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백우천추 [E]

백우천추 1권 1화

2014.11.27 조회 1,805 추천 9


 序章.
 
 
 “흐윽……흐으윽.”
 담장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아이에게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노인이 다가섰다.
 “얘야, 왜 우느냐?”
 슬며시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는 아이는 양쪽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오른 데다 입술도 터져 선혈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모질게 얻어맞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쯧쯧쯧.”
 혀를 찬 노인은 아이의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떤 놈이 이런 몹쓸 짓을 하였을꼬.”
 “…….”
 아이는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느냐?”
 노인이 재차 물은 후에야 아이는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조운(陳祚雲)이요.”
 “복을 내리는 구름이라, 참으로 좋은 이름이구나. 허허헛.”
 빙긋이 웃고 난 노인은 슬며시 왼손을 진조운의 얼굴 아래로 들이밀었다.
 “이게 뭘까?”
 “어……?”
 진조운은 화들짝 놀랐다.
 노인의 손바닥 위에 주먹만 한 청광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자연스레 진조운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청광과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조운은 언제 울었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죠?”
 “무공.”
 “피이.”
 진조운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쭉였다.
 노인이 허허롭게 웃으며 물었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느냐?”
 “그게 뭐가 무공이에요? 무공은 검으로 이렇게, 이렇게…….”
 “얼씨구!”
 진조운이 제법 그럴듯하게 허공에 양팔을 놀리자 기가 찬 노인이 곱게 눈을 흘겼다.
 “이 손바닥 하나면 충분하거늘, 무엇하러 귀찮게 도검을 사용한단 말이냐? 도검을 휘두르는 건 하수들의 무공일 뿐이니라. 자고로 고수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노인이 손바닥을 가볍게 털어 냈다.
 츄앗, 파팍!
 손바닥 위에 떠 있던 청광이 일 장이나 날아가 지면에 작렬하자, 대뜸 어른 머리통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구덩이가 파였다.
 “와아!”
 진조운의 눈에는 그 광경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신기하게 보였다.
 “어떠냐?”
 “굉장해요!”
 “바로 이런 상승의 무학을 배워야만 천하를 굽어볼 만한 고수가 될 수 있는 법이란다.”
 “저도 그런 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좋은 스승을 만나면 가능하지.”
 “할아버지 같은 분요?”
 “허험.”
 헛기침을 하고 난 노인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진조운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끄응.”
 노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진조운은 재빨리 따라 일어나 노인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행여 노인이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냥 떠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어……?”
 한데 소매가 손 안에서 구겨졌다.
 진조운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팔이…… 팔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노인이 왼팔을 내밀었다.
 “이쪽을 잡았어야지.”
 “예?”
 “오른팔은 먼저 보냈단 말이다.”
 “어디로요?”
 “황천으로.”
 “아……!”
 진조운은 그제야 노인이 오른팔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공을 익힌 강호인들 중엔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팔이 하나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노인이 더욱 살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와 약간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조운은 황급히 노인의 왼팔을 붙잡고 재촉했다.
 “어서 가르쳐 주세요.”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상승의 무학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럼요?”
 “상승의 무학을 배우고 싶으면 이 할아비를 따라 저 멀리, 산수(山水)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이다.”
 “멀리요?”
 “그래, 멀리!”
 진조운의 표정이 대뜸 침울해졌다.
 “하지만 전 어머니를 지켜 드려야 하는데…….”
 “싫으면 할 수 없고. 이거 놓아라.”
 노인이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진조운은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다.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놓으래도!”
 “자, 잠깐만요.”
 “왜?”
 뚫어져라 노인을 바라보던 진조운이 뜬금없이 물었다.
 “할아버진 좋은 사람이죠?”
 “글쎄다.”
 “할아버진 좋은 사람이 틀림없어요.”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비록 팔은 하나뿐이지만 신령님처럼 멋지게 생겼잖아요.”
 “……어린 녀석이 보는 눈은 있구나.”
 노인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어린아이의 칭찬이었지만 그리 듣기 싫지는 않았다.
 사실, 용모 하나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기도 했다.
 진조운이 넌지시 물었다.
 “얼마나 걸리죠?”
 “뭐가?”
 “상승의 무학을 배우는 거요.”
 “한 삼 년쯤?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고…….”
 애매모호한 말이었지만 진조운의 귀에는 삼 년이란 말만 들어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진조운이 다짐받듯 물었다.
 “정말 삼 년이면 배울 수 있는 거죠?”
 “자질과 오성이 뛰어나면 가능하지.”
 “전 어떤데요?”
 “글쎄다. 괜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은 이번에도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조운은 스스로 꽤나 총명하다고 생각했기에 삼 년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께 허락을 받고…….”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 어머니께선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게다.”
 어머니를 떠올린 진조운의 얼굴에 서서히 그늘이 드리워졌다.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어떡하련?”
 고개를 푹 숙인 진조운은 힘없이 말했다.
 “할아버지를 따라가 무공을 배우고는 싶지만 그러면……어머니를 지켜드릴 수가 없잖아요.”
 “네 아버지가 계시질 않느냐?”
 “그분은……!”
 진조운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어린아이의 눈빛치고는 사뭇 매서웠다.
 “어머니와 절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어머니를 지켜드릴 수가 있겠어요!”
 노인은 진조운의 사정을 이미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기에 부드럽게 말했다.
 “사내가 뜻을 세웠으면 거침없이 밀어붙여야 하는 법이니라. 정에 얽매여 머뭇거리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게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한참을 생각하고 난 진조운은 노인을 향해 꾸뻑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그러고는 총총 걸음으로 담장을 돌아 사라져 버렸다.
 “허허, 마음 씀씀이가 어찌 저리 갸륵할꼬.”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호인들이 제자를 거두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바로 자질과 심성이었다.
 자질이 좋지 않은 제자는 가르쳐 봐야 보람이 없고, 자질은 좋은데 심성이 좋지 않은 제자는 보람은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호에선 머리가 커진 제자가 사부를 배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노인이 보기에 진조운은 자질과 심성을 고루 갖춘 아이였다.
 저런 아이를 제자로 거두면 가르치는 보람도 있을 것이고, 평생토록 사부를 떠받들며 살 터였다.
 노인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남겨 주셨으니,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겠습니다.”
 평생토록 갈고 닦아 온 절학을 전수해 줄 만한 제자를 찾기 위해, 지난 십 년 동안 천하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끝내 마음에 드는 인재를 찾을 수 없었다.
 하여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염왕도(閻王島)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우연히 진조운을 발견한 것이다.
 노인은 지난 사흘간 진조운의 주위를 맴돌며 주변 환경을 면밀히 살폈다.
 결론은 천생무골(天生武骨)에 심성마저 고운 아이였다.
 적어도 노인의 눈엔 그리 보였다.
 게다가 진조운은 무공을 배우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담장에 숨어 무사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을 힐끔거리는 모습을 몇 차례나 목격했던 것이다.
 결심을 굳힌 노인은 호기심을 자극하여 진조운을 꼬여 보려 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노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녀석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날 밤, 절강 땅의 한 아이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第一章 귀향
 
 
 항주(杭州)의 자랑, 서호(西湖)!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진 서호는 오늘따라 그 자태가 더욱 황홀하고 신비로웠다.
 호변에 서서 서호를 바라보는 건장한 청년.
 그는 비록 입은 옷이 낡았지만 용모만큼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청년이었다.
 청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단아한 모습의 여인.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분의 모습만은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더없이 포근하고 한없이 따뜻했던 분!
 ‘어머니……!’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립고도 그리웠던 어머니.
