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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강호 1-1

2014.09.22 조회 8,163 추천 63


 포효강호(咆哮江湖) 1권
 
 목차
 序章
 第一章 칠사귀
 第二章 단광석
 第三章 인피면구
 第四章 송(宋)
 第五章 잠입
 第六章 서화문
 第七章 대공자의 음모
 第八章 추귀의 과거
 第九章 흑련문 문주
 第十章 암운
 第十一章 돌아오는 기억
 
 
 
 
 序章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우리는 십팔기(十八技)를 통해 살인무술을 익힌 순간부터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야 했다.
 시작은 천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밖에 남지 않았다.
 정확한 사인은 모른다.
 대부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뿐.
 어두운 새벽, 지령을 통해 그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이 순간이 진심으로 마지막이 되길 빌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지식이 있었다면, 적어도 그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 고관대작만 쓸 수 있다는 오사모(烏紗帽)인 줄 알았다면 희망을 품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와.”
 그들은 우리를 동굴로 안내했다.
 종유석이 가득한 석회동굴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입구 쪽으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가 완벽하게 차단될 정도로 어두운 암동이었다.
 “누워.”
 우린 순진했다.
 철삭으로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팔다리를 단단히 묶는 중에도 반항하지 않았으니까.
 이내 다가온 기괴한 노인.
 그는 미친놈처럼 수많은 비침(飛針)을 하나씩 꺼내 내 머리와 몸에 찔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고통은 인간이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첫 번째가 시술이었다면 두 번째는 수술이었다.
 두 항아리 속에 각각 검은 액체와 황금빛 액체를 담아 들이부었다.
 그러고는 내가 그 액체를 전부 삼킬 때까지 그들은 몇 번이고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또 다른 고통을 느꼈다.
 모든 장기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은 물론이고, 약제가 목구멍을 타고 흐를 때마다 식도가 조각조각 끊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게 칼을 준다면 당장 내 목을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우리를 암살을 실행할 살인귀로 만들려 했던 것 같다.
 항아리 속에 담긴 액체들로 하여금 내성을 가진 몸을 만들고 내력을 크게 증진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사실, 그 이유 말고도 다른 증거들이 많다.
 몇 년 전에 그들이 내민 거대한 지도는 한눈에 봐도 황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외성의 모습은 없었으나 지도 좌우측에는 이면(二面) 이상을 경계하는 성루가 있었고, 성벽 모서리에 누각이 위치해 내성과 외성을 고루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어 보통의 건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도의 가장 중심부 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동창의 고수들과 금의부사들의 거처라 말해준 것도 차후 암살을 하기 위한 기본교육 중 하나였을 것이다.
 육도삼략, 손자병법과 무경칠서 등 잡다한 병법.
 그것은 무력만이 아니라 지력까지 갖추기 위한 그들의 준비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황실 최고의 무공인 십팔반무예.
 중원 최강의 신법이라는 백영유운보(白影流雲步).
 고절한 은신술 중 하나라는 잠운미보(熸運尾步).
 멸문한 마교 놈들의 무공인 아수라월광수(阿修羅月光手)와 파천마공(破天魔功)이라는 금지된 마공까지······.
 우리를 완벽한 살인귀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를 제외한 여섯 명의 동료··· 즉, 살아남은 녀석들은 그들이 내민 비급들 중 유독 마공(魔功)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아수라월광수를 처음으로 집어든 누군가가 며칠 만에 절정에 도달하는 무위를 보이자 남은 녀석들이 너도나도 익히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공에 강한 유혹을 느꼈다.
 무공의 고강함을 떠나 마기라는 기운에 몸 자체가 극도로 흥분을 했고, 그 유혹은 마치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줄 것처럼 정말로 강렬했다.
 하지만 내가 비급을 익힐 차례가 되었을 때, 우연히도 나의 눈길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세상에 군림하는 마공도 아니고 악명을 떨치던 사공도 아닌, 정종 계열의 특이한 신공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여의신공(如意神功).
 사실 처음엔 이 신공을 익힐 생각이 없었다. 그저 무슨 내용인지 훑어만 본 뒤 아수라월광수나 파천마공을 익힐 생각으로 집어든 비급이었다.
 당시 그들도 마공을 선택하지 않은 이런 나의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고작 신공 하나가 무슨 큰일을 내겠느냐고 생각했을 테고, 다른 동료들처럼 나 또한 다시 마공을 익힐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몸속에 강력한 살심이 도사리도록 만들어놓았으니 그깟 신공 하나가 무슨 조화를 만들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신공으로 인해 제압당해 있던 기억들이 조금 전부터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의신공의 무리를 깨닫는 순간 내가 알던 기억과는 전혀 다른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지금의 이 기억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조사해 봐야 한다.
 군데군데 기억이 비어 있기도 했고, 더 어릴 적의 기억은 백지처럼 지워져 몇 가지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확인해 볼 것이다.
 이전에 알던 과거가 진실인지, 아니면 지금 떠오르는 기억이 진실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나의 진실인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그 끔찍한 기억들이 내 과거의 진실이라면······.
 
 내 약속하지.
 너희들 모두···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第一章 칠사귀(七死鬼)
 
 
 
 일반적으로 집무실이라고 하면 대청 옆의 부속 건물이 떠오른다.
 업무를 보는 탁자 위에 쌓인 수북한 서류하며 구석에 비치된 늘어선 책장은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곳은 여타의 집무실과는 무언가 달랐다.
 분명 업무를 보는 방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고급스러운 물품들이 널려 있었다.
 바닥에 깔린 황금빛 융단도 일반 융단과는 달랐고, 책상과 의자도 단순한 원목이 아닌 최상급 목재인 검붉은 자단목이었으며 곳곳에 놓인 도자기는 겉보기에도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천장의 조각은 단연 압권이었는데, 웅대한 용 한 마리가 실로 비범하게 양각되어 있어 거대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 돌아왔다고?”
 이 방의 주인인 헌양자(憲陽子)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 앞으로 조호(曺呼)가 부복하며 말했다.
 “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어제저녁으로 칠사귀(七死鬼) 전원이 복귀했습니다.”
 “역시··· 칠사귀로군.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두 명쯤은 늦을 줄 알았더니.”
 헌양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늘 그렇지만 그들에게 맡긴 임무에는 실패란 단어가 따라붙는 법이 없었다.
 그가 목을 쭉 빼고는 다시금 질문했다.
 “그래, 누가 가장 빨리 복귀했나?”
 “천귀(天鬼)와 살귀(殺鬼)입니다. 천귀는 보름 전에, 살귀는 일주일 전에 복귀했습니다.”
 “보름이라고? 지금 보름이라고 했나?”
 “예.”
 “천풍검객(天風劍客) 두중악(頭重嶽)을 상대로?”
 “그렇습니다.”
 헌양자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헌양자가 거론한 천풍검객 두중악은 대표적인 사파 고수 중 한 명이다.
 검에 바람을 실을 수 있다고 하여 천풍검객이라는 별호를 얻은 자로, 최근 강호에 부상하는 대표적인 신흥고수 중 한 명이었다.
 혹자는 그를 평가할 때 대문파의 장문인과 동급이라 했다.
 물론 정말로 장문인을 이길 실력까지야 되겠느냐만은, 그래도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범상치 않은 인물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죽여야 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랐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나 빨랐다.
 거리를 생각해 보면 그를 보자마자 죽이고 복귀를 준비할 정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지금 칠사귀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느냐? 그러니까, 황실의 고수들에 비교하면 말이다.”
 헌양자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재차 물었다.
 조호는 헌양자가 무슨 뜻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칠사귀는 헌양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살인 병기로, 훗날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실력이 어느 선까지 올라왔는지 궁금해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혈승(血僧)의 얘기론··· 황실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이라 하였습니다.”
 “그럼 천귀와 살귀의 실력은 어떠한가? 그들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실력인가?”
 헌양자의 말끝에서 음성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정말로 궁금했던 것이었는지 기대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조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살귀는 정인대사(正人大師)와 신도명(信道明)을 제외한 누구도 적수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귀는······.”
 “천귀는?”
 “정인대사는 몰라도 신도명의 적수는 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신도명? 동창의 하늘이라는 그자를 상대로 말이냐?”
 “예. 며칠 전 혈승이 직접 얘기한 거라 확실할 겁니다.”
 “허허허, 크하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대단해. 이 정도까지 강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다. 네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어.”
 헌양자는 희열에 찼다.
 정말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들이었다.
 호부상서를 설득해 국고에서 빼낸 돈만 해도 부(府), 주(州), 현(縣) 정도의 행정구역 따위는 수십 개를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디 그뿐이랴.
 연해와 내지, 강서와 지구, 청해와 서장 등 전국을 토대로 인맥이란 인맥을 모두 동원하여 수집해 온 절세비급들은 어떠한가.
 북방에서 만독불침을 제조할 수 있다는 사갈노인을 찾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고, 가장 위대한 시술을 할 수 있다는 혈기수(血氣手) 혈승을 설득하고 회유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인력과 돈이 들어갔다.
 그 노력의 성과가 이제야 서서히 빛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다. 다음 임무 때까지 물러가 있어라.”
 헌양자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헌데 공공(公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냐? 보고할 것이 남았더냐?”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추귀(追鬼)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추귀?”
 헌양자는 비스듬히 기댔던 등을 다시 꼿꼿이 세웠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오른 쪽 밑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
 
