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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풍 1권-1

2014.08.28 조회 3,986 추천 52


 월풍 1권-1
 
 작가서문
 
 
 
 
 
 
 
 
 
 하루가 반복되면?
 아마 이 같은 질문이 주어진다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겁니다. 어떤 분들은 로또 당첨 번호가 발표되기 몇 시간 전에 로또를 살 것이고, 수험생들은 시험을 다시 보고 싶어 할 겁니다.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좌절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월풍은 저의 마음을 대변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학창시절 공부는 인류의 적이라고 생각해온 저였기에 만사 제쳐놓고 놀았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공부는 안 하고 신나게 놀다 쌍권총을 맡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군대를 가고 나서야 공부 안 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철이 든 건데, 군대 제대하고 난 이후 공부를 시작했을 때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즈음 본 영화가 <사랑의 블랙홀>이었습니다. 만약 나에게도 하루가 반복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동안 뒤쳐졌던 공부도 만회할 수 있고, 여러 가지 기술도 익히는 상상을 하면서 괜히 흐뭇해하곤 했습니다.
 아마 이런 상상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봄직한 이야기일 겁니다.
 월풍은 <사랑의 블랙홀>에서 모티브를 얻은 글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독특한 스토리입니다. 조금은 낯설면서도 친숙한 스토리를 쓰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독자 분들의 몫이겠지요.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어렵지만, 특히 이번 월풍은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시놉시스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난 몇 개월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월풍이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1장 만시지탄
 
 
 
 
 
 
 
 1
 
 길림성 화룡진.
 장구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장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는 고려인이 살고, 북쪽으로는 중국인이 살고 있다. 장백이라 하면 백두산을 가리킨다. 즉, 고려에서는 백두산이지만, 중국에서는 장백이라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리 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요동이라 해서 길림성과 만주 일대는 고조선과 고구려 시대까지만 해도 고려의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발해가 멸망하면서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중국에서 보면 변방이나 다름없는 도시 화룡진.
 그러나 고려와 여진족이 활발하게 무역을 하는 곳으로 경제적으로 보면 중요한 곳이다.
 또한 장백파라고 하는 중원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무림 방파가 있다.
 장백파는 중원 백대 문파중 하나로 그들의 진중하면서도 강맹한 검법은 무림 일절로까지 불리고 있다.
 화룡진의 번화가에서 동남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하나의 성채가 있다. 화룡진은 그곳을 성역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성채가 바로 장백파였다.
 화룡진의 백성들에게 장백파는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산적들의 침입에서 장백파는 백성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백성들은 관아보다 장백파를 더 믿고 의지했다.
 그리고 감사와 존경의 의미로 장백파를 성역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개의 방파가 새롭게 탄생되기도 하며 명멸되는 것이 강호의 생리.
 허나, 장백파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중원의 변방이나 중원 무림의 중심에 자리한 장백파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성세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앗!”
 “어딜?”
 챙챙!
 기합소리와 함께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연무장에 전 제자들이 모여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 연무장 밑에는 장문인 손평과 네 명의 장로와 두 명의 단주 그리고 네 명의 당주와 다섯 명의 각주가 앉아 있었다.
 오늘은 해마다 한 번 벌어지는 비무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장백파는 일대제자부터 삼대제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무대회에서 이겨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원래의 것을 백팔십도 바꾼 다소 파격적인 체계였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당금 강호는 무황성의 힘이 약해지면서 천하의 군소방파가 난립하는 난세의 시기였다.
 장백파도 난세의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직을 능력 위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능력이 없는 자는 철저히 도태되고, 능력이 있는 자는 우대해 주는 것이 바로 장백파의 전략이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혼란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제도가 정착이 되어 오히려 장백파를 강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비무를 겨루는 사람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싸움은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무는 정오가 되자 더욱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받아랏!.”
 “앗!”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월풍은 연무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가슴에 커다란 족인이 찍혀 있었다. 오현의 발길질에 가슴을 얻어맞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사형,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현은 월풍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패자에게 예를 다하는 모습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그는 곧바로 연무장 밑에서 심사를 보고 있던 손평과 장로들을 향해 허리를 굽힌 다음 가볍게 몸을 날려 연무장 밑으로 내려섰다.
 사람들은 오현에게 다가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오현의 얼굴에서 한껏 고무된 모습이 역력했다.
 겨우 월풍을 이겼다고 일대제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오현이 일대제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오현 역시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승자에게 쏠리면 자연히 패자의 고통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휴!’
 월풍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았지만, 간혹 마주치는 눈빛마다 경멸과 멸시가 담겨 있었다.
 한심한 인간.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건만 그의 가슴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엉덩이가 아픈 것도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월풍은 올해로 팔 년 째 이대제자였다.
 헌데, 이번에도 일대제자로 올라갈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는 평생 이대제자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현은 월풍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지만,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 이번 비무대회에서 일대제자로 올라갈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이대제자가 된 지 겨우 사 년 만의 일이었다. 그에 비해 월풍은 팔 년이 지났어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하기야 그는 이대제자도 오 년이 걸려서야 겨우 될 수 있었다. 남들은 늦어야 삼 년인 것을 말이다.
 장백파에 입문한지 어느덧 십삼 년.
 그의 동기들은 모두 일대제자가 되어 장백파의 중추적인 곳에서 활약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대제자일 뿐이었다. 이제는 동기들에게 말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감히 월풍이 고개를 쳐들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어제까지 그의 사제였던 자들은 일대제자가 되어 그의 윗사람이 되었다. 존댓말을 하는 것은 물론 깍듯이 윗사람으로 받들어 주어야만 했다.
 장백파는 나이보다 능력과 실력이 우선시 하는 곳이고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정말 못난 놈이다.’
 월풍은 쓸쓸하게 연무장을 떠났다. 그를 주의하거나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구 년째로 접어드는 이대제자에게 관심을 가져줄 바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아버님! 어머님!’
 청승맞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가까스로 눈물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삼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그는 어려서부터 망나니에 사고뭉치였다. 못된 자들과 어울려 사람들 등쳐먹고 부녀자를 희롱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기녀원을 출입했고, 못된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술을 먹고 방탕하게 보냈다.
 누가 봐도 질 안 좋고 인간성 나쁜 인간이 바로 월풍이었다.
 그의 부모는 월풍이 열심히 공부해서 증조부처럼 관직에 나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했지만, 월풍은 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길로 나갔다.
 그의 증조부는 고려에서 관직을 한 적도 있는 양반이었다.
 허나, 나라가 망하면서 이쪽 길림성으로 건너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모아놓은 재산은 어느 정도 있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월풍이 문제였다. 월풍이 한번 사고를 칠 때마다 그의 부모는 논과 밭을 팔아야 했고, 집안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세 마리의 황소도 팔고 말았다.
 그래도 그의 부모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철이 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월풍이 어긋난 길을 갈 때마다 천지신명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도 안 되면 불공을 올렸고, 정성이 부족하면 조상신에게 눈물로 간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풍은 계속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생각 끝에 장백파로 입문시켜 버렸다. 무예를 배우다 보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장백파에 입문하게 되자 못된 친구들과의 교제는 자연스레 끊어졌다. 또한 술과 여자도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백파는 규율이 엄격해서 절대 삼대제자가 함부로 문밖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방탕하게 살아온 그가 진득하게 무예를 배울 리 없었다. 그는 일찍이 무공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장백파를 겉돌았다.
 학문의 깊이도 짧고 집중력도 약하며 무공에 대한 열정도 없다보니 자연스레 장백파에서 왕따가 되어 버렸다. 무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도 그의 자질에 실망하고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장백파는 이대제자부터 정식제자로 인정한다. 즉, 삼대제자들은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돈은 결코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월풍의 부모들은 가뜩이나 없는 재산에서 매달 장백파에 돈을 줘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을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일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유모나 남의 집 종살이도 기꺼이 했다. 허리가 휘청거리고 뼈마디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힘들었지만, 월풍이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술과 여자를 멀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했다.
 그렇게 오년.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결국 그들은 힘든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앓게 되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삼년 전에 죽었던 것이다.
 월풍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불효자식이었는지 깨달았으나 그때에는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였다.
 피눈물이 흐르고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모든 것이 피안이라 했는데, 그는 부모님이 죽어서야 정신을 차렸으니 못나도 너무 못난 놈이었다.
 월풍은 부모님의 평생소원이던 공부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살아생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하늘에서나마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입가에 미소를 지으시리라.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망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증조부님처럼 관직에 나가고 아리따운 부인을 얻어 자식들을 낳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는 사서오경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배운 바 지식이 짧은 그가 이해하기에는 사서오경은 너무 어려운 학문이었다. 누가 옆에서 가르쳐줄 스승이 필요했지만, 지금 그의 처지로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던가?
 ‘못난 놈. 왜 이제 서야 지난 날 잘못 산 것을 후회한단 말이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친 듯이 공부하고 부모님에게 효도하며 열심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저 헛된 망상이 불러오는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로구나. 공부도 때가 있는 것을 왜 그때에는 몰랐단 말인가?’
 후회를 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여덟.
 결코 적지 않은 나이건만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자질로 일대제자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장백파에 계속 있자니 평생 이대제자로 남아 눈칫밥만 먹을 터였다.
 ‘정작 걱정인 것은 내년이구나!’
 내년이 넘으면 그의 나이도 이제 서른.
 지금까지 서른을 넘기고 이대제자로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백파를 나가면 먹고 살 것이 없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계집질이나 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가진 기술도 없고, 배움도 짧았다. 무공도 변변치 못했고, 그리고 그를 맞아줄 일가친척이라곤 단 한명도 없었다. 장백파를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휴!’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한없이 서글퍼졌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벌건 대낮에 웬 유성이……?’
 보기 쉽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는 유성을 바라보며 다시금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죽어가던 순간 자신의 손을 꼭 붙잡으며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 하다.
 하지만, 그의 부모들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죽으면 하나뿐인 아들은 영원히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월풍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다시금… 다시 한 번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그는 유성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그 순간 유성과 부모님의 얼굴이 합쳐졌다. 유성 속에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가슴이 뭉클하고 저려왔다.
 그의 기도가 끝나는 순간 유성의 모습은 서쪽 하늘로 사라졌고, 부모님의 모습도 가을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2
 