 이제 곧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그분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청년은 서호를 감싸듯이 자리 잡은 옥황산(玉皇山)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굳건한 의지와는 달리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오늘 같은 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제는 그 누구도 어머니를 멸시하지 못하리라!
 청년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지난 구 년 동안 갖은 고통을 참아 내며 힘을 길러 왔다.
 어머니를 지켜 드릴 힘을!
 이 우스꽝스러운 세상과 당당히 맞서 싸울 힘을!
 팟!
 청년은 옥황산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구 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던 소년, 진조운.
 마침내 그가 장성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 * *
 옥황산 아래 자리한 커다란 장원.
 대문의 처마 밑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백호검문(白虎劒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장원의 대문 앞에 멈춰 선 진조운은 매서운 눈빛으로 현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백호검문은 그의 부친이 창건한 문파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진조운과 어머니는 백호검문의 모든 가솔들로부터 따돌림과 멸시만 받았었다.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어머니는 첩(妾)이고, 자신은 첩이 낳은 서출(庶出)이기 때문이었다.
 진조운은 문득 가슴 아픈 옛일이 떠올랐다.
 악귀 같은 이복형제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짓밟힌 뒤 돌아온 자신을 힘껏 부둥켜안고 설움에 북받친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당시 진조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지옥이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이복형제들이 죽도록 미웠고, 어머니와 자신을 그처럼 살도록 방치한 부친이 너무나 야속했다.
 ‘더 이상은 멸시 받으며 살지 않으리라.’
 현판을 노려보며 굳게 다짐한 진조운은 장원의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 어딘가에 계실 어머니!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를 뵙고 싶었다.
 장성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해후를 마친 연후엔, 바로 어머니를 모시고 미련 없이 이 지긋지긋한 장원을 떠날 터였다.
 어머니를 편히 모실 수 있을 만큼 자랐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 따윈 남지 않았다.
 어릴 적, 진조운은 눈치가 보여 매번 쪽문으로만 장원을 출입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리라.
 쾅쾅!
 진조운이 힘주어 문을 두드렸다.
 끼이이익!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대문 밖으로 걸어 나온 중년무사가 진조운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진조운이라고 밝히면 알아볼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어릴 적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는데, 구 년이나 지난 지금 그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달리 신분을 밝힐 방법도 없었다.
 “난 진조운이오.”
 역시나 무사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조운……?”
 “어머니와 함께 별채에 살았었소.”
 설명을 곁들이자 무사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별채의 그 개구…….”
 무사는 얼른 하던 말을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버릇처럼 개구멍받이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비록 서출이었지만 진조운은 엄연한 장문인의 핏줄이었다.
 눈앞의 청년이 진조운이라 확신할 수 없으나 어쨌거나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무사는 의심에 찬 눈초리로 다시 한 번 진조운의 위아래를 훑었다.
 “별채에 살던 공자께선 십여 년 전에 제 발로 집을 뛰쳐나갔다가 객사했다고 들었소만?”
 진조운은 씁쓸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객사라니.
 아마도 모두들 자신이 그리되길 바라고 있었기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퍼졌으리라.
 진조운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말했다.
 “잘못된 소문이오. 이젠 들어가도 되겠소?”
 무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무작정 들여보낼 수는 없으니, 일단은 안에 들어가 여쭈어 보고 가부(可否)를 결정하겠소.”
 진조운은 무사가 개구멍받이란 말을 흐렸을 때부터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개구멍받이는 어릴 적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수많은 욕 중에서도 가장 듣기 싫은 욕이었다.
 그런 욕을 돌아오자마자 들을 뻔했다. 아니, 들은 거나 다름없었다.
 “난 당장 들어가 어머니를 뵈어야겠소.”
 진조운이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건 안 되…… 허억!”
 무사는 재빨리 따라 들어와 그 앞을 가로막았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조운이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의 두 눈에 지독한 살기와 함께 시퍼런 광채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막 뛰쳐나온 야차의 눈빛이 저러할까?
 진조운이 곁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사는 감히 더 이상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
 그는 두 번 다시 진조운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 *
 장원의 서쪽으로 걸음을 옮긴 진조운은 애증이 뒤섞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 가꾸어진 연못, 이복형제들은 헤엄도 못 치는 그를 저 연못에 처박아 놓고는 좋다고 낄낄거렸었다.
 그리고 연못가의 정자 대들보엔 거꾸로 매달려 죽도록 얻어맞다가 끝내 피가 거꾸로 쏠려 정신을 잃었었다.
 돌이켜 보면 추억이랄 수도 없는 더러운 기억이었지만, 그래도 연못과 정자 주변의 풍경이 예전처럼 아름다운 모습만은 보기 좋았다.
 진조운은 문득 저 풍경처럼 어머니도 예전같이 건강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에 젖어 걷다 보니 가산(假山, 정원에 돌을 쌓아 조그맣게 만든 산)이 보였다.
 가산 옆으로 난 소로의 초입엔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진조운은 느티나무를 정겹게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 그대로구나.”
 이복형제들에게 얻어맞고 난 후엔 어김없이 이 느티나무 뒤에 숨어 얼굴과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곤 했다.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께서 그러한 사실을 아시면 크게 슬퍼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조운은 소로로 접어들었다.
 이 소로를 따라 가산 뒤로 돌아가면 어머니의 처소인 별채가 보이리라.
 가산이 햇살을 가로막아 언제나 그늘졌던 별채는 부서진 창문 틈으로 비바람이 몰아쳤었다.
 별채는 어머니와 그의 처지를 말해 주듯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께선 지금도 그 별채에서 지내고 계실까?
 부서진 창문은 수리를 하셨을까?
 지난겨울 추위가 유난히 매서웠는데 혹여 병환이라도 얻지는 않았을까?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 왔다.
 홀연히 사라진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으셨을까!
 별채가 가까워질수록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진조운은 그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무사하시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어머니만 무탈하다면 그것만으로 한없이 기쁠 터였다.
 앞으로는 절대 어머니와 떨어져 살지 않으리라!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리라!
 ‘어머니,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불초 소자 조운이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소자가 장성하여 돌아왔으니 더 이상은 아무 걱정도 마십시오. 소자가 여생을 편히 모실 것입니다. 어머니께 매일 맛난 요리도 해 드리고, 어머니를 편히 모실 수 있는 참한 여자에게 장가들어 어여쁜 손자도 안겨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한바탕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머니의 인자한 얼굴이, 정겨운 음성이, 따스한 손길이 너무나 그리웠다.
 드디어 별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진조운의 눈빛이 거세게 일렁였다.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고, 온몸엔 말로는 표현 못 할 전율마저 느껴졌다.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사립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 진조운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은은한 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설마 어머니께서 몹쓸 병환이라도 얻으셨단 말인가!
 “어머니!”
 크게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마음이 불안해진 진조운은 황급히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을 지나 방문 앞에 다다른 진조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너무나도 미약한 탓이었다.
 우려가 현실이란 말인가!
 드르륵!
 진조운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그리웠던 어머니던가!
 한데 얼굴이 왜 저리 수척해지셨단 말인가? 머리카락은 언제부터 저리 희끗해지셨고!
 ‘세상 그 누구보다 고운 분이셨거늘.’
 황급히 침상으로 다가간 진조운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떨리는 손을 내밀어 뼈마디 앙상한 손을 부여잡았지만 어머니는 미동도 없었다.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조운이 돌아왔습니다!”
 크게 소리쳐 보아도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힘겨운 호흡만 잇고 계실 뿐.
 “어머니!”
 뜨거운 눈물이 진조운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무엇보다도 건강하시기만을 바랐건만, 이처럼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누워 계신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홀연히 사라진 자신을 그리워하다 병환을 얻으신 걸까?
