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냄새,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전장의 혼란이 눈을 어지럽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이미 피를 잔뜩 머금은 바이킹 소드를 고쳐 쥐며, 난전 속에서 다른 적들을 찾았다.
“우오오오오!”
금방 적 한 명이 고함을 지르며 내게 덤벼들었다.
눈을 가면처럼 가리는 바이킹식 투구에 무릎까지 기장이 내려오는 체인메일을 입고 있다.
나랑 같은 전사계급이거나 아니면 귀족일 허스칼일 가능성이 크다.
허스칼치곤 약간 무장이 추레하긴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나한테 죽는 건 똑같을 테니까.
캉!
라운드 쉴드로 놈의 검을 막았다.
놈도 나의 반격을 막기 위해서 라운드 쉴드로 몸을 가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방패를 검으로 때렸다.
쾅! 엄청난 힘으로 놈이 방패를 든 팔이 흔들렸다.
“아니...!”
그놈은 무지막지한 내 힘을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설마 도끼도 아니고 검으로 쳤을 뿐인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놈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치사하게 추가 보너스로 강해진 놈이라고 한들, 공정한 싸움은 어차피 이곳에 없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선 전장에선 적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가드가 풀린 놈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커흐읍, 크륵....”
피로 가래가 끓는 소리를 내면서 놈이 절명했다.
한 놈을 그렇게 처리하면서 주변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약간 우세가 보이지만, 여전히 팽팽한 난전 상황이다.
이제 적당한 때가 된 것 같았다.
“발할라!”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치 천둥소리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곳이 평범한 세상이라면 그저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한 함성일 뿐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은 평범한 현실이 아니었다.
그래, 여기는 게임 속이다.
어찌 된 일인지 게임 속의 캐릭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어리버리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서 진짜 바이킹이라도 된 것처럼 적응해야 했다.
다행히 그럭저럭 적응해서, 지금은 악귀처럼 싸우고 있다.
난이도를 떨어트리고, 내 아바타의 능력치를 높였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다.
“으으윽, 오, 오딘이시여!”
“헬의 늑대다!”
내 함성을 들은 아군들이 더 광포해졌으며 나도 괴물처럼 싸우기 시작하자, 적들은 사기가 팍 꺾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하는 ‘헬의 늑대’는 나를 지칭하는 별명이었다.
전장에서 적들을 좀 썰어버리니까 붙은 별명이다.
그렇게 겁을 먹고 도망치는 놈들은 쫓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덤비는 놈들에겐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컥! 크윽....”
덤벼들던 한 놈의 목을 라운드 쉴드의 철 테두리로 때린 뒤, 바이킹 소드로 찔러 마무리했다.
방금 녀석은 별 볼 일 없는 컬 계급(빈민 혹은 평민 계급 전사)인 것 같았다.
평민 주제에 용케도 덤볐네.
“바, 발할....”
“그래, 발할라로 꺼져라. 경험치는 내놓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헐떡이면서도 발할라를 외는 게 보였다.
나는 악담을 퍼부으면서 놈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살인은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
그런 자신이 가끔 무섭고, PTSD도 느껴지지만, 살기 위해선 별수가 없다.
여기선 내가 죽이지 않으면 죽을 뿐이다.
“오오오오오!”
“이겼다!”
“오딘!”
적들이 도망친다.
사실 우리들이 습격을 갔던 부족이 반격하기 위해 끌고 온 군대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동쪽의 바이킹 계통의 부족이다.
동쪽의 바이킹이나 러시아 쪽 부족이랑 자주 싸운다.
탐탁지 않았다.
이 세계가 된 게임, 그러니까 <사가 오브 다크에이지>를 클리어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미 공략 같은 건 인터넷 방송이나 영상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공략에 따르면, 바이킹으로 똑같이 거지나 마찬가지인 스칸디나비아 동쪽의 부족들과 싸우는 건 병신 짓이다. 거지들끼리 싸워봐야 거지인데 답이 있나? 물론 거지들 중에 왕이 될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도 뭐라도 있을 때에나 의미 있지 이 시기쯤에는 의미도 없다.
그런데 내가 속한 부족의 족장 크레도는 진취적이지 못한 놈이라 서쪽으로 항해하자는 내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다.
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퉷’하고 침을 뱉곤 돌아섰다.
“헬의 늑대!”
“롤로!”
“롤로! 롤로!”
내가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하자, 전사들이 나를 보곤 내 이름을 연호했다.
엄청난 시작 특전 덕분에 강한 전사인 나는 빠르게 그들의 인망을 얻었다.
그 덕분에 크레도가 나를 눈꼴시게 보고 있지만 말이다.
걸어가는 와중에 내 노예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지나가, 내 전리품을 뒤적이고 있었다.
다른 전사들의 노예들도 마찬가지.
전투는 끝났고 이제 까마귀들의 시간이었다.
“롤로! 오늘도 엄청 대단했어!”
“이그리트.”
오늘도 몇 명을 죽여서 경험치로 만들었고, 그걸 술로 잊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 쉴드메이든(방패처녀)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이그리트다. 이곳에서 친해진 사람 중 한 명이다.
“혼자서 서른 명은 잡았지? 사실 너 혼자서 백 명도 혼자 잡는 거 아냐?”
“전장이니까 가능했을 뿐이다. 혼자선 무리야.”