 “이봐, 월풍!”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월풍은 흠칫했다. 시선을 돌리자 한 명의 청년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월풍보다 약간 어려 보였다.
 하지만, 그는 월풍에게 반말을 했고, 월풍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오셨습니까?”
 고천세.
 그는 작년에 일대제자가 된 인물로 철갑단 소속의 단원이었다. 원래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월풍을 사형이라 불렀다. 허나, 일대제자가 된 이후부터는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월풍이 그를 상관으로 깍듯이 모시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 약간 난처한 빛을 띠곤 한다. 그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신분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어제까지 사형으로 불렀던 사람이다. 한 순간에 말을 놓고 아랫사람으로 대하기는 힘든 것이다.
 허나, 고천세는 예외였다. 그는 뉘 집 하인 부르듯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요즘은 월풍을 괴롭히는 것이 취미가 되어 하루에도 몇 번은 못살게 굴었다.
 “한참 찾았잖아. 청승맞게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었냐?”
 고천세의 눈빛이 교활하게 빛났다. 표정을 보니 월풍이 비무대회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물어보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월풍은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이유로 저를…….”
 “월풍,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다.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이 자식을 그냥?’
 월풍은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가뜩이나 비참하게 느껴지던 그의 마음이 더욱 참담해졌다.
 “뭐야? 얼굴은 왜 찌푸리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야, 뭐야?”
 고천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전신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크게 분노했다는 소리.
 월풍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올해도 비무대회에 떨어져서 그만…….”
 월풍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고천세와 시비가 붙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그가 시킨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주들에게 불려가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이유는 하극상이었다. 심부름 하지 않은 것이 하극상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 심부름이라는 것이 여자 숙소에서 여자들의 속옷을 훔쳐 오라는 것이었는데, 당주들에게는 다른 중요한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는 어이가 없어 항변해 보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장백파에서 월풍은 한심하고 무능하며 멍청한 놈이었다. 그에 반해 고천세는 착실하고 예의바른(?) 일대제자이니 당주들이 고천세의 말을 믿는 것은 당연지사.
 그날 이후로 더 심해졌다. 고천세는 갖은 방법으로 월풍을 괴롭히며 못살게 굴었다.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한때,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부모님께 불효했던 일들을 고천세를 통해 고스란히 돌려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또 한 번 경고를 먹으면 이곳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문득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장백파에서 그 누구도 월풍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주들 역시 무능하고 아무런 자질도 없는 월풍을 귀찮아하고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혼나는 것은 월풍이었고, 처벌을 받는 것도 월풍이었다.
 월풍이 생각해도 자신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
 고천세는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쯧쯧! 이봐, 월풍! 그래서 언제 일대제자가 되겠어? 차라리 나를 스승으로 삼고 무공을 배우는 것이 어떠냐?”
 저 이기죽거리는 모습과 얄밉게 주절대는 입술.
 ‘차라리 눈을 감자.’
 이제 월풍은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을 배웠다. 어쩌면 그것이 고천세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헤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흥, 바보 같은 자식.”
 고천세는 월풍의 행동에 흥미가 떨어졌다.
 처음부터 월풍의 입에서 간사한 웃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웃음을 보면 왠지 자신이 좀 더 우월적인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월풍만 보면 철저하게 짓밟아 주었다.
 고천세는 좀 더 괴롭히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누가 너 같은 머저리를 제자로 삼고 싶겠냐? 넌 백날 해도 일대제자는 안 될 거야. 그러니 일찌감치 꿈 깨라.”
 “헤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웃지 마라. 구역질나니까.”
 고천세는 말과 함께 품속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냈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모르냐? 연서(戀書: 연애편지)다.”
 그리고는 서신을 월풍에게 건네주었다.
 “정화 사매에게 전해 주고 반드시 답장을 받아 와라.”
 “답장을 말입니까?”
 월풍은 흠칫했다.
 “그럼, 빈손으로 그냥 오려고 했단 말이냐? 바보 같은 놈. 연서를 보고 난 후 어떤 반응이 있을 것 아니냐? 넌 기다렸다가 정화 사매의 답장을 받아오란 말이야.”
 “정화 사매에게 연서를 전해주려면 가인전에 가야 하는데 저는…….”
 남자들은 함부로 가인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가인전은 여인들의 숙소로 금남의 구역이었다.
 아무런 허락도 없이 들어갔다 걸리면 목숨이 열개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고천세는 월풍의 대답에 벌컥 노화를 터뜨렸다.
 “에잇, 짜증나게. 하라면 할 것이지 뭔 말이 이리 많아? 그게 정 안 되면 가인전 밖에서 정화 사매를 기다렸다 전해주면 되잖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월풍은 멍청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손정화는 장문인 딸이라는 특권(?) 때문인지 비무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월풍은 손정화만 보면 주눅부터 들었다.
 “왜 꼽냐? 그렇게 꼬으면 너도 일대제자가 되던가? 하지만, 어쩌냐? 넌 올해도 비무에서 패했으니. 쯧쯧!”
 고천세는 월풍이 불쌍한 듯 혀를 찼지만, 다분히 조롱끼가 담겨 있었다.
 월풍은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비무에서 패한 것도 억울한데 매일같이 고천세 같은 인간에게 놀림이나 받으며 살아야 한다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막 이성을 잃고 고천세에게 달려들 찰나.
 갑자기 하늘에 계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금 유성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월풍은 찬서리를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걱정되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부모님들.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월풍을 향한 걱정으로 가득해 있었다.
 ‘휴!’
 순간 월풍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 가득 끓어올랐던 분노도 빠르게 사라졌다.
 고천세는 월풍의 모습에 흠칫 했지만, 이내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전해줄 때 내가 주었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건 알지?”
 “예? 그게 무슨…….”
 월풍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천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서를 전해주고 답장을 받아오라면서 전해줄 때, 누가 주었는지 이름을 말하지 말라니.
 월풍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천세가 아무리 개념이 없다 해도 손정화를 두고 장난을 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손평의 무남독녀였다.
 장백파에서 그녀의 뜻을 거스를 만큼 대담한 사람은 없다. 또한 장백일미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화룡진을 넘어 길림성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미녀였다.
 도도하기가 장강의 물줄기만큼이나 깊은 여인.
 그녀는 장백파의 하늘이요, 상징이었다. 남자 제자들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그녀를 모욕하는 행위는 마치 자신이 모욕을 받은 것처럼 생각했다.
 헌데, 고천세가 무슨 배짱이 그리 크다고 모든 사형제들의 눈총을 받으려 한단 말인가?
 월풍이 속으로 고민하는 순간 고천세가 연서를 내밀며 다그쳤다.
 “무얼 하는 거야? 어서 받지 않고?”
 월풍은 엉겁결에 연서를 받으며 멍청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후후. 부탁한다. 답장 받아오는 거 절대 잊지 말고.”
 고천세는 웬일인지 월풍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해 주면서도 속으로 비웃었다.
 월풍은 왠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고천세의 격려가 결코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가인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려 하겠지.’
 어쩌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괴롭히려고 할지도 몰랐다.
 월풍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지만, 유성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2장 화불단행
 
 
 
 
 
 
 