 가슴이 너무나 쓰라렸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납치하여 구 년 동안이나 오도 가도 못하게 섬에 처박아 둔 사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울컥 설움이 북받친 진조운은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 * *
 진조운의 오열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다, 당신 누구에요?”
 이어 소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조운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이 집안사람들에게만큼은 절대로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조운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십칠팔 세가량의 아리따운 소녀가 겹겹이 쌓아 묶은 약봉지를 들고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진조운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 따스함이 가득한 눈빛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조운이 나직이 말했다.
 “가영…… 나다.”
 툭.
 소녀의 손에서 약봉지가 떨어졌다.
 “조, 조운 오라버니?”
 목소리에선 가는 떨림이 일었다.
 “그래.”
 진조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녀의 눈에 금세 이슬이 맺혔다.
 진가영(陳佳英).
 그녀는 진조운의 이복누이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진가영은 정실의 소생인 적출, 진조운은 첩의 소생인 서출이었다.
 어릴 적, 진조운이 그녀의 오라비들에게 흠씬 얻어맞고 훌쩍일 때면 어김없이 진가영이 나타나 위로해 주곤 했었다.
 남몰래 먹을거리도 챙겨 주었고, 친구가 없던 진조운에게 말벗이 되어 주기도 했었다.
 백호검문의 가솔들 중 그녀만이 유일하게 진조운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었다.
 “흐흑, 오라버니!”
 울먹이며 다가온 진가영이 진조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어떻게 된 거죠?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다 이제야 돌아온 거예요?”
 궁금한 게 많을 터였다. 하지만 그간의 일을 어찌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슬며시 손을 빼낸 진조운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어머니께선 언제부터 이리되셨느냐?”
 진가영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매일같이 오라버니의 이름을 되뇌며 그리워하시더니…… 한 달 전부터 이렇게 몸져누우셨어요.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지만, 약을 드시고도 쉽게 떨치고 일어나시질 못하셔서…… 죄송해요.”
 힘없이 고개를 숙인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조운은 얕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은 어머니를 보살피지 않은 부친에게 있었다.
 진조운은 치미는 분노를 참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의 심중을 눈치챈 진가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하고 계세요. 아버진…….”
 “그만둬!”
 진조운은 버럭 소리쳐 진가영의 말을 막았다.
 부친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았다.
 울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던 진조운은 표정을 바로 하고 진가영을 돌아보았다.
 “가영, 고맙구나. 어머니를 보살펴 준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그런 말 마세요. 오라버니가 돌아왔으니 아주머니께서도 이젠…….”
 순간, 진조운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해졌다.
 아주머니!
 잊고 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너희들은 내 어머니를 그리 불렀었지.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 기생 년이니, 창부 년이니 별의별 욕을 다하며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죄, 죄송해요.”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진가영이 곧바로 사과했지만 진조운의 표정은 싸늘했다.
 “이제부턴 내가 어머니를 보살필 것이니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오라버니.”
 “돌아가!”
 “…….”
 잠시 애처로운 표정으로 진조운을 바라보던 진가영은 바닥에 떨어진 약봉지를 집어 한쪽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힘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진조운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아버지가, 부친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를 따뜻하게 보살펴 줄 거라곤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어머니께서 이렇듯 몸져눕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좋습니다. 당신이 이렇듯 모질게 나온다면……!’
 진조운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만에 하나라도 어머니께서 일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집안을 모두 불태워서라도 복수하고 말리라.
 어머니를 멸시하고 괴롭힌 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복수를 하리라.
 ‘지옥의 악귀라 해도 좋고, 살귀라 불려도 상관없다. 나 진조운은 너희들이 우리 모자를 멸시한 대가를 백배, 천배로 되갚아 줄 것이다.’
 * * *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킨 진조운은 침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췌해진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깊은 설움이 북받쳤다.
 “이제부턴 소자가 어머니를 지켜 드릴 것입니다.”
 진조운은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침상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던 진조운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울적한 마음을 털어 버린 진조운은 조심스레 어머니의 맥을 짚었다.
 사부에게서 약간의 의술을 전수받았기에 어중이떠중이 돌팔이 의원들보다는 실력이 출중한 그였다.
 어머니의 맥은 너무나 미약했고,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불규칙했다.
 “으음?”
 맥을 살피던 진조운은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괴이한 기운이 어머니의 경맥을 따라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진조운은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체내에 구소진기(九푑眞氣)를 불어넣었다.
 구소진기는 청명한 하늘의 기운으로, 어떠한 기운이라도 포용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괴이한 기운은 구소진기에 반발하지 않고 곧바로 한데 어우러졌다.
 진조운은 그제야 괴이한 기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군가 진기를 불어넣어 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하려 했던 흔적이었다.
 또한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다.
 괴이한 기운은 어머니의 체내를 돌며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누구지?’
 내력이 깊은 내가고수여야만 이런 치료가 가능했다.
 누구인지 자못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깨어나신 연후에 여쭤 보는 수밖에.
 어쨌거나 병이 생긴 가장 큰 원인은 탁한 기운이 경맥을 가로막아 기의 순환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괴이한 기운이 탁한 기운을 어느 정도 몰아내긴 했지만, 아직도 체내에 많은 양의 탁한 기운이 남아 있어 병환을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탁한 기운은 가슴앓이로 인해 생기는 법.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탓이로구나.”
 진조운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 때문에 괴로워할 때가 아니었다.
 구소진기를 주입하여 양손이 맑은 하늘빛으로 물들자, 진조운은 어머니의 전신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추궁과혈(推宮過穴)로 탁한 기운을 소멸시키려는 것이었다.
 한 시진이 넘도록 추궁과혈을 시전하니 어머니의 호흡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경맥을 막았던 탁한 기운이 어느 정도 소멸되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조운은 어머니의 등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등 뒤의 명문혈에 구소진기를 주입하여 기경팔맥에 남아 있는 탁한 기운의 찌꺼기까지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의 등에서 손을 뗀 진조운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이 어두컴컴했다.
 그새 밤이 깊은 것이다.
 앞으로 며칠만 지나면 어머니는 쾌차하실 수 있을 터였다.
 사부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구소진기는 과연 많은 효용을 지니고 있었다.
 “응?”
 상념에 잠겨 있던 진조운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별채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누가?’
 창문 틈으로 바라보니 보자기를 손에 든 진가영이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조운은 밖으로 나가려다 그만두었다.
 오늘은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창문 가까이 다가온 진가영은 창문에 비친 진조운의 그림자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오라버니, 식사를 가져왔어요. 앞에 두고 갈 테니 드세요.”
 “…….”
 진조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틋한 표정으로 잠시 동안 창문을 응시하던 진가영은 이내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가영, 고맙구나. 하지만…… 미안하다.’
 진가영은 자신을 대신하여 어머니도 돌봐주었고, 한밤중에 식사를 가져다줄 만큼 따뜻한 심성을 지닌 아이였다.
 진조운은 염왕도에 있는 동안 어머니만큼이나 그녀를 그리워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마저도 거북했다.
 부친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크기에 그럴 터였다.
 어머니만 쾌차하시면 곧바로 이 집을 떠나리라 결심한 진조운이다.
 “남남처럼 살더라도 네 은혜만은 결코 잊지 않겠다.”
 나직이 중얼거린 진조운은 침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허기가 느껴졌지만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가 이리 누워 계신데 어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진조운은 밤새 침상 곁을 지키고 앉아 어머니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날이 밝아올 즈음,
 “으……음.”
