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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왕자

2021.05.20 조회 74,354 추천 1,851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17년째 되는 1417년, 세자 이제가 원로대신 곽선의 첩 어리를 강제로 취한 것이 들통 났다.
 
  또다시 세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궐담을 넘나들고 있다.
 
  이에 원경왕후 민씨는 효령대군 이보와 충녕대군 이도를 불러들였다.
 
 
  # 중궁전.
 
  “효령.”
 
  좌정한 후에도 한참동안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군들을 바라보던 원경왕후 민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보를 불렀다.
 
  “네, 마마.”
  “세자에게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닐 겝니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세자는 어리를 강제로 취할 때 이보와 닮은 점을 이용해 그를 사칭했다. 이에 원경왕후는 또다시 피해를 본 둘째아들을 다독였다. 세자는 예전부터 이보가 불공드리는 절에서 살생을 하는 등 동생을 놀림거리로 삼았다.
 
  “허허, 서운하지 않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러자 이보는 언제나처럼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보는 불교에 심취한 후로 화를 낸 적이 없다.
 
  “충녕.”
 
  이어서 원경왕후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셋째아들을 불렀다.
 
  “네, 마마.”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이도가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뿔이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서책을 멀리하고 정양에만 신경 쓰세요.”
 
  원경왕후는 감기가 다 나은 것을 알기에 추운 날씨임에도 중궁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후는 이도에게 독서를 금하라 명했다.
 
  대신들은 파락호인 지금의 세자 이제 대신 학식이 풍부한 이도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청하고 있었다. 이들의 청을 물리치려면 이도가 왕위를 이을 재목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
 
  하지만 이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허, 어찌 아무 말도 없으신 겝니까? 어서 대답하세요.”
 
  원경왕후는 손바닥으로 서안을 탁탁 내리치며 이도의 대답을 독촉했다. 2차 왕자의 난 때 지아비의 복수를 하겠다며 창을 들고 뛰쳐나갈 정도로 성정이 대단했던 왕후의 기세가 중궁전을 뒤덮었다.
 
  “마마, 정양에 힘쓰겠습니다. 하오니 독서를 금하라는 명만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독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대군 이도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리 해야만 모두가 살 수 있음을 어찌 모른단 말입니까? 자중하고 또 자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고집을 꺾지 않고 더 강하게 다그쳤다.
 
  세자가 훗날 왕위에 오른다면 그의 자리를 위협했던 대군은 이방원의 배다른 형제들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반대로 대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폐세자는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동생 4명을 임금의 손에 잃은 원경왕후는 아들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다.
 
  “하오나······.”
  “그만하면 아우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아우님, 그렇지요?”
 
  이보가 다시 항변하려던 이도의 말문을 막고 참으라 눈짓했다.
 
  “알겠습니다.”
 
  이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미에게 거짓을 고하진 않겠지요. 내 충녕을 믿습니다. 이만 일어나보세요.”
 
  대답을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원경왕후는 이도에게 단단히 일렀다.
 
  “네, 마마.”
  “세자와 충녕의 성정이 바뀌었으면 좋았을 것을······. 한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 어찌 이리 다를고.”
 
  나가는 이도의 귀에 원경왕후의 한탄이 비수처럼 박혔다. 어찌 아들에게 파락호 짓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단 말인가.
 
  “하아.”
 
  중궁전에서 멀어지자 이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하하. 땅 꺼지겠소. 아우님께서 심히 원통했나 봅니다.”
 
  이에 이보가 웃으며 말했다.
 
  “형님은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우리가 어찌 이리도 핍박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하, 그것이 팔자인 걸 어쩌겠습니까. 아우님, 이 참에 나랑 같이 절밥이나 얻어먹고 다닙시다.”
 
  이도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이보가 함께 절에나 다니자고 권유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에 심취한 왕자는 절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
 
  “싫습니다. 고기도 없이 어찌 밥을 먹습니까.”
 
  이도가 질색하며 말했다. 이도는 고기반찬 없이는 밥을 넘기지 못했다.
 
  “하하, 고기가 아니라 왕위를 버리지 못하는 게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이보가 웃는 낯으로 이도를 은근히 떠보았다.
 
  “······. 아닙니다.”
 
  잠시 멈칫했던 이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허, 서책을 보면 뜻을 펼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내 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이제 그만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아야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이도는 부정했으나 이보는 동생에게 욕심이 있다고 확신했다.
 