 1
 
 장백파의 규율이 엄격하다는 것은 남자 제자와 여자 제자들의 숙소를 따로 만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원래 삼대제자들은 장백파의 제자들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문파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혼용해서 숙소를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백파는 삼대제자들도 엄격하게 관리했다. 여자 제자들에게 농담 한번 잘못 건넸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원래 다양한 민족이 어울리다 보니 다른 문파들보다 체계적이면서도 엄격한 규율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약간 경직된 맛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장백파가 중원 백대 문파에 낄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휴!”
 월풍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가인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에는 두 명의 여인이 가인전을 지켜서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 셈이었다.
 초선과 미화.
 그녀들은 삼 년차 이대제자들로 월풍보다 한창 나이가 어리지만, 워낙 성격이 불같아서 남자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그 상대가 월풍이라면 어떤 험한 욕설을 내뱉을지 모를 일이었다.
 가인전은 인공호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전각과 하나의 연무장 그리고 식당과 도서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월풍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인전 안의 풍경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그냥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것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정화 사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제법 정문과 거리가 있었고, 지금은 비무대회가 한창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도 뜸했다.
 “내 신세가 정말 처량하구나! 남들은 일대제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 나는 겨우 정화 사매에게 연서나 전해주기 위해 이러다니.”
 우울한 하루였다.
 월풍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조감이 섞여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어쨌다는 거죠?”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월풍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월풍의 눈앞에는 백의궁장을 곱게 차려입은 미녀가 서 있었다. 월궁항아가 하강한 듯 아름다운 미녀였다.
 “사, 사매!”
 손정화,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월풍을 쳐다보고 있었다.
 월풍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주눅 든 것이다. 월풍은 그녀의 얼굴만 보면 자신의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생각만 해도 한심한 일이었다.
 허나,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는 얼간이 월풍 아니냐? 감히 이대제자가 일대제자에게 사매라니! 설마 목이 열 개라도 된단 말이냐?”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바로 손정화 옆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유해옥!’
 월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는 유해옥 역시 이대제자였다.
 그녀의 앙칼진 성격은 장백파에서도 유명하다. 성격이 불같아서 팩 쏘아붙이는 것이 버릇이었지만, 그렇다고 뒤끝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독 월풍을 보면 잡아먹을 듯 으르렁 거렸다.
 월풍의 한심하고 얼간이 같은 모습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일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둔해서 그만…….”
 월풍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 모습에 유해옥은 경멸의 빛을 띠었고, 손정화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허나, 그런 손정화의 표정이 오히려 월풍의 가슴을 더욱 주눅 들게 만들었다.
 “연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손정화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월풍소매에서 연서를 꺼내는 순간 유해옥이 재빠른 동작으로 연서를 낚아챘다. 월풍은 깜짝 놀라 연서를 뺏으려 했지만, 이미 연서는 유해옥의 손에 들어간 뒤였다.
 “언니!”
 유해옥은 공손한 표정으로 손정화에게 연서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킥킥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얼간이 월풍이 건네준 연서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크게 웃고 싶었지만, 감히 손정화 앞이라 간신히 참고 있었다.
 손정화는 황당한 표정으로 연서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연서를 월풍이 쓴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에게 연서를 받아보았지만, 장백파의 얼간이로 통하는 사람에게까지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대는 이번에도 비무대회에서 떨어지지 않았나요?”
 연서를 쓸 시간이 있다면 무공이나 수련하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간 월풍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고천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난감했다.
 ‘연서를 보면 누가 쓴 것인지 알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을 받아온 터라 이정도의 일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월풍이었다.
 “사저, 보시고 답장을 좀…….”
 그래도 멀쩡한 정신으로 답장을 달라는 말은 하기 어려웠다.
 월풍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는데, 어찌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소리였던지 손정화는 물론 유해옥까지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유해옥은 두 손을 허리에 척 얹고 앙칼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답장이라고?”
 말은 손정화에게 했는데, 유해옥이 더 분노한 모습이었다.
 월풍은 그녀의 반응을 애써 외면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어서 이럴 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난 또 얼간이 월풍이 얼간이 같은 행동을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그가 왜 장백파에서 얼간이란 소리를 듣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유해옥은 월풍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무시당한 느낌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얼간이가 감히…….”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려는 순간 손정화가 아미를 살풋이 찡그리며 말했다.
 “그만둬, 사매!”
 순간이었다.
 “예, 언니!”
 유해옥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순한 양으로 변했다.
 손정화는 수많은 연서를 받아 보았지만, 지금 당장 답장을 바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연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녀가 연서를 펼쳐서 읽는 순간 월풍은 주변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월풍도 연서를 읽지 못해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몰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녀 관계에 눈을 뜬 관계로 대충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쯧쯧! 아무래도 고천세가 너무 성급하게 행동한 것 같군.’
 연애의 초보자들은 언제나 성급하게 행동한다. 하나, 그것이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모른다. 모름지기 연애란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까지 인내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보나마나 퇴짜로군.’
 그래도 고천세가 답장을 가져오라 했으니 어렵더라도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했다.
 “사저, 연서를 보셨으면 답장을…….”
 그 순간이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고고하던 손정화의 봉목에서 서슬 퍼런 광망이 흘러나왔다.
 살기!
 월풍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찰라,
 짝!
 손정화가 매섭게 월풍의 뺨을 후려쳤다. 월풍의 얼굴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홱 돌아갔다.
 “큭!”
 어찌나 강하게 맞았는지 단순히 뺨을 맞았을 뿐인데도 입술이 찢어지고 입속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턱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월풍은 까무러칠 것 같은 충격 속에서도 도대체 자신이 왜 뺨을 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손정화를 쳐다보았다.
 손정화는 분노한 표정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뺨을 맞은 것은 월풍이나, 오히려 손정화가 더욱 화가 난 모습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월풍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징조를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따위 수작을 부리다니…….”
 그녀의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당장 장백파를 나가요.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손정화의 말에 월풍은 다리가 풀려 버렸다.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월풍이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결과가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다.
 그는 일가친척이 단 한 명도 없는 천애고아였고, 장백파를 나가면 갈 곳도 없었다. 장백파에서 나가라는 말은 곧 죽으라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사, 사저… 그, 그것만은…….”
 월풍은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지만, 손정화의 대답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닥쳐요. 그대는 정말 구제불능의 인간이로군요.”
 얼간이에 구제불능!
 평소에 많이 듣던 소리였지만, 지금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월풍은 뭔가 항변해 보려 했으나, 손정화는 이미 등을 돌려 가인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흥, 언감생심 바랄 걸 바래야지. 언니는 너 같은 한심한 인간이 넘볼 만큼 만만한 분이 아니다.”
 유해옥은 한바탕 욕설을 퍼부어 주려다 멀어져가는 손정화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흥, 그 얼굴이 아깝다. 겉만 뻔지르르 하면 뭐해? 속이 텅텅 비었는데.”
 이것 역시 많이 듣던 소리였다.
 월풍의 외모는 임풍옥수처럼 준수했다. 관옥 같은 피부에 우수에 찬 눈빛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장백파는 물론이고 길림성에서 월풍을 따라갈 남자는 없을 터였다.
 “언니, 같이 가요.”
 유해옥은 그 말을 끝으로 총총 걸음으로 손정화의 뒤를 따라갔다.
 “허! 내가 정화 사매를 넘봤다고?”
 월풍은 황당한 생각에 실소가 나오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얼간이에 구제불능의 인간이라 해도 주제파악 정도는 하고 있었다.
 손정화가 누구라고 자신을 쳐다보겠는가?
 그는 맹세코 손정화를 마음속에 담아둔 적도 없거니와 꿈속에서라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건 뭔가 잘못 된 거야.”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연서를 주워들었다.
 
 <나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인은 천하에서 오직 한 명. 바로 손정화 그대뿐이오.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내 입술에 입맞춤으로 답장을 해 주시기 바라오.>
 
 “으으.”
 월풍은 연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연서는 고천세가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월풍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낯 뜨겁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내용.
 손정화가 겨우 뺨 한대만 때리고 추방령을 내린 것은 최대한 관용을 베푼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도도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의 손정화는 사실 내면이 누구보다 따듯한 여자였다.
 그러나 월풍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그는 장백파를 떠나서 살아가야할 일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고천세야! 도대체 나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냐?”
 월풍은 절규했다.
 비무대회에서도 떨어진 것도 부족해 이제는 장백파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그것도 곱게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손정화를 희롱했다는 더럽고 추잡한 죄목이 붙은 채로 말이다.
 월풍에게는 너무 분하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장백파에서 그의 결백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각,
 “푸하하! 지금쯤이면 목이 열개라도 살아있기 힘들겠지? 월풍 이놈, 꼴좋다.”
 손정화의 고고하고 도도한 성격에 그런 무례한 연서를 보고 그냥 참지는 않을 것이었다.
 고천세는 가슴을 젖혀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나 기쁘고 통쾌한지 지난 몇 년간 이렇게 크게 웃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고 월풍이 바로 그랬다. 아니, 임풍옥수처럼 잘생긴 월풍의 얼굴만 보면 괜히 신경질이 뻗치고 그 얼굴을 짓이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 얼굴을 보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일 터.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월풍의 최후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2
 