 “음··· 여기 있군.”
 곧 두툼한 문서를 꺼내 들었다.
 칠사귀의 내력이 적힌 책자로, 그중 추귀에 관한 내력이 적힌 곳을 들춰보았다.
 천귀나 살귀에 대해서는 그들이 받은 임무까지 두루 꿰고 있는 것과 달리 추귀에 대해서는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다른 칠사귀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탓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귀, 귀신을 쫓는 자. 암기를 즐겨 쓰고 완벽한 임무를 위해 병적으로 집착한다라. 칠사귀 중 무공이 가장 떨어지지만 그에 반면 임무 수행 능력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를 받고 있구먼. 또 유일하게 마공을 익히지··· 호오?”
 헌양자는 추귀의 내력을 줄줄 읽어 내려가며 물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왜?”
 “이틀 전에 마지막으로 복귀한 추귀가 이상한 것을 물어왔답니다. 그의 보고서를 기록하던 귀영(鬼影)에게 말입니다.”
 “······.”
 “공공도 아시겠지만 칠사귀는 자아를 통제당한 상태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기억을 제거하고 명령만 듣게끔 새로운 기억을 심어놓은 자들이지요. 그런데 질문을 해왔습니다. 이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무슨 질문을 했다던가?”
 “자신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답니다.”
 “고향? 그건 왜?”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헌양자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사술이 깨진 것은 아니냐?”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사기역유상술(邪氣逆幽想術)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검증된 술법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너는 추귀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
 “소, 소인의 생각입니다만······.”
 조호가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말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했다.
 “예전부터 봐온 추귀는 다른 칠사귀와는 시작이 조금 달랐습니다. 다른 칠사귀는 임무를 끝내고 나면 무공을 익히는 데 반해 그는 온종일 강가에 앉아 있는가 하면, 산등성이에 올라 하늘을 보며 하루를 보내는 일이 주된 일과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행동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흐음······.”
 헌양자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몇 번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
 일곱 명의 사내들을 암동에서 꺼내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최고의 비급을 하사했다.
 황실의 최고 비급뿐만 아니라 중원 전역을 뒤져 최고라는 비급을 전부 가지고 왔다.
 칠사귀 중 여섯 명은 망설임 없이 모두 마공을 선택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생존 경쟁을 통해 얻은 지독한 살심(殺心)에 의해 그들 스스로가 마공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추귀는 마공을 버렸다. 사공 같은 강력한 술법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신공 하나만을 택했다.
 그 때문인지 유독 암기 같은 보잘것없는 병기에 아직까지도 매달리고 있는 듯했다.
 “혈승은 어디에 있느냐?”
 “묘사각(墓社閣)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혈승을 불러오너라!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헌양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방을 나가는 그의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한 사내가 들어오며 다급히 외쳤다.
 “무슨 일이냐?”
 “추귀가··· 추귀가 사라졌답니다.”
 
 ***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추귀는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술을 익히기 전의 기억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뿌연 안갯속을 거니는 것처럼 사람이 움직이는 형상만 떠오를 뿐, 자세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단서가 될 몇 가지는 또렷이 기억난다는 것이다.
 어릴 적 고향이 항주라는 곳이며, 성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이 호연이라는 것, 그리고 서화문이라는 낯선 문파의 이름이었다.
 거기에 조금 특별한 기억 하나가 더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타나는, 어떤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의 느낌으로는 왠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듯했다.
 추귀는 알고 싶었다.
 왜 그 여인이 나타날 때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인지를.
 가슴 한구석이 꽉 막혀 숨을 쉬기가 거북할 정도의 기분은 대체 무엇인지를 말이다.
 마차를 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귀영이라는 자의 뒤를 캐는 것보다 우선 그 여인을 찾아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쿵!
 그때였다.
 마차가 흔들리며 추귀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마차 안에 있던 네 사람도 제각기 몸을 비틀어댔다.
 “거참. 마부 양반, 격하게도 모는구먼.”
 마차 바퀴가 흔들리는 순간 엉덩방아를 찧은 중년인은 인상을 구기며 투덜댔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동승해서 한 냥이라도 아끼지 않았소.”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토록 험하게 모는 건 절강을 통틀어 이 마부가 유일할 게요.”
 “그래도 그만큼 시간은 정확하니 뭐라 하기도 좀······.”
 쿵!
 “이런 육시랄!”
 또다시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자 마부의 편을 들던 노인이 곧바로 짜증을 냈다.
 그 모습에 중년인은 이때다 싶어 불평을 마구 쏟아냈다.
 “거, 내 뭐랬소? 지금 마부가 생각 없이 마차를 몰고 있는 거요. 생긴 것도 몰상식하게 보이더니 과연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소.”
 중년인은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시 마차가 순탄하게 나아가자 그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댁들은 어디 가는 거유?”
 그 말에 노인이 먼저 말을 받았다.
 “난 보타산(普陀山)에 가오. 관음보살에게 참배를 드릴 때마다 일이 잘 풀려서 말이오.”
 보타산은 항주 외곽에 위치한 군도의 한 작은 섬에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참배객들 때문에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는 젊은 여인을 향해 물었다.
 “소저는 어디 가시오?”
 “송강(松江)에 갑니다.”
 “송강이라면 항주에 내려서도 백 리를 넘게 가야 하는 곳이 아니요?”
 “예, 부지런히 가야지요.”
 “여인 혼자서 괜찮겠소? 송강부로 가는 길목에는 시비 거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길도 험해 밤에는 아무도 가지 않는다고 들었소.”
 “괜찮습니다. 한 번 가본 길이라서요.”
 “허허허, 그러지 말고 좀 생각해 보시오. 곧 항주에 당도할 터인데 좋은 호위무사가 필요하지 않겠소? 이래 봬도 내가 이 근방에서는 이름깨나 있는 사람이오.”
 중년인은 여인이 제법 맘에 들었던지 어깨에 힘을 주며 말을 했다. 덩치도 제법 크고 눈빛도 살아 있어 단순한 허세는 아닌 듯했다.
 여인이 살짝 웃어 보였다.
 “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그리고 저는 배편을 이용할 거라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중년인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배편이라면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런 곳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더는 말을 붙이기가 미안했는지 중년인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젊은이는 어디 가는 거유?”
 추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죽립을 눌러쓴 채 그저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항주로 가는 관도를 하루 온종일 내달렸는데도 단 한마디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저기 젊은이, 이렇게 사람이 묻지 않소?”
 “······.”
 “허허허. 거 젊은 사람이 예의가 없군. 이봐, 말 좀 해보시게.”
 거듭 물어보던 중년인의 말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사내의 허리춤에 삐져나온 검자루가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좀 전까지 여인 앞에서 힘자랑했던 그였기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추귀에게 팔을 뻗으며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했다.
 그 순간.
 추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들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중년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헉.”
 중년인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신음을 내뱉었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벌리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귀의 눈은 보통 사람의 눈과 달랐다.
 동공이 튀어나올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거기에 피부는 불에 그슬린 것처럼 불그스름했고, 볼과 귀밑에 커다란 자상이 나 있었다.
 만약 추귀의 무심한 표정이 아니었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부라렸다면 맞은편의 중년인은 그 자리에서 분명 심장이 멎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내, 내··· 실, 실수······.”
 중년인은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무서웠다.
 놀란 가슴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중년인의 이상한 행동에 마차 안에 있던 여인과 노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죽립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밖에서 마부의 말이 들려왔다.
 “다 왔소. 내릴 준비들 하시오.”
 