 의식이 돌아오려는지 어머니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진조운은 다급히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았다.
 “어머니!”
 어머니가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눈을 뜨고는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어머니!”
 진조운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걸까?
 어머니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어머니, 저예요! 조운이 돌아왔습니다!”
 “……!”
 어머니, 매옥향(梅玉香)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반복하니 희미하게나마 앞이 보였다.
 이윽고 진조운을 발견한 매옥향의 눈빛은 크게 일렁였다.
 “우, 운아……!”
 “어머니!”
 진조운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상체를 숙였다.
 어머니께서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실 수 있도록.
 조금은 걱정했었다.
 행여나 어머니께서 장성한 자신을 못 알아보시면 어쩌나 하고.
 “어머니! 조운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알아보다마다. 내 아가를, 내 아들을 어찌 어미가 몰라볼까! 아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진조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매옥향은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운아, 어미가 끝내 저승에 온 것이냐? 이곳에서 네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올 것을 그랬구나!”
 진조운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려 왔다.
 어머니가 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절절히 느껴졌다.
 “어머니, 여긴 저승이 아닙니다. 저도 죽지 않았고요. 어머니 곁을 떠났던 불효자식 조운이 이제야……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저승이 아니라고? 어디…… 어디…….”
 매옥향의 팔이 움찔거렸다.
 손을 들어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쇠약한 나머지 팔을 움직일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진조운은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두 손을 잡아 뺨에 가져다 댔다.
 “어머니, 소자가 느껴지십니까? 조운의 체온이 느껴지십니까?”
 “아! 느껴지는구나. 내 아가……내 아들!”
 “어머니, 으흐흐흑!”
 진조운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오열했고, 매옥향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진조운을 힘껏 끌어안은 채 소리 내어 울었다.
 구 년만의 감격적인 모자 상봉이었다.
 그 가슴 저미는 애틋함을 감히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 * *
 매옥향의 상세는 빠르게 호전되어 갔다.
 진조운이 하루에 두 차례씩 구소진기를 불어넣어 활기를 북돋웠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난 후엔 완전히 일어날 순 없었으나 상반신이나마 일으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침상에 앉아 진조운과 정겹게 얘기를 나누던 매옥향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운아, 장롱 안에서 보자기를 꺼내 오너라.”
 진조운이 장롱을 열자 과연 비단 보자기 하나가 보였다.
 보자기를 침상에 내려놓자 매옥향은 손수 매듭을 풀었다.
 그 안엔 청의 한 벌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너를 주려고 만든 옷이다. 어서 입어 보아라.”
 사부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갈의를 입고 있던 진조운은 너무나 감격했다.
 자신이 언제 돌아올 줄 알고 이처럼 미리 옷을 만들어 놓으셨단 말인가!
 진조운은 서둘러 갈의를 벗고 어머니가 만든 청의로 갈아입었다.
 재고 맞춘듯 꼭 맞았다.
 진조운은 양팔을 벌리고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어머니, 어때요?”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어떻게 제 몸에 딱 맞춰 만드셨죠?”
 “문주님만큼은 자랐을 거라 생각하고…….”
 매옥향은 하던 말을 급히 삼키고 진조운의 눈치를 살폈다.
 진조운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
 진조운은 급히 표정을 바로했다. 고작 이런 일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다니.
 스스로를 책망한 진조운은 다시금 해맑게 웃었다.
 “어머니, 전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
 매옥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 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다.
 객사했을 거라는 소문을 듣고는 혼절까지 했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헌앙해진 외모만큼이나 마음 또한 깊어져서.
 매옥향은 아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매옥향은 아들을 돌려준 하늘에 감사했다.
 모자는 다시금 마주 앉아 정겹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조운!”
 밖에서 꽤나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 년 만에 돌아왔지만 진조운은 대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도 놈은 언제나 저렇듯 사나운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내곤 했었다.
 아들의 얼굴에 분노가 어리자 매옥향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운아, 아무리 화나도 절대 함부로 행동해선 안 돼. 알았지?”
 매옥향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하여 진조운을 달랜 것이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를 안심시킨 진조운은 밖으로 나갔다.
 제법 준수한 청년이 마당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약간 비틀린 입매와 자신을 바라보는 경멸 어린 시선.
 진성(陳惺)이 틀림없었다.
 진조운에겐 두 명의 이복형이 있었다.
 눈앞의 진성과 놈의 형인 진양(陳亮).
 진조운보다 진성은 세 살, 진양은 여섯 살이 많았다.
 어릴 적, 형제는 매일같이 개구멍받이라며 진조운을 죽도록 때렸었다.
 기생 년이, 창부 년이 낳은 자라 새끼란 욕을 퍼부으면서!
 사부와 처음 만난 날, 진조운이 담벼락에 기대어 훌쩍였던 것도 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설움을 눈물로 달래기 위함이었다.
 진조운을 냉담히 노려보던 진성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렇군.”
 진조운도 마주 웃었다.
 형이지만 존대할 마음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존대고 나발이고, 당장 분풀이를 않는 것만으로도 놈은 감사해야 할 터였다.
 진성의 입매가 더욱 보기 싫게 비틀렸다.
 “네놈은 여전히 건방지고 재수 없구나.”
 “너도 만만치 않아.”
 “푸하하핫!”
 진성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진조운의 거침없는 말대꾸가 사뭇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엔 자신의 얼굴만 봐도 놀라 자지러지던 녀석이 말이다.
 진성은 갑자기 정색하고 말했다.
 “못된 놈들에게 끌려가 뒈져 버린 줄 알았다.”
 “미안하군.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아니, 오히려 기쁜데. 앞으론 심심할 일이 없을 테니. 흐흐흐.”
 진성이 비릿하게 웃었다.
 ‘예전처럼 네놈을 죽도로 짓이겨 주마’라는 표정이었다.
 진조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쪼록 그리되길 빌어 주지.”
 “빌어 줘?”
 진조운에게서 조금도 기죽은 기색이 보이질 않자 진성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한 번만 더 건방지게 반말로 지껄이면…….”
 “지껄이면 어쩔 거냐?”
 “이 개구멍받이 자라 새끼가!”
 진성이 당장이라도 내지를 듯 주먹을 쳐들었다.
 어릴 적과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욕설까지도 똑같았다.
 어릴 적이라면 맞는 것이 두려워 황급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조운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두려워하기는커녕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머금었다.
 진성은 주먹을 쳐든 채 눈을 끔뻑거렸다.
 “어라? 웃어?”
 “맞는 연습을 좀 했거든.”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퍽!
 진성의 주먹이 느닷없이 진조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듯 주먹에 실린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크윽!”
 한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맞은 진조운은 멀쩡하고, 되레 그를 때린 진성이 주먹을 감싸 쥐고 오만상을 찌푸리는 게 아닌가?
 철벽이라도 때린 듯 진성은 주먹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너…… 너, 이 자식……!”
 “연습을 했다니까.”
 담담히 웃은 진조운이 진성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그땐 지옥 구경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조심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
 진성의 안색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조운의 두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그 무시무시한 눈빛을 대하는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진성의 반응에 진조운은 내심 혀를 찼다.
 ‘쯧쯧, 고작 이런 놈에게 그토록 얻어맞았다니.’
 사실 그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세 살 차이는 너무나 큰 벽이었고, 무공까지 익힌 형제였으니 반항을 할 엄두도 못 냈었다.
 진조운은 귀찮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볼일 끝났으면 돌아가라.”
 진성은 무척 놀랐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저딴 놈에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진성은 진조운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어디서 괴이한 재주를 익힌 모양이다만, 내 손에 검이 있었다면 네놈 따윈 상대가 안 됐을 것이다.’
