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인간이 너무 강함

서장(1)

2020.12.19 조회 91,005 추천 1,470


 망했다.
 
 마지막 저항군 기지에 폭격이 떨어지기 직전.
 나는 골백번도 더 했던 생각을 또 했다.
 이젠 도망칠 곳도 없다 보니, 거기서 생각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게이트 너머에서 엘프들이 넘어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좋았다.
 놈들의 침입은 지구의 인류에게 일종의 기회처럼 여겨졌다.
 
 대 헌터 시대의 개막!
 마력을 각성한 신인류.
 신 에너지인 마력의 발견과 마법공학의 발달...
 
 애초에 엘프들은 인구수 자체가 너무 적었다.
 반면, 당시 지구의 인구는 자그마치 80억.
 애초부터 싸움이 안 되는 체급차였다.
 
 다음으로 오크들이 넘어왔을 때에도 큰 이변은 없었다.
 그저 전보다 숫자가 좀 많아졌을 뿐.
 지구의 인류는 여전히 최상위 포식자였고, 놈들은 한낱 사냥감이었다.
 언데드가, 데몬이, 라이칸이 넘어왔을 때에도 우리들의 우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드워프가 넘어왔을 때에는 크게 휘청거렸다.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센 난쟁이들과 마법공학 기술의 정수인 타이탄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가 수많은 희생 끝에 겨우 놈들을 해치웠을 무렵.
 마지막으로 등장한 상대는 다름아닌 인간족이었다.
 
 그리고 지구의 인류는 멸망했다.
 누가 알았으랴.
 앞서 등장한 종족들이 모두 해당 차원의 인류를 피해서 도망쳐온 것이었을 줄이야.
 
 다른 차원의 인류는 지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소수의 헌터들이 저항군 활동을 했으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마지막까지 일어나서 싸우긴 커녕 병상에 누워서 최후를 기다리는 신세.
 
 삐이잉, 삐이잉, 삐이잉!
 
 콰앙!
 
 부질없이 울려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염증을 내던 찰나, 폭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헌터로서 갈고닦은 감각 덕분에 내 머리통이 뭉개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향하게 된 곳은 지상도 지하도 아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드러났다.
 
 "뭐야, 마지막은 한국 놈인가?"
 "쟤가 마지막인 줄 어떻게 알아?"
 "저 양반까지 죽었으면 다 끝난거지 뭘. 안 그러냐?"
 
 큼지막한 비석들 사이에 둘러앉아있는 사람들.
 태연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녀석들은 분명 나보다 먼저 죽은 헌터들이었다.
 드워프 전쟁에서 죽은 대마법사는 물론이고 지구 최강으로 불렸던 킬로스까지.
 헌터 역사상 가장 강한 순서대로 아홉명을 주루룩 늘어놓은 것 같다.
 
 내가 그 아홉에 포함됐다는 사실에 어떤 감상을 느끼기도 전에.
 돌연, 조명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위엄있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내가 비석이라 생각했던 것은 다름아닌 그 존재들의 발이요 다리였다.
 끔찍할 정도로 키가 커서 목이 부러져라 올려봐야 한다.
 
 [어서 오라! 지구의 영웅들이여.]
 [그대들도 우리들처럼 비참하게 패했구나.]
 [크르르륵...]
 
 대낮처럼 밝아진 조명이 드러낸 얼굴들은 완전한 이형이었다.
 엘프는 물론이고 드워프에 오크, 데몬, 심지어 우리는 구경도 못 해봤던 드래곤과 바이언 등등.
 인류를 제외한 저쪽 세계의 종족들을 하나씩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놈들에게 신성 주문을 내려주던 신적 존재겠지.
 
 전설적인 헌터들도 놈들의 존재감에 몸을 굳히던 중.
 우리의 반응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제 그대들의 동족은 영원토록 놈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억울하지 않으냐?]
 [아직 자존심과 긍지가 남아있다면 우리가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겠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 종족의 지도자가 되어라. 우리 세계의 인간종에게 복수하고 그대들의 세계 또한 지켜내는 것이다.]
 
 다소 혼란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대충 이해가 됐다.
 이른바 회귀.
 다만 단순히 몇 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세계의 이종족으로서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기회라는 단어를 귀담아 들은 헌터들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눈치가 느리면 헌터 못한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튜토리얼의 요정에게 거스른단 말인가.
 
 "좋습니다."
 
 [...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으냐?]
 
 "그러니까 너희 종족의 지도자로 환생시켜준다는 거잖아. 우리도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싫으니까 문제없어."
 
 베테랑 헌터들의 빠른 이해력에 되레 당황하는 종족신들.
 그들은 우리를 일렬로 정렬시키더니 그대로 선택을 시켰다.
 
 [그럼 어떤 종족이 되고싶은지 선택하라. 먼저 그대부터다.]
 
 "잠깐, 내가 왜 이 자식보다 뒤쪽..."
 [우리들의 평가 기준에 따른 순위다.]
 
 킬로스의 다음을 차지하게 된 대마법사가 항의하자 곧바로 묵살.
 인류 최강의 헌터, 킬로스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내뱉었다.
 
 "드래곤."
 
 [현명한 선택이다.]
 
 의외였다.
 모두 드워프를 최우선으로 고려할 줄 알았는데...
 
 하긴. 킬로스는 워낙 강하니까 개인의 무력을 잘 살릴 수 있는 드래곤 쪽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른다.
 선택을 완료한 킬로스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2순위인 대마법사가 주저없이 외쳤다.
 
 "드워프!"
 [마땅히 그래야지.]
 [다음은?]
 
 "... 중복 선택 됩니까?"
 
 [되겠느냐?]
 