 ***
 
 추귀는 마차에서 내린 뒤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임무를 처리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암습이나 기습을 통해서였다.
 그것도 낮이 아닌 한밤중에 말이다.
 그러니 이렇듯 밤도 아닌 낮에, 거기다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 서 있자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살기!’
 추귀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건물 사이에 몸을 숨겼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은 검자루를 잡고 있었고, 왼손은 품속에 들어가 있었다.
 몸을 숨겨 상대의 눈을 속인 뒤 가까이 있는 적은 검으로, 멀리 있는 적은 암기로 상대할 준비를 마쳤다.
 “······.”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다툼이 조금 있는 것 같았지만, 주위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리고 곧 다툼이 멈추자 살기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감각.
 추귀의 이런 반응은 극도로 발달된 그의 감각 때문이었다. 그들에 의해 몸이 개조된 이후 그의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랬기에 작은 살기에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했던 것이다.
 꼬르륵.
 몇 걸음을 걷던 추귀는 배를 만졌다.
 생각해 보니 이곳으로 오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오직 물만 마시며 이곳에 온 것이다.
 무엇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추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구수한 냄새가 흘렀다.
 추귀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
 
 만두를 팔던 아낙네는 눈앞에 다가온 추귀를 보고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죽립을 쓴 추귀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복장이나 분위기가 그러했다. 추귀의 등 뒤로 언뜻 비치는 검자루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추귀는 여인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무릎을 꿇더니 만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먹기 시작했다.
 말릴 새도 없었다.
 수십 개의 만두를 숨 쉴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단번에 처리해 버렸다.
 삽시간에 수십 개의 만두를 해치운 추귀는 곧바로 뒤돌아섰다.
 “저기, 돈을··· 주, 주셔야지요.”
 “뭐?”
 여인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뒤돌아서는 추귀를 붙잡던 도중 그의 굳은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돈이라.”
 추귀는 한참을 고민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 마부에게 준 것과 똑같은 것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가져가라.”
 “아······.”
 추귀가 내민 것은 붉게 빛나는 구슬이었다.
 눈썰미가 조금만 있더라도 범상치 않은 구슬임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의 눈에도 평범한 구슬이 아닌 듯 보였다.
 대갓집 규수에게 팔면 꽤나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것은 여인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이 정도 구슬을 팔려고 한다면 배경이 제법 든든해야 했는데 그녀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장사할 시간도 없는데 이런 귀한 물건을 위험 부담까지 안고 팔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여인은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사내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길모퉁이를 돌아 객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내를 쫓아가려던 여인이 곧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좀 전의 과묵한 표정하며 허리춤에 찬 검자루하며 필시 보통 일을 하는 사내 같지는 않았다.
 괜히 그를 쫓았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은 채 사내가 건네준 구술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영롱한 구슬이 그녀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편, 그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내 두 명이 제법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와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들로 저잣거리의 뒤를 봐주고 돈을 받는 두반장(頭反掌) 형제들이었다.
 “형님, 저 구슬 보고 계십니까?
 “보고 있다.”
 “제법 괜찮은 물건 같은데요. 진 공자에게 가져다주면 제법 돈 좀 받겠습니다.”
 “그렇게 말이다.”
 그들은 입가를 말아 올리더니 여인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슬을 소매에 감추고 자리로 돌아가던 여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우리 좀 봅시다.”
 
 ***
 
 천화객잔은 항주에서도 제법 유명한 객잔이다.
 방이 넓을 뿐만 아니라 친절한 점소이, 깨끗한 청소가 동반되어 항주에 들르는 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 점소이 중 막내인 영삼은 오늘도 청소로 열심이다.
 아침부터 일어나 입구 쪽을 쓸었고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다시 한번 쓸고 있었다.
 그는 청소를 끝내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옵쇼. 저희 천화객잔을 이토록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는······.”
 죽립의 사내는 그의 말을 받지도 않고 들어갔다. 하지만 영삼이는 개의치 않고 그를 따라갔다.
 사내가 빈 곳에 앉자 그가 물었다.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저희 객잔을 대표하는 음식이 곧 항주를 대표하는 음식이지요. 하여······.”
 설명을 하던 중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영삼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술.”
 추귀의 입에서 한마디가 나왔다. 그 말에 공포에 질려 있던 영삼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헌데 어떤 술을······.”
 “······.”
 “아, 아닙니다. 값싸고 좋은 술을 내오겠습니다.”
 영삼은 자문자답 신공을 발휘하며 주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공포감 때문에 더는 대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추귀는 비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모두···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
 의자에 앉던 그가 한 생각이었다.
 죽이고 싶다.
 객잔 안에 있는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죽이고자 하는 생각은 더욱 커졌다.
 한쪽 의자에 놓아두었던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는 행동도 그에 대한 반응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점소이가 술을 가져다주고 돌아섰을 때 추귀는 더 이상 참지 못해 일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 멈칫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동작이 그대로 멈춰 버린 것이다.
 ‘너는······.’
 또다시 그 여인이다.
 기억을 되찾은 뒤 때때로 나타나는 여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최근에 살심이 치밀 때마다 이 여인이 나타났다.
 “······.”
 짧은 고민 뒤 추귀가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그는 점소이가 가지고 온 술에 시선을 뒀다.
 쪼르르륵.
 ‘술······.’
 추귀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생각했다.
 이제껏 술을 이렇게 마셔본 적이 없다.
 이런 날에 마셔본 적도, 이런 기회에 마셔본 적도 없다.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왜인가······.
 이것이 술이란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혼자 이것을 마실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가.
 왜 임무 수행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그들의 말을 단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가.
 왜 죽여야 하는지도, 그들의 말을 왜 들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의 말에 복종했던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생각나지 않자 추귀는 기억을 좀 더 최근으로 돌렸다.
 ‘고향이 항주라고 했다.’
 추귀는 이틀 전 임무 보고를 끝내고 뒤돌아서는 사내에게 자신의 고향을 물었다.
 보고를 받던 사내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자 항주가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사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틀렸다.
 항주는 여의신공을 익히기 전 이후의 고향이다.
 그전의 기억은 석양(石陽)이라는 북경 서남쪽의 작은 마을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금 떠오르는 과거가 자신의 과거가 아닌 경우.
 그들의 행적을 예상했을 때, 지금 떠오르는 과거와는 다른 기억을 심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빨리 확인해야 했다.
 또한, 가슴속에 있는 꽉 막힌 느낌도 무엇인지도 알아봐야 했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내기 전에 말이다.
 ‘우선 서화문을 찾아야 한다. 그곳에 가서 호연이란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단서란 단서는 모조리 찾아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이 느낌부터······.’
 쪼르르륵.
 술은 계속 비워졌다.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추귀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느 여인이 떠오른다.
 늘 그렇듯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이 보인다. 그 여인을 떠올릴 때마다 늘 그렇듯 편안함이 밀려든다.
 그 편안함은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다스린다. 가슴을 진정시키고 행동을 좀 더 신중하게 만든다.
 그것이 자신의 과거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래, 참아보자.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추귀는 술을 계속 마셨다.
 시간이 흐르며 커다란 동이 세 개가 비워졌지만 추귀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사실 추귀는 술맛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얼마나 독한지도, 어떤 기분에 마시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미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第二章 단광석(丹光石)
 
 
 