 검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한데 그런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단 생각도 들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이내 잡생각이라며 두려움을 털어 버렸다.
 진성은 슬그머니 주먹을 뒤로 감추며 코웃음을 쳤다.
 “흥, 같잖은 잔재주로 건방을 떠는구나. 가소로운 놈.”
 진조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쉽게 정신을 차릴 놈이 아니었다.
 상승의 무학을 잔재주라 폄하하다니.
 사부가 들었다면 ‘같잖은 잔재주에 죽도록 맞아 보련?’이라고 말하며 길길이 날뛰었을 터였다.
 진성이 차갑게 말했다.
 “내 아버지께서 널 데려오라고 하셨다. 당장 따라와.”
 진성은 여전히 어릴 적과 마찬가지로 말했다.
 ‘내 아버지’라 칭한 것은 결코 네놈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의미였고, 진조운과 같은 혈통임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진조운은 대번에 얼굴이 굳어졌다.
 진성 때문이 아닌 야속한 부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부딪혀야 함을 알았지만, 막상 부친을 만난다 생각하니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분노일 터였다.
 어릴 적부터 진조운 모자를 도외시한 부친으로서의 태도나, 병 든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려.”
 진성을 밖에 남겨 둔 진조운은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섰다.
 “문주님께서 절 찾으십니다.”
 그는 첩의 소생인 서출인 까닭에 아버지란 호칭을 쓸 수조차 없었다.
 매옥향이 불안한 신색으로 물었다.
 “어쩔 생각이냐?”
 “찾으시니 만나 뵈어야겠지요.”
 매옥향이 급히 손짓했다.
 “운아, 잠시 이리 오너라.”
 진조운이 다가가자 매옥향은 그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어루만져 주며 간절한 어조로 부탁했다.
 “부디 예의에 벗어난 행동은 삼가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거역해서도 안 돼. 알겠지?”
 진조운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
 * * *
 진조운은 진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몇 채의 전각을 지나 연무장 옆을 걸어가려니, 연무장에서 검법을 수련하고 있던 백호검문의 무사들이 저마다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힐끗거렸다.
 “저 녀석이 그 개구멍받이 진조운이라며?”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그 깐깐한 장 사형이 허락도 받지 않고 들여보냈다더라.”
 “도대체 구 년 동안이나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걸까?”
 “상관 마. 어차피 곧 쫓겨날 녀석이잖아.”
 무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수군댔지만 진조운의 귀엔 말소리들이 똑똑히 들려왔다.
 하나같이 서출인 자신을 적대시하는 자들을 보며 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그들이 뭐라 하건 개의치 않았다.
 어릴 적에도 저들은 늘 그래 왔다.
 흥미로 사람을 상처 주었으며, 험담하길 즐겼다.
 앞서 걷던 진성이 냉랭히 말했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본 문의 화근덩어리일 뿐이야.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꺼지는 게 좋을 거다.”
 진조운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연무장 위쪽에 보이는 삼층 전각 앞에 당도하자, 안에서 돼지처럼 살찐 중년인과 허리에 도를 찬 삼십 대의 무사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진조운의 위아래를 훑어본 중년인이 차갑게 말했다.
 “네놈이 살아 돌아왔다는 얘긴 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진조운을 놈이라 불렀다.
 진조운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이마 한복판에 솟아난 커다란 사마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항주에서 내로라하는 양가전장(梁家錢莊)의 주인, 양오복(梁傲福).
 그는 부친의 손위 처남으로 진성의 외백부였다.
 진조운은 어릴 적 몇 번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할 만큼 세차게 머리통을 얻어맞았었다.
 “왜 족보에도 없는 보잘것없는 서출 놈이 눈앞에서 얼씬거리느냐?”
 그것이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를 때린 이유였다.
 옛 기억을 떠올린 진조운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받았다.
 “여전히 말투가 개차반이시군요.”
 “……!”
 양오복의 안색이 대번에 해쓱해졌다.
 감히 서출 놈 따위가 말대꾸를 하다니!
 하지만 그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네놈의 주둥이가 걸쭉한 것을 보니 그냥저냥 굴러먹다 온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진조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과연 장사치라 안목이 높으시군요. 가슴에 쌓인 한이 많은데 어찌 허송세월했겠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때리고 짓밟던 놈들을 떠올리니, 없던 의욕도 생기더이다.”
 “뭣이!”
 노기가 솟구친 양오복이 대뜸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옛날처럼 진조운의 머리통을 세차게 후려갈기려 했다.
 진조운은 그런 양오복을 시린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내리쳐 보라고.
 그 뒤를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양오복의 눈빛이 크게 떨렸다.
 진조운의 눈에 어린 독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손을 내려치기만 하면 크게 사달이 날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어린놈이 건방지구나!”
 양오복이 손을 쳐든 채 주춤거리자, 곁에 있던 무사가 재빨리 팔을 뻗어 진조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개복도(開腹刀) 마룡(魔龍).
 양오복의 호위무사인 마룡은 항주에선 꽤나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는 이 기회에 진조운을 제압하여 양오복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다.
 “엇!”
 퍼억!
 하지만 그의 손이 진조운의 어깨를 잡기 무섭게 곧바로 튕겨져 나가더니, 공교롭게도 양오복의 머리통을 세차게 후려갈기고 말았다.
 “으헉!”
 부지불식간에 머리통을 얻어맞은 양오복이 기겁을 하며 비틀거렸다.
 마룡은 너무나 당황스러워 황급히 양오복을 부축했다.
 “죄, 죄송합니다.”
 “크으…… 이거 놓게!”
 거칠게 마룡의 손길을 뿌리친 양오복이 사납게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그, 그게…….”
 마룡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진조운이란 놈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은 분명한데, 어떻게 자신의 손을 튕겨 냈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호신강기였나?’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호신강기를 일으키려면 적어도 공력이 초절정의 반열에는 올라야 한다.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그 수준까지 올랐을 리가.
 ‘사술을 익힌 건가?’
 어쨌든 호위무사가 지켜야 할 주인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말았으니, 염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룡은 힐끔 양오복의 눈치를 살폈다.
 “흥, 멍청한…….”
 그 모습에 더욱 화가 치민 양오복은 크게 소매를 떨치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수하에게 얻어맞았으니 창피하기도 했고, 진조운의 독기 어린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져 놈과 언쟁을 벌일 마음도 저만치 달아났다.
 “너, 이놈. 두고 보자.”
 벌레 씹은 얼굴로 진조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 마룡도 서둘러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쯧쯧쯧.”
 허둥지둥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혀를 찬 진조운은 곧장 전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
 그가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진성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진조운의 가슴을 때렸던 손이었다.
 어느새 퉁퉁 부어오른 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려 오기까지 했다.
 아마도 뼈까지 상한 듯했다.
 진성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정말로…… 강해진 건가?”
 
 第二章 조건
 
 
 “앉아라.”
 전형적인 무인의 풍모를 지닌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백호의 가죽으로 치장한 의자에 앉아 손짓을 했다.
 백호검군(白虎劒君) 진소황(陳昭愰).
 그가 바로 백호검문의 장문인이자 진조운의 생부였다.
 구 년 만에 재회한 부자였지만, 둘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애틋한 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소황은 심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고, 진조운도 그런 부친의 반응에 대뜸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살갑게 반겨 주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했었는데, 역시나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한 진조운은 성큼성큼 걸어가 부친의 오른편에 앉았다.
 진조운을 지그시 바라보던 진소황이 준엄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돌아왔으면 먼저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아니더냐?”
 “저 같은 놈에게 어찌 도리를 바라십니까?”