 그날 밤, 비무대회가 끝나갈 무렵 장백파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피와 죽음!
 바로 장백파에 끔찍한 변고가 들이닥쳤다.
 초경(저녁 7-9시)이 지나 주변이 어둑해졌을 무렵, 삼백여 명의 복면인들이 장백파에 침입했다.
 그들은 복면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었다.
 챙! 채챙!
 여기저기서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처절한 비명성이 장백파를 뒤흔들었다.
 “크악!”
 “크아악!”
 혈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류고수들로 이루어진 복면인들이었지만, 장백파의 저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장백파의 제자들은 두세 명씩 짝을 이루어 복면인들을 상대했다.
 전투는 격렬했고,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의 양상이 복면인들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장백파의 제자들은 복면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복면인들을 이끌고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은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장백파의 제자들을 도륙했다.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린 수급들.
 그리고 처참하게 잘려져 나간 팔과 다리들.
 장백파는 서서히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모두 멈추어라!”
 손평은 절규어린 외침과 함께 다섯 명의 복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평을 에워쌌다.
 ‘초절정 고수들. 결코 내 밑이 아니다.’
 손평은 흠칫했다.
 비록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지만, 다섯 명의 무공은 손평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 나와 별 차이가 없는 고수들이다.’
 손평은 긴장한 나머지 잡고 있던 검자루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들이 장백파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흐흐. 손평! 설마 장보도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무슨 소리. 장보도라니?”
 그러나 손평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들이 어찌 알았을까? 오직 나와 정화 그리고 장락방의 철 방주만이 아는 사실을 말이다.’
 장락방은 길림 칠패(七霸) 중 한 곳으로 장백파와 함께 길림성의 수좌로 군림하고 있었다.
 북장락 남장백.
 길림성에는 삼십여 개의 군소문파가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고 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곳을 길림칠패라 한다.
 허나, 길림칠패 중에서도 장락방과 장백파의 위세가 가장 크고 강했다. 장백파와 장락방은 당당하게 중원 백대 문파 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손평과 장락방의 철중산은 오랜 시절부터 절친한 벗이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 서로 오해가 생겨 싸우게 되었는데, 천여 초를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 나중에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들은 서로의 무공에 감탄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절친한 사이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손평과 철중산은 손정화와 철팽호를 결혼시키기로 결정을 보았다.
 원래부터 장락방과 장백파는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지만, 손정화와 철팽호의 결혼으로 더욱 곤고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두 사람의 결혼은 장백파와 장락방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고, 두 문파의 연합은 순식간에 오십대 문파에 들 수 있는 거대 세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제는 길림성을 넘어서 중원무림으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손평은 그렇게 믿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앞에 있는 다섯 명의 복면인들의 정체를 알아 차렸다.
 ‘길림 칠패 중 다섯 문파다.’
 어쩐지 처음부터 그들의 무공이 비범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손평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손평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흐흐. 우리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군.”
 “이미 늦었다. 오늘 이곳이 바로 그대의 무덤이 되리라.”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지 않았다.
 길림 오패.
 그들은 바로 은도세가, 흑사방, 곽가장, 비룡회, 해룡방 등 다섯 문파의 방주들이었다.
 ‘으윽!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손평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어 나왔다.
 칠패 중 오패의 방주들의 합공이다. 그들 개개인은 손평에게 미칠 바가 못 되나, 다섯 명의 합공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크윽!”
 한 자루의 검이 손평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손평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으나 왼손을 휘둘러 바로 앞에 있는 복면인을 후려쳤다.
 펑!
 둔탁한 음성과 함께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크아악!”
 바로 손평의 옆구리를 찌른 해룡방의 방주였다. 그는 손평의 옆구리를 찔렀으나 그 덕분에 가슴이 처참하게 뭉개진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하나, 나머지 네 명의 복면인들은 손평이 비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검을 휘둘러 손평의 전신을 난자했다.
 중과부적!
 손평은 순식간에 혈인으로 변했다.
 그의 몸은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졌고, 그 속에서 검붉은 피가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쿵!
 그의 신형은 무참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길림성의 패자로 군림하던 손평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크하하! 손평이 죽었구나!”
 “이제 길림성은 우리 오패의 것이다.”
 네 명의 복면인은 약속이나 한 듯 크게 웃었다.
 손평의 죽음으로 장백파는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참담한 마음으로 짐을 꾸린 월풍은 짐을 가지고 장백파를 떠나려는 순간 난데없이 복면인들의 공격을 받고 말았다.
 마침, 복면인들은 장백파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월풍을 보는 순간 눈가에 살기를 띄우며 검을 휘둘렀다.
 “헉?”
 월풍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복면인들의 살기에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복면인들은 월풍의 모습에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얼굴은 지극히 영준하나 겉모습과는 다르게 지독한 겁쟁이에 담력이 약한 자였던 것이다.
 “쯧쯧. 장백파에도 이런 한심한 놈이 있었다니…….”
 “내 검에 피를 묻히는 것도 아까운 놈이다.”
 복면인들의 말은 지독한 욕이었다.
 월풍은 그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차피 그의 인생은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는 천 길 낭떠러지 밑에 와 있었다.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죽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몰랐다.
 그는 복면인들이 누구이며, 왜 자신을 죽이려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복면인들이 어떻게 장백파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허나, 그는 주변에 쓰러져 있는 장백파 제자들의 주검을 보며 불현듯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원래 일신에 지닌 무공이 비천하기 짝이 없던 월풍이다.
 하물며 복면인들은 모두 일류고수들.
 월풍은 검을 뽑아 달려들어 보았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 싶은 순간 전신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혼과 육이 서로 분리되는 고통을 맞보았다.
 “크아악!”
 바닥에 쓰러지기 전까지 극히 찰나의 순간, 월풍은 희미해져가는 의식 사이로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만 받다 죽을 바에야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문득 그의 두 눈에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의식은 더욱 희미해져갔다. 그 순간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하얀 빛이 빛나더니 부모님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
 월풍은 간절하게 그들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하나, 그의 손이 부모들의 몸에 닿는 순간, 부모의 형상은 사라지고 한 줄기 유성으로 변했다.
 바로 대낮에 보았던 바로 그 유성이었다.
 유성은 월풍의 눈 속으로 빨려들 듯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유성이 눈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은 바닥에 쓰러졌고, 그 충격으로 그는 의식의 끈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휘리리링!
 스산한 바람이 월풍의 시신위로 불었다.
 한 많은 스물여덟의 삶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허무하면서도 참담한 죽음.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거니와 애도하는 사람도 없었다.
 장백파의 전각은 불길에 휩싸였다.
 화마는 무서운 속도로 장백파를 삼켜가고 있었다.
 
 
 
 3장 어제, 또 어제
 
 
 
 
 