 매캐한 향이 동굴 속에서 피어나오고 있었다.
 냄새만 맡아봐도 즉각 거부 반응이 오는 이 향은 심미약(心迷藥)이란 것으로, 술법 의식을 시행할 때 집중력을 높여주는 향이었다.
 술법사에게는 매우 중요한,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냄새만 맡아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향이기도 했다.
 “내가 들은 얘기는 여기까지라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나?”
 헌양자는 속사정을 털어놓고는 맞은편에 앉은 노인의 반응을 살폈다.
 노인은 말라비틀어진 자신의 볼때기를 슥슥 문질러댔다.
 그러고는 상념에 잠긴 듯 고요한 눈빛으로 턱을 괴었다.
 혈승.
 마교에서도 멸절된 비사의 술법을 이용하여 칠사귀란 인간 병기를 만들어낸 자였다.
 중원에서는 전설이라 불리는 삼천승(三天僧)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철사귀들에게 시전한 사기역유상술(邪氣逆幽想術)은 마교에서도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던 술법입니다. 그만큼 극비의 술법이기도 했고, 위력 역시 대단했던 술법이지요.”
 혈승은 한번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워낙 아는 자가 드물었던 터라 부작용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된 술법대로라면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뇌에서 사물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부분을 독침으로 지워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발생했다면 환경적인 문제겠지요.”
 “환경?”
 헌양자의 되물음에 혈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천사동에 가두고 생존 경쟁을 시킨 것은 술법을 위한 환경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데서 지독한 살심이 피어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추귀만 그런 독특한 행동을 하는 건가? 혹시 살심이 약해져서 그런 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추귀라는 자 역시 사십여 명의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다른 칠사귀에 비해선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숫자라면 일반적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살기를 내뿜습니다. 즉, 살심이 약한 자는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럼 이유가 뭔가?”
 “추측이겠지만··· 아마도 의식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술법을 시행하고 나서도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할 만큼, 비전되어 오는 술법으로도 통하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헌양자는 혈승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어찌하나? 추귀란 자가 만약 사술이 풀린 것이라면··· 과거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라면··· 만에 하나 황실의 금의위나 동창과 연이 닿아 그들에 귀에 들어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인데 말이야.”
 “성급하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직은 그가 어떤 상태인지도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헌양자가 반박을 하려다 멈췄다.
 스스로 지나친 흥분을 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의 말대로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다는 증거도, 사술이 깨졌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읽었던지 혈승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얘기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가 귀영에게 항주가 자신의 고향이 아니냐고 물었다 했습니까?”
 “그렇다네. 항주라고 했네. 그걸 물어봤어.”
 “그럼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우선 제가 한번 상태를 확인해 보러 가겠습니다. 추귀가 혼란스러운 상태라면 쉽게 행적을 드러낼 것입니다. 찾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고맙네. 괜히 수고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말을 하는 혈승의 표정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는 자신이 시행한 술법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추귀가 혼란스러워한다고 하더라도 잠시뿐, 다시 대열로 돌아와 변함없는 살인 병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줄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훌륭한 도구로 쓰임을 다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혈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화려한 표식의 옷을 입은 진천호(眞天浩)는 빛이 나는 구슬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는 한 방향에서 그 진면목을 다 알 수 없었는지 이리저리 굴려보기까지 했다.
 곧 입가가 흔들리더니 이내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카아······! 대단하도다.”
 그의 극찬에 부복하고 있는 두 형제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혹시나 해서 들고 왔는데,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더 좋은 물건인 듯했다.
 “그렇지요, 공자님?”
 “그래, 생각보다 좋은 걸 구했구나. 이걸 어디서 구했느냐?”
 “저잣거리에서 어느 아낙네가 들고 있는 걸 빼앗아 왔습죠.”
 “아낙네가 이런 걸 가지고 있었다고? 이렇게 귀한 걸?”
 “예.”
 두반장 형제 중 큰형인 두성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매우 기대에 차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소공자에게 충분한 사례를 받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동생인 두조가 소공자를 향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런데 소공자님.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그리 놀라시는 겁니까?”
 “이거 말이냐?”
 진천호가 구슬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단광석이다.”
 “단광석?”
 “그렇다.”
 단광석(丹光石).
 일반적으로 단석이라 하면 가공함에 따라 그 쓰임이 변해도 붉은 빛깔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은 물건으로, 가치가 매우 뛰어난 난 돌멩이였다.
 그것을 가공하여 구슬로 만든다.
 쉽지 않은 일이다.
 웬만한 장인이라도 흉내 내기 힘들었다.
 아니, 그보다 구슬로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돌이었기에 굳이 구슬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단광석은 구슬로 만들어졌다.
 거기다 강한 빛까지 났다. 스스로 빛이 뿜어내는 야명주 같은 보석을 혼합하여 넣은 것이다.
 이 정도라면 항주뿐 아니라 중원 전체를 뒤져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단단함의 강도가 현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보였다.
 진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여인은 어디 있느냐?”
 “예?”
 “구슬을 가지고 있던 여인 말이다. 지금 당장 잡아오너라. 그리고 그 구슬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아라.”
 “알겠습니다.”
 두반장 형제가 나가자 진천호는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지난번 도박에 큰돈을 잃은 뒤론 돈이 궁핍하던 참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저잣거리에서 일수를 걷는 일로도 목돈을 마련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이런 구슬을 가진 자들을 발견했다. 들어보니 구슬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부르는 게 값이니 흥정만 잘한다면 그보다 더한 돈도 쥘 수 있었다.
 보석이 날아와 박힌 것과 진배없었다.
 “앞장서라.”
 진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추귀는 침상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지 계속 몸을 뒤틀어대고 있었다.
 
 “호연아.”
 추귀는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워 잘 떠지지 않았지만 계속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호연아.”
 검은 동굴 속에서 소년 한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눈에서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것이 보통의 어린 소년과는 달라 보였다.
 “경일이야?”
 “그래, 나야. 뭐 해? 빨리 일어나. 도망가야 해.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경일아, 나 무서워.”
 “걱정 마. 지금까지 잘 버텨왔잖아? 우린 할 수 있어. 내가 옆에 있잖아.”
 그 말대로 경일은 강했다. 지금껏 그가 죽인 아이들만 해도 스무 명은 족히 넘었다.
 그에 반해 호연은 약했다.
 겁이 많았고 싸움도 할 줄 몰랐다. 만약 옆에서 경일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제길, 늦었어. 그자가 이미 가까이에 있어.”
 “그라면······.”
 “광천(狂天).”
 “······!”
 동굴 속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친 후, 살아남은 아이들은 몇 명의 두려운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년 중 한 명이 바로 광천이란 아이인 것을.
 이름이 광천이 아니었다.
 동굴 속 아이들이 지은 이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경일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이길 수 있겠어?”
 호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경일에게 물었다.
 광천이란 아이가 강하다 해도 경일 역시 강했다.
 싸움을 못하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경일 덕분이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이 동굴에서 그는 자신을 몇 번이고 구해냈다.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호연은 겨우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경일은 누구보다 강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여기 있었네.”
 “······!”
 이질감 있는 목소리에 호연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쪽 구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소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거구의 사내였다.
 침을 질질 흘리며 음침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썼는지 옷은 빨갰다.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빛이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아!”
 그를 보던 호연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이미 다리가 풀려 있었다. 여느 아이들이 내뿜을 수 없는 거대한 살기 앞에서 그는 한없이 무력했다.
 경계의 눈빛을 흘리던 경일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광천의 손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퍼런 칼이었다.
 “어떻게 칼을······?”
 경일의 손에는 여러 가지가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조약돌과 시야를 어지럽힐 가루들, 그리고 끝이 깎여 있는 대나무.
 하지만 칼은 없었다.
 이 동굴 안의 아이들 중 누구도 칼을 들고 있지 않았다.
 “돌아다니다가 발견했지. 물웅덩이 속에 버려져 있더군. 덕분에 더 많은 아이들을 죽일 수 있었어.”
 경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기가 다르다.
 실력이 같다면 필시 당한다.
 경일은 고개를 돌렸다.
 “호연아······.”
 호연이 두려운 얼굴로 대답했다.
 “으응.”
 “내가 움직이는 순간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
 “너, 너는······.”
 “난 괜찮아. 그러니 무조건 뛰어야 해.”
 “안 돼. 너를 놓아두고······.”
 “지금 나는 장난하는 게 아니야. 상대는 광천이야.”
 경일의 호통에 호연이 멈칫거렸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했다.
 호연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경일과 같이 싸워도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싸우는 순간 두 명 다 이곳에서 죽어버릴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은 경일과는 달랐다.
 싸우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설사 친구가 죽게 버려두더라도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처억.
 경일이 한 발 내디뎠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상대의 칼이 뿜어내는 예기는 대나무 창살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실로 무시무시했다.
 눈치를 보던 두 소년이 동시에 움직이자 경일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호연아, 뛰어!”
 