  1년 전 이도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서 좌의정 남재는 “주상께서 잠저에 계실 적에 학문을 권했더니 ‘왕자에겐 소용도 없는데 학문은 해서 무엇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왕의 아들이라면 임금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한 적 있습니다. 지금 대군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 마음이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남재가 이방원의 예를 들어 이도에게 왕위에 도전하라고 보란 듯이 권하자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경악했다. 만약 왕위에 뜻이 없었다면 이도가 나서서 남재를 크게 꾸짖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도는 침묵을 지켰다.
 
  다음 날부터 이도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세자가 신의왕후(이방원의 생모)의 제삿날 매형이 아끼는 기생을 취하려 하자 이도는 “세자저하,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세자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세자는 이도가 말만 번지르르한 소인배에 심약하다 헐뜯었다.
 
  왕자들 간의 대립으로 도성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찌 자꾸 내려놓으라 하십니까? 전 형님처럼 북으로 다스릴 욕심 같은 건 없습니다.”
 
  이보가 계속해서 왕위를 포기하라 강권하자 이도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보는 몇 해 전까지 절에 들어가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쳤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이도는 이보가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번뇌에 빠졌던 것이라 짐작했다.
 
  “하하하, 내가 아우님께 한방 먹었구려.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한 번 쳐보세요. 아우님의 재능이라면 북소리가 무척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보는 동생의 타는 속을 모르는 척 더 크게 웃었다.
 
  “대군마님, 큰일 났습니다.”
 
  그때 사가의 머슴 석삼이 이도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석삼아, 웬 호들갑이냐?”
  “금군이 들이닥쳐 대군마님의 서책을 모두 수레에 싣고 있습니다. 어명이랍니다.”
 
  이도의 물음에 석삼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뭐라? 아바마마께서?”
 
  책을 빼앗으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는 말에 이도는 눈을 부릅떴다.
 
  “하하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한 뜻이 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이보는 이방원이 왕권강화를 위해 지난해 원경왕후의 남은 두 동생들마저 모두 죽인 후 소원했던 부부 사이가 이도 덕분에 좋아졌다며 크게 웃었다.
 
  “형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서책이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독서를 금하란 말은 숨도 쉬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울화가 치민 이도는 눈물을 글썽이며 원경왕후 앞에서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압니다. 알다마다요. 같은 처지인 내가 어찌 아우님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왕위 욕심을 버리세요.”
 
  하지만 이보는 끝내 왕위를 포기하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하아. 그놈의 왕위, 왕위, 제발 그만하십시오. 그냥 서책이나 읽겠다는데 어찌 다들 믿지 못하십니까?”
 
  이도는 답답한 가슴을 내리치며 말했다.
 
  “허허, 알겠습니다. 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자 이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떠났다.
 
  “마님······.”
  “그래, 어서 가자꾸나.”
 
  석삼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이도는 서둘러 사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충녕대군 사저.
 
  “멈추어라. 내 전하께 여쭙고 올 것이다.”
 
  사저에 들어선 이도가 내금위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절대 멈추지 말라는 어명이 있었사옵니다.”
 
  그러자 종사관이 이도에게 다가와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종사관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일이 그르쳤음을 느낀 이도는 빠른 걸음으로 사랑채를 향해 걸어갔다.
 
  이도가 사랑채 앞에 당도했을 때는 군관 두 명이 책을 한 아름 들고 나오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마당에 있는 수레에 책을 옮겨 싣다 떨어뜨렸다.
 
  수백 번을 읽는 동안 닳고 닳아 언제든 찢어질 듯 위태로와 더 소중히 다루던 ‘대학’이다.
 
  군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당에 떨어져 있던 대학을 툭툭 털어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먼지가 풀썩이는 모습을 본 이도의 눈에 불이 번쩍했다.
 
  “종사관.”
 
  이도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종사관을 불렀다.
 
  “네, 대군 대감.”
  “내가 죄인인가?”
  “······.”
 
  이도의 기백에 압도된 종사관이 눈알을 떼구르 굴렸다.
 
  “대답하라. 내가 죄인인가?”
 
  이도가 서늘한 목소리로 더 크게 물었다.
 
  “아니옵니다.”
 
  종사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면 어찌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방을 드나드는 것인가?”
  “주상전하의 어명이라······.”
 
  종사관은 그제야 이도의 질문 의도를 깨닫고 변명을 했다. 양민의 처소라도 주인 허락 없인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이다.
 