 
 1
 
 둥 둥!
 “와와!”
 거대한 북소리와 사람들의 우렁찬 함성.
 비무대 주변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휙! 휙!
 “어딜?”
 “이것도 받아 보시지?”
 비무대 위에서 두 명의 청년이 한데 뒤엉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얀 옷과 파란 옷. 두 사람은 옷 색깔만큼이나 하얀검과 청강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의 무공을 알아내기 위해 탐색전을 펼치다 먼저 움직인 것은 하얀 옷의 청년이었다.
 그는 유성천리라는 신법으로 파란 옷의 청년의 오른쪽으로 돌아나갔다. 그리고 섬광과도 같이 빠르게 일검을 찔러갔다.
 허나, 그것은 파란 옷의 청년이 원하던 상황.
 그는 핑그르르 돌더니 철보이산이란 초식으로 하얀 옷의 청년의 머리를 향해 청강검을 내리쳤다.
 “크윽!”
 하얀 옷의 청년이 어깨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감싸 쥔 청년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천태산 승!”
 사회자의 외침에 파란 옷의 청년 천태산은 환희의 미소를 지으며 비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다음은 월풍대 오현! 두 사람은 비무대 위로 올라오라!”
 사회자의 호명에 오현은 제비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비무대에 올라서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굽혀 사람들을 향해 절을 했다.
 그의 당당하면서도 절도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비무를 앞둔 사람이라면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건만, 그에게는 조금도 긴장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월풍은 멍청한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두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함성과 요란한 북소리, 그리고 비무대의 풍경은 어제와 너무도 똑같았다. 게다가 어제도 천태산은 유약성을 상대로 철보이산이란 수법으로 승리하지 않았던가?
 그것뿐이라면 말도 안 한다. 그들 다음에 자신과 오현의 비무가 이어지는 것까지 똑같았다.
 어제도 오현은 비무대 위로 비연류란 경공을 펼쳐서 올라갔다. 그것은 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서야만 펼칠 수 있는 것으로 월풍은 어제 그것만으로도 기가 팍 죽지 않았던가?
 ‘오현 사제의 뒷짐 쥔 자세와 당당한 모습까지……. 내,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난 어제 복면인들의 검에 죽었는데.’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요상하다.
 그는 세차게 볼을 한번 꼬집어보았다.
 “아얏!”
 볼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꿈은 아니라는 소린데…….’
 월풍이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봐, 월풍! 빨리 비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겐가?”
 갑자기 성에 찬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월풍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헉?”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월풍을 쳐다보고 있었다.
 월풍은 창피한 생각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재빨리 비무대 위로 올라갔지만, 허둥대는 바람에 그만 발을 헛디뎌 비무대에 자빠지고 말았다.
 “푸하하!”
 “한심한 놈!”
 “누가 얼간이 아니라고 할까봐!”
 월풍을 비웃고 조롱하는 소리가 비무대 주위를 진동했다.
 오현은 마치 자신이 조롱이라도 받은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대가 어지간해야 비무할 맛도 나지.
 월풍의 저런 한심한 모습을 보면 비무에서 승리해도 그리 달가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내심을 숨긴 채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형, 어서 준비 하시죠.”
 “그, 그래.”
 월풍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사제가 첫 번째 펼치는 검식이 낙월동추는 아니겠지.’
 어제 그는 오현과 십초식을 겨루었다.
 말이 십초식이지 오현의 일방적인 공세였다.
 월풍은 단 한 번도 반격을 펼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허나, 그는 오현이 펼쳐냈던 초식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낙월동추라는 초식으로 이대제자가 익힐 수 있는 최고의 검초였다.
 월풍이 속으로 반신반의 하고 있을 때였다.
 가볍게 예를 취한 오현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더니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헉? 저럴 수가…….”
 월풍의 안색은 귀신을 본 듯 새파랗게 변했다. 달빛을 가르듯 차가운 기운은 영락없이 낙월동추의 초식이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월풍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텅 비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비무를 치르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말았다.
 오현은 월풍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뭐야, 이건? 저 얼빠진 모습 하고는…….’
 그는 월풍이 자신의 검법에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좋기는커녕 똥을 밟은 듯 찝찝하기만 했다. 이렇게 되면 이겨도 그리 자랑스러울 것이 없었다.
 ‘좀 더 강한 상대를 원했는데.’
 오현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비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장백파의 제자들은 심히 감탄한 표정으로 오현의 근처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은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허나, 오현의 검법에 월풍의 혼백이 빠진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사람들은 오현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격려해 주었다.
 한편, 월풍은 어제보다 더한 멸시와 비웃음을 받아야만 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노골적으로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하기야, 어제는 십초식이나 버티기라도 했지. 오늘은 누가 봐도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보였을 것이다.
 “정말 저 얼굴이 아깝다니까.”
 “한심해도 저렇게 한심할 수 있을까?”
 “쯧쯧! 도대체 생각이라는 것은 하고는 사는지…….”
 월풍은 사람들의 말을 뒤로 하고 비무대를 빠져 나왔다. 창피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강물에 꼭 빠져 죽고만 싶었다.
 월풍은 억울했다. 모든 상황이 어제와 너무나 똑같지 않던가?
 “이건 꿈이야. 지독한 악몽이라고.”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제 왔던 뒷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심결에 발길이 닿는 곳으로 온 것이 어제와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유성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똑같아. 어제와 모든 것이…….”
 월풍은 기가 막혔다.
 이제는 더 이상 놀라는 것도 지겨울 정도였다.
 “귀신이다. 결국 내가 귀신에 쓰인 게야. 크크! 이러다 귀신에게 잡혀가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지긋지긋하던 인생이었다.
 이쯤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잡아가려면 지금 잡아가라. 나 월풍은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월풍은 누가 듣기라도 하듯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허나,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쿡쿡! 이젠 귀신도 나를 무시하는 건가? 그래, 얼마든지 무시해라. 나 역시 네놈들을 무시하면 그뿐이니까.”
 월풍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귀신에게까지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니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이봐, 월풍!”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월풍은 흠칫했다. 시선을 돌리자 한 명의 청년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고천세였다.
 ‘뭐야, 이건? 저 인간이 등장하는 것까지 똑같단 말인가?’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도대체 뭐가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 무슨 귀신의 조화란 말인가? 정말 자신이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한참 찾았잖아. 청승맞게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었냐?”
 ‘얼씨구!’
 어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게다가 고천세의 교활한 눈빛까지 어제와 똑같았다.
 “얼굴은 왜 찌푸리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야, 뭐야?”
 고천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월풍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저 기분이 울적해서…….”
 “네 실력으로 비무대회에 참가한 것이 실수라고. 이봐, 월풍! 그래서 언제 일대제자가 되겠어? 차라리 나를 스승으로 삼고 무공을 배우는 것이 어때?”
 “놀리지 마십시오. ‘누가 너 같은 머저리를 제자로 삼고 싶겠냐? 넌 백날 해도 일대제자는 안 될 거야. 그러니 일찌감치 꿈 깨라.’라고 말할 생각이었죠?”
 “…….”
 고천세는 뜨악한 표정으로 월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다.
 ‘이놈이 어떻게 내가 할 말을 알고 있지?’
 고천세는 갑자기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연서를 꺼내 월풍에게 건네주었다.
 “정화 사매에게 전해 주고 반드시 답장을 받아 와라. 누가 주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월풍은 연서를 받으면서 일이 요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모든 상황은 어제와 똑같았다. 이 편지를 가지고 손정화에게 갔다가는 뺨을 맞는 동시에 장백파에서 쫓겨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더 큰 일은 밤이 되면 괴한들이 침입해서 자신은 물론 장백파의 전 제자들이 죽는다는 것이었다. 어찌할지 갈등하던 월풍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번쩍!
 순간 월풍의 머릿속에 근사한 계획이 떠올랐다.
 그는 연서를 품속에 집어넣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고천세에게 말했다.
 “사형, 일전에 매향루의 은가려 소저와 하룻밤만 보내도 원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 그렇지. 한데, 그건 왜 묻느냐?”
 “내 사형의 생각이 나서 은 소저에게 확답을 받아냈소.”
 “그게 정말이냐?”
 고천세의 눈이 커다랗게 치떠졌다.
 매향루는 화룡진에서 가장 큰 기루였다. 기녀의 수자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다.
 대부분의 기녀들이 절세미녀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은가려의 미모는 단연 압권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허나, 그녀를 품으려면 하룻밤에 족히 은자 천 냥은 있어야 가능했다.
 화중지병(怜中之餠), 즉 그림의 떡이었다.
 고천세도 언젠가 은가려의 얼굴을 보고 난 뒤 열병을 앓을 정도로 몸이 달아 있었지만, 그에게 은자 천 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겨우 하룻밤에 날리기에는 너무도 큰돈이었다.
 “정말 그녀에게 내 말을 했단 말이냐?”
 고천세는 불신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순간 월풍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나를 못 믿겠다는 거요? 하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아니다. 아냐. 내가 잘못했으니 화 풀어라. 사내자식이 겨우 그깟 일로 화를 내면 쓰나. 헤헤!”
 고천세는 월풍의 팔을 붙잡으며 용서를 구했다.
 평소 같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아니었다.
 ‘은가려만 품을 수 있다면…….’
 고천세의 얼굴은 늙은 원숭이 같이 생겨서 지금까지 여자와 대화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은가려는 물론 평범한 여자도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헌데, 선녀처럼 아름다운 은가려가 자신을 원한다고 하니 제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월풍의 얼굴은 과거 송옥이나 반안이 무색할 정도로 잘 생겼다.
 그 때문인지 월풍은 돈이 없어도 매향루에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은가려와도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졌다.
 고천세는 속으로 반신반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월풍의 그쪽 방면의 능력을 믿었다.
 “사제야,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
 ‘허! 인간이 이렇게 간사할 줄이야…….’
 월풍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백 냥만 내 놓으시오. 그럼, 한 달 동안 원 없이 은가려의 속살을 볼 수 있을 것이오.”
 “헉? 한 달 동안? 그것도 겨우 오백 냥으로?”
 “믿기지 않으면 그냥 두던가?”
 “아니다. 아니야. 내 당장 오백 냥을 가져올 테니 너는 이곳에서 꼼짝 말고 있거라.”
 고천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부리나케 뒷산을 내려갔다.
 연서를 가지고 음모를 꾸미려던 계획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월풍은 그런 고천세의 등 뒤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멍청한 놈! 그저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지. 아무리 은 소저가 나를 좋아한다지만, 너 같이 못생긴 놈을 소개시켜 주었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오백냥!
 그 정도의 돈이라면 소박하겠지만, 장사밑천은 될 터.
 월풍은 장백파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오백 냥을 가지고 밤이 되기 전에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디로든 가서 장사나 하면서 소박하게 살 생각이었다.
 “푸하하!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 기연을 가져다주었구나!”
 월풍은 큰 소리로 웃었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하루가 똑같이 반복되는 이 현상은 결코 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월풍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으니 하늘에 계신 부모님들의 돌봐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새로움의 시작은 두렵기도 했지만, 월풍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기도 했다.
 
 
 2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말해주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월풍은 저 멀리 보이는 장백파의 성채를 바라보며 조그만 소리로 중얼 거렸다.
 장백파를 나섰지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만 혼자 도망치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십삼 년을 몸담고 있던 곳이 아니던가?
 허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얼간이 월풍의 말을 그 누가 믿어줄 것이며, 복면인들의 침입을 대비하려 하겠는가?
 말을 했다가 본전도 못찾을 터. 괜히 미친놈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월풍은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이며 그곳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정해놓은 길은 없었다. 그저 장백파를 잊고 지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말도 안 하고 떠났으니 은 소저가 꽤나 섭섭해 하겠군.”
 그나마 그를 인간답게 대접해준 사람들은 매향루의 기녀들이었다. 또한 어렸을 적부터 주색잡기에 능통한 월풍도 기녀들이 편했다. 은가려는 매향루주의 눈을 피해 몇 번 만났는데,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순박하고 가슴이 따듯한 여자였다.
 하지만, 기왕 장백파를 잊고 살 것이라면 매향루까지 잊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래, 이제 나 월풍은 새롭게 사는 것이다.”
 월풍은 가슴속에 남아 있던 미련을 떨쳐 버렸다.
 문득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자유와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와 더불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웅지가 불타올랐다.
 “핫핫! 그래.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얼간이 월풍 따위는 모두 잊고.”
 월풍의 커다란 웃음이 메아리쳐 사방으로 울려 퍼져나갔다.
 
 
 다음 날 아침.
 “으아악! 이건 악몽이야. 이럴 순 없어!”
 월풍은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터뜨렸다.
 그는 분명 어제 고천세에게 오백 냥을 사기 친 뒤 장백파를 도망쳤다. 밤새 미친 듯이 달려 화룡진을 빠져 나가 이름 없는 한 객잔에서 잠을 잤는데, 깨어나고 보니…….
 바로 장백파였다.
 그것도 비무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비무대였던 것이다.
 “천태산 승!”
 사회자의 외침이 월풍의 흐릿한 정신 사이로 파고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 옷의 청년이 어깨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감싸 쥔 청년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천태산과 유약성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월풍은 혼백이 달아난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았다.
 “다음은 월풍대 오현! 두 사람은 비무대 위로 올라오라!”
 사회자의 외침에 월풍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엉엉 울고 싶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빨리 비무대 위로 올라가라는 사회자의 말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조소와 욕지거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월풍은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상황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사흘째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4장 위편삼절
 
 
 
 
 