 "... 오크!"
 
 드워프를 빼앗긴 3순위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퉁명스런 대꾸가 돌아왔다.
 장고 끝에 내려진 선택은 오크.
 압도적인 인구수에서 나오는 포텐셜을 고려한 것 같다.
 
 문득 내 자리를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9번째.
 이래서야 선택권이고 뭐고 없다.
 마지막에 남은 종족으로 환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훨씬 초조한 기분으로 앞 순번을 지켜봤다.
 
 드래곤과 드워프, 오크가 모두 매진된 탓에 길어지는 선택 시간.
 그도 그럴 것이, 남은 종족들은 모두 치명적인 하자를 품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엘프만 아니면 만족한다.
 
 "라, 라이칸!"
 [좋다.]
 
 강력하면서도 다재다능한 수인 종족, 라이칸도 곧바로 매진.
 
 깊은 침음을 삼킨 5순위가 선택한 것은 데몬이었다.
 그냥 엘프나 고를 것이지.
 내가 속으로 그녀를 씹어대자 6순위가 곧바로 선택했다.
 
 "언데드!"
 [죽음의 군세에 합류한 것을 환영한다.]
 
 이제 남은 것은 고작 3명.
 아직 선택받지 못한 종족신들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염려하듯 잽싸게 내뱉는 7순위.
 
 "바이언."
 
 [크르륵...]
 
 지구에선 구경도 제대로 못 해봣던 괴물 종족.
 저런 기괴한 흉물을 잘도 선택했다.
 하긴, 아무리 구려도 엘프보단 낫겠지.
 남은 종족신을 살펴보던 나는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잠깐. 뭐가 좀 모자란데?'
 
 "에, 엘프..."
 
 나와 똑같은 사실을 깨닫곤 하는 수 없이 외치는 8순위.
 엘프의 종족신이 아니꼬운 심정을 팍팍 드러내며 그녀를 거둬갔다.
 
 이제 이 공간에 남겨진 헌터는 나 하나 뿐.
 그런데 아직 선택받지 못한 종족이... 없다.
 나를 위한 재고가 남아있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종족이 하나 모자란데..."
 [... 어쩌지?]
 [애초에 왜 굳이 한 명 더 데리고 온 것이냐.]
 [아니, 여차하면 기선제압 용으로 한 마리 죽여버리려고...]
 
 계획이 어긋났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오크.
 나는 놈의 고백에 어이가 없어졌다.
 
 '이 새끼들이 20년 전에나 먹히던 양아치 짓을...'
 
 진짜 자기들이 무슨 튜토리얼의 요정인 줄 아는 건가?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있자 오크신이 도끼를 치켜든다.
 
 [조금 아깝지만 굳이 후환을 남기는 것도 내키지 않고...]
 [마지막으로 선택권을 주는 건?]
 [반대다. 드워프 선택할 게 뻔하지.]
 [크르르!]
 
 드워프신이 발언하자 냉큼 견제하는 녀석들.
 역시 인류 배제를 위한 일시적인 동맹에 불과한 것 같다.
 이어서 엘프 여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생명의 순환으로 돌아가세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죽게 내버려두던가!"
 
 억울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하강하는 오크의 도끼.
 다행히 그대로 몸이 동강나거나 하진 않았다.
 내 뒤쪽에서 불쑥 솟아난 아홉 번째 종족신이 그것을 막아준 것이었다.
 
 채앵!
 
 귀를 울려대는 쇳소리와 함께 도끼가 정지.
 맨손으로 그것을 막아낸 여신이 다른 종족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놈들과 달리 이형은 커녕 미형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이런, 치사하게 재경기나 하는 것도 모자라서 저만 따돌리시긴.]
 [... 인류신.]
 [재경기를 할거면 하다못해 공평하게 해야죠. 저도 제 마땅한 권리를 이용해서 챔피언을 선택하겠습니다. 불만 없으시죠?]
 
 "누, 누구 맘대로..."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판타지 세계의 인류에 대한 반감이 치솟았다.
 
 애초에 내가 죽고 지구의 인류가 멸망한 것이 당신 자식들 때문 아닌가.
 그러한 뉘앙스를 알아들은 여신이 양손으로 나를 받아들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그대가 저의 챔피언이 되어주신다면, 이번에는 지구의 인류를 침공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만족하시겠죠?]
 
 "뭣?"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곳 말고도 점령할 차원은 많으니까요.]
 
 여신이 강수를 꺼내들었다는 듯, 긴장한 표정의 종족신들.
 그녀의 약속이 사실이라면 내 목숨도 부지하고 지구도 지킬 수 있다.
 
 지금 내게 다른 선택이 가능하기나 할까?
 나는 장고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수락과 동시에 흐려지는 시야.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새로운 인생을 맞이했다.

작가의 말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103)

르밀리옹    
뭐야 내 유니콘 돌려줘요 ㅜ 그래도 응원하겠슴다
2020.12.19 14:51
한승화    
4일 ㅇㄷ
2020.12.19 14:53
노스텔스    
처음부터 매우흥미롭네요
2020.12.19 14:53
뇌절전문가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9 14:56
젤리마시쩡    
흥미로운 소재네요 잘 보겠습니다
2020.12.19 14:58
민트시즈닝    
개돌 강해
2020.12.19 15:04
몰지아나    
비밀글입니다.
2020.12.19 15:32
일독함    
유니콘 연중은 말고 주1회라도 연재해주시면 ㅠㅠ
2020.12.19 19:17
일독함    
응원해요 재밌어보임ㅋ
2020.12.19 19:24
페골    
이건 뭐라 줄여부르면 되나요 한남인류?
2020.12.20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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