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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전생마인

#1화

2021.02.25 조회 2,979 추천 20


 #1화
 
 
 
 
 
 천마신교에는 그림자가 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소교주의 분신, 비공식적으로는 소교주의 개라 불린다.
 소교주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수련을 거치고, 천마신교의 절기들을 수행한 덕에 그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강하다.
 하지만 그 강함과 별개로, 그림자들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부모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왜, 언제부터 그림자로 선택받았는지도.
 그들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아는 것은 천마신교의 장로급 이상뿐이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무시무시한 그림자 중 그 누구도 천마신교의 장로에 오른 이가 없다.
 그런데 무슨 조화일까.
 그림자 역사상 최초로 극마의 고수가 등장했다.
 
 혈천마인(血天魔人) 백천혈(白天血).
 
 그는 그림자의 전설이 되었다.
 
 ***
 
 휘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자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깨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가 펼쳐졌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걸까,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른 걸까?
 확실한 것은 눈을 감기 전의 풍경과 눈을 뜬 지금의 풍경이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것 정도.
 감각이 돌아오자 비릿한 혈향이 다시 코끝을 자극한다.
 사지와 몸 곳곳에서는 뼛속까지 저미는 통증이 찾아 들었다.
 원한과 공포가 섞인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검을 치켜든다.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수천 번의 칼날을 맨몸으로 받아 내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욱신.
 
 “······큭.”
 
 사사삭.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튀어나온 침음.
 그 소리에, 섣불리 접근조차 하지 못하던 이들이 빠르게 주변으로 흩어져 포위망을 다시 굳혔다.
 승냥이들에게 범의 부상만큼 기쁜 소식이 어디 있으랴.
 
 ‘이 백천혈이 이런 꼴이라니······.’
 
 천마신교의 소교주인 천우악의 그림자, 혈천마인(血天魔人) 백천혈(白天血).
 그림자들 역사상 처음으로 극마지경에 오른 천재.
 무공의 성취가 천마신교의 다른 고수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그림자들이지만, 그들에게도 한계가 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소교주를 지킬 수는 있되, 넘어설 수는 없을 정도의 강함.
 그 때문에 그들이 익힐 수 있는 것은, 천마신교의 고수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절기들과 소교주의 아류 무공들뿐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소교주와 동등한 경지에 오른 백천혈이지만, 지금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이들은 그와 같은 천마신교의 고수들.
 이 상황이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을까.
 
 푸숙, 서걱.
 
 “커억!”
 “······!”
 
 빈틈을 노리고 용맹하게 달려들던 천랑대(千狼隊)의 무사 중 하나의 심장이 백천혈의 검에 꿰뚫렸다.
 거의 동시에 함께 뛰어들며 백천혈의 좌측으로 파고든 또 다른 무사는 강기(罡氣)를 머금은 백천혈의 왼손에 의해 목과 몸이 분리되고 만다.
 온몸을 가늘게 한번 떨더니 축 늘어진 천랑대 무사의 시신에서 무감각하게 검을 뽑아내자, 살아남은 천랑대 대원들의 얼굴 몇몇에 경악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 들어 오거라.”
 
 백천혈의 무심한 음성.
 자신의 목숨을 취해보라 말하는 그의 오만함에 그들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죽음의 진이라고 불리는 천랑대의 천라지망을 이만큼이나 파훼했음은 그가 틀림없는 괴물이라는 증거.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그의 뒤에는 더 이상 몸을 피할 곳이 남아 있지 않다.
 천라지망 속에서 싸우고 또 싸우며 도착한 곳은 결국, 절벽에 퇴로가 막힌 막다른 곳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백천혈은 되려 미소를 지었다.
 
 “죽은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느냐?”
 
 덤비면 다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허세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가 되고도 백 명에 가까운 천랑대원을 저승으로 보낸 괴물이다.
 가장 먼저 달려드는 자는 그의 장담대로 죽은 동료들과 대면하게 될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언제까지 그리 서 있을 거지? 혹, 이대로 길을 열 생각인가?”
 