 “헉!”
 추귀는 눈을 부릅떴다.
 끔찍한 꿈을 꾸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추귀는 생각을 가다듬고 재빨리 꿈의 내용을 기억하려고 했다.
 잘만 기억한다면 과거의 실마리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던 것들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추귀는 몇 번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단단히 잠긴 금고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결국, 추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가지에 묻은 땀을 팔로 닦아내며 탁자로 걸어갔다.
 갈증이 났다. 목이 마른 것이 아닌데도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급하게 물을 마셨다.
 벌컥벌컥.
 단숨에 물을 비워냈지만 가슴의 답답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워내고 흘려 버리려고 해도 멍울이 진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을 것이다.
 추귀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 기억이 지워진 데 반해 몸은 아직도 그때의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추귀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상에 막 앉았을 때였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쪽 문이 부서졌다. 내공이 실렸던지 문이 부서지는 순간 방 전체가 들썩이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이, 형장. 안녕하신가.”
 껄렁껄렁한 걸음걸이의 낯선 사내들 세 명이 조소를 머금으며 들어왔다.
 방 안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발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뒤이어 청년 한 명의 모습도 보였다.
 구슬의 주인을 찾으러 움직였던 진천호가 뒷짐을 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
 그때까지 추귀의 행동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방문이 부서졌는데도, 덩치 큰 세 사내가 위협적인 눈빛을 해대는데도 반응다운 반응이 없었다.
 굳이 변한 것이 있다면 바닥을 내려다보던 추귀의 시선이 창가로 이동한 것뿐이었다.
 ‘뭐지, 저놈?’
 지켜보던 진천호의 눈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놀란 표정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일을 몇 번 하면서 터득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자는 아무런 표정과 반응이 없었다.
 마치 남의 일을 대하는 것처럼 매우 무관심했다.
 순간, 진천호는 혹시나 방을 잘못 찾았나 하는 생각에 문 밖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사내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반장 형제들이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데리고 오너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한 여인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획 젖히고는 침상에 걸터앉은 사내를 쳐다보게 했다.
 “이봐. 저 사내가 맞나?”
 “살려주세요.”
 여인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애원했다.
 갑작스럽게 이곳에 끌려온 그녀는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반장 형제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끄럽고, 저 사내가 맞냐고.”
 “빨리 불어, 이년아!”
 그 말에 겁에 질려 있던 여인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향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당시 여인은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다짜고짜 와서는 구슬 하나를 주고 떠난 사내였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녀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죽립과 검을 확인하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저분이 구슬을 주셨어요.”
 “맞답니다, 공자님.”
 그 말에 진천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잘 찾아온 것이다.
 사내의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진천호는 말했다.
 “형씨, 혹시 우리를 보고 얼어붙은 거라면 표정을 펴게. 우리가 여기에 온 건 뭔가를 물어보고, 형씨만 괜찮다면 좋은 협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네.”
 “······.”
 추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지금 일어나는 사건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그의 얼굴에서는 걱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천호는 그런 반응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구슬 말이야, 이 여인에게 준 구슬. 좀 더 가지고 있나 해서 말이지. 혹시나 있다면 내게 팔게. 내 값을 후하게 쳐줌세.”
 “······.”
 “이래 봬도 이름 있는 문파의 자손이네. 얼마를 원하나? 원하는 대로 값은 치러주겠네. 백 냥? 이백 냥?”
 그때였다.
 추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말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다만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어 진천호의 얼굴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냥 가라.”
 “······.”
 “지금 가면··· 모두 산다.”
 진천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방 안의 사내가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지금 가면 모두 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 무슨 개소리인가.
 죽이겠다는 협박도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표현으로 얘기하려 드는 건가.
 진천호는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사내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답이 없는 놈.
 눈앞의 사내는 분명 답이 없는 놈이다.
 답이 없으니 결국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실, 평화적인 방법은 그가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충실한 수하이자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삼호방(三護防) 무사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는가.
 물론 이 방법이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까지 평화적인 방법인 건 아닐 것이다.
 진천호가 고갯짓을 하며 지시를 내렸다.
 그 행동이 무엇인지 눈치챈 삼호방 일행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처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장했던 사내 한 명이 가장 빨리 추귀를 향해 걸어갔다.
 그 옆으로는 짧은 칼자루를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사내가 뒤따라오고 있었고, 뒤에는 가장 덩치 큰 거한이 검을 슬며시 빼어 들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진천호는 편안한 자세로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만에 하나라는 추호의 의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 근방에선 삼호방 녀석들만큼 무서운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윽.
 그 순간 추귀가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는 표현은 틀렸다. 추귀가 움직였다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자각을 해야 했다.
 가장 앞에 있던 삼호방 사내들도 말이다.
 쾅-!
 가장 앞에서 껄렁껄렁 걷던 사내의 몸이 붕 떴다.
 그는 자신의 키 높이만큼 공중에 뜬 다음 얼굴부터 처박혔다.
 바닥이 박살 나고도 얼굴이 반 자 이상이나 깊이 파일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쾅-!
 그와 동시에 칼을 놀리던 사내의 머리가 천장에 처박혔다. 어느새 다가온 추귀의 무릎이 그의 턱을 찍어 올리자 천장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 역시 얼굴은 물론 목까지 천장에 박힌 채 내려오지 않았다.
 쿠왕-!
 삼호방 중 제일 강하다는 삼장이란 사내가 뒤이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추귀의 일권(一拳)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후 곧바로 벽에 부딪혔는데,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벽이 부서지며 옆방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쩌억!
 두 손으로 여인을 짓누르고 있던 두반장 형제들도 바닥에 뒹굴었다.
 추귀의 두 주먹이 그들의 얼굴에 꽂히자 공중에서 몸이 서너 바퀴 돌고, 바닥에 떨어진 뒤에도 다시 두세 번 더 돌았다.
 쩌억 하는 소리는 그들의 광대뼈가 박살이 나는 소리였다.
 “커헙!”
 진천호는 눈을 의심했다.
 빨랐다.
 아니, 빠르다는 말을 꺼낼 틈조차 없을 만큼 상대는 빨랐다. 자신의 눈으로는 추귀의 움직임을 쫓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빠르다’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이, 자신의 목은 어느새 상대의 손에 잡혀 있었다.
 “경고를 어겼다.”
 “잘··· 못······.”
 “너는 죽는다. 나는 너 같은 놈을 반드시 죽인다.”
 “사, 살려······.”
 뚝. 뚝. 뚝.
 진천호는 극한의 공포심에 자리에서 오줌을 지렸다. 사내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공포로 가득 찬 눈이었다.
 동공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충혈된 안구가 분노와 뒤섞여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그 와중에 본능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용, 용서를······.”
 추귀는 그의 부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점점 힘을 가했다.
 그러자 진천호의 눈에서 흰자위가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도가 막혀 암정색 혈관이 얼굴 위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 안 됩니다. 죽이면 안 됩니다.”
 여인이 더는 지켜보지 못하며 추귀를 말렸다. 추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를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일 심산이었다.
 여인이 다시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자는 천의문의 소공자입니다. 죽이면 큰 후환을 당하실 겁니다. 그냥 여기서 나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말에 추귀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복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천의문 소공자란 얘기 때문이었다.
 그래, 잊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음을.
 그 순간, 여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여인은 자신을 향해 무어라 말하며 손짓하고 있었다.
 다시금 가슴이 갑갑해졌다.
 “커억. 컥컥.”
 추귀가 손아귀에서 힘을 빼자 진천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잡으며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신음을 토하는 모습이 꼭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괴로워 보였다.
 추귀는 짧게 말했다.
 “꺼져.”
 “······.”
 “모두 꺼져!”
 귀청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괴성에 진천호는 초인적인 힘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다리가 풀려 있었지만, 그는 일어서서 주위의 사내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인도 합세하여 쓰러진 사내들을 전부 끌어냈다.
 “하아··· 하아······.”
 그들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혼자 있게 된 추귀가 갑자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숨이 차올랐다.
 몸속에서는 특이한 기운이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버텨야 할지 도대체 참을 수 없었다.
 살심과 함께 평정심이 뒤섞이자 추귀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누구냐······ 너는······.”
 추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가에도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억 속 여인의 손짓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기에···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것이냐······.”
 
 ***
 
 “술을 그리 처마셨는데 술값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단 말이냐?”
 “······.”
 “거기다 공짜로 객실을 내주고?”
 “······.”
 “아는 사이도 아니고, 처음 온 손님을 상대로 말이지?”
 “그게 말입니다, 사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딱-!
 천화객잔의 주인장인 유현승은 영삼의 변명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머리를 후려쳤다.
 손이 매서웠던지 영삼은 머리를 한참 동안 부여잡았다. 뒤늦게 변명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믿을 만한 놈으로 보였습니다. 인상이 더럽긴 했지만 어디서 사기 치는 놈들이랑 달라 보였습니다.”
 “너는 사기꾼이 저 사기꾼입니다, 이러는 거 봤냐?”
 “그건 아니지만······.”
 “너는 그게 문제야.”
 유현승은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말했다.
 “이번이 몇 번째냐? 저번에도 산적 놈들이 쳐들어와서 자신을 못 믿느냐고 해 값비싼 술을 내주지 않았느냐? 상대가 무서우면 나를 불러야지, 네 마음대로 판단해?”
 “죄송합니다.”
 “이놈아,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강호는 기세 싸움이다. 기세에 눌리면 이길 싸움도 항상 진다. 너는 그 뜻을 알겠느냐?”
 “아······.”
 “나를 잘 보거라.”
 유현승은 팔을 걷어붙이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 순간, 가자미로 변한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봐라. 이 눈빛이다. 누구든 날 건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이 눈빛. 설사 네놈이 날 죽이더라도 내 눈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 기세! 이제 좀 알겠느냐?”
 “···네.”
 영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주인의 눈에서 전혀 위압감이나 살기가 풍기지 않았다.
 오히려 쉽게 무시할 정도의 미약한 가소로움이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반박을 하지 못했다. 말하면 또다시 무어라 얘기가 나올 것 같기에 그냥 넘어갔다.
 유현승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 당장 네 목을 치기 전에 그자에게 돈을 받아와라. 술값 열 냥에, 대실비 세 냥하고 외상값 한 냥 붙여서 열네 냥이다. 빠짐없이 받아와.”
 “하지만······.”
 영삼이는 유현승에게 사내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통 놈과는 다른 무시무시한 놈이라고.
 태어나 그리 무서운 녀석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이어진 유현승의 말에 영삼은 자신의 입을 곧바로 막아버렸다.
 “시끄럽다! 못 받아오면 네놈의 한 달 수당은 없을 줄 알아라!”
 유현승은 휙 돌아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영삼은 제대로 항변도 해보지 못한 채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第三章 인피면구
 
 
 
 영삼은 사내가 묵고 있는 객실로 걸어갔다.
 객실은 천화객잔 옆에 붙은 건물이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응? 이게 뭐지······.”
 삼 층 객실로 향하던 그는 바닥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단순이 싸움이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핏자국이 너무나 많았다. 이 층 두 자 너비의 계단에도 묻어 있었고, 난간에도 묻어 있었다.
 그리고 올라갈수록 핏자국이 더욱 많아졌다.
 영삼이 객실에 도착하자 문이 반쯤 부서져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핏자국이 이곳 문 앞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었다.
 ‘위, 위험해, 이자는······.’
 영삼은 충동적으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인생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긴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이 무서운 녀석에게 얽혔다가 자신의 목표에 방해라도 된다면 크나큰 문제였다.
 하지만 이대로 내려갈 순 없었다. 주인장이 뭐라 말도 못 붙였다는 걸 알면 정말로 한 달 급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끼이익.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추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덜거리는 판자문을 반쯤만 열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영삼은 난간 옆에 찰싹 기대고는 벌벌 떨며 말했다.
 “엿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잘 지내시고 있나 확인하려고 온 것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추귀는 그런 영삼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별다른 말도 붙이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그 순간, 영삼은 태어나 몇 번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용기를 냈다.
 “저기······.”
 추귀가 고개를 약간 돌리며 반응을 해왔다.
 “으힉! 사, 살펴 가십시오. 제가 방은 잘 정리해 놓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추귀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계단을 내려갔다.
 “하아, 하아······.”
 영삼은 계단에 주저앉아 한숨을 몰아쉬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이제야 든 것이다.
 가슴이 진정되자 영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너덜거리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악!”
 핏자국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푹 꺼져 버린 바닥에도 있었고, 뚫려 버린 천장에도 있었다.
 벽 쪽에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만한 구멍도 보였다
 영삼은 두려움에 소리쳤다.
 “이 새끼는··· 사람 새끼가 아냐!”
 
