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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21.07.02 조회 40,939 추천 478


 어제와 같은 오늘.
 요양원 침대에 누워만 있은 지도 벌써 석 달.
 변한 건 없었고 일말의 희망도 없다.
 
 “어르신, 오늘은 어떠세요?”
 
 요양보호사의 질문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치료를 받지 못해 온몸으로 퍼진 암 덩어리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빠르게 갉아먹는 중이었다.
 
 “이젠 떠날 때가 된 거 같네요.”
 “어르신,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 힘을 내셔야죠.”
 
 진통제도 이젠 먹히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지긋지긋했던 삶을 이젠 정말 끝내고 싶다.
 또다시 강한 고통이 온몸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내는 순간, 귀로 들리는 낯선 목소리.
 
 “이젠 괜찮아질 거야.”
 
 목소리를 찾아 초점 잃은 시선을 돌리자, 요양보호사 옆에서 밝게 웃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그 사내의 손이 가슴에 닿자, 몸을 찢는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힘겹게 숨을 내뱉던 호흡도 편안해졌다.
 
 “고맙습니다. 새로 오신 보호사님이신가?”
 “저 김 보호사예요.”
 “아니, 김 보호사님 옆에 계신 분.”
 “어르신, 여기 저밖에 없어요.”
 
 여전히 웃는 사내를 두고 김 보호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놀리는 걸까?
 김 보호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심각한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김 보호사를 잡을 힘조차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 보호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경환 어르신 말이에요. 이젠 헛것까지 보이나 봐요.”
 “섬망 증상인가?”
 
 보호사의 보고에 요양원 원장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서류를 뒤졌다.
 
 “의사도 며칠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하더니. 구청에 미리 연락해서 장례절차를 준비하자고.”
 “가족은 못 찾았나요?”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혈혈단신이야. 고생을 많이 하셨어.”
 “가족도 없이 안타깝네요.”
 “인생이 다 그런 거지. 갈 때는 혼자 가는 거니까.”
 
 무연고자를 대상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 들어온 것은 행운이었다.
 마지막은 쓸쓸하지 않아도 되니까.
 여전히 웃고 있는 사내를 향해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을 힘겹게 들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이 사내가 보이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말로만 듣던 저승사자?
 검은 도포에 갓도 쓰지 않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사내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이젠 죽는 거겠군요.”
 “아마도.”
 
 덤덤하게 답하는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가요?”
 “글쎄. 어디든 가지 않겠어?”
 “그렇군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정말 지긋지긋했으니까.”
 “후회는 없고?”
 
 매 순간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왜 난 고아였을까.
 왜 난 휴학을 밥 먹듯이 하면서 대학을 다녔을까.
 왜 난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했을까.
 왜 난 가족도 만들지 못하고 쓸쓸하게 늙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을 요양원에서 초라하게 맞이하게 된 걸까.
 그러나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는 후회보다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달라질 수 있다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얼마 만에 나오는 웃음인지 기억도 없다.
 침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는 농담으로는 도가 지나쳤다.
 아무리 이 사내가 저승사자라 해도.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이젠 데리고 가 주세요.”
 
 미소를 거둔 사내는 빠르게 침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사내의 입으로 뻗어 나온 차가운 냉기가 침상 전체를 휘감았다.
 
 “내가 누리지 못한 50년을 주려고 하는데, 선택은 네가 해.”
 “그게··· 무슨.”
 “시간이 없어. 50년, 받을 거야 말 거야?”
 
 험악한 표정으로 변한 사내는 선택을 강요했다.
 77세의 나이.
 늙은 몸으로 50년을 더 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건 그렇고.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자신이 누리지 못한 50년을 주겠다니.
 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1분 후면 넌 죽어.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어.”
 
 1분 후면 죽는다.
 그 순간 징글징글하게 괴롭혔던 삶이 마지막 순간에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그 정도로 삶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사내의 재촉에 머리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살고 싶어···.”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침상에서 멀어진 사내는 안도한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이번엔 잘살아 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누구신가요?”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그리고 미안했다.”
 
 말을 끝낸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다시 몸을 뒤덮으면서 마지막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깊숙한 곳으로 자취를 감췄던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 떠올랐다.
 