 
 1
 
 “에잇, 쌍!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연서를 전하려면 네가 직접 전해.”
 월풍의 욕지거리에 고천세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이게, 미쳤나?’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들자 지독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 네가 방금 나에게 욕을 했냐?”
 “그래, 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너는 늙은 원숭이에 인간쓰레기야. 아니, 너는 악의 축이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의 축! 알았냐?”
 “이, 이……?”
 고천세는 칠공에서 연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놈이 이제 세상 살기 싫은가 보구나!”
 “짜증나는 세상, 죽고 싶었는데 잘 됐네. 어서 네놈의 그 검으로 내 배를 찔러라. 그러지 못하면 너는 병신에다 돌대가리다.”
 월풍은 배를 쭉 내밀고 상의를 옆으로 젖혔다. 찌를 테면 찌르라는 소리.
 아예 배 째라는 것이었다.
 “으으. 이건 반란이고, 반역이야. 아니, 하극상이다.”
 고천세는 악에 바친 듯 소리를 지르면서도 두려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인생을 포기한 듯한 월풍의 모습에 덜컥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다.
 사실 고천세로써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그는 단순히 품속에서 연서만 꺼냈을 뿐이었다. 한데, 월풍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내뱉으니 화가 나고 황당한 것은 오히려 고천세였다.
 하지만, 그것은 고천세의 입장일 뿐이었다.
 지금 월풍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또 그 전날에도 계속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고천세는 오늘 한번이었을지 몰라도 월풍은 도대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이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데, 사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도망치는 것은 기본이었고,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들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날이 밝아올 무렵에는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정신을 잠깐 놓기만 하면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깨어보면 하루가 시작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월풍은 계속 반복되는 하루에 점점 지쳐갔고, 나중에는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이제 월풍은 죽음도 두렵지 않았고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어 자결도 해 보고, 복면인들의 검에 자진해서 뛰어들기도 했다. 월풍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잔혹무도한 복면인들이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칠 정도였다.
 허나, 그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는 눈을 떴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
 “이건 저주야. 지독한 저주라고.”
 죽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자살도 소용없었다.
 결국 월풍은 죽는 것도 포기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데, 더 이상 자살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흑의복면인들과 걸쭉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배를 찌를 때에는 어떻게 찔러서 죽여 달라느니, 기왕 죽일 거면 밤새워 얘기나 한 다음 죽여 달라느니 모두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복면인들은 아예 월풍의 곁에 접근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잔혹무도한 복면인들이라도 사람은 봐 가면서 죽인다. 월풍은 머리에 꽃만 꽂지 않았을 뿐, 딱 미친놈이었다. 죽이는 것은 고사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두려웠다.
 ‘오늘은 어떤 복면인에게 장난을 칠까?’
 막 그 생각으로 열중하던 차에 고천세가 나타났다.
 복면인들조차 두려워 피하는 월풍이다. 하물며 고천세 따위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지만, 사실은 어제는 오늘보다 더욱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다만, 고천세가 모를 뿐이었다.
 “이 빙신아! 찌르라는데 왜 못 찌르는 거야? 내가 대신 찔러줄까?”
 “헉? 넌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어. 미쳤다고.”
 고천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는 뒷산을 도망쳤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것이 그야말로 혼비백산한 모습이었다.
 “흥, 빙신! 죽이라는데도 못 죽이냐?”
 월풍은 고천세의 등 뒤에 대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동안 그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주지의 사실. 그 중에 하나가 싸움의 기술을 알았다는 것이다.
 싸움은 단지 무공의 고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죽음도 불사하는 배짱과 강인한 투지 그리고 하고자 하는 승부욕 등 심리적인 요인이 승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월풍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졌지만, 근본적으로 절정의 무공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무림에서 독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쳇, 누가 그걸 모르나? 계속 하루가 반복되는데, 무공을 배워 봐야 무슨 소용이야.”
 월풍은 만사가 귀찮은 듯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무얼 해도 내일이면 또 다시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절망하고 포기할까 두려웠다.
 문득 뭉게구름 사이로 부모님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보는 부모님의 얼굴은 월풍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하늘에서도 멋진 아들을 기대하시겠지요.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훌륭하게 자란 아들의 모습을…….”
 허나, 그는 여전히 불량스럽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월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무엇이든 해 보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부터 걱정할 필욘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절망하고 포기할 것이 두렵다고 시작조차 안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월풍은 고천세에게 일전에 써먹었던 은가려 수법으로 오백 냥을 얻었다. 그는 그 돈을 가지고 곧장 서원으로 찾아갔다. 서원은 지금의 학교 같은 곳으로 돈을 내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화룡진에는 세 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과거 관직에 나갔다가 낙향했다는 백거서원을 찾았다.
 “오늘 하루 선생님께 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디 저에게 선생님의 학식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는 월풍은 오백 냥을 내밀었다.
 백거 선생은 오백 냥을 보며 경악했다.
 “이, 이것이 오늘 하루 교육비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아, 안 되기는.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백거 선생은 무엇보다도 먼저 오백 냥부터 품속에 챙기고는 월풍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오백 냥이면 일 년치 수입이다. 그것을 단 하루에 벌 수 있게 되었으니 백거 선생의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백거서원은 문을 닫았다. 서원을 찾았던 유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은 백거 선생이 병에 걸려 몸져누워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원의 내실에서는 하루 종일 백거 선생의 강론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다음 날이었다.
 “으하하! 됐다, 됐어. 어제 배웠던 것들이 모두 기억난다.”
 월풍은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그는 너무 좋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어제 백거 선생에게 배울 때만 해도 반신반의 했는데,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어제 배운 내용들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지금까지 공부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이유가 옆에서 기초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제는 백거 선생이 옆에 있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백거 선생은 돈 욕심이 조금 많다 뿐이지, 그의 학식은 실로 대단했다. 월풍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승이었다.
 “으헉!”
 순간 월풍은 웃다 말고 깜짝 놀랐다.
 이곳은 비무대였고, 지금 한창 비무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월풍이 미친 듯이 웃어댔으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월풍에게 쏠린 것은 당연지사.
 “헤헤. 죄송합니다.”
 사람들은 별 괴상한 눈초리로 월풍을 쳐다보았지만, 월풍은 이제 사람들의 그런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지금 일은 기억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곧장 백거서원으로 향했다. 물론 어제와 같은 수법이었다. 백거 선생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반갑게 월풍을 맞이했다.
 그동안 온갖 좌절과 절망을 맛본 월풍이기에 누구보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하고자 하는 의지도 높았다.
 그는 지난 날 잘못 살았던 인생을 참회하는 심정으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 반드시 보여드리고 싶었다.
 월풍의 자질은 그리 훌륭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의지와 뼈를 깎는 노력이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하루가 반복 되었는지 모를 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헛헛! 자네의 학문이 실로 대단하구먼. 헌데도 이 늙은이에게 학문을 배우려 한단 말인가?”
 백거 선생의 눈에는 착잡한 빛이 묻어 나왔다. 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월풍의 말에 별 보잘것없는 청년인 줄 알았다. 허나, 무엇을 물어 보아도 막힘이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심오한 철학이 담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학문의 내실을 튼튼히 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자네는 누구에게 학문을 사사 받았는가?”
 ‘누구긴. 바로 선생님이지요.’
 월풍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백거 선생은 어제까지도 월풍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지만, 정작 그 본인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백거 선생에게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워낙 기초지식이 없는데다 월풍의 자질도 썩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터, 허나, 오백 냥 앞에 백거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백거 선생이 돈을 살짝 밝히는 것이 어쩌면 월풍에게는 다행한 일인지도 몰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독학을 했습니다.”
 “허, 젊은이가 대단하네 그려. 독학으로 이 정도의 학문을 쌓아 올리다니…….”
 백거 선생은 진정 놀란 표정이었다.
 하기야, 독학으로 백거 선생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흠흠. 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 돈은 가져가게나.”
 백거 선생은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눈빛으로 오백 냥을 내밀었다. 일 년 치 수입이 손에 들어왔다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분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허나, 바로 그 순간 월풍의 입에서 복음과도 같은 소리가 튀어 나왔다.
 “선생님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제 성의오니 오백 냥은 그냥 받으십시오.”
 “이 길림성에서 내 서재만큼 책이 많은 곳은 없을 것이네. 자네가 읽고 싶다면 그래도 좋지만, 그렇다고 그냥 받기에는 너무 면목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백거 선생은 오백 냥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역시 학문과 재물은 별개의 것이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내 손에 들어올 것을…….’
 월풍은 속으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책이라 하면 마음의 양식. 선생님이 힘들게 모은 서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보답이 없다면 어찌 양심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껄껄! 아무렴, 그렇고말고. 내 자네처럼 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처음이네. 암, 모름지기 책은 명경지수처럼 맑은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 걱정이야.”
 백거 선생이 돈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서 그렇지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서재에는 생전에 모은 만여 권의 책이 있었다. 누구와 비교해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그는 어디에 희귀한 책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바로 가서 책을 사가지고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얻은 별호가 서귀였다.
 월풍은 이제 백거 선생의 가르침만으로는 마음속에 이는 갈증을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만큼 월풍의 학문이 발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만 갔다.
 