 진조운의 가시 돋친 반문에 진소황은 일시 얼굴에 노기를 드러냈지만 곧바로 표정을 가라앉혔다.
 “모름지기 사내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진조운이 말을 끊었다.
 “찾으신 용건이 저를 훈계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으음.”
 침음을 삼킨 진소황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훈계를 듣고 싶지 않다면 언행을 바르게 하면 될 터, 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울컥 화가 치민 진조운이 벌떡 일어섰다.
 “지금 제 심정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격분한 진조운은 갑자기 말을 삼켰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앉아라!”
 진소황의 호통에 진조운은 이를 악다물었다.
 어릴 적, 자신과 어머니가 모진 설움을 받아도 부친은 시종일관 모른 척했다.
 진조운은 지금까지도 그런 부친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만 아니었다면 한바탕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치고 어찌 어머니에게까지 그토록 무심할 수가 있느냐고, 어머니가 병환으로 몸져누우셨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느냐고!
 울분 어린 표정으로 부친을 바라보던 진조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 부질없는 바람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애태우며 부친에게 뭔가를 바라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어머니를 모시고 이 지긋지긋한 장원을 떠나면 그뿐.
 진조운은 마지막으로 부친이 무슨 말을 하나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화를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착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진조운을 응시하던 진소황이 나직이 물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느냐?”
 “그냥저냥 살았습니다.”
 부친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생각지도 않았던 퉁명스런 대답이 튀어나왔다.
 “무공을 익힌 듯 보이는구나.”
 진조운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릴 적, 너무나 무공이 배우고 싶어 매일같이 담장에 숨어 무사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무공을 배울 수 없었다.
 단지 서출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문주님께서 모른 척하시니, 저라도 강해져야만 어머니를 지켜드릴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소황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회한이 서린 표정이었다.
 진조운은 부친의 얼굴을 마주 보기 싫어 시선을 피하고 있었기에,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사한 이가 누구더냐?”
 “…….”
 진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부도 무공이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사부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었기 때문이다.
 “흐음,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구나.”
 “…….”
 “무공을 익힌 것은 상관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악한 무공을 익혔다면…….”
 진조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절 죽이기라도 하실 작정이십니까?”
 “…….”
 이번에는 진소황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진조운은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였기에, 부친에 대한 반감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진소황이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쾌차하셨다는 얘기는 들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진조운은 고개를 돌려 한이 서린 눈빛으로 부친을 노려보았다.
 한 집안에 살면서 직접 찾아와 어머니를 살피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서야 알았단 말인가!
 참을 수 없을 분노에 진조운은 어머니의 당부도 잊은 채 소리쳐 물었다.
 “어머니께서 몸져누우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계셨습니까?!”
 “…….”
 진소황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진소황이 물었다.
 “앞으로 어찌 살아갈 생각이냐?”
 “그만두십시오!”
 진조운이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 같은 놈이 어찌 살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정히 궁금하시다면 말씀드리지요. 전 조만간 어머니를 모시고 이 집을 떠날 작정입니다. 문주님께서 모르는 먼 곳에 터를 잡고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문주님께선 예전처럼 저희 모자를 모른 척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 할 말만 쏟아 뱉은 진조운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운아!”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부친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조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굳건한 그의 양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운아!
 처음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부친이 자신의 이름을 살갑게 불러 준 것이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진조운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운아, 내 할 말이 남았으니 어서 이리 와 앉아 보아라.”
 부친에게서 다시금 살가운 말이 들려왔지만, 진조운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진조운은 지체 없이 문을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연한 표정으로 진조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소황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긴…… 너무 늦긴 했구나.”
 자조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난 세월, 백호검문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하여 이제 백호검문은 절강 땅에서 내로라하는 문파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때문에 저들 모자에게 너무나 몹쓸 짓을 해 버린 것을.
 * * *
 진조운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매옥향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문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그동안 어찌 살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쾌차하셔서 다행이라고 하시더군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진조운은 어머니의 시선을 외면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길이 없어 중간에 뛰쳐나왔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들의 표정으로 어느 정도 정황을 짐작한 매옥향은 쓸쓸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으니 그만 쉬어라.”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침상 곁에 앉은 진조운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매옥향이 놀라 물었다.
 “떠나다니? 도대체 어디로 떠난단 말이냐?”
 “장원의 모든 식솔들이 어머니와 절 눈엣가시처럼 여기는데 어찌 이 집에 계속 머무르겠습니까. 소자도 이제 장성하였으니 더 이상 저들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멀리 나가…….”
 매옥향이 단호히 말을 끊었다.
 “나는 절대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너도 그래야 하고!”
 진조운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떠나자는 말을 꺼내면 분명 좋아하실 줄 알았건만?
 “어머니!”
 매옥향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사생아로 태어나 집안의 가솔들에게 모진 천대를 받으며 자라 온 아들이다.
 그녀가 어찌 아들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마음 같아선 진조운의 뜻을 따르고도 싶었다.
 하지만 매옥향은 쉬이 그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조운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모든 것이 서글프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어미가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흐흐흑.”
 그녀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노라니 진조운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 왔다.
 “눈물을 거두십시오, 어머니. 조운은 어머니의 뜻을 절대로 거역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떠나실 수 없다 하시면 소자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운아!”
 매옥향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진조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진조운은 부친을 만나 쌓였던 울분이 일거에 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어머니께서 웃으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어머니의 뜻에 따르리라. 그것이 구 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마음 아프게 만들어 드렸던 내 불효를 씻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잠시 후, 모자는 정겹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운아, 어미의 말을 좀 들어 보련.”
 그렇게 매옥향의 기나긴 얘기가 시작되었다.
 “어미는 본래 소주(蘇州) 사람이었다.”
 소주는 절강과 맞닿은 강서의 고도로, 항주만큼이나 아름답고 비옥한 고장이었다.
 그녀는 소주 인근의 조그만 고을에서 단란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거문고를 만드는 장인이었고, 모친은 정이 많은 현숙한 여인이었다.
 비록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궁핍하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역병이 창궐하여 부모가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로 전락해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운명처럼 항주까지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배는 등가죽에 달라붙었지만 세상인심은 각박하기만 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며 항주의 저잣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맛있는 냄새를 좇아 어느 집 대문 앞에 이르렀고, 끝내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곳이 바로 기루였다.
 다행히 마음 넉넉한 기루의 주인에게 발견된 그녀는 그때부터 기루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모진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기루에는 두 가지 부류의 기녀가 있었다.
 웃음을 파는 창기(娼妓)와 풍류를 파는 예기(藝妓).
 거문고를 만들던 부친에게서 연주하는 법을 배운 매옥향은, 우연히 숨은 재주가 드러나 열일곱이 되던 해에 예기가 되었다.
 그녀의 거문고 연주는 무척 뛰어나 삽시간에 항주 전역으로 소문이 퍼졌다.
 당시 항주에선 ‘매옥향의 거문고 연주를 듣지 않고는 풍류남아라 할 수 없다’는 우스갯말이 떠돌기도 했었다.
 얘기를 들려주던 매옥향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아, 어미는 예기였지 창기가 아니었으니, 누가 뭐라던 조금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전 한 번도 어머니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설사, 어머니가 창기였다 하더라도 진조운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터였다.
 천하의 그 누가 천대받는 기녀가 되고 싶겠는가?
 세상이, 운명이 어머니를 기녀로 만든 것임을 진조운은 모르지 않았다.
 마음이 흐뭇해진 매옥향은 얘기를 이어 나갔다.
