이었고, 덕분에 유대웅은 아비를 잃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거짓된 소문이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은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지만.
 “정말 이럴 거야!”
 이자웅이 도끼눈을 하며 노려보자 청진자는 귀찮다는 듯 서찰을 건넸고, 콧방귀를 뀌며 서찰을 낚아챈 이자웅은 앞의 두 사람보다 더욱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서찰을 떨구고 말았다.
 “뭐야, 이게. 그럼 여태까지 헛짓거리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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