 한 번 더 도발을 던져본다.
 하지만 그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자신의 숨통을 무리해서 끊으려 하지도 않고, 그저 몰아놓고 기다린다.
 놈들은 사냥개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결코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 빈틈만을 노리면서 편안히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 덕분에 백천혈은 삼일 밤낮을 검을 휘두르면서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버티고 있어 봐야 결국 자신만 지칠 뿐이다.
 기다리다 못한 백천혈이 결국 먼저 공격을 시도하려 하는 그 순간, 거대한 내력이 실린 일성이 울려 퍼진다.
 
 “길을 열어라!”
 
 스스스슥.
 
 백천혈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중앙에 널찍한 길을 만들며 비켜난다.
 힘이 남아 있다면 이 틈을 이용해 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런 몸 상태로, 이만한 내력을 가진 상대 앞에서 도망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성에 이만한 내력을 자연스럽게 실을 수 있는 인물은 천마신교 내에는 단 한 명뿐.
 지친 백천혈의 귓가로 조금 더 가까워진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꼴이 말이 아니군.”
 
 조금의 구김도 없는 깔끔한 검은 무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어느새 그와 이십여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고수들 사이에서는 언제라도 서로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백천혈의 앞에 선 사내는 세상 편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무방비하게 뒷짐을 지고 있다.
 
 “······혈천마인 백천혈, 예를 갖추어라.”
 
 태산과도 같은 위엄이 느껴지는 음성.
 그의 정체를 아는 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거대한 존재감에는 감히 저항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그런 이를 앞에 두고도 담담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백천혈이, 이윽고 천천히 운을 뗐다.
 
 “······고작 그림자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 역시 내가 이곳까지 직접 오게 될 줄은 몰랐네. 과연 혈천마인. 이만큼이나 천랑대의 천라지망에서 버텨 내다니, 천마신교 역사상 최초의 극마급 그림자다워. 자네 덕에 본교가 입은 피해가 실로 막중하다네.”
 “솥에 들어갈 사냥개의 운명이지만, 살겠다고 발버둥 정도는 쳐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천혈의 음성에서는 다분히 도전적인 의지가 느껴진다.
 천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분명한 살의가 번득이고 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천마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되레 조소가 머금어졌다.
 
 “살기가 제법이군.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는 걸 보니, 개가 아니라 늑대였던 모양이야. 역시, 자네를 제거하기로 한 일은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 앞으로 키울 그림자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
 “큭큭 태어난 순간부터 교에서 주어진 임무대로 소교주에 충성했고, 소교주의 명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소. 이런 나를 죽여놓고 추후에도 그림자들을 양성한다? 나 같은 본보기를 만들어 놓고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충성을 바치리라 생각하시오?”
 “강자지존의 율법이 철칙인 이 천마신교에서 강자의 말은 곧 법.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고, 충성을 바치라고 하면 바친다. 무슨 문제가 있나?”
 “하면 아무 연유도 없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말이오?!”
 
 백천혈의 두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천마의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는 도리어 더 짙어졌다.
 
 “개가 주인을 넘어서려 했다. 그것이 이유지. 그림자는 그림자다워야 하는 법. 자신의 본분과 주제를 파악 못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그림자 모두가 알게 될걸세. 자네의 죽음으로 말이야.”
 “소교주의 그림자는 강해져야 한다! 그것도 교의 명령이었소! 그것을 지킨 것이 죽을 이유라고?!”
 “글쎄······.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죽을 자네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군.”
 
 콰구구구구구구구.
 
 천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천혈의 주위로 무시무시한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분노는 망설이던 그에게 결단을 내리게 했다.
 무인의 생명력이라고도 불리는 진원 진기까지 끌어내, 마지막 살초를 준비한다.
 몸 주위로 생겨난 기의 폭풍에 의해, 산발된 그의 머리칼이 하늘을 향해 솓구친다.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복수의 화신과 같은 모습이다.
 