 “네 아버지를 처음 본 건 어미가 열여덟이 되던 해, 가을이었다. 당시 그분은 백호검문을 창건하여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는데도, 가끔씩 홀로 찾아와 술을 드시며 어미의 연주를 듣곤 했었단다.”
 그처럼 무뚝뚝해 보이던 부친에게 그런 면이 있었단 말인가?
 “당시 어미는 그분이 무척 외로워 한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보았단다. 그분도 고아였기 때문이지.”
 ‘고아였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기인을 만나 고강한 무공을 배웠고 처가(妻家)의 재력으로 문파를 열었지만, 고아라는 서글픔만은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으셨을 게다.”
 매옥향은 옛일을 회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진소황과 정을 나누며 서글픔과 외로움을 달랬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어미와 네 아버지는 그렇게 조금씩 정을 쌓았고…….”
 매옥향은 진조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를 잉태하게 되었단다.”
 매옥향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소황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지만, 처와 처가의 식구들에게 모진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진소황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매옥향은 백호검문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지 불행한 일은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진소황이 매옥향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진조운이 태어났을 때조차도…….
 “문주님께서도 나름 고충이 있으셨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미는 그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단다.”
 진조운의 나이는 이제 열아홉이었고, 섬에서만 살았기에 세상일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여 어머니처럼 부친의 고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부친에 대한 원망이 약간은 수그러들기는 했다.
 진조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음을 느낀 매옥향이 정겹게 웃었다.
 “네가 실종되었을 때, 문주님께선 홀로 반년 동안이나 절강 땅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셨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가끔씩 어미를 찾아와 말벗이 되어 주시기도 하셨지. 얼마 전 어미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에는 한 시진이 넘도록 어미의 곁을 지키다 가셨다고 가영이 말해 주더구나.”
 ‘……!’
 진조운은 퍼뜩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어머니의 경맥을 따라 흐르던 괴이한 기운.
 그 기운을 불어넣어 준 장본인이 부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백호검문에 부친 말고 그 정도 내력을 쌓은 고수는 아마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당시 부친이 어머니의 곁에서 한 시진이나 머물다 가셨다고 하지 않은가.
 진조운은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어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은 부친이었다.
 어머니의 상세를 호전시켜 준 그 괴이한 기운의 주인이 정말로 부친이라면?
 매옥향이 진조운의 손을 잡았다.
 “운아, 문주님께 조금만 더 기회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진조운은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따르겠다고 이미 각오한 바였다.
 게다가 자신이 부친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머니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매옥향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나왔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매옥향이 힘주어 말했다.
 “앞으로 삼 년, 그 때에도 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울분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면, 어미는 결단코 너와 함께 이 집을 나갈 것이니라.”
 * * *
 다시 며칠이 지났다.
 매옥향은 병이 완쾌되어 움직이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진조운은 가장 먼저 구소공을 전수해 준 사부에게 감사했다.
 구소진기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 이처럼 빨리 쾌차하실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 날, 진조운은 자진하여 진소황을 찾아갔다.
 “어머니께서 쾌차하셨습니다.”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진소황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진조운은 전과 달리 부친의 말속에 숨어 있는 따스함을 약간은 느낄 수 있었다.
 “미움을 버리면 세상도 달리 보이는 법이다. 이 사부는 늘그막에야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부친이 조금은 달리 보이자 사부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도 여전히 앙금은 남아 있었다.
 훌훌 털어 버리기엔 앙금을 쌓아 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진조운은 부친에게 기회를 주기로 이미 어머니와 약속하였기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일전엔 제가 경솔했습니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진소황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진조운의 달라진 태도에 마음이 흡족해진 덕분이었다.
 “네게 특별히 지시할 일은 없고, 그저 한 가지 당부를 하고 싶을 뿐이다.”
 “말씀하십시오.”
 “이왕 무인의 길로 들어섰으니 신의와 협의를 가슴에 품은 훌륭한 무인이 되거라.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당부라 하여 약간은 긴장을 했었다.
 그런데 겨우 그것뿐이란 말인가?
 진조운은 불현듯 사부의 말씀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협의와 신의를 내세우는 척하면서, 뒷구멍으로는 온갖 모략을 일삼는 위군자 놈들이야말로 가장 추악한 놈들이니라. 특히 정파 놈들 중에 그러한 부류들이 많으니, 그러한 놈들을 만나거든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말고 뜨거운 맛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운아, 사부는 정파도, 사파도 아닌 그저 당당한 무인이었을 뿐이다. 하늘을 우러러 티끌만큼의 부끄러움도 없는 당당한 무인! 그러니 너도 강호에 나가거든 정파니, 사파니 따지지 말고 당당한 무인으로만 살도록 해라. 도리와 신의를 아는 당당한 무인 말이다!”
 사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위군자들을 경멸했었다.
 그리고 사부가 경멸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미인이었다.
 “계집은 예쁠수록 요물이니, 아예 그런 계집들 근처엔 얼씬도 마라.”
 참으로 괴팍한 사부였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미인을 죽도록 싫어하셨으니 말이다.
 한 가지 괴이한 일은 진조운의 뇌리에도 어느 순간부터 위군자와 미인에 대한 반감이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섬에 처박혀 구 년 동안이나 사부와 동고동락한 까닭에 성정마저 닮아 버린 것이다.
 “왜 아무 말이 없느냐?”
 부친의 물음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진조운은 진중히 대답했다.
 “그리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부친의 고맙다는 말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리 듣기 싫지 않았다.
 그 때, 문이 열리며 중년 부인과 진성이 나란히 대전으로 들어섰다.
 중년 부인은 진소황의 처인 양예화(梁叡和)였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진조운의 뺨을 올려붙였다.
 쫘악!
 진조운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이런 상황에서 부친이 어찌 대처하는지 확인하고픈 생각에서였다.
 아직은 부친을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기에 그처럼 괴상한 생각이 들었으리라.
 이유야 어쨌든 뺨을 얻어맞고 보니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진조운이 애써 치미는 화를 삭이고 있으려니, 그를 대신해 진소황이 노한 표정으로 양예화를 나무랐다.
 “부인,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이오?”
 양예화가 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경우요? 지금 당신이 제게 경우를 따지겠다는 건가요? 경우가 없는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이십 년 전, 당신은 분명 제게 약속했어요. 그년을 받아 주기만 하면 두 번 다시 그년을 찾지 않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당신은 수시로 그년을 찾아가…….”
 “그만두시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어찌 이리 경망되게 구는 것이오?”
 양예화를 꾸짖은 진소황은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진조운을 바라보다 가만히 손을 내저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예.”
 진조운은 순순히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뜻하지 않게 부친이 그동안 어머니를 멀리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부친은 저들 모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감싸 주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대가치고는.
 양예화가 사납게 소리쳤다.
 “이놈, 어딜 도망치려는 게냐? 내 네놈에게 따질 것이 있으니 당장 멈춰 서라.”
 진조운은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양예화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고, 곁에 있는 진성은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양예화가 진성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 전체가 하얀 천으로 단단히 감겨 있었다.
 “네놈 때문에 소중한 내 아들의 손이 부러졌다. 천한 네놈 때문에!”
 힐끗 부친의 눈치를 살핀 진성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우연한 사고였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우연한 사고라니…….
 그래도 아예 양심이 없는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성의 말을 듣고도 양예화는 막무가내였다.
 “사고든 뭐든 다 저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더냐? 저놈이 살아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부인!”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양예화의 말을 끊은 진소황이 자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 모자는 못난 나로 인해 지금껏 모진 삶을 이어 왔소. 그러한 사실은 부인도 잘 알지 않소? 이제 조운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더 이상은 저들 모자를 힘들게 하지 맙시다. 제발, 부탁이오.”