 “아···.”
 
 
 ****
 
 
 “이경환 씨!”
 
 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경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요양원이 아닌 건 분명했다.
 낯설지만 익숙한 곳.
 이곳은?
 
 “회사가 모텔이야? 어제 뭐 했길래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아?”
 
 상황파악이 먼저다.
 환자복이 아닌 양복 차림이라니.
 급히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화면으로 비친 얼굴은 절대 77세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급한 마음에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2008년?’
 
 핸드폰으로 확인한 날짜는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숨이 턱 막혔다.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았다.
 
 ‘꿈일까?’
 
 철썩!
 
 후려친 뺨이 얼얼하다.
 또다시 꼬집은 허벅지로는 강한 통증이 느껴진다.
 절대 꿈은 아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서 50년 전으로 돌아오다니.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상황에 경환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쭈, 이젠 대답도 안 해?”
 “?”
 
 기억을 빠르게 훑었지만, 5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건 쉽지 않았다.
 눈을 부라리고 호통을 치는 사내.
 
 ‘박···, 뭐였는데.’
 
 사내의 성이 박 씨란 것만 떠올랐을 뿐,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기억을 뒤지는 사이, 위쪽에 앉은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 대리, 넌 성질 좀 죽여. 이러다 또 그만두면, 난 이제 모른다.”
 “제가 뭘 어쨌다고···.”
 “너도 신입 때, 내 속 많이 썩였잖아. 올챙이 시절 생각해서 잘 가르쳐.”
 “제가 언제 과장님 속을 썩였다고 그러세요?”
 
 그 순간.
 희미하던 기억의 조각들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분명 죽음을 앞둔, 아니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77세의 노인일 뿐인데,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은 기억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했다.
 
 ‘저 사람은 이해원 과장, 이 사람은 박지상 대리.’
 
 50년 전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돌아온 기억과 함께 50년 전의 모습과 말투, 행동까지, 모든 걸 한순간에 변화시켰다.
 77세의 노인에게서 풍기는 말투와 행동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50년 전으로 돌아오면서 얻은 능력일지도.
 
 ‘그렇다면 여긴 씨원.’
 
 이곳은 첫 직장이었던 주식회사 씨원(Sea One).
 무역과 관련한 서류, 무역 대행, 통관, 물류를 대행하는 포워딩 업체로 직원 수는 40명 여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포워딩 업계에선 나름 견실한 기업으로 평가받는 회사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하는 걸까?
 마른침만 삼키는 경환의 뒤로 박지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재차 들렸다.
 
 “비엘 서렌더(Surrender) 건 어떻게 됐냐고 물었잖아.”
 
 박지상의 말에 경환은 여전히 눈만 껌뻑거렸다.
 꿈이든 생시든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정신 안 차릴래?”
 
 또다시 박지상의 목소리에 경환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가까운 국가와의 거래 시, B/L(선하증권) 원본보다 화물이 먼저 도착하는 경우, 서류 지연에 따른 비용을 줄이기 위해 수입자는 팩스나 메일로 먼저 서렌더 B/L을 받아 통관과 화물 인수를 진행한다.
 당연히 서렌더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회사의 어떤 비엘을 서렌더하라는 건지.
 50년 전의 일을 똑똑히 기억할 정도로 천재는 아니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이해원 과장을 힐끗거린 박지상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자리를 옮겼다.
 
 “이미영 씨, 동성상사 서렌더 건은 어떻게 됐죠?”
 “마스터 비엘은 서렌더 했고, 하우스 비엘 원본은 오전에 동성상사로 넘겼어요. 그거 이경환 씨가 다 처리했는데?”
 “처리했다고요?”
 “네. 이경환 씨가요.”
 
 선사가 발급하는 Master B/L과 포워더가 발급하는 House B/L.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경환은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동성상사라고 적힌 파일명을 클릭해 날짜별로 정리된 파일 중에서 가장 최근의 파일을 찾았다.
 박지상이 말하던 서렌더 건은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땐 나도 열정이 넘쳤었지.’
 