“에이, 그럴 땐 허세로라도 가능하다고 하는 거야. 넌 조금 다른 전사들을 닮을 필요가 있어.”
“....”
이그리트는 조금 친구 같은 느낌이다.
내가 처음 게임 속으로 들어와서 약간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말을 붙인 사람도 이그리트였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는 내가 전사로서 두각을 드러내도 다른 방패처녀들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보통 나하고 친해진 쉴드메이든들은 강한 남자를 열망했고 곧 동침을 요구했는데, 이그리트는 그저 계속 친구처럼 지내려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단순한 원나잇이 아니라 썸씽이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최 살아남는 게 급해서, 바이킹에겐 핑크빛 사랑보단 핏빛 살육이 더 친근해서 좀처럼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나도 힘내서 열 명 정도 잡았어!”
“잘했다.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인 남자 열 명을 발할라로 보냈네.”
“뭐야, 그냥 대단하다고 해주면 안 돼?”
그녀의 말을 조금 비꼬면서 장난치자,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내 팔을 쳤다.
잡담은 마을로 복귀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도 이겼으니 크레도는 기뻐하겠네.”
“그래, 뜯어낸 거라곤 쥐뿔도 없지만.”
“흐응, 나도 그 점은 조금 불만이야. 약탈품이 별로 없잖아. 돈 될만한 건 얼마 없고, 노예를 데려오긴 하지만 이제 노예는 넘쳐.”
“.....”
“그래서 말인데. 너, 여전히 서쪽으로 항해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그리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정말 그 소문 믿는 거구나. 서쪽으로 가면 기름진 땅에 보물이 잔뜩 쌓여있다는 말 말이야.”
“소문이 아니라, 그건 진짜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상인들이 그렇게 말할 뿐이잖아? 상인들은 허풍을 자주 떤다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마.”
이그리트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브리튼 섬이 나온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나로서도 말로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저 거기에 가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바이킹 전사가 된 내가 그토록 그곳에 가고 싶은 이유는 딱히 모험심이 강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바이킹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속 강해지는 수밖에 없고, 세력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어쩌면 ‘게임클리어’를 해버리면 지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없잖아 있었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베르겐으로 향했다.
내가 속한 부족의 본거지인 베르겐 마을은 개판 오 분 전의 내정상태였다.
딱 고사만 면하고 있는 수준, 그것도 나로 인해 약탈을 성공시키고는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걸로는 정복 따위는 할 수가 없다.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혹은 강해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정복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와, 저기 오크 지나간다.”
돌아가는 길에 오크 무리와 조우했다.
이 게임은 판타지가 좀 섞여 있었다.
마법도 존재하고, 오크 같은 이종족이나 괴물도 존재한다.
오크는 그 이미지대로 상당히 강한 종족인데... 지금은 적대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약탈을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보다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그리트는 오크들이 숲으로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내게 말했다.
“그래서, 언제 갈 거야?”
“음?”
“바다, 건널 생각이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에이,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스벤에게 매일 가는 거, 알고 있거든?”
“······.”
스벤은 내가 친해진 다른 바이킹인데, 조선공이다.
조심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다.
“네가 지금껏 모은 돈으로 배를 만들고 있는 거 알아. 대해도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중이잖아?”
“거기까진 어떻게 아는 거야?”
“스벤에게 물어봤거든.”
“······입이 싼 녀석이군.”
“나니까 특별히 말해주는 거랬어.”
이그리트는 얄밉게 혀를 살짝 내밀었다.
스벤도 이그리트라면 함부로 말하진 않을 거라고 믿고 말한 것이긴 했다.
“배는 그렇게 만든다고 해도, 서쪽으로 방향 잡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걸 얻었어.”
“와, 그게 뭐야?”
“나침반.”
“그게 뭔데?”
“북쪽을 가리키는 물건이야. 중국에서 온 상인에게서 샀어.”
“중국은 또 어딘데?”
“아주 먼 동쪽의 나라야. 아마 어지간해선 못 갈 곳.”
“근데 거기서 온 사람이 있어?”
“상인은 어디든 다니니까.”
인간 백정 노릇하면서 모은 돈으로 배를 만들 뿐만 아니라, 항해수단도 손에 넣었다.
물론 항해 자체는 [항해술] 스킬에 보정 받겠지만, 방향을 잃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운 좋게, 항구로 들어온 상인 중에 중국인 상인이 있었다.
그에게서 아주 구식의 나침반을 살 수 있었다.
이런 시대에 나침반이 웬 말이냐고 하겠지만, 나침반은 단테의 신곡에도 나오는 물건이다. 신곡이 아마 1200년대 작품이었던가?
사실 원리와 자석만 알면 그리 어려운 물건도 아니니 신기할 것도 없었다.
물론 실제 역사 속에서 바이킹 시대에 중국인 상인이 나침반까지 들고 스칸디나비아에 올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은 쓸모없는 생각이다.
이 세계관은 그냥 중세풍의 판타지일 뿐이니 말이다.
“대단하다... 그게 사실이면 우리도...”
“그래, 얼마든지 갈 수 있어. 그 서쪽의 땅에 말이야.”
“저기, 롤로. 그럼 나도 데려가 줄래? 약탈에 말이야.”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전사가 필요하니까.”
이그리트가 내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예상 밖이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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