 “광마추혈무(狂魔追血武)!!”
 
 우렁찬 외침을 토해내며 백천혈이 검을 휘두르자, 붉은 강기의 폭풍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천마를 향해 쇄도했다.
 
 “천마추혈장(天魔追血掌)”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손을 풀어 강기를 향해 가볍게 손바닥을 뻗는 천마.
 매섭던 기세와는 달리, 백천혈의 강기는 천마의 오른손에서 만들어진 붉은 장강(掌罡)과 부딪치는 순간 소멸했다.
 광마추형무는 천마추혈장의 아류 무공.
 배에 해당하는 공력이라도 싣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격의 차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미 한계까지 지쳐있는 그의 상태로, 그만한 공력을 쏟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붉은 강기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자 백천혈의 두 눈에 절망이 드리웠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야속하군. 태어난 순간부터 타인의 의지로 살았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가······.’
 
 자신에 의해 죽어 간 수많은 고수들도, 이런 허무함을 느꼈을까?
 무지막지한 강기가 그의 몸을 찢어발기는 것을 느끼며 백천혈은 눈을 감았다.
 
 ***
 
 욱신욱신.
 
 ‘고통도 없이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통증이 오래가는군.’
 
 마치 여기저기 얻어맞은 것처럼, 안면을 포함한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린다.
 죽어가는 와중치고는 꽤나 생생한 통증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굉장히 앳된 목소리가 들린다.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다.
 저승사자일까?
 뒤이어 처음 듣는 사내의 음성도 들려온다.
 
 “흥, 삼초지적도 안 되는 게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군. 하지만, 실력도 없이 감정만 앞서는 행동을 세인들은 흔히 만용(蠻勇)이라고 하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오라버니를 때려요?!”
 “어허, 어린 소저가 끼어들 일이 아니오. 소저의 오라비가 먼저 시비를 걸었기에 생긴 일이오.”
 “당신들이 먼저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따진 것뿐이잖아요!”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대화들이 들려온다.
 그를 데리고 가려 온 저승사자들의 대화로 보기에도 이상스럽다.
 
 ‘무슨 일이지?’
 
 결국 참다못한 백천혈이 눈을 떴다.
 은은한 월광이 자리하고 있던 밤하늘이 아닌, 흰 구름 몇 점이 드문드문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 백천혈을 반겼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가만히 누워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는 분명 천마의 장강(掌剛)에 적중당했다.
 그의 몸을 지키던 호신 강기는 힘없어 부수어졌고, 육신은 찢겨 나갔다.
 바로 조금 전에 겪은 듯한 그 끔찍한 고통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설마······. 내가 죽지 않았다는 말인가? 사지가 찢기던 그 고통이 착각이었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다급히 양손을 그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의 두 손은 멀쩡했다.
 두 다리의 감각도 여전하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하는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하늘을 원망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환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무심코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백천혈의 얼굴이 느닷없이 조금 굳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하늘을 배경으로 놓인 그의 두 손은, 희고 가늘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놀란 백천혈이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천마신교가 자랑하는 혈수마공(血手魔功)을 익힌 덕에 그의 손은 늘 검붉게 달아올라 있다.
 내공을 싣지 않아도 그의 손은, 나무를 찢고 바위를 부순다.
 자랑스러운 살상 병기인 그의 손은 어디로 가고, 웬 서생(書生)의 손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댓글(2)

관독쟁이    
천마신교의 소교주의 그림자이자 충신인 쥔공이 무위가 강해진거면 교의 입장에선 좋은걸텐데 소교주의 그림자 치고 강한거면 걸맞은 직급으로 변경해주면 됬을진데... 강해졌단 이유로 쥔공을 죽이네 안타까워라 ㄷㄷ;;
2021.03.15 02:39
as********    
잘 보고 갑니다.
2021.03.15 08:03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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