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지옥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이곳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 지옥에 매번 뛰어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을 생존자를 위하여.
소중한 생명을 구하고자 우리는 또 다시 우리들의 손으로 자진해서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안쪽에 생존자 두 명 확인! 80대 어르신 한 명하고 20대 대학생 한 명!”
“생존자부터 어서 데리고 나가!”
“예!”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쾅, 쾅!
문을 열려고 했으나, 열기 때문에 문이 녹아버렸는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이럴 때에는 다 방법이 있다.
발을 높이 추켜들고······.
뻐엉!
기물 파손이고 뭐고.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지!’
아까 보고를 받았던 두 명의 생존자가 바로 시야에 포착되었다.
즉각적으로 그들에게 물에 적신 수건을 건냈다.
“이걸로 입하고 코에 대시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세요! 어르신은 저한테 업히시고요!”
“고, 고마우이······ 쿨럭!”
아직 불이 많이 안 번진 탓에 구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불이라는 건, 눈깜짝할 사이에 이 모든 것들을 다 집어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녀석이니까.
대학생 한 명과 어르신 한 명.
이렇게 두 명을 안전하게 밖으로 모시고 나간 직후.
“팀장님! 안에 또 생존자 있습니까?”
-아니, 찾아보고 있어.
“알겠습니다. 저도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아직 생존자가 더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정말로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장비 때문에 무거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니었다.
소방관이라고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자진해서 뛰어드는데.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나는 또 다시 화재 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 인생의 크나큰 분기점이 되었다.
***
“······.”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앉은 채로 상반신을 엎드려서 쪽잠을 잔 여파 때문일까.
“꺼윽!”
절로 트림이 새어나왔다.
“어휴, 죽겠네.”
기지개를 쭉 펴면서 갑자기 찾아온 피곤함을 내쫓으려고 할 무렵.
“어이, 기찬이.”
누군가가 경비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와 같이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형님이었다.
“네, 형님.”
“잠 좀 잤어?”
“아······ 죄송합니다. 요즘 춘곤증이 좀 심해서······.”
“괜찮혀, 괜찮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피곤한 건 다 똑같지, 뭐. 하도 피곤해 보이길래 내가 일부러 안 깨우고 놔뒀어. 잠 좀 자라고.”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는 무슨.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커피 한잔 할 텨? 아까 213동 6층 아주머니가 우리 마시라고 커피 캔 두 개 주고 가더라고.”
“잘 마시겠습니다.”
아파트 경비 일을 하기 시작한지 이제 한달 째.
뉴스에서 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갑질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나도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약간 겁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뉴스에서만큼 크게 회자가 될 만한 일은 없었다.
반대로 이렇게 경비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주민들도 많았다.
아주머니가 줬다는 커피를 마시고 나니, 조금이나마 졸음이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작에 커피 좀 마실 걸 그랬어요.”
“그래도 너무 많이 마시진 마. 그러다가 밤에 잠 안 오니까. 기찬이 너, 안 그래도 불면증 심하다며?”
“네, 뭐······.”
불면증이라고 해야 할까.
후유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옳다.
말을 흐리는 나를 보면서 형님은 쓴 미소를 지었다.
형님에게는 얼추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소방관 일을 하다가 관두고, 지금은 이렇게 경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형님은 장갑을 낀 내 왼쪽 손을 응시하며 말했다.
“세상사 쉬운 일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래도 너무 그렇게 과거에 얽매이지 마. 너, 아직 45살이잖어? 나 같은 노인네보다 훨씬 팔팔하니, 기운 차리고 힘 내.”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형님.”
“그래. 그리고 기왕이면 결혼도 한번 생각해 보고. 내가 중매라도 서줄까?”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 조카 중에 아직 시집 못간 애가 있거든. 나이는 30대 후반이여. 기찬이, 너 정도면 성격도 좋고, 그리고 잘생겼고. 우리 조카가 딱 좋아할 만한 타입인데. 어때. 한번 만나볼텨?”
“아닙니다, 형님. 저는 결혼 생각 없습니다.”
“아니, 왜 없어. 나이 먹고 혼자 있으면 얼마나 쓸쓸한지 알어?”
“혼자는 아닙니다.”
“······응?”
순간 형님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나는 여자 있는감?”
“여자는 여자인데, 그런 건 아닙니다.”
“뭔 소리여, 그게?”
“딸이 있습니다. 그것도 셋이나요.”
형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기야.
놀랄 만도 할 것이다.
결혼도 안 한 남자가 딸을 셋이나 데리고 있다고 말하면, 누구나 다 이런 반응을 보인다.
여태껏 그래왔고 말이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여? 결혼 안 했다며?”
“네.”
“그런데 딸이 있어?”
“예. 장녀가 28살이고, 둘째가 26살, 그리고 막내가 23살입니다.”