 대기업 입사에 모두 실패하고 어렵게 찾은 첫 직장.
 복잡한 무역과 물류 절차를 익히기 위해 밤을 새웠다.
 B/L 뒷면을 영문으로 빼곡하게 채운 약관을 사전을 찾아가며 해석했고, 선사와 해외 파트너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퇴근과 동시에 학원으로 달려가 무역영어를 배웠다.
 그건 모두 50년 전의 일이었다.
 
 “이경환 씨.”
 “네?”
 “퇴근하고 술 한잔하자.”
 
 
 ****
 
 
 무교동 뒷골목.
 
 “내가 말 놔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아닙니다.”
 “동생 같아서 그런 거야. 한잔하자.”
 “네.”
 
 잔을 부딪치고 단번에 소주잔을 비웠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짜릿함.
 소주가 이렇게 달다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렬한 소주 맛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더는 77세의 노인이 아닌, 27세의 젊은이였다.
 
 “넌 왜 장돌뱅이를 선택한 거야?”
 “장돌뱅이요?”
 
 경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워딩 말이야.”
 “아.”
 
 다른 나라에선 포워더를 무역과 물류의 전문가로 대우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포워더는 전문가가 아닌 장돌뱅이로 취급받는다.
 그건 포워더 간의 경쟁이 심한 탓도 있지만, 화주들이 운임을 후려치는데 포워더를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도 다 떨어지고 갈 곳이 이곳밖에 없었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죠 뭐.”
 
 박지상의 말에 경환은 부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포워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합격한 곳이 이곳 씨원이었으니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좋았다더라고. 컨테이너 하나에 2천 불도 남겼다던데, 지금은 백 불이면 굿, 오십 불이면 낫베드야. 핸들링 차지라도 청구하면 쌍욕부터 박는 곳도 있어. 개자식들.”
 
 포워딩 업계의 미래는 밝지 않다.
 대기업은 분사를 통해 직접 물류 업체를 운영하면서 파이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포워딩 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마진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빈 소주잔에 잔을 채운 경환은 한숨을 깊게 내쉬는 박지상을 바라봤다.
 
 “해 준 만큼 당당하게 받으면 될 텐데?”
 
 잠시 경환을 바라보던 박지상은 피식 웃고는 소주잔을 비웠다.
 
 “너 일한 지 석 달 됐지?”
 “네.”
 “이 바닥은 아직도 학연, 지연, 혈연이 없으면 영업 자체가 안 돼. 화주가 죽으라면 우린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당당하게 받을 수 있는 건 부조금뿐이야.”
 
 미래의 기억이 없었다면 박지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당당하게 받을 방법이 있다면요?”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런데, 그런 방법은 없어.”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경환을 두고 박지상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도 한 대 주세요.”
 “너 안 핀다고 하지 않았어?”
 “언제 죽을지 아는데, 가릴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박지상에게서 담배 한 개비를 받아 불을 붙였다.
 군대에서 잠시 피웠던 담배는 경제적인 이유와 건강 때문에 끊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50년 동안은 죽을 일이 없으니까.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를 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아직은 씨원이 필요해.’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마인네스입니다.

새롭게 경영물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완결까지 열심히 글을 쓰겠습니다. 

매일 오전 8시에 연재 글을 올리겠습니다. 


마인네스 배상.


댓글(30)

고망    
응원합니다.
2021.07.07 11:56
ma******    
새연재 축하드려요. 응원합니다.
2021.07.07 13:05
흑돌이    
잘 보고 갑니다.
2021.07.07 18:35
홍당무1212    
경영물은 이 작가님걸 가장 좋아합니다. 화이팅 ㅋㅋㅋ
2021.07.07 22:27
풍뢰전사    
건필하세요
2021.07.14 15:34
굽네인간    
근데 성공한 영업사원할 정도면 회사차리는게 낫지않나
2021.07.17 08:22
푸른평원    
잘 보고 갑니다.
2021.07.21 10:14
물물방울    
연재시작을 축하합니다.
2021.07.21 10:16
n8***********    
흡연 마인드가 짱!! 선작 박아봅니다
2021.07.22 07:54
n8***********    
다만, 골골대다 갈 수도 있다는 거.. 숨만 붙었다가 일흔에 꼴까닥
2021.07.22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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