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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빙궁전설

1화.

2020.11.05 조회 320 추천 2


 1화.
 
 
 
 호가호위(狐假虎威).
 전국시대에 편찬된 전국책의 초책(楚策)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라는 비유에서 유래한 말이다.
 하지만 이곳 북해에서는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개망나니가 집안의 권세를 믿고 밤낮없이 설치고 다닌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호가호위의 줄임말인 호호(狐虎).
 북해 사람들은 그를 호호공자 설수민이라 칭했다.
 거창한 별호답게 설수민은 오늘도 대낮부터 술떡이 되어 객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설화루]
 백웅의 통가죽을 재단해 만든 새하얀 털옷과 중원의 명문 세가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흑담비 가죽 모자는 설수민의 조각 같은 외모와 어우러져 귀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전세를 낸 것도 아닌데, 어느새 객잔 이 층은 설수민의 전용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먼저 자리를 잡았던 손님들이 엮여봐야 득 될 것 하나 없는 설수민을 피했기 때문이다.
 “끄응. 이 봐 여기! 한 병 더! 음냐.”
 벌러덩 뒤집힌 상태에서도 술을 더 달라 외치는 설수민의 모습에, 점소이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저어. 공자님, 이미 충분히 드신 것 같은데······ 내일 다시 오시는 것이 어떨지요? 공자님께 변고라도 생기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뭐? 내가 팔아주는 것이 얼마인데!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나 빙궁의······ 끄윽.”
 어린 점소이가 설수민의 호통에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찰나.
 척-.
 설수민의 옆으로 강직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는 중년의 무인이 내려섰다.
 “공자님!”
 그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방으로 형형한 살기를 뿌려댔다.
 빙랑대주 호엽랑 여불기. 호랑이를 사냥하는 늑대라 하여 붙여진 별호였다.
 그는 북해빙궁의 수호자이자 도살자들이라 불리는 최강의 전투 집단인 빙랑대의 수좌였으며, 동시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이선으로 물러난 빙황 설만해의 수신 호위 장을 맡은 인물이었다.
 점소이가 불안해하던 이유가 바로 여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늘 장사는 공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점소이는 술값 계산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여불기가 내뿜는 살기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술 줘! 술!”
 여불기는 그제까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설수민을 향해 다가섰다.
 “공자님, 술이 과하셨습니다. 걱정하고 계시는 태상 궁주님도 생각하셔야죠.”
 “응? 어떤 새끼가 내 몸에 손을 데? 나 빙궁의 설수민이야!”
 척-.
 여불기는 인사불성 상태인 설수민을 부축해 일어섰다.
 “공자님, 이만 가시죠.”
 “응? 끄윽. 뭐야. 여 대주였어?”
 “예.”
 그의 친절에 감동한 것일까? 설수민의 눈가가 잘게 떨려왔다.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부터 끌어올린 무언가를 여불기의 얼굴 위로 시원스레 쏟아냈다.
 “우, 우웩! 우우우웩!”
 “······.”
 푸더더덕-.
 설수민이 뱉어낸 토사물이 여불기의 얼굴을 뒤덮으며 흘러내렸다.
 시큼하고 역한 냄새들이 올라와 코를 찔렀건만, 설수민을 바라보는 여불기의 표정은 여전히 자애롭기만 했다.
 “공자님. 의원의 처방을 따르셔야죠. 과음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의원? 그들이 내게 해준 게 뭔데? 끄윽······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꼰대 새끼들! 병이나 고친 후에 지껄일 것이지. 여 대주, 그냥 날 내버려 둬. 앞으로 얼마나 더 마실 것이라고? 끄. 우. 우웩! 쿨럭!”
 “공자님······”
 그 순간. 아련한 표정으로 설수민을 바라보던 여불기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것은. 피!? 공자님! 대체 무엇을 드셨기에 피를! 안되겠습니다. 업히십시오! 얼른!”
 설수민을 둘러업고 관도를 쏘아져 가는 여불기의 모습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행인들이 저마다 혀를 차고 나섰다.
 “쯧. 저 개망나니, 저러고 돌아다니니 제 누이에게 후계자 자리도 뺏긴 것일 테지. 병신이 따로 없구먼. 쯧쯧.”
 “허. 이 사람아 너무 그러지 말게. 북해인들 치고 빙궁의 은혜 한 번 입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곧 정신을 차리실 거네. 어디 범이 강아지 새끼를 낳는다던가?”
 “쯧쯧······ 그건 그렇지. 아니. 그래야지. 암.”
 