  “아바마마께서 날 죄인처럼 다루라 하셨단 말이냐?”
 
  이도는 종사관의 말을 끊고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아니옵니다.”
 
  “헌데 어찌 감히 날 죄인 취급하느냐? 나 충녕은 한 치의 죄도 없다.”
 
  그동안 참아왔던 이도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 책을 압수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충녕대군의 건강을 염려한 임금의 배려일 뿐이다. 사대부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도 경을 칠 일인데, 대군의 집은 두말할 것도 없는 중죄다. 대군을 일개 군사들이 죄인취급 했다는 말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 죽음으로 죄를 씻어야 한다.
 
  “대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종사관은 황급히 자리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종사관은 충녕대군이 만류하더라도 무조건 책을 압수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눈이 멀어 절차를 무시한 것을 자책했다.
  그러자 군사들도 책을 내려놓고 방에서 뛰쳐나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후, 서책을 수거해야하는 자네의 입장도 이해하네.”
 
  잠시 화를 누그러뜨린 이도가 종사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일은 묻어두겠다. 그리고 서책도 내 손으로 직접 내놓겠다. 그 뒤에 자네 눈으로 확인하면 되지 않겠는가.”
  “감사합니다. 대감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행하겠나이다.”
 
  살길을 열어주자 종사관은 바로 이도의 뜻을 따랐다.
 
  “군사들은 들으라. 이 서책들은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나를 대하듯 조심히 옮겨줬으면 좋겠구나.”
 
  이어서 이도가 군사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부했다.
 
  “네, 대군대감.”
 
  이도의 말에 내금위 군사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석삼아, 따라오너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도는 잘하면 책 한 권은 건질 수 있겠다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도는 차분히 서재에 남아있는 책들을 석삼이에게 건네면서 한 권을 병풍 뒤로 슬쩍 밀어 넣었다. 송나라 문인인 구양수와 소식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집 ‘구소수간’이다.
 
  “이게 전부다. 확인해 보거라.”
 
  구소수간을 제외한 책을 모두 꺼낸 뒤 이도는 서재 문을 활짝 열고 종사관에게 말했다.
 
  “혹시 들어가도······.”
  “크흠.”
  “아니옵니다. 확인 했습니다.”
 
  종사관은 서재에 들어가려다 이도의 찌릿한 눈총에 포기했다.
 
  이윽고 내금위 군사들이 떠나고 서재엔 이도만 남았다.
 
  “이제 정말 끝인가 보구나.”
 
  이도는 휑한 방안을 둘러보며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에겐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도의 마음 속 깊은 곳엔 왕이 되고 싶은 야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왕수업 대신 계집질에만 열중하는 큰형에게 조선을 맡기면 어찌 될지 걱정도 됐다.
 
  왕조를 창건한 지 25년 밖에 되지 않은 조선은 아직 임금의 권위가 백성들 마음 깊이 자리 잡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연회 때 남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남재의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가 웃음으로 넘겼을 때, 세자에게 충녕을 본 받으라 꾸짖었을 때, 세자가 험담하자 두둔했을 때, 이도는 어쩌면 부왕의 복심이 자신을 향할 수 있다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부왕마저 자신에게 눈을 가리고 바보처럼 살라 권하고 있다. 이도는 아릿한 심장을 움켜쥐었다.
 
  한참 만에 마음을 진정시킨 이도는 조심스레 병풍을 젖혀보았다.
 
  자신이 구한 유일한 책, 구소수간을 발견한 이도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너만은 구했구나.”
 
  조심스레 구소수간을 집어든 이도는 책 밑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지?”
 
  이도는 구소수간 밑에 있던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댓글(105)

자손e    
와하학 스마트폰!
2021.05.20 07:46
지나95    
치트 * 치트 ㄷㄷ
2021.05.20 08:29
바위벌레    
마지막 장 스마트폰이 — 스마트폰을
2021.05.20 08:49
문환    
수정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5.20 08:50
모하는거야    
갤에서 재밋게 봣어요.. 여기서두 화팅
2021.05.20 09:03
ph*******    
건필하세욧
2021.05.20 09:06
g5135_songpa20022    
대역갤 홍보 보고 왔습니다. 재밌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건필하세요
2021.05.20 09:16
promethium    
대붕이가 왔다 감..
2021.05.20 09:32
ps******    
와! 더블 치트키!
2021.05.20 10:38
아타오    
연참해!
2021.05.20 11:05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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