 
 그 사람의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서재에 가 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곧 무슨 책을 읽느냐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얼마나 깔끔하게 책을 읽고 정리했느냐도 중요하다. 그건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백거 선생은 정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서재에는 만여 권의 책이 있었지만, 종류별로 정리를 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길게 책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속에 수많은 서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조그맣게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나 있었다.
 서재라기보다는 고서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삼교구류(三敎九流: 삼교는 유불선. 구류는 유가를 비롯한 여러 학파 즉, 유가(儒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를 가리킨다.)와 의복성상(醫卜星相), 금기서화(琴棋書畫)등 온갖 종류의 책이 있었다.
 “과연 이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월풍은 만여 권의 책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읽는 거야 죽어라 노력하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득 백거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내 서재에는 만여 권의 책이 있네. 어떤 것들은 나조차도 읽지 않았지. 즉, 무턱대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네. 삼교구류면 삼교구류, 의복성상이면 의복성상 목표를 뚜렷이 정하고 읽어야 한다는 소리네. 그렇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을 얻게 될 테니 말일세.’
 백거 선생의 학문이 아무리 고절하다 해도 그의 지식은 삼교구류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삼교구류를 모두 터득한 것도 아니었다. 삼교구류만 공부하는데도 평생이 걸리거늘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단 백거선생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고금을 통틀어 삼교구류에 능통하면서도 의복성상과 금기서화 등에도 능통한 사람이 있었던가? 이는 공자나 맹자 같은 성현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는 법. 어찌 한 사람이 그 많은 재간을 모조리 익힐 수 있겠는가? 무공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검법을 익히는 데도 평생이 걸리는데 또 다른 절기를 익힐 여가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림에 십팔반무예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에 모두 능통한 사람은 없었다.
 학문 또한 이것과 마찬가지였다.
 월풍은 책을 보면서 길게 기지개를 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어.”
 만여 권의 책을 다 읽으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는 삼교구류니, 의복성상이니 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두 익히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시간만 때우면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한창 학문이 성장하고 있을 때에는 그 재미에 푹 빠져서 살았다.
 허나, 그것도 매일 반복되다 보니 요즘에는 약간 지쳐 있었다. 뭔가 변화를 주어야 할 시점이었는데, 책을 읽으면 이 무료하고 지루한 삶에 활력소가 될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월풍은 손을 뻗어 아무거나 펼쳐들었다.
 삼국지연의라는 책으로 학문이 아닌 소설이었다.
 하지만, 월풍은 삼국지연의를 처음 접하는 것이기에 마냥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월풍은 만여 권의 책과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2
 
 매향루는 다른 기루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언제나 손님들로 가득하다. 기녀들의 미모가 수준급이었고, 실내도 화려해서 한번 찾은 사람들은 다음에도 또 다시 찾는다.
 특히, 손님들은 은가려를 보기 위해 애타게 기웃거려 보지만, 워낙 비싼 화대라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월풍은 점심나절은 백거 선생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 뒤 해가 질 무렵 매향루에 갔다. 보통 기루는 해가 지고 난 뒤 손님들을 받지만, 매향루는 해가 지기도 전인데도 벌써 손님들로 가득했다.
 월풍은 그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대낮부터 주색잡기라니……. 허나, 예전에 자신도 저랬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 오빠!”
 바로 그때, 두 명의 기녀가 반가운 표정으로 월풍에게 다가왔다. 그녀들은 십육칠세 정도 되는 소녀들로 깜찍할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월풍은 잠시 당황했다.
 ‘잠깐, 저 아이들의 이름이 뭐였더라?’
 순간 월풍은 실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인생을 포기한 나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매향루를 찾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학문을 하고서부터 매향루에 발길을 끊은 것이다.
 그게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두 소녀들의 이름을 잊은 것을 보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소녀에게는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두 소녀는 월풍의 반응에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월풍이 자신들을 부담스럽게 느낀다고 오해한 것이다.
 “흥, 그 표정은 뭐죠?”
 월풍은 희미하게 웃었다.
 “잘 지냈느냐?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더욱 예뻐진 것 같구나!”
 예쁘다는 말에 안 좋아할 여자 없다.
 청미와 화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월풍의 말 한마디에 섭섭했던 마음이 풀어졌던 것이다.
 “쳇, 누구 병 주고 약 줘요?”
 “아무튼, 오빠는 여자 다루는데는 선수라니까.”
 그녀들은 살짝 눈웃음쳤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월풍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주색잡기만 일삼던 월풍이 아니었다.
 “험험! 은 소저는 안에 있느냐? 내가 왔다고 이르거라.”
 그리고는 품속에서 부채를 꺼내더니 살랑살랑 흔들었다. 원래 월풍의 얼굴은 반안이나 송옥과 비견될 정도로 잘생겼는데, 부채까지 흔들자 영락없이 귀공자였다.
 두 소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월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로만 따지면 월풍은 천하에서 가장 멋진 기남자였다. 허나, 그것은 겉모습뿐이었고, 하는 행동은 멍청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얼간이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왠지 이상하다.’
 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그녀들의 몸을 더듬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오늘은 정인군자인양 너무도 얌전했던 것이다. 게다가 말투 또한 먹물이 흠씬 묻어 나오는 서생의 그것이었다.
 ‘약을 잘못 먹었나? 아니면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예전의 월풍을 생각하면 충분히 드는 생각이었다.
 두 소녀는 달라진 월풍의 모습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들이 속으로 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월풍이 재차 다그쳤다.
 “뭘 하느냐? 어서 은 소저에게 말하지 않고.”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은가려가 있는 삼층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두 소녀도 월풍에게 수작을 걸지 못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녀들 역시 정숙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월풍과 두 소녀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저 청년은 누구인데, 은가려를 찾는 건가?”
 “뭔 남자 녀석의 얼굴이 저리 잘생긴 거야?”
 사람들은 부러운 반 시샘 반 월풍을 쳐다보았다.
 하기야, 그들이 매향루에 온 이유의 절반 이상은 은가려였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아, 생각났다. 저 자는 바로 장백파의 얼간이 월풍이다.”
 “장백파의 골칫덩어리라는 그 얼간이 월풍?”
 “그렇다니까. 기루를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놈은 장백파에서 얼간이 월풍밖에 없다니까.”
 “쯧쯧. 정말 얼굴이 아깝다.”
 ‘끙!’
 월풍은 창피한 나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가 과거에 잘못 산 탓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은가려는 이제 스무 살의 나이로 여자로써는 한창 물이 오를 때였다. 그녀는 청순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지녀 남자들의 혼백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러나 단순히 외모만으로는 결코 최고의 기녀가 될 수 없다. 당시 기녀들은 금기서화에도 능통한 재녀가 많은데, 은가려 역시 금기서화에 능통했다.
 은가려가 기녀가 된 사연은 기구했다.
 그녀의 부모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은가려를 기녀로 팔아 버렸다. 허나, 그녀의 아버지가 그 돈을 노름판에 잃어버리고도 부족해서 빚까지 지고 말았다.
 은가려는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꼬박꼬박 돈을 붙여 주고 있었다.
 기녀가 되지 않았다면 훌륭한 재녀로 성장했을 여인이었다.
 그녀가 모든 사람들이 경원시하는 월풍을 가깝게 대하는 것은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월풍의 방탕한 모습은 과거 그녀의 아버지와 너무도 흡사했다. 그래서인지 월풍에게서 친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월풍은 은가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월풍이 어떤 행동을 했던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언젠가는 월풍이 변화되길 원했던 것이다.
 허나, 지금은 월풍에게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아! 사람의 성격은 도저히 바뀌지 않는 건가?’
 그녀는 장백파가 비무대회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겨우 기루나 찾는다면 더 이상 월풍에게 가능성은 찾아볼 수 없을 터였다.
 “피곤하군요.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 보세요.”
 얼굴을 보자마자 축객령이었다.
 월풍은 처음 대하는 은가려의 싸늘한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었다.
 그에게 내일은 없었다.
 “은 소저. 자고로 손님을 문 밖에서 내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했소.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용건을 말한 뒤 돌아가도 늦지는 않소.”
 월풍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은가려의 의표를 찔렀다.
 은가려는 월풍의 입에서 ‘예’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죠?”
 “핫핫! 은 소저의 침실은 언제 와도 향긋한 냄새가 나는군.”
 월풍은 은가려의 허락도 없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은가려는 제지할 생각도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월풍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왠지 이상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월풍의 모습이 낯설었다. 정인군자 같은 행동을 한 게 언제라고 금방 천박한 말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천박한 행동도 예전과는 뭔가 달라보였다. 과거에는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나온 방탕한 행동이었다면, 지금은 크게 자신감에 찬 상태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은 소저, 의당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 할 게 아니오?”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대답을 해 놓고서도 어이가 없었다.
 월풍의 연이은 돌발적인 행동에 기선이 제압당한 것이었다.
 ‘술이 아니고 차라고? 얼간이 월풍이 기루에서 차를 찾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월풍을 안 것은 일 년도 훨씬 넘었지만, 지금까지 고주망태 된 모습은 숱하게 보았어도 차를 마시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차를 찾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 왜 저 사내에게서 경박하고 천박했던 모습을 찾을 수 없지?’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월풍의 머릿속에는 화룡진 최고의 학자라는 백거 선생을 뛰어넘는 학식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그것이 궁극적으로 월풍의 모습을 변하게 만들었다.
 허나,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지면 은가려가 월풍을 만난 것은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이 백팔십도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설령 은가려보다 백배 똑똑한 여인이라도 지금의 현상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 후, 은가려는 용정차를 가져왔다.
 월풍은 단지 향기만 맡아 보고도 용정차가 어디에서 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서호에서 난 것이로군. 서호의 용정차는 최상품이지요.”
 “공자께서 오늘 저를 몇 번이나 놀라게 만드는군요.”
 은가려는 경악한 표정으로 월풍을 쳐다보았다.
 다도에 보통 지식이 없고서는 향기만 맡고 출처를 알 수는 없었다.
 평소 월풍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은가려로써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월풍은 백거 선생에게 학문은 물론 다도에 대해서는 배웠다. 다도 역시 학문의 일종으로 당시 지식인들은 인격수양하는 차원에서 다도를 배우기도 했다.
 은가려는 왠지 호기심이 일어 다도에 대한 것들을 물어 보았다. 월풍이 몇 번이나 그녀를 놀라게 했지만, 그렇다고 얼간이 같던 월풍의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데, 이게 웬걸?
 월풍은 은가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원에서 십대 차라고 알려진 것들에 대한 기원과 원산지 등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보통 다도에 대한 지식이 없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예전에 제가 알던 공자가 맞나요?”
 상대에 따라서는 엄청 실례되는 질문이었다.
 허나, 은가려는 워낙 충격적인 경험을 한 터라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
 월풍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 대답을 한다면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이럴 때에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이면 된다. 학문을 대성하고 난 뒤 월풍은 상황에 맞는 처세술을 깨달았다.
 한편, 월풍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은가려가 놀라는 것보다 더 놀랐다.
 하기야, 언제 그가 은가려와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었던가?
 예전 같았으면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술술 내뱉고 있었으니 일견 뿌듯한 생각까지 들었다.
 은가려는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었다.
 그녀는 월풍이 자신의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할 줄은 몰랐다. 책에도 행간이라는 것이 있지만, 사람과의 대화에도 행간이라는 것이 있다. 방금 월풍의 웃음은 무수히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행간이었다.
 ‘너무 달라졌어. 겨우 며칠 만에 이렇게 변할 수는 없어.’
 그동안 자신이 월풍을 잘못 생각했던가, 아니면 월풍이 자신을 숨겨 왔든가 둘 중의 하나이리라.
 하지만, 월풍의 변화는 단 하루의(?) 일이었다.
 은가려는 방금까지 실망했던 마음을 버리고 그윽한 시선으로 월풍을 응시했다.
 “저를 찾아오신 용건이 있나요?”
 이제 비무대회는 머릿속에서 지운지 오래였다.
 월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은 소저께 금(琴)을 배우고 싶소.”
 “뭐, 뭐라고요?”
 “은 소저께서 금기서화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음(音)이라는 것이 우주의 조화와 천하의 질서가 집약되어 있다는 말은 읽었지만, 실제로도 그런지 알고 싶습니다.”
 “말도 안 돼. 공자가 책을 읽다니……. 읍!”
 은가려는 말을 하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책을 읽었다면 사서오경 중 하나인 시경과 예기를 읽었을 터. 예기에는 지금의 중용도 들어 있어서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월풍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것이 사서오경이라는 것에 더욱 놀랐다.
 허나, 그것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세상에 기녀에게 가르침을 청하다니…….
 그녀는 월풍의 말에 놀라다 못해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기녀에게 배운다는 것은 곧 자신이 후레자식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월풍은 스스럼없이 금을 배우겠다고 하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렵겠습니까?”
 “진정으로 하는 소린가요?”
 “물론이오. 어찌 대장부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습니까?”
 “공자는 기녀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핫핫! 배움에 왕도가 어디 있습니까? 배울 점이 있다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스승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공자는…….”
 은가려는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허나,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월풍이 며칠 전에 이런 얘기를 했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왠지 믿음이 갔다.
 ‘공자는 나에게 금을 배우려 왔거늘, 나는 겨우 비무대회를 생각하고 실망했으니…….’
 오늘처럼 자신에게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곧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저도 좋아요. 하지만, 루주님의 눈을 피해야 하니 매일 아침 오시(오전11-오후1시)에 오세요.”
 ‘그렇다면 앞으로 백거 서원을 저녁에 가야겠군.’
 은가려가 승낙했으니 시간이야 언제가 되었든 나쁠 것은 없었다.
 ‘으악! 그나저나 이 짓을 내일 또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거리는구나!’
 내일이면 은가려는 오늘 일을 까맣게 잊을 터.
 월풍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월풍은 다음 날 정확히 오시에 은가려를 찾아갔다. 이 시간이면 기녀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월풍은 어제 했던 방법 그대로 은가려에게 해서 결국 금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하루가 지나 그 다음 날이었다.
 “금도 배울 수 있구나!”
 월풍은 정작 금을 연주하면서도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학문이야 기억이 남으니 익힐 수 있다고는 하지만, 금은 육체가 하는 것이다. 그는 반신반의 하는 심정으로 금을 배웠는데, 어제 은가려가 가르쳐 주었던 것을 어설프게나마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육체도 기억하고 있다는 소리.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금기서화를 배워야겠다.”
 한 가닥 걱정과 고민을 떨쳐버린 월풍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5장 일푼만금
 