 ***
 
 추귀는 객잔을 나와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여전히 기피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곧 그들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다.
 어디에 숨어 있든 발견할 것이고,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자신을 회유하려 들 것이다.
 결국, 그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또한 그 이후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추귀는 가까운 산을 찾았다.
 그가 산을 찾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인피면구 때문이다.
 인피면구는 흔히 돼지 살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제작 방법은 꽤나 어려워 아무나 만들지는 못한다.
 제작자가 어느 수준이냐에 따라 그 결과물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추귀는 돼지 살을 이용한 인피면구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주로 상대를 속이거나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인피면구를 쓸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추귀는 돼지 살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돼지 살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냄새도 나고, 접착력도 떨어진다. 돼지기름도 흘러나와 오래가야 반나절이 한계였다.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다는 것과 재료를 구하기 쉽다는 이점 따위를 상쇄시키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렇기에 추귀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중원에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눈도 속일 만한 자신만의 방법을 말이다.
 황궁무고의 인피면구에 관련된 서책에 의하면 인피면구의 훌륭한 표피(表皮)는 사람의 얼굴이라 했다.
 둘째가 동물이다. 셋째는 나무나 식물이었다.
 하지만 추귀는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임무를 거치는 동안 표피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과 수액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중 하나가 아교(阿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반수(膠礬水)였다.
 아교는 불을 붙이는 데 쓰이는 것과 접착체로 쓰이는 것으로 나뉜다.
 어떤 것을 쓰느냐에 따라 어떤 식으로 접착이 될지가 판가름 났다.
 그리고 교반수는 색을 입히는 과정에 쓰이는 것으로, 얼굴에 붙인 뒤 피부색과 같게 칠하는 수액 같은 역할을 했다.
 어느 정도 덧칠하느냐에 따라 얼룩지는 현상을 막아주고 접착면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추귀는 아교를 구하기 위해서 산을 탔다.
 아교는 동물이라면 어느 것에서든 추출할 수 있지만, 그중 최상급은 토끼다. 성분은 돼지에서 뽑아낸 것과 같지만 인피면구를 쓰기엔 가장 최적이었다.
 토끼를 사냥하면 곧바로 강이나 바다로 갈 것이다.
 교반수를 만드는 작업에 적당량의 물과 아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시진 후, 표피를 제외한 재료를 모두 구한 추귀가 마을로 내려왔다.
 인피면구를 당장 제작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그들이 오기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의 얼굴로 할지 생각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아직은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추귀는 과거의 기억 중 하나인 서화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화문을 모른단 말인가? 항주에서 제일 멋있는 성이 바로 서화문이라네. 세 개의 성에 둘러싸여 삼대성(三大城)이라 하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있을 것이네.”
 길 가던 노인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서화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치 철갑을 두른 사내처럼 세 개의 성에 둘러싸여 있었다. 안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나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구조였다.
 추귀는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서화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과거에 자신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시나 대역죄를 지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서화문으로 들어간 후, 자신의 존재를 찾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조금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였다.
 추귀가 외성을 따라 걸을 때쯤 대문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두 명의 중년인의 대화가 들렸는데, 멀리서도 확연히 들릴 만큼 목소리가 컸다.
 “이번에 천의문에서 지원을 나선다지?”
 “그렇다고 하네. 어제 대대적인 공표를 했다고 하더군. 이번에 서화문에서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그들이 나선다고 해도 쉽게 제압이 되겠나. 흑련문(黑練門)은 항주가 아닌 절강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문파 아닌가?”
 “그래도 천의문일세. 항주에서 제일가는 문파 아닌가. 거기다 천의문의 호법들도 대대적인 지원을 나선다고 했으니 제아무리 흑련문이라 해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야.”
 “쯧쯧쯧······ 올해 서화문은 참으로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군. 작년에는 산괴에 활동하는 사마회(邪魔會) 두목이란 녀석도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나. 재작년은 또 어떤가. 수령패(水令牌) 패주도 서화문에 껄떡대지 않았는가?”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영웅호걸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 서화문의 소령 소저가 대단한 미인이란 소문 탓이니까 말이야. 천의문에서 그리 나오는 것도 서화문이 대단한 부를 축척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대공자와 이어주려는 생각에서이지 않겠나.”
 ‘천의문?’
 대화를 듣던 추귀는 잠시 고민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그것도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놈들이 천의문이라 했던가······.’
 