 “흥.”
 코웃음 친 양예화가 진소황을 노려보았다.
 “양이는 맹(盟)에 들어가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는데, 천한 서출 놈을 집안에서 편히 살게 해 주잔 말인가요?”
 진소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양이는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자 자진하여 맹에 들어간 것이오. 그리고 앞으로는 천한 서출이란 말은 삼가도록 하시오.”
 양예화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흥, 사랑하는 계집이 낳은 자식이라 천한 놈이란 소리를 듣는 것마저도 안쓰러운 모양이군요.”
 “으음.”
 진소황은 무겁게 침음을 삼켰다.
 언제나, 그리고 어찌해야 이 집안이 평화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
 집안의 화를 잡는 일이 백호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보다도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도대체 부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양예화는 고개를 돌려 진조운을 노려보았다.
 “양이는 맹의 일원이 되었고, 성이도 상단의 일을 돕고 있어요. 소중한 내 자식들도 일을 하는데, 한낱 첩의 자식에게 공밥을 먹일 수는 없으니 당연히 일을 시켜야죠.”
 백호검문은 휘하에 이백여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절강에서 수위를 다투는 문파로서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이백여 명의 문도들을 먹이고, 입히고, 월봉까지 지급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소황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별 어려움 없이 백호검문을 꾸준히 성장시켜 올 수 있었다.
 모두 처가에서 자금을 지원해 준 덕분이었다.
 양예화의 집안은 항주 제일의 갑부였다.
 전장과 상단은 물론이고 상점도 수십 채나 운영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대가 없이 자금을 지원받는 것은 아니다.
 백호검문에선 그에 합당한 무력을 양예화의 처가에 제공하고 있었다.
 원행을 자주 하는 상단에 호위무사를 붙여 주거나, 전장의 경비 등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모두 도맡아 해 온 것이다.
 사실 그처럼 부유한 처가를 둔 진소황이 매옥향을 첩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매옥향을 사랑했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칫 그 일로 인해 처가의 지원이 끊겼다면 진소황은 문파를 경영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러한 사정 때문에 진소황은 양예화의 의견을 대놓고 무시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오?”
 진소황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양예화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저 아이의 재주가 꽤나 비상한 것 같으니, 그 일을 맡기는 게 좋겠어요.”
 “대체 무슨 일 말이오?”
 “당신도 아실 텐데요. 반년 전, 전장에 도둑이 들어 무려 황금 일천 냥을 도난당한 사건 말이에요. 그때 입은 손실로 인해 전장은 물론이고 상단까지도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어요. 그러니 저 아이에게 그 일을 맡겨 해결토록…….”
 진소황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내 그동안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놈을 행적을 추적하고도 이제껏 조그만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하였는데, 어찌 조운에게 그 일을 맡길 수 있단 말이오? 제발 괜한 억지 부리지 말고 내게도 달리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시오.”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궁리한 계획이 억지라 치부되자 양예화의 얼굴이 대번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전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으니 저 아이에게 그 일을 맡기든지, 아니면 당신이 먼저 약속을 어겼으니 지금 당장 저들 모자를 이 집에서 쫓아내도록 하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조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맡겠습니다.”
 진소황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제가 그 일을 맡겠다고 하였습니다.”
 진소황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쉽게 생각하고 결정할 일이 아니니라.”
 “흥, 제 입으로 맡겠다는데 왜 만류하는 거죠?”
 이번에도 양예화가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자, 진소황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노성을 터뜨렸다.
 “부인!”
 화들짝 놀라 부르르 몸을 떤 양예화가 진소황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당신은 갈수록 저를 함부로 대하는군요?”
 진소황이 침중한 안색으로 대꾸했다.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괜한 억지를 부리니 그러는 것이잖소?”
 “그깟 도둑놈 하나 잡아 오라는 것이 뭐가 그리도 억지란 말인가요?”
 “상대는 보통 도둑이 아니라 경험이 많은, 무척이나 용의주도한 도둑이란 말이오. 그런 자를 이제 갓 돌아온 조운에게 잡아 오라고 시키는 것이 억지가 아니면 무엇이오?”
 “억지든 아니든! 당신이 그 일을 저 아이에게 맡길 수 없다면 저도 더는 양보할 마음이 없으니 그리 아세요!”
 양보할 마음이 없다는 건 곧 진조운 모자를 집에서 쫓아내겠다는 의미였다.
 진조운은 양예화가 부친을 닦달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어 굳은 목소리로 나섰다.
 “저를 믿고 그 일을 맡겨 주십시오. 제가 기필코 해결하겠습니다.”
 “……?”
 진소황은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수많은 인원과 시간을 투자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다.
 도대체 자기 혼자 나서 어찌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허락해 주십시오.”
 “허어.”
 낮게 탄식한 진소황은 진조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조운의 두 눈엔 의지를 넘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진소황은 진조운의 공력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 진조운을 만났을 때부터 그리 느꼈었다.
 후에 진가영에게 듣기를, 진조운이 매옥향의 체내에 진기를 불어넣어 직접 병을 치료했다고 했다.
 그 자신도 매옥향의 체내에 진기를 불어넣어 치료하려 했지만, 공력이 부족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진조운이 해낸 것이다.
 그건 곧 진조운의 공력이 자신보다 우위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공력과 상관없었다.
 도둑을 추적하는 일이니 만큼, 정보력과 끈기가 필요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일천 냥이나 되는 황금을 몰래 훔쳐 달아난 놈이다.
 분명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대도(大盜)임이 분명할 텐데, 제아무리 공력이 높다한들 그런 자를 이 넓은 천지에서 어찌 쉽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양예화는 차치하고서라도 진조운 스스로가 저렇듯 간청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우, 일단은 허락을 한 뒤에 다른 방도를 강구해 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결국 진소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락하마. 하지만 놈은 강호의 수많은 도둑들 중에서도 이름 있는 대도임이 분명하니, 행여 놈을 잡지 못하더라도 절대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느니라.”
 진소황이 약간의 핑계 거리를 만들어 두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양예화가 그것을 구실로 진조운을 닦달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조운은 곧바로 양예화를 돌아보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양예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건이라니?”
 “제가 그자를 잡아 오면…… 제 어머니를 첩이 아닌 정실(正室)로 대우해 주십시오.”
 “뭣이!”
 양예화는 일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한 서출 놈 주제에 감히 그처럼 당돌한 조건을 내걸다니!
 하지만 그녀는 이내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흥, 네놈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무려 반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설사 진조운에게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다 해도, 시간도 오래 경과되고 단서도 거의 없어진 지금, 이 넓은 천지에서 없어진 도둑놈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 확신했기에 그 일을 맡기려고 그토록 안달복달했던 것이다.
 진조운은 끝내 실패할 것이고, 그것을 빌미 삼아 호되게 구박을 한 뒤에 끝내는 집안에서 쫓아내려 계획한 것이었다.
 “좋다. 네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대신 내게도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기한은 앞으로 석 달, 그 안에 도둑놈을 잡아 오는 것은 물론이고, 잃어버린 황금 일천 냥도 함께 회수해 와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어길 시에는 네 어미를 데리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야만 할 것이다.”
 황금 일천 냥까지 회수해 오라는 건 억지나 다름없었다.
 이미 놈이 다 써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진조운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모자를 기어이 쫓아내고 싶은 모양이지만…….’
 듣고 있던 진소황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어찌 그처럼 얼토당토 않는 조건을…… 조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 제게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부친에게 전음을 보낸 진조운은 낭랑히 대답했다.
 “그 조건, 받아들이지요.”
 
 
 
 (백우천추 1권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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