 
 
 
 
 
 1
 
 “아함!”
 월풍은 책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창틈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그가 백거선생의 서재에 온 것은 오전이었는데, 어느새 삼경이 훌쩍 넘었다.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것 역시 예전에 월풍을 알던 사람이 보았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얼간이 월풍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허나, 월풍은 언젠가부터 책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 책 한 줄만 읽어도 머리가 어지럽던 월풍이었으나 이제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것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이제 이 책만 읽으면 이곳에 있는 책을 모두 읽는군.”
 월풍은 한 권의 고서를 꺼내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성취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묻어나왔다.
 말이 만여 권이지 이곳에 있는 책을 모두 읽으려면 평생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정말이지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책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얼마나 씨름을 했었던가?
 허나, 결국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달려든 월풍의 승리였다.
 월풍은 천하를 얻은 것처럼 뿌듯한 감정이 밀려오면서도 동시에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동안 그는 은가려로부터 금기서화를 배웠고, 책을 통해 의술도 익혔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성명복술과 점성술까지도 배웠다.
 이는 고금이래로 그 누구도 동시에 익히지 못했던 삼교구류와 의복성상 그리고 금기서화를 모두 이룩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월풍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제 그가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무엇인가 할 것이 있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지만, 내일부터는 아무런 목표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서를 쥔 월풍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일부터 또다시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죽기보다 무서웠다.
 월풍은 고서를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읽지 않고 남겨두면 그나마 희망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서는 월풍이 처음 접하는 상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읽고 싶은 욕망이 미친 듯이 치밀어 올랐다.
 
 <일푼만금: 일푼이 만금이 된다.>
 
 일수에서 고리대금 그리고 단리와 복리까지…….
 고서는 전형적인 사채놀이 방법을 기술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방법들이었다.
 월풍은 이것을 읽으면 끝장이라는 생각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강한 호기심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무공이나 배워볼까?”
 그러고 보니 정작 학문에만 몰두했지, 무공은 등한시했다.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시간 때우기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배울 길이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무서각은 일대제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내 실력으로 천무관을 숨어들어 가는 일은 꿈도 못 꾼다.”
 당연한 소리.
 겨우 이류고수의 능력으로 일류고수들의 이목을 피하는 것은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설령 무서각에 들어간다 해도 과연 내공을 익힐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금기서화를 배웠으니 초식은 당연히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내공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지금은 그냥 이 고서나 읽자.”
 월풍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일푼만금을 펼쳐들었다.
 일푼만금의 저자는 한때, 일개 전장의 사환에서 천하의 거부가 된 입지전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성공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단리와 복리를 적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전장은 사람들이 돈을 맡기면 이자를 단리(원금에 대한 이자)로 주며, 그 이율도 높지 않다. 하지만, 난 작은 이익에 욕심내지 않고 크게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복리(원금의 이자에 또 이자가 붙는다)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복리의 개념이 생소해 돈을 맡기지 않았지만, 나중에 확실한 신용을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돈을 맡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난 그 돈으로 사업을 확장해서 수많은 돈을 모았으니 사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월풍은 일푼만금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보아도 일푼만금의 저자는 식견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사실 복리라는 개념은 월풍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이자에 이자를 더한다라……. 괜찮은 생각이군.”
 월풍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일푼만금의 저자는 복리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발한 상술을 개발했다.
 즉, 자신이 개발하는 곳에 투자하게끔 만들어서 이후로 그곳에서 발생하는 이익이 투자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끔 하는 방법이나, 땅을 사서 사람들에게 직접 개발을 유도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모두 생소하고 낯선 것들이었지만, 엄청난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무슨 사업을 하던 전부 자신의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 때문에 실패하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푼만금은 자신의 돈을 거의 투자하지 않고도 사업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것이다. 대개 초기비용만 약간 투자할 뿐, 나머지 부분은 사람들에게 투자를 받아서 사업을 진행한다.
 전망이 좋은 사업이라면 당연히 투자자들이 줄을 이을 것이고, 자금도 풍족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엔 투자자들도 돈을 벌고, 자신도 돈을 벌게 된다.
 “허! 정말 대단하구나!”
 월풍은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식의 생각의 발상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어느새 월풍은 일푼만금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고, 방금까지 고민했던 것들도 잊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복리를 계산하는 방법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이자에 이자가 더해지는 것이기에 일 년 보다는 십 년이, 십 년 보다는 이십 년이, 그리고 이십 년 보다는 삼십 년을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복리에 맞추어 계산을 하려니 여간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아니었다.
 월풍은 복리를 계산하다 보니 자연스레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월풍은 일푼만금에서 이상한 문구를 발견했다.
 
 <천하의 이치는 똑같다. 이자에 이자를 더해 돈을 불려 나가듯, 내공 또한 내공에 내공을 더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를 연공하면 하나이고, 이틀을 연공하면 넷이다. 그리고 사흘을 연공하면 아홉으로 불어나고 나흘을 연공하면 열여섯이 된다. 그럼으로 이것을 층층무상공이라 한다.>
 
 “억?”
 월풍은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두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는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하고 몇 번이고 눈을 비벼 보았다.
 허나,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분명 일푼만금 책이 맞거늘…….”
 월풍은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금 일푼만금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하의 내공심법은 대동소이하다. 장사로 따지면 단리의 방식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크게 될 수 없다. 작은 이익만 보고 큰 것을 보지 못한다면 어찌 훌륭하다 하겠는가?>
 
 쾅!
 월풍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는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공에 내공을 더하면 천하에 그 누가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그의 눈앞에는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공에 내공을 더하는 방식의 내공심법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기고한 절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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