 잠시 후 북해빙궁.
 마당을 쓸던 노복은 설수민을 업고 뛰어오는 여불기를 보고는 다급히 뛰쳐나왔다.
 설수민에게 다가와 상태를 살피던 노복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으헉! 피? 공자님! 아이고. 이게 또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여 대주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보게 칠삼이! 어서! 어서 의원을! 급하네!”
 여불기는 자신의 앞에서 방방 뛰며 방정을 떠는 칠삼에게 다급한 한 마디만을 남기고는 설수민의 처소를 향해 쏘아갔다.
 “예? 아. 예 대주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칠삼 또한 의약당을 향해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설수민의 처소.
 북해빙궁의 의약당 당주 냉여해는 잡고 있던 설수민의 손목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흐음.”
 여불기는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냉여해의 옷깃을 붙잡았다.
 “냉 당주님! 어떻습니까! 괜찮으시겠지요?”
 “허어.”
 그러나 냉여해는 모호한 표정으로 가슴까지 흘러내려 온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어댈 뿐이었다.
 “당주님!”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냉여해가 돌연 자신의 침구 꾸러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불기는 그의 태연자약 한 모습에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보시오! 지금 뭐 하는 거요? 당신 의원 아닙니까? 치료다운 치료는 하지도 않았잖소! 공자님의 얼굴을 보시오! 조금 전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태평한 표정의 냉여해는 정리된 침구 꾸러미를 들고 신형을 돌렸다.
 “음주가 과하면 위장의 점막에 상처가 나 토혈을 하기도 합니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왈칵-
 분노한 여불기는 별안간 냉여해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비틀었다.
 “만일 공자님께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결코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빙황과 빙왕을 제외하면 빙궁의 최고수라고 알려진 여불기의 협박성 발언에도 불구하고, 냉여해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설수민을 한차례 흘겨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 말씀하셔도 제 진단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궁주님과 태상 궁주님, 아니 빙궁의 모든 식솔들도 이미 공자님을 포기했습니다. 가능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대주님만 그리 고집을 피우시는 것······”
 여불기는 냉여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누가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설령 그렇다 쳐도. 사람 살리는 것을 업으로 지닌 당신만큼은······ 휴. 됐습니다. 나가 보시지요.”
 “······”
 쾅-.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냉여해가 결국 거칠게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혼자 남은 여불기는 자신의 소매로 설수민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공자님. 다 헛소리입니다. 이 여불기가 공자님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
 
 사흘 후.
 설수민의 곁을 지키며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한 여불기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사흘 내내 미동이 없던 설수민의 눈꺼풀이 살며시 열렸다.
 여불기는 격동하며, 설수민의 손을 붙잡았다.
 “공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
 그것도 잠시 자신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설수민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여불기는 이내 눈을 부릅떴다.
 “이런, 기력이 떨어졌군. 이보게. 칠삼이! 칠삼이!”
 벌컥-.
 여불기의 다급한 호통에 설수민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주님! 찾으셨······ 응? 서. 설마······”
 방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노복 칠삼은 불안한 표정으로 설수민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눈동자를 굴려 자신과 눈을 맞추는 설수민의 모습에 안도한 칠삼의 안구에는 돌연 습기가 차올랐다.
 “공자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저는, 저는 또······ 흑······”
 “칠삼이. 어서. 어서 냉 당주를 불러오게. 기력이 많이 쇠하신 듯하네.”
 “예? 아. 예! 대주님.”
 여불기는 황망하게 뛰어나가는 칠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상 궁주님께도 알려야겠군. 분명 기뻐하실 테지.”
 그러고는 설수민의 손을 다시 한번 붙잡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태상 궁주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여불기가 설수민의 방을 벗어나려던 순간.
 그의 귓가로 설수민의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휙-.
 여불기는 나가려던 걸음을 급히 멈추고 되돌아서며 설수민을 향해 외쳤다.
 “맞습니다! 저 여불기입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공자님?”
 하지만 한참이나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핀 후 이어진 설수민의 말에 여불기의 신형이 뻣뻣이 굳고 말았다.
 “여, 여기는······ 어디입니까?”
 “······!?”
 여불기는 눈을 부릅떴다.
 설수민의 말투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19년을 보낸 자신의 방을 몰라보다니······ 아니, 그보다 갑자기 존댓말이라니?
 설수민은 자신을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하대했었다.
 꽤 요망하긴 했으나, 어차피 자신이 모실 주인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 자신감이 마음에 쏙 들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존대 말이라니!
 ‘뭐.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다 보면, 헛소리가 나올 수도 있지.’
 그러나 계속해 이어지는 설수민의 말에 여불기의 추측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신은 누구······ 절 구해주신건가요?”
 “공자······님?”
 “내가 왜 이곳에······”
 “예?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그날 설화루에서 쓰러지신 공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화, 화사파는······ 돌아가야······ 끄윽.”
 하지만 설수민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허공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반면 여불기는 방금 설수민이 보인 말투와 행동에 놀라 빙황에게 보고하려던 것 마저 잊고 말았다.
 ‘이런 경우가 있는 것인가? 의식을 잃었었다 해도 겨우 사흘. 그런데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삐뚤어지긴 하셨어도 총명하시던 분인데. 모를 일이구나.’
 여불기는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한참이나 생각을 이어갔다.
 가만. 화사파?
 ‘화사파라면······ 꽃뱀? 처음 들어보는 문파인데. 혹시 객잔에서 시비라도 붙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흉수? 으드득. 개자식들. 공자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화사파 네놈들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잠시 여불기는 화사파를 찾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한참이나 더듬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리 삼류 흑도 방파라도 이곳 북해에 여불기가 모르는 문파는 없었다.
 맡은 임무의 특성상 어제 시전 포목점에 납품된 비단의 필 수까지도 아는 자신이 아니던가.
 공자님의 착각일 것이다.
 그렇게 심각하기도 했다가, 분노하기도 했다가를 반복하던 여불기는 불현 듯 눈을 부릅떴다.
 불길한 가정이 떠오른 탓이다.
 그는 이내 황망한 표정으로 설수민을 돌아봤다.
 “그렇다면 설마······ 기억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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