 ***
 
 “악마야··· 그놈은 악마라고······.”
 진천호는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집으로 들어온 직후부터 일어나지 못했다.
 특별히 다친 부분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공포 때문이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그때의 그 사내가 나타나 자신의 목을 짓누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구한테 당했다고?”
 진천호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때였다. 훤칠한 키의 미공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공자 진가운(眞可澐)이다.
 그는 차기 소문주로 불리는 사내답게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마침 진천호의 옆을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가 그를 먼저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진가운이 고개를 끄덕이곤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시선은 누워있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진천호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평소에 얼굴도 보기 힘든 진가운이 나타난 것이다.
 거기다 자신의 방까지 친히 방문해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당한 것이냐? 어찌하다 당한 것이야?”
 “처음 본 녀석이었습니다.”
 “처음 본 녀석이라고? 처음 본 녀석이 무슨 일로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무엇 때문에?”
 순간, 진천호는 반사적으로 단광석 얘기를 꺼내려다가 급히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가운의 성격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남을 배려하고 협의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 그는 누구보다 철저하고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단광석 얘기를 꺼내면 괜히 화가 자신에게까지 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천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길에서 작은 시비가 붙었습니다. 상당한 고수라 제가 데려갔던 삼호방과 두반장 형제가 모두 당했습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나 있었습니다. 만약 옆에 있었던 여인이 말리지 않았다면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게 내가 뭐랬느냐? 그런 애송이들과 어울리다 언젠가 경을 칠 거라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이 어떤 시기냐? 서화문과 연을 이을 중요한 이 시기에 그런 사고를 치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겠느냐?”
 그 말에 진천호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소문이 났습니까?”
 “다행히 그놈들은 치료를 받게 하고 여인은 돈을 주어 멀리 보냈다.”
 그 말에 진천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큰형님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분명 그들은 천의문 무사들에 의해 소리 없이 제거됐을 것이다.
 진천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가운이 말을 이었다.
 “내 이번 일을 특별히 송(宋) 호법님께 부탁을 했다. 그러니 너는 빨리 일어나 괜한 소문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여라.”
 “송 호법님이라면··· 설마.”
 “그래, 우리 천의문을 대표하는 삼대호법 중 한 분이시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왔다.
 시퍼런 대도를 어깨에 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풍기는 분위기는 강호의 노고수였지만 얼굴은 나이에 맞지 않게 동안이었다.
 패섬철도(敗殲鐵刀) 송(宋).
 항주뿐만 아니라 절강에까지 알려진 자로, 천의문 문주 진백양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삼대호법 중 하나였다.
 천의문을 대표하는 고수 중 한 명으로, 무공뿐만 아니라 사교성도 있어 장로와 원로 같은 수뇌부들과 두루두루 친했다.
 거기다 충성심이 강해 문파에서 일어나는 굵직굵직한 일에 자주 관여했다. 처리하기 까다로운 일들을 직접 나서서 해결해 문파 내에선 해결사라 불리기도 했다.
 진천호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저분을 어떻게?”
 “내가 직접 아버님께 부탁하여 모시고 왔다. 네가 당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라도 하면 본문의 위신이 크게 떨어질 것이 아니냐. 더구나 비공식적인 일이니 조심히 처리해야 함은 물론 뒤탈이 없어야 하니 송 호법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형님······.”
 진천호는 진가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눈빛을 내비쳤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진가운이 곧 있을 서화문과의 관계 때문에 이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호의적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송 호법의 등장으로 인해 진정되지 않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송 호법을 본 순간부터 그 악귀의 눈빛이 왠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송 호법에 대한 진천호의 믿음은 컸다.
 “수고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진가운이 그를 향해 짧게 부탁했다.
 서열은 자신이 높지만 문주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실력자였다.
 “제가 늘 하던 일입니다. 대공자님의 부탁도 있고 하니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송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는 대공자 진가운은 어느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천화객잔 주인장 유현승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섬뜩했다.
 마치 칼날에 베일 정도였는데, 웬만한 무림고수라 하더라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만큼 강렬했다.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영삼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머리를 쑥 집어넣어 가슴에서 바로 얼굴이 나올 것처럼 목이 보이지 않았다.
 “이 병신 같은 녀석!”
 딱-!
 영삼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다시 몸을 움츠렸다. 무슨 변명을 한다고 해도 오늘 그의 화를 풀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그놈에게 말도 못 붙였단 말이냐?”
 “주인님도 아시겠지만 보통 사내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묵은 방은 천장이며 바닥이며 벽에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온통 핏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둠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확실합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우리도 크게 경을 칠 것이······.”
 쫙-!
 유현승은 또다시 영삼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곧바로 큰 소리로 외쳤다.
 “강호 신출내기 주제에 어디서 지레짐작을 해? 네놈은 누가 우리 뒤를 봐주고 있다 생각하느냐?”
 “그야 구, 구용문이지요.”
 “그래. 구용문이다. 구용문이 항주에서 몇 번째로 손꼽히는 문파냐?”
 “못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든다 했습니다.”
 “그래. 천의문, 서화문과 함께 항주 삼대문파 중 한 곳인 구용문이 우리 뒤를 봐주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고작 낭인 무사 한 명에게 말도 못 붙였단 말이냐?”
 유현승은 곧 영삼이 죄송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이쯤 했을 때면 항상 자신의 잘못을 고해왔다.
 그런데 영삼은 평소와 다르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법 할 말이 있는 듯 열변을 토해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우리 뒤를 구용문이 봐준다는 얘기는 이 근방에 있는 자들이라면 웬만해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나온다는 것은 그 사내에게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딱-!
 오늘따라 뒤통수를 많이 맞는 영삼이었다.
 “이놈이 서책을 무지하게 봤군. 일 끝나고 들른다는 그 책방에서 말이야. 대체 어디냐?”
 “예?”
 “그놈이 어디에 있냐고!”
 그 말에 영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시려고요?”
 “당연하지.”
 “아, 안 됩니다. 가면 어르신도 당한다구요. 그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또다시 손이 날아오려 하자 영삼이 급히 움츠리며 말했다.
 “앞장서거라.”
 “예? 제가요?”
 “정말 죽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 가야지요. 예엡.”
 영삼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직까지는 겁을 떨쳐내지 못했는지 따라오는 유현승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이내 가자미눈을 한 그의 눈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다시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추귀는 아교와 교반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인피면구에 가장 중요한 표피가 없었다. 아직 어떤 표피를 쓸지 정하지 않았기에 구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들어오자마자 그는 한쪽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정에 보고하고 장강까지 전력 질주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마차로 항주까지 도착하는 데 하루, 그리고 이곳에서 하루가 지났다.’
 보고 후 지금까지 소요된 시간은 총 나흘이었다.
 ‘보고가 끝난 다음 날에 내가 사라진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흘에서 하루를 뺀다. 사흘이다. 그들이 곧바로 대책을 세운 뒤 수하들을 파견하기까지 적어도 반나절이 걸렸을 것이다. 사흘에 반나절을 뺀다. 이틀 반이다. 경신법으로 항주까지 이동하는 데 일류고수라면 보름, 절정이라면 나흘이다. 상대가 절정이라 생각하고 이틀 반나절에서 나흘을 뺀다.’
 하루 반.
 통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들이 항주에 도착하는 시간은 하루 반이었다.
 물론 칠사귀를 보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이라면 적어도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대고수라는 천귀나 살귀 정도면 이틀 안에도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귀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자신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막연한 추측으로 임무 수행 중인 칠사귀까지 파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여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냈을 수하들 수준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내가 서화문에 잠입하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보면 된다. 하루 반이란 시간이.’
 쪼르륵-
 추귀는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는 준비해 온 두 양동이의 내용물을, 작고 가는 대나무 통에 교반수와 아교를 각각 구분해서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 끝을 무명천으로 몇 겹으로 동여 감쌌다. 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추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눈.
 인피면구는 눈까지 가리지 못한다. 얼굴 형상만 복원해 낼 뿐, 눈동자는 변화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눈은 적색이다.
 어떠한 것으로도 변하지 못한다.
 추귀는 급히 탁자 위에 놓인 면경을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본 것이다.
 “헉!”
 그 순간 추귀가 신음을 토해냈다.
 눈동자가··· 적색이 아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새빨갰는데 지금은 달랐다.
 “어찌 된 건가···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추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굵은 상처들이 여기저기 보여 표면상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느껴진다.
 변화가 생기고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자신의 몸에 작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혹시··· 사술이 풀리면서 오는 변화인가?’
 추귀는 한참 동안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살심이 조금 줄어든 정도, 그 이외에는 딱히 추측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이내 고민을 거뒀다. 적어도 나쁘지 않은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은 확신했다.
 추귀는 윗옷을 벗었다.
 창가의 빛을 통해 중원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암기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부터 손등으로 이어지며 팔목을 감싸고 있는 얇은 두 개의 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자검(刺劍)이었다.
 끝이 뾰족하고 기다란 장침처럼 보였지만 손등에 가려서 언뜻 보기에 반지를 착용한 것처럼 보였다.
 추귀는 암동 안에서 시술을 거친 후 지금까지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 자검은 첫 임무에 성공하고 얻은 암기였다.
 과거 첫 임무를 성공한 칠사귀는 철장로(鐵匠老)라는 노인에게 원하는 병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받았던 것이다.
 추귀가 왼쪽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팔목에 매어져 있는 세 개의 둥그런 팔찌가 보였다.
 탄혈주(彈血珠)였다.
 이것도 그쯤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추귀는 철장로를 몇 번이고 찾아갔다.
 근거리인 자검과 중거리인 탄혈주의 단점을 보안하기 위해 또 다른 암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어깨에 나선형으로 메어져 있는 원대(圓帶) 안에 박힌 암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세필 굵기의 쇠침으로, 양쪽에 날이 있는 원기둥처럼 생겼다. 이것은 점혈침(點穴針)이라 불리는데, 멀리 있는 상대를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만든 병기였다.
 추귀는 길고 가느다란 암기들을 점검하며 마지막으로 복대에 두른 연검처럼 얇은 원반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철장로가 만든 암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임무 수행 중 정말 우연히 얻은 암기였다.
 일 년 전, 사파의 거두라는 흑혈신마를 죽인 적이 있었다.
 당시 흑혈신마라고 하면 중원을 대표하는 사파 고수였는데, 칠사귀 전원이 투입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어렵사리 그를 죽일 수 있었고, 그의 거처를 조사하는 와중에 발견한 것이다.
 암기 옆 글귀 때문에 자신이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암혼탈영표(暗魂奪影鏢)를 다룰 수 있는 자.
 천하 위에 군림할 것이다.
 
 무림인들이라고 해도 암기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한다고 해도 비수나 단검 같은 흔하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을 사용한다.
 당문이 주력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추귀같이 독특한 암기를 가지고 돌아다니지 않는다.
 칠사귀는 더욱 그랬다.
 그들은 역시 마공을 대성한 후 다시는 암기에 의존하지 않았다. 검과 도, 그리고 창은 효용성이 크기 때문에 몇 명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것 이외에는 어떤 무기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추귀는 확실히 다른 칠사귀와는 달랐다. 그는 절정에 올라서도 어렸을 때 익혔던 십팔반무예를 잊지 않고 있었다.
 십팔반은 실팔기라고도 불리며 열여덟 가지 병장기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무예는 그 무기를 부리는 기술이란 뜻으로, 하나같이 크고 다루기가 어려운 무기들을 익히는 기술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십팔반무예의 참 뜻은 만병기(萬兵技)를 다룰 수 있는 살인기술이었다.
 병기든 암기든, 무엇이든 살인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십팔반무예였던 것이다.
 추귀가 검 외에 다른 병장기를 들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효용성 때문이었다.
 병장기들은 흔히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맞는 병기를 찾기는 힘들었다.
 추귀는 암기들을 최종 점검하며 잠시 빼두었던 검을 허리에 찼다.
 그러고는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창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최근에 떠오른 기억들이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언젠가 칠사귀와 부딪치게 될 터였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만 분명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두 손 놓고 당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들의 얼굴은 보고 죽어야 하니까.
 추귀는 가부좌를 틀었다.
 여의신공.
 애초에 어디서 시작된 무공인지 모른다. 어디로 흘러왔는지, 누가 창시했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자인지 말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검식에 대해서도, 초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상과 생활에 대해 담고 있었을 뿐이다.
 
 검(劍)은 하나의 병기일 뿐이다.
 도(刀) 역시 그러하며, 창(槍) 역시 그렇다.
 그대는 지금 무엇에 얽매여 수련하는 것인가.
 투로를 그려라.
 믿고 따른다면 분명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추귀가 한동안 여의신공의 구절을 떠올릴 때였다.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리다 누군가 문을 열었다.
 