“동생, 45살이라며?”
나는 형님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정이 있습니다. 하하.”
“······.”
복잡한 사정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기른 세 아이는 법적으로 내 딸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낳고, 길러낸 소중한 제 딸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형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구만. 천사가 따로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화상을 입어 흉측한 꼴이 된 내 왼손을 응시했다.
“알았어. 나도 더 묻진 않을게.”
각자 복잡한 사정이 있는 법.
형님은 내 이런 사정을 알아주신 모양인지, 가족 관계에 대해서 더 이상 내게 캐묻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이렇게 해주면, 나야 편하긴 하다.
“그런데 동생. 딸들이 셋이나 있다며? 들어보니까 다 성인 같은데. 다들 취업은 했나?”
“장녀는 사업한다고 해서 서울로 올라갔고, 둘째도 지 언니 따라서 같이 올라갔습니다. 한 2년쯤 됐을 거예요.”
“둘 다 사업하나?”
“아니요. 장녀만 그렇습니다. 둘째는 무슨 방송 일 한다고 했어요. 근데 솔직히 제가 그쪽은 완전히 젬병이라서. 알려주긴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셋째는?”
“언니들하고 같이 살면서 대학 다니고 있습니다.”
“어휴. 홀몸에 셋을 잘 키웠구만. 대학까지 보내고.”
이런 말도 자주 들었다.
결혼을 안 해서 그런 걸까.
솔직히 돈이 부족하진 않았다.
장녀의 초기 사업 자금을 대줄 때? 그때만 빼고는 딱히 경제적으로 허덕인 적은 없었다.
이제 내 노후자금만 모아두면 된다.
“딸들하고 연락은 자주 하는감?”
“서울로 올라간 이후로는, 1주일에 한 번 정도만 연락하고 그러고 지내고 있습니다.”
“적적하겠구만.”
“그래도 다 자기 앞가림 하면서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명절 때나 서로 만나겠네.”
“하하······.”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딸들이 서울로 상경하고 난 이후, 사실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전화 통화가 대부분.
그렇다고 딸들이 아예 아빠를 잊고 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본인들이 내려오겠다고 하는 것을 내가 몇 번 막은 적이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먼데 굳이 시간 내서 내려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쁠 테니까.
명절 때에는 내가 근무였거나 아니면 딸들이 근무였거나. 이렇게 해서 타이밍이 서로 맞지 않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내 말에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인지, 형님은 혀를 내두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쯧. 딸들 다 키워봐야 소용 없구만.”
“아닙니다. 그래도 힘든 환경이었을 텐데,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건 거짓이 아닌 진심이다.
아직도 나는 내 딸들과 처음 만났을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면서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될 첫 만남.
지옥에서 마주하게 된 사랑스런 세 명의 천사.
이진혜, 이선혜, 그리고 이미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소중한 딸들.
“그래도 오랜만에 형님 덕분에 딸 이야기도 하고. 좋네요.”
“나중에 한번 연락이라도 해봐. 자식들 눈치 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낳고 기른 자식이라며? 어떻게 사는지, 소식이라도 전해듣고 그래야지.”
“네. 그래야겠어요.”
대화를 나누던 찰나,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첫째 딸, 진혜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형님이 내 스마트폰을 슬쩍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딸이여?”
“네. 첫째입니다.”
진혜가 먼저 연락을 다하고.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졌나 하고 걱정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어, 진혜야.”
-아빠. 저예요. 지금 어디 계세요?
“아빠? 아파트 경비 일하고 있지.”
-잠시만요. 순화 아파트였죠?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응? 온다고? 이곳으로?”
-네. 집에 갔더니 안 계셔서요. 그럼 조금 있다가 봬요.
이게 전부였다.
형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물었다.
“벌써 끝났어?”
“네.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네요.”
우리 집에서 이곳 아파트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걸어서 5분 정도.
‘내 집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금방 올 거 같긴 한데.’
그런데 갑자기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니까 좀 이상했다.
그때, 차량 한 대가 아파트 평지 주차장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차량을 확인한 형님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따, 동생. 저 차 봐봐. 롤X로이스 아녀? 우리 아파트에 저렇게 비싼 차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나?”
“그러게요. 제가 알기론 없는 걸로 아는데.”
주차장에 벤X만 보여도 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저렇게 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왜 우리 아파트에 왔을까.
하나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잠시 후에 벌어졌다.
갑자기 경비실 앞에 정차한 차량.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차를 하는 한 젊은 여성.
긴 머리의 여성이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커피 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생, 왜 그래?”
“그, 그게······.”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차에서 내린 젊은 여성이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우리 쪽으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를 와락 안았다.
“아빠, 오랜만이에요!”
이 아이가 내 보물 중 한 명인 장녀, 이진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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