 
 
 第四章 송(宋)
 
 
 
 “저자가 맞느냐?”
 진가운의 말에 진천호는 선뜻 말을 내뱉지 못했다.
 천화객잔에 들어온 순간부터 뛰기 시작한 가슴이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빠지고 있었다.
 송 호법이 옆에 있다는 생각에 잠시 진정이 되었다가도 사내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마, 맞습니다. 저놈이 맞습니다.”
 “그래?”
 진가운의 시선이 자연스레 방 안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마디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저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진가운은 사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송 호법을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대충 행색을 보아하니 사내에게선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 자신이 나서도 되겠느냐는 일종의 표시를 송 호법에게 보낸 것이다.
 그의 행동에 송 호법은 고개를 저었다.
 “고수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행동을 보건대 평범한 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리하시겠습니까?”
 “예. 뭐, 금방 끝날 겁니다. 젊은 날에 꽤 싸움을 즐겨 했나 본데, 객지에서 배운 것과 정통무공은 엄연히 다르지요.”
 스르릉-!
 송 호법은 거대한 도를 꺼내며 추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진가운이 한 발짝 슬쩍 물러섰다.
 “기대하겠습니다, 송 호법님.”
 평소의 그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진가운 역시 어떠한 상대라도 자신이 있었고, 그런 자들을 양보할 만큼 도량이 넓지 못했다. 하지만 송 호법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누구보다 예의를 다했다.
 문주만큼이나 그는 송 호법을 신뢰하고 있었다.
 “······.”
 추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상념을 멈추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의신공은 왠지 모르게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투로(鬪路).
 여의신공은 늘 검이든 도든 병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오직 세상에 펼쳐진 투로를 그리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그것은 늘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고, 수련을 하면 할수록 높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추귀가 눈을 뜨자 그제야 네 명의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 명은 낯이 익었고, 두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장 왼편에 있는 사내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송 호법··· 호법이라.’
 그를 유심히 보던 추귀의 눈에 이채가 일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생각한 듯 그에게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이봐,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 아느냐?”
 송 호법이 자신감 있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바로 천의문의 진 공자님이시다. 항주에서 천의문을 건든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단 말인가?”
 추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송 호법은 사내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생각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게 기회를 주겠다. 지금 바로 진 공자님의 가랑이 밑으로 개처럼 짖으며 기어가거라. 그리하면 편안하게 생을 마감시켜 주는 선에서 끝내도록 하지.”
 ‘기분 탓인 건가.’
 송 호법의 행동을 지켜보던 진천호는 마음이 서서히 진정됨을 느꼈다.
 엄청난 무위를 보였던 사내가 송 호법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 호법은 계속 얘기했다.
 “뭐 하는가?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빨리 막내 공자님께 가서 용서를······!”
 와장창-!
 그가 말하는 와중이었다.
 추귀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했다.
 갑자기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부순 뒤 밖으로 몸을 내던진 것이다.
 순간, 송 호법도 반사적으로 창가로 몸을 던졌다.
 항주의 이름 있는 고수답게 재빠른 상황 판단을 한 것이다.
 진가운은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어댔다.
 “하하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나 보구나.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송 호법님은 단 한 번도 도망가는 적을 놓친 적이 없다!”
 
 ***
 
 항주로 통하는 관도에는 하루에도 수십 대의 마차가 달린다. 제법 부유한 가문이거나 상단에 관련된 사람들, 또는 직책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닌다.
 성도의 최고 직책은 군사를 부리는 도지휘사다.
 그들은 사두마차를 타고 다닌다. 연례행사가 있을 때는 육두마차를 타고 다닐 때도 있다.
 육두마차는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타고 다니는 마차였다.
 그런데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팔두마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거기다 휘황찬란한 금차(金車)는 더더욱 보기 어려웠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팔두금차 안에 있는 자들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쭈글쭈글한 얼굴의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장년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바로 혈승과 조호였다.
 “혈승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말이냐?”
 “추귀의 상태를 말입니다. 정말로 사술이 풀렸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입니다.”
 “······.”
 “사술은 완벽했습니다. 시술하고 난 뒤 추귀가 특이한 행동을 보이곤 했지만, 그 이후로 절대로 명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단순히 자신의 고향을 물어본 것이라면 추귀는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구태여 우리가 찾을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음.”
 그들은 추귀의 고향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수십 년 전에 모은 천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고향을 일일이 알아두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항주는 확실히 아니었다. 칠사귀의 기억 속에 심어놓은 고향은 석양이라는 곳이었다.
 그런데 추귀가 다른 곳을 자신의 고향이냐고 물었으니 혼란스러웠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말입니다.”
 조호가 말을 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습니다. 추귀가 임무 수행에 능통하다곤 하지만 칠사귀 중 고작 한 명입니다. 거기다 가장 약한 자입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추귀가 칠사귀 중 가장 약하다고 누가 그러느냐?”
 “예?”
 조호가 잠시 머뭇거리다 혈승을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동안 수행해 온 보고서에 따르면 추귀는 이름 있는 자들을 상대한 적이 없습니다. 임무의 면면을 보고 칠사귀의 무공을 확인해도 그 능력이 낮은 것으로 조사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혈승이 불쑥 물었다.
 “추귀의 무서운 점이 뭐인 줄 아느냐?”
 “······.”
 “바로 마공을 익히지 않은 것이다.”
 조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으로 마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가장 약하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혈승은 달리 말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천하제일의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약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만약 그가 마공보다 더 강한 무공을 발견한 것이라면 어떻겠느냐?”
 “······!”
 “우리가 구해온 수십 가지 무공들은 전부 하나같이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무공들이다. 그런 무공 중 우리가 미처 몰랐던 대단한 무공이 없다고 어찌 장담하겠느냐?”
 조호가 이해가 된다는 듯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그의 이름을 추귀라 붙인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임무 중 그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쫓고자 하면 상대가 누구든 쫓지 못할 자가 없었지. 만약 그가 마음을 먹고 우리에게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
 “무슨 수를 써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회유해야 한다. 만약 회유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놈이기도 하지.”
 조호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칠사귀는 살인귀들이었다.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하고 하는 것보다 칠사귀인가 아닌가가 더욱 중요했다.
 한편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혈승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추귀는 다른 칠사귀와 다르게 자기 생각을 벗어난 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강한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조금 특이한 칠사귀 중 한 명으로, 임무 수행 능력은 상급, 무공은 하급으로 분류해 놓았을 뿐이다.
 ‘설마 그때 그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말인가.’
 칠 년 전······.
 암동에서 술법을 시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일곱 명의 가신들과 함께 추귀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추귀는 자신과 함께 의식을 진행하는 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소리 질렀다.
 그때의 말이 워낙 강렬해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 너희를 반드시 기억하겠다!”
 
 ***
 
 추귀가 서화문 안으로 숨어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힘들다는 것에 있었다.
 숨어서 하는 단순한 조사만으로 해결하기에는 자신이 가진 정보가 너무나 없었기 때문이다.
 호연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리하기 위해선 문파 내 모든 사람과 대면을 해야 했다.
 설령 모든 사람을 조사한다고 해도 어떤 사정으로 인해 문파를 비운 사람들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 결과적으로 장시간 머물면서 조사를 해야 했는데, 그런 정보를 찾기는 시간상으로 매우 부족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이 천의문이었다.
 소문으로는 천의문에서 서화문 쪽으로 대대적인 지원을 나선다고 했다.
 또한, 호법이란 고수들도 파견 나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송 호법이란 사내도 간다고 봐야 했다.
 만약 그로 변장해서 서화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잠입하는 것보다는 기억 속 여인을 찾는 게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추귀는 급히 달아나는 듯했지만, 산속으로 도망치는 사람답지 않게 동작이 매우 능숙했다.
 몇 시진 전에 인피면구를 제작하면서 이곳 지리를 기억했다. 하여 야트막한 산이라도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한 번 보고 지리를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추귀는 달랐다.
 과거 대수술로 인해 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을 넘어선 상태였다.
 “게 섰거라!”
 뒤에서 송 호법이 미친 듯이 뛰어왔다.
 여간해서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그는 어느새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하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쫓아가던 송 호법은 전력을 다해볼까 하는 생각에 내공을 좀 더 끌어 올렸다.
 그 순간, 도망가던 상대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제야 송 호법은 그와 거리를 좁히며 지척까지 다가갔다.
 “흥! 도망갈 힘이 빠졌나 보지?”
 뛰어난 경공술을 가진 상대였지만 송 호법은 아직도 상대가 자신보다 강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항주에서 근 삼 년 동안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추귀가 뒤돌아서며 천천히 송 호법을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송 호법과 시선을 맞추었다.
 “송? 이름이 송인가?”
 그의 목소리에 송 호법이 조금 당황했다. 갈갈하고 매우 낮은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눈빛도 그러했다. 전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눈동자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내가 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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